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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주제 설교

두려움 에 관한 설교

by Jessi J 2024. 10.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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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안에서 두려움이 사라졌는가? /18:1-14/ 유기성목사

2023-05-12 10:38:59

 

이제 요한복음의 가장 중요하고 은혜로운 부분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기사입니다.

그 중에 본문은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로마 병정들에게 붙들리는 장면입니다.

우리가 주목하게 되는 것은 그 상황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의 행동이 너무나 대조적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당당하셨습니다.

 

병정들이 누가 나사렛 예수냐고 물을 때 "내가 그 사람이다." 대답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얼마나 권세가 있으셨는지 병정들이 나가 쓰러졌을 정도였습니다,

그에 비하여 제자들은 엄청 당황하며 우왕좌왕하였습니다,

베드로는 병사들을 향하여 검을 휘두르다가 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베었습니다,

베드로는 그렇게라도 했지만 다른 제자들은 도망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14:52에 보면 벌거벗은 몸으로 도망한 제자도 있었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은 왜 제자들의 이런 비겁한 모습을 기록했을까? 궁금해집니다.

우리도 충격이지만 초대 교회 교인들로서는 엄청난 충격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초대교회 사도들입니다. 이미 순교한 제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이런 사람들이었다는 것이 알려지면 사도들의 영적 권위에 문제가 되지는 않을까요?

 

그런데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했던 과정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사들에게 제자들은 놓아주라고 하셨습니다,

:8 "내가 그 사람이라고 너희에게 이미 말하였다. 너희가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은 물러가게 하여라."

 

요한복음이 말씀하려는 것이 무엇일까요?

예수님 안에서 사람은 변한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사도들도 십자가 앞에서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간 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고난이 두렵다고 낙심하지 말라’, ‘고난을 두려워하는 이들을 믿음 없다고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겟세마내 동산에서의 제자들의 문제는 십자가 고난이 너무 크고 고통스러웠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아직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지 않은 상태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얼른 도망가라고 하신 이유도 제자들이 성령받지 않은 상태에서는 예수님과 끝까지 동행할 수 없고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두렵다면 겪어야 할 고난이 크기 때문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살지 못하고 두려움의 영을 따라 살기 때문입니다.

8:15에서 불신자를 가리켜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고난 앞에서 두려운 것은 영적인 역사인 것입니다.

고난이 두려울 때, 마귀가 두려움으로 우리를 조종하려 함을 명심해야 합니다.

풀무불과 사자 굴로 위협하고 사람들에게 돌을 맞게 합니다.

목적은 단 하나 우리가 십자가의 길을 가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달라스 윌라드가 쓴 [하나님의 모략]에 보면 미국 교회 안에선교사로 나가라고 할까봐 하나님께 헌신을 결단하지 못하는 교인들이 많다는 말이 나옵니다. 저는 한국 교회만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딤후 1: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예수님을 믿어도 두려움이 해결되지 않습니다하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3년을 함께 지냈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과 함께 있었지만 두려움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예수님과 함께 걸으며 대화도 하였으나 두려움과 슬픔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곁에 계셔도 두려움은 해결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당황해 하는 일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심을 믿는데, 세상이 두렵고 고난이 두려운 것입니다.

그러므로나는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은 내 안에 거하심을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나는 예수님과 함께 죽었고 이제는 예수님이 나의 생명이심을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안에 성령이 오셨을 때, 믿음입니다.

 

정말 고난 앞에서 두려움이 사라질 수 있을까요?’

어릴 때는 혼자 있는 것이 두렵습니다. 그러나 나이들면 혼자 있어도 두렵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는 것이 믿어지면 그런 경험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나이만 들어서는 안됩니다. 영적으로도 성장해야 합니다.

영적으로 성장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마음에 거하시는 것이 믿어지고 예수님과 친밀히 동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뚜렷한 증거가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리처드 범브란트목사님은 루마니아가 공산화된 후 1948년 체포되어 14년간 상상하기 어려운 고문을 당하였다가 1964년 세계적인 구명운동으로 풀려났습니다. 그가 미국 상원에서 증언하였는데, 18군데 몸의 상처를 보여주면서나는 고문을 당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당하기에 기뻐했고, 나를 고문하는 공산당원들은 나에게 고통을 주면서 기뻐하여 우리는 다같이 기뻐했습니다라고 증언하였습니다.

 

실제로 제자들이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고 변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사도가 된 것입니다. 두려움이 없는 사람들 같았습니다.

담대하게 부활의 예수님을 전하고 하루에 3천명씩, 5천명 씩 구원받았으며 순교로 사명의 삶을 마쳤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그렇게 당당하셨던 주님이 그들 안에 거하셨기 때문입니다.

 

세계 4차 로잔대회가 2024년 한국에서 열립니다. 국제 로잔 대표 마이클 오는 한국계 미국 선교사로 일본에서 사역하였습니다. 그가 40세에 국제 로잔 대표가 되었을 때, 세계 기독교계가 깜짝 놀랐습니다. 한국의 유명한 목사님 한 분이마이클 오가 누구야?” 라고 했습니다. 마이클 오는 이 말을 전해 듣고마이클 오, 아무 것도 아니잖아하는 의미로 듣고 기뻤다고 했습니다. 약한 자를 들어쓰신다는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졌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가 하버드 대학을 졸업한 후 선교사로 나가려 할 때, 아버지가 강하게 반대하였다고 했습니다. 그의 부친은 단돈 300달러 가지고 미국에 이민와서, 희생적으로 자녀를 교육시켰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선교사가 되고 싶다는 아들에게안돼 나는 네가 우리랑 미국에서 같이 살고 싶다.”라고 말했습니다. ‘위대한 삶을 살 수 있는데 왜 아무 것도 아닌 삶을 사느냐?’는 것입니다. 그는 아버지에게아빠, 감사해요. 그러나 저는 좋은 대학 좋은 직장 평범한 삶을 살고 싶지 않습니다. 주님 오실 때까지 계속 자손 대대로 그렇게 사는 삶을 원하지 않습니다.”그 말에 아버지는 화를 내고 나가셨다고 했습니다.

 

마이클 오 목사님은 왜 이런 삶을 산 것일까요? 주 예수님과 연합하였기 때문입니다. “제 인생은 나를 위하여 사는 것도 아니고 일본 사람을 위하여 사는 것도 아닙니다. 주 예수님께서 저를 위하여 사는 삶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자손대대로 잘 먹고 살라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고후 5:15“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그는 고백했습니다. “주 예수님이 드러나실 수 있다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요즘 두려운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은 더욱 힘들게 느껴집니다,

믿기만 하면 될까?’ ‘사랑하며 살 수 있을까?’ ‘사명으로 살 수 있을까?’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를 바라보는 자는 한 사람도 잃지 않고 책임져 주십니다,

:9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나는 한 사람도 잃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두려운 일을 묵상하지 않고 계속 주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중국에서 장로수련회를 했을 때, 상하이에 있는 동방명주라는 타워에 올라갔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곳에 바닥이 유리로 된 곳이 있어 그 위를 걸어보았습니다. 그 때, 누가목사님, 무섭지 않으세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이 전망대의 유리 바닥 위를 걷는 것보다 비교할 수 없는 두려운 상황을 여러번 경험했습니다. 그 중에 가장 두려운 순간이 교인들 앞에 나가 설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매주 훈련을 받다 보니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웃었지만 정말 이해하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우리의 삶은 두려움과 믿음의 끊임없는 반복입니다.

눈에 보이는 두려움과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함께 하시는 예수님, 어디가 더 큽니까?

예수님이 커 보이는 믿음을 갖기까지 우리는 계속 믿음의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그래서 일상의 삶에서 주님을 바라보는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눈으로 주님을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믿어지면 본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20:29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저는 어릴 때부터 두려움이 많았는데, 고생하시는 아버님의 목회를 보고 자라면서 무엇보다 목회가 두려웠습니다, 아내에게 프로포즈할 용기도 없었습니다. ‘부름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찬송도 크게 부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바라보면서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종이 될 수있다면 한 쪽 다리를 바치겠다고 기도했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대학원 졸업을 포기하겠다고 했습니다.

더 이상 나의 유익을 구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돌짝밭 사명 외면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선한목자교회로 올 때도 그러했습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중에 어느 순간 제 안에 두려움이 사라진 것입니다,

지금 목사님은 어떤 것도 두렵지않습니까?”물으실 분이 있을 것입니다.

아닙니다. 두려운 마음이 생길 때, 주님을 바라보아야 함을 명심하게 된 것이 뿐입니다

 

우리 앞에 두려운 일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부정하면 안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더욱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놓치기에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고난 때문에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에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방법은 사람의 방법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화를 내고 폭력을 사용합니다. 두려움 때문입니다.

두려움이 사라지면 사랑과 진실함으로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예수님이 거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계속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때 세상을 이길 담대함과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 안에서 두려움이 사라졌는가? /18:1-14/ 유기성목사

2023-05-12 10:38:59

 

이제 요한복음의 가장 중요하고 은혜로운 부분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기사입니다.

그 중에 본문은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로마 병정들에게 붙들리는 장면입니다.

우리가 주목하게 되는 것은 그 상황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의 행동이 너무나 대조적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당당하셨습니다.

 

병정들이 누가 나사렛 예수냐고 물을 때 "내가 그 사람이다." 대답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얼마나 권세가 있으셨는지 병정들이 나가 쓰러졌을 정도였습니다,

그에 비하여 제자들은 엄청 당황하며 우왕좌왕하였습니다,

베드로는 병사들을 향하여 검을 휘두르다가 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베었습니다,

베드로는 그렇게라도 했지만 다른 제자들은 도망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14:52에 보면 벌거벗은 몸으로 도망한 제자도 있었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은 왜 제자들의 이런 비겁한 모습을 기록했을까? 궁금해집니다.

우리도 충격이지만 초대 교회 교인들로서는 엄청난 충격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초대교회 사도들입니다. 이미 순교한 제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이런 사람들이었다는 것이 알려지면 사도들의 영적 권위에 문제가 되지는 않을까요?

 

그런데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했던 과정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사들에게 제자들은 놓아주라고 하셨습니다,

:8 "내가 그 사람이라고 너희에게 이미 말하였다. 너희가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은 물러가게 하여라."

 

요한복음이 말씀하려는 것이 무엇일까요?

예수님 안에서 사람은 변한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사도들도 십자가 앞에서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간 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고난이 두렵다고 낙심하지 말라’, ‘고난을 두려워하는 이들을 믿음 없다고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겟세마내 동산에서의 제자들의 문제는 십자가 고난이 너무 크고 고통스러웠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아직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지 않은 상태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얼른 도망가라고 하신 이유도 제자들이 성령받지 않은 상태에서는 예수님과 끝까지 동행할 수 없고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두렵다면 겪어야 할 고난이 크기 때문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살지 못하고 두려움의 영을 따라 살기 때문입니다.

8:15에서 불신자를 가리켜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고난 앞에서 두려운 것은 영적인 역사인 것입니다.

고난이 두려울 때, 마귀가 두려움으로 우리를 조종하려 함을 명심해야 합니다.

풀무불과 사자 굴로 위협하고 사람들에게 돌을 맞게 합니다.

목적은 단 하나 우리가 십자가의 길을 가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달라스 윌라드가 쓴 [하나님의 모략]에 보면 미국 교회 안에선교사로 나가라고 할까봐 하나님께 헌신을 결단하지 못하는 교인들이 많다는 말이 나옵니다. 저는 한국 교회만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딤후 1: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예수님을 믿어도 두려움이 해결되지 않습니다하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3년을 함께 지냈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과 함께 있었지만 두려움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예수님과 함께 걸으며 대화도 하였으나 두려움과 슬픔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곁에 계셔도 두려움은 해결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당황해 하는 일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심을 믿는데, 세상이 두렵고 고난이 두려운 것입니다.

그러므로나는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은 내 안에 거하심을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나는 예수님과 함께 죽었고 이제는 예수님이 나의 생명이심을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안에 성령이 오셨을 때, 믿음입니다.

 

정말 고난 앞에서 두려움이 사라질 수 있을까요?’

어릴 때는 혼자 있는 것이 두렵습니다. 그러나 나이들면 혼자 있어도 두렵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는 것이 믿어지면 그런 경험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나이만 들어서는 안됩니다. 영적으로도 성장해야 합니다.

영적으로 성장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마음에 거하시는 것이 믿어지고 예수님과 친밀히 동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뚜렷한 증거가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리처드 범브란트목사님은 루마니아가 공산화된 후 1948년 체포되어 14년간 상상하기 어려운 고문을 당하였다가 1964년 세계적인 구명운동으로 풀려났습니다. 그가 미국 상원에서 증언하였는데, 18군데 몸의 상처를 보여주면서나는 고문을 당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당하기에 기뻐했고, 나를 고문하는 공산당원들은 나에게 고통을 주면서 기뻐하여 우리는 다같이 기뻐했습니다라고 증언하였습니다.

 

실제로 제자들이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고 변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사도가 된 것입니다. 두려움이 없는 사람들 같았습니다.

담대하게 부활의 예수님을 전하고 하루에 3천명씩, 5천명 씩 구원받았으며 순교로 사명의 삶을 마쳤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그렇게 당당하셨던 주님이 그들 안에 거하셨기 때문입니다.

 

세계 4차 로잔대회가 2024년 한국에서 열립니다. 국제 로잔 대표 마이클 오는 한국계 미국 선교사로 일본에서 사역하였습니다. 그가 40세에 국제 로잔 대표가 되었을 때, 세계 기독교계가 깜짝 놀랐습니다. 한국의 유명한 목사님 한 분이마이클 오가 누구야?” 라고 했습니다. 마이클 오는 이 말을 전해 듣고마이클 오, 아무 것도 아니잖아하는 의미로 듣고 기뻤다고 했습니다. 약한 자를 들어쓰신다는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졌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가 하버드 대학을 졸업한 후 선교사로 나가려 할 때, 아버지가 강하게 반대하였다고 했습니다. 그의 부친은 단돈 300달러 가지고 미국에 이민와서, 희생적으로 자녀를 교육시켰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선교사가 되고 싶다는 아들에게안돼 나는 네가 우리랑 미국에서 같이 살고 싶다.”라고 말했습니다. ‘위대한 삶을 살 수 있는데 왜 아무 것도 아닌 삶을 사느냐?’는 것입니다. 그는 아버지에게아빠, 감사해요. 그러나 저는 좋은 대학 좋은 직장 평범한 삶을 살고 싶지 않습니다. 주님 오실 때까지 계속 자손 대대로 그렇게 사는 삶을 원하지 않습니다.”그 말에 아버지는 화를 내고 나가셨다고 했습니다.

 

마이클 오 목사님은 왜 이런 삶을 산 것일까요? 주 예수님과 연합하였기 때문입니다. “제 인생은 나를 위하여 사는 것도 아니고 일본 사람을 위하여 사는 것도 아닙니다. 주 예수님께서 저를 위하여 사는 삶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자손대대로 잘 먹고 살라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고후 5:15“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그는 고백했습니다. “주 예수님이 드러나실 수 있다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요즘 두려운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은 더욱 힘들게 느껴집니다,

믿기만 하면 될까?’ ‘사랑하며 살 수 있을까?’ ‘사명으로 살 수 있을까?’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를 바라보는 자는 한 사람도 잃지 않고 책임져 주십니다,

:9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나는 한 사람도 잃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두려운 일을 묵상하지 않고 계속 주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중국에서 장로수련회를 했을 때, 상하이에 있는 동방명주라는 타워에 올라갔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곳에 바닥이 유리로 된 곳이 있어 그 위를 걸어보았습니다. 그 때, 누가목사님, 무섭지 않으세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이 전망대의 유리 바닥 위를 걷는 것보다 비교할 수 없는 두려운 상황을 여러번 경험했습니다. 그 중에 가장 두려운 순간이 교인들 앞에 나가 설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매주 훈련을 받다 보니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웃었지만 정말 이해하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우리의 삶은 두려움과 믿음의 끊임없는 반복입니다.

눈에 보이는 두려움과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함께 하시는 예수님, 어디가 더 큽니까?

예수님이 커 보이는 믿음을 갖기까지 우리는 계속 믿음의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그래서 일상의 삶에서 주님을 바라보는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눈으로 주님을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믿어지면 본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20:29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저는 어릴 때부터 두려움이 많았는데, 고생하시는 아버님의 목회를 보고 자라면서 무엇보다 목회가 두려웠습니다, 아내에게 프로포즈할 용기도 없었습니다. ‘부름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찬송도 크게 부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바라보면서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종이 될 수있다면 한 쪽 다리를 바치겠다고 기도했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대학원 졸업을 포기하겠다고 했습니다.

더 이상 나의 유익을 구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돌짝밭 사명 외면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선한목자교회로 올 때도 그러했습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중에 어느 순간 제 안에 두려움이 사라진 것입니다,

지금 목사님은 어떤 것도 두렵지않습니까?”물으실 분이 있을 것입니다.

아닙니다. 두려운 마음이 생길 때, 주님을 바라보아야 함을 명심하게 된 것이 뿐입니다

 

우리 앞에 두려운 일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부정하면 안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더욱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놓치기에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고난 때문에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에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방법은 사람의 방법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화를 내고 폭력을 사용합니다. 두려움 때문입니다.

두려움이 사라지면 사랑과 진실함으로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예수님이 거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계속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때 세상을 이길 담대함과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찬양: 살아계신 주

 

 

 

두려움이 없는 확신에 이르기까지 /54:1-7/ 유기성 목사

2016-08-23 15:25:21

 

인도 콜카타에서 행려자들을 보살펴온 테레사 수녀가 함께 일할 사람을 선발하는 기준은잘 웃고, 잘 먹고, 잘 자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시편 54편에서 보는 다윗은 믿음이 참 인상적입니다.

 

사무엘상 23장에 보면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하여 은거 생활을 할 때, 그일라에 블레셋이 쳐들어 와서 추수한 것들을 다 빼앗길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 때, 다윗은 그일라로 가서 그들을 구해주었습니다.

 

부하들은 한결같이 반대했었습니다. 도울 입장도 도울 힘도 없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일라 거민들의 고통을 모른 척하고 넘길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에게는 생각하는 것부터 다릅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안목과 하나님의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사울 왕은 그일라를 도울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았습니다. 힘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이 그일라에 있다는 보고를 받고는 즉시 모든 지파에 명하여 군대를 동원하여 그일라로 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울 왕이 군대를 일으켜 그일라로 내려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일라 사람들이 다윗을 내어 주었습니다. 다윗은 생명을 걸고 그일라 사람들을 구해 주었는데, 그일라 사람들은 다윗을 배신한 것입니다.

 

그 때 다윗은 하나님께 이 일에 대하여 의논하고 아무 소리하지 않고 그일라에서 피하여 나옵니다. 힘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블레셋의 손에서 그일라를 구원한 다윗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한 것입니다.

 

여기에 다윗의 위대함이 있는 것입니다. 골리앗을 꺽었을 때 보다 이처럼 그일라에서 피해 나올 때가 진정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그일라 지역에서 도망하여 십 사람들이 사는 광야로 피신합니다. 십 사람들은 다윗과 같은 유다지파인데다 역시 다윗이 블레셋으로부터 구해준 적이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거긴 안전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들도 사울 왕에게 다윗이 있는 곳을 고자질하였고, 사울 왕과 함께 다윗을 잡으려고 수색 작전을 벌이게 됩니다.

 

이젠 정말 도망갈 데도 없는 궁지에 몰렸습니다. 배신의 아픔도 컸을 것이고, 사람들이 다 무서운 처지에 빠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쓴 시가 시편 54편입니다. 이런 배경을 알고 시편 54편을 읽어 보면 좋겠습니다.

 

54:1 하나님, 주님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님의 권세로 나의 정당함을 변호하여 주십시오. 2 하나님,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 입으로 아뢰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3 무법자들이 일어나 나를 치며, 폭력배들이 내 목숨을 노립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하나님을 안중에도 두지 않는 자들입니다. (셀라)

 

한 구절 한 구절이 절박한 기도입니다. 그런데 이런 두려운 상황에서 다윗은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담대한 것을 봅니다

 

4-5절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돕는 분이시며, 주님은 내게 힘을 북돋우어 주는 분이시다. 원수가 나에게 악한 짓을 하였으니, 주님이 내 원수를 갚아 주실 것이다. 주님의 진실하심을 다하여 그들을 전멸시켜 주시기를 빈다.

 

이런 태도를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너무나 두려운 상황인데도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을 확신하고 마음이 평안한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하나님의 구원등에 대하여 들어서 아는 정도가 아니라 정말 믿고 평안한 것입니다. 들어 본 적이 있거나 아는 것과 믿음은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런 믿음이 없음을 늘 안타까와 하셨습니다.

 

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그런데 다윗은 두려워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즐거워하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6절 내가 즐거운 마음으로 주님께 제물을 드립니다. 주님, 내가 주님의 선하신 이름에 감사를 드립니다.

 

근심 걱정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 것도 대단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 믿음이라 단정하기 어려운 때도 있습니다. 선천적으로 성격이 천하태평인 사람도 있습니다. 생각이 모라라서 겁이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내 주먹을 믿어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단순히 두려움이 없다는 것을 믿음이라고 단언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두려움 없는 확신이 감사로 되어야 믿음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토니 캄폴로(Tony Campolo)교수가 책에서 친구의 딸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느 폭풍우치고 무섭게 번개 치던 밤 갑자기 2층 방에서 혼자 자던 4살 된 딸이 큰 소리지르기에 아빠가 급히 2층으로 뛰어 올라갔답니다. 그런데 방에 들어가 보니 딸이 창문 앞에 양 팔을 벌리고 선 채로 큰 소리로 외치고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사진 찍어 주시는 거예요? 예쁘게 찍어주셔요!”

 

진정한 믿음은 감사하는 믿음입니다. 다윗은 어떻게 이런 믿음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7절을 주목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7절 주님이 나를 모든 재난에서 건져 주셨으며, 나의 이 눈으로, 원수들의 멸망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재난에서 건져 주시고, 원수들이 멸망하는 것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다윗이 십 광야에서 사울 왕에게 거의 잡힐 뻔 했었는데, 갑자기 블레셋이 침공을 하였습니다. 그 바람에 사울은 다윗을 추격하는 일을 중단하고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다윗이 이런 결과를 본 다음에 이 시편을 쓴 것일까요? 그러면확신한다, 즐거워한다, 감사한다는 고백이 전혀 이상할 것이 없고, 대단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면 1-3절 기도는 설명이 안됩니다. 어떻게 이미 다 해결되었는데주님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님의 권세로 나의 정당함을 변호하여 주십시오.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 입으로 아뢰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할 수 있습니까?

 

그러니 7절의 고백은 사울 왕이 물러가기 전에 쓴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7절을 자세히 보면주님이 나를 모든 재난에서 건져 주셨으며라고 했습니다. ‘이번 재난이 아니라모든 재난에서 건져 주셨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다윗은 비록 막다른 길에 몰린 것 같은 다급한 상황을 만났지만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생각났던 것입니다. 그동안 하나님께서는 모든 재난에서 건져주셨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이번에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도우시고 재난에서 건져주실 줄 믿어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할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믿으려고 애를 쓰는 것과 믿어지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믿어져야 합니다. 믿어져야 묵묵히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습니다. 결과를 하나님께 맡길 수 있습니다.

 

다윗은 어떤 두려움 상황이 왔을 때라도, 어려운 형편을 보지 않고 자신이 올바르게 행하고 있는지를 확인하였습니다. 그 점에 문제가 없다면 그는 하나님의 구원을 믿었습니다.

 

1 ... 주님의 권세로 나의 정당함을 변호하여 주십시오

 

사울이 자신을 억울하게 죽이려하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배반하지만, 자신은 정당하기에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고 믿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시지 않겠느냐는 말입니다.

 

3절 무법자들이 일어나 나를 치며, 폭력배들이 내 목숨을 노립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하나님을 안중에도 두지 않는 자들입니다.

 

이 말은 다윗 자신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두려운 일이 많은 세상에서 살지만 우리도 이런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의 뜻은 우리를 환란에서 건지시는 것보다 우리가 온전한 믿음을 가지는 것을 더 원하십니다.

 

이랜드의 박성수 회장이 코스타에 강연하실 때, 회사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회사 내에 있는 기도실에 가서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박성수 회장은 기도실에 가서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응답하셨더라는 말을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끝까지 하나님의 방법대로 기업을 이끌어 갈 믿음을 주셨고 지혜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문제 해결이 아니라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믿음입니다.

 

다윗은 한순간에 이런 믿음을 가졌던 것이 아닙니다.

 

7절에서주님이 나를 모든 재난에서 건져 주셨으며라고 한 고백을 보니 그동안 수많은 재난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때마다 다윗은 하나님을 바라보았고,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였고, 하나님은 신실하게 다윗을 구원하여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경험들 때문에 지금 하나님의 구원이 믿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합니까?

 

우리의 모든 삶이 보이지 않는 주님을 보이는 분처럼 믿고 사는 훈련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밤에 보는 별들 중에 상당수가 이미 사라진 별이라고 합니다. 별에서 떠난 빛이 우리 눈에 들어오기 까지 엄청난 시간이 걸려 그 사이에 이미 사라져 버린 별이 많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인다고 다 실재는 아닙니다. 반면에 눈에 보이지 않지만 주님은 너무나 분명히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보이는 것에 의존하지 않고 24 시간 주 예수님을 바라보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노력에 소극적이서는 안됩니다.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완벽주의 성향이라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잘 배우지 못합니다.

 

목사 아들에 동생들 항상 모범이 되어야 하기에 실수나 실패는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어릴 때, 체육시간에 축구를 처음 했을 때, 공을 잘 다루는 친구를 보니 위축이 되었습니다. 한번 제게 공이 오기에 힘껏 찼더니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갔습니다. 너무나 창피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는 축구를 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미국 목사님이 어린 시절 야구하던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타석에 처음 섰던 순간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삼진 아웃이었다.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른다.

 

그런데 한 가지 내 눈에 띈 것이 있었다. 안타를 치지 않고도 출루하는 아이들이 있었다. 포볼로 나가는 것이다. 간혹 후속 타순의 훌륭한 타자 덕에 홈으로 뛰면서 박수 갈채의 감격을 누리기도 했다.

 

투수들이 어차피 수준급이 아니니 항상 스트라이크만 던질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나는 결심하였고, 남은 시즌 동안 다시는 방망이를 휘두르지 않았다. 생각보다 스트라이크 아웃도 많았지만 나는 이따금씩 베이스를 밟았다. 홈까지 들어올 때도 있었다.

 

성인이 되어서도 오랜 세월 나는 방망이를 휘두르지 않는다는 굳은 결심으로 살았다. 스윙이 너무 괴로웠기 때문이다. 스윙으로 공을 놓쳐 버리면 무능함이 탄로 나고 설사 방망이를 휘둘러 안타를 치더라도 더 잘해야 하는 압박감이 따른다.

 

그러나 지금, 어쩔 수 없는 것인 양 일부러 무능을 택해 그 속에서 살아온 세월이 후회된다. 나를 위해 하나님의 설계를 떠나 살아온 것이 슬프다.”

 

저는시도하지 않으면 창피를 당하지는 않는다.’ 것이 지혜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못한 것이 너무 많았습니다. 운동도 못하고 노래도 못하고 춤도 못추고 영어도 못하고 수영도 제대로 배우지 못하였습니다.

 

돌아보니 너무나 바보같이 살았습니다. 어릴 때 실수나 초보자 때 실패를 누가 기억이나 하겠느냐 말입니다. 그리고 기억한 들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래서 지금 잘한다면, 적어도 즐기며 산다면 오히려 자랑스런 일이지 않겠습니까?

 

부끄러워하고 소극적이어서 놓친 소중한 것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뼈아픈 교훈 때문에 가장 소중한 한 가지를 놓치지 않게 되었으니 감사한 일입니다. 살아계신 주님과 동행하며 사는 훈련입니다.

 

저는 지금 보이지 않지만 내 안에 계시고 들리지 않지만 분명히 말씀하시는 주님을 24 시간 바라보며 하루 하루를 살아 갑니다. 그것을 매일 매일 기록합니다. 영성일기라고 이름지었습니다. 또 영성일기를 공개하였습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일을 계속 지켜가기 위해서입니다.

 

실제 이런 시도는 저답지 않은 일입니다.

 

여전히 주님과 친밀히 동행하는 삶은 온전하지 못합니다. 낙심하고 좌절할 될 때도 있습니다. 영성일기를 공개하기가 부끄럽고, 실수하고 넘어지기도 합니다. 이상한 것 한다고 오해받기도 하고 별의 별 말을 듣기도 합니다. 완벽주의 적인 성향인 제게는 엄청난 스트레스입니다.

 

저는 누군가가 정말 주 예수님을 믿고 사는 사람을 만나기를 갈망하였습니다. 그 사람을 따라 살면 확실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세월은 너무 많이 흘러갔습니다. 이젠 더 이상 어떤 사람을 기다릴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이젠 주 예수님을 의지하고 나아가야만 하는 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 만큼은 실수할까, 실패할까 두려워하거나 사람들이 뭐라 할까 봐 움츠리고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 만큼은 결코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 자신이 하나님의 뜻대로 온전히 목회하지 못하는 가장 큰 원인이 두려움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목사이면서도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고 의지하지 못하였습니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하나님 보다 사람을 더 의지하였습니다.

 

지금도 안타까운 것은 저 자신이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제한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과 친밀함에 눈이 뜨이게 하시는 이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지금도 두려움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가슴이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해결하기 어려운 일들 때문인 줄 알았습니다. 아니었습니다. 저 자신만 바라보고 있기 때문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무거울 때면 잠잠히 예수님을 바라 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해 주실 일들입니다. 그러면 마음이 평안해집니다. 회개하지 않고 있는 죄 외에는 두려워 할 것이 없음을 깨닫습니다.

 

속회 방학 중인데 영성일기 꾸준히 쓰고 계십니까? 여러분 중에 두려움이 없고 도전적이고 모험심이 많아 이것도 잘 하고 저것도 잘하여 팔방미인 소리를 듣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과 친밀하지 못하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복근만들기 열풍인데, 죽을 때 복근 아까와서 어떻게 죽을까 괜한 걱정이 듭니다. 다른 것은 다 잘하는데 주님과 친밀하지 않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죽음의 문을 열고 들어갈 때, 주님이 받아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아니겠습니까? 믿음은 믿으려고 애를 쓰는 것이 아닙니다. 믿어지는 것입니다.

 

가을이 오는 것을 믿으려고 애를 씁니까? 하나님의 나라, 영생도 이렇게 믿어져야 정상입니다. 믿어져야 선택을 올바르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일이나 금요일, 주님 면회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신앙생활 이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낳아준 부모도 떨어져 살고 이따금 만나다 보면 사랑을 느끼기 어렵게 됩니다

 

예수님과 실제 사랑을 나누며 살기 원한다면 24 시간 예수님을 바라보며 동행하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100만 명의 영혼을 구원했다는 드와이트 무디, 그는 처음에 믿음이 번개처럼 위로부터 임할 줄로 여기고 막연히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로마서 10 17절을 읽고, 믿음은 말씀을 읽고 들을 때 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경을 읽고, 또 기도하고, 또 성경 읽기를 계속하면서, 자신의 믿음이 자라남을 알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 자리에 저처럼 소심하고 용기없고 그래서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것이 없는 분들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것은 다 못해도 별 상관이 없습니다. 주님과의 친밀함, 믿음으로 사는 훈련 만큼은 놓지면 안됩니다. 어떤 핑계도 통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모두, 24 시간 주님과 동행함으로 세상이 두렵지 않는 확신을 갖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정말 죽음의 두려움도 이길 수 있을까? /2:5-18/ 유기성 목사

2016-08-18 11:01:17

 

이번 주일 설교는 좀 무거운 주제입니다. ‘정말 예수님을 믿으면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신학생 때, 어느 목사님의 죽음에 대하여 듣고 감동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이 목사님이 위암 말기였는데, 혼수상태에 들어가 장로님들이 병원 중환자실에 모셨는데 목사님의 의식이 돌아왔습니다, 목사님이 깨어나서 보니, 수혈하는 붉은 피를 보았습니다,

 

목사님이 바짝 야윈 얼굴이지만 빙그레 웃으시면서 "왜 쓸데없는 짓을 하노? 나는 어차피 가야할 사람인데, 저 피가 없어서 젊은 사람도 죽어가는데 왜 저런 쓸데없는 짓을 해." 라면서 다 뽑게 하셨답니다. 그리고 주위의 한 사람 한 사람 위하여 숨이 차지만 기도하고 눈을 감으셨다고 합니다.

 

장례식 때 광고하던 장로님이우리 목사님은 명설교가일 뿐만 아니라 마지막 순간까지도 설교를 하고 가셨습니다." 하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가슴 뭉클한 감동을 받았지만 당시는 그 목사님의 심정과 믿음을 다 헤아리기 어려웠습니다.

 

정말 예수님을 믿으면 죽음의 두려움이 사라집니까? 본문은그렇다고 말씀합니다.

 

14-15 ...그가 죽음을 겪으시고서, 죽음의 세력을 쥐고 있는 자 곧 악마를 멸하시고, 또 일생 동안 죽음의 공포 때문에 종노릇하는 사람들을 해방시키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왜 최고입니까? 우리를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시키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이 말씀을 하는 것은 당시 로마의 교인들이 정치적 핍박과 유대교의 종교적 핍박 아래서 죽음에 내몰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죽음 앞에선 성도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18 ... 시험을 받는 사람들을 도우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죽음의 공포가 어떻게 우리에게 왔는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본래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죽음의 공포가 마귀 때문에 생긴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14절에서죽음의 세력을 쥐고 있는 자 곧 악마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죽음의 공포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 마귀가 우리를 지배하면서 생긴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우리를 구원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은혜와 사랑을 말로만 했다면 우리가 도무지 믿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 되셨습니다.

 

14절 이 자녀들은 피와 살을 가진 사람들이기에, 그도 역시 피와 살을 가지셨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하려면 우리와 같아지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17절 그러므로 그는 모든 점에서 형제자매들과 같아지셔야만 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자비롭고 성실한 대제사장이 되심으로써, 백성의 죄를 대신 갚으시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살고 있으니, 주님도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18절 그는 몸소 시험을 받아서 고난을 당하셨으므로,

 

사람이 되신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두려움을 경험하셨습니다.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땀방울이 핏방울이 될 만큼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아버지 하나님께 탄원하셨습니다. 그것은 죽음 그 자체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 죽는 것이 두려우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도우실 수 있는 것입니다. 18 ... 시험을 받는 사람들을 도우실 수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시고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사랑이다.” 아무리 말씀하셔도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갔을 것입니다.

 

우리가 야생 다람쥐나 새나 토끼를 보고 사랑스러워하여도 그들이 우리를 피해 도망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 그리스도 예수를 보내 고난을 당하게 하고 십자가에 비참하게 죽게 하심으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정말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 죄가 씻어졌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이제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되었음을 믿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죽음도 두렵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만 이 복음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 다니면서도죽겠다.“고 아우성치는 교인들을 종종 봅니다. 마귀는 여전히 죽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자녀들을 가지고 장난치고 있습니다. 오늘도 마귀는죽인다.” 하면서 두려움을 주어 성도들 조차 영원한 구원을 포기하게 만들려고 합니다.

 

우리가 죽음의 공포를 이기는 능력을 가지지 못하면 구원을 지키지 못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 보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죽음의 공포도 구원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죽음도 이길 수 있음을 믿지 못합니다. 그래서 방황합니다. 이런 믿음은 특별한 사람, 특별한 체험으로 되어지는 것으로 여깁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약속대로 사는 것이 힘들어서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복음을 믿을 때,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속죄함을 받았습니까? 어떻게 의롭다 하심과 하나님이 자녀되는 복을 받으셨습니까? 믿음으로 그리 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원수도 사랑하게 되고 항상 기뻐하게 되고 죽음도 두렵지 않게 되는 것도 믿음으로 취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하여 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까?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함을 받는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우리가 아무 공로없이 천국에 가게 된다! 이것은 믿으면서 왜 죽음도 이길 수 있다는 것은 믿어지지 않는다고 합니까? 우리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바라보면 예수님이 해주시는 것인데 말입니다.

 

장로 부부 수련회 때, 상해의 동방명주라는 타워에 올랐습니다. 468m 높이의 대단한 타워였습니다. 거기에 바닥이 유리로 된 층이 있었습니다. 그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니 정말 아찔하였습니다. 그 위를 한참 걸었습니다.

 

다들 두렵지 않으냐고 했습니다. 솔직히 두려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래로 떨어지지 않게 만들어 놓았으니 관광객들에게 올라가 보라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위험하면 왜 올라가 보라고 했겠습니까?

 

그곳은 믿음을 체험하기 딱 좋은 곳이었습니다. 이미 눈에 보이는 두려움보다 떨어지지 않게 만들어 놓았다는 믿음으로 걸어 보았습니다.

 

저는 매주 이런 믿음의 결단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강단에 서는 것입니다. 동방명주도 이만큼은 두렵지 않았습니다.

 

우리 힘으로 죽음의 공포를 이길 수는 없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죽음의 공포를 이기게 해주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예수님을 믿고 언제나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9절에 보면우리가 봅니다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9절 예수께서 다만 잠시 동안 천사들보다 낮아지셔서, 죽음의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영광과 존귀의 면류관을 받아쓰신 것을, 우리가 봅니다.

 

여기서 본다는 것은 영적인 눈이 열린 자를 말합니다. 영적인 눈이 뜨인 자는 예수님을 직접 보지 못하여도 예수님에 관한 모든 것을 다 보게 됩니다. 하늘의 하나님, 성육신하신 것과 십자가 고난, 부활 승천하신 그 모든 것을 다 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보이지 않습니까? 영적인 눈이 뜨이지 않은 사람은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 보아도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는 자가 될 뿐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눈이 열린 사람입니다. 이것이 죽음의 공포를 이기는 열쇠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 삶이 변하고 원수도 사랑하게 되고 항상 기뻐하며 죄를 이기고 죽음의 두려움도 사라지게 됩니다.

 

요즘 우리는 누가복음 21장 말씀으로 큐티를 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날의 징조, 전쟁과 자연재해와 무서운 징조들이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그 전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박해가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박해를 당할 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친히 무슨 말할지 알려 주리라!는 것입니다.

 

21:15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변과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를 능히 죽음의 두려움에서 건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죽을 몸도 살리실 것이라는 약속을 가지고 우리의 몸 속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장로 부부 수련회 때 유용희장로님께서 주기철산정현교회에서의 설교 제목은 [오 종목(五 種目) 나의 기원] [나의 다섯가지 기도제목]입니다. 주목사님 설교의 첫째 대지가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이었습니다.

 

나는 바야흐로 죽음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나의 목숨을 빼앗으려는 검은 손은 시시각각으로 닥쳐오고 있습니다. 죽음에 직면한 나는 「사망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망 권세는 마귀가 사람을 위협하는 최대의 무기인가 합니다. 죽음을 두려워 의()를 버리며 죽음을 면하려고 믿음을 버린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베드로도 죽음이 두려워 가야바의 법정에서 예수를 부인하고 계집종 앞에서 세 번이니 맹세하였으니 누가 감히 죽음이 무섭지 않다고 장담하겠습니까?

 

... 그러나 폐결핵 환자로 요양원에 눕지 아니하고 예수의 종으로 감옥에 가치우는 것은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자동차에 치어 죽는 죽음도 있는데 예수의 이름으로 사형장에 나가는 것은 그리스도인 최대의 영광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그리스도의 사람은 살아도 그리스도인 답게 살고 죽어도 그리스도인 답게 죽어야 합니다. 죽음을 무서워 예수를 저버리지 마시오. 풀의 꽃과 같이 시들어 떨어지는 목숨을 아끼다가 지옥에 떨어지면 그 아니 두렵습니까? 한번 죽어 영원한 천국 복락 그 아니 즐겁습니까?

 

그리고 두 번째 대지로긴 기간 당하는 고난을 견디게 하여 주시옵소서세 번째 대지로노모(老母)와 처자(妻子)와 교우를 주님께 부탁합니다.’

 

네 번째 대지는()에 살고 의에 죽게 하여 주시옵소서였습니다. 이 부분에서 주목사님은 한탄하셨습니다.

 

... ! 내 주 예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는구나. 평양(平壤)! 평양아! 예의 동방의 내 예루살렘아! 영광이 네게서 떠나도다. 모란봉아! 통곡하라. 대동강아 천백세에 흘러가며 나와 함께 울자!

 

...나의 사랑의 교우 여러분, 의에 죽고 의에 살으사이다. 여러분, 예수는 살아계십니다. 예수로 죽고 예수로 살으사이다. 그리고 끝으로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하고 설교를 마쳤습니다.

 

목사님은 주기철 목사님처럼 이렇게 순교하실 수 있습니까?” 누가 묻는다면 저는 결코 자신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저는 장애인이 될 처지에서도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모릅니다. 그런 제가 어찌 당당히 순교할 수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저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믿을 뿐입니다.

 

고난의 길, 순교의 길은 사람이 통이 크고 결단력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임마누엘하시는 주님을 알고 사랑하면 가게 됩니다. 이것이 순교자들의 신앙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러 가실 때, 제자들도 두려워서 감히 따라가지 못하고, 도망가고, 부인하였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고난 다음 그들은 십자가의 길을 찬송하며 갔습니다. 임마누엘하신 예수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시편 23 4절에서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이라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죽음도 두렵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은부족함이 없다는 고백과 또 다른 고백입니다. 다윗이 이처럼 죽음 앞에서도 담대하였던 것은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고백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중에 죽는 것이 두려운 분은 아직 예수님과의 관계가 인격적이고 친밀하지 못한 채, 여전히 마귀에게 사로잡혀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찌 계속 이렇게 살 것입니까?

 

그러나 절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죽음도 두렵지 않게 해주시는 분이구나! 믿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군목 제대를 할 때 부대장에게 인사를 하고 나오는데, 위병소에서 한 형제가 제 차를 알아보고 웃으며 나와 인사를 하였습니다.“목사님, 제대하신다지요, 저도 10월이면 제대합니다.”저는 차를 세우고, 내려서 그 형제를 꽉 끌어 안아 주었습니다.

 

그 형제는 이등병 때, 자살을 시도하여 오랫동안 상담을 하던 형제였습니다. 대대장으로부터 그 형제의 마음을 바로 잡아달라는 부탁을 받고, 상담하면서 얼마나 낙심스런 순간이 많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형제가 제대하게 된 것입니다. 저는 차를 타고 부대를 빠져 나오면서, 그 형제가 무사히 제대하게 된 것도 감사했지만,

 

사람을 변화시키시는 이가 예수님이신 것을 깨닫지 못하고, 그 형제에 대하여 쉽게 낙심하고, 포기할 뻔 하였던 제 자신이 무척 부끄러웠습니다.‘안된다고 포기했다면 어떻게 할 뻔 하였나?’여러분만 포기하지 않으시면 주님은 결코 여러분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제 아내에게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3 때 장인 어른이 간암으로 세상을 떠나시고 그 후 겪었던 많은 고생이 제 아내 마음에 죽음의 두려움을 깊이 심어주었습니다. 결혼하고서 늘 저도 일찍 죽을까봐 두려워하였습니다. 열심히 일하면 과로하다가 죽을까봐, 열심히 안하면 하나님께 벌받아서 죽을까봐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런 제 아내에게 암이 생겼습니다. 병원에서 암진단을 받고 제게 전화를 하던 그날을 잊을 수 없습니다. “여보, , 암이래요.‘두려움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제 아내에게서 죽음의 공포를 없애주시려는 주님의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아내도 저도 기도하면서 두려움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고 영적인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수술을 앞둔 어느 날 제 아내는 더 이상 안되겠구나 하고 생각하고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더 이상 살려달라고 하지 않겠습니다. 주님 죽어도 좋겠습니다. 주님의 뜻대로 하십시오.” 그 때 살려달라고 할 때는 누릴 수 없었던 평안이 밀려왔다고 했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붙잡으니 사탄이 역사한 것이었는데, 두려움을 놓으니까 사탄이 더 이상 붙잡을 것이 없어진 것입니다.

 

제 아내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다시 한번 점검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아프카니스탄에서 샘물교회 사태가 일어나기 전, 제 아내가 같은 꿈을 꾸었습니다. 제가 선교여행 중 폭도들에게 납치되고 저에 대한 보상금을 논의되더랍니다. 그 때, 제 아내는 장로님들에게 가서남편이 죽는다 하더라도 교인들의 헌금을 이교도들에게 줄 수 없다.’고 눈물로 호소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게 그 꿈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기분이 묘했습니다. 그러나 제 마음에 아내의 두려움이 떠났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 죽음이 두렵지 않다는 것 뿐 아닙니다. 인생의 의미, 진정한 축복의 길이 다 깨달아지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살 길이 열립니다. 세상을 이길 방법이 생깁니다. 능력이 임합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우리는 구원받았습니다. 죽음도 죄도 마귀도 이길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직 주 예수님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두려움을 극복한다 /15:1-6/ 하용조목사

2015-05-24 22:32:08

 

우리가 믿음을 갖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 오셨기 때문입니다. 믿음은로부터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믿음은 말씀에 순종하면서 커 갑니다. 기근을 만나기도하고 갈등도 겪지만 믿음은 새로운 세계를 보게 합니다. 믿음은 위기에 도전하며 물질의 유혹을 극복합니다. 그리고 믿음은 유혹과 의심과 두려움을 극복합니다. 이 말씀이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말씀입니다. 먼저 1절을 보십시오.

 

이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믿음의 사람 아브람도 두려움에 싸여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이전까지 계속 믿음의 승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항상 승리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의 사람도 때로는 넘어지고 때로는 좌절합니다.

 

두려워하는 아브람

 

아브람도 믿음의 삶을 살면서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판단력이 흐려집니다. 잘하던 일도 못하게 되고 절망의 늪으로 점점 빠지게 됩니다.

 

두려움은 미래의 문을 닫게 합니다. 사람은 미래가 보장될 때 소망이 있고 꿈이 있으며 생기가 돕니다. 미래의 문이 닫힌 사람은 절망합니다.

 

아브람도 순식간에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왜 아브람이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었겠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의심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내가 너에게 큰 민족을 이루게 하고 너로 큰 족속을 만들어서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알처럼 창대케 해주겠다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10년을 기다려도 아브람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16 16절을 보십시오.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육세이었더라

 

아브람이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가 75세였습니다. 그리고 이스마엘을 낳은 때가 86세였으므로 지금 일어나는 이 일은 85세 무렵일 것입니다.

그가 믿음의 생활을 시작한 지 10년이 되던 때입니다. 10년 동안 하나님만 믿으며 믿음 생활을 잘 해 왔습니다. 그러나 10년을 믿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아브람은 마음속에혹시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들은 것은 아닐까? 혹시 하나님이 약속을 어기시는 것은 아닐까? 아니, 혹시 하나님이 없는 것은 아닐까?’하는 불 신앙이 생겼습니다. 여러분에게도 그런 경험이 있지는 않습니까?

 

불 신앙에 사로잡히면 지나온 과거에 있던 그 위대한 믿음의 행적은 다 잊어버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12 2절에서 아브람에게 큰 민족을 이루어 주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13 15~16절에서 다시 한 번 같은 약속을 주셨습니다.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큰 민족을 이루려면 먼저 아기가 태어나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을 들은 후 1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도록 아브람은 아기를 갖지 못합니다. 아브람은 갈등을 겪기 시작했고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근본적인 의심으로 인해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아브람이 이런 두려움이 좀더 심해진 이유는 그의 나이 때문이었습니다. 육체적으로 아기를 낳을 수 있는 조건이 있을 때에는언젠가는 낳겠지라고 기대할 수 있지만, 이제 나이가 들어 경수가 끊어지고 더 이상 자식을 낳을 수 없는 상태가 되자 그의 불안감은 더욱 커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면 불안이 찾아오고, 불안이 찾아오면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인간적인 생각을 합니다.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생각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믿음에서 현실로 돌아옵니다.

 

아브람의 인간적인 생각은 양자를 삼아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양자라도 삼아서 하나님의 약속과 복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1절을 다시 보면 몇 가지를 배우게 됩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은 필요한 때에는 꼭 오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지금 내가 나타나야겠다고 생각이 들 때에는 반드시 나타나십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벙어리가 아닙니다. 숨어 있지도 않습니다. 그분은 돌과 같은 물체가 아니라 말씀하시는 인격체이십니다.

 

야고보서1 6~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믿음을 잃지 마십시오.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으며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해도, 복과 약속의 말씀이 현실에 일어나지 않아도, 비록 아무일 없이 10년이 지났다 하더라도 의심하지 마십시오. 믿음으로 나아가십시오.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아브람이 받은 말씀은 무엇입니까?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였습니다. 바로 이 말씀이 오늘 여러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여러분은 기도하는 사람이며, 믿음의 사람이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 속에서 항상 외롭고 고독하고 사막을 걷는 것과 같고 절벽에 부딪히는 것과 같은 경험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의심하고 포기하고 싶고 뒤돌아 서고 싶은 때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이 오늘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두려워 말고, 조급해 하지 말고 기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10년을 기다린 아브람에게더 기다려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아브람은 지금까지 기다린 기간의 배가 넘는 15년이나 더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약속을 받은지 25년이 지나서야 응답을 받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믿음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갖지 못하는 것은 조급한 마음 때문입니다. 기다리지 못하고 당장 달라고 조릅니다. 그래서 믿음이 익을 시간이 없습니다. 믿음이 성숙하지 않고 항상 설익은 상태에서, 아무 기적도 능력도 나타나지 않는 채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확실하게 말합니다.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원수가 너를 공격해 올 때 나는 너의 방패가 될 것이다. 네가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릴 때 내가 너의 상급이 될 것이다.”

 

이런 하나님의 메시지를 이사야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며 패역하고 부도덕하고 하나님을 버렸을 때 그들에게 심판과 징계가 내려졌습니다. 그러나 심판 뒤에는 회복이 있고 죄 뒤에는 용서가 있는 법입니다.

 

심판의 때가 끝날 때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의 복역의 때는 끝났다. 너의 죄는 지불되었으며 대가를 다 치루었다. 이제는 너에게 회복의 때가 올 것이다. 하나님이 오신다. 그분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지 않느냐. 이제 너는 눈물을 닦고 정신을 차리고 회복될지어다.” 이것이 이사야 40장에서 66장까지의 말씀입니다.

 

이사야 41 10절을 보십시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런 메시지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 전에도 똑같이 하셨던 말씀입니다.

 

너희는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가 죽는 것에 대하여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다. 내가 가면 보혜사 성령이 오시기 때문이다.

 

그가 오면 나를 영화롭게 할 것이며 너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 주실 것이다. 그가 오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말할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위로와 격려와 축복의 메시지가 오늘 성령님을 통해 여러분에게 전달되기 원합니다.

 

왜 하나님은 두려워 말라고 하셨을까요?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방패이시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그분이 우리의 지극히 큰 상급이시기 때문입니다.

 

영적 전쟁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울 때에 다윗이 싸우러 나갔지만 실은 다윗이 싸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싸웠던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성을 함락시킬 때 그 여리고성을 무너뜨린 것은 여호수아가 아니라 하나님의 군대 장관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환란을 겪고 원수와 싸우지만 그 싸움의 배후에는 우리의 대장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친히 칼을 들고 싸우시며 결국에 승리의 개선가를 부르게 하십니다.

 

이렇게 우리를 보호하시는 방패가 되시기에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돈이 없거나 건강이 나빠지거나 직장을 잃어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방패가 되시기 때문에 당신은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의 지극히 큰 상급이시기에 우리가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사야 40 10절을 보십시오.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으며

 

사도 바울은 로마서 4 17절에서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우리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십니다.

 

믿음의 최대의 적은 불 신앙과 두려움입니다. 여러분이 약속을 믿지 않고 의심하면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이 모든 회의와 불 신앙과 염려와 근심들이 여러분 안에서 떠나기를 축원합니다.

 

아브람의 인간적인 생각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고 절망과 좌절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드디어 아브람이 두려움에 빠졌던 이유를 발견합니다. 그것은 자식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자녀가 없는 것이 다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자식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이 바라던 자식은 보통 자식이 아니라 약속의 자식이었습니다.

 

아브람은이제 몸은 늙고 해산할 수 있는 가능성은 점점 희박해져 가는데 양자라도 데려와서 하나님의 축복과 약속을 이루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인간적인 생각을 했습니다.

 

인간적인 생각만큼 설득력 없는 것은 없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은 우리의 감정과 잘 맞습니다. ‘하나님도 내 입장이 되보시면 이해하실 걸...’하며 생각합니다. 인간적인 생각은 자꾸 자기를 변명하게 만듭니다.

 

3절을 보십시오.

아브람이 또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 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 운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이나이다

 

두려움에 잡히는 순간 아브람은 믿음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양자라도 데려와야 겠다는 인간적인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아브람의 생각과 전혀 달랐습니다. 양자가 아니라네 몸에서 날 씨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은 분명하다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희미하지 않습니다. ‘양자는 양자인데...’ 혹은아들은 아들인데...’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하십니다.

 

4절에서 더 깊게 봐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생각이 곧 하나님의 생각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의 잘못은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의 생각을 하나님의 생각으로 만들기 위해 자꾸 하나님을 설득하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뜻을 바꿔서라도 내 뜻을 이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믿음이 좋은 것 같지만 사실은 무서운 불 신앙입니다.

 

이사야 55 8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사람들은 편안하고 넓은 길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길은 좁은 길이요 고통의 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넓은 길에는 멸망이 있으며 좁은 길에는 영생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불가능한가 가능한가에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하나님에게는 아이를 가질 수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불가능 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엇에 관심이 있으실까요? 하나님의 관심은 바로 하나님의 약속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다면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해 보면 1백세에는 해산이 전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그 나이까지 약속을 이루지 않고 끌어 오셨을까요?

 

여기에는 두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아브람에게 믿음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아기를 낳을 수 있는 상황에서 아기를 낳는 것은 믿음과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은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자연스런 일 중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서도 아브람이 하나님을 믿는지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과연 믿음으로 행한 일이 무엇이며 과연 몇 번이나 믿음으로 행하셨습니까? 혹시 다 여러분의 이성과 상식으로 한 것은 아닙니까? 믿음으로 행하지 않았다면 기적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불가능한 상황까지 이끄셔서 그를 믿음의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께서 먼 훗날 온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를 보낼 터인데 그 메시아는 성령으로 잉태되어야 하고 동정녀에게서 탄생될 것이기에 임신이 불가능한 사라도 임신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일어나는 일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여러분의 믿음을 키워주기 위해서요, 두번째는 여러분이 알지 못했지만 지금 당하고 있는 고난과 역경은 하나님의 구속사를 이루기 위한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말씀의 약속과 현실의 부재 사이를 연결하는 다리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그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이것을 가리켜 성경은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증거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믿음을 회복시키시는 하나님

5절을 보십시오.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하나님은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아브람에게 야단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절망하는 여러분을 야단치지 않으십니다.

 

아브람아, 나랑 잠깐 밖에 나가 보자.”시며 아브람을 밖으로 데려가셨습니다. 그리고는 유난히 반짝이는 밤하늘을 보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하늘을 봐라. 손에 잡힐 듯 쏟아져 내리는 저 별빛을 보느냐? 그리고 바다의 모래알을 셀 수 있느냐? 내가 그처럼 많은 자손을 줄 것이다.” 하나님께서 실물 교육을 하신 것입니다.

 

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는 순간에 아브람의 마음에는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찬란히 빛나는 별들을 보는 순간 그 동안 의심하고 불안해하고 두려워했던 것들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람의 마음에 믿음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내가 무엇이관데 내게 이렇게 하십니까? 늙고 보잘 것 없는 한 노인네인데 이토록 친절하게 말씀하시고 호의를 베푸시고 사랑과 꿈을 주시니.... 이게 웬 사랑입니까?” 하며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눈물을 흘린다고 내일 당장 아이를 갖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감동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아브람은 자신의 나이와 처지를 다 잊었습니다. 믿음을 가지면 자신의 처지를 잊습니다. 비참한 생각, 열등감, 좌절감이 다 사라집니다. 그의 얼굴에는 찬란한 하늘의 별처럼 그 비전과 환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6절을 보십시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아브람은 다시 하나님을 신뢰하기 시작했습니다. 순식간에 의심과 두려움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믿음은 두려움을 사라지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약속을 신뢰하는 믿음은 모든 염려와 근심과 걱정을 사라지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믿음을 다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람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것을로 여기셨습니다.

 

여기에 위대한 진리가 있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믿고 깨달은 것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로마서의 이 말씀이 어거스틴의 가슴속에 들어갔을 때 히브리즘과 헬레니즘이 통합되었습니다. 또 이 말씀이 마틴 루터에게 들어갔을 때 어두웠던 중세가 무너지고 종교개혁의 밝은 빛이 임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것은 아브람의 차원에 머무는 일이 아니라 인류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어집니다. 누구든지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이 놀라운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하여 이 사건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구원받은 축복이 여러분 안에 있는 줄로 믿습니다.

 

 

 

실패의 두려움

2002-05-23 12:39:46

 

 

미국이 남북전쟁으로 나라가 둘로 갈라졌을 때 아브라함 링컨은 전쟁 의 실패에도 불구하고나는 여러분들의 실패에 대해 관심이 없습니 다. 나는 여러분들이 다시 일어나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라고 연 설했습니다.

 

다음은 윌 스트리트 저널에 게재된 내용을 인용한 것입 니다.

 

여러분들은 기억도 할 수 없는 수많은 실패를 경험했습니다. 처음 걸음마를 하기 위해서 일어서다가 넘어졌을 것입니다. 처음 수 영을 배울 때 물 속으로 쏙 빠지기도 했을 것입니다. 홈런을 많이 치는 타자일수록 스트럭 아웃이 많습니다. R. H. 메이시는 뉴욕에서 일곱 번의 실패 끝에 유명한 점포를 얻게 되었습니다. 영국의 소설 가 존 크래시는 564권의 책을 출판하면서 출판사로부터 753번 출판 거절을 당했습니다. 베이브 룻은 1,330번 스트럭 아웃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714개의 홈런을 때렸습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십시 오. 시도하지 않는 것 때문에 기회를 잃는 것을 염려하십시오.”

 

문제는 생활 가운데 실패가 없다면 생활 속에 위험도 없다는 것입니 다. 그러나 이런 무난하고 안심된 생활은 권태나 열등 의식에 빠지 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생산적인 믿음을 가지고 살 수 있도록 계획하셨고 위임하셨습니다.

 

 

 

두려움을 이기는 예수의 자유 /왕상19:9-14, 고전1:26-2:5, 6:45-52/ 인명진목사

2018-03-09 13:50:57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두려움의 지배를 받습니다. 나이와 상황에 따라 다른 얼굴로 나타나지만 그 뿌리는 동일합니다. 갓난아이가 태어나서 여러 가지 이유로 웁니다. 때로는 배가 고파 울기도 하고, 기저귀를 갈아주지 않는다고 울기도 하고, 자신의 욕구가 충족되지 않아서 울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동 심리학자들은 우리와는 다른 시각으로 보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우는 가장 큰 이유는 두려움 때문에 운다고 합니다. 표면적으로는 아이가 배가 고파 웁니다. 하지만 아이 입장에서는 엄마가 없기 때문에 배가 고픈 것입니다. 엄마가 없기 때문에 기저귀를 갈아주지 않는 것입니다. 설령 방안에 아이와 엄마가 같이 있더라도 엄마의 채취를 느끼지 못하면 아이는 운다고 합니다.

 

무엇이 그 아이를 울렸습니까? 아이는 혼자 있는 것이 두려워서 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를 양육할 때 우유를 주고, 기저귀를 갈아주고, 아이에게 필요한 것을 채워주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이 곁에 함께 있어서 두려움을 이기는 안정감을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스파르타식 교육이라는 말 들어 본 적이 있지요. 아이를 어릴 때부터 강하게 키우기 위해 혹독하게 훈련을 시키는 대명사가 된 말입니다. 그리스의 도시 국가 스파르타는 아주 강력한 국가를 건설하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 인재 양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명문 집안에 사내아이들을 젖을 떼자마자 데려와서 왕궁에서 키웠습니다. 바벨론의 다니엘을 연상하면 쉽게 이해가 될 것 같습니다.

 

이 아이들에게는 최고로 좋은 것으로 먹였습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도 나라에서 제일 좋은 선생님을 데려다가 최상급의 교육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있어도 아이가 우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강한 아이와 용사는 울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들은 대부분 서른 살을 넘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많은 아이들이 우울증에 걸렸고, 자살하기도 하고, 이름 모를 병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습니다. 그리고 스파르타라는 도시국가는 불과 100여년 만에 망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왜 이 아이들이 빨리 죽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두려움 때문에 죽었습니다.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사랑과 안정감이 없어서 죽은 것입니다. 울음으로 두려움을 표현해야 두려움이 극복되는 되는데 두려움을 표현하지 못하게 하자, 두려움에 휩싸여서 두려움의 공포에 눌려 죽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아이들만 두려움이 있고, 어른들은 두려움이 없는 것일까요?

 

우리는 대개 아이들만 두려워하고 어른들은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연약해 보이는 것이 싫어서 그 두려움을 마음속에 감추었을 뿐입니다. “나 떨고 있니?”라는 말처럼 아이들에게는 드러나는 두려움이라면, 어른들에게는 감추어진 두려움입니다. 헤아려 보아야만 보이는 두려움이 우리의 마음속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감추어진 두려움이 분노로 드러나 다른 사람을 공격하기도 하고, 감추어진 두려움이 우울증으로 나타나 자신을 공격하기도 하고, 나중에는 자살에까지 이르게 합니다. 그래서 이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얼굴을 바꾸어가며 사람을 평생 괴롭힙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질문해 해야 하는 것은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두려움이 존재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두려움아 예수 이름으로 물러갈지어다.” 외치니 그 두려움이 일곱 길로 도망가고 다시 찾아오지 않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은 나중에 말하기로 하고, 오늘 여러분 자신에게 두려움이 없습니까? 이 물음 앞에 나는 두려움이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사람 누가 있겠습니까? 오늘 담대한 척 하면서 강단에 서 있는 저도 상황이 좋지 않거나 어려운 일이 있으면 심히 두렵습니다. 때로 떨리기도 합니다. 어떨 때는 혼자서 기도하다가 울기도 합니다. 이런 두려움의 감정은 제가 연약해서 느끼는 감정도 아니고, 저만이 가지는 특별한 두려움도 아닙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있는 이상 누구든지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여러분은 감추어져 있는 이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하고 있습니까?

 

성경이 우리에게 가장 많이 명령하는 말씀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우리는 기도하라, 찬송하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가장 많이 명령하신 것은두려워하지 말라!”입니다. 신구약성경에 365번이 등장합니다. 그만큼이 사람이 두려워하기 때문에 가장 많이, 가장 자주두려워하지 말라!” 명령하신 것입니다.

 

구약의 말씀에 등장하는 엘리야는 너무도 강력한 영적 전사였습니다. 온 이스라엘이 바알 신에게 빠져 있을 때 목숨 걸고 야훼 신앙을 지킨 사람입니다. 그가 기도하니 3년 반 동안 비가 오지 않고, 그가 다시 기도하니 3년 반 만에 비가 왔습니다. 오죽 했으면 불의 선지 엘리야라 불렸을까요? 실로 대단한 사람이지요. 사람의 성정을 가진 이로써 이만한 인물도 없을 것입니다.

 

엘리야의 최고의 절정은 갈멜 산에서 바알 선지자와 850 1로 싸울 때였습니다. 850명의 바알 사제들이 한나절 동안 기도해도 하늘에서 불이 내리지 않았습니다. 나중에는 자기 몸을 자해하고 피를 철철 흘리면서 기도했는데도 불이 내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엘리야는 제단에 물을 붓고 기도했는데 하늘의 불이 내려 제단뿐만 아니라 봇도랑의 물까지 불살랐습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갈멜 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아합 왕의 아내 이세벨의 말 한 마디에 두려움이 몰려왔습니다. 이세벨이너는 정녕 내 손에 죽으리라!”는 말에 엘리야는 벌벌 떨었습니다. 심히 두려워하여 사역을 포기하고 광야로 도망갔습니다. 이때 엘리야는 자신감으로 충만해 있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여인의 말 한 마디에 두려워 사역을 포기하고 광야로 도망가 버렸습니다. 얼른 이해는 되지 않지만 이것이 우리의 현주소입니다.

 

서신서의 말씀에 등장하는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고린도를 방문 했을 때 두려움과 근심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성경이 위대한 점은 사람을 영웅으로 만들지도 않고, 인간을 미화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 “불의 선지 엘리야가 낙심했다. 천하의 바울이 두려워했다.” 우리는 바울이 강철 갑옷을 입은 불굴의 전사와 같아서 두려움과 근심을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생각합니다. 그 예로 그는 감옥을 두려워하지도 않았고, 어떤 위험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칼을 두려워하지도 않았습니다. 핍박을 받는 것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아시아와 온 유럽에 전도하러 다녔습니다. 나중에는 자기 몸을 순교의 제물로 드릴만큼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덴에서 실패한 후 심각한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사실 바울이 아덴에 도착했을 때에 어느 때보다 자신감이 충만해 있었습니다. 바울이 2차 전도여행 때 바울이 방문하는 도시마다 믿음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빌립보에서 옥문이 열리는 역사가 일어났고, 데살로니가에서는 그렇게 심한 유대인들의 박해 속에서도 복음은 폭발적으로 역사했습니다. 베뢰아에서는 토양이 좋은 교인들을 만나 말씀이 깊이 뿌리를 내렸습니다. 바울은 아덴에 도착하기 전까지 박해로 인해 고생은 했지만 가는 곳마다 승리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아덴에서 여지없이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냥 실패한 것이 아니라 아덴에서 어떤 믿음의 역사도 나타나지 않았고, 한 사람도 예수를 영접시키지 못했고, 교회도 세우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의문이 들지 않습니까? 경험이 많고 자신감이 충만하면 더 잘되고 성공해야 정상 아닙니까? 그런데 실패했습니다. 왜 실패했을까요?

 

그 대답은 바울이 제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아덴에서 지식인들과 논쟁을 했습니다. 바울은 다른 도시에서는 분명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메시지가 짧고 분명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그러나 아덴에서는 복음을 전하지 않고 논증하려고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를 하려 했습니다. 복음보다는 지식과 경험을 앞세우려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아덴에서 어떤 열매도 거두지를 못했습니다.

 

바울은 아덴에서 철저하게 실패하고 난 뒤 고린도에 도착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2 3절에서 자신의 심경을 그대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이것이 그의 영적인 현주소였습니다. 바울은 아덴에서의 실패했던 결정적인 이유를 스스로 밝히고 있습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했다.”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무언가에 성공하고 나면 예수 아닌 다른 무언가를 의지하여 더 크게 성공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바울도 이런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바울은 아덴에서 자기 지식을 의지하고, 헬라 철학을 붙들고 있다가 영적으로 흔들렸습니다.

 

바울은 오직 하나님께 붙들렸을 때 두려움이 없었고, 담대했습니다. 누구를 만나든지, 어디가든지 예수를 증거 했습니다. 그런데 말씀에 붙들리지 않고, 자기 지식 붙들고, 철학 붙들고 나가니 그 놀라운 용기와 믿음의 담대함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 대신 두려움이 그의 마음을 지배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에 도착해서는 자기 지식과 경험을 과감하게 포기했습니다. 대신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이때의 정황을 기록하고 있는 사도행전 18 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비로소 말씀에 붙잡혀 두려움을 극복하고 담대하게 나갔다는 증언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아덴에서 겪었던 실패를 우리도 그대로 답습할 때가 있습니다. 이제는 익숙하다 싶어서 내가 가진 능력과 경험을 의지할 때 실패할 뿐만 아니라 두려움이 파도처럼 밀려옵니다. 그럴 때가 언제였던가? 돌아보니 예수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하려고 했을 때였습니다. 예수 아닌 다른 무엇을 가지려 했을 때였습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을 지키려고 했을 때였습니다. 이때 담대함 대신에 두려움이 나를 지배했습니다. 자유가 아니라 속박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자유를 빼앗아가는 첫 번째 것은 돈입니다. 돈이 있으면 마음이 든든하잖아요? 그래서 의지하잖아요?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간사한지요? 호주머니에 돈이 있고 없음에 따라 배고픔과 배부름도 달라집니다. 돈이 달랑달랑한 상태로 시장이나 마트를 가면 사고 싶은 것도 많고, 먹고 싶은 것도 많습니다. 그러나 호주머니에 머니가 빵빵하면 180도 달라지는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사람이 이만큼 물질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돈으로 극복한 두려움은 자유를 빼앗아 가버립니다.

 

저는 신학교 입학 할 때 단돈 30만원 가지고 입학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신학교 졸업하고 목사만 시켜 준다면 목회를 하는 동안 내 이름으로 된 동산, 부동산, 자동차 어떤 재산도 가지지 않고 등기하지도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지금까지는 지키고 있습니다만 언제 변질될 줄 모르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기 때문에 두려울 뿐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데 신학교 졸업하고 목사만 된 것이 아니라 30년 동안 밥 굶지 않았고요. 그 동안 결혼도 했고요. 3년 동안 유학도 다녀왔고요. 아들도 두 명 주셨고요. 한 아들은 학교를 졸업하고 벌써 직장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넉넉하게 주신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2% 부족하게 주셔서 예수를 바라보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두려움을 이기는 예수의 자유까지 선물로 주셨습니다. 예수는 나에게 자유를 의미합니다. 끝까지 예수 안에 있는 두려움을 이기는 자유를 유지하고 싶을 뿐입니다.

 

우리에게 자유를 빼앗아가는 두 번째 것은 자리에 대한 연연함입니다. 자리를 유지를 하려고 할 때, 자리를 차지하려고 할 때 결코 자유롭지 않습니다. 자리를 지키기 위해 두려움이 있기도 했고,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마음을 허탄한 곳에 빼앗기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 안에 있는 자유를 가로막는 것들입니다.

 

작년부터 제가 노회에서 약 6억 원을 개척교회와 농촌교회를 지원하는 동반성장위원회를 맡아서 섬기고 있습니다. 돈을 나누어주는 데는 도덕적 해이가 있으면 바르게 섬길 수 없기 때문에 갈릴리교회 목사답게 정직하게 하라고 저를 그곳에 보낸 것 같습니다. 그 동안 여러 가지 명목을 달아 합법적으로 썼지만 함부로 쓴 것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임원들은 일체의 순서비나 식비를 받지 못하게 결의를 했습니다. 가난한 목회자와 개척교회를 섬기기 위해서 오히려 행사가 있을 때마다 임원들이 찬조를 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행사 때마다 찬조하듯이 돈을 정직하게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작년에는 운영비를 절약하고 더 모아서 중국동포를 대상으로 목회하는 교회에 무상으로 6천만 원을 지원했습니다. 대여해 주는 것도 아니고 그냥 지원했습니다. 파격적이었습니다. 뭔가 일어설 수 발판은 있어야 자립이 되잖아요. 생활비만 지급받는 생활보호대상자 만들어서 안 되잖아요. 롤 모델이 있어야 교회가 건강하게 서기 때문에 올해에도 작년처럼 지원할 것입니다.

 

또한 제가 시골에서 목회한 경험으로 개척교회 목사님들을 마음을 다해 섬겼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최고의 것으로 대접하려 했습니다. 그러자 어떤 분은 저보고 노회 임원하려고 그러느냐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자리를 차지하려는 마음은 손톱만큼도 없습니다. 자리를 차지하려는 순간 진정성이 사라집니다. 결코 자유롭지도 못합니다. 앞으로도 누군가를 섬기는 역할은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감당할 것입니다. 하지만 자리는 분명히 사양할 것입니다. 자리는 나의 자유를 빼앗아 가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예수 안에 있는 빼앗아 갈 수 없는 자유를 발견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 27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자신의 약함을 선택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알았습니다. 바울은 사도로써 흠이 많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의 한 사람도 아닙니다. 예수를 철저하게 핍박하는 자였습니다. 자격 없는 자입니다. 약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능력은 바로 이 약함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아덴에서 이 약함을 버리고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의지하자 열매하나 맺지 못하고 실패 했습니다. 나중에는 두려움까지 몰려왔습니다. 밖으로는 근심이요, 속으로는 두려움이 그를 지배했습니다. 바울은 이런 뼈저린 경험을 하고서내 능력은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약한 그때가 강함이라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바울의 능력이 시작되었고, 두려움을 이기는 예수의 자유가 그를 통해서 흘러나왔습니다.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자리를 유지하고 지키기 위해 자신을 포장합니다. 문제는 포장하고 있는 그것이 약한 그때를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게 만듭니다. 저는 말씀을 준비하다가 제가 겪었던 약한 그때가 다시 떠올랐습니다. 지난 주중 여자 컬링 의성 마늘 소녀들의 이야기가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지난 주중 가장 많이 따라 한 말이영미야! 영미야, 영미 헐.”일 것입니다.

 

여자 컬링을 보면서 의성에서 있었던 한 사건이 떠올랐습니다. 첫 담임목회는 가난한 사람이 있는 곳과 어려운 지역에 가서 목회하겠다고 하나님과 약속을 했습니다. 2000년 의성의 한 시골교회에 선을 보는 설교를 하러 갔습니다. 교인들은 채 20명도 모이지 않는 미자립 교회였고, 예배당도 곧 쓰러질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하고 설교를 마치고 왔습니다. 그런데 퇴짜를 맞았습니다.

 

나중에 뒤로 들려오는 이야기가 설교도 괜찮고 사람도 좋아 보이던데 유학까지 하고 온 목사라서 부담스럽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허리가 꾸부정하고 장애인 같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설교하러 가기 3일 전에 물건을 들다가 허리를 다쳐서 가방도 엉거주춤한 자세로 들었고, 설교할 때도 불편한 자세로 서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깨달은 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작다고 내 마음대로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그 사건이 없었다면 교회를 내 마음대로 선택하고 내 지혜로 목회하려 했을 것입니다. 교회 앞에 겸손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왜 제가 약한 그때의 사건을 다시 떠올리는 것입니까?

 

저는 20명도 모이지 않는 시골교회에서 퇴짜 맞은 형편없는 사람입니다. 저에게서 선한 것이 나올 것이 없습니다. 왜 제가 약한 그때의 사건을 떠올립니까? 이 약함이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알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잊지 않고 예수 안에 있는 자유로 담대해 지고 싶은 것입니다. 약한 그때에 나와 함께 하셨던 예수 안에 두려움을 이기는 자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이 약한 그때를 잊어버리게 만듭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약한 그때를 잊어버리면 두려움이 생깁니다. 있는 것 지키려고 하다가 사람이 변하게 만듭니다. 약한 그때를 기억해야 예수 안에 있는 자유로 담대해 질 수 있습니다.

 

엘리야도 약한 그때를 잊어버리자 두려움이 몰려왔습니다. 바울도 약한 그때를 잊어버리자 두려움이 몰려왔습니다. 예수로 채웠던 약한 그때를 기억하는 힘이 우리를 두려움에서 해방시켜 줍니다. 예수와 함께 했던 약한 그때를 회상하는 힘이 우리를 자유하게 만들어줍니다. 우리를 지켜 줄 것으로 믿었던 돈은 두려움을 가져다줍니다.

 

우리가 지키고 오르고자 하는 자리는 자유를 빼앗아 가버립니다. 바울은 아덴에서 이 실패를 딛고 예수 안에 있는 자유를 누리며 창공을 향해 힘 있게 날아오르고 있습니다. 약한 그때 예수와 함께 했던 기억을 잊지 않는 자가 두려움을 이기고 영원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갈릴리 가족 여러분!

 

여러분은 몰려오는 두려움을 무엇으로 극복하고 있습니다. 무엇으로 사람이 얽어 맬 수 없는 자유를 찾고 있습니까? 사순절 아침에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 보십시오. 나를 둘러싸고 있는 돈, 자리, 사람을 내려놓고 약한 그때에 함께 하셨던 예수를 다시 찾으십시오.

 

바로 그분이 우리에게 두려움을 이기는 영원한 자유를 선물해 주실 것입니다. 바울처럼 약함을 자랑하여 두려움을 이기고 영원한 자유인으로 살아가기를 소망하는 갈릴리 성도들 위에 하나님의 크신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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