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진실, 하지만 좋은 소식 /롬3:21-24/ 김형익 목사
2021-05-08 09:59:38
1. 복음이 가져오는 두 가지 극단적 반응
여러분에게 복음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삶에서 복음은 무엇입니까? 복음은 여러분에게 얼마나 의미가 있습니까? 여러분의 삶에 복음이 미친 영향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복음을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복음의 본질과 관련해서 물을 수 있는 질문들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여러분 자신의 대답은 여러분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답이 될 것입니다. 이 복음은 인류의 역사에서 너무나도 놀랍게 극단적으로 상이한 반응을 이끌어내왔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 복음은 생명, 아니 육신의 생명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절대적 가치입니다. 그들은 복음을 위해서 살았고 복음을 위해서 생명을 걸었습니다.
그들은 복음이 아니고는 설명이 될 수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영원한 영광으로 여겼습니다. 또 다른 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싫어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냥 싫어하지 않고 거의 삶을 바쳐서 복음을 싫어했고 복음을 없애려고 하기도 했습니다. 또는 개인적으로 그 복음에 대해서 경멸하는 태도를 가졌고, 불쾌한 감정을 숨기려고 하지 않습니다. 복음 때문에 어떤 사람들을 향한 미움과 경멸의 태도를 가지기도 합니다. 저는 과연 인류 역사에 어떤 것이 이렇게 인류 전체를 둘로 나눌 수 있을까 생각해봅니다.
때론 정치적 주장이나 인물에 대한 지지 여부에 따라서 사람들이 나뉘어서 싸우기도 하는 것을 보지만, 그것도 그저 인물이나 시대가 지나고 나면 시들해지곤 하는 것이고 한 지역이나 국가에 속한 일부 사람들에게나 영향을 미치는 것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짧게는 지난 2000 여년 동안 쉼없이 이 복음은 모든 인류에게, 적어도 이 복음이 들려지는 곳에서는 극단적인 환영과 적대를 받아왔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실 분도 계실지 모릅니다. 복음도 정치적 문제와 마찬가지로 종교에 무관심한 사람들에게는 얼마든지 냉담한 반응을 일으킬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복음의 내용을 제대로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입니다. 만일 인간이 복음의 내용을 제대로 듣게 된다면 그는 결코 감격과 감사와 환희의 반응 아니면 불쾌감과 적대감의 반응 둘 중 하나를 택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여전히 우리는 복음에 대해서 그런 극단적이라고 할만한 감정 같은 것을 느끼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말씀드리건대 그것도 역시 복음의 내용을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본질상 모든 사람들을 즐겁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세련된 말이라기 보다는 거친 말이기 때문입니다. 가령, 그것은 최종판결을 기다리는 최고재판정에서의 사형선고문 또는 무죄선고문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기분 나쁜 말이 될 것이고, 어떤 이에게는 세상에서 최고의 좋은 소식이 될 것입니다. 가령, 그 재판정에서 사형을 선고하는 판결문은 결코 피고인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서 돌려 표현하지 않을 것입니다.
직선적으로 표현하지 않고서는 사형을 선고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저는 그래서 복음을 ‘불편한 진실, 하지만 좋은 소식’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저는 이것을 좀 더 직선적으로 ‘불쾌하기 짝이 없는 진실 하지만 믿어지기에는 너무나 좋은 소식’이라고 좀 더 길게 표현했으면 합니다. 복음은 이 두 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극단적 반응을 일으킬 수 밖에 없습니다. 불쾌한 것을 찾자면 복음 보다 더 불쾌한 말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좋자고 하면 이보다 좋은 소식은 결코 이 세상에서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2. 우리가 진실이기를 바라는 희망 사항들
하나님이란 존재는 인간에게 그 자체로 불편합니다. 뭔가 책임져야 할 어떤 대상, 내 위에 존재하는 어떤 신을 생각하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설상 신이 있다고 하더라도 바라는 것은 있어도 요구하지 않고, 함께 보내는 시간이 없어도 안심하고 무시할 수 있고 실수하는 인간의 연약을 너무 잘 이해해주고 친절하고 상냥하고 매우 사랑이 넘치는 할아버지 같은 하나님이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실 테니 내 잘못에 대해서도 너그럽게 넘겨주실 것이라고 그림을 그리곤 합니다.
설령, 하나님이 계시고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 자신이 지옥으로 가야할만큼 잘못된 존재라는 생각은 여간해서 가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때론 하나님, 천국, 지옥 같은 개념들이 자신을 괴롭힐 때도 있지만, 그냥 넘겨버리면서 확률상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이 진실과 사실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복음은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잘못 짚어도 대단히 잘못 짚은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복음은 인간의 자존심을 짓밟기 시작합니다.
3. 성경이 말하는 불쾌하고 불편한 진실들
성경이 말하는 요지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에 관한 진실이고 하나는 인간에 관한 진실입니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우리를 불쾌하게 하고 불편하게 하는 진실들입니다.
A. 하나님에 관한 불편한 진실들
먼저 하나님에 관해서 성경이 말씀하는 것을 보겠습니다.
i.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창 1~2).
성경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는 모든 우주 만물이 창조주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가지는지를 보여줍니다. 특히 피조물 가운데 하나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께 책임을 가진 존재라는 것이 성경의 설명입니다. 우리는 스스로가 우리 인생의 주인이 아니고 왕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께 책임을 가진 존재입니다. 우리는 어떤 철학자의 말대로 우연히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책임을 져야 하는 존재라는 것은 그리 유쾌한 소식은 아닙니다.
ii.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신다(롬 2:12,16; 14:10; 고후 5:10; 딤후 4:1).
성경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심판하시되 모든 선인과 악인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산 자와 죽은 자 모두를 심판하실 하나님이십니다(딤후 4:1). 이것은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법정에서 소환장을 받는다고 해도 그것을 피할 길이 없다는 것을 아는데, 어떻게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 전체를 다루시는 법정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근본적으로 법정에 소환된다는 것 자체가 그리 유쾌한 소식일 수 없는데, 우리 모두가 피할 수 없이 하늘의 법정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소식은 좋은 소식일 수 없습니다.
iii.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다(출 34:6~7).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부여하고 싶어하는 성질이 있는데 그것은 사랑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야 자신들에게 있을지도 모르는 모든 무서운 결과를 피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슬프게도 심판자이신 하나님은 비록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많으셔서 인자를 천대까지 베푸시는”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형벌 받을 자를 결단코 면죄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죄를 용납하실 수 없으며,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은 죄인을 의롭다고 하실 수 없으십니다. 공의로우실 뿐 아니라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중심을 보시기에 우리의 마음의 모든 숨은 동기를 가지고 우리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모든 인간에게 좋은 소식일 수는 없습니다.
B. 인간에 관한 불편한 진실들
하나님에 대한 불편한 진실들은 인간의 마음을 불쾌하게 만들 수는 있지만, 그것 때문에 마음과 기분을 상하게 하는 정도까지는 가지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그것 때문에 복음을 극도로 싫어하고 하나님을 증오하게까지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인간에 관한 불편한 진실들은 실로 그것을 듣는 인간의 마음을 불쾌하게 하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i. 인간은 죄인이고 인간의 의로움이란 더러운 누더기다(롬 1:32; 3:23; 사 64:6).
첫째로 성경이 말하는 인간에 관한 불편한 진실은 인간이 죄인이며 인간의 의로움이란 더러운 누더기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해도, 우리가 깨끗하게 살면 그만 아닙니까? 그런데 성경은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고 선언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 23절 말씀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여 지옥으로 가야한다는 말입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무죄가 아닌 사형 선고를 받을 수 밖에 없다고 로마서 1장은 말합니다(롬 1:32). 그 심판대 앞에서 하나님께 억울하다고 자기 사정을 말할 수 있을 만한 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자리에 서게 되면 인간은 직감적으로 자기 인생의 그 알량한 의로움이라는 것들 것들이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대로 ‘더러워서 걸치고 있을 수도 없은 더러운 누더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사 64:6).
여기 말하는 인간의 의란 것은 이 세상을 살았던 가장 깨끗한 어떤 인간의 의를 포함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저와 여러분의 인생의 선행과 교양과 모든 자존심과 잘난 모든 것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 자신에 대한 성경의 설명입니다. 이것은 불쾌하게 만드는 진실입니다. 기분을 상하게 하는 말입니다. 지나가는 어떤 사람에게 혹은 도덕적으로 잘 살고 있는 어떤 사람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모험입니다. 침뱉음을 당하거나 욕을 먹을 수 있는 말입니다.
ii. 인간은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아래 놓여있다(롬 1:18; 3:19; 엡 2:3).
두번째로 인간에 관한 불편한 성경의 진실은 인간이 죄인이기에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아래 놓여져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18에서 사도는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좇아 나타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모든 인류 위에 머물러 있어서 그 진노가 그들에게 떨어지는 것은 시간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인간이 스스로 풀려날 수 없는 율법의 저주 가운데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모두가 양심에 새겨진 하나님의 율법 아니면 돌판에 새겨진 하나님의 율법을 다 범하였기에 그들에게 주어질 운명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입니다. 예외가 없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모든 인류는 하나님의 율법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창조주께서 인간의 양심에 새겨놓으신 율법이 이미 창조때부터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입은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다물어질 것이고, 온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처할 것입니다. 사도는 또한 에베소서에서 인간은 본질상 다 하나님의 진노의 자녀(진노를 받을 대상들)라고 선언합니다(엡 2:3).
iii. 지옥은 회개하지 않고 믿지 않은 죄인의 마지막 운명이다(막 9:43, 48).
인간에 관한 불편한 진실 세번째는 회개하고 믿지 않은 죄인의 마지막 운명은 영원한 지옥이라는 사실입니다. 지옥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도 유쾌할 수 없는데, 만일 내가 지옥으로 가야한다면 그것보다 더 큰 저주의 말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그것을 말합니다. 교양있는 사람에게,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에게, 그 누구에게라도 그가 만일 회개하고 복음을 믿지 않는다면 그는 영원히 지옥에서 보내게 될 것을 성경은 주저없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저주를 듣고 기분이 상하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4. 성경이 말하는 믿어지기에는 너무나 좋은 소식: 살 길이 있다!
여기까지가 복음, 좋은 소식이 주어지기 전의 나쁜 소식입니다. 불쾌할지라도 이 나쁜 소식이 없다면 그에게 복음은 결코 좋은 소식이 될 수 없습니다.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한 것을 기억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에서 제외된다는 것보다 더 두려운 것은 없다”고 제게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솔직하게 지옥가는게 두려워서 지금 교회를 다니고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분이야말로 하나님의 나라에 가까운 분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보다 더 복음이 좋은 소식으로 들려질 수 있는 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복음을 들을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잘 되어 있는 분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여전히 이 불쾌하고 기분 나쁜 이야기가 마음을 상하게도 하지 않고, 이것은 저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는 식으로 넘기는 사람이야말로 복음을 들을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고 복음의 은혜를 누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여러분의 기분이 지금 어떠십니까? 그리스도가 없다면 조금 전 제가 말씀드린 것들은 다 하나같이 여러분에 관한 이야기라는 사실을 아시겠습니까? 예외가 없습니다.
이 불쾌하고 기분 상하는 저주스러운 이야기 속에서 성경은 좋은 소식을 들려줍니다. 그것은 정말 좋은 소식입니다. 우리가 지옥을 면할 뿐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으로 바꾸는 이야기입니다. 마지막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가 완전 무죄로, 완전히 의로운 자로 판결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 21절에서 시작하는 이야기입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라고 말합니다. 본래 이 구절은 헬라어로 ‘그러나 이제는’이라고 시작됩니다.
이것은 이전의 이야기를 완전히 뒤집는 전환점입니다. 20절에서 율법의 행위로는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하나도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자기의 의로움, 도덕적 수준으로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뭔가 다른 상황이 되었습니다. 의롭다는 판단을 하나님께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게 뭔가 하면 ‘나의 의’로 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행위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만들어내는 의가 아니라 하나님이 제공하시는 하나님의 의가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즉, 살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22절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열쇠는 믿음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얻으신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길만이 우리가 살 길입니다.
A. 하나님께서 구주로 오셨다(눅 1:34,35; 히 4:15; 요 1:14): 신인(God-man).
이것을 우리는 하나님께서 구주로 오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동정녀의 몸을 입고 나셨다는 것은 기독교 복음의 사활이 걸린 문제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동정녀에게서 오신 것이 아니라면 그분은 온전히 아담의 자손으로 죄인으로 오셨다는 것을 우리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동정녀에게서 나신 것은 그리스도께서 죄없으신 인간, 즉 완전하신 하나님, 완전하신 인간으로 오셨다는 것을 증거합니다. 주님은 우리와 똑같이 연약을 체험하셨고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를 짓지 않으신 분입니다(히 4:15). 그분에게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이 있었고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습니다(요 1:14). 그는 태초에 성부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분께서 오신 것은 예수의 이름이 의미하는 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신인으로 말입니다.
B. 대속: 그리스도께서 나의 모든 죄를 인한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남김없이 받으셨다(마 1:21; 막 10:45; 마 26:27~28; 요 10:15; 갈 3:13).
그분이 오셔서 하신 일의 중심은 그분의 십자가 죽음에 있습니다. 그 죽음은 대속의 죽음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나의 모든 죄를 인한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남김없이 받으신 죽음이었습니다. 대속의 죽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라고 사도 바울은 설명합니다(갈 3:13).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하신 것은 실제로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저주와 진노를 받아 끊어져야 했던 것을 주님께서 대신 조금도 감함이 없이 다 당하신 것을 보여주는 절규입니다. 더 이상 남은 것이 없도록 주님께서 우리가 받아야 할 모든 죄의 값을 다 치르셨습니다.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죄로 여기셨습니다(고후 5:21). 왜냐하면 우리가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시려고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대속의 의미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교리의 핵심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이 교리를 미워합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피흘림의 제사들, 하나님께서 공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불경건한 자를 의롭다고 선언하시면서도 당신의 의로우심을 조금도 양보하거나 훼손하지 않으시는 방법이 바로 이 대속입니다. 갈보리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죽음은 대속의 죽음이라고 성경은 설명합니다.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죄인을 향하신 하나님의 형벌은 의롭게 집행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하심으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 24절에서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라고 선언합니다. 이것이 좋은 소식 곧 복음입니다. 우리가 들은 모든 불쾌하고 기분 상하는 이야기를 뒤집어놓고도 남을 만큼 충분한 좋은 소식입니다. 아니, 그 불쾌한 진실 덕분에 더 좋은 소식이 되는 복음입니다.
5. 반응: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하나님께서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와질 수 있는 모든 것, 죄인이 하나님께 의롭다함을 얻기 위해서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완전하게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다 공급해주셨습니다. 사람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위해서 요구하시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다 이루셨습니다. 이제 죄인들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완전한 구원을, 거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대속 사역을 완전히 성취하신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 남았습니다.
A. 믿을 때 일어나는 일: 위대한 교환-그리스도와의 연합(벧전 3:18)
믿는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다른 길로는 의롭게 될 소망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다른 모든 시도를 포기하고 내려놓는 것입니다. 자기 선행이나 자기 의의 모든 시도를 내려놓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끝이라는 것을 알고 부딪히고 나아가 그분을 붙잡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붙잡을 때, 그리스도를 믿을 때, 위대한 일이 일어난다고 성경은 설명합니다.
그것은 위대한 교환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는 예수님과 하나로 연합되고 이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께서 얻으신 하나님의 의를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의 죄와 죄에 대한 형벌을 다 그리스도께 돌릴 것입니다. 그리고는 마치 흠 없으시고 온전하시고 아름다우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시듯이 우리들을 바라보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믿음으로 내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죄를 지은 적 조차 없는 사람을 보시는 것과 같이 우리들을 바라보시는 것입니다. 믿어지지 않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B. 진정한 회개는 죄에 대한 마음의 태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킨다(갈 5:17).
그러나 주님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회개가 없는 믿음은 거짓 믿음입니다. 회개 없는 믿음은 없습니다. 회개는 자신의 죄에서 돌아서는 것입니다. 회개는 죄를 짓지 않는 완전한 상태에 이르게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회개하면 죄가 떠나가고 유혹이 멈추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제 죄와 편안하게 동거하지 않고 죄와 싸운다는 것을 뜻합니다(갈 5:17). 이것은 신자가 사는 날 동안에 계속되는 싸움입니다.
참 회개는 죄에 대한 마음의 태도의 문제이지 행동의 변화가 우선되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미워하고 싸우기 시작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죄인이 참으로 회개하고 복음을 믿게 되면 그에게 영적 생명이 주어집니다(엡 2:1,4~5).이때 변화가 즉각적으로, 빠르게, 반드시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삶은 반드시 변합니다. 참 그리스도인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그 변화의 시작은 성령께서 허락하신 새 마음, 거듭난 마음에서 시작합니다.
C. 믿음은 신뢰다.
회개와 함께 복음을 믿으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믿음은 신뢰입니다. 죄에서 구원하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입니다.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신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하나님의 의를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은 선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믿음은 그 선하신 하나님께 대한 신뢰입니다. 십자가에서 나타내시고 확증하여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죄인을 향하신 사랑을 느끼고 반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기 위해서 내세울 것은 오직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 되시고 우리의 구주요 주님이 되시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의 사실을 붙잡고 그리스도만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때,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그리스도께서 저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사 제가 받은 죄의 모든 형벌과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남김없이 다 받으셨습니다. 저를 향한 하나님의 형벌이 그리스도께 완전히 의롭게 집행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하나님의 자비로 구원을 받았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이 복음이 이미 좋은 소식이 되었습니까? 믿어지기에는 너무나 좋은 소식이 되었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저를 잡아주지 않으시면 저는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면서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십니까? 여기에 우리의 살 길이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이루셨고 해주셨기에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회개하고 돌이켜 이 복음을 받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죄인이다 /롬3:23; 1:18/ 김형익 목사
2021-05-04 04:06:52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표준에 미치지 못하였으나(현대인의성경)
1: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17세기 위대한 청교도 신학자인 존 오웬(John Owen)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겸손한 영혼을 지닌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것이 두가지가 있다. 첫째는 하나님에 대한 합당한 생각을 하는 것이요, 그 다음에는 자신에 대해 합당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그의 위대하심, 영광, 거룩하심, 능력, 위엄, 권위 등을 생각해야 하며,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우리의 천박하고 비참하고 죄악된 상태를 생각해야 한다.
오늘 우리는 읽은 두 구절의 본문을 통해서 너무나도 무서운 선언을 듣게 됩니다. 우리가 다 범죄했고 하나님의 영광에 도달하지 못하는 존재이며, 우리의 불경건과 불의로 말미암아 우리는 다 하늘로부터 임하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 모두 위에 머물러 있(었)다.
성경의 놀라운 선언을 우리는 여기서 만납니다. “
하나님의 진노는 그 표현에 있어서 정서적인 또는 감정적인 요소를 담고 있습니다마는, 우리가 쉽게 생각하듯이 어떤 자제력을 잃고 폭발해버리는 것과 같은 것으로 이해하여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그런 비이성적이고 통제할 수 없는 감정이란 의미가 아니라, 그 정도가 너무나 크다는 점에서 ‘진노’라고 표현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혐오’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선언을 하나님의 감정과 떼어서 이해할 수 없듯이, 하나님의 진노의 개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은 죄를 미워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죄, 즉 불경건과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죄인이어서 이런 가공할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 위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 성경의 타협없는 선언입니다.
이것은 나쁜 소식입니다. 그러나 이 나쁜 소식을 알지 못하면 복음은 결코 우리에게 좋은 소식이 될 수 없습니다. 그 복음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를 우리는 조금도 이해할 수 없게 될 뿐 아니라 기껏해야 기독교를 우리의 인생을 풍요롭게 해주는 종교로 치부하고 말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가운데, 믿는다는 사람들 가운데, 그리고 바로 우리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과 그 은혜의 크기를 제대로 알며, 또 알고자 하며 그 안에서 기뻐하는 모습을 찾아보기 힘든 것은 바로 이 나쁜 소식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2. 성경에서 말하는 ‘죄’: 죄는 불경건과 불의(롬 1:18)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고 있다고 이렇게 말해도, 그다지 놀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죄인이라는 성경의 선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비교적 괜찮은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더 나은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보좌 앞에 서게 될 때에는 절대로 그럴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의 기준을 인간에게 제시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에 도달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롬 1:18에서 사도 바울이 죄를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그 죄 위에 임하는 하나님의 진노도 이해할 것입니다.
A. 불경건이 불의를 낳고, 경건이 의를 낳는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죄를 두 가지의 단어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유발시킨 것은 두 가지로 설명됩니다. 바로 불경건(ungodliness or godlessness)과 불의(unrighteousness or wickedness)입니다. 불경건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드러낸다면, 불의는 인간관계 안에서의 죄들을 드러냅니다.
인간의 모든 죄는 바로 이 두가지 안에 귀속될 수 있습니다. 일례로 십계명을 생각해보십시오. 십계명은 두 개의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일계명에서 제사계명은 하나님께 대한 죄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오계명에서 제십계명은 사람들에 관련된 죄를 다룹니다. 즉 전자는 불경건이요, 후자가 불의입니다.
이 두 가지의 순서는 매우 중요합니다. 언제나 불의는 불경건으로부터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경건은 의를 낳는 것입니다. 불의가 불경건을 낳지 않고 의가 경건을 낳지 않습니다. 포도 나무가 포도 열매를, 무화과 나무가 무화과 열매를 내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불경건과 불의를 죄라고 할 때, 죄의 진수는 불경건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불경건은 어떤 모양으로든지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살고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찬미하기 위해서 사는 것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이런 소원이 없거나 약한 것이 바로 불경건의 본질입니다.
i. 죄의 반대말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타락 후, 인간은 죄인이 되어 짖는 것이 개의 본성이듯이, 죄가 인간의 본성이 되었습니다. 죄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하는 삶입니다.
그래서 불경건으로 대표되는 죄와 완전히 반대되는 개념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경건(godliness)으로 대표되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영광을 마땅히 가지고 있도록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이 죄를 범한 결과로 하나님의 영광을 더 이상 가지지 못하고 결핍하고 있다는 상태를 지적합니다. 이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엄위로우신 존재 자체를 의미하지만, 여기서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형상?그리스도를 닮아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닮아감이 경건이라면 우리는 범죄의 결과, 하나님의 영광을 상실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수준에 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ii. 죄는 불의의 목록이기 전에 불경건의 상태이다.
성경이 죄를 논할 때, 술취함이나 음행이나 이런 저런 죄의 목록들이 왜 먼저 나오지 않는가에 대한 해답은 죄의 본질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경건과 불경건의 문제?에 달려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실상 불의가 가능해지는 것은 오직 경건치 않음 때문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경건하면서 불의를 행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불경건과 불의의 큰 주제를 다루고 1장 24절부터 32절까지에 걸쳐 그 불경건과 불의의 목록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죄의 목록들이 불경건의 상태에 앞서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죄는 행위 이전에 우리의 상태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떠난 상태요,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상태요, 의를 행하는데 무능한 우리의 상태입니다. 첫 사람 아담의 실패를 생각해 보십시오.
B. 첫 사람 아담의 실패
i. 죄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우리에게 선을 베푸신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것(창 3:1~6)
아담과 하와는 배가 고파서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본질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반감과 불신 그리고 반역하려는 동기를 가지고 하와가 선악과를 먼저 따먹었고, 남편에게도 주어 먹게 한 것입니다. 너무 심하게 말한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아주 많은 것들을 주시지만 우리는 금지된 것을 마음대로 하게 될 때까지는 결코 만족하지 못합니다.
(어거스틴은 그의 참회록에서, 어린 시절 남의 밭에 들어가 배를 서리한 것을 고백합니다. 그의 집 밭에도 배나무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쾌감을 주었던 것은 배 자체가 아니었고, 도둑질하는 죄였다고 그는 고백합니다.)
다니엘 풀러(Daniel Fuller)라는 신학자는 이렇게 죄를 정의합니다: 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언제나 최상의 것을 주신다는 것을 믿지 않고 의심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형편에서의 불만족은 바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곧 불경건이 됩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시는 것이 최상의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고, 하나님 안에서 최고로 만족하지 않았기 때문에,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스스로 최고의 만족을 쟁취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지난 주, 우리가 아침에 공부한 것을 기억하십니까?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최고로 만족을 누릴 때,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최고로 영광을 받으신다.
반대로,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만족을 누리지 못할 때,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조금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로 인하여 그 영광을 모독 당하고 계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불만과 불평을 통하여 하나님을 모독합니다.
이것, 오로지 하나님 안에서 만족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 가운데 나는 죄없다고 심판자이신 하나님 앞에 설 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ii. 죄는 독립선언
뿐만 아니라 죄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독립선언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을 삶의 기준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내가 내 인생의 기준이고, 주인입니다. 내가 설정한 원칙과 기준에 따라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인생을 살아갑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배제한 채 자기 정체성을 추구하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결코 하나님을 떠나서는 자기의 정체성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말했습니다: 당신은 우리 인간의 마음을 움직여 당신을 찬양하고 즐기게 하십니다.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향해서 살도록 창조하셨으므로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서 안식 할 때까지는 평안하지 않습니다. (고백록 1:1)
하나님을 떠나 살겠다는 독립선언은 최초의 사람 아담 안에서 일어났고, 우리는 에덴을 쫓겨난 타락한 자의 후손으로 하나님을 떠난 자로서 태어나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질상 다 진노의 자녀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엡 2:2). 우리의 삶의 모습들이 그것을 증거합니다. 우리의 본질적 성향들이 그것을 증거합니다. 비록 우리가 아무리 선한 삶을 인간 세상에서 살아왔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C. 둘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영광과 경건을 완벽하게 보여주신 삶
비록 첫 사람 아담은 실패했지만, 그리고 우리는 모두 실패한 아담의 후손으로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인생을 살지만, 둘째 아담?사람의 아들로 오신?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사는 것이 무엇인지, 죄와 무관하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참 경건이 무엇인지를 완벽하게 살아내심으로써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하고 사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소원만을 추구하고 사는 것이 무엇인지 삶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과 연합된 삶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분의 유일한 관심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아버지의 영광이었습니다. 이것이 본래 우리가 살도록 부름받은 삶이라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의 소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더 알고 사랑하고 그를 기뻐하는 것이 되어야 하고, 그래서 그의 뜻을 행하는데 우리의 모든 힘이 쓰여져야 합니다. 이것이 불경건의 반대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삶의 모습입니다.
D. ‘선하고 도덕적인 사람들의 특별한 죄’
누군가 성경에 나오는 죄의 목록들(롬 1:24~32)을 살펴보면서 나는 이런 죄를 짓지 않았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준 삶을 사는데 실패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그들도 다 죄인인 것입니다.
E. 경건한 목사와 악한 살인범은 같은 자격으로 하나님의 법정 앞에 선다.
오직 이런 죄에 대한 관점에서 비로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경건한 목사와 악한 살인범은 같은 자격으로 하나님의 법정 앞에 선다.
사람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불의보다 불경건을 앞에 두는 것입니다. 우리는 불의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불경건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 불경건은 사실상 불의로 우리를 데리고 가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구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범죄하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 모든 사람에게는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진노가 머물게 되는 것이고 마지막날에 그 진노가 퍼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목사와 강도가 구별이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하심을 의지할 수 밖에 없습니다.
3.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존재들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의 영광의 표준에 이를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자격 조건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부적격자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역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니, 은혜의 의미 자체가 역설입니다.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호의가 은혜라면, 은혜는 자격이 있는 자에게 주어지는 한 더 이상 은혜일 수 없습니다. 오로지 자격없는 자에게 주어질 때 그것은 은혜입니다. 그 자격없음에 대한 인정은 하나님 앞에 죄인되었고 그러기에 하나님의 진노 밖에는 받을 것이 없으며 우리가 이땅을 마치고 영원을 지옥에서 보내기에 합당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행복하든지 비참하든지, 부자이든지 가난한 자이든지, 도덕적이든지 부도덕적이든지, 배운 자이든지 배우지 못한 자이든지, 여자이든지 남자이든지, 살인강도이든지 목사이든지 제가 던지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까? 전적으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 계십니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다 죄인임을 기억하십시오. 이것만이 우리를 복음으로 인도하는 슬픈 소식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슬픈 소식은 우리를 복음으로 인도하기에 결코 영영 슬픈 소식일 수 없는 오히려 기쁜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아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는 이미 복음 안에서 풍성하게 나타났습니다. 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의 수준, 곧 하나님의 영광에 도달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의는 복음 안에서 풍성하게 이미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거저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입니다(1:17). 그것이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나타났습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진노는 다 나타났고 거기서 만났습니다.
모든 불경건과 불의를 향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난 하나님의 진노가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남김없이 다 쏟아부어졌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 죄없으신 성자이실지라도,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절규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도록 하나님의 진노는 그분 위에 쏟아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죄인들에게 나타난 방식입니다. 이것은 구원하는 은혜입니다. 여기에 좋은 소식인 복음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실 때, 거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진노를 보아야만 합니다. 거기서는 하나님의 사랑만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완전하게 나타나 부어졌기에 거기에 하나님의 은혜도, 사랑도 있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진노의 잔은 결코 지나갈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잔을 다 마시셨습니다. 남김없이 찌꺼기까지도 다 마시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위해서 죽으신 것을 분명하게 인정하고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조금이라도 미쳐지지 않도록 완전하게 그 잔을 드셨습니다. 할렐루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자기가 전혀 소망이 없음을 깨닫지 않고서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 나아갈 오직 유일한 이유는 어떤 육체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율법에 의해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깨달으셨습니까?
정말 의인은 하나도 없을까? /롬3:9-20/ 유기성 목사
2016-08-25 13:58:20
오늘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원죄 교리에 대하여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10에 “의인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죄인이라는 말인데, 거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이 교리를 믿습니다. 하지만 실제는 믿는지 애매한 교인들이 많습니다. 구원의 감격이 없는 것도 그렇고 용서가 안 된다는 것도 그렇고 다른 사람을 대할 때, 은혜롭지 않은 것을 보면 더 그런 것 같습니다.
복음학교에 다녀온 어느 목사님이 소감을 말하는데, “내가 정말 죄인이라는 것 하나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귀한 것을 깨닫기는 했는데, 그렇다면 그동안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몰랐다는 말입니까? 들어서 알고 있었던 것이지 마음으로 동의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가 죄인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 ‘지옥에 간다’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하는 교인들도 많습니다.
그것은 죄를 거짓말도 좀 했었고 부모님 말씀 좀 어겼고 남의 것에 손댄 적도 있었고 음란한 일을 한 적도 있었고 누구와 싸운 적도 있었던 정도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가정 파괴범이나 살인자나 사이코패스 같은 사람이라면 몰라도 거짓말이나 싸운 것이나 음란에 빠졌던 죄 때문에 지옥에 가야 한다니?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죄의 본질을 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가지는 오해입니다.
우리가 이처럼 의인이 있고 죄인도 있다고 보는 것은 드러난 죄의 열매로 사람을 구분하기 때문입니다. 사과나무가 있습니다, 어느 해 많은 사과가 열렸습니다, 어느 해는 거의 사과가 열리지 않았습니다, 사과나무인 것은 똑같은 것입니다. 열매가 많이 열리는 사과나무가 있고 열매도 맺지 못하는 사과나무도 있는 것이지 사과나무인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질이 악하고 죄지은 일이 많은 죄인이냐, 죄를 거의 짓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죄이냐 차이일 뿐이지 죄인인 점에서는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죄는 무엇을 하고 안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1장에서는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죄악을 폭로하였고, 2장에서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유대인들의 죄악을 고발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믿던 믿지 않던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3장에서 유대인들의 죄악에 대해서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자신들이 이방인과 같은 죄인임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은 이방인들과 다르다면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을 내세웁니다. 그 점은 사도 바울도 인정했습니다.
롬 3:1 그러면 유대 사람의 특권은 무엇이며, 할례의 이로움은 무엇입니까? :2 모든 면에서 많이 있습니다. 첫째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고 의인이라는 말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문자답 말합니다.
:9 “우리 유대 사람이 이방 사람보다 낫습니까? ...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죄는 근본적으로 율법을 아느냐, 모르느냐, 율법을 잘 지켰느냐, 지키지 못했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의 근본 본성을 따지는 것입니다.
1995년 10월 7일 자 국민 일보 [삶의 창가에서]란 칼럼에 실린 내용입니다.
필자가 서울 대학병원 특실에 입원하신 연세 높은 어른께 문병 갔었는데, 그는 외교관 출신으로 ‘신사 중에 신사’였고 점잖고 예절 깍듯한 분이셨답니다. 그런데 병실에 들어서자마자 그 분의 부인이 황급히 구석으로 데리고 가더니 ‘미리 말씀드릴 일이 있는데, 대사님께서 쌍욕을 하시더라도 놀라시지 말고 양해해 달라’하더랍니다, 상대가 누구든 간에 사람을 보면 덮어놓고 욕부터 한다는 것입니다.
육십 평생 욕이라고는 단 한마디도 안했을 뿐더러, 남이 욕하는 걸 보는 것조차 질색하던 분이 입에 담기도 민망한 욕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남부끄럽고 죄송해 죽겠다고 부인이 탄식을 했답니다.
그러자 간병인인 여자가 정신을 놓아버린 뒤 저렇게 욕이나 하는 환자는 아주 양호한 편이라면서 자신이 주로 대학병원 특실의 상류 사회 환자들에게 고용되어 사회적으로 유명했던 분들을 많이 간병했는데 그들 중에 얼마나 해괴한 환자가 많았는지 어느 분은 닥치는 대로 사람을 물어뜯는 분도 계셨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어떤 존재입니까? 마구 욕하고 싶고, 마구 물어뜯고 싶은 욕구가 그토록 강렬하게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는 것을 평생 억누르면서 산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11-17에서 모든 인간의 죄인됨을 구체적으로 언급합니다.
:11 깨닫는 사람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도 없다. :12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13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다. 혀는 사람을 속인다. 14입에는 저주와 독설이 가득 찼다. 15 발은 피를 흘리는 일에 빠르며, 16 그들이 가는 길에는 파멸과 비참함이 있다. 17 그들은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한다.
사도 바울의 이 말에 대하여 쉽게 수긍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입니다. “의인이 있던데? 선한 일을 하는 사람도 많은데?” 실제로 평범한 사람들이 감히 범접하기 어려울 만큼 의롭고 훌륭한 위인들이 있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은 어째서 이처럼 단호하게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사도 바울은 죄의 본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8에서 지적합니다.
:18 "그들의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빛이 없다."
그렇습니다. 죄의 본질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니 하나님을 모를 수 밖에 없고 하나님을 모르니 두렵지도 않은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죄를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는데서 봅니다. 여러분, 선악과 열매를 먹은 것이 온 인류의 원죄라고 할 만큼 그렇게 큰 죄입니까?
아버지가 아들에게 ‘사탕은 절대 먹지 말라’ 고 한 뒤 아들이 어느 날 사탕을 먹은 것을 보고 “이 나쁜 놈, 너는 더 이상 내 아들 아니야, 당장 집에서 나가라” 하는 것과 같지 않습니까?
선악과를 따먹은 죄를 윤리 도덕의 차원에서 보면 이해가 안 됩니다.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은 사건입니다.
이 죄는 마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에덴동산은 모든 환경이 다 좋았습니다. 완벽했습니다. 그런데 마귀가 하와의 마음에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하여 의심하는 생각을 심었습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눈이 밝아져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는 유혹을 심었습니다. 그것을 하와가 마음에 품은 것입니다. 그러자 선악과가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해 줄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선악과를 따 먹는 것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은 하와에게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하와의 하나님은 자기 자신입니다. 아담의 마음에도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아내의 말 사이에서 갈등하였지만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습니다. 그래서 같이 선악과를 먹은 것입니다.
이것이 원죄입니다. 이것은 작아 보이는 아담과 하와의 마음에서 일어났지만 분명히 왕을 내어 쫓는 반역이었습니다. 죄란 사람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롬 1:28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 없이 살려는 것, 마음대로 살고 싶은 욕망이 죄의 실상입니다.
자녀들을 길러 보면 어쩔 수 없이 ‘이것은 하지 마라’, ‘저것은 이렇게 하라’는 말을 하게 됩니다. 아무리 부드럽게 말하고 자녀들 입장에서 말해 주어도, 결국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자녀가 사춘기가 되면 부모의 말에 대하여 반항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엄마 아빠 마음대로 하면서, 왜 나는 아무 것도 못하게 하세요!” 말합니다. 부모 입장에서는 너무나 억울합니다. 아무 것도 못하게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따지고 싸워도 허사입니다. 자녀들은 “이젠 내 마음대로 살고 싶으니 간섭하지 마세요.“ 독립 선언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다르십니까? 우리도 하나님께 꼭 같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만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라 하셨으니 제게 이것도 도와 주시고 저것고 응답해 주세요. 좀 잘 살게 해주시고 편안하게 해주시고 성공하게 해 주세요. 라고 기도한다면 그는 아직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여전히 자기가 하나님인 사람입니다.
사람에 따라서 죄의 열매가 많은 사람이 있고, 죄의 열매가 적은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은 그것을 가지고 흉악한 죄인, 또는 의인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 같다고 말씀합니다. 마음에 하나님이 왕이 아닌 것은 같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주님은 눅 18장에서 부자 관원인 한 청년을 통하여 보여주셨습니다. 그는 영생 얻는 방법을 가르쳐달라고 예수님께 찾아왔습니다. 그는 평생 율법을 어긴 적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죄가 율법을 지키느냐 아니냐 로 따지면 이 청년은 영생을 얻을 자격이 충분한 의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에게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재물을 가난한 자들에게 다 나누어 주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 영생을 얻지 못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마음에 정말 예수님이 주인이시냐는 것을 묻는 것입니다.
마음에 주님이 왕 되신 사람에게는 재물을 다 나누어주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 아 문제가 안됩니다. 그러나 부자 관원 청년은 온 몸이 굳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에게 영생에 관하여 갈망이 있었지만 마음의 왕은 재물이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재물을 버리고 영생을 얻는’ 상상할 수 없는 축복을 받는 순간에 그는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결국 마음의 왕이 누구냐에 따라 우리의 운명은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의 마음의 주인은 재물의 욕심이었습니다. 그것을 온갖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감추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가 대단히 훌륭하다고 칭찬했을 것입니다. 스스로도 그렇다고 착각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명예심, 자존심, 의지력으로도 얼마든지 율법을 잘 지키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자기 속마음을 감추고 영생 얻은 자인 것처럼 꾸밀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죄성, 하나님이 주인이 아닌 마음이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율법으로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이 청년의 죄는 무엇입니까? 율법을 지키고 지키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으로는 우리가 결코 의로와 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변화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단지 우리가 죄인임을 드러내는 역할만 할 뿐입니다.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인식할 뿐입니다.
여러분 알아야 합니다.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 싫어하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거절하는 것이고 배척하는 것이고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니 결국 가는 곳이 지옥인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윤리적인 죄 보다 더 큰 죄가 영적인 죄임을 알게 됩니다. 교만이 가장 큰 죄인 것입니다. 교양 있고 경건한 바리새인이 오히려 세리보다 더 죄인인 이유가 여기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자신이 지옥에 갈 죄인임을 깨닫는 것이 엄청난 은혜라는 사실입니다. 구원의 시작입니다. 오직 성령님만이 우리의 이 죄를 깨닫게 해 주십니다.
노진준목사님이 고등학생 때 주님을 영접하고 아버지를 교회로 인도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교회 가세요”라고 말씀을 드렸으나, 아버지는 거절하셨습니다. 좀더 적극적으로 복음올 전해야겠다고 생각하여 아버지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아버지는 죄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죄인들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아버지도 예수님을 믿어야 죄사함을 받고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라고 했더니 “내가 무슨 죄 인이냐? 내가 살인을 했냐? 도둑질을 했냐? 내가 지은 죄라고는 너희들 키우느라 고생한 죄 밖에 없다"
이에 아버지께서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증명해야 할 거룩한 사명을 느끼고는 기억하는 대로 5학년 때 술 취해서 이유 없이 자기를 때렸던 이야기, 어머니와 싸우면서 어머니에게 욕하고 손찌검한 이야기 등을 말씀드리고 ”이래도 정말 아버지가 한 일이 기억나지 않으세요? 이래도 아버지가 죄인이 아니라고 말하실 수 있어요?" 라고 말씀드렸는데, 그날 아버지에게 무지하게 혼이 났답니다.
[다시 복음 앞에] WEC유병국선교사, 아프리카 감비아에서 선교할 때, 오는 사람들에게 성경 가르쳤는데, 어느 날 무슬림 고등학교 교사 한 사람이 성경을 배우겠다고 찾아 왔답니다. 선교사가 안 가르칠 수 없잖습니까? 그러나 알고 보니 그는 선교사님과 싸우려고 온 것입니다.
교리 싸움을 해서는 전도도 안되고 어려움만 당할 것이 뻔한데, 고민하다가 4영리를 가르치기로 하고 “당신은 학생이고 나는 선생이니 내가 가르칠 동안 질문하라 하기 전 에 질문하지 마라 질문 시간 줄 것이다.” OK 하였답니다.
그러나 질문 시간을 안주었답니다. 그랬더니 안절부절 못하더랍니다. 계속 언제 질문해도 되느냐고 묻더랍니다. 결국 질문 시간을 주기로 한 날 공부 끝나고 기도하려는데, “오늘은 내가 기도하면 어떻겠느냐?” 당황, 기도하라 “주 예수님 나는 죄인입니다.”
얼굴에 땀을 비 오듯이 흘리며 기도하였습니다. “당신은 예수님을 믿게 된 거요?” 물으니 자신이 모슬렘 교리로 이 선교사님을 뭉게 버리려고 왔는데, 복음을 듣고 나흘 만에 뒤집어졌다는 것입니다. 지금 6교회 세웠고 이웃 나라에도 교회를 세웠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마음으로 거부하였다, 지옥에 갈 죄인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괴로운 일이지만 이 사람이 주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게 됩니다. 그래서 마음이 뒤집어지는 것입니다. 그는 반드시 변화된 삶을 살게 됩니다.
제가 죄인임을 깨달았을 때, 제게 소원이 하나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 “수고했다. 내 종아!”라는 말을 듣는 것 뿐 이었습니다. 감사만 하며 사랑만 하며 사는 것입니다. 누구나 그럴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정말 지옥에 갈 죄인임을 언제 아셨습니까? 그것을 깨닫는 것이 은혜 생활의 시작입니다. 이것을 깨달은 사람이 모든 상황이 감사하고 모든 사람에게 은혜로우며 사랑만 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모인 교회야 말로 은혜로운 교회입니다.
러시아 개방될 때, 한 목사님이 돌려받은 예배당 수리하고 있는데, 교회 밖에 찾아온 여자 4명이 있었습니다. 그녀들은 악수도 하지 않고 물었습니다. “우리는 창녀입니다. 우리도 용서받을 수 있는지를 알고 싶어서 왔습니다.” 그들이 복음을 듣고, 예수님 영접했습니다. 그리고는 기뻐하면서, 교회 안으로 들어 왔습니다.
필립 얀시는 “세상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교회만이 줄 수 있는 한 가지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그것은 은혜입니다.
교회가 아닌 어디에서 은혜를 발견할 수 있을까요? 교회가 아닌 어디에서 진정 마음이 변화된 사람을 어디서 찾아 볼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자신을 보는 눈이 뜨여야 합니다. 지옥에 갈 죄인입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거부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또한 알아야 합니다, 주님이 그런 우리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우리 안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 아래 있는 인간이 살 길이요, 기적 같은 은혜입니다.
정말 믿기만 하면 의롭게 될까? /롬3:21-31/ 유기성 목사
2016-08-25 14:04:46
저는 어릴 때부터 행복은 성적 순 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선생님들이 ‘3년 죽어라 고생하면 30년 편안하다’고 한 말이 사실인 줄 알았습니다. 아니었습니다. 저는 사람이 선하고 악한 데도 등급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천국에 갈만큼 선한 사람도 있고 지옥에 가야 마땅할 악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이런 생각이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죄인이 아닌 사람이 없음을 알았습니다. 고상하고 교양 있는 사람이 더 죄인일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지난 주간 간통죄가 폐지되었는데, 안타까운 일입니다. 간통죄가 있어도 간음을 막지 못합니다. 그러나 배우자가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 간음한 것이 죄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어떤 분이 예수님도 간통을 죄가 아니라고 했다고 주장하여 깜짝 놀랐습니다. 아닙니다. 예수님은 교만의 죄, 남에게 돌 던지는 죄를 지적하신 것이지, 간음이 죄가 아니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윤리적인 죄 보다 더 큰 죄가 영적인 죄입니다. 교만이 가장 큰 죄인 것입니다. 교양 있고 경건한 바리새인이 오히려 세리보다 더 죄인인 이유가 여기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율법을 잘 지켜서 의로와 질 수 없습니다. 팀 켈러목사가 비유로 설명했습니다. 율법을 지켜 의로와지려는 것은 태평양을 헤엄쳐 건너가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세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수영을 못합니다. 또 한 사람은 수영을 좋아하고 꽤 수영실력도 있습니다.
또 한 사람은 국가대표 수영선수입니다.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첫 사람은 바다에 들어가자마자 익사했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처음에는 꽤 나가더니 얼마가지 못해 허우적거리다가 바다에 가라앉았습니다. 수영 선수는 4.8km 지점에서 지치기 시작하여 6.4 km에서 힘이 소진되더니 8 km 지점에서 익사했습니다. 수영실력은 다르지만 태평양을 건널 수 없다는 점에서는 똑같은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율법을 지켜서 의로와질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를 가지고 사람을 차별하면 그 자체가 죄입니다. “저 사람, 범죄형이야!” 아닙니다. 우리가 다 범죄형입니다. 곱상한 범죄형이 더 무섭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과 상관없이 의롭다함을 받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속죄의 십자가 복음을 듣고 주 예수님을 믿는 길입니다,
롬 3:21 그러나 이제는 율법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22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오는 것인데, 모든 믿는 사람에게 미칩니다. 거기에는 아무 차별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길은 율법을 지키는 것과 비교하면 말할 수 없이 쉽습니다. 그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라고 말합니다.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에 못 미치는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24 그러나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얻는 구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는 선고를 받습니다.
이처럼 믿음으로 구원받는 길은 낯선 길이 아닙니다. 이미 구약에서 보여주셨습니다.
:21 .. 그것은 율법과 예언자들이 증언한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가 그것입니다. 구약의 속죄 제사의 핵심은 제사 드리는 자가 자기 죄를 제물에 전가한 다음 그 제물을 죽이는 일입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제사 드리는 자와 희생 제물을 동일시하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제물이 피 흘려 죽으면 제사 드리는 자가 죽은 것으로 간주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과의 화해된 삶을 살 길을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제사 드리는 자는 제물의 흘린 피를 보고 자신이 죽었음을 믿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구약의 속죄 제사는 모형입니다. 그 원형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25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를 속죄 제물로 내 주셨습니다. 그것은 그의 피를 믿을 때에 유효합니다. ...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원한 속죄제물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주 예수님이 죽었음을 봅니다. 속죄제물이 되신 예수님은 죽었으니, 죄인인 우리도 죽은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믿으면 우리는 모든 죄에서 사함을 받습니다. 이것이 그 피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지킴으로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할례 받은 유대인도 할례 받지 않은 사람들도 다 마찬가집니다.
:30 ...하나님께서는 할례를 받은 사람도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하시고,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도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하십니다. 이처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의 특징은 자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27 그렇다면 사람이 자랑할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믿음을 자랑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내가 믿었으니 구원을 받았어!” “나는 너 보다 믿음이 좋아!” 이런 극단이 구원파 이단입니다. 믿음을 구원의 조건으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분은 오직 예수님입니다. 믿음 따로 있고 예수님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라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만 의지하고 예수님께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전혀 자랑할 것이 아닌 것입니다.
믿음에 대한 큰 오해가 또 하나 있습니다.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은 안 지켜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말씀과 별개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반문합니다. :31 그러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율법을 폐합니까? ...
사도 바울은 전혀 의외의 말씀을 하십니다.
:31 “... 그럴 수 없습니다.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웁니다.” 이 무슨 말씀입니까? 율법을 지켜서 의로와 지는 것이 아니고 오직 주 예수님을 믿기만 하라고 하더니 율법을 굳게 세운다니요? 믿음을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질문이 생기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죄인이라고 믿게 하려고 설득을 한다고 합시다. “당신은 거짓말 한 번도 안했습니까?” “여러 번 했었습니다.” “그러면 당신도 죄인 이군요” “그렇군요”
이제 이 사람은 자신이 죄인이라고 믿은 것입니까? 아닙니다. 머리로 인정은 했지만 아직 죄인이라는 애통함이 없다면 죄인임을 믿은 것이 아닙니다. 그런 믿음으로는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습니다.
전도할 때도 믿음을 설득하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다 죄인인데, 예수님께서 모든 죄를 다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니 누구든지 이것을 믿으면 모든 죄를 용서받고 의롭다 인정을 받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나도 믿겠소!” 그러면 다 들 모여서 축하합니다. “이제 당신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고 인사를 합니다. 당사자는 약간 어리둥절합니다. ‘정말 이렇게 구원받은 것인가? 이젠 정말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에 간다는 말인가?’
이런 믿음은 아직 구원받을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구원받을 믿음은 믿었기에 삶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구절이 많습니다.
롬 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여기서 ‘믿기만 하면 구원 받는다’고 했는데, 이것은 매우 심각한 결단을 필요로 합니다. 당시는 로마제국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주로 시인한다는 것은 ‘예수가 왕 王인가?’ 아니면 ‘로마 황제가 왕王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죽음을 각오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수많은 순교자가 나오지 않았습니까?
믿는다는 것은 이처럼 삶을 완전히 바꾸는 것입니다. 믿음은 예수님과 온전히 연합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유명한 구절이 요 3:16입니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은 그리스도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서 주목 해야 할 부분은 “믿는 자 마다”라는 구절입니다. 여기서 ‘믿는다’ 말은 헬라어 원문성경에서는 ‘believe’라는 단어에 ‘in’을 함께 사용하는데, 이 동사구는 ‘believe’라는 동사와 판이하게 다릅니다.
‘believe in’은 믿는 자와 믿는 대상의 관계를 중요시한 구절입니다. 믿기 때문에 예수님을 마음에 주님으로 영접하여 자신의 삶의 왕으로 모시고 산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다시 태어나는’ 소위 ‘중생’하는 것이며,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것’입니다. 이 때, 믿는 자는 의의 열매를 맺게 되고 이웃 사랑의 열매도 맺게 됩니다. 이런 믿음이 아닌 그저 ‘believe’하는 것은 교리적인 지식일 뿐입니다.
페이스 북에 어느 교우가 안타까운 글을 올렸습니다. 이번 명절에 구순이 되신 시어머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사위를 용서하게 되기를 기도했는데 시어머님이 사위를 용서하고 받아들이지 못하신다는 것입니다. 사위는 10년 전에 딸에게 돌아왔습니다. 그 사위를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시어머님은 집안에서 정말 신앙 좋은 분 기도 많이 하는 분 감사로 사는 분으로 알고 있는데 누굴 용서 않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가시면,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던 사람이 될까 두렵습니다. 어머님 가슴에 손을 얹고 "어머님, 여기에 예수님 계신가요?"
이렇게 물었더니 "계신다고 믿는다"라고 대답하셨어요. 깜짝 놀랐습니다. ”내 마음에 계시다“ 하고 분명히 대답하지 못하시고 애매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구원은요? 어머님이 받으신 그 구원, 그 용서는 사위를 용서할 만큼 크지 않나요? 그 잘못을 용서할 수 없을 정도로 하찮은 거예요? " 했더니 "구원은 예전에 받았잖아"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의 믿음을 이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예수님을 믿어 속죄 받고 의롭다 됨을 무엇으로 증명할 것입니까? 의롭게 살며 원수도 사랑하는 것으로 증명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님이 되셨으니까요! ‘believe in’과 ‘believe’의 차이점에 대하여 야고보 사도가 날카롭게 지적하였습니다.
약 2: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죽은 믿음이 바로 ‘believe’ 만 하는 믿음입니다. 행함이 따르지 않는 믿음입니다.
약 2: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여기서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고 할 때는 ‘in’이라는 전치사 없이 believe만을 썼습니다. 귀신도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압니다. 그들도 하나님 앞에서 떱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 안에 있지 않습니다. 이런 믿음은 구원받은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셨을 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고백한 사람이 세례 요한 다음에 누구신지 아십니까? 거라사의 귀신들려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막 5:6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7 큰 소리로 부르짖어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 하니
귀신이 예수님을 먼저 알아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런 믿음은 구원받는 믿음이 아닙니다. 지적으로 동의하는 믿음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믿음은 언제나 순종과 함께 갑니다. 믿음은 예수님과 온전히 하나로 묶는 끈이기 때문입니다.
롬 1: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믿음과 순종이 같은 의미로 번갈아 기록되었습니다.
요 3:36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우리가 진정 은혜를 제대로 누리려면 믿음이 바뀌어야 합니다. 어제 영성일기 증인 모임에서 한 집사님의 간증이 귀하였습니다.
[올해 1월 2일 , 목사님께서 '이제 순종만 하고 살라' 라는 제목으로, 신년집회 말씀을 전하실 때, ‘영성일기를 순종일기가 되게 해 보자!’‘주님을 생각하고 바라보는데서만 그치는것이 아니라 이제는 무엇을 순종했나 기록만이라도 해 보자!’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다음날부터 몇월 몇일 순종일기 라는 제목을 붙여서 순종일기를 쓰기 시작했어요. 그로인하여 주님은 자녀 양육에 있어서 제게 변화를 주셨습니다.
(3년전) 2012년 6월 9일 일기:
더 많이 주님께 여쭈어봐야 할텐데, 아직도 내가 알아서 혼자 처리해버리는 일이 너무 많다. 오늘 큰아이를 훈계하는 일에 있어서도 그랬다. 참 유창한 말로, 그럴듯하게 아이의 잘못을 지적했고, 아이에게 잘못된 행동을 수정하겠노라 다짐도 받아 내었다. 그러나 ... 마음은 개운치 않다. 하나님의 온전한 그 사랑으로 아이를 바라보지 못 했기 때문이리라! 주님...
2015년 2월 5일 일기 :
큰아이로 인해 마음이 잠시 요동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잘못을 알고 있는 아이를, 더 이상 야단치지 말라는 마음을 주셔서, 그렇게 되기를 원했더니, 순종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순종한 후 돌아보니 정말 잘했다 싶습니다. 계속 멈추지 못하고 똑같은 소리를 또 하고 또 하며 아이를 혼냈다면... 엄마하고의 관계에서조차 사랑과 은혜를 경험치 못 한, 아이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죄를 도말하시고 더 이상 기억치 않으시는 그분의 은혜를 과연 믿을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오, 주님! 감사합니다...
이렇듯 주님은 부족한 엄마인 저를 주의 사랑과 은혜를 자녀에게 흘려보내는 통로로 온전히 사용하시려고 저를 변화시켜 가고 계십니다 또 주님은 시댁부모님과의 관계에서도 변화를 주셨습니다.
(3년전) 2012년 7월 17일 일기 :
매일 아침 남편 편에 어머님 드실 과일 챙겨서 보내고, 퇴근하며 아이들 데리고 병원 가서, 어머님께 인사 먼저 드리고 집으로 오는데도, 어머님께서는 편찮으셔서 그런지, 고맙다 애 쓴다 소리 한마디 없으시니 참 서운해요.
재활치료를 위해서 모신 지금의 병원도 마음에 들지 않으시는지, 불편하다 소리만 하시니, 어찌 모셔 드리고 어찌 그 마음을 헤아려 드려야할지 ... 주님...힘들어요...주님...자신없어요...
2015년 1월 25일 :
양평 시댁에 늦은 시간 도착했습니다. 저녁을 해 드리러 간 것인데, 5시 30분이 넘어서야 도착하니 이미 시부모님들께서는 저녁을 다 드셨다하십니다. 몸이 불편하신 부모님 찾아 뵙고, 밥 한 끼 해서 같이 먹고 오는 일인데.. 죄송한 마음으로 어머님을 뵈서 그런지, 서운함에 언잖으신 듯 보이셔서, 맘이 편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오기 전 언제나처럼 어머님을 위해 기도하기를 원하시는 주님... 어머님 손을 붙잡고 기도하는데 눈물이 주르르 흐릅니다... 기도를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서 어머님 좋아하시는 드라마가 시작된 듯싶어 기도를 급히 마무리하려는데, 어머님께서 티브이 볼륨을 줄이실 줄이야.
주님... 주님이십니다. 가끔 아직도 저는 문득문득 어머님께 나아가기가 어려울 때가 있어서, 나도 모르게 피하고 싶어 도망갈 때도 있지만, 주님 바라보고 나아가면, 늘 한결 같이 주안에서 영으로 교통케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주님이셨습니다. 이 모든 변화의 주인공은! ]
여러분 이제는 진정 예수님을 믿고 살아보시기를 축복합니다. 믿음은 예수님께 걱정과 근심을 다 맡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왕으로 모시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주님께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제는 율법생활에 매여 평생 두려움에 사로 잡혀 지내거나 서로 정죄 판단하며 사는 삶은 청산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진정한 구원의 삶입니다. 그러면 마음의 주인이 되신 주 예수님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있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admin
폴워셔 2013년 한국 사경회 4-1강 /롬3:23
2015-06-18 15:58:05
◑서론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롬3:23
▶저는 여러분에게, 얼마나 자주 위 말씀을 기초로 설교하는 말씀을 들었는지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이 분문의 말씀을 기초로, 설교하는 것을 들은 마지막이 언제입니까.
이 본문의 말씀을 깊이 있게, 여러분 스스로 공부하거나 묵상한 적이 있으십니까?
제가 이것을 묻는 이유는 이것입니다.
지난 교회 역사를 통해서
많은 신학자들과 설교자들이, 이 본문 말씀이,
모든 성경 가운데, 제일 중대한 말씀이라고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찰스 스펄전과 마틴 로이드존스 목사님이, 본문의 말씀을 가리켜서
‘기독교신앙의 강력한 요새 fortified city of the Christian faith’라는 표현으로,
그 중대성을 설명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본문 말씀을, 어디를 가든지, 아주 강조해서 설교합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현대 기독교와 복음주의가, 지나간 세대의 기독교와 복음주의가
판이하게 상이하다는 것을 알려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과거 시대에 가장 중대하게 강조되었던 하나님의 말씀(죄와 그 결과에 대한 강조)이
지금 시대에 선포되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대단히 걱정스럽게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시간에, 롬3:23~31절의 이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을 다시 한 번 점검하기를 원합니다.
그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설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구절의 중요성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 역사를 보십시오.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 질문해 보십시다.
‘내가 과연, 과거 교회역사에 존재했었던 경건했던 남자,
경건했던 여자들과, 동일한 경건한 신앙의 사람으로 간주되고 있는가?
아니면 그 경건한 계보에서 이탈해 있는지..
내가, 역사적이며 성경적인 기독교로부터 혹시 이탈하지는 않았는지..
세밀히 살펴보기 바랍니다.
제 예상으로는 이 본문을 가지고, 2강, 내지 3강의 시간을 갖기 원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믿기로 이 본문 말씀이야말로
‘복음의 심장 heart of the gospel’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스펄전과, 다른 모든 신학자들과 목사님들과 함께
이 본문 말씀이야말로 ‘기독교인의 강력한 요새’라고 믿습니다.
제가 아주 열정적으로 설교하던 지난 시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제 감정을 이용해서 여러분들을 조작하거나 여러분들을 움직이고 싶지 않습니다.
사실상 제가 하고자 하는 일은, 이 본문 말씀을 한 절 한 절 한 단어 한 단어 해설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진실로 여러분이 이 말씀을 이해하기 원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이 본문 말씀이야말로 복음이 어떠한지 여러분이 깨달아서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를 위해 기도하시고 여러분 자신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진실되게 선포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본론/ 롬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라고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이라는 단어를 강조하고자 합니다.
한사람도 예외 없이 “모든 사람”입니다.
죄의 보편성 universality of sin 을 말하는 것이죠.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만난 가장 큰 난제입니다.
그리고 모든 인간이 가진 모든 문제들은, 바로 이 한 가지 문제(자기 죄)로부터 시작됩니다.
여러분이 그리스 신화를 잘 아시겠지만, ‘판도라의 상자’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녀가 판도라의 상자를 열자, 세상의 모든 악이, 세상으로 뛰쳐나왔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판도라의 상자’에 빗대어 말하자면, ‘아담의 상자’가 되겠습니다.
그는 에덴동산에서 타락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아담 안에서’ 정죄를 받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급진적으로 철저하게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출생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바울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기에 all have sinned”
라는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위 롬3:23절 말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이 말씀이, 당신을 소스라치며 놀라게 만듭니까?
그런데 여러분은, 이 복음의 말씀을 듣고, 반드시 소스라치며 놀라야 합니다.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누구도, 이 말씀에, 두렵고 떨지 않습니다.
저는, 그 누구도, 이 말씀을 듣고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저 폴 워셔는, 이 본문 말씀을 통해서
이 세상에서 흘려진 그 모든 눈물보다 더 많은 눈물이
흘러나와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세상의 모든 비극, 모든 전쟁, 모든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모든 죽음과 사망이, 영원히 운명 지어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죄는 참으로 무시무시한 것입니다.
이것의 실상을, 우리 인간이, 제대로 묘사하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이 죄가 얼마나 무시무시하고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심지어 바로 오늘도, 수 천 수 만의 사람들이, 구원받지 못하고, 지금 죽어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죄는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것입니다.
▶이 죄를 특별히 무서워해야 하는 이유는,
죄가 사람에게 지은 것이기 보다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대해 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욕이라도, 친구에게 한 욕설과
옛날 군주시대에, 왕에게 내뱉은 욕설은.. 그 처벌이 다르겠지요?
마찬가지로, 죄가 그토록 무서운 이유는
내 죄가, 바로 영원토록 무한하신 하나님을 상대하고
하나님을 대적하여 지은 범죄이기 때문입니다.
이 이유 때문에 우리가 그토록 더럽고 역겨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죄는, 지극히 선하신 하나님에게 범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경배와, 영광과, 순종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경배와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하는 대신에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께 반역과, 증오와, 불순종을 드리고 말았습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우리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모든 피조물들까지도, 인간의 타락에 영향을 받아서, 환경의 고통을 당하게 되었고,
그들은 지금, 모든 피조물들이그 탄식가운데서, 구속받을 날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봅니다.
천지창조의 때에, 하나님께서는, 별들을 향해서
우주의 각각의 자리에서, 각자 위치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자 모든 별들이 하나님께 절하고 순종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행성들을 향하여서,
일정한 자기 궤도를 돌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러자 행성들은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산들을 향해서, 솟아나라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계곡들을 향해서는, 내려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자 산과 계곡,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이 대양을 바라보셨습니다.
대양들은 여기까지만 오고, 물이 더 이상 넘치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큰 대양들은, 그 하나님께 경배하고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여러분(사람들)을 향해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여러분(사람들)은 ‘아뇨, 못 갑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저는 절대로 하나님께 가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죄에 대해 생각해보길 원합니다.
우리가 어떤 죄를 짓는 행위를 한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어떤 것, 즉 죄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기 때문에, 우리가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속사람, 그 심성 자체가, 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겉으로 나오는 우리의 말, 행동, 감정이.. 모두 죄인 것입니다.
우리는 아예 피붙이로 태어날 때부터
부패하고 타락한 백성으로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을 혐오하고 증오하는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아담의 죄성을 유전해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사람에 대해 묘사하고 있는 말씀들입니다.
창세기 6:5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이 성경 말씀을 보십시오.
‘사람의 마음에 모든 생각과 계획이 악하다’고 했습니다.
한 가지 예화를 들어보겠습니다.
제가 만약 여러분의 마음을 꺼내서,
그리고 여러분이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생각해왔던 모든 생각들을
영상으로 전부 다 복원해서
그 모든 생각들을, 제가 DVD에 담아서 만들었습니다.
그 DVD를, 지금 이 예배당의 스크린에 틀어서 공개한다고 가정합시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은, 이 자리에서 도망쳐 나가서,
다시는 이 자리로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이지 않습니까?
만약 여러분의 생각을 모니터에 틀어놓으면, 여러분은 절대 안 된다고 할 것입니다.
심지어 여러분은 저와 싸울 것입니다.
저의 손에서 그 DVD를 빼앗아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바닷가로 달려가서, 깊은 바다 속으로 던져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그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죄를 지어서 구원에서 완전히 동떨어져 있는 상태.. 이것이 바로 우리의 실상입니다.
우리는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8:21절을 봅니다. 이것은 노아의 홍수 이후의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여러분 노아의 홍수 이후에도, 사람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은 노아의 홍수를 통해서 이 세상을 깨끗하게 하려 하셨습니다.
그러나 홍수가 사람의 마음까지 깨끗이 하지는 못했습니다.
여러분 그것은 노아의 홍수보다도, 더 큰 어떤 일이 되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필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보십시오.
‘사람이 어려서부터 계획하는 바가 항상 악하다’고 했습니다.
어려서부터, 출생부터 말입니다.
그래서 엄마의 모태에서 나오자마자, 아기는 자기 본성으로, 죄를 짓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저는 종종 어린 아이들의 순진무구함에 대한 노래를 듣습니다.
어떤 노래가사는 이렇습니다.
‘오직 어린 아이들이 우리를 인도한다면, 우리는 세계 평화에 이를 것이다.’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어린 아이들이 우리를 인도한다면
우리는 내일 제 3차대전을 맞이하게 될지 모릅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4살짜리 아이에게, 여러 종류의 장난감들을 줘서, 가지고 놀게 합니다.
장난감이 너무 많아서, 아이는
어떤 장난감은 가지고 놀지만, 어떤 장난감은 손도 대지 않습니다. 자기 관심밖엔 것이지요.
그런데 여러분이, 그 아이가 한쪽에 치워놓았던 장난감을
다시 그 아이에게 권해 보십시오.
그는 다시 옆으로 치울 것입니다. 그는 그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가 이 장난감을 원할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또래의 다른 아이를 데려와서, 그가 버렸던 장난감을 줘 보십시오.
어떤 일이 발생할지 아십니까? 제3차 세계대전입니다.
이것(타고난 타락한 죄성)이 바로, 인간의 살인의 이유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상호 미움과 증오의 원인입니다.
이것이 바로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의 원인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모두의 원래 모습입니다.
▶신학자들은 이것을 가리켜 ‘전적 타락 total depravity’ 이라고 칭합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이것을 가리켜 ‘급진적 타락 radical depravity’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존재하고 행하는 모든 것들이, 다 더럽고 타락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행위만 타락한 것이 아니라, 마음속 근본 동기까지 다 타락하고 부패했습니다.
그 결과, 우리가 하는 일은, 계속해서 죄를 짓는 것이고
그 결과,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히틀러를 생각해보십시오. 그 사람이 아주 특별하고 이상합니까?
보통 사람보다 더 특별하게 악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히틀러를 본다면, 여러분은 거울로 자기 모습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히틀러보다 더 나쁘지 않은 유일한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의 악을 제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십니까?
만약 하나님께서 은혜를 거두어 가신다면
만약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악을 제어하지 않으시면, 세상은 넘치는 죄로 폭발할 것입니다.
그리고 구속의 역사는 존재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모든 지나간 역사를 통해서, 엄청난 죄악들을 보고 있지 않습니까?
그 악들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제어하지 않으셨다면, 더 엄청난 악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세상의 악을 제어하십니다.
살후 2:6절과 7절에 '막고 계신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구속 역사를 이루어가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죄인들을 구원해 가시고, 그들을 점점 더 변화시켜 가십니다.
그래서 지금 세상이, 그나마 조금이라도 이런 질서를 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은 넘쳐나는 죄악으로 스스로 폭발해서 해체되었을 것이며,
아니면 그런 죄인들을 제어할, 강력한 폭군의 억압이 아니면, 절대로 질서가 유지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모든 이유가
‘모든 사람이 지를 지었으니..’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생각할지 모릅니다.
‘목사님 왜 이렇게 심한 말을 하십니까?’
실제로 어떤 기자가 제게 물었습니다.
‘왜 이런 부정적인 말들을 하십니까?’
제게는, 두 가지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는,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저는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하길 원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복음을 감사하고 이해하기 바랍니다. ★★
우리가 도대체, 어떻게 복음을 감사할 수 있습니까?
제가 앞서 3강에서 설명 드린 예화를 기억하십니까?
여러분이 부자에게 조그만 음식을 갖다 주면, 부자는 음식을 내던져버릴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그 음식을 거지에게 준다면, 거지는 당신의 손에 키스할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그렇게 가난한/비참한 상태인 것을, 우리가 절실히 깨달을 때,
우리가 가진 복음이.. 정말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휴머니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이 모든 판단의 척도’라고 하는 사회에 사고 있습니다.
그런 휴머니즘은, ‘인간은 기본적으로 선하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반드시 선한 인간을 구원해야만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가 깨달을 때,
우리가 모든 종류의 정죄를 받기에 마땅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가 당해야만 하는 마땅한 결과가, 심판을 받고 지옥에 떨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바로 이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면..
우리는 놀라움과 경이로움에 가득찰것입니다.
우리는 감사로 충만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 분 구원자의 영광을 위해 살게 될 것입니다.
▶설교자가 죄에 대해 설교하는 것을 거절할 때,
그것은 회중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복음을 감사하게 될 기회를 뺏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설교자가 죄인에 대해 설교하는 것을 거절할 때
결코 백성들은 그리스도에게 감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다른 세상적인 것들을 추구하기 시작합니다.
예를 들면 번영 같은 것 말입니다. 집, 토지 같은 것 말입니다.
자동차, 존경, 명예 같은 것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 대신 말입니다.
여러분, 마약 중독자들이나 창기들이 구원 받는 모습을 본 적 있습니까?
그들이야말로 정말 구원의 감격으로 충만한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였는지,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감격을 깨닫기 위해서
보통 사람이, 일부러 마약중독자나 창기가 될 필요는 없지만,
마치 그들이 느끼는 구원의 감격 이상으로,
세상의 모든 크리스천들이, 그 죄악에서 구원된 감격을 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간접체험으로 깨닫는 것이 낫죠. 직접체험보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이 구절을, 우리는 뼈저리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64:6절 말씀입니다.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filthy rag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 가나이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과거에 문둥병은, 불치병이었습니다.
그 환자들은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정도가 아닙니다.
냄새가 정말 지독합니다. 상처에서 피도 흐릅니다.
여러분 지금 이 순간 제 옆에 한 문둥병자가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우리 모두가 힘을 합쳐서,
이 문둥병자를, 아름답게 꾸며서 훌륭한 외모로 변신시킨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한국에서 살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비단을 사 올 것입니다.
그래서 아름답고 찬란한 멋있는 비단옷 지어서 입혔습니다.
그리고 비단으로 이 문둥병자를 휘감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뒤로 물러서서, 우리가 변신시킨 그 사람을 쳐다봅니다.
그가 정말 훌륭하게 변신했습니까?
그렇습니다. 단, 잠시 동안만 그렇습니다.
자신의 육체를 썩게 만드는 그것이, 바로 그 비단옷을 적시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비단은,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더러움과 부패함과
썩어져가는 베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한센병 환자를 지목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모든 자연인의 실상이 그렇다는 뜻입니다.)
저는 방금 세상의 타종교인이, 이 사람을 어떻게 구원할지에 대해 묘사해드렸습니다.
그의 최고의 선한 행위는 그저 썩은 옷 filthy rag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내면이, 문둥병처럼 부패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그저 평범하지 않은, 사악한 어떤 사람을 묘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회심하기 이전의 나의 모습이요, 여러분의 모습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출생한 모습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고 죄 가운데 출생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죄는 실수가 아닙니다.
죄는 반역입니다. 죄는 하나님을 미워하고 혐오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을 미워하도록 태어난다고 묘사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잠시 생각해봅시다.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을 혐오하고 미워한다. 하나님을 혐오한다..
하나님과 대적한다.. 왜 그렇습니까?
도대체 왜 우리가 선하신 하나님을 미워합니까? 한 가지 이유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선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제가 미국의 고등학교에 다닐 때,
저는 그 학교에서 상당히 골칫거리였습니다.
그 학교에서 어떤 학생이 자신의 숙제를 다하고
선생님께 순종하는 것을 제가 본다면
저와 함께 나머지 친구들이 그 친구를 괴롭힙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는 선하지 않는데, 선한 친구를 보면, 짜증이 나고, 미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는 정말 선한 일을 행하고 있지만, 우리가 그 모범생을 미워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선을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인인 자연인이,
지극히 선하신 하나님을 미워하는 이유요,
지금 세상 사람들이, 안티 기독교인이 되는 자연스런 이유입니다.
▶여러분이 숲에 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통나무가 그 숲길의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쓰러져 있습니다.
여러분은 길을 트기 위해서, 그 쓰러진 통나무를 치울 것입니다.
그 순간, 통나무 밑에 있던 모든 곤충들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들은 순식간에 숨으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둠을 사랑합니다.
그들은 빛을 혐오합니다.
왜 우리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계명을 혐오합니까?
왜냐하면 우리가 악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저는 세속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학생들이 대단히 공격적이었습니다.
그들은 기독교를 싫어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계명의 말씀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 가운데 한 학생이 매우 화났습니다. 그는 기본적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이 모든 계명을 혐오합니다. 그것들은 전부 억압적이고 폭압적입니다.
그것들은 우리의 모든 자유를 빼앗아갑니다.
그 계명들이 우리를 압박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모든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어떤 계명 말입니까? 어떤 율법이 당신의 마음을 억누릅니까?’
제가 몇 가지 리스트를 드릴 테니 그 중 어떤 것인지 말하십시오.
‘간음하지 말지니라’ 이 계명이 당신의 마음을 속박합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당신이, 다른 남자의 아내를 원하고 있다는 사실 아닙니까?
‘이웃에게 거짓 증거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당신에게 공격적입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거짓 증거자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당신이 늘 정직하다면, 그 계명에 거리낄 게 없습니다.
‘술 취하지 말라’는 말씀은 어떻습니까. 그것이 당신의 마음을 속박합니까?
그 이유는, 당신이 친구들과 오늘 밤에
토할 때까지 술을 마시려는 것 아닙니까?
어떻게 이런 방식으로, 여러분이 계명을 미워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악하기 때문에,
이런 계명들을 싫어하고,
그런 계명을 주신 하나님을, 거부하고 반역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여러분, 이것이 우리의 본래 모습입니다.
구원이 아니고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과거의 우리도, 그렇게 하나님과 그 계명에 반역했습니다.
자연인이, 이런 반항적 자세를 갖는 것이 너무 당연합니다.
롬3:23절,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오직 복음과 하나님의 성령만이
그런 죄인의 모습을 변화시키고 깨뜨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설교자들이, 이런 죄인의 실상을, 피상적으로 다룬다면 큰 잘못입니다.
이것은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오직 참된 복음만이 이것을 깨뜨릴 수 있는 유일한 메시지입니다.
▶여러분, 성경에서 조직신학이 없습니다.
그러나 가장 조직신학적인 책이라면 그것은 로마서입니다.
바울은 매우 신중하게 자신의 기독교 복음 교리들을,
로마서를 통해 서술하고 있습니다.
로마서는 총 16장입니다.
바울은 로마 교회 교인들에게, 자신이 무엇을 믿는지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흥미로운 사실입니다.
그러한 바울이 로마서 1장과, 2장과, 3장의 전장을 통해서
“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로마서 전체 중에서 4분의 1정도를 할애해서, 죄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죄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죄에 대한 이해”는, 우리가 기독교 신앙과 신학의 모든 것을 이해하기 위한
근거와 기초와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날 설교자들은
실제적으로 전혀 이 “죄에 대해” 설교하지 않습니다.
기초가 부실한 건물을, 높이 쌓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거의 검사와 같은 자세를 가지고, 이 죄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 능력과 지혜를 총 동원해서
“자연인은 저주 아래 있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설복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3: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admin
폴 워셔 2013년 한국 사경회 4-2강 /롬3:11-19
2015-06-18 16:20:55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롬3:11
여러분이 만약 미국에 와서, 어떤 미국인들에게 ‘당신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라고 묻는다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예’라고 말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냐하면 그들은 ‘나는 착한 사람이기 때문이죠.
나는 괜찮은 사람입니다. 나는 한 사람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무시무시한 사실은, 이들이 복음주의 교회에 다닐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글쎄요, 저는 뭐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십일조도 냅니다.
저는 주일날 교회에 출석합니다. 저는 교회 갈 때, 넥타이도 매고 갑니다.’
그러나 진정 회개, 회심하지 않은 신자들은.. 잃어버린 자들입니다.
그들은 아래 말씀에 해당될 수 있습니다.
▶로마서3: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폴 목사님, 잠깐만요, 이 세상의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을 찾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천국에 못 들어갈 수 있다고요?
-여러분, 회개하고 거듭나서, 참되게 하나님을 추구하는 신자도 있지만,
-깨닫지 못해서, 외식적으로 하나님을 추구하는 신자도 있습니다.
후자를 봅시다.
그런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고, 신앙생활을 하는 목적이 뭡니까?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어떤 일을 해 주실 수 있는가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건 세상 일반 종교가 공통적으로 가지는 ‘기복주의적 속성’입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저 폴 워셔는,
교회에서 목회자들이 ‘축복과 번영’을 설교하는 것을 혐오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수님 이외에, 다른 것들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육적인 사람들을, 교회 안으로 대거 끌어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고, 축복과 번영만을 사랑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롬3:11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지만, 잘못된 동기로 찾습니다.
그들에겐 새로운 직장이 필요합니다. 자기 가족을 도와줄 존재로서의 하나님을 필요로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
제가 믿기로, 주일날이 일주일 가운데,
우상을 숭배하는 가장 사악한 날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그 날에 사람들이 우상 섬기듯이 하나님을 경배하기 때문입니다.
매 주일마다 교회에 모여서, 마치 우상숭배 하듯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참되신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생각 속에서 만들어낸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설교자가 ‘하나님의 속성(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서 거의 설교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심지어 하나님이 아닌 것조차, 하나님으로 만들어 예배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목사님이 제게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저희 교회에 와서 하나님의 속성 attribute of God 에 대해 설교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거 확실합니까? 그렇다면 꼭 기도 많이 하셔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냐하면 저는 당신의 교회를 분리시키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분리된다니요? 우리는 모두 믿는 신자들입니다.
당신 폴 워셔 목사님 이, 하나님의 속성을 설교하면,
그게 어떻게, 교회에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말입니까?’
‘제가 하나님의 의와 거룩에 대해 설교한다면,
또한 제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설교한다면
여러분의 교회에서 어떤 사람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들은 엄청 화를 낼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런 분은 내가 믿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라고 말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하나님을, 절대로 믿거나, 예배하지 않을 것입니다! .. 라고 말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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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매 주일마다 교회에 옵니다. 그들은 습관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경배하는 하나님은, 그들이 창조해낸 상상의 하나님일 뿐입니다.
많은 신자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마치 자판기 같은 하나님이십니다.
자기가 ‘기도’를 집어넣으면, 그 자판기에서 무엇이든지 꺼낼 수 있다고 믿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교회가 우상숭배자로 가득 찼습니다’ 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무엇이 설교되고 있습니까,
어떠한 하나님이 그 교회 안에 계신 것입니까?
▶하나님을 믿되, 우리가 어떻게 하면, 정말로 진실되게 하나님을 믿을 수 있을까요?
우리가, 어떻게 신실하게 하나님을 찾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을, 올바로 추구할 수 있을까요?
오직 한 가지 방식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찾으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 마음 안에서 역사하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먼저, 여러분을 찾으셨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으로써, 여러분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중생시키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믿은 게 아니라, 주님이 나를 불러주셨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라야.. 우리가 참되게 주님을 믿는 것이 가능합니다!
◑철저히 타락하고 부패한 인간의 실상
그래서 자연인은, 스스로 하나님을 찾을 수도, 스스로 자기를 구원할 수도 없습니다.
▶로마서3:12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여러분 ‘인간은 기본적으로 착하고 선하다’라는 것이
휴머니즘의 기본적 대헌장 아닙니까.
물론 우리 속에,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은 면이 일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과 하나님은, 인간의 실상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절대 그렇지 않다.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이다!’ 네, 타락한 형상입니다.
여러분 이 진리가, 바로 이 복음이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이 정면으로, 인간의 선함을 대적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바로 우리가 믿고 있는 휴머니즘의 거짓을 폭로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13절에서
저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고,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다고 했습니다.
구약을 인용한 바울은, 본문에서 우리 입술과 혀가 문제인것처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은, 깨끗한 것일까요? 오직 입술만 문제인가요?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무엇을 말하든지 그것은 마음속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입술과 마음은 일체인 것입니다.
여러분 이사야 6장을 생각해 보십시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거룩함을 대면했을 때,
‘나는 부정한 입술을 가졌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가운데 거하는 사람이다.’
왜 그가 ‘나는 마음이 부정한 사람이다..’ 라고 그렇게 말하지 않고,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다’라고 말했습니까?
왜냐하면 구약 성경은 ‘너의 말이 너의 마음을 나타낸다’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신약은, 입술과 마음의 부패를, 둘 다 말하지만,
구약은, 입술만 부패했다고 말하더라도, 그것은 곧 마음이 부패했다는 사실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롬3:14절 말씀을 보면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만약 14절 말씀을 믿지 않는다면,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다.
지금 밖으로 나가 길 모퉁이에 서 있다가,
첫 번째 만나는 사람과 툭 부딪혔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기대해보십시오. 그냥 양해해 주지 않습니다.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할’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날 젊은 청년들 사이에 이것은 진실이 아닙니까.
젊은 청년들이 정말 더럽고 지저분한 말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 내면을, 입술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현대의 문화가, 점점 더 그들을 참된 기독교로부터 이탈하도록 합니다.
어린 아이들은 점점 더 자제력을 잃고 있습니다.
젊을 때부터 그들은 괴물이 되고 있습니다.
▶로마서3:15,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여러분 이것을 믿지 않습니까? 그러면 역사를 공부해 보십시오.
여러분 역사 공부가 귀찮으면 신문을 읽어보십시오.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이것이 바로 인간의 역사입니다.
파멸과 죽음, 이외에 아무것도 아닌 역사 말입니다.
죽이고 죽임을 당하는 역사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심지어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모든 사람들이 죽기를 원할지도 모릅니다.
심지어 태어나지 않은 셀 수 없는 수많은 아이들이, 오늘날 낙태로 죽임을 당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문화적으로 죽음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폴 목사님, 맞습니다. 많은 정치인들이 썩었습니다.
많은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과 부자들이, 사회를 망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폭압적이고 전제적인 정치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권세를 얻는다면, 여러분도 똑같이 할 것입니다.
역사가 증거하는 바, 대부분 자연인은 바로 이러한 악을 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전적 타락 때문입니다.
그럼 남의 얘기 말고,
여러분의 결혼 생활이 얼마나 어려운지 생각해보십시오.
심지어 그리스도인의 결혼생활이라도 말입니다. 여러분도 부부싸움을 하지 않습니까.
혐오하지 않습니까. 가정에서도 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아이를 보십시오. 주일학교를 다니는 아이 말입니다.
고양이와 강아지처럼 서로 싸우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죄인들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죄악된 본성을 갖고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3:18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제가 신앙이 깊어질수록, 그 사실을 더욱 뼈저리게 느낍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신앙의 선물을 우리가 받도록,
정말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해야 될 일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우리를 죄로부터 멀리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대신에, 하나님을 조소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향해서 정말 무시무시한 말들을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이름을, 너무 가볍게 사용합니다.
그것은 사형에 해당하는 죄인데도 말입니다.
사람들은 마치 심판의 날이 없는 것처럼 살고 있습니다.
심지어 심판의 날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조차 말입니다.
그 심판의 날이 얼마나 무시무시하다는 것인지 기억합니까.
성경은 이런 방식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위대한 군왕들이라도, 산과 바위가 무너져서, 그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자기들을 가리게 해 달라고, 피하게 되기를 바란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절대 숨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하늘과 땅이 갈라지고, 피하여 없어지는 날이 올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언젠가는 서게 될, 최후의 심판대를 상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그 긴 복도를 지나가고 있습니다. (자기 순서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기 앞에는, 하나님의 심판대가 보입니다.
여러분이 아주 담력이 큰 사람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그래서 여러분은 ‘나는 아무것도 무섭지 않습니다’ 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 복도를 걸어갈 때에,
세상을 삼킬 듯한 천사장이, 여러분을 스쳐 지나갑니다.
주위의 모든 사람들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때 여러분의 용기와 만용은, 산산이 부서질 것입니다.
여러분이 세상에 있을 때는, 담대하게 떠벌릴지도 모릅니다.
‘마지막 심판의 날 나는 그 자리에 설 것이다. 나는 두려워 하지 않는다.’ 라고요.
하나님을 참람되게 말하는 여러분,
심판의 날에 여러분은, 밀랍처럼 녹아질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혼자, 자기 의를 의지한 채 그 앞에 선다면
여러분은 정죄를 당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곁에 서 주셔야 합니다)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교회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중 수많은 사람들이, 심판대 앞에서 정죄를 당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들은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믿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많은 목자들이, 복음을 이해하고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평강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평강하다 평강하다!’며, 거짓 평강을 외쳐댔습니다.
▶로마서 3: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지금 바울은 실례로 유대인들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유대인들은 우리 이방인과 같지 않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성전이 있었고, 거기서 희생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은,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유대인조차도,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로 나타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최고의 최고의 더 최고의 사람조차도, 자기 의로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같은 이방인들은, 얼마나 더 실패할 것입니까.
그들이 율법을 지킴을 통해, 자기 자신을 의롭다 하지 못했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그렇게 하지 못하겠습니까.
바울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절망에 처한 인간에게.. 도저히 희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단 한 가지 예외가 있습니다.
하늘을 바라보면 됩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 보면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유일한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가장 듣고 싶어해야할 메시지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말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들이 당신에게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것을
행상인처럼 팔려고 가져 오신다면, 여러분은 거절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만을 원하고 추구하십시오. 그 분만이 여러분에게 소중합니다.
◑구원 받은 신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노니..’ 3:23
▶자연인은, 죄로 타락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현대 휴머니즘은
‘하나님은, 당신을 위해,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물론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계획을 가지고 계시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본문은,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에 미치지 못한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그렇게 위대한 존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아니, 인간은, 타락한 존재요, 원래부터가 멸망 받을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다시 로마서 1:21절을 봅니다.
롬1: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심지어 그들은, 하나님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도 않고, 사랑하지도 않았습니다.
롬1: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현대 휴머니즘은, 인간을 아주 고상한 존재로 숭상하지만
성경이 가르치는 인간의 실상은.. 죄로 타락한, 아주 고약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인들 가운데, 이런 휴머니스트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는 말씀은, 또 무엇을 의미합니까?
원래 여러분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지으심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지으심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위해 지으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렇게 살지 않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우리 자신의 영광을 추구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자녀들에게도, 똑같이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수년 전에 어떤 TV프로그램을 봤습니다.
그 프로그램 안에 4~5살 아이들이
마치 전문가처럼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었습니다.
사회자가 그 교수에게 묻습니다.
‘이 아이들을 어떻게 이렇게 잘 훈련시켰습니까?’
교수가 이렇게 말합니다.
‘어린 아이가 바이올린을 들어올릴 만한 힘을 가졌을 때,
우리는 그 어린 아이를 가운데 두고, 모든 중요한 사람들을 그 주위에 세웁니다.
선생님을 세웁니다. 부모를 세웁니다. 친척들을 세웁니다. 다른 학생들을 세웁니다.
그 아이 주변의 이런 여러 사람들을 주위에 세웁니다.
그 어린 아이가 우연히 줄을 건드려서 소리를 냈을 때에,
박수를 치며 축하해줍니다.
그 아이를 포옹하고 안아줍니다. ‘야, 정말 멋있구나.’ 라고 말해줍니다.
우리는 박수를 치고 찬양합니다. 바로 그것 때문에, 칭찬과 격려의 힘 때문에
그 아이들이 그 악기를 연주하고 싶어하는 동기를 제공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무시무시한 일입니다.
그 아이가 악기를 사랑해야, 악기를 연주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더 중대한 사실은, 그 아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악기를 연주하지 않습니다.
그 아이가, 자기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악기를 연주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문화는 이것 식으로 가득 차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박수와 칭찬을 곧 잘 사용합니다. 우리 아이를 움직이게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무엇인가 하게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들 자신이, 자기 자신이 우주의 중심이 되게 하기 위해 말입니다.
그들은 모든 일을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의 찬양과 칭찬을 받습니다.
그리고 만약 그 아이들이 그러한 성취에 이르지 못한다면
많은 아이들이 자살을 시도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성취한 아이들은, 기쁨은 잠시요, 곧 스스로 비참하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냐하면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지으심을 받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을 위해서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아주 어린 아이가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일 때,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어린 아이가, 학습 능력이 뛰어난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말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아이들과 우리가 어떻게 아이들을 양육하는지
이 말씀에 다 나와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보내는 대신
우리는 그들에게, 너 자신의 영광을 취하라고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비참한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람의 영광에 대해 지음 받은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사람의 영광을 추구하며 삽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지음 받은 존재들입니다.
오직 이것만이 우리가 평강과 기쁨을 유지하기 위한 원동력이 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변에 무엇들이 있습니까?
여러분 인간의 가장 큰 최고의 욕망은, 자신이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세속적인 철학자들과 대화를 나눌 때, 아주 흥미로운 점을 발견합니다.
철학자가 말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는 건, 이상한 일 아닙니까?’
그런데 어떤 운동선수가, 아주 운동을 잘한다고 그를 칭찬합니다. 축구 황제, 농구 황제 등요.
그런 인간이 칭찬을 받을 때는,
그 철학자들은, 어떤 도덕적 결함도 문제를 삼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때는, 인간들은 (또는 철학자들은)
하나님을 경멸하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자신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아주 잠시 동안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명령하십니다.
우리가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또 한 가지 알 것은,
비이성적이고 미친 사람도, 자신이 하는 일이, 이성적이기 바랍니다.
예를 들어, 제가 비 오는 날, 집 밖에서 비를 맞고 서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제게 뭐 하는지 물어봅니다. 저는 잘 모르겠다고 대답합니다.
그것은 비이성적입니다. 다 의아하게 여깁니다.
그런데 제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 이유는 저의 집이 불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성적입니다. 자기나, 타인이나, 그 행동에 의문을 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성적은 사람은, 반드시 그가 하는 모든 행위에
어떤 정당한 이유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정말 진정으로 이성적인 자라면
그는 그가 하고 있는 일에, 최고의 이유를 발견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보다, 우리 행동의 동기에, 더 큰 이유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행하신다고 말하실 때에
이기적인 생각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실상은 하나님이 하시는 가장 자비롭고 사랑스러운 행위입니다.
여러분 만약 제가 저의 사랑을 여러분께 보여드린다고 생각해봅시다.
제가 예배가 끝난 이후에 예배당 뒤에 서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한 명씩 여러분이 저를 지나갑니다. 제가 사탕을 하나씩 나눠드립니다.
여러분은 놀랍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교회 문밖을 나갑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발견하는 모든 사람들이 ‘폴 목사님께서 사탕을 주셨어요!’
오늘 밤에 TV에 나오는 리포터에게 말합니다.
그 앞에서 춤을 추면서 ‘폴 워셔 목사님이 내게 사탕을 주셨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이건 정신 나간 짓입니다. 지금 기복주의 설교를 빗대어 말씀하고 있습니다.)
30년 이후에, 여러분의 손자 손녀들을 앞에 놓고
저의 사진을 보면서, 그 아이들이 묻습니다.
저 분이 누구십니까?
그 할머니가 이렇게 말합니다.
‘저 분이 내게 사탕을 주신 분이야.’
만약에 여러분이 그렇게 한다면, 여러분은 정신과 상담이 필요할 것입니다.
다른 방법을 생각해봅시다.
여러분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심장이식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제가 병원에 가서, 저의 "심장"을 여러분께 주기로 결정합니다. (복음을 빗대어)
여러분은 모든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이것은 이성적인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TV에다가 선전할 것입니다. 놀라운 사실이라고 말입니다.
30년 후에 제 사진을 끼워놓고 벽에 걸지도 모릅니다.
손자 손녀들이 묻습니다.
‘할아버지, 저 사진은 누구입니까?’
‘얘들아, 너희들이 여기 앉아있는 이유는 저 분 때문이다.’
여러분, 제가 여러분께 드리는 사랑은, 선물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피조물에게 당신이 주실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을
선물로 주시기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주셨습니까. 하나님께선 최고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바로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무대 중앙에 오셔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을 그의 피조물에게 당신의 영광을 밝히 드러내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여러분에게 주실 수 있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신의 영광을 취하시는 것이 마땅합니다.
왜냐하면 그 분은 합당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분 자신이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위대한 선물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위대하신 심판이 바로 이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을 숨기는 것입니다.
가장 최고의 선물과 최고의 은혜는 당신 자신을 나타내주시고 계시해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제가 강조하기 원하는 것입니다.
많은 교회 안의 많은 사람들이 다른 선물을 구하고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기적과 이적과 방언 은사에 관한 컨퍼런스를 열면,
수만명이 가득 모입니다. 체육관을 꽉 채웁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속성’에 관한 컨퍼런스는, 백명도 채 모이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현대 기독교에 대한 저의 도전이고 기소장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음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함이로다.
여러분 이 말씀을 들으면, 성령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역사하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설교를 들을 때, 성령이 역사하셔서, 은혜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역사로
여러분이 죄인임을 깨닫는다면, 구원에 대한 아무런 소망이 없다면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십시오.
그 죄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습니다. 그 죽음에서부터 그분이 부활하셨습니다.
당신의 죄를 회개하시고 복음을 믿으십시오.
오늘 저녁에 우리가 다시 만날 때에 24절 이하의 말씀을 통해서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을까에 대해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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