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주님의 뜻대로 살고 싶습니까? /요7:1-24 (:17-24)/ 유기성목사
2022-09-22 10:28:34
요 7:1 그 뒤에 예수께서는 갈릴리를 두루 다니셨다. 유대 사람들이 자기를 죽이려고 하였으므로, 유대 지방에는 돌아다니기를 원하지 않으셨다. 2 그런데 유대 사람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워지니, 3 예수의 형제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형님은 여기에서 떠나 유대로 가셔서, 거기에 있는 형님의 제자들도 형님이 하는 일을 보게 하십시오. 4 알려지기를 바라면서 숨어서 일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형님이 이런 일을 하는 바에는, 자기를 세상에 드러내십시오." 5 (예수의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6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러나 너희의 때는 언제나 마련되어 있다. 7 세상이 너희를 미워할 수 없다. 그러나 세상은 나를 미워한다. 그것은, 내가 세상을 보고서, 그 하는 일들이 악하다고 증언하기 때문이다. 8 너희는 명절을 지키러 올라가거라. 나는 아직 내 때가 차지 않았으므로, 이번 명절에는 올라가지 않겠다." 9 이렇게 그들에게 말씀하시고, 예수께서는 갈릴리에 그냥 머물러 계셨다. 10 그러나 예수의 형제들이 명절을 지키러 올라간 뒤에, 예수께서도 아무도 모르게 올라가셨다. 11 명절에 유대 사람들이 예수를 찾으면서 물었다. "그 사람이 어디에 있소?"
12 무리 가운데서는 예수를 두고 말들이 많았다. 더러는 그를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고, 더러는 무리를 미혹하는 사람이라고 말하였다. 13 그러나 유대 사람들이 무서워서, 예수에 대하여 드러내 놓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4 명절이 중간에 접어들었을 즈음에,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서 가르치셨다. 15 유대 사람들이 놀라서 말하였다. "이 사람은 배우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저런 학식을 갖추었을까?" 16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나의 가르침은 내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것이다. 17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 가르침이 하나님에게서 난 것인지, 내가 내 마음대로 말하는 것인지를 알 것이다. 18 자기 마음대로 말하는 사람은 자기의 영광을 구하지만, 자기를 보내신 분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은 진실하며, 그 사람 속에는 불의가 없다.
19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않았느냐? 그런데 너희 가운데 그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어찌하여 너희가 나를 죽이려고 하느냐?" 20 무리가 대답하였다. "당신은 귀신이 들렸소. 누가 당신을 죽이려고 한다는 말이오?" 21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한 가지 일을 하였는데, 너희는 모두 놀라고 있다. 22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법을 주었다. -사실, 할례는 모세에게서 비롯한 것이 아니라, 조상들에게서 비롯한 것이다. - 이 때문에 너희는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준다. 23 모세의 율법을 어기지 않으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데, 내가 안식일에 한 사람의 몸 전체를 성하게 해주었다고 해서, 너희가 어찌하여 나에게 분개하느냐? 24 겉모양으로 심판하지 말고, 공정한 심판을 내려라.“
어떤 목사님이 “살만하니 예수님만 바라보라는 말을 한다” 라는 말을 전해 듣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 분이 처한 상황이 얼마나 힘들면 그런 말을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제가 예수님만 바라보자고 한 것은 말할 수 없이 어려웠던 시절이었습니다. 너무 어렵기에 예수님만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 하지만 정말 예수님을 믿어는 보았는지 돌아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고 아니고 안 믿는 것도 아니면 방황하게 될 뿐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처했어도 예수님이 믿어지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문제는 예수님을 믿고 싶은데 믿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이유를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라 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그리스도가 아니라면 하실 수 없는 말씀을 들었고 그런 기적을 보고도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진정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사람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하나님에게서 난 것임을 알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17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 가르침이 하나님에게서 난 것인지, 내가 내 마음대로 말하는 것인지를 알 것이다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들 조차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지 못했습니다.
유월절이 되자 예수님의 동생들이 예수님께 고향에 머물지 말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사람들 앞에 큰 권능을 보이라고 강권하였습니다. 요한 사도는 동생들이 이렇게 말한 것은 그들도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믿지는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형이 특별한 사람이라는 생각한 정도였다는 것입니다. 정말 에수님이 그리스도이신 것을 믿었다면 예수님께 이처럼 충고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동생들에게 예수님께서는“내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러나 너희의 때는 언제나 마련되어 있다”(:6)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셔야 할 때가 되면 동생들이 말려도 할 것이지만 동생들은 지금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고 행하는 일을 보았으니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동생들이 정말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 했다면 분명히 믿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 중에도 예수님이 그리스도라 믿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못했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두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믿지만 고난도 감수할 정도의 확신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그들이 확신을 갖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더 많은 기적을 행하였어야 했을까요?
아닙니다. 이미 충분했습니다. 문제는 그들의 마음이었는데, 하나님의 뜻이면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순종하겠다는 마음이 없으니 예수님애 대하여 확신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마음이었는데, 율법대로 살려는 마음은 없었습니다.
그 증거가 예수님을 죽이려 한 것인데, 안식일에 38년된 병자를 고친 일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범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예수님에게로 사람들의 마음이 쏠리는 것 때문에 위기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신 것을 보고 죽여야 하겠다는 생각까지 한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 어디에도 그런 일로 사람을 죽이라는 규정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 너희 가운데 그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어찌하여 너희가 나를 죽이려고 하느냐?”(:19) 하고 물으신 것입니다.
그 때 유대인들은 이미 예수님을 죽이려 모의도 했었고, 사람들도 다 아는 일임에도 자신들은 그런 일이 없었다고 잡아 뗍니다. 이것이 ‘율법’ ‘율법’ 하였던 유대교 지도자들의 실상이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행동한 것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을 따를 것인가 하는데는 관심이 없고 오직 자기에게 유익하냐, 자기들이 영광을 받느냐에만 관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38년된 병자를 고치신 것은 안식일을 어긴 것이 아니라 안식일의 의미를 정확히 드러낸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지키라 하신 것은 우리에게 진정한 쉼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긍휼하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에도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지키려고 할례는 행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것을 예로 들면서“내가 안식일에 한 사람의 몸 전체를 성하게 해주었다고 해서, 너희가 어찌하여 나에게 분개하느냐?”(:23)“겉모양으로 심판하지 말고, 공정한 심판을 내려라” (:24)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유대인들이 진정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했다면 예수님께서 38년 병자를 고치신 일을 통하여 오히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들의 기득권만 지키려 했기에 예수님을 죽여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미국에 한 때 노예 제도가 있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잡아다가 소나 나귀처럼 부렸습니다. 그러면서도 주일이면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런 일이 지금 우리 가운데도 있을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도 진정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교회를 오래 다녀도 예수님의 말씀이 들려지지 않고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이 깨달아지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기도하셨습니다. 그 후에 십자가의 길을 가실 힘을 얻으셨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말씀하시지 않는다고 답답해 하지만 실상은 “나의 원대로 마시고 하나님 아버지의 원대로 하소서” 라고 기도하지 못하기 때문에 들리지 않고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을 너무나 원하시는데 우리에게 말씀하지 않으실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 한다면 지금도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인 것과 함께 하시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목사님 한 분이 청년 수련회 강사로 오셔서 설교 중에 예수님을 처음 믿게 된 동기에 대하여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답니다. 친구 하나가 점심으로 빵을 가져왔는데, 친구들이 너도 나도 달라고 하니 다 나누어 주고 마지막 남은 조각을 먹으려다가 자기를 보았답니다. 그것 보고 자기 얼굴 보고 몇 번 그러더니 그 빵 조각을 자기에게 주더랍니다. 얼마나 얼굴이 간절해 보였으면 그랬겠습니까? 그 아이가 그런다고 그걸 받아 먹었답니다. 먹고난 뒤, 마음이 편치 않더랍니다.
쟤는 자기 먹을 빵도 다 나누어 주는데, 나는 남은 빵 한 조각 마저 사양하지도 않고 얻어 먹었는가? 어떻게 이렇게 다른가? 한 없는 열등감이 느껴지더랍니다. 그런데 얼마후 그 친구가 교회 같이 가자고 하더랍니다. 거절해서는 안된다는 마음이 들어 친구 따라 교회에 갔는데, 그 주일 설교 중에“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 보다 더 큰 사랑은 없느니라”는 말씀이 있었답니다. 자신은 그런 말이 있는 지 꿈에도 생각지 못했는데, 이런 말씀을 들으니 그렇게 행동하는 구나! 감동이 되더랍니다. 그 때부터 교회에 열심히 다녔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도 정말 말씀대로 살려 하면 영혼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제게 오는 요청이 많습니다. 도와달라는 요청도 많고 말씀을 전해 달라는 요청도 많습니다. 요청을 다 들어드릴 수 없으니 무슨 기준으로 응답해야 하는지가 문제입니다.
저도 제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나의 원하는 것이 정말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일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제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 달라는 기도를 내려 놓았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주님의 뜻인가?’ 그 기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순종하기를 힘썼습니다. 그리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일기를 쓰면서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훈련할 수 있는 너무나 간단하고도 놀라운 방법을 알게 되어 예수동행일기 사역을 시작하였는데, 어느 날, 기도 중에‘너는 실패할 것이다’ 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충격이었습니다!‘아, 결국 안되는 일인가?’생각하였을 때, 주님은 다시 물으셨습니다. “실패한다 하더라도 계속 이 일을 하겠느냐?”
혼란스러웠지만 주님께서 무슨 뜻으로 이런 질문을 하시는 것인가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습니다.‘그것이 나의 실패일지는 몰라도 주님의 실패는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일을 100년이 지나 이루신다면 제게는 실패일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는 실패가 아닌 것입니다. 너도 나도 자기가 실패할 일은 하지 않으려한다면 주님의 일은 누가 하겠습니까? 결실을 보지 못하고 죽은 선교사나 복음전하다 순교한 사람은 실패자로 끝난 것일까요?
정말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 하면 실패할 것을 알고도 순종해야 한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고백했습니다.“주님이 기뻐하실 일이면 실패라도 합니다. 실패하겠지만 저는 계속 하겠습니다.”
그 고백을 하는데 눈물이 났습니다. 그렇게 다시 예수동행 일기를 쓰자고 호소한지 12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지금 깜짝 놀랄 열매를 보고 있습니다. 정말 주님이 하신 일이라 고백이 됩니다. 문제는 어떻게 12년을 계속 예수 동행 운동을 할 수 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라면 실패하더라도 계속 하겠다는 결단 때문에 온갖 난관과 장애물을 넘어설 수 있었습니다.
실패할 것처럼 보여도 그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순종하는 사람은 반드시 주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알게 됩니다.
물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도 그대로 살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아니 반드시 그렇습니다. “안된다” ‘못하겠다’ 하는 탄식이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한 사역자의 아내가 남편의 불륜을 알게 되어 너무 고통스러워 했습니다. 그런 배우자도 용서하고 받아주어야 한단 말인가? 도무지 안된다고 하면서“미운 것도 죄입니까?”라고 물으셨습니다.
‘항상 주님을 바라보라’, ‘원수도 용서하고 사랑하라’, ‘오직 기도로 살라’
주님의 뜻인 줄 알지만 너무나 부담이 되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지 못했다고 죄책감을 가질 것이 아닙니다.
‘항상 주님을 바라보라’, ‘원수도 용서하고 사랑하라’, ‘오직 기도로 살라’는 말씀은 애초에 우리 힘으로 안되는 일입니다. 우리 노력과 결단으로 된다면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이유도 없었을 것이고 성령을 보내주지도 않으셨을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의 은혜로 될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정말 주님의 뜻대로 살고 싶은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만 간절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더 간절하십니다.
우리 마음이 정말 주님 뜻을 따르려 하면 주님께서 말씀대로 살게 해 주십니다.
기분 나쁜 때, 낙심될 때, 몸이 아플 때, 눈 앞이 캄캄할 때, 좌절될 때, 사람들이 다 미워지고 포기하고 싶기만 할 때, 주님의 말씀을 명심해야 합니다.
요 15: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우리가 할 일은 오직 그 순간 하나님의 뜻을 따르겠다고 결단하고 그렇게 해 주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감사하라” “찬양하라” “기다리라” “사랑만 하라” 말씀하시면 한걸음만이라도 순종하면 됩니니다. 그 다음은 주님께서 이루어주십니다.
찬양: 주께 가까이
주님의 때를 포착하십시오 /요7:1-10/ 김형익
2021-05-06 05:13:05
1. 때를 알라!
사람들이 인생을 살면서 때가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모든 영역에서 때는 중요합니다. 투자전략에 대해서 어떤 분이 하신 말씀이 기억납니다. “무릎에서 사서 어깨에서 팔라!” 명언입니다.
어디다 투자하느냐도 중요하겠고, 얼마나 투자하느냐도 중요하지만, 때(타이밍)가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주제 가운데 하나는 주님께서 종종 언급하신 ‘때’에 대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그 중 하나입니다. 신앙 생활을 하면서 중요한 것도 때를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때를 파악하고 포착하는 것입니다.
2. 상황과 의문: “주님은 왜 묻혀서 지내시는가?”
본문에서 예수님의 동생들은 예수님에게 “왜 묻혀서 지내느냐”고 묻습니다. 이제 초막절이 가까우니 예루살렘, 큰 무대로 가시라고 권합니다. 이들은 이 말로써 그들의 불신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행하셨던 그 많은 기적이 동생들을 거듭나게 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요한복음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사람이 표적을 보았다고 해서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5). 믿음은 오직 하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는 것이고, 성령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의 작용이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주님께 올 수 없습니다(6:44).” 그러면 제자들이 이런 생각을 했고 주님께 이런 요구를 하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A. 거의 일년을 예루살렘이 아닌 갈릴리에서 보내심(5:1; 6:4)
본문의 상황을 우리가 주의깊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지금까지 거의 일년을 예루살렘에 가시지 않고 갈릴리에서 보내신 것 같습니다. 처음 2:13에서 유월절을 언급했는데 그때 주님은 예루살렘에 가셨습니다. 그리고 6:4에 언급된 유월절에는 오병이어의 이적을 행하셨는데 이 일은 갈릴리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지금 7:2에는 초막절이 가까왔다고 했습니다. 참고로 유월절에서 초막절은 6개월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펴볼 남은 한 구절은 5:1입니다. 베데스다 못의 38년된 병자를 고쳐주셨을 때 주님은 예루살렘에 계셨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유일하게 명시되지 않은 그 유대인의 명절은 아마 유월절이거나 초막절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지만, 나팔절이거나 부림절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떻든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계셨던 것은 그 5장의 사건이 마지막입니다. 그 명절이 유월절이든 초막절이든 주님께서는 1년 혹은 그 이상의 시간을 갈릴리에서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동생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적들을 많이 보았을 것입니다. 아직 예수님을 구주로 믿지 않던 그들은 예수님께서 좀 더 큰 무대로 가셔야 한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는 초막절처럼 알맞은 기회는 없을 것이라고 그들은 느꼈던 것입니다.
B. 위기의식: 대중들의 지지도가 떨어지고 있다!(3~4)
여기 그들의 생각에 작용한 또 하나의 우려는 대중들의 지지도가 떨어지고 있다는 의기의식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대중들에게 점점 잊혀져가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우려입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오랜 기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시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말합니다.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4).” 그러니까 주님이 행하시는 이 놀라운 기적들을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아직 주님을 믿지 않지만,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백성들?도 볼 수 있도록 유대로 가시라고 말합니다(3).
C. 때에 대한 무지는 행동, 원칙에 대한 무지를 가져온다.
주님은 이들에게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6). 지금 동생들은 나름대로 꽤 지혜롭게 생각하고 주님께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시세를 읽고 분석해서 ‘지금이 그 때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타이밍을 놓쳐서는 안 된다고 예수님께 충고를 하는 것입니다. 즉 모멘텀(momentum)을 놓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모든 지혜가 말할 수 있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때로 영적 원리는 그와는 다르게 작용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필요가 있습니다.
간혹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할 때, 또는 주님의 때가 언제인가를 생각할 때, 주님의 때에 대해서 무지하게 되면 그 결과는 행동과 원칙에 있어서의 무지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혜는 때를 아는 것과 깊이 관련이 있다는 것이 성경의 관점입니다. 에베소서에서 바울 사도는 “오직 지혜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엡 5:15~16). 지금 이 때가 어느 때인지를 알고, 기회를 붙잡지 않는다면 그가 할 수 있는 남은 행동과 원칙은 다 무지 위에서 행해지는 열매없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동생들이 예수님께 제안하는 세상의 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때는 언제나 인간의 지혜가 생각해낸 때와 같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이 생기면 언제나 하나님께 기도할 때, 때에 대해서 많이 묻게 됩니다. 때를 분별해야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때를 분별해야 하나님께서 어떻게 영광을 받으시는지를 가늠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D. 주님을 죽이려는 유대 당국자들의 음모(5:18; 7:1)
본문에서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시지 않은 분명한 이유를 한 가지 밝혀줍니다. 그 이유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함이러라”고 했습니다(1). 이 일은 이미 예루살렘에서 안식일에 38년된 병자를 고쳐주셨던 그 사건에서 기인했다고 할 수 있고 거기서 언급된 바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요 5:18).
이 일은 주님의 십자가를 향해서 계속해서 조금의 오차도 없이 하나님의 시간표에 따라 진행이 되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것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정하신 때를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은 이 모든 일 속에서 주도권을 가지고 행하고 계심을 보여줍니다. 즉, 주님의 생각의 중심에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동생들의 생각의 중심에는 성공과 대중적 인기가 놓여져 있습니다. 전혀 다른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 지혜와 세상 지혜의 차이입니다. 무엇이 그 생각의 중심에 놓여있는가가 이처럼 세상의 지혜와 영적 지혜를 구분해주는 시금석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를 섬기는 일에서도 이 차이는 극명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주님의 때를 포착함에 실패하면 인간의 방법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동생들이 보여준 태도입니다. 그들의 태도는 진정으로 주님을 위하고 주님을 생각해서 한 말들임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주님을 위하는 그들의 마음 중심에는 불신이 있었다고 성경이 말씀하는 것을 주목하십시오(5).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분별하고 계십니까? 주님의 때를 우리가 포착하지 못한다면, 그 때에 대해서 무지하다면, 영적 지혜가 없다면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교회를 섬길 수 없는 것입니다. 비록 교회를 위하는 진정한 마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입니다. 주님의 몸은 하나님의 시간표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 때를 지금 본문에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님의 관점과 동생들의 관점의 이 뚜렷한 차이를 보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세상의 지혜에서만이 아니라, 영적 지혜가 무엇인지를 배우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신앙 생활을 하는 이치요, 절대적인 기준입니다.
3. 초막절(출 23:16; 레 23:33~36, 39~43; 신 16:13~15)
여기서 잠깐 우리는 초막절에 대해서 이해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초막절은 포도와 감람열매의 추수를 마치고 추수를 기념하는 것과 관계가 있고, 또한 그 열매들을 저장해둔다는 뜻에서 수장절이라고도 불리웁니다(출 23:16).
이 절기는 특별히 포도 추수를 기념하기에 가장 대중적인 축제였고, 또한 기쁨의 절기였습니다(레 23:40; 신 16:15). 특별히 이 초막절에 대해서만 성경에는 ‘즐거워하라’는 언급이 있는 것도 특이합니다. 아마도 이 절기가 대속죄일인 7월 10일이 닷새가 지난 15일에 시작되는 절기이기 때문에, 그들의 죄가 사하여진 것을 기뻐하는 것과도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초막절에는 그 이름과 같이 일주일 동안을 초막에 거함으로써 과거 하나님께서 조상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광야에서 보호하신 것을 기념하였습니다(레 23:43; 신 16:15). 특히 주님 당시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 초막절 기간에 행하는 특이한 의식이 있었는데, 하나는 매일 실로암 못에서 물을 길어서 성전으로 나르는 행렬이 이어지는 것이고 또 하나는 성전 마당에 있는 등불을 밝히는 의식이었습니다.
실로암 못에서 물을 길어서 나르는 행렬에 있는 사람들은 이사야 12:2~3을 노래하였습니다.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의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그들은 이 노래를 부르면서 스가랴의 종말의 영광에 대한 예언을 기억했습니다. “그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슥 14:8).”
성전 마당의 등불을 밝히는 의식도 역시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과 관계가 있는데 “여호와의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어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슥 14:7)”고 한 말씀을 기억하고 행한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의식은 모두가 종말에 예루살렘의 영광과 관계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런 종말의 영광을 기대하면서 초막절을 기쁨의 축제로 즐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앞으로 상고하게 될 요한복음 7장과 8장 말씀은 다 초막절에 주님이 하신 말씀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 주제는 두 개입니다. 하나는 “목마른 자들에게 생수를 약속하신 것”이고(7:37~39), 두번째는 “내가 세상의 빛이다”라고 하신 선언입니다(8:12). 이 두 주제는 바로 초막절의 의식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들이 바라는 종말론적인 성취는 주님을 통해서 주어지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초막절에 대한 대략적 이해입니다.
4. 주님께서 하나님의 때를 포착하시다.
이렇게 초막절이 이스라엘의 가장 큰 명절로 지켜졌으니, 예수님의 믿음 없는 동생들이 초막절에는 무대의 중심인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셔서 기적을 행하심으로써 당신을 사람들 앞에서 드러내시라고 재촉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처사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세상의 지혜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주님은 이런 것들에 의해서 움직이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적인 관점, 인간적인 지혜에 의해서 움직이시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여기 본문에서 보는 것은 주님께서 철저하게 하나님의 계획의 관점에서 때를 이해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세상의 인정이나 여론, 대중적 지지나 명성의 오르내림에 의해서 조금도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종종 이런 것들은 사람들을 움직이는 힘이 되곤 합니다. 여러분이 사업을 하신다고 하면 이런 세상의 지혜를 십분 사용해야 합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이런 세상 지혜를 무시하고 사업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일반 은혜/일반 은총에 속한 영역이고, 그리스도인들도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런 지혜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런 일반 은혜에 대해서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주님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십자가입니다. 주님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하나님의 때가 되었을 때, 예루살렘에 가셔서 십자가를 지셔야 합니다. 주님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대중적 지지도가 아닙니다.
주님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계획의 관점에 서 계십니다. 하나님의 때를 포착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다투지도 들레지도(소리를 지르지도) 않으십니다”(마 12:19). 예수님의 동생들은 아무 때든지 그들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됩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의 시간표를 보고 하나님의 때를 포착하고 계십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때에 자신의 삶을 맞추어 가고 계십니다.
5. “하나님의 경륜(섭리, 정하신 계획과 뜻)은 하나님의 뜻에 따른 영원한 하나님의 의도인데,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통해서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앞으로 일어날 어떤 것이든지 미리 정하셨다.”(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2~3년 전에 제가 장년주일학교에서 가르친 기초교리강좌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을 근간으로 한 것이었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경륜에 대해서 설명한 것을 살펴보는 것이 오늘 이 ‘때’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경륜(섭리, 정하신 계획과 뜻)은 하나님의 뜻에 따른 영원한 하나님의 의도인데,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통해서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앞으로 일어날 어떤 것이든지 미리 정하셨다.” 이 정하신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경륜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영원이라는 관점에서 전지하신 하나님께서 세우신 계획입니다.
인간의 계획은 이루기도 하고 못 이루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고, 일어나게 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의도와 계획을 벗어난 것은 없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의 뜻, 작정, 혹은 경륜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이 이런 하나님이 아니라면 어떻게 여러분을 구원하실 수 있으며, 어떻게 여러분은 그런 분께 여러분의 인생과 영원을 맡길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성경이 말씀하고 계시는 하나님이며, 그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천지 만물이 이루는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작정하시고 그 선하신 의도대로 이끌고 가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 바로 구원하는 믿음인 것입니다. “아, 나는 그런 하나님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너무 복잡합니다. 나는 그냥 단순하게 예수님이 죄인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라고 이야기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진실로 십자가의 복음을 믿는다면 바로 그 십자가의 복음의 주체가 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거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시간표만이 아니라, 우리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시고, 우리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다 그분의 손 안에서 그분의 시간에 일어나는 일들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6. 주님의 때?하나님의 시간표?를 포착하라.
그렇다면 오늘 2010년의 첫 주일을 보내면서 우리가 상고하고 있는 이 본문은 우리에게 주님의 때를 포착할 것을 요구합니다. 자기 방식대로, 세상의 지혜만이 전부인 줄로 착각하고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불신 동생들이 보여준 태도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그런 방식으로 교회를 섬기는 이들과 인생을 살아가는 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여러분은 과연 주님의 때를 포착하고 살고 계십니까?
작년에 여러분의 삶에 일어난 모든 일들을 여러분은 어떻게 소화하고 새해를 맞으셨습니까? 여러분 자신의 시간표가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표에서 그 모든 일들을 찾아보셨습니까? 어떤 일들은 여러분의 생각대로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더 많은 경우가 우리의 생각대로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것들, 우리의 시간표에 따라서 진행되지 않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시간표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들이며,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과 의도를 따라서 되는 것들임을 여러분은 보고 계십니까? 믿음은 이것을 보게 하는 안목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꽃이 피는 과정을 저속으로 촬영해서 정상속도로 보여주는 비디오를 보신 분이 계실 것입니다. 마치 꽃이 정신없이 꿈틀대고 춤을 추는 모습으로 보입니다. 또 아주 빠르게 날개짓을 하며 날아가는 곤충을 고속으로 촬영해서 재생하면 그 곤충의 날개짓이 얼마나 천천히 움직이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어떤 것은 너무 빨리 움직이고, 또 어떤 것은 너무 천천히 움직입니다. 우리는 다 일정한 시간의 진행 속도에 묶여서 살아가기 때문에 이 세상에 있는 너무나 많은 것들이 우리 눈에 포착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자연세계 속에서도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삶 속에서 행하시는 수많은 일들에 있어서는 어떠하겠습니까? 우리는 다 자기의 시간표, 자기의 시간 진행 속도에 묶여서 살아가는 만큼,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선하고 아름다운 많은 것들을 보지 못한 채 놓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떤 일은 하나님께서 너무나 늦게 행하시는 것 같이 느껴지고, 또 어떤 일은 하나님께서 너무나 빨리 행하시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주님의 때를 포착하십시오. 이 말을 제가 어떤 의미로 쓰고 있는 것일까요? 주님께서 말씀하셨던 때는 모두 십자가 사건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주님의 때에 대한 생각의 중심에는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주님은 모든 것을, 삶 전체를, 역사를 바로 그 때를 중심으로 바라보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때를 포착하라고 제가 말씀드리는 의미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관점에서 우리는 우리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이해하고 바라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을 신뢰함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여러분의 시간표를 신뢰하는 대신, 주님의 때를 포착하고 살아가는 것을 배우십시오. 주님의 때, 십자가를 통해서 여러분 인생의 모든 일들을 이해하십시오. 그리고 해석하십시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시간개념을 가르쳐줍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약속해주셨습니다. 수많은 세대가 지나갔고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이 지나서 주님은 베들레헴에 나셨습니다. 그리고 정하신 때가 차매,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인류의 모든 역사는 바로 이 때를 중심으로 해석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아담에서 오늘날 우리에 이르기까지 말입니다.
역사의 시간표 전체를, 창조에서 완성까지 이르는 역사 전체를 한 눈에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그 시간들은 결코 길고 긴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정하신 일을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계획의 관점에서 당신의 때를 살피셨고 그 시간표에 따라서 움직이셨습니다. 그것은 초조함이나 불안감, 염려와 걱정으로 채워진 삶이 아니라, 확신과 담대함 그리고 능력이 있는 삶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왜 이렇게 더디게 행하시는가?”라는 질문이 있으십니까? “하나님,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합니까?”라는 기도를 하고 계십니까? 주님의 때를 포착하는 안목, 믿음을 구하십시오. 그리고 시간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 주님께서 보여주신 삶의 확신과 담대함, 그리고 능력으로 우리의 새해를 충만하게 채워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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