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운 진리에 서 있으라 /벧후1:12-21/ 김승규목사
2021-06-08 09:05:54
베드로후서1:12 “그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서 있으나 내가 항상 너희에게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교회는 어느 시대나 외적인 핍박이 있었고 교회 내적으로 이단들의 발호와 시험이 있었습니다. 교회는 이런 고통과 갈등을 겪으며 성장해 왔습니다. 베드로는 이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교회들에게 유언을 남기는 심정으로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들의 신앙이 진리 위에 굳게 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I. 이미 서 있는 진리에 굳게 서라(12-15)
12절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이 편지를 쓰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성도들은 사도들이 전해 준 복음진리 위에 이미 굳게 서 있지만 다시 한 번 그들이 서 있는 그 진리를 생각나게 하려고 이 편지를 쓴다고 했습니다. 13절엔 "너희를 일깨워 생각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라" 했습니다. 15절엔 "내가 떠난 후에라도 어느 때나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성도들이 이미 배운 진리를 계속하여 자꾸 되새김질 하여 생각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영접하고, 그 진리 위에서 믿음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진리를 알고 진리 안에서 살면서도 영적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자꾸 뭔가 새로운 것을 찾아 헤맵니다.
"사박자 구원론" "도를 들어 보셨습니까?" "구원 받았습니까? 중생의 비밀이 열린다" "신천지 요한계시록의 비밀" 이런 식으로 새로운 것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그래서 내가 믿고 있는 것 외에 또 다른 진리가 있지 않을까? 하는 헛된 기대와 망상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결국 유혹을 당하게 되고 이단에 빠져 들게 됩니다.
또 외부적으로 핍박이 심하고, 크고 작은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할 때 진리 안에 서 있는 것이 답답하고 벗어나고 싶은 충동도 일어납니다. 그러나 사도 베드로는 이미 서 있는 진리 안에 굳게 서도록 하기 위해서 다시 한 번 복음 진리를 생각나게 하려고 이 편지를 쓰고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미 사도들이 전해 준 복음 진리를 영접하고 믿음으로 그 진리 위에 서 있습니다. 복음 진리는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너무나 단순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그 진리 위에 우리는 굳게 서야 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 진리 외에 무슨 다른 새로운 진리가 있지 않을까 기대해서도 안 됩니다. 새로운 진리를 말하는 것에 호기심을 가지고 기웃거려서도 안 됩니다. 그러다 보면 이단 교리에 빠집니다.
이단에 빠졌던 한 목사님이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10년 넘게 목회를 하고 설교를 했더니 성도들이 자꾸 새로운 것을 계속 요구하게 되고 새로운 것을 찾다 보니 성경을 기존 해석과는 다르게 자꾸 신비적으로 접근하게 되고 결국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보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풀어 설교하니 성도들이 좋아하고 우리 목사님 대단하다 다른 목사님과 다르다 하면서 추종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가 주님이 되어 있더라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영접한 복음 진리는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임을 확신합니다. 우리는 이 진리 위에 서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풀리지 않는 인생문제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진리를 부정하고 회의해서는 안 됩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서 있는 이 진리 안에서 해결책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모든 문제의 해답이 있습니다.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골 2:3) 예수님은 모든 지식과 지혜의 보고입니다. 예수님 안에 모든 문제의 해답이 있습니다. 다른 곳에는 결코 해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생수가 솟아오르기까지 한 우물을 파야 합니다. 십자가의 복음진리는 다 아는 것 같은데 그 깊이는 깊은 심연과 같이 깊어서 아무도 그 깊이를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깊이 알면 알수록 그 폭도 넓어지고, 그 영적인 세계가 무한히 넓고 깊은 것을 깨닫게 됩니다. 겸손히 배우는 마음으로 우리가 서 있는 복음 진리를 더 깊이 알아 가야 합니다. 중요한 것일수록 반복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자꾸 새로운 것을 찾아 헤매지 말고 이미 배운 복음진리를 더욱 깊이 생각하고 일깨워 우리의 신앙이 그리스도 안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시절을 좇아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II. 재림신앙 위에 굳게 서라(16-18)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데 재림을 믿지 못하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초대교회에도 예수님의 죽으심은 믿겠는데 부활은 믿지 못하는 신자들이 있었습니다. 또 예수님의 부활은 믿겠는데 신자의 부활은 믿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믿지 못하면 우리의 몸의 부활도 믿을 수 없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도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기가 믿으려면 다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부분적으로 믿으면 신앙이 절름발이가 됩니다.
베드로는 당시에 거짓 교사들이 예수님의 재림을 부정하는 교리를 퍼뜨리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거짓 교사들은 예수님의 재림은 역사적인 사실이 아니고 사도들이 꾸며 낸 이야기라고 비판했습니다. 그러면서 두 가지 복음 진리를 부정했습니다. 3:3,4절을 보면 첫째는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둘째는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지막 날에 있을 심판을 부정했습니다.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부터 그냥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창조주 하나님은 인정했으나 심판장으로 오시는 주님을 부정했습니다. 주의 재림과 권능으로 심판하신다는 복음 진리를 희롱했습니다.
그런 거짓 교사들의 미혹을 받고 있는 성도들에게 베드로는 무엇을 선포합니까? 16절을 보십시오. 베드로는 주님의 능력과 강림하심은 교묘히 만든 이야기가 아니요, 직접 그분의 크신 위엄을 본자라고 증거했습니다. 교묘히 만든 이야기는 '지어낸 말', '허구', '우화', '신화', '거짓말'을 가리키는 말인데, 항상 복음의 진리와 대조되어 부정적인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딤전1:4, 4:7, 딤후 4:4, 딛1:14). 예수님의 능력과 재림에 관한 진리는 결코 사람이 교묘하게 꾸며 낸 교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사도들이 전하여 준 종말론적 교훈들이 결코 꾸며 낸 이론이 아니라 친히 목격한 자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17,18절을 보십시오. 베드로는 언제 이 사실을 목격했습니까? 마가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저희 앞에서 변형되셨습니다. 그 옷이 광채가 나고,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심히 희어졌습니다. 그 때 엘리야와 모세가 함께 나타나 예수님과 더불어 말씀하였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자고 했습니다.
그 때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었습니다. 그리고 구름 속에서 우뢰와 같은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막 9:7) 자기 생각을 고집하고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것을 반대했던 베드로, 그 곳이 좋으니 산에 별장을 짓고 살자고 했던 베드로에게는 그 음성이 너무나 강력한 음성으로 새겨졌습니다. 베드로는 이 놀라운 광경을 결코 잊을 수 없었습니다. 그의 가슴에 너무나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 음성이 들리는 것만 같았습니다.
베드로는 그 변화산 경험을 통해서 예수님이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분이 세상을 심판하실 권능을 가지신 심판의 주님으로 재림하실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변화산에서 경험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모습을 증거하면서 거짓 교사들의 교훈을 강력하게 반박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 승천, 재림 등 사도들이 전하여 준 교훈들이 꾸며 낸 이야기가 아님을 주장했습니다. 복음 진리는 주님께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요즘도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지 않고 우화적으로 해석하는 이단들이 있습니다. 여호와증인들은 지옥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논리는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어떻게 지옥을 만들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옥에 관한 모든 말씀은 비유로 풀고 은유로 풀어 버립니다. 진짜 지옥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스올이라는 말을 무덤으로 해석해 버립니다. 지옥의 실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지상왕국을 꿈꿉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누가 뭐라고 하든지 재림신앙 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재림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심으로 이 세상의 역사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모든 악의 세력이 멸하여지고, 완전한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됩니다. 만물이 새로워지고, 그리스도 안에 죽은 자들이 다 부활하고,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홀연히 변화되어 공중에서 주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를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것을 믿습니까?
마가복음 13장 24,25절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에 그 환난 후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에 있는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 또 그 때에 저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택하신 자들을 땅 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에는 모든 사람들이 보도록 공개적으로 임하십니다. 예수님이 재림 하심으로 자기의 택하신 자들을 땅 끝에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시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로서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 날에 우리는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여 공중에서 주님을 맞이하게 되고, 주님과 함께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 진리를 확신하고 흔들리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II. 성경말씀 위에 굳게 서라(19-21)
베드로는 자신과 사도들이 함께 목격한 일보다 더 확실한 예언의 말씀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19절을 보십시오. "더 확실한 예언"이 있다고 한 것은 우리의 주관적 간증보다 더 확실한 것은 성경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에 대한 베드로의 믿음이 어떠합니까? 성경말씀은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과 같다고 했습니다. 성경말씀은 칠흑같이 어두운 우리의 마음을 비추는 등불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날이 새어 샛별이 우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성경말씀에 귀를 기울여 주의 깊게 묵상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할 때 처음에는 마음에 떠오르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계속하여 읽고 또 읽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주의하면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밝혀 주십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마음에 샛별처럼 빛나는 진리를 발견하게 해 주십니다. 어두운 마음을 환하게 밝혀 줍니다. 무질서한 내 삶에 질서를 세워 줍니다. 도무지 풀리지 않던 인생 문제를 해결할 지혜의 빛이 떠오릅니다. 그 때 우리는 칠흑같이 어두운 인생의 터널을 빠져 나오게 됩니다. 밝은 빛을 보고 소망 가운데 새 삶을 살게 됩니다.
또 어떤 분들은 날이 샌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리키고, 샛별이 떠오른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강림을 말한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성경말씀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다고 해석합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또 베드로도 변화 산 사건을 예수님의 재림으로 연결시켜 해석한 것을 보면 그렇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여기에서 또 경고합니다. 그렇다고 성경을 사사로이 풀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20,21절을 보십시오.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어서는 안 됩니다. 당시에 거짓 교사들은 성경을 사사로이 해석했습니다(2:1; 3:16). 요즘도 이단들은 성경 해석을 사사로이 합니다. 교주에게 맞추어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합니다. 성경을 사사로이 해석해서 안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난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서 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사사로이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근거로 카톨릭 교회에서는 예수 믿는 성도들은 성경을 해석할 수 없고, 오직 교회만이 성경을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성도 개개인이 성경을 가지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중세교회가 타락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일반 성도들은 성경을 해석할 수가 없기 때문에 교회의 가르침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점점 성경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게 되고, 교황이나 추기경, 사제들이 가르치는 교리서가 성경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후로 모든 성도들이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은혜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루터는 제일 먼저 헬라어로 된 성경을 독일말로 번역했습니다. 그래서 사제들만 읽을 수 있었던 성경을 모든 성도들이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에서 나타난 해석원리를 무시하고 각 개인 신자마다 자기 임의대로 해석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성경을 사사로이 풀어서는 안 됩니다. 사사로이 푼다는 것은 사도적 신앙의 전통을 떠나서 개인적으로 푸는 것을 의미합니다.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방법으로 성경을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사사로이 성경을 푸는 것은, 사사로운 욕심을 따라 성경을 아전인수격으로 푸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단입니다. 이단까지는 가지 않아도 잘못된 신앙, 왜곡된 신앙은 언제나 자기중심입니다. 또 성경을 배운다고 아무 데서나 배우면 안 됩니다. 정통적 신앙을 계승하는 교회를 통해서 말씀을 배워야 합니다. 사도적 계승을 받은 전통적인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곳에서 성경을 배워야 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들어서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함이라.” (고전 4:6) 성경을 해석할 때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말씀이 가는 곳까지 가고, 말씀이 멈추는 곳에 멈추어야 합니다. 그 이상 가면 변론이 일어나고, 엄청난 혼란이 일어납니다. 온갖 인간적인 경험과 사사로운 해석이 들어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우리가 서 있는 진리 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우리가 서 있는 진리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그 안에 우리의 삶을 뿌리 내리도록 해야 합니다. 또 우리는 재림신앙 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재림은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을 역사적인 사실로 믿는 신앙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그 날에 우리도 부활할 것이며,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성경말씀 위에 우리의 신앙을 견고히 세워야 합니다. 그 길만이 우리가 사는 길입니다. 이 신앙의 3가지 원칙을 가지고 말세의 때에 견고하며 흔들리지 않고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이 될 수 있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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