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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로마서 설교 모음

로마서 12:14 - 21

by Jessi J 2024. 4.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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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으로 악을 이기라 /12:14-21/ 하용조목사

2015-05-27 13:28:07

 

미움의 지뢰 제거하십시오

 

사람의 감정중에서 해결하기 어려운 감정이 있다면 좥미움좦일 것입니다. 사람이 미움의 감정에 한번 사로잡히면 빠져나오기가 어렵습니다.

사랑이 논리를 초월하듯이 미움도 논리를 초월합니다. 왜 사랑하는지 설명되지 않듯이 미워하는 것도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저 미울 수 있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세워주지만 미움은 모든 것을 파괴합니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미움이란 파괴하는 힘이 있습니다.

 

미움을 가지고 있으면 제일 먼저 파괴되는 것은 자신입니다. 미움은 마치 날카로운 톱과 같습니다. 미워하고 있는 동안 우리의 인격이 파괴되고 얼굴의 근육이 굳어집니다. 미움의 감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얼굴은 살벌합니다. 전투적이고 방어적입니다.

 

또한 자기만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 있는 사람들까지도 불행하게 만들고 피해를 줍니다. 미움을 오래 간직해서 대대로 물려주기도 합니다. 그것이 한입니다.

 

우리민족은 한이 많은 민족입니다. 만일 피해를 준 상대에게 따지거나 복수할 능력이 있다면 미움의 감정이 해결되지만 복수할 능력도, 보복할 능력도 없을 때는 혼자 밤에 울어야 합니다. 그래서 한이 쌓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몇년동안 분노를 가질 수 있습니다. 또 평생을 미움과 분노로 보내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너무나 화가 나서 이대로 죽을 수 없는데 죽어야만 하기 때문에 눈감고 죽지 못하고 눈뜨고 죽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들에게 어떤 종류의 미움을 가졌든지, 어떤 분노를 가졌든지 분노가 다음 세대로 넘어가지 않게 오늘로 끝을 내라고 말합니다.

 

이 분노와 미움은 마치 지뢰밭과 같습니다. 언제 터질지 모릅니다. 누가 밟기만 하면 터집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점잖게 있다가도 그 분노를 터뜨리면 땅바닥치고 통곡하며 웁니다. 싸워도 머리카락을 잡고 싸웁니다. 분노와 미움을 참고 참다가 어느날 터지면 자기가 감당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에 미움이라는 지뢰밭을 그냥 두지 마십시오. 지뢰를 제거하십시오. 이것은 마치 강대국끼리 핵협상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제는 핵을 폐기하자하는 것처럼 지금 우리 마음속에 미움과 분노를, 복수심을 폐기하지 않으면 엄청난 화와 저주가 우리들의 사회와 개인에게 미치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이 미움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나를 핍박하고 저주하고, 괴롭히는 사람을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을까요? 사실 내 부모를 죽인자를 용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나의 가족을 죽인자를 용서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일 누군가 사랑하는 딸을 납치해서 사창가에 팔아 넘겼다면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제 주변에 그런 사람이 한사람 있습니다. 자기 딸이 납치당해서 사창가에 팔렸습니다.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 어머니는 언제 딸이 돌아올까해서 발 뻗고 잘 수가 없습니다. 자기 방에서 자면서도 웅크리고 잡니다. 이렇게 가정을 파괴한 사람을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나의 직업을 빼앗아 가고 나의 결혼을 파괴시키고 나의 인생을 망가지게 한 사람을 용서할 수 있습니까? 그래도 성경은 여전히 용서하라 너를 핍박하는 자를 저주하지 말고 용서하라라고 말합니다.

 

미움과 분노와 복수심은 광범위하게 온 인류에 오염되어 있습니다. 마귀가 준 전략입니다. 개인적인 미움도 있고 가족단위, 민족단위의 미움도 있습니다. 이 민족적인 미움은 개인의 윤리와 상관이 없습니다.

 

그 당사자가 우리입니다. 우리는 남과 북이 분단된 씻을 수 없는 상처가 있습니다. 그 상처는 우리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같은 상처를 북한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틴, 영국과 아일랜드 동구에 일어나고 있는 민족전쟁들, 도처에서 우리는 이런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우리들에게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그리고 너를 핍박하는 사람을 저주하지 말고 축복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말씀이 오늘 우리가 들어야 할 말씀의 주제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더 강력하게 말씀하십니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우고 목마르거든 마시우게 하라 헐벗거든 입혀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이런 강렬한 메시지를 우리에게 주실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용서받을 수 없는 우리를 용서하셨고 사랑받을 만한 조건이 없는 나를 무조건 사랑하셨고 저주받은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은 축복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도 사랑하고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이런 하나님의 사랑앞에서 그들에게 당한 고난을 기꺼이 겪었습니다.

 

사랑은 댓가를 지불하는 것

 

사랑한다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 말일까요? 용서한다는 말은 무엇을 말할까요? 남을 축복한다는 말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댓가를 치룬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는 말은 십자가에서 댓가를 치루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는 말은 자기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어 죽게 내어주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랑한다, 용서한다, 남을 축복한다는 것은 기분좋은 감정이 아닌 것입니다. 굉장히 어렵고 힘들고 자기 살을 뜯어내는 것 같은 그런 아픔을 수반할때 사랑은 가능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11 36절을 보면 믿음의 사람들이 겪었던 고난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 어떤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여러분,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기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고난의 흔적들이, 사랑의 흔적들이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고난없이 사랑하려고 하는 것에 있습니다. 댓가를 치루지 않고 용서를 하려는 것에 우리의 한계와 갈등이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선배인 스데반은 결코 나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돌에 맞을 만한 이유가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말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자기의 고난에 대해 설명하기를 부끄러워 하지 않았습니다.

 

고린도후서 1 8~9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가지 끊어지고 우리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사도바울이 얼마나 심한 고통을 받았으면 인간적으로 소망이 끊어지고 사형선고를 받은 것 같았겠습니까?

 

고린도 후서 4 8절에서 9절을 보면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이 말씀을 보면 사도바울이 우겨쌈을 당하였고 답답한 일을 당하였고 핍박을 당하고 꺼꾸러 뜨림을 당하였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당할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가말리엘의 문하의 사람이었고 히브리인중에 히브리인이었으며 유대인중에 유대인이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위대한 학자인지 아십니까? 신약성경중에 13권의 성경을 쓸만큼 실력있는 사람입니다. 얼마든지 자신의 삶을 누리면서 잘 살 수 있었던 사람이지만 그는 예수님때문에 모든것을 버린 사람입니다.

 

고린도 후서 11 23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 뻔하였으니

 

여러분, 예수님때문에 이런 고난을 경험해본적이 있습니까? 이런 고난은 고사하고 오해만 받아도 펄쩍 뛰지 않습니까?

 

계속해서 사도바울은 고린도후서 11 24절에서 말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번 맞았으며 세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형제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고난을 겪어본 자만이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정말 사랑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손해보고, 자존심상하고, 감옥에 들어가보고, 매맞아보지 않은 사람은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사랑은 감정적인 것입니다.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그것에는 아무 능력도 열매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가짜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자기가 겪은 고통은 교회를 위하여 흘리는 나의 눈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자기가 전도한 그 영혼을 위해 눈물을 흘리고, 교회를 세워놓고 그 교회를 생각하며 밤잠을 자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여러분, 교회때문에 밤잠을 자지 못하고 교회 때문에 눈물 흘려본 적이 있습니까?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죽고 싶은 것입니다. 다 주고 싶은 정도가 아니라 죽고 싶은 것이 사랑입니다.

 

나를 죽이려는 자 위해 기도하십시오

 

스데반이나 바울과 같은 모든 믿음의 선배들의 고난의 절정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였습니다. 그들은 한번도 변명하지 않고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자기 잘못도 실수도 아닌 단지 예수를 사랑한다는 이유때문에 굶고, 배고프고, 억울한 일을 당하고, 매맞고, 기절하고, 쫓겨나면서도 원망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서 많은 매를 맞고나서도 찬송하였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이런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자기를 죽이려는 사람을 위해 기도해 주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믿음과 헌신이 여기까지 이르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너무나 시시하고 별것도 아닌 일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저희 가족이 웩(WEC)이라는 선교단체에서 훈련을 받은 적이 있는데 그 선교단체의 창설자인 시티스터드는 당신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이 사실이라면 당신의 헌신은 헌신이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헌신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부끄럽다는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헌신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내 몸을 몇번을 죽여서라도 그를 사랑하고 싶은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얼마나 많은 고난을 당하였습니까? 바울은 로마서 9장에서 하나님 아버지 성령이 증거하고 내 양심이 증거합니다. 내게 간절한 소원이 있는데 나를 핍박하는 내 동족 유대인들이 구원받기를 원합니다.

 

그들이 구원받는다면 나는 저주를 받아도 좋겠습니다. 생명책에서 내 이름을 제하여 주어도 좋겠습니다.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행여 다른 사람이 예수 믿고 천국갈까봐 전도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은 너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너를 힘들게 하고 너를 괴롭히는 자를 축복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14절을 보시겠습니다.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여러분을 괴롭히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시고 축복하시고 용서하십시오. 15절을 읽겠습니다.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방관자가 되지 말라는 말입니다. 비판자가 되지 말고 동참하는 자가 되십시오. 상대방이 기뻐하면 함께 기뻐하고 울면 함께 울고 병든 사람과 함께 고난을 나누는 자가 되라는 말입니다. 16절을 읽어주십시오.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있는체 말라

 

하나됨의 비밀은 놀라운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의 기도의 절정은 아버지와 나와 하나인 것처럼 나와 저들이 하나되게 하시고 저들이 다른 사람과 하나되게 해 주옵소서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나될 수 있을까요? 겸손하면 하나가 됩니다. 자기것을 주장하면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자기 주장을 포기하십시오. 자기 생각을 포기하십시오. 그저 순종하기로 결정하십시오. 여기서 무슨일을 하라고 하면 그냥 순종하십시오.

 

그 일을 열심히 하고 있는데 또 그일은 그만 하고 이것을 하세요라고 하면 또 그것을 열심히 하십시오. 하루에 다섯번 바꾸어도 날 뭘로 알고 이래라는 소리하지 마십시오. 그냥 하십시오. 그것이 축복입니다.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해도 하십시오. 왜냐하면 말도 안되는 소리라는 것을 시키는 사람도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가끔 경배와찬양의 형제,자매를 보고 많은 은혜를 받습니다. 추운날 운동장에서 비가 오는데 일미터간격으로 서 있으라고 합니다. 그래도 그 말에순종해서 고독하고 외롭지만 서 있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보고 하나님이 얼마나 예뻐할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되십시오. 하나되기 위해서는 낮아져야 되고 지혜가 있어야 됩니다. 17절을 읽어주십시오.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말고 모든 사람앞에서 선한일을 도모하라

 

하나님은 악인에게도, 선한 사람에게도 햇빛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악한 사람이라고 해서 햇빛과 비를 안 주시지 않으십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잃어버린 것은 사랑입니다.

건물도 있고 돈도 있고 똑똑한 사람도 있지만 우리가 잃은 것은 사랑입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것이 주님의 명령입니다.

 

18절을 읽어주십시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원수맺지 말고 모두 친구를 만들고 화해자가 되라좦 이런 부탁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경의 여러곳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19절을 읽어주십시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악역은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오늘 여기에 우리에게 놀라운 소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원수가 생겼을때 우리가 직접 원수를 갚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원수는 하나님이 갚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피곤한 일이 원수갚는 일입니다. 원수를 갚으려면 집에서부터 연습을 해야 합니다. 난 착해서 모질어야 돼.하며 얼마나 자신을 설득해야 하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마음을 먹는 순간부터 눈은 살기등등해집니다. 공격적이 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내게 다섯개를 잘못했다고 합시다. 참지 못한 내가 복수를 할때는 다섯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일곱개를 하게 되고 상대적으로 그 상대는 더 많이 나에게 복수를 하게 됩니다. 복수는 끝이 없는 것입니다. 갈수록 커지고 광범위 해집니다. 결국 모두 죽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복수는 내가 하겠다라고 하십니다. 혹시 여러분옆에 미운사람이 있으면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은 사랑하십시오.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주고 오른쪽 뺨을 치면 왼뺨을 내주십시오. 속옷을 달라고 하면 겉옷까지 주십시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진노는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시편 23 5절에 제가 좋아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고입니다. 하나님께서 원수를 망하게 하는 방법중 하나는 나를 높이는 것입니다.

 

전에는 같은 수준이었다가 갑자기 높아지면 원수들은 분하고 억울해서 어쩔줄을 몰라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를 높여주실 줄 믿습니다. 내게 상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시편 3 7절을 보면 재미있는 말이 나옵니다.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하나님이 뺨을 때리고 이를 뽑아 버린답니다. 만일 내가 때리려고 하거나 이를 뽑으려면 얼마나 힘들겠습니가?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면 간단합니다.

시편 37 1~3절을 보면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 지어다

 

악한자 때문에 손해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심판하다보면 여러분이 하나님되기가 쉽습니다. 여러분이 욕을 해야 하고 채찍을 들어야 합니다. 이런 모든 일들이 다 고통스러운 일들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그렇게 하게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단지 사랑하라고만 하는 것입니다. 너는 좋은 말을 하라. 악역을 맡지 말라는 것입니다. 시편 37 7~8편을 보십시오.

 

여호와 앞에 잠잠히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니라

 

얼마나 답답합니까? 바보같고 무능한 것 같고 무식한 것 같아서 견디기 힘듭니다.

여러분, 우리가 언제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지 아십니까? 용서할 때 하나님을 느낄 수 있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용서할 수 없었지만 그래! 사랑하고 축복하자하고 포기를 하면 그 순간에 하늘에서 기쁨이 옵니다. 왜냐하면 그때 하나님이 나를 만져주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낮은 자리에 가면 예수님을 만날 수 있지만 높은 자리에 가면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고난을 겪으면 주님이 거기에 계십니다. 억울한 일 당할 때 거기에 계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억울한 일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에 여러분이 십자가를 지면 예수님이 보입니다. 이익을 얻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박수를 받고 칭찬을 받고 팡파레를 울리며 화려하게 등장하면 예수님은 온데간데 없어집니다. 온누리교회는 예수님이 없어질 확률이 많은 교회입니다. 왜냐하면 가진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악을 행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니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다. 잠시후에 네가 악인을 살필지라도 눈을 씻고 보아도 악인은 사라질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0~2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우리의 갈길은 이것입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12:14-21/ 하용조 목사

2015-05-26 13:39:59

 

지난 주에 우리들은 사랑에 대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거짓없는 사랑은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게 되며 형제를 사랑하되 우애하면서 먼저 존경하게 된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거짓없는 사랑은 게으르지 않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며 소망중에 즐거워하며 환난중에 참으며 기도에 힘쓰며 성도들의 쓸것을 공급하는 사람으로 변화시킨다는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오늘의 메시지는 진정한 사랑은 나를 핍박하고 나를 저주하고 미워하고 괴롭히는 사람까지도 축복한다는 것입니다. 14절을 읽겠습니다.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진실한 사랑은 불가능이 없습니다. 진실한 사랑에는 안되는 것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구제하라고 하면 돈이 없다고 말합니다. 아닙니다. 돈이 없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막노동이라도 합니다. 자존심 다 버립니다.

 

그렇게 팔짱끼고 좋은 일만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일을 함께 하자고 제안하면 나는 능력이 없다고 합니다. 봉사 하자고 하면 능력이 없다고 합니다.

 

봉사는 그저 함께 서 있기만 해도 됩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시간이 없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사랑만 있다면 한 두시간만 자거나 밤을 새도 괜찮습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돈이 중심이 된 사회입니다. 그래서 돈을 주면 용서하고 돈을 주면 화해하고 돈을 주면 정당도 움직입니다. 돈을 주면 인격도 팔고 몸도 팝니다. 그러나 돈이 없을지라도 감사하고 배고플지라도 감격하고 일찍 죽을 지라도 기뻐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최악의 환경으로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내는 줄 믿습니다.

 

사실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인간에게는 사랑이 없습니다. 사랑은 하나님 뿐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랑은 동물적이고 본능적인 것입니다.

참 사랑을 인간은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원수를 사랑한다거나 나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한다는 일은 머리로는 되지만 감정으로는 어려운 것입니다.

 

지난 주에 피에로에서 목사님 한분이 오셨습니다. 그 분은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났고 거기서 자란 분입니다. 그의 아버지가 총에 맞아 죽음으로 그는 어려서부터 고아가 되었습니다. 그는 고아원에서 분노와 미움과 한과 복수로 자랐습니다. 그러던 그가 예수님을 믿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지난번에 우리는 그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그가 목사가 되어 목회를 하는데 교인들이 변하지 않고 고아들을 돌보는데 고아들이 변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나중에 알게된 것은 자기속에 분노와 미움이 있고 용서하지 못하는 것을 알게 되었답니다. 그후에 십자가의 사랑을 다시 깨닫고 성령받고 마음으로부터 진정한 용서를 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교인들이 변하고 아이들이 변했답니다.

 

여러분이 변하면 여러분의 자녀들이 변할 줄 믿습니다. 자녀들이 먼저 변하기를 기다리지 마십시오. 부모의 문제이고 우리들 문제입니다. 목사가 회개하지 않는데 어찌 평신도들이 회개하겠습니까?

 

괴롭히는 자를 축복하라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 43~ 44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오늘 주님은 이 아침에 우리들에게 네가 할 수 없는 일이고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너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오늘 메시지는 첫째, 너를 핍박하는 자, 너를 고통스럽게 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고 축복하라는 메시지입니다. 저주하지 말고 축복하라.

 

우리 주변에는 핍박을 받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나를 핍박하고 미워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거나 피해를 주었다면 핍박받는 것이 당연하지만 남에게 피해준 일도 없고 잘못한 일도 없는데 미움받는 경우가 아주 많습니다.

 

이유없이 텃세를 하고 기득권을 행사합니다. 그것은 어느 직장에 들어가도 마찬가지입니다. 군대에서도 신고식을 해야하고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경쟁에 부딪혀야 합니다. 나를 모함하고 나를 파괴시키려는 세력들이 항상 주변에 있게 마련입니다.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다가 군대에서 기합받던 일이 생각났습니다. 지금은 용서했지만 제 사수가 하나 있었는데 예수믿는 저를 보고 재수없다고 때렸습니다. 그리고 술을 주고 나서 안먹는다고 때렸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가 주는 술을 먹지 않는 것은 자기를 무시해서 그러는 것이니 너 한번 맞아 봐라라면서 때렸습니다. 제가 일등병 때 그 사람은 저를 골탕먹이려고 몰래 숨어있다가 갑자기 나타나서 충성하면서 경례를 합니다. 그리고는 졸병이 고참이 인사하는데 먼저 인사하지 않았다고 때립니다. 또 돈을 가져다 주지 않는다고 때립니다.

 

그리고 마음은 참 착한데 저를 때리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대학원까지 졸업한 사람인데 내가 하도 많이 맞아서 너를 때리지 않을수가 없다면서 때렸습니다. 그래서 맞았습니다.

 

그렇게 계속 맞으면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살아가기가 어렵습니다. 보기만 해도 굳어지고 치를 떨게 됩니다. 제가 제대를 하고 신학교를 갔더니 신학교에 예비군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비군 조교가 저를 많이 때리던 제 사수인 바로 그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그 사람을 먼저 찾아가서 악수를 청했지만 그 사람을 보니까 가슴이 두근거리고 다시 보고 싶지 않아졌습니다.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이해하고 축복한다는 것이 이렇게 어렵습니다. 어디 이런 일 뿐이겠습니까? 자기를 고문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법적으로는 걸리지 않게 사기쳐서 자기 기업을 부도나게 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내 기업이 부도가 나고 가정이 힘들어지고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힘들어졌을 때 왜 분노가 없겠습니까? 그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습니까? 장미빛 꿈을 가지고 결혼을 했는데 남자가 남편역할을 하지 않고 딴짓을 합니다.

 

여자가 부인역할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혼합니다. 이혼했을 때 분노가 얼마나 크겠습니까? 사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를 핍박하는 자를 저주하지 말고 축복하라. 예수님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을 향해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스데반은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 저들은 자기의 죄를 잘 모릅니다. 용서해 주십시오.이 사람이 크리스천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 10~1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을 핍박하는 자를 저주하지 말고 축복하십시오. 이것이 오늘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할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주님안에 있을 때는 가능합니다.

 

타인의 고난에 참여하라

 

두번째, 15절을 보십시오.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두번째 메시지는 다른 사람의 고난에 방관자가 되지 말고 참여자가 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두가지 태도를 가집니다. 비판을 하던지 방관을 하던지 합니다.

 

남을 도와준다는 말은 내가 손해보지 않는 범위내에서 도와주는 것입니다. 내 명예가 상하거나 내가 손해를 볼때는 도움을 주지 않습니다.

 

오늘 성경에서는 우리들에게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방관자 입장에서 거리를 두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속에 들어가고 동참해서 사랑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정말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은 다락방에 있는 순예배에도 가지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가 내 생활을 간섭하는 것이 귀찮아서 이무데도 참여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현대인입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스스로 외로운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벽을 만들어 놓고 성을 쌓아놓고 성속에 들어가서 다른 사람이 나를 건들지 못하게 하고 보호장치를 해서 안전하게 만들었지만 외로워합니다. 점점 외로워 집니다.

우리나라의 속담에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사랑하면 그 사람이 잘되기를 원하고 잘되면 좋아합니다. 자식 잘 된다고 질투하는 부모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시골에서 농사짓는 부모님이 자식이 성공했을때 그 부모가 얼마나 좋아합니까? 사랑하는 사람은 잘될수록 좋은 것입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 하라. 우리가 왜 남이 잘되는 것을 잘 보지 못할까요?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사심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사심이 많으면 다른 사람을 축복하지 못합니다.

 

자꾸 경쟁하게 됩니다. 우리가 화를 잘내고 섭섭해하고 미워하는 이유는 상대방이 나에게 피해를 주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안에 경쟁심, 소유욕, 이기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남이 잘되는 것을 축복하지 못합니다.

축복을 해주어야 하겠는데 축복이 안되는 사람의 얼굴을 본 일이 있습니까? 저 사람이 저렇게 복받으면 안되는데... 하는 경쟁심, 이기심이 있을때 축복할 수 없습니다.

 

사심없이 정말 축복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잘 될수록 좋아합니다. 저는 한국사회가 이런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남을 축복해 주는 사회, 격려해주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계속해서 15절을 보면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약자에 대한 동정심이 아닙니다. 약자에 대한 동정심은 화가 나게 하는 것입니다. 자존심을 긁어놓는 것입니다. 그런 동정이 아니라 정말 사랑하기 때문에 긍휼과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아픈 사람을 보고 저 사람이 아파요. 하나님 저 병을 나를 주세요 내가 대신 아플께요라고 하는 기도는 그저 객관적인 입장에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고통속에 함께 들어 가겠다는 말입니다.

 

같이 눈물을 흘리라는 말입니다. 가난한 자와 함께 가난한 자가 되고, 나는 누릴 수 있는 가정환경이 있지만 그 모든 환경을 포기하고 가난한 자와 함께 있고, 병든자와 우는자들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이었지만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사람이 되셨습니다. 종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고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하나님을 느끼고 예수님을 만나고 싶다면 그 방법은 간단합니다. 높은 곳이나 화려한 곳에 가 있으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가난한 자들과 낮은 곳에 가서 며칠만 지내다 보면 하나님을 느낄 수 있습니다.

 

병든자들 속에 가서 도와주십시오. 억울한 자들을 도와주십시오. 거기서는 하나님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랑하면 죽기까지 합니다. 예수님은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자들로 함께 울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세례요한을 참 좋아하는데 나는 광야의 외치는 소리요. 빛에 대하여 증거자요, 나로 인하여 하나님의 어린양을 알고 세상의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 원한다.는 것이 세례요한이 외친 소리였습니다.

 

세례요한이 한 말 중에 높은 산 골짜기는 낮아지고 낮은 골짜기는 높여서 주의 길을 평탄케 만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높아진 사람들은 다 낮아지시기를 축원합니다. 또 낮아진 사람들은 모두 높아지시기를 축원합니다.

1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

 

핍박하는 사람을 축복하시고 고난당하는 사람을 옆에서 그저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고난에 동참하십시오. 어려운 사람은 어려울 때 도와줘야 도움이 됩니다. 어려움이 다 지나간후에 도와주는 것은 도움이 아닙니다. 가장 어려울 때 같이 있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번째, 겸손하십시오. 낮추십시오. 교회안에는 높은 사람도 없고 낮은 사람도 없습니다. 장교와 졸병이 함께 있는 곳입니다. 재벌과 서민이 함께 봉사하고 배운 사람과 못 배운 사람이 함께 기도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모든 높아진 사람은 모두 내려오시기 바랍니다. 잘난 척 하지 마십시오. 낮아있는 사람은 지나치게 열등감에 빠져 있지 마시고 올라오십시오. 자동차는 도로를 달려야 합니다. 산같이 올라갔다 내려왔다 하는 굴곡이 심한 곳은 운전하기가 어렵습니다. 주의 길을 평탄케 하라.

 

네번째 17절을 보십시오.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우리는 17절에서 엄청난 도전을 받습니다. 구약에서는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라고 했습니다. 누가 나를 때려서 오른쪽 두번째 이가 빠지면 마찬가지로 때린 사람의 오른쪽 두번째 이를 빼내면 됩니다. 눈이 빠지면 눈을 빼면 됩니다. 이것이 구약의 율법이었습니다.

 

율법의 사회는 무섭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원수까지 사랑하라. 너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적극적으로 모든 사람 앞에서 선을 도모하라.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라. 선으로 보답하라. 이것이 주님이 원하는 사회이며 교회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사람은 많이 모이는데 왜 능력이 없을까요? 세상과 비슷해서 그렇습니다. 세상과 다른 것이 없습니다.

 

원수를 미워하고 자기 핍박하는 자를 저주하는 것도 똑같습니다. 모두 이익을 따라 살고 필요있으면 하고 필요없으면 하지 않는 이것은 교회가 아니라 세상입니다. 교회가 크다고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일때 능력을 주고 영향력을 주는 입니다. 작은 교회라 할지라도 성도들이 주님의 명령을 온 마음으로 이 지키고 있다면 그 교회는 진짜교회입니다. 18절을 보십시오.

 

할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다섯번째 모든 사람과 더불어 평화를 만들라는 말씀입니다.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

 

우리는 방관자도 비판자도 아닙니다. 우리는 화해자입니다.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나는 이 축복이 온누리교회 성도들의 삶 속에, 가정속에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런 가치관, 철학, 인생, 인생관을 가진 여러분이 가는 곳마다 웃음꽃이 피고 조직이 변하고 사회가 변한다면 얼마나 놀랍겠습니까?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에서 누구든지 네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을 돌려대고 겉옷을 달라하면 속옷까지도 주고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함께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나는 온누리교회에 이런 일이 있기를 바랍니다. 모두 와서 청소하시고 섬기고 대접하시고 이익을 보는 것이 아니라 손해를 보는 사람들, 자기를 희생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10년전에 우리교회에 계시던 한 장로님의 눈동자를 잊을수가 없습니다. 지금은 60이 되신 그 장로님이 처음으로 텔리비전에 조선족이 소개되던 때 제게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50년의 인생은 이제 만족합니다. 제 남은 인생을 조선족을 위해 살겠습니다.

 

그리고는 그는 병원과 농장과 집을 팔고 떠났습니다. 저는 가끔 그분을 생각합니다. 그외에도 그와 비슷한 분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저는 최근에 이런 소식을 들었습니다. 88년도에 우리교회에 와서 일대일을 마치고 새롭게 하나님을 만난 미용하는 자매가 있습니다.

 

제가 가끔 설교할때 나가라고 말했던 그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 경북 봉화라는 곳에 갔답니다. 남편을 졸라서 남편과 함께 사과나무를 심고 농사를 짓기 시작했답니다. 그리고 그 동네에 교회가 없어 교회를 짓는 답니다.

 

온누리교회가 오고싶어서 한주는 남편이 오고 한주는 부인이 오고 그랬답니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일이 많아서 한달에 한번밖에 오지 못한답니다. 저는 아직 얼굴도 못뵈었습니다. 그러나 제 마음이 그렇게 따뜻할 수가 없습니다.

 

또 온누리교회안에서 정말 신실하게 봉사하는 분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저는 그런 분들을 보면 목사님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저는 교인같고 그분들이 목사님들 같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여러분을 괴롭히는 사람을 축복하는 것, 고난에 구경꾼이 아니라 동참하는 사람, 선을 추구하는 사람, 자기를 낮추는 사람들이 있는 곳,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기도합시다

 

주님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주여

우리 성도들이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

낮추어지는 사람들

가난하고 병든사람들과

외로운 사람들과

함께 있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주시고

주의 거룩과 축복이

온누리교회에

나타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선으로 악을 이겨라 /12:14-21/ 곽선희 목사

2014-11-23 23:18:06

 

요새 볼만한 영화가 한편 있었습니다. ‘지옥의 묵시록이라고 하는 겁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지옥' 자가 나왔는데 안 보면 되겠습니까? 게다가 묵시록이라고 했는데 그래도 안보겠습니까? '지옥의 묵시록' 이것은 코폴라감독, '대부'라고 하는 명화 1,2편을 제작했던 그분이 만든 명작입니다.

 

3시간 16, 긴 시간 상영되는 영화입니다. 베트남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커츠라고 하는 대령 한 사람이 전쟁을 하는 중에 전쟁광이 되버렸습니다. 전쟁에 미쳐버렸어요. 그래서 캄보디아 어느 산중으로 들어가서 많은 사람을 거느리고 전제 군주로 군림하게 됩니다.

 

반대하는 사람들을 무차별 추격하면서 시체를 매달아 놓고 이렇게 하면서 거기서 왕같이 호령을 하며 지내는 한 사람이 있는데 정보부에서는 이 사람을 제거하기 위해서 월러트라고 하는 대위를 파송을 합니다. “네가 나가서 저 사람을 제거하라. 뭐 생사간에 제거하라."

 

그런데 이분이 거기까지 가는 동안에 많은 어려움, 천신만고 끝에 도달을 하고 정말 어려운 가운데서 그 대령을 제거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이거 실화입니다. 그 영화를 보다 보면 이건 영화라기보다 다큐멘터리 같은 실제 상황을 경험하게 됩니다.

 

여기서 전쟁이 뭐냐? 하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전쟁에 나가는 사람, 처음에는 누구든지 나라와 진리와 정의를 위해서 나가요. 좋은 이름으로 좋은 명분 하에 나라를 위하여 진리를 위하여 정의를 위하여 그런 마음으로 출전을 합니다만은 전쟁 상황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 상황에 딱 부딪히면 이제 뭐 나라고 국가고 그게 문제가 아니고요 살아남기 위해 싸우는 겁니다. 어떻게 해야 나 한 몸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써바이벌을 위해서 싸웁니다. 셋째는 이제 싸우다 보면 싸우기 위해 싸웁니다. 안 싸울 수가 없게 돼있어요. 이 싸움이라는 불가피성에 몰려서 싸우기 위해 싸웁니다.

 

한 단 더 나아가면은 싸우는 것을 즐기면서 싸웁니다. 여기서 전쟁 미치광이가 되는 것이올시다. 저도 6.25전쟁 때 최 일선에 육박전을 하는 현실 속에 잠깐 있어 보았습니다. 참으로 전쟁이란 무섭습니다. 이 상황 속에 들어가면 몇 번 치르고 나면은 눈이 빨갛게 뒤집힙니다.

 

그러면은 이제는 어느 순간에서는 그대로 총으로 난사하면서 쓰러지는걸 보고 즐깁니다. 그런 전쟁광이 되는 것이예요. 그 영화에 한 장면에서 보면 바그너의 음악을 틀어대며 인간 사냥을 하는 미군 헬리콥터 편대를 볼 수 있습니다. 상상을 해 보세요.

 

바그너 음악을 대형 고성능 스피커로다가 음악을 틀어대고 그리고 인간 사냥을 하는 겁니다. 마구 갈기고 쓰러지는 걸 보면서 불타는 것을 보면서 즐기고 있는 것입니다. 만세를 부르고. 이것이 전쟁이라는 것입니다.

 

악의 속성은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누구나 선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선으로 시작한 행위가 악을 척결하기 위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선한 목적은 사라지고 이제 악한 방법으로 선을 이루려고 합니다. 악을 대항하면서 나 또한 악해지고 맙니다.

 

마침내 목적은 상실하고 왜 싸워야 되는지도 모릅니다. 더 악해집니다. 그래서 흔히 말하지 않습니까? 나쁜 놈 버릇 가르친다고 하다가 자기가 더 나빠진다고. 철학자 피타고라스는 말합니다.

 

분노란 흔히 어리석음이나 경솔에서 시작하고 후회로 끝내기 쉽다. 분노란 것은 언제나 저 끝에 가서 후회로 끝나는 것이요. 아무리 선한 목적이라도 내가 악해졌다면 나는 판정패올시다. 이걸 잊지 말아야합니다.

 

악은 그 속성이 매우 복잡합니다. 오늘 우리가 흔히 악이라고 하게 되면은 뭐 십계명에 있는 대로 살인하지 말며 간음하지 말며 도둑질하지 말며 거짓증거 하지 말며 이렇게 단순 제약을 생각해 봅니다만은 아니올시다. 현대의 악은 더더욱 지능적이고 아주 복잡합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 이 악 중에 가장 무서운 악이 논리적인 악입니다. 논리적 악의 대표가 소위 변증법적 유물론입니다. 여기서 모든 악을 정당화합니다. 그래서 '결과가 방법을 정당화한다', 'The end justify means' 유명한 명제입니다.

 

결과가 방법을 정당화한다.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결과만 좋으면 된다. 어떤 수단이든 관계없다. 결과만 좋으면 다 정당화 될 수 있다. 그럴까요? 여기에 논리적인 악이 있습니다.

 

또는 목적만 선하면 된다. 어찌 방법까지 선할 수 있겠느냐. 방법에 악이 좀 있다하더라도 좋은 목적이라면 그 방법은 정당화 되는 것이라고 논리적으로 이렇게 생각을 하고 주장을 합니다. 이 악이 세상을 이처럼 어렵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 도스또옙스키가 쓴 죄와 벌, 아마도 이 소설을 젊었을 때 안 본 사람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거기에 주인공이 되는 로마노비치 라스꼴리니코프 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이 주인공은 젊었을 때 생각을 합니다.

 

이 세상에는 아무리 봐도 보통 사람이 있고 특별한 사람이 있다고. 초인간적인 사람이 있다고. 이 초인간적인 사람의 행위는 정당화되어야 된다, 이런 이상한 철학을 가집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그 고리대금업을 하는 전당포 노파, 돈은 많은데 그냥 긁어모아서 못된 방법으로 돈을 많이 가지고 있는데 조금도 선한 일에 쓰지 않아요. '저런 쓰레기같은 인간은 죽여도 된다. 그리고 그 돈을 가지고 좋은 일 하면 될 것이다' 라고 생각을 합니다.

'인간 쓰레기같은 저 인간을 없애고 저 돈으로 위대한 일을 할 것이다.' 그리고 죽여버렸어요.

 

그러나 그는 뒤에 두고두고 아무리 변명을 해도 변명이 통하지 않아요. 마음속에 노파를 죽인 가책의식에 한평생을 괴로워합니다. 죄와 벌입니다. 여러분 어떤 악도 좋은 목적에 의해서 정당화될 수는 없음을 말합니다.

 

또 하나는 책임전가올시다. 언제나 나는 결과일 뿐이요 동기는 저쪽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책임을 남에게 돌립니다. 모든 악의 책임을 남에게 돌립니다. 이 책임전가라고 하는 데 악의 극치가 있는 거예요. 오늘도 우리가 엄청난 사건을 봅니다.

 

뉴욕의 쌍둥이 빌딩이 그대로 폭파되었습니다만은 그분들에게 물으세요. 이것은 정당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과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걸 아셔야 됩니다.

 

이러한 악한 철학, 그 논리가 오늘 이 세상을 어지럽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피해자는 죄가 없다. 약자는 죄가 없다. 가난한 자는 무죄다. 억울하게 당했으니까 그에게 잘못은 없는 것이다.

 

얼마나 억울하게 당했으면 이런 일이 왔겠느냐. 그런 고로 이것은 결과일 뿐이요 그런고로 약자와 가난한 자와 피해자는 무죄다. 무죄 선언을 해버립니다. 이 무서운 철학, 이 논리가 이 세상을 어지럽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난하고 배고픈 사람은 도적질해도 되는 것입니까?

 

내가 어느 남자로부터 억울하게 피해를 당했다고 해서 이제 이 여자가 많은 남자를 괴롭혀도 되는 것입니까. 내가 피해자가 되었다고 해서 나의 행위는 정당화 될 수 있는 것이냐고요. 정말로 피해자와 가난한 자는 무죄입니까. 알게 모르게 이 무서운 논리적인 철학이 이 세상을 점점 수렁으로 빠뜨리는 것이예요.

 

또한 악의 속성이라는 것은 심미학적인 악이 있습니다. 사람은 행복이라는 것도 좋은 일에서 행복을 찾아야 합니다. 잠깐 오락도 그렇고 기쁨도 그렇고 우리의 행복은 전부 선한 일, 아름다운 일, 진선미를 찾아가면서 행복을 찾아야 됩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하고 나면은 그 오락성과 행복관도 바뀝니다. 그래서 남 잘되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것이 아니고 남 망하는 걸 보고 기뻐합니다. 잘 걷는 사람 보고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넘어지는 사람보고 폭소를 합니다.

 

그래서 남 잘못되었다는 얘기가 너무 재미가 있어가지고 자꾸 돌아가며 퍼뜨리고 다니는 거예요. 이 자체가 악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게 바로 심미학적 악이예요. 그래가지고 거짓말하는 게 재미있고 속이는 것이 재미있고 악한 일을 하면서 거기서 통쾌함을 느끼는 거예요. 이 자체가 악으로부터 말미암습니다. 그래서 악 자체를 즐깁니다. 악을 행하면서 통쾌함을 느낍니다. 이것이 무서운 악입니다.

 

또 하나는 의지적인 악입니다. 악을 행하고 승리감을 누립니다. 성취감을 즐깁니다. 그러는 사이에 자기가 지금 악마의 노예가 되어있다는 것을 모르고 그대로 성공, 물리적인 성공, 권력 이것만을 즐기고 있는 거예요.

 

벌써 그는 어느 사이에 악마의 도구가 되어있어요. 이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 이제 성경은 이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세상을 향하여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라. 악을 이기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먼저는 신앙적으로 풀어야 합니다. '원수 갚는 것,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네가 갚지 마라, 네가 손에 피를 묻히지 마라. 원수 갚는 것은 내게 있느니라. 내가 갚을 터이니 너는 네가 할 일만 해라.' 이것이 성경 말씀이요. 신앙으로, 하나님 앞에서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어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성경은 말합니다. '평화하라' 그랬어요. 평화하라. 내가 악한 대접을 받아도 내가 어떤 핍박을 받아도 평화하라. 내 마음의 참 평안이, 이 평안이 흔들려서는 안돼요. 그리고 나아가서 평화하라. 내가 미워해야 할 사람, 내가 대하는 저 대상의 마음 속에 평화를 심어줘야 되요.

 

그가 평화하고야 내 평화가 평화 될 수 있는 것이예요. 내 마음이 먼저 평화하고 저를 평화하게 해야 됩니다. 샬롬-샬롬, -(Win-Win)이올시다.

나는 얻고 저는 잃어버리는 게 아닙니다. 나도 이기고 너도 이기고, 거기에만 진정한 평안이 있습니다. 평화하라 그랬어요. 어떤 대우를 받아도 미워해서는 안됩니다.

 

제가 인천에서 목회할 때, 그 때는 심방을 많이 했어요. 하루에 스물일곱 집, 심방을 많이 할 때가 있었는데 어느 날 심방을 어떤 가정에 갔더니 집에 들어서자 마자 그 집에서 난장판이 났어요. 왜냐하면 그 집에 4대 독자 외아들이 있는데 얘가 지금 초등학교 3학년인가 뭐 그 정도 되는 아이인데 밖에 나가 놀다가 얘들하고 싸웠던가봐요.

 

얘가 지금 너무 귀하게 커서 좀 버릇이 없어요. 그래서 어떤 아이한테 몇 대 맞았대요. 그리고 대신 때리려고 하는 순간에 이 사실을 알고 어머니가 나가서 붙들고 들어온 것이에요.

 

얘가 억울하고 분해서 지금 못견디는 것이에요. 당장 달려 나가야 된다고. 어머니가 참으라 그러니까 아니라는 거예요. 한 대 맞았으면 한 대 때려야 되는 거 아니냐 이거예요. 그리고 그냥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는데 도대체 예배를 드릴 수가 없어요. 모처럼 그 집에 찾아갔는데. 그래 제가 그 놈을 붙들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 이길 자신 있냐?" ", 그러믄요." "그럼 이겨라 이놈아. 왜 지냐." 했더니 당장 나가려 해요. "잠깐만 기다려. 이 놈아, 울면 진거야. 사내자식이 왜 우냐." 뚝 그치더라고요. 그리고 앉아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여러분, 한 마디 더 하고 싶습니다.

 

미워하면 진 것입니다. 맞고도 웃으면 이긴 것이고요 때리고도 불안하면 진 것입니다. 내가 어떤 손해를 보고도 내 마음에 평안함이 있으면, 샬롬, 피스(Peace), 평안이 있으면 이긴 것이예요. 그러나 불안에 떨고 저를 미워하게 되면 그건 진 거예요.

 

오늘 성경은 말씀합니다. 사랑하라고요. 원수를 사랑하라. 여러분, 원수를 사랑하라 하면 도덕 규범의 극치처럼 들려집니다.

어떻게 원수를 사랑한다는 말인가. 그야말로 도덕군자나 할 수 있는 일이고 성자들이나 얘기지, 예수님의 얘기지 우리같은 보통사람이 원수를 어떻게 사랑하나. 추상적인 진리처럼 얘기합니다만은 이제는 우리가 현실상황에 왔습니다.

 

원수를 사랑할 것입니까, 미워할 것입니까? 원수를 미워하면 또 원수, 원수 해서 이제 세상이 다 끝나겠는데 아직도 원수를 미워해도 되느냐고요. 이제 우리는 절박한 상황에 왔습니다. 원수를 미워하고는 다 죽습니다. 그런고로 성경은 언제나 실제적 진리입니다. 원수를 사랑해야 합니다.

 

악은 미워하되 원수를 사랑할 것이구요 오늘 성경은 너무나도 높고 냉철함을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배고프거든 먹이라. 내 인도주의, 내가 할 사랑, 내 의무는 다 하는 거예요. 원수가 배고프면은 먹이라.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아주 냉철하길 원하십니다.

 

에리히 프롬의 'The Sane Society' 라고 하는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건강한 사회이 건강한 사회는 이 건강한 정신에서 오는데, 건강한 정신이란 뭐냐? 먼저 사랑하며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이래요. 얼마나 사랑할 수 있느냐?

 

얼마나 창조적으로 사랑할 수 있느냐? 사랑 받고 사랑하는 게 아니에요. 미움 받고 사랑하는 거예요. 창조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바로 거기에 건강한 사회가 있고요. 민족, 토지, 이런 것에 지나치게 유대관계에 머물지 않고 벗어나야 한다.

 

다시 말하면 집단의식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어야 되요. 자기 자신의 주체적 의식, 주체적 행위를 지켜가야 되요. 자기가 책임을 져야 되요. 내부 외부의 현실파악에 냉철해야 됩니다. 리얼리티(Reality), 사실을 똑바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객관성과 이성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는 주관성에 매이고, 나 자신에게 매이고, 내게 돌아오는 이득에 매이는 순간, 벌써 건강한 정신이 아닙니다. 객관성을 지키고 그리고 바른 이성을, 맑은 이성을 가지고 있고, 착한 양심을 지켜가야 된단 말입니다. 거기에 건강한 사람, 건강한 사람이 모였을 때, 건강한 사회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말씀하십니다. 그 모진 고통, 고초를 당하면서하나님,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저들이 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누구나 다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게 얼마나 무서운 일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이라는 걸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모르기 때문입니다.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여기에 해답이 있습니다.

 

벤허라고 하는 유명한 영화가 있습니다. 어떤 분은 극찬한 나머지 벤허는 성경 다음 가는 책이라고 했습니다. , 왜요? 여기 보면 벤허는 미움을 받습니다. 핍박을 받습니다. 많은 고난을 당하면서도 선으로 악을 이깁니다.

 

끝까지 선으로 악을 이기려고 몸부림을 치고 승리합니다. 그것을 그려 놓은 겁니다. 그가 마지막 장면에 유명한 말을 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말씀하시기를

 

'저들의 죄를 사하여주옵소서' 하는 음성이 내 귀에 들리는 순간, 내 손에서 검이 떠나는 것을 보았노라.” 그 후에 그는 검을 쓰지 않고 끝까지 선으로 악을 이기는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벤허를 보세요. 얼마나 크고, 놀라운 메시지가 거기에 있는지 모릅니다.

 

악은 점점 극렬해갑니다. 장악해집니다. 그러나 여러분 악에게 지지 말 것입니다. 절대로 미워하지 말 것입니다. 악을 이겨야 합니다.

사랑으로 이기고 선으로 이기고 끝까지 진리로 이길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여기에만이 승리가 있고 여기에만이 평화가 있고 이것은 실제 상황입니다. 절박한 상황에 왔습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라.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늘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이 말씀과 우리 생활은 좀 거리가 있는 것처럼 생각할 때가 많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엄청난 사건 앞에서 해답을 얻어야 했습니다. 인간의 악을 보았습니다. 그로 인해서 우리가 또 악해지는 일이 없게 하옵소서.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는 그런 승리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악을 이기는 비결/12:14-21

2004-03-18 22:48:22

 

 

토리라고 하는 네 살 된 예쁜 여자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아버지, 어머니, 오빠를 비롯한 모든 가족과 주변 사람에게서 사랑을 받고, 또 모두를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를 오빠에게 조그마한 새 자전거를 사주었습니다. 오빠는 자전거 뒤에 토리를 태워주었습니다. 토리는 자전거 타는 것이 재미있었고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뒤뜰에 놓아둔 자전거를 그만 도둑맞았습니다. 온 집안이 이 일로 인해서 다 기분이 안좋았습니다. 특별히 토리는 마음이 상했습니다. 잠자리에 들기 전, 토리는 눈을 감고 손을 모으고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에게 아버지, 어머니, 오빠 주신 것을 감사하구요, 모든 것을 다 감사드려요. 그리고 모든 사람들을 축복해주세요.” 그리고는 덧붙여서 이렇게 말합니다. “자전거 도둑은 빼놓고요.” 이 세상에는 악이 있습니다.

 

옥스포드 대학의 종교철학 교수인 리차드 스윙버는 악을 네 가지 유형으로 구별해서 말했습니다. 첫번째는 물리적인 악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신체로 느끼는 것입니다. 배고프고, 아프고, 쑤시고.....두번째는 정신적인 악이 있다고 합니다. 마음이 상하고, 상심되고, 혹은 실패와 좌절을 겪는 등 마음으로 느껴지는 아픔입니다. 또 하나는 상태의 악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심적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야 될 이유도 없고, 그래서는 안되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또 이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고통을 느낍니다. 증오와 질투와 시기.....이런 것들입니다. 네 번째는 도덕적 악이 있다고 합니다. 도덕적 규범에 대한 실패를 말합니다. 문제는 악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생각해야 합니다.

 

이런 명언이 있습니다. “선을 악으로 갚는 것이 악마의 행동이다.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이 보통 인간들의 하는 일이다.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이 하나님과 같은 행동이다.”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우리는 어떤 수준에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오늘의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악에게 지지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21)”--그러면 지지 않는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또 이긴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지지 않고 이긴다는 말의 그 깊은 뜻을 우리가 헤아려야 할 것입니다.

 

먼저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은 소극적이지만 악에게 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기본적인 것입니다. 악마의 역사가 있습니다. 악마가 우리 인간을 시험하고, 괴롭히고, 고통을 주어서 이제 여러가지로 자기 제자로 삼고, 하나님을 반역하게 하고, 지옥으로 끌고 가려고 합니다. 이 악마의 작전계획 중에 가장 성공적인 것이 있습니다. 그 최상의 성공 전략이 뭐냐, 그것은 악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악마가 있다는 것을 부인하게 하는 것이요, 죄를 지었는데도 죄가 아니라고 변명하게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입에서 이것은 죄가 아니다, 라고 말하게 하는 것이 악마의 입장에서는 최고의 성공이요 성공작품이랍니다. 오늘날에도 가만히 보세요. 분명히 잘못된 악인데도 불구하고 이 책임을 남에게 돌리고, 사회에 떠넘기면서나는 악하지 않다고 합니다. 혹은 악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스스로 변명합니다. 그 순간, 악마는 축배를 들것입니다. 이것은 악이 성공한 것이니까요.

 

또 악한 사건이나 악한 사람 때문에 내가 약해져서는 안됩니다. 악마의 작전은 인간에게 악한 것을 보여주고 악을 체험하게 해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악에 빠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악화되도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어두워지고, 믿음이 흔들리고...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평생을 이 악한 세상에서 살아도 우리는 악해져서는 안됩니다. 어떠한 미움을 당하고 살아도 내 마음이 함께 미워하는 마음이 되어도 안됩니다. 뿐만 아니라 내가 어두워져서는 안됩니다. 아무리 캄캄한 세상에 살아도 나는 빛으로 살아야 합니다. 아무리 어두운 세상에 살아도, 아무리 악한 세상에 살아도 내 마음은 항상 평안하고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이런 다짐이 흔들릴 때 흔히들 말세라고 말합니다. 소망이 없는 것은 벌써 악에게 넘어간 것입니다. 악에게 진 것입니다. 악마는 모든 악한 분위기를 통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악해지도록 그렇게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환경이야 거꾸로 가든, 바로 가든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선과 의와 빛을 간직해나가면 이것이 악에게 지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악마가 어떻게 역사하느냐, 낙심하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흔들리게 만듭니다. 본래 가졌던 귀한 마음이 그만 사라지게끔 만듭니다. 이럴 때에 또 악마가 이기는 것입니다. 나는 지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실망은 금물입니다. 신앙적 세계관이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평생 내가 고통을 느끼고 살아도 나는 내 할 본분을 다해야 합니다. 어떤 처우를 받아도 내 마음은 항상 고요하고, 내가 해야 할 사랑, 내가 가져야 할 믿음, 내가 가져야 할 소망은 그대로 지켜가는 것입니다. 끄덕없이 지켜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악에게 지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신랑 신부가 결혼식을 올리는데 그날 따라 갑자기 비가 옵니다. 그래서 신혼여행길에 온통 비를 맞게 되었습니다. 신부는 짜증을 냈습니다. “하필이면 우리 결혼식 하는 날에 재수 없이 비가와 가지고.....” 신랑이 신부를 달랩니다. “무슨 소리요? 우리가 이런 날로 정한 게 잘못이지. 또 비가 온다고 해서 일생에 있어 가장 중요하고 행복한 이 시간에 우리의 마음이 흔들려서야 되겠소? 당신이 나를 사랑하고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그것이면 됐지 이까짓 비 때문에 우리의 사랑이 손해를 봐서야 되겠소?” 아무튼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목적지에 도착한 후, 방안에 들어와서 불을 켜놓고 보니 그것 참 분위기 있더랍니다. 비가 오니 밖에도 나갈 수 없고 둘만이 방안에 있으니 절로 무드가 생깁니다. 신랑이 말합니다. “보시오. 행복하지 않소?”

 

여러분, 날씨 탓할 것 없고, 세상이 어떻고, 라고 말할 것 없습니다. 어떤 경우를 만나도 우리의 마음은 항상 고요해야 합니다. home sweet home---우리의 가정, 우리의 마음은 항상 평온을 지켜가고, 내가 해야 될 본분은 끝까지 다하고, 내가 해야 될 사랑의 분량은 전적으로 다하는 것, 이것이 악에게 지지 않는 것입니다.

 

탈무드에 전해지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 노아 홍수 때의 일입니다. 많은 비가 오고 이제 홍수로 인하여 모든 것이 물에 잠기게 될 때, 노아는 모든 짐승들을 암 수 한 쌍씩 방주로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선()이 혼자서 덜렁덜렁 들어옵니다. 그러니까 노아가전부 한 쌍씩 들어오라고 했는데 너는 왜 혼자 들어오는 것이아냐?”하면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할 수 없이 선은 자기와 짝이 될 것을 찾아 돌아다니다가 악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제서야 노아는 그들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그 후로 이 세상에는 선과 악이 공존한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스라엘사람들이세상에 왜 악이 있을까? 왜 선과 악이 함께 있을까?’를 머리 아프게 생각한 나머지 이런 이야기까지 생긴 것 같습니다. 여러분, 이유는 묻지 마십시다. 분명한 것은 선과 악이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유명한 성 아우그스티누스는 악에 대하여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그것을 다 말씀 드리지는 못하겠지만 간단하게 몇가지 특징만을 말씀드립니다.

첫째로, 악을결핍으로서의 악으로 보았습니다. 악이라는 것은 선의 결핍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어두움이라는 것은 빛이 부족하기 때문이요, 죄라는 것은 의가 모자라서 이르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고로 선이 없는 상태, 의가 부족한 상태가 악인 것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볼 때에 이것은 깊이 생각해야 될 문제가 있습니다.

둘째로,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높은 신앙에서만이 이해할 수 있는 높은 차원의 신학을 전개합니다. 그것은 심미적 개념으로서의 악입니다. ‘esthetic concept of evil’--유명한 신학입니다. 이것은 무엇이냐, 궁극적인 하나님의 높은 관점에서 역사 전체를 한눈에 보는 것입니다. 우주적으로 볼 때, 전체적으로 볼 때에는 완전한 선이 있다는 것입니다. 종말적으로 보면 다 선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며 악이란 왜 존재하느냐, 전체적인 아름다움에 기여하고자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검은 반점이 있다 하더라도 이것은 더 빛나게 하는 것이요, 어디엔가 악이 있다 하더라도 이것은 선으로 더 높은 선에 이르게 하기 위한 심미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소화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천사는 직접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악마는 간접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하나님의 능력과 놀라운 지혜, 그 초원적 역사 안에서 볼 때에 악은 선으로 보다 높은 선을, 의로 보다 의롭게, 더 큰 아름다움을 창조하기 위해서 있어진다고 신앙 안에서 이해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악은 선과 공존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부정적인 면에서 보지 말고, 신앙 안에서, 높은 차원에서 긍정적으로 받는 그런 기본 자세가 필요합니다.

 

둘째로 우리가 생각해야 할 문제는 악과 악한 사람을 구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죄인은 사랑해야 하고, 죄인은 미워해야 합니다. 우리가 죄를 보면서 마침내 죄인까지 미워해서는 안됩니다. 어떤 경우에도 어떤 악한 사람이라도 구별하여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보세요. 세상 모든 악한 자의 대표격인 가룟유다를 앞에 놓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차라리 나지 않았음이 좋을 뻔했다가룟 유다의 마음 속에 있는 악마를 보시면서 악마에 붙들려 있는 그를 여전히 불쌍히 여기시고 계십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악한 사람을 보더라도 악과 죄는 미워해야 겠지만 죄인에 대한 긍휼과 자비는 여전해야 한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을 미워하지 맙시다. 사람을 정죄하지도 맙시다. 다만 악을 미워하는 확실한 구별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세번째로 우리가 어떤 문제로 인해서 고통을 당하게 될 때에 내 원수가 생기는데, 이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맡겨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성경은 말씀합니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19)” 너는 손대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높은 섭리와 초월적 지혜에 의존하고, 온전히 그의 인도하심에 맡겨 버립시다. 그의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유명한 스펄젼 목사님이 어느 날 많은 군중들 앞에서 설교를 하는데 어떤 짖궂은 청년이 이렇게 질문합니다. “목사님, 하나 물어 봅시다. 스데반이 순교당한 이야기를 아시지요? 그가 억울하게 돌에 맞아 죽고 있는 그 순간에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 스데반을 치려던 돌을 다 치워 놓으시던지, 아니면 스데반을 어디로 피신시켜 놓으시든지 할 것이지 그래, 그 돌에 몽땅 맞아 죽게 만드십니까? 하나님은 대체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 이상한 질문이지만 실제적인 질문이기도 합니다. 잠시 생각에 잠긴 스펄젼 목사님은 이윽고 아주 확실하게 대답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스데반으로 하여금 원수를 위해서 기도하게 하셨습니다여러분,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그것입니다. 돌에 맞아 죽지 않도록 피신시키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오히려 천사와 같은 얼굴로 자기를 죽이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그 힘과, 그 용기와 그 사랑, 그 승리를 그에게 주셨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하신 일이요, 이것이 주님께서 만드신 작품입니다. 이제 내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어디에 승리가 있고 어디에 패배가 있는 것입니까?

 

한 젊은 농부가 어떤 농부와 나란히 이웃하여 오랫동안 살았는데, 어느날 이웃 농부로부터 참기 어려운 모독을 당하였습니다. 아주 분하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화가 난 농부는 복수할 양으로 존슨쵸라고 하는 잡초씨를 이웃 농부의 밭에 뿌렸습니다. 당연히 그 밭에는 잡초가 무성하게 자랐습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얼마후에 그 농부의 딸과 그 밭을 이 사람에게 결혼 선물로 주었습니다. 농부는 그 밭의 잡초를 없애느라고 무려 30년 동안을 고생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내가 원수 갚는다고 덫을 놓고, 원수 갚느라고 갖은 방법을 다해 봅니다. 그러나 한번 해보세요. 마지막에 보면 그것이 나에게로 돌아옵니다. 결국은 내가 당하고 맙니다. 가만히 보니까 못된 사람 버릇 고친다고 하다가 자기가 더 나빠집니다. 무엇을 바로 잡는다, 정의를 위한다고 하다가 결국은 자기가 더 극단의 악에 빠지고 맙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원수 갚는 것은 내가 갚으리라, 내게 맡기라, 너는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원수가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네가 할 일만 다하라, 하십니다. 어떤 분은 일생을 두고 자기 남편을원수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원수도 좋고 악마도 좋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입에서 그 말이 나와서는 안됩니다. 내가 할 본분은 내가 다 해야지요. 내가 할 사랑은 다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악을 이기는 것입니다. 악이 없어야 한다고 몸부림치지 맙시다. 어째서 이런 일이 있느냐고 불평하지도 마세요. 그것 자체가 벌써 악에게 지고있는 것입니다. 이 가운데에, 이 사건 속에 엄연한 하나님의 교훈이 있고, 경고가있고, 인도하심이 있고, 살아계신 말씀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 말씀을 고요히 듣고 나로서 내가 해야 할 일을 다시 찾아가야 합니다.

 

오늘의 성경은 다시 말씀합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라악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악을 이기라, 사랑으로 증오를 이기라, 어두운 데에서 원수와 피나는 싸움을 벌이지 말고 빛을 밝히라, 그것이 주님의 말씀입니다. 오직 선으로 악을 이기라 선으로 이겨야 하고, 선을 생각해야 하고, 선을 극대화 해야 하고, 선을 강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악을 보면서 선을 챙길줄 알아야 합니다.

 

페르시아의 왕이 어느 날 세계적인 현자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인류에 있어서 가장 무서운 죄악이 무엇이겠냐고 물었습니다. 그 때에 그리이스의 현자는늙어서 가난하게 사는 것이 악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인도의 현자는사람이 도저히 견디기 힘든 고통을 당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악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페르시아의 현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암흑의 세상에 광명을 줄 만한 선을 한가지도 못하고 임종을 맞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이 어두워집니다. 세상이 악해졌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조그마한 빛이라도 비추고, 조금이라도 선을 이루고, 내가 이 세상을 밝힐 만한 한 가지 선이라도 하고 죽어야지요. 마찬가지로 악에 악을 더하고, 악을 개탄하고, 악에서 악화되고, 한 가지 빛도, 한 가지 선도 이루지 못하고 임종을 맞는다면 이보다 어려운 고통은 없는 것입니다. 이보다 결정적인 실패는 없는 것입니다. 악을 보면서 선을 생각하고, 다시금 우리가 선을 깊이 생각하면서 믿음과, 사랑과, 온유와, 겸손에서 새로운 의미의 자아의식을 확인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쳐다보십시오.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면서이 사람들은 모르기 때문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악과 악인을 구별하셨습니다. 조금도 낙심하지 않으셨고, 조금도 누구를 미워하지 않으셨고, 조금도 실망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맡기며, 하나님께 위탁하며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승리하셨습니다. 우리는 빌라도 앞에 선 예수님의 모습과 십자가의 예수님을 생각하며, 승리가 무엇인지를 확실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승리는 약속된 것입니다. 최종 승리는 보장된 것입니다. 참된 승리는 결정적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6 33절은 말씀합니다.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여기에 승리가 있습니다.

 

승자와 패자를 한번 비교해보십시다. 패자는 넘어졌다가 일어날 때에 뒤를 봅니다, 승자는 앞을 봅니다. 패자는 자기만 생각합니다. 승자는 그리스도를 생각합니다. 패자는 원수와 악을 생각합니다. 승자는 선을 생각합니다. 패자는 손실만을 생각합니다. 승자는 합동하여 선을 이루는 득을 생각합니다. 패자는 끝내 원망으로 끝냅니다. 승자는 온유 겸손히 회개합니다. 패자는 절망합니다. 승자는 언제나 은혜와 사랑을 다시 확인하면서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라.”

 

 

 

악에게 지지 말라 /12:14-21/ 김경진 목사

2023-12-19 06:41:10

 

< 복수는 보다 나은 사회로 나아가는 신호일 수 있습니다. >

 

2020년 출간된 문학 작품 중에서 『복수를 합시다』라는 특이한 제목의 장편 소설이 있습니다. 신인문학상을 수상한 배상민 작가의 작품이라고 합니다. 황토색 표지 안에는 그림이 하나 그려져 있는데, 한쪽에는 문이 있고 맞은편에는 한 사람이 케이크에 머리를 처박고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복수를 당한 것 같은 모습입니다. 책 하단에는 파란색 띠지가 있는데 이런 글귀가 적혀 있습니다. “가장 보통의 복수를 상상하다.” 이 글귀가 눈에 들어옵니다.

 

복수를 하려는 사람들이 온라인에서 모이는 내용인데요. 모여서 의견을 나누며 서로의 복수를 도와주는 내용이 전개됩니다. 생색내기를 좋아하는 남편을 보기 좋게 복수하고, 친구와 바람을 피운 약혼녀를 보기 좋게 복수합니다. 과거 사진을 가지고 협박하는 친구를 멋지게 복수하는 장면들도 이어집니다. 하지만 모든 복수가 시원하게 전개되지는 않습니다. 도리어 그것 때문에 덫에 걸려서 어려움에 빠지는 이야기도 나타납니다. 그래서 그런지 마지막 뒷장에 이런 글귀가 적혀 있습니다.

 

쓰디쓴 농담처럼 공허하지만 통쾌한 복수의 맛

 

두 가지 단어가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통쾌라고 하는 단어와공허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두 단어가복수라는 단어에 잘 연결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가 보통 복수를 하면 처음에는 통쾌함이 있죠. 그런데 통쾌함은 잠시, 이내 공허함이 찾아옵니다. 이것이 복수의 속성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최근에 운동선수들이 과거에 행한 학교 폭력이 이슈가 되면서 상당히 곤혹스러운 일을 맞고 있는 것을 봅니다. 연예인들 중에도 비슷한 일들이 꽤 있었고요. 인기가 올라갈 상황이 되었을 때, 지나간 행적에 대한 이야기가 올라오면서 도리어 인생이 망하게 되는 사람들을 종종 보기도 합니다. 지금 보궐선거를 준비하는 서울 시장이 그랬고, 부산 시장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비슷한 일들이 우리 주변에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실을 알리고 밝히는 사람들이야말로 얼마나 마음이 힘들었겠습니까? 그동안 억울한 일이 얼마나 많이 있었겠습니까? 그것을 마음에 담아 두고 사는 일이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이제야 그에게 나타나서 처벌을 원하는 마음이야 오죽하겠습니까? 피해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정말로 억울하고 힘든 시간이 계속 되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이러한 흐름을 보면서보다 투명한 사회로 나아가는 하나의 신호가 아닐까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꽤 있습니다. 동시에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며 몸가짐을 다시 주의하게 되는, 그래서 사회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많이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악은 드러나야 하고 정죄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래야 보다 자신의 삶을 주의해서 살게 될 것이고, 보다 나은 사회가 만들어지지 않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복수는 우리 사회가 조금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는 하나의 과정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어떠실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 이야기입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지금까지도 기억나는 하나의 상황이 있습니다. 초등학교 가기 전 같기도 합니다. 어머니로부터 굉장히 야단을 맞았는지 아니면 제가 하려던 것을 어머니께서 막으셨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나무 아래에 가서 어머니에 대한 복수를 결심했던 것만큼은 생각납니다. 무엇 때문에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그 이후로 어머님께 말도 잘 안 듣고, 한동안 못되게 굴었던 기억이 아주 조심스럽게 납니다. 여러분의 아내가 지금 복수의 마음을 갖고 있을지, 여러분의 남편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일수록 그와 같은 마음을 가질 때가 참 많습니다. 너무 가까워서 함부로 대하다가 원수를 갚고 싶은 마음까지 이르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그러나 복수는 고통의 악순환이기에 하나님이 율법을 주셨습니다. >

 

복수는 때로 우리 마음을 평온하게 하고, 숨겼던 마음을 폭발시켜서 건강한 심리 상태로 돌아가도록 하는 긍정적인 역할을 가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즉 나에게 힘들었던 사건이 복수를 함으로써 한 번 더 생겨났다고 생각한다면, 사실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금방 깨닫게 됩니다. 또 다른 괴로움이 탄생하는 것이고요, 내가 복수를 함으로써 또 다른 희생자가 나오는 것입니다. 결국 고통의 악순환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복수를 했다고 생각해 보십시다. 그래서 내가 가해자에게 복수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그 사람은 어떻겠습니까? 당한 복수를 또 복수하기 위해서 칼을 갈 것입니다. 복수를 하고 나서도 마음을 졸이며 살아야 하는 인생이 되겠죠. 이처럼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고, 악은 또다시 악을 낳습니다. 복수는 사회적으로, 심리적으로 필요하지만 부작용도 많이 있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인들도 복수하고 싶은 마음을 꽤 가집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이 마음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실까요? 하나님은 복수에 대해 어떻게 하라고 가르치실까요? 우리는 어떻게 악에 대해 처신해야 합니까?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악인들에 대해서 어떤 모습으로 대처해야 할까요? 레위기 24장입니다. 말씀은 이렇습니다.

 

사람이 만일 그의 이웃에게 상해를 입혔으면 그가 행한 대로 그에게 행할 것이니 상처에는 상처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을지라 남에게 상해를 입힌 그대로 그에게 그렇게 할 것이며 (레위기 24 19~20)

 

많이 들었던 말씀이죠? 이 말씀을 읽다 보면, 하나님께서 원수 갚는 것을 허용하셨구나. 그것도 아주 제대로 갚아주라고 하시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흐름을 놓고 말씀을 자세히 본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의미하고는 많이 다릅니다. 우선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율법의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법으로 주신 말씀입니다. 법적 판단을 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즉 이 말씀은 사적으로 복수를 해도 된다고 허용하신 말씀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사법 제도를 통해서도 동일한 경험을 하지 않습니까? 살인을 저지른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 사람은 법적으로 사형에 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살인죄를 지었다고 해서 직접 다가가 그를 죽일 순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나 또한 살인자가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법에 맡겨서 그가 합당한 형벌을 받게 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적법한 일이고, 마땅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의 말씀을 주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법체계를 주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이 법체계를 유지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만약에 개인적으로 보복을 할 수 있거나, 원수를 갚을 수 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아마도 과도한 보복이 일어날 것입니다. 인류 역사는 이것을 충분히 증명해 주죠. 그러므로 법을 통해서 저지른 죄에 대해 정당한 평가를 하고, 이에 대한 마땅한 처벌을 함으로써 과도한 보복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입니다. 억울함은 해소하되, 또다시 억울할 사람이 만들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법이 우리에게 주는 또 다른 정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목적은악인의 심판을 그분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이유도 그와 같습니다. 한 사람의 감정에 근거해서 보복할 수 있도록 열어 두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 앞에서 공정하게 판단 받아 악인이 처벌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신 것이 율법의 말씀인 것입니다. 구약의 말씀을 포함해서 신약의 말씀까지 악인을 처벌하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개인에게 맡긴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악인을 직접 처벌하도록 하는 이야기도 많지 않습니다. 도리어 시편 10편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 악인에 대한 처벌을 탄원하고 기도하는 내용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시편 말씀을 한번 보겠습니다.

 

주님, 일어나십시오. 하나님, 손을 들어 악인을 벌하여 주십시오. 고난받는 사람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 악하고 못된 자의 팔을 꺾어 주십시오. 그 악함을 샅샅이 살펴 벌하여 주십시오. (시편 10 12,15절 새번역)

 

이 말씀 외에도 성경에는하나님, 이렇게 벌해 주십시오.”라고 하나님께 탄원하는 기도가 참 많습니다. 하나님께 악인들을 놓고 말씀을 드리면서 이 사람들을 벌하여 달라는 탄원의 기도들이 참 많습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악인에 대해 어떻게 하라고 가르치셨을까요? 산상수훈을 말씀하신 마태복음 5장은 이렇습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마태복음 5 38~39절 중)

 

레위기 24장의 말씀을 인용하신 것인데, “이는 이로 그리고 눈은 눈으로 보상하라고 하신 말씀을 너희가 알지만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을 대적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여기에는 악인에 대한 모든 심판은 하나님께 의탁하고, 그 악인을 대적하지 말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한마디로 악인에 대해서 관심을 끊으라는 말씀입니다. 악인을 바라보지도 말고, 악인에 대해 생각하지도 말며, 그저 그 문제를 끊어 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본문도 동일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로마서 12 14,17)

 

일일이 악에 대하여 맞대응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악에 대한 무저항이나 포기가 아닙니다. 사건마다 일일이 맞대응을 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종종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것만큼은 발본색원拔本塞源하겠다. 악의 뿌리를 뽑겠다.’ 마치 내가 심판자가 된 것처럼 결단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유혹입니다. 악한 영이 우리에게 주는 유혹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악과 싸우다가 또 다른 악에 접어든 사람들을 종종 봅니다. 악을 응징하고 정의와 공의를 세운다며 시작한 일이었는데 결국에는 분을 삼키지 못하고 분노를 분출하고 원수 갚음을 나타내고, 저주와 복수를 키워 내는 안타까운 일들이 너무도 많이 일어나고 있음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악을 쳐다보지 말고 대적하지도 말라고 부탁하십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로마서 12 14)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로마서 12 21)

 

이 말씀이 평범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성경에서 늘 보아 온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놀라운 말씀입니다. 세상이 갖지 못한 말씀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이 추구하지 못한 삶의 방식입니다. 이 말씀은 하늘의 방식이요, 하늘나라의 삶의 원리입니다. 어떻게 우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어떻게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주님의 백성들이 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인 것입니다.

 

 

< 성경 속 인물들은 하나님이 명하신 삶의 방식을 따르며 살아왔습니다. >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하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이어서 8 1절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등장합니다.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사도행전 8 1)

 

여기서는 스데반입니다. 사울은 스데반이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겼습니다. 사울은 박해자였습니다. 그는 한때 악을 행하는 악인이었고, 하나님을 모르는 자였습니다. 만약 그 순간에 스데반이 자신을 박해하는 자들을 저주하였다면 어땠을까요?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저주를 받고 회복의 기회를 얻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하나님 앞에서 변호하며 죽어 갑니다.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사도행전 7 59~60)

 

스데반의 용서의 기도는 결국 바울이 있게 만듭니다.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쓸어버리지 아니하시고 기다려 주신 하나님께서 또 다른 사역자 바울을 찾아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를 이어가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그분의 섭리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악인을 기다리고 계시고, 살인한 자와 도둑질한 자가 돌아오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이 악인들이 주님께로 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핍박하는 악인을 하나님께 맡길 뿐입니다.

 

물론 억울한 이들이 있습니다. 스데반과 같은 인물이죠. 복음을 전하던 그가 그토록 참혹하게 죽어 가야 했는지, 그 이유를 분명하게 설명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을지 모릅니다. 열왕기상에는 아합과 이세벨에게 포도원을 빼앗기고 죽음을 당한 나봇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다윗은 밧세바를 차지하기 위해서 우리아를 적진으로 내보내 죽게 만들었습니다. 우리아, 나봇, 그리고 스데반 모두 피해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피해자들을 어떻게 공의롭게 처리하실지 우리의 지혜로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 맡길 것을 분명하게 요청합니다.

 

그렇다면악인에 대해서 관심을 끊으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은 어디로 이어집니까? 우리가 관심을 둘 곳은 어디입니까?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악인에 대한 관심을 끊고, 가난한 자와 힘없는 자들을 향해 끊임없이 관심을 쏟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잠언의 지혜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공경하는 자니라 (잠언 14 31)

 

우리 주님께서는 산상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을 때, 악한 자들을 대적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후에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이어서 전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마태복음 5 39~42)

 

주님은 악한 자에 대한 관심을 내려놓고 구하는 자, 꾸고자 하는 자, 가난한 자, 어려운 자, 도움을 얻고자 하는 자에게 관심을 두라고 말씀하십니다.

 

 

< ‘선을 통해 악을 정벌하는 자곧 하나님나라 백성입니다. >

 

본문 로마서 12장에서 주님은 바울을 통해 동일한 부탁을 하고 계십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로마서 12 19)

 

주님은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로마서 12 20)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 악인에 대한 관심에서 벗어나 어려운 이웃에 대한 관심으로 우리의 시선을 돌릴 것을 요청하십니다. 심지어 그 이웃이 원수일지라도 먹이고 마시게 하라고 주님께서는 부탁하십니다.

 

로마서 12장은 잘 아시는 것처럼 예수를 믿고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 즉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말씀해 주시는 주옥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12:2)”는 말씀 이후에 이어지는 교훈입니다. 하늘나라 백성에게 주어지는 새로운 삶의 원리요, 원칙입니다.

 

주님께서는 믿음으로 새롭게 출발하는 성령 받은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서 악한 자, 박해하는 자, 해를 끼치는 자에게 관심을 가지지 말 것을 당부하십니다. 심판은 하나님께 맡기고 그들의 구원을 위해 복을 빌기를 요청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배고픈 자, 목마른 자, 고통 속에 있는 어려운 이웃을 향해 관심을 갖도록 하십니다. 심지어 그들 중에 원수가 있을지라도 그들을 돌보고 섬기는 일에 마음을 두기를 권면하십니다.

 

우리들 주위에는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여러분의 눈에는 어떤 사람들이 보이십니까? 악한 사람들이 자꾸 보이시나요? 그래서저 사람 좀 혼내고 싶다. 바로 세워 주고 싶다.’ 하는 생각이 드시나요? 아니면 불쌍한 사람, 어려운 사람,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보이시나요? 오늘 주님께서는 악인들이 보이지 않기를 원하시는 마음을 우리들에게 알려 주고 계십니다.

 

이것은 악에 대한 방치를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악에 대한 포기를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악에 대한 무저항을 이야기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악에 대한 큰 저항을 말합니다. 악에 대한 보다 큰 전투입니다. 곧 선을 통하여 악을 정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해 주십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로마서 12 21)

 

신축년 새해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결심을 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올 한 해 동안 어떤 사람들에게 관심을 두고 한 해를 보내시겠습니까?

 

 

 

 

 

악에게 지지 말라 /12:14-21/ 김경진 목사

2023-12-19 06:41:10

 

< 복수는 보다 나은 사회로 나아가는 신호일 수 있습니다. >

 

2020년 출간된 문학 작품 중에서 『복수를 합시다』라는 특이한 제목의 장편 소설이 있습니다. 신인문학상을 수상한 배상민 작가의 작품이라고 합니다. 황토색 표지 안에는 그림이 하나 그려져 있는데, 한쪽에는 문이 있고 맞은편에는 한 사람이 케이크에 머리를 처박고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복수를 당한 것 같은 모습입니다. 책 하단에는 파란색 띠지가 있는데 이런 글귀가 적혀 있습니다. “가장 보통의 복수를 상상하다.” 이 글귀가 눈에 들어옵니다.

 

복수를 하려는 사람들이 온라인에서 모이는 내용인데요. 모여서 의견을 나누며 서로의 복수를 도와주는 내용이 전개됩니다. 생색내기를 좋아하는 남편을 보기 좋게 복수하고, 친구와 바람을 피운 약혼녀를 보기 좋게 복수합니다. 과거 사진을 가지고 협박하는 친구를 멋지게 복수하는 장면들도 이어집니다. 하지만 모든 복수가 시원하게 전개되지는 않습니다. 도리어 그것 때문에 덫에 걸려서 어려움에 빠지는 이야기도 나타납니다. 그래서 그런지 마지막 뒷장에 이런 글귀가 적혀 있습니다.

 

쓰디쓴 농담처럼 공허하지만 통쾌한 복수의 맛

 

두 가지 단어가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통쾌라고 하는 단어와공허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두 단어가복수라는 단어에 잘 연결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가 보통 복수를 하면 처음에는 통쾌함이 있죠. 그런데 통쾌함은 잠시, 이내 공허함이 찾아옵니다. 이것이 복수의 속성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최근에 운동선수들이 과거에 행한 학교 폭력이 이슈가 되면서 상당히 곤혹스러운 일을 맞고 있는 것을 봅니다. 연예인들 중에도 비슷한 일들이 꽤 있었고요. 인기가 올라갈 상황이 되었을 때, 지나간 행적에 대한 이야기가 올라오면서 도리어 인생이 망하게 되는 사람들을 종종 보기도 합니다. 지금 보궐선거를 준비하는 서울 시장이 그랬고, 부산 시장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비슷한 일들이 우리 주변에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실을 알리고 밝히는 사람들이야말로 얼마나 마음이 힘들었겠습니까? 그동안 억울한 일이 얼마나 많이 있었겠습니까? 그것을 마음에 담아 두고 사는 일이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이제야 그에게 나타나서 처벌을 원하는 마음이야 오죽하겠습니까? 피해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정말로 억울하고 힘든 시간이 계속 되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이러한 흐름을 보면서보다 투명한 사회로 나아가는 하나의 신호가 아닐까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꽤 있습니다. 동시에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며 몸가짐을 다시 주의하게 되는, 그래서 사회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많이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악은 드러나야 하고 정죄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래야 보다 자신의 삶을 주의해서 살게 될 것이고, 보다 나은 사회가 만들어지지 않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복수는 우리 사회가 조금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는 하나의 과정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어떠실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 이야기입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지금까지도 기억나는 하나의 상황이 있습니다. 초등학교 가기 전 같기도 합니다. 어머니로부터 굉장히 야단을 맞았는지 아니면 제가 하려던 것을 어머니께서 막으셨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나무 아래에 가서 어머니에 대한 복수를 결심했던 것만큼은 생각납니다. 무엇 때문에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그 이후로 어머님께 말도 잘 안 듣고, 한동안 못되게 굴었던 기억이 아주 조심스럽게 납니다. 여러분의 아내가 지금 복수의 마음을 갖고 있을지, 여러분의 남편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일수록 그와 같은 마음을 가질 때가 참 많습니다. 너무 가까워서 함부로 대하다가 원수를 갚고 싶은 마음까지 이르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그러나 복수는 고통의 악순환이기에 하나님이 율법을 주셨습니다. >

 

복수는 때로 우리 마음을 평온하게 하고, 숨겼던 마음을 폭발시켜서 건강한 심리 상태로 돌아가도록 하는 긍정적인 역할을 가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즉 나에게 힘들었던 사건이 복수를 함으로써 한 번 더 생겨났다고 생각한다면, 사실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금방 깨닫게 됩니다. 또 다른 괴로움이 탄생하는 것이고요, 내가 복수를 함으로써 또 다른 희생자가 나오는 것입니다. 결국 고통의 악순환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복수를 했다고 생각해 보십시다. 그래서 내가 가해자에게 복수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그 사람은 어떻겠습니까? 당한 복수를 또 복수하기 위해서 칼을 갈 것입니다. 복수를 하고 나서도 마음을 졸이며 살아야 하는 인생이 되겠죠. 이처럼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고, 악은 또다시 악을 낳습니다. 복수는 사회적으로, 심리적으로 필요하지만 부작용도 많이 있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인들도 복수하고 싶은 마음을 꽤 가집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이 마음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실까요? 하나님은 복수에 대해 어떻게 하라고 가르치실까요? 우리는 어떻게 악에 대해 처신해야 합니까?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악인들에 대해서 어떤 모습으로 대처해야 할까요? 레위기 24장입니다. 말씀은 이렇습니다.

 

사람이 만일 그의 이웃에게 상해를 입혔으면 그가 행한 대로 그에게 행할 것이니 상처에는 상처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을지라 남에게 상해를 입힌 그대로 그에게 그렇게 할 것이며 (레위기 24 19~20)

 

많이 들었던 말씀이죠? 이 말씀을 읽다 보면, 하나님께서 원수 갚는 것을 허용하셨구나. 그것도 아주 제대로 갚아주라고 하시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흐름을 놓고 말씀을 자세히 본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의미하고는 많이 다릅니다. 우선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율법의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법으로 주신 말씀입니다. 법적 판단을 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즉 이 말씀은 사적으로 복수를 해도 된다고 허용하신 말씀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사법 제도를 통해서도 동일한 경험을 하지 않습니까? 살인을 저지른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 사람은 법적으로 사형에 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살인죄를 지었다고 해서 직접 다가가 그를 죽일 순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나 또한 살인자가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법에 맡겨서 그가 합당한 형벌을 받게 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적법한 일이고, 마땅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의 말씀을 주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법체계를 주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이 법체계를 유지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만약에 개인적으로 보복을 할 수 있거나, 원수를 갚을 수 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아마도 과도한 보복이 일어날 것입니다. 인류 역사는 이것을 충분히 증명해 주죠. 그러므로 법을 통해서 저지른 죄에 대해 정당한 평가를 하고, 이에 대한 마땅한 처벌을 함으로써 과도한 보복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입니다. 억울함은 해소하되, 또다시 억울할 사람이 만들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법이 우리에게 주는 또 다른 정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목적은악인의 심판을 그분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이유도 그와 같습니다. 한 사람의 감정에 근거해서 보복할 수 있도록 열어 두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 앞에서 공정하게 판단 받아 악인이 처벌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신 것이 율법의 말씀인 것입니다. 구약의 말씀을 포함해서 신약의 말씀까지 악인을 처벌하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개인에게 맡긴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악인을 직접 처벌하도록 하는 이야기도 많지 않습니다. 도리어 시편 10편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 악인에 대한 처벌을 탄원하고 기도하는 내용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시편 말씀을 한번 보겠습니다.

 

주님, 일어나십시오. 하나님, 손을 들어 악인을 벌하여 주십시오. 고난받는 사람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 악하고 못된 자의 팔을 꺾어 주십시오. 그 악함을 샅샅이 살펴 벌하여 주십시오. (시편 10 12,15절 새번역)

 

이 말씀 외에도 성경에는하나님, 이렇게 벌해 주십시오.”라고 하나님께 탄원하는 기도가 참 많습니다. 하나님께 악인들을 놓고 말씀을 드리면서 이 사람들을 벌하여 달라는 탄원의 기도들이 참 많습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악인에 대해 어떻게 하라고 가르치셨을까요? 산상수훈을 말씀하신 마태복음 5장은 이렇습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마태복음 5 38~39절 중)

 

레위기 24장의 말씀을 인용하신 것인데, “이는 이로 그리고 눈은 눈으로 보상하라고 하신 말씀을 너희가 알지만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을 대적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여기에는 악인에 대한 모든 심판은 하나님께 의탁하고, 그 악인을 대적하지 말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한마디로 악인에 대해서 관심을 끊으라는 말씀입니다. 악인을 바라보지도 말고, 악인에 대해 생각하지도 말며, 그저 그 문제를 끊어 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본문도 동일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로마서 12 14,17)

 

일일이 악에 대하여 맞대응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악에 대한 무저항이나 포기가 아닙니다. 사건마다 일일이 맞대응을 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종종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것만큼은 발본색원拔本塞源하겠다. 악의 뿌리를 뽑겠다.’ 마치 내가 심판자가 된 것처럼 결단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유혹입니다. 악한 영이 우리에게 주는 유혹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악과 싸우다가 또 다른 악에 접어든 사람들을 종종 봅니다. 악을 응징하고 정의와 공의를 세운다며 시작한 일이었는데 결국에는 분을 삼키지 못하고 분노를 분출하고 원수 갚음을 나타내고, 저주와 복수를 키워 내는 안타까운 일들이 너무도 많이 일어나고 있음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악을 쳐다보지 말고 대적하지도 말라고 부탁하십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로마서 12 14)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로마서 12 21)

 

이 말씀이 평범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성경에서 늘 보아 온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놀라운 말씀입니다. 세상이 갖지 못한 말씀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이 추구하지 못한 삶의 방식입니다. 이 말씀은 하늘의 방식이요, 하늘나라의 삶의 원리입니다. 어떻게 우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어떻게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주님의 백성들이 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인 것입니다.

 

 

< 성경 속 인물들은 하나님이 명하신 삶의 방식을 따르며 살아왔습니다. >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하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이어서 8 1절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등장합니다.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사도행전 8 1)

 

여기서는 스데반입니다. 사울은 스데반이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겼습니다. 사울은 박해자였습니다. 그는 한때 악을 행하는 악인이었고, 하나님을 모르는 자였습니다. 만약 그 순간에 스데반이 자신을 박해하는 자들을 저주하였다면 어땠을까요?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저주를 받고 회복의 기회를 얻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하나님 앞에서 변호하며 죽어 갑니다.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사도행전 7 59~60)

 

스데반의 용서의 기도는 결국 바울이 있게 만듭니다.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쓸어버리지 아니하시고 기다려 주신 하나님께서 또 다른 사역자 바울을 찾아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를 이어가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그분의 섭리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악인을 기다리고 계시고, 살인한 자와 도둑질한 자가 돌아오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이 악인들이 주님께로 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핍박하는 악인을 하나님께 맡길 뿐입니다.

 

물론 억울한 이들이 있습니다. 스데반과 같은 인물이죠. 복음을 전하던 그가 그토록 참혹하게 죽어 가야 했는지, 그 이유를 분명하게 설명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을지 모릅니다. 열왕기상에는 아합과 이세벨에게 포도원을 빼앗기고 죽음을 당한 나봇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다윗은 밧세바를 차지하기 위해서 우리아를 적진으로 내보내 죽게 만들었습니다. 우리아, 나봇, 그리고 스데반 모두 피해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피해자들을 어떻게 공의롭게 처리하실지 우리의 지혜로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 맡길 것을 분명하게 요청합니다.

 

그렇다면악인에 대해서 관심을 끊으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은 어디로 이어집니까? 우리가 관심을 둘 곳은 어디입니까?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악인에 대한 관심을 끊고, 가난한 자와 힘없는 자들을 향해 끊임없이 관심을 쏟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잠언의 지혜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공경하는 자니라 (잠언 14 31)

 

우리 주님께서는 산상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을 때, 악한 자들을 대적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후에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이어서 전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마태복음 5 39~42)

 

주님은 악한 자에 대한 관심을 내려놓고 구하는 자, 꾸고자 하는 자, 가난한 자, 어려운 자, 도움을 얻고자 하는 자에게 관심을 두라고 말씀하십니다.

 

 

< ‘선을 통해 악을 정벌하는 자곧 하나님나라 백성입니다. >

 

본문 로마서 12장에서 주님은 바울을 통해 동일한 부탁을 하고 계십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로마서 12 19)

 

주님은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로마서 12 20)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 악인에 대한 관심에서 벗어나 어려운 이웃에 대한 관심으로 우리의 시선을 돌릴 것을 요청하십니다. 심지어 그 이웃이 원수일지라도 먹이고 마시게 하라고 주님께서는 부탁하십니다.

 

로마서 12장은 잘 아시는 것처럼 예수를 믿고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 즉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말씀해 주시는 주옥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12:2)”는 말씀 이후에 이어지는 교훈입니다. 하늘나라 백성에게 주어지는 새로운 삶의 원리요, 원칙입니다.

 

주님께서는 믿음으로 새롭게 출발하는 성령 받은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서 악한 자, 박해하는 자, 해를 끼치는 자에게 관심을 가지지 말 것을 당부하십니다. 심판은 하나님께 맡기고 그들의 구원을 위해 복을 빌기를 요청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배고픈 자, 목마른 자, 고통 속에 있는 어려운 이웃을 향해 관심을 갖도록 하십니다. 심지어 그들 중에 원수가 있을지라도 그들을 돌보고 섬기는 일에 마음을 두기를 권면하십니다.

 

우리들 주위에는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여러분의 눈에는 어떤 사람들이 보이십니까? 악한 사람들이 자꾸 보이시나요? 그래서저 사람 좀 혼내고 싶다. 바로 세워 주고 싶다.’ 하는 생각이 드시나요? 아니면 불쌍한 사람, 어려운 사람,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보이시나요? 오늘 주님께서는 악인들이 보이지 않기를 원하시는 마음을 우리들에게 알려 주고 계십니다.

 

이것은 악에 대한 방치를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악에 대한 포기를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악에 대한 무저항을 이야기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악에 대한 큰 저항을 말합니다. 악에 대한 보다 큰 전투입니다. 곧 선을 통하여 악을 정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해 주십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로마서 12 21)

 

신축년 새해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결심을 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올 한 해 동안 어떤 사람들에게 관심을 두고 한 해를 보내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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