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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고린도서 설교 모음

고린도후서 5장 설교 모음

by Jessi J 2022. 10.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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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사람입니까? /고후5:17

2019-05-01 23:25:16

 

1. 정말 새 사람입니까?

 

먼저 오늘 본문을 한 번 더 보십시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이 말씀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말씀입니다. 인간이 거듭나고 새로워지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것이며, 그러면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저는 여러분에게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정말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 새 사람이 되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해 솔직하게 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제게는 “새 사람”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분이 있습니다. 그는 일제강점기의 유명한 부흥사 김익두(金益斗, 장로교 목사, 1874~1950) 목사입니다.

 

김익두 목사님은 예수님을 믿기 전까지 평양의 아주 유명한 깡패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김익두”라면 ‘인간 말종’이라며 머리를 흔들 정도였습니다. 그러다가 그가 미국 선교사를 통하여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가 예수를 믿기로 작정한 날로부터 술을 일절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친구들과 함께 있던 중 친구들이 그에게 술을 권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약을 먹는 중이므로 술을 마실 수 없다’고 핑계를 댔습니다. 친구들이 ‘무슨 약을 먹느냐’고 묻자 그는 ‘신약과 구약을 먹는다’고 했습니다. 신구약 성경을 읽는다는 뜻인데 그런 말로 포기할 친구들이 아니었습니다.

 

친구들이 계속해서 술을 강요하자 할 수 없이 한 잔 받아든 김익두는 곧바로 베드로처럼 밖으로 뛰어나가 슬프게 울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여러 번 주저앉아 울며 기도했습니다.

‘김익두가 예수쟁이가 되었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가 정말 변했는지 아닌지 시험하기 위해 그가 지나갈 때 숨어 있다가 물을 뒤집어 씌웠습니다. 그러자 그는 물을 툭툭 털면서 “예전의 김익두가 죽었다는 사실을 기뻐하시오. 그 김익두가 지금도 살아있다면 당신은 벌써 요절이 났을 것이요” 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정말 변한 것이죠.

 

 

나중에 목사가 되어 부흥회를 인도하려고, 고개를 하나 넘고 있었는데, 너무 더워서 고개 정상의 한 나무 밑에서 웃옷을 벗고 잠시 쉬고 있었습니다. 그 때 술이 거나하게 취한 사람 하나가 비틀거리면서 올라왔습니다. 그러고는 김익두 목사에게 시비를 걸었습니다. ‘왜 그늘을 비켜주지 않느냐’는 이유였습니다.

 

김익두 목사가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자, 그 사람은 다짜고짜 목사님을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얼마인지 한참을 때렸고, 김익두 목사도 말 한 마디 않고 그가 때리는 대로 다 맞았습니다. 그러다가 제 풀에 지쳐 잠시 멈추자, 김익두 목사는 “형님 다 때렸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다 때렸다 왜?”하고는 또 때리려고 했습니다.

 

그때 김익두 목사는 정색을 하고 그에게 말했습니다. “예수는 내가 믿고 복은 자네가 받았네.” 그러고는 “나는 김익두라는 사람이요”라고 했습니다. 김익두라는 말을 듣더니 얼굴이 사색이 되었습니다. 평양의 큰 형님을 때렸으니 큰 일 아닙니까! 그때 김익두 목사는 “내가 예수 믿기 전이라면 오늘은 당신의 장례 날일 거요, 그러나 내가 예수 믿은 덕에 목숨이 붙어있는 줄이나 아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땅에 납작 엎드려 “형님, 제가 어찌하면 되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목사님은 “뭘 어떻게 해, 따라와”했고, 그 사람을 자신이 인도하는 부흥회에 데리고 가서 앞자리에 앉혔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거기서 예수님을 믿고 나중에 장로가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이 김익두 목사님처럼 변화되었습니까? 정말 새 사람입니까? 정말 새로운 피조물입니까? 예수 믿기 전과 후가 달라도 너무나 다른 그런 변화를 경험했냐는 말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저의 결론부터 말씀드릴까요? 저는 새 사람이 아닙니다. 여전히 죄인입니다. 여전히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흔들립니다. 성경의 표현이니까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라고 표현하지만 사실 가장 본능적이고 저급한 욕망의 노예일 뿐입니다. 저는 부족합니다.

 

턱없이 모자랍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이런 나를 새로운 피조물, 새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 뜻은 무엇일까요?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면 조금 변한 것도 같습니다. 생각하는 방식, 살아가는 방식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가치관도 변한 것 같고, 인생을 사는 것이나,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관점,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도 조금 달라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새로운 피조물”이란 개량하거나 개선한 존재, 낡은 것을 고친 존재가 아니라, 겉모습과 함께 그 본질에도 변화가 일어난 것을 뜻합니다. 즉 우리에게 本性, 本質的인 變化는 일어났다는 의미인데, 사실 우리 자신에게는 그런 변화는 일어난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오늘 본문이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2. 새 사람인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중국 선교사였던 ‘허드슨 테일러(James Hudson Taylor, 1832-1905)’ 목사 역시 이 문제를 가지고 고민했습니다.

 

우리로 치면 구한말 시대에 중국에서 선교사로 사역한다는 것은 젊음과, 인생이 누릴 수 있는 편안함을 비롯한 여러 가지, 그리고 삶의 모든 소망을 다 버린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러나 허드슨 테일러의 고민은 다른 데 있었습니다. 자신이 비록 선교사지만 여전히 육신과 죄의 구덩이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다른 선교사들이나 현지 관리들 등으로 인하여 짜증내고, 그들과 다투고, 판단하고, 정죄하는 자신이 가장 큰 ‘골치덩이’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늘 자신이 새로워 져야 한다는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새로워져야 한다, 그 방법은 무엇일까’를 고민하다가 그리스도는 포도나무 줄기이고 자신은 그 가지이기에, 가지가 줄기에 붙어 있기만 하면 절로 열매를 맺는다는 요한복음 15장 말씀을 통하여,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문제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 되는데,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 안에 거하느냐, 그 방법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끊임없이 고민하던 그는 영국에 있는 누이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행할 수만 있다면 나는 새로워질텐데 어떻게 하면 거할 수 있을지 알 수가 없다.’ 그 답을 찾아 이런 저런 시도를 해보았지만 그럴수록 더 절망적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답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누이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습니다. “… 그리스도 안에 거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이 없습니다. 이미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말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려고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나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더 그리스도 밖으로 나가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기 위해 노력해야 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거듭나는 그때부터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즉 우리가 그 뭔가를 함으로서 거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죠. 그러므로 ‘지금 내 모습이 어떻느냐, 내가 성숙했느냐 아니냐, 인격과 삶이 어떻느냐, 깊은 영성의 소유자인가 아닌가, 다른 사람을 포용하고 품는 넓은 아량을 가졌는가, 정말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인가, …’ 하는 것이 기준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내면과 외적인 삶이 어떻느냐에 상관없이 이미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믿고 거듭난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니 내가 느끼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문제로 여기는 이유는 자기 안에서 뭔가를 찾고 느껴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것은 여러분이 느끼고 말고와 상관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의 조건은 그리스도 안에 있느냐 없느냐 단 하나 뿐이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저는 지금 성도의 내면과 외적인 삶의 변화와 성숙이 필요 없다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일단 오늘 본문을 주목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은 여러분에게 ‘새로운 피조물이니까 새로운 피조물답게 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피조물답게 ‘말’도 고치고, ‘행동’도 고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유혹과 죄’를 이기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육신’을 극복한 자, ‘자아’를 극복한 자가 되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기 때문에 죄와 육신과 자아를 극복 할 수 있으며, 거룩의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자가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이죠.

 

과거의 모습이 어떻고, 지금의 모습이 어떻느냐가 새로운 피조물이냐 아니냐의 ‘시금석’이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거저 하나님께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선언하신 것을 믿음으로 받으면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주권적인 선포이고 일방적인 선언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변화나, 나나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여기느냐와 상관이 없습니다.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기뻐하고 감사하면 되는 것이죠.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을 새로운 피조물로 보십니다. 여전히 본능과 욕망에 충실하고, 세상에 대한 욕심이 가득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깊고 높은 인격자의 삶을 보여주지 못하고, 숨기고 감추고 있는 것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이것이 결론이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3. 새 사람, 그리고 새 사람다운 삶

 

 

 

‘트리나 포올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동화가 있습니다. 줄무늬 애벌레 한 마리가 알에서 깨어났습니다. 그저 먹기만 하면서 의미 없이 몸을 키워가던 줄무늬 애벌레는 ‘좀 더 의미 있고 나은 삶이 없을까’ 하여 길을 떠납니다. 여러 환경을 접하고, 다른 애벌레들을 만나보았지만 별 성과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늘 끝까지 솟아있는 커다란 애벌레 기둥을 보았습니다.

 

그 기둥에 오르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무작정 그 기둥을 기어오르기 시작합니다. 그 기둥의 꼭대기에 오르기 위해서는 애벌레들끼리 서로 밀리고 채이고 밟히는 경쟁을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정도 올라간 줄무늬 애벌레는 그곳에서 노랑 애벌레 한 마리를 만납니다. 줄무늬 애벌레는 예쁘고 사랑스러운 노랑 애벌레마저 밟고 올라가다가 죄책감을 느끼고 그 노랑 애벌레와 함께 꼭대기로 오르는 것을 포기합니다.

 

둘은 땅으로 내려와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하지만, 줄무늬 애벌레는 그 꼭대기에 대한 열망으로 노랑 애벌레와의 행복을 포기하고 다시 애벌레 기둥을 오르기로 합니다. 그리고 노랑 애벌레는 그런 줄무늬 애벌레를 기다리기로 합니다. 그러다가 노랑 애벌레는 번데기로 변해가는 늙은 애벌레를 만나는데 그가 ‘고치’에 대해 가르쳐 줍니다.

 

‘고치가 되어야만 나비가 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나비가 되어야 꽃들에게도 희망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죠. 그래서 노랑 애벌레는 고치를 만들어서 나비가 됩니다. 한편, 줄무늬 애벌레는 다른 애벌레들을 누르고 밟으면서 결국 꼭대기에 올랐습니다만, 꼭대기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때 노랑나비 한 마리가 날아오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꼭대기에 오르기 위해서는 기어오르는 것이 아니라 날아야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가 보고 있는 그 나비는 친구 노랑 애벌레라는 것을 알게 되고, 줄무늬 애벌레도 고치를 만들어서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오릅니다.

 

성도 여러분, 애벌레가 나비가 되어 하늘을 날면서 꽃을 찾아다니는 것은 얼마나 큰 변화입니까? 정말 새로운 존재가 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된 것이죠.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도 이와 같습니다. 애벌레가 변화하여 나비가 되듯 우리도 그렇게 엄청난 변화를 받은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즉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 옛날의 우리는 애벌레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때는 마음, 정신, 생각, 그리고 전 삶이 애벌레와 같았었습니다. 그래서 땅에 뒹굴면서 별것도 아닌 것들을 쫓아다니느라 하늘이 푸른지도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세상이나 자신이 세운 꼭대기에 오르기 위해 심한 경쟁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정신도, 마음도, 생각도, 모두 모두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거듭났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보라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라고 감탄하듯 말씀하는 것이죠.

 

나비가 애벌레 때를 생각하고 땅에 내려앉아 기려고 하면 안 되듯이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 받은 그리스도인은 옛사람으로 돌아가면 안 됩니다. 더 이상 세속적인 행동이나, 생활방식, 그리고 이기적인 욕망으로 살면 안 됩니다.

 

나비는 나비의 수준을 지켜서 하늘을 날아야합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은 생각하는 것, 바라보는 것, 살아가는 전부가 달라야 합니다. 왜냐하면 새롭게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마귀의 자녀였던 우리가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죄로 인하여 죽었던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영생을 얻었으며, 이 세상을 바라보고 살던 우리가 이제는 영원한 하늘나라를 목적 삼고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자가 결혼을 하면 ‘새 색시’ 또는 ‘새댁’이라고 불립니다. 그리고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모든 신랑을 ‘새 신랑’이라고 부르며, 나이든 신부도 ‘새 색시’라고 합니다. 결혼했다고 해서 사람자체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새로워진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결혼을 하면, 결혼하기 전보다 더 ‘헌 사람’이 됩니다. 아닌가요?

 

그런데도 결혼을 하면 ‘새 사람’, ‘새 색시’라고 불립니다. 그 이유는 결혼함으로서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삶을 그리스도의 신부로서의 삶이라고 말하는 성경 구절이 많습니다. 즉 그리스도와 결혼한 사람이라는 것이죠. 그런 면에서 여러분은 새 사람입니다. 아멘?

 

따라서 자신을 새로운 피조물이라 말씀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위대한 선언, 자신을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신 그리스도의 위대한 희생의 사랑, 오늘도 자신을 감동 감화시키는 성령의 은혜 속에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그는 애벌레와 같이 진창을 구를 수 없습니다. 세상이 만들어놓은 성공의 탑을 오르기 위해 다른 사람을 밀치고 밟을 수 없습니다. 그는 성부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사랑과 성령의 도우심이라는 날개들을 크게 펴고 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위대한 선언을 믿음으로 아멘하시고, 설사 그리 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여러분을 버리시지 않을 것이며, 여러분을 향해 “새로운 피조물”이라 하신 것을 취소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새로운 존재답게 살려는 거룩한 열망과 노력으로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ad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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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사절/주현절 /고후5:16-21/ 김기석목사

2019-05-01 02:59:23

 

[그러므로 이제부터 우리는 아무도 육신의 잣대로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전에는 우리가 육신의 잣대로 그리스도를 알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내세우셔서, 우리를 자기와 화해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겨 주셨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죄과를 따지지 않으시고, 화해의 말씀을 우리에게 맡겨 주심으로써, 세상을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와 화해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시켜서 여러분에게 권고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리하여 간청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화해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분에게 우리 대신으로 죄를 씌우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

은총처럼 밝아온 새해 첫 주일입니다.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주님의 은혜와 사랑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주현절입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몸을 드러내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서방 교회는 이 날을 동방박사가 예수님을 찾아와 경배한 날로 기념하고, 동방 교회는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공생애를 시작하신 날로 기념합니다. 유럽 사람들은 주현절이면 거리를 행진하며 아이들에게 사탕을 던져주기도 한다고 합니다.

 

동방박사의 선물을 떠올리기 위함일 것입니다. 주님이 세상 앞에 모습을 드러내신 이 날, 우리도 세상에서 구별된 존재로 살 결심을 해야 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하신 주님의 말씀을 구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믿는 이들을 가리켜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켜”진 존재라면서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가지, 보는 것으로 살아가지 아니합니다”(고후5:7)라고 말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 사람들의 시선을 끌만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즉 하나님의 마음과 뜻에 따라 자기를 조율하며 사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바울은 믿는 이들이 추구해야 할 인생의 목표를 간명하게 제시합니다. “우리가 몸 안에 머물러 있든지, 몸을 떠나서 있든지, 우리가 바라는 것은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고후5:9)

 

우리는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사람’입니까? 우리 삶이 하나님의 마음과 깊은 일치를 이루고 있다면,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기뻐하고, 하나님이 마음 아파하시는 일을 보고 차마 모른 척 할 수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맞습니다.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물 위로 올라오셨을 때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막1:11b). 하나님은 예수님의 어떤 모습을 보고 ‘좋아한다’고 하셨을까요?

 

세상의 연약하고 가련한 이들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연민과 사랑, 어떻게든 그들을 돕고 싶어 하셨던 그 마음을 하나님은 좋아하셨던 것 아닐까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외적인 종교 행위에 열성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그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도인桃仁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에게 자기들의 삶의 비밀을 한 마디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휘어잡습니다”(고후5:14). 신앙을 가리켜 ‘궁극적 관심에 사로잡힌 상태’(state of being grasped by the ultimate concern)라고 설명한 신학자가 있습니다. 뭔가에 사로잡힌다는 것은 나의 의지와는 별 관계가 없습니다. 그 순간은 운명처럼 다가옵니다.

 

사랑에 빠진 이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서로에게 ‘유일한’ 사람이 됩니다. 세상은 오직 ‘그’를 중심으로 재편됩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이상해 보여도 그게 사랑의 경험입니다. 어떤 소설가는 사랑을 가리켜 마치 교통사고와 같다고 말합니다. 예기치 않은 시간에 닥쳐오고 그 영향이 치명적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것들에 매혹됩니다. 매혹, 그것은 우리가 벗어날 수 없는 굴레이기도 합니다.

 

신앙인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사로잡힌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그래서 “우리가 미쳤다고 하면 하나님께 미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다고 하면 여러분을 두고 온전한 것”(고후5:13)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 이외에는 바울에게 가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 뜻은 이웃들을 진리의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조롱을 당하고, 박해를 당하고, 죽음의 위협을 당하면서도 믿음의 사람들은 한사코 그 길을 걸어갑니다. 사로잡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대개의 경우 사로잡힘은 부자유를 동반합니다. 유한한 것에 사로잡힌 이들은 더 큰 세계를 보지 못하고 자기 세계를 맴도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궁극적 관심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오히려 자유롭습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 8장에서 세상의 어떤 것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장자의 말대로 하면 ‘하나님께 매인 해방‘(帝之縣解)입니다. 세상에 있으나 세상에 속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습니다.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육신의 잣대로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고후5:16). 함석헌 선생님은 우리 눈이 우리를 얼마나 속이는지를 일깨워주기 위해 복숭아를 예로 들어 설명하신 바 있습니다. 우리 눈길을 끄는 것은 노랗고 붉그스름한 복숭아의 껍질입니다. 생각만 해도 군침이 고입니다.

 

하지만 복숭아를 먹기 위해서는 그 껍질을 벗겨야 합니다. 껍질 속에 있는 과육의 맛이 참 중요합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복숭아의 씨입니다. 그것은 먹을 수는 없지만 복숭아의 생명을 이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일러 ‘도인桃仁’이라 합니다. 우리는 껍질에 사로잡힐 때가 많습니다.

 

어떤 사람의 외모, 학벌, 가문, 피부, 국적, 출신 지역 등을 보고 사람들을 평가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의 능력과 성취를 중시합니다. 다른 이들과 협동할 수 있는 능력도 중요합니다. 그게 과육입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의 인격의 핵심, 그러니까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영혼의 지향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그 씨앗을 튼튼히 키우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 씨앗이 건강한 사람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조덕삼 장로

김제 금산 교회는 ‘ㄱ’자 예배당으로 유명합니다. 지금까지 그 원형이 잘 보존되어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습지다. 남녀가 한 자리에 앉지 않았던 시절에 지어진 교회이기에 ‘ㄱ’자의 모서리에 있는 강대상을 중심으로 하여 남성 신도석과 여성 신도석이 나뉘어 있던 것입니다.

 

그 건물보다 더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곳은 옛날부터 신흥종교가 많이 발생하던 지역입니다. 1904년 미국의 젊은 선교사인 테이트(L.B.Tate) 목사는 전주와 정읍을 오가며 전도를 했는데 가끔 그 중간지점인 금산에 머물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사교가 우글거리는 이 금산리에 꼭 교회를 세워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어느 날 그는 그 고장의 마방 주인인 조덕삼을 만났습니다. 조덕삼은 그 일대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었고, 유교를 믿던 아주 보수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우연인지 섭리인지 모르겠으나 조덕삼은 테이트 선교사와 교제를 시작하였고, 그를 통해 자연스럽게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 집을 예배처소로 제공했습니다. 조덕삼의 집에서 금산교회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집에는 마부로 일하던 이자익이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무학자였지만 독학을 통해 글을 깨친 총명한 사람이었고, 주인의 신임을 받고 있었습니다. 주인의 권고로 그도 또한 예배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그해 10월에 이 두 사람과 박희서라는 이가 함께 세례를 받았습니다. 금산교회의 교인이 많이 늘어나게 되자 장로 한 분을 선출하게 되었습니다.

 

조덕삼과 이자익 두 사람을 두고 투표가 진행되었습니다. 조덕삼은 김제 최고의 부자였고, 교회 지을 땅을 헌물했고, 교회 재정의 대부분을 담당하는 사람이었고, 이자익에 비해 나이도 15살이 많았습니다.

 

이자익은 외지인이었고, 가난했으며, 조덕삼을 모시는 사람이었습니다. 누구나 다 조덕삼이 장로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투표 결과는 의외였습니다. 이자익이 장로로 피택된 것입니다. 사람들이 술렁거리고 있을 때 조덕삼이 일어나 말했습니다.

 

“우리 금산교회는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냈습니다. 저희 집에서 일하고 있는 이자익 영수는 저보다 신앙의 열의가 대단합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뜻을 겸허히 받아들여 이자익 장로를 잘 받들고 더욱 교회를 잘 섬기겠습니다."

 

조덕삼은 실제로 죽을 때까지 이자익 장로를 지지하고 후원했다고 합니다. 나중에 조덕삼도 장로가 되었습니다만 그는 나중에 이자익이 평양신학교에서 공부할 때도 학자금과 생활비 일체를 다 지원하였습니다. 참 놀라운 분입니다(기독교인문학연구소 매거진, 2015년 7월 30일, brunch.co.kr, ‘조덕삼 장로와 이자익 목사’ 참조). 사람을 육신의 잣대로 알지 않는다는 말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새로운 피조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 즉 거듭난 사람은 누구나 다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창조를 대표하는 아담은 인류를 죄로 이끌었지만, 새로운 창조의 첫 열매이신 주님은 우리를 사랑과 구원으로 인도하십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자기 좋을 대로 생각하지도 말하지도 행동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이웃의 유익을 우선적으로 구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선재적 은총으로 우리를 당신과 화해시키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분에게 우리 대신으로 죄를 씌우셨습니다”(고후5:21). 우리가 책임져야 마땅한 죄를 주님이 대신 담당하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주님으로 하여금 우리 죄를 담당하게 하신 것은 그런 변화된 관계를 통해 우리 또한 화해의 사절이 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한 순간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화해를 위해 세움을 입었다는 사실입니다. 화해란 다리를 놓는 것을 의미합니다. 징검다리를 건널 때마다 차가운 물 속에 들어가 징검돌을 놓는 사람들의 노고를 생각하게 됩니다. 만날 수 없었던 이들을 만나게 하는 것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화해 사역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갈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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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이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 사이를 가르는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셔서, 원수 된 것을 없애시고, 여러 가지 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습니다.

 

그분은 이 둘을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들어서 평화를 이루시고,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이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키셨습니다”(엡2:14-16)

 

오늘 이 땅에서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갈라진 세상을 치유하는 자로 산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을 갈라놓고 차별하고 혐오하는 세태에 맞서서, 낯선 이들이 서로 만나 공동체를 이루고, 서로가 선물이 되어 살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소명입니다. 폰티프(Pontiff)는 대제사장 혹은 교황을 이르는 말입니다.

 

이 단어는 로마의 대신관을 가리키는 pontifex에서 유래된 말인데, 폰티펙스는 본래 ‘다리 놓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만날 수 없던 사람들이 만나,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기쁨과 슬픔을 나누며 살아가도록 하는 것, 바로 그것이 다리놓는 사람들인 기독교인들의 삶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사람이 됩니다.

 

이 세상에는 사람들을 갈라놓음으로 자기 이익을 확보하려는 이들이 있습니다. 끊임없이 갈등을 만들어내고, 다른 사람들을 적대시하거나 주변화하고, 혐오함으로써 자기 지분을 확보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그들은 평화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오직 자기 강화에만 몰두합니다. 정치인들이나 종교인들 가운데 그런 이들이 특히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속지 말아야 합니다. 갈등을 조장하고, 누군가를 미워하도록 부추기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팔아먹는 장사꾼에 불과합니다. 속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너희 빛을 사람에게 비추어서,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마5:1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세상 앞에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신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의 빛을 세상 앞에 드러내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걷는 발걸음마다 주님의 빛이 드러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고린도후서강해⑨ 또 다른 사명 /고후5:11-21

2019-04-29 10:33:24

 

1. 사명

 

일본 작가인 ‘하가시노 게이고’가 지은 <사명과 영혼의 경계>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인간은 누구나 사명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을 주 테마로 쓰여졌습니다. 모든 사람은 각자 나름의 사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 소설을 세 가지로 그렸는데요.

 

첫째는 거대한 기업이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의 죽음에 개입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그 기업에 복수하는 것을 사명으로 아는 사람, 두 번째는 아버지의 의문스러운 죽음에 한 유명 의사의 의료실수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그 의사에게 복수를 위해 의사가 된 사람,

 

그리고 한 기업이 생산한 불량품으로 인해 손해를 본 다수의 사람들이 그 기업을 상대로 싸우는 것을 사명으로 아는 것 등이 이 소설의 내용입니다.

 

여러분, 굳이 이 소설이 아니라도 사람은 누구나 사명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학생이면 학생으로서의 사명이 있고, 직장생활을 하면 직장인으로서의 사명이 있고, 가장이면 가장으로서의 사명, 주부이면 주부로서의 사명 등이 다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적으로도 맞는 말입니다. 여러분, 인간은 왜 존재하는 것일까요?

 

과학, 특히 진화론에게서 답을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정의하는 인간은 우연과 진화에 의해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우연과 진화의 산물에 무슨 사명이 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에 의해서 인간이 창조되었다면 입장이 달라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분명한 목적을 갖고서 인간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 1:26)”,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8).”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은 하늘과 땅과 바다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정의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사명을 받은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께로부터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범죄함으로 하나님과 멀어지자 사명 또한 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허망한 것들을 추구하면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들은 관계만 아니라 사명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즉 아직도 죄 가운데서 하나님과 분리된 채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사명이 없지만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사명이 있다는 말이지요.

 

따라서 사명은 오직 하나님을 아는 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명이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아주 명확하게 그 사명이 무엇인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2. 바울의 사명에 비난과 오해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 1장 12절부터 7장 16절까지에서 자신의 사도권에 대해 변호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를 비롯하여 이방지역 교회를 다니면서 바울과 그가 전하는 복음을 의심하게 만드는 무리들이 있었고, 그들의 부추김 때문에 고린도 교인들 중 상당수가 바울의 사도권을 의심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사도권에 대해 의심하는 자들은 그 나름대로 이유를 가지고 있었고, 그에 대해 바울은 세 가지로 답을 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바울이 고린도를 심방하기로 했다가 몇 차례 번복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두고 고린도 교인들과 뒤에서 그들을 부추기는 사람들이 ‘바울이 사도라면 저럴 리가 없다’며 비난했습니다. 쉽게 말을 바꾸고 약속을 번복하는 믿을 수 없는 사람, 그 인격이 의심스러운 사람이라는 것이었지요.

 

성도 여러분, 저는 정말 은혜로, 여러분들의 사랑으로 목회하는 목사입니다. 감히 바울과 비교할 수 없지만, 제게도 바울과 같은 경험이 있습니다. 부산에서 목회하던 때, 한번은 교인들 간에 갈등이 있어서 ‘교회를 옮기니 마니’ 하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옮기려는 분들을 심방하기로 했지요.

 

그런데 세상에! 그 심방 약속을 잊어버린 겁니다. 결국 심방하려던 두 가정은 교회를 떠났고, 한 가정이 남았습니다만, 그 남은 가정은 뒤에 장로님이 되었습니다. 그 후 또 다른 일이 있었는데, 역시 나중에 장로님이 되신 가정을 심방하기로 했었는데, 정말 깜박 잊고 있었습니다. ‘왜 안 오냐’고 전화가 와서 그때서야 제가 심방 약속을 잊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교인들이 착해서, 그리고 하나님께서 저를 긍휼히 여기셔서, 그리고 그 분들이 나중에 장로님이 되셨기 때문에 그냥 넘어갔지, 바울같은 오해를 받을 수 있는 아주 큰 일 날 일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최소 두 세 차례 고린도 심방 약속을 어긴 것에 대해 ‘그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이끔이었고, 결국 그것이 고린도 교회와 교회 안에서 문제를 일으킨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었지 않느냐’고 반문함으로 오해를 풀었습니다.

 

바울에 대한 두 번째 의심과 비난은 ‘바울이 다른 사도들처럼 예수님 살아생전에 예수님께서 직접 사도로 부른 사람이 아니고, 다른 사도들처럼 주님과 同苦同樂하지도 않았으며, 무엇보다 다른 전도자들처럼 예루살렘으로부터의 어떤 추천서, 어떤 편지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자신의 마음에 새겨져 있고, 고린도 교인들이 그것을 읽었으며, 또 사역과 그 결과를 통해서 드러나는 증거야말로 손으로 쓰지는 않았지만 마음과 삶과 사역으로 증거되는 추천서이지 않느냐고 답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세 번째 자기 변호는 오늘 본문인 5장 11절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이 본문에서 그는 사도직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면서 자신이 참 사도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이 말하는 참 사도는 어떤 사람이며, 참 사도가 아닌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3. 참 성도의 표식

 

먼저 바울 사도는 성도를 “새로운 피조물”, 즉 이전 것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던 것과 같은 새로운 하나님의 역사를 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것이 오늘 본문에서의 상황으로 볼 때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갖게 된 직분과 관계되는 말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란 특별한 직분을 지닌 존재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모든 문제가 그렇지만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도 그리스도 때문이고.

 

새로운 피조물은 곧 아주 특별한 직분과 관련이 된다는 것 역시 그리스도와 관련이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가 갖게 된 직분을 알기 전에 먼저 예수님의 직분, 예수님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직분은 무엇이었습니까? 오늘 본문은 그것을 어떻게 말합니까?

 

1) 예수님은 화목케 하시는 분

 

우선 예수님이 어떤 직분을 가지셨느냐 하는 것은 우리 인생들과 연관이 있습니다. 인생이 어떠하냐에 따라 예수님의 직분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인생은 어떻습니까? 한 마디로 ‘죄인’입니다. 죄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분리 되게 만들었습니다.

 

삶의 현실에서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사라졌고, 육신과 이 세상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날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어디 그 뿐 입니까? 평생을 육신의 감옥에 갇혀지내다가 나중에 영원한 지옥의 감옥에 갈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은 죄인들이 당신께 돌아오기를 기다리셨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주님의 종들을 보내셔서 구원의 손길을 뻗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뿌리쳤을 뿐 아니라 그들을 핍박하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럴지라도 하나님은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公義로우시고 사랑이신 하나님은 죄에 대하여 진노하시고 심판하셔야 하는데, 인간이 죄에 대한 심판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아시고, 죄의 심판을 감당하도록 당신의 외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시 바로 그 사명에 따라 예수님은 가장 비참한 죄인의 모습으로 인간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으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는데, 바로 그 순간은 죄된 인간들에게 구원의 유일한 길을 완전히 여신 순간이요, 인간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인류 역사의 최고의 시간이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죽음을 로마서 3장 25절, 요한일서 2장 2절과 4장 10절은 “화목제물(expiation)”이라고 말합니다. 이 “화목 제물”이라는 말은 구약의 제사제도와 관련된 말입니다.

 

구약의 5가지 대표적인 제사는 헌신의 의미로 드리는 번제, 죄를 씻는 속죄제, 부정한 것을 지우는 속건제, 곡식 가루로 드리는 소제, 그리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시키는 화목제입니다. 여기서 “화목제물”이라는 말은 <화목제>와 연관된 것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저주스런 관계를 치료하는 제물을 뜻합니다.

 

즉 그리스도는 화목 제물이 되셔서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고 또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를 이루셨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예수님은 화목제물이 되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주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에 의한 죄 씻음과 하나님과의 화해는 한번만으로 충분했습니다.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다”(히 9:12)고 성경은 선언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이 해마다 의식을 거듭해도 달성치 못했던 백성의 속죄를,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자기의 피로써, 영원히 달성하시고,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를 이루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한 완벽한 화목 제물이 되셨습니다.

 

2) 화목케 직분은 이제 성도의 것

 

예수님의 화목제물 즉 화목케 하는 직분은 성도들에게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즉 하나님과 화목해진 성도 역시 이 땅에서 화목케 하는 자로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이 세상과 하나님 사이를 화목케 하는 사명자로 세우셨습니다.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을 위한 화목 제물이 되셨다면, 그리스도의 몸된 우리도 마땅히 화목하게 하는 사명을 가진 것이 틀림없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 말씀하신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라(마5:9) 우리는 화목하게 하는 사명을 감당하여야 하겠습니다.

 

이 화목하게 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아니 필요 없는 일로 보입니다. 왜요? 세상이 화목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고, 또 당사자인 세상 사람들이 원치 않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약성경 특히 마태복음은 세상의 화목, 세상의 평안, 세상의 사랑, 세상의 행복은 거짓이라고 말합니다.

 

진짜가 아닌데 다 속고 있다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화목을 경험한 성도는 그 화목을 전하는 자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화목케 하는 자로 오셔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셨고 수고하며 그 힘을 소모하셨으나, 백성들은 주님의 말씀은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관원들은 예수를 죽음의 자리로 돌아갔고 백성들은 거부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가운데서 택함받은 백성들은 돌아왔지 않습니까? 즉 화목케 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에는 반드시 열매, 결과가 있다는 말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을 이방의 빛으로 삼아 하나님의 구원을 땅끝까지 이르게 하실 것입니다.

 

그 결과 세상의 통치자들이 일어설 것이요, 경배하기 위해 주께로 돌아올 것입니다. 온 세상이 하나님과 화목케 된다는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분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화목케 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여러분은 사람과 사람 사이, 특히 불신하고, 갈등하고, 싸우고, 돌아선 사람들을 다시 이어주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화목케 하는 삶입니다. 물론 우리에게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기술이나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을 연결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신 예수님을 그들에게 전하면 그들 사이에 화목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사람과 사람이 사이에 예수님이 존재하게 만드는 사역,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사명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화평을 이루는 직책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직장에서, 가정에서, 공동체에서 여러분에게 맡겨진 사명입니다. 화평을 이루기 위해 여러분은 Leader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마음(God's Heart)입니다. 그리스도의 정신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먼저 하나님과 화목케 된 자이기 때문에, 여러분이 먼저 주님의 화목과 그 안에 주어진 놀라운 복들을 경험했기 때문에 얼마든지 이 세상을 하나님과 화목케 만들 수 있고, 사람들을 서로 화목케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4. 화목케 하는 자

 

1944년 4월 28일은 영국을 향한 독일의 엄청난 작전이 실행될 날이었습니다. 이른바 “도버 해협 폭파작전”이었습니다. 독일은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있는 도버해협에 단층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이 단층을 폭파하면그것으로 대 지진이 발생하고 그 지진으로 인해 생긴 큰 해일이 런던을 비롯한 영국 대부분 지역을 휩쓸어 영국을 물바다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그러나 이 작전은 실행되기 바로 몇 시간 전에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독일의 폭격기를 유도하여 폭파작전을 실패하게 만든 영국 공군 ‘브렌드’ 대위의 공이 컸지만, 사실 더 큰 공은 ‘롯지’라는 사람에게 돌아가야 합니다. 롯지는 독일에 파견된 정보원으로 독일의 이 폭파 작전을 알아냈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독일군에게 체포되어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몸에 특수한 잉크로 모르스 부호를 남겨 자신의 시신이 발견되었을 때, 독일의 작전에 대한 비밀이 영국에 전해질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독일에 파견된 영국 정보원 롯지는 죽어가면서 자신의 몸에 작전기밀을 새겨 조국이 물에 잠기는 것을 면하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그의 사명이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그는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으로부터 사명을 부여받은 여러분들도 이러한 철저한 사명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죄에서 구하시고 하나님의 백성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신 이유는 여러분이 자신의 삶을 마음대로 살라는 뜻이 아니라, 여러분이 사명을 수행시키기 위해서 입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는 사명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 세상을, 그리고 모든 사람을 하나님과 화목케 만드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하여 여러분은 화목케 하시는 자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화목한 자로서 여러분은 이제 이 세상을 하나님과 화목시키는 일에, 하나님과 한 사람 한 사람을 화목시키는 일에 부름을 받았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직장에서, 여러분 사는 곳에서 화목하게 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이 가는 곳마다 갈등과 분열과 미움과 파벌이 사라지고, 앙숙 혹은 평생 원수인 사람들이 다시 화합하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들 가운데 성도 여러분이 있는데도 여전히 서로 미워하고 원수보듯 등돌리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주변에 아직도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의 문제가 아니라 화목케 하는 자로 살아야 하는 여러분의 문제입니다. .

 

성 프란시스의 <평화의 기도>를 알고 계시지요?

 

주여, 저를 당신의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모욕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거짓이 있는 곳에 참됨을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소서.

자기를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고,

자신을 버림으로써 영생으로 부활하는 까닭이옵니다.

 

이 <평화의 기도>의 사투리 버전이 있더라고요. 먼저 경상도 버전입니다.

 

주님예

보잘 것 없는 저지만예~ 고마, 당신의 도구로 팍 써주이소

우짜던동, 미움이 있는 곳에는 예 사랑을 억수로 주고예

치고 받고 하는 곳에는예 지가 마 먼저 빌게 해주이소.

 

다음은 충청도 버전입니다.

 

지가 죽일놈이구먼유 시방은 말여유. 션찮은 놈이지만유~

지를 평화의 연장으로 써 주실수 있시유~

미움으로 있는 디에는 말여유~ 사랑을 주시구유~

쌈박질이 있는 디에는 말여유 용서하게 해 주셔유~

 

그릇됨이 있는 디에는 말여유~ 희망을 심어 주실 수 있남유~

위로받기 보다는 유 ~ 그려유~ 지가 먼저 위로 할께유~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세상을 하나님과 화목케 만드는 사명을 가졌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사명을 가졌습니다.

 

등 돌린 이 세상으로 하나님 아버지와 화목케 만드시기 바랍니다. 서로 등을 맞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서로 마주 보고 사랑하게 만드는 사명을 감당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admin

 

 

새것이 된 사람 /고후5:14-19

2018-10-27 09:50:35

 

‘바보 빅터’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멘사 회장이엿던 ’빅터 세리부리아코프’의 삶을 소설형식으로 쓴 책인데

여러분이 알다시피 ‘멘사’는 세게인구 대비 상위 2% IQ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가입자격을 주는 세계 최고의 두뇌집단입니다.

 

빅터는 이 멘사 그룹의 토대를 이룬 멘사의 전설이라 할수 있는 인물입니다.

후에 그는 멘사의 CEO가 되었고 명에 회장으로 추대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멘사 CEO 가 ‘바보 빅터’라니 참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빅터는 32살이 되기전까지 바보로 살았습니다. 그의 주변 사람들이 모두 그를 바보로 취급하기에 자신도 스스로를 바보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이 바보가 멘사의

 

회장이 된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천재가 무슨 연유로 32년간 바보로 살았을까요.

 

그는 어려서 말이 어눌해서 소통에 늘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공부에도 별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엉뚱한 질문을 하여 늘 바보라 놀림 받았습니다.

 

결국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중 2때 자퇴하게 되었고 그후 수많은 직장을 다녀봤지만 실수와 엉뚱함으로 제대로 직장 생할을 할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세계 제2차대전이 일어났고 빅터는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그의 인생의 역전 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신병들을 대상으로 IQ검사를 했는데 빅터의 IQ가 178이 나온 것입니다. 이는 영국 육군 최고의 IQ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난리가 났습니다.

 

그러자 욱군 당국은 곧바로 그에게 신병교육 책임자라는 중책을 주었습니다.

물론 파격적인 조치였지요. 그러자 갑자기 벌어진 상황 앞에서 빅터는 처음에는 얼떨떨했지만 그는 이일을 잘 수행 했습니다, 그리고 2차세계 대전이 끝나자 빅터는 육군본부로부터 장교로 특채하겠다는 제안을 받고 그 일을 잘 수행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빅터는 IQ테스트를 한 이후 달라진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오직 하나였습니다. 스스로 자신을 달리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나는 본래 바보가 아니였어! 이 사실을 알게 되자 빅터는 인생에 새로운 눈을 뜨게 되었고 삶에 자신감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때부터 그의 인생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하고 있습니다. 변하되 빨리 변하며, 근본적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어제의 원수가 오늘의 우방이 되고 어제의 우방이 오늘의 원수로 바뀌지 않습니까? 특히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너무나 많은 변화를 경험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변화를 자세히 관찰하면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썩음의 노예가 되어서 계속 죽어 가는 죽음에로의 변화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생명에로의 변화가 있습니다. 죽음에로의 변화와는 반대로 생명에로 거슬러 올라가는 변화로서, 끊임없이 성장하고 승화하는 것입니다.

 

거름더미 속에서 장미꽃이 피듯 썩어지는 것 속에서 아름다운 것이 자라는 생명의 변화, 즉 거룩한 변화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변화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17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이것은 십자가 사건과 그 말씀과 그 능력에 의해서 이루시는 창조의 역사로서, 우리는 이것을 구원, 중생, 또는 영생이라고 말합니다. 이 역사는 보이지 않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신비로운 역사로, 많은 사람들을 재창조의 구원의 역사로 이루어 나가고 계십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피조물' 즉 창조는 문자 그대로 "새 것이 되었도다" 하는 선언이요 고백이며 실제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서의 재창조의 역사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재창조의 역사도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 맞아야 합니다. 재창조의 실제를 우선 우리들 자신에서 살펴보면

 

​첫째, 영적으로 무에서 유로의 변화를 느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전혀 상상도 못했던 일이 내 안에서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쉬운 예로 사람 구실을 전혀 못할 것 같은 사람이 말씀과 성령 안에서 사람되게 하시는

 

역사를 우리는 종종 경험하지 않습니까? 그러기에 본문 14절에 보면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죽음에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즉 새롭다는 말의 의미가 옛것의 수정이나 발전 또는 교육시킨다는 것이 아니라 옛것의 근본적인 죽음을 말합니다. 적어도 성경이 말하는 새로움의 의미는 옛것의 죽음에서 출발합니다.

옛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아 죽고, 그리고 새롭게 시작합니다.

이와 같은 무에서 유에의 변화를 여러분은 경험하셨습니까?

 

사실 우리가 믿는다는 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가끔 성도들 중에서 수십 년 만에

 

옛 동창들을 교회에서 만나 반가워하면서 그 친구가 예수 믿을 줄은 정말 몰랐다고 감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가 학교 시절에 하는 행동이나 철학으로 보아서는 전혀 믿을 것 같지 않아 전도를 아예 포기했었는데, 이제 보니 자기보다 더 열심이라 깜짝 놀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기적이요 창조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나의 의지, 나의 노력, 나의 선택이 아니라 무에서 유로 변케 하는 하나님의 창조적 능력의 발로임을 알아야 합니다. 아직도 나에게 문제가 있습니까? 옛 사람이 다 죽지 않아서입니다. 옛날의 나의 모든 것을 십자가에 완전히 못박아 버리면 거기서 새로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둘째는 쓸데없는 무용지물이 쓸모있는 것으로 바뀌어지는 변화입니다.

 

다시 말하면 생명적 변화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신 겨자씨 비유처럼 생명의 역사가 있는 곳에는 자꾸자꾸 자랍니다.

 

여러분, 은혜가 자라고 사랑하는 마음이 자라는 것을 체험해 보셨습니까?

봉사하는 마음과 그리스도에게로 향하는 인격이 계속 성장하는 것을 체험하셨느냐 말입니다. 내가 억지로 사랑하겠다든지 내가 억지로 용서하겠다든지, 내가 어떤 결심을 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기에 나도 모르게 어느 사이엔가 놀랄만큼 거룩함의 성숙이 있고 인격의 성장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창조입니다. 아멘- 그리고 생명은 반드시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의 창조입니다. 그러니까 나 닮은 사람으로 자라거나 또는 아버지나 어머니를 닮은 사람으로 자라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형상이 완성되는 그런 창조를 의미합니다. 오늘 본문은 지금까지 설명한 이러한 창조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목적이 변합니다.

 

본문 15절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여기서 '위하여'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직업이 변하거나 지위나 신분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부하든 가난하든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목적이 변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목적은 그리스도께로 향하는 것으로 이것이 바로 창조입니다.

 

그런데 믿은 지 오래된 사람들 중에서 아직도 목적이 달라지지 못한 분들이 있습니다.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국가를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라고 '위하여'를 많이 말하지만 결국은 나 위하여로 본래의 목적지에 돌아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진정으로 여러분의 목적이 그리스도에게로 향하고 있습니까?

 

이것만큼 평안하고 은혜롭고 능력 있는 일은 없습니다. 정말로 우리의 목적을 그리스도에게 두고 살면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아직도 고민하는 문제가 있다면 겉으로는 하나님의 영광, 영광 하면서 속으로는 자기 중심이요 자기가 우상이며 자기가 목적이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영적인 세계관을 갖게 됩니다.

지금까지 육적으로 보던 일을 영적으로 보게 됩니다.

세상적으로 물량적으로 생각하던 것을 이제부터는 영적으로 생각을 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을 볼 때도 얼굴이나 재산이나 지위를 보지 않고 믿음과 진실을 봅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미래 지향적으로 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그리스도의 날에 너희는 나의 자랑이 되고, 나는 너희 자랑이 되리라" 그 날을 생각합니다. 항상 영적으로 신령한 면으로 생각을 돌려서 보고 듣고 생각하고 가치 판단하는 그 기준이 전부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영국에 한 변호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출세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인정받는 변호사가 되어 영국 의사당 앞에서 사무실을 냈습니다.

 

그는 남보다 더 열심히 공부를 했습니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자 도서관에서 오랜 시간을 연구했습니다. 그러나 일에 대한 부담이 가증되어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명성은 계속 높아졌지만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해 결국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병원에 입원을 했습니다. 그가 누워 있는 사이에 다른 변호사들이 명성을 얻으면 자꾸만 높아졌습니다. 자기만 낙오자가 된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우울증에 빠졌다가 ‘나는 기회를 다 놓쳤어’ 라며 정신착란증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다 결국 자살을 기도하고 말았습니다. 그가 이렇게 절망적인 삶에 처해지자 주변의 동료들이 그에게 전도를 했습니다. 그는 성경을 읽었습니다.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우울증에 빠져서 자살하려고 했던 상황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새로운 인생으로 출발을 했습니다. 그의 옛 자아가 완전히 죽고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새로 태워났습니다. 완전한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다시 용기와 희망을 가지고 새로운 출발을 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나의 앞길을 전적으로 하나님이 인도해 주세요’ 그는 기도하면서 자신의 삶을 전폭적으로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고생하며 갈등을 느꼈던 사건들의 신앙고백을 시로 적어서 표현하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바로 그 노래가 찬송가 258장입니다.

 

‘샘물과 같은 보혈은 주님의 피로다 보혈에 죄를 씻으면 정하게 되겠네 정하게 되겠네 정하게 되겠네 보혈의 죄를 씻으면 정하게 되겠네 “

 

그는 시인이 되었고 작사가가 되었습니다. 바로 그가 18세기 영국 문학사에서 존경받는 문학가 ‘월림엄 쿠퍼’입니다. 그가 비록 변호사로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하나님을 알고 나서 문학가이자 시인이 되어 당대의 존경받는 훌륭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아멘이런 변화가 나의 삶에 있어야 합니다.

 

 

또한 사랑에 강권되어 삽니다.

 

본문 14 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 받지 못했다고 함부로 말하는 것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가족이나 이웃이나 친구들이 자기만 사랑하지 않는다고 투덜거리는데, 무엇인가 잘못된 사람입니다.

 

영에 속한 사람은 이미 사랑 받은 것으로 충분합니다. 이래서 고맙고 저래서 고마우며, 특히 그리스도의 사랑을 생각하면 미치는 것입니다.

 

사실 미친다는 것은 남이 보기에는 딱하지만 본인은 행복합니다. 사랑에 미치는 것처럼 좋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 특히 그리스도의 사랑에 반해서 그 사랑으로 충전해서 살면 얼마나 행복합니까? 이와는 반대로 미움으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억울해서 이대로는 죽을 수 없어 복수하는 마음으로 평생을 살아가면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증오라는 것은 정말 무섭습니다. 수년 전에 월남 전쟁이 일어났을 때, 미군들이 월맹의 포로가 되었다가 석방되어 미국으로 돌아온 사건이 있습니다. 미국의 병사들이 얼마나 혹사를 당했는지 나중에는 뱀이나 쥐까지 잡아먹으면서 허기진 배를 채웠다고 합니다.

 

기자들이 포로들에게 묻기를 그 어려운 처지에서 어떻게 살아 남을 수 있었느냐고 하자, 병사들의 대답이 참 무서웠습니다. 자기들을 학대하고 괴롭히는 월맹들을 생각하면 억울해서 이대로는 도저히 죽을 수가 없어서 증오하는 마음으로 "두고보자"하는 복수심 때문에 살았다는 것입니다. 요즈음도 미워하는 마음으로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는 것이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받은 사랑으로 삽니다. 강권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취해서 삽니다.

 

술취한 사오정이 비틀거리며 성당의 고해 성사실에 들어가더니 아무말 없이 주저앉아 있습니다. 신부님은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그런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자 신부님은 헛기침을 하고 눈치를 주었는데 사오정은 여전히 아무말 없이 주저앉아 있습니다. 참다못한 신부님은 벽을 똑 똑 똑 세 번 두드리며 ‘이제 고해를 하셔야지요’ 독촉했습니다.

 

그러자 마침내 사오정이 입을 열었습니다.

‘벽 두드리지 마세요 여기도 휴지가 없다고요?’

제대로 들으셔야 합니다.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끝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화평케 하는 직책을 맡았습니다.

 

본문 18절하반절-19절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화목케 하는 자로 산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분쟁의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화목하자' '화평하자'라고 말한다고 화목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분쟁의 원인이 있으면 거기에는 분쟁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분쟁의 원인은 자기 우월감입니다. 부부 싸움을 할 때에도 상대방이 더 훌륭하다고 생각한다면 싸울 수 있겠습니까? 싸움은 상대방이 자기만 못하고 틀렸다는 생각, 즉 내가 더 잘났다는 마음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겸손합니다. 사실 나 스스로 겸손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자기 교양과 수양으로 겸손해지는 사람을 보았습니까? 그저 겸손할 수밖에 없을 지경이 되어야만 겸손해집니다.

 

이것은 말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겸손해지라고 아주 내려 앉혀서 겸손해진다는 말입니다. 겸손도 하나님의 선물이요 은사입니다. 겸손한 인격은 화목케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부정적인 세계관을 가진 자는 화목할 수 없습니다. 상대방의 단점만 보고 무엇이든지 안 되고 불가능하다고 불평하는 자에게 어찌 화평을 기대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구원받은 자는 항상 상대방의 장점을 봅니다. 그의 밝은 면과 좋은 점만을 보며 긍정적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도 않고 옳은 길이 아니면 가지도 않습니다. 여기에 화평이 있고 그래야 화평을 만들 수 있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전체를 봅니다. 분쟁은 나 하나만을 위해서 전체를 죽이겠다는 데서 생깁니다. 사실은 전체를 살려야 나도 사는 그 이치를 아는 자는 자신을 썩어지는 밀알로 기꺼이 내어놓습니다. 여기에 분쟁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영광과 큰 뜻을 생각하면서 이 유기적 관계 안에서 자기를 죽이는 사람만이 화평케 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혹 이 자리에 결혼 안한 총각과 처녀들을 둔 부모님들 있지요?

여러분은 어떤 사위와 어떤 며누리가 좋습니까?

이쁜 며누리와 잘생긴 사위입니까?

그러나 여러분 얼굴은 2년만 지나면 그 얼굴이 그 얼굴입니다. 뚱뚱하고 날신한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럼 어떤 여자(며누리). 어떤 남자(사위)가 좋습니까? 바로 수용성 있는 남자. 수용성 있는 여자입니다. 혹 행복한 결혼생활 하고 싶습니까? 혹 헹복한 사이와 며누리 보고 싶습니까?

 

바로 수용성 있는 남자, 수용성 있는 여자와 결혼 시키십시오.그리고 결혼 하십시오.‘

수용성=이것은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즉 듣는 마음입니다. 경청과 같은 말입니다..

설교도 마찬 가지입니다. 잘 받아들이는 수용성 있는 성도들이 은혜 받습니다.

믿으시길 축원 드립니다. 아멘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은 옛 시대에 살지만 새 사람이 있고 새 시대에 살지만 옛 사람이 있습니다.

 

사실, 이 세상이 변한다 해도 내가 변하지 않는다면 변화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아무리 새해가 와도 내가 변하지 않으면 여전히 묵은 해지 새해가 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내 목적, 내 중심, 내 영혼의 변화가 없으면 그 어떤 변화도 의미가 없단 말입니다.

 

온 세상이 새로워지는 한이 있어도 여전히 나는 옛 사람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그렇습니다. 새로움의 역사는 창조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새로운 역사가 있음을 알고 이 창조의 역사에 가담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개선되고 이웃과의 관계가 개선되어 새로운 피조물로 사는 은혜를 누리시기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그리하여 상급과 면류관들 주인공 되시길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멘-

 

 

 

가정에서부터 “새 삶을 살아야 합니다 /고후5:17/ 유기성 목사

2016-08-13 10:45:25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기도로 꽃피우는 카네이션]이란 주제로 지난 주간 젊은이교회에서 모인 특별 새벽기도회가 열렸습니다. 자녀의 기도로 꽃 피운 카네이션을 받는 부모는 정말 행복한 부모입니다.

 

한 남자 청년이 울음 섞인 목소리로 간증하였습니다.

 

“하루는 엄마에게 물었다.“엄마, 제가 어떤 아들이에요? 저랑 있으면 행복하지 않아요?”그 때 엄마가 대답하였다.“얘기 하지 않아서 그렇지... 엄마는 네가 취직하면 아빠랑 시골로 따로 가서 살려고 했다. 너를 보고 있으면 엄마도 아빠도 지칠 때가 많이 있다.”

 

나는 어머니 앞에서 통곡하며 눈물을 흘렸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를 보고 행복하지 않다고 하는 사실이 너무나 슬펐다. 나는 나 자신이 두려워졌다. 나 자신에게 절망했다.

 

내가 어릴 때, 집이 고물상을 하고, 슈퍼마켓을 할 때도 부모님에게 나는 자랑거리였다. 내가 학교에서 시험점수 잘 받아오면 엄마 아빠가 행복해하시는 것을 알고, 부모님께 힘이 되어드리고 싶어 열심히 공부했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대학교에 입학을 했다.

 

그런데 대학교 합격 발표 며칠 후 아버지와 함께 간 낚시터에서 아버지는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아빠는 네게 실망했다. 더 좋은 학교 갈 수 있었는데 너는 도전을 포기했다.”

 

그 때 내 마음에 큰 상처가 생겼다. 나는 나름 열심히 했고 들어간 대학교에 만족하였는데, 아버지의 그 기대가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고시합격을 해서 아버지로부터 인정받아야지 결심하고 20대를 그 꿈 하나를 품고 지내왔다.

 

그런데 생각처럼 고시합격이 되지 않았고 아버지는 나에게 실망을 감추지 못하셨다. 아버지는 내가 변했다고 하셨다. 그렇지만 나는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다. 그냥 예전처럼 아버지의 인정을 받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데 나는 어느 순간 아버지께 실망만 안겨드리는 아들이 되었고, 그런 아버지의 실망에 원망하고 반항하는 아들이 되어있었다. 이제는‘내가 없어지면 아버지가 행복하실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비참해졌다. 아버지는 나에게 아픔이었고, 두렵고 힘든 존재였다.“

 

그러나 정말 감사한 것은 이 청년이 십자가의 복음을 알게 되어, 구원을 받았고, 아버지도 부모로부터 받은 마음의 상처가 컸음을 이해하게 되었고, 이제는 아버지의 구원을 위하여 기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정 문제의 핵심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자신이 진정으로 거듭나지 않은 채 행복하게 살아 보려고 몸부림을 치는데서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노력을 안해서 라기 보다는 너무 노력을 해서 문제입니다.

 

우리가 가정에서 화를 많이 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 마음대로 안되니 화를 내는 것입니다. 부부 사이에도 아이들도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것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가정 문제로 괴로워하면서 이런 저런 노력을 다 보았지만 남는 것은 좌절감 뿐인 사람은 오늘 말씀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누구든지” 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절망하고 낙심한 여러분도 다 포함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이라고 했습니다. 이제는 고민하지 말고 잔소리하지도 말고 싸우지도 말고 예수님 안에 거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현주님이 쓰신 아름다운 묵상“잠시 쉼표가 주는 여유”라는 글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면서도 소리만 들릴 뿐 마음에 감동이 흐르지 않는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 식구들 얼굴을 마주 보고도 살짝 웃어 주지 못한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창문을 비추는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 /오래 만에 걸려온 친구의 전화를 받고 ‘바쁘다’는 말만 하고 끊었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 /아름다운 자연을 보면서도 마음에 아무런 감동이 흐르지 않는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 뒤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기 위해 한 번 더 뒤 돌아 보지 않는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

 

그러나 쉬고 싶어도 쉬어지지 않는 것이 문제인데, 예수님 안에 거하면 진정한 쉼을 얻게 됩니다. 새 피조물이 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데도 새 삶을 살지 못하는 가정도 있습니다. 이유는 무엇입니까? 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기도가 없어서 그런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예수님도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 만이라도 정말 예수님을 믿는다면 한국의 교육 상황이 이렇게 악해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하셨습니다.

 

우리의 무거운 짐들 중에 무거운 짐이 자녀를 잘 기르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으면 자녀에 대하여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왜 자녀들 때문에 초조하고 염려하십니까? 예수님과 그 약속을 믿지 않는 증거입니다.

 

부모가 자녀의 미래를 확신하는데 자녀가 열등감과 좌절로 염려하면 부모가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 자신이 자녀의 미래에 대하여 염려하면 자녀는 심각해집니다. 주님도 아무 것도 하실 수 없습니다.

 

잔소리하고 야단치고 채근해도 불안한데, 믿고 내 버려두면 더 악화되지 않을까? 이런 믿음이기에 주님의 약속이 전혀 효력이 없게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부부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부 싸움의 근본 원인은 예수님을 진정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 6: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염려하지 마라” 는 말은 내 버려두라, 포기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했습니다. 항상 “예수님 안에 거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은 예수님과 하나가 되라는 말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4절에 보면 예수 믿는 것이 무엇인지 정의해 주고 있습니다.

 

갈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그렇습니다. 예수 믿는 것은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고 사는 것입니다. 교회 다닌다고 다 예수를 믿는 것은 아닙니다. 정욕과 탐심이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이 예수님으로 살게 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알게 되면 품으면 됩니다. 빌 2:5 “이 마음을 품으라!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니”

 

“예수님 안에 있으면” 환경, 조건 떠나서 행복한 자가 됩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행복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좋은 남편과 살면’ 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마음에 드는 아내와 살면’ 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자녀들이 말을 잘 듣고 공부 잘하면’ 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오직 예수님 안에 있으면 새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행복한 것이 가족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봉사, 최고의 선물입니다. 우리가 행복하면 온 가족들이 숨을 쉽니다. 행복해집니다.

 

자녀들이 정말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부모가 먼저 그렇게 행복하게 살아가면 됩니다. 배우자를 행복하게 하고 싶습니까? 본인 자신이 예수님 안에서 행복한 사람이 되면 됩니다.

 

롬 15:18-19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하게 하기 위하여 나를 통하여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그 일은 말과 행위로 표적과 기사의 능력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졌으며 그리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이 말씀이 우리가 가정에서 실천해야 할 말씀입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나를 통하여 말하시고 나를 통하여 일하시옵소서.’ 하면 됩니다.

 

후배 목사님, 매우 똑똑하고 철저한 분이입니다. 언제나 계획을 세워서 사는 목사님이십니다. 교회를 담임하고 보니 설교 부담이 많다고 한 주에 12편의 설교를 준비해야 하더랍니다. 설교 준비에 최선을 다하려고 하는데, 방해받는 일이 많았습니다.

 

찾아오는 손님들, 설교 준비 계획에 방해되니 마음이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아내와 대화하는 시간 조차 부담스럽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주님을 바라보니 주님은 분주함이 없으심을 느꼈답니다, 자신은 마음에 분주함이 가득한데. 예수님께서는 나를 증거하기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순간 깨달은 것이 설교 준비를 나의 노력으로 최선을 다하려 한 것이지 예수님의 마음으로 준비한 것이 아니구나!

 

“설교 잘하려 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렵니다.” 가정에서 무슨 말하기 전, 무슨 일을 하기 전 먼저 우리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인 “평안, 감사, 사랑”으로 충만한가 하는 것을 점검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이 역사하십니다.

 

가족들이 짐스럽게만 느껴지십니까?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 보십시오. 함께 사는 복이 깨달아질 것입니다.

 

한번은 비행기에서 책자를 보는데, 남 태평양의 환상적인 산호초 섬을 보았습니다. 제목이 파라다이스였습니다! 가보고 싶었습니다. 그곳에는 부데낄 사람도, 고민할 문제도 없었습니다.

 

“여기가 어디지? 어떻게 가지?”그러나 조금있다가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문제도 없고 부데낄 사람도 섬길 교회도 없는 곳에서 살면 정말 행복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데끼는 사람이 감사했고 골치아픈 문제도 감사했습니다. 책을 덮었습니다.

 

우리는 결코 좋은 사람들과만 살 수 없습니다. 모든 인간이 타락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혼자 사는 것 보다 훨씬 감사한 것입니다.

 

이애란박사는 탈북민 최초 박사 학위 취득자이면서 경인여자대학교 교수입니다.

 

그녀는 북한에서 출신성분 때문에 고초가 심했답니다. 남한에 와서 대우받을 줄 알았는데, 실망하고, 누구도 품어주고 도와주지 않아 혼자 울기도 많이 했으나 북한에서는 인민반장이라도 날마다 들여다 보았는데, 남한에서는 밤새 울고 있어도 들여다 보는 사람 조차 없었답니다.

 

울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 눈물을 그치고 새벽기도에 나가게 되었답니다. 혼자되고 보니 감시하는 사람도 그리워지더랍니다!예수님 안에 있으면 감사할 것이 보입니다.

 

 

 

댄 알렌더 목사는 [타고나는 부모는 없다]라는 책에서“부모는 자녀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부모가 자녀 때문에 변하는 것을 아십니까? 기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하다고 생각하지 못합니다.

 

젊은이교회 청년의 부모를 위한 기도 간증입니다.

 

“부모님의 재정을 위한 기도는 9년 전쯤 제가 고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부흥회에서 처음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아빠는 다니시던 회사를 그만두고 아는 분과 동업을 시작하실 때였습니다. 아빠가 좋아했던 연구원의 직업을 포기했던 가장 큰 이유는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이유였습니다.

 

우리 아빠가 얼마나 욕심 없는 사람인지는 제가 가장 잘 압니다. 아빠는 사랑하는 세 딸에게 더 좋은 것을 해 주고 싶으셨던 것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빠의 새 일은 그렇게 녹록치만은 않았습니다. 아빠에게 동업을 제안했던 사람은 아빠를 자꾸 주님과 멀어지게 하고 세상을 보게 했습니다.

 

중요한 약속들을 주일에 잡아서 주일성수를 방해하는가 하면, 남을 속여 돈을 벌자며 부추기기도 했습니다. 그런 아빠에 대한 염려가 더해가던 중 신년 부흥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감당하지 못할 기도를 해버렸습니다.

 

”주님, 돈이 없어도 좋아요, 가난해도 좋아요. 우리 아빠가 주님을 잘 믿게 해 주세요.“ 그렇게 기도했습니다.”우리 자녀들이 부모를 위하여 어떤 기도를 하고 있는지 알고 살아야 합니다.

 

행복은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면 모든 이들을 예수님께 하듯이 하게 됩니다.

 

엡 5: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엡 6:7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골 3:23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한 성도의 편지, 어머니와의 관계가 어려워서 괴로워하던 분입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해결되지 않아서 고민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예수님께서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그동안 나를 괴롭게 한 것은 어머님이 아니라 나 자신이었습니다”“오늘부터 나는 어머니를 예수님으로 모시고 살렵니다. 아침부터 실천해 보니 제 마음이 소프트아이스크림이 된 것 같습니다.

 

“예 어머니, 예 예수님.”“이제 어머님이 예수님이 되었으니 더 이상 어머니와의 다툼은 없겠지요.”

 

가정의 변화, 예수님을 믿으면 됩니다. 결국 열매를 주실 것입니다. 과정이 어떻게 될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결과는 압니다.

 

admin

 

 

3.1절 집회메세지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5:17/ 하용조목사

2015-05-27 16:27:43

 

오랜만에 온누리 가족이 한 자리에 모여 예배를 드리고 축제를 하니 너무 좋습니다. 오늘 축제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날의 세상 모습을 바라보면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3·1절을 맞아 우리 교회가 먼저 회개하고 반성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은 온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세상을 위해, 사회를 위해 피흘린 적이 없었다는 것을 깊이 반성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3·1절인 오늘 어린아이부터 어른까지 온누리 전 성도가 한 자리에 모여 전심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축제를 벌이고, 찬양을 합니다. 우리 마음 깊은 곳에는 세상이 변하기 원하는 간절한 소망과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과거에 하지 않은 새 일을 하십니다.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는 큰 일을 계획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이 일을 선포하고 나누기를 원합니다.

이사야 42장 9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보라 전에 예언한 일이 이미 이루었느니라 이제 내가 새 일을 고하노라 그 일이 시작되기 전이라도 너희에게 이르노라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하나님의 마음은 새로운 계획과 아이디어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것을 깨달아 알고, 하나님처럼 흥분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이사야 43장 19, 20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정녕히 내가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을 내리니 장차 들짐승 곧 시랑과 및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들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나의 택한 자로 마시게 할 것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메마른 땅에 장미꽃을 피우고,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 교회에 이 놀라운 기적과 능력이 있는데도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제한합니다. 우리는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만큼만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지만 희망을 잃어버린 채 삽니다.

 

하나님은 새 일을 행하실 뿐만 아니라 큰 일을 준비하십니다. 예레미야 33장 3절에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하나님은 새 일을 꿈꿉니다.

 

그 일은 내가 알 수 없는 비밀입니다. 역사상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일을 하나님께서는 예비하십니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백성들을 통해, 피로 사신 교회를 통해 그 일을 이루길 원하십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이 이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요 14:12).

 

저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 이 말씀이 제일 이해하기 힘들지만 이 말씀은 들을수록 힘이 솟습니다. 교회와 성도가 기도하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옷 입으면, 우리는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됩니다.

 

성경에는 이런 뜻을 가진 말씀이 많습니다. 성경의 일관된 주장은 ‘당신의 과거가 어둡고, 추하고, 비참하고, 절망적이더라도 하나님은 언제나 새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출발, 시작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할렐루야. 이 귀한 말씀을 주위 분들에게 전하십시오. 성경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새 사람이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변하지 않는 사람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새 세상을 만들고, 새 역사를 창조합니다. 하나님의 큰 일을 이룹니다. 과거가 단절되지 않은 사람은 미래로 갈 수 없습니다. 꿈이 없는 사람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당신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의 사람이다. 절망이 아니라 희망의 사람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가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희망입니다. 그분은 길, 진리, 생명, 빛,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민족은 기적을 체험합니다.

 

역사가 변합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만 하면 새로운 피조물이 될 것이요, 새로운 피조물이 되면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저는 온누리성도가 이 말씀에 기초해 세상에 나가 선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세 가지입니다. 온 인류를 구원하시는 계획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선교입니다. 세상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또 한 가지 계획이 있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하나님은 온 인류가 한 가족이 되어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기를 원합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제가 강조하고 싶은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그것은 온 세상을 복음으로 변화시키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미움, 저주, 절망, 전쟁, 폭력을 내쫓고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 성경은 우리의 정체성을 말해줍니다. ‘너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고 말입니다. 교회가 해야 할 일 중의 하나는 세상을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린 실패했습니다.

 

우리는 오늘 3·1절을 맞이했습니다. 이 날은 민족과 양심,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든 억압과 압제와 불의에 항쟁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해방된 것이 아닙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강대국의 힘을 빌어 우리에게 해방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렇게 받은 선물을 우리는 잘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해방 후에 우리는 이데올로기에 휘말려 골육상쟁을 치러야 했고, 심각한 가난을 경험했습니다.

 

군사정권과 정치적 어려움으로 온 국민이 수 십년 동안 고생을 해야 했습니다. 영광스러운 올림픽을 개최했지만, IMF의 처절하고 기막힌 경험을 했습니다.

 

최근의 국내 상황은 어떻습니까? 도덕이 해이해지고, 가정이 파괴되고, 교육이 몰락하고, 정치가 불안하고, 청소년은 끝없이 방황하고 있습니다. 남북은 아직도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교회는 고속 성장하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품이었습니다.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교회, 부패한 사회 때문에 많은 사람이 절망하고 있습니다.

 

이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를 통해 새 일을 하기 원한다. 온누리교회를 통해 한국사회에 나의 놀라운 꿈과 계시를 이루기 원한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 여러분께 고린도후서 5장 17절 말씀을 다시 드립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우리들이 함께 기도하고, 회개하면 세상은 변할 것입니다. 우리는 세 가지 영역의 변화를 선포합니다. 먼저 우리의 가정이 변하길 원합니다. 남편, 아내, 자녀, 가족이 변하기를 원합니다.

 

가정이 변하면 이 세상이 변할 것입니다. 깨끗한 사회가 되고 건강한 세상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할 것입니다.

 

◆ 사랑으로 십자가 지신 예수님처럼

 

세상을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해야 할 세 가지 일이 있습니다.

먼저 교회가 겸허히 반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민족의 고통, 죄, 아픔을 교회의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교회의 성장에만 매달려 있지 말고, 기도, 헌신, 헌금, 은사, 정열을 가지고 세상으로 나가야 합니다. 방황하는 청소년들, 굶주리는 어린이들, 절망하는 이웃들에게 가서 그들에게 소망을 주고 그들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여러분, 몽둥이로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몽둥이는 때릴 때 쓰는 것이지 청소할 때 쓰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나 교회나 모든 사람이 정의의 칼, 몽둥이를 들고 청소를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청소를 하려면 빗자루를 들고 땀을 흘려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이 깨끗해집니다.

 

오늘 아침 뉴스에서 친일파 명단을 작성해서 공포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명단을 공개한다고 세상이 변하겠습니까? 서로 비판하고 공격하고 저주한다고 해서 나라가 깨끗해지지 않습니다.

 

남을 고발하고 비판하고 정죄하는 방법으로는 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는 남을 비판하는 일을 중지해야 합니다. 용서하고 사랑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냄새 나는 쓰레기를 치워야 합니다. 나 자신, 우리 가족, 우리 공동체부터 앞장 서야 합니다.

 

역사는 하나님의 역사 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투쟁하고 싸워도 역사는 변하지 않습니다. 사랑, 용서, 복음으로만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누군가 피를 흘려야 합니다. 죽어야합니다. 손해를 보아야 합니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것이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해야 할 일은 죽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절제하고, 희생하고, 고통을 나눠야 합니다. 세상을 훈계하고 야단칠 자격이 우리에게 없습니다.

 

이 모든 일은 인간의 힘이 아니라 성령의 힘으로 가능합니다. 교회가 세상의 모임과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말씀과 성령을 의지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이 일을 해 나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계획, 큰 일을 생각하면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세상을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인

 

오늘은 새 날입니다. 복된 날입니다. 온누리교회는 ‘하나님께서 새 일을 행하신다. 하나님께서 큰 일을 행하신다’고 선포합니다. 세상이 변한다고 믿으십시오. 우리가 기도하면 세상이 변합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지면 세상은 변합니다. 우리는 운명의 사람이 아니라 섭리의 사람, 축복의 사람입니다. 말씀, 비전을 가지고 세상과 일터를 향해 나가면 세상은 조용히 변할 것입니다.

 

오늘 저는 잠실로 오면서 태극기를 단 차들을 보며 너무 기뻤습니다. 도로에 많은 차가 있었지만 온누리교회 성도의 차만 태극기를 달고 있었습니다. 작은 물방울이 모이면 물결이 되고 바다가 됩니다.

 

꿈을 꾸는 사람들이 모이고, 그들의 기도가 모이면 물결을 이루고, 바다가 되어 세상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작지 않습니다.

 

지금은 비전과 꿈을 키울 때입니다. 하나님을 제한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나보다 크십니다. 하나님은 엄청난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사용하기 원하십니다. 작게 생각하면 작은 것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만큼 생각하면 하나님만큼 일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은 변할 것입니다. 한국은 변할 것입니다. 통일은 세상적인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청소년도 변할 것입니다. 학교가 변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온누리교인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때문에 행복하고 활기가 생길 것입니다. 행복한 가정, 깨끗한 사회, 건강한 세상을 세우기 위한 행동강령인 10계명을 선포하며 기도하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실천해 나갈 때 이 세상은 예수님이 원하는 놀라운 세상으로 변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온누리교회 성도 여러분,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여러분에게 믿음이 생기길 바랍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넘지 못할 산은 없습니다. 우리에게 어려운 장애물도 없습니다.

 

성령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면 우리 능력으로 못할 일도 없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갈 때 세상은 변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들 마음에 뜨거운 성령의 감동이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온누리교회가 주님 말씀처럼 ‘빛과 소금’이 될 때 이 세상은 변할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저희들은 이 세상 변하길 바라는

간절한 소망으로 모였습니다.

음성을 들려주옵소서

가정과 세상과 미래에 대한

새로운 환상 갖게 하옵소서.

교회가 먼저 사랑하는 법을 깨닫게 하시고,

용서하는 법을 깨닫게 하시고,

작은 일부터 희생하고 헌신하게 하옵소서.

실천하게 도우시고 앞장서도록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admin

 

 

새롭게 미쳐야 합니다 /고후5:13-21/ 이동원목사

2014-12-04 21:54:57

 

월드컵 축제는 이 땅에서 막을 내렸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 땅 이 백성 모두에게 행복한 한 달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지난 한 달은 우리 민족사에 기억될만한 집단적인 엑스터시를 체험한 시간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우리가 4강에 들었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한국 땅의 월드컵 축제가 전 세계인들에게 제공한 가장 강렬한 인상은 4강신화가 아니라 700만을 거리로 내몰았던 집단적 거리응원이었습니다.

 

사실 이 축제가 처음 시작될 때만 해도 이 축제가 이런 정도의 거국적 응원이 될 줄은 우리 자신도 예측하지 못한 의외의 결과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번 월드컵 응원의 성공의 배경이 무엇 때문이었는가를 저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아무래도 그 원인이 우리 안에 잠재된 거대한 민족적 정서에 기인한 것이 아닐까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흔히 우리문화의 특성을 지적할 때 '신바람 문화'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어떤 분은 신바람이야말로 우리 민족정서의 원형질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습니다. 우리민족은 신바람이 나면 두려운 것도 불가능한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신바람에 취할 때 자신을 잊습니다. 배고픔도 서러움도 원망도 자질구레한 일상사에 얽매였던 자신도 잊고 현실을 떠나 탈혼의 경지인 더 큰 세계로 빠져 들어갑니다. 우리 민족에게는 이런 신바람으로 어렵고 힘든 일상의 격랑을 헤쳐온 축제의 정서가 존재합니다.

 

무더운 여름의 폭염아래서도 김매기는 김매기가 아니라 축제였습니다. 소리꾼과 일군들이 어우러져 선창, 후창으로 노래하며 어깨를 들먹이면서 춤추고 일하다 보면 어느새 김매기는 끝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바람의 현장입니다.

 

이런 신바람은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는 집단적 헌신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IMF의 한파가 이 땅을 찾았을 때 나라님의 호소 한마디에 나라 살리자고 결혼반지 돌 반지 싸들고 은행으로 달려가 거국적 금 모으기에 줄을 설수 있었던 것도 이 민족 안에 잠재된 신명만 나면 거칠 것이 없는 신바람정서의 결과였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번 월드컵 축제에서 또 한번 이런 신바람을 경험했고 그래서 지나간 한 달 동안 행복하게 미쳐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분은 이제부터는 월드컵도 끝나고 무슨 재미로 인생을 살아야 하느냐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런 분들에게 이제부터 새롭게 행복하게 거룩하게 미쳐 사는 비밀을 나누고자 합니다.

 

바울사도는 본문이 시작되는 13절에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이라는 사람은 정말 미쳐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도대체 바울은 무엇에게 왜 미쳤을까요? 이 대답을 찾는 과정에서 저는 여러분도 저와 한가지로 미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그는 무엇에 미쳤습니까? 우리는 무엇에 미쳐야 합니까?

 

1.그리스도의 사랑에 미쳐야 합니다.

 

14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강권이란 말은 꼼짝 달싹 못하도록 붙잡아버린 모습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붙잡혀 거기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는 지금 사랑의 열병에 걸린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무엇 때문입니까? 그는 두 가지 이유를 들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이유는 우리가 정말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가 오늘 날 또한 그와의 사랑에 빠져야 할 두 가지 이유이기도 합니다. 두 가지 이유-무엇입니까?

 

첫째 이유, 그는 나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입니다.(14절b)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사랑은 대부분 이기적 동기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부라도 서로를 위해 죽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부모와 자식간이라도 부모를 위해 죽는 자식은 거의 드물고, 자식을 위해 죽는 부모도 찾는 것이 결코 흔한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부모도 자식도 아닌 나와 같은 민족도 아닌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돌아가시다니--이것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정말 사건 중의 사건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사실이라면 나를 위해 목숨을 던지신 그 분과의 사랑에 빠지는 것이 이해할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바울은 롬5:7이하에서 이 세상에서는 의인이나 선인을 위해 죽는 일도 쉽지 않은데 그리스도는 죄인인 나를 위해 죽으셨다고 이것이 어인일인지 모르겠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유명한 롬5:8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말합니다.

 

남동생의 뒷바라지를 위해 시집가기를 거절하고 평생을 희생한 어느 간호사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동생 자신도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고 주변 사람도 좀 지나친 것이 아니냐고 했지만 막무가내였다고 합니다. 그녀는 오직 동생을 위해서만 살았다고 합니다.

 

그녀는 세상 떠나 기전 그 이유를 이렇게 고백했다고 합니다. 자기가 사춘기 시절 수혈을 받을 필요가 있었는데 특이한 혈액형이어서 피를 구하기 어려웠는데 마침 어린 남동생이 같은 피형이어서 자원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수혈이 끝난 후 이 남동생이 입원실에서 의사선생님에게 뜻밖에 이렇게 물었더랍니다. "선생님, 저는 언제 죽게 되나요?"

 

이 소년은 수혈의 의미를 충분히 모른 채 죽기를 각오하고 누님을 위한 수혈에 임했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후에 전해 들었을 때 이 누이는 그때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저는 평생을 제 동생을 위해 살겠습니다"고.

 

그리고 그녀는 그 결심을 실천했던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 죽을 결심을 하고 수혈한 동생을 위해 한 여인이 동생에게 빚진 마음으로 동생을 사랑하여 동생을 섬기는 일에 헌신했다면 우리 위해 실제로 십자가에서 죽어주신 그분과의 사랑에 빠져 살아가는 것이 지나친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둘째 이유, 그가 나의 삶의 이유가 되셨기 때문입니다.(15절)

 

바울사도는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죽으셨을 뿐 아니라, 우리를 위해 다시 사셨다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그가 다시 사신 이유는 우리로 우리를 위해 다시 사신 그분을 위해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다시 사신 그리스도 - 그는 이제 우리들 그리스도인의 존재의 이유요, 삶의 목적이 된 것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이 우리에게 주어진 까닭도 안디옥의 성도들이 늘 그리스도를 이야기하고 그리스도처럼 살고 그리스도를 칭송하고 그리스도를 전하기에 믿지 않는 사람들이 우리보고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목적 없이 살아가고 있는지요. 우리의 삶의 무기력과 무감동은 대부분 목적의식의 결여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에게는 분명히 바라보고 살아갈 수 있는 대상이 생겼습니다.

 

그분이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를 위해 죽었다. 나는 너를 위해 다시 살았단다. 그리고 나는 너를 위해 살고 있단다. 그러면 넌 나를 위해 살지 않겠니?" 이 음성을 들은 그날부터 바울은 그를 사랑하는 일에 미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2.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일에 미쳐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일에 미쳐 있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일에 미쳐있었습니다. 사도행전 26:24에 보면 바울이 전도하다가 죄수로 잡혀 왔으면서도 여전히 자기를 심문하는 로마의 네로에게서 유대 땅으로 파송된 총독 베스도에게 전도를 하자 그는 바울에게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했구나."

 

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바울은 정말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일에 미쳐있었습니다. 저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래야 한다고 믿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일에 미쳐야 할 이유 - 본문에 의하면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이유, 그리스도의 사랑만이 인간을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가진 가장 큰 존재의 갈망은 변화의 갈망입니다. 아무도 자기의 존재 그대로를 만족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인간이 가진 가장 큰 불만은 자신에 대한 불만입니다. 이 불만이 크면 클수록 새로운 존재에로의 변화에 대한 열망은 더 증대됩니다.

 

그러나 문제는 변화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오늘 본문 17절에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고 그리스도안에 있게 되면 새 피조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격하는 사람치고 변화되지 않은 사람을 본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교회에 열심히 나와도 직분을 가져도 그리스도와의 사랑에 빠지지 않은 사람치고 변화된 사람을 본 일이 없습니다. 저에게 복음의 감격을 아는 사람들을 보여 주십시오. 그들은 한결같이 변화를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복음만이 인간을 변화시키는 유일한 처방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내가 이 복음을 부끄러워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복음을 믿는 모든 이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고백합니다. 당시 로마제국은 무력과 과학, 철학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무력도 과학도 철학도 한 영혼을 구원하거나 변화 시킬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는 사람마다 변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사랑을 전하는 일에 미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둘째 이유, 그리스도의 사랑만이 인간을 하나님과 화목 시키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인류최대의 과제는 창조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의 정립입니다. 인간이 범죄한 이후 인간은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왔습니다. 인간의 모든 비극은 하나님을 등진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척 스윈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정보였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교육자를 보내셨을 것이다./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기술이었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과학자를 보내셨을 것이다./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돈이었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경제학자를 보내셨을 것이다./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쾌락이었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연예인을 보내셨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이었기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중보자요 화목자인 구세주를 보내신 것이다."

 

바울사도는 전도의 책임을 본문에서 '화목하게 하는 직책'이라고 말합니다.(18절) 복음을 가르쳐 '화목하게 하는 말씀'이라고 말합니다.(19절) 20절에 의하면 전도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증언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복음전도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이 세상은 하나님이 축복할만한 세상, 하나님과 화목한 세상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복음은 개인을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세상을 변혁하는 사건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일에 미쳤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또한 미쳐야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공산주의가 기승을 부리던 시절 빌리 그래함 목사는 한통의 편지를 공개하면서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의 헌신이 잘못된 이데올로기인 공산주의에 바치는 헌신보다 못한 것을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촉구한 일이 있었습니다.

 

본래 이 편지는 공산주의 사상에 매료된 한 청년이 공산주의 운동에 헌신하기 위해 자기 애인 여인에게 헤어지자고 쓴 편지였다고 합니다.

 

"우리 공산주의자들은 사망률이 높다. 총에 맞고 교수형을 당하고 조롱당하고 직업을 잃고 있습니다. 우리 중 상당한 퍼센트는 이미 죽었거나 감옥에 갇혀있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가난하게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좋은 집, 좋은 자동차를 가질 여유도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우리의 모든 시간, 모든 재산, 모든 재능을 아낌없이 당을 위해 바칩니다. 사람들은 우리를 가리켜 광신자라고 부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광신자입니다. 우리의 삶은 오직 하나의 목적, 세계 공산화의 노력에 의해 지배되고 있습니다.

 

내가 죽도록 갈망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공산주의가 실현된 세상입니다. 그것은 이제 내 삶이요, 내 사업이요, 내 종교요, 내 취미요, 내 연인이요, 내 아내요, 내 애인이요, 내 빵이요, 내 고기입니다. 나는 낮에 그 일을 하고 밤에는 그것을 꿈꿉니다.

 

나에게 이제 이 비전을 떠나서는 나의 어떤 다른 인생도, 우정도, 사랑도, 대화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나는 이 이상을 위해 감옥에 갇힐 준비가 되어있고 필요하다면 사형대에 갈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여러분과 제가 과거에 공산주의자들이 바치던 열정 아니 월드컵의 열정만 가지고라도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헌신한다면 세상은 얼마나 변할까요? 여러분, 거룩한 비전을 위해 한번 미쳐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지금은 새로운 열광을 시작할 때입니다.

 

 

 

 

 

새로운 피조물 /고후5:13-19/ 곽선희 목사

2014-11-20 05:36:24

 

새해 첫 주일 교회에 나오신 여러 분 이같은 큰 축복을 누리게 된 여 러분께 진심으로 축하의 말씀을 드 립니다. 이게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특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특별 하게 2000년에 사는 그 복을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의 역사 2000년'이라고 하는 책이 며칠 전에 출간되었습니다. 예일대 학교 교수 야로슬라프 펠리칸이라고 하는 분이 쓰신 것인데요 예수에 대 한 다양한 해석의 역사를 문화사적 측면에서 고찰한 책입니다. 그는 이 책을 통해서 세계 역사라고 하는 것은 곧 예수님의 역사다. 다시 말 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해석의 역사다, 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어떻게 해석하느냐? 혹은 예수를 어떻게 대하느냐? 혹은 받 아 들였느냐 거절하느냐, 대항했느 냐 아니면 그에게 충성을 다했느냐? 또 예수를 받아들인 자라면 어느 정 도 받아들였느냐? 이런 모든 것에 의해서 그 나라 문화, 그 나라 역사, 그 나라의 번영, 그 나라 정치, 또 우리가 지향하는 안정과 행복도 거 기에 걸려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 래서 예수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역사의 방향은 결정되는 것 이다 라고 그렇게 이 책에서 설명하 고 있습니다. 이미 우리는 새해를 맞았습니다 만은 한번 더 짚고 나가 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가 '2000년'하고 말하지만 그 기 준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는 겁니 다.

 

요새 밀레니엄 베이비라고 해 서 그 새해 첫 시간에 태어난 아이 를 뭐 굉장한 사건인 것처럼 이렇게 얘기들하고 있습니다 만은 난 그 얘 기를 들으면서 이건 넌센스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또 흔히 우리가 말하는 팔자라고 하는 것은 음력이지 양력이 아닙니다.

 

여러분 당장 가서 점을 쳐보세요.

"음력 몇 월 며칠이요?"하고 묻지 양력은 상관이 없는데 뭘 밀레니엄 베이비니 뭐니. 도대체 어디다 기 준하고 이 소란이냐 이 말이에요.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기 준은 예수그리스도입니다.

 

'비포 크 라이스트(Before Christ)' 할 때 우 리가 B.C.하고 말하지 않습니까, 예 수 전. 하지만 이제 주 후를 말할 때는 우리가 주후라고 하지만은 원 래 주 후가 아닙니다. '에프터 크라 이스트(After Christ)'가 아닙니다.

 

A.D.입니다. A.D.라고 하는 것은 그런 뜻입니다. '안노 도미나이 (Anno Domini)'그런 뜻입니다. 안 노(Anno)라고 하는 말은 '해'라고 하는 말이에요. 년, 해 그런 뜻이고 도미나이(Domini)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주'라고 하는 뜻입니다. 그 러기 때문에 영어로 옮기면 '인 더 이어 오브 아우어 로드(In the year of our Lord)' 그것이 A.D.예요.

 

예 수를 기준으로 해서 주 전, 주 후가 아니고 주전은 주 전이지만 주후는 주가 다스리는 해, 우리 주님이 주 관하시는 해, 이것이 A.D.예요. 2000년이라는 말을 똑바로 알고 쓴 다면 그야말로 아멘, 할렐루야죠. 예수의 나라, 예수가 다스리는 세계 2000년에서 이제 3000년으로 넘어갑 니다. 예수가 다스리는 세계가 이 렇게 연장되고 더 확장됩니다 그런 의미라는 말이에요. 뭘 알고 축배 를 드는지 모르겠어요.

 

그 중요한 의미와는 관계없는 축제를 벌이고 소란을 떠는 게 아닌가 그러한 생각 을 합니다. 어쨌든 2000년, 소위 밀 레니엄 축제라고 하는 것은 이 같은 신앙적, 신학적인 중요한 의미를 가 지고 있다 하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전 것은 지 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 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제 새것 에 대한 개념을 한번 정리하고 나가 야겠습니다. 새것이라고 할 때에 시간적 개념의 새것이 있습니다.

 

어쨌든 작년은 지나간 것이고 금년 이 새해요. 어제는 낡은 것이고 오 늘은 새해입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새것, 사실 알고 보면 이것은 새것이라고 하지만은 우리 자신에게는 곧 새것은 아닙니 다.

 

자 이제 우리가 이만큼 살았습 니다. 그러나 그건 의미하는 건 뭘 말하는고 하니 이제 남은 시간이 얼 마 안 남았다 그거예요. 그만큼 남 은 시간이 짧아졌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축배를 들 때마다 생각을 해야돼요. 이제 그만큼 내 가 세상 살 날이 짧아졌다 이걸 알 고 축하해야될 거 아니겠습니까? 생이 연장됐다는 뜻이 아니에요. 생이 얼마 안 남았다는 뜻이에요.

 

어쨌든 이것은 시간적 개념에 의해 서 생각할 수 있는 새로움이고요 또 하나는 형식적 새로움이 있습니다. 어떻게 보이느냐 하는 것인데요 결 국은 주관적인 내 경험에 준한 것입 니다. 내게는 새로운 거예요. 그러 나 그 본래 있던 거예요. 나로서는 새것이에요. 그러나 그건 전혀 새 것이 아닙니다.

 

오래 전 아니 어쩌 면 수천년동안 거기 있었어요. 내 가 그것을 오늘 처음 보고 처음 경 험하면서 이걸 새것이다라고 생각하 게 됩니다. 그건 나 자신에게 속한 것이고요 또 하나는 신분적 의미에 서의 새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 떤 의미에서 소속적 개념에서 말하 기도 합니다.

 

자 여기에 처녀가 있 는데 이미 노처녀입니다. 그렇지만 은 그가 어느 순간에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를 불러 서 새색시라고 합니다. 혹은 새사 람이라고도 합니다. 이것은 지금 자기가 친정에서 친정 식구들하고 같이 살다가 이제 엉뚱한 남자를 위 하고 그의 집을 따라가서

 

"아버님, 어머님"하며 살게 됐으니까 신분이 바뀌었지요. 그래서 새 신분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새것입니다. 그건 시간적 개념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 습니다. 이걸 알아야 되겠고요 또 하나는 좀 더 깊은 의미에서는 존재 와 속성적 의미에서의 새것이 있습 니다.

 

다시 말해서 그 시간과는 관 계없이 그의 생각과 그의 속성이 과 거에 속한 것일 때는 그건 낡은 것 이요 미래 지향적으로 미래에 속한 사건일 때 그것을 우리는 새것이라 부릅니다.

 

또 하나는 계속 죽음에 속한 것을 낡은 것이라고 하고 계속 적으로 생명에 속한 것을 새것이라 고 합니다. 가령 여러분이 좋아하 는 것, 뭐 보석이라든가 옷이라든가 집이라든가 혹은 여러분이 차고있는 시계라든가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딱 내 손에 가지는 그 순간부터 낡 은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차라도 한 번 탔다 내리면 중고입니다. 오 늘 사고 내일 팔아도 '유스드 카 (Used car)' 입니다. 그건 중고차 시장에서 팔리는 거예요. 이와 같 이 모든 것은 옛날에 속합니다. 낡 아집니다. 그런고로 옛것입니다. 그러나 생명에 속한 것을 보세요. 여기 좋은 시계가 있고 여기 콩 한 줌이 있다고 합시다.

 

이 콩과 시계, 놓고 보면 시계가 비싼 거지요. 수 백만원짜리. 상대가 안돼요. 교환 가치로서는 아주 비싼 것이지만은 그건 오늘부터 낡은 것이요. 그러 나 여기에 콩은 땅에다 묻어놓으면 싹이 나고 다시 생명이 솟아오릅니 다. 그런고로 살아있는 것은 새것 이요 죽은 것은 낡은 것입니다. 시 간과는 관계가 없어요. 정신적으로 나 육체적으로나 신앙적으로나 살아 있는 것은, 생명적인 것은 언제나 새것입니다.

 

그걸 우리가 꼭 생각 을 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소생하고 다시 생명을 출산하고 다 시 성장하고 결실하기 때문이요. 생명은 계속적으로 더 새로워지는 역사를 만들어가기 때문이요. 그러 나 생명이 없는 것은 썩어지고 낡아 지고 죽어지고 그러기 때문에 그건 옛것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 본문성경에 의하면은 그리스 도 안에 있으면 새것이고 그리스도 밖에 있는 것은 낡은 것입니다. 이 렇게 새것과 낡은 것을 분별하고 있 습니다. 이게 결정적인 겁니다. 이 건 존재론적 의미를 가졌습니다.

 

이건 자연적 변화나 시간적 개념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로지 생 명, 오로지 창조적 역사는 계속적으 로 새것이다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 습니다. 그래 오늘 성경말씀에 특 별히 아주 중요하게 우리에게 말씀 하고 있는데요 아주 보편적이고 넓 은 개방적 의미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이 '누구든지'라고 하는 말을 귀담아 들 으시기 바랍니다. 부자냐 가난하냐 지식이 있느냐 없느냐 젊었느냐 늙 었느냐 뭐 어떤 일을 하고 있느냐 상관 안해요. 어제냐 오늘이냐도 묻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누구든 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것이고 그리스도밖에 있는 것은 낡은 것이 다 라고 결정적으로 선언합니다.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또한 그 새것 됨의 조건은 오직 하 나 '인 크라이스트(In Christ)', 엔토 크라이스트, 오직 그리스도,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그리스도, 그리스도 안에 이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구속받는 생 명을 의미하는 것이올시다. 오늘 본문에와 같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이다.

 

그가 부활하므로 그 안에 있 는 사람은 모두 산 것이다. 이런 귀한 신비로운 말씀을 합니다. 그 래서 유명한 사도바울의 말씀이 있 지 않습니까.

"아이 엠 크루시파이 드 위드 크라이스트(I am crucified with Christ)",

"나는 그리스도와 함 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나는 이 미 십자가에 죽었어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 부활하는 순간 에 내가 부활했어요.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을 말합니 다.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고 사는 사람, 항상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다. 오늘이 내 마 지막 날일 수 있다 라고 생각하고 사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여기서 한 단 더 나갑 니다. 나는 이미 어제 죽었다, 나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선언 하고 그리스도로 오늘을 사는 거지 요. 이런 신비로운 생명의 속성을 새것, 새사람이라고 말하게 됩니다. 완전히 그리스도 안에 깨끗하게 장 사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아 서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그런 존재, 신비로운 속성입니다. 동시에 이는 오늘 본문의 말씀과 같 이

 

"이전 것은 지나갔다"라고 말합 니다. 옛것으로부터 완전히 자유함 을 말합니다. 옛 속성, 옛 죽음, 옛 습관 그 낡은 모든 것으로부터 온전 히 자유합니다.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로다"

바로 그런 겁니다. 생 각과 의식, 감성, 모든 면에서 낡은 것으로부터 완전히 자유할 때 그 사 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이요 새사람이 다 하는 말씀입니다. 이 인 크라이 스트라고 하는 말은 다시 예수님의 말씀을 빌어서 좀 더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나는 포 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가지가 원 나무에 붙어 있으면 너는 내 안에 있고 나는 너 안에 있다 그래서 내 진액을 받아서 네가 존재한다. 말 씀 안에서 존재한다 내 생명력 안에 네가 살아있다. 이것이 바로 그리 스도 안에 있는 것이죠.

 

마치 나무 가지가 나무 원 줄기에 붙어 있으면 서 그 나무로 존재하는 거와 같이 그 진액을 받아서 존재하고 열매를 맺는 것 같이 이런 신비로운 생명적 관계를 가르쳐서 새사람, 그리스도 인, 혹은 그리스도 안에서라고 말하 게 되고요 동시에 요한복음에 보면 은 예수님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이것은 바 로 성령 안에 있음을 말합니다. 성 령, 그리스도의 마음, 그리스도의 영 이 그를 감동해서 그로 깨닫게 하고 그리스도 안에 살게 하고 그리스도 의 사람으로 성숙하게 하는 그런 신 비로운 성숙, 생명체를 새사람, 새것 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 다 시 이 본문 성경에는 아주 논리적으 로 차근차근 새 사람의 의미가 무엇 인가를 말해줍니다. 첫째는 이 재 창조된 피조물이라는 것은 목적이 새로워집니다. 오늘 15절 말씀을 눈여겨보시면 이렇습니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 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 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위하여"

라는 말을 보세요. 다시는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나를 위하여 죽으 시고 나를 위하여 부활하신 바로 그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게 하려함이 라. 목적이 바꿨어요. 혹 방법은 아직도 옛날 사람일 수도 있어요. 혹 미급할 수도 있어요. 그러나 목 적이 바뀌었어요.

 

그 때 새사람입 니다. 목적이 그리스도를 위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이 목적은 내가 세운 게 아닙니다. 그 가 나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해서 이 목적이 생긴 겁니다. 바울은 위대 한 선언을 합니다. 내가 그 요절을 무척이나 좋아합니다. 빌립보 3장 12절에서 말합니다.

"그리스도께 잡힌바 된 것을 잡으려고 쫓아가노 라"

 

내가 선택한 이상이 아닙니다. 내가 선택한 철학도 아닙니다. 내 가 세운 이상이나 꿈이 아닙니다. 내가 세운 목적이 아니고 그가 나를 포로해서 완전히 강권적으로 체포해 서 내 길을 돌려서 그리스도를 따르 는 사람을 만들었어요. 그런고로 내 목적은 내 것이 아니에요. 그가 만들어주신 거고 그가 강권적으로 세우신 목적이요. 그 목적을 내가 내 것으로 삼고 기쁜 마음으로 쫓아 가노라 그랬어요.

 

억지로가 아니고 기쁜 마음으로. 이것이 새사람이요. 이것이 새로운 피조물이요. 목적이 확 바뀐 거예요. 그걸 알아야 합니 다. 목적이 그리스도께로 향할 때 나를 위하여 죽으신 바로 그 분을 위할 때 그가 그리스도인이요. 두 번째는 삶의 동력입니다. 동력인, 그 동력이 문제입니다. 무슨 힘으 로 사느냐 하는 겁니다. 새 피조물 은 그 삶의 힘이 그 원동력이 본질 적으로 다릅니다.

 

사람 사람들 가 만히 보면 삶의 힘이 무얼까? 욕 심, 혹은 뭐 증오심, 시기, 질투, 경 쟁심, 어떤 사람은 복수하는 마음, 어떤 사람은 그러대요. 죽고 싶어 도 억울해 못 죽어. 억울해서라도 살아야겠다. 발악을 하면서 살아보 겠다고 몸부림을 치는 그 힘이 어디 에 있느냐 미워하는 마음이요. 질 투하는 마음이요. 어떤 사람은 이 경쟁심이 강해 가지고요 경쟁자가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해요.

 

그것도 사실은 타락한 성품이요. 꼭 누구 하고 같이 해야만 뭐 힘이 나는 거 예요. 이기려고 바득거릴 때만 제 대로 되요. 이거 빼놓으면 없어요. 그래 내가 그렇게 그 사람하고 싸우 고 이기려고 하다가 그 사람 죽어버 리면 나도 죽어버려요. 도대체 당 신의 삶의 동력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걸 알아야 됩니다. 새로운 피조 물은 오늘 본문말씀대로

"그리스도 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시는도다"

 

강권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미쳐 서 사는 거예요. 미움으로 사는 게 아니요. 억지로 사는 것도 아니요 사랑에 취해서 살아요. 사랑에 끌 려서 살아요. 이 사랑은 바로 생명 력이에요. 이런 우스운 얘기가 있 습니다. 조선일보에 연재되는 '광수 생각'이라는 그런 칼럼이 있죠. 거 기에 나오는 얘기인데요 어떤 친구 가 자기 친구에게 말하기를

 

"자기 요새 여자 교제한다며?"

"그래"

"그 런데 그 여자가 부탁해서 술을 끊었 다며?"

"아 끊었어, 자꾸 끊으라고 해서 끊었어."

다음에 또 다른 친 구가 말하기를

 

"자네 그 좋아하던 도박도 끊었다며?"

"아 그 내 지금 교제하는 여자가 도박하지 않는 게 좋다고 해서 그 사람을 위해서 끊었 어"

또 한 사람이

"아 자네 요새 그 담배도 끊었다며? 그 줄담배를 피우더니"

"아 그 내 사랑하는 사 람, 그 교제하는 여자 가 담배 피우 지 말라고 해서 담배끊었어."

그 다음 친구가 말하기를

 

"자네 그럼 그 여자하고 왜 결혼하지 않나?"

이 친구 대답하는 말이

"내가 이렇게 다 끊고 착한 사람이 되고 보니까 내가 괜찮은 놈이야. 아무리 생각 해도 그 여자보다 더 좋은 여자를 만날 거 같아서 결혼하지 않네."

 

여러분 저는 생각합니다. 그 사람, 지금 사랑하는 여자하고 헤어지면요 담배 또 피울 사람이에요. 그 사람 술독에 빠질 사람이에요. 이 여자 가 그를 사랑하고 그와 사랑을 느끼 는 동안에 그 사랑의 힘으로 그 좋 아하던 도박도 담배도 술도 끊고 나 가는 줄 모르고, 이 주제넘게. 이 사람 정신없는 소리하고 있는 거예 요. 사랑의 줄이 끊어질 때 나는 옛 사람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이 걸 잊지 말아야 되요. 예수그리스 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해서 여기에 취해 가지고 나갈 때 새사람이죠. 새 세상을 살지요. 이 사랑의 줄이 끊어질 때 나는 다시 저 깊은 수렁 으로, 옛사람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 고요 새 피조물은 16절에 보면 새로 운 가치관을 가지고 삽니다.

"육체 대로보고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 라"

 

즉 신령한 세계에 살아요. 물 질의 세계가 아니라 정신의 세계, 지식의 세계가 아니라 지혜의 세계, 세상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을 지향 하는. 여러분 미래의 시대는 문화 의 시대라고 합니다. 그럴까요? 다음 세대는 영적인 세대입니다.

 

영이 지배하고 영이 영적인 것이 최 고의 가치를 말할 수 있는 그런 시 대입니다. 그걸 깊이 생각해야 합 니다. 새로운 신령한 가치관에 살 고 또 사명에 삽니다. 화목케하는 직책을 주셨다 그랬습니다. 내

 

가 화목할 뿐만 아니라 화해하는 피스 메이커! 이걸 알아야 합니다. 누 구라도 미워하고 있으면 안됩니다. 누구라도 다소라도 기분까지라도 누 구를 언짢게 생각하고 있는 한 당신 은 옛사람이에요.

 

오늘 우리는 새 로운 피조물은 오직 화평, 모든 사 람과 화해할 뿐만 아니라 또 화해되 지 못하는 세상에 내가 들어가서 피 스메이커로 화목케 하는 화목을 만 드는 그런 직책을 가지고 오늘 이 세상에 살아갑니다.

 

그 사람이 새 로운 피조물입니다. 오늘 본문 말 씀의 깊은 뜻을 다시 한번 새겨들어 야 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라 고 말씀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성 경을 자세히 읽으세요.

 

"보라 새것 이 되었도다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다"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지금 주님은 말씀하십니 다.

"너희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다 보라 새것이 되 었도다"

이 선포, 이 선포되는 복 음 내가 받아들일 때 믿을 때에 그 리스도안에 새로운 피조물로 이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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