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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주제 설교

회개 관련 설교 모음

by Jessi J 2025. 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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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세에 하나님이 요구하신 회개 /벧후3:1-10/ 조정의목사

2022-02-18 10:31:18

 

베드로후서는 베드로가 소아시아 교회(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 비두니아) 두 번째로 쓴 편지로(3:1), 주후 68년 로마 감옥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기 직전에 쓴 유서에 가깝다. 베드로가 두 편지를 쓴 목적은 분명하다.

 

1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이제 이 둘째 편지를 너희에게 쓰노니 이 두 편지로 너희의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생각나게 하여 2곧 거룩한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과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1-2)

 

베드로는 성도들이 생각나게 하기 원했다. 또 기억하게 하기 원했다. 무엇을? 성경의 진리를. 2절에 거룩한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은 구약 성경에, 주 되신 구주께서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은 신약 성경(당시는 구전된 말씀)에 기록된 하나님 진리의 말씀이다.

 

베드로는 말세에 거짓 교사가 많이 일어나 교회를 진리에서 멀어지게 할 것을 염려했다(벧전 5:8; 벧후 2; 3:3). 그래서 하나님의 진리를 향한 그들의 진실한 마음을 다시 불러일으켜 그 진리에 삶을 굳건하게 세우길 바랐다. 말세에 거짓에 속아 떠내려가지 말고 오직 진리로 돌아올 것을(회개할 것을) 간청했다.

 

회개란 후회가 아니다. 기대한 것만큼 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나 아쉬움이 아니다. 내가 올바른 길이 아니라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는 걸 깨닫고 정신을 차려 다시 올바른 길을 찾아움직이는 것이다. 거짓에서 돌이켜 진리를 따라 사는 것이다.

 

우리는 말세에 거대한 거짓의 물결을 거스르는 삶을 살고 있다. 가만히 있으면 거짓의 홍수에 휩쓸려간다. 하나님의 진리에 단단히 붙들려 있어야 올바른 삶을 살 수 있다. 먼저 말세의 거짓이 우리를 어디로 끌고 가는지 살펴보고, 하나님의 진리가 거짓과 그에 따른 삶을 어떻게 교정하는지, 어떤 삶으로 우리를 회개하도록 요구하시는지 깊이 생각해보자.

 

1. 말세에 거짓이 요구하는 삶(3-4)

 

3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3)

 

베드로는 거짓 교사를 고발하는데 잡범이 아니라 거물급이다(먼저 이것을 알지니, 긴급!!!). 그들은 말세에 성도에게 접근하여(와서) 미혹하는데 그들의 특징은 자기의 정욕에 따라 행한다는 것이다. 정욕에 따라 사는 삶은 전형적인 믿지 않는 자의 삶이다(벧전 4:3). 신자에게 있어서 정욕은 십자가에 못 박힌 것(5:24), 제어하고(벧전 2:11) 죽여야 할 땅의 지체(3:5)이다.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신 것은 우리가 정욕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기 위함이다(벧전 4:1-2).

 

왜 거짓 교사는 정욕에 따른 삶을 살았을까? 그들이 믿고 있는 거짓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자기 믿음에 따라 산다.

 

4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하니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곧 오신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런 약속이 어디 있냐고 조롱했다. 주님은 사도들을 통해 복음서와 서신서에서 강림하신다고 분명히 약속하셨지만(24-25; 살전 1:10; 5:8), 그들은 믿지 않고 도리어 비웃었다.

 

그들의 불신은 단순히 주님의 다시 오심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 자체에 있었다. 조상들(아브라함, 이삭, 야곱), 하나님 나라의 시조부터 아니 만물이 처음 창조된 때부터 지금까지 그냥 있지 않냐고 비난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만물에 조금도 관여하지 않는, 없는 셈 쳐도 상관없는 분이었다.

 

우리는 이런 자들을 실제적인 무신론자라 부른다. 하나님을 대놓고 부정하진 않더라도 그들의 삶에서 철저히 배제하기 때문이다. 혹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셨을지 모른다. 하지만 자연법칙과 원리에 따라 잘 돌아가도록 만드셨을 뿐이지 절대 개입하지는 않으신다. 하나님이 혹시 존재하더라도 저 멀리 어딘가에서 우리와는 아무 상관없이 존재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없다고 해도 실제 우리 삶에 아무런 지장을 주지 않는다.

 

하나님을 있으나 마나 한 존재로 여기는 자의 삶이 어떠하겠는가? 바울이 이것을 알라고 경고했던 말세의 사람들처럼 정욕에 따라 살지 않겠는가?: 자기, , 쾌락을 사랑, 자랑, 교만, 비방, 부모 거역, 감사하지 않음, 거룩하지 않음, 무정, 원통함을 풀지 않음, 모함, 무절제, 사나움, 배신, 조급, 자만, 선한 것을 미워함, 경건의 모양만 있고 능력은 부인함(딤후 3:1-5).

 

바울은 베드로처럼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라고 명령했다. 이들은 하나님이 없다는 거짓에 기초한 믿음대로 자기 정욕을 따라 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자들에게서 돌아서야 한다. 거짓이 아니라 진리로 돌이켜야 한다. 회개해야 한다.

 

이 시간 당신의 마음을 일깨워 진지하게 생각해 보라. 당신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가?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반드시 강림하실 것과 만민을 심판하실 것을 믿는가?

 

J. D. 그리어 목사는 전도하는 중에 구도자가 한 말에 큰 충격을 받았다. ‘만일 당신이 말하는 것처럼 대부분의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벗어나 영원한 심판을 앞두고 있고 그날이 아주 임박했다면 하루를 어떻게 그냥 살 수 있는가? 매일 구도자를 붙들고 제발 심판을 피하라고 간청해야 하지 않는가?’

 

당신은 주의 임박한 강림을 믿는 사람처럼 심판을 앞둔 이들을 불쌍히 바라보고 심판을 면하라고 간청하고 있는가? 결산을 눈앞에 둔 자처럼 시간을 사용하고 있는가? 곧 불타버릴 곳이 아니라 영원한 하늘에 당신의 재물을 쌓고 있는가? 정신을 차리고 깨어서 당신의 삶을 진지하게 평가해보라. 당신의 삶은 주님의 강림을 믿는 자의 삶인가 아니면 그 진리를 조롱하는 자의 삶인가?

 

믿기는 믿는데 믿는 것처럼 살진 못한다는 것을 겸연쩍어하고 부끄러워하면서도 그렇게 살아도 되는 것처럼 생각했다면, 정신을 차려라. 돌이켜라. 우리는 잘못된 삶을 살고 있고 거기로부터 회개해야 한다. 하나님의 진리, 하나님 말씀이 그것을 요구한다.

 

2. 말세의 거짓을 반박하는 진리(5-10)

 

베드로는 5-10절까지 말세의 거짓을 반박하는 하나님의 진리를 제시한다. 두 가지로 구분하여 살펴볼 수 있는데 먼저 창조될 때부터 지금까지 만물이 그냥 있는 게 아니라 말씀에 붙들려 있다는 반박(5-7), 그리고 말씀하신 대로 주의 날, 만물의 마지막 날이 도둑 같이 올 것이란 반박(8-10)이다.

 

(1) 말씀이 만물을 붙드신다(5-7)

 

하나님을 부정하는 자들은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고 조롱했다. 하지만 베드로는 그냥 있는게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따라 있다고 반박했다.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5)

 

하늘 곧 궁창은 물과 물 가운데 있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됐다(1:7). 그래서 시편 기자는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라고 노래했다(33:6). 하나님이 말씀하셨을 때,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났으며 하나님은 그 뭍을 땅이라 부르셨다(1:9-10; 45:18).

 

만물은 그냥 있는 게 아니다. 무에서 유가 그냥 생길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셨고 말씀으로 움직이시며 붙드신다. 계속해서 베드로는 하나님이 말씀으로 만물 가운데 역사하신다는 걸 부정하는 이들이 피할 수 없는 증거를 제시한다.

 

 

이로 말미암아 그 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6)

 

이로 말미암아가 가리키는 것은 이다. 물은 세상에 그냥 있지 않았다. 넘쳤다. 그냥 넘친 것이 아니라 세상을 멸망시킬 정도로 넘쳤다. 자연 현상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이뤄진 심판이었다(7:4). 다윗은 시편 29편에서 홍수 때 하나님이 왕으로 좌정하셨고 영원히 그리하실 것이라 노래했다(29:10).

 

말세에 하나님 말씀을 조롱하던 자들은 주의 약속이 더디다고 생각하다 못해 그런 약속이 있기는 한 거냐고 불신했다. 하지만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7)

 

그 동일한 말씀으로가 핵심이다. 말씀이 하늘과 땅을 무에서 창조했다. 말씀이 온 땅을 물로 덮어 심판했다. 그 동일한 말씀이 이제 하늘과 땅을 보호하고 보존하신다. 언제까지?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그날에 하나님은 반드시 말씀하신 대로 하늘과 땅을 불사르실 것이다.

 

(2) 말씀은 반드시 이뤄진다(8-10)

 

, 이제 베드로는 거짓이 아니라 진리를 붙드는 자들, 그가 사랑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한다. 계속해서 기억하며 살도록.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며 말세를 살아야 할까?

 

 

8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9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10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고대 사본: 모든 것은 타버릴 것이라)

 

베드로는 시편 904절을 개작하여(“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 모세) 하나님의 시간과 우리의 시간은 같지 않다고 말했다. 먼지와 안개같은 삶을 사는 유한한 우리가 체감하는 시간과 무한하고 영원하신 하나님이 보시는 시간은 확실히 다르다.

 

또한 곧 오신다는 주의 약속이 더딘 것은 아니지만 더디다고 느껴지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하나님의 풍성한 자비 때문이다. 하나님은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오래 참고 기다리신다.

 

하지만 주의 날은 말씀대로 반드시 그리고 갑자기(도둑같이) 임할 것이다. 그 날에는 하늘(6:14)과 땅을 구성하는 모든 물질과 모든 만물이 뜨거운 불로 심판받을 것이다.

 

하나님 말씀이 하늘과 땅을 붙드시고 움직이시고 보존하시며, 하나님 말씀대로 하늘과 땅은 곧 불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당신은 이것을 알고 믿는 자처럼 살겠는가 아니면 알아도 부정하며 사는 경건하지 않은 자처럼 살다가 심판과 멸망을 맞이할 것인가?

 

3. 적용

 

내일 종말이 온다면이란 질문에 흥미롭게도 하나님 말씀을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대답이 현저히 다르다. 믿지 않는 자는 정욕을 따라 최대한 즐기려 한다. 믿는 자는 정욕을 최대한 죽이고 성령을 따라 최대한 살려 한다. 믿지 않는 자는 쾌락을 끝까지 맛보고 죽으려 하고 믿는 자는 거룩을 끝까지 맛보고 죽으려 한다. 믿지 않는 자는 자기를 최우선으로 사랑하려 하고, 믿는 자는 남을 사랑하여 심판을 면하는 복된 소식을 전하려 한다. 믿지 않는 자는 돈과 재능과 시간을 낭비하고 믿는 자는 절제한다. 믿지 않는 자는 조급하고 믿는 자는 기대한다.

 

주의 날 앞에서 믿지 않는 자는 그동안 거짓에 속아 정욕대로 살았던 삶의 방향으로 도리어 전력 질주하고, 믿는 자는 잠깐 졸아 뒤쳐진 삶에서 바짝 정신을 차리고, 깨어서 다시 말씀이 인도하는 곳으로 재빨리 돌아간다. 회개한다.

 

그래서 베드로가 묻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벧후 3:11). 하나님 말씀은 조금의 변함도 없이 오차도 없이 창조 때부터 지금까지 만물을 만들고 붙들고 보호하고 이제 곧 불태울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알고 또 믿고 있는 당신은 어떠한 사람이 될 것인가? 이 질문에 뭐라 답할 것인가?

 

 

 

말세에 하나님이 요구하신 회개 Part 2 /벧후3:11-18/ 조정의목사

2022-02-18 10:49:48

 

베드로는 로마 감옥에서 순교 직전 유언처럼 이 편지를 썼다. 편지의 수신자인 소아시아 교회가 거짓 교훈에 빠지지 않기를 바랐다. 그들의 진실한 마음을 일깨웠고 선지자와 사도를 통해 기록된 진리 곧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라고 강권했다(벧후 3:1-2).

 

예수님의 초림부터 재림까지를 가리키는 말세를 산다는 면에서 우리는 이들과 같다. 하나님 약속을 조롱하며 이들을 미혹했던 거짓이 오늘날 우리를 미혹한다. 주가 곧 오신다는 약속을 굳게 믿고 가르치는 교회를 찾기 힘들다. 마치 세상이 창조될 때와 같이 계속 그냥 있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믿고 사는 교인들이 많다. 입술로는 이런 거짓을 믿는다고 절대로 말하지 않지만, 정욕을 따라 산다. 이는 실제로 주의 강림과 심판을 믿지 않고 오히려 조롱하고 있다는 말이다(벧후 3:3-4).

 

하지만 베드로가 기억하고 생각나게 하려 했던 하나님 말씀은 무엇을 약속하는가?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고, 물로 온 땅을 덮어 심판하신 하나님 말씀이 주의 날까지 천지를 보존하고 있고, 그날이 되면 땅과 하늘이 불타고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에게 심판이 있을 것이라 경고한다. 주의 약속은 결코 더딘 것이 아니다. 회개할 기회를 주고 계신다. 반드시 말씀대로 이루어진다(3:5-10). 그러면 이 약속의 말씀을 믿는 자는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한가? 말세에 하나님이 요구하신 합당한 삶을 살펴보자.

 

1. 힘쓰라(14)

 

첫 번째 명령은 힘쓰라이다. 이 명령은 ‘(현재 이루지 못한)무언가를 힘써 이루라는 명령이 아니다. 이미 이뤄진 것을 끝까지 굳게 지켜내라는 명령이다. 11-13절의 본문이 이를 입증한다.

 

11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 13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11절의 풀어지리니12절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와 같은 단어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날이 임하면 지금 우리가 보는 하늘과 땅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하나님이 하신 약속의 말씀을 주목하게 한다.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질 것이다(10).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도 함께 심판과 멸망을 맞이할 것이다(7). 두렵고 떨리는 날이다. 그런데 베드로는 성도에게 그 날을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고 명령한다. 불타버릴 땅과 하늘이 아니라 다른 걸 바라보기 때문이다.

 

13절에 우리는(베드로와 성도들)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본다. 그들은 의에 속한 자다.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되었다(3:24).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를 가득 맺는 자(1:11),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는 자(5:5)가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한다. 멸망이 아니라 소망을 바라기 때문이다.

 

14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그래서 따라오는 명령인 힘쓰라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정도로 경건함과 거룩한 행실을 쌓으라는 말이 아니다. 지금부터 노력해서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완벽한 수준의 삶에 이르라는 말이 아니다. 성도는 이미 약속된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고 있다. 그들이 힘써지켜야 하는 건 그 나라 백성으로서 합당한 삶, 정욕을 따르지 않고 경건함을 따르는 삶, 더러운 행실을 버리고 거룩한 행실을 갖는 삶을 멈추지 말고 계속 살라는 것이다.

 

점도 없고 흠도 없이는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화목평강을 가져오는 제물을 연상시킨다. 우리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거듭났다(벧전 1:19,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 요일 2:2).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고 택하신 방법이다. 베드로는 편지 초반에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라고 했다(벧후 1:10-11). 택하심과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 끝까지 싸우는 자는 주 앞에서 평강 가운데 나타날 확신이 있다.

 

그리스도인의 영적 성장은 정도보다 지속성이 중요하다. 주의 날까지 얼마나 경건하고 거룩한 사람이 되었는가보다 계속해서 경건과 거룩을 위해 싸웠는가가 중요하다. 매일 죄와 싸우고 피 흘리기까지 싸워라(12:4).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는 씨름을 멈추지 마라. 그것이 말세에 주를 화목하게 만날 확신을 준다.

 

2. 여기라(15-16)

 

다음 명령은 여기라(15). 앞의 명령이 주 오심을 앞으로 당겨 바라보며 삶을 굳게 지키는 것이었다면, 이 명령은 주 오심이 뒤로 물러나 보일 때 가져야 할 마음, 갖춰야 할 자세, 태도다.

 

 

15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주님이 심판을 계속 미루고 계신 것처럼 보이고, 곧 오시겠다는 약속의 성취가 더디다고 생각될 때, 9절에 나온 말씀처럼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 오늘 구원의 은혜를 베풀고 계신다고 여겨야 한다. 내일의 은혜를 기대하다 실망하여 오늘의 은혜를 낭비하지 마라.

 

우리는 주의 날이 마침내 이르기 전까지 하루하루가 주의 구원의 날, 은혜의 날이란 걸 기억해야 한다. 오늘 하루 주가 오시지 않는다면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노래해야 한다(고후 6:2). 당신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구원을 선포할 또 하루가 주어진 것이다.

 

찬송가 330장 어둔 밤 쉬 되리니 가사를 보라. “찬 이슬 맺힐 때에 일찍 일어나 해 돋는 아침부터 힘써 일하라”, “일할 때 일하면서 놀지 말아라”, “지는 해 비낀 볕에 힘써 일하고 그 빛이 다하여서 어둡게 되어도 할 수만 있는 대로 힘써 일하라왜 그런가? “일 할 수 없는 밤이 속히 오리라.” 주님이 오시면 사랑하는 가족, 친척, 이웃, 동료에 대한 주님의 오래 참음이 끝난다. 회개할 기회가 사라지고 구원의 은혜가 그친다. 그러므로 우리는 힘써 일해야 한다.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3:13).

 

하지만 베드로 당시에도 지금처럼 종말에 관한 하나님 말씀을 자기 멋대로 해석하며 합당한 태도를 거부한 이들이 있었다(16).

 

 

15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16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바울이 성령께 받은 지혜대로 쓴 모든 편지에는 이같은 글, 이런 일에 관한 말 곧 주 오심에 관한 가르침이 많다(살전 5, 고전 15). 다른 성경에도 종말에 관한 말씀이 많다(24-5). 그런데 무식한 자들 곧 진리를 거스르기 원하는(무지) 어리석은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 도덕적으로 약하고 불안정하여 정욕에 따른 삶에 쉽게 빠지는 자들(벧후 2:14)이 바울의 편지 그리고 다른 성경의 본문을 억지로교묘하게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렀다. 그들은 말세, 종말, 주의 날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에 합당한 삶을 이해하지 못했고 마땅한 삶을 살지 못했다.

 

하지만 당신은 성령께 받은 지혜로 하나님 말씀에 담긴 뜻을 알았다. 하나님의 말씀이 당신에게 요구하는 삶, 주의 날을 기다리는 말세에 당신이 힘고 여겨야 할 삶이 무엇인지 알았다. 멸망에 이르는 삶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확신에 이르는 삶이다: 첫째, 경건과 거룩을 지키는 일에 매일 힘쓰는 삶, 둘째, 오늘 주어진 은혜에 감사하며 회개에 이르는 구원의 길을 부지런히 전하는 삶.

 

3. 삼가라-자라 가라(17-18)

 

이제 마지막 세 번째와 네 번째 명령을 살펴보자. 두 가지 명령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17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가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18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

 

편지의 끝인사에 해당하는 마지막 두 구절은 앞의 내용을 다시 한번 정리하면서 삼가라-자라 가라는 연결된 명령들을 제시한다. 먼저 나오는 명령인 삼가라는 앞에 언급한 내용을 되풀이한다. 주의 날에 어떤 일이 펼쳐질지 그들이 미리 알았기 때문에 첫째, 그들은 굳센 데서 떨어질까 조심해야 한다. 무법한 자들,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을 거역하는 자들이 그들을 미혹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이끌리면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에 둔 굳센 믿음과 그에 따른 경건한 삶에서 떨어지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기 위해 반드시 그들이 힘써야 할 일이 두 번째로 따라오는 명령 자라 가라이다. 그들은 무법한 자들의 거짓에 귀를 막아야 한다. 항상 깨어 경계해야 한다. 그러려면 오직 진리로 무장해야 하는 수밖에 없다. 수만 가지 위조지폐 중 진짜 지폐를 찾는 기술은 진짜 지폐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는 것뿐이다.

 

자라 가라는 명령이다. 지속적으로 반복해서 우리가 힘써야 할 일이다. 우리가 자라야 할 영역은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이다. 이 표현은 단순히 그리스도에 관한 정보나 단순 지식이 아니라 은혜로 그분을 경험하는 앎에서 자라야 한다는 걸 보여준다.

 

예수님은 그냥 유명인사나 위대한 성인, 대단한 능력과 지식을 가진 스승 정도가 아니라 우리 주님이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구주시다. 그분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는 것은 그분의 은혜 안에 인격적으로 그분을 더욱 알아가고 닮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말씀을 통해, 성도와 교제를 통해, 예배와 찬양을 통해, 기도와 집회를 통해 더욱 예수님을 깊이 알아 가라. 오직 그것만이 당신을 말세의 숱한 거짓으로부터 지켜줄 것이다. 미혹되지 않고 믿음에 굳게 설 수 있는 반석, 정욕에 따른 삶이 아니라 경건한 삶으로 인도하는 목자, 더러운 행실이 아니라 거룩한 행실을 입게 하는 능력이 될 것이다.

 

1995629일 서울 서초구에서 엄청난 규모와 호화로움을 자랑했던 삼풍 백화점이 무너졌다. 이 사고로 502명이 사망했고 30명이 실종됐으며 40명 구조, 937명이 부상을 당했다. 재산 피해만 약 2,700억원에 이른 이 사고는 연일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했다. 매일 매몰자를 수습하는 과정에 피해자 가족들이 오열하는 장면 뒤로 많은 이들을 격노하게 한 이들이 있었다. 구조하는 척하면서 붕괴 현장 곳곳에 떨어져 있는 명품을 챙기느라 바빴던 사람들이다.

 

어쩌면 이 모습이 말세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닐까? 곧 불타버릴 땅에 우리를 두시고 오늘 은혜가 주어진 구원의 날에 구별된 삶, 거룩한 삶으로 회개를 요청하는 삶을 살아야 할 우리가 세속에 빠지고 정욕에 따라 살면서 땅에서 건질만 한 것을 구하러 다닌다면. 우리는 회개해야 한다.

 

의에 속한 나라,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고 사모하며 살아야 한다.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하고, 오늘 주어진 은혜의 기회를 살려야 한다. 매일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분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는 것만이 우리를 말세에 하나님이 요구하신 회개에 합당한 삶으로 움직일 것이다.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11).

 

 

 

날마다 회개하는 신자 /요일1:9, 딤전4:8/ 김형익 목사

2021-05-20 03:54:42

 

2021년 새해에도 여전히 우리는 [말씀이 이끄는 교회]로 주의 인도하심을 받아 세워져 가는은혜를 구하는 가운데, 특별히 금년에 강조하고 싶은 신앙 훈련이 있습니다. 그것은 회개의 훈련입니다. ‘날마다 회개하는 신자로 살아가기를 연습하고 훈련하는 2021년이 되길 바랍니다. 회개는 믿음과 함께 그리스도인의 삶의 출발점을 구성하는 두 기둥이고 또한 신자의 일생에 가장 중요한 두 기둥이기도 합니다. 믿음과 회개로 교회에 들어오고 믿음과 회개로 신자의 삶을 삽니다.

 

그런데 이중 회개는 믿음 만큼 강조되지 않은 면이 많고, 많은 오해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끊임 없이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 성경이 가르치는 회개를 배워야 하고 또 그것을 살아내야 합니다. 금년에 우리는 [날마다 회개하는 신자]라는 타이틀 아래, 회개의 연습과 훈련에 초점을 맞출 텐데, 오늘 새해 첫 주일에 이 주제를 살펴보는 것이 유익할 것입니다.

 

1. 훈련이 필요하다 (딤전 4:8).

바울 사도는 젊은 목회자 디모데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디모데전서 4:8).” 경건을 육체의 연단에 비유했는데 연단이란 말은 훈련, 연습이라는 의미입니다.

 

헬라어로 김나지아(γυμνασία)’라고 읽는데, 체력 훈련장, 연습장을 가리키는 영어 단어 (gym, gymnasium)’이 여기서 나온 말입니다. 바울 사도가 경건을 육체의 훈련에 비유한 것은, 경건도 훈련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래서 바로 앞 구절에서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훈련)하라고 말씀한 것입니다(딤전 4:7). 그리고 경건의 훈련은 범사에 유익해서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 누릴 약속이 있습니다.

 

늘 모여서 무언가를 하는 것에 익숙한 우리는, 홀로 하나님을 독대하여 감당해야 하는 일들에 소홀했을 수도 있는데, 회개의 훈련은 이런 우리에게 큰 유익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회개의 훈련은 특별히 모이기 힘든 코로나 시대에 적절하고 유익한 훈련이 될 것입니다. 회개라는 경건 훈련이 여러분의 영적 근육을 단련하고 깊은 경건에 이르는 결실을 맺기를 바랍니다.

 

2. 회개는 신자의 교인 입회 절차가 아니다(1;15; 요일 1:8).

먼저 회개에 대한 오해들을 바로잡을 필요가 있는데, 첫째 오해는 회개를 신자의 교인 입회 절차로 여기는 것입니다. 물론 교인등록카드만 작성하면 교인이 되는 시대에, 믿음과 회개를 교인의 조건으로 삼는 것만도 의미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회개는 예수 믿을 때 처음 한 번 하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1:15). 회개와 믿음, 믿음과 회개는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일어납니다. 회개 없는 믿음, 믿음 없는 회개는 불가능합니다. 그리스도와 복음을 믿는다면, 그는 이전에 살아가던 삶의 방향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방향을 전환해야 하는 것입니다. 방향을 전환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또 믿음이 없이 회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신자가 된 사람은, 일평생 믿음과 회개를 반복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은 일평생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것입니다. 회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자 안에 남아있는 죄의 경향성은 신자를 지배하고 다스리려는 욕구를 포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평생 회개가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죄를 자백하면이라는 말은 반복적으로 계속해서 죄를 자백하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앞 8절에서 말씀한 것처럼 우리는 어느 순간에도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공예배를 드릴 때, 참회기도 순서가 있는 것도 이런 차원에서 반복적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물론 회개는 공예배의 순서에 한정될 수 없는 것이지만 말입니다. 회개는 신자가 평생에 행하는 일입니다.

 

3. 회개는 단순한 뉘우침이나 반성이 아니다(27:3-5).

회개는 단순한 뉘우침이나 반성도 아닙니다. 본래, 회개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슈브’(שׁוּב)돌아간다는 의미이고, 헬라어 메타노에오’(μετανοέω)마음을 고치다라는 뜻입니다. 둘 다 방향을 전환한다는 것인데, 하나님께로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사실, 한자어인 회개(悔改)’는 뉘우친다는 뜻의 ()’와 고친다는 뜻의 ()’가 결합된 단어인데 마음으로 뉘우치고 행동을 고친다는 의미에서 성경적 회개의 의미를 잘 살린 번역입니다. 왜냐하면 뉘우치는 것만을 회개라고 하지 않고, 회개는 행위를 고치는 것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 뉘우쳐 고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방향 전환입니다. 회개에서는 이 방향이 중요하고 아버지와의 인격적 관계가 중요합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넘겨져 정죄 받는 것을 보고 양심에 가책을 받아 스스로 뉘우쳐 결국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까지 했지만, 그것은 참된 회개가 아니었습니다(27:3-5). 회개는 돌이켜 고침으로써 하나님 아버지와의 인격적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4. 모든 죄를 다 회개해야 하는가?(19:12; 139:23-24)

어떤 사람들은 회개할 때 속죄가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만일 이 말이 옳다면, 회개하지 않은 죄는 어떻게 됩니까? 죽을 때 미처 다 회개하지 않은 죄들은 가지고 주님 앞에 서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람이 어떻게 자기의 모든 죄를 다 알고 회개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를 다 용서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것입니까? 이런 회개의 이해는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모든 죄악을 다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시편 19:12입니다.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시편 19:12).”

 

죄를 특정한 행위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무리 뛰어난 은혜의 상태에 있을지라도 우리가 인식하고 찾아낼 수 없는 죄악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기도한 것입니다. 둘째로,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라는 할 때, ‘알고 지은 죄라는 표현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은 특정한 죄에 대한 인정과 자백이 없으므로 피상적이기 쉽고, 회개의 진정한 의미를 드러낸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이라고 할 때, 죄가 복수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특정한 죄들, 알고 있는 죄들을 자백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시편 139:2324).”

 

때로는 하나님께서 징계를 통하여 죄를 깨닫게 하실 때가 있지만, 다윗처럼 신자는 그 전에라도 늘 자신의 죄를 찾아 회개하려고 해야 합니다. 우리가 금년에 훈련하려는 것이 바로 그런 죄들을 찾아내고 그것을 회개하는 훈련입니다. 모르는 죄는 괜찮다고 안일하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할 수만 있으면 우리 안에 내재하는 죄를 찾아내고 죽이는 일이 신자의 거룩한 삶을 위해서는 절대로 중요한 의무인 것입니다.

 

5. 회개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19:30; 15:11-32)

여기서 질문이 하나 생깁니다. 우리가 회개할 때마다, 우리가 자백하는 특정 죄악들이 사함을 얻는 것입니까? 이것은 쉽고도 어려운 문제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셨을 때, 그의 죽으심을 통하여 다 사함을 받았습니다.

 

주님께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것은, 모든 택자의 죄를 사하시는 일을 성취하셨다는 선언입니다(19:30). 그렇다면, 신자가 자기 죄를 자백할 때 일어나는 일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은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말씀합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를 사하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서 그의 보혈로써 덮여지고 사해진 죄악이 다시 사함을 받는다는 의미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가 그리스도 십자가 사건에서 씻겨졌다면, 우리가 죄를 자백할 때, 그 죄사함의 효력이 다시 우리 심령에 회복되고 역사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죄사함의 은혜가 다시 새롭게 우리 자신에게 적용되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책감을 안고 나아가지 않고 다시 사죄의 기쁨을 가지고 감격함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죄들을 자백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속죄를 회개하는 자녀에게 적용하여 주심으로 그 심령을 회복시켜 주실 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끊어진 사귐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자백한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우리의 양심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방편입니다.

 

죄를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대강 넘기거나 모른 척하게 된다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우리의 양심이 편안함을 가질 수 없을 것은 자명합니다. 양심이 불편한데 어떻게 하나님 아버지와의 사귐에 들어가 거기서 흘러나오는 기쁨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죄들을 자백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깨어진 사귐 속으로 다시 들어가 기쁨을 누리게 하시는 말할 수 없이 크신 하나님의 은혜요, 그 방편입니다.

 

회개할 때 일어나는 일을 그림 같이 보여주는 이야기는 탕자의 비유입니다(15:16-31). 탕자가 인생의 밑바닥에서 자기 죄악을 깨닫고 아버지에게 돌아가기로 결정합니다. 결국 돌아와 아버지의 품에 안긴 아들은 자기 죄를 아버지께 인정하고, 자백합니다.

 

아버지는 그 아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히게 하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을 신기게 합니다. 그리고 잔치를 벌입니다. 회개할 때,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하늘 아버지와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본문은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말씀합니다.

 

불의는 죄로 말미암은 더러운 흔적 즉 오염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죄들을 자백하는 신자들을 사랑하셔서 그들에게서 죄의 흔적들까지도 남김 없이 말끔하게 씻어 주십니다. 마치 죄를 지은 적도 없는 것처럼, 마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듯이, 우리를 용납하시고 기뻐하시고 사랑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탕자의 아버지가 탕자에게 해준 일입니다. 이제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어떤 거리낌도 없습니다. 관계가 회복된 것입니다.

 

회개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기쁨을 가장 놀랍게 경험하게 하는 순간입니다. 우리가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쳐놓은 죄의 장벽을 허물고 우리를 다시 그 품에 안아 주십니다. 신자는 범죄함으로 하나님에게서 버림을 받거나 끊어짐을 당하지는 않지만, 죄를 자백하고 회개함으로써 아버지와의 그 불편하고 힘든 관계를 청산하고 아버지께 안기는 감격을 누리는 것입니다.

 

 

6. 종교적 회개 대() 복음적 회개(8:1)

그러나 슬프게도 많은 사람들이 회개를 종교적 회개로 오해합니다. 종교적 회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려서 하나님이 나를 축복하고 내 기도에 응답하게 하려는 동기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종교적 회개는 이기적입니다. 그리고 자기의를 만들어내려는 시도입니다. 그래서 이 회개에는 기쁨이 없습니다. 자기 죄를 인정하는 것은 유쾌한 경험일 수 없습니다. 쓰디 쓴 경험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만족시키고 복을 얻기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하지만, 복음적 회개는 다릅니다. 이 회개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기쁨을 반복적으로 경험하게 함으로써, 신자 안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싶은 영적 열망을 불러일으켜 죄의 성향을 약화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A. 형벌이 두려운가, 죄를 슬퍼하는가?

조금 더 종교적 회개와 복음적 회개의 차이점을 살펴봅시다. 종교적 회개는 자신의 죄로 인해 받게 될 형벌이 두려워서 하는 회개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신자의 모든 죄를 십자가에서 담당하셨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선언합니다(8:1). 그래서 복음은 회개를 자기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변화시킵니다.

 

불신자의 모든 죄는 지옥으로 인도하는 죄악이지만, 신자의 죄는 아무리 큰 죄일지라도 지옥에 가게 하는 죄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아버지와의 관계를 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신자는 그래서 죄를 미워하고 무서워합니다. 아버지와 올바른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보다 기쁘고 좋은 삶이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적 회개는 죄의 형벌이 무서워서 하는 회개가 아니라, 죄 자체를 슬퍼하는 회개입니다.

 

B. 죄 용서의 근거는 나의 비참함인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속죄사역인가?

뿐만 아니라, 종교적 회개는 자기의와 연결됩니다. 이때 회개는 단순히 죄 용서를 받는 형식이 되거나 내가 이만큼 죄 때문에 힘들어하고 후회하고 있으므로 용서를 받을 만 하다고 느끼게 합니다. 그래서 로마카톨릭의 고행 같은 관습들이 정당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인간이 되는 비하를 겪으셨고 고난을 받으셨으며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선언합니다.

 

신자가 죄 용서를 받는 근거는 자신의 슬픔과 비참함의 정도가 아닙니다. 죄 용서의 근거는 오직 낮아지신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를 얻기 위해 스스로를 괴롭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신 것을 받아들일 뿐입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자백하는 죄를 사하시는 근거를 하나님의 미쁘시고 의로우신성품이라고 말합니다. 미쁘다는 말은, 신실하심인데, 죄들을 자백하는 자들을 용서하신다는 약속을 하나님께서 신실하게 지키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여 하나님께 모든 죄들을 자백할 수 있습니다. 왜 사도는 하나님의 은혜로우심이나 긍휼하심이나 자비하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용서의 근거라고 말씀합니까? 바로 앞 7절에서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한 것이 그 대답입니다.

 

십자가에서 그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율법의 저주와 형벌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를 쏟아 부으심으로 그 아들 안에서 택하신 백성의 죄들을 심판하신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이미 당신의 의로우심을 증명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 용서는 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에 근거합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바로 십자가에서 나타났고 증명되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이 선포하는 내용입니다.

 

C. 쓰디 쓴 회개인가, 달콤하고 기쁜 회개인가?

종교적 회개와 복음적 회개의 차이는 더 있습니다. 종교적 회개는 처음부터 끝까지 쓰디 쓴 것입니다. 죄를 인정하는 것도 마지 못해서 하는 것이고, 또 하나님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해야 한다는 부담이 클 것입니다. 모든 것이 자기 하기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완전하게 용납되었다고 선언합니다.

 

근거는 우리의 선한 행실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과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 사역입니다. 그래서 죄를 자백하는 것이 두렵고 어렵지 않습니다. 법정에서 판사 앞에서 죄를 인정하는 것과, 아버지 앞에서 자기 죄를 자백하는 것의 차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법정은 죄의 대가를 지불하라고 요구하지만, 아버지는 죄를 자백하면 죄를 탕감해 주실 뿐 아니라 아버지와의 상한 관계도 바로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이런 자신감은 어디서 옵니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구속을 완전히 성취하셨다는 사실을 믿는 믿음에서 옵니다. 우리가 회개를 통해서 아버지에게 받아들여짐을 경험할 때보다 더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때는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회개를 통해, 내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된 것을 깊이 경험하게 되고, 이 기쁨은 모든 죄에 대한 우리의 마음을 죽이는 강력한 힘이 될 것입니다.

 

종교적 회개는 할수록 힘들고 고통스러워서 할 수만 있으면 안 하고 싶지만, 복음적 회개는 그 결과가 너무나 좋고 감격스럽고 기뻐서 점점 더 회개를 하게 합니다. 근본적으로 회개가 죄를 자백한다는 점에서는 씁쓸하지만, 그 결과는 참으로 달콤하고 기쁜 것입니다. 여기에는 하나의 악순환과 선순환이 있는데, 회개를 하지 않을수록 그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기쁨을 누릴 수 없기에, 점점 더 죄를 범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회개를 할수록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기쁨을 누리게 되고, 이 기쁨은 점점 더 죄를 멀리 하고 하나님께 가까이 하고 싶어하는 마음을 더해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점점 더 전에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여겼던 것들을 죄로 여기고 회개하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모든 죄악들 아래 있는 죄의 뿌리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죄의 결핍이기 때문입니다.”

 

7. 회개의 실제복음적 회개의 훈련

이제 성경이 가르치는 회개가 무엇인지 조금 이해하셨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복음적 회개의 훈련입니다. 18세기의 위대한 설교자 조지 휫필드는 한 편지에서 자기가 어떻게 자신을 살피면서 복음적 회개를 실행하고 있는지를 밝히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깊은 겸손과 불타는 사랑, 바른 방향의 열정 그리고 나뉘어지지 않은 마음을 주시면, 사람들이나 마귀가 아무리 못되게 해도 나는 상관없다.” 이것은 복음적 회개가 주는 놀라운 열매요 자신감입니다. 마귀나 그 어떤 악한 자들도 날마다 회개하는 신자를 어찌할 길이 없습니다. 조지 휫필드가 남긴 이 자료는 복음적 회개를 훈련하려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유익한지 모릅니다.

 

A. 교만에서 깊은 겸손으로

첫번째 회개의 주제는 교만과 겸손의 문제입니다. 스스로 이렇게 질문해 보십시오. “오늘 나는 누군가를 무시하거나 깔보지 않았는가? 나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 내가 너무나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아닌가? 이것 때문에 나는 내가 무시당했다고 느꼈는가?” 내가 누군가를 무시하거나 깔보았다면 그것은 회개할 일이지만, 나에 대한 비판이나 내가 무시당한 일들에 대해서는 내가 무슨 회개를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복음적 회개는 여기까지 미칩니다. , 어떻게 회개할 수 있습니까?

 

나도 내가 무시한 사람들과 같은 죄인이므로 나의 오만함을 회개하고 그것이 줄어들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누군가의 칭찬이나 비난에 너무 크게 반응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보다 사람의 칭찬과 인정을 더 소중히 여긴 것을 회개하고 남들의 비판으로 인한 고통이 줄어들 때까지 우리는 예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때 우리는 하나님 보다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을 더 구했던 것을 회개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의 빛 아래서만 자신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떠나 보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는 더 이상 자신에 대한 좋은 이미지 따위에 신경 쓸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용납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감사와 평안한 기쁨을 경험할 때까지 주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를 생각하며 회개하십시오.

 

B. 무관심에서 뜨거운 사랑으로

두번째 회개의 주제는 무관심과 애정의 문제입니다. 이렇게 스스로 질문해볼 수 있습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불친절하게 말하거나 생각하지는 않았는가? 마음 속에서라도 누군가를 풍자함으로써 나를 정당화하려고 하지는 않았는지? 나는 참을성 없고 조급하게 행동하지는 않았는지? 나는 자기에게 몰입되어서 다른 사람에게 무관심하고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것은 아닌지?” 인간은 다 자기중심적인데, 이 자기중심성은 죄의 두드러진 성향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회개할 수 있습니다.

 

차가움이나 불친절함을 회개하고 그것이 없어질 때까지 나를 향한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조급함을 회개하고 그것이 없어질 때까지 나를 향해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람에 대한 무관심을 회개하고 그것이 없어질 때까지 그리고 내가 사람들에게 따뜻함과 애정을 보이기까지 거저 주시는 은혜를 생각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그 은혜로 나를 무한히 참으셨고 나를 주목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렇게 우리 안의 차가움과 불친절함, 조급함, 사람에 대한 무관심을 회개할 수 있습니다.

 

C. 불안에서 지혜로운 용기로

세번째 회개의 주제는 불안과 용기의 문제입니다. 날마다 이렇게 자문해보십시오. “나는 직면해야만 하는 줄 알면서도 직면해야 할 사람이나 할 일을 피하지 않았는가? 나는 불안해하고 염려하지 않았는가? 나는 신중하게 행하는데 실패하거나 조급하고 충동적으로 행동하지 않았는가?” 불안은 불신으로부터 야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의 주제가 됩니다. 단순히 용기를 구하기 전에, 우리는 이렇게 회개의 기도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위해 악을 직면하셨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어려운 일을 회피하려는 두려움, 불안함, 조급함을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그 두려움과 불안과 조급한 행동이 없어지기까지 나를 돌보시며 사랑하시며 나를 책임지신다는 것을 증명하시려고 죽으신 예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를 생각하십시오. 불안해하는 것은 내 인생을 내가 책임지겠다는 교만한 태도입니다. 우리는 자기 인생이 어떻게 될지 알만큼 지혜롭지 않습니다. 차분함과 고요함, 그리고 전략적 지혜와 담대함을 주시기까지 주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를 생각하며 불신앙을 회개하십시오.

 

D. 경건한 동기

회개의 마지막 주제는 경건한 동기와 목적에 관한 것입니다. 이렇게 자문해 보십시오.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서 행동했는가 아니면 두려움, 인정받으려는 욕구, 위로와 편안함에 대한 사랑, 남을 지배하려는 욕구, 갈채와 권력에 대한 굶주림, 또는 사람에 대한 두려움에 의해 움직였는가?

 

나는 누군가를 시기하고 있지는 않은가? 정욕이나 폭식의 욕구에 순응하여 첫 발을 떼도록 허용하지는 않았는가? 나는 이런 무절제한 욕구 때문에 내 시간을 중요한 일이 아니라 급한 일에 낭비하지는 않았는가? 이런 질문들은 우리 자신의 동기를 살피게 하고 잘못된 동기를 회개하도록 돕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회개할 수 있습니다.

 

그 잘못된 동기들을 회개하고, 우리가 그 잘못된 동기들 속에서 찾고 있는 모든 만족을 주님께서 어떻게 내게 제공해 주셨는지를 생각하십시오.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오 주 예수님, 제가 죄를 피할 수 있도록 주님 안에서 저를 충분히 행복하게 하여 주시고, 위험을 피할 수 있도록 제가 주님 안에서 충분히 지혜롭게 해주셔서 언제나 주님 보시기에 옳은 것을 행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8. 회개, 거룩의 길

이제, 여러분은 조지 휫필드의 회개의 기도를 여러분의 것으로 삼으시겠습니까? 이 경건의 훈련을 통해서 여러분은 어떤 결과를 기대하시겠습니까? 회개의 열매는 거룩입니다. 여러분은 회개의 훈련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품, 그리스도의 아름다우신 성품으로 빚어져 갈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경건한 어른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회개는 거룩에 이르는 길입니다. 이 경건의 훈련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몸의 훈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 훈련은 모든 면에 유익하니, 이 세상과 장차 올 세상의 생명을 약속해 줍니다(딤전 4:8 새번역).” 아멘

 

 

 

하나님이 원하시는 마음(12) - 하나님께 회개하는 마음 /삼하12:7-15; 51:1-19/ 김필곤 목사

2019-01-11 10:20:58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직업이 택배기사인 사람이 있었답니다. 온종일 택배 생각만 하고 살았답니다. 모처럼 쉬는 날이 있어 가족들과 함께 처가에 놀러 갔답니다. 딩동~ 하고 처가집의 벨을 누르자 장모님이 "누구세요?"라고 했답니다.

 

그러자 그분은 자신도 모르게 "택배요!"라고 했답니다. 사람은 그 마음에 품은 것을 말하고 마음에 품은 대로 살아갑니다. 병을 흔들면 병에 담긴 것이 나오듯 사람도 마음에 담긴 것이 나옵니다.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말이 달라지고 표정이 달라지고 행동이 달라지고 인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마음에 따라 걸음걸이, 태도, , 옷 입는 맵시, 장래, 직업 등이 달라집니다.

 

이무석 교수의 <마음>이란 책을 보면 삶을 이끄는 것은 현실이 아니라 마음이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우리의 현실은 보이지 않는 마음이 좌우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살이 마음먹기에 달려있다"라는 말을 종종 하곤 합니다.

 

<0.1초 만에 최악을 최고로 만드는 방법(히스이 고타로 저)>라는 책을 보면 저자는 마음먹기에 따라 재미없는 세상에서도 얼마든지 재미있게 살 수 있다고 말합니다. 0.1초에 마음만 바꾸면 세상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마음이 삶에 영향을 주는가를 알아보기 위해 의 제작팀은 쥐를 실험해 보았습니다. 고 콜레스테롤 먹이를 토끼에게 먹이면서 한 그룹은 애정을 보이고, 한쪽은 맹수 울음소리를 들려주거나 괴롭히는 등 스트레스를 주었습니다. 4주 후 스트레스를 받은 8마리의 토끼 중 4마리는 콜레스테롤에 의해 혈관이 막히고 녹내장 현상이 발생하였습니다.

 

그러나 애정을 받은 토끼 그룹은 동맥에 콜레스테롤이 쌓이기는 했지만 심각하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몸을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따라 몸의 면역기능 떨어지기도 하고 활성화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심신 상관(心身 相關)"이라는 말처럼 마음과 몸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심리, 신경, 면역, 내분비 등이 서로 긴밀한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 하버드 대학교 의과대학의 벤슨(Benson) 교수는 질병의 60%-90%는 육체적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라고 말합니다.

 

마음이란 결코 단순한 추상적인 에너지가 아닙니다. 마음은 인생길의 안내자입니다. 마음은 인생의 씨앗이고,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에너지입니다. 미국의 수필가인 에머슨은 "사람이란 종일 자기가 생각하는 바로 그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는 "사람의 일생은 자기 생각 그대로 되기 마련이다."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23:7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 "이라고 하였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2:5)"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지난 11주 동안 마음 문제를 말씀을 통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다윗이라는 한 인간의 삶을 통하여 오늘 이 시대 우리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외모보다는 마음을 보시는데 평생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는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둘째는 평생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셋째는 어떤 일이든지 지혜롭게 행하는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넷째는 모든 일에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다섯 번째는 매사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여섯 번째는 인간관계에 있어 타인의 장점을 보는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일곱 번째는 시간에 있어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여덟 번째는 주어진 삶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아홉 번째는 하나님을 향한 열정적인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열번째는 문제 앞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열한 번째는 하나님의 은총을 베푸는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살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마음이 되어 다윗처럼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어 드리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마지막 12번째로 오늘날 하나님이 원하시는 마음은 하나님께 회개하는 마음이라는 사실을 말씀을 통해 살려 보려고 합니다.

 

올해 우리는 미투 운동을 통해 많은 유명인이 쓰러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도지사 했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무너졌고, 유명 연애인이 부담감을 견디지 못해 자살했습니다. 연극계의 황제라는 사람이 한순간에 무너져 감옥에 갔습니다.

 

노예 문학상 후보라는 사람이 이제까지 쌓아 놓은 공든 탑이 휘청거렸습니다. 다양화된 현대 사회에서도 정치, 경제, 문화, 예술, 교육 등 어떤 분야에 있어서나 유명인의 불륜이 드러나면 인정사정없이 비판받고 사회적으로 거의 회생불능의 상태가 되어버립니다. 가장 화려한 연예계조차도 불륜한 배우들은 하루아침에 광고가 끊어지고 출연한 기회가 없어져 버립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어느 날 다윗이 미투에 걸려 자신의 죄가 폭로되었습니다. 고발자는 선지자 나단이었습니다. 요압 장군이 암몬 나라를 멸하려고 전쟁터에 나가 싸울 때입니다. 다윗은 잠은 자다 저녁때 침상에 일어나 왕궁 옥상을 거닐다 목욕하는 아름다운 한 여인을 본 것입니다. 여인을 보는 순간 음욕일 일어나 신하를 보내어 그 여인을 범하였습니다. 그 여인의 이름은 밧세바입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밧세바가 임신해 버린 것입니다. 이 사실이 들통날 것같으니까 전쟁터에 나가 있는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불러들여 아내와 잠을 자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아는 의협심과 충성심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동료들은 전쟁터 천막에서 자고 있는데 어떻게 자신만 편안하게 아내와 함께 자겠냐고 집에 가지 않고 군인들과 함께 병영에서 자는 것입니다. 참으로 충성스러운 신하이고 의협심이 강한 사나이였습니다. 자신의 불륜을 은폐하려는 다윗은 평소와는 달리 완전히 정신이 나갔습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한번 마음이 병들면 이렇게 집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죄를 은폐하기 위해 그 남편을 전쟁터에서 죽이게 할 계획을 세웁니다. 요압 장군에게 편지를 써 우리아를 전장의 맨 앞에 세웠다 죽게 만들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결국 우리아는 밧세바의 남편이라는 한 가지 이유로 전쟁터에서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왕이 되어 충성스런 부하를 자신의 죄를 은폐하기 위해 살인 교사를 한 것입니다. 오늘날 대통령이 이런 짓을 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당시는 절대 왕정 시대이기 때문에 아무도 그의 잘 못을 지적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정의로운 사람 나단 선지자가 서슬 퍼런 권력 앞에 과감하게 권력으로 꼭꼭 숨겨놓은 죄를 지적합니다.

 

다윗의 죄가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정확하게 지적을 합니다. 9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다윗의 죄는

첫째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겼다는 것입니다.

둘째 인간관의 문제인 것처럼 보이지만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다는 것입니다.

셋째 충성스러운 부하 우리아를 이방인 암몬의 칼로 죽였다는 것입니다.

넷째,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다윗의 처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죄가 근본적으로 어떤 죄입니까? 단순한 살인과 간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왕이 된 사람으로 계명에 의해 통치해야 할 왕이 하나님의 십계명을 다 어긴 죄입니다. 네이웃의 지을 탐한 것이고, 거짓말한 것이도, 도적질한 것이고, 부모의 마음을 찢어 놓아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것이고, 엿새동안 힘써 일하라는 계명을 어긴 것입니다. 하나님을 속인 것으로 하나님보다 쾌락을 숭배한 우상죄이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못한 죄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업신여긴 죄라고 말씀합니다.

 

7-8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은혜를 주어

첫째, 다윗을 왕으로 세웠고,

둘째, 사울의 추격에서 막아 주었고,

셋째, 여러 아내를 얻게 했고,

넷째, 유다와 이스라엘을 맡겼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그것이 부족할 것 같으면 충분하게 주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필요한 것을 다 주었는데 정욕의 노예가 되어 하나님을 배반했다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와 같이 하나님께 반역하는 반역의 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다윗이 어떻게 합니까?

1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첫째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다고 지성적으로 인정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죄를 솔직하게 지성적으로 자신의 죄를 알고 인정하는 태도가 바로 진정한 회개의 첫걸음입니다. 회개에는 두 종류의 회개가 있습니다. 불신자의 회개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다가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알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회개입니다(initial repentance).

 

이 시대는 지식은 폭발적인데 영적 지식에 대하여는 무감각하여 죄를 깨닫지도,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거추장스럽게 생각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인데 그것을 애써 외면하는 것입니다. 죄의 댓가는 결국 죽음이고 지옥가는 것이고 불행인데 그것을 무시합니다.

 

또 한 종류는 신자의 회개입니다. 인간의 본성이 부패하여 믿은 후에도 죄를 짓고 반복적으로 회개하는 것입니다(repeated). 오늘날 믿는 사람들도 다윗처럼 살만하니까 하나님에 대하여 무감각해지고 있습니다. 어떤 이단처럼 고의적으로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거짓말 훈련을 시키고 거짓을 밥먹듯히 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영적으로 무감각한 상태에 빠져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다 엄청난 인생의 위기에 처하게 되면 죄를 죄로 깨닫고 인정하게 됩니다. 구분하기 위해 어떤 사람은 불신자의 최초의 회개를 회개라 하고, 신자의 반복적 회개를 자백이라고 구분하여 사용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진정한 회개의 요소에는 지 정 의가 포함됩니다. 먼저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알고 인정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반역하는 것을 알지도 못합니다.

 

가장 큰 죄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지 못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이사야1:3)”

 

시편 104절에는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않으니까 최초의 회개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회개없으면 그 앞에는 천국도 없습니다. 최초의 회개를 했다고 해도 반복적으로 죄를 짓으면 마음이 죄에 대하여 무감각해서 죄가 죄인줄 알지 못하고, 죄를 지적해도 죄를 인정하기보다는 합리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고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여자 때문이라고 하고 뱀 때문이라고 핑계를 댑니다. 다른 사람에게 죄를 전가합니다. 솔직하게 인정하기보다는 죄를 합리화합니다.

 

이스라엘 초대왕 사울도 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사무엘 대신 제사를 드리는 죄를 지고도 사무엘이 늦게 와서 그랬다고 핑계를 댑니다(삼상15:10-23). 전쟁에서 진멸하라는 명령도 어기고 자신에게 유리한대로 핑계대고 합리화합니다.

 

결국 사울은 죄를 인정하지 않고 합리화하다가 하나님의 버림을 받았습니다. 버림 받은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온 가족이 죽임을 당한 아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온전한 회개를 하지 않은 가룟유다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27:4).라고 회개하는 척만 하는 것입니다. 후회만 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달랐습니다. 이 때 상황을 기록한 시편 513절과 4절을 찾아 읽어 보겠습니다.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자기 죄가 어떤 죄인 것을 알았습니다.

 

신명기법은 남자가 남편이 있는 여자와 동침하면 둘 다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22:22).

 

다윗은 이 말씀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합법적으로 위장하여 죄를 저질렀는데 그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죄 앞에 죄를 인정하고 왕의 자리에서 죄인의 자리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자기 위신, 자기 체면으로 자신을 포장하지 않고 솔직하고 진지하고 겸손하게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솔직하게 인정하는 이런 회개하는 마음을 하나님이 원하십니다. 사람은 늘 죄를 짓고 살 수밖에 없습니다.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죄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마음을 가지시길 원하십니다.

 

 

둘째는 죄를 용서해달라고 감성적으로 하나님께 통회 자복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시편 511-2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무엇에 근거하여 용서해 달라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인자,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시편 519절을 보십시오.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51:9)” 자신의 죄를 깨끗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용서해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로 자기의 죄를 용서하시기를 마치 전과 기록을 완전히 삭제해 버리는 것과 같이 해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더 이상 자신의 죄를 기억하지 마시기를 간구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죄 사함을 받기 위해서는 다윗처럼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해야 합니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죄를 사할 수도 없고, 또 다른 사람의 죄를 사할 수도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죄 사함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씻어 주십니다. 성경은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로만 적당히 한 것이 아닙니다. 시편66절 이하를 보면 ““내가 탄식하므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내 눈이 근심을 인하여 쇠하며 어두웠나이다 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셨도다”(6:6-8).”라고 했습니다.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적셨다고 했습니다. 범죄로 인하여 태어난 자식이 병들었을 때 7일 동안 금식하며 밤새도록 땅에 엎드려 울며 회개하였습니다(삼하12:16,21). 간음죄와 살인죄를 짓고 언론과 인터뷰하며 태연하게 위선을 떨며 회개하는 것이 아닙니다.

 

왕이 이렇게 하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대통령이 무릎만 꿇어도 얼마나 언론이 날리를 칩니까? 어떤 목사님 글을 보니까 남편의 구원을 위하여 기도하는 여집사님이 계셨는데 남편이 위암 말기였답니다. 그래서 심방을 가서 죽음을 목전에 둔 남편에게 복음을 전하며 회개하고 예수 믿기를 권했답니다.

 

그 때 군인이었던 그 남편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목사님, 다 죽어 가는 마당에 이제 와서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나약한 짓입니다 군인답게 용감하게 죽음을 맞이하도록 저를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쓸데 없는 자존심 내세울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에 가지고 있는 지식, 권력, , 명예 그런 것이 하나님 앞에서 뭐 대단하겠습니까? 비행기 타고 하늘을 올라가면 103층 빌딩도, 66층 빌딩도 3층 빌딩도 점 하나에 불과합니다.

 

다윗은 한평생 많은 참회의 시를 썼습니다(6,32,38). 다윗은 울다가 또 울다가 하나님께 이렇게 호소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56:8) 다윗은 한평생 자기가 범한 죄 때문에 회개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회개하는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회개의 눈물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셨겠습니까?

 

시편 5117절을 크게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물론 죄를 짓지 않으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그러나 죄를 지을 때 그 상한 심령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 오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예수님은 의인을 구하러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하러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고백합니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32:1, 2)”.

 

 

셋째 의지적으로 결단하여 다시는 그 죄를 반복적으로 짓지 않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다시는 반복적으로 그와같은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다윗은 어떻게 합니까?

 

시편 5110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다윗은, 다시는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51:10)라고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께 지은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시는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변화를 받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죄를 완전히 끊어 버리지 못하면 그것은 진정한 회개가 아닙니다. 인간의 힘으로 완전히 끊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시를 지어 드러내 놓고 자신의 죄를 공포합니다. 동일한 범죄를 짓지 안기 위해 제어장치를 하는 것입니다. 잘못을 인정하고 홀로 참회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선지자 앞에서, 신하들 앞에서, 백성들 앞에서 자신의 죄를 온천하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얼마나 자존심 상하고 수치스럽겠습니까? 그러나 스스로 죄를 스스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어떻게 합니까?

 

시편 511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51:11)” 죄 많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죄악을 이기고 승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연약한 의지를 도와주십니다.

 

로마서 826절을 보면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용서받은대로 다른 사람을 용서하면서 살았습니다. 자신이 죄를 용서받은 대로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회개의 열매입니다. 다윗은 압살롬 반란 때 예루살렘을 버리고 도주하는 다윗을 욕하고 저주한 시므이의 죄를 용서하였습니다(삼하 19:21-23). 므비보셋의 죄를 용서하였습니다(삼하 19:26-30).

 

회개에는 항상 합당한 열매가 반드시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닮아 가려는 마음이 생깁니다. 전에는 더러운 것을 좋아했는데 이제는 싫어집니다. 전에는 하나님이 싫어한 것을 사랑했는데 진정 회개하고 나면 싫어지는 것입니다. 정죄하고 비판하기 좋아 하는 입술이 전에는 아무렇지 않게 보였는데 진정 회개하고 나면 그런 입술이 보기 싫어지게 됩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19:8)”라고 회개했던 삭개오처럼 삶에 변화가 실제적으로 일어납니다.

 

캐나다에서 조선으로 와서 의료 선교사로 활동했던 머레이 선교사의 이야기입니다. 함흥에서 북쪽 100km 가면 삼호라는 자그만 동네가 있는데, 그 동네의 김씨 성을 가진 부자가 최초로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답니다. 그가 예수를 믿은 후 가족을 모아놓고 선언했답니다.

 

"오늘부터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니 그리스도인 답게 행동하라"

 

그리고 그는 함흥까지 사람을 보내어 성경과 찬송가를 사와서 식구들에게 나눠주고 예수 믿었답니다. 그리고는 목사님으로부터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야하는가에 대해 공부를 했는데, 배우다보니 '그리스도인은 아내를 한 사람 이상 가지면 안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부자였던 그는 세 명의 아내를 데리고 있었답니다. 아이들도 있었기 때문에 내어 보내기가 어렵지만 2명은 내어보내야 하는데, 결단하기가 쉽지 않았답니다. 그러나 굳게 결심하고 목사님에게 말했답니다.

 

"세째 마누라가 제일 어리고 예쁘니 셋째 마누라를 데리고 살겠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이 말했답니다.

"'첫번째 부인이 정식으로 합법적인 부인이고 다른 사람들은 측실 아닙니까? 첫째부인을 택하셔야죠."

 

예수 믿고 집안이 깨질 판이 되었답니다. 결국 그는 고민 끝에 목사님 말대로 첫째 부인을 택하고, 다른 부인들은 먹고 살만한 충분한 재산을 내어주고 다 내어 보냈었답니다. 결국 그는 나중에 장로가 되어 교회에 많은 일을 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진짜 회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짝퉁 회개를 원하지 않습니다. 진품 회개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죄많은 이세상에 사는 우리에게 진짜 회개하는 마음을 원하십니다.

 

세례 요한도 이 땅에 오셔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3:2)라고 외쳤습니다. 예수님도 최초의 공식적인 메시지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4:17)라고 외쳤습니다.

 

오순절에 성령받는 베드로도 첫 번째 메시지 역시 "회개하라(2:38)"였습니다. 회개없이는 죄사함도 없습니다. 회개 없이는 천국도 가지 못합니다. 회개 없이는 이 땅에서 참된 행복도 평안도 누리지 못합니다.

 

회개없는 신앙인은 엔진 없는 자동차나 불꺼진 연탄과 같은 것입니다. 회개를 거부하면 천국도 가기 싫은 곳이 되어 버립니다. 회개가 없으면 자아에 집착하고 탐욕의 노예가 되어버립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지국한 이기심과 쓰레기같은 자랑거리, 헌된 자존심, 잠깐이면 살아질 쾌락의 노예가 되어버립니다. 하나님은 탐욕이 판치는 인간 다윗이 왕이 되는 세상 나라가 아니라 인간의 연약함을 깨닫고 회개를 통한 하나님이 왕이 되는 하나님 나라를 원하셨습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회개는 빨리 해야 합니다.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아서는 안됩니다. 작은 구멍 하나 막아 버리면 큰 둑이 무너지지 않습니다. 작은 병든 세포 하나 조기에 없애버리면 온 몸을 죽이는 암세포로 번지지 않습니다. 계속 싸인이 주어지고 경고가 주어지는데도 회개하지 못하면 그만큰 대가를 치루게 됩니다. 다윗의 범죄와 회개 사이는 최고 최소 1년 이상의 시간이 경과했습니다.

 

다윗이 행한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삼하 11:27)는 말씀과 당신이 낳은 아이가 반드시 죽으리이다’(삼하 12:14)는 말씀 사이는 개인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미투 사건을 보지않습니까? 바로 잘못을 시인하고 해결했다면 그렇게까지 자살하고 감옥에 갔겠습니까? 때늦은 회개는 그만큼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회개할 때 사무엘하 7장에서 약속한대로 다윗을 죽게하거나 그 왕위를 빼앗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무엘하 126절에서 네 배나 갚아 주어야 하리라라고 말한 것처럼 그대로 그의 삶에 이루어졌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고통을 받았습니다. 다윗은 시편 11편에서 내 뼈가 녹아 나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밧세바를 취할 때 순간적인 기쁨과 즐거움을 육체적으로 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육체적 쾌락은 오래 가지 않습니다. 마음에 후회와 두려움이 얼마 있으면 다가오고 근심과 걱정에 사로잡힙니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단절된 그 기간 얼마나 지옥같은 생활을 했겠습니까? 아이를 갖게 되고 자신의 죄를 숨기며 하나님께 기도도 못한 다윗의 마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그것을 해결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으로부터 수치와 조롱을 당하고 실제적으로 자식이 죽는 것같은 피해를 보는 것입니다. 아이가 1주일 동안 아프다가 죽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인데 자신이 죽는 고통을 당한 것입니다. 다윗은 아이를 위해 회개 기도를 했을 때 하나님, 차라리 내 영혼을 거두어 주십시오. 하나님, 차라리 내 생명을 취해 주세요.”라고 했을 것입니다.

 

실제적으로 상실이 다가 오는 것입니다. 학개서 12절을 보시면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하나님의 일보다는 너희 일에 빨랐기 때문에 내가 너희들의 하는 일을 불어버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불어 버리면 끝입니다. 인간이 소유하고 있는 것들 하나님이 훅 하고 불어 버리시면 한 순간에 날아가 버립니다.

 

간음죄와 살인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는 다윗에게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무서운 말씀입니다. 10절을 보세요. 다윗이 하나님을 업신여기니까 하나님이 다윗을 업신여기겠다는 것입니다. 칼이 네 집에서 떠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재앙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성폭행과 살인, 패륜과 분열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네 처들을 빼앗아 다른 사람(아들 압살롬) 에게 주며, 그 사람이 백주에 사람들 앞에서 성폭행을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무리 앞 백주에 이 일을 행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런 무서운 말씀을 듣기 전에 빨리 회개해야 합니다. 이 무서운 징계는 다윗 가정에 그대로 임하였습니다. 죄의 댓가를 혹독하게 치르게 된 것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원수들의 비방거리가 되고 아이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죄의 용서를 받고 나서야 다윗의 군사들이 비로소 암몬 자손의 랍바를 쳐서 점령하게 됩니다(삼하 12:26). 다윗의 간음죄는 단순한 간음죄가 아닙니다. 다윗과 밧세바가 반드시 돌에 맞아 죽어야 할 죄입니다. 말씀을 수호하고 하나님의 통치의 본을 보여야 할 대표 선수로 뽑힌 사람이 지은 죄입니다.

 

다윗이 그 사람을 크게 노하여 나단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사무엘하 125)”라고 말한 것처럼 자신이 죽어야 할 죄입니다. 재수 없게 걸린 죄가 아닙니다. 나단 선지자는 반드시 죽어야 할 사람이 바로 당신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회개해서 당신은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자신이 죽지 않는 용서는 받지만 그 죄로 인해 발생된 삶의 불행을 자신 스스로 짊어지고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죄의 무서운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다윗은 용서받아 마땅이 간음과 살인의 댓가로 자신이 죽어야 할 형벌은 면했지만 그 죄의 징계로 혹독한 댓가를 치루어야 만 했습니다.

 

다윗으로부터 낳은 배다른 아들 암논이 이복 누이 다말을 근친 성폭행 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삼하 13:2829). 다말의 오빠 압살롬이 암논을 살해했습니다.

 

셋째 아들 압살롬이 반역하여 다윗은 궁에서 쫒겨났습니다. 아들 압살롬은 다윗의 처들 즉 계모(후궁)들을 백주의 대낮에 성전 꼭대기에서 모든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성폭행을 자행합니다. 압살롬은 아버지를 죽이려고 하다가 결국에 다윗의 군사들에게 처참하게 살해당했습니다(삼하 18:1415).

 

넷째 아들 아도니아가 왕권을 탐하다가 죽임 당했습니다(왕상 2:25). 다윗은 이 모든 것이 왜 일어났는지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삼하18:33)”라고 했습니다.

 

어떤 죄를 졌다고 해도 회개하면 우리 하나님이 용서해 주시고 영적 생명을 살려 주어 지옥에 가지 않게 하십니다. 치유해 주시고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러나 뿌린 죄의 씨앗의 파괴력은 무섭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죄를 반복적으로 짓지 않도록 성령을 의지하며 살아야 합니다.

 

간음하다가 잡혀 온 여인 앞에 돌을 들고 모여든 사람들을 향해서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그리고 여인에게 말씀합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간음죄로 반드시 죽어야 할 여인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생명을 건져주시면서 다시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 여인이 죽음에서 건짐을 받았지만 간음행위로 인하여 상처받은 남편과 부모형제들의 고통까지 다 제거된 것은 아닙니다. “간음한 여인이라는 딱지까지 완전히 사람의 머리에서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간음한 여인이 살아가면서 당할 수많은 사회적으로 고통과 고초까지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 앙금이 오래 남지 않도록 빨리 회개하고 철저히 회개해야 합니다.

 

죄의 무서운 결과를 가볍게 받아들이며 알면서도 스스로 짓는 고법죄의 노예가 되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죄를 지으면 무감각하지 말고 은폐하거나 핑계대거나 합리화하지 말고 회개해야 합니다. 늦게 회개하지 말고 말씀을 듣고 빨리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일 예배때마다 회개의 기도를 드리는데 주일 예배 짧은 회개의 시간 때라도 빨리 회개해야 합니다. 나단 선지자가 폭로할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빨리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약속해 주시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19절의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이사야 1:18)”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이사야 43:25)”

 

 

 

회개의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9:1-21/ 유기성목사

2018-04-10 10:31:08

 

9:1 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었습니다. 내가 보니,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이 하나 있는데, 그 별은 아비소스를 여는 열쇠를 받았습니다. 2 그 별이 아비소스를 여니, 거기에서 큰 용광로의 연기와 같은 연기가 올라왔습니다. 그래서 해와 하늘이 그 구덩이에서 나온 연기 때문에 어두워졌습니다. 3 그리고 그 연기 속에서 메뚜기들이 나와서 땅에 퍼졌습니다. 그것들은, 땅에 있는 전갈이 가진 것과 같은 권세를 받아 가지고 있었습니다.

 

4 그것들은, 땅에 있는 풀이나 푸성귀나 나무는 하나도 해하지 말고, 이마에 하나님의 도장이 찍히지 않은 사람만을 해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5 그러나 그들에게는, 사람들을 죽이지는 말고, 다섯 달 동안 괴롭게만 하라는 허락이 내렸습니다. 그것들이 주는 고통은 마치 전갈이 사람을 쏠 때와 같은 고통이었습니다. 6 그 기간에는 그 사람들이 죽으려고 애써도 죽지 못하고, 죽기를 원해도 죽음이 그들을 피하여 달아날 것입니다. 7 그 메뚜기들의 모양은 전투 채비를 한 말들과 같고, 머리에는 금 면류관과 같은 것을 쓰고, 그 얼굴은 사람의 얼굴과 같았습니다.

 

8 그리고 그것들은, 여자의 머리털 같은 머리털이 있고, 이빨은 사자의 이빨과 같고, 9 쇠로 된 가슴막이와 같은 가슴막이를 두르고, 그 날개 소리는 마치 전쟁터로 내닫는 많은 말이 끄는 병거 소리와 같았습니다. 10 그것들은 전갈과 같은 꼬리와 침이 달려 있었는데, 그 꼬리에는 다섯 달 동안 사람을 해할 수 있는 권세가 있었습니다. 11 그것들은 아비소스의 사자를 자기들의 왕으로 떠받들었는데, 그 이름은 히브리 말로는 아바돈이요, 그리스 말로는 아볼루온입니다. 12 첫째 재앙이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두 가지 재앙이 더 닥쳐올 것입니다. 13 여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었습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있는 금제단의 네 뿔에서 울려 나오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14 그것은 나팔을 가진 여섯째 천사에게 "큰 강 유프라테스에 매여 있는 네 천사를 풀어놓아 주어라" 하는 음성이었습니다. 15 그래서 그 네 천사가 풀려났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삼분의 일을 죽이기 위하여, 그 해, 그 달, 그 날, 그 때에 맞추어 예비된 이들입니다. 16 내가 들은 바로는 그 천사들이 거느린 기마대의 수는 이억이나 된다는 것입니다. 17 나는 이러한 환상 가운데서 말들과 그 위에 탄 사람들을 보았는데, 사람들은 화홍색과 청색과 유황색 가슴막이를 둘렀고, 말들은 머리가 사자의 머리와 같으며, 입에서는 불과 연기와 유황을 내뿜고 있었습니다. 18 그 입에서 나오는 불과 연기와 유황, 이 세 가지 재앙으로 사람의 삼분의 일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19 그 말들의 힘은 입과 꼬리에 있는데, 꼬리는 뱀과 같고, 또 꼬리에 머리가 달려 있어서, 그 머리로 사람을 해쳤습니다. 20 이런 재앙에서 죽지 않고 살아 남은 사람이 자기 손으로 한 일들을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귀신들에게나, 또는 보거나 듣거나 걸어 다니지 못하는, 금이나 은이나 구리나 돌이나 나무로 만든 우상들에게, 절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21 그들은 또한 살인과 점치는 일과 음행과 도둑질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점점 두려운 재앙에 대한 예언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성도들에게 두려움을 주려고 기록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하여 기록된 것입니다.

오늘 그 은혜의 눈이 열리기를 소원합니다.

 

요한계시록 8장에서 시작된 나팔의 재앙은 9장에 와서는 그 강도가 더욱 심해집니다.

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별 하나가 땅에 떨어졌다고 했고, :11에 그 이름이 나오는데 히브리어로 아바돈”, 헬라 발음으로 아볼루온”, 해석하면 멸망시키는 자라는 뜻이어서 사탄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가 온갖 악령들이 갇혀있는 무저갱 아비소스를 열어 버립니다.

 

그러자 짙은 연기와 함께 메뚜기들이 전갈과 같은 권세를 받아서 나왔습니다. 메뚜기가 무엇에 대한 상징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종말의 때가 되면 악의 세력이 연기와 같이 온 땅에 퍼질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7에 보면 악령들은 전투 채비를 한 말들과 같고라고 했습니다.

아예 작정을 하고 사람들의 영혼을 망가뜨릴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섯 째 재앙 때는 하나님의 인침을 받은 자는 공격하지 못하게 했지만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다른 재앙도 그런 것도 아닙니다.

지금은 악령들이 예수님을 믿는 자들도 공격하여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택한 가룟 유다를 빼내어서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게 하였고, 충성스럽던 베드로가 자기 입으로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까지 하게 만들었고 교회를 위하여 전 재산을 헌금하려던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마음에 탐심이 가득하게 하여 하나님을 속이고 거짓말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마귀의 역사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조심 없이 살면 안 됩니다.

 

그런데 주님은 악령들에게 사람을 괴롭히되 죽이지는 말고, 다섯 달 동안 괴롭게만 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심판의 재앙 중에도 사람들이 회개하여 돌이켜 그 영혼이 구원받을 기회를 주시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괴로움을 당하느니 차라리 빨리 죽는 것이 낫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실 매순간 죽고 싶은 심정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그러나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은 죽고 난 다음의 일을 모르기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죽으면 끝이 아닙니다. 죽고 난 다음에 겪는 고통은 살아서 당하는 고난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직 죽지는 않게 하시는 것은 고통을 더하게 하시려는 것이기 보다는 아직 끝을 내지 않으시려는 하나님의 의도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여섯 번째 재앙은 더 무섭습니다. 기마대가 사람의 1/3을 죽이는 재앙입니다.

유프라테스 강에 매였던 네 천사가 풀려나 2억의 기마대를 이끌고 사람들의 삼분의 일을 죽인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2억은 역시 실제 수가 아니라 그만큼 많다는 의미입니다.

 

이 역시 환상이라 정확한 해석이 어렵지만 분명한 것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죽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미 이 재앙이 얼마든지 현실이 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 땅에 핵전쟁이 일어난다면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끔찍한 재앙에서도 사람들이 회개하고 돌이키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안타까운 마음이 드러납니다. 사람들을 다 죽이지 않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6장의 인 재앙에서 사람의 1/4이 죽고, 9장 나팔 재앙에 이르면 사람의 1/3이 죽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마지막 한 사람이라도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신데 어떻게 이렇게 심판하실 수 있을까요? 회개할 가능성이 0.0001% 라도 있다면 하나님은 심판하지 않고 기다리십니다. 그러나 더 이상 회개할 가능성이 없게 될 때,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실제로 오늘 말씀에서 사람의 1/3이 죽어가는 재앙을 당하고도 회개하지 않는 사람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9:20 이런 재앙에서 죽지 않고 살아 남은 사람이 자기 손으로 한 일들을 회개하지 않고 ...

그들은 재앙을 당하면서도 귀신들을 더 섬기고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둑질을 회개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재앙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을 만나도 무슨 말씀을 들어도 회개하여 돌이키지 않는 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죄를 짓고 살면서도 자신이 무슨 죄를 짓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런 말이 기분 나쁘게 들리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죄를 안 짓고 산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죄를 알지 못하는 정도는 아닙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여러분은 아내/남편에게 어떤 잘못을 했는지 아십니까? 알기만 해도 다행입니다. 여러분은 부모, 자녀에게 무슨 잘못을 하였는지 알기는 아십니까? 알기라도 한다면 효자요, 좋은 부모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는 어떤 죄를 지으며 살고 있는지 아십니까?

그렇습니다. 죄를 짓고도 무슨 죄를 지었는지 모르는 것이 죄인의 실상입니다.

그것을 성령께서 깨우쳐 주시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의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회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 마음에 성령께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죄인 줄 몰랐더라도 죄를 깨닫게 됩니다. 또 죄를 지으면 괴롭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회개가 얼마나 귀하고 복된 일인지 모릅니다.

 

존경하는 목사님 한 분이 교역자 수련회에서 함께 동역하는 목사님과 전도사님들에게 종이를 한 장씩 내어주면서, 섬기고 있는 구역장들의 이름, 담당하고 있는 부서와 섬기는 이들의 이름을 적어보자 했습니다. 최근에 하나님 나라로 가신 이들의 이름, 금년에 자신의 교구에 들어온 새 신자 이름을 적어보자고 했습니다. 나중에 제출하여보니 중간 중간 비어 있는 이름들이 많았습니다.

 

교인들에게 사랑합니다 말을 하면서도 위선적이었음을 구멍 뚫린 빈 칸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회개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성도들을 위해 하루 세 번 기도의 제단을 쌓기로 하고 실천하기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선교 초창기 부흥은 회개 부흥이었습니다.

단순히 남을 미워하거나 질투한 죄만이 아니라, 도적질이나, 살인, 강간과 같은 죄도 고백하며 회개하는 사람들이 생겼기에 일본 형사들이 범인을 잡으려고 교회로 찾아왔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19043월에 서울 잣골교회(오늘의 자교교회)의 부흥회 기간에 있었던 일들을 기록한 내용입니다. "이번 부흥회야말로 가장 놀라운 집회였다. 죄의식이 너무나 깊어 온갖 추악한 죄들을 고백했고 훔친 재물들을 돌려주었다. 우리 교인 대부분은 처음으로 죄가 어떤 것이고 죄 사함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다.

 

이 집회의 결과로, 참석했던 사람들은 새 삶을 살게 되었고 축복을 받게 되었다. 이런 집회를 통하여 우리가 확신한 바는 성령께서 한국인들의 마음을 움직여 현재의 구원을 확신하고 증거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여러분, 요즘 회개할 일들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그것이 너무나 귀하고 복된 은혜임을 알아야 합니다. 회개의 마음을 생명처럼 여겨야 합니다. 절대 회개를 뒤로 미루지 말아야 합니다.

매일 매일 몸은 씻고 자면서 죄는 회개하지 않는다면 정말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회개가 되는 사람이 있고 회개가 안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11:20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주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 그 행하시는 큰 이적들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신년 말씀기도를 통하여 읽은 호세아서 에서도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호세아의 탄식이 나옵니다.

 

9:17 그들이 듣지 아니하므로 내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시리니

11:7 내 백성이 끝끝내 내게서 물러가나니 비록 그들을 불러 위에 계신 이에게로 돌아오라 할지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한국 선교 초기 윌리엄 블레이어 선교사는 그가 쓴 책 속히 예수를 믿으시기 바라나이다에서, 진정한 회개의 열풍이 불어 닥침으로 한국 초대교회 부흥이 시작되었다고 증언합니다. 그런데 교인들 중에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끝까지 자기 죄를 고백하고 회개치 않는 자들도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결국 무서운 타락자가 되어 그 지역에서 가장 사악한 삶을 사는 자들로 전락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세상이 왜 이렇게 어둡고, 사랑이 없고, 강포와 음란과 더러운 죄들이 가득한 것입니까?

 

홍정길 목사는 말했습니다. “나는 사람들이 예수 믿기만 하면 이 땅에 천국이 올 줄 알았다. 그래서 목숨을 걸고 민족복음화에 매달렸다.”, “천만 성도를 달라고 했고, 이 나라 마을마다 교회를 세워 달라고 간구했다. 그런데 마침내 이것이 이뤄졌다.”, “그러나 예수를 믿어도 교인들의 삶은 바뀌지 않았다. 목회자들부터 삶이 바뀌지 않았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 예수 믿는 것만 가지고는 안 되는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야겠다.’ 그래서 제자훈련을 참 열심히도 했다.”, “하지만 마찬가지였다. 성도들의 지식은 엄청나게 쌓여갔지만 삶은 그대로였다. 제자훈련 하는 교회가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지식적 축적이 삶과는 상관없다는 생각에 절망했다. 우리의 문제는 삶이 문제다.”

 

교인 수가 몇 명인가, 제자훈련을 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회개하여 삶이 변화 되었는가 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친밀히 동행하는 운동을 하는 것입니다.

 

회개가 그치지 않으면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는 한국 교회가 회개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회개도 식상해져 버렸습니다. 그동안 대형 집회가 열리기만 하면 회개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실망이 더 컸습니다. 회개하고 또 죄를 짓고, 큰 죄를 짓는지도 모르는 자들을 보면서 낙망도 되었습니다.

 

이제는 어떻게 해야하나 너무나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도하는 중에 그동안 집회 때마다 회개 했던 것이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입으로만 회개하는 사람도 있었겠지만 그래도 회개해야 한다는 생각은 있다는 증거고, 진정으로 회개하는 성도들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가 이만큼이라도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요한에게 끔찍한 재앙을 보여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회개하지 않는 자들이 결국 어떻게 될 것인지 알라는 것입니다.

악과 세상을 두려워말고 회개할 것이 있으면 속히 회개하여 구원받은 자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믿사남 조별 모임에서 한 남자 권사님의 감동적인 간증을 들었습니다. 이미 다 장성한 아들이 좀처럼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는 것이 큰 기도제목이었습니다. 어느 날 기도하는데 그것이 자신의 책임이라는 사실이 깨달아졌습니다. 아버지인 자신이 그동안 아들의 마음에 상처를 심어준 것이 깨달아진 것입니다.

 

별 생각 없이 아들 잘 되라는 마음으로 매를 들었던 일들이 아들에게는 깊은 상처가 되고 아버지와 마음의 벽을 쌓고 있었음을 안 것입니다. 5월 가정의 달에 아들에게 회개하리라 주님께 약속하였는데, 막상 아들에게 회개하는 것이 쉽지 않아 미루고 미루다가 530일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어서 저녁을 먹고 야구중계를 보고 있는 아들에게 할 말이 있다고 TV를 끌 수 없겠느냐고 하였답니다.

 

아들은 기분 나쁜 내색을 하면서도 TV를 껐는데, 권사님이 아들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눈물로 아버지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고백하였답니다. 당시에는 지금과 같이 믿음이 성숙치 못하여 쉽게 매를 들었고 그래서 마음에 상처를 주었는데도 깨닫지 못하였다고 고백하고 용서를 구할 때, 아들은 놀란 눈으로 아버지를 보고 당황해 하면서도 함께 손을 잡고 울면서 기도하고 화해할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권사님의 간증을 들으면서 조원들은 이 나눔이 어떻게 끝날까? 가슴이 조마조마했습니다. 그러다가 권사님이 아들과 손을 잡고 서로 울면서 기도했다는 고백에 박수를 치며 기뻐했습니다. 정말 너무나 감사하였습니다.

영성일기를 쓰면서 권사님에게 일어난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여러분 영적 무감각증에 걸리면 큰일입니다. 회개하라 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귀 기울여야 합니다. 24 시간 주님과 동행하며 살아야 합니다.

 

찬양 인애하신 구세주여

 

 

 

나는 죽을 죄인입니다(회개 1)/51:1-5/ 유기성 목사

2016-08-23 11:38:20

 

제자훈련 세미나 중 저녁마다 기도회가 있었는데, 통곡을 하면서 기도하는 목사님들이 여러 분 계셨습니다. 무슨 문제로 그리 기도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저도 애통하여 옆에서 함께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기도 중에 그 목사님들이 복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회개의 문이 열리기를 간절히 원해도 답답하기만 한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님을 믿지만 아직 구원의 확신과 즐거움이 없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렇다면 스스로 물어보기 바랍니다. ‘자신이 정말 죽을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까? 그리고 진정으로 하나님께 회개한 적이 있었습니까?’ 회개는 영적으로 놀라운 축복입니다.

 

시편 51편은 신구약을 통틀어 회개에 대한 가장 잘 알려진 성경입니다.

 

한번 설교로 지나가기에는 너무나 많은 은혜가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51편을 강해하면서 세 번 설교하려고 합니다.

 

특별히 설교를 준비하면서 참고하는 서적 한권을 여러분에 소개하여 함께 읽었으면 합니다. 마틴 로이드 죤스목사님이 쓰신 [회개]입니다. 이 설교집은 시편 51편에 대한 탁월한 설교입니다. 물론 이 설교집대로 설교하지는 않겠지만, 교우들이 함께 읽으면 설교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회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 보다도 자신이 지옥에 갈 죄인임을 깨닫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실제로 얼마나 심각한 죄인인지를 모릅니다. 부모에게 어떤 죄를 지었는지, 남편이나 아내에게 어떤 죄를 지었는지, 자녀에게 어떤 죄를 지었는지, 모릅니다. 기가 막힌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시편 51편은 다윗이 쓴 시인데, 이 시를 쓴 배경은 성경에 나와 있는대로 충신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했던 사건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다윗이 그의 군대가 전쟁터에 나가 있던 어느 날 왕궁 옥상을 거닐다가 목욕하는 밧세바를 보고 욕정을 이기지 못하여 왕궁으로 불러 들여 간음하였습니다. 밧세바가 임신을 한 것을 알고 다윗은 자신의 죄를 은폐하기 위해 우리야를 예루살렘으로 소환하여 집에 가서 쉬게 해 보지만 우리야는 충신이라 집으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되자 다윗 왕은 편지 한 통을 총 사령관 요압 장군에게 보내, 우리야를 전투 중에 죽은 것처럼 죽게 합니다. 그리고 밧세바를 자신의 후처로 삼은 사건입니다.

 

어느 날 나단 선지자가 다윗을 찾아와 말했습니다. “폐하, 어떤 성읍에 부자가 살았는데, 양과 소가 아주 많았는데, 이웃에 가난하여 어린 암양 한 마리를 자식처럼 돌보던 사람의 어린 암양을 빼앗아다가 자기 손님을 대접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에 다윗은 불같이 화를 내며 소리쳤습니다.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그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그러자 나단은 다윗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요" 나단의 외침에 다윗이 고꾸라진 것입니다. 그리고 쓴 시가 시편 51편입니다.

 

우리는 다윗이 이런 역겨운 죄를 지었다는 것도 충격적이지만 그 엄청난 죄를 짓고도 어떻게 다윗 자신이 모를 수 있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의 실상입니다. 우리 자신도 죄를 지었지만 자신은 전혀 모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19844월 광주통합병원에서 회심을 경험할 때, 저는 능력이 많은 목사는 아닐지 몰라도 문제가 많은 목사라는 생각은 추호도 해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날 제가 목사이면서도 하나님과 전혀 친밀한 관계에 있지 않음을 깨달았을 때, 비로서 제 죄를 보는 눈이 열렸습니다.

 

성령님께서만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경건하여 성인이라 추대받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자신을 사악한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죄를 많이 지었느냐 적게 지었느냐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양심이 깨어났느냐 아니냐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시편 51편에서 성령의 역사로 다윗의 양심이 깨어나 죄를 폭로하는 것을 보는 시입니다. 양심이 깨어나면 누구나 이와 같아집니다.

 

어떤 사람은 임종을 맞이할 때 가서야 양심이 깨어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도 양심이 깨어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잘된 것이 아닙니다. 끔찍한 일입니다. 죽은 다음에라도 양심이 반드시 깨어나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619-31절에 보면 부자가 죽어 지옥에 가서야 자신의 양심이 깨어났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을 바로 믿어야 합니다. 주 예수님을 만나면 누구나 자신이 어떤 죄인인지 온전히 깨닫게 됩니다.

 

누가복음 5장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 배에 가득 고기를 잡았을 때, 그는 즉시 주님께 나아가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고백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이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진정한 회개는 몇 가지 뚜렷한 특징이 있습니다. 무엇 보다 먼저 자신이 지옥에 떨어져 마땅한 죄인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다윗은 회개하면서 자신이 하나님께만 죄를 지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4절 주님께만, 오직 주님께만, 나는 죄를 지었습니다.

 

이 고백은 이상해 보입니다. 다윗은 밧세바에게, 우리아에게, 전사한 병사들에게, 이스라엘과 백성들에게 범죄한 것이 아닙니까? 이 고백은 다윗이 그 사람들에게 죄를 지었음을 부인하였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가 사람들에게 지은 것이지만 본질적으로는 하나님께 지은 죄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4...주님의 눈 앞에서, 내가 악한 짓을 저질렀으니...

 

하나님은 언제나 자신과 함께 하시는 분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무서운 것입니다.죄도 중하고 경한 것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재판도 하는 것이 아닙니까?

 

사람에게 지은 죄도 크지만 하나님께 지은 죄는 얼마나 크겠습니까? 다윗은 자신이 반역죄를 지었다고 고백합니다. 다윗이 간음한 것은 사실이고 간접 살인이지만 살인한 것도 맞습니다. 그러나 반역을 했습니까? 다윗은 그렇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하나님께 지은 죄란 하나님의 왕권, 하나님의 주권을 부인한 죄라는 것입니다. 반역죄는 어느 나라나 죄 중에서 가장 큰 죄요, 당장 사형인 죄입니다.

 

성령으로 깨닫고 보면 모든 죄가 다 하나님께 지은 죄요, 하나님의 왕되심과 주권을 거역한 반역죄입니다. 이런 사람이 어찌 지옥에 가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진정으로 회개한 자는 남을 정죄하지 않게 됩니다. 자신이 말할 수 없는 죄인이었는데 누구를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다 용서합니다.

 

남이 무엇이라 지적해도 할 말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죄인인데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은 사람이나 환경을 핑계하며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본성이 날 때부터 악함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5절 실로, 나는 죄 중에 태어났고, 어머니의 태 속에 있을 때부터 죄인이었습니다. 자신의 죄가 부모 때문에, 배우자 때문에, 나쁜 사람들 때문에 환경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악한 것은 세상이 아니라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란 자신의 상태와 처지에 대하여 절망에 빠지는 것입니다. 다윗은 부유한 왕이었고 그의 왕국 또한 넘치는 재물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죄 하나 없애는 데 그 많은 재산. 권력. 지위가 다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교훈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품으로 파고 들어가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다윗은 이 엄청난 죄를 짓고서 하나님께 사랑과 자비를 구하는 기도를 올렸습니다.

 

51:1 하나님,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으로 내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주님의 크신 긍휼을 베푸시어 내 반역죄를 없애 주십시오. 2 내 죄악을 말끔히 씻어 주시고, 내 죄를 깨끗이 없애 주십시오.

 

어떻게 보면 뻔뻔해 보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이 모습이 진정한 회개의 증거입니다. 하나님께 죄를 지었지만 하나님만을 애타게 찾는 것이 양심의 가책과 진정한 회개가 다른 것임을 알게 됩니다. 양심의 가책만 느끼는 사람은 죄를 지었음을 깨닫게 될 때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갑니다.

 

어제 탈주범을 체포한 기사를 읽었습니다. 도망하고 또 도망다니다가 결국 지쳐서 붙잡혔습니다. 이것이 죄인의 심리입니다. 도망가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짓고 나서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었습니다. 이것이 회개하지 않은 죄인의 모습니다.

 

전도하면 나는 죄가 많아서 교회에 나갈 수 없습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그는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았지만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자신의 죄를 깨닫는 사람은 다릅니다. 자신이 하나님께 죄를 지었음에도 하나님을 애타게 찾으며 하나님,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 라고 탄원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를 지은 대상을 간절히 찾는 것이야말로 회개의 특이한 역설입니다!

 

제라드 윌슨 목사님이 [복음에 눈뜨라] 고퉁학교 때 단짝 친구요 학교 교사였던 에릭이라는 사람에 대하여 말하였습니다.

 

어느 해, 그가 학교에서 여학생을 성추행한 혐의로 고소를 당했습니다.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그 여학생이 거짓말로 에릭을 고소한 것에 격분하였고, 그의 명예와 위신이 땅에 떨어진 것으로 인하여 그를 위로하고 하나님께 억울함을 풀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 그가 자신이 그동안 거짓말을 해왔음을 고백했을 때, 모두 (누구보다 그의 아내가 느낀) 충격과 배신감이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다음은 에릭의 고백입니다.

 

2008118, 차를 몰고 달리던 한적한 시골 도로는 내게 다메섹 도상이 되었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올 만난 것 처럼 나도 그곳에서 주님을 대면한 것이다. 그분의 임재는 피부에 와닿을 정도로 생생했다.

 

너는 새로운 피조물이고 새로운 사람이다!”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순간 내 안에서 주체할 수 없는 울음이 터져 나왔다. 생전 처음으로 나라는 인간의 전 존재와 은밀히 감추고 있던 모든 비밀과 두려움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낱낱이 드러났다.

 

나는 아내에게 그동안의 거짓말과 간통, 음란물 중독올 고백했다.

 

나의 어린 시절은 화목한 가정, 즐거운 교회 생활, 그리스도인 친구들과의 추억으로 요약된다 비교적 순탄한 삶이었음에도, 내게는 이주 어릴 적부터 양심을 마비시키던 고질적인 습관이 하나 있었다. 바로 거짓말이었다. 들키지만 않는다면 거짓말은 나쁜 게 아니라 오히려 해 볼 만한 일이리는 주관이 일찍부터 자리잡고 있었다.

 

초둥학교 시절부터 내 인생의 가장 가까운 권위자인 부모님께 거짓말을 했고 자연히 친구와 선생님과 목사님들에게도 거짓말을 했다. 거짓말은 벌을 모면하고 내가 원하는 것을 손쉽게 얻는 이주 유용한 수단이었다. 또한 어린 나이부터 음란물을 접했던 탓에 어느새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은 음란물이 되고 말았다.

 

청소년 시기에 친구들이나 가족, 교회 어른들에게 나의 이런 성향을 들키지 않으려고 전전긍긍했다. 계속해서 음란물올 탐닉하기 위해서는 그 1급비밀을 신중히 숨기는 것 외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나는 누구를 해치지 않는 한 이는 결코 잘못이 아니며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라고 끊임없이 나 자신을 세뇌시켰다.

 

나는 대학에 가서도 여전히 음란물을 떠나지 못했다.

 

나는 십자가 복음을 들었고 주님이 나를 용서해 주심을 알았고 죄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런데도 어떤 면에서 나는 그런 자유를 원하지 않았다. 여전히 그 죄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 뒤 나의 신앙은 성장했고 주님의 뜻을 더 깊이 알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죄를 회개하는 일은 내 삶에 존재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올 갈망하면서도 육신의 정욕이 주는 일시적 쾌락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여러 면에서 회철한 무덤과 다를 바 없는 삶이었다. 199712월에 브랜디와 결혼한 나는 아내와 새 삶을 꾸려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꿈꾸던 삶과 너무도 동떨어져 있었다.

 

결흔식올 올린 지 몇 개월이 지나기도 전에 인터넷에서 만난 사람들과 1:1로 비밀리에 연락을 주고 받았고 여전히 음란물에 탐닉했다. 수십 년 동안 연마해 온 속임수 덕분에 아내는 내가 정말로 자상하고 훌륭한 그리스도인 남편이라고 믿고 있었다. 나의 교활한 계략에 철저히 속아 넘어간 것이다.

 

저속한 인터넷 채탱과 한밤중의 음란물 시청에 빠져 지내던 나는 급기야 인터넷올 통해 알게 된 어떤 여자와 육체적인 관계를 맺고 말았다. 그 사건 이후로 나는 공식적인 간통자가 되었다. 몇 방울의 눈물과 지극히 인간적이며 세상적인 후회, 앞으로는바르게살겠다는 각오가 무색할 만큼 나는 얼마 뒤에 또 불륜올 저질렀다. 그때부터 본격적인 악순환이 되풀이되었다.

 

불륜올 저지르고, 안 그러겠다고 다짐하고 다시 같은 과정을 반복하는 일이 7년이나 계속되었다. 복음에 해결책이 있음을 알았지만 내 눈은 여전히 두꺼운 비늘에 덮여 있었다. 나는 장님이었고 탕자였으며 거역자였다.

 

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던 20016월 어느 더운 날이었다. 나는 우리 반 여학생 한 명과 인터넷 채팅으로 부적절한 성적 대화를 주고 받다가 성관계를 제안했다. 그것은 내가 사는 텍사스 주에서 중형에 해당하는 범죄였다. 결국 6주 후에 나는 미성년자 성범죄법으로 경찰에 체포되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내 거짓말은 멈추지 않았다. 방황하는 여학생을 선도하려 했는데 오히려 나를 유혹했으니, 도리어 피해자는 나라고 억지를 부렸다. 그러나 은밀한 성적인 죄가 내 인생을 망가뜨리고 영적인 죽음으로 몰고 있다는 걸 나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결국 나는 청소년 성범죄 처벌법에 따라 10년 동안의 집행유예와 보호관찰 선고를 받았다. 나는 그 정도의 중형을 받을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판사들의 의견은 달랐다. 나는 몇 년 동안 피해자의 입장올 고수해 왔으나, 모든 것이 들통 나고 말았다. 거짓말탐지기 조사에서 거짓말을 한 것으로 판명된 것이다. 나는 완전히 기가 꺽여 집으로 돌아왔다.

 

처음에는 거짓말로 그 상황을 무마해 버릴까, 성령님이 부드럽게 나를 다그치셨다. 그동안 저지른 잘못을 모두 고백하라는 것이었다. 결국 나의 이중생활은 그렇게 막을 내리고 말았다.

 

나의 고백을 들은 아내는 망연자실했다. 그 동안의 일을 솔직히 털어놓는 동안 아내의 얼굴에는 걱정과 안도감과 형용할 수 없는 고뇌가 차례로 스쳐 지나갔다. 그래도 아내는 내 말을 다 들은 후에당신올 용서할게요.”하고 말해 주었다. 그 자리에서 나를 용서해 준 아내의 사랑은 가히 초인적인 힘이었다고 생각하지만, 그 뒤 아내가 겪은 아픔과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몇 주 동안 나와 아내는 집중적인 상담을 받았다. 그동안 내가 거짓말로 속였던 모든 사람에게 연락해서 나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비는 기나긴 과정도 시작되었다. 고백과 회개는 고통스러웠지만 그 만한 보람도 느낄 수 있었다. 하루하루 내 마음이 가벼워졌다.

 

아내에게 이중생활을 털어놓은 뒤 이틀이 지난 2010118일에 학교로 출근하던 나는 마음 속에서 새로운 생명력이 샘솟는 것을 느꼈다. 그제야 용서와 회개의 의미가 마음 깊이 와 닿았다. 마가복음 115절의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자 내 죄에 대한 통회와 새 생명에 대한 기쁨이 가슴 가득 물밀 듯이 밀려들었다. 드디어 나는 구원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나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할렐루야!

 

하지만 죄악이 남긴 결과를 피해 갈 수는 없었다. 아내는 조금씩 나를 신뢰하는 법을 다시 배워야했고 친구와 가족들은 오랜 세월 속아온 나의 이중성을 용서해야만 했다. 아울러 법의 심판도 피해 갈 수 없었다. 집행유예 선고의 효력이 상실되자 그들은 곧 바로 나를 교도소에 집어넣었다.

 

1월의 그 날 이후부터 지금까지 2년 동안 내 삶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이제는 왜 지속적인 회개가 필요한지, 그리고 무엇보다 성령 안에서 산다는 게 어떤 것인지를 확실히 깨달았다.

 

나는 20081월 이후에 옴란물과 섹스 중독에서 완전히 벗어났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중독 증세가 재발하지 않았다. 이제는 그런 변태적인 짓을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진다. 내면이 변화한 것이다. 하나님은 나를 새롭게 하셨고 더 나은 삶을 주신 정도가 아니라, 내 인생 자체를 돌려주셨다.

 

주님은 오늘 설교를 통하여 많은 이들이 죄의 길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라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2011년 제자훈련 세미나 목사님 부부 간음 사실 고백, 충격, 그러나 그 고백으로 치유의 길을 밟게 되었습니다. 그는 구원받을 기회를 붙잡았던 것입니다.

 

죄는 성령님만이 깨닫게 하십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죄를 깨닫게 하실 때, 외면하고 합리화하고 눌러 버릴 수 있습니다. 죄를 고백하는 것은 자아에겐 가장 두려운 일이고 싫은 일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근심을 깨닫고도 외면합니다. 양심의 가책을 눌러버립니다.

 

다윗도 양심의 가책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눌려버리니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책망을 듣는 두려운 순간을 맞이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십니까? 우리 안에 생명이 있는 것과 하나님과 화평함을 누리는 것은 다릅니다.

 

기도를 하기는 하는데 기도의 능력을 체험하지는 못할 수도 있습니다. 죄책감은 느끼는데 죄에서 완전히 자유함과 승리를 얻지 못할 수 있습니다.이유는 우리의 마음과 삶이 더럽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66:18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시련이 올 때 주님을 신뢰할 수가 없습니다. 기도하기는 하겠지만 응답을 기대하지 못합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받지 않으실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중심에 회개치 않은 죄가 있으면 그렇습니다.

 

어느 성도님의 집에 심방을 갔을 때, 심방받을 준비를 잘 해놓고 있습니다. 생일잔치처럼 음식을 준비하고, 대청소, 도배까지 해 놓고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제 마음에이 집은 아무 준비를 하지 않았다,’하는 마음을 주신 가정이 있었습니다.

 

목회자 모임, 사모님들의 스트레스를 풀자는 기획으로 사모 노래자랑 프로그램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느 목사님이 사모님의 스트레스가 풀리는 길은 목사님이 눈물로 기도하는 것이라고 하여 노래자랑 행사가 취소되었다고 합니다.

 

어느 정도 죄인임을 깨달아야 진정 회개한 것입니까? 자신이 지옥에 갈 죄인임을 아는 데까지 가야 진짜 깨달은 것입니다. 자신이 그러한 죄인임을 고백하는 자가 회개한 자입니다.

 

하디 선교사, 길선주 장로, 그들의 회개가 진실했던 것은 고백하였다는 것입니다.

 

누가 자신에게 책망하고 비난할 때, 아무 할 말이 없는 자가 회개한 것입니다.

 

죄 값을 치르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면 회개한 자입니다. 벌받지 않으려고 회개하는 것은 아직 회개가 아닙니다, 자기 보다 더 악질인 사람이 없음을 알아야 회개한 자입니다.

 

여러분, 이 시간 성령님께서 주님과의 사이에 막힌 담을 깨닫게 해주시기를 기도합시다.

 

막힌 담은 주님이 허물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허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통성기도는 회개기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성령님의 도움으로 회개할 것을 깨닫게 해 주실 줄 믿고 기도합시다.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회개 2) /51:6-12/ 유기성 목사

2016-08-23 11:47:46

 

오늘 게시판에 한 자매가 교회 남자 성도들에게 피눈물나는 요청, 호소를 하였습니다. 믿사남에 부탁이 있습니다

 

요즘 빈번히 올라오는 성폭력 기사를 보면 남자들이 음란의 영으로 집어삼키워진 것 같아, 화도 나고 눈물이 나고 슬픕니다. 심지어 친 자식에게도 성폭력을 하는 기사가 너무 자주 올라오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대낮에 학교 갔다 오는 초등학생 2학년 남자 아이까지 속여서 성폭행 시도를 한 기사를 보고, 너무 충격을 받아, 주님, 이 땅을 어찌하면 좋습니까... 타락하고 죄된 이 땅이 너무나 가슴이 아파 정말 집에 오는 내내 눈물이 그치지 않았고, 집에 오자마자 가방을 던지고 그 자리에 무릎 꿇고 회개하며 통곡을 하였습니다. 정말 음란의 영이 이 땅을 삼키려는가 봅니다.

 

저는 이 문제 하나만으로도 남성들이 합심하여 회개기도와 회개운동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든 크리스찬 남성들이 연합으로 거국적으로 이것에 대해 애통해하고 남의 일이 아닌 내 일로 회개운동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로 회복되고 음란의 영과 포르노 중독에서 빠져나오도록 공론화하고 기도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 회개 기도가 믿사남에서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남성들로 시작되는 거룩한 사회 운동으로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강력하게 남성들 내에서 자정 작용과 회개 운동, 거룩 운동이 일어난다면 저는 분명 마귀는 힘을 잃고 반드시 이 땅이 변할 거라고 믿습니다.

 

음란물 홍수입니다. 그것을 보는 것을 재미라고 여기는 사이 세상은 완전히 미친 세상, 두려운 세상으로 변해가는 것입니다.

 

죄가 무서운 것은 죄 문제에 있어서만은 인간은 동물보다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두려운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다 잃는 것을 말합니다.

 

다윗은 용모가 뛰어났습니다. 다윗의 동상을 보셨을 것입니다. 사람이 시 한편 잘 쓰고 노래 한곡만 잘 불러도 인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수많은 시편을 성경에 올렸습니다. 궁중에서 악기를 연주해 임금님을 즐겁게 해줄 일을 맡을 정도의 음악적 재질의 뛰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는 30세에 왕위에 올라 70세까지 임금을 했습니다. 당시 왕이란 지금의 대통령은 비교도 안되는 지위입니다. 그는 거의 모든 자유를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향락이란 향락은 다 누렸습니다.

 

그런 다윗이 무엇이 부족해서 사람들 앞에서 엎드려 통곡을 하고 우는 것입니까? 밧세바와 간음하고 우리야를 죽인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것입니다. 영혼의 복을 잃어버리니 다른 모든 복이 소용이 없어졌습니다. 다윗이 자기 입으로 말합니다.

 

12절 주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기쁨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내가 지탱할 수 있도록 내게 자발적인 마음을 주십시오.

 

순간에 엄청난 죄를 짓고 평생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지내는 이가 있습니다. 그가 하는 말이 귀에 쟁쟁합니다. "그 사건이 일어나기 이전 상태로 시계 바늘을 돌릴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지 할 것입니다.“ 죄는 정말 두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엄청난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여전히 희망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진정으로 회개하고 구원받는 길이 열려 있는 것입니다. 어떤 죄인이라도 진실로 회개한다면 구원이 회복될 수 있습니다.

 

다윗은 비록 죄를 지었지만 하나님께 마음 속의 진실한 회개를 보여드렸습니다. 6절 마음 속의 진실을 기뻐하시는 주님

 

사람들이 잘못을 시인하고 회개한다고 해도 다 믿기가 어렵습니다. “진심일까?” 그러나 다윗은 진실로 회개하였다는 사실이 명확해 보입니다.

 

선지자 나단이 불의한 부자 이야기를 듣고 화를 내며 소리를 지르는 다윗에게 당신이 그 사람이라!” 라고 하였을 때, 다윗은 나단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자백하였습니다. "내가 주께 범죄하였나이다!" 그가 왕이었음을 생각하면, 그가 진정 회개했구나 하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 랍비들 중에는 "밧세바가 유혹을 했다"고 가르치는 이도 있습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도 있으니 밧세바가 의도적으로 다윗을 유혹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다윗은 일체 밧세바를 핑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단지 "이 모든 것이 내 죄입니다!"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렇게 진심으로 회개한 자에게 하나님의 용서가 임합니다.

 

우리가 반복적으로 죄를 짓다 보면 회개할 힘도 사라질 때가 옵니다. “하나님께서 더 이상 용서하지 않으실 거야!” 하는 무서운 정죄감에 빠지게 됩니다.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음성이 아닙니다.

 

저는 설교 준비를 하면서 지금의 저 자신이 있게 된 것이 하나님의 용서하심 때문임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저는 지금까지내가 너를 용서한다.’‘용서한다.’‘용서한다.’‘용서한다.’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수도 없이 들었습니다.

 

불순종, 불신앙, 혈기와 정욕, 교만과 욕심으로 더러워져 눈물로 가슴을 칠 때마다 하나님께서는용서한다.’하셨습니다.‘용서한다.’그 말씀으로 저는 결국 죄를 이겼고, 절망을 이겼고, 좌절을 이겼고, 혈기를 이겼고, 실수를 이겼습니다. 지금의 제가 된 것입니다. 어느 한 번이라도 하나님께서 더 이상 용서할 수 없어.’하셨다면 저는 끝났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회개하기도 전에 이미 우리를 품으실 준비를 하고 계셨습니다. 아니 우리가 죄짓기도 전에 이미 우리를 용서하시고 계십니다. 심지어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사랑하는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셨고 갈보리 언덕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우리 죄값을 치르셨습니다. 그런데 회개했는데 거절하시겠는가 말입니다.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베드로가 죄 지은 자가 회개하면 용서하라는 주님께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질문하였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리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진심으로 자신의 죄를 회개하면서 놀라운 간구를 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죄를 용서해 달라고만 하지 않고 자신을 깨끗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7절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해주십시오. 내가 깨끗하게 될 것입니다. 나를 씻어 주십시오. 내가 눈보다 더 희게 될 것입니다.

 

9절 주님의 눈을 내 죄에서 돌리시고, 내 모든 죄악을 없애 주십시오.

 

이것은 대단한 간구입니다. 지은 간음죄 살인죄를 용서받는 것도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죄를 씻어 달라니요! 지은 죄가 어떻게 없어질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기도입니다. 암을 고쳐달라는 기도보다 김정은을 변화시켜 달라는 기도보다 정말 불가능한 기도가 이미 지은 죄, 깨끗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이것은 다윗이 진정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기에 가능한 기도였습니다. 다윗은 자신 앞에 있는 이가 하나님이심을 압니다. 사람이 아니십니다. 그래서 용서를 구하는 것 보다 깨끗함을 구하는 것입니다.

 

또한 다윗은 우리가 회개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놀랍게도 이 소원은 이루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졌습니다.

 

요일 1:7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죄사함을 받은 것은 단순히 용서받은 것이 아닙니다. 어떤 기록도 남지 않았고, 어떤 자국도 없으며 하나님의 기억에서 조차 지워졌다는 것입니다. 용서는 받았으나, 재판 원본은 남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천국에서 우리의 죄의 어떤 기록도 보지 못할 것입니다. 누구도 기억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죄를 감추고 숨기고 삽니다. 그래서 근본적으로 불안합니다. 어떤 종교에서도 이 문제의 해결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죄사함 받은 우리는 죄를 감추고 사는 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진정 죄에서 깨끗함을 받은 자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춤추고 찬양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다윗이 구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소원은 다윗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이 죄를 씻어 깨끗하게 해 달라고 떼를 쓰니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죄를 씻어 깨끗하게 하시기를 무엇보다 원하셨습니다. 이것을 다윗이 안 것입니다.

 

51:6 ... 제 마음 깊은 곳에 주님의 지혜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였습니다. 하나님과 마음이 통한 자였다는 말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의 마음, 사람들의 죄를 씻어주시기 원하신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사람의 죄를 씻어 깨끗하게 하시려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만세 전에 계획하신 일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께는 이미 십자가의 계획이 서 있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죄에서 깨끗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요일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그러나 누구나 죄에서 깨끗하게 되기를 갈망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울 왕은 아말렉과 싸우고 승리하였지만 욕심 때문에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지 않고 소와 양 떼를 끌고 돌아왔다가 사무엘 선지자의 책망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왕을 버렸다고 통보하고 떠나려는 사무엘 선지자를 붙잡고 늘어지면서 사울 왕은 이렇게 간청합니다.

 

삼상 15:30 사울이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을지라도 이제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 앞과 이스라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내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하더라

 

다윗이 지은 죄와 사울이 지은 죄를 비교하면 다윗이 지은 죄가 더 커 보일 정도입니다. 그러나 사울 왕은 진정으로 죄에 대하여 애통하고 죄에서 깨끗하게 되기를 원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단순히 자기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게 되는 것이 두려웠을 뿐입니다. 결국 사울 왕은 버림을 받게 됩니다. 진실한 회개가 있고 없고의 차이가 이렇게 큰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선교 초창기인 1903년 선교사였던 하디 목사(R. A. Hardie)의 회개를 시작으로 사람들은 너도나도 자신의 죄를 고백함으로. 영적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일본 경찰이 범인을 잡으려고 교회로 찾아오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영적 대각성 운동 이후 교인의 수가 증가했을까요? 통계를 보면 1907년 대각성 운동이 일어난 후 잠시 교인의 수가 감소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당시 교회에는 나라의 독립을 위해 교회 안에 들어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회개 운동이 일어나자 교회로부터 정치적인 힘을 얻으려고 했던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현상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다 회개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할 것은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다윗이 자신의 죄를 씻어 달라고 하면서 성령을 거두지 말아달라고 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11절 주님 앞에서 나를 쫓아내지 마시며, 주님의 성령을 나에게서 거두어 가지 말아 주십시오.

 

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용서받았다, 깨끗함을 받았다는 증거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이렇게 구하는 것은 그는 항상 하나님을 눈 앞에 모시고 살았던 사람이었고, 하나님을 항상 바라보며 사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16:8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여러분은 정말 모든 죄에서 용서받았는지 어떻게 압니까? 정말 모든 죄에서 깨끗해졌는지 어떻게 압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심을 통하여 아는 것입니다.

 

창세기 66절에 보면 사람이 죄를 지게 되자 하나님께서 성령을 거두어 가셨다고 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성령을 다시 보내 주신다면 그가 용서받은 사람이다. 깨끗함을 받은 사람이다.’ 공언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이 이것을 안 것입니다.

 

모세도 이 진리를 안 사람이었습니다.

 

출애굽기 32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하나님이라고 섬겼을 때, 모세는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 돌 판을 내리쳐 깨뜨리고, 금송아지를 불살라 부수어 가루를 만들어 물에 타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시게 하고 레위인을 동원하여 닥치는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칼로 쳐 3,000명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용서해 달라고 간청하기를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생명책에서 자기 이름도 지워달라고 매달렸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용서하시는 듯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32:34 이제 가서 내가 네게 말한 곳으로 백성을 인도하라 내 사자가 네 앞서 가리라

 

하나님의 이 말씀에 모세는 단호히 안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라니요 안됩니다.” 출애굽기 3315-16절에서 말합니다. "주님께서 친히 우리와 함께 가지 않으시려면, 우리를 이 곳에서 떠나 올려 보내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가지 않으시면, 주님께서 주님의 백성이나 저를 좋아하신다는 것을 사람들이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므로, 저 자신과 주님의 백성이 땅 위에 있는 모든 백성과 구별되는 것이 아닙니까?" 모세의 이 기도에 하나님께서 마음을 돌이키십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 용서받은 증거요 깨끗한 자인 증거요 구별됨의 증거로 보았습니다.

 

우리도 이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용서받았음을, 깨끗해져 의로운 자라 인정받았음을 주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심을 보고 아는 것입니다.

 

8절 기쁨과 즐거움의 소리를 들려주십시오.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인지 알아야 합니다.

 

수묵화가 문순집사님의 화집에 충격적인 그림이 하나 있습니다. [눈을 가리신 예수]입니다. 처음 보았을 때 충격이었습니다.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왜 예수님의 눈을 가리웠을까?’화가 문순집사님은 그것은 우리의 죄를 보지 않으시겠다는 예수님의 마음이라고 했습니다.“내가 네 모든 죄를 다 졌으니 다시는 너를 죄인으로 보지 않겠다!”

 

문순집사님은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울었다. 또 울고 울었다. 왜 그리 울었을까? 나는 내 손으로 예수님의 눈을 닫으며 눈물을 닦았다. 주님의 눈을 가리며 나는 참 많이 울었다. ... 가슴의 답답함 가운데서도 난 가렸다. 숨조차 내쉬기 힘들었던 순간이었지만.. 이 거친 세상에 눈을 가린 예수님의 모습을 내 놓기가 너무나 아프고 쓰라렸지만 두려웠지만 난 가렸다. 그러나 얼마나 큰 은혜가 나에게 머물던지 모른다. 가려도 가려도 가려지지 않는 주님의 얼굴이 나를 향해 미소 짓고 계셨다. ...”

 

이 그림의 예수님은 그대로 삭개오가 만난 예수님이었습니다. 이 예수님을 만나고 삭개오가 변한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할 때, 우리 죄를 보시지 않으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삶이 뒤집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도 큰 감동이 없는 이유는 죄를 씻어주셨으리라 믿기만 하지 눈을 가리신 예수님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회개하여도 바로 해야 합니다. 주 예수님을 바라보고 회개해야 합니다. 죄를 바라보고 회개하는 자는 계속 낙심과 좌절에 빠집니다. 더 죄의 종노릇하게 됩니다.

 

손양원목사님 양자 안재선씨의 삶에 대하여 들었습니다. 그 아들이 목사님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겪은 아픔에 대하여 들었습니다. 그가 만나는 교인들 중에 그에게 싸늘하게 대하는 이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그 아들이 자라면서 너무나 많은 아픔을 겪었답니다. 정작 손양원목사님은 아들 죽인 원수도 용서하고 사랑하여 받아주었는데, 다른 사람들이 그를 받아주지 못하다니요! 주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하니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1만 달란트 탕감받은 종이 100 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하지 못했을까요? 10년이나 20, 30년 지나면 그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세월은 모든 것을 잊어버리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한번 용서받은 체험으로 나머지 일생을 살아가서는 안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항상 예수님을 바라보며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속죄의 은혜를 주시려고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뿐 아닙니다. 그 확실한 증거로 지금 우리 안에 오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깨끗한 사람이 되었다는 확실한 증거이고 속죄받은 자의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죄로 인하여 괴로워하는 분들은 진정으로 회개하고 십자가 속죄의 복음을 믿고 24 시간 주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구원의 기쁨을 회복시켜 주소서(회개 3) /51:12-19/ 유기성 목사

2016-08-23 11:53:13

 

1903년 하디 선교사의 회개가 한국 교회의 회개 부흥으로 이어진 것은 자존심이 강하던 하디 선교사가 공개적으로 자신의 죄를 고백한 것 자체도 충격적이었지만, 죄의 고백으로만 그친 것이 아니라 삶의 변화로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회개하기 전 하디는 환자들이 기피하는 쌀쌀맞은 의사였습니다. 한국인들 중에는 차라리 아픈 것이 더 낫다며 병이 들어도 하디에게 치료 받기를 주저했던 이들도 있었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회개한 하디는 성품과 인격이 완전히 변하여 환자들은 하디의 손만 만져도 병이 나았다고 증언하였습니다.

 

과거에도 하디는 회개에 대해서 설교했습니다. 하지만 진짜 회개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실례를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1903년 하디 자신이 회개하면서 회개를 설교하였을 뿐 아니라 회개의 실례를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첫째, 자신이 정말 지옥에 갈 그 죄인임을 깨닫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진정으로 회개하였으면 모든 죄에서 정말 깨끗이 되었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나 마지막으로는 죄에서 승리하며 사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가야 진정한 회개인 것입니다.

 

다윗은 14절에서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 내가 살인죄를 짓지 않게 지켜 주십시오.” 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이미 지은 죄를 용서해 달라, 깨끗이 씻어달라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죄짓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1부 예배 후 어느 부인이 나오셔서제가 살인죄를 짓지 않도록 기도해 주세요.”부탁하셨습니다.

 

12...내가 지탱할 수 있도록 ....

 

한번이 아니라 계속 죄를 짓지 않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윗은 아예 마음을 바꾸어 달라고 하였습니다.

 

12... 내게 자발적인 마음을 주십시오.

 

다윗은 자신이 아무리 이를 악물고 결심을 하고... 환경을 바꾸어도... 죄짓지 않고 살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마음이 바뀌지 않으면 다 헛 일임을 알고 마음을 새로 창조해 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10절 아, 하나님, 내 속에 깨끗한 마음을 창조하여 주시고 내 속을 견고한 심령으로 새롭게 하여 주십시오.

 

이것이 진정 구원의 기쁨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51:12 주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기쁨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그러나 이 생각 역시 다윗의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그것을 다윗이 안 것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늘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을 안타까와 하셨습니다. 그래서 놀라운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 성령 하나님을 보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11:19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20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이것이 새 언약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단지 죄인인 것만 깨닫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대로 사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방법은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임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약속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시고 죽으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고후 1:22 “하나님이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여러분, 죄짓지 않으려고 애를 썼지만 안된다고 낙심하셨습니까? 이제부터 정말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살아 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죄를 짓지 않는 삶기 위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회개하고 마음에 하나님을 모시고 살면 구원의 기쁨이 회복됩니다. 죄를 짓지 않을 뿐 아니라 다른 죄인들을 주님께 인도하는 사람이 됩니다.

 

13절 반역하는 죄인들에게 내가 주님의 길을 가르치게 하여 주십시오. 죄인들이 주님께로 돌아올 것입니다.

 

찬양의 문이 열립니다. 15절 주님, 내 입술을 열어 주십시오. 주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내 입술로 전파하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삶을 살게 됩니다. 18절 주님의 은혜로 시온을 잘 돌보아주시고, 예루살렘 성벽을 견고히 세워 주십시오.

 

진정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됩니다.

 

19절 그 때에 주님은 올바른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제물을 기쁨으로 받으실 것이니, 그 때에 사람들이 주님의 제단 위에 수송아지를 드릴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 마음입니다. 성경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기를 싫어한다고 했습니다.

 

1:28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마음에 하나님을 모시고 살기를 원하십니까? 준비가 되었습니까? 마음에 하나님을 모시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예배를 많이 드려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다윗은 간음하고도 살인하고도 매일 제사를 드렸습니다. 왕이요 부자였습니다. 소와 양은 얼마든지 제물로 바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제사는 완전 헛수고였습니다. 전혀 하나님께 상달되지 않았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16절 주님은 제물을 반기지 않으시며, 내가 번제를 드리더라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상한 심령’, 마음을 찢는 회개였습니다.

 

17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물은 찢겨진 심령입니다. , 하나님, 주님은 찢겨지고 짓밟힌 마음을 멸시하지 않으십니다. 마음을 찢는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순간 성전 지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찢으신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가로막힌 것이 사라져 누구나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찢는 것은 우리가 더 이상 하나님을 마음 바깥에 두지 않고 마음 안에 오시도록 맞아들인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마음을 찢는 것이 단순히 죄에 대하여 애통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깨닫고 괴로와하다가 자살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이 사람이 얼마나 죄를 깊이 깨닫고 후회한 것입니까? 그러나 이것이 마음을 찢은 것입니까?

 

어떻게 보면 가룟 유다는 진정 회개한 것처럼 보입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죄가 씻겨지지 않습니다. 진정한 회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깊은 죄책감에서 정신이상이 된 이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괴로워한다고 죄가 씻겨지는 것이 아닙니다. 올바른 회개, 진정한 회개는 마음을 찢어 하나님을 모셔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죄짓지 않고 거룩하게 사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원죄의 교리를 가지고 우리는 죄 안 짓고 살 수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죄를 지어 죄인이 아니라 죄인이기에 죄를 짓는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이 원죄 교리를 말합니다. 그러나 또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옛 사람이 죽었다고 말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6: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예수님을 믿으면 새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에 임하시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고든 맥도날드(Gordon McDonald) 목사님은 보스턴 근교의 그레이스채플 담임목사로 섬기다가 간음을 고백하고 스스로 물러나신 일이 있었습니다. 다들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자신을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교회를 사임한 후 3년 동안 주님과 회복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다윗의 간구처럼 주님으로부터 깨끗한 마음을 창조 받은 후 다시 사역을 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주위 모든 사람들이 그를 받아주었습니다.

 

고든 맥도날드 목사님이 사모님과 함께 [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성장]이란 책을 썼는데 그 책에서 다음과 같은 고백을 했습니다.

 

"우리는 정상에 섰습니다. 그동안의 길은 길고도 험했습니다. 그러나 아주 귀중한 경험이었습니다. 우리는 산등성이에 피인 야생화를 보면서 목마르면 바위 틈에서 솟아나오는 샘물을 마시면서 꾸준히 걸어왔습니다. 여기저기서 우리는 우리의 삶을 수술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낭떠러지에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 일어섰습니다. 이제 드디어 정상에 올랐습니다. 우리는 산 정상에서 함께 기뻐하며 서로를 바라봅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가 올라야 할 산등성이가 또 앞에 놓여 있는 줄을 압니다. 그러나 우리는 함께 감당할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입니다. 죄와 실패를 이기고 승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죄를 이길 수 있다고 해서 우리 자신이 변화되어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육신은 여전히 죄 덩어리입니다. 마귀는 여전히 우리의 육신을 충동하여 계속 죄 아래 우리를 사로잡아 오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신 것입니다. 우리 자아가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넘겨졌습니다.

 

그러므로 마귀는 더 이상 우리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우리 마음에 오셔서 우리를 지키기에 마귀가 손도 대지 못하는 것입니다.

 

요일 5:18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여러분들은 음란물, 도적질, 거짓말, 혈기, 다툼과 분열, 미움 등과 같은 죄와 싸워 보셨을 것입니다. 결과는 무엇입니까? 좌절입니까? 너무 좌절이 되어 다시 죄와 싸우려는 마음도 사라진 상태는 아닙니까? “난 안되나 봐!” 이것이 마귀의 목적임을 알면 섬뜻해집니다.

 

코끼리 길들이기, 코끼리를 말뚝에 매어 두면 얼마든지 뽑아 버리지만 새끼 때부터 매어 두면 커도 말뚝을 뽑을 시도조차 안한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성령님에 대하여 교리적으로만 믿어서는 안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 하나님에 대하여 교리로만 알고 있습니다.

 

죄짓는 것이 어려운가? 죄 안 짓는 것이 어려운가? 성령 하나님을 교리로 믿는지, 정말 믿는 지에 따라 다릅니다.

 

죄 안 짓기가 어렵다는 사람은 성령 하나님께서 마음에 계신 것을 실제로는 안 믿는 사람입니다.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죄짓는 것이 어렵습니까? 안 짓는 것이 어렵습니까?

 

지금 어떻습니까?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는 죄짓는 것이 훨씬 어렵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어떻겠습니까?

 

삼하 12:9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냐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치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도다

 

다윗은 하나님을 업신여길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결국 그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이유는 마귀가 유혹으로 다윗의 눈을 가리워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죄 짓는 다윗의 모습을 지켜 보신 하나님의 마음이 어떻하셨겠습니까? 다윗이 자신의 부하의 아내와 간음할 때, 끝까지 자신에게 충성스러웠던 우리야를 죽게 하였을 때, 그것을 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하셨겠습니까?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의 삶도 지켜 보고 계십니다.

 

8:26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많은 증인들도 함께 지켜보고 있습니다!

 

12:1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이 눈이 뜨이는 것이 열쇠입니다.

 

요셉은 주인인 보디발의 아내의 적극적인 유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죄 짓는 것이 더 어려운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에게 정욕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항상 하나님 앞에 있음을 믿었으니 죄를 지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죄가 마귀의 공격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마귀 역사를 몰라서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가룟 유다가 마귀의 역사인 줄 모르고 예수님을 은 30에 팔고 자살했습니다,

 

죄를 이기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마귀의 역사로 독약에 유혹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독약을 평생 마시지 말라.” 한다고 답답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성령 하나님만이 죄가 독임을 분명히 알게 하십니다. 그러면 갈등과 유혹은 끝입니다.

 

한 여성도가 꿈에 옆에서 자는 남편을 큰 구렁이가 칭칭감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깨었습니다. 너무나 섬찟하였는데, 나중에 남편의 이중생활이 드러났습니다.

 

아내는 남편이 음란의 영에 사로잡힌 것을 깨닫고 눈물로 기도하였지만, 남편은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 알지 못하여 명확하게 그 생활을 청산하지 못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죄 안 짓기가 어렵다는 말은 죄 자체의 유혹이 강하기 때문이거나 우리 자신의 의지가 약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에 계심을 진정으로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더 이상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는데!’ 이런 생각해 본 적 없습니까? 성령의 근심입니다. 성령님께서 밖에 계시다면 어떻게 그런 생각이 나겠습니까?

 

호주에서 만난 젊은 집사, 엄청난 포도 농장, 결혼식장, 담배를 끊지 못하던 사람, 어느 날 부흥회에 참석하였다가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지 않은가? 골방에 들어갔습니다. “하나님, 한번 제대로 믿어 보겠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 가서 담배가 끊어졌습니다. 성령 체험을 하였습니다. 아이가 생기지 않아서 고통스러웠는데, 아이가 생겼습니다. 둘이나 주셨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성령 하나님을 정말 마음에 모시고 살 결단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24 시간 예수님을 바라보며 사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을 마음에 모셨으니, 이젠 정말 죄 짓지 말아야 할텐데!” 아닙니다.

 

그러면 주님을 마음에 모신 기쁨이 아닙니다.걱정 염려도 다 맡기는 것입니다. 오직 찬송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죄에 넘어졌더라도 여전히 바라보기는 주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죄를 보며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고백하면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는 주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루에 12번 죄를 짓는다 하더라도 12번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예수님을 계속 바라보면 예수님이 함께 하심이 믿어지게 되고 결국 죄를 지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죄를 이기는 삶은 전적으로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에 계심을 정말 믿게 되었을 때 진짜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인생은 새로워집니다. 놀라운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회개할 결단, 거룩한 삶을 결단할 기회를 드리기 원합니다. 하나님을 정말 믿고, 모든 근심 두려움, 몸부림 다 주님께 맡기고 주님만 바라보고 살기로 결단한 분들은 자리에서 일어서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 회개하고 천국 백성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생명 얻는 회개 /11:18/ 이재철목사

2015-07-25 08:42:21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다 함이라 행11:18

 

골고다에서 죽으신 특별한 이유

 

골고다의 의미

골고다는 예수의 십자가가 세워진 언덕이다.

골고다는 번역하면 해골이란 의미다. 19:17

 

왜 그 언덕이 해골이라고 불려졌을까?

-그 언덕 모양이 해골처럼 생겼다는 설이 있다.

-예로부터 그 언덕이 사형집행장으로 사용되어져 왔기 때문에,

언덕 여기저기에 해골들이 나뒹굴고 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하나님께서 최초로 창조하신 아담의 무덤이 그 언덕위에 있었고,

바로 그 아담의 유골이 그 언덕에서 발견되었다는 설도 있다.

 

어떤 설이 정확한지는, 우리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예수의 십자가가 해골 위에 세워졌다는 사실>이다.

 

그 광경을 믿음의 눈으로 한 번 바라보자.

해골 언덕이 있다.

그 해골의 정수리에 십자가가 세워져 있다.

그 십자가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피가 아래 해골로 흘러내린다.

그 피가 사망을 상징하는 해골언덕(골고다)을 적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흠뻑 젖은 해골이,

그 생명을 힘입어... 소생한다. - 이것이 복음이다.

<죽음과 생명이 대비되고 있습니다.>

 

성경 66권을 단 한 컷의 영상으로 표현한다면,

바로 <해골, 그 죽음의 정수리에 세워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생명>이다.

 

죽음의 덫에 갇힌 모든 인간은, 사실은 해골과 같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죽음을 이기는/깨뜨리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11:25~26

 

 

프쉬케 와 조에

 

헬라어에는 생명을 나타내는 두 단어가 있다.

 

1. 프쉬케 - 인간 육체의 생명

 

자기의 생명(프쉬케)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프쉬케)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요12:25

-안 믿는 사람들은 자기 생명(목숨)에 집착하며 살게 되어 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프쉬케)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20:24

-바울은 자기 생명(목숨)에 집착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어쨌든 생명이라 번역한 위의 성경구절은

프쉬케 - 육체적 생명, 인간의 목숨을 뜻한다.

 

 

2. 조에 -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참되고 영원한 생명을 뜻한다.

우리말로는 다 똑같은 생명으로 번역되어 있다.

그러나 성경 원문에는, 그 의미에 따라 구별되어 사용되고 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조에) 얻는 회개를 주셨다 함이라 행11:18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11:25~2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롭도다 고후4:16

위 구절에서, 겉사람은 프쉬케에, 속사람은 조에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바울은, 자기 육체가 쇠퇴하고 늙어가는 것에 대해 조금도 낙심하지 않았다.

자신의 프쉬케가 쇠퇴해 가는 것과 반비례해서,

자기 심령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조에가 날로 더 새로워졌기 때문이다.)

 

 

조에’(영원한 생명)를 얻는 길

 

그렇다면 예수 안에 있는 그 참된 생명인 조에를 어떻게 얻을 수 있나?

- 그것은 바로 <생명 얻는 회개>를 통해서이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조에) 얻는 회개를 주셨다 함이라 행11:18

 

회개는, 예수 그리스도의 조에(영원한 생명)를 얻는 관문이다.

생명 얻는 회개는, 직역하면 생명을 향하는 회개라는 뜻이 된다.

 

 

회개란?

회개는 입이나 말로 하는 것이 아니다.

입으로 자기 죄를 뉘우치고 고하는 것을, 성경은 자백, 자복이라고 말한다.

회개는 그것들과는 좀 다른 뜻이다.

 

성경이 말하는 회개(메타노이아)<돌아선다. 방향을 바꾸는 행동>을 의미한다.

죽음(골고다)을 향하여 질주하던 인간이

그 죽음의 삶으로부터 조에를 향해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돌아서는 것

바로 회개이다. 생명을 향하는 회개 행11:18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서 돌아서는 것을 의미한다.

 

해골인 자기 정수리에,

십자가를 세우고,

그 십자가에서 타고 내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조에(생명)를 향해

자기 삶의 방향을 회개(바꾸는)하는 것이다.

 

바로 그 때, 예수 그리스도의 조에가 우리 삶 속에서 역사하는 것이다.

 

전기를 예로 들어 설명하면

내가 전기 스위치를 올리면, 발전소가 전기를 생산해내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전기는 이미 우리 집 안방까지 와 있다.

그런데 내가 스위치를 올릴 때, 비로소 전기가 들어오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주신 생명 얻는 회개’. 회개를 통해 얻는 생명

이미 선행적으로 주어져 있다. (, 우리 집 안방까지 와 있다.)

그런데 내가 전기 스위치를 올려야 하듯이,

내가 회개할 때, 즉 삶의 방향을 바꿀 때, 그 생명이 비로소 내 삶에 흘러들어오는 것과 같다.

 

베드로나 바울이 위대한 것이 아니다.

이미 선행적으로 주어져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조에)을 얻기 위해

그들이 회개한 것뿐이다. 삶의 방향을 바꾼 것뿐이다.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대적자들이 되었을 뻔했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기 삶에 흘러 들어오자

그들은 놀랍게 변화되기 시작했다.

생명’(조에)을 사방 천지에 흘러 보내는 위대한 통로가 되었던 것이다.

 

오늘 당신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흐르고 있는가? 통로가 되었는가?

당신은 회개한 사람이다.

 

 

100년 전 대부흥 당시의 회개

 

1907년 당시 부흥의 모습

옥성득 교수의한반도 대부흥에서는, 당시의 회개 운동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죄의 회개에서 시작된 신앙운동은, 게으름과 거짓, 주색잡기 등의 그릇된 습성을 버리고

축첩과 반상(양반상놈)차별 등의 악습을 철폐하며, 노비를 해방하는 등

기독교 윤리의 실천을 자극했고,

이를 통해 한국의 봉건사회를 개혁하는데, 큰 동력이 되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의 회개는 입이나 말로 한 회개가 아니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돌아서는, 삶의 회개를 한 것이었다.

 

게으르던 인간이... 변해서 근면한 사람이 되고

거짓으로 먹고 살던 사람이... 거짓을 청산하고

주색잡기, 첩을 두었던 사람이... 거기서 벗어나고

어제까지 상놈이라고 폄하하던 사람을, 자기와 같은 양반으로 대접해 주는 것,

재산목록 제1호인 노비문서를 불태워버리고, 자기 노비를 해방시켜 주는 것,

이 모든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 사회 풍속 상 맨 정신으로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들이었다.

그럼에도 당시 크리스천들은 참 회개를 실천했다.

 

어떻게 이런 일(회개)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자신들에게 임해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조에(생명)앞에 비추어 볼 때

그동안 자신들이 당연한 듯 집착해왔던 삶은..

송장/해골/죽음 같은 삶이란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죽음의 삶을 미련 없이 벗어던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돌아서는 삶의 회개를 했다.

그들은 자기 정수리에 십자가를 세우고,

십자가를 통해 내려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조에를 향해

삶의 방향을 바꾸는, 돌아서는 회개를 실천했다.

 

1907년 평양대부흥은, 예수 그리스도의 조에(생명)가 역사한 부흥이었다.

죄악된 인간들이, 그 참 생명 앞에 섰을 때, 그 생명의 가치를 깨닫고,

자신의 죄악의 추함을 파악하고, 그 생명을 향하여, 자신의 삶의 진로를 바꾸었다.

골고다, 해골의 삶으로부터 돌아섰던 것이다.

 

입으로만 회개는 안 됨, 삶의 방향을 돌아서야!

오늘날 우리는, 설교하는 저를 포함해서, 회개를 입으로만 하고 있다.

그래서 한국에 부흥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더 원인을 찾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조에(생명)앞에

철저하게 자신을 맞딱뜨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생명 앞에 나아가면, 죽음(해골, 골고다)을 벗어던지게 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 중에 많은 이들이, 아직도 죽음(골고다)의 삶을 더 귀하게 여긴다.

방향을 돌아서기는커녕, 돌아설까봐 걱정이다.

 

영원한 생명(조에)을 향해서.. 살아가야할 터인데

육체적 생명(프쉬케)을 향해서.. 세상 사람들에게 뒤지지 않으려고 열심히 달려간다.

 

회개는, 프쉬케에서 조에로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그것을 바꾼 사람만, 진정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크리스천이 되는 것이다.

 

사순절은 회개의 기간

이 사순절 기간동안 확실한 회개의 사람들이 됩시다.

해골 같은 삶을 버리고,

해골 같은 내 인생의 정수리에 십자가를 세우고

그 십자가에서 타고 흘러내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조에를 향해

우리 삶의 방향을 회개하십시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조에(생명)의 역사가 충만할 때

이 땅에는 회개와 부흥의 역사가 다시 일어날 것이다.

 

내가 변화되는 만큼만 변화된다.

우리 가정도, 일터도, 공동체, 사회도.. 내가 변화되는 만큼만 변화된다.

나의 변화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조에(생명)로만 가능하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시라 /1:15/1:12/ Paul Washer

2015-06-18 20:18:29

 

1. 복음을 다시 한 번 점검하십시다.

 

Paul Washer, 여러분과 만날 기회는 오늘 밤 단 한 번뿐이므로,

꼭 한 번 설교할 기회가 주어질 때는, 제가 늘 그러하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겠습니다.

 

여기 이 자리에 앉아계신 많은 성도님들은

, 복음이라고? 우리는 벌써 복음이 뭔지 다 알고 있는데?’

아마 이렇게 퉁명스럽게 반응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말씀드립니다.

아니요, 여러분은 복음을 잘 모르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는 것은, 그저 <사영리>

<하나님에 대해 알아야 할 5가지의 사실> 등입니다.

 

그런 결단주의지적 동의를 통해서

복음을 이해하고, 복음을 진정으로 받아들이신 분들도 있지만,

그렇지 못하고, 복음을 피상적으로 받아들이신 분들도 많습니다.

*관련글 결단주의와 쉬운 복음

 

누군가의 전도를 통해서, 내가 복음과 그리스도를 내 마음에 믿고 영접할 때,

그 순간에 주님이 함께 하시고, 성령의 역사로 거듭나는 일도 있지만,

 

누군가의 전도를 통해서, 내가 복음과 그리스도를 내 마음에 믿고 영접할 때,

그저 도우미(전도자)의 도움에 의해서만, 하나님의 초자연적 역사 없이

내 스스로 결단하고, 영접하는 것은.. 재고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내가 결단해서 얻는 것이 아니고,

어떤 주도권, 결정권, 선택권이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이 선택, 소명, 은혜, 주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전도가 필요하고, 결신이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결단주의, 값싼 은혜.. 재고를 필요로 합니다.

이것이 무엇인지 아래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2. 복음을 정립하십시다.

오늘날 복음주의권 교회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복음을 정립하는 것입니다.

한때 신자들의 관심이 온통 교회 성장에만 초점 맞춰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미나를 하면.. 그 주제는 언제나 성장이었습니다.

 

또 다른 주제나 관심에 신자들의 관심이 맞춰져 있을 수 있습니다.

내적치유, 자기 계발 등등...

 

그런데 저는,

오늘날 우리 교회에 가장 필요한 것은,

복음을 성경적으로 정립하는 것이라 봅니다.

왜냐하면 제 생각에는 오늘날 우리가 '복음'을 너무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3. 결단주의적 복음은 안 됩니다.

보십시오.

전도자가 누군가에게 다가가

당신이 죄인인 것을 아십니까?’

 

그가 라고 대답하면,

전도자는 곧바로 다음 질문으로 넘어갑니다.

 

당신은 천국에 가길 소망하십니까?’

 

그럼 지금 저를 따라서 예수님을 영접하는 기도를 하시겠습니까?’

그래서 영접기도를 따라하면,

이제 당신은 구원 받았습니다!’ 라고 축하해 줍니다.

 

대답 몇 번 하고,

따라서 기도 몇 마디하면

당장 구원 받았다고, 확인해 줍니다.

이렇게 해서 구원 받을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습니다. 왜 아닌가 하면요...

 

(좀 극단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이해하고 들어주십시오.)

이것은 진정한 복음전도가 아닙니다. 교회로 인도하는 효과는 분명 있을 것입니다.

이런 방식의 전도는,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이단 사상보다

더 많은 피해를 주었습니다.

 

이런 방식이 왜 잘못인가 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삶은 정작 아무 것도 변화되지 않으면서,

그들 자신은 스스로 크리스천으로 믿으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그저 단 5분밖에 걸리지 않는

그 어떤 간단한 결단decision’으로 축소시키고 말았습니다.

 

4. 당신은 진심으로 회개했습니까?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아는' .. 그것은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absolutely nothing입니다.

 

그래서 저는 당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습니까?’ 가 아니라,

대신에 이렇게 여러분께 물어보고 싶습니다.

당신은 진정으로 회개했습니까?’ 이건 초자연적인 역사로 되어집니다.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의 증거는 2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 그 후로도 계속 자기 죄를 회개하게 됩니다.

이미 몸을 씻은 사람은, 발을 매일 씻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 하는 가운데, 매일/매주/매월 회개하면서 신앙생활하는 분은

그가 진정 회개(목욕)했다는 증거입니다. 회개가 라이프스타일이 됩니다.

 

2) 이전에 자기가 사랑했던 죄악을, 이제는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그 죄성이 여전히 잔존해서 남아있다 하더라도

자기가 스스로 압니다. ‘내가 변화되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변화도, 계속 지속적 progressive으로 나타납니다.

 

5. 신앙은 관계입니다.

저는 천국에 가기 원하십니까, 구원 받기 원하십니까?’ 이런 질문 안 합니다.

그런 질문은 무의미합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천국 가고, 구원 받는 것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저는 이렇게 질문합니다.

 

당신이 복음을 전해 받은 이후에,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마음속에서

주권적이며 초자연적인 supernatural 역사를 통해서,

 

이제 하나님을 진정 사랑하게 되었습니까?

그 하나님과 진정 교제관계가 당신의 삶에 시작되었습니까?

하나님을.. 세상보다, 죄악보다.. 더 사랑하게 되었습니까?’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를 영접했는데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롭게 시작되지 않은 사람은,

지적 동의결단주의에 의해서 그냥 자기가 믿은 것뿐입니다.

그 영혼에 주권적이며 초자연적인 supernatural 역사가 일어난 것은 아닙니다.

 

6. 그리스도를 영접함에 대해서도.. 한 말씀 드리기 원합니다.

Washer영접기도에 대해서도, 회의적입니다.

영접기도를 뒷받침 해 주는 성경적 근거는,

성경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아니, 1:12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고 했잖아요?’

 

맞습니다. 그런데 요1:12영접

단지 전도지에 나오는 영접기도를 따라서 중얼거리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영접 receiving’

그리스도의 내 삶의 주Lord와 구세주Saviour로 모셔 들여서

내가 그 분의 제자, , 자녀로

전적으로 순종해서 사는 삶을 뜻합니다.

비록 완벽하진 않더라도, 그런 삶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그저 1분간 입술로 중얼거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올바로 영접하려면,

반드시 진정한 회개와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회개와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은,

이제 그리스도가 자기 삶에 어떤 액세서리가 아니라,

정말 모든 것이요, ‘생명의 근원이 되는 셈입니다. 가장 소중하게 됩니다.

 

그리스도는 당신의 인생을 더 좋게(성공하게) 만드는 그 어떤 분이 아니고,

그리스도는 당신의 전부가 되십니다.

이것이 바로 영접한 사람의 증거입니다.

 

7. 오늘날 회개없이 복음을 영접하는 사람을 양산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부터 내려오던 기독교 신앙은

반드시 회개를 통한 믿음이었습니다.

 

복음서에 소개된 최초의 복음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1:15

 

그러므로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분,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다.

내가 일생에 진정으로 회개한 적이 있는가?

죄의 권능을 무시무시하게 깨닫고, 토해 내듯이 철저히 회개하고,

그 이후로 내 삶이 진정 변화되었나?’

만약 이런 회개가 없었다면, 하나님께 구하시기 바랍니다.

 

회개한 사람은.. 삶이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반드시 삶에 열매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회개하지 않고, 자기 결단에 의해서 예수를 믿은 사람은

삶의 열매, 삶의 변화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를 회개로 인도하는 초자연적 supernatural 역사가 없었습니다.

 

문제는.. '그가 진정 구원 받았느냐, 천국에 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피상적 회개는 했겠지만, 진정한 회개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진정 회개했는지/안 했는지

회개한 사람은.. 자기가 확실히 압니다.

회개 안() 한 사람은.. 자기가 아리송합니다. 긴가민가 합니다.

아리송하고, 긴가민가 하는 것은.. 회개 안()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내가 영접기도 했다가 그 기준이 아닙니다.

그건 성경적 근거가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구원의 그 기준은 내가 진정 회개했느냐?’입니다.

기준을 올바로 설정하십시다.

 

8. 정리하면

오늘날 복음주의권 교회가, <복음을 재정립>하는 일이 꼭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결단주의에 의해

자기 스스로 복음을 영접하고, 구원 받았다고 (잘못)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삶은 전혀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구원도 못 받을 가능성이 높다고.., 저는 그렇게 봅니다.

 

제가 위에서 드린 말씀을 한 마디로 축약하면,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시대부터 내려오는 전통적인 복음입니다.

 

다시 말하면, 오늘날의 복음은

회개 안 하고 복음을 믿는신자를 양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범위를 더 축소시킵시다.

그럼 나는 회개하고 예수를 믿고 있나요?’

 

그 증거는

내가 지금 지속적으로 회개하느냐/ 안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에 의해서 자기 결단이 아니라

회개하고 예수를 믿은 사람은,

그 증거가 평소의 삶에서 지속적으로 회개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진정한 회개의 역사는

초자연적인 성령의 역사이므로, 사람의 힘으로 안 된다는 뜻

그러나 사람의 소원은 도움이 될 것임

우리가 하나님께 구해야 하겠습니다. ‘내가 회개하고 믿도록!’

 

이렇게 회개하고 예수를 믿는 사람은,

-삶이 변화됩니다. ‘변화되어라고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늘 회개하니까요.

-하나님과 교제를 지속적으로 가집니다. ‘교제를 가져라고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

 

2백년 전, 3백년 전만 하더라도

기독교 서적들은 대부분 복음에 대해서였습니다.

 

스펄전, 청교도, 에드워즈가 쓴 책들은 모두 복음에 관한 것들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복음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복음을 제대로 설교할 수 있을까?’

 

어떤 것이 진실된 회심인가?’

어떻게 하면 우리가 진정으로 거듭난 것을 알 수 있을까?’ - 이런 내용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서점에 가셔서,

그러한 복음에 대해 쓰여져 있는 책들이 있는지.. 한 번 찾아보십시오.

아마 대단히 찾기 어려울 것입니다.

 

오늘날 신자들은,

복음, 회심, 회개, 성화.. 이런 것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 없고,

대신에 나를 계발하고, 나를 기분 좋게 하고, 나를 행복하게 하는 어떤 무엇에 대해

듣기 원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을 간절히 바라지 않습니다.

대신에 행복한 나, 성공한 내 인생을 간절히 추구합니다.

그리고 후자를 설교하는 설교자들이 곽광 받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한다고 하는데, ‘복음 아닌 어떤 것을 전하고/듣고 있습니다.

그런 복음에는 아무 능력이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복음을 듣는 사람들은

반드시 자기 삶이 변화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삶에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 진정한 복음이 회복되기를 간절히 바랍시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 /3:7-12/ 곽선희 목사

2014-11-24 23:08:12

 

철학자인 파스칼은 그의 팡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천사도 아니거니와 짐승도 아니다. 그러나 불행한 것은 인간들은 천사처럼 살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짐승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거기에 문제가 있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천사가 아닙니다.

 

그러나 천사같은 그런 존재로 살아가겠다고 높은 이상을 내세우면서도 실제로 사는 것은 너무나도 모순적입니다. '짐승처럼, 그것도 가장 사악하고 더러운 짐승처럼 살아가고 있다. 여기에 문제가 있고 고민이 있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현대인을 비판하는 확실한 정의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유대교에서는 사함 받을 수 없는 죄가 있다고 합니다. 도저히 사함 받을 수 없는 죄를 많이 열거하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것 두가지만 말씀을 드립니다. 하나가 회개하기 위하여 범죄하는 거죠. 지금 뉘우치는 것이 있어요. 회개하고 있는데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또 다른 죄를 짓는 거예요.

 

또 하나는 회개하고 같은 죄를 계속 반복하는 것이죠. 회개하고 또 죄짓고 또 죄짓고. 개가 토했던 것을 다시 먹는 것처럼 늘 회개하며 늘 같은 죄를 반복하는 이러한 죄는 영영 사함 받을 수 없다, 왜냐하면 회개가 없기 때문이요. 회개하지 않는 죄가 사함 받을 수는 없으니까 말입니다.

 

열매없는 회개는 회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죄라고 하면 먼저 죄 짓는 죄가 있고, 둘째는 회개하지 않는 죄가 있고, 셋째는 변명하는 죄가 있고,

 

넷째는 죄를 정당화하는 죄가 있습니다. 다섯째는 정당화하기 위해서 내가 지은 죄를 죄 아니라고 정당화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정죄합니다. 여기까지 나아가면 이제는 강퍅하게 되는 것이요 영영 구제 불능한 운명에 빠지게 됩니다.

 

심리학자 아들러는 사람이라는 것은 외부적인 요구에 대한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보호장치를 몇 가지 가지고 있는 그런 경향성이 있다고 말합니다.

첫째가 변명입니다. 잘못된 것을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밖에서 그것에 대하여 비판할 때에 또 자기 양심도 이것을 비판하게 될 때 변명을 하게 됩니다.

 

이러면은 영영 영영 구제받을 길이 없습니다. 변명처럼 어리석은 짓은 없습니다. 어떤 일에도 믿는 사람은 변명은 하지 말아야됩니다. 최소한도 변명은 하지 말아야 됩니다. 어떤 일에도 변명은 생각하지도 말 것입니다. 대체로 두가지로 변명을 합니다.

 

하나는 'Yes, but' 또 하나는 '단지 하였더라면' 하는 가정법을 씁니다. 먼저는 보세요. 예컨데 학생이 공부를 잘해서 시험을 잘 봐야 하는데 '잘 보려고 했는데 그러나 다른 과목도 공부해야되기 때문에 이 과목은 망쳤다'는 거요.

 

그렇다고 인정을 하면서도 '그러나' 하고 무엇 무엇 무엇 변명을 늘어놓아요. 또 한가지는 가정법을 써요. '만일에 나도 대학을 나왔더라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대학 못 나온 열등의식 때문에 이같은 일들이 있어졌다' 변명합니다.

 

'내가 만일에 돈이 있었다면, 내가 만일에 건강했다면, 나는 이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기의 부족한 처지를 비롯해서 변명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이 일로부터 정직함으로부터 자기를 회피하는 행위입니다.

 

또 한가지는 공격형입니다. 자기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공격합니다. 실패에 대한 원인을 타인에게 돌립니다. 다른 사람에게 돌려서 '너도 그랬지' '너라는 사람이' '너 때문이요' 이렇게. 공격형, 그런 심리를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이게 아주 체질이 된 사람이 있어요. 이 사람은 반성할 줄을 모릅니다. 회개가 없습니다.

 

그런가하면 거리를 두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건 딜레이(Delay)형입니다. 회개는 하겠는데 '좀 더 있다. 아직은 이르다. 회개를 해도 하기야 죽기 전에 해야지. 예수님 옆에 있던 십자가에 매달린 강도도 직전에 회개했는데

 

아주 직전에 그곳까지 가서 해야지.' 자꾸 미뤄나가는 그런 가운데서 자기와 문제를 이렇게 문제되지 않게 끌고 나가려고 합니다. 참으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이게 체질이 됩니다. 이게 성품이 됩니다. 그러면 진실은 아주 멀어집니다.

 

그런가 하면 배제형이 있습니다. 이건 아예 문제 삼지를 않습니다. '나만 죄인이냐? 죄가 그것 뿐이더냐?' 세상을 탓하고 심지어는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그럴 수밖에 없었노라. 회개할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배제해 버리는 이러한 심리입니다. 이것은 강퍅하게 된 것이올시다. 다시 돌이킬 길이 없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 보면 광야에 세례요한은 외칩니다. "회개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말합니다. 구약성경에 있어서 회개의 정의는 이렇습니다. 회개란 뭐냐? 죄를 떠나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에스겔 33장 그리고 호세야 14장에서 누누이 설명합니다. 여러 성경에서 말씀합니다. 회개란, 죄를 떠나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가는 것입니다. 먼저는 회개란 후회와 뉘우침만은 회개가 아닙니다. 한평생 가슴을 치고 눈물을 흘려도 그건 회개가 아닙니다.

 

또한 죄에서 떠나는 행동이 있어야 됩니다. 죄스러운 생활에서 떠나야 되고 두 번째는 하나님께로 향해야 합니다. 이런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누가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참 엄격한 말씀이올시다. 누가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형벌이 무섭고 비난이 무섭고 아니 지옥이 무서워서 그렇게 회개하는 것, 다시 말하면 강요된 회개는 회개가 아닙니다. 자발적이래야 됩니다.

 

누가 하라서 하는 회개는 회개가 아닙니다. 벌이 무서워서 심판이 무서워서 형무소가 무서워서 그건 회개가 아닙니다. 비난도 상관이 없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강요되어서 억지로 하는 회개, 이런 회개는 회개가 아닙니다.

남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내 양심을 내가 살피며 자발적으로 자원해서 회개하는 회개만이 진정한 회개요 또 열매를 맺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많은 사람들이 회개는 하면서도 이 현실에 안주하려고 합니다. 떠나기를 싫어합니다. 아주 이상합니다. 담배가 나쁜 줄 알면서도 끊지 않습니다. 이건 나쁜 줄 알면서도 여전히 거기서 매력을 느끼고 있어요.

 

그것을 즐기고 있어요. 심지어는 아주 위험한 모험을 모험을 즐기고 있어요. 언제까지 그럴 것입니까? 벌써 죄악된 생활에 길들어 졌어요. 심리적으로 길들어져서 아주 그 생활에서 떠나기를 싫어해요. 저는 그런 학생을 보았어요.

 

3학생이에요. 공부 열심히 하다가 병들어서 병원에 갔어요. 물론 병원에 있는 동안 공부 안했어요. 병은 나았어요. 그런데 자꾸 아프데요. 아픈 동안 모든 문제가 없으니까 그렇게 잔소리하던 어머니도 잔소리가 없고 그 병원에서 나오려고 하질 않아요.

 

의사는 아픈 거 없다는데 여기가 아파요. 저기가 아파요. 내 그런 놈을 봤다니까요. 정말 딱 하더라고요. 그래서는 아침 늦게까지 안 일어나요. 도대체가……. 가만히 보았더니 여기서 헤어나오려고 하지를 않아요. 그래서 내가 물었어요. "너 낳고자 하느냐?" 그랬어요.

"! 나아야지요." 그래서 "거짓말하지마!" 그랬습니다. 여러분 안주하려는 마음이 무서운 것이에요.

 

, 그렇다면 회개라는 것은 은총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만 얘기할 수가 있는 거예요. 먼저는 회개의 기회를 주셔야 됩니다. 내가 회개하고 싶었는데 그만 갑자기 차사고로 죽었다. 이거 회개 못합니다. 그래서 전 생각합니다. 가끔 그런 지도도 합니다.

 

병원에 입원해 가지고 몇 달 동안 병원에 있으면서 친구를 불러다가 사과하고 자기 부인에게 내가 그 동안 잘못했소 그런 장면을 내가 볼 때 본인에게 얘기합니다. 당신은 복이 많다고 죽고 사느냐의 문제가 아니오. 회개할 기회가 있잖아. 이게 얼마나 큰 축복이냐 그래요.

 

그 때 가서 울음을 터뜨리는 걸 봅니다. 만일에 꽝하고 죽었으면 어떻게 되겠냐. 이같은 회개를 할 수 있었겠냐. 회개의 기회를 주셔야돼요. 가룟 유다라는 사람을 여러분이 압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번 여러번 기회를 주셨지만 끝내 회개하지 않고 그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 일에 가담을 했고 그 다음에 뉘우쳤지마는 돌이킬 길이 없었어요. 이미 때는 지났어요. 이런 우스운 얘기가 있습니다. 11시에 회개하겠다고 했는데 10시 반에 죽었다고요. 하나님이 회개의 기회를 주셔야 됩니다.

 

또 하나님이 믿음을 주셔야 됩니다. 무슨 믿음인가. 사랑에 대한 믿음이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이 아직도 나를 사랑하신다. 내게 향한 하나님의 약속이 있다. 그것을 믿을 때 진정한 회개가 있는 거요. 아무리 때려도 거기에는 회개가 없습니다.

 

아이들 우는 거 같으면서 잘못했다고 말을 하지만 속으로는 두고보자 그런데요. 참으로 회개는 사랑을 깨달을 때만 있습니다. 어떤 고등학교 학생이 아버지 어머니 잔소리가 싫어서 집을 나가 버렸어요. 어머니는 기가 막힙니다.

 

그럴 줄은 몰랐는데 한 달을 수소문 해가지고 겨우 아이가 있는 집을 찾았습니다. 계단 밑에 있는 조그만 방 하나를 얻어가지고 거기서 자취를 하고 있는 거예요.

거기에 아이가 없을 때 들어가보고, 보니 방안이 엉망이에요. 냉장고는 텅텅 비어있고 옷은 여기저기 벗어가지고 내던졌고. 어머니가 하루종일 다 청소하고 말끔하게 씻어줬어요. 냉장고를 가득히 채웠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않고 냉장고 벽에다가 그 아이의 백일사진을 떡 붙여놓고 왔습니다. 어머니가 백일 된 아이를 안고 너무 좋아하는 그 모습을 딱 붙여놓고 왔습니다. 애가 저녁에 돌아와서 그걸 보고 통곡을 했습니다. 왜요? 어머니는 지금도 나를 사랑하신다.

 

그리고 돌아왔습니다. 여러분, 말이 필요가 없습니다. 믿음이 가야됩니다. 사랑에 대한 믿음이 가야 됩니다. '아직도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구나. 하나님은 지금도 나를 사랑하신다.' 십자가를 쳐다보면서 그 사랑을 확인하게 될 때에 그 사랑에 감격하게 될 때에 그때에 흘리는 눈물이 진짜요.

 

형벌이 무서워서 회개하는 회개는 회개가 아닙니다. 내가 무서워서 회개하는 회개가 회개가 아닙니다. 형무소가 무서워서 벌벌 떠는 것도 회개가 아닙니다. 오로지 사랑을 믿으며 회개하기.

 

또한 회개에는 하나님께서 용기를 주셔야 됩니다. 용기가 없는 자는 회개 못합니다. 구약에서 보면 다윗이라는 사람을 압니다. 그는 엄청난 죄를 지었습니다. 남의 아내를 취했을 뿐더러 그 남편을 죽였습니다.

 

숨겨졌던 악이지만 나단 선지가 와서 당신이 죄인이요 할 때 그는 왕의 보좌에서 아무 거리낌없이 무릎을 꿇었습니다. 내가 죄인입니다. 내가 죄를 지었나이다. 회개의 용기가 있었습니다. 용기 없는 사람은 회개 못합니다. 회개해야지, 해야지, 그리고 한평생 찌그러진 얼굴로 삽니다.

 

구겨진 얼굴로 삽니다. 병든 양심으로 삽니다. 회개에 용기가 필요합니다. 어떤 용기요? 명예와 지위와 체면 다 내동댕이쳐야 됩니다. 왜요? 진실이 먼저니까. 이까짓 체면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다 내 던져야 됩니다. 그리고 모든 운명을 하나님께 맡길 겁니다.

 

회개한 다음에 되어지는 일, 그 어떠한 일이었다 하더라도 상관할 것 없습니다. 모든 운명을 하나님께 맡기는 그 용기가 있고야 회개할 수 있어요. 회개가 쉬운 게 아니에요. 회개의 열매란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힘을 줘야됩니다. 위선을 벗어버리는 힘을 주셔야 됩니다.

 

거짓을 활짝 벗어버리는, 체면같은 것 던져버려야 회개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회개하지 못하고 그냥 자꾸 미뤄 미뤄 가는 동안에 점점 수렁으로 빠져들고 그 어느 때에 가서는 회개할 수가 없게 되어버립니다. 회개할 때에 비로소 자유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비로소 얼굴이 밝아질 수 있습니다. 참으로 회개할 때에 병도 치료받을 수가 있습니다. 환한 양심 환한 얼굴 온전한 인격을 다시 세우게 될 것입니다. 탈무드에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것처럼 마음 가벼운 일은 없다."

 

어떻습니까? "I am sorry. That's my fault" 하는 순간, 마음은 편안해 집니다. 미안합니다. 그럼 그건 내 잘못이었어요. 이보다 더 신바람 나는 일은 없어요. 그런가하면 자기가 옳다고 고집하는 것처럼 마음 무거운 일은 없다. 알아서 하세요. 어느 쪽을 선택하시렵니까?

 

내가 옳고 내가 잘났다고 하면서 점점 썩어가는 운명을 갈 것입니까? 아니면 그건 내 잘못입니다, 하고 환하게 광명을 찾을 것입니까? 회개는 사람을 자유케 합니다.

 

오늘 성경에 말씀하십니다. "속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지 마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는 특권의식이 내 죄를 정당화할 수는 없어요. 내 과거에 새운 공로가 오늘의 죄를 정당화 해주지 못합니다.

 

과거에 아무리 좋은 일을 많이 했고 아무리 특권이요 아브라함의 후손이라 해도 오늘 죄는 오늘 죄요, 오늘 죄인은 오늘 죄인입니다. 그 화려한 과거가 오늘 나의 이 불의함을 씻어줄 수 없다는 걸 알아야 돼요. 또한 조상의 의, 즉 아브라함의 의가 내 죄를 사할 수는 없는 거예요.

그 자손 되었다고 하는 것이 오늘 나의 죄를 씻어줄 수는 없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만 회개할 수 있습니다.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 것, 회개할 용기를 주시는 것, 회개할 깊은 마음을 진실을 주시는 것, 그것이 은혜올시다. 병들어서 회개하든 실패해서 회개하든 감옥에 들어앉아서 회개하든 회개는 복입니다. 회개는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은총의 기회가 됩니다.

은혜로 회개케 하시고 은혜로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게 하십니다. 여기에 승리가 있고 여기에 새로운 능력이 있고 밝은 세상이 있는 것입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저희를 부르시사 오늘도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고 회개하도록 말씀을 주시고 우리 마음에 감동을 주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주의 사랑 그 용서 그 거룩한 은총을 생각하며 감사 감격한 중에 잃어버린 진실을 찾게 하시고 참으로 회개하게 하사 온전한 자유인이 되게 하시고 밝은 빛을 지향하며 생명력 넘치는 그런 생을 살게 오로지 자유인으로 사는 저희들이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 사람의 회개 /5:1-11/ 곽선희 목사

2014-11-23 06:09:29

 

증참이라고 하는 사람은 공자선생님보다 마흔 여섯 살이나 어려서 나이로 비교한다면 공자선생님의 손자뻘 밖에는 안됩니다. 그는 아주 젊은, 어찌 생각하면 어린, 그런 제자였습니다만은 공자선생님께서는 이 증참을 가르쳐서 늘 훌륭한 사람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 증참이라고 하는 제자가 남긴 간단한 상식적인 중요한 말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일일삼성(一日三省)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일일삼성이란 말을 들어왔습니다, 어른들로부터. , 그런데 일일삼성 할 때는 하루에 세 번 자기를 반성한다 그렇게 늘 해석해 왔습니다.

 

그러나, 깊이 연구해 보면 그게 아닙니다. 매일같이 세 가지를 반성한다는 겁니다. 그 첫째가 뭐냐하면, 남을 생각하고 행동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린 언제나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말하는 거나 행동하는 거나 자기 이익을 생각하고 자기 기분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분은 매일같이 생각합니다. '나는 남을 생각하고 살았는가? 그것에 대해서 진실하고 충성되었는가?' 그런 생각을 했어요.

 

두 번째는 '친구와의 교제에 있어서 신의를 저버린 일은 없는가?' 신의. 신실한 교제의 기본인 믿음을 저버린 일이 없는가? 또 하나는 '배우지도 않고 자기도 모르면서 남을 가르친 일은 없는가?' 모르면서 아는 척, 그렇게 남을 가르치며 위선적으로 살아간 일은 없는가? 그것을 이 세 가지를 매일같이 반성해서 그와 같이 공자 선생님으로부터 칭찬을 받는 제자가 되었다 하는 얘기입니다.

 

서양사람들은 늘 입버릇처럼 또 그의 많은 책 중에서 지적합니다. 사람은 두 말을 많이 하고 잘할 줄 알고 그래야 인격이 세워질 수 있다고 합니다. 두말. 간단합니다. Thank you! 여러분은 하루에 고맙다는 말을 몇 마디나 하고 삽니까?

 

작은 일에도 큰일에도 중심에서부터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그 감사, Thank you! 라는 말을 항상 잘할 수 있어야 그게 바로 인격자입니다.

 

또 하나는 I'm sorry.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라는 말을 잘 할 수 있어야 해요. 그런데 죄송하지만 우리는 그 공자의 문화, 유교문화, 이런 걸 좀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아주 못돼먹은 게 많아요. 마치 고맙다고 하면 자기 인격이 내려가는 줄 알아요. 게다가 "내가 잘못했습니다" 라는 말을 하면 아주 족보가 망가지는 줄 안 다니까요?

 

그래가지고 죽을 때까지 I'm sorry 한 번도 못해보고 죽는 사람도 있어요. 되게 못됐지요. 참으로 저질 인간입니다. 볼 것 없어요. 여러분 우리는 "고맙습니다" 그리고 "미안합니다. 그건 제 잘못입니다." 이것을 아주 쉽게, 또 자주 그렇게 마음에서부터 말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훌륭한 인격자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실 때 첫번 말씀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하고 말씀하십니다. 그 심리학적으로 말하면 "내가 잘못했습니다"그러라 그 말이에요. 그런 마음으로 돌아가라 그 말이에요. 하나님의 뜻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오직 회개뿐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도 회개요, 내 인격을 높이 세울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회개에 있습니다.

 

1963년이니까 아주 옛날 얘기이구만요. 제가 처음으로 유학을 갔을 때 어리둥절합디다. 참 거 큰 미국에 가서 보는 것 듣는 것이 다 신기하기만 해요. 그런데, 마침 한국의 고아들을 위해서 많은 연보를 해서 보내시는 분이 저를 만나서 같이 저 뭐 영어도 잘 못하는데 식사를 대접하겠다고 해서 아주 클럽 식당인데 굉장히 화려하고 큰 그런 식당에 들어가서 저녁 식사를 대접받게 되었습니다.

 

뭐 그때 사정으로서는 내 일생 처음이죠. 그런데 이 식당이 높은 곳에 휘황 찬란하게 장식해놓은 샹들리에 등은 다 불은 끄고요, 내가 앉은 식탁, 똥그란 식탁 한가운데에 촛불을 하나 켜 놓고 고걸 또 빨간 유리 갓을 또 이렇게 씌어 놨어요. 그리고 그 불이 깜빡깜빡하는데 이렇게 하고 이제 식사를 하는데 도대체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잘 보이지도 않더라구요.

 

이러다가 손가락을 베일는지도 모르겠어요. , 그런 상황이라서 내가 공부하러 간 터에 무엇을 못 물어보겠습니까? 거기 나이 많은 웨이터가 나와서 봉사할 때에 "웨이터, would you tell me 이거 왜 이렇게 깜깜하게 하고 먹으라는 거요? 아 저거 불 키면 좋을 텐데 이거 어둡게, 왜 이렇게 하고 식사를 하라는 거냐?"하고 물었더니요,

 

그분이 싱글싱글 웃으면서 진리를 말해주었습니다. "보자하니 뭐 나이 그만큼 들었으니까, 손가락 베지는 않을 것 같다고. 또 한 가지는 이렇게 불그스레한 얼굴 불빛에 비추어 보면 맞은편에 앉은 사람이 미인 아닌 여자가 없고 미남 아닌 남자가 없다는 거예요. 여러분, 그 방안에 불 너무 크죠? 밝게 켜지 마세요.

 

불그스레하게 이렇게 해 놔야 주름살도 안보이고 그저 다 예쁘게 보인답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어두운데 비추어보면 다 예쁘게 보인다 그말이에요. 여러분, 여자 분들이 화장을 합니다만은 그 화장도 그게 원래 위장술이거든요.

 

그건 어두운데서 통하는 거예요. 대낮 밝은 빛에 햇빛에 비추어 보면 화장한 거 못 봐줍니다. 그렇지 않아요? 그런고로 우리가 이래 혼탁한 세상에 죄악 중에 사니까 내가 깨끗하고 내가 잘났고 뭐 그런 거 같지. 다 그럴 듯 하게 보이지만, 하나님의 그 밝은 심판대, 밝은 빛 앞에 비추어보면 그 모든 것이 다 노출이 되요. 모든 것이 다 이렇게 드러나게 되면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신앙의 사람, 누구입니까? 다른 사람은 죄라고 생각도 안해요. '뭐 그까짓 것'하고 지나가지만 믿는 사람은 안 그래요. 당연히 도와줘야 될 사람을 도와주지 못했고 용서해야할 사람을 용서하지 못했어요.

 

이럴 때에 그는 괴로워서 잠을 못 자는 거예요. 다른 사람은 죄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까지도 민감하게 죄라고 생각하고 안타깝게 뜨겁게 회개하며 사는 바로 그 사람이 인격도 있는 사람이요 신앙도 있는 사람이다, 하는 말입니다. 회개의 깊이와 은혜의 높이는 언제나 이렇게 반비례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회개해야 될 줄 알면서도 회개 안 합니다. 아니, 회개를 못합니다. 이런 사람은 회개하지 못합니다. 죄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 또는 모든 것을 환경에 돌리고 남의 탓으로 돌리는 사람. 뭘 잘못된 건 누구 때문이요 누구 때문이요 해버리는. 또 하나는 변명체질에 사는 사람. 무슨 일이든지 간에 잘못되었으면 내가 잘못했습니다.

 

I'm sorry. 딱 끝나고 말아야 되요. 뭐 이런데 고 다음 말이 또 따르죠. 그러나, 너도 그렇고, 그러나 누구도 그렇고, 그러나 환경이 어떻고……. 이 뒷이야기가 필요가 없는 거예요. 사과하면서 말많은 사람, 구제 불능입니다. 이유 없어요. 이건 내 잘못이요.

 

이것으로 끝이에요. 그 다음에 주가 달리면 안 되요. 그러나 어떻고, 어떻고……. 왜 이런 쓸데없는 말이 따라가는 겁니까? 내가 잘못했어요. 아주 간단한 말로 끝내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아주 변명이 아주 체질이 되었어요. 이거 배냇병신이요. 그저 말이 많아요. 이거는 영영 구제 받을 수 없는 사람이에요.

 

또 한가지는 운명론자도 회개를 할 줄 몰라요. 모든 것을 팔자 소관으로 돌려요. 팔자가 어떻고 어떻고. 특별히 교만한 사람, 겸손한 사람이 회개할 수 있지요 교만한 사람은 회개하고 싶어도 못합니다.

 

회개로 인해서 오는 후속 결과, 그 불이익에 대해서 걱정을 하기 때문에 그는 회개할 수가 없어요. 만사에 원망과 불평으로 사는 사람, 이 사람은 회개하지 못합니다. 그런고로 그 심령이 그 몸이 계속 썩어가고 있는 거예요. 회개할 때만이 그 영혼이 온전히 자유할 수가 있는 것이죠.

 

회개의 종류가 몇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지적으로, 지적인 회개로서 죄를 인정해야 합니다. 이건 누구에게 말할 것 없어요. 내 잘못이요, 내가 원인이요. 내 잘못이라는 걸 인정하는 지적인 회개가 있어야 되고요, 변명 없이.또 하나는 정적인 회개가 있어요.

 

이 회개로 인해서 오는 형벌과 심판과 저주를 미리 생각을 하면서 미리 느끼면서 통분해 하는 것이에요. '이런 일은 있을 수가 없는데' 하고 가슴 아파하는 통분함이 있어야 되요.

 

또 하나는 의지적인 회개입니다. 잘못된 줄 알았으면 거기서 멈추는 거예요. 결단하고 멈추는 거예요. 그것이, 그리고 돌이키는 것, 이것이 회개입니다.

 

회개의 동기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고통스러워서 너무 마음이 아프고 괴로워서 그 심리학적 이유 때문에 그 가책 때문에 그 가책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회개하는 사람이 있지요.

미국에 심리학자인 마틴 샐리그마 라고 하는 분이 그의 책 가운데서 말합니다.

 

삶을 우울하게 비판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그 첫째가 뭐냐하면 영구성입니다. 변화를 믿지 않아요. 나는 이대로 머물 수밖에 없고, 이대로 반복될 수밖에 없다. '내 이 잘못, 또 이런 행위는 고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해요. 변화를 인정하지 않는 거죠.

 

또 하나는 확산형입니다. 그래서 '내가 하는 일이 다 그 모양이다. 너는 구제 불능하다. 이것도 못했고 앞으로도 아무 것도 못할 것이다.' 스스로 자기를 절망적으로 평가하고.

그 다음에 개인성입니다. '모든 것은 나 때문이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나 자신에 문제 있다' 하고는 자괴감에 빠져요. 자기 스스로를 완전히 불가능한 존재로 평가해 버립니다. 거기도 회개가 없습니다.

 

회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재창조적 역사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믿음에서 출발하는 것이에요. 때로는 형벌이 무서워서 회개하는 경우도 있지요. 뭐 형벌을 피하려고, 어쨌든 벌을 면하기 위해서 잘못했다고 할 수 있게 되지요. 이것은 율법적인 것입니다.

 

또 하나는 어이없게도 보상을 바라고 대가를 요구하면서 회개하는 것이 있어요. '이렇게 하면 상을 받을 것이다. 이렇게 회개하면 용서받을 것이다. 축복이 올 것'이라고 그런 보상 심리적으로 회개하는 수가 있습니다. 생각하면 이 모든 회개는 그리 아름다운 회개가 아닙니다.

 

문제는, 은혜와 은총에 감사하면서 감격한 중에 회개하는 그 회개가 진정한 회개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매를 맞으면서 "잘못했습니다" 라는 말하고, 어머니가 그에게 용서하고 사랑을 베풀어 줬을 때, 잘못한 걸 다 알고도 사랑했을 때 그의 가슴에 안기면서 "어머니,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는 그 회개와 얼마나 큰 차이가 있습니까? 은혜 가운데서 회개하는 회개가 진정한 자기 정체의식이요 진정한 회개란 말씀이죠.

 

오늘 본문에 잠깐 나타난 사건이지만은 이 가운데 예수님과 우리 인간의 관계, 회개가 무엇인가를 잘 말해줍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에 참 이상하게, 엉뚱하게 나오는 말 한마디가 있습니다. 분명히 베드로가 물고기 잡았다는 얘기예요. 그런데 여기에 물고기 잡아놓고 베드로가 하는 말이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말합니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 시간에 그가 무엇을 무서워하고 있습니까? 매를 맞았습니까? 저주를 받았습니까? 병이 걸렸습니까?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 엄청난 은혜를 체험하는 시간입니다. 그 은혜 앞에 자기를 비추어 볼 때 나는 너무 초라하고 너무나 못됐어요. "하나님,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렇게 고백하게 됩니다.

 

여러분 아시는 데로, 이제 무슨 일이든지 한번 끝낸 다음에 다시 시작하는 건 거 귀찮은 일이거든요. 밤새껏 물고기를 잡느라고 수고하다가 그물을 씻어서 지금 다 말려서 걸어놓았습니다. 이제 일을 끝낸 거예요. 정돈해 놓았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지금 그물을 내리라는 거예요. 그뿐만 아니라 이 사람들이 바다에서 한평생을 산 사람들입니다.

 

그물이란 깊은 데서 내릴 수 있는 성격이 못돼요. 그래서 언제나 밤에 어두운 때에 얕은데서 그물을 내리거든요. 그런데 오늘 대낮에 이건 전혀 상식 밖이에요. 특별히 예수님은 목수예요. 베드로는 어부로서 호수에서 한평생을 산 사람이요.

 

목수가 어부에게 "깊은데 그물을 내리라." 시간적으로나 장소적으로나 지식적으로나 경험적으로나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거예요.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많은 설교를 하신 다음에 감동을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지금 깊은 데 가서 그물을 내려라." 베드로의 생각은 확실했습니다.

 

'이건 못 잡는다. 못 잡을 건 뻔하다.' 그래도 오늘 성격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물을 내려 밤새껏 수고하여 잡은 것이 없습니다만은" 거기다 괄호하고 하나 더 넣어야 되요. '이제도 못 잡을 것이 뻔합니다만은'

 

"말씀하시니까 그물을 내리리이다."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인격과 그 말씀하시는 분의 체면을 보아서 일단 내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하고 깊은데 가서 그물을 내렸는데 물고기를 가득 잡아서 그물이 찢어지게 됐다. 이때에 그는 충격을 받습니다. 왜요?

 

내가 분명히 의심하고 했거든요. 순종은 했으나 믿음은 없었어요. "물고기 잡어라" 할 때에 "아이고 감사합니다. 이제는 만선이 되었습니다" 그때 감사했어야 되는데 그런 마음 없었어요. 감격도 없고 기쁨도 없고 다만 "그저 하라 하니 합니다. 안될 줄 알지만 합니다." 억지로, 부득이 순종을 했더랍니다.

 

, 이제 문제예요. 주께서는 그것을 꾸짖지 아니하시고, 너무 중요한 거예요. "이 믿음 없는 사람아" 이렇게 책망하지 아니하시고, 이 믿음 없는 행위에 대하여 주께서는 모두 다 용서하시고 물고기를 많이 잡도록 해주었단 말이에요.

 

물고기 잡았다는 문제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나의 불신앙을 용서해 주신 것, 나의 불신앙을 이렇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수용해 주신 것. 예수님께서 이렇게 나를 덮어주신 거예요. 너무 감사한 거예요. 그래서 그는 이렇게 부르짖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진정한 회개는 은총 속에 있는 것이에요. 감사와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에요. 사랑을 느끼며 회개하는 그 회개가 진짜 회개란 말이에요. 구약성경에 보면 욥기 42장에 볼 것 같으면 그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습니까?

 

10남매나 되는 자녀를 잃었지요, 재산을 다 잃었지요, 몸의 건강을 잃었지요, 많은 친구를 잃었지요.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할 때 너무 힘들어서 그는 어머니가 나를 왜 세상에 낳아 놓았던가. 낳으셔서 왜 나를 이렇게 젖을 먹였던가?

 

너무 살기가 힘들어서 그는 이렇게 부르짖었어요. 원망 아닌 원망을 했어요. 그러나 이 모든 어려운 시간이 지나간 다음에 하나님이 다시 은혜를 주실 때 배나 주셨어요, 배나. 더 많이 주었어요. 그때 그는 말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하나님이여 전에는 내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더니 고난 중에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내가 지난날에 분명히 잘못했습니다. 이제 재를 무릅쓰고 회개하나이다. 욥기에 처음 나오는 말이에요. 회개하나이다.

 

그가 징계를 받으며 회개한 게 아니에요. 큰 은혜를 받으면서 너무 감격해서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그간에 믿음이 없었던 거, 원망한 거, 불평한 거, 참 잘못됐습니다" 그때 회개하더란 말입니다. 이 회개가 높은, 하나님의 사람의 회개란 말이에요.

 

리스트에 대한 유명한 얘기가 있습니다. 유명한 작곡가 리스트가 어느 날 저 독일에 조그마한 마을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 마을에는 마치 아주 피아니스트 하나가 있는데 이 아가씨가 피아노 독주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사방에 광고를 써 붙이고 또 소문을 내게 되었습니다.

 

신문에도 내고. "아무개가 피아노 독주회를 가집니다. 그리고 그는 리스트의 제자입니다" 이랬단 말입니다. 그 리스트의 제자라면은 아주 명예가 높아지는 거거든요. 그런데 독주회하기 바로 전날 리스트가 이 마을을 방문했습니다. 이 여자는 리스트의 얼굴도 본 일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 여자가 이것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리스트가 여기 왔으니 이제 난 죽었다.' 그래서 숙소에 찾아가서 무릎을 꿇고 엎드리고 빌었습니다. "저는 고아출신으로 혼자서 피아노를 배웠고, 이제 독주회를 가지려고 하는 타임에 선생님의 고귀한 이름을 제가 이렇게 도용을 하고 선생님의 제자라고 광고를 했는데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많이 회개를 했습니다.

 

리스트가 껄껄 웃으면서 "큰 실수를 했구먼요. 그러나 누구나 실수는 한답니다. 이리 오세요. 피아노에 앉아서 한 곡을 치세요." 그래서 잠깐 피아노를 쳤습니다. 리스트는 말했습니다. "여기 이렇게, 이렇게 조금 달리 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리고 리스트가 하는 말이 "분명히 내가 당신을 가르쳤습니다. 그런고로 이제는 당신은 분명히 내 제자입니다.

떳떳하게 나는 리스트의 제자라고 말할 뿐 아니라 연주회에 내가 참석하겠는데, '마지막 곡은 제 스승 되시는 리스트 선생께서 하시겠습니다' 라고 하세요. 제가 한 곡 쳐드리겠습니다." 이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거기서 눈물을 흘리고 진정으로 회개합니다. 그 회개가 진짜입니다.

 

믿음이 없는 것을 알고도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기적을 보여줍니다. 그가 회개할 때에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너는 사람 낚는 어부가 되리라. 내 제자가 되라." 베드로는 예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한, 큰 죄를 지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 과거를 묻지 않았습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 그것으로 끝입니다. 베드로는 이에 감격해서 예수를 위해 삽니다. 닭 우는 소리가 날 때마다 닭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모른다고 하리라' 한 말씀을 생각하면서 닭소리만 나면 엎드려 회개했다는 겁니다.

 

그는 예수를 위하여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됩니다. 내가 회개하기도 전에, 내가 죄를 다 회개하기도 전에 벌써 용서하시고 은총을 베푸셨어요. '그 은혜에 감격해서 이제 회개합니다. 아니 일생을 회개합니다.' 바로 그 회개 속에 창조가 있고 능력이 있고 위대한 역사가 있는 것이올시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어리석고 우둔한 저희들, 당연히 회개해야 할 사람이 회개하지도 않고 하지도 못하며 살아가는 미련한 저희들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 크고 위대한 은혜를 매일매일 새롭게 감격하면서 더 깊이 회개하고 또 다시 회개하면서 더 큰 능력을, 회개하는 자에게 주시는 능력을 체험하며 살아갈 수 있게 은혜 더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 수난자의 회개 /42:1-6/ 곽선희 목사

2014-11-27 15:39:09

 

제너럴 일렉트로닉사의 회장이었던 잭 웰치(John Frances Welch Jr)라고 하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CEO가 있습니다. 그의 저서는 너무나도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끝없는 도전과 용기라고 하는 책은 많은 사람에게 큰 용기를 주었습니다.

 

그는 이 책에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 중요한 태도에 대해서 간결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공이라는 것은 얼마나 거창하게 예측을 잘 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수시로 직면하는 변화들에 대하여 얼마나 빠르게 대처하느냐 하는 데에 좌우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고통이라는 것은 단지 예측하지 못한 변화일 뿐입니다. 여러분, 고통이라는 사건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내가 예측하지 못했던 사건, 그것이 바로 고통이라는 말로 바뀌는 것이고, 문제는 그 고통에 내가 어떻게 대처하느냐하는 것입니다.

 

고통은 예측하지 못한 변화일 뿐만 아니라 나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내가 함께 변할 수 있다면, 넉넉하게 이 변화를 감당할 수 있다면 결코 고통은 고통 될 수가 없습니다. 또한 자기 자신에 대하여 진실하고 타인에 대하여 끝까지 정직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성공의 기회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고통에 대해서,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통해서 스스로의 가능성을 창조해 나가는 것이다. 여러분, 우리가 견딜 수 없을 만큼 큰 사건에 직면합니다만 대체로 큰 성공은 바로 이런 사건 앞에서 이루어지는 겁니다. 순탄한 가운데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역경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올시다.

 

아주 오래전 얘기입니다만 기억에 생생합니다. 어떤 사업가가 여기서 사업을 잘 하시는 분인데 상당한 돈을 투자하면서 러시아로 사업을 확장하고 있었습니다. 늘 러시아에 왔다, 갔다 합니다. 내가 만나서 물었습니다.

 

"러시아가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지금 매우 혼란한데 왜 거기 가서 돈을 벌겠다는 거요?" 그런데 그의 대답은 아주 충격을 주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질서가 다 잡힌 데서는 돈을 못 법니다. 혼란한 가운데서 큰 돈을 버는 겁니다." 그 말은 일리가 있었습니다. 깊이 생각할 문제죠.

 

이외수라고 하는 분이 쓰신 그대에게 던지는 사랑의 그물이라고 하는 아주 재밌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험난한 길을 선택한 인간은 길을 가면서 자신의 욕망을 버리는 즐거움을 느끼며 산다.'

 

그래요. 원치 않는 사건에 계속 부딪힐 때마다 우리는 잘못된 욕망을 계속 버려야 돼요. 잘못된 욕망을 버리는 즐거움, 이걸 모른다면 길은 없는 겁니다. 또한 '평탄한 길을 선택한 인간은 길을 가면서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기쁨에 산다.'

 

순탄한 길을 살아온 사람은 대개 이런 형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전자의 사람은 갈수록 너그러워지고 후자의 사람은 갈수록 사람이 옹졸해 진다.' 깊이 생각할 교훈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고난이라고 하면 적어도 성경에서는 고난의 교본적 사건이 욥의 이야기입니다. 욥기는 고난의 서사시입니다. 원래가 기록이 조로 돼 있습니다. 욥은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큰 고통을 당합니다. 여기서 고통의 위계설을 말하기도 합니다.

 

자세히 보세요. 여러분이 당할 수 있는 고통이 여러 가지 있는데, 그 고난의 성격을 가만히 분석해 보면 거기도 위계가 있어요. 여러분, 재산이 아무리 뭐 중요하다, 중요하다 해도 모든 고난 중에 제일 작은 고난이 돈으로 인한 고난입니다.

 

욥이 큰 부자였어요. 동방의 일등 가는 부자였는데 맨 처음 당한 고난이 재산을 홀랑 잃어버리는 겁니다. 하루아침에 거지가 되는 겁니다. 재산, 그렇게 애써서 모은 재산이 다 떠나버리고 맙니다. 이것이 제1단계 고난입니다. 다시 생각하십시다. 이건 1단계 고난이라니까요. 고난 중에 제일 작은 것이에요.

 

두 번째 당한 고난이 가정입니다. 10남매나 되는 자식이 한꺼번에 죽어 버립니다. 아내는 남편을 저주하고 집을 떠나버립니다. 홀로 남았습니다. 가정을 잃어버린다고 하는 아픔, 이것은 재산에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건강을 잃어버리는 겁니다. 재산이 대수겠습니까. 뭐니 뭐니 해도 내 건강 잃어버리는 것, 그거 어려운 겁니다. 그래서 욥은 온 몸에 창기가 나서, 구더기가 나올 정도로 썩은 냄새가 나고, 너무 가려워서 긁고 잿더미에 뒹구는 비참한 신세가 됐습니다.

 

건강을 잃어버린다. 이것이 제3단계의 고통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인간이기에 이보다 더 어려운 고통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명예를 잃어버리는 겁니다. 모든 사람이 손가락질 합니다. , 저 사람 저주 받았다고 합니다. 하나님 섬기는 사람이 저주 받았다고 합니다.

 

명예, 이것은 그보다 더 큰 고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보다 더 어려웠던 것은 하나님 앞에서 의()를 잃어버렸습니다.하나님께서 내 의를 인정하지 않는구나. 하나님 앞에 내세울 의가 없습니다. 마치 저주받는 것처럼 이 고통이 가장 어려운 최고의 고통일 것입니다.

 

여러분, 욥은 이런 어려운 고통을 계속 당합니다. 힘에 지나친 고통을 당합니다. 나아가서는 삶 자체를 부정하고 자기의 생일을 저주합니다. 왜 어머니가 나를 낳았던고. 왜 내게 젖을 먹였던고. 차라리 낳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인데. 생 자체를 부정합니다.

 

뿐만 아니라 친구들이 찾아와서 그를 위로한다고 말하는데, 참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입니다. 47절에 보면, '잘 생각해 봐라. 하나님이 살아계시는데 죄 없이 망한 자가 있더냐.' 은근히 사람을 죽입니다.

 

'죄 없이 망한 자가 있더냐. 잘 생각해 봐라. 깊이 숨은 죄가 있는 것 같다.' 참 어렵습니다. 여러분, 고난당한다고 다 저주받은 게 아니잖아요. 또 고난당하지 않는다고 그가 의인인 것도 아니잖아요.

 

그러나 사람들은 돈 벌면 축복이라고 그러고 돈 잃어버리면 저주 받았다고 그래요. 건강하면 축복이라고 그러고 병들면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았다고 그렇게 생각을 해요. 그렇게 비판을 해요. 그렇게 보고 있어요. 동시에 자기도 그렇게 느껴요. 이 고통이 가장 어려운 고통이었단 말입니다.

 

, 그런데 이런 어려운 고통이 다 지났습니다. 이 고통을 잘 견뎠습니다. 하나님이 귀히 보실 만큼 잘 참고 견디고 견뎠습니다. 이제 책의 끝에 가서 42장에 보면, 하나님은 욥에게 큰 복을 주었습니다.

 

과거보다 배나 되는 복을 영육간에 주었습니다. 그때 가서 성경에 첫 번으로 '회개'란 말이 나옵니다. 그렇게 어려운 고통을 당할 때 회개한다는 말 없었습니다. 이제 다시 회복하여 은총을 입을 때 비로소 '회개'라고 하는 말을 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채찍을 맞으면서 회개한 게 아니고 사랑을 느끼면서 회개한 것이에요. 저주를 느끼면서 회개한 것이 아니고 은혜 중에서 회개한 것입니다. 진노 앞에 벌벌 떨면서 회개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과 그 은혜의 경륜을 생각하며 이제서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게 됩니다. 은총 중에 회개합니다. 욥기 23장에 보면 그가 말합니다. '나의 운명은 당신만이 아십니다. 오직 그가 아신다고 말합니다. 완전히 손을 들었습니다.'

 

노먼 빈센트 필(Norman Vincent Peale)이라고 하는 유명한 저술가의 믿는 만큼 이루어진다라고 하는 세계적인 명저가 입습니다. 그 책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인격의 성숙을 위하여 혹은 그 영혼의 순수함을 위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보다 더 성숙하기 위해서는 3단계를 거쳐야 한다.

 

첫째는, 겸손이다. 낮아지는 마음이다. 우리는 고난당할 때마다 낮아집니다. 계속적으로 낮아져야 합니다. 여러분, 얼마나 낮아져 봤습니까? , 끝까지 낮아져야 됩니다. 발이 땅에 닿을 만큼 낮아져야 됩니다. 재가 될 만큼 낮아져야 됩니다.

 

바로 그것을 위하여 고난은 있는 거니까요. 낮아지라고. 좀 더 낮아지라고. 그 낮아진다는 것, 마음을 비운다는 것이 고난이 주는 가장 중요한 성숙으로 향하는 지름길입니다.

 

둘째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어떤 고난 속에서도 불가능 속에서도 가능성을 찾고, 불가능한 것에 원망하지 않고 가능한 길을 택합니다. 그리고 가능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최선의 길을 살아가는 겁니다.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지금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셋째는, 모든 노력을 다 기울인 다음에는 조용히 하나님의 섭리를 기다리는 것이다. 이 기다림이 믿음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되는가?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가? 절대 절망하지 말고 인간적인 계산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총적 섭리를 기다리는 거예요.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기다리는 거예요. 이러할 때, 성숙한 인간으로 나타나게 된다. 높은 수준의 신앙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은총으로 그 은총 속에서 다시 자신을 돌아보게 될 때 수난과 시련이 저주가 아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저주와 심판, 진노라고 느꼈던 것을 회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만일 감옥에 갇혔다고 합시다. '내가 왜 감옥에 있어야 하지? 내가 왜 이런 시련을 겪어야 하지?' 여러분, 전 저의 아버지가 내 앞에서 총살당하는 것을 봤습니다. 강제노동 수용소에 끌려가서 7개월 동안 무지한 고생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 '이것이 저주입니까? 하나님은 왜 내 죄를 심판하십니까? 왜 나를 벌하십니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강제노동수용소에 들어가 있으니까 편안했습니다. 집에 있을 때, 교회 왔다 갔다 할 때, 이거 언제 체포당할는지 또 어떤 일이 생길는지 알 수가 없어요. 불안해요.

 

하룻밤도 편안하질 않아요. 그런데 아예 광산에 끌려가서 떡 누워보니까 편안합니다. 왜요? 여기서 죽으면 천당은 직행이니까요. 아무 걱정 없습니다. 정말 자유함을 느꼈어요. 마음으로서는 이렇게 편할 수가 없어요.

 

여러분, 그걸 꼭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당하는 시련, 그것은 저주가 아닙니다. 그 속에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있고, 하나님의 어루만지는 손길이 있고, 이것이 사랑임을 깨닫게 될 때 혹시라도 저주받는 것처럼 심판받는 것처럼 낙심했던 길 회개해야죠. 바로 그것을 회개하는 것이에요.

 

욥은 욥기에서 수없이 질문을 했습니다. '왜 이렇습니까? 왜 이래야만 합니까? 왜 나만 고난당해야 합니까? 하나님이여, 왜 그렇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한없이 물었습니다. 어찌 생각하면 무모하기도 하고 뜻 없는, 아무 의미 없는 고난을 당하는 것 같아요.

 

버려진 것 같아요. 하나님은 내게 전혀 관심도 없는 것 같아요. 그러나 이제서보니 아니었어요. 그 속에 목적이 있었어요. 뜻 없는 사건이 하나도 없었어요. 하나님의 하시는 신비로운 의미, 신비로운 경륜이 그 속에 있었어요.

 

이제서 깨닫고 보니 부끄러워요. 하나님, 회개합니다. 진정한 회개입니다. 시련을 통해 세상으로부터 멀리 나를 옮기셨고 하나님께 가까이 가게 하셨어요. 그래서 그는 말합니다. "전에는 귀로 듣기만 하더니 이제는 보나이다."

 

시련을 통해 하나님께 가까이 갔어요. 내가 버리지 못하던 것을 버리게 했어요. 끊지 못하던 것을 끊게 했어요. 게으르던 사람 부지런하게도 하세요. 영영 과거로 맴돌던 사람을 미래로 잡아끌어서 나를 여기까지 인도하셨어요.

 

, 하나님 그 동안 하나님 원망한 거 마치 저주받은 자인 것처럼 착각한 것, 불신앙적으로 생각하고 말한 것 자복합니다. 잘못했습니다. 이렇게 회개하고 있습니다.

 

우스운 얘기입니다만 제가 소망교회에서 목회할 때, 참 지지리도 공부를 못해서 대학 예비고사를 보는데 삼수를 하고도 떨어진 아이가 있어요. 난 그 아이의 어머니 만났을 때마다 하도 여러 번 떨어지니까 만났을 때 '시험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라고 물어보지도 못했어요. 민망해서.

 

그랬더니 본인이 말해요. “또 떨어졌어요.” 그래요. 그래서 , 그러냐고.” , 그거 또 떨어졌다고 하는 그 얼굴이 절대 어둡질 않아요. 그래서 마음에 이상한 감동이 와서 "그 아이가 공부를 잘 못하는가 본데 나한테 보내세요." 말했습니다.

 

왔어요. “너 공부 재미없지?” “재미없어요. 우리 어머니한테 얘기해서 대학 포기하라고 좀 그렇게 말해 주세요.”

 

, 그런데 이거 잊지 마라. 공부란 두 가지 조건이 있다. 하나는 재미가 있어야 되고 또 하나는 기초가 있어야 된다. 너는 공부에 재미가 없어. 그러니 안 될 터. 또 하나는 중학교 1, 2학년을 잘해야 되는데 너는 고3만 공부했으니 되겠냐? 기초 없는 고3, 아무리 해봐야 소용없어. 집어치워라."

 

"아이구, 목사님 감사합니다." "그래 내가 너를 중국에 보내주마. 중국 베이징 대학에 가서 2년 풀코스다. 가서 중국말이나 열심히 배워라." 보내줬어요. 그 때 뭐 돈 한 달에 100불이면 될 때에요. 갔어요. , 겨울방학에도 안 돌아왔어요. 그 열악한 환경에서도 절대 여름에도 안 돌아오고 2년 동안을 아주 공부하더라구요.

 

2년 후에 돌아왔어요. 내 방에 들어왔을 때, "너 중국말 좀 배웠냐?" ", 좀 합니다." 그래 내가 중국에다가 전화를 걸어서 중국 사람한테 한번 중국말로 하라고 그랬어요. 그랬더니 전화를 거는데 '샹샹샹샹샹' 하는데 잘 하더라구요.

 

나 못 알아듣지만 잘하더라구요. 그래서 ", 됐다. 너 그거 큰 거 하나 얻었다." , 마침 그 때 아버지의 사업이 찐따오로 가게 됐어요. 회사가 옮겨 가는데 얘가 전무가 돼 가지고 아 이걸 하게 되는데 사업을 얼마나 잘 하겠어요?

 

어머님 말대로 하면 사업도 잘하고 3년 떨어지더니 겸손하기도 하고 아 사람이 착해졌어요. 그래, 얘가 또 장가도 잘 가구요. 아주 얼마나 잘 됐는지 그 어머니 말을 들어 볼까요? 그대로 말씀드립니다.

 

"얘가 서울대학을 나온들 오늘처럼 쓰일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이래도 원망하겠습니까? 이래도 하나님이 잘못하는 겁니까? 하나님이 어디 계십니까? 나를 버리셨습니까? 그만 하세요. 그런 일 없어요.

 

나의 나 되게 함. 하나님의 사람 되게 하기 위해서 아니 나로 성숙하게 하기 위해서 이런 모든 일은 있어야 했어요. 있어야 할 일이 있을 뿐이에요. 그것을 믿어야 돼요. 그리고 최선을 다하고 또 겸손해야 돼요.

 

베드로는 누가복음 5장에 보면 갈릴리 바다에서 물고기 잡다가 한 마리도 못 잡았어요. 지금 그물을 씻어서 말리고 있는데 예수님이 떡 오셔서 "깊은 데 가서 그물을 던져라." 이건 말도 안 되는 거예요. 대낮에 무슨 그물을 던져요?

 

, 또 그물 다 씻어서 지금 걸어 놨는데 이제 또 가서 뭘 다시 한다는 거 맘에 안 들거든요. 게다가 더 우스운 것은 목수가 어부보고 이래라 저래라 이건 말도 안 되는 거죠. 그러나 베드로가 그때 아주 묘한 말을 해요. "그저 말씀하시니 그물을 내리리이다

 

한 마리도 못 잡았는데 말씀하시니 그물을 내리겠다하고, 그물을 내렸어요. 가득 잡았어요. 깜짝 놀랐어요. 그리고 베드로가 예수님 앞에 가서 무릎을 꿇고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 그럽니다. 지금 무슨 죄를 지었다는 겁니까?

 

뭐 일반적인 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랬던 것 같아요. 깊은 데 가서 그물을 던져라.그럴 때 속으로 생각하기를 '한 마리도 못 잡을 건 뻔한데, 빈 그물을 떡 들고 보라구요. 이렇다니까요.'

 

그러려고 했던 거예요. 그런데 이렇게 많이 잡고 보니까 자기 죄가 확 드러나고 말아요. 이거 불신앙에 노출됐어요. 그저 예수님 앞에 가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 회개는 참 아름다운 회개예요.

 

미처 몰랐던 것을 회개하고, 미처 감사하지 못했던 것을 회개하고, 이것이 사랑인 줄을 몰랐던 것을 회개하고, 그 능력과 지혜를 부정했던 모든 일들을 부끄러운 마음으로 죄송스러운 마음으로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걸 모르고 산 것 회개해야죠. 이 참된 회개 위에 더 높은 은총의 세계가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십시다.

 

 

-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저희들을 이 자리에 불러 주심을 감사합니다. 전쟁의 포화 속에 150만이 죽어간 무서운 6.25전쟁 속에서 우리를 지켜 주시고 이만큼의 자유를 누리게 하시고 오늘이 있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그 많은 시련 속에 그 고통 속에서 은혜의 길로 인도하신 주님, 전에 듣기만 하던 것을 이제는 볼 수 있도록 가까이 가게 하신 그 은혜를 감사하며 주께 영광 돌립니다. 이제 다시는 자신에 매이지 않게 하시고 주의 크신 은혜에 늘 감사하면서 작은 시련이든 큰 시련이든 잘 참고 견뎌서 약속하신 축복을 받는 주의 사람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참된 회개는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9:1-6/ 이재훈 목사

2023-12-24 04:36:03

 

느헤미야의 지도하에 성벽을 재건했던 백성들이 일곱째 날에 있는 절기에 모여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심령에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더 알아가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이 일어났습니다. 그로 인하여 일곱째 달에 있는 초막 절기를 지키는 것으로 시작해서 그들의 사회가 변화되었습니다.

 

더 놀라운 일이 일어났는데, 초막 절기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이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다 같이 모여 하나님 앞에 회개했습니다. 공동체적인 회개입니다. 이것은 느헤미야가 지시해서 이루어진 일이 아닙니다. 성벽은 지시와 관리와 리더십을 통해서 재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이 함께 모여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회개와 부흥의 역사는 지도자의 지시나 리더십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백성들이 성벽을 재건하는 것에 도취되어 자신들의 성공을 축하하고, 자신을 자랑하는 곳에 머물러 있었다면 이루어질 수 없는 일입니다.

 

가난한 마음, 하나님 앞에 엎드린 갈급한 마음,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음성대로, 하나님의 질서대로 살아야겠다는 갈급한 마음 위에 성령께서 불을 붙여 주신 것입니다.

 

그들은 낮 시간의 4분의 1은 율법책을 읽기 원했고, 4분의 1은 하나님 앞에 회개했습니다. 율법을 전달한 레위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도 성령의 깊은 감동을 따라 통회하고 회개했습니다. 큰 소리로 부르짖으며 하나님을 경배했습니다.

 

때로 우리의 목소리는 신앙의 깊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때로는 침묵으로, 때로는 큰 소리로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최고의 경배와 찬양을 하나님 앞에 올려드릴 때 나타나는 회개와 부흥이 진정한 성벽 재건입니다. 그들의 회개는 시간이 흐를수록 사그라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강렬해지고, 더욱 충만해졌습니다.

 

 

그 아버지가 우리 하나님입니다

 

느헤미야 9장은 회개의 장입니다. 역사를 회고하며 역사를 압축해서 드리는 회개입니다. 시편 78, 105, 106편을 읽어보면 이스라엘 역사가 정리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의 가장 중요한 내용들을 압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양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느헤미야 9장에 나타난 회개는 역사 속에서 그들의 죄를 발견하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죄의 역사보다 위대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바라보며 찬양하는 것입니다. 회개기도의 결론이 33절에 나옵니다.

 

우리에게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은 주의 잘못이 아닙니다. 우리는 잘못했지만 주께서는 성실히 행하셨습니다”(33).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끊임없이 도망치려는 역사지만, 하나님은 도망치려는 우리들을 끊임없이 찾아오시고, 추적하시고, 포기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역사는 죄의 역사지만, 하나님의 역사는 은혜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이 끊임없이 죄를 범하는 인간들을 포기하지 않으셔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시고, 죄의 사슬을 끊어주셨습니다.

 

느헤미야 9장을 보면 인간들의 죄의 역사와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맞물리면서 세 번의 사이클이 나타납니다. 반복되는 죄의 역사를 하나님 은혜의 역사가 끊고, 또 끊고 또 끊으셨습니다. 인간은 또다시 반복하고, 또 반복하지만 결국 하나님 은혜의 역사가 이깁니다. 그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회개할 수 있는 것은 우리를 기다리시고, 용서하시며, 받아주시는 아버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집을 나간 아들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맞아줬습니다. 아들이 돌아오기 전에 용서하고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였기 때문에 그가 돌아왔을 때 달려가 안아주고 기뻐하며 축제를 열었습니다. 바로 그 아버지가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하나님은 두 팔 벌려 우리의 마음을 열고,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안에서 용서하시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기다릴 뿐만 아니라 찾고 계십니다. 찾을 뿐만 아니라 추적하십니다. 추적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어떠한 상황에 있든지 돌이키려고 역사 속에서 일하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을 자신들의 역사를 회고하며 고백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회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회개했다고 할 때 반드시 과거의 삶을 되짚어 보게 돼 있습니다. 어느 한 순간의 사건만이 아니라 출생 이후부터 기억할 수 있는 모든 기억 속에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의 <참회록>을 읽어보면 아주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모든 죄를 회개합니다. 친구와의 관계에서 있었던 아주 사소한 일, 과수원에서 훔쳐 먹은 이야기 등이 나옵니다. 그가 <참회록> 후반부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기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억을 주신 것은 기억 속에서 회개하기 위한 것입니다.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은 모두 회개의 주제가 됩니다.”

 

어거스틴은 <참회록>에서 기억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여러분, 역사는 기억입니다. 우리 모두의 기억입니다. 역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역사를 되짚어보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념은 몇몇 사건만을 선택해서 자신들의 주장이 옳다, 누군가 틀렸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과거의 역사를 보면서 하나님의 손길을 되돌아보고, 하나님께 회개하는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내용의 역사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주신 축복 속에서 죄를 지었다

 

역사를 회고하며 회개하는 두 가지 주제가 있습니다. 첫째, 그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 속에서 죄를 지었습니다.

 

그들은 굳건한 성들과 비옥한 땅을 점령하고 온갖 좋은 것들로 가득한 집들과 파 놓은 우물과 포도원과 올리브 나무숲과 풍성한 과일나무들을 다 차지했으며 배불리 먹어 살찌고 주님께서 주신 큰 복을 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불순종했고 주를 거역했습니다. 주의 율법을 뒤로 제쳐 두고, 그들을 주께로 돌이키려고 타이르는 예언자들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25~26).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는 기적의 역사였습니다. 출애굽의 역사, 광야의 역사, 가나안 정복의 역사 그 모든 과정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이 없는 순간이 없었습니다. 또 하나님이 그들의 능력으로 이길 수 없는 상대를 이기게 해주셨고, 그들의 노력으로 얻을 수 없는 풍성한 열매를 맺는 땅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큰 복을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많이 임하면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많은 축복을 받은 자들이 더 많이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많은 축복을 받은 이들이 도리어 하나님을 떠나 거역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간절히 찾을 때가 언제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축복의 때가 아니라 힘들고 어려운 때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죄를 가져오는 아이러니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모든 복의 근원이 자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나오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없어지고 곤란하고 어려울 때 하나님을 다시 찾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것을 회복시켜 주시면 또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믿음이 사라집니다. 죄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를 생각해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최초의 인간이 죄를 범한 곳은 광야가 아니라 에덴동산이었습니다. 축복의 동산이었습니다. 동산 중앙에 있는 금지된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하신 그 명령 외에 모든 것이 자유였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축복의 동산이었습니다. 그때 사단이 우리를 시험했고, 인간은 그때 타락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축복된 환경에서 타락하기 쉽습니다. 인간의 원죄가 축복된 에덴동산에서 시작됐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아무것도 없는 광야는 하나님을 더 깊이 체험하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들을 수없이 광야로 나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는 손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축복의 근원을 자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습니다. 축복을 누리는 조건이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의 축복의 조건은 단 한 가지였습니다.

 

그러나 그 한 가지 조건을 지키기 싫어서 무시했을 때 축복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실까요? 순종이 없는 축복은 그 축복을 받은 만큼 재앙이 되고, 저주가 되고, 도리어 타락의 도구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순종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안전한 그릇입니다.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는 말씀에 순종했다면 모든 축복이 안전한데, 불순종으로 축복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축복된 환경에서 하나님 앞에 범죄 하기 쉬운 본성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축복을 주시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긴장해야 합니다. C.S 루이스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기쁜 일 가운데서는 속삭이신다. 고난 가운데서는 외치신다.”

 

 

징계와 심판을 받고도 반복해서 죄를 짓다

 

 

둘째, 그들이 역사를 회고하며 회개하는 내용의 핵심은 징계와 심판을 받고도 반복해서 죄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과거를 기억할 수 없는 자들은 그것을 반복하는 벌을 받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과거의 죄를 해결하지 않고 돌이키지 않으면 반복되는 그 자체가 벌이 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평안해지면 또다시 주 앞에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그때에는 주께서 그들을 원수의 손에 그냥 내버려 둬 그들을 원수의 지배 아래에 두셨습니다. 그러다가도 그들이 다시 돌이켜 주께 부르짖으면 주께서 하늘에서 듣고 주의 긍휼로 그들을 때마다 구해 주셨습니다. 주께서는 그들에게 주의 율법으로 돌아오라고 경고하셨지만 그들은 교만해 주의 계명에 순종하지 않고 사람이 지키기만 하면 살 수 있는 주의 율법을 거역하는 죄를 지었습니다. 그들은 고집스럽게도 주께 등을 돌려 대고 목을 뻣뻣이 세우고는 도무지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28~29).

 

또 다시 주께 등을 돌리고 불순종하지만 하나님은 또다시 그들을 돌이키시는 분이십니다. 또 다시 범죄 한 인간의 모습을 사단이 잘 알고 이용합니다. 어떻게 하면 또 다시 죄로 돌아오게 할 것인지 늘 전략을 세웁니다. 사단의 입장에서 그리스도인들을 공격하는 내용으로 쓰인 책이 C.S 루이스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입니다. 이 책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네 환자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절망할 필요가 없다. 성인이 되어 회심한 이들 중에는 잠시 원수(하나님)의 진영에 머물다가 다시 돌아와 우리와 함께 지내는 사람이 수백 명도 넘는다. 네 환자의 몸에 있는 습관들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아직은 우리에게 전적으로 유리하단다.”

 

기분 나쁘지만 사실입니다. 회개한 이후에도 언제든지 다시 죄악의 습관으로 돌아갈 수 있는 모습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사탄이 바로 그것을 노린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징계와 심판을 받고도 또 다시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일까요? 죄에 대한 형벌만을 두려워하고 피하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자신을 연합하지 않으면 형벌만이 두려워서 회개하는 것이 오래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분과의 연합에 깊이 들어가지 않으면 또 다시 죄를 범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그분의 거룩한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려고 사람이 되셔서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에서 우리 육신의 죄악을 다 끊으시고, 하나님과 연합할 수 있는 성령을 허락하셨습니다.

 

 

백성들이 죄악을 끊는 은혜의 역사

 

백성들이 죄악의 사이클을 끊는 은혜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첫째, 하나님은 공의롭게 심판하심으로 죄를 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공의롭다혹은 공의롭게 심판하신다는 것은 무섭게 처벌하신다는 의미도 있지만, 그 이전에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은 우리에게 충분한 기회를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죄인의 자유의지로 심판을 피할 기회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기다려 주신다는 것입니다.

 

주께서는 수년 동안 그들을 참아주셨고 주의 예언자를 통해 주의 영으로 그들을 타이르셨지만 그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주는 그들을 이웃 민족들의 손에 넘기셨습니다”(30).

 

수년 동안이라고 고백하지만 실상은 수백 년입니다. 우리에게 적용하면 하나님은 아직도 인내하고 계십니다.

 

데살로니가서에서 사람들이 바울에게 왜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고 했는데 오시지 않습니까?”라고 질문했을 때 이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하나님은 천 년을 하루같이 인내하신다고 설명했습니다. 천 년이라는 긴 시간을 하루처럼 여길 만큼 우리를 기다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거꾸로 이용합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마치 심판이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심판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처럼 생각하고, 오래 참으심을 이용해서 범죄합니다.

 

그러나 충분한 시간을 기다려 주시되 끝이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께 대들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충분히 인내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돌이킬 수 있는 충분한 여건과 상황과 말씀과 노력을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십니다. 우리는 악을 행하였으나 하나님은 진실히 행하셨습니다.”

 

 

둘째, 하나님은 회개하는 백성들에게 언제나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러나 은혜와 긍휼이 많은 하나님께서는 그 큰 긍휼로 그들을 완전히 멸망시키거나 버리지 않으셨습니다”(31).

 

반복되는 죄악의 사이클을 끊는 것은 무한히 반복되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무제한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대로 행하신 분입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하시는 사랑은 십자가의 은혜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부어진 사랑은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합니다. 그 십자가에 나오는 이들은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받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총으로 용서함을 받은 사람은 다른 이들도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슨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 가운데 머물러 있어야 하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죄에 대해 죽은 우리가 어떻게 죄 가운데 그대로 살겠습니까?”(6:1~2).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하시는 은혜의 힘이 우리를 죄에 대해 죽게 합니다.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징벌 그 자체는 우리가 죄를 이길 수 없게 합니다. 죄의 대가는 치르지만 죄를 이기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죄를 심판하시는 것으로 우리를 대하지 않으시고, 죄를 끊을 수 있는 용서의 은혜를 통해 우리 스스로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회개를 통해 우리는 승리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것이 부흥입니다.

 

이 모든 것을 생각하며 우리가 언약을 굳게 세웁니다. 이것을 문서로 남기고 우리 지도자들과 우리 레위 사람들과 우리 제사장들이 서명을 합니다”(38).

 

회개의 마지막은 언약을 갱신하는 것입니다. 공식적인 문서를 만드는 것입니다. 모든 백성들이 참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느헤미야, 제사장, 관료들에게 이르기까지 모든 백성들이 자기 이름으로 도장을 찍고 서약을 맺습니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회개 이후 서약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하십니다. 참된 회개 이후 일어나는 서약이 우리에게 은혜의 축복이 됩니다. 우리의 죄를 처리해 주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죄의 사슬이 끊어집니다.

 

우리에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은혜로 다시 시작하고, 서약을 맺는 모습이 진짜 성벽이 재건된 것입니다. 말씀의 부흥과 회개가 나타난 백성들의 모습이 진정한 성벽 재건입니다. 우리의 보이지 않는 성벽이 재건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예전보다 더 사랑해야 합니다. 더 깊은 회개를 통하여 죄의 사슬을 끊고 다시 시작할 수 있을 때 부흥의 역사를 또다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참된 회개(1) 돌이키고 돌이키라 /33:11/ 이재훈 목사

2023-12-24 05:13:39

 

신앙생활 하면서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듣는 말씀이 회개하라입니다. 그런데 이와 동시에 가장 쉽게 흘려버리는 말씀이 회개하라입니다. 왜 성도들이 회개에 대한 말씀을 쉽게 흘려버리는 것일까요? 첫째, 회개가 너무나 쉬운 것이라는 사단의 속임수에 넘어가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죄를 심각하지 않게 생각하게 만듭니다.

 

죄가 심각하지 않기에 회개하는 것도, 용서받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속삭입니다. 그러나 회개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깊은 회개를 했다 할지라도 여전히 회개하지 않은 죄가 남아 있는 것을 너무나 잘 압니다. 알고 지은 죄를 모두 회개했다 할지라도, 모르고 지은 수많은 죄를 여전히 회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볼 때 회개는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사단은 죄를 짓는 것을 가볍게 생각하게 만듭니다.

 

둘째, 회개는 우리가 원하면 언제든지 스스로의 힘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회개는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본성으로는 참된 회개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자연적으로 인간은 마음에 뉘우침이 있고 양심에 가책이 있습니다. 마음에 괴로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참된 회개라고 할 수 없습니다.

 

가룟 유다도 마음이 괴로워 자살했습니다. 사울도 마음에 늘 짐이 있었습니다. 후회가 있었습니다. 구약에 나오는 악한 아합왕도 마음이 괴로워 죄책감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참된 회개가 아닌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을 때 남아 있었던 양심의 자연적 기능으로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의 기준과 참된 회개를 통해 얻어야 하는 의의 기준에 합당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참된 회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은혜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 가운데 베풀어 주신 구속의 은혜와 부활의 능력이 우리에게 임해야만 참된 회개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는 우리는 회개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셋째, 회개를 예수님을 처음 믿을 때 지나는 통과의례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한 번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나면 평생 회개가 필요 없는 것처럼 여깁니다. 나는 이미 회개했고, 하나님께서 용서하셨고, 나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졌기에 이제 회개라는 단어와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회개라는 단어를 쉽게 흘려버리는 이유입니다.

 

 

끊임없이 회개하는 삶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1517년 로마 교황청을 반박하는 95개 조 반박문을 내걸었을 때 그 첫 번째 문항이 바로 회개에 대한 문항이었습니다.

 

우리의 구주이시며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4:17)로 말씀하신 의미는 신자들의 전 생애가 회개의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진정 회개한 사람은 전 생애를 걸쳐 항상 회개하는 성도입니다. 마틴 루터가 로마 교황청을 반박할 때 교황청의 부패한 것을 95개나 열거해야 하는데, 왜 회개를 첫 번째 항목으로 내걸었을까요? 그 이후에 나오는 94개조 항목들이 첫 번째 항목에 대한 잘못된 생각 때문에 비롯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회개를 한번 하고 지나가는 통과의례로 여기고, 그 이후부터는 회개와 상관없이 살아가도 된다는 잘못된 회개관과 의식 때문에 중세 교회가 타락했고, 신앙의 능력을 잃어버린 것이라고 분석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회개는 한 번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일평생에 걸쳐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룩하게 살아갈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인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성도들은 전 생애에 걸쳐 끊임없이 회개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회개가 어려운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첫째, 자신은 이미 회개했다고 자신하면서 형식적인 신앙생활에 머무르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회개가 너무나 먼 것이 되어버린 사람들입니다.

 

둘째, 회개라는 말이 너무 멀리 느껴지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과 양심의 목소리와 성령의 감동을 외면한 채 반복해서 죄를 짓는 사람들입니다. 구약에서는 이것을 마음이 금강석과 같이 되었다고 말하고, 신약에서는 양심이 화인을 맞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성령의 감동과 경고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반복해서 죄를 짓다 보면 더 이상 회개할 능력조차 잃어버리게 됩니다. 회개할 마음, 회개의 부르심을 완전히 차단한 채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회개와 믿음이 동시에 역사하는 회심

 

그때부터 예수께서 말씀을 전파하기 시작하셨습니다.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4:17).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이 회개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완전히 준비되었고, 그 문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열렸기 때문입니다. 아담 이후 모든 인류는 하나님 나라 밖에서 태어난 존재들입니다. 인류에 존재하는 모든 아픔의 원인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 밖에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 나라 안으로 다시 초청하십니다. 조건은 회개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에 합당한 변화가 우리에게 있어야 하나님 나라로 다시 들어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회개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면 영원한 생명의 집이지만, 회개하지 않고 그 나라로 들어가지 않으면 영원한 멸망인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로 들어간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갑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회개를 말하지 않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된다고 하는 것은 왜곡된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는 반드시 우리에게 요구되는 회개를 함께 말해야 합니다. 우리의 죄인 됨을 말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 밖에 있음을, 하나님을 반역하고 있음을 말해줘야 합니다.

 

이 세상의 수많은 선택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념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실제입니다. 이념이라는 것은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생각에서 나오는 어떤 사상의 체계가 이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리와 복음은 이념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진리입니다. 그 나라에 들어가려면 회개해야 합니다.

 

한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값없이 의롭다 하신다는 진리도 있습니다. 이 두 가지를 어떻게 연결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회개할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믿음과 회개는 동전의 앞뒷면과 같습니다. 회개하는 영혼은 반드시 믿는 영혼입니다. 믿는 영혼은 반드시 회개하는 영혼입니다. 만일 내 안에 회개 없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았다고 하면 그것은 가짜 믿음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때는 반드시 그 뒷면에 내가 죄로부터 떠나는 회개의 체험이 있습니다.

 

구원을 얻는 믿음이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안에 들어왔기 때문에 회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참된 믿음이 참된 회개를 이끌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놀랍게도 우리 스스로 할 수 없는 회개의 영이 임하고, 우리가 죄로부터, 세상으로부터, 자신으로부터 떠나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능력이 부어집니다. 그래서 참된 믿음과 참된 회개는 공존하는 동시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회개와 믿음이 동시에 역사할 때를 회심’(conversion)이라고 합니다. 진정한 회심은 믿음과 회개가 동시에 존재할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참된 회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으로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인간 안에 있는 양심으로 가책을 느끼고 스스로 뉘우치는 정도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으로 인해 우리에게 일어나는 근본적인 변화입니다. 참된 회개는 성령과 말씀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회개의 시작은 성령님께서 하십니다. 회개의 시작은 스스로의 결심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시고, 높임을 받으시고, 성령을 통해 역사하시는 주님께서 우리 안에 회개의 역사를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너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것을 이루실 것이다라는 말씀은 회개의 역사와 구원의 역사는 성령님께서 시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수단과 통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세상에 어떤 위인의 권면이나, 위로의 말이나 질책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영혼들에게 들려질 때 부활 승천하셔서 성령을 통해 임재하시고 역사하시는 예수님의 역사가 각 심령 속에 전달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의 통로가 되어서 구원을 얻는 회개의 역사가 심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줘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그 말씀을 내 마음 속에 두어야 합니다. 말씀의 능력이 우리 속에 체험될 때 가장 중요한 반응이 회개입니다. 여러분, 우리 안에 참된 회개의 역사를 경험하려면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나아가고, 성령님의 임재가 있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반드시 멸망한다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 안으로 들어오기 위해서 행해야 할 회개를 요청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성경 전체 메시지를 요약하라고 하면 바로 이 말씀이 될 수 있습니다. “너는 그들에게 말하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33:11).

 

이 말씀에 참된 회개의 세 가지 진리가 요약되어 있습니다. 첫째, 악인은 반드시 회개해야 하는데 회개하지 않으면 반드시 멸망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진리이고 말할 필요도 없는 이치입니다. 악인이 회개하지 않으면 죽을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나와 어떤 상관이 있느냐 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자신을 악인이라고 생각하는가?”입니다. 우리는 악인을 사람들에게 조롱받고, 비난받고, 때로는 감옥에 갇힐만한 나쁜 일을 한 사람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정의하는 악인은 회개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참된 회개를 잃어버렸다면 우리는 악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자신의 육신 안에 악이 있다는 것을 고백하며 괴로워하며 몸부림칩니다.

 

선을 행하기 원하는 자신에게 악이 함께 있다고 고백하며 괴로워합니다. 사도 바울이 누구입니까? 그는 신약의 1/3을 기록하는데 쓰임을 받은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의 저작이 없었다면 십자가의 복음,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한 비밀들을 우리는 깨달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택하셔서 놀라운 계시의 비밀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들어갈 영원한 천국을 미리 본 사람입니다. 성령의 놀라운 역사가 그를 통해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할 즈음이면 비교적 많은 사역을 이룬 원숙한 시대였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자신에게 끔찍한 악이 있음을 발견하고 괴로워합니다. 악은 우리가 한번 회개한다고 완전히 떠난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회개함으로 의롭게 되었지만, 계속해서 회개한 상태로 존재하지 않으면 구원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악이 소멸된 것이 아니라 우리는 원하기만 하면 악과 다시 하나가 되어 살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끊임없이 회개한 영혼으로 살지 않으면 한순간에 악이 우리를 사로잡는 사도 바울과 같은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거룩해졌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자신 안에 있는 악의 실체를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십자가의 은혜를 붙잡고, 하나님 앞에 더 겸손하게 엎드릴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좋아졌다는 것은 더 이상 회개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는 초신자 때 경험하는 것이고 이제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회개가 더 어려워지는 상태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초기에 자신을 소개할 때는 사도됨을 강조했습니다. 주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사도됨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후반기로 갈수록 사도됨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후반기로 갈수록 자신을 지극히 낮추며 자신의 악함을 고백합니다.

 

가장 후반기에 쓴 서신에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죄인 중에 괴수다”(딤전 1:15). 예전보다 거룩한 삶을 사는데도 자기 안에 늘 같이 존재하는 악의 무서운 실체가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참된 회개가 일어나면 내 안에 온통 악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정진을 위해서 더 애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강하다는 것은 참된 회개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거짓 없이 철저히 회개하면 산다

 

둘째, 악인이 거짓 없이 철저히 회개하면 살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입니다. 이것 또한 너무나 당연한 이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를 통해 악인이 살 수 있는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실 의무가 없으신 분입니다. 인간의 선택과 자유 의지로 죄악을 범했기 때문에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회개하면 다시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살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시고, 회개할 수 있는 능력까지 마련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회개할 수 있는 능력을 부어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중요한 목적이 우리의 회개를 돕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속에 우리의 믿음과 회개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문은 열려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열어두고 계십니다.

 

 

회개하여 죽음과 멸망 피하기를

 

셋째, 하나님께서는 악인이 회개하여 죽음과 멸망을 피하기를 간절히 원하시며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의 기쁨은 악인이 회개하고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악인이 회개하고 살아나는 것을 위해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는 목자의 노력이요, 집 안에서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찾는 여인의 노력입니다. 집을 나간 아들을 애타게 기다리는 아버지의 기다림입니다. 찾고 기다리고 일하며 악인이 돌아왔을 때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기쁨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기쁨입니다.

 

우리의 회개가 어떻게 가능할까요? 이 음성을 붙잡는 것입니다. “돌이키고 돌이키라. 왜 죽고자 하느냐?” 이 말씀을 우리가 붙잡을 때 성령께서 우리 각 사람의 마음에 임하십니다. 성령님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돌이켜야 할 악이 있음을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돌이키고 돌이키라. 네가 왜 죽고자 하느냐?”는 말씀을 붙잡고 은혜를 간구하며 믿음으로 나올 때 내 안에 참된 회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음성을 매일 묵상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매일 눈을 뜰 때, 잠자리에 들 때, 길을 걸을 때, “돌이키고 돌이키라. 네가 왜 죽고자 하느냐?”는 말씀을 붙잡으십시오. 악을 행하기를 즐겨 했던 우리 마음이 드러날 것입니다. 내가 빠져있던 악이 무엇인지 보게 될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드러내시는 죄악을 고백하고 회개하며 나아갈 때 성령의 임재가 우리 안에 회복될 것입니다.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이 부어질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 임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말씀을 붙잡으면 회개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하기 싫은데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벌 받을까 봐 두려워서 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앞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습니다. 그것은 영원한 실재이고, 영원한 축복입니다.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되기에 살고자 택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참된 회개(2) 자기 십자가를 지라 /16:24-25/ 이재훈 목사

2023-12-24 05:14:57

 

참된 회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인간의 본성이나 노력으로는 참된 회개에 이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구원의 중보자로서 하시는 일은 죄인 된 인간들에게 회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을 통해서 하시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쉬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구원의 중보자로 일하고 계시고, 이 땅 가운데 있는 죄인들에게 성령을 통해서 회개를 일으키시는 역사를 하고 계십니다.

 

성령님께서 죄인 된 인간 안에 참된 회개의 역사를 일으키실 때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는 우리 안에 참된 회개를 일으키는 약속이 담겨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바라보고, 묵상하고, 십자가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놀랍게도 참된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모두를 대신하여 죽으신 대속제물,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목제물이 되심을 믿는 자들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참된 회개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믿음과 회개는 동시적인 사건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에게서 나타나는 뗄 수 없는 사건입니다. 동전의 앞뒷면과 같은 것입니다. 참된 믿음의 사람은 참된 회개를 경험한 사람이요, 참된 회개의 사람은 참된 믿음의 역사를 경험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장차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언하셨습니다. 바로 그 말씀에 이어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어떤 이들인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네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

 

그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해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게 될 것이다’”(24~25).

 

예수님을 믿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자,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구원받고, 의롭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일평생 참된 회개를 통해 거룩한 성화의 구원을 이뤄가는 성도들의 삶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여러분, 참된 회개란 자기 부인입니다. 자아의 죽음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자아에 대한 여러 주장들이 있습니다. 그리스 철학자들은 네 자신을 알라고 했습니다. 심리학자들은 네 자신을 수용하고 충족시키라고 합니다. 교육학에서는 네 자신을 개발시켜라고 말합니다. 쾌락주의는 네 자신을 즐기라”, 금욕주의는 네 자신을 억제하라”, 인본주의는 네 자신을 신뢰하라. 네 자신 안에 무엇이 있든지 자신을 자신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

 

예수님을 믿는 것은 우리가 조금 더 나은 사람, 더 교양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자아가 죽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우리의 자아를 더 세련되게 혹은 더 멋지게 변화시키려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 된 인간들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자기 부인과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같은 문장에 나옵니다.

 

대개 이런 경우에는 뒤의 단어가 앞 단어를 설명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곧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뜻입니다. 많은 분들이 자기 십자가를 나름대로 해석합니다. 어떤 사람은 감당하기 힘든 시어머니를 자신의 십자가라고 합니다.

 

이해하기 힘든 시댁 식구들, 속 썩이는 남편이나 자녀, 하기 힘든 일, 원치 않는 의무, 나를 끊임없이 고통스럽게 하는 외부로부터 오는 어떤 짐을 자신의 십자가라고 해석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자기 십자가는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원치 않는 짐이 아니라 자신 안에 있는 자아를 죽이는 도구라는 뜻입니다.

 

 

악의 뿌리, 하나님에 대한 반역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자기를 부인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셨다면 십자가에 못 박히실 수 없었습니다. 엄청난 억울함과 고통, 시련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기 때문입니다. 자기 십자가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자아를 죽이라는 것입니다. 참된 회개란 자기 부인이요, 자기 죽음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왜 자아를 죽이라고 할까요? 인간이 빠져있는 곤경과 위기의 원인이 무엇이겠습니까? 근본적으로 인간의 위기는 스스로 주인 행세하는 것부터 시작됩니다. 표면적으로 나타난 모든 죄의 뿌리에는 악이 있고, 악의 뿌리에는 교만이 있고, 교만의 본질은 하나님께 대한 반역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신 것은 인격적인 선택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삶을 기대하신 것입니다. 어쩔 수 없어서, 기계처럼 움직이는 것을 통해서는 영광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어떤 선택의 가능성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는 자아의 순종을 기대하신 것입니다. 인간 스스로 하나님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반역입니다.

 

그것이 악의 뿌리요, 그 악으로부터 수많은 죄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개선의 필요가 있는 피조물이 아닙니다.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해야 하는 반역자입니다. 아기를 보면 얼마나 순진하고 사랑스럽습니까? 그런데 키워보면 그런데 이 아이가 엄청난 반역자라는 것을 부모가 먼저 압니다.

 

부모의 사랑에 대해 감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기가 기저귀를 뗄 때까지 몇 번 정도 기저귀를 갈아야 하는지 계산해 본 적이 있습니다. 평균 12,000번을 갈아야 합니다. 그렇게 부모가 무릎을 꿇고 기저귀를 갈아줘도 아이들에게는 부모에 대한 반역의 기질이 있습니다. 감사를 모릅니다. 타락한 인간은 교육을 잘 시키면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항복이 이루어져야 제대로 된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보통 우리가 철이 든다고 하는 것은 꺾이는 것입니다. 자아가 꺾이고, 항복하는 경험을 한 사람을 우리는 철이 들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 대해서 전적으로 항복하는 경험을 회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살아왔던 길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반역한 이후로 익숙해진 자기만족, 자기 의, 자기 의지, 자아에 만족되어 스스로 주인인 것처럼 착각하고 살아왔던 반역자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무기를 내려놓고 하나님께 되돌아가는 것이 회개입니다. 하나님께 되돌아갈 때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이 바로 자아의 죽음이요, 자기 부인입니다.

 

 

신앙의 중심 십자가

 

그런데 문제는 항복할 것이 많고, 항복해야만 하는 악한 인간 안에 항복하지 못하게 하는 악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함정입니다. 악할수록 더 회개해야 하는데, 악한 사람일수록 회개할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회개의 필요성을 가져다주는 악함이 우리를 회개하지 못하게 합니다.

 

여러분, 왜 기도하지 않습니까? 약해서가 아닙니다. 악해서입니다. 왜 성경을 읽지 않습니까? 회개할까봐. 회개하면 자아를 포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인으로 살아왔던 것을 내려놓아야 하니까 기도하지 않고, 말씀을 읽지 않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 은혜 받는 자리에 안 갑니까? 하나님께서 진짜 임하실까봐. 우리의 악함은 교묘합니다.

 

은혜 받는 자리, 있어야 할 자리,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자리를 끊임없이 거부하고 스스로 인생의 주인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악함이 우리의 회개를 가로막습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회개할 수 없습니다. 외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C.S.루이스의 표현을 빌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일부를 우리에게 넣어주시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랑을 우리에게 넣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결정하고 판단하고, 계획을 세울 수 있는 것도 하나님 안에 있는 결정과 판단 능력을 우리에게 넣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인간 안에 있는 육체적 성질도 하나님의 이미지 안에 있는 것을 넣어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것도 하나님이 관계적인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인간 안에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일부를 넣어주신 것입니다.

 

참된 회개, 자아의 죽음인데 하나님께서 죽음을 넣어주셔야 가능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죽으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지만 본질과 다른 것은 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생명이시기에 하나님 안에는 죽음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것은 사람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시고, 사람 되신 하나님이 죽으심으로써 우리가 죽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일이 십자가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참된 회개를 통해 거룩하게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넣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바라보고, 묵상하고, 십자가를 의지하는 모든 자에게 십자가의 능력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신학적인 설명으로도 완벽하게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십자가의 능력이 어떻게 참된 회개를 일으키는지 전부를 이해할 수는 없지만 중요한 것은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참된 회개를 경험할 때가 언제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었을 때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눈을 떼는 순간 놀랍게도 우리 삶은 참된 회개를 잃어버립니다. 십자가의 능력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늘 우리가 바라봐야 할 신앙의 중심입니다. 그 십자가를 통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옛 사람의 죽음과 자아의 죽음

 

예수님의 죽으심과 함께 일어나는 두 가지 죽음이 있습니다.

첫째, 죽음은 죄에 대한 옛 사람의 죽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일어난 예수님의 죽음을 모든 인간의 옛 사람의 죽음으로 인정하고 간주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아도, 믿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중요한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우리를 이미 용서하시고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우리가 마땅히 담당해야 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쏟아 부으심으로 우리의 옛 사람이 심판받은 것으로 간주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심판자이시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진노를 쏟아 부으심으로 인류를 다시 살릴 계획을 이루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우리의 옛 사람이 죽은 것입니다. A.B.심슨 목사님은 성령님을 가리켜 우리를 그리스도의 무덤에 함께 장사지내는 위대한 장의사라고 표현했습니다. 성령님의 역사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무덤으로 데리고 갑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데리고 갑니다. 허물과 죄로 죽어있던 우리들이 죄에 대하여 죽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 옛 사람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이 이제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상태로 죄와 율법, 옛 사람으로부터 자유케 하신 것입니다.

 

옛 사람의 죽음이라는 하나님의 선언, 하나님의 위대한 사역이 우리에게 적용될 때, 날마다 삶 속에서 참된 회개를 이뤄갈 때 우리에게 일어나는 두 번째 죽음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서 일어나야 하는 자아의 죽음입니다. 이것은 첫 번째 옛 사람의 죽음이 일어나지 않고는 일어날 수 없는 죽음입니다. 옛 사람의 죽음을 경험한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자로 살아가게 됩니다.

 

서로 연결되어 있고, 동시적인 경험일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순차적인 경험일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서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자유의지에 참여를 원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루신 구원을 우리가 경험할 때 자아가 장애물이 됩니다. 우리의 자아는 여전히 복음에 대항하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아의 죽음까지 가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성령님께서는 강제로 우리를 십자가로 데려가시지 않습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자기를 부인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에 자발적으로 동의하고, 선택해야 체험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해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게 될 것이다”(25).

 

예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내려놓으심으로 육신의 생명과 비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은 두 번 태어나셨습니다. 첫 번째는 베들레헴에서 나약한 육신의 생명으로 태어났지만, 두 번째는 무덤에서 다시 태어나셨습니다. 우리도 이 땅에서 육신의 생명으로 태어나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고 의지할 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으로 따라가지 않으면 그 생명이 우리 가운데 풍성하게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사람들

 

예수님께도 자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자아를 온전히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참된 회개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자아가 끊임없이 십자가 지기를 거부합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말씀은 우리가 사랑하지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은 달갑지 않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아침에 큐티할 때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시작했는데 퇴근하고 집에 오면 십자가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립니다. 어디선가 십자가가 없어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내 자아의 죽음을 요구할 때 나는 죽을 수 없다며 십자가를 내던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는 있는데 우리에게는 없는 것이 무엇일까요? 왜 우리는 십자가를 버릴 수 있는 것일까요? 못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우리 십자가에는 못이 없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십자가는 바퀴 달린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못 박힌 십자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자기 십자가를 질 때 예수님 십자가의 못에 해당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순종입니다. 삶에서 우리를 못처럼 찌르는 모든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사랑할 수 없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 앞에 순종하는 것이 못입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정직하게 행동하고 말하는 것이 못입니다. 분노해야 할 상황에서 분노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 우리를 아프게 하는 못입니다.

 

자기가 볼 때는 옳아 보여도 모두를 위해 자기 방법만을 고집하지 않는 것이 찌르는 못입니다. 우리가 순종하려고 할 때 아픕니다. 내 자아가 부인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인 줄 알면서도 거부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악이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악한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태어난 새로운 자아와 순종을 기뻐하고, 하나님의 뜻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갈망하는 자아를 그리스도와 함께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내어드릴 때 우리에게 부활의 능력이 나타날 것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참된 회개를 평생 경험합니다. 한 번 회개하고 예수님 믿을 때 회개하고 지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초신자들이 배워야하는 교리가 아닙니다. 성도들은 전 생애에 걸쳐서 참된 회개를 이뤄가는 사람들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옛 생명을 십자가에 못 박고,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살아나는 삶이 바로 참된 회개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반역자에서 순종하는 자로, 참된 회개를 이루어가기를 축원합니다.

 

 

 

참된 회개(4) 마음을 찢고 하나님께로 /2:12-18/ 이재훈 목사

2023-12-24 05:16:48

 

회개는 돌이키고 돌이키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응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돌이키라 명하지 않으시고, 또 돌이킬 수 있는 길을 허락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돌아갈 수 있는 길, 돌아갈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준비하고 허락하셨다 할지라도 인간은 자유의지로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타락한 자유의지를 사용해서 인간은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거부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로 하나님께 마음껏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졌다 할지라도 자신의 의지로 끝까지 거부할 수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회개하라 명하시니 저에게 회개의 은혜를 허락해 주십시오.”

 

참된 회개는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여서 자신의 자유의지로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습니다라는 것은 거짓입니다. 잘못된 생각입니다. 아무것도 믿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믿는 것입니다. 무신론은 강력한 믿음입니다. 헛된 우상을 믿음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을 돌이켜서 살아계시며 참되신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내가 믿는 대상이 어떤 존재인지, 참되신 하나님인지 아니면 헛된 우상인지를 분별하는 지성적인 돌이킴을 포함합니다. 또한 참된 회개는 마음을 찢는 회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옷을 찢는 것으로 회개를 표시했습니다. 옷이란 연약함을 덮는 것도 있지만, 우리의 정체를 속이는 것도 있습니다. 그래서 옷을 찢음으로 진실을 표시하고, 회개를 표시했던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옷을 찢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 그것이 참된 회개의 징표가 될 수는 없다. 옷을 찢었다고 해서 참된 회개의 징표가 될 수는 없다고 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은 마음을 속이고 숨기는 기술이 있기 때문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마음은 외적인 형식이나 표현으로 자신의 진실 된 마음을 감추는 교묘한 죄악의 기술이 능숙하기 때문입니다. 참된 회개로 나가기보다는 우리의 계획, 결심, 외적인 형식, 의식적인 표현으로 참된 회개의 마음을 감출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서 죄를 통회하는 마음 대신 다른 어떤 것들로 포장하는 기술이 인간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참된 회개는 마음을 찢는 것

 

참된 회개는 옷을 찢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찢는 것입니다. ‘마음을 찢는다는 것은 감정적인 돌이킴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위선자들의 슬픔은 언제나 얼굴에만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대로 얼굴만 흉하게 합니다. 마음의 슬픔이 아니라 겉모양의 슬픔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많은 위선자들의 슬픔을 보십시오. 바로에게도 슬픔이 있었습니다. 사울에게도 슬픔이 있었습니다. 아합왕에게도 슬픔이 있었습니다. 가룟 유다에게도 슬픔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슬픔은 모두 겉모양의 슬픔이었을 뿐입니다. 진정 마음을 찢는 슬픔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왜 마음을 찢어야 합니까? 위선을 내쫓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겉모양으로 만족하기를 원하고, 진정 자신의 속마음을 하나님 앞에 통회하는 것을 거부하는 마음이 찢어져야 위선을 내ㅤ쫓을 수 있습니다. 참된 회개는 찢어진 마음 사이로 깊은 슬픔의 눈물이 흐르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임재로 강퍅한 마음과 단단한 마음이 깨어지면 그 속에서 눈물의 강수가 솟구치게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다. ‘이제라도 너희가 금식하고 슬퍼하며 통곡하면서 너희의 온 마음을 다해 내게 돌아오라.’ 너희의 옷이 아닌 너희의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돌아오라. 그분은 은혜로우시고 긍휼이 많으시며 화를 내는 데는 더디시고 사랑이 풍부하시며 마음을 돌이켜 재앙을 거두기도 하시는 분이시다”(12~13).

 

 

참된 회개의 슬픔

 

사람이 흘리는 눈물에는 세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 원치 않는 실패로 인한 절망으로 흘리는 눈물입니다. 둘째, 받아들이기 힘든 고난으로 고통스러워 흘리는 눈물입니다. 셋째,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애통해하며 흘리는 회개의 눈물입니다. 참된 회개의 슬픔은 내가 받을 형벌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한 슬픔이 아닙니다. 자신의 죄 그 자체에 대한 슬픔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그 선하심과 풍성하신 인자하심 앞에서 자신의 죄를 슬퍼하는 것이 참된 회개의 슬픔입니다. 이 슬픔만이 죄를 사랑하던 우리의 감정을 내쫓습니다. 우리 마음에 숨어 있는 죄가 씻어는 것입니다. 목사이자 시인인 임병곤이라는 분이 쓴 눈물 예찬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눈물은 보약입니다.

눈물은 그냥 물이지만 흘리고 나면

몸에 면역력이 생기는 종합비타민입니다.

 

눈물은 해독제입니다.

해일처럼 밀려와 깊은 마음속을 뒤집고

우울과 절망을 밀어내는 살균수입니다.

 

눈물은 신비한 액체입니다.

쇳물도 못 녹이는 꽁꽁 얼어붙은

원수의 마음도 봄 눈 녹듯이 녹입니다.

 

눈물은 하늘 씨앗입니다.

마음껏 울고 나면 웃음꽃이 피어나고

눈물을 뿌리면 기쁨을 추수합니다.

 

눈물은 약속입니다.

비 갠 후 희망의 무지개가 피어나듯

눈물 후 언약의 무지개가 떠오릅니다.

 

눈물은 은혜입니다.

눈물의 기도가 수증기 되어 올라가면

은혜의 단비가 되어 촉촉이 내립니다.

! 눈물 흘리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참된 회개의 눈물은 거꾸로 흐릅니다. 땅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 올라가 은혜의 단비가 되어 내려옵니다. 다윗이 회개 가운데 많은 눈물을 흘렸을 때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내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56:8). 죄를 슬퍼하며 흘리는 회개의 눈물을 하나님께서 병에 담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에게 은혜의 단비로 내려주십니다.

 

이 눈물은 억지로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결심으로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이 또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눈물이 솟구쳐 오를 수 있는 길을 하나님께서 열어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영혼들에게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어떤 마음으로 인하여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유일한 길,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

 

내가 다윗의 백성과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 위에 은혜와 용서를 구하는 마음을 부어 줄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찔러서 상처를 입은 나를 보고 슬피 울 것이다. 마치 외아들을 마음에 두고 슬피 울 듯이 슬피 울 것이며 맏아들을 마음에 두고 슬피 울 듯이 슬피 울 것이다”(12:10).

 

마음이 찢어지는 통회의 눈물이 솟구쳐 오르는 유일한 길은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허리에 창을 찔리시고, 온 몸에 채찍질로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를 구하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이 부어질 때 슬피 울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하나님의 선하심, 인자하심, 긍휼하심이 얼마나 크신지 알게 되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 앞에서 우리의 죄가 얼마나 크고 무섭고 무겁고 끔찍한 죄인지를 깨달을 때 내 죄로 인하여 슬퍼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얼마나 슬프게 했는지를 깨닫게 되면서 우리 마음속에 큰 슬픔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그 마음은 은혜와 용서를 구하는 마음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를 구하는 마음이 임할 때 우리의 단단해진 마음을 깨뜨립니다. 강퍅한 마음을 찢게 합니다. 그 찢어진 마음에서 슬픔의 눈물이 흘러나옵니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많은 고통이 있지만 가장 큰 고통은 외아들을 먼저 떠나보냈을 때의 슬픔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슬픔이기 때문입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신 까닭은 우리 모두를 죄에서 건져내시고, 우리를 살려내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 결정, 주권, 사랑의 능력이시기에 그 슬픔을 품으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놀랍게도 십자가를 바라보는 모든 이들은 아버지의 슬픔을 느끼게 됩니다. 그 사랑을 느낄 때 우리는 슬픔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 은혜를 느낄 때 우리는 그 통곡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를 누릴 때 나에게 조금도 감정적인 슬픔, 통회, 마음을 찢는 느낌이 없다면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바라보지 못한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예수님을 동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슬픔을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죄가 그만큼 중한 것이고, 우리는 아주 가볍게 여겼던 그 죄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인가를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여겼던 그 모든 삶이 하나님 앞에서는 얼마나 끔찍한 죄악의 삶인지를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슬퍼하며 그 죄를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왜 이 슬픔을 느끼게 합니까? 그래야 우리가 죄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떠나기 때문입니다. 그 죄가 얼마나 끔찍한 지를 깨달아야 죄를 다시 짓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슬픔을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외아들을 상실한 하나님의 슬픔을 우리 가운데 일부분 넣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용서를 구하고, 은혜를 구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슬픔이 십자가를 믿음으로 바라보는 모든 이들에게 부어졌습니다. 성령의 사역은 이 마음을 부어주시는 사역입니다. 오순절에 성령님께서 임하셨을 때 이런 슬픔이 사람들에게 임했습니다.

 

 

마음이 찢어지는 참된 회개의 눈물

 

“‘그러므로 이스라엘 모든 집은 확실하게 알아 두십시오. 여러분들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께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듣고 마음이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형제들이여,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습니다”(2:36~37).

 

그들의 마음이 찔렸습니다. 참된 회개의 영이 그들에게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슬피 우는 참된 회개의 애통함이 복음이 증거 되는 곳마다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찢어지는 참된 회개의 눈물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이 바로 그리스도요, 죄를 사하시는 구세주임이 선포될 때 예수님을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이방인, 헬라의 많은 사람들, 갈라디아 사람들, 고린도 사람들, 데살로니가 사람들, 빌립보 사람들, 헬라 지역의 수많은 사람에게 마음을 찢는 회개의 은혜가 임했습니다. 선교의 역사는 마음을 찢고 하나님께 돌아온 슬픈 통곡의 역사입니다.

 

우리에게도 그 은혜가 임한 것입니다. 만일 마음을 찢는 회개의 역사가 우리 마음에서 사라졌다면, 십자가를 바라보며 우리 마음이 찢어지는 슬픔이 조금이라도 느껴지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마음을 찢는 통곡과 참회의 슬픔의 눈물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이 슬픔은 누군가 대신 흘려주는 눈물이 아닙니다. 각자의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다른 누군가가 슬퍼할 때를 정서적 공명이라고 합니다. 이 슬픔은 다른 사람이 우는 것을 보면 나도 괜히 슬퍼지는 슬픔이 아닙니다. 각자의 마음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슬픔입니다. 이 슬픔은 생명력을 주는 슬픔입니다. 세상의 슬픔은 죽음을 가져다줍니다. 절망을 가져다줍니다. 사람의 넋을 빼앗고, 마음을 얼어붙게 만들고, 자신의 일을 감당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이 슬픔은 생명력을 줍니다. 능력을 줍니다. 소망을 주고, 삶에 의욕을 가져다주고, 자신의 의무를 잘 감당할 수 있게 만들어 주고, 죄를 떠나게 하고, 우리 영혼을 깨끗하게 만들어 줍니다. 또한 이 슬픔은 자신의 죄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죄까지 슬퍼합니다. 한 가지 죄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자신의 죄는 물론이거니와 이 세상의 죄, 다른 사람들의 죄까지 끌어안는 슬픔입니다. 이 시대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우리가 슬퍼하고 울며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이 땅을 고쳐주실 줄 믿습니다. 이 슬픔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나타납니다.

 

복되도다! 슬퍼하는 사람들이여

 

내 눈에서 눈물이 쉬지도 그치지도 않고 흘러내립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내려다보시고 바라보실 때까지 그럴 것입니다”(3:49~50).

 

우리 안에 있는 죄는 만성 질병입니다. 그래서 번번이 되돌아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참회와 회개의 눈물로 씻어내야 합니다. 이 슬픔은 우리의 죄를 사랑하는 마음을 온전히 파낼 정도로 깊이 임하는 슬픔입니다. 만물보다 심히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마음의 토양은 깊이 오염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슬픔이 깊이 임하지 않으면 마음의 토양이 기경되지 않는 것입니다. 묵은 땅과 같은 우리의 마음, 죄에 오염되어 있는 우리의 마음을 깊이 파헤쳐야 좋은 흙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마음을 찢고 깊은 슬픔으로 죄를 사랑하는 우리의 마음을 파해 쳐 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슬픔은 축복입니다. 이 슬픔은 우리에게 회복을 가져다줍니다.

 

복되도다! 슬퍼하는 사람들이여, 그들에게 위로가 있을 것이다”(5:4).

 

왜 슬퍼하는 사람들이 복됩니까? 하늘의 위로, 성령님의 위로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죄를 애통해하며 마음을 찢고 회개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과 화목하는 평화, 하나님과 하나 되는 위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다른 이들의 죄까지 슬퍼하며 마음을 찢고 애통해 하는 자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성령의 위로하심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 웃으셨다는 기록이 별로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많은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께서 육체 가운데 계실 때에 자신을 죽음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분께 통곡과 눈물로 기도와 간구를 올리셨고 그의 경외하심으로 인해 응답을 받으셨습니다”(5:7).

 

하늘로 승천하신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통곡과 눈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회개의 눈물을 흘린 자는 자신의 죄로 인한 눈물에서 그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죄까지, 마치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듯이 자신의 죄로 인한 슬픔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죄로 인한 슬픔으로 기도하셨듯이 그렇게 슬퍼하고 통곡하며 기도할 때 하늘의 위로와 평화를 경험할 것입니다.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경험할 수 없는 위로의 복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찢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로 돌이키십니다. 우리를 향한 분노를 돌이키십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돌이키십니다. 하나님의 얼굴이 우리에게로 다시 향합니다. 그 얼굴을 드시며 우리에게 돌이키십니다.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관계를 친밀한 친구로 돌이키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동행하도록 초청하십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요 기쁨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강퍅한 마음이 찢어지고, 참된 회개의 슬픔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감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하늘의 위로를 경험하기를 축원합니다. 이것이 참된 믿음의 삶이요,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어진 성도의 거룩한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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