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 롯이 의인입니까? /벧후2:7-8/ 신현식 목사
2020-11-12 09:47:07
동화작가 안데르센의「미운 오리새끼」이야기를 아시죠? 오리 새끼들이 태어났는데, 한 마리는 모습이 남달랐어요. 그래서 다른 오리들이 조롱하며 왕따를 시켜요. 미운 오리새끼가 되어 버렸죠. 다른 오리들처럼 살지 못한다고 슬퍼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날아가는 백조를 봐요. 얼마나 멋있던지 부러웠어요. 그런데 나중에 연못에 비친 자기 모습이 백조와 똑같은 것을 발견해요. 본래 백조였는데 그것도 모르고 미운 오리새끼로 살았던 것이죠.
어쩌면 오늘 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미운 오리새끼처럼 살아가지 않을까 싶어요. 하나님께 속한 사람인데, 세상 사람들처럼 되지 못해 슬퍼해요.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는 존재인데, 땅에 것에만 묶여 살아요.
4천 년 전에도 이런 사람이 있었어요. 롯이에요. 그는 아브라함의 동생 하란의 아들이었는데,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삼촌인 아브라함 손에서 자라요. 그런데 이기적이었어요. 삼촌에게 손톱만큼도 고마움을 표한 적이 없고, 하나님께도 감사한 적이 없어요.
뿐만 아니라, 좋은 목초지를 선점해서 아브라함을 떠나버려요. 그 땅이 소돔이었죠. 겉으로 보기에는 에덴동산처럼 좋아 보였지만, 성경은 이렇게 기록해요.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창13:13) 롯은 정착할 땅을 결정할 때, 영적인 상태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유익성만 계산했어요.
그리고 소돔에서 살 때, 주변 도시들이 전쟁을 벌였는데, 롯이 포로가 되었다가, 가까스로 아브라함을 통해 구조를 받아요. 이 사건은 하나님의 경고였어요. “이젠, 신앙인으로 살아라. 인생의 방향전환을 해라.” 그런데 다시 소돔에 주저앉았고, 또다시 시류에 휩쓸렸죠.
그 후 이런 일도 있었죠. 천사들이 롯을 방문했는데, 소돔 사람들이 천사를 범하겠다며 천사를 내 놓으라고 해요. 이미 그 시대에 동성애자(게이)가 있었어요. 이때 롯은, 천사 대신에 자신의 두 딸을 내어 주려고 해요. 하지만 남색 하는 자들이었기에 딸들에겐 관심이 없어요. 천사들을 보호하려고 한 것은 가상하지만, 이해하기 힘들어요. 평소 롯의 생활로 미루어 볼 때, 적당히 타협하는 습관에서 비롯된 미봉책이었어요. 롯은 늘 신앙적인 단호함과 철저함이 결여 되어 있었고, 위기만 모면하려 했거든요.
물론 소돔 사람들의 불법한 행실을 보고 마음은 아파했어요.(8절) 그러나 관용했어요. 관용하다 보면 묵인하고, 묵인하다 보면 동조하고, 그러다가 자신도 모르게 젖어 들게 되죠. 그 모습이 롯의 가정에 나타나요. 롯의 아내가 소돔과 고모라에 미련을 부리고 집착하다가 소금기둥이 되고 말아요. 롯의 두 딸은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한 후에, 자기들에게 배필이 없다는 이유로, 아버지를 술에 취하게 한 후에 동침해서 임신을 해요.
●전혀 하나님의 사람답지 못한 부끄러운 모습이 가련해 보여요. 그런데 오늘 7절, 8절에서 놀랍고 당황스런 말씀을 하세요. 롯을 “의로운 롯”이래요. 동의가 되시나요? “롯이 어찌 의인입니까?” 질문 받으면 어떻게 설명하시겠어요? 저는 두 가지로 설명하려고 해요.
●첫째, 롯에게 과거 세상을 떠나는 출발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롯이 고향 갈대아 우르를 떠났는데, 당시 주체가 누구인가요? 할아버지 데라였어요.(창 11:31) 이때 아브라함이 50세, 롯이 10세 정도였죠. 우르는 메소포타미아 지방으로 번영한 도시였지만, 미신에 관심이 많았어요. 롯의 할아버지도 우상을 섬기고 있었어요.(수24:2)
그래서 하나님이 “그곳을 떠나서 가나안으로 가라” 하셨어요. 안락한 환경, 집안사람 들, 친구들, 배경이 되고 울타리가 되는 고향을 떠난다는 것을 대단히 어려워요. 그런데 떠나요. 대단한 믿음이죠. 이때 롯은 어렸기에 당연히 따라가야 했어요.
그런데 할아버지 데라가 가나안으로 향하여 1천km를 걸어가다가, 하란에서 멈춰요. 1천km를 더 가면 가나안인데 중간에서 멈춰요. 살기 좋은 곳이었어요. 교통의 요충지였고, 상업이 발달한 풍요로운 도시였어요. 아마도 할아버지가 가족들에게 이렇게 말했겠죠. “하나님이 가라고 해서 이만큼 왔으면 됐다. 이곳에서 머물자. 이 정도면 된 거다.” 지치고 힘든 여정에 비롯된 실수였어요. 그러다가 거기서 할아버지가 돌아가세요.
그러자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지시하신 가나안을 향해, 25년 만에 다시 떠나요. 이때의 주체는 아브라함이에요.(행7:4) 75세 늦은 나이에, 하나님과 함께 하기로 하고 하란을 떠나요.
그런데 우리가 눈 여겨 볼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성경에 75세 이전의 아브라함에 대해서는 아무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는 거예요. 하란을 떠나는 75세 이후부터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본격화 되요. 하나님의 관심은 하란을 떠난 이후부터에 있었다는 얘기죠. 그리고 하란을 떠날 때 “너는 복이 될지라.”(창12:2) 축복도 하셨어요.
여러분의 나이가 몇이신가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 하나님과 함께 하기로 하고, 하란 같은 세상을 조금씩 떠납시다! 그래서 하나님께 관심 받는 인생 되시고, “너는 복이 될지라.” 축복 받읍시다!
그리고 또 눈여겨 볼 것은, 롯이 하란을 떠날 때의 나이가 35세 정도였다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떠나자고 해도, 충분히 떠나지 않고 독자행보를 할 수 있는 나이었어요, 롯의 성격을 볼 때 충분히 그럴 수 있었어요. 게다가 하란에는 누릴 것, 붙잡을 것, 즐길 것들 많았어요. 25년 가까이 살았던 곳이니 적응 된 곳 이구요. ‘떠남’은 손해고 두려움이었어요.
그런데도 롯은 떠났어요. 그 결정의 근거는 하나님의 부르심,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었어요. 믿음으로 세상의 땅, 우상과 불신앙의 땅을 떠났던 거예요.
●전혀 의인답지 않은 롯을, 의인이라 불러 주시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에요. 소돔에 물들긴 했지만, 그래도 롯이 과거에 하나님만 믿고 떠났던 것을 기억하셨어요. 지금은 이기적이고 세상적이지만, 과거에 하나님 말씀을 따라 살려고 했던 롯을 기억해 주셨어요. 그래서 사망의 불구덩이에서 끄집어내시고 살리세요.(7b절)
이 지극하신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가 우리에게도 있어요. 제가 목회 시작할 때, 여러분이 직장에 취직하고 그 일을 시작할 때, 하란을 떠나 가나안으로 향하는 롯과 같은 신앙적인 다짐이 있었죠? “주를 위해 살겠습니다. 잘 섬기겠습니다.” 자식을 대학 보내거나 청년들이 대학 갈 때, 롯과 같은 결단이 있었죠? “말씀대로 살리라! 하나님의 사람이 되리라.”
그런데 대학가고 직장 가서, 세상 맛 보고 나서, 거기 맞춰서 살게 되었어요. 목회하면서, 직장생활하면서, 자식 키우면서, 롯처럼 단호함과 철저함이 무뎌지고, 관용하고, 묵인하고, 타협하고 동조하기도 했어요. 초심을 잃어 버렸죠. 묻게 돼요. “롯이 어찌 의인입니까?” “제가 어찌 의인입니까?” 답해 보세요.
●여러분의 대답과 상관없이 하나님은 우리를 의인으로 쳐 주세요. 비록 내가 그렇게 살았더라도 “너는 내 것이다.” 간주해 주세요. 왜요? 옛날에 우리도 롯처럼 불신의 세계를 떠나서 믿음의 세계로 들어섰거든요. 과거에 믿음을 위해 이런저런 노력도 했었거든요.
하나님은 그것을 기억해 주서서, 부지불식간에 우리를 건져 주셨고, 지금도 시시때때로 우리를 살려 주세요. 창 19:16절을 보세요. “롯이 지체하매 그 사람들이(천사들) 롯의 손과 그 아내의 손과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 밖에 두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자비를 더하심이었더라.” 롯이 소돔을 떠나기 싫어서 주저주저 하니까, 천사가 잡아끌어 당겼어요.
우리에게도 그리하셨어요. 우리가 다 알지 못해서 그렇지, 하나님이 잡아 당겨서, 위험한 자리를 피했던 적이 분명히 있었어요. 내가 세상에 미련을 두고 망설일 때, 하님이 내 손을 잡고 끌어내셔서, 사고의 자리, 죽음의 자리를 피할 수 있었던 적이 분명히 있었어요.
그래서 바울이 말해요.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롬8:31) 우리는 할 말이 없어요. 그저 감사할 뿐이에요.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고소해요. “예수 믿는 사람도 별 볼일 없네. 교회 다니는 사람이 뭐 그래?” 화살을 꽂아요. 때론 내 양심도 나를 고발하기도 해요. “목사가 뭐 이래, 내가 봐도 별 것 아니네. 한심하다.”
그런데 고맙게도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세요.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그리스도 예수가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니라.”(롬8:33, 34)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 하셨으니, 더 고발 못할 것이라 하세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간구해 주시니, 우리를 도우실 것이라 하세요.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감사해야죠. 그리고 새로워져야죠. 초심을 찾아야죠. 믿음의 자리로 돌아서야죠.
●두 번째, 하나님이 롯을 의롭게 봐 주시고, 소돔을 심판하실 때 건져 주신 이유는, 롯을 위해 기도하는 롯의 삼촌 아브라함 덕분이었어요.
창 19:29절에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 기록해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건지세요. 롯이 아브라함 조카여서인가요? 아뇨. 단순히 그래서가 아니라, 아브라함이 롯을 위해서 중보기도 했기 때문이었어요!
창 18장에서,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시려 할 때,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살리기 위해 하나님께 매달려요. “의인 50명 있어도 심판하실 겁니까?” “아니다. 의인 50있으면 멸망시키지 않을께” 그 후 네 번이나 더 매달리면서 10명까지 내려요. 아들이 죽게 되었을 때에는 그렇게 하나님과 줄다리를 기도를 하지 않고, 협상하듯 기도하지 않았는데...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 10명이 없었죠. 이제 도리 없이 심판받게 되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롯과 그의 가정은 살리세요. ●그 이유는 비장하게 조카를 위해 기도했던 아브라함을 생각해서였어요. 그 아브라함을 생각하니까 도저히 망하게 둘 수 없으셨어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구원받은 것, 누군가의 기도 덕분이에요. 우리가 살아 있는 것,누군가의 기도 덕분이에요. 하나님께서 내 곁에 있는 누군가를 생각해서였어요. 그 누군가는 가족일 수 있고, 친척일 수 있고, 친구일 수 있고, 목회자 일 수 있고, 성도일 수 있어요.
●그걸 인정한다면 우리도 빚 갚아야죠. 우리의 기도가 누군가를 살리는 기도가 되게 해얒죠.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생각하사 여러분의 가족을 살리시고, 친구를 살리시고, 이 나라 와 세계를 살리시길 축원해요.
이런 마음으로 옹달샘에 글을 실었는데. 읽어볼까요.
『요즘 기도할 때 마다 고백합니다. “우리는 답이 없습니다.” 복제 인간도 만들 거라고, 암도 정복할 거라고 큰 소리 치지만 미세한 코로나 앞에서 우리는 답이 없습니다. 그럼 답은 어디에 있나요? 다윗이 “모든 것은 주의 손에 달렸습니다.”(대상29:12) 답해 줍니다.
그러니 주님 손에 매달려야 겠지요. 권사님들은 화요일에, 남자 분들은 금요일에 새벽 기도로 주님 손을 부여잡아 주세요! 가족을 위해, 나라를 위해, 세계를 위해, 교회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참새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마10:29) 하셨으니,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단 하나의 바이러스도 활동할 수 없음을 믿고 애걸복걸(哀乞伏乞) 기도해 주세요. 석고대죄(席藁待罪) 하듯 기도해 주세요!』
막 2장에 희한한 말씀이 있어요. 네 사람이 한 중풍병자를 메고, 예수님께로 데리고 왔는데,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만날 수 없게 되자, 지붕을 뜯어서 달아 내려요. 이때 주님이 말씀하세요. “그들의(네 사람들)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막2:5)
주님이 중풍병자를 위해서 일하시는데,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네 명의 믿음을 보시고”였어요. 중풍병자의 믿음이 아니에요. 중풍병자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죽어가는 그를 살리려는 믿음을 보시고, 일하세요. 중풍병자를 위해 시간적인 희생과 물질적인 희생까지 감수하고, 주님께 간곡히 매달리는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를 고쳐 주시고, 죄까지 사해 주세요.
우리의 기도로 가족을 살리고 성도와 이웃을 살리고 나라를 살리고 세계를 살릴 수 있어요.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네 명의 믿음으로 기도하는 우리들을 생각하사, 고쳐 주시고, 죄까지 사해 주시는 은총의 역사가 있기를 간절히 축원해요.
물론 그렇게 사는 일이 어렵죠. 삶이 녹록치 않고 힘드니까요. 그런데 지난 화요일 새벽 말씀에 도전을 받았어요. 못생긴 포도나무에 포도즙이라도 나는 포도라도 몇 개 열려 있으면, 주인이 그 포도나무를 버리지 않는데, 하나님도 그렇게 하시겠다는 거예요.(사65:8) 이스라엘 백성이 죄로 인해 못난 백성이 되었어도, 그들 중에 그래도 하나님을 찾아와서 매달리는 소수의 하나님의 종들이 있으니, 그들을 위하여 이 백성을 다 멸하지는 않겠다는 말씀이에요. 겨자씨만 만한 그들을 생각하사 다시 땅을 주시고 미래를 주시겠다고 하세요.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의롭다 여기고 건져주신 하나님의 사랑이고, 네 명의 믿음을 생각하사 중풍병자를 고치시고 죄까지 용서하신 하나님의 사랑이에요.
이를테면 쓰레기 더미 위에 장미 한 송이가 피었으면, 그 장미 때문에 쓰레기 더미 전체를 보호하시고 아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에요. 쓰레기 더미 위에서 장미를 피우려면 힘이 들어요. 비바람을 견뎌야 하고, 작렬하는 태양도 참아내야 하고, 악취도 이겨내야 하고, 가시도 뚫고 나가야 해요.
●이 장미 한 송이의 삶에 도전해 봅시다! 우리가 가정을 살리고, 교회를 살리고, 이 나라를 살리기 위해 장미 한 송이의 사명자가 되시길 축원해요. 아멘!
ad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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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롯입니다 /벧후2:4-8/ 김경진 목사
2023-12-17 11:06:14
< 롯은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
우리가 롯에 대해 아는 건 그리 많지 않습니다. 롯의 이름을 들어보신 분들은 많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입니다. 아브라함과 함께 하란을 떠났고, 소돔과 고모라 성에 살다가 그 성이 멸망할 때 탈출해 산 위에서 살다 암몬 족속의 조상이 된 인물입니다.
아브라함과 조카 롯에 대한 이야기는 창세기 11장 27절부터 등장합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는 데라입니다. 데라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 나홀, 하란입니다. 이 세 아들 중 한 아들이 먼저 세상을 떠났는데, 그가 하란입니다. 하란은 바빌로니아 우르에서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에게 남겨진 자녀가 롯, 밀가, 이스가였습니다.
롯은 아브라함이 책임지기로 하고, 밀가는 삼촌인 나홀과 결혼해서 살게 됩니다. 아마 이스가도 그와 함께 남았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해서 아브라함과 롯은 운명적 가정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여러 곳을 함께 돌며 인생을 보냅니다. 오랫동안 아들이 없었던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끔찍이 사랑했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아버지와 아들처럼, 때로는 형과 동생처럼,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관계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창세기 12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란을 떠날 때 롯도 함께 떠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롯은 아브라함과 함께한 후로 많은 혜택을 입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많은 축복을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때 롯도 함께 축복을 얻었습니다. 창세기 13장 2절에서 아브라함은 짐승과 은과 금 등 많은 재물을 얻게 된 부자로 묘사됩니다. 이어 5~6절에도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등장합니다.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니라 (창세기 13:5~6)
롯은 아브라함과 함께하면서 점차 부자가 되어 갑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는 서로가 함께할 수 없을 만큼 큰 부자가 되어 있습니다. 결국 아브라함이 롯에게 독립할 것을 제안합니다.
창세기 13장 8~9절을 보면, 아브라함에게서 조카를 향한 애틋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너와 나 사이에 그리고 나의 목자들과 너의 목자들 사이에 어떠한 다툼도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한 핏줄이 아니냐?
네가 보는 앞에 땅이 얼마든지 있으니 따로 떨어져 살자. 네가 왼쪽으로 가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고, 네가 오른쪽으로 가면 나는 왼쪽으로 가겠다.” 이처럼 롯에게 유리한 조건을 제시하면서 그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 아브라함입니다.
그러나 롯에게는 아브라함에 대한 생각이나 배려는 크게 없어 보입니다. 자신에게 더 좋은 땅, 물이 넉넉한 땅을 선택한 롯입니다. 그는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13장 10절입니다.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창세기 13:10)
이렇게 해서 롯은 요단 동편의 온 들판을 갖기로 하고 아브라함을 떠납니다. 롯이 선택한 땅은 이미 문명이 발달한 곳이었고, 성읍들이 있던 지역이었습니다. 롯은 여러 성읍을 돌아다니다 결국 ‘소돔’이란 성에 살기 시작합니다.
< 롯은 주변의 덕을 많이 입은 사람입니다. >
소돔에 살면서 그에게는 여러 어려운 문제가 생겼습니다. 여러 왕들이 연합해 소돔과 고모라 성을 공격했습니다. 그때 소돔에 살던 롯과 그의 가족들 모두가 잡혀가는 처지가 됩니다. 재물도 다 빼앗겨 버립니다. 이때 소식을 들은 아브라함이 훈련된 자 318명을 데리고 달려와 후방을 쳐서 롯과 그의 가족들뿐만 아니라 잃었던 재산까지 환수합니다. 그 내용이 창세기 14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접하면서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많은 왕이 쳐들어 왔을 때 롯은 무엇을 했을까?’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저 사로잡혀 간 정황만 기록돼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318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데려와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데, 롯의 모습은 무기력하기만 합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롯은 아브라함을 통해 복을 얻었고, 성공하게 되었으며, 부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롯이 스스로 한 일은 크게 없어 보입니다. 롯은 누리는 사람이긴 했으나, 무언가를 스스로 세우는 사람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롯에게 가장 큰 사건은, 단연코 소돔과 고모라 성이 멸망하던 순간일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내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생각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드렸습니다.
여러분도 이 대목을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만약 소돔에 50명의 의인이 있으면 멸망시키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어 45명, 40명, 30명, 20명, 그리고 마지막에는 10명만 있더라도 멸망을 거둬 달라고 요청한 아브라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10명만 의인이 있더라도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어땠습니까? 소돔과 고모라 땅에는 의인 10명조차 없었습니다.
물론 아브라함이 이렇게 기도한 것은 조카 롯과 그의 가족을 향한 애정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성에는 의인 10명조차 없어 결국 롯과 그의 가족 모두는 소돔과 고모라에서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연유인지, 하나님이 롯과 그의 가족을 구해 주기로 작정하십니다. 하나님이 두 천사를 보내셔서 롯과 그 가족을 소돔 성 밖으로 내 보내신 것입니다.
찬찬히 롯의 인생을 살펴보면, 그는 참 인복이 많은 사람이란 생각이 듭니다. 늘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고, 특히 아브라함의 보살핌과 배려로 순탄한 인생을 살 수 있었습니다. 더욱이 소돔이 멸망할 때는 하나님이 천사들을 보내주셔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이런 그의 인생을 보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 생겼습니다. ‘과연 롯은 얼마나 정직했을까? 어느 정도로 의인이었을까?’ 또 더 궁금한 것은 이런 내용입니다. ‘왜 하나님은 롯에게 이토록 자비와 은혜를 베푸셨을까? 왜 롯을 사랑해 주셨을까?’ 아무리 살펴봐도 롯에게는 이렇다 할 신앙적 특징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가 정말 신앙이 있었는지 찾아내기도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복을 누릴 만한 자격이 있어 보이지도 않습니다.
< 롯은 신앙적으로 의로운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
롯의 삶을 다시 한 번 천천히 들여다봅니다. 창세기를 보면, 롯이 소돔에 정착할 당시 소돔이 어떤 상태였는지가 드러납니다. 창세기 13장 13절입니다.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 (창세기 13:13)
소돔 성은 롯이 정착하기로 결정한 도시였습니다. 롯 스스로 정착을 결정한 땅입니다. 그러나 롯은 그 땅의 영적인 상태를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소돔 성의 편의성과 여러 유익을 고려했을지는 모르지만, 그곳 사람들이 얼마나 악한 죄인들인지, 얼마나 하나님을 떠나 있는 사람들인지는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소돔을 자신의 거처로 삼았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롯은 소돔 땅에서 의롭게 살았습니까? 그렇지도 않은 듯합니다. 소돔과 고모라 땅이 멸망하기 전, 하나님은 천사 둘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천사들이 롯을 찾아왔을 때 롯은 그들을 극진히 대접했습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이, 롯에게 손님들이 찾아온 것을 알고는 집을 에워싸 그들을 내어놓으라고 야단법석을 떨었습니다. 그들과 성적인 관계를 맺으려는 의지를 보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롯이 그들에게는 아무 일도 저지르지 말라고 하며, 자신에게 남자를 가까이하지 않은 두 딸이 있으니 그들을 내어 주겠다고 선언합니다.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해결 방법입니다. 창세기 19장 8절입니다.
내게 남자를 가까이하지 아니한 두 딸이 있노라 청하건대 내가 그들을 너희에게로 이끌어 내리니 너희 눈에 좋을 대로 그들에게 행하고 이 사람들은 내 집에 들어왔은즉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 일도 저지르지 말라 (창세기 19:8)
과연 이런 결정이 아버지로서 할 법한 일입니까? 그야말로 당시 소돔 성이 얼마나 성적으로 타락하고 혼탁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분명 성적으로 심각하게 타락한 도시였습니다. 물론 롯이 그렇게 말한 이유 가운데는 하나님의 천사를 귀히 여겼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천사를 모시기 위해 어떤 희생이라도 각오하겠다는 의지로 풀이할 수도 있습니다. 나아가 당시 나그네들이 얼마나 힘없는 약자였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롯의 해결 방식은 이해되지 않습니다. 저는 그에게 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문제란 바로 적당한 ‘타협’에 있습니다. 롯은 언제나 타협하는 삶으로 일관했습니다. 불의를 행하는 이들을 보며 안타까워는 하지만, 또 그들이 요구하는 것을 다 줄 수는 없지만, 그들을 위로할 만한 것을 내어 주면서 타협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와 같은 롯의 모습에서 신앙적인 단호함이나 원칙, 철저함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대강 좋을 대로 살아가는 모습만 보일 뿐입니다. 자신의 딸들을 내어 주는 것조차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삶의 모습입니다. 더욱이 자신의 딸들이 남자를 가까이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단언하지만, 사실 그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롯은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뒷부분에 나오는 말씀에서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이 멸망할 것이란 소식을 들은 후 롯은 자신의 딸들과 결혼할 사윗감들에게도 그 내용을 알렸습니다. 그럼에도 사윗감들은 그 사실을 농담으로 여겼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이러한 모습에서 혼탁한 성적인 문화를 유추하게 되고, 그런 상황에서 롯의 딸들이 정절을 지켰을지도 의문입니다.
더욱이 롯의 사위들은 롯의 이야기를 믿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소돔 성을 따라나서지도 않았습니다. 롯은 예비 사위들에게조차 하나님을 알리거나, 그분을 따르도록 하는 데 실패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롯의 가족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어떤 신앙적 기준도 없었습니다. 그중 혹시 한 사람이 그런 기준을 가졌다면, ‘롯’ 정도가 아니었을까 짐작해 볼 뿐입니다.
< 롯의 가족들도 불의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
롯의 아내와 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을 빠져 나올 때 뒤돌아봐서는 안 된다는 주님의 사자들의 명령을 들었지만, 롯의 아내는 결국 뒤를 돌아보아 소금 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사실은 롯의 아내가 세상적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징표입니다. 두고 온 집과 재산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세상에 미련을 두고, 하나님의 명령도 마음에 새기지 못했던 사람이란 뜻입니다.
롯의 두 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한 후 그들은 잠시 소알에 머물다 산으로 피신해 살기 시작했습니다. 어마어마한 심판을 경험한 후에 온 심각한 후유증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산속에서 은둔의 삶을 살아갑니다. 평생을 그렇게 지냅니다. 이때 롯의 두 딸은 자신에게 배필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는 아버지를 술에 취하게 한 후, 아버지가 누운 곳에 몰래 들어가 정사를 합니다. 큰딸에 이어 둘째 딸마저 관계를 맺어 아이를 갖게 됩니다.
이에 대해 어떤 이는 그 당시는 이러한 일들이 가능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어떤 해석자는 바로 이 장면이 당시 그들이 얼마나 성적으로 타락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롯이 성적으로 타락한 소돔에서 탈출하긴 했지만, 또다시 그의 가족들로부터 또 다른 소돔이 시작되었다고 주장합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롯은 그러한 과정에서조차 소외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마 롯에게 두 딸이 아버지에게서 아이를 얻을 계획을 말했다면, 롯은 거절했거나 다른 조치를 취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롯의 딸들은 그 일을 아버지가 모르게 진행했습니다. 창세기 19장 33절입니다.
그 밤에 그들이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큰 딸이 들어가서 그 아버지와 동침하니라 그러나 그 아버지는 그 딸이 눕고 일어나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창세기 19:33)
이어 35절에서는 둘째 딸이 아버지와 함께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역시 같은 표현으로 서술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정, 어떻게 보입니까? 제대로 된 가정입니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가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이런 상상을 해 봅니다. 산에 아버지와 두 딸만 살고 있습니다. 아버지 외에는 어떤 남성도 없는데, 다른 사람들은 만나지도 않는 은둔의 삶을 살고 있는데, 두 딸의 배가 불러옵니다. 이때 아버지의 심정은 어떨까요? 즉 당시 아버지 롯은 무슨 생각을 하며 딸들을 바라보았을까요? 롯이라면 ‘내 딸들이 어디선가 남자와 관계를 맺었나 보다.’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즉 그에게서는 딸들을 훈육하거나 신앙적으로 바로 세우려는 흔적조차 엿보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 롯의 모습이 마치 우리의 인생과 같습니다. >
이러한 인생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이런 롯의 인생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어쩌면 우리네 인생과 너무 닮아서인지도 모릅니다. 롯이 그동안 하나님께 무언가를 드린 적이 있습니까? 성경 구석구석을 살펴보십시오. 롯이 하나님께 무언가를 드렸다는 흔적은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자신을 보호해 주고 사랑해 준 아브라함에게 무언가를 드린 적이 있습니까? 그런 흔적도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저 자신만을 알고, 자기만을 위해, 또 자신의 영달과 번영만을 위해 살아온 사람이 롯입니다. 게다가 어려움이 찾아오면 모른 척하거나 면피한 채 살아가던 사람이 롯입니다.
그는 불의한 소돔과 고모라 땅에 살면서 온전한 제사도 한 번 드린 적이 없습니다. 소돔에 살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증거 한 적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자신의 아내와 딸들, 사윗감들에게도 신앙적 의로움과 원칙을 전달하는 데 실패했던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소돔 성에 10명의 의인만 있으면 구해 달라고 했을 때, 왜 5명으로 줄이지는 않았을까요? 롯의 가족을 다 합하면 대략 6명입니다. 어쩌면 아브라함은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롯이 있으니 가족은 다 구원의 길로 인도했겠지. 적어도 6명은 구원했겠지. 그리고 그 땅에서 오래 살았으니, 적어도 가족 외에 4명 정도는 구원의 길로 인도했겠지.’ 그러나 소돔에는 의인 10명이 없었습니다. 몇 명의 의인이 있었는지도 불분명합니다.
롯은 아브라함 때문에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난 후에도 거부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아끼신 사랑으로 롯도 불쌍히 여기셔서 그를 멸망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이후 롯의 인생은 의미 있는 인생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저 소돔에서 탈출한 후 소알이란 곳에 머물다 산 위로 올라가 폐인처럼 숨어 살았습니다. 그렇게 지내다 암몬 자손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이런 인생이 하나님의 사람다운 인생입니까? 저는 이 말씀을 볼 때마다, 특히 롯의 이야기를 떠올릴 때마다 ‘내가 롯입니다. 내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라는 자책을 할 때가 많습니다. 사회를 변혁하지도 못하고, 살아가는 데 연연하며, 문명의 이기에 익숙해 성읍이 아니고는 도저히 살아갈 줄 모르는 롯! 그래서 문명의 이기는 구하지만, 그 속에서 불신앙과 이교도적인 사상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도 있지만, 세상을 바꾸지 못하는 롯! 더욱이 롯은 한 번도 도전하거나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일해 본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해 보지도 못했습니다. 나약하게 자기 삶만을 꾸릴 뿐입니다.
이런 롯의 모습이 내 모습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연약하고, 가정을 복음화 시키지도 못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아가지도 못하는 그의 모습이 내 모습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때문에 롯이 불쌍할 뿐만 아니라 애처롭기까지 합니다. 마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처절한 우리의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 연약한 우리를 하나님이 ‘자녀’ 삼아 주시고 ‘의롭다’ 칭하셨습니다. >
그런데 오늘 본문에 참으로 기막힌, 너무도 놀라운 구절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베드로후서 2장 6~8절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하지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는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 (베드로후서 2:6~8)
하나님은 이 가련한 인생,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롯을 향해 ‘의인’이란 단어를 사용하십니다. 롯은 어떻게 살았습니까? 정말 형편없이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의 삶을 돌이켜보면, 하나님을 만족시킬 만한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롯을 ‘의인’이라 불러주십니다.
왜 롯을 의인이라고 불러주십니까? 롯을 그토록 귀하게 대해 주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때문입니다. 소돔 성을 멸망시킬 때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생각하셔서’ 롯과 그의 가족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창세기 19장 29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 (창세기 19:29 중)
롯이 한 일은 별로 없습니다.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으며, 마음 상했을 뿐입니다. 무언가 시도한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데 공헌한 적도 없습니다. 그저 마음만 상할 뿐 시류에 휩쓸린 삶을 살아가던 인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셔서 그를 의인으로 불러주십니다. 바로 여기에 신앙의 유비가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롯의 관계는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로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생각하셔서 롯을 의롭다 여겨 주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바라보심으로, 너무도 하찮고 볼품없는 우리에게도 “너는 하나님의 자녀다. 너는 의인이다.”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참으로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할 만한 삶을 살아내지 못하는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셔서 우리를 심판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를 의롭다고 칭해 주십니다.
이제 우리의 삶을 다시 돌아봅니다. 특별히 사순절을 보내면서 ‘과연 나는 하나님의 귀한 존재로 살아가고 있는가?’라고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다시 회개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나는 롯입니다. 나는 이렇게밖에 못 살았습니다. 나는 형편없는 존재입니다.” 이렇게 회개하며, 주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귀한 사순절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적극적인 의인이 되자 /벧후2:6-11/ 옥한흠 목사
2014-11-12 11:18:09
강단에서 말씀 드리기에 거북하 고, 여러분이 듣기에 불편한 이야기 를 하려고 합니다. 우리 나라가 정 말 큰일났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정치가 아직 안정이 안 되어서 그런 것도 아니요, 경제가 불안해서 그런 것도 아닙니다. 짧은 인생을 살았지 만 이렇게 위기 의식을 크게 느껴 본 적이 별로 없었습니다.
어떻게 되려고 그러는지는 모르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큰 일이 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이유는 너무나 급속도로, 너무나 광범위하게 성적으로 타락하 는 현상이 우리 눈 앞에 벌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걷잡을 수 없이 많은 일들과 사건들이 주변에서 일 어나고 있습니다. 바람을 타고 번지 는 불길처럼 수많은 젊은이들을 삼 키고 태우고 있습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모 탤런트 가 자신이 간음하고 혼음한 체험기 를 담은 책을 출판하자 열흘 만에 5 만부 이상이 팔렸습니다. 그 정도의 판매 실적이라면 한 달에 적어도 10 만부가 팔린다는 것이고, 1년이면 100만부가 팔린다는 이야기입니다. 도대체 그 책을 누가 봅니까? 왜 많 은 사람들이 그런 책에 관심을 갖는 것일까요?
여고 3학년생이 30대의 유부남과 함께 놀아 나면서 변태적 성행위를 하는 이야기들을 담은 포르노 영화 '거짓말'이 지금 전국적으로 80여개 이상 되는 영화관에서 상영되고 있 습니다. 그 영화를 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20대입니다. 어떤 영화관 에는 10대 청소년들도 거침없이 관 람객으로 받고 있다고 합니다.
영화 를 보고 나온 관람자들의 8,90%가 여론 조사에는 '이것은 포르노다. 누구한테도 권하고 싶지 않다.'고 응답하면서도 그 영화를 보러 가는 것입니다. 더 기가 막힌 사실이 있 습니다. 영화관에서 상영되는 필름 은 약 40분 정도가 잘려나간 것인데 비해 인터넷을 통해 받은 영상파일 은 120분 짜리 완전 무삭제 판이라 고 합니다.
그런데 영화관에 가는 사람 보다 인터넷으로 그 영화를 관 람하는 사람의 수가 훨씬 많다는 것 입니다. 왜 이런 일이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것일까요? 그런 영화를 ' 창작의 자유다. 표현의 자유다' 하 면서 허가를 내 준 사람들에게 자기 딸이 고등학교에 다닌다면 그런 짓 을 하도록 내버려 둘 것인지 묻고 싶습니다.
현재 십대 미성년자로서 매춘행 위를 하고 있는 여자 아이들이 전국 적으로 50만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 아이들이 하루에 한 건씩만 일을 치루어도 하루에 50만명이고, 열흘 이면 500만, 한 달이면 1,500만명입 니다. 얼마나 많은 남자들이 마귀로 변해 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나 이로 따지자면 딸 뻘도 안 되고, 심 지어 어떤 경우에는 손녀 뻘 밖에 안 되는 아이들에게 그런 못된 짓을 하고 있는 남자들의 수가 도대체 얼 마나 된다는 것입니까? 그런 사람들 은 선진국처럼 명단을 공개해서 사 회에서 매장을 시켜야 됩니다.
그런 데 명단을 공개하자는 법을 만들어 국회에 내 놓았는데도 통과를 시키 지 않고 손에 쥐고만 앉아 있는 법 사 위원들이 있었습니다. 국민 여론 이 워낙 따가웠기 때문에 겨우 통과 는 시켰습니다. 그러나 한동안 쥐고 앉아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왜 통과를 안 시킬까? 아마 자기가 한번 씩 가나보지.'라는 생각이 들 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PC방에 드나드는 연령층은 주로 초등학생부터 대학생까지입니다. 대 부분이 젊은이들인데 열명 중 네, 다섯명은 음란물과 접촉을 하고 있 습니다. 에이즈 감염이 급속도로 확 산되고 있습니다. 에이즈 감염의 원 인은 98%가 성접촉을 통한 것이라 고 합니다. 많은 사람이 동남아로 여행을 갑니다.
그리고 그곳 값비싼 사창가에서 못된 짓은 다 하고, 자 기가 감염이 됐는지 안 됐는지도 모 른 채 한국으로 돌아와 또 원조교제 같은 것을 통해 순진한 딸 아이들을 유혹하여 성접촉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아이들이 자기가 지금 에 이즈 병균을 갖고 있는지 안 갖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정신 없 이 확산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 떻게 이런 일들이 우리 주변에서 이 렇듯 한계를 모르고 확산되고 있는 지 참으로 기가 막힌 이야기입니다.
어느 글을 보니까 서울은 세계에 서 돈만 있으면 매춘을 가장 손쉽게 할 수 있는 도시라고 합니다.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여자하고 놀아나고 남자하고 놀아날 수 있는 시설들이 50m간격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너 무 과장이 심하지 않나 생각했는데 조금 더 읽어 보고는 수긍할 수 밖 에 없었습니다.
거리마다 퇴폐 이발 소, 증기탕, 단란주점, 안마 시술소, 사창가, 윤락가 등이 줄줄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어쩌다가 이 모양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먹 고 살만 하니까 미쳐 버리는 거 같 습니다.
생각만해도 입에서 험한 말 이 튀어 나오려고 하는데 그것을 참 느라고 굉장히 애를 써야 할 지경입 니다. 정말 다들 왜 이러는지 모르 겠습니다. 우리 모두가 대단히 위험 하고 악한 성 감전지대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우리 앞에 펼쳐지는 이런 모습들 이 소돔, 고모라와 매우 유사하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소돔, 고모라가 어떤 곳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 다. 어느날 하루 아침에 갑자기 하 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저 사해 바다 밑바닥으로 가라 앉은 도시입니다. 지구상에서 그 흔적조차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곳 입니다.
왜 소돔, 고모라가 하루 아 침에 이와 같은 심판을 받았습니까? 본문에 그 이유가 나옵니다. 7절에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때문이 라고 말씀합니다. '무법한 음란한 행실'이라는 말입니다. 이 '무법하다 '는 말에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성(性)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고 귀한 선물입니다.
결혼이라는 아름 다운 제도 속에서 남녀 부부에게만 허용하신 너무나도 소중하고 귀한 축복이요, 은혜입니다. 그래서 하나 님이 명령하신 자연 질서대로 남녀 가 결혼해서 결혼 생활을 통해 서로 가 성을 나눌 수 있도록 허락하셨습 니다.
그런데 이 무법하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주신 이 자연법칙을 역 행한다는 말입니다. 자연과 양심을 거역하고 행동하는 모든 성적 문란 행위가 바로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이라는 말로 표현되고 있는 것 입니다.
소돔, 고모라가 바로 그와 같은 성 문란의 도시였다는 이야기 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영어에 '소 도미(sodomy)'라는 단어가 있습니 다. Sodom에다 my를 붙여서 sodomy라는 단어가 되었는데 이는 변태 성행위를 뜻합니다.
호모섹슈 얼리티(homosexuality:동성연애)와 동의어입니다. 그 단어만 보아도 소 돔, 고모라가 얼마나 성적으로 부패 하고 문란한 도시였는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더 이상 눈뜨 고 보실 수 없었기 때문에 하루 아 침에 그 도성을 유황불로 심판해 버 리신 것입니다.
심판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단 순히 그 성을 없애 버리는 데 목적 이 있었습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6 절에 그 목적이 나옵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 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치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다.' 후세에 또 그와 비슷한 일을 할 지도 모를 사람들에게 경고하기 위해서 본을 보여 주려고 소돔, 고모라를 멸하신 것입니다.
긴 세계 역사를 살펴 보 면 폼페이와 같이 화산재에 묻혀서 비극의 현장으로써 역사의 한 페이 지를 장식한 도시의 경우도 간혹 있 습니다. 그러나 소돔, 고모라와 같이 하나님의 손에 직접 심판을 받은 경 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뉴욕의 맨하 탄이 시궁창 같이 더러운 곳이지만 아직도 하나님께서는 그대로 남겨 놓고 계십니다.
유럽도 엉망입니다. 성적으로 얼마나 더러운 곳이 많습 니까?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그곳 에 드나드는 사람들이 다 건강하고, 장수하고, 자기 기분대로 세상을 살 도록 내버려 두고 계십니다.
하나님 께서는 소돔, 고모라와 같이 하나님 이 정하신 질서와 자연을 거역하는 사람은 심판한다고 하시면서 실제로 는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서울 장안 곳곳마다 냄새가 나고 정말로 눈뜨 고 볼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 지만 하나님께서는 가만히 두십니 다.
그러나 지금 당장 심판하지 아니 하시는 이유를 분명히 알아 두어야 합니다. 그들은 이미 형벌 아래에 있다고 9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미 형벌 아래 놓여 있습니다. 심 판은 시간 문제입니다. 심판이라고 말할 때, 단순히 하늘에서 유황불이 떨어지는 것만 심판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런 심판은 주님이 재 림하실 때 이미 이 세상이 받아야 될 심판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그것 이 아니더라도 성적으로 문란하고 성범죄를 함부로 범하는 자들은 스 스로 심판을 자초하고 있습니다. 그 들의 인격이 사정없이 파괴됩니다.
동성연애를 하는 사람들의 인격은 제 인격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완전 히 죽어 버립니다. 소망이 없습니다. 가정이 파괴 되어 버립니다. 많은 사람에게 상처와 고통을 줍니다. 그 리고 나중에는 건강을 잃어 버립니 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는 사회와 국가에 피해를 주는 사람이 되어 버 립니다.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심판 입니까?
소돔, 고모라에 롯이 수십 년 동 안 살았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롯이 소 돔에서 한 일이 무엇입니까? 베드로 는 본문에서 롯을 굉장히 높이 평가 하고 있습니다. 롯에 대해서 무엇이 라고 말합니까? 의인이라고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롯은 무법한 자들이 음란한 행실을 보고는 너무나 마음 이 괴로워서 늘 심령이 상했다고 했 습니다. 그렇게 보면 롯은 의인이었 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경건하게 살려고 무척 애를 썼던 것 같습니 다. 그러나 저는 이런 롯의 행동이 소극적이라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자기 혼자 마음만 아파하면 무엇합 니까?
혼자 그렇게 끙끙 앓으면서 마음만 아파했기 때문에 자연히 주 변에서 벌어지는, 차마 모든 눈 뜨 고 볼 수 없는 일들을 보면서도 관 용하지 않습니까? 관용하다 보면 묵 인합니다. 묵인하다 보면 침묵합니 다. 그러다가 같이 동조하는 것입니 다. 창세기를 보면서 롯이 자기도 모르게 얼마나 그 사회의 풍조에 깊 이 젖어 있는가를 알 수 있지 않습 니까?
그러므로 롯으로 인해 소돔성 은 전혀 도움을 못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성에서 의인 10사람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의인 열 사 람을 만들 수가 없었습니다. 조금만 노력했으면 그 소돔성을 하나님의 심판에서 건질 수 있는 의인 열 사 람을 확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롯만 똑바로 했더라면 말입니다. 우 선 자기가 있습니다.
아내가 있습니 다. 딸이 둘입니다. 학자에 따라서는 넷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둘이 라고 봅시다. 그리고 그 딸들하고 정혼한 사위 후보가 둘 있지 않습니 까? 모두 합해 여섯 아닙니까? 롯 이 제대로만 했으면 여섯 명은 하나 님이 인정하는 의인이 되었을 것이 고, 거기서 4명만 더 보태면 열 명 이 된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것도 못했습니다. 얼마나 무능한 사람이었는지 모릅니다. 자기 혼자 속 아파하면 무엇합니까? 우리는 소 돔, 고모라와 같은 이런 음란한 도 성에 살면서 소극적으로 행동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적극적인 의인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 혼자 마음 아 파하고 괴로워 하면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기도만 하면 안됩니다. 좀 더 적극적인 태도를 가지고 오늘 이 도성을 구원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이젠 한두 번 클릭만 하면 국경 도 없습니다. 언어를 몰라도 괜찮습 니다. 영어를 몰라도 괜찮습니다. 클 릭 한두 번만 하면 인터넷을 통해서 전 세계의 모든 네트웍을 통해 음란 한 것, 포르노에 속하는 것은 무엇 이든지 끌어다가 앉은 자리에서 다 볼 수 있습니다.
문을 잠가 놓고 자 녀들이 그런 것들을 보는지 안 보는 지 여러분이 항상 감시할 수 있습니 까? 헌법을 가지고, 법률을 정해서 감시할 겁니까? 경찰을 옆에다 세워 놓을 겁니까? 무슨 재주로 그 아이 들을 감독하고 감시할 수 있다는 말 입니까?
그러므로 마음만 아파하면 서 가만히 그냥 두면 안됩니다. 지 금 우리 아들 딸들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남편이 지 금 어느 정도인지 모릅니다. 부인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설마는 안 통합니다.
이제는 설마 하고 앉아 있을 때가 아닙니다. 우 리 모두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사랑 하는 가족들을 이 더러운 음란의 물 결에서 지켜야 되고 이 나라가 하나 님의 심판을 받는 일에서 구원을 받 을 수 있도록 나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여러분에게 3가지 를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이 3가지 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는 중요한 영적 원리입니다. 적극적인 의인이 되는 세가지 방법 중 그 첫째는 거룩으로 우리 자신을 철저하게 무장하는 것입니다.
거룩 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거룩이 무엇 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 하신 신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 리를 이 소돔, 고모라와 같은 세상 으로부터 불러 내어 구별하셨습니 다. 이 자체가 거룩한 것입니다. 우 리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우 리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15,19,20절에서 엄청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 님이 우리 몸을 두고 어떻게 말씀하 십니까? 영혼만이 아니라 우리의 육 신, 성행위를 할 수 있는 이 몸, 성 적으로 타락하기 쉽고 더러워질 수 있는 우리 몸, 이것을 두고 하나님 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예 수 그리스도의 지체라고 합니다.
예 수님의 몸이라고 하십니다. 얼마나 거룩합니까? 더 나아가서는 성령의 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령의 전 이 얼마나 거룩합니까? 하나님의 신 을 우리 마음에 모시고, 우리 육신 에 모시고 살고 있습니다. 거룩한 성전입니다. 템플(temple)입니다. 그 리고 더 나아가서 어떻게 말씀하십 니까?
'너희 몸은 너희 것이 아니 다. 내가 값을 주고 산 내 것이다.' 하나님의 소유라고 분명히 선언하십 니다. 이처럼 우리 자신의 몸이, 우 리의 인격과 신분 전체가 하나님처 럼 거룩하게 구별되어 있다는 사실 을 말씀을 통해 분명히 알고, 그 말 씀을 나의 믿음으로 소유함으로써 나는 거룩하다는 분명한 의식을 가 지고서 모든 것을 보고 듣고 행동하 는 것이 거룩으로 무장하는 일입니 다.
우리가 성령을 모시고 살고 있기 때문에 이런 음란하고 더러운 것으 로부터 우리를 지킬 수 있는 구체적 인 방법을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셨 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16절은 이렇 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성령을 좇 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소욕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다시 들어 보 십시오.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 라.' '그리하면'은 조건을 나타냅니 다. 그것만 하면 육체의 욕심을 절 대로 성사시키지 못한다는 것입니 다. 육체의 욕심이 무엇입니까? 19 절을 보면 육체의 욕심은 음행과 더 러운 것과 호색, 즉 성과 관계되는 모든 범죄를 일컬어서 말씀하고 있 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남녀를 불문하고 하나님이 주신 성적 본능 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이 나쁜 것 이 아닙니다. 젊은이는 젊은이로서, 또 장년은 장년으로서 성적 본능을 유지하고 있고 이것은 하나님이 주 신 선물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육신 이 부패한 본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항상 이것이 잘못된 탈출구를 찾으 려고 충동질을 할 때가 많습니다.
이럴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때마다 성령을 찾으라.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에게 기대라. 성령의 은 혜를 입으라. 그리하면 저절로 육체 의 잘못된 본능적인 충동은 사그라 진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 자신을 거룩으로 무장해야 합 니다.
한 순간도 우리가 거룩한 존재라 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한 순간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잘못 할 수 있습니다. 나도 모르게 간음도 범할 수 있습니다. 나도 모르게 이상한 데 끌려 들어갈 수 있습니다.
나도 모르게 인터넷 앞에서 포르노를 보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 러나 그런 위험에 빠질 때마다 정신 차리고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에게 의지하십시오. '나를 좀 도와주십시 오.' 우리가 그와 같이 성령을 찾아 의지하는, 거룩을 지키려고 하는, 거 룩으로 무장하려고 하는 적극적인 노력을 안 하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빠져 들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을 부지런히 교 훈 하십시오. '너는 거룩한 존재야. 하나님의 아들, 딸이야.' 이 사실을 한시도 잊지 않도록 교훈 하십시오. 인터넷을 열 때마다 자정능력을 가 질 수 있도록 자녀들을 교육시켜야 됩니다. 자정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누가 감시하겠습니까?
아무도 감시 못합니다. 오직 자신을 거룩하게 지 키고자 하는 거룩한 자정 능력만이 우리 자녀들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자정능력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하 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내가 거룩한 존재요, 하나님의 아들, 딸이라는 것 을 항상 깨닫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선택할 줄 알고, 가 릴 줄 알고, 멀리 할 것은 멀리하고, 가까이 할 것은 가까이 할 수 있는 능력을 갖는 것이 자정능력입니다. 자녀들에게 이 자정능력을 가르쳐야 됩니다. '요즘 아이들은 자꾸 잔소 리하면 안 들어.' 도대체 누구의 소 리입니까?
'요사이 아이들은 고리타 분하게 자꾸 스트레스 주면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도 들으려고 안 해.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내버려 두는 것이 최고야.' 이런 말들을 많이 하 지 않습니까? 누구의 이야기입니 까? 사람들의 이야기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십시오. 자녀들을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십니까?
부지런히 가르치라고 하십니다. 듣든지 말든지 부지런히 가르치라고 하셨습니다. 잘못 할 때 는 채찍질도 하고 꾸중도 하라고 하 셨습니다. 자녀들의 눈치만 보면서 '세상이 다 이런데 나 혼자 잘 가르 친다고 될까?'라는 식으로 행동하라 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 말씀 대로 하십시오.
여러분에게 책 한 권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아마 예수를 안 믿는 저 자의 책 같은데도 굉장히 유익한 책 입니다. '줏대 있는 아이가 세상의 중심이 된다'는 제목의 책입니다. 린다 리처드 에어가 쓴 것인데, '부 모가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올바른 가치관을 심어 주는 것이다'는 것이 골자입니다. 케케묵 은 이야기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릅 니다. 그래서 12가지의 가치관을 나 열을 해 놓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는 정절과 순결을 지키는 것에 대한 것도 들어 있습니다. 이것을 자녀들 에게 어려서부터 철저하게 가르치라 는 말입니다.
그렇게 바른 가치관을 심어 주면 애들이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버려야 할 것인가를 분명히 알고 처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새삼스러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 로 성경말씀이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렇게 적극적으로 우리 자신을 거룩하게 지키고 자녀 들을 거룩으로 무장하려고 하는 일 에 노력을 안 해온 것이 사실입니 다.
여러분 중에 대학입시를 위해서 주일날 과외 가는 것은 허용하면서 도 교회에 가서 앉아 있는 것은 아 니꼽게 생각한다든지 시간이 아깝다 고 생각하는 부모가 혹시 있습니까? 여러분부터 정신 차려야 됩니다.
자 녀들이 좋은 대학에 가면 무엇합니 까? 속은 다 썩어 문드러지는데 말 입니다. 그들에게 자정능력이 없을 때는 무슨 짓을 할지 여러분이 다 알 수 있습니까? 모릅니다. 차라리 좀 뒤떨어져도 좋습니다.
차라리 사 회적으로 2류 인생이 되어도 좋습니 다.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살려고 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라는 것 입니다. 좀더 적극적으로 자녀들을 다스리십시오. 그러면 2류 인생이 되는 줄 아십니까? 하나님께 2류 인 생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모 든 인생이 다 1류입니다. 할렐루야!
둘째로는 음란한 성문화를 부추 기는 세력에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합니다. 저는 김강자 서장의 기사를 읽을 때마다 감동을 받습니다. 서장 이라는 위치가 그렇게 대단한 줄 몰 랐습니다. 교회의 집사, 장로 중에 서장이 되신 분들을 많이 알고 있지 만 서장이 되어서 그렇게 대단한 일 을 하는 것을 여지껏 못 봤습니다.
별로 힘이 없는 자리로 알고 있었는 데 여자 한분이 서장이 되더니 국력 으로도 어찌하지 못하고 60만 대군 으로도 어찌하지 못하던 일을 붙잡 고 흔들면서 대단한 반향을 일으키 고 있지 않습니까? 그분이 기자들과 인터뷰하는 내용을 읽으면서 감동을 받았습니다.
지금도 새벽 3시까지 유흥가를 순찰하다가 돌아와서는 경 찰서에 있는 자신의 조그만한 방에 들어가 잠이 든다고 합니다. 잠깐 몇 시간 자고 일어나는데도, 너무나 행복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기 때문 입니다.
자기에게 딸 둘이 있는데 하나는 반드시 경찰관을 시킨다고 합니다. 이분이 예수를 믿는지 안 믿는지는 모르지만 제가 도전을 많 이 받았습니다. 저렇게 적극적인 자 세를 가지고 악과 대결하려고 하기 때문에 나약해 보이는 여성이지만 무엇인가 해 내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적극적인 행 동이 필요합니다.
오만 개의 교회가 있고, 천만 명 이 넘는 신자가 있는 이 나라가 지 금 이 꼴이 무엇입니까? 왜 우리가 이 꼴을 하고서 롯처럼 혼자 가슴만 아파하며 그저 교회에 나와 '주여' 하고 한숨 섞인 기도만 하지 더 이 상 아무 것도 못하는 무력한 존재가 되었습니까? 이것은 하나님도 슬퍼 하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중에 공직에 몸 담고 계 시는 분이 있습니까? 그 위치를 최 대한 이용해서 이 잘못된 성 문화를 퇴치하는데 앞장서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전문 지식을 가지고 있는 전문인입니까? 머리를 써서 연구하 십시오. 그래서 우리 어린 아이들이 포르노를 보지 않도록 차단 프로그 램을 만드는 일에 힘쓰십시오.
혹은 그 어떤 프로그램 보다도 어린 청소 년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재미있고 유익한 프로그램을 만드는 일에 심 혈을 기울이십시오. 그 자체가 적극 적인 행동이 됩니다. 여러분이 교육 자입니까? 듣든지 아니 듣든지 가르 치십시오. 잘못된 것은 잘못 되었다 고 말을 하십시오.
만약에 우리가 이것도 저것도 하기 힘든 처지에 있 다면 시민단체에 가입을 하십시오. 그래서 서로가 힘을 모아 어떤 소리 를 낼 수 있도록 노력을 하십시오. 예수 믿는 사람이 교회 안에서만 뱅 뱅 돌면 안됩니다.
우리가 이 사회 악과 대결하기 위해서는 좀더 적극 적인 행동을 취할 필요가 있습니다. 책을 쓸 수 있습니까? 좋은 글을 쓰 십시오. 여러분이 어떤 형태로든지 이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성 문화에 대항하여 과감하고 적극 적으로 대처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 나님의 자녀의 태도입니다.
이틀 전에 기독교윤리실천본부에 서 팩스가 왔는데, 기윤실 안에 이 런 협의회가 있습니다. 이름이 상당 히 깁니다. '음란 폭력성 조장 매체 대책 시민협의회' 그 의도가 참 좋 습니다. 음란과 폭력성을 조장하는 비디오, 인터넷, 영화 등의 모든 매 체에 대해서 힘을 모아 대책을 세우 자는 협의회입니다.
굉장히 좋은 모 임입니다. 우리가 이런 데도 가입을 해서 함께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 곳에서 저에게 요청 하는 것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물론 전국 교회에 요 청을 한 것이겠지요. 지금 '거짓말' 을 상영하고 있는 영화관에 전화를 해서 항의를 해 달라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들고 일어나서 항의하면 그 사람들이 정신 차릴 수 있을 것 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 영화를 상 영하다가 양심에 찔려 중단한 영화 관도 몇 개 있는데 그런 영화관에는 격려 전화를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 영화관이 좋은 영화를 상영할 때 는 일부러라도 가서 영화를 봄으로 써 수입을 올려달라는 것입니다.
그 리고 '거짓말'에 대한 수사를 맡은 검사에게 전화해서 격려를 해 주고 반면에 '거짓말'을 제작한 사람들에 게 전화해서 따끔하게 한 마디 해 달라는 것입니다. 시간이 있었다면 그 팩스를 복사해서 여러분이 돌아 갈 때 손에 들고 가도록 했을텐데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가만히 앉아 기도만 하면 안됩니다. 롯처럼 가슴만 앓고 있으 면 안됩니다. 적극적으로 나서야 됩 니다. 로마서 12장 21절에 보면 '악 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 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런 적 극적인 자세를 가지고 오늘 이 사회 를 우리가 품어야 됩니다.
불쌍한 청소년들을 우리가 품어야 됩니다. 짐승 같은 남자들의 손에 놀아나는 우리 딸 아이들을 살려야 됩니다. 그 아이들이 처음부터 가고 싶어서 그곳에 간 것이 아닙니다. 부모가 이혼을 해서, 어려서부터 부모를 여 의고 사랑받지 못하고 자라서, 가난 때문에 공부를 못해서, 아이들에게 왕따를 당해서, 갈 때가 없어서 끌 려 들어간 곳이 그런 곳이 아닙니 까?
세번째로는 의인 10명을 만드는 데 좀더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합니 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만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만 일 소돔 성에서 의인 오십 명만 찾 으면 그들 때문에 소돔 성을 용서해 주겠다.' 아브라함이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의인 오십명을 찾아낼 재간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기 조카 롯은 의로운 사람인 줄 알았지만, 또 다른 오십 명이 있는지 장담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께 떼를 썼습니다. '하나님, 40명은 어떻습니까?' '40명만 있어도 내가 그 성을 심판하지 않겠다.' '하나님, 30명은요?' '30명도 좋다.' '하나님, 20명은요?' '그래, 20명만 있어도 내가 그 성을 용서해 주마.' 그런데 아무리 헤어봐도 20명이 나올 것 같 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마지막입니 다. 용서해 주십시오. 용서해 주시고 들어 주십시오. 열 명이 있으면 어 떻게 하시겠습니까?' 창세기 18장 32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 다. '내가 열 명을 찾아도 멸하지 아니하리라.' 결국 소돔, 고모라는 성 문란으로 심판 받았다기 보다는 의인 열 사람이 없어서 망한 도성입 니다.
오늘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대 한민국에서, 이 세계에서 의인 열 사람의 구실을 감당해야 합니다. 우 리 모두가 의인 열 사람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만 의인 열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전도 를 해서 한 사람이라도 더 예수 믿 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그 마음에 모시게 함으로써 더럽고 악한 죄로부터 자기를 자유케 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가장 안전 하고, 확실하고, 가장 효력이 큰 성 범죄 백신은 예수 믿는 것 밖에 없 습니다.
저는 어떤 편지를 하나 읽었습니 다. 딸이 가출해서 남자애들과 혼음 을 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런 아이를 불러다 놓고 부도가 나서 정 말 아무 것도 없는 아주 가난한 집 인데, '너에게 돈을 줄 테니까, 성경 을 창세기부터 써 볼래.'라며 부모 가 제안을 했습니다.
돈이 없어 집 에 들어오는 아이에게 그런 식으로 미끼를 던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이가 돈을 받으려고 성경을 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66 권 중에 벌써 40권을 썼습니다. 그 러는 사이에 아이가 자기도 모르게 변화를 받았습니다. 예배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아마 이 자리에 있을 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아무도 형제를 향해서 돌 을 던질 자격이 없습니다. 저도 간 음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간음할 수 있습니다. 저도 포르노를 얼마든 지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얼마 든지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거룩 한 자녀로 지킬 수 있는 이유는 우 리 안에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 다.
할렐루야! 그래서 잘못된 곳에 빠졌다가도 금방 나옵니다. 우리 주 변에 예수가 없어서 죽음의 골짜기 인 줄도 모르고 끌려 들어가는 수많 은 청소년들, 수많은 불신자들을 주 님 앞으로 인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의인 열 사람을 만드는 작업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의인들 이 이 땅에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우 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연기할 수가 있으며, 이 세상에 구원의 기회를 더 줄 수 있습니다.
이 역할을 우리 가 해야 합니다. 그러면 아무리 우 리 눈 앞에 있는 상황이 절망적이라 고 할지라도 희망은 살아있다고 확 신합니다. 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 다고 확신합니다. 우리의 청소년들 을 구원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이 땅에 사창가가 없어지고 이 땅에 미성년 매매춘이 없어지고, 이 땅에 모든 더러운 음란물, 음란한 소재들 이, 통신들이, 매개체가 다 사라지는 날이 올 줄 믿습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적극적인 의인이 됩시다.
세가지를 말씀 드렸습니다. 첫째 는 거룩으로 철저하게 우리 자신을 무장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음란한 성문화를 부추기는 세력에 적극적으 로 대응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의인 열명 만드는 일에 좀더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하 나님의 명령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것을 마음에 담고 세상을 향해서 다 시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관심/벧후2:4-8
2003-10-29 15:51:09
며칠 전, 제가 아파트에서 나오다가 우리 교회 교우이신 한 모친께서 뜨락에서 무엇을 줍고 계신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3개월 전에 큰 수술도 받으셨고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하시는 연세 드신 모친께서 청소를 하고 계시는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아니, 뭐하세요? 청소하세요?"
제가 그렇게 묻자 여중생처럼, 여고생처럼 얼굴이 발개지시면서 수줍게 대답하셨습니다.
"아니에요, 목사님. 청소하는 게 아니라 낙엽이 예뻐서 몇 개 주웠어요."
그리고 그 낙엽들을 제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 모습이 마치 소녀 같았습니다.
소녀든 가정 주부든 할머니든 여자는 예쁘게 단풍든 낙엽이 떨어져 있으면 그것을 줍고 싶어하고 간직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소년이든 청년이든 장년이든 노인이든 남자는 낙엽을 보아도 "와! 낙엽."하지 않고 그것을 주워서 간직하지도 않습니다. 특별한 남자, 별난 남자가 아니고는 그냥 밟고 지나가버립니다.
이것이 남자와 여자의 차이입니다.
또 나이에 따라서도 관심이 다릅니다.
한 남자가 두 여인을 거느리고 살았답니다. 제가 오늘 1부 예배 때 회개를 했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전하면서 "어느 남자가 두 여인을 거느리고 살았대요. 복 있는 남자지요?"라고 했는데, 그 남자는 복이 있는 남자가 아니라 팔자가 험한 남자입니다. 한 여자와 살아도 골치 아픈 일이 많은데, 두 여자와 살려면 얼마나 복잡하겠습니까?
어쨌든 그 남자의 한 애인은 나이가 어린 예쁜 여자였고, 한 애인은 나이가 지긋한 성숙한 여자였답니다. 그런데 젊은 애인은 자기 애인이 나이 들어 보이는 것이 싫어서 애인이 자기를 찾아올 때마다 반백인 애인의 흰 머리카락을 하나 둘 뽑았답니다. 또 나이 든 애인은 남자의 새까만 머리가 보기 싫어서 까만 머리를 자꾸 뽑았답니다. 세월이 지나니, 남자의 머리는 완전히 벌거숭이가 되고 말았답니다.
사람의 관심은 이렇게 다릅니다.
저희 아이들이 어릴 때 장난감을 사 달라고 얼마나 졸라댔는지 모릅니다. 자기 장난감은 물론 자기의 것이고, 교인들의 아기들이 갖고 온 장난감도 빼앗아 가지고 주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장난감을 좋아하던 아이들이 대학생이 되더니 장난감 가게를 지나가도 눈길 한번 보내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관심은 나이에 따라 달라집니다.
또 직업에 따라 관심이 다릅니다.
예전에 몇 주간 스위스에 다녀올 때 모 대학의 교수와 함께 갔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수는 어느 도시에서든 서점에 갔습니다. 쮸리히에서도, 베른에서도, 하이델베르그에서도 서점에 들어가서 책을 샀습니다. 그리고 호텔에서도 책만 읽었습니다. 관심이 학문에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여러분과 저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관심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의인이 어디에 있나? 이 도시에 의인이 몇이나 되나?'
하나님의 관심은 '이 도시에서 누가 제일 잘 사나? 제일 높은 사람이 누구냐? 제일 잘 생긴 사람, 가장 매력 있는 사람이 누구냐?'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의 헤어스타일이 가장 좋으냐?'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 주님의 관심은 '어디에 의인이 있나?'하는 것입니다.
소돔 고모라에 갓난아기들도 많고 짐승들도 많아서 그냥 넘어가고 싶으셨는데, 소돔 고모라에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그냥 용서해 주려고 하셨는데, 의인 열 사람이 없으니 할 수 없이 하나님께서 그 도시를 유황불로 다 태우셔서 잿더미가 되게 하셨습니다. 훗날에 경건치 않은 자들에게 "음란한 도시는 이렇게 된다."라는 본을 보이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을 얼마나 간절히 찾으시는지 모릅니다.
예레미야 5장 1절에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고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If you can find but one person)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I will forgive this city.)』
'의인을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도시를 용서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디에 의인이 있나? 의인이 몇 사람이나 되나?'하시며 찾으십니다.
하나님 앞에 찾으신 바 된, 하나님께서 발견하시는 여러분과 제가 의인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의인 한 사람이, 의인 열 사람이 백만, 천만 군대보다 더 강합니다. 소돔 고모라에 하늘의 유황불이 떨어질 때 백만 명의 군사로 그것을 막겠습니까? 천만 명의 군사로 막겠습니까? 엄청난 무기로 막겠습니까? 하늘의 불을 그 누가 막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의인 열 사람은 막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을 보호하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의인'과 거리감을 너무 많이 두면 안 됩니다.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의인이 되나? 나같이 부족한 사람이 어떻게 의인이 되나?'
아닙니다. 우리는 벌써 의인이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을 믿으면 믿음으로 의인이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믿음으로 이미 의인이 되었습니다.
창세기 15장 6절에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의로 여기시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부족한 사람이었습니다. 부끄러운 가문의 아들이었습니다. 우상을 만들어 파는 우상 숭배자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임기 응변적으로 거짓말도 잘 했고, 상황에 따라 비겁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그것을 의로 인정하셨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아무리 부족해도 예수님을 믿으니 갈라디아서 3장 16절 말씀대로 의인이 되었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를 믿나니』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성령으로 거듭나고 예수님의 피로 죄 사함을 받고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의인은 믿음의 의가 있는 동시에 생활에도 의가 있어야 합니다. 창세기 15장 6절에서는 아브람이 하나님을 믿으니 그것을 의로 인정하신 하나님께서 창세기 17장 1절을 보면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을 믿습니다.'하면서 생활에서는 의를 별로 따르지 않으니, 하나님께서 기다리시다가 오셔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완전하라'는 말씀은 흠과 티가 없이 되라는 것입니다.
'네가 나를 마음으로 믿는 믿음도 중하지만 생활도 따라야 한다. 생활도 흠 없이 점 없이 의롭게 되어 내 앞에서 완전하라.'는 말씀입니다.
아브람이 그 때부터 노력하여 의가 많이 자라니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아들도 주신 줄로 믿습니다.
의가 얼마나 중한지 모릅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의인이 되었지만 동시에 생활도 의를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남자들이 입는 바지는 가랑이가 두 개입니다. 그런데 만일 한쪽 가랑이만 있고, 다른 한쪽 가랑이는 잘려 나가고 없는 바지를 입고 밖으로 나간다면 그 남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정말 부끄러울 것입니다.
믿음과 행함은 바지의 양쪽 가랑이와 같아서 정신적으로, 마음으로 믿는 믿음의 바지가 있는가 하면 행함이 있는 생활의 바지도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2장 22절에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한쪽 날개로 나는 새가 있습니까? 새는 양쪽 날개를 저으며 납니다. 만일 한쪽 날개만 젓는다면 어디로 가겠습니까? 빙글빙글 돌다가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 수영해 보셨지요? 물에서 수영을 할 때는 양손으로 해야 합니다. 한 손으로 하면 빙글빙글 돌기만 하지, 앞으로 나가지 못합니다.
우리가 정신적으로, 마음으로 믿는 것은 한쪽 날개와 같습니다. 물론 이것으로 구원은 받습니다. 오늘 처음 교회에 오신 분이라도 예수님을 믿으면 오늘 세상을 떠나게 되셔도 천국은 갑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부족합니다.
생활이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생활이 의를 겸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짓 선생들, 이단들, 마귀들은 교회 밖에서는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막습니다. 이런 저런 방해를 해서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합니다. 교회에 가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는 거짓 교사로 의의 일꾼으로 등장해서 어찌하든지 예수님을 바로 믿지 못하게 합니다. 믿음이 전진하지 못하도록 막습니다.
'주일 낮에만 나오지, 밤에는 뭐하러 나오니? 네가 올빼미냐? 밤에 그렇게 다니게? 낮에만 나와.'
'뭐? 삼일 예배? 왜 그렇게 야단스럽게 믿니? 그렇게 광신적으로 믿으면 안 돼.'
'뭐 그렇게 애써 기도하니? 좀 품위 있게 기도해라.'
그래서는 신앙 생활이 퇴보하게 하고, 나중에는 죽게 만듭니다. 거룩하게 살지 못하게 합니다. '예수 믿었으니 너는 구원 받았다. 그러니 막 살아도 된다. 영혼만 구원 받으면 된다. 육신은 함부로 살아도 괜찮다.'하며 속이는 것입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교회에 나간다고 구원 받는 줄 아느냐? 예수 믿는다고 구원 받는 줄 아느냐? 의롭게 살아야 구원 받지.'하며 의로운 생활로 구원 받는다고 속입니다.
여러분, 절대로 의로운 생활로 구원 받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받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으면 거룩해야 한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제 내 아들딸이 되었으니 나처럼 거룩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be holy, because I am holy)." (레위기 11:45)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도 거룩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을 믿어 이미 구원을 받았어도 우리의 생활이 점점 의로워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의인이 되어야 합니다. 두 날개를 젓듯이 마음으로도 믿고 생활도 의로워져야 하나님의 온전한 사람인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가능한 일입니다. 초등학교 2학년 아이의 시험 문제를 내는 선생님은 고등학생들이 푸는 방정식 문제를 내지 않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생이 풀 수 있는 더하기와 빼기 정도의 문제를 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과 저를 너무나 잘 아십니다. 여러분과 제가 미치지 못할 의를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최선을 다 하는 어느 정도의 의만 유지하면 "됐다. 너는 의인이다."라고 인정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노아를 보세요. 노아는 술을 좋아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믿었지만 가끔 술을 마신 사람입니다. 한번은 포도주를 너무 많이 마시고 취하여 벌거벗고 술주정을 했습니다. 그래도 창세기 6장 9절을 보면,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비록 노아에게 부족한 점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세우신 기준에 합격했던 것입니다.
또 롯은 어떻습니까? 롯은 노아보다 더 낮은 의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롯은 의인이라 부르기에 부끄러운 사람입니다. 술을 너무 많이 마시고 취하여 자기 딸을 다른 여자로 알고 딸의 침상에 올라가서 자식을 낳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의인이라 하기 어려운 사람입니다. 그래도 롯은 그 당시 사람들의 삶을 보고 가슴을 쳤습니다. 그 당시 소돔 고모라의 사람들은 마치 이성 없는 짐승같이 막 살았습니다. 롯은 그들을 보면서 '사람들이 왜 이렇게 음란할까? 사람들이 왜 이렇게 더럽게 살까?'하며 가슴을 쳤습니다. 하나님을 믿어도 욕심이 많고 이기적이고 의가 너무 약하고 소극적이었지만, 하나님 앞에 너무나 부족한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소돔 고모라에서는 최고의 의인이 롯이었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한 롯을 하나님께서 베드로의 입을 통해 의로운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7절에 '의로운 롯'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거룩하게 생활해도 하나님처럼 거룩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으로서 이를 수 있는 곳에 다다르면 하나님께서 의인이라 불러 주시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따라합시다.
"나는 의인이 되었고, 의인이 될 수 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인이 되었고 생활로도 의인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런 의로운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발견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야! 창원, 마산, 진해에 의인이 가득 찼네." "야! 서울에, 광주에, 부산에, 대전에, 경주에 의인이 가득 찼네."하시며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우리가 의인이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 때문에 즐거워하십니다.
에베소서 1장 3절에서 6절에, 우리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신 목적 세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신령한 복을 주시기 위해 택하셨고, 우리로 하여금 흠이 없고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게 하시려고 택하셨고, 우리가 거룩함으로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기 위해 택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자, 보세요.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교회에서 예배드리면서도 밖에 나가서 막 살면 하나님의 영광이 어려워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마음으로 회사에 가서도 직장에 가서도 거룩하게 살면 우리를 보는 사람들이 "야! 하나님의 사람은 다르네.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다르네. 어찌 저렇게 정직하고 의로울까?"하게 되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되는 것입니다.
또 교회가 칭송을 받게 됩니다. 우리 한국의 1300만 명의 크리스천이 믿음으로만이 아니라 생활까지 의롭게 되면 우리 겨레가 "야! 교인들을 봐. 교인들은 다르네."하며 교회를 칭송하게 될 것입니다.
어제 기독교 신문에 '한국 교회는 맛을 잃은 소금이다.'라는 한 기자의 글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에 화가 났습니다. 모든 한국 교회에 대해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왜입니까? 이 땅에 훌륭한 주의 종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 나라에 훌륭한 목사님, 훌륭한 장로님, 훌륭한 교인이 가득한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전국에 있는 여러 교회에 다니면서 귀한 목사님, 귀한 장로님, 귀한 성도님들을 얼마나 많이 만나는지 모릅니다. 생선 망신은 꼴뚜기가 시킨다는 말이 있듯이 가끔 꼴뚜기 같은 주의 종, 꼴뚜기 같은 장로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을 보고 모든 한국 교회가 그런 것처럼 말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꼴뚜기 같은 교인들을 보고 한국 교회가 망했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훌륭한 교인들을 보고 감사하며 기뻐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 교회마다 하나님의 보배로운 일꾼, 의인들이 가득한데, 가끔 좋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니 그런 사람은 드러내지 말고 선하고 귀하고 보배로운 분들을 많이 나타내어야 합니다.
교회에 대해 함부로 말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몸을 주시고 피를 주시고 세우신 교회를 사람이 함부로 말하면 안 됩니다.
한국 교회는 거룩합니다. 빛이 납니다. 의인들이 가득합니다. 그러나 더 가득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나 한 사람이 의롭게 되면, 나부터 의롭게 되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이 '나는 주일 낮 예배만 드릴 것이다. 밤 예배는 드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한다면 오늘 저녁에 교회에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한 사람이 '나는 생명을 걸고 예수님을 믿으니 낮에만 교회에 오는 것이 아니라 밤에도 교회에 와서 주님을 찬양하리라.'라고 결단한다면 오늘 저녁 예배 시간에는 아마 앉을 자리가 모자랄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저녁 예배에도 자리가 꽉 차니 우리 교회에 오시는 분들이 놀랍니다. 이번에 우리 교회에 오셔서 말씀을 전하신 장 목사님께서도, 수만 명이 모이는 교회에도 많이 가 보셨지만 저녁 예배에 양곡교회처럼 많이 모이는 교회는 없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나는 예배에 생명을 건다.'라고 마음을 먹으면 교회가 차고 넘칠 줄로 믿습니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살든지 나는 의롭게 살 것이다.'라고 마음 먹으면 대한민국의 1300만 크리스천이 다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럴 때 교회가 빛이 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활까지 의로우면 우리가 어떠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따라합시다.
"물 가운데서도 구원하시고 불 가운데서도 구원하신다."
노아 시대 때, 사람의 죄악이 관영하니 하나님께서 물로 심판하셨습니다. 하늘의 창을 열어 물을 부으시고 땅의 물샘이 솟아나게 하셔서 땅에 물이 창일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하늘에도 물이 있고 불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면 구름이 번개가 되어 불로 임하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면 구름이 비가 되어 쏟아지기도 합니다. 땅에도 불이 있고 물이 있습니다. 샘을 파면 물이 솟아나지만 지진이 일어나면 불이 뿜어나옵니다. 하늘도 신비하고 땅속도 신비합니다. 이 지구촌에 물이 있고, 기름이 있고, 금 은 광석이 있고, 가스가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데 노아 시대 때에는 하늘에서 물이 쏟아지고, 땅의 샘이 터져 물이 솟아 나왔습니다. 40일간 하늘에서 땅에서 물이 쏟아지니 150일간 지구촌의 산꼭대기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물이 창일했습니다. 노아가 방주에 있었던 날이 1년 10일이었습니다.
창세기 7장 22절을 보면, 육지에 있어 코로 생물의 기식을 호흡하는 것은 다 죽었습니다.
그러나 방주 안에 있었던 사람들과 생물들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물 심판으로 다 망하게 하실 때에도 구원하실 의인은 구원해 주셨습니다.
소돔 고모라는 불로 심판하셨는데, 롯의 의가 부족했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그 곳에서 최고의 의인인 그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사야 43장 1절부터 죽 보십시오.
『…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
우리가 의로우면 불 가운데서나 물 가운데서나 비행기를 타나 자동차를 타나 어디에서나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지구촌에서 비행기를 많이 탄 사람 중의 한 사람일 것입니다. 아마 백만 마일 정도는 탔을 것입니다. 그렇게 비행기를 많이 타고 다녔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토론토에서 워싱턴 디시로 가는 비행기를 탔을 때의 일입니다. 어떤 분이 비행기 안으로 들어오는데 제 영혼이 쭈뼛 쭈뼛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 거룩하고 귀한 분이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분이 자리에 앉자마자 기도를 하시더니 성경을 펴서 읽으셨습니다. 그 모습이 마치 천사 같았습니다. 샌프란시스코의 패숀 목사님이셨는데, 그토록 경건할 수가 없었습니다. 워싱턴 디시에 착륙할 때, 그 목사님이 또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비행기가 착륙할 때 턱 소리도 나지 않았습니다. 제 평생에 그렇게 착륙하는 비행기는 처음 타 보았습니다. '의인이 비행기를 타니 비행기도 달라지는구나.'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은 호랑이를 만나도 구원해 주시고, 사자를 만나도 구원해 주십니다. 풀무 불에 들어간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를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사자 굴에 들어간 의인 다니엘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5학년 때 부흥회에 참석했다가 큰 은혜를 받았는데, 그 강사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목사님이 금강산에서 기도하시다가 호랑이를 만나 죽게 되었답니다.
"하나님, 호랑이! 하나님, 호랑이!"
그런데 너무 다급하니 나중에는 "하 호! 하 호!"하는 말만 나오더랍니다.
그렇게 기도를 하는데도 호랑이가 뛰어들더랍니다. 그런데 호랑이가 뛰어드는 순간에 나뭇가지가, 고목의 한 가지가 바람에 떨어져 호랑이를 이마를 쳤답니다. 그러니 호랑이가 삼십육계를 놓더랍니다.
그것이 우연한 일이었겠습니까?
아프리카의 한 선교사가 밀림 지역에서 사자를 만났답니다. 너무 다급해서 "하나님, 저 사자가 회개하고 예수 믿게 해 주세요."하고 기도하고 눈을 떠보니, 사자가 기도하고 있더랍니다. 그런데 "하나님,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하더랍니다.
이 이야기는 사실이 아닌 것 같습니다. 만든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제가 은혜를 받은 강사 목사님의 이야기는 사실입니다.
어쨌든 이 세상에는 사고도 많고 천재지변도 많습니다. 그러나 의인은 그 사명을 다 할 때까지 하나님께서 반드시 구원해 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의인을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십니다.
시편 4편 3절에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을 너희가 알지어다 …』
디모데후서 2장 20절에서 21절에도 말씀하십니다.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한경직 목사님이 훌륭하지만, 한 목사님보다 학식이 더 풍부한 신학자도 많고, 한 목사님만큼 훌륭한 분들도 많습니다. 훌륭한 인물이 꽉 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한 목사님을 한 세대의 목사님으로 가장 크게 쓰신 이유는 한 목사님이 경건하셨기 때문인 줄로 저는 믿습니다.
독일이 낳은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 스위스가 낳은 종교 개혁자 쯔빙글리, 프랑스가 낳은 종교 개혁자 존 칼빈, 그분들이 모두 얼마나 경건했는지 모릅니다. 가정 생활이나 경제 생활이나 모든 생활이 참으로 경건했습니다.
디엘 무디, 웨슬리, 스폴젼 모두 얼마나 경건했는지 모릅니다.
인물이 잘 났다고, 학력이 좋다고, 가문이 좋다고 주님께 쓰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경건한 사람을 주님께서 쓰시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은 쓰임을 받으면 기쁩니다.
제가 늘 행복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크고 여러분의 사랑이 큰 이유도 있지만, 여기 저기에서 자꾸 오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뉴욕에서, LA에서 "목사님, 연합 집회 좀 인도해 주세요." "목사님, 목회자 세미나 좀 인도해 주세요."하면서 저를 부릅니다. 제가 다 가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쓰시는구나.'하는 생각이 들 때 얼마나 보람이 있고 기쁜지 모릅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을 때 얼마나 좋습니까?
대통령에게 쓰임 받으면 정권이 바뀔 때 감옥에 가기도 합니다. 그 대통령이 있을 때는 깃발을 날리다가 정권이 바뀌어 대통령이 물러가면 감옥에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쓰임 받으면 영원히 소중한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경건한 사람을 쓰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경건한 사람에게 복을 주십니다.
시편 92편 12절에 『의인은 종려나무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같이 발육하리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기쁨도 주십니다. 영적인, 정서적인 행복도 주십니다.
시편 118편 15절에 말씀하십니다.
『의인의 장막에 기쁜 소리, 구원의 소리가 있음이여 …』
시편 97편 11절에는 『의인을 위하여 빛을 뿌리고 마음이 정직한 자를 위하여 기쁨을 뿌렸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죄를 지은 자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의인은 행복합니다. 의로울수록 행복이 더 올라갑니다. 할렐루야!
따라합시다.
"의인과 행복은 정비례한다."
생활이 의로울수록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이 크고, 죄를 지을수록 괴로움이 큽니다.
제가 군에 있을 때, 월남전에 참전했던 박 모 병장님이 돌아오자마자 드러누웠습니다. 걸음도 걷지 못했고, 온 몸이 퉁퉁 부어 있었습니다. 치료되지 않는 성병에 걸렸다고 했습니다. 월남에서 이성과 도덕적인 실수를 저지르다가 얻은 병이었습니다. 두 달 정도 내무반에 누워 있다가 들 것에 실려 나갔는데, 몸이 다 썩어 있었습니다.
그가 월남에서 여자와 쾌락을 누리던 그 몇 시간은 좋았는지 모르지만, 그것 때문에 젊은 청년이 썩어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심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천사도 용서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떤 학자들과 시대주의 학자들은 창세기 6장의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라는 말씀을 천사들의 범죄라고 해석하는데, 아닙니다.
따라합시다.
"성경은 전체로 보아야 한다."
이 말씀만 보면, 혹시 '천사들이 세상의 아름다운 여자를 보고 욕심 품어 아내로 삼아서 음란할 수도 있었겠다.'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성경 전체를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22장 30절을 보면, 천사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간다고 예수님께서 분명 말씀하셨습니다.
나무꾼과 선녀의 이야기가 얼마나 재미있습니까? 나무꾼이 나무를 하다가 선녀들이 옷을 벗고 목욕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자들은 잘 모르겠지만, 남자들은 그 기분이 얼마나 좋은지를 알 것입니다. 나무꾼이 '우아!'하고 선녀들을 보다가 지혜를 발휘해서 옷 한 벌을 감추었습니다. 옷이 없으니 한 선녀(천사)가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고 울고 있었습니다. 나무꾼은 그 선녀(천사)를 아내로 삼아 아들을 낳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이야기, 꾸민 이야기입니다.
천사는 시집도 못 가고 장가도 못 갑니다.
그러니 천사의 범죄는 유다서에 나온 대로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 자리를 떠나 하나님 앞에서 충성을 거부한 것입니다. 그것이 천사의 범죄입니다. 그것도 하나님께서 벌하십니다.
어느 시대의 사람이든 범죄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벌하십니다. 범죄한 사람은 그냥 넘어갈 수 없습니다.
경찰의 추격을 받는 한 범인이 도망을 가다가 강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마침 막 출발하는 나룻배가 있어서 뛰어 탔습니다.
"후유, 잡히지 않았다."
그것을 본 경찰들이 소리쳤습니다.
"사공! 사공! 빨리 배를 돌려."
경찰들이 아무리 크게 소리쳐도 사공은 그대로 나룻배를 저어 갔습니다. 귀 먹은 사공이었기 때문입니다.
범인은 다시 한 번 안도의 숨을 내쉬었습니다.
"후유, 살았다."
배가 맞은 편 나룻터에 거의 다 왔을 때, 범인은 이미 그 곳에도 경찰들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경찰들이 서로 연락을 해서 다른 경찰들이 와 있었던 것입니다.
범인이 사공에게 말했습니다.
"사공, 빨리 방향을 바꾸어요. 빨리 방향을 바꾸란 말이오."
그러나 귀먹은 사공은 계속 노를 젓기만 했습니다.
범죄하면 그대로 심판을 받습니다.
그런데 의로운 사람은 심판이 없습니다. 자유와 평화만 있습니다. 행복만 있습니다. 할렐루야!
시편 37편 29절에 말씀하십니다.
『의인이 땅을 차지함이여 거기 영영히 거하리로다』
의인은 복을 받으면 영원히 간직합니다.
그러나 악인은 잠시 후에 사라집니다.
시편 37편 10절에 말씀하십니다.
『잠시 후에 악인은 없어지리니 네가 그 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악인은 호박 같습니다. 호박씨를 심으면 삼 개월만에 큰 호박이 달립니다. 그러나 겨울이 되면 아무리 찾아도 호박을 볼 수 없습니다.
악인은 잠시 동안은 되는 것 같아도 나중에는 없어집니다.
그러나 의인은 대대로 잘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인은 하나님께서 예뻐하셔서 구하는 대로 응답을 해 주십니다.
야고보서 5장 16절에 말씀하십니다.
『…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따라합시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크니라. 강하니라."
요한일서 3장 21절, 22절에도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미국의 유명한 신학교 중의 하나가 달라스 신학교입니다. 유명한 신학자를 많이 배출한 그 신학교가 한번은 재정난으로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그 날 12시에 채권자들이 와서 학교를 폐쇄시키면 교수들과 학생들은 다 밀려나야 했습니다. 그 날 아침 예배를 드릴 때 학장이 말했습니다.
"오늘 우리 학교가 문을 닫게 됩니다. 12시가 되면 우리는 다 나가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 기도합시다."
모든 교수들이 돌아가면서 기도를 했습니다.
유명한 설교 학자이자 경건한 신학자인 해리 아이언 사이드 박사님의 차례가 되었는데, 그분이 창 밖을 보니 수많은 소들이 산에서 꼴을 뜯어먹고 있었습니다. 그분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천하 만물이 다 아버지의 것인데, 저 소들을 팔아서라도 우리 학교의 문이 닫히지 않게 해 주세요."
기도회가 끝났습니다.
부츠를 신은 한 남자가 터덕터덕 발자국 소리를 내며 신학교 교무실로 들어왔습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방금 큰 트럭 두 대 분의 소를 팔았습니다. 이 돈으로 사업을 하려고 했는데, 자꾸 '신학교에 돈이 필요하니 돈을 신학교에 갖다 주어라. 신학교에 돈이 필요하니 신학교에 갖다 주어라.'하는 마음이 너무 간절하게 임해서, 하나님의 말씀인 줄로 알고 돈을 갖고 왔습니다."
남자가 소를 판 돈이라고 하면서 돈을 내 놓고 갔습니다. 부채를 정리하기에 딱 맞는 돈이었습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달라스 신학교가 유지되고 있는 것입니다.
아이언 사이드 박사님이 경건하니 하나님께서 즉시 응답해 주신 줄로 믿습니다.
또 중요한 것은 의인은 이 사회의 하나님의 등불이라는 것입니다.
따라합시다.
"의인은 이 사회의 하나님의 등불이 된다."
낮에도 별이 있지만, 낮에는 밝으니 별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태양이 사라지고 난 밤에는 별이 빛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믿음과 생활이 겸한 의인이 되면 하나님의 등불이 되어 우리 때문에 많은 사람이 희망을 갖게 되고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어두우니 노아의 의가 더 빛이 나고 세상이 더러우니 별로 의인이 아닌 롯이 의인이 되었듯이, 세상이 어두워질수록 우리는 더 빛이 나는 하나님의 등불이 되는 것입니다.
고기를 무척 좋아하는 한 가난한 목사님이 사례비를 받으면 십일조와 이것 저것을 떼고 난 다음에 꼭 고기 한 근 값을 따로 떼어 가지고 고깃간으로 가셨습니다. 목사님이 친히 고기를 사러 가셨습니다. 고기를 좋아하시니 고기를 사러 가는 것이 행복하고 고기를 사 가지고 오시는 것이 행복했기 때문입니다.
"아주머니, 수고하십니다. 고기 한 근만 주세요."
고기를 받아든 다음에는 "감사합니다."하고 인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고깃간 아주머니가 매달 고기를 사 가는 점잖고 품위있는 목사님에게 그만 반해버렸습니다. 고기를 사러 오는 사람들마다 "좋은 부위 주세요." "조금 더 주세요."라고 하는데, 목사님은 아무 말 없이 산 다음에 "감사합니다."라고 하니, 반할 만하지 않습니까?
하루는 고깃간 아주머니가 앞치마를 벗어 던지고 목사님 뒤를 따라갔습니다. 고개를 넘고 내를 건너 먼길을 간 목사님이 교회로 들어섰습니다.
그제서야 고깃간 아주머니는 그 점잖고 품위 있는 손님이 목사님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다음 주일에 고깃간 아주머니는 자기 발로 교회에 나와서 구원을 받고 좋은 교인이 되었습니다. 또 목사님이 고기를 좋아하시는 것을 알고 교회에 올 때마다 고기를 가지고 왔습니다.
목사님의 생활이 거룩하니, 영혼을 구원한 것입니다.
거룩하면, 의로우면 만 가지 복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범죄하고 더러우면 명예도 떠나가고, 존귀함도 떠나가고, 건강도 떠나가고, 손가락질이 오게 됩니다. 비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거짓 선지자들은 우리를 자꾸 죄 짓게 하고 방탕하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는 우리에게 자꾸 의롭게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할렐루야!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의로워집니까?
간단합니다.
기본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는 의롭게 되는 길이 없습니다.
둘째는 말씀에 맞추어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따라합시다.
"하나님의 말씀은 의로우시도다."
다섯 살 먹은 유치원 아이는 선을 반듯하게 그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를 대고 그으면 쉽게 그을 수 있습니다.
성경을 캐논이라고 하는데, 캐논은 자 막대기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어리석어도 말씀대로 죽 생활하면 반듯한 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는 욕심이 있고 죄성이 있습니다. 목사님에게도 장로님에게도 오랜 믿음 생활을 한 권사님에게도 새신자에게도 다 죄성이 있습니다. 동시에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가지지 못하는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따라합시다.
"성령."
우리에게는 성령의 소욕이 같이 있습니다.
우리가 내 죄성을 따라 살면 추하게 되고,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살면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6절에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지금 우리 한국의 여대생들 중에 폐결핵환자가 많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침은 굶고, 점심은 건너뛰기 때문입니다. 날씬해지려고 먹지 않아서입니다.
미국 LA에 두 아들을 둔 한 가정이 있었습니다. 큰아들이 결혼을 했는데, 잘 생긴 며느리의 허리가 개미처럼 가늘었습니다. 그리고 수를 놓는 솜씨가 아주 좋아서 나비의 수를 놓으면 마치 나비가 날아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니 시어머니가 다니면서 자랑을 했습니다.
"우리 며느리는 밥도 조금 먹고 솜씨가 얼마나 좋은지 나비를 수 놓으면 나비가 날아갈 듯 하고 …."
둘째 아들도 결혼을 했습니다. 둘째 며느리는 마치 역도 선수 같았습니다. 그래도 시어머니는 다니면서 막 자랑을 했습니다.
"우리 둘째 며느리는 밥도 많이 먹고, 힘도 세고, 청소도 잘 하고, 빨래도 잘 하고…."
그런데 삼 년 후에 큰며느리가 결핵으로 죽었습니다.
너무 적게 먹으면 결핵에 걸릴 수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의 어느 교회 강단에 이런 글이 써 있었다고 합니다.
'설교를 짧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다음에 또 초청을 받을 것이요'
그것은 마귀의 글입니다. 그것은 온 교인들을 영적 결핵에 걸려 죽게 만들고자 하는 글인 것입니다.
실제로 미국 교회 중에 설교를 한 시간, 두 시간씩 하는 교회가 다 몇 만 명씩 모이는 교회, 강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저도 좀 길게 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경건하게 살려면 경건의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10년, 20년, 30년 뒤의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지금 면도기 업계에서 세계 랭킹 1위인 회사는 스위스의 모 회사인데, 대단히 뛰어난 선전을 하고 있습니다.
제품이 아무리 좋아도 선전하지 않으면 잘 팔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품이 조금 안 좋아도 선전을 잘 하면 잘 팔리는 것입니다.
교회도 전도로 선전해야 부흥됩니다. 전도하지 않는 교회는 말씀이 아무리 좋아도 부흥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면도기 회사는 선전을 어떻게 하는지 아십니까? 아이들이 뛰어 노는 공원이나 놀이터마다 면도기를 걸어놓고 상품 광고를 합니다.
어떤 분이 물었습니다.
"아니, 아이들은 면도도 하지 않는데, 왜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에 면도기 광고를 합니까?"
그러자 그 회사 책임자가 대답했습니다.
"아이들이 지금은 면도하지 않지만, 20년만 지나면 면도하지 않을 아이는 없습니다."
뛰어 놀면서 쳐다보고, 뛰어 놀면서 쳐다보면 아이들의 머리에 면도기가 입력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나중에 면도기를 쓰게 될 때 다른 면도기를 쓰지 않고 그 면도기를 쓴다는 것입니다. 20년 뒤를 내다보고 광고를 하는 것입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미국의 코카콜라 회사는 미국의 모든 유치원생들에게 코카콜라를 무료로 줍니다.
선한 일을 하기 위해서입니까? 아닙니다. 1년간 봉사하고 70년간 잘 팔기 위해서입니다. 유치원 다닐 때에 코카콜라의 마시면서 매일 코카콜라를 보아 왔기 때문에 유치원을 졸업해도 코카콜라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한 회사도 대회사는 이렇게 미래를 바라보는데, 우리도 큰 의인이 되려면 미래를 볼 수 잇어야 합니다. 오늘 죄를 지었다고 낙심하면 안 됩니다. 한 달간 추하게 살았다고 포기하면 안 됩니다. 5년, 10년, 20년 뒤를 내다보면서 의를 쌓아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아가는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할아버지 할머니가 될수록 천사같이 됩니다. '나는 의인이 되어야지.'하며 의를 계획해서 사는 사람은 갈수록 귀하게 됩니다. 곱게 늙습니다.
그러나 몸을 막 쓴 사람, 막 산 사람은 추하게 늙습니다. 막 산 사람은 명예도 떠나가고, 존귀함도 떠나가고, 존경도 떠나가고, 찌들어질 뿐입니다.
그리스의 한 무덤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온다고 합니다. 주위에 볼거리도 없고 그 무덤도 자그마한데 사람들이 그렇게 오는 이유는 그 무덤의 묘비에 있는 글이 가슴을 찡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내 차례, 내일은 네 차례'
우리 모두 우리의 차례가 옵니다.
그 날, 의로운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서게 되는 여러분과 제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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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관심
2001.10.28 주일 낮예배 (베드로후서 2:4-8)
며칠 전, 제가 아파트에서 나오다가 우리 교회 교우이신 한 모친께서 뜨락에서 무엇을 줍고 계신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3개월 전에 큰 수술도 받으셨고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하시는 연세 드신 모친께서 청소를 하고 계시는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아니, 뭐하세요? 청소하세요?"
제가 그렇게 묻자 여중생처럼, 여고생처럼 얼굴이 발개지시면서 수줍게 대답하셨습니다.
"아니에요, 목사님. 청소하는 게 아니라 낙엽이 예뻐서 몇 개 주웠어요."
그리고 그 낙엽들을 제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 모습이 마치 소녀 같았습니다.
소녀든 가정 주부든 할머니든 여자는 예쁘게 단풍든 낙엽이 떨어져 있으면 그것을 줍고 싶어하고 간직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소년이든 청년이든 장년이든 노인이든 남자는 낙엽을 보아도 "와! 낙엽."하지 않고 그것을 주워서 간직하지도 않습니다. 특별한 남자, 별난 남자가 아니고는 그냥 밟고 지나가버립니다.
이것이 남자와 여자의 차이입니다.
또 나이에 따라서도 관심이 다릅니다.
한 남자가 두 여인을 거느리고 살았답니다. 제가 오늘 1부 예배 때 회개를 했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전하면서 "어느 남자가 두 여인을 거느리고 살았대요. 복 있는 남자지요?"라고 했는데, 그 남자는 복이 있는 남자가 아니라 팔자가 험한 남자입니다. 한 여자와 살아도 골치 아픈 일이 많은데, 두 여자와 살려면 얼마나 복잡하겠습니까?
어쨌든 그 남자의 한 애인은 나이가 어린 예쁜 여자였고, 한 애인은 나이가 지긋한 성숙한 여자였답니다. 그런데 젊은 애인은 자기 애인이 나이 들어 보이는 것이 싫어서 애인이 자기를 찾아올 때마다 반백인 애인의 흰 머리카락을 하나 둘 뽑았답니다. 또 나이 든 애인은 남자의 새까만 머리가 보기 싫어서 까만 머리를 자꾸 뽑았답니다. 세월이 지나니, 남자의 머리는 완전히 벌거숭이가 되고 말았답니다.
사람의 관심은 이렇게 다릅니다.
저희 아이들이 어릴 때 장난감을 사 달라고 얼마나 졸라댔는지 모릅니다. 자기 장난감은 물론 자기의 것이고, 교인들의 아기들이 갖고 온 장난감도 빼앗아 가지고 주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장난감을 좋아하던 아이들이 대학생이 되더니 장난감 가게를 지나가도 눈길 한번 보내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관심은 나이에 따라 달라집니다.
또 직업에 따라 관심이 다릅니다.
예전에 몇 주간 스위스에 다녀올 때 모 대학의 교수와 함께 갔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수는 어느 도시에서든 서점에 갔습니다. 쮸리히에서도, 베른에서도, 하이델베르그에서도 서점에 들어가서 책을 샀습니다. 그리고 호텔에서도 책만 읽었습니다. 관심이 학문에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여러분과 저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관심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의인이 어디에 있나? 이 도시에 의인이 몇이나 되나?'
하나님의 관심은 '이 도시에서 누가 제일 잘 사나? 제일 높은 사람이 누구냐? 제일 잘 생긴 사람, 가장 매력 있는 사람이 누구냐?'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의 헤어스타일이 가장 좋으냐?'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 주님의 관심은 '어디에 의인이 있나?'하는 것입니다.
소돔 고모라에 갓난아기들도 많고 짐승들도 많아서 그냥 넘어가고 싶으셨는데, 소돔 고모라에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그냥 용서해 주려고 하셨는데, 의인 열 사람이 없으니 할 수 없이 하나님께서 그 도시를 유황불로 다 태우셔서 잿더미가 되게 하셨습니다. 훗날에 경건치 않은 자들에게 "음란한 도시는 이렇게 된다."라는 본을 보이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을 얼마나 간절히 찾으시는지 모릅니다.
예레미야 5장 1절에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고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If you can find but one person)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I will forgive this city.)』
'의인을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도시를 용서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디에 의인이 있나? 의인이 몇 사람이나 되나?'하시며 찾으십니다.
하나님 앞에 찾으신 바 된, 하나님께서 발견하시는 여러분과 제가 의인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의인 한 사람이, 의인 열 사람이 백만, 천만 군대보다 더 강합니다. 소돔 고모라에 하늘의 유황불이 떨어질 때 백만 명의 군사로 그것을 막겠습니까? 천만 명의 군사로 막겠습니까? 엄청난 무기로 막겠습니까? 하늘의 불을 그 누가 막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의인 열 사람은 막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을 보호하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의인'과 거리감을 너무 많이 두면 안 됩니다.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의인이 되나? 나같이 부족한 사람이 어떻게 의인이 되나?'
아닙니다. 우리는 벌써 의인이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을 믿으면 믿음으로 의인이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믿음으로 이미 의인이 되었습니다.
창세기 15장 6절에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의로 여기시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부족한 사람이었습니다. 부끄러운 가문의 아들이었습니다. 우상을 만들어 파는 우상 숭배자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임기 응변적으로 거짓말도 잘 했고, 상황에 따라 비겁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그것을 의로 인정하셨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아무리 부족해도 예수님을 믿으니 갈라디아서 3장 16절 말씀대로 의인이 되었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를 믿나니』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성령으로 거듭나고 예수님의 피로 죄 사함을 받고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의인은 믿음의 의가 있는 동시에 생활에도 의가 있어야 합니다. 창세기 15장 6절에서는 아브람이 하나님을 믿으니 그것을 의로 인정하신 하나님께서 창세기 17장 1절을 보면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을 믿습니다.'하면서 생활에서는 의를 별로 따르지 않으니, 하나님께서 기다리시다가 오셔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완전하라'는 말씀은 흠과 티가 없이 되라는 것입니다.
'네가 나를 마음으로 믿는 믿음도 중하지만 생활도 따라야 한다. 생활도 흠 없이 점 없이 의롭게 되어 내 앞에서 완전하라.'는 말씀입니다.
아브람이 그 때부터 노력하여 의가 많이 자라니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아들도 주신 줄로 믿습니다.
의가 얼마나 중한지 모릅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의인이 되었지만 동시에 생활도 의를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남자들이 입는 바지는 가랑이가 두 개입니다. 그런데 만일 한쪽 가랑이만 있고, 다른 한쪽 가랑이는 잘려 나가고 없는 바지를 입고 밖으로 나간다면 그 남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정말 부끄러울 것입니다.
믿음과 행함은 바지의 양쪽 가랑이와 같아서 정신적으로, 마음으로 믿는 믿음의 바지가 있는가 하면 행함이 있는 생활의 바지도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2장 22절에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한쪽 날개로 나는 새가 있습니까? 새는 양쪽 날개를 저으며 납니다. 만일 한쪽 날개만 젓는다면 어디로 가겠습니까? 빙글빙글 돌다가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 수영해 보셨지요? 물에서 수영을 할 때는 양손으로 해야 합니다. 한 손으로 하면 빙글빙글 돌기만 하지, 앞으로 나가지 못합니다.
우리가 정신적으로, 마음으로 믿는 것은 한쪽 날개와 같습니다. 물론 이것으로 구원은 받습니다. 오늘 처음 교회에 오신 분이라도 예수님을 믿으면 오늘 세상을 떠나게 되셔도 천국은 갑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부족합니다.
생활이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생활이 의를 겸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짓 선생들, 이단들, 마귀들은 교회 밖에서는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막습니다. 이런 저런 방해를 해서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합니다. 교회에 가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는 거짓 교사로 의의 일꾼으로 등장해서 어찌하든지 예수님을 바로 믿지 못하게 합니다. 믿음이 전진하지 못하도록 막습니다.
'주일 낮에만 나오지, 밤에는 뭐하러 나오니? 네가 올빼미냐? 밤에 그렇게 다니게? 낮에만 나와.'
'뭐? 삼일 예배? 왜 그렇게 야단스럽게 믿니? 그렇게 광신적으로 믿으면 안 돼.'
'뭐 그렇게 애써 기도하니? 좀 품위 있게 기도해라.'
그래서는 신앙 생활이 퇴보하게 하고, 나중에는 죽게 만듭니다. 거룩하게 살지 못하게 합니다. '예수 믿었으니 너는 구원 받았다. 그러니 막 살아도 된다. 영혼만 구원 받으면 된다. 육신은 함부로 살아도 괜찮다.'하며 속이는 것입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교회에 나간다고 구원 받는 줄 아느냐? 예수 믿는다고 구원 받는 줄 아느냐? 의롭게 살아야 구원 받지.'하며 의로운 생활로 구원 받는다고 속입니다.
여러분, 절대로 의로운 생활로 구원 받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받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으면 거룩해야 한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제 내 아들딸이 되었으니 나처럼 거룩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be holy, because I am holy)." (레위기 11:45)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도 거룩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을 믿어 이미 구원을 받았어도 우리의 생활이 점점 의로워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의인이 되어야 합니다. 두 날개를 젓듯이 마음으로도 믿고 생활도 의로워져야 하나님의 온전한 사람인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가능한 일입니다. 초등학교 2학년 아이의 시험 문제를 내는 선생님은 고등학생들이 푸는 방정식 문제를 내지 않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생이 풀 수 있는 더하기와 빼기 정도의 문제를 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과 저를 너무나 잘 아십니다. 여러분과 제가 미치지 못할 의를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최선을 다 하는 어느 정도의 의만 유지하면 "됐다. 너는 의인이다."라고 인정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노아를 보세요. 노아는 술을 좋아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믿었지만 가끔 술을 마신 사람입니다. 한번은 포도주를 너무 많이 마시고 취하여 벌거벗고 술주정을 했습니다. 그래도 창세기 6장 9절을 보면,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비록 노아에게 부족한 점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세우신 기준에 합격했던 것입니다.
또 롯은 어떻습니까? 롯은 노아보다 더 낮은 의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롯은 의인이라 부르기에 부끄러운 사람입니다. 술을 너무 많이 마시고 취하여 자기 딸을 다른 여자로 알고 딸의 침상에 올라가서 자식을 낳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의인이라 하기 어려운 사람입니다. 그래도 롯은 그 당시 사람들의 삶을 보고 가슴을 쳤습니다. 그 당시 소돔 고모라의 사람들은 마치 이성 없는 짐승같이 막 살았습니다. 롯은 그들을 보면서 '사람들이 왜 이렇게 음란할까? 사람들이 왜 이렇게 더럽게 살까?'하며 가슴을 쳤습니다. 하나님을 믿어도 욕심이 많고 이기적이고 의가 너무 약하고 소극적이었지만, 하나님 앞에 너무나 부족한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소돔 고모라에서는 최고의 의인이 롯이었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한 롯을 하나님께서 베드로의 입을 통해 의로운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7절에 '의로운 롯'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거룩하게 생활해도 하나님처럼 거룩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으로서 이를 수 있는 곳에 다다르면 하나님께서 의인이라 불러 주시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따라합시다.
"나는 의인이 되었고, 의인이 될 수 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인이 되었고 생활로도 의인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런 의로운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발견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야! 창원, 마산, 진해에 의인이 가득 찼네." "야! 서울에, 광주에, 부산에, 대전에, 경주에 의인이 가득 찼네."하시며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우리가 의인이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 때문에 즐거워하십니다.
에베소서 1장 3절에서 6절에, 우리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신 목적 세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신령한 복을 주시기 위해 택하셨고, 우리로 하여금 흠이 없고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게 하시려고 택하셨고, 우리가 거룩함으로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기 위해 택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자, 보세요.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교회에서 예배드리면서도 밖에 나가서 막 살면 하나님의 영광이 어려워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마음으로 회사에 가서도 직장에 가서도 거룩하게 살면 우리를 보는 사람들이 "야! 하나님의 사람은 다르네.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다르네. 어찌 저렇게 정직하고 의로울까?"하게 되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되는 것입니다.
또 교회가 칭송을 받게 됩니다. 우리 한국의 1300만 명의 크리스천이 믿음으로만이 아니라 생활까지 의롭게 되면 우리 겨레가 "야! 교인들을 봐. 교인들은 다르네."하며 교회를 칭송하게 될 것입니다.
어제 기독교 신문에 '한국 교회는 맛을 잃은 소금이다.'라는 한 기자의 글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에 화가 났습니다. 모든 한국 교회에 대해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왜입니까? 이 땅에 훌륭한 주의 종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 나라에 훌륭한 목사님, 훌륭한 장로님, 훌륭한 교인이 가득한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전국에 있는 여러 교회에 다니면서 귀한 목사님, 귀한 장로님, 귀한 성도님들을 얼마나 많이 만나는지 모릅니다. 생선 망신은 꼴뚜기가 시킨다는 말이 있듯이 가끔 꼴뚜기 같은 주의 종, 꼴뚜기 같은 장로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을 보고 모든 한국 교회가 그런 것처럼 말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꼴뚜기 같은 교인들을 보고 한국 교회가 망했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훌륭한 교인들을 보고 감사하며 기뻐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 교회마다 하나님의 보배로운 일꾼, 의인들이 가득한데, 가끔 좋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니 그런 사람은 드러내지 말고 선하고 귀하고 보배로운 분들을 많이 나타내어야 합니다.
교회에 대해 함부로 말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몸을 주시고 피를 주시고 세우신 교회를 사람이 함부로 말하면 안 됩니다.
한국 교회는 거룩합니다. 빛이 납니다. 의인들이 가득합니다. 그러나 더 가득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나 한 사람이 의롭게 되면, 나부터 의롭게 되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이 '나는 주일 낮 예배만 드릴 것이다. 밤 예배는 드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한다면 오늘 저녁에 교회에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한 사람이 '나는 생명을 걸고 예수님을 믿으니 낮에만 교회에 오는 것이 아니라 밤에도 교회에 와서 주님을 찬양하리라.'라고 결단한다면 오늘 저녁 예배 시간에는 아마 앉을 자리가 모자랄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저녁 예배에도 자리가 꽉 차니 우리 교회에 오시는 분들이 놀랍니다. 이번에 우리 교회에 오셔서 말씀을 전하신 장 목사님께서도, 수만 명이 모이는 교회에도 많이 가 보셨지만 저녁 예배에 양곡교회처럼 많이 모이는 교회는 없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나는 예배에 생명을 건다.'라고 마음을 먹으면 교회가 차고 넘칠 줄로 믿습니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살든지 나는 의롭게 살 것이다.'라고 마음 먹으면 대한민국의 1300만 크리스천이 다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럴 때 교회가 빛이 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활까지 의로우면 우리가 어떠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따라합시다.
"물 가운데서도 구원하시고 불 가운데서도 구원하신다."
노아 시대 때, 사람의 죄악이 관영하니 하나님께서 물로 심판하셨습니다. 하늘의 창을 열어 물을 부으시고 땅의 물샘이 솟아나게 하셔서 땅에 물이 창일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하늘에도 물이 있고 불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면 구름이 번개가 되어 불로 임하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면 구름이 비가 되어 쏟아지기도 합니다. 땅에도 불이 있고 물이 있습니다. 샘을 파면 물이 솟아나지만 지진이 일어나면 불이 뿜어나옵니다. 하늘도 신비하고 땅속도 신비합니다. 이 지구촌에 물이 있고, 기름이 있고, 금 은 광석이 있고, 가스가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데 노아 시대 때에는 하늘에서 물이 쏟아지고, 땅의 샘이 터져 물이 솟아 나왔습니다. 40일간 하늘에서 땅에서 물이 쏟아지니 150일간 지구촌의 산꼭대기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물이 창일했습니다. 노아가 방주에 있었던 날이 1년 10일이었습니다.
창세기 7장 22절을 보면, 육지에 있어 코로 생물의 기식을 호흡하는 것은 다 죽었습니다.
그러나 방주 안에 있었던 사람들과 생물들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물 심판으로 다 망하게 하실 때에도 구원하실 의인은 구원해 주셨습니다.
소돔 고모라는 불로 심판하셨는데, 롯의 의가 부족했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그 곳에서 최고의 의인인 그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사야 43장 1절부터 죽 보십시오.
『…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
우리가 의로우면 불 가운데서나 물 가운데서나 비행기를 타나 자동차를 타나 어디에서나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지구촌에서 비행기를 많이 탄 사람 중의 한 사람일 것입니다. 아마 백만 마일 정도는 탔을 것입니다. 그렇게 비행기를 많이 타고 다녔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토론토에서 워싱턴 디시로 가는 비행기를 탔을 때의 일입니다. 어떤 분이 비행기 안으로 들어오는데 제 영혼이 쭈뼛 쭈뼛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 거룩하고 귀한 분이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분이 자리에 앉자마자 기도를 하시더니 성경을 펴서 읽으셨습니다. 그 모습이 마치 천사 같았습니다. 샌프란시스코의 패숀 목사님이셨는데, 그토록 경건할 수가 없었습니다. 워싱턴 디시에 착륙할 때, 그 목사님이 또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비행기가 착륙할 때 턱 소리도 나지 않았습니다. 제 평생에 그렇게 착륙하는 비행기는 처음 타 보았습니다. '의인이 비행기를 타니 비행기도 달라지는구나.'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은 호랑이를 만나도 구원해 주시고, 사자를 만나도 구원해 주십니다. 풀무 불에 들어간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를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사자 굴에 들어간 의인 다니엘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5학년 때 부흥회에 참석했다가 큰 은혜를 받았는데, 그 강사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목사님이 금강산에서 기도하시다가 호랑이를 만나 죽게 되었답니다.
"하나님, 호랑이! 하나님, 호랑이!"
그런데 너무 다급하니 나중에는 "하 호! 하 호!"하는 말만 나오더랍니다.
그렇게 기도를 하는데도 호랑이가 뛰어들더랍니다. 그런데 호랑이가 뛰어드는 순간에 나뭇가지가, 고목의 한 가지가 바람에 떨어져 호랑이를 이마를 쳤답니다. 그러니 호랑이가 삼십육계를 놓더랍니다.
그것이 우연한 일이었겠습니까?
아프리카의 한 선교사가 밀림 지역에서 사자를 만났답니다. 너무 다급해서 "하나님, 저 사자가 회개하고 예수 믿게 해 주세요."하고 기도하고 눈을 떠보니, 사자가 기도하고 있더랍니다. 그런데 "하나님,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하더랍니다.
이 이야기는 사실이 아닌 것 같습니다. 만든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제가 은혜를 받은 강사 목사님의 이야기는 사실입니다.
어쨌든 이 세상에는 사고도 많고 천재지변도 많습니다. 그러나 의인은 그 사명을 다 할 때까지 하나님께서 반드시 구원해 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의인을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십니다.
시편 4편 3절에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을 너희가 알지어다 …』
디모데후서 2장 20절에서 21절에도 말씀하십니다.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한경직 목사님이 훌륭하지만, 한 목사님보다 학식이 더 풍부한 신학자도 많고, 한 목사님만큼 훌륭한 분들도 많습니다. 훌륭한 인물이 꽉 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한 목사님을 한 세대의 목사님으로 가장 크게 쓰신 이유는 한 목사님이 경건하셨기 때문인 줄로 저는 믿습니다.
독일이 낳은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 스위스가 낳은 종교 개혁자 쯔빙글리, 프랑스가 낳은 종교 개혁자 존 칼빈, 그분들이 모두 얼마나 경건했는지 모릅니다. 가정 생활이나 경제 생활이나 모든 생활이 참으로 경건했습니다.
디엘 무디, 웨슬리, 스폴젼 모두 얼마나 경건했는지 모릅니다.
인물이 잘 났다고, 학력이 좋다고, 가문이 좋다고 주님께 쓰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경건한 사람을 주님께서 쓰시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은 쓰임을 받으면 기쁩니다.
제가 늘 행복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크고 여러분의 사랑이 큰 이유도 있지만, 여기 저기에서 자꾸 오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뉴욕에서, LA에서 "목사님, 연합 집회 좀 인도해 주세요." "목사님, 목회자 세미나 좀 인도해 주세요."하면서 저를 부릅니다. 제가 다 가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쓰시는구나.'하는 생각이 들 때 얼마나 보람이 있고 기쁜지 모릅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을 때 얼마나 좋습니까?
대통령에게 쓰임 받으면 정권이 바뀔 때 감옥에 가기도 합니다. 그 대통령이 있을 때는 깃발을 날리다가 정권이 바뀌어 대통령이 물러가면 감옥에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쓰임 받으면 영원히 소중한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경건한 사람을 쓰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경건한 사람에게 복을 주십니다.
시편 92편 12절에 『의인은 종려나무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같이 발육하리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기쁨도 주십니다. 영적인, 정서적인 행복도 주십니다.
시편 118편 15절에 말씀하십니다.
『의인의 장막에 기쁜 소리, 구원의 소리가 있음이여 …』
시편 97편 11절에는 『의인을 위하여 빛을 뿌리고 마음이 정직한 자를 위하여 기쁨을 뿌렸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죄를 지은 자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의인은 행복합니다. 의로울수록 행복이 더 올라갑니다. 할렐루야!
따라합시다.
"의인과 행복은 정비례한다."
생활이 의로울수록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이 크고, 죄를 지을수록 괴로움이 큽니다.
제가 군에 있을 때, 월남전에 참전했던 박 모 병장님이 돌아오자마자 드러누웠습니다. 걸음도 걷지 못했고, 온 몸이 퉁퉁 부어 있었습니다. 치료되지 않는 성병에 걸렸다고 했습니다. 월남에서 이성과 도덕적인 실수를 저지르다가 얻은 병이었습니다. 두 달 정도 내무반에 누워 있다가 들 것에 실려 나갔는데, 몸이 다 썩어 있었습니다.
그가 월남에서 여자와 쾌락을 누리던 그 몇 시간은 좋았는지 모르지만, 그것 때문에 젊은 청년이 썩어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심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천사도 용서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떤 학자들과 시대주의 학자들은 창세기 6장의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라는 말씀을 천사들의 범죄라고 해석하는데, 아닙니다.
따라합시다.
"성경은 전체로 보아야 한다."
이 말씀만 보면, 혹시 '천사들이 세상의 아름다운 여자를 보고 욕심 품어 아내로 삼아서 음란할 수도 있었겠다.'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성경 전체를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22장 30절을 보면, 천사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간다고 예수님께서 분명 말씀하셨습니다.
나무꾼과 선녀의 이야기가 얼마나 재미있습니까? 나무꾼이 나무를 하다가 선녀들이 옷을 벗고 목욕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자들은 잘 모르겠지만, 남자들은 그 기분이 얼마나 좋은지를 알 것입니다. 나무꾼이 '우아!'하고 선녀들을 보다가 지혜를 발휘해서 옷 한 벌을 감추었습니다. 옷이 없으니 한 선녀(천사)가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고 울고 있었습니다. 나무꾼은 그 선녀(천사)를 아내로 삼아 아들을 낳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이야기, 꾸민 이야기입니다.
천사는 시집도 못 가고 장가도 못 갑니다.
그러니 천사의 범죄는 유다서에 나온 대로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 자리를 떠나 하나님 앞에서 충성을 거부한 것입니다. 그것이 천사의 범죄입니다. 그것도 하나님께서 벌하십니다.
어느 시대의 사람이든 범죄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벌하십니다. 범죄한 사람은 그냥 넘어갈 수 없습니다.
경찰의 추격을 받는 한 범인이 도망을 가다가 강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마침 막 출발하는 나룻배가 있어서 뛰어 탔습니다.
"후유, 잡히지 않았다."
그것을 본 경찰들이 소리쳤습니다.
"사공! 사공! 빨리 배를 돌려."
경찰들이 아무리 크게 소리쳐도 사공은 그대로 나룻배를 저어 갔습니다. 귀 먹은 사공이었기 때문입니다.
범인은 다시 한 번 안도의 숨을 내쉬었습니다.
"후유, 살았다."
배가 맞은 편 나룻터에 거의 다 왔을 때, 범인은 이미 그 곳에도 경찰들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경찰들이 서로 연락을 해서 다른 경찰들이 와 있었던 것입니다.
범인이 사공에게 말했습니다.
"사공, 빨리 방향을 바꾸어요. 빨리 방향을 바꾸란 말이오."
그러나 귀먹은 사공은 계속 노를 젓기만 했습니다.
범죄하면 그대로 심판을 받습니다.
그런데 의로운 사람은 심판이 없습니다. 자유와 평화만 있습니다. 행복만 있습니다. 할렐루야!
시편 37편 29절에 말씀하십니다.
『의인이 땅을 차지함이여 거기 영영히 거하리로다』
의인은 복을 받으면 영원히 간직합니다.
그러나 악인은 잠시 후에 사라집니다.
시편 37편 10절에 말씀하십니다.
『잠시 후에 악인은 없어지리니 네가 그 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악인은 호박 같습니다. 호박씨를 심으면 삼 개월만에 큰 호박이 달립니다. 그러나 겨울이 되면 아무리 찾아도 호박을 볼 수 없습니다.
악인은 잠시 동안은 되는 것 같아도 나중에는 없어집니다.
그러나 의인은 대대로 잘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인은 하나님께서 예뻐하셔서 구하는 대로 응답을 해 주십니다.
야고보서 5장 16절에 말씀하십니다.
『…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따라합시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크니라. 강하니라."
요한일서 3장 21절, 22절에도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미국의 유명한 신학교 중의 하나가 달라스 신학교입니다. 유명한 신학자를 많이 배출한 그 신학교가 한번은 재정난으로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그 날 12시에 채권자들이 와서 학교를 폐쇄시키면 교수들과 학생들은 다 밀려나야 했습니다. 그 날 아침 예배를 드릴 때 학장이 말했습니다.
"오늘 우리 학교가 문을 닫게 됩니다. 12시가 되면 우리는 다 나가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 기도합시다."
모든 교수들이 돌아가면서 기도를 했습니다.
유명한 설교 학자이자 경건한 신학자인 해리 아이언 사이드 박사님의 차례가 되었는데, 그분이 창 밖을 보니 수많은 소들이 산에서 꼴을 뜯어먹고 있었습니다. 그분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천하 만물이 다 아버지의 것인데, 저 소들을 팔아서라도 우리 학교의 문이 닫히지 않게 해 주세요."
기도회가 끝났습니다.
부츠를 신은 한 남자가 터덕터덕 발자국 소리를 내며 신학교 교무실로 들어왔습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방금 큰 트럭 두 대 분의 소를 팔았습니다. 이 돈으로 사업을 하려고 했는데, 자꾸 '신학교에 돈이 필요하니 돈을 신학교에 갖다 주어라. 신학교에 돈이 필요하니 신학교에 갖다 주어라.'하는 마음이 너무 간절하게 임해서, 하나님의 말씀인 줄로 알고 돈을 갖고 왔습니다."
남자가 소를 판 돈이라고 하면서 돈을 내 놓고 갔습니다. 부채를 정리하기에 딱 맞는 돈이었습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달라스 신학교가 유지되고 있는 것입니다.
아이언 사이드 박사님이 경건하니 하나님께서 즉시 응답해 주신 줄로 믿습니다.
또 중요한 것은 의인은 이 사회의 하나님의 등불이라는 것입니다.
따라합시다.
"의인은 이 사회의 하나님의 등불이 된다."
낮에도 별이 있지만, 낮에는 밝으니 별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태양이 사라지고 난 밤에는 별이 빛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믿음과 생활이 겸한 의인이 되면 하나님의 등불이 되어 우리 때문에 많은 사람이 희망을 갖게 되고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어두우니 노아의 의가 더 빛이 나고 세상이 더러우니 별로 의인이 아닌 롯이 의인이 되었듯이, 세상이 어두워질수록 우리는 더 빛이 나는 하나님의 등불이 되는 것입니다.
고기를 무척 좋아하는 한 가난한 목사님이 사례비를 받으면 십일조와 이것 저것을 떼고 난 다음에 꼭 고기 한 근 값을 따로 떼어 가지고 고깃간으로 가셨습니다. 목사님이 친히 고기를 사러 가셨습니다. 고기를 좋아하시니 고기를 사러 가는 것이 행복하고 고기를 사 가지고 오시는 것이 행복했기 때문입니다.
"아주머니, 수고하십니다. 고기 한 근만 주세요."
고기를 받아든 다음에는 "감사합니다."하고 인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고깃간 아주머니가 매달 고기를 사 가는 점잖고 품위있는 목사님에게 그만 반해버렸습니다. 고기를 사러 오는 사람들마다 "좋은 부위 주세요." "조금 더 주세요."라고 하는데, 목사님은 아무 말 없이 산 다음에 "감사합니다."라고 하니, 반할 만하지 않습니까?
하루는 고깃간 아주머니가 앞치마를 벗어 던지고 목사님 뒤를 따라갔습니다. 고개를 넘고 내를 건너 먼길을 간 목사님이 교회로 들어섰습니다.
그제서야 고깃간 아주머니는 그 점잖고 품위 있는 손님이 목사님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다음 주일에 고깃간 아주머니는 자기 발로 교회에 나와서 구원을 받고 좋은 교인이 되었습니다. 또 목사님이 고기를 좋아하시는 것을 알고 교회에 올 때마다 고기를 가지고 왔습니다.
목사님의 생활이 거룩하니, 영혼을 구원한 것입니다.
거룩하면, 의로우면 만 가지 복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범죄하고 더러우면 명예도 떠나가고, 존귀함도 떠나가고, 건강도 떠나가고, 손가락질이 오게 됩니다. 비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거짓 선지자들은 우리를 자꾸 죄 짓게 하고 방탕하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는 우리에게 자꾸 의롭게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할렐루야!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의로워집니까?
간단합니다.
기본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는 의롭게 되는 길이 없습니다.
둘째는 말씀에 맞추어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따라합시다.
"하나님의 말씀은 의로우시도다."
다섯 살 먹은 유치원 아이는 선을 반듯하게 그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를 대고 그으면 쉽게 그을 수 있습니다.
성경을 캐논이라고 하는데, 캐논은 자 막대기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어리석어도 말씀대로 죽 생활하면 반듯한 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는 욕심이 있고 죄성이 있습니다. 목사님에게도 장로님에게도 오랜 믿음 생활을 한 권사님에게도 새신자에게도 다 죄성이 있습니다. 동시에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가지지 못하는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따라합시다.
"성령."
우리에게는 성령의 소욕이 같이 있습니다.
우리가 내 죄성을 따라 살면 추하게 되고,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살면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6절에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지금 우리 한국의 여대생들 중에 폐결핵환자가 많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침은 굶고, 점심은 건너뛰기 때문입니다. 날씬해지려고 먹지 않아서입니다.
미국 LA에 두 아들을 둔 한 가정이 있었습니다. 큰아들이 결혼을 했는데, 잘 생긴 며느리의 허리가 개미처럼 가늘었습니다. 그리고 수를 놓는 솜씨가 아주 좋아서 나비의 수를 놓으면 마치 나비가 날아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니 시어머니가 다니면서 자랑을 했습니다.
"우리 며느리는 밥도 조금 먹고 솜씨가 얼마나 좋은지 나비를 수 놓으면 나비가 날아갈 듯 하고 …."
둘째 아들도 결혼을 했습니다. 둘째 며느리는 마치 역도 선수 같았습니다. 그래도 시어머니는 다니면서 막 자랑을 했습니다.
"우리 둘째 며느리는 밥도 많이 먹고, 힘도 세고, 청소도 잘 하고, 빨래도 잘 하고…."
그런데 삼 년 후에 큰며느리가 결핵으로 죽었습니다.
너무 적게 먹으면 결핵에 걸릴 수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의 어느 교회 강단에 이런 글이 써 있었다고 합니다.
'설교를 짧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다음에 또 초청을 받을 것이요'
그것은 마귀의 글입니다. 그것은 온 교인들을 영적 결핵에 걸려 죽게 만들고자 하는 글인 것입니다.
실제로 미국 교회 중에 설교를 한 시간, 두 시간씩 하는 교회가 다 몇 만 명씩 모이는 교회, 강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저도 좀 길게 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경건하게 살려면 경건의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10년, 20년, 30년 뒤의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지금 면도기 업계에서 세계 랭킹 1위인 회사는 스위스의 모 회사인데, 대단히 뛰어난 선전을 하고 있습니다.
제품이 아무리 좋아도 선전하지 않으면 잘 팔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품이 조금 안 좋아도 선전을 잘 하면 잘 팔리는 것입니다.
교회도 전도로 선전해야 부흥됩니다. 전도하지 않는 교회는 말씀이 아무리 좋아도 부흥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면도기 회사는 선전을 어떻게 하는지 아십니까? 아이들이 뛰어 노는 공원이나 놀이터마다 면도기를 걸어놓고 상품 광고를 합니다.
어떤 분이 물었습니다.
"아니, 아이들은 면도도 하지 않는데, 왜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에 면도기 광고를 합니까?"
그러자 그 회사 책임자가 대답했습니다.
"아이들이 지금은 면도하지 않지만, 20년만 지나면 면도하지 않을 아이는 없습니다."
뛰어 놀면서 쳐다보고, 뛰어 놀면서 쳐다보면 아이들의 머리에 면도기가 입력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나중에 면도기를 쓰게 될 때 다른 면도기를 쓰지 않고 그 면도기를 쓴다는 것입니다. 20년 뒤를 내다보고 광고를 하는 것입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미국의 코카콜라 회사는 미국의 모든 유치원생들에게 코카콜라를 무료로 줍니다.
선한 일을 하기 위해서입니까? 아닙니다. 1년간 봉사하고 70년간 잘 팔기 위해서입니다. 유치원 다닐 때에 코카콜라의 마시면서 매일 코카콜라를 보아 왔기 때문에 유치원을 졸업해도 코카콜라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한 회사도 대회사는 이렇게 미래를 바라보는데, 우리도 큰 의인이 되려면 미래를 볼 수 잇어야 합니다. 오늘 죄를 지었다고 낙심하면 안 됩니다. 한 달간 추하게 살았다고 포기하면 안 됩니다. 5년, 10년, 20년 뒤를 내다보면서 의를 쌓아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아가는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할아버지 할머니가 될수록 천사같이 됩니다. '나는 의인이 되어야지.'하며 의를 계획해서 사는 사람은 갈수록 귀하게 됩니다. 곱게 늙습니다.
그러나 몸을 막 쓴 사람, 막 산 사람은 추하게 늙습니다. 막 산 사람은 명예도 떠나가고, 존귀함도 떠나가고, 존경도 떠나가고, 찌들어질 뿐입니다.
그리스의 한 무덤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온다고 합니다. 주위에 볼거리도 없고 그 무덤도 자그마한데 사람들이 그렇게 오는 이유는 그 무덤의 묘비에 있는 글이 가슴을 찡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내 차례, 내일은 네 차례'
우리 모두 우리의 차례가 옵니다.
그 날, 의로운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서게 되는 여러분과 제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의인이 있어야 합니다/창18:22-33,벧후2:5-8
2001-10-15 14:19:57
영국의 작가 웨일즈가 쓴 대주교의 죽음이라는 글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 글에 보면 대주교가 아침마다 일정한 시간에 성당에 들어가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어느 날 아침에 성당에 들어가 두 손을 높이 들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오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시여" 라고 기도하는데 갑자기 위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오냐, 내가 여기 있다. 무엇을 원하느냐" 대주교는 너무나도 놀랬습니다. 얼덜결에 하나님 정말 나의 기도를 듣고 계셨군요 하고 신음하듯이 부르짖고는 벌렁 나자빠져서 심장마비로 죽고 말았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드리는 기도 한마디 한마디를 하나님께서 다 들으신다는 것을 믿고 기도하십니까? 하나님이 다 들으시는 것을 알고 기도하십니까? 들으시지 않겠지 하면서 기도하십니까?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다 들으신다는 것을 확실히 믿고 기도하십니까? 내가 드리는 기도가 다 하나님 앞에 상달되고 하나님이 기억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기도하십니까? 여러분은 나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즉시 즉시 상달 된다는 것을 확실히 믿으십니까? 신학자 폴 틸리히는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불안의 원인은 3가지라고 했습니다. 첫째는 죽음에 대한 불안입니다. 우리 모두는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불안을 누구나 가지고 있습니다. 둘째는 공허함과 무의미 때문에 불안합니다. 우리가 많은 일을 한다고 몸부림치지만 깊이 성찰해 보면 쓸 때 없는 일이 많습니다. 별로 이렇다할 의미가 없는 것이 많습니다. 셋째는 죄책감이 불안하게 합니다. 의인은 없습니다. 다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다 죄책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도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올 때에 '예,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하시옵소서.' 하고 얼른 대답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읽은 구약의 말씀을 보면 소돔 고모라성은 죄로 인하여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놓고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성을 멸할 수밖에 없는 형편입니다. 죄가 꽉 차있습니다. 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진멸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도 어떻게 해서든지 용서했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로는 멸망시킬 수밖에 없고 사랑으로는 멸망시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조금만 살릴 수 있는 근거가 있으면 용서해 주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죄악이 관영한 성이지만 용서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이 오늘 읽은 말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멸망시킬 수밖에 없고 그러면서도 멸망시키지 않으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나타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덮어놓고 용서해 달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 성의 죄악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창18:23∼24절에 하나님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 그 성중에 의인 50이 있을찌라도 하나님께서 그곳을 멸하시고 그 50의 의인을 위하여 용서치 아니하시렵니까? 하고 애원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즉시 동의 하셨습니다. 의인 50명만 있으면 온 성을 용서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거듭거듭 그 숫자를 번복하면서 의인 45명, 40명, 30명, 20명까지 내려 왔습니다. 하나님은 의인 20명을 인하여도 멸하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또 말하기를 하나님 노하지 마십시오. 내가 이번만 더 말하겠습니다. 거기서 의인 열명을 찾으면 어찌 하시렵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열명을 인하여도 멸하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더 이상 하나님께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소돔성에는 의인 열명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망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깨달아야 할 가장 중요한 주제는 멸망이 아니라 심판이라는 사실입니다. 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심판 하셨습니다. 자연재해로 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심판하셨습니다. 노아 홍수도 하나님께서 심판하셨습니다. 바벨론 포로 이스라엘의 멸망 다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전쟁, 기근, 지진, 재난, 참사 모든 사건이 영적인 눈으로 볼 때는 전부가 심판이지 자연 재해가 아닙니다.
사람은 번영과 자유를 원합니다. 죄와는 관계없이 잘 살기만을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시는 시각은 그렇지 않습니다. 소돔 고모라는 분명히 죄로 인하여 망했습니다. 원인은 사람에게 있습니다. 범죄한 사람에게 있습니다. 타락한 인간성에 원인이 있습니다. 창13:10에 보면 소돔 고모라는 물이 넉넉하고 에덴동산 같고 애굽땅과 같은 풍요로운 지역이었습니다. 모자람이 없는 아름답고 풍요로운 지역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풍요롭게 살다가 범죄하고 타락했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에 보면 의인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죄인은 하나님의 안중에 없습니다. 죄인은 수에 칠 가치가 없습니다. 노아 홍수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죽이셨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선으로 볼 때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창6:3에 보면 사람이 육체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떠나 버리고 영혼이 없는 포악한 육체 더러운 육체는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엄격히 말하면 노아 홍수는 산 사람을 죽인 심판이 아니라 죽은 사람을 없애는 심판이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성은 당시 인구가 5만명이었다는 글을 읽었습니다. 그러나 5만명이든 10만명이든 하나님의 안중에는 중요하지 아니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의인의 수만 헤아리십니다. 의인의 수가 문제입니다. 의인과 악인을 함께 멸하시지 아니하시겠다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당연히 죽어야 하고 마땅히 멸망시켜야 하겠지만 적은 수라도 의인만 있으면 그 의인을 보고 전체를 용서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적은 수라도 의인이 있으면 그 의인을 통하여 더 나아지고 더 밝아지고 장차 생명의 길이 열릴 것을 바라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인이 없다면 더 이상 그냥 둘 이유가 없습니다. 의인이 열명만이라도 있으면 거기에 소망을 걸고 거기에 기대를 걸고 전체를 용서하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렘5:1에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사람을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성을 사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실 때 예루살렘에 의인 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의인이 있으면 예루살렘을 용서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의인을 애타게 찾으시는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뜻을 이해해야 합니다.
오늘 읽은 창18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이와 같은 중보적 기도가 필요합니다. 아브라함은 멀리서 소돔과 고모라를 생각하면서 기도합니다. 아브라함처럼 기도하는 의인이 있어야합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외적으로 볼 때는 죄 때문에 망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볼 때는 의인이 없어서 망했습니다. 소돔 고모라는 사람 편에서 볼 때는 죄 때문에 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의인이 없어서 망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 가장 필요한 것은 도덕성의 회복입니다. 그리고 의인이 있어야 합니다. 의인이 있어야 나라가 삽니다. 잠21:3에 의와 공평을 행하는 것을 제사 드리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기쁘게 여기신다고 했습니다. 잠21:15에 공의를 행하는 것이 의인에게는 즐거움이요 죄인에게는 패망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의롭게 사는 것을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것 보다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롭게 살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고 나가서 불의하게 살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흔히 국가의 약하고 강한 것을 면적이 넓고 좁고 인구가 많고 적은 것 국민 소득이 높고 낮은 것으로 판단합니다. 그러나 그 보다 중요한 것은 도덕성입니다. 얼마나 의롭게 사느냐 얼마나 바르게 사느냐 다시 말해서 의인이 얼마나 있느냐에 있습니다. 의인이 그 나라의 흥망성쇠를 결정짓습니다. 역사학자 토인비가 21개 국가의 멸망에 대하여 연구한 결과 19개 나라가 내적으로 부패하여 망했습니다.
왕하13:14에 보면 엘리사가 중한 병이 들었을 때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찾아가서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종 엘리사는 우리나라의 병거와 마병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세상을 떠나면 어떻게 되겠느냐는 말입니다. 엘리사는 전쟁터에 나가 활과 창으로 싸운 일이 없습니다. 마병이나 병거 노릇을 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이스라엘에서 의인인 엘리사의 존재는 병거나 마병 보다 훨씬 더 힘이 있었고 나라를 지키는 파수꾼의 존재였습니다. 엘리사 때문에 다른 나라가 쳐들어오지를 못했습니다. 잠28:1에 의인은 사자 보다 더 강하다고 했습니다. 잠30:30에 사자는 짐승 중에 가장 강하여 아무 짐승 앞에서도 물러가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의인은 세상에서 가장 강한 존재입니다. 의인이 있어야 나라가 강해지고 계속 존재 할 수가 있습니다. 의인이 있으면 그 감화력이 사회에 미칩니다. 의인에게는 의인의 향기가 있습니다.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은 부패한 세력입니다.
18세기에 일어난 프랑스 혁명은 유명합니다. 1789년 프랑스에 혁명이 일어나 루이 16세는 처형을 당하고 종래의 왕조는 몰락하고 공화체제가 되었습니다. 그때 콩코드 공장에서 2,500명이 처형되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부정과 부패에 연루된 사람과 왕실에서 기생충처럼 살아가던 봉건 귀족과 승려들이었습니다. 날마다 5명의 형리들에 의해 칼로 목이 잘렸을 때 프랑스의 수도 파리는 공포의 전율로 꽉 차있었습니다. 세계에서 넓은 광장 중의 하나인 콩코드는 글자 그대로 피의 광장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프랑스는 자유가 보장되었고 부정과 불의가 용납 될 수 없는 새로운 나라가 되었습니다. 콩코드 광장에서 흘린 피는 민주주의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같은 시대에 영국에서는 피 흘림이 없이 영국이 변하여 새로운 자유와 평화와 의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역사가들의 말에 의하면 여러 가지 원인이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큰 힘은 영국에 요한 웨슬레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요한 웨슬레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사방에 다니면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그때 평민들도 회개하고 귀족들도 회개하고 국회의원들도 회개하고 각계 각층의 사람들이 회개하므로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모두가 새로워졌습니다. 사회의 모든 것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 결과 19세기에 와서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영국의 역사에서 피를 흘리지 않고도 의인만 있으면, 복음을 전하면, 예수님만 믿으면 나라를 살리고 새롭게 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소금이 하는 일은 썩는 것을 막고 새롭게 하는 일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예수 믿는 사람을 두신 목적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소금 노릇을 제대로 해야 세상이 썩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이 의롭게 살고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의인은 그 사회의 생명입니다. 잠14:34에 의는 나라를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한다고 했고 잠11:18에 악인의 삯은 허무하되 의를 뿌린 사람의 상은 확실하다고 했고 잠28:12에 의인이 득의하면 큰 영화가 있다고 했습니다. 잠29:2에 의인이 많아지면 백성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탄식한다고 했습니다. 시106:3에 공의를 지키는 자들과 항상 의를 행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오늘 읽은 신약의 말씀 벧후2:6에 "소돔 고모라성을 멸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에게 본을 삼으셨다"고 했습니다. 소돔 고모라성은 죄 때문에 멸하였습니다. 멸하였다는 말은 화산의 폭발로 인하여 잿더미가 되어 버리는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7절 "무법한 사람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다"고 했습니다. 무법이란 말은 질서가 붕괴되고 도덕이 붕괴된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소돔 고모라성 사람들은 음란한 삶을 살았습니다. 영어에 소도마이트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소돔 사람이라는 뜻인데 아주 타락한 모습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성적으로 타락해서 동성연애, 동물과의 관계, 비정상적이고 변태적인 사람을 소도마이트라고 합니다. 더러운 것을 가리키는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성범죄가 많기로 세계에서 3번째입니다. 신문에 성범죄 사건 기사가 보도되지 않은 날이 하루도 없습니다. 40대 남자가 8세된 여자아이를 성폭행 하려다가 죽이고 17세된 고등학생이 47세된 여인을 성폭행 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지난 목요일 신문에 보니까 학교 성적이 전교 수석을 다투는 모범 여중생이 용돈 마련을 위해 원조 교제를 하고 여고생이 원조 교제를 미끼로 상대 남성을 협박 천여만원을 빼앗았습니다. 그날 원조교제로 7명을 구속 기소했습니다.
소돔 고모라에 살고 있었던 롯은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마음에 고통을 느꼈습니다. 마음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7절에 보면 롯을 가리켜 의로운 롯이라고 했고 8절에는 의인이라고 했습니다. 롯은 의인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롯을 살려 주셨습니다. 8절에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으므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였다고 했습니다. 롯이 구원받은 원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상하였다는 말은 고문을 당한다는 뜻입니다. 양심의 극한 고통을 표시하는 말입니다. 롯의 고통은 두가지 면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날마다 소돔 고모라 사람들의 죄악된 행실을 보고 듣는 가운데 멸망할 그 사람들을 인하여 고민했습니다. 두 번째는 소돔 고모라성에 자신이 살게 된 것은 자신의 선택이었으므로 롯은 전날에 자기의 비 신앙적이며 물질에 치우친 선택에 대해서 많은 자책을 느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양심을 스스로 고문하는 사람을 의롭게 보시고 멸망 중에서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의롭게 살아야합니다. 예수님은 마5:6에 말씀하시기를 의에 주리고 목이 마른 사람은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주리고 목마름은 사람의 가장 강렬한 욕망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의에 해한 욕망이 있습니다. 문제는 의에 대한 욕망이 얼마나 강렬한가가 문제입니다. 그리고 얼마나 오래 지속되느냐가 문제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의롭게 살아야 되겠다는 결심을 하게되고 예배당에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의롭게 살아야 되겠다고 결심하고 다짐합니다. 그러나 예배당 밖에 나가면 그 결심이 무너집니다. 왜 그렇게 됩니까? 그 결심과 욕망이 강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의롭게 사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모르고 사는 사람은 몰라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언제나 어디서나 의롭게 살아야합니다. 나라를 살리는 길은 의롭게 사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의인의 숫자를 헤아리십니다. 예수님께서 마5:20에 말씀하시기를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 보다 더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지금 우리나라 상황에서 바꾸어 말하면 예수 믿는 사람이 불교를 믿는 사람이나 유교를 믿는 사람 보다 그 행위가 더 의롭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나라를 살리는 의인이 되어야 합니다. 지난 수요일에 책에서 읽은 이야기입니다. 1999. 7. 16. 새문안 교회에서 서재현 장로의 장례식이 있었습니다. 서 장로님은 인천 제일 교회에서 장로로 시무 하다가 서울로 이사와서 새문안 교회에서 시무했습니다. 그날 장례식 집례는 전에 인천 제일 교회에서 목회했던 곽선희 목사가 서 장로님의 요청에 의해 집례했습니다. 곽선희 목사는 말하기를 자기가 가장 존경하는 장로님이고 지금까지 서 장로님보다 더 겸손한 사람을 못 보았고 서 장로님 보다 더 진실한 사람을 못 보았고 서장로님 보다 더 의로운 사람도 못 보았다고 했습니다. 장례식 때 서 장로의 손녀가 나와서 할아버지를 생각하며 추모사를 읽었습니다. 할아버지 우리는 할아버지를 사랑합니다. 진실과 겸손과 의롭게 사는 길의 표본이 되어 주시고 말없이 실천하신 할아버지를 존경합니다. 할아버지를 할아버지로 모신 것을 저희는 행복하게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할아버지 제가 할아버지 같은 신랑을 만나게 해 달라고 소원하고 하나님께 기도했던 것을 아시지요-
이 대목에서 많은 조객들이 울었습니다. 우리가 세상 떠난 후에 어떤 추모사가 들려 질 것 같습니까? 할아버지와 같은 신랑감을 만나게 해 달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한 그 손녀의 고백을 볼 때 그 할아버지의 믿음과 사랑과 겸손과 진실과 의로움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참으로 존경스럽고 큰 감동을 주는 장로님이셨습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무슨 일에나 의롭게 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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