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자씨와 누룩의 비유 /마13:31-33/ 김형익 목사
2021-05-12 03:36:56
1. 예수님의 시대와 우리의 시대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의 생각의 변화를 우리는 잠깐 추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처음에 그들은 주님의 권능에 압도되었고 주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깨닫고 주님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흥분했었고 기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가면서 그들 앞에 펼쳐지는 상황은 그들의 기대를 충족시켜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특히 주님의 고향인 갈릴리에서 사람들의 불신은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주님은 어떤 권능도 행하지 않으셨고 소수의 사람들만을 고치고 가르치셨습니다(막 6:5~6).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주님의 가르침의 권능에 놀랐지만 주님을 믿지는 않았습니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예수님의 가르침에 격분하는 유대인들 특히 유대 당국자들의 반응은 심각해져 갔습니다. 한편 주님의 표적을 보고 주님을 따르는 자들이 많기는 했지만 주님의 가르침에 걸려서 이탈하는 자들도 많았습니다(요 6:66). 제자들이나 멀리서 주님을 바라보고 기대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마태복음 13장의 비유들은 바로 이런 배경에서 전해진 가르침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교회 현실은 어떻습니까?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세속화의 움직임은 점점 가속이 붙고 있습니다. 그 세속화는 사실상 반기독교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단지 전통적 가치에 대한 반발과 역행이 아니라, 성경의 가치들이 하나같이 도전에 직면해있고 하나씩 무너져가고 있습니다.
조국교회는 이미 공공의 적으로 여겨지고 있고 개독교라는 말은 이제 흔해빠진 말이 되어버렸습니다. 교회는 많지만 복음을 듣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엘리 제사장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때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습니다(삼상 3:1).”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인 홉니와 비느하스는 천하에 불량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제사장직을 이용해서 배를 불렸고 성소에서 일하는 여성들을 겁탈했습니다. 오늘날 일어나는 일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 무렵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패하자 이스라엘 장로들은 언약궤를 앞세워 나가면 이길 것이라는 전략을 냅니다.
그 시대의 영적 무지를 드러내는 대목입니다. 결국 블레셋에게 대패했고 언약궤를 가지고 나갔던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었고 언약궤는 빼앗겼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엘리 제사장은 의자에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었고, 마침 해산하던 비느하스의 아내는 비보를 듣고 아들의 이름을 ‘이가봇’이라 짓고 죽습니다. 이가봇은 “영광이 어디 있느냐?” 즉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을 떠났다는 말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사는 지금 이 시대의 교회를 향해서 그런 말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여기서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비느하스의 아내가 ‘이가봇’이라고 말한 것은 옳은 판단이었습니까? 정말 하나님의 영광이 언약궤와 함께 이스라엘을 떠났습니까? 이것은 한 시대를 진단하는 중요한 질문입니다. 성경적 대답은 그녀가 틀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자기 백성을 떠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교회를 떠난 적이 없습니다.
설령 유대가 망하고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성전이 불에 타서 무너졌어도 하나님의 영광은 바벨론으로 붙잡혀가는 자기 백성과 함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궤를 빼앗기던 때에도 자기 백성들 중에 계셨습니다. 계실 뿐 아니라 당신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고 계셨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조국의 교회를 떠나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떠나지 않으십니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기 때문입니다(엡 1:23).
2. 겨자씨 비유의 교훈(31~32)
이런 문제를 인식하면서 이 비유의 교훈을 살펴보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라고 말씀하십니다(31). 여기서 천국의 비교 대상은 겨자씨라기 보다는 겨자씨가 뿌려졌을 때 어떤 결과가 일어나는가 하는 것에 있습니다. 겨자씨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라고 하시지만(32),
사실 더 작은 씨가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당시에 작은 것을 ‘겨자씨’에 비유하던 관습을 주님께서 그대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가령, 주님께서는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라고 말씀하기도 하셨습니다(마 17:20). 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실까요? “너희는 지금 하나님의 나라가 겨자씨 같다고 생각하지?”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보잘것없고 작고 미약해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고 하십니다(32).
이것은 제국을 표현하는 이미지입니다. 에스겔 17:22~23을 보지요.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백향목 꼭대기에서 높은 가지를 꺾어다가 심으리라 내가 그 높은 새 가지 끝에서 연한 가지를 꺾어 높고 우뚝 솟은 산에 심되 이스라엘 높은 산에 심으리니 그 가지가 무성하고 열매를 맺어서 아름다운 백향목이 될 것이요 각종 새가 그 아래에 깃들이며 그 가지 그늘에 살리라.”
유다가 완전히 멸망하기 전에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 유다 백성들에게 에스겔 선지자가 전하는 말씀입니다. 그들의 존재는 마치 불에 타다 남은 포도나무같이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존재처럼 스스로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선지자가 전하는 메시지는, 하나님께서 백향목 꼭대기에서 높은 가지를 꺾어다가 이스라엘 높은 산에 심을 것인데, 그 가지는 무성하고 열매를 맺어서 아름다운 백향목이 되어 각종 새가 그 아래 깃들이게 될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좌절과 절망에 싸인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큰 나라를 이루도록 회복하실 것이라는 메시지입니다. 느부갓네살의 꿈에서도 새들이 깃들이는 큰 나무는 제국의 상징으로 사용되었습니다(단 4:10~12). 또 주님께서는 겨자씨가 커서 나무가 된다고 하셨는데, 여기에는 비유의 과장적 요소가 있다고 볼 여지가 있습니다. 물론 크면 3~4미터까지도 자란다고 하지만 기본적으로 겨자는 나무라기 보다는 관목(shrub)에 속한답니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는 표현은 이방인들이 하나님 나라로 모여 하나님의 백성에 편입될 것에 대한 종말론적인 암시로 이해되기도 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전세계적인 규모가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즉 겨자씨 비유는 그 씨가 너무나 작아서 뭔가 기대할 수 없는 것이지만 결국에는 큰 나무가 되어 새들이 깃들이게 되듯이 하나님의 나라는 작고 초라해서 보이지 않지만 결국 큰 나라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3. 누룩 비유의 교훈(33)
두 번째 비유는 누룩 비유입니다.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33). 가루 서 말은 약 40리터, 100인분 정도의 빵을 만들 수 있는 양입니다. 그러니까 보통 주부들이 거의 경험하지 못할 큰 양입니다. 그 밀가루 안에 밀가루를 부풀게 하는 누룩이 있습니다. 누룩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그 밀가루를 100명 이상이 먹을 수 있게 부풀릴 것입니다. 누룩은 거의 언제나 성경에서 죄의 파급력을 부정적인 의미로 표현할 때 쓰입니다.
그래서 여기서도 주님께서 부정적 의미로 말씀하셨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지만 여기서는 누룩의 파급력만을 말씀하신 것으로 보는 것이 문맥상 자연스럽습니다. 그리고 가루 서 말은 하나님 나라의 풍성한 종말론적 성취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누룩의 비유도 겨자씨의 비유와 마찬가지로 현실적으로 보잘것없고 눈에 띄는 것이 없지만 결국 그 목적을 풍성하게 이룬다는 것입니다. 두 비유를 통해서 주님께서는 “봐라, 지금은 아무 것도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지 않지?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궁극적으로 성공할거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4. 비유의 강조점: ‘크기’가 아니고 ‘시작과 끝의 대조’다.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이 두 비유의 강조점은 크기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크기를 강조하려고 하셨다면 겨자나무를 사용하시기 보다는 상수리나무나 참나무, 삼나무를 비유에 사용하셨을 것입니다. 이 두 비유는 아주 하찮은 시작과 위대한 결과를 대조시키는데 그 강조점이 있습니다.
겨자씨나 밀가루 속에 감춰진 누룩은 잘 안 보이는 미미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미미한 시작에 비교하면 그 결과는 엄청납니다. 서구인들은 보통 과정에 관심을 가지는 경향이 있다면 근동 사람들은 처음과 끝을 더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시작과 끝이 근본적으로 다른 것을 주목하게 함으로써 하나님 나라가 그럴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너희 눈에 보이고, 지금 너희가 느끼는 것으로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한 일이 궁극적으로 일어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때까지 하나님께서는 쉬지 않고 그 일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고 계시며 일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전능하심으로 모든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고 그 일을 결국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5. 하나님은 언제나 일하고 계시며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서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일하신다.
여기에 일반적 교훈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일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증거가 잘 안 보일 수 있고, 그 증거가 너무나 미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일하고 계십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방식이 아니라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일하십니다. 눈 앞의 증거들은 말해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음으로 확인할 수 있으며 결국 주님께서 오실 때 확연하게 하나님께서 일하신 성취와 결과가 드러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참 중요합니다. 우리는 쉽게 낙심합니다. 그러나 이 두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깨닫는 자들은 낙심에서 소망으로 옮겨지게 됩니다. 신자는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습니다(고후 5:7). 이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바라보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믿음의 원리가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은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에서 아들 이삭을 얻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는 불가능이 없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아들 이삭을 바치면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무너진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는 순종하여 이삭을 번제로 바치는 자리까지 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없는 데서 있게 하시는 분임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기 눈에 근거가 되는 어떤 것을 확인하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이래서 이렇게 되었다’고 설명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설명이 불가능한 자리로 우리를 데리고 가십니다. 그냥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게 하십니다. 요한복음 9장에 나면서 맹인이었던 사람의 눈을 주님이 뜨게 해주셨을 때, 바리새인들은 그 사람에게 설명을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뭐라고 말합니까?
“내가 아는 한 가지는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것이며, 그가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누가 나면서 맹인인 사람의 눈을 뜨게 해줄 수 있습니까? 불가능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거기에는 인간이 설명할 어떤 원인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것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불가능한 상황에서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당신의 일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눈에 어떤 증거가 있지 않고, 오히려 거꾸로 가는 것 같이 보여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일하고 계시다는 것을 겸손하게 믿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430년을 지냈습니다. 처음에는 좋은 출발이었지만 애굽의 압제자인 바로의 노예가 되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40년도 아닌 430년의 세월을 뒤집고 자유로운 민족이 되어 한 나라를 세웠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기억하셨고, 그 430년 동안 신실하게 당신의 목적을 위해서 가장 합당한 방법으로 일하고 계셨다는 것을 성경은 증거합니다. 모세는 어떻습니까?
그는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나이 40세에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 나이가 80세가 되어 그것도 애굽의 왕자라는 신분이 아니라 미디안 광야의 목자로 늙어가고 있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본격적으로 무대에 등장합니다. 그러면 그 이전의 인생은 헛된 삶이었습니까? 아니지요.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으로 빚어가고 계셨고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백성을 준비시키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포기하고도 남을만한 시간과 조건에서 극적으로 당신의 역사를 보이십니다.
이스라엘과 유다의 역사를 보십시오.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요, 예루살렘에 세워진 하나님의 성전이 불타 없어질 수 있습니까? 선지자들 외에는 아무도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상상 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앗수르와 바벨론의 손에 넘기셨고 성전은 무참하게 불타버렸고 그 안의 모든 것들은 바벨론 제국의 전리품으로 옮겨졌습니다.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나라는 망했고 사람들은 다 바벨론 제국으로 끌려갔지만,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시고 일하고 계셨습니다.
다니엘,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그리고 모르드개는 모두 그 시대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당신의 일을 하셨는지를 보여주는 인물들입니다. 유다라는 나라가 망했고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하나님의 교회를 떠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언약궤를 빼앗긴 것이 이가봇이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처녀의 몸을 통해서 이 땅에 성육신하신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은 인간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자리에서 일하신다는 것, 인간의 판단과 생각에 제한 받지 않으신다는 것, 하나님은 인간이 예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일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놀라운 사건입니다. 불가능이 하나님께는 가능함이고, 죽음이 하나님께서는 생명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사건을 통해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무력하게 인간의 손에 의해 죽으셨습니다.
모든 것이 다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두가 다 절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당신의 독생자를 버리시고 저주하시고 율법의 형벌을 가하여 죽이심으로써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고 하나님의 나라를 성취하시기 위하여 가장 놀라운 일을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역행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때 하나님은 가장 놀랍게 일하고 계십니다.
당신의 아들을 죽음에서 일으키심으로써 자기 백성의 구원이 성취되었습니다. 이것이 앞에서 언급한 모든 사건들의 절정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도 계속해서 일하고 계시며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서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일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는 궁극적으로 영광스럽게 세워지고 하나님의 백성은 승리할 것입니다.
6. 하나님은 신자의 유익을 위해서 그렇게 일하신다.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일하시는지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가장 합당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어떤 원인이나 공로를 찾을 수 없고 하나님께서 홀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입니다.
인간은 아담 이래로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망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 망상은 질기게 인간의 삶을 조종하고 지배하려고 합니다. 우리의 자기 의가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온전히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의를 의지하게 하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십니다. 그 시간이 우리에게는 대개 고난으로 경험됩니다. 우리의 예상대로 되지 않을 때, 우리의 기대처럼 하나님께서 뭔가를 이루시고 보여주시지 않을 때 우리는 실망하고 좌절하고 고통스러워합니다.
그래서 “어찌하여?”라고 묻거나 “얼마나 더 오래?”라고 하나님께 묻습니다. 그 고난이라는 상황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빚어가시기 위해서 일하시는 상황입니다. 이 고난 속에서, 이 불가능한 절망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당신의 영광을 담지하는 영광스러운 그릇으로 빚어가십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 방법으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십니다. 이 기막힌 하나님의 방법을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깨달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7. 적용적 교훈
A. 신자 개인의 성화에 적용
이 말씀을 적용할 때 우리는 먼저는 신자 개개인의 성화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믿음을 가졌다고 하지만 그 증거가 미미하고 열매가 눈에 띄지 않는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이 두 비유가 뭐라고 말합니까? 우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는 결과를 만들어내신다고 말합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지금은 미미해도 결국은 열매를 맺습니다.
이것뿐입니까? 신자는 어떤 상황에도 처할 수 있고 그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심을 아는 사람입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1~13).”
어떤 형편에 있어도 나는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심을 안다는 이 말은 얼마나 담대하고 영광스러운 말입니까? 신자는 자신이 처해 있는 모든 형편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가난해도, 실패해도, 문제가 많은 중에도 그는 하나님께서 지금도 이 환경 속에서, 이 환경을 통해서 당신의 일을 하고 계심을 아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죽음에서 살아나셨고 지금도 살아계시고 다시 오실 것입니다.
B. 교회와 선교에 적용
이제 이 비유들의 교훈을 교회와 선교에 적용해보지요. 서두에 말씀드린대로 오늘날 우리 교회의 현실은 어둡습니다. 그러나 이가봇은 아닙니다. 교회는 승리합니다. 우리가 바라는 만큼의 열매가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당신의 교회에 충만하게 계시며 당신의 방법으로 일하고 계십니다. 선교 역사의 초기 개척 선교사들은 첫 열매를 보기까지 수년 혹은 십 년 이상을 기다려야 했던 경우들이 흔했습니다.
그런 방법으로 어떻게 그 민족, 그 나라의 복음화를 이룰 수 있을까 염려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가 어떻게 로마 제국의 300년 동안의 그치지 않는 박해 속에서 죽지 않고 살아서 로마 제국의 종교가 될 수 있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방법으로 지난 2천년 교회 역사 속에서 그 일을 놀랍게 이루셨고 우리는 그것을 보고 있습니다.
C. 모든 불가능한 상황에서 신자의 믿음은 소망을 이룬다(롬 4:18~21).
불가능해 보이는 모든 상황에서, 고난 속에서 신자의 믿음은 소망을 이룹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고 하신 말씀을(롬 4:18) 그대로 이루십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여러분이 처해 있는 모든 환경 속에서도 역시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는 믿음의 장성한 자리로 여러분을 빚어가십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가 처한 그 자리에서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우리 안에서 우리를 빚어가십니다.
그리고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이 살아계신 증거를 하나도 볼 수 없고 교회에서도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는 증거를 볼 수 없을지라도,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작은 겨자씨 하나가 큰 나무를 이루듯, 밀가루 속에 감추어져 보이지 않는 누룩이 밀가루를 다 부풀어오르게 하듯이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하게 성취되는 일을 보게 하실 것입니다. 이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신자의 부르심입니다.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마13:33
2015-09-04 18:25:32
'조용히' 변화시키는 누룩 (당신도 조용한 혁명가)
▲믿음의 단돈 1페니의 위력
영국의 어떤 교회에서 다섯 살 된 한 소년이 지정 선교헌금을 했습니다.
헌금 액수는 1페니였습니다.
그러면서 이것으로 꼭 신약성경을 사서 인도에 보내달라고 지정했습니다.
교회는 이 어린아이의 뜻을 존중하여 돈을 조금 더 보태서
아주 작은 신약성경 한 권을 샀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의 이름을 사인해서
인도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모두 다 잊었습니다.
그로부터 20년 후 그 교회의 목사님이 인도에 들러
어떤 마을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 마을은 독특하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잘 믿으며 건실하게 신앙생활하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이 마을에 복음이 전파되었습니까?”
그들은 참 간단하면서도 감동적인 얘기를 전해 주었습니다.
옛날에 어떤 선교사님 한 분이 자기 마을에 들어와 전도를 하면서,
조그만 신약 성경 한 권을 주고 간 것이
그 마을 복음화의 기초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잘 보관하고 있는 그 신약 성경을 직접 보여주었습니다.
다 떨어지고 남루한 신약성경이었는데, 거기에는 20년 전 자기 교회의
5살 어린아이의 이름이 사인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감격스런 현상이었습니다.
다섯 살 된 어린아이 한 명이 인도 어느 지역에 ‘조용한’ 복음의 혁명을
일으킨 것입니다.
믿음을 가진 한 사람의 1페니 헌금으로도 복음의 ‘조용한’ 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 것입니다.
▲1. 누룩 복음은 가만히 있지 않고, 조용히 변화시키는 운동을 합니다.
누룩을 반죽 속에 넣으면, 그 누룩은 보이지 않게 ‘조용히’ 활동합니다.
밀가루 반죽 자체는 아무런 변화의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누룩이 들어가면 발효되기 시작합니다.
누룩이 들어가야 가루가 부풀어 커지게 늘고, 또 빵의 맛을 냅니다.
맨 밀가루 빵은 별 맛이 없습니다.
이것이 곧 복음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 가슴에 들어가면 변화가 일어납니다.
맛이 달라지듯이 삶이 달라집니다.
그 사람이 모르는 사이에 ‘조용한’ 변화운동을 일으킵니다.
복음의 생명력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기독교선교 초기 때 대원군은
"기독교는 염병과 같다"고 표현했습니다.
복음이 일단 그 지역이나 마을에 들어가기만 하면 동네가 달라집니다.
사람들은 별것도 아닌 쪽복음을 받으면 놀라운 변화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한 지역에 예수쟁이가 생기면 전염병처럼 번져나갑니다.
내가 분명히 예수 믿는 신자라면
어디 가서든지 조용히 변화를 일으키는 혁명가가 됩니다.
나 한 사람으로도 생명운동을 일으키는 누룩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할렐루야!
▲2. 누룩 복음은 적은 양으로도, 많은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바로 앞 절(마13:32) 겨자씨 비유에선 남성적입니다.
외부 지향적 농부비유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여성적 비유를 사용하십니다.
누룩비유는 내부 지향적 가정주부의 비유입니다.
여기 몇 가지 중요한 단어에 주목해야 합니다.
①첫째는 주인공이 ‘여자’입니다. ‘힘이 없는 연약한 자’입니다.
②둘째는 밀가루 ‘세 말을 전부다 부풀린다’입니다.
오늘날로 환산하면 약 42리터입니다.
단 한 줌의 누룩이 밀가루 반죽 42리터를 다 부풀리는 것입니다.
작지만 굉장한 영향력입니다.
물론 누룩이 발효되는 데는 시간이 걸립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부풉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초라하게 시작합니다. 조용히 진행됩니다.
그러나 나타나는 결과는 놀랍습니다.
아무 힘도 없는 못 배운 여성이라 할지라도,
누룩의 변화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몇 사람, 기도한 몇 사람, 전도하는 몇 사람,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몇 사람이 한
지역과 한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저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 조용히 오셨습니다.
마구간의 구유에서 조용히 천국운동과 세계선교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전 세계를 복음화 하고 있잖아요!
예수님은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데 많은 숫자로 시작하지 않으십니다.
12명의 제자로 출범하십니다.
그런데 그들은 금새 ‘천하를 어지럽히는 혁명가’가 됩니다(행17:6).
▲미국 청교도의 뿌리가 된 여인들
특히 오늘의 미국을 이룬 청교도들의 경건한 신앙은
그 뿌리가 네덜란드에서 기원합니다.
그런데 네덜란드인들은 복음화 되기 이전에 조상은 본래 바이킹 해적들입니다.
당시 바이킹들의 본토 아내들은 방탕하고 수준이 낮아서
결혼생활과 가정이 엉망이었습니다.
그래서 머리가 좋은 바이킹들은 이 문제를 놓고 연구하다가
좋은 묘안을 떠올렸습니다.
‘우리가 비록 해적질을 하며 먹고살지만, 우리 자녀들만큼은 잘 키워야 하는데,
그 비결은 예수 잘 믿는 여자들과 결혼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 나라 저 나라 다니면서 기독교 여성들을 마구 잡아다가
강제로 결혼을 했습니다. 그 결과, 신앙이 좋은 그 여인들은 졸지에
바이킹의 아내가 되었지만, 그들은 자식들을 경건하게 키웠고,
누룩처럼 남편들을 서서히 변화시켰습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자 나라 전체가 기독교 나라로 변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자란 후예들은 신대륙 미국에까지 건너가
미국 청교도들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로마 사회를 변화시킨 여성의 힘
콘스탄틴의 어머니 헬레나가 조용히 신앙적 영향을 주다보니,
아들 콘스탄틴 황제가 로마를 기독교 국가로 만들었습니다.
한 여인의 복음적 영향력이 인류 역사의 혁명을 일으킨 것입니다.
마케도니아 빌립보 성의 섬유사업가 루디아가 바울에게 힘을 주므로,
유럽 선교와 로마 선교를 가능케 해주었습니다.
또 뵈뵈라는 한 여인의 묵묵하고 조용한 뒷바라지가
사도 바울을 평생 지치지 않고 뛰어 다니는 목회자가 되게 하였습니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작은 읍내 한 주일학교에서
어린 개구쟁이 소년 빌리에게 장래 비전을 심어주신 한 할머니의 영향력이
그를 금세기 최고의 전도자가 되게 하는 영적 혁명을 일으킨 것입니다.
▲조용한 혁명가가 필요함
오늘 이 시대야말로 조용히 혁명을 일으키는 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복음 혁명운동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조용한 혁명가로 만들어주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시끄럽게 소란 피우지 않습니다.
회사에서 노조를 선동하여 요란하게 데모하듯이 그렇게 야단 피우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누룩처럼 살며시 퍼집니다.
조용히 운동합시다. 조용한 혁명을 일으킵시다.
<인터넷 방송설교 요약 2002년 가을
◑세계 선교 역사에 있어서 소수의 힘
세계 선교 역사를 보면, 창조적 소수minority들이
선교의 역사를 이끌어오다시피 했습니다.
개신교가 탄생하기 전 중세 천주교 시대에,
세계 선교는 주로 수도원과 수도사 중심이었습니다.
'미션' 영화로 유명한 예수회, 그 외 프랜시스 수도회, 도미니크 수도회 등
이들 수도회들은 로마 가톨릭이라는 거대 교회에서 그 차지하는 위치가
변방이요, 소수minority요, 선교사업에 있어서 천주교회의 정식 인준을
절실히 필요로 했던 자생적 종단order들이었습니다.
처음엔 정식 교회도 아니었던 셈이지요.
그러나 그 소수들이 큰 일을 저질렀습니다.
그 결과 남미가 지금까지 천주교화 되었습니다.
그것은 개신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소수 모라비안 운동
개신교 세계 선교는 18세기에 할레 대학에서 기원을 갖고 출발합니다.
할레 대학은 당시 약 반세기만에 6천 명의 사역자를 배출했는데,
그 중 60명이 개신교 최초 해외선교사로 자원해서
인도와 신대륙 등지로 떠났습니다.
이 할레 대학은 ‘경건주의’라는 일종의 소수minority 집단이었습니다.
개신교식 프란시스회, 도미니크회 같은 수도원 운동인 셈이지요.
할레 대학에서 배출한 걸출한 인물은 진센돌프(1700-1760)입니다.
그는 할레에서 7년간 수학했고, 공동체herrn hut를 조직해서
‘제2의 할레’를 꿈꾸었습니다.
그는 그 유명한 모라비안 선교회를 조직해서 해외에 선교사를 파송했는데,
그들이 단 20년 만에 이룬 선교의 업적들은
앞서 2세기 동안 영국 국교회와 개신교 전체의 해외선교 사역보다
더 큰 것이었습니다.
▲소수 웨슬레 운동
진센돌프와 모라비안 공동체의 또 하나의 큰 업적은
그 유명한 요한 웨슬리의 회심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웨슬리는 대서양 풍랑 이는 배속에서 모라비안들에게 큰 영향을 받았고,
또한 영국의 올드스게이트에 있는 모라비안 집회소에서
모라비안들이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읽고 있을 때인 1738년 5월 24일에
그는 회심의 체험을 하게 됩니다.
후에 그는 대륙의 모라비안 공동체를 직접 방문해서 진센돌프를 만나며
그에게 영감을 받습니다.
웨슬리는 후에 킹스우드Kingswood라는 공동체 학교를 세웠는데,
그것과 모라비안 공동체 herrn hut 와 하루 일과표를 비교해보면,
거의 똑 같습니다. 거기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는 증거입니다.
「존 웨슬리와 교육」 알프레드 버디, 감리회 교육국 출판, pp.41-46
◀ 적은 누룩과 하나님의 나라 /눅13:20-21/ 옥한흠 목사
2015-05-11 23:30:00
◑작은 누룩이 하나님 나라를 만듭니다.
▲하나님 나라를 ‘누룩’에 비유하신 이유
왜 하나님 나라를 누룩과 같다고 하셨을까요?
누룩이란, 적은 양이지만, 밀가루 반죽 속에 섞어 놓으면,
그것을 부드럽고 큼직하게 부풀게 만드는 신비한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적은 누룩과 같이 약한 자, 작은 자들이
사랑과 의가 넘치는 하나님의 나라를
온 세상에 퍼뜨리는 데 주인공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 작은 자가 천을 이루고
그 가장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루는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60:20
눅12:32절에, 적은 무리여 무서워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즉, 하나님 나라는 적은 무리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요란하고, 화려한 사람들의 손에 달린 것이 아니라,
누룩과 같이 작은 자, 약한 자들의 손에,
그 숫자가 얼마 되지 않는 무리들 손에,
그 중요한 하나님 나라의 운명이 달려 있다는 것이
바로 누룩 비유를 예로 들어 설명하시는 예수님의 의도입니다.
▲이런 하나님 나라의 특징을, 예수님이 먼저 잘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동안 주로 하신 일은, 12제자를 키우시는 일이었습니다.
온 세상을 구원코자 하시는 그 분의 비전에 비교하면
12명은 너무나 초라한 숫자입니다.
숫자만 초라한 것이 아니다. 그 제자들의 배경을 보더라도
대부분 변방 갈릴리의 무식한 어부들이었습니다.
일반 사람들 보기에는, 예수님이 오합지졸과 같은 12명을 끌고 다니시면서
도대체 무슨 일을 하시려는지... 쉽게 감이 잡히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위해 예수님은 3년 동안 온갖 정력을 다 쏟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제자들은 한심하게 모두 도망갔습니다.
그런 자들을,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다시 불러 모으셨습니다.
그 40일 동안에도 다시 하나님 나라의 일들을 가르치셨습니다. 행1:3
그리고 그들을 항상 격려하셨습니다.
지금은 너희가 아무 것도 못하지만, 나중에는 큰일을 하리라
너희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되는 날, 나보다 더 큰 일을 할 것이다... 요14:12
승천하시기 직전에는, 온 천하에 나가서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으라는
격려의 당부 한 마디를 남기시고, 손 털고(믿고) 승천하셨습니다.
그 초라한 12명을 남겨놓고, 주님은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이들이 세상을 바꾸어 놓으리라고 그만큼 믿었다는 것입니다.
이들 때문에 하나님 나라가 세상 구석구석까지 퍼져나갈 것을.
예수님은 믿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때, 다수에게 의지하신 적이 한 번도 없으셨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원들 같은 힘 있는 사람들에게 뭣을 기대하신 적도 없으셨습니다.
왜냐면 약하고 초라한 자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질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누룩’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 받은 우리 모두가 누룩입니다.
누룩은, 약하고, 가난하고, 작은 자들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저게 뭐할까?’ 싶을 정도로 볼품없는 작은 양量입니다.
그럼에도, 가루 세 말을 모두 부풀게 하는 신비한 능력을 가졌습니다.
한국과, 세계의 기독교 역사를 한 번 보십시오.
누가 하나님 나라를 임하도록 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쓰임 받았습니까?
대부분 약하고 가난한 자들입니다. majority보다는 엄연히 minority입니다.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는 전파되었고, 확장되었고, 세상은 변화되었습니다.
내로라하며 배 내밀고, 자기 가진 것으로 과시하던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볼 때, 하나님 나라를 위해 별로 기여한 것이 없습니다.
▲진실로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자기를 ‘약한 자’로 낮춥니다.
작은 자, 아무 것도 없는 자로 여깁니다.
자기 혼자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익한 종’으로 봅니다.
바른 신앙을 가진 사람은 다 그렇게 됩니다.
우리가 크다면, 진짜 크시고 영광스러우신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큽니까?
위대하면 얼마나 위대하며, 가졌으면 얼마나 가졌습니까?
진정한 신앙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어린아이로 만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아이의 것이니라. 막10:14등
진짜 믿음을 가지면, 스스로 작은 자라고 생각하지, 큰 자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항상 관심을 가져야 하는 대상은 작은 자, 약한 자입니다.
두 세 사람이 모인 자리입니다.
교회는 항상 거기에 주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거기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고,
성장하는 기적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제자훈련 목회 회고
▲제자훈련은 - 작은 소수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저는 25년 동안 목회하면서, 제자훈련에 심혈을 기울여왔습니다.
제자훈련이 무엇입니까?
‘작은 자 하나를 주목하는 목회’입니다.
‘누룩과 같은 소수의 사람에게 모든 것을 거는 목회’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작은 자, 약한 자 같고, 가난한 자, 실패한 자 같이 보이더라도
예수님은 그들을 통해 ‘천을 이루고, 강국을 이루는’ 비전을 가지고 뛰셨습니다.
그렇게 (소수의 누룩 같은) 제자들을 훈련시키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다수는 허수입니다.
많은 무리는 허상입니다.
그래서 12명 제자들을 위해서, 주님께서 3년 동안 있는 힘을 다 쏟으셨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도 예수님처럼 저렇게 해야지!’ 생각하며 목회해 왔었습니다.
▲교회를 크게 만드는 일에 집중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런 의미에서 저는 대형교회 목사가 아닙니다.
제가 만약, 큰 교회당을 소원하고 수 만~수 십 만 명 모이는 목회를 원했더라면,
장년 출석 숫자가 1만 명을 넘어가던 15년 전에
아마 어떤 식이든지 일을 저질렀을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당도 아마 크고 화려하게 지었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오늘 우리 성도들이 주일날 자리가 없어서 고생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제가 마음이 좀 아프기는 합니다.
그러나 솔직히 이야기 하면, 1만 명 모이는 교회도... 예삿일은 아닙니다.
무슨 능력으로 내가 그 많은 분들을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예수의 제자’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
<은혜의 사각지대가 없는 교회,
한 사람, 한 사람이 무시당하지 않는 교회> 이런 중요한 가치도,
“사람이 너무 많으면” 알맹이 없는 빈 껍질이요, 위선적인 구호에 그칠 뿐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몇 만 명을 모으는 교회를 만들겠다고 생각했겠습니까!
이런 의미에서 저는 대형교회로 커지는 것을 애당초 원치 않았습니다.
▲제 두 가지 고집
그래서 장년출석 1만 명이 넘어갈 때, 저는 의도적으로 두 가지를 고집했습니다.
*교인들이 5~6백 명 모일 때 지은 교회당을 계속 사용하는 것입니다.
장소가 불편하면, 사람들이 몰려오지 않을 것이라는 의도가 깔려 있었습니다.
*또 하나는 제자훈련을 집요하게 집중하는 것이었습니다.
‘제자훈련 제대로 받아서 영적으로 성숙하지 않으면
이 교회 안에서는 설 땅이 없어진다’ 라는 사상이 교회문화로 형성되게 했습니다.
이 ‘제자훈련’을 위해서 저는 모든 것을 포기해 왔습니다.
밖에 나가서 감투 쓰는 것도 포기했고,
이 일에 집중하기 위해서 여러 곳에 돌아다니는 것도 포기했고,
제가 하고 싶은 일들도 많이 절제했었습니다.
▲원치 않았던 결과,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대형교회를 꿈꾸는 사람에겐, 이 두 가지가 장애가 될 것입니다.
큰 교회를 지어야 사람들이 몰려오고,
또한 제자훈련 같은, 성도들에게 부담을 주는 프로그램을 안 해야
사람들이 편하게 다닐 게 아닙니까!
그러나 제가 거꾸로 간 것은, 교회가 너무 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계속 성장했습니다.
한창 크는 아이를, 크지 말라고 위에서 누른다고 해서 안 크겠습니까!
좁은 공간 속에서도, 사람들은 계속 몰려왔습니다.
성도들이 가슴이 뜨거워져서 자꾸 전도해서 데려오는 것을 막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교회가 커진다고 해서 무radish 자르듯이 잘라서
사방으로 널어놓을 수도 없었습니다.
결국 제 의도와는 달리 대형교회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저는 솔직할 수 있습니다.
저는 크고 화려한 교회당과, 수만~수십만이 모이는 교회를 꿈 꾼 적이 없습니다.
지금 쓰는 이 교회당을 지을 때도, 저는 교인들과 티격태격했습니다.
저는 2천석 교회당 짓는 것도 크다고 여겨서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때 당시, 제가 나서서 건축규모를 더 줄이자고 했었습니다.
성도 한 분 한 분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키우는 일에,
사람이 많이 모일수록...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1만 명의 청중보다도, 1백 명의 예수의 제자들이 있는 교회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제자훈련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특별한 비전입니다.
뒤돌아보면, 하나님께서 이 교회를 통해, 지난 30년 동안 엄청난 일을 하셨습니다.
한 사람을 예수의 제자로 만드는 일,
하나님 나라가 누룩처럼 퍼져나가게 하는 일은
전 세계적으로 확장되었습니다.
이 사역을 세계로 확장시키고자 하는 동역자들이 점점 더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제게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제가 과연 잘 해왔는지...
주님 앞에 섰을 때, 주님이 잘했다고 저를 칭찬하실지...
◑윌로우크릭 교회의 자기반성
▲저는 며칠 전에 매우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미국 시카고에 월로우크릭 교회가 있고, 빌 하이벨즈 목사님이 목회하십니다.
그 교회는 개척된 지 30여년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2만 명 가까이 모이는 큰 교회입니다.
하이벨즈 목사는 교회를 개척할 때, 집집마다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교회를 좋아하는 요인, 좋아하지 않는 요인들을 분석해서
그들이 좋아하지 않는 요인은 교회에서 과감하게 제거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좋아하는 요인들을 중점적으로 교회가 준비했습니다.
이런 면들이 그 교회를 크게 성장시키는데 기여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 영향력을 미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 교회에서 최근, 호킨스 와 파킨슨 부목사가 쓴 책이 발간되었습니다.
Reveal : where are you? 란 제목의 책입니다.
책 제목으로 보면, ‘당신이 영적성장의 여정에 어디쯤 와 있느냐?’를 묻고 있습니다.
이 책은, 지난 32년 동안 윌로우크릭 교회가 사역을 제대로 해 왔는지,
성경적으로 분석하는 보고서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3년 동안 몇 만 명에 가까운 성도들을 대상으로 자세히 조사했습니다.
▲그런데 결론이 충격적입니다.
한 마디로 뭔가 잘못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뭔가 실수했다는 것입니다.
지난 32년 동안 교인들의 영적 성장을 위해서
수많은 프로그램과 이벤트들을 가동하면서, 막대한 재정과 자원을 쏟아 부었습니다.
교인들은 열심히 교회 안에서 섬기고 봉사했습니다.
그 결과 교회도 외적으로 폭발적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래서 4천명이 들어가는 큰 교회당을 쓰다가
그것도 모자라 그 옆에 7천명이 들어가는 큰 교회당을 다시 지었습니다.
외형적으로는 얼마나 대단한지..!
그런데 그들은 왜 실패했다고 합니까?
성도들 한 분 한 분의 삶을 분석해 보니,
그들이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로서의 삶을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가,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로 만드는데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 예수의 제자로 만드는데 실패했다면, 목회가 실패한 것입니다.
대형교회로 만족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이벨즈 목사는 이 결과를 보고 너무 큰 충격을 받아서
땅이 흔들거리는 것 같은 떨림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우리는 근본부터 새로 시작해야 한다.
지금까지 그려온 그림을 지우개로 하나씩 지우는 정도가 아니고,
아예 흰 백지를 새로 꺼내놓고,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렇다면 한국의 우리 교회는 실패했다고 말 안 해도 될까요?
우리 교회 성도들의 삶을 면밀하게 조사해서
과연 제자의 삶을 산다고 자신하는 성도는 몇 퍼센트나 될까요?
우리는, 윌로우크릭과 달리, 잘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윌로우크릭 교회처럼,
백지를 꺼내놓고 아예 새로 시작해야 한다고 말해야 할까요?
저 역시 만감이 교차되었습니다.
▲교회의 외적 성장, 성도의 양적 성장이
목회자의 성공으로 치부되는 현실에서
(예수님이 관심가지신) 약하고 작은 자들은 경시하고
화려한 교회당, 수많은 청중들을 과시하려는
야망에 들떠있는 모습으로
사람들의 눈에도 비쳐지는 이런 때에,
장차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이 저를 어떻게 평가하실까요?
과연, 잘했다고 하실까요?
◑지금은 큰 공동체보다, 작은 누룩이 필요한 때
▲오늘날 탁월한 영성지도자인 달라스 윌라드 교수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 정말 필요한 것이 과연 무엇인가?
더 많은 청중, 더 큰 교회당일까?
더 많은 교회재정일까?, 아니면 더 많은 자랑거리일까?
결코 아니다.
성경을 보든지, 기독교 역사를 돌아보면
자기 시대를 바꾸고 변화시킨 진짜 능력 있는 교회를 면밀히 검토해 보면,
언제 그 교회가 이런 능력을 최대로 발휘할 수 있었는가 하면,
큰 교회당이 없을 때, 많은 성도가 모이지 않았을 때,
교회가 세상적으로 크게 자랑할 것이 없었을 때, 또한 재정이 약할 때였다.
교회가 이런 것들을 가지지 못하였을 때, 또는 아예 없었을 때,
그 능력을 칠 배로 발휘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윌라드 교수의 지적에, 저도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달라스 윌라드 교수는 다시 이렇게 묻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에 진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큰 교회당도 아니요, 구름 떼처럼 몰려드는 청중도 아니다.
예수님께 순종하는 삶을 통해서 세상을 변화시킬 도덕성과 능력을 가진
누룩과 같은 제자들이다! 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1만 명의 청중보다도, 1백 명의 제자가 더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누룩 비유’를 통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준엄한 메시지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날 주님이 우리 교회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수 만 명의 청중일까요?
크고 화려한 교회 건물일까요?
양심적으로 대답하면,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원하신다는 것입니까?
그 숫자가 얼마가 되던 간에,
말씀대로 순종하는 충성스런 제자들의 공동체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바꾸는 ‘작은 누룩’이 되라고 하십니다.
▲이런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기에는
지금 우리가 조금 비대증에 걸려있지 않는가... 생각이 듭니다.
제가 은퇴할 때부터 벌써 그런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후임 오 목사님이 오신 이후부터도 계속 체중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자를 만들려고 하는 그 정신이 점점 흐려지기 쉬운 것입니다.
우리 교회 원래 목적과 초점이 흐려지기 쉬운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원리를 붙잡는 데... 한계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이라도 정신을 차리고,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여러분,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까?
왜 부활하셨습니까? 왜 하늘 높은 보좌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까?
주님의 제자가 되어서,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바꿔 놓으라는 것입니다.
누룩이 반죽 덩어리를 부풀게 하듯이,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끝으로 “전부”라는 말에 주목합시다.
누룩은 한 모퉁이만 부풀게 하지 않습니다.
가루 세 말은 작은 양이 아닙니다.
교계는 물론이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계 등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내 한 명 구원받았고, 우리 가정 구원받았다고 만족하면 안 됩니다.
우리 교회에 사람 많이 모인다고 할렐루야 하고 있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온 세상 땅 끝까지 전파되고 세워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엡1:10
▲작은 자일수록 더 큰 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대부분 작고 평범하기 때문에, 더 큰 은혜가 필요하다”는
의미심장한 말이 있습니다.
만약에 내가 장관이 되거나, 아주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그래서 사람들에게 여러 면에서 존경과 기대를 한 몸에 받는다면,
뭐라도 영차 영차 하며 일을 수행해 나가는 동기와 환경이 조성됩니다.
그렇지만 아무 직책도 없고, 아무도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소외된 곳에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하루하루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에게는
진짜 큰 은혜가 필요합니다. 아니면 그 일을 못 해 냅니다.
그 큰 은혜가 있어야, 내가 오늘 하루를 예수의 제자로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작은 자이기 때문에, 은혜가 더 크게 필요한 것입니다.
약한 자이기 때문에, 지탱하려면 은혜가 더 넘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내가 있는 곳에서 누룩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내 모습이 하찮은데, 은혜까지 작으면
어떻게 하루하루를, 하나님 나라와 그 영광을 구하며 살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런 ‘작은 자’일수록 더 큰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주야로 묵상해야 합니다.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날마다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주십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으면, 우리 안에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누룩처럼, 소리 없이 자기 주변을 변화시킵니다.
나는 작고 별 거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 같은 작은 자를 사용하셔서,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바꾸시길 원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절대 평범하지 않습니다.
내가 약하다고, 내가 작다고, 가난하다고... 평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대단하게 보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역사의 최후 승리자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결국 이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
당신은 그 나라의 영원한 주인공입니다. 대단한 자존감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각자 때문에,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더욱 임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 누룩을 주의하라 /마16:5-12/ 곽선희 목사
2014-11-25 05:30:05
제가 어렸을 때에 할아버지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들에 나갔다가 들에 매어놓은 남의 황소 한 마리를 훔쳐 가지고 돌아왔는데, 이것이 발각이 되어서 경찰서에서 취조를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경찰이 말하기를 “이 사람아, 벌건 대낮에 남의 황소를 훔쳐? 어떻게 그래가지고 그게 무사할 수 있다고 생각했느냐?”하고 물었더니 도둑이 하는 말이
“나는 들에 나갔다가 고삐 하나가 땅에 놓여있는 것을 끌고 왔는데 와보니 소 한 마리가 따라오더군요. 난 소까지 훔칠 생각은 없었는데요”라고 능청맞게 대답을 했습니다.
경찰의 대답이 더 재미있습니다. “그래? 우리도 자네 손만 묶어 가지고 왔는데 자네는 왜 따라왔나?”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무책임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어떤 행동이든지 반드시 거기에 의지가 있고 생각이 있고 사상이 있는 것입니다. 행동은 행동대로 생각은 생각대로 별개로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간혹 우리는 부지중에 혹은 몰라서 혹은 무의식중에 이런 말은 합니다만은 알고 보면 무의식도 의식적인 행동이 반복되면서 이제는 행동만 남고 의식이 뒤에 감추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행동은 우리 자신의 것이요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시편 49편 20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같도다.”
역시 사람의 사람됨은 그 사람의 깨달음에 있습니다. 그 깨달음이 어디까지냐가 문제입니다. 무엇을 생각하며 무엇을 깨닫느냐 거기에 사람된 위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경영학 이론에 “전파론” 이라는 이론이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사람의 유형을 이렇게 분석하고 있습니다. 사람 가운데는 변화를 즐기며 모험을 좋아하고 호기심이 많고 항상 창의적인 것으로 치닫는 그러한 유형이 있다고 합니다.
변화를 즐기는 사람, 다시 말하면 파이오니아쉽(Pioneership)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모든 사람 중에 5%밖에는 없다고 합니다. 또 하나는 타인 인식형입니다. 아주 소극적이라서 변화를 원하면서도 다른 사람과의 조화를 맞추려고 합니다.
그래서 부딪히지 않으려고 하고 ‘다른 사람이 어떻게 볼까’하는 것까지 생각하다 보니 진정한 변화를 꾀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한 20%가 된다고 합니다. 그 다음에는 추종자 유형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무조건 남이 하는대로 따라갑니다.
남이 가면 가고 오면 오고 남이 입은 옷을 내가 못 입으면 속상합니다. 남이 입은 대로만 입으면 그럼 내 마음은 행복합니다. 남이 하는 일을 못 따라 하면 마치 그것을 악처럼 생각하고 남이 하는 일대로 따라하면 그것은 선이라고 그렇게 느끼고 사는, 완전히 타인 추종형, 이런 형은 무려 70%가 된다고 합니다.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나머지 가운데는 자신의 고집대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가 살아온 철학, 생활 태도․방법이 무너지면 인생이 망가지는 줄로 생각합니다. 절대로 양보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주 고집불통의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이십니까? 문제는,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들으면서 기억하고 기억이 축적되어서 논리적으로 정돈해서 이해가 됨으로써 지식이 됩니다. 그러나 지혜라고 하는 것은 사건에 부딪히면서 경험하게 됩니다.
몸으로 부딪히면서. 그래서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을 얻게 됩니다. 깨달음이 지혜를 주고 지혜가 믿음을 주고 믿음이 능력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능력이 실생활에서 생명력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사람 가운데는 말귀를 못 알아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듣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니, 듣지 않기로 결심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제는 들을 수 없게 된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이제는 깨달음과는 거리가 멉니다. 성경에 보면 말귀를 못 알아듣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제가 쉽게 기억하는 두 사람, 대표자가 있습니다. 하나는,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수가성 근처에 우물가에 앉으셨다가 그 수가성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을 때, 그에게 귀중한 아주 신비로운 차원 높은 말씀을 하나 하십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이 말을 듣고 이 여자가 하는 말을 보십시오.
“그런 물을 나 좀 주어서 물을 길러 오지 않게 해주세요.” 참 맹추같은 여자입니다. 이거 참 힘든 사람입니다. 또 그런가 하면 요한복음 3장에 보면 또 유식한 사람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니고데모같은 사람은 바리새교인이요 당대 종교 지도자입니다만 예수님께서 그를 맞아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거듭나야겠다. 중생해야겠다”라고 말씀했더니 이 사람 하는 것을 보십시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갑니까?” 아니 젊으면 다시 들어갑니까?
어찌 이렇게 맹추같은 소리를 하노.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랍비가 되어서 그것도 모르느냐?” 정면적으로 충고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왜 그러셨을 것 같습니까? 이 모두가 다 자기 생각, 자기 경험에 집착을 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기억지도 못하느냐.”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왜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왜 기억지도 못하느냐,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5000명을 먹이는 역사를 보여주셨습니다.
떡 다섯덩이로 5000명. 또 떡 일곱개로 4000명.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굉장한 사건인가. 이런 엄청난 사건을 보면서 깨달음도 많고 느낌도 많고 감격도 컸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감격을 가진지 불과 며칠 후에 예수님께서 지금 어떤 복음에는 다음 날로 되어있구요, 며칠 후 정도밖에 안되요. 그런데 배를 타고 지금 가십니다.
배 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바리새인의 누룩을 삼가라”고 하십니다. “누룩”하고 나올 때에 ‘아이쿠, 빵이 없구나’ ‘아, 우리가 빵을 준비하지 못했구나’ 서로 시비를 벌였습니다. 의논했다는 말은 서로 변론했다는 말입니다.
“왜 빵을 준비하지 않았느냐?” 아마도 그랬겠지요. 베드로가 그러니까 가롯유다가 회계 아닙니까? “아, 당신이 수제자로 ‘준비하라’ 했으면 내가 했을 것이 아닙니까? 아무 말도 없다가 이제 와서 왜 나에게 시비냐”는 것입니다. 서로 의논을 하게되고 변론을 벌입니다. 예수님께서 기가 막히셨습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아니 5000명을 먹이는 큰 기적을 본 사람이 또 5000명을 먹이는 그 귀한 역사를 나타낸 그 하나님의 아들이 눈앞에 계시는데 아, 그 앞에서 빵이 없다고 시비하게 되었습니까 지금? “왜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정말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기억하지도 못하느냐?” 이렇게 예수님께서 책망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기적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다 이적입니다. 그런데 이 이적에 대한 이해는 삼단계로 이루어집니다. 성경에도 아주 고맙게 세단어로 구별되게 나타납니다. 첫째가 테라스입니다. 이적이라는 말입니다.
영어로는 wonder라고 합니다. miracle, 기적이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인간 상식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경험으로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경험과 지식의 한계를 넘어서 초월한 일이 있을 때에 “이적이다”라고 말하게 됩니다.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이적은 많습니다. 오늘도 죽을 사람이 사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꼭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전혀 그런 때에 살아남을 수가 없는데 살아남았습니다. 저는 이적하면은 제가 아는 친구 한 사람을 생각합니다.
바로 옆에 있는 중앙 의료원에서 오랫동안 병중에 있다가 죽었습니다. 죽어서 시체를 냉장고에 넣었다가 장례식을 하려고 냉장고로 갔더니, 냉장고가 꽉 찼습니다. 넣을 데가 없어서 내일 아침에 하나 뽑아서 장례식을 하면 그 때 그 자리에 넣기로 생각하고 그 냉장고 앞에 놓아두었습니다. 그리고 하룻밤을 지냈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냉장고에 넣으려고 가보니까 살아났습니다. 자,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것이 기적이 아닙니까? 그래서 그 사람은 ‘이렇게 살았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그래서 목사가 이미 되었고 병원전도를 위해서 한 평생을 바쳤습니다. 이것 보십시오. 기적이란 있습니다.
깜짝 놀라는 기적이 있잖습니까. 이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기적을 기적으로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두나미스라는 것입니다. 다이나믹이라는 말이 거기서 나온 말입니다. 헬라어에서 두나미스란 능력이라는 말입니다. power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다. 이 사건 속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다,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인지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능력이요 권능입니다. 다음에 세 번째 단어가 있습니다. 그게 바로 세메욘이라고 하는데 표적이라는 말입니다.
표적, 이렇게 번역하는데 이 말은 영어로 sign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표적, 이것은 무슨 말입니까? 보이는 것 속에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 다시 말하면 그 속에 말씀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 말씀을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지나가는 사건이 아닙니다.
여기에 깊은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저 사람에게 나타난 일이지만 내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어제 된 사건이지만 오늘 말씀하고 계십니다. 2000년 전에 된 사건이지만 지금 새롭게 내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지금 저는 그것을 설교하고 있는 것입니다.
2000년 전에 된 사건인데 그것을 오늘에, 그 의미를 오늘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메욘, 표적 이해의 능력입니다. 표적을 표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보십시오. 남의 죽음을 보면서 나의 죽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몇 년 전의 사건을 기억하면서 오늘 내게 주시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다시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이 표적을 이해하는 능력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 사람들은 그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 큰 능력을 보고도, 감격하고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오늘 떡 하나 없는 것 가지고 시비를 벌이고 문제를 삼고 있습니다. 참 생각하면 어이가 없고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책망조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항상 생명에 대해 말씀하고 계시고, 떡을 보시면서도 생명에 대하여,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40일 금식한 후에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 우리는 떡을 대할 때마다 생명을 생각하고 생명의 주인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어리석은 말이 또 문제가 됩니다. 신앙 없는 말,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데이라고 하는 사람이 쓴 “세 황금 문”이라고 하는 작은 책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에 대해 충고를 합니다. 적어도 말을 할 때에는 이 세가지를 생각하고 말하라.
세가지 문을 통과해야 한다. 첫째가 ‘내가 지금 하는 말이 진실 된 참말인가’ 하고 물어봐야 됩니다. 여러분, 가끔 우리는 남의 말이라고 할 때가 있습니다. “아, 그런다더라” “그렇대” 혹은 “누가 그런대” 이 정도로 말을 하는데 이걸 잊지 마십시오. 내 입으로 말하는 한, 나의 말입니다.
남의 말이라고 그러지 마십시오. Quotation is nothing, 아닙니다. 남의 말이지만 내가 말하면 내 말입니다. 이제부터. 내게서 듣는 사람은 내 말로 듣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러므로 말은 참 조심하고 책임을 져야 합니다.
어제 저녁에 혹, 그 프로그램을 보셨습니까? 연예가 중계. 제가 그 프로그램을 재미있게 봅니다. 그런데 연예가 중계가 나오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그간에 요 몇 년 몇 달 동안에 소문이 났던, 인터넷에 뜨고 신문에 나고 했던 그런 이야기들을 전부 확인을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연애한다더라 해서 물어봤더니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혼한다더라 해서 물어보니 “우리가 왜 이혼합니까? 그런 거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죽으려고 약을 먹었다고 하는데 안 먹었습니다. 멀쩡합니다. 그뿐입니까? 와, 놀랍습니다.
어느 가수 에이즈 걸렸대, 그래요. 그 아이들까지 걸렸다고 소문이 났다고 합니다. 아 이거 야단났습니다. 저도 들었습니다 오래전에. 그래서 정말 그런가 했더니 어제 보니 멀쩡합니다. 절대 그런 일 없다고 합니다.
자, 그러니 연예인들 고생을 많이 합데요 정말. 그 연예인 된 죄로 말야 아니 이게 무슨 일입니까? 다른 건 몰라도 에이즈 걸렸다는 것은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이런 엉뚱한 말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전부 확인을 하면서 그런 일이 없다고 하는 얘기를 보았습니다.
결론은 무엇인가요? 여러분, 쉽게 이야기하지 마십시오.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날까, 그것이 망조입니다. 연기 납니다 요즘에는. 나고 말고요. 왜 그 생각을 못하십니까? 여러분이 하는 말은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져야합니다.
한 치의 거짓이라도 있다면 당신의 책임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말을 할 때에는 참으로 확실한 말만 해야 합니다. 그 외의 말은 들은 말이라도 옮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두 번째는 내가 해야 될 말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상황에 꼭 필요한 말인가? 그것이 내가 할 말인가? 또 하나, ‘이 상황에 이 말이 필요한가?’ 그것을 물어봐야 합니다. 말이란 시간과 장소에 따라서 다릅니다. 제가 이 말을 할 때마다 늘 생각나는 제 경험이 있습니다
. 제가 중학교에 다닐 때에 기계체조를 했습니다. 그래서 철봉을 잘했습니다. 아주 썩 잘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도 하고 저렇게도 하고 다 잘했는데 딱 하나, 못하는 게 있었습니다. 대회전을 못했습니다. 그것을 하려고 애를 써보았지만 잘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 친구는 그것을 잘했습니다. 공부하고 잠시 쉬는 시간에 운동장에 나와서 탁 붙잡자마자 휙 돌아가는데 참 부러웠습니다. 그래서 지켜보고 있는데 구경하던 친구 중에 하나가 입바른 소리를 했습니다. “원숭이가 나무에서 떨어지지. 표주박이 우물에서 깨지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돌면서도 그것을 또 들었습니다. 내려오자마자 “나 이거 하다가 죽으란 말이냐” 하더니 냅다 치는데요 저도 안 말렸습니다. 내키는 데로 때리라고. 참, 그거 입방아 못됐더라구요. 그거 어떻게 그 자리에서 그런 말을 합니까? 위험한 운동을 하고 있는데. 안 그렇습니까?
그런 것이 바로 문제입니다. 그런 때에는 입이라고 잘 안 합니다. 그런 때는 뭐라고 합니까? 여러분, 말조심해야 합니다. 입이라는 것이 아무 때에나 불리는 것이 아닙니다.
말이라고 다 말입니까? 진리야 진리입니다, 원숭이가 나무에서 떨어집니다. 그러나 그 시간에 할 말은 아닙니다. 여러분, 이 상황에 이 말이 필요한가, 물어 보십시오.
세 번째, 내 마음에 사랑이 있는가? 사랑에서부터 나오는 말이어야 합니다. 혹이라도 시기, 질투, 원망, 불평이 이 속에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빗나가기 때문입니다. 동기를 물어야 합니다. 정말로 사랑하는가? 이 세 가지 문을 통과하면 훌륭한 덕을 나타낼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여러분이 잘 아시는 디트리히 본훼퍼라고 하는 독일의 신학자요 순교자가 있습니다. 그가 쓴 작은 논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탄은 우리를 어떻게 유혹하는가? 라고 하는 논문에서 세 가지를 지적합니다. 하나는 감정을 사로잡는다.
그래서 질투심을 유발해서 불평하게 만든다. 그것을 잊지 마십시오. 질투는 죄가 아닌 줄로 아십니다만 마귀가 작용을 합니다. 원망하게 만듭니다. 작은 일 큰 일에서 원망하게 만듭니다. 이 원망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우리를 우울하게 만듭니다.
우울증을 우리는 병이 아닌 줄로 착각을 합니다. 우울증은 불치병입니다. 무서운 병입니다. 자기가 죽던지 남을 죽이던지, 이것이 우울증입니다. 그래서 자기 생애의 의미를 부정하게 만듭니다.
셋째는 구원 신앙을 흔들어서 ‘너는 용서받을 수 없다, 이미 죄가 많다, 너는 끝장이 났다’ 이렇게 유혹을 합니다. 절망하게 만듭니다. 다시 말해서 원망과 부정과 절망으로 유혹하다. 한번 들어둘 만한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 제자들, 어느 사이에 유혹을 받아서 방금 5000명을 먹이는 큰 기적을 보았건만 다 잊어버렸습니다. 그 감격도 없습니다. 그 능력도 잊었습니다. 오늘은 또 원망, 이렇게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깨닫지도 못하느냐. 기억지도 못하느냐. 어찌하여 서로 의논하느냐.” 바리새 교인의 누룩, 외식주의 형식주의 위선과 이기주의 세속주의 이것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실 때에 비유해서
“누룩과 같다, 한 번 받으면 자꾸 퍼져나간다, 무서운 힘으로 퍼져나간다, 그러므로 조심해라. 이 악한 교훈을 조심해라, 사탄의 역사를 조심해라”라고 말씀하시는데
이 중요한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어째서 떡만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까? 바로 거기에 불신앙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시는 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열 가지 재앙을 보았습니다. 놀라운 이야기 아닙니까?
그리고 홍해를 건너는 감격을 누렸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자세히 보면 두 주일도 못 가서 원망을 합니다. 모처럼 애굽에서 나온 사람들이 가나안에 못 들어간 죄목이 원망죄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작은 일이나 큰일이나 원망하게 되면 마귀가 기뻐합니다. 원망하는 사이에 마귀의 노예가 됩니다. 딱 붙들리는 순간 완전한 절망으로 치닫게 됩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깨닫지 못하느냐? 깨달아야 되고 기억치 못하느냐? 여러분, 은혜에 대한 건망증 환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은혜는 오래오래 기억해야 됩니다. 그 큰 은혜에 감격했으면 그 은혜를 기억하고 살면 오늘의 문제를 해결하기가 쉽습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주께서 자신의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에게 내어주셨습니다. 그 큰 은혜에 감격하는 순간 오늘의 모든 문제가 시원하게 풀려지는 것입니다. 은혜는 깨달아야 은혜입니다. 그리고 기억해야 능력으로 바꾸어집니다.
생명력으로 바꾸어지는 것입니다. 은혜를 깨닫고 은혜를 기억하고 그 기억한 바 은혜로 오늘의 모든 문제를 해석하고 해결해 보십시오. 밝은 미래가 환하게 보일 것입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쉽게 잊어버리는 저희를 꾸짖지 아니하시고 또 새 은혜를 주시며, 또 은혜를 깨닫지 못하는 자에게 또 다시 깨달음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주여, 은혜 위에 은혜를 더하사 우리가 누리는 큰 기적을 순간순간 깊이깊이 깨닫게 하시고 은혜를 기억하게 하시고 기억하는 바대로 모든 것을 은혜로 소화하고 은혜로 해석하고 은혜 안에서 충실히 사는 주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누룩과 천국 /마13:33
2023-03-29 11:02:58
먼저 순천의 소녀시대가 만든 책을 소개해 드립니다.
책 제목이 눈에 띕니다.
“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
20명으로 구성된 예쁜 소녀시대 멤버들 모습입니다.
이 분들은 어릴 때 학교를 다니지 못해 글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2016년에 순천시에서는 이들을 위한 학교를 설립하였고 이들은 초등학교 과정에서 한글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이 당시 소녀들의 나이는 60대 후반에서 80대까지…. 70, 80대에 들어서 겨우 배운 한글이지만 한글을 가지고 드디어 사회생활을 적응해 나가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런데 약 3년간 학교를 다녔는데 한글만 배우기 어려우니 한글과 함께 그림그리기를 배웠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들이 그린 그림 안에는 그 들의 전 삶이 녹아서 아름다운 예술성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결국 그들의 작품들이 그림 일기 책으로 발간케 되었습니다. 한편 그들의 작품은 한국을 순회한 것은 물론 미국과 이태리까지 전시회를 열게 되었습니다.
대표적인 그림 하나만 보여 드립니다.
보면 볼수록 책 제목을 아주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
이 분들의 작품을 보면서 한편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분들이 어릴 때 제대로된 교육을 받았더라면 과연 이런 작가들이 될수 있었을까?’
그런데 우리 주님도 교육을 받지 못한 분들 안에 있는 놀라운 잠재력을 너무도 잘 알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33절,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자주 말씀드렸습니다. 비유는 천국 이야기라고, 그리고 항상 역설적인 내용이 담겨져 있다고…. 왜냐하면 이 땅에 사는 자들에게 하늘 나라를 알려 주시기 위해서는 깜짝 놀라게 하는 역설적 표현을 사용할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비유를 잘 해석하려면 청중이 누구인지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두 주 전 가라지의 비유를 말씀드릴 때 청중은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나온 일반인들이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의 비유도 같은 청중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비유를 듣기 전에 이미 청중은 몇 가지 비유를 들었습니다. 제일 먼저는 잘 알려진 아직 나누지 않은 ‘씨뿌리는 자의 비유’입니다. 13:3 하반절,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그리고는 가라지의 비유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24절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그 다음으로는 겨자씨의 비유가 나오는데 이렇게 시작합니다. 31절,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 세 비유의 주인공들의 공통점은 쉽게 알수 있습니다. 모두 남성입니다. 헬라어 원어 성경은 남성 여성 중성이 잘 구분되어 있는데 모두 남성입니다. 남성 중에서도 농부에 가깝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농부들은 권력가들이 아닙니다. 총칼을 든 사람들에게 순종하는 자들입니다. 주님은 이처럼 세상적으로 약한 농부들의 이야기로 천국을 설명하고 계신 것입니다. 어쩌면 하늘나라는 농사 짓는 것과 유사하니 농부의 이야기를 많이 비유에 사용하셨을수도 있습니다.
이에 청중은 특히 농부들은 귀담아 주님의 비유를 듣고 있었을줄 압니다. 세번 남성을 주인공으로 천국의 비유를 말씀하시니 청중은 계속 기대할줄 압니다. “당연히 다음 비유를 말씀하신다면 남성을 주인공으로 또 말씀하시겠지….” 그런데…,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세번 연속해서 남성을 주인공으로 말씀하시더니 이번에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삼으십니다. 청중은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잘 아시죠? 주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셨는데 모든 성경기자들은 장정 오천명이 먹고 12광주리가 남았다고 표현하지 않습니까? 이유는 이 당시는 아이들과 여인들은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을 때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비유의 주인공으로 드디어 여인을 세우신 것입니다. 그것까지는 좋습니다. 주님은 천국을 누룩과 같다고 표현하십니다.
사실 이 당시는 ‘여자’를 무시하던 시대입니다. 한편 이 당시 ‘누룩’의 대한 이미지도 좋지 않은 때였습니다. ‘여자’도 ‘누룩’도 천시 여기던 시대입니다.
물론 여자도 꼭 필요하고 누룩도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둘 다 천시하던 아주 모순적인 시대였습니다.
누룩이 천시된 것은 주님도 인정하신 것 같습니다. 마태복음 16: 6절 말씀을 보면,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곧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나쁜 영향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말씀하실 때 누룩을 비유로 사용하실 정도로 이 당시 이미 이 당시 누룩에 대한 이미지를 주님께서도 잘 아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이처럼 이 당시 상황을 잘 아시면서도 과감하게 천국을 소개하는데 세상 사람들이 천시 여기는 ‘여인’과 ‘누룩’을 주인공으로 내세우시는 것입니다.
요즘도 종종 어릴 때 저의 모습이 생각이 나곤합니다. 제가 어릴 때니 거의 60년전입니다. 초등학교 2, 3학년때는 멀리 걸어서 학교를 다녔습니다. 혼자 걸어 오면서 이런 저런 day dreaming을 하면서….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몽상이 있습니다. ‘우리 집이 과자 가게를 하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을 하면서 마음껏 과자를 먹는 모습을 상상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 당시는 이북보다도 못 살았을 때이니 요즘 젊은이들은 전혀 감을 잡지 못할줄 압니다.
그런 상상을 하면서 집안 문을 들어서는 데 빵 구운 냄새가 앞 마당에 가득찰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얼마나 행복한지요.
실은 바로 전날 어머니와 일하시는 아줌마가 밀가루 반죽을 해서 따뜻한 아랫목에 넣고 하루 밤을 지낸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학교에서 돌아 오는 시간에 맞추어 빵굽는 기계에 넣어 놓으신 것입니다. 두 여인과 밀가루 그리고 누룩이 조화를 이룰 때 저는 천국을 맛보곤 했던 것입니다.
물론 요즘은 전혀 이런 몽상에는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만일 집에 들어 왔을 때 힘들게 집 사람이 빵을 만들고 있는 것을 보면 저는 기겁을 하겠죠. 건강을 위해 현미밥을 먹고 사는데 어떻게 빵을…. 결코 천국의 향기로 다가오지 않을줄 압니다.
주님의 비유를 듣는 많은 사람들도 비슷했을줄 압니다. 어떻게 천국의 주인공으로 여인을 그리고 누룩을 삼고 있는지 기가 막혀 했을줄 압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지난번에 말씀드린대로 neural coupling(신경 동조화)가 일어나신 분들은 무릎을 칠 것입니다. 신경 동조화는 말씀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들이 같은 뇌파가 형성되는 것을 뜻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으며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머리 속에는 주님께서 말씀하려 하시는 놀라운 천국 이야기가 화려하게 펼쳐집니다. 당연히 주인공은 여인과 누룩!
처음에 순천 소녀시대를 소개해 드렸는데 KBS등 여러 방송국에서 이들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이야기는 하나 같이 같습니다. 여자 아이이니 학교를 다닐수가 없었습니다. 서울이면 몰라도 70년전 순천에서는 여자 아이들이 학교 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평생 글도 못 배웠고 달력도 볼수 없이 70, 80년을 살아 오셨다고 합니다. 그들은 입이 있어도 말을 하지 못하는 벙어리로서 지내 온 것입니다. 그들의 삶은 침묵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삶의 아픔을 어디에도 말할수가 없었던 침묵의 여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세계적인 인물이 되어서 미국과 이탤리까지 그들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습니다.
사회는 여인을 침묵하게 만들었지만 침묵은 오랜 시간이 지난후 새롭게 최고로 아름다운 예술품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누룩도 매한 가지입니다. 누룩이 삶에서 그렇게 필요하지만 늘 천시를 받고 있습니다. 천시 받는 누룩은 항상 말없이 자기의 일만 묵묵히 행합니다. 이처럼 천국은 세상에서 버림받은 곳에서 버림받은 자들로 인해서 묵묵히 자라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침묵은 바로 버림받은 자들의 누룩이 아닐까요? 여인들의 누룩은 바로 여인들의 침묵이었습니다.
물론 요즘은 ‘침묵은 금이다’라는 말이 잘 통하지 않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순천 소녀시대들은 우리에게 이 표현을 새롭게 해석하게 합니다.
‘오랜 침묵 가운데 나온 말이 금이다.’
Lohmann이란 분의 ‘기원’이라는 시의 일부를 소개해 드립니다.
“우리가 입 안에 물고 있는 조약돌들은
우리의 노래 연습을 도와주고, 우리는 바다를 향해 노래합니다.”
입 안에 조약돌이 물려져 있습니다. 이는 침묵하게 했다는 것이 아닐까요? 도리어 조약돌로 인해서 노래 연습이 잘 되었다고 말합니다. 조약돌로 인해서 침묵하게 되었지만 도리어 침묵후 금과 같은 노래가 불리워졌다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그 노래는 세상이 아니라 바다를 향해 뻗어 나가는 노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침묵의 노래는 도리어 먼 바다를 항해하게 됩니다. 온 세계를 감싸는 노래가 된다는 것입니다.
한편 시인은 또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우리의 말은 우리의 숨결을 타고 날아가는 깃털
그것이 거룩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하소서”
침묵이라는 누룩을 소유한 자들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침묵에서 흘러 나오는 말들은 하나의 깃털이 되어서 거룩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이것이 천국의 주인공들의 모습이 아닐까요?
물론 그렇다고 침묵의 주인공들은 여인들만이 아닙니다. 남성들도 침묵의 주인공이 될수 있습니다. 소설가 김훈 작가가 이순신의 생애를 담은 소설 ‘칼의 노래’를 지었습니다. 죄송하게도 저는 그 좋은 작품을 읽지는 못했지만 다른 책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김훈 작가는 이 소설을 쓰기 위해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섭렵하신 것 같습니다. 김훈 작가는 이순신의 글이 마치 문학소녀의 일기처럼 섬세함에 놀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결코 옥중일기에는 억울한 옥고에 대해서는 일체 침묵한다는 것입니다. 김훈 작가는 다음과 같이 마음을 토로합니다.
“소설에 차마 못 썼던 대목이 있으니 바로 그 분의 침묵입니다. 한산도에서 서울로 끌려간 이순신은 임금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조정을 능멸했다는 누명을 쓰게 되어 통제사직을 박탈당하고 백의종군의 명령을 받게 됩니다. …… 이순신도 사람인데, 연전연승하는 장군을 고문으로 몸을 망가뜨리고 군인의 명예를 다 짓밟아 다시 전쟁터로 나가라고 한다면 조선의 왕과, 정치권력에 대한 증오심과 적개심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취중에도 그 일에 대해 단 한마디 말씀을 한 적이 없는 것이죠. 죽을 때까지, 그렇게 기록을 좋아하시는 분이 일기나 편지에도 그 일을 쓴 적이 없습니다. …… 그 분은 그렇게 가슴에 다 묻고 간 것입니다. 그런 침묵을 바탕으로 명량에서 이기게 됩니다.”
김훈 작가는 그 유명한 명량해전의 승리를 이순신의 누룩 이순신의 침묵에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순신의 승리가 침묵에 있었는데 그러면 우리 주님의 승리는 어디에 있었을까요?
오늘 사순절 셋째 주일 예배를 드립니다. 침묵하시는 주님의 모습은 마가복음 15장에 잘 소개되어집니다. 새벽에 대제사장들이 산헤드린 공회와 짜고 주님을 빌라도에게 넘겨 줍니다. 빌라도가 묻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주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네 말이 옳도다.” 이에 대제사장들이 여러 가지로 고발합니다. 빌라도가 또 묻습니다.
“아무 대답도 없느냐 그들이 얼마나 많은 것으로 너를 고발하는가 보라.” 5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아무 말씀으로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빌라도가 놀랍게 여기더라.”
주님은 침묵하십니다. 그런데 그 침묵에서 무서운 힘을 느낀 것 같습니다. 빌라도는 놀랍게 여겼다고 마가는 기록합니다.
주님도 침묵이라는 누룩의 주인공이 되신 것입니다. 이순신의 침묵이 조선을 구한 것 처럼 주님의 침묵은 온 인류를 구원한 것입니다. 침묵은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는 누룩입니다. 그러나 이 누룩이 온 세계를 구원하는 길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겉으로는 침묵하셨지만 속으로도 침묵하셨을까요? 저는 주님께서 침묵 중에 하신 말씀을 주님은 십자가상에서 말씀하셨으리라 믿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달려서 드디어 침묵을 깨십니다. 누가복음 23: 34 상반절,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침묵 끝에 하신 이 고백이 온 인류를 위한 구원의 길을 열어 놓은 것입니다.
한편 이 고백을 스데반이 이어 받습니다. 스데반이 설교를 한 후 사울과 그의 일당이 돌로 칩니다. 사도행전 7: 60절,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이 스데반의 기도로 인해서 구원받은 사람이 바로 사울, 후에 사도바울이 됩니다. 사도바울도 평생 이 침묵의 기도의 주인공이 되어 간 것입니다. 누룩의 주인공이 되어 간 것입니다.
침묵은 누룩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싫어합니다. 그러나 침묵은 바로 천국의 능력이 임하는 놀라운 시작입니다. 침묵의 능력은 누룩처럼 온 세계를 뒤덮습니다. 남은 사순절 기간 침묵의 사람들이 되어 가십시다. 침묵이 우리들의 말보다 훨씬 더 큰 위력이 있습니다.
주님의 침묵에 동참하십시다. 이 때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중국 당나라 시인 백거이의 고백입니다.
“이 순간
소리가 없음이
세상의 모든 소리를 이기네”
침묵하십시다. 우리가 침묵할 때 주님의 소리가 이깁니다. 주님의 소리를 온 인류가 듣도록 침묵하십시다. 주님은 침묵을 깨고 십자가에서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또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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