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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고린도서 설교 모음

고린도후서 4장 설교 모음

by Jessi J 2022. 10.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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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감사주일] 질그릇의 노래 /고후4:7-15/ 김다위목사

2022-02-17 10:20:04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저희 가정에게 올해는 특별한 한 해입니다. 교회로부터 후임자 청빙을 받고 미국에서의 11년의 삶을 마무리하고 한국에 다시 돌아온 해이기 때문입니다. 자격 없는 저를 오직 은혜로 부르신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아이들도 한국에 잘 정착하는 것이 기도제목이었는데 잘 적응하는 것 같습니다.

 

지난주에 초등학교 2학년 막내가 학교 가서 장기자랑으로 퀴즈를 냈답니다. 상어는 영어로 뭘까요? 샤크. 그럼 이 세상은 누가 만드셨을까요? 몇몇 답변이 있었지만 오답... 한 여자애가 조심스레 “하나님??” 그러자 “딩동댕~~” 아직 한국 공립학교 분위기를 모르고 잘 적응하지 못한 듯합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자라고 있음에 감사할 뿐입니다.

 

올해 추수감사주일의 주제는 “질그릇의 노래”입니다. 코로나19 기간 중 맞이하는 두 번째 추수감사주일인데, 올해 여러분은 어떠한 노래를 부르고 계십니까? 감사와 찬양입니까? 아니면 낙심과 절망의 노래입니까? “노래”라는 제목을 보니 저에게 떠오르는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1학년 때 남고를 다녔는데요, 특별활동으로 기독교부에 가입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부서 안에 기독교 중창단이 있었습니다. 그 이름이 S.C.S 였습니다. 제가 그 이름을 지은 선배님께 그 이름의 의미를 물었습니다. Super Christian Singers.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습니다. 선배님의 얼굴이 심각해지더니 “왜 촌스러워?” “아닙니다. 멋집니다!” 그러나 사실 슈퍼 크리스천이 뭡니까?

 

슈퍼라는 형용사가 크리스천에 맞는 단어가 아닌 것 같거든요. 여러분, 정말 Super Christian이 있는 걸까요? 예수를 믿었기에 질병도 없고 아픔도 없고 역경도 없고 형통하기만 한 그런 슈퍼 크리스천이 있는 것일까요? 혹은 환난과 핍박을 당한다 할지라도 삶의 환난 중에도 전혀 아파하지 않고 슬퍼하지 않고 눈물도 흘리지 않고 감정의 요동도 없는 그런 슈퍼 크리스천이 있는 걸까요? 

 

만일 그럴만한 후보가 있다면 모세입니다. 모세는 출애굽을 인도했고 홍해를 가를 때에 중심에 있던 사람입니다. 슈퍼 크리스천이라고 할 만합니다. 모세는 걱정도 근심도 눈물도 없겠지요? 민수기 11장을 보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만나만 먹어야 하는 백성들의 불평에 모세는 걱정이 태산 같았습니다. 심지어는 너무 백성들에게 시달리다보니 하나님께 그가 간청합니다. 이 짐이 너무 무거우니 차라리 제 생명 가져가달라는 겁니다.

 

민 11:14-15 저 혼자서는 도저히 이 모든 백성을 짊어질 수 없습니다. 저에게는 너무 무겁습니다. 15 주님께서 저에게 정말로 이렇게 하셔야 하겠다면, 그리고 제가 주님의 눈 밖에 나지 않았다면, 제발 저를 죽이셔서, 제가 이 곤경을 당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모세는 슈퍼 크리스천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수많은 백성들의 요구 사항을 다 들어줄 수 없었습니다. 그는 극심한 걱정을 넘어서서 하나님께 자기 목숨을 가져가달라고 요구합니다. 모세는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었지만, 그도 연약한 인간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어떻습니까? 그는 1, 2, 3차 선교여행을 하며 소아시아에 수많은 교회들을 개척했으며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도로 꼽힙니다. 오늘 본문에 그의 고백이 나옵니다. 몇 가지만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고후 1:8-9b 8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여러분이 알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힘에 겹게 너무 짓눌려서, 마침내 살 희망마저 잃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9 우리는 이미 죽음을 선고받은 몸이라고 느꼈습니다

 

사도행전 9장에서 예수님께서 그를 “나의 택한 그릇”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를 택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는 성령에 이끌리어 소아시아 선교를 가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가 선교를 잘 감당하도록 보호해주셔야 하잖아요?

 

그의 첫 번째 1차 선교여행 중 루스드라에서 그는 사람들에 의해 돌에 맞아 거의 죽기 일보 직전까지 갑니다. 그 뿐이 아니에요. 배를 타고 가다가 몇 차례 배가 파선되어 죽을 뻔했습니다. 감옥에 갇히고 매를 맞고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립니다. 바울은 자신이 택함 받은 그릇 같긴 한데, 깨지기로 택함 받은 그릇이라고 여겼을 거예요. 고린도후서 6장을 보세요.

 

고후 6:4b-5 우리는 많이 참으면서, 환난과 궁핍과 곤경과 5 매 맞음과 옥에 갇힘과 난동과 수고와 잠을 자지 못함과 굶주림을 겪습니다

 

바울이 선교한다면 이런 고난은 막아주셔야지요. 과연 하나님은 무엇을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그 뿐이 아니라, 바울은 고린도교회 내의 분쟁과 갈등을 보면서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을 하면서 편지를 썼었습니다. 

 

고후 2:4 나는 몹시 괴로워하며 걱정하는 마음으로, 많은 눈물을 흘리면서, 여러분에게 그 편지를 썼습니다.

 

바울도 괴로워했고 걱정했는가? 네, 그도 그랬습니다. 그도 많은 눈물을 흘려야 했습니다. 그도 온갖 환난과 궁핍과 곤경과 갇힘과 굶주림을 겪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몸의 가시, 즉 육체의 질병마저 있었습니다. 너무 괴로워서 하나님께 치유해 주시기를 구했지만 하나님은 그가 기대했던 결과를 주지 않으셨어요. 바울도 슈퍼 크리스천이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슈퍼맨과 같은 슈퍼 크리스천은 없는 것 아닐까요?

 

바울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엘리야가 불의 사자 같았지만 그도 절망했고 하나님께 자신의 목숨을 가져가달라고 했지요. 야고보서 5:17에 의하면 그도 우리와 똑같은 본성을 가진 사람이었다... 사람이라는 영어 단어 human은 ‘흙’이라는 라틴어 humus에서 나온 말입니다. 인간이라는 말의 히브리어가 아담이지요, 즉 인간은 흙에서 지음 받았다는 겁니다. 흙으로 지음 받은 존재, 바로 본문의 표현에 의하면, 인간은 “질그릇”입니다. 7절에 보면, 

 

고후 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 보배는 4절에 의하면 보배는 “복음의 광채”요 더 넓게 보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그 영원한 생명”을 가리킵니다. 그 예수님과 그분의 생명이 어디에 담겼냐면 질그릇에 담겼다는 겁니다. 질그릇은 고대 근동 지역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값싼 그릇이었습니다. 즉 질그릇은 ‘평범성’, ‘보편성’을 가리킵니다. 또한 질그릇은 금그릇이나 은그릇과 달리 잘 깨진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취약성’입니다.

 

외부의 충격이나 환경에 쉽게 영향을 받습니다. 조금만 충격을 주어도 깨지거나 금이 갑니다. 다시 말해 이 질그릇은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슈퍼맨이 아닙니다. 이 질그릇은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질병과 사고와 고난과 풍파에 쉽게 흔들리고 금이 가고 심지어는 깨져버리고 상처를 받는 힘없고 연약한 평범한 사람들, 그들이 바로 질그릇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들 아닙니까?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지난 한 주 내내 질그릇의 노래라는 타이틀로 성도님들의 감사 사연을 라디오 형식으로 담아서 매일 한편씩 소개했었습니다. 유산에 유산을 거듭하여 낙심한 한 부부 이야기, 또 다른 부부는 여자 아이를 낳았는데 아이가 1.5kg 약하게 태어났어요. 4살이 넘어도 엄마 한마디 하지 못하는 아이입니다.

 

부모가 얼마나 마음을 졸이며 기도해야 했는지 몰라요. 또한 췌장암에 걸리신 엄마 이야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지요. 모든 각 사연들의 공통점들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모두가 “평범한” 성도님들입니다. 유명한 분들이 아닙니다. 평범성, 보편성입니다. 또한 제각기 여러 모양의 아픔과 고난을 다 안고 있어요. 취약성입니다. 왜요? 우리 모두는 질그릇이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은 보배를 담는 그릇을 ‘금그릇’으로 쓰지 않으시고 질그릇으로 하셨을까? 그런 의문이 들지 않습니까? 사실 우리 입장에서도 기왕이면 질그릇보다 금그릇이 좋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금그릇처럼 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고 인정받으려 하지 않습니까?

 

그리하여 비싸고, 값지고, 귀하고 잘 상하지도 않고 오래가고, 빛깔도 좋은 금그릇이 되려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금그릇이면 사람들은 그 안에 담긴 것보다 그 그릇에 더 주목할 겁니다.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 초대를 받아 음식이 나왔는데 그릇이 금그릇이에요.

 

이거 진짜 금이에요? 18k? 24k? 설마 순금? 사람들은 그 안에 무엇이 담겨 있든지 간에 당연히 그 그릇을 주목할 겁니다. 그 안에 무엇이 담겼느냐보다 이거 금이에요? 진짜 금이에요? 이 분이 그 유명한 분이에요? 이 분이 그렇게 권력이 있는 분이에요? 또한 그 금그릇 조차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금그릇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그 안에 보배를 귀히 여기겠습니까? 금그릇은 그 안에 무엇이 담겼든 크게 상관하지 않을 겁니다.

 

왜요? 자신이 너무 귀하니까. 주인도 금그릇이면 잘 쓰지 못해요. 그릇이 너무 귀해서. 긁힐까봐, 찌그러질까봐. 고이고이 금고에 간직해둘 겁니다. 그런데 질그릇은 그렇지 않아요. 워낙 자신은 내세울 것이 없기에 그 안에 담긴 보배만이 드러날 뿐입니다. 왜 주님은 우리와 같이 보잘 것 없고 평범하고 연약하고 취약한 우리를 그릇으로 삼으시는 것일까요? 7절에 그 이유가 이렇게 나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고후 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복음의 광채, 예수 그리스도를 질그릇에 담은 이유는 바로 심히 큰 능력이 내 자신,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께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해서라는 겁니다.

 

제가 이 교회에 후임 담임으로 청빙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축하해주신 분들도 계시지만 어떤 분들은 그러세요. 그 사람이 왜? 어떤 유튜브에서는 대놓고 이렇게 말하시더라고요.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그를 부른 이유는 무엇인가?” 그 영상을 보고 제가 아내에게 그랬어요. “그러게요 저도 그게 궁금합니다.”

 

제가 중대형 교회를 담임했던 것도 아니고, 책을 써서 유명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통해 그 이유를 알았습니다. 별로 내세울 것 없고, 보잘 것 없는 질그릇과 같은 저를 통해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음을 보여주려고 하시는구나... 함을 알았습니다.

 

2013년에 아내가 막내를 낳고 한 달 뒤, 피가 철철 흐르는 하혈을 하여 응급실 수술대 위에서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저는 아무런 힘이 없었습니다. 어린 세 자녀를 두고 죽어가는 아내를 3m 거리에 두고도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더라고요.

 

1시간 넘게 수술실 앞 복도에서 아내를 살려달라고 울부짖었습니다. 그 때 분명히 알았습니다. “생명이 전적으로 주님께 있구나. 인간의 삶, 내가 가진 것? 모두 주님이 주신 것이구나. 주신 분도 주님이시고, 취하실 분도 주님이십니다. 주님만이 영광을 받으소서...” 주님이 그 고백을 받으신 것 같아요.

 

“깨어진 그릇”이라는 책을 쓰신 김태훈 선교사님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시고 소아외과를 전공하신 분이십니다.

 

“너는 내가 보내는 곳으로 갈 수 있느냐”는 주님의 물음에 응답하여 에티오피아 선교사가 되신 분입니다. 그 분이 그곳에 간지 1년 8개월 정도 되었을 때, 남수단에서 사역을 하다가 몸이 이상함을 느껴서 검사를 해보니 파킨슨병을 진단받게 됩니다. 너무 큰 좌절이 온 거에요. 외과의사가 파킨슨이라니. 병의 원인도 치료법도 아직 없는데. 그 분이 다니엘기도회라는 기도회 강사로 초청을 받고 기도를 하던 중에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했답니다.

 

“하나님, 저는 깨어진 그릇 같아요.. 하나님께서 쓰시지 못하는 그릇이요...”

시편 31편의 기자가 이런 고백하지요.

“내가 죽은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나는 깨진 그릇과 같이 되었습니다..”

그 말씀을 읽으며 눈물이 주르륵 흐르더랍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이런 답을 주시더래요.

 

“너의 깨어짐 때문에 내가 너를 택한 거야.. 너의 깨어짐 때문에 내가 십자가에 달린 거야.”

자신을 택해주셨다는 말씀에 더욱 눈물이 나더랍니다. 박보영 목사님께서 이 책의 서평을 쓰셨어요. 중국에서는 귀한 손님이 오시면 가장 오래된 그릇, 실금이 가고, 이가 나간, 실은 버려야 맞는 그릇으로 대접을 한답니다. 왜 그럴까요? 주인이 가장 사랑하고, 자랑하고 싶고, 보여주고 싶은 보물이기 때문입니다.

 

지난주 유튜브 라디오로 성도님들의 감사 사연을 다 들어보니 하나 같이 다 금이 가고 이가 나갔고 어찌 보면 깨어진 그릇들입니다. 세상 기준으로 보면 버려야 하는 그릇들인지도 몰라요. 그런데 주님 보시기에는 어떠할까요?

 

주인이 가장 사랑하고 자랑하고 싶고 귀히 여기고 세상에 보여주고 싶은 그릇입니다. 왜요? 심히 큰 능력은 우리에게 없고,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누구보다도 분명하게 드러낼 그릇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중에 금이 가고 깨어진 그릇과 같다고 여기는 분들이 계십니까? 바로 여러분들이 주님이 가장 사랑하고 귀히 여기시는 그릇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고린도후서를 가만히 읽어보면 역시 두 명의 사도 바울을 보는 듯합니다. 하나는 어떠한 상황을 만나도 낙심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고 하나님만 담대히 의지하며 나아가는 바울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하나는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고 느끼고, 심지어 교회 문제로 인해 눌림이 심하여 걱정을 하는 바울의 모습입니다. 두 명의 다른 사람 같지만 실은 같은 사람입니다. 왜 성경은 이 바울의 두 가지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일까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그가 1차, 2차, 3차 선교여행을 하며 소아시아와 유럽에까지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바울 그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는 본래 이렇게 염려하고 걱정하고 눌리는 연약한 질그릇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그러나 그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그는 또한 전혀 다른 사람처럼 나타납니다.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해도 / 싸이지 아니합니다. 답답한 일을 당하지만 / 낙심하지 아니합니다.

 

박해를 받지만 /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지만 / 망하지 아니합니다. 

죽은 자 같아 보이지만 / 살아 있으며, 징계를 받는 것 같지만 / 죽임을 당하지 않고

근심하는 것 같지만 / 그 가운데서도 기뻐하며

가난한 자 같이 보이지만 /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이것이 바로 질그릇의 노래입니다. 질그릇 같은 우리 삶은 너무나 연약하고 깨지고 부서집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로인해 우리는 더욱 주를 의지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의 25-30여 년의 선교 기간 동안 고난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사망이 그의 삶과 사역 중에 역사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을 맞이하면 할수록 오히려 그는 하나님을 더 의지하였습니다. 그렇게 되니 그 질그릇 안에 담겨 있는 예수의 생명이 환히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10절입니다. 

 

고후 4:10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임 당하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도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의 죽임 당하심, 즉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그분의 생명, 그 보배가 담겨졌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영원한 예수의 생명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같은 역경과 고난을 통해 우리 삶에 더욱 분명히 나타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바울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이 은혜입니다. 그것으로 인해 예수의 생명이 더 드러나고 복음의 광채가 우리를 통해 환히 비취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고난 중에도 감사하고 주께 찬양할 때마다 예수님의 생명, 복음의 광채가 더욱 환히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눈물을 흘리고 아파하는 모습도 바울이고, 담대히 복음을 선포하며 슬픔 중에도 슬픔에 계속 머무르지 아니하고 항상 기뻐하는 자도 역시 바울입니다. 눈물을 흘리지 않아야 성숙한 그리스도인이고, 실패하지 않아야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비록 힘든 인생, 근심과 눈물로 인해 깨어진 그릇처럼 보일지라도, 슬픔과 아픔에 계속 거기에 머무르지 아니하고 부활이신 주님, 다시 살리실 생명의 주를 바라보기에 다시 일어서는 자, 그 자가 바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요 주께서 쓰시는 질그릇과 같은 사람입니다. 

 

저희 가정 이야기를 나누고 마치려 합니다. 저의 아버지는 감신대를 졸업하시고 어머님은 총신대를 나오셨습니다. 두 분이 결혼하셔서 아버지는 군목으로 섬기시고 제대 후에 70년대 후반(77년)에 개척교회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쁜 딸 셋을 낳으셨지요. 두 분이 기도하며 심방하며 열심히 목회하셨습니다. 1978년 4월, 부활절이 좀 지난 어느 날이었습니다. 부모님이 심방을 나가신 사이 집에는 세 딸이 있었습니다.

 

그 때가 각각 만 7세, 6세, 3세였습니다. 막내딸은 만 세 살로 어렸지만 이미 그해 5월에 어버이의 날 노래를 다 외우고 부를 정도로 똑똑한 딸이었습니다. 사택이 삼성로 근처였는데 집에서 길을 건너가야 가게가 있었습니다. 세 딸이 동네 친구들과 함께 길을 건너서 가게에 갔습니다. 네 살짜리 막내 주애가 둘째 언니에게 거북이 장난감이 함께 붙어 있는 과자를 사달라고 조릅니다. 그 과자는 50원짜리였습니다. 여섯 살 둘째 언니에게 마침 50원이 있었는데 그 50원은 실은 다음날 예배 때 내려고 따로 빼둔 십일조였습니다.

 

“안 돼, 이건 내일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십일조야. 나중에 엄마 오시면 사달라고 하자.”

막내 아이는 엄마가 오면 과자를 살 수 있다는 부푼 꿈을 안고 뛰어 찻길을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는 한창 강남이 개발을 하던 때였습니다. 커다란 덤프트럭들이 자재들을 잔뜩 싣고 빠르게 다니던 때였지요. 맞습니다.

 

트럭 운전수는 길을 건너던 그 막내아이를 보았지만 내리막길이었고 과속했기에 결국 치고 말았습니다. 너무나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어린 언니가 길에 쓰러져 있는 막내를 보았는데 이상합니다. 막내가 숨을 쉬지 않아요. “왜 주애가 숨을 쉬지 않을까? 어떻게 된 거지?”

 

사랑스런 그 막내딸은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던 겁니다. 사고 소식을 듣고 외할머님이 먼저 오셨고, 뒤늦게 부모님이 심방을 다녀오신 후에 병원으로 오셨어요. 외할머님이 어머님께 그러셨답니다. “애야, 보지 마라... 그냥 엉덩이만 툭툭 치고 보내거라..” 할머님은 사랑하는 딸이, 자신이 낳은 딸이 사고로 죽은 모습을 보면 더 큰 충격을 받을까봐 그러셨던 거예요. 결국 부모님은 그렇게 마지막 딸의 모습도 보지 못하고 사랑하는 어린 딸을 주님께 보내드려야 했습니다.

 

부모보다 먼저 죽은 자녀를 보내야 하는 그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아버지는 목회자였지만 딸의 죽음 앞에 통곡하며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장례식 사진 속에 아버지와 어머니는 약하고 약한 깨진 질그릇이었습니다. 어쩌면 사고의 충격으로, 깨어진 그릇이 되어 이제는 더 이상 목회를 하지 못할 수도 있는 상황이 된 겁니다. 힘들긴 했지만 장례식을 치렀습니다. 그리고 사고 수습을 해야 했는데 기도 중에 부모님은 그 사고를 내어 감옥에 갇혀 있는 트럭 운전수를 풀어달라는 요청을 합니다.

 

“그를 용서합니다. 그를 풀어주세요.” 당시 그 운전수는 젊은 가장이었는데 가정을 먹여 살리려고 그도 열심히 일하다가 사고를 낸 겁니다. 물건을 많이 나르면 나를수록 더 수당을 많이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트럭 회사에서 사망 “보상금”이 나왔습니다. 부모님은 그 전액을 고스란히 교회와 하나님께 드리기로 했습니다. 50원의 십일조가 아니라 한 아이의 값진 생명을 주님께 드린 것입니다. 과연 저희 부모님은 슈퍼 크리스천이었을까요? 아닙니다. 두 분은 사랑하는 딸을 먼저 데려가신 주님의 크신 섭리가 있음을 믿고 신뢰했습니다. 고난과 슬픔 중에도 감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로 꽤 오랜 기간 동안 사고의 아픔 때문에 잠자리도 함께 하지 못하셨다고 해요. 금그릇이 아니라 질그릇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 이후에 부모님의 목회에 큰 은혜와 부흥을 부어주셨습니다. 성도님들이 그 아픔 중에서도 여전히 신실하신 하나님을 고백하는 부모님을 보며 그분들 안에 계신 예수님의 영원한 생명을 보았던 것 아닐까요? 사고 이후 1년 정도 지났을 때, 둘째 딸이 자기가 꿈꾼 이야기를 해주더랍니다.

 

“엄마, 아빠, 막내 주애가 꿈에 나왔어요. 근데 머리를 다 깎았고 여자가 아니라 남자애에요..” 알고 보니 어머님이 사고 후 울다가 그런 기도를 하셨다고 해요. “주님, 아들을 제게 주시면 제가 뭐하겠어요. 주님의 사람으로 키울게요..” 약 1년 뒤에 이 가정에 남자 아이가 태어났고 40여년이 흘러 이렇게 여러분 앞에 서 있습니다.

 

저는 지난 8월에 귀국하고 몇 주 뒤에 막내 주애 누님이 묻힌 곳에 아버님과 함께 찾아갔습니다. 75년생이었으니까 살아 있다면 지금쯤 이제 중년의 나이가 되었겠지요. 저는 그곳에서 잠시 눈을 감고 조용히 누님께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주애 누나, 주님이 부르셔서 다시 한국에 왔어. 주님께서 이 보잘 것 없는 나를 쓰실 데가 있나봐. 누나 몫까지 두 배로, 아니 그 이상으로 살게. 누나의 생명, 예수님의 생명 받았으니 평생 죽어가는 이들을 살리며 살게. 그리고 천국에서 만나..” 비록 어린 셋째 누님의 죽음은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그 죽음이 아니었다면 아마 저는 태어나지 못했을 겁니다. 저의 삶 자체에는 한 사람의 죽음과 생명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인해 제 안에 영원한 예수 생명이라는 보배를 담게 되었습니다.

 

이 불완전한 세상을 살다보면 우리는 질그릇이기에 울어야 할 일, 슬퍼할 일이 참 많습니다. 그렇지만 계속해서 울거나 슬퍼하지는 않습니다. 어찌 보면 정신 나간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울다가 웃고, 웃다가 울고, 그리고 다시 웃을 수 있습니다. 왜 그렇죠? 우리 안에 보배로 계신 예수님 때문에. 영원한 생명이요,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실 부활의 예수님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부분의 14절에 보면,

 

고후 4:14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연약함과 고통 중에도 우리가 이 믿음, 영원한 생명, 부활에 대한 믿음으로 그분의 은혜를 감사할 때, 주님께서 영광 받으십니다. 그것이 우리를 위함입니다. 15절에,

 

고후 4:15 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그렇습니다. 질그릇의 어떠한 연약함도 그 안에 담긴 보배를 감출 수 없습니다. 이것이 은혜요 감사입니다.나의 은혜가 너에게 족하도다.. 이는 나의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아멘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오늘도, 내일도,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이 질그릇의 노래, 감사와 은혜의 노래를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질그릇 안에 담긴 영광스러운 보배2 /고후4:7-18 / 김형익 목사

2021-05-04 06:28:47

 

이제 바울 사도는 그런 영광스러운 자신의 직분에 대해서 말을 하다가 갑자기 어조를 바꾸면서 더욱자기가 하고 싶었던 가슴 속의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는 것입니다. 이 무슨 어울리지 않는 소리를 하고 있는 것입니까?

 

1. 그 영광이 질그릇에 담겨있다(4:7~15).

먼저, 우리가 풀어야 할 오해가 있습니다. 복음이 말하는 것은 우리가 본래 질그릇이었는데, 보배로 변화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질그릇인데, 보배를 소유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보배로울 수 있는 까닭은 우리가 소유한 보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근거가 언제나 하나님께 있습니다. 예수 몇 년 믿고 나면 자기가 보배인 줄로 착각하게 되면서 더 이상 감사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질그릇이라는 사실을 깊이 지속적으로 인식할수록 우리 마음에 감사가 넘치게 되어있습니다.

 

신앙을 가지고 사는 것은 자기 자신에 매여 사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잘났다고 생각하고, 못났다고 생각해서 거기에 묶이거나 매여서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고, 질그릇 안에 보배에 마음을 잡혀서 사는 것입니다.

 

A. 어울릴 수 없는 조화, 믿어지지 않는 진실(4:7)

여기 사도가 말하는 ‘질그릇’은 도자기와는 크게 구별되는 것입니다. 고대 세계에서도 이 흙으로 만든 토기는 오늘날의 일회용 용기와 비슷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런 저런 것들을 담아두고 깨지거나 잃어버려도 아깝지 않은 그릇이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질그릇을 통해서 우리가 흙으로부터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연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존재임을 보여주고 싶어합니다(창 2:7; 3:19). 옛날에 이사가려고 하면 항상 조심해야 하는 것이 장독이었습니다. 장독은 너무나 깨어지기 쉬운 것이었습니다. 질그릇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장독과는 비교할 수 없이 싼 것이었다는 게 차이라면 차이입니다.

 

지금까지 바울 사도가 말해왔던 그 영광에 관한 것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보배라는 말로 설명하고 있습니다(4:6). 이것이 바울 사도의 너무나도 영광스러운 직분에 대한 명칭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설명한 것과 같은 영광스러운 직분을 받은 당사자인 바울 자신은 너무나도 보잘 것 없는 사람, 질그릇에 불과한 사람이었습니다. 여기 복음의 역설이 있습니다. 우리의 운명과 존재, 신분을 바꾸어놓은 것은 바로 질그릇인 우리가 소유한 보배 때문입니다.

 

B. “나는 질그릇이다”(4:7~12).

바울 사도는 말합니다. “나는 질그릇이다.” 그는 도자기가 아니었습니다. 도자기처럼 보이는 거짓 사도들이 있었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의 사도직을 변호하면서도 자기는 질그릇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자기는 별 것 아니지만, 단지 자기 안에 담겨진 것에 대해서는 양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너무나 영광스러운 직분이고, 하나님의 영광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 자신도 이런 착각을 하게 될 때가 종종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귀중할수록 우리는 자신과 자신의 일을 구분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 사도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분명한 태도, 자신과 자신의 직분을 구별하는 것은 우리를 끝까지 겸손하게 만드는 소중한 태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자랑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여러분, 자신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순간,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기를 멈추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를 자랑하게 될터이고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할 것을 가로챔으로써 우리의 영혼을 파괴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에게 묻혀 살지 마십시오. 자기를 증명할 생각일랑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증명하십시오. 이것이 우리의 삶의 흔들릴 수 없는 원칙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면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은 보통 사람들이 듣기 좋으라고 말하는 것처럼 ‘너 없으면 안 된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그저 우리 자신이 거기에, 그것이 그리스도의 개선행진에 포로로 끼워진 것이라고 하더라도 감사할 뿐이고, 우리 자신이 질그릇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 보배인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담아주시는 것이 감사할 뿐인 것입니다.

 

질그릇에 보배가 있다고 해서 질그릇이 보배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질그릇의 영광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렇게 부르시길 기뻐하십니다. 왜냐하면 본래 우리가 질그릇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가 그냥 질그릇이라면 너무 칠하지 말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성화는 절대로 질그릇을 아름답게 칠해서 도자기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 기준의 괜찮은 것들로 우리 연약함을 감추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질그릇일 뿐이기 때문이며 그 연약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강함이 나타날 뿐 아니라, 우리 안에 감추인 보배의 빛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깨어지고 갈라진 틈으로 그 영광의 빛이 밖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강한 척, 외롭지 않은 척, 힘들지 않은 척, 잘 하는 척….이런 것들은 도자기로 착각하고 사는 겁니다. 우리는 약하고 죽어가고 있으며, 고난 가운데 사는 존재들입니다. 우리가 사는 방법은 자존심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사실, 오늘 본문은 바울의 인간 선언입니다. “나는 철인이 아니다. 나는 수퍼맨이 아니다. 나도 너희와 똑같은 인간이다. 나는 깨어지기 쉽고 약한 질그릇이다.”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어 8,9절에서 4중의 설명을 덧붙입니다. 이 설명들은 질그릇에만 어울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포로로서도 잘 어울리는 본문입니다. 4중의 어려움은 우리가 질그릇임을 보여주는 부분이고 4중의 ‘아니하며’란 부분은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첫째로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신약학자 메릴 테니(Merrill Tenney)는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We are squeezed but not squashed.” 우리는 사방으로 짜내듯이 눌리지만 으깨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이지요. 사도는 자기가 받은 고난들을 떠올리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메릴 테니의 번역입니다. “bewildered but not befuddled.” 당황하고 답답해하는 일은 있지만, 정신을 잃지는 않는다는 말이지요.

 

세째로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도는 핍박 속에서도 하나님의 함께 하시는 임재를 절대적으로 확신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도는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할 때 돌에 맞아서 죽게 되었지만(가해자들은 바울이 죽은 줄 알고 성 밖으로 시신을 끌어냈습니다) 그는 형제들 앞에서 다시 일어나 성으로 다시 들어갔다고 했습니다(행 14:19~20). 이런 모습이지요. 그는 거꾸러뜨림은 당했지만 결코 망하지 않았습니다. 메릴 테니의 번역입니다. “knocked down, but knocked out.”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는 일이나 답답한 일, 핍박과 거꾸러뜨림은 있습니다. 질그릇이니까요. 이게 얼마나 큰 위로예요? 바울 사도도 그랬다고 하는게 얼마나 큰 위로예요?

 

여러분, 그러니까 우리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도 낙심하지 말아요. 하지만 그가 그리스도인이기에, 보배를 가졌기에 결코 싸이지 않고, 낙심하지 않고 버린 바 되지 않으며 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가 도자기라서가 아니라, 그가 질그릇이지만 보배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진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죽음이라는 단회적 사건과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과정’을 의미합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의 고난과 그리스도의 고난, 자신의 죽음의 과정과 그리스도의 죽음의 과정이 깊이 연합되어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실 바울이 다메섹에 가는 길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을 때 주님은 바울에게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행 9:4). 바울은 예수님을 핍박하지 않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는데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바울 사도는 자신을 핍박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왜 나를 핍박하느냐’고 물으신다고 생각합니다.

 

고난과 죽음을 통해서 부활에 이르신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바울 사도의 최대의 소원이었다면 지금 바울 사도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지금 자기에게 중요한 것은 그리고 예수님을 만난 후에 자기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의 사역의 성공도 아니고, 자기를 멋있게 증명하는 것도 아니고 오직 예수의 생명이 자기 안에 나타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요. 자기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서 말이지요. 사실, 우리 인생에 일어나는 고난과 죽음은 성화의 방편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가 바라는 것은 12절에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원리입니다. 너희가 살도록 내가 이렇게 고난 가운데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난을 대적하기 보다는 고난을 끌어안고 가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보배를 드러낼 수 있는 고난인 줄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바울에게는 기회지요. 성화라는 큰 그림에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 사도는 너희가 살 수만 있다면, 깨달을 수만 있다면 나의 고난은 가치가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C. 마지막에는 다 밝혀질 것이다(4:13~15).

다시 한 번 바울 사도는 자신이 고린도 사람들과 함께 마지막 날 부활의 날에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날이 있을 것이며 그 날 부끄럽지 않게 행하노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은 교회인 고린도 성도들을 위해서 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그들이 다 바울의 사역으로 인하여 감사하게 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표명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마지막 날에는 숨겨진 것이 없이 다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두려워했던 바울 사도와 같이 우리 모두가 그렇게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마음

A. 능력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않음을 알게 하려 하심이다(4:7).

도대체 하나님께서 왜 영광을 도자기가 아닌 일회용 그릇에 불과한 질그릇에 담아두기를 기뻐하셨을까요?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4:7b). 사도가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과 그 영광스러운 직분과 자신을 구별하지 못함으로써 자신을 도자기로 착각하지 않도록, 그리고 보는 이들이 다 ‘하나님의 능력이구나’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되도록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루는 어거스틴에게 어떤 이가 와서 물었답니다. “당신이 하실 수 있는 일은 얼마나 됩니까?” 어거스틴이 대답합니다. “이것이 대답이 될 겁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다보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가장 약하고 가장 조그만 자가 땅에 어디 있나 보자’.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나를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찾았다. 그 친구는 결코 자랑하지 못할 게다. 그는 자기의 미천함 때문에 내가 자기를 사용하는줄 알게 될테니까.’”

 

질그릇이 자신을 질그릇으로 아는 것은 다행한 일이고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비극은 질그릇이 자신을 도자기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잠깐 쓰임을 받다가 죽어 주 앞에 가게 될 존재들입니다. 너무 크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B.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다(4:15).

결국은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셨으면 좋겠다는 것이 바울 사도의 간절한 마음이었습니다. 왜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영광에 그토록 집착하는 것일까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바울 사도가 회심한 것, 그리고 그가 점점 거룩함 가운데 변화되어 간 성화 이 모든 것이 무슨 프로그램이나 단순한 성경공부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주의 영광을 봄으로써 이루어진 변화였기에, 그가 그 영광을 보고 알았기에 그는 그 영광에 집착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을 말하는지 아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알고 계십니까? 아신다면, 여러분은 바울 사도와 한 가지로 그분의 영광을 추구하며 자신을 낮추며 살아가시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알지만, 여러분 자신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3. 낙심하지 않는다!!!(4:1,16~18)

바울 사도는 이런 모든 이야기를 고린도교회에 나누면서 말합니다. “나는 낙심하지 않는다.” 낙심할 만한 상황입니다. 답답하고 우겨쌈을 당합니다마는, 낙심하지 않고 오히려 담대히 말할 수 있습니다. 질그릇은 시간이 흐를수록 금이 가고 깨어지고 부서지겠지만, 부서질수록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로와지는 것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부서질수록 부서진 틈새로 보배의 광채가 밖으로 찬연하게 비추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질그릇은 시간이 흐르면 용도를 다하지만, 결국 새 것, 영광스러운 것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질그릇이 부서지는 것 때문에, 늙어가는 것 때문에, 몸이 병약해지는 것 때문에, 마음의 고생이 너무 심한 것 때문에 그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날로 새로와지는 은혜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삶의 신비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말씀을 맺습니다.

 

A. 질그릇과 보배를 구별해라(4:16).

여러분이 질그릇이란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단지 거듭난 신자들이 그 질그릇 안에 엄청나게 영광스러운 보배를 가졌다는 것, 하나님의 영광을 담고 있다는 것, 복음의 영광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 놀라운 사실이요, 감당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그 보배를 제가 가졌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오해하겠습니까? 능력이 제게 속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능력의 심히 큰 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라고 나를 보는 사람마다, 우리 교회를 보는 사람마다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드온의 횃불을 생각해보세요. 미디안의 거대병력을 대항하여 싸운 소수의 기드온의 병사들의 무기가 무엇이었는지를 말입니다. 항아리와 그 속에 숨긴 횃불이었습니다. 항아리를 깨자 그 속의 횃불이 빛을 발하면서 미디안 진영에 놀라운 공포를 몰고 왔고 전쟁을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항아리는 깨어지기 위해서 존재했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질고 속에서 깨어질 때 우리 안의 보배가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B. 환난은 잠깐이고 가볍지만, 영광은 영원하고 무겁다(4:17).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여러분, 기억합시다. 환난은 잠깐입니다. 그리고 가볍습니다. 영광에 비하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영광은 영원하고 영광은 너무나 무거운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질그릇이 만나는 환난은 보배를 드러내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가 가진 환난에도 불구하고, 고통에도 불구하고 암에도 불구하고 질병에도 불구하고 장애에도 불구하고 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겪는 환난 때문에, 고통 때문에, 암 때문에, 질병 때문에, 장애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을 더욱 드러나게 되며, 우리 안에 있는 보배인 빛이 온 세상을 향하여 비추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확인해야만 합니다.

 

복음의 목적은 편안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을 더 깊이 알고 그분을 더 깊이 신뢰하게 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목적은 나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깊은 사랑에 빠지고 그분의 영광을 너무나 사모한 나머지 나의 고난이 그분의 가치를 비출 수 있다면 기뻐함으로 그 고난을 참게 하는 것입니다. 또 복음의 목적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편안함이나 부유함이나 안전을 누리는게 아니라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분의 영광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 때문에 기꺼이 고난을 선택한다면 그것으로 하나님의 영광은 빛나게 되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C.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에 인생을 건다(4:18).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그래서 바울 사도는 자기의 눈을 고정한다고 말합니다. 어디에요?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에 말입니다. 왜냐하면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한 가치라는 사실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것은 질그릇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 안에 있는 육안으로는 볼 수 없으나 믿음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영광, 그 보배에 자신의 눈을 고정시키기로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거기에 우리의 인생을 걸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위해서 시간을 쓰셔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열망이 있었으면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복음의 빛을,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온 세상에 드러내고 싶은 열망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는 열망, 비록 나는 깨어지지만 이 깨어짐의 아픔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수만 있다면 더욱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하는 열망 말입니다. 그런 열망이 저와 여러분, 그리고 우리 온 교회를 삼켰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간절히 부탁합니다.

질그릇을 영화롭게 하느라 인생을 허비하지 마십시오. 질그릇에 덧칠을 하고 기름을 바르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질그릇은 시간이 다하면 부서지고 버려질 것입니다. 땅에 묻혀지고 버려질 것입니다. 질그릇의 영광은 겉에 있지 않고 속에 그것이 무엇을 담고 있느냐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 앞에 여러분 자신을 드리십시오.

영원을 위해 사십시오.

현재의 고난을 이겨내십시오.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흘러나오게 하는 것이 고난을 이기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포로일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질그릇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 포로는 그리스도의 승리를 더욱 영화롭게 하는 포로이며, 그 질그릇은 자기 안에 감추인 보배의 영광을 더욱 놀랍게 드러내는 질그릇입니다.

하나님께서 질그릇일 뿐인 저와 여러분의 삶을 그런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은혜로 채워주시고 인도하여 주시기를 구합니다.

그리고 여러분 안에 계시는 보배이신 그리스도로 인하여 기뻐하십시오. 아멘.

 

 

질그릇에 담긴 보배 /고후4:1-18/ 유기성목사

2021-01-26 02:34:09

 

어려운 일이 많겠지만 예수님과 동행하는 사람으로서 낙심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저는 ‘예수님과 친밀히 동행하며 살자’고 예수동행운동을 이끌고 있는데, “안돼요” “못하겠어요” “나는 안 되나 봐요” 하며 낙심한 사람을 많이 봅니다.

 

가정에서 배우자나 자녀나 부모에 대하여 낙심한 사람도 많습니다.

경제적으로 좌절한 사람도 많고 아직 젊은데도 자신의 삶을 포기한 청년들도 있습니다.

낙심이 무서운 것을 알아야 합니다.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습니다.

 

단테의 신곡에 보면 지옥문에 ‘이곳에 들어오는 자는 모든 희망을 버려라’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낙심은 지옥을 사는 것입니다. 믿음을 잃었다는 의미입니다. 영적인 문제입니다. 마귀가 낙심의 영으로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아 파멸로 이끌어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낙심할 일이 많은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개척한 고린도 교회 안에 다툼과 온갖 문제가 일어나고 자신을 거짓 사도라 매도하는 사람들이 생기고 교회를 향한 핍박은 점점 더 강해지며, 몸도 질병으로 고통을 당했습니다.

 

이런 형편인데도 사도 바울은 󰡐낙심하지 않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고후 4:1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를 힘입어서 이 직분을 맡고 있으니, 낙심하지 않습니다.

 

이 말은 사도 바울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여도 누구나 낙심하지 않는 믿음을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믿어져야 낙심하지 않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믿었다는 증거는 그가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다고 고백하는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2 우리는 부끄러워서 드러내지 못할 일들을 배격하였습니다. 우리는 간교하게 행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환히 드러냄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의 양심에 우리 자신을 떳떳하게 내세웁니다.

 

누가 이런 말을 당당히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시고 언제나 함께 하시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 사람은 이렇게 살 수도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마귀는 사람들이 살아계신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도록 계속하여 우리 마음을 혼미하게 만듭니다.

:4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서,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선포하는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그렇게 복음을 전해도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도 못하는 것은 마귀가 그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선포하는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태양 빛이 아무리 강렬하여도, 손으로 눈만 가려도 캄캄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해서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예수님을 아는 빛을 비추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6 "어둠 속에 빛이 비쳐라" 하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 속을 비추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의 빛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질그릇 같은 우리 안에 보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하심을 아는 것입니다.

:7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 엄청난 능력은 하나님에게서 나는 것이지, 우리에게서 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어떤 형편에서도 낙심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만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다 이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말할 수 없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 동행운동을 하면서 “난 안되나 봐요” 하는 낙심의 말을 수도 없이 들으면서도 저는 “아닙니다. 반드시 됩니다. 주님이 하실 것입니다”라고 권하는 이유는 제가 그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이 제게 질문하였습니다. “목사님은 카리스마가 전혀 없는데 어떻게 그렇게 유명하세요?” 제가 궁금한 질문입니다. 몇 주 전에는 중국 동포 한 분이 예배 후에 나와서 물었습니다.

 

“주위에서 선한목자교회에 가서 유기성목사님 설교를 들어보라고 하도 권하여 멀리서 찾아 왔는데 목사님에게는 성령의 능력은 없어 보이네요. 성령의 능력이 강한 목사님이 있는 교회를 소개해 주세요.”

 

너무나 해맑고 순진한 얼굴로 질문하시기에 기분이 나쁘지도 않았습니다. 저도 “나는 학식도 부족하고 말재주도 없고 능력도 없고 지혜도 부족한데 어떻게 이 많은 교인들 앞에서 설교하고 예수동행운동을 이끌어 가는가?” 하는 생각에 낙심에 빠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이 모든 일을 네가 아니라 내가 하는 줄 모르느냐? 너는 단지 내가 전하라고 하는 말을 전하기만 하면 된다. 너는 사람들의 관심을 오직 나에게 집중하도록 해야 한다.”

 

이 말씀을 듣고 제가 능력이 없고 질그릇임에 감사하였습니다. 제가 질그릇 같기에 사람들이 제가 아니라 주님을 주목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8절과 9절에서 그동안 자기가 복음 전하느라고 당한 모든 약함을 네 가지의 고난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방으로 죄어들어도, 답답한 일을 당해도, 박해를 당해도,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그런데도 사도 바울은 “움츠러들지 않으며, 낙심하지 않으며, 버림받지 않으며, 망하지 않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위대한 사도였습니다. 그런데 그 위대한 사역을 사도 바울이 했습니까?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한 것이라고는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 고백한 것입니다.

고후 4;10-11에서도 같은 고백을 합니다.

 

고후 4:10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임 당하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도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11 우리는 살아 있으나, 예수로 말미암아 늘 몸을 죽음에 내어 맡깁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도 또한 우리의 죽을 육신에 나타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 결과 그는 ‘예수님께서 나를 통하여 역사하셨다’ 하고 선언할 수 있었습니다.

롬 15:17-18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하게 하기 위하여 나를 통하여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저도 부족함을 느낄 때마다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고백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주님께서 역사하셨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예수님이 정말 마음에 거하심을 믿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13 성경에 기록하기를, "나는 믿었다. 그러므로, 나는 말하였다."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와 똑같은 믿음의 영을 가지고 있으므로, 우리도 믿으며, 그러므로 말합니다.

 

우리가 이처럼 정말 예수님을 믿고 고백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점점 더 많은 사람에게 퍼져서,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15) 됩니다.

 

우리는 이따금 약할 때가 있는 것이 아니고, 언제나 약한 존재입니다. 이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오직 하나님께 맡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너희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시 37:15) ‘너희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잠 16:3) ‘너희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시 55:22) ‘너희 모든 염려를 여호와께 맡기라’(벧전 5:7) 하였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예수님은 이처럼 우리 안에 거하시는데, 이 엄청난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안에 거하심을 믿지도, 삶을 예수님께 맡기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집에 보물 상자를 두고도 돈이 없어서 굶고 사는 것입니다.

질그릇 같은 자신만 주야로 묵상하며 사는 것입니다.

 

안소니 블룸(Anthony Bloom)은 주님의 임재는 도전이고 충격이며 기절할 만큼 놀랄 일이라면서 “주님을 만난다는 것은 ‘호랑이 굴’에 들어가는 것을 뜻한다. 어쩌다 마주치는 고양이가 아니라 바로 호랑이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것이 호랑이와 함께 있는 심정입니까?

 

아프리카 코스타를 갔다가 민속촌에 있는 사자 동물원에 갔는데 새끼 사자들과 함께 어울려 만져도 볼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우리에 들어가니 새끼 사자도 큰 개만 했고, 같이 간 송솔나무 집사님은 등을 보인 바람에 새끼 사자에게 어깨가 물리기도 했습니다.

 

호랑이나 사자를 사진이나 영상으로 보는 것과 실제로 보는 것은 엄청난 차이입니다.

그처럼 예수님에 대하여 들어서 아는 것과 실제로 만나 동행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과 동행할 때 우리는 어떤 형편에서도 낙심하지 않게 됩니다.

:16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겉 사람은 늙지만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집니다.

고난을 겪게 되지만 비교할 수 없이 영원하고 크나큰 영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17에서 ‘일시적인 가벼운 고난’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이 정말 놀랍습니다. 사도 바울이 겪은 고난은 실제로는 엄청난 고난이었습니다. 매도 맞고 감옥에도 갇히고 죽을 뻔한 상황을 수도 없이 겪었습니다. 그런데도 ‘일시적인 가벼운 고난’이라니요!

사도 바울은 보이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보물이신 예수님과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니 어떤 고난으로 낙심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중에 아직도 그 눈이 뜨이지 않아서 답답하십니까?

 

R. A. 토레이 목사님에게 어떤 여인이 찾아와서 안타까운 상담을 했습니다.“목사님 저는 예수님을 뜨겁게 믿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잘 되지 않습니다. 부흥회에도 참석해보고 은혜 받으려고 애를 썼는데 은혜가 오지를 않습니다. 열심히 교회 생활을 해도 은혜가 없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목사님께서 그 여성도에게 물었습니다. “성도님은 뭐라고 기도하십니까?” “기도제목이야 많지요.” “그렇게 하지 말고 한 가지 제목으로만 기도하십시오.” “무슨 기도요?” “하나님 아버지, 나 자신을 알게 해주세요.”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그녀는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나 자신을 알게 해주세요. 나 자신을 바로 보게 해주세요." 간절히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그녀의 모습을 보도록 하셨습니다.

 

그녀는 목사님께 와서 “목사님, 제가 얼마나 추하고 더러운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성한 곳이 없었습니다. 더러움과 시기, 질투, 거짓, 명예욕, 재물욕 등으로 너무 더럽고 추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습니다. 너무 창피해서 살 수가 없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목사님은 그에게 말했습니다. “이제는 십자가의 예수님을 알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세요.." 그녀는 그렇게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자신을 대신하여 피 흘리시는 모습을 보여 주시며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그 일로 너무나 기뻐하는 그녀에게 목사님은 말했습니다.

“이제부터는 은혜를 은혜 되게 하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주님을 사모하는 자에게 주님은 반드시 역사하십니다.

여러분 모두, 세상이나 사람의 눈으로 자신을 보지 않고, 온전한 믿음으로, 함께 하시는 보배로우신 주님을 바라보기를 축원합니다.

 

찬양: 약할 때 강함 되시네

 

admin

 

 

예수님의 생명으로 사는 성도들 /고후4:7-18/ 곽창대 목사

2020-05-31 08:20:44

 

  모든 성도는 “살아 있는 자들”입니다(11절). 반면 육체적으로는 살아있다 할지라도 영적으로는 “죽은 자”가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허물과 죄 때문에 죽었습니다(엡 2:1~3). 그 결과 사탄의 유혹에 빠져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됩니다. 그들에게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일은 영적으로 살아나는 것입니다.

 

자기의 허물과 죄를 해결하고 하나님과 생명적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일을 우리 죄인들이 스스로 할 수 없습니다. 죽은 자들을 살려내는 일은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엡 2:4~6). 오직 하나님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허물과 죄를 제거하고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게 하십니다(요일 5:11~13). 

 

  우리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구주와 주님으로 믿는다면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속에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허물과 죄를 십자가에서 대속하신 것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는 우리의 허물과 죄를 회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믿음과 회개를 통하여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는 세례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세례는 물 아래에 있다가 물 위로 나오는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사는 것을 뜻합니다. 죄에 대하여 죽는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의에 대하여 산다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믿음으로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가 다시 살아났을 뿐 아니라 그 후로도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사는 자가 되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사는 자는 보배를 질그릇에 가진 자와 같습니다(7절). 질그릇은 성도를, 보배는 성도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그리스도는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생명의 주님이시기에, 주님을 모시고 사는 성도는 날마다 새 생명의 위력을 경험하며 살게 됩니다(8~9, 16절).

 

거룩한 소망이 불 같이 일어나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 소망을 두 가지로 요약하면, “현재적인 소망(10~11절)”과 미래의 “최종적인 소망(14, 17절)”입니다. 바울의 최고 소망도 예수님의 부활을 생생하게 경험하는 것이었습니다(빌 3:10~12).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믿습니까?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예수님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속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이 있습니다. 부활을 생생하게 경험하려면, 우선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해야 합니다(13~14절).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뿐 아니라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10~11절). 

 

  그러면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가 무엇일까요? 본문에서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유익을 위하여 어떠한 고난이라도 달게 받겠다고 다짐합니다(12절). 바울과 같이 우리도 형제를 위하여 사명의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성도는 자신을 죽음에 내어줄 때 더욱 강렬하고 생생하게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부활신앙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날마다 죽노라!”라고 고백했습니다. 날마다 죽을 때 날마다 부활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생생하게 경험하고 싶다면 죽으십시오! 사명의 십자가를 지십시오! 형제와 교회를 위해 고난을 달게 받으십시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십시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되 최선을 다해 사랑하십시오!

 

그리하면 여러분 안에 예수님의 생명이 약동할 것입니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믿음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세상에 흔들리는 자가 아니라 세상을 흔드는 자가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 되라고 예수님께서 생명의 영이신 성령님으로 우리 안에 내주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성찬식을 통해 부활을 경험합니다. 성찬식에 사용되는 떡은 예수님의 몸을, 포도주는 예수님의 피를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떡과 포도주는 예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성찬식을 통하여 자신을 내어주십니다.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을 주십니다.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은 부활의 영이요 생명의 영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도들에게 생명의 성령을 주심으로써 성도를 살리십니다. 예수님께서 성도들에게 부활의 영이신 성령을 주심으로써 부활을 경험하며 살게 하십니다. 그래서 겉사람은 낡아질지라도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집니다.

 

  생명의 영이요 부활의 영이신 성령님을 힘입어 사는 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예수님의 제자로 삽니다. 형제와 교회를 사랑하여 자신을 내어줍니다. 세상을 변혁하는 사람이 됩니다. 생각대로 되지 않아도 결코 낙심하지 않습니다. 최후 승리를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심령에 보배가 있습니다. 그 보배는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보배는 예수님의 생명입니다. 생명의 영이요 부활의 영이신 성령님입니다. 질그릇 같은 우리 안에 그 보배가 있으므로 우리는 결국 승리합니다.

  

전문

오늘 본문에서 주로 등장하는 인칭대명사는 “우리”입니다. 문맥상으로 볼 때 “우리”는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사도 바울을 포함하여 그와 함께 동역하고 있는 복음전파자들을 일컫습니다. 11절에서는 복음전파자들을 총칭하여 “우리 살아있는 자”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복음전파자들만 아니라 모든 성도가 다 “살아있는 자”들입니다.

 

성경은 가르칩니다. 육체적으로는 살아있다 할지라도 영적으로는 “죽은 자”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영적으로 “죽은 자”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떨어져 사는 자를 뜻합니다. 반대로 영적으로 “살아있는 자”는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교제하며 사는 자를 뜻합니다. 

 

이것을 엡 2장에서 잘 말씀하고 있습니다. 

 

(엡 2:1-3) 『[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금방 읽은 말씀은 사람이 영적으로 죽게 된 원인을 말씀합니다. 무엇 때문에 사람이 죽었다고 합니까? 자기의 허물과 죄 때문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자는 허물과 죄 가운데서 생활합니다. 세상 풍속을 좇습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사탄)를 따릅니다. 사탄의 유혹에 빠져 자기 마음대로 삽니다. 결국 하나님의 진노(심판)를 받게 됩니다.

 

그러하기에 사람에게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것은 영적으로 살아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는 사는 길은 하나님과 생명적 관계를 맺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런데 그 일을 우리 죄인들이 스스로 할 수 없습니다. 죽은 자들이 스스로 살아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들을 살려내는 일은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엡 2:4-6에서 잘 말씀하고 있습니다. 

 

(엡 2:4-6) 『[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 성경구절은 우리의 허물과 죄를 제거하고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게 하신 분이 계시는데 그 분이 바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보다 명확하게 설명하는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요일 5:11-13입니다.

 

(요일 5:11-13) 『[11]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1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여러분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구주와 주님으로 믿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생명이 여러분 속에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허물과 죄를 십자가에서 다 대속하신 것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는 우리의 허물과 죄를 회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을 신학용어로 “생명에 이르는 회개”라고 부릅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과 회개를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세례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세례는 물 아래에 있다가 물 위로 나오는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사는 것을 뜻합니다. 죄에 대하여 죽는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의에 대하여 산다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본문 11절의 “우리 살아있는 자”란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믿었을 때 즉시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가 다시 살아났을 뿐 아니라 그 후로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사는 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사는 자를 본문 7절에서는 보배를 질그릇에 가진 자라고 묘사합니다. 질그릇은 성도를 가리킵니다. 보배는 성도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는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생명의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주님을 모시고 사는 성도는 날마다 새 생명의 위력을 경험하며 살게 됩니다. 

 

그 새 생명의 위력을 8-9절에서 잘 묘사합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그리고 16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이렇게 새 생명을 누리며 사는 성도에게는 거룩한 소망이 불 같이 일어납니다. 그 소망을 두 가지로 요약하면, 현재적인 소망과 미래의 최종적인 소망입니다. 

 

10-11절이 성도의 현재적인 소망에 관한 말씀합니다. “[10]…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을 지금 여기서 풍성하게 경험하며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14절은 미래의 최종적인 소망에 관한 말씀입니다.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날, 모든 성도들이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함으로써 예수님의 영원한 생명을 온전히 누리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17절에서는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이 우리에게 이루어질 것이라고 바울은 최고의 강세어법으로 표현합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3:10-12에서도 자신의 최고소망이 예수님의 부활을 생생하게 경험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빌 3:10-12)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믿습니까? 지금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온 세상을 통치하고 계시는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속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무덤을 깨치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을 우리가 어느 정도로 경험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생명에 전율하고 있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질문이 생깁니다. 어떻게 하면 주님의 부활을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주님의 부활을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을까요? 우선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해야 합니다. 13-14절을 보세요. “[13] 기록된바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었으므로 또한 말하노라 [14]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뿐 아니라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부활을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습니다. 10-11절을 보세요. “[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 우리 살아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질 때, 예수님을 위하여 고난을 달게 받을 때 예수님의 부활을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생생하게 경험하려면 항상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성도 여러분, 십자가 없이는 부활이 없습니다. 예수님께 십자가가 없었다면 부활도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집니다. 우리가 부활을 경험하려면 반드시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왜 우리에게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십니까? 그래야 날마다 부활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가 무엇일까요? 사명의 십자가입니다. 그 사명은 형제를 위하여 지는 십자가입니다. 12절을 보세요.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사도 바울과 동역자들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살게 하려고 죽음까지도 감수하겠다.”는 뜻입니다. 15절에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유익을 위하여 어떠한 고난이라도 달게 받겠다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죽은 자”는 더 이상 죽을 수 없습니다. “살아있는 자”만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자”가 죽음에 자신을 내어준다 해도 죽지 않습니다. 이유는 영원한 생명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자신을 죽음에 내어줄 때 더더욱 강렬하고 생생하게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부활신앙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날마다 죽노라!”라고 고백했습니다. 날마다 죽을 때 날마다 부활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질문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부활을 지금 여기서 생생하게 경험하고 싶습니까? 그러면 죽으십시오! 사명의 십자가를 지십시오! 형제와 교회를 위해 고난을 달게 받으십시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되 최고로 사랑하고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람들을 사랑하되 최선을 다해 사랑하십시오! 그리하면 여러분 안에 예수님의 생명이 약동할 것입니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믿음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세상에 흔들리는 자가 아니라 세상을 흔드는 자가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 되라고 예수님께서 생명의 영이신 성령님으로 우리 안에 내주하고 계십니다.

 

이제 성찬식을 거행하려고 합니다. 성찬식에 사용되는 음식은 두 가지입니다. 떡과 포도주입니다. 떡은 예수님의 몸을 상징합니다. 포도주는 예수님의 피를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떡과 포도주는 예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떡과 포도주를 주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제가 여러분들에 나누어주지만 실상은 예수님께서 나누어 주십니다. 제가 어떻게 예수님을 여러분에게 줄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식탁에 오셔서 자신을 주십니다. 신령한 눈이 열려 자기 자신을 내어주시는 예수님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주신다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자신의 생명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자신의 영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은 다름 아닌 성령님입니다.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은 부활의 영이요 생명의 영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도들에게 생명의 성령을 주심으로써 성도를 살리십니다. 예수님께서 성도들에게 부활의 영이신 성령을 주심으로써 부활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겉사람은 낡아질지라도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집니다.

 

이처럼 생명의 영이요 부활의 영이신 성령님을 힘입어 사는 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예수님의 제자로 삽니다. 형제와 교회를 사랑하여 자신을 내어줍니다. 세상을 변혁하는 사람이 됩니다. 생각대로 되지 않아도 결코 낙심하지 않습니다. 최후 승리를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7절을 함께 봉독합시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여러분, 우리의 심령에 보배가 있습니다. 그 보배는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보배는 예수님의 생명입니다. 생명의 영이요 부활의 영이신 성령님입니다. 바로 질그릇 같은 우리 안에 그 보배가 있으므로 우리는 결국 승리합니다.

  

오늘 성찬에 참여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부활을 경험하게 하시는 생명의 영이요 부활의 영이신 성령님의 내주를 확인함과 동시에 이제 성령님으로 충만하여 담대히 세상을 달려 나가 부활의 증인으로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고후4:10-11/ 체험하는 복음/ 조용기목사

2018-07-14 08:14:36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후서 4장 10-11절

 

 

신앙이란 이론적, 형식적, 이성적 3차원의 세계를 의지하여 말하는 철학이 아닙니다. 제아무리 그 어떤 이론을 개발해도 살아서 체험할 수 있는 은혜가 아니고서는 믿을 수가 없습니다. 고로 신앙이 체험에 뿌리를 두고 가슴에 뿌리를 내려야 사울이 바울이 되는 신앙인 것입니다. 맛있는 요리를 앞에 두고 그 맛에 대해 아무리 설명을 해도 먹어보지 않고는 그 맛이 알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멋진 풍경을 그림으로 그려 와도 실제로 가서 보는 것에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대해서 이론적인 설명을 아무리 듣는다고 해도 하나님을 직접 만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기막힌 신앙의 이야기를 한다 해도 체험해보는 것보다 못합니다. 신앙은 체험해보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한때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을 핍박하고 스데반을 죽일 때, 보증자로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맡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토록 예수 믿는 사람들을 붙잡는데 앞장섰던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강한 불빛 중에 임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이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는가?’ ‘뉘십니이까?’ ‘내가 너를 나를 핍박하는 예수라.’ 예수님의 환상을 직접 보고 거꾸러져서 기독교 역사상에 비교할 수 없는 위대한 사도가 되었던 것입니다. 사람이 그렇게 일심하여 새사람이 되려면 체험을 해야되는 것입니다.

 

1. 항상 예수님의 죽음을 짊어져라 (항상 예수님의 죽음을 짊어짐)

 

항상 예수님의 죽음을 우리 몸에 짊어지면 살아있는 예수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10절로 11절에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엇이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였습니까? 예수를 죽인 것은 하나님을 반역하는 죄악인 것입니다. 또 우리 삶 속에 있는 정신적인 불안, 공포, 절망, 미움, 파탄, 답답한 마음입니다. 폐병, 심장병, 신장병, 암 등도 포함됩니다. 나아가 우리 인생에 헐벗고 굶주리고 괴로운 삶을 사는 고통스러운 삶 등이었습니다. 만일 이런 것들이 없었으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걸머질 필요가 없습니다.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사람을 멸망시킬 죄가 횡행하니까 예수님이 사람들을 건지러 이 세상에 오셔서 이 부정적인 것하고 싸운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것을 대적해서 싸워야 우리를 건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죽인 것을 우리가 알고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지고 나가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산 생명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말하기는 쉬워도 깨닫는 것이 참 힘듭니다. 내가 예수 죽인 것을 같이 걸머지면 예수 살린 것이 내 몸에 역사해서 그리스도와 같이 부활의 축복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영혼이 못되는 것을 예수님이 짊어지셨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끌어안으면 영혼이 잘못되게 하는 것을 끓어안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 예수와 일체된 삶을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것을 우리가 그대로 다 짊어짐은 예수와 똑같이 죽음에 동참하게 되고 예수 동참하게 된 그 속에서 똑같이 예수 부활하는데 같이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죽음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예수의 부활을 절대로 체험할 수 없습니다.

 

삶의 위기를 만날 때,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문제와 싸워보기도 전에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눈앞에 서 있는 거대한 골리앗을 보고 지레 겁을 먹었습니다. 사무엘상 17장 24절에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그 앞에서 도망하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려움이 마음을 사로잡자 싸워보기도 전에 도망 쳤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골리앗 앞에 담대히 나갔습니다. 왜냐하면 체험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목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도와주심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다윗은 “야훼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사무엘상 17장37절)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골리앗이 이스라엘 백성을 침략해 올 때 다른 사람들은 다 기절초풍을 했는데도 다윗은 “무슨 소리 하는거냐? 곰과 사자도 내가 잡았는데 그 곰 같은 다윗, 사자 같은 다윗을 무얼 두려워하겠어?”라는 체험적인 신앙으로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신명기 7장 21절에 “너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의 하나님 야훼 곧 크고 두려운 하나님이 너희 중에 계심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같이 계시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삶에서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을 체험하면 두려움을 이기고 믿음이 더 견고해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힘의 논리가 지배합니다.

 

힘이 있는 사람이 힘없는 사람을 이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지 않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대개 힘이 없고 약하고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복음을 전할 때 그 힘이 얼마나 강했는지 로마제국이 거꾸러졌습니다. 힘이 없어도 하나님이 같이 계시니까 로마 제국을 무너뜨린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은 유대의 권력자들 앞에서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사도행전 4장20절)라고 전합니다. 사도들이 그처럼 담대할 수 있었던 것은 보고 들었기 때문에, 즉 체험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고 하나님 섬기면서 교회 왔다 갔다 하더라도 체험하지 못하면 하루에도 열두 번 믿었다가 안 믿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 믿으면 예수님 흔적을 만나봐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무리 예수님 믿는데 대해서 조롱을 하더라도 그 조롱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미국 모자이크교회를 담임하는 어윈 맥매너스 목사님은 자기 교회에 관한 책을 썼는데 제목이 ‘멈출 수 없는 힘’입니다. 책 제목이 말해 주듯이 초대교회는 수많은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복음 전파를 멈추지 않았는데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복음의 능력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 교인들은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사람이 대다수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라고 하더라도 물고기 잡는 사람, 세금 징수원 등 사회 하층계급에 속하는 사람이 거의 전부였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수많은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는가?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복음의 능력을 체험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어떻게 체험했느냐? 예수님 세상 뜨시고 난 다음에 제자들이 마가요한의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 할 때 오순절 날에 하늘에서 성령이 임하여 성령충만함을 받았습니다. 모두다 성령이 불같이 임하여서 온 몸에 하나님의 능력이 임했을 뿐 아니라 성령이 오신 증거로써 자기가 배우지 않은 방언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성령침례를 받고 방언하고 그러니까 예수님을 상상 생각 속에서만 믿은 것이 아니라 온 몸으로, 온 말로 목욕하듯이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했기 때문에 그들 입으로 그들은 죽은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전도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에 일천만 성도들이 모두다 성령의 불을 받았다고 생각하면 한국이 바짝 뒤집혀질 것입니다. 엄청난 확신을 가지고 복음을 증거 하니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같이 하심을 전할 수 있어서 한국교회가 달라지고 한국사회가 달라질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시 성도들은 예수님을 지식으로만 알았던 것이 아니라 체험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어려움을 이길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이 피상적인 신앙이 아니라 체험적인 신앙을 가질 때 고난과 괴로움을 견딜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서 잡혀가는 중에 이스라엘 청년들 중에 지혜롭고 총명하고 대단히 아름다운 청년들도 잡혀갔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포로 중 지혜로운 자를 관리로 등용했는데, 그들 중에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세 청년이 있었습니다. 바벨론에 가서 높은 자리에 임명을 받아서 관리로 활동을 했습니다.

 

한번은 느부갓네살 왕이 금으로 우상을 만들고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절을 하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그 우상에 절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 때 다른 사람들이 왕에게 고발을 합니다.

‘왕이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왕의 신상에 절을 하지 않습니다.’

왕이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를 불러서 다시 한번 기회를 줍니다. 너희들이 이 신상에 절을 하면 살려주겠으나, 만일 그렇지 않으면 풀무불에 던지겠다는 것입니다. 절재절명의 위기입니다. 말 한마디에 죽음을 당할 수가 있습니다. 목숨을 잃더라도 하나님을 부인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다니엘 3장16절~17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얼마나 담대한 신앙입니까?

 

이스라엘 청년 중에 다니엘이라는 똑똑한 청년이 바벨론의 국무총리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을 시기하던 사람들이 왕을 속여 앞으로 30일 동안 왕 이외에는 그 어떤 신에게도 숭배하는 것을 금하는 법을 반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은 왕의 명령이 반포된 것을 알면서도 이스라엘을 향한 창문을 열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이 사실을 안 왕은 다니엘을 사자굴에 던집니다. 밤이 새도록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던 왕이 아침일찍 사자굴로 달려가 ‘다니엘아 너 하나님이 너를 불러 살려주었더냐?’라고 부를 대 사자굴 속에서 다니엘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왕이여, 만세수를 하옵소서. 나는 죄를 지은 적이 없습니다. 나는 내 신앙을 견제했을 뿐이지 왕의 나라에 아무 해도 끼친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늘 천사가 내려와서 밤새도록 저를 지켜서 저는 살아있습니다.’

이에 왕이 기뻐하고 즐거워해서 다니엘을 사자굴에서 건져내고 그 참소한 다른 사람들을 사자굴에 대신 던질 때 그들의 발이 땅에 닿기도 전에도 사자들이 그들을 잡아먹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을 신뢰하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을 지켜주시는 것입니다.

 

2. 타협하지 않는 신앙을 가져라 (타협하지 않는 신앙)

 

구약성경에 보면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타협하지 않는 신앙을 가지고 고난을 당할 때 기도와 믿음으로 극복을 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38절로 39절에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 믿음으로 극복하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선지자 하박국은 한 줄기 희망도 보이지 않는 암울한 시대에 살았습니다. 주변 강대국의 압박과 기근과 흉년으로 인한 경제적인 궁핍으로 사람들의 삶은 황폐해져 갔습니다. 게다가 권력자들의 부패와 횡포로 인하여 가난한 자들은 비참한 삶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하박국이 하나님께 질문했을 때, 하나님께서 이런 대답을 주셨습니다.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하박국 2장4절)

하나님의 백성은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을 갖고서 하나님을 믿고 살라는 것입니다. 하박국이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자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믿음 없는 눈으로 바라볼 때에는 불평이 나왔는데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니 감사와 찬양이 나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야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하박국 3장17절~18절)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고 내 앞길 칠흑같이 어두워도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고서 의지하고 나간다는 것입니다. 대단한 믿음입니다.

 

요한일서 5장 4절에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어려움을 믿음으로 이겨내야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믿음 없이 살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마음을 정돈하고 하박국이 신앙한 것과 같은 절실한 신앙을 마음속에 가지고 살아야겠습니다.

 

3. 오중복음을 적용하라 (오중복음의 실천)

 

우리는 예수님이 걸머진 우리의 짐을 보고 예수님을 더 의지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린도후서 5장21절)

우리의 모든 죄와 불의, 추악과 저주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걸머진 것입니다. 이 세상에 모든 부정적인 세력은 예수님이 다 짊어졌기 때문에 이 예수님을 우리가 끌어안으면 생명이 예수님으로부터 넘쳐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짐을 지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생활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지은 전부 우리 짐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짐을 지셨기에 예수님을 의지하면 예수님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장 28절)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경주를 할 때,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예수님께 맡기면 끝까지 잘 달려서 마침내 승리를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려움과 위기를 당할 때 부정적인 생각을 조심해야 합니다.

 

허드슨 테일러의 자서전을 보면 그의 선교 사역을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부정적인 생각이었다고 말합니다. 그 중에서도 나를 가장 괴롭힌 것은 모든 상황이 내게는 불리하고 부정적인 것이라고 투정했던 생각인 것입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내버려두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됩니다. 그러다 결국 ‘할 수 없다, 안 된다’라는 결론을 내리고 포기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이기는 좋은 방법 중에 하나는 자기 스스로에게 긍정적인 말, 믿음의 말을 해 주는 것입니다. 시편기자는 어려움을 당했을 때, 자기 자신에게 말을 겁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편 42편 5절)

자기 스스로를 향해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격려를 한 것입니다.

저는 자기가 자기를 보고 격려하는 말을 대단히 많이 하는 사람 중에 한사람입니다. 몸이 건강이 좋지 못하면 늘 밤에 자다가도 일어나서 ‘용기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는 나음을 입었다. 너는 건강하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는 나았다. 두려워말라.’라며 날 보고서 하나님 말씀으로 격려를 하고나면 온 몸이 후끈해지면서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라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믿음의 힘을 얻어 건강하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 가장 무서운 것은 낙심하는 것입니다. 낙심하면 기도조차도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자신을 향해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말하면서 우리의 마음을 단단히 붙잡아야 되는 것입니다.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요한일서 4장 4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린도전서 15장 57절)

자기 자신을 격려한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목사님 한 분이 시련을 당해서 어깨가 축 늘어져서 집에 들어와서 응접실에 들어오니까 7살 먹은 딸아이가 “아빠, 이제 왔나?” 2층으로 올라가려고 하는데 손에 짐을 들고 있으니까 “아빠, 내가 짐을 들어줄게.” 7살 먹은 딸이지만 소아마비 병을 앓아서 걷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얘, 네가 소아마비가 걸려서 걷지를 못하는데 내 짐을 어떻게 네가 들고 간단 말이야?” “왜 못 들고가? 내가 짐을 들고 아빠는 나를 안고 가면 되는 것이 아니냐?” 딸이 그 말 한 것이 번갯불같이 자기 마음을 때리더랍니다. “네가 왜 걱정하고 있느냐? 네 딸이 짐을 들면 네가 안고 올라가면 되는 것처럼 네 짐을 네 손에 들면 내가 너를 안고 갈 것이 아니냐? 뭐 두려워할 것이 있느냐?”그래서 그 번개 같은 암시를 받고 믿음을 회복해서 굉장한 은혜를 받았다고 말한 글을 제가 읽어보았습니다.

 

증명 및 체험되지 않는 신앙은 이론과 말장난에 불과합니다. 120 성도는 성령을 체험했기 때문에 기적의 신앙생활을 할 수 있던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와 불의, 추악과 저주, 절망과 죽음을 다 짊어졌습니다. 하나도 없이 다 짊어졌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하나님이고, 영원히 이루셨습니다. 예수님께서 33년 동안 이 세상에 복음을 전할 때, 끊임없이 마귀하고 싸웠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마귀에서 빼앗긴 세상을 예수님이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그럴 동안에는 33년 동안 예수님이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이 세상 우주를 돈 주고 산다고 비유한다면 아직 사기를 다 해도 소유등기를 넘기지 않은 상태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 우주가 주님이 가져갈 것인데 아직 그 대가를 지불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혀 마지막 숨이 넘어갈 때, 내가 다 이루었다는 것은 소유등기를 다 예수님께로 넘겨갔습니다. 피를 흘려서 대가를 지불하고 마귀는 영원히 쫓겨나가고 하늘과 땅과 세계의 그 안에 모든 것은 예수님 것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예수님이 응답해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을 한없는 사랑으로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쉽게 낙심하지 말고 예수님을 따라가서 구하면 예수님께서 책임져주시는 것입니다.

 

마귀는 이제 여러분을 직접 도적직하고 죽이고 멸망시킬 권한이 없습니다. 거짓이나 하고 협박이나 하고 다니지 실제로 힘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영원한 보혈로 이 우주를 마귀가 아담을 통해서 점령한 것을 도로 다 빼앗았습니다. 이제 예수그리스도가 여러분과 같이 계시면 여러분을 해할 자 없습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예수님을 모시고 있으면 예수님과 여러분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즐거움과 기쁨이 마음에 충만하고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아멘.

 

<기도>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시고 인류에게 지어져있던 죄와 저주와 가난과 질병을 청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세상과 짝하지 않고 철저히 주님만 의지하고 주님만 붙잡고 살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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