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빛으로 충만한 은혜 /요8:12-30/ 유기성목사
2022-09-22 10:58:01
요 8:12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사람은 어둠 속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13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당신이 스스로 자신에 대하여 증언하니, 당신의 증언은 참되지 못하오." 14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비록 내가 나 자신에 대하여 증언할지라도, 내 증언은 참되다. 나는 내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희는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르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다.
15 너희는 사람이 정한 기준을 따라 심판한다. 나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는다. 16 그러나 내가 심판하면 내 심판은 참되다. 그것은,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17 너희의 율법에도 기록하기를 '두 사람이 증언하면 참되다' 하였다. 18 내가 나 자신에 대하여 증언하는 사람이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도 나에 대하여 증언하여 주신다." 19 그러자 그들은 예수께 물었다. "당신의 아버지가 어디에 계십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너희는 나도 모르고, 나의 아버지도 모른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나의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 20 이것은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헌금궤가 있는 데서 하신 말씀이다. 그러나 그를 잡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것은 아직도 그의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21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가고, 너희는 나를 찾다가 너희의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22 유대 사람들이 말하였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하니, 그가 자살하겠다는 말인가?" 23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여 있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여 있지 않다. 24 그래서 나는, 너희가 너희의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내가 곧 나'임을 너희가 믿지 않으면, 너희는 너희의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다." 25 그들이 예수께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지 않았느냐? 26 그리고 내가 너희에 대하여 말하고 또 심판할 것이 많이 있다. 그러나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시며, 나는 그분에게서 들은 대로 세상에 말하는 것이다." 27 그들은 예수께서 아버지를 가리켜서 말씀하시는 줄을 깨닫지 못하였다.
28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인자가 높이 들려 올려질 때에야, '내가 곧 나'라는 것과, 또 내가 아무것도 내 마음대로 하지 아니하고 아버지께서 나에게 가르쳐 주신 대로 말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29 나를 보내신 분이 나와 함께 하신다. 그분은 나를 혼자 버려 두지 않으셨다. 그것은, 내가 언제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30 이 말씀을 듣고,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
독일 다름슈타트에 있는 바실리아 슐링크 여사가 세우신 가나안 공동체를 방문하였던 적이 있었는데 거기서 인상 깊은 경험을 했습니다.
매일 저녁 [빛 가운데 교제] 시간을 가졌는데 하루 동안 지내면서 서로에 대하여 본 것을 말해 주는 시간입니다. 본인이 미처 깨닫지 못한 자신의 모습을 깨닫게 해 주는 시간입니다. 아름답고 좋았던 모습도, 추하고 악했던 모습도 다 말해 줍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빛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웬일인지 오늘 종일 얼굴을 찌푸리고 계셨어요?” “그때 벌컥 화를 내시던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아팠어요.” 이렇게 하는 것은 자기도 모르게 어떤 잘못을 한 것이 있다면 하나님 앞에 회개하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난한다거나 비판하는 분위기가 아니라 그 안에 놀라운 사랑이 있었습니다. 오직 그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 늘 거하도록 도와주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모임을 보면서 교회는 어떠해야 하는지 분명히 깨달아졌습니다. 그동안 경험했던 교회는 [어둠 속의 교제]를 나누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빛 가운데 교제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자신을 드러내는 것도 싫고 다른 사람에 대하여 본 것도 다 말해 주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말을 안 하는 것은 아닙니다. 본인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말합니다, 그래서 계속 교회 안에 시험과 갈등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진정 빛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것은 어둠 속에 살다가 빛 가운데 나와 사는 것입니다.
그저 교회만 다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엄청난 사건이고 엄청난 변화입니다.
더 이상 숨기고 꾸미고 억누르고 살지 않습니다.
빛이신 주님과 동행하기에 드러내고 또 드러내어도 자유하고 평안합니다.
그러나 누구나 이처럼 빛 가운데 사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은 후 하나님을 보지 않으려고 숨었습니다. 우리가 다 그 아담의 후손입니다, 그래서 어둠을 더 좋아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솔직히 빛 가운데 사는 것이 싫습니다. 재미없다고 생각합니다. 몰래 짓는 죄를 재미라 여깁니다.
이것은 진정 예수 믿는 삶이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싫어하고 죽이려 한 것은 예수님이 빛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너희는 사람이 정한 기준을 따라 심판한다”(:15)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판단 기준이 하나님이 아닙니다. 오직 자신들의 생각입니다.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마 23:27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회칠한 무덤과 같기 때문이다. 그것은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지만,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이 가득하다. 28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의롭게 보이지만, 속에는 위선과 불법이 가득하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마음 중심을 드러내십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싫은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어도 바리새인처럼 믿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나를 따르는 사람은 어둠 속에 다니지 아니하고”(:12) 했습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면 숨길 것이 없습니다. 겉으로는 이 말하고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속에 기쁨과 사랑이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여전히 어둠 속에 산다면 속히 빛 가운데 나와야 합니다.
마음에 주님이 주지 않은 생각과 감정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깨달아져야 생명의 회개를 할 수 있고 예수님 안에서 자유함을 얻게 됩니다.
제가 목회하면서 가장 큰 충격을 받은 사건은 속장이었던 한 남자 권사님께 주일예배에 자주 빠지는 속회원을 심방해 달라고 했다가 면박당했던 일입니다.
버럭 화를 내며 “목사님, 우리도 숨 쉬고 삽시다. 우리가 왜 목사님의 성공을 위하여 혹사당해야 합니까?”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말은 제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습니다. 즉각 반발하고 싶었습니다.
그 권사님이 가시고 비참한 마음을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너무 억울했고 너무 좌절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면서 점점 제 마음 한 구석에 교회 성장에 대한 욕심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부터 저 자신과 교회와 교인들을 생각하며 울었습니다.
그날 저는 주님을 바라보는 눈이 뜨였고 제가 목회해야 할 방향을 정확히 붙잡게 되었습니다. 그 권사님께서 다 잘하신 것은 아니지만 제겐 감사한 분이라 여겨졌습니다.
그분은 나중에 장로가 되어 제 목회에 큰 힘이 되어 주셨습니다.
주님이 보여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우리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는 나도 모르고, 나의 아버지도 모른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나의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1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신앙이 무서운 것은 죽을 때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바리새인들에게 매우 두려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21 "나는 가고, 너희는 나를 찾다가 너희의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24 '내가 곧 나'임을 너희가 믿지 않으면, 너희는 너희의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다.
‘죄 가운데서 죽는다’는 말이 너무나 두려운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죄 가운데서 죽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습니까?
죄 가운데 죽지 않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계 14:13에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오래 살고 편안하게 살다 죽는 것을 복이라 하지만 진정 중요한 문제는 죄 가운데서 죽었느냐 주 안에서 죽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 안에서 죽는 자들입니까?
어떻게 하면 주 안에서 죽을 수 있습니까? 간단합니다. 주 안에서 살면 됩니다,
주 안에서 살지 않다가 죽는 순간 주님 안에 죽는 것은 누구에게나 보장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 살면 주 안에 죽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친밀함 속에서 사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9 나를 보내신 분이 나와 함께 하신다. 그분은 나를 혼자 버려 두지 않으셨다. 그것은, 내가 언제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도 예수님을 이렇게 믿어야 합니다,
십자가 구원의 복음도 알아야 하지만,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지난주간 목사 부부 수련회에서 ‘생명의 빛으로 충만한 은혜’를 누렸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교회로 돌아오는 차 안 분위기가 부흥회였다고 했습니다.
목사님들과 사모님들은 어떤 은혜 간증이 있을까요?
목사님 사모님들은 한결같이 성실하고 착하고 열심인 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빛이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 전까지는 마음이 혼란스럽고, 좌절하고, 상처가 많았습니다. 겉 다르고 속 다른 것입니다. 그런데 머리로 알던 예수님을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으로 만난 후 착한 사람이 성령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실한 사람이 충만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느 사모님이 남편 목사님이 전도사 시절 교제할 때, 한국 교회에 대하여 대화하다가 의견 대립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사모님은 목사의 딸로 자라면서 이런저런 한국교회의 현실을 들었기에 “목회가 쉽지 않다. 늘 장로들과 목사는 서로를 견제할 수밖에 없고… 한국교회는 학벌이 중요하다. 신학교 어디 출신이냐에 따라 나중에 갈 수 있는 목회지가 정해져 있다. 자녀를 많이 낳으면 교회에서 부담스러워서 싫어하기 때문에 목사 가정은 자녀를 많이 낳으면 안 된다”라고 말했더니 남편이 묻더랍니다. “자매님의 말이 옳습니까?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의 모습이 그것이 맞습니까?” 그때 사모님은 ‘옳지는 않지만, 현실이 다 그렇다’는 말이라 대답했고 남편은 ‘아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교회’가 ‘어딘가’에 있다..고 대답했고 사모님은 ‘이 세상에 그런 교회는 없다’고 말했답니다. 그러면서 ‘전도사님이 너무 순진해서 세상을 모른다’고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선한목자교회에 와서 목회하던 어느 날 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중에 주님이 그때 일을 생각나게 하면서 물으시더랍니다. ‘아직도 네가 옳으냐?’ 주님의 그 한마디에 고꾸라져 한참을 울었다고 했습니다. 남편이 말한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는 ‘성경이 말하고 있는 그 교회’. 선한목자교회에서 사역하면서 ‘그런 교회가 여기 있지 않느냐, 선한목자교회가 그런 교회가 아니냐’고 주님이 보여주시는 것만 같았다고 했습니다. “오랜 시간 선한목자교회에서 사역하면서 교회 안에 이런저런 어려움도 있고 사건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예수님의 뜻을 구하고 결정하고 한걸음씩 나아갔던 담임목사님과 장로님, 교인들의 모든 과정을 오랜 시간 지켜보면서 제 가치관과 믿음은 완전히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제 한국교회의 모든 문제는 더 이상 바뀔 수 없는 현실이 아니라 저의 가슴 절절한 기도의 제목이 되었습니다. 나 한 사람이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고, 진짜 교회가 되고… 함께 동역하는 목사 가정들이 그런 교회가 되면 머지않아 한국교회가 회복된다는 소망을 품게 하시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대하며 바라보게 하십니다.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소망이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은 “교역자 부부도 서로 경쟁하며 쉽게 나누어지는 것이 현실인데 이 교회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연합하는 은혜가 있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한 목사님은 고백했습니다. “제 안에 성령께서 충만하게 임하는 그 순간... 모든 염려가 한순간에 사라지고.. 내 안에 기쁨의 눈물이 흘렀습니다. 주여... 제 안에서 처음으로 성령의 충만을 경험한 순간이었고... 부흥에 대해 진정한 갈망을 처음 가진 날이기도 했습니다. 성령의 바람아 불어라, 성령의 강물아 흘러넘쳐라, 성령의 불아 타올라라. 이 세 가지 감동을 주셨습니다.”
아직 빛이신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분이 계십니까?
나는 주님을 보지 못하지만 주님은 나를 보시고 함께 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찬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지금도 함께 하시고 우리와 한 몸이 되셨음을 확증해 주는 은혜의 시간입니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야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조차 주님이 함께 하심을 확증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셨다, 정말 믿는 순간, 빛이 그 인생에, 빛이 그 마음에 임하는 순간인 것입니다.
아쉽지만 매일 성찬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매일 빛이신 주님이 보여주는 하루를 일기로 기록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나누자는 것입니다. 이미 빛 가운데 드러난 것입니다.
이제 성찬을 받기 전에 믿음으로 기도합시다.
“생명의 빛이신 주여, 나의 모든 것을 다 보여 주옵소서!
드러나야 할 것은 드러나게 하시옵소서!
어둠 속에 다니지 않도록 가야 할 길을 보여 주옵소서.
영생을 바라보게 하시고 모든 일들을 바로 판단하게 하옵소서.
빛의 통로가 되기 원합니다.
저를 통하여 주위 사람들에게 생명의 빛이 비춰지게 하옵소서!”
찬양: 주님 당신은 사랑의 빛
따르는 자는 안다 /요8:12-20/ 김형익 목사
2021-05-06 11:28:47
예수님이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인지 어떻게 아느냐는 것은 아주 오래된 2000년 묵은 질문입니다. 본문에서 보는 바리새인들의 질문이 그것이었고, 오늘날에도 수없이 많은 사람은 예수님의 선언 앞에서 이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만일, 주님이 선언하신 대로 그것이 참이라면, 주님을 믿지 않고 살아간 모든 사람은 다 심판 날에 정죄를 받게 되고 지옥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시할 수만은 없고, 그래서 이렇게 질문합니다. “어떻게 아느냐?”고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비록 2000년 전에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논쟁이지만, 그런 질문을 가진 21세기의 사람들에게도 중요한 빛을 던져주는 바가 있습니다.
1. 상황: 성전 연보궤 앞에서 벌어진 논쟁(20)
우리는 이제 8장 전체에 걸쳐서 결국에는 돌을 들어 예수님을 치려고 하기까지 과열되는(8:59), 바리새인들과 주님 사이에 벌어진 논쟁을 보게 됩니다. 이 초막절 마지막에 주님께서 생수를 약속하시고, 세상의 빛으로 자신을 선포하시고, 바리새인들과 논쟁을 벌이게 된 장소는 20절에 기록된 대로 성전의 연보궤 앞이었습니다.
거기는 성전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말씀하실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습니다. 그리고 산헤드린이 공권력을 행하려고 한다면 행하기가 가장 용이한 장소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결국 이 모든 일의 주도권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십니다. “이는 아직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라(20).”
2. 불씨: “나는 세상의 빛이다(12).”
오늘 이 본문에 나오는 논쟁의 불씨가 된 것은 주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사실상 주님께서는 이 선언에 대해서 구체적인 가르침을 여기서 주시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9장에서 날 때부터 소경된 자의 눈을 열어보게 하심으로써 주님께서 세상의 빛이심을 보다 분명하게 드러내시고 설명하시게 됩니다. 여기서 주님께서 하신 선언은 8장의 나머지에 나오는 모든 논쟁의 불씨를 제공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여기서도 우리는 주님의 이 짧은 선언에 담겨진 의미를 좀 더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3. “나를 따르는 자”만이 흑암에서 나와 그 빛을 소유한다.
주님께서는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소유한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따르는”이란 단어의 헬라어 용법은 “(계속해서) 따른다”는 의미를 전달합니다. 한 번 따르고 마는 것이 아니고, 한 번 결단을 내리면 되는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주님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자도의 기초를 우리에게 제공해주는 단어입니다. 주님의 제자는 주님을 계속해서 따라가는 자입니다.
여기 ‘따른다’는 단어는 제자가 되어서 스승의 뒤를 따라가는 것 뿐 아니라 ‘동행한다’, ‘같은 길에 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제자는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이고, 주님이 서계신 곳, 서계신 길에 함께 서는 자입니다. 한 번이 아니라 계속해서, 넘어지더라도, 벗어나더라도 다시 그 길에 와 서서 주님과 동행하고 주님을 따라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전심전력을 다하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오늘날 성경이 가르치는 참된 제자도가 너무나도 희석된 것은 비극입니다.
주님과 다른 길에 서서 살아가면서도, 주님을 계속해서 따라가지 않으면서도, 아니 주님을 따라갈 의향이 없으면서도 단지 매 주일 교회에 나오고 있다는 사실 하나를 가지고, 교회에서 직분을 가지고 있다는 것 하나로 자신을 주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주님의 제자라고 생각하는 일이 비일비재한 것입니다. 여기 본문에서 ‘따른다’는 말을 할 때, 그것은 믿는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주님을 믿는 자는 주님을 계속해서 따르는 자이고, 주님과 계속 동행하는 자이며, 주님이 서계신 길에 계속해서 서는 것입니다. 마음이 합해지지 않고서야 어찌 두 사람이 동행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주님을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닐 수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어두움은 요한복음에서 특별히 독특하게 강조되는 단어인데, 이 세상의 흑암, 사단에게 속한 영역을 상징합니다. 그는 다시는 사단의 영향력 안에서 살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4. 바리새인들의 논점: “당신의 독단적인 주장은 법적 효력이 없다.”(신 17:6; 19:15)
바리새인들이 구약성경에 능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전제할 때, 주님의 선언은 주님께서 자신을 메시야로 선언하신 것이었습니다. 이 선언은 바리새인들의 마음에 심히 걸리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래서 이렇게 주님께 도전했습니다.
“당신의 주장은 너무나 독단적이어서 법적 효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독단적이라는 것은 자기가 자기를 증명하는 것은 율법의 원리로 볼 때 타당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어떤 사람에 대해서 사형을 선고하려면 절대로 한 사람의 증인만으로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못을 박고 있는 것을 그들은 생각하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신 17:6; 19:15). 주님께서는 그것을 이미 간파하셨습니다.
5. 주님의 판단과 주장
A. “너희는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기에 모른다.”(14)
먼저 주님은 “나는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지만, 너희는 그것을 모른다”고 말씀하심으로써 그들의 영적 무지를 지적하십니다(14). 이것이 주님의 선언이 참될 수 있는 이유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에 예수님의 주장과 선언은 참될 수 밖에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도 알고, 다른 많은 인간의 기준을 가지고 예수님을 판단하려고 하지만, 예수님이 성육신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면 그들의 율법의 지식과 인간적인 모든 기준들은 다 무용지물에 불과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치명적인 영적 무지였으며 주님께서는 이것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증명해보라는 식으로 도전하는 많은 사람들은 자기 지식의 수준으로 하나님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지식도 다 깨달을 수 없고, 다 채울 수 없는데 그들은 하나님을 자기 수준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건방진 착각을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을 이렇게 저렇게 재보려고 했던 모든 사람들이 도무지 예수님을 알 수 없었던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B. “너희 인간적 기준으로는 나를 판단할 수 없다.”(15)
그런 태도를 가리켜 주님께서는 “너희가 인간적 기준으로는 나를 판단할 수 없다”고 단언하십니다(15). 바리새인들은 지금 주님을 육체를 따라 판단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도 다메섹 도상에서 빛을 보고 주님을 만나 주님을 따르기 전에는 그렇게 생각하고 판단했었습니다. 고린도후서에서 사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 5:16).”
예수님을 믿게 되면, 바로 이 관점이 변화됩니다. 이것이 거듭난 자와 거듭나지 않은 자의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영적인 일들을 판단함에 있어서 육체의 판단, 인간의 기준은 무용합니다. 인간적 관점, 이성의 판단, 세상의 지혜, 심지어는 종교적 기준으로도 그리스도를 알 수 없습니다. 인간 이성과 감각의 한계는 주님이 누구인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는 일반계시의 한계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논증을 해서 그리스도를 믿게 하겠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바르게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논증 자체가 불필요하다고 말씀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마는, 사람이 논증을 잘 해서, 말싸움에서 승리해서 그리스도를 믿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을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에는 영적인 지혜가 필요하고 거기에 영적인 권위도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이렇게 자기들이 모든 영적인 일들을 바르게 판단할 능력을 갖추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을 상대하시면서, 영적 권위로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너희의 인간적 기준과 관점으로는 절대로 나를 알 수 없다. 너희는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알지 못하고 있지 않느냐”고 말씀하시면서 말입니다. 그들이 아는 것은 오직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온 사람이라는 것만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7:27).
C. “나를 보내신 이가 나를 증거하신다.”(16~18)
주님께서는 이어서 그들의 문제제기에 직접적으로 반응하십니다. 주님은 홀로 선언하신다고 해도 그 주장은 옳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결코 혼자 주장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부 하나님께서 주님을 증거하고 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결코 어떤 순간에도 홀로 계시지 않고 주님을 보내신 분, 성부 하나님과 함께 계신다고 말씀하시고, 주님의 모든 말씀과 판단은 다 성부 하나님의 것과 동일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듣고 있는 바리새인들을 더욱 궁지에 빠뜨리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기준에서 보자면 이것은 논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마치 1+1=2를 하는 아이와 미적분을 다루는 학자가 나누는 대화 같습니다.
6.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19)
이쯤 되면 바리새인들이 할 수 있는 말이 무엇이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지금 이 모든 대화의 주도권을 가지고 주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의 질문은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주님의 대답은 한 마디로, “너희가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다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아버지는 아들 안에서만 계시된다는 중요한 의미를 전합니다.
주님은 후에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요구하는 빌립에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고 하십니다(요 14:9). 같은 취지의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은 못 믿겠지만, 하나님은 믿는다고 말합니다. 어불성설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의하면 그것을 자기 식의 신을 섬기는 것일 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떠나서 하나님을 알 길이 없습니다.
요한복음의 첫 구절을 생각해보십시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누구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며 요한복음이 강조하는 주님의 특성은 바로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인간들에게 설명하고 보이시는 말씀의 기능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7. 교훈과 적용
A. 인간적 기준으로 주님을 이해할 수 없다!
오늘 본문이 명확하게 가르쳐주는 첫번째 교훈은 우리가 인간적 기준으로는 주님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비록 성경 학자들이었지만, 그들의 판단은 육체를 따른 판단이라고 주님은 지적하십니다. 주님은 그런 식으로 판단하시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앞서 7장에서 주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고 하신 말씀과 같습니다(요 7:24).
우리가 가진 판단 능력은 아무리 부인한다고 해도 외면적이고 이성적인 기준을 떠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인식과 판단 능력으로 예수님을 알 수는 없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사람이 제아무리 많이 배웠어도 영적으로는 어린 아이는 커녕 지각 능력이 전무한 사람과 같을 수 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고전 2:12~14).
신체적 표현으로 보자면 빛이 왔어도 그 빛을 인식할 수 없는 소경에 비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소경에게 형광등 불빛이나 태양빛이나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그에게는 모든 것이 다 어두움에 불과한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이것에 대한 인정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아무도 ‘내가 노력해서 연구해본 결과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는 결론을 얻어서 예수님을 믿기로 결정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조심하셔야 합니다. 아무 유익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는 여전히 자기의 의로 충만해서 자기를 증명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이용할 것입니다. 진짜 예수님을 믿게 되면 누구나 다 이렇게 고백하게 되어있습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다. 도무지 하나님을 믿을 수 없는 나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로 찾아와 주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B. 빛은 논쟁으로 증명되지 않고 비췸으로써 증명된다(고후 4:4~6; 마 11:25~27).
이런 의미에서 바리새인들이나 유대인들이 예수님과 논쟁을 하려는 모든 시도는 그들의 시건방진 행위 밖에는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빛은 논쟁으로 증명되지 않고, 비췸으로써 증명될 뿐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이 다 소경이라는 사실입니다(9:39~41).
고린도후서에서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어주신 것이 바로 회심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고후 4:4~6).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영적 소경 같은 삶에 찾아 오셔서 ‘빛이 있으라’ 하심으로써 그 빛이 우리 어두운 영혼 안에 비추어진 것입니다. 회심이란 우리의 영적으로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해주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본 것입니다. 이것을 주님께서는 이렇게 기도로 표현하셨습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마 11:25~26).”
이어서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 11:27).” 그렇습니다. 이렇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스스로 똑똑하다고 여기고, 자기의 지적 능력과 인간적, 이성적 판단 기준을 가지고 판단을 하여 그리스도를 알고자 하는 자는 결단코 실패할 것입니다. 하지만, 어린 아이와 같이 하나님께 엎드리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계시를 주심으로써 즉 빛을 비추어주심으로써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언제나 영적 진리, 하나님께 속한 진리를 알고자 할 때 가장 치명적으로 해악을 끼치는 태도는 무엇인가 하면 내 머리로 알아보겠다 하는 생각입니다.
신앙 생활에서 머리는 필요없다는 이야기를 하는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데는 지, 정, 의가 다 필요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머리로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자기의 지적 능력을 믿지만, 하나님께 겸손히 엎드리지 않는 태도입니다. 이런 태도는 참으로 우리를 주님 앞에 서서 감히 주님과 논쟁을 벌임으로써 자신들의 무지만을 드러낼 뿐인 건방지고 교만한 바리새인들로 만들어줄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의 영적 지식을 자랑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가르치는 자리에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누구를 만나도 한 수 가르쳐주려는 부담감을 가질 것입니다. 영적 교만입니다. 교회 안에 이런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교회는 생명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나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께 엎드림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읽고 묵상하는 자들, 그리고 자신을 돌아봄으로써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시고 알게 하신 자들에게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거룩한 수줍음일 것입니다.
이런 자들에게서 흘러나오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은혜의 능력일 것입니다. 머리를 좀 내려놓으십시오. 전인격적으로 내게 말씀하시고 찾아오시고 내 마음을 만지시고 나를 고치시는 능력의 주님 앞에 무릎을 꿇으십시오. 매 순간, 순간에 그렇게 하십시오. 오, 주님, 우리를 이런 자로 변화시키시고, 이런 사람들이 가득한 교회가 되게 하여주옵소서!
C. 주님을 계속해서 따라감으로써만 주님을 알 수 있다.
한 가지 더 이 말씀에서 붙잡아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계속해서 따라감으로써만 주님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에 대한 책을 읽어서 사람이 변화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학교를 열어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가르치심으로써 사역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 행하신 것은 “나를 따라오라”고 하심으로써 제자들을 부르셨고 그들로 3년 동안 주님을 따라오게 하심으로써 제자로 삼으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따름으로써 주님을 알게 되었고 배웠던 사람들이었지, 결코 주님이 여신 신학교의 학생들이었기 때문에 주님을 알게 된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진짜 아는 것은 교회를 열심히 다니면서 그냥 설교를 많이 들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러분에게 들려졌을 때, 그 말씀을 안고서 믿음의 삶을 싸우며 살아내는 수고를 통해서 되는 것입니다.
신학교를 가서 믿음이 자라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주변에서 참으로 내가 본받을 수 있는 믿음의 선배를 만남으로써 믿음이 자라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을 따름으로써 주님을 알게 되는 참된 지식입니다.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12).”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지금까지 몇 년 동안 교회에 다니셨는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따라서 사셨습니까? 주님이 서 계신 그 길에 서서 살아오셨습니까?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오셨습니까? 매 주일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여러분의 반응은 어떤 식으로 나타납니까? 지난 주일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회개하였습니까? 순종하였습니까?
주님께서 주시는 부담 앞에서 힘들지만 영적 씨름을 회피하지 않고 싸우셨습니까? 이런 매일 매일의 삶이 없다면 우리의 신앙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어쩌면 허구일 뿐입니다. 여러분의 신앙 생활이 그렇게 흘러가지 않도록 경성하십시오. 오늘 주신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씨름하십시오. 한 번 들어서 넘기지 마십시오. 어쩌면 하나님의 말씀은 목으로 그냥 삼키기에는 힘든 생선가시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유익입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순종의 고통이 없다면 여러분은 결코 주님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자, 주님을 계속해서 따르는 자는 주님을 압니다. 오, 주님, 우리가 주님을 알기 원합니다. 매일 매 순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주님을 따라가게 하시고 그럼으로써 주님을 깊이 알게 하옵소서!
나는 세상의 빛입니다 /요8:12-20/ 이동원 목사
2015-05-07 16:44:07
때는 장막절이었습니다. 해마다 장막절 기념 절기가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나간 40년 동안의 광야 생활 중에 그들을 성실하게 인도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그 당시를 되돌아보게 됩니다.
본문 배경
본문은 예수께서 성전 안의 ‘여인의 뜨락’에서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이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연보궤 앞에서 하셨으나…”(20절).
이 연보궤는 성전 안 여인의 뜰에 놓여 있었는데, 이곳은 가난한 과부가 자기 생활비의 전부였던 엽전 두 푼을 드렸던 장소입니다.
장막절 기념 절기가 되면 이 여인의 뜨락에는 네 개의 대형 금촛대에 불이 밝혀집니다. 이 불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을 할 때 하나님께서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그들의 갈 길을 보이시고 인도하셨음을 기념하는 것으로서,
예루살렘 도시의 어느 곳에서나 다 볼 수 있을 만큼 밝았다고 합니다. 문서에는 예루살렘의 아낙네들이 이 불빛을 의지하여 바느질도 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하니 그 밝기를 가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금촛대에 불이 붙여지면,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기뻐하는 백성들의 축제가 벌어집니다. 사람들은 여기 저기에서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춥니다. 장막절은 안식일에 시작해서 그 다음 안식일에 끝나는 것이 상례입니다.
장막절 절기 행사가 거의 끝나 가는 마지막 날인 안식일 저녁이었을 것입니다. 마치 올림픽의 성화가 꺼지듯 네 촛대의 불이 가물가물 꺼져 가고, 이제는 노래 소리도 들리지 않고 신나게 춤을 추는 모습도 보이지 않습니다.
아쉽고도 엄숙한 순간입니다.이때 한 젊은이가 군중들을 헤치고 여인의 뜰의 한복판에 들어섭니다. 잠시 긴장이 감돌았습니다. 드디어 그 젊은이가 무리를 향해서 외쳤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는 의미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12절).
이 말씀은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두번째 「나는 ∼이다」(I AM)라는 선언입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I am the light of the world).
자신의 역할과 사명을 드러내 보이시기 위한 중요한 두번째 선언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나는 ∼이다」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입니다. 하나님이신 바로 그분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이 어떤 일을 하실 것인가를 보여주는 위대한 선언입니다.
이 「나는 ∼이다」는 선언은 헬라어에서 독특한 의미를 갖습니다. 즉, 결코 다른 사람이 아닌 나만이, 나 홀로 빛이라는 선언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선언입니다.구약의 불 기둥의 빛은 하나님 자신의 현현(顯現)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께서는 자신이 바로 세상의 빛이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의 시편 기자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시 27:1).
신약성경에서 사도 요한도 이렇게 선언합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다”(요일 1:5).
그런데 지금 주께서는 이렇게 선언하고 계십니다.“나는 세상의 빛이라.”
장막절 마지막 날, 예루살렘 도성을 비추고 있던 자연적 혹은 인공적인 모든 불빛이 스러져 가는 극적인 순간에 선언되었던 예수님의 이 위대한 선언!
“나는 세상의 빛이라.”
이 선언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번 장에서는 이 선언에 담긴 세 가지 중요한 의미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임재의 증거입니다.
마치 광야의 성막에서 쉐키나의 영광스러운 빛이 주의 임재를 보여주었던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름 기둥과 불기둥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심을 알았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단적으로 말하면, 그분은 우리와 함께하기 위해서 찾아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탄생을 예언한 임마누엘의 의미입니다.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 1:23).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계시기 위해서 찾아오신 하나님!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 1:14).우리와 함께하시기 위해서 찾아오신 말씀(κ´ξβξ /로고스)이신 예수님.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주님의 손을 만졌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손을 만졌던 것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는 무엇이었겠습니까? 광야길에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고통과 걱정이 있었겠지만, 그 중 가장 큰 고통은 아마 고독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없는 데서 오는 고독이 아닙니다.
적어도 백만 이상, 학자에 따라서는 이백만에 가까운 군중들이 이 광야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행진 중에 많은 난관과 역경을 경험하게 되고 저마다 자기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다 보면, 사람은 많았지만 정말 마음을 터놓고 지낼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자기의 삶을 다 내놓고 나눌 만한 사람들이 없는, 어떤 실존적인 고독이었을지 모릅니다.
고통이 올 때 우리는 저마다 홀로인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아무도 이 고통의 짐을 져 줄 수 없다는 사실은 우리를 참으로 외롭게 합니다. 가장 사랑하는 가족조차도 이 고통을 함께할 수 없다는 처절한 고독! 우리 인생의 여정에는 이런 고독이 종종 있을 수 있습니다.
외롭고 힘겨운 광야 생활 중에 갑자기 그들 앞에 나타난 구름 기둥과 불 기둥! 누군가는 이렇게 소리쳤을지 모릅니다.“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시다.”
그 순간 이 광야를 걸어가면서 느껴야 했던 온갖 좌절과 방황은 새로운 희망으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와 함께하시는 분, 진실로 나의 모든 문제의 응답이신 그분. 창조주이신 하나님. 나와 더불어 함께 계시기 위해서 찾아 오신 이 하나님의 현현! 이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놀라운 증거였던 것입니다.
일전에 젊은이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홀로 서기」라는 시가 있습니다.
서정윤이라는 젊은 시인이 쓴 시집 제목이기도 한데,
시집으로는 우리나라 출판사상 경이적인 판매 부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유행했는가 하면, 이 이름을 따서 「홀로서기 찻집」도 생겼다고 합니다.
홀로 서기
기다림은
만남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
좋다.
가슴이 아프면
아픈 채로,
바람이 불면
고개를 높이 쳐들면서, 날리는
아득한 미소.
어디엔가 있을
나의 한 쪽을 위해
헤매이던 숱한 방황의 날들.
태어나면서 이미
누군가가 정해졌었다면,
이제는 그를
만나고 싶다.
제가 강조하려는 것은 이 시의 첫번째 대목이 아닙니다. 두번째 대목을 보십시오.
2
홀로 선다는 건
가슴을 치며 우는 것보다
더 어렵지만
자신을 옭아맨 동아줄,
그 아득한 끝에서 대롱이며
그래도 멀리,
멀리 하늘을 우러르는
이 작은 가슴.
누군가를 열심히 갈구해도
아무도
나의 가슴을 채워줄 수 없고
결국은
홀로 살아간다는 걸 한겨울의 눈발처럼 만났을 때나는
또다시 쓰러져 있었다.
또 이런 대목도 있습니다.
6
나의 전부를 벗고
알몸뚱이로 모두를 대하고 싶다.
그것조차
가면이라고 말할지라도
변명하지 않으며 살고 싶다.
말로써 행동을 만들지 않고
행동으로 말할 수 있을 때까지
나는 혼자가 되리라.
그 끝없는 고독과의 투쟁을
혼자의 힘으로 견디어야 한다.
부리에,
발톱에 피가 맺혀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숱한 불면의 밤을 새우며
<홀로 서기>를 익혀야 한다.
이것은 현대인들이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여전히 홀로일 수밖에 없는 자기 실존에 대한 고독을 대표하고 있는 고백일지도 모릅니다.
사실상 인간이 가장 깊은 의미의 고통 속에 몰입할 때는 그 누구도 함께해 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죽음의 다리를 건너갈 때 누구와 손을 잡고 함께 건널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놀라운 것은, 그 순간에도 나와 함께할 수 있는 분이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임재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진정 놀라운 희망이지 않습니까? 광야 생활 중에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하신 하나님을 성경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출 13:22).
이것은 그 백성들에게 얼마나 커다란 희망이었겠습니까? 내가 걷고 있는 이 삶의 여정에서 오늘의 고통이 아무리 심각하고, 오늘의 방황이 아무리 어렵고, 오늘의 좌절이 아무리 눈물겹다고 해도 하나님만 떠나지 아니하신다면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만유를 창조하신 하나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들고 섭리하시는 그 하나님이 나를 붙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두려워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므로, 우리는 담대하게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길을 걸어갈 수가 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하시는 예수님의 바로 이 빛은 하나님의 임재의 증거였던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인도의 선언입니다.
우리가 말할 수 없는 가슴앓이와 고통을 당할 때, 그 고통을 이해하고 함께 나눌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얼마나 고마운 일이겠습니까? 하지만 그들이 우리와 함께 있어 줄 수는 있을지라도, 우리를 인도해 주지는 못합니다.
광야 길을 방황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아마도 사막의 무변성(無邊性)이었을 것입니다. 가도 가도 끝없는 사막! 그게 그것 같고, 무엇이 옳은지 분별하기도 힘듭니다.
이는 우리 삶의 일상성을 말해 준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루 하루가 그저 그렇게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것 같습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길을 잃어버리고, 다람쥐 쳇바퀴 돌듯 삶의 악순환을 계속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때가 비일비재 하지 않습니까?
게다가 사막의 강렬한 태양까지 연상해 보십시오. 땡볕 아래에서의 행군! 고통스러운 사막의 이 방황이 그들을 얼마나 지치게 했겠습니까?
그런데 이보다도 더 고통스러운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아무리 가도 제 자리에 서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얼마나 지겨운 고통이었겠습니까?
그런데 그들 앞에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이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한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그 기둥은 움직이며, 갈 길을 제시했습니다. 이 얼마나 인상적인 하나님의 인도하심입니까? 이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을 따라 한 발짝 두 발짝 내딛는 발걸음은 가볍기 그지없고 백성들의 입에서는 금새라도 찬양과 감사의 시가 쏟아져 나올 것 같습니다.
민수기 9장에는 이 장면이 극적으로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구름이 성막에서 떠오르는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곧 진행하였고 구름이 머무는 곳에 이스라엘 자손이 진을 쳤으니”(17절).구름이 진행하면 백성들도 진행하고 구름이 머물면 그들도 머물렀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명(命)을 좇아」 진행하였고 「여호와의 명을 좇아」 진을 쳤으며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무는 동안에는 그들이 유진(留陳)하였고 구름이 장막 위에 머무는 날이 오랠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명을 지켜」 진행치 아니하였으며 혹시 구름이 장막 위에 머무는 날이 적을 때에도 그들이 다만 「여호와의 명을 좇아」 유진하고 「여호와의 명을 좇아」 진행하였으며 혹시 구름이 저녁부터 아침까지 있다가 아침에 그 구름이 떠오를 때에는 그들이 진행하였고
구름이 밤낮 있다가 떠오르면 곧 진행하였으며 이틀이든지 한 달이든지 일 년이든지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물러 있을 동안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유진하고 진행치 아니하다가 떠오르면 진행하였으니 곧 그들이 「여호와의 명을 좇아」 진을 치며 「여호와의 명을 좇아」 진행하고 또 모세로 전하신 「여호와의 명을 따라」 여호와의 직임을 지켰더라”(18-23절).
‘여호와의 명을 좇아’ 주님의 인도를 경험하며 나아가는 장면들! 얼마나 아름답고 인상적입니까?
그러나 그들에게도 유혹이 있었을 것입니다. 사막 길에서는 이따금씩 오아시스를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오아시스가 있는 사막의 쉼터에 한번 털썩 주저앉게 되면 다시 일어나고 싶지 않은 유혹을 느꼈을 것입니다.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힘든 방황 길을 끝없이 걸어야 하니 말입니다. 그러나 구름이 떠올라 움직이면 그들은 다시 발걸음을 옮겨야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까?
계속 무엇인가를 결정해야 하는 인생의 갈림길에서 당신은 정말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결정하십니까? 아니면 쉽고 편리한 쪽으로 결정하십니까?
나의 편리와 나의 쉼과 나의 안식을 위해서 결정하지는 않습니까? 참으로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며, 주께서 내가 어디로 가기를 원하시는지, 그 뜻을 분별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누군가가, 이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이 하나님의 임재임을 알면서도 자신의 편리와 자신의 쉼을 위해서 주님을 좇아가지 않았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이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어리석은 사건들이 우리들의 삶 속에서 자주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까? 당신은 중대한 결정을 할 때 성경을 열어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십니까?
지금은 구름이 뜨지 않고 불 기둥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보다 더 확실한 성경의 메시지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또한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또 우리 곁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조명하십니다.
그러나 이렇게 확신과 평안을 주시며 우리의 길을 인도하신다고 선포하신 말씀에도 불구하고 내 편리를 위해서 어떤 결정을 내리지는 않습니까?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라야 빛 가운데 거하는 이 놀라운 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따른다」는 것은 계속해서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신실하고 계속적으로 성실하게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이 빛 가운데로 걸어가며 하나님의 인도를 경험하는 삶! 당신은 하나님의 인도와 은총을 체험하는 이 삶을 원합니까? 그 대답은 “참으로 주님 따르기를 원하는가?”라는 질문과 더불어 해결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삶의 갈림길에 설 때마다 주님의 말씀을 열어 그분의 인도를 구하며 나와 함께하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좇아 걸을 때, 이 모든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들의 것입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상징된 이 빛은 하나님의 임재의 증거요, 하나님의 인도의 선언이었던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 나라의 약속입니다.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은 그 백성을 가나안으로 인도했습니다.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땅이야말로 궁극적으로 그 백성이 가야 할 땅입니다.
구름 기둥과 불 기둥처럼 오신 예수님, 자연의 불빛은 사라져도 여전히 우리를 인도하는 영원한 인도자가 되시기 위해서 우리 역사 가운데 찾아오신 예수님! 그분은 이렇게 선언하고 계십니다.
“바로 내가 구름 기둥이야, 내가 불 기둥이야.”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던 그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의 임재 이상으로, 더 정확하고 더 아름답고 더 평안하게 우리 삶 속에 간섭해 오시는 예수님! 그분은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기를 원하십니까? 바로 약속의 땅인 아버지의 나라로 인도하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내려야만 했었던 그 많은 결정들! 그들은 약속의 땅으로 잘 나가다가, 때때로 방향을 잘못들어 방황하고 헤메이며 위험에 직면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내리는 어떤 결정이 우리의 소망을 하늘나라에 두게 할 수 없다면 그것은 그릇된 것입니다. 당신의 결정은 하나님께 시선을 두게 하며,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를 사모하게 합니까? 그리고 발걸음을 주님 앞으로 이끌고 있습니까?
만일 다른 곳에 눈을 두게 하고 하나님께 맞춰진 초점을 흐리게 만든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결정이 아닙니다. 당신은 이것을 단호히 거부할 수 있는 용기가 있습니까?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직면했던 가장 큰 유혹이 있었다면, 약속의 땅을 등지고 애굽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만일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이 없었더라면 그들은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만약 예수님이 함께하시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서 진행하던 우리의 발걸음도 어느 한 순간에 돌이키고 말았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도 이 세상에 소망을 두고 싶은, 별 수 없는 인간들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가야 할 목표를 다시 바라봅니다. 세상의 유혹과 세상의 정욕이 순간순간 우리 삶의 초점을 흐리게 만들 때에도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다시 주님 앞에 나가게 됩니다.
가야 할 그 땅이 있기에, 약속의 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에 우리는 정진(精進)할 수 있습니다. 거룩하신 주님을 바라보며 그 인도를 좇아 오늘도 이 길을 걸어가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 이 행렬 속에 당신이 서 있음을 바라볼 수가 있습니까?
지금 당신의 삶은 빛 가운데 있습니까? 아직도 어둠 가운데 있지는 않습니까? 이 어둠은 죄, 방황, 무목표, 무의미, 무목적일 수 있습니다. 혹시 당신의 삶이 이런 특징으로 묘사되고 있다면, 당신은 어둠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여기 구름 기둥이 있습니다. 불 기둥이 있습니다. 빛으로 다가오시는 그분의 모습을 보십시오. 아니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자연의 불빛이, 세상의 불빛이, 친구들의 불빛이, 이성(理性)의 불빛이 꺼지는 이 순간에도 내 앞에 다가오시며 내게 말씀하시는 거룩하신 주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이 빛은 당신을 위한 빛이십니다. 하늘나라로 가는 밝은 빛이신 예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부르며 인도하기를 원하십니다.이 빛은 하나님의 임재의 증거요, 하나님의 인도의 선언이요, 하나님 나라의 약속이었던 것입니다.
“광야 같은 이 세상의 그 많은 사람 속에서도, 여전히 홀로임을 느껴야 하는 우리들. 그러나 이 고독과 고통 속에 우리를 홀로 버려두지 아니하고, 우리와 함께하시기 위해 찾아오신 하나님. 임마누엘이신 예수님! 주께서 이 땅에 찾아오심을 감사합니다.
주님이 제게 오시지 않았더라면 제 삶의 방황은 언제까지 계속되었을까요? 주께서 제게 말씀하시고, 주의 성령을 통해 저를 인도해 주셔서, 제 삶의 목표를 바라보게 하심을 감사합니다.이제 주님을 따르렵니다.
어떤 대가를 치른다 해도, 주님을 따름이 제 삶의 가장 큰 부요요, 승리요, 영광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잠시 동안의 쾌락이나 편리의 유혹 때문에, 주님 따르기를 주저하거나 포기하는 어리석은 저희들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주 안에 거함이 빛 가운데 거함이며, 주를 따름이 빛을 따름임을 알게 하옵소서.
영원한 빛으로 가득 찬 그 나라에 이를 때, 제 인생 여정을 돌이켜보며 주님을 찬양케 하옵소서.‘오, 빛되신 주님의 인도 때문에 제 삶은 진정 의미있는 인생이었습니다’라는 고백이 빛되신 주님을 따르기 원하는 저희 모두의 고백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요8:12-20/ 김기석목사
2017-05-12 10:57:06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사람은 어둠 속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당신이 스스로 자신에 대하여 증언하니, 당신의 증언은 참되지 못하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비록 내가 나 자신에 대하여 증언할지라도, 내 증언은 참되다. 나는 내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희는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르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다. 너희는 사람이 정한 기준을 따라 심판한다. 나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심판하면 내 심판은 참되다. 그것은,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너희의 율법에도 기록하기를 '두 사람이 증언하면 참되다' 하였다. 내가 나 자신에 대하여 증언하는 사람이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도 나에 대하여 증언하여 주신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께 물었다. "당신의 아버지가 어디에 계십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너희는 나도 모르고, 나의 아버지도 모른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나의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헌금궤가 있는 데서 하신 말씀이다. 그러나 그를 잡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것은 아직도 그의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 캄캄한 세상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어제 환하게 떠오른 대보름달을 보면서 어둠이 지극한 이 땅에도 저런 환한 빛이 깃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참 곤고한 나날입니다. 우리 사회를 뒤덮고 있는 어둠이 지극합니다. 정치를 잊고 살 수 있는 세상이 안정된 세상일 텐데, 우리 사회는 그런 외면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근 석 달을 이어온 탄핵 정국이 점점 진흙탕 싸움으로 변질되어가고 있습니다. 불신의 장벽이 점점 높아가면서, 싸늘하게 마주보는 두 진영 사이에 합리적인 의사소통의 길은 점점 막히고 있습니다. 1부 예배 때 김수진 집사가 연주한 곡을 들으며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정의가 강물처럼/평화가 들불처럼/사랑이 햇빛처럼/하나님 주신 생명 보듬어/희년을 향해 함께 가는 길/주의 약속 굳게 믿으며/일곱 번씩 일곱 번 넘어져도 약속을 굳게 믿으며". 희년을 향해 함께 가는 길의 사람들이 이곳에 있습니다. 참 고맙고 든든합니다.
마종기 시인의 '의사 호세 리쟐의 증언'이라는 시를 읽었습니다. 시인은 마치 한가로운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처럼 이야기를 풀어나갑니다. 시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19세기말에 필리핀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스페인의 식민지, 아시아의 태평양에 섬나라가 있었다. 그 섬나라에 호세 리쟐이라는 의사가 있었다".
시제는 과거형입니다. 시인은 실존 인물인 의사 호세 리쟐에 대해 매우 제한적인 정보만 제공합니다. 그는 파리, 마드리드, 하이델베르크로 떠돌다가 조국인 필리핀에 돌아가 환자도 보고 <사회의 암>이라는 소설도 쓰다가 설흔 다섯 나이에 총살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산문조로 이렇게 호세 리쟐의 짧은 인생을 소개한 시인은 어투를 바꿔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호세 리쟐이 진단한 사회의 암은 우리였네.
나태한 우리와 타협해서 쉽게 사는 우리,
의타심에 눌려서 눈치로 사는 우리,
작패로 싸우고 죽이고 이간질하는 우리,
암세포로 썩어 가는 나라의 병은
우리도 볼 수 없는 우리들 마음에 있었네."
여기서 '우리'는 비단 필리핀 사람만을 가리키는 게 아닐 겁니다. 시인은 호세 리쟐의 말을 빌어 대한민국 사회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나태한 우리, 눈치만 보며 사는 우리, 파당을 지어 싸우고 죽이고 이간질하는 우리가 바로 나라의 암세포더라는 말입니다.
너무 쉽게 미워하고 쉽게 죽이면서도 돌아서면 쉽게 은총을 비는 사람들을 보며 시인은 탄식합니다. "한 세상의 귀함은 헐벗은 맨발 걸음뿐,/세상을 어려워하라./걷는 자도 말탄 자도 큰 짐을 진 듯/어려워해야만 살리라."
잘 산다는 것은 어쩌면 모세가 떨기나무 불꽃 앞에서 신발을 벗은 것처럼 조심스럽게 경외하는 마음으로 사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조금 더 나은 세상을 열기 위해 조심조심 걷는 것 말입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어둠이 너무 짙습니다.
세월 탓일까요? 거리를 걷다 보면 저도 모르게 자꾸 찬송가 84장을 흥얼거리게 됩니다. "온 세상이 캄캄하여서 참 빛이 없었더니/그 빛나는 영광 나타나 온 세상 비치었네/영광 영광의 주 영광 영광의 주/이 세상의 빛은 오직 주 예수님". 이 고백이 진실하다면 우리는 어둠의 행실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겁니다.
• 따르는 자라야 빛을 안다
오늘 본문은 간음의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 이야기 바로 뒤에 나옵니다. 살기를 띠고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현장을 떠나고 그 자리에 둘만 남았을 때 주님은 서서히 몸을 일으켜 여인을 바라보십니다.
수치심과 모멸감과 두려움에 떨고 있던 여인을 바라보는 주님의 시선은 아마도 시린 마음을 감싸안는 외투와 같이 포근했을 것 같습니다. 윤리니 도덕이니 하는 기준을 들이대는 것보다 더 긴요한 것은 그 여인을 있는 그대로 긍정해주는 마음이었습니다. 그 따뜻한 눈길과 마주치는 순간 여인의 마음에는 한 줄기 빛이 스며들었을 것입니다.
그 빛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 속에서 솟아났던 태초의 빛이 아니었을까요? 마침내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이 용서의 말 한 마디는 수천 마디의 훈계보다 더 큰 울림이 되었을 겁니다.
이 이야기에 바로 이어서 나온 구절이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사람은 어둠 속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8:12)입니다. 앞 단락이 빛의 암시였다면 본문은 빛의 선포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용서하고, 받아들이고, 사랑으로 대하는 것이 바로 예수를 통해 세상에 드러난 빛입니다.
그 예수의 빛 가운데서 걸어야 세상의 어둠에 삼켜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불교는 진리를 알지 못하는 것을 일러 無明(avidya)이라고 말합니다. 깨달음이 없는 상태이기에 불각不覺이라 말하기도 합니다.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출세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영원한 빛과 만나지 못해 우리 삶이 어둡고 무겁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라는 이 담대한 선언은 새로운 삶으로의 초대로 이어집니다.
"나를 따르는 사람은 어둠 속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주님의 마음을 품고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산다는 뜻입니다. 가련한 사람의 벗이 되어 주고, 우는 이의 곁에 머물고, 배고픈 이를 먹이려 할 때 우리는 빛을 따라 사는 사람이 됩니다.
며칠 전 모처럼의 미담을 듣고 마음이 훈훈해졌습니다. 한 젊은이가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노인정에 들어가 쌀과 김치를 여러 차례 훔쳐 먹었습니다. 그는 죄책감 때문인지 깨끗하게 설거지를 하고 또 청소까지 해놓고 떠나곤 했습니다. 결국 그는 경찰에 붙잡혔습니다.
그런데 젊은이의 딱한 사정을 들은 경찰은 그를 입건하지 않고 오히려 밥값 3만원까지 쥐어준 채 훈방했습니다. 그런데 한 달 후 그 젊은이가 경찰서를 제 발로 찾아왔습니다. 자기에게 삶의 용기를 주었던 경찰관의 돈을 갚기 위해서였습니다. 한 경찰관의 따뜻한 마음씀이 그 젊은이의 마음에 빛을 밝혔고, 절망의 어둠 속에 있던 한 사람이 그렇게 회복되었던 것입니다. 어둠을 뚫고 솟아오르는 빛이 이런 것 아니겠습니까?
그 광경을 지켜본 이들의 마음에도 한 줄기 빛이 비쳐들었습니다. 빛은 그렇게 커지고 있었습니다. 그 경찰관이 기독교인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 그의 종교가 무엇이든 그는 잠시나마 여기서 말하는 예수의 빛 안에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성경책을 들고 다니고, 주일이면 교회에 다닌다고 다 신자가 아닙니다. 일상의 자리에서 그분의 빛 안에서 걸어가는 사람이라야 진실한 신자입니다.
생명이 회복되는 사건은 예수가 있는 곳 어디에서나 일어났습니다. 병자들은 치유받았고, 귀신 들린 사람들은 온전해졌으며, 사람들의 눈길을 피해 어둠 가운데 유폐되어 살던 사람은 빛 앞으로 나왔습니다. 인색했던 사람들은 나누기 시작했고, 부자들은 가난한 이들을 위해 자기 재산을 기꺼이 내놓았고, 자기만 알던 사람들이 다른 이들을 아끼는 사람으로 거듭났습니다.
서로 미워하고 적대시하던 사람들은 화해의 악수를 나눴고, 낯선 사람까지도 환대하는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주님이 세상의 빛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바로 이런 사건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세상의 빛이라는 고백이 진실하려면, 주님이 앞서 걸어가신 삶의 길을 따라야 합니다. 따름이 없는 고백은 공허합니다. 믿음은 사랑을 통하여 일하는 법입니다(갈5:6).
• 삶으로 하는 증언
"나는 세상의 빛"이라는 주님의 선언에 대해 바리새파 사람들이 딴죽을 겁니다. "당신이 스스로 자신에 대하여 증언하니, 당신의 증언은 참되지 못하오"(13). 상식적으로 보면 이 말이 그른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율법에 대한 상식에 기대 예수를 부정하려 합니다.
어떤 증언이 가치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두세 명의 증인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잘못이나 어떤 범죄라도, 한 사람의 증언만으로는 판정할 수 없습니다. 두세 사람의 증언이 있어야만 그 일을 확정할 수 있습니다"(신19:15). 신명기에 나오는 이 규정은 사실 억울한 희생자를 만들지 않기 위한 조치입니다.
증언의 확실성은 증인들을 통해 입증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떻습니까? 힘 있는 이들이 거짓 증언을 교사하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청문회나 국정조사에 나오는 증인들이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하는 것을 우리는 참 많이 봤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라는 예수님의 자기 증언이 참되지 못하다는 지적에 대해 주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비록 내가 나 자신에 대하여 증언할지라도, 내 증언은 참되다"(14a). 사실 이 말은 아무도 설득할 수 없는 말입니다. 증언이 참되다는 증거로 내놓는 말은 더욱 기이합니다. "나는 내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14b).
'내 증언은 참되다'라는 구절과 '알고 있기 때문이다'라는 구절은 인과관계가 성립하지를 않습니다. 종교적 언어는 때로 인과관계를 뛰어넘을 때가 많습니다. 선불교의 공안公案이라는 것을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사전적인 의미는 "선종禪宗에서 수행자의 마음을 연마하기 위해 부과하는 시험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제자가 스승에게 '부처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마삼근麻三斤'('내가 입고 있는 삼베옷이 세근이라네') 하고 대답한다든지, '뜰 앞의 잣나무' 하고 대답하는 식입니다. 인과관계가 성립되지 않지만 깊이 새겨가면서 근본을 생각하라는 뜻이겠지요.
지금 우리는 "나는 내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라는 말씀을 깊이 새겨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는 우리 인생의 근원과 완성을 제대로 이해하고 사는지를 먼저 물어야 합니다. 제 사무실에는 지저 쾨더(Sieder Koder, 1925-2015) 신부의 '근원으로부터 완성으로'라는 제목의 그림이 있습니다.
화면의 아래쪽에는 지구처럼 보이는 구형 위에 눈을 감고 있는 사람의 머리가 보입니다. 주위는 온통 다채로운 꽃들이 만발해 있습니다. 그리고 화면의 위쪽에는 검은 머리의 남자와 흰 머리의 여자가 부둥켜 안고 있는 게 보이는데 그 모습이 마치 온전함을 상징하는 원처럼 보입니다. 그 사방으로 붉은 색 장미꽃이 만발해 있습니다.
마치 햇빛이 번져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화가는 어떤 메시지를 담고 싶었던 것일까요? 저는 둘이 부둥켜 안고 있는 모습, 곧 진실한 사랑으로부터 세상의 온갖 아름다움이 탄생한다는 뜻으로 새겼습니다. 인간의 근원도 사랑이고 지향해야 할 목표도 사랑입니다. 아주 강력한 이미지의 그림입니다.
• 인간이 된다는 것
"나는 내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안다". 주님은 자신의 기원과 목표를 분명히 알고 사신 분입니다. 이론이나 머리가 아니라 온 몸으로 체득하셨다는 말입니다. 물론 우리 생명의 기원과 목표는 하나님입니다. 지거 쾨더 신부는 하나님께 이르는 길은 오직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그런 우주적 사랑에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날마다 지고 가는 인생의 짐이 무거워 허덕이다보니 우리는 왜 이 세상에 왔는지, 또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모르고 삽니다. 철학자들은 현실 세계에 깊이 빠져서 자기의 존재 목표를 잃어버린 채 사는 삶을 '퇴락頹落'(Verfallenheit)이라 했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용어로 하자면 '타락'일 겁니다. 존재의 목표라고 해서 괜히 거창하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사람답게 사는 것, 곧 애린의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살피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지상의 삶에서 성취해야 할 영원의 흔적입니다. <어린왕자>로 유명한 프랑스 작가 생 텍쥐페리는 <인간의 대지>에서 인간이 된다는 것을 아주 명료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인간이 된다는 것, 그것은 바로 책임을 지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과 관계없는 것처럼 보이는 비참함 앞에서 부끄러움을 아는 일이다. 그것은 동료들이 거둔 승리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일이다. 그것은 자신의 돌멩이 하나를 놓으면서 세계를 건설하는 데 일조한다는 것을 느끼는 일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이런 것이 아닐까요? 책임을 지는 것, 그리고 나와 무관해 보이는 세상의 비참함 때문에 부끄러워하는 것이야말로 예수님이 걸었던 인생의 길입니다. 뜻을 알고 사셨기에 주님의 증언은 참됩니다. 하지만 바리새파 사람들은 아직 그런 자리에 당도하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자신과 더불어 당신을 보내신 아버지가 당신에 대해 증언한다고 말하지만 그들은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고 묻습니다. "당신의 아버지가 어디 계십니까?"(요8:19a) 그들은 하나님도 모르고 예수님도 몰랐던 것입니다. 모르면서 안다고 착각하는 것, 그 착각에 근거해 다른 이들을 함부로 재단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게 또 있을까요?
요한은 주님이 이 모든 말씀을 하신 것이 헌금궤 앞이었다고 말합니다. 헌금궤가 있는 곳은 성전 마당입니다. 누구라도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이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유대인들만의 빛이 아닙니다. 이방인들을 포함하여 온 세상의 빛이십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적잖이 당황했을 것입니다.
백성들을 가르치는 자리에 있다고 자부했던 자기들의 편견과 무지가 은연중에 폭로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 예수를 붙잡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요한은 '아직도 그의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 한마디가 참 강력합니다. 주님의 생애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때'를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그 '때'는 주님이 보내신 분의 뜻을 다 이루고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때이며, 영광을 얻는 때입니다. 주님은 그날을 바라보며 사셨습니다. 가야 할 곳을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삶은 당당합니다. 우리는 지금 누구 뒤를 따르고 있습니까? 우상 혹은 거짓 신들을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혼신의 힘으로 주님의 뒤를 따르는 사람은 당당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내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안다". 이 한마디 할 수 있다면 우리 삶이 헛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영원한 중심에 도달하기 위해 늘 깨어 있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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