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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사도행전 설교 모음

사도행전 3:17 - 21절 설교 모음

by Jessi J 2024. 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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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되는 날 /3:17-26

2023-08-23 00:37:01

 

회개를 권하다

 

앞선 말씀에서 베드로 사도는 솔로몬 행각에 모여든 청중들에게 기적의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첫째로, 기적은 예수님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둘째로, 유대인들이 예수를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살려내셔서 영화롭게 하셨다! 셋째로, 그 예수의 이름을 힘입어 병자가 고침을 받았다! 오늘 말씀에서는 유대인들에게 회개하라고 권면합니다. 목적은 그들을 회개시키는 데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회개시키기 힘든 족속이 유대인들입니다. 가장 종교적이고, 가장 율법적이고, 가장 윤리적인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이들을 회개시킬 수 있겠습니까?

 

베드로 사도는 먼저 유대인들의 입장을 두 가지로 변명해 줍니다. 첫째로, “너희가 몰라서 그랬다!”고 변명해 줍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리들도 그리한 줄 아노라.”(17) 몰라서 행한 것은 알고 행한 것보다는 덜 나쁩니다. “네 죄를 알렸다!” 하는 것보다, “너희가 몰라서 그랬다고 하면 부드럽게 받아드릴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란 사실을 안다면, 죽였겠는가? 일반 백성들이 몰랐습니다. 뿐만 아니라 백성의 지도자들도 몰랐습니다. 랍비들이나 서기관들, 혹은 공회원들도 몰랐습니다. 몰라서 그랬다고 하면 죄책감은 조금 가벼워집니다.

 

둘째로, 그리스도의 죽음은 이미 하나님이 계획하셨던 것임을 알려 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자기의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18)

 

한 차원 높은 안목에서 본다면 예수님의 죽음은 당연히 일어나게 되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성경에 예언되어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래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으시도록 계획하셨습니다. 인류의 모든 죄를 대신 지고 속죄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이미 메시야가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것은 오래 전에 기록하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53:5-6)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22:1)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22:6-8)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저희가 나를 주목하여 보고,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나이다.”(22:17-18) 어차피 그리스도는 죽으러 오신 분입니다. 다만 유대인들의 손에 죽임을 당한 것이 유대인인 베드로의 입장에서는 안타까운 일이라는 뜻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유대인들을 회개시키기 위해 먼저 그들의 사정을 변명해 줍니다. “너희가 몰라서 그랬다. 알면 메시야를 죽였겠는가? 그리스도가 죽임을 당하는 것은 성경에 이미 정해진 일이다. 다만 너희 손으로 죽인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오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먼저 변명을 해 줍시다. 사랑의 권면입니다.

 

그것이 죄인에게 접근하는 좋은 방법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이 계신 줄 몰라서, 또한 예수님이 구주이신 줄 몰라서 인정하지 않고 살아 온 줄 압니다. 당신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더라도, 메시야를 모르고 있더라도 상관치 않고 하나님은 이미 당신 죄를 위하여 예수님의 십자가를 준비하셨습니다. 본래 당신은 하나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귀한 인생입니다. 당신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이 있고, 축복의 약속이 있습니다. 이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회개하고 돌이키라!

 

유대인들이 모르고 그리스도를 죽였다고 해서 죄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계획이라고 해서 죄가 아닌 것도 아닙니다. 명백히 죄는 죕니다. 그러므로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19)

 

회개하고 돌이켜라! 죄 없이 함을 받아라! “회개하라는 말은 헬라어로 “metanoevw”(메타노에오)입니다. “meta”(메타 : 후에), “noevw”(노에오 : 생각하다, 이해하다)는 뜻입니다. 모든 죄는 저지르고 난 뒤에 깨닫는 법입니다. 아하, 이것이 큰 죄구나! 나중에 생각하는 겁니다. 어쨌든지 나중에라도 죄를 생각하게 된다면 다행입니다. 내가 어떤 죄를 저질렀는지 알게 된다면 회개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회개하고, 돌이키라고 합니다.

 

돌이키라”, “ejpistrevfw”(에피스트레포), “ejpi”(위로) “strevfw”(돌다)는 뜻입니다. 회심, 방향전환(return)을 의미합니다. 방향을 바꾸되 위를 향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방향을 바꾸는 것이 참 회개입니다. 방향 전환은 일생에 한 번으로 족합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살다가 하나님을 향하여 방향을 한 번만 돌리면 됩니다.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살다가 그리스도를 인정하고 영접하면 됩니다. 교리적으로는 이런 방향 전환을 회심(回心)이라고 합니다.

 

회심은 일생에 한 번이면 됩니다. 그 한 번의 회심으로 우리는 하나님 자녀로 신분이 변화됩니다. 천국 백성이 됩니다. 이런 회심과 일반적인 회개는 좀 다릅니다.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들도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이런 죄들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죄는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죄도 아닙니다. 심지가 연약함으로 짓는 윤리적인 죄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죄들이 그리스도인의 신분에 영향을 주지는 못합니다. 하나님 자녀의 지위를 박탈당한다든지, 천국 백성 자격을 빼앗기는 일은 없습니다. 한 번 회심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영원히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면서 죄들을 깨닫고 고칠 때에 회개라는 말을 씁니다. 회개는 수시로 하게 됩니다.

 

죄를 회개하면 죄 없이함을 받습니다. “없이 함을 받다”(ejxaleivfw, 엘살레이포)는 말은 “ejk”(밖으로) + “ajleivfw”(기름붓다)는 뜻입니다. 깨끗하게 지워버린다는 뜻입니다. 어떤 영문 성경에는 “be wiped away”(NASB)로 번역했고, 어떤 성경에는 “clean”(NLT)이란 말로 번역했습니다. 수동태로 된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죄는 인간 스스로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없애주셔야만 없어집니다. 정죄도 하나님이 하시고, 용서도 하나님이 하십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회개하는 일입니다.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정죄를 없애버리십니다. 영혼을 청결케 하고, 의인의 신분을 유지하게 하십니다. 죄에서 clean 한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은 내가 할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해 주실 일입니다. 내가 할 일은 죄를 회개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거부하는 죄악으로부터

 

유대인들의 가장 큰 죄악은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것은 곧 하나님을 죽인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죽임을 당하실 분이 아닙니다. 사람이 죽인다고 죽으실 분도 아니고, 사람이 인정하지 않는다고 안 계시는 분도 아닙니다. 사람이 어떻게 대하든지 하나님께는 아무 영향이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거부하고 인정하지 않는 그 사람이 불행할 뿐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죄는 존재 부정의 죄입니다. 엄연히 있는 것을 없다고 하면 됩니까? 인륜 가운데 가장 큰 범죄는 불효 죄입니다. 불효 죄의 근본은 부모를 인정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부모의 존재를 부정하고, 부모의 권위를 부정할 때, 최악의 범죄자가 됩니다. 십계명에 보면 먼저 하나님을 향한 네 가지 계명이 나옵니다. 그 다음에 인간을 향한 여섯 가지 계명이 나옵니다. 인간의 계명 중에 첫 번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입니다. 부모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자식은 죽여버리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계명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계명도 마찬가집니다. 하나님을 향한 첫 번째 계명은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계명입니다. 다른 신들이 존재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른 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주 가운데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십니다. 그 창조주 하나님은 부인하고, 존재하지도 않는 다른 신들을 인정한다면 하나님을 향한 엄청난 모독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을 부정한 것보다 더 큰 죄가 없습니다. 살인, 강도, 강간, 도적질, 사기, 거짓말, 여러 죄가 있지만 하나님을 부인한 것보다는 작은 죄악입니다. 인간으로서 가장 큰 죄악은 바로 하나님을 부인하는 죄악입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이런 얘기를 본 적이 있습니다. 어떤 산 밑에 있는 집에 바위덩어리가 굴러 떨어졌습니다. 산비탈에 있던 5톤이나 되는 큰 바위가 굴러 내려왔습니다. 벽을 뚫고 방 한 가운데 멈춰 섰습니다. 그 바위가 집을 박살내지 않고, 사람을 해치지 않은 것이 너무 고마워서 주인은 가 바위를 그냥 방 안에 모시고 절을 합니다.

 

집 주인만 그런 게 아니라, 동네 사람까지 다 절을 하고 섬깁니다. “바위 신령님 고맙습니다! 우리를 죽이지 않으시고, 집을 허물지 않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은 사람들의 종교성입니다. 고목나무 귀신에게 절하고, 산신령에게 절할 줄 알면서 어떻게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그렇게 힘듭니까? 바위나 산은 결코 신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엎드려 절하면서, 창조주 하나님은 없는 것으로 여깁니다. 산신령, 바위 신은 인정하지 않아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은 단 하루도 없으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아테네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거리에 나가보니 사방에 신전이 가득합니다. 제우스, 헤라, 아프로디테, 헤르메스, 헤파이스토스, 포세이돈, 하데스, 헬리오스.... 신전마다 제물이 가득 바쳐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제단이 있었습니다.

 

알지 못하는 신에게!” 바울은 아테네 거리의 철학자들 앞에서 설교를 합니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17:24-31)

 

당신들은 참으로 종교성이 많습니다. 아는 신들도 다 못 섬기는 판에 알지 못하는 신까지 챙겨서 섬깁니까?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은 한 분입니다! 그 분은 하늘과 땅의 지배자이십니다. 사람이 만든 신전에 갇혀 있는 분이 아닙니다. 사람이 드리는 제물을 받아 먹는 신도 아닙니다. 그 분은 오히려 만민에게 생명을 수시고 양식을 주시는 분입니다. 인류를 한 혈통으로 만드셨습니다. 사람들로 땅에 흩어져 살게 하시고, 거주지를 정하시고, 연대를 정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나님을 인식하도록 하셨고, 하나님은 인간에게서 멀리 계시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지금도 그 분의 도움으로 살아 움직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의 소생입니다. 이제까지 알지 못하고 살았다면 이제부터는 생각을 고치시기 바랍니다. 몰라서 섬기지 못했다면 이제 알려드립니다. 이제부터는 회개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천하를 심판하실 때가 옵니다. 그 때까지 회개하십시오.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심으로 믿을 만 한 증거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회개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을 섬기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회개를 명하셨습니다. 종교성은 많은 데 하나님은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 이제는 돌이켜야 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바꾸기 힘든 것이 종교적 신념을 바꾸는 겁니다.

 

지금까지 가졌던 모든 생각을 근본적으로 고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혁명적인 변화가 요구 됩니다. 사상, 가치관, 우주관, 세계관, 역사관, 결혼, 자녀, 교육, 정치, 경제, 사회, 모든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우리로 회개하기 힘들게 만드는 것들이 있습니다. 환경도 문제지만 내 자신이 문제입니다. 첫째는 자존심입니다. 내가 이제까지 아무도 의지하지 않고 살았는데! 남자가 연약하게 누구를 의지한단 말인가? 갑자기 약해진 모습을 보이기 싫다! 둘째는 남의 눈입니다.

 

이제까지 나는 강한 사람으로 비쳐졌는데, 남들이 나를 보고 뭐라고 할까? 어 저 사람 그렇게 반대하던 예수를 믿네! 저 사람 갑자기 약골이 됐구만! 저 사람 갈 때가 됐나봐, 마음이 약해졌어! 누가 뭐라고 하든지 잘못을 알게 됐다면 고쳐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용기입니다. 오늘이 바로 그 시간입니다. 결단을 내리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처럼 오늘부터 새로운 아브라함이 되세요. 믿음의 새로운 가문을 세우는 조상이 되시기 바랍니다.

 

 

 

새롭게 되는 날이 오리니

 

회개하고 돌이킬 때 새로운 날들이 시작됩니다.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19) “새롭게되다”(ajnavyuxi") 단어의 뜻은 호흡을 회복한다는 뜻입니다. , 상쾌하게 하다, 서늘하게 하다, 신선하게 하다는 뜻입니다. TIMES OF REFRESHING! 인생에서 가장 신선한 시기! 그 때가 바로 회개하고 돌이킨 시기입니다.

 

그러면 그 새롭게 되는 날이란 어떤 날일까요?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날들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새로운 날들을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날들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유대인들에게 이런 말씀을 합니다.

 

너희는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이 너희 조상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의 자손이라.”(25) 유대인들은 선지자들의 자손이고 언약의 자손입니다. 선지자들을 통해서 많은 언약을 주신 바로 그 자손들이란 뜻입니다. 선지자들과 언약이 대표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메시야에 대한 약속입니다.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의 모든 말을 들을 것이라.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 받으리라 하였고, 또한 사무엘 때부터 이어 말한 모든 선지자도 이 때를 가리켜 말하였느니라.”(22-24)

 

모세 이후로 사무엘, 이사야, 세례요한까지 모든 선지자가 전한 약속의 핵심은 바로 메시야를 보내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런데 그 약속이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말한 후손, 모세가 말한 선지자, 사무엘, 이사야, 모든 선지자들이 말한 메시야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가장 복된 날들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집니다.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너의 씨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셨으니,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25-26)

 

내 인생에서 가장 신선한 날들은 주님과 함께 할 때에 열려집니다.

 

첫째로, 이 땅에서 내 인생이 새롭게 시작됩니다. 하나님 자녀로서의 새로운 축복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26) 신분 변화가 일어납니다. 모든 정죄가 사라집니다. 의인으로 인정받습니다. 하나님 자녀가 됩니다. 천국 상속자가 됩니다. 영적 변화가 일어납니다. 죄를 미워합니다.

 

저는 예수 믿기 전에 의문이 많던 사람입니다. 왜 세상은 불공평 한가? 대학 시절 최대 의문이 바로 그거였습니다. 그 뿐 아니라 모든 게 의문투성이였습니다. 우주가 어떻게 생겨났나? 생명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누구인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나? 영혼은 있는가? 죽음은 무엇인가? 왜 사람의 마음에 죄악성이 있는가? 왜 미워하고 시기하고 다투는가? 왜 사람에게 종교가 있을까? 이 모든 의문이 한꺼번에 다 해결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생 의문의 해답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함께하실 때에 능력이 나타납니다. 세상을 이길 힘이 생깁니다. 아브라함의 축복이 회복됩니다. 영혼에, 자손에, 물질에, 범사에, 하나님 자녀다운 삶이 시작됩니다. 오늘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바로 그런 사람이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둘째로, 영원한 미래의 삶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바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20-21) 현세의 축복이 전부가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영원한 축복입니다.

 

그 미래의 축복은 주님이 다시 오심으로써 완성됩니다. 주님은 지금 하늘나라에 계십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하늘이 받아두셨다가 종말에 다시 보내십니다. 새로운 세계가 시작 될 때에, 그 통치자이신 주님이 다시 오십니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히 새롭고 신선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이사야65,66, 계시록21-22) 현재가 힘들고 어렵다 해도 참고 견디세요. 우리 앞에는 영원히 새롭고 신선한 삶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준비된 삶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유쾌하게 되는 날 /3:11-21/ 곽선희 목사

2014-11-26 21:35:37

 

어느 곳에 지혜롭고 권세가 있으며 겸손한 왕이 있었답니다. 그 왕이 저녁식사로 진수성찬을 대접받았습니다. 기막히게 훌륭한 음식을 먹고 나서 감동을 받아서 왕은 말합니다. 이 음식을 만든 자는 분명히 세계적으로 제일가는 요리사일거라고, 그러니 그냥 지날 수가 없으니 요리사를 불러오라고 합니다.

 

그를 세워놓고 "자네가 내 생전에 처음 먹어보는 이렇게 훌륭한 음식을 차려 주어서 고맙네" 하고 인사를 했더랍니다. 그 요리사가 하는 말입니다. "아니올시다. 제가 한건 별 게 아닙니다. 오늘 따라 야채가 너무 싱싱하고 좋은데 그런 좋은 재료를 보내 주어서 이렇게 좋은 음식을 대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왕은 ", 그러면 그 야채 장수를 불러 오라"고 했습니다. 야채 장수를 불러다가 "자네가 그렇게 좋은 야채를 제공해서 좋은 음식을 제공을 받았는데 참으로 고맙구만" 했더니 야채장수 하는 말이 "아니올시다. 저는 씨를 뿌리고 물만 주었는데요.그런데 야채가 잘 자라 주었습니다. 햇빛을 주시고 비를 주시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그저 한 끼의 식사를 해도 우리가 다 하나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모두가 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사소한 일도 생각해 보면 그것이 전부 하나님께로 향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또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큰 은총적 사건이었음을 우리는 순간순간 감격하고 깨달아야 합니다.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은 무엇인가'라고 하는 질문은 결국은 세 가지 질문으로 이어진다. 첫째, 나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 아니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역시 사람은 단순한 동물이 아닙니다.

 

그런고로 그 사람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느냐, 무엇을 알고 있느냐에 따라서 평가되는 것입니다. 그는 항상 무얼 생각하고 있을까? 그것이 그 사람의 사람됨일겁니다. 둘째,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것은 도덕적인 면입니다. 그래서 책임적 인간을 말합니다. 적어도 인간이라면 자기 행위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하는 그 행위만큼 인간의 가치는 정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말하기를 사람답게 살아야 사람이지. 그렇지 않습니까? 바로 그 행위를 통해서 그 사람을 볼 수 있다하는 말입니다.

 

셋째는 무엇을 소망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이것은 종교 철학적 문제요. 하나의 신앙 문제입니다. 사람이기에 소망을 가집니다. 현실보다는 소망으로, 그가 가진 소망에 의해서 그 사람의 사람됨을 평해야 한다. 역시 훌륭한 철학자의 참 명언입니다.

 

여러분, 깊이 생각해 보십시다. 이걸 종합해서 다 합쳐서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이것을 행복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당신은 행복한가'하고 묻습니다. 지적으로 행복한가? 당신의 행위에 있어서 얼마나 자유한가? 그리고 당신은 얼마나 소망으로 가득하여 환한 미래를 전망하며 살고 있는가? 그런고로 묻습니다. 얼마나 행복한가?

 

초대 교회에 나타난 정황을 살피면 세 단어로 요약해 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충만함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누가의 전용 용어입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있는 용어입니다. '프레레스' - 충만함을 말하는 특별한 용어입니다.

 

충만, 성령으로 충만. 물론 성령이 임해서 내게 충만이라는 결과가 오는데, 충만이라는 결과가 오는 순간 이성도 만족하고 가슴도 만족하고 행위로부터 자유하고 그가 무한한 소망의 세계를 바라봅니다. 이게 충만함입니다.

 

모든 면에서 만족하게 채워집니다. 그리고 플러스알파가 있습니다. 용기가 생깁니다. 복음을 전하는 용기가 생겨요. 이것이 바로 충만의 뜻입니다. 그래 그건 은사적인 것으로 구분합니다.

 

두 번째는 유무상통이라는 겁니다. 간단한 말이지만 참으로 중요한 말입니다. "내 것을 내 것이라고 하는 자가 없더라." 저는 이것을 사회적 충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욕심이 없어요. 그리고 나보다 어려운 사람들을 생각하게 되요.

 

그래서 내 것을 내 것이라고 하는 자가 없더라. 이거 얼마나 굉장한 얘기입니까? 모든 이기심 극단적인 이기주의로부터 다 벗어나서 유무상통하는 그런 마음가짐 그런 사회가 되었더라. 깜짝 놀랄만한 얘기죠. 참으로 귀한 또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유무상통하는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 얼마나 행복하겠어요.

 

세 번째는 오늘 본문에 나타난 대로 유쾌함이라는 것입니다. 유쾌한 날이 올 것이다. 유쾌하다하는 말. 영어로는 Refreshment. 이 헬라 원문대로 보면 좀 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아납쉭시스'- 심리적인 정신적인 세계의 영, '프쉬케'가 만족 하는 것입니다.

 

Refreshment - 우리가 목이 마를 때 물 한 컵 먹으면서 시원한 것처럼 아주 상쾌하고 유쾌한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이란 유쾌함이에요. 신앙생활은 유쾌함이에요. 잘 믿는다는 것은 바로 유쾌한 심령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유쾌함은 주 앞으로부터 온다. 주 앞으로부터 오는 유쾌함. 여러분 이것은 물질이 아니에요. 이것은 어떤 지식도 아니에요. 이것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유쾌함입니다. 여기에 몰입해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유명한 철학자인 파스칼(Blaise Pascal)은 인간을 양면적 존재라고 분석을 합니다. 그래서 참 재미있게 표현을 합니다. "행복을 추구하지만 행복을 얻지 못하고 진리를 추구하지만 오히려 거짓말만 하고 선을 추구하지만 오히려 악만 저지르는 존재다."

 

맞습니까? 인간이 양면성을 가지고 있으나 인간의 고귀한 점은 비참하다는 것을 인간 스스로가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글쎄올시다. , 아침 일찍 일어나겠다고 저녁에 맹세하고도 아침에 늦잠 자기도 하고, 무엇인가 이렇게 하고 싶은데 그렇게 못하고, 그야말로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은 여전히 모순 되게 이렇게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무너지면 안 됩니다. 스스로 안 된다는 것을 아는 그 비참함을 인정할 줄 아는 그만큼의 실존적 존재가 돼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 비참함으로부터 스스로 자기를 구원하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파스칼의 고민이 여기에 있는 겁니다. 자기 스스로 뻔히 알면서도 자기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성경은 그것을 해답해 줍니다. 유쾌하다.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임할 것이요(19)." 이건 소유에서 오는 게 아니고 명예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성취감도 아닙니다.

 

온전히 위로부터 오는 것, 주님 앞으로부터 오는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다. 마치 샘물같이 그렇게 비유하고 있습니다. 시원한 물, 그리스도로부터 흘러내려오는 저 시원한 물줄기를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은 베드로의 설교의 단면입니다. 베드로가 설교하면서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로부터 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수 말미암은 믿음을 강조합니다. 이게 샘의 근원이요 유쾌함의 뿌리입니다. 유쾌함의 근본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부활사건입니다. 예수님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셨어요. 부활 사건은 엄연한 사건이죠. 문제는 그 사건에 대한 부활 신앙을 가지는 순간에 부활 생명을 경험하게 되는 겁니다. 이 속에서 유쾌함이 오는 거예요. 어떤 논리에 의해서?

 

어떤 지식에 의해서? 아니에요. 어떤 소유욕을 채워 충족하기위한 것? 아니에요. 오직 부활신앙, 부활신앙이 확실해지는 순간에 부활생명에 접하게 되요. 그 때에 유쾌함을 얻게 됩니다. 아주 신비롭고 또 현실적인 말씀입니다. 베드로는 당당하게 말합니다. 유쾌하게 되는 날이 올 것이라고.

 

저는 이 베드로의 설교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설교하면서 얼마나 신바람이 났을까? 죄송하지만 나도 그래봤으면 합니다. 왜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이 있었어요. 바로 이 미문에 이 자리에서 몇 일전에 앉은뱅이를 일으켰어요.

 

그 사람이 자기를 고쳐달라고 한 것도 아니에요. 간구한 것도 아니고 서원한 것도 아니에요. 그저 지나가다가 앉은뱅이 앉아 있는 것을 보는데 성령이 말씀해요. 왜 그냥 지나가느냐? 그 앞에 섰어요. "은과 금은 내게 없다." 거기까지만 생각합시다.

 

그럴 때에 앉은뱅이가 뭐라고 했겠어요? '그러면 그냥 지나가. 뭘 서서 연설을 하누?'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이 엉뚱한 말을 하는 거예요.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라." 벌떡 일어나요.

 

저는 그런 생각을 해요. 베드로가 얼마나 놀랐을까? 난 아무리 생각해도 앉은뱅이보다 베드로가 많이 놀랐을 것 같아요. 심장병 안 생긴 게 다행이죠. 얼마나 놀랐을까? 그 순간 베드로의 마음속에 유쾌함이 옵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이 일어났어요. 이 사람을 앞에다 딱 세워놓고 베드로는 지금 설교하는 거예요. "예수께서 이 사람을 일으켰고 예수의 이름이 승하게 하셨느니라." 이렇게 앉은뱅이 일어난 사람을 세워 놓고 설교를 하니 이 설교가 얼마나 위대합니까?

 

얼마나 신바람이 날 것입니까? 참으로 당당하고 담대한 바로 그 순간이입니다. 그리고 말씀합니다. 이 사건이 뭘 의미합니까? 부활하신 예수님 멀리 가신게 아니에요. 오늘 여기에 살아 계세요. Living Christ! 빌리 그레함 목사님 설교의 총 주제입니다.

 

살아계신 그리스도, 오늘도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 베드로가 지금 이 자리에서 한 사건을 통해서 입증하고 있는 거예요. 당신들이 죽인 예수가 부활하시고 그 생명력이 나타나서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40세 된 이 사람이 벌떡 일어났느니라.

 

그뿐입니까? 베드로 개인적인 것도 있어요. 그것은 베드로가 예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거든요. 아주 부끄러워요. 물론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만 교인들 보기에도 부끄러워요. 저게 시원치 않은 사람인데……. 그러나 오늘은 다릅니다.

 

이 큰 표적을 통해서 베드로 사도를 아주 재임명했어요. 재임명, 다시 기름 부어 주었다는 말입니다. 그 때에 그는 어두운 과거, 뭐 물고기 잡던 얘기, 뭐 밤새껏 잡아도 못 잡은 얘기, 예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하고 비겁하게 돌아가던 얘기를 싹 잊어버려요. 오직 이 사건만 생각해요. 주님이 나를 통해 역사하셨다.

 

끝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유쾌하게 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유쾌함이요. 모든 어두움으로부터 깨끗이 벗어나서 이 표적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생명력을 맘껏 경험하고 있는 시간이에요. 그리고 설교합니다. 이 표적을 보라. 이 표적으로 검증되지 않았느냐? 그런고로 여러분들도 유쾌하게 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

 

, 그러기 위해서는 이 사건은 임마누엘 사건이 됩니다. 이 사건은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건이요, 우리 모두의 어두운 과거를 묻지 않는다는 사건이요, 그리고 주님이 살아 역사한다는 사건입니다.

 

그런고로 돌이키라, 너의 생각을 돌이키라, 행위를 돌이키라, 마음을 돌이키라, 돌이켜서 그리스도에게도 향하라. 세상으로 기울던 생각 그리스도에게로 돌이켜라. Turn to Christ "그리스도에게도 돌이키라"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고 회개하라. 죄 씻음을 받으라. 회개하면 죄 씻음을 받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죄가 있는 곳에는 고민이 있습니다. 죄책이 있는 곳에는 절망 밖에 없습니다. 죄 씻음을 받으라. 죄 씻음을 받고 죄책으로부터 벗어나고 죄의 저주로부터 자유하라. 얼마나 중요한 얘깁니까? 모든 것의 근본은 죄 문제입니다.

 

사람은 두 가지 고민 밖에 없대요. 알고 보면 심리적으로 잘 분석하면 둘 밖에 없대요. 하나는 죄이고, 또 하나는 죽음이요. 그 외에 다른 고민 있습니까? 그건 다 시시한 거요. 그러면 이 근본적인 문제로부터 벗어나서 자유하라, 그리고 그리스도에게 속하라. 그러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시원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얼마나 중요한 얘기입니까?

 

영성가인 프랑소아 페넬롱이라고 하는 분이 쓴 이라고 하는 책이 있는데, 이 책은 3세기를 통해서 스테디셀러로 알려진 유명한 책입니다. 그는 여기서 말합니다. 참된 평안을 방해하는 요인이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금지되어 있는 것에 대한 끊임없는 욕망과 소유에 대한 집착이다. 그렇습니다. 안 될 것은 안 됩니다. 그걸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아무리 가지려고 해도 못 가집니다. 그렇다면 그런 줄 아세요.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평준화 시리즈를 아십니까? 나이 오십이 되면 용모의 평준화. 아무리 주워 발라 보세요. 소용없어요. 내가 보니까 똑같아요. 50 넘으면 그 여자가 그 여자예요. 그런 줄만 아세요. 괜히 쓸데없이 시간 보내지 마세요.

 

그 다음엔 60이 되면 지식의 평준화. 뭐 더 배워봤자 별것 없어요. 건망증 걸려가지고 왔다 갔다 하는데 뭐 그게 그거예요. 괜히 학벌가지고, 뭐 어느 대학출신이니 박사니 그까짓 박사 그거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 줄만 아세요.

 

그런가하면 70대가 되면 이게 중요해요. 소유의 평준화. 가지나 못 가지나 두고도 못 먹으니 그까짓 것 소용없잖아요. 많이 가지나 적게 가지나 그 사람이 한 끼 먹으면 그만이고, 그 한 끼도 제대로도 못 먹는데요 뭐. 그 다음에 하나는 건너뜁시다.

 

90이 넘으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생사의 평준화. 살아있으나 죽은 거요, 산 것도 산 게 아니고 죽은 것도 죽은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어차피 평준화 될 건데요. 그런데 뭘 욕심을 부려요. 그 아직도 거기에 집착을 한다면 이것이 평안을 얻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두 번째는 인생의 가치에 대한 왜곡된 인식입니다. 가치관입니다. 정말 잘못된 가치관이 그 인생을 망칩니다. 세 번째는 염려입니다. 일어날 수도 없고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한 염려입니다. 80%가 일어나지 않을 일입니다. 그런 일 없어요.

 

잊어버리고 사세요. 그런데 이렇게 저렇게 생각하면서 자기 자신을 속박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허탄한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이제 다 버리세요. 지식도 의지도 소망도 오직 그리스도에게로만.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생명력을 강하게 받아 느낄 때에 유쾌하게 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

 

유쾌한 후에야 비로소 창의력도 있고 능력도 있고 용기도 있는 거예요. 마음이 침침해지면 아무것도 소용없어요. 지식도 소용없고 건강도 소용없어요. 유쾌하게 되는 때에 비로소 밝은 세상을 보고 그를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일을 감당하게 됩니다.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올 것이라. 이 귀한 은혜에 다 같이 참예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는 우리에게 귀하고 복된 은혜를 주었건만 어느새 우리는 마음이 어둡고 유쾌함보다는 침울함에 살고 넉넉함보다는 원망에 사는 저희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고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다시 그리스도의 생명력을 체험하면서 주께로 향하게 하시고 주 앞으로부터 오는 그 능력과 그 놀라운 은총을 힘입어 유쾌한 심령이 되게 하시고 건강한 육체도 되게 하시고 밝은 세계관도 갖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어두운 세상을 밝히기도 하며 침울한 세상에 유쾌함을 전하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정말 새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3:14-20/ 유기성 목사

2016-08-05 16:47:02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리들도 그리한 줄 아노라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자기의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정말 새 삶을 사는 놀라운 복을 여러분이 다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이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7절 말씀에 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으니 이전 것은 지나 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하고 분하게 약속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면 우리에게는 완전히 새로운 삶의 복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예수 믿고도 지금까지 진정한 새 삶을 살지 못하였다면 지난 세월이 너무나 억울한 것입니다. 또 앞으로 계속 그렇게 살라는 것은 정말 두려운 일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새롭게 살 수 있습니까?

베드로 사도는 회개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이른다고 했습니다.

 

본문 말씀에서 사도 베드로는 나면서 걷지 못하던 자를 일으킨 일로 인하여 몰려든 많은 무리 앞에서 세 가지 요지의 말씀을 증거하였습니다.

 

첫째, 기적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둘째,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를 하나님이 살려내셔서 영화롭게 하셨다!

셋째,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너희들이 죽였으니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으라!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예루살렘 거민들의 죄를 사하시기 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23:34)하고 기도하신 것을 응답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죄를 짓고도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인데,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은 저들도 하나님 용서해 주셔야 된다고 기도하셨고,

하나님은 그 기도에 응답으로 베드로를 통하여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자를 일으키시고 몰려든 예루살렘 거민들에게 너희들이 지은 죄가 무엇인지를 알고 빨리 회개하라고 증거한 것입니다.

 

베드로의 말처럼 예루살렘 거민들이 몰라서 하나님의 아들을 죽였습니다.

17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리들도 그리한 줄 아노라.”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이미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18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자기의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

 

그러나 모르고 그리스도를 죽였다고 해서 죄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계획이라고 해서 죄가 아닌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죽이고 어찌 잘 살기를 기대하겠습니까? 그러므로 베드로는 예루살렘 거민들에게 회개하라고 촉구하였습니다.

 

19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오늘 우리는 베드로 설교에서 어떤 죄이든지 회개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이른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 새 삶을 살기 원한다면 회개가 분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회개의 능력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하는 것을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도대체 회개가 무엇이길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죄도 사함을 받을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인지. 그러니 오늘 이 시간에 이 말씀을 들을 때 지금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회개에 대한 도전을 해오고 계시는데 우리가 정말 새 삶을 살기 원한다면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회개에 대한 말씀은 그 전에도 여러 번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 중에 죄를 지었다고 생각되거나 또 원인을 알 수 없는 어려운 일이 생기면 '회개하여야 하겠구나.' 생각하고 금식하고 철야하고 기도원에 가서 열심히 회개하고, 깨닫지 못한 것까지 깨우쳐 달라고 기도하며 회개하려는 이들을 봅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 회개하였더니 정말 문제가 해결되고 삶에 변화가 일어났다고 간증하는 이도 있지만, 그렇게 회개하였는데도 자신의 삶에 전혀 새로운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서 언제까지 회개해야 하며 어디까지 회개해야 하는 것이냐고 물어 오는 일들이 있습니다.

 

회개의 능력이 그처럼 강하다면 왜 회개하면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가. 답은 하나입니다. 회개하면 새 삶을 살게 된다는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아직도 회개에 대해서 정확하게 모르기 때문입니다. 회개하는데도 하나님이 풀어주시기 않는 것이 아니고 내가 회개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모르고 회개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3장에 보면 사람들이 세례 요한에게 회개의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37절에서 세례 요한은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무리들에게 이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라고 꾸짖습니다.

 

세례 요한이 왜 회개하러 나오는 이들을 꾸짖는 것입니까? 세례 요한의 눈에 사람들이 회개하는 동기가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벌 안 받으려고 회개하러 나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로를 피해보려고 그런 계산으로 나오는 이들을 세례 요한이 꾸짖습니다. 이것은 독사의 자식들이나 하는 행위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누가 너희를 그렇게 가르쳤더냐?" 책망하였습니다.

 

그러면 회개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회개는 내가 벌을 안 받겠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내가 회개하면 벌을 안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 분이 있다면 이 말씀을 제대로 들어야 합니다.

 

회개는 벌을 받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벌을 받겠습니다. 하나님, 저는 매맞을 짓을 했습니다. 하나님 제게 벌을 주세요.”

이렇게 나오는 사람이 정말 회개를 한 것입니다. “내가 회개했으니 빨리 용서해 주세요. 내가 회개했으니 빨리 이 벌이 떠나가게 해주세요.” 하는 사람은 회개를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세례 요한은 회개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피해 볼까 하는 잔 머리를 굴리지 말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하였습니다. 여기서 회개의 합당한 열매라는 것은 첫째, 앞으로 죄짓지 말고 좋은 일을 하라는 것이고 둘째, 전에 지은 죄에 대해서는 정당한 벌을 받으라는 말입니다.

 

회개란 무엇입니까? 벌을 안 받겠다는 것이 아니라 벌을 달게 받겠다는 것이어야 회개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그 다음의 처분은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세상에서 회개하면 용서입니까? 구속입니까? 검찰에서 죄를 자백하면 용서받는다고 생각해서 자백을 합니까? 그러면야 무슨 밤새워가면서 조사할 필요가 뭐 있습니까?

 

자백함과 동시에 용서 받는다면 검찰청에 들어오자 마자 자기가 죄인임을 시인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죄를 시인하는 것은 결코 용서를 기대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죄를 고백하면 그 다음에 오는 것은 쇠고랑을 차고 구속됩니다.

 

가장 회개 같은 회개를 하고도 하나님의 진노를 더욱 샀던 경우가 민수기 1439-41절에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들어가라고 명하신 가나안 땅으로 가지 아니하고 정탐꾼의 보고를 들은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른 지도자를 세워 애굽으로 되돌아가려고 하였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이 백성들을 향하여 "전염병을 내려서 몰사시키겠다." 하셨습니다.

 

그때 모세가 그 백성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여 하나님께서 뜻을 바꾸셨습니다. 그들을 즉시 다 죽이지는 않고 자기 명대로 살게 하겠지만 그 대신 광야에서 살다가 광야에서 죽게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모세가 이 말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였더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제서야 사태가 심각함을 깨달았습니다. 밤새도록 대표들이 모여 의논을 했고, 다음 날 아직 날이 새기도 전에 가나안 땅으로 출발해서 이미 산꼭대기까지 올라갔습니다.

 

산에 올라가서 외쳤습니다.

40보소서 우리가 여기 있나이다 우리가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곳으로 올라가리니 우리가 범죄하였음이니이다

 

그렇게 회개했던 것입니다. 슬퍼하고 죄를 자복하고 말로만 아니라 실제로 행동을 돌이켰으니 그야말로 참 회개를 잘한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은 그들의 그러한 회개하는 행위로써 하나님을 더욱 노엽게 하였다고 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아말렉인, 가나안인들에 의해서 다 멸망했습니다.

41"너희가 어찌하여 이제 여호와의 명령을 범하느냐 이 일이 형통하지 못하리라"

 

왜 이런 결과가 일어났습니까? 이 사람들의 이 회개의 목적이 무엇이었느냐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이렇게 한 회개의 목적은 진정한 죄에 대한 애통함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했구나! 하나님을 거역하였구나!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광야에서 죽는다니 그것만은 안돼. 죄는 지었지만 벌은 받지 않으면 좋겠어! 벌 안 받으려면 회개하면 된다니 나 회개합니다." 이런 회개를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벌을 받지 않기 위해서 회개를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회개는 받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하여도 새 삶을 살지 못하는 이들이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무슨 문제만 있거나 병들었거나 어려움이 있으면 "회개하고 회개 기도하세요. 회개하면 다 됩니다." 했는데. 이런 가르침을 잘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회개를 벌 안 받고 고통을 면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에는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하였다고 새롭게 해달라고 요구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오직 회개만 분명히 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풀립니다. 그것은 우리가 회개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 때문인 것입니다. 회개가 무슨 공로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회개하면 십자가의 은혜가 임합니다.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진실하지 못한 회개는 아무런 변화의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플로이드맥클랑 목사님은 딸 미샤가 거짓말하는 습관을 고쳐 보려고 애를 썼답니다. 야단도 쳐보고 달래도 보고 때려도 보았지만 잘못했다는 말은 그 때 뿐이었고 거짓말은 갈수록 더 심해졌습니다.

결국 하나님, 저는 도무지 딸 아이를 고칠 수 없습니다.”

 

자신의 무능함을 고백하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부모들도 더디게 배웁니다).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미샤와 함께 산책하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집에서 얼미쯤 걸어왔을 때, 멈춰 서서 무릎을 꿇고는 미샤의 눈을 마주 보았습니다.

 

아주 부드럽게 미샤야, 나는 너를 더 이상 믿지 못하겠단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때 내 뺨엔 눈물이 주르륵 흘러 내렸습니다. “아빠가 자기 딸을 믿지 못한다는 건 아빠에겐 아주 슬픈 일이야. 우리는 어쩌면 좋지?” 미샤는 아빠의 눈물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습니다.

 

아빠 엄마가 때리기도 하고 호되게 꾸짖는 것은 보았지만 그 일 때문에 우는 것은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딸의 얼굴이 슬픔으로 일그러지는 것을 보고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방과 후에 만나기로 약속했습니다. 아내와 딸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렸습니다.

 

미샤가 걸어오더니 울기 시작했습니다. “아빠, 아빠가 다시 나를 믿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하고 딸 아이는 아빠의 팔을 감싸 안고는 울먹였습니다. 거짓말을 했노라고 용서를 구한 것이 처음이 아니었지만 이때 비로소 미샤가 참으로 회개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때부터 미샤의 거짓말하는 버릇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거짓말을 했노라고 용서를 구한 것이 처음이 아니었지만 이때 비로소 미샤가 참으로 회개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때부터 미샤의 거짓말하는 버릇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매 맞는 것이 두려워서 하는 회개는 아직도 온전한 회개가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앞에서 진정으로 자기 죄를 깨닫고 애통하는 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우리가 진정 회개한 증거 중 하나는 우리의 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죄가 드러나는 것, 이것이 가장 두려운 죄 값입니다. 회개란 바로 자기 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여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 안에서 발견되기 위하여 죄가 드러남으로 인한 부끄러움과 고통도 감수할 수 있는 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누가복음 1511-24절에 나오는 탕자는 아버지의 재산을 갖고 나가서 허랑 방탕하게 살다가 주려 죽게 되어 돌아왔습니다. 이런 탕자인 둘째를 위하여 아버지는 동네 잔치를 벌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면 이런 역사가 일어나는구나.' 하고 자신도 회개하면 이런 일이 있을까 기대하지만 돌아온 탕자가 정말 이런 잔치를 원했을까요?

 

여러분 같으면 잔치 자리가 편하겠습니까? 소 잡고 풍유를 울려서 동네 잔치를 벌렸으니 모여든 동네 사람들이 "오늘 무슨 날이냐? 회갑 날이냐? 혼인 잔칫날이냐?" 물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는 사람 가는 사람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잔치에 모여온 모든 사람들에게 하루종일 "저 놈 아버지 재산 다 말아먹은 그 둘째 아들인데, 아버지가 받아주었어." 하는 말을 들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얼굴을 들여다보고 "맞기는 맞네. 살이 다 빠져서 그렇지 둘째가 맞기는 맞소." 그러니 얼마나 미안하고 얼마나 죄송하겠습니까? 정말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바늘 방석 같았을 것입니다.

회개는 죄를 감추지 않고 드러내는 것입니다.

 

저는 최근에 출간한 책으로 인하여 하루 아침에 유명인이 된 기분입니다. “책을 잘 보았다.”책이 많이 팔린다.”고 여기저기서 와서 말씀을 전해달라고 부르십니다. 이런 일로 인하여 어떤 이들은 유목사, 유명해졌네. 유목사 축복받았네.” 합니다.

 

심지어 한턱 내라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 심정은 잔치 자리에 앉은 탕자의 심정입니다. 책을 읽어 보셨다면 알겠지만 온통 제 부끄러운 고백 뿐입니다.

 

부흥회에 가서도 제 부끄러운 모습을 고백해야 합니다. 이제 책으로 제자훈련 교재로 나왔으니 앞으로 얼마나 더 부끄러움을 당해야 할지 저로서는 죽을 맛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회개입니다. 그런데도 이것을 축복이라 보시니 정말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지금 여기서 의인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죄인 대접 받으시는 분 계십니까? 여러분은 저를 죄인 취급하십니까? 의인 취급합니다. 죄인인데 말입니다.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 성도님, 목사님이라고 하지, 교회에서 만나서 인사를 할 때 어느 누가 여러분을 보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저 죄인을 좀 봐.” 그런 사람 누가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손가락질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우리는 누구나 다 의인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어찌 의인 대접이 가당합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받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탕자에게 하신 것처럼. 그러니 더 미안합니다. 의인 대접, 오직 예수님의 보혈 때문입니다.

 

의인 대접을 당연하게 여기면 안됩니다. 사실은 더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용서받은 의인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새 날을 주시고 오히려 복을 주셔서 잔치 날이 되면 더 회개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죄짓고 죄에 대해서 잘 고백하지 않습니다. 숨기려고 합니다. 아직 회개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탕자가 잔치를 통하여 철저히 깨어졌을 것입니다. 그는 부끄러워도 숨을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탕자는 할 수만 있었다면 아마 뒷방으로 도망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잔치 자리에 앉아서 오고 가는 사람들을 만나고 얼굴을 보여주어야 했습니다.

 

그 잔치는 탕자의 자아가 죽는 잔치입니다. "내가 회개했으니 고운 옷 주십시오." 탕자는 그렇게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탕자가 집으로 돌아오면서 마음 속으로 뇌아린 말이 있습니다.

 

19"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차라리 저에게 품꾼으로 취급해 주소서. 품꾼의 하나로 여겨주소서."

이렇게 회개하니 그에게 아버지의 은혜가 임하였는데, 그렇다고 그의 죄가 감추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회개한 사람은 드러나는 것을 거부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죄인이었음을 무슨 비밀이 드러난 것처럼 여기며 보지 말아야 합니다.

 

요즘에 자신의 은밀했던 죄를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성도들을 자주 보게 됩니다. 거짓말했던 죄, 도적질했던 죄도 그렇지만 음란과 간음의 죄에 대하여 들을 때는 민망할 정도입니다. 교인들 중에는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당황해 하는 이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엄청난 죄악을 고백한 것 같아도 아직 아닙니다. 진정한 회개는 자기 의에 대한 회개가 터져 나와야 진짜입니다. 이 죄는 좀처럼 깨닫지 못합니다. 이유는 죄라고 여겨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정이 왜 깨지고 교회가 분열이 됩니까? 자기 의때문입니다.

 

사사기 2125절에서 사사 시대 사람들의 문제를 한 마디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고 지적했습니다. ‘내 생각에 옳은 대로 사는 것이것이 바로 자기 의입니다. 성경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것을 죄라고 말합니다.

 

우리 삶에 일어나는 대부분의 문제는 우리가 내 생각에 옳은대로 살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부부 싸움, 교회 분열, 모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주장하니까 싸우게 되는 겁니다.

 

이사야 6장에서 이사야가 환상 중에 하나님을 만나고 상상도 못한 자기 죄를 토해 놓게 되었습니다. 그 전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문제이고 지도자들이 문제라고 생각하였지, 정작 자기가 죽을 죄인인 줄 몰랐던 것입니다.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함부로 말했던 자기 죄가 얼마나 큰지 비로서 그때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알았고 은혜를 받았다면 내 속에 있는 진짜 죄가 다 터져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죄를 터뜨려놓는 것이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더 이상 과거의 죄를 감추지 않습니다. 이미 자유함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수가 성 사마리아 여인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고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나의 행한 일을 나에게 말한 사람을 보라했다는 것입니다.

 

자기 입으로 나의 행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남이 수근거리며 하던 말이었습니다. 무엇이 이 여인으로 자기의 부끄러운 모습조차 드러내게 만든 것일까요? 한마디로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한 것입니다.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클린턴은 백악관 인턴 르윈스키와의 관계를 아내와 딸에게 고백한 뒤 최소한 두 달 동안 거실 소파에서 자야 했습니다.

그의 자서전 `나의 인생'에서 자신으로부터 사실을 들은 아내 힐러리 여사가 마치 복부를 강타당한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성추문 사건으로 클린턴은 그를 지지해 준 민주당으로부터, 자신과 함께 일한 고어 부통령으로부터 얼마나 왕따를 당했는지 모릅니다. 한 순간의 쾌락이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하원에서 그의 탄핵이 가결되었을 때 미국의 현직 대통령인 빌클린턴은 4500명이나 되는 많은 목사님들 앞에서 고백했습니다.

 

"나는 언제나 내가 남을 용서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사실은 내가 전 세계 앞에서 용서를 구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원이 나를 탄핵했습니다. 처음에는 괴로웠습니다만은 오히려 그 탄핵으로 인해서 그 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내가 철저히 무너지지 않았다면 100% 진지하게 반응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숨길 것이 아무 것도 없이, 아무 것도 남지 않았을 바로 그 때에 내가 해야할 일을 하는데 자유로워진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마 클린턴처럼 공개 회개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전 세계 모든 사람들 앞에서 그는 자기 죄를 드러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 그는 비로서 자유함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아이들이 잘못하였을 때, 매를 들면 당장 매 안맞으려고 잘못하였다고 소리치며 회개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진정한 회개가 아니라 매맞는 것을 피해 보려는 회개인 것입니다. 우리도 영적으로 어린아이 같을 때는 이런 회개를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진실한 회개입니다.

 

이런 회개가 새 삶을 시작하는 문입니다.

매 안맞으려고 하는 계산된 회개, 벌 받을까 두려워하는 회개가 아니라 십자가의 사랑,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깨달음에서 나오는 진정한 회개, 죄 자체를 애통하는 회개를 해야 합니다.

 

여러분, 2009년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완전히 새 삶을 살도록 계획하신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 가운데 그대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러려면 반드시 진짜 회개가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벌 받을까봐 하는 회개, 어린 아이들은 그렇게도 합니다.

 

부모가 매라도 들면 잘못했다고 소리 지르면서 외칩니다. 매 맞는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도 어린 아이때는 그랬지만 이제는 그런 회개를 회개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죄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차라리 내 죄 때문에 맞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매를 피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된 것입니다. 그러면 그 다음부터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진정으로 회개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새 삶을 살 수 있는 복을 주십니다.

 

이제 같이 기도하십시다.

 

여러분,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죄를 십자가에 못박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 앞에 오히려 하나님, 나는 맞을 일을 했습니다.” 그렇게 주님 앞에 나가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숨기고 감추려고 하지 마시고 진짜 죄가 무엇인지 깨닫게 되기를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붙잡으십시오.

 

(성령이여 강림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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