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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요한복음 설교 모음

요한복음 8장 31절 - 35절 설교 모음

by Jessi J 2023. 8.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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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자유인 /8:31-38/ 곽선희 목사

2014-11-20 13:58:12

 

러시아의 문호 도스또예프스키의 작품 가운데 '대 심판관'이라고 하는 유명한 명작소설이 있습니다. Great Inquisitor 라고 하는 소설입 니다. 그 내용 가운데 다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체포하고 대 심판관 이 여기서 예수님의 잘못을 지적하 는 그런 내용으로 장면이 전개됩니 다. 심판관의 말속에 이런 말이 있 습니다.

 

"너는 인간을 너무 존귀한 존재로 과대평가하고 있다. 인간이 란 바로 유치한 아이와 같아서 권위 와 기적으로 영도되기를 바라고 있 다. 인간들에게 빵을 주었다면 너 는 쉽게 성공했을 것이다.

 

인간은 빵만 쥐어주면 누구에게나 복종하는 데 어째서 자유가 무슨 가치가 있단 말이냐? 인간에게 자유를 주어도 결국은 그 자유를 발아래 내동댕이 치고 다시 노예로 삼아 달라고 애걸 복걸할 것이 뻔한 일이다"하고 말합 니다.

 

아주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사람들은 빵만 주면 누구에게나 순 종한다. 자유를 주었댔자 그 자유 의 소중함을 모르기 때문에 바로 다 시 또 다른 어떤 것에 스스로 노예 가 되어버리고 만다. 인간은 근본 적으로 노예성이 있는 구제불능한 인간이라고 고발하는 그런 내용의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스스로 얼마나 자유 하다고 생각하 십니까? 얼마나 스스로 자유를 누 린다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정치적 인 자유,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 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경제적 자유입니다. 가난한 자는 자유인이 아닙니다. 한 그릇의 빵을 위해서 양심을 팔아야 되니까요. 또 지식 의 자유가 없는 자도 자유가 아닙니 다.

 

우스운 얘기입니다 만은 제가 오래 전에, 아주 오래 전에 대만을 처음 갔을 때, 좀 거리를 구경하고 싶어서 혼자서 이 골목, 저 골목 다 니다가 배가 고파서 식당을 찾아 들 어갔는데 내가 중국말 모르지요, 그 사람이 한국말 모르지요, 내가 영어 를 하지만은 저 사람 영어 모르지 요, 말이 전혀 안 통하는 겁니다.

 

그 뭐 메뉴, 차림표라고 가지고 왔 는데 빨간 글씨로 맨 중국말만 썼는 데 그거 하나도 모르겠어요. 자 이 거 먹기는 해야겠고, 정말 정말 답 답하더만요. 그래서 할 수 없다, 거 기에 있는 분을 소매를 끌고 가서 남 먹는 걸보고 저 사람 먹는 것 좀 달라고 손짓, 발짓해 가지고, 그래 한끼 얻어먹고 나온 일이 있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는 다는 거, 지식이 통하지 않는다는 거 얼마나 답답한 건 지, 뭐 감옥이 따로 없습니다. 이게 바로 부자유라는 것이죠, 자유 함이 없는 것이에요. 그런데 이 보 다 더 무서운 것은, 내가 얼마나 비 참한 노예적 상황에 있다는 것을 자 기가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 치 아픈 줄 모르는 병이 죽는 병인 것처럼 이렇게 자기가 얼마나 지금 구제불능한 노예상태에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오 늘 본문성경에 보면 예수그리스도께 서 자유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바로 그 유대인들을 향해서 정면적으로 아주 직선적으로 저들의 어리석음을 꾸짖는 그런 내용이 있습니다.

 

저 들은 정신적으로, 문화적으로, 도덕 적으로, 신학적으로 철저하게 노예 상태에 있었습니다. 아주 불쌍한 정도로. 그들의 철저한 노예상을 예수님께서 지금 지적하고 있는 그 런 모습입니다. 유대사람들이 말합 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이다. 노예 된 적이 없거늘 우리를 어째서 자유케 한다고 하느냐?"

이 얼마나 웃기는 소리입니까. 아 애굽에서 400년 동안 노예생활 했잖아요, 바 벨론 70년 포로생활도 했잖아요.

 

, 역사 속에 노예생활 한 것이 얼 마나 많은데, 우리는 자유인이다, 노 예 된 적이 없다, 이건 허상이고요 또 자기 자신, 벌써 선민의 협소한, 스스로의 민족 우월감에 빠져있고 문화적으로, 정신적으로, 노예적이에 요. 아주 비참할 정도의 노예생활 을 하고 있는 것이고 더 중요한 것 은 신학적 문제입니다.

 

율법주의의 노예가 되어서 그 결과로 외식주의 자들이 되어서 많은 종교 예식과 함 께 허상, 거짓, 위선에 빠져 있잖아 요. 그 율법에 매여서 벌벌 떨고 살고, 그 많은 계율에서 노예가 되 어 사는 그 비참한 모습, 자기들이 모르고 있는 거예요. 그 뿐입니까? 기득권에 대한 아집입니다.

 

예수를 영접할 수 없는 것이에요. 자기 지 금 현재에 있는 이 자기 처지, 바로 여기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 를 영접할 수가 없었고 마침내 예수 를 십자가에 못박게 됩니다.

 

자기 고집, 자기라고 하는 그런 집착성, 여기에 매여있습니다. 이 기득권을 양보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 소 중한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저들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가 얼마나 비참한 건지 자기 스스로 모 르고 있습니다. 때로는 좀 알지요.

 

깨닫기도 하고, 보기도 하고 예수님 의 이적 기사를 옆에서 보았습니다. 더욱이 상당한 깨달음도 있었습니 다, 느낌도 있지만은 그러나 자기 현재의 처지에서 물러서고 싶지 않 아요. 그래서 메시아를 영접하지 못하고 마침내 회개없이 예수를 십 자가에 못박는 엄청난 죄를 범하게 됩니다. 자 이 사람들이 자유인입 니까? 엄청난 죄악의 노예상태에 있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는 자유인이다', 이게 얼마나 한심한 일입니까?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얼마나, 얼마만에 자유를 누리고 있 습니까?

오늘 본문 가운데는 예수님께서 대단히 중요한 전제를 내 놓습니다.

"자유 문제는 죄 문제다"

 

이렇게 결 론을 짖습니다. 정치·경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죠. 이거는 교육의 문제도 아니요, 자유의 문제는 바로 죄 문제라는 것이죠. 죄를 짓는 자 마다 죄의 종이 되니까요. 이것은 잘 살고, 못 살고의 문제가 아니에 요.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잘 살고, 못 살고는 얘기하지 맙시다.

 

좀 제 대로 바르게 사는데 문제가 있는 거 예요. 바르게 사는 자유를 잃어버 린 거예요. 어떤 사람이 셋방살이 로 이리저리 다니면서 사니까 한평 생 소원이 제발 좀 내 집 쓰고 살았 으면 좋겠다. 그러면 이사 안 할 수 있으니까 좀 자유롭게 신앙생활 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어찌어찌 해서 집을 하나 마련했어 요.

 

너무 좋아요. 그 때에 그 만족 한 마음은 비교할 수가 없어요. 그 러나 바로 몇 달 안돼 가지고 '집이 왜 이렇게 작아? 남의 집들은 크더 만, 이게 요렇게 조그매 가지고 답 답해서 살수가 있나.' 좀 큰집, 좀 큰집이 있어야 자유롭겠다고 몸부림 을 쳐서 또 애써서 큰집을 마련했습 니다.

 

좀 무리하게 하고 나니까 이 젠 집이 커서 좋다, 했더니요 청소 하는 게 힘들더랍니다. 또 그런가 하면 집이 크다보니까 작은 집 쓰고 사는 사람들 친구들 만날 때마다 이 거 돈도 없는 사람이 집만 큰 거 가 졌다고 하는 거 비난하는 거 같아서 이거 또 따가워요.

 

마음이 좋지 않 아요. 그런가 하면 밖에 나갈 때마 다 도둑놈 들어 올까봐, 밤에 잘 때 마다 아무 것도 없는데 집이 크니까 강도 들어 올까봐 걱정이 되어 가지 고. 심지어는 누가 찾아 올까봐 교 회도 못 나가요. 집을 비울 수가 없어서. 자 자유는 어디로 갔습니 까?

 

차라리 문단속 안 해도 될 만 큼 살 때가 좋았는데, 그렇게 생각 했다는 거죠. 참 자유라는 것은 그 것은 경제문제도 아니요 정치문제도 아닙니다. 지위와 명예도 아닙니다. 죄의 문제입니다 죄. 죄를 짓는 자 마다 가책에 매이죠, 양심의 가책. 또 저주의식에 매입니다.

 

죄를 짓 고 사는 사람은요 감기만 걸려도 죄 때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조그만 자동차 접촉사고만 나도 하나님이 나를 저주하신다고 생각합니다. 벌 벌 떨면서 이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어디 자유가 있다는 말입니까? 또 그런가 하면 죄의 노예가 되었기 때 문에 죄를 반복하는 죄를 짓습니다.

 

죄에 끌려서 또 다른 죄, 또 다른 죄를 지을 수밖에 없어요. 이 얼마 나 비참한 것입니까? 죄의 영향을 받아서 성품도 파괴되고 맙니다. 그래서 거짓되지요, 변명의 사람이 되지요, 남을 원망하고 불평하는 사 람이 되지요, 무능한 사람, 무지한 사람, 그리고 아무 것도 없으면서 속에 쓸데없는 교만만 남았어요.

 

이러한 인간, 정말 살고싶지 않은 그런 비참한 인간이 되는 거예요. 죄의 값은 사망이니까요. 그렇다면 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자유함의 근본이에요. 돈 벌어 자유하는 거 아니에요. 출세해서 자유하는 거 아닙니다. 오직 죄로부터 자유할 때만이 내 영이, 내 인격이 자유하 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또 소중한 진 리를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것 은 자유케하는 일에 대해서 말씀합 니다. 어떻게 해야 자유함을 얻을 수 있느냐하는 거지요. 이에 대해 서 자세하게 비결을 가르쳐 줍니다.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그랬어 요. 이게 비결입니다. 주님의 말씀 을 영접해야 되고,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되고, 주님의 말씀을 많 이 깨끗한 마음으로 수용해야 되요. 그리할 때 나도 모르게 어느 사이에 진리를 알게 되요.

 

진리를 알게 되 면 이제는 진리가 나를 자유케 하는 것이에요. 주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됩니다. 그런데 바리새 교인과 서 기관들, 예수님이 그렇게 귀한 말씀 을 전하는데 받아들이지 않아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가 없 어요. 너희 마음에 내 말이 거할 곳이 없다고 말합니다.

 

욕심과 시 기 질투로 가득차 있으니 주님의 말 씀이 들어갈 곳이 없어요. 그래 하 시는 말씀이예요. 내 말이 너희 안 에 거하면 진리를 알게 되고, 진리 를 알게 되면 너는 자유케 되리라. 말씀이 내 안에 밀려올 때 내가 매 여있던 이 많은 쇠사슬이 다 풀려나 는 것이예요.

 

그걸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유명한, 여러분 잘 아시는 지미 카터가 The Virtues of Aging 이라고 하는 책을 써서 여러분 다 읽어보신 줄 압니다. 제가 언젠가 도 한 번 말씀을 드렸는데 그 책 중 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기자가 묻 기를

 

"당신은 대통령도 했고, 세계 를 호령하면서 여기저기 큰 일도 많 이 하고 했는데 참 많이 행복한 날, 가장 즐거웠던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한평생 지내오면서 최고의 때가 언제였습니까?"라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지미 카터의 유명한 말은 이렇습니다.

"바로 지금입니다."

 

다 그만두고, 다 은퇴하고, 지금 농촌에 있지마는 바로 지금이 가장 행복하 다고. ? 가장 자유로우니까. 이 제 아무 걱정도 없어요. 아무 미련 도 없어요. 내 영혼이 가장 자유롭 기 때문에 지금 이 시간이 가장 행 복한 시간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반생을 살아오면서 그 언제가, 언제 가 가장 최고의 해였습니까? 어떻 게 되면 최고의 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가장 위대한 사람의 고백은 이겁니다. 바로 지금이라고. 지금은 내 영혼이 온전히 자유하고 있으니까 이 시간이 가장 행복한 것 이라고 이러한 고백이 아쉽습니다. 진리를 알아야합니다.

 

아는 문제입 니다. 진리를 깨달아야합니다. 진 리를 깨달을 때에 그 속에서 내 가 치의 존재를 찾고, 삶의 의미를 찾 고, 내게 주어진 약속의 땅을 바라 볼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 진리를 알기 위해서는 주님의 말씀을 내가 받아들여야 됩니다. 순수한 마음으 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됩 니다.

 

그러면 이제는 진리가 너를 자유케 하리라. 여러분 내가 스스 로 자유할 수 없는 것입니다. 생각 해보세요. 내가 물에 빠져서 이제 홍수에 떠내려간다고 합시다. 내가 내 머리카락을 내 손으로 추켜올린 다고 해서 물에서 빠져 나올 수 있 는 겁니까?

 

몸부림 쳐봐야 아무 소 용없어요. 이젠 적어도 이건 알아 야지요. 내 노력, 내 수고, 내 의지 로서는 불가능한 것이요. 이제는 주님의 말씀이 나와 함께 하는 길 외에 자유케 될 수 있는 길이 없습 니다. 특별히 여기에는 중요한 신 학적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 다 시 말씀하기를

"아들이 자유케 하면 자유하리라"

 

간단한 말씀이요, 우주 적인 진리입니다. 예수그리스도 메 시아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 희를 자유케 하면 비로소 자유하리 라."

무슨 말입니까? 예수께서 우 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셔서 우리로 사망과 죄로부터 자유케 하 실 것을 말씀하는 겁니다. 그 약속 입니다.

 

뉴욕에 브르클린에 플림마우스 (Plymouth)라고 하는 교회가 있는 데 여기에 1928년에 있었던 이야기 입니다. 어떤 할머니가 예배 끝났 을 때쯤 되서 손을 들고

"목사님 죄 송하지만 딱 한번 마지막으로 부탁 하는데 저 강단에 나가서 간증 좀 하게 해 주세요"

 

그 너무 간절해서 허락을 했어요. 이 할머니가 이 강 대상에 올라와서 조심스럽게 이야기 합니다.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 은 68년 전 이야기입니다"그래요. 68년 전 날짜까지 자세하게 기억하 고 있습니다.

 

"1860919, 그 날은 주일날이었습니다. 저는 이 교회당 바로 마당에서 거기서 노예 시장이 열렸는데 저는 노예로 팔려 가는 시간이었습니다. 이제 경매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딴 곳으로 노예로 팔려 가는 모습을 보 면서 나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 다.

 

나는 지금 어디로, 어떤 집으로 팔려가게 되나, 내 운명은 어떻게 되나, 초조하고 벌벌 떨고 있을 때, 방금 이 예배를 마치고 이 교회에서 나오는 목사님이 나를 붙들고 800불 을 주고 나를 사서 그 시간에 나를 자유하게 해 주었습니다.

 

듣자하니 그날 우리가 어찌할 수가 없지만은 우리가 오늘 헌금을 해서 노예 한 사람이라도 자유를 줍시다, 해서 헌 금한 돈을 가지고 저를 사서 풀어주 어서 내가 자유인이 된 것입니다.

 

저는 그런고로 이 교회를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68년 동안 이 교회에 출석하며 이 교회를 위해 기도하며 이렇게 한 평생을 살았는데 이제 내 가 나이 많아서 죽을 때가 가까왔기 에 이 말을 꼭 하고 가야겠기에 말 씀을 드리는 겁니다. 여러분 노예 가 스스로 자유할 수 있습니까?

 

팔 려 가는 노예가 자유 할 수 있습니 까? 정욕과 죄와 시기, 질투, 저주 로 지금 완전히 노예된 인간이 스스 로 자유 할 수 있습니까?

 

예수그리 스도께서 값을 치러서 대신 십자가 를 지심으로 그리고 그를 믿음으로 해서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가 되고 다시 하나님의 자녀가 될 때, 오늘 말씀대로 아들에게만 자유 함이 있어요. 노예는 자유가 없어 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순간에 그로부터 자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국의 학자인 아이자야 베를린 (Isaiah Berlin)이라고 하는 분은 Four Essays on Liberty라고 하는 책에서 이렇게 자유를 두 가지로 나 누어 설명합니다. Negative Liberty, 소극적인 자유가 있고 Positive Liberty, 적극적인 자유가 있다. 그런데 소극적인 자유는 어 떤 간섭이나 억압으로부터의 자유, 여기서 벗어나는 자유, 그런고로 Freedom from Something, 그러한 자유가 있고요.

 

또 하나는 Freedom for Something, 무엇을 위 하여 스스로 자기 자유를 버리는 자 유, 거기에 진정한 자유가 있는 것 이다. 무엇으로부터 벗어나는 소극 적 자유만 가지고는 자유하지 못합 니다. 오히려 나 자신을 선한 일에, 의로운 일에, 사랑에 노예가 될 때 자유할 수 있어요. 미워하는 사람 은 자유인이 아닙니다.

 

내가 미워 하는 사람에게 내 자유를 빼앗기고 있기 때문이에요. 용서하고 사랑할 때만, 사랑하는 자만이 자유인이 되 는거요. 영국의 교육 철학자인 알 에스 피터스(R.S. Peters)Paradox of Freedom이라고 하는 아 주 재미있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 다. 자유의 역설! 왜요? 큰 자유 를 위해서 작은 자유를 버려야 되니 까요. 작은 자유를 버릴 때에 큰 자유를 얻을 수 있다. 여기에 자유 의 역설이 있습니다.

 

내 정욕, 시 기, 교만, 이 우스꽝스러운 자존심, 이 끝없는 욕심, 깨끗이 버려요. 그 리고 주님을 영접할 때만 비로소 참 자유, 큰 자유, 영원한 자유를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진리를 알지 니 십자가의 진리를 알고 비로소 그 지불된 값을 할 때, 나 자신이 하나 님의 자녀로 소중한 존재로 발견됩 니다.

 

나는 진리의 노예가 되고 진 리는 나를 자유케 할 것입니다. 나 는 그리스도의 종이요, 영원한 노예 로, 영원한 사랑의 노예가 될 때 비 로소 여러분은 자유인이 될 수가 있 는 것입니다. 이 자유인만이 건강 합니다. 이 자유인만이 행복합니다. 이 자유인만이 창작적, 창의적 능력 이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만이 21 세기를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의 사람 이 될 수 있습니다. 내 손에 무엇 이 있던 없던 그거 중요하지 않습니 다. 남이 나를 향하여 뭐라고 하든 말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 영혼 이 자유할 때만이 영원한 자유인이 될 수 있는 겁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얼마나 깊은 수렁 에 빠졌고 얼마나 비참하게 쇠사슬 에 묶여있는지 그것조차 의식하지 못하고 사는 저희들을 자유케 하신 주님의 은혜를 감사합니다. 얼마나 고귀한 값이 주어졌고 나의 자유의 의미가 얼마나 큰 것을 알아서 다시 는 죄의 노예가 되지 않고 물질의 노예가 되지 않고 세상 그 무엇의 노예되지 않은 영원한 자유인으로 그렇게 살아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 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 다 아멘.

 

 

 

admin

 

댁쟾쇰줈

 

이리도 자유를 원하는데 /8:31-36/ 조상호목사

2023-07-21 23:07:29

 

이솝 우화에 <이리와 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날 뼈만 앙상하게 남은 깡마른 이리가 살이 토실토실 찌고 털빛도 반질반질 윤이 나는 개를 만났습니다. 이리는 그 개가 너무 부러워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멍멍아, 너는 먹고 싶은 것 마음대로 먹고, 마시고 싶은 것 마음대로 먹을 수 있으니까 좋겠다.” 그 소리를 들은 개는 우쭐해져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리야 내가 부럽니? 너도 나처럼 잘 먹고 잘 살려면, 우선 네가 산속에서 나와야 해. 산속에서 계속 있으면 굶어죽기 딱 안성맞춤이지. 나 있는 농장으로 따라오면 잘 먹고 잘 살 수 있어.” 이리는 궁금해져서 개에게 물었습니다.

 

네가 있는 농장에 가서, 내가 뭐하면 되는데?” “아무 일을 안 해도 좋아. 그냥 사람들의 비위만 맞춰주고, 필요하면 꼬리만 흔들고 있어도, 맛있는 고기 뼈다귀 같은걸 얼마든지 먹을 수 있어이리는 솔깃해져서 개를 따라 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개 뒤를 따라가던 이리는 개의 목에 털이 벗겨진 자국을 보았습니다.

 

멍멍아, 너의 목에 털이 벗겨졌는데, 무슨 일이 있었니?“ ”, 이건 목걸이 자국이야“ ”목걸이라니? , 농장에서 목걸이 차고 살고 있니?“ ”, 때로는 줄에 매여 있을 때도 있어“ ”그럼 멍멍아, 농장에서는 줄에 묶인 채 살아야 하니?“ ”이리야, 걱정하지마. 묶여 있는 일이 간혹 있지만 힘든 일 아니야.“ 이리는 갑자기 이상한 표정을 짓더니 멍멍아, 나는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매일매일 먹을 수 있다 해도 묶여 있는 건 싫어. 세상에 있는 좋은 보물을 다 준대도 난 자유가 없는 곳에는 가지 않을래.“라고 말하며 숲 속을 향해 다시 쏜살같이 달아나 버렸다고 합니다.

 

이 이솝우화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이리는 먹을 것 보다, 자유를 더 중요하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비단 이리와 같은 짐승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닙니다. 과거 18세기에 활동하던 패트릭 헨리(Patrick Henry, 1736-1799)라는 사람이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말한 것처럼, 사람들도 자유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래 전에 출시된 영화 중에 스티븐 킹 원작 '쇼생크 탈출'(The Shawshank Redemption)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젊고 유능한 은행원 앤디 듀프레인은 어느 날 아내와 그 정부를 살해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두 번의 종신형을 선고받고, 탈출이 불가능하다는 악명 높은 쇼생크 감옥에 수감됩니다. 앤디는 그 감옥 안에서 자신을 괴롭히는 악당들을 특유의 강인함으로 굴복시키고, 자신의 특기를 살려 간수들로부터 신임까지 얻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여 감옥에서 나가 자유를 되찾으려는 노력을 계속해서 합니다. 시간이 흘러 결국 그에게 죄가 없다는 것이 밝혀지기는 했지만, 교도소 안에서의 부정을 은폐하려는 교도소 소장의 무서운 음모 때문에 번번이 실패하고 맙니다. 감옥에서 나가려면 탈옥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19년 동안 은밀히 준비한 끝에, 결국 천둥번개가 치던 어느 날 탈출을 감행합니다. 천신만고 끝에 극적으로 감옥을 빠져 나온 그는 쏟아지는 폭우를 맞으며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높이 들고 있는 힘을 다해 소리칩니다. "나는 자유자다. I am free!"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서 사람이 얼마나 자유를 갈망하고 있는지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습니다. 인간의 자유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소중한 것 중의 하나입니다. 이 세상에서 불행한 일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자유의 상실입니다. 우리나라의 지나간 역사를 뒤돌아보면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채 36년 동안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산 적이 있습니다.

 

한국 문화 대신에 일본 문화를 배우게 하고, 우리말 대신에 일본 말만 사용하게 하고, 우리나라 왕은 폐위시켜 버리고 대신에 일본 천왕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하고, 이름도 자기 이름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일본식 이름을 사용하게 하는 등, 자유를 상실한 채 억압당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지금으로부터 59년 전인 1945년 오늘, 해방이 되면서 잃었던 나라를 다시 찾게 되고 상실한 자유를 다시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8.15 광복절 59주년을 맞이한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참된 자유는 무엇이며, 우리가 어떻게 참된 자유를 얻을 수 있으며, 누가 참된 자유를 누리며 살 수 있는지에 대해서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무엇이 참된 자유인가?

그러면 참된 자유가 무엇일까요? 무엇이 참된 자유입니까? 죄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되는 영적인 자유야말로, 세상의 어떠한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진정한 자유입니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누려야 할 자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1941년 미국의 프랭크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말한 것처럼, 표현의 자유나 종교의 자유나, 가난으로부터의 자유나 공포로부터의 자유나, 다 우리에게 필요한 자유입니다.

 

이러한 자유가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보다 더 중요한 자유는 영적인 자유입니다. 죄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야말로, 세상의 어떠한 자유보다도 소중한 자유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영적인 자유를 잘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마음먹은 대로 말할 수 있고, 원하는 대로 여행할 수 있고, 생각하는 대로 행동할 수 있으면 나는 자유자이며, 나는 자유를 누리고 있다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바로 그랬습니다. 그들은 주로 신체적인 자유만을 생각하며 신분상의 제약을 받지 않으면 자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33절을 보겠습니다.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을 주장했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인 그들 역사를 뒤돌아보면 애굽에서 종살이할 때도,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을 때에도, 로마 황제의 통치 아래에 있을 때에도 그들은 어떠한 외부 세력에 굴하지 않고 항상 하나님께 제사 드렸습니다. 유대인들이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다고 말한 것은 종교적인 자유를 말합니다. 비록 나라를 빼앗긴 적도 있고, 포로로 잡혀간 적도 있고, 노예 생활을 한 적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께 당당하게 제사를 드렸던 종교적인 자유인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자유>는 그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34절을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말씀하시며, <자유>에 대해서 분명하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마음대로 제사할 수 있는 자유를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해서 진정으로 자유로운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죄를 범했으면 아무리 다른 것을 누리고 있다할지라도, 그 사람은 자유자가 아니라 죄의 종이라는 것입니다.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할 수 있고,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고, 원하는 대로 살수 있다 할지라도, 죄에서 자유롭지 못하면 진정한 자유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리차드 훼플러(Richard Hoefler)라는 사람이 쓴 <아침이 밝을 것인가(Will Daylight Come)>라는 제목의 책에서, 할아버지 농장을 방문한 남매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쟈니(Johnny)는 새총을 하나 구해서 그것을 가지고 날마다 연습했습니다. 솜씨가 점점 좋아졌습니다. 어느 날 쟈니는 창고에 들어갔다가 할머니께서 아끼시는 오리를 몰래 훔쳐보게 되었는데, 장난삼아 새총을 당긴다는 것이 그만 오리에 정통으로 맞아, 할머니가 매우 아끼시는 그 오리가 죽고 말았습니다. 쟈니는 겁이 덜컥 났습니다. 그는 두려운 마음으로 오리를 장작더미 속에 감추고 나서 고개를 드는 순간, 누나 샐리(Sally)가 지켜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누나 샐리(Sally)는 쟈니가 한 짓을 모두 다 보고 말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날 점심을 먹고 나서 할머니께서 "샐리야! 우리 접시좀 닦을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샐리는, "할머니, 쟈니가요. 오늘은 자기가 부엌 일을 돕고 싶다고 그러던데요. 그렇지, 쟈니?"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그녀는 허리를 굽혀 그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습니다. "오리...알지!" 쟈니는 자기의 죄가 탄로날까봐 하는 수 없이 할머니를 도와서 접시를 닦았습니다. 접시를 닦고 나자, 할아버지께서 아이들을 데리고 낚시하러 가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할머니께서는 "어쩜 좋지? 샐리가 저녁 만드는 걸 거들어 주었으면 좋겠는데...."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샐리는 웃으면서, "걱정하실 거 없어요. 쟈니가 하고 싶다는데요." 라고 말하며 쟈니에게 가까이 다가와서 또 이렇게 속삭였다. "오리......" 쟈니는 누나 샐리가 할아버지와 낚시를 가서 재미있게 지내는 동안 집에 남아서 많은 일을 해야 했습니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쟈니는 분명히 원하는 것을 다 할 수 있는 아이였습니다. 먹고 싶은 것 마음대로 먹을 수 있고, 자고 싶으면 언제든지 잘 수 있고, 하고 싶은 것 마음대로 할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유를 누리지 못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죄 때문입니다. 할머니가 아끼는 오리를 죽인 죄로 말미암아, 그는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죄의 종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이처럼 죄가 우리 속에 들어오면서 가장 먼저 빼앗아 가는 것이 자유입니다. 죄의 종이 되면 죄가 시키는 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에는 자유는커녕 예속만이 있을 뿐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그렇습니다. 죄의 종이 되는 순간 우리는 자유를 잃어버린 채 죄의 사슬에 묶여 불행한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고,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심판 때에 죄를 범하고 회개하지 않은 자들은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불 못에 던져져 영원토록 극심한 고통을 겪으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라는 것은 이 세상에서 우리를 구속할 뿐 아니라, 미래까지도 영원히 우리를 자유하지 못하도록 가두어 놓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범하고도 회개하지 않으면 이 땅에서 뿐 아니라, 영원한 감옥에 갇히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죄를 범하고 회개하지 않으면 진정한 자유도 참된 해방도 있을 수가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자유를 얻을 수 있나?

그러면 참된 자유를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요? 무엇을 통해서 진정한 해방을 얻을 수 있을까요? 오늘의 본문 말씀을 보면 참된 해방, 진정한 자유라는 것은 인간 스스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유를 얻기 위하여 투쟁하고 데모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등의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지만, 그렇게 해서 얻어낸 자유는 참된 자유가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인간 스스로 참된 자유를 얻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참된 자유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실 때 우리는 자유를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36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이 말씀은 나 스스로 자유를 쟁취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내가 자유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말도 아닙니다. 내가 스스로 자유 할 수 있다는 말도 아닙니다. 자유는 인간적인 노력이나 우격다짐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자유케 해야만, 우리가 자유 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진정한 해방자가 되시며,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 참된 자유를 주실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참된 자유는 어느 한 개인에게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다고 어느 집단이나 국가가 주는 것이 아니라, 참된 자유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말미암아 정결하게 씻을 수가 있으며,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죄로부터 자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선한 일을 하고, 열심히 수행을 하고, 도를 닦아도 우리 죄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돈이나 지위나 권력으로도 우리가 지은 죄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만이 우리의 죄를 씻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종종 부르는 찬송가 202장 가사를 아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1절 가사를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 보혈의 능력, 주의 보혈, 시험을 이기는 승리되니 참 놀라운 능력이로다. 주의 보혈 능력 있도다. 주의 피 믿으오. 주의 보혈 그 어린 양의 매우 귀중한 피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만이 우리를 죄로부터 자유케 하고 해방시켜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앞서서 소개한 리차드 훼플러(Richard Hoefler)라는 사람이 쓴 <아침이 밝을 것인가(Will Daylight Come)>라는 제목의 책을 계속해서 소개합니다. 놀러온 할아버지 농장에서 재미나게 놀지도 못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날마다 힘들게 일을 하던 쟈니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그는 할머니에게 자기가 실수로 할머니가 아끼시는 오리를 죽였다고 말씀드리기로 결심했습니다. 쟈니는 용기를 내어 할머니에게 가서 그 동안 있었던 일을 사실 그대로 말씀 드렸습니다. 그런데 화를 내시며 야단을 칠 줄 알았던 할머니께서는 예상과 달리 쟈니를 꼭 안아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다 알고 있단다. 나는 네가 오리를 죽였을 때 창문에 서 다 보고 있었거든. 너를 용서해주마. 나는 널 사랑한단다. 걱정하지마....”

 

우리의 실수를 고백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에게 들볶이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답답한 일입니다. 털어놓으면 손쉽게 해결될 것을 그렇게 하지 못함으로 더 어렵게 일을 만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만 국한되는 얘기가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우리는 연약한 존재이므로 살다보면 실수할 수 있습니다. 범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 이후에 있습니다. 우리가 그 범죄를 감추고 은폐하려고 할 때, 사단에게 자유를 박탈당한 채 억압당하며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죄 때문에 마음껏 자유를 누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지금 이 시간 과거에 지었던 죄로 인해 고민하고 있는 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만이 우리를 죄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주님께 여러분들의 허물과 죄를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사랑의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보혈로 깨끗하게 씻어주실 줄로 믿습니다. 자비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참된 자유를 허락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또한 악한 흑암의 세력 때문에 참된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밤새도록 두려워하며 늘 불안해하며 살아가는 분이 이 자리에 계시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십자가의 보혈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참된 자유를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악한 흑암의 세력을 당당하게 꾸짖으시기 바랍니다. 악한 마귀는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 도망갈 줄로 믿습니다.

 

누가 자유를 누릴 수 있나?

그러면 누가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람들이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을까요?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의지하여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했음에도 불구하고 참된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많이 있습니다. 분명히 자유를 누릴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자유를 얻는 것자유를 누리는 것은 언뜻 들으면 비슷한 말 같지만, 엄밀하게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느 인디안 마을에 시장이 열렸습니다. 많은 인디언들이 사고 팔 물건들을 가지고 왔습니다. 한 농부가 메추라기 한 떼를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그 농부는 시장에 도착하자마자, 가지고 온 메추라기 새들의 발목에 줄을 맨 후, 튼튼하게 생긴 긴 막대기를 땅바닥에 세워놓고 거기에 새를 묶은 모든 줄을 걸어 놓았습니다. 발목에 줄이 묶인 메추라기들은 마치 노새가 방앗간에서 맷돌을 돌리며 뱅뱅 돌아가듯이 계속해서 긴 막대기 주위를 돌면서 걷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메추라기들을 사려고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조그마한 메추라기들을 불쌍하게 생각하는 한 사람이 메추라기를 파는 인디언에게 그 가격을 묻고 그 상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것들을 다 사겠소." 그 인디언은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 사람은 메추라기들의 값을 지불한 후에 메추라기를 팔던 인디언에게 갑자기 이렇게 말했습니다. ", 이제 그 새들을 다 놓아 주시요." "뭐라고요, 선생님?" "내가 말하지 않았소. 새 발목의 줄을 끊어 그 새들을 놓아 주란 말이요. 그 새들을 모두 자유케 해 주시오." ", . 선생님, 그렇게 하지요. 선생님이 원하시는 것이라면 그렇게 하지요." 그 인디언은 칼로 메추라기 다리의 줄을 끊고 그 새들을 풀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진 줄 아십니까? 그 메추라기 떼들은 이미 자유의 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늘로 날아가지 않고 아까처럼 계속해서 땅바닥을 빙빙 원을 그리며 돌더랍니다. 결국 그는 메추라기 새들을 억지로 좇아서 날려 보냈다고 합니다.

 

저는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교훈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자유로운 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묶여서 원형을 계속 돌고 있는 어리석은 메추라기와 같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 딸들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특권을 누리지 못하는 메추라기 같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말미암아 죄 용서함 받고 자유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유의 특권을 누리지 못하는 메추라기 같은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31절과 32절을 통해 그 방법을 말씀하십니다. 다같이 31절과 32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우리가 참된 자유를 얻으려면 세 가지 선행 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첫째로, 예수님을 믿고 영접할 때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자유를 누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믿고 따르는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신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참된 자유를 누리려면,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하고 죄 용서 받는 것으로 되지 않습니다.

 

참된 자유를 누리려면,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는 것은 물론이고, 둘째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 안에 거할 때 참된 자유를 맛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당장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를 믿었다고 해서 즉시 참된 자유를 누리며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것만큼 진리를 경험할 수 있고, 내가 진리를 경험하는 것만큼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음식을 보는 것과 음식을 먹는 것이 분명히 구분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우리가 음식을 보고만 있으면 그 음식이 살이 되고 피가 됩니까? 안 됩니다.

 

물론 다이어트 하는 분들은 음식을 먹지 말고 구경만하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경만 하지 않고 음식을 맛있게 먹을 때, 몸 안에서 음식이 소화가 되고, 소화된 음식은 우리 몸에 필요한 피가 되고 살이 됩니다. 이처럼 진리의 말씀을 취하여 우리 심령 속에 거하게 하면 말씀의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주님의 말씀이 내 안에 거하면, 그 말씀이 나의 생각과 말이 되며 그 말씀이 지시하는 대로 행동하게 됩니다. 성경은 우리가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면 참 제자가 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우리를 자유케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셋째로, 참된 자유를 누리려면 성령 충만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317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이 말씀에 의하면,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참된 자유를 주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옛 관습들과 악한 생각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끊지 못하는 악한 습관들을 끊게 해주고 우리를 자유케 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아직까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분들이 있다면 가장 먼저 예수님을 여러분들의 구주로 영접하시고, 이제까지 지었던 모든 죄를 주님께 고백함으로 십자가의 보혈로 깨끗하게 씻음 받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항상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므로 그 말씀이 여러분의 생각과 마음을 지배하게 하여 말씀의 능력으로 참된 자유를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자유를 누리지 못하게 하는 악한 마귀를 성령의 능력으로 결박하고, 성령께서 주시는 참된 자유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끝으로 어느 글에서 본, (Kite) 이야기를 소개하고 말씀을 마칠까 합니다. 한때 높이 날기를 좋아했던 연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 연은 거센 바람을 받아, 하늘 높이 솟아오르면서 큰 기쁨과 행복을 느꼈습니다. 그 연은 불어오는 바람의 느낌과 멀리 내려다보이는 경치를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점점 불만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더 높이날 수 있다면 얼마나 더 좋을까! 지금보다 더 높이 올라갈 수는 없을까!..." 연은 그저 높이 올라가는 것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연은 자기를 붙들고 있는 연줄이 못내 불만스러웠습니다. 그 연줄이 끊어질 수만 있다면 더 높이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아, 하루는 자기에게 매달린 연줄을 당기고 또 당겼습니다. 결국 연줄이 뚝 끊어졌습니다. 그 연은 하늘 높이 떠오르는 동안, 황홀함을 맛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동안이었습니다. 이내 뒤집히더니 빙빙 멋대로 돌다가 곧바로 땅에 곤두박질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밖에서 자유를 찾으려고 합니다. 아니 세상 사람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주님을 믿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조차, 그리스도 밖에서 자유를 찾으려고 합니다. 진리인 말씀의 줄을 벗어나서 돈 줄을 가지고, 권력의 줄을 통해, 명예의 줄을 통해, 자유를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세상의 그 어떠한 줄도 우리에게 참된 자유를 주지 못하지만, 아직도 끊어지지 않고 우리를 붙잡고 있는 주님의 줄이 우리를 자유케 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진정한 진리가 되는 말씀의 줄이 우리들을 자유케 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어떠한 줄보다도 강한 성령의 줄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진정한 자유인 /8:31-36/ 조학환목사

2023-06-07 20:40:57

 

8: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8:33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8: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8:35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8: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1.오직 말씀 안에 참된 자유가 있습니다.

여러분, 세상에 법이나 윤리 규범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누구의 간섭이나 제재도 받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것 마음껏 하면서 자유를 만끽할 수 있을까요? 물론 아닙니다. 그러면 속된 말로 힘센 놈이 장땡인 무법천지가 됩니다. 그래서 자유를 누리기는커녕 마음대로 밖에 돌아다닐 수도 없고, 기껏 수고해봐야 어느 놈 좋은 일 시킬지도 모르고 밤낮으로 문 걸어 잠그고 불안에 떨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 없으면 간섭이나 구속받지 않고 평안하게 마음껏 자유를 누리며 살 것 같지만 천만의 말씀이죠. 그러면 인생이 뭔지,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고, 마귀의 하수인이 되어 죄와 무지와 왜곡된 가치관 속에서 돈과 명예와 권력과 육체의 정욕의 노예로 온갖 욕심과 시기와 질투와 싸움 속에서 여기서도 참된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평안을 누리지 못하고 살다가 영원한 지옥 속에 갈 수 밖에 없는 불쌍한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안타깝게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두말할나위도 없거니와 심지어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을 구속하는 것처럼 여기며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려고 할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 이건 착각도 이만저만한 착각이 아닙니다. 즉 마귀는 어떻게든지 우리를 하나님과 분리시켜 자신의 하수인 노릇하게 만들려고 네 마음대로 하라. 너는 자유인이다. 하나님께 얽매이지 말라. 한번 뿐이 인생 실컷 네 마음대로 즐기라며 충동질하고 있는데 죄와 무지 속에 빠진 인생이 거기에 혹하여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래서 오늘 32절에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여러분 보세요. 진리가 어떻게 한다고 하였습니까? 우리를 속박하고 거추장스럽게 합니까? 물론 아닙니다. 반대로 자유를 준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제 멋대로 사는 것은 자유인이 아니라 죄의 종일 뿐이요 오직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만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되고 영원하고 온전한 생명의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자유를 마음껏 누리는 진정한 자유인이 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결코 마귀의 달콤한 속삭임에 속아 죄와 무지와 한계속에 있는 자신의 생각과 의지와 지식과 경험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언제 어느 때 어떤 상황에서도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주님과 동행함으로써 주님이 주시는 영원하고 온전하고 고귀한 생명의 능력과 기쁨과 자유와 평화와 은혜가 넘치는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 누리는 참되고 온전하고 영원한 자유는 무엇입니까?

2.죄와 사망 권세에서 해방되어 누리는 자유.

여러분, 그렇습니다.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때에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되는데 인간이 누려야 할 자유 중 가장 근본적이고 시급하고 중요한 자유는 죄와 사망과 사탄과 지옥의 권세로부터 해방되어 누리는 자유입니다. 이것만이 우리에게 참되고 영원하고 온전한 생명의 기쁨과 평안과 위로를 주는 참되고 완전하고 영원하고 온전한 자유인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세상의 모든 권세와 명예와 영광을 누리며 아무런 속박이나 구속을 받지 않고 마음껏 먹고 마시고 즐기고 부귀영화를 누린다해도 죄와 사망과 사탄과 지옥의 권세로부터 해방되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물론 여기서도 참된 평강과 위로와 소망과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끔찍한 고통 속에서 영원한 지옥의 고통을 당하게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 세상의 모든 것을 누린다해도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되어야 하는데 그 자유는 물론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당연하지요. 인간과 인간에 속한 모든 것은 다 죄와 악하고 추하고 연약하고 부족하고 한계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제아무리 능력이 있고 지식과 문명과 과학이 눈부시게 발달한다한들 죄와 무지와 사망과 사탄과 지옥의 권세 아래 있는 인간이 어떻게 죄와 무지와 사탄의 권세에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오직 흠없이 티없고 완전하고 영원한 생명과 능력과 진리와 선과 의이신 예수님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니냔 말씀입니다.

바로 그래서 롬8:1,2절에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오직 유일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며 빛이시며 선이시며 의이신 예수님을 통해서만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어 정죄함을 받지 않고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린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여러분, 너무 잘 아시겠지만 돈 명예 권세 세상 영광 이런 것들도 필요는 하겠지만 그러나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참되고 영원한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평안과 자유를 주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영원한 영광의 나라는 물론 지금 여기서도 참 생명과 기쁨과 평안과 자유를 주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오직 예수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으로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감으로써 주님이 주시는 그 참되고 온전한 영원한 생명의 기쁨과 자유와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여기서도 마음껏 누리다가 마침내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복되고 존귀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모든 사람과 환경과 상황으로부터의 자유.

여러분, 그렇습니다. 오로지 예수님을 알고 믿을 때만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영원한 영광의 나라의 은총을 누리는 참된 자유인이 되는데 우리가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주님 안에 있는 영원하고 온전한 생명의 기쁨과 자유와 평안은 단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몸담고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도 누릴 수 있는 기쁨과 은혜와 평안과 자유라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예수님 알고 믿고 주님을 모시고 성령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내 안에 주님이 계시고 성령님이 계시면 당연히 주님안에 있는 생명의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과 사랑과 선과 의가 우리 가운데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지금 여기 사는 동안도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누리는 것이 너무 당연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가 정말 주님을 모시고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누리며 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면 말할 것도 우리는 정말 믿음과 진리와 사랑과 선과 의가운데 살아갈 수 있는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안 그래요?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좋아하고 하고 싶은 것들은 우리 안에 들어 있는 것들로 인하여 결정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내 안에 주님이 계시고 그래서 주님이 주시는 생명과 진리와 선과 의와 기쁨과 평안이 내안에 심어져 있으면 당연히 그런 것들을 누리는 것은 물론 당연히 저절로 우리 안에 있는 생명과 진리와 사랑과 선과 의를 따라 주님과 동행하게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것도 누가 뭐 시켜서 그러는 것도 아니요,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의무감에서 하는 것도 아니라 그게 좋고 하고 싶고 기쁘고 행복해서 하게 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34절에서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무슨 뜻입니까? 세상 사람들은 물론 심지어 믿는 사람들조차도 자기 생각과 의지를 따라 사는 것이 자유라고 착각하며 살 때가 많은데 그건 자유인이 아니라 죄의 종으로서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죄와 무지와 한계와 허물과 연약함과 악함 속에 있는 인생이 자기마음대로 살아가면 결국은 죄와 무지와 악함과 허물과 추함 속에 살아가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죄의 종노릇하는 삶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이미 말씀 드린대로 예수님 믿고 거듭나서 예수님과 성령님을 심령에 모시고 살면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과 능력과 은혜와 기쁨과 평안과 사랑과 선과 의가 내 안에 있으면 당연히 믿음과 생명과 사랑과 진리와 선과 의와 경건을 따라 살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죄의 종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의의 종이요, 그렇게 생명과 진리와 선과 의를 따라 살면 당연히 여기서도 생명의 능력과 은혜와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다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 너무 당연하지 않느냐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정 주님을 모시고 산다면 이제는 정말 죄와 무지가운데서 죄의 종노릇하던 삶을 벗어던지고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의 은총과 기쁨과 평안을 누리는 것은 물론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믿음과 선과 진리와 사랑과 의를 따라 살아갈 수 있는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 그것도 누가 강요해서도 아니요, 억지로 마지못해 의무감에서 하는 것도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계신 성령의 역사하심을 따라 감사와 기쁨으로 정말 하고 싶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 너무 좋고 행복해서 오직 주님의 말씀,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 따라 살아갈 수 있는 이 자유를 누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분명 돈과 세상 즐거움과 세상 영광을 따라 사는 것보다 믿음으로 선과 진리와 사랑과 의를 따라 사는 것이 천만배 더 기쁘고 즐겁고 행복해서 말씀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예배드리고 말씀 듣고 기도하고 찬송하는 게 너무 좋아 교회에 모이는 시간에는 열일 젖혀 놓고 교회로 달려오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나 사람을 섬기고 봉사하고 사랑하는 것이 너무너무 좋고 하고 싶고 행복해서 섬기고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싫어하시고 미워하시고 그래서 하지 말라고 하신 더럽고 추하고 속되고 악한 일들은 누가 하지 말라고 강요해서도 아니요, 억지로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보기도 싫고 하기도 싫고 혐오스러워 근처에 얼씬 거리기도 싫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그런 사람들은 당연히 시기 질투 불평 불만 원망 미움 한탄 절망에서도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우리가운데 주님이 계시고 그래서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기쁨과 자유와 평안과 사랑과 은혜가 넘치고 그래서 예배드리고 말씀 듣고 기도하고 찬송하고 사랑하고 봉사하고 충성하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게 사는 것이 너무 좋고 행복하고 하나님이 싫어하시고 미워하시고 하지 말라고 하신 것들은 보기도 싫고 혐오스러운데 시기 질투 불평불만 원망 미움 비난 정죄 한탄 절망과 같은 것들이 어떻게 나올 수 있겠습니까?

또 그뿐이 아닙니다. 여러분, 진정 예수님을 심령에 모신 사람은 모든 사람과 상황과 환경과 조건에서도 자유합니다. 안 그래요? 우리는 예수님 만나서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의 귀한 자녀가 되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차지하게 된 사람들입니다. 또한 이 땅에서 분명히 성령님의 능력과 인도하심과 지혜 가운데 모든 여건에서도 분명히 감사하며 기뻐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좀 못나면 어떻고, 지위나 물질이나 지식이나 영광이대단하지 않으면 무슨 대수겠으며,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면 어떻겠으며, 무슨 큰 문화나 교육이나 복지 혜택을 좀 못 누리면 어떻습니까? 정말 안 그래요? 우리는 그것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것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까짓 세상의 것 다 주어도 살 수 없는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연약함이나 작음이나 열악한 환경과 상황과 조건들이 뭘 그렇게 대단한 것이라고 거기에 얽매어 근심 걱정 염려 시기 질투 불평 불만 원망하며 더 가지려고 아우성을 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런 하잘 것 없는 것들에 인생을 걸고 지지고 볶고 싸우고 할 이유가 뭐냔 말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시기 질투 불평 불만 원망 미움 비난 정죄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사탄의 역사입니다. 너 때문에 누구 때문에 교회 때문에 상황 때문에 환경 때문에 조건 때문에 하면서 불평 불만 원망 비난 정죄 분노하는 것은 결코 믿음의 사람들이 할 일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시37:8절에서는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고 하셨고, 고전10:10절에서는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고 하셨으며, 5:9절에서는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고 하셨고, 2:1절에서는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진정한 자유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 예수님 알고 믿고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에서 해방된 사람으로 이제는 정말 죄의 종노릇하던 삶에서 해방되어 주님이 주시는 참된 생명의 기쁨과 평안과 자유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진정 주님이 주시는 참된 생명의 기쁨과 평안과 자유를 누리는 사람이라면 누구 때문에 교회 때문에 하면서 시기 질투 미움 불평 불만 원망 비난 정죄 하지 말고 그런 것들로부터도 자유하시기 바랍니다.

정말 그런 것들로부터 자유하다면 상황 때문에 환경 때문에 주님을 가까이 하며 섬기는 일에 참여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지 말고 말씀 듣고 기도하고 찬송하고 사랑하고 섬기고 봉사하고 충성하는 일이 하고 싶고 좋고 행복해서 열일 젖혀놓고 할 수 있는 참 자유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정 우리 모두 함께 주님이 주시는 그 놀라우신 생명의 능력과 은혜와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과 자유를 마음껏 누리며 주님의 향내 나는 삶이 되고 주께 영광을 돌리며 주님 나라 세워가는 복되 존귀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진리로 자유를 /8:30-36/ 박형근목사

2023-03-04 15:27:15

 

오늘은 대림절 첫째 주일로 예배드립니다. 대강절도 같은 말입니다. 저 초에 불을 하나하나 붙여서 다섯이 다 켜지는 날이 성탄절인데, 올해는 마침 주일입니다. 대림절을 지나면서,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어둔 세상에 빛으로 오신 아기예수의 탄생을 기다리며, 우리자신을 돌아보는 겁니다. 믿는 성도로서 예수님께 부끄러움이 없는지 살피며, 잘못은 고치고 부족한 것을 채우는 기간이지요. 또 하나는, 다시 오실 심판주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두 가지라 말씀드렸지만, 자신을 잘 돌아보며 잘못이나 부족한 것을 고치면, 더 기쁘게 성탄절을 맞을 것이고, 예수님이 언제 오시더라도 당황치 않고주님, 어서 오세요.’맞을 수 있으니, 하나입니다. 오늘말씀 앞에, 예수님께서 아버지하나님과 함께 하신다하시니, 많은 사람이 믿었다 하는데, 오늘 이 땅에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과 같다봅니다. 예수님은 당시 믿는 유대인을 향해, 동시에 오늘 교인들, 곧 우리들을 향해 말씀하십니다.‘믿는 것이 전부가 아니니, 바로 믿어야한다.’

 

그 말씀이 31,32절에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참 귀하고 은혜로운 말씀이지요.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예수말씀에 거해라, 제자가 되라, 진리를 알라, 자유로이 살라.’연결 지으면, 말씀에 거해야 참으로 예수제자가 될 수 있고, 진리를 알게 된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니, 자유롭게 살아라. 이렇게 사는 것이 예수님의 뜻이요, 성도가 갈 길이요, 예수 믿고 누릴 복입니다.

 

예수님말씀에 거하는 것을 잘 알려주는 요 15:7을 함께 읽습니다.‘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교회 다니는 이들 중에, 내 소원하는 대로 다 이뤄지면 얼마나 좋을까, 왜 주님은 내 기도를 안 들어 주시는 거야? 그런 이에게, 예수님이 무엇을 하라 하십니까?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곧 성경말씀이 우리 안에 있어서 주님이 내 안에 거하면, 무엇을 구하든지 이룬다, 하시지요.

 

왜 그럴까요? 그래야 주님의 뜻에 합당한 것을 구할 수 있으니, 주님께서 기쁘게 들어주십니다.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려면, 평소에 말씀에 마음이 열려야, 마음이 끌려서 더 배우려하고, 말씀을 즐거워합니다. 119:103절에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그러면 시 1:2,3처럼,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게 되니, 모든 일이 다 형통합니다. 성경말씀을 즐거워하면, 모든 것이 형통합니다.

 

주의 말씀에 거하면, 구하는 것을 이루는데, 그를 위해선 여러분의 노력과 함께, 말씀 전하는 자의 역할도 중요하지요. 어느 교회에 출석하는 인기 연극배우가, 하루는 목사님께 초대권을 주면서, 출연하는 연극을 보러 오랍니다. 목사님이 가서 보며, 연극배우의 훌륭한 연기에 모든 관중이 매혹됨에 탄복했습니다. 연극이 끝난 후, 배우를 만나 칭찬하며오늘밤 연기를 보면서 느낀 점이 많습니다. 목사는 생명의 말씀을 전해도 조는 사람이 많은데, 연극을 구경하는 사람 중에 조는 이가 없네요.’

 

배우는목사님은 그렇지 않지만, 많은 목사들이 진리를 거짓처럼 힘없이 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듣는 이가 졸지요. 배우들은 거짓을 힘을 다해 진리처럼 전하니 졸지 않습니다.’설교 때 여러분이 존다면, 90프로 제 책임이지요. 설교 중에 앞자리에 앉은 권사님이 계속 졸자, 목사님이 기분이 상해권사님, 어찌 그리 졸고 계십니까?’권사님이 속으로 궁실거리길목사님이 졸게 해놓고, 왜 제게 역정을 내십니까?’주의 말씀에 잘 거하려면, 여러분과 제가 힘을 합해야합니다.

 

오늘말씀에 돌아가, 말씀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게 됩니다. 여기 진리는, 복음이자, 예수님입니다.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알면, 복음인, 예수를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음을 알게 되지요. 그러면, 참 자유를 누립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이리 말씀하시자, 듣던 유대인들이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는데 어떻게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우리가 지금도 자유를 잘 누리는데, 자유를 누리라는 엉뚱한 말을 하느냐? 예수님께 항의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그들 말은 틀렸지요. 애굽의 종살이를 사백 년 이상했고,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도, 여러 차례 주위의 강한 부족에 종살이를 했습니다. 그 후,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망해 종이 되었고, 남 유대는 바벨론에 망해 종으로 끌려갔다가 돌아왔지요. 그들이 예수님께 말할 때는, 로마의 식민지로 종살이하고 있습니다.‘남의 종이 된 적이 없다.’는 말은 틀렸으나, 그들이 이리 말하는 것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어떤 경우에도 여호와신앙을 굳게 지켜왔다는 겁니다.

 

몸은 비록 남의 종이지만, 믿음을 지키며 아브라함의 자손답게 살았으니 자유한 데, 어찌 우리에게 자유하라 하느냐? 그런 이들에게 예수님은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여호와 믿음을 잘 지키며 자유하다고 하나, 너희는 죄의 종이다. 오늘 우리에게자유 대한민국에서 자유로이 신앙생활을 하며, 스스로 자유롭다고 생각하느냐? 죄를 범하면 죄의 종이다.’하신다면, 당시, 예수님말씀을 듣던 유대인들처럼, 우리도 듣기 거북하지요.

 

나는 교통법규 하나 어기지 않을 정도로 법 없이도 살아왔는데, 왜 죄인이라 합니까? 교회에서 죄란 말을 안 하면 안 되나요?’죄를 잘 이해하게 하는 롬 1:28-31을 읽습니다. 좀 길지만, 우리가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 싫어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냥 내버려두심으로 행하는 것이 죄입니다. 함께 읽습니다.‘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읽은 중에, 살인, 사기, 불의 등은 법의 처벌을 받지만, 탐욕, 수군수군, 자랑, 무정 등은 법의 처벌은 받지 않지요. 탐욕에 징역 1년은 아니지만,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서 생긴 것이니, 우리마음이 중요함을 알게 합니다.

 

어떤 사람이, 꿈에 죽어서 저 세상에 갔습니다. 저 세상에 들어서니, 천사가 그를 맞으며 한 책을 보여줍니다.‘무슨 책입니까?’‘그대의 삶을 기록한 것이지.’책의 첫 장을 넘기니 글이 적혀 있습니다.‘이게 무엇입니까?’‘그대가 지은 악한 행동들이지. 참 많구나.’다음 장을 넘기니, 거기엔 아까보다 더 많은 글이 쓰였습니다.‘이건, 그대 입에서 나온 악한 말들이야. 악한 행동보다 많지? 사람은 누구나 행동보다 말이 많기 마련이야.’

 

그 사람은 책을 보기에 두려워졌습니다. 다음 장을 넘기니, 거기엔 더 촘촘하게 기록되었습니다.‘이건 무엇입니까?’‘이건 그대 머릿속에 있던 악한 생각이야. 엄청나구먼. 사람이란 말하고 행동하는 것보다 생각하는 게 많으니까.’더 넘기기 싫어서다음 장도 넘겨야 됩니까?’천사가 다음 장을 넘기자, 마치 어두운 밤처럼 글씨로 온통 새까맣습니다.‘이건 그대의 악한 마음일세. 검은 마음에서 그 모든 생각이며 말이며 행동이 나오지.’

 

이 말씀을 두고, 과연 천국에 가면 이런 일이 있을까 하는 생각보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 싫어하면, 생각과 말과 행동이 잘못 될 수 있음을 마음에 담았으면 합니다. 마음이 어두우면, 나오는 생각, , 행동이 밝을 수가 없지요. 어제 역대 최다인 190만 명이 촛불을 든 것은, 나라의 어두움을 밝히자는 것 아닙니까? 바라기는, 박 근혜, 최 순실 씨가 저지른 어두움만 밝힐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마음에 어두움이 있음을 깨닫고, 그 어둠을 밝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어느 신문에, 고 김 영삼 대통령과 박 근혜 대통령의 사진을 함께 실으며, 어찌 1997년과 2016, 20년이 지나도 이리 같을 수 있느냐합니다. 임기 말에 비슷한 시련을 겪는다는 건데, 사람들 마음이 어두우니, 사회가 그렇습니다. 정치지도자들이 이제부터라도, 박대통령 탄핵만 애쓰지 말고, 우리 모두의 문제임을 알고, 앞으로 그런 일이 다시는 없도록 해결책을 찾았으면 합니다. 어떻게 해야, 2의 최 순실이 나오지 않게 할까, 머리를 맞대야합니다.

 

로마서말씀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했기 때문에 그런 어두운 것이 함께 합니다. 이런 일들을 죄라 할 때나는 죄가 없어할 사람이 있을까요? 내가 그런 잘못을 범하는 것을 안다면, 죄의 종살이를 하고 있는 것인데, 자유롭게 하실 분은 오직 예수님입니다. 36절에오직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그들이 지킴으로 스스로 자유하다 여겼으나, 혈통이나 율법으로는 자유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셨지요. 우리가 교회를 다닌다고 매사에 자유할 수 없습니다. 믿으며 먼저 넘어야할 걸림돌이 하나 있습니다. 교회 다니며, 주일예배에 꼭 참석하며, 정성껏 헌금하고, 말씀을 잘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 틀린 말은 아니나, 그것이 우리를 구속하면 자유할 수 없지요. 억지로 신앙생활을 하려하면, 자유는커녕 더 힘듭니다. 예수 믿어 구원받았으니, 은혜 감사하며 즐거이 예배에 나오고, 정성껏 헌금하고, 성도답게 삽니다.

 

예수님은 얽어매는 분이 아니요, 우리가 자유롭게 즐거이 신앙생활하기를 원하십니다. 가정에 비유하면, 자녀가 부모 앞에 오면 주눅 들어 바짝 긴장하는 것이 좋습니까? 예의를 지키되 밝고 즐거워하는 것이 좋습니까? 이제 믿는 이가 누릴 자유에 대해 살핍니다. 우리가 지금 얽매인 것은 무엇일까요? 진리가 주는 자유는 어떤 것일까요? 먼저, 두려움에서 자유입니다. 두려움은 자신이 혼자라 생각할 때 더 크게 몰려오지요. 주위에 사람들이 많으나, 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이는 나뿐이라 생각들 합니다.

 

사회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변화는 빠르고, 불확실한 것이 많으니, 혼자서는 더 두려울 수밖에 없지요. 주위에 외로움, 두려움, 거기서 오는 우울증에 힘들어 하는 이들 많습니다. 성경은, 거센 풍랑에 휘몰린 작은 배와 같으나, 아무리 풍랑이 거세도 그 배에 예수님을 모시면 평안한 항해를 할 수 있다합니다.‘강하고 담대하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성도는, 주님이 함께 하심을 믿으면, 혼자임을 떨치고 두려움에서 자유합니다. 아울러, 주위에 외로워 두려워하는 이들과 함께 하며 두려움을 떨쳐줍니다.

 

둘째로, 자기 자신에게서 자유 할 수 있습니다. 조금만 잘못하면 나 중심이 되고, 때로 나약함에 빠지고 주위유혹에 넘어갑니다. 내가 극복해야 할 큰 적은, 나 자신이라 하지요. 내 의지, 내 힘으로 어찌 할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말씀에 거하면, 인간의 의지로 안 되던 것이 술술 풀립니다. 길이 보이고, 치유가 이뤄지지요. 어느 술고래가 교회에 다니다가 간증하기를, 설교를 잘 알아듣지 못하는 데 듣다가 보니, 술맛이 떨어졌다합니다. 자신은 할 수 없으나, 주님이 하십니다.

 

말씀이 내게 자유를 주면, 나를 이기게 되고, 이기면 나는 없어집니다. 대신에, 내 안에 그리스도가 있고, 나는 자유하게 되지요. 성경은, 믿는 성도는 옛 사람을 주님과 함께 못 박고, 새 사람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합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우리를 이리 변화시킵니다. 육신을 따르며 세상을 좇는 옛사람에겐 자유가 없었지만, 새 사람은 영의 사람으로 영생의 소망으로 살기에 매사에 자유롭습니다. 믿는 이는 영적 새 사람임을 알고, 그리 살려 힘쓸 때, 자신에게서 자유할 수 있습니다.

 

셋째는, 다른 사람에게서 자유하게 되지요. 사람이 세상에 살려면 여러 가지로 남이 나에게 뭐라 하나 신경을 쓰며 눈치를 봅니다. 그러다 보면 때로 허세도 부리고, 자랑도 하지요. 시기도 하고 질투도 합니다. 고등학교 다닐 때 어렵게 살던 친구가, 지금은 나보 잘 사는 것을 보면 속이 불편합니다. 대개 그렇지요. 주님말씀 안에 거하면, 남이 낫다고 부러워하기 전에, 그의 약함을 보고 불쌍히 여깁니다. 전에는 남들의 좋은 점만 보여 마음이 편치 않았는데, 믿음이 자라가니 남의 약하고 힘든 것이 눈에 들어와 돕고 싶습니다. 다른 사람에게서 자유한 거지요.

 

넷째로, 죄로부터 자유지요. 죄를 지으면 죄의 가책에 빠지고 매여서, 또 죄를 짓는 반복을 합니다. 죄에서 벗어나지 못해 고통을 당합니다. 아들이 우연히 아버지가 유리단지에 동전을 모으는 걸 보았습니다. 아들은 동전을 슬쩍해서 과자를 사먹으려고, 단지에 손을 넣고 동전을 움켜쥐었습니다. 손을 빼려니 빠지지 않습니다. 아이는 겁이나 울며 소리칩니다. 가족들이 와서 힘을 합해 빼려 해도 빠지질 않고, 아들은 하얗게 질립니다. 아버지가 언뜻 생각나는 게 있어너 손에 뭘 잡고 있냐?’

 

동전을 쥐고 있어요.’‘그걸 놓아라.’동전을 놓고 나자, 손이 쉽게 빠졌습니다. 우리도 무엇인가 집착해서, 손을 놓지 않을 때 점점 더 거기에 매이고, 자칫하면 죄를 짓고 고통당하지요. 그때 예수님은 이 아버지처럼네 손에 잡은 것을 놓아라.’순종하면 자유를 누립니다. 다섯째는 사망에서 자유입니다. 죽어 봤자 저 좋은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니, 죽음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문제는, 천국이 있음을 믿지 못하거나, 내가 천국 감에 확신이 없는 건데, 말씀에 거하며 믿으면, 죽음에서 자유합니다.

 

오늘부터 시작하는 대림절, 오늘말씀을 하나하나 이뤄갔으면 합니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자녀로서 하나님은 우리기도를 들어주시길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할 일은, 성경말씀을 읽기를 즐기며 말씀대로 살기를 힘쓰며 구하면, 내 기도가 이뤄집니다. 둘째로, 신앙생활을 억지로, 겨우 하는 것을 주님은 원치 않으십니다. 십자가은혜를 바로 알 때, 교회 나와 예배드리는 것이 즐겁고, 언제나 성도답게 사는 것에 감사합니다. 기쁘고 즐거운 신앙생활도 우리가 누릴 참 자유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겪는 속박인, 두려움, 자기 자신, 다른 사람, , 죽음에 대해 주님과 함께 하며, 말씀에 거하면 다 자유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바라시는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여러분 모두 이리 살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정말 자유합니까 /8:30-36/ 김형익 목사

2021-05-07 08:06:34

 

1. 자유에 대한 왜곡된 갈망 그리고 오해

오늘 주님의 잘 알려진 말씀을 우리가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유에 대한 일반적인 오해부터 다루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A. “예수를 믿는 것은 속박당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예수를 믿는 것은 속박당하는 것이다라는 오해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합니까? 이런 오해에 머무르는 한, 아무도 예수를 믿겠다고 생각할 사람은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속박을 당하고 계시며 그것 때문에 많이 불편하십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 여러분의 대답이 무엇인지 저는 매우 궁금합니다. 사람이 처음에 범죄할 때부터 거기에는 자유의 정의에 대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자유에 대한 왜곡된 갈망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권위 아래서의 삶을 거부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왜곡된 자유에 대한 갈망은 결국 인간을 죄의 속박 아래로 데리고 갔다는 것이 성경의 설명입니다. 왜곡된 자유에 대한 갈망은 물고기가 물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는 갈망과 비슷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B. “나는 자유하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많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들이 자유하다고 스스로 느끼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야말로 종교에 구속된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파우스트는 악마에게 영혼을 팖으로써 더 많은 지식을 얻고자 했습니다. 악마는 네 영혼을 팔면 나는 네가 원하는 것을 주고 너의 종이 되겠다고 하지만, 결국 종이 되는 것은 파우스트입니다.

 

마귀가 교활해서 인간의 자존심을 한껏 세워줌으로써 그를 완전히 지배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마귀의 종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결코 자유하다고 느끼게 만드는 것입니다. 죄의 영향력 아래서 마귀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사람들은 자신은 절대 자유하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이것은 착각입니다.

 

2. 당신은 정말 자유한가?

그렇다면 이런 생각들이 왜곡된 자유에 대한 것이며, 오해들이라는 전제에서 다시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정말 자유하십니까? 만일, 우리가 위의 왜곡과 오해 속에 머물러 있다면 우리는 결코 주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신 것의 진의를 깨달을 수 없고 경험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직 저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자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반대로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속박하고 있는 죄의 문제들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십니까?

 

아마, 두 가지 정도로 여러분을 속박하고 있는 것을 생각할 수 있을텐데, 첫째는 자아의 문제입니다. 이미 인간이 타락하면서 하나님께서 차지하셔야 하는 자리에 우리는 자아라는 우상을 놓고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아를 기쁘게 하고, 자아를 숭배하며, 자아를 높이고 살아갑니다. 모든 인간이 다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먼저 묻는 것은 여러분은 바로 이 자아를 높이고 자아를 만족시키고 자아를 숭배하는 일에서 자유로우신가 묻는 것입니다.

 

두번째로는 세상의 존재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세상은 정말 거대한 존재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있을 것 같고, 우리의 삶을 윤택하고 괜찮게 만들어줄 수 있는 수많은 것들이 이 세상 속에는 존재합니다. 세상에 있는 것들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그리고 이생의 자랑이라고 사도 요한은 썼습니다(요일 2:13). 여러분은 이런 의미의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우십니까? 조금의 흔들림도 없으십니까?

 

3. 신앙고백은 있지만,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지 않는 자들에게

오늘 주님의 말씀은 약간 당황스러운 면이 없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30절에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고 했는데, 주님께서는 지금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말씀하시고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31).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저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었지만, 아직 참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는 말입니까? 이 말은 신자가 올라가야할 다음 단계는 제자라는 것을 가르쳐줍니까? 아닙니다. 주님께서 지금 참 제자가 되고라고 하실 때, 의미하신 것은 저들이 믿었다고는 하나 아직은 제대로 믿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원하는 믿음은 사람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만듭니다. 주님의 말씀에 의도적으로 복종하지 않고 또 그럴 의지가 없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참된 제자입니다.

 

주님께서 지금 말씀하시는 것은 신앙고백은 있지만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지 않는 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 믿는다고 말은 하지만, 그 믿음이 말에 지나지 않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신앙고백은 있지만,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지 않음으로 참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 사람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A. “내 말에 거하는 참 제자가 되라(31).”

주님의 이 말씀은 단도직입적으로 너희는 내 제자가 아니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믿는 자들에게 말입니다. 참되게 믿는 모든 성도들은 다 예수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자들입니다. 여기서 거한다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그 말씀에 복종하여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얼마나 도전적인 말씀인지 모릅니다. ‘너희가 나를 믿는다면 내 말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내 말을 따를 생각이 없고, 따르지 않을 것이라면 너희는 내 제자도, 신자도 아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들이 바로 조금 있으면 예수님을 돌로 쳐 죽이려고 한 그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성경이 놓치지 않고 보여준다는 것은 놀랍습니다(59). 끝을 보아야 안다는 말을 합니다마는, 주님께서는 이미 이들을 뚫어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오늘 이 상황을 제자들이 보았을 때에는 매우 고무적인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30).

 

오늘날의 교회는 이런 상황 가운데 이미 너무나 오랫동안 들어가버렸고 계속해서 이런 길로 행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속지 않으십니다. , 주님께서 여기서 자유에 대해서 말씀하시기 직전, 자유에 대해서 주시는 한 교훈은 자유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아래로 들어와 거기에 순종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유란 법으로부터의 도피라고 생각하던 18세기 영국에서 백작 윌리엄 머레이는 자유란 법치 정부 아래 사는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것은 비록 정치적 해석이긴 하지만 영적으로도 뛰어난 통찰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은 사실 자유에 대한 왜곡된 갈망을 가지고 죄를 지은 후에, 그가 얻고자 했던 자유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낙원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그 잃어버린 자유를 다시 찾는 것은 다시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이고, 그분의 통치 아래 들어오는 것이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가르치는 참 자유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독립선언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 아래로 들어오는 항복 선언 혹은 복종 선언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믿으신다면 주님께서 하신 이 말씀도 믿으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신앙고백만으로는 설 수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셔야 주님의 참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B. “그때 진리를 알게 될 것이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32).”

주님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32절은 조건적입니다. “만일 너희가 내 말에 거하여 나의 참 제자가 된다면이라는 조건을 달고 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알게 될 것이고 그 알게 된 진리는 너희를 자유하게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사실상, 이런 단도직입적인 선언입니다. “너희는 자유인이 아니라 종이다!” 사실 예수님을 믿었다고 한 유대인들이 주님의 말씀을 들은 후에 반응한 것을 보면 그들이 이것만은 제대로 알아들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3절입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놀라운 자기 부인입니다. 사람이 자유라는 문제가 나오면 여기서는 자존심이 발동하는 모양입니다. 그들은 주전 586년 이래로 잠깐을 제외하고는 계속해서 자유국가와 민족이 아니라 제국들의 통치 아래 복종해야 하는 나라의 국민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께서 너희는 자유인이 아니라 종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알아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런 정치적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 물론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34절에 보면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니라고 대답하심으로써 영적인 의미에서 말씀하신 것임을 분명히 하십니다. 죄의 종이라는 말을 우리는 이렇게 이해해야 합니다.

 

성경은 타락한 인간은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다고 가르칩니다.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다는 말은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자유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을 죄의 종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만, 앞서 말씀드린대로 그들 자신이 죄의 주인이라고, 마귀의 주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마귀가 자기의 종들을 다스리는 방식은 종종 사람들이 마귀의 주인이라고 착각하고 살게 하는 방식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자유라는 것은 원하는대로 사는 자유가 아니라, 타락한 육신의 통제(압제)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는 자유인 것입니다. 인간은 이렇게 예수님께서 주시는 자유를 얻게 될 때 비로소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자유를 경험하게 됩니다.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고 그 말씀에 복종하는 삶을 삶으로써 주님의 참 제자가 되면, 그들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 진리는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깨달음을 포함합니다. 그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진정한 깨달음에 도달하게 되는 것은 주님의 말씀 안에 살 때, 그 말씀에 순종할 때라는 사실을 생각하십시오. 진리에 순종해야만 우리는 그 진리를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 진리는 머릿속의 진리가 아니라, 나의 전존재를 자유하게 하는 놀라운 능력이라는 사실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전에 나를 속박하고 있는 것인줄도 모르고 살아왔었는데, 나를 속박해왔던 나의 옛 주인이 누구인지를 발견하게 되고 거기서 벗어나게 되어 새로운 주인인 하나님의 통치 아래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자유라고 말합니다.

 

4. 우리를 자유케 하는 진리

이제 저는 여러분에게 조금 더 깊이 들어가서 질문하고 싶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우리를 자유하게 하는 이 진리를 경험하셨습니까? 여러분께서는 예수님을 믿을 때 이런 자유함을 느끼셨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은 후에, 이런 자유함이 무엇인지를 누리고 살아가십니까? 좀 더 조심스럽게 묻는다면, 여러분께서는 여러분을 속박하고 있는 죄의 권세로부터 자유함을 얻으셨습니까?

 

A. 자아냐, 그리스도냐?

예수님을 믿고 복음의 진리를 알게 될 때,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가장 중대한 변화는 중심의 변화입니다. 중심에 자아가 있었는데, 자아는 주변으로 내려오고 그 중심에 그리스도가 계시게 된 것입니다. 그 전에는 자아가 가장 중요했는데, 이제는 그리스도가 가장 중요합니다. 자아를 높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내 자아가 인정을 받는 것에 대한 이전의 관심이 다 사그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속박하고 있던 주인으로부터 우리가 자유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그냥 일어나지 않습니다.

 

새 주인을 섬기게 될 때에만, 참 주인을 섬기게 될 때 거짓 주인이 물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삶의 중심에 들어오시지 않으신다면 여러분은 여전히 자아라는 우상을 숭배하고 높이고 기쁘게 하는, 자아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아직도 진리를 깨닫지 못하신 것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여러분은 신앙고백은 있을지 몰라도 아직도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고 있지 않으며 주님의 참 제자가 아니라고 말씀드릴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바로 불신자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참된 신자는 자아를 섬기지 않습니다. 주님의 참 제자는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를 알았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게 된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게 된 사람을 성경은 신자, 성도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더 이상 자아(자기)를 위해서 살거나 죽을 수 없게 된 사람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구원의 은혜가 무엇인지에 대한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B. 인생이냐, 영생이냐? (지금 대 영원)

인생이냐, 영생이냐 하는 문제도 생각해보십시오. 진리를 깨달은 사람에게는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영원에 관한 지평이 펼쳐지기 시작합니다. 그전에는, 죄의 종으로 살아가던 시절에는 인생이 다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예수님을 믿게 되자, 영생이 보입니다.

 

모든 것을 영원의 관점에서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그러니 모든 것이 다르게 보입니다.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거두기 위해서 살아가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인생의 승패가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압니다. 결국 인생이 잘 살았는지의 여부는 하나님 앞에 설 때 하나님께서 가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는 압니다. 인생에 모든 것을 걸지 않습니다. 오히려 영원에 모든 것을 겁니다.

 

그것이 바울 사도가 고린도후서 5장에서 보여주는 삶의 태도입니다. 그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을 바라보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는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 목숨을 걸고 살아보십시오. 때로는 비굴함을 견뎌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을 바라보는 사람은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그러니 여기서도 결론은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원하노라하는 것입니다(고후 5:9).

 

C. 육신이냐, 영혼이냐?

육신이냐, 영혼이냐 하는 구분은 플라톤적 사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먹고 사는 문제는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육신에 좋은 것이 언제나 영혼에 좋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예수님의 참 제자는 압니다. 그래서 이전에는 육신에 좋으면 언제나 좋은 것이었지만, 이제는 영혼에 유익한 것인지를 묻기 시작합니다. 영혼에 유익하지 않다면 육신에 유익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환영하지 않습니다.

 

D. 세상의 가치냐, 하늘의 가치냐?

결국 이 모든 것들은 세상의 가치에 헌신하고 사는가, 하늘의 가치에 헌신하여 사는가 하는 문제로 귀착됩니다. 세상에 있는 가치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그리고 이생의 자랑입니다. 육신의 정욕은 육신의 필요에 종속되어 살아가는 삶이며 가령 식욕이나 성욕과 같은 감각적 만족만을 추구하는 태도입니다.

 

안목의 정욕은 잘못된 가치관에 따라 사는 것, 겉으로 드러나는 외모로 판단하고 살아가는 태도입니다. 여기에는 허영의 문제가 포함됩니다. , , , 소유 기타 이런 눈에 치중하고 눈의 자극을 만족시키는 삶입니다. 자기의 외모가 다른 사람에게 주는 인상에 치중하는 삶입니다. 이생의 자랑은 자기 영광의 추구입니다. 이것은 가장 위험하고 악한 죄 즉 교만입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교묘하고 영적이어서 자기 자랑거리들, 출신, 학력, 직업이나 교양, 가문, 근면이나 성공, 명성, 사회적 지위, 영향력, 유명한 사람……이런 것들에 의해서 생각이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크심을 알게 되었다면, 그가 참으로 진리를 알게 되었다면 그는 이런 것들을 배설물과 같이 여기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자랑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 그의 가장 큰 기쁨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참 자유를 얻은 신자에게서 나타나는 자유의 태도이며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그의 큰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5. 그리스도: 죄의 종을 자유케 하시는 아들(36)

자아와 세상의 것들로부터의 자유함이 정말 가능한 것일까요? 혹시 여러분 가운데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그냥 하는 소리라고 여기시지는 않습니까? 잘 보신 겁니다. 이런 일은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어떤 방법으로도 인간은 이렇게 개조될 수 없습니다. 그런 자유함이 인간에게 주어진다면 그것은 실로 주님께서 하신 일일 것입니다. 그것은 기적입니다. 은혜의 기적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매우 담대하게 그리고 확신있게,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주님은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우리를 죄의 종으로부터 건져주실 수 있는 분은 주님 밖에 없습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죄 가운데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가치들을 그 발밑에 내려놓게 되는 일이, 이 세상의 모든 가치들의 종이 되어살다가 그것의 주인이 되어 사는 일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일어납니다. 돈의 종이 하나님의 종이 되는 순간에 그에게서 일어나는 일은 돈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가치, 이전에는 나를 주장하고 나를 지배하던 모든 가치가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주님의 참 제자가 된 사람, 그래서 진리를 알게 된 사람을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합니다. 이제 그가 섬기는 주인은 오직 한 분 하나님 뿐입니다. 이 일이 모든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 일이 여러분의 삶 속에서 일어났습니까? 이것이 오늘 본문을 통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시는 것입니다.

 

6. 신앙을 고백하는 당신은 정말 자유한가?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죄의 종입니까, 하나님의 종입니까?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자유케 하시는 은혜를 입으셨습니까? 이것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구체적으로 묻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시는 참된 주님의 제자입니까? 여러분은 그 진리를 아십니까?

 

여러분은 자아에 묶여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고 그리스도를 더욱 아는 일에 더 부심하며 사십니까?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발견한 까닭에 이 세상이 작게 보입니까? 여러분의 영혼의 유익을 위해서 염려하십니까? 아니면 여러분은 아직도 신앙은 고백하지만, 여전히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지 않던 유대인들과 같은 자리에 계신 것은 아닙니까? 한 가지를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죄의 종은 죄 가운데서 살다가 죄 가운데서 죽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됩니다. 그러나 한 가지 길이 있다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자유케 하시는 아들에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나아오는 자를 거절하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신 그분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당신은 자유인인가? /8:31-38/ 김기석목사

2015-07-07 15:47:32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나의 말에 머물러 있으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들이다. 그리고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그들은 예수께 말하였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아무에게도 종노릇한 일이 없는데, 당신은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였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죄를 짓는 사람은 다 죄의 종이다.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물러 있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제까지나 머물러 있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참으로 자유롭게 될 것이다. 나는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안다. 그런데 너희는 나를 죽이려고 한다.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의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한다.”]

 

 

누가 제자인가?

 

어느 날 공자의 제자 자하가 스승에게 묻습니다.

안회는 사람됨이 어떻습니까?” “인의(仁義, 어짊과 바름)는 나보다 낫지.” “자공은 어떻습니까?”

말재주는 내가 따라갈 수가 없을 정도야.” “그럼 자로는요?” “용기에는 내가 엄두도 못내지.”

 

자장은요?” “장중함(점잖음)은 나보다 나아.” 이쯤 되자 자하는 궁금증을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벌떡 일어나며 묻습니다.

그들이 다 선생님보다 나은데 왜 선생님께 머리를 조아리고 스승으로 삼으며 배우고 싶어 하지요?” 공자는 조급한 제자를 안돈시켜 자리에 앉게 한 후 말합니다.

 

안회는 인의를 말 할 줄은 알지만 변통은 모른다. 또 자공은 말은 잘 하지만 겸손하지 못하다. 자로는 용감하지만 물러날 줄을 몰라. 그리고 자장은 장중하지만 남과 어울리지 못해. 그들은 각각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단점도 있다. 내가 네 사람에 대해서 잘 알고 인정하기 때문에 그들이 나를 섬기되 두 마음으로 섬기지 않는 것이다.”

 

<<列子>>仲尼 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스승이란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 꿰뚫어 볼 줄 아는 사람임을 깨닫습니다. 스승은 어느 한 편에 치우치지 않는 사람, 즉 균형 감각이 탁월한 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을 닮은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생이란 벼랑과 벼랑 사이에 놓인 줄 위를 걷는 것과 같다고들 말합니다. 그 위를 잘 걷는 방법은 뭘까요? 몸이 왼쪽으로 기울면 오른쪽으로 돌이키고, 오른쪽으로 기울면 왼쪽으로 돌이켜야 합니다.

 

치우침이야말로 우리 삶의 병통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구주로서 믿고 신뢰하지만, 삶의 길을 여쭐 수 있는 균형잡힌 스승으로서도 존경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요한은 유대인들과 예수님의 대화 한 토막을 들려줍니다. 요한은 그들을 믿은 유대인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믿는이라고 하지 않고 굳이 믿은이라고 번역한 것은 그 동사가 원문에서 완료분사 형태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지금 막 예수님과 대면한 사람들이 아니라 상당한 시간을 예수님 곁에 머물렀던 사람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제자가 된다는 것이 뭘 의미하는지를 가르치십니다. “너희가 나의 말에 머물러 있으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들이다.”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많은 가르침을 받았을 것입니다.

 

이제 남은 문제는 그 말씀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말씀을 살아내는 것을 여기서는 나의 말에 머물러 있으면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처럼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는 나라도 많지 않을 겁니다. 어떤 성도들은 목회자보다도 더 전문적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삶을 통해 구현되지 않으면 오히려 우리의 거짓 자아를 강화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말씀 안에 머문다는 것은 그 말씀을 바탕으로 해서 나의 사욕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뜻에 일치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한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사람됨의 길을 가르치는 논어의 맨 첫 대목이 배우고 또 경우에 맞게 그것을 익힌다(學而時習之)’인 것은 참 의미심장합니다. 참 사람됨의 길은 마음을 열고 열심히 배우는 데서 시작됩니다. 하지만 그 배움은 삶 속에서 적절하게 훈련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당신의 말씀 안에 머무는 사람이 곧 제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진리와 자유의 상관관계

 

그리고 결정적인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그 말씀을 살아내려고 애쓰면 결국 진리가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진리라는 말은 매우 추상적으로 들립니다. 진리는 철학을 전공하거나, 그래도 교양적 지식이 풍부한 사람이나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진리는 우리가 노력하여 얻을 수 있는 어떤 지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된 가르침을 뜻합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진리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려고 애쓰다 보면 결국에는 그 분이 참 삶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알 수밖에 없습니다.

 

나중에 빌라도는 자기 앞에 서 있는 주님께 진리가 무엇이오?’ 하고 묻습니다. 아이러니입니다. 진리를 눈앞에 두고도 그는 진리가 뭐냐고 묻고 있습니다. 눈을 감은 사람에게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진리는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과 가르침 자체입니다. 그 진리를 깨달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은 자유로움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얼마나 가슴 벅찬 말입니까?

 

예수가 우리 삶에 들어오면 우리는 자기 삶의 주인이 됩니다. 성전 미문 앞에 앉아 있는 것을 자기의 숙명으로 여기던 앉은뱅이 걸인은 베드로와 요한을 만난 후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주님은 진리를 인하여 환난을 겪게 될 제자들에게 아주 솔직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16:33) 주님은 고난을 눈앞에 두고도 세상을 이겼다고 하십니다. 세상의 어떤 세력 앞에서도 짓눌리지 않는 영혼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를 위협하고, 감옥에 가두고, 죽일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굴복시킬 수는 없습니다. 프란체스코는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으로 살았지만, 그의 삶을 누추하다고 말하는 이는 없습니다. 마틴 루터 킹도, 마더 테레사도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믿음 하나로 세상을 변혁한 이들입니다. 그들이 누린 영적인 자유를 누가 빼앗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과 처음으로 만났을 때 나는 새로운 세상과 만난 느낌이었습니다. 세상에 두려울 게 없었고, 주저할 것도 없었습니다. 예수처럼 살고, 예수처럼 죽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를 믿어서 얻는 복 따위는 제게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예수와 복을 연결시키는 생각 자체를 저는 불순한 것으로 알았습니다. 이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향한 나의 단순하고 소박했던 사랑도 세월과 함께 퇴색된 듯합니다. 자꾸 몸을 사리고, 계산을 합니다. 예수의 손과 발이 되어 살기보다는 예수를 해석하고 설명하는 일에 훨씬 익숙하게 되었습니다.

 

다시금 주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해야 할 때입니다. 예수님은 자유입니다. 진리입니다. 진리 아닌 다른 군더더기에 마음이 팔리는 순간 우리 영혼은 위축되게 마련입니다. 33살에 생을 접을 수밖에 없었던 그 청년 예수의 외침,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는 말이 가슴 벅차게 다가옵니다.

 

생명을 주는 자

 

주님의 이런 선포에 대해 사람들은 의아해 합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아무에게도 종노릇한 일이 없는데, 당신은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까?”(33) 문자 그대로 보면 옳은 말입니다.

 

넘어진 사람이라야 일어설 수 있고, 떠난 사람이라야 도착할 수 있지 않습니까? 종노릇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자유롭게 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주님을 믿어온 그 유대인들의 반응에는 노여움이 배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에게 종교적, 민족적 자긍심에 상처를 입히는 말씀이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이 말이야말로 그들의 내면에 있던 자부심의 근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간단하게 대답하십니다. “죄를 짓는 사람은 다 죄의 종이다.”(34) 간명하지만 핵심을 꿰뚫는 말씀입니다. 이 말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말합니다.

 

그런데 전에는 여러분이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 본디 하나님이 아닌 것들에게 종노릇을 하였지만, 지금은 여러분이 하나님을 알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알아주셨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 무력하고 천하고 유치한 교훈으로 되돌아가서, 또다시 그것들에게 종노릇 하려고 합니까?”(4:8-9)

 

지금 우리도 누구의 혹은 무엇의 종노릇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왕자의 운명을 타고 나서 거지의 운명을 살아가는 것이 죄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유인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자유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소명입니다.

 

제멋대로 살자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아닌 어떤 것에도 휘둘리지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과도한 욕망의 노예가 되어 살고 있습니다. 한동안 사람들 사이에 유행어처럼 번지던 말이 있습니다.

 

부자 되세요.” 이 말은 한동안 최고의 덕담 대접을 받았습니다. 기독교인들도 이 말의 주술에서 자유롭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정신을 차린 사람들은 이 말이 갖는 위험성을 잘 압니다.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유혹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도 해로운 욕심에 떨어집니다. 이런 것들은 사람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립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좇다가, 믿음에서 떠나 헤매기도 하고, 많은 고통을 겪기도 한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딤전5:9-10)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많은 재물이 아니라, 자족하는 마음입니다. 소유에 대한 욕망에 사로잡히는 순간 이성이나 양심은 작동을 멈춥니다. 종노릇이 시작됩니다. 예수 잘 믿으면 만사형통한다고 가르치는 이들도 있고 또 그렇게 믿는 이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 경험은 다릅니다. 잘 믿는데도 실패를 경험하고, 병으로 신음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신앙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문제가 많은데 세속적인 성공을 거두는 이도 많습니다. 여기서 사람들은 신앙적 딜레마에 빠집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지? 전도서는 말합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는 감각을 주셨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깨닫지는 못하게 하셨다.”(3:11) 옳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다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등지고 거두는 성공보다 하나님을 향해서 거두는 실패를 더욱 소중히 여깁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누리는 건강보다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면서 겪는 연약함을 소중히 여깁니다.

 

말씀이 머물 자리를 마련하라

 

37절과 38절에 나오는 말씀은 31절과 맥락이 조금 다른 듯합니다. 당신을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 제자의 삶을 가르치시던, 예수님은 본문의 뒷부분에서 당신을 대적하는 이들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내세우지만 진리이신 예수님을 죽이려 합니다.

 

그 까닭을 주님은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텅 빈 공간에 분자가 들어 있습니다. 그 숫자가 많지 않아 자유롭게 노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공간에 분자 수가 늘어나면 움직일 수 있는 여백은 점점 줄어듭니다.

 

분자 수가 더 늘어나 더 이상 들어올 수 없을 지경이 되면 분자들은 조금도 움직일 수 없게 됩니다. 최초의 상태가 기체였다면 마지막 상태는 고체입니다. 사람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받아들일 수도 없고, 스스로를 바꿀 수도 없습니다.

 

부드러움은 생명의 친구이지만, 굳어짐은 죽음의 친구입니다. 굳어짐은 죽음입니다. 정신의 굳어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에스겔을 통해 그 백성들의 굳어진 마음을 도려내고, 새 살과 같은 마음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자리가 없다는 주님의 말씀이 참 아프게 다가옵니다. 신앙생활이란 다른 것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여백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분주한 일상 가운데서도 시간을 구분하여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까닭은 정신의 굳어짐을 막기 원해서입니다. 감각적인 세상의 물결에 휩쓸려 우리 영혼이 떠내려가지 못하도록 하려면 우리를 든든히 붙들어줄 내적인 닻이 필요합니다. 그 닻의 이름은 기도와 성도들과의 깊은 사귐입니다.

 

이번 유럽 여정 가운데 가장 행복했던 시간을 물으신다면 카푸친 수도회 교회에 앉아 있던 시간이라고 말하겠습니다. 잘츠부르크의 뒷골목을 배회하다가 나는 우연히 카푸친 수도회의 영내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비가 내리던 날, 마치 뭔가에 이끌리듯 나지막한 산길을 따라 1시간 30분 동안 숲속을 홀로 걸었습니다. 새소리는 황홀했고, 무엇보다 적막함이 참 좋았습니다. 산책길 끝에 있던 수도원 교회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발소리를 죽여야 했습니다.

 

누군가가 파이프오르간을 연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연주자와 나 외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가만히 자리에 앉아 연주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 아름다운 선율은 예배당 곳곳을 어루만지고, 성상들을 쓰다듬고, 마침내 내 가슴에 파고들어 내 영혼 구석구석을 어루만졌습니다.

 

치유의 시간이었고, 회복의 시간이었습니다. 연주가 끝난 후에도 나는 가만히 자리에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나를 감싸 안고 있음을 이론이 아니라 몸으로 느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을 때, 그래서 우리 마음이 아버지이시고 어머니이신 하나님과 하나가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지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복잡할수록, 해야 할 일이 많을수록, 분노와 절망의 감정이 깊을수록, 주님께 기회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 속에 오셔서 고치시고, 회복시키시고, 새로운 소명을 주시도록 말입니다. 엎드리지 않고는 세상을 바꿀 수 없습니다. 내가 변하면 세상도 변합니다. 세상은 예수와 진정으로 만난 사람을 뒤흔들어 놓을 수 없습니다.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가 진리이신 예수로 인하여 진정한 자유인으로 거듭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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