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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요한복음 설교 모음

요한복음 18:12 - 14, 19 - 24

by Jessi J 2024. 7.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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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당한 재판 /18:12-14;19-24/ 박형근목사

2023-03-05 06:03:28

 

옆의 분들과 인사하시죠?‘더운 날씨에 잘 지내셨습니까?’더운데다 날이 너무 가물어 걱정입니다. 어느 분이 제게올해 표어 아래 기록된 성구 두 개 중, 19:2은 이해가 되는데, 1:17은 왜 있습니까?’저는 이런 관심을 갖고 질문하시는 분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19:2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여호와께서 거룩하시니 우리도 거룩하라 합니다. 거룩은 안 믿는 이들과 생각, 바라는 것, 행함이 다르게 사는 겁니다. 표어인다시 거룩한 교회로와 맞습니다.

 

1:17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인데, 여기에 기록한 것은, 올해가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이기 때문입니다. 루터 당시의 천주교는 행함과 공덕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지요. 천주교 신부였던 루터는, 로마를 순례하며, 남들이 하는 대로 성당의 돌계단을 맨 무릎으로 오르내렸습니다. 무릎이 깨지고 피가 나면, 구원에 큰 도움이 된다고 여긴 겁니다. 루터는 무릎이 깨지고 피가 나며 고통스러울 때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셨는데 무릎 깨지는 정도로 구원을 받을까?’

 

루터마음에이건 아닌데, 이건 아니야.’할 때, 떠오른 것이 롬 1:17입니다.‘행함이 아니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루터는 이 깨달음으로, 종교개혁의 표어로오직 믿음한 것이지요. (복창) 올해표어에 저 성구를 넣은 것은, 올해가 종교개혁 500주년임을 생각하며, 우리가 죄 가운데 방황하며 아무 공로도 없을 때, 오직 믿음으로 구원해주신 주님은혜를 기억하면서, 다른 해보다 더 안 믿는 사람과 구별되는 거룩한 삶을 살자는 겁니다. (표어 복창)‘다시 거룩한 교회로!’

 

교회가 거룩함을 잃어가기에, 달리 말해, 믿는 이가 안 믿는 이와 별로 다를 것이 살기에, 표어를 붙여두고 보며, 거룩하게 살기에 힘씀으로, 다시 거룩한 교회를 이루자는 거지요. 오늘말씀은,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기도하고 내려오실 때, 배신자 가룟유다의 인도로 따라온 군병들에게 체포되어, 안나스에게 끌려갑니다. 말씀 13절에 보면, 그해의 대제사장은 가야바인데, 안나스에게 끌고 간 것은, 뒤에 힘 있는 실세가 안나스이기 때문입니다.

 

전에 대제사장을 지내고 나서, 다섯 아들과 사위가 돌아가며 대제사장을 하게하고, 뒤에서 조종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를 잡자마자, 현 대제사장 대신에 안나스에게 먼저 데려간 거지요.‘각하의견은 어떻습니까?’당시 유대종교의 혼란을 알려줍니다. 14절에, 안나스의 사위이자 현 대제사장인 가야바를 소개하며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권고한 자라 합니다.

 

예수에 대한 처리문제로 공회가 모여서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어떻게 하겠느냐 그대로 두면 모든 이가 믿을 것이요 로마인들이 와서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예수가 많은 이적을 행해, 백성이 따르며 반란을 일으키면 나라가 망한다는 거죠. 대제사장 가야바와 종교지도자들은, 나라를 구한다는 명분으로 예수를 십자가에 죽였지만, 하나님은 그를 통해 예수를 믿는 자가 구원받을 길을 여셨습니다.

 

이천 년 전에도, 유대인들 나름으로 정당한 재판을 위한 규정들을 여럿 갖고 있었지만, 종교지도자들은 서둘러 예수를 제거하고자 온갖 불법을 서슴치 않습니다. 예를 들어, 밤에는 재판하지 못하고, 명절이나 안식일에도 못합니다. 중요한 재판은 이틀이상을 해야 하며, 재판에 죄를 밝히는 증인이 반드시 있어야 하고, 가능한 사형판결을 내리지 않습니다. 생명존중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규정들을 거의 어겼지요. 예수님을 밤에 체포해서 재판을 밤중에 진행한 것과, 그날은, 재판을 못하는 유월절입니다. 제대로 된 증인이 없습니다. 사형을 결정하고 그날 집행합니다. 예수가 율법을 어겼다고 사형을 내리며, 그들 자신이 율법을 어긴 부당한 재판을 한 것이지요. 서두른 것은, 그만큼 예수가 두려웠던 겁니다. 예수를 그냥 두면 그들 위치가 위험하다는 거지요.

 

예수를 사형에 몰고 갈 수 있었던 것은, 예수 스스로 하나님아들이라 하면서 감히 하나님이름을 손상했다는 것인데, 그런 신성모독을 했다면 분명히 사형 죄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아들이요, 메시야지요. 종교지도자들이 조금만 구약성경을 살폈어도 분명히 드러났을 텐데 아예예수가 메시야 일 리 없어.’처음부터 외면한 거지요. 하긴,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하면 종교지도자들이 설 자리를 잃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경말씀을 살피며, 구약의 예언대로 오셔서 이루신, 예수님이 확실히 하나님아들이요 메시야이심을 확인하고자 합니다. 구약성경에 메시야에 대한 예언은 여러 곳에 있고, 유대인들은 속속들이 알고, 메시야 오시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먼저, 구약에 메시야는 베들레헴에 나신다고 예언되었고, 우리는 아기예수가 베들레헴에 나신 것을 압니다. 함께 구약 미가 5:2을 읽습니다.‘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 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유대인이면 누구나 알고 기다리는 베들레헴에 오실 메시야입니다.

 

예수님이 베들레헴에 나신 것은, 종교지도자들이 원하기만 하면, 근처에 있는 어머니 마리아를 불러 확인하거나 베들레헴주민을 불러 확인할 수 있고, 로마문서를 뒤져도 찾을 수 있지요. 로마황제가 호적 하라고 명하여, 요셉과 마리아가 고향 베들레헴에 왔다가 아기예수를 출산한 것이니, 그때 기록을 확인하면, 호적에 예수이름이 있을 겁니다. 메시야가 베들레헴에 난다는 것은 알면서도,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난 것은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둘째로, 메시야는 다윗의 후손으로 온다는 여러 말씀이 있는데, 그중 사 11:1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이새는 다윗의 아버지지요. 유대인들은 구약말씀으로 다윗 왕의 후손 중에 메시야 올 것을 믿었습니다. 마태가 혼자 힘으로, 마태복음을 기록하며 1장 시작에 아브라함부터 예수까지 족보를 쭉 기록한 것을 보면, 많은 사람들과 자료를 가진 유대지도자들이 마음만 먹었으면, 예수가 다윗의 후손임을 쉽게 알았을 겁니다.

 

셋째로, 61장에 메시야가 오시면 큰일과 이적을 행하신다고 했는데, 오신 예수님이 많은 이적을 베푸셨지요. 유대지도자들이 서둘러 예수를 죽이고자 하는 이유가, 이적을 많이 베풀어 백성들이 따르기 때문 아닙니까? 예수가 많은 이적을 베푼 것도 그들은 외면했습니다. 그들은, 구약성경말씀에 귀를 막고, 예수님이 베푸신 수많은 이적에 눈을 막고, 그저 예수를 죽이려고만 했습니다.

 

넷째로, 구약에 메시야는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한다고 합니다. 9:9을 읽지요.‘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예수님이 예루살렘성에 나귀새끼 타고 들어오실 때, 온 백성이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호산나외친 것은, 이 스가랴 말씀을 다들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제야, 기다리던 메시야가 오셨구나, 기쁨의 외침이지요.

 

그런 백성들이 그 외친 입으로 불과 사나흘 후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요!’외칩니다. 뒤에서 종교지도자들의 부추김도 있었지만, 그들이 사태를 보고 실망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오래 동안 바라오던 메시야는, 로마를 내쫓고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드는 분인데, 예수가 아무 힘도 못 쓰고 로마총독 앞에 무릎 꿇려 있으니우리가 속았구나, 그런 가짜는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한 거지요. 여기서, 오늘 우리가 바라는 메시야 예수는 어떤 분인지 잠시 살폈으면 합니다.

 

예수님이 어려움을 해결하고, 길을 열어주시는 분은 맞지만, 그를 위해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셨습습니다. 우리는 당시 예루살렘백성들의 잘못을, 다시 범해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그를 믿는 자는 누구나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 그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답게 예수님말씀 따라 살기에 힘써야지요. 예수 믿으니 건강하고 매사에 순탄하다, 아니고요, 믿고 예수님말씀을 따르니 세상이 줄 수 없는평안을 누린다, 맞습니다.

 

다섯째로, 메시야는 은 삼십 개에 가까운 친구에게 배반당한다고 구약에 말합니다. 41:9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하였고, 11:12그들이 곧 은 삼십 개를 달아서 내 품삯을 삼은지라.’그런데, 묘하게도, 이 말씀을 잘 아는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를 따르던 제자 가룟 유다를 은 30에 매수해서, 예수를 체포합니다. 그들은 예수를 죽이고자 급급했지만, 그들로 인해 구약성경이 말씀대로 이뤄졌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참으로 묘하지 않습니까?

 

하나 더 생각하면, 53:3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않았도다.’오시는 메시야는 가난하고 고난 받는 사람이고, 이스라엘 지도자에게 멸시와 배척을 받는다 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세상에 나와 복음을 전하기 전에는 천한 목수로서, 공구보따리 메고의자나 창문 고치시오.’외치며 다녔고, 공생애 3년도 머리 둘 곳도 없이 노숙하며, 멸시를 받으며 지내셨지요.

 

오늘말씀에도 멸시를 당합니다. 19절에 보면, 안나스가 예수의 제자들과 교훈에 대해 묻습니다. 만일 예수님이내 제자들은 갈릴리 어부 몇인데, 지금 다 도망치고 없오.’그러면 안나스는그러고도 네가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냐, 순 사기꾼이잖아.’안나스는, 그저 비난하려고 질문했지요. 교훈을 물은 것도, 뭔가 죄를 정할 꼬투리를 잡으려 묻는데, 예수님은 당당합니다.‘내가 모든 것을 회당이나 성전에서 공공연히 가르쳤는데 왜 묻느냐, 들은 자에게 물으라.’

 

그러자, 곁에 섰던 아랫사람이 손으로 예수를 치며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버릇없이 말하느냐?’예수를 업신여긴 거죠. 예수님은내가 잘못했으면 잘못한 걸 말하라 바른 말을 하였으면 어찌 치느냐.’예수님은 우리에게 바르게 살고, 언제나 당당하라 하십니다. 안나스는 더 얻어 낼 것이 없다 여기고,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보냅니다. 가야바는 당시 최고 결정기관인 공회를 소집해서, 예수에게 사형을 판결하지요.

 

총독 빌라도가 끼게 된 것은, 로마지배 하에서 사형은 로마총독의 손에 달렸기 때문입니다. 한밤에 체포해서, 안나스에게로, 공회로, 빌라도총독에게로 급히 몰아쳐 사형을 확정짓고, 예수를 아침 9시에 골고다에서 처형하지요. 매우 부당한 재판입니다. 예수님의 사형판결에 결정적인 증언인 마 26:61을 읽습니다.‘이르되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 하니예수를 고발한 자의 말로, 말도 안 되는 황당한 거짓말로 들리고, 성전을 허문다는 것은 신성모독죄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2:19 이하에 하셨는데,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짐승 파는 자들을 내쫓고 돈 바꾸는 이들의 상을 엎으시니, 유대인들이네가 이런 일을 행하는데 어떤 표적을 보이겠느냐?’할 때너희가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유대인들이 기가 차서 이 성전을 46년이나 걸려 지었거늘 네가 삼일 동안에 일으키겠다 하느냐? 예수가 잡혔을 때, 증언한 사람은 성전에서 하신 이 말을 들은 거지요.

 

사도요한은 이 예수님말씀을 요 1:21에 해석하여,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하신 말씀이라 하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다고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은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복음이 지난 이천 년 간 온 세계로 전파되었으나, 유대인들이 의지하던 예루살렘성전은 한 40년 쯤 후에 철저히 멸망되었으니, 성전을 허물고 사흘 만에 새 성전을 짓는다는 말씀이 그대로 이뤄진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요, 아들이십니다. 베드로가 고백한 것을 마음에 새기며 따라하십니다.‘주는 그리시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기 전에 한 베드로고백이지만, 죽고 부활하심으로 확실하게 증명되었지요. 메시야는 히브리말이고, 그리스도는 헬라말로서 같은 의미입니다. 오늘 살펴본 대로, 예수님은 구약에 예언된 대로 오셔서 모든 것을 이루신 메시야, 그리스도, 구세주이십니다. 이 믿음이 더 굳어지길 축원합니다.

 

또 하나, 당시의 모든 권세를 쥔 유대종교지도자들은, 예수등장이 큰 위협이 되는 것만 생각해서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율법을 어겨가며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성전을 허물면 사흘 만에 다시 세운다고 뻥을 치더니 죽으니 별 거 아니네.’그랬던 이들 중에 상당수 제사장들이 살아남아, 예수복음이 퍼져나가는 것을 보았고, 예루살렘성전이 철저히 무너지는 것도 보았을 겁니다. 그들 중에예수가 한 말이 이 말이었나.’하는 자도 있었을 겁니다.

 

우리는 그리고 나서 이천 년 후를 삽니다. 우리에겐 당시의 그들보다, 이 성경책과 함께 훨씬 많은 복음의 증거가 있습니다. 지금 예배드리는 여러분이 산 증인이지요. 모든 것이 말씀대로 이뤄진 것을 믿으며, 더 굳건한 믿음 위에 서기를 축원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배신자 가룟 유다나 종교지도자들까지 이용해서, 예수님을 구세주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런 능력의 하나님을 의지하며, 오늘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뤄가는 여러분 모두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순절 /예수 그리스도 /18:12-14, 19-24

2022-07-10 06:37:41

 

서기 325년에 소아시아의 니케아라는 곳에서 아주 중요한 회의가 열렸는데,그 니케아회의에서 부활절을 언제로 정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있었습니다.그리고나서 부활절은 춘분 이후 첫 만월 이후 첫 주일로 정해졌습니다. 춘분 이후에 처음 보름달이 뜨고나서 그 이후 첫주일이 부활절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날은 해마다 조금씩 달라지게되는데 올해는 417일이 부활절입니다.

춘분 이후 첫만월 이후 첫주일이 부활절이다.” 그렇게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올해의 부활절은 417일인 것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칠순하면 70을 의미하고 팔순하면 80이고......사순하면 40이라는 뜻입니다.

부활절 이전의 40일간을 사순절이라고 합니다.

중간에 들어있는 주일은 제외하고...부활절 이전의 40일간을 사순절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순절은 해마다 수요일에 시작되는데, 다가오는 수요일에 사순절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사순, 40이라는 숫자가 나올 때, 40이라는 숫자에는 고난과 연단과 기다림의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은광야에서 방황하며 연단을 받아야 했습니다.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40일 동안 광야에서 마귀 사탄에게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때까지, 죽음과 부활 사이의 시간은 40시간 정도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순절의 40은 고난과 연단의 시간이요 약속의 땅을 바라보는 시간이요

하나님의 영광을 기다리는 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

 

며칠 후 수요일에 올해의 사순절이 시작되는데,성경적인 교과서적인 믿음을 가지고 사순절을 지내시기 바랍니다.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에 내버려진 며칠 후에 부활의 아침이 밝아왔듯이이 시대의 많은 고난을 넘어서 다가올 부활의 아침을 기다리자는 말씀입니다.그래서 이 시간에는 우선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II

 

예수님 시대에, 유대 최고의 권력기관을 산헤드린이라고 불렀습니다.​ ​

 

II-1

 

산헤드린은 함께 모이는 것을 의미하는 히브리어인데,신약성경에는 공회라는 말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2659절은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으매...”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기 위해 거짓증거를 찾고 있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나온 공회가 산헤드린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로마제국은 유대인들에게 어느 정도의 자치를 허락하고 있었습니다.

로마에 대항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유대인들의 자치권을 허락한 것인데,그렇게 유대의 자치권을 행사하던 기구가 산헤드린이었습니다.그러니까 산헤드린은 유대사회 전반의 문제를 논의하면서 결정하고 있었습니다.유대 최고의 권력기관이면서 최고의 재판기관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 산헤드린이 나사렛예수의 문제로 고심하다가 어떤 결정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마가복음 1453절은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를 끌고 대제사장에게로 가니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다 모이더라.”

 

여기에 나온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의 모임이 바로 산헤드린입니다.

한밤중에 예수님을 체포한 무리들이 예수님을 끌고 공회로 갔다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이미 공회가 소집되어 있었습니다.

 

나사렛 예수를 죽여야 한다.”는 결정도 이미 내려져 있었습니다. 결정은 내려져 있었으니까 그에 필요한 증거를 수집해야 했는데...그런데 증거를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거짓증거라도 모으려했는데, 마가복음1456절은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쳐서 거짓증언하는 자가 많으나 그 증언이 서로 일치하지 못함이라.”

 

거짓증언하는 자들이 많은 증거들을 제시했는데, 증언들이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에 어떤 사람이, 예수가 하나님의 성전을 모독했다는 증언을 했습니다.

바로 그 성전모독죄로부터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구체적으로 추진하게 되는 것입니다.

 

 

II-2

 

그런데 산헤드린이 나사렛 예수를 십자가 죽음으로 몰아가기 전에그 이전에 판결과 처형의 방향을 결정했던 최고 권력자가 있었습니다.요한복음 1812절과 13절은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아래 사람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 먼저 안나스에게 끌고 가니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라.”​ ​

 

산헤드린의 의장은 현직 대제사장이 맡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체포한 무리들이 현직 대제사장인 가야바에게로 갔을 듯한데그런데 그들은 먼저 안나스에게로 갔다고 합니다.

 

안나스는 직전의 대제사장이면서 그 자리를 가야바에게 물려준 사람입니다.

안나스는 자신의 사위인 가야바에게 대제사장 자리를 물려준 것입니다.

 

겉으로는 가야바가 최고 권력자인데, 실제 최고의 권력자는 안나스였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공적인 판결 과정은 바로 그 안나스로부터 시작된 셈입니다.

그 깊은 밤에, 안나스가 예수님에 대한 심문을 시작하게 됩니다.

 

당신이 제자들에게 가르친 교훈은 어떤 내용인가?”

 

요한복음 1819절은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물으니...”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20절과 21절을 통하여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내가 드러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보라.”

 

나는 항상 공개적으로 가르쳤으니까, 가르침을 들은 사람들에게 물어보시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대답하셨습니다.

그러자 안나스 곁에 있던 부하 한 사람이 예수님을 때리면서 야단을 쳤습니다.

 

너가 어찌 대제사장에게 그렇게 무례하게 대답하는 것인가?”​ ​

 

그런 과정에서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안나스의 의지가 암묵적으로 전달되고 있었던 것이요.

이후의 모든 과정은 그의 뜻을 이루어가는 과정이 되는 셈입니다.

요한복음 1824절은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안나스가 예수를 결박한 그대로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내니라.”

 

안나스가 자신의 사위인 가야바에게 이후의 구체적인 결정과 처형과정을 넘기고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II-3

 

그런데 나사렛 예수를 죽여야 한다는 것은 가야바의 소신이기도 했습니다.

죽은지 나흘된 나사로가 부활했을때 유대사회가 발칵 뒤집힌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도 공회로 모여서 예수의 문제를 논의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가야바가 요한복음 1148절을 통하여 이렇게 외쳤습니다.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우리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

 

나사렛 예수가 놀라운 기적을 자꾸 행하고 백성들이 예수만 쫓으려 하는 것을이대로 놔두면 사회적인 대혼란이 일어나게 될 것이요.로마제국이 유대의 이런 혼란을 그냥 놔두지 않을 것이 아닌가?그러니까 유대의 정치적 사회적 안정을 위하여 이 한사람을 죽여야 한다.”

 

요한복음 1150절을 통하여, 가야바가 이런 제안을 합니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온 민족의 유익을 위하여 나사렛 예수 한 사람을 죽여야 한다.”

 

유대 민족의 현실적인 유익을 위하여, 유대의 사회적 안정을 위하여 이 한 사람을 죽이는 것이 옳다.”

 

하나님의 종이라는 가야바가 하나님의 아들을 죽여야 한다고 외친 것입니다.

 

유대의 정치적 사회적 현실을 위하여 이 한 사람을 죽이는 것이 옳다.”

 

예수를 없애야 한다.” “예수를 버려야 한다.”는 그 점에서 하나님의 종이라는 안나스와 가야바의 마음은 하나가 되어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

 

최고 권력자들의 마음에서 그렇게 결정이 이루어지고 나서 구체적인 증거 수집과 공적인 고발 과정이 이어지게 됩니다.그리고나서 빌라도의 법정에서 사형판결을 받아내면 모든 일이 마무리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새벽에 빌라도를 찾아갔을 때 빌라도는 귀찮은 듯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율법과 종교 문제를 가지고 찾아온 거 같은데 너희가 너희 유대의 법대로 처리하면 될 거 아닌가?”

 

요한복음 1831절은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그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그러자 유대인 무리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우리 유대인들에게는 사형을 판결하고 집행할 권한이 없나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사람을, 나사렛 예수를 반드시 죽여야만 합니다.”

 

그들의 함성과 뜻대로 예수님께서는 이제 십자가 죽음을 향하시게 됩니다.

안나스와 가야바의 뜻대로, 산헤드린의 뜻대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게 되는 것입니다.

 

 

II-4

 

그렇게 십자가 위에서 숨이 끊어지던 순간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마가복음 1534절은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엘리라마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외치면서 예수님께서 숨이 끊어지셨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종이라는 대제사장들이 유대민족의 정치사회적 안정을 위하여 나사렛예수를 죽이기로 결정했습니다.정치 사회적 현실을 위하여 하나님과 미래와 진실은 내버리기로 하나님의 종들이 그렇게 결단했고 그렇게 실천해갔다는 말씀입니다.​ ​

 

그렇게 십자가에 버려진 예수님의 고통과 절망의 부르짖음이 있고나서십자가 저편으로부터 부활의 아침이 밝아오게 됩니다.인간들이 합력하여 하나님과 진실과 미래를 죽음에 내버린 거기서부터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하나님의 아침이 밝아오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III

 

어느 시대나 세상 권력은 권력의 현실을 유지하려고 온갖 애를 쓰며 살아갑니다.​ ​

 

III-1

 

권력의 현실유지를 고집하는 만큼 그들은 진실과 양심을 외면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하나님과 미래에 대해서는 등지게 됩니다.

어두운 권력은 별거리낌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

 

그렇게 해서 십자가에 내버려진 하나님의 아들의 외침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러니까 십자가의 그리스도는 세상으로부터 버려진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니까 그의 몸된 교회도 기독교인들도 이 세상에서 버려지는것이 당연합니다.

 

그래서인지 이 나라의 교회들과 기독교인들은 이 세상, 이 나라에서 버려진 듯이 한참을 살아왔다고 생각됩니다.그렇게 버려진 흐름 속에서 우리는 올해의 사순절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III-2

 

그런데 그렇게 내버려진 것은 우리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믿음의 선조들은 버려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거나, 길없는 광야에 내버려졌거나열심히 기도했지만 응답을 얻지 못하고 버려진 사람들이었습니다.​ ​

 

시편 777절은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

 

하나님께서 이 나라의 교회와 기독교인들을 버리신 것인가?

다시는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시려는가?

 

그 절망적인 부르짖음을 걸머지고 십자가를 향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세상에서 버려진 많은 사람들의 절망과 탄식이 예수님의 엘리엘리라마사박다니로 나타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III-3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버려진 그 외침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요 최고의 진리이기도 합니다.

 

버려진 그 외침 이후에 십자가의 예수님에게서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 것인가?

누가복음 2346절은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온세상으로부터 버려진 이후의 모든 일을 아버지 하나님께 맡기면서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숨지셨습니다.​ ​

 

이후의 모든 일은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들입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과 세상 역사에 가까이 개입하시게 됩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사흘째 되는 아침에 부활의 영광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권력에 의하여, 정치 사회적인 현실 논리에 의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골고다 십자가에 내버려지셨습니다.그렇게 버려진 하루이틀사흘 후에 아버지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으니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요 기독교의 복음인 것입니다.​ ​

 

시대적인 재앙과 정치사회사상의 혼란과 나라들간의 분쟁과 전쟁으로이 시대는 그리고 우리는 내버려진 듯이 살아왔습니다.십자가 죽음에 버려진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께서오랫동안 버려진 듯이 살아온 이 나라와 교회들과 그의 백성을 다시 살리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

 

세상은 버렸으되 하나님은 다시 살리신다는 믿음과 기도로다가오는 사순절을 살아가시기를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심문 받으시는 예수님 /18:12-14, 19-24/ 손재호목사

2021-04-17 09:56:41

 

오늘 본문 말씀은 체포당하신 예수님께서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에게 심문 받으시는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신 후 어디로 끌려 가셨습니까? 12-14절에 보면 예수님을 체포한 자들이 예수를 결박하여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갔습니다.

 

안나스는 전직 대제사장이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체포한 자들이 먼저 예수님을 안나스에게 데리고 갔다는 것은 그 당시 가야바가 대제사장이었지만 실제로는 안나스가 실권을 잡고 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하여튼 그리하여 안나스가 예수님을 심문하였습니다.

 

19절에 보면 대제사장 안나스는 예수님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질문은 진리에 관심을 가지고 묻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고소하기 위한 힐난(트집을 잡아 거북할 만큼 따지고 듦)하는 질문인 것입니다. 그러면 안나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20-21절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드러내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히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 보라. 저희가 나의 하던 말을 아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동안 드러내어 놓고 세상에 말하였다고 하십니다.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히 말한 것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보라고 하셨습니다. 대제사장 안나스는 이미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보고를 받아서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22절에 보면 옆에서 예수님의 대답을 듣고 있던 대제사장의 하속 하나가 예수님을 손으로 치면서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고 하였습니다. 감히 네가 건방지게 대제사장에게 무슨 그런 버릇없는 말투냐고 한 것입니다.

 

참으로 가짜 대제사장을 위하여 참된 하늘의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멸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2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치는 자에게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거하라. 잘하였으면 네가 어찌 나를 치느냐?”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대제사장 앞에서 기가 죽지 않았습니다. 당당하게 자기를 치는 자의 잘못을 문책했습니다.

 

그러자 24절에 보면 안나스는 예수님을 결박한 채로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보내는 것입니다. 안나스가 왜 심문을 하다가 갑자기 가야바에게로 보내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아마 안나스가 그렇게 한 것은 자신에게는 법적인 처결권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체포하여 심문하는 것도 사실은 불법입니다. 그런데도 자기의 권세와 힘을 가지고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 당시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제 예수님께서는 그 해의 대제사장이었던 가야바에게서 심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가야바는 어떤 대제사장이었습니까? 14절에 보면 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 권고하던 자러라고 했습니다. 가야바는 예수님께서 체포당하실 당시의 대제사장이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에게 한사람이 백성을 위해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주장하던 자였습니다. 가야바가 이 말을 한 것은 예수님께서 백성들을 위하여 대속하시기 위한 것이라는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자기들이 살기 위해서 한사람을 희생시키는 것이 났다고 말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민란이 일어나면 로마가 무력으로 진압을 하게 될 텐데 그러면 우리가 다 죽게 되니 한사람을 죽여서 다수가 안전하게 지내자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곧 대를 위하여 소를 희생시키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수가 항상 진리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가야바는 다수가 진리가 아니라도 그 속에 자신이 들어있었기 때문에 진리인 소를 희생시키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도 세상은 이 모양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다수를 위하여 소수가 희생되라고 합니다. 그런데 다수라고 해서 항상 진리가 아닙니다. 다수가 이기는 것은 그것이 진리라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힘으로 이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세상입니다. 민주주의라는 원리가 다수주의 원리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결정한 것은 진리이냐, 비 진리이냐를 따지지 않습니다. 이러한 다수 속에 자신이 들어 있음으로 안전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노아 홍수 때에 노아는 단 한 가정이었습니다. 절대 다수가 홍수를 우습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수를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진리를 기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지금 이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의 형태가 진리를 따르지 않습니다. 다수를 따르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23:2절에 보면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며 송사에 다수를 따라 부정당한 증거를 하지 말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수라고 해서 결코 진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라고 합니다. 다수를 따라 부정당한 증거를 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0:5절에 보면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정신 곧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는 정신이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는 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러한 중심에 대제사장이 있었고 오늘날 우리도 들어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45-52절을 보면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의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저를 믿었으나 그 중에 어떤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의 하신 일을 고하니라.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가로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만일 저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저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그 중에 한 사람 그 해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저희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한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에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이 날부터는 저희가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린 사건을 어떤 사람이 바리새인에게 알리는 것입니다. 그러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서 예수님을 제거할 의논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신 것이 사형에 해당하는 죄가 됩니까?

아닙니다. 그런데 왜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까? 사람들이 예수를 왕으로 삼고, 저를 따르게 되면 로마인들이 와서 자기들의 땅과 민족을 빼앗을 것이라고 걱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야바 대제사장은 대를 위하여 소를 희생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사람 죽여서 민족을 살리는 것이 유익하다고 합니다.

 

이것은 악한 의도로 말하였지만 그러나 그 형식은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죽는 죽음인 것입니다. 즉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시기 위한 죽음이지만 대제사장이란 사람이 어떤 식으로 예수님을 죽이고 있는가를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때로부터 저희가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를 하는 것입니다. 기회만 되면 예수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한곳을 더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6:57-68절을 보면 예수를 잡은 자들이 끌고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가니 거기 서기관과 장로들이 모여 있더라.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좇아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가서 그 결국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속들과 함께 앉았더라.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증거를 찾으매. 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얻지 못하더니 후에 두 사람이 와서 가로되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 하니.

 

대제사장이 일어서서 예수께 묻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의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뇨 하되. 예수께서 잠잠하시거늘 대제사장이 가로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 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저가 참람한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참람한 말을 들었도다. 생각이 어떠하뇨. 대답하여 가로되 저는 사형에 해당하니라 하고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혹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가로되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더라고 했습니다.

 

가야바 대제사장이 심문을 합니다. 그런데 누구의 이름으로 맹세를 시키는 것입니까? 63절에 보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시키면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네가 말하였다 하시고서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십니다. 그러자 대제사장이 어떻게 합니까? 어떻게 이렇게 참람한 말을 하느냐고 자기의 옷을 찢으면서 화를 냅니다. 이러니 더 이상 무슨 증인이 필요하냐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되느냐고 합니다. 사형에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참람 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빌라도에게 보내서 억지로 사형을 허락받아 나오는 그 중심에 대제사장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하여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인간이 얼마나 하나님께 대하여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섬기느니, 예배를 드리느니, 선교를 하느니, 구제를 하느니 하지만 과연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가를 보라는 것입니다. 나를 위하여 죽고,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신을 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이것이 인간의 실상이요, 한계인 것입니다. 죄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한다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는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란 인간이 신을 위하여 무엇을 거창하게 이루어 내라는 것이 아닙니다. 네가 어느 정도의 부패한 종자인지를 아느냐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말처럼 행악의 종자이고 부패한 자임을 아느냐는 것입니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1:4). 그러므로 자신이 이러한 자임을 아는 것이 은혜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순전히 나만을 위하여 살아왔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 예수님을 말하고 있지만, 아주 작은 이익 앞에 나의 양심도 신앙도 간곳이 없습니다. 나의 작은 자존심 상하는 일 때문에 남편도 아내도 자식도 부모도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자입니다. 정말 나는 구제불능의 죄인입니다. 그러니 어찌 눈에 보이지도 아니하는 주님을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말로서는 주님 앞에서 산다고 하고, 이제 내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라고 말하며 성경을 보고 찬양을 하지만 막상 나의 삶에서는 얼마나 주님을 무시하고 멸시하고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러한 고백이 말씀을 통하여 자신을 볼 때에 나오고 있습니까? 나오고 있다면 참으로 성령의 역사인 것입니다. 이것이 기적입니다. 자신이 죄인 됨을 알고 주님 외에 나의 구원자가 없음을 아는 것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통해 얼마나 인간이 부패하여 있는지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이러한 죄인을 위하여 대신 죽으신 예수님을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한사람이 많은 사람을 위해 죽는 것이 유익이라고 말하였지만, 그러나 그것은 이미 하나님의 뜻대로 자기 백성을 살리시기 위한 대신 고난 받으심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을 제대로 알아 가면 갈수록 할 말이 없어지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오직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사람이 되지 않겠습니까?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2:36).

 

이것이 사도들이 증거 한 복음의 핵심내용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죽인 자들에게는 이것이 얼마나 못 견디게 하는 괴로운 소리입니까? 예수가 그리스도라면 그리스도를 죽인 자가 바로 자기 자신들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를 갈며 돌을 들어 쳐 죽인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 택한 백성들은 그 복음의 소식을 듣고 어떻게 합니까?

 

사도행전 2:37절에 보면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그들을 향해 베드로는 무어라고 합니까? 사도행전 2:38절에 보면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 안에서도 이런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

 

성경에서 인간이 어떠한지를 밝히고 있는 대로 인간을 알지 못하면 인간에 대하여 수많은 환상을 가지게 됩니다. 오늘날도 세상에서는 인간의 위대성을 부르짖고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인간이 얼마나 죄로 가득한가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죄를 해결하실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임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하여 인간의 죄가 어떠함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계속하여 인간에 대한 잘못된 기대와 환상에 붙들려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결국은 죄라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지 못하도록 너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에서는 인간을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자기의 주인을 알아보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의 주인을 알아보는 짐승만도 못하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1:2-4절을 보면

 

하늘이여! 들어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라고 했습니다.

 

예레미야 8:7절을 보면 공중의 학은 그 정한 시기를 알고 반구와 제비와 두루미는 그 올 때를 지키거늘 내 백성은 여호와의 규례를 알지 못하도다 하셨다 하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정도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다는 것이 성경의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마지막 성경인 말라기에서는 무어라고 합니까?

 

말라기 1:6-10절을 보면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일찐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찐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주의 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함을 인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기를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고 했습니다. 아들은 아비를 공경하는 것이 당연한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아버지가 되시는데도 이스라엘이 공경하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이렇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증거해야 하는 제사장들은 이렇게 되지 말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말라기 1:6절에서 무어라고 하십니까?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라고 합니다.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오히려 제사장들은 무어라고 합니까? 우리가 언제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습니까? 하고 따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그들의 수많은 제사들이 얼마나 외식적이었느냐고 고발합니다. 제사를 다 지낸다고 하면서도 결국은 하나님의 기쁨이 아니라 자기들의 기쁨을 위한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생각은 뒷전인 것입니다. 아모스 4:4-5절에 보면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로 드리며 낙헌제를 소리내어 광포하려무나 이스라엘 자손들아 이것이 너희의 기뻐하는 바니라. 이는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했습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너희가 아침마다 희생을 드리고 삼일마다 십일조를 드리고 온갖 제물을 드리지만 그것이 너희의 기뻐하는 바라고 하는 것입니다.

 

순전히 자기 기쁨을 위한 것, 자기 이익을 위한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함부로 제사를 드리지 못하도록 성전의 문을 닫아 버릴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의 결론입니다. 일반 백성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증거 해야 할 제사장이 하나님을 멸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제사장의 모습이 결국 어디로 가고 있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에 나타난 대제사장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는 그 중심에 대제사장이 있었다는 사실이 우리를 경악케 하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예수님을 심문하고 죽이는 대제사장들을 통해 우리의 본질을 알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나의 유익을 위해, 나의 명예와 자존심을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신을 알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죄악됨을 인정하고 우리를 위해 체포당하시고 심문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우리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오직 의지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E

 

 

 

예수님이 당하신 첫 번째 심문 /18:12-14 /18:19-24

2017-05-31 02:40:41

 

18:12 이에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

 

18:13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라

 

18:14 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권고하던 자러라

 

.....................................................................................................................

 

18:19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물으니

 

18:2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드러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하게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

 

18:21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 보라 그들이 내가 하던 말을 아느니라

 

18:22 이 말씀을 하시매 곁에 섰던 아랫사람 하나가 손으로 예수를 쳐 이르되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 하니

 

18:2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언하라 바른 말을 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 하시더라

 

18:24 안나스가 예수를 결박한 그대로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내니라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 흘리시며 간절히 기도하신 후에 사로잡히셨습니다. 그런 후에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모두 여섯 번에 걸쳐 심문을 당하셨습니다. 처음 세 번은 유대인들에게, 나중 세 번은 이방인들에게 심문을 당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있는 말씀대로, 먼저 예수님은 안나스에게 끌려가셔서 심문을 당하셨습니다. 안나스는 당시 최고의 권력자였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심문하는 동안에 그의 사위이자 대제세장이었던 가야바는 한 밤 중에 자기 집으로 예루살렘 공회를 소집했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안나스에게 심문을 당하시고, 다음으로 밤중에 가야바의 집에 모인 공회에 끌려가셔서 심문을 당하셨습니다. 공회는 반드시 낮에 모이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공회는 반드시 예루살렘 성전 안에 있는 법정에서 모이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새벽에 날이 새자마자, 서둘러서 예루살렘 성전 안에 있는 법정에서 다시금 공회로 모였습니다. 자신들의 판결이 합법적인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와 같이 해서 예수님은 세 번째 심문을 당하신 것입니다.

 

일사천리로 순식간에 예수님에게 사형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먼저 유대인들에 의해서 세 번 심문을 당하셨습니다. 먼저 안나스에게, 다음으로 가야바의 집에 모인 공회 앞에서, 그리고 새벽에 다시 한 번 공회 앞에서 심문을 당하셨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에게는 사람을 죽일, 곧 사형을 시킬 수 있는 권한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을 끌고서 로마의 총독 빌라도에게 갔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네 번째로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으셨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해보니, 예수님께는 죄가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빌라도가 고소하는 자들의 말을 들어보니, 예수님이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예루살렘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케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갈릴리 사람임을 알았습니다.

 

이에 빌라도는 예수님을 분봉 왕 헤롯에게 보냈습니다. 그 당시 갈릴리는 분봉 왕 헤롯의 관할이었습니다. 유월절을 맞이해서 분봉 왕 헤롯도 예루살렘에 와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은 분봉 왕 헤롯에게 보내져서 다섯 번째 심문을 받으셨습니다.

 

분봉 왕 헤롯도 예수님을 심문했지만, 아무런 죄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헤롯은 그의 군인들과 함께 예수님을 희롱했습니다. 예수님께 빛나는 옷을 입혀서 다시금 빌라도에게 보냈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여섯 번째 심문을 빌라도에게 받으셨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죄가 없음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유대인들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주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짧은 시간동안 이리저리 끌려 다니면서 모두 여섯 차례 심문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심문을 당하셨기 때문에, 예수님 안에 있는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심문을 당하지 않아도 됩니다. 예수님은 예수님 안에 있는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시기 위해서, 여섯 번에 걸친 심문을 묵묵히 참으시면서 끝까지 견디어 내신 것입니다.

 

18:12 이에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

 

 

이 때의 군대는 빌라도가 보낸 군대입니다. 천부장은 빌라도의 군대를 지휘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천명의 군인들을 거느리는 지휘관이 천부장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붙잡으러 갔던 군인들의 수가 많았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이방인들이었습니다.

 

여기에 유대인의 아랫사람들이 가세했습니다. 22:52 말씀처럼, 이들은 예루살렘 성전의 경비대원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유대인들입니다. 그러니까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함께 가서 예수님을 체포하여 결박한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자신을 사로잡으러 온 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나사렛 예수라하는 말에, “내가 그니라고 예수님이 자신을 밝히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예수님을 체포하러 왔던 자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려졌습니다.

 

그들은 경배하는 자세를 취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위용과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찾거든 나 외에 다른 사람들에게는 손을 대지 마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자기가 가진 칼로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오른쪽 귀를 베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은 말고의 귀를 만져서 낫게 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으로서, 이 때 분명한 창조의 역사, 놀라운 기적을 그들 눈앞에서 친히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예수님을 체포하고 결박했습니다.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상관들의 명에 복종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위의 것, 영원한 것을 찾기보다는 땅의 것, 그저 일시적인 것을 구했던 것입니다. 이게 바로 우리 인간의 연약함을 보여주는 실례입니다.

 

찬송가 2631절 가사입니다. “이 세상 험하고 나 비록 약하나.” 이 세상은 험하고 우리는 참으로 약합니다. “늘 기도 힘쓰면 큰 권능 얻겠네.” 이 세상은 우리는 약하기 때문에, 우리는 늘 기도에 힘쓰면서 큰 권능을 얻어야 비로소 세상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18:13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라

 

 

예수님을 체포하고 결박한 무리는 예수님을 옥에 가두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로마의 총독 빌라도에게 끌고 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먼저 안나스에게 끌고 갔습니다.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약 20년 전, 안나스도 역시 대제사장을 역임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후에 안나스에게 여섯 아들이 있었는데, 돌아가면서 모두 제사장을 지냈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예수님이 사로잡히셨을 때는, 안나스의 사위인 가야바가 대제사장의 지위에 있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빈손으로 가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성전에 나아갈 때는, 짐승을 가져와서 하나님께 제물로 바쳤습니다. 물론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반드시 흠이 없는 짐승이라야만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바칠 짐승을 가지고 가면, 성전에 있는 제사장들이 그 짐승에게 흠이 있는지 없는지를 점검했습니다. 그러나 십중팔구는 거절당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성전에서 파는 짐승을 비싸게 사야합니다. 여기에서 많은 이권이 발생했습니다.

 

또한 성전에 올라갈 때는, 성전세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 당시에 통용 되고 있던 이방인의 화폐에는 왕의 초상화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이스라엘의 화폐인 세겔로만 성전세를 바치게 했습니다. 이 때도 환율을 엄청 비싸게 해서 폭리를 취했습니다.

 

예수님은 두 번이나 성전에서 돈 바꾸는 자의 책상을 뒤엎으시고 짐승 파는 자들을 쫓아내셨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기도하는 집인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었도다고 질책하셨습니다. 여기서 강도들은 안나스를 비롯한 그의 일가들을 칭합니다.

 

안나스는 예수님을 미워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자기의 지위와 이권을 취함에 방해가 되므로, 그는 예수님을 죽여 없애기를 바랐습니다. 아무튼 무리는 예수님을 붙잡아 결박한 후에, 맨 먼저 당시 유대인의 최고 권력자인 안나스에게로 끌고 갔습니다.

 

18:14 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권고하던 자러라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죽은 지 나흘이나 되는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놀라운 표적을 보고서,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고 따랐습니다. 그러자 그 일 때문에, 예루살렘 공회가 모였습니다.

 

그들은 서로 걱정하면서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보라!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뒤를 따르고 있다. 그대로 두면, 그들의 눈에는 마치 우리가 로마에 반란을 일으키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로마가 우리를 짓밟지 않겠는가?”

 

그 때 대제사장 가야바가 공회 앞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11:4950 말씀입니다.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 도다.”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라고 가르치셨지, 로마에 반기를 들 것을 가르치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단지 가야바는 예수님에 대한 시기와 성전에서 얻는 이권을 상실할까봐 그런 말을 한 것입니다.

 

18:1518 말씀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처음 부인한 장면이 나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차마 예수님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차마 담대하게 나서서 예수님을 변호하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모습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베드로와 같이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차마 용기가 없어서, 때로는 예수님의 증인되는 일을 주저하는 우리들입니다. 이와 같은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은 심문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부족과 허물을 다 용서하셨습니다.

 

 

18:19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물으니

 

여기서 대제사장은 안나스를 가리킵니다. 안나스는 과거에 대제사장이었지만, 지금은 그의 사위 가야바가 대제사장입니다. 그렇지만 안나스는 여전히 대제사장으로 불렸습니다. 예컨대 은퇴한 장로님이지만, 계속해서 장로님이라고 불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안나스는 예수님에게서 죄를 찾기 위해서 유도심문을 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죄목을 분명히 지적하지 않았습니다. “네 죄를 네가 알렸다하는 식으로, 안나스는 예수님 스스로 무엇인가 자백하기를 바라고 예수님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또한 그의 질문은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습니다. “네가 무엇을 가르쳤느냐?” 먼저 예수님의 교훈에 대해서 물어야 했습니다. 그런 후에 너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들이 누구냐? 몇 명이냐? 어디 있느냐?”라면서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해서 물어야 논리적으로 맞습니다.

 

그런데 안나스는 먼저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약점인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미 예수님의 제자였던 가룟 유다는 자기편이 되었습니다. 그는 뇌물을 받고서, 예수님을 배반하고 예수님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넘겼습니다.

 

또 예수님이 잡히실 때, 예수님을 붙잡지 못하게 막는 제자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대제사장의 집 앞뜰에 있기는 했지만, 그들은 나서면서 예수님을 변호하지도 않았습니다. 도리어 베드로는 자기 살겠다고 예수님을 부인하고 있는 실정이었습니다.

 

18:2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드러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하게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

 

18:21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 보라 그들이 내가 하던 말을 아느니라

 

안나스가 예수님을 심문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도리어 예수님이 안나스를 꾸짖으셨습니다. “나는 늘 공개적으로 모든 사람을 가르쳤다. 그런데 너는 어찌 나를 은밀하게 심문하느냐?” “나를 고소하는 자들이 있으면, 그들에게 내가 무엇을 가르쳤는지 물어보라!”

 

말하자면 예수님은 안나스의 심문이 불법임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실 안나스에게는 예수님을 심문 할 권한이 없었습니다. 또한 밤중에, 은밀하게, 그것도 안나스 개인의 집에서 예수님을 단독으로 심문하는 것은 완전히 불법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책망에 안나스는 당황하여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노련하고 관록 있는 안나스였지만, 예수님 앞에서 그의 인간적인 지혜나 잔꾀, 인간적인 관록은 전연 통하지 않았습니다. 안나스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있을 바로 그 때였습니다.

 

18:22 이 말씀을 하시매 곁에 섰던 아랫사람 하나가 손으로 예수를 쳐 이르되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 하니

 

여기서 아랫사람은 성전의 경비대원입니다. 당시 성전의 경비대원들은 곤봉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 경비대원은 자기가 모시고 있는 대제사장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자기 몸에 있는 곤봉을 끄집어내서 그것으로 예수님을 쳤습니다.

 

이 때 예수님의 거룩하신 몸에 처음 폭력이 주어지게 됐습니다. 아직 예수님에 대해서 유죄가 확정되지도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그가 예수님 몸에 폭력을 가한다는 것도 역시 불법이었습니다. 이로써 아래의 두 말씀이 응하졌습니다.

 

15:25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는 그들의 율법에 기록된 바 그들이 이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또한 미가 5:1 말씀입니다. “딸 군대여 너는 떼를 모을지어다 그들이 우리를 에워쌌으니 막대기로 이스라엘 재판자의 뺨을 치리로다.”

 

경비대원 가운데 하나가 자기의 곤봉으로 예수님을 칠 때, 예수님은 바로 그 순간 그 경비대원의 팔을 꺾어버릴 수도 있으셨습니다. 아니면 그 즉시 땅이 갈라지게 하여, 그 경비대원을 땅속으로 빠뜨려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18:2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언하라 바른 말을 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 하시더라

 

예수님은 자기를 치는 경비대원에게 물으셨습니다. “내 가르침에 잘못이 있었느냐? 내가 백성들에게 무엇을 잘못 가르쳤느냐? 그렇다면 그것을 증언하라. 내가 바른 것을 가르쳤다면, 네가 나를 칠 이유가 없지 않느냐?” 이런 뜻으로 물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지만, 자기를 치는 자를 바로 심판하지 않으셨습니다. 벧전2:23 말씀처럼, 예수님은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그 모든 고난을 기꺼이 당하셨습니다.

 

 

18:24 안나스가 예수를 결박한 그대로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내니라

 

안나스의 심문은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안나스는 예수님에게서 아무런 죄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안나스는 예수님을 심문하는 일을 포기했습니다. 죄를 발견하지 못했으면 결박된 것을 풀어줘야 했습니다. 하지만 안나스는 사악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미 예수님을 죽이겠다는 결론은 나와 있었습니다. 그저 형식적으로 예수님을 심문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안나스는 예수님을 결박한 그대로 자기 사위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냈습니다. 그 동안에 이미 가야바는 자기 집에 공회를 소집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창세전부터 하늘에서 천사들의 경배를 받아오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어찌 유한한 인간이 무한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결박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람은 하나님을 결코 결박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때 예수님이 스스로 결박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 까닭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결박을 풀어 주시려고, 예수님이 친히 결박을 당하신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의가 되게 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스스로 죄가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임을 당하시므로, 죽었어야 할 살인강도 바라바가 대신 살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죄인인 우리가 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결박을 당하셨기 때문에, 예수님 안에 있는 우리가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다음에 나오는 요18:2527절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두 번째, 세 번째 부인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베드로도 가룟 유다도 똑같이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두 사람 모두 큰 죄를 범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에게는 차이점이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서, 다시금 사도로 세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지만,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목매달아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죄도 많습니다. 예수님은 죄의 결박에서 우리를 풀어주시려 스스로 결박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회개합시다. 그리고 베드로처럼 다시 일어나, 예수님의 뒤를 끝까지 따라가기를 바랍니다.

 

 

 

고난받으시는 예수님 /18:12-14, 18:19-24

2013-10-10 13:45:49

 

조선시대 황희라는 유명한 정승이 있었습니다. 황희가 어느 날 시골길을 가다 두 마리 소를 몰고 일하는 농부를 만났습니다. 황희는 농부에게 그 두 마리 소 가운데 검은 소가 일을 잘합니까, 누런 소가 일을 잘합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농부는 침묵을 지켰습니다. 황희가 몇 번씩 물었지만 마찬가지였습니다. 황희는 불쾌한 표정으로 지나갔습니다. 한참 가는데 그 농부가 뒤쫓아 와 말했습니다.

 

선비 양반, 아까는 죄송했습니다. 제가 왜 그때 말하지 않았느냐 하면, 아무리 짐승이지만 주인이 누구보다 누가 더 일 잘한다고 해보십시오. 얼마나 섭섭하겠습니까? 그래서 침묵을 지켰습니다. 사실은 검은 소가 일을 더 잘합니다. 누런 소는 꾀를 좀 부려요.”

 

이 말은 황희는 크게 깨닫고 그때부터 아랫사람들을 대할 때 함부로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백성의 지도자로서의 대제사장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아닌 두 사람의 대제사장이 등장을 합니다. 이것이 어떻게 된 것일까요?

 

대제사장은 일 년에 한 번 속죄일에 지성소에 들어가 백성을 위한 속죄의 피를 법궤 위 시은좌에 올려 드림으로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여 백성들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역할을 할 뿐 아니라 또한 그들은 하나님의 복을 백성들에게 선언할 권한과 육체의 정결 여부를 판결할 권한을 부여 받았습니다. 더 나아가,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묻는 우림과 둠밈이라는 제비뽑기를 사용하여, 특별한 일들에 대해 여호와께 물어봐야 했습니다. 그만큼 대제사장의 직무는 아주 중요합니다.

 

그러기에 대제사장이란 직임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레위 지파 가운데서도 아론의 직계 자손들만이 감당할 수 있도록 위임받은 직분이 바로 제사장이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대제사장이 되어 죽을 때까지 대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합니다. 그렇다면 대제사장이 두 사람이나 있다고 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먼저 생각할 것은 대제사장들의 속셈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가야바와 안나스라는 두 인물이 등장을 합니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이 다같이 대제사장으로 표현이 되고 있습니다.

 

실상 한 시대에 두 대제사장이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대제사장직은 종신직이기 때문에 전임 대제사장이 죽거나 아니면 건강에 이상이 생겨서 전혀 대제사장직을 감당할 수 없을 경우에만 후임 대제사장이 세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두 명의 대제사장이 등장을 합니까? 먼저 등장하고 있는 안나스는 전직 대제사장이고 그때 현직 대제사장은 가야바입니다.

 

현직 대제사장만이 대제사장이고 전직 대제사장은 요즘으로 말하자면 증경 대제사장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현역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바로 그 안나스의 사위가 바로 현직 대제사장인 가야바입니다. 사실 로마 총독에 의해서 해임이 돼 버린 제사장입니다.

 

그러니까 정치적으로 자기에게 협조하지 않는다고 해서 안나스를 해임해 버리고 그 사위되는 가야바를 대제사장으로 위촉을 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빌라도가 총독으로 제직할 당시 산헤드린의 최고 지도자로서의 자리에까지 올라서 비록 종교 지도자의 자리에서는 쫓겨났어도 막강한 정치 지도력을 발휘하고 있었던 인물입니다. 그래서 그가 예수를 먼저 심문을 하는 겁니다.

 

또 하나 문제는 대제사장은 누가 세우느냐 하면 하나님이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것도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레위 지파 가운데서도 아론의 지계 후손들만이 제사장이 될 수 있고 그들 가운데 한 사람만이 대제사장으로 세움 받을 수 있는 것인데 로마 당국에 의해서 제사장에 세워진다고 하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났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미 정통성을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건 로마에 의해 정령당한 나라 잃은 백성의 슬픔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더라도 적어도 대제사장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백성들을 이끌어야 할 책임 즉 중재자로서의 역할과 더불어 백성들을 위한 축복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데 그들은 자기들의 기득권 즉 로마 당국과의 협조를 통해 종교를 빙자한 백성들의 지도자로의 역할에 보다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안나스는 그 기득권을 이용해 산헤드린 공의회 의장의 직분을 맡아 계속해서 사위되는 가야바와 더불어 로마 정령 상태의 이스라엘을 실제적으로 이끌고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종교 지도자라고 하기보다는 정치적인 권력에 더 관심이 많을 수밖에 없었고 바로 그런 세속적인 권력에 더 관심이 많은 사람들을 가리켜 흔히 사두개파 사람들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어찌 되었든 이런 입장에 있는 안나스에게로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하속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 끌고 갑니다. 성경은 이르기를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라 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 권고하던 자러라그랬습니다.

 

로마 군병들이 예수를 잡았으면 마땅히 총독에게로 끌고 가야 옳지 않습니까? 그런데 안나스에게 끌고 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계획이 대제사장으로부터 나오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겁니다. 그게 어떤 계획이었습니까?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 권고하던 자라고 했습니다.

 

즉 예수를 죽이고자 계획한 자는 바로 가야바와 안나스라는 사실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백성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며 대속하는 것 즉 죽을 수밖에 없는 자를 살리는 것이 바로 대제사장의 할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거꾸로 예수를 죽이려고 꾀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의 뜻을 묻는 자가 대제사장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자기들이 정말 예수님이 메시야인지 확신이 안 선다면 마땅히 하나님께 물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지금까지 메시야가 우리 가운데 오시기를 오래도록 기다려 왔는데 지금 이 예수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보내주신 메시야가 맞습니까? 그런데도 그들은 애써서 예수가 메시야가 아니라는 증거만을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증거가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예수를 처형할 증거를 만들어내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야만 빌라도에게 말하여 예수를 처형할 수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자기들이 옳다 그르다를 판단하여 죄를 정할 수는 있어도 궁극적으로 사형시킬 권한은 오직 로마 당국에만 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주후 70년경은 로마군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함락된 비극의 해입니다. 그때 예루살렘 성은 완전히 파괴되고 성전은 불태워지고 성 안에 살고 있던 9만 명이 참사를 당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야 했던 그런 비극이 일어났을 때 예루살렘 시민들의 지주가 된 사람이 벤 자카이라는 랍비였습니다.

 

예루살렘이 함락되어질 때 벤 자카이는 로마군 사령관을 찾아가서 당신이 말하는 대로 다 따를 테니 나와 함께 랍비 10명이 기거할 수 있는 방 한 칸만 마련해주십시오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래서 방 한 칸만 파괴하지 말아달라는 제의는 받아들여졌습니다. 그후 예루살렘의 모든 집들이 불태워지고 파괴되었지만. 벤 자카이와 랍비 10명이 살고 있는 집 한 칸만은 남아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벤 자카이를 `민족의 배신자'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벤 자카이는 아무 말 없이 동료 랍비 10사람과 함께 20년 동안 작업한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탈무드'입니다. 그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시대는 달라지고, 사람은 죽고, 태어나고, 새사람이 나타나고, 인류의 문명, 물질의 세계, 집이나 건물, 이런 것은 다 없어지고 파괴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남는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벤 자카이가 이스라엘 민족이 역사를 두고 터득해왔던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 지혜를 모으고 후손들에게 전해주어야겠다는 생각으로 20년 동안 작업해서 만든 것이 `탈무드'입니다.

 

이것을 오늘날까지 이스라엘 백성에게 교훈집으로 남겨주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이 될 때 이스라엘은 결코 망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지고 탈무드를 남겨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이 복된 백성이 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섬길 줄 아는 백성이 복되다는 확신을 가졌던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지도자입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준 일을 지켜보았던 그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예루살렘 성이 멸망당하는 것을 보면서 두려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 한 가지 희망 즉 말씀만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세울 수 있다는 희망으로 이렇듯 귀한 일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앞에서 말한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는 이스라엘을 멸망의 자기의 정치적 권한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예수를 잡아 죽이도록 함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렁텅이로 빠뜨렸다면 벤 자카이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희망을 남겨 주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가 오늘의 유대인들이요 이스라엘 나라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오직 말씀 안에 바로 서는 길 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지금 당장은 나에게 이익이 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나게 되면 그 결과는 두고 두고 후회할 수밖에 없는 것임을 우리 모두 기억하여 오직 말씀 안에서 은혜로 사시며 믿음으로 내일을 위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부패한 인류의 실상입니다.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물으니

대제사장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그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묻습니다. 이건 바꿔 말하면 이런 말이 됩니다. “아니, 네가 그렇게 잘난 사람이고 네가 그렇게 큰일을 했다고 하는데 어떻게 네가 기른 네 제자들은 하나도 안 남았느냐? 네가 신중하게 뽑아 선택하여 세운 그들은 지금 왜 하나도 네 옆에 없느냐?” 이렇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목사는 꼭 연예인들과 같다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인기 직업이라는 것입니다. 연예인들이 인기를 관리하듯이 목사들도 어떤 의미에서는 인기 관리를 하는 듯이 보이는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느냐 사람을 기쁘게 하느냐가 중요한 하나의 이슈가 됩니다. 누구라도 압니다.

 

비단 목사이니까 그래야 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면 당연히 먼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하는데 과연 저와 여러분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시는가요? 아니면 내 생각을 앞세우는가요? 어떨 때는 스스로 생각기에도 내가 목사가 맞나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맞나 싶을 때가 있습니다. 에이 목사님들은 그럴리 있겠습니까?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그렇게 말씀해 주시는 분들 정말 고맙습니다만 인간의 나약함이 드러날 때에는 여지없이 무너지는 것이 목사에게도 예외는 아닌 것 같습니다. 나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남을 깎아 내리는 일이 어찌 나 하나만의 일이겠습니까?

 

그래서 주님께서 다락방의 기도에서 그토록 우리가 하나 되기를 위해서 기도하셨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서로가 경쟁적으로 자기를 세워나가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입니다. 그래서 더 큰 은혜를 사모하고 어떻게 하면 보다 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까 하여 선의의 경쟁을 한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선의의 경쟁이 아닌 살리는 일이 아닌 죽이는 일이 되고 서로를 깎아 내리는 일이 된다면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그것이 오늘 현실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기독교인들이 많이 줄고 있다고하지를 않습니까?

 

우리가 다들 힘들게 살 때는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고 하나님의 허락하시는 복을 받기를 소망하며 살았지만 그래서 복 받기를 위해 더욱 하나님과 사람 앞에 심고 뿌리고 나누었는데 이제는 살만 하게 되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들 어릴 때만 하더라도 먹을 것도 변변치 않았습니다. 배가 고픈데 음식 투정 부릴 겨를이나 있었던가요? 그런데 요즘에는 거꾸로 다이어트 열풍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살만 하니까 이제는 가꾸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게 서로를 세워나가면 좋을 텐데 사실은 그렇지를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줄 서기 문화입니다. 아니 다같이 일등하면 안 됩니까? 그래서 요즘에는 일등상 이등상 하지를 않고 무슨 재능상 무슨 봉사상 이런 이름으로 모두에게 상장을 하나씩 안겨주기도 한다고 하는데 그렇습니다.

 

하나님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시고 우리 모두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더군다나 하나님께서 귀한 직임을 맡겨 세우신 사람들이라고 할 때는 더욱 많이 맡은 자들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라고 하시지 않습니까? 이건 당연히 긍정적인 접근을 주님이 원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대제사장은 부정적인 접근을 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나사로를 살렸다면서? 당신이 38년 된 중풍병자를 고쳤다면서? 그런데 당신이 그렇게 애지중지하며 심혈을 기울였던 그 제자들은 지금 어디 갔느냐? 게다가 그 중 한 명은 당신을 팔아먹지 않았더냐?”라는 희롱 섞인 질문인 것입니다. 이 대목이야 말로 우리가 십자가 사건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대목인 것입니다. 이 질문이야말로 인류 전체가 얼마나 썩어 문드러진 존재인가 하는 사실을 대제사장을 통하여 나타내주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6: 57~68에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를 잡은 자들이 그를 끌고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가니 거기 서기관과 장로들이 모여 있더라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가서 그 결말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인들과 함께 앉아 있더라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으매 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얻지 못하더니 후에 두 사람이 와서 이르되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 하니 대제사장이 일어서서 예수께 묻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이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하되 예수께서 침묵하시거늘 대제사장이 이르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그가 신성모독 하는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신성모독 하는 말을 들었도다 너희 생각은 어떠하냐 대답하여 이르되 그는 사형에 해당하니라 하고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어떤 사람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이르되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더라

 

이게 무슨 말입니까? 대제사장들은 지금 어떻게 해서든 예수를 죽이려고 올가미를 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세벨이 거짓 증인을 내세워 나봇을 죽이는 것처럼 그렇게 이들은 거짓 증인을 내세워 예수를 옭아매 죽이려고 하고 있지만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를 않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심문하는 것도 사실과 증거와 증인들을 놓고 심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죽일 핑계거리를 찾아내기 위한 잘 짜여진 각본이라는 뜻입니다. 한데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두 사람이 와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이 사람이 말하기를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만에 짓겠다했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의 참 뜻은 성전이라는 건축물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성전 된 자기 몸을 가리켰다고 하였습니다.

 

, 예수님께서 죽으실 것과 다시 사흘 만에 부활하시는 것으로 구원을 완성시키시는 이야기를 하신 것이었습니다. 구약시대에 제사장이 성전에 들어가서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도 인간을 완전하게 구원할 수 없었던 것을 예수님께서는 친히 제물이 되시고 대제사장이 되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완성될 구원을 그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을 들은 자들은 그 말씀의 진의가 무엇인지를 살펴보려 하지 않고 단지 올무에 걸어 넘어뜨릴 구실 만을 찾고 있었기에 정말 그랬었느냐? 이것만 물었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대답하셨고, 게다가 앞으로 심판날에 인자가 하늘 아버지의 권능의 보좌 우편에 앉은 것과 구름타고 올 것을 너희가 보리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시자마자, 마침 잘 되었다는 듯이 의도적으로 제사장은 자기의 옷을 찢으며 말하기를 저가 참람한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하고는 때리고 매질하고 이제 빌라도에게 사형에 처해주기를 요청하기 위해 넘겨주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깊이 살필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도 사람 사이에 시기심이나 증오심을 갖기 시작하면 꼭 대제사장과 같은 그런 행동 양식을 따라간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상대방이 한 말의 뜻이 무엇인가?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말꼬리를 붙잡아서라도 상대방을 칠 근거를 삼으려고 하는 것이 우리들 모두의 죄악된 성품입니다. 이게 우리의 본능입니다.

 

결국 우리의 죄악 된 마음 저 밑바닥엔 사람에 대해 하나님에 대해 좋은 마음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사람이 되지 못하면 우리의 현실은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죄의 본성입니다.

 

더구나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시며 빛을 비추시어 영생을 주러 오셨습니다. 한번도 우리에게 손해 끼치는 일을 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오히려 배고픈 자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목마른 자에게는 물을, 다친 자를 싸매시며 병든 자를 고쳐주신 이에게 이같이 증오심으로 갚을 수 있습니까?

 

사랑으로 두 손을 펴고 다가오신 주님의 그 사랑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거꾸로 그 사랑을 외면했습니다. 오히려 멸시하며 손바닥으로 내리쳤습니다. 누가 그랬습니까? 평범한 사람이 그랬다면 또 모르겠습니다만, 지금 대제사장이 그러고 있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물으니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내가 드러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하게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 보라 그들이 내가 하던 말을 아느니라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대제사장이면서도 예수님의 가르침과 교훈과 행적에 대하여는 하나도 깨우친 것이 없고 다만 죽이려는 마음만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 본성 깊이 뿌리박힌 쓴 뿌리입니다.

 

화상을 입어 온통 일그러진 얼굴을 한 사람이 처음으로 거울을 보게 되었을 때에 거울 속에 비쳐진 일그러진 자신의 모습을 보고 어떤 행동을 취합니까? 자기의 얼굴을 뜯는 것이 아니라, 거울을 깨뜨리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빛 되신 주님이 나타나시자 자신의 추하고 부패한 모습이 드러남을 알고 스스로를 고치려고 하기보다 그 빛을 끄려고 덤벼들고 있는 것이 대제사장의 모습이요, 우리 인간들의 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성도들은 끊임없이 겸손하게 은혜를 구하며 통회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다윗입니다. 다윗의 생애는 전기와 후기로 나뉩니다. 그 분기점은 밧세바 사건입니다. 밧세바 사건 이전의 전기에서는 물맷돌로 골리앗을 보기 좋게 때려 눕혀 승리를 합니다. 그리고 그를 잡아 죽이려고 쫓아오는 사울을 향하여 한 번도 거친 말이나 부정적인 말이나 어떤 횡포를 부리지 않았습니다. 늘 말없이 도망만 다닙니다.

 

그런 다윗과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드디어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다고 성경은 거듭 기록합니다.

 

그런 다윗이 하루 아침에 무너져 내립니다. 밧세바 사건을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이 일로 다윗은 여지없이 땅에 떨어집니다. 밧세바 사건 이전에는 대부분 다윗 외부와의 문제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밧세바 사건 이후에는 모두 자신에 관한 싸움들입니다.

 

왕궁 내에 일어난 반란 사건들도 모두 스스로와의 싸움으로 수렴해 나갑니다. 그래서 변합니다. 다윗이라는 믿음의 사람이 철저히 변하게 됩니다. 이리하여 나온 유명한 고백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이러한 고백을 통해 다윗은 철저히 깨닫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사람으로 살아가지 않는다면 날마다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순간적으로 무너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우리가 온전한 믿음의 사람 순종의 사람 은혜의 사람으로 살아가며 하나님의 복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지금 대제사장의 심문을 통해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인간의 자가 얼마나 무서운가 하는 것입니다. 그 부패하고 더러운 죄가 바로 내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에이 그건 대제사장 얘기라고 하시겠습니까?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라고 하신 말씀을 떠올려 보십시오. 우리의 대제사장은 예수님이시고 우리는 그 수종을 드는 제사장들입니다. 왕 같은 제사장 왕권 제사장 즉 주님과 같은 제사장이라는 뜻입니다. 그런 우리 안에 안나스 같은 가야바 같은 추하고 온갖 더러운 것들로 가득차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씻음 받았다고 해도 그위에 그리스도의 피계속해서 뿌리고 바르지 않는다면 어느 순간 나의 죄악된 본성이 또다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망하고 좌절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고 그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들은요 누구든 누가 조금만 추켜 주면 우리 마음에 그렇지 나도 꽤 괜찮은 사람이야 하는 생각을 갖습니다. 어림 반 푼 어치도 없는 생까 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사람다울 수 있는 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로만입니다. 조금만 방심해도 내가 드러나요. 그런데 나는 어떤 사람이냐 하면 원래 죄 가운데 태어난 사람이란 말입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은혜로 덮여 있으니 괜찮은 줄 알지 실은 저 밑바닥에는 추하고 더러운 것들로 가득하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은혜로 그것을 덮어두지 않으면 언제 그것이 겉으로 드러날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래서 아무 조건 없이 주시는 주님의 사랑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그 사랑을 받아들이십시오. 그건 나도 그렇고 우리도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다른 잣대를 들이대지 마십시오. 나는 죽고 그리스도만 존귀하게 되기를 원했던 바울의 고백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은 아낌없이 자신을 주셨습니다. 지금도 은혜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예수님마저도 깔고 앉아야 속이 편한 사람들 아닙니까? 겉으로는 안 그런 척 하면서도 사실은 시기심과 미움과 질투로 우리 마음이 가득하지는 않습니까?

 

아니 그렇지는 않더라도 다른 사람을 무시하지는 않습니까? 그런데 그 무시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보다 잘 나서입니까 나보다 못 낫다고 생각해서입니까?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세상에 나만 못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주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들치고 다 주 안에서 귀한 하나님의 보배들인데 누가 잘 나고 못 나고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그러니까 이제 겉모습으로 사람 보지 마십시오. 못난 사람 망가진 사람 잘못된 사람을 오히려 더 불쌍히 여기십시오.

다시 말씀드립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제사가 무엇이라고요?

 

상한 심령이라

그렇다면 이 대제사장이 왜 이런 일을 했습니까? 이들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자신을 위해서만 그들의 인생이 존재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일들을 서슴없이 저질렀던 것입니다. 자기 하나 밖에는 그 목표가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도 두려움을 주는 중요한 대목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들도 혹시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모든 것은 겉치장과 구호에 그칠 뿐 오직 나 자신과 가족들만을 위해서만 모든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는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지금 안나스나 가야바도 그들 나름대로 하나님을 향하여 열심을 갖고 있고 하나님 편을 든답시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묻지를 않고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보낸 사람이 맞습니까? 묻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자기 생각이 옳다고 철썩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게 하나님을 위한 열심인 줄만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자기 자신을 위한 일인 줄 꿈에도 모르고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사랑은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살리는 것이 사랑이고 은혜입니다. 그런데 혹 나 역시 누구를 죽이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 나 자신을 죽이고 있지는 않은지요?

 

대제사장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예수를 죽였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자기를 죽였고 이스라엘을 죽인 것입니다. 이런 어리석음이 우리들 가운데 있지는 않은지 항상 살펴서 항상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안에서 나를 다스려 나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워터루 싸움에서 나폴레옹을 이긴 아더 웰링턴의 일화입니다. 그가 여러 부하들을 거느리고 어느 날 여우 사냥을 떠났습니다. 여우를 발견한 웰링턴은 힘차게 말을 몰았습니다. 그런데 여우는 펄쩍 담장을 넘어 농장 안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마침 농장에는 문을 지키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얘야, 문을 열어라. 여우를 잡으러 들어가야겠다

그러자 소년은 딱 잘라 거절했습니다.

죄송합니다만, 농장 안으로 들어가실 수가 없습니다. 사냥꾼이 농장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일부러 이 담을 쌓은 것입니다. 저희 농장을 지키기 위한 것이니 그냥 돌아가십시오.”

웰링턴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습니다.

 

네 이놈! 이건 내 명령이다. 빨리 문을 열어! 난 웰링턴 장군이란 말이다!”

하지만 소년은 침착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더욱 열어드릴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각하처럼 높으신 분께서 농민의 어려움을 상관하지 않고 그저 무리한 요구를 하십니까?”

할 말을 잃은 웰링턴은 혼자 이렇게 중얼거리고 말았습니다.

그래, 네 말이 옳다. 여우는 놓쳤지만 오늘 귀한 교훈을 얻었구나.”

오늘 우리가 꼭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 오늘 하루 모든 일을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게 하옵소서.” 하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많을수록 또한 수고하는 일이 많을수록 맡은 직분이 귀할수록 더욱 겸손하게 사랑으로 베풀며 섬기는 성도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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