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떡이신 예수님 /요6:30-40/ 김창진목사
2023-01-16 14:44:14
● 썩지 않을 하나님의 일
오병이어의 기적을 경험 한 사람들이 먹었던 떡을 그리워하며 예수님을 찾아 가버나움에 오게 됩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요6:27)고 말씀하십니다. 썩을 양식이 무엇입니까? 세상의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이 썩을 양식이 아닙니다. 만일 이 세상에서 살기 위해 먹고, 마시고, 입어야 하는 것이 썩을 양식이라면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하여 썩을 양식을 사람들에게 먹인 꼴이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양식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일에 강조점이 있습니다. 즉,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라는 것은 세상의 먹고, 마시고, 입는 것들을 더 갖고자, 추구하며 하나님께 매달리는 일들이 썩을 양식을 위해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을 하는 어리석은 짓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내가 이 만큼 하나님을 위해, 교회를 위해, 헌금하고, 수고하고, 헌신하고, 봉사하고, 전도하고, 선교하고, 예배하였으니 내가 일하며 쏟은 물질과 시간에 하나님은 30배 60배 100배의 복을 주실 거야’라는 생각으로 예배하고, 헌신하고, 수고하고, 전도하고, 선교를 했다면 그것이 썩을 양식을 위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무리들이 묻습니다. 28절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그런 물음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29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하나님의 일이란 어떤 특정한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즉,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한 일이란 곧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란 것이 내 의지로 갖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그래서 믿음은 구원을 얻고자 하는 모든 일을 무효화시킵니다. 믿음은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도록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면 우리는 아무것도 안 해도 됩니까? 아무것도 안 해도 됩니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 그러나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은 후의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수고하게 하고, 헌신하게 하며, 봉사하게 하고, 예배하게 하고, 기도하며, 찬송하며, 전도하고, 선교하게 하며 이웃을 사랑하게 하며, 선한 일과 착한 일을 하게 합니다. 구원을 얻을 때의 믿음은 나로 하여금 아무 일도 못하게 만들지만, 구원을 받은 후에는 이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죽도록 충성하게 만듭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헌신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2: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고 합니다.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는 말씀의 영어성경의 표현은 ‘행함과 믿음이 함께 일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썩을 양식을 위하여 하는 일인지, 영생하도록 하는 양식을 위하여 하는 일인지는 겉으로 들어난 외적인 모습으로는 다른 사람들은 잘 모릅니다. 그것을 잘 아는 존재는 내 자신과 하나님입니다. 다른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자기 자신과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썩지 않을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 하늘의 참 떡, 세상에 생명을 줄 떡, 나는 생명의 떡 = 예수
그러자 무리들이 묻습니다. 본문 30-31절 ‘30. 그들이 묻되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31. 기록된바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조금 더 쉽게 번역한 새번역 성경으로 읽어 보겠습니다. ‘30. 그들은 다시 물었다. "우리에게 무슨 표징을 행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보고 당신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당신이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31. '그는 하늘에서 빵을 내려서, 그들에게 먹게 하셨다' 한 성경 말씀대로,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지금 무리들이 예수님께 묻는 내용은, 모세는 광야에서 만나를 먹게 하므로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라는 것을 증명하였는데, 당신은 무엇으로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라는 것을 믿게 할 것입니까? 라는 물음입니다.
지금 무리들이 굳이 가버나움까지 예수님을 찾아온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병이어의 표적을 친히 보고,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오병이어의 표적을 행하신 예수님에 대해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요6:14)고 까지 말했던 무리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분으로 믿을 만한 또 다른 증거를 내 놓으라고 합니다.
혹여 우리들은 이러고 있지는 않은지요. 이미 우리의 삶 가운데 수많은 주님의 도우심의 역사와 은혜와 긍휼을 베풀어 주셨음에도 우리는 주님의 주님 되심을 내 삶 가운데 놀랄만한 역사로 나타내 달라고 조르고 있지는 않는지요!
무리들은 모세를 빗대어서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라는 것을 믿을 만한 증거를 내 놓으라는 말에 만나는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이며, 하나님은 참 떡을 주시는데, 하나님이 주시는 참 떡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32-33절 ‘3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33.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그러시면서 35절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켤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럼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를 믿는 우리는 배고픔이 없습니까? 목마름이 없습니다. 분명 예수님은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켤코 주리지 아니하고,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셨는데, 우리는 안 먹어도 배부르고, 안 마셔도 목마름이 없습니까? 이 세상을 살아 갈 때에 필요한 것들이 하나도 없습니까? 예수를 믿고 살면 이 세상에 것은 하나도 필요가 없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를 믿고 살아도 이 세상 속에서는 세상 것에 대한 주림과 목마름이 여전히 있습니다. 그것을 채우기 위해 열심히 일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주리지 않고, 나를 믿는 자는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늘의 참 떡이나, 세상에 생명을 줄 떡이나, 나는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세상에서 필요로 하는 그 어떤 것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비오스와 조에
헬라어에는 생명이란 단어가 두 가지가 있는데 비오스와 조에입니다. 비오스는 육체의 생명을 말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육체를 입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하루 세끼의 밥을 먹고 물을 마셔야 합니다. 밥과 물이 육체의 생명입니다. 그래서 먹지 않고, 마시지 않으면 짧으면 일주일 길면 보름을 넘기지 못하고 육체의 생명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러한 비오스와 같은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을 주기만 한다면 그것이 불상이든, 무당이든, 알라든, 큰 돌이나 나무든, 거북이든 상관없이 하나님으로 믿고 섬기겠다고 합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생각으로 종교를 찾습니다. 지금 예수님의 오병이어의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찾아 온 무리들 그렇습니다.
생명에 대한 또 다른 단어는 조에인데, 조에는 영적인 생명을 의미합니다. 영적인 생명은 생명의 원천이 되시는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과 화목한 것을 말하며,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영원히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영생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사용된 생명이란 단어들은 모두 조에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생명을 주는 하늘의 참 떡, 그 하늘의 참 떡 되시는 예수님이 나는 생명의 떡이라고 하십니다. 곧 영적인 생명을 주시는 분이심을 말씀합니다. 그래서 나에게 오는 자는 주리지 않고, 나를 믿는 자는 목마르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그 말씀은 조에의 영생을 얻는 것에 예수님 외에 다른 어떤 것도 필요치 않음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4:6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37-40절 ‘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38.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조에의 생명을 모르는 사람들은 비오스의 생명에 집착할 수밖에 없습니다.
● 건강한 생명
말씀을 정리하고 마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오병이어의 표적을 좇아 가버나움에 온 무리들에게 예수님은 생명의 떡이 되심을 말씀해 주십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떡이 되신다는 것은 영적인 생명을 주시는 유일한 분이심을 말씀하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 나오는 자는 주리지 않고, 예수님을 믿는 자는 목마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인 생명, 곧 영생을 주시는 유일한 분이심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 육체의 생명이 강건하기 위해서는 규칙적으로 먹고 마시고 운동을 해야 하듯이, 영적인 생명이 강건하기 위해서도 규칙적으로 먹고, 마시고, 운동이 필요합니다. 영혼의 양식인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배우고, 영혼의 호흡인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더욱 더 가까이 나아가고, 영혼의 운동인 복음 전하는 일들을 통하여 내 안에 있는 영적인 생명이 더욱 더 강건할 것입니다.
날마다 생명의 떡이 되시는 우리 주님을 따라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심으로 하나님이 주신 풍성한 영생의 삶을 귀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을 먹고 마시기 /요6:28-35/ 김도완 목사
2022-08-02 13:57:41
1. 왕비가 택한 보물
옛날 어느 나라의 왕비가 왕궁의 법을 어기는 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신하들이 들고 일어나 왕비를 궁에서 쫓아내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습니다. 왕비를 사랑했지만 법을 무시하기도 어려웠던 왕은 왕비에게 그 동안의 공과 정을 생각해서 왕궁의 보물 중 무엇이든 하나는 들고 나갈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신하들도 거기까지 반대하지는 못 하여서 왕의 처사가 공정하다고 인정하였습니다. 마침내 왕비가 궁을 떠나는 날이 되었습니다. “그래, 왕비는 어떤 보물을 들고 가기를 원하는가?” “임금님, 저는 오직 한 가지 보물을 골랐습니다. 그 보물은 바로 임금이옵나이다.” 그러자 왕이 무릎을 탁 치면서 말했습니다. “그렇구나. 이 나라는 왕의 것인데 그대가 왕을 골랐으니 그대야말로 이 나라의 주인이 아닌가? 나라의 주인을 왕궁에서 어떻게 쫓아낸단 말인가? 경들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신하들은 왕비의 지혜에 아무 말도 하지 못 했고 왕비는 쫓겨나지 않고 왕궁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이 재미있는 우화에는 중요한 원리가 등장합니다. 왕국의 어떤 보물도 왕국을 소유한 왕보다 더 귀중한 것은 없습니다. 왕국의 주인인 왕을 소유하면 왕국 전체를 소유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최고의 보물을 원한다면 왕을 얻어야 합니다. 이 원리가 오늘 본문의 핵심메시지입니다.
요한복음 6장을 계속 살펴봅니다.
2주 전 설교에서 오병이어 기적을 체험한 무리들이 다음 날 예수님을 찾아와 시작된 대화의 앞 부분을 살펴보았습니다. 영성지능이 바닥이나 다름없는 무리들은 주님이 또 다시 그들을 배불리먹여주시기를 기대해 찾아왔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썩을 양식이 아니라 영생하도록 썩지않는 양식을 위해 일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늘 썩을 양식을 구하느라 염려하고 근심하는 우리에게도 무엇을 구하며 살아야 하는지 가르쳐주었습니다. 그것은 영원히 썩지 않는 양식 곧 하나님 나라입니다.
2. 구원은 일이 아니라 믿음으로 얻는다
그럼 그 하나님 나라는 어떻게 구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해야 영생의 양식을 얻을 수 있는 것일까요? 무리들은 예수님 말씀을 듣고 이렇게 질문합니다. 28절입니다.
(요 6:28)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그들은 영생의 양식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일을 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생각에는 한 가지 전제가 있습니다. 영생을 얻으려면 ‘그들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물론 그들만의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사람 누구라도 공짜가 없다는 점을 압니다. 영생도 얻으려면 그들이 무언가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부자 청년도 똑같이 물었습니다.
(눅 18:18) 어떤 관원이 물어 이르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우리도 똑같은 생각을 합니다.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더 잘, 열심히 믿어야지. 예배를 안 빠지고 봉사와 헌금을 하고 선교와 구제도 해야겠지. 이렇게 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염치없이 구원을 얻는다고 하겠나?’ 그런 생각이야말로 영생의 양식을 얻는데 가장 큰 걸림돌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무리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 6: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무언가 일함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그 아들 나를 믿는 것이야말로 영생의 양식을 얻는 길입니다. 일이 아니라 믿음, 행위가 아니라 믿음, 공로가 아니라 믿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의 가르침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9장에서 민족 이스라엘이 영생의 양식을 얻는데 실패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롬 9:32)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이스라엘)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영생의 양식은 얻는 방법도 썩는 양식과 다릅니다. 세상에서 먹을 것을 얻으려면 부지런히 일해야 합니다. 더 많이 얻으려면 더 공부하고 더 머리를 쓰고 더 노력해야 합니다. 하지만 영생의 양식은 그렇게 해서는 얻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무언가를 하려는 시도를 버리고 가만히 앉아 믿어야 합니다.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깨닫고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이 점이 선뜻 이해되지 않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믿기만 하는데 영생의 양식을 얻는다고요? 무리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질문합니다. 30절입니다.
3. 구원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다
(요 6:30) 저희가 묻되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질문의 의미는 이것입니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기에 당신을 믿기만 하면 영생을 얻는다는 말입니까?’ 그들은 떠올릴 수 있는 가장 권위있는 인물 모세를 떠올려서 예수님이 모세보다 더 대단한 인물인지, 그렇다면 그 증거는 무엇인지 제시하기를 요구합니다. 31절입니다.
(요 6:31) “기록된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모세가 주는) 만나를 먹었나이다.”
당신이 모세보다 더 위대한 인물이라면 그래서 당신을 믿기만 하면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영생을 얻을 수 있을 정도의 인물이라면 믿을 수 있도록 표적을 보여달라는 요구입니다. 당연해 보이는 이 요구는 그러나 그들의 불신앙과 편견을 여전히 보여줄 뿐입니다. 불신앙은 그들이 요구하는 표적을 예수님은 이미 보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여전히 믿지 못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지금 그들이 예수님에게 또 몰려오도록 만든 사건이 무엇입니까? 바로 전 날 예수님이 일으키신 오병이어의 표적 때문이 아니었던가요? 예수님은 이미 당신이 모세보다 뛰어난 분이심을 표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또 표적을 요구합니다. 그들이 믿지 못 하는 이유는 표적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믿음의 부족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감사하며 살지 못 하는 이유는 가진 것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믿음이 부족해서입니다. 평안히 살지 못 하는 이유는 고난이 많아서가 아니라 믿음이 없어서입니다. 기뻐하며 살지 못 하는 이유는 좋은 일이 없어서가 아니라 믿음이 없어서입니다. 성도의 삶의 모든 문제의 원인은 궁극적으로 믿음이 부족해서입니다. 모든 문제의 해결도 믿음의 회복입니다. 믿음이 회복되면 모든 꼬인 문제의 실타래가 풀립니다. 여러분에게 하늘로부터 오는 참된 믿음이 회복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무리들의 요구는 그들의 불신앙과 함께 편견을 여전히 보여줍니다. 그 편견은 광야에서 만나를 조상들에게 준 것이 모세였다는 생각입니다. 어, 모세가 준 것 아닌가요? 우리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것은 구원이 여전히 사람들이 하는 무언가에 달려있다는 편견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생각을 바로잡아주십니다. 32절입니다.
(요 6:3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모세가 준 게 아니야. 아버지 하나님이 주신 거야. 하늘의 양식, 영생의 떡을 모세가 준다고 생각하지 마라. 하나님이 주신 거다. 영생을 인간이 얼마나 훌륭하거나 노력하거나 희생하여서 얻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영생은 하나님이 주시는 거야. 33절입니다.
(요 6:33)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그 떡은 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오는 거야. 땅에서 노력하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비가 오고 해를 비추듯이 은혜로 내려주셔서 얻는 것이다!
이렇게 구원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어야 합니다. 영생은 사람이 얻어내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요, 땅에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주시는 것이요, 자격과 노력이 아니라 은혜로 얻는 것이다!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땅에서부터 하늘로 관점이 바뀌고 하나님이 영생의 주관자임을 믿을 때에 비로소 구원의 길이 열립니다. 이 관점이 바뀌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이 관점이 안 바뀌어서 구원이 이해가 되었다가 다시 알쏭달쏭하고 어제는 구원받은 것 같다가 오늘은 아닌 것 같고 왔다갔다 합니다. 평생 우리는 나와 땅과 행위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여러분의 관점이 바뀌고 영생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믿으시기를 축복합니다.
4. 구원은 예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다
말씀을 들은 무리들은 그들 스스로 영생을 얻기에 합당한 일을 하겠다던 처음 태도를 버리고 겸손하게 구합니다. 34절입니다.
(요 6:34) 저희가 이르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예수님이 드디어 기대했던 간구입니다. 예수님은 이 간구가 나오도록 대화를 이끄셨던 겁니다. 우리는 영생을 얻어내려고 하지 말고 영생을 주실 분에게 간구해야 합니다. 예수님에게 나왔던 부자 관원도 자신이 영생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려했던 태도를 버리고 주님께 이렇게 간구할 수 있었다면 아마 은혜를 입었을지 모릅니다. 아무튼 무리에게서 기대했던 간구를 들으신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답을 주십니다. 35절입니다.
(요 6: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영생의 떡을 달라고? 내가 바로 너희들이 먹을 영생의 떡이다. 영생의 떡을 먹으려거든 나를 먹어라! 그러면 영원히 배고프지 않는다. 영생의 물을 마시려거든 나를 마셔라! 그러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다. 아주 중요한 이미지입니다. 예수님이 영생의 떡을 주시는 게 아니라 예수님 자체가 영생의 떡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먹고 마셔야 영생을 누립니다. 뒤잇는 예수님의 말씀에도 이 점을 분명히 강조하십니다. 6장 53-54절을 보십시오.
(요 6: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요 6: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 주님을 먹고 마시라
예수님이 성찬식을 제정하신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성찬식은 이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의식입니다.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지 않으면 영생이 없습니다. 성찬식 때마다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을 먹어야 합니다. 주님을 마셔야 합니다. 그럼 주님을 먹고 마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로마제국 정부는 이 비유의 말씀을 오해하고 그리스도인들을 식인종으로 몰아 박해하기도 했습니다. 56-57절에서 두 가지로 부연설명해 주십니다. 예수님을 먹고 마심의 첫 번째 의미는 주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요 6: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우리는 어떻게 주님 안에 거합니까? 주님은 어떻게 우리 안에 거하십니까? 요한복음 15장으로 가봅니다.
(요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주님의 말씀을 우리가 마음에 품고 말씀을 따라 살아갈 때 주님은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도 주님 안에 거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쉬지 않고 말씀을 묵상하고 공부하고 순종하는 이유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에 가득함으로 주님이 여러분 안에 거하시고 여러분도 주님 안에 거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을 먹고 마심의 두 번째 의미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사는 것입니다. 57절을 보십시오.
(요 6:57)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예수님은 아버지로 인하여 살았습니다. 이 말은 아버지가 주신 사명을 이루며 사셨고 아버지가 예수님 삶의 목적과 의미와 이유가 되셨다는 뜻입니다. 흔히 대중가요에서 사랑하는 연인에게 ‘당신은 나의 모든 것’이라고 고백할 때와 비슷한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먹는 이들은 예수님으로 인하여 삽니다. 예수님이 우리 삶의 의미와 목적과 사명과 이유가 되실 때 우리는 그 분을 먹고 마시는 이들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인하여 살아가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많은 이들이 자기를 인하여 살아갑니다. 자신이 자신의 목적과 이유와 의미입니다. 어떤 이들은 자식으로 인하여 살아갑니다. 어떤 이들은 연인을 인하여 살아갑니다. 하나같이 소중하지만 영원하지 않은 관계입니다. 예수님이 여러분 삶의 의미와 목적과 사명과 이유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자, 이제 영생의 길이 분명히 정리되었습니다. 영생은 인간의 노력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로 베푸시는 선물입니다. 그 선물은 예수님을 믿음으로만 받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 함은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먹고 마심입니다. 예수님을 먹고 마심은 그 분의 말씀으로 그 분과 연합함이요, 그 분이 삶의 목적과 의미와 이유와 사명이 됨입니다. 곧 영생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소유하면 하나님 나라의 모든 복과 생명을 소유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질문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습니까? 예수님을 먹고 마십니까? 예수님의 말씀이 여러분 안에 거하고 예수님으로 인하여 살아가십니까? 이것은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단락을 보면 이 질문에 답하지 못 하고 예수님을 떠나 돌아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뉴저지장로교회 성도 여러분은 단 한 분도 예외없이 예수님을 먹고 마심으로 영생이신 예수님을 누리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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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적 만족인가, 영원한 만족인가 /요6:22-35/ 김형익 목사
2021-05-06 03:21:40
우리가 스스로에게 진지하게 물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우리의 삶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습니까? 교회다니는 것입니까? 그외 다른 것이 또 있습니까?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도전하는 것은 믿음은 우리 관점을 일시적 만족을 추구하고 사는 삶에서 영원한 만족을 추구하는 쪽으로 옮겨준다는 것입니다.
1. 사람들의 관심
오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한 사람들의 열심은 대단했습니다. 이튿날 아침, 주님께서 아직 자기들 있는 곳에 계신 줄 알았다가 계시지 않은 것을 알자,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 건너편 가버나움으로 예수님을 찾으려고 건너왔습니다(22~24).
A. 열심이 신앙의 표지가 될 수는 없다(22~25).
하지만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고자 하는 것은 열심 자체가 신앙의 표지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종종 우리는 이런 열심을 내는 사람들을 볼 때가 있습니다. 열광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듯 합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난 후에 보면 그는 더 이상 교회에 나가지도 않으며 하나님을 섬기지도 않습니다. 어쩌면 여러분 중에서도 이런 경험을 과거에 하신 분들이 계신지 모릅니다. 우리는 이렇게 질문하곤 합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셨다가 다시 버리시기도 하는가? 성경의 설명은 처음에 그 열심으로 나타나는 것이 신앙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열심을 내지 마시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과연 열심을 내고 있는 것이 하나님을 알기 때문인가? 나는 그분을 알고 있는가? 내게는 그분의 자녀라는 분명한 확신이 있는가?”라고 말입니다.
B. 물질주의적 동기는 신앙의 표지가 될 수 없다(26)
본문이 우리의 주의를 기울이게 하는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주님을 찾은 후에 주님께 언제 여기 오셨느냐고 묻습니다(25). 주님은 그들의 질문에 대답을 하시지 않고 매우 엄중하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26).”
조금의 여지도 남겨두지 않으시고 그들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은 그들의 동기의 문제를 직접 지적하셨습니다. 신앙은 동기와 매우 중요하게 연관이 됩니다. 이들의 열심이 신앙이 아니었다는 것은 그들의 동기가 무엇이었는가를 지적하시는 주님의 말씀에서 입증이 되는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열심을 만들어내는 마음 속의 동기가 무엇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 모두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실 수 있으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읽으시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가슴의 충만함이 아니라 배부름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라도 주님을 좇아왔는데, 이것만이라도 훌륭한 것이 아니냐고 이야기할 수 있고, 그래도 주님은 격려했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단호하십니다. 여기서 주님은 목회적 기교를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지적입니다. 이들의 물질주의적 동기는 결코 신앙의 표지가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따르시는 이유, 동기는 무엇입니까? 무엇이 여러분을 주님께로 움직이도록 만든 요소입니까? 주님은 어떻게 여러분을 판단하시겠습니까?
C. 기적은 일시적인 만족만을 줄 뿐이다. 기적을 보고 그 효과를 누리지만, 표적을 통한 유익을 얻지 못하는 신앙의 태도
이들은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표적을 통한 유익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기적은 일시적인 만족을 줄 뿐입니다. 병이 낫고, 은사를 체험하고, 문제가 해결됩니다. 하지만, 그 기적 체험이 자동적으로 신앙을 만들어내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
래서 신앙이 만들어내는 영원을 바라보는 관점은 중요합니다. 우리가 일시적인 만족에 머물러서 배부름의 체험, 문제 해결의 체험에 매여서 하나님을 믿게 된다면, 그것을 기적적으로 경험했다고 하더라도 주님을 만나지는 못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볼 때 이것이야말로 가장 불쌍한 일입니다. 그들은 천국문 가까이에 이르렀다가 문을 박차고 나가는 것과 다름이 없어보이기 때문입니다.
2. 썩는 양식이 아니라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라(27).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주님의 목회적 가르침이었습니다. “썩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27).”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깊이 상고해야 할 부분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지금 나를 찾으러 바다 건너에 온 열심은 대단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먹고 살자고 나를 찾아온 것이다. 이렇게 나를 찾는다면, 너희는 결국은 죽고 말 것이다.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서 나를 찾아라. 그러면 너희는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A.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가진 직업을 헛되다고 말씀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의 이 말씀을 오해하면 마치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직업을 가지고 사는 것 자체가 헛된 것이라고 하시는 것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자체, 먹고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부인하거나 무시하시지 않으십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바는, 오히려 세상에서 직업을 가지고 살 때에 불신자 보다 더 열심으로 하라고 합니다. 마치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처럼 하라는 것이 성경의 권면입니다.
B. 육신이 아니라 영혼을 위하여 염려하고 힘쓰라!
여기, 주님의 의도는 무엇보다도 영혼을 위해서 그만큼 염려하고 힘쓰라는 것입니다. 배부름의 욕구가 그들로 하여금 주님을 찾아 바다 건너로 오게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보여주는 열심은 정말 대단합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 신앙의 영역에서는 그런 열심을 가지고 살아가지 않습니다. 썩을 것을 위해서는 생명을 걸지만, 영생을 위해서는 조금의 시간도 드리지를 않습니다. 썩는 양식이란 표현은 우리가 천국갈 때 가지고 갈 수 없는, 일시적인, 지상에서 끝나게 되는 가치를 말합니다.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은 우리가 죽은 후에도 영원히 우리의 것으로 남게 될 것을 말합니다.
일시적인 만족을 얻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지만, 영원한 만족을 위해서는 약간의 노력도 기울이지 않는 것을 성경은 어리석다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오늘 이 갈릴리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것은 바로 물질지상주의의 세상을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너무나 불편한 지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불편한 말씀입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이 불편한 말씀을 주님께서 하시는 것은 주님 앞에서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사는 일을 더 이상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3. 영원한 만족을 얻기 위해서 어떤 프로그램이 필요한가(28~29)
사람들의 접근방식은 참 놀랍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라고 묻습니다(28). 무슨 프로그램이 필요하냐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썩는 양식 때문에 움직이는 삶, 그 동기가 고작 배부름의 수준에서 움직이는 삶을 중단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 내가 그렇게 움직였구나. 내 영혼을 염려하고 산 것은 아무 것도 없었구나’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모르겠다는 듯이, 그러면 어떤 프로그램이 없냐고, 어떻게 해야하느냐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일이 무엇이냐고 천연덕스럽게 묻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너무나 직접적이고 분명한 말씀을 피하는 오래된 방식입니다. 영혼을 생각하고 살라는 것은 결코 어려운 말씀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기가 싫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프로그램을 알려달라고 주문하는 것입니다. 손에 잡히는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심지어 고상해보이고 신앙적으로 보이기까지 할 수 있지만, 결국 불신앙이며 불순종일 뿐입니다.
A. 생명의 떡은 신뢰 가운데서 받는 선물이다.
우리를 세상에서 배부르게 하는 떡은 일과 수고에 대한 댓가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떤 일을 하면 그것을 얻을 수 있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생하도록 있는 생명의 떡은 신뢰 가운데서 받는 선물이기 때문에 그들이 일을 해서, 얻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주님의 대답에 함축된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떡을 그들에게 주시기 위해서 일을 하라고 요구하시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함으로 받게 되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B.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믿음입니다. 여러분의 영혼을 위해서,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얻으려 하신다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일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성경에서 가르쳐주는 믿음은 인격적인 것입니다. 관계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 예수님을 믿는 것이고, 예수님의 인격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너, 나를 믿느냐”고 물을 때, 이것은 인격에 대한 신뢰를 묻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를 믿으면 문제가 해결된다든지, 형통하게 된다든지 하는 신앙적 명제를 믿는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믿음의 수준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습니다. 어떤 믿음이 정말 센 믿음이겠습니까?
언제나 기도하면 문제가 해결되고 기도응답이 원하는대로 즉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할렐루야’하면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사람의 믿음과, 비록 오래도록 기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문제를 그대로 안고 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서 의심치 않고 이 과정을 통해서도 범사에 유익하게 하실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가지는 믿음은 어떤 것이 하나님의 인격에 대한 더 깊고 센 신뢰요, 믿음이겠습니까?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가져야 하는 것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돈을 내라고 요구하거나, 일을 더 많이 하라고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신앙이 일시적인 수준의 만족을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결코 만족스러운 것이 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함정이 일시적 만족을 추구하는 우리의 마음에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C. 이 일은 하나님이 하셔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이다(44).
믿음이 이런 차원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주님의 말씀 그대로 하나님의 일이지, 사람의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내려오셨을 때, 벙어리 귀신들린 아들을 고쳐주기를 바라고 제자들에게 데리고 온 한 아버지를 보셨습니다(막 9:14~27). 제자들은 그 귀신을 능히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을 ‘믿음이 없는 세대’라고 하시면서 책망하시고는 아버지에게 묻습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그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그랬다고 대답하면서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라고 구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아버지의 대답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그 아버지는 큰 소리를 질러 말합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막 9:24). 바로 이것이 우리가 필요로 하는 자세입니다. 그 아버지는 자기는 주님의 말씀과 인격을 믿겠지만, 그것이 자기에게서 나올 수 없는 것이라면 자기에게 그 믿음을 달라고 구하는 것입니다. 그는 조건적으로 ‘믿음을 주시면 믿지요’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내가 믿습니다. 하지만, 이 믿음으로 안된다면, 그 믿음을 제게 주십시오’라고 간청합니다. 믿음을 우리 속에 주시는 것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내가 믿습니다’라는 자세가 동시에 요구되는 것입니다. 나중에 우리가 살펴보겠지만, 요한복음 6:44에 주님은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다”고 하실 때, 그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속에서 하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4. 자기 지향적인 마음이 요구하는 것, 또 다른 표적(30~33)
자기 지향적인 마음이 아마 모든 인간의 본성일 것입니다. 마음은 계속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으니까, 그들은 주님의 이 말씀을 아멘하고 받지를 못합니다. 그들은 그렇게 당신을 믿게 하시려면 또 다른 그리고 더 나은 표적을 제시해달라고 요구합니다. 이들의 이 음란한 마음은 결코 어떤 것으로도 채워질 수 없고, 하나의 기적을 경험하면 그보다 더한 기적을 요구하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A. 하늘에서 내린 떡, 만나(신 8:3)
그래서 그들이 요구한 것은, 하늘에서 떡을 내려보라는 요구였습니다. 광야에서 조상들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를 먹었듯이, 모세가 한 것처럼 당신도 그렇게 해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하신 것은 일정한 재료를 가지고 많은 떡을 만들어 여자, 어린애 합하여 약 2만명을 먹이신 것이라면 모세는 하늘에서 떡을 내려서 200만이나 되는 사람들을 먹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말을 하면서도 실상 그 만나가 의미한 것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신명기 8:3에 하나님께서는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만나는 하늘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양식, 곧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여전히 갈릴리 사람들이 마음의 눈이 가리워져 있으니까, 그들은 모든 영적 상징과 의미들을 발견하지 못하고 육신적 필요와 일시적 만족에 부합하는 것들만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일시적인 만족에 눈이 멀면, 결코 우리는 영적이고 영원한 만족을 만나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서 열심을 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B.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다”(35).
이제 오늘 본문의 마지막 구절에 도착했습니다. 주님은 여기서야 비로소 진짜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을 주십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35).” 만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는 것일 뿐 아니라, 사실 우리 주님 자신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이 참 떡이십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실 세상의 양식에 주목할 것이 아닙니다.
주님 자신이 바로 생명의 떡이십니다. 주님이 무엇을 주실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 자신에 대해서 배고픔을 가지고 나오라는 것입니다. 썩는 양식은 일시적 만족을 주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 생명의 떡이신 주님 자신에 대해서 굶주려하고 그분을 경험하고 맛본 사람들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영적 만족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죽음 후에도 여전히 우리의 양식이 될 것입니다. 이 참 뜻은, 다시는 영적으로 굶주림이 없다는, 세상에서 아무리 최선의 것이라도 염증과 권태가 그 특징이었던 것과는 반대로 다시는 아쉬움이 영원히 없다는 그런 의미인 것입니다. 이 구절을 추상적 선언으로 여기지 마십시오. 이것은 간절한 호소입니다. 예수께서 생명의 떡이시니 사람은 그에게 와야 하며 그를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5. 교훈
A. 그림자 때문에 실체를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
그러므로 육신적 배부름에 취하여 영적으로도 만족을 누리는 것처럼 착각하고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육신적 건강에 취하여 영적으로도 건강한 것인양 착각하지 마십시오. 육신적 성공과 성취에 취하여 그것이 영원한 만족을 보장해줄 것인 것 처럼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그림자를 보면서 실체를 보고 있다고 착각하는 어리석음일 뿐입니다. 즉각적인 기도의 응답이 전부라고 여기지 마십시오. 오히려 오래도록 기도하지만, 여전히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응답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선하신 인격을 믿으며 영원을 향하는 그런 믿음의 수준으로 나아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B. 영혼을 염려하는 지혜
그러므로 여러분의 영혼에 대하여 합당한 염려를 하시고 사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영혼의 상태를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여러분은 무엇을 하나님께 구하십니까? 하나님께 구하는 여러분의 기도의 제목들,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말하는 모든 것들이 바로 여러분 자신이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인가를 보여주는 시금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원하는 것은 일시적인 만족을 줄 뿐인 것들입니까,
아니면 영원토록 쇠하지 않고 없어지지 않을 영원한 만족을 주는 것입니까?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인하여 여러분의 삶이 움직여지게 하십시오. 일시적 만족 때문에 바다를 건너 주님을 찾으러오는 열심이 아니라,
영원한 만족이 되시는 주님, 친히 생명의 떡이 되어서 자기 몸을 깨뜨려 우리를 위해서 내어주신 그 주님 자신을 원하기 때문에 주님께 나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영혼을 영원토록 만족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입니다 /요6:30-40
2020-08-11 07:37:33
주의 은혜가 여러분의 삶 속에 함께 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코로나 19시대를 살아가면서 참 어려움이 많은 것 같습니다. 얼굴을 봐도 표정이 어떤지, 반가운 표정인지, 아니면 싫어하는 표정인지 또 여러 가지 상황들, 어떤 경우는 마스크가 크니까 눈만 딱 나오는 경우가 있어요.
눈만 보고는 사람을 알아보기가 참 어렵습니다. 참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데 그러나 이 어려운 시대에 더욱 하나님 의지하고 뜨겁게 주님을 사랑함으로 우리가 풍성한 은혜를 누리며 살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향하여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내용이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아멘는 말씀을 주셔요. 그 첫사랑, 처음 사랑, 아주 뜨겁게 사랑하는 그 마음, 이렇게 설레는 마음, 그런 마음을 회복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고 마지막 일곱 번째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서는 그 교회가 아주 미지근한 그런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차갑지도 더웁지도 아니하고 아주 미지근하다. 그래서 나는 너를 토하여 버리고 싶다."아멘
우리 신앙이 정말로 뜨거워야 합니다. 사모함을 가지고 뜨겁게 우리가 이 마지막 때에 믿음 생활을 해야 합니다. 믿음이 식어 버려도 안 되고 주님을 향한 그 사랑이 식어 버려도 안 되고 또 하나님이 주신 그 사명이 없어져 버리면 안 되고 그래서 아주 뜨겁게! 라오디게아 교회의 아주 미지근한 신앙 때문에 주님이 책망하신 것이지요. 라오디게아 교회가 알지 못했어요.
"나는 부요한 자라, 나는 부족함이 없다"아멘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셔요.
"너의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 가난한 것 그 모든 것들 네가 알지 못해서 그러고 있다"아멘
그래서 우리의 삶이 영적으로 뜨겁게 주님을 사모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우리 수정의 가족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은 예수님은 생명의 떡이라고 하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꼭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의식주라고 합니다. 옷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음식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야 될 집이 필요한 것이지요.
그 세 가지가 다 중요하게 다 필요하지만 그 중 한 가지만 선택하라고 하면 여러분,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요? 옷을 선택해야 할까요? 혹시 집이 강남에 있는 집 같으면 강남 아파트를 선택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한다고 하면 먹는 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옷은 그저 누더기 같은 옷을 입어도 죽지 않습니다. 아니면 정말로 옷이 없으면 나체촌에 가서 함께 살아도 됩니다. 집이 없으면 불편하지요? 자기 집이 아니고 전제만 살아도 불편한데 그런데 집이 없으면 불편하지만 죽진 않습니다. 노숙이라도 하면 됩니다. 그러나 먹을 것이 없으면 죽게 되어 있습니다. 먹지 못하면 죽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예수님은 생명의 떡"아멘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우리의 구원자이신데 그 예수님이 나의 생명의 떡이 되신다. 여기에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말씀하는 거예요.
이 땅에 살아가는 육신의 생명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그 생명, 생명의 떡, 그 떡을 먹어야 살 수 있다는 말씀이에요. 떡은 무엇이죠? 밥이에요. 우리가 같으면 밥이지요. 빵을 먹는 나라 같으면 빵이 되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떡이 되시고 밥이 되시고 빵이 되시는데 생명의, 그 영원한 생명의 떡이 되어 주신다고 말씀하셔요. 우리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에요. 사단이 예수님을 시험할 때 예수님께서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아멘고 했습니다.
어떤 교회 목사님이 할머니가 교회를 잘 안 나와서 심방을 가서 이 이야기를 한 거예요. “성도님,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에요.” 그리고 또 말을 하려고 하니까 그 성도님이 “아, 목사님, 그 말 맞아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으로 살 수 없어요. 밥으로 사는 것이지.”라고 했어요. 그 할머니는 아마 그렇게 이해했던 모양이에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밥이라고 하는 것, 떡이라고 하는 것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필수적인 것이지요. 반드시 있어야 될 것이 의식주이지만 그 중에 더 필수적인 것은 바로 밥이라, 음식이라는 것입니다. 음식 속에는 또 여러 가지 음식이 있지요. 반찬들도 있고 밥도 있지만 정말로 밥이 필수적입니다. 반찬은 없으면 없는 대로 먹을 수가 있는 것이지요. 고기 집에 가면 고기를 잘 안 드신 분이 있어요. 체질적으로 잘 안 맞는다고 잘 안 드시는 분, 아니면 자신의 신념 때문에 안 드시는 그런 분들도 있고, 채식주의자들, 고지 잘 안 먹지 않습니까?
고기를 먹긴 먹는데 그 고기가 콩으로 만든 고기에요. 똑같은 소고기 냄새도 나고 똑같은 소고기를 먹는 것 같은데 사실은 그게 콩으로 고기를 만들어요. 그것을 고기 대신 먹는 채식주의자들이 있어요. 어떤 분들은 생선을 잘 못 드신 분도 있어요. 식사를 하러 가면서 보통은 회를 먹으러 간다하고 어떤 식당에 갔을 때 전혀 식사를 못해요. 그러니까 이런 부분들은 서로 좋아하는 기호, 반찬 같은 것은 그렇게 다를 수 있지만 밥은 차별이 없는 거예요.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고 매일매일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생명이 떡이 되고 생명의 양식이 되실 때 이것은 꼭 필요한 것이고 누구든지 차별이 없습니다. 유대 사람이 되었든 이방 사람이 되었든 차별이 없는 것이고 또 남자든 여자든 누구든지 차별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떡이시기 때문에. 그리고 매일매일 먹어야 합니다. 하루에 식사를 세끼 하시는 분도 있고 두 끼 하시는 분도 있어요. 습관에 따라서 두 끼 먹어도 충분하다고 생각하시고 두 끼 먹는 것이 습관이 되신 분이 있어요. 보통은 다 세끼를 먹지요. 세끼 드시는 분들은 반드시 세끼를 먹어야 합니다. 한 끼라도 안 먹으면 힘이 없어요.
어제 제가 밤에 교회 있다가 늦게 집에 들어갔는데 전화를 미리 해 봤어요. “오늘 저녁을 집에서 먹어야 되느냐? 밖에서 먹어야 되느냐?” 했더니 준비해 놨다고 집에서 먹으라고 해요. 그래서 집에 갔는데 상에 밥을 차려놨어요.
그런데 제 밥만 차려 놓은 거예요. 같이 식사하자고 했더니 먼저 먹었대요. 그런데 그 시간이 오후 6시 밖에 안 된 시간이에요. 남편을 기다려야지 어떻게 먼저 먹었냐고 했더니 손이 떨려서 먹었다는 거예요. 점심을 안 먹었다는 거예요. 점심을 안 먹고 한 5시나 되니까 손이 떨리더래요. 그래서 혼자서 드셨나 봐요. 어쨌든 그만큼 식사가 중요합니다.
식사를 아예 안 먹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며칠 안 먹는 사람들이 있어요. 이런 경우는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것을 심리학적, 의학적 용어로 거식증이라고 해요. 심리적인 병이에요. 또 거식증하면 클 거(巨)로 생각해서 많은 먹는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아니고 막을 거(拒)에요. 음식을 막아버리고 음식을 부정해 버리고 음식을 거부해 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심리적으로 음식을 막아버려요.
그래서 밥을 먹고 싶은 생각도 없고 밥을 먹으려고 하면 역겨운 생각이 들고 또 조금 먹으면 토하고 또 위가 아프고...그게 이제 보통 거식증이라고 하는데 대체로 젊은 아이들이 다이어트 하다가, 다이어트 약을 먹거나 심리적으로 꼭 살을 빼야 된다는 생각이 강하면 뇌에서 그런 기능이 되어요. 그래서 음식을 거부하는 거예요.
그러다보면 힘도 없어지고 무기력해지고 의욕도 없어지고 그냥 모든 것이 다 싫어지는 거예요. 그러다가 나중에는 우울증도 찾아오게 되고 힘이 없으니까, 그리고 뇌에 그런 영향이 있으니까. 그러니까 여러분, 잘 먹는 것도 복이에요. 잘 드시기 바랍니다. 하루에 세끼를 드시든 두 끼를 드시든 정해진 대로 꼭 찾아서 드세요. 밥이 약이예요. 어디 식당에 가서 보니까 “밥이 답이다.”그렇게 써져있는 곳도 있더라고요. 어쨌든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그 생명의 떡이 되시는데, 그 생명의 떡을 먹는 방법이 무엇인지, 첫째는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26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아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찾아온 그 이유가 어떤 예수님을 통해서 표적을 보기 위함도 아니고 또 예수님을 믿기 위함도 아니고 예수님 앞에 나오기는 나왔지만 예수님을 믿으려고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믿어야 되는데 어떤 오병이어를 통해서 (6장 시작하면서 오병이어의 기적의 사건이 나와요.) 그것을 보고 육신의 빵을 구하기 위해서 떡을 구하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이 되면 다 다시 떠나가 버리는 거지요.
빈민촌에 우리가 사역하면서 쌀을 나눠주고 빵을 나눠주고 하는데 그것을 나눠줄 때 사람들이 참 많이 모여요. 수백 명이 모입니다, 빵을 나눠준다고 하면. 가난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교회 남느냐? 그러진 않아요. 다른 때 오라고 하면 잘 나오지 않아요. 복음을, 이 생명의 떡을 먹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양식을 먹지 못했기 때문에. 그래서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다.
27절 말씀입니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아멘 아멘.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29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아멘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는데 하나님의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셔요.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보내신 이를 믿는 것,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 것이 가장 큰 일이예요. 가장 귀한 하나님의 일입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 받습니다. 그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그 믿음을 통해서 기적도 체험합니다. 그 믿음을 통해서 하늘 문이 열리기도 합니다. 작은 믿음이 아니라 큰 믿음, 주님 칭찬할 만한 그런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데,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데 사소한 문제가지고 절망하고 낙심하고 두려워하고 그럴 필요가 없어요. 만왕의 왕 되신 주님이, 주님의 오른손으로 나를 붙잡고 있는데 믿어야 합니다.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35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아멘
나를 믿는 자,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 하다. 세상 것으로는 채울 수가 없습니다. 세상 적인 것으로는 그 갈증을 채울 수가 없습니다. 마셔도, 마셔도 우물가의 여인처럼 우리가 구할 때가 많아요. 헛되고 헛된 것들을. 그때 주님 말씀 하시기를 “내 샘에 와 생수를 마셔라!”
주님이 주시는 생수를 마셔라. 주님이 주시는 영생의 떡을 먹으라!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이것이 생명의 떡입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영혼의 갈증문제, 죽음의 문제, 지옥의 문제, 형벌의 문제가 다 해결 되는데 세상 사람들은 그냥 헛된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는 철학을 통해서, 철학에 심취하면 그것이 자신의 영혼의 만족을 줄 것으로 생각하는데 결코 만족함이 없습니다. 재물이 어떤 자신의 만족을 줄 것 같은데 그 재물이 만족감을 주지 못하는 거예요. 자살한 사람들 가운데 세계적으로 부자들이 있잖아요? 그런 분들이 더 자살을 많이 해요. 그렇게 재산이 많은데 왜 자살을 합니까? 그것이 영혼의 만족감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아무리 마셔도 마셔도 목마름이 해결되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리 먹어도 먹어도 그 목마름이 해결되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의 권력도 마찬가지입니다. 권력도 다 안개 같은 것이지요. 그냥 있다가 다 사라지는 것이에요. 그게 우리 인생에 만족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상 앞에 가서 절을 하면서, 우상을 섬기면서 그것이 자신의 영혼의 만족을 줄 것으로 생각하지만 결코 만족이 없습니다. 그 영혼이 결국 지옥의 두려움이 있는데 어디에서 만족이 있습니까?
어디에서 영적인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 나와야합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한다"아멘라고 말씀해요.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믿는 것이 중요해요.
36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 도다 하였느니라"아멘 보고도 믿지 않는 사람들. 40절 말씀입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아멘
하나님의 뜻은, 아버지의 뜻은 그 아들을 보고도 믿지 않는데 보고 믿는 사람이 있다는 거예요. 보고 믿는 자 마다 영생을 얻는다.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부활에 참여하게 되어지고 그리고 영원한 천국의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믿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믿어야 믿는 것이 예수를 영접하는 것이고 영접하는 것이 믿는 것이고 믿는 것이 바로 생명의 떡이 되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 생명의 떡을 우리가 먹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믿는 것, 또 예수님께 나오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예요. 아무리 믿으려고 노력해도 믿어지지 않는다. 아무리 복음을 전해도 그것을 듣지 않는 사람들이 있어요. 어떻게 생각하면 하나님이 선택해 주셔야, 하나님이 인을 쳐 주셔야 되는데 믿지를 못하는 거예요. 예수님께 나오지 못하는 거예요.
썬다 싱 이라고 하는 인도의 성자가 있습니다. 그 분이 복음을 전하는데 여러 가지 은혜로운 일화가 많이 있지요? 한번은 기차에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기차 전도도 참 좋습니다. 전에 신학교 다닐 때 광주 금남로 나가서 전도하고 또 금요일은 주로 수업이 없거나 일찍 끝나요. 그러면 기차여행 하면서 완행열차 타고 아주 전도하기 좋아요. 사람이 같이 앉아서 오랫동안 가잖아요?
그러면 이제 복음을 전하다가 (완행열차는 지정석이 없어요. 빈자리 가서 앉으면 되니까) 그래서 복음을 전하고 영접 기도하면 또 다른 칸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빈자리 있으면 앉아서 옆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런 전도가 생각나요.
그런데 썬다 싱이 그렇게 기차에서 전도를 하는데 복음을 전하고 요한복음만 있는 성경을 나눠주었습니다. 나눠주는데 어떤 분이 성경을 딱 받더니 쫙 찢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면서 창문 밖으로 던져 버립니다. 그런 경우의 전도자의 마음이 참 아프겠지요?
그런데 놀라운 일은 어떤 분이 철길을 걷다가 그 종이를 발견한 거예요. 심심하니까 그 종이를 읽어보았는데 생명의 떡 이야기가 나온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떡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보고 믿어지는 거예요. 성경만 보고도 예수님이 믿어집니다. 그래서 교회로 나가기 시작했고 그리고 나중에 이분이 전도자의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믿어진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믿음의 큰 선물을 주신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께 나와야 합니다.
27절 말씀입니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 치신 자니라"아멘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예수님이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이미 예수님은 하나님의 인 치심을 받은 자이다 말씀하면서 예수님께 나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35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아멘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않는다. 37절 말씀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아멘
우리가 예수를 믿었으면 반드시 예수님 앞으로 나와야 합니다. 예수님 앞으로 나아와서 하나님을 경배하고 예배드리고 또 말씀 배우고 이러면서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지요.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표적을 보고 믿지 아니했고 예수님께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표적을 구했어요.
30-31절 말씀입니다. "그들이 묻되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기록된바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유대인들이 그렇게 이야기 한 거예요.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싶고 예수님께 나오고 싶은데 표적을 보여 주십시오.” 이미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표적을 보여 주셨습니다. 바다 위를 걸어 오셨습니다. 많은 기적을 행하시고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표적을 구하고 있고 또 그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에 나오는 그 사람들, 결국 예수님을 다 떠나가 버리고 맙니다.
오늘 영생하시는 그 떡, 예수님은 그래요. 표적이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 생명을 주는 그 예수를 믿어야 한다. 그 유대인들이 “아니 모세는 40년 동안 그 광야에서 먹게 하지 않았습니까? 오병이어, 한 번 오천여명 먹여놓고 이게 표적이라 하십니까?” 그런 뜻이에요. 거의 250만 명되는 그 사람들을 모세는 인도하면서 만나를 통해서 40년이나 먹여 주셨습니다. 예수님 말씀은 “그래. 그 만나, 모세가 준 거 아니야. 하나님께서 내려 주신 거야. 그러나 그 만나 먹은 사람들, 광야에서 다 죽었어. 1세대 사람들 다 죽었어.”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그거예요. 32-33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아멘
광야에서 40년 동안 만나라고 하는 떡을 먹었지만 그것이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참 떡을 주시는데 바로 내가 생명의 참 떡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 떡을 먹어야 합니다. 이 예수의 생명을 누리는 것이고 이 생명을 누리는 자는 예수님 앞으로 나와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이에요.
우리교회에서 전도 사역이 축호전도 노방전도가 코로나 때문에 중단되어 있는 상황인데 그러나 전도를 안 할 수 없잖아요? 그래서 한 가지 전도 방법을 생각했는데 179전도를 생각했어요. 한 사람 전도해서 한 사람 친구 삼아서 교회로 초청하는 거예요. 한 사람 친구 삼아서 “우리 교회 한 번만 가보자!” 한 번만 가보자고 해도 되요. 한 번 왔다가 그 복음 듣고 깨닫고 영생의 떡 먹으면 주님 앞에 남아있는 것이에요. 그러나 아무리 많은 표적을 보고 기적을 보았다고 해도 영생의 떡을 먹지 못하면 주님 앞에 머물러 있지 못해요.
그래서 179, 7,9가 무엇이냐면 친구 삼자는 거예요. 우리 주변에 보면 아직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한 사람을 친구삼아서 교회에 초청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 한 번 나왔다가 복음을 만나면 생명의 떡을 만나면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고 믿음의 사람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육신의 떡을 가져다 줘도 그것 가지고는 영생을 얻지 못하고 예수님께 붙어 있지 못합니다. 어떤 분이 교회에 나왔는데 나온 목적이 무엇이냐면 영생의 떡이 아니라 병 고침을 받기 위해서예요. 병이 다 나았습니다. 그러면 교회 잘 다녀야해요.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병 고침 받은 목적이 달성되었으니까 다시 세상에 나가서 더 큰 죄 짓고 살아갑니다. 그러나다 하나님 앞에 얻어터지고 다시 돌아오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아예 돌아오지 못하고 세상에서 영원한 불 속으로 떨어져버리는 그런 사람들도 많아요. 오늘 우리는 생명의 떡이 되신 예수님을 믿어야 하고 믿었으면 반드시 예수님께 나와야 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예수님께 붙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 붙어 있어야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64-67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또 이르시되 그러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아멘
예수님께 붙어 있어야 하는데 예수님은 그런 표적을 보고도 믿지 아니할 자, 또 예수님은 자기를 팔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는 그 구원의 역사가 있습니다. 67절에 보면 이미 12제자를 세워 놓았잖아요? 일반 많은 제자가 예수님을 떠나갔지만 그 12제자에게 물어봐요. “너희도 떠나겠느냐?” 그랬더니 시몬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68-69절 말씀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아멘
우리가 주님께 붙어 있으려고 하면 영생의 말씀을 들어야합니다. 영생의 떡을 먹어야 합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거룩한 자 이심을 믿고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알되 깊이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나(예수님)는 누구인가에 대한 말씀을 앞으로 7번에 거쳐서 나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 12을 택하였다. 70-71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그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아멘
예수님은 가룟 유다에 대해서 저주하십니다. 어떤 저주를 했지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 했다.
여러분, 그것처럼 무서운 저주가 없어요. 이 땅에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 했다. 결국은 예수님을 생명의 떡으로 믿지 못하다 보니까 2-3년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훈련을 받았어도 이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육신의 왕으로, 세상의 왕으로, 그냥 육신의 떡으로만 생각한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을 팔고 말았습니다. 왜 마귀라고 했을까요? 마귀가 또 그 생각 속에 그 마음속에 들어갔기 때문이에요. 사단의 역사는 무섭습니다. 예수님을 팔게 만듭니다. 예수님에게서 떠나게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붙어 있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5장 5-6절 말씀입니다. "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아멘
예수님 말씀이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붙어있으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는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부러진 가지, 떨어져나간 가지처럼 결국은 마르고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른다.”
결국은 예수님께 떨어져 나가면 지옥행밖에 될 것이 없습니다. 불에 던져 사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육신의 떡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생명의 떡,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 예수님을 믿을 때, 예수님 앞으로 나올 때, 이미 나오게 하신 것, 하나님이 택하여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끌어 주셨기 때문에 나온 것이고 우리가 믿는 것도 성령이 우리에게 인을 쳐서 믿음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믿는 것이고 사명을 주신 것도, 주님, 성령이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고 인을 쳐 주셨기 때문에 사명을 감당하게 된 것이고 가룟 유다가 되면 안 되는 것이죠. 얼마나 참 안타까운 사람이에요.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팔기도 했지만 자살을 했어요. 자살을 했는데 안타깝잖아요. 목매달아 죽었습니다. 곤두박질되어 가지고 창자가 터져 나왔어요. 그리고 인류역사 속에, 2000년 역사 속에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하고 그런 지탄을 받는 거예요. 성지 순례 가보면 성전에 12기둥이 있어요. 12기둥이 있는데 한 기둥만 새까만 색으로 칠해 놓았어요. 이 기둥은 가룟유다를 상징하는 그런 기둥이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만 붙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마지막 때가 되어지면 불법이 성함으로 사랑이 식어진다고 했어요. 우리가 마지막 때를 살아가고 있어요. 이런 코로나 시대가 어떻게 생각하면 마지막 수많은 징조들 가운데 하나인 것 같아요. 이럴 때 우리의 사랑이 식어지면 안돼요. 이 사랑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교회를 향한 사랑입니다. 성도를 향한 사랑입니다. 목회자를 향한 사랑입니다.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 영혼들을 우리가 이끌어 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오늘 우리가 마지막 때를 살아가고 있는 이 때에 우리의 믿음이 사라져도 안돼요. 주님을 향한 그 사랑이 식어져도 안돼요. 해바라기가 온 종일 해만 바라보고 있듯이 우리가 주바라기가 되어서 온 종일 주님만 바라보아야 됩니다. 꿈속에서라도 주님 보기를 원하고 새벽에 일어나서 눈 뜨면 처음 생각나는 것이 ‘오 주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새 날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을 생각해야 돼요. 하루 종일 주님 생각하고 그리고 잠자리 들면서도 주님 생각하고 그게 주님께 붙어 있는 자의 삶이에요. 에배소의 처음 사랑을 회복한 자의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수정의 가족들에게 이런 특별한 은혜를 부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다 예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항상 예수 앞에 나오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붙어 있으시기 바랍니다.
영원한 생명의 양식 /요6:24-35
2019-12-22 11:27:21
24 무리가 거기에 예수도 안 계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25 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 2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27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28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30 그들이 묻되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31 기록된 바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3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33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34 그들이 이르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배불리 먹었다는 ‘오병이어’ 이야기가 당시 유대인들에게 얼마나 강한 인상을 주었을지는 명약관화합니다. 그것은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가 떨어지던 모세의 광야시절을 연상시킨 사건이었습니다. 요 6:14,15절에 따르면 당시 군중들은 카리스마 넘치는 모세를 떠올리면서 예수님을 임금으로 옹립하려고 시도했습니다.
그걸 눈치 챈 예수님은 그 자리를 피했습니다. 다음날 군중들은 호수 건너편 마을인 가버나움에 머물고 있던 예수님을 다시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 요 6:26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이 문장에 나오는 표적이라는 단어는 헬라어 ‘세메이온’의 번역입니다. 세메이온은 miraculous sign, miracle 등등의 뜻입니다. 루터는 그 단어를 Zeichen(짜이헨)으로 번역했습니다. 표시, 신호, 부호라는 뜻입니다. 어느 방향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은 겁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이 고전 1:22절에서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라고 말한 것처럼 원래부터 표적을 추구하는 민족입니다.
구약성경을 보십시오. 온갖 종류의 표적들이, 즉 기적들이 나옵니다. 이집트 파라오에게 열 가지 재앙이 내리고, 홍해가 갈라지고, 광야에 만나가 내리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광야에서 길을 안내했습니다. 엘리야가 기도하자 하늘에서 불이 내려 제단에 올려놓은 제물을 몽땅 태웠습니다. 이런 표적을 열거하자면 거의 끝이 없을 정도입니다.
유대인들은 왜 표적을 구했을까요? 하나님이 자신들과 함께 한다는 사실을 표적에서 확인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일리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분이 아닙니다. 사람의 감각을 통해서 일상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분이 행하시는 기적적인 사건입니다.
그 기적이 곧 표적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자나 깨나 하나님의 표적을 찾았습니다. 이런 표적 신앙 자체를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강하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표적 자체에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위 본문에서 군중들이 하나님을 가리키는 표적이 아니라 먹고 배부른 것에만 관심을 보인다고 일침을 놓으셨습니다.
오늘 기독교인들 중에서도 이런 전철을 그대로 따르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믿을 수 있는 표적을 달라고 매달립니다. 심지어 벼락부자가 되게 해달라거나, 백마 탄 남자를 만나게 해달라고 간구합니다.
이런 기도 자체를 매도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이 아니라 표적 자체에 매달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결국 자신의 삶에서 이용할 대상으로 떨어지게 되어, 겉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을 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먹고 배부르겠다는 자신의 욕망에 집중하는 것과 다를 게 없습니다.
‘먹고 배부른 것’은 인간에게 영원한 유혹이자 처절한 숙명입니다.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인간은 먹고 배불러야 합니다. 아무도 거기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근원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먹는 문제는 하나님의 창조 섭리, 창조 질서입니다. 먹어야겠다는 욕망이 작동되지 않는다면 인류는 지구에서 생존할 수 없을 테니까요. 만약 모든 사람이 거식증에 걸린다면 인류 멸절은 시간문제가 될 것입니다.
먹어야겠다는 욕망 자체가 아니라 그것에만 영혼을 몰입시킨다는 게 문제입니다. 이 문제는 단순히 식탐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소유욕 전반에 대한 것입니다. 그런 욕망에 사로잡히면 결국 먹을거리를 독점하게 되고, 이로 인해서 다른 사람의 생존을 위태롭게 만듭니다. 상대적으로 풍요로운 시대인 21세기에도 여전히 소유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우리를 무한 경쟁으로 몰아넣고 있다는 데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 현상을 보고 자기를 다시 찾은 유대 군중들에게 27절에서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의 양식을 위해서 일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표적 신앙의 오류를 교정하신 겁니다. 세상 사람들이 매력을 느끼는 일확천금이나 ‘대박’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양식이야말로 참된 표적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군중들은 예수님에게 물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즉 영원한 양식을 얻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합니까? 유대인들은 율법적인 민족이기 때문에 영생의 양식도 하나님의 일을 해서 얻는 것으로 생각한 겁니다. 그들의 태도는 진실한 겁니다. 눅 10:25절에 따르면 어떤 율법 학자가 예수님에게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눅 10:25)라고 질문한 적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과 비슷한 관점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29절에서 다음과 같이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유대 군중들의 질문은 절박한데 반해서 예수님의 답변은 좀 한가해보입니다. 자신과 세상을 새롭게 하기 위한 일을 구체적으로 알려주기를 기대했는데, 그냥 믿기만 하라는 겁니다. 예수님에게 질문했던 군중들이 얼마나 당혹스러워했을지 상상이 갑니다.
비유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장로 투표가 있었습니다. 한 후보자가 당회에 들어와서 소견을 발표합니다. 자기가 장로가 되면 교회를 위해서 어떤 봉사를 하겠다고 열변을 토합니다. 그때 담임 목사가 ‘그런 거보다 예수 잘 믿으세요.’라고 했습니다.
본문 30절에 따르면 유대 군중들은 예수님에게 다시 표적을 요구했습니다. ‘우리가 당신을 믿을 수 있는 표적이 무엇이냐?’고 말입니다. 모세의 만나와 같은 표적을 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기적에 마음을 두지 말고 하나님에게 마음을 두라고 예수님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말씀하셨는데, 군중들은 아무 것도 알아듣지 못한 사람들처럼 다시 예수님을 향해서 표적 운운합니다.
사람의 생각은 한번 틀이 잡히면 변화되기가 힘들다는 게 여기서도 확인됩니다. 표적과 기적에 마음이 쏠려 있어서 모든 문제를 그쪽의 관점으로만 접근하는 겁니다. 오늘 우리들도 혹시 신앙과 삶을 근본적으로 오해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헛것에 마음이 쏠려서 정작 중요한 것은 놓치고 있는 게 아닐까요? 몇몇 논쟁이 오간 뒤에 예수님은 35절에서 다음과 같이 돌직구와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이게 도대체 무슨 해괴 망측한 말인가요? 자신이 생명의 떡이라는 게, 자기에게 오는 자는 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도 않는다는 게 말이 될까요? 당시 예수님에게 와서 따지듯 논쟁하고 있는 군중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는 인간의 먹고살기 힘든 현실을 외면한 채 뜬구름 잡은 이야기로 구체적인 인간 실존을 호도하는 전형적인 종교 사기꾼은 아닐까요?
지난 기독교 역사에서 이런 잘못은 반복해서 일어났습니다. 세상은 죄악으로 물들었고, 썩어 없어질 것이니 신경 쓰지 말고 신앙생활이나 열심히 하다가 죽어서 천당 가는 게 중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오죽했으면 칼 마르크스가 기독교를 가리켜 민중의 아편이라고 했겠습니까. 히틀러 시대의 독일교회는 관념적인 신학과 신앙에 떨어져서 세계를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은 히틀러에게 대항하지 못했습니다.
오늘의 한국교회도 성속이원론과 영육이원론에 떨어져서 경제정의와 통일 문제 등에서 소극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소극적인 정도가 아니라 민족의 역사 앞에서 퇴행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일은 영육이원론과 기복주의가 교회 안에 착종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현상은 ‘둥근 삼각형’이라는 말처럼 형용모순입니다. 일종의 정체성 분열증세로서, 신앙을 정직하게 대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생명의 떡’이라는 예수님의 이 위험한 말씀은 당시의 유대 군중들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해당됩니다. 우리는 그 말씀 앞에서 정직해야 합니다. 책임 있는 대답을 해야 합니다. 설교자로서 여러분들에게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정말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이며, 그에게 가면 굶주리지 않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실제로 믿습니까? 근거를 댈 수 있습니까? 그런 경험이 있습니까?
예수가 생명의 떡이라는 말을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우리 말 표현으로 바꾸면 예수가 생명의 밥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를 믿어도 밥을 먹지 않으면 배가 고프고, 물을 마시지 않으면 목마릅니다. 그렇다면 본문이 말하는 생명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생명이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을 하기 전에 생명에 대한 성서의 대전제를 알아야 합니다. 성서는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그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그의 피조물입니다. 창조자와 피조물의 질적인 차이를 생각해보십시오. 성서는 그 관계를 토기장이와 질그릇 비유로 설명하곤 했습니다.
질그릇이 토기장이를 향해서 자기를 왜 이런 모양으로 만들었느냐고 따질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생명이 무엇인지는 우리가 규정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먹고 마시고 호흡하면서 생명을 부지하고 있지만 생명의 본질을 다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방식이 아닌 다른 생명을 우리는 경험하지 못한 채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명의 능력을 허락하기만을 기대할 뿐입니다. 우리가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씀이 좀 불편하게 들리나요? 인간을 너무 초라하게 말하는 것 같은가요? 여러분 마음에 들던 않든 간에, 이게 우리의 피할 수 없는 실존이니 제가 어떻게 다른 말을 하겠습니까. 여러분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서, 약간의 위로를 드리기 위해서 어떻게 다른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숨을 쉬지 않고 10분 이상 버텨낼 수 있다면 다른 토를 달아도 좋습니다. 이런 생명 조건을 우리는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조건의 세상 안으로 던져진 존재들(세계내존재)입니다. 과학발전이 크게 이루어진 먼 훗날 인간 수명이 2백 살이 되거나, 우주여행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순간이 온다고 하더라도 이런 인간의 실존적인 한계는 피할 수 없습니다. 그게 피조물의 속성입니다.
우리의 생명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말은 우리의 신세를 초라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오히려 든든하게 세우는 신학적인 대명제입니다. 생명이 우리 손에서 처리될 수 있다면 우리 운명은 더할 나위 없이 초라한 겁니다. 세상이 아귀다툼으로 변할지도 모릅니다. 돈 많은 사람들은 밥을 다섯 끼씩 먹고, 가난한 사람보다 1백년은 더 오래 살려고 애를 쓸 겁니다. 자기를 끊임없이 확대하려다가 절망하고 말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생명의 주인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그분만이 그분만의 방식으로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우리가 생명을 누릴 수 있게 도와주십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분만이 고유한 능력으로 생명을 완성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늘에서 내려온 영원한 생명이라는 말은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생명을 얻는다는, 즉 구원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다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를 좀더 생생하게 이해하려면 생명 충만감을 얻는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써 하나님을 통해서만 가능한 생명의 깊이로 들어갑니다. 신약성경의 핵심 주제가 이것입니다.
이 말씀을 제가 어떻게 더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기독교 신앙의 진수를 실제로 경험할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누구를 사랑해보신 적이 있나요? 그를 통해서, 또는 그녀를 통해서 세상을 전혀 새롭게 경험하게 됩니다. 모든 사물에 생기가 돕니다.
그와 함께 한다면 아무리 허술한 밥상이라도 진수성찬 부럽지 않게 됩니다. 더 근본적으로 삶의 기쁨이, 존재의 기쁨이 밀려드는 걸 느낍니다. 더 이상 다른 것이 보충되지 않아도 충분히 만족한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사람을 사랑할 때도 이런 경험이 주어지는데, 하물며 예수를 사랑한다면 긴 말이 필요 없습니다. 본문의 표현처럼 결코 주리지 않을 것이며,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설명이 옳다는 건 분명한데 왜 나에게는 그런 경험이 없을까, 이상하게 여길 분들도 계실 겁니다. 이게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런 경험 없이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따분하고 피곤한 일입니다.
이런 경험이 없으니 교회 안에서 사소한 일로 충돌이 일어나고, 공연한 일에 마음이 흐트러지게 됩니다. 사랑을 경험해보지 못한 채 자기라는 성채에 갇혀 지내는 사람의 운명과 비슷합니다. 어떻게 예수를 통한 생명 충만의 경험을 할 수 있을까요? 그런 삶에 대한 열망이 간절하지 않으십니까?
본문이 답을 줍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이라고 했습니다. 오기만 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너무 쉬운 대답이라서 허전한가요? 40일 금식기도가 아니라서 시시해보이나요? 예, 쉽습니다. 우리에게 어떤 학위나 돈이나 인격이나 온갖 업적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냥 오기만 하면 됩니다. 예수 앞에 서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그를 믿기만 하면 됩니다. 겉으로 쉬워 보이지만 그게 가장 어렵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뭔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에 관심이 있고, 그래서 그런 것에 열정을 보이지 예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열리는 생명의 신비에 집중하지 못합니다. 알지만 잘 안 됩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인생살이의 돌부리 같은 것에 걸려서 결코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 않는 주님의 약속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지만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지 못한 채 영적인 갈증만 더 심해지는 것은 아닐까요? 또는 완전히 신앙생활의 매너리즘이라는 늪에 빠져버리고 있는 건 아닐까요?
그래서 요 6:66절이 말하듯이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 제자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떠난 것처럼 복음의 세계로부터 시나브로 멀어지고 있는 건 아닐까요? 저는 지금 여러분의 신앙과 삶의 문제를 한방에 해결해드릴 묘책을 제공할 수가 없습니다. 각자 영적 수준만큼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단계에 머물러 있던지 다음의 한 가지 사실만은 잊지 말고, 혹시 잊었다가도 다시 기억해내도록 하십시오. ‘예수님만이 영원한 생명의 참된 양식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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