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설교문 모음/사도행전 설교 모음

사도행전 19:1 - 7절 설교 모음

by Jessi J 2024. 7. 10.
728x90
반응형

 

 

당신 안에 하나님이 임하셨는가? /19:1-20/ 유기성 목사

2016-08-09 14:19:48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바울이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니라

바울이 이르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

두 해 동안 이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삼아 악귀 들린 자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 하더라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악귀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악귀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뛰어올라 눌러 이기니 그들이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

에베소에 사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알리며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중고등학교 다닐 때, 친구들과 신앙 논쟁을 자주 했었습니다. 하나님이 진짜냐 부처님이 진짜냐 하는 좀 유치한 것이지만 당시에는 꽤 심각했습니다. 저는 당시에도 하나님은 정말 계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부모님이 다 믿고, 성경에도 분명히 기록되어 있고, 하나님 믿는 나라들은 다 잘 사는 것 등이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계실 것이라고 믿는 근거였습니다.

그렇다고 의심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계시다는 분명한 체험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친구들이 너 하나님 봤냐?” 하고 물을 때가 가장 힘들었습니다.

 

그런 제가 고등학생 때 들은 설교, “하나님은 우리 안에 오셨다.”는 말씀은 정말 충격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존재하신다는 믿음도 겨우 가진 때, 하나님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은 정말 믿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성령 하나님을 체험하고 말씀에 눈이 뜨이고서야 이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모든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면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을 아는 정도가 아닙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임하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 믿고 누리는 복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이고 만나는 정도가 아니고 우리 안에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가장 놀라운 복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예수를 믿지만 정말 하나님은 내 마음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지 못하고 사는 이들도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도 그런 분이 계실 것입니다. ‘교회는 왔고 예수 믿는다고는 하지만 하나님이 내 마음 안에 계시다는 것은 잘 모르겠다.’ 하시는 분이 있으실 것입니다. 오늘 에베소에서 바울이 만난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사도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하면서 에베소에 들렀습니다. 에베소에는 이미 제2차 전도여행 중에 들렀지만 더 머물며 복음을 전해달라는 요청을 받고도 하나님의 강권하심으로 떠날 수 밖에 없었던 곳입니다. 저희가 성지순례를 갔을 때 에베소를 둘러보았는데 정말 대단한 도시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뜻이면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지키려고 에베소에 들렀는데, 그곳에 제자들이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무엇인가 부족한 듯 보여서 물었습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그들의 대답은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하니 요한의 세례로라하였습니다.

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세례입니다. “내가 죄인입니다.”하는 것을 하나님께 고백하고 죄 사함의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이에 바울이 십자가와 성령의 말씀에 대하여 자세히 가르치니, 저희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니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셨는데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알 수 있듯이 성령 하나님을 모른 채 예수 믿는 이들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들은 아직 예수님을 온전히 믿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 89절에 저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저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제대로 믿으려면 반드시 성령 하나님께서 마음에 임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임하시다! 너무나도 놀라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마 저처럼 아직도 믿어지지 않으시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분부하신 후,

 

마가 다락방에 모인 120문도에게 성령 하나님이 임하신 후, 초대교회, 로마 카톨릭교회, 종교개혁 후의 유럽 교회, 미국 교회를 거쳐 20세기에 들어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중국, 인도, 남미, 아프리카 등 전 세계에 동시다발적으로 불길 같은 뜨거운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미 성경에 예언 된 일입니다. 이사야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40:5).”고 예언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두 가지 형태의 부흥, 곧 죄악의 부흥(세상 충만)과 성령의 부흥(성령 충만)이 동시에 빠르게, 뚜렷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지금의 우리는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하는 엄청난 죄악의 풍조에 휩싸여 있습니다. 반면에 또 한 가지 놀라운 것은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강력한 성령 충만의 역사를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 중에 하나에 속하게 되어있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흐름에 타든지 죄악의 흐름에 타든지 둘 중에 하나에 들어가게 되어있는데 여러분은 어떤 흐름 속에 있습니까? 성령의 부흥의 흐름 속에 있습니까?

 

중립인 것 같습니까? “목사님 저는 중립입니다. 성령이 충만하다고 말하기는 그렇고, 그렇다고 해서 죄악이 충만하게 사는 것도 아니고 저는 중립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말하고 싶어도 중립은 없습니다. 착각입니다. 둘 중 하나에 속하게 되어있습니다.

 

성령 충만이 아니면 죄악 충만 속에 사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성령이 충만한 흐름 속에 있지 않다면, 중립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나는 멸망으로 가는 죄악의 흐름 속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성령 충만한 가운데 믿지 못하는 성도는 이런 처지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는 반드시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 충만을 받지 않고는 하나님을 온전히 믿을 수 없고,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로 살아갈 수도 없습니다.

신앙 생활이 힘든 것은 성령 충만하지 않은 채 신앙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 충만을 원하면서도 성령 충만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성령 충만에 대한 오해도 한 이유가 됩니다.

 

분명히 예수를 믿으면 성령 하나님께서 모든 성도들에게 오셨습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성령 충만함에 대해서 생각할 때 성령 하나님에게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성령 충만으로 일어나는 여러 현상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 하나님과 성령의 역사를 혼돈하고 있습니다.

 

성령 충만받는 것을 방언을 한다거나 황홀한 신비한 체험을 하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기대를 갖거나 거부감을 갖기도 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이 우리 가운데 임하면 우리 눈에 보기에 놀라운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실제로 성령 하나님이 임하면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에베소 교회에 성령이 임하게 되니까 에베소 교회에 놀라운 기사와 이적이 일어났습니다.

 

11절에 보면 바울이 손을 얹고 기도하면 병든 사람이 고침을 받고, 귀신이 쫓겨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심지어 바울의 몸에 지니고 있던 손수건이나 병자를 고치기 위해 둘렀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 위에 얹기만 해도 병이 물러가고, 악한 귀신이 쫓겨갔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에베소에 있는 사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도대체 이것이 무슨 일인가?’ 사람은 ,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시구나!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임하셨구나!’ 이렇게 생각하기 보다는 , 이런 기적이 어떻게 일어날까?’ 거기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나타나는 능력만 관심을 가졌지, 성령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에베소 교회 사람들은 자기는 확신이 없고 사도 바울이 전하는 예수 이름으로 명하니 귀신아 나가라!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생겼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유대의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 같이 사도 바울의 흉내를 내면 그런 능력이 자기에게도 나타날까 하는 이들도 생겼습니다. 그들이 보니까 너무너무 신기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내좇아내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귀신 들린 사람을 만나서 일곱 아들이 삥 둘러서서 바울기 하던 것과 똑같이 그들도 해보았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귀신아 떠나가라!“ 그랬더니 귀신 들린 사람속에 역사하던 귀신이 얼마나 짜증이 나겠어요?

 

그렇지 않아도 지금 사람들에게서 다 떠나야 되는 형편인데 너도 나도 그렇게 말을 하니까 혼란스러운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그러니까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너는 누구냐?

 

그러고 악귀 들린 사람이 달려들어서 스게와의 일곱 아들에게 뛰어올라 상하게 하니 벗은 몸으로 도망을 갔다는 에피소드가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14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악귀 들린 사람이 그 두 사람에게 뛰어올라 억제하여 이기니 저희가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

 

그러나 이런 안타까운 일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나타날 때, 성령 하나님을 바라보기 보다 방언을 받았느냐 병고침을 받았느냐 귀신이 쫓겨났느냐에만 관심을 두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성령 충만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성령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영적으로 방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그저 성경에만 있는 분으로 여기고 하나님은 내가 오래 믿었지만 한번도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체험을 못하고 내 삶 속에 약속한 말씀의 증거나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기적, 행적 다 전설처럼만 여겨지지 조금도 현실감이 없습니다. 오래 하나님을 믿었지만 살아계신 하나님은 체험하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생각하지만 예수님은 실제가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오늘 말씀을 보면 성령 충만을 받는 방법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정확히 알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기 이전의 삶을 완전히 회개하고 청산하고 십자가에서 옛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믿고, 이제는 성령 하나님을 모시고 살기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속죄 주님이시고 예수님을 내 생명의 주님이심을 고백하면 반드시 성령님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렇게 간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왜 성령 충만함을 받는 이들이 적은 것입니까? 마음에 준비가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목회를 하다 보니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목회가 안되었습니다. 기도하면 기도의 역사가 나타나고 병자를 위해서 기도하면 병자가 고침받고 말씀의 능력이 있어 은혜가 되어 성도들이 모이는 역사가 일어나야 교회 부흥도 되고 목회도 되겠더라고요. 그것을 어떻게 얻는가?

 

그것이 성령 충만함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제게 성령 충만함을 주옵소서. 이왕 목회하는 것 한번 능력있게 목회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저는 성령 충만함이 능력인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네가 정말 원하느냐? 네가 정말 나를 원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성령 받으려면 간절히 기도도 해야 하고 성경 말씀을 제대로 알아야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이 준비되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 충만함은 성령님이 정말 우리 마음에 오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저녁에 귀한 손님이 여러분 집에 오셔도 여러분은 집을 청소하고 음식도 준비하며 손님 맞을 준비를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여러분 마음에 오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성령님을 원하면 성령님은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러나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성령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살려면 자기 마음대로 살려는 태도는 버려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각오가 분명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기뻐야 합니다.

결혼하려는 사람이 갖는 마음과 같습니다.

 

결혼하자면서 혼자 살 때처럼 자기 마음대로 살려는 마음을 버리지 않으려고 한다면 불행합니다. ‘나는 원해도 내 배우자가 원하지 않으면 나는 이젠 그것 안하겠다.’

 

배우자와 함께 일평생 사는 것이 기쁘지 않다면 왜 결혼합니까?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서 함께 살게 되는 결혼 생활만 해도 삶의 태도가 바뀌어야 하지 않습니까? 하물며 하나님이 내 마음에 오시는 것입니다.

 

요즘에 결혼 주례를 해보면 옛날과 틀려서 얼굴 표정 속에 정말 좋아 기뻐하는 것이 역력합니다. 그러나 사실 따지고 보면 혼자 사는 것과 함께 사는 것 중 어떤 것이 편합니까?

 

함께 살면 얼마나 포기하는 일이 많고 얼마나 버릴 것이 많습니까?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과 사는 것이니까 그렇게 좋아하면서 결혼식을 하는데 하나님이 내 마음에 오신다는 것을 부담스럽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성령 충만은 결혼 보다 더 놀랍고 기쁜 일입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하나님을 맞이 할 마음이 먼저 준비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 마음에 오셨다는 말은 이제부터는 성령님에게 완전히 복종하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시고도 마음대로 살 생각을 하는 사람은 무엇이 잘못 된 사람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기로 사모하십니까? 그것도 기쁘게 그리하기를 사모함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그 마음만 준비하면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꼭 오십니다.

 

흔히 예수님 우리 가정에 오소서. 우리 집에 오소서!” 하고 기도하지만 가정이 변화가 없고 기쁨이 없고 가정 문제 해결이 안되며 성령 충만하지 못하다고 말합니다. 예수님만 우리 가정에 오시면 우리 가정이 변하고 천국 같을텐데 왜 예수님은 안 오시는가? 하는데,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예수님 우리 집에 오소서!” 하는 것은 여전히 우리 집 주인은 나라는 생각입니다. 이제는 내가 예수님 집에서 산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예수님이 쓰라고 하셨으니까 예수님 집에 들어가 산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러면 얼마나 감사합니까? 잠을 자도 밥을 해 먹어도 주님의 허락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 하나님과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감이 잡힐 것입니다.

 

많은 경우 성령님을 원한다면서 실제로는 방언이나 치유 등 체험을 원하거나 능력을 원하거나 축복을 원합니다. 정작 성령님은 부담스러워 합니다.

 

로마서 128절에서 사람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불신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많은 성도들이 솔직히 성령님을 모실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 성도들 조차도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는 것은 부담스럽다고 생각을 합니다.

 

능력 주시는 것은 좋고 복을 주시는 것은 바라는 일이고 방언도 하고 싶고 좀 신비한 성령 체험을 주시는 것은 좋아합니다. 그런데 성령님 뜻대로 사는가? 그것은 부담스럽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에게 완전히 순종하겠는가? 그것은 겁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은밀한 죄 끊어지지 않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성령 하나님을 정말 마음으로 모시기를 기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복종한다고 하면 두려움부터 앞섭니다.

 

하나님은 엄하시고,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을 가져 가시는 분, 하기 싫은 것은 꼭 하라고 하시는 분, 하고 싶은 것은 꼭 하지 말라는 분, 힘든 사명만 주시는 분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마음이 성령 충만을 가로막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 체험을 했어도 성령님을 마음에 모시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성령 체험을 하였지만 삶이 변화되지는 않습니다.

 

실제로 성령 하나님은 이미 우리 안에 임하여 계십니다. 성령 체험을 했기 때문에 , 하나님은 정말 살아계신 것이 맞구나. 성령님은 역사하시는구나!’ 능력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아직도 내 마음에 하나님이 계신 것은 아닙니다.

 

자기 마음대로 자기 원하는대로 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내 마음에 계시면 그 다음부터는 전부 하나님 뜻대로 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내 마음대로 살 주장을 할 수 있습니까?

 

성령 하나님이 어떻게 내 안에 들어오셨는지 모르지만 성령 하나님이 내 안에 들어오신 것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성령님이 내 안에 들어오신 것은 결과를 보고 압니다.

 

3: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여러분,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전혀 몰라고 바람이 부는 것은 아는 것처럼, 성령님이 어떻게 내 안에 들어오셨는지는 모르지만 성령님이 내 안에 들어오신 것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구주이심이 믿어지고 하나님이 아버지라고 고백되고 은혜를 느끼고, 용서하라 사랑하라는 마음이 생기고 하나님 뜻대로 기도못하고 십일조 생활 못하고 주일성수 못하면 내 마음에 근심이 생기고, 하나님의 일을 하고 싶은 소원이 생기는 것이 다 성령의 역사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 보면 전도해서 믿게 하고 싶은 것도 내 안에 계시는 성령님의 역사가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계심을 분명히 알지 못하는 이유는 성령님에 대한 우리의 마음 태도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을 하나님으로 대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는 멸시 받을 때가 있습니다. 말도 안되는 일이지만 그게 사실입니다. 우리는 성령 하나님 역사에 대해서 하나님께 대하듯이 하지 않습니다. 힘들면 못한다, 어려우면 안한다, 조금 부담되면 싫다고 합니다.

 

성령 하나님을 무시하고 거절하고 부담스러워 합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오셔서 그동안 얼마나 우리에게 계속해서 말씀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셨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신 줄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삽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하나님 되시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오셨지만 세상에 하나님이 이런 대접 받으시며 우리 안에 계신 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을 정말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직도 몰라서 그렇다!’ 인정하시니까 우리에게 오셔서 떠나지 않으시고 지금도 계속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230절에 엘리 제사장에게 예언을 주십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이런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령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도 정말 어처구니없이 하나님 무시하고 심지어는 하나님을 멸시하는 듯한 언행을 할 때도 많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정말 이 마음을 바꾸셔야 합니다. ‘성령 하나님이시구나! 하나님이 내 안에 오셨구나!’ 마땅히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마음을 가지면 그때부터 얼마나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고 사는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에베소에서 강하게 역사하신 목적이 17-20절에 나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어떤 일을 하기를 원하시는가? 이제는 제발 좀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말하고 행동하고 직장도 다니고 사업도 하고 가정도 꾸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에베소에 거하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고하며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성령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눈을 뜨면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고, 예수님을 뜨겁게 찬양하며 예배하게 되고, 죄를 공개 자백하게 되고, 온갖 악한 것들을 다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집에 가셔서 가만히 보십시오. 있어서는 안될 것들이 있으면 다 내놓으셔야 됩니다.

 

성령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살면서 거실에 양주가 말이 됩니까? 주머니 속에 있는 담배, 그게 어떻게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 가능합니까? 명절 때 쓰려고 했던 화투, 그것도 다 버리십시오.

책꽂이에 옛날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 사다놓은 테잎, 비디오 테잎이 있으면 다 태워 버리십시오. 성령이 역사하시면 반드시 그렇게 됩니다. 태워버리라 말라 할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내 안에 계시구나!’ 내가 거기에 전심으로 반응하기 시작하면 돈을 주고 그런 것을 가지고 있으라고 해도 가지고 있을 사람 없습니다.

이것이 진정 성령 하나님을 마음에 모신 사람의 태도입니다.

 

성령 하나님을 바라보며 순종하지 않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성령님 아니면 세상의 영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고전 12: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8:1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여러분, 이따금 누구랑 싸우고 막 화를 내고 혈기를 내고 성질을 낼 때가 있습니까? 그때 즉시 거울을 쳐다보십시오. 여러분의 눈이 정상이 아닙니다. 영이 다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충만하지 않으면 무서운 영이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배합니다.

 

교역자 제자훈련 세미나를 할 때 질문 중에 여전히 악질이 있는데 어떻게 합니까? 나는 구원도 못 받은 사람인가요?

 

자신과 그 사람을 비교하지 말고,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를 보십시오. 그래도 나 보다 악질인 사람인가? 나랑 똑같습니다. 예수님 못 박아 죽인 죄인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똑같습니다. 눈이 뜨여야 됩니다.

 

예수 믿어도 받은 복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을 모르겠습니다.” 하는 분이 있는데 십자가를 바라보며 자신을 보십시오.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입니까?

 

이 세상에 여러분이 부러워하는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십자가 앞에 서 보십시오. 예수 믿고 구원받은 것이 얼마나 놀라운 복인가 눈이 안 열려서 그런 것입니다. 영적으로 완전히 미혹을 당해서 그렇습니다.

 

어느 사모님과 상담을 했는데 자살 유혹을 받으시는 분이었습니다. ‘차라리 죽으면 되겠다. 이런 사람 안 만나고 이런 일 안 겪어도 되겠다. 죽으면 지옥간다고 하지만, 그것은 나중 문제고 지금 내 처지와 형펀에서 이 사람들 속에서 떠날 수 있다면 차라리 지옥에 가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라는 것입니다.

 

정말 심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사모님, 기도할 때 그냥 예수님만 부르세요.

소스라치게 놀라며 예수님!” 부르는데, 눈물이 나더랍니다.

 

신앙 생활 잘하던 사람들도 영적으로 세상의 영 미혹의 영에 사로잡히면 판단도 다 그르칩니다. 정말 무서운 길로 가게 됩니다. 보지 못하게 되고 깨닫지 못하게 되니까 평생 후회할 길을 간다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은밀한 죄를 끊지 못하는 이유는 성령 하나님을 거부하고 세상의 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영이 눈을 가리고 있는 것입니다. 죄의 실체를 알고 나면 죄를 짓고 싶은 사람 한 사람도 없습니다.

 

소아암으로 두 눈을 실명한 동진이의 어머니이신 강혜성 집사님, 동진이가 생후 9개월째 되었을 때 안구암이라는 진단을 받고 두 눈을 다 실명하였습니다.

 

게다가 남편의 부도로 엄청난 빚을 져야 하는 상황에서 겪었던 절망과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전도를 받아 교회를 나오게 되었답니다. 몸부림치며 기도도 해 보았지만 어려워져 가기만 하는 형편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 의심하는 마음도 생겼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제자훈련을 통해 회개의 눈물과 성령 충만의 감격을 경험하였답니다. 성령의 충만을 경험하고 나니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 깨달아지더랍니다. 그리고 예전에는 고통 뿐이라고 생각되었던 일들에 대하여도 감사한 조건들이 깨달아져서 많이 울었답니다.

 

지금 저는 세상적으로 볼 때 가진 것이 하나도 없이 보일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앞을 보지 못하는 아들과 남편 그리고 아직도 빚이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제 생활은 행복 그 자체입니다. 내게는 내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 아버지와 사랑하는 남편과 아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사 내게 주신 특별한 선물이라 믿습니다. 그래서 더욱 더 감사하며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령 충만입니다.

 

성령 하나님이 이미 우리 마음에 오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모신 사람으로서 마땅한 마음과 태도로 주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은밀한 죄 지으라고 돈을 주고 유혹해도 죄 못 짓습니다. 성화, 저절로 됩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 여러분의 마음 준비를 하셔야 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이 정말 하나님이 내 마음에 와계시다는 것을 믿고 하나님의인도를 받기를 원하면 하나님의 권능, 하나님의 놀라운 복이 여러분 삶에도 놀랍게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이 시간에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하나님, 하나님이시군요. 하나님이 제 마음에 오셨군요. 제가 이제부터는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살겠습니다. 하나님, 제 삶을 주관해 주시옵소서. 제 삶을 다스려주시옵소서.”

 

 

 

복음의 능력과 축복(7)- 성령세례의 축복 /19:1-7/ 하용조목사

2015-05-27 10:00:37

 

복음의 능력과 축복 시리즈의 마지막으로 일곱 번째인 성령 세례의 축복입니다. 우선 사도행전 191, 2절 말씀을 읽습니다.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 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사도 바울은 1, 2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안디옥으로 돌아와 잠시 휴식을 취한 뒤 3차 전도 여행을 떠납니다. 그때 갈라디아와 부르기아를 거쳐 에베소에 도착합니다. 에베소는 바울에게 많은 추억이 서린 곳입니다.

 

바울은 16개월 동안 에베소에 머물면서 훌륭하게 목회를 하고, 에베소를 떠날 때 교회의 리더들과 부둣가에서 만나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며 헤어졌던 감동이 있는 지역입니다.

 

성령님에 대해 무지한 현상

 

이제 바울이 다시 에베소를 방문하게 됩니다. 바울이 없는 동안 아볼로와 그의 제자들이 에베소교회에서 가르쳤습니다. 바울이 3차 전도 여행으로 다시 에베소에 도착했을 때, 아볼로는 고린도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아볼로는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하며 복음을 잘 전했던 학자였습니다. 아볼로가 예수님에 대해 잘 가르침으로써 많은 제자들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아볼로는 다른 것들은 잘 가르쳤는데, 성령님에 대해서 침묵으로 일관했습니다.

 

사도행전 1824, 25절에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라 그가 일찍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볼로가 예수님께 관해 자세히 말하며 가르쳤다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전문 지식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요한의 세례에 대해서만 알 뿐, 성령 세례에 대해 몰라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누구에게서 배우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학문과 사상과 신앙을 결정짓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어느 교회에 다니느냐에 따라 신앙의 자세와 믿음의 성향이 달라집니다. 자유주의 신학을 공부한 사람은 자유주의 사상을 갖게 되고, 복음주의 신학을 공부한 사람은 복음주의 신앙을 갖게 됩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에게서 배운 제자들은 학문도 있고 성경의 지식도 있으며 예수님에 관한 복음도 있었지만, 성령 세례에 대해서 전혀 몰랐습니다. 보수주의 한국 교회와 비슷한 상태인 것 같습니다.

 

성경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지만, 성령님에 관해선 외면하고 상대적으로 덜 강조하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성령님을 믿고 있지만, 성령님의 능력을 제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령님의 역사에서 일부분만 믿고 받아들이기 때문에 영적 빈곤 상태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회개를 위한 요한의 물세례

 

에베소에 도착한 사도 바울은 제자들의 영적 빈곤 상태를 직감합니다.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 성령님에 대해 무지하고 체험이 없음을 알고 질문합니다. 3절 말씀을 봅니다.

 

바울이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로라.”

 

2절 말씀에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에게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성도들이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고 대답했습니다. 어떤 교회에선 1년 내내 성령님에 대해 설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성령님의 능력, 은사, 기적, 역사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에베소의 성도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고 다시 묻고 있습니다. 그들은 요한의 세례라고 응답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은 사람들에게 그 증표로 물세례를 줍니다. 우리는 모두 물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물세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정말 중요한 성령 세례도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요한이 물세례를 주었습니다. 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외쳤습니다. 그때 하나님을 사모하던 수많은 사람들이 나아와 회개하고 물세례를 받았습니다. 요즘 교회에서 목회자들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물세례를 베풉니다.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죽어서 그분과 함께 부활하는 것을 의미하는 증표입니다. 물세례를 받고 나면 변화되는 사람도 있지만, 대개 영적 체험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영적 충만을 위한 성령 세례

 

성령 세례란 무엇일까요? 물세례는 사람이 주는 것이지만, 성령 세례는 예수님께서 직접 주시는 것입니다. 물세례는 물 속에 들어가거나 약식으로 물을 뿌려 대신하지만, 성령 세례는 성령님께서 임재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불로 세례를 주시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2절 말씀으로 돌아가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 자체가 성령님의 역사인데, 에베소 성도들은 성령님께서 존재하신다는 말조차 듣지 못했다고 합니다. 성령님에 관한 지식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의 뜻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구원의 역사는 우리의 이성이나 사고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역사에 의한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면, 이 순간에 우리는 교회에 와서 설교 말씀을 들을 수 없는 것입니다.

 

주일에 골프 치러 가고 낚시터로 가며 등산을 가더라도, 교회에 오지는 못합니다. 우리가 주일 아침에 교회로 온 것은 개인의 의지나 습관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주장하신 결과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일을 찾는 것은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곧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게 된 것도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성령님께서 계시지 않으면, 우리는 예수님을 믿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에베소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어도 성령님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 이상할 정도입니다. 고린도전서 123절 말씀에 성령님과 예수님의 영접에 대한 관계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우리는 분명히 성령님으로 인해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영접한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계심을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님에 대해 듣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더라도 그분께선 분명히 우리 안에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찬송을 부를 때 기분이 좋아지고, 기도할 때 능력을 얻으며,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꾸 주님의 은혜 안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 성도들의 문제는 성령님에 대해 전혀 배우지 못한 것입니다. 가르치는 사람이 성령님에 대해 알지 못하고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침묵을 지킨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교회에서도 목사님이 성령님에 대해 말하지 않으면 성도들은 성령님에 대해 달리 들을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10년 동안 교회에 다녔지만 방언, 치유, 성령의 능력이 뭔지 모른다면서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지만, 그것에 대한 가르침이 없으니 성령님께서 활동하실 수 없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 생활은 답답한 것입니다. 믿었다가도 의심하게 되고, 은혜를 받았다가도 공허해지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심

 

사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는 길을 곧게 했던 세례 요한이 이미 모든 것들을 밝혔습니다. 사복음서를 통해 그에 대한 말씀을 확인해 보겠습니다.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3:11)

 

요한이 준 물세례는 회개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해야 예수님을 믿을 수 있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회개 없는 구원은 없습니다. 교회에서 한 사람이 예수님을 믿기로 결정하면 문답을 한 후 세례를 주는 이유는 예수님을 믿기로 결정한 증표로 삼기 위함입니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지만 뒤에 오시는 주님께서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이미 선포한 것입니다. 따라서 물세례를 받으신 분들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불세례를 받아야 하는 숙제가 남아있는 겁니다.

 

우리가 오랫동안 예수님을 믿어도 성령과 불로 세례를 경험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신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성령 세례를 주시기로 이미 결정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1:8).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3:16).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1:33).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로 결정하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십니다. 이것을 잘 생각해 보면, ‘공수표’(空手票)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금식을 잘하는지, 봉사나 헌금을 잘하는지 확인하신 후에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약속의 말씀이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성령 세례는 예수님께서 믿은 사람들에게 직접 주시는 것입니다.

 

이미 임하신 성령 세례에 대한 믿음

 

따라서 성령님께서 임하셨느냐 임하시지 않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성령 세례가 임하신 것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의 문제입니다. 성령 세례가 장차 오실 것이 아니라, 이미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두 하락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이미 성령 세례가 임하셨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사실을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성령님에 대해 관심이 없고 그냥 내버려 두고 있습니다. 신앙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지만 무용지물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영접했다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고아처럼 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성령님 없이 고아처럼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보호와 양육과 축복을 받으며 당당하게 살 자격이 있습니다. 우리의 죄는 이미 용서받았습니다. 더 이상 마귀에게 농락당하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있던 모든 저주는 떠났습니다. 더 이상 마귀의 계략에 까불림 당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만약 우리의 기도는 전부 응답되었겠지요라고 묻는다면 , 모두 응답받았습니다라고 대답을 못합니다. 미래에 있을 일을 현재로 끌어올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미래는 믿음을 가진 우리가 주인공입니다. 미래를 믿음의 힘으로 취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미래에 기도가 응답될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자녀, 가정, 건강에 관한 기도를 이미 응답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미래가 보여야 하고 미래가 들려 와야 합니다. 그리고 미래를 향해 믿음으로 걸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집에 들어갔을 때, 우리 안에 하나님께서 계시니까 집 안의 주인공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집에 들어갈 때마다 하나님께서 들어가신다라면서 떳떳하고 당당해야 합니다. 모든 은혜는 믿음으로 자신의 것이 됩니다. 성령 세례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순절에 첫 성령 강림 사건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 120명이 모여 10일 동안 전심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성령이란 것을 체험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성령님에 대해 알고 있지만, 당시 사람들은 전혀 알 길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다리라고 말씀하는데 무엇을 기다려야 하는지조차 모르는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오직 믿음으로 기다렸습니다.

 

그들 120명이 모두 믿음이 좋았을까요?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보이시고 일시에 500여 형제들에게도 보이셨지만, 모두 떠나고 120명만 남았습니다. 걔 중에도 확실히 믿지 못하고 온 사람도 있었을 겁니다. 옆 사람의 성화에 못 이겨 따라 온 사람도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오순절에 홀연히 급하고 강한 바람이 와서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모습을 보이며 다락방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영적으로 충만하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성령 세례의 첫 경험입니다.

 

120명이 앉아 기도하던 다락방에 성령의 바람이 불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이상한 분위기를 느끼고 모두 깜짝 놀랐습니다. 머리 위에 불이 떨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성령님의 임재가 시작된 것입니다.

 

봄이 오면 봄바람이 불고 산천에 꽃이 피며 초목에 새싹이 돋는 기운이 일듯이, 성령님의 기운이 돌기 시작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충만해지고 얼어붙었던 가슴이 뜨거워지며,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영적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말을 하면 갑자기 방언이 터졌습니다. 이것이 오순절에 있었던 성령 강림 사건의 대략적인 스케치입니다. 4, 5절 말씀을 읽습니다.

 

바울이 가로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여기서 성령 세례를 받는 방법이 나옵니다. 그것은 아주 간단합니다. 사람들이 성령 세례가 있다는 말을 듣고 먼저 예수님의 이름으로 물세례를 받습니다. 그리고 성령 세례를 받겠다고 기도하면 됩니다. 6, 7절 말씀입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모두 열 두 사람쯤 되니라.”

 

에베소 성도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자, 성령님의 활동이 시작된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물세례를 받은 사람들에게 임하신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임하시자, 사람들은 순간적으로 자신도 모르게 방언하고 예언하는 것입니다.

 

믿는 자들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

 

성령 세례는 이미 우리에게 임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 제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령 충만이 있기를 원합니다. 성령님을 사모합니다.”

 

우리가 계속 기도하면, 바울의 안수로 인해 방언이 터지고 예언하게 된 것 같이 됩니다. 꼭 방언과 예언이 아닐지라도 우리 안에 기쁨이 찾아옵니다. 언행과 생각이 변하고 가슴이 뜨거워지기 시작합니다.

 

저는 바울처럼 모든 사람들에게 안수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성령 세례에 대해 약속하신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믿는 자들에게 성령 세례를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들어오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 세례의 능력과 축복입니다. 성령 세례를 받은 후에 지혜가 생길 것입니다. 영적 분별력이 생기고 삶의 태도와 사고 방식이 변할 것입니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질 것입니다. 최악이 최선으로 바뀔 것입니다.

 

성령 세례는 이미 우리에게 온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인정하고 믿음으로 뚜껑을 열어야 합니다. 그러면 기도가 나오고, 전도하기 시작하며, 즐거운 일들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니까 우리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일들이 일어나 하나님께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복된 일들이 성도님들의 가정에서, 직장에서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주여! 이 짧은 시간에 하나님의 성령께서 강렬히 역사하신 줄 믿습니다. 어둠의 영, 죽음의 영은 떠날지어다.

저주의 영, 결박의 영은 떠날지어다. 우리를 부정적으로 만들고 파괴하며 음침하게 만드는 모든 결박이 풀어지고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불로 역사하셔서

우리의 언행, 생각, 태도가 달라지게 하옵소서. 주님을 찬양합니다. 영광을 받아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성령을 받았느냐 /19:1-7/ 박요한목사

2024-05-04 00:17:18

 

어느 여름날 밤, 아빠와 엄마와 아이가 한 방에서 함께 잠을 자게 되었습니다.

그 때, 아빠가 아이에게 더우니까 창문 좀 열어라.”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엄마가 아이에게 모기 들어오니까 창문 좀 닫아라.”하고 말했습니다.

이럴 때, 아이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보통 고민거리가 아닙니다.

창문을 열 것인가? 닫을 것인가?

선택하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아빠 엄마의 말이 모두 맞기 때문입니다.

창문을 열면, 모기가 들어옵니다.

창문을 닫으면, 덥습니다.

 

이런 종류의 고민을 수평적 사고라고 합니다.

수평적 사고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3의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3의 방법은, 방충망을 다는 것입니다.

방충망을 달면, 덥지도 않고 모기도 들어오지 않습니다.

이렇게 제 3의 방법을 찾는 것을, “수직적 사고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발상의 전환”, 또는 패러다임의 변화라고 합니다.

 

물리학에서는 1차원이라고 하고, “평면2차원이라고 하고, “입체공간3차원이라고 합니다.

1차원에 머무는 존재는 2차원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2차원에 머무는 존재는 3차원이 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머무는 세계만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3차원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단계 더 나아가서 4차원의 세계가 있습니다.

현대 물리학에서도 4차원의 세계를 증명해내고 있습니다.

4차원의 세계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세계입니다.

몸은 3차원의 세계에 머물면서, 의식은 다른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것입니다.

4차원의 세계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영성의 세계”, “영의 세계입니다.

 

신앙생활이란 몸은 3차원의 세계에 머물면서, 영은 4차원의 세계에서 사는 것입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3차원의 세계에서 수평적인 사고를 가지고 살지만, 예수 믿은 후에는 4차원의 세계에서 수직적인 사고를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 에베소 교회 성도들은, 예수 믿고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3차원의 세계에서 수평적인 사고를 가지고 살았는데, 바울의 안수기도를 받은 후에 성령이 임하여 4차원의 세계에서 수직적인 사고를 가진 신앙으로 전환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바울이 제 3차전도 여행중에 에베소 교회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방문해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는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령이 계신 것도 듣지 못했습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바울이 제자들에게,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는냐하고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요한의 세례입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그 때, 바울이 예수님을 증거하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그들에게 안수하니까 성령이 임하여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게 되었는데, 모두 열두 사람쯤 되었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믿고 신앙생활하면서 몸은 3차원의 세계에 살아도, 영은 4차원의 세계에서 수직적 사고를 가지고 사는 영적인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 1절에서 2절 말씀에 보면,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는냐 이르되 아니다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그랬습니다.

여기서, “어떤 제자들은 예수님의 12제자가 아니라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을 말합니다.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하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아니다.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고 대답했습니다.

한마디로 답답한 일입니다.

예수 믿고 신앙생활하면서 성령이 계신 것을 듣지도 못했다니, 정말 답답한 일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에게 같은 질문을 한다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여러분! 성령을 받았습니까? 언제 성령을 받았습니까? 성령 충만하십니까?”하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바울이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하고 물었습니다.

한마디로 에베소 교회 성도들의 신앙생활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에베소 교회 성도들은 성령 받지 않고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에, 불완전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본성과 삶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삶속에서 능력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안타까운 심정으로 묻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임금님이 돼지를 잘 훈련시켜서 양과 같이 정결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서 궁궐도 데려다가 좋은 음식을 먹이고 좋은 환경에서 살게 했습니다.

그리고나서 몇 달 후에, 다른 돼지가 있는 곳에 데려다 놨더니 단번에 돼지 똥과 오줌에 몸을 뒹굴어서 더러워지고 말았습니다.

그것을 본 임금님은, “아직 훈련이 부족한가 보다. 훈련을 더 시켜야겠다.”하고 다시 돼지를 궁궐로 데리고 와서, 좋은 음식을 먹이고 좋은 환경에서 살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임금님이 꿈을 꾸었는데 한 신하가 나타나서 하는 말이 임금님! 하나님께 부탁하면 돼지를 양과 같이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하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임금님이 하나님께 부탁을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천사를 시켜서, “돼지의 심장을 꺼내고, 양의 심장을 넣어주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천사가 와서 돼지의 심장을 꺼내고, 양의 심장을 넣어 주었습니다.

그 후에, 다른 돼지가 있는 곳에 데려다 놨더니 더러운 곳에 들어가지도 않고 깨끗한 곳을 좋아했습니다.

임금님은 너무 신기해서 좋아하다가 깨어보니 꿈이었습니다.

꿈에서 깬 임금님은, “더러운 것을 좋아하는 심장을 바꾸기 전에는 아무리 훈련이나 교육을 시키고 좋은 환경을 제공해도 소용없겠구나.”하고 돼지 훈련시키는 것을 포기했다고 합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죄의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죄의 본성을 버리고 새 사람이 되는 것은, 훈련이나 교육이나 좋은 환경을 제공하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을 받아서 심장이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바뀌어져야, 본성이 바뀌고 삶이 바뀌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 받고 성령으로 거듭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이 이식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진 새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본문 3절에서 5절 말씀에 보면, “바울이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니라 바울이 이르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그랬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요한의 세례예수의 세례가 나오고 있습니다.

요한의 세례는 물 세례요, 예수의 세례는 성령 세례입니다.

세례, ‘잠긴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 세례를 받으면, 물에 잠기는 것입니다.

성령 세례를 받으면, 성령에 잠기는 것입니다.

여기서 잠긴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옛 사람이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세례를 베풀 때 우리 장로교에서는, 손에 물을 묻혀서 머리에 얹고 세례를 베풉니다.

그런데 어떤 교단에서는 몸을 물속에 완전히 잠그는 세례식을 합니다.

둘 다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온 몸을 물에 잠그는 세례식을 하는 데, 한 젊은이가 오른손을 높이 들고 물속에 넣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왜 몸은 물속에 들어가면서 오른손은 물속에 넣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젊은이가 하는 말이, “나는 소매치기를 해서 먹고 사는데, 손까지 세례를 받아버리면 어떻게 먹고 삽니까?”하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옛 사람이 죽는 것입니다.

옛 사람의 생각, 옛 사람의 습관, 옛 사람의 언어, 옛 사람의 생활이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는 것도 그렇습니다.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성령 세례를 말합니다.

성령 세례를 받아서 옛 사람이 완전히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을 받아서 성령으로 거듭난 진정한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더 나아가서 본문 6절 상반절 말씀에 보면,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그랬습니다.

여기서 안수하매라는 말은, 손을 얹고 시도했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성령을 받는 방법입니다.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성령 받는 방법은, “안수기도였습니다.

성경에 보면, 성령 받는 방법이 몇 가지 있습니다.

찬송할 때 성령이 임합니다.

말씀 들을 때 성령이 임합니다.

기도할 때 성령이 임합니다.

그래서 찬송과 기도와 말씀은, 성령을 받는 방법입니다.

또한 성령 충만을 받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능력 나타내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 와서 예배드리며 기도하고 찬송하고 말씀들을 때, 성령이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성령 충만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감동하심과 교통하심이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능력 나타나기를 축원합니다.

 

본문 6절 말씀에 보면, “임하시므로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성령이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임하시었습니다.

여기서 임하시므로라는 말은, ‘들어오다라는 뜻입니다.

성령이 들어오셨습니다.

성령을 성신이라고도 합니다.

성신이 들어오셨습니다.

어디로 들어왔습니까?

에베소 교회 성도들의 몸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그래서 에베소 교회 성도들은, “성신”, 이 임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속에서 이 역사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대한 경신 연합회라는 것이 있습니다.

한국 무속인 연합회를 말합니다.

무속인들도 연합회가 있습니다.

전국본부가 있고, 도별, 시별 연합회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무속인이 50만명 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무속인도 크게 세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세습무입니다.

두 번째는 학습무입니다.

세 번째는 강습무입니다.

세습무는 부모가 무당이었기 때문에 대를 이어서 무당을 하는 것입니다.

학습무는 무속을 공부해서 무당이 되는 것입니다.

강습무는 신이 내려서 신내린 무당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무당은 대부분 세습무나 학습무이고, 강습무는 10%도 안 된다고 합니다.

강습무는 신이 내린 무당이기 때문에 진짜 무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몰론 귀신이 내린 무당이기 때문에 사람들을 지옥으로 끌고 가는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도, 세습신앙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모태신앙이라고들 합니다.

학습신앙을 가진 사람도 있습니다.

말씀을 배우고 공부해서 믿음이 성장한 사람입니다.

강습신앙을 가진 사람도 있습니다.

성령, 즉 성신이 임한 사람입니다.

이 임한 사람입니다.

성신이 임한 사람은, “성신의 지배와 통치를 받습니다.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그랬습니다.

에베소 교회 성도들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아볼로를 통해서 말씀으로 양육 받았습니다.

그렇게 에베소 교회 성도들은 성령, 성신이 임한 신 내린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습신앙도 좋습니다.

학습신앙도 좋습니다.

그런데 강습신앙, 성신이 임한 신앙은 더욱 좋습니다.

그러므로 에베소 교회 성도들처럼, 성령이 임하시어 성령의 지배와 통치를 받고, 속에서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신앙생활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성령이 임하시므로어떻게 되었습니까?

본문 6절 하반절 말씀에 보면,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그랬습니다.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방언을 했습니다.

예언도 했습니다.

이것은 성령 받은 증거입니다.

성령 받은 증거가 방언과 예언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그 증거가 여러 가지 은사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지혜의 은사, 지식의 은사, 믿음의 은사, 병 고치는 은사, 통역하는 은사, 영분별의 은사, 섬김의 은사, 가르치는 은사, 전도의 은사 등등, 여러 가지 은사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또한 성령 받으면, 그 증거로 기도하고 싶은 감동, 찬송하고 싶은 감동, 성경 읽고 싶은 감동, 예배드리고 싶은 감동, 예물 드리고 싶은 감동, 봉사하고 싶은 감동, 전도하고 싶은 감동이 일어납니다.

뿐만이 아니라 성령을 받으면, 성령의 9가지 열매인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가 나타납니다.

더 나아가서 성령을 받으면, 우리 안에서 성령님이 능력으로 역사하시기 때문에 성령님의 능력 나타나는 삶이 됩니다.

 

손오공과 사오정이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하기 위해서 면접을 보았습니다.

먼저 손오공이 면접을 보게 되었습니다.

면접관이 물었습니다.

자네 이름이 무엇인가?”

, 손오공입니다.”

축구를 좋아하나?”

, 좋아합니다.”

축구선수 중에 누구를 좋아하나?”

, 옛날에는 차범근이었는데 지금은 박지성입니다.”

산업혁명은 언제 일어났는가?”

“18세기입니다.”

“UFO 비행접시가 있다고 믿는가?”

과학적으로는 증명이 안 됐지만,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손오공은 똑똑하게 대답을 잘하고 나왔습니다.

손오공이 밖으로 나오자 사오정이 벌벌 떨면서 무엇을 물었는지, 어떻게 대답했는지 물었습니다.

그래서 손오공이 차례대로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제 사오정 차례가 되어서 면접관이 물었습니다.

자네 이름이 무엇인가?”

, 옛날에는 차범근이었는데 지금은 박지성입니다.”

당신 언제부터 그렇게 됐어?”

, 18세기입니다.”

아니, 이 사람 바보 아냐?”

, 과학적으로는 증명이 안 됐지만,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애기입니까?

신앙생활도 다른 사람 따라서 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내 소신껏 신앙 생활하는 것도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은 성령을 받아서, 성령의 감동과 교통과 능력 나타나는 삶, 성령의 지배와 통치를 받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아프리카 케냐에서 활동한 선교사님의 말에 의하면, 케냐의 마사이족들은 장정 서너명이서 홈이 파인 나무에 강한 막대기를 힘껏 비벼서 불씨가 생기면, 그 불씨를 각 가정으로 가지고 가서 불을 밝히고, 그 불로 고기를 구워서 먹고, 그 불이 밤에는 난방역할을 하고, 그 불이 말라리아를 전염시키는 모기를 쫓아내고, 그 불이 맹수의 위험으로부터 보호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성령의 불을 붙여야 합니다.

기도로 성령의 불씨를 살려서, 가정에도 붙이고, 교회에도 붙이고, 직장과 사업장에도 붙이고, 우리의 심장에도 붙여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불을 밝히고, 성령의 불은 악한 세력을 쫓아내는(~), 성령의 불의 능력 나타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임하신 성령이 저와 여러분에게 임하시어, 성령의 감동과 감화, 성령의 지배와 통치, 성령의 능력으로 4차원의 삶을 사는 복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령을 받았느냐 /19:1-7/ 박요한목사

2024-05-09 00:40:47

 

아프리카 케냐에 마사이족이 살고 있는 마을이 있다고 합니다. 마사이족은 불붙이는 장면이 인상적이라고 합니다. 장정 세 명이 홈이 파인 나무에 강한 막대기를 대고 힘껏 비벼대면 한참 후에 불씨가 생기고 거기에 마른 나뭇잎이나 마른소똥 같은 것을 대면 불길이 타오른다고 합니다. 불길이 타오르면 그 불을 각 가정에 옮겨 붙인다고 합니다.

 

마사이족은 고기를 구워 먹어야하기 때문에 반드시 불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뿐만이 아니라 이 불은 밤에는 난방 역할을 하고, 말라리아를 전염시키는 모기를 쫓아주고, 맹수들의 위협에서 보호해 준다고 합니다. 마사이족에게 불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에게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불이 있습니다. 바로 성령의 불입니다.

 

성령의 불이 우리의 심령에 불어야합니다. 성령의 불이 우리의 심령에 붙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성령의 불을 붙이고, 교회에 성령의 불을 붙이고, 가정에 성령의 불을 붙여야 합니다.

 

성령의 불이 붙어야 내 심령이 살고, 다른사람도 살고 가정이 살고, 교회가 살게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성령을 받았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본문 1절에서 2절 말씀에 보면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서 어떤 제자들을 만났습니다. 바울이 그 제자들에게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제자들이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여기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12제자가 아니라 일반 성도들을 제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성도들의 신앙을 점검하는 질문을 할 때는 구원을 받았느냐?” “구원의 확신이 있느냐?” “천국에 갈 수 있느냐?” 하고 물어보는데 바울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을 만나서 성령을 받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에베소교회 성도들이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에베소 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출석하고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성령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에베소 교회는 아볼로라는 젊은 목회자가 목회를 하고 있었는데 아볼로는 배운 것도 많고 성경도 능통하고 성경도 잘 가르치고 설교도 유창하게 하는 유능한 목회자였습니다. 그런데 아볼로는 성령에 대해서 알지 못하였고 성령체험도 없는 목회자였습니다. 그러니 아볼로에게 배운 에베소 교회 성도들은 당연히 성령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 성령체험도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모든 것을 버리고 3년반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예수님께 직접 가르침을 받고, 예수님께서 능력 행하시는 것을 직접 보고 예수님을 섬기는 사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지 못하고 성령체험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1장에 보면, 예수께서 감람산에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나서, 사도행전 2장에 가서 보면, 예수님의 12제자들을 비롯한 120명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할 때 오순절날 아침에 바람같은 성령, 불같은 성령이 임하여 모두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다른 언어로 말하기를 시작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그들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며 성령의 능력을 행하는 사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무디 목사님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성령은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신이시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서 일하시고 역사하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영국의 스펄전 목사님은 성령과 함께 하지 않는 사람은 동력이 끊어진 방앗간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방앗간에 동력이 끊어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방앗간이 움직이지 않게 됩니다. 사람의 힘으로 움직이려고 하면 힘이 너무 많이 들게 됩니다. 그런데 동력이 연결되어 있으면 방앗간이 자동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자전거를 타고 오르막길을 올라가면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그런데 오토바이를 타고가면 오르막길이든 내리막길이든 상관없이 힘들지 않게 갈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을 받은 사람은 오토바이를 타고 가는 것과 같습니다. 인생의 오르막길이든 인생의 내리막길이든 힘들지 않게 갈 수 있습니다. 왜냐면 성령의 능력으로 인생길을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당도 종류가 있습니다. 크게 세 종류입니다.

 

첫째는 학습무입니다. 공부를 해서 무당이 된 사람입니다.

 

둘째는 세습무입니다. 대를 이어서 무당이 된 사람입니다.

 

세 번째는 강신무입니다. 귀신의 영이 임한 사람입니다.

 

 

 

성도도 그렇습니다.

 

학습신앙이 있습니다. 성경공부를 통해서 신앙이 성장한 사람입니다.

 

또 세습신앙이 있습니다. 대를 이어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영적신앙이 있습니다. 성령을 받고 신앙 생활하는 사람입니다.

 

성령받고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 능력이 있습니다. 기쁨과 즐거움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의 동력이 넘치게 됩니다.

 

 

 

손오공과 사오정이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하기 위해서 면접을 보게 되었습니다. 먼저 손오공이 면접을 보게 되었습니다. 면접관이 손오공에게 물었습니다.

 

자네 이름이 무엇인가?” “네 손오공입니다.”

 

축구를 좋아하나” “네 좋아합니다.”

 

축구선수중 누구를 좋아하나?” “옛날에는 차범근이었는데 지금은 박지성입니다.”

 

산업혁명은 언제 일어났는가?” “18세기입니다.”

 

“UFO 비행접시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과학적으로는 증명이 안되지만 그렇다고 생각합니다.”하고 손오공은 면접관의 질문에 대답을 잘했습니다.

 

손오공이 면접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사오정이 벌벌 떨면서 오공아 오공아 무엇을 물었는지 나에게 좀 가르쳐 주라하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손오공이 면접관의 질문을 차례대로 가르쳐 주었습니다. 사오정은 손오공이 가르쳐주는 차례대로 달달달 외웠습니다.

 

사오정이 들어가자마자 면접관이 물었습니다.

 

자네 이름이 무엇인가?” “네 옛날에는 차범근이었는데 지금은 박지성입니다.”

 

당신 언제부터 그렇게 됐어?” “18세기입니다.”

 

아니, 이 사람 바보아냐?” “네 과학적으로는 증명이 안되지만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실력이라는 것은 자기가 갈고 닦아야지 남의 흉내내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남의 흉내내가지고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영접해서 내가 예수님을 믿고, 내가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18세기 프랑스의 사상가이며 철학자인 루소는 인생에 대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10대는 먹는 것에 따라 움직이고, 20대는 사랑 연인에 의해 움직이고, 30대는 쾌락에 의해 움직이고, 40대는 야망에 의해 움직이고, 50대는 탐욕에 의해 움직이고, 60대는 명예욕에 의해 움직이고 그것 때문에 산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것에 의해 움직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은 성령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을 사모하여 성령받고 성령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역사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을 받고 더 나아가서 성령으로 충면하여 성령에 의하여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본문 3절에서 6절 상반절 말씀에 보면 바울이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니라 바울이 이르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바울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요한의 세례라고 대답했습니다. 바울이 다시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곧 예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를 했습니다.

 

 

 

종합해 보면 성령을 받으려면 기본적으로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안수를 받아야 합니다.

 

한마디로 성령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받습니다.

 

예수님 이름을 믿고 예수님 이름으로 세례 받고, 예수님 이름으로 안수 받고, 예수님 이름으로 찬송하고, 예수님 이름으로 말씀 듣고, 예수님 이름으로 예배드리고, 오직 예수님 이름으로 성령을 받습니다.

 

보살의 이름으로 성령 받는 것이 아닙니다. 공자의 이름으로 석가모니의 이름으로, 마호멧트의 이름으로 성령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령 받습니다.

 

 

 

사도행전 1044절에서 46절 말씀에 보면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라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셨습니다. 그래서 방언을 하고 하나님을 높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성령이 임하신 것입니다.

 

 

 

독실한 크리스챤인 이비인후과 의사에게 두 분의 목사님이 찾아와서 진료를 받았습니다.

 

먼저, 한분의 목사님이 진료를 받는데 성대를 무리하게 사용해서 치료를 받으러 온 것입니다. 그러자 의사선생님이 목사님 성대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설교할 때 목소리를 낮추시고 찬송도 가급적 적게 부르시기 바랍니다하고 말했습니다.

 

다음으로 두 번째 목사님이 진료를 받는데 그 목사님도 성대를 무리하게 사용해서 치료를 받으러 왔습니다. 그러자 의사선생님이 목사님 성대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설교시간을 대폭 줄이시고 찬송가도 가급적 짧은 것으로 부르시기 바랍니다하고 말했습니다.

 

두 목사님이 진료를 마치고 가신 후에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간호사가 선생님! 두 분 목사님이 증상은 비슷한데 왜 다른 처방을 내리시나요?”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비인후과 의사선생님이 두번째 목사님은 우리교회 목사님이시거든하고 말했다고합니다.

 

웃을려고 하는 이야기지만 실제로 그런 마음으로 설교를 듣고,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드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성령이 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더 나아가서 기도할 때 찬송할 때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성령을 받으면 어떻게 됩니까?

 

본문 6절 하반절에서 7절 말씀에 보면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바울이 안수할 때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셨습니다. 성령이 임하시니까 방언도 하고 예언도 했습니다. 모두 열두 사람쯤 되었습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성령을 받으면 은사가 나타나게 됩니다. 성령장이라고 불리는 고린도전서 12장에 보면 성령의 여러 가지 은사가 나와 있습니다.

 

특히 고린도전서 127절에서 11절 말씀에 보면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에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성령을 받으면 각 사람에게 은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성도들의 은사체크를 해보면 성도들마다 각자 은사가 다르게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성령으로 은사를 주셔서 그 은사를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고 교회를 섬기고 사람을 섬기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모두가 성령을 받아서 성령의 은사대로 섬겨야합니다.

 

 

 

우리나라에 처음 복음이 들어왔을 때 유교와 불교와 토속신앙의 박해로 인해서 교회가 세워지고 복음이 확장되는데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러다가 1907116일에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부흥사경회가 열렸는데 그때 성령이 강력하게 임하셨습니다. 성령이 강력하게 임하게 되니까 성도들이 회개하고 방언을 하고 성령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이 성령의 불길이 전국으로 번져갔습니다. 그러면서 한국교회는 부흥의 불길이 타올랐고 오늘의 한국교회를 탄생시켰습니다.

 

성령을 받으면 성도들의 신앙이 뜨거워집니다. 성령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교회가 부흥이됩니다. 성도들이 축복을 받습니다.

 

오늘 우리교회도 성령으로 더욱 뜨거워져야합니다. 우리 성도들도 성령으로 더욱 뜨거워져야합니다.

 

스가랴 46절 말씀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으로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 받고 성령 받으신 분들은 더욱 성령으로 충만하여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령이 임하시므로 /19:1-7/ 박요한목사

2024-05-14 06:55:27

 

스테인드글라스의 거장인 찰스코닉은, 어느날 젊은 미술 학도의 방문을 받았습니다. 그 미술 학도는 스승인 찰스 코닉에게 선생님의 화구를 며칠만 빌려주십시오. 제가 찰스 코닉이 된 기분으로 스테인드 글라스 하나를 그려 보겠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찰스 코닉은 제자에게 자신의 화구를 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찰스 코닉은 궁금해서 제자의 화실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미술 학도는 스승의 화구를 써도 그림이 잘 안 그려진다고 하면서 투덜대고 있었습니다. 그때, 찰스 코닉이 미술학도에게 스승의 도구가 자네를 변화시킬 수 없네. 오직 스승의 불을 받아야 한다네하고 말해 주었다고 합니다. 스테인드글라스 즉, 색유리 한 장을 그리는데도 제대로 된 그림을 그리려면 스승의 불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받고 제대로 된 신앙생활을 하려면 예수님의 영이신 성전의 불을 받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에베소서 교회의 열두 사람도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성령세례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제대로 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령세례를 받고 제대로 된 신앙생활을 하게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내용을 보면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물었습니다. 너희가 믿을 때 성령을 받았느냐 그러자 그들이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하고 대답했습니다.

 

바울이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이르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이는 곧 예수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며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했습니다. 모두 열두 사람쯤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되는 말씀은 본문 6절 말씀입니다. 본문 6절 말씀에 보면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라고 했습니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셨습니다. 성령이 에베소 교회의 열두 사람에게 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약속하신 성령이 에베소 교회의 열두 사람에게도 임하셨습니다. 그래서 에베소 교회의 열두 사람도 성령을 받았습니다.

 

요한복음 2021절에서 22절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라고 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4절에서 5절 말씀에 보면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시느니라하고 했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늘로 승천하시기 전에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하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사도들과 여자들과 함께 120명이 미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열흘동안 오로지 기도에 힘썼습니다.

 

 

 

그러고 나서 사도행전 21절에서 4절 말씀에 보면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ㅇ약속하신 성령님이 바람과 같이 불과 같이 임재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마가의 다락방에 임재하신 성령님이 에베소 교회의 열두 사람에게도 임재하셨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임재하신 성령님, 에베소 교회의 열두 사람에게도 임재하신 성령님이 우리 시화충현교회 성도들에게도 임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언제 성령님이 임재하셨습니까? 성령님이 임재하시는 때는 다양합니다.

 

사도행전 114절 말씀에 보면 여자들과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라고 했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있던 120명이 오로지 기도에 힘쓸 때 바람 같은 성령, 불같은 성령이 임재하셨습니다.

 

기도할 때, 성령님이 임재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044절 말씀에 보면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라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성령님이 임재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6절 말씀에 보면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 교회의 열두 사람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셨습니다. 안수할 때, 성령님이 임재하셨습니다.

 

, 찬송할 때, 예배드릴 때 성령님이 임재하시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 말씀 들을 때, 안수할 때, 찬송할 때, 예배드릴 때, 성령님이 임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령님이 임재하시므로 어떤 현상이 나타났습니까?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라고 했습니다.

 

성령님이 임재하시니까 방언을 했습니다.

 

사도행전 14절 말씀에 보면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라고 했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있던 120명이 바람 같은 성령, 불같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했습니다.

 

성령이 방언으로 말하게 하신 것입니다.

 

방언은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방언입니다. 언어가 다른 나라 사람과 소통할 수 있는 방언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방언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방언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 사용하는 방언입니다.

 

또 성령님이 임재하시니까 예언을 했습니다.

 

예언은 장차 일어날 일을 미리 알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미리 알고 말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방언과 예언은 성령님이 주시는 은사입니다.

 

성령님은 방언과 예언의 은사뿐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은사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고린도전서 127절에서 11절 말씀에 보면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라고 했습니다.

 

 

 

뿐만이 아니라 성령님이 임재하시면 사도행전 18절 말씀에 보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재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 되리라라고 했습니다.

 

성령님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예수님의 증인이 됩니다.

 

갈라디아서 522절에서 23절 말씀에 보면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성령님이 임재하시면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맺으며 살게 됩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바울이 제2차 선교여행을 하는데 성령님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이 바울에게 환상을 보여주시고, 바울을 마게도냐로 인도하셨습니다. 바울이 마게도냐의 첫 성인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자색 옷감 장사 루디아를 만나서 빌립보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성령님이 임재하시면 성령님이 인도해 주십니다.

 

사도행전 8절에 보면 성령님이 빌립에게 광야로 가라고 지시하셨습니다. 빌립이 광야로 가니까 에디오피아의 내시가 수레를 타고 가고 있었습니다. 성령님이 빌립에게 수레로 가까이 나아가라로 하셨습니다. 그래서 빌립이 수레로 가까이 가서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하여 에디오피아 내시가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성령님이 빌립과 에디오피아 내시 사이에서 교통하셨습니다.

 

성령님이 임재하시면 사람과 사람 사이를 교통해 주십니다.

 

사무엘상 1613절 말씀에 보면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고 했습니다. 성령님이 임재하시면 성령님의 감동을 받게 됩니다.

 

베드로전서 411절 말씀에 보면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라고 했습니다. 봉사도,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 , 성령의 힘으로 하라는 말씀입니다. 성령님이 임재하시면 성령님이 봉사할 수 있는 힘도 주십니다.

 

누가복음 1113절 말씀에 보면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을 구하고 또 구하고 늘 성령을 구하여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승리하며 사는 복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요한의 세례와 예수의 세례 /19:1-7

2024-04-30 00:02:41

 

에베소 교회

 

그리스도교의 대표적인 성지는 예루살렘과 갈릴리입니다. 복음서가 말하는 예수님의 3년간 공생애가 주로 이곳을 배경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승천 이후 바울이 왕성하게 선교 활동을 펼친 소아시아, 그러니까 지금의 투르키예 중서부와 그리스 지역에도 성지라 일컬어질 만한 장소는 많습니다. 교부 시대로 넓히면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와 예루살렘과 이스탄불이 중요하겠지요. 저는 요한계시록에 거론된 소아시아 일곱교회가 있었던 튀르키예를 가보고 싶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의 배경인 에베소(에페소스)는 튀르키예의 남서쪽에 자리합니다. 에베소 왼편으로는 지중해가 있고, 아래로는 밀레도가 있습니다. 밀레도(밀레토스)는 고대 서양 철학의 발생지입니다. 탈레스가 바로 이곳 출신입니다. 바울은 2차 선교 여행을 마칠 때 에베소에 잠시 들렸습니다. 시간이 충분하지 못하여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예루살렘을 거쳐서 처음 출발지인 시리아 안디옥으로 갔다가 3차 선교 여행을 시작하면서 에베소에 다시 들립니다. 3차 선교는 대부분 에베소에서 이뤄졌습니다.

 

두란노서원이 바로 에베소에 있습니다. 바울 일행은 민중 폭동으로 인해서 에베소를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에게해 건너편 마게도냐 지역으로 가서 교우들을 살펴본 다음 되돌아서 예루살렘으로 갈 계획이었습니다. 마게도냐에서의 활동이 끝난 뒤에 밀레도로 내려왔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에베소에 들르고 싶었으나 오순절 안으로 예루살렘에 도착해야 했기에 에베소 바로 아래 도시인 밀레도로 갔습니다. 교통 여건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밀레도에서 바울은 사람들을 에베소에 보내서 에베소 장로들을 초청했습니다. 그들 앞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자기의 심정을 토로합니다. 그 자세한 내용이 행 20장에 나오는데, 그중에서 행 20:22-25절만 읽겠습니다.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보라 내가 여러분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이제는 여러분이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바울과 에베소 교회의 관계는 아주 특별했습니다. 그 내용을 우리가 자세하게는 알지 못합니다. 그것에 관한 자료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죽을 각오를 다질 수밖에 없을 정도로 위태로운 절체절명의 순간에 에베소 장로들을 초청해서 마치 죽음을 앞둔 사람이 유언하듯이 말하는 걸 보면 그 관계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왜 이렇게 에베소 교회에 관심이 큰 걸까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에베소가 선교 전략적으로 거점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에베소는 소아시아 지역의 주도였습니다. 로마가 직접 통치하는 지역입니다. 로마 제국 시대에 두 번째 도시라 할 알렉산드리아 못지않은 국제도시였습니다. 밀레도가 가까이 있습니다. 정치, 경제, 문화, 예술, 철학 등등에서 다시 가장 잘 나가는 도시였습니다. 그런 국제도시에 교회를 반듯하게 세운다면 세계 선교를 추진하는 데서 상당한 탄력을 받을 수 있다고 바울이 생각했겠지요.

 

다른 하나는 에베소 회당을 다양한 분파가 구성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회당에는 유대교인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도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그리스도인들이 회당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었습니다. 유대교인과 그리스도인의 차이도 서로 배척할 정도로 크지 않았습니다. 이게 지금 우리 눈에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나 당시는 자연스러웠습니다. 에베소 디아스포라 유대인 중에는 바리새파도 있었고, 사두개파도 있었고, 에세네파도 있었고, 세례 요한 추종자들도 있었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이 완전히 구분되지도 않았습니다. 바래새파이면서도 세례 요한의 제자일 수 있고, 세례 요한의 제자이면서 그리스도인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이 큰 틀에서 회당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을, 즉 복음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하는 일이 바울에게는 무엇보다도 중요했습니다. 그런 정체성이 희미해지면 그리스도교는 자칫 유대교의 아류로 떨어지고 말 테니까요. 당시 바울의 심정이 이해가 갑니다.

 

아볼로

 

이런 역사적 배경을 전제하고 오늘 설교 본문을 따라가 봅시다. 바울은 드디어 에베소에 왔습니다. 재미있게도 본문은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어떤 제자들을(그리스도인 일반을 가리키는지, 세례 요한의 추종자들을 가리키는 정확하지 않은데) 만나서 성령을 받았느냐(19:1-2)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성령이 있다는 말을 듣지도 못했다고 대답합니다. 바울이 다시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고 묻자 그들은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고 대답합니다. 요한의 세례만으로 신앙생활이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이 크게 잘못도 아닙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 중에도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세례 요한의 세례에 머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게 무슨 말인지, 그리고 그것이 왜 문제인지는 뒤에서 밝혀질 것입니다. 우선 요한의 세례 전통이 당시 교회에 얼마나 광범위하게 퍼져있었는지를 조금 더 분명하게 설명해야겠습니다.

 

고린도 교회에도 서로 다른 세례 전통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고전 1:12)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느냐에 따라서 분파를 형성되었습니다. 요즘 장로교와 감리교와 성결교가 교파를 형성하듯이 말입니다. 사실은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베풀지 않았기에 그리스도파라는 말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에게 속하지 않았기에 스스로를 그리스도파라고 말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네 분파의 하나인 아볼로 파가 곧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요한의 세례를 따르는 자들입니다. 18:24-25절에 따르면 이 아볼로는 알렉산드리아 출신 율법 학자입니다. 그도 바울처럼 여러 지역을 순회하면서 요한의 세례 전통을 전파한 사람은 아니었을까요? 위에서 인용한 고린도 교회의 여러 분파 현상과 요한의 세례만 알던 에베소 제자들 현상을 놓고 본다면 아볼로는 세례 요한 추종자들을 대표하고 바울은 예수 추종자들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예수의 제자들은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미묘한 관계에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세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도 불편한 진실이고, 예수께서 세례 요한에게서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복음은 그들이 친족간이었다고 말합니다. 세례 요한이 먼저 출가했습니다. 예수께서 세례 요한에게 영향을 받아서 출가했다고 말해도 크게 잘못은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메시지의 내용입니다. 예수께서 처음 선포한 메시지는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입니다. 이 메시지는 요한이 먼저 선포한 것입니다. 이를 가장 정확하게 진술하는 복음서는 마태복음입니다. 다른 복음서는 단순하게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요한이 전파했다고 말하지만, 마태복음만은 요한이 유대 광야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으니라.”(3:2)라고 전파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짚었습니다.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다는 말도 사실은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말과 같은 의미입니다. 요한은 먼저 하나님 나라와 세상 개혁을 외치다가 삼십 대 초반에 참수형을 당했고, 예수께서는 뒤를 이어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다가 삼십 대 초반에 십자가 처형을 당했습니다. 훗날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요한의 제자들과 예수의 제자들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때로는 경쟁 관계를, 때로는 협조 관계를 맺으면서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공동체 안에서 왜 이렇게 오랫동안 세례 요한의 전통이 영향을 끼친 것일까요? 세례 요한의 가르침과 삶이 매우 강력했다는 게 그 이유입니다. 이를 총칭해서 물세례라고 이름 붙여도 됩니다. 물세례의 내용은 세례 요한의 설교에 다 들어있습니다. 새로운 삶으로 변화하는 겁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그것을 자세하게 전합니다. 한 마디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3:8)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알곡은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십니다.(3:12) 요즘 말로 개혁적인 삶, 윤리와 도덕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런 삶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오늘날 교인들이 목사들을 판단할 때도 이런 기준이 작용합니다. 아무개 목사님은 정말 정의롭게 살았다고, 도덕적이고 윤리적으로 살았다고, 청렴하게 살았다고 칭찬합니다. 그런 도덕주의 설교가 주목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세례 요한의 물세례에 머물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바울에게 빚진 게 많습니다. 그가 없었다면 복음의 본질이 크게 약화하거나 훼손되었을지 모르니까요. 한 개인이 역사의 흐름을 종종 바꾸기도 합니다. 그는 오늘 본문에서 에베소 교회의 제자들이 세례 요한의 세례만 안다는 대답을 듣고, 4절에서 세례 요한도 사람들에게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말했다는 사실을 풀어서 설명했습니다. 5절에 따르면 바울의 설득으로 그들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세례 요한의 전통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 전통으로 돌아섰다는 의미입니다.

 

 

 

성령세례

 

세례 요한의 세례를 물세례라고 한다면 예수의 세례는 성령세례입니다. 물세례는 앞에서 설명했듯이 손에 잡히는데 성령세례는 그렇지 못합니다. 오늘 본문 6절에 따르면 성령세례는 방언과 예언으로 나타납니다. 방언과 예언은 성령 은사입니다. 은사에는 방언과 예언만 있는 게 아니라 가르치는 일과 설교하는 일과 각종 봉사가 다 포함됩니다. 방언과 예언은 아주 특별한 현상이라서 사람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런 은사를 강조하는 교파를 가리켜서 오순절파라고 합니다. 유대교의 오순절에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했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대표적으로 속칭 순복음교회가 그 교파입니다. 저는 오늘 방언과 예언 현상 자체를 자세하게 설명하지는 않겠습니다. 성령세례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밝힌다는 차원에서 방언과 예언의 본래 의미만을 설명하겠습니다.

 

1) 방언은 언어 존재론에 해당합니다. 이전에 알던 언어와 다른 새로운 언어를 알면 세상이 새로워집니다. 새로운 세계를 알면 언어도 달라집니다. 언어가 바로 그 사람의 존재 근거이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들이 언어를 어떻게 배우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자기를 따뜻하게 안아주고 젖을 주는 대상을 엄마라는 단어로 인식합니다. 수 없는 반복을 통해서 그 아이에게 엄마의 세계가 열리는 겁니다. 만약 그 아이가 청각장애를 겪는다면 엄마라는 언어를 경험하지 못하겠지요.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방식으로 엄마를 경험하긴 하겠으나 그것이 제한적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이를 극복하려면 그 아이와 엄마는 다른 이들보다 더 큰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스도교 언어는 모두 기본적으로 방언입니다. 설교도 방언입니다.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내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총, 하나님의 사랑, 믿음으로 의로워짐,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 깨어서 기도하고, 예수 재림을 기다리라, 등등이 모두 방언 아니면 무엇인가요? 오늘 우리가 예배 시간에 부른 상투스찬송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도다 만군의 주 하나님/ 하늘과 땅에 가득한 그 영광/ 높은 데에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양받으소서 높은 데에 호산나그리스도교 신앙의 깊이를 모르는 사람은 이 찬양이 방언으로 들립니다. 아는 사람은 신앙과 삶의 새로운 깊이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교회 다니고 예수 믿어도 그리스도교 신앙과 삶을 새롭게 느낄 수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어디에 문제가 있을까요. 안타깝지만 영적인 청각장애를 안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2) 성경이 말하는 예언을 오해하기 쉽습니다. 족집게 점쟁이처럼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알아맞히는 어떤 것쯤으로 말입니다. 옛날에는 기도를 많이 한다는 분들이 태아의 성을 맞춰주기도 했습니다. 그 확률은 50%쯤 되겠지요. 예언은 주술적으로 미래를 알아맞히는 일이 아니라 알파와 오메가이신 하나님 안에서 삶을 종말론적 차원에서 받아들이는 영적 태도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오십니다, 우리는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품에 안깁니다, 하는 문장이 바로 예언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다시 바울의 문장을 인용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현재의 우리는 연약합니다. 시험도 받습니다. 실수도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속사람은 종말론적으로 완성됩니다. 그런 종말론적 미래를 희망하면서 삽니다. 그런 희망 가운데서 나오는 말이 곧 예언입니다.

 

언어의 존재론적 깊이를 가리키는 방언과 미래지향적인 삶을 가리키는 예언을 삶의 중심으로 삶기가 쉽지 않습니다. 거의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태어나서 사춘기와 청소년기와 장년기를 거치면서 세속 원리에 길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세속 원리의 핵심은 자기애입니다. 유치원 시절부터 자기에게 몰입하게 합니다. 자기를 내려놓지 못합니다. 짜증이 나고 불안하고, 거꾸로 잘난 척하고 싶어집니다. 지금 당장 기분 좋은 일만 찾습니다. 세상이 자기 뜻대로 굴러가지 않기도 하고, 잘 굴러간다고 해도 만족이 안 되니까 마치 앞만 볼 수 있는 안대를 낀 경주마처럼 전력 질주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회개하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일단 삶의 방향을 바꾸지 않으면 생명을 얻지 못하니까요.

 

지금 당장 삶이 피곤하기에 회개라는 말이 귀에 들리지 않는다, 방언과 예언은 배부른 사람에게는 어떨지 몰라도 배고픈 사람에게는 거리가 멀다, 하고 속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적지 않을 겁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분발하시라고, 은총을 구하라 말 외에 맞춤형 대답을 저는 드릴 수가 없습니다. 이런 이들보다 더 많은 숫자의 그리스도인은 요한의 세례인 물세례 수준으로 만족할 겁니다. 그런 정도로 살아도 괜찮습니다. 그렇게 사는 분들을 저는 칭찬하고 싶습니다. 위선이 아니라 진정한 바리새인으로 사는 거니까요. 그러나 복음을 전하는 설교자로서 저는 여러분이 이왕 그리스도교의 세계에 발을 디뎠다면 요한의 세례에 머물지 말고 예수의 세례 안으로 들어가시라고 말씀드립니다. 성령세례를 받으시라고 말입니다. 단순히 행위의 변화가 아니라 존재의 변화로 나아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2024년 한 해가 이제 시작했습니다. 한 해를 다 보내고 12월 마지막 주일에 우리 모두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지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봅시다.

 

 

 

복음의 승리 /19:1-/ 조정의목사

2022-02-18 09:46:04

 

2차 전도 여행을 마친 후 수개월 뒤(“얼마 있다가 떠나”, 18:23) 3차 전도 여행이 시작됐다. 갈라디아, 브루기아를 시작으로 세워진 교회를 굳건하게 하고 마침내 에베소에 도착했다. 전에 잠시 들렸다가 하나님의 뜻이면 돌아오겠다고 약속한 곳이다(18:21). 거기서 바울은 전도사역 중 가장 큰 성공을 거두었다.

 

서방 본문에 따르면 바울은 거의 3년 가까이 에베소에 머물며 매일 이른 아침부터 늦은 오전까지 가죽 장사를 했다. 해가 중천에 떠서 다들 일하지 않고 낮잠을 자는 시간에(오전 11~오후 4) 매일 제자를 모아 복음을 전했다. 한 주석가는 계산하기를 1주일에 6, 하루 다섯 시간, 3,120시간 동안 복음을 가르쳤다고 한다. 유대 회당에서 비방을 받고 우상 숭배자들에게 곤욕을 치렀지만, 끝까지 신실하게 복음을 선포한 바울이 복음이 마침내 승리하는데 크게 기여한 것 아닌가?(10-20).

 

하지만 본문의 주인공은 성령님이시다. 사람이 승리를 보장하는 게 아니다. 승리의 능력은 성령님께 있다. 성령께서 충성된 일꾼이 전하는 복음을 통해 승리를 거두게 하신다. 우리도 성령을 받았다. 참 복음을 알고 믿는다. 그래서 우리도 성령이 복음을 통해 거두시는 참 승리를 삶에서 기대할 수 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복음의 승리가 무엇인지 알고, 구하길 바란다. 복음의 충성된 일꾼성령의 도구가 되어 성령이 주신 승리를 맛보길 원한다.

 

1. 성령께서 복음을 통해 참 신자를 낳으신다(1-7)

 

현대 교회는 복음의 승리를 교인 수 증가와 같은 것으로 착각하지만 참 승리는 교인이 아니라 신자를 낳는 것이다. 성령의 역사는 (열심히) 종교 생활 하는 많은 가라지를 교회 심는 게 아니라 알곡을 심는 것이다. 성령은 복음을 통해 참 신자를 낳으신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처음으로 만난 어떤 제자들”(열두 사람쯤, 7)은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한 이들이었다(1, 2). 그들은 요한의 세례를 받았는데, 그래서 많은 이들이 이들을 세례 요한의 제자들로 추측한다(3). 그들은 아직 거듭난 상태가 아니었다.

 

하지만 세례 요한의 제자는 종교인으로 볼 때 매우 신실하고 훌륭한 자들이다. 스승인 요한은 청빈한 삶을 살았고(낙타털 옷, 메뚜기와 석청, 3:4) 대쪽같이 회개를 촉구했으며(3:6-7), 그의 제자들은 금식과 기도에 헌신했다(9:14; 11:1). 교리상으로도 부족하지만 잘못된 건 아니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하나님이 회복하실 나라를 기대했고(3:2-3), 요한을 신처럼 숭배한 것이 아니라 요한이 가리키는 메시아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들에게 부족한 것이 있었다. 요한이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고 한 예수님을 알지 못했던 것과 그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성령을 받아야 함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4-6). 바울은 그들에게 예수의 복음을 전했고(4),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다(5). 그 결과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셨고, 방언과 예언으로 그들도 그리스도의 참 제자가 되었음을 보이셨다(6). 처음에 오순절에 유대인에게, 그 후에 사마리아인과 이방인 고넬료에게 행하신 성령의 역사가 똑같이 일어났다(2:1-4; 8:14-17; 10:44-47).

 

성령께서 복음을 통해 이루시는 승리가 참 신자를 낳는 거라면, 우리도 복음을 통해 그것을 기대해야 한다. 우리는 교회에 종교인이 늘어나길 원하지 않는다. 공예배 참석과 헌금, 기도에 헌신하기만 하면 그 사람이 정말 주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아 거듭난 삶을 살든지 살지 않는지 아무 상관 안 하는 그런 교회가 되길 원하지 않는다. 적은 무리일지라도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주시길 기뻐하시는 참 신자의 모임이 되길 원한다(12:32).

 

교회에 새로 온 사람의 흥미를 끌고 구도자의 구미를 당길 이벤트, 등록된 성도를 잘 관리하는 시스템, 한 사람도 빠져나가지 않도록 잘 붙잡아 주기 위한 소그룹 등을 통해 교회의 부흥을 꿈꾸는 것, 어떤 면에서 좋지만 다 부차적인 것이고 가장 중요한 것을 먼저 생각하지 않으면 오히려 잘못되기 쉽다. 교회의 모든 프로그램, 시스템, 소그룹 등은 구도자가 구원받고, 참 신자가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기 위해 만들어지고 운영되어야 한다.

 

유평교회에 성령님께서 복음 듣기 원하는 이들을 불러모아 달라고 기도하되, 그들이 복음을 듣고 성령의 역사로 거듭나게 해달라고 간구하자. 사랑하는 가족이 교회 다니기 시작한 것에 감사하지만, 진짜 복음이 일으키는 승리, 죄와 허물로 죽은 영혼이 살아나는 승리를 성령님께서 일으켜 달라고 간절히 구하자.

 

2. 성령께서 복음을 통해 참 능력을 보이신다(8-20)

 

바울의 에베소 사역은 두 장소에서 이뤄졌다. 첫 번째로 회당이다. 인구 25만의 큰 도시였기 때문에 적지 않은 유대인 회당이 있었을 것이다. 그곳에서 약 석 달 동안 하나님 나라 복음을 강론(토론식 설명)하고 권면(받아들이도록 설득)했다(8).

 

두 번째 장소는 두란노 서원이다. 두란노라 하는 사람이 가르치는 곳으로 사용한 강당이나 그가 소유한 건물을 가리킨다. 회당에서 석 달간 가르치면서 서서히 시작된 유대인들의 거부와 비방 때문에 결국 바울은 이곳으로 장소를 옮겨야 했다(9). 여기서 두 해 동안(2) 매일 하나님 말씀을 강론했다(9-10). 결과적으로 복음은 아시아 전역에 사는 유대인, 헬라인 모두에게 들려졌다(계시록에 나오는 아시아 일곱 교회도 이때 설립).

 

이런 엄청난 부흥은 성령께서 복음에 능력을 더하심으로 일어났다. 성령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셨다(11). 얼굴을 닦거나 덮는 손수건, 몸을 가리는 앞치마 등 바울의 몸에 걸친 것들을 가져다 병든 사람과 귀신 들린 사람에게 얹으면 치유와 축귀 역사가 일어났다(12; 베드로 그림자, 5:15). 성령께서 복음을 전하는 이에게 능력을 더하신 것이다.

 

그러자 가짜가 나타났다. 유대인 중 순회 마술사로 밥벌이하는 이들이 성령이 바울을 통해 하시는 일을 흉내 내기 시작했다(13). 대표적으로 유대 제사장 가문의 스게와와 일곱 아들이 있었는데(14), 악귀 들린 사람이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라고 말하며 엄청난 힘으로 그들을 제압했고, 결국 그들은 발가벗겨져 몸에 멍이 들도록 맞았다(16). 그 소식을 들은 에베소의 모든 유대인과 헬라인은 무얼 알게 됐을까?

 

바울을 통해 일하시는 성령님을 함부로 대하면 큰일 난다. 복음의 능력은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특별한 주문에 있는 게 아니다. 복음을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님께 있다. 성령님의 능력이 아니면 사람의 말이나 물건엔 아무런 효력이 없다.

 

이 일을 통해 결국 주 예수님의 이름이 높여졌고(17), 많은 죄인이 예수님을 믿고 자기 죄를 자백했으며(18), 이전에 행하던 악한 일들, 마술로 사람을 미혹하며 돈을 벌던 과오를 청산했다. 19절에 그들이 불사른 책값이 은 오만이라 하는데, 5만 명의 하루 품삯, 환산하면 약 25억에 이른다. 이처럼 놀라운 복음의 승리는 주의 말씀 곧 복음 말씀에 성령께서 힘을 더하시고 세력을 더하셨기 때문이다(20).

 

오늘날 성령께서 우리가 전하는 복음에 이런 능력을 더하시면 얼마나 좋을까? 이렇게 가시적으로 복음의 능력이 나타난다면, 더 많은 사람이 예수를 높이고 회개하고 믿게 되지 않을까? 바로 그런 이유로 오늘날 많은 은사 주의 교회와 이단에서 가짜 성령 쇼를 벌인다. 치유과 축귀를 흉내 내며 거짓으로 사람들을 불러모으고, 자기 배를 불리려고 가짜 복음을 선포한다. 셀 수 없이 많은 피해자를 낳고 물질적, 정신적, 영적 폐해를 끼친다. 결국 예수님 이름에 먹칠을 하고, 조금의 회개도 일으키지 않으며, 짜릿한 흥분과 열기가 사라지면 참회심과 구원의 열매는 하나도 남지 않는다.

 

오늘날 성령의 능력은 주로 어떻게 보여질까? 성령께서 복음을 믿고 따르는 자의 삶 속에 맺으시는 성령의 열매를 통해 보여진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온유, 절제(5:22-23). 참 신자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살고, 그런 자는 성령의 능력으로 이와 같은 열매를 맺는다(5:25).

 

우리가 전달하는 복음이 정확하고 올바른 것이어야 함에 틀림없지만, 대부분의 사람이 그 복음을 전달하는 우리의 삶을 먼저 보고 듣는다는 걸 알아야 한다. 성령님께서 당신 삶에 심겨진 복음을 통해 참 능력이 나타나게 하시길, 그래서 당신의 삶을 통해 예수님이 높아지시고, 회개와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간절히 구하라. 성령님은 지금도 복음을 통해 능력을 보이신다.

 

3. 성령께서 복음을 통해 이 세상을 이기신다(21-41)

 

성령께선 바울에게 로마 그리고 스페인(서바나, 15:24, 28)에 이르는 선교 여행의 큰 그림을 보여주셨다. 21절에 보면 바울은 자신이 예루살렘 그리고 로마도 보아야 한다는 걸 알았다. 그 전에 복음 동역자들을(디모데, 에라스도)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보내 예루살렘 구제에 필요한 물질을 마련하게 했고(고후 9:3, 4), 자신은 에베소에 조금 더(얼마 동안 더) 머물게 됐다(22).

 

바로 그때 복음 때문에 에베소에 큰 소동이 일어났다(23). 에베소는 아데미 신을 모시는 특별한 신전을 소유했고, 그 신전은 220년간 온 아시아가 재건에 힘써 완공한 고대 7대 불가사의 건물 중 하나였다. 아덴에 있던 파르테논 신전의 네 배 크기로 축구 경기장보다 훨씬 큰 규모였다. 에베소 사람들은 아데미 신을 자신들이 수호하고 있다는 특권 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신의 형상을 새겨 두둑이 돈을 챙기는 상인들은 그들의 신앙심과 상관없이 이를 매우 좋게 여겼다(24-25, “적지 않은 벌이, 풍족한 생활”).

 

그런데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계속해서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라고 하니(26), 자기들 사업에 지장을 줄 게 뻔하고, 그러면 풍족한 생활을 잃게 될 것이며, 핑계지만, 아데미 신에 대한 종교심까지 상실될까 염려가 되었다(27). 분노로 가득 찼다(28). 그래서 조합장쯤 되는 더메드리오가 같은 일 하는 사람들을 모아다 대규모 집회를 벌인 것이다(24).

 

그들은 바울의 측근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들어 연극장으로 끌고 들어갔다(29, 25천 명 수용 가능). 소식을 들은 바울도 연극장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바울의 여러 친구들이 말렸다(아시아 관리 중에 바울의 친구, 30-31). 연극장엔 수많은 사람이 모였지만, 정작 왜 모였는지 모르는 자가 태반이나 되었다(32).

 

상황은 심각했다. 유대인 대표 알렉산더의 말도 묵살하고(33)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라고 두 시간 동안 크게 외칠 만큼(34). 하지만 상황은 생각보다 쉽게 종료됐다. 서기장(시장)이 아주 차분하고 냉정하게 설득했기 때문이다(35-40).

 

우리가 제우스에게서 내려온 우상 아데미의 신전지기란 걸 모두가 안다. 그리스도인이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거나 여신을 비방한 적이 없다. 정식으로 총독 앞에서 재판하도록 고소하거나 민회에서 결정하면 된다(달에 세 번). 그런데도 정당한 이유 없이 소동을 일으키면 로마 주 정부가 오히려 우리를 책망하고 불법 집회로 소동을 일으킨 죄목으로 자치권을 빼앗아 갈 수 있으니 주의하라. 이 말에 모임은 흩어졌다(41).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서기장이 그들의 법을 통해 살펴볼 때 그리스도인에게서 책잡을 것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이다. 만일 그들이 복음의 열정이란 핑계로 신전을 훼손하거나 우상을 모욕했다면 은장색의 집회가 정당해졌을 것이고, 이후에 정식 고소나 재판이 일어날 가능성도 충분했다. 기독교는 쓸데없는 박해를 받고 복음 전파도 강력한 제지를 당했을 것이다.

 

복음을 믿고 따르는 교회는 마땅히 법과 질서를 무너뜨리는 불법 단체가 아니라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생활하는 무리가 되어야 한다(딤전 2:1-2). 이 땅에 시민권이 있는 게 아니라 하늘나라 시민권을 가진 자들이지만 누구보다 선량하고 신실한 시민이 되어야 한다. 구약의 다니엘을 보라. 그는 하나님의 율법에서 근거를 찾지 못하면 고발할 수 없을 정도로 충성되어 아무 그릇됨이나 허물을 찾을 수 없었다(6:4-5).

 

오늘날 교회가 세상을 이긴다는 표현을 잘못 이해하는 사람이 많다. 물론 성령께서 복음의 반석 위에 세워진 교회를 견고하게 지키실 것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그것은 교회 집단의 정치적 영향력이나 투표권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교회가 세상을 전복시키고 군림하는 것도 성령이 일으키는 승리가 아니다.

 

성령이 이 세상을 이기는 힘은 우리의 믿음에 있다(요일 5:4). 우리의 믿음이 누가 뭐라고 해도 절대 굽히지 않는 복음의 진리 위에 있을 때, 그리고 그 믿음이 삶에서 성령에 따른 행함으로 풍성히 열매 맺을 때, 그때 우리는 세상을 이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성령님께서 복음으로 세상을 이기는 승리이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복음 사역을 설명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하게 하기 위하여 나를 통하여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그 일은 말과 행위로 표젹과 기사의 능력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졌으며 그리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15:17-19).

 

복음의 승리가 당신 삶에서 선포되길 바란다. 성령께서 참 신자를 낳으시고, 능력을 보이시고, 세상을 이기는 역사를 당신이 전파하는 복음을 통해, 당신이 행하는 복음적인 삶을 통해 일으키시길, 그래서 그것을 기쁨으로 자랑하는 우리가 되길 바란다.

 

 

 

19:1-7/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조용기 목사

2014-09-09 09:56:19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이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900년대 초에 나타나기 시작한 성령운동은 이제 전 교파를 초월하여 전 세계에 걸쳐서 영원의 불길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는 마치 2천년 전 오순절 다락방에서 일어난 성령운동이 복음을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충만하게 채운 운동과 같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먼저 이른 비 성령을 주셔서 교회를 탄생시키고 그 후 마지막 때에 늦은 비 성령을 주심으로 교회를 성장시키고 열매 맺게 해서 급기야 추수해서 천국으로 데려가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성령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예언한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주님이 교회를 성장시키고 열매 맺게 해서 이제는 스스로 하늘나라를 주기 위해서 그와 같은 성령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와 같은 하나님의 섭리를 모르고 지금도 성령운동을 비난하고 반대하는 평신도나 신학자나 목사나 있습니다. 나는 이런 분들이 있는 것을 생각할 때 저의 마음속에 안타깝기 말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최근에는 한국의 어떤 목사가 우리 교회와 저를 공격하는 글을 쓴 중에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 중 성령님께 관하여 너무 강조하여 신학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다고 비난한 글을 읽어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글을 읽고 저는 실수했습니다. 그분이야말로 삼위일체가 무슨 의미인지를 전혀 알지 못하고 있음을 나타내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구약 4천년 동안은 삼위일체 중에 아버지 하나님이 정면에 나오셔서 역사하셨습니다. 그리고 항상 예수님은 야훼의 사자로 또 성령은 야훼의 영으로 나타나셔서 아버지 배후에서 일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구약에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3백 여번 이상 예수를 보내 주시겠다고 늘 예언하셨는데 그 예언대로 2천년 전 예수님께서 육신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이제는 아버지는 뒤로 물러서시고 삼위일체 하나님 중에 2위인 예수님이 정면에 나타나시고 아버지와 성령은 그 배후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약성경을 읽어보면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으로부터 계시록까지 전혀 예수께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예수님을 통해서 성령님도 예수님을 통해서 역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사역의 마지막 때에 성령님을 보내시겠다고 계속 강조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말씀하신대로 예수님의 부활승천 이후 오순절 날 성령께서 강림하셨고 이제는 성부, 성자, 성신의 시대가 아니라 성령시대가 오셔서 아버지와 아들도 성령의 배후에서 성령을 통해서 나타나시는 시대에 우리가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성령님을 통하지 않고는 예수님이나 아버지를 알 수도 믿을 수도 없습니다. 그 때문에 성령님을 아무리 강조해도 충분치 않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삼위일체 하나님 중에 성령께서 정면에 나와서 일하는 시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예수를 주라고 할 수도 없고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은 삼위일체 하나님 중에 성령께서 정면에 나와서 일하시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으므로 우리가 성령을 올바르게 알고 성령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고는 아버지도 아들 예수도 모르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성령운동을 비난하는 사람은 삼위일체의 역사가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성령을 비난하는 사람은 오늘날 마귀와 짝을 해서 일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성령을 비난하고 난 다음 하늘나라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면 오늘 여러분과 함께 알아보고 싶은 것은 첫째로, 예수님과 성령님의 관계를 우리 한번 알아보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령님을 통해서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잉태되셨습니다. 1:35에 보면 마리아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예수님이 마리아에게 잉태할 때도 벌써 성령을 통해서 잉태한 것입니다.

 

성령을 통하지 않고는 마리아의 몸에 잉태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 예수님께서는 태어나셔서 30이 되시자 요단강에서 세례 받으셨는데 주님은 성령 세례 받으시고 난 다음 성령을 통해서 3년 반동안 사역을 하셨습니다.

 

3:16~17에 보면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 받으시고 올라오실 때 성령이 그 위에 임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께로부터 증거를 얻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곧 성령께 이끌려 광야로 나가서 4040야 금식하시고 마귀를 정복하고 성령의 능력으로 돌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3년 반의 사역이라는 것은 성령을 통해서 주님은 말씀하시고 기도하시고 가르치시고 병을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신 역사를 베풀었지 성령을 통하지 않고는 예수님 역사하지 않았었습니다.

 

4:18~20에 보면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란 전혀 성령님의 역사 없이는 이뤄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그때도 예수님이 성령을 통해서 역사하시는데 오늘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시고 난 다음 성령시대가 되어서

성령을 통해야만 예수님께서 역사할 수 있는데 오늘 성령을 인정도 아니하고 환영도 아니하고 무시하고 성령역사를 비난하는 이러한 따위의 교회나 목사는 바로 마귀의 사도요, 하나님의 사역자라고는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께 대해서 철저히 소개를 하셨습니다. 주님은 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성령 없이는 주의 사업이 계속되지 않을 것을 아시기 때문에 계속해서 성령님에 대해서 주님은 자세하게 강조하셨습니다. 주님은 성령을 다른 보혜사로 소개하셨습니다.

 

14:16~17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처음 보혜사고 성령은 다른 보혜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보혜사란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항상 우리 곁에 있어 우리를 돕는 자를 보혜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처음 보혜사로써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우리 곁에 오셔서 우리 죄를 사하시고 귀신을 쫓아 내시고 병을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며 굶주린 자를 먹이시며 슬퍼하는 자를 위로하시는 역사를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한 후 승천하실 때 예수님을 따르던 모든 사람들은 허공을 쳐다보고 탄식을 했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고아와 같이 되었구나. 우리는 버림받았구나. 예수님 없이 어떻게 우리가 살아가느냐?”

 

그때 주님께서 그들에게 약속한 것은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 줄 것이다. 처음 보혜사 나는 가지만은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낸다.” 이 다르다라는 말은 헬라원어는 알로스인데 똑같은 다른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전혀 같으나 다른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영으로 오셨으나 예수님과 똑같은 하나님으로써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우리 곁에 와서 항상 계시며 우리를 돕는 자로써 와계신 것입니다.

 

이러므로 예수를 구주로 믿으신 여러분에게는 벌써 성령께서 와 계신 것입니다. 이는 너희와 함께 거하시며 너희 속에 계시며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계시겠다고 했으므로 여러분 영으로 왔었으므로 눈에는 안보이지만 성령은 여러분 속에 와계시고 여러분과 함께 와 계신 것입니다.

 

이 성령은 여러분을 돕기 위해서 와 계신 것입니다. 죄를 용서하고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그리고 여러분에게 문제를 해결해 주는 돕는 자로써 와 계신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이 성령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 들이고 이 성령께 의지하고 살 때 우리는 약한 자가 되지 않고 강한 자로써 신앙에 승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성령님을 선생님으로 소개했습니다.

 

14:25~26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우리에게 대해서 모든 하늘나라의 진리를 가르치고 예수님의 것을 생각나게 하는 보혜사 성령은 우리 선생이라고 말했었습니다. 여러분 학생이 선생 없이 배울 수가 있나요? 또 학생이 선생과 같이 계시면 선생을 무시고 멸시해 버리면 어떻게 선생이 가르치겠습니까?

 

학생은 선생을 존경하고 선생에게 모르는 것 자꾸 물어야죠. 그러면 선생이 가르켜 주지 묻지 않고 가만히 있는 학생이 어떻게 깨달을수 있습니까? 성령은 보혜사로써 우리에게 모든 진리를 가르치시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나게 하기 위해서 와 계시므로 우리는 성령께 모를 때 물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이 가르켜 줄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성령을 공경하고 성령을 존중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성령은 오늘날 우리의 선생이 되셔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우리에게 가르켜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깨닫게 만들어 주시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하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성령님을 예수님에 대한 증인으로써 소개하셨습니다.

 

15:26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라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확실한 증거가 없으면 믿을 수 없습니다. 재판정에 가서도 증인이 있어야 원고나 피고가 주장하는 것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되 우리 마음속에 성령이 오셔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확실히 증거를 해주셔야지 성령이 증거를 안해 주시면 우리가 아무리 머리 속으로 믿는다고 애를 써도 마음속에 의심이 꽉 들어차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믿음이 들어갔다 나왔다하고 신앙이 확고하지 못한 이유는 성령의 증거를 받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함께 계신 성령이여 예수를 내 영혼 속에 증거하여 주시옵소서. 그렇게 부탁했더라면 성령이 그 놀라운 능력으로 우리의 마음속에 예수를 증거해 주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 우리는 머리 속에서 믿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확고부동하게 흔들리지 않는 신념을 가지고 예수를 믿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에 대한 증언은 오직 성령께서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성령의 증거를 받는 자마다 여러분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은 성령 보혜사께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해 달라고 부탁하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저는 늘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 가정예배를 드릴 때 저희 셋째 놈이 어릴 때였습니다.

 

이제는 미국으로 유학가고 없지만 그가 국민학교 다닐 때 하루는 가정예배를 보는데 반발을 해요. “왜 반발하느냐?” 하니까 아버지 아무리 찬송을 부르고 성경을 해석하고 가정예배를 봐도 나는 안 믿어집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 목사집 아들이 안 믿어져?” 그러니까 아버지가 목사지 내가 목삽니까? 아버지가 항상 예배보라고 하니까 할 수 없이 나와서 내가 보았지 난 안 믿어집니다.

 

내가 아버지 집에서 살 동안은 내가 할 수 없이 아버지가 와서 예배보자고 하면 볼 수밖에 없지만은 독립하면 나는 안 믿을래요. 안 믿어지는 것 어떻게 믿어요.”

~ 큰일 났다. 이것 내가 다른 사람에게 전도하고 다른 사람 주께로 인도하면서 자기 자식은 구원으로 이끌지 못하는구나!’

그래서 그날부터 매일 잠자리에 가서 내가 머리에 안수하고

 

하나님이여, 조용기는 이 사람을 믿게 만들지 못하지만은 보혜사 성령은 믿게 만들 수가 있습니다. 성령이여 예수를 이 마음 가운데 증거해 주시옵소서. 내가 아무리 입으로 증거해도 그것은 머리속에만 들어가지 마음에 증거는 안 됩니다. 성령이여 증거 하여 주시옵소서.”

 

제가 몇 주간을 계속해서 잠자리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고 성령께 부탁을 했는데 하루는 기도하러 가서 보니까 아버지 이제는 오지 말아요.”

왜 그러느냐?” 그러니까 이제는 믿어요. 이제는 내 마음속에 감동이 되어서 내가 확실히 예수가 구주된 것을 믿게 되었어요. 이제는 믿을 수 있어요.” 그렇게 말했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우리는 확실한 믿음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예수님의 계시자로써 소개했습니다.

 

16:12~15에 보면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

 

여기에 보면 보혜사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께 대해서 알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우리에게 보여 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성령은 자기 자신에 관해서 말하지 않습니다. 성령은 오직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님께 관한 증거만 하지 성령은 자기 자신에 관해서 절대 말하지 않습니다.

 

성령 받았다는 사람이 내가 성령이다~ 내 말을 들으라!” 이렇게 하면 이것 가짜입니다. 성령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말하지 않습니다. 여기도 예수님께서 성령을 소개할 때 뭐라고 했습니까?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려 주리라. 내 영광을 가지고 너희에게 보여 주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성령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일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때문에 성령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것입니다. 성령은 자신에 관해서 말하지 않습니다. 이러므로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일을 알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체험하지 못하는 것은 성령을 우리가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들이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충만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은 성령자체의 충만이 아니라 바로 예수 충만인 것입니다. 성령은 예수 것을 가지고 우리에게 가르치시며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분이기 때문에 성령이 오시면 예수밖에 우리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성령 충만은 예수 그리스도 충만 이요, 아버지 하나님의 충만 입니다. 이것이 참된 삼위일체인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그 안에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시지 성령은 자신을 나타내지 않으므로 진실로 삼위일체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둘째로, 성령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우리가 좀 알아봐야 되겠습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오셔서 어떤 일을 하실까요? 여러분 성령은 우리에게 와서 회개 및 중생을 시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우리가 회개를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죄악 가운데 태어나서 죄악 가운데 살기 때문에 성령의 빛이 비춰야 우리가 죄인인 것을 알고 버림받은 것을 알고 회개합니다.

 

온 세계 각지에서 모든 사람들이 종교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일본에서 잠시 교육 TV를 보니까 티벳 사람들이 히말리아 산을 향해서 하는데 오체예배라고 해서 한발자국 뛰고 난 다음에는 팔 다리 다펴서 땅에 엎드려서 산을 향해서 절을 하고 그 다음 일어나서 또 한발자국 뛰고는 또 땅에 엎드려서 절을 합니다. 온 얼굴이 흙 판이고 온 몸 전체가 벗겨졌습니다.

 

그러면서 히말리야 산을 향해서 예배를 드리면서 갑니다. 자기들의 죄가 용서함 받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나는 그것을 보고 탄식 스러웠 습니다. 여러분 온 세계 어느 곳에 가나 종교는 다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은 짐승과 달라서 짐승은 종교가 없지만 사람은 종교를 가지고 있습니다. , 사람 속에는 영이 있기 때문에 영은 신을 사모합니다. 영은 하나님을 사모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사람치고 마음속에 종교심이 없는 사람이 없는 것은 사람은 육체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영이 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영이 바른길을 얻지 못하면 이 티벳 사람처럼 히말리야 산을 보고서 오체예배를 드리며 피를 흘리고 행진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시면 성령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해 주시는 것입니다.

 

16:7~11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성령이 오시면 이 세상 모든 사라들이 예수 안 믿는 죄를 책망하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죄 때문에 지옥가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고 청산했는데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기 때문에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오늘날 성령은 오셔서 예수 안 믿는 죄가 멸망의 죄라는 것을 우리에게 깨닫게 해주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성령이 오셔야 우리가 이것을 깨달아 알고 예수를 믿게 됩니다. 성령이 오셔야 비로소 예수님만이 우리 죄를 다 청산하고 사흘 만에 부활하사 아버지 하늘나라에 올라가셨으므로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인 것을 보여 주시고 성령이 오셔야 만이 원수 마귀를 드러내고 원수 마귀는 십자가에서 이미 무장 해제되고 원수 마귀는 이미 패배했고 원수 마귀는 우리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킬 권한이 없다는 것을 가르켜 주시므로 우리가 강하고 담대하게 서서 마귀를 대적하고 마귀를 이기고 승리로운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 주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성령께서만이 우리에게 구원의 도를 확실히 보여 주시고 회개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이 오셔야 죄와 사망을 이기게 해주십니다.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도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사모하되 육신은 약해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세상 자랑을 따라 살고 음란하고 방탕하고 술취하고 세상 쾌락을 따라서 갈 때가 많습니다.

 

바울사도도 말하기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그러므로 내가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체로써는 죄의 법을 섬긴다고 했었습니다.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들 중에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데 육신이 약해서 여전히 죄악가운데 끌려 들어가면서 탄식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누가 우리를 도와 줄수 있습니까? 여기에 성령을 알면 우리가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8:1~2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한 것 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나온 성령께서는 이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죄를 멸하고 마귀를 멸해 버리기 때문에 그 권능을 가지고 오셔서 성령께 부탁하면 성령께서 우리 속에 역사하셔서 죄의 사슬을 끌러 버리고 사망의 사슬을 끌러 버리는 것입니다.

 

성령만이 죄악의 사슬을 끊을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죄악이 홍수처럼 몰려올 때 우리는 보혜사 성령이여 나를 도우소서. 내가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나 육체는 죄의 법에 끌려갑니다. 보혜사 성령이여 나를 도우소서.”

 

성령께 부탁하면 오늘날 성령께서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놓지 않고 우리를 도우시고 붙들어서 죄악의 사슬을 끌러 버리고 우리를 승리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 있고 난 다음 의와 거룩하기 살기를 원치 않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다 의롭게 살고 거룩하게 살기를 원하지만 그러나 세상의 유혹과 죄악과 육신의 정욕이 우리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것입니다

 

.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보혜사 성령에게 부탁하는 도리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도우셔서 우리를 죄악의 사슬에서 놓아주고 사망의 사슬에서 끌러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성령 충만해서 성령 세례 받으면 하나님 능력이 오시는 것입니다.

 

1:8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믿으면서 능력이 없는 사람 많습니다. 기도에도 능력이 없고 전도에도 능력이 없습니다. 신앙생활에 아무런 능력이 없습니다. 의식과 형식적인 예수를 믿지만 폭발적인 그러한 파워가 없습니다. 다이나마이트 같은 힘을 가지고 기도를 하고 아주 즐거운 신앙생활을 하고 남에게 예수를 척척 전도하는 것을 보면 부럽기가 한이 없습니다.

 

왜 나는 저렇게 되지 않을까?” 그것은 성령세례 받지 않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예수 믿으면 성령이 와 계시지만 간절히 성령 충만을 위해서 기도하면 성령세례란 충만의 체험을 하게 되면 권능이 임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에 권능과 능력이 임해요. 그래서 여러분의 신앙생활은 능력 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무능력한 이름만 믿는 신자가 아니라 정말 그 생활 속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그런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성령은 오셔서 우리에게 기도의 힘을 주십니다.

 

8:26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하나님이 성령께 기도의 힘을 달라고 기도해야 됩니다. 우리 신앙이 성장하려면 기도를 해야 돼요. 적어도 하루 1시간 이상 기도해야 되겠는데 기도하는 것이 안 됩니다. 기도가 나오지 아니하고 기도가 힘이 들고 졸음이 오고 기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 기도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이가 성령인 것입니다.

 

보혜사 성령이여 나를 붙들어서 기도하게 만들어 주시옵소서. 기도할 수 있는 힘을 주시옵소서 할 때 성령이 능력을 주셔서 우리를 도와주시므로 우리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할 수 있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은 우리에게 오시면 성령은 여러 가지 은사를 나타내 줍니다. 우리가 전에 갖지 않았던 그러한 능력이 우리 속에서 나타납니다.

 

성령 충만하면 계시의 은사로써 지혜의 은사, 지식의 은사, 영분별의 은사가 나타나고 발성의 은사는 방언과 방언통역, 예언도 있고 권능의 은사로는 믿음의 은사도 있고 병 고치는 은사도 있고 기적의 은사도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로마서 12장에 보면 섬기는 은사가 있고, 가르치는 은사가 있고, 구원이 하는 은사가 있고, 구제하는 은사가 있고, 다스리는 은사가 있고, 긍휼을 베푸는 은사가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예수 믿고 성령 충만 하면 전에 없던 이런 은사들이 나의 생애 속에 나타납니다.

 

성령을 통해서 이런 은사가 나타나면 이 은사를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몸 된 교회를 잘 섬길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굉장한 효과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모두다 예수를 믿고 성령 충만한 사람은 그 어떤 은사든지 하나님이 은사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 은사를 받아서 역사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이럴 때 하늘나라의 능력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광의 이와 같은 관계 속에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그러면 이 성령을 우리가 어떻게 모시고 인생을 살까요?

 

여러분 아버지 하나님은 구약 4천년 동안 역사하여 주셨고 예수님은 신약 33년 동안 역사하고 승천하셨는데 지금 우리와 같이 계신 하나님은 성령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성령은 2천년 전에 오셔서 교회를 세우시고 성령은 교회 안에 거하시고 예수 믿는 성도들안에 거하십니다.

 

이러므로 오늘날의 시대는 성령시대요, 아버지도 아들도 성령의 수레를 타고 우리에게 오시고 성령을 통해서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는 성령님을 모시고 함께 살아야 되는데 성령을 어떻게 모실까요? 성령은 하나님이시며 또한 인격을 갖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은 지식과 감정과 의지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후13:13에는 성령을 인격적으로 모시고 교통하라고 말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찌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이 강단과 교통 안 됩니다. 인격이 없습니다. 꽃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교통이 안 됩니다. 꽃은 인격이 없습니다. 이 교회 건물하고 교통이 안 됩니다. 인격이 없기 때문에 교통 안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과는 교통이 됩니다. 대화가 됩니다.

 

여러분은 인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처럼 보혜사 성령은 인격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성령님을 인격으로 대우해야 되는 것입니다.

한 가정에도 남편이 인격을 가지고 있고 아내가 인격을 가지고 있는데 인격을 무시하고 짓밟아 버리면 그 가정은 파탄에 이릅니다. 남편이 아내의 인격을 무시해 버리면 아내는 소멸됩니다. 아내가 남편의 인격을 무시하고 짓밟아 버리면 남편은 인격이 소멸됩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집에 들어오기를 원치 않습니다. 보혜사 성령은 인격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보혜사 성령님이 인격으로 우리와 같이 계시므로 우리는 하나님이요, 인격자인 성령님을 존중하고 감사드리며 성령께 예배 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 말에 의하면 아이고 하나님 아버지하고는 이야기하고 예수님께는 기도하라 했지만 성령께는 기도하라는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여러분 삼위일체 하나님 성부, 성자, 성령이신데 삼위일체 하나님은 어느 하나님에게도 우리는 대화할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는 아버지가 신약 33년은 예수님이 이제는 성령께서 책임을 지고 일하시는데 성령과 이야기하지 않고 어떻게 우리가 신앙생활 할 수 있는 것입니까?

 

한 가족에 아버지와 어머니와 아들이 있으면 가족이면 어느 가족 멤버하고도 다 이야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성령님과 대화해야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 들이고 의지하며 성령께 도움을 청하면 성령이 우리를 도우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 속에 들어가도록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성령과 인격적인 교통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를 공격하는 사람 어리석기 짝이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 성령 인정한다고 성령 합리화 한다고 성령 모셔 들인다고 성령을 강조한다고 우리를 공격한다면 그 사람들은 그러면 누구를 의지하고서 하나님을 믿습니까? 성령을 통하지 않고는 예수를 주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성령을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를 믿을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성령 강조한다고 공격한다면 그러면 그것은 마귀지 하나님의 역사라고는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성령과 인격적인 교통을 해야 되고 언제나 성령 충만을 위해서 기도해야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께 성령 충만을 위하여 기도해야 됩니다.

 

간절히 사모하는 영혼 속에 하나님은 이미 와 계신 성령을 더욱 충만하게 채워 주셔서 더욱 영적으로 풍성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은 예를 든다면 거울과 같습니다. 거울은 자기를 위하여 있지 않고 다른 이를 비취기 위해서 있습니다. 거울을 아무리 닦아 놓아도 거울은 날 봐라. 날 봐라. 그러지 않습니다.

 

거울은 자기 자신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거울을 돌아보는 그 사람의 얼굴을 비추는 것입니다. 성령은 거울과 같아서 성령은 아무리 우리가 충만해도 성령은 보이지 않고 성령을 들여다 보면 아버지와 예수의 얼굴만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성령으로 충만하면 할수록 그것은 하나님으로 충만하고 예수님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교회도 있을수가 없고 우리 신앙생활도 있을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성령이 주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기도는 성령이 우리를 통해서 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역사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첫째도 성령, 둘째도 성령, 셋째도 성령. 성령으로 충만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바울사도가 에베소에 가서 그곳에 있는 맥 빠진 신자들보고 제일 먼저 질문한 것이 너희가 믿을 때 성령을 받았느냐?’라는 질문을 하신 것입니다. 오늘날도 여러분 우리가 늘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됩니다. ‘너는 성령으로 충만 하느냐?

 

너는 성령과 함께 교제하고 있느냐?’ 성령 충만하고 성령과 함께 교제하면 성령은 사라지고 그곳에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님만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의 영으로써 아버지와 아들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고 나타내기 위해서 우리 가운데 와 계신 것입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시고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구약 4천년의 긴 세월은 아버지가 역사하여 주시고 신약 33년의 짧은 세월은 아들 예수가 와서 우리의 구속을 완성하시고 이제 신약 2천년의 긴 세월은 성령의 시대로써 성령이 오셔서 아버지의 일한 것을 우리에게 나타내 주시고

 

아들의 일한 것을 우리에게 성취시켜 주십니다.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아버지의 4천년 준비도 헛것이고 아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한 것도 헛것이 되고 맙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전달해줄 성령 보혜사야 말로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하나님이시오, 이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 들이고 의지하며 성령으로 충만해서 사는 신앙생활은 내 아버지 하나님이시여,

 

아무리 강조해도 더 강조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 그러므로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우리 모든 성도들이 성령 충만하게 만들어 주시옵소서. 악한 원수 마귀의 꾀임에 속지 말게 하여 주시옵시고 아버지 하나님이시여 현대주의나 신신학자들의 공격에 넘어가지 말게 도와 주시옵시고 주님이 강림하는 그날 말세에 부어지는 성령으로 충만하게 도와 주옵시고 성령의 은혜 중에 생활하게 도와 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admin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