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님의 책망 /요16:1-4/ 배혁목사
2023-11-28 00:48:28
지난 주일이 성령강림주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성령님이 오실 것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성령님이 오시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제자들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셔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땅에서의 예수님의 구원의 사역을 다 마치시고 하나님 아버지께로 간 후에, 성령님을 보내시겠다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예수님을 이어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을 이어가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입장에서 예수님이 자신들을 떠나신다는 것은 아주 슬프고 받아들이기 힘든 일입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은 제자들이 앞으로 고난을 당할 것을 말씀해 주신 상태였습니다. 사람들은 제자들을 출교하고 때가 이르면 죽이기까지 한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제자들을 유대교로부터 쫓아낸다고 했는데, 이는 유대교인들이 제자들을 더 이상 하나님의 구원의 백성이 아니라 이방 사람들과 같은 존재라고 여기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사람들에게 박해의 대상이 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일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여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다.”
제자의 입장에서 보면, 앞으로 당할 고난의 때를 생각한다면, 예수님이 그 어느때보다 더 필요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떠난다고 생각하니 그것이 얼마나 낙심되는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이 떠나는 것이 유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예수님이 계속 계시는 것이 유익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꼭 그런 것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육신을 입고 하실 사명을 다 감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앞으로의 사역은 영이신 성령님께서 오셔서, 제자들과 함께 하셔야 할 사역이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령님의 형태로 이천년전의 제자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예수님을 믿는 제자들과 함께 하시고자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령님께서 어떠한 일들을 하실 지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8절에 보면,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고 말씀하십니다.
성령님이 하시는 일 중에 하는 책망하시는 일입니다. 누가 책망받는 것을 좋아하겠습니까? 하지만 이 세상은 성령님의 책망이 필요한 것입니다. 희랍어로 ‘책망하다’는 ‘엘렝코’입니다. 이는 ‘죄를 낱낱이 드러내어 폭로하다.’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 세상을 책망하시는 목적은 사람들에게 창피를 주시기위한 것이 아닙니다.
한 목사님의 아버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목사님께서 돌아가신 아버지의 빈자리를 생각하며 그리워했던 것 중에 하나가 아버지의 책망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살아계신 동안, 목사님이 잘못한 일이 있으시면 책망해 주셨는데, 아버지의 책망을 더 이상 듣지 못한다는 것이 참으로 그리웠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책망을 자신을 욕보기이 위한 것이 아니라, 아들을 사랑하고 바르게 지도하려는 아버지의 애정어린 소리임을 목사님은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령님의 책망이 그렇습니다. 세상의 죄를 폭로하심으로 세상을 잘못으로 부터 돌이켜 바로 잡기 위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책망입니다.
오늘날, 다른 사람들로부터 책망 받는 것을 많이 어려워합니다. 책망을 받을 때에 마음이 상하고 관계가 어긋나기 쉽습니다.
그런데 성도들에게 꼭 필요한 책망이 있는데 성령의 책망입니다. 영적으로 잘못된 것을 바로 알고, 진리를 따라 살아가도록 하는 책망이 필요합니다. 이제 성령님께서 책망하심으로 그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면 서운하고 시험에 들게 됩니다. 그런데 성령님이 책망하시면 다릅니다. 성령님의 책망하실 때에 진정한 회개가 있고,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변화되는 역사가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성령님께서 어떤 일로 세상을 책망하십니까? 8절에 보면 성령님에 오셔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히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성령님의 책망의 내용이 무엇이고, 우리가 성령님의 책망받을 것이 있는지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잘못된 것이 있다면 책망받아, 올바로 돌이키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1. 먼저 성령님은 세상의 죄에 대해서 책망하십니다.
죄를 헬라어로는 ‘하마르티아’라고 합니다. ‘하마르티아’의 뜻은 ‘과녁을 빗나간 화살’이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에게는 각자 마땅히 이루어야 할 삶의 과녁, 목표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원래의 목적에서 어긋나서 살아가는 것이 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성령님께서 이 죄가 무엇인지를 책망하신다고 했는데, 그 죄는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얼마나 끔찍한 죄들이 많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뉴스를 보게 되면 이 세상이 얼마나 죄로 가득한지를 실감하게 됩니다. 뉴스를 찾아 볼 것도 없습니다. 우리 자신을 살펴 볼 때에도 우리가 얼마나 죄가운데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 책망하시는 세상의 죄는 바로 예수님을 믿지 않는데서 온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사회법으로는 죄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모든 죄의 근본이 되는 심각한 죄임을 성령님은 책망하십니다.
예수님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어떤 부분을 믿기를 거부했습니까? 사람들은 예수님이 사람들의 구원자요, 주인임을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를 믿게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고린도전서 12:3절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여러분의 주님이라고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성령님께서 우리를 책망하셔서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주이심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보니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대적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의 근본적인 죄는 예수님을 자신들의 주인으로 믿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들 또한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여전히 죄가운데 있을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말로 예수님을 주인으로 믿는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오신 예수님을 말씀을 들어야 하고, 들은 말씀을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종이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종이 주인한테 말로는 “주인님, 주인님” 하면서 그 주인의 말을 들으려고하지 않는다면 그 종은 자신의 주인을 진정한 주인으로 여기는 종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자신들의 구원자요, 주인으로 믿지 않았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이러한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우리의 구세주로 믿음으로,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예수님을 구세주 되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2. 그리고 두번째로 성령님께서 책망하시는 것은 의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신다고 했습니다.
10절에,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행실을 통해서 의에 이르게 되고,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성경 그렇게 해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죄로 인해서 불의한 존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의롭게 될 수 있는 비결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통해서 입니다.
로마서 3:23-24에,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성령님은 사람이 행위를 통해서 의로워 질 수 없음을 말씀하십니다. 도리어 성령님은 우리가 의로운 존재가 아니라, 죄가운데 불의한 존재임을 알려주십니다. 죄에 대해서 깨닫게 하시고 회개케 하십니다.
혹시나 자신이 무척 의롭다고 생각되어지는 분이 있다면 그것은성령의 책망을 받아야 할 일입니다. 자신의 선함을 과신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죄와 불의함을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성령님이 말씀하시는 의는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로 의로우심을 입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의를 이루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이제는 아버지께로 가셔서 계신 것입니다.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셔서 죄인된 사람들을 의롭다고 칭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의를 자랑하지 마십시오. 성령님의 책망가운데 있는 이들은, 자신의 의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의만을 자랑하게 마련입니다.
디모데전서 1:15절에서 바울은 자기 자신을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성령님의 책망을 받기 전에 바울은 자신이 정말 의롭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은 바리새인이고, 가말리엘 랍비로부터 율법을 배우고, 그 율법대로 행한 의로운 사람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그를 따르는 제자들, 교회를 정죄하며 박해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그는 자신의 실체를 보게 되었습니다. 자신은 의로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박해하는 죄인중에 괴수를 보게 된 것입니다. 이를 깨달은 다음부터 바울은 자신의 행위를 의로 자랑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십자가의 의만을 자랑하게 된 것입니다.
자신의 의를 드러내고자 하는 이들은 자신의 행위를 알아주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원망하고 섭섭해합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깨달은 자는, 불의한 자신을 구원해 주시는 예수님께 감사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의 의를 자랑하며 사십니까? 오로지 십자가에서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늘 누리는 성도 되시길 축원합니다.
3.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령님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십니다.
11절에,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다고 했는데 이 세상의 임금은 누구를 말합니까? 이는 사탄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12:31절에도,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 했습니다. 모두 사탄을 말합니다.
사탄은 이 세상의 임금으로 사람들 위에 왕노릇을 했습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은 사탄에게 종노릇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탄은 자신이 사람들의 심판자가 되어서, 사람들의 죄를 정죄하고 심판하며 사망에 이르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께서 오셔서, 의를 이루신 다음에 이것이 바뀌었습니다. 이제 사람들이 죄에 정죄함을 당하지 않고, 예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사탄은 어떻게 됩니까? 세상의 임금인 사탄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사탄은 자신이 저지른 죄로 인해서 영원한 지옥 형벌을 이미 심판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심판에 관한 책망은 사탄에게뿐만 아니라, 사람에게도 해당이 됩니다.
히브리서 9:27절,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사탄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간과하며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심판을 기억하게 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준비하면서 살아가게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앞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니다. 우리 앞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깨닫고,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의 심판대가 곧 은혜의 보좌가 되는 줄로 믿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책망하시는 분입니다. 사람들은 성령님의 책망없이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분간하지도 못하는 어리석은 존재입니다. 13절에, 예수님은 성령님을 진리의 성령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진리가운데 책망하심으로 바른 길을 가도록 도우십니다.
성령님은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책망하십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라고 말씀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요, 주인으로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분을 주인으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에 예수님을 우리의 구세주로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의에 대해서 책망하십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불의함을 알려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만이 우리를 의롭게 하시고 구원에 이르게 하실 수 있음을 알려 주십니다.
그리고, 심판에 대해서 책망하십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심판자이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임금인 사탄을 심판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또한 심판하십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심판을 외면하도록 만들지만, 성령님은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지속적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대에 설 수 있도록 준비시켜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책망하시는 성령님이 오시는 것을 제자들에게 유익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무지합니다. 이럴 때에 성령님의 책망이 없으면 우리를 그릇된 길로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늘 성령님의 책망을 구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른 길로 늘 인도함받는, 성령님께서 주시는 유익을 누리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박해를 예고하심/요16:1-4
2001-11-02 13:52:42
요즘 기상대에서는 좋지 않은 소식만 전하는 것 같습니다. 90년 만에 최악의 봄가뭄으로 모든 국민들이 물 걱정을 하고 있는데 태풍이 온다느니 집중호우가 쏟아진다느니 하는 소식은 전해주지 않고 앞으로도 당분간은 비소식이 없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기상대에서 좋은 소식을 전해주기만을 모든 국민들이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국민들 중에서 왜 비 온다는 소식을 전해주지 않느냐고 항의하며 기상 예보관을 교체하라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가뭄이 계속되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비가 오지 않음을 전하는 것은 가뭄을 미리미리 대비해서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함입니다. 만일 가뭄소식을 듣기 싫어한다고 비가 오지 않음에도 곧 많은 비가 온다고 예보한다면 그 피해는 엄청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좋지 않은 소식을 예고하십니다. 장차 사람들로부터 박해를 받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이유도 박해가 있을 때에 믿음을 지키도록 하시려는 사랑의 배려인 것입니다.
Ⅰ. 무지로 인한 박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장차 받을 고난을 말씀해 주셨는데 첫 번째는 출회를 당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출회란 무서운 고통입니다. 종교적인 것은 물론이고 문화, 교육, 경제적인 모든 분야에서의 분리를 의미합니다. 출회를 당한 사람에게는 문둥병자와 같이 일반인의 교제와 접근이 철저히 금지되어 정신적, 육체적, 경제적, 사회적인 고립을 뜻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죽음을 당하기도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스데반 집사가 죽임을 당했고, 야고보 사도도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 외에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을 지키다가 죽음을 당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원인이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하여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다른 나라의 사람들이라면 하나님에 대하여 알지 못한다는 말이 이해가 되겠지만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모른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일찍이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받았고 항상 율법의 말씀을 공부했기에 율법에 정통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을 믿고 섬긴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을 모른다니 그게 무슨 뜻입니까?
본문 3절에서 "알지 못함이라"의 '알다'는 '기노스코'란 말로 단순히 지식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체험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누가복음 1장에 보면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31절)"고 말하자 마리아가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이까?(34절)"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때에 '알다'는 말도 같은 단어입니다. 마리아가 사내를 알지 못한다는 말은 남자에 대하여 지식적으로 모른다는 뜻이 아니라 남자와 동침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아이를 낳을 수 있겠느냐는 뜻의 말입니다. 즉 체험적인 앎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지식적으로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을 체험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체험하지 못했기에 그들은 하나님의 진정한 뜻을 몰랐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구세주라는 사실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위하여 충성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보내신 구세주를 박해했고 후에는 그리스도인들도 박해를 했던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예수님을 체험적으로 만나기 전에는 그리스도인들을 죽이고 잡아 가두고 기독교를 말살하는 것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라고 확신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보니 자기가 하나님께 충성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고 반대한 사람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종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마귀의 종노릇을 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외부적으로 다른 나라 즉 로마에 의하여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 더욱 괴로움을 준 사람들은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하는 같은 동족들이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을 어렵게 하는 사람들이 교회 밖의 사람들보다 같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즉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 안다고 하지만 무지한 사람들로 인한 어려움이 더욱 클 때가 많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아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거스르는 자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Ⅱ.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할 제자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장차 사람들에게 고난과 박해를 받을 것을 말씀하신 것은 나중에 박해를 받을 때에 제자들이 그 말씀을 기억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생활에 대하여 적지 않게 오해를 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왕으로 등극하시면 예수님 덕분에 한자리 얻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예수님을 좇아 다녔던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와 요한이 자기의 어머니를 내세워서 예수님 좌우 편에 앉혀달라고 청탁을 했고 그것을 본 다른 제자들은 자기들이 서로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서로 얼굴을 붉히기까지 했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알려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 이 세상에서 한자리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고난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고난이 있을 것을 알고 고난을 당하는 것과 고난이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다가 고난을 당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주먹이 날아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 맞으면 큰 펀치에도 쓰러지지 않지만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다가 맞으면 작은 주먹에도 넘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는 예수 믿으면 전혀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가 조그만 박해나 고난이 오면 그럴 줄 몰랐다고 원망하고 신앙을 떠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큰 고난이 닥쳐도 고난을 준비하는 성도는 의연하게 버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고난을 말씀하신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고난을 당할 때에 견디고 신앙을 지키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후에 제자들은 고난을 받을 때에 예수님의 이 말씀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속하지 않으셨기에 고난을 당한 것처럼 제자들도 죄악 된 이 세상에 속하지 않고 예수님께 속하였기 때문에 고난을 받는 것이 당연한 것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았을 때에 제자들은 고난을 불평과 원망의 제목으로 삼지 않고 오히려 주님의 편에 선 증거로 생각하고 당당하게 고난을 이겨 나갔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바로 알아야만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에 이 세상에서의 부귀와 영화를 약속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고난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고난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증거가 되며 장차 영원한 주님의 나라가 임할 때에 그 나라의 축복을 주님과 함께 누릴 사람임을 확인하는 표시이기도 한 것입니다.
사단은 끊임없이 이 세상에서의 풍요로움의 길로 가라고 유혹합니다. 돌로 떡을 만들어 배불리 먹으라고 유혹합니다. 성전에서 뛰어내려서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얻으라고 유혹합니다. 신앙을 버림으로 이 세상의 부귀영화와 권세를 얻는 것이 좋지 않느냐고 유혹을 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영원한 심판으로 가게 됩니다. 반대로 주님은 우리에게 좁은 길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길이 험하지만 영생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결 론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나를 따르는 너희들에게 이 세상의 부귀와 영화를 약속할 수 없다. 오히려 가난함과 비천함이 있을 것이다. 내가 그랬듯이 너희들도 불의한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배척을 받고 심지어는 나를 따르다가 죽음에 이르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를 끝까지 따르는 자들에게는 장차 내가 다시 올 때에 나와 함께 천국의 축복을 누리게 할 것이다."
예전에 하신 말씀/요16:1-4
2005-02-15 15:22:50
오늘 본문은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라는 말씀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신앙 생활을 하다 보면 늘 즐겁기만 한 것이 아니라 낙심을 할 수도 있는데, 바로 그런 때를 대비하여 하는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15장에서 예수님은 포도나무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은 가지가 줄기에 붙어 있는 것처럼 우리의 신분과 소속이 바뀐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다 되었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만사 형통하고 늘 행복하고 즐겁게 살아간다면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과 같은 말씀을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 믿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별도로 설명하지 않아도 “예수를 믿었더니 역시 좋구나!” 하고 희희낙락하며 살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1편에 보면 복 있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는 것 같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어떤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을 수 있게 된 원동력은 시냇가에 심겼다는 사실 한 가지입니다.
그것 말고는 다른 나무와 똑같습니다.
비가 오면 비를 맞아야 하고 바람이 불면 바람을 견뎌야 합니다.
여름에는 뜨거운 태양 빛에도 시달려야 하고 겨울이면 눈보라도 감수해야 합니다.
힘든 일이나 어려운 일 아무것도 없이 편하게 지낼 수 있어서 복된 것이 아니라 단지 시냇가에 심겼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복된 것입니다.
자기 뿌리를 시내 근처까지 뻗어서 거기에서 올라오는 진액에 힘입어 모든 외부 환경을 자기가 견뎌야 합니다.
우리 생각에는 시냇가에 심긴 나무보다 온실에 심긴 나무가 더 복될 것 같지 않습니까?
온실에 있으면 근심이나 걱정이 있을 수 없습니다.
비바람, 눈보라가 아무리 닥쳐도 신경 쓸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물과 비료는 주인이 때에 맞춰서 알아서 줄 테니 그것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심지어는 열매를 맺는 일까지도 자기가 알 바 아닙니다.
자기는 아무 생각 없이 가만히 있으면 모든 것이 저절로 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얘기하지 않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온실에 심겨서 모든 것이 저절로 해결되는 팔자가 늘어진 나무 같다고 하지 않고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는 것 같다고 합니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으면 온실에 심은 나무가 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신앙 생활을 잘하면 잘할수록 힘든 일이 없어지고 자기에게 좋은 일만 있는 줄 압니다.
그런 기대가 있는 것은 비단 지금 시대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아예 못을 박으셨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지 않게 하려 함이니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 저희가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이른 것은 너희로 그 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이 말 한 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요 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음이니라(요16:1-4)
“내가 지금부터 하는 얘기를 잘 들어라. 내 얘기를 잘 새겨듣지 않으면 너희끼리 엉뚱한 기대를 갖고 있다가 괜히 낙심하기 십상이다.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면 너희는 그것으로 만사 형통할 줄 안다만 절대 그렇지 않다. 세상은 너희를 못살게 굴 것이다. 심지어는 너희를 죽이기까지 할 것이다. 별 수 없다. 세상은 나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이다. 혹시 이 다음에 그런 일을 만나거든 내가 미리 얘기했다는 사실을 기억해라. 그런 일이 있는 것이 이상한 것이 아니고 정상이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 말씀을 보면 의아한 내용이 있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못살게 굴면 나한테 얘기해라, 내가 책임지고 혼내주마!”라는 말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그런 말은 없고 “세상이 너희를 못살게 구느냐? 거봐라, 내가 뭐라 그랬느냐? 그런 일이 있을 거라고 하지 않더냐? 다 내가 얘기한 대로 되는 거다.”라는 말만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래도 예수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고통받는 문제를 해결해 줄 의사가 없는 것 같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요15:11)
14장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15장에서는 기쁨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환난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본래 이 세상에 있는 평안이나 기쁨은 환난과 공존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 말씀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평안과 기쁨을 주시되 이 세상에 있는 환난을 없애주겠다는 말씀은 안 하십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에게 평안과 기쁨을 주마, 환난 같은 것은 얼씬도 못하게 내가 다 막아주마.”라고 하셨으면, 당장 듣기에는 달콤하게 들릴지 몰라도 별로 달가운 얘기가 아닙니다.
우리를 온실 속의 화초로 키우겠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때 우리에게 있는 평안은 고작해야 아무런 문제가 없어야 가능한 평안이고, 그때 우리에게 있는 기쁨은 문제가 해결되거나 일이 잘 풀린 기쁨에 불과합니다.
가끔 제 동기 목사님들과 통화를 하는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지내십니까?”라고 물으면 돌아오는 대답은 언제나 “잘 지냅니다.”입니다.
정말로 잘 지내서 잘 지낸다고 하는 것인지, 아니면 습관적으로 그렇게 대답하는 것인지 하여간 대답이 항상 똑같습니다.
다른 사람들만 그렇게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 저도 그렇게 대답합니다.
그런데 저는 “잘 지냅니다”라는 한 마디로 끝내지 않고 대답을 좀 길게 합니다.
“예, 잘 지냅니다. 저는 늘 잘 지냅니다. 저는 원래 환경에 관계없이 잘 지내는 사람이니까 항상 잘 지냅니다.”
처음에는 단지 우스갯소리로 그렇게 대답했는데, 대답을 하고 보니 그 대답이 참 마음에 들었습니다.
환경에 관계없이 잘 지낸다는 얘기가 다분히 성경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그렇게 대답하는 것이 저의 고정된 레파토리가 되었습니다.
자기한테 유리한 일이 있을 때만 잘 지내는 것을 누가 못합니까?
그 정도는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다 하는 것입니다.
이 다음에 죽어서 지옥에 갈 사람들도 그 정도는 하는데 천국 백성이라고 하는 우리가 그 정도 수준에 머무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는 환난이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능력으로도 이 세상에 있는 환난을 어떻게 할 수는 없다는 뜻이든지, 아니면 그 환난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심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주로 자기 편한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어려움이 없어지느냐?” “어떻게 하면 일이 잘 풀리느냐?”가 일차적인 관심입니다.
그런 관심은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변하지 않습니다.
평소에 그런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다가 예수를 믿게 되었으니 당연히 예수님께서 자기를 도와주실 것을 기대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관심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환난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훈련되고 연단되기를 바라십니다.
교회에서 가장 많이 듣는 질문 중의 하나가 하나님께서 왜 선악과를 만드셨느냐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니까 선악과를 만들면 인간이 그것을 따먹을 것이라는 사실을 아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대체 왜 만드신 것입니까?
먹지 말라고 얘기를 할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선악과를 만들지 않았으면 지금처럼 복잡한 문제는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혹시 선악과를 만들었다고 해도 동산 한 쪽 구석에 숨겨놓았을 수도 있고, 아담, 하와가 그것을 따먹으려는 순간에 천둥, 번개를 보내서 막으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 하와가 따먹을 때는 가만히 계시다가 따먹은 다음에야 왜 따먹었느냐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조금 무책임한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하나님께서는 왜 선악과를 만드셨을까?”를 궁금하게 여기는 것은 양심불량입니다.
“아담, 하와는 대체 무슨 정신으로 선악과를 따먹었을까?”가 궁금해야 합니다.
중학생쯤 되는 자녀가 있는 집에서는 어느 집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 있습니다.
어머니도 아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아이도 어머니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아이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우리 어머니는 대체 왜 그럴까? 공부하라고 잔소리하지 않아도 내가 하고 싶으면 어련히 알아서 할텐데 왜 달달 볶을까? 내일 시험이기는 하지만 지금은 별로 공부할 마음이 없으니까 잠깐만 컴퓨터 게임하고 머리 좀 식힌 다음에 기분전환을 해서 공부하는 것이 더 효율적인데 왜 그걸 모를까? 나는 올빼미 체질이어서 지금은 공부해봐야 머리에 안 들어오니까 일단 좀 쉬다가 밤에 공부한다는데 왜 내 맘을 몰라줄까?” - 아이들은 주로 이런 것을 궁금하게 여깁니다.
어머니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 애는 대체 왜 이렇게 공부하는 것을 싫어할까? 학생 때는 공부가 가장 중요하다고 충분히 알아들을 만큼 얘기했는데 왜 말귀를 못 알아들을까? 필요하다고만 하면 책도 사주고, 스탠드도 바꿔주고, 과외도 시켜주고…… 해달라는 것은 다 해줬으니까 자기만 마음잡고 공부하면 되는데 왜 그걸 안 할까? 놀고 싶은 것 조금만 참고 지금 공부를 해두면 그것이 나중에 자기 인생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왜 모를까?” - 어머니는 이런 것이 궁금합니다.
어떤 것을 궁금하게 여기는지가 그 사람의 수준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얘기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궁금하게 여겨야 할 문제는 “하나님은 선악과를 왜 만드셨을까?”가 아닙니다.
“대체 아담과 하와는 그것을 왜 따먹었을까?”를 궁금하게 여겨야 합니다.
“따먹어봐야 이익 될 것 하나도 없고, 따먹지 않아도 불편한 것 아무것도 없는데 왜 따먹었을까? 아담과 하와는 어쩌자고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단의 얘기를 더 귀담아들었을까? 사단이 아무리 그럴 듯하게 꼬셨어도 그렇지, 하나님께서 친히 그걸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엄중하게 말씀하셨는데 대체 무슨 정신으로 하나님 말씀을 무시했을까?” - 우리는 이런 문제를 궁금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를 궁금하게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죄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왜 만들었을까?”만 궁금하게 생각합니다.
우리도 선악과를 따먹은 사람과 전부 한통속이라는 뜻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원하신 것이 어떤 것입니까?
‘선악과를 따먹지 않은 상태’입니까, ‘선악과를 따먹지 않는 수준’입니까?
상태는 문제가 안 됩니다.
수준을 따져야 합니다.
가끔 저한테 개고기를 먹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저는 항상 못 먹는다고 대답합니다.
“목사님, 개고기 드세요?”
“아뇨, 못 먹습니다.”
“왜요? 입에 안 맞으세요?”
“아뇨.”
“그럼요?”
“저…… 못 먹기는 못 먹는데, 없어서 못 먹어요.”
어떻습니까?
없어서 못 먹는 것도 못 먹는 축에 끼는 겁니까?
선악과를 먹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먹을 기회가 없어서 못 먹은 것도 선악과를 안 먹은 것과 마찬가지입니까?
선악과를 따먹지 않은 상태가 문제가 아닙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않는 수준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수준’과 ‘상태’를 구분하지 못합니다.
자기의 이성적인 판단으로 선악과를 따먹지 않는 것이 자기의 책임인 줄은 모르고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자기를 선악과를 따먹지 않은 상태로 유지시켜 주기를 바랍니다.
역기를 들면 근육이 생깁니다.
이때 역기를 든다는 얘기는 자신의 근력으로 역기의 무게를 떠받친다는 뜻입니다.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지 역기가 공중에 떠 있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역기의 무게를 자기가 지탱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자기한테 근육이 생깁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얻은 구원을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로 설명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가 구원 얻은 신분이라는 것을 알았는데, 이 세상이 자기에게 있는 신앙을 인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박해하면 가장 먼저 어떤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주님, 이것이 어떻게 된 영문입니까? 분명히 제가 옳고 저 사람들이 틀렸습니다. 그런데 왜 제가 핍박을 받아야 합니까? 속히 이 억울함을 보응해 주옵소서.”라고 기도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주님께서는 “알았다, 내가 당장 그 악당들의 버릇을 고쳐주마.”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거봐라, 내가 이럴 줄 알고 그때 미리 얘기하지 않았느냐? 이렇게 되는 것이 정상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내용은 15장에 있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와 연결해서 생각하면 훨씬 이해가 쉽습니다.
어떤 가지가 포도나무에 접붙여졌습니다.
때가 되면 소담스런 포도 열매가 열릴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주변 환경이 그 가지에 우호적으로 바뀐다는 뜻은 아닙니다.
포도나무에 접붙여졌다는 것 말고는 변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따가운 햇살에도 노출되어야 하고 비바람에도 견뎌야 합니다.
그 모든 외부 환경을 자기가 감당해서 자기가 튼튼해져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포도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뜻밖에도 신앙 생활을 자기에게 있는 어려움을 면제받는 수단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어려움을 이길 만큼 자기가 강해지는 것이 신앙이라는 생각을 안 합니다.
마라톤으로 치면 심장이 터지는 한이 있더라도 42.195km를 자기가 달려야 하는 줄은 모르고 주님께 업어달라고 엄살하는 것이 신앙인 줄로 압니다.
전에 기도를 설명하면서 제가 드렸던 말씀이 있습니다.
“저한테 기도 부탁할 때는 생각 잘해보고 부탁하십시오. 저한테 기도 부탁했다가 오히려 문제가 더 커진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어려움이 있으며 그때마다 빨리 기도해서 어려움을 벗어나는 것이 능사가 아닙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맷집을 기르는 것이 훨씬 더 성경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뭐라고 기도하는지 잘 생각해 보십시오.
혹시 자기가 할 일을 하나님께 대신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아닙니까?
고등학교 1학년 때의 일입니다.
당시 제가 다니던 고등학교에서는 월요일마다 주초고사라는 시험을 보았습니다.
그런 시험을 보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학생들로 하여금 토요일과 일요일에 놀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학교측에서는 공부를 시키기 위한 것입니다만 학생들 입장에서는 이만저만 스트레스가 아닙니다.
주초고사를 아무도 주초고사라고 하지 않고 전부 다 ‘주책고사’라고 했습니다.
“이 놈의 주책고사만 없으며 살 것 같다”는 얘기를 누구나 다 했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정말로 주초고사를 안 볼 뻔했던 적이 있습니다.
학교에 불이 났기 때문입니다.
아침에 학교에 가니 학교 분위기가 어수선했습니다.
매캐한 연기 냄새가 코를 찔렀습니다.
불에 탄 교실을 보면서 학생들이 무슨 얘기를 했을 것 같습니까?
“와, 오늘 잘하며 시험 안 보겠다!”라는 얘기가 가장 많았습니다.
그때 교실 세 개가 불탔는데 학생들의 기대와 달리 시험을 봤습니다.
시험을 본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무슨 말을 했겠습니까?
“에이, 조금만 더 탔으면 시험 안 볼 수도 있었는데……”라는 한탄이 가장 많았습니다.
학교에 불이 난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자기들이 공부하는 교실이 불탄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시험을 보는지 안 보는지, 그것이 문제입니다.
유감스럽게도 그때 불은 실화가 아닌 방화였습니다.
월요일마다 시험을 봐야하는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한 학생이 불을 지른 것이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대부분의 학생들이 그 학생에게 동정적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오죽하면 그랬겠느냐?”라는 얘기가 가장 많았고 “그 학생이 며칠만 참았으면 내가 불을 지르려고 했다”는 얘기도 있었습니다.
공부는 자기가 하는 것인데도 학교를 원망하는 마음이 누구에게나 있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신앙 생활을 이렇게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진리나 영생에 관심이 없습니다.
지금 당장 자기 한 몸 편할 수만 있으며 그것으로 얼마든지 만족합니다.
학교에 불이 나는 한이 있더라도 시험을 안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기독교 교리가 저급해지는 한이 있더라도 자기가 편할 수 있는 방도를 찾습니다.
그런 자리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안락한 삶을 약속하신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든 날 동안 우리는 예수 믿은 덕을 봐야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이 더욱더 정결하게 다듬어져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영원한 하늘 기업을 상속받는 날까지 각자 자기에게 주어진 믿음의 선한 싸움을 더욱 열심히 싸워나가야 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희의 허물과 죄로 인하여 이미 죽은 바 되었던 저희 영혼을 일깨우시사
이 시간에도 이렇게 거룩한 전에 모일 수 있게 인도하셨사옵나이다.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만세 전부터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저희에게 복 주시려고
친히 저희를 택정하시고 저희를 부르셨사옵건만
저희들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지
이제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시옵소서.
입술로는 언제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겠다고 하면서도
실제 세상을 살아가면서는
사소한 어려움만 있어도 엄살부터 하는 것은 아닌지
자신을 점검하게 하옵시고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예수 믿은 덕을 보려는 마음이 있는 것이나 아닌지
자신을 확인하게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친히 저희 모두에게 바라시는 것은
세상을 편히 사는 요령을 터득하는 것이 아니라
제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그것을 기꺼이 감당하는 수준에 이르는 것임을 명심하게 하셔서
오직 그 나라에 이르는 그 날까지
더욱 자신을 훈련할 수 있게 하옵시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넉넉히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는 믿음의 역군이 다 되게 하옵소서
asdf
때가 되면 /요16:1-3
2011-09-06 15:54:29
국민일보 2011년 8월 7일자 "미션"란에 고신대학 대학원의 유력한 교수가 장로교 분열의 역사를 다룬 책에 대한 퇴출논란이 가시화된 기사가 실렸습니다
예장 고신 총회운영위원회는 고신대학 대학원 교수의 저서 [한국장로교회사](생명의 말씀사)에 대해 교단정신을 왜곡했다는 이유로 폐기처분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와 함께 해당 서적의 신학대학원 교재 사용금지, 해당 교수의 순환보직 지시, 총회 앞에 사과할 것 등을 결의했습니다.
조사위와 운영위원회가 문제 삼은 것은 교단 설립자인 한상동 목사를 장로교 분열의 원인으로 본 것입니다. 그의 책에서 "한상동이 사실상의 교회 분열을 의미하는 고려신학교 복구를 선언한 것이 교단 분열의 원인"으로 본 것입니다.
이에 대해 총회 운영위원회는 이 책은 학문의 자유를 남용하고 교단의 권위와 정신을 침해했을 뿐만 아니라 다분히 의도적으로 교단 정신을 왜곡했다고 지적했습니다.
운영위원회를 통과한 이번 보고안은 다음 달 열리는 61회 총회에서 채택 여부가 판가름 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운영위원회에서도 조사위 보고를 놓고 격론 끝에 찬성 41, 반대 28로 겨우 통과했다는데 의미를 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욱이 교단징계가 우선이 아니라 학문적 검토와 토론이 우선이라는 저자의 변함없는 소신이 개인과 교단의 발전이라는 그의 무책임한 주장에 대해 멀리 있는 저로서도 당혹감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닥칠 환난과 핍박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장차 일어날 박해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면서 제자들에게 대비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16장 1절에 『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지 않게 하려 함이니 』라고 했습니다.
그 핍박은 먼저 민족공동체의 중심이었던 공회(sanhedrin)로부터의 핍박입니다. 그 다음은 로마제국으로부터 오는 정치적 핍박입니다. 핍박의 내용은
Ⅰ. 너희를 출회(출교)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본문 16장 2절에 『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 아니라… 』고 했습니다.
여기 예수님의 제자들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출교는 단지 종교적 출교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출회"는 단순히 "유대 공동체"에서 쫓겨나는 것만 의미하지 않습니다
. 보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에서 제외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비록 유대 랍비들은 "출회"를 몇 가지로 세분하였습니다. 그러나 구약적 의미에서 "출회"는 "하나님의 백성"에서 제외되어 유대인들과 교제의 떡을 뗄 수 없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출교는 파문(破門-종교의 자리를 박탈시키고 유대교에서 쫓음)을 의미합니다. 구약에서는 당시의 의식법을 어겼거나 공동체의 규율을 어겼을 때 출교가 가능했습니다.
출애굽기 12장 15절에 『 너희는 칠일 동안 무교병을 먹을찌니 그 첫날에 누룩을 너희 집에서 제하라 무릇 첫날부터 칠일까지 유교병을 먹는 자는 이스라엘에서 끊쳐지리라 』고 했습니다.
레위기 17장 4절에 『 먼저 회막문으로 끌어다가 여호와의 장막 앞에서 여호와께 예물로 드리지 아니하는 자는 피흘린 자로 여길 것이라 그가 피를 흘렸은즉 자기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 』고 했습니다.
에스라 10장 8절에 『 누구든지 방백들과 장로들의 훈시를 좇아 삼일 내에 오지 아니하면 그 재산을 적몰하고 사로잡혔던 자의 회에서 쫓아 내리라 하매 』라고 했습니다.
신약시대에는 이단사상을 퍼뜨릴 경우 출교처분이 가능했습니다.
요한복음 12장 42절에 『 그러나 관원 중에도 저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을 인하여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회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출교의 절차를 마태복음 18장 15-17절에 『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고 했습니다.
유대교에서 행해졌던 출교는 ① 네지파(비공식적인 징계, 책망) ② 니두이(공식적인 징계, 30일간 종교 활동 금지, 효과 없을 때 추가 30일) ③ 헤렘(무기한 동안 출교) ④ 솸마다(영구적 출교)였습니다.
이렇게 출교당한 자들은 문둥병자와 같이 2m 이내의 접근이 금지되었습니다. 그런 자가 죽었을 때 애곡하는 것도 금지되었습니다. 이런 것 외에도 태형도 행해졌습니다.
우리 헌법 예배모범 제 16장 시벌 6항에 징계 받은 자와의 교제 단절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쯤 되고 보니 예수를 믿는 신앙과 예수를 배척하는 유대교의 긴장 관계는 제자들이 현실적으로 직면하는 민감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출회"는 종교적인 것으로부터 쫓겨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그 시대의 문화, 교육, 경제 외에 사소한 마을의 공고문이나 시장 정보 등으로부터도 분리되는 현실적인 고난이었습니다. 실제로 유대 지도자들은 급속히 성장하는 기독교 세력을 억제하기 위해 유대 기독교인들을 회당으로부터 파문(excommunication)시키는 일들을 강행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후 90년경에는 랍비 가말리엘 2세(Rabbi Gamaliel Ⅱ)가 마침내 기독교를 이단으로 정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출회"라는 고난의 역사를 통하여 기독교 공동체 문화를 더욱더 견고하게 형성했습니다. 무릇 경건하게 살려고 하는 자는 핍박을 받는다고 했습니다(딤후 3:12). 그 핍박이 생존의 위협을 받기까지 갑니다. "때가 이르면"
Ⅱ. 진리에 대한 도전을 하나님 섬기는 예 (예배)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본문 16장 2절에 『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 』고 했습니다.
여기 『 때 』는 예수의 생전의 사역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이 『 때 』는 예수가 이 세상을 떠난 후에 있게 될 예수의 제자들과 성도들의 순교의 때 곧 박해의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 『 때 』에 대한 (호라, )관사가 생략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의 사역 때와 구분하기 위함도 있지만 이러한 박해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탄생과 함께 이 땅에 환난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탄생과 함께 말세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자들이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라 한다고 했습니다. 2000년 기독교 역사를 돌아보면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하는 자들에 의해서 진리가 무참히 수난을 당했습니다.
진리를 외치는 자들에 의하여 수많은 신앙인들이 순교의 피를 흘렸습니다. 예컨대 사도 바울은 그가 다메섹에서의 개심(改心) 전에는 하나님을 섬기는 열심으로 성도들을 죽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열심은 외국에 있는 성읍 다메섹까지 찾아가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다고 고백했습니다(행 26:9-12). 이것이 당시 바울로서는 자기 나름대로의 진리운동이었습니다.
종교개혁시대 수많은 지도자들이 로마 교회로부터 숱한 박해와 순교를 당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종교적 맹종이 빚은 어리석음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맹종은 예수를 결박했습니다.
요한복음 18장 40절에 『 저희가 또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러라 』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의 맹신은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요한복음 19장 6절에 『 대제사장들과 하속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질러 가로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가로되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노라 』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9장 15절에 『 저희가 소리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가로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 』라고 했습니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앞으로 있을 핍박에 대해 미리 가르치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이 핍박과 죽임을 당할 때 이상히 여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때가 이르면"
Ⅲ. 무지한 자들이 득세한다고 했습니다.
본문 16장 3절에 『 저희가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고 했습니다.
직역하면 "이것들을 행하는 자들은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라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의 종교적인 열정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를 알지 못하는 영적 무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로 집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로마서 1장 21절에 『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9절에 『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 하려하느냐 』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들을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요한일서 2장 3절에 『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라고 했습니다.
요한일서 3장 16절에 『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의 관계는 요한복음 1장 1절에 『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8장 54-56절에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 것도 아니어니와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라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 만일 내가 알지 못한다 하면 나도 너희 같이 거짓말장이가 되리라 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이 땅의 교회와의 관계에서 일체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0장 28절에 『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고 했습니다.
골로새서 1장 18절에 『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라고 했습니다.
골로새서 1장 24절에 『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지식에 대해 풍부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예수의 관계에 대해서는 무지했습니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려고 애를 썼으나 결국 한계에 부딪치고 말았습니다. 그 대표적인 파가 에비온파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할 수 없었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유일신 사상의 죽은 전통이 결국 예수를 하나님과 동일한 분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해서 진리를 도전하고 핍박하고 죽인다고 했습니다. 안다는 말은 체험적인 만남을 통해서 구체적이고도 충분한 앎을 말합니다.
구약에서 야다( ), 신약에서 기노스코( )가 그렇습니다. 외적인 앎은 아는 것이 아닙니다.
신학이 없다는 말을 우리에게 익숙해질 만큼 많이들 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성경적 깊은 사색에 기초를 두지 않고 있다는 말입니다. 필요한 말만 한다면 하나님과 성경과 예수와 교회의 관계가 성경적 깊이에서 사색되지 않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시의존사색이 우리 삶의 궤도가 되어야 합니다. 신학적 기초가 없는 자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도전을 받습니다. 이 세상 과학 지식은 항상 배워도 진리지식에 이를 수 없다고 했습니다(딤후 3: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리를 도전하는 자들은 영적으로 무지해서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의 학벌이나 지식을 영적 지식과 상대적 위치에 두거나 당돌하게 우위에서 거래하려고 하는데, 참으로 심히 유감입니다. "예수도 평신도였다"는 소위 기독교 지도자들의 말은 목사의 권위를 도전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한 말입니다. 한참 무식한 말입니다. 예수는 우리의 신앙의 대상이지, 예수는 의존적 존재가 아닙니다.
루터파 세계연합회 회장인 크리우세 감독과 로마 천주교 특사인 캇시디는 "루터가 널리 일으킨 오직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이신득구 교리의 중심 논제가 모두 오해에서 비롯되었다"고 선언하고 칭의 교리에 대한 재평가에 들어갔습니다.
예장 고신측의 젊은 교수들이 교단 설립과 한상동 목사를 교단 분리주의자로 재평가해야 된다고 했습니다. 예장 합신측의 설립자 박윤선 목사님이 헌법 선언문에 "W.C.C.와 관계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교단중심에 있는 지도자들이 W.C.C.와 공조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예입니다. 예장 합동측의 설립자 박형룡 목사의 신학사상과 신앙이 어떤 경우에도 계승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초대형 교단인 합동측은 여러 가지로 사상적 혼재에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앞서간 신앙조부들의 순교적 신앙이 후손들에 의해 파손되고 재평가 된다면 결국 아버지세대(체험세대)는 비참하게도 자식세대(역사세대)에 의해 순교당하는 것입니다. 신앙조부들이 해놓은 일에 묻어갈 줄도 알아야 합니다.
구운몽의 작가 서포 김만중은 나이 오십에 어머니 앞에서 동물 흉내를 내어 어머니를 즐겁게 해드렸다고 했습니다. 말세의 징조니 도리가 없겠지만 순교적 신앙으로 물려준 고귀한 신앙유산이 오늘의 잣대로 재평가라는 값싼 이데올로기에 포박당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내 생각의 최대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 죽는 법이 없다는 말이 날이 갈수록 새로워지고 있습니다. 출회당할 각오를 해야 합니다. 무지한 자들이 진리를 도전하는 것이 저들의 예배라고 하는 적반하장의 시대에 우리는 죽음으로써 대처해야 합니다. 이미 때가 이르렀습니다. 『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치 않게 하려 함이니라 』고 했습니다.
이젠 이렇게 믿읍시다 /요16:1-4
2016-06-15 15:24:05
대우주와 소우주
지난 주간에 사람이 살기에 적합한 환경을 가졌으리라고 짐작되는 ‘또 하나의 지구’가 태양계 밖에서 최초로 발견됐다는 소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행성이 어디쯤 있나 궁금했는데 알고 보니 그게 여기서 1천 4백 광년 떨어져 있다고 합니다.
이를 익숙한 단위로 계산하면 1경 1천 2백 54조 km라고 합니다. 킬로미터라는 단위는 익숙하지만 숫자가 어마어마해서 감이 잡히지 않네요. 이 행성은 지금까지 발견된 외계 행성들 중에서 지구와 가장 비슷한 행성이라고 합니다.
TV나 인터넷에서 우주를 찍은 사진을 볼 때마다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럴 때마다 아름다움을 넘어서서 신비하다는 느낌까지 듭니다. 크기를 가늠조차 할 수 없는 광대한 우주, 아름답기 그지없는 우주는 그 자체로 아름답고 경외심을 불러일으킵니다.
우주 못지않게 신비한 게 있는데 그것은 사람의 마음입니다. 옛날사람들은 사람을 ‘소우주’라고 불렀습니다. 특히 동양의학에서는 인체를 소우주라고 불렀지요. 저는 특별히 사람의 ‘마음’이 소우주라고 생각합니다.
대우주가 가늠할 수 없이 광대해서 경외심을 자아내듯 사람의 마음은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어서 경외심을 불러일으킵니다. 이런 점에서 무의식의 세계를 발견한 프로이트의 공로는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크리스토퍼 놀런(Christopher Nolan)이라는 영화감독이 있습니다. 놀란은 많은 영화를 만들었는데 최근에는 <인셉션 Inception>과 <인터스텔라 Interstella>라는 영화를 만들어 화제가 됐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각각 소우주와 대우주에 대한 영화로 봤습니다.
<인셉션>은 남의 꿈속에 침투해서 그의 생각을 훔치는 이야기입니다. <인터스텔라>는 곧 멸망할 지구를 떠나서 사람이 살 수 있는 다른 행성을 찾는 얘기지만 결국 ‘차원’에 관한 얘기입니다.
3차원에 있는 딸은 5차원에 있는 아버지를 볼 수 없지만 5차원에 있는 아버지는 딸을 볼 수 있습니다. 영화에서 아버지와 딸은 서로 다른 차원에 존재하지만 결국 서로 소통합니다. 저는 이 두 영화를 보고 사람의 마음은 우주 못지않게 넓고 깊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람이 갖고 있는 하느님에 대한 생각은 넓은 대우주 하고만 관계된 것이 아니고 깊은 소우주와도 관계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언제부터 하느님을 알게 됐을까? 언제부터 하느님을 상상하게 됐을까요?
무엇 때문에 하느님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게 됐을까요?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냄새를 맡을 수도 없는 하느님을 믿는다는 게 어떤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짓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제게는 보이지도 않고 경험하지도 못하는 하느님의 존재를 믿는 것이 참 신기하고 신비스런 일입니다.
여러분도 생각해보십시오. 신을 본 것도 아니고 듣거나 냄새를 맡거나 만져본 것도 아닌데 그분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말입니다.
믿음의 진화과정
하느님에 대한 사람의 생각과 믿음은 계속 변해왔습니다. 21세기를 사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은 지난 세기를 살았던 사람들의 그것과 다릅니다. 현대인이 갖고 있는 하느님에 대한 생각과 믿음은 구약시대 사람들의 그것과도 다르고 신약시대 사람들과의 그것과도 다릅니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하느님에 대한 사람의 생각은 늘 모호하고 분명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짙은 안개 속에 숨어 있습니다. 잘 보이지 않고 그래서 알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안개 속에 가려져 있는 하느님을 보려고 안경을 만들어 쓰고 하느님을 찾으려고 애를 써왔습니다.
처음에 사람들이 만들어 썼던 것은 ‘두려움’이라는 안경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사건들, 천재지변 같은 사건들을 겪으면서 두려움이란 안경을 쓰고 하느님을 바라봤습니다. 두려워 떨면서 하느님이 자기들에게 뭘 원하는지 알고 싶어 했던 겁니다.
그들은 재해는 하느님이 화나서 벌어지는 거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화나지 않게 하고 기쁘게 하는 일이 종교가 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느님을 분노하지 않고 기쁘게 할 수 있을까?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은 기름진 제물을 바치는 일과 최고의 예술적 표현을 써서 하느님을 기쁘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제사나 축제를 통해 그런 일을 했습니다.
다음으로 사람들은 하느님이 윤리적인 행위를 원한다고 믿었습니다. 율법이나 계명을 지키는 것이 하느님이 원하는 윤리적인 행위라고 믿었습니다. 여기에 보상과 징벌의 패러다임이 따라붙었습니다.
하느님이 원하는 행위를 하면 상을 받고 그걸 하지 않거나 하느님이 싫어하는 것을 행하면 벌을 받는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종교의 역사에서 이 패러다임이 가장 오랫동안 지속됐습니다.
그런데 18세기와 19세기에 들어와서 이 패러다임에 반대하고 반발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과학을 비롯해서 모든 학문이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발달했고 이에 발맞춰 사람의 이성이 발달하면서 과거에는 하느님만 하신 일이라고 믿었던 많은 것들을 사람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또한 하느님의 맘에 드는 행위를 하면 상을 주고 하느님의 맘에 안 드는 행위를 하면 벌을 준다는 공식에 반발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고 그들이 무신론자가 됐습니다.
그런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설령 존재한다 하더라도 믿지 않겠다는 겁니다. 격렬하고 전투적인 무신론이 등장했습니다. 이것이 지금부터 2백 년 전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럼 요즘은 어떻습니까? 요즘 사회는 전반적으로 세속적이고 무신론적인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은 종교를 가진 사람의 숫자가 과거에 비해서 현격하게 줄었습니다. 현대를 무신론적 세속사회라고 보는 까닭은 비단 종교인 숫자가 줄었기 때문은 아닙니다.
종교를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 그러니까 과거엔 무신론자로 분류됐던 사람들이 이젠 더 이상 종교에 대해 전투적으로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아예 종교에 대해 관심이 없습니다. 종교에 열광하지도 않고 분노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전투적인 무신론이요 반기독교주의자인 <만들어진 신 God Delusion>을 쓴 리처드 도킨스는 예외적인 인물이라 하겠습니다. 그는 21세기적 인물이라기보다는 20세기적인 인물입니다.
현대사회에서 의미가 없어진 기독교 신앙
요즘 금요일 성서공부에서 같이 읽고 있는 마커스 보그의 <기독교의 심장>이 갖고 있는 문제의식은 ‘오늘날 기독교가 사람들에게 말이 되는가? 그게 현대사회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하는 점입니다.
말하자면 ‘세상이 기독교에 신경이나 쓰는가?’를 묻습니다. 2천 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기독교라는 종교가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무슨 관련성(relevance)이 있느냐는 겁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종교에 무관심하듯이 기독교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울지도 않고 분노하지도 않습니다. 과거에는 제대로 믿지 않는 데 대해서 화도 내고 잘 믿어보자고 기도도 열심히 하고 토론도 열심히 했는데 요즘은 그렇게 믿는 사람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자기 신앙을 죽도록 사랑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적당히,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적당히 믿습니다. 아니, 믿는 척합니다. 이젠 서구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종교에 대한 얘기는 금기가 됐습니다. 종교에 대해 얘기하는 걸 피하는 겁니다.
저는 이런 현상이 한편으로는 우려스럽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잘 하면 제 길을 찾아서 잘 가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우선 우려할만한 현상인 까닭은 신앙에 대한 열정(passion)이 식었기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에 대한 열정은 ‘광신’과 다릅니다. 광신은 열정적인 신앙이 아니라 ‘병든’ 신앙입니다. 현대사회가 당면한 문제에 기독교 신앙이 의미 있는 답을 내놓지 못하기 때문에 관련성을 찾기 어려워졌고 열정도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기독교 신앙이 제 길을 찾는다고 보는 이유는 현대에 맞는 신앙의 형태가 ‘당위’에 매달리지 말고 매일 매일의 삶속에 용해되어 형체를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요즘 기독교에 대해 무관심한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겁니다. 기독교인들이 자기들만 잘난 듯 독단적이고 말로는 이웃사랑을 말하지만 사회봉사나 사회적 실천을 등한시한다는 데 큰 이유가 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 외부에서 기독교를 바라보는 시각인데 그럼 기독교 안에서는 어떨까요? 슬픈 얘기지만 기독교 안에도 기독교에 대해 무관심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기독교인이면서도 신앙에 열정이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자신이 기독교인이란 게 뭘 의미하는지, 내가 뭘 믿는지, 내 신앙이 뭘 추구하는지, 신앙을 통해서 뭘 성취할지에 대해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시계추처럼 교회만 왔다 갔다 합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이젠 이렇게 믿읍시다
저는 이렇게 된 데는 기독교인이라면 모름지기 이래야 한다는 당위적인 생각을 너무 강조했던 데 큰 원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루지도 못할 목표를 세워놓고, 아니면 현대의 가치기준에 맞지 않는 기준을 세워놓고 그걸 이루지 못해서 무기력에 빠져 있습니다.
오늘 요한복음 16장을 읽었습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기독교인들이 회당에서 쫓겨나고 심지어 순교할 거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각오를 단단히 하고 믿으라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이런 일이 벌어집니까? 물론 세계 어느 구석에선 이런 일이 벌어지겠지요. 하지만 우리가 사는 미국이나 한국에서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많은 교회에서 ‘순교의 각오’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선포되고 있습니다. 이런 얘기가 신자들의 일상적인 삶과 무슨 관련이 있겠습니까. 그러면 기독교 신앙이 내 얘기가 아니라 남의 얘기로 들리는 겁니다.
그러니 신앙에 대해 무관심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높디높은 목표를 세워놓고 거기 다다르지 못해서 비통해 하는 기독교인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좌절해서 ‘아, 나는 안 되나보다.’라고 생각하면서 포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점점 신앙에서 멀어져가는 거죠.
과거에는 두려움이란 안경으로 하느님을 바라봤습니다. 그 다음에는 율법 또는 계명이란 안경으로 하느님을 찾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다가 기독교는 ‘그런 신을 없다!’는 무신론의 강력한 반격을 당해서 엄청난 데미지를 입었습니다.
지금은 기독교 신앙이 무의미하다는 사조가 팽배합니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기독교가 배운 것은 하느님과 하느님을 바라보는 안경을 구별해야 한다는 겁니다. 오늘날 신앙은 두려움도 아니고 보상 및 징벌도 아닙니다.
두려움이나 보상, 징벌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아닙니다. 누가 오늘날에도 그것들이 기독교신앙이라고 주장하고 그걸 믿으라고 한다면 그건 거짓말이고 여러분은 속고 있는 겁니다. 제게는 그것이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악한 세력의 계략으로 여겨집니다.
이제는 하느님을 매일의 일상에서 만나는 신앙을 살 때입니다. 신앙은 두려움도 아니고 보상이나 징벌도 아닙니다. 늘 우리 곁에 계셔왔고 지금도 계시는 하느님을 마음을 비우고 경험하고 자연스럽게 믿는 신앙을 갖자는 말입니다.
두려움이나 의무감 같은 안경들은 다 용광로에 집어넣어 녹여버립시다. 소금이 물에 녹아 스스로 형체는 사라지지만 짠맛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우리 신앙도 독단성이나 개별성에 매달릴 게 아니라 삶속에 완전히 녹아서 예수 없이 예수를 말하고 전통을 고집하는 복음이 아니라 형태도 없고 특수하지도 않은 복음을 전하는 방향으로 탈바꿈할 때가 이제는 됐습니다.
대우주는 신비하고 소우주도 신비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신비한 소우주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공동체도 소우주와 대우주 못지않게 신비합니다. 이 공동체가 우리가 신앙을 실현할 장(場)입니다. 우리는 거기에 녹아들어야 합니다.
튀려 하지 맙시다. 배타적이지 말고 모든 사람들을 끌어안읍시다. 이젠 기독교 신앙이 이런 모습을 가질 때가 됐습니다. 이젠 우리가 예수를 이렇게 믿을 때가 됐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오도된 확신 /요16:1-4/ 김기석 목사
2023-04-14 23:40:24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것은, 너희를 넘어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그리고 너희를 죽이는 사람마다, 자기네가 하는 그러한 일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할 때가 올 것이다. 그들은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하므로, 그런 일들을 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하여 두는 것은, 그들이 그러한 일들을 행하는 때가 올 때에, 너희로 하여금 내가 너희에게 말한 사실을 다시 생각나게 하려는 것이다. 또 내가 이 말을 처음에 하지 않은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 암담한 현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사순절이 깊어가고 있지만 이 땅에 드리운 어둠은 좀처럼 물러갈 생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지난 주중에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사건은 3월 1일 세종시의 어느 아파트에 내걸린 일장기였습니다. 그 주인공은 항의하는 주민들에게 자기는 일본 사람이라며 한국이 너무 싫다고 말했고 유관순이 실존인물이냐고 물었습니다. 며칠 후 그가 어느 교파의 목사라는 사실이 드러났고, 그는 부끄러운 기색도 없이 그 사건으로 자기가 대스타가 되었다고 떠벌렸습니다.
또 정부는 강제징용 문제가 원만한 한일관계의 장애가 된다는 구실 하에 전범기업의 배상 책임에 면죄부를 주었습니다. 일본은 강제징용에 대해 인정하지도 않았고 사죄하지도 않았습니다. 일본 외무상은 며칠 후 ‘강제 동원은 없었다’고 발뺌했습니다. 피해자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은 셈입니다. 진정한 용서와 화해는 진상이 규명되고 가해자의 진실한 참회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요구해도 일본이 사죄할 것 같지 않으니 사건을 덮고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자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이래저래 참담한 마음인데 요즘 넷플릭스에서 방영된 기독교 이단들의 행태를 파헤친 고발 프로그램 <나는 신이다>가 사람들에게 깊은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교주 노릇을 하는 정명석이라는 이의 엽기적인 행각, 많은 이들을 죽음에 이르게 했던 오대양 사건들이 적나라하게 파헤쳐졌다고 합니다. 신학교 시절 은사님께서 하신 말씀이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종교는 사기꾼들이 숨기 매우 좋은 장소’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단 종파들은 힘겹고 암담하고 불안한 삶에 지친 이들에게 아주 친절한 이미지로 다가섭니다. 그들의 시린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집니다. 한번 그런 환대를 경험한 이들은 그들을 멀리하기 어렵습니다. 일단 그런 접촉점이 마련되면 그들은 기존 종교나 질서에 대한 비평을 쏟아냅니다. 이단 종파에 빠진 이들은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비의를 홀로 아는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힙니다. 교주들은 특별한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스스로 메시야를 참칭하기도 합니다. 그 속에 사로잡힌 이들은 성찰적 거리를 확보할 수가 없기 때문에 반사회적 태도를 보이기 시작합니다. 교주는 신적 존재로 숭앙되고 그는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제 마음대로 착취합니다. 악마적인 행위입니다.
∎ 확신이라는 함정
미국의 신학자인 하비 콕스는 <뱀이 하는 대로 내버려두지 말라>는 책에서 자기 스스로 내려야 할 결정을 타자들에게 맡겨버리는 태만의 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생각하지 않음’이야말로 사탄이 우리 속에 들어오는 통로입니다. ‘난 복잡한 것은 딱 질색이야. 결론만 말해’라며 사람들을 윽박지르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삶을 아주 단순화시켜서 바라봅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문제를 흑과 백으로 가를 수는 없는 법입니다. 단순화는 삶의 복잡함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폭력적입니다. 다른 이들의 아픔이나 상실감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결단이고 모험이지만, 회의를 허용하지 않는 믿음은 위험합니다. 지나칠 정도로 확신에 찬 이들은 자기들과 다른 견해를 가진 이들을 싫어합니다. 그들은 다른 이들과 만나 새로운 것을 배우려 하지 않습니다.
확신에 찬 사람들은 ‘다름’을 용납하지 못합니다. 다른 이들을 배제하거나 폭력적으로 동화시키려 합니다. 영국의 소설가 조지 오웰이 1948년에 완성한 소설 <1984>는 전체주의적 사회의 참상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빅 브라더가 감시하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자유를 누리지 못합니다. 그 사회는 사람들의 행동은 물론이고 사고까지 지배하려 합니다. 빅 브라더가 정해놓은 기준을 따르지 않는 이들은 다 비정상으로 여겨져 처벌을 받습니다.
“얼굴에 나타나는 경련, 무의식적으로 짓는 불안한 표정, 혼자 중얼거리는 습관 등 조금이라도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것은 없어야 한다. 무언가를 감추려는 행위로 간주되어 위험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든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면 그것만으로도 처벌 대상이 된다. 심지어 이에 대한 신어까지 있는데, ‘표정죄(facecrime)’가 바로 그것이다.”(조지 오웰, <1984>, 정희성 옮김, 민음사, p.88)
이단 종파들이 하는 일이 이와 매우 유사합니다. 다른 생각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의 답만이 있을 뿐입니다. 사람들이 여기에 넘어가는 것은 그들이 모호한 삶에 대한 분명한 답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오도된 확신’처럼 위험한 게 또 있을까요? 에스겔은 제사장들에게 요구되는 매우 중요한 능력이 분별력이라고 말합니다. “제사장들은 내 백성이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도록 백성을 가르치고,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을 분별하도록 백성을 깨우쳐 주어야 한다”(겔 44:23). 오늘 스스로 종교 지도자를 자처하는 이들은 오히려 사람들을 혼돈 속으로 밀어 넣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오도하는 이들을 보고 주님은 분노하셨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개종자 한 사람을 만들려고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하나가 생기면, 그를 너희보다 배나 더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마 23:15)
하나님은 우리를 자유인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그릇된 종교인들은 우리를 추종자로 만들려 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사람들을 수단으로 이용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릇된 열정에 사로잡힌 이들의 처지를 설명하기 위해 하나의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더러운 귀신이 어떤 사람에게서 나와서 쉴 곳을 찾다가 찾지 못하고 떠나온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가서 보니 그 집이 깨끗하게 치워진 것을 보고는 자기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 끝에 덧붙여진 이야기가 기가 막힙니다.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비참하게 된다”(눅 11:26). 참으로 두려운 이야기입니다.
∎ 제자의 길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더 나아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은 세상의 입장에서 보면 불편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그 당시 지중해 세계를 지배하던 로마 제국과 대비되는 나라였습니다. 로마 제국은 힘 있는 사람이 힘없는 사람을 지배하는 것이 정상인 사회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장 높은 사람이 가장 낮은 자리에서 섬기는 세상을 선포하셨습니다. 우리도 갈릴리 호숫가에서 잉태된 그 영롱한 꿈에 동참하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자기 목소리를 갖지 못한 이들의 목소리가 되어줍니다. 평화를 지향하지만 불의에는 저항합니다. 세상에서 그림자 취급을 받는 사람들의 설 자리를 마련해주기 위해 노력합니다. 누릴 것을 다 누리며 홀로 만족하는 이들은 아랫것으로 여기던 이들이 ‘나도 인간’이라고 고개를 들면 질색을 합니다. 참의 길이 십자가로 이어진 것은 그 때문입니다. 주님은 당신이 떠난 후 세상에 홀로 남겨질 제자들에게 마음을 단단히 먹으라며 말씀하십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세상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여 있다면, 세상이 너희를 자기 것으로 여겨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고 오히려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가려 뽑아냈으므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요 15:18-19)
주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까닭은 세상에서 시련을 겪을 제자들이 낙심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머지않아 회당에서 쫓겨날 것이고, 심지어는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하나님 나라를 거절하는 이들이 제자들을 박해하면서 오히려 그것이 곧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도된 신념처럼 위험한 게 없습니다. 작고하신 이어령 선생은 폭탄 테러리스트들이나 히틀러도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말하면서 인간사는 ‘예스’와 ‘노우’만으로 판단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메이비maybe를 허용해야 하네. 메이비maybe가 가장 아름답다고 포크너가 그랬잖아. ‘메이비maybe’ 덕분에 우리는 오늘을 살고 내일을 기다리는 거야.”(김지수,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열림원, p.172)
메이비, ‘어쩌면’, ‘아마도’라는 말은 판단을 유보하는 말입니다. 다른 이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여백입니다. 여지 혹은 여백이 없는 말이 우리 사회를 어지럽힙니다.
∎ 혼자 힘으로는 할 수 없겠네
존 웨슬리는 ‘광신의 본성’이라는 설교에서 광신자들의 첫 번째 특성이 교만이라고 말합니다. 교만은 자기 분수를 알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교만한 이들이 있는 곳에서는 사랑과 평화의 샘물이 솟구쳐 나올 수 없습니다. 교만은 일종의 독입니다. 자기를 해치고 남을 해칩니다. 교만과 함께 생기는 것이 고집입니다.
“교만이 커질수록 그를 권면할 수 없는 상태와 고집도 역시 커집니다. 그는 납득이 되도록 이야기가 통할 가능성과 설득당할 가능성이 점점 줄어들어서 오히려 자기 자신의 판단과 자기 자신의 의지에만 더욱더 집착을 하기 때문에 드디어 그는 완전히 고착되어 요지부동이 됩니다.”(<웨슬리 설교전집 3>, 한국웨슬리학회 편, 대한기독교서회, p.30-31)
설득당할 가능성이 줄어든다는 것이야말로 오도된 확신에 사로잡힌 이들의 특색입니다. 이들은 불친절합니다. 자기와 다른 이들을 경멸합니다. 그들은 사람을 가르는 장벽을 세웁니다. 사람들이 서로 통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평화가 아니라 불화를 조장합니다. 그들은 하나님도 모르고 예수님도 알지 못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평화의 여정 가운데로 부르십니다. 아무리 애를 써 봐도 세상이 점점 어두워가는 것 같아 맥이 빠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평화를 향해 내딛는 발걸음 하나하나가 결국은 길을 이룰 것입니다. 마음에 깃드는 어둠을 내몰기 위해 자꾸만 주님을 찬미해야 합니다. 그래야 지배하고 장악하려는 의지에 사로잡히지 않게 됩니다. 믿음의 여정 가운데 있는 이들의 연대 또한 꼭 필요합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젊은 시절에 목이 터져라 불렀던 노래가 떠오릅니다. “혼자 힘으로는 할 수 없겠네/둘의 힘으로도 할 수 없겠네/둘과 둘이 모여 커단 힘이 될 때/저 굳센 장벽을 깨뜨릴 수 있네”. 조급해 하지 말고, 느긋하게, 그러나 즐겁게 진리의 길을 걸어가는 우리가 되기를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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