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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요한복음 설교 모음

요한복음 8:21 - 30 절 설교 모음

by Jessi J 2023. 8.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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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과 하나님 임재 /8:21-30/ 김형익 목사

2021-05-06 11:35:30

 

1. 논쟁의 중심, 네 가지 질문에 대하여

우리가 상고하고 있는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예수님과 바리새인들 사이의 논쟁에는 네 개의 질문이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8장은 이 질문들을 둘러싼 논쟁입니다. 첫째는 예수님이 어디서 오셨는가 입니다(23, 26, 29).

 

둘째는 예수님은 어디로 가시는가 입니다(21~22, 28). 셋째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아버지가 누구인가 입니다(26~27, 38, 54~55).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누구인가 입니다(23~26, 38, 54~55). 이 질문들을 둘러싼 논쟁은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 논쟁의 당사자인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은 이 각각의 질문을 토대로 정반대의 자리에 서있기 때문입니다.

 

첫번째 질문을 보면, 예수님은 위로부터 오셨지만, 유대인들은 아래서 난 사람들입니다(23). 예수님은 세상에 속하지 않으셨지만, 이들은 세상에 속한 자들입니다. 여기서 위/아래의 구분이나 세상에 속하였는가 속하지 않았는가의 구분은 플라톤 철학에서 말하는 영/육의 이원론적 구분은 아닙니다. 여기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세상은 타락한 도덕 질서를 가지고 하나님께 반역하는 영역을 말합니다. 세상은 주님께서 그 행사를 악하다고 증거하심으로 주님을 미워하는 세상입니다(7:7).

 

두번째 질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에 그들은 갈 수 없습니다(21). 이들이 아들을 거절하고 있는데, 어떻게 아버지가 계신 곳에 가서 환영을 받으리라고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이제 십자가를 지고 나시면 천국 보좌로 돌아가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자기들의 죄 가운데서 죽음으로써 천국으로 들어갈 수 없다고 주님이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21, 24).

 

나중에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이와 비슷한 말씀을 하셨지만, 이것은 전혀 경우가 다른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늘 이 본문에서 하신 말씀을 제자들과 다락방에서 다시 한 번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3:33을 보십시오. “소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터이나 그러나 일찍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그리고나서 서로 사랑하라는 새계명을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근심이 가득해서 묻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주님께서는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주님은 지금은따라올 수 없다고 하셨지만,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말씀은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그들은 그곳에 지금이나 나중에나 올 수 없다고 즉, 그들은 죄 가운데서 죽어 지옥을 갈 것이라고 선언하시는 셈입니다.

 

그러니 이런 논쟁의 결과가 돌을 들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것이었음은 별로 놀랄 일이 아닙니다(8:59). 세번째 질문은 어떻습니까? “네 아버지가 누구인가?” 예수님의 아버지는 성부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이 바리새인들의 아버지는 마귀입니다(26~27, 41~44, 54~55). 그러니 어떻게 그들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었겠습니까?

 

저희는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인줄 깨닫지 못하더라(27).” 다음에 살펴보겠지만, 주님께서는 이 논쟁이 가열되면서, 직접적으로 그들에게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라고 선언하십니다(44). 예수님이 누구신가 하는 마지막 질문에 대해서는 결국 결정적으로 다른 대답을 가지게 됩니다. 그들이 처음 세 개의 문제에서 주님과는 완전히 정반대의 방향에서 서있기 때문입니다.

 

2. 자기 죄 가운데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사람들(21, 24)

예수님께서는 조금도 이 논쟁의 주도권을 놓지 않으시고 바리새인들을 몰아가십니다.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라고 하십니다(21). 이 말은 예수님을 찾는다는 말이 아니라, 메시아를 기다리고 찾고 있지만, 결국 주님이 메시아인 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찾다가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24절에서 재차 죄 가운데서 죽는다는 말을 하십니다.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이것은 단순한 반복만은 아닙니다. 21절과 24절의 말씀에는 두드러진 차이가 있습니다. 21절에서는 죄가 단수로 쓰였지만, 24절에는 복수로 쓰인 것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21절에서 주님은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라고 하신 것이고, 24절에서는 너희 죄들 가운데서 죽으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무슨 차이입니까?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지 않는 불신의 죄를 제일 먼저 언급하신 것입니다. 모든 죄들은 바로 이 불신의 죄를 뿌리로 해서 파생되는 것들일 뿐입니다. 사람이 도둑질을 하고, 강도질을 하고, 온갖 못된 짓을 해서 천국에 가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천국에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모든 이런 잘못된 행위들은 그 본질에 있어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불신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들이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결국 바리새인들이 가지고 있는 딜레마는 그들이 메시아를 기다린다고 하고, 하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음으로써 그들의 모든 종교 행위와 노력들은 자기 의를 쌓아가는 것 밖에는 되지 않고 결국 죄?불신의 죄 가운데서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본문에서 놓칠 수 없는 또 하나의 중요한 내용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고 하셨을 때, ‘내가 그인 줄이란 말입니다(24).

 

이 말은 지난 번에도 잠깐 설명 드렸듯이 영어로 표기하면 ‘I am’이란 말입니다. ‘I am’은 그 뒤에 설명하는 어떤 단어가 와야 완성되는 문장입니다. 여기서 주님이 표현하신 이 말을 많은 신학자들은 주님의 신성에 대한 선언이라고 이해합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이름을 물었을 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고 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의 의미를 문자적으로 드러내신 표현이라고 읽는 것입니다.

 

,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예수님이 구약 성경에서 세상을 창조하셨고, 아담과 하와에게 계명을 주셨으며, 모세에게 율법을 주셨던 바로 그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믿지 않는다면 누구라도 자기의 죄?불신의 죄 가운데서 영원한 죽음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인류는 모두가 바로 이런 자리에 처해 있습니다. 뭔가 그들을 구원해 줄 수 있는 출구가 없는 한, 그들은 자기 죄 가운데서 죽게 됩니다. 그 출구는 오직 하나 밖에 없습니다. 진정한 구원 얻는 믿음에 이르는 것입니다.

 

3. 인간의 무지도 하나님의 일을 드러낼 수 있다(22).

우리가 계속해서 보는 바이지만, 요한복음에는 바리새인 혹은 유대인들의 영적 무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바리새인들은 주님의 말씀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가시는 곳에 저들이 올 수 없다고 하시니까, “저가 자결하려는가하고 의문을 제기했습니다(22). 앞에서도 그랬습니다. 주님께서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고 하시자, 그들은 예수님이 헬라인들을 가르치러 가시는가 하고 오해했었습니다(7:35).

 

하지만, 바리새인들이 지금 주님이 자결하려는가 라고 생각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자살만큼 악하고 잘못된 것은 없습니다. 생명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에 자기 목숨이 자기 것이라고 여기는 행위인 자살이야말로 죄악 중에서 가장 악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만일 예수님이 자살을 하게 된다면, 자기들은 그가 가는 곳으로 따라갈 수 없다는 비아냥이 섞여있는 말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기묘한 것은 이들의 무지와 오해가 빚어낸 말이 자기들도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진리를 드러냈다는 점입니다. 만일 이들의 지혜와 이해가 하나님의 진리를 드러내고 있지만 그들은 자기들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조차 깨달을 수 없습니다.

 

물론 주님께서는 자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죽으심은 완전한 타살이라고만 할 수 없는 특별한 죽음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10:17~18).”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주님의 십자가 죽으심은 주님께서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으신 것이지, 누가 주님의 목숨을 빼앗을 능력이 있어서 빼앗은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죽으심은 물론 자결이 아니지만, 아버지의 뜻에 철저하고도 완전하게 복종하신 주님 자신의 주도적인 행위였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에 대한 주도권은 총독 빌라도나 헤롯이나 대제사장이나 관원들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십자가 죽음에 대한 주도권은 오직 주님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4. 출구: 십자가는 주님이 누구신지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최고의 계시다(28).

주님께서는 이런 오해 속에서 한 가지 분명하게 주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될 때가 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28절입니다.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28).” 여기서 든다는 표현은 생소하지 않습니다. 이미 주님께서 니고데모와 말씀하실 때 사용하신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십자가에 높이 들리우실 것에 대한 말씀이고 동시에 천상의 보좌로 올리우실 것에 대한 암시도 있습니다.

 

이 바리새인들이 결국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 것을 요구하고 결국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실 것입니다. 그 때에는 내가 그인 줄 알고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바리새인들이 나중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게 되면 예수님을 믿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까?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주님이 여기서 말씀하신 의미는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게 되면, 그 십자가로 인하여 예수님이 누구셨는지를 가장 확실하게 알게 되는 기준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 십자가의 죽으심이 없다면 아무도 예수님이 누구신지, 예수님이 왜 보내심을 받으셨는지, 예수님이 하신 일이 무엇이었는지를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예수님이 왜 이 땅에 보냄을 받아오셨는지, 예수님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게 하는 열쇠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무엇인지를 깨닫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는 죄인을 향하신 하나님의 증명된 사랑을 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죄인됨의 존재와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아래 있었던 모습을 발견합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비로소 깨닫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가 우리의 억만 죄악을 용서하신 것을 깨닫고 느낍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진 의인들이 되었음을 배웁니다. 십자가를 떠나서 주님을 이해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비록 예수님을 믿었고 따랐지만, 결국 그들의 영적인 무지가 벗겨지게 되는 것은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성령께서 그들 가운데 부어졌을 때였습니다. 모든 인간의 영적 무지가 벗겨지는 곳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가 드디어 십자가로 보이기 시작할 때 우리의 영적 무지는 벗겨지고 하나님께 속한 것들을, 영적 진리들을 드디어 인식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주님이 누구신지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최고의 계시입니다.

 

요한복음이 강조하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고 요한복음을 썼노라고 사도 요한은 밝히고 있습니다(20:31). 지금 바리새인들이 자신들이 서 있는 영원한 죽음의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들 앞에 계신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은 다 이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자리에 서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쓴대로, 예수님을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는 것, 이것 밖에는 살 길이 없습니다. 이것이 죄 가운데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에게 하나님이 주신 유일한 출구입니다.

 

5. 순종과 하나님의 임재 감각은 비례한다(29).

이제 우리는 오늘 살펴보는 본문의 마지막 구절에 이르렀습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주신 유일한 출구를 통해서 나온 사람이 얻게 되는 삶의 내용에 관한 것입니다. 저는 이 구절이야말로 주님께서 하셨던 그 많은 담대함의 열쇠를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지금까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유대인, 바리새인들을 대하실 때 보여주시는 그 담대함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단지 주님의 신성에다 모든 것을 돌릴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역사 속에서 수많은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은 주님과 같은 이런 담대함을 소유한 사람들이었음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담대한 사람이십니까? 여러분은 스스로 담대한 사람이라고 여기십니까? 이 담대함은 그냥 용기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과 수많은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이 자신들의 믿음이 위축될 수 밖에 없을 적대적 상황 속에서도 한결 같은 담대함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의 비결이 바로 이 한 구절에 담겨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29).” 우리 중에 아무도 하나님께서 항상 나와 함께 하신다고 말할 만큼 하나님의 임재와 동행을 느끼는 것을 마다할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 저는 괜찮습니다. 이대로가 좋아요. 적당히 하나님과 거리를 유지하고 사는 게 제게는 편합니다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그것은 주님과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거듭난 사람,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 그리고 하나님의 거듭나게 하시는 은혜에 가까이 온 모든 사람에게는 이런 열망이 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나님의 임재를 늘 경험하고 살고 싶은 것입니다. 그는 얼마나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겠습니까? 말로만이 아니라, 그의 삶으로 그리고 어떤 불이익이 닥친다고 할지라도 조금의 위축됨도 없이, 그리고 조금의 비겁함도 없이 복음을 전하고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이런 그리스도인들을 필요로 합니다. 이런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힘있게 세상 속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심을 수 있는 하나님의 도구들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가 지향하고 바라는 바도 바로 우리 자신들이 이런 그리스도인들이 되며, 이런 그리스도인들로 채워진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를 이 세상 속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런 영향력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지위나 물질적 부나 성공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영향력은 그 교회가 가지고 있는 소위 교세에 달려 있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오늘 보여주시는 그런 담대함의 근거는 바로 하나님의 임재, 변함없이 항상 인식되고 감지되고 경험되는 임재였습니다. 그런 임재를 주님은 어떻게 그토록 철저하게 항상 감각하고 사실 수 있었습니까? 여기에 그 비밀이 있습니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100% 그 삶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에 바쳐져 있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아무 것도 스스로 말씀하시지 않으셨고 하나님 아버지의 주신 것만을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모든 판단은 아버지의 판단이었습니다. 주님은 아버지께서 하라고 주신 일만을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기쁘신 뜻에 대한 주님의 완전하고도 자의식적인 순종은 직접적으로 변함없고 항상 있는 충만한 하나님의 임재 감각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순종과 하나님의 임재 감각은 비례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과거 신앙 생활을 한 번 돌아보십시오. 언제 여러분은 가장 충만하게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사셨습니까?

 

그때가 언제였습니까? 왜 그때 그렇게 놀랍게 하나님의 임재를 감각하고 누리실 수 있으셨습니까? 순종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순종하려는 열망이 충만했을 때였을 것입니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라는 삶의 열망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여러분이 하나님의 살아계심도, 임재도, 동행하심도 느끼지 못하고 광야에 홀로 버리워진 것처럼 느끼고 사셨던 때는 언제입니까?

 

그 때 여러분은 자기의 뜻을 좇아, 자기를 기쁘게 하려는 욕구를 가지고 사셨을 것입니다. 자기 추구의 결과는 공허함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도전하십니다. 네가 나의 임재와 동행을 놀랍게 경험하고 감각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여러분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언제나 주님께서 병자를 고치실 때, 그들에게 원하느냐고 물으셨다는 사실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일하실 때, 언제나 우리 속에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만일 오늘 저와 여러분의 대답이 하나님 아버지, 저는 아버지의 변함없는 임재와 동행을 충만하게 느끼고 경험하기를 원합니다라는 것이라면, 그것처럼 복된 일은 없습니다. 바로 거기서 하나님의 은혜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이런 일에 아무 관심이 없다고 하신다면, 여러분은 오늘 주님의 경고를 들어야 하는 위험한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아십시오. “여러분은 주님을 나름대로 찾다가 여러분의 죄 가운데서 죽을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믿지 않았지만 주님은 아버지께 순종하셨습니다. 믿음과 순종은 성경에서 다른 의미로 쓰이지 않습니다. 믿는 자는 순종하는 자입니다. 순종하는 자는 믿는 자입니다. 믿고 순종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스러운 임재를 놀랍게 느끼고 경험하게 하십니다. 여러분은 항상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행하고 계십니까? 그렇게 하기를 원하고 계십니까?

 

 

 

나는 혼자가 아니다 /8:21-30/ 김기석목사

2015-07-13 09:25:52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가고, 너희는 나를 찾다가 너희의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유대 사람들이 말하였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하니, 그가 자살하겠다는 말인가?"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여 있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여 있지 않다. 그래서 나는, 너희가 너희의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내가 곧 나'임을 너희가 믿지 않으면, 너희는 너희의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다."

 

그들이 예수께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지 않았느냐? 그리고 내가 너희에 대하여 말하고 또 심판할 것이 많이 있다. 그러나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시며, 나는 그분에게서 들은 대로 세상에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께서 아버지를 가리켜서 말씀하시는 줄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인자가 높이 들려 올려질 때에야, '내가 곧 나'라는 것과, 또 내가 아무것도 내 마음대로 하지 아니하고 아버지께서 나에게 가르쳐 주신 대로 말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나를 보내신 분이 나와 함께 하신다. 그분은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셨다. 그것은, 내가 언제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이 말씀을 듣고,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

 

 

'?'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지난 설날은 절기상으로 우수雨水였습니다. 언 땅이 녹고, 눈석임물이 흘러 계곡에 활기가 돌아오는 때입니다. '우수 뒤의 얼음같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맺혔던 것이 풀리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저희 아파트 앞에 있는 산수유나무는 벌써 노란색 꽃망울을 머금고 있습니다. 이맘때면 수달은 물고기를 잡아 늘어놓고, 기러기는 봄기운을 피해 추운 곳으로 날아간다고 합니다.

 

모천으로 회귀하는 어종들이나 철새들은 어떻게 자기 때를 분별하고, 돌아갈 곳을 향해 길을 떠나는지 모르겠습니다. 때를 분별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마땅히 가야 할 길을 알지 못해 허둥거리는 것은 오직 인간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오직 인간만이 자기 실존을 문제 삼는 존재입니다. '어떻게?'라는 질문은 고단한 생존을 이어가야 하는 모든 동물들이 묻지 않을 수 없는 질문이지만, '?'라는 질문은 오직 인간만이 던질 수 있습니다.

 

'?'라는 질문에 스스로 답을 찾을 때 삶은 튼실해집니다. 아이들은 질문이 많습니다. 온통 궁금한 것투성이입니다. 아이들의 질문은 우리를 근본적인 것 앞에 세웁니다. 그래서 대답하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어른의 세계에 진입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라는 질문을 유보하고 삽니다.

 

어차피 인생에 정답은 없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느끼기 때문일까요? 질문이 소거되면 삶은 납작해지게 마련입니다. 헝가리의 문예 사상가인 루카치(Lukacs, 1885-1971)는 별빛을 보고 길을 찾을 수 있던 시대가 행복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물론 상징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때는 사람들이 온 우주와의 연관 속에서 자기 삶을 파악했다는 말일 겁니다. 우리 영혼 속에서 타오르는 불꽃과 별들이 발하고 있는 빛이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사실을 안다면 뭐가 좀 있다고 우쭐거릴 것도 없고, 가진 게 없다고 주눅 들지도 않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별들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인공의 불빛에 온통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길을 잃은 자들이 되었습니다. 일상 속에서 진정한 평화를 누리지 못하는 까닭은 마땅히 마음 둘 곳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가야 할 곳을 알고 있습니까? 그 길을 걷고 있습니까?

 

'''아래'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제 마음을 가장 깊이 울리는 것은 "나는 내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알고 있다"(8:14)는 구절입니다. 이 말 한 마디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주님은 당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았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살았습니다.

 

보냄을 받은 자는 보내신 분의 뜻을 수행하기 위해 전심전력을 다합니다. 흔들림조차 없을 수는 없겠지만 가야 할 길을 분명히 인식하고 사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주님은 아버지께로 돌아갈 때가 다가왔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나는 가고, 너희는 나를 찾다가 너희의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8:21) '가다'라는 동사와 '죽다'라는 동사가 대조되고 있습니다. 같은 현실의 다른 표현입니다.

 

그런데 이 둘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죽음을 아버지께로 돌아감으로 이해하는 사람과 존재의 소멸로 생각하는 사람의 삶이 같을 수는 없습니다.

 

성 어거스틴의 <고백록>에서 제가 만난 구절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것은 '진리를 피하면서 찾았다'는 구절입니다. 진리는 먼 데 있지 않습니다. 바로 우리 앞과 뒤, 위와 아래, 왼편과 오른편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하늘에 오를 필요는 없습니다.

 

바다 건너로 갈 필요도 없습니다. 신명기는 말합니다. "그 명령은 당신들에게 아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당신들의 입에 있고 당신들의 마음에 있으니, 당신들이 그것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30:14) 볼 마음만 있으면 볼 수 있고, 실천할 생각만 있으면 실천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마음입니다.

 

''로 가득 찬 사람은 진리가 눈앞에 있어도 진리를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고향인 나사렛 사람들이 그러했고, 빌라도가 그러했고, 지금 예수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혈안이 된 바리새파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자기가 문제임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예수를 따를 수 없습니다. 그런 이들을 향해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여 있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여 있지 않다."(23)

 

'아래'에서 왔다는 말은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테너시 윌리엄스의 희곡 이름)에 오른 채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자기중심성이라는 중력에 속절없이 끌려가며 산다는 말입니다. ''에서 왔다는 말은 하늘 뜻에 붙들려 산다는 말입니다.

 

그런 이들의 삶은 어떠할까요? 그들도 땅에서 사는지라 땅의 현실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순간순간 하늘 뜻을 조회하며 살아갑니다. 하늘 뜻은 명백합니다. 다른 이들을 배려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웃 사랑이야말로 하늘로 통하는 문입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스스로 하늘에 속한 사람이라고 여기는 이들 가운데 다수가 자기 욕망을 하나님처럼 섬기며 산다는 사실입니다. 욕망의 특색은 독점욕과 배타성입니다. 과도한 욕망에 사로잡힌 이들에게 타인은 언제나 경계의 대상입니다.

 

욕망에 사로잡힐 때 사랑의 능력은 줄어들고, 나눔은 불가능하게 됩니다.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이 폭력적인 까닭은 자기들만 옳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모든 독점은 타자 파괴적이기에 악마적입니다.

 

IS(이슬람국가)라는 집단이 하는 일들을 보십시오. 자기들의 종교를 무시하는 자들을 징계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지만 그들이 섬기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 자기들의 탐욕입니다. 종교는 그저 허울일 뿐입니다. 양두구육羊頭狗肉입니다.

 

사는 모습을 보면 믿음과 무관한 데도 스스로 잘 믿고 있다고 착각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욕심 사납고, 무례하고,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신자들로 인해 주님의 영광이 가려지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런 이들을 일러 아래에서 온 사람, 세상에 속한 사람이라 말씀하십니다.

 

지금 우리 곁에 계신 주님

 

예수님은 자신은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여 있지 않다(in the world, but not of the world)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문제는 소속감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나그네처럼 순례자처럼 사셨습니다. '가야 할 곳'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가벼워져야 합니다. 비우고, 나누고, 내려놓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게 어렵습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채우고, 독점하고, 집착하라고 우리를 채근합니다. 이미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살기보다는, 부족한 것 때문에 툴툴거리며 살도록 만듭니다.

 

그래서 이웃은 정과 사랑을 나누어야 할 하나님의 선물이 아니라, 혹시라도 내 것을 가져갈지도 모르는 잠재적 적으로 인식됩니다. 시몬느 베이유의 책 <중력과 은총>은 제목 그 자체로 상징적입니다. 중력이 아래로 잡아당기는 힘이라면 은총이란 위로 밀어 올리는 힘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 속에 불안감을 증폭시킴으로 우리를 세상에 붙들어 매두려고 합니다. 하지만 은총은 우리를 들어 올려 더 큰 뜻 앞에 서도록 만듭니다. 물 위를 걷던 베드로가 물속에 빠져든 것은 무거워졌기 때문입니다. 은총이 아니라 중력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당신이 높이 들려 올려질 때에야 '내가 곧 나'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나'라는 말은 범상한 말이 아닙니다. 호렙산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임재하신 주님은 당신의 이름을 묻는 모세에게 '나는 나'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도 같은 맥락에서 발설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어떤 이름으로도 규정될 수 없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땅에 붙들려 살아가는 이들에게 하늘에 속한 삶이 어떠한지를 몸으로 보여주신 분이십니다.

 

주님은 혼자 있을 때라도 홀로가 아니었습니다. 그를 보내신 분이 늘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진실 하나를 발견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힘써 행할 때 주님은 우리와 동행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임마누엘 칸트는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23:4)라는 시편 구절이 자기 삶을 든든히 지켜주었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이 멀리 계시다고 느껴질 때, 그래서 삶이 고달프고 힘겹다고 느껴질 때, 주님의 임재하심을 경험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맡겨주신 일을 성심껏 감당하는 것입니다. 욕망이 잡아끄는 대로 살지 않고, 은총이 우리를 손짓하여 부르는 삶을 향하여 길을 떠나는 것입니다. 사순절은 바로 그러한 삶을 익히는 시간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하나님이 정녕 살아계신다는 증거가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요한복음강해-44 /8:21-30

2011-01-20 17:04:20

 

기회 지나가기 전에'

 

<너희가 죄 가운데서 죽겠고>

본문 말씀은 지난 주에 말씀드린 사건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과 유대인들 사이에 논쟁이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공관 복음서와는 다른, 요한 복음만의 고유한 성격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이 본문이기도 합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어디론가 떠나신다는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21절을 보십시오.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여기서 예수님은 어디론가 가시게 될 것이 분명한데 유대인들은 죄 가운데서 그냥 죽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것이며 결국 하나님 아버지께 돌아갈 것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말뜻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22절에 보니까 "유대인들이 가로되 저가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하니 저가 자결(自決)하려는가."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어디로 가시는지에 대해서 알지 못했습니다. 그것도 자기들은 가지 못할 곳으로 간다고 하실 때 더욱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겨우 한 가지 생각한 것이 지옥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결, 즉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은 음부의 세계로 떨어진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혹시 예수님께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셔서 음부의 세계, 즉 지옥으로 가려는 것인가 하고 지레 짐작을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각과는 정반대의 해석을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으로 가시는 것으로 말씀하셨는데 유대인들은 지옥으로 가려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과 불신으로 가득차 있었던 유대인들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깊은 골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과 유대인들의 차이점>

이렇게 주님의 말씀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과 그들 사이의 두 가지 차이점을 말씀하십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유대인들은 아래, 즉 이 세상으로부터 났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위, 즉 하늘로부터 나셨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인 유대인들은 피조물에 불과할 뿐이며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과 동격이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유대인들은 이 세상에 속하였고 예수님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세상'은 희랍어로 'KOSMOS'입니다. 예수님께서 계신 천국과 정반대 되는 곳입니다. 이 세상은 변화하고 유한하고 무상합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만들어내신 피조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죄가 찾아와 피조물과 창조주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아서 피조물이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피조물을 창조주처럼 생각해서 절하고 경배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이렇게 유대인들과 예수님 사이에는 단지 양적인 차이뿐만 아니라 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당신과 믿지 않는 유대인들 사이의 차이를 말씀하신 후 24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결론을 내리십니다. "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 인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믿지 않으면 유대인들은 죄 가운데 죽을 것이라고 단호히 말씀하십니다. 피조물과 창조주 사이에 단절이 생겨서 이를 회복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들은 예수님 가시는 천국으로 갈 수 있지만 예수님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세상에 속해서 살다가 결국 죄로 인해서 죽게 될 것입니다.

 

<'': 하나님이라는 과녁을 빗나간 화살들>

''는 희랍어로 'HAMARTIA'입니다. 'HAMARTIA'의 원 뜻은 화살을 과녁에 쏘았는데 과녁을 빗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죄는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살도록 되어 있는데 하나님을 떠나 사는 것입니다. 화살이 과녁 정 중앙에 가서 맞아야 되는데 빗나가듯이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을 향하여 살도록 지음을 받았는데 그렇게 살지 못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떠나 사는 것이 죄입니다.

 

더군다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화해하는 길을 열어주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는데 사람들은 영접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과녁을 빗나가 자기 멋대로 불신앙 가운데 삽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들은 천국이라는 과녁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이 궁극적으로 돌아가야 할 본향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세상에 속하여 살다가 죄 때문에 세상에서 죽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셔도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28절에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인자를 든다는 것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다음에야 비로소 예수님을 바로 알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행동하시는 일체가 당신의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당신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가르침에 따라서 이루어진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본문이 주는 영적 교훈: '기회 지나가기 전에'>

그러면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영적인 교훈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기회는 항상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에서 복음을 전할 때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인간의 양심이나 이성에 호소해 볼 때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것이 하나도 그름이 없습니다. 전부다 지당한 말씀이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들입니다. 이 좋은 기회가 유대인들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만과 완고함과 전통에 대한 집착 때문에 이 좋은 기회를 놓치게 되었습니다. 이제 얼마 있지 않으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서 이 기회는 저절로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메시아를 만날 기회가 그들에게 주어졌지만 다른 곳에서 열심히 찾다가 결국은 기회를 놓치고 죄악에 파묻혀 죽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어떤 기회는 몇 번이고 자주 돌아오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기회는 일생 일대에 단 한번 밖에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그 순간을 놓쳐버리면 평생을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버스를 타려면 버스가 지나가기 전에 손을 들어야 합니다. 버스가 지나간 뒤에 손을 들어봐야 소용없습니다.

 

이 천년 전에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때 여인숙 주인들은 돈에 눈이 멀어서 일생일대에 단 한번 주어질 기가 막힌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만삭이 된 마리아와 요셉에게 따뜻한 방 한 칸을 내어주어서 아기 예수님이 태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었더라면! 아마 성경에도 기록되고 인류사에 오래 오래 남게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기회가 항상 주어지는 것은 아님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둘째로, 그러므로 기회 지나가기 전에 기회를 잡아야 합니다.

시간이 촉박합니다. 이 세상은 신속하게 지나가기 때문에 기회는 우리의 형편을 보면서 마냥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영접할 때가 있는가 하면 예수님 위하여 열심히 일해야 할 때가 분명 있습니다. 우리의 시간을 주님 위하여 쓸 때가 있고, 우리의 물질을 주님 위하여 사용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건강과 재능을 주님 위하여 쓸 때도 있습니다. 심령이 갈하여 성령을 충만히 받아야 할 때도 있고, 은혜를 함께 나누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어떤 기회가 주어지더라도 기회가 주어지는 순간 결단해야 합니다. 신속하게 포착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특히 영적인 문제와 관련된 것일 때에는 슬기로운 판단과 신속한 결정이 중요합니다.

 

49: 8은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은혜의 때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도다 내가 장차 너를 보호하여 너로 백성의 언약을 삼으며 나라를 일으켜 그들로 그 황무하였던 땅을 기업으로 상속케 하리라."

 

이 말씀을 바울은 고후 6: 2에서 이렇게 바꾸어 말합니다.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여러분은 은혜 받을 만한 때, 구원의 날이 주어질 때 즉시 포착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기회가 주어졌어도 기회를 잡지 못한 이들에게는 심판이 기다립니다.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잡지 못했다면 누구에게 책임이 있습니까? 본인에게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회를 전혀 주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변명할 길이 있습니다. 예컨대 아무도 복음 전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예수의 이름을 모르고 죽었습니다. 그 때에는 하나님께 변명할 수 있습니다. 내 잘못이 아니라 복음이 아직 미치지 못해서 예수님을 믿을래야 믿을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수많은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자신의 마음이 완고하고 불신앙에 가득차서 그 기회를 의도적으로 배척했다고 한다면 책임은 본인에게 있습니다. 주님은 분명히 기회를 의도적으로 버린 사람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 16: 27에서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또한 고후 5: 10에서 바울 선생도 말씀합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주님의 엄중한 심판이 기다리고 있음을 성경은 약속합니다.

 

<결어>

"너희는 세상에 속해 죄 가운데서 죽겠고." 참으로 비참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는 이들은 진리를 알지 못하는 가운데 죄중에 죽어간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했습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죄 가운데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예수님을 믿지 않아서 죄중에 있다고 한다면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주님을 속히 받아들이십시오! 거기에 생명과 구원이 있습니다. 아멘.

 

 

 

 

요한복음강해 51. 아래에서 난 자 위에서 난 자 /8:21-30/ 이종철목사

2022-06-07 04:58:32

 

21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22 유대인들이 이르되 그가 말하기를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하니 그가 자결하려는가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25 그들이 말하되 네가 누구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 26 내가 너희에게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 말하노라 하시되 27 그들은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더라

 

28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29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30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

 

 

아래와 위

 

최근 우리 사회가 경험하는 문제 중 하나는 의사소통의 부재입니다. 대화가 대화라기보다는 일방적인 독백인 경우가 많습니다. 상대방의 말을 듣고 여기에 합당한 답을 하는 식보다는 자기 이야기만 무한 반복합니다. 선거철인데 정치에선 더 심합니다. 언론이나 유튜브도 자기 생각과 맞는 것만 들으려 합니다. 세대 간의 단절은 위험한 수준인데 50대 이상의 남성의 경우에 더 심하게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중년의 남성들이 가족들에게서 소외받는 경향이 많은데 주로 대화법의 문제에서 발생합니다. 적당한 경험도 있겠다, 지적질 받는 것은 싫고, 자기 합리화 능력은 발달 되었기에 자기 주장이 강하여 고립된 섬처럼 되어갑니다. 주로 자녀들이 부모 세대를 일컫는 비하적 표현이 꼰대가 되었습니다. 일방적인 지적질 싫다는 겁니다.

 

60을 이순(耳順)이라고 하는데 한자 그대로 풀이하면 귀가 순하다는 뜻입니다. 이에 대해 풀이하기를 듣는 것을 잘 다스려 감정통제가 되는 나이라 합니다. 나이 들수록 귀가 막히지 않고 잘 들을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대화의 시작입니다. 잘 들으면 상대방의 마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잘 들으면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잘 들으면 그것이 나에게 변화를 일으켜 발전할 수 있습니다. 잘 듣는 것이 지혜이고 사회성을 잃지 않는 비결입니다.

 

오늘 예수님과 유대인들 간의 대화를 보니 의사소통의 부재가 심각합니다. 동문서답, 소귀에 경 읽기 식으로 대화가 진행됩니다. 이미 이전부터 익히 보아왔던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이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요 그들은 그곳에 오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에 대해 유대인들은 정말로 못 알아들었던지, 아니면 듣기 싫었던지 그러면 자결하려는가?(22)하고 심하게 되칩니다.

 

저번에는 동일한 말에 헬라인들에게 가려는가? 하고 나름 논리적인 답을 했었습니다. 아마 예수님이 너희 죄 때문에 죽을 것이라는 말에 화가 나서 그러면 당신은 지옥에 갈 것이냐는 투로 비난한 것 같습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예수님에게 당신은 누구냐”(25)고 정체를 묻습니다. 예수님은 지금껏 계속 자신이 누구인지 말해 왔는데 들으려 하지 않는 유대인들의 모습에 매우 답답해합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하고 있는 걸까요? 그것은 서로 태어난 곳이 다르고 소속된 곳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23) 위와 아래, 세상과 하늘이 대립하고 있습니다. 먹는 양식도 다르고 추구하는 것도 다릅니다. 더 결정적인 것은 위에서 실상을 본 자와 우물에 갇힌 개구리가 자기가 본 세상이 다인 것처럼 우기는 데서 비롯되는 차이입니다.

 

지난 번 플라톤의 동굴 비유를 통해서 그림자 세계와 진짜 세계에 대해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 연속되는 장면입니다. 그렇게 빛을 본 사람이 그림자 세계로 내려왔습니다. 처음에는 다시 깜깜한 곳으로 오니 모든 게 어둡고 서툽니다. 적응의 기간이 필요합니다. 자기가 본 것을 말하며 대화를 시도하지만 그림자 세계에 묶여 사는 사람들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도무지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상한 사람 취급을 합니다. 급기야는 위험한 존재로 몰아붙여 죽이고 맙니다. 소크라테스가 그렇게 죽었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 상에서 그렇게 돌아가셨습니다. 본 자와 보지 못한 자의 차이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위에서 보았던 자의 답답함이 묻어나오고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신앙인들 또한 위에서 난 자들입니다. 거듭나다는 단어가 아노텐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이 23절에서 위에서 났다고 하시는데 여기 위에서가 아노입니다. 신앙인들은 위에서난 자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달리 이를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3:20)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고향은 이곳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영원한 하늘의 세계로 돌아갈 사람들입니다.

 

출신이 다르기에 먹는 것도 추구하는 것도 살아가는 방식도 다릅니다. 세상은 빵을 먹고 돈과 높은 자리를 선호합니다. 위에서 난 자들은 진리를 먹고 예수를 먹는 것을 즐거워합니다. 사랑을 나누고 선행을 베푸는 것을, 섬기고 하나님 뜻을 따르는 것을 자기 양식으로 삼는 자들입니다. 이 땅에서 이름을 남기는 것보다 하늘에 이름을 남기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 땅에서 썩어질 보화보다 하늘나라에 쌓는 보화를 즐겨합니다. 정의와 사랑이라는 하늘 양식에는 관심을 가지지만 이 땅의 정치와 권력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 언어도 다릅니다. 불만의 언어보다 감사와 찬양의 언어입니다. 긍정의 언어입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이번 주 금요일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성금요일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 전하는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린다 고난받는다 이런 말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28) 들린다는 것은 십자가에 달린다는 말입니다. 들린다는 말은 긍정적 표현입니다. 골고다는 언덕이기에 높고, 십자가에 달렸으니 더 높습니다. 가장 비참하고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높이 들린다고 말씀합니다. 마치 영광의 순간처럼 표현합니다. 실제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위의 하늘나라에 가장 가까운 곳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오르는 통로입니다.

 

위에서 태어난 자에게 십자가는 고통이 아니라 영광입니다. 요한복음의 겟세마네 기도에 해당하는 17장의 기도의 첫마디를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17:1) 영광입니다. 자신의 일을 다 마치고 곧 하늘나라로 돌아가는 순간이 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만날 때가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입니다. 땅에서 태어난 자들에게는 그 근본인 땅에서 제거되는 순간이지만 위에서 태어난 자에게는 이때가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는 영광의 귀환입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이 자신의 정체를 소개하는 이름이 있습니다. 24절입니다.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28절입니다.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내가 그이다는 번역의 헬라어 원문은 에고 에이미입니다. 영어로 ‘I am’입니다. 문장이 완성되지 않은 것 같은 이런 문장은 구약에서 하나님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사야 4310절입니다. “너희가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 줄(에고 에이미) 깨닫게 하려 함이라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 414절입니다. “나 여호와라 처음에도 나요 나중 있을 자에게도 내가 곧 그니라(에고 에이미)”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에고 에이미 문장의 특이점은 술어가 없다는 점입니다. 나는 있는데 나를 설명하는 술어는 없습니다. 결국 는 비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28)는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말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생각이 없습니다. 그것은 달리 하나님의 말과 생각과 온전히 일치하였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비었기 때문입니다. 비었기에 온전히 하나님의 것으로 채울 수 있습니다.

 

장자의 소요유 편에 나온 말씀입니다. “지인(至人)은 무기(無己)요 신인(神人)은 무공(無功)이요 성인(聖人)은 무명(無名)이라지극한 경지 곧 최고의 경지에 이른 지인은 자기나 규정된 틀이 없다, 신과 같은 경지에 이른 신인은 공을 이루지만 공을 자랑하지 않는다, 높은 인격과 학문의 성인은 이름을 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사람의 눈이나 세상의 평판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절대자유의 경지입니다.

 

요즘 시대는 자기를 자랑하고 자기 욕망추구를 당연시합니다. 공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알량한 것을 내세우고 욕망만 추구해왔던 매우 이기적인 자들이 목소리를 높이는, 때로는 정의를 부르짖는 부끄러운 시대입니다. 땅에서 난 자들은 그것이 전부이기에 거기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하늘의 뜻이 머물 곳이 없습니다. 자기 생각으로 자기 욕심으로 가득 찬 순간 하나님은 머물 곳이 없습니다. 욕망에 매어 부자유합니다. 어리석음에 갇혀 진리를 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비웠기에 하늘의 뜻으로 채울 수 있었습니다. 낮은 곳을 물이 곧 채우듯, 빈 항아리에 다른 것들이 가득 담기듯, 예수님의 빈 곳은 하나님으로 채워졌습니다. 예수님은 낮아짐, 사라짐, 섬김과 사랑, 자기 부정을 통해 자기를 비웠습니다. 나는 사라졌는데 오히려 나는 하늘의 생명으로 충만합니다.

 

예수님의 양식은 하늘 뜻을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기쁨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는 것에 있었습니다. 29절입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예수님이 하나님을 생각하니 하나님이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니 하나님은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만듭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의 온전한 하나됨을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 응답의 비결이 여기에 있습니다. 산상수훈에서는 말씀합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6:33) 우리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주십니다.

 

기도응답을 넘어 이제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는 것이 우리의 즐거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하는 행동은 부자연스럽습니다. 힘들여 행해야 하는 것은 힘이 듭니다.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 것이 우리 즐거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논어에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알고 좋아하는 것은 억지로 힘을 들여야 하지만 즐기는 것은 생활이 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기쁘고, 공기를 마시듯, 물고기가 물을 마시듯, 생활이 될 정도로 즐거운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일이 양식이 된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생명으로 풍성히 부어주십니다. 그것이 위로부터 난 사람들의 참다운 사람의 길입니다.

 

 

 

 

믿음의 장애물 /8:21-30

2021-11-14 05:51:27

 

제가 설교를 시작하기 전에 사진 한장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오른쪽에서 두번째 사람이 그 유명한 빌리 그래이엄(Billy Graham) 목사님입니다. 제가 청년시절에 빌리 그래이엄 목사님이 서울의 여의도에서 집회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무렵에 저도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진의 맨 왼쪽에 있는 사람이 빌리 그레이엄의 친구인 찰스 템플턴(Charkes Templeton) 입니다. 그 역시 복음 전도자이었습니다. 사실은 이 사람이 빌리 그레이엄 보다 더 유명한 복음전도자가 될수 있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찰스 템플턴은 복음 전도자의 길을 포기하고 불가지론자 (Agnosticist)가 되고 맙니다. 그는 예수님을 찾았지만 결국에는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고 예수님을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또 그리스의 문학가인 니코스 카잔차키스(Nikos Kazantzakis)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이 사람은 젊어서 진리를 사모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열심히 찾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성경에서 말하는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는 그의 인생이 끝나갈 무렵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The Last Temptation of Christ)이라는 문학작품을 썼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 작품에서 설명한 예수님은 성경의 예수님과 너무나도 달랐습니다. 그는 그 책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아니라 죽으시기 이전에 내려와서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을 하고 늙어서 죽었다는 식으로 너무나 엉뚱한 예수님을 묘사했습니다. 그도 예수님을 찾았지만 참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방금전에 소개해 드렸던 찰스 템플턴이나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한때 예수님을 열심히 찾았지만 그들은 결국 참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마치 예수님을 찾아와서 예수님과 끊임없는 논쟁을 통해서 예수가 누구인가를 알기를 원했던 종교지도자들과 유대인들이 결국에는 예수가 누구인지 깨닫지 못했던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모습을 요한복음 8:21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너희가 나를 열심히 찾았지만 너희의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결국에는 구원에 이르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또 한장의 사진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이 사진은 영화 벤허(Ben Hur)의 광고입니다. 그런데 벤허의 원 작가는 루 월레스 (Lew Wallace)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도 예수님을 열심히 찾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 예수님을 찾았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유럽과 미국의 유명한 도서관들을 돌아다니면서 자료를 수집하고 깊이 연구하여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가 모두 거짓말이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 책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책을 쓰다가 거꾸로 참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2주후에 바로 유명한 영화 벤허의 원작(original)을 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저희가 사도행전 큐티를 하면서 바울의 회심하는 장면을 읽으셨을 것입니다. 바울은 기독교 최초의 순교자인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때 찬성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감옥에 쳐넣은 사람입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멀리 수백 마일 떨어진 다메섹까지 가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찾아내어 끌고 가려고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거꾸로 참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을 핍박하던 자가 아닌 예수님 때문에 핍박받는 자로 평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 처럼, 어떤 사람은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 예수님을 열심히 찾았지만 참된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배척하기 위한 목적으로 예수님을 열심히 찾았음에도 불구하고 진짜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처음에 소개해 드렸던 찰스 템플턴이 예수님을 열심히 찾았지만 나중에 예수님을 포기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버리고 불가지론자가 된 결정적인 이유는 사진 한장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즉 아프리카의 한 여인이 이미 죽은 자기 아이를 앉고 비가 오지 않는 하늘을 쳐다보며 원망하는 듯한 표정의 사진이었습니다. 그 사진을 보고 찰스 템플턴은 이 땅에 고통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을 도저히 믿을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에게는 이 땅에 존재하는 설명하기 힘든 수많은 고통의 문제가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 뛰어넘어야할 가장 큰 장애물이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지구 여기 저기에서 지진, 쓰나미, 태풍, 허리케인, 가뭄, 홍수, 테러, 전쟁 등으로 인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고통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지 않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일수 없다고 하며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 뛰어넘어야할 장애물이 어찌 고통의 문제 하나만 있겠습니까?

 

제가 최근에 읽은 책중에 특종! 믿음사건이 있습니다. 이 책에는 현대인들이 믿음을 갖기 위해서 뛰어넘어야할 대표적인 장애물이 무엇인지를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이책은 Lee Strobel이라는 사람이 쓴 책으로서 이 사람은 원래 무신론자이었습니다. 지금은 그 모든 믿음의 장애물을 뛰어넘었고 릭 워렌 목사님이 세운 새들백교회의 교육목사로 사역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는 대표적인 믿음의 장애물 8가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몇가지만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첫번째는 사랑의 하나님이 왜 악과 고난을 허용할수 있는가? 두번째는 비과학적 기적을 믿을수 있는가? 세번째는 생명의 기원은 진화론이면 충분하지 않은가? 네번째는 살인을 명하는 하나님은 예배받을 자격이 있는가? 다섯번째는 왜 예수만이 유일한 길인가? 여섯번째는 영원한 지옥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등등입니다. 이러한 장애물들은 누구나 한번쯤은 심각하게 생각해보았을 것입니다.

 

이번 한국의 대구에서 세계육상선수권대회가 있었습니다. 이번 대회에 참가한 선수중에서 가장 큰 관심과 인기를 받은 선수는 자메이카의 우사인 볼트이었습니다. 그는 100m 세계 신기록을 갖고 있는 대단한 선수입니다. 그런데 저에게 가장 인상적인 경기는 100m 경기가 아니라 허들경기(Hurdling)와 장대높이뛰기(pole vault) 이었습니다. 경기장면을 사진으로 보여드리겠습니다. 이 두 경기의 특징은 승리하기 위해서 반드시 장애물을 잘 뛰어 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허들경기나 장대높이뛰기 처럼, 예수님을 찾아서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뛰어넘어야할 수많은 장애물들이 있고 때로는 아주 높은 장애물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이 자리에서 예배를 드리기 까지 어떤 장애물들이 있었으며 어떻게 뛰어 넘으셨습니까?

 

저의 경우에도 고등학교때 예수님을 믿기전에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한 작은 나라의 한 신(a god)에 불과한데 어떻게 한국사람인 내가 다른 나라의 신을 믿어야하는 하는 점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한 작은 나라 이스라엘의 지역 신이 아니라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될때에 그 장애물을 뛰어넘을수 있었습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찰스 템플턴에게 가장 큰 장애물은 고통의 문제이었습니다. 그는 고통의 장애물을 뛰어 넘지 못했습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참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가장 큰 장애물은 성경의 권위에 대한 의문이었습니다. 그는 성경을 하나의 문학작품으로만 생각했고 성경을 읽으면서 너무나 많은 상상력을 동원했습니다. 결국 그는 성경의 권위에 대한 의문의 장애물을 뛰어넘지 못하고 성경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데 방해가 되는 장애물이 한두개도 아니고 수없이 많다면 어떻게 그 많은 장애물을 다 뛰어 넘을수 있겠습니까? 계속 장애물을 넘다가 결국에는 지쳐서 쓰러지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아무리 장애물이 많다 할지라도 우리가 한가지 진리를 분명하고 정확하고 확실하게 깨닫는다면 그 어떠한 장애물도 더 이상 장애물이 되지 않을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모든 장애물들을 뛰어넘을수 있는 방법을 말씀해주셨습니다. 요한복음 8:28을 읽겠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인자를 든다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사건을 표현한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의 비밀을 깨닫는 순간 내가 예수님을 믿는데 걸림돌이 되는 그 어떠한 장애물도 뛰어넘을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십자가를 비밀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십자가의 의미를 바르게 깨달고 믿을 때에만 모든 장애물을 뛰어넘을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십자가의 사건이 2000년전에 있었던 역사적인 사실로 인정한다 할지라도 그 사건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여전히 십자가는 비밀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모든 장애물을 뛰어넘을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까? 그것은 십자가를 통해서만 참 하나님을 그리고 참 예수님을 만날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면, 어느 민족이나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종교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사의 현장에는 반드시 3가지 요소가 있어야 합니다. 첫번째는 제사를 받는 신이 있어야 합니다. 두번째는 신에게 바칠 제물이 있어야 합니다. 세번째는 제물을 준비하고 제물을 바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내일이면 한국에는 추석입니다. 추석때 많은 사람들이 제사를 드립니다. 그때 제사를 받는 신이 누구입니까? 바로 죽은 조상 신입니다. 그럼 신에게 드리는 제물은 무엇입니까? 바로 음식을 제물로 바칩니다. 마지막으로 누가 제물을 준비하고 제물을 바칩니까? 바로 죽은 조상의 자손들입니다. 이처럼 제사는 일반적으로 사람이 신에게 바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사를 드리는 목적은 감사의 뜻도 있겠지만 대체로 신으로부터 저주와 심판을 받지 않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면 십자가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십자가는 단순히 한 인간이 죄를 짓고 사형을 받은 사형집행현장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는 바로 제사를 드리는 현장이었습니다. 그럼 제사는 누가 받으셨습니까? 하나님이 받으셨습니다. 제물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몸이 제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사는 하나님이 받으셨고, 제물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럼 제물을 준비하고 바치는 사람은 누구이었습니까?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다른 모든 종류의 제사와 결정적인 차이점이라는 사실을 발견할수 있습니다.

 

로마서 3:25을 보시겠습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제물을 누가 준비했습니까? 제물을 드려야하는 사람이 아니라 제물을 받으시는 하나님이 직접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제물을 바치는 자는 누구입니까? 에베소서 5:2을 보시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예수님 자신이 자신의 몸을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일이 십자가상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십자가는 단순히 한 사형수가 죽은 나무 막대기가 아니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일어난 사건을 예수님이 인간을 대신해서 자신의 몸을 제물로 하나님께 바치는 제사현장으로 깨닫고 믿는 사람에게는 십자가는 모든 장애물을 뛰어넘는 장대막대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일어난 사건을 단순히 한 인간의 사형집행현장으로만 인정하는 사람에게는 십자가는 여전히 비밀인 것이며, 이 땅에 존재하는 수많은 믿음의 장애물을 결코 뛰어넘을수 없게 됩니다. 장애물을 뛰어넘지 못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결국 죄 가운데서 죽을수 밖에 없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인생 앞에 어떠한 장애물들이 있습니까? 질병이 여러분의 장애물입니까? 가난이 장애물입니까? 아니면 내가 끊지 못하는 중독된 습관이 장애물입니까? 나의 고치지 못하는 성격이 장애물입니까? 인간관계의 어려움이 장애물입니까? 나에게 이러한 장애물들이 너무 많고 또 너무 높아서 그 장애물들을 뛰어넘기가 힘드십니까?

 

여기서 한번 잠시 곰곰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왜 나에게 그렇게 많은 장애물 그리고 그렇게 높은 장애물이 생겼다고 생각하십니까? 성경은 그 이유를 바로 인간의 죄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예를 들었던 수많은 장애물들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가장 크고 가장 높은 장애물인 죄의 장애물을 뛰어넘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믿는사람은 누구든지 최대의 장애물인 죄를 뛰어넘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믿어 죄의 장애물을 뛰어넘은 사람들에게는 그 어떠한 장애물도 더 이상 장애물일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주변에 수많은 장애물을 뛰어넘지 못하여 신음하고 절망하는 사람들을 붙잡고 함께 장애물을 뛰어넘게 해줄수 있게 됩니다.

 

저는 모든 성도님들이 인생의 길목마다 놓여있는 그 어떠한 장애물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힙입어 언제나 뛰어넘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장애물 앞에서 절망하는 내 형제자매들에게 장애물을 뛰어넘게 하는 장대의 역할을 하는 복된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다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았지만 결국 여러가지 크고 높은 장애물 때문에 참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과 더 멀어진 삶을 살다가 죄 가운데서 죽어가는 안타까운 모습들을 보았습니다.

 

저희들 역시 여러가지 장애물들이 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깨닫고 가장 큰 장애물인 죄의 장애물을 뛰어넘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비록 삶의 길목 마다 크고 작은 장애물들이 여전히 저희들을 힘들게 하지만 십자가의 은혜를 늘 기억하며 장애물을 더 이상 장애물로 여기지 아니하고 우리를 성숙하게 하시려는 훈련의 도구로 받아들이게 하여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수많은 장애물들을 넘지못하여 신음하는 내 형제자매들을 위로하고 함께 뛰어넘을수 있도록 격려하고 돕는 삶을 살게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내가 그인 줄 /8:21-30

2014-04-22 14:53:24

 

요즘은 태평양을 건너가는 장장 열 몇 시간의 장거리 비행도 흔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아주 드물기는 하지만 비행기 안에서 응급환자가 발생하는 경우도 생기는데, 환자 자신에게나 승무원들에게나 다들 난감한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한 사람 때문에 비행기를 되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고, 결국 할 수 있는 방법은 도착지 공항에 구급차를 대기시켜 달라고 요청하는 동시에 승객들 가운데 혹시 의사가 있으면 도와달라고 기내방송으로 찾아보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만일 그 비행기 안에 마침 의사가 있다면 그 환자로서는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기는 합니다.

응급환자가 발생했다는 방송을 듣고 누군가가 "내가 의사입니다."라고 나설 때 무슨 '의사 자격증' 따위를 가지고 있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즉 그런 경우에 환자의 생명은 순전히 '그 사람이 의사'라는 사실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이것은 '죄인을 치료해 주는 의원'(9:12-13)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그것이 바로 본문 24절 하반절에서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라고 선포하신 말씀입니다.

죄인의 생사여부는 순전히 '예수님'''이신 줄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이 한 가지 사실에 100퍼센트가 다 걸려 있다고 단언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예수님은 '누구'이십니까?

오늘 종려주일에 저는 예수님께서 친히 선포하신 또 하나의 위대한 '자기선언'을 통하여 원래 죽을 수밖에 없었던 죄인이 영생의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어떻게 믿고 고백해야만 하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예수님은 '화육강세'하셨으며 또한 '부활승천'하신 성자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본문 21절부터 24절에 "21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22유대인들이 가로되 저가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하니 저가 자결하려는가 23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24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고 기록했습니다.

 

지난 주일에 살펴보았던 바로 앞의 사건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대상으로 당신의 참 메시아 되심에 대한 '증거'들을 보여 주셨지만 여기서는 22절에 나오는 대로 그 청중이 "유대인들"로 바뀌고 있습니다.

그 설교의 첫마디는 "내가 가리니"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비록 여기서 그 '가시는 목적지'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그 곳이 어디인지는 요한복음의 다른 구절들을 통해서 명백히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733절과 34절에서는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고 하셨고, 133절에는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라고 기록되었으며, 1610절과 17절에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즉 예수님께서 지금 가신다고 하신 행선지는 바로 '성부 하나님이 계신 곳'이 분명합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가리니"라는 주님의 말씀은 당신께서 십자가 수난을 당하신 후에 '부활 승천'하실 것을 예언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반면에 지금 그 말씀을 듣고 있는 유대인들을 향해서는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라고 하셨습니다.

통상적으로 생각한다면 '너희가 나를 찾지 않으면 죄 가운데 죽을 수밖에 없다.'라고 해야 될 것 같은데, 그렇지 않고 '너희가 나를 찾다가 죽는다.'라고 말씀하신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은 바로 '너무 늦은 때'에야 비로소 예수님을 찾는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미 '은혜 받을 만한 때가 다 지나간 후'에 헛수고를 하는 것입니다.

 

그처럼 예수님을 헛되이 찾거나 심판날이 되어서야 찾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처럼 예수님을 불신한 사람에게는 오직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는 딱 한 가지 필연적인 결과만 남아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단순히 육체적 사망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영원히 갈라지는 '영벌의 죽음'입니다.

 

바로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고 이어서 하신 말씀이 그 뜻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가시는 '아버지의 집'은 요한복음 143절에 의하면 나중에 예수님께서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말씀하신 곳입니다.

 

다시 말해서 천당은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는 자를 데려다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신 장소인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끝까지 믿지 않고 그 결과 '죄 가운데 죽는 자'들은 그 곳에 결코 '오지 못하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그런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유대인들은 그 뜻을 깨닫지 못하고 "저가 자결하려는가"라고 저희들끼리 쑥덕거렸습니다.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9:6)는 말씀을 따라서 유대인들은 자살이 오로지 '저주의 죽음'인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저가 자결하려는가"라는 유대인들의 말은 '만일 당신이 자살을 해서 지옥으로 간다면 당연히 우리도 그 곳으로는 갈 수 없겠지.'라는 조소의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향하여 "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이라고 하시면서 "너희는 아래서 났고"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라고 되받아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너희들이야말로 세상에 속하였으며 원래 지옥으로 내려갈 자들이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반면에 "나는 위에서 났으며"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기원, 예수님의 본적을 스스로 밝히신 말씀입니다.

즉 당신은 어디까지나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이시며 '성자 하나님'이라고 자기선언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고 결정적인 선언을 하셨습니다.

여기서 "내가 그인 줄"이라는 말씀은 헬라어 원어로 'oti ego eimi'(호티 에고 에이미)로서 영어로 직역하자면 'that I AM'으로 번역되는 말입니다.

신약에서 이 '에고 에이미'는 구약에서 '여호와' '스스로 있는 자'라는 말과 동격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출애굽기 314절 하반절에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라는 말씀의 영어 번역을 보면 "I AM has sent me to you"라고 되어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간단히 말하자면, 예수님께서 지금 "내가 그인 줄"이라고 하시는 말씀은 바로 성부 하나님의 자기선언과 똑같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예수님은 곧 '위에서 나서 세상으로 찾아와' 주셨으며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신 까닭에 하늘로 돌아가신' '성자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사실, 즉 예수님은 '화육강세'하셨으며 '부활승천'하신 성자이심을 믿어야만 합니다.

비록 33년 동안 육신의 몸을 입고 살기는 하셨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결국 돌아가셔야 할 행선지가 어디인지를 시종일관 정확하게 알고 계셨습니다.

그 곳은 애매모호한 '저 세상'이나 추상적인 '다른 세상'이 아니라 틀림없이 실존하고 있는 '하늘나라'였습니다.

그러므로 천당이 있다는 사실에 대한 가장 확실한 최고의 증인은 바로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그처럼 애당초 '위에서 나시고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자'이신 예수님께서 도대체 왜 이 세상으로 오셨습니까?

그것은 원래 '아래서 나서 지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죄인들을 구원하여 그 '하늘 아버지 집'으로 데려가 주시기 위함입니다.

지금 부활승천하신 이유도 바로 그 천당에 우리의 '거할 곳'을 예비해 두시려고 먼저 가 계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당신 혼자만 하늘나라로 올라갔다가 내려왔다가 하시는 분이 아니라, '내가 그인 줄'을 믿는 모든 성도들 역시 저 하늘나라로 영접하여 영원히 같이 살게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정말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그러니 예수님이 바로 이런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것조차 믿지 않는 자들은 그 '불신앙의 죄 가운데서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성자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큰 사랑으로써 화육강세해 주시고 이제 부활승천하셔서 장차 저 '하늘 아버지의 집'으로 우리까지 다 초청해 주실 이 예수님이 실로 '그인 줄'을 확실히 믿고 소망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예수님은 '구원의 특별계시'인 동시에 '구속사의 완성자'가 되신 구세주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25절 이하 29절의 말씀에 "25저희가 말하되 네가 누구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 26내가 너희를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게 말하노라 하시되 27저희는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더라 28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29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은 이제 "네가 누구냐"라고 또다시 반문했습니다.

이 말은 '지금 세상에 속하지 않고 위에서 왔다고 말하는 당신의 정체가 도대체 뭐냐?'라고 대놓고 추궁한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고 대답하셨는데, 이 말씀은 신약에서 가장 해석이 까다롭고 많은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 구절들 중에 하나입니다.

여러 가지 해석들 중에 대표적인 것 세 가지만을 들자면, 우선 '내가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해 오지 않았느냐?'라는 번역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오래 전부터 이미 당신이 누구이신지에 대하여 명백히 공포하셨다는 사실을 천명하는 말씀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혹은 '내가 너희들에게 말해 줄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번역하는 성경도 있는데, 이것은 '어차피 너희들은 믿지도 않을 것이니 대답해 줄 가치조차 없다.'는 의미로 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이 말씀을 '나는 처음부터 있는 자라고 너희에게 말해 온 자이다.'라고 해석하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으로 보입니다.

즉 예수님은 '네가 누구냐?'라는 질문에 대하여 '나는 태초부터 존재하고 있는 자이다.'라고 당신의 '선재성'을 공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앞에서 '위에서 난 자'라고 당신의 '신적 기원'을 선포하신 말씀과 문맥상으로도 잘 연결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성자 하나님'인 까닭에 또한 '영원 전부터 자존하고 계시는 자'이시기도 한 것입니다.

 

그런 후에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라고 하셨습니다.

앞의 바리새인처럼 예수님을 '육체를 따라서만 판단'하고 여기서의 유대인들처럼 예수님의 말씀에 꼬투리만 계속 잡으려 하는 자들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말하고 판단하실 것' 즉 심판을 내리실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장차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하실 일이고 지금 당장은 오로지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게 말하노라"고 하셨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 다시 말해서 당신을 보내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온 세상에 전하기 위하여 초림하신 것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을 가리켜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직역하자면 '나를 보내신 이는 진리이시매'라는 말입니다.

그처럼 본성 자체가 '진리'이신 성부 하나님의 계시를 그대로 전달하시는 분이신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당신 스스로를 가리켜서도 "내가 곧 진리요"(14:6)라고 선포하셨으며, 장차 당신께서 부활승천하신 후에 보내실 성령을 가리켜서도 "저는 진리의 영이라"(14:17)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세상에게" 즉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에게 이르기까지 온 세상 사람들에게 '진리의 말씀',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기 위하여 친히 이 땅에까지 찾아오신 '특별계시' 바로 그 자체이셨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그 예수님의 말씀이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나를 보내신 이는 진리 되신 성부 하나님이시다.'라고 말씀하고 계셨지만, 그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보내신 분이 하나님이신 줄'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아직도 '내가 그인 줄'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분'이신 줄을 믿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또다시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리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여기서 '들다'라는 말은 '높이 들다'라는 뜻의 단어로서 사도행전 233절의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라는 구절이나 사도행전 531절의 "(하나님이)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는 구절 등에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예수님을 '들고 있는 자''너희' 즉 유대인들이므로 이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게 됨을 가리키는 말씀임이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처럼 당신께서 들리신 후에 "(너희는) 내가 그인 줄 알 고"(you will know that I AM) 또한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끝까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십자가 사건 이후에는 모든 사람들이 다 예수님을 믿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 십자가 사건이 곧 예수님께서 '성부께서 가르치신 대로 말씀하신 사실' '스스로 메시아라고 증거하신 사실'을 공적으로 확증해 주는 최고의 하이라이트가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높이 달리시게 된 의미를 바로 깨닫는 것이 곧 예수님을 제대로 아는 것과 직결되는 것이며, 십자가를 통해 명백히 선포된 이 사실을 믿느냐 안 믿느냐 하는 것이 나중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온 세상 사람들을 '판단'하실 때에 최종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장차 당하실 그 고난의 십자가 사역을 두고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실행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기뻐하시는 일'이란 요한복음 640절에서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고 밝혀 주시는 그대로 간단히 말하자면 곧 '죄인 구원'입니다.

그리고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이 구속사역이야말로 성부께서 계획하시고 성자께서 성취하심으로써 '함께 행하시는' 가장 위대한 사역인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곧 '구원계시의 선포자'이신 동시에 '구속사역의 완성자'이시라는 사실을 두고서 '내가 그인 줄 믿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요한복음 11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한 대로, 예수님은 '처음부터 말하여 온 자' 즉 영원 전부터 존재하면서 말씀하고 계시는 '로고스' 그 자체이십니다.

 

그런 까닭에 특히 '구원의 계시'에 있어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라고 선포하신 그대로 그야말로 유일무이한 존재이십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사람에게 직접 전해 주시는 '특별계시' 그 자체이신 까닭에 예수님만큼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정확하게 세상에 알려 주시는 분은 다시없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은 그러한 구원 계획 곧 '여자에게서 난 후손이 사단의 머리를 밟을 것'이라고 약속하신 예언을 실천하러 오신 분이시며 그것을 완성하고야 마신 분이시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시기 직전에 "다 이루었다"라는 위대한 선언을 하실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 '죄인 구원'이라는 최고의 사명을 가지고 이 세상에까지 찾아와 주셨으며 그것을 성취해 주신 실로 고마운 구세주라는 사실을 저와 여러분은 '인자를 든 후에' 반드시 깨달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실로 '예수 이름 외에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결코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는 것'이 명백합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까지 보내 주신 후에 그것이 모자라서 석가모니나 마호메트나 공자도 같이 보내셔서 죄인 구원을 위하여 '협동'하도록 하셨을 리가 만무하지 않습니까?

구원에 관한 한 모든 것이 다 예수님 한 분일 뿐입니다.

 

구원의 근원과 계시, 구원의 사역과 완성 모두 다 오직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졌을 뿐인 것입니다.

태초부터 '구원의 특별계시'가 되셨고 십자가에 높이 달리심으로써 그 '구원사역의 완성자'가 되어 주신 이 예수님이 진정 '그인 줄', 이 예수님만이 유일한 '나의 구세주'이심을 또한 믿고 고백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본문의 마지막 절인 30절에 "30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곧 이어지는 31절 이하 59절까지의 말씀에 보면 그 믿음이 다 지속되지는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의 '믿더라'는 동사가 '동작의 시작'을 의미하는 '부정과거형'이 사용되고 있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그들의 믿음이라는 것은 순전히 즉흥적이며 일시적인 것에 그치고 말았으며, 그 결과 그 자리에 있던 유대인들 대부분은 결국에 가서는 다 '죄 가운데 죽고' 말았던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죄 중에서 가장 극악한 죄는 바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죄'이며, 그들은 끝내 '예수님이 그인 줄'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히브리서 927절에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모든 사람은 어차피 죽게 되어 있으며 끝내 '최후 심판'의 자리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사람들은 온갖 소리들을 늘어놓을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은 믿지 않았지만 하늘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양심을 지키며 살았습니다." - 예수님께서 그런 사람에게 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까?

 

"너희가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저는 불교 신자였지만 기독교도 서로 인정하면서 살았습니다." - 예수님께서 그런 종교인에게 지금 미리 경고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희가 아무리 종교 간의 화합을 이룬다 해도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심지어는 "저는 종교도 없고 신의 존재도 믿지 않았지만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은 좋은 교훈으로 받아들이면서 그대로 살려고 노력했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처럼 자기 딴에는 논리적으로 자신을 합리화시키려는 자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엄중히 선포하시는 말씀은 똑같습니다.

"너희가 그 무슨 변명과 핑계들을 늘어놓아도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예수님의 이 명백하고도 단호한 선언에 대하여 예외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온 세상에 단 한 명도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반대는 곧 '내가 그인 줄 믿으면 살리라'가 아니겠습니까?

아까 서론에서 예를 든 비행기 안의 상황이 실제로 일어났을 때에 그 환자 편에서 스스로 의사라고 하면서 자기를 치료해 주겠다고 찾아온 사람을 의심할 사람은 아마 단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그 의사라는 사람을 믿지 못하고 그의 자원 치료를 거부한다면 자신은 공항에 도착해서 구급차로 옮겨지기도 전에 죽게 될 위험이 훨씬 더 크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결국 환자는 그 사람이 스스로 의사라고 주장하는 말만 듣고 그대로 '믿으면 살고' '안 믿으면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장망성에서 죄로 인하여 죽어 가고 있는 죄인을 살려 주시려고 친히 이 세상에까지 찾아와 주신 예수님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지 않겠습니까?

이 예수님은 지극히 높으신 '성자 하나님'이시면서도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해 주시는 구세주'이시라고 믿으면 살고 안 믿으면 그대로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927절에 곧 이어지는 28절에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당신이 그 분이신 줄을 믿지 않는 자들은 '심판'하시기 위함이지만, '자기를 바라는 자' 즉 예수님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죄인의 구주'이심을 믿고 기다리는 자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오시는 것입니다.

 

원래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죄인에게 이 얼마나 쉽고 간단하며 그래서 고맙기 짝이 없는 일입니까?

우리는 그저 '예수님이 그이신 줄'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번 수난주간을 통하여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화육강세하셨고 다시 승천하신 성자 하나님'이시며 또한 '태초부터 구원의 말씀이셨고 끝내 그 구원의 완성자가 되신 구세주'이심을 더욱 확실히 알고 믿고 고백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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