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 부활하셨다 /막16:1-11/ 옥한흠목사
2014-11-09 21:26:15
예수님의 부활은 우연한 사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구약시대부터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기록해 놓으시고, 반드시 그렇게 되리라고 선언하신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 거짓말쟁이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데리고 3년
간 사역하시면서 세 차례 자신의 부활을 예고하셨습니다. 그 중 한 예가 마가복음 8장
31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리라." 이렇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미래를 대해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미리 예언만 하지 않으셨어도 심적인 부담감이 훨씬 줄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자기가 사흘 만에 살아날 것을 이미 수차에 예언하셨기 때문에, 이
예언대로 예수님이 부활하시면 그 말씀이 진리로 판명되겠지만 만일 그렇지 않으면 그분은
한낮 사기극을 벌이다가 형극의 길로 치닫게 된 존재로 밖에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죽으신 후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분이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기독교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지구상에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날처럼 기독교가 이 세상을 바꾸어 놓진 못했을
것입니다. 정치계, 경제계, 문화계, 교육계가 바뀌고 예수의 이름이 들어가는 곳마다 놀라운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부활을 근거로 우리는 기독교만이 참 구원의 종교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요즘 많은 젊은이들과 지성인들이 다원주의를 좋아합니다. 기독교만이 참 구원의
진리라고 고집스럽게 주장하는 것을 아주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이런 기독교를 향해
"오만하다. 고집스럽다. 독선적이다. 배타적이다. 영적인 독재다."라고 하면서 갖가지
언어폭력으로 공격합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세계 60억 인구가 3,000여 개의 종교를
가지고 있는데, 각각의 종교마다 진리가 있고 신이 있고 구원이 있는 법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포용하고 상호 존중해야 된다." 또한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을 굉장히 높이
평가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다원주의를 쫓는 많은 젊은이들과 지성인들이 갖고 있는 생각의
흐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경계해야 합니다. 이런 주장은 다 기만에 지나지 않습니다. 죽음으로
끝을 본 자를 우리는 구원자로 섬길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죽음을 이기고
부활한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종교가도 구원자라고
보지 않습니다. 무덤을 놓고 경배와 찬양의 대상을 삼는 종교에 구원이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구원이 무엇입니까? 전 인류가 소원하는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죽음에서 우리를
건지는 것입니다. 죽음의 손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죽음에서
구원할 구원자는 죽음을 정복하고 살아나신 분이어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죽음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고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2장
14~15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라.' 이와
같이 죽음을 이기고 우리를 죽음에서 건져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원자로 믿는
것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전파하는 기독교만이 참 진리요, 참 구원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부활 주일을 맞아 세 가지를 다시금 다짐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을 통해 과연
내가 확실하게 부활 신앙에 기초하여 신앙생활하고 있는지를 스스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철저하게 믿어야 합니다. 주일날 원근 각처에서 교회로
모여 하나님 앞에 정성스럽게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 가운데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은 아마도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좀더 깊이 들어가보면 마음이 아닌
머리로만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리로서는 예수님의 부활을 버젓이 고백하지만, 그
고백이 그 사람의 삶과 생각과 인격을 좌우할 만큼 능력 있는 고백이 되질 못합니다.
그래서 믿는 것 같은데 사실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만일 이런 사람들이 우리
중에 있다면, 이 시간 마음 속에 숨어 있는 의심을 씻어버리는 시간이 될 수 있길
바랍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철저하게 믿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 목격하고 증언하는 사람들의 기록이 있습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만 봐도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셔서 장사된 지 사흘째
되던 날 이른 아침에 무덤 앞에서 일어난 사건이 마가복음 16장 이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가운데 예수님의 부활을 기대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조금이라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평소 예수님은 "내가 죽은
지 사흘 만에 살아나리라."고 몇 번이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지만, 정작 그 말씀을 기억하고
사흘째 되던 날 아침 일찍 무덤 앞에서 서성거린 제자라곤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전혀 기대하지도 않고 믿지도 않았던 사람들,
나중에는 이를 알고서도 믿으려 하지 않았던 사람들만 등장합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다른 복음서의 기록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도록 하고 싶은 욕심을 가졌더라면 이런 식으로
기록해선 안됩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 함께 모여 서로 입을 맞춰 기록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부활에 대해서 일관성 있게 기록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각 저자마다 서로 말이 안
맞습니다. 최소한 우리를 납득시키려면 증거에 있어서 모순이 없어야 합니다.
더욱이 맨 처음에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목격한 자들이 여자들이라고 증거합니다. 그 당시
여자들의 말은 참말도 거짓말로 취급해버리는 시대였습니다. 따라서 그런 하찮은 여자들의
입을 빌려 예수님의 부활이 증거된 사실을 그대로 기록했다는 것은 도무지 사람들이 믿도록
하기 위해서 기록한 책인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합니다. 단지 자기들이 예상 밖에 발견한
사실을 보고 듣고 느낀 대로 적어 놓은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주목해보면 그것이 거짓말일 수 없음을 분명히 확인하게 됩니다.
믿으려고 한 사람이 아닌데도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증거한 점만 봐도 그렇습니다. 11절에
보면 여자들이 가서 예수님이 살아나셨다고 하자,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듣고도 믿지
않았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13절에도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예수님을 만나고는
예루살렘으로 허겁지겁 돌아와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외치자 그 말을 들은 다른
제자들도 역시 안 믿었다고 나옵니다.
나중에 예수님이 열한 제자가 있는 방에 나타나셨을 때 책망 먼저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저희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가운데 아직도 부활에 대해서 회의적인 분들이 있다면,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기록한 사람들의 기록을 정직한 마음으로 대해 보십시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믿도록 설득하려고 기록해 놓은 것이 아닙니다. 자기들도 안 믿었는데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엄격히 보면 이 사실을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누우셨던 무덤이 비어
있었다는 사실만 봐도 그렇습니다. 빈 무덤에 대해 설명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만일
시체를 훔쳐갔다면 예수를 죽인 자들이 기필코 찾아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몇몇 사람들을 직접 만나셨습니다. 결국 십자가에 예수님을 못박아 죽인 자들은
부활의 사실 앞에 침묵하고 말았습니다. 또한 대제사장들은 예수님의 부활 현장에 있었던
군인들의 입을 뇌물로 틀어 막았지만, 예루살렘의 골목골목을 누비며 예수님의 부활을
외치는 제자들과 여인들의 소리를 잠잠케 할 순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루살렘 도성에 예수의 부활을 외치며 이를
믿는 거룩한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거짓말이라면
어떻게 그 거짓말을 믿고 수천 수만 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예수님을 찬양할 수 있겠습니까?
부활 사건은 꾸며낸 이야기도 아니고, 기독교가 말하는 전설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철저하게 주님의 부활을 믿어야 합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심으로 예수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았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나의 부활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사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사는 놀라운 부활의 축복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런 믿음이
철저하면 우리의 삶 구석구석에 믿음의 영향이 미칩니다. 나의 사고 구석구석에 이 부활의
믿음이 영향을 미칩니다. 그러므로 보는 것이 달라지고, 생각하는 것이 달라지고, 문제를
다루는 자세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활동중인 미국 학자들 가운데 예수의 부활을 변론하는데 가장 탁월한 학자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분이 있습니다. 바로 하버마스(J. Habermas) 박사입니다. 그가 한번은 예수의
부활을 부인하는 무신론자로서 유명한 앤토니 플루 박사와 함께 공개토론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버마스 박사는 예수를 철저하게 믿는 학자요, 플루 박사는 예수를
절대적으로 안 믿는 학자입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예수는 부활했는가?"라는 제목으로
토론을 벌이게 된 것입니다. 이를 위해 여러 대학에서 온 다섯 명의 교수가 심사를 맡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중립적인 입장에서 누구의 변론이 더 설득력이 있고 논리적이며
학구적인지, 그런 다음에 그 변론의 사실여부를 평가하기로 했습니다. 이 날 공개토론
석장엔 많은 청중들이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열띤 토론 결과 5명의 심사위원 중 4명이 하버마스 박사에게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참석한 청중들도 하버마스 박사의 말을 듣고는 믿지 않던
사람들까지도 예수의 부활을 믿게 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미 예수의 부활에 대해 박사
학위 논문을 쓴 바 있으며, 이 주제에 대해서만도 무게 있는 책을 무려 7권이나 쓴
석학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내가 그만 위암에 걸렸습니다.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병세가 악화되어
아내는 서서히 죽어가고 있습니다. 어린 자녀 넷을 둔 가장으로서 아내가 죽어가는 모습을
본다는 것은 정말로 이 세상에서 겪을 수 있는 지옥의 고통과도 같았을 것입니다. 어느 날
아내는 2층에 있는 방에 누워서 신음하고 있고, 자기는 현관에 앉아서 깊은 고뇌에
빠져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기가 가르치는 여러 명의 신학생들이 전화해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오는 전화마다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교수님, 아내가 죽어가는 마당에 교수님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이 기쁘지 않습니까? 부활이 있다는 사실이 기쁘지 않습니까?" 이 전화를
받고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합니다.
평생 예수의 부활을 가르치고 증거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아내가 죽어가는 현장에서는 부활신앙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처럼 깊은 고통에
빠져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전화를 받기 전까지만 해도 "하나님, 왜 하필이면 내
아내입니까? 왜 내 아내가 하필이면 이런 병에 걸려야 합니까?" 하고 하나님께 항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하나님의 대답이 똑같았다는 것입니다. "나는 내 아들을 사흘 만에
살려냈지 않느냐?" 그런데 학생들의 전화를 받고 나서 하나님의 대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깨달았다는 말입니다.
'그렇지. 하나님은 예수님을 사흘 만에 죽음에서
살리셨어. 그렇다면 내 아내도 반드시 하나님이 살리실 거야. 비록 육신은 죽을지라도
주님이 부활하신 것처럼 때가 되면 반드시 내 아내도 부활할거야. 그리고 나도 죽을 것이고
나중에는 부활할거야. 그러므로 내가 왜 낙심하고 깊은 고뇌에서 헤매겠는가?'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죽어가는 사람을 앞에 놓고
예수님의 부활신앙이 어느 정도 나에게 힘과 기쁨과 소망이 되는지는 다른 차원입니다.
예수의 부활을 철저히 믿어야 되는 이유는 어떤 상황에서도 그 부활신앙 때문에 우리가
좌절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죽음 앞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 앞에서도
우리는 생명 되신 주님을 찬양할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주님 안에서
우리는 더 힘있게 우리의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철저히 믿는다는 것은 나의
부활신앙이 나의 삶 전체를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예수의 부활을 담대하게 전해야 합니다. 15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여기에서 복음이란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
부활하심으로 모든 인류가 부활할 수 있고, 예수 부활하심으로 모든 예수 믿는 자들이
영원히 살 수 있다고 전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래서 빈 무덤을 본 자들은 남녀 할 것
없이 예수님의 살아나심을 증거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난 자들도
나중에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어디를 가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오순절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직접 빈 무덤을 보지 못했고 예수님을
만난 적도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에서 부활하셨다고 소리치며 외쳤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 외에 이
세상에 다른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콘라드 아데나워(Konrad Adenauer) 수상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는 나치에 대항하다가
투옥되었고, 나중에 2차 대전이 끝나자 독일 수상이 되어 오늘의 독일이 있도록 한 위대한
정치가입니다. 한번은 그가 젊은 빌리 그래함 목사님과 만났습니다. 그 목사님을
만나자마자 수상이 물었습니다. "목사님,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것을 믿습니까?" 빌리
그래함 목사님은 분명하게 대답했습니다. "예, 저는 믿습니다." 그러자 아데나워 수상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목사님, 예수의 부활이 없다면 이 세상에는 다른 희망이 있을 수
없습니다." 수상의 자리에 있는 사람이 왜 이런 말을 합니까?
우리는 두 가지 안목으로 역사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이 세상의 죽음, 고통, 죄악,
전쟁, 기아, 고통을 놓고 세상을 보는 눈입니다. 이런 것을 놓고 세상을 보면, 이 세상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수상의 자리에 앉아있을 지라도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역사를 보는 다른 안목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출발점으로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놓고 이 세상을 보면 죄는 반드시 정복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악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능력 앞에서 심판을 받는 날이 올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고통
하는 수많은 죄인들이 용서 받고 영생을 얻는 축복의 날이 올 것입니다. 이 더럽고 악한
세상은 하나님 앞에 심판 받고 영원히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그 나라가 올 것입니다.
예수의 부활을 중심으로 놓고 보면, 이 세상은 희망이 있습니다. 주님만이 희망이요,
소망입니다. 앞으로 이 세상에 태어날 모든 인류의 소망은 예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전해야 합니다. 예수 부활하심을 전하십시오.
세 번째는 부활하신 주님과 날마다 동행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살아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와 동행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한편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일 먼저 찾은 사람들이
누구인가를 살펴보면 여러 가지 은혜스러운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나서 빌라도나 그 당시의 실세인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을 찾아가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고
자신의 승리를 선포하기 위해서 지붕위로 올라가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시자 마자 제일 먼저 막달라 마리아를 만나 주셨습니다. 소망을 잃고
슬퍼하며 눈물 흘리고 있던 초라한 여인, 막달라 마리아를 먼저 만나셔서 왜 우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막달라의 눈물을 보신 것입니다. 이분이 바로 부활하신 주님입니다. 부활의
주님은 그녀의 눈물을 보셨습니다. 슬퍼하는 여인, 세상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여인, 아무
소망이 없어 보이는 여인, 그를 만나신 분이 부활의 주님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문을 걸어
잠그고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고 있는 제자들을 찾아 오셨습니다. 두문불출하고 소망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는 제자들을 먼저 찾으셨습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한 후,
마음 속에 가책을 이기지 못해 번민하면서 갈릴리 바다로 도망치다시피 한 베드로를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일으켜주셨습니다. 쓰라린 기억들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끌어안아
주셨습니다. 바로 이 분이 예수님입니다.
부활의 주님이 찾아가신 사람들을 가만히 보면, 그분이 어떤 사람들과 동행하기를
원하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세상을 사는 조건들이 다양하지만 인간의
실존 밑바닥을 보면 대동소이합니다. 우리도 막달라 마리아처럼 눈물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인생의 좌절을 맛본 사람입니다. 인생의 무서운 시련 앞에 고통 하는 사람들입니다. 내
힘으로 일어설 힘이 없어 주저앉을 때가 많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제자들처럼 실패한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믿었던 것이 다 날라가 버린 허무를 느끼기도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럴 때 부활의 주님은 찾아 오십니다. 우리가 약할 때, 실패할 때, 주저
앉아 있을 때 주님은 와계십니다. 이분이 부활의 주님인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부활하신 직후에는 예수님을 만나고 동행하는 것이 쉬웠습니다. 우리의
눈에 보이는 몸으로 찾아오셨기 때문입니다. 손에는 못 자국이 있고 옆구리에는 창 자국이
있었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음식도 나누고, 귀에 들리는 말로 서로 대화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주님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더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를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 나를
찾아와서 손 바닥을 내밀고, "바로 나다. 보아라." 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예수님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영으로 계십니다. 나는 주 안에 있고, 주는 내
안에 있습니다. 어디서나 주님은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우리는 주님과 한 시간도 따로
떨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은 살아계셔서 오늘도 이 우주를 충만케 채우시는 만유의
주가 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부활의 신학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그분과 동행하는 삶을 조금도 등한히 여겨선
안됩니다.
켄 가이어(Ken Gire)가 쓴 아름다운 기도문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
모든 것이 너무나 뿌옇게 보일 때
당신조차도 뿌옇게 보일 때
그리고 당신의 목소리가 이상하고 낯설게 들릴 때
제가 눈물을 씻고 당신이 제 곁에 서 계신다는 것을 보게 해 주시옵소서.
제가 왜 우는지를 알고 싶어하시고
제 상처가 무엇인지도 알고 싶어하시고
제 눈에서 눈물을 닦아 주고 싶어하신다는 것을 보게 해 주시옵소서.
감사합니다. 부활의 주님.
거기에 계심을 감사합니다.
그리고 결코 저를 떠나시거나 버리시지 않고
제 삶의 가장 어둡고 추운 때에도 함께 계심을 감사 드립니다.
예수님은 바로 우리 곁에 계십니다. 우리가 부활 주일마다 자주 애창하는 151장
찬송입니다. "예수 예수 늘 살아계셔서 주 동행하여 주시며 늘 말씀하시네. 예수 예수 내
구세주 예수 내 맘에 살아 계시네 늘 살아계시네."
다같이 기도합니다.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 주님이 부활하셨음을 찬양합니다. 주님이 사망을
이기셨음을 찬양합니다. 주님이 우리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심을 찬양합니다. 주님 때문에
우리도 부활하게 됨을 찬양합니다. 주님 때문에 이 세상의 죽음이 정복됨을 찬양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면서 우리 마음에 추호라도 의심이 남아 있으면
이 시간 철저하게 그 의심을 씻어 버려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부활의 사건을 믿는
믿음이 우리의 삶 전부를 지배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그리고 누구를 만나든지
어디를 가든지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우리의 구원자가 되셨음을 기쁘게 증거하는 자가 되게
하시고, 어떤 상황에서도 부활하신 주님과 동행하는 기쁨을 맛보게 해 주시옵소서. 한시도
우리를 혼자 두지 않으시는 살아계신 주님과 동행하는 행복과 기쁨과 충만함을 맛보면서 이
세상을 이기고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되도록 우리를 축복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예수 부활의 첫 증인들 /막16:1-11/ 이동원목사
2014-12-02 09:38:48
제가 목회를 하다가 보면은 이따 금씩 교인들로부터 새신자들을 소개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목사님, 이분 들에게 관심을 가져주세요. 이분들 이 한 번 제대로 믿기만 한다면, 아 주 큰 일을 할 사람들입니다.
이런 부탁을 종종 받습니다. 이건 나쁜 부탁은 아니지만, 흔히 이런 부탁을 하는 사람들의 숨어있는, 밑바탕에 깔려있는 세속적인 전제가 하나 있 습니다,
그것은 뭐냐하면, 대부분 이 런 큰일을 할 사람들이라는 사람들 은 재력이 있다든지, 아니면 학문적 인 실력이 대단한 사람들이라는 뜻 이 숨어있습니다.
하나님도 이런 재 력이나 학력 앞에는 꼼짝 못하시고, 이런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일 하실 수 밖에 없다는 숨어있는 우리 들의 생각이 전제 되어질 수 있습니 다.
옛날에는 제가 순진해서 정말 그렇구나.라고 믿고, 그런 분들에게 시간들도 내고, 관심도 갖고 그랬지 만, 그런 분들이 그렇게 큰 일을 하 는 경우가 별로 없더라구요.
저도 조금 성숙한 후 부터는 그런 부탁을 받으면, 아, 그러십니까?라고 말하면 서도 속으로는 별로 큰 기대를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분들에게 평범 하게 대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목회를 하면서 제가 느끼는 것은 하나님이 정말 쓰시는 분은 누구인 가? 라고 생각해 보면, 뜻밖에도 매 우 평범한 사람들을 쓰십니다. 또한 우리 기독교의 역사도 그렇습니다.
처음부터 굉장한 사람들이 있어, 하 나님이 그들과 함께 어떤 일을 시작 하신 것이 아니라, 의외로 평범한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이 루어 가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역사는 평범한 사 람들이 만들어 놓은 비범한 역사이 다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링컨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님 은 평범한 사람들을 좋아하신다.
왜 냐하면, 이 세상에 보니까,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사람들 중에는 평범한 사람들이 가장 많은 것을 보면, 하 나님은 평범한 사람들을 사랑하신 다.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오늘 마가복음의 마지막 장입니 다. 이 마지막 장은 바로 이런, 여러 분과 저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에 의 해서 시작되는 복음 역사의 새로운 무대, 그 무대가 어떻게 열리는 가 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의 마지막 장이지만, 이것은 복음역사 의 마지막이 아니라 복음 역사의 시 작을 선포하는 장이기도 합니다. 자, 마가복음 1장 1절을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마가복음 1장 1절은 이런 말로 시작을 하게 됩니다.
하 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예수님이 오셔서 어떻게 복음의 역사를 시작하셨는가, 그분 이 어떻게 복음을 선포하셨는가. 자, 그러던 예수님이 십자가에 가셔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셨습니 다.
오늘 이 마지막 장에는 십자가 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이 제 이 땅 가운데 시작하신 그 일, 복음의 역사를 전세계를 대상으로 본격적으로 어떻게 시작하시는가. 그분은 복음의 역사를 당신들의 제 자들을 통해서 계속하고자 하셨습니 다.
그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하신 주님이 나타나십니다. 그때 부 활 하신 주님이 자신을 가장 먼저 계시하시고, 보여주신 사람들. 그들 과 더불어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십 니다.
그 새롭게 주님이 만나주시 고, 또 그 주님의 복음의 위대한 새 로운 역사의 시작을 만드는 사람들 이 의외에도 아주 평범한 사람들입 니다. 여자들이었습니다.
여자들.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 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 품을 사다 두었다가. 이 향품을 가 지고 주님이 묻혀있을 동산에 올랐 다.
여성들이 올랐다. 그리고 16장 9 절에 보시면, 예수께서 안식후 첫 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먼저 보이셨다 자! 부활하신 주님이 자신을 먼저 누구 에게 보이셨습니까?
막달라 마리아 라는 한 여성에게 먼저 보이셨다. 바로 이런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여 성을 통해서 새로운 복음의 시대가 동통합니다. 평범한 여성이죠.
자, 그렇다면, 제가 주님이라면, 부활하신 주님의 입장에서, 내가 만 약 주님의 시각에서 판단을 했다면, 누구에게 먼저 나타나셨을까요? 저 같으면 아마도 베드로에게 먼저 나 타나셨을 것 같습니다.
아니면, 도마 에게. 의심 많았던 도마에게 봐, 내 가 나타났쟎아.하고서 먼저 도마에 게 나타나서 의심 많았던 도마 하나 를 확 바꾸어 놓으면, 아마도 더 쉽 게 역사가 바뀌어지리라고 판단했을 지도 모릅니다.
혹은 그 위계 질서 를 존중한다면, 예수님의 제자 중 수제자 격인 베드로에게 먼저 나타 나는 것이 순서이겠지요. 어떤 분이 그런 joke를 하더라구요.
베드로에 게 먼저 나타나시지 않은 이유가 베 드로라는 이름이 반석, 돌 이라는 뜻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나타나셔 봤자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하구요.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습니 다. 평범한 여성에게 나타나셨습니 다. 그리고 그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부탁을 하십니다. 그리고 그의 친구 여성들이 부활의 첫번째 증인이 됩 니다.
자, 주님이 이 평범한 여성들 을 부활의 증인으로 쓰셨던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어디에 있었습니 까? 그들이 어떻게 해서 평범한 사 람으로서 쓰임을 받을 수 있었습니 까? 평범한 사람이라는 사실만으로 쓰임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 은 평범한 사람들이었는데, 어떻게 부활의 위대한 증인으로, 또 신약시 대에 막을 올리는 그 위대한 역사의 무대의 증인으로 쓰임을 받을 수가 있었을까요?
첫째로 그들은 예수의 은혜를 체 험했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체험하지 않고 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증인은 말하는 사람입 니다. 본 것이 없이, 체험이 없이 그 들은 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들 은 이미 예수의 은혜를 체험하고 있 었던 사람들입니다. 자, 오늘은 이 여성들에 관해서 누가복음 8장을 보 시면, 그들이 본격적으로 예수님의 사역의 장에 뛰어들게 되는 동기를 누가복음 8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 다.
다 같이 한 번 찾아보세요. 누가 복음 8장 입니다. 1절부터 보시면 이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촌에 두 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반포 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새 열 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그렇지만, 열 두 제자만 함께 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열 두 제자만 쓰신 것이 아 닙니다. 자, 열 두 제자와 함께 더 불어 처음부터 주께서 쓰셨던 아주 소중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제 2절에 나타납니다. 8장 2절을 같이 읽습니다.
또한 악귀를 쫓아 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 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 는 마리아와 3절까지 또 헤롯의 청 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 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하여 자 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 자, 여성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사역의 장, 예수님의 사역의 장에 관련이 되기 시작했는가를 여기서 볼 수 있 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 여성들 은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귀신에게서부터 자유를 얻었 습니다. 병 고침으로 부터 해방되어 서 주님을 만나고, 건강과 자유와 새로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어요. 3절에 보실 까요? 그들은 자기들의 소유를 가지 고 자기들의 물질을 가지고, 제자들 을 섬기면서 그들과 함께 주님의 일 을 하기 시작했다라고 말합니다. 자, 그들은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이었습 니다.
저는 그들이 체험했던 은혜는 결코 값싼 은혜가 아니었다, 싸구려 은혜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왜 냐하면, 거기에는 대가가 있었습니 다. 그 은혜를 베풀어주신 주님이 지불해야만 했었던 대가가 있었습니 다.
자, 여성들에게 은혜를 주시면 서, 그들과 함께하고 그들을 훈련시 키면서 예수님에게는 이런 비난의 소문이 따라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창기와 세리들의 친구. 그래서 바리 세인들과 적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사 람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삶을 바꾸 기 위해서 기어이 마지막에는 십자 가까지 가셔야만 했었던 것이었습니 다. 그 여성들은 그것을 알았어요. 이것이 주님의 값비싼 은혜, 주님의 대가를 지불하고 그들이 얻었던 자 유요 해방이었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따라갑 니다. 끝까지 따라갑니다. 오늘 우리 본문이 마가복음 16장이지요? 그런 데 15장을 보세요. 십자가를 둘러싸 고 있는 장면을 보도하고 있는 마가 복음 15장을 보시기 바랍니다.
15장 4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5장 40절 을 보시면, 한 번 같이 읽을까요? 시작! 멀리서 바라보는 여자들도 있 는데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 아와 또 살로매가 있었으니 자 십자 가를,
십자가의 그 예수께서 달려 돌아가실 때, 거기까지 따라왔던 사 람들 중에 이 여자들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멀리서 봤다고, 왜 가까이서 보지 않았냐고 트집을 잡지는 마십 시요.
왜냐하면, 이때 남자들은 다 없어져 버렸어요.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했고, 저주했고, 떠나갔고 다 주 님을 등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 성들은 끝까지 그 십자가의 현장에 남아서 주님을 지켜보고 있었습니 다.
41절을 보세요. 어떻게 이들을 묘사하고 있는가 이들은 예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좇아 섬기던 자 요 또 이외에도 예수와 함께 예루살 렘에 올라온 여자가 많이 있었더라 남자들은 다 어디 갔습니까?
네, 여 자들이 끝까지, 평범하고 가난한 마 음을 가졌던 여성들이 십자가의 현 장까지 끝까지 찾아왔던 것을 볼 수 가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절에 보 시면, 마가복음 15장 마지막절에 보 시면, 때에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의 둔 곳을 보 더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나서 그의 시체가 뉘어 지던 곳을 이 여인들은 주목해 보았습니다. 그 리고 본문 마가복음 16장 1절 안식 일이 지나매. 안식일은 장례를 치룰 수 없어요. 안식일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안식일이 지나고 이 이튿날 새벽 2절, 안식 후 첫날 매 우 일찍이 해 돋을 때 이 여인들은 향품을 가지고 무덤을 찾아왔습니 다. 왜 이렇게 했습니까?
사람들의 비난을 받을 수 있는 여지, 때로는 사형수를 그들 마음대로 처리하고 접근한다는 사실 때문에 받을 수 있 었던 어떤 형벌에도 불구하고, 그들 은 끝까지 그렇게 했습니다. 그들이 이 값비싼 은혜에 빚진 자임을 알았 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알았어요.
저는 최근에 미국의 닉슨 대통령 의 보좌관을 지냈던 척 콜슨이라는 사람이 쓴 책 가운데, 누가 하나님 을 대변할 것인가 Who speaks for GOD?이라는 책을 읽다가 이런 감 동적인 이야기 하나를 읽었습니다.
인디아나주 출신의 미국의 대법관으 로 있었던, 윌리엄 본 트레이저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본 트래이저. 이 분은 비교적 늦게 예 수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주님의 구 원의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그는 하 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 속에서 살 았습니다. 어느날 그가 재판을 하게 되었는데, 아주 여러 건의 죄질이 질이 나쁜 강도질을 저질렀던 헤리 팔머라는 사람을 마지막 대법정에서 심의를 하고 다루는 책임을 판사로 서 맡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강 도도 또한 교도소에서 복음을 전해 듣고 예수그리수도를 영접하게 되었 어요. 같은 크리스찬으로서 본 트레 이져판사는 이 팔머라는 사람의 회 심이 진지하다는 것을 알았어요. 이 사람이 정말 변했구나. 라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어요. 돕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요.
그러나 그의 판사로서의 공인의 입장이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 도울 것인가를 그는 깊이 고민했습니다. 정상적인 판결 에 의하면 적어도 한10년 쯤을 언도 하는 것이 정상적인 언도 였다고 합 니다.
그러나 그는 고민합니다. 10 년이라는 시간은 너무 길다. 이 사 람을 교도하기는 커녕 이 사람을 망 칠 수도 있다.고 고민합니다. 그러나 그는 마음속에 어떤 중대한 결단을 합니다. 심지어 그는 금식기도까지 하고 나서 마지막 언도를 내릴 때 1 년, 그리고 몇 년간의 사회봉사 명 령을 내렸습니다.
이것은 파격적인 것이고, 법쪽에서 문제가 되었습니 다. 이것은 매우 부당한 판결이다. 는 여론이 들끌어 올랐습니다. 이것 때문에 그는 코너에 몰렸고, 어떤 법적인 제재를 받기 위한 회의가 열 렸습니다.
이때 본 트레이저 판사는 주저하지 않고, 그는 이런 사태를 예견하고 있었고, 그는 사표를 냈습 니다. 대법관의 자리를 미련 없이 그는 사표를 냈습니다. 그리고 1년 후, 그가 언도를 내렸던 헤리팔머가 교도소에서 형을 살고 나오던 그날 그는 마중을 나갔습니다.
그가 교도 소를 걸어나올 때, 트레이저는 팔머 머라는 죄수를 끌어 안았습니다. 죄 수는 굵은 눈물을 흘리면서 이 본 트레이져 판사앞에 엎그리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해요. 판사님, 이렇게 까지 하실 필요는 없었는데. 판사님, 이렇게 까지 하실 필요는 없었는데.
그때 본 트레이져는 그를 향해서 이 런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이렇게 까지라니요. 주님은 형제와 나를 구 원하시기 위해 목숨까지 주셨는데 요. 이것은 값비싼 은혜였습니다.
그 는 굵은 눈물을 떨구며, 일어나서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살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최선을 다해서 사는 정말 변화된 자 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은혜이고, 이 것이 바로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입 니다. 바로 이 여성들에게는 이 은 혜를 체험한 감격이 있었던 것입니 다. 그래서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 었던 것입니다. 예수의 은혜를 체험 했어요.
두 번째로 예수의 은혜를 체험했 을 뿐만 아니라 예수의 부활을 믿은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부활을 믿지 도 않고 어떻게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을까요? 예수의 부활을 믿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이것입니다. 이 여성들이 처음 부터 부활을 잘 믿을 수 있었던 것 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묻혀있던 이 동산에 그 여자들이 올라왔던 이유 는 차라리 단순한 이유였을 것입니 다.
주님에 대한 단순한 애정, 단순 한 감사, 단순한 충성심 때문에 그 의 시체에 향유를 발라 드리려는 동 기였지, 이 여성들이 예수님의 부활 을 기대했다는 흔적은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 기대하지 않았던 예수의 부활 사건을 접했을 때 여성 들이 보여 주었던 반응은 어떤 반응 이었습니까?
8절에 그 반응이 나와 있지요? 자, 본문 8절을 같이 읽겠 습니다. 다같이, 시작! 여자들이 심 히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 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이것은 부활을 기대 했던 사람들의 반응은 아닙니다.
만 약 부활을 기대했더라면, 주님은 부 활할 것이다. 맞았어! 주님은 예측 대로 부활하셨어. 주님이 부활하셨 어요. 할렐루야! 그런 상황이 아니 지요? 전혀 그런 상황이 아닙니다. 부활에 대한 기대가 없었기 때문에 그것은 충격이었습니다.
여자들이 심히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 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 도 하지 못하더라 이것이 이 여인들 이 받았던 충격이었습니다. 이 여성 들 뿐만 아니라, 이 여성들로부터 부활의 소식을 전해 들었던 다른 제 자들도 마찬가지예요.
그들에게 기 대했던 흔적도 없고, 부활을 믿었 다는 흔적도 없습니다. 그들은 불 신앙 했습니다. 저는 이것이 오히려 역설적으로 부활을 기대했다면, 기 대했었다면, 어떻게 하든지 부활 사 건의 조작은 가능했을지 모릅니다.
이 제자들이 철저하게 믿지 않았음 에도 불구하고, 부활사건을 둘러싼 상황의 반전이야말로, 역설적으로 부활을 증명하는 사건이라고 생각합 니다. 제자들의 모습을 보시면 11절 에 그들은 예수의 살으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뭐라고 그랬습니까?
믿지 아니하니 라라고 했어요. 처음에는 그럴 수 없다. 사람이 다시 살다니. 믿지 아 니하니라. 그것이 당연한 거예요. 자, 13절에 보시면 소위 엠마오 길 에 두 제자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고, 그것을 나머지 제자들에게 그 사실을 전했을 때,
13절 주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교하였으되. 역시, 역시 역시나, 믿지 아니하니 라라고 했어요. 믿지 아니하는 것이 당연한 거죠.
14절 그 후에 열 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저 희에게 나타나사 저희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 니 이는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 자 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믿지 않았다! 믿지 않았다! 이 구절이 되 풀이 되지 않습니까?
네. 중요한 것 은 이거예요. 부활을 믿지 아니하는 것이 사실은 타당하고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불신앙과 회의를 어떻게 넘어서느냐는 것이 중요해요. 마침내 이 여성들과 제자 들은 그들의 불신앙과 회의를 넘어 서서 믿는 자리에 설 수가 있었습니 다.
저는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해요. 먼저 부활하신 주님이 먼 저 이들에게 자신을 먼저 계시하셨 기 때문에 비로서 그들은 믿는 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믿는자가 행복한 자라고 생각해요.
믿을 수 있는자. 세계적인 심리학자 가운데 소위 내담자 중심의 접근 이론을 전 개한 칼 로저스라는 심리학자가 있 지요. 본래 그는 20대에 신학교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나 신학교에 서 공부하면서 그는 그의 머리 속에 몰려오는 많은 회의를 그는 극복하 기 어려웠습니다. 그는 결국 신학교 를 떠납니다.
나중에 그는 자기의 전기를 통해서 자기 신학교 시간을 회고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내게 밀려오는 회의를 넘어설 수 없 었다. 결국 나는 신학교를 떠났다. 나는 불행한 사람이다.
나는 불행한 사람이다. 그는 심리학계에서는 존 경을 받는 세계적인 석학이 되었고, 많은 기여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신앙적으로는 그는 스스로를 불행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회의를 넘어 설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또 다른 부분에서 자기 나름대 로의 또 다른 독백을 첨부합니다. 내가 좀더 추구했었더라면.이런 말 을 덧붙이고 있어요. 내가 좀더 추 구했었더라면. 좀더 계속해서 주의 은혜를 구할 수 있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저도 이 말이 너무 안 타깝게 들리더라구요. 그가 만약 정 말 좀더 추구해서 주님의 은혜를 받 은 자가 되었었더라면, 그는 부활하 신 주님의 붙들림을 받아 얼마나 놀 라운 하나님 나라의 사역자로 쓰임 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그는 심리 학자로 큰 기여를 한 것도 사실이지 만, 다른 측면에서 위대한 신앙적인 기여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회의는 있 을 수 있습니다.
불신앙은 있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예요. 회의를 넘어서서 마침내 신앙의 자 리에 도달하는 것. 오늘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구하시기 바랍니다. 구하는 자가 얻을 것입니다. 찾으시 기 바랍니다. 찾는 자가 찾을 것입 니다.
문을 두드리는 자에게 비로서 열려질 것입니다. 구한다는 말은 한 번 구한다는 말이 아니예요. 계속에 서 구한다는 말이예요. 본래 원례 원문의 뚯이 계속해서 구한다. 찾으 라. 한 번 찾으라는 말이 아니예요.
지속적으로 찾으라는 것이예요. 두 드리라. 한 번 두드려 보라는 것이 아니예요. 한 번 조금 생각해 보았 다가, 한 번 조금 기도해 보았다가 에이~ 이 소용없어. 이것이 아닙니 다. 진정한 구도자는 계속 분을 두 드리는 자여야 합니다.
이 은혜 받 았던 여인들처럼 주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주님의 애정을 표현하며 그 자리에 끝까지 남아있었던 여인들이 마침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찾는 자가 찾을 것입니다. 두드리는 자에 게 열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 성들은 부활을 믿은 자가 되었습니 다.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세 번째로 부활을 전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예수의 은혜를 체험했고, 예수의 부활을 믿은 자가 되었고, 세 번째 는 예수의 부활을 전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자 본문의 6절에 보시 면, 청년의 모습으로 나타난 천사를 이 무덤에서 만납니다.
이것이 진짜 청년이 아니예요. 청년의 모습으로 나타난 천사입니다.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 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게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7
절에,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 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 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 씀하신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중요한 동사가 둘이 나오는데, 하나는 가서 두번째는 말 하라 영어 성경에 보시면 Go and tell.. 가서 말하라 그의 제자들과 베 드로에게 말하라.
예수께서 살아나 셨다. 그리고 갈릴리에서 먼저 가서 기다리실 것이다. 이 사실을 가서 전하라, 가서 전하라. 물론 기대하지 않았던 예수그리스도의 부활 사건 앞에 이 여인들은 황당해 할 수 밖 에 없었고, 차라리 그들은 겁에 질 려있었습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그 들은 순종을 결단합니다. 10절에 보 시면, 본문의 10절에 마리아가 뭐라 고 했어요? 가서~라고 했어요. 천사 를 통해서 주님은 명하셨습니다. 가 라 자, 마리아는 어떻게 행동했습니 까?
가서 이게 순종이요? 예수와 함께하던 사람들의 슬퍼하고 울고있 는 중에서 이 사실을 전했습니다, 이것이 순종이예요. 자, 믿는 것으로 부족합니다. 믿고 나서 우리가 순종 하기 시작할 때, 그때부터 우리의 생애 중에서 놀라운 일들은 벌어집 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이것은 마 리아에게만 주셨던 명령은 아니었습 니다. 이것은 그 다음 제자들에게, 그리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의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도 계속적으 로 유효한 명령 이예요. 그래서 우 리는 이것을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 이라고 부릅니다.
이 마가복음에서 나타난 지상명령은 어떤 식으로 표 현되어있습니까? 15절을 다 같이 읽어 보세요. 15절을 다 같이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달리 말 하면, 너희는 온 천하, 모든 곳에 가 서 모든 곳이 우리가 전도해야 할 장소입니다.
모든 곳에 다니며, 만민 에게 모든 사람에게, 모든 곳에 가 서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 하라. 이것이 오늘의 우리를 향해 주께서 주시는 명령이라고 믿으십니 까? 그러면, 어떻게 응답하시는 것 이 옳습니까?
우리가 가야지요. 우 리가 가야 합니다. 믿고 가야합니다. 이것이 순종입니다. 자, 순종하는 자 들에게 어떤 약속을 주십니까? 여기 17절, 18절은 약속입니다. 이 명령에 순종하는 자들에게 주께서 주신 약 속, 약속입니다.
17, 18절을 다 같이 한번 읽어 보시겠습니다. 믿는 자 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좇아내 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 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 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가끔 신문에 보 면,
기독교인 가운데 이상한 사람들 이 이러한 말씀을 실험해 보시다가 돌아가시는 분이 있어요. 믿는 자들 에게는 이러한 표적이 따르리니, 독 을 마실 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 며, 그래서 독을 한 번 마셔 봅니다.
그리고 돌아가십니다. 그리고 신문 에 나십니다. 짤막하게 한 구절 납 니다. 그런 사건이 종종 일어납니다.
성경을 잘못 읽어서 그래요. 자, 이 사건이 누구에게 주신 약속 이예요. 정말로 복음선교의 명령을 받고 그 복음 선교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가서 전도하다가 어떤 사람 을 만날 때에, 특별한 상황, 기적적 인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 는 특별한 기적의 약속 이예요.
여 러분 종종, 기적의 소식을 들을 때 에, 어디서 가장 커다란 기적의 소 식이 제일 많이 들려옵니까? 선교지 예요, 선교지. 선교지에 가면 이상하 게 기적이 일어나요. 우리가 이번에 단기선교 팀이 일곱 팀이 나가는데,
제가 워싱턴에 있을 때, 한 번 멕시 코에 젊은이들 팀을 보냈어요. 다 뒤집어 지고 바뀌었어요. 그게 왜 그러냐하면, 멕시코에서 선교하다가 장님 하나를 위해서 기도하다가 눈 이 떴어요. 이 애들이 어떻게 이것 을 잊어버릴 수 있겠어요?
인생이 다 바뀌어 버리고 마는 거예요. 그 런데 그것이 왜 선교지에서 많이 일 어날까? 여기서는 기적이 안 일어나 고. 여기서도 기도해서 딱 떳으면 좋겠는데, 안된다는 말입니다. 선교 지에서만 일어납니다.
긴급한 전도 의 상황속에서 하나님이 전도의 경 륜을 이루시기 위해서 이런 기적들 을 종종 베풀어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 여기에 서도 우리가 정말 전도의 명령에 순 종하기로 결단하고, 철저하고도 깊 은 헌신을 드릴 수 있다면, 지금 여 기서도 이런 기적은 가능할 수 있다 고 믿습니다.
종종 우리는 전도하는 사람들에게 일어난 놀라운 기적들을 볼 수 있습니다. 한 번은 저는 여러 해 전에 유럽을 방문했다가 독일에 있는 선교사님 한 분을 만났습니다.
그 분은 주둔은 독일에 하면서 아직 도 공산당이 무너지기 전에 동구권 에 들어가서 성경을 전달하고 전도 하는 일을 하셨던 선교사님이었습니 다. 늘 성경을 숨겨서 들어가고 전 달 하는 일을 했는데, 이 분이 한 번은 기도하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 다고 합니다.
내가 한번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좀 당당하게 성경 가 지고 들어갈 수 없나 보통 때는 007 작전처럼 성경을 숨겨 가지고 들어 가는 작전을 했는데, 이번에 한 번 은 마음속에 담대함이 기도 가운데 생겼습니다.
그래서 배짱 좋게 가방 에 성경을 잔뜩 집어 넣고, 성경가 지고서 헝가리 쪽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경계선상에서 세관을 통과 하는데, 세관 관원이 이렇게 물었습 니다. 신고할 물품이 있으십니까? 그래서, 처음으로 예, 있습니다. 뭡 니까? 가방을 열면서 성경입니다. 라고 말했데요.
그러니까, 세관이 눈 이 동그래지면서 이것이 왜 신고할 물품입니까?라고 세관이 물었답니 다. 그래서 이 선교사님이 이게 워 낙 비싸서요.라고 했데요. 얼마나 비 쌉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 분이 침착하게 이건 너무너무 비싸서 돈 으로 환산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책에 있는 메시지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고, 평화가 없던 사람들에게 평안을 주고요, 죄 속에 빠져있던 사람들에게 용서와 구원을 주는 말씀이 이 안에 들어있기 때문 입니다.
라고 당당하게 전했더니, 그 책 나 하나 주슈~그랬답니다. 나머 지는요?라고 물었더니, 그냥 들고 들어가슈!그랬답니다. 할렐루야! 이 분이 막 들어갔다가 나와서 저를 만 나서 흥분을 해서 목사님, 기적은 20세기에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체험 했습니다.
여러분, 기적이 20세기에 도 가능하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그러나, 그것은 아무에게나 가능한 것은 아니예요. 참으로 주의 말씀을 순종하고자 하며,그 기적은 지금도 가능합니다. 마지막절을 한 번 읽어 보세요. 마지막 절이 중요합니다.
마가복음 16장에 마지막장, 제자들 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 을 확실히 증거 하시니라. 자, 언제 표적들이 나타났다구요?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단순히 믿음의 차원에 머물러 있던 것이, 그들은 부활을 믿었을 뿐만 아니라 나가서 부활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전파할 때, 나아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표적으로 그 메시지 의 신실성을 증명하기 위해서 주께 서 역사하셨던 것입니다.
주의 말씀 에 순종도 안하고, 시험하려고 이것 먹으면 죽나, 안 죽나 한 번 먹어보 자. 이렇게 하면 어떻게 됩니까? 틀림없이 돌아가실 것입니다.
그러 나, 정말 주의 말씀을 순종하고자 하는 자들에게 주께서 지금도 전도 의 역사를 주께서 보존하시고, 그리 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땅에 확장하 시고, 복음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 해서 주님은 지금도 주의 말씀에 순 종하는 자들에게 기적으로 함께 하 실 것입니다.
순종하는 자들에게 주의 표적과 능력이 나타날 것을 믿 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이 역사하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지난 수요일 작은 기적을 체 험했습니다. 우리가 월, 화, 수 우리 교회에서 중보기도 사역 세미나를 마치고, 수요일 낮 12시에 수요예배 겸, 수료예배를 마치고, 수요일 저녁 에 부산에서 청년 대집회가 있었어 요.
부산 시내가 생긴 이레 처음으 로 청년과 대학생이 한 번 전부 모 여보는 집회를 하겠다고 월-수 사 흘 동안 집회가 열리는데, 제가 마 지막날 저녁 메시지를 맡았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2시쯤 비행장으로 향했습니다.
비행장에 도착했을 때, 부산으로 가는 비행기가 모두 취소 되었다고 했습니다. 김해 공항의 비 와 안개 때문이었습니다. 카운터에 가서 보니까, 40-50분 후에 혹시 늦 게 비행기가 뜰 지도 모른다고 했습 니다.
일단 하는 수 없이 1시간정도 를 기다렸습니다. 그 후에 갔으나, 비행기가 떠날 희망이 없었습니다. 부산에 전화를 했습니다. 비행기가 못 떠난다고 하는데 어떻게 할까요? 라고 했더니, 목사님, 수단과 방법 을 가리지 말고 오십시요.
5천명의 젊은이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수 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오십시요. Asiana와KAL을 번갈아가면서 모두 알아 보았으나, 방법이 없었습니다. 김해 공항말고 다른 비행장을 알아 보았으나, 울산, 포항비행장 모두 비 행장 모두cancle이 되었습니다.
또 전화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또 목사 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오 십시요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저는 제 수단과 방법이 자 떨어졌습니다. 라고 했어요. 목사님 그러면, 택시라 고 타고 오세요.
어떤 택시는 3시간 30분이면 도착을 합니다. 그 때가 5 시가 다 되었어요. 제가 순진해서 밖에 가서 물었어요. 3시간 30분이 면 부산에 갈 수 있습니까?
아이~ 비가 오는데 어떻게 갑니까? 최소한 5시간은 걸립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러면, 10시가 넘어야 갈 수 가 있는 데, 그러면 집회가 다 끝나는데. 또 다시 전화를 했습니다.
형편이 이래 서 도저히 못 갈 것 같습니다. 목사 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오 십시요.
이제 정말 불가능해요. 사실 그때 제 마음 속에서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사흘동안 중 보기도 세미나 때문에 너무나 피곤 했어요. 하지만, 부산에서는 무슨 일 이 있어도 오셔야 합니다. 그래서 조금만 더 기다려 보지요.
그 때 다 시 카운터에 가니까, 진주로 가는 비행기가 6 시에 있답니다. 그래서 진주에서 부산은 얼마나 걸립니까? 라고 했더니, 2시간정도 걸리는데, 보통 차가 밀려서 3시간정도 걸린데 요. 그럼, 10시쯤 도착할 것 같았습 니다.
다시 전화를 해서 상황을 말 했더니, 목사님, 그렇게 해서라도 오 십시요. 얼굴이라도 보여주시면, 준 비위원들이 살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쨌든, 6시에 진주로 가는 비행기 는 탔습니다. 비행기를 타면서 이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하나님 뜻이 있 겠지. 하나님, 저는 모르지만, 부산 집회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있다면 하나님 뜻을 이루어 주십시요. 그리 고 비행기에서 7시 10분쯤 내려서 택시를 잡기로 되어있었기 때문에 택시를 잡으려고 하는데,
갑자기 엥~하면서 경찰차가 오더니 이동원 목사 계십니까? 그래서 접니다 그랬 더니, 타십시요. 전 죄도 안 졌는데, 왜 이걸 탑니까?했더니,
부산 KBS 홀까지 모셔오라는 명령을 받았습니 다.그래요. 그 차가 뭐하는 차인지를 물었더니, 고속도로 순찰차라고 하 더라구요. 그래서 엥~하면서 가는 것 이예요. 그래서 제 생각에는 어 떤 크리스찬 경찰을 감동 시켜서 어 떤 소스에서 왔는가 해서 물었습니 다.
죄송하지만, 경찰님은 어느 교회 에 나가십니까? 저는 절에 나갑니 다. 그래서 예수님 이야기하면서 갔 습니다. 그 경찰이 너무 진지하게 이야기를 듣는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을 같이 이야기 하면서, 8시 45 분에 도착을 했습니다.
도착하니까, 모두들 박수를 치고, 난리가 났어요. 제 평생에 그런 박수를 받는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준비위원이 목사 님, 10시까지만 이 홀을 사용하게 되어있기 때문에 꼭 30분 동안만 설 교가 가능합니다.
저는 제 생애 가 장 먼 거리에 가서 가장 짧막한 설 교를 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일이 벌어졌어요. 젊은이들이 짧은 설교 속에서 얼마나 그렇게 격정적으로 반응을 하는지, 선교사 초청을 했 을때 절반 이상이 반응을 보이더라 구요.
혹시 여러분 가운데 예수 그 리스도와 상관없이 살아왔던 사람 들, 그리스도 앞에 인생을 드리고 주님을 만나길 원하는 사람들 한 번 일어나 보십시요. 굉장히 많은 젊은 이들이 일어나요.
한 목사님이 마무 리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 하나님께 서는 이 집회를 하나님의 뜻 가운데 계획하셨지만, 사탄은 이 집회를 막 고, 강사가 오지 못하도록 노력을 다했지만, 하나님은 드디어 성령으 로 역사하셨습니다.
수 많은 젊은이 들이 그의 생애를 받치는 놀라운 장 면 속에서 저는 회계했어요. 피곤하 다고 안 갔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순종하니까 역시 축복이, 기적이 있 더라구요. 순종은 언제나 기적을 가 져 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우리가 말씀을 믿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 믿음보 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말씀을 믿고 그대로 살기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순종할 때 성령은 역사하실 것입니 다. 기적은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 을 함께 할 것을 신뢰하시기 바랍니 다. 위대한 새 시대에는 이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자들을 기다립니다. 그들과 함께 주님은 새로운 역사를 진행해 주실 것입니다. 기도하시겠 습니다.
막16:1-8/ 부활의 복음 /한경직 목사
2014-08-25 16:23:13
‘부활장’으로 유명한 고린도전서 15장 첫 부분을 봉독했습니다. 제가 이제 다시 1절에서부터 몇 절만 읽을 때에 자세히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이렇게 고린도전서 15장이 시작됩니다.
여기에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의 내용이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또 성경대로 다시 살아난 사실입니다. 복음의 내용은 간단히 말하면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오늘 부활절을 당하여 복음의 내용인 부활에 대하여 잠깐 생각하고자 합니다.
주님께서는 성경대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또한 성경대로 다시 사흘 만에 살아나셨습니다. 이것이 곧 우리 기독교 신앙의 근본이 되는 진리입니다. 우리가 다 이 진리를 믿지만, 이 부활의 사실은 너무나 인간의 생각을 초월하므로 때로는 잘 믿는 이들 가운데도 의심의 조각구름이 우리 믿는 이들의 가슴에도 솟아오를 수 있습니다. 이 시간 먼저 이러한 면에 대하여 잠깐 생각하고 계속하여 부활의 참뜻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부활은 과연 있을 수 있는가? 혹은 믿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잠깐 생각하십시다.
먼저, 부활은 과연 가능한가? 가능할까? 그 가능성에 대하여 생각하여 보십시다. 인간으로서는 물론 불가능합니다. 인간으로서는 자기 자신의 죽음 가운데서 스스로 부활할 수도 없고, 또 다른 사람을 죽음 가운데서 부활하게 할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분명한 자명의 이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으로서는 어떠합니까?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곧 태초에 천지를 지으시고 인간까지 지으신 하나님으로서는 어떠합니까? 물론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부활도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은 부활의 가능성을 믿을 수 있고 또 믿습니다.
그러므로 기억하십시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무신론자들 외에는 다 부활을 믿을 수 있고 또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사람들은 부활을 다 믿습니다.
그리고 둘째는, 부활의 개연성(蓋然性)을 생각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개연성이란 ‘그러한 일이 있음직하냐?’ 곧 이러한 뜻입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도 물론 보통 사람이 부활하였다고 하면 믿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독생자요, 만민의 구주로 오신 예수님의 경우에는 다릅니다. 으레 그래야 될 일이 아닙니까? 예수님의 신분으로 보아서 우리는 모두 그의 부활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셋째로, 우리가 부활의 가능성과 그 개연성을 모두 인정한다면 그 다음 문제는 단순히 역사적 사실에 대한 고찰이 있을 뿐입니다. 가능하다고 다 있는 것이 아니고 개연성이 있다고 다 그대로 되는 것도 물론 아닙니다.
그런데 이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하여 오늘 읽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사도 바울은 분명히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게바와 열두 제자와 심지어 500여 형제에게 나타나셨고, 또 그 중에 태반이나 그 당시까지 살아 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이 사실을 어떻게 부정할 수 있습니까?
사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직후에는 제자들이 모두 낙심하고 실망하였는데, 며칠 후에 새 용기를 얻어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다고 증거하였습니다. 그 원인이 무엇일까요? 그 대답은 한 가지뿐입니다. 곧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를 친히 만나본 까닭이었습니다.
어떤 심리학자들은 그들의 이러한 경험을 심리적인 착각, 혹은 환상이라고 설명하고자 하나 그것은 말이 안 됩니다. 한두 사람이면 모르지만, 500여 명에게 일시에 어떤 환상이 일어날 수는 없습니다. 기독교회는 그 제자들의 부활에 대한 증거로 사실은 일어났습니다. 기독교의 존재 자체가 주님의 부활을 증거하며, 지금까지도 부활을 선포합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처음 제자들은 모두 유대인으로서 수천 년간 이레 중 마지막 날을 안식일로 지켰으나 점점 변하여 이레 중 첫날을 성일로 지키게 되었습니다. 왜요? 이레 중 첫날에 주님이 부활하신 까닭입니다. 사실 이러한 의미에서 매주일 아침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합니다.
그러므로 이 부활에 대하여는 가능성으로 보나 개연성으로 보나, 그리고 역사적으로 보나 다 믿을 만합니다. 주님은 과연 성경의 말씀대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3일 만에 하나님의 권능으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 부활하신 주님은 영원히 살아 계셔서 지금까지 죄인을 불러 구원하시고,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제 계속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의 뜻에 대하여 간단히 생각하고자 합니다.
첫째는, 그리스도의 부활은 진리의 부활과 승리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는 오직 진리를 가르치셨고 또 그 자신이 진리의 화신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허위와 거짓의 세력은 예수를 모함하여 결국은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그리하여 당시 온갖 허위의 주동자들은 자기들이 승리한 줄로 처음에는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깐뿐이었습니다. 진리의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이 우주에는 그러한 일이 오래 계속될 수는 없습니다. 진리의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부활은 모든 진리의 부활과 진리의 최후 승리를 의미합니다.
진리는 아무리 묻어도 다시 살아납니다. 지금도 어떤 나라에서는, 특히 이북에서는 진리를 묻어 보려고 갖은 애를 씁니다. 그러나 그것은 허사입니다. 진리는 묻고 묻어도 그 무덤의 문은 다시 열리고야 맙니다. 이북에도 무너진 제단이 다시 건축될 때가 반드시 옵니다. 밤이 비록 캄캄하고 어두운 듯하지만, 부활의 아침은 온 세계에 다시 오고야 맙니다.
그리고 둘째는, 주님의 부활은 또한 정의의 부활과 승리를 의미합니다. 사실 이 세상은 정의와 불의의 싸움터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역사 또한 그러합니다. 신약시대에는 정의를 대표하는 그리스도와 온갖 불의의 상징이던 바리새인, 사두개인과의 큰 충돌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합세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무덤에 장사한 후에는 그들은 승리한 줄 착각하고 기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악마의 웃음은 오래 가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곧 부활하셨습니다. 최후 승리를 얻었습니다. 아직도 이 세상에는 어느 나라,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불의와 부정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눌린 자, 탄식하는 자, 억울하게 신음하는 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 부활절은 정의의 최후 승리를 모든 인류에게 새롭게 선포하는 거룩한 날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시고 살아 계시므로 정의는 반드시 승리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부활은 사랑의 부활과 승리를 또한 의미합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사랑 그대로입니다. 사랑의 화신이십니다. 그는 죄인을 사랑하시고 약한 자와 눌린 자를 사랑하시고 원수도 사랑하셨습니다. 이 사랑의 화신을 당시 악마의 세력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무덤에 넣고 뚜껑을 덮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현상은 오래 갈 수는 없었습니다.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사랑은 다시 살아 무덤을 열고 나왔습니다. 이렇게 주님의 사랑은 온 세계를 지금까지 비춥니다. 이 세계는 아직도 미움과 시기와 다툼과 싸움으로 이 세계를 검은 구름으로 덮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다. 최후 승리는 사랑의 편에 있습니다. 사랑이 이깁니다. 주님은 사랑으로 온 세계를 정복하였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만 더 기억하십시다. 주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친히 증언하셨습니다. 이 세상에는 이 생명의 세력과 사망의 세력이 서로 싸웁니다. 때로는 일시적으로 사망의 권세가 이기는 듯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깐일 뿐입니다. 생명은 반드시 부활합니다. 예수님과 같이 다시 살아납니다. 최후 승리는 생명에게 있습니다.
우리 인간 자신도 일시적으로 사망의 권세에게 패배하는 듯하는 때가 옵니다. 곧 죽을 때가 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도 잠깐뿐입니다. 우리 인간 하나하나도 다시 살아날 때가 반드시 옵니다. 우리에게도 부활의 아침은 반드시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아침 사도신경을 통하여 우리의 신앙을 고백할 때에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이렇게 우리는 모두 고백하였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인생의 마지막 카드는 죽음이 아니요, 생명입니다. 영윈히 사는 생명입니다. 이 부활주일은 생명은 반드시 최후 승리를 얻는다는 진리를 다시 한 번 온 세계에 선포하는 날입니다. 분명히 기억하십시다. 성경의 말씀대로 주님의 부활은 모든 잠자는 자의 처음 익은 열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모두 부활의 열매에 참여할 때가 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활절은 진리와 정의와 사랑과 생명의 최후 승리를 선포합니다. 아직도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거짓과 불의와 증오와 죄악과 죽음의 세력이 인류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부활절을 통하여 생명의 최후 승리를 또 한 번 새롭게 선포합니다. 한 조각 검은 구름이라도 청천백일을 가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깐뿐입니다. 진리와 생명의 아침 해는 반드시 온 누리를 밝게 비추입니다.
우리는 이 영광스러운 부활절에 아직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헤매는 모든 인간들에게 이 부활의 기쁜 복음을 전파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은 여러분이 특별히 전도회에도 가입하는 날입니다. 이 기쁜 부활주일에 우리 모두 부활과 생명의 주님을 우리 마음 속에 영접해서 이 어둡고 사망의 세상에 비록 살지만, 오직 진리와 정의와 생명의 삶을 가질 수 있는 축복을 우리 모두에게 더하여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십시다.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셨습니다만 우리의 구원을 완성케 하시기 위해서 3일 만에 다시 살아서 온 세계에 진리와 정의와 사랑과 생명의 최후 승리를 선포하여 주신 이 날, 오 하나님 우리 아버지! 감사와 찬송을 무엇으로 다 드릴 길이 없습니다. 간절히 기도합니다. 여기 거룩한 이 집에 나와서 주님께 봉사하고 주님을 숭배하는 모든 아버지 사랑하는 자녀들 마음 속에 이 시간 부활하신 생명의 주님이 그 심령마다 친히 오셔서 과거의 죽음의 생활은 과거로 청산하고 앞으로는 오직 진리와 정의와 사랑과 참 생명의 삶을 가질 수 있는 이 축복을 우리 모두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막16:1-11/ 부활한 생활 / 한경직 목사
2014-08-22 23:54:26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골 三․一-二)
부활주일은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과거에 있어서는 역사적인 사실, 곧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이올시다.
둘째는 미래에 있어서는 모든 인간의 부활과 영생에 대한 예표(豫表)와 확신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날입니다.
셋째는 현재에 있어서는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적 부활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날입니다.
오늘 아침, 이 시간은 특별히 현재 우리 믿는 사람들이 체험할 수 있는 영적 부활에 대해서 잠깐 생각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 생활은 이 영적 부활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우리의 옛 사람을 십자가에서 못박아 죽이고 같이 묻히고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변화하여 새 사람으로 살아남으로 말미암아 우리 신앙생활은 비로소 시작되는 것입니다.
본래 세례 요한이 세례를 베풀 때에는 지금처럼 간단하게 세례를 베풀지 아니하고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푼 것을 여러분이 기억합니다. 그 때에는 세례 받는 사람이 물 속에 온전히 그 몸을 담그고 그 후에 물 속으로부터 다시 올라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특별히 의미가 있습니다.
옛 사람은 물 속에 온전히 장사하고 새 사람으로 올라오는 깊은 뜻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실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사람은 옛 사람을 온전히 물 속에 장사하고 새 사람으로 부활하는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밀 한 알에 대한 비유도 또한 여기에 적용되는 진리가 있습니다. 밀 한 알이 먼저 땅에 떨어져 묻히고 썩은 후에 그 속에서 새 싹이 변화되어서 땅 위로 올라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 생활이란 옛 사람은 떨어지는 밀 알과 같이 땅에 떨어져서 먼저 죽어야 하고 그 뒤에 새로운 생명이 새 싹과 같이 올라와야 우리의 신앙 생활이 온전히 시작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는 이와 같은 말씀으로 가르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사람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우리 믿는 사람들은 먼저 우리 육신에 속하는 모든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 그 다음에 새 사람으로 살아날 때에 참된 신앙 생활이 시작된다고 하는 뜻을 가르쳐 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은 우리에게 계속해서 간절히 권면합니다.『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치욕과 안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곧 우상 숭배니라.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들이니라. 거짓말을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온전히 벗어 버리라.』이와 같이 우리에게 간절히 권면하여 줍니다. 우리 신자의 생활은 온전히 옛 사람을 십자가에서 못박아 죽이고 새 사람으로 영적으로 부활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믿는 사람들은 이 다음 마지막에 육신의 부활을 기다릴 것 없이 우리의 영혼이 먼저 죽은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될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말씀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우리가 과연 그리스도와 같이 죽고 그리스도와 같이 부활한 은혜를 받았으면 위에 있는 것을 찾으라고 우리에게 권면했습니다.
새 생명은 새 법칙 아래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밀 알이 땅에 떨어져서 죽고 변화해서 새 싹으로 나온 후에는 언제든지 위를 향해서 올라가는 것이 새 생명의 원칙입니다. 하늘을 향하여 향상하는 것이 새 생명의 원리입니다.
여기, 벌레의 생활을 볼지라도 진흙 속에 있던 것으로 보기가 아주 험악하게 생긴 유충이 한번 변해서 날개도 나고 성충이 된 후에는 옛날과 같이 진흙 속에 그냥 묻혀서 살수는 없습니다.
나비가 되고 벌이 된 후에는, 맴이 된 후에는 진흙 속에서 더 계속해서 살수가 없고 맑은 공기 가운데서 살수밖에 없으며 다른 많은 꽃들과 아름다운 나뭇잎 사이로 날아다니면서 깃을 들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꼭 마찬가지로 우리가 과거에 어떠한 생활을 하였든지, 아무리 부패한 가운데 빠졌었든지, 아무리 우리 심령이 죄악 가운데서 죽었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사함을 받고 죽은 가운데서 그 영혼이 다시 부활하였다고 하면, 죽은 시체가 있던 어두움 속에 그냥 머물러 있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죽은 송장이 입었던 수의를 그냥 입고 이 세상에 나와 다닐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어두운 환경을 벗어날 것입니다.
수의와 같이 죽었을 때에 행하던 온갖 불의와 악독(惡毒)과 음란과 부정과 협잡과 모든 이 악한 행위는 온전히 벗어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위에 있는 것을 찾아서 날마다 향상의 생활을 하는 것이 부활한 생활의 새로운 원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간절히 권면합니다. 우리가 과연 우리 영혼이 부활했으면 이젠 위에 있는 것을 찾으라고 하며, 아래를 보고 땅에 있는 것을 찾지 말고, 항상 위에 있는 것을 찾으라고 권명합니다.
음악 가운데도 위에 속하는 음악이 있고, 땅에 속하는 음악이 있습니다. 그림 가운데도 위에 속하는 그림이 있고, 땅에 속하는 그림이 있습니다. 문학 가운데도 위에 속하는 문학이 있고, 아래에 속하는 문학이 있습니다.
실업계에도 위에 속하게 실업을 할 수도 있고, 땅에 속하는 실업을 할 수 있습니다. 공무원이 되어서도 위에 속하는 공무원이 될 수가 있고, 땅에 속하는 공무원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떠한 방면에 살든지 우리의 심령이 과연 부활하였다고 하면, 내가 어떠한 방면에서 어떠한 곳에서 살며 활동하든지 그 속에서 위에 있는 것을 찾을 것입니다. 그 곳에서 거룩한 생활을 할 것이요, 그 속에서 참된 생활을 할 것이요,
그 속에서 화평한 생활을 할 것이요, 어디서나 진리를 찾고, 어디서나 아름다움을 찾을 것입니다. 우리 영혼이 과연 부활하였으면, 땅에 있는 것을 찾지 말고 위에 있는 것을 찾으라고 우리에게 분부하십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하시는 말씀이『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이 앉아 계시 나니라.』이런 말씀으로 권면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가운데서 다시 살으실 뿐더러 四十일만에 승천해서 하나님 우편이 앉아 계십니다.
여기 특별히 위에 있는 것을 찾으라고 하는 이유는 위에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까닭입니다. 다시 말하면 위에 있는 것을 찾으라고 하는 말은, 단적으로 말하면, 언제든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하고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우리 생의 최고 목표를 삼으라고 하는 그 말입니다.
물론 학생들에게 그가 이 다음에 커서 무엇을 하겠느냐고 물어 보면, 여러 가지 대답을 합니다.『나는 커서 과학자가 되겠습니다.』『나는 예술가가 되기를 원합니다.』『나는 정치가가 되기를 원합니다.』『나는 의사가 되기를 원합니다.』『나는 종교가가 되기를 원합니다.』여러 가지 방면에 대한 포부를 가집니다. 이것이 다 귀합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귀한 것이 한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어떠한 사람이 되겠느냐? 어떠한 사람이 되어서 정치가가 되겠느냐? 어떠한 사람이 되어서 과학자가 되겠느냐? 위에 있는 것을 찾으라고 하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우리 인격의 목표를 삼으라고 하는 그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인격으로서, 그리스도의 마음으로서, 그리스도의 성품으로서, 그리스도의 생활로서 내 태도의 규범을 삼아서 항상 그리스도와 같이 되기를 원하여 그리스도의 신명과 그리스도의 정신을 가지고, 내가 정치가도 되고, 실업가도 되고, 공무원도 되고, 과학자도 되고, 예술가도 되라는 그 말이올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생의 최고 목표로 삼으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또한 계속해서 권면하는 말씀이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이 절에 기록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생의 최고 목표로 삼았으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그 목표에 도달할 수 잇느냐?
여기에 특별한 방법을 한 가지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항상 그리스도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 볼 때에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고 사도행전에 기록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과 접촉하고 내려온 후에 그 얼굴이 빛나서 감히 다른 사람들이 모세의 얼굴을 바라 볼 수 없으므로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었다고 하는 말씀도 있습니다.
꽃이 어떻게 아름다워집니까? 항상 태양을 바라보는 가운데 혹은 붉어지고 혹은 노랗게 되고 혹은 보라 빛으로 여러 가지 아름다운 꽃이 피는 것입니다. 풀이 어떻게 자라고, 나무가 어떻게 자라고, 곡식이 어떻게 자랍니까? 항상 위를 향해서 태양을 보는 가운데 풀이 자라고, 나무가 자라고, 곡식이 자라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전에 다니엘이 비록 멀리 바벨론에 가서 종노릇을 하기는 하지마는 언제든지 예루살렘으로 향한 문을 열어 놓고 하루에 세 때씩 기도하듯이 우리 믿는 사람들도 언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항상 위를 향해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생각하는 가운데서, 우리의 성품과 생각과 우리의 모든 생활이 점점 변화해서 그리스도를 최고 목표로 하는 그 이상에까지 도달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하려고 하면, 제가 항상 하는 말과 같이 특별히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하나는, 묵상과 기도입니다. 묵상과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신령한 눈으로 그리스도를 바라 볼 수 있습니다. 묵상과 기도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은연한 감화를 우리가 받을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교훈을 직접 들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직접 그리스도의 말씀을 우리 심령 속에 전하여 주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는 가운데서 점점 이와 같은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심령이 다 죽은 가운데서 과연 부활하였습니까? 여러분이 부활한 생활을 하십니까? 우리 가운데 한 분이라도 아직까지 옛 사람이 온전히 죽지 못하고 아직까지 옛 육신에 속하는 이가 있으면, 이 시간 먼저 십자가에 못박고 이 기쁘고 즐거운 부활주일 아침에 그리스도의 부활과 같이 여러분의 심령이 부활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주신 그 생명이 부활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그 본래의 양심이 부활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본래 주신 그 내재의 모든 능력이 부활해야 됩니다. 그리고 부활하였습니까? 항상 위에 있는 것을 찾으며, 위에 있는 것을 바라보며,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며, 묵상과 기도로서 우리의 최고 목표를 향해서 매일 매일 발걸음을 앞으로 내어 디디시기를 바랍니다.
이 기쁜 부활주일 아침에 우리 하나 하나의 심령이 부활의 축복을 받고 위를 향해서 한번 더 올라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부활 승리의 신비 /고전15:50-58/ 곽선희 목사
2014-11-27 08:07:11
오늘 본문 성경 51절에 보면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이렇게 말씀합니다. 비밀을 말하노니, '비밀'이라는 말은 다른 말로 바꾸면 '신비'라고 하는 말입니다. 무스테리온이라고 하는 단어로 영어로 번역할 때는 미스테리(mystery)라고 번역을 합니다.
무스테리온 - Mystery, Secrete 이렇게 번역하게 됩니다. 여러분, '신비'라고 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셨습니까? 어찌 생각하면 이 세상은 온통 신비로운 곳입니다. 신비라는 말은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모르겠다는 말이죠. 이해가 안 된다.
그걸 흔히 말하기를 불가지론(不可知論)이라고 합니다. '생각해도, 생각해도 모를 거다, 이건 모를 거다.' 그래서 모를 것으로 그렇게 간주합니다. 알 수 없는 것, 불가지론이라 생각하는 정도라면 괜찮은데, 더 나가서 '모를 것 없다, 내가 모르니까 사실이 아니다.
내가 경험하지 못했으니까 그건 없는 거다.' 이렇게 부정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이 신비에 대한 부정적 견해입니다.
그러면 긍정적 견해는 어떨까요. 같은 신비로운 일을 놓고서도 '모르는 것뿐이지 사실은 사실이다. 리얼리티. 그건 그대로 있는 것이다. 이해되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건 아니다. 내 경험에 없다고 해서 없는 게 아니다.
어찌 생각하면 내 경험으로 이해되지 않는 것일수록 더 온전하다. 내가 이해할 수 없기에 더욱더 확실하다.' 이것이 교부 터툴리안(Tertullian)의 말입니다.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 이해가 안 되기 때문에 더 확실하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신비에 대해 말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생명의 신비처럼 놀라운 신비는 없습니다. 요새 뭐 생명의 신비, 이것을 파헤쳤다, 이해했다, 뭐 그런 얘기 합니다만 그건 이미 있는 것을 우리가 조금 아는 것뿐이지 무슨 새로운 것을 생각해낸 것은 아니지요.
몰랐던 것을 조금 더 알았다는 것 뿐 이에요. 아직도 무궁무진한 신비의 세계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조금 야한 이야기 하나 할까요? 저는 젊었을 때 책을 보면서 이거 이렇게 해서 한 생명이 태어난다 할 때, 남녀관계에 있어서 정자가 5억이 출동해야 된다는 거예요.
5억. 그리고 그 하나가 그 많은 중에서 당선이 되서 생명이 된다, 아, 그건 낭비가 너무 많다. 아니 5억 중에 하나라니, 그 희한한 선택이지만 너무 너무 낭비가 많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요 얼마 전에 리더스다이제스트를 읽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이 5억이 다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요새 젊은 사람들 불임이 많아요. 그런데 여성에만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남성원인 불임이 많다는 겁니다.
왜? 이거 정자가 2억 이하로 떨어지면 불임이요. 그러니까 3억 이상이 돼야 돼요. 이 5억이라는 정자가 나가서 난자를 향해 올라가는 동안에 그 모든 어려운 여건을 헤쳐요. 그래서 헤치고, 헤치고, 헤쳐 나가면 난자 앞에 딱 섰을 때는 60개의 정자가 거기 올라간대요.
그것도 운동을 하고서 다 죽고 마지막 하나가 딱 들어가서 난자와 만나서 여러분이 태어난 겁니다. 세상에 희한하지 않습니까? 5억이 다 필요하다는 거예요.
마치 예를 들면, 우리가 에베레스트 산을 올라간다고 한다면, 마지막에 올라가서 깃발하나 띄우고 산을 정복했다고 그렇게 외치지만 사실은 거기까지 가는 데는 수많은 사람, 수백 명의 사람이 그를 위해서 수고했어요.
마지막 베이스캠프까지 갈 때는요, 당나귀까지 동원돼요. 당나귀까지. 그리고 그 수고 수고를 다해서 하나가 올라가서 깃발을 꽂는 거예요. 마찬가지로 5억이라는 생명이 다 희생되면서 하나를 살립니다.
이것만 가지고도 이 얼마나 신비롭습니까? 그러고서야 여러분과 내가 태어난 거예요. 그러니 이 얼마나 중요한 얘기입니까? 생명의 신비 그것을 이루다 말로 할 수 없어요.
우스운 얘기입니다만 제 손자 아이가 걸어가는 걸 봅니다. 딱 보니까 고거 날 닮았더라구요. 아니 도대체 어떻게 저게 날 닮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하는 짓 보면 내가 꼭 거울을 보는 것 같아요. 이거 보세요.
놀라운 신비, 그렇죠? 그런가하면 성장에도 신비가 있습니다. 우리가 저들을 성장하게 자라나는데 한 일이 뭐 있습니까? 그저 우유 먹인 거 밖에 없거든요. 젖 먹인 거 밖에 없는데 그렇게, 그렇게 자라는 걸 보면 이 또한 성장의 신비를 말로 다 할 수가 없어요.
그 다음에는 죽음의 신비. 죽음 역시 우리가 참으로 다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죠? 이건 형체가 사라진다는 것이지만, 중단되기도 하는 것이지만,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분리되는 것입니다. 영과 몸이 분리되는 것입니다.
또는 영의 입장에서 보면 떠나는 것입니다. 육체의 감옥에서 떠나는 것, 또 다른 말로 말하면 Next Stage - 다른 단계의 생명으로 우리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변화된다는 말을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자, 그러면 이것을 또 넘어서 부활의 신비. 알거나 모르거나 이건 생명 신비 차원에서 순리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부활 사건을 특수한 기적으로만 이해하려고 하는데 문제가 있어요. 나는 데서부터, 성장하는 데서부터, 죽음에서부터, 부활에까지 이 생명의 연장선에서 전부가 신비요,
이 신비 속에서 이걸 수긍해야 이해해야 된다는 그 말입니다. 그러면 본문에서 변화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성경을 자세히 상고해 보면 부활, 변화 두 가지 단어를 쓰는데 변화 쪽이 훨씬 더 많습니다. 부활은 변화올시다.
다시 말하면 죽음에로의 변화 - 이건 썩어지는 것이에요, 또 하나는 생명에로의 변화 - 그리스도적 생명의 단계로 변화하는 것입니다. 그래, 오늘 성경에는 알라게소메사 - We shall be changed, 우리는 반드시 변화하리라.
우리는 죽음에로의 변화를 이해 못하고 있듯이 다음 단계인 부활에로의 변화는 더더욱 이해 못하고 있습니다. 사건은 있고 사실은 분명하지만 우리 이해는 너무 거기에 가까이 가지 못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고로 문제는 부활 사건이 아니라 부활 사건에 대한 우리의 신앙입니다.
내가 알 수 있으면 있고, 알 수 없으면 없다는 그런 망언을 부리지 마세요. 엄연한 사실이에요, 내가 아는 것은 몇 억 만 분의 일도 못돼요. 그걸 가지고 아느니 모르느니 믿을 수 있다느니 없다느니 그런 쓸데없는 말 하지 마세요. 생명은 엄연한 것이에요. 이 부활사건은 엄연한 사실이에요. 다만 내가 얼마나 이것을 믿느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 사건과 부활 신앙을 구별합니다.
부활 신앙 다음에 부활 이해로 바꾸어집니다. 부활의 현실화, 부활의 윤리화 이렇게 말하게 됩니다. 우리 기독교인의 메시지는 딱 세 가지예요. 첫째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가 점점 확장되어 가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져 가고 있다. 첫째구요. 둘째는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우리의 이해입니다. 이걸 꼭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부활을 어느 정도 믿고 있습니까? 십자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십자가는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요.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최고의 은사라는 것. 십자가의 이해, 십자가를 쳐다볼 때 마다 그 안에서 신비로운 생명력을 우리가 느끼게 되는 것이죠. 이것이 그리스도인요.
셋째는 그리고 부활입니다. 미안합니다만 제가 언제 한번 장례식을 했는데요, 산에 가서 하관식까지 할 때가 있었어요. 산에 가서 땅에다가 묻어놓고 마지막으로 기도하죠. 그리고 설교하는데, 그 때의 설교는 그렇게 길지 않습니다.
주로 고린도전서 15장에 있는 부활장에 있는 이야기, 오늘 본문 같은 이야기를 쭉 성경으로 많이 읽고 설교는 5분 정도 합니다. 그 5분 간단하죠. '우리가 여기서 이렇게 헤어집니다. 그러나 멀지 않아 다 같이 그리스도 앞에 가서 부활한 다음에 함께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 때 반갑게 만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 때 부끄러움 없이 서로 대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자랑스러운 아들, 자랑스러운 아내, 자랑스럽게 만나게 되기를 우리 위해서 힘씁시다.' 하고 끝났거든요.
그리고 내려오는데 거기에 대학 교수인 안 믿는 사람 하나 있었어요. 철저하게 안 믿는 사람. 같이 내려오는데, 저는 처음 보는 사람이에요, 가까이 오더니 "목사님, 제가 하나 물읍시다. 목사님, 제가 오늘 설교를 가만히 들어보니까 기독교인들은 부활을 진짜로 믿는구만요." 그렇게 물어요.
"아, 그럼 진짜로 믿지 가짜로 믿어요?" "난, 그저 그렇거니 했지만 그렇게까지 확실하게 믿는 줄 몰랐습니다. 아 진짜로 믿어요?" "아, 그럼요. 진짜!" 얼굴이 확 달라지더라구요. 그 다음 주일날 보니까 교회 나왔어요.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이거 진짜로 믿어야지요.
이거 무슨 소리입니까? 추상적 얘기가 아니에요. 내 지식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아요. 이 엄연한 사실 앞에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진짜로 믿는 거죠. 부활을 진짜 믿는 거예요. 자 이 관계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십자가 사건에서 이해가 돼야 하고 또 십자가는 부활 신앙 아래서 이해돼야 된다 하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사망 권세에 대해서 생각해 보셨습니까? 모든 가치, 도덕관, 세계관이 다 죽음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는 종종 이런 위트를 우리에게 말합니다. '만일에 부활이 없다면, 만일에 부활이 없다면 우리는 참으로 불쌍한 사람일 거라고.'
만일에 부활이 없다면, 그래 율법을 무엇으로 이기겠느냐고. 우리는 다 죄인인데. 만일에 부활이 없다면 얼마나 헛되겠느냐고. 그렇게 설명해 나가다가 "만일에 부활이 없다면 예수님의 부활도 없었으리라.(13)" 거기에 못을 박았어요. 예수의 부활이 있으니까 부활은 있는 거예요.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저 아프리카에 가서 선교하는 어느 선교사가 어떻게 용케, 용케 해서 어느 부족에 이르렀습니다. 아주 씨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 씨족제도가 강한 데서는 추장이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어떻게든지 추장 하나만 믿게 하면 그거 다 믿는 거예요.
그 외에 사람을 뭐 아무리 붙들고 해봐야 소용없어요. 그래서 여러 해 동안 추장을 만나고 도와주고 봉사하고 이렇게 하면서 설득을 해서 예수 믿을 단계까지 왔어요. 그래서 성경 공부를 해요. 성경 공부를 하다가 보니까 쭉 읽어 나가는데 부활이 나왔어요.
그래 추장이 벌떡 일어나더니 하는 말이 "선교사님, 다시 물어보는데 그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얘기 아닙니까?" "아, 그렇지요." "안돼요, 그건 안 됩니다." 그러더래요. 왜 안 되냐고 그러니까
"내가 억울하게 죽인 사람이 많거든요. 이 사람들이 다 살아나면 큰일 나죠. 부활 안 됩니다." 그러더래요. 여러분, 안되고 되고가 문제입니까? 부활한다니까요. 그런 줄 알고 사세요.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중국의 선교사의 딸로서 「기도에 관한 편지」라고 하는 책을 쓴 아그네스 샌포드(Agnes Sanford)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기도하는 순간까지도 자기감정과 욕망, 분노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 인간들. 이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어디 있느냐?
그는 이렇게 간단하게 말합니다. "'나는 죽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라." 그래서 '메멘토모리' - 중세기 교부들이 많이 쓰던 말입니다. 메멘토모리. 인사할 때도 굿모닝이 아니고 메멘토모리 그랬어요. 죽음을 생각하십시오. 죽는다고 생각하십시다.
이게 인사였어요. 메멘토모리. 왜? 메멘토모리 하는 순간에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있다. 생명으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역사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완전한 순종을 하게 되고 둘째, 나도 죽음을 피해가지 못한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 무엇을 생각해야 되는가? 그리고 내 앞에 있는 영생을 바라보게 됩니다. 이것만이 이 복잡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다. 그렇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부활은 변화라고 말씀했습니다.
기독교적인 변화요 그리스도적인 변화입니다. 생명에로의 변화입니다. 생명의 다음 단계로서의 변화입니다. 소위 그리스도 스피어(sphere) - 그리스도적 단계로서의 변화를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오늘 성경이 가르쳐 주는 또 하나 희한한 말씀이 있어요. "순식간에(51)" 라고 했어요. 이걸 강조합니다. '순식간' 이라는 말은 뭡니까? 진화가 아니라는 거예요. 자연적 변화가 아니라는 거예요. 창조적 능력 가운데에 있는 순식간에 예수님의 부활이 순식간에 되는 것처럼 우리 앞에 있는 부활도 순식간에 이루어집니다. 이걸 확실하게 알아야 되겠어요.
그리고 "우리도 변화하리라.(52)" 우리도 변화하리라. 빌립보 3장 21절에서 강조합니다. "그가 우리를 변화케 하리라." 변화시켜요. 그가 우리를 변화케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에게 와서 변화시킬 것이다.
그리고 더 놀라운 신비로운 말씀은 "입으리라(53)" 하는 말입니다. '덧입는다' 혹은 '삼킨바 되리라' - 자 여기에 생명의 역사가 나타날 때에 죽음이라는 것은 생명에 흡수되고 마는 거예요. 흡수되고 마는 거예요.
너무 먼 비유 같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해 봅니다. 처녀들이 결혼을 하기 위해서 약혼을 하는데요. 약혼을 하고 그 다음에 보니까 정신없어요. 약혼자 집에 갔다가 왔다가 하느라고 정신없어요.
그 준비하느라고. 그 뿐입니까. 결혼 딱 하고 나면은 수십 년 동안 살던 친정집 그 집 훌쩍 떠나 버립니다. 돌아오지도 않아요. 그쪽이 좋으니까. 그쪽이 신랑과 함께 사는 그 생활이 너무 행복할 때, 수십 년 동안 머물렀던 친정 생각지도 않아요. 이게 뭡니까? 행복에 과거가 흡수된 거예요. 우리가 생명의 역사가 나타날 때, 썩어짐의 역사라는 것은 그 안에 흡수되고 마는 거예요.
그래서 삼킨바 되리라고 아주 오묘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어느 의사가 쓴 수필에서 중요한 비유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는 의사이면서 신앙이 돈독합니다. 그런데 그 분이 생각하는 부활관은 이렇습니다.
의사기 때문에 늘 애가 태어날 때 탯줄을 끊어요. 어머니의 탯줄을 끊는 순간 아이의 입장에서 보면 죽음입니다. 어머니의 탯줄과 나와 연결된 그걸 끊는 순간은 아이의 입장에서 보면 죽음입니다만 거기에서부터 새로운 세계로 나옵니다.
새로운 생명으로 출발합니다. 마찬가지로 이 분은 모태가 아니라 세태를 말합니다. "세상이라고 하는 탯줄에 매여 있다가 세상 탯줄이 끊어지면서 새로운 생명으로 독립하고 자유하게 된다. 나는 이렇게 부활을 믿습니다." 그거 옳은 얘기예요. 참 귀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행복한 멈춤 -The power pause」이라고 하는 존 하리차단(John Harricharan)이 쓴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서 말합니다. "인간의 적은 가난도 질병도 전쟁도 아니다. 문제는 두려움이다. 오직 두려움이 적이다." 여러분, 이 두려움을 무엇으로 이길 수 있습니까?
여러분, 이것도 저것도 아닙니다. 쓸데없는 생각하지 맙시다. 두려움, 진짜 실존적인 이 무서운 종말론적인 두려움에 해결 열쇠는 부활뿐입니다. 오직 부활, 그것만이 문제의 해결입니다. 고난도 선도 의도 그리고 순교도 큰 기적도 이제 해결의 열쇠는 오직 하나 예수 부활입니다.
그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부활을 알기에 스데반은 순교하면서도 천사의 얼굴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부활을 믿기에 자기를 죽이는 사람들을 용서할 수도 있었습니다. 오직 부활, 이것만이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임을 잊지 마십시다.
그래서 오늘 58절에서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부활이 있기 때문에 오늘이 헛되지 않습니다. 부활이 있기 때문에 죽음도 헛되지 않습니다. 부활이 있기 때문에 오늘의 모든 생활과 삶의 의미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기도하십시다.
-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이렇게 태어나서 성장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이제 멀지 않아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나야 하고 이 장막을 벗어야 합니다. 눈앞에 있는 죽음을 보면서도 아직도 죽음을 실감하지 못하며 또 저 앞에 있는 부활을 보면서도 우리는 아직도 세상에 매여 여기에 안주하려고 하는 미련함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항상 주의 부르심에 응답할뿐더러 십자가를 바라보며 주의 사랑을 확인하고 구속함을 확인하게 하시고 부활의 아침을 바라보면서 항상 옷깃을 여미고 그 나라와 그 의를 위하여 몸과 마음 다해서 주께서 머무르게 하는 시간 동안 귀하고 복된 일들을 이루어 갈 수 있는 확실한 부활의 증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부활의 첫 열매 /고전15:20-24/ 곽선희 목사
2014-11-26 15:44:45
장자옥 교수님이 쓰신 「마지막 남은 생명」이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 속에 나오는 실화입니다. 그 책의 사건 하나하나가 대단히 중요한 상징적 의미가 있습니다. 오래전에 군 형무소에 두 사람의 사형수가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전방에서 총기를 난사하다가 민간인들을 몇 사람 죽였습니다. 그 죄로 사형에 처하게 됐고, 또 한사람은 월남전 참전 때 일시적으로 흥분을 참지 못해서 자기 동료를 죽였기 때문에 역시 사형선고를 받고 집행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은 형 집행날짜가 가까올 때 마지막 소원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 소원은 한번 고기를 실컷 먹고 싶다는 것입니다. 죽기 전에 먹고 싶던 것 한번 실컷 먹고 싶다고…….
그러나 누구도 그의 사정을 들어줄 사람은 없었고, 마지막 먹고 싶던 것을 먹여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겁니다. 물론 사식을 넣어주는 사람도 없고……. 마침내 그는 자기 몸을 대학병원에 해부용으로 팔았습니다. 그리고 선금으로 10만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먹고 싶었던 고기를 먹었습니다. 실컷 먹어보려고 했는데 3만원어치 밖에는 못 먹었습니다. 그를 마주보던 사람이 얘기했습니다. "야, 그 참 맛있겠구나." 대답했습니다. "맛은 무슨 맛? 내 몸뚱아리를 팔아서 먹는 건데……."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떨어뜨렸고, 그 후에 그는 형장으로 걸어 나갔습니다.
여러분, 어찌 생각하면 우리가 하루하루 욕심을 채우겠다며 사는 것이 이 사형수가 고기 먹고 싶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영생을 모르고는 사실 입맛도 없는 겁니다. 아직도 입맛이 있는 것처럼 뭐 소위 말하면 엔조이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사실 철없는 사람의 생각입니다.
인생무상입니다. 생이 이생뿐이라면 우리가 산다는 게 이 사형수가 먹고 싶은 고기 먹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여기에 상징적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영생 없이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이 얼마나 하찮은 일입니까? 얼마나 바보 같은 짓입니까? 얼마나 맹랑한 얘깁니까?
그런데 다른 한 사형수는 자기 친구가 이렇게 하는걸 보면서 '아이구 그거 먹으면 뭘 하나? 한 끼 먹으면 뭘 하고 안 먹으면 뭘 하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는 자기 주머니를 다 뒤져봅니다.
15,000원이 있었어요. 어느 날 교회성가대원들이 와서 위로한다고 복도에서 찬송을 부르는걸 보았어요. 이 사형수가 나가서 15,000원을 내놓으면서 "나는 이제 죽습니다. 이게 내가 가진 전부인데 당신들 좋은 일에 써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말합니다.
마침 형무소의 교회를 건축하고 헌당식을 앞두고 있었는데 교회에서 그 15,000원을 가지고 강대상을 만들었어요. 그리고 헌당식 날 설교하는 목사님이 이 강대상은 지금 여러분 가운데 앉아있는 한 사형수가 죽기 전에 마지막 가졌던 것을 다 내놓아서 그것으로 만든 것이라고 발표하게 될 때 모든 사람이 다 눈물을 흘렸어요. 큰 감동을 받았어요. 이것이 법무부에 그렇게 전해져서 사형수가 무기징역으로 바꾸어졌답니다.
요한크리스토프 아놀드(Johann Christoph Anold) 라고 하는 분은 「두려움 너머로」라는 책에서 말합니다. 죽음은 "결정적 과제"라고 "결정적 필연성"이라고……. 여러분, 요새 웰빙이니 해서 뭐 보약도 먹어보고 운동도 하고 발광을 하면서 오래 살아보겠다고 버티지만 웬만하면 이제 그만 합시다.
다 소용없으니깐. 그 조금 더 살면 어떻다는 얘깁니까? 그냥 살다 그냥 갑시다. 그리고 할 일이 있습니다. 이제 생각해야 합니다. 사후 생명에 관심을 가져야 되요. 죽지 않으려고 몸부림치지 말고 죽은 다음 생명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되요.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은 이걸 말하고 있는 거예요. 성경은 사람이 안 죽는다고 말한 적 없어요. 단, 죽은 다음에 어떻게 되느냐를 예수님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아시는 대로 예수님은 서른세살에 가십니다. 생이 이생뿐이라면 예수님이야말로 정말 완전히 실패한 것입니다. 잘못 산겁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해주는 핵심은, 예수님이 말씀해주시는 핵심은 죽음다음이에요.
예수님의 말씀을 보세요. 성경을 똑바로 봐야 됩니다. 성경을 보면서 잘살고 성공하고 소원성취하고 그런 지엽적인 얘기 너무 관심가지지 마세요. 그저 성경은 똑똑히 말합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합니다. "마음이 가난한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요, 핍박당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요, 나와 같이 고난당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나와 같이 영광을 누릴 것이다"라고. 언제나 사후의 세계, 영생의 세계를 말하고 있죠.
거기다 초점을 맞추었지 이 땅에서 뭐 어떠하고 어떻고 관심 없네요. 성경 똑바로 봅시다. 아직도 기복사상에 매이고 세상에 매이고 뭐 그거야말로 도토리 키 재기이지 조금 나으면 어떻고 덜하면 어떻습니까? 그게 무슨 문제요? 수명이 길면 어떻고 짧으면 어때요? 그거 아니올시다. 아주 냉정하게 생각을 다시 해야겠습니다.
독립운동가로 유명한 이상재 장로님께서 독립운동 하다가 감옥에 갇혔는데 옥중 생활할 때 많은 사람에게 존경을 받았습니다. 옥중에 있으면서도……. 그런데 어느 일본인 기자가 물어보았습니다.
자신이 알기는 인도의 간디는 평소에 100세를 산다고 늘 말했고 누구도 얼마, 누구도 얼마, 누구도 얼마, 그 유명한 사람들이 오래살기도 했고 오래 산다고들 얘기했는데 "선생님은 몇 년이나 사실 생각입니까?"
이상재 선생님이 감옥에서 내일을 알 수 없는 가운데 하시는 말씀 들어보실까요? "사람이 한번 났으면 영원히 사는 거지 죽기는 왜죽어?" 이것이 우리의 믿음의 조상들의 외침이에요.
"사람이 한번 났으면 영원히 사는 것이지 죽기는 왜죽어?" 이상재 장로님의 호언장담입니다. 무슨 뜻으로 이 말씀을 했겠습니까? 여러분, 성경은 안 죽는다고 말하지 않아요. 성경은 이적을 많이 말하고 있어요. 나사로도 나흘 만에 살아났습니다.
나는 그래 생각해요. 그 사람 괜히 장례식만 두 번했지 별거 아니에요. 뭐 누가 살고 누가 살고 누가 뭐 병 낫고……. 예수님이 많이 이적을 행하셨고,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매력을 느낍니다마는, 예수는 자신도 서른세 살에 죽었어요. 성경에는 뭐 구백세 살았다는 사람의 얘기도 있긴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녜요. 성경은 부활을 말하고 있어요. 부활은 곧 생명의 변화예요.
성경을 자세히 연구해보면 부활이라는 말과 변화라는 말을 동의어로 사용해요. 그리스도와 같이 변화하리라. 변화! 생명의 변화를 생각해야 되요. 이게 영생의 뜻입니다. 죽음이 말하는 뜻을 알고 부활이 말하는 뜻을 알면 그 사람은 바른 신앙의 사람이에요. 죽음은 무궁무진한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그렇다면 부활이 말하는 뜻은 무엇입니까? 이걸 알아야 사실은 오늘도 바로 살게 되고, 오늘을 살며 영생을 살게 되고, 영생으로 이어가는 오늘을 사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11:25-26)"는 이 말씀의 뜻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오늘 성경말씀은 우리에게 너무 귀한 복음을 주십니다. "부활의 첫 열매!" 부활의 첫 열매……. 여러분, 십자가의 죽음이 계시입니다. 한 사람의 죽음을 말하고 있는 게 아녜요. 만백성의 죽음, 예수를 믿는 사람 모든 사람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에요.
이 십자가가 우리 생명의 계시인 것같이 부활이 또한 계시적 사건이에요. 한 사람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났다는 그런 기적을 말하는 게 아녜요. 그런 하나님의 능력에 놀라지 마세요. 그런 사건이 아녜요.
이건 한 사람에게 있었던 죽음과 한 사람에게 있었던 부활사건을 말하는 것이 아녜요.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중요한 내용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모든 사람을 대신해서 대표로 죽으셨고 예수님의 부활이 모든 사람을 대신해서 대표로서 첫 열매의 테이프를 끊은 거예요.
그런 귀중한 사건입니다. 그의 죽음이 나의 죽음이요, 그의 부활이 곧 나의 부활이에요. 이것을 계시적으로 우리에게 보여준 사건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됩니다. 부활을 무슨 낭만적인 얘기로 생각하지마세요.
여러분, 생명이란 네 단계로 보아야 합니다. 첫째는 식물입니다. 요새 여기저기 벚꽃이 많이 피었어요. 벚꽃은 참 신기해요. 왜냐하면 꽃잎이 어디서 나왔는지, 피어나는데 아직도 나뭇잎도 없잖아요. 이게 특징입니다.
파란 나뭇잎은 전혀 없는데 꽃만 활짝 피니까 그 벚꽃이 참 아름답습니다. 정말로 아름다워요. 일부러 벚꽃 있는 길을 차를 몰고 가다가 내려서 한번 쳐다보면 너무너무 신비로워요. 고목나무처럼 다 말라빠져서 '에라, 이제는 아무데도 못쓰겠다' 싶은 그런 나무에 어디서 준비됐다가 그렇게 꽃잎이 나옵니까? 너무 신기하잖아요? 식물의 생명은 신기합니다. 정말 신비롭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식물적 생명입니다. 그 다음에 한 단계 높은 생명이 있죠. 동물적 생명. 이 또 얼마나 신비롭습니까? 동물이 태어나는 것, 암수가 그 멀리서 만나서 생명을 잉태하고 또 그 생명을 키우는 것 보세요.
여러분, 다 보셨겠지만 나도 들여야 보고서야 감탄을 한일이 있어요. 개가 강아지를 낳았거든요. 이게 아직 눈도 못 떴어요. 눈도 뜨지 못한 이 몸뚱어리가 벌벌 기어들어가서 그 어미 젖꼭지를 물고 빨잖아요. 가만히 보자하니 사람보다 낫대요.
사람은 갖다 물려도 못 빠는데, 이건 어떻게 눈도 못 뜬 게 찾아 들어가서 딱 빠는데, 그것도 자기 번호가 있어요. 고놈은 고것만 빨아요. 세상에 참 신기해요. 이걸 무슨 말로 설명하겠습니까? 어떻게 이걸 물리적으로 생리학적으로 설명하겠어요? 신비한 거예요.
신비한 생명력이 여기 있어요. 동물 세계의 생명의 위대함 이예요. 그러나 그 위에 한 차원 높은 게 바로 인간입니다. 인간은 동물적이면서도 또 동시에 영적입니다. 이성이 있고 영이 있고 영의 지배를 받는 이성, 이성의 지배를 받는 육체, 그 본능이 종합적으로 이루어져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 고귀한 생명 이예요. 고귀한 존재 인간입니다.
그러나 지금 제가 식물의 생명 동물적 생명 인간의 생명을 말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나면 안 됩니다. 우리가 모르고 있는 또 한 단계 높은 생명이 있어요. 바로 그게 그리스도적 생명 이예요.
예수님은 부활하셨어요. 부활하신 예수의 생명, 그 무얼 말하는 거냐? '너희도 나와 같이 될 것이다. 너도 나와 같이 변화될 것이다. 내가 십자가에 죽는 줄 알았지? 봐라. 이렇게 부활했느니라.' 그리스도적 생명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부활의 첫 열매"라고 '너희도 나와 같이 될 것을 내가 보여주노라.' 여기에 부활의 의미가 있는 거예요. 첫 열매 다음엔 우리예요.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가끔 보면 이 부활절에 가서 큰 실수를 많이 해요. 뭐냐 하면 소위 '영혼불멸설' 같은 겁니다. 이걸 부활로 착각하는 사람도 있어요. 아녜요. 어떤 사람은 '도덕적 부활'을 말해요. 허튼소리 하지 마세요.
그거 아녜요. 낭만적으로 윤회적으로 생각하는 것, 곤충이 다시 회생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 다 아니올시다. 식물이 죽은 줄 알았는데 다시 살아나는 것처럼도 아니올시다. 자, 조그마한 표적이 될 수는 있으나 아니올시다. 다시 말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사건만 부활입니다.
톨스토이의 「부활」이란 소설이 있죠? 아, 이게 기독교적인 뭔 줄 알고 열심히 읽어보고 아무리 읽어봐도 이거 부활이 없네요. 그건 사랑의 부활을 말할 뿐이지 기독교적 생명의 부활을 말하는 게 아녜요. 부활이란 단어의 개념을 우리 기독교만이 가지는 것을 분명히 확실하게 정리해야 합니다.
예수의 부활만 부활입니다. 이것은 이론도 추상도 철학도 감상도 아녜요. 사건이에요. 이걸 보여준 것이 예수부활 사건이에요. 예수부활, 이건 사건이에요. 역사적 사건이에요.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부활했다. 너도 부활할 것이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 첫 열매라고 합니다. 이것이 샘플 이예요. 이것이 모본이요 이것이 표본 이예요. 이것이 예언이요 계시란 말입니다. 확증이란 말입니다. 이것을 믿고 이 은혜에 사는 사람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어요. 이 단계에서 저 단계로 넘어가니까……. 그 순간에 그의 얼굴은 천사와 같아요.
사도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말합니다.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 내게만 아니라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4:7-8)." 앞서가면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내게만 아니라 모든 자에게니라." 첫 열매!…….
아담 이후로 모든 사람이 죽음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의 문을 열었습니다. 아담의 후예가 되는 것은 자연적이고 유전적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합하는 것은 인격적이고 신앙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성경에도 암시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 붙은 자 마치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것같이 그리스도에게 생명적으로 접하여 연결되어서 생명을 받고 있는 바로 그 사람, 그리스도에게 붙어있는 사람, 이제 마지막 나팔과 함께 다 함께 부활하여 그리스도의 영화로운 몸과 같이 변화될 것이다.
여러분, 부활의 첫 열매입니다. 그 뒤에 우리가 있습니다. 곧 따를 것입니다. 그 첫 열매되신 그리스도의 부활을 바라볼 때 옛날에 있었던 사건을 기념하고 있는 게 아녜요. 이건 우주적인 것이고 바로 나의 부활을 예고하고 있는 거예요. 이 엄청난 사건 앞에서 이 은총 안에 오늘을 내가 살아야 합니다. 부활생명으로 살아갑니다. 영생을 소유하고 오늘을 삽니다.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까?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사망으로 치닫고 있는 저희들을 부활생명으로 확정해주시고 영원한 하늘나라의 세계에 저 부활하신 예수님의 거룩한 영광된 몸을 바라보면서 그 날의 아침을 지향하며 오늘을 살게 해주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립니다. 부활신앙을 새롭게 하여 주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시고 주의 사람으로 살게 하시고 그리고 어두운 세상에서 빛으로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부활신앙은 우리를 바꾼다 /고전15:1-19/ 옥한흠 목사
2014-11-11 10:18:26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던 금요일 오후 3시쯤 운명하셨습니다. 그날 오후 6시부터는 안식일이 시작되는 날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운명하시고 안식일이 시작될 때까지 불과 3시간 정도의 여유밖에 없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는 서둘러 시신을 장례 해야 했기 때문에 시간적으로 굉장히 촉박했습니다. 유대나라도 매장이 있었기에 가난하고 보통 사람인 경우 그냥 땅을 파서 묻어버리면 끝납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존경하던 부자 아리마대 요셉은 자기를 위해 파 놓았던 동굴 무덤을 기증했습니다.
당시 부자들은 동굴에 무덤을 만들고 거기에다가 선반을 달아서 시체를 안치했습니다. 마침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자기 무덤에 장사하기를 원하여 이제 급히 장례 절차를 밟고 준비를 할 때였습니다.
그런데 니고데모라는 경건한 사람이 찾아와 마치 왕이 세상을 떠났을 때 대우하듯 많은 향료를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시신에 발랐습니다. 그리고 수위를 싸고 두건을 씌워 정중하게 예수님의 시신을 무덤에 장례 지냈습니다.
이 일에 여인들이 와서 함께 거들었습니다. 그리고는 10~20명 되는 장정들이 매달려야 겨우 굴릴 수 있는 큰 돌로 동굴 무덤 아귀를 막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급하게 장례를 끝냈습니다.
예수님을 장례 한 사람들 가운데 예수님이 무덤을 막은 돌을 굴리고 다시 살아나리라고 기대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은 남자건, 여자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장례와 함께 예수님의 시대는 끝이 났고 예수님의 생애도 종말을 고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흘이 되던 날 아침,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살리셨습니다.
죽음 가운데서 예수님을 일으키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이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셨습니다. 새벽에 무덤을 찾았던 여인들이 천사들을 통해 이 사실을 먼저 확인했습니다. 그리고는 무덤 안으로 들어가서 예수님이 실제로 무덤에 없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달려가서 제자들에게 이 소식을 알렸습니다.
그러자 제자들 가운데 몇 사람이 무덤으로 급히 와 무덤 속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시체는 온데 간데 없고 비어있는 무덤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쌌던 수위와 두건만이 고스란히 누웠던 자리에 있었습니다
. 따라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중 몇 사람에게 친히 나타나셔서 자기가 부활하신 것을 실제로 입증해주셨고, 여인들 중 몇 사람에게도 나타나셔서 자신의 부활이 사실임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나고 나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핍박하는 사울이라는 청년을 만나주셨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이 사울을 만나 주신 것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주여, 뉘시오니이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이처럼 바울은 예수님이 살아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20여 년이 지나고 난 후, 고린도전서를 쓰면서 본문 15장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약 25년이 지난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이 실제로 살아나신 것을 목격자들을 중심으로 하나씩 증거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에게 나타나신 예수님, 야고보에게 나타나신 예수님, 열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예수님 등, 전부 일일이 기록했습니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이 한번에 오백 여명이 될 때도 있었는데, 아직 그들 가운데서 반이나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부활이 안 믿어지면 앞서 생존해 있는 그 목격자들을 만나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오늘 15장의 내용을 가지고 바울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믿기가 어렵습니다. 안 믿는 편이 훨씬 쉽습니다.그래서 복음을 막론하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안 믿으려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여러분,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온 천하가 예수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그런 삭막한 분위기에서 바울로부터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복음을 듣고 예수 믿은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었기에 그들이 다 세례를 받고, 고린도교인이 되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린도교회 안에서 조차 예수 부활을 부인하는 사람이 생겼어요. 부활이란 있을 수가 없는 말이다. 부활은 절대로 불가능한 이야기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 소식을 듣고 너무 답답해가지고, 바울이 지금 고린도전서 15장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의 날조된 학설 내지는 종교적인 맹신이라고 몰아붙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 특별히 머리가 비상한 학자들 중에는 평생 예수님의 부활이 거짓말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아까운 인생을 다 날려버린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실과 진리를 증명하기 위해 평생 학자의 생활을 했다면 보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을 거짓말로 증명하려고 평생 학자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특히 독일에는 부활한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았다는 것을 학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평생 머리를 싸매고 달려든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를 연구해서 박사나 교수, 세계적으로 저명한 학자가 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실을 왜곡하고 잘못된 것으로 증명하여 세상적으로 학자, 박사가 되면 뭐하겠습니까? 정말 그들이야 말로 불행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성경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면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것은 절대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 쓴 복음서를 읽다 보면 이야기가 제각기인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서로 입을 맞추어 거짓을 진실처럼 꾸미려고 하면 그런 식으로 기록해서는 안됩니다. 어설프기 끝이 없는 기록들을 복음서에 남기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에 찾아간 여인들의 이름을 보면 사복음서간에 차이가 있습니다. 어느 쪽이 진짜인지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게다가 여인들이 무덤에 찾아간 시간도 일치하지 않습니다.
어떤 곳는 새벽 일찍이 갔다고 하고, 어떤 곳은 해가 돋아서 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여인들이 무덤에 가서 만났다는 천사의 숫자도 틀립니다. 어떤 기록에는 천사 한 명을 만났다고 하고, 어떤 기록에는 두 사람을 만났다고 합니다.
천사가 있던 위치도 다릅니다. 어떤 기록은 천사가 무덤 안에 있었다고 하고, 어떤 기록에는 천사가 굴러낸 돌 위에 앉아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도대체 누구의 말이 옳은지,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의 부활을 날조하려고 조작했다면 이렇게 기록할 수가 없습니다.
더욱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온 천하에 증명하려고 하는데 여자를 앞세워서 되겠습니까? 요즘 같이 여권이 큰 소리를 치는 때는 여자 말이 더 설득력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당시 여자는 사람이면서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법정에서도 여자를 증인으로 채택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옳은 말을 해도 여자 말은 안 듣기로 작심을 한 시대입니다. 그런 마당에 여자들을 내세워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증명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따라서 성경의 모든 내용을 종합해 보면, 예수님의 부활이 날조됐거나 조작됐다는 말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그들은 보고 들은 대로 적어 놓았습니다. 하나도 꾸밈 없이 이야기입니다. 이렇듯 서로의 말들은 좀 틀려도 확실한 결론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는 이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는 사실이라는 점입니다.
게다가 더욱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소문이 난 것은 예수님이 처형 당한 지 사흘만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기 시작한 현장이 예루살렘에서 수백 리 떨어진 갈릴리에서 나온 이야기가 아닙니다.
먼 곳에서 나온 이야기라면 예수님을 사모하던 사람들이 너무나 그리워서 만들어낸 소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은 지 사흘 만에, 그것도 예수님이 처형당한 예루살렘 현장에서 부활하셨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고, 이 말을 겁 없이 외치는 사람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아직도 형장에는 핏자국이 낭자합니다.
아직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자고 소리치던 폭도들의 눈에는 광기가 서려있습니다. 빌라도와 대제사장이 시퍼렇게 살아있습니다. 아직도 예수님의 무덤가에는 병정들이 오고 가고 있습니다. 그런 살벌한 분위기에서 예수님이 살아나셨는 소리를 함부로 할 수 있습니까?
만약 그렇게 함부로 떠들다가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발각되면 생명을 부지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가뜩이나 제자들은 두려운 나머지 방안에 틀어 앉아 자기들도 잘못하면 예수님처럼 끌려가지 않을까 하여 밥도 제대로 못 먹는 판국입니다.
바로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살아 나셨다는 소리를 함부로 합니까? 그런데 그런 현장에서 예수님이 살아 나셨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담대하게 그런 말을 하는 여인들이 습니다. 그것이 진실이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더욱 더 놀라운 것은 예루살렘이 그런 소문을 듣고도 조용했다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이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군인들도 벙어리처럼 가만히 있었습니다.
아무도 여인들과 제자들의 주장을 반박해서 뒤집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습니다.요. 왜 그렇습니까? 변명을 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성경 기록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은 날조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한번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다면 예수님의 부활을 날조된 사건으로 주장하는 사람들의 책을 읽어보십시오. 물론 학적으로 굉장히 높은 수준에 있는 학자들의 이야기이므로 쉽게 읽을 수는 없지만 한번 읽어보면 우스워서 못 읽을 정도입니다.
그것을 말이라고 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차라리 거짓말이라고 증명하려면 그럴 듯한 소리를 해야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가지고 똑똑한 것처럼 고개를 흔들고 있는 것을 보면 불쌍하기 짝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살아나셨습니다. 그것은 진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처형당한 그 도시에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고 그 사실을 생명 걸고 외치는 사람들이 나타났고, 그들이 뭉쳐서 교회가 형성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부활에 관한 신앙은 교회가 세월과 함께 만들어낸 신앙이 아닙니다.
C. H. 도드라는 유명한 학자가 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탁월한 신학자이긴 하지만 중생 받은 그리스도인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깊이 연구하면서 이렇게 유명한 말 한마디를 남겼습니다.
"부활신앙은 교회 안에서 막연히 생긴 믿음이 아니다. 막연히 예수님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환상 중에 예수님을 보고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다. 부활신앙은 교회를 존재하게 만든 믿음이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교회가 생긴 것입니다.
교회가 있었기 때문에 부활 신앙이 생긴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교회에는 이 지상에 등장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교회가 생겨나게 되었다는 사실을 볼 때, 부활을 믿지 않는 것보다 믿는 쪽이 훨씬 더 자연스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교회를 다니는 많은 분들 가운데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처럼 예수님의 부활을 은근히 의심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니까 이런 주장을 하는 거지,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해?
다만 아내의 권유에 밀려 억지로 교회에 나오다 보니 약간 믿기는 하지만 그게 있을 법한 일이겠어? 그냥 그런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지.'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실존적인 믿음이라고 합니다. 사실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저 내가 그러리라고 믿으면 된다는 식입니다. 그러나 이 믿음을 가지고는 구원을 못 얻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사실로 믿어야 합니다
.
그래서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부활을 안 믿는다는 말을 듣고는 기가 막힌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만약 부활이 없다면 자기도 예수님을 못 만나야 됩니다.
그런데 엄연히 살아계신 주님을 본 바울의 입장에서는 기가 막히는 것입니다. 한 유명한 논증을 인용하겠습니다. "부활이 없다면 예수님도 부활하지 못했을 것이다. 부활이 없다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살리지 않으셨을 것이다.
부활이 없다면 아무도 부활의 소망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도 다 쓸데 없는 것이 된다. 부활이 없다면 우리는 거짓말쟁이가 될 것이다. 부활이 없다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이다.".
◀ 죽음을 이기신 예수 /고전15:1-26/ 옥한흠 목사
2014-11-11 09:33:20
오늘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할렐루야! 우리 예수 그리스 도께서
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셔서 지금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 니다. 할렐루
야! 우리는 모두 그에게 경배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그는 우리의 생명 의 주요, 만왕의 왕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계심을 증거하는 것만
큼 신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울다가도 춤을 출 수 밖에 없는 너무나 아름다운 메시지입
니다. 이런 부활의 기쁜 소식을 함께 나누는 주일날, 먼저 죽음에 관한 이야기부터 해야 될
것 같습니다.
분위기에 어울리지 아니하는 것 같지만 부활의 기쁨과 소망을 나누기 위해서
는 피할 수 없는 주제가 죽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이라고 하는 제법
잘 팔리는 책이 있습니다.
운동세포 가 파괴되어 가는 불치의 병을 앓고 있는 모리라는 노
(老)교수, 이제 죽음의 날을 카운트다운하고 있는 그에게 제자 중 한 사람이 매주 화요일마
다 찾아가서 함께 인생을 논하는 내용을 담은 글입니다. 그 글 가운데 인간적으로 공감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다 죽게 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하나
도 없네. 만일 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진실로 믿는다면 사람들은 금방 딴 사람이 될 걸세.'
우리의 의식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생각을 드러내는, 의표를 찌르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자기 것이라고는 수긍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죽음이라는 것을 남의 이야기처럼 듣는 사람에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이 무
어 그렇게 대단히 기쁜 소식이 될 수 있습니까? 죽음을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겸허한
자세가 있을 때 예수 님이 다시 사셨다는 것이 엄청난 기쁨이요, 소망을 불어넣는 메시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죽음은 아무도 거역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마치 아침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하루 종일 일하다가 밤이
되면 자는 것과 전혀 다를 것이 없어 보이는 자연스러운 것이 죽음이라는 생각 이 듭니다.
1998년도 한 해에 우리나라 에서 세상을 떠난 사람이 25만 명으로 최종통계가 나왔습니다.
한 해에 25만 명이라고 한다면 도대체 어느 정도일까요? 사랑의교회가 자리잡고 있는 서초
구의 전체 인구가 40만 명하고 몇 백 명이 더 많습니다.
그렇다면 25만 명은 서초구에 사는 사람들의 60%에 해당합니다. 1년에 서초구 인구의 60%
가 저 세상으로 가는 것입니다. 엄청난 숫자입니다. 시편 저자가 표현한 것처럼 마치 홍수가
쓸어가듯이 죽음이 사람들을 끌고 갑니다. 현실이 이렇습니다. 최근 몇 년 동안 사랑의교회
만 해도 하루에 한 명 꼴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습니다. 통계상으로 보면 1년에 365명이 세
상을 떠난다는 말이 아닙니까?
사랑의교회 교인 전체로 따지자면, 거의 100명에서 120명중에 하나가 날마다 세상을 떠난다
는 이야기 입니다. 이만큼 죽음은 우리가 나 몰라라 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기분이 좋다,
나쁘다를 떠나서 진지하게 직시해야 될 실체입니다.
우리가 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매력을 느낍니까? 왜 주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
셨다는 것이 우리의 관심사가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 무덤을 갖고 있지 아니하신 하나님
의 아들을 믿으려고 하는 마음을 갖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진리이기 때문 입니
다.'라고 대답할 수도 있습니다. '좋은 소식 아닙니까?'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좀
더 인간적인 대답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다 인간이기 때문에 너무 고상하게 대
답을 하면 마음에 잘 와 닿지 않습니다.
마음에 와 닿지도 않았는데 다 이해한 체 한다면 본심을 숨긴 가식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좀더 인간적인 대답이 필요한 것입니다.
필립 얀시라고 하는 사람의 책을 여러 권 읽어 보셨을 것입니다. 그가 쓴 '내가 알지 못했
던 예수'는 굉장히 감동적인 책입니다. 그 책 안에 정말로 옥 목사의 마음과 서로 통하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왜 부활의 주님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 왜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건에 마음이 끌렸는지에 대하여 그는 퍽 인간적인 이유 때문이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인간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사실이었으면 좋겠다는 은근
한 바람이 자기 마음에 있기 때문이었다고 했습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았으면 좋겠다는 인
간적인 바람이 마음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말이 귀가 번쩍 뜨이는 메시지가 되는 것입
니다. 어느 해인지는 정확하게 모르지만, 한해 안에 자기 친구 셋을 잃은 슬픈 이야기를 하
고 있습니다.
한 친구는 나이에 비해서 일찍 은퇴를 한 사람 인데, 어느 날 저녁에 아내와
더불어 좋은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나와서 차를 타려다가 '윽' 하고 쓰러지더니 그 자리에
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또 한 친구는 40대 부인인데, 믿음이 아주 좋은 부인이었습니다. 교
회에서 모이는 선교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안개가 짙게 깔려있는 길을 드라이브 하고 있었습
니다.
그런데 뒤따라오던 유조차가 앞에 있는 차를 못 봤던지 들이받아 차에 화재가 나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말았습니다. 또 한 친구는 건장한 친구인데, 미시건 호수에서 스쿠버
다이빙을 하다가 심장마비를 일으켜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한 해에 졸지에 사랑하는
친구를 이렇게 셋씩이나 잃어버리는 기막힌 슬픔을 가슴에 안게 되자, 그의 마음 속에서 죽
음이 끝장이라는 생각에 저항하고 싶은 욕구, 죽음이 마지막 이라고 하는 말에 저항하고 싶
고 거부하고 싶고 비판하고 싶은 욕구가 강렬하게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죽은 친구가 살았으면 좋겠다는 인간적인 기대감이 마음에 많이 남아있
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그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게 만
들었다는 것입니다. 굉장히 인간적이고 솔직한 대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우리 중에는 죽음을 환영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 니다. 죽음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기를 원하는 사람도 아무도 없습니다. 죽음이 끝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싶은 사람도 아무도 없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불면 날아갈까 쥐면 깨질까 하며 귀
여 워하던 어린 딸이 죽었습니다. 그 딸의 시체를 앞에 놓고 울부짖는 부모의 심정이 어떻
겠습니까?
아이가 다시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 아니겠 습니까? 어느 누구라도 그 부
모의 입장이라면 부활을 믿고 싶지 않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거짓말이라도 믿고 싶을 것입
니다. 거짓말이라도 매달리고 싶은 것이 부모의 심정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을 이기고 사흘만에 부활하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엄청난 메
시지요, 우리의 생각을 확 뒤집어 놓는 놀라운 복음 이라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전체를 죽은 자가 다시 살아 날 수 있다는 사실을 변증하는데 할애하고 있
습니다. 그는 먼저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이요, 진실이라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은 성경대로 살아났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3절입니다.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죽으시
고 살아나셨다.' 예수님의 부활은 액시던트(accident) 가 아닙니다. 어쩌다 일어난 사고나 돌
발적인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래 전부터 예고된 일입니다. 수 백년 전부터 구약의 선지자
들이 영감을 받아, 장차 이 세상에 오실 하나님의 아들이 죽음을 이기고 살아날 것을 여기
저기 예언해 놓았습니다. 그 한 예로 시편16편 10절을 보면 다윗이 이렇게 예언하고 있습니
다.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다윗은 자기를 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자기를 빗대어서 장차 세상에 오실 예수 그리
스도가 죽지만 반드시 살아날 것이라는 것을 예언하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요나의 경우를 예로 들어서 자기가 부활할 것을 말씀 하셨습니다. 요나라는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니느웨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지만 요나는 가기 싫
어 도망쳤습니다. 도망치다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서 바다에 빠지는 절망적인 존재가 되었
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고기를 준비하셨습니다. 고래인지 확실치는 않지만, 큰 고기
뱃속으로 빨려 들어가서 3일 동안 지옥의 고통을 당하다가 나왔습니다. 예수님이 그 사건을
놓고 이렇게 말합니다.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마12:40) ' 인자도 무덤에서 사흘 동안 있을 것이고 그 다음에 요
나가 사흘 후에 살아나온 것처럼 인자도 사흘 후에 부활하리라.'는 의미입니다. 구약에 있는
요나의 사건마저도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표하는 사건이라고 해석하신 것입
니다. 이런 배경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돌아가시기 전에 제자들을 앉혀 놓고 자
주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내가 십자가에 죽는다.
그러나 사흘만에 살아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그는 예수님이
아닌 것입니다. 그는 구원 자가 아닌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대로 살아나셨다고 하는 것은 대
단히 중요 한 의미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진실이라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단서 중에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구약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부활하셨
습 니다. 할렐루야!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자들이 많이 있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5절 이후에 보면 바울이 대충 언급한 사람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베드로를 위시해서 500여
명이나 되는 제자들과 끝까지 예수를 믿지 않으려고 버티던 예수님 의 동생 야고보까지도
부활하신 예수님 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다 목격자들입 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진짜 목격자
들이 빠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경건한 여인들, 즉 예수님을 통해서 은혜 받은 여인
들이 제일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했고 그것을 전했습니다. 바울이 고린전서를
쓰던 당시만 해도 여자들의 증언은 법적으로 효력을 가지지 못했었습니다. 아무리 진실한
말을 해도 여자가 한 말은 일단 접어두고 참고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관례를 따라서 바울도 여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한 것을 여기에 기록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남자들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한 두 사람이 보았다고 말해도 함부로 의심할 수
가 없거늘, 수백 명의 사람들이, 경건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그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면, 누가 이것을 거짓말 이라고 꾸며낸 이야기라고 부인
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은 이만큼 확실한 것입니다.
또 바울은 말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자기 자신의 간증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제일 마지
막에 본 사람이 누군가?' 라고 묻는다면 바울 자신이라고 간증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그는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 하려고 이를 갈면서 다메섹을 향해 가던 사
람입니다.
그 때 갑자기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를 찾으셨습니다. 그는 그의 영광스러운 빛 앞
에 거꾸러졌 습니다. 간신히 눈을 뜨고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습니다. '주여, 누구시니 이까?'
아무도 없는데 누구냐고 물었 겠습니까? 아니죠. 분명히 바울만이 본 예수님의 실체가 있었
습니다. '주여, 누구시니이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니라.' 그 다음부터 바울은
숨만 쉬고 있었지 제 정신이 아니었 습니다. 얼떨결에 이렇게 물었습니다. '주여, 나는 지금
부터 어떻게 해야 합니까?
' 이렇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드디어 사도 바울이 탄생하
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확실히 증언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간증자였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사실을 가지고 고린도전서 초반부에 예수님이 부활하셨
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인
진실입니다.
진실이기 때문에 복음이 지금도 땅끝까지 증거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살아나신 것이 진
실이기 때문에 지금도 북한을 비롯 하여 중국에 있는 지하 교회 성도들은 믿음을 지키기 위
해 오늘도 자기 생명을 내어놓고 투쟁하고 있습니다. 진실이기 때문에 지금도 지구상에 있
는 수십 억의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을 부르면서 무릎 꿇고 경배하고 있습니다. 꾸며낸 이야
기에 누가 생명을 걸겠습니까? 꾸며낸 이야기에 누가 변화를 받을 수 있습니까? 진실입니
다.
살아계신 그 분이 오늘도 계시기에 그 이름 만 불러도 귀신이 쫓겨 나가고, 그 이름만 불
러도 병든 자가 나음을 입고, 그 이름만 불러도 영적으로 죽었던 자가 구원 받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은 오늘도 살아 계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부활을 이렇게 확실
하게 믿을 때 우리가 어떤 영적인 유익을 얻을 수 있는가의 문제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
니다. 아주 많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가져다 준 혜택에 대해 논하라면 끝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고린도전서
15장을 중심으로 몇 가지만 간단하게 정리하면서 함께 은혜를 나눌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믿도록 했습니다.
인류 역사상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 상당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사람만 해도 여러 명
입니다. 수넴 여인의 아들이라든지, 야이로의 딸이라든지, 나사로라든지, 이렇게 여러 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한번 죽었다가 살아났지만 또 죽었습니다. 그렇지요? 죽었다
가 다시 살아나서 영원히 죽지 아니하신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바울이 고
린도전서를 쓸 당시에는 헬라 철학이 사람들의 생각을 꽉 쥐고 있었습니다.
그 헬라 사상 가운데 '부활 불가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은 한 번 죽으면 절대로 다시
살지 못한다는 사상입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 중에도 비록 예수를 믿기는 하지
만 부활한 사람이 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을 갖고 신앙생활 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12절에는 바울의 엄중한 책망이 나옵니다.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이것이 헬라 사상이었습니다. 이런 사상을 반박하기
위해서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을 들고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라. 죽은 자가 살아날 수
있다.
죽음은 절대로 끝이 아니다.' 라고 말하면서 죽은 자의 부활을 자신있게 논증하고 있
는 것입니다. 바울은 13절부터 17절까지 비슷한 말씀을 반복함으로써 이것을 논증합니다. 이
구절 안에는 유명한 오중주의 '욱'(uk)이 들어있습니다. 헬라어에서 부정어 (not, nothing)로
쓰이는 단어가 '욱'입니다. '아니요', '없으면'하는 뜻입니다.
13절만 봐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이것이 '욱'입니다. '만
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리라.' 비슷한 형식을 17절까지 5번
정도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 골자는 이것입니다. '왜 부활이 없다고 하느냐? 죽은 자라도 살
수 있다.
무엇을 보고 그것을 알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살리시지 않았는가? 하나
님께서 예수님을 살리신 것을 보면 죽은 자가 살아날 수 있는 것이다. 만약에 죽은 자가 다
시 살 수가 없다면 하나님께서 예수님도 절대 살리지 못하셨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보아라. 죽은 지 사흘만에 살아나시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얼마든지 부활이 가능하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셔서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다.'
이것이 얼마나 우리에게 큰 소망을 줍니까? 우리 모두는 다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의 부활은 우리에게 소망을 주었습니다. 무슨 소망입니까? 다시 살아난다는 소망입니다. 성
경이 말씀하는 기본적인 이 진리를 가슴이 뭉클할 정도로 감격스럽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맹숭맹숭하다면 자신이 정말 하나님의 진리에 매료되어 예수님의 이름 앞에 굴
복한 사람인가 다시 물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는 얼마든지
살아날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의 부활은 이 죽은 자가 다시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정말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할렐루야! 세상 빅 뉴스 가운데 제 1면에 대문짝만하게 큰 글자
로 나올 수 있는 뉴스가 있다면 '죽은 자는 살 수 있다.' 하는 뉴스 아닙니까? 바로 예수의
부활이 이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축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의 믿음과 구원을 확실하게 보장해 준다는 것입니다. 17절부터 19
절까지의 내용 중에 재미있는 말씀이 나옵니다.'만약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못했다면 우리
믿음도 헛되고' 믿어봐야 소용없다는 말입니다. '또 우리의 죄는 하나도 용서받지 못하고 그
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예수님이 만약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지 못했다면 우리 보다
먼저 세상 떠난 사람들은 아무리 좋은 믿음을 가지고 떠났더라도 다 소망 없는 사람들이라
는 뜻입니다. 어디에 가서 있을지 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또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은 누구라고 합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어디에 그런 말씀이 있습니까? 19절 보십시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고 부활이 없다고 한다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니라.' 바
울은 정말 인간적인 말을 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바울을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셨다는 복음을 전하느라고 결혼도 하지 않았고, 평생 두들겨 맞으면
서 여기저기 다녔고, 천대받아 가면서 살다가 나중에는 로마 감옥에서 고생하다 끌려 나와
참수형을 당한, 인간적으로 보면 정말 비참한 일생을 살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시
지 않았고, 그가 전하는 예수의 부활이 꾸며낸 이야기나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면 세상에 바
울 만큼 불쌍한 사람은 없습니다. 멍청해도 한참 멍청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울만 불쌍합
니까?
이렇게 좋은 날씨에 왜 하필이면 여기 와서 앉아있습니까? 벌써 더위 때문에 힘이
드는데 왜 여기 와 앉아 있습니까? 모두 다 오염이 되어서 갈 때도 마땅치 않겠지만 그래도
여기 저기 꽃이 피어 있는 계절인데 야외에 나가서 도시락 풀어놓고 먹어 가면서 연인과 함
께 꽃향기도 맡고 아름다운 인생의 꿈도 서로 나누면 좋을 텐데, 왜 지금 여기 와 있습니
까?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여기 와 있습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에 여기 와서 계시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살아
계시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웃기는 사람들입니다. 게다가 정성껏 헌금까지 준비해 가지고 들
고 나왔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솔직하게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정말 우리는 불쌍한 사람들이다.' 평생을 그런 식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두
려워서 못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하지 않은 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가서 칭찬을 듣겠지만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괜
히 재미있는 일도 못하고 한 생을 보냈으니 얼마나 불쌍합니까? 그만큼 예수의 부활은 굉장
히 중요한 것입니다.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부활이 있음으로 인해 우리의 믿
음도 있고, 부활이 있으므로 우리의 구원이 보장되고, 부활이 있으므로 우리에게 소망이 있
고, 부활이 있으므로 우리는 이 세상 사람들 앞에 불쌍한 자가 아니고 영광스러운 자요, 가
장 복 받은 사람이요,
정말로 멋진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이것을 믿어야 됩니다. 부활이 이렇게 중요하기
때문에 신약성경 27권 가운데서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언급한 성경이 17권이나 되고, 나머
지 10권은 간접적으로 다 언급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부활을 빼고서는 신약의 말씀이
성립이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의 부활이 주는 축복이 무엇입니까? 한 마
디로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예수 부활은 우리의 부활을 보장해 준다. 예수 부활은 내
부활이다.' 우리로 하여금 이처럼 자신있게 말할 수 있도록 해준 것입니다. 20절부터 24절까
지 보면 그 사실이 나와 있습니다. 20절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
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잠자는 자들'이란 이미 세상을 떠난 자
들을 가리킵니다.
앞으로 우리가 죽어도 잠자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세상
을 떠난 모든 사람들, 즉 먼저 간 성도들의 첫 열매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유대 나라 사람들
은 추수기가 다가오면 들녘에 나가 먼저 익은 곡식들을 조금 베어 옵니다.
그리고 그것을 들고 하나님 앞에 나와 흔들면서 요제를 드립니다. 요제란 흔들어서 제사를
지내는 것입니다. 처음 익은 곡식단을 들고 제사를 지내면서 하나님 앞에 이렇게 기도드리
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하나님, 이번 농사에도 축복하시어 이른 비도 주시고 늦은 비도
주셔서 이렇게 추수하게 됨을 감사합니다. 이제 앞으로 추수할 동안에 주님이 우리를 지켜
주셔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거두게 하옵소서.' 손에 들고 있는 처음 익은 열매는 무
엇을 의미합니까?
들판에 있는 모든 곡식이 다 익을 것이라는 것을 전제하는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들녘에 있는 모든 곡식을 대표해서 첫 열매가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것입니다. 예
수님이 바로 이 첫 열매인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 다
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다음에 예수 믿고 따라올 모든 성도들의 부활을 보증하는 것입
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보면 그 다음에 다 따라서 부활하게 될 것을 알 수 있다는 이야기입
니다.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은 완전 구원입니다. 다시 말
하면 영과 육의 구원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세상에서 살다가 죽으면 우리 영은
하나님나라로 갑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대기소에 머무는 것입니다. 완전 구원이 아
닙니다. 하나님나라에서
우리 영혼이 어느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땅에 묻힌 썩은 저
육신이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 입었던 영광스러운 몸을 입고 부활하여 하늘에 있는 영과 결
합하는 영화로운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일컬어서 성경에는 영화라고 합니다.
또 몸의 구속이라고도 말합니다.
로마서 8장 23절에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
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고 했습니다. 목을 빼고 기다린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완전 구원을 주십니다. 영혼만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육신도 구원받습니다.
영과 육이 결합해서 마치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그대
로 닮아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도록 하는 것이 완전 구원입니다. 이 구원을 우리가 기 다리
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은 내 부활입니다. 할렐루야! 독일의 유명한 복음주의
신학자 중에 한 사람인 에릭 사우어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부활절은 예수님의 부활로부터
시작하여 우리 성도의 부활로 끝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개의 부활절 사이에 살고 있다.'
예수님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 사이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님의 부활이 주는 믿음의 능력을 가지고 우리의 부활을 향해서 달려가는 사람들이다.'라고
했습니다.
참 멋진 말이 아닙니까? 따라서 우리가 예수의 부활하심을 믿으면 죽음을 보는
패러다임이 바뀝니다. 죽음이 두려운 것이긴 하지만 절망적인 것으로 보지않습니다. 죽음이
불쾌한 것이긴 하지만 저주스러운 것으로보지는 않습니다. 죽음이 우리의 생에 종지부를 찍
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그것이 마침표라고 보지 않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모두에게
예수님의 부활 때문에 죽음 자체를 부정할 수 있는 배짱이 있고 믿음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를 놓고 잔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죽음 자체를 인정 하시지 않는 것입
니다. 우리에게 그와 같은 담대함이 있습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지금 여든 세 살 정도 되십니다. 그분이 쓴 글을 최근에 보았더니 참
인상 깊은 말을 한마디 하셨습니다. '여러분, 빌리 그래함이 죽었다는 소식이 신문에 나거든
그 신문기사를 믿지 마시오. 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주소를 옮긴 것뿐이오.' 주소를 옮긴 것
이라고 합니다. 죽음 자체를 흔히 말하는 죽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
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믿기때문에 그렇습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실낙원을 쓴 영국의 문호 밀턴이 죽음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죽음은 영
원한 하나님나라 궁전의 문을 여는 열쇠다.' 미국의 한 때 유명한 설교자였고 목회자였던
아이언 사이드 박사는 죽음을 놓고 이런 예를 들었습니다. 그가 하루는 마을길을 지나가다
가 항상 열려 있는 어떤 상점의 문이 닫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창문에는 커튼이
내려져 있었습니다. '이상하다 이 집에 무슨 일이 있나?' 하고 자세히 봤더니 창문 밖에다
다음과 같이 써 놓았더랍니다. '내부 수리중' 그 후 여러 날 동안 그 가게문은 열리지 않았
습니다.
여전히 '내부 수리중'이라는 팻말만 붙어 있었습니다.드디어 어느 날인가 가게문이
활짝 열려서 들어가 봤더니 가게 안이 얼마나 멋지게 장식이 되었는지 모든 것이 새로웠습
니다.
들어가는 손님들마다 아주 기분 좋게 물건을 사서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을 보
고 아이언 사이드 박사는 깨달았다고 합니다. '아, 예수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내
부 수리중인것과 같구나.' 우리가 죽습니까? 그러면 문 딱 닫아 놓고 '내부 수리중'이라는
팻말을 걸어 놓은 것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실 때 우리 몸이 주님의 몸과 같이 영화롭게 변
화되는 부활의 날까지 내부 수리중 팻말을 걸어 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날이 오면 우리 몸은 정말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주님과 함께 하나님나라에 입성
할 것입니다. 할렐루야! 사람이 죽어 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아마 세상에서 가장 피하고 싶
은 일일지 모릅니다. 얼마나 비통합니까? 어떤 면에서는 얼마나 추합니까? 얼마나 허무합니
까?
사랑의교회에 어떤 자매가 있었는데, 그 자매 남편이 30대에 암이 걸려서 병원에서 죽
어가고 있었습다. 라고 그랬더니 안 가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끝까지 안 갔습니다. 가지
못하는 심정이 이해가 됩니다. 죽어 가는 사람을 쳐다보면서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
으로 다시 부활할 것이라는 믿음을 갖는 다는 것, 소망을 갖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대단히 어렵습니다.며칠 전에 우리 한국 교회의 큰 별이 하나 떨어졌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우리목회자의 사표가 되는 어른이었 는데 그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제가 빈소 앞
에 가서 한참 동안 앞에 있는 큰 사진을 쳐다보며 생각을 해 봤습니다.
그 사진은 아마 그분이 한 80세 정도 되었을 때 찍은 것 같았습니다. 깊게 파인 주름살이
잔뜩 덮여 있는 얼굴, 이목구비의 모든 균형이 다 어그러진 얼굴, 생명의 빛이 거의 사라져
버린 것 같은 얼굴, 이것을 쳐다보면서 '사람은 누구나 다 저렇게 되는구나.' 하고 다시 한
번 절실히 느꼈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예수 부활이 내 부활이 되지 않는다
면, 이런 마당에서 사람이 보일 수 있는 반응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참 정말 허무하네, 허
무해.' 그 목사님의 친척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에 눈물은 안 나오겠지만 당장 이
런 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정말 허무하네. 빌어먹을 세상, 가서 마음대로 먹고 마시고 하고
싶은 것 다 하면서 살다가 죽어야지. 마지막이 저 모양인데 잘 살겠다, 의롭게 살겠다, 이런
소리 할 필요가 있나?'
그러나 그 목사님의 그 사진을 보면서 제 마음에는 예수님의 부활이 생각났습니다. '그래,
지금은 저렇게 추한 모습이지만, 주님이 재림하시면 엄청난 미남이 되어 우리 앞에 나타나
시겠지.' 할렐루야! 예수님의 부활이 주는 아름다운 소망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부활을 생각하면 먼저 떠난 내 아버지도 반드시 부활할 것을 믿습니다. 먼
저 떠난 우리 어머니도 부활할 것을 믿습니다. 나보다 먼저 떠난 내 남편, 반드시 부활할 것
을 우리는 믿습니다. 내 눈물을 쥐어짜면서 세상을 떠난 내 아들, 내 딸 반드시 부활할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지금 이 세상에 살면서 불구의 몸으로 고통 당하고 있는 사람이거나 몸
안에 있는 질병을 가지고 씨름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예수의 부활을 생각하며 그 부활을
바라볼 때마다 '그 날이 되면 나는 예수님처럼 완전한 몸을 입고 영원토록 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는 소망을 가지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부활을 통해 완
성될 영광스러운 존재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예수님의 부활을 묵
상합시다.
또 우리 자신이 부활할 그 날을 늘 생각하는 습관을 가집시다. 그럴 때마다 이 세상에서 우
리는 강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담대할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부활에 관한
가능성을 길게 변증한 사도 바울은 끝으로 우리를 향해서 교훈하고 있습니다. 57절 보십시
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
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
라.' 아멘!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의 부활을 생각하고 날마다 감사해라. 예수의 부활을 생
각하고 절대로 흔들리지 말라. 예수의 부활을 생각하고 주님께 더욱 헌신하라.'는 이야기입
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부활의 기쁨, 부활의 소망, 부
활의 능력을 날마다 샘솟듯이 회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부활의 문제 /고전15:1-/ 이동원목사
2014-12-05 10:07:57
우리가 고린도전서15장, 고린도전서15장 말씀을 잠시 후에 같이 나누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은 흔히 부활장이라고 불리워지는 유명한 장입니다.
부활장. 고린도 전서 13장은 무슨 장이에요?사랑장. 히브리서11장 믿음장. 네, 고린도전서 15장? 무슨 장이에요? 부활장. 네, 부활의 부활의 장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 바울의 메세지는 사실은 고린도 교회가 부딪혀 있었든 부활의 문제에 대한 바울의 답변으로 시작 됩니다.
고린도는 그리스 희랍에 한 도시 가운데 하나입니다. 매우 영향력이 있었든, 아테네와 함께 그리스에서 아주 영향력이 있었든 도시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따라서 고린도는 희랍의 문화, 희랍의 철학에 한 중심지 였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희랍 철학에 핵심가운데 하나가 부활을 거절하는 그런 경향성을 갖고 있었습니다. 희랍 사람들이 당시에 붙잡고 있었든 희랍의 철학에 크다란 경향을 크게 세가지로 나눌 수가 있어요.
우리가 사도 행전 17장에 보시면 바울이 아테네에 갔을 때 희랍의 가장 대표적인 도시 아테네에서 철학자들을 만나서 논쟁을 벌입니다. 그리고 아래오바고라는 언덕에 올라가서 유명한 설교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바울이 아테네에서 만났든 두 가지 종류의 철학자들에 관해서 사도 행전 17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녜, 이두가지 종류의 철학자들, 어떤 철학자들이 였습니까? 한 종류는 누구에요? 사도행전 17장이라는 거 읽어보지 않으셨어요?
한번 찾아 보세요. 사도 행전 17장.18절 입니다 사도행전 17장18절의 말씀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사도행전 17장 18절 다같이 시작, “어떤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녜, 바울이 어떤 철학자들과 논쟁을 벌였습니까? 에비구레오, 발음이 좀 이상 하지만 우리가 옛날에 학생시절에 배웠을 때 에피규레안, 에피규레안. 공부를, 공부를 잘한 사람들은 생각이 날거고, 녜, 에피규레안이라는 철학 사조가 있었어요.
또 하나는 스도이고. 이 스도익크, 스도익크. 스도이고. 당시 아테네 아주 유명한 철학에 두 흐름 중에 하나였습니다. 소위 에피큐레안은 쾌락 주의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쾌락주의자들, 일종의 유물론자들이였고, 영적인 일에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유명한 에피큐로스의 그 명언 가운데 하나로 이런 말이 있어요. 죽음에 대해서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사람들에게 이런 아주 쑈피스틱한 괴변으로 사람들에게 설득했는데 어떻게 말했느냐 하면,
러분 우리가 아직 살아 있을 때 죽음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걱정하지 마십시요. 우리가 죽었을 때 이미 죽음은 나에게서 떠나간 것 입니다. 감동이 안돼요? 걱정하지 말라는 거에요. 우리가 살아있을 때 죽음은 오지 않았고 죽었을 때 이미 죽음은 나에게서 떠나간 것이니까 걱정하지 마십시다.
그러나 이것은 언어의 유희를 통해서 실상은 죽음으로부터 도피 하고 죽음을 잊어 버릴려는 것에 불과 합니다. 이것은 사실은 도피에요. 해결이 아니에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두려우니까 죽음으로부터 도피 하기위한 일종의 철학자들의 언어의 유희에 불과 했던 것 입니다.
그들은 따라서 죽음을 생각하지 말고 즐기자! 즐기자. 인생을 엔죠이 하자, 쾌락주의의 사상이였습니다.
또 하나는 스토익 이라는 학파가 있었습니다. 스토익은 에피큐로스와 정반대의 일종의 금욕주의적인 철학을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매우 진지하게 죽음을 사색했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문제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정의하기를 죽음이라는 것은 우리가 신에게 연합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하나가 되고 연합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뭐냐하면 신에게 연합 되어서 신에 일부가 되어버리고 우리가 신의 품안에 안겨버린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문제는 뭐냐하면 개인적인 존재에 대한 언급이 없어요. 내 개인이 어떻게 되느냐, 우리 모두가 그냥 신에게 연합해 버린다는 매우 희미한, 안개 같은 사상 속에서 어떤 죽음이후의 개인에 대한 구체적인 아무런 소망을 스토익 학파들은 제시하지 못하고 있었든 것입니다.
이두가지 철학 사조와 함께, 아~소위 프라톤 아리스토텔래스, 프라톤 이래로 그 당시 희랍을 지배하고 있었든 매우 중요한 철학적인 사조가 소위 이월론적인 철학이였습니다. 프라톤익 철학의 핵심은 소위 이월론적인 철학이였습니다.
이월론 이란 것은 뭐냐하면 영혼과 육체를 딱 나누어 놓아요.나누어놓아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처럼 영혼과 육체를 나누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죽은 다음에 그 영혼은, 영혼은 영원히 살아있다. 소위 불멸설을 주장 했습니다.
육체는 없어진다. 육체는 없어진다. 육체가 없는, 육체가 없는 영혼의 불멸을 주장 했습니다. 그런데 이건 기독교가 아니에요 이것은 기독교 사상이 아닙니다.
우리도 영혼 불멸을 믿어요. 그러나 우리가 믿는 영혼 불멸은 육체가 없는 영혼 불멸이 아니라 육체를 가진, 부활의 몸을 가진 영혼의 불멸을 믿습니다. 기독교는 육체를 무시하지 않아요.육체를 소중히 여깁니다.
하나님이 지어주신 육체, 비록 이땅에서는 병들고, 아우성치고, 배고프다고 그러고, 언제 끝나나, 그렇지마는 육체는 여전히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육체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거하는 몸이라고 말합니다. 성전이라고 말합니다.
죽음으로서 육체는 포기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후에 주께서는 부활의 몸을 약속합니다. 여러분 믿으십니까? 그러나 소위 이월론적인 희랍의 철학자는 영혼의 말을 높여놓고 육체는 온전히 무시해 버리고 말았어요.
그러니까 죽음과 함께, 죽음 저 건너편에는 아무런 희망이 없는 거에요. 죽음 건너편에 기다릴 것도, 기댈 것도, 바라볼 곳도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희랍 사람들은, 그리스 사람들은 그 당시에 죽음 저 건너편, 무덤건너편에 아무런 희망을 가질 수가 없었든 것입니다. 자, 자 이러한 희랍 사람들에게 바울이 복음을 선포 했을 때 복음의 내용가운데는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이 들어 있단 말이죠. 어떤 반응을 불러 일으켰을까요?
사도 행전 17장을 한번 찾아 보세요. 사도행전17장, 사도행전17장입니다. 31절, 사도행전 17장 31절에 보시면 같이 한번 읽습니다.
사도행전17장31절 다같이 읽습니다. 시작,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아테네 아래오바고의 유명한 바울의 설교 입니다.
지금도 아테네를 찾는 사람들은 반드시 바울이 이 말씀을 선포했든 아래오바고의 언덕에 서기를 즐겨합니다. 저는 우리 성지순례 팀이 아테네에 갔다가 아레오바고 언덕 위에 올라갔다가 미끄러질번 하고 내려왔습니다.
하하하.녜, 유명한 아래오바고의 설교, 설교의 절정이 뭐냐하면 복음에 대한 프리젠테이션, 복음의 전달이였고, 복음 전달의 핵심은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시고 부활 하신 사건이였어요. 그런데 어떠한 반응을 일으켰느냐?
32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32절 다같이 읽습니다. 시작, “저의가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혹은 기롱도 하고 혹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녜, 저희가 죽은 자의 부활의 메세지를 듣고 혹은 뭐했다고 그랬어요? 조롱을 했다,
조롱을 했다. 어떤 사람은 이해가 안된다 나중에 다시 설명을 해달라. 그것이 일방적인 반응이였어요. 왜냐하면 그 당시 희랍 철학의 분위기가 부활을 전혀 받아드리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입니다.
바울이 부활의 메시지를 외쳤을 때 당연히 희랍 사람들은 아테니안, 고린도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던졌을 것입니다. 부활이란 도대체 무엇이냐? 부활은 무엇이냐? 그 답변이 바로 고린도전서15장이에요.
사실 15장 하나 가지고 한 열 시간 정도 우리가 강해를 할 수가 있습니다. 아주 깊이가 있는, 바울의 신학적인 부활론이 농축되어 있는, 성경에 가장 위대한 장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 시간에는 짤막하게 15장 전체를 저가 썸머라이즈 해드리면서 스케치 해드리겠습니다.
우선 1절부터 19절까지는 부활의 사실을, 부활의 사실을 말합니다. 펙트, 부활의 사실을 바울이 전개하고있습니다. 부활의 사실. 그 다음에 20절부터 28절까지는 부활의 순서, 어떤 순서로 부활 할 것인가,부활의 순서.
그 다음에는 29절부터 34절까지는 부활의 근거, 우리가 부활을 믿을 수 있는 근거가 어디에 있느냐? 그 다음 35절부터 49절까지는 부활의 특성, 부활체, 부활의 몸이 어떤 특성을 갖고있느냐? 부활의 특성, 그 다음에 50절부터 58절까지는 부활의 소망. 이런 순서로 되어있습니다. 부활위 소망.
첫째로 부활의 사실 1절부터19절까지는 바울은 부활의 펙트를 제시합니다. 부활의 사실. 그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허구가 아니라 역사 속에 뿌리박고 있는 분명한 사실이다. 부활의 사실. 우선 바울은 부활은 복음의 절대적 요소라고 말합니다.
복음의절대적 요소에는 부활이 있다 부활이 있다.자, 1절 2절 다같이 읽습니다. 시작,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아멘?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무었을?복음을, 복음을 너희들에게 알게 한다. 너희가 이 복음을 받았다. 그리고 복음 가운데 서있다. 3절, 내가 받은 이 복음을 먼저 너희에게 전한다. 이 복음은 무엇이냐, 복음은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죽으신 것만 복음이 아니에요. 죽으신 것은 복음의 반쪽 싸이드 에 불과해요. 부활하셨다. 부활하셨다.
오래 전에 제가 대학 캠퍼스에 가서 아주 옛날에 저가 젊었을 때 지금도 젊었지만, 지금보다 훨씬더 젊었을 때,
하하~ 대학 캠퍼스에 가서 제가 전도 했는데요 한 학생에게 전도를 하니까 학생이 뭐라고 그랬느냐 하면은, 목사님 저는 예수님의 죽음을 얼마든지 믿을 수가 있어요. 그런데 부활이 안 믿어져요.예수님의 죽음만 믿고는 크리스챤이 될 수가 없습니까?. 저가 뭐라고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그랬어요
. 참 미안하지만 그리스도의 죽음만 믿고 있는 사람은 아직도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로마서에 보면, ‘너희가 만일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다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믿으면 뭐라고 그랬어요?
구원을 얻으리니. 로마서 10장 9절, 너가 만일, 너가 만일 예수께서, 그리스도께서, 죽은자 가운데서 그분이 다시 살아나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그러니 그거 안 믿으면 구원 못받는 거에요.
그렇다면 복음이 아니죠. 그는 우리의 죄 용서함을 위해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죽으셨을 뿐 아니라 그는 우리가 새로운 생명 가운데서, 새생명 안에서 행하고, 하나님의 도우심과 임재를 체험하며 날마다 살아갈 수 있도록 그는 다시 부활 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사신, 지금 이순간도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부활은 복음의 절대적인 요소 가운데 하나에요. 한걸음 더 나아가서, 아~ 이 부활은 구약 예언의 성취입니다. 구약성경에 예언된 것을 성취한 것입니다.
자, 우리 3절 4절 다시 한번 읽어요. 3절 4절, 다같이 시작,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무슨 단어가 강조 되었어요? 성경대로, 그리스도의 죽음은 어느날 갑자기 일어난 우연한 해프닝,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성경대로 죽으셨다. 성경대로 다시 사셨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구약에 예언되어 있는 것 처럼,
그렇죠? 많이 예언 되어 있죠? 어떤 말씀이 생각 나세요? 대표적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예언이, 제일 유명한 장이 뭐일까요 이사야 53장.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우리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으로 인함이라, 예수님 오시기전 700년 전에 이미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분명히 예언을 해놓았어요.
그런데 죽으심만 예언 해놓은 것이 아니라 부활도 예언되었습니다. 여러가지 방법으로, 예를 들어서 유대인의 칠대 명절가운데 하나인 초실절이 있어요. 초실절 무슨 뜻 입니까 초실절? 첫 열매를 바치는 절기, 이 첫 열매가 무얼 상징합니까?
죽음을 이기시고 처음으로 다시 사신 새로운 생명의 첫 열매,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절기였어요. 초실절 초실절, 아들 처음 낳으면 초식이라고 지어도 괜찮을꺼에요 하하~ 녜, 힌트를 드려요
녜, 우리23절에 보시면 고린도전서 15장23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23절 다같이 시작,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여기 첫 열매라는 말이 나와요.
구약에 예컨데 요나의 체험,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가 죽었다가 다시 산 요나의 체험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는 그것이 이 시대에 보여줄 수 있는 최대의 그리스도의, 예수의 그리스도 되심의 표적이라고 말합니다. 표적, 표적이라고 말합니다.
부활의 사건의 예표하고 있었던 거예요. 구약에 직접적인 예언가운데 하나로 이런 말씀을 보세요 시편16편 보겠습니다. 시편16편 시편16편10절 한번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시편 16편입니다. 같이 읽습니다.
시편16편10절 다같이 읽습니다.시작,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11절,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이게 누구에 대한 예언일까요? 예수님, 예수님의 무엇에 대한 예언일까요? 부활, 자, 이 시편 16편10절과11절이 신약의 어디에서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가를 보세요.
사도행전2장을 보겠습니다. 사도행전2장22절을 보겠어요. 사도행전2장, 사도행전2장22절입니다. 사도행전2장22절. 어떻게 시작 되느냐하면, 베드로의 설교. 오순절설교.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어라 너희도 아는 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리라”
23절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대로 내어준바 되었거늘”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이 말이죠. 그러나 거기서 끝나지는 않아요. 27절에 보시면은 뭐라고 말합니까? 베드로의 설교에요
27절 다같이 시작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 임이로다” 어디서 많이 보았든 구절 같지 않아요? 시편16편10절이죠. 그 다음 구절 다같이,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셨으니 주의 앞에서 나로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니” 하였으니.
31절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 하시리라 하더니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일에 중인이로다” 할렐루야! 바로 이 부활에 구약에 약속된, 예언된 부활의 성취가 바로 그리스도의 사건, 부활 사건이였든 것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이 부활의 사실은 수많은 증인들을 갖고있습니다. 베드로 게바가 보았다. 열두제자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
어떤 사람들은 하도 예수님 사랑하고 사모하다가 어떤 사람이 그냥 허깨비 환상을 보고 예수님 부활했다고 소문을 낸 것이다. 신학적 이론이 있는데 이걸 가지고 환상설, 이렇게 말합니다.
환상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있어요. 환상을 잘보는 체질이 있어요. 녜.그런데 그래 뭐 한 두사람 환상을 본다고 합시다. 그 다음 에 500명의 형제들이 한꺼번에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다고 500명이 다 미쳤나?
무슨 말이냐 하면 바울은 충분한 증인을 갖고 있다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적 사실에 관한 허다한 증인들을 우리는 소유한다!. 무슨 말입니까? 부활은 사실이다. 그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이 부활은 신앙의 본질이다. 이것은 본질적 사건이다 신앙의 본질이라고 말합니다.
14절 같이 보겠습니다 14절, 자,고린도전서15장14절 다같이 읽습니다. 시작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 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여기서 어떤 단어가 강조되고 있습니까?
헛것 이다. 주님이 다시 살아나심이 없었다면 우리가 예수 믿으라고 전도하는 것 헛것이다. 말짱 헛 것이다. 너희 믿음도 헛 것이다 본래 헛 것이라는 이 단어가 쓰레기, 휴지,그런 말에서 나온 말이에요. 만약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의 신앙은 쓰레기에 불과해요 휴지 조각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아무런 능력이 없어요. 사람을 변화 시킬 수도 없고 소망이 될 수도 없고 능력이 될 수도 없고,그렇습니다. 2000년 전에 이땅에 오신 예수그리스도,그의 탄생은 죽기위해서 오셨어요
. 그리고 그의 죽음은 부활로, 그가 이땅에 오신 사건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부활 때문에 오늘우리는 우리의 주님 2000년 전에 이땅에 오신 그 주님이 여전히 내 안에 우리가운데 살아계신 주님이신 것을 고백하는 줄로 믿습니다.
부활은 사실입니다. 믿습니까? 사실을 사실대로 믿는 것이 신앙이에요. 안 사실을 사실처럼 착각하고 믿고 있는 것이 미신입니다. 분명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사실을 안 믿는 것이 불신입니다. 신앙은 사실대로를 사실대로 믿는 것 입니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이 사실인 것을 믿습니다. 이게 부활의 사실입니다 1절부터19절까지.
그 다음에 20절부터28절까지는 부활의 순서에요. 부활이 어떤 순서로 이루어지는가? 우선 22절보세요. 22절 다같이 읽습니다.시작,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부활은 죽음 때문에 부활이 필요한 거에요. 죽음은 왜 오느냐? 아담 때문에 왔습니다. 첫 사람이 범죄하므로 아담에게 속한, 아담의 후예인 우리도, 아담이 범죄 했을 때 우리도 그 안에서 죽은 것 입니다. 억울해요?
억울해도 할 수 없어요 여러분이 버스타고 운전수 잘못 만나면 잘못 만난 운전수 때문에 그 버스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죽을 수가 있습니다.
억울해도 할 수 없어요 그때 운전수 행동은 버스 안에 타고 있는 모든 승객의 운명을 짊어지고 있는 대표적 행동이에요. 아담 한 사람의 행동은 인류의 전체를 대표하는 행동이였어요.
아담 안에서 우리가 다 죽었어요. 아담 안에서 다 죽었어요. 그래서 죽음을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아담 안에서 죽음을 피할 수 없었든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은 마지막 아담, 둘째 아담을 준비 하셨습니다.
둘째 아담이 누구에요? 예수그리스도.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어리라’ 그래서 그리스도는 오셨고 우리의 죄를 짊어지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부활 하심으로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다.
죽음 다음에 오는 부활을 그분은 증명하고 약속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아담 안에서 내가 죽었다 이것이 첫번째이고
그러나 그리스도가 부활 하시므로 예수그리스도가 부활 하심으로. 죽음을 이기는 첫 열매가 되셨어요. 예수님이 첫 열매에요.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첫번째 열매에요, 예수그리스도, 물론 일시적 부활이 있었지만,
예수님이 살리시든 나사로, 살아났지만 또 죽었어요 나사로, 일시적 부활의 하나의 에~ 케이스에 불과 했어요. 그러나 정말 본격적으로 죽음을 이기시고 영원히 다시 사신 예수그리스도의 사건은 부활의 첫번째 사건이에요.
첫 열매에요. 그러나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의 예표가 된다. 주님이 다시 사신 것 처럼, 주님을 믿는 주님 안에 있는 우리도 다시 산다. 우리를 다시 살리시기 위해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 다시 오신다 믿습니까?
23절의 약속 다시 읽어보세요. 23절 다같이 읽습니다. 시작,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부활의 순서, 우선 아담 때문에 죽었다.
그런데 뭐에요 이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부활하셨다. 부활하신 주님은 다시 오신다. 다시 오실 때 우리도 뭐에요 우리도 부활한다. 우리도 부활한다. 누가 부활합니까?
23절에 보시면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 어떤 사람이 부활 한다구요? 그에게 붙은 자. 저는 여기 크리스챤에 대한, 저가 제일 좋아하는 정의, 그리스도인에 대한 정의, 크리스챤이 누가 크리스챤이냐? 교회 나가는 사람?
노(No)! 아니에요. 교회 나오면서도 예수 안 믿는 사람 너무너무 많아요. 난 안속아요. 교회 나온다고 다 예수 믿는다고 안속아요. 크리스챤의 정의, 그리스도인의 정의 뭘까요? 다같이 그리스도에게 “붙은자”
녜, 예수에게 붙어 있는 자. 여러분 예수에게 붙어 있습니까? 그러면 예수에게 붙어 있어니까 주님이 와! ~ 그러면 딸려가고 올라갈 거 아니에요 예수님이 그리스도에게 붙은 자니까, 주님 강림하실 때 다시 일어나요.
우리가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되어 주님과 함께 저 영원을 누리기 위해서 우리는 주님과 함께 저 영원의 기업을 누리기 위해서 주와 함께 설 줄로 믿습니다. 이게 부활의 순서에요.
그 다음 29절부터34절까지 부활의 근거, 우리가 부활을 믿을 수 있는 근거, 바울은 세가지 근거를 둡니다, 첫째 어찌하여 저희를 위하여 세례를 받느냐 좀 어려운 말이죠? 이건 기독교 사상이 아니에요. 이교 사상 가운데 그 당시,
그 당시에 다른 종교를 믿고있는 사람들 가운데 죽은 자들을 위한 세례를 받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게 정당하다 이렇게 말한 것이 아니에요 바울이. 정당하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죽은 사람을 대신해서 세례를 받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왜 받느냐하면 죽은 사람을 위해 대신 받으면 죽은 사람에게 무슨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까라는 소망 때문에, 그러면 너희가 죽은 다음에 어떤 소망이 없다면 왜 세례를 받느냐? 다른 사람들이 하는 습관을 가지고 바울은 까꾸로, 죽은 다음에 어떤 가능성을 여기서 증명하고 있는 거에요. 마치 이런 얘기에요.
우리가 천국을 증명하기 위해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런 식으로 전도할 수가 있습니다. 여보세요 우리한국에 옛날 아, 대대로 우리주변에 어떤 분이, 어른신네가 돌아가시면 우리가 어떻게 말합니까? 돌아가셨다~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돌아가실 곳이 없으면 왜 우리가 돌아가셨다고 말하겠어요? 돌아가실 곳이 있지않습니까? 이런 식으로 우리가 전도를 할 수가 있어요 없어요 있죠? 바울이 그런 비슷한 논리를 펴는 거죠.
죽은 사람을 위해서 대신 세례를 받는 것이 정당한 교리다 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에요. 잘못된 교리지만 잘못된 교리를 신성시하고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면서 그러나 죽음 다음에 뭐가 없다면 사람들이 왜 저런 일을 하겠느냐 이 말이에요. 저런 일을 하겠느냐? .그 다음을 보시면 더 알 수가 있습니다
. 부활의 둘째 근거. 성도의 고난. 우리들이 전도 하다가 고난을 받는 이유. 그 왜 고난을 받느냐? 30절 같이 읽겠습니다. 30절 다같이 시작, “또 어찌하여 우리가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리요” 여기 인칭 대명사를 주의해 보셔야 돼요.
뭐냐하면 음~ 29절에는 저들이 나와요. 자 죽은 자를 위하여 세례를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저희를 위하여 저들이 세례를 받느냐’ 저들에 대한 얘기, 이건 우리에 대한 얘기가 아녜요. 크리스챤에 대한 얘기가 아니죠?
그러나 여기 30절에 보면은 또 어찌하여 우리가, 이번에는 우리 성도들 얘기에요. ‘우리가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리요’ 우리가 목숨을 걸고 전도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 죽는 것을 겁내지 않고 담대하게 크리스챤들이 전도하다가 순교를 당하는 일 왜 그럴까요?
그게 끝이 아니기 때문에, 부활을 믿기 때문에 그 얘기에요. 그래서 우리가 부활을 믿는 또 하나의 근거, 이것은 무얼보면 알 수가 있느냐, 왜냐하면 목숨을 걸고 전도 하고 있는 사람들, 이것은 죽음 건너편에 부활의 확실한 사실을 우리가 소망하기 때문인 줄로 믿습니다. 녜,
그 다음에 부활의 또 하나의 근거는 뭐냐하면 거룩한 삶의 죽음,거룩한 삶의 죽음, 32절
“내가 범인처럼 에베소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웠으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느뇨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것이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여러분 부활의 소망이 없고 내세에 소망이 없다면 뭐에요? 이 세상이 전부에요 그러니까 어떻게 해요? 이 짧은 세상 끝나기 전에 뭐에요? ‘노세, 노세, 젊어 노세’ ‘부어라 마셔라’ 하~ 녜,
먹고 마시고 즐기자. 뭐, 그것이 우리 인생관의 전부가 될 수밖에 없어요. 만약 부활이 없다면, 만약 내세가 없다면, 그러나 그 다음절에는 “속지말라 이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짖지 말라”
우리가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 이유, 그것은 이세상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에,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인정 하심과 상급 주심과 우리를 기다리고있는 영원한 나라를 우리가 소망 하는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부활을 믿는 근거란 말이에요. 근거,
자 그 다음에 부활의 특성.35절부터 49절까지 부활의 특성. 지금 저가 초 급행열차로 지금 달려갑니다. 녜, 한 열 달 할것을 몇 분 동안 요약하는 거에요. 35절부터 49절까지 부활의 특성, 부활의 몸은 어떤 특성이 있느냐,
저는 이세상에서 우리가 소유하고있는 몸과 부활 때 가지게 될 몸 사이에 공통점도 있고 차이점도 있다고 생각해요. 공통점, 알아볼 수 있어요. 뭘 보면 알 수가 있느냐 하면 예수님의 부활을 보면 알 수가 있어요.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자들이 알아봤어요. 조금 달랐지만 알아봤어요. 너무 빛나고 아름다운 모습이어서 헛갈리고 착각하기도 했지만 그러나 알아볼 수 있었어요. 저는 우리가 천국가서 알아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알아볼 수 없다면 무슨 재미에요? 응? 서로 알아봐야지, 저도 여러분을 알아보고, 그러나 그때는 주름살도 걱정할 필요가 없고 흰 머리도 걱정할 필요가 없고,우리 인생의 최정상의 모습으로 최절정의 모습으로 만날 줄로 믿습니다.
저는 공통점도 있다고 생각을 해요.그러나 차이가 더 많다고 생각을 합니다. 차이가 더 많을 꺼예요. 그러나 그것을 바울이 어떻게 비유를 했느냐하면 씨앗과 열매로 비교 했어요. 씨앗과 열매, 3십 여기6절에 보시면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또 너의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갱이 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 씨앗에게 형체를 주신다.
열매, 공통점도 있어요 없어요? 있긴 있어요. 어떤 생명의 본질성에 있어 공통점이 있어요. 그러나 같습니가 다릅니까? 굉장히 달라요. 우리가 뿌린 건 씨앗 하나에요. 그러나 나중에 뭐에요? 엄청난 열매를 보세요. 엄청난 열매. 굉장히 다른 모습이에요. 어떻게 다르느냐? 부활의 몸이 어떻게 다를 것이냐, 그 정수를 바울은 이렇게 요약을 합니다. 어떻게 다를 것인가?
42절부터 보시면 42절 자 다같이 읽습니다 시작,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그러니까 이땅의 몸과 부활의 몸의 차이,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몸은 뭐에요? 썩을 몸! 옆에 있는 사람 째려 보세요.
그리고 폼 잡아도 썩을 몸 이에요 한마디 해봅시다. 시작, ‘폼 잡아도 썩을 몸 이에요’ 그러나 그때에는 어떤 몸을 입을까요? 그때는, 썩지 아니할 몸! 썩지 아니할 몸, 옆에 사람에게 썩지 아니할 몸 궁금 하네요 한번 해보세요.
시작, ‘썩지 아니할 몸 궁금 하네요’ 하하~ 녜, 썩을 몸이 썩지 아니할 몸을 입는다고 했어요. 그 다음에 보시면 욕된 몸이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그러니 욕된 몸, 어떤, 우리 몸에는 부끄러움을 느껴요.
그렇지 않아요? 이상하게, 우리 몸에 대해서 어떤 자부심도 있지만 또 부끄러워하고, 벗지도 못하고, 어떤 부끄러움이 있어요 부끄러움이 있어요. 그러나 그때 우리가 가질 몸은 아주 영광스럽다. 부끄러움의 요소가 하나도 없다.
어떤 죄 때문에, 죄성 때문에 어떤 부끄러움이 개제되어 있지만, 그때 그 몸은 영광스러운 몸이 될 것이다. 그 다음에 또 약한 것이 강한 몸, 그러니 얼마나 약해요. 그냥 감기 한번 돌아 다니니까 캑캑 거리고 그냥, 얼마나 약한 몸 이에요.
그러나 그때 우리는 강한 몸. 여러분 기대 하십니까? 또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 육의 몸이지만 그때 우리는 신령한 몸. 어떻게 다른가? 나도 몰라요. 어쨌든 육의 몸과 신령한 몸이라고 그랬어요. 흙에 속한 몸,
49절에 보면은 하늘에 속한 몸.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몸은 흙에 속한 몸 이에요. 그때 우리가 가질 몸은 하늘에 속한 몸. 어떻게 다를까요? 그건 나도 몰라요. 어쨌든 굉장히 다르다! 굉장히 다르다.
같은 것도 있지만 굉장히 다르다. 한번 따라서 하세요. ‘같은 것도 있지만 굉장히 다르다’ 녜, 옆에 사람보고 ‘어떻게 다를까요?’ 한번 상상 해보세요. 어떻게 다른 몸으로 만날까? 어떻게 다른 몸으로 우리가 만날 것인가? 부활체의 특성,
마지막 50절에서 58절까지 부활의 소망, 부활의 소망 두 가지 입니다. 미래의 소망,52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52절 다같이 시작,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 하리라”
나팔이 막 울려 펴지면 우리가 일어나요. 죽은 자리에서 다 일어나게 되요. 광야의 나팔은 전쟁을 위해서 예비하는 나팔이 제일 중요한 용도였어요.그러나 가나안 땅에 들어간 다음 나팔은 축제의 나팔, 나팔이 울려 펴지면 뭐했어요 축제를 시작해요.
저는 주님이 다시 오실 때 불어지는 나팔, 그것은 축제의 시작이다. 우리가 새로운 몸을 입고 주님과 영원을 즐기기 위한 나팔소리와 함께 우리는 다시 살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찬양을 불러요. 그 찬양의 제목가운데 하나가 뭐냐하면 죽음을 이긴 찬양이에요. 죽음을 이긴 찬양. 그 찬양이 뭐냐하면 55절, 다같이 읽습니다.
시작,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니가 나를 잡아 먹었다고 생각했지? 그러나 놀랬지? 내가 지금 부활했다. 사망아 네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 이기는 것이 어디에 있느냐 우리는 사망을 이긴 영원한 승리자로 부활의 찬미를 부르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미래의 소망이에요.
그러나 부활은 미래의 소망만 주는 것이 아니라 현제의 소망을 줍니다. 현제의 소망은 무얼까요 58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58절 다같이 시작,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아멘~ 아멘, 그 부활의 소망이 확실하기 때문에 뭐에요? 지금 우리가 주를 위해서 흘리는 땀, 우리가 바쳐진 수고, 드려진 봉사의 모든 수고, 그것은 하나도 헛되지 아니하고 그 앞에 영광스러운 상급으로 나타날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라.’이것이 지금 여기서 또한 누릴 수 있는 우리의 소망인줄로 믿습니다. 이 부활의 소망을 주기위해서 2000년 전 이 땅에 오신 주님을 찬양하시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 녜, 오늘 얼마나 수지 맞았어요. 부활 뛰었습니다. 옆에 사람보고 ‘부활 뛰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자 우리 조용히 기도 하시면서 하나님 감사해요. 부활의 소망을 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 다같이 조용히 주앞에 찬양하십시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가 이 부활의 소망을 주신 내 사랑하는 주님을 높여드립니다.찬양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오시지 아니 하셨더라면 우리가 어떻게 이 찬미를 부를 수가 있었을까요 죄를 이기고 죽음을 이기고 우리가 바라볼 수 있는 영원한 나라의 소망, 소망의 주님을 찬양합니다. 찬양을 받으옵소서
사랑하는 주님 감사합니다 성탄의 씨즌 오늘우리가 부활의 소망을 다시 한번 확인 했습니니다. 주님 주께서 부활 하셨기 때문에 주님께 붙어 있는 자로 그 부활의 소망이 나의 소망이 된 것을 인해서 주님을 찬양합니다.
세상이 어둡고 세상이 비바람이 요란하다고 할찌라도 그리고 우리를 꺽어버리는 죽음의 세력이 우리를 낮추고 우리를 좌절 시키고 우리를 실망시킨다 할찌라도 하나님 우린 실망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부활의 소망을 바라보고 승리로운 걸음을 옮겨 갈 것입니다. 육체의 병이 있어도 우리는 부활의 소망으로 승리 하고야 말 것입니다. 이 소망 중에 승리하는 당신의 백성들 되게 해 주시옵소서
아름다운 성탄의 씨즌, 우리가 여러가지로 복잡한 생각들이 또 삶에서 우리가 지고 가야할 짐이 무겁고 또 우리 마음속에 단순하지 않는 여러가지 삶의 무게가 우리를 짓누르고 있지만 우리의 어린시절 우리가 기다려 왔든,
성탄의 그 순전한 낭만과 기쁨. 주님이 우리에게 주셨든 그 크리스마스의 아름다운 로맨스, 주님이 오셔서 우리에게 그 구원의 기쁨을 주시고 또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희망을 주셨기에 우리 그리스도인 들만이 부를 수 있는 아름다움의 노래 그 찬양속 에서 내게 내 삶에 주인 되어주신,
구주 되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뻐하고, 감격케 하고, 감사하며 주님의 이름을 높여드리고, 또 주를 찬양하면서 새로운 천년의 꿈을 꾸는 귀한 우리 성도들이 될 수 있도록 축복하시기를, 이날도 수요 모임으로 모여 주앞에 경배 드리고 찬양으로 영광을 돌리고 말씀을 받고, 부활의 소망을 확인하며 우리 사랑하는 이웃들을 우리의 사랑으로 함께 끌어 안기 위해서 귀한 헌금을 주앞에 드리고 나아가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성령의 축복이 이날도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복 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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