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매맺는 계절 /요15:1-9/ 이동원 목사
2014-11-29 10:18:32
벌써 여러 해전에 작고하신 기독 교 시인이신 고 김현승님의 시 가운 데 보면 '가을의 기도'라는 시가 있죠?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 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 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 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은 열매의 계절입니다.
농부의 삶의 보람은 열매를 거두는데 있습니다. 봄에 씨를 뿌리고 여름에 그 폭염과 무 더위를 견디면서 땀을 흘리고 애 써 일하는 농부의 유일한 보람, 유일한 기대는 가을에 열매를 거두 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저와 여러분이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열 매를 구하기 보다 꽃을 구하는 시 대입니다. 우리가 성경 공부를 해 보면 이 꽃에 대해서 그렇게 긍정적 이지만은 않아요. 좋은 표현도 있긴 있습니다만 꽃은 더 많이 부정적 인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순간적인 인생의 허무, 오래가지 못하는 것 들을 비유하고 있습니다만 열매는 항상 긍정적인 모습으로 성경에 그 려져 있습니다. 인생은 그 날이 풀 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 도다 그것은 바람이 지나면 없어 지나니 그 곳이 다시 알지 못하게 된다.
시편의 말씀이구요.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야고보서 1장 10절의 말씀입니다.
모든 육체는 풀의 꽃과 같아서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진다, 베드로전서 1장의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오늘 우리의 이 시대는 순간 적인 만족, 순간적인 쾌락, 결국에는 허무로 끝날 이것들을 구하는 시 대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생의 보람과 의미, 그 진지 함의 열매를 사모한다면 꽃이 아닌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열매를 구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그렇 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열매를 기대하십니다. 어떤 열매를 맺어야 할까요?
어떻게 그 열매를 맺을 수 가 있을까요? 자, 오늘 본문에서 우 리는 그 대답을 찾고자 합니다. 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 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첫째로 어떤 열 매를 우리는 기대해야 되는가?
어 떤 열매를 맺어야 하는가? 사실 이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의 지상생애의 마지막 날, 그 직전날 내일이면 십 자가인데 오늘 아마도 주신 말씀이 었을 것입니다.
유월절 주간, 최후의 만찬을 다락방에서 갖고 아마도 해가 서서히 늬엿늬엿 지기 시작 하는 는 저녁 무렵 예수님은 다락 방에서 나와서 제자들과 함께 기 드론 시냇가를 향해서 내려가고 있 었을 것입니다. 이 시내를 건너가면 겟세마네 동산입니다.
그 동산에서 주님은 최후의 씨름, 기도의 마지 막 고뇌의 밤을 지나시게 됩니다. 자, 겟세마네 동산을 향해서 내려가 는, 기드론 시냇가를 향해서 내려가 는 그 양쪽에는 지금도 포도원이 있 습니다. 성지를 순례하고 방문해 보 면 지금도 그 쪽 지역에 포도원들이 있어요.
예수님은 3년동안 함께 삶을 나누었던 제자들, 그의 가슴을 주고, 사랑을 주고, 교훈을 주었던 사랑하는 제자들 그들에게 세계의 복음화, 인류의 복음화를 부탁하 면서 이제 내일이면 십자가로 가야 하는 비장한 그 시각,
제자들과 마지막 겟세마네 동산을 향해서 내 려 가시면서 포도원을 지나실 때 제자들을 아마 흘낏 돌아보시면서 아마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입니 다.
나는 포도나무고 자네들은 가지 야, 그리고 이제부터 자네들은 열 매를 맺어야 해. 그렇습니다. 예수 님을 따르고 있는 제자들이 맺어 야 할 열매, 어떤 열매일가요?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가 있는데요, 첫째는 존재의 열매입니다.
존재의 열매.이것을 인격의 열매라고 말해 도 괜찮습니다. 자, 예수님을 믿고 나서,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우리에 게 주어지는 가장 중요한 과제는 이제부터 내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 바로 그 문제입니다. 자, 예수님 믿 었어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어요,
구원받았어요, 그리스인이 되었어 요, 이제부터 우리에게 주어지는 가 장 중요한 과제 - 이제부터 내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 어떤 인간이 되느냐? 소위 being의 문제, 존재 의 문제, becoming.. 내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 가장 중요한 과제 입니다. 그것이 열매입니다
. 인격적 인 열매, 존재의 열매, 내가 어떤 종 류의 존재가 되느냐? 어떤 인격이 되느냐? 이것이 신앙생활의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열매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다 살고 하나님앞에 섰을 때 하나님이 먼저 물으실 질문은 저는 틀림없이 이 것일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네가 어떤 일을 했느냐가 아니라 어떤 위 대한 성취를 했느냐가 아니라 네가 어떤 직업을 가지고 영광을 받았 느냐가 아니라 가장 중요한 질문은 너 나 믿고 얼마나 변했니? 네가 어 떤 사람이 되었느냐는 사실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오늘 요한복음 15 장은 13장부터 시작해서 다락방 교 훈, 예수님이 이 세상을 떠나시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주셨던 다락 방 강화에 그런 연장선상에 있습 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나 서 주셨던 그 교훈의 연장선상에 서 주어집니다.
자, 발 다 씻기고 나 서 예수님이 요한복음 13장에 보시 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너 희들에게 새로운 계명을 주노니 너 희들은 서로 사랑하라 이로서 너 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주님이 기대했던 제자상, 당신을 따라오던 제자들이 어떤 삶을 살 것을 기대 하셨느냐?
사랑의 삶, 사랑의 존재 가 될 것을 기대하십니다. 요한복 음 14장에 보시면 계속되는 교훈 가운데 14장 27절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라 이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르다.
평화가 없는 세상, 불 안한 세상, 날마다 소요하는 세상, 격동하는 세상, 그러나 주님은 당신 의 제자들이 움직일 수 없는 주님의 견고한 평안을 가지고 한 세상을 살아갈 것을 기대하십니다. 평안의 존재, 그리고 평화를 만드는 삶..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이 가기만 하면 문제가 일어나요.
불화의 존 재가 아니라 평화의 존재, 평화를 만드는 사람, 평화의 인격이 될 것 을 기대하십니다. 그의 교훈은 계속 됩니다. 요한복음 15장에 들어오면 사랑이라든지 혹은 평화라든지 이 런 theme이 15장 이하에도 되풀 이 되지만 또 하나 새로운 기대로 강조된 중요한 단어가 하나 있습니 다.
그것은 기쁨이라는 단어입니다. 기쁨! 자, 요한복음 15장에 우리 본문 읽은 말씀에서 조금 더 나아 가시면 11절입니다. 다같이 읽겠습 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 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내 기쁨이, my Joy! 아까는 14 장에서 나의 평안, my Peace! 나 의 평안이 너희에게 있어서...이제 는 내 기쁨이 너희안에 있어서 my Joy, 내 기쁨이 너희안에 있어 서.. 나의 기쁨이 너희안에 있기를 원한다. 자, 우리가 계속 읽어보시면 요한복음 16장 23절
"그 날에는 너 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 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 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 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24절 다같이 읽어요."지 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이 충만한 기 쁨, 기쁨의 존재, 기쁨을 가지고 살 아가는 삶..자, 어떤 것들을 기대하 십니까? 이런 사랑의 삶, 평안의 삶, 기쁨의 삶. 사랑할 수 있는 존 재, 평안을 갖고 살아갈 수 있는 존 재, 기쁨을 갖고 살아갈 수 있는 존재. 사랑, 기쁨, 평화.. 이러면 여러분, 생각나는 구절없어요?
이 런것들이 함께 엮어진 성경구절? 성 령의 열매가 생각나지 않습니까? 성령의 열매? 오직 성령의 열매는 갈라디아서 5장, 성령의 열매는 사 랑과 희락과 화평과 ..그 순서예요. 그렇지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이렇게 쭉 되어있어 요. 아홉가지의 열매예요.
그런데 성 령의 열매라는 말이, 갈라디아서 5 장 22절의 열매라는 말이 복수가 아니예요. 단수입니다. 성령의 열 매는 단수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아홉가지의 열매들이 아니라 한 열매라고 했습니다. 한 인격을 지향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이런 아홉 가지 열매의 요소를 갖춘 대표적 인 인격, 모델이 되시는 인격이 있다면 누구일까요? 예수님이십니 다. 이 성령의 열매는 바로 예수의 인격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세요? 사랑이 충 만하십니다. 기쁨이 충만하십니다.
평화가 충만하십니다. 오래 참으십 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인격이 예요. 예수님의 인격입니다. 자, 내 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면 예수님이 뭘 기대 하실까요?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 예수님을 닮아가는 존재, 예수님을 닮아가는 인격을 기대하시겠지요.
저는 인생에서 경험하는 많은 우리 들의 사건이 바로 예수님을 닮은 인격이 되기 위해서 역사하시는 사 건들이라고 생각해요. 주님이 그것 을 위해서 허용하십니다. 때로는 사 랑하기 어려운 사람들을 우리 주변 에 놓아두십니다.
그것 때문에 고민 하고 아파하면서 우리는 사랑을 배 워갑니다. 기뻐할 수 없는 환경 속에서 우리는 몸부림치고 고통스 러워 하다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도 누릴 수 있는 견고한 기쁨 을 발견합니다.
때로 평화를 누리기 어려운 상황속에 하나님은 나를 집 어 넣으시고 그러나 이 요동치는 이 삶의 환경속에서도 마침내, 마침 내 견고한 평안의 사람이 되도록 주께서 나를 훈련해 주시는 줄을 믿습니다. 참기 어려운 상황속에서 도 하나님은 마침내 오래 참음의 인격을 내 안에 연단시켜 주십니 다.
어떤 분이 자기가 하도 참을성 이 없어서 '하나님 저 인내하게 해 주세요, 꼭 저에게 오래 참음의 은 사를 주시옵소서' 얼마쯤 지나서 자기가 기도한 것을 잊어버렸는데 자기 동생하고 싸움이 일어났습니 다.
형제사이에, 고통스럽게 형제 사이에.. 너무나 억울해서 형제에게 이렇게 서로 관계가 어긋나고 갈등 을 느끼게 되니까 '하나님 어쩌자고 형제사이에서 이런 일을 허용하 십니까?' 기도하다가 갑자기 하나 가 생각이 나더래요. 기도의 응답 이다. 무슨 응답이십니까?
네가 오 래참음의 은사를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느냐? 그래서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로 하여금 오래참는 인 격이 되도록 우리를 훈련시켜 주시 는 하나님. 그리하여 마침내 내 사랑하는 주님을 닮아갈 것을 기 대하시는 주님. 그렇습니다.
우리가 한 평생을 통해서 맺어야 할 가장 중요한 열매, 존재의 열매, 인격의 열매, 예수님을 닮아가는 저와 여러 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 하나가 무슨 열매일까요? 사역의 열매입니 다,사역의 열매. 내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이 질 문과 함께 내가 무엇을 하고 사느 냐? 이것이 사역이에요. 내가 무엇 을 하고 사느냐?
내가 어떤 존재가 되느냐? being의 문제도 중요하지 만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내가 어 떤 일을 하느냐? doing! 어떤 일을 하고 사느냐? 사역의 문제, 우리가 해야할 사역이 많습니다.
많은 과 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많은 사 역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뭐 냐? 증거의 사역입니다. 전도하는 사역입니다. 자, 첫째 열매가 무슨 열매에요? 존재의 열매, 그 존재는 어떤 존재입니까?
예수님을 닮아가 는 존재, 예수님을 닮아가는 인격, 또 하나는 사역의 열매 그것은 바 로 예수님을 증거하는 열매! 자, 내 가 예수믿고 구원받아 예수님을 따라 가는 자가 되었다면 예수님이 내 삶의 존재의 이유요,
예수님 때 문에 기쁨을, 보람을 삶의 감격을 얻었다면 그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보다 더 위대한 사역의 과제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열매! 중요한 것입니다. 자, 다시 요한복음 15장에 들어오셔서 1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 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 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 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 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 려함이니라"
너희가 나를 택한 것 이 아니다. 너희가 예수믿을 때 에 내가 결정하고 내가 선택한 것 같지만 알고 보니까 그것은 하 나님의 은혜었습니다.
하나님의 주 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이었 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 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 니... 그런데 그 이유가 뭐냐? 주님 이 나를 선택하신 이유, 너희로 가서 무엇을 하게? 열매를 맺게 하 기 위해. 열매를 맺으려면 가야돼 요. 가서 열매를 맺고자 내가 너를 선택한 것이다.
우리는 주님앞에 왔습니다. 주님앞에 와서 은혜받고, 주님앞에 와서 구원받고, 주님앞에 와서 용서받고, 주님앞에 와서 기쁨 을 얻고, 주님앞에 와서 인생의 의미를 얻었어요. 그렇다면 이제는 가야돼요. 가서 열매를 맺어야 됩니 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라. 그런데 우리가 왜 안가요? 왜 안가요? 가는게 두려 울지 모릅니다. 전도하다가 내가 그냥 사람들앞에 챙피를 당하지 않을까, 왕따 당하지 않을까, 우리의 마음속에 두려움이 있어요.
아마 예수님 말씀을 듣던 그 당시의 제 자들에게도 이런 두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지상명령, 마지막 명령에 서 마태복음 마지막 장에 보시면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내 제 자를 삼으라. 그러면서 무슨 약속을 하셨어요?
볼찌어다 내가 세상끝날 까지 너희와 뭡니까? 항상 함께 하리라. 주님이 같이 가 주실 것입 니다. 믿으십니까? 가고자 한다면, 순종하고자 하면 함께 가 주실 것입 니다. 본문에도 동일한 약속이 있어 요. 마지막, 요한복음 15장으로 다 시 돌아오셔서 15장의 마지막 부분 26절, 15장 26절을 다같이 읽겠습니 다.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 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 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 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 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어떤 일 을 한다고 했습니까? 성령이 하시 는 일? 나를 증거한다. 예수님을 증 거한다. 여러분! 전도하실 때에 걱 정하지 마세요.
내가 전도하기만 한 다고 결심하면, 작정만 하면 성령이 도와주세요. 믿습니까? 성령이 함께 증거하실 것입니다. 성령이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 주실것입 니다. 그 성령을 믿고 가시길 바랍 니다. 안 가면 어떻게 되느냐?
여 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를 생 각해 보세요. 이스라엘 백성들의 최 고의 프라이드가 뭐냐? 선택한 백 성이다. 우리는 chosen people, 선민 의식, 나는 선택한 백성이다. 주님이 우리 민족을 선택하셨다. 뭐, 지금 도 유태인들은 이 사상이 아주 견 고합니다.
주님이 나를 선택하셨다. 그런데 선택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약의 역사를 봐도 그렇고 인류의 역사를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처럼 고통을 많이 겪은 민족이 없어요.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이 그들을 선택하신 이유가 어디있느냐?
가서 열매를 맺어라. 그 하나님을 이방 인에게 전하고 축복을 이웃들과 더불어 나누라고... 그런데 거꾸로 유대인들의 최대의 실수는 뭐냐 하면 선택의 특권은 엔조이했지만, 선택의 특권은 강조했지만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셨다.
선택의 이유를 몰랐어요. 그리고 선민의 의무를 감 당하지 못했습니다. 주님이 나를 선 택하신 이유? 가서 열매를 맺고자. 그래서 하나님이 어떻게 하세요?
그들을 깨달으라고 끌고 다니세요. 광야를 끌고 다니시고, 바빌로니 아에, 갈대아에 포로로 끌고 가시 고 만신창이가 되도록 끌고 다니세 요. 깨달을 때 까지,
깨달을 때 까지. 채찍을 치시고... 그래서 마 침내 이 소명을 감당하는 자리에 설 수 있도록 그러니까 결국 두 가 지예요. 실컷 매 맞고 순종하는 것 하고 알아서 순종하는 것, 둘밖에 없습니다.
어느 길을 선택하시겠습 니까? 직사하게 얻어 맞고 나중에 깨닫길 원하십니까? 아니면 미리 하나님 뜻대로 할께요, 가서 이 복 음 전할께요. 여러분? 순종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내야지, 카 드를, 태신자 카드를. 그것부터 순종 해야 돼요.
오늘 다 써 내 놓고 가 세요, 그것부터 내야 돼요. 자, 어떻게 열매를 맺을 수가 있느냐? 어떻게 열매를 맺느냐? 요한복음 15장 전체의 내용을 한 마디로 요 약하면 그 대답은 아주 확실하고 분명합니다. 주 안에 있으면 돼요.
주 안에 있으면 열매를 맺어요. 그 런데 주 안에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자, 구체적으로 열매를 맺기 위한 것 첫째로 강조 해야 할 것은 주님과의 바른 관계입 니다. 주님과의 바른 관계가 있어 야 열매를 맺는 자가 될 수가 있습 니다. 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 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자, 가지가 열매를 맺 으려면 제일 먼저 포도나무에 붙 어 있어야 돼요, 그렇지요? 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가 없어요. 크리스챤의 정의가 뭘까 요? 그리스도인의 정의? 교회나 오는 사람? 아닙니다.
이 나이가되 도록 목회하면서 느낀 것이 뭐냐하 면 교회 안에도 예수 안 믿는 사람 이 너무나도 많다. 아주 절실하게 느껴요. 크리스챤의 정의는 교회 나 오는 사람이 아닙니다. 크리스챤 의 정의에서 제가 적확한 정의, 가 장 아름다운 정의가 찾을 수가 있 다면 여기에서 찾을 수가 있는데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는 사람! 제 일 좋은 정의예요.
예수에게 붙어 있는 사람. 정말 예수에게 붙어 있 는 사람, 예수를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하고 내 삶 속에 그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에게 소속되어 정말 인 생을 살아가는 사람,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는 자. 그러니까 예수에게 붙어 있지도 않으니까 내가 무슨 열매를 맺겠어요?
열매 맺는 일에 관심도 없고,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 을 때, 그리스도가 주님이 되었을 때, 그리스도를 닮고 싶어하는 열망 이 생기고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싶 은 열망도 생기고... 그렇습니다. 먼 저 주님과의 바른 관계속에 들어가 시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 여러분 의 구주와 주님이 되시기를 바랍니 다. 주님과의 바른 관계!둘째는 주 님과의 지속적인 교제, 주님과의 지 속적인 교제가 있어야 돼요. 자, 예 수를 믿는 순간 주님과의 관계속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주님과의 관계 속에 들어간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 은 이제부터 주님과 교제를 해야 돼요. 지속적으로 교제를 해야 합니 다. 깊이 있게 교제를 해야 합니다. 그 교제 가운데서 열매가 맺어지는 것입니다. 7절을 다같이 읽겠습니 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 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 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 라"
그 다음에는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진 실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런데 그 렇게 열매를 맺는 제자가 되려면 이 7절 말씀이 열쇠인데요, 주님과 의 교제의 두 가지 방편이 여기에 나와 있습니다.
주님과의 교제하는 두 가지 방편, 내 말이 너희안에 거 하면... 말씀,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돼요. 응답해야 돼요, 주님의 말 씀을 묵상해야 돼요.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 말씀에 응답하면서 이제 구합니 다. 기도합니다.
말씀과 기도. 하나 님과 교제하는 두 가지 방편. 친 구들과 어떻게 교제해요? 좋은 친구 가 되려면 상대방의 말을 잘 들어야 합니다. 자기 얘기만 하지 말고 친 구되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예요. 친구되는 방법! 잘 들으 시면 됩니다.
부부사이에도 좋은 관계를 맺으려면 상대방의 얘기를 잘 들으셔야 합니다. 남자 여러분, 특별히 남성 여러분! 저도 아내 얘 기를 잘 안 듣다가 핀잔을 받을 때 가 많은데요,
'여보 나 좀 봐요' 그러면 TV보다가 응, 응,,, '아! 나 좀 봐요!' 그러면 정신이 나서 '예, 마누라님' 잘 들어야 돼요. 남 의 얘기를 잘 들어주면 고마워하고 감사하고...들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듣고 그 들 음에 대해서 진지하게 응답하는 것, 그게 기도예요. 주님, 주님 말씀 들 려옵니다. 말씀을 읽으며 주의 음성 을 듣습니다.
주님! 제가 이 말씀대 로 살지 못했어요. 도와주세요. 살고 싶어요, 기도하지요.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주님과의 지속적인 교제안에서 열매가 맺어져요. 정상 적인 부부, 좋은 부부에게 있어서 열매가 맺어지고 자식을 낳는 것처 럼.. 그렇습니다.
주님과의 교제안 에서 인생의 열매가 나타나요, 열매 가. 주님과의 지속적인 교제 안에 들어가시길 바랍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주님께 대한 순종입니다. 주님께 대한 순종! 열매를 맺으려면 순종 해야 합니다.
자, 여기 계속 강조된 단어가 주 안에 거한다. 열매 맺는 방법을 한 마디로 말하면 주 안에 거한다는 거예요. 주 안에 거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아주 쉬운데 어려워요. 다른 말로 말하면 사랑 한다 이 말이에요. 주님을 사랑한다. 그런데 이 말도 쉬운데 어려워요.
자, 주님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징후, 증거가 뭘까요? 주님을 사랑한다. 증거가 뭘까요? 자, 한번 9절을 같 이 읽겠습니다
.
"아버지께서 나를사 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 하였으니 나의 사랑안에 거하라"
그런데 어떻게 주님의 사랑안에 거하느냐? 그 대답은 10절에 있어 요, 10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내 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 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 리라"
내가, 예 하나님 아버지의 계 명을 지켜 그의 사랑안에 거한 것 같이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 의 말씀을, 성부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순종했습니다. 이 순종하 는 아들을 보았을 때 아버지 하 나님이 얼마나 기뻤겠어요?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그래요. 우리는 그의 말씀을 순종함으로, 계명에 순종함으로써 그의 사랑을 받는 자가 되는 것입 니다. 그것이 주 안에 거하는 방 법이에요. 그러니까 주 안에 거 한다는것은 구체적으로 주의 말씀을 따르고, 정말 순종해야 합니다.
따 르고 순종하는 것이예요. 그럼 주 의 말씀을 순종해야지요, 계명을 순종해야지요. 뭐, 그냥 듣고 마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주님의 계명! 많이 있지 요? 그러나 가장 중요한 계명이 뭐 겠어요? 사랑하는 것이에요.
이웃 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 떻게 말씀하십니까? 계속 되는 말씀 가운데서 그 분이 강조하는 것, 12 절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내 계명 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 니라"
13절,
"사람이 친구를 위 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좀 사랑해 보 세요, 이웃을. 그리고 그에게 가장 선한 선물을 주세요. 여러분, 이번 전도잔치에서 그런 일을 할 수가 있 습니다. 정말 주님이 기뻐하시는 가장 중요한 계명도 전도하는 것 이고, 명령도 전도하는 것입니 다.
너, 나 사랑하느냐? 전도하라, 이웃을 위해서. 나는 그들을 위해 서 목숨까지 버렸다. 아니 주님은 목숨도 버렸는데 그것 뭐 이웃들 데 리고 나와서 복음을 듣게 하는 것, 그것 뭐 그렇게 어려워요? 정 말. 단순한 마음으로 순종하고 믿고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 이게 진짜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란 말 이지요. 그런데 왜 전도안합니까?
아직도 자기가 죽지 못해 갖고, 자 기가 죽지 못해 갖고, 자기 체면, 프 라이버시, 또 전도한다 불편하게 생각하고... 제가 오래 전에 일본에 가서 일본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해 서 컨퍼런스를 인도한 적이 있었는 데 일본교회와 한국교회를 비교하는 그런 세미나가 있었어요.
왜 일본 교회는 자라나지 못하느냐? 전도하 지 않느냐? 만장일치로 일본 목 사님들의 결론이 뭐냐하면? 일본 사람들은 너무나 지나치게 남을 의 식한다.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 프라이버시를 건드리 지 않기 위해서, 남에게 예수님 얘 기를 꺼내는 것을 그렇게 어려워 한다.
그 때 그 컨퍼런스가 벳부라 는 온천지대에서 열렸는데요,제가 그래서 마지막 설교를 하면서 이 런 도전을 했습니다. 일본의 목회자 들에게요. 여러분! 제가 여기에 와 보니까 온천이 아주 좋고 용암천, 뭐 그 도시에 용암천들이 굉장히 많아요.
그런데 온천을 보니까 이름 이 다 지옥이라고 붙여져 있어요. 해지옥, 산지옥, 아기지옥, 뭐 별 지옥이 다 있어요. 여러분! 저 무서 운 펄펄 끓어 오르는 지옥을 향해 서 어떤 술취한 사람이 멋도 모르 고 지금 걸어가고 있다고 하십시 다.
그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기 위하여 그 사람 그대로 가도록 버 려 두어야 마땅할까요? 아니면 그 의 길을 막고 안돼요! 돌아서야 돼요, 그래야 살아요! 그게 전도 하는 것입니다. 그대로 가시면 안돼 요, 회개하합니다. 돌아서셔야 됩니 다.
그리고 생명을 향해서 돌이셔 야 합니다. 예수님 믿고, 예수님 영접하고 사세요. 그래야 구원받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실 수가 있습니다. 한 생명을 건지는 기 쁨, 그 생명의 열매를 드리는 기 쁨! 이것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 있을까요?
제가 좋아하는 인도의 시성 타고르의 키탄잘리라는 시 가운데 보면 이런 대목의 시가 있 습니다. '죽음이 나의 문을 두드릴 때, 나는 생명이 가득 찬 그릇을 당신앞에 갖다 놓겠어요' 우리가 마 지막 주 앞에 설 때, 최후의 질문 이 있을 것입니다. 두 가지 질문 입니다.
"너 나 믿고 얼마나 변했 니?"
인격의 열매, 존재의 열매? 또 하나
"너 나 믿고 나서 나 때문 에 구원받았다고 좋아했다면 얼 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 니?"
주님, 제가 이 사람, 이 사람, 이 사람...., 이 사람에게 전도했어 요. 생명의 열매를 주 앞에 드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도적 인간상 /요15:1-8/ 곽선희 목사
2014-11-26 20:09:11
골프계의 프로선수인 레리 넬슨이라고 하는 분은 1983년 U. S 오픈에서 그는 우승을 했습니다. 그가 우승하게 되는데 대하여 여러 가지 일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는 16번 홀을 앞에 놓고 잔디에 앉아서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잠깐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골프에 그렇게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고 어찌 생각하면 형편없는 그런 수준이었습니다만은 어쨌든 우승은 꿈도 꾸지 못했던 사람이 이 기도하고 나서 아주 비약적으로 골프가 잘 되면서 최우승을 하게 됐습니다. 이러고 보니 많은 사람들이 궁금할 수밖에요.
그래서 그 친구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의 기도하는 모습을 잘 지켜본 친구가 물어보기를 우승트로피를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드렸는가? 라고 물었습니다. 넬슨은 대답했습니다. 아니요. 정반대입니다. 트로피가 내 눈앞에서 왔다 갔다 하는데 하나님 내 머릿속에서 트로피를 지워버려 주세요.
그리고 깨끗한 마음으로 마음을 비우고 그렇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대자연속에 푹 파묻혀서 하나님을 주시는 평안을 누리며 자유한 마음으로 골프를 치게 해주세요. 그렇게 기도하고 났더니 1등했다고 그랬어요.
여러분 상상을 해보십시다. 골프 치는 사람 머릿속에 이 트로피가 왔다 갔다 해요. 그러면 골프는 망가지는 거예요. 무슨 일을 하던지 이래돼서는 안 되는 거예요.
일본에서 1년 동안 골프 치면서 평균 160명이 죽는다고 합니다. 뭐 우리나라도 꽤 많이 죽을 겁니다. 왜 그러냐하면 1번 2번 홀에서 맥박이 135까지 올라간대요. 그러니까 맥박이 막 심하게 뛰면서 오버해가지고 심장마비로 죽어요. 왜 그럴 거 같습니까?
승부욕과 시기와 질투 때로는 부끄러운 마음 불안과 초조의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에요. 우리나라 골프는 더 그렇대요. 마지막에 퍼팅을 하려고 그럴 때 그 뒤에 서있는 아가씨들이 보면서 괜히 돈 없애고 왔다 갔다 하누만. 저 사람은 저 뭣 하러 돈 없애고 여기 와서 골프 친다고 저러고 다니나? 꼭 그러는 거 같대요. 비웃는 거 같대요. 그래 이 생각에 사로잡히는 동안 다 망가지는 거예요.
대자연에 대한 평안 그리고 모든 것으로부터 훨훨 날아가는 것 같은 그런 자유함이 없고 대자연속에 있는 거 같으나 오히려 가장 추잡한 생각 이기려는 생각 좀더 잘해야겠다는 생각 칭찬받겠다는 생각 트로피가 왔다 갔다 하면 인생은 망가지는 거예요. 이걸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은 소유와 지식과 기술과 경험에 의해서 산다고 합니다. 그러나 다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그것이 마음의 소속입니다. 내 마음이 어디에 속했냐 하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무엇에 지배를 받고 있느냐 하는 겁니다. 마음 소속 그것이 문젭니다.
아이들이 시험을 본다고 합니다. 이 시험을 잘 보아서 뭐 칭찬받겠다는 생각도 있지만은 이거 못보면은 집에 가서 초상집이 될 텐데 그 아버지 어머니의 꾸중 뭐 이런 거 저런 거 다 생각하고 불안에 떠는 동안 생각이 깜깜해진다고 합니다.
생각해보세요. 마음이 깨끗해야 되고 자유로워야 되는데요 깨끗이 비워져야 되는데요 자 이제 문제는 무엇이 내 마음을 지배하고 있느냐 하는 겁니다. 마음의 소속 마음을 지배하는 주도성이 어디 있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 결실의 열매 그것은 바로 종자의 문제입니다. 내 마음의 그 깊은 곳에 무엇이 뿌려져있는가? 무엇이 뿌리박고 있는가? 아니 나는 지금 무엇에 사로잡혀 있는가? 모든 소설 모든 철학 모든 드라마 전부가 이것을 말합니다.
그 사람들 모습 보세요. 원수 갚는다고 벌벌 떨고 뭐 어떤 사람 또 사랑한다고 뭐 그러고 뭐 배신당했다고 억울하고 분하고 뭐 그 노예가 되어가지고 그 비참한 모습말예요. 아니 그 소중한 젊음까지 다 내버리고 얼마나 비참한 인간군상을 우리는 매일 매일 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역사의 흔히들 말하기를 두 문제아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칼 막스요 하나는 프로이드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막스는 유물사관입니다. 물질이 근본이다. 그리고 이 세상은 변증법적으로 진행이 된다. 생존경쟁 적자생존 스트라글 퍼 이그제시텐스. 살기위해서 먹고 먹고 그런 먹이사슬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내가 살려면 남을 죽여야 하고 아니 남을 죽여야 내가 사는 것이다 이런 유물사관의 철학 이것을 근본적으로 시작한 것은 다윈입니다. 그 종의 기원을 연구하면서 진화론적 그 진화론의 그 맥락 속에서 근거를 얻어가지고 유물사관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하더니 공산주의라고 하는 것을 만들어 버렸어요.
오늘도 알게 모르게 이 변증법적 유물론 이 속에 노예가 되어서 헤어나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멀쩡한 거 같은데 그 속은 자유인이 아닙니다.
또 한사람의 문제아는 프로이드입니다. 모든 인간의 마음의 뿌리는 성적욕망이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죽을 때까지 성적욕망에 사로잡혀있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 우리가 또 다른 것 우리가 뭐 즐거워하는 것 절망하는 모든 것이 성적욕망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렇게 세상을 봅니다.
결국은 허무주의에 빠지게 됐습니다. 이제 묻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내 마음을 지배하는 건 뭡니까? 내 마음의 고향은 어디 있습니까? 아니 나는 무엇에 끌려가고 살아가고 있는 겁니까? 내 궁극적 관심이 어디 있는 겁니까? 내 기쁨의 근거는 어디 있으며 내 절망의 원인은 어디 있는 겁니까? 이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오늘 성경말씀에 보면 포도나무 비유가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아주 평범하고 아주 당연한 이야기 같은데 이 속에 무궁무진한 진리가 있습니다. 가지는 마땅히 나무에 붙어있어야 합니다.
아 그렇지 않습니까? 나무에서 끊어지면 말라 버리는 것이 구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죠. 오늘 본문말씀 너무 귀중한 말씀이에요. 나는 사업을 하는 분들 뭐 개업을 한다던가 하면 개업예배에 가서 이 본문 성경을 많이 읽습니다.
나뭇가지가 나무에서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예수님의 말씀이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알았는가? 당신이 돈 가지고 하고 경험가지고 하고 지식가지고 하는 줄 알지만 아니다 이거예요.
사업의 뿌리는 예수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는 예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여기서부터 다시시작하자고 그렇게 강하게 강조를 합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나무가 나뭇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어야 햇볕의 뜨거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 끊어지는 순간 가지는 말라버립니다. 또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어야 성장을 합니다. 특별히 여러분 봄에 가서 보면 은 다 말라서 죽었던 나무같이 보이는데 새싹이 나는 것을 봅니다. 희한하지 않습니까?
나뭇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어야 성장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습니다. 이 간단한 이치입니다. 왜요? 나무로부터 진액을 받아야 되니까. 나무로부터 생명력을 계속 공급받아야 하니까 잠시도 끊어지면 끝나는 거예요.
여러분 예수님과 나와의 관계를 이만큼 절실하게 절대적 관계요 생명적 관계요 유기적 관계로 그렇게 느껴가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떠나서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아니 살아있으나 죽은 것이다.
아니 곧 죽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게서 끊어지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아무것도 할 수, 생각도 할 수 없고 말도 할 수 없고 먹을 수도 없고 잘 수도 없고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이것을 이대로 우린 받아들여야합니다.
아니 이대로 간증해야 되고 이대로 매일같이 느껴야 한단 말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아주 심플 가스플입니다. 단순한 메시지입니다. 내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주의 말씀만 내 안에 거한다면. 그렇습니다.
저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저는 어렸을 때 뭐 아버지 할아버지 어머니 앞에 이렇게 앉아서 뭐 정식으로 이렇게 교육을 받고 사람은 이래야한다 저래야한다 뭐 그렇게 가르침 받은 일은 별로 없는 거 같아요.
그저 뭐 어머니가 성경을 읽어주고 할아버지가 옛날얘기해주고 뭐 그런 정도지 뭐 정식으로 앉아서 이렇게 무릎 꿇고 앉아서 그렇게 교육받은 건 아닌 거 같은데 아 놀라운 게 있어요. 내가 고향을 떠나고 집을 떠나서 혼자서 유리방황하면서 군대생활도 하고 고학생활도 하고 유학생활도 이렇게 하면서 가만히 보니까 간간이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탁 아버지가 하시던 말씀이 생각이 나요.
한 말씀 한 말씀 그저 그때그때 생각을 했는데 이제 나이가 드니까 그렇게 하면 안 되겠다 싶어서 제가 수첩에다가 다 써놨습니다. 글을. 아버지가 하신말씀 뭐 뭐 뭐 써놨는데 이걸 써놓고 가만히 보니깐 요 내가 이것가지고 오늘까지 살아왔더라고요 보니까. 아 놀라워요. 그것이 내 마음에 깊이 뿌리박고 있었어요. 그것이 있었단 말예요.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은 첫째 말씀이 귀에 들어와야 됩니다. 설교가 하나님말씀으로 들려져야 합니다. 말씀이 들려온다는 게 참 중요합니다. 이게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 성경에서 내게 말씀하십니다.
성경의 역사서가 아니요 문학서가 아니고 고전이 아니고 살아있는 말씀으로 내게 들려옵니다. 그 유명한 신학자 칼 바르트는 말합니다. 워드 어브 갓 웨이츠 퍼 어스 신 더 바이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성경 그 신약요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 안에서 나를 기다린다. 워드 어브 갓 웨이츠 퍼 어스 신 더 바이블. 그렇습니다. 그래서 내가 성경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어요. 읽는 순간 성경이 내게 말씀하십니다. 성경이 내게 말합니다.
여담을 하나 하겠습니다. 여러분 공부해보셨습니까? 아 공부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 있습니다마는 제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보니까 어느 교수님이 내가 공부하는 요령을 가르쳐줄게 아 그리고 가르쳐주는데 그 교수는 특별한 사람이에요.
왜요? 교과서를 한 40권을 리콰이어 해놓고 그 중의 네 권을 하드 리콰이어 이건 꼭 읽어라 이거는 정독을 하라 해놓고 아 그다음에 그 사람 보세요. 몇 주일 있다가 내가 읽으라는 책 가져와 그래요. 그 책을 가져오라고 그 책을 어떻게 읽었나? 책에 얼마나 줄을 그었나? 밑줄을 그었나? 그렇잖아요. 그 책을 검사해요. 그리고 성적을 내고 말아요. 그 이상한 사람이에요.
그러나 일리가 있는 거예요. 책은 깨끗하면 안 돼요. 책을 놓고 박박 긋고 마진에다가 막 써놓고 막 이렇게 하거든요. 그렇게 하라는 거예요. 많은 표시를 해가면서 읽어요. 왜요? 그 다음에 시험 볼 때는요 이제는 내가 책을 보는 게 아네요.
책이 내게 말해줘요. 책 척척척 돌리면 벌써 착 생각이 나요. 이래돼야 되는 거예요. 내가 책을 보는 게 아니라 책이 내게 말을 하게 돼야 된다는 거야. 아 그 일리 있잖아요? 참 그분 내가 고맙게 생각을 해요. 좋은걸 가르쳐줬어요. 그렇습니다. 내가 성경을 봅니다. 아네요. 이제는 성경이 내게 말씀을 하세요. 성경 그대로가 내게 말씀을 하세요.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아 옳은 말입니다. 이제 말씀해 주시는 거예요.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구하라 내가 이루리라. 아 옳은 말씀이다. 이제 그대로 내게 말씀해 주시는 거예요. 구절구절에서. 아시겠습니까?
그런고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계속 들려오는 거예요. 들려오고 그 다음에는 믿어지고 그리고 말씀을 사랑하게 되요. 사랑이라는 게 뭔데요? 사랑별거 아네요. 생각나는 거예요. 생각 안 나면 사랑 아니죠.
맛있는 음식을 먹을래도 생각나고 좀 어려운 일이 있어도 생각나도 우선 당장 생각나는 거예요. 계속 생각이 나는 거예요. 그리움이라고 하죠? 자나 깨나 생각이 나는 거예요. 그것이 사랑이에요.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이나요.
그리고 또하나있어요. 언제나 그 말씀이 옳아요. 그걸 토털 엑셉텐스라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 부부싸움을 합니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옳고 저 사람이 틀렸어요. 다시 한번 생각해보세요. 사랑하나 안하나.
사랑하고나면 그런 게 아네요. 언제나 내 생각은 틀렸고 저 사람이 옳아요. 그러니까 마음에 안 들더라도 그분이 뭐라고 하면 그냥 따르고 싶어요. 왜? 먼 훗날엔 그게 옳은걸 아니깐. 틀림없이 저게 옳으니까 지금은 납득이 안돼도 그게 사랑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밤낮 자기가 옳아. 죽을 때까지 내가 옳아. 잘못 살았습니다. 불행하게 산거예요. 사랑 없이 산거예요. 이거는. 심지어 음식을 먹어도 내 입맛보다 저의 입맛이 더 좋아요. 내가 먹는 것 보다 저분이 먹는 게 더 맛있어 보여요.
이게 사랑이라는 거예요. 자 보세요. 긍정하고 받아들이게 되고요 또 순종하게 되고요 다음에 더 있어요. 커미트멘트 위탁하게 되요. 그에게 내 운명을 맡겨버려요. 나 판단 안할 랍니다. 나 생각도 안할 랍니다.
그저 판단능력까지 다 그에게 맡겨버리는 거예요. 토털 커미트멘트 이것이 사랑이라는 거예요. 그래 운명을 맡기고 일생을 사는 거 아닙니까? 이것이 결혼생활이라는 겁니다.
사도행전 20장에 보면 32절에 사도바울은 이렇게 에베소교회 장로들에게 말합니다.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내가 말씀께 너희를 부탁하노라. 말씀이 너를 지켜줄 것이다. 바로이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마틴 루터는 보름스회의에 나가서 95개조를 내걸고 종교개혁을 일으킬 때 종교지도자들은 그를 심판하며 대주교가 말합니다. 이제 한마디에 의해서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하는 이런 무서운 시간입니다. 그 시간에 루터는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나 여기 서있습니다. 히어 앤 스탠드. 유명한 얘깁니다. 그래 지금 스투트가르트에 가면 거기에 루터가 서있던 장소에 요렇게 조그맣게 표시를 해놨어요. 내가 그거 찾느라고 얼마나 시간걸인지 몰라요. 요만큼 표시해놨거든요.
여기 루터가 서서 집은 다 없어졌어요. 하지만 서서 하나님 나 여기 서 있습니다라고 말했던 곳이다 이래 표시를 해놨더라고요.
그런데 거기서 그가 유명한 말을 합니다. 너 95개조 취소할 마음 없느냐? 네 주장을 철회할 마음 없느냐? 철회하지 못하면 죽을 텐데 괜찮겠냐? 이런 재판을 하게 될 때 그는 유명한 말을 합니다. 나는 말씀을 떠나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습니다.
성경이 이렇게 말하므로 성경을 떠나 다른 선택이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종교개혁을 일으키게 됩니다. 여러분 아셔야 됩니다. 믿는 사람은 거기에 운명을 거는 거예요. 그런고로 말씀 주도적으로 사는 거예요. 말씀 주도적으로. 아시겠습니까?
내가 말씀을 읽는 게 아니라 말씀이 나를 주도하시는 거예요. 그에 이끌리어 살고 그에 사로잡혀 살고 그가 주시는 대로 살고 그가 인도하는 대로 그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모습니다.
여러분 오늘이라도 세상을 떠난다고 생각을 해봅시다. 무엇이 생각날 거 같습니까? 주님의 말씀이 그대로 떠올라야 됩니다. 그때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지 않으면 나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요한복음 14장에 말씀하시는 것처럼 너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아니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하는 말씀이 내 귀에 생각나지 않으면 나는 어떻게 될 거 같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말씀과 함께 중생을 했습니다. 말씀에 이끌리어 살아옵니다. 마지막 요단강을 건너갈 때 다시 그 말씀이 나를 인도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주도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입니다.
-기 도-
하나님아버지. 저희를 여기까지 인도하심을 감사합니다. 주께서 깨닫게 하셨지만 깨닫는 대로 살지 못했고 주께서 말씀을 주셨지만 말씀을 극진히 사랑하며 살지 못한 것을 용서하옵소서. 원하옵는 것은 주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에 계셔서 우리 마음을 감동케 하고 우리 마음을 생각을 주관하고 우리 뜻을 주관하사 말씀에 이끌리어 살고 말씀과 함께 승리하며 살고 어느 날 부르시던지 말씀에 이끌리어 주님 앞에 갈 수 있는 주의 사람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포도나무와 가지'의 오해 /요15:1-7/ 폴 워셔 Paul Washer
2015-06-18 20:15:04
◑서론. 풍요와 진보를 조심하십시오.
▲호세아14:8절을 보십시다.
“에브라임(이스라엘)이 말하기를,
‘내가 다시 우상과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 하는지라. *'나는 더 이상 우상을 섬기지 않겠습니다'라는 뜻
나God는 푸른 잣나무와 같으니, 너희는 나로 인해 (풍성한) 열매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에브라임’이라는 말은 ‘풍성함 fruitfulness’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풍성함’의 근원이 되셔야 하는데,
북이스라엘은, 다른 우상에게서 ‘풍성함 fruitfulness’의 근원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호14:8절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니다, 내가 네 모든 풍성함의 근원이다.”
우리는 물질적 풍성함으로부터 생기는.. 교만을 주의해야 합니다.
호14:8절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의 풍성함'은, 또한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주시는 '풍성함'은
일차적으로 '주님과 교제로 인한 영적인 풍성함'입니다.
▲우리는 진보progress를 조심해야 합니다.
물질적 풍요, 진보... 이런 것들이 우리를 타락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모든 진보를
때로는 다 허락하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진보progress로 인해 우리가 교만해져서,
하나님을 멀리 떠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대단히 성숙하지 않으면, 진보하면 할수록(선진국이 되면 될 수록)
우리는 진보의 결과로, 오히려 하나님을 떠나기 쉽습니다.
우리는 미숙해서 자주 비틀거립니다.
그래서 늘 그리스도께로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매일 매시간 그리스도께로 가까이 나아가는 길만이..
우리의 비틀거림 inconsistency(비일관성)을 극복할 수 있는 길입니다.
그런 신자만,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풍요와 진보로 인한 교만으로 자고하다가는,
망하게 되는데요... 어떻게 망하는지 아래에 계속 설명하겠습니다.
풍요와 진보가 무조건 나쁘다는 뜻은 아닙니다.
충분한 영적인 성숙이 있기 이전의, 풍요와 진보는 위험하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그것 때문에 다 넘어지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기 때문입니다.
◑1. ‘포도나무와 가지’ 비유의 첫 번째 오해 - '열매'에 대한 오해
▲가지의 열매를 ‘풍요와 진보’로 생각하는 것은, 오해입니다.
여러분, 요15장의 비유에서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그 가지가 맺는 ‘열매’를
‘풍요 또는 진보’로 생각합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그렇게 설교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일관성에 비추어볼 때,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어서 맺는 포도열매는
1차적으로 ‘성령의 9가지 열매’입니다. 갈5:22~23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의 열매들입니다.
이사야서에도 비슷하게 '포도나무 비유'가 나옵니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었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 포도를 맺혔도다. 사5:2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의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공평 justice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의로움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사5:7
이사야서에도, 포도나무에게, 하나님이 바라신 열매는
공평이요, 의로움이었습니다.
물질적 풍요나 성공의 열매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풍요와 진보’의 열매를 간절히 기대합니다.
아직 우리가 영적으로 충분히 성숙되지 못한 가운데서, 그런 물질적 풍요를 간구합니다만,
하나님은 좀처럼 우리 소원대로 허락해 주시지 않습니다. 이 무응답이 오히려 은총입니다.
하나님은 1차적으로 성령의 9가지 열매를 주셔서, 우리가 먼저 성숙하기 원하십니다.
그렇게 성숙된 다음에 2차적으로 ‘풍요와 진보’도 따라올 수 있겠죠.
만약 하나님이 포도나무 가지들에게
성령의 9가지 열매보다, ‘풍요와 진보’의 열매를 먼저 주신다면,
그 가지들은 아마 분명히 타락하고 말 것입니다. 아직 미성숙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먼저 맺기를 소망합시다.
많은 신자들이, 주님을 믿고, 주님 안에 거하여 열매 맺기를 소망합니다.
그런데 성령의 9가지 인격적 열매보다
물질적이고, 진보적인 열매들을 먼저 맺기 원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자비하셔서, 우리의 그 소원을 잘 들어주시지 않지만,
만약 하나님이 우리 소원에 다 응답해 주셔서,
우리가 물질적이고, 진보적인(문명의 발달) 열매를 먼저 맺게 된다면,
아마 우리는 쉽게, 북이스라엘처럼, 타락하고 말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는, 북이스라엘처럼,
물질과 풍요와 다산과 진보를 누군가 내게 허락해 준다면,
그가 누구이든지 상관없이, 우상과 다른 신을 섬기는 것도.. 꺼려하지 않을 것입니다.
온통 자기 소원과 관심이 풍요와 진보에 집중되어 있으면.. 그렇게 되기 십상입니다.
▲풍요와 진보보다, 하나님 자신을 구하십시오.
예레미야 2:13절은 말씀합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생수의 근원이 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팠는데, 그것은 물을 저축하지 못하는 터진 웅덩이니라”
여러분, 만약 성도가 하나님 자신을 구하지 않고,
성령의 9가지 열매를 구하지 않고,
생수의 근원을 버리고, 스스로 웅덩이를 파면 (물질과 진보를 구하면),
하나님은 그 성도를 징계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우상들을 부수어 버릴 것입니다.
▲그리스도만 바라볼 때까지 징계하십니다.
그래서 구약을 읽어보십시오.
하나님은 끊임없이 백성들을 징계하시고,
끊임없이 그 백성들이 추구하고 섬기는 우상을 깨어버리도록.. 역사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아직 그를 사랑하신다면,
그를 징계하셔서, 모든 우상의 근원을 다 끊게 하시고,
오직 그가 그리스도만 집중하도록 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탁월하심,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 그리스도의 지속되는 사역, 그리스도의 십자가 등
오직 그의 관심이 그리스도에게만 다시 집중될 때까지.. 그를 징계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때로, 포도나무 밭을 황폐하게 하십니다.
렘17:5~6절을 봅시다.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권력을 삼는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 그들은 아무도 살지 않는 소금 땅, 황무지에서 살게 될 것이다.”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하나님을 먼저 찾지 않을 때,
만약 그 사람에게 권력이 주어진다면,
그는 ‘혈육으로 권력을 삼는’ 사람이 됩니다.
그때 그는, 하나님의 공의로 행하지 않고, 사람의 권력을 휘두르게 됩니다. 그 결과,
“그들은 아무도 살지 않는 소금 땅, 황무지에서 살게 될 것이다.”라는 징계를 받게 됩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형상을 본 받은 사람이 되려고 목표하십시오.
신자들이 포도나무 가지로서 열매를 맺고싶다고 하면서,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은 인격자’가 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대신에, 열매를 맺는다고 하면서
여러 가지 외적인 사역의 풍성한 열매를 맺으려고 애를 씁니다.
또한 그렇게 외적인 사역의 외적인 열매가 맺혀서
사람들이 모이고, 목회사역이 바빠지면
뭐가 된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맺지 못하고,
예수님의 인격을 전혀 닮지 못한 상태에서,
즉 자기의 옛사람이 거의 변한 것이 없는 가운데서,
목회적 열매가 많이 맺혀 보십시오.
-그런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다 타락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외식하면서 살 것입니다.
그 결과, 그의 목회에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고, 타성에 젖게 되며, 늘 심령이 메마르게 됩니다.
오늘날 많은 신학생들이, 스펄전과 같은 설교자가 되기 원합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께 권면 드립니다.
정말 스펄전처럼 설교를 잘 하게 되기 이전에,
예수님의 형상과 인격을 닮은 변화가.. 나타나기를 바라는 사람이 되기를 먼저 바라십시오.
만약 그런 인격적 변화와 열매가 나타나지 않으면..,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아래의 말씀이 그 답을 주고 있습니다. ↙
◑2. ‘포도나무와 가지’ 비유의 두 번째 오해 - '제하여 버린다'에 대한 오해
▲무릇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하여 버리시고... 15:2
포도나무 가지의 열매는, 1차적으로 성령의 열매, 인격적 열매라고 했습니다.
그 열매가 없으면.. 농부이신 아버지께서, 그 가지를 잘라버린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잘라버린다/제하여버린다’가 무슨 뜻입니까?
보통 ‘징계하신다’는 뜻으로 해석합니다만, 이것은 오해입니다.
저는 이 말씀의 뜻이 ‘지옥에 간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외적인, 눈에 보이는 열매가 있든지/없든지
성령의 9가지 열매, 예수님 형상을 닮은 인격적 열매를 맺지 못하면,
그저 가지가 포도나무에서 떨어져 나가는 정도가 아니라,
결국에는 지옥에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만 다니면 지옥에 안 가고, 천국에 간다’라고들 생각 하지만,
요15:2절에서 예수님은, ‘(인격적) 열매를 맺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본문의 비유에서 ‘포도원’은 오늘날의 교회를 의미합니다.
본문의 포도원 비유에서, 어떤 가지가 잘려져 나갔다면,
오늘날의 교회에서도, 어떤 가지는 잘려져 나갈 수/지옥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가지’(교인)들은
끊임없이 ‘풍요와 진보’를 구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를 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생명)을 구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결국에는 영원히 ‘제하여 버려질’ 것입니다.
매우 두려운 말씀입니다.
▲‘성령의 열매’가 없다는 것은.. 따지고 보면 ‘가지에 붙어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교회에 오래 동안 다녔지만,
그 인격적 삶의 변화가 전혀 일어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앞서 설명했지만
풍요와 진보라는 자기 이기적인 목적으로 신앙생활 했기 때문입니다.)
포도나무 가지에 ‘열매’가 열리지 않는다는 것은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지 않다는 .. 결정적인 증거가 됩니다.
그래서 (듣기 싫은 말이지만) 그 가지는 제해진다는(지옥 간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지식적 동의 정도로 예수를 믿으시면.. 아무 변화도 안 일어납니다.
속사람이 거듭나야 합니다.
그 속 본질이, 예수의 생명으로 확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예수를 구하고, 생명을 구합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지속적인, 꾸준한 인격의 변화/성령의 열매가 자연스럽게 나타납니다.
그들은
풍요fruitfulness와 진보progress를 우선적/1차적으로 구하지 않습니다.
포도나무에 붙어있기 때문에,
그 포도나무의 관심이 곧 자기의 관심입니다. 그것은 곧 생명, 영생입니다.
그러나 회심하지 못한(설교자는 거듭남=회심으로 봄) 사람의 뚜렷한 특징은
자기 이기심selfishness입니다.
그러니까 항상 추구하는 것이 ‘복 받는 것, 즉 풍요와 진보’입니다. (생명, 영생과 반대)
이런 사람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못하다는 증거입니다.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사람은.. 그 관심이 주님의 관심과 일치하게 되어있습니다.
여러분, 교회에 오래 다닌 것, 교회에서 기득권을 가진 것
그것이 여러분에게 구원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은 외적인 도덕성이 남보다 조금 나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하고 성령의 열매하고 동일시하면 안 됩니다.
성령의 열매는 내적/본질적인 것이고,
도덕성morality은 보다 외적인, 남의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외적인 도덕성이 있었지만, 내적인 성령의 열매는 없었습니다. ▣ 복음 관련
....................................
▶청주의 한 목사님이, 50대 중반의 나이에 지난 화요일 소천하셨습니다. (10년5월경)
이 목사님이 임종 전에 갈라디아서 5장 22절 말씀에 나오는
성령의 9가지 열매를 외우고 묵상하신 일에 대하여 들었습니다.
사랑의 열매, 얼마나 많은 사랑을 가지고 사람을 대했는가?
부끄러웠답니다.
희락의 열매,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목회를 하였는가?
주신 은혜에 만족하여 기뻐하고 감사하지 못한 삶에서 막혀버렸답니다.
화평의 열매, 화평을 회복해야 할 사람들이 너무 많아
그 사람들을 불러 화해하였답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하나 하나 다 자신이 없더랍니다.
‘내가 다시 일어난다면 사람을 사랑하고,
상처를 싸매주고 위로하는 목회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였지만
이제는 그것도 하나님이 그만 두라.’고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소천이 가까움)
그러면서 깨달아지는 것이 요한복음 15장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이 생각났답니다.
성령의 열매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기만 하면 되는 것을
마치 자신의 힘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무엇인가 이룰 수 있는 것처럼 열심히 일만 하였다는 것을 깨닫고
너무나 후회하였다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렇지만 내 삶을 뒤돌아보면
하나님께 감사할 것이 너무 많다.’고 하셨습니다.
붙어있으라 /요15:1-16/ 조상호목사
2023-07-25 14:49:09
저는 지난 주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더니든순복음교회 창립7주년감사예배와 해밀톤순복음교회 담임교역자 부임예배에 참석을 하고, 3번의 특별집회를 인도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더니든에 갔을 때, 묵었던 숙소와 해밀톤에서 묶었던 숙소가 똑같은 이름의 Quality Hotel 이었습니다. 아마 오세아니아총회에서 숙소를 예약하는 과정에서 저렴하면서도 전국적인 체인망을 가지고 있는 Quality Hotel을 택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더니든의 Quality Hotel은 시내 중심가에 위치해서 그런지 모든 것이 협소했습니다. 들어가는 진입로나 출입구, 체크 인하는 리셉션과 아침식사를 하는 식당, 자동차를 주차하는 주차장도 매우 협소했습니다. 이튿날 새벽기도를 마치고 숙소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관광객을 태우기 위해 대형버스 한대가 호텔정문 앞 Drive Way에 주차하는 바람에 자동차를 주차장에 주차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출입하기에도 불편했습니다. 그러나 해밀톤의 Quality Hotel은 더니든과 달랐습니다. 똑같은 Quality Hotel이었지만, 모든 것이 반대였습니다.
자동차를 주차하는 주차장과 체크인하는 리셉션과 아침식사를 하는 식당과 손님들이 드나드는 출입구, 왔다 갔다 하는 복도, 등 거의 모든 것이 달랐습니다. 그 숙소가 얼마나 크고 넓은지 처음에는 제가 머무르고 있는 방을 찾지 못해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마침 더니든에서 저와 함께 방을 사용하시고 저보다 하루 늦게 해밀톤에 합류하신 모 목사님이 숙소에 도착하셔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 이것이 호텔이야. 호텔이라고 하면 이 정도는 되어야지. 목사님 안 그래요. 솔직히 말해서 더니든 Quality에는 ‘호텔‘이라는 이름을 붙여서는 안 되고, 여기 해밀톤 Quality에 호텔이라는 이름을 붙여야 합니다.”
그 후 저는 그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한 가지 영적인 교훈을 얻었습니다. 더니든에 있는 Quality Hotel이 호텔급의 시설은 하지 않은 채 그럴듯하게 ‘Hotel’이라는 이름만 붙여 놓은 것처럼, 우리들이 ‘크리스챤’이라는 이름만 달고 다니는 사람이 아닌지 깊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똑같이 성경책 끼고 교회에 오고, 똑같이 앉아 예배를 드리고, 똑같이 찬양을 부릅니다. 거의 같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마치 더니든이나 해밀톤이나 똑같은 Quality라는 이름을 달고 있고,
똑같은 로고가 새겨진 간판이 손님들을 반겨주며, 직원들의 복장도 똑같고, 객실 안에 배치해 놓은 가구들도 거의 같을 정도로 더니든이나 해밀톤이나 똑같은 Quality Hotel이었던 것처럼, 언뜻 보면 모든 사람들이 똑같아 보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자세하게 살펴보면 실제로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무엇을 보고 차이를 알 수 있을까요? 겉모양이 아닌 내면을 보면 그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잎사귀보다 열매를 보면 그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농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농부는 무엇보다도 과실을 원합니다.
농부는 가지에 달린 잎보다 주렁주렁 매달린 열매를 원합니다. 내용물을 중요시합니다. 오래 전에 제가 “잎사귀보다 열매가 중요합니다.“라고 설교를 했더니 어느 분이 예배 후 저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 요즈음 그 말이 꼭 맞는 것이 아닙니다. 은행나무에 열리는 은행 알보다 은행잎이 더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을 아십니까? 어떤 제약회사에서는 은행잎 모으기에 혈안이 되어 있어요. 그것을 가지고 징코민인가 하는 약을 만듭니다.” 물론 요즈음 열매보다 잎사귀를 더 소중하게 여기는 나무도 있기는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농부는 겉으로 풍성하게 보이는 잎사귀보다 내용물인 열매에 관심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열매에 관심이 많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열매에 관심이 많으십니다. 그런데 현대는 열매 대신에 꽃을 구하는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시들어 버릴 꽃의 영광을 구하고 있습니다. 겉으로만 그럴 듯하게 보이는 잎사귀만 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른 어떤 것보다도 열매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꽃’이라는 단어가 모두 37회 가량 언급되어 있는 반면, ‘열매’라는 단어는 자그마치 200회 이상이나 언급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1장 11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어....” 하나님께서는 땅을 지으시면서 “땅이여, 열매를 맺는 과목을 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다른 것보다, 열매 맺는 것에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있다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또 골로새서 1장 10절에서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라고 말씀하시면서 신앙생활에 열매를 맺기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구할 것은 무성한 잎사귀이나 화려한 꽃이 아니라, 열매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6절을 보십시오. 16절을 보면 주님의 관심을 알 수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주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믿으십니까?
비록 내가 내 스스로 자동차를 운전하여 교회에 왔다 할지라도, 내가 친구 손에 이끌려 교회에 왔다 할지라도, 자녀의 성화에 못 이겨 교회에 나왔다 할지라도, 이웃 친구의 인도로 예배당에 왔다 할지라도 그것까지도 주님이 우리를 선택하시고 우리를 이끄셔서 우리가 주님 앞에 나온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무슨 목적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우리를 불러 주셨을까요? 우리를 택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로 하여금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 속에서 나타나는 열매에 관심이 많으신 줄로 믿습니다.
열매란 무엇인가?
그러면 열매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옛날에 자식을 열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기 자녀를 “내 몸의 열매”라고 표현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세상에서 잘 나가는 것을 열매라고 생각합니다. 돈 많이 벌고 번성한 것을 보고 열매가 많다고 했습니다.
또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많은 종교적인 업적을 남기는 것을 열매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들을 보고 예수님께서 “외식하는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아”라고 책망했습니다. 주님께서 본문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열매’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로 열매란 인격의 열매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이제부터 가장 중요한 과제는 ‘내가 어떠한 사람이 되느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열매 맺는 삶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백성들이 주님의 성품을 닮은 모습이 삶의 현장 가운데에서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갈라디아서 5장 22절과 23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우리는 이것을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라고 합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5장 22절 이하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란 말은 복수가 아니라 단수입니다. 언뜻 보면 굉장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아홉 가지의 열매가 있으면 복수가 되어야 하는데, 단수라니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홉 가지의 열매가 각기 다르지만, 한 인격에서 나오는 아홉 가지 모습이라고 한다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가 바로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살펴보면 정말 풍성한 사랑과 진정한 기쁨과 흔들리지 않는 화평과 포기하지 않는 인내와 끝없는 자비와 선만을 추구하는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같은 성품들이 보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예수님의 인격을 닮아간다는 의미입니다. 둘째로 열매란 사역의 열매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다면 ‘내가 어떠한 삶을 사느냐’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나를 구원해주신 주님께 예배하는 일입니다. 또 내게 생명과 소망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전도함으로 새로운 영혼을 구원했다면 전도의 열매를 얻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열매란 인격적인 것과 사역적인 것, 두 가지를 다 포함합니다. 예수님의 인격을 닮고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행하는 사람이 열매 맺는 사람입니다.
열매 맺는 방법은?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포도나무를 비유로 들어 말씀하십니다. 포도나무는 열매를 맺기 위해서만 존재합니다. 포도나무 꽃은 아름답지 못합니다. 건축에 쓰지도 못합니다. 땔감으로도 가치가 없습니다. 포도나무는 오직 열매를 맺기 위해서만 존재합니다. 그러면 포도나무가 포도열매를 맺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시 말하면 우리가 주님이 원하시는 인격의 열매와 사역의 열매는 어떻게 맺을 수 있습니까?
1) 주님 안에 거하라
첫째로 주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주님과 바른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본문 4절을 보십시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가지가 스스로 과실을 맺을 수 없습니다. 가지가 어떻게 해야 과실을 맺을 수 있습니까? 가지는 나무에 붙어 있어야만 과실을 맺을 수 있습니다. 가지가 나무의 원줄기에 붙어 있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뿌리로부터 뽑아 올린 영양분과 수분을 공급받습니다. 가지는 그것을 받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잎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지가 포도나무 원줄기에 붙어 있어야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그리스도께 붙어 있어야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저는 여기에서 ‘그리스도인‘에 대해서 정의하고 싶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무엇입니까? 교회에 나오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까? 아닙니다. 성경은 단 한번도 그렇게 그리스도인을 정의한 적이 없습니다. 제가 지난 화요일 더니든순복음교회 창립 7주년 감사예배를 참석할 때, 교민 한 분을 만났습니다.
그 분은 제 기억하기로는 개인 사정으로 한국에 가는 바람에 딱 한번만 빠지고 더니든교회 창립예배 때부터 지난 7년 동안 계속해서 창립감사예배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그분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정의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저 행사에 참석한 손님일 뿐입니다. 그러면 믿는 부모님을 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까? 역시 아닙니다. 성경은 단 한번도 그렇게 정의한 적이 없습니다. 여기 본문에서 그리스도인에 대한 정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께 붙어 있는 사람”인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을 때 열매를 많이 맺을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붙어 있을 때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붙어 있을 때, 우리는 이 땅에서 승리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목표는 “내가 무엇이 되어야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무엇을 하겠다, 내가 무엇을 이루겠다.”고 하는 사람은 아직 믿음의 초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승리의 방법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무엇이 되는 싸움을 하기 보다는 예수 그리스도께 붙어있는 싸움을 해야 합니다. 이미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붙어 있기만 하면 우리는 승리할 줄로 믿습니다.
몇 번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시중에 이런 농담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기는 놈 위에 뛰는 놈이 있다.” 그러면 뛰는 놈 위에 누가 있습니까?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 나는 놈 위에 누가 있습니까?
“나는 놈 위에 붙어 다니는 놈이 있다 저는 “나는 놈 위에 붙어 다니는 놈이 있다”는 이 말이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주 3박4일 동안 저는 크라이스트처치에서 더니든, 그리고 더니든에서 웰링톤, 윌링톤에서 해밀톤, 모든 행사를 마치고 해밀톤에서 웰링톤, 웰링톤에서 크라이스트처치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떻게 그 긴 거리를 여행할 수 있었을까요? 아마 제 능력으로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3박4일 동안 여기에서 더니든까지는 걸었을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제 힘만으로 걷는다든지, 헤엄을 친다든지 하는 방법으로 3박4일 동안 북섬의 해밀톤까지 다녀올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3박4일 동안의 짧은 기간 동안 여러 도시를 다녀왔습니다. 어떻게 이 일이 가능했을까요? 나는 놈 위에 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혼자 힘으로 날을 수 없지만, 날을 수 있는 비행기를 5번이나 탔기 때문에 3박4일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여러 도시를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 원리입니다. 우리는 연약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 붙어 있기만 하면 우리는 강한 존재가 되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에게는 힘이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께 붙어 있으면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떨어지면 연약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5절 하반절을 보면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떠난 성도는 영적 무능력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또 6절을 보면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무슨 말입니까? 원줄기를 떠난 가지는 불속에 던져지는 죽음을 당할 뿐입니다. 이 포도나무 비유는 그리스도인들의 위치를 정확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입니다. 그리스도께 붙어서 그리스도로부터 흘러넘치는 생명과 사랑과 모든 능력을 공급받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승리의 열쇠는 “열매를 맺읍시다. 열매를 보여 줍시다”하는 구호에 있지 않고,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께 붙어있느냐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 4장13절에서 뭐라고 고백했습니까? “내게 능력 주시는 자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사도바울은 누구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합니까? 능력 주시는 자안에서, 즉 능력 주시는 주님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승리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가 주님께 붙어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자녀가, 우리의 가정이, 우리 교회가, 우리 민족이 승리하려면 주님께 붙어 있어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께 묶여져야 할 줄로 믿습니다. 먼저 믿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은 묶는 일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자녀들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묶고, 우리의 믿지 않는 아내와 남편들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묶고, 소망 없이 방황하는 청년들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묶어야 합니다. 그러면 자녀와 아내와 남편과 청년들이 다시 살아날 줄로 믿습니다. 이 땅 크라이스트처치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묶으면 이 도시가 살아날 줄로 믿습니다. 죽어가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께 묶어 주기만 하면 다 살아날 줄로 믿습니다.
2) 스스로 성결케 하라
열매 맺는 두 번째 비결은 깨끗한 가지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3절에서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주신 말씀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과실을 맺을 수 있는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2절을 보겠습니다.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
열매를 얻기 위해서는 작고 쓸모없는 가지들을 잘라버리라고 요구하십니다. 또 이사야 18장 5절을 보면 “추수하기 전 꽃이 떨어지고 포도가 맺혀 익어갈 때에 내가 낫으로 그 연한 가지를 베며 퍼진 가지를 찍어 버려서”라고 말씀하시면서 풍성한 열매를 위해, 많은 추수를 위해 자를 것을 자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한 가지 목적, 곧 ‘거룩한 생산성’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관심은 눈에 보이는 화려한 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씨가 있는 열매에 있습니다. 열매를 위해서는 ‘잘라야 할 것을 자르고, 버려야 할 것을 버리라‘고 합니다.
옛날 한국에 있을 때 보면 직장 동료들이나 친구들이 모이기만 하면 지겹도록 하는 것이 있습니다. 한국사람 대부분이 즐기는 고스톱입니다. 때때로 분위기를 깨지 않기 위해 저는 예의상 고스톱을 치곤했는데, 그 때 마다 돈을 잃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돈을 따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고스톱을 칠 때마다 귀가 따갑도록 친구들한테 들은 말이 있습니다. “상호야, 비풍초 똥팔삼. 이렇게 버려라.” 웃으시는 분들은 고스톱을 아는 분일 것입니다만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설명하겠습니다. 고스톱을 치다가 따먹을 것이 없으면 “비풍초 똥팔삼 순으로 버리면 산다.” 것입니다. 이 말이 100% 맞는 말은 아니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나름대로 깨달아지는 것이 있습니다. 버림의 중요성입니다. 이 자리에서 고스톱 강의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말을 통해서 우리가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잘 버리면 산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잘 버리지 못하면 오히려 죽습니다. 포도농사를 짓는 농부가 포도열매를 많이 거두기 위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열매를 많이 맺도록 하기 위해서 전지(剪枝)를 잘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가지치기를 잘해야 풍성한 수확을 거둘 수 있습니다. 죽은 가지는 사정없이 잘라주고, 열매를 맺을 가능성이 없는 가지라고 생각되면, 그것도 가차 없이 잘라주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병든 것을 그대로 놓아두면 건강한 가지에 나쁜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건강하지 못한 가지를 그대로 놓아두면 나중에 다른 가지들이 열매 맺는데 필요한 영양분을 다 도둑질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닮아 가는데 방해가 되는 요소가 있다면 그것을 잘라 버려야 합니다. 주님의 사역을 하는데 방해가 되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을 잘라 버려야 합니다. 한국에 가면 종종 보게 되는데, 식탐이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밥 한 끼 먹으려고 2시간 동안 차를 타고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그 식탐을 잘라 버려야 합니다. 무슨 호피 가죽인지, 배비램 가죽인지 하는 코트를 사기 위해 카드 빚내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러한 사치를 잘라 버려야 합니다. 올빼미가 되어 밤늦게까지 빈둥빈둥 놀다가 아침 늦게까지 자다가 학교에 지각하는 학생들이 많은데 그러한 게으름을 과감히 잘라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음란물이나 폭력물이나 잡기들과 같은 경건한 생활에 방해가 되는 것들을 과감하게 자르고 하나님 앞에 성결하게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실 것을 믿습니다.
자주 드리는 예화이지만, 중요하기 때문에 다시 소개합니다. 미국에서 남북전쟁에서 북군이 남군에 비해서 전세가 불리 할 때였습니다. 링컨의 한 참모가 링컨에게 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각하, 하나님은 우리 북군 편일까요, 남군 편일까요?”
이 질문을 받은 링컨은 유명한 대답을 했습니다. “나는 그런 것 가지고 고민하지 않는다네. 내 고민은 하나님이 우리 편에 계신가 적군 편에 계신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하나님 편에 서 있나 하는 것이네.” 우리들은 하나님의 도움을 받기를 원합니다. 풍성한 축복과 열매를 맺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움과 축복을 받기에 합당한 사람이 되려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구원은 믿음으로 받습니다만, 축복과 기적은 순종과 행함으로 받는 줄로 믿습니다. 버릴 것을 버리므로 성결한 삶을 살아야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될 줄로 믿습니다.
열매를 맺으면?
그러면 우리가 풍성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갈 때, 어떤 결과가 주어집니까? 8절을 보겠습니다.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우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결과적으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게 됩니다. 우리의 열매는 하나님의 영광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우리가 주님의 제자인 것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열매에 관심이 많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열매를 통해서 영광 받으시기 원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풍성한 열매를 맺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싫어하시는 습관과 행동을 제해 버리고 항상 예수님께 붙어 있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한 포도나무 이야기를 소개하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영국 햄프턴에 포도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포도나무는 상당히 잘 성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과실을 잘 맺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나무 주인은 매우 실망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해에 줄기가 부러질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포도송이가 그 나무에 열렸습니다. 전문가들이 그 이유를 조사한 결과 그 이유가 밝혀졌습니다. 수백 미터 떨어진 곳에 템즈강이 흐르고 있었는데, 포도나무 뿌리가 그곳까지 연결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 포도나무는 수분이 있는 곳으로 계속해서 뿌리를 내리어 그 해에 템즈강까지 뿌리를 계속 뻗치게 되었고, 결국에는 그곳으로부터 수분을 흡수하여 그 해부터 엄청나게 많은 포도열매를 맺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뿌리를 깊이 박고 살아가면 놀라운 능력과 축복을 누리며 살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이제 우리는 3월에 들어왔습니다. 뉴질랜드에서의 3월은 4월과 5월과 함께 추수의 계절인 가을로 여겨집니다. 추수의 계절을 맞이하여 무성한 잎사귀가 아닌, 풍성한 열매로 주님께 드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화려한 꽃이 아닌, 열매로 주님께 드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사랑만 하며 살 수 있는가? /요15:1-17/ 유기성목사
2022-09-23 13:22:50
요 15:1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2 내게 붙어 있으면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잘라버리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시려고 손질하신다. 3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말한 그 말로 말미암아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4 내 안에 머물러 있어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 안에 머물러 있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과 같이, 너희도 내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다. 사람이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가 그 안에 머물러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6 사람이 내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면, 그는 쓸모 없는 가지처럼 버림을 받아서 말라 버린다.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서 태워 버린다. 7 너희가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물러 있으면, 너희가 무엇을 구하든지 다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8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어서 내 제자가 되면, 이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10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것과 같다.
11 내가 너희에게 이러한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게 하고, 또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12 내 계명은 이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13 사람이 자기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14 내가 너희에게 명한 것을 너희가 행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이다. 15 이제부터는 내가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겠다. 종은 그의 주인이 무엇을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들은 모든 것을 너희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운 것이다. 그것은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받게 하려는 것이다. 17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것은 이것이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여라.
코로나19와 전쟁, 폭우와 태풍 등으로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힘을 다하여 이러한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을 도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배고프고 병들고 헐벗는 것보다 더 심각한 것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영적인 궁핍입니다.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계 3:17) 하셨습니다.
그들은 물질적으로는 풍요했지만 영적으로는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었다는 것입니다. 말할 수 없이 궁핍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 안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문 밖에 계셨습니다.
계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이와 같은 영적 궁핍함이 두려운 것은 스스로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배고프거나 몸이 아프면 “도와주세요”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도움을 받습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궁핍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야 깨닫게 됩니다.
저는 이런 그리스도인이 두렵습니다.
싸우고 아무렇지도 않게 예배하고 은밀히 죄지으면서 열심히 교회 봉사를 합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영적 궁핍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주님께서 제자를 부르실 때, “나를 따르라” 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으면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에 대한 정확한 답입니다.
주님만 따라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사는 것은 이처럼 간단하고 쉬운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어느 날 제자들에게 "내 안에 머물러 있으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얼마나 난감하였겠습니까?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제자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따를 것인가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셨으니 제자들은 더 이상 예수님을 따를 수 없게 됩니다.
그때 제자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애쓰게 될 것입니다.
고민하고, 애쓰다가 좌절하고, 낙심하고, 지치고, 두려움과 염려로 가득찰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요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이 말은 예수님이 승천하셨다고 제자들만 남겨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신 후에는 오히려 포도나무와 가지처럼 예수님과 한 몸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지금 우리에게 너무나 중요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 사는 것이 힘듭니다.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은 우리 안에 거하심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믿어지는 사람이 영적으로 충만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열매가 많이 맺힙니다.
감출 수 없는 기쁨으로 사랑만 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기쁨도 없고 사랑하지도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영적 궁핍함이 온 것입니다. 주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것입니다.
요 15:4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과 같이, 너희도 내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고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지를 분별하는 기준이 있습니다. 그것이 성도의 삶의 열매인데 사랑입니다.
:17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것은 이것이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여라.
저는 설교를 준비하면서 사랑에 대한 설교를 너무 많이 하는 것이 아닌가 걱정했었습니다. 그러나 기도 중에 하나님께서 제 마음을 치셨습니다.
사랑에 대하여 너무 적게 설교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제게 물으셨습니다. “교인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었느냐? 사랑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지 교인들이 분명히 아느냐?”
제가 사랑에 대하여 너무 적게 설교했음을 깨달았습니다,
여러분, 제가 사랑에 대하여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랑이 구원의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칭찬받을 일을 많이 했던 에베소 교회가 주님으로부터 “...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 2:5)는 무서운 경고를 들었습니다.
주님은 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까? 처음 사랑을 버렸기 때문입니다.(계 2:4)
그러므로 어떤 일이 있어도 ‘원수를 용서할 수 없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이 안 된다’라고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자신이 예수님과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지 못하면 구원받지 못한다’가 아닙니다.
사랑이 안 되면 속히 예수님과의 관계를 점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예수님처럼 사랑할 수 없어요!”라고 말합니다.
당연한 말입니다. 우리는 결코 예수님처럼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기쁨이 우리 안에 넘쳐흐르게 됩니다.
:11 내가 너희에게 이러한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게 하고, 또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이처럼 예수님의 기쁨으로 충만하니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12 내 계명은 이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 사람을 예수님께서 친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4 내가 너희에게 명한 것을 너희가 행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여러분, 우리에게 닥치는 가장 큰 시험은 가난이나 질병이나 실패가 아닙니다.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이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내 안에 머물라는 말씀을 ‘나의 사랑 안에 머물라’고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10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것과 같다.
송솔나무 집사님이 우리 교회에 와서 간증할 때, 미국 이민을 가서 아버지 사업은 망하고 학교에서 매일 같이 놀림과 구타를 당하여 점심시간이면 화장실에 숨어 지내던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하루는 화장실에 숨어 울며 부르짖을 때, 놀랍게도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너는 내 아들이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화장실에서 나와라!” 하시는 것입니다.
그 순간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신다는 것이 믿어지더랍니다. 화장실에서 나와 학교 강당을 걸어가는데, 학교 악단을 연습시키던 지휘자가 부르더니 악단에 들어오라고 권하더랍니다. 그때까지 음악을 접해본 적이 없었기에 전 같으면 두려워 도망쳤을 텐데 자신 있게 “네”라는 대답이 나왔답니다. 지휘자가 그에게 플루트를 연주하게 하였고 특별한 교육도 받지 못했지만 13살에 뉴욕 시티 줄리아드 음악학교(Juilliard School of Music)의 대학 예비 과정에 지원했습니다. 수억 원을 호가하는 플루트를 가지고 온 지원자도 있었는데 자신의 플루트는 부서진 부분을 테이프로 붙인 중고 플루트였습니다. 심사위원 중 한 사람이 무시하는 말을 했을 정도였습니다.
송솔나무 집사님이 간증할 때, 그 플루트로 연주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줄리아드에서 장학금까지 받고 공부하였습니다. 링컨 센터와 카네기 홀을 비롯한 세계 최고의 공연장에서 공연을 하였습니다. 그는 일본의 도시들에서 많은 무료 콘서트를 열며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로하였고 지금은 우크라이나에서 전쟁 난민들을 위로하고 돕고 있습니다.
송솔나무의 음악이 많은 사람에게 위로가 되고 은혜가 되는 것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려는 욕구에서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아버지 하나님께 사랑받고 있다는 깊은 확신에서 나온 연주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속히 영접 궁핍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것이 살 길입니다.
그것은 포도나무와 가지처럼 예수님과 하나 되었음을 믿는 것입니다.
중국 선교사였던 허드슨 테일러는 좌절과 낙심으로 쓰러졌습니다. 당시 중국 선교 현장의 어려움도 컸지만 더 큰 좌절은 중국 동역자들에 대하여 자꾸 화를 내고 불평하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증거인가, 이렇게 되라고 예수님을 믿으라는 것인가, 그래서 좌절하였습니다. 허드슨 테일러가 그 낙망에서 다시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이 요 15:5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결코 자신을 떠나지 않으실 뿐 아니라 자신이 이미 포도나무와 가지처럼 주님과 한 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그 사실을 믿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믿었습니다. 그 말은 더 이상 염려하지 않기로 한 것입니다,
그후 어느 곳에서 어떻게 지내더라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장사되었으며, 또한 부활하였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허드슨 테일러가 중국 대륙에 복음의 씨앗이 된 것입니다.
저는 목사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하나님이 사랑이시고 우리의 좋으신 아버지라는 사실을 성경에서 읽었고 설교를 통하여 수도 없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저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이 없었습니다.
늘 교회에서 살았지만 영적으로는 궁핍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24시간 주님을 바라보기를 힘쓰면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이 달라졌습니다. 저는 성격도 까칠하고 잘하는 것도 없고 열등감이 많았지만 하나님께서 저를 사랑하신다는 것이 믿어졌습니다. 주님이 제 안에 계시니까요! 그래서 좌절과 낙심, 열등감에서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사랑하신다는 것이 믿어지니 저도 저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늘 꼬리표처럼 따라 다니던 “멍청이”나 “실패작”, “가짜”, “못난이”, “무가치한 자”, “추악한 자”, “패자”라는 생각이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도 그렇게 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머무는 것이 어렵다”는 이가 있습니다,
여러분, 앉아 있는 것이 얼마나 쉽습니까? 그것이 예수님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아무리 속상한 일이 있고, 힘들고 답답하고 두려워도 “하나님, 나를 사랑하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받아들일게요. 감사해요.” “예수님,, 충분합니다.”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의 생명의 역사, 사랑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번 호주 집회는 너무나 일정이 빠듯하여 아침 일찍 숙소를 나가 밤늦게 들어와 일기를 쓰고 쓰러지는 날이 계속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슴이 철렁했던 적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눈 밑이 찢어져 피가 흐르고 안경이 부러져 두 번이나 안경 없이 말씀을 전해야 했었고 강사이신 김승회 목사님이 건강상 어려움으로 갑자기 귀국하셔야 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런 중에도 은혜는 그 어느 때보다 컸었습니다. 무엇보다 제 안에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너무나 분명하였습니다.
주님을 바라보며 살았던 지난 12년의 열매였습니다.
존 하이드는 관계에 문제가 생기면 무조건 기도했다고 합니다,
‘십자가의 사랑이 마음속에서부터 흘러넘치기 까지’
이렇게 하면 사랑하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손양원 목사님께서 원수도 사랑하신 것은 그분이 성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을 정말 믿고 주님 안에 거하니 주님께서 사랑하게 해주신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데 우리가 그렇게 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동행일기는 예수님께서 포도나무요 나는 가지임을 믿고 예수님 안에 거하는 삶을 계속 살기 위해서 쓰는 것입니다.
그러면 ‘원수도 사랑하라’가 아닙니다. ‘원수도 사랑하게 될 것이라’ 입니다.
♬ 주님 내 안에 (언제나 내 모습)
더 열매를 맺게 하려 /요15:1-4/ 김진흥목사
2022-01-11 06:07:50
(1)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2)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3)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4)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1. 오늘 여러분과 함께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은혜 받고자 하는 말씀은 소위 말하는 포도나무 비유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내리실 줄 믿습니다. 우리 모두는 내려주시는 은혜를 또 충만하게 맏으실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2. 이 포도나무 비유에서 제일 먼저 우리 눈에 띄는 표현은 “참포도나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참포도나무라고 하신 것은 가짜포도나무가 있다는 뜻도 됩니다. 셨습니다. 4절에 있는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라는 표현과 연결하여 그 뜻을 생각해보면 보다 정확하게 “참포도나무”라는 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우리 인생이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가지가 되기 위하여 붙어 있어야 할 나무는 예수님 한 분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 외에 자칭타칭으로 포도나무라고 주장하는 것들이 많지만 다 가짜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사실을 하나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제대로 된 믿음이 되려면 예수님만이 참포도나무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아브라함이 우리의 참포도나무다.’, ‘모세가 우리의 참포도나무다.’, ‘율법이 우리의 참포도나무다.’, ‘헤롯 왕이 지은 화려한 성전이 우리의 참포도나무다.’,
‘자신들이 철저하게 지켜내는 유대교의 유전이 참포도나무다.’ 기타 등등 가짜포도나무들을 믿었습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그런 자신들의 믿음을 반하여 자신을 참포도나무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어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말았습니다. 또한 당시의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수많은 사람들이 참포도나무이신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엉뚱한 것들을 참포도나무라고 믿고서 같은 잘못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참포도나무라고 말씀하시면서 “내 아버지는 농부라”는 말씀으로 더욱 분명하게 자신이 참포도나무임을 밝히셨습니다. 자신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친히 농사를 지으시는 유일한 참포도나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농부가 되어 직접 가꾸시는 포도나무는 자신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14,1에서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하셨고, 요6,40에서는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라고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요1,9이 말하는 것처럼 ‘참 빛’이십니다. 예수님은 요6,32과 55절이 말하는 것처럼 참된 양식이요 참된 음료입니다. 히8,2이 말하는 것처럼 참 장막, 참 성전이십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무이한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어서, 믿는 자로 하여금 이 험난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열매를 맺으며 살게 하시는 참포도나무이심을 우리는 믿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인정하시는 포도나무는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세상에 그럴 듯한 것들이 수없이 많이 있지만, 별별 것들이 다 나서서 진리인 양 자신을 드러내고 자랑하고 있지만, 여러분, 여러분이 선택하여 믿고 있는 예수님이 바른 선택입니다. 산에 가면 눈에 확 띄는 버섯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그것을 함부로 먹다간 큰 일 납니다. 누가 뭐래도 ‘나는 예수님만 바라보고 예수님만 믿으며 예수님을 따라서만 산다.’ 그렇게 외치시면서 믿음의 순결, 믿음의 정절을 지키며 사십시다.
3. 다음 2절입니다.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예수님을 참포도나무로 알고 거기에 붙어 있는데 어떤 가지는 열매를 맺고 어떤 가지는 열매를 맺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제거해 버리시고’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해석하기에 따라 정 반대의 뜻이 됩니다. 이 제거해버린다는 헬라어는 ‘아이로’인데, 이 단어는 또 다른 뜻이 있으니 그것은 ‘들어준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여기에서 제거한다는 말은 없애버린다는 것이 아니라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는 요소를 제거한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포도열매는 가지에 맺힙니다. 그런데 포도나무 가지는 약해서 Y자형 내지는 T자형 받침대를 이용하여 들어주어야만 줄기로부터 진액을 받아들여 열매를 맺습니다. 따라서 제거한다는 말씀은 심판의 의미가 아니라 격려의 의미요 돌봄의 의미인 것입니다. 그리고 기왕에 들려 있어서 열매를 잘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하여 깨끗하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은 당연히 하나님의 생명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거룩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열매를 풍성하게 맺어야 합니다. 진정한 사랑과 기쁨과 화평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코로나19보다 더 독한 어려움이 온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믿고 참아내야 합니다. 견디어내서 악에게 지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자비한 마음과 착한 마음을 유지해야 하고 충성을 포기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런 행복의 열매들을 맺게 하시고 더 열매를 맺게 하시려고 농부이신 하나님은 연약하여 땅바닥을 기어가는 우리 성도들을 번쩍 들어 올려주십니다. 받쳐주십니다. 진딧물을 제거해 주시고 각종 해충들로부터 보호해주십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는 패배의 자리에 떨어졌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절망의 자리에 떨어질 것을 미리 아신 예수님은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22,32)라고 들어 올려주셨습니다.
그래도 정신을 못 차리고 헤매다 옛 생활 어부로 되돌아가버린 갈릴리 해변까지 찾아가셔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씩이나 동일한 질문을 하시면서 받쳐주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는 고백과 함께 제자의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그후 예수님을 위해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죽는 순교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주님이 붙들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들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깨끗하게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무슨 문제로 축 처진 포도나무 가지처럼 땅바닥을 기고 있습니까? 기억하십시오. 땅바닥을 기고 있는 우리들을 들어 올려주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은 오늘 이 시간도 여러분들을 들어 올려주고 싶어 하십니다. 제법 잘하고 계십니까? 좋습니다. 주님은 더 열매를 맺게 하시려고, 더 높은 수준의 열매를 맺게 하시려고, 지금보다 더 풍성하게 하늘의 복락을 누리게 하시려 하십니다. 이 은혜가 오늘 여러분들의 것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4. 다음 3-4절입니다. “(3)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4)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이건 또 무슨 말씀일까요? 2절에서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하여 깨끗하게 하신다고 하셨음을 기억하십시오. 이 가지는 열매가 없는 가지가 아니라 열매를 맺고 있는 가지입니다. 그런데 더 풍성하게, 더 좋은 품질의 열매를 맺게 하려고 깨끗하게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깨끗하게 하느냐는 질문이 남아 있습니다. 그 답으로 하신 것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4절이 보다 명확화게 이 뜻을 전달합니다. 내 안에 거하라...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으로 자신의 생각, 자신의 사상, 자신의 이상을 업그레이드하라는 뜻입니다.
언젠가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사람은 점점 더 좋아지면 천사보다도 더 훌륭한 존재가 될 수 있고, 점점 더 악해지면 나중에는 마귀보다 더 악한 존재가 될 수 있는 존재라고. 사람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한계를 모릅니다. ‘나는 이정도가 한계야.’ 그렇게 단정을 짓지 말란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알고 있는 지식과 경험과 환경에 갇혀 스스로를 한정하고 스스로를 제한하는 선을 그어놓고 삽니다. 하지만 그 선을 무너뜨리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입니다.
여러분, 휴대폰을 사용하시다보면 가끔씩 업데이트 내지는 업그레이드 하라는 메시지가 뜰 때가 있을 것입니다. 지금 사용하고 있는 기기를 더 잘 사용할 수 있는 기능이 담겨 있는 것들로 한계선을 높이라는 얘기입니다. 휴대폰 업그레이드는 잘 하면서 믿음의 업그레이드에는 왜 무심하십니까?
휴대폰 업그레이드는 메시지가 뜨자마자 바로 ok 버튼을 누르면서 네 믿음을 업그레이드 하라는 주님의 메시지에서는 왜 머뭇거리고 계십니까?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영혼은, 우리의 속사람은 지금보다 훨씬 더 흠 없고 순전한 모습을 가질 수 있습니다. 지금보다 훨씬 더 충성스러운 믿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열매를 맺고 있는 성도의 믿음을 업그레이드하고 싶어 하십니다. 주저하지 마세요. 포기하지 마세요.
여러분, 내 생각이라는 그릇에 하나님의 말씀을 담으려 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내 생각을 담으려 하십시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성경은, 성도로 하여금, 정말 무한한 발전 가능성을 가지게 하여줍니다.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오늘 말씀대로 이미 우리는 말씀으로 구원을 받았고, 말씀으로 새로워졌습니다.
그 구원하신 그 말씀을 따라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내 생각으로 제한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기왕에 따르기로 한 말씀이라면 한 번, 말씀의 더 깊은 한 가운데로 가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거기에 여적 보지 못했던 신세계가 있습니다. 우리를 감탄하게 할 paradise가 약속되어 있는데 가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부디, 더 열매를 맺게 하시려고 우리의 생각, 사상, 이념, 주의, 주장, 관습, 방식 등등을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시는 은혜를 붙드시기를 축복합니다.
요한복음 강해 (103) - 참 포도나무/요15:1-/ 김형익 목사
2021-05-08 16:21:48
주님께서 잡히시기 전, 마지막 시간을 제자들과 보내면서 나누신 이야기가 13장부터 시작해서 16장까지에 걸쳐 놀랍도록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14장 마지막 구절에서 우리는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눈치채게 됩니다.
주님은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15장과 16장이 아마 주님께서 기드론 시내를 지나 감람산으로 향하시는 길에서 제자들과 나누신 이야기일 것이라고 추측하거나 혹은 식사하시고 말씀을 하시던 방에서 일어나 나가시기 위해서 바깥 방으로 옮기셔서 나누신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정확한 변화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15장을 시작하는 주님의 말씀은 한편 새로운 국면을 말씀하시는 듯하고 또 한편으로는 하시던 말씀의 연장선상에서 말씀하시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나는 참 포도나무다”라는 선언으로 말씀을 시작하셨습니다. 우리가 먼저 이 문맥이 어떻게 진행되는가를 보는 것이 앞으로 이 말씀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1. 포도나무 은유의 문맥(15:1~8; 9~16)
소위 주님이 “나는 참 포도나무다”라고 하신 포도나무 은유의 본문은 1절부터 16절이라고 봅니다. 이 본문은 다시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1~8절과 9~16절입니다. 두번째 단락은 첫번째 단락에 대한 부연 설명이라고 보아도 됩니다. 그런데 이 전체 본문을 죽 읽어보면 어렵지 않게 몇 가지 반복되는 단어들을 만나게 됩니다. ‘거한다’, ‘과실’, ‘기도’, ‘계명’, ‘사랑’ 이런 단어들입니다. 그 중에서도 특별하게 중심된 단어는 ‘거한다’(to remain)는 단어입니다.
A. 거함
두 문단이 모두 거한다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첫 문단에서는 포도나무이신 예수님 안에 거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4~7). 그리고 두번째 문단에서는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에 대해서 말씀합니다(9~10). 거하는 것이 제자의 삶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열쇠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B. 제자들의 목적: 열매 맺음(5,16), 열매와 기도(7~8,16)
둘째로 제자들의 목적에 대해서 주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열매를 맺는다는 말은 요즘식으로 표현하면 생산성에 대한 말입니다. 분명히 주님은 이 본문에서 제자들의 삶이 얼마나 열매를 맺어야 하는 삶인가를 강조하고 계십니다. 열매를 맺는 것 뿐 아니라 많이 맺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고 하십니다(8). 열매를 많이 맺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다시 16절에서 말씀합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구원하신 목적이 과실 즉 없어지지 않고 주님 앞에 설 때까지 있을 과실을 맺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을 믿는 신자들에게 있어서 열매를 맺는 것이 이렇게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열매를 맺고 계십니까? 아니면 그냥 교회를 다니고 계십니까? 어느 쪽입니까?
주님의 이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이 질문을 피할 수 없게 만듭니다. 그리고 이 과실 즉 열매를 맺는 것과 기도는 매우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7~8절을 봅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열매를 맺는 것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주님은 기도를 요구하십니다. 기도 없이 열매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또 16절을 다시 보십시오. 하반절에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십니다. 즉, 열매를 맺는 삶은 그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기도하여 응답을 받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열매를 맺는 삶의 처음이자 동시에 열매를 맺는 삶의 마지막입니다. 기도와 열매 맺음은 이렇게 깊이 연관된다는 것을 주님은 가르치십니다.
C.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 순종, 인내, 계시, 사랑
세번째로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에 대해서 본문은 많은 것을 말해줍니다. 여러 단어들로 그 관계를 설명하시는데, 순종, 인내, 계시, 사랑과 같은 단어들입니다. 순종은 주님과 제자들의 관계의 핵심입니다. 순종이 없다면 믿음도 헛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는다면, 여러분은 예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든지 순종하실 각오가 있어야 옳습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주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그리스도를 믿지도, 따르지도 않는 사람입니다. 10, 12, 14절이 다 그것을 가르칩니다.
인내도 주님과 제자들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단어입니다. 한 때 주님을 섬기고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주님 안에 거하고 머물면서 열매를 맺는 지속적 인내는 제자들의 표지입니다. 주님은 또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고 15절 하반절에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계시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들으신 것을 알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을 알게 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사랑이 그리스도와 제자들의 관계를 설명해주는 말입니다. 주님은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하십니다(9).
어떻게 우리가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할 수 있습니까? 주님은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10).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고,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사람에게는 주님이 ‘내 기쁨’을 충만하게 경험하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11). 이것이 주님과 제자, 주님과 신자들 사이의 관계의 영광입니다.
간단하지만, 이렇게 우리는 1절에서 16절에 이르는 큰 문맥의 특징들을 개괄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2. 포도나무의 은유
이제 우리는 주님이 말씀하신 핵심, “나는 참 포도나무다”라고 하신 것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주님이 왜 포도나무에 당신 자신을 비유하여 표현하신 것일까요? 사실, 이 포도나무 은유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매우 오래된 은유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아주 익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은유였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구약 성경에 조금만 익숙해도 주님이 왜 포도나무에 자신을 비유하여 참 포도나무라고 하셨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A. 실패한 포도나무 이스라엘(시 80:8~13; 사 5:1~7; 렘 2:21)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바로 포도나무로 불렸기 때문입니다. 먼저 시편 80편을 보겠습니다. 8절부터 13절을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 열방을 쫓아내시고 심으셨다고 시작합니다.
포도나무는 물론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미리 준비하셨고 그 뿌리를 깊이 박으시고 땅에 편만하게 하시고 그 그늘이 산들을 가리우고 그 가지는 하나님의 백향목처럼 바다까지 뻗고 넝쿨이 강까지 미치게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포도나무로서 포도원 전체를 가득 채운 한 그루 큰 포도나무로 묘사됩니다. 그런데 12절에 보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하나님께서 포도원의 담을 허시고 길에 지나가는 모든 자가 그 포도를 따게 하셨고 수풀의 돼지가 포도원을 해치고 들짐승들이 포도를 먹게하셨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대적들이 이스라엘을 침범하여 해치는 모습을 그려줍니다. 그래서 시인은 기도합니다. “만군의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돌이키사 하늘에서 굽어보시고 이 포도나무를 권고하소서. 주의 오른손으로 심으신 줄기요.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가지니이다.
그것이 소화되고 작벌을 당하며 주의 면책을 인하여 망하오니(14~16).” 결국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애굽에서 옮겨심으신 거대하고 무성한 포도나무였지만, 범죄함으로 열방과 짐승에게 따먹히는 신세가 된 것을 시인은 한탄합니다. 그러나 소망이 피력됩니다. 17절입니다. “주의 우편에 있는 자 곧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인자의 위에 주의 손을 얹으소서.” 이 인자가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인데, 메시아가 오셔서 실패한 포도나무인 이스라엘을 회복할 소망을 보여줍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이와 동일한 은유를 사용하여 이스라엘을 묘사했습니다. 이사야 5장을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으시고 좋은 포도를 맺을 것을 기대하셨지만 결국 맺힌 것은 들포도였습니다(3). 들포도는 먹을 수 없는 신 포도, 야생 포도를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포도원의 울타리를 제하시고 담을 헐어 짓밟혀 황무하게 하셨습니다(5~6). 7절을 보세요.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의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공평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의로움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7절이 바로 앞의 포도나무 은유에 대한 명쾌한 해설입니다.
우리가 한 군데 더 살펴볼 구약 본문은 예레미야 2:21입니다.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찜이뇨.” 선지자 예레미야도 이사야 선지자도 동일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시는 극상품 포도나무로 묘사하셨습니다. 문제는 이런 은유가 나오는 곳에서는 언제나 이스라엘 백성의 실패와 쇠락을 지적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스라엘이 잘못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포도나무라고 지적하십니다.
이 포도나무에 이스라엘 백성을 비유하신 이유 가운데 하나는 포도나무가 포도 열매를 맺는 것 외에는 아무 용도도 없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그것을 분명하게 지적하여 말했습니다. 에스겔 15:2~5을 봅니다.
“인자야 포도나무가 모든 나무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랴 삼림 중 여러 나무 가운데 있는 그 포도나무 가지가 나은 것이 무엇이랴. 그 나무를 가지고 무엇을 제조할 수 있겠느냐 그것으로 무슨 그릇을 걸 못을 만들 수 있겠느냐?
불에 던질 화목이 될 뿐이라 불이 그 두 끝을 사르고 그 가운데도 태웠으면 제조에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그것이 온전할 때에도 아무 제조에 합당치 않았거든 하물며 불에 살라지고 탄 후에 어찌 제조에 합당하겠느냐?” 포도나무는 포도 열매를 내는 것 외에는 아무 용도도 없는 나무입니다. 포도나무 가지는 열매를 맺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데에도 쓸모가 없는 나무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점에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이 열매를 맺기를 바라셨고 기다리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번번이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열매 맺는 일에 실패하였습니다. 이것이 구약 성경의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시편 80:17에서 보았듯이 소망이 있습니다. 그 소망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께 있는 소망입니다.
B. 참 포도나무 그리스도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에 “내가 참 포도나무요”라고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에게 그 은유는 아주 익숙한 것이었습니다.
i. 예수님의 마지막(7번째) I AM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가 참 포도나무요”라고 하신 이 말씀은 요한복음에서 특별하게 강조하고 있는 예수님의 어법인 “I AM..”의 마지막이자 일곱번째 경우입니다. “나는..이다”의 어법은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의 철자와 동일한 표현인데, 이로써 주님은 당신의 하나님되심을 암시적으로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이미 주님은 “나는 생명의 떡이다”(6:35,48), “나는 세상의 빛이다”(8:12; 9:5), “나는 문이다”(10:17), “나는 선한 목자다”(10:11~14),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11:25), “나는 길과 진리, 생명이다”(14:6)라고 하셨습니다. 마지막이자 일곱번째로 “나는 참 포도나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ii. 참
그런데 여기서 주님은 “나는 참 포도나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참’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가짜와 진짜라는 비교가 아닙니다. 이것은 그림자와 실재라는 의미에서 실재를 가리키는 뜻으로 쓰이는 말입니다. 주님은 이미 ‘참 빛’, ‘참 떡’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주님이 얼마나 완전하고 본질적이며 영속하시는 분이신가를 드러내주는 표현입니다.
iii. 열매 맺는 포도나무
앞에서 우리가 본대로 구약 성경이 이스라엘을 포도나무로 묘사할 때는 언제나 그들이 쇠락하고 있었고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이나 실망을 표현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들은 실패한 포도나무였다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우리는 실패하지 않으시는, 즉 하나님께서 바라고 기대하셨던 최고의 포도열매를 무성하게 결실하는 포도나무를 만납니다.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내가 참 포도나무”라고 하신 의도입니다.
iv. 새언약: 이스라엘을 대체하시는 그리스도
또한 새언약이 옛언약을 대치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옛언약의 질서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대체하시는 것입니다. 실패한 포도나무 이스라엘은 이제 열매를 맺고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열매를 맺으시는 그리스도로 대체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참 포도나무인 그리스도께 믿음으로 나오는 자들은 모두가 그리스도께 접붙임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복음주의 기독교 안에는 하나님께서 구약 이스라엘과 신약 교회를 향해서 각각 다른 두 개의 프로그램을 가지고 계시다고 믿고 가르치는 그룹이 있습니다.
이 가르침을 세대주의(Dispensationalism)라고 말하는데, 이 세대주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구약 이스라엘의 성취라는 것을 거부하는 신학 사상입니다. 주님께서 내가 참 포도나무라고 말씀하실 때, 의미하신 것이 바로 이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구약 이스라엘과 신약 교회를 향한 별개의 프로그램을 가지신 것이 아닙니다.
3. 열매 맺음은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n with Christ)의 결과다.
포도나무의 생명은 포도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주님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주님과 신자의 관계를 설명하십니다(5). 포도 열매가 맺히는 것은 가지 끝입니다. 가지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은 전적으로 가지에 수액을 공급해주는 나무의 생명입니다.
가지가 열매를 맺을 때는 언제나 가지가 나무에 잘 연결되어 있을 때입니다. 즉 열매 맺음은 참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께 연결되어 있음,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당연한 결과입니다. 거듭난 신자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는 말은 그리스도 안에 그가 있고 그 안에 그리스도가 계신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와 일체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부 하나님께서는 귀하신 성자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시듯이 그리스도와 연합한 신자를 바라보십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게 된 존귀한 신분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와 연합한 신자는 반드시 열매를 맺습니다. 열매 맺음은 인간의 성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열매 맺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될 때 오해가 적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어떤 일을 해야만 할 필요가 없다는 가르침이 그것입니다. 이 사상은 우리가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니까 행위는 정말 중요하지 않고 의미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저 하나님의 은혜에 기대어 쉬기만 하면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하나님의 독단적인 구원 사역(monergism)에 대한 오해가 선행에 대한 성경적 요구의 정당성을 약화시키거나 간과하게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신자는 행위와 무관하게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지만 그 믿음은 행위로 인도하는 믿음이라는 사실을 간과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예수님을 믿는 신자가 참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께 붙어있어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 일은 또한 주님의 명령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열매를 맺으라는 것은 자본주의가 고안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명령하신 것입니다. 열매 맺음은 주님 자신의 명령입니다. 여러분이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와 연합된 신자라면 열매를 맺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특권입니까?
하나님이 심으신 포도나무 이스라엘 백성은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가득히 결실하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실패를 성공으로 바꾸신 분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실패를 답습하지 않고 열매가 풍성한 사람으로 하나님께 받아들여집니까?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됨으로써 열매가 풍성한 포도나무의 가지가 되는 축복과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4. 나는 참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인가?
이것이 신자의 특권입니다. 주님은 지금 그 놀라운 특권을 제자들이 알게 되기를 바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도 이 포도나무 은유로 알려진 본문이 도전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참 포도나무에 견고하게 붙어있는 가지가 맞습니까?” 몇 번에 걸쳐서 우리가 이 본문의 말씀을 생각할 때 유념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나는 참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인가? 만일 그렇다면 여러분은 열매를 맺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열매가 없습니까? 이렇다 할, 여러분 스스로가 인정할 수 있는 열매가 없다면 그것은 정말 심각한 것입니다.
만일 이것이 여러분의 상태라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열매를 맺으면서 살아야지 하는 결심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의지력이나 결심 여하에 따라서 맺어지는 열매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참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인가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참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께 접붙임을 받은 가지인가, 나는 참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인가 하는 문제를 좀 더 진지하게 우리는 주님의 이 말씀을 통해서 살펴볼 것입니다.
요한복음 강해 (104) - 아버지는 농부시라 /요15:1-3/ 김형익 목사
2021-05-08 16:24:35
1. 농부는 열매를 바란다(약 5:7).
야고보서는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라고 말씀합니다(약 5:7). 이 말씀은 성도들이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권면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농부가 바라는 것은 열매라는 것이지요.
아버지가 그 농부라고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아버지가 열매를 바라신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가 열매 맺기를 바라셔서 우리를 다루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농부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두 가지로 설명하십니다. 첫째는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를 제하여 버리시는 일이고 둘째는 과실을 맺는 가지로 과실을 더 맺게 하시려고 가지를 깨끗하게 하시는 일입니다.
2. 열매가 무엇인가?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열매가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신약 성경이 열매라는 단어를 상당히 다양하게 쓰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성경이 말하는 열매는 외적 성공이나 객관적으로 혹은 수량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있는 어떤 결과나 가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열매에 대해서 대략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몇 가지를 정리해보겠습니다.
A. 영적 자질/성령의 열매(갈 5:22~23)
가장 대표적인 것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영적 자질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그리스도를 닮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됩니다. 왜냐하면 믿는 자 안에 성령님이 오셔서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그 안에 있는 것이 밖으로 나오는 이치와 같습니다. 그래서 이런 성품의 열매를 성령의 열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성품들은 사랑, 기쁨, 평안, 인내, 친절, 착함, 신실함, 온유, 절제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가리켜 열매들이라고 하지 않고 단수인 열매라고 표현합니다. 어떤 것은 있고 어떤 것은 전혀 없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성품이 다소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다 그리스도인 안에서 맺히는 하나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B. 변화된 삶의 열매(마 3:8; 13:23; 엡 5:9; 빌 1:11; 히 12:11; 골 1:10)
사실 열매란 단어를 사용하는 여러 구절들이 있는데, 대개는 성령의 열매 즉 변화된 삶의 열매, 성품의 열매들을 다양하게 표현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했을 때가 바로 이런 경우입니다(마 3:8). 주님이 씨뿌리는 비유에서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100배, 60배, 30배 열매를 맺는다고 했는데 이 열매도 일차적으로 그 마음 밭에서 맺어지는 삶의 변화들을 가리킵니다(마 13:12).
에베소서 5:9은 착함, 의로움, 진실함이 빛의 열매라고 했고, 빌립보서 1:11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의 열매를 말합니다. 히브리서 12:11은 신자가 징계를 받은 후에, ‘의의 평강한 열매(peaceful fruit of righteousness)’를 맺는다고 했습니다. 골로새서 1:10은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으라고 합니다. 이런 구절들이 다 믿음으로 변화된 삶의 열매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크게는 성령의 열매에 다 포함시킬 수 있는 것들입니다.
C. 회심자(요 4:36; 12:24; 롬 1:13; 16:5; 고전 16:15; 골 1:6).
한 가지 더 살펴본다면 복음을 듣고 회심한 사람들을 가리켜 열매라고 표현합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을 믿은 수가 성 사람들을 열매라고 부르십니다(4:36).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고 하셨을 때도 같은 것을 가리킵니다. 이외에도 이런 용례가 많이 있습니다.
3. 열매 없는 그리스도인이 가능한가?
그렇다면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과연 열매 없는 그리스도인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인데 열매가 하나도 없을 수 있겠습니까? 왜 이 질문을 하는가 하면, 2절에서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가 어떤 사람을 의미하는가 하는 문제 때문입니다. 그들을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제해 버린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아, 지옥으로 보낸다는 말씀이군”, 이렇게 쉽게 받아들이면 되는데, 약간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첫째는 ‘내게 있어’라는 단어 때문입니다.
주님 안에 있다는 말은 구원받은 사람에 대하여 사용하는 표현인데, 이 말이 걸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제해 버린다’는 말의 의미인데, 이 말은 없앤다는 것 외에 ‘들어올린다’는 뜻도 있습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들어올려서, 햇빛을 더 뱓게 함으로써 열매를 잘 맺게 한다는 뜻으로 해석이 가능한 단어입니다. 그러면 이 문제를 푸는 열쇠는 단어의 뜻 보다는, 열매 없는 그리스도인이 과연 가능한가에 대한 대답일 것입니다.
A. 가능하다(벧후 2:7; 고전 3:15).
가능하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예를 들 수 있는 인물이 있습니다.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롯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그는 삼촌 아브라함을 따라 나왔다가 삼촌과 자신의 재산이 불어나면서 삼촌의 양보로 아름다운 땅 소돔을 선택해서 소돔이 멸망하기까지 소돔에 살았던 인물입니다.
그는 소돔이 멸망할 때 두 딸과 함께 가까스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소돔의 윤리에 영향을 받으면서 성장한 두 딸은 아버지를 술 취하게 하여 아버지와 성관계를 맺어 자손을 번식하게 하는 일을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참 부끄러운 사건의 주인공이 롯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그가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베드로후서 2:7입니다.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 롯이 소돔에 사는 동안에 의로운 심령이 상하였다는 것은 그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임을 증거합니다. 하지만 그는 뭔가 내놓을 열매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열매 없는 그리스도인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그 주장을 입증해 줄 수 있는 성경구절로 고린도전서 3:15을 듭니다.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소위 불 가운데서 얻은 구원도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자, 이 문제가 쉬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실 것입니다. 더구나 이것은 이론 싸움이 아니라, 한 영혼이 죽고 사는 문제이고,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영원한 구원과 관계가 있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B. 열매 없는 그리스도인은 없다.
이에 반하여 열매 없는 그리스도인은 있을 수 없다고 성경이 가르친다고 주장하는 성경 학자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위의 주장에 대하여 답변을 주어야만 합니다.
i. 고전 3:15의 ‘공력’은 성품의 열매가 아니라 사역의 열매다.
먼저 이들은 고린도전서 3:15에서 말씀하는 ‘공력’이 무엇인가에 주목합니다. 고린도전서의 이 문맥은 주님과 주님의 교회를 섬기는 사역자들의 사역에 대한 주제를 다루는 본문입니다. 아볼로나 바울 같이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사역자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맥락에서 ‘공력’이 의미하는 것은 사역의 결과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공력이 그리스도인이 맺을 수 있는 모든 열매를 가리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사역의 결과는 다 그 공력이 불로 시험을 받을 것입니다. 그 공력이 불탔다고 해서, 그 사역의 결과에 따라서 구원이 좌우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고린도전서 3:15을 이해하는 열쇠라는 것입니다.
ii. 롯은 사역의 열매가 없는 그리스도인의 전형이다(부끄러운 구원).
그렇다면 롯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롯은 구원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섬기고 살아온 삶과 사역의 열매가 없습니다. 자기 눈에 좋은 소돔을 선택해서 살았습니다. 그곳이 자기 의로운 심령을 상하게 함에도 말입니다. 저는 롯의 경우야말로 정말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자비를 드러내는 대표적 경우라고 이해합니다. 그는 고린도전서 3장에서 말씀하는 의미의 공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사역의 열매는 없을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품의 열매, 성령의 열매는 어떻습니까? 그것이 없었다면 롯은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할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의로움은 분명히 믿는 자가 맺는 열매입니다(엡 5:9; 빌 1:11; 히 12:11). 이런 열매는 그리스도인 안에 성령님이 거하시기 때문에 일어나는 당연한 열매입니다. 마태복음 13장의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주님은 오직 하나의 밭, 좋은 땅만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이 바로 참된 그리스도인의 마음을 가리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열매 없는 그리스도인이 가능한가에 대한 어느 정도의 답이 되었습니까? 정리가 되십니까? 사역의 열매는 없을수도 있지만(이것도 심히 부끄러운 구원입니다!!) 성품으로 맺어지는 성령의 열매는 반드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열매가 없는 그리스도인은 있을 수 없습니다. J.C.Ryle이 “선택은 오직 그 열매로만 알 수 있다”고 했을 때에도 이런 의미에서 말한 것입니다.
4. 원리
그러면 우리는 이런 전제를 가지고 본문을 볼 때, 몇 가지 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A. 명목상의 신자로 남아있는다면 결국은 제해 버림을 당한다.
먼저 2절에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비록 자신은 믿는다고 말하고 교회를 다니고 있을지라도 실제로 거듭나지 않은, 명목 상의 신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이런 사람들이 교회 안에 점점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결국에는 포도나무인 그리스도로부터 ‘제해 버리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에서 말씀하셨듯이, 마지막 심판 때에 다 가려내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가운데서 지금 자신이 명목상의 신자라고 생각하신다면, 돌아서야 합니다. 거듭남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명목상의 신자로 시간을 많이 보내면 보낼수록 그 영혼의 위험 수위가 높아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계속해서 명목상의 신자로 남아있는다면, 결국은 농부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제해 버리신다는 것이 첫번째 원리입니다.
B.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하나님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
두번째는 이미 열매를 맺고 있는 가지, 즉 참으로 거듭난 신자, 그리스도께 실제로 붙어있는 신자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농부이신 아버지께서는 그들이 더 과실을 맺게 하시려고 그들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깨끗하게 한다’는 말은 카타리조라는 헬라어 단어인데 카타르시스(catharsis)라는 영어 단어가 여기서 나왔습니다. 눌려있던 감정이 분출됨으로써, 정화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이 단어는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는 모든 불순물을 제거하는 것을 뜻합니다.
농부되신 아버지께서는 열매를 맺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잘라내십니다. 여기 ‘무엇이든지’라는 말이 사실 많이 걸리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우리가 귀하고 중요하게 여기고 좋아하는 것들이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영적으로 해롭게 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하나님은 제거하심으로써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우리 영혼에 해가 된다면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은 다 병충해로 여기십니다. 그것은 우리 스스로 도무지 끊어내지 못하는 나쁜 습관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우선순위의 문제일 수도 있고 우리가 추구하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에 해로운 인간 관계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하나님의 자녀들이 열매를 맺는 자녀들이 되게 만들어가십니다. 이것은 질투하시도록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열심입니다. 비록 우리 육신에 손해가 가해진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아버지는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을 잘라내십니다. 그럴 때 우리는 말할 수 없이 큰 고통을 경험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해서 결국에는 유익하게 하시고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이것이 농부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행하시는 일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잘려나가는 고통이 없이 하나님을 잘 배우지 못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여러분의 생애에 가장 귀하고 소중한 것이 무엇입니까? 성경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그렇게 쉽게 하나님께 나오지 않습니다. 할 수 있는데 까지 제 고집을 부리고 불순종을 해보고야,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그 고통이 너무나 크지요. 너무나 수치스럽고, 인생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아픔이기도 하지요. 왜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런 일이 당신의 자녀들에게 일어나게 하시는 것일까요? 하나님 제대로 만나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만나면, 그 사람의 인생은 성공한 인생입니다. 이 말이 동의가 되십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 저에게 원하시는 것은 제가 하나님 아버지를 알고, 사랑하고, 열매를 많이 맺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보다 중요한게 없습니다.
그래서 다른 것들을 잃어버리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주시려고 고통과 좌절을 주기도 하십니다. 주님께서 “내 아버지가 그 농부시라”고 하시면서 “깨끗케 하신다”고 말씀하실 때, 이런 것을 염두에 두고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녀들에게 고통과 수치와 좌절을 주시는 아버지는 마음이 편하실까요? 무정하신 아버지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탕자의 아버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 아버지는 매일을 밖에 나와서 그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모습을 그려줍니다. 바로 여러분을 향하신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이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배우는 것이 그렇게 쉽게 일어나지를 않습니다. 탕자가 자기 인생의 가장 소중한 부분을 탕진하고서 배운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해서 배우기만 한다면, 참으로 아버지를 만나기만 한다면, 그 고생, 그 고통은 결코 낭비된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시편 기자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 119:67).”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 여러분은 가지로서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하시는 것을 경험하셨습니까? 신자가 인생에서 경험하는 고통과 고난들, 좌절과 낙담의 시간들은 거의 다 아버지께서 깨끗하게 하시는 시간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그러나 단순히 그런 고통을 겪는 것이 언제나 우리가 깨끗해지고 열매를 맺는 자리로 가는 것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C. 깨끗케 하시는 방편은 말씀이다(요 17:17; 시 119:9).
왜냐하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녀들을 깨끗하게 하시는 방편이 두 개이기 때문입니다. 농부이신 아버지께서 한 손에는 고난을 그리고 또 한 손에는 말씀을 가지고 자녀들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고난과 말씀은 농부이신 아버지의 두 가지 방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면 우리는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고난과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은 자기 자녀들을 정결한 가지로 만드셔서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3절에 주님이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느니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으로 제자들이 이미 깨끗해졌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구별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주님은 3절에서 제자들의 신분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깨끗합니다. 이것이 모든 신자가 믿음으로 얻은 신분입니다. 그러나 2절에서 아버지께서 깨끗하게 하신다는 것은 신자의 경험과 상태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자의 전 생애에 걸쳐 일어나는 점진적인 과정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원리는 깨끗케 하시는 방편이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뒤에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7)." 말씀이 없다면 고난만으로는 신자들이 정결하게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가 지금 당하고 있는 고난을 해석하게 하고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고 계신지를 알게 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읽게 해주는 것입니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시 119:9)." 바로 이것이 말씀이 여러분 안에 풍성하게 거하게 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말씀이 없으면, 고생은 고생대로 해도 배우지를 못합니다. 고생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농부로서 우리가 열매를 많이 맺을 수 있게 하시는 일은 깨끗하게 가지치기를 해주십니다. 그것은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고통스럽기만 하고 아무 의미도 발견할 수 없다면 비극입니다. 그 고통이 가치있고 의미있고 말할 수 없는 유익을 주고, 열매를 맺게 하는 고통이 되게 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심령에 풍성하게 거해야 합니다.
5. 적용: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를 정직하게 물어라.
말씀을 맺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열매가 여러분의 삶에 나타납니까? 여러분은 그 열매를 경험하십니까?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식별합니까? 만일 이 질문들에 예라고 대답하실 수 없다면 여러분은 그냥 종교인일 가능성, 명목상의 신자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더 이상 시간을 끌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십시오. “주여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음을 도와주소서”라고 구하십시오. 회심의 은혜를 구하십시오.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A. 잘려나가는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라.
여러분이 앞의 질문들에 예라고 대답하실 수 있다면, 하나님은 거기서 만족하지 않으시고 여러분이 더 과실을 많이 맺게 하시려고 깨끗케 하시는 일을 하실 것입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우리 농부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버지 마음을 알게 하시고, 아버지를 사랑하게 하시고, 아버지를 닮아가게 하시고 그 과실이 우리 안에 풍성하게 맺히게 하실 것입니다.
어떤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말입니다. 잘려나가는 것과 같은 고통이 각양 다양한 방식으로 여러분의 인생에 찾아오게 될 때, 감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뭔가 나를 깨끗하게 만들어가시려고 하시는구나” 생각하십시오. 그 고통 너머에 있는 아버지의 마음을 보려고 하십시오. 탕자는 그것을 보았을 때, 아주 조금 보았을 때 아버지께 돌아갈 수 있었고, 생전 처음으로 아버지를 제대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히 12:8~11)."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여러분의 영혼에 장애가 되고, 여러분으로 하여금 열매 맺지 못하게 하는 모든 장애물을 다 잘라내시는 은혜를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한치의 오차도 없이 그 일을 완전하게 이루시는 하나님의 손에 여러분의 삶을 맡기는 안전함을 누리십시오.
B. 하나님의 말씀이 풍성히 거해야 하고 그 말씀에 반응하라.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십시오. 열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섭취하십시오. 그리고 그 살아있는 말씀에 늘 반응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이 인식하지 못하는 동안에도, 하나님은 여러분을 기르는 농부로서 완전하게 당신의 일을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삶에 풍성하게 맺혀지는 열매를 보며 감격하고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인 것을 증명하라 (Prove Yourselves to be Christ’s True Disciples.) /요15:1-8/ 김태환 목사
2021-03-07 12:27:08
1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정원사이시다.
2 내 안에서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마다 아버지께서 잘라 내시고, 열매 맺는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려고 깨끗하게 다듬으신다.
3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해 준 말 때문에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4 내 안에 있어라. 그러면 나도 너희 안에 있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가지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않으면, 스스로는 열매를 맺을 수 없다.”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사람이 내 안에 있고 내가 그 안에 있으면, 그는 열매를 많이 맺는다. 그러나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6 누구든지 내 안에 있지 않으면, 그 사람은 꺾여서 말라 버리는 가지와 같다. 사람들이 그 마른 가지를 주워다 불에 던져 태워 버릴 것이다.
7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으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이루어질 것이다.
8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어 내 제자인 것을 나타내면 이것으로 내 아버지께서는 영광을 받으신다. (쉬운성경)
1“I am the true vine, and my Father is the vinedresser.
2 Every branch in me that does not bear fruit he takes away, and every branch that does bear fruit he prunes, that it may bear more fruit.
3 Already you are clean because of the word that I have spoken to you.
4 Abide in me, and I in you. As the branch cannot bear fruit by itself, unless it abides in the vine, neither can you, unless you abide in me.
5 I am the vine; you are the branches. Whoever abides in me and I in him, he it is that bears much fruit, for apart from me you can do nothing.
6 If anyone does not abide in me he is thrown away like a [broken off] branch and withers away; and the branches are gathered, thrown into the fire, and burned.
7 If you abide in me, and my words abide in you, ask whatever you wish, and it will be done for you.
8 By this my Father is glorified, that you bear much fruit and so prove to be my disciples. (English Standard Version)
지금으로부터 10여년 전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 비행기 안에서 그 긴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하다가 책을 한권 가져갔었습니다. 찰스 스탠리 (Charles Stanley) 목사가 쓴 “성령 충만 그 아름다운 삶 (The Won-derful Spirit Filled Life)”이라는 책이었습니다.
찰스 스탠리 목사는 애틀랜타에 있는 제일침례교회의 목사로 오랫동안 재직했습니다. 간결하면서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능력이 탁월한 설교자입니다. 미국 전역에 방송되는 텔레비전과 라디오 프로그램 “인 터치 (In Touch)”에 출연하는 방송 설교자이기도 합니다.
이 책을 한번 읽기 시작했다가 비행기 안에서 그 책을 모두 읽었습니다. 한번 읽기 시작해서 마지막 페이지를 읽을 때까지 그 책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The Wonderful Spirit Filled Life (성령 충만 그 아름다운 삶)”은 요한복음 15장 말씀을 기초로 해서 크리스천의 성령 충만한 삶에 대하여 설명한 책인데, 그 책의 내용이 아주 설득력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 도서부에도 이 책이 있을 것으로 봅니다만, 기회가 있으면 꼭 한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조금 복잡하다 싶은 말씀은, 그 말씀을 읽고 나서 몇 가지로 요점을 정리해 보면 큰 도움이 됩니다. 오늘 요한복음 본문(本文, text)도 그렇습니다. 별로 어려운 말은 없는 것 같지만, 이런 말씀은 요점을 정리해 보면 본문 말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은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열매를 조금 맺는 것이 아니라, 많이 맺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You bear much fruit and prove to be my disciples (8절, 열매를 많이 맺어서 나의 제자인 것을 증명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관심은 자연히 어떻게 하면 열매를 많이 맺느냐 하는 질문으로 연결됩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말씀은 우리 크리스천의 삶의 가장 중요한 핵심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크리스천의 삶에는 말로 잘 설명할 수 없는 신비스러운 점들이 있습니다. 크리스천의 삶에 세상 사람들이 알 수 없는 능력이 있습니다. 어떻게 그 능력을 소유할 수 있는지 이것도 참 신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행하게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열매 맺는 삶의 원리(原理, principle)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꼭 지켜야 하는 원칙이라고 할까요? 크리스천의 삶은 각자가 알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원리가 있고 원칙이 있습니다. 이 원리를 따르지 않으면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없습니다. 언젠가 제가 골프 코치의 말을 인용한 적이 있습니다.
감리교 안의 같은 뉴잉글랜드지방에 속한 목사님이신데요. 프로 골퍼들을 코치하는 분입니다. 그분이 그래요. 많은 사람들이 골프를 조금해 보다가 “나는 운동 신경이 둔해서 골프를 잘 못 친다고 하면서 포기해 버리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골프는 운동 신경으로 하는 스포츠가 아닙니다. 공을 치는 폼 (form)을 잘 배워서 그대로만 치면 그 쪽으로 공이 가게 되어 있는 운동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열매 맺는 삶의 원리는, 먼저 쓸모 없는 가지들을 쳐 내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1-3절까지 나와 있습니다. 정원사들은 잘 압니다. 이 나무가 열매를 많이 맺으려면 어떤 가지를 쳐 줘야 하는지 잘 압니다. 이것을 전문 용어로 ‘전지(剪枝)’ 혹은 ‘가지치기’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prune’이라고 합니다. 가지치기를 귀찮아 하거나, 게을러서 가지치기를 하지 않으면 결과적으로 자잘한 열매를 많이 맺게 됩니다. 이런 열매들은 상품 가치가 없습니다.
나무는 쓸모 없는 가지를 쳐 주면 되는데,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규칙적으로 읽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는 정원사이시다. 내 안에서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마다 아버지께서 잘라 내시고, 열매 맺는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려고 깨끗하게 다듬으신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해 준 말 때문에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Already you are clean because of the word that I have spoken to you).” (1-3절)
참 감동적인 말씀 아닙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회 있는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어떤 말씀들은 길 가에 떨어지기도 하고, 가시덤불에 떨어지기도 하고, 어떤 말씀들은 돌짝 밭에 떨어지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말씀들은 제자들의 마음 밭에 떨어졌습니다. 제자들은 잘 몰랐을 수도 있었지만, 그 때마다 제자들의 삶 속에서 불필요한 것들을 제거하는 작업이 소리 없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말에 ‘백약이무효’라는 말이 있습니다. 불필요한 가지를 제거하지 않으면 백약이 무효입니다. 절대로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규칙적으로 읽고, 그 말씀을 공부하고, 그 말씀을 묵상하면서 전지 작업(剪枝作業)을 해야 합니다. “주의 말씀이 나의 입에 얼마나 단지요. 나의 입에 꿀보다 더 답니다. 나는 주의 말씀으로부터 깨달음을 얻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모든 악한 길을 미워합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불이며, 내 길의 빛입니다.” (시편 119:103-105)
지금 내가 가고 있는 길이 악한 길인지, 잘못된 길인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lamp’와 같습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 길을 비쳐 보면서 내가 가는 길을 수정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나에게 ‘깨달음 (understand-ing)’을 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사람은 이해력이 있고, 통찰력이 있기 때문에 늘 현명한 판단을 합니다.
열매를 맺는 두 번째 원리는,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견고하게 붙어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오늘 본문 말씀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내 안에 있어라. 그러면 나도 너희 안에 있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가지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않으면, 스스로는 열매를 맺을 수 없다.”
(4절) 또, 5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사람이 내 안에 있고 내가 그 안에 있으면, 그는 열매를 많이 맺는다. 그러나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I am the vine; you are the branches. Whoever abides in me and I in him, he bears much fruit, for apart from me you can do nothing).”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의 삶의 비결을 제자들에게 그대로 말씀해 주셨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내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시는 내 아버지께서 하시는 말씀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행하는 일들을 보고 나를 믿으라.” (요한복음 14:10-11)
예수님의 능력의 비결은 “I abide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abides in me”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능력의 비결을 그대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Whoever abides in me and I in him, he bears much fruit (누구든지 내 안에 거하고, 내가 그 사람 안에 거하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크리스천의 삶의 비결은 내가 열매를 생산하는 (produce)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 저절로 열매를 맺는 (bear) 것입니다. ‘produce’라는 말은 ‘생산한다’ ‘만들어 낸다’는 그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서 시간과 노력과 돈을 들여야 합니다. 하지만, ‘bear’는 ‘to produce by natural growth’입니다. 자연적인 성장에 의하여 맺히는 것입니다.
나무가 꽃을 피울 때, 나무가 열매를 맺을 때 ‘bear’라는 단어를 씁니다. 꽃을 피우기 위해 나무가 애쓰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나무가 열매를 맺으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건강하게, 정상적으로 잘 성장하면 꽃을 피게 되고,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런 경우 ‘produce’라는 말을 쓰지 않고, ‘bear’라는 단어를 씁니다. 예수님은 ‘produce’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bear’라는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중국 선교의 문을 연 허드슨 테일러 (Hudson Taylor, 1832-1905, 영국)를 아시지요? 허드슨 테일러는 ‘Inland mission (내륙선교, 內陸宣敎)’라는 새로운 선교 방식을 만들어 낸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그 때까지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선교지에 가면 주로 도시 중심의 선교를 했습니다.
그러나, 허드슨 테일러는 도시가 아니라 내륙으로 들어가서 그들과 똑 같은 머리를 하고, 옷을 입고, 젓가락을 사용하여 음식을 먹으면서, 현지인들과 같은 생활을 했습니다. 그가 말년에 선교사들의 부축을 받으면서 한 지방에 이르렀을 때, 성문 위에 금빛으로 ‘내륙은인(內陸恩人)’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깃발이 그를 환영했다고 합니다.
이런 허드슨 테일러였지만, 한 때 그는 중국 선교의 성과가 없다고 크게 낙담한 적이 있었습니다. 몸에 병까지 얻은 그는 두문불출했습니다. 그 때, 존 매카시 (John McCarthy)라는 선교사가 허드슨 테일러에게 편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그 편지에 이렇게 써 있었습니다. “포도나무의 가지가 어떻게 열매를 맺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햇빛과 공기를 얻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한 결과도 아니고, 생명의 기운을 얻으려고 노력한 결과도 아닙니다.
단순히 포도나무 본체에 순종해서 본체와 온전히 하나가 하나가 된 결과입니다. 그렇다면, 허드슨 씨, 그리스도인이 열매를 맺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대가 없이 주어지는 열매를 노력과 투쟁을 통해서 얻으려고 하면 되겠습니까? 우리의 생각과 감정을 온전히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 시켜야 합니다.
주께 모든 것을 내려 놓고 항복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이 자연스럽게 몸에 배서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는 크리스천들은 엄마 품에 안겨 있는 아기처럼 편안함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존 매카시가 보낸 이 한 장의 편지는 주님께서 허드슨 테일러에게 보낸 편지였습니다. 이 편지를 읽고 허드슨 테일러는 선교의 성과를 내려는 욕심을 내려 놓고, 주님과의 교제에 더욱 치중했다고 합니다.
“Abide in me, and I in you. As the branch cannot bear fruit by itself, unless it abides in the vine, nei-ther can you, unless you abide in me. I am the vine; you are the branches. Whoever abides in me and I in him, he bears much fruit, for apart from me you can do nothing. If anyone does not abide in me he is thrown away like a [broken off] branch and withers away.” (English Standard Version) 이 말씀 속에 크리스천의 삶의 모든 비밀과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주님은 이 말씀을 통해 열매 맺는 삶의 원리를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이 말씀에 순종해서 이 원칙대로 하면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가지는 자기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포도나무에 온전하게 붙어 있는 가지가 열매를 맺습니다. 예수님은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원리를 “Abide in me and I abide in you”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가 너희 안에 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abide’라는 말 속에 여러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remain (머무르다)’ ‘stay’ ‘dwell (살다)’ ‘reside (거주하다)’ 또 ‘to accept’ “submit to (......에 복종하다)’ ‘suffer (감수하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 안에 abide한다는 것은 내가 주님의 뜻을 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주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럴 때 나는 주님 안에 ‘abide’할 수 있고, 주님은 내 안에 ‘abide’ 할 수 있습니다. 주님과 내가 함께 사는 데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아무 불협화음(不協和音)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크리스천의 삶의 원리는, 간단합니다. 주님께 온전히 붙어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 붙어 있다’는 말은 주님과 온전한 교제를 이루는 삶을 말합니다. 주님과 내가 완전히 하나로 연합된 삶을 말합니다. 나에게 붙어 있지 않는 사람은 시들어 버린 가지와 같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크리스천이 맺는 열매는 그 사람이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라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길은 우리의 열매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주님은 “You bear much fruit and prove to be my disciples (열매를 많이 맺어서 나의 제자임을 증명하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의 삶에 열매가 있습니까?
그 열매로 내가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증명할 열매가 있습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한 두개 열매가 아니라, “You bear much fruit (많은 열매를 맺으라)”고 하셨습니다. 많은 열매를 맺어서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셨습니다.
크리스천의 삶은 결과적으로 열매를 맺는 삶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열매 맺는 삶의 원리를 분명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 원리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따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 원리와 반대로 살았습니다. 애쓰고, 힘쓰고, 열심히 하면 뭔가 열매를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가르쳐 주신 원리가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따르는 원리였습니다. 두 원리의 차이는 율법주의와 복음주의의 차이이기도 합니다. 율법주의의 핵심은 열심히 일해서 성과를 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주의의 핵심은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용서입니다.
2017년 한 해가 벌써 밝았습니다. 올 한 해는 그동안 우리가 잘못 알고 있었던 세상적인 원리를 버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열매 맺는 원리를 따라 사는 한 해가 되기를 원합니다.
두려움, 근심, 좌절, 메마름이 없는 삶 /요15:1-8/ 유기성 목사
2016-08-03 16:13:40
“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
지난 특별 새벽 기도회 중에 한 부인이 기도 받으시러 나오셨기에 무슨 기도 제목이 있으신가 물었습니다. 그 부인은 잠시 망설이는 것 같더니 “저도 한번 행복한 삶을 살아 볼 수 있을까요?” 하시면서 눈물을 주루룩 흘리셨습니다.
그 마음에 ‘영원히 지금처럼 살아야 한다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기도 중에 성령님께서 그 부인의 마음에 놀라운 평안을 주셨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분명히 알기만 해도 너무나 달라집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님 안에서 행복하게 잘 살고 계시지요? 이런 질문에 당황스런 분이 혹 계십니까?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마음이 메마르고, 두려움과 근심과 좌절의 삶에서 평안이 있고 기쁨이 있고 ‘이제는 모든 사람을 사랑만 하며 살리라!’ 결단이 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라고 하신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두려움과 근심, 좌절과 메마름은 우리 자아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아무리 환경이 좋아지고 재산이 많아도 두려움과 근심은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는 두려움과 근심이 없습니다. 평안과 기쁨과 사랑이 충만하십니다. 강과 같이 흘러넘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생명으로 사는 자는 삶이 변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이 그림의 떡이 되면 안됩니다. 살다 보면 그림의 떡과 같은 일들이 있을 수 있지만, 예수 믿고 받는 변화된 삶의 축복만큼은 절대로 그림의 떡, 말로만 들은 축복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누가 정말 예수 믿는 사람인가? “나는 예수 믿습니다.” 하는 말만 가지고는 아직 알 수는 없습니다. 삶의 열매를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 ”(마 12:33)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은 예수님과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2절)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6절)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마 3:10) “...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예수님 안에”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실 수 있나요?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요. 예수님이 육신으로 계실 때였기에 ‘어떻게 예수님을 내 안에 모시며, 나는 어떻게 예수님 안에 들어갈 수 있을까?’ 당황스러웠을 것입니다. 그 정도로 예수님을 사모하라, 예수님을 닮기 힘쓰라는 말씀인가요?
그러나 이 말씀이 요한복음 14장에서 말씀하신 성령님에 대한 가르침에 이어진 것을 알면, 곧 우리에게 오신 성령님과 관계를 어떻게 맺어야 하는 지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포도나무요 우리가 가지라는 말은 예수 믿을 때, 성령님이 우리에게 오심으로 우리가 새 생명, 곧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게 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생명으로 사는 사람의 기도는 다 응답되는 것입니다.
(7절)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우리가 전에는 내 소원을 기도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과 맞지 않을 때는 그 기도가 응답받을 수가 없습니다. 응답 안 받는 것이 차라리 잘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일이 그저 내가 떼쓴다고 되면 하나님이 우리를 정말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자녀들이 떼쓴다고 다 들어주십니까?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내 생명이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이 내 생명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를 통하여 기도하십니다. 그러니 다 응답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웨스트코트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참 제자의 기도는 그리스도 말씀의 산울림이다. 그리스도가 말씀하신 것처럼 저희도 말한다. 그들의 기도는 주께서 교훈하신 말씀이 기도의 형식으로 변화한데 지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필연적으로 응답받는 것이다.”
여러분, 예수님과 하나된 사람의 기도가 이런 놀라운 비밀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 안타까운 것은 이것이 믿으면 되는 것이지만 믿는 것이 어렵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안 믿어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것이 안 믿어진다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 생명으로 산다는 것이 정말 믿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믿으면 되는데, 이제는 믿는 것이 또 어려우니. 어떤 성도는 믿음을 달라고 하나님께 소리 소리 질러 구합니다.
여러분, 믿음은 그렇게 어렵게 몸부림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믿어져야 되는 것이지, 내가 믿으려고 몸부림쳐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믿는 것일까요? 믿음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들었을 때 그것을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저도 그랬지만, 요한복음 15장 말씀을 예수님의 열매를 맺으려고 노력하라는 말씀으로 이해하는 교우들을 봅니다. “이제부터 사랑하려고 노력하라! 기뻐하려고 노력하라! 평안하려고 노력하라! 예수님의 열매를 맺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아닙니다.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마음은 귀하지만 정말 부질없는 노력입니다. 노력하면 할수록 계속 두려움과 좌절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는 더 메말라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두려움, 좌절, 영적인 메마름은 우리 자아 속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결국은 “너무 힘들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기 어렵다!” 고 말하면서 좌절하거나 적당하게 살 수 밖에 없다고 타협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말씀하신 것은 열매는 우리 노력으로 맺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되도록 친히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생명이신 예수님이 친히 그 엶매를 맺도록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 사실을 오직 믿는 것 뿐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 예수님과 우리가 하나 되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우리 옛 사람도 예수님과 함께 죽었고,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새 생명으로 부활하도록 하나님이 다 해놓으셨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사실을 믿으면 예수님께서 우리 생명의 열매를 맺는 변화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롬 6:3-4)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이 다 이루어졌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죽은 것도 예수님과 함께 새 생명으로 살게 되는 것도 이미 하나님이 다 이루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믿을 때 우리가 무엇을 구하든지 다 응답받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으라” 하니 믿는 것도 힘들다고 하는 이가 있습니다. 믿으려고 애를 쓰는데도 안된다고 말합니다. 많은 교우들이 “죽는 것이 안된다! 예수님의 생명으로 사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고 합니다. 믿음은 믿으려고 몸부림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믿으라는 말은 “믿음을 주시옵소서!‘ 하고 소리쳐 기도하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행하셨다는 일을 알았다면 그저 “주님이 그리하셨으니 종은 감사할 뿐입니다. 주여, 저는 오직 찬송하겠습니다.”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일이 내 삶에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 중에서 예수님께서는 계속하여 “내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4-5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우리가 믿는 것을 예수님은 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거한다는 것은 아주 간단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앉아계신데 힘드십니까? 앉아있으려고 몸부림치시나요? 아니지요. 그냥 편안하게 앉아있는 것이지요.
똑같습니다. “주님, 저는 지금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도 제 안에 계시지요?” 그것이 믿는 것입니다. 주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렇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 저는 지금 주님 안에 있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 찬양합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한다는 말은 바로 그 말입니다.
중국 선교사였던 허드슨테일러는 1869년 좌절과 낙심으로 쓰러졌었습니다. 자신이 온전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지 못한다는 자책감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이 경건한 생활을 열심히 하면 서서히 얻어지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거룩한 삶을 추구하고 애쓸수록 더욱 거룩하지 못한 자신을 보게 될 뿐이었습니다.
그는 한 순간도 예수님으로부터 시선을 떼지 않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그 중압감 때문에 오히려 너무 신경이 예민해져서 주위 사람들에게 더 자주 화를 내었고 말도 거칠게 하는 자신을 보고 당황하였습니다. 그는 기도하고, 금식하고, 결단하고, 더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시간을 더 많이 가졌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는 결국 믿어야 한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그러나 믿으려고 애썼지만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아침에 믿음을 달라고 기도했으나, 저녁에 돌이켜 보면 하나님 앞에서 고백하고 슬퍼해야 할 죄와 실패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자 좌절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정녕 벗어날 수 없는 것은 아닌가? 그는 절망했습니다. 나의 체험이 그렇지 않은 데 어떻게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능을 주셨다.”고 진지하게 말씀을 선포할 수 있단 말인가? 마음이 이러니 쓰러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때 친구 멕카디(McCarthy) 선교사로부터 온 편지에 담긴 한 문장이 허드슨 테일러의 눈에서 비늘을 제거해 주었다.
“그러나 어떻게 믿음을 강하게 할 수 있는가? 그것은 믿음을 구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그저 신실하신 분을 의지하는 것이다.”
그 문장이 허드슨 테일러에게 빛으로 다가 왔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바라보았다. 그 때 그 분께서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았다. “우리가 믿지 아니한다 할지라도 그 분께서는 변함없이 신실하시다.” “오, 거기에 안식이 있구나!”
“그 동안 예수님 안에서 안식하기 위해 헛되이 애써 왔구나. 이제 결코 더 이상 애쓰지 않겠다. 왜냐하면 그 분께서 나와 함께 거하시겠다고 - 결코 나를 떠나지 않으시고 결코 나를 저버리시지 않으시겠다고 - 약속하지 않으셨던가? 그것이면 충분하였다.”
그리고 오늘 본문인 포도 나무와 가지에 대한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나는 예수님께서 결코 나를 떠나지 않으실 것이라는 사실 뿐 아니라 내가 그 분의 몸과 살과 뼈의 한 지체라는 사실을 보았다.
그는 이후에 더 이상 염려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자신이 어느 곳에서 어떻게 지내더라도 두려워하지도 않았습니다. 언제나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장사되었으며 또한 부활하였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나는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을 믿는다. 내가 이 빛을 본 이후로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죄를 범할 필요가 없었다고 느낀다. 게다가 빛 가운데를 걸으면 걸을수록 나의 양심은 더욱 부드러워졌다.
내 안에서 죄는 끊임없이 나타났지만. 나는 즉시 고백했고, 항상 용서를 받았다. 완전히 고백을 하지 않고 자아를 정당화 하려고 시도했던 때의 몇 시간 동안 화평과 기쁨이 돌아오지 않았던 한 번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화평과 (겸손이 함께 한) 기쁨이 즉시 회복되었다.“
허드슨테일러가 체험한 것은 소수의 몇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신 복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더욱 알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 단계 중에 은혜를 받는 단계가 있고 주님의 영광을 보는 단계가 있습니다.
주님의 은혜만 받는 단계에서는 죽음은 힘들어 보입니다. 죽음이 이해가 안되고 죽는 것이 어렵고 ‘꼭 이래야만 되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예수님을 깊이 알아서 예수님의 영광을 보는 눈이 조금이라도 열리고 나면 죽음도 죽느냐 안 죽느냐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냥 내가 죽으므로 처리가 되어버려요. 주님의 영광을 보는 단계로 나아가면 죽음은 즉시 이루어집니다.
이사야는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다가 영광스런 하나님을 만나고 고백했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사 6:5)
영광스런 하나님을 보는 순간에 이사야는 그냥 죽은 것입니다.
도마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말을 듣고도 의심했었습니다.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요 20:25)
그러나 막상 영광스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에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요 20:28) 하며 고꾸라졌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전하는 사람들을 죽이려고 다메섹으로 가던 사울이 강렬한 빛 가운데서 영광스런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행 9:3) 하셨을 때, “땅에 엎드러져 ...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했습니다. 주님의 영광을 보는 순간 우리는 즉시 죽음으로 들어갑니다.
우리가 죽음을 받아들일 때, 비로서 우리에게서 주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면 진짜 예수님의 영광의 자리까지 가야 합니다. 내가 죽고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게 될 때 하나님의 영광이 내 삶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8절)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지난 주 제게 온 선교사님의 보고 편지에 중국 홍선교사님의 이야기가 실렸습니다.
러시아와 중국으로 부름을 받고 사역하다가 여러 번 공안에 발각되어 체포되었습니다. 처음 체포될 때는 정말 두려웠다고 합니다. 중법죄인 취급을 받으며 벽에 세워져 사진을 찍는데, 너무나 마음이 참담하고 두렵더랍니다.
바로 그 때 앞의 카메라 렌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모습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 감사의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지더랍니다. ‘이 일이 곧 예수님이 당하시는 고난이시구나!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구나’! 이것을 깨닫자 두려움이 사라지고 마음이 너무나 평안해지더랍니다.
그리고 취조를 받는데 조사 내용이 오히려 전도가 되어서 조사를 맡은 공안이 은혜를 받아 예수님을 영접하였답니다. 그리고 그 직원과 둘도 없는 친한 친구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게 되면 깨끗한 삶을 살게 됩니다.
(2절)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우리가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기 전에는 깨끗함에 대한 욕구가 적습니다. 깨끗함의 중요함을 잘 모릅니다. 오히려 깨끗함이 삶을 즐기거나 성공하는데 거추장스런 장애물처럼 여깁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영광을 조금이라도 경험하고 나면 가장 중요한 욕구가 깨끗함입니다.
세상 영광도 깨끗함을 요구합니다. 공직자로 천거된 이들 마다 자신에게 그런 귀한 기회가 올 줄 알았다면 좀 더 깨끗하게 살 것을 하고 후회합니다. 요즘 인사청문회를 하지 않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는 자리에 서다 보니까 과거가 다 드러나서 지난 날 과거에 더러웠던 일, 남에게 숨기고 싶었던 일들이 깨끗하게 되었으면 하는 소원이 얼마나 강하게 일어나겠습니까?
여러분을 위한 영광의 자리가 마련되었다면 깨끗하게 씻고 깨끗한 옷을 입고 가고 싶지 않습니까? 천국에 하나님 앞에 갈 때 무엇이 가장 큰 소원이겠습니까? 깨끗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알면 알수록 깨끗함이 그렇게 좋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십니다.
(3절)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얼마나 더러운지 알게 됩니다. 하나님 말씀을 모를 때는 죄인 줄 몰랐는데, 하나님 말씀을 읽다 보니까 ‘아, 내가 불평한 것도 죄구나! 의심했던 것도 죄구나! 내가 원망했던 것도 죄구나!’ 다 드러납니다.
이렇게 죄가 드러난 것에 대해서 주님 앞에 회개하고 고백하면 또 그 말씀이 우리를 깨끗하게 씻겨주신다는 약속을 주십니다. 우리의 깨끗함은 죄를 안 지은 자가 아니라 자기 죄를 깨달은 것에 있습니다. 이것이 말씀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말씀의 또 하나의 역사는 우리가 회개하면 즉시 용서받아 깨끗하게 됨을 믿게 합니다.
(요일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여러분, 더 좋은 곳으로 이사 가기를 꿈꾸시지요? 두려움, 근심이 없는 곳에 가서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치안이 잘 되어 있는 곳, 공기도 좋고 물도 좋은 곳을 찾아가는 분들이 많습니다. 자유를 찾아 목숨을 거는 이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 어디에 가도 두려움, 근심, 좌절, 영적인 메마름이 해결되는 곳은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와야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예수님은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진정한 평안, 치유, 사랑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면 그의 평안으로 내가 평안을, 그의 자유함으로 내가 자유 함을, 그의 부유하심으로 내 영혼과 육신에 부유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고전 1:30)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그러나 이것이 그림의 떡이 되면 안됩니다. 그저 그렇게 들었다고 넘어가도 안됩니다. 누구나 누릴 수 있는 복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성찬을 받는데, 이 성찬식은 우리가 예수님과 하나 됨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시는 은혜의 시간입니다. 성찬은 믿음으로 받는 모든 이들에게 예수님의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는 능력입니다. 여러분, 믿음으로 성찬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어떻게 받는가? “주님, 제게 믿음을 주세요!” 라고 하지 말고 “주님, 이 성찬을 받는 자는 예수님과 한 몸이 되게 하셨다고 하셨으니 감사합니다. 예수님, 제가 이 포도주를 마실 때 주님의 피로 내가 씻김을 받았다고 하니 오직 저는 주님을 찬양할 뿐입니다.”
그렇게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이 시간에 여러분과 예수님이 한 몸이 되고 예수님의 생명으로 사는 역사가 여러분에게 임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을 사로잡고 있었던 두려움과 근심, 여러분을 깊은 절망 가운데 빠뜨렸던 좌절이 떠나갑니다. 생수의 강같은 은혜가 메마른 마음에 흘러넘치게 됩니다. 주님이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 예수는 나의 힘이요 내 친구 되시니
그 은혜를 간구하면 풍성히 받으리
햇빛과 비를 주시니 추수할 곡식 많도다
귀한 열매 주시는 이 주 예수 ♬
하나님을 신뢰하기 /요15:1-5/ 김병삼 목사
2016-03-10 10:59:37
크리스천 성품 2 -
1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2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3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며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한복음 15:1-5)
지난 주중에 할 얘기가 있어서 3층에 있는 강 모 목사님 방을 찾아갔습니다. 마침 목사님은 잠시 자리를 비웠더군요. 그 방을 나오려는 찰나 책상 위에 놓인 핸드폰이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제 취미인 장난끼가 발동했습니다. 옆에 있는 홍 모 목사님께 강 목사님의 핸드폰 잠금 패턴을 아는지 물어봤더니 친절하게 가르쳐주시더군요. 그래서 잠금 패턴을 다른 패턴으로 바꿔놓고 나왔습니다.
그 목사님께서 제 Facebook에 이런 글을 남겨놓으셨습니다.
“같은 방에 있는 목사님이 나보고 ‘조현철 목사 자리에 왔다 갔다. 뭐 변한 것 없어.’ 이 말을 듣는 순간 책상 위의 핸드폰을 보았다.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그런데, 이런... 전화기 잠금 패턴이. ㅜㅜㅜ. 당했다. 그래도 조 목사님 성품 많이 변했네요. 패턴을 찾기 쉽게 바꿔 주어서. 나중에 이 은혜 꼭 갚겠습니다.”
아무도 보는 이 없을 때 성품이 가장 잘 드러난다고 설교한 사람에게 걸맞은 착한 행동을 했더니 은혜 갚겠다는 소리도 듣게 되네요. 여러분들은 한 주간 크리스천다운 성품을 가진 사람으로서의 품격에 맞는 삶을 사셨습니까? 흠... 간혹 내가 언제 그런 설교를 들었나 하시는 분들도 계시군요.
지난주부터 크리스천의 성품에 대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왜 성품이 중요한가?’라는 지난 주 말씀 기억하십니까?
우리의 성품은 아무도 보는 이 없을 때, 위기의 상황 가운데에서 여지없이 드러납니다. 아무도 보는 이 없는 상황 가운데서도 요셉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성품을 잘 유지했던 반면, 베드로는 위기의 상황 가운데서 그 성품을 잠시 잃어버렸습니다.
아무도 보는 이 없는 것 같지만, 하나님은 보고 계시고, 위기 상황 가운데 나 혼자 덩그러니 떨어져 있는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성품이 중요한 이유는 구원 받기위한 조건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자들의 열망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크리스천에게 있어서 필요한 삶의 지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성품은, 로마서 8장 29절에 기록된 것처럼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것, 즉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훈련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성품은 평생을 써내려 가야 하는 서술형의 문제입니다.
하지만 이 훈련도 나 중심적이 아닌 하나님 중심적인 기준에 의해 만들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만들어가야 하는 성품은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양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좋은 성품을 갖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겠다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성품이란 일신상에 어떤 대가가 따르더라도 하나님의 기준의 옳은 길을 가려는 의지”입니다. 신앙은 감동에서 출발하지만 신앙생활은 의지입니다.
지난주 말씀에 이어 이번 주부터는 어떻게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갈 수 있는지 그 방법들을 함께 나눠 보겠습니다. 오늘 여러분과 함께 나눌 말씀은 크리스천 성품이 어디에서 시작되는지 그 출발점입니다.
그 출발점은 바로 신뢰를 통한 올바른 관계의 형성입니다. 결론을 먼저 이야기하자면,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만이 성품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방법을 압니다. 우리를 끝까지 믿어 주시는 하나님을 알 때, 자신을 신뢰할 수 있고, 타인을 신뢰하는 성품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크리스천의 성품을 갖기 위한 출발점으로서 우리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첫 번째 질문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십니까?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자신이 없으시네요. 로마서 10장 10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했습니다. 신앙은 결단이요, 의지라고 말씀드렸는데, 그 결단과 의지를 실천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십니까?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근본적인 관계에 대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풍성한 삶, 좋은 성품을 가질 수 있는 원리를 담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주님 안에 거하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포도나무가 되시고, 우리는 포도나무이신 주님께 붙어 있는 가지라고 하십니다. 굳이 여기서 나무와 가지의 관계를 설명하지 않아도, 나무와 가지가 어떤 관계인지를 잘 아실 겁니다. 나무 없는 가지 보셨습니까?
나무가 있음으로 가지는 존재하고, 나무에 붙어 있음으로 가지는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주님이 있으므로 우리가 존재하고, 우리가 주님께 붙어 있음으로 열매 맺는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 삶의 성공과 실패, 우리가 좋은 성품을 갖느냐 못 갖느냐의 여부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과 여러분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형성되어 있습니까? 혹시 삶 가운데 하나님의 기준과 여러분의 기준이 다르지는 않습니까? 그것 때문에 힘들어하고, ‘하나님과의 멀어짐’ 혹은 ‘죄책감’을 느끼고 있지는 않습니까? 포도나무에서 떨어진 가지처럼 말라죽을 것 같은 그런 절망감을 느끼시지는 않습니까?
주님과 관계없는, 즉 포도나무이신 주님과 떨어져 있는 가지는 아무리 노력을 해도 가장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진정 그 분의 성품을 가질 수 없습니다.
얼마 전 대학교 동창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남편이 모 정당의 최고위원이 되었는데, 기도 부탁을 요청했습니다. 제가 기도하기 전 이런 말을 했습니다.
“유명한 정치인 되지 말고, 좋은 정치인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 척하지 말고,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국민을 사랑하는 정치인이 되었으면 좋겠다. 다들 변질되는데, 정치를 시작했을 때의 그 마음 변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요즘 유행하는 단어 중에 하나가 ‘진정성’입니다. 국민을 위한다는 정치인들에게 우리는 진정성을 따지고, 고객을 위한다는 기업들에게 진정성을 찾고 있습니다. 이 말은 그들이 가장을 할 뿐 ‘진정성’을 갖고 있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정치인들이 국민과 한 나무에서 나온 가지로, 기업들이 고객들을 자신들과 생사를 함께 하는 한 몸으로 생각한다면 ‘진정성’을 굳이 찾지 않아도 그 마음이 느껴질 텐데 말입니다.
우리가 포도나무이신 주님께 붙어 있다면 우리는 굳이 꾸미고 노력하지 않아도 ‘진정성’을 가진 크리스천이 될 수 있습니다.
제가 지난주 크리스천 성품 시리즈 설교를 시작하면서 행동하기가 참 불편해졌습니다. 제 취미이자 특기가 다른 사람들을 놀리고 괴롭히는 건데, 제가 취미생활을 하려고만 하면 목사님, 전도사님, 또 성도님들이 “목사님, 성품 설교 하시는 분이 왜 그러세요?”
하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설교를 하기 위해 억지로 제 성품을 고친다고 해서 고쳐질까요? 설교를 하는 동안은 혹시 그럴지 모르겠지만, 모르긴 몰라도 다시 옛날로 돌아가고 말 겁니다.
많은 분들이 크리스천 성품에 대해 의식적으로 꾸미는 것이라고 오해 하시는 것 같습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아무리 그런 척 하려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짝퉁 크리스천의 성품일 뿐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견고해서 내 안에 계신 그 분이 말씀하시는 음성을 순간 순간 들으며, 무슨 일을 하든 그 분의 뜻을 물을 때 진정한 크리스천 성품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과의 관계가 분명할 때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도, 위기의 순간에서도 크리스천의 성품을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2007년 8월호 낮은 울타리의 제목이 [35초]입니다.
과연 이 ‘35초’가 무엇을 의미할까요? 문자 한통 보내는 시간? 공중전화에서 70원으로 통화할 수 있는 시간? 자판기 커피 나오는 데 걸리는 시간?
올챙이 뒷다리가 나오는데 45일이 걸린다고 합니다.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는 데는 21일. 봉숭아 새싹이 돋는 데 일주일. 배추를 맛있게 절이는 데 필요한 시간은 5시간 35분.
계란을 삶을 때 걸리는 시간 12분.
공중전화에서 기본 요금으로 걸 수 있는 시간 3분. 팝콘이 튀겨 지는데 2분 40초.
35초의 정답은 부모와 자녀의 하루 평균 대화 시간입니다.
‘35초.’ “공부해라. 밥 먹어라. 일찍 들어와라. 인터넷 그만하고 자라. 일어나서 학교 가라. 학원가라.”
하루에 기껏해야 35초의 시간만으로 부모와 자식 간의 올바른 대화가 가능할까요? 35초의 시간만으로 부모의 삶이, 성품이 자녀들에게 잘 대물림될까요?
동일한 원리가 주님과 우리와의 관계에서도 적용됩니다. 나무되신 주님과의 대화 시간은 얼마입니까? 가지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나무로부터 영양분을 공급받아야 하듯이, 우리들도 영적 영양분인 주님의 말씀과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미국에 있는 한인교회에서 목회할 때 성경공부 시간에 그런 질문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한국 비디오 보는 시간과 주님과 대화하는 시간 중 어느 시간이 더 많습니까?”
우리들의 삶에서 하나님이 무관심해 보이고,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깨어진 이유가 있다면, 하나님과의 대화가 단절된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과 대화하는 시간이 없어진 것입니다.
시편에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친밀한 관계를 가졌던 신앙인의 고백이 있습니다. 시편 46편을 보세요. 시인은 하나님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얼마나 믿고 신뢰하십니까?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여러분들의 성품이 어떻게 변하셨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자의 가장 큰 변화는 성품의 변화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인정하고 부르셨다는 사실, 나무되신 하나님께서 끝까지 가지인 우리들을 붙들어 주시고 인도하여 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나 자신과의 관계
이제 하나님을 신뢰한 사람들, 포도나무 되신 주님에게 붙어 있는 가지들인 우리들이 크리스천으로서 올바른 성품을 갖기 위한 출발점으로서 던져야 할 두 번째 질문이 있습니다. 나 자신과의 관계에 대한 질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관계를 양자 간의 문제로 정의합니다. 그래서 ‘자신과의 관계’란 이 말이 다소 이상하게 들릴 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과의 관계? 그리고 이게 성품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자신을 어떻게 보느냐? 자신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는 것이 성품을 형성하는 데 아주 중요한 요소입니다. 타인과의 관계로 나아가기 이전에 자신과의 관계를 정립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스스로를 얼마나 믿으십니까? 저요. 저 못 믿습니다. 아니 솔직히 믿고 싶은데, 믿기가 너무 힘듭니다. 의지도 약하죠. 게으르죠. 수없이 ‘할 수 있다!’라고 반복해 보지만 실패를 경험할 때마다 제 자신에게 실망하기 일쑤입니다.
지금 이 분위기는... 여러분도 별반 차이가 없으리라 여겨집니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기도 힘든 마당에 나 자신에 대해서도 만족하지 못하고 스스로 원수가 되니 사는 게 얼마나 힘듭니까?
이런 실패를 경험하며 자신에 대한 신뢰를 상실한 사람들은 자신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좋은 성품을 기대하기란 힘들겠죠.
오늘 저는 여러분 자신과의 관계를 깊이 살펴보기를 도전합니다.
대부분 자신에 대한 생각이 다른 사람에게 투사되기 마련입니다. 자신을 사랑하고 믿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믿고 신뢰하지만, 자신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상대방도 신뢰하지 못하기 마련입니다.
저희 교회 권사님 중에 평생 직장 생활을 하시다 은퇴 하신 후 사업에 투자하라는 어떤 사람의 말만 믿고 퇴직금을 다 넣었다가 사기를 당하신 분이 계십니다.
사리도 분명하시고 명철하신 분인데 왜 그렇게 당하셨냐고 했더니, 그분 말씀이 ‘다른 사람도 저 같은 줄 알아죠 뭐!’그래서 그 분을 무조건 믿으셨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결국은 내 눈높이에 맞춰 바라보게 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나 자신을 신뢰하며 살아갈 수 있느냐 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요? 대답은 “믿을 수 없다, 그런데 믿을 수 있다”입니다.
이사야서 64장 8절을 보면, “그러나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고 합니다. 오늘 말씀과 비슷한 맥락의 말씀입니다.
주님은 포도나무요 토기장이시고, 우리는 가지요 진흙입니다. 토기장이와 진흙의 비유 바로 앞에 있는 말씀을 주목해 보십시오.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오늘 본문에서는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진흙 자체만으로는, 가지 자체만으로는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토기장이 되신 주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기에 나를 믿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비록 가지에 불과하지만 나무 되신 주님 안에 우리가 거하고 있고, 주님도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 믿을 수 있습니다.
내가 내 자신을 믿을 수 있는 것은 내 모습을 보고, 내 능력을 가지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 인한 것임을 인정할 때 가능합니다. 내가 나를 믿을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사람들의 특권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그렇습니다. 내가 나를 보면 가능성이 없습니다. 너무 연약합니다. 그럴 때 마다 실망합니다. 내 자신이 나의 삶의 원수일지도 모릅니다. 나처럼 약하고, 나처럼 무능하고, 나처럼 초라한 루저(Loser)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자괴감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더 이상 루저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각자의 빛을 발하는 star입니다. 내가 계획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획하신 삶 앞에서 우리는 이전과는 다른 나의 인생을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 안에서 나를 신뢰하게 됩니다.
나를 믿고 살아가는 우리 앞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 의미 있는 사람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여러분 자신을 믿어 주고, 여러분 자신에 대한 밝은 모습을 보십시오. 나 자신이 얼마나 의미 있고 멋진 존재인지 스스로 어깨를 두드려 주십시오.
다른 사람과의 관계
하나님을 신뢰하고, 나 스스로를 믿게 된 크리스천이 올바른 성품을 갖기 위한 출발점으로서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세 번째 질문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한 질문입니다.
본문 5절을 보겠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하나님 안에 있으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갖고, 나 자신을 신뢰하게 되면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도 변화가 일어납니다.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의 눈으로 이 세상을 바라봅니다. 내가 만나는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대할 수 있습니다. 이 단계에 와야 우리는 비로소 ‘성품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목적 중심, 일 중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효율적으로 일을 해서 멋지게 일을 마치는 것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일을 제대로 못하거나 더디 하는 사람들을 보면 답답해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상자 밖에 있는 사람들’(책 표지)이란 책을 읽으며 제 신앙에, 제 삶에 큰 도전을 받았습니다. 이 책은 신앙 서적은 아닙니다. 경영 및 교육 컨설팅 회사인 아빈저연구소에서 저술한 경영이나 인간관계에 관한 책입니다.
저와 같은 일 중심적, 목적 지향적인 사람들, 이 책의 표현대로 하면 상자 안에 있는 사람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 관계의 문제에 있어서의 소홀함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상자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면서 빠지기 쉬운 수많은 오류들에 대해, 그리고 결국은 일을 만들어 내는 것도 사람이라는, 그래서 함께 이해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책입니다.
이 책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결코 내가 이룬 성과나 일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고 기뻐하시는 분이 아니란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내 시각으로, 내 잣대로 바라보았던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었을까를 생각하면서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일을 이루어내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더욱 기뻐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이 없어서 제 힘을 빌리시겠습니까? 그야말로 하나님은 말씀만으로 모든 것을 이루실 수 있는데, 왜 이 세상 속에서 우리에게 숙제를 주신 걸까요? 하나님께서는 나 혼자, 더 빨리, 더 정확하게 그 숙제를 해내기보다는 옆의 사람들을 도우며 함께 그 숙제를 해나가는 모습을 기대하고 계십니다.
크리스천 성품에 대한 설교 예고를 들은 제 주변에 많은 분들이 “이 설교는 누가 꼭 들어야 하는데…”라며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들을 떠올리시더군요. 그러나 이제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립되고, 자신과의 바른 관계를 맺은 성도의 눈에는 다른 사람이 이전과는 다르게 보일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기대가 충만해집니다. 하나님이 나를 신뢰하시는 것처럼 다른 이들도 신뢰할 수 있게 됩니다. 비판이나 비난, 질책의 시선이 아니라 신뢰와 사랑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바로 하나님의 눈으로 그 사람들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시선, 눈. 이런 단어를 들을 때마다 기억나는 영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다룬 ‘Passion of Christ’입니다. 저는 이 영화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를 바라보시던 예수님의 눈빛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베드로가 회개하고 하나님을 전하는 위대한 사도로 돌아 서게 한 것은 바로 이 눈빛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눈빛은 베드로를 멸시하거나 원망하는 눈빛이 아니었습니다. 끊임없는 신뢰의 눈빛이었습니다.
베드로에게 그를 끊임없이 믿어주었던 예수님이 계셨다면, 사도 바울에게는 바나바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바나바는 사도 바울이 아직 사울이었던 시절, 누구도 그를 신뢰해 주지 않을 때 그를 바울로 보아주었던 사람입니다. 바울의 인생을 보장해 주었습니다. 위대한 사도 바울은 성품의 사람 바나바에 의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영적 아들 디모데가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를 어디에 보내든지 그를 신뢰하도록 편지를 썼습니다.
고린도전서 16장 10절입니다. “디모데가 이르거든 너희는 조심하여 그로 두려움이 없이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 이는 그도 나와 같이 주의 일을 힘쓰는 자임이라.”
베드로에게는 예수님이, 사도 바울에게는 바나바와 같은 성품의 사람이 있었다면, 디모데에게는 사도 바울과 같은 성품의 사람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은 누군가에게 예수님이나 바나바나 바울과 같은 존재입니까?
자, 이제 오늘 말씀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견고한 관계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게 만듭니다. ‘관계’는 ‘신뢰’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깊이 신뢰한다는 것은 우리를 끝까지 믿어 주시는 하나님을 확실히 아는 것입니다.
(힘들고 지쳐.. 반주 시작)
하나님은 우리가 멋질 때, 하나님 마음에 들 때는 물론이고 우리가 초라하고, 심지어 하나님을 배신할 때도 바보같이 우리를 신뢰하시는 분입니다.
저는 고등학교 때까지 교회를 잘 나갔던 학생이었습니다. 그러다 대학에 와서는 하나님을 부정하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유토피아를 세워보고자 무던히도 애를 썼던 사람입니다.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친구들을 비웃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담배를 구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꽁초를 모아다가 성경책으로 담배까지 말아 피웠던 하나님 앞의 패륜아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저를 끝까지 믿어 주셨습니다. 철없는 아들이 아버지의 마음을 찌르고 할퀴어도
“사랑하는 내 아들아, 나는 너를 믿는다. 언젠가 내 사랑을 네가 받아 주리라 믿는다. 나는 너를 사랑한단다.”고 바보같이 되풀이 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을 맘 아프게 하던 제가 뻔뻔스럽게 ‘하나님, 저 당신에게로 돌아가도 될까요?’ 라며 주저 했을 때 선뜻 두 팔을 벌리고 맞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절대 우리를 버리거나 떠나지 않습니다. 단지 우리가 하나님을 떠날 뿐입니다. 혹시 오늘 이 자리에 오신 분들 중에 죄책감으로 하나님 앞에 나서기가 망설여지는 분이 계십니까?
주저 없이, ‘뻔뻔하게’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십시오. 당신이 아무리 더럽고, 그 어떤 패륜아라도 하나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두 팔을 벌리고 맞이하실 겁니다.
포도나무이신 그 분 옆에 달라붙으십시오. 그 분과의 관계, 끊임없이 나를 신뢰하시는 그 분을 신뢰하는 것, 바로 크리스천 성품의 출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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