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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고린도서 설교 모음

고린도후서 6장 1절 - 11절까지 설교 모음

by Jessi J 2022. 10.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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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야말로 은혜의 때다! /고후6:1-18/ 유기성목사

2021-01-26 02:39:31

 

중동에서 선교사로 헌신한 한 청년이 선교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얼마 전, 한 광고를 보았는데, 악마와 올해를 의인화한 여성이 연인이 되어 아주 오붓하게, 사람 없는 거리들, 식당과 극장가를 다니면서 데이트하는 장면들을 연출하며 마지막에, 2021년은 당신의 해가 되기를 바란다는 메시지로 마무리하는 영상이었답니다.

 

아주 익살스럽게 표현했지만 결론은, 2020년은 한마디로 악마의 해였다는 것입니다. 그 청년 선교사는 그 메시지에 동의할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세상은 올해를 악마의 해, 어두움의 2020년이라고 불러도, 하나님 아버지는 항상 신실하셨고 선하시기 때문에 2020년도 은혜의 해가 분명하다고 했습니다. 그 고백이 참 귀하였습니다.

 

지금 코로나19의 재확산 속도가 무섭습니다. 주일예배도 당회와 구역회도 성탄절예배도 송구영신예배도 비대면 온라인으로 드려야할 사정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주님께서 ‘지금이야말로 은혜의 때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지금이야말로 은혜의 때요 구원의 날이라” 하였습니다. 이 말은 지금, 예수님의 십자가로 누구나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믿고 주 예수님을 영접하면 모든 죄에서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주님은 그 안에 임하시고 그와 동행하시는 은혜의 시대가 열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후 5장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여러분은 하나님과 화해하십시오”하고 호소했습니다. 고후 6장에서 다시 고린도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도록 하십시오”(:1)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율법주의자인 거짓 교사들이 고린도 교회에 들어와서 사도 바울은 거짓 사도라고 주장하고,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거짓 복음이라고 가르치는 바람에 고린도 교회 교인들의 마음이 흔들려서 엄청난 은혜의 때가 임하였음에도 믿고 누리지 못하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웠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이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고난을 당하고 있음을 고백했습니다. 환난과 궁핍과 곤경과 매 맞음과 옥에 갇힘과 난동과 수고와 잠을 자지 못함과 굶주림을 겪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왜 이런 고난을 겪는 것입니까?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1)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유대인만 아니라 세계 모든 민족들에게 ‘지금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때요 지금이 구원의 날’이라고 전하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4에서 자신은 “무슨 일에서나 하나님의 일꾼답게 처신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어떤 고난을 당하든지 끝까지 ‘순결과 지식과 인내와 친절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명을 감당했다’는 것입니다.

 

영광을 받거나, 수치를 당하거나, 비난을 받거나, 칭찬을 받거나, 상관없이 한결같이 의로운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오직 복음을 전하는데 자신이 걸림돌이 되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도 바울과 언제나 함께 해주셨습니다. 유명한 간증입니다.

:8 ...우리는 속이는 사람 같으나 진실하고, 9 이름 없는 사람 같으나 유명하고, 죽는 사람 같으나, 보십시오, 살아 있습니다. 징벌을 받는 사람 같으나 죽임을 당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고, 10 근심하는 사람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사람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 말을 한 것은 복음을 듣지 못하는 사람들도 안타깝지만, 복음을 들은 고린도 교인들마저 하나님의 은혜, 구원의 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1 고린도 사람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에게 숨김없이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마음을 넓혀 놓았습니다. ... :13 ...여러분도 마음을 넓히십시오.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하면서도 하나님의 은혜의 때가 임하였음을 전하는 자신을 보고 이제는 모든 의심을 버리고 사도 바울을 향하여 마음을 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대하여 가졌던 답답함이 오늘 우리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고린도 교인들과 달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잘 압니다.

그러나 여전히 오직 예수님만 믿고 사는 그리스도인을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온 세상의 구주인 것은 믿는다 하면서 여전히 자신의 삶의 진정한 주인은 아닌 것입니다.

 

온라인 목회자 세미나에 참석하신 목사님 한 분이 코로나19로 인하여 너무나 목회가 어려워 오셨다고 하면서 “이젠 주님만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만큼 형편이 어렵다는 의미이지만 또한 그동안 주님만 바라보지 않고 이런 저런 방법을 기웃거리며 목회하였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상황이 어려워짐으로 오직 주님만 바라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목사님의 말을 들으면서 이것이 사실이라면 코로나19로 인한 어려운 시기는 오히려 하나님의 크신 은혜라고 여겨졌습니다. 이제 진짜 예수님을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암몬과 모압 연합군이 이스라엘을 쳐들어왔을 때, 여호사밧 왕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했습니다.

대하 20:12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라는 고백은 여호사밧 왕이 절망적인 상황에 처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이제 진정한 답을 발견했다는 의미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직 주님만 바라보겠다’는 여호사밧에게 응답하셨습니다.

 

대하 20:17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내일 그들을 맞서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겠다는 응답을 받은 여호사밧 왕은 다음날 찬양대를 앞세워 전쟁터에 나갔고 하나님께서 친히 모압과 암몬 연합군을 전멸시키셨습니다.

 

여호사밧 왕에게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던 암몬과 모압의 침공이 하나님의 은혜의 기회였던 것입니다. 오직 주님만 바라보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수도 없이 나는 죽고 예수로 살며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고 사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 지나친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제 그런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14 믿지 않는 사람들과 멍에를 함께 메지 마십시오.

세상을 떠나 살라는 말이 아니라, 이제는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살겠다는 신앙의 태도를 분명히 하고 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엄청난 선언을 합니다.

:16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하나님과 화해하였다는 것을 교리 지식으로만 알고 지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해하였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전삼아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입니다. 엄청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했음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성전 된 자로 사는 것을 보고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했다는 것과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으로 그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임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계획하셨던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로 그 은혜를 거두셨습니다. 그렇지만 구약 성경에서 여러 번 하나님께서 이 일을 반드시 다시 이루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16 "내가 그들 가운데서 살며, 그들 가운데로 다닐 것이다.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 레 26:12 말씀입니다.

 

:17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가운데서 나오너라. 그들과 떨어져라.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아라. 나 주가 말한다.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영접할 것이다." 사 52:11 말씀입니다.

:18 "그리하여 나는 너희의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 자녀가 될 것이다. 나 전능한 주가 말한다." 삼하 7:14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로 회복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전으로 사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지금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활짝 열려 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은혜의 때요, 지금이야말로 구원의 날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 된 자로 살게 되었다면, 지금이 아무리 어려운 때라 하더라도 오히려 은혜의 때입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신데 무엇이 두렵고 무엇이 염려가 되겠습니까?

코로나19로 말할 수 없이 어렵고 혼란스럽지만 하나님의 성전으로 살기에는 너무나 좋은 상황이지 않습니까?

 

은혜는 어려울 때 드러납니다. 시험이 오고 고난이 닥칠 때, 드러납니다.

욥기는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이 닥쳤기에 쓰인 성경입니다. 그러나 욥기를 통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당하는 성도들이 이길 힘을 얻었습니까?

요나는 실패한 선지자였습니다. 그러나 요나서를 통하여 이방인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알게 되지 않습니까?

 

성경의 보석이라 일컬어지는 로마서는 사도 바울이 그토록 로마에 가서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의 핵심을 전하고 싶었으나 도저히 갈 수 없었기에 쓰인 성경입니다.

로마에 가지 못하여 안타까워했던 사도 바울이 그려집니다. 그 답답하고 힘들었을 그 때가 사실은 은혜의 때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손에 로마서가 있는 것입니다.

 

지난 금요일 아둘람 기도회는 환우들의 치유를 위한 집회였습니다. 설교자인 김동호 목사님께서 참 귀한 말씀을 전해주셨는데, 폐암 투병 중인 목사님이기에 더욱 귀한 메시지였습니다.

 

 실제로 암 투병을 하면서 겪으셨던 일, 실제로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 좋은 결과만 아니라 안 좋았던 일까지 솔직히 나누면서 깊은 은혜를 전해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지난 한 해가 70 평생에 가장 고통스런 해였다고 했습니다. 암 치료만 세 번 해야 했습니다. 폐암 수술, 전립선암 방사선 치료, 갑상선암 수술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70년 생애 중 가장 기쁘고 감사하고 은혜로운 해였다고 했습니다.

 

기가 막힌 고백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곧 사도 바울의 고백이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은혜의 때요, 지금이야말로 구원의 날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의 한결같은 고백입니다. 그 말은 예수님 안에 있는 여러분 모두의 고백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믿고 고백하고 감사하며 나아가기만 하면 반드시 그 실체를 보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 된 것, 주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사는 것이 말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이 아무리 어려운 때라 하더라도 오히려 은혜의 때인 것입니다.

 

우리는 나라를 잃어도 보았고 6.25 전쟁도 겪어 보았습니다. 그러니 지금의 어려움을 왜 못 이겨내겠습니까? 낙심되고 절망될 때, “나는 하나님의 성전이다!” “주님이 내 안에 거하시며 나와 동행하신다!” 외치고 또 외쳐보시기 바랍니다.

 

기도도 기도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한시간 기도, 성전 기도, 삼겹줄 기도, 기회를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회개도 기회가 있고 봉사하고 섬기는 것도 기회가 있고 선한 일도 기회가 있습니다.

교육관 비품 헌금에도 힘을 다해 봅시다.

은혜 받을 기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하나님을 향한 문은 활짝 열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 된 은혜, 예수님과 친밀히 동행하는 은혜를 소홀히 여기다가 나중에 땅을 치며 후회하지 않기 바랍니다.

 

찬송: 은혜로다

 

admin

 

댁쟾쇰줈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고후6:9

2015-09-10 16:13:11

 

교회가 검을 신뢰하면 십자가를 잃는다

 

미국의 미네소타 세인트 폴의 우드랜드 힐스 교회에서 목회활동을 하고 있는

그레고리 보이드(Gregory A. Boyd, 49) 목사.

보수교회 목사인 그는 왜 교회와 정치권을 향해 쓴 소리를 날리게 된 걸까?

 

그는 수차례의 설교와 저작을 통해 9·11 테러사건과 이라크전 이후로

미국 보수 복음주의권 교회들이 지나치게 정치적이고 우경화되고 있다고 거센

비판을 가해, 교계는 물론 11월 중간선거를 앞둔 정치권의 주목을 받고 있다.

 

◑보이드 목사의 보수교회에 대한 경고

 

보이드 목사가 교회와 정치권을 비판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04년 미 대선 직전부터였다.

보이드 목사는 당시 '십자가와 검'(The Cross and the Sword)이라는 제목으로

6차례에 걸쳐 "미국을 '기독교 국가'로 불러서는 안 된다"는 내용을 주제로

설교를 하면서 교회를 정치로부터 분리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미국 교회는 도덕적 차원의 성적 이슈에 대한 논쟁을 중단해야 하며,

(동성연애, 낙태 안 하면 무조건 보수인줄 알고 공화당을 지지 함.

그것을 등에 업고 네오콘 주축으로 중동에서 힘의 전횡을 일삼고 있다)

미국이 벌이는 전쟁에 축복을 해서도 안 된다고 강조했다.

"교회가 세속적 논쟁에서 승리하고 세상을 지배하게 될 때 더욱 세속화 되며,

검에 대해 신뢰하게 될 때 십자가를 잃게 된다."는 것이다.

 

보이드 목사는 지난 8일 NPR 뉴스의 '복음주의 기독교인과 정치'라는

대담 프로에서도 비판적 발언을 계속했다.

그는 미국의 대형교회 지도자들이,

세속적 우파 이데올로기와 공화당의 리더십에 이끌려가는 우를 범하고 있다

면서 “교회의 종교적 권리 추구는 결국 교회로 하여금 정치권력을 우상화하는

위험에 빠트린다.”고 경고했다.

 

그는 몇 년 전 한 대형교회가 예배를 끝낼 때 '신이여 미국을 축복하소서'라는

노래를 합창하고 전투기가 십자가 위를 날아다니는 비디오를 상영하는 것을

보고 매우 큰 충격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보이드 목사는 신학자들로부터 보수적이기는 하지만

'열린 신학', '열린 유신론'을 추구해온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런 그에게 9·11 테러사건과 이라크전 이후로

미국 복음주의 교회들이 보인 모습은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보이드 목사는 그때부터 미국교회의 '타락'에 신앙고백적 메스를 가하며

보수교회의 세속화에 대한 경고를 본격화했다.

 

 

그레고리 보이드 목사

 

◑정교분리를 엄중히 지켜라!

 

정교분리 원칙이란, 기독교인이 정치에 담을 쌓고 지낸다는 것은 아니다.

정치에 지대한 관심으로 참여하지만, 교회 조직을 통해 특정 정당 지지 등

정치에 가담해서 교권을 이용한 실력 행사를 하지 않는다는 것.

 

보이드 목사는 "기독교인들은 정부통제, 입법, 전쟁 등을 통해

다른 이들을 지배할 것이 아니라,

예수가 했듯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 밑에서 자신을 희생하고 봉사함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보이드 목사는 "미국은 신정정치를 위해 세워진 것이 아니라

그로부터 탈피하기 위해 세워졌으며,

정치와 종교를 분리시키기 위해 헌법을 제정했다.(유럽의 폐해에 반작용, 분리추구)

교회 지도자들이

'미국은 기독교 국가이고, 교회의 역할은 이 같은 신념을 보강시켜 주는 것'

이라는 잘못된 신념을 갖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는 "미안하지만 미국은 세계의 등불이나 희망이 아니며,

세계의 등불이자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강조한다.

 

그는 또 미국의 보수교회들이 종교의 자유를 규정한 '수정헌법 제1조'를

잘못 읽고 있다고 비판한다. 교회가 제대로 된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그리고 사회에 바른말을 하기 위해서는

정치권력으로부터 철저하게 분리되어야 한다는 것.

 

*관련기사: 미국 복음주의 11월 선거에도 공화당 민다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킨다.

(큰 문제는 지나치고, 작은 문제에 매달린다는 뜻으로)

 

보이드 목사는 동성애, 낙태, 슈퍼볼에서 자넷 잭슨이 가슴을 보여준 사건

등에 초점을 맞추는 기독교인들의 '위선과 속 좁음'을 비난하기도 했다.

 

그에 따르면 현재의 기독교인들은 정작 본질적인 문제는 비켜지나가고

공공장소에서의 신앙표현을 막는 행위나

성적인 이슈 등에는 지나친 분노를 표출하고 있는데,

예수는 이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는 것이다.

 

◑반대자들도 있었다.

 

보이드 목사의 이런 주장들은 결국 정치적으로나 신앙적으로 보수적인 중산층

교인들로부터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보이드 목사는 교회기금모금 기간에 이 같은 내용의 설교를 해

목표액인 7백만 달러에 훨씬 못 미치는 4백만 달러만을 모금하는데 그쳤다.

 

우드랜드 힐스 교회에 출석했다가 얼마 전 교회를 떠난 변호사 윌리암 버겐은

<뉴욕타임스>에 "아내와 함께 6년 전 처음 그 교회에 출석했을 당시만 해도

보이드는 보수교회 목사 그대로였다. 그러나 나는 그가 현재 주장하고 있는

것에 전혀 동의할 수 없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무엇보다도 이로 인해 5천여 명의 신도들 가운데 약 1천여 명과

50명의 교회간부 중 7명이 교회를 떠나는 아픔도 겪어야 했다.

그러나 다른 신도들은 두려워하며 꺼내기를 꺼리는 주제들을 과감하게 전하는

그의 설교에 감동을 하여 눈물을 흘리며 고마움을 전하기도 했다.

 

◑미국 보수 복음주의의 희망

 

오늘날 보이드 목사와 같은 사람을 보수 복음주의 교회에서 찾기는

매우 힘든 것이 사실이지만, 그가 일으키고 있는 새 바람은

미국의 복음주의 신학교나 교회에서 어떤 논쟁이 진행되고 있는지

그 일단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분명한 것은 미국의 보수 복음주의 교회가 이라크전을 통해

공화당이나 미국 민족주의와 연계하는 경향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교계 일각에서나마 높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이에 대한 책들도 출판되었다.

우선 보이드 목사의 설교에 바탕을 둔 「한 기독교 국가의 신화 : 정치권력에

대한 추구가 어떻게 교회를 파멸시키는가」

(The Myth of a Christian Nation: How the Quest for Political Power Is

Destroying the Church)라는 책이 그 가운데 하나다.

 

 

 

바나드 대학의 종교학 교수이자 복음주의자인 랜달 바머의

「너의 왕국이 도래한다 : 어떻게 종교적 권리가 신앙을 왜곡하고

미국을 위협하는가? 한 복음주의자의 탄식」

(Thy Kingdom Come: How the Religious Right Distorts the Faith and

Threatens America - an Evangelical’s Lament)이라는 책도 호평을 받는다.

 

이 책들은 미국에서 보수 복음주의를 내세우는 교회들 중 상당수가

정치권력과의 결탁에서 얻어낸 세속적 파워를 향유하며

순수복음과 교회를 타락시키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교회가 2천년 전 예수가 보여주었던 십자가의 자리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충고한다.

 

◑보수교회 제자리 찾기 운동의 향방은?

 

현재 우드랜드 힐스 교회의 중산층 백인들이 떠난 자리는

흑인들, 히스패닉들, 아시아계 이민자들로 채워졌다.

평소 교회성장론이나 리더십에 대한 주제를 입에 올리지 않는 보이드 목사는

이를 오히려 자신의 목회 목적에 들어맞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는 교회가 인종적, 경제적으로 다양해져야만 하며

이것이 예수의 가르침이라고 말한다.

 

그와 그의 아내를 비롯한 다른 세 가족은 3년 전 교회의 주택에서

세인트 폴의 흑인주거지역으로 이사했다.

그가 목회하는 교회의 4천여 신도들은 여전히 그의 설교를 좋아하고 있다.

 

과연 보이드 목사를 비롯한 소수의 목회자들이 시도하고 있는

'보수교회 제자리 찾기 운동'이

종교적 기득권 획득에서 정체성을 찾으려는 미국 복음주의 교회의 대세를

거스르고 어떤 결말을 도출해낼지 귀추가 주목된다.

 

 

그레고리 보이드 목사가 설교하고 있는 장면이 실린 <뉴욕타임스>

 

[주제별 분류] 복음과 사회 [주제별 분류] 기독교승리주의

 

 

admin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 /고후6:1-/히12:14/행26:20/ John Bevere 존 비비어

2015-06-23 15:27:08

 

◑우리는, 은혜를, 일부분만 이해하고 있습니다.

 

▲오늘 제가 전할 말씀은, 많은 사람들이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살지 않고 있는 부분을 다루려 합니다.

 

사도바울은 말씀하기를

내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여러분께 “간청하노니” 고후5:20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고후6:1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간청하여 말한다 pleading” 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고린도교인들은 이미 구원받은 신자들이었습니다.

이미 방언 받은 신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그들에게 “간청하여, 즉 간곡하게” 말합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요!

 

▲오늘날 대부분 교회들은

(제가 대부분이라고 말해도, 결코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는 뜻을, 거의 모르고 있습니다.

 

심지어 은혜를 강조하는

은사주의 교회, 오순절파, 복음주의파 등의 교회들도

이 성경구절의 실제적인 의미를

제대로 이해도 못하고, 감도 못 잡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올바른 이해를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그 한 단면만 보고, 전체적 의미를 보지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 제가,

그 “은혜”에 대한 의미를, 잠깐 여러분께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대부분의 교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오늘날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말씀드려 볼까요?

 

대부분의 신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자신의 죄를 덮어주는, 큰 가리개 정도로 여깁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자신의 육신적이고, 불순종하는 삶을 숨겨주는

안전한 가리개 정도로 여긴다는 말입니다.

 

물론 그런 면도, 은혜에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은혜”에 늘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육신적이고, 한없이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고 있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았습니다.

 

혹자는 이렇게 질문할 것입니다.

“그러면 목사님은, 예수님의 보혈, 그 은혜가

내 죄를 깨끗케 하신 게 아니라는 말입니까?”

 

아니요,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물론 예수님의 보혈이 우리 죄를 깨끗케 하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은혜의 다른 중요한 측면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 한 면만 봐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칭의 Justification과, 성화 Sanctification의 과정을 절대 혼동하지 마십시오.

저와 여러분은, 이 과정을 둘 다 보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는 사람은,

칭의.. 한 면만 보고서,

성화.. 의 면을 간과하는데, 그건 잘못된 것이요, 부분적으로만 보는 것입니다.

 

<칭의>는.. 우리가 죄인임을 고백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이기로 고백한 그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때 주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이, 우리의 죄를 깨끗케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동시에 <성화>의 과정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화란.. 거룩함과 동의어입니다.

그것은 내면에서 시작해서 밖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칭의와 성화는, 동전의 양면과 같고,

젓가락 두짝과 같이, 함께 공존하는 것입니다.

어느 한 쪽 만으로, 단독으로 성립할 수 없습니다.

 

지금부터 제 말을 주의 깊게 들으시기 바랍니다.

제가 드리는 말씀이, 여러분의 영에, 공명될 것입니다. 즉 여러분이 동의하실 것입니다.

 

 

◑은혜는.. 성도가 말씀대로 살아가게 하는 능력입니다.

 

▲히브리서 12장14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러분들은) 거룩함을 좇으십시오.

이것(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님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 분명히 보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은, “칭의를 좇으십시오.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님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거룩함이 없이는, 즉 성화가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즉 구원받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말씀의 가르침을 그동안 간과해 왔습니다.

칭의와 성화.. 두 면을 다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한 측면만 보고서, ‘칭의’한쪽만 강조해 왔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주님의 얼굴을 뵈오려면,

즉 구원 받고,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거룩함을 좇아야” 하는 것입니다.

 

칭의와 성화.. 둘 다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칭의> 뿐만 아니라, <성화>에 동참해야할 책임이, 우리 각자에게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죄를 가려주십니다.

하지만, 그것은 일면이고요, 또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 요구하는 대로 살아갈 수 있게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찌니..” 히12:28.

 

위 말씀은, 우리가 은혜를 받을 때,

그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즉 거룩한 삶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7:21.

 

위 구절은 은혜에 대한 잘못된 교리를 부숴버립니다.

 

어떤 사람이 믿게 되어, 영접기도를 따라하게 되고, 신자가 됩니다.

그러고 나면, 모든 것이 다 끝났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아래의 고백을 하는지.. 다들 들으셨을 것입니다.

“아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더 이상 율법에 매여 있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함께 살펴볼까요? 마5장으로 가 봅시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요1:17

요약하면 율법은 모세, 은혜와 진리는 예수님으로부터 온 것인데,

 

예를 들면, ‘살인’에 대해서

율법은, 직접 사람을 죽이는 것을.. 살인으로 규정한다면,

 

예수님이 전하시는 ‘은혜와 진리’는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것까지도 ‘살인’이라고 가르치십니다.

여러분이 다 아시듯이 ‘간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은혜(와 진리)의 또 다른 측면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 요구하는 대로 살아갈 수 있게

우리에게 올바른 가르침을 주시는 것입니다.

 

요1:17절에,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왔다고 했는데,

그 구절을, 마5~7장의 산상수훈과 연결시키면,

 

‘은혜와 진리’는, 즉 은혜는,

율법을 그저 형식적으로, 외식적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정신, 율법의 본래 의미, 율법의 본질을.. 지키게 하십니다.

 

▲그렇다면 제가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율법>과 <하나님의 은혜> 둘 중에, 어느 쪽 기준이 더 높습니까?

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능력을, 우리에게 부어주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의 말씀, 또는 율법의

근본정신, 그 속 본질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 때문에,

 

예전에는, 그게 뭔지 몰라서, 그걸 못 지켰는데, 또는 형식적으로 지켰는데,

이제는, 예수님이 오신 이후로,

은혜와 진리를 받은 우리들은,

그 하나님의 율법 또는 계명의 속본질, 그 근본바탕 정신을.. 지키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은혜>를 일부 측면만 보고서,

은혜로, 만사오케이, 오직 은혜를 ‘나의 죄를 가려주는 덮개’로만 생각해서는,

큰 오해라는 것입니다.

 

율법 안에서는, 실제로 간음을 하지 않으면, 간음죄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은혜 안에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은 자는, 이미 간음하였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율법 안에서는, 행동을 해야 죄가 되지만,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는, 생각만 품어도 죄가 됩니다.

 

그래서 신약시대, 은혜시대에 사는 백성들은, 은혜와 진리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 요구하는 대로 살아갈 수 있게

우리에게 올바른 가르침을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은혜를 너무 얕보지 마십시오.

은혜는, 구약의 율법보다, 훨씬 더 높은 기준입니다.

 

 

◑그 ‘은혜’를 받은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어떤 사과나무를 봤을 때,

그게 좋은 나무인지 아닌지 알아보려 할 때,

나무 몸통 중앙을, 드릴로 구멍을 뚫어봐야만 알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냥 그 나무의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알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진정 <은혜로> 구원 받은 사람은,

자기 스스로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로.. 그 <은혜로> 구원 받은 사람은,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면.. 열매를 봐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선한 행동으로 영생을 얻을 자격이 없습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구원은 은혜, 즉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선물, 그 은혜를 받은 사람과,

자기 스스로 받았다고 착각하는 사람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습니까?

-열매를 보고서, 구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에, 이 부분에 관한 중요한 결론이 나와 있습니다.

 

약2:17~18,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그러므로 여러분, 아직도 불신자와 비슷하게

죄 가운데 살고 있으면서 ‘나는 구원 받았다’ 라고 장담하지 마십시오.

 

사도바울은, 자기가 구원 받았는지, 스스로를 살펴보고, 시험해보라고 말씀합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고후13:5.

 

사도바울이 이방인들에게 전한 말씀입니다.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 선전하므로..” 행26:20.

 

NIV성경에는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진정한 회개인지

행함으로 증명해 보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I preached that they should repent and turn to God

and prove their repentance by their deeds. Acts.26:20/NIV"

 

왜냐하면 디모데후서에 나온 말씀처럼,

사람들은, 경건에 대해서는 말을 많이 하지만,

스스로의 삶에서는, 경건을 나타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은혜는.. 거룩한 삶을 살게 하는 능력입니다.

 

▲제가 분명히 선포합니다.

우리가 믿는 복음은.. 경건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경건케 하는 능력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한 가지 묻고 싶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행하신 것처럼 살 수 없게 하고

‘은혜’가 거룩한 삶을 살게 하는 권능이 아니라,

단지 죄를 덮어주는 수단이라면,

 

그렇다면, 교회가 존재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진짜 무슨 의미인지 아십니까?

예수님처럼 살아갈 수 있게, 우리에게 능력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설교한다고 합시다.

“네,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것을 덮습니다.

여러분이 넘어지고 죄짓고 살아도, 아무 걱정마세요.

우리에겐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은혜가 다 덮어줍니다.”

그러면 교회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물론 은혜가 덮어주고, 가려주는 면도 사실이고, 복음입니다. 시32:1.

그러나 그 한 면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칭의를 얻고,

동시에 그 은혜로 거룩한 성화의 삶을 살려고 발버둥치는 사람에게,

그 은혜가 그의 부족한 부분들을, 덮어주고, 가려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은혜가 내 모든 죄와 허물을 덮어주니, 나는 성화의 삶은 관심없다!’

만약 이런 사람이 있다면,

왜 그런 줄 아십니까?

 

-진짜 은혜를 받지 못하고, 진짜 의롭다 하심(칭의)을 받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은혜, 칭의.. 모두 신비적 역사입니다.

위에서 주셔야 받습니다.

내가 원할 때, 언제든지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란 뜻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믿기로 결단만 하면, 다 받는 줄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내가 원하기만 하면 다 받는 것은 아니고요.. 위에서 주실 때만 받습니다.

‘받는’ 키를 내가 쥐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하나님께서 쥐고 계십니다.

물론 내가 간절히 사모할 때,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는, 더 잘 받을 것입니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고후7:1

 

만약 우리가, 은혜만 극단적으로 강조한다면,

사도바울은, 위와 같은 성경구절을, 기록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거룩함을 강조하는 위와 같은 구절들은,

제가 이 설교에서도 여러 구절 언급했지만,

사도바울의 서신서 말고도, 야고보서, 베드로서, 요한서신서에 가득 나옵니다.

 

오늘날 우리가 믿고 따르는 ‘극단적 은혜론’의 관점이 만약 맞다면,

위와 같은 성경의 상당 부분을, 다 폐기처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극단적 은혜론’을 폐기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따라하십시오!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는 무슨 뜻입니까?

다른 말로 ‘진행되어져 가는 과정’이라는 말입니다.

 

도중에 힘들어 할 때도 있지만

‘구원을 이루어 가는 과정’이라는 말입니다.

 

▲성화는, 거듭난 그날부터 시작됩니다.

성화를 이루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하지만, 처음 상태로 머물러 있는 게 아니라

어떤 식이든지 진보가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열 처녀의 비유, 양과 염소 비유 등을 보면,

두 그룹 간에 발견되는 단 한가지 차이점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한 쪽은 했고,

다른 한 쪽은, 결국 하지 않는 쪽을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은혜는.. 성화, 신부단장을 하도록, 그들을 도왔지만,

자기들이, 그 은혜를 무시하고, 거부한 것입니다.

 

그저 사람들에게 ‘신실한 자, 선생님’이라는 인정과 높임을 받았는지 모르지만,

자기 내면 속에서부터, 진정한 성화의 삶을 추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이 말씀도, 은혜가 모든 것을 자동적으로 다 해 준다.. 는 개념을 깨뜨리지요?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라는 말씀은,

은혜에 이르도록, 은혜를 받은 자가, 자기가 해야 할 몫이 있다는 뜻입니다.

 

물론 우리가 알고 있는 기존의 은혜 개념이 다 틀렸다는 것은 아니고요,

우리가 일부분만 봐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은혜의 여러 측면을, 두루 두루 다 봐야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 성경적인 의미가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능력>임을 알아야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비로소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은

우리를 경건케 하는 능력을 최대한 사용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는’ 것입니다. 히6:1.

 

그래서 사도바울은 ‘거룩함을 좇으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히12:14

 

교회를 오래 동안 다니지만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되지 않도록

자신의 삶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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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고후6:1-2/ 곽선희 목사

2014-11-25 04:34:30

 

'아더 베리(Arthur Barry)'라고 하는 분은 명문의 가정에서 태어나고 유족하게 자라난 그런 남부러울 것이 없는 그런 행복한 유족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천부적 재능을 고루 갖추고 태어나 아주 이러한,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지능지수도 탁월하고 또한 학벌도 특출했습니다. 용모도 뛰어나고 키도 훨씬 크고 늠름한 그런 청년이었습니다. 운동신경도 좋아서 못하는 운동이 없고 또 음악적으로도 재질이 있어서 피아노 독주회를 할만큼 피아노도 천재적으로도 잘치는 그런 재능이 있는 능숙한 사람이었습니다.

 

춤은 또 얼마나 잘 추는지 많은 사람이 부러워할 만큼 춤을 즐기는 사람이었고요 말재주 또한 특별히 좋아서 사교계의 영웅처럼, 혜성처럼 높이 떠있었습니다. 뭇 여인들이 그를 부러워했고 한 번 만나는 것을 큰 영광처럼 생각을 했더랍니다.

 

이렇듯 부러워할만한 모든 여건을 고루 갖춘 이 사람, 여러분 무엇에 전념했을 것 같습니까? 그리고 그가 무엇을 위해서 살았을 것 같습니까? 그 운명이 어떻게 되었을 거라고 생각해보십니까? 어이없게도 이 사람은 보석 도둑이었습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그 명성이 높은 유명인사가 뒤에서 그런 일을 하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오랫동안 그는 보석 도둑질을 하면서 유족하게 사교계에서 살아왔습니다.

 

마침내 꼬리가 길어서 그는 잡혔고 체포되어가지고 너무나도 지능적이었기 때문에 그에게 큰 벌을 내렸습니다. 20년 징역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가 출옥할 때에 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나는 보석을 훔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훔치고 산 죄인이었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아일랜드 출신 작가로 유명한 오스카 와일드라는 분을 여러분이 들어 아실 것입니다. 그에게 우화적인 단편소설이 있습니다. 그는 특별한 소재에 착안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은혜 베푸신 사람들이 많고 예수님께로부터 은혜받은 사람이 많잖아요.

 

많은 문둥병자들을 고치셨으니 고침 받은 사람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습니까? 심지어 죽은 사람을 살리셨으니 그 얼마나 감사할 일입니까? 뭐 장례 하러 가다가 살아난 청년도 있잖아요? 이 많은 은혜받은 사람들, 성경에는 그 사람들이 그 다음에 어떻게 살았다하는 이야기가 전혀 없습니다.

 

그것이 특징입니다. 은혜 베풀고는 그 다음에 어떻게 됐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스카 와일드는 그것을 나름대로 추리한 것입니다. 생각해보았습니다. 예수님이 과거에 은혜를 베푼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만나본 일이 있다는 것으로 소설은 설명합니다.

 

어떤 곳에서 예수님은 알코올 중독자를 만났습니다. 보니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았습니다. "내가 당신을 어디서 본 일이 없습니까?" 그분이 대답합니다. "아, 있었지요. 나는 본래 절름발이 이었는데 예수님께서 고쳐주셔서 제가 이렇게 걷게 되었습니다.

 

절름발이였을 때에는 이렇게 저렇게 얻어먹고 살았는데 건강해지고 나니 할 일이 없어요. 또 누가 나를 환영하지도 않고. 그래 이럭저럭 하다보니 타락하고 타락해서 이 알코올중독자가 되었습니다." 또 한사람을 만났는데 이 사람은 창녀였습니다.

 

"아니 내가 네가 창녀일 때에 용서하고 구원했는데 아직도 창녀인 것이냐?"하고 꾸중하듯이 물었더니 이 창녀가 대답하는 말이 "물론이지요. 제가 예수님으로부터 구원받고 새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의 딸이 되고 감사해서 창녀생활을 청산했었지요. 그런데, 아무도 거들떠보는 사람이 없고 갈 데도 없고 할 일도 없고 그리고 무엇보다 외로워서 살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힘들지만 다시 옛날 직업으로 돌아와서 삽니다." 또 다시 창녀가 되었답니다. 또 한 곳에 가서 예수님이 만난 사람은 싸움질을 하고 있는, 아주 혈기와 주먹이 있는 조폭을 하나 만났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보니 옛날에 본 사람이었습니다.

 

"자네는 어떻게 폭력배가 되었나?" "예수님 죄송하지만 저는 원래 시각장애자였는데 예수님께서 저의 눈을 치유해주셨습니다. 그래서 감격하고 감사했습니다만은 눈 감았을 때는 몰랐는데 눈뜨고 보니까 아니꼬운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더럽고 치사하고 모순되고 부조리하고 부정부패 사치와 타락, 여기에 울분이 터져서 주먹을 쓰다 보니 조폭이 되었습니다."

 

말 되는 이야기죠? 정말입니다. 예수님께로부터 은혜를 받았다, 예수님으로부터 구원받았다 하는 사실까지는 좋은데 그 다음에 그가 어떻게 살았을까? 은혜를 지켜가며 은혜 안에 살았나, 그것이 문제입니다.

 

철학자 파스칼은 말합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사는 것 같으나 알고 보면 두 가지 종류의 사람밖에 없다. 왜? 다 죄인이니까.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죄인 아닌 사람은 없다. 그러나 두 가지 죄인이 있다.

 

하나는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죄인됨을 알고 사는 죄인, 또 하나는 죄인이면서도 '나는 죄인이 아니라'고 혹은 내 잘못까지도 남에게 떠맡기고 내가 왜 죄인이냐고 죄인이 아니라고 굳이 고집부리면서 사는 교만한 죄인, 두 가지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글쎄입니다. 저는 이 시간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이 세상에는 두 가지 사람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안 입은 사람은 없습니다. 은혜 속에 태어나서 은혜 속에 삽니다.

 

모두가 은혜 속에서 사나 은혜를 아는 사람이 있고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은혜에 감사하며 사는 사람이 있고 은혜를 배반하며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밖에 없다, 그렇게 생각해 봅니다.

 

여러분, 은혜로 은혜 되게 하는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은혜가 은혜 되려면 먼저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깨달음이란 참 중요합니다. 우리는 종종 인식론에 있어서 감정을 앞세웁니다. 그래서 생각 이전에 감정이 있다고. 그러나 한가지 잊지 마십시오. 생각이 없는 감정은 감정이 아닙니다.

 

심지어는 잠재의식에까지도 지식이 있어서 감정이 더 많은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뱀을 만져도 뱀인 줄 모르면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내가 사자를 만나도, 사자라는 것을 모르는 동안은 내가 두려워 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보십시오. 어쩌다가 남편이 결혼 10년만에 집에 돌아오면서 그래도 큰 맘 먹고 장미꽃 한 송이를 사왔다고 생각합시다. 이 의미를 아는 사람은 감격을 합니다. 그러나 의미를 모르고 보면, 그까짓 장미꽃 한 송이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뭐 그렇게 감격을 주겠습니까? 아무 것도 아니죠. 결국은 내가 과거에 얼마나 은혜 가운데 있는지, 내가 은혜를 얼마나 헤아릴 수 있는지, 은혜를 은혜로 아는 지식이 있어야 비로소 감격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은혜 가운데 살면서도 은혜를 모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은혜에 대한 감각지능은 역경 속에 있습니다. 결코 유족한 가운데에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배고픈 사람의 코가 예민하다'고. 배부른 사람의 코는 둔합니다.

 

그러나 정말로 배고파보면 몇백 미터 앞에서 나오는 불고기 냄새도 코를 찌릅니다. 여러분 그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은혜에 대한 것도, 이 고마운 마음도 알고 보면 유족한 사람에게는 감각이 둔합니다. 그 감각지수가 낮습니다.

 

그까짓 것 그까짓 것 그래요. 그러나 가난하고 어려운 역경 중에 있는 사람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전 가끔 그럴 때 좀 마음이 아플 때가 있습니다. 전에 어떤 분이 제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지금 수술을 받습니다.

 

목사님 기도해주세요." 제가 지난번 미국에 갔을 때에도 전화가 왔습니다. 전화로 기도합니다. 찾아가지는 못했지만 전화로 잠깐 기도를 하는데도 얼마나 울면서 감사해 하고 은혜를 받는지. 그런데 이 건강한 사람들은 하루종일 같이 있어도 고마운 줄 모르더라고요?

 

안 그래요? 어렵고 어려울 때 '정말 전화로 한 통의 기도를 받으면서도 이렇게 감사를 하는가' 그런 생각을 하고 "하나님 내가 무엇입니까? 이 기도가 그에게 꼭 응답되도록 해주세요" 한참동안을 계속해서 기도할 마음이 있습니다. 여러분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합니다.

 

R. A. 토레이라고 하는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 목사님에게 어느 날 어떤 여인 한 사람이 찾아와서 안타까운 상담을 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예수님을 좀 화끈하게 믿고 싶습니다. 좀 더 뜨겁게 믿고싶고요 충만한 가운데 살고 싶은데 이것이 잘 되지 않습니다.

 

부흥회에도 참석해보고 목사님께서 인도하시는 부흥회도 여러번 따라다니면서 은혜를 받아 보려고 애를 썼는데 이 은혜가 오지를 않습니다. 좀 화끈하게 은혜 속에서 살아야겠는데 이렇게 열심히 교회 생활을 해도 은혜가 없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목사님께서 참 지혜로운 말씀을 가르쳐 주셨어요. "뭐라고 기도하십니까?" "기도제목이 많지요 뭐. 뭐 뭐 뭐." "그러지 말고 늘 기도하는 것 하나님이 다 들으셨을 테니까 미루어 놓고 딱 한가지 제목으로만 기도하십시다." "무엇인대요?" "하나님 아버지, 나 자신을 알게 해주세요.

 

하나님 아버지, 나 자신을 알게 해주세요. 자신을 똑바로 알게 해주세요. 정직하게 알게 해주세요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정말 그대로, 착한 그 아주머니께서 그대로 순종을 하였습니다.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나 자신을 알게 해주세요. 나 자신을 바로 알게 해주세요. 바로 보게 해주세요."

 

간절히 며칠 기도를 했는데 정말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시는데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 속에서 자기 모습이 나타났어요. 얼마나 추하고 더러운지 머리끝서부터 발끝까지 성한 곳이 없어요. 더럽고 시기, 질투, 명예, 욕심, 게다가 거짓, 너무너무 더럽고 추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어요.

 

그러고 나니 남편을 볼 수도 없어요. 부끄러워서. 아이들을 대할 수도 없어요. 이렇게 추해졌어요. 또 다시 목사님께 와서 "목사님, 이제는 너무 창피해서 살수가 없는데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다음 기도를 하세요.

 

'십자가를 알게 해주세요. 십자가의 은혜를 알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세요. 십자가를 생각하세요." 그래서 간절히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보여주었어요. 그를 위하여 대신 피를 흘리시는 모습을 보여 주었어요. 그리고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너무 감격했어요.

 

이제 비로소 충만한 은혜의 사람이 되었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자기 자신을 알아야 됩니다. 내가 누구입니까? 나의 나됨을 똑바로 알아야 됩니다. 그리고 나면 누구를 원망할 것이 없습니다. 누구를 비방할 자신이 없어요. 섭섭하고 억울하고 분하고… 택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 게 있을 수 없습니다. 오로지 감사할 뿐입니다. 여러분, 은혜를 입게되면 은혜를 알 때는 나 자신의 의가 부정됩니다. 그래서 내 공로도 아니고 내 진실도 아니고 내 의도 아니고 내 노력도 아니고 내 지혜도 아니고 다 없어져요.

 

오직 은혜. 그것도 현실적인 은혜. 그 속에서 자기가 완전히 사라지고 은혜만 남습니다. 여러분, 요새 우리는 월드컵 행사를 통해서 많은 것을 배웁니다만은 여러분 월드컵 시작하기 전에 몇 달 전부터, 심지어는 어떤 분들은 구체적으로 기도했습니다. 우리의 소원이 뭡니까? 16강입니다.

 

꿈에도 소원은 16강입니다. 오로지 소원은 16강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8강으로 바뀌었습니다. 아, 그 다음에 4강으로 바뀌고 아, 그 다음에 요코하마 간다나? 사람이 이렇게 둔갑을 잘해요. 어제 저녁에 축구 보다가 그거 참 어이없게 두골 먹었습니다.

 

그래서 분해가지고 분해가지고 잠을 못잔다구. 16강 어디에 갔습니까? 여러분, 제 정신 차리세요. 모든 것은 은혜요. 그 은혜의 현장을 잊어버리지 마세요. 분명히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또한 그 은혜 속에 깊은 뜻이 있습니다. 그 속에 말씀이 있습니다. 그 은혜 속에 목적성이 있습니다.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마십시오. 은혜를 쏟아버리지 마십시오. 기적이에요. 이건 다 기적이에요. 그리고 은혜를 부르신 이의 깊은 뜻을 헤아려야 되요. 그리고 여러분 이제 감격해야 합니다.

 

은혜에 대한 보답은 기쁨입니다. 은혜로 주셨으니 감사해야지요. 용서받았으니 감격해야지요. 만족함이 중요합니다. 만족함. 그리할 때에 그 만족과 충만함이 사람을 내적 변화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성품이 변하고 가치관이 변하고 세계관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얼굴도 변할 것입니다. 어떤 여집사님이 아주 교회생활을 열심히 하는데 열심히 찬송도 부르고 열심히 기도도 하고 그런데 자기 남편은 가자고 자꾸 조르면 한 달에 한 번 교회에 따라갑니다. 따라가서는 그냥 졸다가 오는 것입니다.

 

아내를 사랑하니까 가자면 그저 '아니 죽은 사람의 소원도 들어주는데' 그래가지고 따라올 뿐이지 은혜를 못 받아요. 이게 마음이 아픈 거예요. 어떻게 남편이 좀 은혜를 받아야겠는데,

이래가지고 애를 쓰다가 유명한 목사님이 부흥회를 한다고 해서 잘 달래가지고 남편을 모시고 가서 뒷전에 앉았는데, 여집사님은 은혜를 받고 기뻐하는데 남편은 여기서 졸기만 하고 있는 거예요. 이게 속상해서 다음날 또 데리고 갔습니다.

 

"여보, 오늘은 뒷전에 앉지 말고 앞에 앉아서 아랫목에 가서 뜨끈뜨끈한데서 은혜 받읍시다." 여기가 아랫목이예요. 앞자리에 가야 은혜가 크지. 그래서 같이 제일 앞자리에 가서 은혜를 받으려고 했는데 역시 집사님은 은혜가 충만한데 남편은 여전히 졸고 있어요.

 

이게 속이 상해서 나오면서 '당신 어떻게 이럴 수 있소.' 어찌 이럴 수 있냐고 왜 은혜를 받지 못하느냐고 그러니까 남편이 빙그레 웃으면서 하는 말이 "은혜받으면 어떻게 되는데?" 이제 부인이 할 말이 없어요. "은혜 받은 당신, 그것이 은혜요?

 

나 은혜 별로 바라지 않아" 그렇게 말했답니다. 여러분, 그 부인의 마음속에 감격이 있고 생활이 변화가 왔어야 되는데 그것 없이 잔소리꾼이에요. 은혜는 말에만 있고 성품에 없었어요. 그러므로 이 남편은 그런 은혜라면 나 받고 싶지 않다고 그랬어요.

 

여러분, 이것을 알고 계셔야 합니다. 참 은혜는 삶의 의미를 변화시키고 새사람 되게 하고 얼굴까지 달라지고 마음도 달라지고 말이 변합니다. 오로지 덕스러운 말만, 은혜로운 말만, 그래서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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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가진 자 /고후6:3-10/ 곽선희 목사

2014-11-26 21:03:32

 

어느 날 낡은 승용차에서 한 신사가 내립니다. 차에서 내리다가 일 달러짜리 동전을 땅에 떨어뜨렸습니다. 이 동전은 줍기 어렵게 차 밑으로 굴러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동전을 줍기 위해 이 신사는 허리를 굽혀 차 밑에 손을 넣어보았지만 손이 닿지 않습니다.

 

아주 여러 모양으로 애를 쓰는 것을 보고 옆에 있던 호텔직원이 "선생님, 제가 도와드리죠." 그리고 차 밑으로 기어들어가서 간신히 동전하나를 집어 꺼내가지고 나와서 이 신사에게 드렸습니다.

 

그는 그때 그 직원에게 답례로 이백 달러를 주었습니다. 그는 그 직원에게 중요한 한마디 말을 남겼습니다. "내 돈이라면 일 달러를 떨어뜨려서도 안 된다. 내 돈이라면 일 달러라도 반드시 주워야한다. 그러나 내 돈이 아니라면 누군가가 내 집 앞에 천 달러를 떨어뜨렸다하더라도 나는 절대로 손을 대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유명한 일 달러 철학입니다. 이것은 바로 아세아의 최고 갑부 홍콩의 창장(長江)그룹의 리자청(李嘉誠) 회장의 말입니다. 리자청 회장은 갑부일 뿐만 아니라 많이 베푸는 자로서 세계를 놀라게 한 사람입니다. 자기 고향 가까이에 산터우(汕頭) 대학을 세워 세계적인 대학으로 만들었고 그리고 홍콩대학, 버클리 대학에 여러 모양으로 좋은 일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돈이 많아서 부자이기보다 좋은 일을 많이 한 사람으로 부자입니다. 자기에 대해서는 일 달러를 버리지 않는 그런 인색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남을 위해서는 아주 후하게 아니 미래를 위해서는 거침없이 많은 재산을 내놓는 그런 분으로서 리자청 회장은 세계에 알려졌습니다.

 

2500년 전 아주 옛날 헬라의 철학자 플라톤은 행복에 대하여 가르치면서, 불행은 결핍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남과 비교하면서 오는 결핍감에서 오는 거라고 말합니다. 결핍한 것이 아니라 결핍하게 느끼는데 문제가 있다는 것이죠. 만족이라는 것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만족하게 느끼는 바고 거기에 만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구체적으로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먹고, 입고, 살고 싶은 그 얼마간의 수준이 있는데, 이 만큼만 있으면 좋겠다하고 바라는 것이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조금 부족한 그것 가지고 만족해하는 것이 행복이다. 왜일까요? 만족할 마음의 그것을 다 가지면 더 가지고 싶으니까 고것 남겨두고 조금 부족한데서부터 만족을 찾아야 틀림없는 만족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칭찬하기에는 조금 부족한 외모. 여러분, 너무 그렇게 완벽하길 바라지 마세요. 그랬다가 성형수술 하다가 아주 망가집니다. 그저 고만하면 좋다고 생각하는 그런 조금 부족한 가운데서 만족하는 그런 마음. 왜요? 이렇게 살면 다른 사람의 질투를 받지 않거든요.

 

이게 행복한 것이구요. 또 자신이 자만하고 싶은 것에서부터 절반밖에 알아주지 않는 그 정도의 명예. 남들이 나를 알아주기를 얼마나 바랍니까? 나의 나됨보다 더 크게 알아주면 곤란합니다. 불안합니다.

 

나의 나됨보다 한 절반정도 그 정도만 알아주는 그런 명예를 가지고 사는 것이 행복할 수 있는 비결이다. 겨루어 한 사람에게 이기고 두 사람에게는 질 수밖에 없는 정도의 체력. 그 너무 체력이 강해서 열 사람도 때려눕힐 정도가 되면 어쩌면 조폭 될 거예요.

 

그런고로 그런 체력은 바람직하지 않아요. 또 연설을 한다고 할 때 청중의 절반 정도는 박수를 치고 절반 정도는 박수를 안칠 수 있는 정도. 이런 정도의 인기가지고 사는 게 좋다는 겁니다. 모든 사람이 아우성을 치며 그렇게 박수를 치는 거 그거 위험합니다. 그러면 어쩌면 내가 망가집니다. 그리고 또 문제가 많이 생깁니다.

 

한 절반 정도만 박수를 치는 그 정도의 말솜씨와 인기를 가지고 거기서 만족할 수 있어야 한다. 참 옛날 어른이지만 지혜롭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늘 좀 모라란 중에서 그런 수준에서 만족하라는 것이죠. 또 그 만족하는 비결을 터득해야 행복할 수 있다는 거죠. 참으로 놀라운 지혜라고 생각이 됩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을 가진 자라고. 여러분, 앞으로 가질 거라는 게 아네요. 현재 모든 것을 가진 자 바로 이 사람이 그리스도인이에요. 그 만족감을 말하는 거예요. 내가 만족함이 넘쳐서 베푸는 거예요. 내가 먼저 기뻐요. 알게 모르게 다른 사람을 또 기쁘게 하고 있어요.

 

내게 없는 만족을 남에게 베풀 수 없어요. 만족감이 없는 베풂이라고 한다면 그건 대가적인 거예요. 또 다른 원망과 불만으로 끝나는 거예요. 만족하고 넘치는 마음에서 베풀고 내가 기뻐요. 내가 행복함으로 그 행복이 그대로 유출되어서 어느 사이에 또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겁니다. 스스로 만족해야 합니다. 스스로 부요해야 합니다. 그리함으로 다른 사람을 부요하게 할 수 있는 것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란 말입니다.

 

탈무드에 이런 말이 있는걸 여러분이 아십니다. "돈을 잃어버린 사람은 일부분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건강을 잃어버린 사람은 다 잃어버린 것이다." 여러분, 돈이 많으면 뭘 합니까? 병원에 들락날락하면서 더 뭘 벌어서 어쩌자는 겁니까? 아무 소용없어요.

 

그러니까 건강은 모든 행복의 조건의 하나가 아니고 근본이란 말이죠. 그런데 더구나 정신적 건강 행복감이라고 하는 이런 건강은 아주 중요한 것이죠. 그런고로 목적을 잃었다는 것은 삶의 의미를 잃은 것이요, 진실을 잃어버린 사람은 인격을 잃어버린 것이요, 또한 믿음을 잃어버렸다면 생명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아주 역설적입니다. 여러분 보시는 대로 "-같으나, -어찌하다" 이렇게 말합니다. 이리한 것 같으나 어떻다. 그래서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자요, 징계를 받은 자 같으나 복 받은 사람이요, 근심하는 자 같으나 기뻐하고. 보세요.

 

가난한 자 같으나 부요하고, 없는 자 같으나 가진 자고, 오히려 남을 부요하게 하는 사람이다. '같으나' 라는 게 뭡니까? 사람보기에는 다른 사람보기에는 그렇다는 얘기죠. 가난한 것 같고, 없는 것 같고, 한심한 것 같고, 미련한 것 같고. 그렇죠? 그건 다른 사람 보기에 그래요. 세상의 판단으론 그래요.

 

그러나 나는 안 그래요. 누가 뭐래도 난 스스로 행복해요. 스스로 만족해요. 천하에 부러움이 없어요. 바로 그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생각해야합니다. -같으나.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렇게 판단하지만 아네요.

 

나는 아니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는 아니요. 그런고로 새로운 가치관이요, 새로운 생의 패러다임을 말해주고 있는 거예요. 이것이 내적인 충실이요 영적인 존재에 풍요함을 말하는 것이올시다.

 

그래 오늘 본문의 그 깊은 뜻은 좀 더 모든 것을 깊은데서 보라. 영적인 차원에서 보라.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보라. 그리고 '내가 부요한가?' 묻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헤아릴 수 없는 부요함이 내게 있다는 거예요. 이걸 생각해야 합니다.

 

또한 영원한 것을 생각합니다. 천국에 가치를 두고 생각합니다. 그리할 때 그건 얘기가 다릅니다. 땅에서 보는 판단과 하늘나라에서 두고 보는 그 판단은 달라요. 또한 현실적으로 이렇게 영원한 약속을 지향하며 사는 오늘의 생활 그 자체 삶의 의미 판단력 전혀 틀립니다.

 

우스운 얘기 하나 고백 하리이다. 여러분, 아시는 대로 내가 소망교회에서 은퇴할 때 교회에서 10억짜리 사택을 하나 제게 사주었어요. 생전 처음으로 제 이름으로 집을 하나 얻게 됐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했어요.

 

여러모로 생각하다가 뭐 그럴 필요 없다. 생전 내가 남의 집에 살았는데 그건 또 가져서 뭐하노? 여러 가지 생각하다가 교회에다가 헌금을 해버렸어요. 그래서 교회이름으로 등기를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전 집은 없어졌고요 이제 두 사람이 사는 동안만 살게끔 그렇게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 뭐 내가 살면 내 집이지 하고 살고 있는데 요새 그 집이 올라갔어요. 아이파크가요, 내가 이사 갈 때 20억, 지금 25억까지 됐단 말예요.

 

그러니까 우리 교인들이 날보고는 "목사님, 아깝습니다. 그거 조금 있다가 할 걸" 그런 얘기합니다마는 그게 아니올시다. 언젠가 집에 들어갔더니 제 아내가 - 제 아내가 웬만해서는 저 칭찬 잘 안하거든요 -

 

"여보, 여보 당신은 아무리 생각해도 머리가 좋아." 그래요. "왜요?" 그러니까, 요새 이 집 우리 이름으로 가지고 있었으면 재산세가요 삼천만원이 되요. 생돈 삼천만원 어디서 만드냐는 겁니다. 집 파는 것도 아닌데.

 

그러니 요걸 딱 바쳐버리니까 남들은 세금 때문에 무슨 월급이 다 죽었는데 나는 아무렇지도 않거든. 그래서 당신은 역시 똑똑하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렇습니다. 똑똑하게 사세요. 그거 그렇게 뭐 움켜쥐고 있어봐야 그 별거 아니네요. 그저 훨훨 나는 것처럼 그렇게 살수 없겠습니까? 부요함이란 바로 거기에 있는 거예요. 성공은 만족함을 말하는 것이고 풍요의식을 말하는 것이에요.

 

여러분, 내가 그저 입버릇처럼 말합니다만 가진 건 내 것이 아니고, 먹은 것만 내겁니다. 그 많이 잡수세요. 먹어버렸으니까 틀림없이 그건 내꺼지. 그리고 여러분 또 하나있습니다. 준 것만 내겁니다. 자유로운 마음으로 내가 주고 싶어서 속에서부터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고 주어 버린 거 이건 내겁니다.

 

왜? 하늘나라에 기록됐으니까. 예수님 말씀대로 보면, 네 보화를 하늘에 쌓아두라. 이건 하늘에 저금해 놓은 거예요. 그러나 아직도 내가 가지고 있는 건 이건 땅의 것이에요. 게다가 어찌 어찌한 이유에서 주었다면 그건 빼앗긴 거예요. 결코 준 게 아네요. 그런고로 자유한 가운데서 아무 보상 없이 보상 바라는 마음 없이 순수하게 베풀어보세요. 그것만 내거에요. 준 것만 내거에요.

 

우리교회의 어떤 집사님이 회사를 경영하면서 어째 좀 사업이 잘될 때 모 기관에다가 모 대학에다 삼백 억을 기증한 일이 있었죠. 여러분, 아마 신문에서 다 보신 겁니다. 그래 제가 만나서 "아이 그 삼백억 나한테 주지, 왜 거기다 줬나?" 그랬어요. 그래, 그 사유를 설명을 합디다. "아, 그거 참 좋은 일 했구만" 하고 칭찬을 했더니 대답은 간단합니다.

 

"목사님이 하라는 대로 했습니다." "내가 뭐라고 했는데?" "준 것만 내거라고 하지 않습디까? 제 사업 저 믿지 않습니다. 언젠가는 또 기울어질 겁니다. 그러나 이제 남은 거는 삼백억 준거 그거 하나만 남았습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여러분,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베푼 것만 내꺼다. 이게 새로운 가치관이에요.

 

여러분, 잘 아는 대로 테레사(Mother Teresa) 수녀는 1997년 87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유품은 평생토록 입던 단 두벌 옷 그리고 한권의 성경책 그것뿐이에요. 한평생 그렇게 살았어요. 그러나 그는 한평생 베푸는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그리해서 1979년 노벨평화상을 받았고 막사이사이상을 받았고 요한 23세 상을 받았고 또 착한 사마리아인 상을 받았고 템플턴상을 받았고 슈바이처 상을 받고 그리고 대영제국의 상을 받았습니다. 좌우간 상은 두루두루 한평생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세상사람 보기엔 아무것도 없는 할머니입니다.

 

그러나 본인의 마음으로는 다 가진 사람입니다. 아무 부족함도 없습니다. 부요함을, 부요함을 누리면서 그렇게 살았습니다. 얻기 위해서 주는 마음은 피곤합니다. 받기위해서 베푸는 마음 이것 또한 언젠가 원망으로 끝납니다. 베풀고 잊어버리세요. 그 결과가 어떻게 되느냐고 알아보지 마세요.

 

가끔 보면 북한을 위해서 도웁시다. 이런 말을 해보면 "그거 제대로 전달되나요?" "아, 그거 어떻게 되나요?" 그저 베푸는 사람은 그 다음에 어떻게 되느냐를 생각하면 안 됩니다. 당신의 손에서 떠날 때 끝이에요.

 

바로 그 마음이 진정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마음입니다. 이걸 꼭 잊지 말아야 되요. 받기위해서 주는 일 흔히 우리가 기복사상이라고 합니다마는 아주 피곤합니다. 오직 이미 가졌다는 마음, 스스로 풍요하다는 마음, 가진 마음에서 베풀고 기쁜 마음에서 주고 은혜에서 은혜로 그래서 모든 사람을 부요하게 하는 그 부요하게 하는 풍요를 즐기는 거예요.

 

여러분, 잘 외우시는 시편 23편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I want Nothing! -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다. 하나님이 나의 목자시니 나는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풍요함입니다.

 

넉넉함입니다. 아니 만족함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행복입니다. 모든 것을 가졌습니다. 이미 가졌습니다. 그리고 이제 내가 가진 이 기쁨을 다른 사람과 더불어, 함께 누리는 것입니다. 여기에 참된 인생의 성공이 있습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넉넉하게 받았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분에 넘치도록 가졌습니다마는 가진 것보다 욕심이 더 커서 늘 불만하고 더 큰 것을 얻기 위해서 이미 가진 것을 통해서 만족하지 못하는 저희들입니다. 끝없는 욕심에 사로잡혔고 또 한없는 그 허영에 휩싸여서 이렇게 많은 세월을 가진 자 되지 못한 것처럼 빼앗긴 자처럼 다 잃어버린 자처럼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이제는 세상사람 보기에는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가졌고 그리고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할 수 있는 그러한 기쁨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고후6:1-10/ 창조적 생활의 비결 / 한경직 목사

2014-08-23 07:06:31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 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六․九-十)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구역; 병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갈 四․十三)

 

이 말씀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편지한 가운데 한 구절이올시다. 아마 사도 바울이 몸이 약해서 혹은 병이 나서 여행을 할 수 없는 까닭으로 처음에는 갈라디아 지방을 그저 지나가려고 생각했지마는 아마 그 곳에 머물 수밖에 없게 되었고 그래서 잠깐 머무는 동안에 복음을 전파해서 갈라디아 교회가 시작된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몸이 연약해서 부득이 다른 일을 할 수 없는 그런 때에라도 이와 같은 큰 열매를 맺어서 하나님의 교회를 세운 것입니다. 사실 사도 바울의 생활을 보면 어떠한 처지와 환경에서든지 이와 같이 그 처지와 환경 가운데서 적당한 열매를 맺은 것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실 오늘 아침에 고린도 후서에서 읽은 바와 같이 그의 생활은 남 보기에는 근심하는 자 같지마는 항상 기뻐하는 생활이요, 남 보기에는 가난한 자 같지마는 많은 사람을 부요 하게 하는 생활이요, 남 보기에는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지만 모든 것을 가진 자의 생활을 한 것입니다. 이런 생활을 보통 쉽게 말하면 사도 바울은 어떤 곳에서든지 창조적 생활을 한 것입니다.

 

물론 여기「창조」라고 하는 말은 창세기 一장에서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시듯이 없는 가운데서 있는 것으로 창조한다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자료를 가지고 새 가치를 창조한다고 하는 뜻입니다.

 

바위가 산에 있을 때는 그 가치가 별로 없지마는 석공이 그 바위를 깨어서 이렇게 좋은 성전을 지으면 그 돌에 새로운 가치가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 쇠뭉치가 그냥 땅 속에 묻혀 있을 때에는 가치가 없지마는 그것을 캐어 내어다가 연단을 시켜서 만일 시계의 태엽을 만든다고 하면, 그 쇠에는 새로운 가치가 발생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인간에게도 제한된 범위 안에서 창조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 사실이올시다.

 

그래서 사실 우리는 창작이나 창조라고 하는 말을 종종 씁니다. 가령 예술제라면 언제든지 새로운 창작품이라고 이런 말을 씁니다. 여러 가지로 새로운 그림을 그리고 새로운 조작을 구성을 하고 새로운 건축을 하게 될 대에, 우리는 그것을 창작적 작품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없는 데서 있는 것이 아니고 이미 있는 자료를 가지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한다고 하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래서 음악계에서도 새로운 음악을 창작합니다. 새로운 곡을 창작하는 것입니다 문학 방면에서도 새로운 문학의 작품 혹은 시나 혹은 소설이나 혹은 희곡이나, 여러 가지 작품을 내는 것이 사실이올시다. 사상 면에서는 더욱 이런 것을 우리가 항상 보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새로운 것이 나타나게 됩니다. 새로운 작품과 새로운 발명품이 우리 시장에 범람하는 것을 봅니다. 나일론에서부터 시작해서 모든 플라스틱 제품에 이르기까지 혹은 텔레비전에서 시작해서 원자탄이나 수소탄이나 유도탄에 이르기까지 매일 새 것이 과학자의 머리를 통해서 공장을 통해서 이 세상에 나오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

 

이렇게 우리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자료를 가지고 역시 하나님이 주신 우리의 지력과 통찰력과 상상력을 통해서 매일 새로운 가치를 창조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예술이나 과학 방면뿐만이 아니고 모든 방면이 역시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이 짐승과 다르다는 것은 짐승은 새 것을 만들 수 없지만 인간은 언제든지 새 것을 구상하고 만들어 낼 수 있는 지력이 있는 까닭입니다.

 

또한 이것은 인간 생활에 있어서 우리의 영적 방면에도 또한 그런 것입니다. 위대한 예술가일수록 변변치 못한 자료를 가지고 더욱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어 내는 것이 사실인 것입니다.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생활을 고요히 묵상해 볼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인간의 영적 방면에 있어서 위대한 작품을 낸 예술가라는 것을 우리는 느끼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가령 우리가 항상「십자가, 십자가」하고 찬송가를 부르지마는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이 십자가로 말하면 본래 가장 추악한 죄인을 사형에 처하는 아주 추악한 그런 형기에 불과하였던 것입니다.

 

그렇지마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십자가에 한 번 못 박히셔서 만민의 죄를 대속(代贖)하신 이후에는 그 흉악한 십자가는 인류의 모든 죄는 대속하는 대속의 표가 되었고 인류의 소망의 상징이 된 것입니다. 부끄러운 십자가를 변해서 영광의 십자가로 만드신 이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가만히 생각할 때에 얼마나 큰 새로운 가치의 창조인지 말로 다할 수 없는 줄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가장 추하게 생각하는 십자가로 하여금 인간의 모든 소망을 빛나게 하여 주는 아름다운 영광의 십자가로 만드신 이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입니다.

 

그분만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하시는 모든 일이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옛날이나 오늘이나 각 방면에서 이와 같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십니다.

 

완고하고 편협하고 독선적이요, 무자비한 바리새인 사울을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불러서 사람을 변화시켜 사랑과 화평의 사도가 되게 하였고 이런 사람을 통해서 온 세계에 복음을 전파하게 하였으니 이 얼마나 큰 가치의 새로운 창조이십니까? 과연 예수 그리스도만 이와 같은 영예의 창작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 뿐이 아닙니다. 돈만 알던, 이기주의자요, 자기의 민족도 모르던 민족반역자인 삭개오 같은 사람을 불러내어서 자기 재산의 절반을 팔아서 모든 다른 사람을 구제하는데 쓰게 하였고 자기가 토색(討索)한 것은 四배나 갚아주는 사람으로 만들었으니, 이것이야말로 또한 얼마나 큰 가치의 창조인지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 님의 생활을 보면 이 영적 방면에서 언제든지 새로운 작품을 만드신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 같은 여자, 일곱 귀신이 들려서 정신없고 미치고 부끄러운 줄 모르던 이런 여자를 변하게 해서 아름다운 하나님의 딸로 삼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봉사할 수 있게 만든 그 기적을 생각할 때에 이것이야말로 얼마나 큰 가치의 창조인지 말로 다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만 그와 같이 한 것이 아닙니다. 세기를 통해서 복음이 가는 곳마다. 이와 같은 새로운 가치의 창조가 있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린도 후서 五장 十七절에 사도 바울이 스스로 간증하는 말이『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새로운 작품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온전히 새로운 작품,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옛 것은 지나가고 새 것이 되어서 전에는 아무리 더러워졌었으나 이제는 깨끗하게 되었고 전에는 아무리 이기주의적이었으나 이제는 오직 사랑의 생활을 할 수 있는, 새로운 사람을 만든 것입니다.

 

이 새 사람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가치 창조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이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복음 전파야말로 최고의 가치를 창조하는 활동이라고 또한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은 우리도 주안에서 새로운 이와 같은 피조물이 되었다고 하면 우리도 주안에서 역시 이와 같은 창조적 생활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말씀을 기록하는 사도 바울의 생활에서 여실히 우리에게 그 증거를 나타내어 보인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잘 기억하는 사실이지마는 사도 바울이 빌립보에서 전도할 때에 어떠한 사귀(邪鬼) 들린 여자, 정신없는 여자를 불쌍히 여겨서 고쳐주지 않았습니까?

 

오히려 그 여자를 고쳐준 까닭으로 그 여자아이가 점을 친다고 해서 오래 수입이 있던 그 주인의 증오를 받아서 여러 사람을 충동해서 오리려 사도 바울과 실라를 잡아끌고 관원에게 가서 무고하게 많은 매를 맞히고 수고를 시키고 마지막에는 빌립보 감옥에까지 갇히게 되고 만 것이 아닙니까?

 

아마 보통 사람 같으면 그날 저녁에 바울과 실라가 마음속에는 그저 분한 마음만 가득했겠고 온 몸이 결리고 아픈 생각밖에는 다른 생각이 별로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마는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읽는 대로 바울과 실라는 그날 밤이 깊을 때에 오히려 하나님께 찬송을 부르고 모든 사람 앞에서 감사의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때마침 큰 지진이 있었고 그 후에 그 감옥의 간수가 회개를 하게 되었고 빌립보 교회는 처음에는 여자들만 있었지마는 아주 유력한 한 분 교인이 생기게 되었고 이래서 점점 기초가 튼튼해졌고 사도 바울의 모든 전도여행 때에도 항상 물질로도 도와주는 귀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또한 이 교회에 사도 바울이 귀한 빌립보서라고 하는 편지를 써서 오늘날까지 우리가 그 편지를 읽고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해 보세요.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매맞고 감옥에 갇히고 이런 환경 가운데서 산수를 회개하게 만들었고 빌립보 교회의 기초를 튼튼히 닦게 되었고 빌립보서를 써서 세기를 통해서 많은 사람에게 은혜를 기칠 수 있는 그야말로 창조적 생활을 하였다 하는 그 말이올시다. 이것은 이 한 가지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전 생애를 통해서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이 물론 자유로운 몸을 가지고 밖에 나와서 활동할 마음이 늘 있었습니다. 그러나 만년에 여러 해 동안 감옥의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감옥의 생활을 한 까닭으로 그의 생활은 무의미한 것이었습니까? 그렇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감옥의 생활을 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는 귀중한 신약의 옥중 서신이 되게 되었습니다.

 

빌립보서니, 에베소서니, 골로새서니, 혹 디모데 전후서, 빌레몬서, 이와 같은 것은 다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 가운데 갇혀서 이 불멸의 저서를 남기게 되었고 이것이 그 당시의 사람뿐만 아니라 오고 오는 세대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위대한 창조적 생활을 감옥 가운데서 한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사도 바울의 생활만이 아닙니다. 과연 누구든지 신앙을 가지고 창조의 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주안에서 산다고 하면 가능한 것입니다. 어떠한 환경에서든지 어떠한 입장에서든지 이와 같이 열매 맺는 생활을 한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존 번연의 생활을 회고하면, 영국에서 청교도들을 핍박하게 될 때에 오히려 복음을 전파하게 되었다고 이 존 번연을 감옥에 집어넣고 억울하게 十二년 동안이나 썩는 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존 번연은 거기서 썩은 것만은 아닙니다. 그 자리에서 은혜를 받고 우리가 아는 서로역정이라고 하는 성경 다음에 많은 사람이 읽는다고 하는 불멸의 저서를 써서 감옥 가운데서도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서 위대한 창조적 생활을 한 것입니다.

 

몇 해 전에 우리 교회에서도 잠깐 와서 이야기했지마는, 지금 일본에 와서 선교사로 있는 사람 가운데 디 세이저(De Shazer)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二차 대전 때에 미국에서 제일 먼저 동경에 와서 폭격하고는 이 두리를 소장이 지휘한 그 폭격기대로 와서 싸운 한 대원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동경에서 폭격하고는 저 중경으로 가다가 중경까지 채 가지 못하고 남경 부근에서 부득이 낙하산으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일본 사람한테 잡혔습니다. 근 四년 동안 중국 여러 감옥, 마지막에는 일본 감옥에 와서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의 감옥 생활은 헛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감옥에 사는 동안 성경을 읽게 되었고 성경을 읽는 가운데 온전히 회개한 사람입니다. 자기가 간증하는 대로 전에 유년 주일학교에는 좀 다녔지만 장성해서는 전혀 교회에 나가지 아니하고 여러 가지 죄를 많이 짓던 사람입니다.

 

그 감옥에서 죄를 회개하고 그리고는 제二차 대전에 끝나자 포로 교환에서 나와 결심한 것은 내가 본국에 돌아가서 신학을 마치도 다시 일본에 와서 일본 사람에게 그가 처음에는 폭탄을 내려 던졌지마는 이번에는 복음을 전파해서 구제를 해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대로 꼭 실행했습니다. 해방된 다음 미국에 돌아가서 공부했습니다. 그 다음에 일본의 선교사로 나왔습니다. 선교사로 나와 전도하는 동안 제일 먼저 믿은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일본 폭격기대를 영도해서 진주만을 一九四二년에 먼저 폭격한 그 폭격기의 대장으로 있던 후지다(藤田) 대위입니다. 그 사람 역시 예수를 믿고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안에서 있게 될 때에 어떠한 환경에서든지 우리가 창조적 생활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실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될 때에는 역경이나 실패가 문제가 아니요, 질병도 문제가 아니요, 시험을 받는 것도 문제가 아니요. 어려운 일을 당하는 것도 문제가 아닙니다. 요컨대 이와 같은 자료를 가지고 어떻게 위대한 작품을 만들 수 있는가가 문제입니다.

 

우리가 요셉의 생활을 잘 기억합니다. 그의 생활을 잠깐 회고해 보세요. 까닭 없이 형제들에게서 시기를 받았습니다. 까닭 없이 저 깊은 우물 속에 던짐을 받았습니다. 그 다음에 까닭 없이 종으로 팔려서 멀리 고독하게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애굽에 갓서 오랫동안 종으로 수고하게 되었습니다. 그 또한 시험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시험을 이겼습니다. 그 결과는 오히려 억울하게 형무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형제의 시기, 미움, 우물에 던짐을 받는 사실, 먼 나라에 종으로 팔려 가는 설움과 고독, 오랫동안 남의 집에서 종노릇하는 그 억울한 고통, 그런 가운데서도 시험을 받으니까 오히려 더 억울하게 감옥에 던짐을 받았습니다. 그 모든 서러운 사정, 이것이 요셉이 받은「자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준 한 자료입니다.『너 이것을 가지고 무엇을 해보아라.』

 

요셉은 그런 모든 것을 다 가지고서 마지막에는 자기 자신을 애굽의 총리 대신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가족들을 기근 가운데서 구원해 내고 모든 애굽 국민들을 七년 동안 가무는 동안에 기근 가운데서 구원해 낸, 말하자면 애국의 구주가 된 것입니다.

 

얼마 전에 대광(大光) 학교에서 미술 전람회를 하는데 가서 한 번 구경하였습니다. 여러 가지 좋은 작품들이 있어요. 그 가운데 특별히 제 흥미를 끈 것은 어떤 학생들이 만든 공예품이었는데 목수들이 쓰다 내버린 나무 조각으로 공예품 하나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어떤 학생은 철공소에서 공인들이 쓰다 내버린 쇠 조각으로 공예품 하나를 그럴 듯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이와 같은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사람 보기에는 변변치 않은 것, 사람 보기에는 쓸모가 없다고 하는 것, 사람 보기에는 그렇게 자랑할 것이 없는 것, 그런 것들을 가지고 아름다운 작품을 만드는 것이 오직 우리가 주안에 있을 때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 과일 나무, 혹은 사과나 복숭아나무를 기르는 사람은 누구나 겨울에는 전부 가지를 전정 해주지 않습니까? 다 잘라 줍니다 만일 이 나무들이 우리처럼 감각이 있다고 하면 그 전정을 받을 때 대단히 아플 것입니다.

 

이 나무가 전정을 받을 때 아프게 그렇게 많은 가지를 잘라내지마는 그 대신 나무가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는 불평하지 아니해요. 그 대신 쓸데없는 가지로 정력을 보내지 아니하고 모든 정력을 다 열매에 보냅니다. 그래서 사과 알이 커집니다. 그래서 복숭아 알이 커집니다.

 

사실 전정 하는 목적은 열매를 크고 아름답게 잘 맺기 위해서 해줍니다. 아마 어떤 때는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 전정을 더러 해주시는 것 같습니다. 환난도 보내시고 질병도 보내시고 시험도 보내시고 이와 같이 전정을 해주십니다. 이렇게 하는 그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좋은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 그와 같이 하시는 줄 압니다.

 

언제든지 창조적 생활의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너무나 잘 아는 이야기이지마는 진주가 어떻게 되는지 아시지요? 진주도 별것이 아닙니다. 진주 속에는 모래알이 있다고 합니다. 겉만 그렇게 아름답지 속에는 모래가 있다고 합니다.

 

진주 패라고 하는 조개 속에 어떻게 모래알이 들어갑니다. 지금은 인공적으로 넣어준다고 합니다. 그 보드라운 조갯살에 깔깔한 모래알이 들어갔으니까 얼마나 아프겠어요. 그러니까 이 조개가 그 깔깔한 것을 이기기 위해서 생명의 즙을 내서 그 모래알을 싸주고 또 싸주고 또 싸주고……. 여러 해 싸주면 점점 큽니다. 그것이 진주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때는 우리의 생활 가운데 모래알과 같이 사도 바울이 말한 육체의 가시와 같이 깔깔하고 아픈 것을 던져 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싸고 또 싸서 우리의 영혼이 진주와 같이 아름다운 영혼을 만들기 위해서 그와 같이 하시는 줄 생각합니다.

 

여러분 잊지 마십시다. 주안에서 모든 것이 창조의 자료입니다. 주안에서는 모든 것이 창조의 기회입니다. 서양 속담에「필요는 혹은 곤 고는 발명의 어머니」라고 하는 속담이 있습니다. 요새 직업이 없어서 걱정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직업이 없다고 불평하지 말고 직업을 만들도록 힘을 쓸 때가 된 것입니다.

 

제가 어떤 책을 보니까 지금 폐 염도 잘 고치는 페니실린도 본래 곰팡이 가운데서 처음에 발견하고 적출 해 냈다고 합니다. 아무리 곰팡이 같은 죄악 세상에 사는 사람도 주님께 나오면 귀한 약품이 되어서 다른 사람의 병까지 고쳐줄 수 있는 새 사람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는 상한 갈대도 꺾지 아니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상한 갈대를 고쳐서 아름다운 초적(草笛)피리를 만들어서 아름다운 음악의 선율을 내게 하는 권능이 우리 주님께는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상처 입은 몸이라고 할지라도 우리가 우리 주님 앞에 나와서 내 생명을 맡긴다고 하면 주님께서는 그 상한 생명, 그 상한 생황을 변화해서 하늘의 음악을 나타낼 수 있는 귀한 하나님의 자녀를 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자리에 있던지 낙심하지 말 것입니다. 주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서 우리도 창조의 생활을 하여야 될 것입니다.

 

그래서 작년은 어떠했던지 이 새해야말로 창조의 해를 삼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도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 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의 생활을 하십시다.

 

 

 

 

 

ad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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