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는 끔찍한 실패자였다 /요18:15-27/ 유기성목사
2023-05-12 11:12:25
예수님께서 심문을 당하실 때, 정말 기가 막힌 일이 있었습니다. 대제사장의 종 하나가 예수님의 대답이 불손하다고 뺨을 때린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기가 막힌 일이 일어났습니다. 사랑하는 수제자 베드로가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것입니다. 마지막에는 주님을 저주하기까지 했습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에게 이보다 더 충격적인 일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가장 충격을 받았고 고통스러웠던 사람은 베드로 자신이었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얼마나 좌절했겠습니까? 차라리 죽고 싶었을 것입니다.
저는 이 부분을 묵상하면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느꼈습니다,
베드로가 누구입니까? 자타가 공인하는 예수님의 수제자였습니다,
그는 맨 처음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 것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을 한 사람입니다,
그는 가장 놀라운 기적들의 목격자였고, 그 자신이 물 위를 걸었던 사람입니다.
그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생각하기도 싫었습니다.
제가 이 본문으로 처음 설교하였을 때, 너무나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도대체 무슨 설교를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베드로의 잘못을 시시콜콜 지적할 것입니까? 베드로가 그렇게 된 이유를 밝히는 것입니까?
그런데 기도 중에 갑자기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에게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오 그렇습니다!” 마음에 빛이 비추이는 것 같았습니다.
베드로는 끔찍한 실패자였지만, 그는 결국 위대한 사도가 됩니다.
‘주여 그렇습니다.’ 마치 내 일인 것처럼 기뻤습니다.
그때가 제가 가족과 함께 어디를 가면서 운전 중이었는데 아내와 딸들에게 소리쳤습니다. “‘끝이 아니었다!’ 그렇게 메모해 줘!”
눅 22:61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째 부인하였을 때, 예수님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셨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베드로와 예수님의 눈이 마주친 것입니다.
그 순간 베드로는 바깥으로 나가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베드로를 돌아보신 예수님은 눈으로 무슨 말씀을 하셨을까요?
“야, 베드로, 네가 그럴 수 있어?!” 책망과 분노의 눈이었을까요?
저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확신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이미 베드로가 부인할 것이라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눅 22: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베드로의 본래 이름은 시몬인데, 예수님께서 반석이라는 의미의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할 사람에게 베드로라니 마귀가 배꼽을 잡고 웃을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왜 반석이라는 이름을 주셨을까요? 베드로가 끔찍한 실패를 하겠지만 반드시 다시 일어나 교회의 반석이 될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당신을 부인했을 때, 예수님의 마음은 분노가 아니라, 베드로가 죄책감에 사로잡혀 스스로 무너질 것을 더 걱정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얼마나 의협심이 강하며 주님을 사랑했는지 아셨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입으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다는 사실 때문에 베드로가 영원히 예수님을 떠나 버리거나 가룟 유다처럼 자살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눈으로 베드로에게 “베드로야 괜찮다. 내가 이미 말하지 않았느냐?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해야 돼”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 눈을 쳐다보았기에 베드로는 밖에 나가 통곡하였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던 기록은 초대교회 교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이었으면서 동시에 한없는 격려와 확신을 주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나도 베드로처럼 변화시킬 수 있다!’
‘주님은 저 사람도 베드로처럼 변화시킬 것이다!’
이것은 너무나 중요한 믿음입니다.
‘나는 왜 이래’ ‘저 사람은 안 돼’ 하는 것이 다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저주까지 한 베드로에게 왜 이렇게 자비로울 수 있으셨을까요?
그의 변화를 내다 보셨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변화를 믿으니 실패자 베드로를 끝까지 품어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도란 이름을 주셨습니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이며 마귀가 배꼽을 잡고 웃을 일입니까?
우리도 예수님을 부인한 순간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꼭 말로 부인해야 부인한 것입니까?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처럼,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 것처럼 말하고 행동한 것이 다 예수님을 부인한 것입니다.
예수동행일기를 쓰기 시작했을 때, 예수님을 생각하지도 않고 살고 있었음을 깨닫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미워하는 것보다 더 심한 것이 무시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 중에 가장 무시 받으시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아무리 믿음의 실패를 하여도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요 6:39 ...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낙심하지 말아라, 너는 성도다! 내가 너를 반드시 성도가 되도록 할 것이다.”
이 말은 예수님을 부인해도 좋다는 말이 아닙니다.
어떤 실패가 있었어도 낙심하지 말고 예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신앙의 실패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은 쓰실 리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베드로를 보시기 바랍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자였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하지 말아야 할 사람이 딱 한 사람 있다면 베드로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베드로는 실패자로 생을 마치지 않고 위대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베드로도 변화되었다면 우리도 변화될 것입니다.
저는 저 자신에 대한 좌절감 때문에 무너질 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은밀한 죄, 도무지 조절이 안 되는 감정, 분노, 욕망, 천성적인 게으름,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생각, 제 속에 선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때 붙잡는 말씀이 있습니다,
요 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태국에서 열린 아시아 2022 선교대회 때 말씀을 전하였더니, 어떤 목사님이 “제 주위에는 믿고 맡길 사람이 없습니다. 이런 경우 어떻게 제자 삼는 사역을 할 수 있습니까?”라고 질문하였습니다.
저는 그분께 “베드로는 대 실패자였습니다. 그러나 위대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주님이 하셨습니다. 그러니 사람을 보지 말고 그 사람 안에 계시는 주님을 바라보십시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제자로 부름 받을 때 이미 자신은 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눅 5:8)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10)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베드로가 된 것은 주님이 하신 일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믿을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다 사도가 되지 않았습니까?
하디 선교사가 보기에 한국 사람들 중 예수님을 제대로 믿을 사람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회개 부흥을 통하여 한국에 대 부흥이 임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가만히 있어도 예수님께서 우리를 변화시켜 주신다는 말은 아닙니다.
실패자라고 누구나 쓰신다는 말도 아닙니다.
우리가 성령의 사람이 되면 그리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실패자였던 제자들에게 ‘성령을 기다리라’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마가 다락방에 모였지만, 어떻게 열흘을 기다릴 수 있었겠습니까? 누군가 끊임없이 격려하면서 마음을 잡아 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누가 그렇게 하였을까요? 베드로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였던 끔찍한 실패자였기에 베드로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성령께 모든 것을 걸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성령받기까지 열흘이 문제가 아니라 열 달도 기다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끔찍한 실패가 베드로로 하여금 오직 성령만 갈망하게 하였고 하나님의 때까지 기다리게 하였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기다리게 하였습니다.
실패를 겪으면서 마음이 무너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이것입니다.
오직 예수님만 사모하며 성령의 역사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살면 시험될 일도 두려울 일도 좌절도 없을 것입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목사님이셨고, 기독교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템플턴상을 받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템플턴상을 받는 자리에서 자신이 일제시대 신사참배를 하였음을 고백했습니다.
한국 교회 성도들에게 있어서 신사참배를 했느냐 안 했느냐는 것은 그가 참 신앙인이냐 아니냐를 구별하는 기준으로 여길 정도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신사참배 했었음을 고백하는 것은 모든 명예와 지위를 다 잃어버릴 수도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그런 한경직 목사님을 한국 교회 목사들의 표상으로 만드셨을까요? 실패자를 쓰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한경직 목사님을 기억하기를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이라 합니다. 아마 한경직 목사님은 자신이 신사참배 했던 죄인이요 실패자인데, 주님의 은혜로 쓰임 받는다는 것을 평생 명심하셨던 것 같습니다.
30대 젊은 목사님께서 은밀한 죄와 싸우며 승리하였던 일을 책으로 내었습니다. 장산하 목사의 [죄에 좌절한 이 시대 청년들에게]라는 책입니다.
이 책은 저자 자신이 은밀한 죄와의 싸움을 싸우면서 실패와 좌절을 겪다가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복음을 깨닫고 죄에서 승리한 보고서입니다.
은밀한 죄로 괴로워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은밀한 죄에서 벗어나려면 오직 하나 주님을 바라보는 눈이 뜨여야 합니다.
그것을 청년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너무나 탁월하게 정리하였습니다.
또한 실제 죄에서 승리하도록 자상하게 안내하고 있습니다.
이런 주제로 쓴 책으로서는 너무 일찍 책을 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나고 보니 삶은 이런 저런 생각을 할 만큼 여유롭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담대한 이 고백이 장산하 목사님의 앞으로의 삶을 지켜줄 것이라 믿어졌습니다.
죄와의 싸움에서 승리하기 원하는 이들은 꼭 이 책을 읽어 보기 바랍니다.
죄로 무너졌던 청년을 주님이 어떻게 놀랍게 쓰시는지를 보게 될 것입니다.
저는 평범하다 못해 부끄러운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으라, 주님을 바라보라, 하는 말씀에 목숨을 걸은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제게 아무런 희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의 실패가 오히려 제겐 유익한 것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제 안에 거하시지 않다면 저는 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제 안에서 역사하시면 어떤 자리에도 담대합니다.
주님을 바라보게 되었다면 그것이 아무리 끔찍한 실패였어도 은혜입니다.
아시아 2022 대회 때, 아시아의 교회 지도자 한 분을 만났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20년 전 한국 교회 목사님들은 너무나 자신만만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너무나 겸손해진 모습입니다.”
저는 이 말이 감사했습니다. 그러면 됩니다.
한국 교회의 실패 때문에 주님은 더 쓰실 것입니다.
베드로가 증인입니다.
여러분, 좌절이 있습니까? 사람에게 실망하고 자신에게 좌절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이 시간, 나의 실패를 주님께 드립니다.
실패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위대한 사명자로 살게 하소서! 기도하겠습니다.
찬양: 약할 때 강함 되시네
왜 “나는 아니라” 고 했을까? /요18:15-18, 25-27
2023-04-07 18:18:52
매년 이맘때만 되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다. 베드로는 전 세계의 기독교인들이 자기 얘기를 할 때마다 귀가 간지러울 것이요, 게다가 이맘때 얘기하는 것은 대부분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신한 사건일 테니 아마 쥐구멍이라도 찾아서 숨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우리 또한 살면서 “그때 내가 왜 그랬을까?” 라는 후회를 할 때가 있다. 좀 더 의연하게 대처했으면 좋았을 것을... 또한 나만 살기 위함이 아니라 차라리 나는 죽더라도 좀 더 큰 뜻을 위해 희생하는 모습을 보였으면 좋았을 것을... 이라며 뒤늦게 후회를 하기도 한다.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 는 광고 문구도 있지만 사실 선택의 결단은 어느 한순간에 하는 것이 아니요, 삶의 축적된 경험과 본능적 판단이 함께 작용한 결과라 말할 수 있다. 즉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의 결단이 단순히 그때의 상황과 분위기 때문이 아니요,
평소에 예수님에 대한 믿음의 확신을 갖지 못한 결과이며, 특히 베드로가 생각했던 방향과 전혀 다른 곳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에 대한 위기의식의 결과라 말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선택과 판단은 오랜 시간 잠재의식 속에 축적된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러기에 매 순간 영적으로 훈련하고 무장하지 않는 한 우리는 언제나 넘어질 수밖에 없고, 그릇된 판단을 할 수밖에 없으며, 특히 고난과 위험 앞에서는 자기를 지키려는 본능이 강하게 작용하기에 자기 믿음을 끝까지 붙잡는 것이 쉽지 않을 수 있다.
지난 3년 동안 코로나를 통해 우리의 모습을 확인하지 않았는가? 예배를 드리는 것보다 생명을 지키는 것이 우선이었고, 교회를 돌보는 것보다 가정과 식구들의 건강을 먼저 챙기는 것이 우선이지 않았는가? 그리고 지금도 코로나를 핑계로 교회와 신앙을 버리고 간 사람들이 많지 않은가?
한편 군대의 천부장과 그의 군사들이 예수님을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해서 당시 정치적인 힘을 발휘하고 있던 안나스(대제사장 가야바의 장인)에게로 끌고 갔다. 그런데 모두가 대제사장의 집 뜰 안으로 들어갔을 때 베드로는 문 밖에 서 있었다(16절)는 것이다.
사실 베드로는 평소에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곁에 서 있었던 제자가 아니었는가? 그런데 지금은 곁이 아니요, 멀리도 아니며, 아예 문밖에 서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신앙은 예수님과의 거리와 비례한다” 고 말할 수 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잘 나갈 때는 늘 예수님 곁을 지키면서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았고, 권세를 누렸으며, 정치적으로 차기 지도자감이라는 인정을 받으면서 좋아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고난과 위기를 맞이하니 가까이는커녕 아예 문밖에 서서 예수를 모르는 사람처럼 딴청을 부리고 있었으니 이를 어찌하랴?
우리 또한 코로나가 있기 전에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눈물로 고백하고, 내가 지금까지 지내온 것은 주의 은혜라며 눈물로 감사하고, 그리스도의 핏값으로 세운 교회를 지키겠다며 눈물로 다짐했으면서 막상 코로나 앞에서는 나 몰라라 하며 신앙과 교회를 등지고 세상을 피난처로 삼아 몸을 피하지 않았는가?
분명한 것은 고난과 위기 속에서도 말씀을 놓치지 않고, 교회를 떠나지 않으며, 자기 자리를 끝까지 지키는 성도들이 믿음이 있는 성도다. 예전 초기 기독교인들은 그 어떤 고난의 상황 속에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에 대한 믿음과 교회를 지켰다. 결국 저들의 순교적 신앙이 있었기에 2.000년이 넘도록 지금까지 신앙의 전통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어떤 이들은 코로나 이후에 교회가 완전히 무너질 것이라 말했지만 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교회가 흔들림이 없이 굳건하게 서 있음은 고난 속에서도 믿음과 교회를 지키려 했던 우리 성도들의 헌신적인 신앙 때문이라 생각하며 담임목사로서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한편 유월절은 양력으로 3. 4월 경이요, 저들이 예수를 안나스에게 끌고 간 시간은 저녁때였기에 제법 추운 상황이었다. 성지순례를 해 보면 이스라엘은 낮에는 엄청 덥고 밤에는 매우 춥다는 것을 알게 된다. 특히 대적들이 “예수의 얼굴에 침을 뱉고, 주먹으로 치며, 손바닥으로 때렸기에 (마26:67)” 예수님은 육체적으로 많이 지쳐 있는 상황이었고, 이미 겟세마네 동산에서 붙잡히실 때부터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마26:56)” 였기에 심적으로도 허한 상태였다. 한마디로 말해 예수님의 몸과 마음은 많이 추운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베드로는 “종과 아랫사람들이 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 (18절)” 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예수님은 추워하셨는데 베드로는 불을 쬐었고, 예수님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셨는데 베드로는 자기 몸을 보호하는 일에만 신경을 썼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만약에 베드로가 저들에게 “차라리 나를 죽여라!” 며 예수님 대신 자기가 맞고, 추워하시는 예수님을 불가로 모셨다면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그러면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베드로의 아름답고 멋진 신앙이 증거되지 않았을까?
우리는 코로나 기간에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얼마나 생각하며 돌아봤는가? 교회는 문을 닫든 말든 우리 가정만 지키면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는가? 목사가 혼자서 교회를 지키든 말든 우리는 그저 직장과 사업만 지키면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는가?
오늘 최목사가 사순절 기간에 베드로의 모습과 코로나 기간 동안 연약함을 드러낸 우리의 모습을 비교해서 설교하는 것은 사순절 기간은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며 회개하는 절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오해하지 말고 말씀을 통해, 그리고 베드로의 모습을 통해 우리 자신의 신앙의 현주소를 확인하는 성도들이 되길 바란다. 자신을 돌아보며 회개하면 은혜요, 깨닫지 못하고 마음이 상하면 믿음이 약함이다.
한편 베드로가 불을 쬐고 있을 때 문을 지키는 여종이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17절)” 라고 추궁을 했다. 순간 베드로는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얼마 전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16:16)” 라는 신앙 고백으로 예수님께 칭찬까지 받았는데 지금 여종의 추궁에 예수님을 안다고도 할 수 없고, 그렇다고 모른다고도 말할 수 없는 난감한 상황에 빠졌다.
그러나 위기는 곧 기회다. 비록 예수님과 의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었고, 혼자서 불을 쬐면서 나만 챙기려 했지만 그래도 신앙 고백만큼은 잃지 않고 “그래! 내가 예수님의 제자다” 라고 말을 했으면 이전에 부끄러운 모습들을 한순간에 씻어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됐을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회개의 기회를 주신다. 이는 모든 인간은 넘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안고 살아가는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넘어짐을 탓하시는 분이 아니요, 일어나지 못하는 것을 책망하는 분이시다. 그래서 회개의 기회를 잡아야 한다. 회개의 기회는 다시 일어날 기회요, 회복의 기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베드로는 이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래서 “나는 아니라(17절)” 는 말을 하고 말았다. 즉 신앙 고백을 한 것이 아니라 배신의 고백을 한 것이다. 무엇보다 자기보다 약한 여종이 묻는 말이었는데 그 여종보다 못한 말을 하고 만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회개의 기회를 허락하신다. 즉 양심의 울림으로, 주변 사람의 조언으로, 목사의 설교로, 기이한 현상으로 우리의 심령을 자극하신다. 그러기에 우리가 그 음성을 듣고, 깨닫고, 돌아서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탕자를 맞이하는 아버지처럼 우리를 기다려 주시고, 달려오시어 안아 주시며, 좋은 옷 입혀 주시고, 가락지를 끼워주시며, 잔치를 벌여 주신다. 즉 하나님은 과거의 실수를 묻지 않으시고 현재의 회개와 고백을 기뻐하신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 좋은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럼 하나님은 한 번의 실수로 내치시는가? 아니다. 하나님은 다시 기회를 주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25절)” 라고 재차 물었다. 이 두 번째 물음이야말로 다시 찾아온 기회가 아니겠는가?
“한번 실수는 병가지상사” 라고 했으니 이제 두 번째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안타깝게도 베드로는 “나는 아니라 (25절)” 는 말로 또 다시 부인을 했다. 우리가 흔히 한 번 죄를 짓기가 무섭지 두 번째는 오히려 쉽다고 말하듯, 베드로도 처음에는 갈등을 했겠지만 두 번째는 쉽게 부인을 했을 것이다.
이때 대제사장의 종 중 한 사람(베드로에게 귀를 잘린 말고의 친척)이 “네가 그 사람(예수)과 함께 동산에 있는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 (26절)” 며 자신이 방금 전에 본 증인이라며 빼도 박도 못하게 만들었다. 이제 더 이상 물러날 수 없는 삼 세 번이다.
그럼에도 “이에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27절)” 라는 결정적 반응으로 베드로는 자신을 완전히 배신의 수렁에 빠뜨렸다. 이는 예수님과도 회복할 수 없고, 자신의 신앙도 회복할 수 없는 절망적 상황으로 자신을 빠뜨린 것이다. 그래서 양심에 화인을 맞은 사람은 아무리 그 어떤 자극을 주어도 반응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반응하지 못함은 이미 죽은 상태요, 구제 불능의 상태가 아니겠는가?
우리도 코로나가 창궐할 때 처음에 집에서 영상으로 예배를 드릴 때는 양심에 가책도 들었고, 혹여 하나님 앞에 불충한 예배가 아닐까? 라는 두려움도 생겼지만 계속해서 영상으로 예배를 드리니 나중에는 양심이 마비가 되었고, 오히려 교회에서 예배하자고 강조하는 목사님을 부담스럽게 여기지 않았는가? 베드로도 처음에 부인을 할 때는 가슴이 떨렸지만 두 번, 세 번 부인할 때는 무감각해졌을 것이다.
마태복음을 보면 처음에는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 (마26:70)” 면서 사람의 말귀를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영이 막혔고, 두 번째는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이르되 (마26:72)” 라며 하나님의 이름을 끌어들여 맹세하면서 부인할 정도로 영이 타락했으며, 세 번째는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마26:74)” 라며 저주하면서 맹세할 정도로 베드로의 영혼이 완전히 망가졌음을 보게 된다.
재미있는 것은 사람의 목소리를 통해 경고를 듣고 회개하지 않으면 이제 짐승의 목소리(닭울음 소리)를 듣고 회개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베드로가 “곧 닭이 울더라 (27절)” 는 닭울음 소리를 듣고 회개를 했다는 것은 곧 베드로의 영이 짐승의 수준으로 떨어졌음을 뜻한다.
사람이 말을 할 때 들었으면 좋았을 뻔 했고, 목사가 설교할 때 듣고 회개를 했으면 좋았을 텐데 닭울음 소리를 듣고 회개를 해야 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결국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마26:75)” 는 비참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음을 보게 된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어차피 회개하고 돌아설 거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함이 좋지 않겠는가? 너무 비참한 모습으로 회개함은 훗날 그것조차 부끄러움으로 남지 않겠는가? 문을 지키는 여종이 처음으로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17절)” 라고 말했을 때 예수님께서 해주신 말씀을 기억하고 떠올릴 수는 없었을까? 그럼 단 한 번에 회개를 할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래서 회개도 질적으로 차이가 있다. 탕자처럼 재산을 다 거덜 내고, 종이 되어 돼지를 키우며,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를 먹는 단계까지 간 다음에 회개를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윗이 밧세바를 범했을 때처럼 “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 사람이라(삼하12:7)” 할 때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삼하12:13)” 하며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삼하12:13)” 로 한 번에 끝나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어떤 회개를 하고 있는가? 혹시 회개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아닌가?
부끄럽지 않은 신앙으로 남고 싶고, 멋진 신앙으로 기억되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기껏 예수 잘 믿는다고 하면서도 뭔가에 막혀 그것이 흠이 되고, 그것 때문에 신앙이 더 깊어지지 못하는 어려움을 겪지 않았으면 좋겠다. 혹여 회개할 것이 있으면 회개하고, 결단할 것이 있으면 결단하면서 부끄러움이 아닌 자랑스러운 신앙으로 마무리하고 싶다.
사순절을 지내면서 예수님을 내치지 말고 꼭 붙잡으며, 너무 멀리 서지 말고 가까이 다가서고, 자신만 챙기지 말고 예수님을 더 많이 생각하면서 예수님에 대한 온전한 사랑 고백을 입술과 심령에 담고 지내길 바란다. 그래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고백으로 반석 위에 우뚝 서는 복된 사순절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한다.
요한복음 강해 (135) - 신자가 넘어지는 때 /요18:15-18, 눅22:31-34/ 김형익 목사
2021-05-09 10:07:25
1. 베드로가 넘어졌다면 누구나 넘어질 수 있다.
신자가 넘어지는 때가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이야기는 이 사실을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넘어진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베드로였습니다. 베드로가 넘어졌다면 누구나 넘어질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분의 말씀대로 그가 넘어진 것은 그가 겁쟁이였기 때문이 아니라 용감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대제사장의 집까지 따라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예수님을 부인하는 지경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어난 일을 이해하기 위해서 누가복음에 있는 주님의 말씀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2. 사단의 무서운 공격(눅 22:31~32)
누가복음 22:31~32을 봅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사단이 예수님께 베드로와 제자들을 체질할 수 있도록 요구했다는 말입니다. 분명히 주님은 시몬 베드로에게 말씀을 하고 계시나 ‘너희’라고 하신 것으로 보아 사단은 베드로를 위시하여 모든 제자들을 다 체질할 수 있도록 허락을 구한 것입니다. 이 말씀이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허락 안에서만 일할 수 있다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이것은 욥기에 가장 잘 드러납니다. 사단이 아무리 욥을 고통스럽게 해도 하나님께서 주권 가운데 허락하신 만큼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그것을 똑같이 보여줍니다. ‘청구했다’는 말은 정확히 번역하자면, 체질할 수 있도록 허락을 요청하여 이미 허락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자칫 사단이 허락을 구했으나 그 뒤에 주님께서 기도하셨다는 말씀이 있으니까 주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셨다고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허락하신 것입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을 체질해 보라고 사단에게 허락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특별히 크게 넘어지게 될 베드로가 그 믿음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아버지께 기도하셨다는 내용입니다. 주님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베드로에게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고 이어 말씀하십니다. 그 형제들 또한 주님을 버리고 도망가게 되는 형제들이며, 회복되어야 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3. 부인할 것을 예고하심(눅 22:34; 요 13:38)
여기에 그치지 않고 주님은 베드로에게 일어날 일을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미 살펴본 대로,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후에 다시 믿음을 회복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조치를 취하신 것입니다. 이미 그 밤에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할 것은 주님께서 알고 계셨다는 사실을 나중에 베드로가 생각하게 된다면,
“아, 주님께서 다 아셨구나! 다시 주님께로 돌아가자”하는 마음의 자세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범죄한 후에 주님의 낯을 볼 수 없다고 느끼는 것은 당연하더라도 주님께서 이미 다 아셨다는 것은 신자들에게는 하나의 위로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히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왜냐하면 인간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다의 배신이나 베드로의 부인을 미리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지금 우리 자신을 아는 것 보다 더 잘 아시고 다 아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주님을 속임으로써 뜻밖의 실망을 드렸다고 말하는 것은 엄밀히 불가능한 것이지요. 주님은 사단이 청구했다는 말씀에 이어서 베드로가 그 밤에 세 번 주님을 부인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것도 조용히 개인적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듣는 자리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이것은 일면 제자들 모두를 생각하셨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4. 베드로가 넘어진 몇 가지 문제들
자, 이제 우리가 살펴보려는 것은 베드로가 넘어지게 되는 이유, 혹은 그렇게 가게 되는 상황, 그의 자세와 태도가 있는가? 또 성경이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려고 하는 부분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넘어지게 되는 몇 가지 문제들을 우리는 볼 수 있고 또 이것은 우리 자신이 신앙 생활을 하다가 넘어지게 되는 일반적 현상이기도 합니다. 고로, 이제 살펴보는 것은 베드로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이야기라는 점을 놓치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씩 살펴보지요.
A. 자신만만함(눅 22:33; 요 13:37)
주님께서 이런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셨는데,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반응을 하셨겠습니까? 사단이 너희를 청구했다고 하셨고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셨다고 하십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데도 갈 준비가 되어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베드로의 진심이라고 우리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하신 말씀들이 자기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런 말로써 자기의 자신감, 각오, 결심을 주님과 다른 제자들 앞에서 분명하게 표출했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호언장담하는 베드로에게 그 밤에 세 번 주님을 부인할 것이라고 조금의 틈도 주지 않으시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삼국지와 같은 소설에서 이런 인물을 본다면 이는 정말 멋진 인물일 것입니다. 충성스러운 사람이지요. 그리고 주님과 같이 그 충성심을 몰라주는 주군을 섬기는 장수는 참 불쌍한 사람이다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면서 넘어지는 대목이 바로 이런 대목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육적으로 생각이 돌아가는 것입니다. “왜 주님이 나를 몰라 주시는가?”하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성경 말씀이 그렇지만, 그런 육적인 생각으로는 깨달을 수 없습니다. 베드로가 말해야 했던 것은 “나는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습니다.”가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이런 말씀을 그가 들었다면, 그는 “주님, 저는 홀로 있으면 넘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붙들어 주시옵소서(요 15:5)!”라고 구했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주님은 사단의 엄청난 영적 공격이 이제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주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단이 그들을 체질할 테니 허락해 달라고 구했고 주님이 허락하신 것입니다. 물론 주님이 허락하셨다는 말 속에는 주님께서 그들의 영원한 안전을 지키신다는 뜻이 있습니다마는, 다가올 일은 엄청난, 그들이 아직까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엄청난 영적 공격이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베드로가 견지했던 이 자신만만한 태도가 신자들이 넘어질 때 그들에게서 보게 되는 보편적인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태도지요. “나는 한다면 하는 사람이다.”
뭡니까? 자기를 증명하는 것, 자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태도입니다. 그에게 주님이 하시는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시지 않아서가 문제가 아닙니다. 내 소리가 너무 커서 세미하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나는 기도하는 사람이다”, 혹은 “나는 믿음으로 잘 살고 있다”라는 생각들을 조심하십시오. “나는 이제 말씀을 제대로 배웠으니 이제는 좀 된 것 같다”라든지, “나는 복음을 아는 사람이다”하는 생각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선 줄로 안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권면합니다(고전 10:12).
다윗이 넘어진 때는 그가 가장 편안한 시절을 보낼 때였습니다. 사람은 다 같습니다. 사람 안에 있는 죄성이 그렇습니다. 신자들을 넘어뜨리려는 사단의 역사를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잠언 16:18,20을 봅시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나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베드로는 이 일에 실패했습니다. 사단의 무서운 공격 앞에서 이 내면의 적이 얼마나 우리를 무너지게 하는지 모릅니다.
B. 기도의 실패(마 26:36~46; 눅 22:39~46)
우리는 또 한 가지 베드로가 넘어지기 전에 보여주었던 태도를 주목하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마치시고 감람원을 향해 가셨습니다. 마태복음은 상황을 이렇게 기록합니다(마 26:36이하). 예수님은 일단 제자들을 한 곳에 머물게 하시면서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에 앉아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베드로, 요한과 야고보만을 데리고 더 가셔서 심한 마음의 고통과 슬픔을 가지고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어달라”고 부탁하십니다. 그리고는 조금 나아가셔서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한 시간쯤 지났을까요? 주님이 이렇게 기도하시고 세 제자들에게 오셨을 때 그들은 자고 있었습니다. 주님이 특별히 그들의 대표격인 베드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호언장담하던 베드로를 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물론 세 제자에게 말씀하신 것이나, 옥에도, 죽는데에도 갈 준비가 되었다고 말하던 베드로의 얼굴과 눈을 보시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 말씀하십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베드로의 마음의 진심을 무시하신 것이 아닙니다. “네가 원해도 네가 모르는 것이 있다. 바로 네 실력을 모르는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두 번 더 동일하게 나아가 기도하셨습니다.
물론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서도 세 번 다 자고 있었습니다. 죽는데 까지 갈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한 베드로는 그 일을 할 수 있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사실 이후에 주님을 그가 따라간 것을 보면 그는 말한 대로 어느 정도 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대제사장의 하속을 향해서 칼을 휘두를 용기, 대제사장의 집 뜰까지 쫓아 들어갈 수 있는 용기는 있었지만, 그는 심히 고통스러워하시면서 함께 깨어서 기도해달라는 주님의 말씀대로 ‘단 한 시간도 기도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 신자가 넘어지는 부분입니다. 다른 일은 다 할 수 있습니다. 누구보다도 많은 봉사를 하고 탁월한 사역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는 눈에 띄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아는 것도 많고 말도 잘 합니다. 그러나 입으로 하는 말이 곧 그 사람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 앞에서 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하는 말입니다. 베드로가 넘어진 지점은 수많이 신자들이 넘어지는 지점입니다.
주님은 누가복음의 같은 본문에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눅 22:40).” 시험에 들게 되는 것이 곧 넘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시험은 유혹을 뜻하는 temptation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시험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사단의 공격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신앙 생활을 하면서 시험을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넘어뜨리는 마귀의 공격이 언제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실 때,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라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마귀의 시험을 이길 수 있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 힘으로 마귀를 대적할 슈퍼 그리스도인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 하나님의 힘이 아니면 마귀를 이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신약 성경은 너무나 자주 ‘깨어 기도할 것’을 권면합니다.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고전 15:34).”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고전 16:13).”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엡 6:18).”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골 4:2).”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지라(살전 5:6).” “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바 되어 그 뜻을 좇게 하실까 함이라(딤후 2:26).”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단 한 시간도 주님과 함께, 주님을 생각함으로, 주님의 심정을 앎으로 기도할 수 없다면, 시험에 들어 넘어지는 일은 불 보듯 분명하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기도하기를 쉬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 개인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기도의 시간을 얼마나 깊이, 얼마나 충분하게, 얼마나 깨어서 가지고 사시는지 묻습니다.
이 일이 없다면, 우리는 과거에 어떠했고 지금 어떠하든지, 우리가 교회에서 어떤 사람이든지 우리는 넘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깨어 있으십니까?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녀와 교회와 교회의 지도자들을 향한 사단의 무서운 공격을 여러분은 인식하십니까? 용기, 신앙 고백, 솔선수범 등 모든 일에 탁월했지만, 한 시간도 기도할 수 없었던 사람, 베드로가 넘어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C. 멀리서 따라감: 가까이 따라갈수록 위험이 클 것 같지만 더 안전하다.
우리는 베드로가 넘어지기 전, 보여준 또 하나의 태도를 주목할 수 있습니다. 그는 멀리서 주님을 따라가기 시작했습니다. 요한복음 18:15은 베드로가 주님을 대제사장 안나스의 집 뜰까지 따라왔다고 기록합니다. 그런데 공관복음은 그가 주님을 쫓아간 이 모습을 일치하는 단어를 써서 표현합니다.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좇아(마 26:58).”
“베드로가 예수를 멀찍이 좇아(막 14:54).”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눅 22:54).” 그가 멀리서 주님을 좇아갔다는 말을 의도적으로 강조합니다. 베드로는 전에는 이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갑자기 주님을 멀리서 좇기 시작한 베드로를 이전의 베드로와 대조적으로 묘사합니다. 주님과의 거리가 멀어질 때 베드로는 넘어졌습니다.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까? 주님은 제자들을 부르실 때, “나를 따라오너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 말은 멀리서 좇아오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아주 바짝 주님의 발자취를 보면서 그 길을 따르라는 명령입니다. 주님을 멀리서 좇아가는 것은 위험합니다. 이상한 것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너무나 가까이서 좇아가게 되면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주님의 제자가, 신자가 주님을 멀리서 좇아가기 시작하면, 주님과의 거리가 조금씩 벌어지기 시작하면 그것은 위험한 조짐입니다. 주님과의 거리가 멀어지는 것, 내가 점점 주님과 거리를 두고 멀리서 좇아가기 시작하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여러분의 기도의 삶이 식어지고,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그 말씀 듣기를 즐거워하던 태도가 의무가 되고,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이 약해지며, 모든 영적인 일들에 대해서 냉담해지는 것을 통해서 여러분은 스스로 얼마든지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주님이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바짝 따르라”고 말입니다. “어서 뛰어와서 내 옆으로 오라”고 부르십니다. 여러분, 멀리서 주님을 좇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베드로는 거기서 넘어졌습니다.
5. 열심을 내라(계 3:19)
오늘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는지를 요한복음 외에 공관복음서의 기록을 통해서 상고하였습니다. 사단의 무서운 공격이 있다는 사실에서 시작했습니다. 이것을 결코 과소평가하지 마십시오. 여기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각오와 결심이 아닙니다.
자신만만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우리 한 몸 지킬 수 없는 존재임을 아십시오. 베드로는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마음은 원이로되 기도할 실력이 없었습니다. 말의 실력은 있었을지 몰라도, 기도하는 실력이 없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말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자신의 심정을 토해낼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어떤 상태에 속합니까? 그리고 더 이상은 멀리서 주님을 좇아가시지 마십시오. 바짝 주님 곁으로 따라붙으십시오. 가까이 있다가 멀어지신 분들에게 주님이 오늘 가까이 따라오라고 하십니다. “한 때 나도 정말 가까이서 주님을 따라간 적이 있었지”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을 주님께서 “이제 그만! 이제는 가까이 내게 와서 나를 좇으라”고 하십니다. 힘을 내어 따라가십시오. 이런 분들은 바로 오늘 주님께 순종하십시오. 그리고 한 순간의 감정이 아니라 일평생을 그렇게 주님을 따라갈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진심은 중요합니다. 속이지 않는 마음, 참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영적인 실력입니다. 김홍전 목사님은 베드로의 실패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가 성숙하지 못한 까닭에, 그가 오직 하나님만 믿고 의지한다는 신앙의 본질적인 활동이 빈곤했던 까닭에 그랬던 것입니다.”
신앙이 성숙하지 못하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만일 어린 신앙일지라도 그 신앙이 성장해가고 있는 신앙이라면 그것이 무슨 문제겠습니까? 제가 말씀드리는 슬픈 일은 신앙이 지난 10년 전과 비교해볼 때, 지난 5년 전, 1년 전과 비교해 볼 때 진보가 없고, 여전히 자신을 의식하고 사람을 필요로 하고 의지하는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미숙함 가운데 처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는 결코 형제들을 굳게 하는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가 다 이 자리에 서라고,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넘어지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돌이킨 후에는, 다시 일어서서 믿음에 성숙해져서 형제를 돌아보고 넘어지는 형제를 굳게 세워주는 자리로 가라는 것입니다. 만일 계속 미숙한 자리에 있게 되면, 사람은 사단의 무서운 공격이 있다는 것을 거의 의식하지 못하게 됩니다.
베드로와 같이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지 않으면 넘어짐도 없습니다. 이미 넘어져 있고, 이미 엎어져 있는 자를 사단이 공격하지 않습니다. 사단은 베드로와 같이 선 자들을 공격하고, 베드로와 같이 주님을 섬기려 하는 자들을 공격합니다. 제대로 신앙 생활을 한 번 해보겠다고 하는 자들을 사단은 무섭게 공격합니다. 이것을 의식하십니까?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주님께서 하신 말씀대로, 주를 섬기는 일에 “열심을 내십시오.”
여러분 인생에 펼쳐지는 모든 하나 하나의 상황 속에서 주를 붙잡고, 주를 의뢰하십시오.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주님이 여러분을 붙잡아 주시지 않으면 베드로가 넘어졌듯이, 우리는 넘어질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아십시오. 그러므로 오늘, 아니 지금 기도의 무릎을 다시 꿇으십시오. 기도의 무릎을 더욱 꿇으십시오. 그렇게 주님을 바짝 좇으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신자가 넘어지는 때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주님은 여러분이 넘어질 것을 알고 계신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실패와 비통함을 회복시킬 수 있는 주님이시기도 합니다. 다시 일어나 주님을 바짝 따라가십시다. 넘어진 채로, 엎어진 채로 더 이상 살지 마십시오. 힘있게 일어서십시오.
한 번 밖에 살지 않는 인생, 멋지게 주를 섬기며 주를 따라 사십시다. 우리를 붙드시는 주의 은혜의 능력을 경험하고 누리십시다. 넘어진 자를 일으키시고 회복시키시는 자비로운 주님을 경험합시다. 그리고 형제를 굳게 하는 자리에 섭시다. 이 복된 은혜를 일평생에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 또 다른 제자 /요18:15-27/ 이재철목사
2015-07-27 10:48:42
근대 프랑스가 낳은 가장 위대한 수도자였던 사를르 드 푸코(Charles de Foucauld)는 1858년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프랑스는 카톨릭 국가였기에 그 역시 태어나면서부터 기독교 신자였습니다.
불행하게도 어린 나이에 양친을 여의면서 그는 신앙의 길을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육군사관학교에 진학, 장교가 되어 북아프리카에서 일어난 반란군 진압에 참여하여, 상관의 명령에 따라 반란군의 심장을 겨누어 총을 쏘면서 그는 인생에 대하여 큰 회의를 갖게 됩니다.
그 후 군대를 스스로 떠나 학자로써 모로코를 탐험하던 중, 그 곳의 이슬람 교도들이 깊은 신앙 속에서 신앙을 따라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그는 하나님을 향해 시선을 돌리고 다시 기독교로 귀의합니다.
그리고 오랜 기간 동안의 수도원 생활을 거쳐 그의 나이 43세가 되던 1901년 신부 서품을 받은 후, 당시 세상에서 가장 버림받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여겨지던 아프리카 사하라의 베니아베스로 들어가, 1916년 12월 한 토착민이 쏜 총에 맞아 숨질 때까지 15년 동안 그곳에서 그곳 원주민들과 더불어 살면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어느 날 푸코는 나무를 보면서 깊은 깨달음을 얻습니다. 나무는 떨어지는 자신의 잎이나 부서져 나가는 가지에 대해 아무런 염려를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떨어지지 못하도록 기를 쓰거나 떨어지는 것을 잡으려고 전혀 안달하지도 않았습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그저 의연할 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다는 자들이 떨어져 나가는 재물이나 건강이나 생명 때문에 염려하고 절망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하찮은 나무보다도 더 못한 존재로 전락시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근심하거나 탄식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뒤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 여러분은 무엇이 가장 어렵다고 생각하십니까? 푸코의 답변은 이러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다' 우리는 얼마나 쉽게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합니까?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얼마나 자랑스럽게 이야기합니까? 그러나 정말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까? 진정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부족함 없는 신앙을 갖고 있습니까?
진짜 향나무와 가짜 향나무의 차이가 언제 드러납니까? 도끼에 찍히는 순간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향나무는 찍힐수록 향기를 더욱 진동하지만, 가짜는 찍을수록 도끼의 날만 상하게 할뿐입니다.
겉모습은 똑같아 보일 수 있지만 찍히우므로 비로소 진위가 판가름 나는 것입니다. 생화와 조화의 차이는 어디에 있습니까? 진짜 꽃의 잎은 떨어지지만 인조 꽃잎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진짜 꽃은 벌이나 나비에게 기꺼이 자신의 꿀을 빼앗겨 주고 나누어주지만, 모조 꽃은 떨어지거나 빼앗길 것을 아예 소유하고 있지를 않습니다. 요즈음 조화를 얼마나 잘 만듭니까? 구별이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러나 떨어짐과 빼앗김의 유무에 따라 생화와 조화 여부가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믿는 자인가 아닌가는 평소에는 판가름 나지 않습니다. 오직 결정적인 때에 드러나는 법입니다.
내 건강이, 내 재물이, 내 생각이, 내 뜻이 찍히고 떨어지고 빼앗기고 부서지고 깨어져 나갈 때, 바로 그 순간에서 마저 우리가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한다면 우리는 정말 하나님을 믿는 자들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바로 그 결정적일 때를 위해 결정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일 때, 가장 중요한 순간에, 가장 믿음이 필요할 때에 비신앙적인 길을 걷는다면 우리는 아직까지 참된 신앙인 일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를르 드 푸코는 크리스천들이 이처럼 결정적일 때 오히려 비신앙적으로 처신하는 이유를 두 가지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을 보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보기 때문이요, 둘째는 하나님보다는 내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더 크게 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적절한 지적입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나를 들여다 본들 탄식밖에 더 나오겠습니까?
눈 앞에 펼쳐진 상황을 극대화하여, 내가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자요, 가장 불행한 자요, 그 누구보다 비참한 자요, 내가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자란 피해망상에 젖는다면 절망 외에 무엇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샤를르 드 푸코가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보다 자기 자신을 더 의뢰하고, 하나님보다 자기 상황을 더 크게 여기는 자였다면, 어찌 그 절망적인 사하라 속에서 금세기를 밝히는 진리의 불꽃, 인류의 양심이 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가 매일 매일 하나님께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키면서, 모든 면에 걸쳐 진정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을 스스로 훈련하지 않는 한, 이 시대를 밝히는 등불이 되기는커녕,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정말 추한 인간으로 전락해 버리고 만다는 것―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메세지입니다.
주님의 제자였던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 예수님께 어떤 호언장담을 했었는지를 4복음서는 이렇게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마 26:33)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막 14:31)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눅 22:33)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요 13:37)
얼마나 자신에 찬 고백입니까? 베드로는 이처럼 고백만으로 그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 나타난 군대가 예수님을 체포하려는 순간, 칼을 뽑아 휘두르며 그들 앞을 가로막고 선 사람은 베드로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어떻게 베드로 홀로 그처럼 용감할 수 있었습니까? 그는 그와 함께 하고 계신 예수님께서 로마를 물리치고 이스라엘에 독립을 가져다 줄 정치적 메시야이심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지금 주님을 잡으러 나타난 군대의 수효가 얼마이든지 간에, 주님께서 광풍이 몰아치는 바다를 잠재우시던 그 능력으로,
떡 다섯 조각과 물고기 두 토막으로 5천명이 넘는 대 군중을 먹이시던 그 권능으로, 그들을 완전히 쓸어버리실 것을 굳게 믿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 주님 앞에서 그 주님을 위해 단신으로 군대와 맞선다는 것은 오히려 영광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베드로의 눈 앞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그처럼 철썩같이 믿었던 주님께서 군대를 쓸어버리시기는커녕 저항한번 없이 잡히시는 게 아닙니까? 그저 무기력하게 결박을 당하고 계십니다.
그리고는 마치 개 끌려가듯 대제사장의 집으로 끌려가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베드로가 상상하던 하나님 아들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가 머리 속에 그리던 메시야의 형상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소망하고 바라던 사건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간단히 말해, 그의 신념이 찍히우고 꿈이 꺾어지며 계획이 부서지고 희망이 떨어지며 야망이 빼앗기우는 결정적인 순간이었습니다. 그 결정적인 순간에 베드로가 무엇을 했다고 오늘의 본문이 증거하고 있습니까?
"문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17)
결박당하신 채 끌려가는 예수님을 따라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집안 뜰에 들어갔을 때, 문을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를 알아보고 '너도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냐'고 묻자 베드로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아니라고 간단하게 부인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주님을 버릴 찌라도 나만은 주님을 버리지 않겠노라 장담하던 그 베드로가 말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서서 불을 쬐더니 사람들이 묻되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베드로가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아니라 하니"(25)
이번에는 뜰 안에 있던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졌지만 이번에도 베드로는 한 마디로 부인해 버렸습니다. 내가 죽을지언정 어떤 경우에도 주를 부인치 않겠노라 맹세했던 베드로가 말입니다.
"대제사장의 종 하나는 베드로에게 귀를 베어 버리운 사람의 일가라,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던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26)
마침 그곳에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베드로가 칼을 휘두르는 것을 직접 목격했던 증인이 있었습니다. 그가 베드로를 분명히 알아보았지만 베드로는 역시 부인으로 일관하였습니다.
마태복음 26장에 의하면, 이때 베드로는 자신이 정말 예수님과 무관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저주하고 욕하며 맹세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주님 가시는 곳이라면 감옥에도 죽는데도 따라가기로 이미 만반의 준비가 끝났다고 큰소리 치던 베드로,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마저 아까워하지 않겠다던 바로 그 베드로가 말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생각과 뜻과 꿈이 여지없이 찍히우고 부서지고 깨어지고 떨어지고 빼앗겨 나가는 그 결정적인 순간을 맞아 눈앞에 펼쳐진 상황이 아니라, 그 상황 너머 계시는 하나님을 보아야만 했습니다.
그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이 아니라 더더욱 하나님을 의뢰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베드로는 가장 결정적일 때 상황만을 보고 자기만을 의지하므로, 가장 중요한 순간에 추악한 배신자가 되고 말았고, 그 일생 중 가장 수치스러운 기록을 남기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본문 속에서 베드로보다 더 추악한 인간을 만나게 됩니다. 오늘 본문 15절 상반절이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하나가 예수를 따르니"(15a)
대제사장의 집으로 끌려가는 예수님을 베드로만 뒤따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 다른 제자 한 명이 베드로와 함께 예수님의 뒤를 좇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이 놀랍게도 그 제자에 대해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 베드로는 문 밖에 섰는지라"(15b-16a)
그 제자는 평소에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정도로 잘 아는 사이였는지 대제사장 집 문 앞에 당도한 베드로가 더 이상 들어가지 못하고 문 밖에서 기다리는 반면,
그 제자는 분명히 그 집에 경비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고 그 집을 당당하게 들어갈 수 있는 자였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본문은 더 놀라운 사실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대제사장과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 왔더니"(16b)
대제사장의 저택이라면 이스라엘에서 최고 실권자의 집인데 어찌 아무나 출입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대제사장의 집안으로 먼저 들어갔던 그 제자가 다시 나와 문 지키는 여종에게 말하자, 그때까지 문 밖에서 기다리던 베드로도 그냥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베드로의 얼굴을 본 여종이 '너도 예수의 제자가 아니냐'고 물었던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신성모독법, 국사범으로 끌려 대제사장의 집에 끌려와 심문을 받고 있는 중이라면, 그 집의 하속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소위 '예수일당'은 모두 일망타진해야 하는 대상이였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하속은 또 다른 제자에게는, 그 역시 분명히 예수님의 제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의문이나 질문도 제기치 않았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겉으로는 예수님의 제자인 것처럼 살아가면서도 내막적으로는 대제사장과 내통하던 자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철저하게 자기를 감추고 있는 이 추악한 제자가 누구였을까요? 칼빈의 말처럼 그것은 공허한 이야기일 뿐입니다.
요한은 자기 자신을 3인칭으로 표현할 때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라 표현하지, '다른 제자'라 표현한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만에 하나라도 요한 자신이었다면 요한은 이 후에 반드시 회개의 사실을 기록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엄청난 죄를 짓고서도 회개치 않았다면, 결코 복음서를 기록하는 주님의 사도로 쓰임 받지는 못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공개적으로 배신했던 가룟 유다였을까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만약 가룟 유다였다면 요한이 그 이름을 본문 속에서 밝히지 않았을 리도 없고, 더욱이 이미 예수님의 배신자로 증명된 가룟 유다와 베드로가 함께 걷거나, 그 가룟 유다의 청탁으로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 리는 더욱 만무합니다.
몇몇 주경학자들의 주장처럼 요한복음을 기록한 요한 자신이었을까요?
예수님께는 초기부터 주님을 따르던 12명의 제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복음서는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과 산헤드린 공회원이었던 니고데모 역시 제자라 부르는 등, 2명 이외에 제자라 불리우는 자들이 더 있었음을 일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 속에서 자신을 숨긴 채 대제사장과 내통했던 그 제자가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그처럼 끝까지 불의와 은밀하게 내통했던 그의 삶은, 비록 그 댓가로 현실적인 이득을 취할 수는 있었겠지만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는한 순간만이 아니라 일평생동안 결정적으로 추악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어리석고 추악한 제자가 바로 우리 자신들의 모습이 아닙니까? 우리가 바로 공개적으로는 그리스도인이요, 숨어서는 온갖 불의와 내통하는 치사한 인간들이 아닙니까? 우리의 이와 같은 이중적인 삶때문에 이 세상이 점점 더 추악해지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 온 나라를 뒤흔들고 있는 한보그룹 정태수 회장과 우리 사이에는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아니 분명한 차이가 있긴 있습니다. 그의 허물은 이미 공개된 데 비해 우리는 본문속의 제자처럼 아직까지 우리의 이름을 감춘 채 숨어서 그 짓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충청북도 능곡에 있는 조그마한 식당 벽에는 초등학교 5학년 학생인 그 집 딸이 지은 시가 걸려 있습니다.
내 마음에는 빛이 있어
무엇보다 밝은 빛
해보다 밝고 달보다 밝아
별처럼 반짝이는 빛
어른들은 몰라
내 마음의 밝고 반짝이는
이 아름다운 빛을
그건
욕심 없는 깨끗함이야
듣기만 해도 우리의 마음을 정화시켜주는 아름다운 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경우에도 내가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십시다. 목전의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십시다. 그 분의 빛으로 우리를 채우십시다.
그래서 내 존재가 찍히고 부서지는 결정적인 순간에 이 빛을 발하십시다.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아니 일평생토록 이 빛 속에서 살아가는 맑고 밝은 그리스도인이 되십시다.
나의 정화없이 이 사회는 정화되지 않습니다. 이 사회는 비판만으로 바로 세워지지 않습니다. 내가 빛 가운데 거하는 만큼 이 세상은 맑고 밝아지는 것입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나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므로, 결정적인 순간에 주님을 부인하는 베드로가 아니라, 통곡하며 회개하는 베드로가 되게 도와주십시오. 눈 앞에 펼쳐진 상황보다는 그 너머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므로, 은밀하게 불의와 내통하는 추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한평생 빛의 증인이 되게 해 주십시오.
내 존재가 찍히우고 꺾이우고 부서질 때, 그때도 이 빛을 발하므로 이 빛으로 이 세상을 맑히고 밝히는 자들이 되게 해 주십시오. 어린아이가 아무런 어려움 없이 부모를 신뢰하듯,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 가장 쉬운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요,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 가장 충만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임을 보여주는 자들이 되게 해 주십시오. 이 사회는 비판만으로 정화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빛의 증인이 됨으로부터 시작됨을 기억하고 실천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아멘.
★ 예수를 쳐 가로되 /요18:15-27/ 이재철목사
2015-07-27 10:55:19
식용인 육계가 아닌, 달걀을 낳는 산란계를 30만 수나 양계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 분에 의하면 양계에서 중요한 것은 세 가지인데, 첫째는 종계입니다. 얼마나 건강하고 좋은 종계의 새끼냐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경우에도, 병든 여자나 나이든 여자는 건강한 아이를 낳기 어렵지 않습니까? 닭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먹이입니다. 어떤 사료를 먹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셋째가 환경입니다.
요즈음 양계는 고밀도 양계이기 때문에 환경은 더없이 중요합니다. 온도와 습도의 적절한 조절 및 청결성과 쾌적성에 따라 생산량의 증감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양계 선진국의 경우 닭 한 마리가 1년에 약 300여 개의 달걀을 낳는 반면에 우리 나라는 그보다 10%나 뒤떨어지는, 년간 270여 개밖에 낳지 못한다고 합니다.
닭 1마리가 선진국에 비해 1년에 30여개 덜 낳는다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30만 수를 가지고 있는 그 양계장의 경우 같은 규모의 선진국 양계장에 비해 1년에 무려 900만 개나 생산량이 뒤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나라 양계 전체를 놓고 볼 때 그 차이는 실로 천문학적인 숫자가 될 것입니다. 똑같은 노력을 기울이고서도 선진국에 비해 그만큼이나 뒤진다면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 나라의 경우, 종계, 먹이, 환경 중에 무엇이 미흡해서 그처럼 큰 차이가 나는지 이유를 물어 보았습니다.
먼저 종계에는 별 차이가 없다고 했습니다. 종계를 100% 외국에서 수입하기 때문입니다. 종계장에서 종계를 수입하여 알을 낳으면, 부화장에서 그 알을 사다가 부화시킨 뒤에 양계장에 분양하게 됩니다.
따라서 그 과정상 약간의 기술적인 차이가 있을수 있으나 종계 그 자체는 선진국과 차이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환경은 오히려 우리가 선진국에 비하여 더 낫다고 했습니다.
계사를 한번 지으면 시설의 수명이 대개 30년 가량 가는데 선진국의 경우 계사가 이미 오래 되어 노후한 반면, 우리 나라는 불과 5년 전부터 전자동시스템을 갖춘 최신 계사를 짓고 있으므로 환경에 관한 한은 오히려 우리가 우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장 큰 원인은 나머지 하나, 먹이 즉 사료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나라에서 직접 만든 사료를 먹이는 것은 아닙니다.
사료 역시 100% 수입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료에 원인이 있는 것은, 선진국에서는 똑같은 사료를 반드시 쪄서 먹이는데 비해 우리 나라는 그냥 먹이는 것입니다.
선진국에서는 번거롭고 불필요해 보이기는 하지만 모든 사료를 찜으로서, 만에 하나라도 있을 수 있는 경우에 대비하여 철저한 살균과정을 거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과정을 무시해 버림으로써 결국엔 완전한 먹이가 되지못한 채, 엄청난 생산량의 감소를 초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교훈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우리의 뿌리도 중요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도 더없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뿌리와 환경이 아무리 좋아도 우리가 무엇을 먹고 있느냐, 우리가 무엇을 양식으로 추구하고 있느냐에 따라 우리 삶의 결과는 엄청난 차이를 드러내기 마련입니다.
년전에 해남에 있는 대단위 다원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같은 산자락에 광활하게 펼쳐진 농원 속에 같은 나무가 심기워져 있었지만, 유독 오른쪽 끝자락 부근의 나무는 모두 시들어 있었습니다.
이유인 즉은 그 곳만은 토양이 마치 반석처럼 단단해서 나무가 뿌리를 제대로 내릴 수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같은 묘목을 심고 같은 비료를 주었습니다. 똑같은 물을 주었습니다. 똑같은 태양의 빛과 열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나무들이 처해 있는 환경이 좋지 못할 때 그 나무들은 병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의 뿌리도 중요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양식으로 삼고 있느냐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뿌리와 먹이가 아무리 훌륭해도 우리가 처해 있는 환경에 따라, 혹은 우리가 우리 손으로 어떤 환경을 만들어 가느냐에 따라 우리의 내일은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농업 진흥청에서는 종자개량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영농기법, 비료, 토양 등 모든 여건이 뛰어나도 종자의 가능성을 극대화 할 수 있을 뿐이지, 그 한계를 뛰어 넘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더 좋은 종자가 좋은 여건과 맞아 떨어질 때 더 많은 수확이 보장되는 것입니다.
한국이 올림픽에서 열세인 종목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두드러진 종목이 승마입니다. 한국에는 한 필에 수십억 원, 혹은 그 이상을 호가하는 좋은 종마가 없는 까닭입니다. 지금 한국에 있는 정도의 말로는, 아무리 좋은 먹이를 주고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어도, 세계 기록 언저리에도 들어 갈 수 없습니다.
우리의 환경도 중요하고 우리가 추구하는 양식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양식과 환경이 아무리 출중해도 우리의 뿌리가 좋지 못할 때, 우리의 혈통이 부실할 때, 우리의 삶은 그 한계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학자 집안에서 학자가 더 많이 나오고, 법률가 집에서 법률가가, 의사 집안에서 의사가, 사기꾼 집안에서 사기꾼이 상대적으로 더 많이 배출된다는 통계야말로 우리의 뿌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어떤 존재들이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여 어리석게도 낙원을 잃어 버렸던 인류최초의 밤죄자인 아담의 후예들입니다. 우리의 죄성과 욕망을 배부르게 할 것만을 양식으로 삼던 자들입니다.
이 세상의 온갖 악과 불의를 우리의 환경으로 삼았던 자들입니다. 말하자면 철저하게 악 속에서 악을 먹고 살아오던 악의 종자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합니까?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우리의 죄를 씻어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주님의 보혈의 은총 속에서, 아담의 자녀로부터 하나님의 자녀로 우리의 뿌리를, 혈통을 바꾸는 것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것이라"(마 4:4)
오직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우리의 가장 귀한 양식으로 알고 주야로 그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가 되느니라"(마 13:23)
우리의 삶이 풍성한 진리의 열매를 수확할 수 있도록 우리의 환경을 진리의 옥토로 쉬임없이 일구어 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믿음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가 진리를 양식으로 먹고 마시면서, 진리를 우리의 환경으로 삼아, 우리 자신을 진리의 종자답게 가꾸어 가는 구체적인 행동이요, 삶입니다.
종자, 먹이, 환경 이 세 가지는 양계장이나 농장, 혹은 승마장에서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 교육에서도 이 세 가지의 중요성은 지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이 세 가지는 더없이 중요합니다.
이 세 가지의 유무 여부에 따라 신 불신이 결정되고, 이 세 가지의 정도에 따라 신앙의 성숙도와 선진도가 판가름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이 일깨워 주는 교훈이 바로 이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된 예수님께서는 결박당하신 채 대제사장의 집으로 끌려 가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물으니"(19)
자신의 집으로 끌려온 예수님을 본 전임 대제사장 안나스는 즉각 예수님을 심문하기 시작했습니다. 평소 제자들에게 무엇을 가르쳐 왔었는지 그 내용을 이실직고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주님의 답변을 본문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드러내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의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히는 아무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보라 저희가 나의 하던 말을 아느니라"(20-21)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무엇을 가르치셨는지 구체적으로 답변치 않으셨습니다. 정 알고 싶다면 당신의 말씀을 들었던 자에게 직접 물어 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대제사장이 정말 주님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기 위함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트집잡기 위함임을 잘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런 자에게 진리를 말한다는 것은 돼지에게 진주를 주는 것과 같이 부질 없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22절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매, 곁에 섰는 하속 하나가 손으로 예수를 쳐 가로되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 하니"
예수님의 답변이 끝나기 무섭게 그 집의 하속 한 명이 대제사장 앞에서 예수님의 답변 태도가 불손하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손으로 쳤습니다. 예수님을 때린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한 인간에 대한 구타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진리를 친 것이요,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폭행이자 그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에 대한 폭력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본문 속의 이 하속은 진리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폭력을 행사했던 최초의 인간― 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인간이었습니다. 그가 어떻게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짓을 행하는 자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까?
첫째 그의 뿌리가 나빴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통로인 예수 그리스도로 부터 벗어나 있던 그는 여전히 아담의 후예일 따름이었던 것입니다. 둘째 환경이 나빴습니다. 그가 거하고 있는 곳이 어디였습니까? 대제사장의 집이었습니다.
대제사장의 집이란 어떤 곳입니까?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 인간의 의만 드러나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법이 아니라 인간의 관습만 중요시 되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인간의 명예만 드높여 지는 곳입니다.
그 곳은 하나님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결코 만날 수 없는 최악의 환경이었습니다. 셋째 양식이 나빴습니다.
그 하속이 그 곳에서 얻을 수 있는 양식이란 진리와 생명의 말씀이 아니라, 백해 무익한 탐욕 그리고 자신과 생각을 달리하는 사람에 대한 증오가 고작이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가까이에서 만나 뵙는 행운을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예수님에게 폭력을 행사한 최초의 패역한 인간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러고서도 회개조차 않는 비참한 인간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 뿌리, 그런 양식, 그런 환경으로서는 죄를 짓고서도 무엇이 죄인지조차 알 수 없기에 회개가 아예 불가능한 까닭이었습니다.
이 불쌍한 하속에 비하여 볼 때 본문 속의 베드로는 어떠합니까? 그는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였습니다. 이를테면 이 하속과는 뿌리, 종자가 달랐습니다.
그렇다면 하속과 뭐가 달라도 분명히 달라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베드로의 처신은 어떻하였습니까? 그는 주님께서 서 계시는 대제사장의 바로 그 뜰에서 세 번씩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공개적으로 부인했습니다.
마지막에는 주님을 욕하고 저주하기까지 했습니다. 그것 역시 주님에 대한 폭력이었습니다. 하속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하속은 주먹으로 폭력을 행사한 데 비해 베드로는 혀로, 말로 했다는 차이 뿐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에게 뿌리를 둔 예수님의 제자가 이처럼 하속과 똑같을 수가 있습니까?
첫째는 바른 양식을 취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이전에 여러 번이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 고난을 받고 돌아가실 것을 예고하셨댔습니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그 말씀을 믿고 삼켜야만 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기의 생각과 다른 그 말씀을 흘려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생각, 자기의 계산을 양식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둘째는 지금 베드로가 처한 환경이 좋지 못했습니다.
베드로가 그처럼 예수님을 부인했던 곳은 대제사장의 집 뜰이었습니다. 만약 그곳이 대제사장의 집이 아니었던들 베드로가 그처럼 어처구니없이 주님을 부인치는 못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하속과는 아무 다를 바가 없는 그가, 하속과는 확연하게 달리 언제 자신의 죄를 뉘우치면서 회개했었습니까?
"이에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곧 닭이 울더라"(27)
새벽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회개했습니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다 주님을 버릴지라도 나만은 죽을지언정 주님을 버리지 않으리라 베드로가 호언 장담할 때, 오늘 밤 닭 울기전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란 주님의 말씀이 불현듯 기억 났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삼키는 순간 회개했던 것입니다. 어디에서 회개했었습니까? 대제사장의 집안에서 회개했습니까?
아닙니다. 마태복음 26장 75절은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집을 뛰쳐나가 밖에서 통곡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의 집이란 환경을 벗어나서야 참된 회개를 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속의 하속과 베드로의 행적은 참으로 우리에게 귀중한 교훈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아무리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라 할지라도 바른 양식을 취하지 않고 바른 환경 속에 거하지 않는 한 불신자와 아예 아무런 차이가 없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크리스천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입고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은 자들입니다. 뿌리가 바뀐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이 진리를 알지 못하는 자들과 동일하다면 그것은 첫째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구하지 않기 때문이요,
둘째 바르지 못한 환경으로부터 벗어나거나 혹은 그 그릇된 환경을 적극적으로 개선하려 하지 않고, 그 속에 안주하면서 오히려 거기에 적응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평생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성경 한번 읽지 못하다가 최근에 창세기부터 통독을 시작하여 이제 구약 마지막 부분을 읽고 있는 성도님이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보니, 그 동안 얼마나 허무맹랑하게 믿고 살아 왔는지 하나님 앞에서 수치스럽고 후회스러울 뿐이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말씀을 양식으로 삼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도리가 없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닭의 모이만을 먹고서는 사람 구실을 절대로 할 수 없는 것과 동일합니다.
우리 자신이 정녕 하나님의 자녀 되었음을 믿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의 양식으로 삼는 것으로 증명되어야만 합니다. 진리의 말씀을 양식으로 삼지 않고서도 살 수 있다면 하나님의 자녀일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아울러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릇된 환경에서 벗어 날뿐만 아니라 잘못된 환경을 바로잡는 자들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역군들인 것입니다. 지금 한보 사태로 온 나라가 요란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비단 어제 오늘만의 일이 아닙니다. 80년대, 70년대, 60년대, 50년대 신문을 뒤져보십시오. 단지 사건의 주인공과 제목만 틀릴 뿐 소위 한보 사태는 늘 있어 왔습니다. 어느 정권치고 새 시대, 새 사회, 새 역사를 소리쳐 외치지 않았던 정권이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 정치 사회 경제 문화적으로 모두 새로운 환경을 일구자고 역설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나라를 뒤흔드는 대형 비리는 끝없이 계속되고 있습니까?
모두 다른 사람을 고치려고만 했지 자기를 바로 세우는 것을 등한시한 까닭입니다. 나를 바로 세우지 않고서는 이 세상이란 환경은 절대로 개선되지 않습니다. 나에게 있어서 다른 사람이 나의 환경이 듯이, 그들에게 있어서는 내가 그들의 환경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각각 타인의 환경인 우리 자신이 진리로 우리의 환경을 삼아 진리 안에 설 때에만, 자연을 포함하여 이 세상이라는 환경이 비로소 새로와 질 수 있고, 그 새로와진 환경 속에서 밝고 건강한 삶이 보장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대제사장의 집이라는 환경 속에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했던 그가 그 이후 진리의 말씀을 양식으로 삼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환경으로 삼았을 때,
그에게 다가온 순교라는 최악의 환경이 그를 결코 무너트리지 못했고, 오히려 그에게 십자가 순교를 강요했던 로마제국이라는 세상의 환경이 그로 인하여 전혀 새로와지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음을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자기를 바로 세움 없이, 예수님을 부인하던 그대로 였다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 되었음을 믿습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뿌리가 새로와 졌음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진리의 말씀을 양식으로 삼읍시다.
우리의 목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여 그분을 우리의 환경 으로 삼아 우리 자신들이 타인을 위한 바른 환경이 되십시다. 잊지 마십시오. 뿌리 먹이 환경의 바른 어우러짐 속에서만 개인의 역사도 민족의 역사도 새로이 구축됩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하나님!
추악한 아담의 후예로 태어나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시사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 되는 권세를 주시므로 우리의 종자를, 우리의 뿌리를, 우리의 혈통을 근원적으로 바꾸어 주셨음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된 자답게 살아오지 못하였음을 용서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바로 내 아내의, 내 남편의 환경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내가 근로자의, 경영자의 환경임을 인식치 못했습니다. 내가 내 형제와 이웃의 환경임을 자각치 못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나를 바로 세우려 하지 않고 다른 사람만을 바로 세우려다가 수많은 사람들을 치고, 법과 질서에 폭행을 가해 왔음을 이 시간 회개하오니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제 하나님의 자녀 된 자답게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우리의 양식으로 삼게 하옵시고, 우리의 목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환경 삼아 오직 그 분 안에 거하므로, 타인을 위한 바른 환경, 진리의 환경이 되게 하옵소서.
그리스도 안에서 종자, 양식, 환경이 바르게 어우러지는 삶을 살므로, 우리의 삶으로 인해 이 세상이라는 환경이 맑고 밝아지는 역사가 시작되게 하옵소서. 아멘.
실패의 자리에서 배워라/요18:15-18
2006-07-12 15:59:44
박승규 목사
은혜 받기 좋은 아침 입니다! 성령의 불을 온전히 내려주셔서 하나님의 역사가 있는 귀하고 복된 하루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최근에 한 뉴스를 접하면서 도전을 받았습니다. 전남 보성에 사는 ‘최 복순’ 할머니의 얘기 입니다. 할머니의 나이는 88세 입니다. 그런데 할머니는 3월 6일 오전 10시에 서울 마포구 양평 초등학교에 입학합니다. 할머니에게는 5남 6녀의 자녀가 있습니다. 오랜 세월을 살았지만 할머니에게는 학교를 다닐 수 있는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88세라는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학교를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할머니가 학교에 입학하게 된 동기는 다니던 교회 목사님을 통해 듣기만 했던 성경 말씀을 이제 글을 배워 직접 읽어보고 싶다는 열망 이었습니다. 글을 깨우쳐서 성경을 읽는 것뿐만 아니라 이왕이면 운전도 배워 자동차를 운전해 보겠다는 소망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나이 때문에 하지 못했던 일들을 후회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할머니의 소식을 들으면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 이라면 어떠한 어려운 환경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새로운 세계를 향해 도전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부득불 자랑할 찐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 하리라”(고후11: 30). 하나님 앞에서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면 자랑할수록 영적으로 더 성장하게 되고 새로운 것에 도전할 수 있는 새로운 힘이 생깁니다. 이런 삶이 있는 반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인물은 모든 지위와 부를 다 가졌지만 역사는 그를 실패한 인생을 산 사람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목회 생활을 하면서 많은 인물들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그 많은 인물들 중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본디오 빌라도 일 것 입니다. 사실 빌라도의 삶을 살펴보면 예수님을 직접 죽이지도 않았고 결정적인 역할을 안 한 것 같은데도 사도신경에 보면 이렇게 고백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주일 예배 때 한번쯤은 이 신앙고백 합니다. 그때마다 ‘본디오 빌라도’ 라는 이름은 얼마나 많이 불리겠습니까? 아마 그는 지옥에서도 귀가 근지러워 더욱
괴로워할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을 사실상 죽이기 위해 앞장섰던 사람들은 빌라도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첫 번째로 유대인이 있습니다, “빌라도가 가로되 너희가 저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이 없나이다 하니(31절)”. 유대인들의 최고 종교 의결 기관은 산헤드린 종교회 입니다. 이곳은 당시 대 제사장들과 제사장들 그리고 율법학자와 서기관들 등 약70이 모여 종교적인 회의를 거쳐 의결을 하는 곳입니다. 이들은 이방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오는 것을 제외하고는 사형을 언도할 수 없었습니다. 본문에서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이 없다” 라고 말하는 그들을 볼 때 이들은 대제사장 들이거나 산헤드린 공회에 속해있던 사람들 입니다. 성경학자들은 예수님을 실질적으로 앞장서서 죽인 사람들은 대 제사장들 계열이었던 가야바라 안나스 혹은 산헤드린 공회에 속했던 사람들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잡아 죽이기 위해 함께 모여 의논했고 끝내 예수님을 죽음으로까지 몰았던 사람들 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앞장섰던 인물중의 또 한 사람은 바로 제자였던 가롯 유다 입니다. 그를 생각하면 제자의 삶이 얼마나 어렵고 스승을 배반한 후 그의 삶이 얼마나 비참했을까 불쌍한 마음이 느껴집니다. 그 외에 헤롯왕과 예수님을 직접 잡으러 갔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른 사람들, 머리에 가시관을 씌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냐바와 예수님을 두고 예수님을 죽이라고 외쳐댔던 민중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도신경은 본디오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인물로 고백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본디오 빌라도는 어떤 잘못을 했길래 무수한 사람들을 제치고 책임을 받고 있습니까?
첫째, 그는 진리를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살던 시대에 유대라는 곳은 특별했습니다. 당시 로마는 다신교 사회였습니다. 로마가 다신교가 된 배경은 전쟁을 통해 영토를 확장한 나라로 모든 군인들에게는 항상 전쟁에 대한 공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신을 믿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힘이 센 신을 믿었습니다. 로마 병정들의 장신구에는 온갖 신을 표현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신이 자신들을 보호해 준다고 믿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대만은 유일신 이신 하나님만을 믿고 있었습니다. 로마의 황제도 이곳을 특별하게 생각했고 그곳을 방문하는 사람들도 특별하게 생각했습니다. 빌라도는 클라디오 황제의 칙령을 받고 유대에 와서 10년 동안 집정관으로 행정을 맡고 있었습니다. 탁월한 행정가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으로 몰고 있다는 사실 조차 깨닫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 안다”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질문합니다, “진리가 무엇인가?” 그는 진리가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그는 당시 최강국 이었던 로마의 총독으로 집정을 하던 사람이었지만 진리를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참 진리를 십자가에 못 박는 어처구니 없는 일을 한 역사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진리를 알 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 32).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는 존귀한 인생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둘째, 그는 정직하게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고백했습니다,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했노라”(38절). 예수 그리스도를 심문한 결과 아무런 죄를 찾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고 정직하게 사실대로 말했습니다. 현대 터어키에 가면 성 소피아 사원이 있는데 그곳에는 ‘빌라도의 보고서’ 라는 50쪽 가량의 기록이 있습니다. 보고서에는 당시 빌라도가 겪었던 정치적인 갈등, 예수님을 만났을 당시의 모습,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내용들이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보고서는 빌라도를 예수님에 대해 적대심이나 저항심이 없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에게 많은 자유를 주었다고 적혀있습니다. 유대 지방을 마음껏 다닐 수 있는 자유를 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만났을 때 그의 권위에 눌려 벌벌 떨었다고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아무런 죄를 찾지 못했지만 유대인들이 그를 설득하려는 모습도 기록에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음 당한 예수 그리스도의 소식을 듣고 그는 안타까워했고 삼일 후 부활한 사실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 인 것을 인정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간적인 면에서 그는 정직하게 말하고 생각했을 줄 모르나 그러나 행동은 정직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폭동이 일어날것을 우려해 예수 그리스도의 처형을 허락했습니다. 폭동이 일어나면 자신의 위치가 위험해 질것을 염려해서 허락한 행동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정직한 말은 있었으나 정직한 행동은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몇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첫 째, 내 생각과 달라도 진리는 반드시 붙잡아야 합니다. 여기서 진리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이 진리로부터 힘이 생기고 역사가 생기며 새로운 세계가 생깁니다. 빌라도는 바로 이 진리를 몰랐기 때문에 모든 것을 소유한 것 같았으나 몰락하고 말았습니다. 진리는 나와 맞이 않을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도전이 되고 자극은 되지만 따르지 않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를 붙잡고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선택하는 길이 옳은 길인 것처럼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이라고 해도 진리가 아니라면 돌아설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남은 인생 중 아무리 생각이 다르고 뜻이 달라도 진리를 붙잡고 순종하며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 째, 두려움을 새로운 도전에 촉매제로 삼아야 합니다.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 3:10). 이 말씀의 뜻은 인간이 죄를 짓고 최초로 표출한 감정은 두려움 입니다. 죄를 짓는 모든 환경에서는 끊임없는 두려움이 우리를 엄습할 것입니다. 사과나무에 사과가 다 떨어져도 분명히 사과나무 입니다. 나무를 다 치고 밑둥만 남아도 여전히 사과나무 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아무리 착하고 선한 일을 많이 해도 죄인 입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반복해서 죄를 짓습니다. 죄악이 있는 곳에서는 두려움이 끊이질 않습니다. 두려움은 더 이상 우리를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인생에 두려움과 염려가 닥쳤을 때 오히려 친구로 삼고 동행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두려움을 멀리 한다고 이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사랑이 두려움을 이긴다” 라고 말씀합니다. 온전한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뿐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인 진리를 붙잡고 두려움과 동반자가 되어 인생에 도전과 자극을 삼고 그것들을 극복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본디오 빌라도는 자신의 자리를 연연하고 그것이 없어질까 두려워한 나머지 두려움에 패해 역사에 치욕적인 인물로 남게 되었습니다.
교육 전문가인 조 레이놀즈(Joe Reynolds)는 말했습니다, “놀랍게도 두려움은 생각지도 않은 힘을 우리에게 던져준다”. 콜린 파월(Collin Powell)장군은 그의 책 ‘열 세가지 성공법칙(Leadership Secrets of Collin Powell)’ 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두려움이나 반대자의 의견을 두려워하지 말라”. 루즈벨트 대통령(Franklin D. Roosevelt)은, “인생은 할 수 없다고 생각한 일을 하는 것이다” 말하고 언제나 할 수 없는 일이 닥쳤을 때 두려움을 이겨냈다고 합니다. 진리 되신 예수님을 이 땅에서 믿고 산다는 것은 두려움을 오히려 도전으로 삼고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기회로 만드는 것입니다. 두려움에 짓눌리고 그것 때문에 판단력이 흐려질 때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더 큰 우를 범하게 됩니다. 두려움을 두려워하지 않고 언제나 우리와 동행 하는 것이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할 때 참다운 승리의 인생이 될 것 입니다.
셋 째, 실패와 패배를 통해서 배워야 합니다. 승리자에게 승리가 항상 옳은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패배자라고 패배의 모습이 항상 나쁜 것은 아닙니다. 볼프 슈나이더의 ‘위대한 패배자’ 책에서 저자는, “나는 패배자들을 좋아한다. 장애인, 외국인, 뚱뚱해서 놀림을 받은 친구들은 말할 것도 없이 누구도 춤추려 하지 않는 모든 이들을 사랑하고 있는 그 자신이 패배자들의 사랑하는 모습” 이라고 했습니다. 인생을 실패하고 패배한 사람들은 사랑하는 모습을 읽을 수 있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서 본디오는 마치 승리자 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에게 심문을 받고 있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는 초라하기만 합니다. 어쩌면 실패한 인생이며 아무런 저항도 없이 죽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영원한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잡지 못하고 산 사람과 그것은 잡고 산 사람은 역사가 흐른 뒤 영원한 실패자요 영원한 성공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랬던 것처럼 진리를 붙자고 살다 보면 어렵고 때로는 실패한 것 같기도 하지만 그것은 승리하는 길이고 인생을 가장 위대한 것으로 만들어 주는 길 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언제나 진리를 붙잡고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떤 두려움이 와도 오히려 두려움을 벗 삼아 이겨내는 삶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실패를 통해서도 지혜를 얻는 존귀한 인생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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