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엇을 갈망하는가? /요18:28-40/ 유기성목사
2023-05-12 11:17:46
누가 ‘당신의 삶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라고 묻는다면 짜증나는 분이 많으실 것입니다.
먹고 살기도 바쁜데 그런 골치 아픈 생각 할 시간이 없다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만약 자녀들이 그렇다면 어떻겠습니까? 걱정되지 않겠습니까?
한밤중에 깨어 답답한 마음이 사라지지 않아, 뉴스를 보니 어젯밤 이태원 거리, 할로윈 축제 현장에 10여만 명의 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이 북적였는데, 대형 압사 사고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어제는 교회 중보기도팀이 이태원에 가서 기도도 했었기에 밤에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새벽에 149명이 죽었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대부분 10-20대들이라고 합니다. 얼마나 많은 가정에서 어젯밤 잠을 자지 못했을까요? 무슨 위로의 말을 해야 할지,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마음이 답답했습니다.
그들은 왜 그리로 갔을까요? 분명한 것은 그들 마음에 있는 갈망이 그들을 그곳으로 이끌었을 것입니다.
우리 마음의 갈망이 우리 인생을 결정합니다.
본문은 ‘나는 무엇을 갈망하는가?’ 우리에게 질문하고 있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저주 받는 이름이 있다면 본디오 빌라도일 것입니다. 전 세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신앙고백 할 때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당하사” 하고 고백합니다.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님을 죽였다는 것입니다.
당시 총독이었던 빌라도는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께 호감을 보였습니다.
예수님을 살려주려고 나름 애도 썼습니다. 명절이 되면, 로마 총독의 권한으로 죄수 한 사람을 살려줄 수 있는 전례가 있었기에 흉악한 살인범인 바라바를 미끼로 예수님을 석방시키려 했습니다. 결국 예수님을 사형시켜야 했을 때, 자신이 예수님을 죽인 것이 아니라는 의미로 손을 씻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그의 마음의 갈망이 성공하고 출세하고 부유하게 살고 싶었던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다 그것을 갈망하고 있지 않습니까?
자신도 배우자도 부모도 자녀도 그렇게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그것 때문에 빌라도는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빌라도를 보면서 우리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나는 무엇을 갈망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혹시 빌라도와 같은 사람은 아닌가?
오늘 본문에 깜짝 놀랄 부분이 나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께 "진리가 무엇이오?" 하고 물은 것입니다.
아주 좋은 질문입니다. 진리 그 자체이신 분에게 진리를 물은 것입니다.
이제 빌라도가 진리를 알 수 있는 절호의 순간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빌라도는 그 질문을 던지고는 유대인들을 만나러 나가버렸다고 했습니다.
‘이게 무슨 일이지?’ 순간 멍할 정도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는 진리가 무엇인지 물었지만 마음의 갈망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중요하지도 의미도 없는 문제로 세월을 허송하지 말아야 합니다.
연속극 작가에게 전화를 걸어서 주인공을 살려주지 않으면 가만있지 않겠다고 협박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유치하게 살기에는 너무나 인생이 짧습니다.
올해 프로 야구 시즌에서 어느 팀이 우승하든지 상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월을 아껴야 합니다. 때가 악합니다.
정말 중요하고 귀한 질문을 붙잡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정말 내 안에 계신가?”
“나는 죽고 예수님으로 사는 것이 어떻게 사는 것인가?”
“어떻게 예수님과 친밀히 동행하며 살 수 있을까?”
고등학생 때, 예수님이 제 안에 거하신다는 말씀을 듣고 제 안에 갈망이 생겼습니다.
그 갈망이 저를 여기까지 이끌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생명이고 우리 마음의 갈망이십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종교를 가진 것뿐입니다.
그러면 빌라도처럼 세상이 주인인 사람으로 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두 종류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속한 사람과 진리에 속한 사람입니다.
:36 ...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오.
:37 ...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가 하는 말을 듣소.
빌라도는 진리에 속한 사람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과 예수님께 속한 사람은 진리에 대한 반응이 다릅니다.
구한말 헐버트 선교사는 복음 전파는 물론이요, 한국 문화를 연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저서 <대한제국멸망사>에서, 한국인의 종교를 이해하기는 대단히 어렵다고 하면서 "한국인들은 사회적으로는 유교도이며, 철학적으로는 불교도이고, 고난을 당할 때는 영혼 숭배자 즉 미신적이 된다. 그러나 어느 한국인이 진정 무엇을 믿는지 알려면 그가 고난에 빠졌을 때에 어느 쪽으로 기우는지를 살펴보면 된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과연 예수님을 믿는 사람인지 드러납니다.
빌라도는 진리에 속한 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의 관심은 총독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을 보고도 진리를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은 정말 무서운 일입니다. 그가 마귀에게 사로잡힌 사람이라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고후 4: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시 49:20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빌라도는 진리이신 예수님을 못 박게 내어주면서까지 총독의 자리를 지키려 하였습니다.
그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빌라도는 불과 몇 년 후 로마 황제로부터 파면 당한 뒤, 갈리굴라 황제 때 자살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여러분은 지난 일주일 동안 무엇을 갈망하며 살았습니까?
이 질문을 골치 아픈 것을 넘기듯 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진정 구원받은 사람인지 빌라도 같은 사람인지를 묻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정말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지는 마음의 갈망이 바뀌었는지를 보면 스스로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당시 세계 최대의 도시인 로마와 고린도와 에베소를 다녔지만 그들의 삶을 부러워하거나 놀라지 않았습니다.
빌 3:7-9에서 오히려 그 모든 것을 다 배설물처럼 버렸다고 했습니다.
빌 3: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사도 바울 안에 갈망이 바뀌었다는 말입니다.
그는 세상 성공보다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 더 기뻤습니다.
여러분도 예수님을 믿고 마음의 갈망이 바뀌었습니까?
언제 그런 일이 여러분 안에 일어났습니까?
목사님 한 분이 ‘목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질문하였습니다. ‘목회보다 예수님을 더 주목하시라’고 대답해 드렸습니다.
목회자도, 마음의 갈망이 목회도 삶도 다르게 만듭니다.
원로목사님 한 분이 “은퇴하기 전, 나는 ‘목회, 목회’만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가장 마음 아픈 일입니다. 목회가 나의 우상이었습니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항상 목회만 생각하는 것이 왜 목사에게 우상입니까?
목회만 생각하느라 예수님을 무시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목회 때문에 교만하고 좌절하고, 목회 때문에 화나고 두렵고 염려하고 짜증내고 싸우고 미워한다면 목회를 왜 하는 것입니까?
예수님 안에 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성령의 은사에 마음이 꽂혀서 은사 중심의 목회를 하려는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 목사님에게 “은사보다 예수님이 더 좋으면 은사 사역해도 좋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많은 은사 사역자가 예수님보다 은사를 더 갈망하기 때문에 무너집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행복을 갈망합니다. 그것은 큰 문제 같아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배우자나 자녀들, 주위 사람들에게 항상 불만이고 원망하고 미워하고 절망하는 것입니다.
행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이미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 행복을 배우자와 부모님과 자녀들, 이웃에게 흘려보내는 것뿐입니다.
행복이 우리 삶의 목적이 아니라면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까?
거룩함입니다. 가정도 교회도 우리의 거룩함을 위하여 주신 곳입니다.
가정과 교회에서 우리의 믿음과 성품이 단련되는 것입니다.
행복이 아니라 거룩의 관점에서 보면 불평할 일도 원망할 사람도 없습니다.
그로 인하여 우리의 믿음이 더 견고해졌고 주님을 향한 사랑도 더 깊어졌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도 더 커진 것입니다.
행복을 바랐다면 원망할 일이 거룩을 바랐다면 감사할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과 동행하십니까?
그것이 안 된다면 마음에 무엇을 갈망하는지 살펴보기 바랍니다.
한 젊은 수도사가 나이 많은 원장에게 찾아가서 물었습니다. "제가 어디서 하나님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벌써 많은 시간 명상도 하고, 고행도 하고, 수도도 하고, 기도도 했지만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어디서 하나님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원장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은 네 안에 계시단다"라고 했습니다.
젊은 수도사가 또 물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왜 그분을 못 뵈옵는 것입니까?" 원장은 술 취한 사람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술 취한 사람이 왜 자기 집을 못 찾고 사람을 똑바로 알아보지 못하고 비틀거리는가? 술에 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말했습니다. "무엇이 너를 취하게 만드는지 알아내어라. 하나님을 보기 위해서는 취해있지 아니하여야 하느니라."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을 갈망하는 사람만 위기의 순간에 주님을 붙잡을 수 있고 주님만 따라 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빌라도 같이 되고 맙니다.
‘오직 주님을 갈망합니다!’ 일어나 기도합시다.
요한복음 강해 (136) - 빌라도 앞에 서신 그리스도 /요18:28-38/ 김형익 목사
2021-05-09 10:10:58
주님께서는 안나스의 법정에서 심문을 받으시고 본문 24절에 쓴대로 가야바에게서 심문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이 생략하고 있지만, 그 꼭두새벽 어쩌면 한 밤중이라고 말해야 할 시간에 가야바의 집에서 열린 산헤드린 공회에서 사형 선고를 받으셨습니다. 이 과정은 신사적이기는커녕, 피고에 대한 폭력이 난무한 자리였습니다.
대제사장의 하속이 예수님의 얼굴을 때란 것도 22절에 기록되어 있지만, 예수님은 가야바의 뜰에서도 얼굴에 침뱉음과 주먹과 손바닥으로 맞고 온갖 조롱을 받으셨습니다(마 26:67~68). 이렇게 한 후에 그들은 이미 얼굴이 상할 대로 상한 예수님을 이끌고 로마의 총독 빌라도의 관정으로 갔고 예수님께서는 빌라도의 법정에 서게 되시는 장면을 어느 복음서 보다 상세하게 요한복음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1. 예수님께서 빌라도에 의해 로마 법정에 서셔야 하는 이유(32)
성경은 왜 이런 이야기들을 이토록 세밀하게 기록하고 있을까요? 그리고 왜 예수님께서는 당시 유대인들의 정죄만이 아니라 로마 법정에까지 서셔야 했을까요? 두번째 질문부터 먼저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에는 적어도 분명한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A. 말씀하신대로 이방인에게 넘기어 십자가의 죽음을 죽으셔야 했음(마 20:18~19; 요 3:14; 12:32,33).
첫번째 이유는 예수님께서 앞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박게 하리니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마 20:18~19).”
주님은 너무나 정확하게 당신께서 죽으실 것에 대해서 예언을 하셨고 이제 모든 것이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이방인에게 넘기었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본문 32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어떠한 죽음이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로마 법정의 판결을 받고 죽으셔야만 주님은 돌로 쳐 죽이는 유대적 방식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여러 번에 걸쳐 하신 말씀을 기억해 보십시오. 니고데모에게 주님은 광야 시절에 장대에 높이 달린 놋뱀과 같이 들리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3:14).
그리고 바로 며칠 전에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요 12:32~33).” 12:33은 오늘 본문 32절과 똑 같은 말씀입니다. 바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 성경의 말씀대로 예수님께서 저주를 받으신다는 것을 분명히 하시는 것입니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신 21:23).”
바울 사도는 구약의 이 구절을 그대로 인용하여 예수님의 죽으심을 설명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얼마나 철저합니까? 주님께서는 치밀하게 말씀하신 대로 저주의 죽음을 죽으시기 위해서 십자가 형에 죄수를 죽이는 로마 법정에 서신 것입니다. 모든 것이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되는 일이며, 구약의 예표대로 되는 것임을 우리는 봅니다.
B. 단지 유대인만이 아니라 당대 최고 법정의 판결을 받으셔야 했음.
그러나 이것만이 주님께서 로마의 법정에 서신 이유가 아닙니다. 두 번째로 분명한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을 정죄하고 거절한 것이 단지 유대인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당시 세계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던 로마 제국의 법정, 말하자면 온 세상이 그리스도를 정죄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는 사실을 이렇게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어느 작은 한 민족 안에서 일부 몰지각한 유대인들 집단에 의해서 일어난 불의한 폭력 사고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법체계가 가장 발달되어 있었던 로마제국내의 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으신 죽음이었습니다. 온 세상이 그리스도를 거부한 것입니다.
2. 총독 본디오 빌라도(AD 26~36 유대의 6대 총독으로 재임)
그러니 지금 주도적으로 자기들의 뜻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한 이 모든 인물들은 결국 자신들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도 모른 채, 악하게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다는 것처럼 슬픈 일은 없습니다. 이 가운데 빌라도가 있습니다. 거의 2천년 가까이 기독교회가 사용해 온 표준 신앙고백서인 사도신경에 등장하는 이름입니다.
저는 종종 빌라도를 동정하는 사람들을 만나봤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서가 보여주는 빌라도의 모습은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을 풀어주려고 애를 쓰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성경이 이 인물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하지는 않습니다마는, 성경 외의 자료들, 가령 요세푸스와 같은 유대 역사가에 의해 전해지는 빌라도에 대한 기록은 어느 정도 그 사람의 인물됨을 알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우리가 이런 배경을 아는 것이 본문을 이해하는데 상당히 도움이 됩니다. 빌라도는 주후 26~36년까지 유대 총독을 지낸 사람입니다. 사실 유대의 총독 자리는 로마의 정치인들에게는 그다지 좋은 자리는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로마가 보기에 유대인들은 매우 다스리기 힘든 사람들이었고, 종교적으로도 까다로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웬만하면 빌라도의 전임자들은 유대인들의 종교적으로 예민한 부분을 건드리지 않고 존중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빌라도는 부임해 오는 날부터 황제 디베리우스의 얼굴이 새겨진 로마의 기장을 예루살렘에 거는 무모함을 보여주었습니다. 우상숭배라면 치를 떠는 유대인들의 이 거룩한 도성에 황제의 얼굴이 있는 기장을 내건 것은 유대인에 대한 모독으로 간주되었고, 유대인 지도자들은 가이사랴에 있는 총독의 관저에 가서 연좌 시위를 벌였습니다.
계속되는 이 시위를 해산시키기 위해서 빌라도는 군대를 동원했고 목을 쳐 죽이겠다고 위협을 하자, 유대인들은 그 군장들을 내릴 것이 아니라면 차라리 자기들의 목을 치라고 목을 다 내밀었습니다. 결국은 빌라도의 양보로 이 위기는 가라앉았습니다. 그러나 곧 이어서 빌라도는 예루살렘에 상수도를 건설하겠다고 하여 환영을 받았는데 문제는 그 비용을 유대인들이 성전세로 낸 고르반에서 충당하겠다고 함으로써 갈등을 만들었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에 대해서 언급합니다(눅 13:1).
아마 이 사건은 갈릴리 사람들이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때 살륙을 행한 잔인한 어떤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결국 이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들의 소요를 잔혹하게 진압한 사건 때문에 주후 36년 총독에서 파면되고 로마로 소환됨으로 역사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후에 프랑스 지방으로 귀양을 갔다고도 하고, 자살을 했다고도 하나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이 기록들에 의하면 그는 지혜롭지도 못하고 잔혹하고 유대인을 멸시하는 성품을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3. 새벽에 빌라도를 찾아온 경건한 행악자들(28~31)
이 사람 빌라도에게 대제사장들과 공회원들이 예수님을 끌고 온 시간은 새벽이었습니다. 성경은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 이미 말씀한 바 있습니다. “대저 그 발은 악으로 달려 가며 피를 흘리는데 빠름이니라(잠 1:16).” “그들은 악을 행하지 못하면 자지 못하며 사람을 넘어뜨리지 못하면 잠이 오지 아니하며(잠 4:16).”
이들은 바로 당대 최고의 경건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날 유월절 식사에 참여해야 했기 때문에 그들은 부정한 일을 할 수 없었는데, 여기에는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는 것도 포함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의식상의 정결을 지키기 위해서 빌라도의 관정에 들어가지는 않았다고 말합니다. 얼마나 모순입니까? 이들은 거짓 증인들을 세워 무죄한 그리스도를 죽이기로 결의함으로써 살인을 획책하는 행악자들이면서 종교 의식상의 정결을 유지하려고 부단히 애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찾아온 시간이 ‘새벽’이라고 했는데 많은 학자들은 이 시간이 적어도 오전 6시 이전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죽일 열심이 그들로 밤을 새게 한 것입니다. 사실 로마 총독의 관정은 가아사랴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의 명절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밀려 들어오기 때문에 총독은 일어날지도 모르는 소요를 대비하여 로마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에 체류하곤 하였습니다.
성경이 확실하게 말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밤중에 예수님을 잡으러 갈 때 로마군인들이 동원된 것으로 보아 천부장만이 아니라 빌라도 자신도 지금 유대인들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를 어렴풋이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빌라도는 이들에게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소하느냐?”고 묻습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가 아니라, 이 사람을 고소하는 죄목이 무엇이냐고 묻는 것입니다. 이는 로마 총독으로서 당연히 물어야 할 것이었습니다.
4. 예수님에게 씌워진 죄목(눅 23:2)
유대인들은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었더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이때 유대인들이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기소한 죄목은 세 가지입니다. 누가복음 23:2에서 그것을 봅니다.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이 죄목들은 자기들이 그 밤에 다루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빌라도에게 제시할 정치적 죄목들을 준비해 온 것입니다. 주님은 미혹을 받는 백성들에게 진리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며칠 전에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세금을 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눅 20:25).
또 주님의 메시아 주장은 이런 식으로 거두절미하고 해석할 것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원하는 것은 이 사람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당시 로마제국은 자기들의 식민지에 사형권 만은 부여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이 제기한 기소 내용 중 빌라도의 마음을 건드린 것은 세 번째 것이었습니다. 그가 왕이라면, 이것은 로마 정부에 위협이 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가 관정에 들어가 예수님을 불러 묻는 첫 마디 말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는 질문이었습니다.
5. 빌라도에게 선한 증거로 증거하시는 그리스도(33~37; 딤전 6:13)
이제 빌라도와 예수님의 대화가 시작됩니다. 형식은 총독 빌라도가 죄수 예수님을 심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상 이것은 심판주의 심문을 받는 죄인 빌라도의 모습을 암시합니다.
A.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여 네게 한 말이냐?”(34)
빌라도의 질문에 대해서 주님은 또 다른 질문으로 대답하셨습니다.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여 네게 한 말이냐?”
일차적으로 이 질문은 주님께서 로마 법정의 규칙을 알고 계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주님은 증거가 없는 들은 이야기를 가지고는 선고를 내릴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 질문이야말로 심판주 하나님 앞에서 우리 인간이 피해갈 수 없는 질문입니다. 빌라도는 대답해야 했습니다
. “그리스도가 왕이신가?” 그것은 여러분의 목사가 하는 말일 수 있고, 여러분의 부모나 배우자나 자식들이 하는 말일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그렇답디다”하는 말인가, 아니면 나의 고백인가 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저나 여러분,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가 만왕의 왕이다”라는 명제에 생소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여러분 자신의 참된 고백인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것을 알고 있는가? 진정한 나의 고백인가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 질문은 마지막 날 우리가 심판 보좌 앞에서 듣게 될 질문일지 모릅니다.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네게 한 말이냐?”
지금 여러분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교활한 정치인 빌라도는 예수님의 이 질문을 비껴갔습니다. 적어도 지금 이 시간은 자기가 재판장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것을 이용한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냉소적으로 반문합니다.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그는 자기가 유대인이 아니라는 사실로 이 질문을 비껴갈 수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질문은 단지 유대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님을 그는 모르고 있습니다.
B.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36)
이 질문을 받아서 주님은 친절하게 주님의 나라에 대해서 설명해 주셨습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36).”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통치와 권위가 이 세상을 포함하지 않는다거나 내 영토는 초월적인 저 세상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후에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 28:18).”
하늘의 권세만이 아니라 땅의 권세도 가지신 왕이 바로 지금 빌라도 앞에 서신 그리스도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즉, 주님은 빌라도에게 “내 나라는 힘으로, 무력으로 피와 전쟁 위에 세워지는 너의 나라와는 다르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빌라도는 다시 묻습니다.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이미 빌라도는 예수님이 로마에 위협적인 왕이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간파했습니다.
C. “나는 하늘에서 온 왕이다.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는다.”(37)
그런데 주님은 이제 직접적인 대답을 주십니다.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이제 오해의 소지가 없어졌기에 주님께서 왕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놀라운 설명을 덧붙이셨습니다.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주님은 단순히 태어나신 분이 아니라 암시적이기는 하지만, 하늘에서 이 세상에 오신 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왕으로서,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 요한복음의 서두에 예수님을 소개하던 말씀이 아닙니까?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1:10~11).” 창조주께서, 하늘과 땅의 통치자께서 자기가 창조하신 세상에 오셨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고 그를 영접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내내 요한복음을 살펴보면서 그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공식적으로 유대인의 대표기관인 산헤드린을 통해서, 그리고 세상의 대표로서 로마 법정을 통해서 창조주요, 통치자이신 주님은 거부를 당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끝으로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사실상 빌라도를 하나님의 나라로 초청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진리를 듣고 순종하라는 초청입니다. 주님께서 빌라도에게 하신 이 모든 말씀에 대해서 후에 사도 바울은 이렇게 썼습니다.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거로 증거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내가 너를 명하노니(딤전 6:13).”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 사형을 언도할 빌라도에게 끝까지 선한 증거로 증거하셨던 것입니다.
6. 빌라도의 반응: “진리가 무엇이냐?”(38)
슬프게도 빌라도는 이 영광스러운 왕의 초청을 냉소적으로 거부했습니다. “진리가 무엇이냐?” 이것은 그 대답을 구하는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진리를 찾을 희망을 포기한 회의주의자가 보일 수 있는 가장 냉소적인 반응입니다. 요즘 같은 포스트모던 시대에 가장 많이 찾아볼 수 있는 태도일 것입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을 거부하는 하나의 반응의 양태입니다. 존 맥아더의 말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없다면, 어떤 절대 진리도 없다. 절대 진리가 없다면 객관적인, 보편적인 또 규범적인 진리도 있을 수 없다. 진리는 다 주관적이고, 상대적이며, 실용적인 것들이 되고 만다. 그래서 우리 시대에 객관성은 주관성에 자리를 내주었고, 시대를 뛰어넘는 보편 원리는 그저 개인적이거나 문화적인 기호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말았다.” 이것이 1세기에 유대를 다스리던 한 사람의 로마 총독이 보여준 태도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그리스도를 거부했습니다.
7. 빌라도의 판단: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38)
그러나 놀라운 것이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죄가 없다는 사실은 알았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심문하면서 예수님의 기품과 위엄을 보았는지, 그가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가 심문을 마치고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한 말을 듣습니다.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했노라.” 빌라도가 예수님을 자기의 왕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이것은 그가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중립적인 판단이고 선언이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께서는 이 땅의 심판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죄 없으심을 역사 속의 공인으로서 인정하고 선언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이 장면을 지켜보는 우리를 더 슬프게 하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에게서 죄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는 중립적 입장을 취합니다. 그는 예수님의 선한 증거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그 진리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왕이라는 말씀을 듣고 그 왕 앞에 무릎을 꿇지 않았습니다.
8. 적용
A.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여러분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십니까? 주님께서 빌라도에게 물으셨던 그 물음을 여러분께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왕이라는 사실을 들어서 하는 말입니까, 아니면 진정으로 예수님이 여러분의 왕이십니까?
그것이 여러분의 참된 고백입니까? 이것이 모든 차이를 만들어냅니다. 우리가 일평생 살면서 고민하고 한 입장에 서지 않을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질문이 있다면 이것 말고 무엇이 있겠습니다. 그리스도가 여러분에게는 누구십니까? 들어서 아는 것, 머릿속 지식이 아니라 여러분 가슴이 그리고 삶이 말하는 고백은 무엇입니까?
여러분도 교회를 다니면서, 결국은 “진리가 뭐야?”하는 냉소적인 태도로 돌아서시겠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로마 군인의 책임자였던 백부장처럼,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하십니까? 절대자 앞에 선 빌라도는 간절한 것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예수를 심판하며 판단하고 있다고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심판하지도, 판단하지도 않습니다.
그날이 오면, 여러분은 그 전능하신 창조주요, 만왕의 왕이고 하늘과 땅의 심판주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오늘, 그분께 나아오십시오. 오늘이라는 시간이 주어져있을 때, 그분을 여러분의 왕으로 알게 해달라고 간절함을 가지고 나아가십시오. “지금 여러분에게 그리스도는 누구십니까?” 우리는 이 질문을 비껴갈 수 없습니다. 결국에는 이 질문이 여러분을 심판할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B.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을 생각하라.
제가 이 본문을 설교하면서 말하지 않고는 설교를 마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첫번째 질문, ‘왜 성경은 주님이 받으신 수난에 과한 이야기를 이토록 세밀히 기록하는가?’에 대한 대답이기도 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그의 구속사 설교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가 이 땅에서 직면한 것만큼 큰 도발을 겪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가 얼마나 심각하게 미움을 받았는지, 그가 그 악랄한 사람들에게 받은 모욕이 얼마나 큰지, 그들이 그리스도를 이같이 모욕할 때 얼마나 악의적이고 얼마나 멸시적이었는지 고려한다면, 또한 이 모욕이 얼마나 까닭없고 불합리한지,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얼마나 무시를 당했는지 그리고 그들의 손에 얼마나 사랑과 영예와 존대와는 정반대의 취급을 받았는지 감안한다면, 그리고 우리가 이런 일을 겪는다고 생각한다면, 그리스도가 사람들에게 받은 도발과 비교하면 어느 누구도 그 분량이 그 1천분의 1도 되지 못할 것이라고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욕을 먹든지 먹지 않든지, 그리스도는 그 모든 도발 아래서도 얼마나 온유했는지, 그의 영은 얼마나 태연하고 평온했는지 모르고, 불안과 흥분과는 또 얼마나 거리가 멀었는지 모릅니다...따라서 그들이 가장 악랄한 도발 행위를 감행했을 때, 곧 십자가에 그리스도를 못 박았을 때 그는 그들의 용서를 위해 열렬하게 그리고 효과적으로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사하여 주소서””
천지를 창조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속을 완전히 이루시기 위해서 우리가 죄로 말미암아 당할 모든 비참함을 몸소 다 겪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를 생각함으로 우리가 감당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양다리 걸친 사람 /요18:28-40/ 조상호목사
2023-07-23 14:04:18
어느 글을 보니 교회 안에는 크게 네 종류의 크리스챤이 있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바울 형(Paul Type)’ 입니다. 바울은 처음에 기독교를 박해하며 믿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가두며 핍박했습니다. 그러다가 믿는 자들을 체포하려고 다마스커스로 가는 도중에 예수님을 만나 후 인생의 방향이 180도 변한 인물입니다. 박해자에서 하루아침에 믿음의 사람이 되었고 남은 생애를 변함없이 주님을 위해 헌신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주님을 만나서 인생의 방향을 완전히 급선회한 바울처럼, 주님을 믿고 딴 사람이 된 후 이웃으로부터, 친구들로부터,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사람이 완전히 변했다>는 말을 들을 뿐 아니라, 주님 만나는 그날 까지 바울처럼 치선을 다하여 굴곡 없이 주님을 섬기는 성도가 있습니다. 둘째로 ‘베드로 형(Peter Type)’ 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로 열정적이고 매사에 적극적입니다. 호언장담을 하며 다른 사람들을 이끄는 리더쉽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께서 로마군병에게 잡혀 가야바에게 심문을 받을 때, 세 번씩이나 부인하며 주님을 배신했다가 곧 바로 회개하여 마음을 돌이키는 등, 부침이 심한 사람입니다. 이처럼 좋을 때는 태산도 옮길 것 같은 태도로 호언장담을 하다가도, 겨우 한 달도 못되어 꼬리를 내리며 식어지는 사람입니다.
그러다가 또 어떤 부흥회나 수련회 같은 때에 다시 불이 붙었다가 시간이 흐르면 또 식어져 믿음이 완전히 바닥에 떨어지기를 반복하는 성도가 바로 베드로 형입니다. 셋째로 ‘롯의 아내 형(Lot's Wife Type)’ 입니다. 그녀는 소돔과 고모라성이 멸망할 때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천사의 말을 어겼다가 소금 기둥으로 변한 성경속의 인물입니다. 그녀는 주님을 알고 주님을 믿고 주님의 말씀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즐겨왔던 세속의 달콤함을 못 잊어 뒤돌아보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소돔과 고모라 성을 뒤돌아보았던 여인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주님을 믿고 주님의 말씀을 들으며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롯의 아내처럼 세상의 즐거움에 미련이 남아 자꾸 세상을 뒤돌아보는 사람이 바로 이 유형에 속합니다. 넷째로 ‘빌라도 형(Pilate Type)’ 입니다. 그는 로마 총독의 신분으로 예수님을 재판 할 때, 세상과 주님 사이에서 고민하며 갈등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그른지를 결정하지 못한 채 어정쩡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그는 세상과 주님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던 양다리 걸친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이 네 가지 부류 중에 어느 부류에 속하십니까? 독야청청 주님을 위해 살았던 바울 타입 입니까? 아니면 믿음이 식었다가 다시 불붙었다가를 반복하는 베드로 타입 입니까? 아니면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세상에 미련이 남아 자꾸 세상을 뒤돌아보는 롯의 아내 타입 입니까? 아니면 세상과 주님 사이에서 교묘하게 양다리 걸치고 있는 빌라도 타입 입니까? 여러분들은 어떤 타입에 속합니까? 저는 오늘 양다린 걸친 사람, 빌라도에 대해서 살펴보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그는 누구인가?
오늘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빌라도 총독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그는 본래 로마 상류층 출신이 아니라 평범한 중류층 출신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로마 황실 집안의 여인인 <클라우디아 프로큘라>라고 하는 여인과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여인은 우리에게는 디베료라고 알려져 있는 티베리우스 황제의 세 번째 아내인 클라우디아의 딸이며,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손녀입니다. 중류층 출신인 그가 어떻게 해서 황실 집안의 딸과 결혼을 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중류층 출신인 그가 황실 집안의 여인과 결혼함으로써 단번에 상류층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후 26년에 그는 유대의 총독으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이 시기는 세례 요한이 막 메시야이신 예수님의 출현을 예언하면서 예수님께서 활동을 시작하려는 시점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상황을 기록한 여러 가지 역사서적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는 정치를 잘 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가 유대 총독으로 취임한 초기에 로마 황제숭배를 강요하다가, 우상숭배를 그 어떤 것보다 금기시하는 유대인들과 아주 심각한 갈등 가운데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또 그가 다스리고 있는 지중해 해안도시인 가이사랴에 소위 수문(水門) 건축을 하기 위해 과도한 세금을 징수하자, 유대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켜 큰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빌라도 총독이 정치를 잘 하지 못하자, 그에 대한 나쁜 소식이 로마 중앙정부에 끊임없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졌습니다. 그에게는 더 이상의 기회가 없었습니다.
만약 한번 만 더 유대 땅에 문제가 발생하면 유대 총독인 그는 더 이상 로마 황제의 신임을 받지 못할 만큼, 그는 절박한 상태에 처해 있었습니다. 이 때가 그가 유대의 총독으로 파견된 지 4년째 되던 시기입니다. 그가 이렇게 정치적으로 어려운 상태에 유대인들에게 있어 가장 큰 명절인 유월절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루살렘에서 큰 소동이 일어날 것 같다는 보고를 받게 되어 평상시 머무르고 있던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겨와서 예루살렘에 있는 총독 관저에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시기에 유대인들이 그에게 찾아와서 나사렛 예수를 재판을 해서 사형시켜 달라는 것입니다.
웃기는 재판
그런데 이 재판이라는 것이 웃기는 재판입니다. 원래 재판을 언제 합니까? 날이 환한 낮에 진행합니다. 그런데 28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 ” 남들 다 집에서 두 다리 뻗고 자고 있는데 웃기지도 않게 새벽에 찾아와서 재판을 해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중요한 사건에 대해서 밤에 심문하는 것을 금지한 로마법에 어긋나는 재판이었습니다. 또 재판이란 고소한 원고와 고소당한 피고가 각각 재판관 앞에 함께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본문 28절을 보면 고소인인 유대인들은 이방의 재판정에 들어가면 자신들의 몸이 더럽혀진다고 해서 재판정에 들어가지 않고 밖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고소한 유대인들은 재판정 밖에 있고, 고소당한 예수님은 재판정 안에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재판장인 빌라도는 고소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 어떻게 합니까? 29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빌라도가 밖으로 저희에게 나가서 말하되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소하느냐 ” 그는 고소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재판정 밖으로 나가서 질문을 합니다. 그리고 고소당한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그가 어떻게 합니까? 33절을 보겠습니다.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그는 고소한 유대인들의 이야기를 들은 후, 다시 재판정안으로 들어갔습니다. 38절도 보시기 바랍니다.
“빌라도가 가로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 지금 빌라도가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나가서.. 다시 들어와서.. 다시 나가서..” 그의 들락달락, 왔다갔다, 갈팡질팡하고 있는 그의 이와 같은 행동은 19장에서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19장 4절을 보면, “빌라도가 다시 밖에 나가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다 하더라.”
또 9절을 보면 “다시 관정에 들어가서 예수께 말하되 너는 어디로서냐 하되 예수께서 대답하여 주지 아니하시는지라.” 또 13절을 보면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예수를 끌고 나와서 박석 (히브리 말로 가바다) 이란 곳에서 재판석에 앉았더라.”라고 언급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는 계속해서 밖에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고, 다시 나갔다가 다시 나오고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결단하지 못하는 모습이 빌라도의 모습이요, 이쪽으로 갔다가 저쪽으로 갔다가를 반복하는 양다리 걸친 모습이 바로 빌라도의 모습입니다.
양다리 걸친 자
당시의 정황에 의하면 그는 예수님이 죄가 없으시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마태복음 27장 18절을 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저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러라.” 빌라도는 왜, 무엇 때문에 예수님이 지금 자기 앞에 붙잡혀 왔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서기관들의 시기 때문에 예수라는 사람이 곤경과 박해를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가 알고 있었습니다.
비록 자기 앞에 죄인으로 끌려왔지만, 예수님은 죄가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그는 예수님이 자기에게 끌려왔을 때, 유대인의 종교문제로 쉽게 처리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33절을 보겠습니다.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다른 복음서와 본문을 정리해서 보면 예수님께서는 대제사장 가야바의 뜰에서 했던 것과 같이 아주 간결하고 분명하게 대답하십니다.
“네가 말하였도다. 네가 말한 그대로다.” 빌라도가 또 묻습니다. “저희가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거하는지 듣지 못하느냐?(마27:13)”예수님은 거짓증거에 침묵하셨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재판하면서 예수님에게 죄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는 예수님이 두려워하지 않고 침착하게 서 있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아, 오히려 심히 기이히 여기게 되었습니다(마27:14). 그는 예수님에게서 보통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느낀 것입니다. 또한 마태복음 27장 19절을 보면 갑자기 자기 집으로부터 그에게 메시지가 왔습니다. 자기 아내가 그에게 재판 직전에 보내 준 메시지였습니다.
“총독이 재판 자리에 앉았을 때에 그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을 인하여 애를 많이 썼나이다 하더라.” 아마도 새벽녘에 밖이 시끄러워서 빌라도가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나간 후, 그의 아내는 계속해서 잠을 잤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이상한 꿈을 꾸었습니다. 무슨 꿈인지 모르지만 꿈자리가 매우 시끄러워 그녀를 괴롭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재판하고 있는 남편에게 편지를 보낸 것 있습니다. “내가 꿈에 무척 고생을 했어요. 저 사람은 의로운 사람이니 상관하지 말고 당신은 손을 떼세요.” 아내의 꿈을 통해서 전해진 메세지 역시, 예수는 죄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빌라도 그는 예수님이 죄가 없으시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38절을 보면 더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빌라도가 가로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 그는 예수님에게서 그 어떠한 죄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죄!>라고 선언하면 되는데, 그는 <무죄!>라는 단 한 마디조차 하지 못합니다. 그냥 어정쩡하게 외줄 타기 하듯 양다리 걸치고 고민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양다리 걸치는 사람은 힘이 든다는 것입니다. 고통스럽다는 것입니다.
양다리 걸치면 고통이 따른다
제 초등학교 친구 중에 이모라는 친구가 있습니다. 이 친구를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다가 대학교 1학년 때 실로 8년 만에 만났습니다. 알고 보니 저와 같은 대학을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는 학교에서 유명한 춤꾼이었습니다. 당시에 얼마나 춤을 잘 추는지 이 친구가 떴다하면 춤을 추던 사람들이 다 춤을 멈추고 그가 추는 춤을 보고 있었다고 할 정도로 소문난 춤꾼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여학생들에게 꽤 인기가 있었습니다. 많은 친구들의 부러움을 살 정도로 많은 여자들이 그를 따랐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친구가 우거지상을 하며 찾아왔습니다.
알고 보니 두 여자 사이에서 양다리 걸치고 있었는데 그것이 고민이 되어 잠도 오지 않고, 공부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친구는 1학년 때 4.2만점에서 평균 점수 1.8인가를 받아서 낙제하여 1학년을 또 다시 다니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친구를 보면서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두 여자를 한꺼번에 사랑하는 남자치고 행복한 사람은 없다” 이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이란 아무리 두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고 싶어도 한꺼번에 둘 다 사랑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진실한 사랑은 한 쪽에만 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쪽을 다 가슴에 품고 왔다 갔다 하면 마음에 갈등과 심적 고통만이 뒤따릅니다. 두 여자 사이에 양다리 걸친 남자는 결코 행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세상을 앞에 두고 있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과 하나님을 함께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행복하지 않습니다.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면 세상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세상과 당신을 겸하여 섬기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싫어하십니다. 구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우상 사이에서 양다리 걸치기를 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호세아 10장 2절에서 “저희가 두 마음을 품었으니 이제 죄를 받을 것이라. 하나님이 그 제단을 쳐서 깨치시며 그 주상을 헐으시리라.” 우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죄 값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도 소중히 투자하고 아끼면서 세워놓은 모든 것이 다 허물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두 마음을 품고 하나님과 세상을 겸하여 양다리 걸치기를 하는 사람은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양다리 걸치는 사람의 말로는 비참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줄타기 하듯이 양 다리 걸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고정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향한 한 마음만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내 마음을 채울 때는 항상 행복합니다. 그러나 세상에 마음을 주기 시작하면 갈등과 고통밖에 남는 것이 없습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성경말씀을 읽어도 그 마음에 평안이 없습니다. 마음이 나뉘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본문에 등장하는 빌라도는 고통스러운 양다리 걸치기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는 최후로 자기가 판결하지 않고 군중들로 하여금 판결을 하도록 유도하기 위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39절)” 그는 책임을 회피하기 위하여 최후의 결정권을 군중들에게 넘겨줍니다. 그러자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의 사주를 받은 군중들은 “바라바라. 바라바를 놓아주소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라고 소리 지르기 시작합니다.
유대인들은 진짜 강도인 바라바를 놓아주는 대신, 죄가 없으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주장합니다. 이 때 빌라도는 어떻게 합니까? 마태복음 27장 24절에 의하면 그는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고 하며, 결국은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님을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넘겨주었습니다. 그 다음 그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는 저주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저주받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저주 받는 이름
우리가 매 주일 주일예배에서, 혹은 새벽기도회나 각종 예배를 드릴 때, 신앙고백을 하는데, 그 때마다 어떻게 합니까?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고 고백합니다. 예배 때마다 빌라도의 이름은 저주받고 있습니다. 그것도 하루 이틀도 아니고 2,000년 동안이나 계속해서 그의 이름은 저주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 두 사람도 아니고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수십억의 기독교인들로부터 예배 때마다 저주받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이 축복받는 이름이 되어도 시원치 않은데, 저주를 받는 이름이 된 것입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런데 양다리 걸친 빌라도의 행동을 보면서 놓쳐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그의 모습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는 한 발은 주님께, 다른 한 발은 세상에 들여놓은 박쥐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과학시간은 아니지만, 한 가지 질문하겠습니다. 박쥐가 날짐승입니까? 아니면 들짐승입니까? 날아다닌다는 사실만 놓고 보면 분명히 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박쥐는 새가 아니고 정확하게 분류하면 포유동물, 즉 들짐승입니다. 박쥐의 이러한 특성 때문에 좋지 않은 비유에 곧잘 이용됩니다.
그래서 우화에 박쥐 이야기가 있잖습니까? 다 아실 것입니다. 새가 유리할 것 같으면 자기도 새라고 했다가, 다시 쥐가 유리할 것 같으면 자기는 쥐라고 하던 박쥐가, 결국은 새와 쥐 양편으로부터 다 버림받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필요에 따라 이편에 붙었다 저편에 붙었다 하며 양다리 걸친 사람을 <기회주의자> 혹은 <박쥐같은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양다리 걸친 사람의 말로는 비참합니다. 박쥐같은 사람은 양쪽으로부터 다 배척을 당합니다.
사무엘하 15장을 보면 박쥐같이 양다리 걸치기를 하는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아히도벨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원래 다윗 왕의 측근 모사로서, 요즘말로 말하면 대통령의 정치분야 고문과 같은 직책에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압살롬이라는 불효자식이 아버지 다윗 왕에 대해 반역을 일으키자, 아히도벨은 다윗을 배반하고 하루아침에 압살롬에게로 가버렸습니다(삼하16:15).
그리고 아들이 아버지의 후궁과 동침해 왕위계승이 완료되었음을 전 국민 앞에 과시하도록 조언을 하였습니다. 당시 고대 근동의 풍속에 의하면 전왕의 후궁들을 취하는 것이 왕권의 완전계승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기회주의자 아히도벨은 (레20:11)에서 “누구든지 그 계모와 동침하는 자는 그 아비의 하체를 범하였은즉 둘 다 반드시 죽일지니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는 말씀을 알면서도, 압살롬을 부추겨 아버지 다윗 왕의 후궁들을 취하게 하였습니다.
더 나아가서 아히도벨은 아들에게 쫓겨 가는 다윗을 추격해 압살롬으로 하여금 아비를 죽이도록 까지 진언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아히도벨은 명석한 두뇌와 재빠른 상황분석력으로 충고를 했지만, 압살롬에게도 인정을 받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그는 다윗을 배반했기 때문에 다윗에게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압살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이 되자, 목매어 자살해 버리고 말았습니다(삼하17:23). 이와 같이 기회주의자는 양쪽으로부터 다 배척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줄타기 하는 인생은 저주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막으라고 유대인들에게 내어주고 나서, 자신은 아무런 죄가 없다고 책임이 없다고 손을 씻었지만, 그의 이름은 역사 속에 씻을 수 없는 저주받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만약 여러분들이 빌라도의 자리에 섰다면 어떤 결정을 내리시겠습니까? 구약의 여호수아서 24장 15절에서 여호수아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늘 선택하라!
그는 그와 함께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언가 한 가지를 오늘 선택하라!”고 요구합니다. 하나님을 위해 살지 않으려거든 차라리 하나님에게 대적하든지, 아니면 하나님을 위해 살고자 한다면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버리고 하나님만 섬기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또 엘리야 선지자도 열왕기상 18장 21절에서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고 도전합니다. 그 역시 하나님이든지 바알이든지, 무언가 선택하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또 주님은 계시록 3장 15절에서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중간은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과 세상 사이에서 줄타기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정쩡하게 미지근 상태로 있으면 토해내시겠다고 하십니다. 여러분! 만약 여러분들이 빌라도의 자리에 섰다면 어떤 결정을 내리시겠습니까? 예수님입니까? 아니면 세상입니까?
하나님입니까? 아니면 썩어질 우상입니까? 여호수아는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24:15하)”고 하며,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지 않고 분명하고 확실하게 하나님만 섬길 것을 결단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과 세상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양쪽에서 재미를 보려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명심하십시오.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다 결국 한 마리도 못 잡게 됩니다. 여러분! 오늘 이 아침에 귀중한 선택을 하시기 바랍니다. 헛된 것을 따라가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고 영원한 것을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중국사람 중에 임어당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버드대학에서 40년 동안 강의를 했던 석학 중에 석학입니다. 대만의 양명산 밑에 임어당의 무덤과 그가 살던 집이 있다고 합니다. 그 집에 가보면 많은 문집들이 있는데, 어느 문집 중에 이런 글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 없이 보낸 40년은 나에게 있어서 완전히 고아와도 같은 삶이었다.” 그는 예수 없이 살았던 인생을 고아 같은 인생이었다고 합니다. 자신이 공부를 많이 하고 많은 재물들을 소유했지만 여전히 그의 인생은 여전히 고아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난 다음,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로서 평안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모습인 줄로 믿습니다. 부모 있는 아이와 부모 없는 고아가 언제 차이가 나는 줄 아십니까? 같이 놀 때는 모릅니다. 똑같습니다. 그런데 저녁때가 되면 구별됩니다. 해가 지면 부모가 있는 자녀들은 콧노래 부르며 서둘러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고아는 돌아갈 곳이 없습니다. 반겨줄 부모님이 없습니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구분이 될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죽을 때 보면 압니다. 믿지 않는 자는 돌아갈 곳이 없기 때문에 죽을 때 보면 불안과 괴로움 가운데 부들부들 떱니다.
그러나 믿는 자는 평안 가운데 아버지께로 돌아갑니다. 여러분들은 고아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자녀입니까? 아직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치 않은 채, 살아가고 있는 분들은 오늘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의지함으로 고아가 아닌,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축복된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아직까지 세상과 주님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빌라도와 같은 삶을 살고 있다면 여호수아처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고 믿음으로 결단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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