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설교문 모음/베드로서 설교 모음

베드로후서 1:1 - 4절 설교 모음

by Jessi J 2025. 1. 2.
728x90
반응형

 

 

참 믿음, 거짓 믿음 /벧후1:1-4

2024-04-13 00:45:54

 

한국의 TV프로그램중에 12일이라는 예능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복불복게임을 통해서 상과 벌을 주게 됩니다. 그중에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게임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진짜 커피와 까나리가 들어있는 가짜 커피 중에서 진짜를 찾아내거나, 사이다와 소금물 중에서 진짜 사이다를 찾아내거나, 토마토쥬스와 캡사이신쥬스 중에서 진짜 토마토쥬스를 찾아내는 게임입니다.

 

이러한 쥬스들은 눈으로만 보면 거의 구분하기 힘듭니다. 결국은 맛을 보고 나서야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확인하게 됩니다. 시청자들은 출연자들이 가짜를 진짜로 알고 마셨을때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재미있어 합니다.

 

그런데 신앙의 세계에서도 진짜 믿음과 가짜 믿음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까나리가 들어있는 가짜 커피나 소금물이나 캡사이신을 마셨을 때에는 물로 입을 행구고 시간이 지나면 별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세계에서 가짜에 속아 넘어가는 일은 복불복게임처럼 그냥 웃어 넘기기에는 정말 심각한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의 세계에서 가짜에 속게 되면 잠시 고통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멸망을 당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후서 전체를 통해서 참 믿음이란 무엇이며 거짓 믿음이란 무엇인지 즉 진짜 믿음과 가짜 믿음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먼저 베드로는 참 믿음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1:1을 읽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기적중의 하나는 지금 내가 예수님을 믿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베드로는 우리가 갖고 있는 믿음은 그냥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이며 그래서 보배로운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믿음이 그렇게 귀하고 보배로운 이유는 내 안에 그러한 믿음이 생기게 되면 내 모습이 놀랍게 변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믿음이 생길때 내 안에 어떤 변화가 생기게 되는지 베드로후서 1:4를 읽겠습니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우리 안에 참 믿음이 생기게 되면 놀랍게도 신성한 성품이 생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개역성경은 신성한 성품을 신의 성품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 안에 믿음이 생길때 나타나는 가장 큰 변화는 우리의 성품이 신의 성품 즉 하나님의 성품으로 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 신의 성품 즉 하나님의 성품을 갖게 되면 어떤 특징들이 나타나게 됩니까? 베드로는 구체적으로 베드로후서 1:5-7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참 믿음이 내 안에 생기게 되면 7가지 새로운 성품들이 생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새로운 성품들은 우리가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저절로 생기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믿음 안에는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만들어 낼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믿음을 가진 신자들에게 더욱 힘쓰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첫번째 믿음에 무엇을 더하라고 했습니까? 덕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고 난 이후의 내 모습은 믿기 이전의 내 모습과는 뭔가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복음을 전해도 전도가 잘 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과 예수를 믿는 사람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성형수술을 하는 병원에서 많은 고객이 자신의 병원에 오게 하려면 어떤 광고가 효과적이겠습니까? 성형수술 이전과 성형수술 이후의 사진을 동시에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형수술후 이후의 얼굴모습이 너무나 예쁘게 변해 있으면 많은 사람들이 그런 병원을 찾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기 이전에는 이유없이 화를 잘 내고 사람을 잘 때리던 사람이 온유한 성품으로 변하거나 게으른 사람이 부지런하고 성실한 사람으로 변했다면 주변 사람들이 크게 놀라지 않겠습니까? 저 사람이 예수를 믿고 나더니 많이 변했구나!라며 칭찬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신자들에게 참 믿음이 있다면 믿기 이전과는 달리 변화된 말과 행실을 갖도록 힘쓰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을 덕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럼 덕에 무엇을 더하라고 했습니까? 지식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식은 단순히 누구에게 가면 좋은 집을 싸게 살수 있다거나, 어느 의사에게 가면 병을 잘 고치더라라고 하는 어떤 정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지식을 더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무슨 일을 행하셨는지, 왜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지, 예수님을 믿는 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등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속에서 반드시 알아야 하는 진리를 사모하고 열심히 배우기 위해서 힘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생기게 되면 갓난아이가 엄마의 젖을 사모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사모하고 열심히 배우고 싶어하는 열망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야 할 시간에 TV앞에 앉아 있거나 게임에 빠져 있지는 않습니까?

 

저는 우리 모두 바울처럼 다음과 같이 고백했으면 좋겠습니다. 빌립보서 3:8을 읽겠습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바울은 신약성경을 절반 가까이 기록했지만 예수님을 아는 지식을 항상 사모하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지식에 무엇을 더하라고 했습니까? 절제입니다. 절제를 잃어버린 사람은 마치 브레이크가 고장난 자동차와 같습니다. 그래서 음식을 먹을때 절제하지 못하면 과식을 하게 되고, 또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 절제를 잃어버리면 쉬지 못하게 되어 건강을 해치게 됩니다. 즉 절제라는 브레이크가 고장나면 욕심과 욕망에 사로잡히게 되고 유혹에 쉽게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절제는 내 마음대로 내 욕심대로 내 뜻대로 하고 싶어도 하나님의 말씀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으려는 노력과 결단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 열매를 먹으면 하나님처럼 된다는 마귀의 거짓 유혹이 있었을때 절제를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선을 넘어 결국 범죄하게 된 것입니다.

 

그럼 절제에 또 무엇을 더하라고 했습니까? 인내입니다. 바울은 말세의 특징중의 하나가 조급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상대방의 말을 다 듣기도 전에 쉽게 남을 판단하고 쉽게 다투고 싸우기를 잘합니다. 또 상대방이 작은 실수만 해도 쉽게 비난하거나 실망해 버립니다. 여유를 가지고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또 하나님이 내 기도에 빨리 응답해주시지 않으면 쉽게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사실 우리가 이렇게 멀쩡히 살아있는 것도 하나님이 오랫동안 참고 인내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내는 구원을 얻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합니다. 즉 믿다가 중간에 포기하고 중단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과거의 믿음이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믿음이 나를 구원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인내에 무엇을 더하라고 했습니까? 경건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도 부모님을 잘 공경하고 가정에 충실하며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갈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사람도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은 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미워하고 죽이는 것도 큰 죄이지만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하지 않는 것은 더 큰 죄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경건한 삶이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바르게 살아갈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지막으로 형제 우애와 사랑을 더하라고 했습니다. 형제 우애는 특별히 교회안에 형제자매들을 육신의 가족처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은 믿음안에서 하나님을 한 아버지로 모시고 있는 한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랑은 가족과 교회안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바깥 이웃에게까지 흘러넘쳐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특징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면 나타나야 하는 신성한 성품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품은 있어도 괜찮고 없어도 괜찮은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후서 1:9을 읽겠습니다. “이런 것이 없는 자는 맹인이라 멀리 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느니라이런 것이란 지금까지 살펴본 성품들을 의미합니다. 그런 성품이 없으면 아직 영적으로 맹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영적인 맹인의 대표적인 사람으로 교회를 어지럽게 만든 거짓 선생들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거짓 선생들의 특징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2:1을 읽겠습니다. “그러나 백성 가운데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그들은 멸망하게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거짓 선생들의 가장 큰 특징은 거짓말을 만들어내고 그 거짓말을 다른 사람들이 믿도록 유혹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여호와의 증인이나 몰몬교같은 이단도 문제이지만, 자신의 생각이 마치 하나님의 생각인 것처럼 주장하거나 헛소문을 이 사람 저 사람에게 퍼트리는 사람도 문제인 것입니다.

 

베드로 당시의 거짓 선생들은 예수님의 재림은 더 이상 없다는 거짓말을 가르쳤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더 이상 죄의 심판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무리 죄를 지어도 부끄러워하지도 않았고 회개하지도 않았습니다.

 

베드로후서 2:10을 읽겠습니다. “특별히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는 형벌할 줄 아시느니라 이들은 당돌하고 자긍하며 떨지 않고 영광 있는 자들을 비방하거니와거짓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죄에 빠져 살면서도 부끄러워하거나 회개하기는 커녕 오히려 더 당돌하고 교만하며 죄를 짓는 일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특징을 베드로후서 2:14에서 확인하겠습니다.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저주의 자식이라

 

죄를 짓는 일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죄 짓는 일이 습관이 되고 훈련이 되어서 죄의 전문가가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자신만 망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굳세지 못한 영혼 즉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을 유혹하여 함께 멸망의 길로 이끌고 간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말씀을 들으시고 참 믿음과 거짓 믿음을 구분하실수 있겠습니까? 참 믿음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게 하지만 거짓 믿음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거짓말로 유혹한 사탄 마귀의 모습을 닮아가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믿음은 어떤 종류의 믿음입니까?

 

내가 어떤 종류의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사실은 말로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나의 성품이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지를 잘 살펴보면 내가 말하지 않아도 또 내가 설명하지 않아도 알수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러한 믿음과 함께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갈수 있도록 하는 능력도 함께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기 위해서 날마다 힘쓰고 애쓰고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내가 가진 믿음이 거짓 믿음이 아니라 참 믿음이라는 사실을 말이 아닌 삶으로 증명해 보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믿기 이전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새로워진 모습을 통해서 믿음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멸망이 아닌 구원으로 인도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에도 진짜와 가짜가 있듯이 믿음의 세계에도 참 믿음과 거짓 믿음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가짜가 진짜인 것으로 속임을 당하면 잠시 괴로울수 있지만 믿음의 세계에서는 가짜에 속으면 영원한 고통과 멸망에 빠질수 있음을 깊이 생각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 믿음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참 믿음을 갖게 되면 신의 성품 즉 하나님의 성품을 가진 성숙한 사람으로 점점 변화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거짓 믿음은 거짓을 믿으며 죄를 지어도 부끄러워하거나 회개하기는 커녕 오히려 당돌하고 교만하며 죄를 지어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믿음이 연약한 사람을 유혹하여 함께 멸망의 길을 간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시간 저희는 우리가 참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입으로만 말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며 삶을 통해서 증명하며 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믿기 이전과는 전혀 다른 우리의 새로워진 성품을 통해서 믿음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구원의 생명으로 인도하는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저희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예물을 드립니다. 또한 저희에게 주신 물질과 시간과 은사를 형제자매들과 이웃들을 사랑하며 섬기는 일에 귀하게 사용하며 살게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신앙생활의 셈본 /벧후1:1-11/ 이재철목사

2015-07-27 16:55:37

 

벧후 1:1~11

 

1. 예수그리스도의 종이요 사도인 시므온 베드로가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서 우리의 믿음과 같은 귀한 믿음을 받은 이들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2.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써,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더욱 풍성하여지기를 바랍니다.

 

3.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를 앎으로 말미암아 생명과 경건에 이르게 하는 모든 것을, 그의

권능으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셔서 그의 영광과 덕을 누리게 해주신 분이십니다.

 

4. 그는 이 영광과 덕으로 귀중하고 아주 위대한 약속들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은

이 약속들로 말미암아 여러분이 세상에서 정욕 때문에 부패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5. 그러므로 여러분은 열성을 다하여 여러분의 믿음에 덕을 더하고, 덕에 지식을 더하고,

6. 지식에 절제를 더하고, 절제에 인내를 더하고, 인내에 경건을 더하고,

 

7. 경건에 신도간의 우애를 더하고, 신도간의 우애에 사랑을 더하도록 하십시오.

8. 이런 것들이 여러분에게 갖추어지고, 또 넉넉해지면,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게으르거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9. 그러나 이런 것들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근시안이거나 앞을 못 보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의 옛 죄가 깨끗하여졌음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10.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더욱 더 힘써서,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은 것과 택하심을 받은 것을 굳게 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11. 또한 여러분은,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충분히 갖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본문 1절에 기록되었듯 베드로가믿음을 가진 성도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본문을 깊이 묵상하면서이것이 하나님의 셈본이구나!’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요즘에는산수라고 쓰는 말을, 옛날에는셈본이라고 했습니다.

이 셈본에는 4천만이 다 아는더하기, 빼기, 곱하기, 나누기라는 기본공식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셈본 즉, ‘가감승제(加減乘除)의 법칙이 있습니다.

 

첫째, 곱하기(×)

2절에더욱 풍성하기를 바랍니다.’라는 말씀은, 영어성경에 보면 multiplied(곱하였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둘째, 나누기(÷)

3, 4절에 반복되는우리에게 주셨습니다.’라는 말씀에는나누어주셨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셋째, 더하기(+)

5, 6, 7절에 반복된 말씀 그대로입니다. ‘더하고, 더하고, 더하고...’

 

넷째, 빼기(-)

10택하심이란 말씀을 최초의 한글 성경에 보면빼어내셨다라고 표현돼 있습니다.

 

이처럼 오늘 본문은, 이미 믿음이 있는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로신앙생활의 셈본에 대해

자세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신앙생활의 셈본

 

신앙생활의 곱하기 (2)

 

본문 2절에 은혜와 평화가더욱 풍성하여지기를 바랍니다.’라는 말씀을,

개역성경에는 은혜와 평강이많을 지어다영어성경에는 ‘multiplied’ 즉 곱하여진다!

즉 은혜와 평강이 자꾸 자꾸 넘쳐난다는 뜻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은혜와 평강이 무엇입니까?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6:25~26)

은혜와 평강은 주님의 얼굴을 뵈올 때 찾아오는 것이며, 넘쳐나는 것입니다.

 

신실하게 주님의 얼굴을 바라볼 때, 우리 안에 은혜와 평강이 넘쳐나는 축복,

즉 신앙생활에 있어 곱하기의 복이 넘치는 2007년이 되시기 바랍니다.

 

 

신앙생활의 나누기 (3~4)

 

3, 4절에 반복되는 우리에게주셨습니다.’라는 표현을 영어성경에 보면

3절에는 ‘give (거저)주다’, 4절에는 ‘share 나누어주다로 각각 기록돼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나누어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 믿으면 죄 사함 받고, 거룩함 입어 천국에 갑니다!’

 

이 보배롭고 귀한 약속을 우리에게 나누어주시려고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말씀, 구원의 약속을 전파하는 선교사로 오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본을 보여주신 것처럼,

우리도 선교에 힘써야 합니다. 구제에 힘써야 합니다.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기에 힘써, 주님 나라로 인도해야 합니다.

거룩한 나눔이 신앙생활의 두 번째 셈본입니다.

 

 

신앙생활의 더하기 (5~7)

 

우리의 신앙과 믿음은 성장하고 성숙해야 합니다.

믿음이 성장하지 않고, 계속 어린아이의 단계에 머물러 있으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성장을 넘어 성숙의 단계까지 이르러야 하는데, 그 성숙의 목표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 4:13)"입니다.

 

본문을 기록한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의 성숙의 로드맵을 이렇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더하고, 더하는...’ 법칙입니다.

 

덕은, 약하고 힘없는 자들에게 양보하고 물러설 줄 아는 마음입니다.

지식은,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지식입니다.

 

인내와 절제는, 성령의 열매로써 참고 또 참는 것입니다.

경건은, 헬라어로유세베이안으로, ‘하나님을 잘 섬기고 예배하는 마음이라는 뜻입니다

신도간 우애는, ‘필라델피아라는 말로 성도들 간의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 성도들의 본문은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꾸더하고 더하는신앙생활의 셈본을 통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성장과 성숙이

삶속에 구체적 나타나길 소망합니다.

 

 

신앙생활의 빼기 (10)

 

최초의 한글성경에는 10절 말씀이부르심과 빼어내심을 진지하게 생각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왜 우리 같은 사람을 목사로, 장로로, 혹은 목자로 빼어내셨을까요?

 

우리는 자신의 실상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알고 계신 하나님께서 쓰시기 위해, 빼내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 중에 우리를 파내고, 떠내서 사명까지 주셨습니다.

 

우리는나 같은 사람을 빼내어 써주시는 주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빼내어 사명자로 써주시는 은혜!’ 신앙생활의 네 번째 셈본입니다.

 

본문을 통해 말씀하신 더하고, 빼고, 곱하고, 나누는 신앙생활의 셈본을 실천에 옮겨,

성장하고 성숙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 가시기를 바랍니다.

 

 

 

거듭난 새사람 /벧후1:1-4

2009-05-06 10:46:45

 

파키스탄의 어느 시골에 큰 맷돌을 가는 소가 있었습니다. 맷돌 주위를 빙빙 돌면서 맷돌질을 하는데 가만히 보니 눈이 가려져 있어요. 주인에게왜 소의 눈을 가렸습니까?” 하니소가 매일 같은 곳을 도는 줄 알면 지쳐서 일을 하려 하질 않습니다. 눈을 가리면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계속 돌면서 맷돌질을 잘 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하더랍니다.

 

사람도 때로는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인생의 방향이 어디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왜 살아야 하는지를 모르고 마냥 달리기만 합니다. 노벨상수상자인 헤밍웨이는인생에는 목적이 없다. 인생이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물을 필요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노벨 문학상까지 받은 사람이 그렇게 말한 것은, 그가 똑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한 번밖에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게 영적 생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헤밍웨이를 만나셨다면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당신은 물과 성령으로 한 번 더 태어나야 인생의 의미를 알게 됩니다. 당신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한 번 더 태어나야 한다고 한 말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시오. 인간은 반드시 한 번 더 태어나야 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는 우리가 부모로부터 한 번 태어나 이 땅에 살다가 어느 시점에서 하나님이 주신 영원한 생명을 받아 영적으로 한 번 더 태어나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오늘은 사람이 한 번 더 태어나면 어떤 존재가 되는지 나누고자 합니다.

 

본문 4절 끝에 보면, 하나님께서 거듭난 자에게신의 성품’(divine nature), 즉 하나님의 성품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즉 새로운 성품(new nature), 새로운 본질을 주십니다. 사람은 누구나 인간의 본성, 즉 죄성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요, 부모로부터 생명을 받은 사람은 누구나 그 속에 이미 죄성이 들어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은 죄성에서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사도바울도 우리가본질적으로(by nature) 진노의 자녀들이었다고 선언합니다(2:3). 죄성을 가지고 태어나 죄를 범하고 죄의식을 지니고 살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썩어져 가는 이 세상의 습관을 따라 살다가 결국 몸도 마음도 영혼도 망가져 하나님 없이 영원히 죽게 되는 것이 인간의 본질입니다.

 

어린이를 하나하나 개인적으로 보면 아주 착하고 사랑스럽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밖에 나가 또래들을 만나면여럿이 모였으니 동네를 위해 좋은 일을 하자!” 하지 않고 나쁜 생각을 하는 경향성이 있습니다. 멀쩡한 아이가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다 보면 엉뚱한 짓을 합니다. 가게에서 슬그머니 물건을 훔쳐 나오다가 경비원에게 들켜서 집으로 연락이 옵니다.

 

당신 아이가 우리 가게에서 물건을 훔쳤으니, 아이를 데리러 오십시오!” 부모로서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지요. “아니, 내 아이가 얼마나 착한데 그런 일을 하다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내 아이는 그럴 아이가 아닌데 친구를 잘못 만나서 그렇다고 생각하며 당황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를 돌이켜보면 착한 아이였어요. 어머니께서 바느질하실 때 항상 옆에서 도와드렸고, 학교에서는 우등생이고 말썽 한번 부린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정말 잘못한 것이 한 가지 생각납니다. 지나가는 사람을 새총으로 쐈습니다. 어떻게 제가 그런 짓을 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어요. 친구랑 둘이 숨어 있다가 지나가는 사람을 쐈는데, 그 사람이 얼마나 놀랐겠어요.

 

어디서 돌이 날아왔는지도 모르고 두리번거리며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재미있던지! 여러분, 제가 그런 짓을 한 아이처럼 보입니까? 그러면서도 주일에는 성경 들고 교회에 갔습니다. 만약 그 때 저희 부모님께서 아셨다면우리 상복이가 그런 짓을 하다니!”하고 통곡을 하셨을 것입니다. 저는 어떻게 그때 그런 생각을 했는지 지금도 이해할 수 없어요.

 

어린 아이가 누가 시켜서 그런 행동을 할까요? 부모님이 저에게 그런 짓을 하라고 시키신 적이 없습니다. 특히 제 어머니는 우리 입술에 좋지 않은 단어 하나라도 올라가면 용서치 않으셨어요. 그렇게 철저한 교육을 받았는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요? 죄성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한 번 더 태어나 새로운 하나님의 성품을 받지 않으면, 우리는 죄인으로 살다 죄인으로 끝나고,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영원한 사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한 번은 점잖은 의사들 여섯 분이 모인 자리에서 전도를 했습니다. “인간은 다 죄인입니다라고 했더니, 한 분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푹 숙이셔요. 잠시 후에 귀에서 연기가 막 피어오르더군요. 그래서교수님, 화가 나셨군요!”했더니 고개를 번쩍 들면서왜 날보고 죄인이라고 합니까? 내가 뭘 잘못했소?”라고 소리를 지르셨어요. 그래서 제가 설명을 했습니다. “성경에서 죄라는 말이 무슨 큰 악을 저질렀다는 것이 아니라 완전하지 못하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하나님의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며, 과녁을 향해 쏘기는 쏘는데 잘 맞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분 얼굴이 점점 펴지기에 제가 농담을 했습니다. “박사님이 완벽한 사람인지 아닌지 교수님 부인에게 한 번 물어볼까요?” 했더니뭐 그런 걸!”하면서, 죄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인정하고 수긍을 하시더군요. 감사하게도 그분이 예수를 믿어 좋은 신앙인이 됐고 얼마 전에 신문을 보니 모교인 연세대학에 10억원을 기증했더군요. 사람이 달라졌습니다. ? 새로운 성품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거듭나면 우리 속에 하나님의 본질이 생깁니다. 하나님을 가장 완벽하게 닮은 분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질 수 있었던 예수님입니다.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고 그 안에 있는 영생을 받아들이면 그때부터 점점 하나님의 성품이 우리 안에 나타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되지는 못하지만 하나님의 성품을 받아서 성장하면 점점 예수님을 닮아갑니다.

 

인간은 죄성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존재입니다. 사도바울도 절규하였습니다. “오호라 나는 비천한 사람이로다. 선을 행하고 싶은데 잘 되지 않고, 악을 피하고 싶은데 자꾸 나타나는구나. 도대체 나는 왜 이럴까? 내 속에 있는 죄성 때문이구나. , 나는 정말 피곤하고 비천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 나를 가만히 두면 결국 영원히 죽고말 텐데, 누가 여기서 나를 건져내랴!”(7:24-25). 그러나 이어서 그는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8:1)고 선언합니다. 예수를 만났을 때 새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성품을 주십니다. 만지거나 사진을 찍을 수는 없어도, 죄를 고백하고 예수를 믿고 영접하면 영원한 하나님의 성품이 여러분 안에 나타나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 새로운 성품을 성장시켜 시간이 갈수록 예수님을 닮아가는 축복이 우리에게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인간이 거듭나면 새로운 피조물(new creation)이 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주께서 우리를 새롭게 만드셨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이전의 모든 것이 다 없어진다는 말은 아닙니다. 과거의 잘못된 것들이 새로워진다는 말입니다. 내 속의 욕망이 거룩한 욕망으로 바뀌고, 나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사용했던 재능이 성령의 은사가 되어 하나님을 위해 사용됩니다. 내 것이던 재산은 하나님의 것으로 바뀌고, 성은 타락한 쾌락을 위해 사용되지 않고 성화되어 가정생활을 원만하게 만드는 행복의 요소가 됩니다. 창조적 에너지로 변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릴 때, 우리의 옛 것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그것을 받아 새롭게 변화시켜 우리에게 돌려주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새롭게 창조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에는 육체가 우리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은 후 이 육체가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육체의 뜻이 달라졌습니다. 육체를 내 마음대로 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쓰게 됩니다. 어느 연세가 많으신 분이 평생 담배를 피우시다가 얼마 전에 우리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설교를 듣고 당장 끊었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혀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기도하고 하루 만에 끊었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내 속에 들어와 계신 줄 알게 되니 이렇게 변하여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거듭나면 속에 새로운 마음(new heart)이 생깁니다.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찌라”(36:25-27).

 

저도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고 거듭난 이후에도 한동안은 좋지 않은 것을 향한 예전의 경향이 남아있어서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점점 달라지면서 힘들지 않게 되었고, 내가 달라지는 것을 보면서새 마음’(new heart)을 주신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내 멋대로 살려는 돌처럼 굳은 마음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싶은 마음을 발견합니다. 여러분도 이런 체험을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새로운 마음을 주신 것을 감사하며 사십시다. 하나님의 법을 순종하는 것이 쉬워집니다. 어렵지가 않습니다.

 

또한 거듭나면 새로운 관계(new relation)가 성립됩니다. 요한복음 1 12절에 “(예수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 (예수님과 1 1의 관계를 맺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하신 것처럼 예수님과 새로운 개인적 관계가 형성됩니다. 예수 믿기 전에 예수는 그저 유대인이고 기독교의 창시자일 뿐입니다.

 

제가 중학교 2학년 때 주일에 학교에 나오라고 하더군요. 저는 담임선생님을 찾아가서저는 주일에 교회에 가야 하기 때문에 학교에 못 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선생님은이 똑똑한 아이가 왜 이렇게 되었지?’하는 얼굴로 저를 불쌍하게 보시면서상복아, 너 그렇게 예수 믿으면 안 돼! 예수님은 옛날에 갈릴리의 목수였고 기독교의 창시자일 뿐이야. 학교에서 매 주일마다 나오라는 것도 아닌데, 예수 믿는다고 학교에 안 오면 안 돼!”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저는 그 선생님이 얼마나 불쌍해 보였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을 그저 기독교의 창시자 정도로 밖에 모르니 얼마나 불쌍합니까! 예수님을 영접하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나의 영원한 구원자가 됩니다. 내 일생의 모든 죄를 다 덮어주시고 내게 부활과 생명을 주시는 구주가 되십니다. 관계가 달라집니다. 새로운 관계가 됩니다.

 

또한 거듭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습니다. ‘권세는 권리를 의미합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하셨다는 것입니다. 양자의 권리지요. 여기에서하나님의 자녀 'the children of God'으로 복수형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의 가족이 되고 갑자기 수많은 형제자매가 생깁니다. 우리 교회뿐 아니라 대한민국, 전 세계의 23억 인구가 내 형제자매가 됩니다. 세상 어디를 가도 내 형제가 있고 자매가 있습니다. 예전에는 예수 믿지 않는 친구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믿는 친구들이 많아집니다. 새로운 관계들이 점점 늘어납니다. 신앙의 형제자매들은 만나면 금방 알아보고 서로 좋아합니다.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고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원자가 되고 믿는 사람들이 전부 내 형제가 되어 어느 나라 어디를 가도 외롭지 않습니다.

 

제가 처음 미국에 갔을 때는 참 외로웠습니다. 방학 때 큰 학교 건물에 혼자 있으면내가 왜 여기 와서 이렇게 사는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빵과 우유를 먹을 때는 밥 생각이 간절해지고 힘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주일에 미국 사람들의 교회에 갔더니 내가 잘 아는 사도신경을 암송하고 기도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찬양을 하고 설교를 하더군요. 그 때, 내가 집에 왔구나. 여기도 내 형제, 내 친척들이 이렇게 많구나!’하고 느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새로운 관계가 형성됩니다. 여러분은 이 좋은 새로운 관계들을 많이 누리시기 바랍니다.

 

또한 거듭나면 새로운 통찰력(new insight)이 생깁니다. 요한복음 3 3절 말씀은 거듭나면 하나님의 나라, 영적인 세계가 보인다고 말씀합니다. 기도가 무엇인지 알게 되고 성경말씀이 좋아지고 깨닫게 됩니다. 설교가 들립니다. 기도를 할 때마다아멘!” 소리가 나옵니다. ? 느끼고 깨닫고 새로운 통찰력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조금씩 깨달으면서 점점 발전하는 것입니다. 심지어고난마저도 내게 유익이라. 내가 이 시련을 거치고 나면 정금과 같이 빛나리라는 욥과 같은 고백이 됩니다. 고난 중에도 의미를 찾고 희망이 보이고 앞이 보입니다. 새로운 통찰력이 생깁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거듭나면 새로운 도덕적 경향(new ethical inclination)이 생깁니다. 예수를 만나서 새 생명을 얻으면 우리 속에서 이상하게 악이 점점 싫어집니다. 하나님과 선이 좋아집니다. 새로운 도덕적, 윤리적 성향이 생깁니다.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4:23).

 

형제자매들이 다 내 가족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아요. 하루아침에 달라지지는 않지만 시간이 감에 따라, 신앙생활을 함에 따라,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점차 변해갑니다.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며 선한 일을 하라.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4:28-29).

 

우리가 잘 아는 성 어거스틴은 젊었을 때 망나니짓을 하고 살았습니다. 결혼도 하지 않았을 때 아이를 낳아, 그 이름을 하나님이 사랑한다는 뜻의 데오필러스(Theophilus)라고 지었던 사람입니다. 그가 예수를 믿은 후 어느 날 옛날에 알던 술집 여자가 길에서 그를 알아보고 왜 자기를 보러 오지 않느냐고 하자옛날 어거스틴은 죽었다. 나는 새 사람이 되었어!”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새 사람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새로워져서 선과 악을 구별하고 예수님을 닮아가며, 가정과 이웃과 직장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날마다 드높이며, 주님께서 주신 축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신성한 성품을 가진 교회 /벧후1:1-4/ 김경진 목사

2023-12-17 14:15:32

 

< 어떤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까? >

 

여러분에게 만일 연인이 있다면, 어떤 조건을 가진 연인이면 좋겠습니까? 최근 한 연구저널에 실린 내용입니다. 스완지대학에서 연구를 실시했습니다. 세계 59개 국 2400여 명의 젊은이를 대상으로 조사했습니다.

 

연구진은 참가자들에게 평생 함께할 배우자가 지녔으면 하는 부분이 무엇인지 물으며, 한정된 예산을 주고 그것을 구매할 수 있다고 가정한 후에 자신이 원하는 것에 얼마를 투자할지를 결정하게 했습니다. 젊은이들은 한정된 예산으로 여덟 가지 조건 가운데 자신이 투자할 만한 것들에 값을 매겼습니다. 신체적인 매력, 재정적인 전망, 다정함, 유머, 순결, 종교, 자녀계획, 창의성이라는 여덟 가지 항목 중에서 우선시되는 게 무엇인지, 또 그것에 얼마를 투자하고 싶은지를 결정하게 한 것입니다. 어떤 결론이 나왔을까요? 무엇이 1위를 차지했을까요?

 

흥미로운 결과가 나왔습니다. 참가자들이 전체 예산 중 가장 많이 투자하려고 한 항목은 남성과 여성 모두가 동일하게 나왔습니다. 1위를 차지한 것은 다름 아닌다정함이었습니다. 22~26%를 차지했습니다. 아마 남성이 26%, 여성이 22%를 투자하겠다고 한 것 같습니다.

 

한편 남성과 여성이 다르게 나온 결과도 있었습니다. 2위가 달랐습니다. 남성은 여성의 신체 매력에 22%, 여성은 남성의 재정적인 전망에 18%를 투자하겠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남성은 여전히 여성의 신체적인 매력에 관심이 있고, 여성은 여전히 남성의 재정적인 전망에 관심이 있다는 결과치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흥미로운 것은 그들이 첫 번째로 꼽은 것입니다. 남녀 모두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인생의 동반자가 될 사람에게서 가장 원하고 기대한 것이 바로 상대방의 다정한 성품이었던 것입니다. 젊은이들이 많이 지혜로워졌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러한 질문을 대상을 바꿔 적용해 봅니다. ‘어떤 조건을 가진 교회를 선호할까?’ 하고 말입니다. 교회에는 여러 다양한 기능이 있습니다. 다양한 일도 감당합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인들이 교회에 원하는 모습은 정말 어떤 모습일까? 만약 투표를 한다면, 혹 투자의 방식으로 접근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하는 궁금증도 생깁니다.

 

사실 이러한 질문이 적절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감당해야 하므로, 무엇보다 하나님의 뜻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것과 다를 수도 있고, 또 달라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우리가 원하는 게 무엇인가를 묻는 것은 적절한 질문이 아닙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에게교회가 어땠으면 좋겠는가?’ 묻는다면, 아마 나름대로의 생각과 기준, 의견이 있을 것입니다. 어떤 교회가 되면 좋겠는지에 대한 생각도 표출할 수 있을 것입니다.

 

 

< 교회는 다양한 관점에서 이해되고 기대될 수 있습니다. >

 

지금까지교회는 어때야 하는가? 교회는 어떤 일을 하는 곳인가?’라는 질문에 수많은 대답이 있었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잘 아실 것입니다. 우선 첫 번째로교회는 방주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죽어가는 많은 사람의 영혼을 구원해 내는 일이야말로 교회가 감당해야 할 일이라고 여기며, 구원을 담당하는 일이 교회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교회에 나오도록 하고, 세례를 받아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게 하는 것이야말로 교회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명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입니다. 그래서 이런 분들에게 교회의 모습 중에서 가장 중요한 모습은 얼마나 전도를 많이 하고 있는지, 얼마나 세상 사람들을 구원의 자리로 초청하고 있는지, 세례를 많이 베풀었는지 등으로 평가되곤 합니다.

 

한편 또 다른 관점에서 교회를 기대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마치병원의 형태로 교회의 방향성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대를 하시는 분들에게 교회는 상처받은 사람들, 병자들, 불치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 마음의 병을 지닌 사람들이 주님 앞에 나와 치유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우리의 고통과 함께하시는 주님에게서 위로를 얻도록 하는 역할을 감당하는 공동체입니다.

 

이 세상에서 어렵고 힘든 일을 당한 사람들이 교회에 나와 예배를 통해 새로운 힘을 얻고, 다시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분들에게 가장 중요한 교회의 일은 기도, 찬양, 치유의 은사와 각종 성령의 은사와 관련된 것들입니다.

 

나아가 교회를학교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인생을 잘 살기 위해, 좋은 가르침을 얻기 위해, 이런저런 종교를 찾아다니면서 경전을 읽어 가며 배움을 구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교회를 찾는 분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주옥같은 말씀을 붙잡고, 세상을 지혜롭게 살아나가기 위해 하나의 기준점을 발견하고자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성공적인 삶을 살아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교회는 귀에 들리는 설교와 좋은 성경공부를 제공하는 장이 되어야 합니다. 참 배움을 허락해 바른길로 들어설 수 있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교회가 해 줘야 할 매우 중요한 사역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 어떤 분들은 교회를 적십자사와 같은 세상을 향해봉사하는 곳으로 이해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세상을 섬기는 공동체라고 말합니다. 어려운 이들을 돕고, 병자들을 돌아보며, 가난한 자들을 섬기고,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파하는 것이야말로 교회의 사명이라고 주장합니다. 작게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연탄을 나눠 주거나 담요를 나누어 주는 것에서부터, 크게는 사회 제도를 바꾸고 정의롭고 평등한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이 땅에 세워 가는 데까지 실현하려는 관점입니다. 이러한 분들에게 교회의 매우 중요한 덕목은 교회의 봉사, 섬김, 선교, 그리고 사회 정의 실현과 같은 덕목입니다.

 

여러분에게 만약 이와 같은 덕목들 가운데 선택해 투자하라고 한다면, 어디에 더 많이 투자하시겠습니까?

 

 

<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두는 지체들의 공동체입니다. >

 

우리는 이런 교회가 되면 좋겠다.’ 아마 이런 마음과 생각을 가지신 분들이 많이 계실 것입니다. 지난 10개월 동안 소망교회의 많은 분들을 만났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을 만날 때마다 제게 여러 부탁의 말씀도 해 주셨고, 권면의 말씀도 해 주셨습니다. 그런 분들은 대부분 이런 말씀을 빠뜨리지 않으셨습니다. “교회가 이렇게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교회가 이렇게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교회는 이런 교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나름대로 자신이 생각하는 교회관을 말씀하시며, 그런 교회로 만들어 달라고 부탁해 주셨습니다.

 

저도 그 모든 부탁을 다 들어드리고 싶습니다. 그런데 정말 가능할지 생각해 보면, 사실 자신은 없습니다. 이 모든 일이 다 하나님의 일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참 연약하고 한계 안에 있는 존재입니다. 이러한 교회의 모습은 어느 것도 틀렸다고 말할 수 없고, 그렇다고 그 하나가 모든 교회의 모습을 대체할 수 있다고도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의 일들을 감당하기 위해서 우리는 늘 한 몸으로서의 교회를 늘 주장해 왔습니다. 로마서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로마서 12:4~8)

 

로마서의 이 말씀은 교회에는 다양한 사역들이 있다는 뜻이며, 그것은 한 몸으로서 서로 다른 기능을 가진 각 지체처럼 기능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이 말씀은 당시 교회가 여러 일로 분쟁에 놓인 탓에 주어진 말씀이기도 했습니다. 서로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면서 분쟁이 일어나는 교회 상황 속에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와 고린도전서를 쓰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고린도서는 더욱 그러한 정황 가운데 기록된 서신서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 (고린도전서 12:25~30)

 

이 말씀은 우리 성도들과 교회가 한 몸이 되어 교회의 다양한 기능을 서로 다툼 없이 일사불란하게 감당해야 한다는 말씀으로, 지금까지 교회의 매우 중요한 지침으로 적용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그 원리가 오늘날까지 잘 이루어져 왔다고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 교회는 신성한 성품을 드러내는 공동체입니다. >

 

어느 날 이 말씀을 읽고 묵상하다가 또 다른 깊은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앞서 읽어 드린 말씀은 주로 한 몸, 한 지체의 기능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곰곰이 묵상하다 보니, ‘한 몸이라는 의미가 조금 다르게 다가왔습니다.

 

여러분은 사람을 만날 때, 그 사람을 어떤 기준으로 평가하십니까? ‘, 저 사람은 팔이 기네? 손이 좀 이상하네? 발이 이상하네? 코는 좀 다르네? 코는 이렇게 생겼네? 저렇게 생겼네?’ 하면서 사람을 판단하십니까? 그렇지는 않지요? 물론 첫인상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 번 두 번 만나다 보면, 그 사람의 발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떻게 기능하는지, 무엇을 하는지보다 더 중요하게 보이는 게 있습니다. 바로 그의성품입니다. 그의마음입니다. 그의인격말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기억할 때, 인격과 성품으로 기억하게 됩니다. 생김새도 다르고 신체 기능도 조금씩 다르지만, 우리가 깊이 느끼게 되는 부분은 그 사람의 성품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많은 일을 해 왔습니다. 소망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혼 구원을 위한 전도도 했고, 병원을 찾아다니면서 위로도 했습니다. 병을 고치기도 했고, 가난한 이들을 찾아가 먹을 것도 나눠 주었고, 학교도 만들어 주었으며, 병원도 세웠고, 예배당도 세웠습니다. 고아원도 설립했고, 장애인들을 위한 시설을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정치적인 이슈에도 참여했고, 좋은 법을 만드는 데도 공헌했으며, 하나님의 뜻이 아닌 법을 만들려고 할 때는 강하게 저항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교회가 해 온 일들입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러한 기능을 감당하고 있는 교회를 세상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도리어 교회에 대한 강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그러면서 얻게 된 하나의 관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격, 성품으로서의 한 몸이 되는 교회입니다. “우리가 한 몸이다.”라고 말해 오는 동안 지금까지 우리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 다양한 기능을 수행하는 한 몸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각각의 지체가 감당하는 일과 기능에 관심을 가져 왔습니다.

 

그러나 한 몸이라고 하는 이 말 속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인격체, 하나의 성품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그와 같은 관점에서 깊이 접근하지 못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머리가 되시고,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우리가 그의 지체가 된다면, 교회는 당연히 그리스도의 성품을 드러내야만 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인격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녀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고린도전서 6:15)

 

지체가 있다고 다가 아닙니다. 팔과 다리가 있고, 그것이 기능한다고 해서 전부가 아닙니다. ‘그가 그리스도인이냐? 아니면 창녀냐?’ 하는 데서 달라지는 것입니다. 성품이 중요합니다. 누구의 지체인지가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인격인가? 어떤 성품을 가진 존재인지가 중요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인격입니다. 그리스도의 성품입니다.

 

 

<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신성한 교회가 됩시다. >

 

여기,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전서 2:9)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교회의 참 기능을 수행하라는 데에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넘어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 하나님의 아름다운 인격, 그분의 신성한 성품을 드러내는 일을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그와 같은 아름다운 덕을 전하지 못했습니다. 덕스럽지 못했습니다. ‘맞다, 틀리다혹은옳고 그름의 차원이 아닙니다. 덕스럽지 못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의 인격과 인품을 전달하는 통로로서의 교회가 되지 못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인품과 성격을 드러내는 통로로서의 우리 자신이 되지 못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새번역으로 봉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를 앎으로 말미암아 생명과 경건에 이르게 하는 모든 것을, 그의 권능으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셔서 그의 영광과 덕을 누리게 해 주신 분이십니다. 그는 이 영광과 덕으로 귀중하고 아주 위대한 약속들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은 이 약속들로 말미암아 여러분이 세상에서 정욕 때문에 부패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1;3~4, 새번역)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지금까지 하나님의 성품을 잘 드러내지 못한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해야 하는 지체인 우리가 도리어 머리가 되고, 우리의 뜻대로 교회를 세우려 하고, 우리의 마음대로 교회를 만들어 가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성품이 드러나야 했습니다. 나의 마음대로, 나의 생각대로 교회를 만들어 가고 꾸려 가려고 하는 사이에 우리의 죄성과 나쁜 품성이 세상적 교회의 모습으로 드러나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말씀 앞으로 다시 나아가야만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실천해 냄으로써 우리가 그리스도의 성품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습니다.

 

소망교회가 창립 42주년을 맞이합니다. 우리는 어떤 교회를 만들어 가야 합니까? 물론 여러 일을 해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더 좋겠지요? 그러나 한 가지 사실을 기억합시다. 하나님의 성품을 가진 교회, 신의 성품을 가진 교회,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열성을 다하여 여러분의 믿음에 덕을 더하고, 덕에 지식을 더하고, 지식에 절제를 더하고, 절제에 인내를 더하고, 인내에 경건을 더하고, 경건에 신도간의 우애를 더하고, 신도간의 우애에 사랑을 더하도록 하십시오." (베드로후서 1:5~7, 새번역)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벧후1:1-4

2017-10-23 17:03:36

 

예수는 역사다!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는 절대 허상이 아닙니다. 실재하시며 오늘도 살아계신 분입니다. ‘존재라는 말 자체가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은 존재하고 계십니다. 이 자리에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확신을 갖고 있는 자가 진짜 신앙인이고, 확신이 없다면 계속 넘어질 수 있습니다. 나에 대한 확신은 없다 할지라도 주님에 대한 확신은 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열심히 공부하면 뭔가 이루어 낼 거야. 내가 취업의 문을 두드리면 좋은 직장에 취직이 될 거야.” 나의 열심으로 말미암은 내 삶에 대한 확신은 때론 깎여지기도 하고 파쇄되기도 하고 자꾸 희미해져 갑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확신만큼은 날로 날로 증가되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이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이 말씀으로 우리에게 증거가 되었습니다. 흥해진다는 것을 어떻게 비유했는지 기억하십니까? 흥해진다는 것은 바람 빠진 풍선에 자꾸 바람을 집어 넣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날숨을 쉬면 폐가 수축되고, 들숨을 쉬면 공기가 들어와 폐가 팽창하는 것처럼 우리의 육신은 날마다 쇠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서 팽창해지기를 원합니다. 바람을 넣어 풍선이 팽창하는 것처럼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이 날로 날로 증가되길 바랍니다. 그것이 축복입니다. 신앙생활 하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이 흔들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 승리는 나의 확신이 아닌 하나님을 향한 확신이어야 합니다.

 

 

(벧후1:1) 이 편지의 수신자는 누구입니까? 시몬 베드로가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에게 편지한다고 했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우리의 생각이나 마음이 이 성경을 썼던 당시의 상황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사도 베드로가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이 글을 쓸 당시 예수님은 이미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영광 보좌, 우리가 가야 될 천국에 계셨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 천국에 계신 예수님께 말씀을 듣고 배우고, 이적도 경험했던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편지를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 쓰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읽으며 비록 지금은 내 믿음이 부족하고 연약하다 할지라도 사도 베드로의 입장에서 한 번 더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분은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그 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실수를 참 많이 합니다. 넘어지기도 하고 하나님 앞에 온전히 드리지 못하는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의 삶 역시 실수투성이의 삶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하나님께서 주신 의를 가지고 있었고 그 의에 대해 말했습니다.

 

이 편지를 쓸 당시 사도 베드로는 예루살렘에 있었고, 지중해에 많은 나라로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을 생각하며 이 편지를 썼습니다. 그들에게 가장 먼저 가르쳐주고 싶은 것은하나님 의였습니다. 이 편지의 수신자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이 말씀이 깨달아집니다. 우리 삶 가운데 신앙생활 가운데 기둥으로써, 터로써 가지고 있어야 될 것이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하다 보면 때로는 목회자와 지체들에게 나의 연약한 모습, 실수하는 모습을 보이고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마음을 가져도 실수하며 넘어지고, 이거밖에 안 되는 나 자신 때문에 괴롭습니다. 교회에서는 기도하고 전도하고 더욱더 모이자고 하는데 그 가운데 나아가지 못하니까 때로는 미안하고 교회에 나오는 것들이 부담스럽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다니며 함께 듣고 보고 만졌던 제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넘어졌습니다. 그런데도 그가 주장했던 것은 하나님의 의였습니다. 우리가 주장해야 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주신 하나님의 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넘어짐, 실수함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삶을 얽매인다면 로마서 8 1-2절 말씀처럼 죄와 사망의 법으로 가게 됩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는 죽음만 있습니다. 절대 다시 일어날 수 없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주님, 형제가 나에게 범죄하면 내가 몇 번이나 용서하리까?” 물었습니다. 이 말은 형제가 나에게 실수가 아닌 고의성을 가지고 범죄할 경우를 말합니다. 누군가 고의성을 가지고 나를 넘어뜨린다면 용서가 잘 될 것 같습니까? 성경에서는 용서해야 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용서가 잘 되지 않습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소원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10여년 전 소원이라는 아이가 학교에 가다가 술 먹은 남자한테 주먹으로 얼굴과 배를 맞고 성폭행을 당했습니다. 범인은 아이가 죽은 줄 알고 갔지만 다시 숨이 들어가면서 간신히 살게 되었습니다. 병원에서 의사가 하는 말이 아이의 대장과 항문이 모두 파괴되어서 인공항문을 달아야만 그나마 살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영화에서 친구가 소원이의 아빠한테이것을 사건이라고 생각하면 힘들고 견딜 수 없으니 사고라고 생각하라고 합니다. 그러자 아빠는만약에 네 자식이 그렇게 됐으면 너는 그것을 사고라고 할 수 있겠느냐하며우리 애 엄마가이 세상에 있는 모든 아이들이 소원이와 똑같이 일을 당해서 모든 엄마가 자기의 심정이 어떠한지를 알기를 원한다는 말을 내가 조금은 이해를 하겠다는 말을 합니다. 영화를 잠깐 보면서도 마음이 찡했습니다.

 

만약에 누가 내 자식을 그렇게 만들어놨으면 용서가 가능할까 싶습니다. 용서가 안 될 것 같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삼세 번을 말하지만 유대인들의 사고는 일곱 번까지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물음에 예수님은일곱 번에 대한 숫자는 말씀하시지 않고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야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한국사람의 사고로는 세 번, 유대인의 사고로는 일곱 번인데,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횟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내가 넘어졌다 할지라도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예수로 말미암아 주신 하나님의 의입니다.

 

 

당시에 사도 베드로가 초대 교회 성도들과 함께 가지고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의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이는 내가 스스로 취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받은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의를 주장할 때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에도, 로마서에도 구원은 우리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를 얻고 구원을 받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우리는 육체를 가지고 있기에 분명히 연약함이 있고 실수합니다. 계속 넘어지고 넘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들이 줄기차게 놓여져 있습니다. 어찌 하시겠습니까? 넘어지고 끝내고 말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가 우리가 정말 가지고 있어야 될 것이 하나님의 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의 열심이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가져야 합니다. 베드로도 삶에 대한 연약함이 있었습니다. 주님을 만나도 주님인지 몰랐고, 그분이 어떤 분인지 몰랐습니다. 그냥 주님에 대한 인식의 문제였습니다. 그렇게 주님을 따라다니면서 실수하는 것들이 점점 더 커집니다. 겟세마네에서 만났던 대제사장 말고의 귀를 잘라버리고, 3 6개월 동안 양육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마지막에 자기가 따랐던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의 목숨을 건지기 위해 단박에 부인합니다.

 

그런데 그와 같이 실수가 커지고, 고난이라는 믿음에 대한 테스트를 겪은 후 그가 평생에 사는 날 동안 고수할 수 있었던 것이 하나님의 의였습니다. 시편 121편에 나의 도움이 천지에 충만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온다고 고백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게 의입니다. 다른 것은 없습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의 전부고, 그것만 주장해야 합니다. 직분감당도 나의 열심, 나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 하나님께서 주신 열심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주신 하나님의 의를 가지고 있는 자들에게 결과가 있어야 하는데, 그 결과는 (1:1) 사도 베드로가 가지고 있던 보배로운 믿음을 동일하게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가지고 있었던 그 믿음과 지금 2017년을 살아가는 우리 영혼의 믿음이 동일해져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 동일한 믿음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신 것이 아닙니까!

 

오늘 영상에서 봤지만 예일대를 다니며 기자상도 받고 세상에서 지식이 있던 영상의 주인공의 딸이 사탕을 먹다 목에 걸려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간호사가 지나가다 그 아이를 살려줍니다. 아내는 감사의 인사를 하지만 그 간호사는 자기가 아닌 예수님께 감사하라고 말합니다. 자기가 지나가면서 괜히 들어오고 싶은 마음에 들어왔는데 하나님께서 이 상황을 보게 해주셨고, 결국은 하나님이 살리신 것이라는 고백을 합니다. 이에 엄마는 예수를 믿지만, 남편은 믿지 않았습니다. 남편은 예수가 정말 역사적으로 있는지, 과거에 실존했던 인물이 맞는지 증거를 찾아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역사적 자료를 쌓으면 120m의 높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관련된 역사적인 증거는 1600m가 된다고 합니다. 과거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철학자였고 지식이 있는 유능한 사람이었다는 증거는 누구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계시다는 역사가 1600m입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가 진실하시기 때문에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이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동일하기를 우리 주님이 원하십니다. 그 동일한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동일한 믿음으로 부활하고, 저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김용이 선교사님에 대해 들어보신 분이 많을 것입니다. 세상 가운데서 방탕하게 살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확실히 체험하고 믿고 난 후 다섯 명의 자식 모두를 하나님 앞에 선교사로 서원하셨습니다. 한번은 첫째 아들이 선교하는 서쪽 아프리카에 집회를 하기 위해 갔는데 상황이 너무 안 좋은 것입니다. 말라리아가 창궐하고 온갖 벌레들에 먹을 것이 없는 상황들을 보며 아들에게 같이 돌아가자는 말을 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하나님 앞에 기도했다고 합니다.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시는 것이 있어서 박스에다 하나님께서 주신 감동을 그대로 써서 두고 그냥 와버렸다고 합니다. 몇 해가 지나고 가족들이 모두 함께 모여 사역에 관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는데 첫째 아들이 아버지가 아프리카에서 박스에 써준 글에 대해 얘기를 했습니다. ‘우리 땅 끝에서 죽어 하늘 복판에서 만나자이 말을 벽에 붙여놓고 사역하면서 계속 봤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사역을 해오면서 아버지께 감사하다는 고백과땅 끝에서 죽어서 하늘 복판에서 만나길 원한다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 얘기를 들으며 아버지 선교사에게 줬던 믿음이 첫째 아들에게 유전된 것을 보면서 참 복 된 선교사, 복 된 가정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도 베드로가 가졌던 믿음을 오늘 우리에게도 요구하십니다. 그 믿음을 온전히 가질 수 있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죽음의 상황, 고난의 끄트머리에서도 우리가 주장할 것 하나님의 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동일한 믿음은 모든 상황 가운데서 나를 보지 말고 나를 주장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볼 때 우리에게 동일한 믿음을 주시고, 동일한 생명으로 갚아주십니다.

 

 

계시록을 보면 마지막 환난이 옵니다. 그 환난을 통과하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그 환난은 예수님 오시기 전에 시작이 되는데, 우리는 그 환난 전에 죽을 수도 있습니다. 7년이라는 대환난 가운데 3 6개월 끄트머리에서 적그리스도가 나옵니다. 그리고 거기서 우리는 휴거가 됩니다. 지금은 육신을 입고 있지만 그때는 영혼이 신령한 옷을 입고 신령한 몸으로 공중에 재림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3 6개월의 시간 동안 많은 환난이 있는데, 그 시간 가운데 교회 내 성도의 숫자가 늘어날까요? 지금도 학교나 직장의 문제, 육체의 어려움, 가정 문제가 있으면 그것으로도 포기하는데 환난이 닥치면 성도수는 더 줄어들 것입니다. 환난이 다가올수록, 환난을 통과할수록 나와 함께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 줄어들고, 예배 드릴 사람, 전도할 사람이 더 줄어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가진 의가 있다면 베드로가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죽는 상황 가운데도 오직 하나님만을 찾은 것처럼 우리도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만을 찾을 것입니다. 우리 신앙 가운데 정말 놓치지 말아야 될 것은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환난이 닥쳐도 고난이 닥쳐도 우리 삶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 인하여 항상 승리하고, 항상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영혼이 되어야 합니다.

 

 

(벧후1:2) 그 동일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자들에게 이제 하나님을 알아야 되는 단계가 옵니다. 그 의를 주장하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알려고 몸부림 쳐야 합니다. 하나님을 앎이라는 것은기노스코라고 합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육체의 겉으로 보여지는 정도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앎은 우리 속에 있는 모든 것까지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알 때 은혜와 평강이 넘칩니다.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은 로마 식민지 하에 붙잡혀 있고 핍박 가운데 살아가던 자들입니다. 그런 자들에게 하나님을 알아야 너희들에게 은혜와 평강이 온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성경 어디를 봐도 은혜와 평강을 계속 강조합니다. (1:7) (고전1:3) (벧전1:2) (1:5) 모든 서신서의 서두에 계속 강조한 것이 은혜와 평강이었습니다. 왜 계속 강조할까요? 당시에 핍박과 박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가는 곳곳마다 계속 그리스도인들이 죽는 상황이 있었고, 베드로도 초대교회에서 핍박 당하는 상황 가운데 언제 감옥에 갈지 모릅니다. 계시록에서 사도 요한도 똑같습니다. 그 당시 계속 주장했던 것은 은혜와 평강이었습니다.

 

그 은혜와 평강은 하나님을 알 때, 하나님을 알려고 몸부림 칠 때, 하나님을 아는 자에게 온다고 했습니다. 핍박과 환난이 있어도 하나님을 알면 이길 수 있습니다. 여러분, 직장 내 문제가 있습니까? 가정에 불화가 있습니까? 사람과의 관계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알면 은혜와 평강 가운데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아시는 분입니다. 그 하나님 앞에 내가 하나님을 알려고 몸부림쳐야 됩니다.

 

 

옛날에 중국에서 화국봉이라는 외교부장이 외교부출신들과 함께 일본에 갔던 영상이 있는데, LA에 살고 있던 미국 교포인 70대 할머니가 영상을 보며 갑자기내 자식이다라고 하며 어디 있는지 알아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자식들이 깜짝 놀라 수소문 해서 알아봤습니다. 이 가족은 한국사람이지만 중국에 피난을 가서 살다가 1945년 해방이 돼서 한국으로 넘어왔습니다. 그 때 첫째 아들은 거기서 대학을 다니고 있었고 졸업을 하지 않아 거기서 계속 학교를 다녔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둘째 아들이 미국 LA로 이민을 가면서 가족 전체가 미국으로 이사를 간 것입니다. 그 기간이 45년인데 45년 동안 자기 아들을 보지 못했으니 얼마나 많이 변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아들을 단박에 알아봤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알고 계십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주장하면서 동일한 믿음을 갖고 그 믿음 안에서 하나님을 알아가라.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라. 모든 상황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알 때 우리는 진실로 은혜와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 가운데서 알고 은혜와 평강 가운데서 항상 승리하시는 몸 된 교회 모든 지체 여러분이 되시길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베드로를 통하여 주는 교훈(소명관,직업관,죽음관,성공관)/벧후1:1-2

2002-09-20 08:32:41

 

성경:

제목:베드로를 통하여 주는 진리교훈(소명관,직업관,죽음관,성공관)

요절:우리 주 예수에 대한 지식으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 지어다(벧후1:2)

 

한 사람이 변하여, 수많은 사람을 구원하는 귀한 일을 하고, 한 사람이 타락하여 수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일을 합니다.

내 한사람이 변하느냐? 변화지 않느냐? 따라서, 수많은 사람에게 미치는 영양이 큽니다. 시몬 베드로 한 사람이 변하여, 역사세계에 미친 영양은 무한한 축복을 가져왔고, 아담 한 사람의 타락으로 수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미치게 했습니다.

베드로후서는 베드로가 두 번째로 보낸 진리말씀입니다. 누구에게 보냈습니까? 벧전1:1절에 기록하여 주었습니다.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성도들에게 보낸 것입니다.

이 지역은 현재 터어키 지역과 그리스지역입니다. 이 말씀을 선포하는 양목사는 이 지역을 가보고,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로마 황제의 핍박중에서 신앙을 지킨 자들입니다. 생활이 극도로 어려운 환경속에서 오직 주님의 재림만을 바라보고, 신앙을 지키고 천국으로 간 분들입니다.

오늘 본문은 베드로의 일생의 삶을 통하여, 위대한 신앙의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상고하여 은혜를 받기를 원합니다. 할렐루야!

 

.소명관(召命關)

 

갈릴리 호수에서 40년이 넘게 고기를 잡아서 매매하는 사업가가 시몬 베드로입니다. 맛있는 고기를 로마로 판매하는 사업으로 큰돈을 번 시몬 베드로였습니다.

하루는 30대 청년이 나타나서, 베드로씨! 나를 따라 오십시오? 하는데, 저 젊은이가 나를 어떻게 알지, 자기를 따라 오라 하니, 내 가족을 먹이고 살릴 것인가?

성령의 충격을 받고, 감동을 받은 시몬(베드로)은 결단하여, 배를 두고 예수님을 따라 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름에 즉시 따라 나서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서 즉시 말씀을 좇아 가나안땅으로 떠났습니다.(12:1-4) 또 이삭을 다리고 모리아산으로 즉시 일어나서 갔습니다. 아브라함같이 우리도 죄악 세상을 떠나야 합니다. 말씀을 쫓아 천국길, 예수님을 따라 산길을 가야 합니다.

교회 오면서, 세상 구경을 다하고 올라올 수 있습니까? 좌우로 기우려지지 말고, 예수를 바라보고 달려가야 합니다. 바울도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믿음을 지키며 달려갈 길을 달렸다고 했습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회하지 못하고. 옛날에 사업하던 것을 잡고, 돈 벌어서 목회한다는 분이 있습니다. 매를 많이 맞고 목회할지? 다 버리고 목회길을 갈지? 베드로같이 즉시 세상사업을 뒤로하고 따라가야 합니다.

 

.직업관(職業關)

 

고기 낚는 어부직업을 가졌습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 직업으로 바꿨습니다. 일이 바꿨습니다. 직업이 바꿨습니다. 갈릴리 호수에는 수많은 산고기가 살고 있습니다. 산 고기 잡아죽이는 사망직업, 살생직업으로 살아온 자가 시몬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죄와 허물로 죽은 인생을 살리는 생명직업으로 바꿨습니다(2:1) 우리도 직업을 바꿔야 합니다. 사망일에서 생명일, 살리는 일로 바꿔야 합니다. 남을 빼앗는 일을 했는데, 하나님의 복을 받아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일, 주는 일, 생명을 구원하는 일로 바꿔야 합니다.

죄와 허물로 죽은 부부, 부모, 자식, 친척, 이웃, 직장동료, 이방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에 내 모든 일을 바쳐야 합니다. 할렐루야!

 

.죽음관(死亡關)

 

인간의 죽음은 누구에게나 필연적으로 옵니다.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한번은 죽습니다. 죽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죽음관을 확실히 가져야합니다.

죽음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죄짓고 죽는 저주죽음이 있고, 하나는 예수 믿고 의행하다가 죽는 복된 죽음이 있습니다(14:13)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을 믿고 따라가지 않았다면, 갈릴리호수에서 잡은 고기를 날로 해해 먹고 간지스토마 걸려 죽었든지? 고기 잡다가 물에 빠져 고기밥이 되었든지? 오래 살다가 디베랴 언덕에 한줌의 흙으로 묻었든지? 저주죽음으로 생을 마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위하여 살다가 로마에서 순교했으니, 인생에 가장 복된 죽음으로 천국영광에 이르렀습니다. 죄값으로 죽고, 저주죽음으로 지옥 갈렵니까? 예수님을 믿고 복된 죽음으로 천국에 가겠습니까?

집사가 주일날 낚시 가서 태풍으로 물에 빠져 죽었다고 하는데, 그런 죽음은 징계로 온 불행죽음입니다. 주의 일을 하다가 죽음을 통과하여 천국영광에 이르는 자가 되시기를 주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공관(成功關)

 

인간에게는 일생동안 산 이력이 따라 옵니다. 세상이력이 따라옵니다. 행한 일이 영원히 따라옵니다. 행한 대로 갚아 줍니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16:27) "주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의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14:13)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22:12) 했습니다.

세상에서 일을 하다가 갑니다. 아무리 큰 일이라도 세상일은 죽음 선에 가서 지옥가서 영원히 저주를 받는 일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일한 자, 사람을 구원하는 일을 한자는 천국에 들어가서 영원한 축복에 이릅니다.

예수님은 모든 인간의 흥함과 패함에 기준입니다(2:34)

베드로는 무명의 사람으로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존재였으나, 예수 때문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이름을 가졌고, 존경을 받은 자가 되었으니, 오직! 예수 덕분입니다.

우리도 예수 때문에 위대한 이름을 얻게 되었고, 가장 출세성공하고, 영원히 잘 난자로 영광중에 나타날 것입니다. 할렐루야!

시몬 베드로를 통하여 주시는 소명관, 직업관, 죽음관 성공관을 터득하여 확실한 생애를 살아 영원히 성공하시기를 주 이름으로 축원합니다.할렐루야---아멘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