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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요한복음 설교 모음

요한복음 6:60 - 71절 설교 모음

by Jessi J 2023. 6.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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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가운데 하나는 악마이다” /6:60-71/ 유기성목사

2022-09-22 10:22:40

 

6:60 예수의 제자들 가운데서 여럿이 이 말씀을 듣고 말하기를 "이 말씀이 이렇게 어려우니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61 예수께서, 제자들이 자기의 말을 두고 수군거리는 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말이 너희의 마음에 걸리느냐? 62 인자가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면, 어떻게 하겠느냐? 63 생명을 주는 것은 영이다. 육은 아무 데도 소용이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이 말은 영이요 생명이다. 64 그러나 너희 가운데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처음부터 예수께서는, 믿지 않는 사람이 누구이며, 자기를 넘겨줄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고 계셨던 것이다.

 

65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버지께서 허락하여 주신 사람이 아니고는 아무도 나에게로 올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 66 이 때문에 제자 가운데서 많은 사람이 떠나갔고, 더 이상 그와 함께 다니지 않았다. 67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물으셨다. "너희까지도 떠나가려 하느냐?" 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주님,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 선생님께는 영생의 말씀이 있습니다. 69 우리는, 선생님이 하나님의 거룩한 분이심을 믿고, 또 알았습니다." 70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않았느냐? 그러나 너희 가운데서 하나는 악마이다." 71 이것은 시몬 가룟의 아들 유다를 가리켜서 하신 말씀인데, 그는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예수를 넘겨줄 사람이었다.

 

오늘 설교 제목이 충격 그 자체입니다.‘너희 가운데 하나는 악마니라

그러나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 말은 우리가 깨달아야 할 엄청나고 심각한 영적 진실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영혼은 하나님에게 속해 있는지 악마에게 속해 있는지 둘 중의 하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놀랍고 풍성한 이야기로만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후 일어난 일련의 사건은 이처럼 너무나 슬프고 또 충격적인 것입니다.

예수님께 왕이 되어 계속 빵을 만들어 달라는 무리들에게 육신을 위하여 빵만 구하지 말고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 영생을 얻으라말씀하셨을 때, 사람들은 떠나갔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보시고 제자들에게너희까지도 떠나가려 하느냐?”(:67) 물으셨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유명한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68 주님,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 선생님께는 영생의 말씀이 있습니다.

 

이 고백이 얼마나 귀합니까? 예수님을 얼마나 기쁘시게 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기뻐하신 것이 아니라 더 마음 아파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서 하나는 악마이다.”폭탄선언을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가룟 유다를 향한 말씀이었는데 그도 예수님을 떠나지 않았던 제자였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하나님께 속한 영혼의 소유자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였으면서도 세상 권력 욕심, 재물에 대한 탐심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런 사람은 결코 악마의 유혹을 이길 수 없습니다. 결국 그가 결국 무슨 일을 했습니까? 예수님을 팔아 넘기게 됩니다. 악마가 하는 일을 한 것입니다.

 

이번 주간, 대통령 선거를 합니다.

정치적 의견이 다른 사람을 만났을 때, 어떤 느낌인지 경험해 보셨을 것입니다.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힘듭니까?

그렇다면 영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사람과 세상에 속한 사람은 얼마나 다르겠습니까?

은혜롭게 들리는 말씀이 뚜렷하게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궁금한 것은 이 말씀을 가룟 유다만 따로 불러 말씀하시지, 왜 제자들 모두에게 말씀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제자들도 악마 노릇을 할 수 있다는 경고인 것입니다.

실제로 수제자였던 베드로도 마귀 역할을 하여 예수님으로부터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책망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16:23)

베드로도 그럴 수 있다면 이것은 분명히 우리들의 문제이기도 한 것입니다.

 

여러분, ‘너희 가운데 하나는 악마니라이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돈 많이 벌고 좋은 집 사고 좋은 차 타고 자녀들 공부 잘 시키고 시집 장가 잘 보내는 것만 생각하며 살아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정치나 권세에만 관심가져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가룟 유다처럼 영생에 대한 말씀은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게 됩니다.

 

문호 빅톨 유고는 70세 생일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 머리엔 겨울이 왔으나 (백발이 되었다는 뜻) 내 가슴엔 영원한 봄을 느낀다. 마지막 시간이 가까울수록 저 우렁찬 영원이라고 하는 제목의 교향곡을 나는 듣는다.”여러분 이 말이 공감이 됩니까?

 

여러분 중에도 죽으면 끝이지, 라고 생각될 뿐, 영혼이나 영생에 대한 말씀이 막연하게 느껴지는 분이 있습니까? 그 상태로 계속 살면 안됩니다.

그러면 반드시 말할 수 없이 후회하고 애통하고 두려운 날을 맞이 하게 됩니다.

주님을 만났는데, 하나님의 나라 위하여 아무 것도 한 일이 없고 자신의 영혼이 말할 수 없이 비참한 모습인 것을 알게 되었을 때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저는 목회하면서 교회 안에 악마의 역할을 하는 사람을 많이 보았습니다.

교회를 무너뜨리고 구원의 문을 막아서서 자신도 들어가지 않고 다른 사람도 들어가지 못하게 막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교회 안에 악마가 역사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자신은 결코 그렇다고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마음에 사탄이 가득하였으면서도 전혀 깨닫지 못하지 않았습니까?

오히려 스스로 잘한다고 생각하니 기가 막힌 일이고 두려운 것입니다.

 

정말 두려운 것은 저 자신이 악마 노릇을 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설교 열등감이 심하였을 때, 어느 집회 때 다른 목사님들 설교가 죽쑤기를 바랐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깨닫고 너무 두려워 금식을 하였었습니다.

그것이 마귀의 역사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나치 독일의 아돌프 아이히만은 유대인 학살을 주도했던 사람입니다. 그가 1960년 이스라엘 비밀첩보원에 의하여 남미의 은둔지에서 체포되어 이스라엘로 압송되어 재판받을 때, 증인 중 예힐 디누어라는 사람이 재판정에 들어가 방탄유리가 설치된 작은 방안에 있는 아돌프 아이히만을 보고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 채 한참을 흐느끼며 울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무엇을 보고 그렇게 충격을 받았는지 궁금했습니다. 후일 미국 CBS 방송 60Minutes에 출연한 디누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상상했던 사악한 악마의 화신이 아니었다는 사실 때문에 울었습니다 그는 보통 사람이었습니다. 그 순간 나 자신이 두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나도 그와 똑같이 그런 잔인한 짓을 충분히 저지를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너희 가운데 하나는 악마니라는 말씀 명심해야 합니다.

마귀는 우리 마음에 틈만 생기면 들어옵니다. 그래서 화를 품지 말라는 것입니다.

4: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27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어떻게 화도 내지 말라는 말이냐?”

충분히 이해가 되는 말이지만 주님이 그렇게 해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귀의 일을 멸하려고 오셨기 때문입니다.

요일 3:8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오스왈드 챔버스는 [주님은 나의 최고봉]에서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한 이후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실망한 적이 없습니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세상에! 다른 사람에게 불평과 원망은 커녕 실망도 느끼지 않게 되었다니, 도데체 어느 정도 믿음이 성장해야 다른 사람에게 실망조차도 안하게 될 수 있을까요요? 오스왈드 챔버스는 계속하여 말했습니다.

"십자가에서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 줄 알았습니다. 나는 어느 누구도 비판은 커녕 실망할 자격도 없는 죄인입니다"

오스왈드 챔버스만 이런 은혜를 받았습니까? 우리 모두가 받은 은혜입니다.

 

교회에 시험이 생기든 가정에 시험이 생기든 항상 명심해야 합니다.

'절대 마귀가 원하는대로는 하지 않을거야!'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걸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625 전쟁 때 우리도 목숨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나라만 위하여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숨을 거는 심정으로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4:23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어떤 분이 제 페이스 북 컬럼에 댓글을 다셨습니다.

제가 만약 제 생각 속에 다가오는 메세지에 순종했더라면 아파트에서 여러번 뛰어 내렸을 것이고 집을 여러번 뛰쳐 나갔을 것이고 벌써 이혼을 한 상태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마다 이것은 사단의 궤계이기 때문에 넘어가면 안된다라는 의지로 잘 이겨온 것 같습니다

 

너희 가운데 하나는 악마니라그래서 나는 죽었습니다 고백하고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영혼은 하나님께 속한 영혼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아버지라 고백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십자가의 속죄의 은혜를 믿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심으로 오늘 이렇게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자신의 영적 상태를 항상 점검하며 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당시 성도들에게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2:5) 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과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사는 것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은 늘 보고 듣는 것에 영향을 받습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늘 보고듣는 것이 세상이면 세상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 제게 편지가 하나 왔습니다.

장애인이신데 불안장애와 공항장애, 강박증, 우울증으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는데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복음으로 자신 안에 기쁨과 평강, 온유한 마음, 겸손한 마음,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임하였다는 간증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교인들에게 꼭 전해 달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하여 우리 영혼에 기쁨과 평강과 생명을 주시기 원하시지만 TV와 휴대폰, 인터넷이 우리 안에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끊임없이 부추기며 성령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기쁨과 평강의 은혜를 빼앗아갑니다. 태초부터 오늘날까지 이런 시대는 없었습니다. 우리는 TV 나 인터넷에 대하여 너무나 안일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눈을 즐겁게 하는 영상을 10분 정도만 바라보면 우리 안에서 육신의 생각과 감정이 성령의 역사를 잠잠하게 만듭니다. 다시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려면 몇 배로 주님을 바라보고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야 겨우 회복됩니다. 이런 식으로 매일 살면 결국 두 마음을 품은 자가 되고 위선자로 살게 되고 성령의 역사는 소멸하게 되고 영혼은 죽음의 잠을 자게 됩니다. 목사님, 지금 영적으로 심히 악하고 교활한 시대임을 교인들에게 꼭 전해 주세요.”

 

너희 가운데 하나는 악마니라

이 말씀을 명심하였기에 예수동행일기를 쓰는 것입니다.

매일 세상만 바라보지 않고 항상 예수님을 바라보려는 것입니다.

매일 일기를 쓰고 또 성도들과 나누는 것은 악마로부터 마음을 지키기 위함입니다.

혼자 생각에 골돌히 빠져 들어가면 안됩니다.

성도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열고 나누어야 합니다.

만약 나눌 수 없는 것이 생겼다면 그것은 자신 안에 마귀가 역사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한 성도가 동행일기에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오늘 아들에게 화를 내버렸습니다. 기분도 너무 상하고 스트레스에 눌려 울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동행일기 제자훈련반 모임에 참석하여 마음이 풀렸고 기쁨이 회복되었습니다. 집에 돌아와 아들을 맞이하기 위하여 기도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오랫만에 집에서 큰 소리로 방언기도를 했습니다. 나의 잘못임이 분명하기에 회개하고 주님을 더욱 붙잡았습니다. 아들에게 엄마가 어른인데 더 이해하고 참아주지 못해서 미안했다고 사과하였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점점 열이 오르더니 감기증세가 심해졌습니다. 체온을 재보니 40도에 육박합니다. 아침에 아이가 말을 안듣고 징징거렸던 이유가 감기 때문이었음을 알게되니 더욱 미안했습니다. 안그래도 힘든 아이를 제가 더 아프게 해버린 것입니다. 너무 후회됩니다. ㅜㅜ

이 성도의 일기를 읽고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마음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너희 가운데 하나는 악마니라하신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마귀에게 마음의 틈을 주지 않을 것니다.

결코 마귀가 원하는대로 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 마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주님을 바라보고 살면 우리 영혼을 지킬 수 있습니다.

 

찬송: 세상의 유혹 시험이

 

 

 

 

악마는 평범한 모습으로 숨어있다 /6:60-71/ 김다위목사

2022-09-22 10:21:06

 

우리는 시기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번 주 수요일이 대선이고 이미 사전 투표가 진행됐습니다. 오미크론 확산은 정점을 향해 가고 있으며,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여 수많은 군인들과 민간인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지난 3일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대통령이 이런 성명서를 냈습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대성당과 교회를 모두 파괴하더라도 우크라이나와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믿음과 사람에 대한 신념을 파괴할 수는 없다

대한민국의 대선과 우크라니아를 위해 특별히 더욱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요한복음의 666이라 불리는 부분입니다. 요한복음 666절 말씀에 보면 제자였던 이들 중에서 많은 자들이 예수님을 떠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시는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습니다.

6:66 이 때문에 제자 가운데서 많은 사람이 떠나갔고, 더 이상 그와 함께 다니지 않았다.

 

제자라고 해서 다 제자가 아닙니다. 결국 어느 결정적인 순간에는 예수님을 떠나는 이들이 있다는 겁니다. 감리교 부흥 운동을 이끈 존 웨슬리도 1763년에 한 기록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자신의 영혼 깊이 새롭게 된 사람들은 영국 내에서는 소수에 불과하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나는 진짜인가? 나는 진정으로 주님을 따르는 제자인가를 점검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몸의 이상 징후를 감지하고 정기적인 검진을 통해 미리 암을 예방하고자 하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 영혼의 상태를 날마다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가 날마다 말씀을 읽으며 말씀에 비추어서 우리 영혼을 점검해야 합니다. 또한 예수동행일기라는 좋은 도구가 있습니다. 일기를 쓰면서 우리 영혼의 상태를 점검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각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누가 믿는 자인지 안 믿는 자인지 다 아십니다. 어떤 사람이 믿는 것 같아도 실은 믿지 않는 사람인 것을 주님은 다 아세요.

 

6:64 그러나 너희 가운데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처음부터 예수께서는, 믿지 않는 사람이 누구이며, 자기를 넘겨줄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고 계셨던 것이다

 

예수님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음을 보고 계십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기는 하지만 실은 믿지 않는 사람이 누구인지 예수님은 아십니다. 내가 예수님을 정말 믿는지, 내가 구원 받았는지 어떻게 알까요? 예수님의 말씀을 생명으로 받아들이느냐 아니냐입니다. 1) 믿지 않는 이들은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60절에 보면,

6:60 예수의 제자들 가운데서 여럿이 이 말씀을 듣고 말하기를 이 말씀이 이렇게 어려우니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말씀을 알아들을 수도 없고 소화할 수도 없습니다. 여기서 어렵다는 말은 단지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것이 아닙니다. 알긴 알아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겁니다. 이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거듭나지 못한채 육적인 존재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214절에 보면

 

고전 2:14 그러나 자연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에 속한 일들을 받아들이지 아니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이런 일들이 어리석은 일이며, 그는 이런 일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런 일들은 영적으로만 분별되기 때문입니다. .

 

여기서 자연에 속한 사람이란 말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 그냥 보통 일반인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이 보기에 영의 일들은 어리석은 일이요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고 받아들일 수도 없었던 겁니다. 믿지 않는 사람의 또 다른 특징이 있어요. 2) 말씀을 들으면 속이 거리낍니다. 다시 말해 거슬립니다. 예수님을 떠나가는 이들도 그랬습니다. 61절 보세요.

6:61 예수께서, 제자들이 자기의 말을 두고 수군거리는 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말이 너희의 마음에 걸리느냐?

 

믿지 않는 이들은 말씀이 걸리적 거리고 부대낍니다. 심지어 화가 납니다. 이 걸린다라는 원어 스캔달리조에서 영어의 스캔들이라는 말이 나온 거에요. 사람들을 불쾌하게 만드는 것들이죠. 믿지 않는 자는 모든 사람이 죄인이다라는 말을 들으면 화가 납니다. 내가 왜 죄인이야? 내가 얼마나 선하게 살아왔는지 알아? “당신은 영적으로 죽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생명의 빵을 먹어야 합니다.” 그러면 내가 왜 죽었어? 나 살아 있어. 당신이 죽었지. 말씀이 이해가 안되고 말씀이 거리끼는 거에요. 이것이 믿지 않는 자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고도 떠나는 거에요.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케이스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떠난 것은 아닌데 실질적으로는 떠난 사람입니다. 가룟 유다입니다. 무서운 것은 예수님은 그를 가리켜 악마라고 하셨습니다. 70절 보세요.

 

6:70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않았느냐? 그러나 너희 가운데서 하나는 악마이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악마라뇨. 유다가 무슨 악마입니까? 유다는 그저 한 사람일 뿐입니다. 유다에게 무슨 뿔이 달렸고 얼굴이 험상 궃고 빨간 피부에 꼬리가 달렸습니까? 유다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가 악마라는 거에요. 이것이 오늘의 핵심 본문입니다. 도대체 예수님은 왜 이 이야기를 하시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우리도 얼마든지 그렇게 될 수도 있음을 경고하시는 겁니다. 단지 예수님을 믿지 않고 떠나는 정도가 아니라 악마와 같은 역할을 하는 자가 될 수도 있음을 경고하시며 돌이키라고 하시는 겁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마귀나 사탄이 직접 등장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욥기에서 나오고 사복음서에 예수님을 시험할 때 마귀가 등장합니다. 그 외에는 드러내놓고 나타나지 않습니다. 주로 어떻게 나타나냐면 평범한 사람을 통해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을 사랑했던 베드로 역시도 예수님의 길을 가로 막으려 했다가 예수님으로부터 사탄아 물러가라며 사탄 소리를 듣지 않았습니까? 사도행전 5장에 나오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보세요. 자신의 땅을 팔아서 헌금하겠다는 얼마나 귀한 분들입니까? 그런데 충격적이게도 베드로는 아나니아에게 어떻게 말했는지 생각나십니까?

5:3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그는 평범한 성도였습니다. 그런데 한순간에 사탄에 사로잡힌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인류 최초의 형제 살인 사건, 창세기 4장에 나오지요.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사건입니다. 가인이 악마라서 그럴까요? 가인은 평범한 사람이자 심지어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였습니다. 인정받고 사랑받는 동생에 대한 시기와 미움이 평범한 가인을, 예배자인 가인을 악마로 만듭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보셨어요. “가인아, 죄가 너의 문에 도사리고 있다, 가인아, 너는 그 죄를 잘 다스려야 한다!” 그러나 가인은 그 말씀을 무시하고 돌로 아벨을 쳐 죽입니다. 악마가 물론 존재하지만, 악마가 뿔달리고 꼬리가 있어야 악마가 아닙니다. 악마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의 얼굴을 하고 나타납니다.

 

2.

작년 초에 한국 사회를 소란하게 했던 사건이 있었지요. 정인이 사건입니다. 그 어린 정인이가 장이 파열되어 죽을 정도로 때린 자는 악마가 아닙니다. 정인이를 입양했던 부모였습니다.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것이 충격이었던 거에요. 악마가 그랬다면 악마니까 그런가보다 했을 겁니다. 그러나 그 어린 아이의 배속에 피가 가득해서 죽을 정도까지 아이를 학대한 자는 뿔달린 악마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것이 온 사회에 충격을 준 거였습니다.

 

누가 악마입니까? 지극히 평범한 사람도 악마가 될 수 있습니다. 그 말은 우리도 그렇게 될 수도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이들도, 심지어 예수님의 핵심 그룹에 속한 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꽤 유명한 사건이지요.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500만명을 죽음의 학살 수용소로 이송시킨 책임자인 아돌프 아이히만에 대한 재판이 1961411일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열렸습니다. 여러분, 오백만명을 죽음의 수용소로 몰아간 자는 뿔 달리고 무섭게 생긴 악마겠지요? 그러나 그 재판소에 등장한 사람은 너무나 평범한 얼굴을 한 이웃집 아저씨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리 봐도 그 사람이 그런 일을 했으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얼굴이었습니다. 아이히만은 악마라서가 아니라 그저 이성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생각할 능력이 없는 평범한 관료였다는 거죠. 그의 문제는 악한 지시를 받고도 그것이 악하다고 생각할 능력이 없었던 것이 문제였지 그가 악한 것은 아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악이란 지극히 평범한 모습과 형태를 지닐 수 있다는 악의 평범성이란 유명한 표현이 등장합니다. 한나 아렌트라는 미국의 철학자가 한 표현입니다. 악마는 어느 누구나 될 수 있다는 거에요. 그런데 그 이후로 시간이 지나면서 한나 아렌트 조차도 그 아이히만에게 속았다는 평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비록 그가 평범한 얼굴을 가졌고 그저 생각할 능력도 없이 상사가 시킨 대로 따라한 것처럼 보였으나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그는 옛 친위대 종료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1천만 명의 유대인을 모두 죽였다면 만족했을 것이다. 난 일반적인 명령수행자가 아니었다.” 정말 아이히만은 평범한 얼굴을 하고 숨어있던 악마였던 겁니다. 악마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해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고 있습니까? 자전거를 타던 어린 아이가 파편에 맞아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엄마 아빠와 장을 보던 여자 아이가 미사일에 맞아 응급실에 실려가서 응급 처치를 받다가 죽었어요. 평화롭던 그곳은 지옥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21세기에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습니까? 이런 일을 일으킨 자는 악마가 분명하지요? 그러나 그는 악마가 아니라 그저 사람입니다. 국내의 어느 대학이 몇 년 전에 푸틴에게 유도 명예박사를 주었습니다. 그가 이런 끔찍한 전쟁을 일으키는 자인줄 알았더라면 박사학위를 주었을까요? 그러나 지금 우리가 목도하는 일을 보면 그를 악마라고 불러도 부정할 사람은 거의 없으실 겁니다. 그러나 푸틴도 사람입니다. 우리가 뉴스에서 보듯이 푸틴도 얼굴이 붉거나 뿔이 달린 악마가 아닙니다.

 

가룟 유다, 아이히만, 이들이 태어날 때부터 그랬을까요? 아니지요. 처음부터 악마로 태어난 자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심지어 가룟 유다 조차도 발을 씻기셨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예수님도 마지막 순간까지 유다가 돌이키기를 원하셨다는 겁니다. 왜 예수님은 악마라고 하시는지 아세요? 듣고 돌이키라는 겁니다. 내가 알고 있다. 그러니까 회개하라는 겁니다. 여러분, 그들은 처음부터 악마가 아니라 인생을 살면서 악마의 유혹을 받은 것이고 악마의 생각을 받아들이면서 점차 악마화된 겁니다. 그렇기에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음을 알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악마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 악마와 같은 자가 되는 거에요.

 

과연 평범한 사람이 악마가 되는 그 분기점은 어디에서 발생하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에서 그 힌트를 주고 있습니다. 63절입니다.

6:63 생명을 주는 것은 영이다. 육은 아무 데도 소용이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이 말은 영이요 생명이다.

 

예수님은 영과 육을 대비시키십니다. 그러면서 생명을 주는 것은 영이고 육은 소용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우리 육신이 쓸데가 없다거나 우리가 먹는 것과 마시는 것과 살림살이가 소용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만일 이 말씀이 육신을 부정하는 것이라면 예수님이 왜 성육신하여 아기의 모습으로 태어나셨겠습니까? 이 말씀이 육신을 부정하는 것이라면 굳이 몸의 부활을 하실 이유가 뭡니까? 그냥 영으로 존재하시면 되지요. 이건 그런 뜻이 아닙니다. 우리의 몸도, 음식도 모두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라고 믿는 순간, 우리가 가진 것, , , 물질, 이게 전부 무용지물이 된다는 겁니다. 육은 아무데도 소용이 없다는 말을 영어로 보면 count for nothing 이에요. 카운트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나 영의 눈이 열리고 그리하여 영의 세계,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돈과 재정과 물질과 내 몸을 사용하면 그것은 모두 카운트가 되는 겁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사실상 빵이 전부인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것이 문제라는 겁니다. 거기에서 악이 발생합니다. 예를 들어 공산주의 밑바탕에는 유물론, 즉 물질이 전부라는 사상이 깔려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 영혼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라는 겁니다. 히틀러와 푸틴과 가룟 유다의 공통점이 무엇이죠? 물질에 대한 욕심, 탐욕입니다. 더 많은 땅, 더 많은 재산, 더 많은 힘을 원하는 겁니다. 가룟 유다는 돈 궤를 맡던 자였는데 몰래 몰래 돈을 빼다가 취한 도둑입니다. 탐욕 때문에 예수님을 따른 것이고, 탐욕 때문에 예수님을 팔아 넘기는 거에요. 우리는 절대로 가룟 유다가 악마라는 예수님의 말을 흘겨 들어서는 안됩니다. 육이 전부라고 믿으면 과장해서 거의 열에 아홉은 이 유혹을 이길 수 없습니다. 육이 전부라고 믿으면 인간은 탐심을 거의 이길 수 없습니다. 야고보서 115절에,

 

1:15 (개정)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욕심이 죄를 낳고 죄가 사망을 낳습니다. 시작은 욕심입니다. 탐욕입니다. 그것이 그 사람을 죽이는 겁니다.

그래서 사탄의 예수님에 대한 첫 번째 유혹이 이었던 겁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돌을 빵으로 바꾸어봐라. 그 유혹의 본질은 인생은 빵이 전부다. 먹고 사는 것이 전부다. 그러니까 거기에 너의 인생을 올인해라.” 사탄은 우리가 빵에만 몰두하게 만들기만 한다면 우리가 악마처럼 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어떻게 물리치시죠?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이 말은 빵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빵이 전부가 아니라는 거에요. 최우선순위가 아니라는 거에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생명의 빵을 먹음으로써 사는 자들이라는 거에요. 우리는 영의 존재지, 단지 육적인 존재, 고기 덩어리가 아니라는 겁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받고 있는 유혹이 혹시 이것 아닙니까? 빵에 올인해라. 영끌족이 왜 나왔죠? 이 세상은 빵, , 경제가 전부인 세상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돈 없으면 무시 당하고 돈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왜 아이들의 꿈이 백만 유튜버입니까? 돈입니다. 왜 한창 꿈꾸어야 할 아이들이 주린이가 되었습니까? 주식으로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믿으니까요. 돈 많이 벌어서 뭐할건데? 다 자기 위해 쓰는 거에요.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평범한 사람이 악마처럼 변하는 분기점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합니다. 빵이 전부요 돈이 전부라는 생각. 그리고 그 생각이 쌓이고 쌓여서 변하는 거에요.

 

6:45 (개정)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우리 본성도 죄 중에 태어났습니다. 그 뿐 아니라 우리 생각을 통해 마음에 온갖 악이 쌓이고 쌓여서 결국 악한 자가 되고 마음에 가득한 악이 입으로, 행동으로 나오는 거에요. 그래서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 넘기는 겁니다. 71절에,

 

6:71 이것은 시몬 가룟의 아들 유다를 가리켜서 하신 말씀인데, 그는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예수를 넘겨줄 사람이었다.

12:6 ...그는 도둑이어서 돈자루를 맡아 가지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것을 훔쳐내곤 하였기 때문이다

 

유다가 예수님을 넘겨준 이유는 돈과 탐욕에 눈이 먼 도둑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중에 예수님을 정말 팔고 넘겨줄 자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얼마든지 우리도 그렇게 변질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64절과 71절에 나오는 예수를 넘겨주다, 넘겨주다라는 말은 팔다, 배신하다, 포기하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다가 자신에게 뭔가 불리하고 손해를 보는 상황이 되면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기를 포기하는 거에요. 그것이 예수님을 넘겨주는 겁니다. 거기서 변질이 시작되는 거에요. 그래서 영이 아니라 육에 사로 잡힌 신앙인들의 특징은 겉과 속이 달라지는 겁니다. 악마가 평범한 모습으로 숨어 있고 위장하는 것처럼, 사람도 겉과 속이 달라지고 교회에서의 모습과 바깥에서의 모습이 달라지는 겁니다. 그것이 내가 점점 악마화 되고 있다는 싸인입니다.

 

몇 년 전에 한 전도사님 상담을 한 적이 있습니다. 자신이 신학을 하면서 교회에서 사역을 하는데 찬양 인도를 맡은 거에요. 처음에는 감사한 마음으로 섬겼는데 사역을 하면서 자신이 공허해지기 시작합니다. 주님과의 시간을 갖지 못하고 영혼을 말씀으로 채우지 못하니까 메말라 가는 겁니다. 그러나 앞에 나서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듯이 은혜롭게 찬양을 인도합니다. 그러나 집에 돌아오면 찬양할 때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사는 거에요. 그러나 이것을 멈출 수는 없어요. 사례비를 받아야 하니까. 안 그러면 살 수 없으니까. 더 심각한 것은 처음에는 이것이 괴로웠는데 나중 시간이 지나니까 익숙해지더라는 겁니다. 겉과 속이 다른 것이 자기 자신이 되어 가더라는 거에요. 그런데 어느 날 사람들이 보는 내 모습과 내 자신의 진짜 실체를 본 거에요.

 

아 내가 괴물이 되어가고 있구나...” 그 전도사님의 표현이었어요. 자신이 괴물이 되고 있다는 겁니다. 어떻게 하냐는 거에요. 그 이야기를 듣던 제가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했어요. 먼저는 그것을 깨닫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많은 이들이 그것을 모른채 그냥 살아간다. 두 번째, 그것을 내게 고백한 것도 은혜다. 도움을 요청한 것은 아직 기회가 있고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다. 그렇게 기도했던 기억이 납니다.

 

내가 점점 악마화되고 있는지 아닌지는 이걸 확인해야 합니다. 교회에서의 내 모습과 집에서의 내 모습, 직장에서의 모습이 같은가? 악마는 절대로 뿔달린채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지극히 평범한 모습으로 우리 안에 숨어 있습니다. 위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은 바로 배우자와 자녀들이 제일 잘 압니다. 그러니까 내가 가룟유다와 같이 악마가 되고 있는 건 아닌가? 그것은 배우자와 자녀들에게 물어보세요. 제자로서 교회에서의 모습과 집 안에서의 모습이 같다면 진짜입니다. 그러나 다르다면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가룟유다는 자신의 실체를 직면해서 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모른채 넘어갑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을 판 거에요.

 

스캇 펙이라는 기독교 정신과 의사가 쓴 거짓의 사람들이란 책에 악한 사람들의 다양한 사례들이 나옵니다. 사기꾼, 거래처 장부 조작, 축소 납세자, 부정행위자, 바람핀 남편, 가정폭력범...이들의 공통점은 겉모습만 보면 평범하고도 아주 멀쩡한 사람들이었다는 겁니다. 이들을 만나면서 이 의사는 악한 사람들의 핵심적인 결함을 발견했습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것을 거부하는 그 마음에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진짜 악한 사람들은 언제나 감옥 바깥에 있다라는 상징적인 말을 했습니다

 

. 평범해 보이고 선해 보이는 이들이 실은 진짜 악한 사람들일 수 있다는 거에요. 그가 말하는 거짓의 사람들, 악한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을 직면하는 대신 다른 사람들을 공격한다는 겁니다. 그들이 파괴적인 이유는 그들이 악을 퇴치하려는 데 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악의 소재지를 잘못 파악하고 있다는 거죠. 자신 안에 있는 악을 보지 못한다는 겁니다. 내로남불이 되는 겁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 속의 질병부터 막아야만 한다는 겁니다. 그들은 빛을 미워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실체를 드러내는 성찰의 빛, 자신의 기만을 들춰내 버리기 때문에 진리의 빛을 죽도록 싫어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거짓의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이것이 악의 기만성, 평범성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내면과 실체를 건강하게 드러내야 합니다. 서로 고백해야 합니다. 속회 안에서, 일기를 통해, 배우자와의 대화를 통해, 가정예배를 통해 드러내야 합니다. 자신 안에 악의 씨앗을 발견하고 날마다 떨쳐 내야 합니다.

4.

지난 월요일 저녁에 장로부부수련회가 있었습니다. 장로님들과 소통하는 시간을 가졌는데요, 장로님들께서 궁금한 질문들을 정리하여 보내주셨습니다. 저와 아내가 그 질문들에 답하고 즉석 질문을 통해 생동감 있는 소통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즉석 질문 중에 이런 질문이 있었습니다. “목사님, 유목사님은 말씀과 삶이 일치하여 그 메시지에 힘이 있고 감동이 있었는데 목사님도 그렇게 하실 계획이십니까?” 그래서 저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저는 완벽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전한대로 살고자 힘쓸 것이고 그렇게 산대로 전할 것입니다.” 만일 제가 그렇게 살지 않는다면 그것은 유다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겠지요. 거래적인 관계. 예수님을 이용하는 관계. 예수님을 팔아먹고 유익을 보려는 관계. 정말 두려운 일입니다. 작은 이민 교회할 때에는 제 삶을 숨길 수 없었습니다.

 

저의 집, 저의 생활, 저의 모든 것이 다 노출이 되어 있습니다. 청년들과 성도들이 다 집에 옵니다. 그들과 함께 어울리다보면 저의 성격, 삶이 다 노출이 됩니다. 감출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정말 전한대로 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큰 교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사람들에게 영상으로 알려져서 밖에 나가면 알아보시는 분들이 늘어나서 어떻게 보면 노출이 더 많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작은 교회 만큼 성도님들과 친밀한 관계를 갖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보니 더 위험할 수 있습니다. , 주님께서 그것을 경고하시는구나. 가룟 유다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누구든지 될 수 있고, 나도 예수님을 팔아 먹는 그런 자가 될 수도 있겠구나...주님은 그 날 그 장로님을 통해서 저에게 미리 깨우쳐 주신 겁니다.

 

감사한 것은 다른 어떤 장로님이 그 다음에 이런 질문을 하셨어요. “목사님의 초심을 유지할 특별한 방법이 있으십니까?” 제가 초심을 붙잡는 방법 중 하나는 말씀입니다. 제가 신학교 시절부터 붙잡았던 말씀 중 하나는 시편 7871절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암양을 돌보는 다윗을 데려다가 주님의 유산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게 하셨다..” 다윗이 다윗 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작은 것, 작은 양을 돌보는 다윗을 보시고 하나님이 그를 이스라엘의 목자로 삼으셨어요.

 

목동 다윗은 왕이 될 마음이 없었습니다. 다윗은 그저 양을 귀히 여기고 사랑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기름 부음을 받은 겁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작은 이민교회에서 소수의 양들을 돌볼 때나 지금이나 제가 변한 것은 없습니다. 양들을 사랑하고 양들에게 꼴을 먹이는 거에요. 그리고 그 때나 지금이나 저는 그저 주님의 목동이요 무익한 종일 뿐입니다.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가 말씀을 떠나 빵과 육신의 일에만 매달리다 보면 우리도 욕심과 탐심에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중 그 누구라도 가룟 유다처럼 될 수 있습니다. 악마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악마는 늘 평범한 모습으로 우리 안에 숨어 들어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악마처럼 될 수 있는 미혹을 피할 길은 무엇일까요? 주님이 너희도 가려느냐라고 물으셨는데 베드로가 답합니다. 68절입니다.

6: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주님,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 선생님께는 영생의 말씀이 있습니다 69 우리는, 선생님이 하나님의 거룩한 분이심을 믿고, 또 알았습니다.”

 

주님,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 자신의 무능력과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님을 인정하는 겁니다. 우리는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아닌데 주를 어떻게 떠납니까? 이것이 제자도의 시작입니다. 그리고는 영생의 말씀이 여기에 있는데 우리가 어디에서 영생을 얻겠냐는 겁니다. 날마다 영생의 말씀을 주님으로부터 듣고 먹는 자는 완전히 곁나갈 수 없습니다. 시편 기자가 자신이 주께 범죄하지 않기 위하여 한 일이 있어요. 주의 말씀을 자신의 마음에 두는 겁니다.

119:11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시편 기자가 마음을 지키는 겁니다. 왜냐하면 생명의 근원이 여기에서 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마음에 둔 것은 주의 생명의 말씀이었습니다. 그것이 그를 육적인 존재로 그저 빵과 돈만 추구하는 자로 타락하지 않게끔 지켜주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이 생명입니다. 이 말씀이 성령이 임하는 통로에요. 그래서 생명의 말씀을 통해 주님을 알게 된 이들은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구나. 영의 세계가 있구나. 물질이 전부가 아니구나. 돈과 빵이 전부가 아니구나. 영원한 나라가 있고 영원한 생명이 있구나. 절대로 악마처럼 될 수 없습니다. 악마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좋은 예가 바로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배반합니다. 세 번이나 주를 부인합니다. 그런 점에서 베드로와 유다는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둘의 차이는 생명의 말씀이 그의 안에 있었나 없었나 그 차이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을 때 닭이 우는 소리를 듣자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26:75) 베드로는 그가 세 번이나 주를 부인하며 배신했을 때 그의 마음 속에 있던 예수님의 그 생명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부인할 줄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 때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이것만은 아닙니다.

13:36 “내가 가는 것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누가복음 2232절에는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22:32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베드로야, 너가 연약하고 유혹에 약한 것, 두려워하는 것, 내가 다 알고 있다. 그래서 내가 너를 위해 기도했어. 너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했어. 넌 지금은 안되지만 결국에는 날 따라올거야. 베드로는 닭 울음 소리를 들을 때 비로소 그 생명의 말씀들이 다 생각이 났습니다. 주님은 내가 이럴 줄 다 알고 계셨어. 내가 배반할 줄도 알고 계셨어. 그러나 나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셨어. 그래서 주님은 나를 위해 죽으셨던거야. 그 생명의 말씀이 베드로를 살린 겁니다. 영생의 말씀이 여기에 있으니 우리가 어디를 가겠습니까? 영생의 말씀이 있으니 우리가 어찌 악마가 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이 믿음 붙잡기를 원합니다. 악마는 우리가 그저 육적인 존재로 살다가 죽기를 원합니다. 그저 이 세상의 즐거운 일들, 쾌락, 육적인 일들에만 온통 관심을 쏟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유혹이고 거기에서 악이 발생합니다. 탐욕과 욕심이 사망으로 우리를 이끄는 거에요. 그러나, 생명의 말씀, 영생의 말씀은 그 유혹을 이기게 합니다. 그리하여 끝까지 주를 따르게 합니다. 생명의 말씀을 붙잡는 길은 고독하고도 좁은 길입니다. 666, 666처럼, 다른 수많은 사람들이 다 떠나가고 혹시 여러분은 혼자 남았다고 생각하십니까? 외롭고 고독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히브리서 121절에,

 

12:1 그러므로 이렇게 구름 떼와 같이 수많은 증인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우리도 갖가지 무거운 짐과 얽매는 죄를 벗어버리고, 우리 앞에 놓인 달음질을 참으면서 달려갑시다.

 

영생의 말씀을 붙잡는 중에 많은 이들이 다 떠나가고 혼자 남은 것 같다고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아닙니다. 떠나간 이들과 비교할 수 없이 많은 증인들이 여러분들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응원하고 있습니다. 죄를 벗어버리고 믿음의 경주를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가라고 응원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결코 떠나지 아니하십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주님을 사랑하는 그 초심을 잃지 않고 끝까지 주를 따르며 악마의 유혹을 이기고, 악마의 모습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더욱 더 닮아가는 거룩한 백성이 되어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뉘게로 가오리이까?/6:60-71

2003-06-13 21:51:23

 

 

로마에서 로마문()을 지나, 남쪽으로 가다보면 쿼바디스(Quo Vadis)라는 이름의 교회가 있다고 합니다. 이 예배당은 예수님의 수제자, 사도 베드로에 관한 전설을 따라 그를 기념해서 세운 것입니다.

네로의 박해가 극에 달하였을 때, 베드로는 주변 성도들의 강권에 의해, 원치 않는 마음으로 로마를 벗어나 다른 곳으로 피신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그를 향해 다가오는 신비한 형체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가 거의 가까이 임하였을 때, 그는 그분이 예수님이신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 말하였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Quo Vadis Dominae)" 그 때 예수님은 "내 종 베드로가 교회를 버리고 도망친 로마로, 내가 가서 다시 십자가를 지려 하노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눈물로 회개하고 다시 로마로 돌아가서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순교하였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생각하기에 이 길이 주님을 위한 길이라고 도망갔지만 그것은 주님을 배반하는 길이었습니다. 우리는 때로 쉽게 자기 자신을 합리화시키면서 '그래 주님은 이렇게 원하실지도 몰라'라는 잘못된 생각으로 주님께 등을 돌리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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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에도 보면, 많은 제자들이 있었지만, 모두 떠나고 12제자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 때 주님이 물으십니다. 또한 오늘 예배에 참여한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같은 질문을 하십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이 예수님의 질문에 12제자들 가운데 언제나 성질이 급했던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68절입니다.

 

6:68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사람들은 육체적인 허기짐을 해결하기 위해, 정치적인 억눌림을 해결하기 위해 모여들었다가 갔지만, / 우리는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왔습니다. 어디를 가도 누구를 만나도 영생을 선물로 받을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께만 영원한 생명, 참된 구원이 있습니다. 이 주님을 꼭 만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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ꁾꁿ 베드로를 비롯한 주님의 제자들이 죽어도 주님을 떠날 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3가지입니다.

 

1. 예수님만이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늘 자신의 세 친구를 자랑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어느 날 죄를 지어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정거장에서 첫째 친구를 만났는데, 그 친구는 그에게 차표만 사 주고 갔습니다. 둘째 친구는 그의 변호사가 되어 법정에서 그를 열심히 변호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죄로 사형에 처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때 세 번째 친구가 와서 그를 대신 하여 죽겠노라고 했습니다. 이 세친구의 이름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첫째 친구는 금전입니다. 우리의 편안한 삶을 위해 필요한 친구입니다. 그러나 금전은 우리와 인격적으로 만나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거짓말 안하는데, 돈이 거짓말합니다. 빚을 갚겠다고 아무리 결심해도 못 갚게 하심으로 거짓말 하게 만듭니다.

 

여러분! 돈 많이 벌면 행복할까요? 어떤 목사님, 돈 많은 사람 장례식에 가볼 때마다 느끼는 씁쓸한 마음이 든답니다. 자식들이 진정으로 슬퍼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모두 다 자기에게 돌아올 유산만 생각하느라고, 돌아가신 부모님에 대한 슬픔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는 부자로 살았는지 모르지만, 최후는 얼마나 불쌍한 사람입니까?

 

둘째 변호사가 되어주는 친구는 세상의 친구입니다. 재판정까지 따라 와서 내 편이 되어 주는 듯합니다. 그러나 사형선고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내가 죽으면 장례식에 열심히 참석하고, 무덤까지만 따라 오나, 나의 영혼을 돕지는 못합니다.

 

셋째 친구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영혼의 문제를 결정 짓습니다. 나의 모든 죄악을 대신 짊어지시겠다고 말씀하셨고 실제로 십자가에서 대신 지셨습니다. 그리고 죽음 이후의 삶에 있어서도 우리와 동행해 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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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곁에는 언제나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우리들은 보통 얼마나 모였나?” 모인 사람들의 수에 관심이 있지만 예수님은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어떤 목적으로 왔나를 보셨습니다.

많이 모여도 주님이 인정하지 않는 모임이 있고, 적게 모여도 주님이 인정하는 모임이 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비록 지금은 적게 모여도 주님이 인정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할렐루야!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오병이어)로 장정만 5천명을 먹인 기적을 보자 사람들은 입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님만 있으면 더 이상 배고프지 않겠다. 더 이상 가난하지 않겠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억지로 잡아 임금을 삼으려고 했습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십니다. 그러나 그들의 의도는 저 분만 우리의 왕으로 삼으면 우리는 평생 배고프지 않고, 일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자기 욕심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 자리를 피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시며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지만, 그것을 목적으로 예수님께 다가오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들이 배를 빌려 타고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정말 주시고자 하는 영생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영이 거할 곳은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천국과 지옥입니다. 천국과 지옥 앞에서는 가족도 헤어집니다. 친구도 헤어집니다. 이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에는 눈물이 있습니다. 지옥을 향하여 가는 사람들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옥을 아십니다. 지옥을 아시기 때문에, 다리를 자르고, 눈을 빼서라도 지옥에는 가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에 가며 영생을 얻게 되는 것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입니다.

 

여러분! 천국과 지옥은 죽은 다음에 결정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현재를 살면서 결정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면 구원을 얻습니다.천국을 보장 받습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을 믿지 못하면, 구원 받지 못하며, 지옥에 가게 됩니다. ###########################

 

저는 어버이 주일을 지나며, 부모님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지난 수요일, 여러분 주보책자 45쪽에 나와 있는 내용을 설교하면서 속으로 많이 울었습니다.

 

자신의 차가 레카에 끌려가는 것을 막기 위하여, 다리가 부러지면서까지 열심을 내지 않습니까? 막상 끌려가는 차 보니깐, 자기 차가 아니라 비슷한 차라는 참으로 웃기는 실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다리 부러진 목사님! 이런 열심으로 목회하고, 전도하면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할 거라는 이야기이지요..

 

저는 부모님 모두 하늘나라에 가셨습니다. 어머니는 저를 전도하시고, 집사님으로 소천하셨지만, 아버지는 저를 특별히 그렇게나 사랑해 주셨건만, 그러나 예수님만은 끝까지 영접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제 가슴에 못을 받는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교회 잘 다니는 동생에게, “내가 죽으면 제사 안 지내주면 어떻하나?” 말씀을 남기시는 바람에, 세례까지 받은 동생은 교회에 출석하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 저는 얼마나 후회막심인지 모릅니다. 그때 더 열심히, 더 적극적으로 아버지를 전도하지 못한 것이 저에게 큰 못이 되어 남아 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의 기회가 없습니다. 예수님 믿는 성도로서, 목사로서, 아버지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효도는 영원토록 천국에서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저희 아버지 기일이 음력으로 4월 초8, 석가탄신일입니다. 대개 그때쯤에 부모님 주일을 지납니다. 그때마다 제 입에는 찬양이 나오기보다는 불효자는 웁니다.” 가사는 모르지만, 안타까운 속앓이만 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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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지금이나, 예수님때나 이런 영적인 말씀은 이해하지 못하는 말씀입니다. 본문에도 보면, 이 말씀을 하실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6:60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설교가 어려운 설교가 있고 쉬운 설교가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과 먹는 떡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영적인 말씀, 영생의 말씀, 사명의 말씀이 무조건 어렵습니다. 듣고 싶은 말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6:66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예수님을 이용하여 자기 목적을 이루려는 사람은 결국 이렇게 떠나갑니다.

 

여러분! 구원에 대해서 눈이 뜨이고, 영생에 대해 눈이 뜨인 사람은 결코 예수님을 떠나지 않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시험이 있어도, 시련이 있어도 예수님을 떠나지 않습니다. 영생을 알기 때문입니다.

 

어제 신문에, 경기도 연천에서 폭행하여 죽은 시신을 살리겠다고 하면서 4구의 시체나 오랫동안 보관하다가 들킨 사건이 보도되었습니다. 이들은 대순성도회라는 유사 종교로, 대순진리회에서 나온 무리들입니다. 이들은 죽은 시체 위에 영생수를 부어 다시 살리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세상도 예수님 없이 천국을 얻고, 영생을 얻는다고 주장합니다만 다 거짓입니다. 오직 예수님에게만 구원이 있고, 영생이 있습니다.

 

지금 이 세계를 어지럽히는 두 영적인 세력이 있습니다. 중동지역에 있는 이스라엘과 아랍국가입니다. 이들은 아브라함의 두 후예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마엘과 이삭, 2아들을 두었습니다. 이스마엘은 처에서 난 서자이며, 오늘날 아랍의 뿌리입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낳은, 남자와 여자의 성적 기능이 멈춘 상태에서 얻게 된 적자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의 조상입니다. 이스마엘, 아랍국은 마호맷교를 믿습니다. 이삭, 이스라엘은 유대교를 믿습니다. 이 둘이 지금도 세계를 뒤흔들며, 테러로, 전쟁으로 몰고 가고 있습니다.

잘 보십시오. 유대교가 무엇입니까? 구약을 우리와 같이 믿습니다. 그러나 신약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호맷교가 무엇입니까? 모세 5경을 믿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에수님 대신에 마호맷을 믿습니다. 이처럼 예수님 없는 두 영적 세력이 지금 세계를 공포 가운데로 몰아 가고 있습니다.

 

또한 이미 퇴락한 공산주의가 무엇입니까? 성경이 말하는 천국, 유토피아를 예수님 없이, 인간의 힘, 특히 프롤레타이아를 통해 이루겠다는 사상입니다.

 

예수님을 일부러 빠뜨러거나, 예수님이 없는 모든 시도는 거짓입니다. 가짜입니다. 진짜를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안산제일교회 담임하시는 고 훈목사님, 위암으로 2년전에 수술 받으셨습니다. 그분이 수술 후 고통 가운데 다음과 같은 체험을 하셨습니다.

그분이 무의식 중에 목회자들이 가는 모세의 방이라는 굴같은 방에 들어 가셨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어떤 젊은 사람이 오더니 핀셋을 갖고 목사님의 배 속에서 무엇인가 자꾸 끄집어 내더랍니다. 배는 멀쩡한데 마치, 종기나고, 그 위에 생기는 딱딱한 껍질 같은 것을 계속해서 끄집어 내더랍니다. 그래서 묻기를 당신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그랬더니 그 청년이 대답하기를 나는 너의 친구다.” 그렇게 말씀 하시는데, 그때 고 훈목사님 깨닫기를 [! 예수님이 이렇게 역사하시는구나!]를 느끼셨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다 해도, 예수님은 친구로 바로 내 곁에, 우리 곁에 계셔서, 우리의 아픔을 같이하시고, 또한 치유하시고, 회복시켜 주시는 분임을 깨달으셨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바로 이런 예수님을 떠나 우리가 어디로 갈 수 있겠습니까?

 

 

2.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모든 적을 묶어 우리가 승리하게 도우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지켜 주시는데,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고, 악하게 만드는 마귀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시기 위하여, 우리의 적들을 묶어 두실 때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 성을 함락 할 때에, 그들은 전쟁을 위한 액션은 하나도 취하지 않고, 6일동안 여리고 성을 한바퀴 돌고, 7일째는 7바퀴를 돈 다음 여리고성을 향하여 함성을 질렀더니, 그 견고한 여리고 성이 무너진 사건을 우리가 잘 압니다.

여러분? 성경은 그 때 여리고 성 사람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혔다고 했습니다. 만약 그때 여리고성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두려워하지 않고, 성밖으로 나와 전쟁을 치루었다면, 성을 그저 돌기만 해서 일어나는 믿음의 역사를 이스라엘이 체험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바로 여리고 성의 사람들의 마음을 묶어 놓으셔서, 가만히 있게 만들고, 이스라엘은 믿음으로 돌게 만드신 것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상대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조그마한 목동 출신 꼬마에게 거인 골리앗이 물맷돌에 맞아 직사합니다. 사실, 골리앗이 작정하고, 덤비면 소년 다윗이 이길 수 없는 싸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골리앗의 마음을 방심하게 묶으셨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믿음의 물맷돌이 골리앗에게 정확하게 명중하도록 이끄신 것입니다.

 

우리 교우들 중에도 이런 간증은 많습니다. 건물을 증축하는데, 반대하던 주변 사람들이 직사하는 끔찍한 간증도 있습니다.

도저히 하나님이 아니시고는 안되는 일들이 지금도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여리고 성을 묶으시고, 골리앗을 묶으시는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셔서 역사하십니다.

우리를 불행으로 몰아 부치는 가난과 질병, 고난과 염려를 묶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믿음으로 살아가려고 순종하고 있다면, 믿음으로 나아가고 있다면 반드시 하나님은 우리의 적들을 묶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승리하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여러분?! 믿음을 포기하고, 불순종할 때에 오히려 세상이 믿는 저와 여러분을 묶는다는 것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삼손이 하나님께 순종할 때에 그는 천하무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들릴라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의 비밀을 포기하고, 불순종할 때에 오히려 세상이 삼손을 묶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믿음으로 살면, 주님께서는 우리의 운수들을 묶고, 우리로 하여금 승리하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 불순종하게 되면, 오히려 세상에 묶여 비웃음 꺼리가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이 물으십니다. “너희도 나를 떠나려 하느냐?” 그때에 믿음을 포기하고 떠나면, 우리는 세상에 묶여 비웃음꺼리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주님밖에 없습니다. 고백하며, 믿음으로 나아갈 때, 우리 주님이 운수를 묶고 승리하게 하십니다. 할렐루야!

 

 

 

3. 우리가 주님을 떠날 수 없는 이유는 주님이 우리를 포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실력 좋은 위대한 의사라 할지라도, 암수술을 하는데, 암덩어리가 너무 퍼져 있으면, 배를 열었다가도, 손도 안대고 닫아 버립니다. 포기하는 것이 암말기 환자를 위하는 길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우리를 절대 포기하지 않습니다. 의학적으로 끝났다 사형선고를 내렸다 할지라도, 우리 주님은 절대로 절대로 포기하지 않습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인간의 끝이 하나님의 시작일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품격있는 재판장이라 하더라도 죄를 용서 해 줄 수 없습니다. 죄를 지은 죄인에 대해서, 인격적으로 대해주고, 인권을 생각하고, 대접은 잘 해 줄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죄를 용서해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죄 자체를 용서 해 주십니다. 모든 죄악을 용서하심으로, 더 이상 우리가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 되게 하십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는 모든 죄악으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됩니다. 구원을 얻습니다. 천국과 영생을 보장받게 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가 절망의 계곡에 떨어질 때에 세상 사람들, 세상의 가치관은 우리를 포기하지만, 기껏해야 무덤까지는 따라오지만, 우리를 구원 해 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미국 시카고에 뉴올라 대학에 존 포엘박사라고 영성훈련에 뛰어난 천주교 신부님, 박사님이 게십니다.

그 분이 쓴 무조건적인 사랑이라는 책에 나오는 간증입니다.

존 포엘 박사님이 뉴올라 대학에서 신입생과 졸업생 특별강좌를 영성훈련으로 담당하셨습니다. 어느 핸가 톰이라는 학생이 입학을 했는데, 히피족처럼 하고 학교에 나왔답니다. 노랗게 붉게 물든 머리에, 찢어지는 청바지에 소위 날라리처럼 영성훈련에 참석했답니다.

톰이라는 학생이 질문 시간에 질문하기를 아직도 구닥다리 성경을 믿냐고, 하나님을 믿냐고?” 하면서, 하나님을 부정하고, 신앙을 부정하더랍니다.

 

그 시간에 말할 것이 아니라서, 존 포엘 박사님이 톰을 따로 불러서 상담을 합니다. “내가 그래도 이 학교의 교수이고, 너보다 인생을 많이 산 사람이다. 내 말을 들으라. 예수님을 믿으라!” 그렇게 권면했는데도, 이 톰이 나는 절대로 예수님을 만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찾지도 않겠다.”

 

그러자 존 포엘 박사가 유명한 말을 하게됩니다.

너가 예수님을 찾지 않으면, 반드시 예수님이 너를 찾으실 것이다.”

 

그리고 4년이 지난 뒤, 톰이 초췌한 모습으로 졸업생을 위한 특별강좌에 참여하게 되었답니다. 히피같은 머리는 다 자르고, 정장 차림으로 참여하고, 강의를 다 들은 후 포엘 박사님을 찾아 왔습니다.

교수님! 제가 지금 폐암 말기 환자입니다. 수술도 할 수 없고, 꼼작 없이 죽게 되었습니다.”

 

그때 톰이 24살인데, 24살 나이에 죽게 되어 찾아 온 것입니다.

제가 교수님을 찾은 이유가 있습니다. 제가 더 살 수 있다면, 제가 만난 예수님을 전하고 싶은데, 제가 죽고 나면, 예수님을 전할수 없으니깐, 교수님이 제 얘기를 졸업생 특별강좌 때마다 꼭 해 주셔서, 학생들이 예수님을 만나도록 해 주십시오. 그렇게 되면, 저는 하늘나라에서도 교수님을 통해서 예수님을 전하게 되는 것 아닙니까?”

 

존 포엘 박사님이 알았다고 한 다음 묻기를 “24살에 죽기에 원통하지않느냐?” 그랬더니

아닙니다. 제가 폐암에 걸려,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새상 다른 사람들처럼 죄악에 빠져, 자기 잘난맛에 살게 너무 분명한데, 그랬다면 지금 예수님 만나 누리는 이 기쁨과 행복을 도저히 맛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내 생명을 잃는다 해도 주님 만나 누리게 되는 이 구원의 확신, 영생이 저에게는 더욱 귀합니다.”

 

그래서 존 포엘 박사님이 지금까지 뉴올라대학 졸업생 특별강좌 때마다 이 []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예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찾지 않으면, 반드시 예수님이 여러분을 찾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이시여!

더 늦기 전에 예수님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예수님이 저와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너희도 다른 사람들처럼 가려느냐?”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베드로처럼 분명하게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 제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저에게는 주님밖에 없습니다. 주님만을 사랑하겠습니다.”

 

왜 우리가 주님을 만나야 합니까? 그 이유는

 

1. 예수님만이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2. 적을 묶고 우리를 승리하게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3. 우리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찬양하십시다. 찬양집 122, “주를 향한 나의 사랑을부르시고, 말씀을 붙잡고 잠깐 통성으로 기도하십니다.

 

 

 

 

말씀이 어려운 이유/6:60-66

2001-10-25 17:30:16

 

예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 천명을 먹이신 일이 있은 후, 제자들에게 "떡을 먹고 배불렀던 사람들은 다 떠났다. 그러나 너희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고 영생하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렵다"며 뒷전에서 수근거리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내가 하는 말이 어려워 너희에게 걸림돌이 되느냐?"고 물으시며 "너희가 이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면 내가 죽은 사람 가운데서 다시 살아날 때는 어떻게 하려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

 

 

1. 말씀이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수군거리기만 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은 너무 고상하셔. 예수님은 이상이 너무 높으셔. 현실을 너무 몰라. 식민지에 시달리는 우리 민중들의 아픔이나 배고픔을 너무 모르셔. 지금 떡 한 개가 필요하고 물고기 한 마리가 필요하지 하늘의 양식, 생명의 양식, 그것이 다 무엇이란 말인가?"하고 불평을 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당장에 필요한 한 조각의 빵과 한 벌의 옷을 아쉬워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어렵다"고 했습니다. 어렵다는 말은 '단단하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먹이지 못하였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고전3:2). 어린아이가 어느 정도 자라면 젖을 떼고 밥을 먹여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도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경험으로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는 세련된 지각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5:14).

여러분은 젖을 먹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단단한 식물을 먹으면서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는 세련된 지각을 가진 어른 신자입니까? 대화가 단절되어 투정과 불평으로 수근거리기만 하면 어린아이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무엇이든지 묻고 믿음으로 대화를 나누며 살아 간다면 아무런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2. 말씀이 어려운 이유는 육에 속하였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보려고 하지 마십시오. 마음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닫히면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하고, 영의 눈이 열리지 않으면 영원한 것을 볼 수 없습니다. 마음의 문이 열리면 가을 한 송이 국화꽃을 보면서도 봄부터 피를 토하고 울었던 소쩍새와의 관계가 심상치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한 여름 먹구름 속에서 울던 천둥소리도 범상치 않게 들립니다. 그래서 온 우주의 힘으로 피워 낸 한 송이 꽃을 노래하게 되고 간밤에 왜 무서리가 내렸는지 잠은 어찌 오지 않았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노란 꽃잎하나에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님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십자가를 말씀하시는데 제자들은 자리다툼을 하고 있습니다. 십자가가 없이는 면류관을 얻을 수 없는데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을 바라보자 하는데 제자들은 땅에 있는 양식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말씀하시는데 제자들은 한끼 밥을 걱정합니다. 예수님은 영원을 이야기하는데 제자들은 옛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영적인 것을 말씀하시는데 제자들은 육체적인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어려운 이유는 육에 속하였기 때문입니다. "성령과 피로 거듭나면 세상도 나도 없고 사랑의 주만 보이며 흰옷을 입은 천사들과 신비한 환상이 보인다"고 한 이 찬송가의 작시자가 맹인이라는 사실을 여러분 아십니까? 얼마나 위대한 고백입니까?

 

 

3. 말씀이 어려운 이유는 믿음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스승의 말씀을 믿지 않고 배신한 유다는 결국 '마귀'라는 평가를 받고 맙니다. 예수님은 끊임없이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이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하고 탄식하셨고 "마지막 날에 내가 믿음을 보겠느냐"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네 믿음대로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일을 하리이까?"하고 묻자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고 하셨습니다(6:28-29).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왜 예수님을 믿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유일한 이유는 하나님이 그분을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주신 책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설교를 경청하고 교역자를 존경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세우셔서 말씀을 전하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11:6).

수군거리던 사람은 다 떠났습니다. 육에 속하여 배불렀던 사람도 다 떠났습니다. 믿음이 없이 예수님을 팔고 배신했던 제자도 곧 떠날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도 가려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베드로는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습니다. 우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분인줄 우리가 믿고 알았습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내가 알아서 믿습니다"고 고백한 것이 아니라 "내가 믿고 알았습니다."고 말했습니다

부드럽게 달콤하게 우리들의 귀를 즐겁게 하는 이야기를 얼마든지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장성한 사람은 단단한 식물을 먹어야 합니다. 달고 오묘한 그 말씀, 생명의 말씀, 내 평생의 듣는 말씀, 그 말씀이 나에게 평안과 용서를 주고 모든 사람들에게 복을 주는 말씀인줄로 믿고 귀를 기울이므로, 말씀을 듣는 즐거움이 날마다 더하는 여러분의 생애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말씀을 듣기가 어렵고 신앙생활이 힘들다고 느껴질 때 마음을 열어 먼저 믿은 이들에게 묻고 대화함으로 깨닫는 은혜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육신에 속해 있는 우리의 욕심을 버리고 영적인 것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큰 믿음을 주시고 순수하고 온전한 믿음을 주심으로, 설교를 들을 때마다 달고 오묘한 말씀, 생명의 말씀을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경청할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예화

1대지. 미국의 어떤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교회 안에 수군수군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어디에서 나오는 소리인지 알지 못하지만 어느 날 교회의 담임 목사님이 그 지역에서 아주 유명한 사창가에서 새벽에 눈치를 살피며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가 교회의 전체에 퍼져서 시람들이 모이는 곳마다 "목사님이 사창가에서 나오더라. 목사님이 그럴 수가 있어?"하고 수근대는 소리가 그치지를 않았습니다. 계속 소문에 소문이 꼬리를 물고 나중에는 "그렇다더라" 하는 이야기까지 돌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다 못한 장로님 한 분이 용기 있게 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목사님, 이런 소문이 있는데 어찌된 일입니까? 사실이라면 더 이상 문제가 커지기 전에 조용히 떠나셔야 하고, 그렇지 않다면 사유를 밝히십시오."하고 용기있게 말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목사님이 무릎을 탁! 치고 껄걸 웃으시면서 "그런 일이 있었지요."하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너무도 태연히 대답하는 목사님을 보고 장로님은 "아니 목사님 그것이 어찌 보통 일입니까? 웃고 이야기 할 일이 아닙니다. 어찌 그럴 수가 있습니까?"하고 언성을 높였습니다. 목사님은 ", 제가 사창가에 다녀온 일이 있습니다."하며 이야기하는 사연은 어러하였습니다. 그 지역의 유명한 사창가 어느 집에서 평생을 몸을 팔며 살던 한 여인이 외롭게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자신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예감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면서 어린 시절 예수를 믿었던 것을 기억하였습니다. 그가 "죽기 전에 목사님을 모시고 회개하고 기도를 받고 세상을 떠나고 싶다"고 하자 그를 불쌍히 여긴 이웃 사람이 교회의 목사님에게 연락을 해 주었습니다. 사실은 주변의 여러 교회의 목사님들에게 연락을 했는데 모두 "갈 수 없다"며 외면을 하였습니다. 마지막 희망을 가지고 그 목사님께 연락을 했고 딱한 사정을 들은 목사님은 도덕적 비난과 오해를 받을 위험을 무릅쓰고 한 밤중에 사창가를 찾아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죽어 가는 그 여인이 평생의 죄를 회개하고 "나 같은 죄인도 용서받을 수 있습니까?" 하고 눈물로 호소하는데, 목사님은 그에게 복음을 전하여 예수를 믿고 영접하게 하게 함으로 편안히 눈을 감고 주님의 품으로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2대지. 이솝우화로 유명한 이솝은 원래 그리스의 노예였다고 합니다. 그가 하인으로 있는 집의 주인이 하루는 이솝을 불렀습니다. "이솝, 내가 목욕을 가려고 하는데 저 대중탕에 사람이 많이 있는지 없는지 가서 봐라." 이솝은 달려갔습니다. 목욕탕에 가 보고 와서 주인에게 "목욕탕에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주인은 "그래 잘 되었군, 시원하게 목욕 좀 하고 와야지."하고 목욕탕에를 갔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목욕탕에는 사람이 바글바글했습니다. 사람이 너무 많아 들어가서 몸도 움직이기가 어려웠습니다. 주인은 "기왕 왔으니 할 수 없지" 하고 목욕을 하였습니다. 투덜거리면서 돌아가서 이솝을 불러서 야단을 쳤습니다. "이솝, 너는 가 보지도 않고 거짓말을 했지? 목욕탕에 사람이 꽉 차 있는데 한 사람도 없다고 하다니. 도대체 이럴 수가 있단말이냐?" 이솝은 말했습니다. "주인님, 그 목욕탕에 있는 사람들은 사람이 아닙니다." 주인이 물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이솝은 대답하였습니다. "제가 목욕탕을 가는데 길이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목욕탕에 거의 이르러서 커다란 돌멩이가 하나 놓여 있었습니다. 길을 가기도 힘이 들고 사람이 걸려서 넘어질 수도 있는 위험한 돌이 있는데 목욕탕 가면서 그 돌멩이를 치우는 이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들이 어디 사람입니까?" 주인의 말과 이솝의 말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였습니다. 같은 하늘 아래 같은 지붕 밑에서 같은 언어를 쓰면서도 관심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니까 대화가 서로 통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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