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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로마서 설교 모음

로마서 8장 18절 - 30절 설교 모음

by Jessi J 2024. 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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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보라! /8:18/ 김병삼 목사

2016-03-22 14:03:5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사도 바울을 생각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무엇인가요?

'옥중서신'

 

그는 복음을 전하는데도 전력을 다했지만, 감옥에 있으면서 복음을 기록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던 사람이고, 감옥에서 고난의 시간을 보내며 하나님과 친밀함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오늘 빌립보 감옥에서 있었던 일을 볼까요?

 

오늘 우리가 서 있는 빌립보는, 성경에서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16:12)이라고 소개되는 곳으로 서쪽으로는 스트림몬 강과 동쪽으로는 네스토스 강을 경계로 하는 마게도냐 동쪽에 소재합니다.

 

빌립보의 옛 명칭은 크레니티였으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아버지 마게도냐 왕 필리포스 2(재위 BC 359336)가 이 지역을 크게 확장하고 자기 이름을 따서 빌립보라고 바꾸었습니다.

 

신약성경 사도행전에 1616-34절에 보면, 바울이 빌립보의 감옥에 갇히게 된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할 때, 귀신이 들려 점하는 여종을 고쳐줌으로써 그 주인에게 고소를 당해 갇히게 됩니다.

 

귀신들린 여인이 얼마나 점을 잘 쳤는지 주인에게 돈벌이를 해주었는데, 사도 바울이 귀신을 쫓아냄으로 인해 돈을 못 벌게 된 것이죠.

 

그런데 감옥에서 사도 바울은 쇠사슬에 발목이 묶인 채 감옥에서 기도하고 찬미합니다. 그러자 옥문이 열리는 기적이 일어났고, 감옥을 지키던 간수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믿고 세례를 받는 기적이 일어났던 곳이죠. 이 일로 기독교 역사상 이곳에서는 기독교가 왕성하여졌습니다.

 

고난당할 때. . .

 

이 세상을 살면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고난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 아닐까요?

 

우리가 믿는 기독교가 위대한 것은 십자가를 수치의 상징으로 여기지 않고, 승리와 사랑의 상징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아니, 하나님께서는 가장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통해, 당신의 사랑을 확증하셨고, 죄와 죽음에서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기독교가 부활의 종교인 것은 십자가의 죽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을 때, 그의 삶은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주님을 증거하기 시작하면서 핍박하는 사람에서 핍박받는 사람으로 바뀌었지만, 그의 삶에는 생동감이 있습니다. 그의 삶에 놀라운 열정이 생겼습니다.

 

오늘 본문을 상상하며 묵상해 봅시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생각해보니까, 지금 당하는 고난은 장차 우리가 받을 영광에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가 빌립보의 감옥에서 찬양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얼마나 억울하게 고난을 겪고 있습니까?

 

사도행전 1616-18절을 보세요.

 

"16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에게 큰 이익을 주는 자라

17 그가 바울과 우리를 따라와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하며

18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우리가 고난 겪는 것이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고난을 받아야 할 상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다 보면 마땅한 고난보다는 억울한 고난을 겪을 때가 많습니다. 아니 오히려 의인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 많습니다.

 

나 하나만을 위해 살아간다면 겪지 않아도 될 고난이, 하나님이 주시는 사명 때문에 감내해야 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면 그냥 지나쳐도 될 일을, 그렇게 할 수 없이 만들기 때문입니다. 사명은 우리에게 가슴 벅차오르는 감정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부담이기 때문입니다.

 

사명자가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지금 당하는 고난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멀리 보기 때문입니다. “장차 드러나게 될 영광을 생각하면 지금 당하는 고통이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의 신앙을 보면 하나의 맥이 있습니다.

 

소망입니다.

 

한 번도 그의 사역에서 고난이 떠나간 적이 없습니다. 그가 소명을 받은 이후에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시온의 대로가 활짝 열린 것이 아니라 가는 곳마다 막히는 것 같았습니다.

 

그가 불림을 받았지만, 그의 사도성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 그를 배척했습니다. 그의 마음은 뜨거웠으나 환경은 차가웠습니다.

 

그가 복음을 전할 때, 믿고 변화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를 죽이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는 참 억울하게 옥에 갇히고 매를 맞아야 했습니다.

 

그가 복음을 전하고 싶었던 곳에도 하나님은 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는 뜨거운 열정으로 복음을 전하고 싶었지만, 하나님은 계속 그를 감옥에 가둬두셨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그때를 지나며 실족하지 않고 소망 가운데 인내하며 견뎌냈습니다.

 

로마서 53-4절입니다.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참으로 신기하게 환난을 겪으면 당할수록 단단해졌고 소망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소망은 환난이나 연단이라는 말과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걱정할 일이 없는데 소망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살아가면서 수없이 경험해야 하는 것이 아픔입니다.

 

오스왈드 챔버스가 그의 책 [주님은 나의 최고봉]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픈 마음 때문에 이 세상에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진다면, 하나님이 당신의 마음을 아프게 하신 것에 감사하라."

 

얼마나 멋진 말입니까?

아픔이 우리의 소망과 하나님의 목적을 앞서지 못합니다.

 

그렇습니다.

패배로 끝나는 고난이 있고, 영광으로 가는 고난이 있습니다.

 

자신의 삶에서 좌절케 하는 고난은 패배이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멀리 보며 인내하는 고난은 영광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소망은 눈에 보이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영광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믿음의 눈을 들어보면 보이는 것이 소망입니다.

소망은 믿음의 경험을 통해 더욱 견고해집니다.

 

하나님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 없으시고, 언제나 공평과 은혜로 나를 지키셨네,

오 신실하신 주, 오 하신 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공평과 은혜는 현실의 상황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참 멋지지 않습니까?

영광은 장차 받는 것이지 지금 받는 것이 아닙니다.

 

중국 속담에 누군가 침을 뱉어도 닦지 말라, 조금 있으면 마른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시편 1265-6절의 말씀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한 달이면 씨를 심고 먹을 수 있는 배추와 적어도 5년은 지나야 열매를 딸 수 있는 사과가 같은 가치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지난 한해 우리 교회 신천 장로님들이 힘든 시간을 지났습니다. 교단과의 관계에서 진급이 1년 동안 유보된 것이죠.

 

제가 장로님들에게 그런 말을 했습니다. 교단을 통해 정치를 하려는 사람들에게 1년이라는 시간이 중요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교회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1년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제가 목회 초년병시절, 은혜를 받고 목회를 해야겠다고 소명을 받았을 때, 목사로서 진급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미국에서 유학하는 동안 5년을 목사로서 진급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다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저에게 이런 믿음이 있었습니다. 평생 목회하는데 5년 먼저 진급하는 것이 뭐가 그렇게 중요합니까? 제가 지금 미국에서 공부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리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인데 왜 불법으로 진급을 해야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손길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고난도 견딜 수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조금은 손해 보는 것 같아도, 여전히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있음이 흔들리지 않게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이 믿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감옥에서. . .

사도 바울의 주옥같은 믿음의 고백들은 대부분 감옥에서 쓰인 것들입니다.

 

감옥은 사방이 막힌 곳이고, 감옥은 자신의 능력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곳입니다. 참으로 신기한 것은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포기하는 사람이 있고,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온전히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감옥에서 믿음이 증명됩니다.

감옥에서 기적을 체험합니다.

감옥에 있으나, 감옥 너머를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욥을 가리켜 왜 우리가 의인이라고 합니까? 인간이 당할 수 있는 최악의 고난 가운데서 그는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그가 얻은 것이 있습니다. 바로 믿음의 고백이었습니다. 욥기 238-10절입니다.

 

"8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9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감옥 밖에서 밖을 보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감옥 안에서 밖을 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시편 1211-2절을 보세요.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고난을 겪지 않는 것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고난을 이긴 것이 위대합니다.

고난을 겪되, 고난을 왜 겪는지 이유가 분명해야 합니다. 누구와 함께 고난 겪는지가 중요합니다.

 

오늘 사도 바울의 고백이 빛나는 것은 로마서 826-28절과 연관이 있습니다.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도우시나니라는 말인데, 본래 원어의 뜻을 보면 다른 사람의 손을 붙잡아 준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단어는 신약에 딱 두 번 나옵니다. 다른 하나는 누가복음 1040절에서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여기에서의 의미는 함께 담당한다.” “맞잡아 준다.”라는 뜻이지요.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신다는 것은 우리의 고난 중에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도우신다는 것은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일입니다.

도움이 가장 필요한 곳, 사방이 보이지 않는 감옥 같은 곳에서 일어나는 도움입니다.

 

사도행전의 역사는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 모였던 120명의 성도가 성령을 받았을 때 일어난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슬픔과 고통, 그리고 절망 가운데서 문을 닫고 있었습니다. 사방에서 에워싸는 것만이 우리를 답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 가운데서 우리가 스스로 문을 닫는 것도 큰 문제입니다.

 

그때 성령께서 오셨습니다. 그들의 상식을 뛰어넘는 일들, 불이 혀같이 갈라지고 방언을 하는 것뿐이 아니라 그들이 닫아 놓았던 문을 열고, 두려움을 제치고 밖으로 나갔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여 있어도 혼자였습니다.

두려웠습니다. 하지만 성령님께서 임재하셨을 때, 그들을 돕는, 그들을 맞잡아 주시는 성령님께서 함께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사도행전이 영어로 'Acts'입니다. 성령께서 임하셨을 때 일어났던 사건들의 기록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성령님의 임재를 일회적인 사건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디모데 후서 47-8절을 보세요.

 

"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사도 바울이 그의 인생의 마지막에 자신을 회고하면서 보니까, 한 번만 싸움을 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싸우며 달려온 것이죠. 우리가 흔히 쓰는 말 중의 D-Day라는 말이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앞둔 결전의 날 "Decision-Day"라는 말입니다.

 

이 작전의 성공으로 연합군은 승리를 쟁취하게 됩니다. 하지만 노르망디에 상륙하므로 전쟁에 승리한 것이 아니라, 독일군의 강력한 저항을 이겨냈기 때문에 또 다른 날을 맞이하게 됩니다.

 

V-Day, "Victory-Day"입니다.

 

결전의 날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 결심을 위해 끝까지 싸워 쟁취한 것이 승리의 날입니다.

사도 바울의 위대함은 그가 영광의 날을 바라보며 끝까지 싸우며 나갔다는 것입니다.

달려갈 길을 다 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라는 것은 D-Day에서 V-Day를 향해 가는 중간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사이에는 끊임없는 사단의 저항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영의 아들 디모데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고 불림을 받은 순간 우리가 순종한다는 것은 이제 V-Day를 향해 기꺼이 고난에 동참한다는 것입니다.

 

릭 워렌 목사의 사모인 케이 워렌은 [위험한 순종]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 표지에 이런 글귀가 있습니다.

 

당신이 하나님께 'yes'라고 했을 때 일어나는 일은 위험한 순종이라고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순종은 절대로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는 것, 순종한다는 것은 자기 혼자 독단적으로 살지 않겠다는 것이며,

내 능력에만 의지하지 않겠다는 것이고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주장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순간 모든 것이 변합니다.

 

케이 워렌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하겠습니다.

 

"어릴 때 그녀는 공부 잘하는 똑똑한 학생이 되고 싶었지만, 한 번도 우등생이나 장학생이 되어 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가 목사님이어서 교회에서 피아노 반주를 맡긴 했지만, 피아노 역시 보통 실력을 넘지 못했다.

사람들한테 못생겼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지만, 그렇다고 눈에 띄는 미모도 아닌, 그저 평범한 여자일 뿐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녀가 결혼한 사람은 슈퍼스타(?)가 아닌가! 남편 릭 워렌은 뭐든지 잘하는 팔방미인이었다.

 

하나님 정말 크게 실수하신 거예요, 하필이면 왜 저를 요거밖에 안 되는 인간으로 만드셨어요? 우리 남편에게 좀 더 예쁘고 재능 있고 똑똑한 사모를 허락하시지. 저는 아무리 해도 안 돼요.”

하고 울먹일 때,

라디오에서 대니벨 홀의 평범한 사람들이란 노래가 흘러나왔다. 하나님은 평범하지만, 자기가 가진 모든 걸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을 사용하신다는 내용의 노래였다.

 

하나님 아버지, 잘난 게 없다고 늘 불평하고 투정부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저를 만드신 당신께 실수했다고 비난했던 것도 용서해 주세요.

이제부터는 저를 평범하게 만들어 주신 사실을 기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저 자신을 당신께 바치며 순종하겠습니다.”

 

그때 드린 짧고 정직한 기도가 알고 보니 그녀의 생애에 가장 위험천만(?)한 순종의 기도였음을 어찌 알았으랴."

 

순종하는 믿음은 절대 무모한 믿음이 아니다. 언젠가 모든 그림은 분명해집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모든 것이 분명해지길 기다렸다가 하나님께 라고 대답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고통 없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애원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단순히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했을 뿐입니다.

 

아더 핑크는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는 구절에 대하여 이렇게 해석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 구절을 대할 때 이 성경의 말씀을 기록한 사람은 틀림없이 고난에 끄떡도 않는 강철 같은 사람이거나, 아니면 일상생활 중에 일어나는 별것 아닌 귀찮은 일들에 익숙해진 사람일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 구절은 성령의 인도로 기록된 것이며 가장 가혹한 고통에 시달린 사람이 기록한 것이다. 고난 후의 영광은 상상이 아닌 확신이다.

 

제가 요즘 제일 많이 듣는 말이 이런 말입니다

조금 천천히 하세요. 쉽게 하세요.”

 

그런데 그럴 수 없습니다. 내 속에 있는 열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나 교회 목사로 불림을 받은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불림을 받는 순간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파구스 10호 점을 여는 날 제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처음 파구스를 시작할 때, 모든 사람이 찬성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저에게 꿈을 주셨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만나는 장소, 그래서 역사가 일어나는 장소가 될 것이다.

 

그 일을 감당하는 장로님의 눈물, 아니 그 눈물을 지켜보는 권사님의 아픔이 더욱 컸습니다. 왜 그런 비난과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보게 하셨던 것은, 앞으로 행하실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사실을 두렵습니다. 꿈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두려운 것이 없습니다.

그 꿈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떡합니까?

 

하지만 하나님의 꿈은 하나님이 이루시는 것이고, 그 꿈을 가로막는 어려움이 하나님의 계획을 앞서지 못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끝까지 하나님이 영광 앞에 서는 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고 그 길을 가는 한, ‘고난영광을 막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크리스천의 힘과 능력이 무엇입니까?

영광을 바라보며 앞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히려 우리의 계획을 앞서 가시는 하나님의 영광 말입니다.

 

지난 연말을 앞두고 석 달 가까이 참 많이 아팠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이 그런 말을 합니다.

 

목사님에게는 안 된 말이지만 아파서 하는 설교는 가슴에 확 와 닿습니다.”

 

지난해 말 아마도 처음으로 출석 성도가 만 명을 넘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교인들이 모인 이유가 없습니다. 제가 아파서 의자에 앉아 설교했다는 것 말고는.

 

정말 살다 보면 고난과 아픔이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을 수 없다는 고백을 합니다.

 

고난 속에서, 캄캄한 감옥 속에서 부르는 찬양이 빛나고,

절망 가운데서 의지하는 믿음이 확고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고난 속에서 멀리 바라보는 영광.

그것이 힘이고 능력이 아니겠습니까?

 

 

 

 

@요약말씀@ 고난, 탄식, 영광/ 818~25/옥한흠목사

2014-11-17 22:00:05

 

한때 미국 오페라계에서 활약했던 할버튼이란 유명한 가수가 있었습니다. 어느날 할버튼은 자기 아들과 이웃집 아이가 놀면서 주고 받는 대화를 엿듣게 되었답니다.

 

이웃집 아이가 "우리 아버지는 시장님을 잘 안다"고 자랑을 하자 할버튼의 아들은 "우리 아버지는 하나님을 잘 안다"고 당당히 대꾸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대화를 들은 할버튼은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고 마침내 서재로 들어가 실컷 울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처럼 하나님을 알고 있다는 것, 더군다나 가장 높으시고, 전능하시고, 가장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른다는 것은 놀라운 감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황홀하고 자랑스러운 감격이 악한 세상에서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못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보다 시장을 아는 것을 더 선호합니다.

 

아니 오히려 이질감 내지는 거부감을 일으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를 핍박하고 조롱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영광의 자리에 들어가기까지 '고난'이라는 값을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17).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들이 받는 고난은 어떤 고난입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받는 고난이며 "현재의 고난"입니다.

 

먼저 "그리스도와 함께"라는 말은 그리스도가 세상에서 받으신 고난을 함께 나누어 진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고난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와 함께 아들된 우리도 고난을 받는 것이 마땅합니다. 주인이 받았는데 종이 어떻게 고난을 피할 수가 있으며 맏형이 고난을 받았는데 동생이 피할 수가 있겠습니까?(요한 1:20).

 

그래서 성경은 '고난을 피하라'고 말하지 않고 '고난을 받으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벧전 4:13).

 

그리고 또 "현재의 고난"은 잠시 동안의 고난을 의미 하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현재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재림하시기까지의 기간을 말하며 개인으로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기간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고난"이란 그 기간 동안에 받을 수 있는 고난을 통칭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고난을 받으면서 그 자녀들만이 아는 탄식이 있습니다.(23) 소망의 탄식입니다(고후 5: 2). 우리는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자들입니다. 물론 성령의 첫 열매란 죄와 사망에서 자유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말합니다.

 

이제 우리는 첫 열매를 받았으니 뒤따라 오는 열매를 받게 되는데 그것이 "몸의 구속" "영광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 "영광"을 바라보며 마치 산모가 아기를 낳으면서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탄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탄식은 단지 하나님의 자녀들만 탄식하는 것은 아닙니다. "피조물"도 하나님의 자녀들처럼 탄식합니다(22). 여기서 "피조물"이란 비이성계의 만물, 즉 해, , , 나무, 동물 등을 가리킵니다.

 

왜냐하면 썩어짐의 종노릇을 하면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피조물은 왜 탄식하는 것입니까? 아담이 범죄하는 순간부터 피조물"도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만물의 영장인 인간의 운명과 끊을 수 없는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피조물"의 희망이란 인간의 저주가 완전히 풀리게 되는 그 날인 것입니다.

 

그 날이 되어야만 피조물도 썩어짐에서 해방되며 영광에 동참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나 피조물이나 다 탄식하되 영광의 날을 바라보며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바라는 그 영광은 어떤 것입니까? 몸이 구속을 받는 영광입니다(23).

 

다시 말하면 썩지 않을 새 몸을 입고 영생하는 영광입니다. 그때 우리는 죄와 그 비참한 결과들로부터 완전히 자유입니다. 예수님처럼 흠과 티가 없는 신령한 자가 되며 천사의 수종을 받으며 왕노릇할 것입니다(22:5).

 

또 우리의 몸이 새로워졌으니 자연 만물도 새로워진 몸이 살기에 맞는 신천신지로 바뀌지 않으면 안됩니다(22:5). 이사야는 그 신천신지가 얼마나 아름답고 평화스러운지를 생생하게 묘사하곤 있습니다. "그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11:5~9).

 

그러면 이 영광은 언제 나타납니까?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그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 예수 믿는다는 그 이유 때문에 불이익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지만 두려워하거나 피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고난을 기쁘게 받아야 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나요?

 

첫째, 고난과 영광을 비교하는 것입니다.(고후 4:17~18)

 

비교를 해보면 사도 바울처럼 현재 이 세상에서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장차 올 영광과 비교가 안된다는 것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의 부귀와 영광, 재산과 영광, 가난과 영광, 질병과 영광, 핍박과 영광을 자주 비교하면 할수록 우리의 고난은 가벼워질 것입니다.

 

둘째, 참음으로 기다리는 것입니다(24,25).

 

소원과 소망은 다릅니다. 소원이란 우리의 것이지만 소망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기 원하시는 것을 바라며 기대하는 것입니다.

 

새벽이야말로 가장 어둡고 추운 때입니다. 고난이 심할수록 때가 다다랐다는 것을 알아야겠습니다.

 

 

 

 

 

@요약말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 828~30/ 옥한흠목사

2014-11-17 21:58:06

 

본문은 3절 밖에 안되지만 세상을 구원코자 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청사진이 들어 있는 말씀입니다.

본문을 읽고 나면 분명한, 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데 그 결론이란 하나님은 구원에 있어서 절대 실패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28절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 말씀을 좀더 뜻이 분명하게 번역하자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 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을 구원하시는 목적은 이중적입니다.

하나는 예수님을 많은 아들가운데서 맏아들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29, 2:9).

 

맏아들이 된다는 것은 백성이 많으면 많을 수록 그 왕은 영광을 더 많이 받는 것처럼 예수님도 동생들, 즉 구원받는 백성이 많아야만 더 영광스러워지는 법입니다.

 

또 하나는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게 하는 것입니다.

물론 '본 받는다'는 의미는 외모 뿐만이 아니라 내면까지 같은 모양을 취하는 것을 말합니다. 8장에서는 '본 받는다'는 뜻을 몸의 구속,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영광, 영화라는 다른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그러면 이 구원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어떤 단계를 취하시는지 살펴봅시다.

 

첫째, 미리 아시는 단계입니다.

 

이미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기도 전에 이 세상이 만들어지기도 전에 하나님이 우리를 아셨습니다(1:4).

 

둘째, 미리 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기쁘신 뜻대로그의 자녀를 선택하셨습니다.

 

셋째, 부르셨습니다. 내가 스스로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이 아니라 그 분이 믿게끔 하신 것입니다.

 

넷째, 의롭다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피흘려 죽으신 대가입니다.

다섯째,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그의 형상을 본받는 것이며 그와 함께 영원히 사는 복을 말합니다.

 

그분의 계획은 완전합니다. 어떤 장애물도 그의 계획을 방해하거나 변경시킬 수 없습니다. 이런 확실성을 강조하기 위해 29,30절에는"하나님이"8번이나 반복 사용되고 있으며 5개의 동사가 전부 과거시제 입니다.

 

영화가 우리의 미래사이지만 그것을 이미 성취된 과거사로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표현할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의 계획은 곧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구원계획을 완전히 이루기 위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진행합니다.

 

물론 선은 통속적인 만사형통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선의 핵심은 완전한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보기에는 아무리 좋아도 구원에 방해가 된다면 그것은 선이 아니며 우리가 보기에는 아무리 불만족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데 필요하면 그것은 선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되는데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작업을 하신다는 점입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모든 것이 합력하게 되는 것은 그분의 손길인 것입니다.

 

그런데 구원 5단계 중에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그분의 손길을 체험하게 되는 것은 부르시는 과정에서 영화롭게 되는 과정 사이의 일입니다. 미리 아시는 것과 선택하는 것은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의 일이며, 의롭다하시는 과정 역시 신비하게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은 복음을 듣고 예수를 주로 영접하고 순종하게 되는 삶을 일컫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르심을 받으면 근본이 바뀌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28) 믿음이란 단순히 아는 정도가 아니라 사랑으로 역사하는 것이라야 합니다.

 

믿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기쁨으로 순종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변화가 있어야만 그를 가리켜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강제적인 성격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귀찮은 방해요 간섭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질병, 가난, 실패, 인생의 허무 등을 통하여 우리의 뜻을 꺾습니다. 절망에 떨어지는가 하면 죄가 생각나고 불안과 갈등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교회로 피난을 하게 되며 성경을 읽게 됩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가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의 택하신 자녀를 꼭 구원해 내고 맙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기적입니다.

 

다음으로 의롭게 된 후부터 영화롭게 되는 날까지의 삶을 통해 체험하게 됩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모든"은 우리의 삶 가운데서 행복은 물론이요 불행까지도 포함합니다. 심지어 죄에 빠지는 것까지도 말합니다.

 

죄의 늪으로 실족하는 것이 매우 위험하고 조심스러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은 사랑과 겸손을 알게 하실 뿐만 아니라 그분의 거룩함을 바라보게 합니다. 하나님은 최악의 사건을 통해서도 최상의 축복을 만들어 내시는 분입니다.

 

하찮은 우리의 일상이 무의미한 것으로 보아서는 안됩니다. 지금 전개되고 있는 모든 일들이 우리를 영광의 그 자리로 이끌고 있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혹 현재의 되어지는 일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할지라도 그의 아들을 내어주기까지 우리를 사랑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시면서 마침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될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의 날의 영광을 바라보게 하소서! /8:18-25/ 유기성 목사

2016-08-26 15:03:48

 

우리는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영을 잘 분별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안에 두 영이 역사한다고 했습니다.

 

8:15 여러분은 또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자녀로 삼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영을 바로 분별하지 못하면 예수님을 믿고 교회를 다니면서도 자녀처럼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종살이 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15장에 나오는 탕자가 그랬습니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지만 자신이 아버지의 아들로 불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품꾼의 하나로 받아주어도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 이런 믿음을 가진 이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아실까? 하나님께서 나를 기뻐하실까? 하나님이 원하는 삶을 살고 있지 않는데 나에게 화가 나 계시지는 않을까?” 종살이의 영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 생각은 성령께서 역사하시지 않으면 결코 바뀌어지지 않습니다.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셔야 자녀처럼 하나님을 믿게 됩니다.

 

입으로만 아버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 이상 먹고 살기 위하여, 성공하기 위하여 안달하고 염려하며 살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되셔서 책임지신다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진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을 위하여 살고 다른 사람을 위하여 살고 싶어집니다.

 

고후 5: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노력해서 이렇게 변할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이렇게 바꾸어주시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고난의 길을 갈 담대한 마음을 주십니다.

 

그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상속자임이 깨달아졌고, 장차 나타날 주님과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을 바라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18 현재 우리가 겪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견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딤후 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이 말씀을 그저 읽으면 참 부담스럽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두려워집니다. 하지만, 성령으로 충만하면 달라집니다. 예수님 안에서 경건하게 삶으로 박해를 받는 것이 감사하며 기쁩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을 보기 때문입니다.

 

고시생, 입시생, 취업준비생, 장교 훈련 중인 사람, 국가대표 합숙훈련장에 들어간 선수들도 장차있을 영광을 보면서 현재의 고난을 이겨내는데,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에 눈이 뜨인 성도는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서의 고난은 결코 저주가 아닙니다. 오히려 장차 있을 영광을 보지 못하고 이 세상에서 편안하게 살려는 것이 저주입니다.

 

북한의 핍박받는 지하교회 성도들은 불행한 사람들입니까? 그렇다면 핍박받지 않고 살다가 지옥에 가면 다행이겠습니까? 여러분이 지금 북한에 있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그리스도를 부인하면 편합니다. 예배처소나 동료 그리스도인을 밀고하면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순교도 각오해야 합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 정신이 번쩍 듭니다. 북한의 그리스도인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없어집니다. 결국 불 시험을 통과하여야 구원받은 믿음을 가졌는지 확인하게 된다는 점에서는 북한이나 남한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도 순교할 믿음이 없으면 마귀의 먹이가 되고 맙니다.

 

전도사 영성훈련 때, “목회 성공하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죽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아무도 안 가겠다는 곳이 있다면 주님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 주십시오. 라고 기도하십시오라고 전하였습니다.

 

이제 막 목회의 길에 들어선 전도사들에게는 잔인한 말처럼 들렸겠지만 지금에서야 진작 그런 자세로 목회를 하였다면 저도 살고 교회도 살았을 텐데하고 깨달아졌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분명히 제자들을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로 부르실 때, 조금도 미안해하시거나 부탁하시거나 사정하시거나 주저하시지 않으시고 당당하셨습니다.

 

저는 제 아내에게 낭만적이고도 멋있는 프로포즈를 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제게는 목회자의 길이 고난의 길이라고만 알았지 영광의 길이라는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 때가 목회자의 아내였던 어머님이 돌아가신 직 후였습니다. “내가 가는 길은 고생 길이다라는 생각 뿐이었는데, 어찌 제 아내가 되어달라고 간청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다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조금도 망설임 없이 모든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다 나누어주고 주님을 따라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이 청년에게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그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이 진정한 축복의 길임을 분명히 아셨기 때문입니다.

 

복 받으려고, 잘되려고, 문제 해결을 받으려고 예수님을 믿는 것은 진정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었으니 이미 충분히 행복해진 것입니다. 받을 축복은 다 받았습니다. 영생을 얻었고 죄 사함을 받았고 의롭다 인정받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주님이 마음에 오셔서 영원히 동행해 주시니 부족한 것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서 좀 더 가지고 사는 것은 주셔도 그만 안주셔도 그만인 것입니다. 이제 남은 삶은 주님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이 눈이 뜨이게 해주십니다.

 

성령께서 오실 때, 일어나는 또 하나 놀라운 변화는 주님의 날을 기다리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19에서는 모든 피조물들도 간절히 기다린다고 말씀하십니다. :19 피조물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하였을 때, 모든 피조물도 저주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자연이 아름답고 웅장해 보이지만 알고 보면 고통 속에 있습니다. “썩어짐의 종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피조물들이 주님의 날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더욱 그렇습니다.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23 그뿐만 아니라, 첫 열매로서 성령을 받은 우리도 자녀로 삼아 주실 것을, 곧 우리 몸을 속량하여 주실 것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고대하고 신음하는 것은 성령께서 오셨지만 우리 몸은 여전히 악한 영향력에서 자유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기심과 욕심, 혈기와 음란함으로 인한 내적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래서 몸도 온전히 변화되고 죄에 대하여 완전히 승리하고 거룩한 본성이 회복되는 날이 오기를 갈망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사람은 이처럼 사는 것이 다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24 ...눈에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겠습니까? :25 그러나 우리가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면, 참으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림’ ‘인내는 너무나 중요한 성령의 역사입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하나님 앞에 서는 성도의 가장 중요한 덕목임을 알 수 있습니다.

 

14:12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기다림’‘인내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달으려면 인생을 보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지금 지글러의 [정상에서 만납시다] 같은 성공학이나 처세술, 자기계발에 관한 책들은 한결같이 인생을 산에 오르는 것이라고 말하고 어떻게 하면 정상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지 그 비결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망치고 있습니다.

 

좋은 책 한 권이 출간되었습니다. [광야를 읽다] (두란노) 입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인생이 산을 오르는 것이 아니라 광야를 지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광야 길을 가는 것과 산을 오르는 것은 너무나 다릅니다.

 

산은 정상이 보입니다. 그러나 광야는 끝이 보이지 않는다. 어떤 것이 인생 같습니까? 산은 어떻게 올라가야 할지 어느 길로 올라가야 하는지 대개 정해져 있습니다. 그러나 광야에는 길이 없습니다. 어떤 것이 인생 같습니까?

 

산은 전체가 한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사막은 그렇지 않다. 산은 변하지 않는다. 항상 그대로다. 그러나 사막은 변화무쌍하다. 오늘 있던 모래 언덕이 내일이면 사라진다. 없었던 산이 새로 생기기도 한다.

 

산에 오를 때는 혼자 가도 된다. 그러나 광야에 들어갈 때는 절대로 혼자 들어가서는 안 된다.

 

결혼하는 것은 산에 오르는 것이다. 그러나 결혼 생활은 사막을 통과하는 것이다. 아이를 낳는 것은 산에 오르는 것이다. 그러나 아이를 키우는 것은 사막을 통과하는 것이다. 아이를 낳는 것도 힘들지만 아이를 낳고 나서 더 힘들다.

 

직장에 들어가는 것은 산에 오르는 것이다. 그러나 직장 생활은 사막을 통과하는 것이다. 학위를 하고 성공을 하는 것은 산에 오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는 광야를 통과하는 것입니다. 광야를 산에 오르는 것처럼 사니 인생이 힘들고 너무나 혼란스러운 것입니다.

 

제가 처음 목회를 시작할 때, 큰 교회 담임목사가 되는 것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목회도 산을 오르는 것이라고 이해한 것입니다.

 

그것이 큰 잘못인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큰 교회 담임목사가 되기 위하여 목회하는 것은 목사가 빠지는 가장 흔한 우상숭배입니다.

 

목회는 광야를 지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아야 목사의 목표는 큰 교회 담임목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친밀히 동행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목회의 목적이 큰 교회 담임목사라고 생각했을 때는 열심히 목회하면서도 마음은 메마르고 지치고 원망만 커지고 경쟁심과 교만과 열등감의 연속이었습니다. 목회의 목적이 예수님임을 깨닫고 나니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한 몸이고 하나님 나라를 위한 동지요 천국까지 함께 가는 이들입니다.

 

인생은 성공하기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실 것을 기다리며 매일 매일 순종하며 묵묵히 광야를 걸어가는 것입니다.

 

살기가 너무 힘들고 좌절감, 실패감, 열등감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상하게 여기지 말고 광야를 걷는 것처럼 살아보기 바랍니다.

 

광야에서는 축복을 구하지 않고 은혜를 구하게 됩니다. 황금이 아니라 생수를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곳간을 채워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좋은 집이나 은금이 증식되지 않는다고 원망하고 불평하지 않습니다.

 

광야에서는 만나 내려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장막에 머물 수 있는 것만으로 감사합니다. 로뎀나무 그늘만 있어도 감사합니다. 광야에서는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축복의 장마비가 아니라도 이슬 같은 은혜에도 감사합니다.

 

인생이 산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광야를 통과하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더 높은 곳에 오르려고 발버둥치지 않는다. 더 빨리 올라가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24 시간 예수님과 동행해야 하는지 알게 됩니다. 왜 성경을 반드시 읽으며 매일 묵상해야 하는지 알게 됩니다.

 

왜 교회 공동체에 꼭 속해야 하는지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살아간 길을 이해하게 됩니다.

 

손양원목사님은 한 평생을 한센씨 병 환자들을 위해 살았습니다. 일제 강점기 때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6년 동안 옥살이를 했습니다. '여수 순천 반란 사건' , 공산주의자가 두 아들, 동인과 동신을 총살했을 때, 두 아들을 총살시킨 그 원수를 아들로 삼았습니다. 이러한 손양원 목사님을 이해할 수 있는 노래가 있습니다.

 

손양원목사님이 지은 복음성가, '주님고대가'입니다.

 

1. 낮에나 밤에나 눈물 머금고, 내 주님 오시기만 고대합니다. 가실 때 다시오마 하신 예수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2. 고적하고 쓸쓸한 빈 들판에서 희미한 등불만 밝히어 놓고 오실 줄 만 고대하고 기다리오니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3. 먼 하늘 이상한 구름만 떠도 행여나 내 주님 오시는가해, 머리 들고 멀리멀리 바라보는 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4. 내 주님 자비한 손을 붙잡고 면류관 벗어들고 찬송 부르면 주님계신 그 곳에 가고 싶어요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5. 신부되는 교회가 흰옷을 입고 기름준비 다해 놓고 기다리오니 도적같이 오시마고 하신 예수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6. 천년을 하루같이 기다린 주님 내 영혼 당하는 것 볼 수 없어서 이 시간도 기다리고 계신 내 주님, 오 주여 이 시간에 오시옵소서.

 

성도 여러분, 마음에 어떤 영이 역사하고 있습니까? 두려워하는 종살이의 영은 아닙니까? 돈 걱정하며 사느라 누구를 한번 제대로 도와주지도 못했고, 고난을 두려워하느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한번 살아 보지 못했고, 주님의 재림을 생각하지도 못하고 세상만 바라보고 살지는 않습니까?

 

이제 돌이켜야 합니다. 성령을 붙잡아야 합니다. “주의 날의 영광을 바라보게 하소서!”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을 사모하면 반드시 눈을 뜨게 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담대함을 주십니다.

 

베풀며 살게 하십니다. 고난이 두렵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게 하십니다. 주의 날의 영광을 사모함이 실제가 됩니다.

 

기도합시다. 성령님 역사해 주소서! 우리의 눈을 열어 주의 날을 보게 하소서!

 

 

지나온 모든 것을 감사 /8:26-30,살전5:18/ 이동원목사

2014-12-03 19:00:06

 

오늘 우리는 12월의 끝, 한해의 마지막 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정유찬 시인의 시 가운데 ‘12월의 끝에서라는 시가 있습니다. 한해를 결산하는 의미 있는 시가 될 듯 합니다.

들어 보시지요.

 

사랑한 날이 미워하는 날보다 많았는지/슬프고 힘들었던 날보다 행복했던 날이 많았는지/12월의 끝에서 지난날들을 떠올려 보고 있어/보석 같은 날들을 가슴으로 살았니 머리로 살았니/얼마나 웃고 살았어 아니면 찡그렸어/

맑은 하늘아래 투명한 날들을 뿌연 눈으로 보낸건 아닐까/별이 찬란하던 밤 내가 깨어 있었는지 잠들어 있었는지/난 거울을 봐 거울속의 나를 봐/아름다워 진거야 추해진 거야 무엇이 변한 것일까/밤이 깊어만 가네 한해가 또 저무네

 

나는 그의 시를 읖조리면서 그리스도인답게 한해를 마무리하는 합당한 단어가 무엇인가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내 결론이 났습니다. 그것은 감사라는 단어였습니다. 감사야 말로 시간의 한 페이지를 닫고 또 다른 시간의 페이지를 여는 하나님의 언어인 까닭입니다.

 

바울 사도는 역사의 종말에 대한 성경적 교훈을 곡해하여 일상적인 삶의 자리에서 도피하고 하늘만을 바라보고 있었던 신생 데살로니가 교회 일부 성도들에게 재림을 기다리는 깨어 있는 성도의 삶의 모습을 가르치고자 데살로니가전서를 쓰면서 결론으로 감사하는 삶을 권면합니다.

 

살전5:18을 읽겠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여기서 바울 사도는 모든 일에 즉 범사에 감사하라고 권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리스도인다운 삶의 모습이요 하나님의 기대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오늘 12월의 끝 날에 합당하게 적용할 수 있다면 지나온 모든 일, 이 한해에 우리가 경험한 범사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가 지나온 한 해 동안 우리는 우리가 원하지 않았고 환영할 수 없었던 질병과 사고, 실패와 수치와의 그 치열한 싸움 그리고 그 뼈아픈 고통이 있었는데도 과연 감사가 가능할 수 있겠습니까?

 

이 질문에 답하게 위해 우리는 또 다시 바울사도의 유명한 인생 레슨의 보석으로 불리 우는 로마서 826-30절의 교훈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어떻게 우리는 우리가 겪은 모든 것에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바울 사도는 본문에서 그 이유를 두 가지로 대답합니다.

 

1.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룰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인생에 대해서 감사를 느끼지 못하는 대부분의 경우-왜 그렇습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인생이 내 뜻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누구입니까?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아닙니까?

 

우리의 스승이요 주님이신 예수께서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신 모범을 보이신 분이 아닙니까? 그분은 또한 우리에게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분이 아니십니까?

 

그렇다면 비록 인생이 내 뜻대로 되어지지 않았어도 그분의 뜻대로 된 것이라면 감사한 일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과연 우리의 삶의 현재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결과이냐 라는 것입니다.

다시 로마서 8장의 가르침으로 돌아오십시오.

 

8:26의 교훈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인생의 길에서 탄식을 경험하며 무엇을 위해 기도해 좋을지도 모를 상황에 처할 때 성령께서 또한 우리와 함께 탄식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는 것입니다. 함께 읽어 보시겠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이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느니라그때 성령께서 우리를 위하여 무슨 기도를 하실까요?

 

그 대답이 27절입니다.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라성령은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삶의 장에 이루어지도록 간구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성령의 간구가 실패하시겠습니까? 결과가 무엇입니까?

그 결과가 바로 유명한 롬8:28인 것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오랜 옛날부터 철학자들은 소위 인간의 최고선(最高善)’ ‘summum bonum’을 탐구하여 왔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최고선을 행복이라고 했고, 임마누엘 칸트는 그냥 행복이 아니라 도덕적 법칙과 결합된 행복이야말로 최고선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최고선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여기서 말한 모든 것에는 롬8:18에서 말한 고난과 영광, 슬픈 일과 기쁜 일, 좋은 일과 안 좋은 일 모든 일을 다 포함합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 곧 하나님의 뜻을 이룰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오직 그리스도인들에게만 해당되는 약속입니다.

 

다시 28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을 향한 약속이요 우리만 알고 있는 사실이라고 선포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는 지나온 한해 우리가 겪어온 모든 부정적인 경험들에 대해서도 감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물론 이 말은 우리가 겪어온 모든 악한 일들이 다 좋은 일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쁜 일은 나쁜 일이고, 악한 일은 악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도들의 인생의 장에서 경험되는 나쁜 일이 나쁜 일로 끝나도록 악한 일이 악한 일로 끝나도록 버려두시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나쁘고 악한 일조차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간섭과 개입으로 궁극적으로는 선한 일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시 롬8:35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어떤 나쁜 일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단절시킬 수는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경제적 시련, 사업의 실패)이나 적신(질병)이나 위험이나 칼(도난, 파산, 사고와 재앙들)이랴

그렇다면 사랑하는 사도 여러분, 이제 우리는 이 모든 것들에 대해서도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뜻을 이룰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대표적인 케이스가 요셉의 인생이 아닙니까? 요셉이야 말로 얼마나 나쁜 일들을 많이 경험한 사람이었습니까?

형제들의 질투와 핍박, 사막의 웅덩이인 사지에 던져진 죽음과의 대면, 억울한 감옥살이, 은혜를 잊어버린 관원--그러나 우리는 좀처럼 요셉의 입술에서 불평이나 원망의 언어를 찾을 수 없습니다. 그 비결이 무엇이었습니까?

 

우리는 그 비밀을 그가 자기를 사지로 내몰고 죽음을 시도한 형제들을 만나서 그가 고백한 창45:5이하의 간증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45:5을 읽어 보십시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다시 7-8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어떻게 이 험한 세월을 이기고 요셉이 이런 간증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성도가 경험하는 모든 것에 개입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었던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나온 모든 것을 감사할 수 있는 이유가 또 하나 있습니다.

 

2. 모든 것이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성도들이 경험하는 모든 것들이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있다고 해서 당장에 악한 일이 선한 일로, 악한 상황이 선한 상황으로, 실패의 환경이 성공의 환경으로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오래 동안 우리의 상황은 나쁘고 악하고 고단한 상황 그대로 머물러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울 사도가 롬 8장에서 가르치는 두 번째 교훈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얼마동안 우리를 나쁜 상황 한 복판에 그대로 두신채로 우리의 인격을 변화시키는 작업을 진행하고자 하십니다. 그때 우리를 둘러싼 고난의 상황은 우리의 인격을 연단하는 작업의 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인격적 주조의 모형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인 것입니다. 8:29의 말씀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이야 말로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인 것입니다.

바로 이 목적을 마음에 두시고 하나님은 우리가 경험할 모든 상황을 아시면서도 그런 상황을 통과하도록 작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신학자들은 이런 과정을 영광의 작업이라고 부릅니다. 8:30에는 기독교 교리의 기둥이 되는 몇 가지 교리가 연속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소위 예정의 교리, 소명의 교리, 칭의의 교리, 영화의 교리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결코 분리될 수 없이 연결되어 있어서 이들을 가르쳐 황금 사슬의 교리들’(doctrines of gold chains)이라고 부릅니다. 읽어 보실까요?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미리 당신의 사랑받는 자녀로 정하시고 때가 찬 어느 날 복음으로 부르시고 부르신 우리를 의롭다하셔서 당신의 자녀로 인치셨다가

우리를 인생의 모든 상황 속에서 우리를 인격적으로 연단하사 마침내 영화로운 존재가 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이 영광의 작업장에서 작업 중인 작품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영화로움의 초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인 것입니다. “보라 내 사랑하는 아들이로다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이 진실로 기뻐하신 유일한 존재이신 그리스도 바로 그분을 닮도록 인생의 모든 것으로 그 분은 우리를 연단하시는 것입니다.

 

때로는 사랑하기 힘든 사람들과 씨름하며 사랑을 배우게 하시고, 슬픔의 파도 속에서 슬픔을 넘어서는 기쁨을 배우게도 하시고, 때로는 불화의 딜레마 속에서 화평의 진리를 배우게 하시고, 때로는 견디기 힘든 환경에서 오래 참는 인격을 연단하게 하시고,

 

때로는 억지로 손해 보는 경험을 통해 관용을 배우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인생의 마지막에 하나님은 우리가 살아온 결과물로서 업적이 아닌 우리가 빚어 온 인격을 보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진지하게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우리가 얼마나 거창한 일을 하느냐가 아닙니다. 날마다 부딪치는 일상의 경험을 통해 우리가 어떤 존재, 인격으로 빚어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의 행위doing이 아닌 우리의 존재being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일생을 통해 하나님의 합격을 받은 대표적인 케이스가 욥이 아니겠습니까?

 

욥이 무슨 거창한 업적을 남긴 것이 있습니까? 업적이라면 그는 계속해서 다가오는 인생의 시련들을 무던히도 잘 견디고 인내한 것 뿐 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내 종(사랑하는, 의로운) 이라고 계속해서 부르십니다. 야고보는 인내의 표상으로 그를 소개합니다.

 

5:11에 보면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다고 증거합니다. 욥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그 지독한 고통의 순간들을 이겨 낼 수 있었을 까요?

 

23:10이 그 대답입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욥은 자신의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믿었습니다.

 

그가 나를 아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나를 순금과 같은 인격으로 연단하시고자 함을 믿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잘 견딘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이 모든 시련을 이겨낸 어느 날 위로 자를 자청하고 와서 오히려 자신에게 상처만 주었던 친구들까지 용납하고 용서하는 기도를 시작하는 욥의 모습을 본 순간 이제 하나님이 감동을 받으십니다. 그리고 그 순간 하나님은 욥의 고난을 끝내십니다.

 

작업의 목적이 훌륭하게 성취됨을 보신 까닭입니다. 42:10을 보십시오. “욥이 그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그렇습니다.

 

욥의 순금의 인격이 증명되는 그 순간 하나님은 욥에게 더 이상의 고난이 불필요한 것을 아시고 고난의 세월을 끝내십니다. 그리고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축복의 드라마 제2막을 올리십니다.

 

그는 진실로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결코 우리를 버리지도 우리를 떠나지도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를 찬양하십시오.

 

고난이 아직 안 끝나셨습니까? 그러면 아직 아직도 당신은 시험 중에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감사함으로 시험에 임하십시오.

그리고 감사함으로 기대하십시오. 시련을 이겨낸 순금 인생을 기대하십시오. 내 인생의 주인께서 내게 펼쳐 주실 인생의 제2막을 말입니다.

 

12월 송년에 대한 의미 있는 시를 찾다가 설교 첫 머리에 소개한 정유찬 시인의 시와 함께 박우복 이라는 이름의 시인의 시 얼마나 아름다운 12월인가를 찾았습니다.

 

이 시는 우리로 하여금 12월을 희망적으로 마무리하게 하는 힘찬 긍정의 메시지를 담고 있었습니다. 이 시로 한해를 함께 마무리하고 싶었습니다.

 

한해의 끝에 서면 나이를 더하는 것이 아니고 새해를 맞는 것이다

/한해의 끝에 서서 아픈 기억을 지워 버리듯 얄팍한 우리의 나이도 지워버리자/애당초 시작하면서 빈손 하나만 가지고 인생을 엮어갔듯이 다시 한번 어깨를 펴자/우리에게 12월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가./침몰하는 시간이 아니고 희망찬 내일을 바라보는 가장 높은 전망대처럼.” 그렇습니다.

 

그 높은 전망대에서 감사함으로 새해를 맞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해피 뉴 이어

 

 

 

 

영광에 이르는 소망 /8:18-25/ 이재훈 목사

2023-12-28 06:36:55

 

오늘 본문에서 그리스도인을 설명하는 단어가 새롭게 등장합니다. 그 단어는 앞으로 영광스럽게 변화될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받은 성도들을 미래 측면에서 설명한 것입니다. 구원을 세 가지 시제로 설명하면, 과거는 하나님 앞에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받는 칭의의 구원입니다. 현재 측면의 구원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성화의 구원입니다. 로마서 1장부터 817절까지는 칭의의 구원과 성화의 구원을 말씀합니다. 로마서 118절부터 425절까지는 칭의의 구원, 로마서 51절부터 817절까지는

 

성화의 구원을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은 구원의 미래적 측면입니다. 영화롭게 되는 영화의 구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움과 함께 영광스럽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릴 영광이 있습니다.

 

우리는 원래 하나님의 영광을 가진 존재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죄로 말미암아 그 영광을 상실했고, 영광스럽지 못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본래 인간이 영광스러운 존재이기에 영광에 대한 굶주림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느끼는 비참함, 자존심, 명예욕 등은 모두 영광에 대한 굶주림의 특징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 가운데 인간만이 비참함을 느끼고, 자존심이 상하며, 명예욕을 추구합니다. 오직 인간만이 경쟁을 통해서 더 높은 곳에 오르기를 원하고,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기 원하고, 그렇지 못했을 때 실패에 대한 깊은 좌절감을 느낍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비참함을 느낍니다. 왜 인간은 비참함을 느낄까요? 무엇인가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원래는 비참하지 않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위대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파스칼은 인간이 비참함을 느끼는 것이 곧 위대한 존재라는 증거라고 했습니다. 성경적인 표현입니다. 인간은 원래 영광스러운 존재로 지음을 받았는데 그 영광을 잃어버렸습니다. 그 영광은 오직 하나님만 회복할 수 있는데, 인간 스스로 영광을 회복하려고 하거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회복하려고 하니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명예욕이 되고, 비참함, 자존감의 상실, 열등감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본래 우리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존재였음을 알고, 죄로 말미암아 영광을 잃어버렸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영광을 믿고, 깨닫고, 체험한다면 이 세상에서 헛된 영광을 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영광에 목마른 자들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사망과 지옥의 형벌에서 건짐을 받는 것은 구원의 시작에 불과합니다. 구원의 끝이자 절정은 영광스럽게 되는 것입니다. 의롭다함을 받는 구원에서 영화롭게 되는 구원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타락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타락 이전의 상태보다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는 구원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것이고, 구원받는 성도들은 영광에 이르는 소망 가운데 살아갑니다.

 

로마서 323절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죄의 영향력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져간 것이고, 가로막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죄로부터 건짐을 받는 것이고, 다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영광에 이르게 되는 것을 믿고 바라는 것이 신앙입니다.

 

 

영광에 이르는 소망으로 승리

 

이는 우리가 이 소망 가운데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소망하겠습니까?”(24).

 

소망 가운데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의롭게 되고, 영광스럽게 되는 모든 과정에서 우리는 영광에 이르는 소망 가운데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영광에 이르는 과정에 있는 이들에게 따라오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고난입니다. 로마서 817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을 것인데,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18절은 현재의 고난은으로 시작합니다.

 

현재의 고난은 앞으로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18).

여기서 현재는 시점이 아니라 이 세대를 의미합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며, 종말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세대입니다. ‘앞으로라는 말은 이 세대가 끝난 이후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새 하늘과 새 땅, 예수 그리스도가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심으로 시작되는 새로운 세대입니다. 그때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세대는 고난의 세대입니다.

 

이 세대에서 영광에 이르는 소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세상이 환영하지 않습니다. 이 시대 교회의 위기는 성도로 살면서 받는 고난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받아야 하는 어떤 희생이나 고난이 없을 때 우리는 영광을 바라보기보다 세상의 헛된 영광을 취합니다.

 

여러분, 핍박 속에 있는 초대교회가 서로 다툴 수 있는 여력이 있었겠습니까? 다툼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분열이 있었지만, 그 분열의 이유는 배교자를 받아서는 안 된다, 허락해야 한다는 다툼이었습니다. “누가 더 큰 자인가?”의 다툼은 없었습니다. 이 시기 교회의 많은 위기는 영광을 바라보며 고난의 여정을 함께 겪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복음이 전해지는데 있어서 짐을 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증거되는 일에 전심전력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광에 이르는 소망 가운데 있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영광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현세대는 고난을 피할 수 없습니다. 고난을 통과해서 우리는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왜 우리가 고난 앞에서 무너지지 않을 수 있습니까? 앞으로 이 고난이 사라지고, 이 세대 가운데서 상황이 좋아질 것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그때 이전에는 세상은 갈수록 악해질 것입니다. 과학 기술이 발달하고, 교육 기관이 많아지고, 경제가 부유해지면 사람들이 더 선해질 것이고, 훌륭해질 거로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24장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역사에 대한 전망은 더욱 어둡습니다. 우리가 이 세대 가운데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사실 고난밖에 없습니다. 세상은 점점 나아지기는커녕 죄와 고통과 갈등과 전쟁과 지구에 요동치는 지진과 수많은 자연재해와 악들이 만연해질 것입니다. 그것을 보여준 것이 <요한계시록>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이 세대가 짐승들로 비유할 수 있는 원수들에 의해서 사로잡혀 있고, 고난에 처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활동은 미래에 일어날 것이 아니라 이미 시작되었고, 갈수록 악한 형태로 찾아옵니다. 시대마다 매우 교활하고 거짓된 사상과 세계관으로 나타나 하나님을 대적하기도 합니다. 특히 이 시대에서는 성을 생물학적 성이 아니라 사회문화적 성으로 정의하고,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무너뜨리는 교묘한 사상과 흐름으로 나타납니다.

 

이 세대는 갈수록 교활해지고, 악해집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대로 나아갑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들이 도리어 소수자가 되는 시대입니다. 주변인이 되는 시대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거센 무신론의 물결이 강하기에 예수님을 믿는 것은 고난을 각오해야 하는 시대입니다. 로마 시대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무릇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을 것입니다. 사회에서 정직하고, 거룩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으로 살아가려고 할 때 사람들이 싫어합니다. 좋아하지 않습니다.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은 점점 더 고난 속으로 접어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앞으로 나타날 영광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영광 가운데 다시 나타날 때 우리에게 주어질 영광입니다. 고난의 세대에 우리는 영광에 이르는 소망으로 승리해야 합니다.

 

 

소망가운데 생명의 열매 맺는 탄식

 

피조물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게 된 것은 자신의 뜻이 아니라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분으로 인한 것입니다. 그러나 피조물도 소망 가운데 있으니 이는 피조물 자신도 썩어짐의 종노릇하는 데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가 누릴 영광의 자유에 이를 것이기 때문입니다”(19~21).

 

피조물은 영어로 크리처(creature)’입니다. 그런데 피조세계(creation)’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습니다. 인간을 제외한 모든 피조세계도 장차 나타날 영광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고대한다는 것은 강렬하게 기대하며 얼굴을 앞에 내밀고 기대한다는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이 피조세계를 의인화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광스럽게 변화될 것을 고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광스럽게 될 것을 고대합니까? 자신들의 상태가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광스럽게 되는 것과 긴밀하고 절대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피조세계가 영광스럽게 될 때가 있는데,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광의 자리에 이르는 순간입니다. 왜 이렇게 피조세계와 하나님 자녀들의 운명이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까? 피조세계가 탄식가운데 있게 된 것이 죄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피조세계가 탄식하고 있는 것, 썩어짐에 종노릇하고 있는 것은 인간 죄의 결과입니다.

 

창세기 317절 말씀에서 타락한 직후 하나님이 아담에게 땅이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을 것이고,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은 흙으로 된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더 넓게는 피조세계 전반이기도 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여기서 천지는 우리가 눈으로 보는 하늘과 땅을 의미하는 것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모든 세상과 보이는 모든 세상을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의미인 것처럼, 땅이 저주를 받는다는 것은 피조세계에 하나님의 전반적인 저주가 임했다는 뜻입니다. 저주가 임했다는 것은 하나님이 땅의 모든 것을 중지시킨다는 것이 아니라 원래 가지고 있었던 영광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모든 만물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스며들어있고,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죄악으로 인해서 피조세계가 허무한데 굴복하게 되었습니다. 제역할 하지 못합니다.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죽음의 종노릇하고 있습니다. 인간만이 죽음에 처한 것이 아니라 피조세계도 죽음에 종노릇하고 있습니다.

 

모든 피조세계에 죽음의 씨앗이 들어가 있습니다. 아름다운 꽃도 시들어버리고 맙니다. 모든 자연이 썩어짐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썩어짐을 통해서도 새로운 일을 하십니다. 낙엽을 두면 썩어서 비료가 되는 것처럼 하나님이 피조세계를 다시 사용하는 은혜를 베푸시지만, 피조세계는 썩어짐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피조물이 탄식하며 고통스러워하기까지 고대합니다. 피조세계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루속히 영광스럽게 변화될 것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때까지 고통스러워하기까지 탄식합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22).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함께라는 것은 피조세계의 탄식은 우주적이라는 뜻입니다. 모든 피조세계가 함께 탄식하며 고통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구원의 위대함은 그 범위가 우주적인 것에서 나타납니다. 모든 피조 세계가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는 것은 인간의 영혼만이 아니라 몸의 구속까지 입는 것처럼, 인간만이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가 회복됩니다. 그들도 구원을 받는 것이고, 영광에 이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통해서 하나님이 모든 만물을 다시 새롭게 하십니다.

 

그런데 그들의 탄식을 해산의 고통으로 비유했습니다. 피조세계의 탄식은 절망의 탄식이 아니라 소망의 탄식입니다. 피조세계의 탄식은 소망적인 것입니다. 해산의 고통이 단지 고통으로 끝나지 않고 생명의 탄생이라는 희망이 있는 것처럼, 피조세계의 탄식은 절망적 탄식이 아니라 언젠가 소망가운데 생명의 열매를 맺는 탄식입니다.

 

 

영원한 영광이 이르는 소망

 

그뿐 아니라 또한 성령의 첫 열매를 가진 우리조차도 속으로 탄식하며 양자 됨,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고 있습니다”(23).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광스럽게 될 때 나타나는 모습이 바로 몸의 구속입니다. 이것은 부활의 영광스러운 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죽은 자나 살아있는 자나 영광스러운 주님의 몸과 같이 영화로운 몸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영화롭게 되셨을 때 영광스러운 몸이기 때문에 제자들이 처음에 못 알아봤지 않았습니까?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도 처음에는 모르다가 예수님이 식사하실 때 알아보았습니다.

 

그것은 영광스럽게 된 몸이 예수님이 육신을 입었을 때의 모습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부활의 영광스러운 몸이 되셨을 때 제자들이 선뜻 알아보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신 것은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바로 그 영광스러운 모습입니다. 우리의 몸도 영광스럽게 변화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확신을 주시기 위해서 성령의 첫 열매를 주셨습니다. ‘성령의 첫 열매란 우리에게 성령의 확신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 몸이 부활할 것을 성령으로 말미암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몸의 구속, 영광스러운 몸의 변화가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도록 성령님이 임재하셨습니다.

 

성령의 첫 열매를 가진 이들은 더욱 간절히 탄식하며 소망합니다. 피조세계도 탄식하고, 하나님의 자녀들도 탄식합니다. 이 탄식은 절망의 탄식이 아니라 소망의 탄식이요, 영광에 이르는 소망의 탄식입니다. 피조세계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광스럽게 되는 때를 기다리며 탄식하고,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리스도가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실 때를 기다리며 탄식합니다.

 

모두 영광에 이르는 소망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령님은 탄식하며 우리가 그 영광을 소망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복음을 알지 못하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들은 소망이 없습니다. 소망이 없기에 탄식도 없습니다. 그저 세상의 즐거움만을 찾을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영광에 이르는 소망이 있기에 이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습니다. 이 세상을 바라보며 오히려 탄식합니다. 영원한 영광이 이르는 소망을 가진 이들은 이 세상에서 영향을 미치며 살아갑니다.

 

날마다 성화의 구원을 이루고,

영광스럽게 될 것을 소망하는 믿음으로

 

이는 우리가 이 소망 가운데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소망하겠습니까?”(24).

참으로 구원받은 자, 의롭게 된 자, 거룩함을 이루는 자들은 영광에 이르는 소망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소망이 참된 신앙의 척도입니다.

 

거짓 신앙은 새 하늘과 새 땅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새 하늘과 새 땅에 영광스럽게 될 구원의 소망을 두는 사람은 세상의 헛된 영광에 마음을 두지 않고, 이 세상에 진정한 영향력을 주며, 이 세상을 변화시키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자라면 있어야 할 것이 날마다 성화의 구원을 이루고, 영광스럽게 될 것을 소망하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찬송가 4071절이 이 내용으로 작사된 것입니다.

 

구주와 함께 나 죽었으니

구주와 함께 나 살았도다

영광의 그날에 이르도록

언제나 주만 바라봅니다

 

언제나 주를 바라보는 소망 가운데 살기를 원합니다. 영광에 이르는 소망이 삶의 능력이 되고, 원리가 되고, 법칙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도우시는 성령님,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 /8:26-30/ 이재훈 목사

2023-12-28 06:38:49

 

로마서 8장은 성도들이 받은 구원의 확실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이 완전한 구원이며, 하나님이 그 구원을 보증하심을 말씀합니다. 이를 종교개혁자들은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중요한 교회의 교리로 가르쳤습니다.

 

위대한 프로테스탄트의 유산으로 여겼습니다. 당연히 로마 가톨릭은 이 교리를 강조하지 않고, 심지어 믿지 않는 이들도 있습니다. 만일 이 교리를 강조하고, 이 진리를 교회 모든 성도들에게 알리면 로마 가톨릭의 체제가 위협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성도의 견인이 무엇입니까? 진정으로 거듭난 성도는 성령님의 내주와 역사하심으로 인하여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고, 떠날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에서는 이를 증거하기 위해서 성령님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받는 구원의 확신과 구원의 보증에 있어서 성령님의 역할을 강조합니다.

 

로마서 8장 구절마다 성령님이 등장합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2),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5), ‘그리스도의 영’(9), ‘예수를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리신 분의 영’(11),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13),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를 받는 사람들’(14), ‘양자의 영’(15), ‘성령은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언합니다’(16), ‘성령의 첫 열매’(23)라고 했습니다. 구절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이 완전한 구원임을 확신할 수 있도록 도우시고, 역사하시고, 증언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님이 도우심으로

 

오늘 본문에서는 성령님이 도우심으로 우리가 받은 구원의 확실함 가운데 거할 수 있음을 말씀합니다. 성령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은 많은 영역에서 나타납니다. , 질병, 마음의 아픔, 낙심 등 여러 연약함이 있지만,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연약함은 마땅히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모르는 연약함입니다.

 

인간의 타락한 이성은 기도하려 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타락한 감정과 의지도 마찬가지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자신의 감정과 이성, 의지에 묶여서 기도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일지라도 마땅히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알지 못하는 연약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도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을 자신이 보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나로 하여금 요단강을 건너가 아름다운 땅을 보게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광야 40년을 이끌었고 출애굽을 이끌었던 이스라엘의 지도자라면 당연히 볼 수 있고, 허용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은 단호하게 모세에게 그만해라. 족하다.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조차 자신이 무엇을 마땅히 구해야 할지 모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다면 우리는 기도할 수 없습니다.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우리의 마음을 살피셔서 마땅히 구해야 할 것을 구하도록 도우십니다. 우리가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뜻이 아닙니다. 연약함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증거가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의 자녀 됨의 놀라운 증거일 수 있습니다. 성령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셔서 마땅히 기도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이 우리가 마땅히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신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도우신다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모든 것을 일일이 지시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져야하고, 판단해야 할 모든 것을 빼앗아 가신다는 뜻도 아닙니다. 성령님이 우리의 기도를 도우시고, 기도는 우리가 합니다. 성령님은 중보기도로 우리를 도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을 돕는 두 분이 계십니다. 한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 곁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도우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 앞에 서지 않도록 우리를 변호하시고, 모든 고발로부터 보호해 주심으로 도우십니다.

 

또 한분은 성령님입니다. 성령님은 우리 속에서 도우십니다. 성령님은 우리 대신 도우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돕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도와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구해야 하고,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깊은 비밀을 우리가 체험함으로써 완전한 구원을 확신하도록 도우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대신 도우시고, 성령님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도우십니다. 두 분 모두 완벽한 병행을 이루시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우리에게 전달하기 위해서 일하고 계십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마땅히 구해야 할 것을 알려주심으로 도우십니다. 그러나 때로 우리가 고난 가운데 기도할 수 없을 때,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모를 때, 우리를 도우시는 성령님과 함께 기도하고 있지 못하면, 성령님이 친히 탄식하시며 간구하십니다.

 

때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아무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지쳐있을 때, 하나님의 이름만 부르고 가만히 있는 곤비한 상태에서 신음하고 있을 때, 그 신음까지 기도가 됩니다. 성령님이 우리 마음의 신음소리를 읽으시고, 들으시고, 우리가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친히 탄식하시며 하는 기도를 하나님 아버지가 들으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를 위해 간구하십니다. 완전히 주어진 구원을 우리가 날마다 확신 가운데 누리는 방법으로 하나님은 기도를 택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땅 가운데 살아가며 완전하고, 확실하고, 영원한 구원을 체험하고, 확신하는 통로로 하나님은 기도를 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기도를 통해서 많은 확신과 지식을 알려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라는 두 축이 영원한 구원을 이 땅에서 누리는 확신의 통로입니다. 예수님이 친히 지상에 계실 때 많은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와 친밀한 교제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기도하셔야 했다면 우리는 얼마나 많은 기도가 필요한 존재일까요? 우리가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 기도함으로써 온전하고, 완전하고, 영원한 구원을 누리고, 구원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완전한 구원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세계,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나라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그분의 뜻을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해 선을 이루는 줄을 압니다”(28).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어려운 일을 당하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거야라는 말씀으로 위로하기 쉽습니다. 정말 위안이 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씀은 결코 아닙니다. 그 앞에 대상이 규정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어떻게 하다 보면 잘 될 거야라는 낙천주의를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어렵지만 다 좋게 될거야라는 세상적인 긍정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원문은 번역하기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다양한 번역이 나오고, 학자마다 논란이 많습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번역은 영어의 AV번역을 직역한 것인데, 많은 학자들이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NIV번역은 모든 것 안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의 선을 위하여 일하신다고 번역합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하면 모든 것이 저절로 선을 이루는 것처럼 해석될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인생의 모든 일속에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과 주권이 있다는 것이 배경이지만, 모든 것이 저절로 선을 이루어가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은 무엇일까요? 구원입니다. 최종적이고, 완전하신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이 모든 것 안에서 선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잘 안될 때 이제 모든 것이 다 잘 될거야라고 할 수 있는 맥락의 말이 아닙니다. 이 말씀으로 위안을 받으셨던 분은 실망했을지 모르겠지만, 잘 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완전한 구원을 체험하고,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때로 고난을 주십니다. 우리에게 있어야 할 선이 구원으로 가까이 나아가는 것인데, 인간의 탐욕이 원하는 방식으로 잘 된다면 구원으로부터 점점 멀어집니다. 그것은 잘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바라보는 우리를 위한 선은 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때로 우리가 즐거워하는 것을 끊기도 하십니다. 세상에 염증을 느끼도록, 세상이 싫어지도록 상처받는 일을 허락하시기도 합니다. 선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들의 선을 위해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존 스토트 박사는 이 말씀 속에 나타난 다섯 가지 흔들릴 수 없는 확신을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첫째,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일을 이루신다는 것을 안다. 둘째,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의 선을 이루기 위해서 역사하신다. 셋째, 하나님은 모든 것에서 우리의 선을 이루기 위해서 일하신다. 넷째, 하나님은 모든 것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의 선을 위해 일하신다. 다섯째,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또한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부름을 받은 자들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 가운데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있다면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또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반드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사람은 누군가 자신을 사랑하도록 부를 수 없습니다.

 

당신은 나를 사랑하도록 내가 택했어라고 한다고 해서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택하신 자를 부르셔서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때로 우리 삶에 간섭하시고, 우리가 원하는 길을 때로는 가지 못하게 하시고, 원하지 않는 길을 가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이끄셔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로 바꿔주십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했는데, 하나님의 뜻을 설명하는 말씀이 29절과 30절입니다. 28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다섯 단계로 나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구원의 위대한 사슬이라고도 부릅니다.

 

 

구원의 위대한 사슬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신 사람들을 자기 아들의 형상을 닮게 하시려고 또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그 아들이 많은 형제들 가운데 맏아들이 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습니다”(29~30).

 

첫째, ‘하나님의 미리아심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다는 것을 잘못 이해하면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믿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믿지 않을 것을 미리 예정하신다고 오해하면 안 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믿을 것을 아시기 때문에 선택하신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하지 않고, 인간에게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안다는 것은 사랑의 깊은 친밀한 교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미리 안다는 것은 미리 사랑하셨다’, ‘먼저 사랑하셨다’,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먼저 우리에게 찾아오셨다고 해석하는 것이 더 바람직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미리 정하심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어떤 결정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결정 이전에 하나님의 결정이 있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미리 아시며,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겠다는 결정이 있었습니다. ‘정하다는 단어는 영어로 호라이즌(horizon)’의 어근이라고 합니다. 볼 수 있는 한계입니다. 하나님이 보고 계시고, 하나님이 결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예정에 대한 많은 오해가 아직도 많습니다. 예정은 하나님 편에 들어가면 안 됩니다. 누구는 구원할 것으로 정하고, 누구는 구원하지 않을 것으로 정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편에 들어가면 안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아닌 이상 우리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정은 우리 편에서 봐야 합니다. 우리 편에서 본다는 것은 사도 바울이 고백한 대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택하셨고, 나를 미리 아시고, 나를 미리 구원하시기로 결정하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기도 전에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시기로 결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랑이신 그분께서 인간이 타락한 이후 부랴부랴 대책을 세우시고, 예수님을 보내셔서 해결해 보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기도 전에 인간의 타락의 가능성을 아셨고, 타락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과 새 하늘과 새 땅을 미리 아시고 결정하셨습니다. 바로 이 고백이 구원 받은 성도들의 예정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교를 가로막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기로 예정되어 있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고, 구원 받지 못할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인데 우리가 왜 복음을 전합니까?”라는 주장은 완벽하게 예정론을 잘못 적용한 것입니다. 예정의 의미를 오해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편에서 고백하는 단어입니다. 예정론의 근거가 된 사도 바울의 수많은 서신은 자신의 고백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사랑 속에 거하다보니 하나님이 미리 나를 아셨고, 사랑하셨고, 택하셨고, 부르셨고, 그랬기에 내가 여기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결정 이전에 하나님의 미리 결정하심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예수님을 닮아가게 하시고, 나를 택하셨을 뿐만 아니라 구원하기로 결정하셨습니다.

 

나를 예수님처럼 닮아가게 하심으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맏아들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데 맏아들이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적인 의미로 맏아들의 영광, 우리로 인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더 영광을 받으시도록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미리아심과 미리 정하심이 한 세트라면 그 중간에 세 번째 단계가 있습니다. 미리 정하신 자들을 부르시는 단계입니다. 하나님은 미리 아시고 정하실 뿐만 아니라 일하시는 분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부르십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부르심이요, 내 편에서는 믿음입니다. 내 안에 믿음이 일어났다는 것은 하나님이 부르셨다는 증거입니다. 그 부르심은 우리가 거부할 수 없습니다. 단순한 초청이 아닙니다. 내가 원하지 않으면 거절할 수 있는 초청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은 거부할 수 없는, 잡아당기시는 부르심입니다.

 

넷째, ‘부르신 자들을 의롭다 하심입니다. 로마서 1장부터 4장까지 살펴본 내용입니다. 상태와 상관없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원수되었을 때, 연약할 때 그리스도가 행하신 일을 근거로 하나님의 의를 선물해 주시는 것이 의롭다하심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다섯째, ‘의롭다 하신 자를 영화롭게 하심입니다. 모든 죄가 사라지고, 몸과 영혼이 완전해지는 영광스러운 상태입니다. ‘칭의영화만 나오고 왜 성화가 없습니까? 문제가 있는 것 아닙니까?”라고 할 수 있지만, 이것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영화롭게 하실 것이라고 미래 시제로 말하지 않고, 과거 시제를 썼습니다. 신약에서는 너무 선명하게 실현될 것은 과거 시제로 표현합니다. ‘예언적 과거라는 시제를 씁니다.

 

29~30절에 기록된 다섯 단계 모두 과거 시제로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완전한 하나님 자녀의 모습으로 영광스럽게 되며, 영원한 생명을 이미 소유한 자이기에 성도의 견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른다라고 할 때, 그 사이에 뭐가 들어옵니까?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해야 하고, 저것을 해야 하고, 면죄부를 사야한다는 등의 논리가 비집고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결코 취소되지 않는 구원이기에 이미 이루어진 과거로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아무렇게나 살아야 하는 이유가 되지 않습니까? 그것 또한 오해입니다. 성도의 견인을 굳게 믿는 사람들이 더욱 거룩하게 살았습니다. 이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더욱 거룩하지 않게 살았습니다. 나에게는 온전한 구원이 약속되어 있고, 영광스럽게 되고, 의롭게 되었기에 영화롭게 될 소망을 가진 자마다 스스로 깨끗하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자로 살아가는 이유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의 완전한 믿음은 현재에서 불투명한 미래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소망은 확실한 미래에서 현재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비전과 소망은 현재에서 미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진정한 소망과 비전은 확실한 미래에서 현재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두 과거시제로 표현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구원의 확실함을 체험하도록 도우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이 우리의 기도를 도우심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셔서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일을 날마다 이루어 가십니다. 성령님 덕분에 이 모든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기도 가운데 구원의 확실함을 날마다 체험하기를 바랍니다.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를 더 깊이 체험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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