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 (110) - 환난 중에 평안을 누리는 믿음 /요16:25-33/ 김형익 목사
2021-05-08 16:45:30
1. 믿음에 대한 오해: ‘쎈 믿음’, ‘약한 믿음’
믿음이라는 말보다 더 중요한 말이 있을까요? 문제는 믿음에 대해서 자기 나름대로 생각하기가 참 쉽다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가 그렇지만, 특별히 요한복음은 우리에게 믿음에 대한 오해들을 많이 교정해주면서 바른 믿음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고 뿐만 아니라 이 바른 믿음을 가지게 하려는 의도로 기록된 성경입니다. 종종 우리는 '아무개는 믿음이 좋다' 혹은 '아무개 권사의 믿음은 쎄다'하는 식으로 표현합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그 사람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잘 들어주신다는 말입니까?
그 사람의 기도는 다른 사람보다 효험이 있다는 것입니까? 믿음이 쎄다, 약하다는 어떤 차이입니까? 곤란한 질문을 하나 드리지요. 말기 암과 같은 불치의 병이 걸렸을 때 낫는다고 믿고 치유해주시기를 끝까지 기도하는 것이 믿음이 센 것입니까? 아니면 이때 하나님의 뜻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하고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것이 믿음이 센 것입니까? 극단적이기는 하지만, 이 질문은 믿음의 본질에 대하여 매우 중요한 차이를 드러냅니다.
2. 믿음의 주체 대(vs) 믿음의 대상
여러분은 암에 걸려서 죽기 직전까지 하나님께서 나를 낫게 해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가 돌아가신 분을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런 경우를 더러 보았는데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문제는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제가 보기에 평안을 누리지 못하셨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분의 신앙은 거짓 신앙이라기 보다 오류가 있는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낫기를 원하는 자기 생각, 자기 뜻을 끝까지 하나님께 구하였습니다
. 그런데 또 한 분은 그런 원치 않는 똑같은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또 낫기를 구하기도 하였지만, 어느 정도 상황이 진행되는 것을 보면서 만일, 주님의 뜻이 저를 불러가시는 것이라면, 제가 이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꼭 붙들고 이 속에서도 주님의 주시는 평안을 잃지 않게 해주시고 주변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선하심을 증거할 수 있게 해주시기를 구합니다. 그리고 그도 물론 하나님이 데려가셨습니다.
믿음에 대한 혼동이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제자들이 가졌던 믿음이 어떤 믿음인지를 보게 됩니다. 이제 3년 동안 거의 풀타임으로 역사상 유일무이하게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제자훈련을 받았던 사도들은 예수님이 죽으시기 전에 마지막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제자훈련의 마지막 시간입니다. 자, 이 때 제자들이 가졌던 믿음이 보여주는 것은 어떤 모습일까요?
3. 제자들의 믿음: 약하지만 바른 믿음
A. 비사로 말씀하시지 않는 때가 온다(25, 비교, 막 4:33~34).
본문을 보겠습니다. 이제까지 주님은 많은 비유도 말씀하셨지만, 사실 주님의 말씀들이 그리 명료하게 이해되는 말씀들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많은 것을 배우고 공부하였지만 사실상 그들이 제대로 깨달은 것은 참 적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 증거가 요한복음에 무수히 등장하는 예수님과의 대화 속에서 제자들이 동문서답을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25절에서 이제는 비사로 말하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말할 때가 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비사라는 말은 제가 10장을 설교할 때 설명 드렸지만 비유와는 차이가 있는 말입니다. 비사란 비유를 포함한 가르침인데, 가령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다고 할 때 이것은 비유입니다. 비사는 이런 비유 외에도, ‘나는 양의 문이다’라든지 ‘나는 포도나무다’라는 은유들이 포함된 것입니다.
비유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것을 가르치실 때 비사로 말씀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비사로 말씀하신 것들도 약간의 모호함을 가지고 있어서 여러 가지로 해석이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직접적으로 이야기해도 제자들이 깨닫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판단하셨기 때문입니다(16:12).
그런데 이 말씀은 마가복음 4:33~34에 주님이 하신 말씀과는 상충되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에 해석이 어렵습니다. “예수께서 이러한 많은 비유로 그들이 알아 들을 수 있는 대로 말씀을 가르치시되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 하지만 이것은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의 관점의 차이입니다.
마가복음이 예수님의 공생애 안에서 대상을 기준으로 말씀하고 있다면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죽으심/부활/승천/성령강림이라는 시간을 기준으로 말씀하는 것의 차이입니다. 물론 공관복음서 모두가 요한의 관점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요한복음은 오로지 이 관점만을 매우 좁게 견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요한복음에서 제자들이 주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해서 동문서답을 하는 것을 유난히 많이 보는 이유가 이것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비사로 말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부활 사건 이후에는 제자들이 깨달을 수 있게 되고 그래서 직접적으로 말씀하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그리고 다락에 모여있던 제자들에게도 구약 성경을 풀어주실 때 그렇게 하신 것을 우리는 찾아 볼 수 있습니다(눅 24: 27, 44~48).
B.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확증과 확신(26~27)
주님은 이어서 앞서 여러 차례 언급하셨던 주제인 기도에 대해서 오해하지 말도록 한 가지 주의를 주십니다. 내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뜻은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대신 구해주겠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26).
비록 우리 스스로는 자격이 없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하지만, 그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중개하시겠다거나 예수님의 또 다른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말씀은 아니라는 겁니다. 신자들의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께 직접 구하는 것입니다. 천주교에서 말하듯이, 예수님도 모자라서 마리아에게 부탁하거나 성인들에게 부탁해서 하는 게 아니라고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 근거가 27절입니다.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
아버지께서 친히 사랑하시는데 누구를 사랑하시는가하면,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믿는 사람,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순종하심으로써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시듯이, 제자들이 예수님께 순종함으로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 연결되는 사랑의 경험입니다(요 15:9~10).
아버지의 사랑은 예수님에 대한 제자들의 사랑과 믿음에 대한 아버지의 당연한 반응입니다. 아버지께서 보내신 독생자를 믿음으로 사람은 아버지의 자녀가 되고, 아버지는 그런 당신의 자녀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왜 주님이 이 말씀을 하십니까? 이제 예수님이 떠나가시지만, 제자들이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확신을 가진다면 그들이 능히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기에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C. 예수님의 미션(28)
28절은 예수님의 사명에 대한 요약입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믿음은 예수님이 바로 이런 분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이제 주님은 세상에 오셨던 목적을 눈 앞에 두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제 그 일을 마치고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실 것입니다.
D. 제자들의 신앙고백(29~30)과 예수님의 책망(31~32)
주님의 말씀을 듣던 제자들의 반응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제자들은 정말 알아들었다는 듯이, 아주 시원한 표정으로 말합니다. “지금은 밝히 말씀하시고 아무 비유로도 하지 아니하시니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전지하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심을 우리가 믿사옵니다.” 제자들의 신앙고백입니다. 이 신앙고백으로 제자들의 신앙에 대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까? 첫째 제자들은 또 틀렸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비사로 말씀하지 않으신다고 하신 때는 아직 이르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를 가리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지금 오버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일은 처음이 아닙니다. 늘 아는 척하는 때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책망을 면치 못했습니다. 베드로가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줄 믿고 알았삽니이다"라고 멋진 고백을 했을 때 주님은 "너희 중 한 사람은 마귀니라"라고 하십니다(요 6:68~70).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한 후에, 베드로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호된 책망을 들은 것을 우리는 압니다.
또 베드로가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라고 했을 때, 주님은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하셨습니다(요 13:37~38). 주님은 여기서도 이 고백에 대하여 뭐라고 하십니까?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전에 저는 이 말씀이 칭찬일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잘 보면 칭찬이 아닙니다. 이것은 일종의 책망입니다. “이제야 믿는다고 하는거냐? 그런데 너희가 지금 믿는다고 하지만...” 그 다음에 주님은 제자들이 다 주님을 버리고 도망갈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제자들의 믿음의 수준이고 실력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주님이 덧붙이신 말씀은 제자들이 다 주님을 버릴지라도 주님은 혼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비록 제자들은 신실하지 못하지만, 아버지는 신실하셔서 주님을 홀로 두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상에서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으시는 것을 부인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사실,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선언인지 모릅니다. 이런 환난 속에서도 주님이 평안을 잃지 않으실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도 나중에 이것을 경험했고 이렇게 썼습니다.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딤후 4:16~17).” 이런 것은 사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경험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앞으로 제자들이 경험하게 될 것을 암시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제자들의 믿음은 어떤 것입니까? 그들은 옳게 말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전지하신 하나님이신 것과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는 것을 믿었고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종종 정답을 말했습니다. 하지만 정답을 말했다는 것이 언제나 정답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했다는 말은 아닙니다. 즉 답은 맞추었는데 어떻게 푸는지는 모르는 것입니다. 그들이 모르는 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승리라는 사실을 그들은 모릅니다.
그들에게 십자가는 오직 죽음의 형틀이고 수치일 뿐입니다. 이것은 중요한 차이입니다. 다 알 수 있습니다. 정답을 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정답이 의미하는 바, 십자가가 나에게 무엇이냐 하는데서는 차이가 나는 겁니다. 그래서 한 사람은 십자가를 짊어지고 주님을 따르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십자가를 지는 대신, 자기의 영광을 추구하면서 가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신앙은 아직은 연약한 상태였습니다. 그들의 신앙의 정도면에서 보자면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정작 그때가 오자 주님을 버리고 도망한 것입니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말입니다.
그들이 주님을 사랑한 것은 거짓이 아닌 진심이었는데 말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의 신앙이 진심이었기 때문에 참 신앙이었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제자들의 신앙이 연약하고 아직 무지한 수준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믿은 대상이 바로 예수님이었고, 성경이 계시하는 대로의 예수님이었기 때문에 참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이들은 진짜 신앙이었고 다만 이미 이 그룹을 벗어나버린 유다만은 가짜였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의 믿음을 칭찬하신 것은 아니지만, 그 믿음의 참됨을 받아주십니다. 17:8을 보십시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 그들은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제자들의 신앙은 비록 연약한 믿음이었지만, 바른 믿음이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의 진정성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믿음의 대상 때문에 바른 믿음이었다는 말입니다.
4. 마지막 격려: 환난 중에 평안(33)
33절은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따뜻한 격려인지 모릅니다. 감사하지요. 책망으로, 다 도망갈 것이라는 말씀으로 끝내지 않으셨으니 말입니다. 세상에서 제자들은 환난을 면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고 이 모든 말씀을 주셨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고 담대하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A. 오해: 환난이 없는 평안이 아니라, 환난 중에 평안이다.
환난은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피할 수 없는 문제들 또 믿음으로 말미암아 겪게 되는 고통?세상이 미워할테니까?을 다 포함하는 말입니다. 이런 고통의 문제, 환난의 문제는 본질적으로 죄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역사적으로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룰 것인지를 고민해왔습니다.
그중에 고대 희랍 철학에서 고통의 문제를 다룬 두 가지 방식이 아마 모든 시대 사람들의 태도를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스토아학파는 고통은 우리가 바꿀 수 있는게 아니니까 그냥 견뎌야 하고,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일이 일어날 때 잘 반응하는 것 뿐이다라고 말합니다. '잘 반응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그것은 포기하지 말고 견디는 것이지요. 반면에 쾌락주의로 알려진 에피큐리언 학파는 이렇게 말합니다
. "먹고 마시고 즐기자. 내일은 죽을테니까." 결국 인생의 무의미를 말하는 것입니다. 니체의 선배들입니다. 언제 고통이 다가올지 모르니 지금을 즐기라는 것입니다. 인생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지요. 주님은 그들과 다르게 말씀하십니다. 환난과 고통은 옵니다. 하지만 즐거워하라고 하십니다. 평안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리석은 부자가 엄청난 재물(수확)을 모아놓고 바라보면서 "이제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고 말하는 그런 평안이나 기쁨이 아닙니다(눅 12:19)
. 이렇게 말하는 기독교는 거짓 기독교입니다. 성경은 이런 평안과 즐거움을 어리석다고 판단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시고 기독교 복음이 가르치는 평안은 바울 사도가 빌립보 감옥 안에서 매를 맞고 찬송을 부르는 그런 평안입니다.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분부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행 16:23,25).”
그리고 하박국 선지자가 자신의 생존의 조건이 위협이 받고 원하는 것을 주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셨지만, 그 속에서 하나님, 그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그런 평안입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 3:16~17).”
오해하지 마십시오. 기독교 복음은 예수를 믿으면 환난을 겪지 않고 고통을 없애준다고 약속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은 "너희가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약속하시는 평안은 환난이 없는 평안이 아니라, 환난 중에 누리는 평안입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힘, 이유, 근거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B. 우리의 승리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승리다.
우리가 세상에 사는 동안, 날마다 숨쉬는 순간마다 우리를 위협하는 고통과 환난과 슬픔이 있습니다. 우리는 수도 없이 넘어지고 힘들어하고 낙심하고 좌절합니다. 우리는 집니다. 우리가 이 환난 중에 평안을 누리는 길은 오직 하나, 우리가 '그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하신 말씀을 잘 보십시오.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내 안에서'라고 하십니다. 포도나무의 비유를 생각나게 합니다. 주님 안에 있을 때에만 우리는 세상의 환난 중에서도 평안을 누릴 수 있다고 합니다. 다윗도 그랬습니다.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시 57:1).”
모든 신앙의 사람들이 이 비결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잘나서가 아닙니다. 참을성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주님이 세상을 이기셨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서 대신 싸우셨고 세상을 굴복시켰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 평안은 오직 주안에서 주어집니다. 이 말은 이 평안이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와 주님을 믿는 자에게만 주어진다는 말입니다. 이런 평안을 누리려면 그리스도를 나의 주, 나의 구세주로 믿어야 합니다. 그 믿음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 안에 거하게 됩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우리 편에서의 엄청난 믿음, 쎈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얼마나 진심으로 믿느냐도 아닙니다. 믿음은 본질적으로 그 대상의 문제입니다. 이슬람의 알라를 진심으로 뜨겁게 믿는 것을 참 믿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요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받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존재적으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 피할 수 없는 저주와 진노를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는 길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그분을 붙잡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 적이 있습니까? 이것은 매우 분명한 질문이고 분명한 대답을 요구하는 질문입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여러분의 생애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믿음을 달라고 절박하게 지속적으로 얻을 때까지 하나님께 구해본 적이 있습니까?
이것보다 중요한 일은 여러분의 생애에 있을 수 없습니다. 물론 이런 일이 여러분 생애에서 일어난 적이 없었다면, 여러분이 누구든지 간에 지금 하나님께 믿음을 달라고 구할 수 있고, 이제 제가 믿나이다 하고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고 주님이 말씀하시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단순히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평안을 찾아서, 세상에서 바라는 것을 얻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좋아 보여서 믿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하나님 앞에서 인정함이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내가 옳고 잘난 것을 인정받겠다는 생각은 믿음과 함께 설 수 없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환난 중에 누리는 평안은 오직 이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고, 이 믿음은 우리 믿음의 진실성의 정도에 달린 것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신 그리스도,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그리스도께 달린 것입니다.
5. 믿음으로 환난 중에 평안을 누리라(롬 8:31~39).
참된 믿음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환난 중에도 평안을 누리게 하는 믿음입니다. 그것은 소위 쎈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이 좋다, 쎄다고 하는 말에는 믿음의 중심이 대상이신 그리스도께 있지 않고 사람 자신에게 있는 것을 드러냅니다. 믿음은 본질적으로 믿는 주체가 아니라 믿음의 대상에 중심을 두는 것입니다.
주님은 어린 아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어린 아이가 성숙한 믿음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바른 믿음을 가집니다. 바른 믿음은 자신이 잘 믿고 있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만을 순전하게 바라보는 것입니다. 믿음은 믿음의 주체인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것을 전제합니다. 이 믿음이 참된 믿음입니다. 연약할지 모르지만,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바른 믿음입니다.
암으로 시한부 생명을 선고받는다고 할지라도, 불의의 사고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한 순간에 잃어버린다고 할지라도, 이 환난 중에도 평안을 누리게 하는 것은 바른 믿음, 참된 믿음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세상을 정복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일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사실 때문에, 믿는 자는 환난 중에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기뻐하고 평안을 누립니다. 그래서 믿는 자는 바울 사도처럼 말할 수 있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5~39).”
아멘.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환난과 곤고와 여러분이 겪는 그 모든 슬픔과 고통을 다 이기시고 정복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분 안에서 평안을 누립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것이 믿는 자가 잃어버릴 수 없이 경험하는 실재입니다. 이 평안, 이 기쁨이 참된 그리스도인만이 누릴 수 있는 실재이고,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이 기쁨과 이 평안을 누릴 때 우리는 우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자녀임을 이 세상 앞에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이여, 여러분이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주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평안을 누리십시오. 그리고 담대하십시오.
★ 헛된 승리와 참된 승리 /요16:25-33/ 이재철목사
2015-07-26 22:32:27
세상의 살벌한 경쟁사회에서 승리한다고, 참 평안이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유한한 것이고, 승리한다 해도 또 경쟁자에게 쫓기게 되는 ‘헛된 평안’이다.
‘참 평안’은,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 안에서만 얻는다는 주제의 설교문.
◑헛된 승리
▲무함마드 알리
`96 애틀랜타 올림픽'때 전 세계적으로 큰 화제를 불러일으킨 주인공은
올림픽 성화에 점화를 한 왕년의 권투스타 무함마드 알리입니다.
그의 모습이 점화대에 나타났을 때 현장에 앉아 있던 관객은 물론이요,
TV를 시청하던 온 세계인이 함께 놀랐습니다.
그가 파킨슨 병세로 인해 흔들거리는 손으로 점화를 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한 한편의 드라마였습니다.
그 장면을 가지고, 다음날 모든 세계의 매스컴들은
무함마드 알리에 대하여 대서특필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은 인간 감동의 드라마라고 말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불치의 병을 앓고 있는 알리의
위대한 인간 승리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흑인과 백인의 화합의 상징이라 표현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인간 승리의 허망함
알리에 대한 사람들의 찬사가 어떠하든 상관없이,
그날 제가 그 장면을 보면서 느낀 것은 오직 하나―인간 승리의 허망함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이 말하는 승리란 결코 참된 승리가 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1960년 로마 올림픽에서 당시 18세의 소년으로 금메달을 딴 알리는
그 이후 20년 동안 세계 프로권투 헤비급을 지배한 위대한 복서로,
위대한 승리자로 불후의 명성을 날렸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어떠합니까?
선수 생활 중, 상대선수로부터 가격 당한 펀치드렁크의 후유증으로
불치의 파킨슨병에 걸려 자기 스스로 자기 몸을 제어할 수도 없는
불우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제 54세인 그의 나이를 생각할 때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그 동안 쟁취했던 그 수많은 승리의 의미는 과연 무엇입니까?
그의 승리가 그의 인생을 근본적으로 망가뜨려 놓았다면,
그가 도대체 무엇을 이겼단 말입니까?
자기의 생을 걸었던 것 때문에 벗을 수 없는 병마의 고통을 당한다면,
그는 그 자신의 인생에 대한 패배자가 아니겠습니까?
▲허무한 인간의 승리
이번 애틀랜타 올림픽 남자 육상 100m 결승에서는
캐나다의 베일리 선수가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그의 기록은 9.84초로써 세계 신기록이었습니다.
종전 기록은 2년 전 미국의 버렐이 스위스의 로잔에서 기록한 9.85초였습니다.
말하자면 베일리가 2년만에 세계기록을 0.01초 갱신한 것입니다.
60년 전 육상 100m 세계기록은 10.24초였습니다.
말하자면 60년 동안 100m기록은 0.4초 빨라진 것입니다.
그 0.4초를 위해 지난 60년 동안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뛰고 또 뛰었겠습니까?
얼마나 많은 승리자들이 탄생했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의 모든 승리, 모든 기록은
베일리의 새로 수립한 신기록 앞에서 더 이상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그러나 베일리 역시 영원한 승자일 수는 없습니다.
그의 기록 역시 누군가에 의해서 갱신되고 말 것입니다.
앞으로도 사람들은 0.01초 기록을 단축하기 위해 이를 악물고 애를 쓸 것입니다.
운동장에 ‘영원한 승리’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저 잠시 동안의 승리요, 찰나적인 승리에 불과하기에
참된 승리가 될 수 없습니다.
더구나 베일리가 자신의 젊음을 바쳐 세계기록을 0.01초 단축한 만큼
그의 삶이 행복과 평안을 누리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추구하는 승리란, 긴 안목에서 볼 때, 더더욱 덧없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현대인은... 알리나 베일리처럼, 헛된 승리를 추구 합니다.
승리란 운동장의 선수들만 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처절한 생존경쟁 사회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승리를 추구하는 자들입니다.
자기 나름대로 이기기를 원하며, 이기기 위해 온갖 노력과 열정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겼을 때에는 승리의 감격을 만끽합니다.
그러나 그 감격은 결코 오래도록 지속되지 않습니다.
인간의 승리는 ‘영원한’ 승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유한한 인간이 얻는 승리란 알리나 베일리의 승리처럼 유한한 승리요,
한시적인 승리일 뿐이기에,
오늘 승리했다는 것은 내일의 패배가 시작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경쟁에서 승리가 무의미하다는 뜻이 아니라,
일평생 자기 목숨 걸고, 남을 죽이면서까지 추구하기에는 허무한 것이라는 뜻)
▲승리도 어렵지만, 승리하고 나서도 불안하고 초조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승리를 얻고서도 평안을 누리지 못합니다.
큰 승리를 얻으면 얻은 만큼 오히려 더 불안해하는 것이 인간의 실상입니다.
그 승리를 빼앗기고 싶지 않으면서,
또 언제 빼앗길는지 알지 못하는 불안 때문입니다.
◑참된 승리
▲예수님의 마지막 긴 강론의 목적
그러나 여기에 참된 승리가 있습니다.
결코 패배의 전주곡이 아닌, ‘영원한’ 승리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진정한 의미에서 영원한 승리자가 될 수 있는 비결이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요16:33a
예수 그리스도께서 잡히시던 날 밤,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가지십니다.
식사 후 주님께서는 무릎을 꿇으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다음,
다시 자리에 앉으시어 제자들에게 마지막 강론을 행하신 바,
그 내용이 요한복음 13~16장까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체포당하시기 직전, 그 마지막 순간에 제자들에게
그처럼 긴 강론의 말씀을 주신 이유를 본문에서 밝히고 계십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주님께서 마지막 순간 그처럼 긴 가르침의 말씀을 주신 까닭은
부자가 되거나 남달리 성공하는 비법을 일깨워 주시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권력에 이르는 첩경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의 이유, 인간으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해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불안의 존재임을 주님께서는 잘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환란을 당하지만 평안하다
그렇다면 주님 안에서 누리는 평안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 세상에서의 무사안일이나 천하태평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미풍도 없는 지극히 고요하고 평화스러운 밤에도
불안과 초조로 잠 못 이루는 사람들은 부지기수입니다.
승리자는 승리자대로 승리를 빼앗기지 않으려,
패배자는 패배자대로 또 다시 패배의 쓰라림을 겪지 않으려고
모두가 불안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세상을 살며 환난을 당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육체적으로 경제적으로 가정적으로 얼마든지 환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진리를 추구하는 자이기에,
불의를 좇는 자보다 현실적으로 더 큰 환난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그 어떤 큰 환난도 결코 건드릴 수 없는 평안,
결코 허물어질 수 없는 절대적인 평안을 우리로 하여금 누리게 해 주시기 위해
지금 주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어떻게 그와 같은 절대적인 평안을 우리에게 주실 수 있습니까?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절대적인 평안을 수실 수 있는 까닭은,
주님만이 세상을 진정으로 이기신 영원한 승리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무엇을 이기셨습니까?
인간을 억누르는 ‘죄의 권세,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것입니다. “세상을 이기었노라”
주님께서 인간의 모든 죄 짐을 지시고 십자가의 형벌을 대신 받고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시므로 영원한 생명의 승리자가 되신 것입니다.
그것은 이기고서도 그 승리 때문에 펀치드링크에 시달리는 무함마드 알리처럼
허망한 승리가 아닙니다. 베일리의 승리처럼 누군가에 의해 또 다시 갱신되어질
일시적인 승리가 아닙니다.
영원히 부활하시어 지금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기에
주님의 승리는 완전무결한 승리, 참된 승리, 영원한 승리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한다 할지라도
성도가 그리스도안에서 절대적인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주님의 영원한 그 승리가
곧 믿는 우리의 승리가 되는 까닭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담대하라=즐거워하라, 용기를 가져라
‘담대하라’는 단어 tharseo는 `즐거워하라' `용기를 가져라'는 뜻입니다.
올림픽 경기에서 언젠가는 깨어져 버릴 유한한 승리를 얻고서도
당사자들이 얼마나 기뻐합니까?
하물며 영원한 승리에 동참한 자라면 어찌 즐거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인간을 유한하게 만든 죄와 죽음을 이긴 자에게 무엇이 두려울 것이 있겠습니까?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자가 어찌 매사에 용기를 가지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떤 상황에서도 담대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세상을 승리한 승리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병들 때도 있고, 풍랑 칠 때도 있고, 넘어질 때도 있습니다.
‘세상에서 환란을 당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담대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그런 모든 환란이 결코 우리를 정복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크게 구애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혹시 최악의 결과라도... 결국에는 천국의 평안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세상적 승리 집착 vs 주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는 삶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이란 더 이상 이 세상의 덧없는 승부에
인생을 거는(올인 하는) 자일 수는 없습니다.
이미 영원한 승리를 얻은 자답게 ‘죄로부터 자유하는 진리의 삶’,
‘죽음으로부터 자유하는 영원한 생명의 삶’을 지향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믿는다면서도 여전히 세상의 승리만을 인생 최대의 목적으로 삼는다면,
그는 아직 세상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바로 알지 못하는 자 입니다.
그와 같은 자는 이 세상에서의 승리를 수백 번 얻는다 할지라도
자신과 타인을 결국엔 패배케 하는 어리석은 자일뿐입니다.
▲기업의 승리 - 알리의 승리와 무엇이 다른가?
지난 주간 며칠 동안 경주에서 지내었습니다.
첫날 저녁 숙소의 방에 들어갔을 때 다음과 같은 안내문이 책상 위에 놓여 있었습니다.
`96년 8월 20일 새벽 4시부터 모 기업이 주관하는 대형 행사 관계로
다소의 소음이 예상되오니 양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기업은 해당 분야에서는 판매실적 1위를 기록하는 기업입니다.
대수롭게 생각지 않고 잠을 잤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마이크 소리가 밤하늘의 정적을 깨트린 것이 새벽 1시 30분,
그래도 견딜 수는 있었습니다.
한참 지나 느닷없이 지축을 뒤흔드는 함성소리가 들렸습니다.
창문을 열고 내려다보고서는 깜짝 놀랐습니다.
약 3천명에 달하는 그 회사 직원들이 모두 새빨간 T 셔츠를 입고
발을 구르며 함성을 지르고 있었습니다. 그 새벽 시간에 말입니다.
그 함성은 사주의 사열이 끝나기까지, 무려 한 시간 동안이나 계속되었습니다.
그 뒤 1시간에 걸친 구보가 끝난 뒤,
새벽 6시부터 오후 2시까지 무려 8시간 동안이나
사장의 특별 교육이 계속되었습니다.
주제는 단 한 가지 ― 오직 이기자는 것, 최후의 승리자가 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무서운 세뇌교육이었습니다.
사주가 원하는 승리를 얻기 위해
직원들을 철저하게 도구화시키는 무서운 시험장이었습니다.
(물론 경쟁사회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패배를 미화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경쟁승리 지상주의’적 삶의 철학은 재고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의 승리만을 목적으로 삼고,
그 승리를 위해 인간을 비인격적인 도구로 전락시키는 자는
그가 누구이든 결국엔 (알리와 같은) 패배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와 같은 자는 결코 죄악과 죽음의 벽을 뛰어 넘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겨우 몇 십 년에 불과한 이 땅에서의 유한한 승리를 위해
영원한 승리를 상실한다면 그보다 더 어리석은 자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경쟁적 승리에 집착하는 삶인가, 주님 안에서 승리한 평안을 누리는 삶인가?
세상에서의 승리에 너무 집착하지 마십시오.
세상에서의 승부만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자가 되지 마십시오.
그것은 영원한 패배와 불안으로 행하는 지름길일 뿐입니다.
세상을 이기신 주님의 승리에 동참하십시오.
아니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승리자가 되었음을 잊지 마십시오.
승리자답게 죄로부터 자유하는 삶, 영원한 생명을 지향하는 삶을 추구하십시오.
평안은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세상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과 함께 하신 그분 안에 있습니다.
내가 이기었노라 /요16:25-33/ 곽선희 목사
2014-11-18 15:51:34
철학자 야스퍼스는 싸움은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한계상 황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운명적 상황이라는 겁니다. 부득불, 원치 않지만 우리는 싸워가며 살 수 밖에 없는 그러한 순명 적 존재란 말입니다.
첫째는 자연과 더불어 싸 웁니다. 그래서 우리는 추위 와 싸워야 하고, 때로는 더위 와 싸우고, 홍수와 싸우고 또 때로는 가뭄과 싸우고, 그리 고 지진과 싸우고, 무서운 바 람과 많은 재난 사건들과 싸 워야 합니다. 자연,자연이 그 리 순한 것만이 아닙니다. 이 런 역경적 자연환경과 우리는 싸우면서 그렇게 살아갑니다.
또한 우리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 싸움이 있는 것을 압 니다. 보이지 않게 귀에 총 소리가 들리고 대포 소리가 들리지 않지마는 그러나 우리 는 얼마나 무서운 싸움을 하 고 있습니까? 경제, 정치, 사 회, 문화, 이런 팽팽한 긴장 속에서 우리는 무한경쟁, 무 한투쟁,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살아 남기 참 어렵 습니다. 온 세계가 이렇게 계 속 싸움에 휘말리고 있는 것 이예요. 그 속에서 굳게 서서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가야 하 는데 이거? 하나의 싸움 입니 다.
또 하나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 입니다.뭐니 뭐니 해도 자기 양심을 지키기 위해서 싸웁니다. 죄와 정욕과 욕심 과 자존심과 특별히 시기 질 투 아주 못된 마음 이런 것들 과 싸웁니다.
양심을 위한 싸 움이요, 양심에 자유를 위한 싸움이요, 나가서는 자기자신 의 율법 내가 세워놓은 율법 을 지키기 위해서 내가 싸웁 니다. 나와의 싸움, 아주 치 열한 것입니다. 오늘도 여러 분 이 비오는 날 아침에 교회 에 나올 때 조금 싸우고 나왔 을 거예요. 나갈까 말까? 이 겨서, 싸움에 이겨서 게으름 을 이기고 나약함을 이겨 승 리해서 이 자리에 계신줄 압 니다.
몇 년 전에 캠브리지 대학 의 콜린 렌피유라고 하는 교 수님이 계시는데, 그 렌피유 교수님의 역사 비판이 세계적 으로 논란이 됐던 때가 있습 니다.
그는 유럽 역사에 대 한 기존 학설을 아주 근본적 으로 뒤집어 엎는, 놀라운 자 기 나름의 학술을 전개해서 발표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동안 많 은 학자들의 생각은 유럽의 역사라고 하는 것은, 뭐 그것 만 아니라 세계에 역사가 다 그렇지요만, 무기를 든 전사 들의 정복 전쟁을 통한 역사 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전쟁의 역사란 말이지 요. 역사를 보면 그저 책을 펴자 마자 어느 왕이 싸우고, 어느 왕이 망하고, 어느 왕이 쳐들어 가고 뭐 그런 얘기 아 닙니까?
그러니까 이 무기를 든 정복 전쟁이 역사를 형성 하고 있다고 생각을 했는데 이 콜린 박사님은 그게 아니 예요. 이것은 그런 것이 아니 라, 더 잘 살기를 바라는.... 그래서 기름지고 좋은 땅을 찾아 나서던 평화로운 농업 이민, 농업 이민에 의해서 역 사는 형성 됐다. 이런 논리 를 전개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억세고 강한 군인에 의해서 역사가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라 평화로운 농업 이민들, 즉 평화를 사랑하는 농민들 바로 이 착한 사람들 에 의해서 역사는 이루어졌다 이렇게 역사관을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 하십니까?
성경은 분명히 말하기를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 한다 고 했습니다. 강자의 역사가 아니고, 약자가 지배하는 세 상이다. 역사의 의식을 한 번 바꾸어 볼 수 없습니까? 승리 라는 것은 정복이 아닙니다. 승리는 남을 죽이고, 내가 사 는 뭐 그런 얘기가 아닙니다.
참 승리 라는 것은 함께 사는 것입니다. 승리라는 것은 빼 앗고 그리고 빼앗은 후에 허 망해하는 그런 것이 아니고요 오히려 주고 구원하고 그리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남을 미 워하면서 스스로 통쾌하게 여 기는 그런 잔인한 승리가 아 니고요 사랑하고 감사하는 그 것이 진정한 승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의에 도취해서 남을 정죄하고 그리고 기뻐하는 그런 승리가 아닙니다. 이유야 어쨌든 남 을 용서하고야 기뻐할 수 있 는 바로 거기에 승리가 있다 는 말이요. 남을 누르고 즐 기는 것이 아니고 화목하고 더불어 기뻐하는 거기에 참 승리가 있다는 말입니다. 결 국은 미워하고 증오한다는 시 기, 질투 거기에는 승리가 없 습니다. 사랑하는 가운데 승 리가 있고 어쩌면 사랑 그 자 체가 승리요, 구원이 승리요, 영생이 승리다 이렇게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특별히 영국 사람들이 이 렇게 생각 한다고 합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Aptitude에 의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Attitude에 의해서 성 공하는 것이다 말합니다. Aptitude 라는 것은 적성과 재능을 말하는 것이고, Attitude는 태도와 자세를 말 하는 것 입니다. 참 승리 라 는 것은 재능과 능력에 문제 가 아닙니다.
재주있다고 너 무 좋아하지 마세요. 재주있 는 사람들 뒤에 많이 후회들 하며 삽니다. 능력도 아니고 권세도 아닙니다. 이것은 환 경에 문제가 아닙니다. 역시 승리 라는 것은 자세의 문제 입니다. 어떤 자세로 어떤 태도로 임하느냐 거기에 승리 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예수님 께서 나귀 를 타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신 그 입성을 기념 하 는 그런 날 입니다. 우리가 종려주일이라고 합니다. 예 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올라 갔다--- 초라하게 보이지만 이것은 전통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의 대관식을 말하는 것 이요.
왕이 왕으로 취임하게 될 때 그 대관식에 행사중에 하나가 어린 나귀 새끼를 타 고 올라 가더라 왜요? 왕은 겸손해야 되니까 그런 원리에 위해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올 라 가신다 이 말이예요. 그러 면 여기서 우리가 생각 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승리에서 승리로 행하시는 겁니다. 예 수님은 최종 승리만을 위해서 나머지는 모두 고통과 절망과 그리고 아주 어려운 시련으로 그렇게 설명하고 있지 않아 요. 승리에서 승리로 향하시 는 것입니다. 최후 승리만이 승리가 아닙니다. 현재적이 고 본래적인 승리를 스스로, 스스로 만끽하고 있는 거예 요. 자축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적 승리, 도덕적 승리, 실존 적 승리가 먼저 있고 다른 말 로 말하면 태도적 승리 그리 고나서 저 앞에 물리적이고 정치적인, 우주적인 최종 승 리가 있더란 말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은 지금 십자가를 향해 가고 있 습니다. 바로 눈 앞에 십자 가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 님은 나귀를 타고 입성을 합 니다.
이것은 왕입니다. 남 이야 뭐라고 하던 알던 모르 던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 님은 왕으로, 이미 승자로서, 이긴 자로서 행사하신 것 입 니다. 이기고 또 다른 승리 를 향하여 가신겁니다. 이 점을 깊이 생각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 말씀 하십니다."내가 세상을 이기 었노라."
먼저 승리를 선포하 고 그리고 최후 승리를 향해 서 나간 것입니다. 깊이 깊 이 생각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특별히 예수 님께서 십자가 지시기 전야에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으로 만 찬을 하시면서 이 성만찬에서 주신 교훈의 말씀입니다. 몇 일 후가 아닙니다. 몇 시간 후에 십자가를 집니다. 이 사실을 아시면서 말씀하십니 다.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너희는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이 얼마나 통쾌한 승리 입니까? 얼마나 엄청난 의미에 승전 선포 입니까? 그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무 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무지와 불안으로부터의 승리 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속에 걱정도 있 고 불안한 마음도 있어요. 이 것이 다 사라집니다. 깨끗해 지는 순간 내가 세상을 이겼 노라. 여러분 가끔 우리는 그 런 생각을 합니다.
무지한 자가 용기가 있다고요. 무식 한 자가 용기가 있지요. 그러 나 그것은 용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만용입니다. 문제는 지식이 문제요. 무엇이 보이 지 않는 거예요. 도대체 알 수가 없어요. 특별히 미래에 대한 것 그리고 소망의 문제 요, 신앙의 문제 입니다. 그 런고로 가장 큰 공포는 두려 움 그 자체입니다.
내가 두 려워 하고 있다는 것, 이것이 문제예요. 왜 용기가 줄어들 고 있는 것 입니까? 그것은 다른데 있지 않아요. 미래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요. 사도 바울 사도행전 20장 22절에 보면 그가 예루살렘을 향하 여 올라갑니다. 성령에 이끌 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 가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내 가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무슨 일 을 만날는지 내가 예수님을 위하여 몸 바치고 희생하고 순교 할 각오도 돼있어요. 그러나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 수가 없어요. 불안해요. 여기에 두려움이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도 우리에게 두려 움이 있다면 그런 무지때문이 예요.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 다.
도대체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 이 세상이 어떻게 될 것인지 알 수가 없어요. 벌컥벌컥 되니까 또 무슨 일 이 있을는지.... 어떤때는 아 침 신문을 들여다 보기가 겁 이 나요. 또 무슨 일이 터 졌나 싶구요. 미래를 알 수가 없어요. 불확실한 거예요. 불 확실성 때문이요. 무지 때문 이요.
더 나아가서는 무지에 대 한 구체적 해석을 얻지 못 했 기 때문이요. 무슨 말인고 하니 내가 하나님 앞에 몸 바 치는 마음은 있어요. 그러나 도대체 어떻게 내 생을 끝내 야 하는 것입니까? 이것이 문제 라고요. 예수님께서 갯 세마네 동산에서 기도 하시는 모습에서 이것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이 렇게 승리를 선포 하셨고, 십 자가 지시기로 결심하셨습니 다. 그러나 갯세마네 동산에 올라 가시면서 민망하여 죽게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 고 밤새 피땀흘려가며 기도합 니다. 그럼 무슨 고민이 있 었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은 다 알 길이 없어요. 많은 사람들이 나름대로 추측 을 해봅니다마는 마땅지 않아 요. 이건 가장 현실적인 것 이예요. 그것 무슨 말씀인가 하니 주님 앞에 몸 바치기로 십자가 지시기로 결심 한 건 사실인데, 내일 아침 빌라도 법정에 나가서 불이한 재판을 받으시고, 골고다 언덕에서 죽는 것 이것이 하나님에 뜻 입니까 아닙니까?
하나님에 뜻에 대한 현실성이 문제 라 고요. 추상적 으로는 이미 결단을 했지만은 구체적 으로 는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 의 뜻 입니까? 바로 여기에 고민이 있었던 거예요. 오늘 도 여러분 내가 어떤 형편에 있던지 그저 하나님에 뜻대 로, 하나님 말씀대로, 하나님 진리대로 그 살아요. 그 마 음 있어요. 그렇지만은, 오늘 내가 어떻게 하는 것 입니까?
이 사건 앞에서 나는 어떤 태 도를 취해야 합니까? 바로 이 진리에 대한 현실성, 구체성 에 문제가 있는 것이예요. 예수님은 이 문제에 대한 해 답을 얻었습니다. 확실해 집 니다. 특별히 중요한 것은 의미의 문제 입니다. 도대체 이 십자가에 죽음이 무엇을 의미 하는 것이며 이에 대한 보상은 무엇 입니까?
그 다음 은 어떻게 될 것 입니까? 이 렇게 죽어가면 다음 일은 어 떻게 되는 것 입니까? 이 철 없는 제자 이 한심한 세상 도 대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이것이 보이지 않으면 그것은 실패예요. 그러나 예수께서 는 이 십자가 사건을 보며 이 에 대한 의미, 이 구속 사정 의미를 확실하게 알게 됩니 다. 그런 순간 미래가 환하 게.... 십자가 다음에 이루어 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 봅니다.
내가 세상을 이겼노 라 이것이 승리 올시다. 무 지와 불안으로 부터 확실한 하나님의 뜻으로 향한 구체적 인 것이 환하게 나타날 때 이 게 승리예요. 또 하나는 고 독으로 부터의 승리 입니다. 여러분 뭐니 뭐니 해도 외로 움 처럼 어려운게 없습니다. 여러분 병 드는게 아픈게 아 닙니다. 병 들면 외로워요. 가난한게 어려운게 아니예요 가난하면 친구가 없어요.
구십이 넘은 어느 목사님, 아주 건강 하세요.
"가끔 만날 때 어떻게 지내십니까?"아주 괜찮다고 그러세요.
"아 직도 건강해서 그래 괜찮아 요. 그러나 한 가지 좀 좋지 않은게 있어"
뭐냐고 오래 오래 같이 지내던 친구가 다 떠나 버렸어 동 연배 친구가 다 가버리고 홀로 남았어요. 동창을 꼽으면서 누구 누구 누구 정말 가까이 지내는 것 보았는데 다 떠나고 나 혼자 라고 이제는 전화 걸때도 없 어 젊은 사람한테 전화 걸면 방해 될까봐 수화기 들었다 났다 그만두지 이래서 고독 한거야. 고독이 무서운 거예 요. 외롭습니다.
다 떠나 버 려요. 이걸 극복 해야 되요. 요세도 보니까 아이들 있을 때는 시달리고 아이들 학비 보내느냐고 뭐 하느냐고 애쓰 다가 다 시집 장가 보내고 다 떠나보니까 둘이 남지요. 이 제 집은 큰데 그래 집을 큰 것을 마련하지 말았어 하는건 데 처음부터 큰 집에 쓸쓸 하 거든요. 고독하다 그래요.
고독이 무서운 거예요. 또 하나는 이해가 없다는 것이예 요. 지금 눈 앞에 제자가 있 지만은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 하지를 못해요. 그 많은 주 변에 사람들이 있고 호산나 만세를 부른다고 하지만은, 예수님의 그 깊은 마음을 아 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내 뜻을, 내 희생에 의미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거, 참 괴로운 것입니다. 이 게 사람을 괴롭혀 참 힘들게 만듭니다. 또 그 가운데
유다는 배신을 하지요. 베드로도 몇 시간에 후에 모 른다고 할 사람이요. 다 알 고 계십니다. 배신 당한 다 는 것 참 어려운 것 입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수고가 꼭 헛것으로 돌아 가는 것 갔습 니다. 그래 가장 무서운 적 이 허무주의 입니다. 내가 한일, 내가 공부한 것, 내가 애쓴 것, 내가 바닥바닥 쌓아 온 것, 이 아무것도 아니라 이 말이예요.
이 시간에 보 니 다 부질없는 짓 이었어요. 허무해요. 내가 병 고쳐 준 사람 다 어디 갔어요. 그 많 은 말씀을 듣던 사람들이 다 어디 갔냐 말이예요. 다 헛 되게 되는 것 같이 느껴 집니 다. 이것을 이겨야 한다는 것 이지요. 허무와 고독, 예 수님 앞에 다가 옵니다. 그 래 예수님 말씀 하시기를"너 희가 다 나를 버려 둘때가 왔 다. 다 떠나 갈 것이다."
이것 을 이기셨습니다. 그리고 말 씀 하십니다.
"내가 혼자 있 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는니라. 하나님 이 함께 계세요. 엘리야가 고독해 합니다. 에덴 나무 밑에서"하나님 나를 죽여 주 십시오."
고독해서, 외로 워서, 동지가 없어요. 이제는 할 일도 없는 것 같아요. 그 것이 고독의 무서운 고통 이 었습니다만은, 오늘 주님 말 씀 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 와 함께 계시느니라 하나님은 나를 아십니다. 하나님만이 내 모든 것을 아십니다. 모 든 일이 하나님의 경륜 속에 있습니다. 오래 오래 예원에 오신 하나님의 경륜 그 속에 역사 속에 이 사건이 있습니 다.
그걸 알고 계십니다. 이 십자가에 사건은 하나님에 능 력이요 하나님에 지혜 입니 다. 그것을 아는 순간 승리 하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 의 사랑이 계시입니다. 엄청난 사랑이 여기 계시되고 있습니 다. 그 순간 주님은 말씀 하 십니다.
"내가 세상을 이겼 노라"문제에 해답은 승리 하 시고, 그리고 다음 승리로 향 하시는 것 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예수님 말씀이 내가 이겼다 그 말은 너희도 이길 것이라는 말씀 이예요. 내가 이겼으므로 너희도 이긴다. 승리케 하는 승리 입니다.
우리에게 승리를 보장해 주시 는 승리 입니다.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그런고 로 너도 이길 것이다. 여기, 약속이 있습니다. 제가 6.25 전쟁 때 서해 안에서 군인으 로 있을 때 그 참 제가 마음 아팠던 것은, 우리 국군들 해 군에 군함이라는 것을 타 보 니까 군함이 요만하더라구요. 그 때 뭐 우리 한국 군에 무 장이 시원치 않았어요.
조그 만 군함 이름을 대지 않겠습 니다만은, 군함이 있는데 그 걸 내가 몇 번 타 봤거든요 그런데 미군 군함을 타 보니 까 아 이건 엄청나게 크거든 요 그걸 보고 이걸 보니까 이 걸 가지고 어떻게 전쟁을 하 나 싶더라군요. 그나마도 자 세히 보니까 군함 이라는게 나무로 만들어 졌더라군요. 하도 한심해서 함장에게 물었 어요.
"함장님 도대체 이 군 함이 어느 나라 거요?"
"그 러니까 이게 2차 대전 때 사 용한 건데 이게 미군 것 입니 다""그래 이 조그만 것이 어떻게 태평양을 건너 왔소?"
아주 재미있는 말씀을 들었어 요. 큰 군함이 앞에 오고 뒤 에 졸졸 따라 왔습니다. 그 래요 여러분 주님께서 가시거 든 우리는 그 뒤에 졸졸 따라 가면 되는 것이예요. 무서워 할게 하나도 없어요. 주님 말씀 하십니다.
"내가 세상 을 이겼노라 너희도 이길 것 이다."
여러분 승리에서 승 리로 행한다는 것을 잊지 마 세요. 최후 승리만이 승리가 아니예요. 오늘 여러분에 영 속으로 여러분의 자세에서, 여러분의 삶에 태도에서 먼저 승리가 있어야 되요. 신앙적 승리가 있고, 그 후에 저 앞 에 물리적, 정치적, 우주적, 최종 승리가 있는 것이예요.
요16:25-33/ 승리의 그리스도 / 한경직 목사
2014-08-23 00:27:02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 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요 十六․三十二)
이 말씀은 마지막 날 저녁 다락방에서 주님께서 여러 가지 권면을 제자들에게 주시고 결론으로 하신 말씀이올시다. 그 날 저녁 주님께서는 친히 발을 씻겨 겸손의 덕을 보여 주시고『내가 너희를 사랑하듯 너희가 피차에 서로 사랑하라』
고 하는 새 계명을 주시고『내 집에 있을 곳이 많다』하는 하늘나라의 비밀을 알려주시고『너희는 내 안에 있으라. 내가 너희 안에 있으리니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지 아니하면 절로 열매를 맺힐 수 없다』
고 열매를 맺는 비결을 가르쳐 주시고, 또는 보혜사(保惠師) 성령을 보내주실 약속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여러 가지 깊은 말씀을 하신 후에 결론으로 이렇게 마치셨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 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우리가 이 결론의 말씀을 잠깐 이 시간 생각하는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여기 먼저「내 안에」라고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예수 님 안에도 있고 또 세상에도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믿는 사람들은 구 세계에서 삽니다. 두 차원에서 삽니다. 우리의 심령은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육체는 이 세상에서 살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물질로 된 까닭으로 물론 물질 세계에서 살수밖에 없습니다. 물질을 입고 물질을 먹으며 물질로 지은 집에서 삽니다. 그러나 우리의 심령은 그리스도 안에서 삽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힘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그리해서 우리 믿는 사람들은 세상 나라의 국민이 되는 동시에 하늘나라의 국민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회의 일원인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요, 성도의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물론 이 세상 나라의 주권 아래 있지마는 실상은 그보다 더 높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여러 가지 사업을 많이 하듯이 천국의 사업을 많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땅에 발을 디디고 걸어다니지마는, 우리의 심령은 실상은 하늘나라에 두고 하늘에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세상에서 우리가 한 나그네로 산다는 사실입니다. 또는 우리가 이 세상에 나그네로 사는 동안은 영원한 것이 아니고 잠깐 뿐입니다. 세상에 사는 사람은 언제든지 한 번은 떠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우리는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믿는 사람의 생활은 두 차원에서 삽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삽니다. 동시에 이 세상에서 삽니다. 물론 세상에서 사는 것은 우리가 물어볼 것도 없고 의심할 것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깊은 관심을 가질 것은 우리가 주안에서 또한 산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편지할 때에『주안에서 갇힌 내가…』이런 말을 기록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몸은 감옥에 갇혔지마는 실상 그의 심령은 주안에서 살고 있었습니다.『주안에서 갇힌 내가…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주안에서 항상 즐거워하라…내가 네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능치 못한 것이 없느니라.』
여러분, 다「주 안에서」삽니까?
둘째로 생각할 것은, 이렇게 이 세상에 있을 때에는 우리가 두 차원의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데 그 경험은 온전히 다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체험하는 경험은 그야말로 평강(平康)입니다. 평안입니다.
여기서 주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바로 전에 요한 복음 十四장 二十七절에 말씀하셨습니다.『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우리가 주안에 있을 때에 주님께서 주님의 평안을 우리에게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도 찬송을 부르는 것입니다.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이것이 우리 믿는 사람들의 주안에서 얻는 경험이올시다. 주안에서 기쁨이 있을 뿐입니다. 감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옛날 사도들의 모든 행적을 볼 때에 주로 말미암아 핍박을 받으면서도 항상 기뻐했습니다.
실라와 바울이 빌립보에서 억울한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혀서도 깊은 밤에 찬송을 부른 것입니다. 환난의 밤에도 찬송을 불렀습니다. 순교를 하면서도 감사를 드린 순교자의 역사를 우리는 종종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안에서 얻는 경험은 오직 우리 심령의 평안이올시다. 즐거움이올시다. 감사올시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어떠합니까? 여기 주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이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하겠다고 말씀했습니다. 이 세상은 본래 환난이 많은 곳입니다. 천재지변이 있고 생로병사의 인생 사고(四苦)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라고, 우리가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이 모든 환난이 우리에게는 아주 오직 않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같이 이 환난을 종종 당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이렇게 보통으로 당하는 환난을 가리킨 것이 아닙니다.『이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하는 말씀은 이 환난은 너희가 나를 믿음으로, 너희가 내 안에 있음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당할 환난이 있다고 하는 그 말입니다.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사도 요한 이 요한 一서를 기록할 때에 이런 말씀으로 기록했습니다.『너희는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하지 말라.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에는 하나님께로 좇아오지 아니하고 이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 많이 있습니다. 곧 악의 세력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좋은 씨를 뿌렸지마는 원수가 가라지를 도처에 뿌렸습니다.
이 가라지들이 성하였습니다. 이 악마의 세력은 각계각층에 침투하여 있습니다. 이들의 세상생활의 원리는 그리스도께서 가르치는 생활의 원리와는 정반대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충돌이 있습니다. 여기에 반대가 있습니다.
빛과 어두움의 충돌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벨리알의 충돌이 있습니다. 의와 불의의 충돌이 있습니다. 선과 악의 충돌이 있습니다.
『너희 나를 따르려고 하는 사람은 부득이 이 충돌로 말미암아 오는 환난을 당할 수밖에 없다』고 미리 주님께서 경고를 하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죄악이 많은 세상 가운데서 우리가 과연 그리스도를 따라서 진리와 사랑과 성결(聖潔)의 생활을 하려고 하면 자연히 여기에 충돌이 있습니다. 세상의 비난이 있습니다. 세상의 중상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핍박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때에는 순교를 당할 수밖에 없는 때도 있는 것입니다. 또 세상의 악한 마귀는 일변 우리를 유혹하고 우리가 유혹에 들지 아니할 때에는 핍박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세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분명히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 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너희가 장차 이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할 수밖에 없으나 담대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전의 성경에는「안심하여라」혹은「용기를 내어라」하였습니다.
왜? 내가 이 세상을 이미 이겼으므로 너희는 내 안에 있어 내가 세상을 이길 때 너희도 같이 세상을 이겨서 내가 세상을 이김으로 너희도 세상을 이길 터이라고, 그러므로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게 살라고 우리에게 권면 하여 주십니다.
과연 예수님의 일생을 우리가 복음서를 통해서 잠깐 생각하면 그의 일생은 싸움의 일생이었습니다. 악한 마귀와의 대결이었습니다. 악의 세력과의 충돌이었습니다. 어느 때가 그렇지 아니 하리요 마는, 복음서를 가만히 읽어볼 때 예수 님께서 악의 세력과 대결해서 싸운 싸움터가 한 서너 곳 특별히 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제일 먼저 싸운 곳은 주님께서 광야에서 홀로 四十일 동안 금식하시면서 기도할 때에 그의 심령 깊은 곳에서 큰 싸움이 벌어집니다. 모든 큰 싸움은 사람의 심령 속에서 먼저 벌어집니다.
예수 님께서 오래 금식하실 때에 매우 주렸습니다. 시험하는 자가 와서 하는 말이『네가 심히 주린 모양인데 돌로 떡을 만들어 먹어라』하였습니다.
배고플 때에 시험이 들어옵니다. 빈궁할 때에 경제의 시험이 들어옵니다. 경제를 통해서, 먹을 것을 통해서 들어옵니다. 배고플 때에 돌로라도 떡을 만들어 먹어라, 수단을 가질 새가 있느냐, 먹어야 되지 않느냐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겼습니다.
『사람이 사는 것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 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이니라.』주림을 이기면서 악한 마귀의 유혹을 또한 이긴 것입니다.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심령을 높은 성전 꼭대기에 데리고 가서는『뛰어 내리라. 그러면 선지자 노릇을, 메시야 노릇을 쉽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인기와 명예에 대한 시험인 줄 생각합니다. 특별히 청년 시대에 이런 시험이 있을 수 있습니다.
『좀 빨리 성공을 해야지…좀 빨리 명성을 얻어야지…그렇게 하려면 남 안 하는 일을 뭘 좀 해 봐야지…이것도 해야지…』예수 님께서는 역시 하나님의 말씀으로『주 너희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고 물리친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또한 예수님의 심령을 이끌고 높은 산에 올라 천하 만국의 영광을 다 보이면서『이것은 내게 속하는 것이요 내가 네게 줄 수 있는 것인데 거저 나에게 절만 한 번 한다면 곧 주리라』고 했습니다.
권세와 지위와 영광과 허영에 대한 유혹이올시다. 이런 시험을 받는 청년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가 없습니다.『그저 이런 것을 얻으려면 마귀에게 절을 해야 돼. 악한 수단이라도 사양치 않아야 돼. 권모술수도 좋고, 무엇이든 가리지 말고….』
심령 깊은 속에, 청년들의 마음 가운데 이런 싸움이 얼마나 벌어지는지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때에도 예수님께서는 오직 주 하나님만 경배할 것이라고 하는 말씀으로 물리친 것입니다. 그는 먼저 고요한 가운데, 깊은 심령 속에서 홀로 이 악한 마귀의 유혹을 이겼습니다.
모든 시험이 먼저 우리의 마음속에 온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먼저 마음속에서, 심령 속에서, 악마의 유혹을 우리가 이겨야 합니다. 우리가 주안에 있을 때에만 이 승리를 얻을 수 이 승리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큰 대결은 역시 그의 실제 생활 면에서도 있는 것을 우리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큰 권세로 가르치십니다. 많은 병을 고쳤습니다. 사람이 구름 같이 모입니다. 인기가 대단히 높아졌습니다.
그런 때에 무슨 시험이 들어오는지 아십니까? 우리가 순전히 인간적 견지에서 말합니다. 교만의 시험이 들어오기 쉽습니다. 어떤 여인이 예수님께 와서『당신을 밴 태와 당신에게 젖을 먹인 그 젖이 복이 있다』는 말을 합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이어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아십니까?『그것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모여서 예수께서 그 때에 정치적 구주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를 높여서 왕을 삼자고 하는 그런 운동을 하였습니다. 예수 님께서 그 광경을 보고는 이어 다른 곳으로 피했다고 하였습니다.
악한 마귀가 실패할 땡 이런 면으로 전술을 바꾸어서 그 다음에는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들의 마음속에 들어가서 그들의 마음에 시기를 일으켜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비난과 공격으로 나오기 시작합니다.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한다. 성전을 훼방했다. 여러 가지로 비난을 하고 중상을 하고, 그가 무슨 이적을 행하는 것은 실상은 바알세불의 악한 마귀의 힘을 빌어서 행한다고 중상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이 때문에 자기 자신을 잃지 않았습니다. 가만히 우리가 복음을 읽어보면, 주님께서 어떠한 때에 의분을 발한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자기를 중상하거나 자기에 대한 무엇일 있을 때에 분노한 것을 우리가 찾지 못합니다.
그리스도는 언제든지 욕을 욕으로 갚지 아니하고, 악을 악으로 갚지 아니하고, 익을 선으로 갚으면서 이긴 것입니다. 마지막에는 악한 마귀가 모든 세력을 동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조소가 있습니다. 희롱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고통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망의 고통이라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기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십자가 위에서 못박는 사람들을 위해서 죄를 사해 달라고 기도를 하였습니다 미움을 사랑으로 이겼습니다. 정복했습니다. 악을 선으로 이겼습니다.
이 악한 마귀의 세력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 승리한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이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고, 만민의 죄를 대속 하게 되었고, 실상은 악마의 한 일이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준 것뿐입니다. 결국은 십자가에서 악마는 온전히 패배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의와 불의의 대결을 보면 항상 그렇습니다. 어떤 때에는 불의한 사람들이 이기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지나 보면 실상은 그 사람들이 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그를 사랑하고 택함을 입은 사람에게 있어서는 모든 일에 합동하여 선을 이루게 해 주시고 승리로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그를 무덤 가운데 장사하고 바위로 덮었지마는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 사망의 권세까지 이기셨습니다. 이렇게 우리 주님은 모든 유혹과 모든 비난과 모든 중상과 사망의 권세까지도 이기신 승리의 주님이올시다.
이미도 말했지마는, 우리 주님의 승리는 우리 믿는 자의 승리올시다. 그는 우리는 대표해서 이 승리를 얻으셨고 우리는 그 가운데 살고 있으므로 그의 승리가 우리의 승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가 먼저 세상을 이기었으므로 우리도 그와 같이 세상을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너희가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하나 담대 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예배당 뜰 안에서, 제가 사는 집(사택)안에서, 아주 오랜 은행나무를 보시지요. 아마 여러 백 년 된 것 같습니다. 여러분, 그 은행나무의 전체를 보십니까? 그렇지 않아요. 여러분은 그 은행나무를 절반만 봅니다.
땅 위에 있는 부분 절반만 보는 것입니다. 실상은 그 절반은 어디 있는지 압니까? 깊이 땅 속에 있습니다. 그 뿌리가 그만큼 땅 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바람이 불어도 가지는 흔들이지마는 결코 넘어지는 일이 없습니다. 왜? 그 속에 깊은 뿌리가 박힌 까닭입니다.
참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어떤지 압니까? 그 은행나무와 같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삽니다. 우리 육신을 가지고 세상에 삽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에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우리의 뿌리를 그리스도 안에 깊이 두고 사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환난이 옵니다. 세상에는 유혹의 바람이 옵니다. 세상에는 시험의 바람이 옵니다. 혹 어떤 때 다소 흔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넘어지지 아니합니다. 왜? 우리 인격의 깊은 뿌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까닭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八장 三十七절에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이 말씀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사도 요한 은 요한 一서 五장 四절에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대저 하나님께로 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우리가 비록 약하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까? 우리가 온전히 죄를 회개하고, 우리의 몸과 마음을 온전히 주님께 바치고, 우리의 생활이 주안에서 사는 생활입니까? 그러면 우리도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강해-75/ QT와 여백 /요16:25-33
2020-01-22 03:22:26
올 한 해 동안 교회가 QT를 하기로 계획을 세우고 2월 1일부터 전교인이 함께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준비 중에 있습니다. 저도 1월 1일부터 QT 교재로 사용하려고 하는 ‘생명의 삶’을 구입해 매일 QT를 하고 있습니다. 며칠 되지 않았지만 QT를 하면서 새로운 깨달음과 묵은 마음이 기경되는 은혜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조금 엉뚱한 이야기입니다만 QT 교재를 보면 말씀과 말씀 사이에 여백이 있습니다.
저는 그 여백이 있어서 좋습니다. 이 여백이 주는 묘한 흐름이 있습니다. 무엇인가로 채워야만 하는 의무감이 생기기도 합니다. 또 말씀을 더 깊이 생각해 보는 마음의 여유로움을 갖게도 합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을 하면서 깨달은 바를 여백에 기록하다 보면 말씀 안에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고 있는 나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여백에 나의 깨달음과 고백을 기록하고 기도하다 보면 메말랐던 눈에 감사의 눈물이, 어떤 때는 죄송함의 눈물이 고입니다.
우리 신앙의 삶에도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여백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와 영적인 교제를 나누시기를 원하십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사건이 출애굽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430년 동안 노예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신 사건입니다.
우리들은 출애굽 사건을 보면서 노예 생활을 하던 애굽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며 공간의 이동을 출애굽 사건의 중심에 둡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핵심은 ‘공간 이동’ ‘공간 소유’가 아닌 ‘관계 회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지신 것은 그들과 친밀한 관계, 믿음과 순종의 관계를 갖기 위해서입니다. 장소는 그 관계를 가꾸는 수단일 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헛되이 40년을 방황한 까닭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승리를 주실 수 없어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에게 그것은 쉬운 일이었습니다. 그들을 광야에 두신 것은 당신과 바른 관계를 맺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장소는 눈앞에 있어도 관계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상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40년의 광야 생활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이뤄질 때까지 하나님은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법궤를 매고 요단강을 건너는 것을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관계가 회복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되시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QT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중하게 맺는 공간적, 시간적 여백입니다. 세상의 모든 일을 잠시 멈추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며 교제하는 공간이며 시간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의 공간과 시간을 세우며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다. 저는 요즘 QT를 하면서 하나님과 새로운 마음으로 교제를 나누고 있습니다. 참 좋습니다. 말씀을 묵상하는 것도 좋지만 교재에 보면 귀한 믿음의 사람들의 명언들이 나옵니다.
그 명언들을 읽다보면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그리고 믿음의 도전을 받습니다. 예를 들어 7일의 QT 내용에 ‘교회가 세상과 비슷하게 사는 한, 교회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양의 우리로 데려올 수 없다’는 무디의 말입니다.
짧지만 매우 강렬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신앙의 도전을 받습니다. 맞습니다. 교회가 추구하는 것이 세상과 다를 바가 없다면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찾을 이유가 없습니다. 교회가 존재해야 할 이유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성도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됩니다.
9일 금요일의 교재에 보면 ‘믿음은 해가 뜬 것을 보는 것과 같다. 그것으로 인해 다른 모든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C.S 루이스가 한 말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 주시고 그를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다는 말씀이 중심 내용이었습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루이스는 예수님을 떠오르는 해에 비유했습니다. 해가 떠오르면 그 해를 통해 다른 모든 것을 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던 세계가 보인다는 말입니다. 믿음은 바로 해와 같아서 믿는 순간부터 보이지 않았던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보이기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이 명언을 읽고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하게 됩니다. 마음이 달라집니다. 보는 시야가 달라집니다. 이것이 매일 매일 QT를 하는 매력이고 이유입니다.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다.
QT 교재의 여백에 이런 깨달음과 느낌과 다짐을 기록하며 채웁니다. 한 줄이라도 채웁니다. 고난을 겪는 가운데서도 말씀을 묵상하며 여백을 채우는 가운데 고난으로 포장된 하나님의 귀한 선물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 여백에 어느 때는 불안함으로, 어느 때는 답답함으로, 어느 때는 감사함으로 채울 때 말씀을 통해 주시는 소망과 지혜, 용기와 평안을 주시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저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를 통해 여백 위에 채워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십자가를 지고 죽게 된다는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제자들은 두려워하며 근심에 쌓였습니다. 예수님은 근심하며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조금 있으면’ 다시 나를 보게 될 것이니 근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제자들에게 무엇이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구하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뤄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조금 안정된 제자들이 ‘우리가 이제야 주님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셨음을 믿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제야 너희들이 나를 믿느냐고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이 무안해 할 수 있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32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보라 너희가 다 각자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예수님은 위기 상황이 오면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 갈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매우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사랑하다고 말한 사람, 함께 동고동락 하겠다고 다짐했던 사람들이 위기의 순간에 모두 떠나버린다면 그것처럼 고통스러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순간이 자신에게 닥쳐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누구하나 따뜻한 말을 건네주는 사람도 없고, 위로해 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의 길을 도와줄 사람도 없습니다.
모든 제자가 떠나고 홀로 십자가의 고통의 길을 걸어가야 했습니다. 그 고독과 고통의 순간에도 예수님께 위로가 되시는 분이 계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예수님은 ‘너희들이 다 나를 버리고 떠날 것이지만 그러나 내가 혼자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끝까지 나와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그 고난의 길을 걸으면서도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나누셨습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예수님이 지시는 십자가의 길은 패자의 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걸으면서도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고 당당하게 선포하십니다. 그 당당함은 하나님 아버지가 약속하신 부활에 대한 믿음이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성경을 읽으면 예수님께서 사역에 힘이 드실 때마다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마가복음 1장 35절에 보면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누가복음 5장 16절에 보면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예수님은 사역을 하시면서 힘들고 고독할 때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어느 때는 늦은 밤에, 어느 때는 이른 새벽에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셨습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는 예수님의 사역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영적인 깊은 교제는 고난과 고독을 이길 수 있는 힘이었습니다. 변화산의 기도,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는 하나님과 깊은 영적인 교제를 나누는 자리입니다. 군중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연호하며 왕이 되어줄 것을 요청했을 때 그 유혹을 뒤로 하고 십자가의 길을 향해 갈 수 있었던 힘과 의지도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를 나누는 공간과 시간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행복한교회의 모든 성도님들이 한 주간을 살아갈 때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며 삶의 여백을 채우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지치고 힘든 일이 있을 때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하는 가운데 삶의 여백에 하나님의 은혜와 위로로 가득 채워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기쁘고 감사한 일이 있을 때 말씀 안에서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는 가운데 성도님들의 삶의 여백을 하나님을 향한 찬양으로 가득 채우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심을 믿지 못하면 고난과위기 속에서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는 선포가 나올 수 없습니다. 전 교인 QT를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삶의 여백을 하나님과 교제한 내용으로 가득 채우며 하루하루의 삶을 살아가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설교문 모음 > 요한복음 설교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한복음 18:12 - 14, 19 - 24 (2) | 2024.07.15 |
---|---|
요한복움 18:1 -11절 설교 모음 (0) | 2024.07.08 |
요한복음 16:5 - 15절 설교 모음 (0) | 2024.05.27 |
요한복음 16:1 - 4 절 설교 모음 (0) | 2024.05.20 |
요한복음 15:18 - 27절 설교 모음 (1) | 2024.05.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