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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주제 설교

주기도문 주제 설교 (마태복음 6:5 - 13)

by Jessi J 2024. 4.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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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의미 /6:9-13/ 이동원목사

2014-12-05 20:52:10

 

여러분은 그 인간도 동물에 속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인간 존재 안에 우리가 동물성 혹은 동물적 요소가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부인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광의에서 인간도 동물의 한 부분이라고 할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기독교적 전망 또한 성경적 가치관에서 볼 때 우리 사람은 분명히 동물과 차별화 되는 존재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어떤 면에서 그렇다면 인간은 동물과 차별화 되는 존재일까요?

 

저는 두 가지의 특별히 영역을 생각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인간은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기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문화와 종교야말로 인간을 다른 동물과 차별화 시키는 독특성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기능 사고하는 기능이 우리에게 문화를 발전시켜 온 것이지요.

 

그래서 예술도 하고 과학도 발전시키고 이 생각하는 기능이 우리에게 문화생활을 가져다 준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가 종교를 만든 것입니다.

 

우리는 아직까지도 동물에게는 문화생활이 있다든지 또 동물에게 종교생활이 있다는 흔적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한 신학자는 인간다움의 증거가 무엇이냐? 그것은 우리가 생각할 줄 알고 기도할 줄 안다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 인간의 인간다움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생각하지않고 인생을 살고 있다면 이 사람은 사람답지 않은 사람, 인간이 아니라고 우리는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 다음 똑같은 의미에서 우리는 어떤 사람이 기도하지 않고 산다면 사람이 아니다, 인간다운 사람이 아니다, 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한번 옆에 있는 사람에게 이렇게 질문을 해 보십시요. “기도하고 사십니까?” 이렇게 한번 질문 하겠습니다. 다같이 시작, 옆에 사람에게. “기도하고 사십니까?” 아이 질문을 좀 해봐요! , 그리고 대답을 들어보세요 대답을, 기도하고 사십니까? 한번 대답을 들어보세요.

 

, 대답이 시원치 않다든지 괜히 침묵 지키고 있는 사람, 이건 자신이 없다는 얘기에요 그렇죠? 그러니까 그런 사람을 다시 쳐다보시면서 인간이 아니시로군요? 하하하~~ 이렇게 한번 해 보시기 바랍니다. 시작, 하하하~~

 

 

 

어느날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산 마루턱에서 기도하시는 모습을 지켜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도하고 일어서시는 주님에게서 어떤 영광스러움 거룩함 신비로움을 느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기도하고 일어난 예수님을 보면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기도하고 싶다라는 기도의 갈증이 기도의 목마름이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1장에 보시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달려가요. 달려가서 뭐라고 말하는가 하면, 선생님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요. 그래서 예수님이 그때 정말 기도를 배우고 싶니? 그러면서 주 기도를 가르쳐 주신것으로 되어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기도가 아니에요. 우리의 기도에요. 어떤 사람은 정확하게 말하면 제자들의 기도다, 왜냐하면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이것은 예수님에게 적용이 안되거든요 우리에게 필요한 기도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라! 그러면서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신것입니다.

 

우리는 주기도문을 면밀하게 분석하고자 할만한 충분한 시간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은 이 주기도문을 분석적으로 접근하기보다도 개괄적으로 포괄적으로 접근하면서 이 주 기도문 속에 나타난 기도의 의미, 도대체 무엇일까요? 이것을 같이 살펴보고자 합니다. 기도의 의미, 무엇일까요?

 

 

 

이 주기도문에 의하면 첫째로 기도란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는 것입니다. 한번 따라서 하십시다. “기도는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는 것이다

 

, 이 주 기도문이 어떤 말로 시작 됩니까? 주 기도문 시작이 어떻습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다시 말하면 아버지를 부르는 것으로, 하나님이신 우리 아버지를 부르는 것으로 이 기도가 시작됩니다.

 

제가 미국 있을 때 한번 어떤 미국교회에 갔다가 청년 한 사람이 모노드라마를 혼자서 드라마를 하는 것을 보았어요. 그런데 제목이 주기도문이에요.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우리교회에서 누군가 언제 한번 시도해 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합니다만

 

, 혼자서 모노 드라마를 하는데, 주기도문을 하는데 이렇게 나와 시작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아버지여그러니까 마이크로 녹음된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왜 불러?” 그러니까

 

아이 나 지금 주기도문 하고있어요 나를 방해하지 마세요

 

, 너 나 부르지 않았니?”

 

그러면 다시 하죠. 하늘에 계신 우리아버지여 이름이…”

 

너 나 또 불렀니?”

 

아이, 나 주 기도문 하는데 왜 자꾸 방해 하십니까?

 

, 너 그러면 정말 나를 부르는 것이 아니로구나?” 이러면서 시작이 돼요.

 

우리가 이 주기도문을 너무나 외우는 것, 암송하는 어떤 종교 의식적인 무엇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암송하는 일에 급급하지, 정말 우리가 하나님을 부르고 계십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아버지여. 그래서 기도라는 것은 단순히 어떤 종교 의식적인 주문을 외우는 것이 아니라 이 말입니다. 또 이것은 단순히 우리가 필요한 무엇을 구하여 얻기만 하는 행위이기 전에 앞서서 본질적으로 기도라는 것은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진지하게 불렀고 그분이 살아계시다면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시고 그 분은 나에게 다가오시고 나를 만나주시고 나는 그 분과의 만남 속에 그분과의 대화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기도의 본질적 경험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왜 우리가, 저와 여러분이 어느날 기도생활 다운 기도생활을 갖지 못할까요? 뭐 여러가지 원인이 있을거에요. 그런데 아마도 중요한 원인은 우리들의 조급함 때문일지 모릅니다. 그것은 어쩌면 현대 문화적인 경향, 우리문화가 자꾸만 우리를 급하게 만들잖아요? 그러니까 기도하는 시간을 시간낭비라고 생각합니다.

 

또 특별히 현대문화의 특성가운데 하나가 이런 컴퓨터의 클릭시대, 우리는 한번 딱 클릭을 하면 내가 원했던 정보가 튀어나와야 합니다. 이런 시대적인 경향, 거기다가 이러한 시대적 정신이 끼쳐준 기도에 대한 오해, 우리는 마치 컴퓨터의 클릭처럼 기도란 것도 내가 딱 기도하면 즉각적으로 응답이 와야 하는데 기도해 보아도 응답이 없단 말이죠.

 

그러니까 정말 하나님 살아계실까? 기도가 정말 필요한 것일까? 이런 본질적인 기도에 대한 회의를 갖습니다. 이것은 바로 이런 급해지는, 또 컴퓨터의 클릭시대의 영향도 적지않게 기도생활에 영향을 끼친다고 저는 생각을해요.

 

요즘 컴퓨터식 주기도문이 나와있는 것 여러분 아십니까? 컴퓨터식 주 기도문. 제가 한번 소개 해 드리지요.

 

하드디스크에 계신 우리 프로그램이시여.

 

패스워드를 거룩하게 하옵시고 운영체계에 임하옵시며

 

명령이 키보드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모니터에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데이터를 주시옵고

 

우리가 프로그램의 오류를 용서한 것 같이 우리의 오타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바이러스에 들지 말게 하옵시며 다만 불시의 정전에서 구하옵소서. 엔트. 하하하~~

 

, 여러분 기도가 컴퓨터와 차별화 되는 특성이 무어라고 생각하십니까?

 

기도의 본질은 이미 말씀 드린 것처럼 정보의 획득이 아니라 이것은 본질적으로 인격의 대화입니다. 그리고 이 대화의 깊이는 기다림의 그 과정과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충분한 시간을 통해서 나는 기도하는 대상인 인격자이신 하나님과의 친밀함의 관계를 개발하고 발전시켜 나갈 수가 있습니다.

 

저 뱅크웨어에 리젼트라는 유명한 신학교가 있는데 신학교의 학장이신 제임스 휴스턴 박사는 기도를 정의를 하면서 이런 독특한 정의를 했어요. 기도란 뭐냐? 기도는 하나님과의 우정이다. “friendship with God” 하나님과의 우정이다.

 

저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 주 기도문을 가르쳐 주셨을 때 이 첫마디가 딱 끝나고 나서 아마도 제자들은 굉장한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 다시 한번 주 기도문이 어떻게 시작이 돼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구약시대에 보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해서 가장 많이 보편적으로 사용한 칭호가 있다면여호와, 야훼라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너무 거룩한 이름이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함부로 부르지 않았습니다. 대신 아도나이, 뭐 주님, 이러한 표현을 많이 썼어요.

 

어쨌든 구약의 하나님은 굉장히 멀리 계신 하나님,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나 먼 당신, 거룩하신 하나님, 이런 이미지가 있었는데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시면서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아버지여!”

 

우리가 예수님이 실제로 그의 공생애 가운데 복음서에 보시면 예수님이 하나님을 향한 호칭 속에서 그는 마지막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꼭 한번 엘리 엘리, 나의 하나님 하나님! 그 표현을 써셨을 뿐 예수님은 주로 사용하신 표현이 뭐냐하면아버지이렇게 써셨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어떤 나라 언어를 써셨을까? 학자들은 예수님이 아라믹 랭기지, 아람어를 써셨을 것이라고 생각을 해요. 그런데 아람어에 의하면 이 아버지라는 거창한 존칭이 없습니다. 대신 아주 간단한 애칭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우리말의 아빠와 같에요. 그래서 아람어로도아바입니다. 아바, 아바. 그래서 아빠란 뜻이에요. 그러면 이렇게 가르쳐 주신 거예요.

 

, 너희들 앞으로는 기도할 때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빠시여!”

 

아니 아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빠. 우리 어린 아이들이 단순하게 아버지를 부르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요. 나는 아빠 같은 분이야 하나님은 말이야, 그러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아빠, 그러면서 그 하나님 앞에 나와 기도하라고.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늘이란 말이 복수입니다. 하늘들, 이것은 하늘들을 만드시고 만유를 만드시고 만유를 통치하시는 그 하나님이 우리 아빠다 우리 아빠다.

 

우리 부모들은 특별히 아버지들은 어린아이들이 아빠하고 부를 때 어떤 행복을 느끼잖아요 아빠 된 행복을 느낍니다.

 

그런데 한 신학자가 하늘에 계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도 그의 자녀들이 아빠하고 부르며 나올 때 그는 행복해 하시며 기뻐하시며 우리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주시는 분이시다. 이렇게 얘기를 했어요. 그래서 오늘 그 하나님에 관해서 여러분은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왜 우리가 기도 속에 들어가지 못합니까?

 

 

 

현대 실존주의 작가 가운데 커다란 영향을 끼친 프란츠 카프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분은 현대인을 그의 작중 인물들을 통해서 묘사하면서 자주 이 단어를 썼어요.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마치 아버지를 잃어버린 고아와 같다. 아버지를 잃어버린 고아와 같다.

 

이것은 프란츠 카프카 자신의 경험을 사실은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분의 아버지가 있었어요. 그런데 한 저널에서 일기 가운데서 이런 말을 남깁니다. 자기 아버지가 있었지만 그는 단 한번도 아버지와 의미 있고 친밀한 대화를 나누어본 경험이 없다. 자기는 고아처럼 느끼고 있었다.

 

오늘 현대인들의 문제가 거기에 있습니다. 자기가 믿고 부를 수 있는 아버지를 갖지 못한 현대인들, 요즘 현대 와서 이 동성연애 자들이 더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 증가되는 원인을 여러가지 이유로 진단하고 설명하지만 그 이유 중의 하나가 여러분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한 아이들이, 소위 그 게이, 호모, 동성연애자가 되는 것 아세요? 아버지를 잃어버린 고아들, 고아들.

 

프란츠 카프카의 그 작품 가운데 대표적인 작품 가운데 하나가 성() “The castle” 이라는 작품이죠. 이 작품에 보면 케이라는 주인공이 나오는데 척량사에요. 그래서 자기가 어떤 계약문서를 가지고 성을 찾아갑니다. 어떤 마을을 통과하면서 성을 찾아가서 성에 들어 갈려고 하는데 이상하게 성에 들어가지 못해요. 작품의 마지막에 그는 성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으로 마을 주변에서 배회하는 것으로 이 작품은 막을 내립니다.

 

기독교 문화 평론가들은 그것이 카프카가 어떤 신앙을 그리워하고 하나님을 그리워했지마는 그러나 하나님을 소유하지 못하고 이 세상에서 땅의 아버지도 아버지다운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카프카의 소외된 외로움이 이 작품을 탄생시켰을 것이다.

 

그리고 그 성은 신의 존재, 영혼의 고향이 되시는 하나님의 품과 같은 그 무엇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끝내 그 성에 들어가지 못한단 말이지요.

 

우리는 아~ 뭐 기도해보겠다는 마음을 감히 갖지마는 그 하나님 속에 들어가지 못해요. 하나님 임재 속에 들어가지 못해요. 하나님이 어려워 보이고 멀리 있는 분으로 보이고.

 

그런데 예수님은 이 주기도문을 가르치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기도할 때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우리 아빠!

 

단순한 마음을 가진 아버지의 사랑을 알고있는 어린 아이들이 아빠하고 부르면 왜? 하고 다가오시는 하나님 처럼, 성경의 하나님은 우리가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고백한다면 내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빠! 부를 때 마다 내게 다가오시는 하나님, 기도란 그 하나님과 만남이요 그 하나님과의 교제요 그 하나님과의 대화요 그 하나님의 임재 속에 들어감이 바로 기도의 본질이라는 사실입니다.

 

기도란 무엇일까요? 기도란 것은 하나님의 그 임재를 구하는 사건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이 주기도문에 의하면 기도라는 것은 하나님의 사역을 이루는 것입니다. 한번 따라서 하세요. “기도는 하나님의 사역을 이루는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기도로 하나님의 사역을 이룰 수가 있을까요? 세가지 차원이 있어요.

 

우리가 기도함으로 할 수 있는 것, 또 우리가 기도함으로 마땅히 해야 할 것, 세가지가 있다는 것 이에요.

 

첫째는 뭐냐? 하나님의 이름을 높일 수가 있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나라를 넓힐 수가 있어야 합니다.

 

세번째, 하나님의 섭리를 펼칠 수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로 할 수가 있는 것, 그리고 기도로 마땅히 해야 할 것이 세가지가 있다.

 

첫째 기도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일 수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것이 주기도문의 어떤 부분이예요?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또 하나님의 나라를 기도로 확장 시키고 넓힐 수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어떤 부분이에요?

 

나라이 임하옵소며

 

또 기도로 하나님의 섭리를 펼쳐갈 수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어떤 부분입니까?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그런데 이 주기도문의 전반부를 여러분이 면밀하게 관찰해 보면 이 전반부에 특별히 강조된 단어하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말 번역에서는 그 단어가 의도적으로 생략되어 있어요. 그것이당신이라는 단어에요 당신, 당신.

 

왜 생략되었을까? 저는 이해는 돼요. 왜냐하면 우리 한국어에서는 당신이라는 그 표현이 상당히 비하적인, 사람을 낮추는 뜻을 갖고있기 때문에 당신! 뭐 이러잖아요? 그래서 그것을 하나님께 써는 것은 불경하다, 우리의 선배들이 그렇게 느꼈을지 몰라요. 그러나 영어나 외국어 권에서는 당신이라는 말이 결코 사람을 낮추는 표현이 아니죠. 그래서 본래는 이렇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그 다음에 뭐에요?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그 이름이 아니에요. “당신의 이름이” Thy name., Thy name, Your name.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그 다음에 그냥 나라이 임하옵시며 가 아니라 당신의 나라가 “Thy kingdom, Your kingdom” 당신의 나라가 임하여 주옵시고, 그 다음에 뜻이, 그냥 뜻이 아니라당신의 뜻이” Thy will be done 당신의 뜻이 Your will, 당신의 뜻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당신의 뜻.

 

그래서 이 주기도문의 전반부는 그 초점이 어디에 있나 하면 나에게 있지 않아요.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필요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필요에 있어요.

 

기도란 본질적으로 단순히 내 소원을 만족시키고 내 욕심을 채워가는 것이 아니라 기도란 것은 하나님의 관심, 또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필요에 일차적으로 관심을 갖는 것이 기도이여야 한다, 이것을 가르치고 있다는 말이지요.

 

이것을 총체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역.

 

그래서 산상수훈의 다른 부분에서는 주님이 또 우리에게 가르치시기를 너희는 먼저 뭘 구하라고 그랬어요? 그의 나라와 그 다음에 그분의 의를 구하라!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이렇게 가르치셨단 말이죠.

 

 

 

여러분 기독교가 다른 종교의 기도와, 다른 종교의 사람들도 기도 하잖아요? 그런데 그리스도인의 기도와 타종교의 기도가 차별화 되는 특성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바로 이 대목이에요. 우리는 하나님의 사역, 하나님의 일, 거기에 일차적 관심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우리가 만약 그것을 무시하고 그것을 망각하고 우리의 필요, 소원에만 몰두하는 기도를 한다면 우리의 기도는 기복적 수준의 기도로 타락해 가는 것입니다. 그때 기독교인의 신앙이 기복적 신앙이라는 비난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그러면 우리의 소원을 기도하는 것이 잘못일까요? 그렇지 않아요. 우리의 소원, 우리가 구하고 싶은 것, 구해야지요. 기도 해야지요. 마땅히 해야 돼요. 그러나 우리의 소원만 기도하면 안된다는 말이죠. 우리의 소원을 기도해야 되지마는 우리의 기도 속에 관심이 오직 나의 필요 밖에는 없다, 우리의 필요 밖에는 없다, 우리의 소원 밖에는 없다. 그렇다면 그것은 기독교적 기도가 아니란 말이에요. 그게 바로 기복적인 기도에요.

 

우리가 내 필요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 더 앞서서 정말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일에 관심을 가질 수가 있느냐?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으시고 그의 통치의 영광이 이땅에 모든 영역 속에서 드러나고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일에 내가 정말 관심이 있다면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느냐? 그래서 기도에 관한 본질적 정의 하나는 기도라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역을 실현하는 혹은 하나님의 사역을 성취하는 방편이 된다는 사실이에요.

 

여러분이 우리교회에 와서 성경공부를 하시다 보면 기도를 배우는데 그때마다 매우 중요하게 강조하는 성경구절 하나가 있습니다. 저는 이 구절이야말로 기도의 정의를 가장 아름답고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에스겔36장에 나오는 말인데요. 3637절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에스겔 36장을 펼쳐보시면 1절부터 36절까지 시온의 회복의 약속입니다.

 

, 저 바벨로니아에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시온의 땅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래서 시온의 땅에 다시 강이 흐를 것이고, 백합화가 피어날 것이고, 사막이 다시 새로운 땅으로 개간 될 것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였으니 이루리라, 내가 반드시 그것을 이루겠다. 그런데 거기서 끝나지 않고요. 에스겔 3637절에 보시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그래도그래도 내 백성 이스라엘 백성이 이와 같이 이루어 달라고 나에게구하여야할지라. 할 수 있는 말이에요.

 

하나님이 시온의 회복을 약속하시면서 내가 이루겠다, 그러면 이루시면 될 것 아니에요? 하나님 혼자 하시면 될 것 아니에요? 그런데 시온의 회복을 약속하신 하나님이 그래도 내 백성이 나에게 이렇게 이루어 달라고 구하여야 한다. 무슨 말입니까?

 

여기서 우리가 기도가 뭔 줄 알 수가 있어요. 하나님은 시온의 회복을 약속해 놓으시고 성경은 약속의 책이에요. 놀라운 약속들이 있단 말이죠. 하나님은 그 약속을 해 놓으시고 기다리신다는 거에요. 뭘 기다리실까요? 저와 여러분이 기도하는 것을, 그리고 우리가 기도하는 순간 하나님의 액션이 시작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그가 약속하신 바를 그가 계획하신 바를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 주신다는 것에에요.

 

그렇다면 기도란 무엇입니까? 기도란 단순히 내 생각과 소원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기도란 하나님의 사역을 이루는 방편입니다. 내가 기도할 때 나는 하나님의 일에 파트너가 되어, 동참자가 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과 저의 기도를 통해서 이땅에 하나님의 뜻을 펼쳐 가십니다. 놀라운 사실이 아닙니까?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땅에서 이루어져 간다. 여기에 Christian prayer, 기독교 기도에 아주 중요한 정곡의 핵심이 있는 것이에요.

 

기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사역을 이루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 기도의 의미 무엇일까요? 첫째로 저는 기도란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는 것이라고,

 

자 기도란 무엇일까요? 둘째로 기도는 하나님의 사역을 이루는 것이라고.

 

 

 

세 번째로 한걸음 더 나아가서 오늘 주기도문에서 배울 수 있는 기도의 의미, 기도는 셋째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다같이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이다

 

, 주기도문의 전반부는 당신, 즉 하나님의 필요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마는 후반부는 다시 우리의 필요로 돌아옵니다. 우리의 필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아십니다. 또 그것에 대해서 도움을 구하는 것이 결코 잘못이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물론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사역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의 뜻이 펼쳐져 가고 이루어져 간다는 것, 이것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중요한 사항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러분과 저의 일상적인 필요에도 관심이 있어요. 그것에 대해서 도움을 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 어떤 영역에서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야 할까요? 세가지 영역에서, 세가지 영역.

 

첫째, 일상적 생존을 위해서 우리의 일상적 생존을 위해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둘째로, 관계적인 평화를 위해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세 번째로 영적전쟁 신령한 전쟁의 승리를 위해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 어떤 면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야 돼요?

 

첫째 일상적 생존을 위해서, 그것이 어떤 대목입니까?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 그 다음에 두 번째로 뿐만 아니라 우리는 관계적 평화를 위해서 도움을 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어떤 대목입니까? “우리에게 죄 지은자를 사하여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또 뿐만 아니라 우리가 영적전쟁에 승리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또 어떤 대목입니까?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저는 이 세가지 영역은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가장 필수적인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일상적 생존, 우리가 육체적으로 생존하기위해서 하니님의 도움을 구해야죠. 하나님께 양식을 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기도에 대해서 냉소적인 어떤 사람은 이렇게 비판할 수가 있습니다. 기도한다고 양식이 하늘에서 떨어지니? 물론 기도하는 그 순간 하늘에서 양식이 떨어지지 않을지는 몰라요. 우리가 기도란 것은 곧 기도한 그대로 어떤 사건이 내 눈앞에 어떤 제품처럼 주어지는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적어도 기도가 하나님이 약속한 그대로 진지한 하나님 앞에서 약속의 사건이라면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가 양식을 얻을 수 있는 에너지 주시고 상황을 공급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기도는, 성경이 가르치는 성서적 기도는 우리의 기도에서 책임 있는 노력을 그 다음에 요청해요.

 

그러니까 그것을 무시하는 것은 상식적 기도가 아니지요.

 

얼마 전에 우리가 수해가 있었는데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가 살고 있는 마을에 수해를 입었어요. 그래서 지붕으로 대피했습니다. 물이 막 차 올라요. 그런데 이 사람이 크리스챤인데 상당히 엉뚱한 생각을 가진 크리스챤 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지붕에 올라가자 말자 기도를 시작합니다. “하나님,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낼 수 있는 놀라운 기회가 왔사오니 기적을 일으키시사 이 지붕에 서 있는 저를 구출해 주시옵소서

 

, 그 마을이 거의 물에 잠기면서 이제 구명 보트들이 당도합니다. 그래서 여기 저기 사람들이 구명보트를 타고 나갑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자기에게 구명보트가 네번씩이나 왔는데 거절하면서 나는 괜찮다고, 내가 기도했으니까 하나님이 기적을 주실 것이라고,

 

, 어떻게 되었을까요? 물이 계속 차오르면서 이 사람은 물 속에 빠져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좀 억울했겠죠? 그래서 돌아가시자 마자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 앞에 이렇게 질문을 했답니다.

 

하나님! 제가 기적을 일으켜서 저를 살려주시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내어 달라고 기도했는데 하나님 왜 기적을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내가 기적을 안주었니? 네 번씩이나 기적을 베풀었는데

 

뭐가요?”

 

내가 네 번씩이나 네 기도를 응답하고 너에게 구명보트를 보내지 않았더냐?”

 

기도라는 것은 기도에 따르는 상식적인 우리의 책임을 면제하지 않는다는 것이에요. 다시 말하면 예를 들어서 우리가나라이 임하옵시며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의 통치하심이 우리의 가정과 직장에 나타나게 해 달라고, 그러면 그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가치가 나타날 수 있도록 우리는 책임 있는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기도했다면 그 기도에 합당한 노력을 이제 하나님이 주시는 에너지를 가지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삶의 장에서 땀 흘리는 노력을 계속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도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이 신실하게 응답하신다! 이것을 믿어야 할 것으로 믿습니다.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우리가 일상적 생존에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 아주 중요한데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행복의 전부는 아니지요.

 

 

 

또 하나,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있다고 주님은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업니까? 관계의 평화에요. 우리가 먹을 것이 있어도 아무리 배불러도 여러분이 인간관계의 상처와 갈등을 경험할 때 얼마나 아프세요 살 맛이 안나잖아요? 인간관계가 왜곡되고 갈등과 미움과 분쟁과 어려움이 생길 때 우리는 얼마나 아픔을 겪어야 합니까? 그래서 주님은 관계의 평화가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못지않게 중요하고 그것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자를 사하여준 것 같이, 하나님 우리 죄를 사하여 달라고, 하나님 내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요 그리고 주님이 내 죄를 용서하여 주신 것처럼 저에게서 상처를 입혀준 사람도 내가 용서할 수 있게끔 해달라고,

 

내가 용서를 받고 또 용서를 하면서 하나님을 향하여 또 사람을 향하여 누릴 수 있는 마음의 당당한 평화, 이것은 행복을 위해서 얼마나 필요한 것입니까? 만약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이 내가 이웃을 용서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간단할 것입니다. 충분히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요. 기도해 보세요. 아무리 그 상처가 아파도, 예리해도, 그 사람을 품고 기도해 보세요. 그를 용서할 수 있는 넉넉한 여유를 주시는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있어요. 영적 전쟁의 승리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에요. 우리가 정말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영적 전쟁에서 승리가 필요합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우리가 죄 짖고 있다면 시험 속에 빠져있다면 우리가 악함 속에 빠져있다면 결코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 나는 괜찮은데?” 거짓된 평안이에요. 거짓된 행복이에요. 우리가 죄의 악에서 탈출함이 없이 인간은 결코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누가 우리를 악 속에 빠트립니까? 성경은 그것이 악한자의 계략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성경의 어떤 번역에는 그냥 악에서 구하옵소서가 아니라악한 자에게서 구하옵소서어떤 사본에는 그렇게 되어있어요. 악한 자에게서, 우리로 악을 경험하게 만들고 악에 빠지게 만드는 악한자의 공격에서 나를 지키고 죄악에서 나를 지킬 수 있는 이 싸움에 승리의 비밀은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기도입니다. 기도하지않고 우리는 결코 악한자와의 싸움에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그러므로 기도하지 않고 산다는 것, 이것은 얼마나 인생에 대해서 위태로운 모험인지요. 우리가 기도 없이 산다는 것, 하나님의 도움을 거절하고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수년 전에 세상을 떠나간 그 스위스의 라브리를 중심으로 해서 공동체 운동을 했던 프랜치 쉐이프 박사라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그의 책 가운데서 이런 기록을 남겼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 오늘 우리 시대에 사람들을 죄와 악 속에 물들게 하는 가장 강력한 기독교의, 반 기독교적인 이단 운동이 하나 있다.

 

나는 그래서 이게 뭐 여호와 증인을 얘기하나? 몰몬을 얘기하나?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고, 그 보다 훨씬 더 위험한 것 기독교 신앙을 본질적으로부터 위협하는, 그리고 많은 사람의 진정한 행복과 경건을 빼앗아가는 무서운 이단 사상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세속적인 인본주의다, 소위secular humanism이다. 세속적인 인본주의. 오늘날 문화와 철학, 삶의 모든 영역 속에 이 세속적 인본주의가 침투해 들어오고있다고 그는 경고합니다.

 

지나간 6월인가요? 티모시 맥베이 라는 사람, 미국의 오클라호마 시티에 그 주 청사를 폭발물로 습격해서 168명인가 그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갔던 사람이 독극물 주사로 사형을 당하는 뉴스가 전 세계에 보도되었죠. 끝까지 자기는 뉘우치지 않는다고, 자기의 행동에 대해서.

 

그러면서 그가 죽기 직전에 할 말이 있는가? 라는 말 앞에 영국의 윌리암 어네스티 헨리의 시를 인용하면서 죽어갔다는 사실이 전세계에 보도되었습니다. 그 시의 내용이 이런 것이였습니다.

 

나는 내 운명의 주인, 그리고 내 영혼의 선장

 

얼른 겉으로 들으면 굉장히 멋있는 소리 같지요? 그런데 이것이 바로 여러분, 세속적 인본주의의 모토라는 것을 아세요? 나는 내 운명의 주인, 그리고 내 영혼의 선장.

 

이것은 철저하게 반 기독교적인 것입니다. 우리의 운명의 주인은 내가 아니에요 하나님이십니다. 내 영혼의 선장도 하나님이십니다. 세속적 인본주의의 사고는 우리의 생각의 틀 안에서 하나님을 추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이런 세속적 인본주의 사상의 결과로서 그런 일까지 저지를 수가 있었습니다.

 

그가 죽은 후에 필립 얀시가크리스챤 잇 투 데이라는 잡지에 기고를 하면서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이 티모스 맥배이의 사건, 그의 불행은 단순히 인생을 잘못 살아왔던 한 청년의 비극이 아니라 바로 세속적 인본주의에 고무된, 그 이단사상의 피해자로 우리는 이 사람을 보아야 한다고.

 

그러면서 얀시는 이런 글을 남깁니다. 당신이 불행해 지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신을 추방 하십시요. 신을 거절 하십시요 그리고 기도를 거절 하십시요. 그러나 정말 행복해 지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을 당신의 인생의 주인으로 복귀 시키십시요. 그리고 그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는 것을 배우십시요.

 

나의 연약성을 내가 안다면, 내가 죄인이고 하나님 앞에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겸허히 깨닫는다면 나는 그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호흡할 수도 없는 존재 생존이 불가능한 존재, 따라서 그 하나님을 아빠라 부르며 그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 하나님에 의해서 내가 쓰임을 받아 하나님의 역사를 펼쳐가는 그 보람 속에서 인생을 살기를 원한다면 기도를 배우십시요. 기도란 바로 나의 도움에 대해서 하나님의 공급을 체험할 뿐만 아니라 내 인생이 하나님께 붙들림을 받아 쓰임을 받는 설레이는 모험, 그것이 바로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의 모험이요 기도의 의미인 것입니다.

 

중세기에 그 유럽의 어떤 수도원에 수도사들이 기도하고 있었든 프레어 챔버, 기도방이 있었는데 기도 방에 현판에 이런 글이 새겨져 있었다고 합니다. 한국에도 그것이 요즘 많이 소개가 되고 있어요. 그런데 굉장히 소개되면서 변질이 되었어요. 아마 제가 번역한 것이 오리지널에 굉장히 가까운 내용일 것입니다.

 

본래 그 제목은 이런 제목입니다.

 

 

 

네 삶이 가난해도 나를 원망치 말라

 

네 삶이 가난해도 나를 원망치 말라

 

너는 나를 주라고 부르면서 나를 주인 삼지 않았고

 

너는 나를 진리라고 하면서 내게 배우지 않았고

 

너는 나를 빛이라고 하면서 나를 바라보지 않았고

 

너는 나를 길이라고 하면서 나를 따라오지 않았고

 

너는 나를 능력이라 하면서 나를 의지하지 않았고

 

너는 나를 응답이라고 하면서 기도하지 않았나니.

 

 

 

제목이 뭐에요 제목이? “네 삶이 가난해도 나를 원망치 말라

 

오늘 삶의 창백함은 바로 기도의 상실에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기도를 배우고 싶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 무더위 속에서 다시 한번 사랑하는 우리의 아빠 되시는 우리를 창조하신 그분, 그리고 우리를 섭리하시는 그분 앞에 나와서 하늘에 계신 우리아버지 저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요! 기도를 배우는 그 위대한 연습 속에 들어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십시다.

 

 

 

우리 다 일어나셔서 우리 기도하는 마음으로 우리 주 기도문을 찬양하시겠습니다.

 

우리 가사의 뜻을 깊이 기억하면서 기도하시면서 주기도문을 찬양하시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이름 거룩하사

 

주님 나라 임하시고 뜻이 이루어 지이다

 

일용할 양식 주시고 우리들의 큰 죄 다 용서 하옵시고

 

또 시험에 들게 마시고 악에서 구원하소서

 

주여 주의 나라 주의 권세 주의 영광 영원히 아멘.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6:5-8/ 곽선희 목사

2014-11-27 17:00:37

 

초등학교에 다니는 소년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 어린이가 자기를 참으로 사랑하는 할머니에게 소원을 말합니다. "할머니, 자전거를 갖고 싶어요." 자전거를 사 달라고 졸랐습니다. 믿음이 좋고, 교회의 권사이신 할머니는 "그래? 자전거가 필요하면 하나님께 기도해라.

 

하나님은 네 기도를 들어 주시니 열심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아버지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자전거를 사 주게 될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 어린아이는 할머니의 말씀대로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일주일동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이 사실조차 절대로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가도 아버지가 자전거 사줄 생각을 안 하는 거예요. 다음날 아버지가 출근시간이 되었을 때, 이 어린아이는 자기 방에 들어가서 문을 열어 놓고 큰 소리로

 

아버지가 자전거를 사 주시도록 우리 아버지의 마음을 감동시켜 주세요.” 기도했습니다. 할머니가 옆방에서 이 기도 소리를 듣고 찾아가서 얘기했습니다. “얘야, 기도할 때에 그렇게 크게 기도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는 다 들으신단다.” 그랬습니다.

 

이 어린아이의 대답을 들어보세요. “할머니, 내가 그걸 모르는 게 아니에요. 하지만 하나님도 들으시고 아버지도 들으셔야 효과가 있거든요.” 여러분, 어찌 생각하십니까?

 

요새 가만히 보면 우리 예수소망교회만 빼 놓고, 다른 교회에 가면 기도소리가 너무나 커요. 정신이 없어요. , 통성기도 뭐 이런 거 하는 것을 보면 어떻게 소리가 큰지, 아니 일반 사람은 그렇다 치고 여기에 사회자가 또 마이크를 대고 소리를 질러요.

 

앞에 나와서 쭉 서서 마이크 다섯 대가 동원이 되어서 소리소리 지르는데 내가 뒤에 앉았다가 너무 귀가 아파서 저는 귀를 손으로 막았습니다. 고막이 터질 것 같아서. 그 때 제가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어쩌면 하나님도 귀를 막으실지 모르겠다.'

 

너무 소리가 커요. 이제 묻습니다. 지금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는 겁니까? 사람에게 하고 있는 겁니까? 심리학적으로 말해서 자기 자신에게 하고 있는 겁니까? 도대체 누구에게 기도하고 있는 겁니까? 기도의 자세,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옛날 2,000년 전에도 그던 것 같아요. 오늘 성경에도 쓰여 있는 바와 같이 회당과 큰 거리 어귀와, 거리에 서서 하늘을 향해 손을 들고 소리를 높여서 기도했어요. 그런 사람이 있었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러지 말고

 

"골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기도하라."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었어요. 이 똑같은 상황이 우리에게 왔습니다. 뭐 그렇게 너무 소리 지르지 말고 골방에 들어가서 조용하게 은밀하게 계시는 하나님께 기도하면 안 되겠나.

 

여러분, 정말 하나님만 들으시는 기도, 하나님이 들으실 수 있는 꼭 그런 기도여야 하겠는데 어떻게 이렇게 기도의 윤리가 빗나갔는가 싶습니다.

 

제가 소망교회에서 시무할 때 어느 날 낯선 손님이 한분 찾아왔어요. 그리고 제게 명함을 내놓아요. 이렇게 명함을 내놓는 걸 딱 보고 '참 희한한 세상이다' 생각했어요. 명함에다 뭐라고 썼느냐? ‘40일 금식기도 두 번썼어요.

 

(웃음) 40일 금식기도 두 번 했다는 게 명함에 나와 있어요. 이걸 들고 다니면서 필요한 것이 뭐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내가 ', 이거 참, 이걸 어떠해야 되나……,' 그래서 제가 그 때 그런 얘기 했습니다. 그거 잘한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40일 했다고 하는데 조금 더 가서 하십시오.” “왜요?” “아직도 내게는 응답이 안 왔거든요.”

 

여러분, 누구에게 기도하고 있습니까? 어떤 자세로 기도해야 되겠습니까? 의사이자 심리학자인 빅터 프랭클(Victor Frankl)이라고 하는 교수님께서 「The Will to Meaning」이라고 하는 유명한 책을 썼습니다. 그 책 속에서 말합니다. ‘존재적 진공상태란 말을 씁니다.

 

'Existential vacuum', 아주 중요한 얘기입니다. 존재적 진공상태, 이 진공상태라고 하는 것은 채워질 수가 없어요. 사람은 동물이 아니에요. 그런고로 동물적 욕망이 채워진다고 해서 이 진공이 메워지질 않아요. 또 사람은 전통과 관습을 따라 산다고 해서 이 진공이 채워지질 않아요.

 

이것은 절대적 진공이에요. 먹어도 안돼요. 살아도 안돼요. 흔히 말하는 대로 사랑을 한다고 해도 안돼요. 결혼을 해도 안돼요. 출세를 해도 안돼요.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가 없어요. 이 절대적 진공, 이것은 하나님과 만남의 관계에서만 가능한 것이에요.

 

존재적 진공, 한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 그 많은 세월 뭔가 이루어지면 좋겠다고 요것만 있으면, 요것만 있으면, 요것만 있으면 했고 오늘까지 왔지만 채워졌습니까? 한순간도 채워진 일이 없었어요.

 

이것은 하나님과 나와의 만남, 하나님께로부터 음성이 들려와야 합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하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기 전까지는 절대로 이 절대적 진공은 충족될 수가 없는 것이에요.

 

40여 년 동안을 무신론자로 살아가던 임어당(林語堂)이라고 있었습니다. 제가 대학 다닐 때에 이 분의 책을 참 즐겁게 즐겨 읽었습니다. 그러나 읽으면서 어딘가 모르게 허무하곤 했습니다. 그가 마지막 40년 후에 예수를 믿고 하나님께 돌아오면서 한 말을 타임지에서 제가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저버리고 산 40년은 마치 고아와 같은 것이었다. 어머니의 품을 떠나서 길거리에 방황하는 그런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살았노라.' 이렇게 썼더라고요. 우리 영혼은 하나님을 만나야 돼요. 하나님과의 만남의 관계가 아니고는 절대로 충족할 수 없어요. 이걸 꼭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하나님과의 만남, 바로 이것이 기도입니다. 기도라는 말로 요약됩니다. 그리스도인이 누구입니까? 기독교인이 누구입니까? 이건 백과사전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기독교인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하나님의 계시자로 믿는 사람을 기독교인이라 한다.'

 

저는 다시 고치고 싶습니다. 기독교인이란 기도하는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요, 기도의 신비, 기도의 행복, 기도의 능력을 알고 그것을 체험하며 사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그 행복 속에 사는 사람이에요.

 

하루하루의 현실을 기도의 응답이라고 믿고 사는 사람이에요. 기도의 응답을 현실 생활 속에서 매일매일 같이 경험하고 신문을 볼 때나, 텔레비전을 볼 때나, 누구하고 얘기할 때던지 들려지는 소식 속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이 있고, 그 속에 기도 응답이 있음을 알아요. 그렇게 하나님과 가까이 사는 사람, 하나님과 가까운 만남의 관계 속에서 사는 바로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성 어거스틴(Augustine)은 말합니다. 그는 늘 이렇게 기도했답니다. ‘오 하나님시여 나로 하여금 나를 더욱 더 깊이 알게 하여 주십시오.’ 먹고 입고 사는 얘기가 아닙니다. 세상 얘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알게 해 주십시오. 내가 나를 알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 수없이 그 많은 시간 기도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내가 누굽니까? 바르게 알고 있습니까? 어느 순간에 내가 나를 몰랐다. , 이럴 줄 몰랐다. 잘못 산거죠. 하나님과의 만남 속에서만 나를 알 수가 있어요. 그래서 칼빈(Jean Calvin)은 말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인간 자신, 나 자신에 대한 지식이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만나고야 내가 나를 알 수 있어요. 또 유명한 성 프란시스(Francis)하나님이여 도대체 당신은 누구시며 나는 누굽니까?’ 사흘 나흘 물도 마시지 않고 기도했답니다.

 

그렇게 신비롭게 하나님과 교제하면서도 기도 제목은 '당신은 누구며 나는 무엇입니까? 당신은 누구며 나는 무엇입니까?' 그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본을 한번 보십시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신관, 예수님은 하나님을 누구라고 말씀하셨느냐, 너무나도 간단합니다. 너무나도 쉽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외우는 주기도문이 있습니다.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그렇게 말씀하시며 가르쳐 주었는데 그 주기도문에는 아무리 봐도 하나님이란 말이 없어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 전 그래서 신학적으로 혹은 심리학적으로 이렇게 설명도 해 봅니다.

 

'아버지 개념이 잘못된 사람은 하나님 개념도 잘못된다. 아버지 개념이 건강하고 좋아야 그의 신관도 바로 된다.' 그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이 말을 했거든요. 마틴 루터의 아버지는 광부였어요. 그리고 좀 성격이 급한 분이었어요.

 

그 아들을 많이 괴롭혔어요. 그래서 매를 많이 맞았대요. 그래서 그는 기도할 때에 '하나님, 아버지'하면은 왜 그런지 자기 아버지가 자꾸 생각이 났대요. 몽둥이 들고 따라오는 그 아버지가 생각이 나서, 고약한 생각 때문에 그는 table talking에서 이런 농담 섞인 말까지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란 말이 영 마음에 안 드는데 하나님 어머니라고 하면 안 될까?'

 

아버지 개념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 아버지는 상징적 용어거든요. 여기서 우리가 가진 아버지 개념이 거기에 같이 묻어 들어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버지 개념이 참 중요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고 또 아버지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에 아버지만 있을 뿐이에요. 엄청난 사건이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눈앞에 십자가가 다가오는데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서 피땀 흘려 기도하실 때에도 아버지를 부릅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아버지께 위탁합니다

 

. 아버지의 뜻대로. 그 뿐입니까? 기도응답을 받으시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려오실 때 체포되는 바로 그 순간입니다. 요한복음 18장에 보면 매우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 전 이 한마디가 너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받은 기도응답입니다. 십자가, 이 엄청난 모순, 이 현실이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받아들이면서 아버지께서 내게 요구하시는데 내가 이 잔을 마시지 않겠느냐고 말씀합니다. 엄청난 진리입니다. 이건 현실적인 진리입니다.

 

여러분, 어떤 처지에 있습니까? 기도한 사람의 마음은 이렇습니다. 기도의 응답으로 사는 사람은 이렇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 여러분, 여기서 기도하셨습니까? 기도하고 예배당 문을 나갈 때 이제부터 내 앞에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그건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입니다. 그런고로 감사한 마음으로 마셔야 됩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수용해야 됩니다.

 

뿐만 아니라 누가복음 23 46절에 보면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에도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입니다. 여러분, 그 아버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 아버지, 우리에게 소개하고 계시는 그 아버지를 생각해 보세요. 그는 창조주입니다. 그는 생명의 근원입니다.

 

동시에 그는 진노의 근원 하나님이십니다. 공의로운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볼 때마다 진노적 사랑을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십자가 안에서 구체화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의 진노 속에서 현실화됩니다.

 

여러분, 혹시 부모에게 매를 맞아본 일이 있습니까? 이제서 생각하니 그 매가 얼마나 소중했다는 것을 생각하십니까? 그 매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내가 아니라고 생각해 보십니까? 여러분, 그 자식을 때려놓고 밤에 그 이불을 덮어주고 그 멍든 것을 쓰다듬으면서 우는 아버지를 생각해 보셨습니까?

 

진노적 사랑입니다. 저는 아버지로부터 매를 무척 많이 맞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제서 생각하고 또 그 때를 생각합니다. 아버지는 말씀이 없어요. 그러나 그 속에 사랑이 있었어요. 그 속에 뜨거운 사랑이 있었어요. 진노적 사랑. God's love is concreted in his wrath. 칼 바르트의 유명한 신학이론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 진노 속에서 구체화되는 것이다.

 

여기에 창조적 은혜가 있고, 여기에 사랑이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나님을 보십시다. 가장 중요한 말씀입니다. 탕자 비유를 보세요. 탕자의 아버지, 참 좋은 아버지예요. 그 아들이 집을 나가겠다고 할 때에 나가라고 합니다. 재산을 나누어 줍니다.

 

이 재산을 다 없애서라도 좋으니 아들이 되서 돌아오라. 그렇게 집을 내보내 놓고 기다립니다. 오늘이나 내일이나 기다립니다. 돌아오는 아들을 맞이합니다. 아무것도 묻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기뻐하기만 합니다. 잔치를 합니다.

 

그 아버지, 그 탕자의 비유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신관을 말씀하셨어요. 하나님에 대한 모든 것을 말씀하셨어요. 아버지 하나님, 탕자의 아버지, 그 좋은 아버지, 늘 생각합니다.

 

여러분 신앙의 수준은 바로 기도 수준입니다. 얼마나 기도하시며 얼마나 기도를 즐기십니까? 얼마나 기도가 중요합니까? 여러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버지 됨을 알며, 그의 능력에 놀라며, 그의 사랑에 감사하며 그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그 공의로운 사랑을 느끼며 그 용서와 인내를 몸으로 느끼며 자기희생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감사 감격하면서 기도합니다. 이제 무슨 긴 얘기가 필요하겠습니까?

 

이 하나님, 이 위대한 하나님, 이 고마우신 하나님, 이 아버지 앞에 뭐 그렇게 긴 얘기가 필요합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이제 다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구하기 전에 아시느니라.' 구하기 전에 아시느니라.

 

죄송한 얘기입니다만 제가 30대 초반에 남대문교회 부흥회 인도하러 갔을 때, 그 교회 권사님이 계시는데 아주 유명한 분입니다. 어느 원장의 부인인데 어느 날 제게 말해요. "목사님, 저는 요새 성경을 읽다가 아, 내가 잘못 생각 했구나 해서 요새는 기도 안합니다."

 

", 기도 안 하다니요?" "그 성경에 보니까 '구하기 전에 아시느니라' 그랬던데, 그럼 척척 줄 거지 뭘 구하겠습니까? 그래서 그냥 그저 아멘 감사합니다, 그렇게 삽니다." "그러니까 권사님은 그저 마태복음 6장만 봤구만. 1장만 더 볼걸. 7장엔 뭐라고 했습니까?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만날 것이요, 두드리라 열어줄 것이니라.' , 구하기전에 아시면서도 안 주시는데 어떡할 거예요? 그리고 구해야 준다는데 어떡하면 좋겠어요? 구해야 준다는데."

 

제가 그런 가정을 하나 압니다. 제 집안 식구인데요. 팔남매를 두고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어요. 이제 계모를 모셔왔는데 그 계모가 잘 해요. 그런데 아이들이 계모 어머니를 어머니라고 부르지를 않아요. 이거 어떡하면 좋아요.

 

양말이라도 하나 얻어 가지려면 가서 옆구리를 꾹 찌르고양말그런데요. 돈이면이러지어머니, 돈 주세요.’ 그렇게 안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어느 날 가족회의를 했어요. 가족회의를 할 때 제가 그 자리에 있었어요. 뭐라고 말하시나 하니 그 아버지가

 

잘 들어라. 어머니에게어머니, 이거 주세요.’라고 말하기 전에는 절대로 양말도 없고, 용돈도 없다. 어머니라고 한마디 하고야 얻어 가질 줄 알아라. .” 그랬습니다. 그 다음에는 도리가 없어요. 뭐든지 하나 얻어가지려면 한번은 어머니라고 불러야 됩니다.

 

그 다음에 주시는 거예요. 이렇게 해서 가정질서를 잡아 나가는 걸 보았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을 그렇게 기뻐하십니다. 부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얼마나 답답하면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 하겠습니까?

 

'너희가 악할지라도 자식에게는 좋은 것으로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 아버지께서 안 주시겠느냐. 제발 아버지라고 좀 불러라.'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요. 이것이 신앙고백이요. 이것이 바로 기도응답입니다.

 

또 여기 성경에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말을 많이 해야 하나님이 들으실 줄 아느니라.' 그것도 잘못된 생각이에요. 그건 기도를 공로화하는 거예요. 말을 많이 해야 될 줄 아느니라. 성경에 그렇지 않아요. 엘리야의 기도는 한마디지만 응답이 된 거예요.

 

아브라함의 기도도 그렇고 예수님의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기도를 많이 해서 이만 했으니까 됐을 꺼다. , 내가 금식까지 하고 밤새 했으니까 하나님도 별 수 없지. 들어주시겠지. 아멘' 하더라도 천만의 말씀! 말을 많이 한다고 들으시는 게 아니에요.

 

기도는 공로화 될 수 없는 거예요. 단 한마디의 기도라도 아버지의 마음에 합당해야죠. 구약 성경에 보면 솔로몬이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그럴 때에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맞은지라.” 하나님의 마음에 맞을 때, 딱 한마디 기도가 응답되어서 솔로몬은 지혜의 왕이 됩니다. 여러분, 기도를 그렇게 많이 해야만 되는 건 아니고, 이것이 공로화 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그 하나님의 품 안에 안긴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 하면 벌써 하나님이 나를 품어주시는 걸 느껴요. 마치 '오냐, 오냐' 하고 말씀하시는 것을 느낍니다. 그런 기도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아버지 하나님을 부르라. 그리고 그 기도 응답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기도하십시다.

 

 

-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오늘 이렇게 주님 앞에 모였고 다시 아버지의 이름을 부릅니다. 생명의 주인이시요 사랑의 원천이신 주님을 생각합니다. 우리의 기도 생활이 좀 더 주님 앞에 가까이 가게 하셔서 주의 음성을 가까이 듣고 주의 손길을 몸으로 체험하며 사는 그리고 사랑하는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며 세상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골방에서 기다리시는 하나님 /6:5-8/ 옥한흠 목사

2014-11-10 10:46:22

 

교회를 다니시는 분들에게 가끔 질문을 던져 봅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특별히 어렵다고 느

끼는 것이 어떤 것이 있습니까?" 그러면 놀랍게도 많은 분들이 기도가 어렵다고 대답을 합

니다. "기도가 제일 힘들어요. 어떻게 기도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1분만 기도하고 나면 할

말이 없어요.

 

목사님 기도를 꼭 해야 됩니까?" 이런 이야기들을 가끔 합니다. 인간의 본성이

위급할 때 신을 찾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막상 하나님 앞에 기도하라고 하면 생각보

다 쉬운 게 아닙니다. 어렵다고 말하는 것이 어떤 면에는 솔직한 표현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오감을 가진 육체를 입고 땅에서 사는 아주 미천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시공

의 세계에 갇혀 있습니다. 따라서 영이신 하나님 앞에 기도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하나님은 만져지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들리지도 않

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보아야 알 수 있고, 들어야 깨닫고, 손으로 만져야 느낍니다. 그러므

로 우리가 눈을 감고 있지만,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손을 휘둘러 봐도 잡히는 것

도 없습니다.

 

들리는 음성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한다는 것, 이것

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 기도가 이렇게 어렵다 보니 잘못된 기도를 하는

일들이 많이 발생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나라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보시기에, 그들은 기도를 하기는 하

는데 바른 기도를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읽은 이 본문 말씀은 바로 유대 사람들

이 잘못하고 있는 기도를 지적하시고, 무엇이 참된 기도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드리는 기도가 어떤 면에서 잘못 되었습니까?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것이 크게

두 가지 있습니다. 우선 첫째로는, 유대인들은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린다고 하면서 실상은

사람에게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사람에게 기도를 하느냐고 물을지 모르지만 그렇

 

게 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설명을 들으면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을 한번 보십

시오. 예수님이 5절에 그렇게 지적하시지 않았습니까? '또 너희가 기도 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결국 그들은 사람에게 기도했다는 이야기 입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오래 전부터 기도의 중요성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좀 더 철저하

게 가르치고, 또 기도를 더 잘하도록 하기 위해 그 방법을 궁리하면서 열심을 지나치게 많

이 낸 덕분에 이상한 방향으로 갔습니다. 기도를 세트(set)화 시키기 시작했습니다. 내용과

 

형식, 시간까지 모두 규격화 시켰다는 말입니다. 좀 더 종교적인 용어로 빌면 의식화시켰다

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하나하나마다 제품을 만들듯이 기도를 만들었습니다. 가장 대표적

인 기도가 소위 '쉐마' 라고 하는 것인데, 신명기 6 4절에 있는 구절을 그대로 반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들으라. 주여호와 하나님은 오직 하나인 하나님이시니.'

이런 말씀을 하나의 기도문으로 규격화 해서 그것을 계속 외우도록 했습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여러 가지 중요한 일들이 있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 '슬픈

일을 당한다, 기쁜 일을 만난다, 여행을 한다.' 하는 식의 일들 말입니다. 그런 일들 하나하

나에 해당하는 기도문을 만들었습니다.

 

심지어 '밥 먹기 전에 하는 기도, 밥 먹은 후에 하는

기도, 취침시간에 하는 기도, 아침에 하는 기도.' 이런 식으로 기도를 요란하게 만들어서 그

것을 사람들에게 가르쳐 그대로 하게 했습니다. 내용만이 아닙니다. 시간까지 세트화 했습니

.

 

그래서 우리 시간으로 9, 12, 3시는 기도시간으로 정해 놓았습니다. 이런 기도 문화

가 예수님 당시에 온 세상에 만연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예수님 보시기에 기도가 아니었습

니다. 잘못된 기도였습니다.

 

이런 기도에 유대나라 사람들이 익숙해지자 자기도 모르게 점점 외식에 빠졌는데,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한번 이렇게 상상해 보십시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예루살렘 거리입

니다.

 

시간이 12시가 되었습니다. 기도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흔히 유

대나라 사람들이 하듯이 두 손을 들고 고개를 숙이고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그럼 일반

사람들은 한 1,2분 그저 '쉐마'를 외우고 눈을 뜨고, 또 평상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가운데서 경건하다고 소문이 나 있는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일부러 손을

 

높이 들고 오래 시간을 끄는 것입니다. 계속 같은 기도를 반복하면서 시간을 질질 끌고 있

습니다. 그러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고 ', 저 바리새인 참 기도 많이 하시는구나. 참 경

건하신 분이다.

 

참 존경이 간다.' 하는 소리를 수근거립니다. 그런 소리를 기도하면서 듣는

것입니다. 벌써 자기가 상당히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을 의식적

으로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시간을 끌면서 손을 들고 있습니다. 이렇게 기도함으로써 사

람들로부터 칭찬을 받는 맛을 알게 되자 어떤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은 일부러 기도시간

 

이 가까워 오면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시장 바닥이나 회당거리, 아니면 큰 도시 모퉁이에

서서 기다리다가 기도시간이 되면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마음을 아주 꿰뚫어 보시고 5절 끝에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저희는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그것을 즐기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

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사람 앞에 기도하는 것이요, 사람보고 기

도하는 것입니다. 유대나라 기도가 그렇게 되어 버렸습니다. 주님께서 기도가 아니라고 말합

니다.

 

이것이 남의 이야기 입니까? 여러분 우리도 그렇게 되기가 쉽습니다.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기도할 때는 왜 그렇게 유달리 길게 해야 합니까? 다 사람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교포 사회에 가면 가끔 이런 장면을 봅니다. 미국 사람들도 있고 한국 사람들도 있는 식당

에 몇몇이 들어가서 식사를 하는데, "누구 기도 좀 합시다." 하면 벌떡 일어나서 큰 소리로

기도를 합니다. 거기가 어디 교회당입니까? 주변 사람들이 쳐다봅니다. 이게 무엇입니까?

시하는 것입니다.

 

'한국 사람들 믿음이 좋다. 미국 사람들은 식사할 때 기도도 잘 안 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기도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면서 식사한다.' 이것을 은근히 과시하는 것

입니다.

 

그리고 그런 기도라도 짧게 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오래 합니다. 제가 볼 때

는 바탕이 무엇인가 잘못된 기도입니다. 평소에 가정에서는 기도 안 하던 사람이 강대상에

서서 대표 기도 할 때는 왜 그렇게 기도가 깁니까? 집에서는 5분도 채우지 못하는 사람이

강대상에만 서면,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해서 모세를 지나 선지자들을 거쳐, 나중에는 신약

시대에 들어와서는 요한계시록의 예수님 재림까지 죽 훑는 장로들이 가끔 계십니다.

 

우리 교회는 그런 장로님들이 아직 한 분도 안 계십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1부 예

배 때 기도하시는 권사님들을 가만히 봐도 얼마나 기도를 은혜스럽게 잘 하시는지 모릅니

. 우리 교회는 그런 면에서는 좋은 교회입니다. 그런데 어떤 교회는 장로님이 올라와서 기

도했다 하면, 벌써 한숨 소리부터 먼저 나옵니다. ', 한참 기다려야 되겠구나.' 왜 그렇게

합니까?

 

사람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경건하게 보이거나, 기도를 많이 하는 것처럼 보이려고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이 생각밖에 우리 주변에 많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또 주님이 지적하신 유대인들의 기도에 잘못된 것은 중언부언하는 기도였습니다. 7절에 주

님께서 그렇게 잘 지적해 주셨습니다. '또 기도 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아느니라.' 중언부언이 무엇입니까? '바타로 게오'라는

 

헬라어 말인데 의미 없는 말을 반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또 의미가 있는 말이라도 생각을

담지 않고 계속 지껄이는 것을 일컬어서 중언부언이라고 말을 합니다.

 

여러분, 유대나라 사람들이 규격화된 기도, 세트가 된 기도를 계속 반복하면서 '그것을 수없

이 반복하면 하나님이 설득을 당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면, 그 기도는

틀림없이 중언부언의 기도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중언부언하는 기도의 함정에

 

빠질 수 있는 요인들이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많이 반복합니까? 시간을 오래 끕니까? '그러

면 하나님은 반드시 설득 당할 것이다.' 하는 생각을 합니까? 주님이 보실 때 그것은 기도

가 아닙니다.

 

반복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반복하셨

습니다. 성경에는 3번 밖에 반복이 안 나왔지만 우리가 볼 때에 그렇게 긴 시간 3번만 반복

해서 기도했다고 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엎드려서 하나님 앞에 힘을 다하여 기도했습니다.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이 말씀 한마디만 하셨겠습니까?

다섯번만 하셨겠습니까? 10, 20번도 반복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기도를 반복하

실 때마다 이마에 흘러내리는 땀방울에 피가 섞였습니다. 자기의 전인격, 모든 힘을 다 그

 

말 한마디에 담아서 하나님 앞에 드린 기도였습니다. 이렇게 기도는 아무리 반복해도 중언

부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격자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중언부언하는 기도는 그를

모독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한국교회를 가만히 보면 중언부언 하는 기도

가 너무 많습니다. 끝없이, 무슨 말이든지 주어 대가지고 이어가야 기도라고 생각하는 사람

들이 있습니다.

 

기도를 유창하게 한다고 하는 분들을 가만히 보면 단어 하나에 형용사 10,

20개를 갖다 붙입니다.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우시며, 사랑이 한이 없으신 하나님' 그래 놓고

그 다음에 '언제든지 진실하시고 온 땅에 충만하시고' 하면서 한참 갖다 붙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래야 들으신다고 생각합니까? 그건 하나님의 인격에 대한 모독입니다. 한마디를

해도 왜 내가 이 말을 하는가를 알고 기도해야 됩니다.

 

이상과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기도한다고 해놓고는 사람 보고 기도하고,

격자 되신 하나님 앞에 중언부언 기도하는 잘못을 범했습니다. 이것을 지적하시면서 드디어

예수님은 어떤 기도가 참 기도인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중요한 두 가지를 우리

에게 교훈하셨습니다.

 

귀를 기울이십시오. 우리의 기도가 다시 힘을 얻고, 우리의 기도가 다

시 한번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할 수 있기를 원하고,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골방에서 우리를 만나시기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이 이 사실을 가르

쳐 주셨습니다. 골방에서 하나님은 만나기를 원합니다. 6절입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

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시는 네 하나님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즉 응답해 주실 것이다.' 골방이라는 것은 글자 그대로 아무런 방해

를 받지 않고 단 둘이 만날 수 있는 공간을 이야기 합니다. 이것은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인

작은 공간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작은 밀실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

 

서든지 우리는 골방을 만들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방해를 받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내 앞에 모시고 내가 그분과 상대할 수 있는 여건만 된다면 그것은 우리

에게 골방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요란한 곳을 피하여 산이나 저 들판에 가셔서 기도

하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산이 골방이었습니다. 들판이 골방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왜 골방을 좋아하실까요? 왜 하나님은 하필이면 골방에서 기다리시고 계실까요?

여기에 기도의 심오한 차원이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루 생활을 하면서 사람들

을 많이 만납니다. 그들과 교제를 하면서 사람 따라 교제의 방법도 다르고 내용도 다르고

 

질도 틀립니다. 유명인사를 만나 교제하려고 할 때는 어느 정도의 어떤 절차가 있지 않습니

? 마음 편하게 만날 수 있는 가까운 친구들도 그 나름대로의 내용이 있습니다. 이렇게 우

리가 자주 만나는 사람 가운데 쉽게 '나하고 아무도 없는 조용한데 가서 이야기 좀 하자.'

 

하면서 끌고 갈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무나 붙들고 '나하고 조용

한데 가서 둘이만 이야기 합시다.' 하면 따라올 것 같습니까? '이 친구가 안 좋은 생각하고

있나?' 하고 의심을 받을 확률도 많이 있습니다. 그것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골방에서 만나자는 게 아무에게나 통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자연스러운 경우가 어떤 것

일까요? 사랑에 빠진 연인들입니다. 그렇죠? 그 연인들은 사람이 없는 데만 찾아 다닙니다.

단둘이 앉아서 아무도 방해 받지 않고 마음과 마음을 열고 사랑을 주고 받기 원하는 것,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부부사이라도 특별히 참 사이가 좋은 잉꼬

부부 같은 경우는 단둘이 앉아서 조용한 시간을 보내기를 원합니다. 가끔 보면 함께 파티를

하다가도 둘이서 살그머니 빠지는 부부들이 있지 않습니까?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부부 가운데서도 별로 애정이 없는 부부는 골방 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남편이 어쩌다 "여보, 나하고 조용한 데 가서 둘이서만 이야기 하자."고 말하면은 부인은 화

를 내면서 무슨 비밀이라고 그렇게 으슥한 데 가서 이야기 하자고 그러느냐고, 여기서 이야

기 하면 된다고 아마 핀잔을 줄 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골방에서 만난다는 것은 어느 정도

충분한 조건이 갖추어져야 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골방에서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골방에서 우리를 만나기

를 원하십니다. 그것은 골방이라야 우리가 마음을 온전히 영이신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복잡하고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곳, 우리의 생각이 산만해서 흩어지는 곳은

 

하나님 앞에 우리 마음을 진심으로 드리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왔다 갔다 하면

서 입으로는 기도한다고 하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싫은 것입니다. 기도 할 바에는 온전히 마

음을 바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무지무지하게 사랑하

십니다. 그분 만큼 우리를 끔찍하게 사랑하시는 분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므로 그 사랑을

 

가득 우리에게 주기를 원합니다. 어디서 주시겠습니까? 어디서 그 마음에 있는 그 뜨거운

사랑을 다 우리에게 쏟아 주시겠습니까? 골방에서 입니다. 방해 받지 아니하는 곳에서,

둘이 앉아서 마음과 마음을 나누는 곳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기의 사랑을 표현하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골방을 좋아하십니다.

 

기도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와 마음을 열고 사랑을 주고받기 위해 만

든 하나님 자신의 아이디어 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만든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만

들어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너무나 소중한 은혜의 채널입니다. 골방에서 하나님이 기도하는

우리에게 그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마음껏 보여주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부르면 벌써 하나님은 우리 앞에 계십니다. 우리를 만나십니다. 그리고 스

바냐 선지자가 3 17절에 고백한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 중에 거하셔서 우리에게 구원을 베

푸시는 하나님으로 우리 앞에 그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시는 전능자시라. 그 하나님이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면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우리를 보시면

서 잠잠히 사랑하십니다. 마음으로 우리를 진정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보시면서 보는

것만으로도 기뻐하시고 즐거워 하시는 하나님이 골방에서 우리를 만나주시는 것입니다.

분을 만나는 것이 기도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사람만 쳐다보고 살면 못 삽니다. 여러분, 24시간, 일주

, 365, 매일 사람만 상대하고 인생을 산다고 가정해 봅시다. 숨이 막혀 못 삽니다. 답답

해서 못 삽니다. 마음에 상처 때문에 견디지 못합니다. 우리는 인간보다도 더 위대한 존재를

 

자주자주 만나야 됩니다. 하나님을 만나야 됩니다.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자주 올

려다 보아야 합니다. 이 거짓되고 더럽고 냄새 나는 세상에서, 한 사람도 믿을 수 없는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우리는 진정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자주 만나야 합니다.

분을 만날 때 우리가 치유 받습니다. 그분을 단둘이 만나 그 놀라운 사랑을 내 마음에 가득

 

히 채울 때, 내 눈에 눈물을 씻고 다시 한번 웃으면서 세상을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

만 보면 안됩니다. 세상만 보면 안됩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면 마귀가 됩니다. 결국 세상 사

람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천한 존재가 되고 맙니다.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그를 만나야

됩니다. 그를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맛보아야 합니다. 그 맛으로, 그때 얻는 능력 가

지고 우리는 이 세상을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기에게 골방이 있고 그 골방을 자주 드나드는 사람들을 가만히 주목해 보십시오.

다른 데가 있습니다. 삶은 힘든 것 같고, 그의 어깨에 지워진 십자가는 몹시 무거운 것 같지

, 그러나 그 얼굴에 기쁨이 잔잔히 흘러가는 것을 봅니다. 여유가 있습니다. 평안이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런 사람을 쫓아가서 가만히 살펴 보십시오. 그에게는 골방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자비로우신 하나님, 우리를 잠잠히 보시며 사랑하시는 그 하

나님, 그 분을 만나는 재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은 웃지 못하는 환경에도 그 사람

은 웃고 있습니다. 기뻐하고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자기가 겪은 이야기 한 토막을 써 놓은 것을 보았습니

. 기상이 좋지 않아서 비행기가 계속 흔들리고 사람들은 긴장하고 있습니다. 벨트를 매라

는 신호가 나옵니다. 그런데 뒤에서 자꾸 웃는 소리가 들립니다. 누군가가 자꾸 웃습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돌아보았더니 어떤 사람이 귀에 리시버를 끼고 있더랍니다. 코미디

프로그램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그걸 들으니 재미가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다른 사람은

아무도 안 웃는데 자기 혼자 웃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긴장하고 있는데도 자기는 즐거운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목사님이 깨달았답니다. '저 사람하고 나하고 다른 점이 무엇인가?

 

저 사람은 듣는 것이 있고 나는 듣지를 못한다. 그것이 틀리구나.' 여기에 큰 진리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긴장합니다. '경제가 어려워진다. 미국경제도 지금 밑바닥을 치고 있다. 지진

이 일어나서 수십 만 명이 죽어가고 있다. 한국도 절대 지진 안전지대가 아니다. 앞으로

2015년이 되면 전세계의 인구의 반이 물 부족 사태로 인해서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다.

제인간이 생겨서 이제는 나중에 윤리적으로 인간가치가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듣는 소리

마다 즐거운 소리가 없습니다. , 이런 세상을 살면 우리 가슴이 답답해지지 않습니까?

전벨트를 매도 안심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모든 사람이 긴장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럴 때 나 혼자 웃습니다. 찬송합니다. 평안이 있습니다. 무엇이 있는 것입니까? 골방이 있

는 것입니다. 골방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그분을 통해서 하나

님의 말씀을 펴놓고 하나님의 살아계신 음성을 듣는 재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

 

람 앞에는 온 세상이 소돔 고모라 같이 더러워져도 실망을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결국

은 예수 그리스도 그의 나라가 승리합니다. 할렐루야. 내 앞에 있는 문제가 산더미처럼 높아

보이지만 하나님보다 크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나오면 문제도 작아 보입니다.

 

낙담을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가 있

다고 한다면, 그 하나님을 내가 방금 만나고 나오는데 왜 내가 낙담합니까? 그러므로 골방

에 들어갈 땐 마귀 얼굴을 하고 들어가던 사람이 나올 땐 천사의 얼굴을 하고 나온다는 말

이 있습니다. 절대 과장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골방에서 기다리시는 이유를 여러분이 아셔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예배를 시작하

면서 부른 찬송이 있습니다. 그 찬송작가는 맹인으로서 월 포드 목사님입니다. '내 기도하는

그 시간 그때가 가장 즐겁다.' 그 사람은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내 기도하는 그 시간

그때가 정말 지겹다.' 가장 즐겁다고 했습니다. 맹인입니다. 세상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지만

기도하는 그 시간만은 가장 즐겁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 근심 걱정에 얽매인 나를 부르사

내 진정 소원 주 앞에 낱낱이 바로 아뢰어 큰 불행 당해 슬플 때 나 위로 받게 하시니 기도

하는 그 시간이 정말 즐겁다.' 과장된 말이 아닙니다. 골방을 가지고, 골방에서 하나님을 만

나고 하나님을 통해서 놀라운 사랑을 체험하는 사람은 이 말이 절대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

을 압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한 인생을 살면서 남녀가 사랑에 빠져서 연애할 때 만큼 행복

한 때가 없지 않습니까? 그때 그 연애를 다른 사람한테 부탁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대리

연애를 시키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죠? 진정 사랑하는 사이에 사랑을 주고 받는 그 기쁨을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서 대신하라고 하는 법이 있습니까? 없지요. 우리는 그런 것을 남에게

 

시키지 않습니다. 골방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에 흠뻑 젖어 봅니

. 그 하나님의 크시고 전능하시고, 성실하시고, 자비로우신 모습 앞에 우리 모두가 나 자

신을 잊어 버리는 흥분과 행복을 맛봅니다. 그 일을 남에게 맡깁니까? 남에게 맡기면 안됩

 

니다. 가끔 보면 "저를 위해 기도 많이 해 주십시오." 하고는 자기는 기도 안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럼 대리 기도 시키는 것 아닙니까? 그 사람은 그 바보입니다. 기도가 무엇인지

몰라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 행복과 그 기쁨을 왜 남에게 빼앗기느냐 그 말입니다. 여러

,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살아가야 될 세상, 너무나 험악한 세상입니다. 다시 말씀 드립니다. 사람만 보고 살

수 없습니다. 가슴이 터집니다. 세상만 쳐다보고 신문만 쳐다보고 살지 마십시오. 그렇게 살

다가는 모두 짐승처럼 됩니다. 하나님을 만나야 됩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그의 음성을 들어

야 합니다.

 

예수님이 기도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가르쳐 주시면서 또한 중요한 교훈을 우리에게 주셨습

니다. 하나님은 다 아시면서 기도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8절을 봅니다.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

 

니라.' 하나님이 다 아십니다. 여러분, 기도는 하나님이 잘 알지 못하시기 때문에 무엇인가

를 알려주는 수단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모르기 때문에 내가 계속 말을 해서 하나님으로 하

여금 기억하게 하고 또 하나님께서 알 수 있도록 설득시킨다고 하면 그것은 너무나 우스꽝

스러운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시편 139 4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여 내 혀에 말을 알지 못하는 것이 없나이다.' 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지하신 하나님이 모르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멀리서도 우리의 생각을 다 헤아리고 계시는

분이고 태초부터 마지막까지 알파와 오메가 되신 하나님이 모르시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다 아십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하나님이 잘 알지 못하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님은 내 마음에 무슨 슬픔이 있는지 아십니다. 내 안에 있는 상처가 무엇인지 아십니다.

내가 그에게 지금 말하고 싶어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다 알고 계십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분은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똑 같은 소리를 자꾸 반복할 필요

가 없는 것입니다. 전도서 5 2절입니다.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니라.' 말을 하지 말라는 말도 아닙니다. 말을 반복하지 말라는 말도 아닙

니다. 한 마디를 해도 내 모든 전심을 담아서 하나님 앞에 드리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무엇입니까? 내가 말을 많이 해서 내가 원하는 것을 받아내는 수단이 아닙

니다. 기도는 무엇입니까? 오히려 거꾸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기를 원하시는 것을 주시기

위해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수단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있는 선한 것을 다 우리에게 안

 

겨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어떻게 줄꼬? 어떻게 해야 이 좋은 것을 옥 목사가 받아서 제

대로 누릴 수 있도록 할까?' 하나님의 고민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무거나 막 안겨주면

안 되는 줄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린애들에게 아무거나 안겨줍니까?

 

요즘 돈 좀 벌어서 재산이 있다고 해서 애들에게 돈을 갖다 막 집어 주었더니,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대형교회에 어느 목사 아들까지 지금 히로뽕을 맞고 잡혀 들어갔지 않습니까?

미국에 보내서 전부 다 갱이 되고 마약 중독자들이 되지 않았습니까? 밤마다 가서 춤이나

추고 말입니다.

 

도대체 그런 애들을 어디에 쓸 겁니까? 왜 그런 꼴이 되었습니까? 함부로

주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100만원이 1000원짜리 만큼도 못합니다. 그러니 인간이 되겠

습니까?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하늘에 있는 모든 것을 항상 주시면 좋겠

지만, 천만에 말씀입니다.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그렇게 안 하십니다. '내가 주

고 싶은 것을 어떻게 주면 좋을까?' 그래서 우리에게 유익한 하나님의 선물을 주시는 방법

 

으로 기도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 알면서 기도 하라고 그러십니다. 무엇이 필요한

줄 다 알면서 기도하라고 그러십니다. '하나님, 왜 알면서 그러십니까?' 하면 '잔소리 하지

말고 기도해.', '하나님, 내 형편 다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내가 몇 번째 기도합니까?' 하면

 

'잔소리 하지 말고 계속 기도해' 하십니다. 다 알면서도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아십니까? 내가 원하는 것은 손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직도 내 환경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계속 골방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다 보면 내 자신이

 

변해버립니다.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인자 하심과 그 긍휼하심에 나도 모르게 사람이 바뀌어

버리고 생각이 바뀌어 버립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한번 체험했더니 지금까지 '다오,다오'

면서 욕심부리던 것이 나도 모르게 사라지는 것을 봅니다. 그렇게 무겁게 느껴지던 십자가

가 하루 아침에 가볍게 여겨집니다. 나도 모르게 불평하던 입에서 찬송이 나옵니다. 내가 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예수님처럼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고 기도해 버립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오냐 알았다 내 뜻대로 할게.' 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분이 좋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을 설득 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

. 내 자신이 기도를 통해 변화 받아야 됩니다. 변화되면 평범한 것들이 비범한 것으로 바

뀌는 일들이 우리 주변에 자주 일어납니다. 짧은 외마디 기도가 놀라운 위력을 나타내는 일

들을 우리는 가끔 체험합니다.

 

이상과 같이 하나님은 골방에서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시면서 우리보고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이 두 가지 사실 안에 기도의 중요한 본질이 들어있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기억하고 골방을 자주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알고 계시는 줄을 알지만 내

가 왜 기도해야 되는가를 여러분이 깊이 인식하고 깨달아야 됩니다. 그래야만 기도의 사람

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너무나 바쁜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10년 전에 비해서 우리의 생활 템포는 배

나 빨라진 기분입니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기도할 시간이 점점 없어진다는 것입니

. 너무 바쁩니다. 너무 재미 있는 것이 많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시간을 빼앗는 것들이 주

변에 수두룩합니다. 이런 것들을 마귀는 최대한 이용해서 시간을 계속 좀먹어 갑니다. 기도

 

할 시간은 점점 없어집니다. 골방에 들어간 지가 언제인지 모를 정도로 한 주간을 그냥 보

내버립니다. 여러분 이것은 불행한 이야기 입니다. 진짜 바빠서 그럴까요? 아닙니다. 골방기

도는 바빠서 못하는 법은 없습니다.

 

어느 기록을 보니 7,80년 살다가 가는 서구인들에게는 신호등 앞에서 기다리는 시간이 전체

6개월이나 된다고 합니다. 광고를 보고 우편물을 뜯고 하는 시간이 전생애 중에서 8개월이

라고 합니다. 분실물을 찾아 다니는데 1년 반이 걸립니다. 줄서기 하는데 5년을 쓴다고 합니

. 약간 과장된 통계 같지만 의미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줄을 서서 기다리는 시간에 우리는 골방에 얼마든지 갔다 올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을 집중

해서 '하나님, 아버지' 하고 찾고 나의 영혼이 그의 거룩한 존전을 바라보면 그 시간이 골방

이 되는 것입니다. 줄을 서고 있는 시간에 기도할 수가 있습니다. 못할 것 없습니다. 신호등

앞에 기다리는데 불과 1,2분도 안 되겠지만 그 시간도 나에게는 골방이 될 수 있습니다.

 

의를 기울이지 아니하면 얼마든지 흘려 보낼 수 있는 시간이지만 '하나님을 꼭 만나야 돼,

골방에 가서 하나님과 만나서 내가 은혜를 받아야 돼.' 하는 마음을 갖는 사람은 아무리 세

상이 요지경처럼 돌아가는 바쁜 환경이라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운전하면서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골방기도에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골방기도는 우리의 영혼을 소

생 시키는 은혜의 샘입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기적의 현장입니다. 여러분, 골방기도는

우리의 공허함을 하나님의 충만함으로 채우고 우리의 연약함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대신하며

 

우리의 필요를 하나님의 성실하심으로 공급 받는 축복의 채널이 된다는 것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시간부터 우리의 모든 삶이 항상 골방에 계시는 하나님과 주파수를 맞추

 

고 그를 통해서 우리에게 임하는 놀라운 은혜와 능력을 힘입고 이 세상을 살면 우리 모두

얼마든지 승리할 수 있습니다. 어떤 문제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어떤 슬픔도 이길 수 있습

니다. 세상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천상을 나는 거룩한 주의 백성의 모습을 보여

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골방에서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이렇게 기도하라(1) /6:9-10/ 옥한흠 목사

2014-11-10 10:37:56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기도를 모르는 사람이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겠습니까? 기도를 가볍게 여기는 사람이 건강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의 마음에 이 질문을 한번 담고 스스로 대답해 보십시오.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이렇게 대답이 나올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이 주시는 대답입니다. 기도의 거장인 바운즈라고 하는 사람은 이런 말까지 했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기도를 대신할 만한 것도 없고 기도에 버금갈 만 한 것도 없다. 옳은 말입니다. 정말 기도를 빼버리면 신앙생활은 심장이 멎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습니까?

 

예수를 믿으면 누구든지 반드시 기도해야 합니다. 또 기도할 때에 바로 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 할 때에는 뜨겁게 해야 합니다. 반드시 해야 합니다. 바로 해야 합니다. 열정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진면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말씀에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시면서 유명한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주기도문이라고 하기보다는 제자의 기도라고 해야 더 적절할 것입니다.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는 말씀은 무엇을 암시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무엇을 경고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기도는 나 좋을 대로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식으로 하라고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기도는 되는 대로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칙을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에도 원칙이 있고 기도에도 법칙이 있습니다. 그 법칙을 항상 마음에 두고 기도하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주기도문 하면 외우는 기도로 늘 생각을 합니다. 주후 2세기 교회에서는 교인들에게 하루 3번씩은 꼭 주기도문을 외우라고 가르쳤다고 합니다. 물론 외워야 합니다. 너무나 좋은 기도, 너무나 소중한 기도를 왜 안 외웁니까? 외우기 때문에 자주 반복합니다. 1000, 100번이라도 이 기도를 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의 교회가 시작되고 나서 아마 1,2년 후부터 예배시간마다 주기도문송을 부르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제가 워낙 주기도문을 좋아하고 그 말씀을 마음에 담고 기도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러기도 하지만 주기도문송을 부를 때마다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벌써 20년 동안 한 주일도 빼놓지 않고 주기도문송을 불러왔습니다. 특별히 2부와 3, 전통적인 예배를 드릴 때에는 꼭 주기도문송을 부릅니다. 부를 때마다 너무 가슴이 뜨겁습니다. 내 영혼이 찬양의 날개를 달고 우리 아버지 되신 하나님 앞으로 훨훨 날아 올라가는 것 같습니다.

 

성령이 우리의 마음을 꽉 쥐고 은혜를 주십니다. 그런데 어찌 안 부를 수 있습니까? 언제부터인가 나도 모르게 손을 번쩍 들고 부르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눈감고 부르기 때문에 목사가 손을 드는지 내리는지 모르실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번쩍 들고 기도합니다. 10번이고 20번이고 부르고 싶습니다.

 

저와 같이 주기도문 찬양을 할 때마다 그 영혼이 하나님을 향해서 달려가는 거룩한 백성들이,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손을 번쩍 들고 찬양하는 그런 성도들이 많이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교회에 처음 들어와서 주기도문송을 부르는 것을 들으며 너무나 진한 감동을 받았다고 간증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외워야 합니다.

 

10번이고 100이고 반복해야 합니다. 그것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꼭 기억하십시오. 주기도문은 외우라고 주신 기도가 아닙니다. 외우라고 주신 기도라기보다는 오히려 기도의 지침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기도의 골격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려고 주님이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기도문을 가지고 기도의 원칙을 파악합니다. 기도라는 것은 이렇게 하는 것이구나. 하는 원칙을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그 원칙을 중심으로 해서 다양한 기도를 하게 됩니다. 내가 원하는 모든 기도를 하게 됩니다. 원칙만 어그러지지 아니하면 됩니다. 이 원칙을 주기도문이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주기도문을 살펴보면 기도가 쉽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잘못된 기도를 할 확률도 높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린애가 배고프면 보채듯이 하는 기도, 그런 기도는 아무나 할 수 있지 않습니까?

 

불이 나면 119로 다이얼을 돌리듯이 하는 기도는 누구나 합니다. 안 믿는 사람까지도 하늘을 향해서 급하면 손비비고 하는 기도는 누구나 다 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나서도 믿음이 약할 때는, 하나님이 그렇게 약간 유치한 기도를 해도 별로 상관하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지금 자기를 따르고 자기를 닮고 자기를 위해 생명을 바치기를 소원하는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고 계십니다. 적어도 제자들의 수준에 이르는 기도를 하려면 항상 그렇게 유치하게 기도하는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안됩니다. 제자들의 수준에 이르는 기도를 하려면 주기도문을 아주 진지하게 검토해야 합니다.

 

한번 보십시오. 순서부터 다르지 않습니까? 우리는 기도 하면 내 마음에 있는 것을 처음부터 쏟아 놓기가 바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 하고는 그 다음부터는 브레이크가 파열된 자동차처럼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하는 것입니다. 보통 우리가 하는 기도가 이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기도에는 순서가 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시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 주의 나라가 임하시며 주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기도가 먼저 있어야 된다. 하는 것을 주님께서 보여주고 계십니다.

 

아무리 우리에게 급한 기도가 있어도 하나님을 위한 기도, 하나님에게 집중하는 기도, 하나님 자신을 먼저 마음에 떠올리는 기도, 그 기도부터 앞세우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순서가 틀립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시는 대로 기도할 때에 비로소 우리는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닮은 제자다운 사람이 됩니다.

 

그 뒤에 따라 오는 기도를 보십시오. 별로 호감이 안 가는 기도들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여러분 가운데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할 만한 사람이 얼마나 되십니까? 한번 손 들어 보십시오. 일용할 양식이 무엇입니까?

 

그날 먹고 마시고 끝나는 것이 일용할 양식입니다. 꼭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아침에 나가 만나를 거두어 와 가지고, 하루종일 그저 그것을 가지고 빻고 찌어서 빵도 구워먹고 여러 가지로 자기가 하고 싶은 요리를 해서 먹고 저녁이 되면 없어집니다.

만약 아까워서 두면 벌레 먹어 못 씁니다. 그래서 그 다음날 아침에 또 나가서 들판을 헤매면서 만나를 거두어야 됩니다. 이것이 일용할 양식이라 말입니다.

 

우리 가운데서 기도할 때에 주여, 일용할 양식만 주옵소서. 그런 기도하면서 만족할 사람이 몇 명이나 됩니까? 대부분 오 하나님 아버지, 제가 하는 일에 축복 하옵소서. 하늘의 복도 주시고, 땅의 복도 주시고, 떡 반죽에 복이 넘치게 해 주옵소서. 주여, 이것도 주시고, 저것도 주소서. 나도 모르게 막 내놓는단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에 비추어보면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욕심이 너무 많이 차 있는 기도입니다. 주님은 그런 기도를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주기도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굉장히 무서운 교훈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기도 할 때에 하나님 앞에 내가 용서 받기 위해서 나에게 잘못한 다른 사람의 죄를 먼저 용서하려고 노력합니까? 주기도문에 그렇게 나오지 않습니까?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내가 먼저 용서하오니 나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우리 주님이 그렇게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용서 받기 위해서 내가 먼저 용서합니까? 저도 잘 못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네가 용서 받기 원하면 먼저 용서해라. 이것입니다. 이 원칙대로 우리는 잘 안합니다.

 

그리고 여러분 또 보십시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요즘에는 자동차 타고 다니기 무섭습니다. 술 먹은 운전자가 너무 많습니다. 마약에 빠져 가지고 환각 증세를 일으키면서 운전하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 꼭 지켜주셔야 되겠습니다. 하는 기도를 합니다. 이 기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 이 젊은 나이에 병들어 죽는 사람도 가끔 보는데, 주님 제발 병좀 들지 않게 해 주시고 건강하게 해 주십시오. 하고 기도합니다. 당연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기도보다도 다른 기도를 말씀하십니다.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악에서 건지시옵소서. 우리는 나의 육신적인 건강, 세상의 평안을 위해서, 안전을 위해서 항상 기도를 앞세우지만 주님은 영혼의 건강, 영혼의 안전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주기도문의 전체 흐름입니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을 가만히 보면서 야, 기도하기가 쉽지 않구나. 잘못하면 빗나간 기도도 하기가 쉽구나. 하는 것을 우리가 배우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 우리가 주기도문을 외웁니다. 주기도문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면 안됩니다. 또 어떤 때는 의미 없이 외우는 것으로 반복하는 것으로 주기도문 기도를 했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이 주기도문을 통해서 기도의 원칙을 배워야 됩니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은 기도의 교과서입니다. 이 교과서를 우리가 잘 배우고 깨닫고 마음에 담으므로 그 기도를 중심으로 해서 날마다 다양한 기도, 짧은 기도, 긴 기도, 개인의 기도, 중보기도, 다양한 기도를 하나님 앞에 올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와 같은 기도의 용사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기도를 드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다운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한두 가지 생각합시다. 첫째로, 예수님은 기도를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는 것이라고 가르쳐주십니다.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입니다. 하늘에 계시는 우리 아버지여 어느 학자의 견해를 보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실 때까지 유대나라에서는 아무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남아있는, 전해 내려오는 모든 문서를 다 뒤지고 연구를 해도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아버지라고 부른 사례가 없습니다. 만약에 그렇게 하나님을 아버지하고 부른다면 그것은 신성모독죄로 다루어지기 때문에 엄두도 못 내는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자마자 처음부터 항상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아버지는 내 안에 있고 나는 아버지 안에 있느니라.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하나님을 120번 이상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그리고 이 아버지는 우리가 흔히 격식을 갖추어서 부르는 호칭하고도 다릅니다. 아버님이 아닙니다. 아빠, 아빠 그래서 아바 아버지라고 그러지 않습니까? 어린 아이가 자기 아빠가 너무 좋아 가지고 격식 없이 부르는 그런 이름입니다.

 

이런 이름을 우리 주님께서 부르시면서 특별히 기도할 때에는 하나님 앞에 어린애처럼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우릴 보고 너희도 그렇게 기도하라. 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기도해라.

 

왜 그런지 아십니까? 요한복음 1 14절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하나님을 아버지 하고 마음대로 부를 수 있는 권세를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얻었습니다.

 

또 갈라디아서 4 6절에 보면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다시 한번, 너희는 아들인고로, 너희는 자녀인고로 하나님이 우리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성령이 우리 마음에 계셔서 계속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하시기 때문에 부르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너희도 기도 할 때에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불러라. 내가 부르듯이 그렇게 불러라. 이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지금 당장 우리 눈에 보일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이 자리에 임재하신다면 우리 모두는 죽은 자와 같이 다 쓰러지고 맙니다. 구약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인간의 모양으로 어떤 때는 약간 찬란한 천사의 모양으로 사람 앞에 나타난다고 해도 그 사람이 그 모습을 보고는 견디지 못해 다 쓰러지지 않습니까?

아니면 옷으로 자기를 뒤집어 쓰고 일어나지도 못하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은 완전 죽은 자처럼 되 버리지 않습니까?

 

 

 

 

이렇게 기도하라(2) /6:11-15/ 옥한흠 목사

2014-11-10 10:34:54

 

동구 루마니아에 살아있는 순교자라는 별명을 가진 아주 위대한 분이 한분 계십니다. 리차드 범브란트 박사인데, 이분은 저술가이면서 또 신학교 교수 입니다. 원래 혈통이 유대인이기 때문에 나치가 루마니아를 침공했을 때 가족들을 많이 잃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루마니아가 공산화 되고 나서는, 이 범브란트 박사는 지하조직을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열심을 다했습니다. 그러다가 1948년도에 잡혀서 투옥을 당하고 그 후 15년 동안 감옥에서 고통을 당하는 어두운 인생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석방이 되고 서방으로 빠져 나와서, 공산권 선교회라는 것을 만들어 가지고 그 노구를 끌고 다니며 복음을 전하셨는데, 지금 생존하고 계시는지 아직 확인은 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처음에 잡혀서 3년 동안 지하 감옥 독방에 갇혀 있었습니다. 생각을 나눌 만한 말벗도 없습니다. 읽을 책도 없고, 자기 생각을 써 볼만한 종이나 연필도 없었고, 심지어 지저귀는 새소리도 들리지 않았으며 파란 풀 포기 하나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조용히 스며드는 햇빛도 구경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지옥 같은 환경에서 그는 3년을 버티면서 혹독한 굶주림을 가지고 시름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매일 주는 것은 더러운 감자껍질을 가지고 만든 스프였는데, 그것도 충분하게 주는 것이 아니었고 일주일에 한번씩 빵 조각을 주는 것으로 연명을 했습니다. 게다가 자주자주 끌려 나가서 고문 당하고 매질을 당했다고 합니다.

 

이 악독한 공산주의자들은 범브란트의 정신세계를 파괴하기 위해서, 그리고 영적인 세계를 마비시키기 위해서 스프에다가 매일 마약을 탔습니다.

 

마약이 든 스프를 계속 먹어대니 점점 정신계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서 가장 심각한 것은 기억력 상실이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는 성경에 있는 내용을 깡그리 잊어버리기 시작했습니다.

 

신학자로서 그 동안 그렇게 많은 책을 읽고 연구한 사람이었지만 그 신학적인 지식도 다 날라가 버렸습니다. 14개 국어를 유창하게 할 정도의 탁월한 언어학자였지만 모든 언어를 다 잊어버리고 자기 모국어인 루마니어를 조금 기억하고 있을 정도 입니다.

 

어느날 밤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조용히 눈을 감고 하나님을 향하여 주님이 가르치신 주기도문을 외우려고 했는데, 그날 따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시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하고는 그 다음 내용이 전혀 생각이 안 나는 것이었습니다.

 

잊어 버린 것입니다. 그는 너무나 당황하고 너무나 서글펐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런 말을 써 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나는 매우 슬펐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기도를 우리에게 가르치시기 위해서 하늘에서 땅에 오셨는데 내가 그 분의 기도를 잊어 버리다니"

 

그리고는 옷 매무새를 다시 고쳐 잡고 하나님 앞에 머리 숙여 이렇게 기도했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내가 주님의 기도문을 다 잊어버렸지만 하나님은 제 마음을 아시죠? 예수님 사랑합니다. 예수님 사랑합니다. 아멘."

 

마약으로 인한 정신적 암흑상태를 2년 동안 버티면서 그는 싸웠습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갑자기 마약 투여가 중단이 되고 음식이 조금씩 질이 나아지기 시작하면서 몇 달 지나자 기억력이 다시 되살아 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느날 갑자기 주기도문이 생각이 났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이다." 잊어버렸던 주기도문의 단어 하나하나가 샘이 솟듯이 다시 솟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기절했다가 갑자기 깨어난 사람처럼 잊어버렸던 주기도문을 마음에 담고 그 말 한마디 한마디에 하나님을 향한 열정과 사랑과 믿음을 담아 하나님 앞에 기도 드리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주기도문을 골자로 해서 자신의 마음에 있는 모든 기도를 거기에 첨가하고, 드리고 싶은 모든 이야기를 그 기도에 담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매일매일 올렸습니다.

 

그 회복된 주기도문의 기도를 통해서 그의 메말랐던 심령에 다시 한번 꽃이 피기 시작했고 그의 영혼이 다시 회복되는 놀라운 축복을 누리면서 그 혹독한 감옥생활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고 그가 쓴 것을 보았습니다.

 

사탄이 성도에게서 마지막으로 빼앗고 싶은 기도가 있다면 주기도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만큼 이 주기도문은 우리에게는 중요하고 사탄에게는 너무너무 듣기 싫은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세상이 얼마나 바쁩니까? 정신을 차릴 수 없이 돌아가는 세상, 조금만 아침에 늦잠을 자도 기도할 틈을 얻지 못하고 문을 박차고 달려나가야 되는 것이 우리의 현실 아닙니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시간이 없어서 기도를 드리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운전대에 앉아서 잠깐이라도 머리 숙이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하며, 이 주님이 가르쳐 주신 한마디 한마디에다가 우리의 혼을 담고 우리의 믿음을 담고 우리의 뜨거운 열정을 담아 하나님 앞에 올려 드리면,

그 날은 기도 없이 시작한 하루라고 하는 딱지는 붙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은혜 주실 줄 믿습니다.

 

그렇다고 여러분들이 아침마다 주기도문만 외우고 하루를 시작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만큼 주기도문이 중요하다는 이야기 입니다. 우리가 주기도문 안에 들어있는 정신, 원칙, 그리고 주님이 요구하시는 귀한 진리들을 마음에 담고 잊지 않고 적용하면 우리의 기도는 훨씬 더 풍성해 지고 능력 있고 놀라운 하늘의 축복을 끌어 내리는 은혜의 손길이 될 줄 믿습니다.

 

주기도문을 보면 먼저 하나님 자신을 위한 기도가 나온다고 지난 시간에 이야기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많은 기도를 들으시지만 무엇보다도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원과 열정을 담고 하나님 앞에 간구 하는 것을 기뻐 하신다고 예수님은 주기도문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우리 자신을 위한 세 가지 기도가 나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며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아멘.' 이 세가지 기도가 나오는데 모두가 우리 자신을 위한 기도입니다.

 

윌리암 버클리라고 하는 아주 탁월한 성경 학자는 이 세 가지를 놓고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관시켜서 해석을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하는 기도는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우리의 생명을 공급하시는 성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고,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하는 기도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우리의 모든 허물을 덮으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성자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고, '우리가 시험에 들지 않고 악에서 건져 달라'고 하는 기도는 이 세상 다 할 때까지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와 동행 하시는 성령 하나님께 하는 기도라고 말했습니다.

 

마음에 담아두면 주님 가르치신 기도를 드릴 때마다 매우 유익하게 생각할 수 있는 좋은 해석이라고 봅니다.

 

이 세 가지 우리 자신을 위한 기도 안에 3가지의 중요한 기도원리가 들어있습니다. 기도의 원칙이 있고 기도의 정신이 있습니다.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첫번째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는 욕심을 비우고 하는 기도라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고 하나님 앞에 드리는 기도라야 하나님이 받으신다는 사실이 들어 있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는 오늘 하루 살 수 있는 일용할 양식을 말합니다. 오늘날 하는 말로 하면 '오늘을 살 수 있는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입니다. 신약의 카피본인 다른 사본에 보면 '내일의 양식을 주옵시고' 하고 기도 하고 있는데 다 똑같습니다.

 

유대나라 사람들처럼 하루가 저녁에 시작하는 경우에는 엎드려 기도할 때에 날이 새야 되기 때문에 내일의 양식을 달라는 기도가 될 수 있고, 우리처럼 눈을 뜨고 해가 솟는 그 시간부터 하루를 시작하는 경우는 '오늘날 우리에게 양식을 주옵시고' 하는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이 일용할 양식입니까? 가장 좋은 샘플이 있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농사 한번 지을 수 없는, 온통 광야뿐인 그 시내산 아래서 40여 년을 방황하면서 살 때 그들이 먹고 살 수 있었던 것은 날마다 하늘에서 내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만나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만나를 먹고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처음에 만나를 주실 때 "너희들은 아침마다 나가서 들에서 만나를 거두어 찧고 삶고 해서 그 날의 양식을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그 말을 듣고 나갔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 마음에 걱정이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욕심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당일분만 거두라고 했지만 말을 안 들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두 부대도 거두고, 어떤 사람은 세 부대도 거두고 해서 식구대로 나가서 한 짐씩 지고 들어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날 하루 먹고 남은 것은 내일 먹지.' 하고 생각했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저녁이 되자 썩어서 못쓰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제서야 이스라엘 사람들이 매일 나가서 매일 먹을 것만 거두어 왔습니다. 이것이 일용할 양식입니다.

 

공중에 새가 날마다 먹고 마시는 것을 하나님께 의지하고, 하나님이 주시면 먹고 하나님이 주시지 아니하면 먹지 못하는 것을 우리가 알지 않습니까? 일용할 양식이라는 것은 이처럼 날마다 사는 양식입니다.

 

다시 말하면 날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생명이요, 날마다 우리에겐 필요한 건강이요, 날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먹고 마시는 물질입니다. "하나님이여, 오늘 우리가 살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주시옵소서." 하는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 안에는 욕심이 자리를 잡을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더 가지고 싶다, 쌓아 놓고 싶다, 저축해 놓고 살고 싶다, 남 보다도 화려하게 살고 싶다.' 하는 생각들이 끼여들 만한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 오늘을 살 수 있는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얼마나 욕심 없는 기도입니까? 얼마나 소박한 기도입니까? 얼마나 어린아이 같은 기도입니까? 하나님이 이 기도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서구의 선진국에서는 50년 전만 해도 한 사람이 그래도 사람 대우 받고 살려면, 적어도 생필품이 70가지 정도는 있어야 된다고 했습니다. 저는 세어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 사람들이 그래도 삶의 질을 높여 가면서 살려고 하면 10배가 더 되는 생필품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800가지 정도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굉장하지 않습니까? 삶의 질은 점점 높아지는데 그 반면에 사람들은 800가지 900가지를 충족시켜야 되기 때문에 점점 더 구하는 것도 욕심을 부리게 되고 점점 마음은 탐욕으로 가득해졌습니다.

 

그래서 삶의 질은 높아질지라도 행복도는 자꾸 떨어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욕심이 많아지기 때문에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원하는 것을 손에 넣으면서도 감사할 줄을 모릅니다. 자기밖에 모릅니다.

 

하나님을 의지할 줄 모릅니다. 결국은 영적으로 부도 난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세상 사람은 그렇다 하더라도 예수 믿는 사람까지도 가만히 보면 그 기도에 욕심이 너무 많이 끼여 있습니다. 탐욕의 냄새가 물씬물씬 나는 기도를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줄 모르고 드리고 있습니다. 그만큼 기도가 오염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하는 기도만큼 인기 없는 기도가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 중에 이 기도만 가지고 만족하겠다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어떻게 하루 사는 것을 가지고 만족할 수 있다고 생각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기도는 인기 없는 기도라는 말입니다. 좀 더 얻기를 바라는 것이고 할 수 있으면 더 많이 하나님이 허락해 주시기를 원하는 것이 우리 대부분의 소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 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재물이라는 것은 구두와 같다고 교부 클레멘트가 한 말을 기억합니다. 구두는 마냥 크다고 좋은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구두는 화려하다고 좋은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자기 발에 맞아야 되고 자기 신분에 맞아야 되고 자기 멋에 맞아야 합니다.

 

 

 

 

 

 

 

admin

 

댁쟾쇰줈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시고 우리가 기도를 통해서 전능하시고 또 사랑이신 하나님 그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한평생을 살 것을 기대하시며 우리를 기도의 자리로 초청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한결같은 사랑과 우리를 구원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과 성령님의 우리와 함께 하심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면서 기도 속에 한평생을 당당하게 건강하게 살 것을 기대하시는 성령님의 평안케 하심과 기도로 인도하심이 오늘 이 말씀을 붙들고 기도의 일생을 살기를 작정하며 삶의 자리로 떠나가는 당신의 백성들의 걸음마다 삶의 장마다 기도의 거룩한 사역이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축복 하옵나이다 아멘.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리라 1: 기도는 관계다 /6:5-15/ 조정의목사

2021-09-01 10:19:13

 

시리즈 제목은 사무엘의 퇴임사에서 가져왔다(삼상 12:23). 우리는 기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도 안다(살전 5:17-18). 영생을 풍성히 누리는 비결이 기도라는 것도 배웠다(요일 5:14-21). 그런데 왜 기도가 의무를 넘어 특권이 되지 않는 걸까? 짐이 아니라 선물이 되기 힘든 걸까?

 

기도의 완벽한 본이시자 신적 권위가 담긴 기도 강의를 하신 예수님을 통해 기도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아보기 원한다. 이를 통해 기도는 철저하게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특별한 관계에 기초하며, 그 안에서 우리가 풍성히 누리는 축복이자 특권임을 바로 알기 원한다. 그래서 기도는 하면 좋고 안 하면 조금 손해 보는 일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친밀하고 건강하게 만드는 호흡과 같음을 알고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리라라고 결단하기 원한다.

 

관계를 고려하지 않는 기도의 형태 두 가지(5-8)

 

1. 관계를 고려하지 않는 기도의 형태(1): 외식하는 기도(5-6)

 

예수님의 기도 강의를 듣는 이들은 대부분 유대인이었는데( 4:25), 그들은 겉으로 볼 때 기도하지 않는 자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쉬지 않고 열심히 기도하는 자들이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루에 세 번(아침, 오후 3, 저녁) 기도하였고( 6:10; 3:1; 10:3), 특별히 성전에서 매일 오후 제사 때 나팔을 불면(2), 그 자리에 멈춰서 기도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좋은 유대인은 식전, 식중, 식후 이렇게 세 번 18가지 축사를 드렸고, 쉐마( 6) 기도를 하루 두 번 드렸다.

 

만일 이렇게 규칙적으로 자주 기도하는 성도가 있다면 우리는 그를 기도하기를 쉬지 않는기도의 사람이라고 부를 것이다. 기도의 모델로 삼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기도의 대상인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는 기도는 아무리 자주 또 규칙적으로 많이 해도 유익이 없다고 책망하셨다. 그들의 기도가 하나님이 아닌 사람을 향한 기도 곧 외식하는 기도였기 때문이다.

 

5절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여기서 외식하는 자는가면을 쓰고 연기하는 연극배우를 의미하는데, 어떤 사람은 기도할 때 가면을 쓰고 연기하듯 기도한다는 것이다. 어떤 연기를 펼쳤는가?

 

5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기도의 장소로 회당과 큰 거리 어귀가 등장한다. 회당은 유대인의 예배가 이루어지는 공적인 장소이자, 유대인이 서로 관계를 맺고 더불어 살아가는 사적인 장소이기도 했다. 하지만 회당은 궁극적으로기도하는 집이다( 21:13).

 

큰 거리 어귀는 넓은 길이 교차하는 그래서 지나가는 사람이 아주 많은 장소를 가리킨다. 유대인은 때로 성전에서 나팔 소리가 울릴 때 이곳에 멈춰 서서 기도하기도 했다. 회당, 큰 거리 어귀 모두 기도의 장소로서 잘못된 것이 없다.

 

그러면 외식하는 자의 기도는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5절에 보면서서라고 되어 있다. 회당에서 대표 기도를 할 경우 서서 하였고, 거리에서 걷다가 멈춰 기도할 때 역시 서서 기도하였다. 기도의 자세가 잘못된 것도 아니었다.

 

문제는 5절에 나오는 것처럼사람에게 보이려고기도하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기도의 대상이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기도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기반으로 소통하는 것인데, 외식하는 자는 엉뚱한 대상인 사람을 향해 기도하기를 즐거워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하나님과 관계를 고려하지 않는 기도는 아무 유익이 없다.’

 

5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예수님의 모든 말씀이 진실이지만, 이렇게 말씀하실 때는 그만큼 주님이 강조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잊지 않고 반드시 기억하기를 원하신다. 사람을 향하여 기도하는 자는 사람의 칭찬과 인정을 받는 그것으로 자기 상 곧 기도의 응답이나 열매를 이미 다 받은 것이다. 잘못된 대상을 향해 기도하는 것은 아무런 소득이 없는 쇼와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충실한 기도를 드려야 한다. 사람을 의식하지 말고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해야 한다. 그분과 우리의 관계를 기초로(위해) 기도해야 한다. 예수님은 이를 “(그러나) 너는으로 시작하는 6절 말씀으로 강조하신다.

 

6절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장소가 중요한 건 아니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기도하라 말씀하신 예수님도 동산, 들판, 바닷가, 회당, 성전 어디서든 기도하셨다. 왜 골방(옷장, 창고), 그것도 문을 닫은 밀실에서 기도하라고 하셨을까? 아무도 없고 오직 하나님과 기도하는 사람만 교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골방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면 그 누구도 들어올 수 없고 들을 수 없다. 하지만 오직 하나님은 들으신다. ? 하나님은 은밀한 중에 보시는 분(전지), 은밀한 중에 계신 분이기 때문이다(편재).

 

하나님은모든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의도를 아신다(대상 28:9). 솔로몬은 이렇게 기도했다.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각 사람의 마음을 아시오니주만 홀로 사람의 마음을 아심이니이다”(왕상 8:39; 대하 6:30). 다윗도 이렇게 말했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139:2). 시편 기자도 이렇게 기도했다. “주는 마음의 비밀을 아시나이다”( 44:21; 참고. 1:24; 15:8).

 

기도는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교제다. 무리를 대표하여 기도할 수도 있고, 기도를 통해 공동체에 유익을 끼칠 수도 있지만, 기도는 전적으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 안에서 전심으로 하나님만을 향한다.

 

2. 관계를 고려하지 않는 기도의 형태(2): 주문하는 기도(7-8)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 책망하신 기도 역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형태의 기도 곧 주문하는 기도다.

 

7절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첫 번째 반면교사가 외식하는 자였다면, 두 번째 반면교사는 이방인이다. 그들의 기도 대상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 아니라 그들이 빚어 만든 가짜 신, 우상이다. 이방인의 기도방식을 예수님은 중언부언이라고 요약하셨다. ‘중언부언을 가르키는 헬라어 단어는 아람어에 영향을 받은 의성어인데, 완곡하게 우리말로 비교하자면중얼중얼’, ‘나불나불정도가 될 것이다.

 

구약과 신약에서 각각 이방인이 중언부언하는 기도의 대표적인 예시를 찾을 수 있는데, 첫째로 갈멜산에서 아침부터 낮까지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라고 계속해서 반복하여 길게 주문한 바알 선지자들(왕상 18:26),

 

그리고 에베소에서 두 시간 동안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라고 한소리로 외쳐 기도한 무리다( 19:34). 이방인이 오랜 시간 같은 말을 반복하여 자기들이 섬기는 우상에게 주문하는 것, 그래서 자기들의 요구를 관철시키는 것이 이방인 기도의 특징이었다. 예수님은 그들처럼 기도하지 말라고 명백히 말씀하셨다.

 

8절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왜 그런가? 그들이 기도로 관계 맺고 있는 하나님이 우상과 다르기 때문이다. 우상은 주문처럼 의미 없는 말을 오래 길게 반복하여 요청하면 기도를 들어주는 신인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8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기 전에 이미 우리의 필요를 아신다. 선지자 이사야에게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라고 말씀하셨다( 65:24). 예수님도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 12:30)(인자, 긍휼, 자비).

 

길게 기도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도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셨다( 6:12). 반복하여 간절히 요청하는 기도 자체도 문제는 아니다. 예수님은 항상 기도하라고 가르치시면서 비유로 재판장에게 자주 가서 계속 번거롭게 요청하는 과부의 기도를 말씀하셨다( 18:1-8).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간절한 기도를 세 번 반복하여 드리셨다( 26:39-44).

 

중요한 것은 기도의 대상인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나아가느냐에 있다. 계속해서 조르고 떼쓰고 닦달하면 그 대가로 내가 원하는 것을 마지못해서 주는 존재로 보느냐 아니면 나의 필요를 아시고 돌보시는 사랑의 아버지로 보느냐. 예수님은 5절부터 8절까지 계속해서 우리 기도의 대상을네 아버지, 네 아버지, 너희 아버지라고 분명히 밝히셨다. 우리는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 분명히 알고 그분의 자녀로서 기도로 아버지께 나아간다.

 

3. 적용: 당신은 누구에게 기도하는가?

 

예수님의 기도 강의는 사람의 타고난 죄성을 깨부수는 것으로 시작한다. 죄인은 지극히 사람 중심적이다. 사람에게 어떻게 보이는가를 하나님이 어떻게 보시는가보다 더 신경 쓴다. 죄인은 지극히 자기중심적이다.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무엇을 기뻐하시는지 전혀 관심이 없고, 하나님을 마치 계속해서 누르면 원하는 걸 토해내는 자판기처럼 취급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죄와 정욕을 못박으셨을 때 우리는 사람보다 하나님을, 자기 자신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되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바뀌었을 때 기도가 바뀐 것이다. 우리는 참된 관계를 회복한 후 마침내 참된 기도를 할수 있게 되었다. 당신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당신의 관계를 평가할 수 있는 두 가지 적용 거리를 살펴보자.

 

첫째, 당신의 은밀한 기도를 평가해보라. 시리즈 제목이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리라이다. 기도하는 것을 쉬는 것이 왜 죄인가? 기도가 관계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기도하지 않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과 당신의 관계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방치하는 것을 의미한다.

 

윌킨스는모든 기도의 중심인 마음속에서 하나님과 갖는 교제의 친밀함에 그(기도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라고 말했다(NIVAC, 308p). 식사기도, 대표기도, 공기도를 종종 혹은 자주 드리고 있더라도 당신이 은밀한 곳에서 하나님과 기도하고 있는지, 오직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하고 있는지 진지하게 평가해보라. 당신의 기도 밀도가 곧 하나님과 당신의 관계의 친밀도를 말해준다. 혹시 당신은 외식하는 자의 기도를 하고 있지 않은가?

 

둘째, 당신의 기도 내용을 평가해보라. 만일 당신이 소리 혹은 마음으로 하는 기도를 모두 적어서 책으로 낸다면, 어떤 책이 되겠는가? 그 기도문을 통해 분명히 알수 있는 건 당신이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생각하는가이다.

 

수많은 미사여구가 당신의 진심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반복해서주시옵소서라고 부르짖거나 알아들을 수 없는 마법 주문처럼 방언으로 길게 쏟아낸 내용은 당신이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여기는지 알려주는데 무용지물이다.

 

진정 당신의 기도에서 하나님이 당신의 아버지, 독생자를 희생제물로 내어주어 자녀로 삼으신 사랑의 아버지, 모든 필요를 아시고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아버지라는 믿음과 신뢰, 철저한 의존과 사랑을 발견할 수 있겠는가? 다윗이 기도한 것처럼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하게 되길 바란다( 19:14).

 

<죠지뮬러,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청교도인의 기도문> 등 기도의 사람들에게선 언제나 하나님과 친교를 누리고 싶은 갈망과 열정이 보인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회복해야 할 첫 사랑이다. 우리는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결단코 범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를 멈추지 않고 사랑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 아버지 사랑하기를 멈출 수 없기 때문이다.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리라 2: 기도는 예배다 /6:5-15/ 조정의목사

2021-09-01 10:21:21

 

기도는 관계다. 기도는 숙제가 아니라 만남이고, 주문이 아니라 친교다. 관계를 고려하지 않고 드리는 기도는 아무런 의미도 유익도 없다. 우리의 기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된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의미가 있다. 그리고 그 관계 속에서 누리는 기도의 축복과 은혜는 측량할 수 없을 만큼 값지다. 그때 기도에 역사하는 힘이 있다.

 

예수님은 본격적으로 기도의 본을 가르쳐 주시기 앞서 기도가 관계라는 사실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아닌 사람을 향하여 드리는 기도는 잘못됐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생각하지 않고 자기중심적인 요구만 하는 기도도 잘못됐다. 우리는 은밀한 곳에서 들으시고 우리 필요를 이미 다 아시는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한다. 아버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그 관계를 생각하며, 또한 더욱 친밀한 관계를 위하여 기도한다.

 

기도가 관계라는 사실은 우리 기도의 태도뿐만 아니라 방식 혹은 내용도 바꾼다. 살아계신 하나님과 인격과 인격으로 친교를 나누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의 본에서 우리는 기도가 우선적으로 아버지 하나님을 높이고 겸손히 그분께 복종하는 예배라는 사실을 배운다. 적어도 세 가지 면에서 기도는 예배이고, 그래서 기도를 쉬는 것은 예배를 멈추는 것이기 때문에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결단코 범하지 않아야 한다.

 

먼저, 예수님 가르쳐주신 기도의 시작을 살펴보자. 9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9절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잘못된 기도를 금하신 후, “그러므로 너희는이라는 말씀으로 예수님은 바른 관계 속에 있는 자들, 하나님의 백성들, 예수님의 제자들이 드려야 할 기도를 본격적으로 가르치셨다.

 

이렇게 기도하라는 명령은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이런 기도가 삶의 습관이 되게 하라는 명령으로(현재형), 2세기 중반 디다케(8.3) 문서에 따르면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하루 세 번 암송했다고 한다. 하지만 예수님의 의도는 이 내용을 주문처럼 반복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다. 우리가 드리는 모든 기도가 모두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의 틀로 빚어지기를, 기도의 내용이 아니라 방식에 있어서 모두 이 기도 원리를 따르기를 요구하신 것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는 우리와 관계를 맺고 계신 분, 우리 기도를 들으시는 분을 부르는 것으로 시작한다. “하늘에 계신은 단지 그분이 계신 장소가 아니라 하늘에서 모든 것을 감찰하시고 다스리시는 그분의 전능하심과 주권을 기억하게 한다. 그런 하나님께서우리 아버지이시라는 고백은 우리가 언제든지 기도로 친밀하게 그분께 나아갈 수 있고, 그분의 돌보심과 보호를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이 담겨있다.

 

그러면 기도가 예배라는 사실을 세 가지 관점에서 살펴보자.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 전반부(9-10)는 세 개의 요청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사실 하나의 연합된 요청이라고 볼 수 있다. 모두 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1. 기도의 순서에 있어서 기도는 예배다

 

예수님은 기도에 관한 가르침 말미에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라고 말씀하셨다(33). 그날의 필요를 하나님이 공급하신다고 굳게 신뢰하면서 가장 먼저 구할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라고 순서를 정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의 본 역시 그 순서로 되어 있다. 첫째,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9), 둘째, 나라가 임하시오며, 셋째,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10). 모두 하나님에 관한 것이다.

 

네 번째부터 마지막 일곱 번째까지의 기도는 우리 영육의 필요를 구하는 것이지만, 가장 먼저 제시된 기도는 철저하게 아버지 하나님 중심적이다. 십계명이 하나님과 관련된 법이 먼저 나오고, 이웃과 관련된 법이 나중에 나오는 것과 같다.

 

가장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는 것이고, 둘째 계명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라고 순서를 정하신 예수님은( 22:36-40) 기도도 가장 크고 첫째 되는 기도가 하나님을 위한 것,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되어야 하고, 그 다음으로 우리의 필요를 구하며 그분을 신뢰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어린아이는 항상 자기의 필요만 구한다.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거나 그 계획이나 생각을 들어보는 일은 아주 드물다. 하지만 자녀가 자라면서 성숙할수록 점점 자기 요구만 하고 필요만 구하는 게 아니라 부모의 뜻과 생각에 관심을 두고 필요를 채우기 원한다. 관계가 더욱 친밀해지고 성숙해진다는 증거다.

 

당신의 기도는 어떠한가? 당신은 먼저 하나님의 평판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가? 아니면 아직도 어린아이처럼 자기 것만 요구하는가? 데이비드 터너는 이렇게 말했다. “기도의 첫 번째 그리고 가장 중요한 목적은 자기 명분을 세우거나 자기 소원을 이루거나 자기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구하는 게 아니다. 기도는 우리 우선순위를 하나님 평판이 높아지고, 하나님 통치가 확장되고, 하나님 뜻이 실현되기를 구하는 것에 맞추는 것이다”(BECNT, 187p).

 

기도는 우리 마음의 묵상과 생각과 바람과 기대를 먼저 하나님의 것에 맞추는 예배이다. 죄성에 따라 항상 자기중심적인 삶으로 되돌아가려는 우리 육신을 쳐서 하나님 중심적으로 살도록 만드는 은혜의 방편이다. 그래서 기도하기를 쉰다면 우리를 제사장 나라 곧 예배하는 백성으로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께 불충하는 죄, 직무유기의 죄를 범하는 것이다. 기도는 예배다. 그래서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결단코 범하지 않아야 한다.

 

2. 기도의 제목(내용)에 있어서 기도는 예배다

 

앞서 간단하게 살펴본 세 가지 기도 제목은 모두 종말에 온전히 실현될 내용이다(“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이루어지이다모두 부정 과거, 미래 도래할 역사적 사건).

 

하나님의 이름 곧 그분의 성품, 권위 등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합당한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라는 9절의 기도 제목은 종말에 온전히 이루어질 것이다. 지금은 하나님을 멸시하고 배반하며 사는 이들이 훨씬 많다( 4:25-26; 12:32 참고).

 

10절에서 임하시기를 구한 하나님의 나라는 그분을 따르는 백성 안에 이미 시작된 측면도 있지만( 17:21; 1:6), 그 온전한 성취는 역시 종말에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통치, 다스리심이 모든 사람, 모든 민족에게 빠짐없이 미치는 그 날은 아직 오지 않았다. 현재 우리가 보는 죄악과 그에 따른 고통은 모두 그날이 오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마지막으로 뜻이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기도 역시 종말에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대로 만물이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게 순종하며 살아갈 그 날이 올 것이다. 지금은 패역한 세대요( 9:41), 불순종의 아들들이 사는 시대다( 2:2).

 

이처럼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는 순서상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분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 먼저일 뿐만 아니라, 내용상 철저하게 하나님이 앞으로 이루실 것들에 맞춰져 있다(“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이루어지이다모두 수동태,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이루실 그분의 계획과 뜻).

 

때로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구하고 그분의 의를 구하지만, 그 또한 지극히 자기중심적일 때가 많다(삶이 괴로우니까 빨리 천국이 도래했으면, 나를 괴롭히는 원수들에게 하나님의 뜻, 심판이 빨리 임했으면). 정말 아버지 하나님께서 멸시받고 거절 받는 상황에 분노하는가? 하나님의 주권이 온전히 실현될 날을 기대하는가? 하나님의 뜻이 만국에 미쳐 모든 만물이 그 뜻에 굴복할 날을 갈망하는가? 그것을 구하는 것이 바로 예배다. 예배자로 부름을 받은 자들은 반드시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 가르쳐주신 대로 기도하는 것을 멈춘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는 것이나 그분 뜻이 온전히 실현되는 것에 신경 쓰지 않으며, 그저 이 땅에서 내가 먹고 마시고 입을 것만 가끔 구하며 사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이는 반역이다. 하나님 나라가 이 땅을 정복할 것을 기대하는 백성이, 그 나라의 도래나 그 나라를 다스릴 왕의 명예와 통치를 거의 구하지 않으면서, 단지 지금 머문 곳에서 잘 먹고 잘살 것만 구한다면 말이다. 다른 말로 그런 기도는 예배하지 않으면서 구하기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하기를 쉬는 건 죄고, 그런 죄를 우리는 결단코 범하지 않아야 한다.

 

3. 기도의 실천()에 있어서 기도는 예배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는 순서상 하나님 우선적이고, 내용상 하나님 중심적이다. 먼저 하나님의 영광과 그분의 나라, 뜻을 구하는 기도는 그래서 예배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모든 기도를 이런 원칙에 따라 드리는 자의 삶은 어떠할까? 하나님 우선적이고 하나님 중심적인 기도를 드리는 자는 당연히 하나님 우선적이고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산다. 다시 말해 기도가 예배인 사람은 삶이 예배라는 것이다.

 

9절에 나오는 기도, 하나님께서 그분께 합당한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길 항상 구하는 자는 어떤 삶을 살까?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는 삶을 살 것이다(고전 10:31).

 

10절에 나오는 기도,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갈망하며 그분의 통치가 온 세상에 온전히 미치기를 항상 간구하는 사람은 어떤 삶을 살까? 거룩한 나라로서 아름다운 하나님의 덕을 선포하며 살 것이다(벧전 2:9). 어떻게? 하나님의 통치가 자기 삶에 이루어지도록 철저하게 그분께 복종함으로.

 

마지막으로 하늘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뜻이 땅에 온전히 이루어지길 항상 바라며 기도하는 사람은 어떤 삶을 살겠는가?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나타내신 뜻이 적어도 자신의 삶을 통해 실현되기를,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그분의 명령들을(뜻을) 지키는 것이 자기 본분이라고 생각하며 살 것이다( 12:13).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라고 말했다( 12:1). 어떤 사람이 이런 예배의 삶을 살 수 있는가? 이 세대를 본받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사람. 자기의 뜻이나 세상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을 구하는 사람.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구하는 사람이다( 12:2).

 

어떤 면에서 우리 삶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 영적 예배가 되는 데 실패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것을 구하지 않는데 어떻게 그렇게 살겠는가? 그러므로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모든 기도가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하나님 우선적으로, 하나님 중심적으로 빚어져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 우선적이고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살 수 있다. 예배의 기도를 드리면 예배의 삶을 살 수 있다.

 

욥은 사람으로서 당할 수 있는 고난을 최대한으로 받은 사람처럼 보인다. 재산을 모두 잃고, 자식을 모두 잃고, 배우자도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친구들도 자신을 정죄하는 상황에서 물론 낙심하고 탄식하긴 했지만 놀라운 믿음을 보여준다. 에스겔은 욥을 대표적인 의인으로 꼽고( 14:14, 20) 야고보 역시 욥의 인내를 복되다고 칭찬했다( 5:11). 그런데 비결이 뭘까?

 

욥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였다( 1:1). 그 대표적인 장면은 자기 생일잔치를 마치고 나서 혹 자녀들이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을까 하여 번제를 드린 것이다. 욥은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 받기를 구하였다. 그것을 구했고 그것을 위해 살았다. 히브리서 기자는 바로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한다고 선언했다( 11:38).

 

기도는 예배다. 그러므로 결단코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하지 말라. 우리는 영원히 예배받으시기 합당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그분의 나라와 의를 진실로 사랑하는 자들이다. 기도할 수 없을 만큼 큰 문제는 없고 기도가 해결하지 못할 장애물도 없다. 우리 하나님께서 모든 문제보다 크신 분이기 때문이다. 환난 중에 오히려 예배의 기도를 드려라.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하나님 안에서 평안을 누릴 것이다. 세상을 넉넉히 이길 것이다. 예배자로서 항상 살아갈 힘을 얻을 것이다.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리라 3: 기도는 신뢰다 /6:5-15/ 조정의목사

2021-09-01 10:23:10

 

11-13절은 우리가 주로 기도하는 내용이다. 하나님께 무언가를 요청하는 기도, 우리의 필요에 집중된 기도다. 혹자는 앞서 다룬 기도의 관계적 측면, 예배적 측면을 간과하고 본격적인 기도는 지금부터라고 착각할 수 있지만,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의 후반부에서도 우리는 기도가 관계이고 예배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14-15절에서 하나님은너희 하늘 아버지이고 죄를 사하여 달라는 기도는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요구하는 기도다. 또한 11-13절까지 하나님께 무언가를 달라고 요청하는 모든 기도에서 예배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 중 하나인 믿음, 신뢰를 발견한다. 그래서기도는 예배그리고신뢰이다.

 

기도에 반드시 믿음이 필요하다는 말은 비가 오게 해달라는 기도를 할 때 우산을 준비하는 것이란 예화로 종종 강조되었다.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자기 영광을 나타내실 때, 산 밑에서 남은 제자들이 귀신 들린 아이를 고치지 못해 애를 먹었는데, 나중에 예수님이 그들을 꾸짖으시면서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라고 말씀하셨다( 17:20). 그러면 믿음만 있으면 간구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인가?

 

기도가 신뢰라는 것의 의미, 기도할 때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이 무엇인지 본문을 통해 배워보자. 그리고 기도할 때마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대로 하나님의 공급하심, 회복하심, 보호하심에 대한 신뢰, 믿음, 확신의 기도를 드리자.

 

1. 기도는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11)

 

기도는 추상적이고 막연한 믿음의 고백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이미 아시고 공급하실 것을 신뢰하는 고백이다.

 

11절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양식을 구하라고 말씀하셨지만, 먹을 것만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일부로 전체를 나타내는 제유법이 사용되어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 등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물질적 필요를 가리킨다. 논쟁이 되는 표현은 양식을 수식하는일용할인데, 매일의 필요, 내일의 필요, 종말의 필요까지 구하는 것으로 범위가 넓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유대인은 아침 기도에서 오늘의 필요를 구하고, 저녁 기도에서 내일의 양식을 구하였다. 대부분 하루 일당을 받고 사는 이들에게 매일의 공급은 절실한 기도였을 것이다.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가 실질적인 그들의 염려였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냉장고에 음식이 가득하고, 옷장에 옷이 가득하며, 적어도 한 달 급여를 받고 큰 염려 없이 살아간다. 염려하지 않는다는 건 좋은 일이나, 그만큼 하나님께 철저히 의존하는가?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는 우리가 매일 하나님께 의존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우친다. 그분이 주시지 않으면 우리가 생존할 수 없다는 걸 가르친다. 넉넉하고 풍족한 우리도 염려할 때가 있다. 병에 들거나 갑작스러운 경제적 타격을 입거나 간절히 원하는 배우자, 자녀를 얻지 못할 때 깊은 염려에 빠진다.

 

예수님은 우리에게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6:34). 염려가 우리 상황을 조금도 개선하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갉아먹기 때문이다. 우리는 도리어 기도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고,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더하실 능력이 있는 아버지를 신뢰하며 간절히 구해야 한다( 6:31-33).

 

신뢰가 있으면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나? 모세는 약속의 땅 앞에 진친 이스라엘 민족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8:3).

 

우리는 떡을 얻기 위해 믿음으로 기도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떡과 상관없이 약속의 말씀을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기 위해 구하는 것이다. 누구도 알지 못한 생명의 떡, 예수님을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신 하나님께서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겠는가?( 8:32) 하나님을 신뢰하는 게 기도다.

 

2. 기도는 회복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12)

 

물질적 결핍이 고통을 가져오는 것만큼 깨어진 관계는 고통을 가져온다. 다윗은 시편 6편에서 원수로 인해 탄식하고 피곤하며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라고 토로했다(6). 시편 51편에서는 자기 죄로 하나님과 관계가 틀어졌을 때, 구원의 즐거움을 잃고 상한 심령으로 주 앞에서 쫓겨난 자처럼 괴로워한다. 살면서 우리는 자주 하나님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에 문제를 겪고, 그럴 때 그 관계를 회복하시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12절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죄는 빚과 같다. 갚기 전까지 나를 힘들게 만든다. 죄는 일차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일으킨 범죄이고, 그 죄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대가가 따른다. 누가 하나님께 자기 죄에 대한 대가를 완전히 지불하겠는가? 아무도 없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이다( 6:23).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죗값을 탕감하셨다. 그 아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다 이루었다’, ‘다 지불했다고 선언하셨고, 우리는 그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백성도 죄를 짓는가? 그렇다. 그러면 이미 용서받았으니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도 되는가? 그렇지 않다. 죄는 여전히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멀어지게 한다. 똥 묻은 자식도 자식이지만 그를 끌어안기 위해서는 먼저 오물을 씻어야 한다.

 

사도 요한은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우리가 죄를 지을 때 다음과 같이 하라고 명령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10).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는 바로 이 약속에 기초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 관계를 회복시키실 것이다. 그 약속을 신뢰하고 자백할 때, 그분께 죄를 용서해달라고 구할 때 회복하신다.

 

한 가지 흥미로운 단서가 붙어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형제자매를 용서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실 때 정상참작해 주신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용서를 구하는 자의 마땅한 태도를 말한다.

 

예수님은 이를 일만 달란트 빚진 자 비유로 설명하셨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빚을 진 종을 불쌍히 여기고 탕감해줬는데, 곧이어 만난 동료를 얼마 안 되는 빚 때문에 옥에 가뒀을 때, 주인이 어떻게 했는가? 너는 용서받을 자격이 없다고 말하면서 그를 옥에 가두었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18:35).

 

용서하는 사람만이 용서받는다. 참된 용서를 받은 사람은 용서하는 사람이다.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를 사랑하며 허다한 죄를 덮고 아들을 통해 죄인의 죗값을 모두 탕감하신 분께, 관계를 회복하실 것을 믿으며 구하는 기도, 그래서 기도는 신뢰다.

 

3. 기도는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13)

 

마지막으로 13절은 우리의 보호자, 아버지 하나님께 영적인 보호를 신뢰하며 구하는 기도이다.

 

13절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시는 분인가? 야고보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하나님은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1:13). 우리 믿음을 뿌리채 뽑히도록 흔들고 악에 빠지게 만드는 시험(유혹)은 사탄이 주도한다. 그래서 예수님의 기도에 악이 나온다(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악한 자 마귀가 바로 우리를 죄와 그 파멸의 열매로 빠져들어 가게 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에게 약속하신 게 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할 시험만 허락하신다. 때로 정말 감당하기 힘들어 고통스러울 때도 있다. 그때 피할 길을 내시고 능히 감당하게 하시는 분을 신뢰하며 구하는 기도가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이다. 이길 힘, 빠져나갈 방법을 달라는 기도이다. 그렇게 하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철저히 의존하는 기도이다.

 

죄가 얼마나 강하고 끈질기고 파괴적인지 느낄 때, 사탄이 얼마나 강력하고 지혜롭고 악한지 체감할 때, 이 약속을 기억하라.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 16:20).

 

모든 영적 전쟁에서,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사탄의 함정에서, 울부짖으며 우리를 삼키려는 사탄에게서, 하나님은 능히 우리를 보호하신다. 예수님은 우리를 그분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다고 말씀하셨고( 10:28), 아버지께서 만물보다 크시기 때문에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우리를 빼앗을 수 없다고 약속하셨다( 10:29).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이렇게 기도할 수 있다. 다만 악(한 자)에서 구하시옵소서.

 

이처럼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에서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신뢰와 믿음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풍족하게 공급하시는 아버지이시고, 놀랍게 회복하시는 아버지이시며, 신실하게 보호하시는 아버지이시다. 그 아버지를 믿는다는 고백, 신뢰한다는 고백, 철저히 의지하고 그가 베푸실 것을 확신한다는 고백이 바로 기도다. 그래서 기도는 신뢰고 하나님은 우리 기도에서 이런 믿음을 보기 원하신다. 다윗의 기도 역시 예수님 기도의 본을 따랐다.

 

우리가 신뢰하는 하나님은 100세의 노부부에게 아기를 주신 분이다. 사별한 이방 여인에게 기업 무를 남편을 만나게 하신 분이다. 홍해를 갈라 적군을 피하게 하신 분이고,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 없는 사막에서 40년간 매일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을 공급하신 분이다. 나면서부터 소경인 자를 보게 하신 분이고, 유대인과 이방인처럼 섞일 수 없는 민족을 한 몸으로 만드신 분이다.

 

교회를 핍박하고 죽인 자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만든 분이고, 인류 역사에 끊임없이 하나님의 백성을 몰살하려는 사탄의 시도에서 자기 백성을 구하시고 악을 선으로 바꾸어 주신 분이다. 특히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주셔서 자기 백성의 죗값을 대신 지고 죽게 하신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할 그 어떤 핑계도 만들 수 없게 한다. 당신은 아버지 하나님을 얼마나 신뢰하는가? 당신의 기도에 얼마나 그 믿음이 뒤따르는가?

 

러시아의 한 고아원에 있는 아기들은 울지 않는다고 한다. 울어도 아무도 오지 않는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때로 우리가 처한 상황이 심각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고아처럼 버린 아버지라고 오해하지 않는가? 갓난아기는 할 수 있는 것이 우는 것뿐이라서 부모에게 간절히 도움을 요청하고 부모가 자기 필요를 신실하게 공급할 걸 믿기에 운다. 당신은 하나님을 어떤 아버지라 생각하는가? 당신은 기도로 울고 있는가? 그 기도에 신뢰와 믿음이 담겨 있는가?

 

기도하기를 쉬는 것은 아버지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는 증거다. 아버지 없이 내 힘과 지혜로 살 수 있다는 교만이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결단코 범하지 말아야 한다.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리라 4: 기도는 함께다 /6:5-15/ 조정의목사

2021-09-01 10:26:28

 

기도의 네 가지 본질을 배웠다. 우리의 모든 기도를 예수님 가르쳐주신 기도의 틀로 빚어야 한다.

 

첫째, 기도는 관계다. 관계가 없는 기도는 허공에 외치는 주문이다(이방인). 사람 앞에서 하는 자랑일 뿐이다(유대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었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 우리는 그분의 자녀다. 기도는 전지전능하신 아버지와 그분의 자녀가 누리는 교제다. 그래서 기도는 아주 특별한 은혜, 특별한 권리이다.

 

둘째, 기도는 예배다. 관계 안에서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자세가 있다. 아버지와 대화할 때는 공경이 요구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기도로 나아갈 때 역시 우리는 경외심을 갖춰야 한다. 먼저 그분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 하나님께 마땅히 돌려야 할 영광을 구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드리는 모든 기도에 장착되어야 할 기도의 자세 곧 예배의 자세이다.

 

셋째, 기도는 신뢰다. 우리의 물질적, 관계적, 영적 필요를 구할 때, 우리는 염려하거나 불평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버지 하나님의 신실하신 공급과 회복과 보호를 신뢰한다. 있어야 할 것을 이미 아시는 아버지께서 주신다고 약속하셨다. 우리가 자백하면 아버지께서 죄를 사하신다고 약속하셨다. 만물보다 크신 아버지께서 반드시 지키신다고 약속하셨다. 그 약속을 신뢰하며 필요를 구하는 것이 바로 기도다. 그래서 기도는 신뢰다.

 

마지막 기도의 본질은 기도의 공동체적 특징이다. 예수님은 우리 각자가 가르쳐주신 기도대로 기도할 것을 요구하셨을 뿐 아니라 가르쳐주신 기도로 우리가 함께 기도할 것을 명령하셨다.

 

본문에서 예수님은너희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셨다(5, 8, 9, 14, 15). 무슨 말인가? 너희가 함께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도문에서도우리 아버지”(9), “우리에게”(11), “우리가 우리에게”(12), “우리 죄를”(12), “우리를”(13)이란 표현을 반복하여 사용하셨다. ? 우리를 위해 함께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현대사회는 갈수록 개인주의가 심화되고 그러면서 기독교 진리의 공동체적 성격이 점점 약화되고 있다. 기도에 있어서도 그렇다. 우리가각도’(각자 기도)를 선호하는 이유 중 하나는 공동체를 위한 대표 기도가 어색하고 불편하기 때문이다. 만찬 예배 시간에 회중을 대표하여 기도하는 게 왜 어려운가? 많이 안 해봤기 때문이다. 개인을 위한 기도를 자주 하지만 공동체를 위한 기도를 할 일이 별로 없다.

 

유평교회 기도 제목 책자엔 117가정의 성도 기도 제목이 적혀 있다. 그리고 제일 앞에는 교회 전체를 위한 기도 17개가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자주 성도 가정을 위해 중보기도 한다.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5:16). 하지만 우리는 우리 전체를 위한 기도를 드려야 한다. 그리고 자주 함께 있는 자리에서 우리를 위한 기도를 드려야 한다. 그렇게 공동체를 위한 기도를 드려야 하는 몇 가지 이유를 먼저 살펴보자.

 

1. 함께 기도해야 하는 이유

 

첫째, 우리는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3:15).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일대일 관계이면서 동시에 일대 다의 관계이다. 하나님은의 아버지이시면서 또한우리아버지이시다. 그리스도는의 신랑이시면서 또한우리의 신랑이시다. 주의 신부인 교회는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다. 우리는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인데, 그 몸은 여러 지체의 연합이다.

 

결혼한 신랑이나 신부가 자기를 위한 기도만 하는 건 참 이기적이다. 상대방을 위한 중보를 해야 한다. 나아가 한 몸인 가정을 위한 기도를 함께 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교회의 지체된 우리는 다른 지체를 위한 기도뿐만 아니라 몸 전체를 위한 기도를 드려야 한다. 교회가 하나님과 맺은 관계를 기억하는 공동체가 되도록, 그분의 나라와 뜻을 구하는 공동체가 되도록, 그분의 공급과 회복과 보호를 신뢰하는 공동체가 되도록 끊임없이 기도하자.

 

둘째, 성경엔 공동체적 기도가 많이 기록되어 있다. 성경은 많은 공동체적 기도를 담고 있다. 구약시대 대표적인 공동체 기도는 솔로몬이 성전 봉헌을 할 때 드린 기도다(왕상 8; 대하 6).

 

에스라가 성전 앞에서 백성과 함께 통곡하며 기도했던 장면도 있다( 10). 신약성경 사도행전에는 예수님께 기도를 배운 제자들이 공동체적 기도를 드리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교회는 맛디아를 세울 때( 2), 핍박받은 후 한마음으로( 4), 베드로가 투옥되었을 때( 12),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파송할 때( 13) 등 함께 기도했다(참고. 시편, 서신서의 공동기도).

 

특히 계시록 22 3절에서 우리가 하나님과 어린 양 예수님을 세세토록 섬긴다고 말한다(섬기다, 예배하다). 기도의 예배는 영속성, 그것도 공동체적인 영속성을 가진다. 하나님의 종들(복수) 즉 우리는 함께 영원토록 하나님을 예배할 것이다. 성경이 처음부터 끝까지 공동체적 기도를 이토록 강조한다면, 우리는 이를 간과하거나 무시해서는 안 된다.

 

셋째, 함께 기도할 때 함께 은혜를 경험한다. 국가대표 경기를 집에서 혼자 응원하는 것과 여럿이 함께 모여 응원하는 것은 확실히 다르다. 이기면 똑같이 기쁘지만, 체감하는 기쁨의 정도가 달라진다. 기도가 공동체적 성격을 갖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함께 그분을 경험하기를, 그래서 하나님 은혜를 더 크고 깊게 경험하길 원하신다.

 

가령 솔로몬의 봉헌 기도는 훗날 백성이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회복의 약속을 붙들게 했다. 에스라의 회개기도는 백성이 함께 민족의 죄를 회개하고 돌이키게 했다. 사도행전에서 온 교회가 한마음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은 기도에 응답하셔서 그들을 인도하고 지키고 보호하신다는 걸 경험하게 하셨다. 특히 사도행전 4장을 보면 기도한 후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라고 말한다(31). 하나님의 특별한 임재와 역사를 경험하는 것, 그것이 공동체적 기도가 가져다주는 은혜다.

 

2. 함께 기도하자

 

첫째, 기도로 동참하라. 우리가 한 몸이란 사실은 우리가 지체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만든다.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가장 많이 범하는 건 우리가기도하겠다라고 약속하고 쉽게 그 약속을 어길 때다. 아버지가 투병 중인데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는 자식이 있나? 자식이 서로 원수처럼 다투는데 화목하게 해달라고 구하지 않는 부모가 있는가? 중요한 일을 앞둔 가족을 위해, 구원의 길을 모르고 지옥으로 가고 있는 가족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남보다 못한 사람이다.

 

조금 더 그 가족의 개념을 확장하여 하늘나라 가족을 생각해 보자. 우리 중에 병과 싸우는 이들이 있다. 갈등 중에 가슴 아파 하는 이들이 있다. 코로나라 다들 어려운 짐을 지고 살지만, 남들보다 더 큰 짐을 지고 우는 이들이 있다. 교회 사역으로 성도를 섬기기 위해 자발적으로 봉사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을 위해 두 손을 모으지 않는다면 어떻게 내가 한 몸이라 말할 수 있는가? 그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으면 나는 교회를 내가 선택한 서비스 업체, 성도는 나를 위해 일하는 직원 정도로 여기는 셈이 아닌가?

 

유평교회 기도 제목 중 어떤 성도님은교회에서 실업자가 되지 않게 해달라라고 기도 제목을 내셨다. 은사를 가지고 성도를 섬기는 것이 곧 주를 섬기는 것이다. 하지만 가끔 자기 은사를 파악하기 쉽지 않다. 섬길 기회를 얻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걱정하지 말라. 누구나 쉽게, 하지만 열정적으로, 역사하는 힘이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바로 기도하는 일이다. 교회의 모든 사역에 기도로 동참하라. 교회의 모든 필요를 구하는 일에 기도로 동참하라. ‘기도하겠다라고 거짓말하지 말고 진실로 기도하라.

 

둘째, 함께 기도하는 자리에 함께하라. 교회는 처음 시작된 날부터 기도 공동체였다. 사도행전 2 42절을 보면 교회는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썼다. 여기 기록된 네 가지 활동(가르침, 교제, 떡을 뗌, 기도) 모두 공동체가 함께 모여 힘썼던 활동이다.

 

오로지~힘쓰다는 여러 번 기도와 연결되어 사용되었는데( 1:14; 6:4; 12:12; 4:2), ‘전심으로 하다’, ‘고집하다’, ‘탁월하다등의 뜻도 내포한다. 교회 사역의 핵심은 함께 기도하는 것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 교회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교회는 전심으로 함께 기도해야 한다. 기도를 고집해야 한다. 함께 기도하는 일에 탁월해야 한다.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함께 기도하기 위한 집회가 점차 사라지거나 매우 약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금요일 기도 집회는 겨우 명맥을 이어가는 곳이 많다. 수요일에 함께 기도하고 있지만, 참여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기도 제목 책자로 각자 기도할 수 있지만, 그 책자를 가지고 함께 기도하는 시간에 얼마나 동참하고 있는가? 만일 소그룹이 모여서 기도하는 시간을 갖자고 한다면, 당신은 얼마나 그 기도 모임의 필요성을 느끼는가? 얼마나 그 모임에 참여하기 원하는가?

 

기도하지 않는 교회는 부흥할 수 없다. 아니, 기도하지 않는 교회는 생존할 수 없다. 교회는 함께 기도하는 집이다. 교회가 함께 기도하는 자리에 반드시 함께하라. 자신을 쳐서 복종시켜라. 기도에 최우선 순위를 두라. 오로지 함께 기도하는 일에 힘쓰라.

 

셋째, 공동체를 위한 기도를 훈련하라. 공동체를 위한 기도는 일상에서 훈련이 가능하다. 남편은 가장으로 가정의 영적 인도자다. 가정에서 대표로 기도하면서 교회 공동체를 위해 기도할 수 있다. 자녀는 부모의 본으로 양육 받는다. 아빠의 기도로 기도의 본질을 맛보는 특혜를 입는다. 아빠의 기도에서 하나님을 아는 관계적 지식을 얻는다. 아빠의 기도에서 예배를 배운다. 하나님을 신뢰하게 된다. 그리고 공동체를 위한 기도에 동참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 명하신 것을 보라. 하나님 구원의 손길을 기억하게 하고 공동체가 함께 경험하게 하기 위해 유월절을 기념하면서 가정이 함께 기도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피와 살로 맺은 새 언약을 우리가 어떻게 기억하는가? 공동체가 함께 기도하면서 은혜를 함께 맛보지 않는가?

 

일상에서 공동체를 위한 기도를 실천하라. 식탁에서 가족과 함께 둘러앉았을 때, 교회를 위해 기도하라. 교회에서 함께 기도하고 있는 기도 제목을 자녀가 알게 하고, 그 기도에 하나님이 어떻게 응답하셨는지 말해주라. 개인적인 기도도 필요하지만, 자주 가족 구성원, 성도와 함께 기도하라. “우리 같이 기도할까요?” 이 말이 당신의 입에서 자주 흘러나오기 바란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공동체를 위한 기도가 잘 훈련된 사람은 교회 전체를 위한 기도하는 자리에 서기 더 쉽다는 것이다. 평소에 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예배의 날 교회가 함께 모인 자리에서 대표로 기도드리기 쉽다. 가정을 기도로 인도해본 사람이 교회를 기도로 인도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공동체를 위한 기도를 부지런히 훈련하라.

 

J. C. 라일은 <기도를 잃어버린 당신에게>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몸에 생명이 있는 것처럼 신자의 영혼에는 믿음이 있습니다. 호흡으로 몸이 사는 것처럼 믿음은 기도로 삽니다. 숨을 쉬지 않고도 살 수 있는 몸이 있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믿음이 있다는 사람이 기도하지 않을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19페이지).

 

기도하기를 쉬는 죄는 믿음의 호흡을 멈추는 자살행위와 같다. 기도에서 멀어지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멀어진다. 기도를 멈추면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도 멈춘다.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의존하지 않게 되고, 기도를 쉬면 하나님을 신뢰하는 일도 쉬게 된다. 이래도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할 것인가?

 

기도의 영웅이나 기도의 위인은 없다. 영웅과 위인은 하나님 한 분뿐이시다. 의인의 기도에 역사하는 힘이 많은 것은 하나님께서 역사하는 힘이 많으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을 움직인다.

 

기도할 때 하나님이 우리 가까이 임하신다. 기도할 때 우리 마음이 자기중심적, 사람 중심적인 우상숭배에서 하나님 중심적인 예배의 마음으로 가지런히 정리된다. 기도할 때 우리 모든 염려가 사라지고, 하나님 주시는 평강이 우리 마음과 생각을 모두 지키신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이렇게 선언하자. ‘나는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리라.’

 

 

 

이렇게 기도하라(1) /6:9-13

2019-11-25 01:07:58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기도는 매우 중요하다. ‘기도하나님과의 대화또는영혼의 호흡라고 한다. 숨을 쉬지 않고 살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기도 생활을 거의 하지 않고 사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은 영적으로 거의 죽은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사람도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는가?

 

그래도 주일이면 예배당에 나와 예배에 참석하는 것을 보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다.

계시록 3장에 사데교회 신자들이 이런 상태에 있었다.

 

네가 살았다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로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영적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특별한 조치가 있는데 성령께서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신다.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영적으로 중환자실에 누워 산소호흡기로 연명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얼마나 답답하고 힘들겠는가? 속히 그런 상태에서 벗어나야 할 줄로 믿는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상태에 있다.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기도에 대한 오해와 무지 때문이다. 그렇다면 영적으로 싱싱하고 활력 있게 되는 방법은 무엇인가? 기도의 법을 알아야 한다.

 

 

지난 주일 예수님께서는 실패하는 기도의 두 가지 사례를 말씀하셨다.

 

첫째는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처럼 외식하는 기도. 둘째는 이방인들처럼 중언부언 말을 많이 하는 기도. 이런 기도는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신다. 유대교의 지도자들이나 이방인들의 기도가 잘못된 기도임을 지적해 주셨다. 그럼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기도는 은밀한 기도, 골방 기도를 말한다. 골방기도는 문자적으로 골방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나님과 독대할 수 있는 환경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열어 놓고 하나님과 통하는 기도를 원하신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기도나, 응답 받는 것이 목적인 기도를 원치 않으신다.

 

지난 주일 5-8절의 말씀이기도의 법에 대한 서론이라면, 오늘 9-13절의 말씀은 기도의 본론이라 할 수 있다. 이 기도를 우리는 보통주기도문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기도하라

 

오늘 본문 9절에서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로 시작하고 있는데, 앞에그러므로라는 접속사는 앞 문장의 내용과 대조될 때 사용한다. 바리새인들과 이방인들이 하는 기도대로 하지 말고 내가 일러주는 대로 기도하라는 뜻이다.

 

보통 학자들은 주기도문을 기도의 최고봉이라 말한다. 성경에 나와 있는 훌륭한 믿음의 사람들의 기도가 많다. 시편에는 다윗의 주옥같은 기도문들이 많이 소개되고 있다. 그런 많은 기도 가운데서주기도문을 최고의 기도라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친히 가르쳐주신 기도이기 때문이다. ‘주기도는 기도하는 법과 무엇을 기도하는가에 대한 완전한 교훈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주기도문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에서 가장 많이 남용되는 기도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떤 목사님은 탄식하듯 이런 말은 했다.

 

대한민국에서주기도문이 가장 많이 순교당하고 있다!”

 

교회 안에서 모임을 마무리할 때 생각없이 마무리용으로주기도문을 애용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주기도문은 성도의 입에서 떨어져서는 안될 중요한 기도문이다.

 

 

주기도문의 구조

 

주기도문의 구조는 부름과 6개의 기도 항목과 마지막에 송영으로 되어 있다. 6개의 기도 항목은 그리스도인들의 기도에서 빠질 수 없는 핵심되는 내용들이다.

 

6개의 기도 항목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앞의 세 항목은 하나님께 대한 내용이다.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광에 관심을 가지며 오로지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한 기도이다. 그리고 뒤의 세 항목은 우리 자신들과 관련된 내용들이다. 일용할 양식, 죄에 대한 용서, 시험에 들지 않도록 구하는 것이다.

 

이 기도는 순서적으로 하나님과 관련된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철저하게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도록 하셨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은 기도의 원칙이다.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기도를 해도 실패하고 응답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순서를 따르지 않고 먼저 일용할 양식부터 구하기 때문이다. 나의 기도를 잘 점검해 보기 바란다. 주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대로 했는가?

 

주기도를 바르게 잘 알고 그대로 시행해 보기 바란다.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기도, 응답 받는 기도, 영혼이 살아나는 기도, 기도의 능력자가 될 줄로 믿는다. 오늘은 부름과 첫 번째 항목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1) 하늘에 계신...

 

여기서 말하는 하늘은 어떤 지정된 장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유대인들은하늘에 대한 개념을 세 가지로 나누었다. 첫째 하늘은 새들이 날아다니는 공간, 둘째 하늘은 해 달 별들이 떠 있는 공간, 셋째 하늘은 하나님이 계시는 공간이라고 생각했다. 사도 바울은 고후 12장에서 셋째 하늘, 곧 삼층천에 대한 체험을 말한 바 있다.

 

그러니까주기도에서하늘은 삼층천, 곧 하나님이 계시는 신적공간, 신적장소를 의미하는 것이다. 만약 우주계 어디엔가 하나님이 계시다면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의 속성에 어긋나는 것이다.

 

23:24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하나님이 존재하시는 공간은 현재 우리가 사는 장소와 전혀 다르거나 유리되어 있지 않다. 하나님은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면 어느 곳이든 계신다. 그러나 우리 사람이 살고 있는 지상공간보다 훨씬 더 존귀한 곳에 계신다는 뜻에서 하늘에 계신다고 표현하신 것이다.

 

 

2) 우리 아버지여!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이라고 부르지 않고아버지라 부르도록 하신 것에 대하여 마음에 진한 감동을 느끼게 된다. 어떻게 우리가 감히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겠는가? 하나님과 관계 없이 살던 때의 모습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2: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15, 탕자의 비유에서 둘째 아들은 아버지 앞에 범죄함으로아버지라 부를 수 없다고 독백하고 있다.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자격을 스스로 차버린 불효 자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그를 받아 주었다. 아버지의 사랑이 그를 품어 주었기 때문이다.

 

우리 역시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이었는데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아버지라 부를 수 있었던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때문이다.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빠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내게는 지난 어린 시절의 아픔이 있다. 초등학교 6학년 가을에 아버지가 갑자기 과로로 쓰러지셨다. 회복되지 못하고 일주일만에 세상을 뜨셨는데 그 이후로아버지란 호칭이 내게는 낯설어졌다. 아버지가 계시지 않는 세상은 참담했다. 수년 동안 그 어두움에서 벗어나는데 힘들었다. 이 세상에서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존재가 없다는 것이 참 슬펐다. 명랑했던 소년은 그 후로 말이 없고 과묵한 사람이 되었다.

 

20대 중반에 하나님께서 내 인생에 찾아오셨다. 예수님을 영접하였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을 한 가지 발견하게 되었다. 교회 청년들이나 집사님들이 툭하면아버지!’ 기도할 때도아버지하는 것이었다. 몇 년이 지난 후에 내 입에서도아버지란 호칭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하나님께서 나의 아버지되심을 알고 부르게 되었을 때 어린 시절의 아픈 상처가 치유되었고 육친의 빈자리가 더 이상 나의 슬픔이 되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어린 시절아버지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박혀 있어서하나님 아버지란 호칭을 피하는 경우도 있다. 술 먹고 고함지르고, 어머니를 때리는 아버지, 사납고 무정한 아버지의 모습은 신앙생활에 장애물이 된다. 육신의 아버지는 가정의 고통되기도 하지만 하늘 아버지는 그렇지 않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친밀하고 자비하신 분, 우리를 늘 살피시고 필요를 채워주시려는 사랑의 아버지이시다. 무디, “기도는 아버지와 더불어 함께 있는 것이다.”

 

여러분에게 문제, 아픔이 있는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기다리고 계신다. 우리 아버지 앞에 나아가서 엎드리기 바란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이제는 주의 기도 첫 번째 순서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다시 한 문장으로 다시 정리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라 할 수 있다.

 

구약시대 성경 필사자들은, “하나님자가 나오면 나가서 손을 씻고 와서 썼다고 한다. 그리고 읽을 때는 묵음으로 지나갔다고 한다. 그들의 이런 행위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이름의 거룩함을 드러내려 했다.

 

하나님의 이름은 성경에서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는데 하나님의 이름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사용되고 있는지 몇 가지만 살펴보고자 한다.

 

1) 엘로힘, - 이것은 하나님의 힘, 능력을 의미한다. 이 이름을 사용하실 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의 힘과 지배와 능력에 대한 힌트를 주셨다.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 엘 솨다이 -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구원의 원천, 능력이 충만하신 하나님을 나타낸다.

 

17:1 "아브람의 구십 구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3) 엘욘 - 지고하신 하나님

 

24:16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가 말하며 지극히 높으신 자의 지식을 아는 자, 전능자의 이상을 보는 자, 엎드려서 눈을 뜬 자가 말하기를"

 

 

4) 여호와 - 영원히 자존하시는 하나님을 나타낼 때여호와라는 이름으로 나타내셨다.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그 외에도 여러 이름이 있다. 이와 같은 다양한 이름은 온 세계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한 소원의 표현이다. 예수님의 기도 가운데서 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17장은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이다.

 

17:4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6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예수님은 항상 아버지의 영광에 관심을 두셨다.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해 오셨고, 이 세상에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시기 위해 오셨다. 이 목적이 제자들을 통해 전해지길 원하셨고 그것을 위해 기도하셨다.

 

그렇다면 그의 백성들을 통해서 그들의 삶 속에서 거룩하고, 존귀하고, 영광스럽게 나타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할 수 있는가?

 

1)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그의 이름이 거룩해 진다.

 

33:21 "우리 마음이 그를 즐거워함이여 우리가 그의 성호를 의지하였기 때문이로다"

 

위대한 사상가 파스칼은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하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했다.

 

 

2)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나아옴을 인해 거룩해 진다.

 

10:3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이르시기를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겠고 온 백성 앞에서 내 영광을 나타내리라 하셨느니라"

 

내 삶의 처음이자 마지막 되심을 믿고 가까이 가서 마음을 열어 그분을 경배하는 시간이 많을 때 나의 삶을 통해 영광을 나타내신다.

 

 

3) 영광을 가로채지 않고 하나님께 돌릴 때 거룩히 여김을 받으신다.

 

115:1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는 인자하시고 진실하시므로 주의 이름에만 영광을 돌리소서"

 

) 세례 요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4) 우리의 생활을 통해서 주님의 이름을 존귀케 하는 것이다.

 

5: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알렉산더 대왕의 휘하에 알렉산더라는 병사가 있었다. 전투에서 도망치다 붙잡힌 어린 소년 병사가 왕 앞에서 두려워 떨고 있었다. 왕이 어린 소년 병사에게 이름을 물었다.

 

네 이름이 뭐냐?”

알렉산더입니다.”

뭐야? 알렉산더! 네게 명하노니 이제 네 이름을 바꾸든지 아니면 네 삶을 바꾸어라.”

 

우리가 부모님의 이름에 욕되지 않도록 조심한다. 하물며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스런 이름 앞에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우리의 삶을 통해 하늘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살아야 할 책임이 있다.

 

2년 전 가을, 국내 최고령 여의사 한원주씨에 대한 내용이 방송을 탔다. 당시 91. 매그너스재활요양병원의 내과과장이다. 5회 성천상 수상자로 내정되어 소감을 말하는데, “남은 삶이 허락하는 날까지 환자들의 옆을 지킬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분은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가 그리스도인인 것을 다 알았다. 말 없이 자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을 높였을 뿐이다.

 

 

 

결론적 메시지

 

어느 교회 집사님, 하는 일마다 안되니까점을 한 번 쳐볼까?”라는 마음이 들었다는 말을 들었다. 신앙생활 잘못한 것이다. 농담이라도 이런 말을 해서는 안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렇게 기도하라!”

 

엉뚱하게 기도하기를 멈추어야 한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깊이 묵상할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의 기도의 대상은 살아계신,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그분은 여호와 이레, 여호와 랍바, 여호와 닛시, 여호와 샬롬, 여호와 라아(목자)이시다.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우리의 아버지시다.

 

그리고 우리를 통해서, 나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 받기를 원하신다.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8:16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이런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내며, 더 깊고 놀라운 기도의 세계로 들어가는 성도가 되기를 축원한다.

 

 

<주기도송>

 

하늘에 계신 아버지 이름 거룩하사 주님 나라 임하시고 뜻이 이루어지이다. 일용할 양식 주시고 우리들의 큰 죄 다 용서하옵시고 또 시험에 들게 마시고 악에서 구원하소서. 대개 주의 나라 주의 영광 영원히~ 아멘

 

 

 

이렇게 기도하라(2) /6:9-13

2019-11-25 15:08:05

 

처음 교회당에 나온 후 6개월 정도 지났을 때 학습 문답을 받아야 한다고 해서 준비해서 문답을 받았다. 문답 중에는 3가지 암송 사항이 있는데, 사도신경, 주기도문, 십계명이었다. 세례 받을 때도 같은 질문을 받았다. 문답에 통과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암송해야 했다.

 

그런데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선배들에게 물어봐도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대표적인 것이 사도신경의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였고, 주기도문의나라이 임하시오며였다. 2006년도에 개정판이 나오면서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그리고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라고 새롭게 번역이 되었다. 뜻이 이전보다는 분명해졌지만 그 의미를 제대로 알고 암송하는 성도가 많지 않다.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서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으로 인해 예배 중에 이중창으로 고백할 때가 많다. 어느 교회에서는 구 버전으로 어느 교회에서는 신 버전으로 고백한다. 짜증이 날 정도 혼란스럽다. 센스 있는 사회자는신앙고백은 새로 번역된 것으로 고백하겠습니다라고 멘트하기도 한다. 답답한 마음에 수 년 전 총회 석상에서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을 신 버전으로 통일해서 사용할 수 있도록 헌의한 적이 있었다.

 

답변은 각 교회에서 자유롭게 선택하여 사용할 것을 권하였다. 혼란은 지속될 수 밖에 없었다. 예배에 참여할 때마다 은혜가 되질 않아서 개혁신보에 소견을 발표한 적도 있었다. 다행스럽게 새롭게 번역된 것을 사용하는 교회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난 주일, 주기도문의 첫 번째 기도를 살펴 보았다. 예수님께서 무리에게 가르쳐주신 첫 번째 기도는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인데, 이 기도를 쉽게 풀어 설명하면, “아버지께서 우리를 통하여 당신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소서라고 할 수 있다.

 

이 기도는 최고의 기도 중에서 첫 번째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첫 번째 목적이기 때문이다. 웨스트민스터소요리문답 제1번의 질문,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이에 대한 대답은,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고 선언하고 있다.

 

여러분, 아무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구속함의 은총을 받은 성도, 곧 하나님의 자녀들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존재 목적,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것을 외면하고 자신을 높이기 위해 산다면, 그것은 바벨탑을 쌓는 교만이요, 헛된 삶을 사는 어리석음이라 말할 수 있다. 세상의 즐거움을 모두 버리라는 말이 아니라 우선순위가 무엇인가를 분명히 하라는 뜻이다.

 

나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영화롭게 되기를 원합니다.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이런 기도가 나의 기도에 첫 번째가 되기를 바란다.

 

두 번째 기도는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이다. 짧은 내용이지만 그 속에 담긴 비밀과 보화는 엄청나다.

 

 

1.아버지의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아버지의 나라하나님의 나라를 가리킨다. 이것은 또한 세속 국가와 반대 개념을 갖는다. 국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3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국민, 주권, 영토. 일제강점시대에는 국민이 있고, 영토가 있었어도 주권을 빼앗겼기 때문에 국가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주권이 없었기 때문에 수 많은 고난과 수탈을 당하였다.

 

하나님의 나라는, 주권이 하나님께 있는 나라이다. 세상나라는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대통령은 국민의 뜻을 따라 나라를 다스리도록 권력을 위임받은 자이다. 국민 다수가 원치 않으면 내려와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이다.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이기 때문에 그 나라는 공평과 정의, 사랑과 신뢰, 자비와 평화가 있는 나라이다.

 

그러나 세상나라는 그렇지 않다. 인류가 지면에 번성하면서 각 지역과 부족에 따라 나라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인류 역사 가운데 나라의 기원은 그리 오래지 않다. 고대 국가인 이집트도 BC 3천년 경에 시작되었다. 국가의 형태를 띠기 시작한 것은 5천년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역사는 전쟁의 역사다. 끊임없는 흥망성쇠가 오늘까지 이어져 왔고 앞으로도 전쟁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세상나라는 경우에 따라 정도 차이는 있으나 아무리 좋은 복지국가라 해도 범죄와 질병, 죽음과 이별이 있다. 그래서 이 세상나라에는 소망이 없는 것이다. 그러면하나님의 나라는 어떤가? 계시록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21: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무고, 무루, 무한, 무사의 나라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나라를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 이유는 그 나라는 죽어서 가는 나라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신앙생활하는 것은 천국 가기 위한 대합실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또 이해가 안되는 것은 그 좋은 천국을 빨리 가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죄악된 세상에서 천수를 다 누린 다음에 가고자 한다. 천국에 대한 무지와 오해의 결과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도 모든 성도들이 천국을 누리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예수님께서아버지의 나라가 임하도록기도하라고 가르쳐주고 계신 것이다.

 

 

2. 하나님 나라의 특성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천국의 삶을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나님 나라의 특성을 알아야 한다. 물론하나님의 나라천국은 개념상 차이가 있다. 그러나 혼용해서 사용해도 문제가 없기 때문에 혼용하기로 하겠다. ‘하나님의 나라는 세 가지 특성이 있다.

 

1) 도래한 하나님의 나라

 

세례 요한의 첫 번째 메시지는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였다. 이어서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의 첫 메시지도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였다.

 

천국의 임박을 알리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와 예수님의 등장에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특별히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탄생을 왕의 탄생으로 증거하고 있다. 1장의 족보는 다윗의 족보 곧 왕의 족보이다. 2장에서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이렇게 묻고 있다.

 

2:2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3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이러한 사건들은 예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다. 또 하나의 증거는, 예수님께서 귀신들려 귀먹고 벙어리된 자를 고쳐주셨는데, 바리새인들이 보고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쫓아낸 것이라고 예수님을 비방했다. 이때 예수께서 이렇게 답변하셨다.

 

12:28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고, 그분의 사역을 감당하는 것을 보면 이미 하나님의 나라, 천국이 임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이다.

 

 

2) 현재적 천국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고 계시다면 바로 그 순간 현재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현재적으로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할 수가 없다.

 

3장에 밤에 유대교의 지도자인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 왔다. 그리고 예수님께 질문했다.

 

어떻게 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이런 현상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도 현재적이다. 다만 사람들이 느끼지 못할 뿐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가능하다.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셨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14:6).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믿고 고백할 때 내 심령 속에 하나님의 나라, 천국이 임하게 되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이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임하느냐고 물었다. 예수님의 답변이 이렇다.

 

17:20 ...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21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3) 미래적 천국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심은 구원을 위함이었다. 그러나 다시 오실 예수님은 심판의 주로 오신다. 사도신경의 마지막 부분의 고백은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내용이다. “거기로부터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24장에서도 예수님께서 친히 재림의 징조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사랑이 식어지고, 개인주의 이기주의 세상, 거짓 선지자, 이단, 천재지변, 기상 변화 현상이 나타난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살전 4장에서 구체적으로 언급하였다.

 

살전 4: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심판의 주가 오시므로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 천국이 시작될 것이다. 이것이 미래에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이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특성을 알지 못하면 죽어서 가는 천국만 바라보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지고 있으면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고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는 소망을 갖게 되는 것이다.

 

여러분, 사람은 소망으로 사는 존재이다. 소망이 없으면 낙심하게 된다. 그러나 소망이 있을 때 인내하게 되고 믿음이 흔들리지 않게 된다. 성도들은 미래의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산 소망이 있는 존재임을 명심하기 바란다.

 

 

3.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시도록 기도해야 하는 이유?

 

하이델베르그요리문답 123문에서주기도문의 둘째 간구는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하여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주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를 통치하시사 우리가 점점 더 주님께 순종하게 하옵소서. 주님의 교회를 보존하시고 흥왕케 하옵소서. 마귀의 일들과 주님께 대항하여 스스로 높이는 모든 세력들, 그리고 주님의 거룩한 말씀에 반대하는 모든 악한 의논들을 멸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나라가 온전히 이루어져 주께서 만유의 주가 되실 때까지 그리하옵소서!”

 

 

1) 주의 다스림에 순종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을 말씀과 성령으로 다스리신다. 성도들이 자신 삶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불순종이다. 세상 나라는 법과 권력으로 다스린다. 만약 불순종하면 벌금을 부과하고 감옥에 가두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공권력을 동원하고 무력적으로 제압하지 않는다. 그래서 주의 말씀을 가볍게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주의 말씀에 불순종한다고 해서 당장 무슨 어려움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순종하지 않을 때 하나님 나라의 그 놀라운 은혜를 잃어버리게 된다.

 

그래서 성도는 주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주의 다스림을 받도록 기도해야 한다. 주의 나라가 내 심령 속에 임하시도록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2) 주의 교회가 세상에서 선한 영향력을 끼치기 위하여

 

독일의 신학자인 본 회퍼목사는예수님께서는 지금 교회로 이 세상에 존재하신다라는 말을 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주님께서는 교회를 통해서 공생애 동안 행하셨던 일들을 교회가 수행하길 원하신다.

 

소금은 맛을 내야 하고, 빛은 어두울 때 그 효력이 나타난다. 그러나 소금이 사람들에게 짓밟히고, 빛을 말 아래 두면 비출 수가 없는 것이다. 성도는 교회의 구성원이다. 교회가 이 세상에서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것은 본질적 사명이다.

 

오늘날 교회가 교회로서의 그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책임을 느끼고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그 지역 사회에 나타나도록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3) 악한 영 마귀의 세력을 제어하여 주께서 왕되심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도 바울은 이렇게 증거했다.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 땅에 복음을 훼손하고, 성도들을 흔들어대고, 교회를 핍박하는 세력의 뒤에는 반드시 마귀의 음모가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통치가 이뤄지지 않도록 교묘한 방법과 전술로 유혹하고 무너뜨리려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성도들 심령 속에 파고 들어가 자아가 왕이 되도록 부추긴다. 재물이나 세상의 권력이나 쾌락의 종노릇하도록 유혹한다. 이런 상황을 빨리 깨닫고 영적으로 무장해야 한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권면하는 것이다. 우리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 마귀의 궤계를 이기고 하나님의 나라가 서기 위해 성도들은 기도해야 한다. 주님의 나라가 온전히 이뤄지기까지 기도해야 한다.

 

 

4.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야 할 성도의 사명

 

13:33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예수님께서는 천국을 누룩으로 비유하셨다. 누룩은 빵을 만들때 반죽을 부풀게 하는 발효제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이와 같다는 것이다.

 

첫째는 화학적 변화가 나타난다. 누룩이 들어가므로 인해 부풀게 되고 밀가루 본래의 성질이 빵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본질적 변화라고도 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두 번째는 반죽 전체로 번져나가는 확장성이 있다. 조용하지만 눈에 띠지 않게 변화를 확산시켜 나가는 것이다. 이것은 성도와 교회의 역동적인 힘과 역량을 가리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말씀하셨다( 12:24). 예수님의 마지막 부탁의 말씀도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다.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왜 이렇게 해야만 하는가? 죄악된 세상에서 유일한 소망이 예수 그리스도이며 복음의 전파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되기 때문이다.

 

 

결론적 메시지

 

20:20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가? 인간의 욕망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오해 때문이다. 이런 오해로 인해서 불필요한 다툼과 경쟁에 휘말리게 된다. 그런데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은 오늘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의 마음 속에도 자리잡고 있는 생각이다. 예수 믿고 잘 되고, 예수 믿고 성공하고 싶은 것이다. 이런 마음이 있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맛볼 수 없다.

 

먼저 우리 자신에게 질문해야 한다. “너는 어느 나라에 속한 자인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속한 자,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세상 나라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도 말했다.

 

3: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한다. 비록 우리가 이 세상 나라에 속해서 이 땅에 살고 있지만 그러나 우리가 돌아가야 할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다. 이 세상에 살지만 이 세상에 물들어서는 안된다. 도리어 이 세상에 살면서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면서 살아야 한다. 이미 우리에게 그런 권세를 주셨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 가운데 바라보면서 살아야 한다. 이것이 우리에게 부담이라기보다 도리어 감사와 기쁨이 되어야 한다.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우리 각자의 삶을 통하여 우리 자신의 심령 속에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의 가정과, 직장 뿐만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 - 정치, 경제, 문화, 과학, 예술, 산업. 스포츠 - 하나님의 나라가 나타나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세상의 길 위에서 하나님의 길을 걷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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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기도하라(3) /6:9-13

2019-11-26 02:36:07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주기도문은 크게 두 단락 6개의 기도로 구성되어 있다. 앞 부분은 하나님께 대한 기도이고, 뒷 부분은 우리들과 관련된 제목들이다.

 

앞 부분의 세 가지 기도는 서로 관련성이 있다. 두 번째 간구인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는 첫 번째 간구인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실 때그 나라가 성취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아버지의 나라, 곧 하나님의 나라는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는 곳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아버지의 뜻이 완벽하게 성취되는 곳이다.

 

이런 연관성을 가지고 있음을 이해할 때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중요함과 필요성을 절감할 수 있고, 크고도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오늘 세 번째 기도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겠다. 본문 10절에서, 주기도문의 세 번째 기도는 ...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찬송가 앞에 나와 있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으로 번역되어 있다. 그렇다면 세 번째 기도에서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주제는아버지의 뜻’, ‘하나님의 뜻이다.

 

아버지의 뜻, 또는 하나님의 뜻이란 무엇인가?

 

어느 성도가 물었다. “목사님,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일반적으로 납득되는 수준을 넘어서는 경우에는 대답하기가 쉽지 않은 경우도 있다. 그러나 성경에는하나님의 뜻이 분명하고도 다양하게 표현되어 있다. 좁은 의미에서 일상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을 예로 든다면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살전 5:16 항상 기뻐하라 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18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기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아무래도 성경 전체에 흐르고 있는 구속사 곧 구원의 약속과 관련된 것이라 할 수 있다.

 

2:23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1: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1:11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궁극적인 하나님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것이다. 그곳은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으시는 곳이며,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뤄지는 곳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이 완벽하게 실현되는 곳은 어디인가? 현재 이 지구상에는 없다. 그러나 성경 가운데는 있었다. 그곳이 바로 에덴 동산이었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다. 동산 안에는 진정한 평화와 사랑, 풍요와 기쁨이 있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말씀하시는대로 다 이뤄졌다. 정말 하나님의 통치가 완벽히 이뤄지는 곳이었다. 모든 만물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였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지으셨다. 그것이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첫 명령을 내리셨다.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한 동안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유지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에 빠져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동산 중앙의 선악과를 따먹고 말았다. 죄가 인간의 마음 속에 들어옴으로 인해 동산의 평화는 깨지고 말았다.

 

그 때로부터 인간은 자기 속에 왕국을 만들고 스스로 왕이 되기를 원했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자기 고집, 자기 생각대로 살기 시작한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을 포기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모습을 사도 바울이 잘 묘사했다.

 

3: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3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16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모습이다. 인생들은 누구나 예외 없이 불행하게 되었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전적으로 타락한 절망적 상태에 놓이게 된 것을 잘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소망이 없는 인생들에 대한 놀라운 계획을 준비하셨다.

 

그것이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무너진 에덴 동산을 회복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에 나타난하나님의 뜻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도록 기도하라!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이 말씀에 대한 쉬운 성경의 번역을 보면,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이 세상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라고 되어 있다. 하늘에서 계획하신 아버지의 뜻이 이 세상에서 이뤄지도록 기도하라는 말씀이다.

 

이 기도는 성도들에게만 주어진 놀라운 특권이다. 불신자들은 하나님의 뜻에 무관심할뿐더러 기도할 자격도 없다. 그렇다면 성도들은 어떤 자세로 기도해야 하는가?

 

앞서 언급한대로 주기도문의 앞 부분, 하나님께 대한 간구는 서로 상관관계가 있다. 그 관계 속에서 올바른 기도의 자세를 찾을 수 있다.

 

 

1) 인간의 존재 목적을 바르게 인식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원래 바리새파 사람이었고 율법의 추종자였다. 그는 자신을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소개했었다. 철저한 율법주의자였다. 율법을 준수함으로 의를 이룰 수 있다고 믿고 주장한 사람이었다. 행위구원론자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예수를 만난 후 그의 삶에 대 반전이 이뤄졌다. 자신의 내면에 가득한 죄악이 있고 그것으로 인해 그는 깊은 수렁에 빠진 사람처럼 고민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7:4).

 

내가 죄인 중의 괴수로다”(딤전 1:15)라고 고백했다. 예수님을 만났을 때 자신이 누구인 줄 알았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삶의 목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이렇게 선포할 있게 된 것이다.

 

고전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자기 영광을 위하여 사는 존재로 전락했다. 오늘날도 인간의 삶이 불행한 이유는 자신의 인생에 자신이 왕이 되고자 하는 욕망 때문이다. 결코 행복하지 않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다.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을 높여 드릴 수 없다. 분명한 사실은 인간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며 그로 인하여 즐거워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첫 번째 기도 제목,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옵시고...’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첫 번째 존재 목적이자 기도 제목이다. 자신의 존재 목적을 알고 기도할 때 하나님의 뜻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2) 주의 다스림에 복종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들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고백하는 자들이다. 사도행전 8장에 예루살렘에 교회에 대한 큰 핍박이 일어났다. 사도들만 남고 대다수의 성도들이 흩어졌다. 그들 중에 시리아의 안디옥으로 피신한 성도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그곳에서 전도하여 이방인들 중에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래서 그곳 성도들이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 목사님을 보내달라고 요청을 했다. 그래서 파송 받은 분이 바나바이다.

 

그래서 생겨난 교회가 바로 안디옥교회이다. 바나바가 열심히 목회를 하여 교회가 더욱 부흥되었다. 그래서 다소라는 곳에 머물고 있던 사울을 초빙해 왔다. 둘이서 열심히 목회한 결과 교회가 더욱 견고하게 성장하게 되었다. 성경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11:25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그리스도인크리스챤이란 이름을 얻게 됐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란 뜻이다. 그들이 주의 말씀을 받고 순종한 결과가 사도행전 13장에 나타난다.

 

13:1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2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3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성령의 명하심을 따라 순종했다. 그 결과 안디옥교회는 선교하는 교회, 주님의 나라를 확장해 나가는 선도적 교회가 되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예수로 믿고 고백한 후 일정 기간이 지나면 세례를 받는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세례를 주라고 명하셨다. 세례를 받을 때는 반드시 그 사람이 진실한 마음으로 고백하고 있는지 확인하게 된다. 그것이 세례 서약이다. 일종의 충성 맹세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겠다고 약속을 한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성도들의 삶의 주인이 되시고 왕이 되신다고 고백했고, 서약했다면 성도는 마땅히 주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순종할 때 그리스도의 통치가 이뤄지게 되는 것이다.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뤄지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성도 각 개인의 인생에 주인이 되신다.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우리를 사셨기 때문에 주인된 권리가 있으신 것이다. 그리고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시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주인이 되신다. 그렇다면 그 구성원인 성도는 주의 나라, 주의 법에 순종해야 한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은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다.

 

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예수를 따르면서도 우리는 늘 궁시렁 궁시렁, 이런 걱정 저런 걱정 안고 산다. 주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고 제 고집대로 살기 때문이다. 주께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뜻을 구하라고 명하셨다. 그렇게 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주의 말씀 앞에 순종하기를 힘쓰기 바란다. 작은 것부터 실천하기 바란다. 순종하는 자세로 기도해야 한다.

 

 

3) 아버지의 뜻이 이뤄지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함께 기도할 것을 부탁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동산 깊은 곳으로 들어가셔서 땀 방울이 핏방물이 되시도록 힘써 기도하셨다.

 

26: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돌아와보니 제자들이 잠에 빠져 있었다. 그때 이렇게 말씀하셨다.

 

26:40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육신적으로 연약한 것을 아신다. 알기 때문에 기도할 것을 요청하고 계신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에로 연결하는 통로와 같다.

 

예수님께서 세 제자,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시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셨다. 그리고 나머지 제자들은 산 아래에 있었다. 그때 어떤 사람이 귀신 아들을 데리고 제자들에게 와서 쫓아내주기를 요청했다. 그러나 제자들은 쫓아내지 못했다. 그때 마침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 오셨다. 그리고 사정을 듣고 제자들을 책망하시고 귀신을 쫓아내 주셨다. 무리에게서 벗어나 어느 집으로 들어간 후,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와 조용히 여쭈었다. “왜 우리는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그때 이렇게 대답하셨다.

 

9:29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실제로는 이뤄지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기도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육체로 우리와 함께 하지 않으신다.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신다. 우리의 기도가 약하기 때문에 성령께서는 우리를 위해 탄식하며 기도해 주신다. 은혜 영적 생명을 유지할 수는 있으나 능력 있는 성도의 삶은 누리지 못한다. 이것이 안타까운 우리의 현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이 아닌 당신의 자녀들, 그리스도의 핏 값으로 구속받은 성도들을 통하여 영광 받으시길 원하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고,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기도하기를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 메시지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이 있다. 기도의 목적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기도해도 소용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유는 자신의 뜻대로 생각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부분 자기 중심의 기도를 하고 있다. 자녀들을 위한 기도도 자기의 기대치를 미리 설정해 놓고 기도한다. “우리 아이 이번에 S 00과에 꼭 합격할 수 있게 해 주옵소서!”

 

새벽에 작정기도하고 교회는 특별새벽기도까지 한다. 그러나 정작 아이는 공부한다고 주일날 교회도 안가고 학원에 가거나 독서실에 가 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응답하실까? “너는 합격, 네 자식은 불합격!” 하나님의 뜻과는 관계 없이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기도한다. 이런 기도는 다른 종교에서도 다 한다. 종교가 없는 사람도 하는 기도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경험을 간증했다. 그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질병이 있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육체의 가시라고 표현했다. 그는 하나님 앞에 낫게 해달라고 세 차례나 기도했다. 응답의 내용이 이렇다.

 

고후 12: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물론 우리는 일상의 필요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기도라는 통로를 통해서 자기의 뜻을 이루기 위한 도구나 통로로 생각했다면 크게 회개하고 이제부터는 바꾸어야 한다. 너무나 오래되고 굳어졌다면 개인적으로 기도할 때주기도문을 천천히 암송하면서 기도하고 설교 말씀을 다시 들으면서 기도를 시작하기 바란다.

 

나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나의 말이나 행실을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드러나기를 원합니다. 나의 삶 속에 자아는 죽어지고 그리스도께서 사시기를 원합니다. 주의 말씀 앞에 순종하기를 원합니다. 이 세상에는 소망이 없사오니 오직 주의 뜻만이 세워지기를 원합니다.

 

 

모세에 대하여 히브리서 기자가 이런 말을 했다.

 

11: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만족을 구하면 결국 후회하게 된다. 우리 기도는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나의 삶을 통해 주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나의 삶을 통해 주의 나라가 이뤄지기를 원합니다. 나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기 원합니다.”

 

주께서 친히 가르쳐주신대로 기도할 때, 우리 심령 속에 진정한 하나님의 위로와 평강이 넘치게 될 줄로 믿는다.

 

 

 

이렇게 기도하라(3) /6:9-13

2019-11-26 02:36:07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주기도문은 크게 두 단락 6개의 기도로 구성되어 있다. 앞 부분은 하나님께 대한 기도이고, 뒷 부분은 우리들과 관련된 제목들이다.

 

앞 부분의 세 가지 기도는 서로 관련성이 있다. 두 번째 간구인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는 첫 번째 간구인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실 때그 나라가 성취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아버지의 나라, 곧 하나님의 나라는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는 곳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아버지의 뜻이 완벽하게 성취되는 곳이다.

 

이런 연관성을 가지고 있음을 이해할 때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중요함과 필요성을 절감할 수 있고, 크고도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오늘 세 번째 기도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겠다. 본문 10절에서, 주기도문의 세 번째 기도는 ...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찬송가 앞에 나와 있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으로 번역되어 있다. 그렇다면 세 번째 기도에서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주제는아버지의 뜻’, ‘하나님의 뜻이다.

 

아버지의 뜻, 또는 하나님의 뜻이란 무엇인가?

 

어느 성도가 물었다. “목사님,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일반적으로 납득되는 수준을 넘어서는 경우에는 대답하기가 쉽지 않은 경우도 있다. 그러나 성경에는하나님의 뜻이 분명하고도 다양하게 표현되어 있다. 좁은 의미에서 일상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을 예로 든다면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살전 5:16 항상 기뻐하라 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18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기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아무래도 성경 전체에 흐르고 있는 구속사 곧 구원의 약속과 관련된 것이라 할 수 있다.

 

2:23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1: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1:11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궁극적인 하나님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것이다. 그곳은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으시는 곳이며,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뤄지는 곳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이 완벽하게 실현되는 곳은 어디인가? 현재 이 지구상에는 없다. 그러나 성경 가운데는 있었다. 그곳이 바로 에덴 동산이었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다. 동산 안에는 진정한 평화와 사랑, 풍요와 기쁨이 있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말씀하시는대로 다 이뤄졌다. 정말 하나님의 통치가 완벽히 이뤄지는 곳이었다. 모든 만물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였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지으셨다. 그것이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첫 명령을 내리셨다.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한 동안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유지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에 빠져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동산 중앙의 선악과를 따먹고 말았다. 죄가 인간의 마음 속에 들어옴으로 인해 동산의 평화는 깨지고 말았다.

 

그 때로부터 인간은 자기 속에 왕국을 만들고 스스로 왕이 되기를 원했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자기 고집, 자기 생각대로 살기 시작한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을 포기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모습을 사도 바울이 잘 묘사했다.

 

3: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3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16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모습이다. 인생들은 누구나 예외 없이 불행하게 되었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전적으로 타락한 절망적 상태에 놓이게 된 것을 잘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소망이 없는 인생들에 대한 놀라운 계획을 준비하셨다.

 

그것이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무너진 에덴 동산을 회복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에 나타난하나님의 뜻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도록 기도하라!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이 말씀에 대한 쉬운 성경의 번역을 보면,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이 세상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라고 되어 있다. 하늘에서 계획하신 아버지의 뜻이 이 세상에서 이뤄지도록 기도하라는 말씀이다.

 

이 기도는 성도들에게만 주어진 놀라운 특권이다. 불신자들은 하나님의 뜻에 무관심할뿐더러 기도할 자격도 없다. 그렇다면 성도들은 어떤 자세로 기도해야 하는가?

 

앞서 언급한대로 주기도문의 앞 부분, 하나님께 대한 간구는 서로 상관관계가 있다. 그 관계 속에서 올바른 기도의 자세를 찾을 수 있다.

 

 

1) 인간의 존재 목적을 바르게 인식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원래 바리새파 사람이었고 율법의 추종자였다. 그는 자신을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소개했었다. 철저한 율법주의자였다. 율법을 준수함으로 의를 이룰 수 있다고 믿고 주장한 사람이었다. 행위구원론자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예수를 만난 후 그의 삶에 대 반전이 이뤄졌다. 자신의 내면에 가득한 죄악이 있고 그것으로 인해 그는 깊은 수렁에 빠진 사람처럼 고민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7:4).

 

내가 죄인 중의 괴수로다”(딤전 1:15)라고 고백했다. 예수님을 만났을 때 자신이 누구인 줄 알았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삶의 목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이렇게 선포할 있게 된 것이다.

 

고전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자기 영광을 위하여 사는 존재로 전락했다. 오늘날도 인간의 삶이 불행한 이유는 자신의 인생에 자신이 왕이 되고자 하는 욕망 때문이다. 결코 행복하지 않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다.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을 높여 드릴 수 없다. 분명한 사실은 인간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며 그로 인하여 즐거워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첫 번째 기도 제목,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옵시고...’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첫 번째 존재 목적이자 기도 제목이다. 자신의 존재 목적을 알고 기도할 때 하나님의 뜻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2) 주의 다스림에 복종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들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고백하는 자들이다. 사도행전 8장에 예루살렘에 교회에 대한 큰 핍박이 일어났다. 사도들만 남고 대다수의 성도들이 흩어졌다. 그들 중에 시리아의 안디옥으로 피신한 성도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그곳에서 전도하여 이방인들 중에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래서 그곳 성도들이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 목사님을 보내달라고 요청을 했다. 그래서 파송 받은 분이 바나바이다.

 

그래서 생겨난 교회가 바로 안디옥교회이다. 바나바가 열심히 목회를 하여 교회가 더욱 부흥되었다. 그래서 다소라는 곳에 머물고 있던 사울을 초빙해 왔다. 둘이서 열심히 목회한 결과 교회가 더욱 견고하게 성장하게 되었다. 성경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11:25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그리스도인크리스챤이란 이름을 얻게 됐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란 뜻이다. 그들이 주의 말씀을 받고 순종한 결과가 사도행전 13장에 나타난다.

 

13:1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2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3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성령의 명하심을 따라 순종했다. 그 결과 안디옥교회는 선교하는 교회, 주님의 나라를 확장해 나가는 선도적 교회가 되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예수로 믿고 고백한 후 일정 기간이 지나면 세례를 받는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세례를 주라고 명하셨다. 세례를 받을 때는 반드시 그 사람이 진실한 마음으로 고백하고 있는지 확인하게 된다. 그것이 세례 서약이다. 일종의 충성 맹세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겠다고 약속을 한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성도들의 삶의 주인이 되시고 왕이 되신다고 고백했고, 서약했다면 성도는 마땅히 주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순종할 때 그리스도의 통치가 이뤄지게 되는 것이다.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뤄지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성도 각 개인의 인생에 주인이 되신다.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우리를 사셨기 때문에 주인된 권리가 있으신 것이다. 그리고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시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주인이 되신다. 그렇다면 그 구성원인 성도는 주의 나라, 주의 법에 순종해야 한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은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다.

 

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예수를 따르면서도 우리는 늘 궁시렁 궁시렁, 이런 걱정 저런 걱정 안고 산다. 주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고 제 고집대로 살기 때문이다. 주께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뜻을 구하라고 명하셨다. 그렇게 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주의 말씀 앞에 순종하기를 힘쓰기 바란다. 작은 것부터 실천하기 바란다. 순종하는 자세로 기도해야 한다.

 

 

3) 아버지의 뜻이 이뤄지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함께 기도할 것을 부탁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동산 깊은 곳으로 들어가셔서 땀 방울이 핏방물이 되시도록 힘써 기도하셨다.

 

26: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돌아와보니 제자들이 잠에 빠져 있었다. 그때 이렇게 말씀하셨다.

 

26:40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육신적으로 연약한 것을 아신다. 알기 때문에 기도할 것을 요청하고 계신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에로 연결하는 통로와 같다.

 

예수님께서 세 제자,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시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셨다. 그리고 나머지 제자들은 산 아래에 있었다. 그때 어떤 사람이 귀신 아들을 데리고 제자들에게 와서 쫓아내주기를 요청했다. 그러나 제자들은 쫓아내지 못했다. 그때 마침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 오셨다. 그리고 사정을 듣고 제자들을 책망하시고 귀신을 쫓아내 주셨다. 무리에게서 벗어나 어느 집으로 들어간 후,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와 조용히 여쭈었다. “왜 우리는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그때 이렇게 대답하셨다.

 

9:29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실제로는 이뤄지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기도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육체로 우리와 함께 하지 않으신다.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신다. 우리의 기도가 약하기 때문에 성령께서는 우리를 위해 탄식하며 기도해 주신다. 은혜 영적 생명을 유지할 수는 있으나 능력 있는 성도의 삶은 누리지 못한다. 이것이 안타까운 우리의 현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이 아닌 당신의 자녀들, 그리스도의 핏 값으로 구속받은 성도들을 통하여 영광 받으시길 원하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고,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기도하기를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 메시지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이 있다. 기도의 목적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기도해도 소용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유는 자신의 뜻대로 생각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부분 자기 중심의 기도를 하고 있다. 자녀들을 위한 기도도 자기의 기대치를 미리 설정해 놓고 기도한다. “우리 아이 이번에 S 00과에 꼭 합격할 수 있게 해 주옵소서!”

 

새벽에 작정기도하고 교회는 특별새벽기도까지 한다. 그러나 정작 아이는 공부한다고 주일날 교회도 안가고 학원에 가거나 독서실에 가 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응답하실까? “너는 합격, 네 자식은 불합격!” 하나님의 뜻과는 관계 없이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기도한다. 이런 기도는 다른 종교에서도 다 한다. 종교가 없는 사람도 하는 기도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경험을 간증했다. 그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질병이 있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육체의 가시라고 표현했다. 그는 하나님 앞에 낫게 해달라고 세 차례나 기도했다. 응답의 내용이 이렇다.

 

고후 12: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물론 우리는 일상의 필요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기도라는 통로를 통해서 자기의 뜻을 이루기 위한 도구나 통로로 생각했다면 크게 회개하고 이제부터는 바꾸어야 한다. 너무나 오래되고 굳어졌다면 개인적으로 기도할 때주기도문을 천천히 암송하면서 기도하고 설교 말씀을 다시 들으면서 기도를 시작하기 바란다.

 

나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나의 말이나 행실을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드러나기를 원합니다. 나의 삶 속에 자아는 죽어지고 그리스도께서 사시기를 원합니다. 주의 말씀 앞에 순종하기를 원합니다. 이 세상에는 소망이 없사오니 오직 주의 뜻만이 세워지기를 원합니다.

 

 

모세에 대하여 히브리서 기자가 이런 말을 했다.

 

11: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만족을 구하면 결국 후회하게 된다. 우리 기도는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나의 삶을 통해 주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나의 삶을 통해 주의 나라가 이뤄지기를 원합니다. 나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기 원합니다.”

 

주께서 친히 가르쳐주신대로 기도할 때, 우리 심령 속에 진정한 하나님의 위로와 평강이 넘치게 될 줄로 믿는다.

 

 

 

이렇게 기도하라(5) /6:9-13

2019-11-28 02:20:58

 

오늘 본문의 주제는 용서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성경에 나오는 많은 스토리 중에 우리 마음에 진한 감동을 주는 사건이 있다. 요셉과 그의 형들에 관한 이야기다. 창세기에 무려 8장에 걸쳐서 소개하고 있다.

 

요셉은 야곱의 총애를 받는 열 한 번 째 아들이었다. 그러나 형들의 미움을 받아 애굽에 종으로 팔려 갔다. 그때 그의 나이 17살이었다. 애굽 궁정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서 종으로 살았고, 또 누명을 쓰고 억울한 감옥살이까지 했다. 13년 동안 타향에서 온갖 고생과 수모를 당했다. 형들을 향한 분노의 마음으로 잠 못이루는 밤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기적적으로 감옥에서 나오게 되었고, 바로왕의 꿈을 해석해 줌으로 일약 대국의 총리가 되었다. 애굽과 가나안 일대에 지독한 흉년이 들었을 때 형들이 양식을 구하기 위해 애굽으로 왔다. 요셉은 자기 형들인 것을 금방 알아 봤다. 그러나 그의 마음 속에 미움보다는 보고 싶은 마음이 더 넘쳤다. 그가 형들과 대면하게 되었을 때 형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했다.

 

45:4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5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원망과 분노를 사랑으로 승화시킨 아름답고도 감동적인 이야기이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한 도구가 바로 용서라는 것이다.

 

사람은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그래서 많은 부딪힘이 있다. 특별히 가까운 사이일수록 다툼이 많다. 살면서 머리 속에 지워지지 않는 미운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자신에게 깊은 상처와 고통을 준 사람들,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모습이 종종 떠오르고 이름을 듣게 되면 불쾌해지고 피하고 싶은데 그럴 수도 없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입장이다.

 

오늘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의 다섯 번째, 이 간구의 의미를 잘 이해함으로 원망과 분노가 변하여 사랑과 화목의 관계로 회복되어지기를 바란다. 그러기위해 우리는 주님의 가르쳐주신 기도의 의미를 좀 더 명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1. 주기도에서 언급하고 있는 죄는 어떤 죄를 말하는가?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죄는 어떤 죄인가? 먼저 죄에 대하여 언급할 필요가 있다. 죄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데, 근본적인 죄와 일반적인 죄가 있다. 근본적인 죄는 인류의 조상인 아담의 범죄로 인해 승계되는 죄, 곧 원죄를 가리킨다.

 

이 죄는 우리가 해결할 수 없다. 이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속해 주신 것이다. 그러나 주기도에서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죄는 일반적 죄를 말한다. 우리 일상 생활 속에서 날마다 일어날 수 있는 일상의 범죄를 가리킨다. 그 대표적 사례가 유월절 만창 석상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다. 베드로의 차례가 되었을 때 베드로는 거부하였다.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십니다.”

 

13:8 ...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9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여기서목욕한 자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근본적인 죄, 곧 원죄를 사함 받은 자를 가리킨다. 제자들은 이미 목욕한 자다. 목욕한 자는 굳이 머리부터 다시 씻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온 몸이 깨끗게 되었다고 선포하셨다.

 

그러나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이유는 일상적으로 범하는 죄를 회개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씻는다는 의미는 일상의 범죄에 대하여 성결을 위하여 죄 용서를 구해야 하는 것이다.

 

불신자는 온 몸을 씻어야 할 대상이지만, 예수를 믿는 성도는 일상에서 짓는 죄에 대하여 용서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주기도에서 말씀하신, 우리들끼리 짓는 죄, 일상적인 죄를 가리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사실에 대한 분명한 지식이 없을 때 종종 실수하는 분들이 있다. 대표로 기도하면서,

 

지난 한 주 동안도 우리가 지은 죄가 많사오니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하게 씻겨주옵소서!”

 

은혜로운 기도 같지만 잘못된 것이다. 예수님이 다시 십자가에 박히셔야 한다는 뜻이 된다. 이렇게 바꿔야 한다.

 

지난 한 주 동안도 지은 죄가 많사오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여 주님 앞에 나왔사오니 회개하는 심령마다 사죄의 은총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진실한 회개를 원하신다.

 

 

2.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하기 전에 먼저해야 할 일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의 죄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하기 전에, 먼저 형제의 죄를 용서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함을 말씀하고 있다.

 

6:14-15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15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일 만 달란트 빚 진자가 있었는데 일 만 달란트는 평생에 갚아도 갚을 수 없는 큰 금액이다. 그런데 주인이 그의 빚을 탕감해 주었다.

 

그런데 거리에서 100 데나리온 빚 진 동료를 만났는데 그 빚을 갚지 못하자 그 친구를 감옥에 집어 넣었다. 자신이 탕감받은 것에 비하면 극히 적은 것이었다. 백 데나리온은 오늘날 금액으로 환산하면 100일의 품삯이다. 하루 일당 10만원으로 계산하면 천 만원인 셈이다. 그러나 자신의 탕감받은 빚은 6조원에 달하는 큰 금액이다. 이 소식을 들은 왕은 탕감 받은 자를 잡아들이고 책망하였다.

 

18:32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마 18: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예수께서 말씀하셨다(18).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리려다가 형제에게 원망들을 일이 생각나거든 그 제물을 제단에 두고 가서 먼저 형제와 화목하고 와서 그 제물을 드리라고 하셨다.

 

마음에 분노를 품고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리는 일은 대단히 귀한 일이다. 그러나 더 앞서서 행해야 할 일은 먼저 형제와 화목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서로 용서해야 한다. 용서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드릴 수 없다. 예수님의 말씀이다.

 

 

3. 용서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먼저 용서하셨기 때문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지 않았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의롭다 하셨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사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하셨다. 용서 받았기에 용서할 것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2) 용서할 때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깊이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코리텐 붐 여사, 화란인으로 유대인을 숨겨준 죄로 언니와 함께 수용소 생활, “주는 나의 피난처의 저자. 독일의 라벤스부르크 수용소에서 살아남. 그리고 독일인들에게 용서의 복음을 전하기로 작정하고 독일교회를 순회했다.

 

어느날 줄을 지어 한 사람씩 코리 텐 붐 여사의 손에 입을 맞추며 독일인들이 감사의 표를 하는데 앞에 나타난 한 남자를 보고 몸이 굳어지고 말았다. 그 남자는 수용소에서 자기 옷을 벗기며 채찍을 가하고 침을 뱉었던 친위대 장교였다. 그녀의 언니가 이 남자에 의해 죽음을 당했고, 자신이 당한 갖은 모욕을 생각할 때 손이 나가질 않았다. 그때 고통 속에서 기도했다고 한다.

 

주님 나는 저 사람을 사랑할 수 없으니 주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사랑할 수 있는 것을 믿나이다. 주여 믿나이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독일인 간수의 손을 잡았다고 한다. 그 순간 하늘의 사랑이 자기의 영혼 속으로 파고 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3) 주님의 명령이다

 

22: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사랑은 어떻게 완성되는가? 용서함으로 완성된다. 미움을 품고 있다면 주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이다. 주의 제자 베드로가 예수님께 물었다. 선생님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 일곱번까지 해야 합니까? 이때 예수께서 답변하셨다.

 

18: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4. 어떻게 용서할 수 있는가?

 

용서하는 것이 옳고, 용서해야 하는 이유도 알고 있는데 잘 되지 않는다. 성경학자 윌리엄 버클레이의 권면을 참고로 하면...

 

1) 서로 이해하기를 배워야 한다.

 

용서의 첫 단계는 이해다. 왜 저 사람이 저렇게 생각하고 말하는가를 이해해야 한다.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 보는 것이다. 이해라는 말이 영어로 ‘understand’라고 한다. 아래서 본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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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잊어버리기를 배워야 한다.

 

은혜를 바위 위에 새기고 서운한 마음은 모래 위에 새기라는 말이 있다. 상대방의 허물, 미움, 손해끼친 것을 가능하면 잊어버리는 것이다. 주께로부터 받은 은혜를 크게 생각하고 감사하면 섭섭하고 미운 마음을 떨쳐버릴 수가 있다. 속을 넓게 갖는 훈련이 필요하다.

 

 

3) 기도하는 것이다.

 

상대방을 이해하고, 자기를 성찰해도 잘 안되면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이다. 내 심령에 은혜가 바닥나면 사소한 일에도 분노하고 다투게 된다. 그러나 내 심령에 은혜가 넘치면 주님의 마음이 되고 용서할 수가 있다. 못 견디게 밉고 용서가 안되면 기도의 자리로 가지고 나가서 엎드리기 바란다. “사랑할 수 있는 마음, 용서의 마음을 주옵소서!”

 

 

결론적 메시지

 

용서에 관한 감동적인 스토리, 구약에 요셉의 이야기가 있다면 신약에는 탕자의 이야기가 있다.

 

15장에,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 집을 나갔다. 아들이 집을 나간 후 아버지는 하루도 편안히 잠을 자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상한 습관이 하나 생겼는데 대문을 박차고 나간 동구밖을 수시로 바라보는 것이었다.

 

어느 날, 초라한 차림의 젊은이가 마을 어귀에 나타났다. 아버지는 직감적으로 아들인 것을 알았다. 맨 발로 달려나가 아들을 끌어 안았다.

 

아무리 큰 죄를 지었어도 아버지는 용서하셨다. 이유는 아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신다. 조건 없이 용서하시고 조건 없이 받아 주신다.

 

용서 안되는 사람이 있는가? 먼저 용서 받을 자격이 없는 나 같은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 고난 당하신 주님을 기억하기 바란다. 그리고 그를 불쌍히 여기고 기도하기 바란다. 용서하는 자는 용기 있는 사람이다. 순종하는 마음으로 먼저 손을 내밀고 용서할 때 하늘의 축복이 있다.

 

11:25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벧전 3:9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 모두 피차에 허물이 많은 사람들이다. 주의 말씀대로 서로 불쌍히 여기고 서로 용서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 우리 마음 속에 응어리 진 것들을 풀 수 있는 열쇠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다.

 

16: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천국의 열쇠를 우리가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기 바란다. 쉽지 않지만 순종하는 마음으로 먼저 손을 내밀고 용서할 때 세상 것으로는 맛볼 수 없는 하늘의 놀라운 은혜와 평화, 기쁨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작은 관계부터 시작해 보라. 그리고 기도를 시작하라. 이런 은혜를 경험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이렇게 기도하라(6) /6:9-13

2019-11-28 03:10:18

 

경기도 가평에 필그림하우스라는 침묵기도원이 있다. 그 안에 천로역정의 내용을 담은 테마공원이 있다. 어떤 사람이 멸망의 성에서 벗어나와 많은 유혹과 고난을 이겨내면서 마침내 천국에 이르게 된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실제로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여정을 돌아보면 많은 위험과 고난, 유혹과 위기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가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가장 안전하고 행복한 순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면에서 여러분은 승리자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순례여정을 잘 마치지 못하고 중도에 하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도 안심할 수 없다. 예배가 끝나고 다시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면 우리 앞 길에 많은 어려움과 유혹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천로역정의 주인공처럼 어떻게 하면 천성에 이르기까지 유혹에 빠지지 않고 끝까지 순례의 길을 갈 수 있을까?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가르쳐주시는 기도처럼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하면 되는가? 그렇지 않다. 끝까지 우리의 여정을 잘 마치기 위해서는 알아야 한다. ‘시험이란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우리를 유혹하며,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를 알아야 한다.

 

 

시험의 종류

 

성경에는시험이라는 단어를 다양하게 사용하고 있다.

 

1) 시련(Trial)

 

1: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2) 테스트(Test)

 

22: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3) 유혹(Temptation)

 

1:13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오늘 본문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신시험이 바로 이 유혹을 가리킨다. 앞서 두 가지 시험은 매우 긍정적이고 건설이다. 그러나 이 유혹은 인생을 무너뜨리는 파괴적인 성질이 있다. 그 이면에는 사탄의 계교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사탄의 공격 앞에 쉽게 무너지고 믿음의 길에서 떠나 불신자처럼 세상에 물들어 사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이것은 크게 잘못하고 있는 것이고, 불행한 것이다. 그렇다면 사탄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날마다 승리하는 삶을 사는 방법은 무엇인가?

 

병법에지피지기면 백전불패라는 말이 있다. 사탄의 정체와 전략을 알게 되면 백전백승할 수 있다. 어떻게 하면 되는가? 사탄이 잘 사용하고 있는 유혹의 통로를 알면 된다. 사탄은 주로 세 가지 통로를 이용하여 성도들을 유혹한다.

 

 

유혹의 3가지 통로

 

1) 세상(외부적 공격)

 

세상이란? 우리가 사는 세상을 가리킨다. 그런데 세상이 만만치가 않다. 많은 위험 요소를 안고 있다.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다. 사탄은 세상에 있는 것들을 가지고 유혹한다. 사도 요한이 세상에 대하여 이렇게 경고하고 있다.

 

요일 2: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세상이 우리를 유혹하는 세 가지 영역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는데...

 

첫째는 육신의 정욕, 둘째는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다. 이런 것들의 특징은 쾌락적, 탐욕적이다. 세상의 매력적인 모든 것, 좋은 음식, 좋은 옷, 좋은 집, 좋은 취미 생활, 여행, 인터넷, 도박, 음악, 텔레비전, 만화, 당구, 오락 게임. 골프등 스포츠, 고급 물건들등.

 

)며칠 전 부산항에 4천억원짜리 요트. 러시아의 억만장자.

 

이런 것들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로 인해 하나님과 멀어지게 된다면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이런 것들의 특징이 있다. 하나는 일시적인 것이고, 또 하나는 기만적이라는 것이다.

 

 

2) 죄성

 

세상이 밖에서부터 오는 유혹이라면, 죄성은 우리의 내면으로부터 일어나는 시험거리다. 죄성은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나오는 본성적인 죄, 원죄를 가리킨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자아또는이기적 본성이라고 말한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공로로 죄 용서를 받았다. 그러나 죄성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죄의 흔적이 남아 있어서 죄를 짓게 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우리 내면에 있는 죄성들을 다음과 같이 열거하였다.

 

5:19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이 세상이 조용할 날이 없는 이유는 아직도 우리 속에 죄성, 이기적 속성이 남아서 욕심을 부리고 서로 미워하고 시기하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은지 30 40년이 되었어도 여전히 내 속에 이기적 욕심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실망스럽고 낙심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사탄이 바로 이런 약점들을 노리고 있다는 것이다.

 

 

3) 사탄의 직접적 공격

 

22:3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

 

13: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사탄이 신자들을 유혹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우리의 신앙을 근본적으로 흔들려고 한다. 하나님의 대한 의식을 흐리게 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의심하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부정하게 한다.

 

사탄은 한가히 놀고 있지 않다. ‘우는 사자와 같이늘 삼킬 자를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3. 시험(유혹)을 이기는 방법

 

1) 사랑의 대상을 바꾸는 것이다

 

3: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사도 요한은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했다. 사랑하지 말라고 한 이유는 성도들의 사랑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을 사랑해서 결과가 좋은 사람은 없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다.

 

7: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그러면 무엇을 사랑해야 하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해야 한다. 왜 사랑해야 하는가? 예수 그리스도 그분 만이 우리의 가장 큰 기쁨이요 위로가 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달은 사람은 이렇게 노래한다.

 

찬송가 95 1,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3, 유혹과 핍박이 몰려와도 주 섬기는 내 맘 변치 않아~

 

세상 것들을 무조건 거부하라는 뜻이 아니다. 자신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을 소중히 여기면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소중히 여기신다. 여러분의 한 주 일과를 어떻게 보내는가?

 

 

2)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셔야 한다

 

예수를 믿어도 우리의 본성은 이기적이다. 자신의 삶의 모든 영역에게 주인 노릇 왕 노릇하려 한다. 우리 인생이 꼬이고 평안이 없는 이유는 항상 자신이 왕이 되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욕심과 이기심 때문에 실패하게 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삶에서 그리스도를 왕으로 주인으로 모셔야 하는가?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했다.

 

고전 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 인생의 핸들을 내가 쥐려하지 말고 탁월하신 예수께 맡기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인정하고 핸들을 맡기는 것이다. 맡길 때 우리의 인생 항해는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도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복음성가 중에서, “왕이신 나의 예수님,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이다.”

 

 

3) 마귀를 대적하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을 근본적으로 흔드는 마귀의 공격에 대하여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예수님께서 대처 방법을 보여 주셨다.

 

4: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4: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우리의 힘으로로는 마귀를 대적할 수 없다. 예수의 이름을 의지하는 것이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교황의 압력을 당할 때 부른 찬송가가 있다.

 

585내 힘만 의지할 때는 패할 수 밖에 없도다 힘있는 장수 나와서 날 대신하여 싸우네 이 장수 누군가 주 예수 그리스도 만군의 주로다 당할 자 누구랴 반드시 이기리로다.

 

 

결론적 메시지

 

야곱이 말년에 아들 요셉으로 인해 애굽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먼저 바로왕 앞으로 인사차 면전에 서게 되었다. 그때 바로왕이 야곱에게 나이를 물었다.

 

47:9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험악한 세월을 보낸 이유가 무엇인가? 자기 고집대로 육신의 정욕을 따라 살았기 때문에 험악한 세월을 보낸 것이다. 그러나 말년에 그는 평안을 찾을 수 있었고 조용히 하나님 나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온전히 주님 안에 거했기 때문이다.

 

천로역정의 저자 존 번연은 이 세상을 멸망의 성이라고 말했다. 사실 그렇다.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기상천외한 현상들을 매일 목도하고 있다. 축원한다.

 

 

 

이렇게 기도하라(7) /6:9-13

2019-11-30 15:26:29

 

가깝게 교제하는 목사님 중 한 분이 종종 혈압이 오르고 두통과 답답함을 호소하는 경우가 생긴다고 한다. 이유는 혈액 속에 산소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밤중에 응급실로 달려가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냥 방치하면 혼수상태에 빠지거나 생명을 잃는 경우도 생긴다고 한다.

 

기도는 영적 호흡과 같다.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생활에 매우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기도를 하지 않는 것은 영적으로 죽어 있는 상태와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도를 소홀히 하고 있다. 그 이유 중의 하나가 기도에 대한 무지와 오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대다수가 기도에 대한 부담을 가지고 있다. ‘기도라는 말을 들을 때 죄의식과 불편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만약 예배 중에 기도순서라도 맡게 되면 그 시간이 지날 때까지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 외에도 교회 생활 중에 새벽기도, 철야기도, 특별새벽기도, 금식기도, 산기도, 통성기도 등 다양한 형태의 기도들이 있다. 실제로 참여하지는 않지만 책임처럼 안고 산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괴롭히시는 분이신가? 결코 그런 분이 아니시다. 도리어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인 성도들과 더욱 가깝고 친밀하게 지내기를 원하신다. 그 방편으로 기도라는 도구를 주셨는데 성도들이 잘못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잘못된 기도의 두 가지 사례를 말씀하셨다.

 

 

첫째는 바리새인들의 기도다. 그들의 기도가 잘못된 이유가 무엇인가?

 

기도의 대상은 하나님이신데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기도를 외식적인 기도라고 한다. 기도를 자기 신앙을 자랑하는 도구로 삼는 것이다. 자신의 기도가 사람들 듣기에 감동이 되고 칭찬 듣는 기도가 되기 위해 자세, 목소리, 문구를 연습해서 경건한 모습으로 드러내려는 것이다.

 

둘째는 이방인들의 기도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이방인들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많이 말해야 들으시는 줄로 안다고 하셨다. 하나님 앞에 많은 말을 하고, 크게 하고, 반복적으로 하면 하나님께서 감동을 받으셔서 기도에 응답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기도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강하게 책망하셨다. “그렇게 기도하지 말라!”고 경계하시면서 가르치신 기도가주기도문이다.

 

오늘은 주기도의 마지막 순서로 송영 부분에 대한 내용을 설교하고자 한다. 복습 차원에서주의 기도전체 내용을 다시 한 번 요약 정리하고자 한다.

 

 

주기도문의 전체 구조

 

1) 부름

 

주기도(예가기도)부름으로부터 시작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우리 기도의 대상,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은 어떤 분이신가? ‘하늘에 계신다는 말의 의미는 무소부재의 하나님, 어느 곳에나 계시는 분이심을 나타낸다. 또한 개인적으로는 그분과 나와의 관계를 나타낸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은 바로 나의 아버지, 영적인 아버지가 되신다. 우리를 양자 삼으셨다. 그리스도를 희생 시키시면서까지 우리를 구원하셔서 자녀로 삼으셨다. 그래서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우리의 아버지는 자녀들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는 분, 우리의 신음까지도 들으시는 분이시다. 그분에게 드려야 할 기도는 다음과 같다.

 

 

2) 간구 6가지

 

첫째는,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나님의 이름이 높힘을 받으시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하나님의 이름을 지워버리고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에 오르려고 한다.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는 것이다. 교만한 마음 버리고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둘째는, 나라가 임하시오며.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 나라에서도 실현되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세상나라에는 끊임없는 다툼과 경쟁이 있는 곳이다. 그곳에 평화가 없다. 그래서 기도해야 한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 의와 희락과 평강의 나라가 임하시도록 기도해야 한다.

 

 

셋째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나님의 뜻은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는 것과 이 세상 나라가 하나님 앞에 복종하여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가 이뤄지는 것이다. 성도는 주님의 뜻이 나의 뜻이 되도록 기도해야 한다.

 

 

넷째는,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영육 간에 자족하는 삶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인류의 불행은 소유권 다툼이다. 하나님의 주재권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받아 사용하는 것이다. 나에게 주어진 삶을 주님께 의존하는 것이다.

 

 

다섯째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죄 용서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연약하여 죄 지을 수 밖에 없는 존재이다. 우리의 의지로는 용서가 어렵지만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지할 때 용서할 수 있는 것이다. 용서할 때 더욱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을 수가 있다.

 

 

여섯 번째는,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우리의 인생여정에 많은 함정과 유혹이 있다. 끝까지 안전하게 우리의 여정을 마치는 벙법은 우리의 대장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우리 인생의 핸들을 붙드셔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마귀를 대적하고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간구의 내용은 마무리되게 된다. 그렇다면 주기도는 이것으로 끝이 나는가? 그렇지 않다. 주기도의 시작은 성부 하나님께 대한 영광스러운 부름으로 시작된다. 마찬가지로 마무리 역시 성부 하나님께 대한 송영으로 끝이 난다. 그 내용이 이렇다.

 

 

3) 송영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그런데 성경 원문을 보면호티라는 이유를 설명하는 접속사가 붙어 있다. 따라서 이를 우리가 쓰는 말로 번역해보면 다음과 같다.

 

“…이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설명하자면, 이렇게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주석가 윌리암 핸드릭슨은, “주의 기도를 마무리 지을 때 우리의 눈을 들어 위로 향하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실 것을 확신하면서 겸손한 자세로 영광 돌리는 것은 합당한 일이 아닌가!”라고 말했다. 성도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것은 마땅한 것이다.

 

 

영원한 하나님의 소유 3가지

 

그러면 하나님의 영원한 소유가 될 3가지 항목은 무엇인가?

 

1) 나라

 

그리스도인들이 사모하고 기도해야 할 나라는 세상 나라가 아니다. 세상 나라에는 소망이 없다. 지구상에 200여개의 나라들이 있다. 그중에 힘이 세고 큰 나라의 통치자들의 면모를 보면 실망스럽다. 선한 것이 나올 기대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는 공의와 정의가 하수처럼 흐르는 나라, 진정한 평화와 사랑이 있는 나라다. 그 나라는 오직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실 때만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들은 그의 나라가 오기를 소망하며 기도해야 한다.

 

2) 권세(power}

 

사람들은 권세를 소유하기 원한다. 제자들도 권세자가 되기를 원했다. 주님을 따르면서도 다퉜다. 이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0:25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26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역사 이래 세상 군왕들의 권세가 영속되고 있는 나라는 없다. 가장 비참하게 죽는 사람들의 대다수가 군왕들이다. 제명에 산 사람들이 별로 많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권력과 그 그늘 아래 머물기를 원한다.

 

그러나 진정한 권세는 군림하는데 있지 않다. 진정한 권세는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진정한 권세가 무엇인가를 보여주셨다.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하나님께 속한 권세는 전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지배하는 권세 뿐 아니라 자연까지도 다스리는 권세, 악한 영들까지도 다스리는 권세를 말한다. 그 권세를 가지시고 다스리실 왕을 사모해야 한다.

 

 

3) 영광

 

세상의 영광은 어떤 것인가? 사람들이 자기를 위하여 만든 영광이다. 그 영광은 영원하지 않다.

)훈장 - 전직 대통령, , 학위등

 

벧전 1: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로마 황제 트라이안이 유대의 유명한 랍비 여호수아를 만났을 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랍비여 내게 하나님을 보여주면 하나님을 믿겠네.”

 

폐하! 당신은 하나님을 볼 수가 없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을 보면 죽고 말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패한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 앞에 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말로 나를 설복시킬 수는 없다. 나는 꼭 하나님을 보아야겠다.”

 

그때 궁전에 비취는 정오의 찬란한 태양을 가리키며 랍비가 말했다 ..

 

폐하 그렇다면 저 태양을 바라보십시오.”

 

너무 눈이 부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예 그렇습니다. 폐하. 피조물의 광채도 바라보기 어렵거늘 어찌 창조주의 영광을 바라볼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자기의 영광을 구하는 인간들의 욕망이 언젠가는 하나님 앞에 무릎 꿇을 날이 오게 될 것이다.

 

2:14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

 

 

주기도의 활용과 적용

 

첫째, 여러분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기 바란다. 3명에서여호와의 이름을 망녕되이 일컫지 말라고 하셨다. 나의 삶이 거룩해질 때 주님의 이름도 높아진다.

 

둘째,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삶을 다스리시도록 하기 바란다. 그리스도께서 나의 삶의 주인이 되시고, 왕이 되시면 내 심령 속에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내 삶 속에, 나의 가정이 먼저 주의 다스림이 있도록 기도하기 바란다.

 

셋째, 주님의 뜻에 순종하기 바란다. 신앙을 자신의 뜻과 목적을 관철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을 때 삶이 곤고해지는 것이다. 주의 말씀 앞에 순종할 때 나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게 된다.

 

넷째,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기 바란다. 그것은 주님의 소유권을 인정해 드리는 것이고, 주님께로부터 받은 바 청지기적 삶을 사는 것이다. 많든 적든 자족하는 마음, 겸손한 마음을 가질 때 더욱 풍성케 되는 역사가 나타난다.

 

다섯째, 용서하기 바란다. 서로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기 바란다. 용서가 안될 때에도 용서해야 한다. 왜냐하면 용서받을 수 없는 내가 용서받았기 때문이다.

 

여섯째,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해야 한다. 나의 죄성을 알고 늘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한다. 나의 힘으로는 마귀의 유혹에 빠질 수 밖에 없다. 우리의 대장되신 예수 그리스도, 예수 이름으로 대적해야 한다.

 

 

결론적 메시지

 

주기도의 가치는 영원하다. 시대를 초월한 모든 성도들이 이 기도를 함으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영원할 것이며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역사는 확대되어 마침내 온 세상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속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기도를 드리는 모든 심령마다아멘할 것이다.

 

예가기도는 모임 마침의 기도가 아니다. 생활의 기도다. 언제 어디서든 할 수 있다. 기도 생활이 죽어 있다면 이번 기회에 나의 기도가 올바르게 세워지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만약 바리새인처럼 외식하는 기도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또 이방인처럼 중언부언 주문 외듯이 기도했다면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이렇게 기도하기 바란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께 있사옵나이다 아멘)

 

초기교회 성도들은 하루에 세 번 주의 기도를 묵상하고 기도했다고 한다. 주의 기도를 다시 만나고 기도의 능력을 회복하는 성도가 되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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