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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주제 설교

영의 세계에 관한 주제 설교 모음

by Jessi J 2024. 1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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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의 세계의 문을 열라 /2:37-42/ 이규현 목사

2020-12-26 04:24:37

 

지금 우리 사회 전반에는 기본으로 돌아가자는 외침이 커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가장 기본적인 문제에서부터 무너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것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국가적인 어려움을 맞으면서 더욱 절실해졌습니다. 우리 신앙도 기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신약의 교회가 출발하는 장면으로, 우리 신앙의 기본을 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214~36절까지는 소심했고 겁 많던 베드로가 오순절에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담대하게 말씀을 전하는 내용입니다. 설교의 결론이 36절에 나오는데 구약의 성경을 인용하면서 유대인들에게 날카로운 인상을 남깁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2:36)

 

너희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입니다. 자칫하면 생명의 위협을 받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설교가 놀라운 열매를 맺습니다. 이날 예수를 믿기로 한 사람의 수가 3천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외적인 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들이 어떤 경험과 과정을 통해서 이렇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37절은 설교의 첫 반응입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2:37)이들은 이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림이 있었고,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어찌하냐고 물었습니다. 자신들이 예수를 죽였다는 깨달음이 온 것입니다. 그들에게 각성이 일어났다는 것은 굉장히 건강한 반응입니다. 사실 사람은 죄를 짓고도 죄에 대한 인식이 별로 없습니다. 중한 죄를 짓고도 태연한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죄인이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해 자각을 한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영성이 깊었던 다윗마저도 밧세바 사건 이후를 보면 영적으로 무디어져서 굉장히 뻔뻔합니다. 자기가 죄를 지었다는 인식을 전혀 못합니다. 다윗만큼 어떤 영적인 수준이 있던 사람이 없었는데 그도 어느 순간 영적 어두움이 오니까 자기 죄를 자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나단 선지자가 죄를 인식하도록 예화를 들었을 때에도 그 죄인이 누구냐며 오히려 화를 내고 그를 죽여야 된다고 합니다. 인간은 죄에 대해서 아주 둔합니다. 우리가 계속 죄를 짓는 것은 죄에 대한 인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죄를 죄로 여기지 못하고 죄에 대한 부담이 없습니다. 대부분의 인간이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으며 그 일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잘못을 보면 나쁜 인간이고 감옥에 넣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사실 우리 안에도 동일한 죄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여러분 복음이 전해지면 사람들이 불편해하는 이유가 자신을 죄인으로 몰아가기 때문입니다. 평소에는 내가 도덕적이고 양심적이고 고상한 지성인인 것 같고 나만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교회에 와서 복음을 접하면 나를 죄인으로 모는 것 같습니다.

 

십자가 앞에 선다는 것은 내가 얼마나 심각한 죄인인가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진리를 받아들일 때 불쾌하고 더 강팍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로 하루에 3천 명이 예수를 믿고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났지만, 사도행전 7장의 스데반 집사의 설교를 보면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옵니다. 스데반 집사의 설교는 명설교입니다.

 

그런데 이 설교를 듣고 난 후 사람들은 돌을 던져 스데반 집사를 죽게 합니다. 같은 설교지만 설교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전혀 다릅니다. 어두운 곳에서 죄를 짓고 있는데 누가 갑자기 불을 켜면 화가 납니다. 컴컴한 곳에서 밀거래를 하는데 갑자기 조명을 밝히면 죽이고 싶어지는 마음입니다. 설교를 들으면 자신들의 죄와 부끄러움이 드러나니까 화가 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는 찔림과 탄식이 일어났습니다. 이처럼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서 인생의 방향이 바뀝니다. 진리를 듣고 전혀 다른 반응이 일어나면서 인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진리를 듣고 말씀을 읽을 때 우리 내면에는 치열한 전쟁이 일어납니다. 이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할 것입니까?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림을 받아 어찌할꼬 하는 반응을 했을 때 베드로는 명확하게 선포합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2:38)

 

여기에 기독교의 핵심단어 회개’, ‘세례’ ‘죄사함’, ‘성령이 나옵니다. 베드로가 어찌할꼬 하는 그들에게 첫 번째로 하는 말이 회개하라였습니다. 베드로는 돌려서 말하지 않고 아주 직설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 회개하라는 메시지는 오래 전에 세례 요한을 통해서 들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이것은 구약시대의 마지막이자 신약시대를 여는 과정에서 세례 요한의 역할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마치 다른 메시지가 없는 것처럼 올곧게 회개를 말합니다. 그 당시 백성들도 회개를 촉구할 때 모두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도 회개를 선포하다가 헤롯왕에게 목 베여 죽습니다. 회개의 설교를 하는 것은 자칫 위험한 일입니다

 

. 환영 받을 수 없는 설교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시대에도 환영 받지 못하는 설교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의 첫 메시지도 회개였습니다. 예수님이나 세례요한, 베드로나 바울의 설교에서도 굉장히 중요한 핵심이 회개였습니다. 왜 그렇게 회개를 핵심으로 다루었을까요? 회개를 다루지 않고는 신앙의 세계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회개 없는 신앙, 회개 없는 구원이 가능합니까?

 

죄에 대한 심각한 결단이 없는 사람이 십자가의 예수를 만날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통과하려면 회개를 거쳐야 합니다. 회개는 끔찍한 죄 앞에서 몸서리를 치는 경험을 하고 절망적인 상태에서 다가오는 구원의 빛, 십자가를 보는 것입니다. 오늘날 안타까운 것은 유사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것입니다. 사이비, 가짜에 대한 폐해와 심각성을 요즘 사회적으로도 많이 보게 됩니다.

 

이것은 한 개인 뿐 아니라 국가에 미치는 영향도 큽니다. 이렇게 사이비 종교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이비 그리스도인들도 문제입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유사 그리스도인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신자가 아닌데 신자인 것처럼 하는, 진리가 전혀 심장을 관통하지 않은, 복음을 경험하지 않아 신앙의 바깥에 있으면서도 신앙인인 것처럼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유사 그리스도인들은 회개에 관심이 없습니다. 죄 문제 앞에 직면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전혀 보지 못했고 십자가는 나와 상관이 없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베드로는 정확하게 너희들이 예수를 죽였다고 말합니다. 그 때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죄 없으신 그분을 십자가에 매단 사건에 가해자가 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것은 보통 죄가 아닙니다.

 

마음이 찔려서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도 이천 년 전의 십자가사건에 내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서 인생이 나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느냐, 유사 그리스도인이 되느냐. 진짜가 되느냐, 가짜가 되느냐. 그 모든 것은 정확하게 십자가 앞에서 갈라지는 것입니다. 유사 그리스도인들은 설교를 들어도 자기가 듣고 싶은 얘기를 기대합니다. 당신은 멋있고 잘못이 없고 교회에 와주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치켜 세워주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이런 메시지가 인기가 높아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복잡하고 무거운 이야기는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회개는 인기 없는 주제입니다. 지금 우리는 회개를 통과하지 않고는 결단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는 사실에서 얼마나 멀어져 있습니까? 회개를 반기지 않는 이 시대 속에서 우리는 심각한 결함과 변질을 보게 됩니다.

 

배가 물속에 잠기고 있는데도 배 안에서 구명조끼를 입고 가만히 있으라고 하는 것에서 우리가 가슴을 치는 것입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정확하게 말해주지 않은 죄입니다. 죽는다고, 빠져 나오라고 정확하게 말했어야 하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도 회심과 회개에 대한 단어가 천 번 이상 나옵니다. 회개를 피해서 성경을 읽을 방법이 없습니다. 배가 침몰하고 있는데 당신이 듣기 거북할까 봐 이야기 못했다고 한다면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우리를 불편하게 합니다. 속을 뒤틀리게 합니다. 진정한 신앙생활은 우리의 강한 자아가 깨어지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자존심이 박살나고 자기 죄로 인해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되는 경험들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건드리면 불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하라는 말은 이제까지 살아온 방식으로 살면 안 된다는 것을 정확하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힘든 일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기쁨을 얻으려면 한번은 통과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슬픔, 고통, 절망이라도 그렇습니다. 그토록 회개가 강조되었던 것은 본래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궤도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도를 벗어나 살고 있으며 근본적으로 뒤틀려 있습니다. 무엇이 죄입니까?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53:6)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가는 것입니다. 원어상으로 보면 죄는 과녁을 벗어났다는 의미입니다. 일그러져 중심을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회개하지 않은 상태는 심각한 결함을 받은 상태입니다. 마치 핸들도 브레이크도 말을 듣지 않는 자동차가 돌아다니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행을 피할 길이 없는 존재가 죄인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기만 하면 산다는 것입니다. 다시 고쳐주고, 회복시켜 주겠다는 것입니다.

 

이 회개는 자신이 누구인가를 깨닫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죄를 죄로 깨닫는 것이 진짜 은혜입니다. 그래서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죄가 주는 파괴력, 인생의 거대한 불행을 생각한다면 죄를 죄로 깨닫고 돌이키는 것만큼 큰 은혜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쉽지가 않은 것입니다. 죄의 심각성이 크게 다가오면 죄를 짓지 않지만, 죄를 죄로 여기지 않기 때문에 갈 때까지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 죄를 깨닫고, 그 죄가 너무도 심각하다는 것을 깨닫고 돌이키는 것이 축복입니다. 여러분, 어둠 속에 있으면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아 죄의식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리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의 실제 모습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우리의 관절과 골수와 영과 혼까지 비춰 깊숙이 숨겨진 것까지 드러날 때 문제가 해결되고 우리 안에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잘 모르고 어떤 죄를 지었는지도 잘 모릅니다. 죄가 인간을 심각하게 변형시켜버렸습니다. 우리 모두는 죄에 취약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악에 쉽게 오염됩니다. 죄에 대한 면역력이 없어 쉽게 죄를 짓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를 뿐 아니라 노골적으로 반역하며 살아갑니다. 우리가 어느 정도까지 죄인인지 모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올 때 주어지는 큰 축복은 죄에 대한 인식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작은 죄 앞에서도 깊은 고통을 느끼기 때문에 그 죄가 진보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회개는 죄를 깨닫고 죄를 죄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 자신의 죄로 인해 고통하며 그 죄를 인정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용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회개에서 중요한 것은 그 죄를 슬퍼하고 인정하는 것뿐 아니라 죄를 버리고 그 죄로부터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의 정확한 의미는 방향전환입니다. 그냥 몇 방울의 눈물을 흘리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내 방식과 고집대로 살아가는 모든 것을 정리하고 돌이키는 것입니다. 어디에서부터 얼마나 잘못되어있는가를 확인하고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번 525 회개의 날을 통해 우리가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는가를 살펴보고 돌이키는 결단을 하고자 합니다. 지금 우리는 회개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도, 국가적으로도, 공동체적으로도, 교회적으로도 무엇인가 우리가 잘못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세월호 사건은 우리에게 강력한 메시지를 주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는지를 돌이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 신앙은 외형은 더 세련되어졌지만 내용적으로는 훨씬 더 부실해졌습니다. 세상이 우리를 부러워하고 따라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부러워하고 열심히 따라가고 있습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는 마음은 없고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보는 것은 영원한 세계밖에 없습니다.

 

현실이 어렵고 시련이 있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믿음을 지키며 살아갔던 것은 그들에게 영원의 세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잘 먹고 잘 사는 일에 믿음이라는 도구를 사용하고 싶은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그런대로 먹고 살만해진 것이 우리 신앙에 얼마나 큰 시험거리인지 모릅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릴 일이 없어지고, 세상이 너무도 좋아진 것입니다.

 

돈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은 두렵지 않은데 돈이 없는 것은 두려운 것 아닙니까? 신앙이 약해지는 것이 걱정이 아니라 돈이 적어지는 것이 걱정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어느 순간부터 하나님보다 세상의 힘이 더 우위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힘을 더 의지하고 살아가고자 하는 모습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돈을 더 많이 묵상합니다.

 

신앙에 생명을 거는 것이 아니라 돈에 울고불고 하는 것입니다. 손해를 보더라도 말씀 따라 살려는 영적 투지를 보기 힘들어졌습니다. 물질주의가 너무도 강력하게 교회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돈 맛을 한번 보면 빠져나가기가 힘든 것 같습니다. 우리 신앙, 교회 영역 안에 돈의 힘이 큽니다. 돈에 미친 세상이 되었습니다. 돈 앞에서 생명의 가치도, 우리 삶에 가장 귀중한 가치를 다 잃어버렸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사람들의 영혼을 흔들고 있습니다. 여러분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 속에서 구별된 공동체입니다. 배가 물을 거부할 수는 없지만 그 배에 물이 들어오게 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등지고 살 수는 없지만, 세상의 탁류들이 우리 영혼을 지배하게 한다면 그것은 침몰입니다. 어떤 흐름이 생기면 그것이 문화가 되고, 그것을 흔히 대세라고 합니다.

 

거대한 강물이 줄기를 형성하면서 흐를 때 그것을 아무도 거스르지 못하면 저항하지 못하고 거기에 떠내려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고 벗어났는지를 꼼꼼하게 살피고 돌아서야 합니다. 한국은 1988년 올림픽 이후, 90년대부터 경제적 성장을 이루었고 20여 년이 지난 지금은 경제적 성장과 물질적 번영이 우리의 신앙을 심각하게 침해했습니다. 에베소교회에게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2:5)어디에서부터 변질이 왔는지, 어디에서부터 신앙이 왜곡되었는지를 돌아보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합니다.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 회개하지 않으면 촛대를 옮기겠다는 무서운 심판을 말씀하십니다.

 

역사 속에서 부흥이 일어났던 곳에는 반드시 회개가 있었고, 그 회개는 개인뿐 아니라 사회적 변화로 이어졌습니다. 1907년 평양에서도 회개 운동이 강력해서 사람들이 평소에는 할 수 없는 부끄러운 이야기들을 털어놓고, 지도자들까지 나와서 자기가 얼마나 심각한 죄를 지었는가를 선포했습니다. 남의 돈을 떼먹고 첩을 거느린 일들을 고백하며 통곡의 바다가 되었습니다.

 

그 사건 이후에 평양은 술집이 줄어들고 주일이면 문을 닫았습니다. 2의 예루살렘이라고 할 만큼 도시에 거대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회개는 구체적인 삶의 변화를 일으켜야 합니다. 성령이 임하셔서 강력하게 내 속에 있는 것을 드러내기 시작할 때 내가 감출 수 없어 회개가 터지는 것입니다.

 

525일에 그런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공허한 회개가 아니라 진정한 돌이킴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대가를 지불해야 할 지도 모르지만, 진정한 행실의 변화, 합당한 회개의 열매를 맺는 역사가 일어날 때, 우리 삶에 진정한 회복이 일어나 예배가 살고, 기도가 진실해지고 삶에 진정한 기쁨이 오고, 모든 깨지고 망가진 것들이 온전하게 되는 축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 회개 이후에 주어지는 선물이 성령입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그 다음에 성령이 오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에 결정적인 요소입니다. 누구든지 예외 없이, 죄사함을 받고 성령이 임하시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영의 세계가 시작됩니다. 죄사함을 받고 성령을 받는 것이 기독교의 기본입니다.

 

이것이 안 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그냥 교회만 다니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리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 죄사함을 받는 경험은 말씀 앞에 나의 죄가 드러나면서 어찌할 줄 모르는 경험들을 통해 십자가를 부여잡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용서를 얻을 때 정결함을 얻고, 그 순간 하늘 문이 열리고 주의 성령이 임하시고, 내 안에 다른 힘이 작용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27절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흙으로 지어져 있는 동안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인간다워질 수 있던 것이 생기를 불어넣으신 것입니다. 생령, 살아있는 영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인체에 호흡, 순환기관이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숨을 쉬는 것입니다. 성령이 바로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 호흡을 주시고 생명을 공급하셨습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생령으로 오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찾아오셔서 하신 말씀이 이것입니다.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20:21~22)

 

이것은 성령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그 성령을 받기 전에는 죽은 자와 같습니다.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실패와 좌절로 죽은 자와 같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실패와 절망밖에 없었습니다. 죄의 유혹을 이길 수 없어 세상의 풍속을 따라 갈 수밖에 없고 힘없이 죽은 자와 같았습니다.

 

그냥 흙덩어리입니다. 죄에 저항할 힘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생령이 부어진 것입니다.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임하시자 사도행전의 사람들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오늘 그 성령은 우리가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을 때 우리에게 임하신다고 했습니다. 그 성령은 거룩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그 성령이 임하면 우리는 더 이상 육의 지배를 받지 않고 영이 나를 주관합니다. 비로소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번 525 성령 대집회를 통해 모든 성도들이 회개를 통해 온전한 죄사함의 은혜를 경험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심령 가운데 주의 영이 임하시는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야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 이 세상의 시류에 흔들리지 않고 세상을 거스를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회개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는 반드시 해야 하고, 죄 사함은 반드시 경험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위에 성령이 임하실 때 우리는 온전한 신앙인이 될 것이고 물질과 이 세상에 영향을 받지 않고 능력 있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줄 믿습니다. 회개하여 죄사함을 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는 놀라운 축복이 모두에게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은 영의 세계를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다(11:1-6)

2004-01-17 14:30:33

 

1.이스라엘 종교(유대교)가 몰랐던 것들의 세계

 

(1)천사의 창조와 타락

인간의 창조와 타락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

를 창조하시고(1:27)"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

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

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

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 치

마를 하였더라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

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

디 있느냐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

려워하여 숨었나이다(3:1-10)"

(2)원죄를 알지 못함

죄의 원인자

멸망의 근거

(3)구원의 유일성

구원의 내용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요일3:8)"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

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이들과 같

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2:1-5)"

구원의 시작, 예언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

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3:15)"

구원의 방법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1:1-2)"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14)"

구원의 유일성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4:6)"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

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4:12)"

구원의 완성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53:5)"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1:12)"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

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

3:20)"

 

2.영의 세계를 이해 못한 결과

(1)종교 출현

(2)율법 고수

(3)우상 숭배

(4)사명 망각

 

3.사명 잃은 이스라엘의 모습

(1)애굽 시대

(2)블레셋 시대

(3)앗수르 시대

(4)바벨론 시대

(5)로마 시대

 

4.교회의 사명

28:16-20, 1:8, 16:13-20

 

 

 

영의 세계를 보는 자/

2002-03-28 13:00:37

 

 

5:17-26

 

 

볼지어다 ! 하나님께 징계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경책을 업신여기지 말지니라 ! (18)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 손으로 고치시나니 (19) 여섯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며 (20) 기근 때에 죽음에서, 전쟁 때에 칼 권세에서 너를 구속하실 터인즉 (21) 네가 혀의 채찍을 피하여 숨을 수가 있고 멸망이 올 때에도 두려워 아니할 것이라 (22) 네가 멸망과 기근을 비웃으며 들짐승을 두려워 아니할 것은 (23) 밭에 돌이 너와 언약을 맺겠고 들짐승이 너와 화친할 것임이라 (24) 네가 네 장막의 평안함을 알고 네 우리를 살펴도 잃은 것이 없을 것이며 (25) 네 자손이 많아지며 네 후예가 땅에 풀 같을 줄을 네가 알것이라 (26) 네가 장수하다가 무덤에 이르리니 곡식단이 그 기한에 운반되어 올리움 같으리라 "

 

할렐루야!!

수요저녁 예배를 맞이하여 이밤도 은혜를 사모하여 성전에 나와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새힘과 평강과 확신이 넘치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현실과 삶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삶의 현실이라는 것이 얼마나 냉정하고 힘들고 의외적 요소가 많은지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생존경쟁이라고 삶의 세계를 말했듯이 글자 그대로 세상은 삶을 영위하기 위한 전쟁터이며 나를 쓰러뜨리려 하는 숱한 원수 사탄이 우리 주위에서 우리로 삶의 실패자가 되게하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여 우리에게 도전하고 있습니다.이런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에게 또 하나의 짐은 성도는 그래도 거룩하고 구별되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2.삶과 신앙의 괴리

믿음의 사람들이 세상을 살면서 잘되어지면 이상한 눈으로 보고 또 동시에 잘못되면 비아냥과 비판이 심화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큰소리도 못치고 하고 싶은 것도 못하고 하고 싶은 말도 못하고 그저 인내하고 관용하며 살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어떤 사람은 아주 노골적이고 직접적으로 교회와 성도라는 위치적인 약점을 이용하고 그것을 이용하여 막무가내로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려 하고 때론 위협과 공갈을 서슴치 않는 것을 봅니다. 성도들은 이런 때 신앙이냐 삶이냐? 라는 사이에서 갈등하고 고뇌하게 됩니다.

 

3.고난 중의 복음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이런 삶의 괴리에서 고뇌하는 성도들에게 그 의미와 사건 뒤에 감추인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밝혀주시도 있습니다.

 

1) (17) 볼지어다 ! 하나님께 징계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경책을 업신여기지 말지니라 !

 

본문에서 볼지어다!! 라는 외침은 확실한 어떤 실증이 있음을 말하는 외침입니다. 분명하다. 확실하다. 틀림없다. 보라!! 그리고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징계를 받는 자는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고난이 있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더 크고 놀라운 누리기 위한 예비적인 단계임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다가 뜻하지 않는 고난과 역경을 당하고 탄식과 절망적인 상황에 빠지는 것이 망하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깊은 섭리 속에서 이런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섭리속에서 주신는 경책을 가치없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베다니 마을에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믿음의 형제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제자들이요 깊은 관심의 대상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집에 대들보가 되는 아들 나사로가 깊은 병이 들어 시름 앓다가 죽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잘 믿는 사람 예수님이 사랑하는 사람이 왜 죽을 병이 들어 젊은 나이에 죽어야 하는가? 살아계신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과연 하나님이 살아계시는가? 계시다면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 라는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과연 예수님께서 그곳에 당도하셨을 때 주위의 사람들은 여기 저기에 예수님을 향해 비판과 비난을 서슴치 않는 것을 봅니다. 이미 저는 죽어 장사된지 나흘이 지나고 있었고 그의 시체는 부패되어 썩어 냄새가 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절망 슬픔이 온통 그 가정을 덥고 그 주위를 사로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죽은 자의 무덤을 열어제치시고 능력으로 나사로를 부르셨고 나사로는 얼굴과 온 몸에 붕대 수건을 동인채로 걸어나왔습니다. 할렐루야!! 이 사건은 고난과 절망을 통해 자신과 보는 모든 자들에게 전능하신 하나님과 소망의 하나님을 만천하에 보여 주신 사건입니다. 할렐루야!

 

2).(18)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 손으로 고치시나니 (19) 여섯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며 (20) 기근 때에 죽음에서, 전쟁 때에 칼 권세에서 너를 구속하실 터인즉 할렐루야!!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과 역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권세를 알게 하시며 깊고 넓은 사랑을 알게 하신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의 눈을 뜨고 고난과 역경 뒤에 숨겨진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을 볼 수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의 주인공인 욥은 순식간에 재산을 다 잃어버리고 자식을 다 잃어버리고 몸은 심하게 병들고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마저 병든 남편을 버리고 떠나버리니 집안이 순식간에 콩가루 집안이 되어버립니다. 이게 무슨 하나님을 믿는 집안에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그뿐입니까? 친구들마저도 그에게 찾아와서 온갖 험담을 퍼붓고 그의 신앙이 잘못되었으니 벌을 받는 것이라고 목청을 돋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하나님을 향하여 끝까지 인내하며 자신의 신앙을 고수하는 아름다운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믿는 자의 믿음만큼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소망의 신앙을 가지고 전능하신 하나님께 소망을 둔 욥은 끝내는 승리하고 풍성하신 은총과 복을 누리게 됩니다.

 

42:12 여호와께서 욥의 모년에 복을 주시사 처음 복보다 더하게 하시니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할렐루야!!

 

3).(22) 네가 멸망과 기근을 비웃으며 들짐승을 두려워 아니할 것은 (23) 밭에 돌이 너와 언약을 맺겠고 들짐승이 너와 화친할 것임이라 (24) 네가 네 장막의 평안함을 알고 네 우리를 살펴도 잃은 것이 없을 것이며 (25) 네 자손이 많아지며 네 후예가 땅에 풀 같을 줄을 네가 알것이라 (26) 네가 장수하다가 무덤에 이르리니 곡식단이 그 기한에 운반되어 올리움 같으리라

 

결론:

 

결국 모든 일을 지내고 보면 오직 은혜요 축복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멸망도 사나운 들짐승도 아무 것도 아니며 주위를 살펴보면 잃은 것은 없고 오히려 더 크고 놀라우신 은혜와 넘치는 복만이 남아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000년 한 해를 살면서 삶에 폭풍이 불어와도 땅이 흔들려 바다에 빠진다하여도 오히려 더 찬송하고 더 충성하고 주님을 더 사랑하여 주시는 복을 후회없이 받아 누릴 믿음의 삶을 사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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