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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요한복음 설교 모음

요한복음 8:1 - 11절 설교 모음 (간음한 여인설교)

by Jessi J 2023. 8.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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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음한 여인 /8:1-11/ 이동원목사

2014-11-29 14:58:34

 

청년 시절 저의 생각의 세계에 깊은 영향을 남긴 책의 하나가 유대인 철학자인 말틴 부버(Martin Buber)의 책 나와 너였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오늘날의 대부분의 인간관계를 나와 그것”(I-it)의 관계라고 지적합니다.

 

나는 나의 목적 달성을 위해서만 너를 만나고 너를 이용하고 너를 버리는 관계가 바로 나와 그것의 관계, 너를 물격화하는 관계라는 말입니다. 그는 진정한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나와 그것의 관계가 아닌 나와 너”(I-Thou)의 인격적 관계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나는 너 때문에 존재할 수 있고 나는 너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자각으로 만나는 인격과 인격의 만남, 이런 만남을 그는 나와 너의 관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말틴 부버의 자서전을 쓴 작가 머리스 프리드먼(Maurice Friedman)이 부버를 늘 우편과 전화로 만나다가 얼굴과 얼굴을 맞대게 되었을 때 부버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당신이 내게 대한 책을 쓰는 사람이기에 당신을 이렇게 대한다고 오해하지 말아주십시오. 당신은 다만 하나의 인간으로 내게 소중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마틴 부버는 너무나 책을 좋아해서 책 없이는 그냥 죽을 것 같다는 고백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그런 그가 그러나 책과 인간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그는 책이 아닌 인간을 선택하겠다고 말합니다.

 

내가 몇 일씩 방안에 틀어박혀 문을 닫고 책을 읽는 것은 축복이지만 그것은 내가 다시 문을 열고 나가 누군가를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말틴 부버는 유대인으로서 처음에 시온주의 운동에 헌신했지만 나중에 유대인들이 아랍인들을 거칠게 대하는 모습을 보고 시온주의 운동을 떠나 유대인과 아랍인의 대화 그리고 평화 공존을 위해 헌신합니다.

 

그 결과로 그는 많은 동족 유대인들의 미움을 받았지만 그는 그를 미워하는 모든 사람들을 진지하고 정성스럽게 대했다고 합니다. 그는 유명한 벤 구리온 수상과도 정치적인 입장의 차이로 극심한 갈등을 빚었는데 부버가 85세 생일을 맞았을때 벤구리온 수상은 그에게 유명한 축하 전문을 보냈다고 합니다.

 

나는 당신을 반대할 수밖에 없오. 그러나 당신을 존경하오”(I oppose you. I honor you) 그가 이렇게 사람을 존중하는 일생을 산 이유에 대하여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하늘을 가르키며 우리 모두--~‘영원하신 당신’(Eternal-Thou)의 모습대로 지어진 존재이기 때문이지요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간음의 죄를 짓고 끌려온 여인이 돌로 쳐 죽임을 당할 위기에 처했을 때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과 다르게 여인을 맞아주신 주님의 아름다운 모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무슨 죄를 지었느냐와 상관없이 그 녀는 여전히 소중한 하나님의 작품이요, 예수님의 VIP였기 때문입니다.

*과연, 간음하다 잡혀온 이 여인의 사건을 통해서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1.인간 모두가 죄인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결코 죄를 미화하거나 죄를 부인하지 않습니다. 본문에서도 이 여인의 죄가 돌을 맞아 마땅하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전달하고자 하신 진리가 무엇입니까?

 

죄에서 자유로운 인간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모세는 율법에 이런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5)라는 질문을 받으시고 몸을 굽히사 땅에 글을 쓰시던 순간이야 말로 시계 바늘이 멎을 만큼 긴장된 침묵의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만일 그가 돌로 치지 말라고 하시면 그는 모세의 율법을 부인하는 사람이 될 것이고, 만일 그가 돌로 치라고 하시면 그가 친히 가르치신 사랑을 부인하는 사람으로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긴장된 순간 그는 몸을 굽히시고 땅에 글을 쓰고 계십니다.

 

무슨 글을 쓰고 계셨을까요? 이 대목에서는 순전히 상상적이 될수 밖에 없지만 어떤 학자는 아마도 예수께서 돌을 들고 있는 자들의 죄목을 쓰고 계시지 않으셨을까 추측하기도 합니다. 분명한 사실은 9절의 증언처럼 그들은 이 말씀에 양심의 가책을 받았고 한 사람 한 사람씩 자리를 떠났다고 기록합니다.

 

9절은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그랬다고 기록합니다. 한 설교 가는 그래도 이 시대의 사람들은 순진한데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그 자리를 떠났다는 것은 그들의 죄를 시인한 것이 아닙니까? 만일 이 사건이 오늘 이 시대에 일어났더라면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시침 딱 떼고 돌을 들어 이 여인을 쳤을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사람들이 당연한 자신의 죄를 묵과하고 다른 사람의 죄를 지적하는 일에만 열을 올리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우리의 타락한 성품 안에 자리 잡은 두 가지의 본능-곧 공격 본능과 방어 본능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 본능을 사용하여 우리는 남의 죄를 확대하고 자기 죄는 축소하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자기 죄는 별 죄가 아니고, 남의 죄만 죽을죄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발생하는 흥미로운 현상을 사도 야고보는 이렇게 고발합니다.

 

2:10-11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나니

 

이런 광경을 연상해 보십시오. 한 감옥의 방에 수감된 두 죄수가 있는데 한 사람은 간음죄로, 또 한사람은 살인죄로 들어 왔습니다. 그런데 살인죄인이 간음죄인보고 어떻게 그렇게 연약한 어린 여인을 건드리느냐고--네가 인간이냐고 비난합니다.

 

그랬더니 이번엔 간음죄인이 살인죄인보고 어떻게 넌 그렇게 힘없는 노인의 목숨을 빼앗느냐고--네가 인간이냐고 비난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것이 바로 이웃의 죄를 비난하면서 자기 죄를 보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이라고 지적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성경이 증언하는 그대로의 인생-그것이 바로 우리라는 것입니다. 바로 당신과 내가 간음한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2.예수 안에만 용서가 있음을 선언하십니다.

 

이 여인을 정죄하던 무리들이 자리를 다 떠난 후 예수께서 이 여인에게 선언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11)입니다. “내가 너를 용서한다는 말입니다. 도대체 그가 누구이시기에 이 선언이 가능할 수 있으셨을까요?

 

유대인들은 오래 동안 용서는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이라고 믿어 왔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2장에 친구 네 명에게 들것에 실리어 예수님 앞에 나아온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선언하실 때 거기 있던 서기관들의 반응이 무엇이었습니까?

 

2:7입니다.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분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그들의 말이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이 몰랐던 것이 있었습니다. 무엇을 몰랐습니까? “예수가 하나님이신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사실 사도 요한이 요한 복음서에서 증언하려고 한 핵심 선언의 하나가 바로 예수의 신성-곧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는 유달리 예수께서 내가’(ego-ego eimi)라는 말이 자주 사용됩니다.

 

성경학자들은 이 표현이 바로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자기 계시 선언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지금 하나님으로서 이 여인에게 용서를 선언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더욱 이 예수님은 잠시 후 이 여인의 죄와 인류의 죄를 담당하고 십자가로 가실 분이 아니십니까? 실제로 요한복음이 증언하는 이 예수님은 처음부터 우리의 구원을 위해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구속자이신 예수님이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한1:14) 그는 바로 우리의 죄를 대신 하여 속죄 양으로 희생의 제물이 되시고자 오신 분이었다고 증거 되지 않았습니까?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한1:29,36) 그래서 한 신학자는 예수께서 이 여인에게 내가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라고 말씀하시는 순간 그는 골고다 언덕 십자가에 달리신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시며 이 선언을 하고 계셨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롬8:1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그런데 이 대목에서 기독교 교리에 민감하신 어떤 분들은 아마 아직 이 여인의 회개의 증거도 없는데 어떻게 예수께서 용서를 선언하실 수 있느냐고 물으실 분이 있을지 모릅니다. 타당한 질문입니다. 회개는 언제나 용서의 조건입니다. 그러나 회개의 모습은 다양할 수가 있습니다.

 

나는 이 여인이 사람들이 다 떠나간 후 도망가지 않고 예수님 앞에 엎드려 있는 것-바로 그 모습이 회개의 모습이요, 그 엎드림의 자리가 이 여인의 회개의 자리였다고 믿습니다. 예수님의 지적을 받고 자취를 감춘 많은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은 느꼈으나 자신들의 인생을 돌이킬 생각은 없었던 것입니다.

 

잘못했습니다.”-이렇게 말할 용기도 없거든 그냥 그 자리에 엎드리십시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하십시오. “주님, 정말 죄송합니다. 처분만 기다립니다. 하라는 대로 하겠습니다.” 그 마음에 회개가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이 회개입니다.

 

그런 마음의 찢어짐, 상한 마음의 토해냄은 입술의 고백이상으로 중요한 회개의 증거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51:17)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런 자들에게 주님은 지금도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

 

3.용서 받은 자에게 새 삶을 격려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용서를 선언하시는 것만으로 이 여인을 돌려보내시지 않았습니다. 뭐라고 덧 붙여 말씀하셨습니까?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그는 그녀의 용서 받음의 증거로 새로운 삶을 격려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죄 사함은 구원의 소극적 은총에 불과 합니다. 구원의 적극적인 은총은 새 생활의 출발인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용서 받음은 이제부터 새 삶을 살기 위함인 것입니다. 복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우리가 용서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예수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 죽으심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새로운 인생의 걸음을 시작할 수 있음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부활하시어 우리를 새 길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이어지는 요한8:12의 말씀을 읽어 보십시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그렇습니다. 새 삶은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입니다. 이제 그 분만 바라보고 그 분만 따라가시면 됩니다.

 

그러면 다시 어둠을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문제는 그 빛을 등지시는 일입니다. 빛이신 주님에게서 시선을 떼지 마십시오. 그분을 바라보십시오. 날마다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그 빛 안에 머무시는 것을 최고의 즐거움으로 삼으십시오.

 

유명한 화가 렘브란트가 그린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의 성화(그림 참고)를 보면 따뜻한 빛이 한 가운데 엎드린 여인을 둘러 비추고 있습니다.

 

그 빛은 너무나 환하고 밝고 따뜻합니다. 바로 이 빛 안에서 그녀는 용서를 경험하고 새 인생의 출발을 경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여인의 삶을 지켜보는 또 다른 용서 받은 사람들의 따뜻한 시선과 함께 이제 이 여인은 일어서서 새 인생의 길을 걸어가게 된 것입니다.

 

KAL기를 타고 미국 뉴욕에 가면 뉴욕 케네디 공항에 내립니다. 그런데 뉴욕에 이 공항 말고 또 하나 공항이 있는데 이 공항을 라과디아 공항이라고 일컫습니다. 본래 라과디아는 오래전 뉴욕 시장이었던 피오레로 라과디아(Fiorello Laguardia)씨의 이름에서 딴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시장을 하기 전에는 즉결 사건을 담당하던 판사이었다고 합니다. 그의 판사 시절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1935년 미국 대공황시의 추운 겨울 한 할머니가 배고파서 빵을 도둑질하다가 체포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할머니의 딸은 아파 누웠고, 사위는 도망가고 너무 배고파하는 두 손자를 보고 할 수 없이 빵을 훔쳤다는 죄목이었습니다. 라과디아 판사는 10불이나 혹은 10일간의 옥살이 벌금형을 내리면서 이렇게 선고문을 읽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노인의 범죄에는 나도 상당한 책임이 있습니다. 이렇게 불쌍한 노인이 먹지 못하고 거리를 방황하는 동안 나는 너무나 잘 먹고 잘 살았습니다. 그래서 이 10불은 제가 내도록 판결을 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중절모자를 벗어 10불을 넣어 법정 서기(Bailiff)에게 주면서 말을 이어갔다고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여기 계신 마을 분들도 무죄하지 않다고 판단되어 모두에게 50센트 이상의 벌금을 선고하는 바입니다. 저의 지불로 피고는 벌금을 해결하지만 여러분의 벌금은 이 분의 새로운 삶을 격려하게 될 것입니다.”고 선고를 했답니다.

 

법정에 있던 분들은 이 명 판결문을 듣고 모두 자리에서 일어서 라과디아 판사에게 경의를 표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날 이 노인은 당시로는 적지 않은 액수인 $47,50을 들고 눈물을 글썽이며 법정을 떠났다고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용서가 그런 용서였음을 아십니까?

 

그렇다면 이 용서를 체험하신 여러분, 아직도 이런 주님의 용서를 알지 못하고 어둠 속에 거하는 이웃들에게 책임을 느끼시겠습니까? 그들에게 주님의 복음을 전해 주시겠습니까?

 

그리고 이제 자신의 몸으로 죄를 대신하고 오늘 이 성경의 여인에게 용서를 선언하신 바로 그 동일하신 주님께서 당신의 이웃들을 소중한 VIP로 기다리고 계시다고 말씀해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주님 안에만 참된 용서가 있다고, 주님 안에만 새 삶이 있다고 말입니다.

 

 

 

 

 

땅에 쓴 글씨 /8:1-11/ 곽선희 목사

2014-11-27 08:29:16

 

어떤 목사님께서 아침 일찍 차를 몰고 어딘가 좀 급히 가시게 되었습니다. 길을 나섰더니 어떤 차 하나가 뒤에서 쫓아오더니 옆으로 아주 위험하게 난폭 운전을 하면서 앞질러 가는 겁니다. 목사님이 화가 났습니다.

 

참다못해서 목사님은 속도를 더 내서 그 차를 따라가서 앞질러서 딱 가로막고 차를 세웠습니다. 차 문을 열고 나와서 그 사람을 향해서 ", 너 나와" 하고 소리를 쳤는데 나올 때 보니까 자기 교회 집사님이더랍니다. 그래서 아주 큰 부끄러움을 당했다고……. 본인한테서 들었습니다.

 

일생동안 잊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여러분, 차를 운전하시지요? 저도 수십 년 동안 차를 운전합니다만 차 운전을 가만히 보면 이 속에 철학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도사가 돼야 됩니다. 여러 가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만 우선 운전자는 모든 사람을 다 수용하는 성현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사람 있고, 저런 사람 있고, 바쁜 사람 있고, 급한 사람 있고, 못된 사람도 있고 뭐 세상에 별별 사람들이 다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차 운전하고 다닌다고 욕도 많이 먹습니다. 그 이유 없이 그렇게 소리 지르고 가는 사람도 있어요. 거 어떡하겠습니까?

 

그럴 때마다 그러려니 하고 살아야 합니다. 세상은 그저 그렇거니 하고 살아야 합니다. 저들을 내가 가르칠 수도 없고 내가 지도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면 할 수 없는 일이라면 그대로 수용해야 합니다. 이게 철학입니다. 고치지 못할 일이라면 받아들여야 됩니다.

 

바꾸지 못할 일이라면 내가 정정하게 바르게 수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초연하게 큰일을 하는 사람은 작은 일에 너무 신경을 써서는 안 되는 겁니다. 먼 미래를 바라보는 사람은 눈앞에 있는 일에 너무 그렇게 괘념치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 성경에 보면, 인간적으로 아주 짜증나는 나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나쁜 사람들입니다. 아주 짜증나는 아주 고약한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 나타납니다. 요한복음 81절을 우리가 보았습니다만, "감람산으로 가시다." 왜요? 기도하러 가신 거죠. 감람산으로 가서 밤새 기도하셨어요.

 

그리고 아침에 성전에 올라가서 백성들에게 가르칩니다. 이 아름다운 시간, 참으로 성스러운 아침입니다. 성스러운 아침에 이거 웬일입니까? 여기 성경대로 간음하다 붙들린 여자 하나를 사람들이 붙들고 옵니다. 한번 상상을 해 보세요. 그 갈기갈기 찢긴 옷과 그 흐트러진 머리. 이걸 끌고 와서 딱 세워놓고 "이런 여자를 어떻게 할 것입니까?" 하고 물어보는 겁니다.

 

모세의 율법에 분명히 신명기 22장에 보면 이런 사람은 끌어내다 돌로 쳐 죽이라고 그랬거든요. 그러니까 '모세의 율법대로 쳐 죽일까요? 말까요?' 이렇게 물어봅니다. 이는 오늘 성경 말씀 그대로 예수를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서라고 6절에 말하고 있습니다.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 이러라."

 

여러분, 질문이라는 게 또 묘합니다. 몰라서 묻는 말이 있지만, 알고 묻는 말이 있습니다. 몰라서 물으면 내가 배우려고 하는 자세이지만 알고 묻는 것은 상대방을 괴롭히는 겁니다. 가끔 질문이라는 그 자체가 상대방 마음을 아주 그야말로 찢어놓는 경우가 있습니다.

 

질문 경영학이라는 책이 있어요. 질문 하나가 대단히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물어보느냐 하면 모세의 율법대로 한다면 쳐 죽여야 합니다. 그러나 당시 로마 사람들의 법은 절대로 사형 집행은 로마에서만 하게 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만일에 '율법대로 쳐 죽여라' 하면 로마의 법을 어기는 것이 되고 또 '죽이지 말라' 하면 율법을 어기는 것이 됩니다. 이게 딜레마입니다.

 

이래도 걸리고 저래도 걸리고. 이런 묘한 질문을 가지고 나와서 예수님을 괴롭히는 겁니다. 어떻게 할까요? 많은 백성이 보는데서 이제 예수님이 어떻게 할까? 이것을 듣고자 합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대답해도 그것으로 예수님을 비하시키고, 괴롭히고, 저렇게 대답해도 예수님은 백성들로부터 비난을 받게 됩니다. 이런 대단히 중요한 위기의 질문을 받게 된 것입니다.

 

, 예수님이 이런 절박한 시간 이런 아주 짜증나는 시간에 어떻게 하셨는가? 오늘 본문에서 보게 됩니다. 이 나쁜 사람들, 이 악의에 찬 사람들, 아니 악의에 찬 사건 앞에서, 이 절박함 앞에서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는가 하는 겁니다.

 

이건 중요한 교훈을 우리에게 줍니다. 몸을 굽혀 땅에 손가락으로 글씨를 썼다. 예수님이 글씨 썼다는 것은 이거 하나 밖에 없습니다. 땅에다가 손가락으로 글씨를 썼다. 이건 Cool down 시키는 겁니다. 지금 사람들이 돌을 들고 막 치려고 하는 시간이거든요. ',' 막 소리를 지르는데 이 격한 마음을 Cool down, 가라앉히는 데는 이게 효과적이에요.

 

땅에다가 글을 써요. 호기심도 있고, 뭐라고 썼나? 왜 저러는가? 사람들은 의아하게 예수님을 보았겠지요. 격한 마음을 일단 가라앉히는 그런 시간이올시다. 여러분, 자세히 생각해 보십시다. 듣는 것과 보는 것을 생각해 보세요. 듣는 것보다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읽을 때 생각하게 됩니다. 보는 것보다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가 가끔 다른 교회 집회를 인도하러 가면 지금 우리 교회와 달리 교회의 한 쪽에다가 커다란 스크린을 만들어 놓고 거기다가 제 얼굴을 크게 비추었어요. 그러고선 나보고 설교하라고 그러면 제가 딱 보고 "이거 끄세요." 그래요. 당장 끄라고. 설교자가 끄라는데 안 끄겠어요? 끄고 나서 말을 합니다.

 

"분명히 잊지 마세요. 보는 것이 많아지면 듣는 것이 없어집니다. 듣는 것이 없어지면 생각하는 것도 없어집니다. 여러분, 여기에 보는 것이 커지면, 보세요. 손을 내가 이렇게 들 면 손이 둘이죠, 스크린 갖다 놓으면 넷이예요. 손 네 개가 왔다 갔다 해. 그 커다란 얼굴도 보다 보면 뭐 잘 생겼니, 못생겼니 그런 것도 있지만 '머리가 많이 빠졌다.

 

오늘 많이 피곤한가보다.' , 뭐 별 생각 다 하게 돼요. 그 보는 것 때문에. 내가 지금 전하는 말씀에 청종하지 못하게 되거든요. 그러니까 다시 말합니다. 보는 것이 많아지면 듣는 것이 적어진다. 그런고로 꺼라. 이렇게 하고 그 다음부터는 안 켜요. 그거 참 생각 많이 해야 됩니다. 여러분, 보는 게 좋은 줄 알지만 보는 동안이 문제가 됩니다.

 

철학적으로 말하면 또 이걸 경험이라고 말하죠. 경험하면 좋겠다. 그런데 내가 직접 경험하고 경험하고 경험하면 몰라집니다. 점점 멍청해지는 거예요. 그 경험에 집착하면서 생각이 없어집니다. 알겠어요? 그래 젊은 사람들이 경험부터 먼저 하니까 사랑이 뭔지를 모르고 살잖아요. 이걸 알아야 돼요. 생각이 먼저라야 하는데, 이게 인간인데. 이게 잘못하는 거거든요.

 

여러분, 우린 걸핏하면 전화로 다 해결하려고 그럽니다. 아니올시다.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이에요? 편지를 쓰세요. 편지 쓰면서 생각하고 편지를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짧은 편지지만 편지를 읽을 때 절절히 우리 마음에 깊이 파고드는 거 아닙니까? 

 

전화 한 통으로 I love you . 이거 가지고는 안 되는 거예요. 그보다는 편지, 이건 생각하게 하니까. 시간을 가지고 생각하게 하거든요. 읽는 것, 이거 중요합니다. 그래서 여전히 책은 중요한 겁니다. 요새 와서 읽는 것이 없어졌어요.

 

전부 그저 화면으로 보고 화면으로 처리하는데 이것이 인간 정신문화를 망가뜨리고 있어요. 읽어야 됩니다.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깊이 생각합니다. 이게 아주 중요한 겁니다. 그래 예수님께서 사람들로 하여금 읽게 만들었어요.

 

땅에다가 글을 썼단 말이에요. 생각하고 반성하고 그리고 냉정을 되찾도록 침착하게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건 중요합니다. 급한 일 일수록 생각을 많이 해야 되요. 중요한 일 일수록 더 많은 시간을 생각해야 하고, 우리가 기도하고 침착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그 말이죠.

 

19세기 영국의 지성을 대표하고 있는 존 러벅(John Lubbock)이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인류학자이면서 곤충 학자이었는데 그의 책 가운데에 인생에 관한 17일간의 성찰이라는 재미있는 책이 있습니다. 17일간 동안 깊이 성찰을 해 보았는데 그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역시 인간은 관계 기술이 있어야 한다. 관계, 이 인간의 관계 속에서 우린 깊이 생각해야 되는데 그 원칙은 평등의식이다. 죽음은 사람을 평등하게 만든다. 여러분, 평등합니다. 언젠가는 다 평등합니다.

 

요새 그 돌아가는 유행어 아시죠? 평등시리즈. 50이 넘으면 용모의 평등. 뭐 그 여자가 그 여자예요. 60이 넘으면 지식의 평등. 뭐 안다고 해 봐야 무식하긴 마찬가지예요. 70이 넘으면 재산의 평등. 돈 있으나마나 옷은 입어 봐도 맵시가 안 나고 좋은 집에 살아도 허리만 아프고. 재산의 평등입니다.

 

그 다음에 하나 건너뜁시다. 90이 지나면 생사의 평등. 살아있으나 죽은 거다. 죽으나 사나 뭐 거기가 거기요. , 여러분 한 번 더 생각해 보세요. 이 완전한 평등의식에서 사람을 봐야 되요. 누구를 보든지 내가 특별한 사람이 아니요. 저 사람과 나는 같아요. 조금 다른 점이 있는 듯 하나 아니에요.

 

내가 아프면 저도 아파요. 그래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겁니다. 보세요. 이 평등하다고 하는 의식을 기본으로 깔고 생각해야 되요. 뭐 돈 좀 있다고 다를 것 없고, 공부 좀 했다고 다를 것 없고, 뭐 젊었다고 다를 것 없어요. 죽음 앞에서, 죽음은 사람을 평등하게 만들어요. 그런고로 완전한 평등의식으로 사람을 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 두 번째는 현명하게 되기 위해서는 일단 앉아서 경청해야 한다. 뭐니 뭐니 해도 듣는 것보다 좋은 일이 없어요. 인격은 듣는 것으로 결정이 됩니다. 저는 교인들의 신앙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예배시간 빠지지 않고 나와서 그 듣는 자세를 보고 평가한다.

 

여러분, 밖에 나가서 얼마나 선한 일 하는지 직장에서 얼마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사는지는 그 다음 얘기입니다. , 흥미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자리에서 열중해서 집중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먹을 때, 사람이 달라지는 거예요. 그래서 설교란 많이 깨닫게 하고, 많이 느끼게 하고, 많은 지식을 주고 뭐 그거 중요하지 않아요.

 

사람을 변화시키는 거예요. 사람이 변화되는 것은 바로 말씀을 받아들이는 그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경청, 경청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이 없어요. 이보다 더 중요한 효도가 없어요. 이보다 더 훌륭한 인격도 없어요.

 

경청, 거기서 인격의 변화가 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세 번째는 인격이란 바로 인생을 말한다. , 행동을 심으면 습관이 되고, 습관을 심으면 인격이 되고, 인격을 심으면 운명이 된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이 강조하는 게 뭡니까? 행동하기 전에 생각하라. 그리고 경청해라. 내 마음에 들려오는 양심의 소리를 들으라.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보라. 그리고 행동할 것이다. 돌을 던지는 행동이 먼저가 아니에요. 내가 급하게 말해 버리는 것이 아니에요.

 

경청하고 생각하고 그리고 또 한 가지 재밌는 것이 있습니다. 당시에는 글을 읽는 사람이 많지 않았거든요. 저도 어렸을 때에 그런 일 많이 봤어요. 편지가 왔는데 편지를 읽을 수가 없어서 길 가는 나를 붙들고 '편지 읽어주세요' 하는 말 많이 들어 보았어요.

 

여러분, 그런 거 봤어요? 요새야 뭐 글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옛날에는 그게 많았어요. 편지는 왔는데 그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거든요. 그래서 남에게 읽어달라고 하는 것 말입니다. 동네에 편지 읽어 줄 사람이 몇 안 되거든요. 자 이런 때를 생각해 보세요.

 

2,000년 전에, 예수님이 땅에다 글씨를 쓰는데 이 글씨를 볼 사람이 별로 없거든요. 그러니 지성인들만, 글씨를 아는 사람들만 가서 읽어본 거예요. 이 사람들이 지성인이에요. 지성인이 먼저 생각하게 하고 또 집단화된 세력을 분산시키는 거예요.

 

그래서 글씨를 본 사람만 하나씩 보고 가고 한 사람 또 보고 가고 이렇게 분산이 되는 거예요. 그냥 집단화 되어서 와와 소리 지르면 이건 뭔지도 모르고 그냥 큰 위험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하나 개별화하여 분산시켰다는 그 말이에요. 그러니까 집단화된 흥분을 개별적으로 분산시켜서 스스로 반성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참 중요한 사건이에요. , 예수님은 놀라와요. 이렇게 해결했어요. 이렇게 해서 시간을 벌어 놓고서 모두가 다 Cool down 된 다음에 이제 조용히 말씀하십니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져라."

 

여러분, 죄라고 할 때 우리는 남을 심판할 때와 같은 그런 죄만 생각하려고 합니다. 이 사람은 지금 간음죄를 범했어요. 그러면 간음죄는 이 여자가 범했지요. 그러나 살인죄는 저 사람이 범했거든. 거짓말은 내가 했거든요. 위선 죄는 내가 하고 있거든요.

 

죄라고 하면 다 같은 죄죠. 그런데 꼭 이 사람이 지은 죄만을 죄라고 생각하려는 그런 잘못된 우리의 집착이 남을 비판하게 하는 거예요. 저 사람이 말하는 죄는 내게 없어요. 대답할 말이 있어요. 그런 일 없다고. 그러나 그 외의 죄가 많아요. 가끔 저는 중요한 질문을 받습니다.

 

"목사님, 거 많은 어려움을 당하고 계신데, 목회를 어떻게 참고 하십니까?" 그런 얘길 해요. 어떻게 참고 견디냐구요? 난 참는 데는 그렇게 별로 어려움이 없다고. 왜요? 내가 죄인이니까. 아니 죄인보고 죄인이라고 하는데 무슨 말을 하누? 저 사람이 지적하는 그 죄는 내가 없어.

 

그건 아니야. 하지만 다른 면으로는 많잖아요. 그래서 내가 농담 삼아 진담삼아 말합니다. 아 들키지 않은 죄가 얼마나 많이 있는데, 고까짓 하나 가지고 내가 지금 시비를 벌이겠냐고.

 

오늘 말씀에서 이야기하시는 중요한 것은 이겁니다. 죄 없는 자 - 물론 간음죄는 아닐 거예요. 간음하다 붙들린 사람은 이 사람 뿐이에요. 이 자리에서는. 그러나 죄 없는 자라고 할 때, 거기서 빠져나갈 사람은 없습니다. 만약 그 사건과 같은 사건만을 생각한다면 여기에 문제가 있는 거예요. 아니올시다.

 

설사 간음죄 아니라도, 교만죄, 거짓죄, 불경건죄, 이기적인 죄, 얼마든지 다 죄인이지요. 그런고로 오늘 죄 없는 자가 돌을 던져라. 아무도 던질 사람이 없어요. 하나하나 양심에 가책을 받고 다 가버리더라. 그 여자 혼자서 서 있더라. 이거 기가 막힌 이야기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여자는 고독한 여자예요. 참으로 고독한 여자예요. 신명기대로 말하면 간음죄는 두 사람이 한 것 아닙니까. 여 두 사람이 와야 합니다. 어떻게 한 사람만 죄인입니까? 두 사람 다 끌어내다 돌로 던져라 그랬어요. 그랬는데 한 사람만 끌려 온 거예요. 남자는 어디로 도망갔는가 봐요. , 그러면 이 사람만 억울하잖아요.

 

지금 간음죄라고 말하지만 어쩌면 강간죄인지도 몰라. 어떻게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나만 죄를 당해야만 하느냐고 할 말이 많습니다. 당신들은 죄인이 아니냐고 외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 말도 말할 수 없는 그런 사람입니다.

 

김흥식 소장님이 쓰신 책 가운데 우리가 살아가야 할 이유라는 아주 재미있는 교양서적이 있습니다. 그 속에서 그는 이런 유명한 말을 합니다. "실패했을 때에 가장 두려운 것은 실패 자체가 아니고 실패하는 순간 가까웠던 사람들이 다 멀어진다는 것이다.

 

그렇게 좋았던 친구들이 다 가버리고 나 혼자 남는다는 것이다. 그 누구 한 사람만이라도 내 진실을 이해할 수만 있다면 나는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다"라고 말합니다. 오늘 이 여자가 이렇게 불쌍해 졌습니다. 그에게는 위로자가 없습니다.

 

변명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이해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 이 고독한 여인, 이 불쌍한 여인을 이해하고 위로자가 됩니다. 그래서 프레드 러스킨(Fred Luskin)용서라고 하는 책에 보면 이런 명언을 합니다. '사람은 자유가 필요합니다.

 

내 영혼이 자유해야 하는데 자유의 뿌리는 용서에 있다. 남을 용서할 때, 과거로부터 자유할 수 있고 내가 남을 용서할 때 모든 두려움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다.' 모든 두려움, 깊은 곳에는 남을 심판한 그 심판죄가 있다는 거예요. 다 용서하고 나면 자유롭다. 또한 용서하고 나면 미래가 보인다.

 

환하게 미래가 보여요. 미래가 안 보이는 이유는 깊이깊이 들어가 보면 내가 남을 정죄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용서할 때 비로소 내 자신을 바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엄청난 말씀을 하십니다. "너를 정죄하는 자가 없느냐?" "없습니다." 죄 없는 자가 돌을 던지라고 하신 예수님은 돌을 던져야 됩니다. 죄 없는 자니까.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이 귀한 말씀을 가까이 들으세요.

 

"나도, 죄 없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바로 여기에 성육신적인 인카네이션의 의미가 있습니다. 나도 죄 없으나 죄 있는 자처럼 너를 이해하고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 기도하십시다.

 

-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이 아침에도 새로운 음성으로 우리에게 들려주심을 감사합니다.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 앞에 보여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간음하다 붙들려온 여자 앞에 서신 예수님 그리고 조용하게 말씀하시던 주님의 음성을 바로 듣게 해 주시고 바로 그 사건이 내가 당한 사건이고 내가 당하는 사건임을 항상 알게 하셔서 괴롭고 짜증나는 세상이지만 항상 스스로를 살피면서 침착하게 경청하며 주의 뜻을 이루게 하시고 가능하면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 하시던 그 주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감사하며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그 여자만 남았더라 /8:1-11/ 곽선희 목사

2014-11-23 05:38:40

 

본문 성경은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는 이야기이요 또 사건입니다. 이 본문을 읽을 때마다 저는 늘 세 가지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무슨 글씨로 땅에 쓰셨나 하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히브리 말도 있고 헬라 말도 있고 로마 말을 쓰고 있었습니다. 이 복잡한 언어문화 속에서 예수님은 땅에다가 어느 나라 글자로 글을 쓰셨을까? 그리고 무엇이라고 썼을까? 왜 말로 하시지 아니하고 땅에다가 글을 썼을까?

 

그런 궁금한 마음이 있고 또 하나는 간음이라는 것은 혼자 범하는 죄가 아닙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서 간음죄를 짓게 될 것인데 여자는 끌려왔고 남자는 지금 어디있나, 나는 지금 그게 궁금합니다. 레위기 2010절이나 신명기2220절에 보면 남녀를 함께 죽이라 그랬어요.

 

근데 그 남자는 어디 있고 여자만 끌려와서 이렇게 비참한 일을 당하게 됐을까? 또 하나는 예수님께서 이 여자에게 말씀하시기를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마라" 라고 하고 용서하셨는데 이 여자가 나가서 다시 범죄하고 두 번째 붙들려 왔다면 예수님은 그때는 뭐라고 하셨을까? 그것이 궁금합니다. 그것이 알고 싶어요.

 

이것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된 사건입니다. 모름지기 성전마당에서 된 사건입니다. 이 사람들이 이 여자를 끌고 온 것은 오늘 성경에 그 목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고소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책잡아서 올무로 옭아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이같은 사건을 만들었다는 것이지요. 뭐 간음한 여자가 이 사람뿐이겠습니까?

 

문제는 이렇게 함으로써 예수님을 참 난처하게 만들었어요. "돌로 쳐라" 하면은 당시에는 로마가 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는 때입니다. 사형집행권은 반드시 로마 사람에게 있습니다. 로마 사람이 아니고는 누구도 어떤 죄로도 정죄할 수 없고 또한 사형집행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예수님이 "쳐라" 해서 돌로 치는 날이면은 로마의 법을 정면적으로 어긴 것이 되기 때문에 고소거리가 됩니다.

 

반대로 예수님의 자비로운 마음으로 "치지 말라" 하면은 이제 어떻게 되느냐? 모세의 법을 어기는 것이 됩니다. 이런 것은 모세가 쳐죽여라 했거든요. 그런데 예수는 메시아라고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데 이제 "치지 말라" 그러면 '모세의 법을 어긴 사람이요,

 

모세의 법을 거역하라고 가르친 사람이다' 이렇게 이제 모든 사람에게 선전을 할 참이에요. 이래서 예수님과 많은 백성들을 이렇게 이간질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간에 예수님께서는 소중한 기회를 포착하시고 더 소중한 교훈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 전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래도 이때는 사람들이 양심이 있어서 이 말을 듣고 다 하나씩 하나씩 돌아갔다고 했지만은 요새 이런 일이 있다면 저마다 들어서 칠 겁니다. 나는 죄없는 사람이라고 자기 스스로를 증거하기 위해서 열심히 돌로 칠 겁니다. 그러나 이 당시 사람들은 그래도 일말의 양심이 있어서 다들 피해갔다, 하는 그런 얘기입니다.

 

땅에 글을 썼습니다. 왜 썼을까? 그 이유가 있다면 모름지기 심리학적인 것 같습니다. 쿨 다운(cool down) 시키겠다는 것이지요. 라인홀트 니버(Reinhold Niebuhr)의 기도문을 여러분이 잘 아실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고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을 고칠 수 있는 용기를 주시고, 고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냉정함을 주십시오.

 

리하여 고칠 수 있는 것과 고칠 수 없는 것을 식별하는 지혜를 주십시오." 세 가지를 구합니다. 용기, 냉정, 그리고 지혜. Courage, Sincerity, 그리고 Wisdom. 이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오늘 이 시간에 이 냉정이 필요한 시간입니다. 이 사람들은 지금 격분했습니다. 뭐 정신이 없습니다. 분노했습니다. 묻기를 마지 아니했다. 재촉하고 있습니다.

 

군중심리가 발동을 했습니다. 때로 모여서 돌을 들고 막 치려는 순간입니다. 고함을 지르구요. 예수님은 저들을 일단 그 격한 감정을 가라앉히시고 싶었습니다. 흥분된 감정을 냉정하게 되돌아가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밝은 이성과 밝은 양심을 가지고 깊이 생각하게 하시려는 것이올시다. 그것이 필요합니다.

 

아시는 대로 흔히 야만인이란 말이 있습니다. 야만인이 뭡니까? 그 특징이 많이 있겠습니다만은 그 중에 하나가 감정 주도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화가 나면 정신을 못 차려요. 자기 집 재산도 다 때려 부셔. 가문 망신하고 자손 만대에 망신할 짓도 막 하는 것이에요. 이게 야만인이죠. 그 왜 그런 야만인들을 가만히 보면은 그 족속들끼리 싸울 때, 한 번 화가 나면은 모조리 다 죽여버리잖아요. 여러분 이런 말이 있지요. 너 죽고 나 죽자.

 

이게 무슨 말입니까? 최소한도 너죽고 나 살아야지. 너 죽고 나 죽으면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전혀 생각이 없는 이 감정, 폭발하는 감정에 사로잡혀서 행동하는 것, 이게 야만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시간에는 예수님께서는 저들을 Cool down 시키려 합니다. 냉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의과 대학 교수들께서 외과 의사가 될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물었습니다. "이제 의사로서 환자에게 대해서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이겠냐?" 그러니까 어떤 사람은 친절이요, 인간관계요, 또 주사를 잘 놔야되겠고 처방을 잘해야되겠고 뭐, , , 뭐 따로 얘기했어요. 다 들은 후에 교수님은 말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진단이다." Diagnosis, 진단이 먼저요. 사실이 뭐냐 이거예요. 어디까지가 사실이냐. 진실을 찾는 것이 먼저요. 이걸 잃어버리면 안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잠깐 멈추도록 땅에 글씨를 썼어요. 그리하여 자책을 유도하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글을 보는 사람이 많지 않았거든요. 옛날에는 우리 나라에도 좌우간 편지가 왔는데 편지를 못 봐서 이걸 누구에게 가서 읽어달라고 부탁하지 않았어요?

 

그렇듯이 지금은 우리가 다 글을 봅니다만은 글을 못 보는 일이 많거든요. 2000년 전 그 때에는 글 보는 사람 몇 안돼요. 글만 읽으면 그게 지성인이요. 그런고로 땅에 글을 썼어요. 지성인 먼저. 글을 볼 줄 아는 사람 먼저, 와서 보라 이거예요. 아주 중요한 것이에요. 이래서 감정을 바꾸고 지성인 먼저 생각해 보라, 깨달으라는 것이지요.

 

이 문제는 뭐라고 썼을까? 그건 성경에는 없습니다. 많은 사람이 많은 학자들이 생각을 해봅니다만은 대체로 두 가지의 생각을 합니다. 하나는 예수님 말씀하신 것처럼 "죄 없는 자가 돌을 들어 먼저 쳐라" 썼을 것이다.

 

그리고 글 읽는 사람은 먼저 읽고 글 못 읽는 사람들은 자꾸만 재촉을 하게 됐지요. 근데 글 읽는 사람들은 먼저 읽고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가 버리고 글 못 읽는 사람들, 남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말씀을 하신 것 같다, 이렇게 생각도 하고, 또 하나는 예수님께서 죄목을 썼을 것이다.

 

살인, 간음, 도적, 거짓, 위선, 교만, 이렇게 죄목을 쭉 썼을 것이다, 라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여기서 한가지 조심해야 될 것은 이렇게 지금 집단화되어 가지고 있거든요. 감정과 격동이 지금 집단화해서 행동으로 나타나는 때인데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개별화했어요.

 

흩어 놓았어요. 한 사람 한사람 와서 보게 만들었어요. 개별적으로 문제를 처리해야 되요. 집단적인 행동이란 언제든지 크게 잘못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래서 '나 먼저 죄인임을 생각하라' 이거지요. 나 자신을 먼저 생각하라는 것이지요. '내가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인가?' 사건 앞에서 자신을 먼저 살필 줄 알아야 합니다.

 

갈라디아 61절에 보면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앞차가 고장이 났으면 내 차가 어떤가 생각해야 되고, 앞사람이 넘어지는 것을 보았으면 나도 넘어질 것을 생각해야지요. 넘어지는 사람과 나와 상관이 없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되죠. 다른 사람이 실수하는 것을 볼 때 그 사람과 나,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먼저 생각할 줄 알아야죠. 깊이 생각할 문제입니다.

 

나 먼저 생각해야됩니다. Self-examination Chance 예요. 자기 자신을 시험할 때가 됐어요. 남의 실수를 보면서 나 자신을 돌아보고 '내게 그런 실수가 있나 없나', '아니, 나도 그런 실수를 할 수가 있으니까' 하는 문제를 함께 생각할 수 있어야 하겠지요.

 

레마르크라고 하는 사람이 쓴 "서부전선 이상 없다" 아마 보신 분이 많을 겁니다. 영화도 나왔었습니다. 이 소설에 보면 1차 대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전범국인 독일이었습니다. 독일 소년, 아주 어린 소년 일곱명이 전쟁에 나가고 싶어서 자원해서 일곱사람이 전쟁에 나갑니다.

 

3년 동안 이 어린 소년들이 무자비하게 군인으로서 그렇게 용감하게 행동을 하다가 여섯사람이 죽고 한사람이 남는, 뭐 그런 얘기입니다. 그런데 주인공이 한때에 적과 마주서서 총을 쏩니다. 총공격을 합니다. 무자비하게 총을 난사합니다.

 

한참 쏘다 보니까 조용해졌어요. 웬일인가 하고 살펴보았더니 다 죽어버렸어요. 그리고 가서 시체들을 돌아보니까 지금 죽어가는 사람, 비참한 사람, 그 모든 모습을 보면서 거기서 그가 절규를 합니다.

 

"이제 나는 비로소 당신들이 나와 꼭 같은 인간임을 깨달았노라." 너희들이 죽은 것처럼 나도 죽을 수 있고, 당신들에게도 어머니가 있어서 당신들을 보내면서 괴로워했고 지금도 조마조마 기다리고 있고, 당신들에게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나도 있고, 나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소. 당신들도 죽음에 대해 두려워하면서 죽어가는 것을 봅니다.

 

당신들도 용서를 바라는 사람이요 나도 용서받을 사람이요. 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고 절규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이게 클라이맥스입니다.

 

여러분, 내가 총을 쏘아서 저 사람이 죽었어요. 그 사람과 나와 다릅니까? 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알아야하지 않겠습니까? 누가 누구를 비난합니까? 누가 누구를 비방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까?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현대인에게 결정적인 죄가 이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잃어버렸다는 것이지요. 그뿐이 아닙니다. 잃어버렸다는 사실마저 잊어버렸어요. 아무 생각도 없어요. 뻔뻔해요. 바로 그것이 현대인의 모습입니다. 오늘 이 사람들, 자기 눈에 들보가 있는 줄 모르고 남의 눈에 티를 탓하고 있는 것이에요.

 

언젠가 그런 일이 있었어요. 어떤 여집사님이 제게 찾아와서 뭐 용케 어떻게 알기도 잘알았대요. 어느 집사 어느 집사 어느 집사가 이혼을 했고 어느 집사는 별거생활 하고, 뭐 그러고 비방을 하더라구요. 한참 듣고 나서 저는 이렇게 물어보았습니다.

 

"집사님, 집사님은 결혼생활 하면서 '에이, 이혼해 버리고 말자' 그런 생각 안 해보셨습니까?" 했더니 "몇 번 해 보았지요." "그러면 혼자 살 자신이 없었구만요. 용기가 없었구만요." 얼굴이 파랗게 질리더라구요. 여러분, 누가 누구를 정죄할 거요. 말조심하세요. 감히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어요. 오늘 이걸 알아야됩니다.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 이것이 주님의 말씀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말합니다. 그 유명한 말, Know thyself, 키노시아우터스, 네 자신을 알라. 뭘 알라는 겁니까? 나 자신의 무지함을 알라. 나의 무능을 알라. 내가 지혜가 없음을 알라, 그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한마디 더 하겠습니다. 당신이 죄인임을 알라. 이걸 알아야합니다.

 

16세기에 폴란드의 유명한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라고 있습니다. 여러분 아시는 분입니다. 그가 세상을 떠날 때 자기의 묘비를 자기 자신이 썼습니다.

 

묘비에 뭐라고 썼느냐구요? "하나님이여, 나는 바울이 가졌던 특권을 구하지도 않습니다. 베드로에게 주셨던 능력을 구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 십자가 지실 때 옆에 있었던 강도에게 베푸신 그 긍휼을 구할 뿐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구하고 있습니까?

 

그저 십자가 옆에 있던 강도에게 베푸신 그 긍휼을 주여 나에게 베푸시옵소서. 무슨 말입니까? 나는 저 강도 같은 사람입니다. 이것이 그의 진실한 마지막 유언적인 고백이었습니다. 여기에 귀중한 복음이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아무도 없고 예수님과 이 여자, 여자만 남아있더라구요. 예수님 말씀이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 다시는 죄를 범치말라" 하고 자유하게 해 주었습니다.

 

여러분,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신학적으로는 이것이 인카네이션(Incarnation) 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습니다. 죄가 없으니까 돌로 쳐야지. 그러나 "나도" 이 시간은 예수님이 자기자신을 죄인으로 스스로를 간주하는 시간입니다. 자신이 죄인이 되는 시간입니다. 의인의 권리를 포기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됨을 포기하는 시간입니다. 영적으로 십자가를 진 시간, 죄인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시간입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 여기에 구원이 있습니다. 여기에 놀라운 은총이 있는 것입니다. 깊이 생각해야합니다.

 

이 여자, 이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너무 감격합니다. 그 예수님, 글쎄요. 원래 창녀니까, 간음하다 붙들려온 여자이기에 감히 그렇게는 못했겠지만 예수님의 발에 입을 맞추고 싶고 예수님을 포옹하고 싶었겠죠. 이 감격과 이 고마움, 한 사람을 구원합니다.

 

여러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세요. 지금 이렇게 예루살렘 마당처럼 시끄럽습니다. 모두가 비판하고 모두가 죽여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비판 소리입니까? 죽여라 죽여라 하는 소리예요. 언제까지 이 고함 소리를 들어야 합니까? 당신은 누굽니까?

누가 누구를 비판합니까? 그리스도를 만난 이 여자가 예수님 앞에 홀로 서 있는 것 같이 여러분, 고함을 지르는 그 사람 생각하지 마시고 오돌오돌 떨고 있는 이 여자를 생각하세요. 그것이 바로 내 모습이라고 생각하세요. 그 속에서 나 자신을 발견하세요. 여기에 창조적인 구원의 기회가 있는 것이올시다. 여러분 그 여인만 홀로 남았습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저 예루살렘 성전 마당과 같이 시끄러운 세상에 삽니다. 어느 사이에 군중 속에 서서 우리 또한 고함을 지르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불쌍히 여겨 주시며 이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바꾸어서 정죄받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저 여인을 생각하고 그리고 그리스도를 만난 그 감격에서 새로운 생을 시작하는 그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이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어서 속히 이 모든 비방을 멈추고 새로운 구원의 역사를 창조할 수 있는 저희가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용서받아야 할 죄인 /8:1-11/ 옥한흠목사

2014-11-11 11:00:34

 

(8:1-11)오늘 처음으로 우리 교회에 오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그리고 또 어제 나오시고 오늘 나오신 분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발걸음을 인도해 주신 줄 알고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오늘은 특별히 누가 처음 오셨고 초대되었는지를 알고 싶어서 꽃을 준비를 좀 했습니다. 그런데 꽃 만들어놓은 것이 동이난 것 같은데요. 오늘 처음으로 모시고 왔는데 꽃이 없는 분들 우리 교인들만 손을 한번 들어보세요. 얼마나 되세요. 그 외에는 다 달고 계시네요. 정말 아름답습니다. 진작 그래야 하는데 미처 머리가 돌지를 못해서 그랬습니다.

 

오늘 저하고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면서 여러분의 마음을 좀더 하나님이 활짝 열어 주시고 진리를 깨닫게 해주시기를 기도하는 마음에서 오늘 우리가 다루게 될 하나님의 말씀을 같이 먼저 읽겠습니다.

 

요한복음 81절부터 11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오늘 제목이 용서받아야할 죄인입니다. 거기에 맞추어 말씀을 잘 보세요. 우리가 좀 문학적인 감각이 있다면 이 짧은 스토리 안에 있는 장면을 상상으로 그려보았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이 주변에 모였을 때에 항상 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천국의 진리를 가르쳐 주는 것이었습니다. 천국의 진리를 그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었어요. 예수님의 목적은 병고치는데 있지 않았고, 예수님의 목적은 귀신 쫓는데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목적은 사람들의 요구에 부응해서 그들의 만족을 채워주는데 있지 않았습니다.

 

더 깊은 주님의 뜻이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캄캄한 영혼 속에 허덕이고 헤매는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어 주셔서 깨닫게 하시고 자기를 발견하게 하시고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을 알게 하는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가르치는데 사람들은 유대나라의 지도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율법학자, 바리새파 하는 사람들은 유대나라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종교적인 지도자들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권력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잡아먹지 못해 항상 불을 켜는 사람들이었는데 이들이 예수님을 함정에 끌어넣기 위해서 여자 하나를 데리고 왔습니다.

 

현장에서 부정한 성관계를 하다가 잡힌 여자입니다. 그 당시 유대나라에서는 성경에 의하면 소위 성적인 범죄를 하다가 잡히면 영락없습니다. 유대나라 사람들이 제일 크게 죄로 생각하는 것이 첫째는 우상숭배요, 둘째는 살인이요, 셋째는 성범죄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 가지 죄를 범한 것이 분명하게 드러나기만 하면 무조건 사형입니다. 레위기 20:10, 구약성경을 보면 부정한 관계를 맺는 남녀를 발견하면 둘다 끌어다가 돌로 쳐죽이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동정의 여지를 전혀 주지 않는 엄중한 죄로 다루었습니다. 그러니 현장에서 잡혔으니 전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여자입니다. 남자는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어요. 남자는 발이 빨라 도망을 간 것 같습니다. 여자를 데리고 와서는 예수님을 시험하기 시작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구약에 나와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이런 여자는 돌로 쳐죽이라고 했는데 예수님 당신은 어떻게 하면 좋겠소"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법대로 하시오" 하면 끝날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쳐죽이라고 했으면 쳐죽이시오" 하면 끝나는데 여기 만약 이렇게 대답을 할 때는 예수님이 매우 정치적으로 난처한 입장에 놓여 버립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유대나라가 로마나라에 식민지였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식민지 나라에는 생사를 결정할 수 있는 사형권,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권한은 절대 부여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도 과거에 그랬죠. 죽이고 살리는 것은 일본 정부의 명령대로, 일본 법대로 해야지 한국 사람이 함부로 죽이고 살리는 재판을 하지 못합니다. 재판권을 완전히 빼앗긴 것입니다. 유대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재판권을 빼앗겼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설령 잘못해서 타인을 죽여도 꼭 로마의 허락을 받고 죽여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예수님이 이 시간에 "율법대로 이런 사람은 죽여야 합니다" 말하면 로마의 법을 깨는 모순에 빠지고 정치적으로 말려들게 됩니다. 이것을 노리고 지금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음흉한 마음을 꿰뚫어 보시고는 어떻게 하셨나요? 아무 말씀 안하시고 가만히 땅에 앉아서 글을 쓰셨죠. 우리가 이 장면을 가만히 생각합니다. 어떻게든지 구실을 잡아 올가미를 씌우려고 눈에 불을 켜고 노려보고 있는데 한 분은 지금 대답을 해야 할 입장입니다.

 

5공비리 청문회에 증인으로 나와 있는데 질문하는 사람이 악을 쓰면서 그 사람에게 무엇이라도 하나 찾아내려고 악을 쓰는데 그 비슷한 모습이 우리에게 연상이 되어집니다. 예수님이 땅에 글을 쓰셨어요. 무슨 글을 쓰셨는지 몰라요. 성경에는 아무 이야기가 없습니다.

 

그런데 참 추리를 하기 좋아하는 학자들은 여러가지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도대체 무슨 말로 대답을 할지 몰라서 시간을 벌기 위해 잠깐 앉았다." 이렇게 해석을 합니다만 이것은 말도 안되는 이야기입니다. 시간 벌기 위해 앉은 것이 아닙니다.

 

어떤 학자는 말하기를 "예수님이 이때 앉으신 것은 그 여자를 고발하는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의 죄를 땅에다가 쓰기 위해 앉았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글을 쓰고 계시니까 그들이 보았을 것 아닙니까? "너는 무슨 죄를 범했니?

 

나는 다 안다. 너는 전에는 이런 죄를 범하지 않았느냐?" 하고 쓰셨다는 것입니다. 참 재미있는 상상인 것 같습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글쓰는 것을 보고는 모든 사람들이 멈칫하고는 입을 다물었으니까요. 그리고는 일어나셔서 주님이 말씀하셨어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이 여인을 먼저 돌로 치라"

 

사람들이 아무리 더럽고 부패해도 100% 악한 사람은 없죠. 그래서 1-2%의 양심은 남아있는 것입니다. 비록 그것이 다 찌그러진 자동차 엔진 비슷하지만, 그 기능은 굉장히 희박하지만 그래도 양심이라는 것이 남아서 죄없는 사람이 돌로 쳐 하니까 양심의 가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는 어른들로부터 시작해서 아이들까지 뒤로 빼서 전부 도망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과 여자가 남았습니다. 예수님이 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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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고소하던 자들이 어디 갔느냐?"

"주님, 아무도 없습니다. 다 도망가고 없습니다."

"내가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 가서는 다시는 그런 못된 짓 하지마!"

 

그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여자가 어떤 모습으로, 어떤 표정으로 돌아갔을까요? 이것은 참으로 신비스러운 장면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보는 장면입니다. 왜냐하면 처음에 예수님 믿으라고 하니까 아무 것도 모르고 믿겠다고 들어와서 오늘 간증하는 어느 자매처럼 몇 개월이 지나서

 

'내가 죄인이었구나'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고 나와 같은 죄인을 용서해 주셨다는 것을 알았을 때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 없는 감격과 기쁨을 맛보았죠. 이와 같은 표정이 이 여자의 표정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기쁨, 이런 표정의 모습은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 오늘 제가 여러분들에게 질문을 드립니다. 만약에 우리 모두가 현장에서 간음하다가 잡힌 여자처럼 하나님 앞에 끌려가서 서게 된다면 우리의 운명은 어떻게 됩니까? 피할 수 있는 길이 있나요? 이 현장에서 잡힌 여인은 오늘 이 시대를 살고 있는 모든 사림이요, 저와 여러분입니다.

 

성범죄라는 것은 모든 범죄에 있어서 말기적인 죄입니다. 다시 말하면 말기적인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보세요. 어느 나라든지 망하기 전에 크게 일어나는 범죄가 있다면 성문란입니다. 과거에 소돔과 고모라가 그랬고, 로마가 그랬고, 지금 서구문명이 그렇습니다.

 

어머니가 학교 가는 딸의 가방에 피임약을 넣어주어야 하는 곳이 서구의 모습입니다. 성문란은 어느 시대나 말기현상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더럽고 추한 이 세상을 살고 있는 사람 치고 간접적으로 직접적으로 성문제에 오염되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과거에 정조를 잃었느냐 잃지 않았느냐, 정절을 지켰느냐 지키지 않았느냐 하는 것은 다 쾌쾌묵은 이야기로 다 받아들여집니다. 웬만한 집에는 누구나 VTR을 사가지고는 어디서 빌리든지 구해서 밤에 자녀들 몰래 음란 비디오를 보고 있는 부부들이 늘고 있다는 것도 부인하지 못할 일이요.

 

그렇게 정신없이 VTR을 보고 있는 부모를 자녀들이 모를 리가 있나요. 문틈으로 들여다보고 저게 뭐길래 저렇게 입을 헤벌리고 보고 있나? 그게 뭔지 몰라도 보고 싶어 애를 쓰다가 부모가 며칠 집을 비운 사이 샅샅이 뒤져서 찾아내면 고등학교 아이들이 자기들끼리 모여서 보다가 교사에게 들킨 일이 한 두건인 줄 아십니까?

 

요즘 신문을 보세요. 돈벌기 위해서라면 국민학교 어린이에게도 외설 잡지, 외설 비디오 보여주고 돈벌어서 축재하겠다는 인간들이 점점 더 늘어가고 있습니다. 이들은 악마보다도 더 악한 사람들입니다.

 

자기도 자식을 낳아 기르면서 남의 자식은 망하든지 말든지 돈만 벌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국민학교 근처에 외설 비디오, 외설 만화방을 차려놓고 애들을 유인해서 그 캄캄한 방에서 그런 것을 보여주면서 돈 뜯어내는 인간들, 점점 더 많아지고 요즘의 국산영화는 무조건 벗기기 작전이야. 나는 하나도 아직 안 봤지만. 목사가 봐야 한다면 무슨 영화가 그렇게 잘 벗겼는지 한번 가서 볼려고 그래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우리 모두가 직접 간접으로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과 관계가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이 문제는 이 사회의 운명을 좌우하는 심각한 문제로 대두됩니다.

 

교회가 앞장서서 이 성적문란 문제를 방지하면 이 사회가 살고 이 나라가 살지만 만약에 이것을 조금이라도 묵계하고 동조하는 스타일로 나간다면 이 사회가 드디어 구제불능의 상황에 빠지면 이 나라는 아무리 잘살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정신적으로 썩으면 그 나라는 망합니다.

 

그러므로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자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나요. 있다면 손을 들어보세요. 여러분 중에 내가 돌을 던지겠습니다 하고 나설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느냐 그말입니다. 누구나 다 조그마한 양심은 살아있습니다. 아무도 여자에게 돌을 던지 도망간 이유가 무엇입니까?

 

차이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했어요. 우리가 현장에서 나쁜 짓을 하지 않았지만 이성을 향해서 악한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이미 죄를 범했다고 주님은 말씀합니다.

 

샛별 같은 맑고 밝은 눈으로 우리를 꿰뚫어 보시는 주님의 눈에는 현장에서 실제로 나쁜 짓을 하다가 잡힌 사람이나 날마다 나쁜 생각을 하는 사람이나 마음이 더러워진 것은 똑같고, 추악한 것은 똑같고, 어떤 면으로는 행동으로 범죄하지 않고 마음으로 범죄 하는 사람이 더 악취가 날지도 모릅니다.

 

누가 돌을 들고 던질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 앞에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가 다 똑같은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 앞에 돌멩이가 날아올까봐 오들오들 떨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내가 범한 죄 때문에 하나님이 어떤 벌을 내리실지 몰라서 두려움을 안고 얼굴을 들지 못하고 있는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많이 배웠든 적게 배웠든, 큰 아파트에 살든, 작은 아파트에 살든, 인물이 좋든 나쁘든 상관없습니다. 우리는 똑같은 사람입니다.

 

어제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우리의 죄라는 것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피상적인 것을 놓고 하나님이 자꾸 괴롭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죄는 너무 심각합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무시하는 것 자체가 벌써 죄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사고 자체가 벌써 죄입니다.

 

내가 하나님이 되어서 나를 위하여 짧은 70,80년을 멋대로 살아버리는 이것만큼 무서운 죄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서, 교회를 통해서 너는 그렇게 살다 가면 망한다 가르쳐 주는데도 픽하고 웃어버리고는 무시했던 이 뻔뻔스러운 태도가 하나님 앞에 가면 무서운 죄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부모를 멀리 떠난 아이는 무엇이든지 대범하게 마음대로 한번 해보는 습관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웬만한 일은 두려움없이 해버릴 수가 있습니다. 거짓말도 해버립니다.

 

남의 것을 떼먹기도 합니다. 미워하고 질투합니다. 남편도 속일 수 있습니다. 아내도 속일 수 있습니다. 대범하게 행동합니다. 그리고는 대범하게 잊어버립니다. 이와 같은 모든 죄들이 오늘날 우리를 형편없는 존재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인정하십시오.

 

아무도 돌을 들고 다른 사람을 칠 사람이 없습니다. 이와 같은 죄의 문제가 우리에게 심각하게 남아있는 이상 우리는 진정한 행복과 평안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죄인은 늘 불안해야 합니다. 우리는 늘 가책을 받습니다.

 

집안에 무슨 일이 있어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습니다. 무슨 일을 하나 해보고 싶어도 용기가 생기지 않습니다. 이것이 가책과 불안이 점점 더 짙어지면 정신질환까지 일으킵니다. 그래서 정말 어떤 사람은 정신병자가 되어 버립니다.

 

우리가 암을 안고 살 때 암이 완전히 퍼지기 전까지는 건강한 것처럼 착각하고 삽니다. 어떤 암은 그 사람 몸에서 5년을 자라야 밖으로 표가 난다고 합니다. 그러면 밖으로 표가 나기까지 3-4년은 끄떡 안하고 건강한 것처럼 허허하고 웃고 자신만만하게 산다 그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것을 알지 못할 때에는 허풍도 떨 수 있고, 자기보다 못한 사람은 멸시하며 살 수도 있었지만 그러나 여러분이 오늘 이 자리에 오셔서 내가 죄인이라는 말을 들은 이상은 여러분은 평안한 생활은 못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그것을 알게 하기 위하여 불렀습니다. 암이 있는 사람을 병원에 데려다가 진찰시켰다고 잘못했습니까? 잘못했나요? 잔인한가요? 우리의 본질이 하나님 앞에 무서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우쳐 주기 위하여 여러분을 여기까지 모시고 온 사람이 잔인한 사람인가요? 몇 년 더 행복하게 살고 난 뒤에 데리고 오든지 하지 왜 이렇게 젊었을 때 데리고 와서 벌벌 떨게 만드느냐고요? 그렇게 말할 수 있어요.

 

현대인은 굉장히 약은 사람들입니다. 머리가 대단히 좋습니다. 그래서 죄의 문제를 가급적이면 최소화시켜 보려고 합니다. 우선 현대인은 굉장히 듣기 싫어합니다. 지금 아마 굉장히 뒤틀려 가지고 듣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뒤틀려도 괜찮습니다. 뒤틀리는 것이 정상입니다. 풀어주시는 것은 하나님이 풀어주실 테니까 귀만 막지 말고 들으세요. 오늘 현대인들 치고 죄의 이야기 듣고 싶어하는 사람 하나 없습니다.

 

사랑의 교회는 비교적 죄의 문제를 솔직하게 많이 이야기하는 교회인데도 그래도 교인들이 모이는 것이 기적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현대인들은 죄의 문제를 표현부터 바꿔볼려고 노력들을 하지요. 예를 들어서 약점이라는 말로 바꾼다든지 아니면 정신적인 불안증세 등으로 바꾼다든지 여러분 여러가지 표현들이 있습니다.

 

그 표현을 바꾸어 가급적이면 죄라는 말을 듣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죄를 범하는 어떤 요인이 나타날 때에는 내가 쉽게 그 책임을 벗을 수 있는 제 3자에게다 떠 맡기려하는 강한 집착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저 사람 저렇게 남을 미워하고 그야말로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뇌에 종양이 있어서 그러는지도 모르니까 병원에 가서 세밀하게 뇌파 검사를 받아보라고 한다든지 하지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정말 병원에 가서 뇌파 검사를 받았더니 미국에서 말입니다.

 

사랑해야하고 남을 관용해야 하는 뇌세포를 종양이 꽉 누르고 있어서 사랑하고 싶어도 사랑할 수 없었다는 어떤 의학적인 발표가 난 예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종양을 떼어 냈더니 그 다음부터 너그러워지고 좋아지더라 그러니까 성경에서 말하는 죄! !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나빠서가 아니라 신체 안에 어떤 결함이 있어서 그러니까 그 결함을 찾아내면 된다 하는 식으로 이제 빠져나갑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이 사람이 자란 배경을 조사해보자.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느냐, 아니면 유복자냐, 아니면 형제들이 하나도 없었느냐, 아니면 고아원에서 자랐느냐, 아니면 아주 어렸을 때에 어떤 성적인 타격을 받았느냐 한번 조사를 해보자. 거기에서 피해가 있었기 때문에 여기에서 이와 같은 나쁜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해서 과거를 추적을 합니다.

 

그래서 무엇 하나를 발견하면 "당신이 이와 같이 나쁜 짓을 한 것은 당신이 악해서가 아니고 당신이 자란 과거가 이래서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당신 너무 과히 염려하지 말고 모든 책임은 과거에 있으니까 거기에다 책임을 떠맡기고 마음의 평안을 얻으십시오." 이렇게 말합니다. 이게 오늘 현대인들이 죄를 처리하는 방법입니다.

 

죄가 아는 신박사는 그래요. 상담 클리닉을 만들어 놓고는 역시 미국입니다마는 부부가 너무 싸우니까 "언제 당신이 오시고, 언제 남편은 오시오." 스케쥴을 짭니다. 그래서 스케쥴이 짜인 대로 남편이 오기도 하고 부인이 오기도 합니다.

 

"당신들이 이렇게 싸우는 이유는 마음 속에 스트레스가 쌓여 가지고 그것을 풀 길이 없기 때문에 지금까지 싸우는 것이요. 그러니까 내가 풀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줄 테니까 그대로 하시요."

 

그래 가지고 옆의 빈방으로 데리고 가서는 의자를 하나 가운데 놓고 그 위에 이름 같은 것 하나를 얹어 놓습니다. ", 지금 이것이 당신 남편이오. 지금부터 내가 야구 방망이 하나 줄 테니 실컷 두들겨 패시오."

 

, 이런 식으로 해서 신박사는 어떤 부부는 굉장히 효력을 많이 보았다고 말하는 것을 제가 들었습니다. 실컷 두들깁니다. 그리고 나와서는 "아휴 - 정말 이제 후련합니다." "그러면 다음 시간에 또 오십시오." 이렇게 해서 모든 죄의 원인이 제 3의 어떤 책임져야할 대상이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은 거기서부터 벗어나려고 합니다. 이것이 현대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분명히 아십시오.. 하나님은 절대로 그런 방법으로 우리를 죄인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만약에 우리의 죄를 책임져야할 제 3의 어떤 대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계속 죄를 회개하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면 하나님처럼 바보스러운 존재가 없습니다.

 

3의 구실을 하나님이 모르고 계신다는 이야기니까 심리학자만도 못하고, 정신분석학자만도 못하고 카운셀러만도 못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모든 죄의 원인이 우리의 부패하고 썩은 마음에 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제맘대로 인생을 사는 사람은 그의 마음이 부패했습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생각이 악한 것뿐입니다.

 

선하게 보이는 것도 그 밑뿌리를 보면 전부 자기 욕심이 도사리고 있는 악입니다. 이 세상을 보세요. 고아원을 하는 사람, 구제를 하는 사람, 남 앞에 선한 일을 하는 사람들을 전부 보세요. 하나님을 모르고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의 뿌리를 찾아보면 전부 불순한 어떤 자기 욕심이 도사리고 있는 것 여러분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부패한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 그 생각이 발전해서 나타나는 행동, 그 행동이 또 발전해서 나타나는 남을 해치는 행위까지 나타나는데 이 모든 것은 똑같이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마음에서 나오는 더러운 죄요 악입니다.

 

다른 데다가 책임전가하면 안됩니다. 내가 자란 환경이 이러쿵저러쿵 책임전가하는 것은 너무나 바보 같은 소리입니다. 내 몸에 이상이 있어서 스트레스가 쌓일 수도 있지만 내 마음이 근본적으로 부패하지 않았더라면 조그만 스트레스가 쌓인다고 해서 그렇게 남을 미워하고 증오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근본적인 것은 내 더러운 마음이요. 그러므로 하나님은 "네 마음에 있는 모든 악이 깨끗하게 씻음 받지 아니하면 너희는 내 앞에 올 수 없다. 그리고 네 모든 악을 완전히 해결하지 아니하면 너는 그 죄값으로 영원한 죽음을 맛볼 수밖에 없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이 사실을 절대로 우리가 과소평가하면 안됩니다.

 

여러분 잘 들으세요. 우리가 범하는 모든 죄, 심지어 조그만 생각 하나까지도 우리가 범하는 모든 죄는 대상이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가 범하는 모든 죄의 대상은 다같이 따라 하십시오. "하나님이다." 많은 분들이 이 사실을 잘 이해를 못하시는 것 같애요. 여러분 뭐 좋은 예가 될지 모르겠습니다. 보세요.

 

어머니가 애를 키우다가 솔로몬 앞에 나왔던 어떤 여자처럼 좁은 방에서 잠을 자다가 몸부림을 치다가 애를 깔아 죽였다고 합시다. 자기애 죽였는데 무슨 상관이요. 내 아이 죽었는데... 그런데 왜 그 사람이 영창에 가 앉아 있어야 합니까? 자기가 낳은 애 자기가 죽였는데 왜 다른 사람하고 관계가 있습니까?

 

그런데 왜 그 여자가 영창에 가 앉아 있어야 하느냐 그말입니다. 그것은 살인하지 말라는, 살인하면 이런 형벌이 따른다는 국가의 법을 범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애는 내 애지만 법을 범한 대상은 국가입니다.

 

내가 실수해서 우리집이 몽땅 다 타버렸습니다. 얼마나 손해를 보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내가 왜 영창에 가 앉아 있어야 합니까? 모순 아니에요? 그러나 그것이 법입니다.

 

국가의 법을 어겼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국가의 법을 어긴 것은 국가가 주는 벌을 받는 것으로 모든 것이 마무리지어 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두워서 하는 이야기고 우리가 성경을 펴보면 우리가 범하는 죄는 이웃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국가가 대상도 아닙니다.

 

법을 만드신 하나님, 자연법을 만드신 하나님, 죄에 대한 모든 벌을 규정해 놓으신 하나님, 죄는 조금도 용납할 수 없는 거룩한 하나님을 상대하는 행위가 바로 죄라는 것을 여러분이 아셔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죄가 뭐냐? "하나님을 반역하는 것이다." 죄가 뭐냐?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의 문제는 하나님과의 문제지 사람과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아니하면 그 다음에는 어떤 방법으로 용서받아도 끝까지 마음 속의 가책과 불안과 공포가 남고 나중에는 하나님 앞에 가서 설 때 그 죄 때문에 그는 그 앞에서 절대로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 그렇다면 심각한 문제가 하나 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누구로부터 용서받아야 합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아야 한다는 절대 과제가 남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인간은 한사람도 예외없이 하나님의 눈에는 철저한 죄인입니다. 조용히 들으세요.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3:10-12)

이것이 하나님이 사람을 보시고 내린 결론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1:24)

여러분, 왜 오늘 나쁜 짓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가만히 내버려둡니까? 왜 당장 죽여버리지 않아요. 하나님이 내버려두셨습니다. 이것 때문에 인간은 굉장히 용감하지요. 내버려두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용감했는지 모릅니다.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1:28-32)

 

이 가운데 나는 그런 것이 하나도 없다할 분이 있나요? 그리고 그들은 수근거리며 서로 헐뜯고 하나님을 미워하고 건방지고 교만하며 무자비합니다. 이런 식으로 사는 사람은 죽임을 당한다는 하나님의 법을 알면서도 그들은 자기들만 이런 짓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하는 사람들을 옳다고 두둔까지 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다 그런데 뭐. 여러분, 성경말씀은 날카로운 칼을 가지고 우리의 깊은 마음을 찔러서 헤쳐내는 것 같습니다.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도 깨끗한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단입니다.

 

안 믿는 사람, 예수 안 믿는 사람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심지어 보세요. 그들의 마음, 양심까지 더러워져 있습니다. 따라서 죄를 해결 받아야 할 최우선의 과제입니다. 여러분, 이걸 해결하지 않으면 암을 안고 껄껄거리며 웃는 사람과 같습니다. 정말 심각합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습니까? 그 다음을 봅시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5:12)

 

한 사람을 통해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이 한 사람은 아담입니다. 죄를 통해서 다같이 "모든 사람이" 처음에는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들어왔다고 했는데 그 한 사람을 인하여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다고 했습니다. 온 인류에게 죽음이 퍼지게 되었습니다. 여러 번 세상이 얼마나 끔찍하고, 비참합니까?

 

이 모든 것이 죄의 값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육신의 죽음을 한번 당하는 것은 그저 운명이라고 생각하더라도 육신의 죽음을 당하기 전에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겪어야 하는 고통이 얼마나 얼마나 심각합니까?

이 모든 것이 우리가 죄를 범한 죄인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하나의 증거가 됩니다. 그리고 나중에 육신이 죽은 다음에는 영원한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삽니까?

 

제가 지난 여름에 미국에 들렸을 때 십년 만에 나이아가라 폭포를 갔습니다. 하도 마음도 컬컬하고 해서 조금이라도 시원한 자연 속에 있고 싶어서 같습니다. 갔는데 저를 안내하는 분이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얼마 전에 이 나이아가라 폭포 상류 100M 지점을 가리키면서 저기에서 기적이 하나 일어났습니다. "무슨 기적이요?" 했더니 나이아가라 폭포 상류 200,300M 지점부터는 물이 얕기 때문에 파도가 심합니다. 그리고 1Km 정도 올라가면 경계선이 있습니다.

 

그 위에는 보트들이 얼마든지 놀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경계선을 넘어오면 안됩니다. 넘어오면 구제불능입니다.

물살에 밀려들어가기 때문에 60M의 폭포에 떨어지면 끝장나는 것이지요. 그런데 무슨 기적이 있었느냐고 물으니까 얼마 전에 남자 둘이 저녁에 낚시를 나왔다가 고기가 너무너무 잘 낚이니까 신이 나서 술을 마셔가면서 밤새도록 낚시질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술기운에 뻗었습니다.

 

기분 좋게 자는데 배는 아래로 아래로 내려갔습니다. 아주 높은 산에서 그랬는데 몇 시간을 떠내려갔습니다. 떠내려가서 밤중 1시 그쯤 됐는데 사람이 술이 깨서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경계선을 넘어와 버렸습니다. 폭포소리가 들립니다. 얼마나 정신이 없었겠습니까?

 

막 소리를 지르는데 둑에서 누가 보았는가봐요. 그래서 비상이 걸렸습니다만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런데 내려가다가 물이 얕으니까 배가 바위에 걸리면서 두 사람이 물속으로 빠졌습니다. 그 둘이 바위가 약간 튀어나온 것을 붙잡았습니다. 그렇게 매달려 새벽까지 있었습니다.

 

여러분 생각을 좀 해보세요. 그래가지고 살아났대요. 구조대 가서 헬리콥터가 구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기적이 일어났다고 그래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술먹고 고기 많이 낚고 기분 좋게 잘 때야 세상에 부러운 것이 없지요. 그러나 자기가 탄 배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그것을 모르고 즐기기만 한 것입니다.

 

오늘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모르고 사는 사람, 그 죄의 결과가 무엇인지를 알고 싶어하지도 않고, 예측하지도 않는 사람, 누가 무슨 말을 해도 픽 웃는 사람, 그 사람이 꼭 지금 나이아가라 폭포의 경계선을 넘어온 사람과 같아요.

 

그러니 이 죄의 문제는 해결해야 합니다. 여러분 자녀의 입시문제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이 문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가정의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는 게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 주변에 짜증스러운 일들이 일어나는데 이것을 벗어나는 게 우선이 아닙니다. 고부간에 갈등을 해결하는 게 우선이 아닙니다. 여러분 남편과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우선이 아닙니다. 제일 우선을 두어야 하는 문제! 이것은 죄의 문제입니다.

 

이걸 해결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정말 바보 같은 사람이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 결과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알면 한 시간도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내가 용서받아야 할 대상이 하나님이라고 하면 굉장히 곤란한 문제입니다.

 

왜 곤란한가 하면 죄용서 받는다는 문제가 보통 어려운 문제가 아니라는 결과가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웃 사람에게 잘못했다면 찾아가서 잘못했다고 빌고 용서받는 것은 간단한 문제이지만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 앞에 무슨 재주로 가서 죄를 용서받습니까? 어떻게 해서 용서받을 수 있습니까?

 

구약에 있는 미가 선지자 같은 사람은 이런 문제를 생각하니까 하도 답답해서 이런 말까지 했어요. "내가 내 맏아들을 데리고 가서 제사 드리고 용서를 받을까" 했습니다. 하도 답답하니까 무슨 재주로, 무슨 방법으로 하나님을 찾아가며, 무슨 변명으로 하나님 앞에 가서 내가 용서를 받느냐 그말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은 완전한 거룩자입니다. 죄라는 것은 절대 용서 못하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어려운 것이 무엇인가 하면 죄를 용서하는 일입니다. 제일 어려운 일입니다. 그리고 죄를 범한 사람에게는 죄의 결과가 꼭 따라오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원하는 죄의 댓가를 내가 무슨 재주로 드리며 갚을 수 있느냐 그말입니다.

 

이것만큼 심각한 문제가 없어요. 다른 사람이 나를 보고 "괜찮다 괜찮다" 백마디 해도 소용없고 상담하는 사람이 "당신 그것은 시간 보내면 자연스럽게 스스로 가라앉습니다"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는 하나님을 상대로 해서 지은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속 시원한 말 한 마디 듣기 전에는 내 안에 자책과 불안은 끝까지 남아버립니다.

 

가정에서 우리는 얼마든지 보지 않습니까? 집안에서 야구 방망이를 가지고 놀다가 아이들이 어머니가 아끼는 화장대를 망가뜨려 놓았다고 합시다. 동생이 야구공을 던지다가 망가뜨려 버렸어요. 애가 부들부들 떨면서

 

", 어떡해 어떡해" 하는데 형이 "괜찮아, 괜찮아. 내말들어. 괜찮아." 아무리 형이 동생보고 괜찮다 괜찮다 해도 그 동생 마음은 편하지 않은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화장대의 주인이 어머니야. 그 주인 되는 어머니가 무슨 말 한 마디 하기 전까지는 도무지 마음을 놓을 수 없는 문제입니다.

아무 형제들이 눈물 닦아주고 해도 소용없어요. 우리의 죄의 문제가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한 마디 하시기 전에는 도무지 안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슨 재주로 하나님을 찾아갑니까? 무슨 재주로 하나님이 요구하는 죄의 값을 그분에게 드릴 수 있습니까? 자신 있어요. 여러분, 무슨 선행을 그렇게 많이 하셨나요.

 

지금까지. 하나님이 보실 때 우리 인간은 죄용서 받아야 할 필연적 상황에 놓여 있지만 죄용서 받을 수 있는 능력도 없고, 죄용서 받을 수 있는 수단도 없고, 죄용서 받을 수 있는 방법도 찾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며 체념하고 있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그걸 아셨어요. 그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죄용서 받을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없는 줄 아시고 자기가 우리를 위해서 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저는 어릴 때 기억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뭘 해라 하는데 어떤 때는 안합니다. 왜냐하면 학교에 가서 숙제하고 내 나름대로 공부를 하고 싶은데 아버지가 일을 시켜 놓았으니까 일을 해야 하는데 죽어도 일하기가 싫은 거예요. 그러니까 책가방을 들고 슬그머니 빠져나가 버립니다. 일을 안합니다. 그러면 저녁에는 매맞는 것이 기정사실입니다. 그럴 때 어머니가 중간에서 중개역할을 합니다.

 

내가 듣지 못했지만 추측에 화가 나있는 아버지에게 "그 애가 지금 시험 때 아니요. 당신 왜 그래요. 그런 것은 봐줘야지. 아무리 농사를 짓지만 그 애가 그렇게 일만 해서는 어떻게 공부를 따라가오."

하고 무슨 말을 했겠지요. 그러면 아버지가 누구보고 화를 냅니까? "뭐라카노!" 경상도 사투리로 이러죠. 우리 아버지 어머니 농사 지으셨기에 말투도 그런 사투리를 많이 쓰십니다. 그러면 어머니가 아버지 앞에 호되게 한번 당합니다.

 

나는 겁이 나서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그러면 둘이서 어머니는 제 변명하고 아버지는 화가 나서 소리지르고 그러시다가 시간이 좀 지나서 "애가 안 들어오는데." 하고 걱정을 합니다. 아버지가 "당신이 나가서 한번 찾아봐" 그러면 내가 집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누가 마련한 것입니까? 아버지가 마련해서 어머니에게 지시하는 것이죠.

 

이 말은 들어와도 내가 아무 말 안할 테니까 데리고 와라 하는 것이죠. 하나님 편에서도 똑같은 입장이 되셨어요. 가만히 두면 제가 내일 말씀을 드리겠습니다만 가서는 안될 곳으로 가지 않으면 안되는 존재들입니다.

 

도저히 구제불능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자기 아들 되신 예수님을 보고 "네가 좀 내려가라. 네가 내려가서 중간에 서라."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들 되신 예수님 기쁜 마음으로 "내가 내려가겠습니다" 하고

그 영광스러운 하늘나라에 있는 모든 영광 다 내어놓고 그 화려한 그 모든 지위와 권세 다 포기하고 말구유에 초라한 종의 모습으로 태어나셔서 인간 세계에 찾아오셨습니다. 귀족의 모습으로 오신 것도 아닙니다. 그분의 모습은 죄인 중의 죄인, 제일 불쌍한 사람의 모습으로 찾아오셨죠.

 

그리고는 그분이 이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재역할을 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면 중재역할을 하려면 꼭 그분이 처리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뭐냐하면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가 용서하지 아니하면 안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죠. 그 다음에 우리가 범한 죄의 댓가가 얼마나 무거운 것인가를 주님이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의 댓가를 자신이 대신 짊어져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 방법을 택했습니다.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욕을 먹듯이 나 때문에 어머니가 욕을 먹듯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 내가 받을 죄값을 다 송두리채 짊어지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걸어가신 곳이 골고다였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 여러분의 목에도 십자가가 달려 있을지 모릅니다. 여러분의 집에 십자가 모양의 벽걸이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를 믿던 안 믿던 십자가를 좋아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십자가 그것은 정말 끔찍한 것입니다.

 

나는 어릴 때 개구리를 잡아 네 다리를 벌리고 못을 한번 쳐봤어요. 왜냐하면 하도 어릴 때부터 예수님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고 해서 도대체 십자가에 죽는 것이 어떤 것인가 사람을 잡아서 못을 칠 수는 없으니까 개구리를 잡아 판자 위에다가 못을 쳐봤어요. 아유 - 못보겠대요.

 

세상에 그거. 총으로 꽝 쏴서 죽이는 것은 양반이야. 약과지요. 얼마나 어려워요. 십자가에 한번 매달리면 건장한 사람은 일주일동안 고통받다가 죽습니다. 파리, 모기 등 해충들이 입,코를 다 막아 버립니다.

 

그러나 꼼짝 못하지요. 십자가는 가장 저주스러운 죽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러셨어요. 하나님 앞에 죄용서 받으려면 피를 흘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 우리의 생명은 피에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피입니다. 우리가 죄를 범함으로서 우리는 영원한 죽음을 맛보았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생명을 잃어버렸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잃게 이 죄값을 지불하기 위해서는 다시 그 생명을 잃게 한 죄에 해당하는 피를 흘리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그것도 더러운 죄인의 피가 아닌 죄없는 의인의 피를 흘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죄없는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다 쏟으신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내가 범한 모든 죄의 값을 하나님 앞에 지불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와 같이 무참하게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흘리신 보혈의 피를 보시고 하나님이 만족하셨습니다.

 

"이제는 내가 모든 세상의 사람들로부터 죄의 값을 요구하지 않겠다. 이제는 내 마음에 만족해. 내가 요구하는 죄의 댓가가 완전히 지불되었어. 그러므로 누구든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삼일만에 살아나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내가 그 사람의 죄를 묻지 않고 무조건 용서하겠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마련해 주신 죄용서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여러분 보고 하나님께서 과거부터 수십년 동안 범한 죄의 명세서를 써오라고 하지 않습니다.

 

어느 교단에서 말하는 것처럼 여러분을 불러놓고 밀실에 앉아서 "네가 지금까지 무슨 죄를 범했느냐", "내가 비밀 지킬 테니까 다 말하라" 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아무리 몸부림쳐도 구원받지 못한다고 공갈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간음한 여자를 앞에 두고 "너 어디서 그랬냐? 상대가 도대체 누구야?" 예수님께서 그런 질문하시지 않았어요. 그런 질문하지 않아도 주님은 다 알고 계셔요. 내 생각의 토막 토막까지도 다 알고 계시는 주님, 하나님께서는 다 아십니다. 그러므로 무조건 예수님 붙드는 것입니다. "예수님 나를 좀 살려 주세요."

 

나 같은 죄인이 용서받는 길은 예수님 앞에 나아가 용서받는 길밖에 없다고 하니까 "예수님, 제가 예수님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섬기지 않고 살던 이 못된 죄, 다 회개합니다. 주님 용서해 주시고, 나를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설 수 있게 해주세요." 하고 주님만 붙들면 하나님께서는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과거를 묻지 않으시고 "내가 예수님 믿겠습니다" 하는 그거 하나 너무너무 귀하게 보시고 모든 죄 깨끗하게 씻어주시기로 약속했습니다. 예수님이 여자보고 뭐라 하셨습니까? "나도 너를 죄인 취급하지 않겠다." 이것은 의인 취급하겠다 하는 말씀하셨지요?

 

마찬가지로 예수 믿는 사람을 보면 예수님은 "나도 너를 죄인 취급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우리를 의인으로 다루어 주십니다. 이와 같은 축복을 받는 것이 예수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과거에 어떤 죄를 지은 것이 문제가 안됩니다. 회개하기만 하면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가서 용서받지 못할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지금은 세상을 떠나셨습니다마는 가나안 농군학교 김용기 장로님은 새벽마다 산에 올라가 기도하기를 "김일성이 회개하고 장로 되게 하시고, 김정일이 목사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못된 놈들이 어떻게 구원을 받습니까? 그러나 우리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지신 십자가는 김일성이 아니라 김정일이라도 예수님만 믿으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 받고 구원받게 하십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 믿으면 좋다는 것이지요. 뭐 다른 것 때문에 좋다고 생각하는지 아세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나님 앞에 나와 예수님 내가 죄인입니다. 내 죄를 용서해 주시고,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을 증거하고 주님, 내 죄를 용서해 주심을 믿습니다.

 

그러면 이상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무슨 일들이 일어나느냐? 마음에 있을 때는 불안이 싹가십니다. 그리고 항상 가책감을 갔던 것이 불안해집니다. 아 이거 진짜 놀라운 일입니다. 거짓말 같애요. 그리고 기쁨이 솟고 감사합니다 하는 고백이 나옵니다.

 

여러분을 이 자리에 초청한 이유가 이런 놀라운 일이 있으니까 알려주려고 오시라고 그랬지요.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당신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구원자입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 2:24)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소 우리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므로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매맞고 상처를 입음으로 여러분이 낫게 된 것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53:5-6)

 

그러므로 예수 믿으십시오. 하나님의 용서를 받습니다. 여러분은 용서의 축복을 아십니까? 하나님이 뭐라고 약속했는지 보십시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8:1)

누구든지 안심하고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는 말입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5:10)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믿기만 하면 의롭다함을 인정받아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아버지 되고 나는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는 그분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서 참여하게 될 것을 인하여 기뻐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그 나라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아름답고 복된 소식을 여러분에게 전해드리고 싶어서 이런 시간을 마련했고, 우리 교회 형제 자매들이 전화를 몇 번씩 해가면서 여러분을 괴롭혔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잘 오셨습니다. 너무너무 중요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것, 예수 믿기만 하면 됩니다. 이 큰 축복을 거절하지 마세요. 놓치면 정말 어리석은 분입니다. 기회는 또 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바로 이 시간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를 죄인이라고 돌로 쳐서 죄인이 된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나를 보고 죄인이라고 하시기 때문에 내가 죄인입니다. 내가 만약 죄인이라면 내가 범한 모든 죄는 하나님을 반역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용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야지 사람으로부터 받으면 안됩니다. 용서는 하나님의 입에서부터 떨어져야 합니다. 무슨 재주로 하나님 앞에 가서 용서받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기 아들을 주셨습니다. 그분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한 방울, 한 방울 십자가에서 흘리신 핏방울은 바로 내 죄를 덮어주고 씻어주고 가리워주는 피입니다. 그 예수님 여러분에 마음의 문을 여시고 받아들이세요. 예수님, 나의 죄를 회개합니다.

 

용서해 주옵소서. 예수님 믿습니다. 하는 뜨거운 마음이 여러분 가슴에 일어나기만 하면 하나님은 과거를 묻지 아니하시며 여러분을 탓하지 아니하시고 영원토록 의인으로 인정해 주시고 영원한 영생을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이 축복을 거절하지 마세요.

 

기도드립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내가 어머니의 배에서 태어날 때는 하나님 앞에 죄인인 것을 전혀 알지 못해서 그저 세상에 태어났으니 내 맘대로 살면 될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오늘까지 세상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양심은 항상 찔리는 것이 있었고, 늘 불안했고, 두려웠고, 누군가 나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으면 안된다는 은근한 생각에 사로잡혀 살아왔습니다. 아버지, 아무리 우리가 몸부림치고 하늘을 향해 소리쳐도 이 깊은 죄의 고민과 가책과 불안에서 우리를 해결해 줄 자가 없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나님 아들 예수님 죄도 없으시면서 나 때문에 이 땅에 찾아오시고 나의 죄값을 전부다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으심을 감사하옵나이다. 나의 죄의 벌을 예수님이 대신 받으심을 감사하옵나이다. 이제는 부활하신 예수님, 삼일만에 살아나신 예수님, 믿기만 하면 모든 죄 용서받을 수 있는 축복을 누리게 해주심을 감사합니다.

 

하나님 오늘 이 시간 귀한 하나님의 아들 딸들이 죄용서함 받기 위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 이들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심을 믿고 감사합니다. 그리고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영원한 영생을 선물로 주심을 감사합니다. 이 세상 살 동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모든 문제를 하나님과 의논하며 살 수 있게 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아버지여, 오늘 믿기로 작정한 주의 자녀들에게 한량없는 은혜 베풀어 주셔서 그 믿음이 날로 날로 자라고 하나님의 진리를 깊이 깨달음에 따라서 일년 후, 이년 후에는 내 주변에 있는 아직도 용서받는 길을 모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지금까지 저들의 모든 것을 쥐고 있던 공중의 권세 잡은 자의 손길을 끊어주시고 성령이 지배하시고 하나님이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하게 해주시는 놀라운 축복을 누리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8:1-11/ 자기 양심의 직면 / 한경직 목사

2014-08-26 14:01:30

 

오늘 읽은 성경 말씀은 여러분께서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 뜰에서 가르치실 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어떤 젊은 여자를 데리고 와서 그 가운데 세우고 예수님께 질문을 하였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의지하건대 간음하는 여자는 돌로 쳐서 죽이라고 하였는데, 저 여자는 현장에서 잡힌 그러한 여자입니다. 선생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시겠습니까?” 이런 괴상한 질문을 하였습니다.

 

이런 질문의 배후에는 또한 그들의 속셈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만일 돌로 치라고 하시면 예수는 무자비한 사람이요, 또 그때에 로마 법률에 유대 사람이 누구를 사형에 처할 수 없는 그러한 때입니다. 로마법에 걸릴 것입니다. 또 그냥 돌려보내라고 한다면, 이들은 예수는 그들이 그렇게 높이고 존경하는 모세의 율법을 범하는 사람이요, 또 그런 음란한 행위를 묵인하는 이라 선전할 그럴 조짐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관계를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얼른 대답을 하지 아니하시고, 머리를 숙여서 땅을 보시며 무슨 글자를 손가락으로 땅에 쓰셨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들이 어서 대답하라고 재촉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조용히 머리를 드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저 여자를 치라그리고는 다시 머리를 숙이시고 무슨 글자를 땅에 쓰시며 한참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은 후에는 이 무리들이 어른으로부터 젊은이들까지 하나씩 하나씩 슬며시 그곳을 떠나갔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보시니 그 여자 홀로 섰습니다. 그 여자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를 고소하던 사람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하는 사람이 없느냐여자가 대답합니다. “주여 없습니다그때에 주님께서는 다시 말씀하시기를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이 일화 가운데서 우리는 단 한 가지 사실을 주의해야 합니다. 그것은 몇 분 전만 해도 멸시와 분노의 눈초리로 그 여자를 보던 무리들이 어찌해서 하나씩 하나씩 슬며시 그곳을 떠났습니까?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조금 전에는 그들이 그 여자의 죄만 보았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너희들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말씀하실 때에는 각각 자기 자신을 살피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그들은 자기의 양심에 각각 직면케 되었습니다. 그렇게 될 때에 그들은 자기의 죄를 깨닫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 스스로 물러갔습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잊을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종종 자기 양심에 직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시간, 이 문제에 대하여 성경의 교훈을 생각하고자 합니다.

 

첫째, 양심 직면의 중요성을 기억하십시다.

 

인간은 자기 얼굴을 스스로 보지 못합니다. 남의 얼굴만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남의 얼굴에 있는 흠은 잘 보지만, 자기 얼굴에 있는 흠은 도무지 보지 못합니다. 주님의 말씀과 같이 남의 눈에 있는 티는 보면서 내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내 자신을 바로 보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주님의 말씀과 같이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합니까?

 

그러므로 옛날 헬라의 철인 소크라테스 같은 이도 항상 네 자신을 알라.”고 권면하였습니다. 잠언에도 지키는 것 가운데 무엇보다도 네 자신을 지키라고 권면하였습니다. 사도 바울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경고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기의 양심을 직면하여 자기 자신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지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둘째는, 양심 직면의 계기를 생각해 보십시다.

 

이미 말씀한 이 얘기 가운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각각 자기 양심에 직면하게 되었습니까? 양심 직면의 계기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간단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을 들은 까닭입니다.

 

언제나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살피게 되고 양심에 직면하게 됩니다. 죄를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교회에도 나와야 합니다. 설교도 들어야 합니다. 성경은 거울과 같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에 우리는 우리의 얼굴을 바로 보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을 바로 보게 됩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도 그대로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412절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원동력이 있어 좌우의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느니라하였습니다.

 

전에 다윗왕이 간음과 살인의 무서운 죄를 짓고도 태연하게 있었습니다. 하루는 하나님의 사자 나단이 그에게 나타나서 대략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자기가 사는 동네에 큰 부자가 하나 있었는데, 이 부잣집에는 양과 소와 모든 가축이 떼를 지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부자 옆에 한 가난한 농부가 살았습니다. 이 농부는 가난해서 그저 어린 암양새끼 하나밖에 없었는데, 이 농부는 이 암양새끼를 극진히 사랑해서 그저 쓰다듬어 주고 같이 살고 먹고 자기 가족처럼 지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부자의 집에 귀한 손님이 왔습니다. 그러니까 이 부자가 자기 양과 소 떼는 그렇게 많지만 그냥 두고, 자기 옆집에 있는 가난한 이 농부의 어린 암양새끼를 끌어다가 잡아서 자기 손님을 대접했습니다.”

 

이야기가 여기까지 이를 때에 다윗은 크게 노했습니다. 그런 사람이 이 땅에 있을 수가 있느냐? 그런 놈은 반드시 죽을 놈이다. 그때에 나단이 손가락으로 다윗을 가리키면서 당신이 그 사람이올시다.” 그러면서 다윗이 여러 가지 축복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건만, 자기의 신복 우리아를 전쟁터 최전선에 고의로 내보내서 원수로 하여금 생명을 빼앗게 만드는, 그리고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취해서 자기의 아내를 삼은 이 추한 얘기를 털어놓자 그때에 다윗이 비로소 자기의 양심에 직면하게 됐습니다. 얼굴이 흙빛같이 변하면서 제가 범죄한 놈입니다.” 죄를 고백했습니다. 이 얘기는 너무나 유명해서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셋째는, 양심의 직면과 회개에 대해서 조금 더 생각하십시다.

 

양심에 직면하게 되면 누구나 자기의 죄를 깨닫고 부끄러운 마음이 생깁니다. 양심 앞에는 다 비겁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만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그 죄를 온전히 청산하는 회개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사실 성전 뜰에 있던 그 무리가 예수님 말씀을 듣고 양심을 직면하게 될 때에 부끄러워서 그 자리를 다 물러간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다 돌아가서 온전히 죄를 회개하였는지는 의문이올시다. 죄를 회개한 이도 있겠지요. 그러나 회개하지 않은 이들도 있을 듯합니다.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과 후회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참 회개가 따라야 합니다. 죄를 멀리 떠나야 합니다.

 

전에 여리고의 세리장이었던 삭개오의 얘기 여러분 잘 아십니다. 삭개오가 뜻밖에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자기 집에 영접하게 되니 자연히 그의 양심이 뜨거웠습니다. 여러 가지 죄가 나타났습니다. 크게 부끄러웠습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부끄러움을 느끼는 데만 그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온전히 회개했습니다. 그 증거가 나타납니다. 예수님 앞에 공손히 서서 자기의 죄를 고백하면서 내 재산 가운데 절반은 팔아서 가난한 이들을 구제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왜 이런 말을 했습니까? “돈을 모으기는 모았는데 귀한 돈이나, 또 만일 남의 것을 토색한 것이 있으면 구약의 율법대로 4배나 갚겠습니다.” 그렇게 한 줄 압니다. 여기에 참 회개가 있습니다.

 

우리 믿는 이들은 주님을 우리 마음에 영접한 이들입니다. 주님을 우리 가정에 영접하였습니다. 주님의 임재 앞에서 우리는 우리 양심에 직면하게 됩니다. 우리도 삭개오와 같이 회개의 열매를 맺습니까? 우리는 다음 세 가지 면에서 언제나 양심에 직면하면서 우리의 삶을 실현해야 합니다.

 

첫째는 진실의 면입니다.

 

하나님은 진리이십니다. 하나님은 진실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무엇보다도 중심의 진실을 요구하십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나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말씀했습니다.

 

제가 일찍이 숭실대학 학장으로 잠깐 있을 때에, 한번은 한 청년이 내게 와서 하는 말이 나는 옛날 평양에 있는 숭실대학에서 3년 동안 공부했는데 그러나 졸업은 못했어요. 내가 미국에 갈 마음이 있는데, 미안하지만 그 대학을 졸업한 증명서를 하나 좀 써 주세요.” 이런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제 말이 그저 졸업을 했으면 물론 써드리겠지만, 졸업 못한 일이 분명한데 어떻게 써드리겠습니까?” 그렇게 거절했어요. 그러니까 이분이 자기 기대와 다르니까 아주 섭섭한 얼굴로 돌아가는 모습이 지금까지도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사실 해방 후에 가짜 이력서를 가지고 취직을 하였다고 하는 그런 말이 많이 들렸어요. 가짜 교인 증명서를 가지고 와서 결혼식을 해 달라는 청년도 혹 있는 모양입니다. 우리 사회에 가짜 주사니, 가짜 약품이니, 가짜 식품이니, 가짜가 너무 많더니, 요새는 가짜 교사까지 있는 모양입니다. 제가 미국에 가서 들으니 가짜 목사도 있는 모양입니다.

 

이런 허위로 가득한 세상에서 우리 믿는 이들의 생활은 어떠합니까?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양심에 직면할 필요는 없습니까? 그리스도는 진리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진실이 충만합니다. 진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품격의 첫째 조건입니다. 제 아홉째 계명은 우리에게 진실하라는 계명입니다. 거짓증거하지 말라고 합니다.

 

둘째는 우리는 물질의 면, 혹은 돈의 면에서 언제나 양심에 직면해야 합니다.

 

물질 자체는 악이 아닙니다. 물질은 인간생활에 아주 필요합니다. 물질을 위해서 사업을 하거나 일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이 물질에 대해서 경계하는 교훈이 많이 있습니다. 열 가지의 계명 가운데 두 계명이 물질에 관한 계명입니다. 여덟째 도적질하지 말라열째 탐내지 말라예수님께서도 산상보훈에서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경고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근본이라고 지적합니다.

 

분명히 들으세요. 돈 자체가 악의 근본이란 말은 아닙니다.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는 것, 사람보다 돈을 더 사랑하는 것, 돈을 사랑하는 것은 악의 근본입니다. 야고보는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경고합니다. 사실 아닙니까? 많은 죄악이 금전과 관련해서 범행됩니다. 투기, 도박, 뇌물의 수수, 사기, 횡령, 절도, 강도, 심지어 살인까지 감행되는 것을 우리는 매일 같이 신문에서 봅니다.

 

최근에도 어떤 사장의 부인이라고 하는 여자가 몰래 아파트 투기를 하다가 빚을 많이 지고 빚쟁이, 빚을 준 다른 여자를 살인했다고 하는 끔찍한 사건까지 우리는 들었습니다. 실로 무서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탐심을 경계하라고 권합니다. 탐심은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적은 돈 관계에도 정직해야 합니다. ‘바늘 도둑이 소 도둑이 된다.’고 하는 속담이 있습니다. 또 아마 그게 사실입니다. 물질 생활에 있어서 늘 우리의 양심에 직면하여야 신앙생활을 옳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셋째는 정욕의 남녀간의 문제, 곧 성적인 면입니다.

 

열 가지 계명에는 일곱째 계명이 정욕에 관계된 계명입니다. “간음하지 말라사실 구약의 모세 율법에는 간음하는 자들을 돌로 쳐서 없이 하라고 했어요. 여러분, 구약 읽어 보세요. 옛날에는 또 그렇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보훈에서 음욕을 품는 것까지 경계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음욕을 오래 품으면 그것은 간음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요사이 우리 사회는 소위 성추행 사건으로, 성 스캔들로 어지럽습니다. 사실 이러한 추문은 빙산의 일각이기도 합니다. 나타나지 아니하는 일들이 얼마나 더 많을 것입니까? 기업인들, 권력을 가진 이들, 공무원들, 심지어 소위 지도층에 있다고 하는 이들 가운데도 알게 혹은 모르게 소위 내연의 처 곧 축첩 생활을 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아요? 공창 제도는 없어졌다고 하지만 사창 매춘으로 이익을 삼는 악덕 상인들은 얼마나 많습니까? 또 이런 구석을 귀신같이 찾아다니는 젊은이들은 얼마나 많습니까? 옛날 소돔과 고모라가 유황불로 멸망을 받은 원인이 성 도덕의 혼란인 것을 우리는 기억하고 살아야 합니다.

 

어떤 사회나 국가나 문화의 파멸 전야에는 성 도덕의 타락이 성행된다고 하는 역사적 교훈도 기억하고 살아야 하고, 정치도 해야 합니다.

 

 

 

바로 이달이 우리는 우리 대한민국 건국 30주년을 맞이한 달입니다. 우리나라는 그동안 많은 시련을 겪어 오면서도 경제 또는 교육, 문화 방면으로, 여러 면으로 상당한 발전을 이룩한 것은 실로 감사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 도덕 방면은 어떠합니까? 윤리 방면은 어떠합니까? 바로 이달에 소위 불미스러운 3대 사건으로 우리 사회가 얼마나 진통을 겪고 있습니까? 이러한 때에 우리가 남의 허물만 보고 남의 죄만 타도하면 우리 사회 풍토가 개선될 것 같습니까? 도저히 아니됩니다. 우리 국민 모두가 내 양심에 직면하고 내 죄를 회개하는 큰 회개 운동이 필요합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여러 가지 면에서 발전되는 면이 있지만 특별히 두 가지 면에서 낙후되어 갑니다. 뒤떨어져 갑니다. 하나는 제가 지금 말하는 이 윤리 방면이고, 또 하나는 사회 정의 방면인데, 빈부 차이가 너무 커갑니다. 이 두 가지 면에 우리가 정신을 차려야 우리나라가 옳게 성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시점에서 우리 믿는 이들은 먼저 내 자신을 살피어 양심을 직면하고 솔선수범하여 빛과 소금의 책임을 다하여야 하겠습니다. 사회 풍토를 변화시키려면, 무슨 신풍(神風) 운동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양심의 직면으로 일어나는 참된 회개와 성령의 역사로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 성도들, 특별히 진실의 면에서 경제 문제에 대한 청렴의 면에서, 그리고 성결의 면에서 빛의 사명을 다하듯 새로운 다짐을 해야 하겠습니다. 기도합시다.

 

사랑하시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하나님 앞에서 이 시간 아버지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우리 하나하나가 내 자신을 살피고 내 양심에 직면해서 마땅히 버릴 것을 버리고 고칠 것을 고치고 죄를 회개하며 주의 십자가 앞에 나와서 모든 죄의 씻음을 받고 아버지 앞에서 깨끗한 영광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이 축복을 이 시간 우리 하나하나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해서 이렇게 혼탁한 세상 가운데서 빛과 소금의 책임을 감당할 수 있도록 크신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8:1-11/ 양심의 소리 / 한경직 목사

2014-08-23 00:43:11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이 말씀은 여러분께서 잘 아는 유명한 얘기입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칠 때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자를 하나 끌고 와서 예수 님께 질문을 합니다.

 

모세의 율법에 의거하면 돌로 쳐서 죽이라고 하였는데 선생께서는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이런 질문을 하는 저의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님께서, 그 여자를 용서하라고 할 것이면 예수는 모세의 법을 범한다고 고소할 수 있습니다.

또 돌로 쳐라 할 것이면 예수는 사랑이 없고 죄인을 불쌍히 여기는 이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고 또 그 때의 로마법에도 유대 사람은 누구를 죽일 수가 없었음으로 로마법에 저촉된다고 고발 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에 예수는 그 뜻을 아시고 곧 대답하시지 아니 하셨습니다. 성경에 기록한 대로 잠깐 머리를 숙이시고 땅을 보시더니 땅에 무슨 글자를 쓰셨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얼른 대답하라고 성화같이 재촉했습니다.

 

조금 있다가 예수 님께서는 머리를 조용히 드시고 조용한 어조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을 들어 쳐라.

 

그리고는 다시 머리를 숙이고 땅을 보셨다고 하였습니다. 한참 있다가 머리를 들고 보니 한 사람 두 사람 슬며시 다 떠나가고 그 여자 홀로 남았습니다. 예수 님은너를 정죄(定罪)하던 자들이 다 어디 있느냐?』『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니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 이 사람들이 어떻게 되어서 슬며시 다 돌아가게 되었다고 했습니까? 절을 읽어보세요. 양심에 가책을 받아서 이들이 돌아간 것입니다. 양심의 소리를 듣게 된 것입니다. 양심의 소리는 귀합니다. 이 시간 양심의 소리에 대한 성경의 교훈을 생각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특별히 주신 선물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성이요 하나는 양심입니다. 이성의 역할은 머리를 통해서 무엇을 생각하고 이치를 추리하고 새로운 것은 착안하여 모든 문화를 발전시키는 것입니다.

 

양심의 역할은 간단히 말해서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배에서 쓰는 나침반(羅針盤)의 역할을 합니다. 배속에는 나침반이 있어서 배의 방향을 가리켜 줍니다. 마찬가지로 양심이라고 하는 것도 사람의 가슴속에서 도덕 생활의 방향을 가리켜 줍니다.

 

옳고 그른 것, 선하고 악한 것, 의와 불의를 분명하게 가리켜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五十절에 보면 양심은 마음에 새긴 하나님의 율법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양심은 마음의 등불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이는 양심은 마음의 눈이라고 말했습니다. 옳고 그른 것을 보여 줍니다.

 

예수께서도 산상 보훈에 말씀하시기를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지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냐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눈은 마음의 눈 곧 양심을 가리킨 것이 분명합니다. 양심은 우리 인간의 마음속이 있는 지성소올시다. 가장 거룩한 곳입니다. 우리 인간은 이 지성소를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양심의 역할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학교로 말하면 스승의 역할을 합니다. 옳고 그른 것을 우리에게 보여 줄 뿐더러 옳은 대로 하면 우리를 칭찬해 주고 그릇된 길로 가면 우리를 책망해 줍니다. 채찍질 할 때도 있는 것입니다. 양심의 가책이라는 말은 그런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 해서 양심의 지도대로 할 때에는 우리의 마음이 기쁘고 평안합니다. 그러나 그대로 하지 아니할 때에는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불안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예수 님의 제자들이 복음을 전파하다가 핍박을 받아 공회에 잡혀가서 많은 굴욕과 매를 맞고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기뻐하였다고 하였습니다. ? 매는 맞았으나 양심은 그들을 칭찬하였습니다.

 

가룟 유다는 三十냥의 돈을 받고 자기 주님인 예수 님을 팔았습니다. 유다가 그 돈을 가지고 집을 잘 짓고 안일하게 살았습니까? 그 돈을 도로 갖다가 성전 뜰에 던지고 마지막에는 목을 매어 자살하였습니다. ? 양심의 채찍을 맞은 것입니다.

 

사실 양심의 채찍을 안 맞는 분이 별로 없는 줄 압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제일 먼저 양심의 법정에서 정죄를 받습니다. 혹 세상의 법정은 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양심의 법정은 피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양심의 소리는 반드시 들어야 합니다. 양심의 소리에 반드시 순복(順服)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사생활을 돌아보든지 사회의 현상을 돌아보면 사실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리해서 우리는 저 사람은 양심이 없는 사람이라는 말을 듣습니다. 이 세상은 양심이 다 썩어진 세상입니다. 이런 말도 들립니다.

 

몇 가지 이유가 있는 줄 생각합니다. 욕심의 소리가 너무 커서 양심의 세밀한 소리는 듣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때에는 전화를 받다가 옆에서 라디오나 다른 것의 큰 소리가 나면 전화 소리가 안 들리지요, 큰 소리 대문에 멀리서 오는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이것과 조금은 비슷합니다.

 

다윗 왕도 궁전 꼭대기에 올라가서 아름다운 예루살렘 성을 돌아보고 스스로 기뻐했습니다. 그때 어떤 여자의 목욕하는 광경이 보였습니다. 그 모습을 볼 때에 그의 마음에는 정욕의 불이 붙었습니다.

 

당시 왕의 권세는 못할 일이 없을 때입니다. 곧 그 여자를 불러다가 추행을 감행하였습니다. 알고 보니 자기의 충복, 우리야의 아내인 바세바였습니다. 그 여자를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우리야를 암몬 사람과의 전쟁터에 보내라는 밀서를 이스라엘의 사령관인 요압에게 보냈습니다.

 

그래서 그대로 되어 그는 죽었습니다. 좋은 왕이었으나 이런 일을 감행했습니다. 그리고도 태연히 있었습니다. 그 동안에 양심의 소리는 몇 번이나 울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 정욕의 소리가 너무 컸기 때문입니다.

 

얼마 후에 하나님의 사자 나단이 찾아와서 다윗에게 아룁니다. 어떤 성에 한 부자와 한 가난한 사람이 사는데 부잣집에는 양도 많고 소도 많습니다. 그러나 이 가난한 사람의 집에는 조그마한 암 양의 새끼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가난한 사람은 이 양을 자기 딸처럼 사랑했습니다. 같이 먹고 같이 자고 아주 귀엽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부잣집에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이 부자는 가난한 자의 암 양을 빼앗아 잡아서 자기 손님을 대접했습니다. 임금님은 이런 사람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다윗은 노해서 그런 사람이 내 나라에 있을 수가 잇느냐 당장 죽여 마땅하다고 소리쳤습니다.

 

그 때에 나단은 손가락으로 왕을 가리킵니다. 대왕이 바로 그 사람이올시다. 하나님께서 대왕을 사랑해서 온 이스라엘 백성을 다 맡기고 이 나라를 다 맡기고 모든 영광을 다 주셨는데 무엇이 부족해서 우리야를 죽이고 그 아내를 빼앗았습니까.

 

그 때에 다윗은 양심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 내가 죄인입니다.

 

정욕의 소리가 너무 커서 양심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사람은 없습니까? 정욕뿐이 아닙니다. 모든 욕심이 그렇습니다. 물욕도 그렇습니다. 옛부터 우리 동양에는 황금이 흑사심(黃金黑士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누른 금이 선비의 마음을 새까맣게 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양심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누구나 말합니다. 우리 대한 민국에 제일 큰 원수가 둘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공산당이요 하나는 부정 부패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이 부정 부패를 없이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으며 정부에서도 항상 애씁니다. 그러나 그것은 없어지지 않고 그냥 있습니다. 얼마 전에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고위층에 올라갈 수록 단수가 높다는 말입니다. 나는 유도에만 단수가 있는 줄 알았더니 뇌물에도 단수가 있는 모양입니다.

 

며칠 전에 신문에서 의사 시험을 치르는 고시 과장이 어떤 사람이 七十만원의 뇌물을 보낸 것에 분개해서 그 뇌물을 검찰 국에 보내면서 고소를 했다고 하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만일 우리 대한 민국의 관리가 이 고시 과장처럼 양심의 소리를 들을 줄 알면 한국 사회는 하루아침에 명랑해 질 것입니다. 양심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강한 욕심을 경계하여 합니다. 정욕뿐이 아닙니다.

 

물욕뿐이 아닙니다. 권세욕이 그렇고 명예욕이 그렇고 온갖 욕심이 그렇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양심의 소리가 가슴에 있지만 그 소리를 듣지 아니하고 순복(順服)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렇게 양심의 소리의 경고가 있지마는 계속해서 순복지 아니하며 듣지 아니하며 성경 디모데전서 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 이 양심이 화인을 맞습니다.

 

옛날에는 사람의 몸에 화인을 찍는 풍속이 있었습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종을 가지고 있으면 그 종의 몸에다 자기 이름을 화인 찍었습니다. 그 화인을 치 면 살이 익어서 뜸장 처럼 되고 그렇게 되면 감각이 둔해져서 더운 것을 모릅니다.

 

양심의 소리를 계속해서 듣지 아니하면 양심이 무디어져서 그 다음에는 양심의 소리가 분명해 지지 아니 합니다. 얼마 전에 들으니 어떤 타락한 교인이 이렇게 얘기하더랍니다. 처음에 술집과 댄스홀에 갈 때는 가슴이 두근거리더니 몇 번 가니 괜찮더라고. 양심이 화인을 맞았습니다.

 

그러기에 도둑질도 처음에 할 때는 가슴이 두군 거리지마는 몇 번하게 되면 그런 느낌이 없어진다고 합니다. 양심의 소리를 듣기는 여러 번 들으나 거절하면 그 후에는 들리지를 아니 합니다. 그뿐인 줄 압니까? 그런 상태가 점점 오래가면 양심의 괴로움이 없어질 뿐더러 오히려 그 악을 청하는 것이 잘 하는 것으로 알게 됩니다. 그런 단계가 옵니다.

 

전에 바리새인과 사두개 교인들이 예수를 미워하고 예수를 핍박하고 마지막에 십자가에 못 박을 때에 그들은 양심의 가책이 없었을 뿐더러 오히려 그것을 잘 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마지막에는 양심이 왜곡되고 전도(顚倒)가 됩니다.

 

사도 바울도 그랬습니다. 회개하기 전에 그의 양심은 왜곡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옥에 잡아 가두는 것이 잘 하는 일인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릇된 사상과 편견으로 그 양심이 왜곡되었습니다.

 

종교개혁사를 읽을 때에 놀랄 만한 일은 불란서에서 성 바오로의 날에 갑자기 구교도들이 일어나서 신교도 수천 명을 학살한 사실입니다. 그 때의 구교도들은 양심의 가책을 별로 안 받았으며 잘 하는 것으로 아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은 예수를 믿되 바로 잘 믿어야 합니다. 그릇된 사상과 편견으로 양심이 왜곡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차대전 때에 유대인 백만을 학살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을 뿐더러 잘 하는 것으로 히틀러는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공산당의 양심입니다. 이들은 게릴라를 남한으로 보내서 무도한 양민을 학살하고 민족 상쟁(相爭)하는 것에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은 뿐더러 잘 하는 줄로 생각합니다. 거꾸로 되었습니다. 흰 게 검게 되고 검은 것이 희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이 아닙니다. 짐승만도 못하게 됩니다. 마음속의 나침반이 없어졌습니다. 이런 사람은 파멸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주의 대 양심이올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아들로서 이 세상에 오신 이 대 양심의 화신이올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나와서 그리스도와 접촉할 때에 양심의 소리를 언제나 듣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처음에는 양심의 소리를 도무지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님께 나와서 예수 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은 돌을 덜어서 저 여자를 치라는 말을 들을 때에 양심의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삭개오의 얘기를 다 알지요? 삭개오는 세리 장이요 큰 부자입니다. 요사이 말로 하면 탐관오리입니다. 부정 공무원, 모리배, 축재자였습니다. 그러나 아무 양심의 가책이 없었습니다. 태연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 님께서 여리고를 지나가실 때에 삭개오가 뽕나무에 올라갔다가 예수 님을 만나게 되어 뜻밖에 자기 집으로 오시겠다고 합니다. 자기 집에 예수를 영접했습니다. 예수 님을 자기 집에 영접하자마자선생님 내가 내 재산을 팔아서 절반은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겠습니다. 또 내가 토색(討索)한 것은 배나 갚아 주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를 영접하고 양심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예수를 영접하면 양심의 소리를 듣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렇지 않았습니까? 사도 바울도 예수를 영접하기 전에는 양심의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비뚤어진 소리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다매색으로 가는데 갑자기 길가에 빛을 비추어 부활하신 예수 님이 나타났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불렀습니다. 이 때에 꿇어앉아 하는 말이누구십니까?』『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예수 님을 만났습니다. 그 때부터 사을이 변해서 바울이 되고 새로운 양심을 가진 사도가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十四절에는 그리스도의 보혈이 양심을 깨끗케 한다고 기록했습니다. 십자가의 보혈이 더러워진 양심을 깨끗케 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님께 나와서 주님을 대면하고 주님 앞에 죄를 회개하고 보혈로써 죄 씻음을 받으면서 새 사람이 되고 그 때부터 맑은 양심을 가질 뿐더러 양심의 소리를 언제나 분명히 듣게 됩니다.

 

오래된 이야기지만 간단히 하지요 제가 전에 신의주 제이 교회에서 봉사할 때에 저녁 예배를 필하고 집에 오니 어떤 청년이 와서 나를 보자고 했습니다. 들어온 후에 사정 얘기를 들으니 이러합니다. 내가 내 처남의 재봉틀을 몇 해 동안 그냥 썼는데 이제 돌려보내야겠습니다.』『어떻게 된 거냐?하니

 

내가 믿기 전, 몇 해 전에 어떤 상점에서 연말 대매출을 할 때에 처남과 같이 가서 물건을 샀는데 처남도 경품권 하나를 받고 나도 하나 받았습니다. 그런데 처남이그것 다 매부가 간수하시구려 하면서 주기에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번호가 어느 것이 자기 것이고 어느 것이 처남 것인지는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제비를 뽑았더니 처남의 번호로 재봉틀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제가 타다가 썼습니다. 처남은 번호도 알지 못했으니까요. 그 후에 재봉틀이 나왔다는 소리를 듣고 처남이 묻기에 내 번호로 나와서 내가 가졌다고 대답하고 내가 쓰고 있었습니다.이 청년이 예수를 만나게 되니 양심의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참된 행복은 양심이 평안히 있을 때뿐입니다.

 

전에 한자(韓子)라는 사람은 가난해서 바구니에 밥을 먹고 바가지로 물을 떠먹고 팔을 굽히고 잔다고 할지라도 즐거움이 그 가운데 있다고 하였습니다. 양심이 평안한 상태입니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도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한 것은 양심의 평안을 말합니다. 아무리 좋은 집에서 산다고 할지라도 양심이 괴로우면 그 곳에 행복은 없습니다.

 

양심의 소리는 누구나 들어야 합니다. 언제나 들어야 합니다. 어디서나 들어야 합니다. 어떤 방면에서나 들어야 합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방면에서 양심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요사이 우리 사회를 보면 개헌 문제로 토론이 굉장한 모양입니다. 아마 우리 국민은 이 문제를 투표할 수밖에 없어요. 맑은 양심으로 투표를 해야 합니다.

 

신앙 생활은 양심을 떠나서 있을 수 없습니다. 디모데 전서 十九절에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양심을 떠나면 그 믿음은 파산합니다.

 

그리스도에게 나오세요. 양심의 소리를 들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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댁쟾쇰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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