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곧 나의 친구라 /요15:11-17/ 곽선희 목사
2014-11-18 13:45:18
어느때에 런던 타임즈가 친구의 정의에 대해서 현 상 모집을 한일이 있다고 합니다. 도대체 친구란 무엇이냐? 어떤 사람을 참 좋은 친구라고 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겁니다.
이 현상모집에서 당선된 1, 2, 3등 세 대답만 소개 하게 됩니다. 3등으로 당선된 대답은 이렇습니 다. 친구란.. 기쁨을 더 해주고 슬픔을 나누는 자 이다. 이렇게 말했습니 다.
기쁠때 만나면 기쁨 이 더 커지고, 슬플때 만 나면 슬픔이 반으로 감해 지는 자다. 그러니까 기 쁠때에 만나면 내 기쁨을 함께하고 기쁨을 극대화 해주는 사람 그게 친구예 요. 기쁠때 만나면 기쁘 다고 뭐 얘기하면 그까짓 거 가지고 그러냐 초쳐버 려 가지고 영 기분잡쳐 버리는 경우가 있거든요.
그건 친구 아닙니다. 다 시 만나지 마세요. 그건 안되구요. 기뻐서 만나 면 너무 더 기쁘게 만들 어 주고, 슬플때 만나면 그 근심을 반으로 감해 주는 그런 친구가 진짜 친구다. 또 2등으로 당 선된 것은 친구란... 한 보따리의 동전이다.
그저 이해해 주는거다. 내 모든 사정을 다 이해 하고 동정하는 바로 그가 친구다. 뭐 비판하고 설 명하고 뭐 어쩌고 그건 아니요. 깊은 동정 그것 이 친구다. 1등으로 당 선된 대답은 이렇습니다.
친구란 온 세상이 나에 게서 떠날때 다 나를 버 릴때 내게로 오는 자이 다. 그것이 진정한 친구 다. 미국의 유명한 설교 가인 웹박사는 우정을 지 속하기 위해서 이 친구의 정을 지속 할려면 몇가지 조건이 있다는 겁니다.
첫째는 내가 남의 친구가 될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겁니다. 다른 사람이 좋 은 친구가 되어 주기를 바라지 말고 내가 먼저 다른 사람의 사정을 깊이 이해하면서 내 먼저 좋은 친구가 될려고 노력할 때 만이 또 다른 사람도 내 게 좋은 친구가 되어줄 수 있다. 하는 것이구요. 두번째는 진실이올시다.
사실 이것은 매우 중요 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비밀이 있을 수 있습니 다. 부부간에도 비밀이 있다구요. 그러나 친구 에게는 비밀이 없습니다. 또 비밀이 없어야만 친구 입니다. 이 사이만은 완 전한 진실이 있습니다. 친구에게 거짓말이란 있 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진실만이 친구의 정을 지 속하는 아주 중요한 조건 이 된다. 세번째는 평등 의식이올시다. 다시 말 씀드립니다만은 봉건주의 적 행복관을 가진 사람은 영원히 친구가 없습니다. 친구가 없다면 여러분이 가지는 가치관과 행복관 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 다.
평등의식을 가져야 됩니다. 너와 나는 똑같 다. 지위가 높든 낮든, 학벌이 있든 없든, 나이 가 많건 적건, 심지어는 남녀 어른 상관없어요.
문제는 나와 너는 똑같 다. 그런 평등의식을 가 진 사람만이 친구가 있습 니다.
자기 아내를 소개할 때 옛날 사람들은 제 집사람 입니다. 제 아내입니다. 제 처입니다. 그랬는데 요새는 유행어가 바꼈어 요. 제 친구입니다. 그 러더라구요. 마이 걸 프 랜드 아! 그게 사실이라 면 참 좋은 일이예요. 친구죠. 그런데 평등의 식 속에만 진정한 친구는 가능해요.
혹이라도 내 가 더 잘났고, 더 똑똑하 고, 더 높고 낮고.. 이래 가지고는 혹은 열등의식 이 있어도 친구 될 수 없 습니다. 오직 겸허한 가 운데에서 평등의식을 가 져야 친구가 되고, 또 친 구를 얻을 수도 있는 것 이다. 하는 말입니다. 스티븐 존슨박사는 이렇 게 친구에 대해서 질문을 합니다.
네가 곤경에 처 했을 때 금방 부를 수 있 는 친구가 있느냐? 당장 달려올 사람이 있는가? 없다면 당신은 친구가 없 는 사람이요. 또 내가 함께 기뻐할 사람이 있는 가? 작은 일이든 큰 일 이든 내가 기쁜 일이 있 을 때 찾아 가서 붙들고 얘기하면 그래 그래 그거 참 좋겠다. 아무 시기 질투가 없이 내 기쁨에 동참해 줄 사람이 있는 가?
그래 그건 친구요. 그러나 내 기쁨을 이해하 지 못하는 사람 그거는 친구가 아니요. 또한 내 가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선뜻 내게 돈을 빌려 주고 만일에 저가 없으면 믿고 다른 사람에게 가서 돈을 꿔서라도 빚을 갚아 주고 내 어려운 사정을 도와줄 사람이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하여 긍정 적 대답을 하지 못한다면 그는 친구가 없는 사람이 요. 당신 자신이 좋은 친구가 되지 못하고 있다 는 것을 의미합니다. 대 단히 중요한 질문이올시 다.
예수님께서 오늘 본 문에 보면 사랑하는 제자 들을 앞에 놓고, 너희는 곧 나의 친구다. 라고 말합니다. 너희는 나의 친구다.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렇게 말 씀하실 때에 제자들을 지 금 최고로 최고의 지위로 우대하는 시간입니다.
높이 대하는 시간이올시 다. 예수님 지금 십자가 지시기 전야밤에 말씀하 시는 거요. 이제 너희는 나의 친구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 는 일단 제자로 통합니 다. 예수님은 스승이요 랍비요. 그를 따르는 사 람들은 제잡니다.
예수 님의 제자들은 예수로부 터 배우고, 예수를 따르 고, 예수를 모방합니다. 제자와 스승입니다.
그래서 제자라고 합니다 만은 두번째 말씀은 사도 라고 말합니다.
사도는 보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사명을 지워 서 보냈습니다. 그러니 까 보냄 받은 사람은 보 낸자의 명령을 따라야 합 니다. 그가 그들에게 넘 겨준 사명을 충실히 감당 해야 합니다. 이게 사도 입니다.
그런데 제자도 사도도 아니요. 오늘 이 시간에는 친구라고 말합 니다. 십자가 지시기 전 날밤에 제자들을 앞에 놓 고 너희는 나의 친구다. 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제자들을 동등하게 높이 추대하는 시간입니다.
동시에 예수님 자신은 아주 낮추고, 낮추어서 그들과 수평관계에서 만 나는 시간입니다. 이 얼 마나 대단한 사건입니까?
여러분 가끔 그런 경우 가 있어요. 이 친구라는 말도 조심해야 됩니다. 같은 동창 대학교 고등학 교 동창들 보면은 동창들 끼리라는게 그저 이렇게 출발할때는 같이 출발했 지만 한 20년 지나고 나 면 한사람은 출세하고 한 사람은 못하고 한사람은 잘되고 한사람은 못되고 다 그렇지요. 그게 다 똑같이 잘될 수는 없습니 다. 그런데 이제 친구가 되는데 이런때 문제예요.
친구는 친군데 가령 아 주 높은 지위에 있는 사 람이 아주 어려운 형편에 있는 사람은 여러 사람에 서 소개하면서 이 사람 내 친구요. 아주 죽마고 우요 좋은 친구라고 이렇 게 말하면은 이거는 자기 는 낮추고 친구는 높이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아주 형편 없이 인격적으로나 무엇으로도 형편 없는 사람이 아 거 높이 추대받는 존경받는 사람을 텔레비젼에서 보 고 저 친구 내 친구야 웃 기지 마세요. 언제 친구 요. 그게. 이런 이야기 는 잘못된 거요.
이건 다른사람은 격하 시키는 거요. 그러니까 나보다 못한 사람을 대할 때는 내 친구요. 할것이고 나 보다 높은 사람을 향해서 거기다 대고 저사람 지금 거드름 피우는데 옛날에 형편없는 사람이었는데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정 말 형편없는 친굽니다 이 거는요. 말 조심해야 됩 니다.
친구라는 말도 함부로 할 수 있는게 아니요. 그래 저는 그래서 죄송합 니다만은 찬송 부를때 예 수 내 친구 하는거 조금 거북스러워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나더러 친구 하 는건 고맙지만 내가 예수 님더러 당신 내친구. 이 거 말 돼요. 좀 말이 안 돼요. 이 사람들 버릇없 는 찬송이예요. 그렇지 안습니까? 안 그렇습니 까?
그러니까 이 친구라 는 말도 친구라는 말 하 는 순간에 자기는 낮추고 내 친구는 높이는 그런 결과가 되는 것이예요. 그런데 오늘 깊이 생각하 면은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친구로 그 렇게 표명하고, 친구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리고 하시는 말씀이 친구 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 느니라.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그러한 좋은 친구로 자기 자신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아시는대로 예수 님의 자기 표명하는 말씀 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만은 그 중에 하나 또 설 명하면 목자라는 겁니다. 조금전에 찬송가, 성가대 에서 부를때 어린양 목자 의 사랑을 노래했습니다 만은 어린양을 사랑하는 목자, 또는 예수님도 친 히 말씀하시기를 선한 목 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 좋은 말씀이예 요. 그렇습니다.
정말로 양을 사랑해서 양을 위하 여 목숨을 버립니다. 그 러나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거 하고 친구를 위 하여 목숨을 버리는거 하 고 얘기가 다릅니다 이거 는요. 양을 아무리 사랑 해서 해도 그건 동물이요 미물입니다. 친구라는 것은 인격입니다. 그리 고 친구는 선택적 사랑이 요. 자발적 사랑이요.
특별히 중요한 것은 라 이벌의식을 넘어서는 사 랑입니다. 여러분 친구 가 왜 어렵습니까? 친구 사랑이 힘든거예요. 동 물사랑은 쉬워요. 그러 나 또 불쌍한 사람 사랑 하는 것도 쉬워요. 정말 로 어려운것이 친구사랑 하는거. 왜 그것은 라이 벌이기 때문에 시기, 질 투 하기 때문이요. 그래 서 유명한 한 학설이 있 지 않습니까?
가까운 사람하고 멀고 먼 사람하고 가까워요. 먼 사람은 나하고 이해관 계가 없거든요. 그러나 친구란 나하고 가깝고 이 해관계가 있어요. 그래 서 저가 올라가는 동안 나는 내려가고, 저가 내 려가면 내가 올라가고... 요거 아주 어렵단 말이예 요. 시소 게임을 하거든 요.
보세요. 여러분 친구, 또 아내도 아내 나름이겠 지만은 자 친구가 출세하 면 곧 좋지 못한 마누라 는 꼭 거기서 말을 하거 든요. 당신 친구는 이렇 게 출세를 하는데 당신은 친구라면서 이게 뭐요. 이런 여자하고 살려면 힘 들죠. 이것이 문제가 된 다구요. 그러나 목자가 양을 사랑한다고 해서 누 가 질투를 합니까? 시기 를 합니까? 친구사랑은 이래서 어려운 거예요.
그래 예수님 말씀이 친 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 면 이라는 말씀이 말인데 깊이 생각하면요. 그것은 아주 정신을 말하는 것이 예요. 이 몸뚱아리 목숨 이 아니예요. 이 목숨이 라는 말은 그래 그 푸쉬 케라는 말에서 사이컬리 지라는 말이 나왔어요.
사이코라는 말이 그러니 까 마음을 친구를 위하여 마음과 몸을 다 바치는 그거 최고의 사랑이라는 말이죠. 친구사랑이 가 장 높은 사랑이요. 왜 인 격적이니까 시기 질투라 고 하는 그것을 다 넘어 서서 사랑하는 것이니까 요. 나를 낮추고 그를 높이는 거니까요.
정신 적인 엄청난 사랑이 거기 들어있는 거요. 그리고 또한 제자들을 친구로 대 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니까 너희가 나 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 나니 친구란 누군가가 먼 저 주도적으로 출발을 해 야 됩니다. 인씨에이티 브가 중요한거예요.
모든 사람이 내게 친구 되어 주기만을 바라고 기 다리면 죽을 때까지 친구 못 만납니다. 내가 좋은 친구가 먼저 되어야 되 죠. 내가 너희를 택하였 다. 주도적으로 인씨에 이티브를 가지고 내가 너 를 사랑했다. 택했다. 먼저 사랑했다는 말입니 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먼저 스스로 자기를 크 게 비하시킨 것이올시다. 그리고 제자를 높이는 시 간이요. 그러면서 말하 는 것입니다. 이런 얘기 가 있습니다. 참 눈물이 겹도록 귀한 이야기입니 다. 어떤 친구가 소화가 안돼요.
이상하게 소화 가 안되기 시작하면서 점 점 입맛도 없고 괴로워 요. 몸은 자꾸 마르고 자기 친구를 불러가지고 내가 요새 소화도 잘 안 되고 위가 좀 아프다고 속이 아프다고 하니까 아 그럼 병원에 가서 진찰을 좀 해보지. 알았어. 병 원에 안가요. 왜 안가느 냐?
이 사람이 소심한 사람이라 갔다가 위암 꼭 그럴것 같거든요. 꼭 위 장병 이거 고장난 거 같 거든요. 큰 병이 걸린거 같아서 그 진찰이 나올까 봐 위암이라는 진찰이 나 올까봐 겁이 나서 병원에 안갑니다. 또 한가지는 위장병 조사할 때는 내시 경 하면서 뭘 이렇게 복 잡하게 한다며 아유 그거 힘들다며 그러면서 이사 람이 병원에 못가요. 그 친구가 몇번 권면 했지만 이 친구가 병원에 안가 요.
얼마후에 그 친구로 부터 전화가 왔어요. 자 네가 소화가 안된다고 하 더니 나도 소화가 안돼. 나도 위장이 안된거 같애 나하고 병원에 같이 가 세. 그래 둘이 같이 가 서 진찰을 받는데 진찰 받아 보니까 뭐 견딜만 하더래요. 두 사람이 같 이 진찰을 하고 난 다음 에 의사가 말하기를 둘 다 병이 없습니다. 건강 하다고 얘기해 줬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병원 을 나오면서 그 먼저 위 장병 걸렸던 사람은 생각 했습니다. 아 내 친구는 위장이 아프지 않은데 나 를 위해서 아프다고 하고 나하고 함께 와서 진찰을 받았구나. 참으로 좋은 친구라고... 생각했습니 다.
여러분 참 좋은 친구는 남을 비판하는게 아니예 요. 의지가 있느니 없느 니 그런 설교하는게 아닙 니다. 그저 자기를 낮추 어서 그와 나를 동격시 해 버리는 거예요. 그거 서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 이지요. 오늘 성경에도 보니까 기쁨을 나누자고 합니다.
나의 기쁨을 너 희에게 준다. 내 기쁨을 이 신비로운 기쁨을 함께 나누자. 이렇게 말씀하 시구요. 또한 비밀이 없 다고 말합니다. 너희와 나의 사이에는 비밀이 없 다. 종은 주인의 뜻을 모르지만 나는 너희에게 모든 말을 다 했다. 절 대 비밀없이 모든 말을 다 했고, 더욱 중요한 것 은 이 모든 것을 너희가 이해해 줄거다.
여러분 친구라고 말하면 서 말 못알아 듣는다는 얘기 하면은 그건 친구가 아니예요. 다 이해할 줄 로 믿습니다. 충분히 이 해할 줄로 믿어요. 그래 예수님 참 생각하면 얼마 나 고마우신 분입니까?
그 답답한 제자들 몇일 있다가 몇일도 아니죠 몇 시간 후에 예수님을 모른 다고 다 도망갈 사람들이 요. 그 사람들을 앞에 놓고 예수님 말씀하고 발 을 씻기시면서 말씀하십 니다. 지금은 모르지만 이후에는 알리라. 너희 들 다 들어둬라. 충분히 알꺼다. 내 속뜻을 다 알꺼다. 이걸 믿고 있어 요.
이해 능력을 충분히 믿고 있구요. 그뿐입니 까? 참 놀라운 것은 베 드로가 예수를 세번이나 모른다고 하지 않았습니 까? 그리고 도망가서 물 고기 잡을 때 찾아가서 말씀하실 때 말입니다.
저는 그럴때마다 성경이 너무 너무 고마워요. 예 수님 참 좋으신 분이예 요. 아 그자리에 가서 나 같으면 꼭 한마디가 있거든요. 그러기에 깨 어 기도하라 하지 않더 냐? 아 모른다고 한마디 했으면 되지 뭘 세번씩 하고 맹세까지 했냐? 넌 어째서 이모양이냐? 한 마디 꼭 할 것 같은데 아 무 말이 없어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 양 을 먹이라. 거기다가 제 가 좀 사족을 달면은 과 거는 묻지 않으마 지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 나를 위하여 네가 십자가를 져 야 되겠다. 하고 말씀하 십니다. 믿어요. 전적으 로 믿어요. 예수님의 그 모든 말씀하신거 충분히 이해하고 그 말씀안에 사 는것으로 믿어요.
믿어 주었어요. 이게 친구라 구요. 의심하는건 친구 가 아니요. 완전히 믿었 어요. 그리고 나아가서 는 제자들이 좋은 친구 가 되기를 원하고 계십니 다. 친구라고 하는것은 평등한 관계에서 이루어 지거든요. 절대로 일방 적인 것이 아니라 쌍방적 인 것이예요. 그래서 내 가 너희에게 좋은 친구 다. 너희들 또한 서로 사랑하라 그랬어요.
서 로 사랑하라. 아가파테 알렐루스 내가 아가페의 사랑을 하니까 너희들도 아가페의 사랑을 하라. 내가 너희들의 친구 되었 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 을 버리는 친구가 되었 다. 너희도 좋은 친구가 되라. 하고 말씀하십니 다.
조선일보 8월28일자에 나온 말입니다. 아름다 운 우정이 기록되어 있는 데요. 경민이라고 하는 18세 소녀 가장이 있었습 니다. 이 소녀 가장이 아주 애써서 고학을 해가 지고 혼자 공부를 해가지 고 학원을 다녀서 대입검 정고시에 합격을 합니다. 합격 하자마자 합격증을 가지고 자기 친구 지현이 를 찾아가서 자랑을 합니 다.
둘이가 그렇게 기뻐 하게 됩니다. 사연은 이 렇습니다. 이 경민이는 6년전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어머니는 또 아주 당뇨병으로 심한 고생을 합니다. 중학교를 졸업 하고 고등학교에 진학을 못합니다.
상업학교에 들어 갔다가 중도에 그만 두고 편의점에 가서 아르 바이트를 하면서 많은 고 생을 하면서 어머니를 병 수발을 하고 또 어린 동 생들을 가르치고 그렇습 니다. 많은 고생을 했습 니다. 그럴때에 그 친 구 지현이라고 하는 친구 가 찾아와서 아무말도 하 지 않고 봉투 하나를 던 져주고 갔습니다.
봉투 를 뜯어보니까 거기에 편 지를 이렇게 썼습니다. 항상 이글거리는 태양처 럼 지칠줄 모르던 네가 요즘 구름에 쌓여 빛을 보지 못하는구나. 힘들 어도 이겨낼 줄로 믿는 다. 이 작은 이것은 학 원비로 보태써라. 나는 이것을 마련하기 위해서 몇달동안 저금을 했단다.
여기서 용기를 그 어려 운 가운데서 또 저녁마다 공부를 합니다. 그래서 이 대학검정고시에 합격 을 한거예요. 그리고 나 서 그에게 편지를 썼는데 그 편지는 이렇습니다.
지현아! 고마워 모든것은 네 덕택이야 나도 꼭 대 학에 입학을 하고 앞으로 남을 도울 수 있는 사람 이 되도록 힘쓸께. 꼭 남을 도울 수 있는 사람 이 되도록 힘쓸께 이것이 편지 내용입니다. 진정 한 친구를 가졌으면 다시 나도 남에게 또 좋은 친 구가 되야되는게 아닙니 까? 내가 너희를 사랑하 니 너희도 서로 사랑하 라. 이렇게 말씀하십니 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 우 리 가슴을 뜨겁게 하는 것은 내가 너희를 종이라 말하지 않는다. 친구라 고 말한다. 왜? 너희같 은 굴종, 너희같은 독종 을 원하지 않는다. 심지 어는 율법적 관계에서 보 상받기 위하여 혹은 저주 가 무서워서 벌벌 떠는 그따위 순종 원치 않는 다. 사랑하는 친구로서 의 그같은 충성, 그같은 사랑, 그같은 마음을 원 한다.
그런고로 나는 너 희를 종이라 하지 않고 친구라고 부르노라. 나 는 너희를 친구로 대하고 죽는다. 너희는 이같은 사랑을 서로 나누라. 하 고 말씀하십니다. 좋은 친구가 되라. 이제 우리 가 다시 생각해야 겠습니 다.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곧 나의 친구라. 깊이 생각해야 겠습니다. 이런 친구를 가진자는 절 대 고독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강해 (106) - 내 사랑 안에 거하라 /요15:7-17/ 김형익 목사
2021-05-08 16:31:01
1. 열매를 맺는 삶에 대한 또 하나의 차원
열매는 맺는 것은 헌신된 그리스도인의 몫이 아닙니다. 열매를 맺는 것은 모든 신자에게 사활적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주님은 죽으시기 직전에 바로 이 문제를 가지고 많은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열매를 맺는 것은 믿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와 생명적 관계를 가지지 않았다면 아무 해당도 없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자리에 계신 분들 가운데, 비록 내가 아직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거듭나지는 않았으나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면 이 말씀은 그런 분들에 생명을 줄 수 있는 너무나 중요한 말씀입니다.
A. 서로 사랑이 열매다(12,17)
주님께서는 계속 열매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오늘 본문을 잘 보면, 서로 사랑하는 것이 바로 열매다라고 말씀하십니다. 12절과 17절에서 같은 말씀을 반복하십니다. 이 서로 사랑은 믿는 자가 믿는 자를 알아보고 사랑한다는 말씀인데, 요한일서에서 말씀하듯이, 이것은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부인할 수 없는 증거이고 열매입니다. 좋은 나무가 맺는 좋은 열매는 서로 사랑입니다.
B. 내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 서로 사랑의 열매를 맺는 길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 열매를 맺습니까? 주님은 너희가 내 사랑 안에 거하면 서로 사랑이라는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큰 주제입니다.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면 서로 사랑이라는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형제 사랑은 노력의 산물이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2. 전제: 주님의 사랑의 완전함과 충분함과 만족함(9)
오늘 말씀 중 저의 마음을 가장 강하게 끌어당기고 흥분하게 하는 구절은 9절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누가 과연 하나님 아버지께서 성자 하나님을 사랑하신 그 사랑의 깊이와 크기를 측량 조차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을 향하신 그 무한하고 측량 조차 할 수 없는 완전한 사랑, 질적으로 양적으로 조금도 다르지 않은 그 동일한 사랑으로 성자 하나님께서 믿는 자를 사랑하셨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저는 오늘 이 구절 하나로 이미 만족합니다. 이미 배가 부릅니다. 아무 것도 더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어느 그리스도인이 이 사랑을 받은 후에, 더 사랑에 굶주릴 수 있고, 부족함을 호소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한다면 그는 아직 그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것이지요. 그럴만큼 사랑스럽지 않은 존재라는 사실을 나 자신이 너무나 잘 아는데, 그 창조주 하나님, 심판주 하나님께서 성부가 성자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신다고 확증하여 주십니다.
예수님은 그 아버지의 사랑을 확신했기에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인간의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셨고, 갖은 모욕과 천대와 멸시를 다 받으셨고 십자가의 고난과 수치스러운 죽음 까지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무엇이 이것을 가능하게 했습니까? 우리가 사랑스러워서 그러셨다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우리를 사랑해서라고 말하지도 마십시오.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고 성경은 말합니다(사 53:10).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그 사랑의 완전함과 충분함에 만족하셨습니다. 그랬기에 비록 죄인들을 향하여 쌓여진 하나님 아버지의 진노와 심판을 남김없이 다 십자가에서 받으셔서 하나님의 버림을 받으시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그것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히 12:2). 주님은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셨고 늘 그렇게 하셨습니다. 이제 주님은 바로 이 구절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그 똑 같은 사랑으로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다고 말입니다. 그러니 내가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처럼, 너희도 내 사랑 안에 거하라고 초청하십니다(10). 안 불러주셔도 우리는 그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고 싶어할 판인데, 주님께서는 은혜롭게도 불러주셨습니다. “내 사랑 안에 거하라”고 말입니다. 누구든지 원한다면 말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이 주님의 은혜로우신 초청을 다 받고 계십니다.
3. 순종: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거하는 방법(10)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어떻게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는겁니까? 우리는 세상에서 어떤 사람들의 사랑이나 호의를 입어서 사는 방법을 대강 압니다. 그 사람 비위를 잘 맞추면 됩니다.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을 해주는 것입니다.
사람이라도 그렇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당신께서 어떻게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시는지를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라고 하셨습니다(10). 떠오르는 구절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8:29입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A. 주님의 계명을 지킴(10b,14)
이와 같이 계명을 지키는 것이 사랑 안에 거하는 비결입니다. 순종입니다. 주님은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고 하십니다(10). 순종은 주님의 사랑 안에 지속적으로 거하는 조건이고 주님에 대한 신자의 사랑은 또 순종의 원천이기도 합니다. 순종과 사랑은 도무지 끊어질 수 없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미 우리는 14장에서도 주님께서 그것을 두 번이나 말씀하신 것을 보았습니다(14:15,21).
B. 계명: 형제의 서로 사랑은 예수 믿는 증거다(12; 요일 3:14~16).
주님은 계명을 순종하라고 하시는데, 그 계명이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12절에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서로 사랑이라는 것은 열매이면서 동시에 순종해야 할 계명입니다.
요한일서에서도 사도 요한은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고 말씀하였습니다(요일 3:15). 형제 사랑은 믿는 자의 덕이 아니라 믿는 자의 증거이고 열매이면서 동시에 순종해야 할 계명인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신자를 알아봅니다. 무서운 말씀이 아닙니까? 형제 사랑은 신자의 본성이고 본능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다른 하나님의 자녀를 알아보면 사랑하게 됩니다. 이유는 오직 하나, 한 아버지를 두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은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끼리 그렇게 하라는 이야기가 분명히 아닙니다.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을 아버지로 사랑하는 신자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늘 우리가 생전에 받아보지 못한 엄청난 초청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거하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는 비결을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은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계명을 순종함으로써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더 깊이, 더 깊이 들어온다고 말씀하십니다.
4. 특권: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결과(11)
주님은 마치 무엇이 부족하기라도 한 듯 우리에게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결과 얻게 될 특권이 무엇인지를 또 말씀해주십니다.
A. 주님의 기쁨을 누린다(시 16:8,9).
제일 먼저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게 되면, 예수님이 가지고 누리셨던 기쁨을 얻고 누리게 됩니다. 11절입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
여러분은 주님의 기쁨에 대해서 아십니까? 주님은 슬픔의 사람이 아니었던가요? 왜냐하면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아니 죽으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니었던가요? 우리의 뇌리 속에 박힌 주님의 모습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시며 그 잔을 피하려고 하셨던 분이 아니신가요? 여러분은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기뻐하셨다는 기록을 본 적이 있으십니까?
사실 두어 차례 나옵니다. 먼저는 누가복음 10:21입니다. “이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좀 의외가 아닙니까? 그리고는 나사로의 죽음의 시간에 거기 계시지 않은 것을 기뻐하신다고 하신 기록이 요한복음 11:15에 있습니다. 두 경우가 다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녹아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누리는 하늘의 기쁨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통해서 신자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주님에게 33년 간 영광을 버리고 낮은 인간의 삶을 살게 하신 것이나 십자가의 고통과 수치의 죽음으로 나아가게 한 모든 힘은 당신이 가지셨던 그 기쁨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말씀한 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이라는 말도 같은 것입니다(히 12:2). 시편 기자가 이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시 16:8~9).” 이것이 바로 주님의 기쁨이었고, 주님은 이것을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자들에게 동일하게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B. 주님의 친구다(14): 사귐/교제
두번째로 우리가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면서 얻게 되는 특권은 주님의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14절에 “너희가 나의 명하는대로 하면 나의 친구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매우 황송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이 너무나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말씀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느끼십니까? 주님은 당신의 사랑 안에 거하는 자를 친구라 하십니다. 여러분의 친구 가운데 가장 자랑스러운 사람이 누구입니까? 여러분이 친구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말고 그 사람이 여러분을 나의 친구라고 말할 수 있는 자랑스러운 인물이 누구입니까? 저는 예수님입니다. 저는 감히 예수님을 저의 친구라고 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저를 친구라고 하십니다.
저는 이 특권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를 조금 압니다. 그래서 제가 가지는 어떤 관계일지라도 그것이 설령 부부의 관계, 부모와 자식의 관계라고 할지라도 이 관계에 우선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 엄청난 특권이 무엇인지 조금 알기 때문입니다.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마 10:37).” 그래서 예수님의 친구가 된 사람들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뒤돌아서지 않겠네
이 세상사람 날 몰라줘도 이 세상사람 날 몰라줘도
이 세상사람 날 몰라줘도 뒤돌아서지 않겠네 뒤돌아서지 않겠네
여기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너희가 나의 명하는대로 행하면.” 까다로운 친구 관계라고 생각되십니까? 이 말씀의 논리를 잘 따라가보십시오. 이미 주님의 계명을 순종함으로써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특권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조건은 순종이 없이는 주님과의 교제와 사귐도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순종이 없다면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친구(벗)였다는 표현을 읽은 적이 있을 것입니다(약 2:23; 대하 20:7; 사 41:8). 왜 이렇게 특이한 칭호를 아브라함에게 붙였는지 아십니까? 창세기 18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창 18:17).”
하나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실 것에 대해서 아브라함에 숨김 없이 말해주셨습니다. 이 구절로 인해서 하나님의 벗이라는 칭호를 얻었습니다. 주님도 15절에 말씀하십니다.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무엇을 알게 하실까요? 마가복음에서 주님이 하신 말씀을 보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라고 하셨습니다(막 4:11).”
이와 같이 주님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 즉 복음의 비밀을 자기 친구들에게 알게 해주시고 깨닫게 해주십니다. 이보다 더한 비밀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호기심을 채워주신다는 말씀이 아니라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복음의 비밀을 알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C. 기도 응답(7,16): 열매를 맺는 것이 나의 간절한 소원이며 갈망인가?
주님 사랑 안에 거하는 사람의 세번째 특권은 기도와 응답입니다. 오늘 본문을 마치 괄호처럼 둘러싸고 있는 것이 기도에 대한 말씀이라는 것을 아셨습니까? 7절과 16절입니다.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7).”
그리고 16절 하반절에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함이니라.” 앞에 14:13~14에서도 같은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왜 기도에 대한 말씀을 강조하시는가?
지금 주님은 떠나실 것이고, 제자들은 기도라고 특별한 방식으로 주님께서 육신으로 그들과 함께 계신 때와 마찬가지로 주님을 만날 것이고 하나님께로부터 주님이 이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능력을 주실 것임을 확증해주기 위해서 계속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은 ‘무조건적으로’가 아닙니다. 주님의 일, 주님이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는 것, 주님의 제자로서, 친구들로서 그 사명을 행할 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시겠다는 보증인 것입니다.
말하자면 보증수표를 주시는 것인데,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해서 너희가 하는 일이 다 외적인 성공을 거둔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어 15장의 남은 부분에서 주님이 말씀하시듯이 세상은 이유없이 주님의 제자들을 미워할 것인데, 그 속에서도 지치지 않고 인내하며 주님의 계명에 순종하며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면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잘 마치게 하시겠다는 보증입니다. 승리는 이미 주님이 다 얻으셨기 때문에 하시는 말씀인 것이지요.
그러면 우리는 다시 원점으로 가봅시다. 열매를 맺는 것에 대해서 주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님을 떠나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니, 열매를 맺으려면 주님 안에 거하고 또 거해야만 합니다. 기도는 또한 열매를 맺고 잠깐 있다 없어질 열매가 아니라 영구적으로 있을 열매를 얻기 위해서 사용되는 신자의 특권입니다. 자, 그러면 여러분은 열매를 맺기를 원하십니까?
열매, 주님 앞에 설 때 없어지지 않을 열매를 얻는 것이 정녕 여러분의 간절한 기대와 소원입니까? 만일 이 열매를 맺는 것,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이 여러분의 삶의 어느 한 구석에 처박혀 있는 생각에 불과하다면 여러분은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 여러분의 영혼을 위해서 안전합니다. 왜냐하면 경건의 열망은 그리스도인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고 중생의 당연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5. 선택: 어떻게 이 일이 내게 일어났는가(16)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일이 도대체 어떻게 나에게 일어날 수 있습니까? 그 일이 일어났다면, 그 일이 도대체 어떻게 일어난 것입니까? 그 일이 내게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 일은 어떻게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16절 상반절에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내가 예수님을 선택해서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모두가 다 그렇게 시작합니다. 그것이 정상이고 표면적으로는 그것 밖에 인식하지 못하는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문 안으로 들어와서 보면, 비밀이 벗겨지기 시작하지요. “아, 하나님께서 나를 그때 이끌어주셨구나. 그래서 내가 예수님을 믿을 수 있게 되었구나.”
처음부터 하나님이 나를 택하셨으면 어떻게 하시겠지라고 생각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는 믿기를 원해야하고 믿도록 결단을 촉구받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결정을 합니다. 하지만, 그 후에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그 사랑의 크기와 깊이 놀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복된 소식입니다.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고, 상상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 감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6. 내 사랑 안에 거하라.
주님은 내 사랑 안에 거하라는 엄청난 초청을 오늘 우리 모두에게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에게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하나님을 향하여 가지고 계시는 그 완전하고 아름답고 인간의 언어로는 형언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받으라고, 그 사랑을 누리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 가운데 사랑이 필요 없는 분은 없습니다. “나는 사랑 따위는 필요없다”고 말할 수 있는 분은 대단히 꼬여있는 분이 아니라면 없을 것이 분명합니다.
주님이 지금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을 부르십니다. “내 사랑 안에 거하라.” 저는 그 사랑 안에 거함으로 세상의 어떤 것도 더 필요로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충분합니다. 이것이 바로 형제를 조건 없이 사랑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나는 이미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으로 만족되었다. 그래서 나는 다른 사람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애를 쓰고 그것 때문에 마음이 상하지 않는다.
나는 형제, 그런 필요를 가진 연약한 형제를 사랑하고 싶다.”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형제를 사랑할 수 있는 온전한 힘을 얻게 된다는 말의 뜻입니다. 주님의 사랑 안으로 나아오십시오. 내가 그 사랑 안에 거하고 싶다고 주님께 말씀드리며 나아가십시오. 나아오는 자를 주님은 쫓아내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노래하게 될 것입니다.
주 사랑 안에 살면 나 두렴없으며
그 사랑 변함없어 늘 마음 편하다
저 폭풍 몰아쳐서 내 마음 떨려도
주 나의 곁에 계셔 겁낼 것 없어라
주 나의 목자시니 나 부족 없으며
주 인도하는 대로 늘 따라 가리라
그 지혜 나를 깨워 내 앞길 밝히니
나 주의 길을 따라 주 함께 살리라
저 넓고 푸른 동산 내 앞에 열리고
그 검은 구름 걷혀 새 하늘 보인다
끝없는 나의 소망 저 환한 생명길
참 보배되신 주님 늘 함께하소서 아멘
(454장 주 사랑 안에 살면)
어떻게 사랑만 하며 살 수 있는가? /요15:1-17/ 유기성목사
2022-09-23 13:22:50
요 15:1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2 내게 붙어 있으면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잘라버리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시려고 손질하신다. 3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말한 그 말로 말미암아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4 내 안에 머물러 있어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 안에 머물러 있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과 같이, 너희도 내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다. 사람이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가 그 안에 머물러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6 사람이 내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면, 그는 쓸모 없는 가지처럼 버림을 받아서 말라 버린다.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서 태워 버린다. 7 너희가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물러 있으면, 너희가 무엇을 구하든지 다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8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어서 내 제자가 되면, 이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10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것과 같다.
11 내가 너희에게 이러한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게 하고, 또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12 내 계명은 이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13 사람이 자기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14 내가 너희에게 명한 것을 너희가 행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이다. 15 이제부터는 내가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겠다. 종은 그의 주인이 무엇을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들은 모든 것을 너희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운 것이다. 그것은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받게 하려는 것이다. 17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것은 이것이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여라.
코로나19와 전쟁, 폭우와 태풍 등으로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힘을 다하여 이러한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을 도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배고프고 병들고 헐벗는 것보다 더 심각한 것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영적인 궁핍입니다.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계 3:17) 하셨습니다.
그들은 물질적으로는 풍요했지만 영적으로는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었다는 것입니다. 말할 수 없이 궁핍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 안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문 밖에 계셨습니다.
계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이와 같은 영적 궁핍함이 두려운 것은 스스로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배고프거나 몸이 아프면 “도와주세요”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도움을 받습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궁핍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야 깨닫게 됩니다.
저는 이런 그리스도인이 두렵습니다.
싸우고 아무렇지도 않게 예배하고 은밀히 죄지으면서 열심히 교회 봉사를 합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영적 궁핍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주님께서 제자를 부르실 때, “나를 따르라” 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으면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에 대한 정확한 답입니다.
주님만 따라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사는 것은 이처럼 간단하고 쉬운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어느 날 제자들에게 "내 안에 머물러 있으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얼마나 난감하였겠습니까?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제자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따를 것인가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셨으니 제자들은 더 이상 예수님을 따를 수 없게 됩니다.
그때 제자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애쓰게 될 것입니다.
고민하고, 애쓰다가 좌절하고, 낙심하고, 지치고, 두려움과 염려로 가득찰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요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이 말은 예수님이 승천하셨다고 제자들만 남겨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신 후에는 오히려 포도나무와 가지처럼 예수님과 한 몸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지금 우리에게 너무나 중요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 사는 것이 힘듭니다.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은 우리 안에 거하심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믿어지는 사람이 영적으로 충만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열매가 많이 맺힙니다.
감출 수 없는 기쁨으로 사랑만 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기쁨도 없고 사랑하지도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영적 궁핍함이 온 것입니다. 주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것입니다.
요 15:4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과 같이, 너희도 내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고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지를 분별하는 기준이 있습니다. 그것이 성도의 삶의 열매인데 사랑입니다.
:17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것은 이것이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여라.
저는 설교를 준비하면서 사랑에 대한 설교를 너무 많이 하는 것이 아닌가 걱정했었습니다. 그러나 기도 중에 하나님께서 제 마음을 치셨습니다.
사랑에 대하여 너무 적게 설교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제게 물으셨습니다. “교인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었느냐? 사랑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지 교인들이 분명히 아느냐?”
제가 사랑에 대하여 너무 적게 설교했음을 깨달았습니다,
여러분, 제가 사랑에 대하여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랑이 구원의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칭찬받을 일을 많이 했던 에베소 교회가 주님으로부터 “...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 2:5)는 무서운 경고를 들었습니다.
주님은 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까? 처음 사랑을 버렸기 때문입니다.(계 2:4)
그러므로 어떤 일이 있어도 ‘원수를 용서할 수 없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이 안 된다’라고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자신이 예수님과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지 못하면 구원받지 못한다’가 아닙니다.
사랑이 안 되면 속히 예수님과의 관계를 점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예수님처럼 사랑할 수 없어요!”라고 말합니다.
당연한 말입니다. 우리는 결코 예수님처럼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기쁨이 우리 안에 넘쳐흐르게 됩니다.
:11 내가 너희에게 이러한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게 하고, 또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이처럼 예수님의 기쁨으로 충만하니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12 내 계명은 이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 사람을 예수님께서 친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4 내가 너희에게 명한 것을 너희가 행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여러분, 우리에게 닥치는 가장 큰 시험은 가난이나 질병이나 실패가 아닙니다.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이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내 안에 머물라는 말씀을 ‘나의 사랑 안에 머물라’고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10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것과 같다.
송솔나무 집사님이 우리 교회에 와서 간증할 때, 미국 이민을 가서 아버지 사업은 망하고 학교에서 매일 같이 놀림과 구타를 당하여 점심시간이면 화장실에 숨어 지내던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하루는 화장실에 숨어 울며 부르짖을 때, 놀랍게도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너는 내 아들이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화장실에서 나와라!” 하시는 것입니다.
그 순간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신다는 것이 믿어지더랍니다. 화장실에서 나와 학교 강당을 걸어가는데, 학교 악단을 연습시키던 지휘자가 부르더니 악단에 들어오라고 권하더랍니다. 그때까지 음악을 접해본 적이 없었기에 전 같으면 두려워 도망쳤을 텐데 자신 있게 “네”라는 대답이 나왔답니다. 지휘자가 그에게 플루트를 연주하게 하였고 특별한 교육도 받지 못했지만 13살에 뉴욕 시티 줄리아드 음악학교(Juilliard School of Music)의 대학 예비 과정에 지원했습니다. 수억 원을 호가하는 플루트를 가지고 온 지원자도 있었는데 자신의 플루트는 부서진 부분을 테이프로 붙인 중고 플루트였습니다. 심사위원 중 한 사람이 무시하는 말을 했을 정도였습니다.
송솔나무 집사님이 간증할 때, 그 플루트로 연주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줄리아드에서 장학금까지 받고 공부하였습니다. 링컨 센터와 카네기 홀을 비롯한 세계 최고의 공연장에서 공연을 하였습니다. 그는 일본의 도시들에서 많은 무료 콘서트를 열며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로하였고 지금은 우크라이나에서 전쟁 난민들을 위로하고 돕고 있습니다.
송솔나무의 음악이 많은 사람에게 위로가 되고 은혜가 되는 것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려는 욕구에서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아버지 하나님께 사랑받고 있다는 깊은 확신에서 나온 연주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속히 영접 궁핍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것이 살 길입니다.
그것은 포도나무와 가지처럼 예수님과 하나 되었음을 믿는 것입니다.
중국 선교사였던 허드슨 테일러는 좌절과 낙심으로 쓰러졌습니다. 당시 중국 선교 현장의 어려움도 컸지만 더 큰 좌절은 중국 동역자들에 대하여 자꾸 화를 내고 불평하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증거인가, 이렇게 되라고 예수님을 믿으라는 것인가, 그래서 좌절하였습니다. 허드슨 테일러가 그 낙망에서 다시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이 요 15:5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결코 자신을 떠나지 않으실 뿐 아니라 자신이 이미 포도나무와 가지처럼 주님과 한 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그 사실을 믿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믿었습니다. 그 말은 더 이상 염려하지 않기로 한 것입니다,
그후 어느 곳에서 어떻게 지내더라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장사되었으며, 또한 부활하였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허드슨 테일러가 중국 대륙에 복음의 씨앗이 된 것입니다.
저는 목사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하나님이 사랑이시고 우리의 좋으신 아버지라는 사실을 성경에서 읽었고 설교를 통하여 수도 없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저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이 없었습니다.
늘 교회에서 살았지만 영적으로는 궁핍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24시간 주님을 바라보기를 힘쓰면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이 달라졌습니다. 저는 성격도 까칠하고 잘하는 것도 없고 열등감이 많았지만 하나님께서 저를 사랑하신다는 것이 믿어졌습니다. 주님이 제 안에 계시니까요! 그래서 좌절과 낙심, 열등감에서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사랑하신다는 것이 믿어지니 저도 저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늘 꼬리표처럼 따라 다니던 “멍청이”나 “실패작”, “가짜”, “못난이”, “무가치한 자”, “추악한 자”, “패자”라는 생각이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도 그렇게 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머무는 것이 어렵다”는 이가 있습니다,
여러분, 앉아 있는 것이 얼마나 쉽습니까? 그것이 예수님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아무리 속상한 일이 있고, 힘들고 답답하고 두려워도 “하나님, 나를 사랑하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받아들일게요. 감사해요.” “예수님,, 충분합니다.”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의 생명의 역사, 사랑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번 호주 집회는 너무나 일정이 빠듯하여 아침 일찍 숙소를 나가 밤늦게 들어와 일기를 쓰고 쓰러지는 날이 계속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슴이 철렁했던 적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눈 밑이 찢어져 피가 흐르고 안경이 부러져 두 번이나 안경 없이 말씀을 전해야 했었고 강사이신 김승회 목사님이 건강상 어려움으로 갑자기 귀국하셔야 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런 중에도 은혜는 그 어느 때보다 컸었습니다. 무엇보다 제 안에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너무나 분명하였습니다.
주님을 바라보며 살았던 지난 12년의 열매였습니다.
존 하이드는 관계에 문제가 생기면 무조건 기도했다고 합니다,
‘십자가의 사랑이 마음속에서부터 흘러넘치기 까지’
이렇게 하면 사랑하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손양원 목사님께서 원수도 사랑하신 것은 그분이 성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을 정말 믿고 주님 안에 거하니 주님께서 사랑하게 해주신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데 우리가 그렇게 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동행일기는 예수님께서 포도나무요 나는 가지임을 믿고 예수님 안에 거하는 삶을 계속 살기 위해서 쓰는 것입니다.
그러면 ‘원수도 사랑하라’가 아닙니다. ‘원수도 사랑하게 될 것이라’ 입니다.
♬ 주님 내 안에 (언제나 내 모습)
열매 /요15:16-17/ 이동원 목사
2014-11-29 09:01:17
가을이 오면 제 머리에 어김없이 떠오르는 시 한편이 있습니다. 고 김 현승 시인의 <가을의 기도>입니다.
“가을에는/기도하게 하소서/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가을에는/사랑하게 하소서/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시간을 가꾸게 하소서-가을에는/호올로 있게 하소서/나의 영혼/굽이치는 바다와/백합의 골짜기를 지나/마른 나뭇가지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가을에 열매로 가득한 수확의 황금 들판을 바라보는 것은 삶의 환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당연히 열매를 맺어야 할 계절-열매 없이 버려진 황량한 들판을 바라보는 것은 애잔한 슬픔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정녕 우리의 삶은 오늘 어떤 열매를 맺고 있을까요?
오늘의 본문 요한복음 15장은 소위 포도나무 비유의 장으로 불리워집니다. 포도나무 가지와 같은 우리가 포도나무이신 주님께 붙어 있을 때 당연히 맺어야 할 열매를 교훈하는 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5장 1절의 메시지를 이렇게 시작하십니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5절을 보십시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종교 개혁자 칼빈은 이 말씀에묘사된 주님이 우리 안에, 우리가 주님 안에 막힘없이 거함의 상태를 가르쳐 ‘신비적인 연합’(mystical )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실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의 삶의 주인되신 주님과 우리의 관계는 지상의 어떤 관계보다도 신비한 연합의 관계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순간부터 우리는 이 신비한 교제 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제의 성격은 신비한 것이지만(교제의 대상이신 주님의 신비성 때문에) 교제의 결과는 결코 신비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분명한 열매로 드러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부부의 사랑의 관계를 생각해 보십시오. 부부 관계는 신비로운 관계이지만 이 관계의 결과는 삶의 현장에서 분명하게 드러날 수 밖
에 없지 않습니까?
예컨대 부부사이에 자녀가 생기고 어떤 특성을 갖는 가정을 이루어 가는 결과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부부 관계의 열매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문은 바로 이런 열매 맺음의 인생의 비밀을 가르칩니다.
*바람직한 열매 맺음의 인생을 살기 위해 우리가 기억할 것은 무엇일까요?
1. 열매는 믿는 자의 존재의 이유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본문 16절을 읽겠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무슨 말씀입니까?
주께서 우리를 선택하여 예수 믿게 하신 이유가 열매 맺는 삶을 위해서 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제 그리스도인된 나의 존재 이유는 열매를 위해서 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우리는 존재 이유를 상실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복음 15장에서 열매를 맺지 못한 다면 어떻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까? 15:2을 읽겠습니다.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우리는 이 말씀에서 열매 맺지 못하는 나를 제거하실지 모른다는 무시무시한 하나님의 심판을 연상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심판의 경고가 아닌 열매 맺음을 촉구하는 간절한 권면일 따름입니다.
<열린다 성경>의 저자 류모세 선교사는 여기 <제거한다>는 말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포도나무의 특징은 길게 뻗어나가는 가지에 있는데 오늘 날은 Y자 철사를 설치하여 가지가 올라가며 원없이 자라게 하지만 옛날 예수님 당시의 재배법은 달랐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철사가 귀했기 때문에 포도가지는 뱀처럼 땅을 기어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땅에 닿은 포도 가지는 열매를 맺을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기에는 땅에 닿은 부분이 습기로 인해 썩고 건기에는 본 뿌리에 가지를 내리지 못해서 영양분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서시대의 농부들은 땅 바닥에 닿아 과실을 맺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가지를 <들어 주어>밑에 돌을 괴어 주는 장치를 함으로 과실을 잘 맺도록 했다고 합니다. 반면 잘 과실을 맺는 가지는 잔 가지를 쳐주는 작업을 함으로 자잘한 포도 열매가 아닌 극상품의 포도 열매를 맺게 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제거한다>는 말의 원어 아이로(airo)는 영어로 말하면 ‘들어올린다’(lift up)의 의미라고 말합니다.
본문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주님은 연약한 우리가 열매를 맺도록 끊임없이 우리를 들어 올리시며 내 인생의 잔가지를 만지시며 지금도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오직 한가지 그분의 우리를 향한 소망-우리가 열매 맺는 것을 보고 싶어하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선택하신 이유, 곧 우리의 존재이유이기 때문입니다.
2. 가장 중요한 열매는 ‘이웃 사랑’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문제는 이 열매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본문 요한복음 15장엔 몇 가지의 의미로 이 열매가 설명됩니다. 사랑과 기쁨으로 사신 그리스도를 닮는 인격적인 품성의 열매(10-11절) 혹은 본문 16절의 말씀처럼 ‘기도 응답의 열매’(7절,16절)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열매는 이웃 사랑입니다. 17절 말씀이 그것을 분명하게 가르치지 않습니까.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이미 요한 13:34에서는 그것을 새
계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이 사랑에는 수고와 땀 흘림이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 포도나무 가지를 들어 올리고 잔가지를 손질하는 과정에서도 적지 않은 농부의수고와 땀 흘림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이런 사랑의 수고없이 열매는 맺어지지 않습니다. 이번 우리 교회 이웃 사랑 축제는 단순히 전도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연습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목숨까지 내어 주신 희생, 그 희생으로 우리가 구원받은 자들이라면 우리는 그 사랑의 빚진 자들입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예견하시면서 이미 요한 12:24에서
주셨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그분의 땅에 떨어지심, 그분의 희생과 죽음, 그로 말미암아 오늘 무수한 성도들이 열방 중에 이 주일도 그분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죽음까지는 아니더라도 ,목숨까지 내어 놓는 희생은 아니더라도,
내 이웃들과 함께 하여 주님의 사랑을 나누고 그들로 복음을 듣게 하는 가장 적은 수고를 주저하시겠습니까? 사랑의 길에는 때로는 눈물이 때로는 고통이 때로는 깨어짐이 있지만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성숙하고 우리는 마침내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3. 이웃 사랑의 열매는 결국 ‘그리스도 증언’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는 방식은 실로 다양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 전도는 가장 위대한 이웃 사랑의 방법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장 좋은 것을 선물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이웃들에게 줄수 있는 선물 중 그리스도보다 더 위대하고 더 좋은 선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무엇을 우리에게 주셨습니까? 예,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면 그 그리스도를 이웃들에게 증거하여 우리 이웃들로 하여금 구원받고 영생을 얻게 하는 일-그보다 더 위대한 사랑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래서 요한 복음 15장 이 열매의 장은 앞으로 성령이 오시면 그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증언하게 되리라고 그리고 나와 함께 있었던 너희들도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이 그리스도를 증언하게 되리라는 말씀으로 마무리 됩니다.
본문 26-27의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내실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27)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음으로 증언하느니라
” 누구를 증언합니까? 예,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그와 함께 해 보니 요한의 증언처럼 우리가 그를 경험해 보니 그는 정녕 사랑이셨습니다. 우리가 그를 경험해 보니 그는 정녕 기쁨이셨습니다. 우리가 그를 경험해 보니 그는 정녕 평화이셨습니다. 우리가 그를 경험해 보니 그는 정녕 생명이셨습니다.
우리가 그를 경험해 보니 그는 정녕 희망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증언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이웃 사랑 축제의 마당을 준비한 것입니다.
도대체 이런 전도로 어떤 일이 일어나겠느냐고 아직도 묻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혹시 <개구리 왕자>라는 동화를 기억하십니까? 옛날 한 임금님에게 귀여운 공주 딸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녀는 숲 근처 연못에서 금으로 된 공을 가지고 놀다가 실수로 공을 연못에 빠트렸습니다.
그때 개구리 한 마리가 연못에 등장하여 내가 그 공을 찾아 줄 터이니 나하고 함께 식사하고 키스를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공주는 그것을 약속합니다. 공주는 개구리의 도움으로 잃어버린 공을 찾았지만 약속을 무시하고 궁궐도 돌아옵니다.
개구리가 궁궐 문을 녹크하자 임금님도 이 사실을 알게 되고 공주에게 약속은 지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공주는 하는 수 없이 개구리와 식사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개구리가 키스까지 요구하자 징그럽다고 개구리를 잡아 벽으로 던집니다.
그러자 개구리가 움직이지를 않습니다. 당황하고 미안한 생각이 든 공주가 축 늘어진 개구리에게 눈물을 흘리며 키스를 하는 순간 못 생긴 개구리가 한 순간 잘 생긴 왕자로 변신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전도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축 늘어진 개구리처럼 삶의 의욕을 잃고 무엇인가를 찾고 있는 이웃들을 긍휼히 여겨 그들의 영혼에 키스를 해주는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죄인들의 영혼에 키스를 해주는 순간-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로 딸로 하나님의 왕자와 공주로 태어나게 되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월트 디즈니에서는 새로운 버전의 <개구리 왕자>를 만들고 있다고 하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공주가 개구리에게 키스를 하는 순간 개구리가 왕자로 변신하는 것이 아니라, 공주가 개구리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전도를 잘 못할 때 일어나는 전형적인 케이스라고 생각합니다. 전도를 잘 못하면 우리가 이웃을 감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웃의 세속성과 불신앙을 오히려 거꾸로 닮게 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이슬람권에 선교사로 갔던 자매가 이슬람이 되어 이슬람 남편과 결혼한 케이스를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도하기 전 우리는 분명한 자신의 정체성을 확신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그리스도안에서만 진정한 삶의 의미가 있다는 확신말입니다. 그리스도만이 우리 인생의 유일한 해답이라는 확신 말입니다.
저는 전도를 생각할 때마다 지난 주간에 돌아가신 CCC 김준곤 목사님의 <백문 일답>이 떠 오릅니다. 우리가 무슨 질문을 하던 대답은 하나라는 확신말입니다. 한번 해 볼까요? 자, 제가 무슨 질문을 하던 대답은 하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민족의 소망은 누구입니까? 우리 가정의 소망은 누구입니까? 우리 친구들의 소망은 누구입니까?
우리 역사의 소망은 누구입니까? 우리가 평생을 걸고 전해야 할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앞으로 두 주간 우리의 사랑하는 이웃들을 우리는 누구에게로 데려와야 합니까?
우리가 두 주간 우리의 사랑하는 이웃들에게 나누어야 할 최고의 선물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우리 인생의 유일한 해답이신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가슴 벅찬 열매의 계절을 누리십시다.
우정의 의미 /요15:13-17/ 이동원목사
2014-12-05 20:58:41
귀한 찬양 감사 드립니다.
최근에 극장가에는 아주 그 이상 기류 하나가 흐르고 있다고 그럽니다. 과거에 수입 영화가 아니면 흥행이 안되던 그런 신화를 깨고, 우리 한국 사람들이 만든 국산영화가 허리우드 영화를 압도하는 그런 이상 기류가 나타나고 있다고 그럽니다.
그 이유를 분석하는 전문가들의 견해는 다양하게 엇갈리고 있지만, 공통된 지적 가운데 하나는, 최근 히트하고 있는 방화들이 대부분 한국인들의 소위 바닥 정서, 우리가 잃어버려가고 있지만 잠재되어 있는 어떤 정사적 갈망들을 자극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런 대표적인 작품이 ‘친구” 라든지 혹은 뭐 “신라의 달밤” 그런 영화들이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 사실 두 영화가 작품성에 있어서는 별것 아니지만 그렇게 많은 관객동원에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원인은 그 대중들에게 어필하는 어떤 정서적 공감대가 있었다, 이 사실을 우리는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 정서적 공감대의 정체는 한마디로 말하면 그 순수한 친구에 대한 갈망, 어떤 우정에 대한 인간의 마음속에 잠재된 갈망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옛날부터 그 친구를 한문으로 지기(知己)라고 불러왔습니다.
지금 많이 그 말을 쓰지는 않죠. 지기(知己), 그 알 지(知)자에다가 자기 할 때 기(己)자, 그래서 나를 알아주는 사람, 나와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할 수 있는, 그리고 내 마음을 이해 줄 수 있는 사람, 이런 친구를 내 인생에서 갖는 다는 것은 분명한 행복의 요소가 아닐 수가 없습니다. 이런 친구를 일찍이 어려서 부터 갖고 있을수록, 또 그런 친구가 주변에 여러 사람 있을수록, 우리 인간의 행복지수는 높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친구들을 우리는 예로부터 “죽마고우”다 이렇게 불러왔죠? 죽마고우.
어떤 사람은 죽마고우를 “죽, 죽치고 마주앉아 고스톱 치는 우정의 친구” 라고 그렇게 부르는 사람도 있더라구요.
예수님께서는 3년 동안 제자들과 슬픔과 기쁨을 같이 하시고 또 삶에 여러가지 교훈들을 같이 나누시는 생애를 살아오시다가 그 3년의 거의 끝 자락, 마지막 부분에 제자들을 모아놓고 다락방에서 마지막 유훈 같은 교훈을 남기셨습니다. 우리가 이 교훈을 가리켜서 소위 다락방 감화다 이렇게 말하는데 요한복음13장에서부터16장까지가 바로 이 다락방 감화에 속합니다.
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에 제자들을 모아놓고 다락방에서 마지막으로 남기시는 이 교훈 가운데 한 대목은 제자들에게 아마 깊은 충격을 주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한참 교훈을 베푸시다가 갑자기 예수께서 제자들을 돌아보시면서 오늘 본문에서 하신 말씀인데 너희들은 이제부터 나에게 있어서는 종과 같은 존재가 아니다, 너희들은 내 친구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들은 내 친구라고.
유대의 문화적 정서는 한국과 대단히 흡사합니다. 그래서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거의 주인과 종의 관계에 비교될 수 있는 과거의 그런 정서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친구라니, 스승 편에 서 있는 사람이 갑자기 말하기를 이제부터 그대들은 나의 친구라, 이 말은 제자들을 얼마나 놀라게 만들었을까요?
도대체 친구란 무엇일까요? 저는 오늘 친구나 소위 우정의 의미를 정의하고자 시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차라리 이 친구라는 것이 어떻게 만들어 지는지, 소위 우정이라는 것이 가지고 있는 구조, 우정이 형성되는 단계를 주목해 보고자 합니다. 그 단계 속에서 나타나는 우정이라는 의미를 함께 나누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런 우정이 형성되는 단계에 관해서 매우 의미 깊은 그런 교훈들이 우리에게 던져지고 있습니다. 우정이 형성되는 그 단계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첫째로 “우정은 선택으로 시작된다” 이렇게 오늘 본문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정은 선택으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생을 통해서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일생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다 우리의 친구가 되는 것은 아니지요. 오직 몇 사람만이 그 중에 나의 친구가 됩니다. 이렇게 선택된 친구들은 우리 인생의 길을 통해서 매우 중요한 영향을 주기도하고 받기도 합니다.
그래서 서양의 그 속담처럼 전해지는 명언가운데 본래 세르반테스가 이 말을 처음 했다고 전해집니다마는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알기를 원한다면 친구를 보라” 그가 어떤 사람인가 알기를 원한다면 친구를 보라, 이런 말이 생겼습니다.
일생을 통해서 우리는 많은 선택을 합니다. 아마도 가장 중요한 선택이 있다면 그것은 구원을 위해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는 것, 그를 구주와 주님으로 선택하는 것, 그것은 영원한 운명을 좌우하는 선택이 되겠죠.
저는 인생에서 그 다음으로 중요한 선택이 있다면 배우자의 선택이라고 생각해요. 일생을 함께하는 내 아내, 내 남편을 선택하는 선택처럼 중요한 선택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우정의 선택, 혹은 친구의 선택은 아마도 그 다음쯤 오는 인생의 중요한 선택일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자,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친구를 선택해야 할까요? 이 선택의 성경적 가이드 라인이 있을까요?
저는 오늘 본문에서 그 지침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을 하는데요,
자! 예수님이 뜻밖에 그 제자들에게, 12명으로 선택했던 당신의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내 친구야!”이렇게 말씀 하시면서 16절에서 매우 의미 있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16절에 보시면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뭐에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운 것이다” 이렇게 해서 친구가 된 것이다.
물론 이 말씀의 중요한 뜻은 구원이라는 것은 인간 편에서 시도된 그 무엇이기에 앞서서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와 간섭에 근거한 것이다. 물론 그것을 강조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말씀이 우리의 우정의 선택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어떤 사람은 친구가 없다고 불평을 합니다. 친구가 어느날 갑자기 내 일생 속에 나타나기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적용해 보자면, 친구란 어느날 갑자기 인생 속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누군가를 선택함으로써 친구가 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어떤 사람에게 친구가 되어줌으로써, 오히려 우리가 친구의 관계 속에 적극적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교훈하지 않습니까? 내가 어떤 사람을 선택한다면 왜 선택할까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12제자를 친구로 선택하신 어떤 동기를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자 다시 읽어보시면 16절에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다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운 것이다 그 이유는 너희로 가서, 그 다음에 뭘 맺게 할려고? “과실을 맺게 할려고” 또 그 과실이 항상 있게 할려고,
자, 예수님이 12명의 제자를 자기의 제자로, 그리고 친구로 선택하신 그 중요한 의도는 어디에 있느냐? “열매를 맺기 위해서다” 그들의 삶이 열매로 풍성하도록, 그리고 그 열매가 항상 있는 삶을 보고파서 예수께서 그 제자들을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그 제자들을 친구로 선택함으로 자신이 어떤 이익을 얻기 위해서 친구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만약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무엇을 얻기 위해서만 친구를 선택한다면 그 우정은 이기심에 근거한 상대방을 이용하고 조작하려는 의도가 숨어있는 선택일 수가 있습니다. 그런 선택이 순수한 우정으로 발전하기는 어렵겠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상대방의 삶 속에 그분이 축복이 되어주기 위해서, 그래서 상대방의 삶이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것들로 풍성한 것을 보기위해서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상대방의 삶에 축복이 되어주기 위한 선택,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우리 주변의 어떤 사람을 접근해서 우정을 형성하려고 할 때 주님에게 배울 수 있는 아름다운 우정의 선택의 모습이 아닌가요? 무엇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덕을 보기원해서가 아니라 내가 저 사람의 인생 속에 축복이 되어주기 위해서 내가 그들의 친구가 되겠다. .
마치 저 유명한 하바드와 예일의 교수였던“헨리 나우웬”이 캐나다의 토론토 근처의 데이브레이크라는 작은 공동체의 장애인들과 더불어 그 속에 살기위해서 갈 때 그들을 자기의 친구로 삼기 위해서, 그들의 인생 속에 축복이 되어주기 위해서 선택한 그 길은 얼마나 의미 있는 우정의 선택이 였을까요? 우리가 이런 동기로 나선다면 우리들의 우정의 모습은 얼마나 달라질까요? 참된 우정, 그것은 선택으로 시작됩니다. 오늘 본문은 그것을 가르칩니다.
두 번째로 한걸음 더 나아가서 “우정은 나눔으로 자라가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이것이 우정의 두 번째 단계에요. 우정이 형성되는 두 번째 단계, 우정은 나눔으로 서만 자라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친구를 한번 만나고 내가 당신 친구가 되고싶다 라는 선언,
혹은 우리 친구가 됩시다 라는 어떤 약속, 혹은 어떤 결단만으로 그것이 순수한 우정으로 발전해 가는 것은 아니죠. 우리가 만났던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단 한번의 만남으로 그 다음엔 별 의미 없이 우리의 기억의 스크린 저 건너편으로 사라진 관계들이 얼마나 많이 있었습니까? 우리의 만남이 진솔한 우정으로 발전해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나눔이라는 하나의 과정이 소위 프로세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나눔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우리의 속 깊은 내면을 열어서 상대방에게 보여주는 비밀을 나눌 수 있는 나눔 이여야 합니다. 이 비밀을 나누지 않고 우정은 깊이 있는 우정으로 발전해 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살았던 이 시대에 아주 굉장히 크다란 기독교적 영향력을 끼쳤던 상담자요 또 심리학자요 의사 가운데 “폴 투리니에”라는 분이 계시죠? 제가 자주 인용하는 분인데 폴 투리니에 는 그 비밀에 관리를 중심으로한 인간 성숙의 발달의 단계를 세 단계로 나누었어요.
첫 단계는 뭐냐하면 어린이의 삶의 단계, 그 아이들에게는 비밀을 간직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어린이의 특성입니다. 비밀을 절대로 간직할 수가 없어요. 아빠 이건 비밀이야! 해놓고 그 다음에 금새 그 비밀을 말해 버립니다. 어린아이들은 비밀을 간직하거나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물론 어른 가운데서도 그런 사람이 가끔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어른 아리라고 말합니다. 그건 어른 아이에요. 그러나 이런 어린 아이들이 사춘기가 되면 틴에이져의 그 단계가 되면은 달라져요. 소위 비밀을 갖기 시작합니다. 사춘기의 특성 가운데 하나는 비밀을 갖기 시작하는 나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갑자기 부모에게 얘기 안하고 비밀이 생겨요. 어쩌면 이것은 당연한 발전 단계의 한 모습이라고 할 수가 있겠죠.
그러나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에요. 사춘기에 들어선 우리의 자녀들은 비밀을 간직하면서 그 비밀을 나눌 수 있는 친구를 찾기 시작합니다. 이때 좋은 친구를 갖게 되면 건강한 발전이 이루어지고 또 그렇지 못하면 매우 불안한 성장이 이루어질 수도 있는 거죠.
자, 그 단계를 넘어서면 세 번째, 성인이 됩니다. 이 성숙한 성인의 단계에 있어서는 자기의 비밀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부부가 돼요. 저는 부부의 정의 가운데 하나가 비밀을 나눌 수 있는 친구의 발견이라고 생각해요. 내 약점도 나누고 아픔도 나누고 좌절도 나누고 실패도 나눌 수 있는 관계, 이것이 부부관계가 아니에요? 특별한 친구죠.
그러나 심리학자들은 이런 이성 배우자 만으로 우리의 마음속에는 채워지지 않는 어떤 공간이 있는데 이 공간을 채우기 위해서는 자기 동성관계의 건강한 친구가 필요하다고 지적합니다. 그런 친구들을 통해서, 또 우리는 그 배우자와 함께 건강한 배우자와 함께 건강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인격의 형성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여러분에게 그런 친구가 있습니까?
아주 흥미로운 사실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나 친구라고 말하는 이 시점을 우리는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본문의 15절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우리 15절을 같이 한번 읽겠습니다. 15절 다같이 시작,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오늘 이 말씀이 “이제부터” 라는 단어로 시작되는 것을 주목해 보세요. 이제부터는, 내가 너희를 종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친구로 삼겠다. 또 그 이유는 내가 아버지께 들은 모든 것을 너희에게 알게 하였고 이제 알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예수님이 12제자를 선택한 그 직후부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소위 비밀을 말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가 이땅에 오신 이유,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 인자가 되어 이땅에 오신 성육신의 비밀들을 나누기 시작했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 생애에 거의 마지막 끝자리 단계에 와서 비로소 가장 중요한 비밀인 십자가의 비밀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조금 있으면 그분이 죽으러 간다고,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고, 십자가의 엄청난 비밀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정말 깊은 친구, 피상적인 친구가 아니라 깊이 있게 삶을 나누는 친구는 비밀을 말할 수 있는 친구잖아요. 예수님은 지금 그 비밀을 말하고 있는 거에요. 우리가 비밀을 말할 수가 있다라는 것은 중요한 하나의 전제가 있습니다. 그 전제는 뭡니까? 신뢰에요.
신뢰의 관계가 없이는 아무도 비밀을 말하지 않죠. 비밀을 말했다가는 큰일 나잖아요.
그런데 신뢰 할만하다! 라는 어떤 수준에 도달하면 우리는 비밀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때 진짜 친구가 되는 거에요. 나만이 가지고 있는 어떤 약점, 내 인생의 실패, 내가 숨기고 있는 내 인생의 갈등, 이런 속 깊은 자기의 내면을 열기 시작할 때 우리는 정말 친구가 되는 것이에요.
어디에서 이런 친구를 구할 수가 있을까요?
저는 교회라는 공동체야 말로 우리가 좋은 신앙의 친구를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이 주신 마당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주일날 예배만 왔다 갔다 해 갖고는 그런 친구를 얻을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 교회가 내년부터 굉장히 중요한 목표를 삼고있는 Cell Church화 하자! 이런 운동을 지금 우리 사역자들이 진지하게 연구하고 있어요. 소그룹에 들어가야 돼요. 소그룹에. 마을 목장이라든지. 혹은 형제 선교회, 자매선교회 우리들의 작은 바이블 스타디의 그룹이, 소그룹에 들어가게 되면, 비로소 그 작은 그룹 안에서 우리가 마음을 열 수가 있잖아요. 그것도 쉽게 열지는 않지요.
믿을 만하다, 그러면 그 시점부터 열기 시작합니다. 내가 내 속에 있는 것을 내어 놓아도 내가 비판되지 않고 오히려 이해 될 수 있다, 이것을 확신할 때 우리는 우리 속에 있는 내면의 비밀한 것들을 나누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친구가 되는 거에요. 그때 치유가 일어나요 우리 안에. 건강한 삶이 형성됩니다.
전 교회 나와도 사람들이 변하지 않는 이유, 이런 나눔의 마당을 갖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내년부터 우리 교회에서, 만약 여러분이 그냥 주일날 예배만 왔다 갔다 하고 소그룹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러면 인간취급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이 변화를 위해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나눔이 없이는 안돼요. 이런 나눔이 없이는. 우리가 자기의 마음을 오픈 하지 못할 때, 열지 못할 때 사람은 더 외로워지고 더 깊은 병에 걸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근대 인류 역사에 있어서 저는 가장 불행했던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아돌프 히틀러”가 아닐까 생각해요. 유태인 600만 명을 죽이는 그런 참극의 주인공이 였던 아돌프 히틀러. 그런데 한 히틀러의 전기 작가는 그의 불행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아돌프 히틀러의 불행은 친구가 없었던 불행 이였다” 친구가 없었던 불행 이였다.
한 전기 작가가 그의 전기를 쓰기 위해서 사람들을 만났어요. 히틀러의 친구 될만한 사람이 있느냐? 꼭 한 사람을 발견했어요. 어렸을 때부터 같이 아주 가까이 지내던 사람, 그래서 히틀러는 이 사람을 매우 중용했습니다. 군수물자의 책임을 지는 사람으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하고 인터뷰하고 얘기를 했는데 뜻밖에도 그는 이런 얘기를 나중에 남기게 됩니다.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제가 그대로 읽겠습니다. “그에게” 이것은 친구가 한 얘기에요. 그 “엘버트 스피어”라는 히틀러하고 어린시절을 함께 보내었고 나중에 같이 내각의 참모로 일했던 그 엘버트 스피어 라는 사람이 한 얘기입니다. 그대로 제가 읽겠습니다.
“그에게 즉 히틀러 에게 단 한명의 친구가 있을 수 있었다면 그것은 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즉 히틀러는 환상가였고 자신의 카리스마에만 몰두했을 뿐 이였다. 그는 우정에 반응할 줄 모르는 사람이였다. 그는 본성적으로 우정을 거부하였고, 매사에 우리와 공감할 수 있는 것을 의도적으로 그는 피했다. 심지어 그는 우리와 더불어 함께 체리 열매를 먹으며 즐거워 하는 것 조차도, 그는 거부했다. 우리 모두는 단지 그의 거대한 에고의 투사체에 불과했다. 이 우정을 거부했던 사람, 이것이 바로 히틀러 의 불행 이였다” 라고 그는 지적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나눔이 정말 건강한 우정으로 발전 하기 위해서는 내면을 열기 시작해야 돼요. 우리 속을 열기 시작해야 돼요. 이러한 비밀을 나누는 우리의 속 깊은 내면을 열어 보이기 시작할 때, 우리의 우정은 깊은 의미의 우정으로 피상적인 우정이 아니라, 정말 깊은 우정으로 자라갈수가 있다 라고 성경을 가르칩니다.
지금 예수님이 그 얘기를 나누고 있어요. 나는 하나님 아버지의 모든 비밀을 너희들과 나누겠다, 왜냐하면 너희들은 내 친구이기 때문이야.
우정, 우정의 두 번째 단계. 그래서 우정은 나눔을 통해서만 자라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세번째로 “우정이라는 것은 순종함으로 강화될 수 있는 것”이라고 본문은 가르칩니다. 저는 이것을 우정의 세번째 단계라고 말하고 싶어요.
우정이 형성되는 세번째 단계, 우리는 서로 피차에 순종함으로 그 우정을 강화 시킬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를 신뢰할 수가 있다면 서로를 따라갈 수가 있어야지요. 안 그렇습니까? 신뢰하는데 안 따라갈 수가 있습니까? 우리가 상대방을 믿을 수가 있다면 우리는 따라갈 수가 있습니다. 함께 할 수가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야말로 순종의 의미라고 생각해요.
오늘 14절에 본문에 보시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 어떻게 말씀하세요?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저는 이 말씀이, 주님이 지금 제자들에게 너희들이 친구이기 때문에 내 말을 무조건 따라야 한다, 순종을 강요하고 있는 대목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저는 이 말씀을 그렇게 해석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그 분의 말씀 앞에, 아니 그분에게 제자들이 순종함으로써 그 분 자신이 아니라 그 분을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룰 수 있다 라는 것을 지금 제자들에게 설득하고 있는 것 이에요.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운명 공동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기 시작한 순간부터 우리는 동일한 가치관과 세계관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일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운명을 함께 할 수 있는 자라까지 나갈 수가 있어야 되겠죠.
그렇다면 거기서 필요한 것은 이제 주님이 주신 그 말씀 앞에 순종함으로서 함께 인생의 길을 같이 걸어 갈려는 진지한 노력이 요청되지 않겠습니까?
현대 선교회에 매우 중요한 발자취를 남긴 사람가운데 한 사람은 중국내지 선교회에 소속해 있던 아마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 허드슨 테일러가 영국으로부터 중국에 파견된 다음에 얼마 되지 않아서 몇 년이 지난 후에 그의 생애 가운데 아주 커다란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갈림길이 찾아왔습니다. 이분은 의욕적인 선교사였기 때문에 여러 가지 개척적인 선교의 프로젝트들을 시행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빨리 가다가 보니까 선교 본부와 이견이 생겼어요. 이견이 충돌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선교 본부에서 드디어 경고장 하나가 날라 왔습니다.
선교 본부를 탈퇴하던가 아니면 지금까지 하던 모든 프로젝트를 중단하고 순종하던가 선택하라!
그래서 그 통지를 받고 허드슨 테일러는 아주 깊은 절망 속에 빠졌습니다.
거의 같은 때에 허드슨 테일러는 또 편지 한 장을 받습니다. 그 편지는 뭐냐하면 영국에 있던 자기 애인으로부터 날아온 편지에요. 그런데 허드슨 테일러가 너무나 모험적인 라이프 스타일을 삶을 살기 때문에 이런 사람과 내 일생을 같이 할 수가 있을까 불안해 졌어요. 그래서 우리 교제 그만하자고, 절교하는 편지가 날라 왔어요. 그래서 허드슨 테일러가 아주 깊은 낙심과 절망 속에 빠졌습니다. 그는 선교를 포기하고 싶었고 심지어는 인생을 포기하고 싶은 유혹까지 그때 받았다고 술회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허드슨 테일러를 건질 수가 있었던 것은 그가 그 위기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 곁에 친구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친구는 놀랍게도 나이가 20살이나 많은 사람 이였어요. 선교사 였는데 스코트랜드 출신에 윌리암 번스라는 20살 많은 그런 선교사가 그 분 곁에 있었습니다. 이분은 허드슨 테일러를 가만히 보니까 허드슨 테일러가 굉장히 아주 가능성이 많은, 포텐셜(potential)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허드슨 테일러를 좋아했고,
자기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이 였지만 허드슨 테일러를 열심히 따라 다녔습니다. 이 윌리암 번스가 이 절망과 낙담 속에 빠진 허드슨 테일러에게 이런 제안을 합니다. “아주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리고 나와 같이 여행을 떠나자!” 그래서 여행을 떠나요. 무려 7개월 간의 중국 여행을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중국의 여기저기를 돌아보고 쉬기도 하고 또 같이 사역하기도 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됩니다. 그러면서 허드슨 테일러는 다시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이 윌리엄 번스라는 이 20살이나 많은 친구를 자처했던 이 사람은 허드슨 테일러에게 그 여행하는 기간동안에 7개월간 계속해서 말한 것이 두 가지 말이 였다고 그래요.
하나는 뭐냐하면 “나는 자네를 믿네” 나는 자네를 믿네, 또 하나는 “나는 말이야 자네를 따라 갈거야” 나는 당신을 믿소! “I trust you” 그리고 나는 당신을 따라가겠네. 이 두 마디 말이 허드슨 테일러를 회복시키는 길에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만약 허드슨 테일러 에게 그 친구가 없었더라면 그는 결정적인 인생의 위기를 결코 극복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나중에 허드슨 테일러는 그런 회고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물론 예수님과 나 사이에 관계에 있어서는 그분에게 어느 정도 절대적인 순종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사이의 관계, 우정에 있어서도 이런 절대적 순종이 가능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못할지도 모르죠. 저는 결코 순종이라는 단어를 쓴다고 그래서 우리가 친구에게 맹목적 순종을 해야 한다 라고 여러분에게 말씀 드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친구 사이에도 의견을 달리할 수 있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때라도 순종하지 못할 상황 속에라도 순종의 태도는 여전히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순종할려는 태도, 나는 자네를 따라갈 수 있다는 태도.
비록 어떤 의견에 우리가 온전한 일치를 보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사실 순종이라는 단어가 가진 중요한 핵심은 어떤 의견에 대한 100%의 합의만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순종이라는 희랍어 단어에 어근(語根)은 본래 듣는다는 단어에서부터 나왔다고 그럽니다. 듣는다
우리가 어떤 사람의 얘기를 잘 귀를 기울여 경청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나는 당신을 존중합니다라는 멧세지를 보내는 것 아니에요? 그래서 우리가 잘 들어 주는 거에요. 어떤 경우에 내 얘기를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우리는 얼마나 외로운 삶을 살고있습니까? 친구는 내 얘기에 귀를 기울여 경청해 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윌리엄 번스는 허드슨 테일러의 모든 결정에 대해서 100% 그것을 찬성하고 동의한 것은 아닙니다. 자세히 그 자서전을 읽어보면 나중에 그 여행, 7개월간의 여행을 통해서 많은 허드슨 테일러의 잘못 생각했던 것들을 교정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윌리엄 번스와 대화를 하면서.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것 이에요. 친구를 교정 시키기 전에 윌리엄 번스는 외롭고 혼란 되어 있었던 친구에게 진지하게 귀를 기울여 줄 수가 있었다는 사실 이에요.
오늘 우리에게는 얼마큼 이렇게 아무도 나를 믿어주지 않는 상황 속에서 나를 신뢰하고 그리고 내게 귀를 기울여 줄 수 있는 친구들이 우리 곁에 있을까요? 저는 이것이 순종의 첫번째 스텝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이런 신뢰와 순종을 통해서만 우리들의 우정은 비로소 견고해질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마지막으로 우정의 네번째 스텝이 있다면 “우정은 희생으로 완성된다는 사실입니다” 우정은 희생으로 완성됩니다. 저는 이것이 우정의 마지막 완성의 단계라고 생각을해요. 우리가 지속적인 우정의 교류는 우리들의 우정을 마침내 아가페적 사랑의 단계까지 승화 시킬 수가 있어야 한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저는 이것이 우정의 구조이고 모든 진지한 우정이 마침내 도달해야 할 마지막 단계라고 생각합니다.
자,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그 얘기를 하고있지 않습니까? 본문이 시작되는 13절 말씀을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우리13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그리고 본문이 마지막은 어떤 말씀으로 끝납니까?
17절 우리 다같이 읽어요. 17절 시작,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로라” 사람이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크다란 사랑이 없다. 이 사랑을 위해서 친구 여러분, 나는 지금 이 말씀을 마지막으로 여러분과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예수님은 이것을 말씀으로만 한 것이 아니지요? 난 너를 위해서 목숨을 버릴 수가 있다고 말로만 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자, 이 말씀을 한 시점이 어떤 시점 이에요? 십자가를 바로 앞에 두고 이 말씀을 하신 거에요.
그러니까 십자가를 질 각오를 하고 친구들을 위한 죽음을 각오 해 놓으시고 지금 주님은 이 말씀을 하고 있는 것 이에요.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크다란 사랑이 없다”
그리고 그는 친구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릴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든 우정은 그 우정을 시험 받는 어떤 테스트의 시기를 반드시 만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내가 구체적으로 어떤 인생에서 고난을 만나게 될 때 그때 친구들의 모습을 지켜보십시요. 고난을 만났을 때 내 곁을 떠나가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것은 친구가 아니지요. 그런 친구들은 벌써 떠나보내 주어야 했을 친구들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내 인생에 고난의 순간 그리고 고독의 순간 내가 정말 방황할 수밖에 없는 그 순간 내 곁에 끝까지 머물러 있을 수가 있는 사람들, 그리고 나를 위한 가장 작은 희생이라도 진지한 희생의 노력을 보여주고 있는 친구들, 이런 친구들이 인생의 길에 얼마나 우리들의 커다란 힘이 될까요? 그래서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영국 속담이라고 합니다마는 “순경(順境)은 친구를 만들지만 역경은 우정을 시험한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로마의 철학자인 킬케골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고난을 만나야 우리는 진정한 친구를 알아본다”
여러분이 고난 속에 있을 때 곁에 머물러 있을 수 있는 진정한 친구들을 여러분은 얼마나 가지고 있습니까?
세계 제 1차 대전 중에 있었던 실화라고 그럽니다. 미국에 어떤 같은 마을에서 자라났던 두 친구가 같은 때에 이 전쟁에 징집이 되었어요. 그런데 공교롭게도 두 친구는 같은 부대에 배치되었고 또 같은 전선에서 싸우게 되었다고 합니다. 한번은 그 전선 순찰을 나갔다가 갑자기 아군에서부터 격리 되었어요.
포탄이 나르기 시작했고 그리고 이 친구는 나른 파편에 부상을 입어 피 흘리고 쓸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광경을 멀리서 참호 속에서 바라보고 있던 친구가 견딜 수가 없어서 참호를 빠져 나와 친구에게 달려 갈려고 그랬더니 주변에 있었던 부대원들이 그를 막습니다.
분대장이 그를 막습니다. “가면 안돼 이미 때는 늦었어, 너까지 죽어!” 그러나 분대장이 잠시 시선을 다른 쪽으로 팔고 있는 그 순간 다시 그는 참호를 빠져 나와 그 친구가 쓸어져 있는 그곳을 향해 달렸습니다. 그리고 친구를 들쳐 업고 다시 자기 참호로 돌아왔습니다. 그때 친구는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고 그래요. 그런데 분대장이 화를 내면서, 그것 보라고, 내가 늦었다고 말하지 않았냐고 너까지 죽을 번했다고.
그때 이 사람은 자기 분대장을 향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분대장님 그렇지만 제가 이 친구에게 다가갔을 때 이 친구는 아직도 목숨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때 내 친구가 저에게 무어라고 그랬는지 분대장님 아십니까?”, “무어라고 그랬나?”, “내 친구는 헐떡이면서 이렇게 말 하더라구요. 친구야 나는 네가 나한테 올 줄 알았지.”
친구야 난 네가 올 줄 알았단다. 그것이 친구가 아니겠어요. 이것이 우정이죠.
저는 여러분과 제가 인생의 길을 살아가면서 이런 친구들을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하고 싶습니다.
이런 친구들과 더불어가는 인생 길은 얼마나 보람 있는 인생의 길이 되겠어요.
그러나 이런 친구를 만나기 앞서서 나는 어쩐지 친구가 없다 인생이 외롭다, 그렇다면 먼저 여러분은 정말 우리를 친구라고 불러주기를 기뻐하시면서 다가오시는 예수그리스도라는 분을 만났는지를 여러분 앞에 묻고 싶어요.
우리는 예수님을 향해서 이렇게 고백 합니다. 예수님 나의 구세주 이시요 그리고 나의 주님이시여 그러나 또 하나의 명칭으로 그 예수님을 부를 수 있는지를 여러분에게 묻고싶어요.
“나의 친구이신 예수님” 우리가 찬송가의 가사에서 부른 데로 “죄 짐 맡은 우리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그 분은 내가 그를 선택하기 앞서서 나를 선택해놓고 내게 다가오신 바로 그 분, 그리고 내가 그를 붙드는 순간 하늘나라의 비밀을 나에게 쏟아놓으시면서 나와 함께 하겠다고 말씀하시는 그 분. 그리고 십자가에서 기꺼이 나의 죄와 고난을 짊어지고 나를 대신해서 죽음을 대신 죽어 주시고 그리고 부활하신 그 분, 내게 사랑한다고 고백하시면서 다가오시는 바로 그 분, 그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은 친구로 정말 만난 적이 있습니까?
그 친구를 만나셨다면 이 위대한 친구 앞에 또 이렇게 요청해 볼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저에게 저의 친구이신 주님을 함께 섬길 수 있는 이 놀라우신 주님을 함께 전할 수 있는 친구들을 만나게 해달라고,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이런 좋은 친구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그런 친구들과 더불어 우리의 위대한 친구이신 주님을 섬기는 그 놀라운 행복, 그리고 그 놀라운 감격 속에 들어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싶습니다.
세상을 떠나가신 고 함석헌 선생이 시를 많이 쓰셨는데 그분의 시 가운데 최대의 걸작 시는 저는 이 시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분의 시를 소개하고 싶어요.
제목이 그 사람을 가졌는가 라는 시입니다.
그 사람을 가졌는가?
만리길 나서는 날 처자를 내 맡기며 마음 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너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너 뿐이야 하고 믿어주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탓던 배가 가라앉을 때 구명대를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너 하나 있으니 하며 빙그레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에 예 보다도 아니오 라고 가만히 머리를 흔들어 진실로 충언해 주는
그 한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기도하십시다.
인생의 길이 때로 외롭다고 느끼지 않으십니까? 그러나 외로운 인생 길에 우리의 친구가 되기를 자청 하시면서 다가오시는 그 분, 네가 알지 못할 때부터 나는 너를 선택했다. 네가 나의 친구 될 것을 선택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버려주시면서 이것이 너를 향한 내 사랑이라고 말씀하시며 인생의 길에 함께 하자고 다가오시는 바로 그 분,
그 예수님을 만나신 적이 있습니까? 혹시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교회에 나오시면서 그 예수그리스도를 내친구로 만나지 못한 분이 계시다면 이 시간 기도해 보세요. 예수님, 내 친구가 되어주세요. 내 주님이 되어주시고, 그 분이 함께할 때 비로소 우리는 인생 길의 외로움을 극복하고 그 분의 위로와 그 분의 임재로 경험하는 놀라운 행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을 만나셨다면 또 그 분 앞에 이렇게 매달려 기도해 보십시요. 그 위대하신 친구 되시는 주님을 함께 섬기고 함께 자랑하며 함께 전할 수 있는 그리스도 안에 친구들을 만나게 해달라고. 하나님 그래서 인생길 그 모든 외로움 이기고 승리 길을 살아갈 수 있도록 저를 도와 달라고 우리 다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기도하십시다.
자비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의 구주요 주님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친구 되기를 기뻐하시는 신실하신 그 주님을 오늘 이 시간 만나게 하시고 또 그 주님을 함께 더불어 섬길 수 있는 친구들과 더불어 인생 길의 모든 허무를 이기고 삶의 아름다운 승리를 선포할 수 있는 인생이 우리의 인생이 될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주님, 오늘 우리는 우정의 축복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우정의 축복을 그리워 합니다. 우리의 위대한 친구 그리고 신실하게 약속을 지키시는 그 주님으로 말미암아 누릴 수 있는 이 진정한 우정의 축복을 흠모합니다. 오늘 이 우정 때문에 목말라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께서 다가오시사 친구 되어주시고 또 이 주님을 함께 섬길 수 있는 친구들을 허락하시므로 예수님 때문에 인생의 길은 결코 외로울 필요가 없다고 고백하고 찬양하며 걸어가는 복된 삶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우리 다 기립하셔서 우리 하나님 한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으신 신실하신 친구 되시는 주님을 함께 찬양하시겠습니다.
하나님 한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 없으시고
언제나 공평과 은혜로 나를 지키셨네
오 신실하신 주 오 신실하신 주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약속하셨던 주님 그 약속을 지키사
이후로도 영원토록 나를 지키시리라 확신하네
지나온 모든 세월들 돌아 보아도
그 어느것 하나 주의 손길 안 미친 것 전혀 없네
오 신실 하신 주 오 신실하신 주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약속하셨던 주님 그 약속을 지키사
이후로도 영원토록 나를 지키시리라 확신하네
오 신실하신 주 오 신실하신 주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약속하셨던 주님 그 약속을 지키사
이후로도 영원토록 나를 지키시리라 확신하네
옆에 사람 좀 쳐다보시면서 “우리 친구 됩시다” 이렇게 한번 인사하세요. 멀리서 친구 찾을 필요 없잖아요? 가까운데서, 한번 악수 하시면서 “친구 합시다” 한번 해 보세요. 그러니까 친구가 생길 리가 없죠 그러니까, 하하하~~
녜? 다시 한번 따뜻하게 잡아보세요. 친구 됩시다. 한번 악수해 보세요 녜.
우리 같이 기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 어찌 생각하면 정말 외로운 인생길 인데 우리 주님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고 우리 위해 생명까지 내어놓으신 예수님이 내 친구 하시겠다고 선포하신 놀라운 그 사랑 어찌 다 감사드릴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이 진실한 친구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또 하나님 아버지의 한결같은 사랑하심과 성령님의 교통케 하심이 외로움의 인생길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친구 삼고 걸어가는 사람들 또 그리스도안에 외로운 이들에게 친구가 되어주며 함께 인생 길을 걸어가기로 작정하며 다시 나아가는 그 길 우리의 삶의 장 걸음 걸음마다 성령 하나님 이 우정을 만드는 그 축복 속에 우리 인생의 여정이 계속될 수 있도록 도우시기를 간절히 축복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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