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할 수 있는 자 /요7:45-52/ 김창진목사
2023-01-16 14:22:27
● 예루살렘의 분위기
오늘 본문은 요한복음 7장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초막절과 연관하여 예수님께서 동생들의 요구에 ‘이번 명절에는 올라가지 않겠다.’(요7:8)고 하셨지만 ‘절기를 지키라’(출23:14-17)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초막절을 지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올라가십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시는데 그 가르침이 여느 랍비와는 달랐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놀라며 말합니다. 14-15절 ‘14. 이미 명절의 중간이 되어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사 가르치시니, 15. 유대인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하니)’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는 율법의 껍데기만 알고 지키는 유대인들의 어리석음을 보시고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요7:24)고 책망하십니다.
그리고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제사장들이 실로암 연못에서 물을 길어 성전 제단에 붓는 예식을 행할 때에 예수님께서 서서 외치십니다. ‘37.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요7:37-38) 이 말씀과 예수님의 행적으로 인해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그 선지자인가? 혹은 그리스도인가? 혹은 미혹자인가?’ 의견이 분분했습니다(요7:12, 40-42). 그 와중에도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표적을 통하여 믿는 무리들도 있었습니다(요7:31).
▶ 그러나 그 당시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사두개인들이나, 바리새인들의 반응은 냉대했습니다. 그런 분위기를 보여 주는 것이 요한복음7:1, 25절에 보입니다. ‘1.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25. 예루살렘 사람 중에서 어떤 사람이 말하되 이는 그들이 죽이고자 하는 그 사람이 아니냐’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들어 내놓고 예수님에 대한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13절 ‘그러나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므로 드러나게 그에 대하여 말하는 자가 없더라.’
계속해서 요한복음 7장에서 보이는 모습은 예수님을 잡으려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모습입니다. ‘30. 그들이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 이러라. 32. 예수에 대하여 무리가 수군거리는 것이 바리새인들에게 들린지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를 잡으려고 아랫사람들을 보내니, 44. 그 중에는 그를 잡고자 하는 자들도 있으나 손을 대는 자가 없었더라.’(요7:30, 32, 44)
● 예수님을 잡지 못하는 이유
오늘 본문은 예수님을 잡으려 하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 사이에서 예수님에 대해 말하는 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잡으러 보냄을 받았던 아랫사람들이 빈손으로 돌아옵니다. 그 모습에 화가 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어찌하여 잡아오지 아니하였느냐?’고 아랫사람들을 다그칩니다. 그러자 그들이 말합니다. 본문 46절 ‘아랫사람들이 대답하되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 때까지 없었나이다하니’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 하지만 잡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아직 ‘예수님의 때’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서에서 말씀하는 ‘예수님의 때’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당하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승천 하시는 때를 말합니다. 요한복음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7장에서도 ‘33. …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34.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요7:33-34)고 말씀하십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때가 있기에 잡으려 하나 잡지 못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더불어 보여주는 모습은 예수님을 잡으러 갔던 아랫사람들은 자신들의 공적임무를 잊을 정도로 예수님의 말씀에 깊은 인상을 받고, 예수님의 신적 권위에 압도되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 때까지 없었나이다.’(요7:46)고 말합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은 ‘47. …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48.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자가 있느냐, 49.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요7:47-49)
이 말의 의미는 ‘율법을 아는 자라면 결코 예수라는 사람의 말에 미혹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예수라는 사람의 말에 미혹되고 믿는 자가 있다면 그는 저주를 받은 자’라는 겁니다. 율법에 대해서 잘 안다고 하는 바리새인들은 정작 율법의 본의(本意), 진의(眞意)는 잊고, 예수님을 배척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 이런 모습에서 이단들이 발생합니다. 하나님이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본의(本意), 진의(眞意)는 저버린 체, 직접계시를 받았다는 교주는 성경 말씀이 기록된 역사적 배경이나, 사실들이나, 언어들을 무시하고, 오직 교주의 자기 계시로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것을 기준 삼아 ‘참’인 것처럼 말하며, 자랑하며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그리고 자신들 외에는 모두 저주받은 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자신들을 아름답게 포장한다 할지라도 이단은 이단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이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모습과 흡사합니다. 진리를 추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6: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 말하는 니고데모
예수님을 무리를 미혹하는 자로 몰아가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을 율법의 저주를 받은 자라고 정의하는 분위기 속에서 예수님을 대변하는 사람이 등장하는데, ‘니고데모’입니다. 본문 50-51 ‘50. 그 중의 한 사람 곧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그들에게 말하되, 51.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느냐’
이러한 니고데모의 말을 보면 예수님에 대해 어떻게 처리할지 어느 정도 중지(衆志)가 모아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니고데모는 법적 판결이 있기 전에 먼저 증거를 검토하고, 3인 이상의 증인들의 증언을 듣고, 당사자의 변호를 들어야 하는 율법이 제시하는 법적 절차(출23:1; 신1:16; 17:4)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반응이 어떻습니까? 본문 52절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찾아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하였더라.’
분위기는 이미 예수님을 율법의 이단자로 처리하려는 분위기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에 대한 처리가 바뀌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분명하게 예수님을 변호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용기가 있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 이런 니고데모에 대해서 본문은 말하기를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요7:50b) 니고데모가 언제 예수님께 왔습니까? 요한복음 2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성전청결 사건을 행하며,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요2:16)고 하십니다. 그리고는 유월절에 여러 가지 표적을 행하십니다(요2:23).
그 모든 것을 보았던 니고데모가 요한복음 3장에 가면 밤에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니고데모는 당시 유대 사회의 행정과 사법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으로서 ‘바리새인이요 유대의 지도자’(요3:1)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런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밤에 찾아 온 것은 다른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여 몰래왔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요3:2)
예수님은 밤에 자신을 찾아 온 니고데모에게 거듭남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우리가 많이 암송하는 말씀을 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다시 한 번 니고데모가 등장하면서 예수님을 변호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 만큼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커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니고데모가 또 한 번 요한복음 19장에서 등장합니다. ‘38.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 가니라. 39.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40.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요19:38-40) 니고데모는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임 당한 예수님을 세마포에 싸서 장사 지냅니다.
그러한 행위는 정치적으로는 로마의 반역자로, 종교적으로는 율법의 이단자로 낙인 찍혀 죽임 당한 예수님의 추종자로 찍혀서, 산헤드린 공회원의 자격을 박탈뿐만 아니라, 출교까지 당할 수 있는 위험한 일이며, 로마에 반대하는 정치범으로도 몰릴 수 있는 행동입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감히 그렇게 합니다. 왜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리스도이시며, 어둠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죄 사함을 얻게 하시는 구원자이심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 잠시 우리 이야기를 하고 마치겠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확신합니까? 우리는 분명하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를 죄악 가운데서 구원하신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세상 속에서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 무엇이라고 변호합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위해서 어떤 자리까지 갈 수 있으며, 어떤 오해까지 받을 수 있으며, 예수님을 위해서 어디까지 포기할 수 있습니까?
니고데모는 예수님에 대해 사람들이 무엇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분명히‘말 할 수 있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우리 역시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무엇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어떻게 평가한다 할지라도, 예수님은 분명한 우리의 구원자 되심과 나는 예수님을 믿는 성도됨을 말하며, 나타낼 수 있는 믿음의 용기를 가진 성도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부류의 사람들 /요7:45-53/ 조학환목사
2023-01-01 14:45:23
1.예수님의 초대(37-39절)
다 내게로 오라. 내가 해결해 주겠다. 내게로 오면 다 얻을 수 있다. 모든 목마름은 다 해결된다. 생수의 강이 흘러나온다. 성령의 충만함으로 생명, 기쁨, 은혜, 능력, 평안, 승리를 누리게 된다. 인생의 문제는 예수님을 모셨느냐, 성령충만하냐의 문제
2.사람들의 반응(40-43절)
1)선지자 2)그리스도 3)핍박자 그러나 그리스도 외에는 다 무지요, 편견이요, 오판에 불과.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야 한다. 오로지 구세주 예수를 믿고 구원의 은총을 누려야 함.
3.반대자들이 잡지 못한 이유(44절)
적대자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애를 썼으나 잡을 수가 없었다. 왜? 예수님의 때가 되지 않았기에... 구원의 역사는 도도히 흐른다. 하나님의 시간표대로. 우리가 얼마나 그것을 알고 거기에 참여하느냐의 문제. 그에 따라 인생이 달라짐.
*오늘 말씀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 초막절에 예루살렘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말씀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들이 나타나. 앞에서는 주로 군중들의 반응, 여기서는 대제사장의 지시에 의하여 예수님을 잡으러 갔던 사람들과 대제사장과 바리새인의 반응.
그 중에 두 부류의 사람들. 첫 번째는 겸손한 사람들, 경청할 줄 아는 사람들, 진리에 대하여 관심을 가진 사람들. 다른 하나는 예수님을 핍박하는 사람들.
1.예수님께 귀 기울이는 사람
1)하속들-그 사람처럼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46절)
먼저 하속들의 반응을 보자. 이들은 지금으로 말하면 하급 관리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들의 반응은 한마디로 예수님께 대한 경외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본래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잡아오라고 보낸 사람들이었다.(32절)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모습이나 말씀을 들을 때에 마음에 감동을 받았다. 그의 모습에서 그의 말씀에서 무언가 도저히 항거할수 없는 힘과 능력을 느꼈다. 그래서 도저히 잡아 갈 수가 없었다. 잡아 갈 이유도 없었고, 잡아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러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들을 책망하며 묻는다. “어찌하여 잡아오지 아니하였느냐?(45절) 그러자 이들이 대답한다. ”그 사람의 말한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46절)
이들은 아마도 37, 38절의 말씀을 두고 말했을 것이다. 물론 예수님의 행하시는 모습이나 다른 모든 말씀들도 권위가 있고, 신비한 능력이 있었지만 특히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하신 말씀은 감히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말씀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잡아 가기는커녕 도리어 예수님의 말씀에 깊은 감명을 받고 경외심을 가지고 돌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2)니고데모-행한 것을 알기전에 판결하느냐(50절)
두 번째 예수님께 긍정적이고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은 유대공회원 중의 한 사람인 니고데모라는 사람이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하속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말하자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들은 저주를 받은 자들이라며 책망을 하자 니고데모가 나서서 유대지도자들의 잘못을 지적한다.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판결하느냐?” 즉 당신들은 어째서 그의 말을 들어보지도 않고 판단하느냐는 것이다. 당신들은 어째서 그가 행한 일을 바르게 알지 못하면서 판단하느냐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가 한 말이나 그가 행한 일은 악한 것이 없는데 어찌하여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그것이 정녕 선이냐 악이냐, 정말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났느냐 아니야하는 것도 생각해 보지 않고 그를 정죄하느냐는 말이다. 그것이 과연 율법을 아는 자들의 태도냐 하는 것이다.
실제로 율법에 의하면 분명히 자기 변호와 증인들의 증언이 있어야만 정죄할 수 있었다. 이것은 신19장에 명백히 기록되어 있다.
“사람이 아무 악이든지 무릇 범한 죄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 / 만일 위증하는 자가 있어 아무 사람이 악을 행하였다 말함이 있으면 / 그 논쟁하는 양방이 같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당시 제사장과 재판장 앞에 설 것이요 / 재판장은 자세히 사실하여 그 증인이 위증인이라 그 형제를 거짓으로 무함한 것이 판명되거든 / 그가 그 형제에게 행하려고 꾀한 대로 그에게 행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
즉 죄인으로 정죄하려면 본인에게 소명 기회를 주어야 하며 거기에 더하여 최소한 2명 이상의 증인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유대종교지도자들은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예수님을 죄인으로 정죄하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여기서 우리가 여기서 먼저 생각할 것은 예수님을 잡으러 갔던 하속들과 니고데모의 태도이다. 특히 이들은 예수님과 관련하여 어느 쪽에 서느냐하는 것이 자신들의 안위와 입지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위치에 있었다.
하속들은 대제사장의 말을 듣지 않으면 어떤 중벌이 내려질지 모른다. 니고데모는 유대의 관원 즉 산헤드린 공회원으로써 요3장에서 예수님을 찾아갔던 사람이다. 즉 니고데모도 예수님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갖느냐에 의하여 자신의 입지에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보면서 그러한 사실은 잊어버리고 예수님을 변호하는 입장에 서게 된 것이다. 자신의 행위가 외적으로 얼마나 자신에게 유리하냐, 불리하냐 보다는 과연 예수님이 말씀이 옳으냐 그르냐에 더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설령 자신의 행위가 인간적으로는 자신에게 불리하게 작용할지 모르지만 그러나 겸손히 혹은 진리안에서 생각해 볼 때 예수님을 그렇게 대우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들은 자청해서 예수님의 변호자가 되었다.
우리는 늘 이걸 생각해야 한다. 외적으로 현실적으로 얼마나 유리하냐 불리하냐에 의하여 우리의 행동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그것이 옳으냐 그르냐, 그것이 진리이냐 아니냐에 의하여 우리의 행동이 좌우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은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참된 의미에서 우리에게 유리한 것이다. 그것이 정말 유익을 가져다 준다.
그러나 오늘날 세상의 물질과 안락과 평안과 이런 것들이 우리의 행동을 좌우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은데 이것은 결국 우리에게 손해를 가져다 줄뿐이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생명의 풍성한 은혜와 기쁨과 안식을 주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겸손한 마음으로 혹은 올바른 마음으로 언제나 진리편에 서서 진정한 생명의 유익을 누리는 방향으로 나아가자.
2.편견, 무지, 오만 속에 빠져 있는 사람들
그러나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편견과 관능적 자기 보호 심리로 예수님을 끝까지 시기하고 미워하고 증오하는 모습으로 일관한다.
그래서 하속들에게 왜 잡아오지 않았느냐(45절)고 책망을 한다. 내 말이 들리지 않느냐, 너희들은 무슨 생각으로 잡아오지 않았느냐? 너희도 미혹되었느냐(47절), 당국자들 중에 믿는 자가 있느냐?(48절), 법을 알지 못하는 저들은 저주받은 자들이다.(49절), 선지자가 갈릴리에서 나오지 못한다며(52절) 도리어 진리를 따르는 자들을 책망하며 바보취급을 하며 다그친다.
사실은 하속들이 책망받을 일을 한 것이 아니다. 그들이 미혹당한 것이 아니다. 그들이 법을 알지 못하는 저주 받은 자들이 아니다. 도리어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시기와 편견과 무지로 예수님을 잡아오려는 그들이 죄를 짓고 있는 것이며, 미련한 짓을 하고 있는 것이며, 마귀에게 미혹당하고 있는 것이며, 결국 저주를 받을 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아니라 바로 그들 자신이다. 그런데 도리어 진리를 따르는 그들을 책망하며 저주를 받은 자들이라고 적반하장 격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은 실은 그들 자신은 정말로 자신들이 하는 일이 옳다고 여기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들도 예수님을 인정하면서도 단지 자신들의 기득권 때문에 예수님을 이단자로 모는 것이 아니라 정말 예수님을 이단자라고 생각을 했고, 그러기에 이단으로부터 무지한 백성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그런 일을 하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어처구니 없는 현상 하나있다. 현재 정통교회로부터 이단으로 정죄당하고 있는 이단들 중에서도 이런 논리로 자신들이 핍박당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봐라. 예수님도 처음에는 당시로서는 정통이라고 할 수 있는 유대교에 의하여 배척당하고 이단으로 취급되지 않았느냐, 너희가 우리를 핍박하는 것은 바로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했던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이라며 억지 주장을 펴며 기성교회 교인들을 미혹하고 있는 것이다.
정말 그런가? 미친 소리다. 정통과 이단의 기준은 하나다. 바로 성경이다. 성경에서 벗어나면 이단이요, 성경 안에 있으면 정통이다. 저들은 성경에서 완전히 벗어나 제멋대로 하면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여하튼 우리가 깊이 새겨야 할 것. 무지와 편견이 얼마나 무서운가 하는 것이다. 무지와 편견에 빠져 있으면 틀린 주장을 하면서도 죽어라고 맞다고 여긴다. 안 믿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죽어라고 제 생각이 맞단다. 우리들도 그렇다. 그게 아닌데 죽어라고 자기고집을 굽히지 않는다. 하기사 서로 내가 맞고 네가 틀렸다고 생각하니 그럴 수 밖에 없을 테지만.....
그러면 어떻게 이 문제를 풀까? 누가 맞는 걸까? 다른 방법 없다. 정말 말씀을 바르게 알아야 한다. 예수님의 사상과 가르침과 삶과 의도를 바르게 알아야 한다. 그러려면 기도하고 말씀 묵상해야 한다. 그래서 바르게 예수님 만나야 한다.
오늘 말씀 보면서 정말 더욱 기도하고 말씀위에 굳게 서서 눈에 보이는 어떤 것에 의하여, 인간적 유불리에 의하여 좌우되지도 말고, 엉뚱한 것을 고집하지도 말고 오직 진리와 말씀과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삶으로 더욱 생명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는 삶을 살아가자.
요한복음 강해-37/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안다 /요7:45-52
2020-01-21 11:03:19
생선 중에 부세라는 생선이 있습니다. 모양이 조기와 비슷해 시장에서 조기라고 속여서 팔기도 해서 ‘가짜 조기’로 불리기도 합니다. 부세와 참조기 구별하는 방법에 대해 사람들이 여러 가지를 말합니다. 참조기는 머리에 다이아몬드 형태가 있는데 부세는 마름모꼴의 형태가 있다는 등의 구별 방법입니다. 부세는 참조기에 비해 가격이 훨씬 쌉니다.
그래서 어부들에게는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던 부세가 ‘황금알을 낳은 생선’으로 변했습니다. 지난주에 뉴스를 보니까 한 어판장에서 부세 10마리 1상자에 810만원에 낙찰이 되었습니다. 어민들에게 부세는 천덕꾸러기가 아니라 로또로 불려지고 있습니다.
갑자기 이런 변화가 일어나게 된 이유는 중국에 있습니다. 중국의 최대의 명절인 춘절에 제사상에 생선을 올려놓습니다. 중국 사람들의 단어 발음에 ‘여유로울 여’와 ‘고기 어’자의 발음이 비슷하고, 특히 부세의 배가 누런 황금색인데 유독이 ‘재물’을 상징하는 황금색을 좋아하는 중국 사람들의 취향과 맞아 떨어진 것입니다.
부세를 제사상에 올려놓으면 한 해 동안 많은 부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 부세를 찾으니 갑자가 부세의 값이 천정부지로 오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변화를 인생역전이라고 말합니다. 아니, 어생역전인가요? 부세가 참조기보다도 훨씬 비싼 생선이 된 것은 부세에 좋은 의미를 부여하고 그 생선을 찾는 사람이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천하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보배와 같은 존재라고 말하고 계십니다. 잘난 것도 없고, 세상에서 뛰어난 삶을 사는 것도 아니라 사람들은 나를 인정하지 않지만 하나님은 나를 천하의 그 어떤 것 하고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존재라고 말씀합니다.
이사야서 43장 1절의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4절의 말씀을 이어서 읽어보겠습니다.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하나님은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우리를 지명하여 불러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부세라는 생선이 참조기 보다 맛이 없지만 그러나 사람들이 의미를 부여하며 가치를 인정할 때 참조기 보다 훨씬 더 높은 가격이 형성되는 것처럼 우리는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가장 귀한 존재로 인정하시니 그 가치는 무엇으로도 비교할 수가 없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이것을 내가 깨달을 때 감사하며 살아야할 이유를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의 세계로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요한복음 7장 37,38절을 보면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 된 기쁨의 자리로 우리를 초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초대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둘로 나눠집니다. 예수님의 초대와 예수님께서 전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듣고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들로 나눠집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말씀을 중심으로 변화되는 사람과 변화되지 않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변화되지 않는 대표적인 사람들이 본문에 나오는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과 당국자들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과 가르치시는 말씀을 듣고 바리새인들과 당국자들은 불안해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잡아 오라고 보낸 종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감동을 받고 빈손으로 돌아오자 분노하며 저주했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옹호하는 니고데모를 향해 화를 내며 공격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과 행하신 일을 보고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유는 갈릴리와 같이 천한 곳에서는 하나님의 사람이 날 수 없다는 선입견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감동이 없고 변하지 않는 이유는 자신들의 욕망에 대한 집착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정신이 담겨 있는 율법을 말하지만 그 율법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기준이 자신의 욕망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율법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입니다. 귀에 걸면 귀걸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식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삶의 기준이 아니라 자신의 바람과 욕망이 삶의 기준이 되어 있기 때문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반면에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처럼 니고데모는 요한복음 3장에 보면 밤에 예수님을 찾아와 거듭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물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당시의 최고의 권력 기관이었던 산헤드린공회의 공회원이었습니다. 그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 왔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온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가르침을 받고 싶은데 자신의 직책에 대한 체면과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돌아갔습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만난 뒤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성경은 침묵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니고데모가 나타납니다. 사람의 시선을 피해 밤에 예수님을 찾았던 니고데모가 이제는 사람들 앞에서, 그것도 산헤드린 공회원과 정권을 잡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옹호합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51절 말씀을 한 목소리로 읽어보겠습니다.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느냐’ 무슨 뜻입니까? ‘너희들은 마음을 열고 예수님의 설교를 직접 들어 본적이 있느냐? 그 분이 행한 일들이 어떤 정황 속에서, 어떤 사람에게 행했는지 확인하지도 않고 판단하느냐? 이것이 너희들이 말하는 율법의 정신이냐? 이렇게 하는 것을 옳지 않은 일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만난 후에 약 2년 정도의 시간이 흐른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 기간 동안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말씀을 듣고, 그분이 행하시는 일을 보고 변했습니다. 사람의 시선을 두려워하며 밤에 예수님을 찾아 왔던 니고데모가 종교지도자들 앞에서 예수님을 옹호합니다.
요한복음 19장에 보면 니고데모가 다시 한 번 나옵니다. 오늘 사건 이후에 6개월이 더 지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현장에서 니고데모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을 때 빌라도와 헤롯 왕과 종교지도자들이 두려워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시신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그때 아리마대 요셉이라는 사람이 예수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려 거두었습니다. 니고데모도 예수님의 시신을 거두는데 동참합니다.
그는 향유를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시신에 바르며 세마포로 예수님의 시신을 쌉니다. 이 행동은 자신의 명예, 권력, 부 등 세상의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수습한 이후에 니고데모의 행적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만난 이후부터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의도적으로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관계를 세 번에 걸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변화되는 니고데모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신앙의 참 변화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그 하나님을 알아야 믿습니다. 하나님을 알려면 하나님의 사랑과 역사를 말씀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믿음의 기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한 사람의 믿음이 온전한 믿음인지를 알려면 그 사람이 고백하는 말이 아닌 그 사람이 생활 속에서 맺는 열매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2장 33절을 함께 읽어봅시다. ‘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 포도나무에 포도가 열리지 돌배가 열리지 않습니다. 믿음이 온전하면 믿음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성경에 세 번 나오는데 그는 예수님을 향한 어떤 신앙의 고백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에서 보이고 있는 열매를 보면 그가 얼마나 예수님을 사랑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신앙의 향기입니다. 믿음은 열매로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자극에 익숙한 신앙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잔잔하게 믿음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런 성도들 위에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기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령으로 살아갑시다. /요7:45-53
2015-08-22 08:21:10
*원제목 : 사람은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하신다
우리가 중간 중간에 늘 점검해 보아야 하는 것은, <내가 오늘 성령충만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하는 점입니다...
성령충만은, 다른 말로, 말씀 충만, 기도 충만, 찬양 충만, 전도 충만, 사랑 충만, 감사 충만, 봉사 충만입니다.
◑신앙생활은 성령님의 역사로 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성령님이 강권적으로 시키시는 기도
24시간 기도센터로 유명한 미국 캔사스시티의 IHOP 기도 컨퍼런스가
3주간 저희 교회에서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들이 한국 교회의 새벽기도, 기도원 운동에 놀라워했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24시간 기도로 하나님이 주신 복, 영적인 도전을
한국 성도들과 나누기 위해서, 지난 금요일부터 3주간에 걸쳐서
기도 컨퍼런스를 합니다.
부흥회도 그런 부흥회가 없을 만큼 하나님이 강력한 은혜를
이 집회 중에 우리에게 허락해주고 계신 것을 봅니다.
이 운동은 전 세계에 ‘기도의 영향력’을 끼치고 있습니다.
24시간 (연속)기도, 엄두나 나는 일입니까? 성령님의 역사인 것입니다.
컨퍼런스가 시작되던 지난 금요일 저녁 메시지를 전할 앨런후드 목사님께서
11살 된 아들 사무엘에게 말씀을 시작하기 전 중보 기도를 요청하였습니다.
매우 수줍어하던 아이가 마이크를 들자,
엄청난 능력 있는 기도를 쏟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어제 저녁 집회에도 아버지와 함께 강의와 기도를 담당했습니다.
IHOP에서는 유치부, 어린이부가 따로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아이들도 다 함께 치유, 중보, 예언 등 성령의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을 본 교우들이 충격을 받으신 분들이 많으실 텐데
그러나 괜히 아이들에게 너는 뭐하니 하며 다그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께서 하셔야 되는 것입니다.
IHOP 앨란후드 목사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24시간 기도, 어떻게 하나 물어오지만 기도는 방법이 아닙니다. 사랑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24시간 기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기도는 기쁨이고, 기도는 되어지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성령님의 역사가 없이는, 정상적인 신앙생활은 불가능합니다.
성령님의 역사를 힘입지 않는 성도는
비정상적인 신앙생활을.. 정상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흔히 “하나님 말씀대로 살기 힘들어요! 예수님 믿는 것이 더 어렵네요!”
하는 말을 듣습니다. 그런 말을 하는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성령님의 역사 없이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100여 년 전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왔던 그 시절,
그 때는 신앙 생활하기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지금도 믿음으로 살기 힘들다, 말씀대로 살기 힘들다고 한다면
선교 초창기에 예수님 믿을 사람, 누가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정말 어려운 여건에서 뜨겁게 신앙 생활하였고
전도도 하였고, 순교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성령님의 역사인 것입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께서는 하시는 것입니다.
◑본문 설명 - 성령의 역사가 없었던 유대인들
▲성령의 역사가 없으니까, 예수를 그리스도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본문 요7장을 보면, 예수님을 만났던 당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말씀을 직접 듣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참으로 그 선지자라, 그리스도라 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대제사장이 보내어 예수님을 잡으러 갔던 사람들조차 은혜 받고 돌아갔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왜 잡아오지 않았느냐고 질책하였을 때,
그들은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46절)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믿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잡으러 갔던 이들이, 오히려 은혜 받고 그냥 온 것 때문에
바리새인들이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너희도 미혹되었느냐?(47절) 하면서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이가 있느냐?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48-49절) 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당국자와 바리새인 중에도 예수님께 호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대표적인 사람이 당시 존경받던 공회원이었던 니고데모였습니다.
그 니고데모가 예수를 잡아오라는 대제사장에게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판결하느냐? (51절) 고 지적하였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율법을 모른다고 하지만,
실제로 율법을 어기고 있는 사람은 바로 바리새인들이라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니고데모의 말에 할 말이 없으니까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상고하여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면서
어거지로 윽박지르고는 가버렸다고 했습니다.
참, 당황스럽습니다. 예수님을 한 번만 만나보면 순교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실상은 정반대입니다. 무엇을 말하려는 것입니까?
답은 그 때는 성령님의 역사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성령충만은, 사람을 바뀌게 만듭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배(몸)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고 하셨습니다. 요7:38
그러나 당시는 성령님이 임하기 전이기에 모든 것이 다 걸리는 것입니다. 요7:39
예수님이 갈릴리 출신이며, 천한 사람들이 사는 나사렛 사람이라는 것이 걸렸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때 오게 될 박해가 두려웠습니다.
니고데모 같은 지체 높은 사람도 핀잔을 당했을 정도였으니,
보통 사람들은 어떠했겠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쉽고 잘되는 길이라면 누구나 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면, 당시 지도자들의 미움을 사게 되니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공개적으로 믿는다고 말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임하면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오순절 날 마가 다락방에서 성령님을 받은 후
예수님의 제자들은 너무나 바뀌었습니다. 무엇보다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행5:40-42, 저희가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
◑지금은 성령의 시대입니다.
여러분, 성령님이 아니면 담배를 끊고 술을 끊는 것도 어렵습니다.
도박을 끊고 음란한 일을 끊는 일은 더욱 어렵습니다.
사는 낙이 없어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십일조 헌금을 드리고, 새벽 기도에 나오고, 제자 훈련을 받고, 속회, 선교회에
참여하고, 성가대, 교사로 봉사하는 일, 어느 하나 쉽기만 한 것은 없습니다.
교회는 나오지만 예수님이 믿어지지 않는 분이 있습니까?
그러나 지금은 성령님 시대입니다.
예수님을 향하여 기도를 한번 진실하게 해 보시기 바랍니다.
자기 죄를 깨닫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고, 회개하신 후에, 성령충만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의 역사에 의한 전도
김시묵 집사님은 65세에 예수를 믿으셨습니다. 그 전에는 절대 믿지 않았습니다.
딸이 이렇게 전도를 하더랍니다.
“아버지, 이제 술 좀 그만 드시고 교회에 나가세요. 아버지 연세가 벌써 예순다섯이잖아요.”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습니다. 모처럼 외손자가 보고 싶어 찾아온 자기에게
딸은 또 잔소리를 시작했습니다. 이런 일은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찾아올 때마다 들어야하는 '교회 타령'이 싫어서 오랫동안 발길을 끊은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건은 엉뚱한 곳에서 터지고 말았습니다.
저녁상을 차려온 딸이 숟가락을 건네주면서 또 잔소리를 시작한 것입니다.
“아버지, 왜 교회에 안나가세요. 아버지가 교회에 나가는 것이 바로 제 소원이에요.”
골치가 지끈지끈 아파왔습니다. 또 교회타령이라니...
그 분은 숟가락을 놓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습니다.
“나 집에 갈란다. 제발 이 애비 속 좀 뒤집어놓지 말아라.
네가 그런다고 내가 교회에 갈성싶으냐?”
문을 나서는 나를 붙잡고 딸은 애원을 했습니다.
“교회얘기 안 할 테니 식사나 하고 가세요.”
“싫다. 밥이 편하게 넘어가겠느냐?”
밖은 몹시 추웠습니다. 오들오들 떨면서 버스를 기다렸습니다.
생각할수록 딸이 괘씸하게 생각됐습니다. ‘마음이 움직여야 교회를 나가는 법이지,
주위에서 강요한다고 되나?’ 눈발이 휘날리는 저녁거리에서 뿌드득 이를 갈았습니다.
‘절대로 교회에 나가지 않으리라.’
버스는 너무도 늦게 도착했습니다. 추위에 떨다가 버스에 오르니 너무도 따뜻했습니다.
자리에 앉자마자 졸리기 시작하더니 그만 잠이 들어버렸습니다.
어차피 종점까지 가야하니 안심하고 잠을 청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꿈속에서 목사님께서 자기를 위해 기도하는 모습이 나타나는데,
그 옆에 자기 딸이 보였고,
그 옆에는 5년 동안이나 전도해오는 친구 장로의 모습도 보였습니다.
그날 밤 그는 딸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버스 안에서 참 묘한 꿈을 꾸었구나.
꿈속에 한 목사님과 너희들의 얼굴이 나타나지 않았겠니. 그런데...’
딸은 신이 난다는 듯이 말끝마다 “예, 예” 하면서 맞장구를 쳤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매듭을 지었습니다. “교회에 나가시라는 꿈이에요.
내일 열두시에 집으로 찾아가겠어요. 아버님, 고마워요.”
딸은 감격스런 목소리로 내일 만나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그 약속을 거절하지 못했습니다.
정오가 되자 사위와 딸이 찾아왔습니다. 성경책과 찬송가를 내밀었습니다.
“아버님, 축하드립니다. 이제부터 새로운 삶이 시작된 거예요.”
사위와 딸의 예상처럼 그는 그 날부터 새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조석으로 성경을 읽고 있으며 양로원에 다니며 말씀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의 연세가 지금 일흔여섯이지만, 한 생명이라도 더 구원시켜야 되겠다는 생각 때문에
집에 편히 누워 지낼 수 없다고 합니다.
지금 그는 안수집사가 되어 노인들에게 전도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말씀이 틀림없네요.”
큰 딸은 그만 보면 이런 말을 한답니다.
▲진실한 신앙을 사모하십시오.
예수님을 믿어도 능력이 없습니까?
능력있는 성도가 특별한 것이 아니라, 불신과 무기력한 신앙 생활이 이상한 것입니다!
성령님의 역사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 성령님은 여러분과 함께 계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러분이 정말 진실히 주님을 구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정말 계십니까? 저도 만나고 싶습니다.
저도 예수님을 이제는 뜨겁게 확신 가운데 믿고 싶습니다.”
진심에서부터 그렇게 기도하는데 달려있습니다. 그러면 주님은 정확하게 역사하십니다.
▲교회적으로도 성령이 충만해야 합니다.
요즘 저희 교회에서 큰 집회들이 열리면서,
아무리 이 예배당을 한국 교회와 민족을 위하여 내어 놓으려 해도
재정이 뒷받침해주지 못하면 “안돼요, 못해요” 할 수 밖에 없음을 알았습니다.
예배당을 내어 놓는 것도, 성령의 능력이 없으면 못합니다.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성령님의 능력으로 함께 하옵소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옵소서.
우리가 재정이 어렵기 때문에 여기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집회가 열리는 것에
주저하지 않게 해주옵소서.”
능력이 없으면 마음의 소원이 있어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 싶다고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개인이 예수 잘 믿고 싶어도 그렇다고 해서 예수 잘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의 능력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님과 동행했던 링컨 대통령
미국의 링컨대통령은 정말 놀라운 일을 했습니다. 흑인 노예제도를 종식시켰습니다.
만약 그 때 흑인 노예 제도가 해결되지 않았다면 오늘의 미국이 있었을까요?
전 세계적으로 흑인 차별 문제, 인종차별 문제가 해결되었을까요?
그러나 흑인 노예 해방은 링컨에겐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반대자가 많았습니다. 결국 이 일로 미국은 남북 전쟁, 내전 상태에 빠졌습니다.
그는 결국 암살당했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 이런 일을 감당할 정치인이 있을까요?
링컨 대통령이 이 일을 해낸 것은 그가 진정한 성령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명 앞에서 두려움이 없었던 것입니다.
남북 전쟁 당시 링컨대통령이 이끄는 북군이 처음에 전투에 패하면서
밀리는 상황이 계속될 때, 장군들이 대통령을 격려했습니다.
"각하,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북군 편이 되어서 북군이 승리하게 해달라고
온 교회가 날마다 눈물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 때 링컨대통령이 대답했습니다. "그렇게 기도하지 마십시오."
모인 사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링컨이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어 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항상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다."
링컨은 수많은 실패를 경험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 숱한 실패에도 링컨이 좌절하지 않은 힘의 원천은 <성경 읽기>에 있었습니다.
링컨은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어김없이 2시간 가량 <성경>을 읽곤 했습니다.
링컨은 성경을 열심히 읽었고, 읽은 그대로 행동하였습니다.
수1:8-9,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성령님께서 링컨에게 용기와 담대함을 주셔서
온 세계가 겪는 고통을 해결하신 것입니다.
▲성령은 긍휼과 사랑의 마음을 심어줍니다.
지난 번 목회자 기도 모임에서, 한 목사님이 자기 딸에 대한 간증을 하셨습니다.
착하고 예쁘던 중3 딸이 밤 중에 창문으로 집을 나가 담배를 피는 것을 알았습니다.
마음이 무너지는데 화를 참지 못하겠더랍니다. 쇠 파이프로 엉덩이를 때렸으나
얼마 뒤 학교에서 다시 담배를 핀 것이 발각되어 연락이 오고,
급기야 학교에서 반 아이를 폭행하여 맞은 아이가 병원에 입원을 하고, 고소를 당했답니다.
한 번 혼이 나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학교에 가지도 않았더니
선생님이 찾아와서 경찰서에서 피해자와 합의를 하고 고소를 취하해야 한다고 해서
피해자를 찾아갔답니다.
피해자에게 사과하고 용서를 구했으나 고소를 취하하지 않더랍니다.
학교에서도 전학 가기를 강요하더랍니다.
모두가 다 딸을 버리고 미워하고 손가락질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딸이 너무나 불쌍한 마음이 들더랍니다.
딸이 가장 비참해진 순간 아버지 마음에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일어나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마음이 이렇구나.’ 느꼈답니다. 비로소 울면서 기도했답니다.
그리고 마음으로 다짐했답니다.
“걱정 마! 아빠가 있어. 내가 너와 함께 할 거야. 내가 반드시 너를 지켜줄 거야.
아버지는 네 편이야.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내가 너와 하리라.”
다음날 딸에게 눈물을 흘리면서 그 말을 해 주었답니다.
“너 두려워하지 마라. 아빠가 너를 지켜줄 거야.”
딸이 얼마나 놀라는지. 그러나 딸 얼굴이 달라지는 것을 보았답니다.
사람이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하십니다.
우리는 그 성령님을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 성령론
요한복음강해-41 /요7:45-52
2011-01-20 16:57:10
모두가 "예" 할지라도
민주주의는 다수결의 원칙에 의해서 만사를 결정합니다. 그래서 대통령이나 국회위원을 뽑을 때 투표를 합니다. 또한 어떤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무기명 비밀 투표를 하든지 아니면 거수 투표를 해서 한 표라도 더 많으면 그 쪽으로 결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다수결의 원칙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절대 다수가 원한다고 해도 하나님께서는 원치 않는 일이 분명히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투표에 참여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생각으로 가득차 있을 경우 더더욱 민주적인 투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아는 일이 매우 어렵기 때문에 대부분의 교회들이 민주적인 방법으로 일을 처리해 나갑니다. 각 부서와 위원회가 있어서 다수결의 원칙에 의해서 의사(議事)를 결정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는 길을 걸어갈 때 민주주의라고 하는 것, 다수결의 원칙이라는 것은 매우 인본적인 것이 될 위험성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때로 사람들 숫자로 하나님의 진정한 뜻을 왜곡시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감독이나 총회장 같은 교단장 선거를 표대결로 결정하는 것을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표를 던지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 안에 있지 않는 한, 민주적 투표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진짜 그리스도인은 모든 사람들이 다 "예!" 하면서 동의해도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아니오!"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본문은 초막절 기간 동안에 일어난 소동의 결과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이상한 말씀을 가르치시는 예수님을 어떻게 해서든지 체포하기를 바랬습니다. 그래서 하속들, 즉 성전을 지키던 '성전 경찰'(temple police)이 당시 예루살렘의 유대교 지도자들이었던 자기들에게 왔을 때 대뜸 왜 예수를 잡아오지 않았느냐고 다그칩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체포하지 못한 것에 대한 논쟁이 세 부류의 사람들 가운데 일어납니다. 먼저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을 골탕먹이고 잡으려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있습니다. 둘째로, 양심 때문에 자기가 속한 집단의 뜻을 따르지 않는 하속들이 있습니다. 셋째로, 양틈에 끼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고뇌하는 지식인 니고데모가 있습니다.
①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집단의 힘으로 진리를 거슬리려고 했던 사람들입니다.
요한 복음에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언제나 예수님을 대적하고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로 나타납니다(요 1: 19, 24). 특히 요 18: 28-19: 16을 보면, 유대인들과 더불어 대제사장들은 빌라도 총독을 설득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했던 장본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예루살렘에서 다수의 세력이었고 언제든지 큰 음모를 벌일 수 있는 힘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성전 경찰들이 예수님을 체포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온 것에 몹시 실망했습니다. 그래서 하속들을 다그칩니다. 이 때 하속들까지 예수님을 변호하는 말을 하게 되자 화가 머리끝까지 났습니다. 하속들은 자기들이 이 때까지 예수님처럼 말하는 사람을 일찍이 보지 못했노라고 대답했습니다.
47절에 보면 기가 찬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너희도 미혹을 당했느냐?"고 추궁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다 사기꾼에게 속아넘어가듯이 미혹된 것으로 보았던 이들은 하속들까지도 미혹당한 것으로 치부합니다. 제 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속아넘어갔기 때문에 예수님을 체포하지 못한 것으로 보았던 것이지요.
그러면서 48-49절에서는 한층 더 오만한 말을 서슴지 않고 내뱉고 있습니다.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이가 있느냐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나 바리새인들 중에는 아무도 예수를 믿는 이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율법을 잘 알기 때문인데 율법을 알지 못하는 무지렁이들이나 예수님의 뒤를 따른다고 빈정거린 것입니다. 그래서 49절에서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라고 혹평을 합니다.
참으로 못된 심사요 교만한 태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잡아오지 못한 하속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과 마찬가지로 율법에 무지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꾀임에 속아넘어갔을 뿐 아니라 저주받아 마땅한 자라고 힐난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의 맥락으로 볼 때 하속들을 한심하게 생각한 나머지 저주하기 위해서 이 말을 했던 것입니다. 오직 자기들만이 율법에 대해서 제일 잘 알고 속아넘어가지 않을 정도로 똑똑하고 지혜롭기 때문에 예수의 거짓을 가장 잘 판단할 수 있다는 교만에 가득차 있는 것입니다.
② 하속들은 양심과 진리에 입각해서 예수님을 보았던 사람들입니다.
하속들은 성전 경비를 맡은 경찰들입니다. 그러므로 누구의 편이 되겠습니까? 두말 할 필요도 없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과 한 통속이 되어야 마땅한 사람들입니다. 한솥밥을 먹는 처지로 다수결의 원칙을 따른다면 유대 종교 지도자들 편을 들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예수님을 잡아오기는커녕 이상한 말까지 서슴지 않고 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예수의 말을 가만히 들어보니까 지금까지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음을 알았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같은 분을 처음 보았다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은근히 자기들도 예수님 말씀에 은혜받고 믿게 되었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아무리 자기가 같은 편에 속했다고 할지라도 진리와 양심을 따라야 합니다. 한국은 유난히 소속감을 강조합니다. 이른 바 '삼연'이라고 해서 '혈연,' '지연,' '학연'을 따집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디 남이가?" 하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편이면 그 사람이 아무리 잘못되어도 무조건 편을 든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태도 때문에 한국에서는 지역 감정이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정책이 어떻든, 그 사람의 인물됨이 어떻든지 간에 자기 고향 사람이면 무조건 찍어준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고, 나라 전체가 망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손이 안으로 굽는다"고 자기가 소속된 사람 편을 드는 것이 자연스러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순간에도 진리와 양심을 따를 때 개인은 물론이고 나라 전체가 바른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하속들이 위대한 것은 높은 사람 밑에 있는 힘없는 부하, 말단 직원에 불과했지만 윗사람 눈치를 보지 않았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진리와 양심을 따랐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끼친 인상이 너무나 강렬해서 그렇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속들같이 모두가 다 "예!" 하더라고 "아니오!"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그 사회는 건강한 사회요 미래가 있는 사회인 것입니다.
③ 니고데모는 양심으로는 예수님을 지지했지만 행동으로는 주저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하속들과 말다툼을 하고 있을 때 니고데모가 등장한 것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요 3장에 보면 니고데모는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요 3: 5 참조)을 잘 이해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는 유대의 국회인 산헤드린의 의원이었으며 바리새인이었기 때문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과 함께 한 자리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이들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얕잡아 보는 것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자기들 빼놓고 예수님을 따르는 유대 무리들은 다 율법에 무식한 무지렁이들이라고 폄하했을 때 조금 분개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양심적으로 즉 마음속으로만 그렇게 분개했을 뿐, 머리나 행동은 괜히 편 잘못 들었다가 당하게 될 망신이나 피해를 고려해서 적극적으로 자기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습니다.
그 대신에 51절 말씀에 보면,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판결하느냐?" 하면서 지극히 원론적인 이야기만 하고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출 23: 1과 신 1: 16에 있는 율법을 근거로 해서 예수님을 판단하려면 공정한 절차를 통해서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먼저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 보고 또 예수님의 하시는 일을 보고 난 뒤에 예수님께서 어떤 분인지 심판해야 옳다는 교과서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물론 니고데모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다수가 힘으로 밀고 나올 때 적극적으로 "아니오!"라고 말하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그 마음이 약했기 때문에 그랬을 것입니다. 양심으로는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또 믿고 싶었지만 머리로는 만에 하나 집단적으로 왕따를 당한다든지 어떤 불이익을 당하는 것이 두려워서 그 이상 나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니고데모의 말을 들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이렇게 점잖게 율법적인 정석(定石)을 말하는 니고데모까지 싸잡아서 핀잔을 주고 있습니다. 52절을 보세요.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상고하여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아주 비열한 방법으로 지방 감정을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갈릴리 같은 촌동네에서 무슨 선지자가 나올 수 있겠느냐 하면서 혹시 너도 갈릴리 출신이라서 이런 정신나간 말을 하는 것이 아니냐고 빈정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나중에 예수님을 믿어서 요 19: 39에 보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의 시신을 장사까지 지내주었습니다. 이렇게 나중에는 동료들이나 다수 집단의 눈치를 보지 않는 적극적인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지만 이 때까지만 해도 눈치를 보고 있었습니다. 다수의 눈치를 보면서 혹시 왕따나 당하지 않을까 하면서 절반 정도만 자기 속내를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속한 집단의 힘에 좌우 당하지 않고 진리와 양심을 따르는 일은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길을 원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모두가 "예!" 할지라도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있는 사람을 하나님은 오늘도 찾으십니다. 아멘.
믿지 못하는 이유/요7:45-53
2004-03-25 13:13:43
오늘 53절에 은혜 받으신 분들이 있습니까?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 집으로 돌아 가는 것이 가장 은혜가 되는 분들이 계시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새기고 가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작고하신 가나안농군학교를 세우신 김용기장로님은 자신도 생일잔치를 해 본적이 없고, 그 가족들 모두가 모두 생일이라고 특별한 잔치해 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김용기장로님의 아들인 김범일장로님이 어릴 때, 생일이 되었습니다. 남들처럼 생일상 차려주시나 하고 있는데, 아버지가 물으시더랍니다. “너 생일 잔치 해먹을 자격 있니?” [무슨 말씀입니까?] “생일 잔치라는 것은 축하식인데, 너 국가를 위해서 무슨 공로 세운 것 있니?”“ 없습니다 ”
“지역 사회를 위해서 한 일 있니?”“ 없습니다. ”
가정을 위해서 한 일 있니?“ 어린아이니깐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무슨 축하식을 해?“ 생일잔치 안하는 것이 옳습니다. ”말 똑바로 해. 생일잔치 안해 주는 거야, 못해 먹는 거야?“ 예, 못 해먹습니다. 그 이후 생일이 없었답니다. 생일잔치를 하려면, 자격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지요.
이 일화를 듣고, 지도자의 길이 쉽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라가 어려울 때, 민족의 지도자들부터 생각을 바로 가져야 한다고 부르짖으셨던 그 어른이, 자신의 생일을 차려먹는 것이 용납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은혜만 받는 것으로는 부족한 시대입니다. 말씀대로 사는 것이 중요한 시대입니다. 많은 불신자들이 성도들을 바라보며, 말씀대로 사는가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 오늘 우리가 말씀을 듣습니다만 내 삶은 어떤가 하는가를 살펴봐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가 직접 들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실제로 예수님의 말씀에는 엄청난 능력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붙들기 위해서 파견 나온 사람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다보면, 감동이 되어서 붙들기는커녕, 은혜 받고 돌아 갔습니다.
그들이 빈손으로 돌아가서는 “왜 그냥왔어?” 질책하는 바리새인들에게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46)라고 대답할 정도로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으면서도, 예수님을 정말 그리스도라고 믿고 따르기로 결단하는 사람은 굉장히 적었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 받은 사람들이 고작 한 일이라고는 자기들끼리 논쟁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다” “아니다” “맞다.”“아니다.”
ꁾ 오늘 읽은 본문의 내용이 바로 이 내용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냐, 아니냐를 놓고 논쟁한 내용]을 오늘 우리가 읽은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갈등만 하지, 선뜻 예수님을 따르지 못하는 데는 크게 두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 이유는 오늘 우리에게도 중요한 이유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긴했지만, 예수님을 제대로 잘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선입관)
지금도 교회를 다니고, 설교를 들으면 은혜가 되지만, 예수님 믿는 것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을 잘 몰라서 그렇습니다.
유대인들의 눈에는 예수님이 아주 가난한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그리고 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나사렛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 가장 큰 걸림돌이었습니다.
요새도 그렇습니다. 개천에서 용났다라는 말은 하지만, 정말 개천과 같은 곳, 정말 가난하고, 천한 지역 출신을 지도자로 모시는 것에는 여전히 걸림돌이 있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하고 천한 목수 출신이지요. 거기다가 당시 천한 지역인 갈릴리 출신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41)
이렇게 선입관을 가진 사람은 예수님을 믿을 증거가 아무리 많아도 믿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붙잡아 오라고 보낸 종들이 은혜 받고 그냥 왔을 때, 왜 그런지 알아볼만도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들은 알아 보려고도 하지 않고,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47)고 책망부터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이가 있느냐?”(:48) 하면서 “예수님과 제자들을 율법을 모르는 사람이라, 저주받은 사람”(49)이라고 매도하였습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에 당시 존경받던 공회원 니고데모가 나옵니다.
조금만 정직하게 살폈다면 당시 당국자와 바리새인 중에도 예수님께 호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음을 알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 니고데모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판결하느냐” (:51)
이 니고데모의 질문에 바리새인들은 할말이 없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율법을 모른다고 했지만, 실제로 율법을 어기고 있는 사람은 자신들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갈릴리 사람들은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율법을 모른다고 전제하는 것입니다. 즉 자기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잘 안다는 선입관에 사로잡혀서 진실을 거꾸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ꂐ 바리새인들이 니고데모의 말에 할 말이 없으니까,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하면서 어거지로 윽박지르고는 다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마치 사람들이 토론을 하다가 더 이상 논리로 말이 안되니깐, 하는 말이 “당신 나이가 몇 살이야? 버르장머리도 없이” 이런식으로 어거지로 밀어 부치고는 가버리는 것하고 비슷한 경우입니다.
결국 이런 부정적인 행동의 이유는, 예수님께서 갈릴리 출신이라는 한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52 “상고하여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그렇습니다. 선입관이 사람의 눈을 가립니다.
어느 고등학교 야학생이 자신의 친엄마를 친엄마라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겁니다. 이것 어떻합니까? 어머니도 미칠 노릇이지요.
그 이유가 이 여학생이 어릴 때 말을 안 들을 때마다, 장난삼아 “너 자꾸 말 안들으면 진짜 엄마에게 데려다 준다.” 한 말이 화근이 되어, 엄마가 친엄마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교회 전도사님에게 자기 딸하고 상담을 해 보라고 요청을 했답니다. 전도사님이 만나보니, 그 여학생이 친엄마가 아니라고 분명하게 확신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증거를 말하는데,
어느날 학교에 가서 점심시간이 되어, 도시락을 열어보니 젓가락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친 엄마가 아니니, 도시락은 싸 주는척 했지만, 젓가락을 안 넣어 준 이유가, 먹지말고, 굶으라는구나! 그래서 확신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대단하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도 이 여학생처럼 대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겁니다.
마음문을 닫고 주님을 보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못 봅니다. 예수님 믿을 증거는 많은데도 말입니다.
어느 분이 아무리 전도를 해도 예수님을 안믿겠다고 그래요. 왜 그런가하고 나중에 들어 보니깐. 자기가 다니는 회사의 사장님 때문에 교회에 안 나온다는 겁니다. 목사님이 자주 심방오고, 회사에서도 예배를 억지로 드리게 되는데, 자기가 볼 때, 사장님이 [이건 아니다.] 하는 행동을 여러번 하더랍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예수믿는 사람은 다 그렇더라, 예수 믿어 뭐해”라고 말합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충분히 이해가 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잘해야 합니다. 예수님 믿으라고 전도는 못할망정, 다른 사람 예수님 믿는 일에 가로막아서는 안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여러분! 충분히 이해는 되지만, 참 어리석은 일입니다.
만약에 문제가 많은 선생님이 계시다고 해서, 아이들을 학교에 안 보낼 겁니까?
그렇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사랑이 커도, 믿으려고 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선입관을 버려야 합니다.
인도에서는 코끼리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어렸을 때부터 커다란 나무에 꽁꽁 묶어 놓는다가 헙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커다란 나무' 에 묶인 새끼코끼리는 꼼짝도 하지 못하는데,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코끼리는 이른바 후천적인 무력감을 '습득'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달아나려고 무던히 애를 써 보지만 매번 실패하면서 결국 포기하고 맙니다.
몸무게가 수 톤에 달하는 어른이 된 뒤에도 코끼리는 도망칠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몸집보다 훨씬 작은 나무에 묶여 있더라도 나뭇가지 하나 움직여 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은 평범하게 살 팔자라거나, 넌 어쩔 수 없다거나, 현재와 같은 상황을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다 보면 고정관념으로 머리가 굳어져 코끼리처럼 무력하게 되고맙니다. 시각이 좁아지면서 생각 역시 점점 작아지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이런 기대와 비젼, 꿈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신앙도ㅓ 더 성숙될 수 있다. 더 성장할 수 있다.
나도 새벽기도 할 수 없다가 아니라, 비록 무엇 무엇이 걸림돌이 되어도 나는 새벽기도 할 수 있다. 이렇게 되야 하는 겁니다.
요새 제가 강력하게 느끼는 것이 이 부분입니다. 최소한 기도라도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사람은 포기할지언정,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라도 열심히 해야 되겠다, 이런 마음이 자꾸 듭니다.
그래서 새벽기도회 때마다, 기도제목이 있습니다. 교인들 전 가정을 날자별로 기도하고 있는데, 잘 나오지 않는 분들을 위해서도 열심히 기도라도 해야지 하면서 새벽기도회 때마다, 특별 시간을 내어, 나온 분들과 합심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를 위해서도 안된다는 고정관념, 선입관을 버리고, 믿음의 모험을 시도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반드시 기도 해 주시기 바랍니다.
기도라도 못합니까? 최소한 기도는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새벽기도, 작정기도, 금식기도, 산기도 등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마음을 열고 주님께로 나가보시면, 반드시 주님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크고 위대하신 분이시며, 예수님은 느끼고 있는 것보다 더 가까이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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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제대로 믿지 못하는
두 번째 이유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 할 때의 두려움, 이것 때문입니다.
하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은혜받았다”고 고백하니깐. 주인인 바리새인들이 “너희도 미혹되었느냐”(:47) 책망을 합니다. 게다가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49)하며 저주까지 합니다.
교회 다닌다고 은혜 받은 표시를 내면, 직장 상사에게 핀잔을 받고, 동료들로부터 왕따를 당할 수 있습니다.
니고데모 같은 지체 높은 사람도, 예수님을 조금 변호하니깐,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하는 핀잔을 당했을 정도였으니, 보통 사람들은 어떠했겠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쉽고 잘되는 길이라면 누구나 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따르면, 당시 지도자들의 미움을 사게 되니, 이 두려움 때문에 믿지 못한 것입니다.
저는 고2, 고3때 담임선생님이 한 분 이셨습니다. 선태문 선생님이라고 제가 신학한다고 했을때, 아쉬워하면서도, 나를 격려 해 주신 분입니다.
이 분이 제가 모의고사가 잘 안나왔을때, 저 때문에 장독을 깨부신 분이십니다. 제가 고2때, 반을 대표하는 실장이었는데, 고3이 되면서, 실장하면 공부에 전념 못한다고 막으신 분이기도 합니다.
이 선생님은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동생들을 책임지는 가장역할을 하셨습니다. 이런 이유로, 고등학교를 검정고시로 통과하고, 전남대 화학과를 나오신 똑똑한 분입니다.
이 분이 제가 고3때, 교회에 빠져 사니깐, 한잔하시고는 술이 취하셔서, 저를 부르시고는 하는 말이, “교회가 그렇게 좋으냐? 하나님이 그렇게 좋으냐?”물으시는 겁니다. 그래서 “예, 그렇습니다. 선생님도 교회 다니시고, 예수님 믿으십시오.” 그렇게 말씀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선생님이 자신의 입장을 말씀하시더랍니다. 당신에게는 이상한 능력이 있어서, 꿈에 가족과 친척들이 어떻게 될지 다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꿈대로 실제 이루어지니깐 두렵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야기가 길어지면서 하시는 말씀이, 새벽 2시만 되면, 어떤 귀신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화학을 가르치는 엘리트 선생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는데, 듣는 제자 입장에서는 정말 난감하더라구요. 꼭 미친 사람 말 아닙니까? 술김에 하는 말이구나! 하기에는 좀 도가 지난친 상담이었습니다.
당시 선태문선생님은 제가 다니던 서귀포 충일교회 바로 입구에 사셨는데, 결론은 당신도 교회는 다녀야 하는 것을 알지만, 그 귀신 때문에, 그 귀신이 당신의 가족들을 해꼬지 할까봐 교회 못다니시겠다는 것입니다. 당신 자신이 다치거나, 죽는 것은 괜찮은데 가족들이 해꼬지 당하는 것은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서, 그 두려움 때문에 교회 못나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도를 나가보면 이런 분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어머니가 불교에 심취해 있어서, 조상때부터 제사를 드려와서 등등, 이런 두려움 때문에 주님을 제대로 믿지 못하는 분들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주님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 믿는 것을 결단이라고 말합니다.
담배를 끊고, 술을 끊고, 도박을 끊고, 음란한 일을 끊는 일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미 끊은 사람이야 별 문제가 없지만, 술, 담배 끊는 것, 이것 하나 끊는데도 모든 인간관계가 끊기는 것과 같은 두려움 때문에 잘 끊지 못합니다.
거기다가 십일조 헌금을 드리고, 새벽기도에 나오고, 제자훈련을 받고, 속회, 선교회에 참여하고, 교회 전도, 행사 등에 봉사하는 일, 주님께 나아가는 순간 순간의 일들에는 반드시 다 결단이 필요한 일입니다. 어느 하나 쉽기만 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두려움과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인생을 성공하는 길, 되는 길로 가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참으로 행복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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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 번 큰 강을 건넜습니다. 홍해와 요단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두 번 다 다른 방법으로 건너가게 하셨습니다.
홍해는 먼저 바다를 갈라놓으신 후, 건너가게 하셨고, 요단강은 넘치는 강물에 먼저 발을 드려 놓으라고 하신후, 고만큼만 물이 멈추게 하시면서 건너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눈앞에서 홍해처럼, 먼저 홍해를 갈라놓으시고 홍해를 건너가라고 한다면 누구나 건너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단강처럼 강물이 넘치는데 그 속에 먼저 발을 들여 밀라고 하신다면 그대로 행하기가 대단히 어려울 것입니다.
홍해의 역사는 극적이긴 하지만, 어린아이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들은 아직 하나님의 존재조차 믿지 못하는 단계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약속된 축복의 땅을 소유할 자는 그런 믿음으로는 안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직전 요단강에서는 먼저 믿음으로 넘치는 강물에 발을 들여 밀게 하신 것입니다. 요단강은 먼저 순종할 때, 갈라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생 몇 번 중요한 결단을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낙심스러운 것은 이 때를 놓쳤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한 두 번의 결단한 것 때문에 지금까지 온 것입니다.
어느 내과 의사가 어느날 야구 중계를 보는 중에 관중 석에서 어느 사람이 핫도그를 맛잇게 먹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가만 보니 어디서 많이 본 사람이라, 생각해 보니, 위궤양으로 자기 병원에 치료하러 오는 환자였다는 것입니다. 그때, 이 의사가 “정말 못말린다.” 한탄했답니다. 그렇게 핫도그 같은 것 먹지 말라고 하는데도, 저렇게 잘 먹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 보실 때, 우리가 정말 이 환자와 같지 않습니까? “야! 정말 못말린다.”
여러분! 이제는 돌이켜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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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집사님, 청년 때부터 청년부에서도 열심이더니, 결혼하고 집사님 되어 교회 일에 열심인 분이었습니다. 온 교회가 칭찬하는 열심있는 집사님인데, 한 가지 숨기고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고스톱하는 습관입니다. 유일한 부부싸움 거리였습니다.
아내의 잔소리가 점점 심해졌습니다. “아니 당신이 집사라면서 매일 고스톱을 해요? 목사님이라도 아시면 어떻게 할려고 그래요?” 그저 재미로 한다고 하지만, 늘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그러다가 생각했습니다. 결국 며칠을 고민하다가, 고스톱을 끊는 방법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신학교 가는 길입니다. 그래서 아내에게 “신학교 가자” 말하니깐 아내가 펄쩍 뛰었습니다.
‘내가 신학교에 가서 목사가 되면 고스톱 안 할 것 아니야?“ 정말 그가 신학교에 갔고, 지금 목회 잘하시는 목사님이 돠었습니다.
목사가 된 동기가 고스톱 안치려는 것이었다는 것도 우습고, 혹시 그분처럼 고스톱으로 고민하는 분들 모두가 이렇게 신학교에 다 가야할 필요는 없지만,
결단할 때, 결단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요즘 여러분에게 집요하게 말씀하시는 것이 없습니까?
여러분은 자꾸 주님을 피해 다니지는 않습니까? 이제 주님을 향하여 방향을 돌리셔야 합니다.
마태복음 26:58에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좇는 바람에 예수님을 3번씩이나 부인하게 된 것을 모르십니까?
여러분을 향한 주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아직도 망설이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지금 내가 결단해야 할 것들이 있지 않습니까? 미루고 미루는 결단, 여전히 망설이면서 결단하지 못하는 것들이 지금 나에게, 여러분들에게 없습니까?
하나님 앞에 설 때를 바라보면서 결단하는 시간을 갖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돌아오는 7월 6일에는 우리교회 창립3주년을 감사하며, 총동원주일로 지키게 됩니다. 그때 예수님 믿지 않는 식구들, 이웃들을 데려 와야 합니다. 주님을 믿을 것 같은데도, 선입관 때문에, 두려움 때문에 믿지 않는 사람들을 데려 와야 합니다.
누구를 데려 올 것인지, 전도대상자를 정할 수 있도록, 기도하시고,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찬양하겠습니다. 찬양하고 통성으로 기도하십니다.
[☻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지 못하는 이유
첫째는 예수님을 바로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선입관)
두 번째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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