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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베드로서 설교 모음

베드로전서 4:12 - 19 설교 모음

by Jessi J 2024. 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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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과 고난 Part I /벧전4:12-19/ 조정의목사

2020-09-23 15:00:07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17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18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

 

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

 

 

오늘 말씀의 부제는고난 중에 우리가 기억해야 할 6가지 명령입니다. 본문 말씀에 나타난 6가지 명령은 다음과 같습니다. 고난을 기대하라(“이상히 여기지 말라”(12)), 고난을 기뻐하라(“즐거워하라”(13-14)), 고난을 기피하라(“고난을 받지 말라”(15)), 고난을 당당히 여기라(“부끄러워하지 말라”(16)), 고난을 기회로 삼으라(“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16)),

 

고난 중 주님만 바라라(“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17-19))입니다. 이것이 고난 중에 그리스도인이 기억해야 할 명령들입니다. 오늘은 그 첫 시간으로 첫 번째와 두 번째 명령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것은 고난을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에 대한 명령들입니다.

 

본문을 살펴보기 앞서 당시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편지를 받고 있는 소아시아 성도들은 여러 가지 시험을 받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도 앞부분에서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으로 근심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 지역은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 지역으로, 복음이 전해지는 그 순간부터 환란이 함께 한 곳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3, 14장을 보면 바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에서의 박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19장을 보면 에베소 지역에서 복음을 박해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들은 복음을 처음 들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많은 시험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받은 고난과 현재 우리의 고난이 어떻게 관련이 있을까요? 우리의 고난을 그들의 고난과 비슷하게 여길 수 있을까요? 그들의 고난은 정말 직접적인 것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인해서 비난과 손가락질을 당했고 사회적인 불평등을 경험해야 했으며 육체적인 핍박이 있었습니다.

 

네로 황제의 광기어린 핍박이 있었고 그러한 고난으로 순교 당하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당한 고난과 우리의 고난은 확실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도 복음으로 인해 박해를 당하고 사회적으로 고난을 당하는 곳이 분명 있습니다. 우리도 차별금지법 등의 법률이 통과될 때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할 수 없고 그로 인해 사회적인 제한을 받게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받는 고난에는 질병으로 인한 것, 재정적인 어려움이나 인간관계의 어려움, 직장 내에서 그리스도인답게 살고자 할 때 경험하는 고난들이 있습니다. 이 편지를 받은 소아시아 지역 성도들과는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누구든지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그리스도인답게 살고자 한다면 고난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저 역시 아내의 질병이라는 고난을 경험하면서 그것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고난을 모든 성도님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겪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고난을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가 매우 중요합니다.

 

첫 번째 명령: 고난을 기대하라(12)

 

말씀은사랑하는 자들아로 시작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연구할 때 말씀에 대한 많은 정보를 알고자 접근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편지는 이론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이 편지는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에게 위로와 격려를 주기 위해서 쓴 것입니다. 베드로는 지금 사랑하는 자들, 그가 동정하고 불쌍히 여기며 아끼는 이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고난 중에 있는 성도의 손을 붙잡아 주면서 따뜻하게 전해주는 힘 있는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저도 이 시간이 본문 말씀이 무엇인지 그저 알려주기만 하는 시간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 시간이 지금 고난 가운데 있는 분들에게 참된 위로와 격려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참 위로와 격려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그들이 당한 시험을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불시험에서이라는 말은 무섭고 파괴력이 강한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현재 당하고 있는 고난이 그러했습니다. 그것은 가볍고 견디기 쉬운 시험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을 뒤흔들만한 시험, 불이 타오르는 것처럼 강렬한 시험이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시험들에 대해그것은 별 것 아니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당하는 사람에게는 불과 같은 시험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너희를 연단하려고오는 시험입니다. 시험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목적입니다. 불의 목적은 태워버리는 것과 정화시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사용하고 있는 불의 모습은 금을 제련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불로 달구면 광석의 불순물이 사라지고 순수한 불만 남아있습니다. 불이 그런 용도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에게 임한 불시험이 그들을 연단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1:3-4). 온전한 모습, 부족함이 없는 순수한 모습으로 만들기 위해 믿음의 시련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저 역시 최근에 시험을 겪으면서 이 시험이 우리 부부에게 무엇을 주었는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시험은 인내심을 키워줍니다. 우리로 성숙한 거룩으로 이끌어주고 믿음을 강하게 단련시켜 줍니다. 그동안 의지하고 있었던 것들이 끊어지고 오직 하나님 한 분만 남아 그분에 대한 믿음이 더욱 강해지는 것입니다.

 

또한 나의 영적인 현주소를 보여줍니다. 그동안 어려움이 없을 때는 잘 몰랐던 나의 참 모습, 하나님을 신뢰하는 정도를 보게 됩니다. 우리의 실체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고난은 하나님 외에 내 마음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들을 보여줍니다. 이렇듯 시험은 베드로의 말처럼 우리를 연단하기 위한 목적으로 주어집니다.

 

너희를 연단하려고오는시험입니다. 그 시험이 여러분을 찾아오는 것입니다. “오는의 더 정확한 해석은일어나는입니다. 일어난다는 것은 영어로 ‘happen’입니다.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날 때 그것을 해프닝이라고 말합니다. 고난은 그냥 갑자기 일어난 해프닝처럼 느껴집니다. 우연처럼 찾아옵니다. 그러나 여러분과 저는 알고 있습니다. 세상에 우연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입니다.

 

시험이 일어난다면 배후에 하나님이 계심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모든 우리에게 허락된 시험과 고난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신실하게 통제하고 계십니다. 또한 우리는 그 시험 가운데서 하나님이 우리를 신실하게 돕고 계신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8:28).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 하나님이 허락하신 삶에 주어진 시험과 환경을 통하여 하나님이 선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더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게 하기 위해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고난이 오는 방향은 다양합니다. 때로는 나의 죄 때문에 일어나고, 때로는 나의 잘못과 상관없이 다른 사람의 죄로 인해 일어납니다. 예상하지 못한 사건과 사고, 자연재해 등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나에게 닥친 고난이 하나님의 철저한 통제 하에 일어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분이 신실하게 우리의 환경을 만들고 계신다는 점입니다. 토기장이가 섬세한 손으로 아름다운 도자기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하나님은 이 시험을 통해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빚어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어지는 명령어는 당연한 것입니다.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라”. 고난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것, 그것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상히 여기지 말라는 것은현재형입니다. 계속 이상하게 여기고 의문을 갖는 행동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동차 사고를 당했는데 전혀 놀라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갑자기 질병이 생겼을 때 태연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계속해서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속적으로 의문을 갖는 것을 멈추라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지?’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셨지?’라는 의문을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계획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모든 시험은, 특별히 그리스도를 인하여 당하는 시험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예견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15:19). 우리는 모두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이 주님을 미워했듯이 우리 역시 미워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고난을 기대하십시오. 당연히 고난이 찾아올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 중에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2천 년 전에 예루살렘 밖에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아무런 죄도 없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법정에서 그의 죄를 찾을 수 없었지만 십자가에 매달렸습니다. 그가 한 일은 가난한 자를 돕고 병든 자를 고치며 귀신을 쫓고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한 것 밖에 없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모든 천지만물을 지으신 주인이었습니다. 그분이 피조물에 의해 고난을 당하신 것, 그것만큼 이상한 일이 또 있을까요? 그러나 그 일 조차 배후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택하시고 구원하시며, 예수를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으로 주사 모든 무릎을 그 앞에 꿇게 하시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라면 고난과 환란에 대해 이상하게 여길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기대해야 합니다.

 

두 번째 명령: 고난을 기뻐하라(13-14)

 

13절은오히려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고난을 이상한 일로 여기지 말고대신이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모든 시험은 하나님의 신실하심 아래 주어졌다, 모든 시험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단련시키신다,

 

모든 시험을 하나님은 반드시 감당할 수 있게 하신다, 모든 시험의 결과는 우리의 유익과 하나님의 영광이다, 시험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일이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이제 또 하나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고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저 이유 없이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고난에 참여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고난의 모습을 닮아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고난을 기꺼이 받아들이신 그분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9:23)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철저히 자신을 부인하셨고 자기 권리를 내려놓으시고 섬기는 자리에 계셨습니다. 주님은 자기 목숨을 십자가에서 내어 주시기까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바로 그런 삶을 택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여러분의 시험 중에 그리스도의 모습처럼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고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주님처럼 사는 것이라는 찬양의 가사가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처럼 사는 것, 주님 가신 길 가는 것, 험한 그 길 가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 갈길이죠이것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당하는 모든 시험과 환경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고난을 감당하십시오. 그럴 때 참 기쁨이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가고 있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우리가 고난을 당하고 있을 때,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고난을 당하고 있을 때 그 길을 가고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 3:12). 여러분이 경건하게 살고 있다면 박해를 받고 있을 것입니다.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너희도 함께)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베드로는 앞부분에서 언급했던 1 6-7절의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영광을 가지고 다시 나타나실 그날이 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답게 살고 있다면, 모든 고난을 감수하고 그 길을 가고 있다면,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그 영광을 함께 누릴 자가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버린 돌처럼 여겼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을 살아있는 돌로 여기셨습니다. 그 돌이거치는 돌’, ‘부딪치는 반석이 되십니다. 즉 심판자가 되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택했고 그분께 나아갔고 모퉁이 돌이신 그분과 연합하여 살아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습니다.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의 영광을 가지고 다시 그 영광에 참여할 사람들이 됩니다. 현재 고난 중에 그리스도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면 주님의 영광이 임했을 때 그 영광을 함께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 영광을 지금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영광을 이어받을 자라는 사실에 기뻐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눈물을 씻어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길은 좁은 길이지만 영광스러운 길입니다. 그 고난에 참여함으로, 그리스도답게 살아감으로,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그분을 맞이할 자는 두 부류입니다. 한 부류는 경건치 않은 자와 죄인입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심판자로서 오실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 부류는 하나님의 집, 의인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이어받을 자입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8:17). 영원한 영광을 위해 고통도 함께 받는 것이 당연합니다.

 

우리는 고난을 기대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 배후에 계시기에 그렇습니다. 또한 기뻐해야 합니다. 그것이 믿는 자라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상속자의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고난이 임했을 때 이 모든 사실을 잊어버리기가 쉽습니다.

 

고난이 나를 둘러 쌀 때 다윗의 고백처럼 주님께 주무신다고 하거나 왜 나를 돌아보지 않느냐고 말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내가 얼마나 힘든지 몰라’,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존 스토트의 책에는 한 연극이 소개됩니다. ‘기나긴 침묵’(The Long Silence)이라는 제목의 연극입니다. 내용의 일부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세상의 마지막 날, 수십 억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거대한 평원에 뿔뿔이 흩어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 앞에 비취는 눈부신 빛으로부터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맨 앞부분 가까이에 있는 몇몇 집단은 격하게 이야기했다. 수치에 움츠러든 것이 아니라 호전적인 태도로.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할 수 있어? 그가 고난에 대해 어떻게 안단 말이야?” 피부가 거무스름한 건방진 젊은 여자가 눈에 불을 켰다. 그녀는 나치의 강제 수용소에서 문신으로 새겨진 번호를 보여주기 위해 옷 소매를 잡아 뜯었다. “우리는 공포, 구타, 고문, 죽음을 참고 견뎠어!”

 

다른 집단에서는 한 흑인 소년이 옷깃을 내렸다. “이건 어때요?” 그는 흉한 실 모양의 화상 자국을 보이면서 물었다. “린치를 당했어요. 아무 죄도 없이 다만 흑인이라는 이유로 말이에요.”

 

다른 무리에서는 우울한 눈빛의 임신한 여학생이 있었다. “왜 내가 고통을 받아야 해요. 그넌 내 잘못이 아니예요그녀는 투덜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래서 이 집단들은 각각 그들의 지도자들을 파견했는데 그들은 가장 많이 고난을 받았다는 이유로 뽑힌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유대인 한 명, 흑인 한 명, 히로시마에서 온 사람, 지독하게 불구가 된 관절염 환자, 탈리도마이드로 인한 기형아 등이었다. 평원 한 가운데서 그들은 서로의 의견을 들었다. 마침내 그들의 제안을 제시할 준비가 되었다. 그것은 다소 재치 있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그들의 심판관으로서의 자격을 부여받기 전에 그분은 그들이 견뎠던 것을 견디셔야 했다. 그들의 결정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한 인간으로 살아야 한다고 선고를 내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를 유대인으로 태어나게 하자. 그의 출생의 합법성이 의심을 받게 하자. 그에게 굉장히 어려운 일을 주어서 그가 그 일을 하려 할 때 가족들조차 그를 미쳤다고 생각하게 하자. 가장 친한 친구에게 배반을 당하도록 하자. 잘못된 비난을 받고, 편견에 찬 배심원들에게 재판을 받고, 비겁한 재판관에게 선고를 받게 하자. 그가 고난을 당하게 하자

 

마지막에 혼자라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가 무섭게 맛보도록 하자. 그 다음에 그를 죽게 하자. 그가 죽었다는 사실에 도저히 의문의 여지가 있을 수 없게 하자. 그것을 입증해 줄 많은 무리의 목격자들이 있게 하자.”

 

그리고 마지막 사람이 판결을 발표하는 것을 마쳤을 때 기나긴 침묵이 흘렀다. 아무도 다른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갑자기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이미 그 형벌을 다 당하셨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때로는하나님께서 내 고통은 모르실 거야’, ‘높은 곳에 계시는데 내가 당하는 고통을 아실까라는 생각이 오늘 본문 말씀을 잊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고난을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견디기 힘든 여러 시험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그러한 고난을 다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가 고난을 말씀의 진리로 바라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신실하게 통제하셔서 우리에게 감당할 시험을 주신다는 것, 그리고 그 고난을 통해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빚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시험 가운데 순종함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그것으로 온전히 기뻐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인과 고난 Part II /벧전4:12-19/ 조정의목사

2020-09-23 10:37:48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17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18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

 

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본문에 나타난고난 중에 우리가 기억해야 할 6가지 명령중 두 가지 명령을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은고난을 기대하라’(12)고난을 기뻐하라’(13-14)였습니다. 고난은 참 다양합니다. 고난의 경로를 생각하면, 나의 죄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 있고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성도 간의 송사 때문에 세상의 조롱과 비난이 있었습니다. 이는 분명 그들의 죄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전도를 할 때 고난을 당한 것은 진리를 거절하는 유대인들로 인한 고난이었습니다. 때로는 쌍방과실도 있습니다. 세상의 악을 악으로 갚고, 욕을 욕으로 갚는다면(3:9) 그것은 나의 죄도 있고 상대방의 죄도 있는 것입니다. 환경으로 인한 것도 있습니다. 자연재해나 환경 때문에 오는 경우입니다.

 

사도 바울이 겪은 풍랑, 독사에 물렸던 사건 등은 사건이나 환경이 주는 어려움이었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시험들이 있기에 우리는 쉽게 고난에 대해 접근하기 어렵습니다. 불신자와 결혼했을 때 우리는 고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불신자와 결혼하게 하셔서 이런 고난을 당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앞에서 살펴본 두 가지 명령(‘기대하라기뻐하라’)은 고난의 다양한 경로와 상관없이 우리가 고난을 바라봐야 하는 태도였습니다.

 

모든 환경이 하나님의 주권과 통제 아래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고난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까마귀 새끼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먹을 것이 없어서 허우적거릴 때에 그것을 위하여 먹이를 마련하는 이가 누구냐”( 38:41).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10:29).

 

작은 미물에 대한 기록을 보아도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철저한 주권 아래 일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고난을 이상히 여기지 않고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고난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환경과 고난을 바라보는 관점이 이러해야 합니다.

 

이제 베드로는 다음 구절에서 그리스도인이피해야 할 고난부끄러워하지 않아야 할 고난에 대해 말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고난을 받지 말려니와”(15).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14),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16).

 

세 번째 명령: 고난을 기피하라(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15). “너희 중에 누구든지에서 가리키는 이들은 소아시아 성도들, 즉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참된 신자들로서 이러한 고난은 받지 말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4가지입니다. 살인, 도둑질, 악행,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입니다. 처음 세 가지는 공식적인 법과 관련이 있습니다.

 

살인이나도둑질은 로마시대에도 유대인들의 법에서도 금한 것입니다. ‘악행역시 범법행위입니다. 이 단어는 베드로전서에만 3번 등장하는데 총독에 대해 말하면서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기 위해 그들의 권세가 주어졌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법을 어기는 것이나 살인, 도둑질로 고난을 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남의 일을 간섭하는 것입니다. 이는 신약 성경에 단 한 번 나오고 유대 헬라 문화에도 잘 등장하지 않는 말입니다. 쓸데없이 참견하는 자, 자신의 적합한 관심사가 아닌데 참견하여 악행하는 자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로서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가정 안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역행하는 일, 권위와 질서를 무너뜨리는 일, 반사회적인 일을 가리킵니다.

 

직장이라면 계속해서 사람들을 선동하여 직장 내의 분쟁을 가져오는 사람입니다. 그런 행동으로 인해 고난을 당한다면 이는 옳지 않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4:11에서조용히 자기 일을 하라고 명하였습니다. 질서를 깨지 말라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에서는게으르게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 있다 하니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살후 3:11-12)고 말합니다.

 

범법행위,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를 벗어나서 사회를 분열시키는 것으로 인해 오는 고난은 받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에게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다음 중 그리스도인이 피해야 할 상황은 무엇일까요?

1.고속도로에서 과속으로 달려 사고를 냈고 피해자로부터 많은 욕설을 들었다.

2.독서실에서 큰 소리로 복음을 전하다 쫓겨났다.

3.직장의 과도한 업무에 대한 불만을 직원들과 함께 나누다가 발각되어 지적을 받았다.

4.교회 청년부와 함께 볼 성경영화를 불법다운 받아서 보았는데 경찰에 발각되어 많은 벌금을 물게 되었다.

5.공산국가에서 성경을 소지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가뒀다.

 

1-4번은 우리가 피해야 할 고난입니다. 취지가 좋았다 하더라도 법을 어기는 것이라면 피해야 합니다. 그러나 5번은 피해야 할 고난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법이 성경에 나오는 것을 거스르기 때문입니다. 법을 어기며 말씀을 선포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법 자체가 성령의 명령을 역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 이러한 고난을 당하는 성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다시 정리하면, 법을 어기고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를 어기면서 당하는 고난은 그리스도인에게 합당하지 않습니다. 그 고난을 당하면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당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3:13). 우리가 악을 떠나고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를 존중할 때 오히려 많은 고난을 피할 수 있습니다.

 

네 번째 명령: 고난을 당당히 여기라(16)

 

다섯 번째 명령: 고난을 기회로 삼으라(16)

 

이제 등장하는 고난은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당하는 치욕입니다. 16절에서는그리스도인으로 받는 고난”(life)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식의 고난을 복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이미 말씀하신 것입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5:10-12).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고 순종함으로 고난을 받는다면 복되다 하늘의 상이 크다 천국이 너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실제로 사도 베드로를 포함한 사도들은 공회에 잡혀가 채찍에 맞았고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 5:41)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인해서 고난 받는 것을 복되게 여긴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아나니아에게 바울에게 가라고 하시면서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9:16)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따르고 증거하는 삶을 살면서 많은 고난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기에 고난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이 그리스도인을 미워하고 박해하는 이유는 우리가 따르는 그리스도를 그들이 미워하기 때문( 17:14)이고 우리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고 그리스도에게 속하였기 때문입니다( 15:19). 우리가 세상에 속해있다면 세상이 우리를 미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에게 속했기에 세상이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과 그분을 따르는 삶은 세상으로부터 고난이 따라올 수밖에 없습니다.

 

신은 없다고 말하는 세상에서, 유일한 신이 있다고 믿고 살아가면 비방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우리는 이것도 맞다 저것도 맞다고 하는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 다원주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오직우리만 진짜다라고 말합니다. 당연히 고난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세상은 말세가 될수록 방탕해집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며 쾌락을 좇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따르는 것은자기 부인이고거룩함입니다.

 

저는 고등학교 때 거룩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가 참 어려웠습니다. 친구들이 음란한 책들을 보면서 거룩하게 살고자 하는 저를 손가락질 하였습니다. 사회생활을 하시는 분들, 직장생활 중에 성경적인 가치관으로 살아갈 때 세상 사람들은 바보같다, 미련하다고 할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따를 때 당연히 받게 되는 고난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난은 복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이 세상은 없어질 것이지만 우리는 영원한 천국을 소유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베드로는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성령)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가지신 신성, 능력, 지혜가 드러나는 것을 말하는데 하나님의 실체가 우리 가운데 임재하는 것입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성막에 임재하신 하나님의 영광( 24:16-17), 솔로몬 성전에 임재하신 영광(왕상 8:11)이 그러했습니다. 고난 가운데 이러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의 순간에는 하나님은 멀리 계신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처럼왜 멀리 계십니까’, ‘등을 돌리십니까라는 탄식이 흘러나옵니다. 그러나 사실 그 반대입니다. 고난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하는 복된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고난 가운데 함께 하시고 그 안에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십니다.

 

고난 중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고난 중에 우리는 다듬어지고 깎이게 되는데 그 일을 하고 계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강력한 소욕을 일으켜 인내하게 하시고 열매 맺게 하십니다( 8:26; 5:22-23).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을 버리고도 주님을 따르겠다고 결심한 자들입니다. 훗날 하늘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될 것입니다. 그 날에 우리는 이 땅에서 받았던 고난과 슬픔을 다 잊게 될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주님을 만나기 위해 그 고난을 감수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복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고난당했던 40년 광야 생활은 물도 없고 음식도 없고 어디로 갈지 모르던 기간입니다. 그 고난에 대해 모세가 회상하면서 다음 세대에게 말합니다.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그는 너희보다 먼저 그 길을 가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가 갈 길을 지시하신 자이시니라”( 1:31, 33). 그들의 고난 중에 하나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의 시간은 겟세마네의 기도에 나타납니다. 주님은 고민하여 슬퍼하고 죽게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고난 중에 기도하실 때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22:43)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홀로 두시지 않았습니다. 스데반은 돌로 치는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7:55).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보았던 하나님의 영광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에서 사역할 때 사람들이 복음을 거절했습니다. 낙심된 바울에게 하나님은 그냥 두지 않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18:9-10).

 

여러분이 사도 바울이라면 복음을 전할 힘이 생길 것입니다. 어떤 거절과 핍박이 있더라도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신다고 말씀하셨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지역에 편지를 쓸 때 이렇게 편지합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그리스도를 위하여 당하는 고난은 하나님을 가까이에서 경험할 수 있는 특권입니다.

 

저 역시 지난 시간들을 기억해보면 여러 영적인 축복도 있었지만 어려움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난은 참 즐거운 기억입니다. 그 어려움 중에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그 일 자체가 행복하고 좋아서가 아닙니다. 고통스럽고 힘들고 어렵지만 그 일 가운데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에 기쁜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는 것, 나를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빚어가고 계시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난을 받을 때 부끄러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여러분을 비난하고 조롱할 때 수치스러울 수 있습니다. 모욕과 손가락질, 후욕, 차별대우, 따돌림, 육체적인 핍박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그러한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라고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모습으로 그 고난을 이겨내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모든 고난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기에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습니다. 나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계신다는 것에 감사하고 영광 돌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고난을 참고 인내하며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을 드러내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스도의 삶은 고난의 삶이었습니다. 이 땅에서 고난 받는 종으로 오셨고 다음에는 영광의 주로 오실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같은 삶을 살고 세상의 핍박을 받을 때 진정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속했다는 증거가 됩니다.

 

죄를 범함으로, 사회 질서를 어김으로 받는 고난은 피하십시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당하는 고난은 부끄럽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 가운데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고난에 대처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세입니다.

 

 

 

그리스도인과 고난 Part III /벧전4:12-19/ 조정의목사

2020-09-23 10:14:35

 

17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18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

 

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

 

 

우리는 고난 중에 기억해야 할 6가지 명령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세 번째 시간입니다. 과거에 일본에서 큰 쓰나미가 일어난 적이 있습니다. 물에 휩쓸려 마을이 잠기고 무너지는 모습을 여러분도 뉴스를 통해 보셨을 것입니다. 유명한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한 앵커가 유명한 목사를 초청하여 매우 강한 어조로 물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막아날 수 없는 분인가, 아니면 막아낼 수 있는데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 것인가 라고 말입니다. 저는 그 뉴스를 보면서 제가 그 자리에 없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생각했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의 삶에서 일어나는 고난과 시험들을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그것을 막을 힘이 없으셔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아니면 막을 힘은 있는데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지는 않으시는 것일까요?

 

베드로전서 편지를 받고 있던 소아시아 성도들은 여러 시험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도 역시왜 우리가 이러한 고난을 받는가라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저 역시 그런 질문을 할 때가 있습니다. 마음 속에서 의심과 염려가 생길 때입니다. ‘하나님이 왜 이런 질병을 허락하셨지?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 자들에게는 별로 고난이 없는 것 같은데…’라는 생각입니다. 이제 베드로는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왜 이런 고난이 주어졌는지를 성령의 감동하심을 통해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하나의 그룹은하나님의 집”(17), “의인”(18), “우리라고 언급하는 자들입니다. 모퉁이 돌이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신령한 돌로 세워진하나님의 집은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 위에 세워진 각각의 지체들, 바로 교회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인하여 의롭게 여김을 받은의인이었고, 베드로와 소아시아 성도를 포함한우리였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인 그룹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그룹은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17)입니다. 또한경건하지 아니한 자죄인”(18)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에게 속하지 않고 경건하지 않은 자이며 하나님 앞에서 죄인입니다. 의인으로 칭함 받을 수 있는 복음을 거절한 자들입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으로부터 심판이 시작된다고 말하고,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의 마지막은 어떠하겠느냐고 말합니다. 의인이 이렇게 심판을 받는다면 믿지 않는 자들은 더 얼마나 큰 심판을 받겠냐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를불시험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집 안에서 시작하여 밖으로 나가는 불을 생각하면, 집 안에서부터 시작된 불이 밖으로 나가 모든 것을 태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세상의 재판도 그 결과는 유죄, 또는 무죄입니다. 심판이 항상 부정적인 것은 아닙니다. 심판은 좋은 평결이거나 나쁜 평결이거나 승인, 징계, 정죄 등 다양합니다. 칼은 어떻습니까. 어떤 용도로 쓰느냐에 따라 사람을 죽이는 도구도 되지만 살리는 도구(의사의 메스)도 됩니다. 심판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는 이러한 그림을 어디에서 얻었을까요. 17-18절은 구약성경을 인용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심판과,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들에 대한 심판으로 구별하여 설명하고 있는 구절로, 에스겔 9장을 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가증한 일이 일어났고 우상숭배였습니다. 하나님은 탄식하는 자들에 대해 표를 하라고 하고 표 없는 자를 치라고 하십니다.

 

또 그가 큰 소리로 내 귀에 외쳐 이르시되 이 성읍을 관할하는 자들이 각기 죽이는 무기를 손에 들고 나아오게 하라 하시더라너희는 성읍 중에 다니며 불쌍히 여기지 말며 긍휼을 베풀지 말고 쳐서 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이와 여자를 다 죽이되 이마에 표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 하지 말라 내 성소에서 시작할지니라 하시매 그들이 성전 앞에 있는 늙은 자들로부터 시작하더라”( 9:1-6). 하나님의 심판이 하나님의 성전 바로 앞에 있던 늙은 사람들로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하나님의 집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말라기 3장을 보겠습니다. “그가 임하시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하게 하는 자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하되 금, 은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공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바칠 것이라”( 3: 2-3). 여기서도 역시 하나님의 백성, 제사장을 먼저 깨끗하게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심판, 그들을 깨끗하게 하기 위한 심판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엔 죄인들에 대한 심판이 언급됩니다. “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 점치는 자에게와 간음하는 자에게와 거짓 맹세하는 자에게와 품꾼의 삯에 대하여 억울하게 하며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하게 하며 나를 경외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속히 증언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5).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악인에 대한 심판입니다. 하나님께서 의인에 대한 심판으로 시작하셔서 악인에 대한 심판을 이루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본문 18절은 잠언 말씀과 유사합니다. “보라 의인이라도 이 세상에서 보응을 받겠거든 하물며 악인과 죄인이리요”( 11:31). 베드로가 잠언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의인도 심판하시는데 악인은 얼마나 심판하시겠느냐는 말씀입니다. 모든 고난에는 하나님의 목적과 뜻이 있습니다. 의인에게는 그를 연단하기 위해, 거룩하게 하기 위해, 깨끗케 하기 위해서 고난을 사용하고 계십니다.

 

신약 성경의 많은 구절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15:1-2). 열매 맺는 자들도 깨끗케 하시기 위해 무엇인가를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소개할 때 이렇게 소개합니다.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3:16-17). 성령과 불이 하는 작용은, 그리스도인을 거룩하게 하는 역할과 비그리스도인을 심판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임한 고난은 주님의 도구입니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12:4-8).

 

그리스도인들에게 왜 고난이 있어야 하는지 이제 아시겠습니까. 우리에게 왜 어려움이 주어지는지 아시겠습니까. 그런 것이 없다면, 즉 우리를 성화시킬 환경이 없다면 우리가 사생아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또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12:9-10). 이제 베드로가 한 말, 고난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 고난을 기대하고 기뻐하라는 명령이 이해되지 않으십니까.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더욱 큰 고난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모든 종과 자유인이 굴과 산들의 바위틈에 숨어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6:17). 이것이 우리가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는 비그리스도인들이 당할 고난입니다. “창세로부터 이런 환란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하셨습니다. 그러한 무서운 고난 이후에는 영원한 불못입니다.

 

오늘 우리가 17-18절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의인을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 고난을 허락하신다는 사실과, 또한 죄인들을 심판하시기 위해 영원한 고난을 허락하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중에 고난 있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이 왜 이러한 고난을 허락하실까요. 하나님이 힘이 없어서일까요, 힘은 있지만 우리를 사랑하시지 않아서일까요.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깨끗케 하시기 위해 이러한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19). 악을 인하여 고난 받는 것은 피해야 하지만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니 선을 행하면서 고난을 당할 때 부끄럽게 여기지 말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고난은 우리에게도 불신자들에게도 불입니다.

 

또는 칼과 같습니다. 믿지 않는 자들은 멸망을 당할 것이지만 믿는 자들은 공의로운 심판 앞에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살아남을 것입니다. 우리가 심판 앞에 살아남을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이고,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옷 입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할 시험만을 주시는 전능하신 분입니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위해 우리에게 시험을 주십니다. 성령은 우리의 거룩함을 이루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인이 고난 중에 기억해야 할 명령 마지막은, 고난 중주님만 바라라입니다.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19). 우리는 고난을 주관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기에, 고난 중에 감사하고 순종하며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베드로는미쁘신 창조주라고 말합니다. 그분은 전능한 하나님이요 언약에 신실하신 헤세드 하나님이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할 시험만 허락하십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허락하신 일만 우리에게 일어나게 하십니다. 그런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무 유익이 없는 일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낙심시키거나 죄 짓게 하는 분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는 참 신실하신 분입니다. 그분은 원하시는 것을 이루고자 신실하게 일하실 것입니다. 금과 은을 연단하여 순수한 광물을 만드시는 것처럼 우리를 단련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그 하나님만 바라고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아침 말씀을 보면서 이 말씀이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을 드러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난을 당하는 자의 자세입니다. “밤에 내 영혼이 주를 사모하였사온즉 내 중심이 주를 간절히 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땅에서 심판하시는 때에 세계의 거민이 의를 배움이니이다”( 26:9). 이 세상에 하나님의 공의가 선포되기를 바라며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의로움이 드러나기를 원합니다.

 

소아시아 성도들의 고난은 우리가 지금 당하는 고난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소아시아 성도들 이후의 성도들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여러분은 삶을 돌이키며 어떤 고난을 당하고 계십니까. 주님을 위해 어떤 고난을 당하고 계십니까. 나와 반대되는 성격을 가진 배우자, 가족의 질병, 어려움, 연약함, 직장에서의 어려움, 경제적인 어려움, 진로에 대한 걱정 등이 고난이 될 것입니다.

 

자주 두통을 앓는 분들도 있을지 모릅니다. 왜 한 주님을 섬기겠다는 사람들이 이렇게 다를까, 교회가 왜 하나가 되지 못할까로 낙심이 됩니다. 우리는 많은 문제들, 걱정들, 고난들로 인해 왜 하나님이 이것을 허락하셨을까 의문을 갖습니다. 하나님이 쓸데없는 것들을 주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때로는 두려움이 듭니다.

 

하지만 오늘 고난에 대한 베드로의 말씀을 살펴보면 이것이 바로 내 이기심을 드러내기 위해, 교만을 들추시기 위해,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기 위해, 하나님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는 사람인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교회의 어려움은 인내하게 하시고 섬김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게 하십니다. 여러분을 둘러싸고 있는 어려움을 염려거리나 하나님의 실수로 생각지 마시고, 하나님께서 나를 단련하시고 죄를 잘라내기 위해 예리한 칼로 역사하고 계시다는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고난 중에 오직 주님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믿음을 확증하시라 /벧전4:18/고후13:5/ Paul Washer

2015-06-18 18:59:45

 

의인도겨우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 저는, 많은교인들이 화를 낼 설교를 할 수도 있습니다. *not true Xn

또 제가 여러분 부모님들에게, ‘자녀들의 신앙교육을 이제껏 잘못 했습니다!’ 라고 말하면,

아니, 우리가 믿음으로 반듯하게 잘 키웠는데, 무슨 소리냐?’ 하며

제게 분노하실 것입니다.

 

흔히들, 진리를 듣는 것보다는, 거짓 소망이라도 붙잡는 편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교회에 다니면서도, ‘진리는 듣기 껄끄러워 합니다.

왜냐하면 그진리,

자신이 믿기만 하면 쉽고 편하게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하는거짓 소망

자꾸 뒤흔들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믿어도 구원받기 어렵다는 구절이 있음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 벧전4:18

And, "If it is hard for the righteous to be saved,

what will become of the ungodly and the sinner?"

 

우리는믿음으로 의인으로 인정받아서, 다 구원 받는다고 알고 있지만,

베드로 사도는그 의인도, 겨우 구원 받을 수 있다’ ..

다른 말로의인이 되었을 지라도, 구원 못 받을 수도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머리로만의인이 되었을 때 그렇습니다.

관계로는의인이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신앙은관계적입니다.

 

예를 들면,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15:7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요일2:6

빛 가운데 있다 하며... 요일2:9

여호와를 친근히 하라.. 23:8

 

이런 구절들은, 성경에 수두룩 빽빽하게 나옵니다.

다 관계를 표현하는 구절들입니다.

 

자신이 머리로써 믿음을 가지면서도,

주님과 개인적/인격적 관계가 없으면... 그것 구원 받는 믿음이 아닙니다. (이 단락, 편집자 삽글)

 

 

◑‘믿음을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지금 기독교 안에는,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칭하셔서,

자신이 구원 받은 성도라고 스스로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신칭의 신앙

 

( Paul Washer, 지금 목회자들이

성경을 더 많이 연구하고, 설교를 더 적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전 세계의 사람들, 특히 미국 신자들이,

스스로 구원 받은 자라고 안심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때마다 저는 그 분들께 되묻습니다.

당신이 구원받은 것을, 당신은 어떻게 아십니까?’

 

그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글쎄요. 그냥 믿으니까요.’ 혹은 '우리 목사님이 그랬어요.'

 

오늘 집회가 끝나면, 여러분은 이 도시 각처의 집과 직장으로 흩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동네와 직장에서 만나는 거의 모든 사람을 붙잡고 물어보십시오.

그들은 불신자가 아닙니다. ‘대부분 다 예수님을 머리로만 믿는 신자들입니다.’

 

여러분, 이런 현상은 미국뿐만 아닙니다.

전 세계의 유흥업소, 홍등가(붉은 등불의 거리), 카지노에 가 보시면,

거기에 앉아있는 사람들도다 머리로는 믿는 사람들입니다.

 

만약 여러분의 믿음이, 그런 사람들의 믿음과 비슷한 수준이라면..

여러분의 믿음이.. 구원 받는 믿음이라고.. 확신하실 수 있으십니까?

그들은, 머리로만 믿고 있지.. 주님과의 관계는 없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개신교에는 2가지 교리가 상당한 위험을 주고 있습니다.

이신칭의성도의 견인입니다.

2가지가 극단적으로 강조된 나머지, 전통적 기독교가 표류하고 있습니다.

 

-이신칭의는.. belief system(신념체계, 사상체계)으로 전락해서

그 원래 뜻이 완전히 달라져 버렸고요,

또 태생적으로 이 교리가.. 중세 가톨릭에 대항해서 나온 것입니다.

16세기 가톨릭교회가, ‘교회 바깥에 구원이 없다고 개신교를 거세게 위협하니까,

개신교는 ‘(교회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고 주장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관련글 : 은혜와 선행, 둘 다 보기

-‘성도의 견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시 가톨릭교회가 너무교회가 인정하는 구원, 교적에 의한 구원만 주장하니까,

종교개혁자들은, ‘참 믿는 성도는, 하나님이 끝까지 그를 지켜 천국으로 인도하신다

대항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물론 성경적인 바탕에 의한 주장이었습니다.

 

그런 시대적 상황 속에서 생성된 이 두 교리가

16세기와는 전혀 다른 배경에 사는 오늘날 전 세계 성도들에게

거짓일지도 모르는 구원의 확신을 보장해 주고 있습니다.

 

마음으로 믿기만 하면, 누구든지 구원 받는다고.. 그것도 확신하고 있으며,

한 번 구원 받으면, 비행기 안에서 넘어지고 자빠져도 목적지에 간다고 하는데요..

이런값싼 은혜로 자기 구원에 (거짓) 확신을 주고 있습니다. *cheap grace, 본 훼퍼의 주장

 

처음 믿을 때부터.. 잘못 믿은 것

만약 어떤 신자가,

3~4~1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며 말씀공부와 기도와 성도의 교제에 힘쓰다가

어느 시점부터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하는 것을.. 오늘날 주위에서 흔히 봅니다.

그들은 점점 죄와 세상이 자기를 점령해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제 성도의 교제권을 완전히 버리고,

점점 세상적 교제권 속으로 빠져 들어갑니다.

그렇게 주님을 떠나서 3~4~10년을 계속 삽니다.

 

저는 그분들에게

당신은 크리스천입니다만.. 지금 잠시 넘어져 있습니다.

그러니 속히 회개하고 돌이키십시오!’ ..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진짜 신자라면.. 그렇게 오래 동안 타락할 수 없습니다.

진짜 신자는, 혹시 타락해도 금방 회개하고 돌이킵니다.

 

대신에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처음부터 잘못 믿었습니다.

회개도 하지 않고, 너무 쉽게 신자가 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당신은 크리스천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회개하고.. 정말 참된 크리스천이 되십시오!’

 

그럼 지난 10년간, 교회 다닌 것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그동안크리스천인 척했던 것입니다. 본성은 아니었습니다.

그는자기 본래 본성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가 정말본성적으로 크리스천이 되었더라면,

한 때 타락했다 하더라도, ‘본성’(크리스천)으로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그렇게 오래 방황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스스로 확증하십시오.

 

지금 이 자리에도, ‘피상적으로 교회 왔다갔다하는 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본성은 전혀 변하지 않았지만, 크리스천인 척 하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그 본성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본 어겐해야 합니다. *born again : 중생

여러분이본 어겐했는지, 자신을 확증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고후13:5절에서 바울은여러분의 믿음을 스스로 확증해 보라고 말합니다.

Examine yourself, Test yourself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고후13:5

 

중생한 사람의 특징

-중생한 사람은, 하나님과 관계를 지속적으로 가집니다.

그래서 늘 기도하고, 말씀을 가까이 합니다.

하나님을 즐거이 섬깁니다.

 

-중생한 사람은, 죄를 두려워합니다.

죄를 지을 때도 있지만, 지속적으로 짓지 못합니다.

죄를 지어도, 즉시 회개합니다.

 

-중생한 사람은.. 하늘을 소망하며, 내세 중심적으로 삽니다.

중생 못한 사람은, 현세 중심적으로 삽니다.

 

-중생한 사람은, 어쩌다 한 번 넘어져도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납니다.

그러나 중생 못한 사람은, 한 번 넘어져도 계속 넘어진 상태로 지냅니다.

 

미국의 최고 보수교단인 남침례교의 어떤 지도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 우리가 진지하게 성경이 기독교에 대해 무엇을 말씀하는지 깨닫는다면,

우리 교인들 가운데, 10~15% 정도만 구원 받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추정 수치입니다. 그것은 하나님만 아시겠지만요...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그만큼 지금 교회 안에세속적 크리스천이 많다는 뜻입니다.

 

미국에서 가장 보수적이라고 인정받는 남침례교도 이 정도라면

(최근에 남침례교도 교세가 감소하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습니다.)

다른 교단의 사정은 더 심각할 것입니다.

 

계곡을 건너기에는 너무 불안한 구름다리

제가 남미 안데스 산맥에서 선교사역할 때,

가끔 밑이 안 보이는 아득한 계곡 사이에 걸쳐져 있는, 구름다리를 건너야 했습니다.

 

그때는 건너기 전에, 그 구름다리를 한 번 흔들어 봅니다.

밧줄이 튼튼한가, 나무발판이 안전한가..

그리고 그 삐그덕 거리는 소리를 예민하게 들어봅니다.

 

왜냐하면, 내가 그 구름다리의 중간쯤 건넜을 때,

만약 다리가 끊어진다면.. 계곡에 떨어져 죽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믿고 있는구원을 생각해보노라면,

제가 남미 계곡을 조마조마하게 건너던, 그 구름다리가 자꾸 생각납니다.

여러분들은 너무나 약한, 실타래 같은 줄, 짚으로 엮은 새끼줄을 붙잡고.. 건너려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너무나 안전하지 못합니다. 중간에 툭 끊어져버릴 것만 같습니다.

 

그 계곡 아래에는, 지옥불이 세차게 이글거리고 타오르고 있습니다.

당신의 줄이 끊어질 때, 어리둥절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examine yourself, test yourself (믿음을 확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으시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구원이 무엇인지..

한 번 스스로 연구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 자신이 정말 구원 받았는지.. 한 번 확증해 보십시다.

 

 

스스로 속지 마십시오.

 

요한1서에 <거짓말> 하는 자가 나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요일1:6

 

-당신이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고, 또 자기 스스로 그렇게 믿고 있어도

계속어두운 죄 가운데 사는 사람.. ‘거짓말하는 사람입니다.

사실은 믿지 않는데, 자기가 믿는다고 거짓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스스로 속는 거짓말입니다.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요일2:4

 

-‘안다는 말씀은, 신약성경에서인격적으로 안다는 뜻이고, ‘믿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믿는다는 교인이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거짓말인 것입니다.

 

자기는 사실 믿지도 않고, '알지도' 못하는데..

스스로 속고 있습니다.

자기가주님을 안다고 하고, ‘주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속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요일4:20

 

-번과 같은 맥락이므로, 설명을 생략합니다.

 

바울은 빌1:6에서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라고 말씀 했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10년 이상 다녀도, ‘이루어지지 않는사람이 있습니다.

믿음이, 구원이, 형상이 성숙되거나 온전해지지 않는 사람이 꽤 많습니다.

 

그것은착한 일(중생)이 아예 시작되지도 않은 것입니다.

거듭나지 않은 채 교회에 다니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분들은, 간절히 기도하며 자기를 확증해야 합니다. examine yourself

주님의 은혜로, 참된 중생의 체험을 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 거듭남, 회심

 

지적 동의로 신앙생활을 시작한 것은,

거짓말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고의적이 아니라, 스스로 속은 것입니다.

 

 

 

시각을 바꾸십시오 /벧전4:12-19

2011-11-29 14:02:39

 

목회 중에 종종 난감한 일을 당하는 경우가 있다. 애써서 한 자매를 전도해서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 그 자매의 남편은 교회에 대하여 부정적인 사람이었다. 못 마땅했지만 아내의 의견을 존중해서 교회 출석을 허락했다. 그 자매는 교회에 잘 적응해 갔다.

 

그런데 얼마가지 않아 문제가 생겼다. 그 집 아이가 교통사고를 당하게 되었고, 그 와중에 시어머니가 갑작스럽게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화살은 며느리에게로 돌아왔다. ‘네가 교회 나가면서부터 집안이 편안치가 않다는 것이다. 시댁과 남편으로부터 시달림을 받은 그 자매는 결국 당분간 교회를 쉬겠다고 했다.

 

일반적으로 교회를 다니면 모든 것이 좋아져야 한다는 기대와 기복적 사상을 가지고 있다. 교회 다니면 더 잘되고, 더 건강해지고, 더 착해지고... 그러나 반대 현상이 나타나면교회 다니는데 왜 그 모양이냐며 질책을 당하게 된다.

 

교회 잘 다니고 그래서 복도 받고 형통하면 얼마나 좋은가? ‘저 사람 예수 잘 믿더니 저렇게 복을 받았다는 말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란다. 목사의 간절한 소망이다. 요즘 같이 교회 안에 어려움 당하는 가정들이 생겨나면 목사는 근심하게 된다. 혹 그 어려움으로 인해 시험에 들지는 않을까?

 

그러나 고난은 성도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축복이다. 이것이 고난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이다. 고난 속에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고난에 대하여 우리의 시각을 바꿀 필요가 있다. 사도 베드로는 오늘 말씀을 통해 성도들이 고난에 대하여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권면하고 있다.

 

1.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라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왜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하는가? 고난 당하는 것을 당연히 여기라는 뜻인가? 그런 의미는 아니다. 고난 당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고난을 당한다 하더라도 고난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알면 당하는 사람의 태도가 달라질 수 있다.

 

사도 베드로는 불 시험의 목적이 성도들의 연단을 위한 것이라고 전제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연단하시기 위해 고난이라는 용광로 속으로 들여 보내신다.

 

철광석을 용광로 속에 넣으면 찌꺼기들이 다 걸러지고 순수한 철을 얻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더욱 더 성숙하게 더욱 강한 성도로 만드시기 위해 고난이라는 과정을 허락하신다. )권투선수, 레슬링선수들의 체중 감량, 그들은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2.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고난 당하고 있는 성도들을 향하여 한 단계 더 나아가 즐거워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이것은 수용하기 힘든 역설이다. 그러나 사도는 즐거워해야 할 이유에 대하여 두 가지로 말씀하고 있다.

 

1)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무엇인가? 의로운 죽음, 곧 십자가를 가리키는 것이다.

 

벧전 3:18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이러한 고난이라면 참여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의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주의 일에 참여하면서 고난을 받게 되면 주님과 더욱 더 친밀해진다. 이것을 동일화라 한다.

)김병만의 아프리카 체험. 전우애.

 

그러나 만일 불의한 일에 참여함으로 인해 고난을 받는 것이라면 수치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2)주의 날에 받을 큰 기쁨과 상급이 있기 때문이다.

 

벧전 1: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7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3.고난은 축복의 통로다.

 

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쉬운 성경,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모욕을 받는다면, 그것은 도리어 복입니다. 이는 영광의 영이신 하나님의 성령이 여려분과 함께 계시다는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모욕을 당해 본 적이 있는가? 내가 기독교 신앙을 가진 것으로 인해 무시 당하거나 무례한 일을 당해 본 적이 있는가? 직장에서, 아니면 이웃들에게 비난 조롱 당한 적이 있는가? 군대에서 종종 이런 일들이 벌어진다. 지난 7월 해병부대총기사건의 공범 정이병, 선임병들의 가혹행위 - 내가 신이다. 나에게 기도해라. 성경을 불 태우고 담뱃불로 지지는 행동들이 반복됐다고 한다.

 

5: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2, 제자들이 성령이 충만해서 각 나라 말로 복음을 전할 때 유대인들이 듣고, ‘아침부터 이 사람들이 술 취했다라고 조롱했다. 26, 사도 바울이 아그립바왕과 베스도 총독 앞에서 복음을 전했을 때 총독 베스도가 바울을 향하여,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하는도다라고 비난했다. 사도행전은 제자들이 복음 전하다가 모욕을 당하고 조롱당한 사건의 기록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비난하고 조롱하는 무리들을 향하여 대항하지 않았다. 그들은 욕을 먹었고, 맞았고, 쫓겨 다녔다. 그들이 힘이 없어서 무식해서 당한 것 아니다. 성령께서 그들과 함께 하셨기 때문이다.

 

때때로 모욕을 당하는 일이 있으면 맞대응하지 말라. 도리어 기쁨으로 수용해라. 주의 이름으로 욕 먹을 때 주님께서 위로해 주신다. ‘네가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하나님의 영, 성령께서 함께 계신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4.고난 당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처음 안디옥교회 성도들이 그렇게 불림을 받았다( 11:26).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는 따로 따로 나뉘어 있지 않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면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하신다. 그래서 하나가 된 존재가 된다. 내가 고난을 받으면 그것은 곧 그리스도의 고난이 되는 것이고, 내가 치욕을 당하면 그리스도께서 치욕을 당하신 것이 된다. 그러나 종종 자신의 신분을 숨기는 경우가 있다.

 

8:38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그렇다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 적극적으로 담대할 필요가 있다. 생각의 전환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로서 당당하게 자신을 소개하라. 그러기 위해서는 부끄러운 행동들을 확실히 끊어버려야 한다.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자신이 그리스도인 된 신분으로서 고난을 당하게 되면 당당하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왜냐하면 바로 그 때가 하나님께 영광 돌릴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 바로 이때가 하나님께 영광돌릴 때로군요. 감사합니다!’ 고난 당할 때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다. 도리어 그때 감사하고 영광 돌려야 한다.

 

당시 고난 받는 성도들을 향한 사도의 권면

1)고난 당함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 단련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2)즐거워하라. 주의 재림 때 그리스도의 기쁨에 동참하기 위함이다.

3)축복의 통로가 된다. 장차 상급이 있다.

4)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릴 기회가 된다.

 

사도의 경고

 

고난에 대한 올바른 인식은 신실한 성도들에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된다. 그러나 불경건한 자와 불신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된다.

 

벧전 4:17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18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

 

1)심판은 하나님의 집에서부터 시작된다.

본문 17절에서, 하나님의 집은 교회를 가리킨다. 그리고 심판은 고난을 가리킨다. 교회 공동체에 닥치게 된 고난을 통해서 알곡과 쭉정이를 가린다는 뜻이다. 참된 신자는 더욱 더 믿음에 견고히 서게 될 것이다. 그러나 거짓된 신자는 믿음의 길에서 떠나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성도의 삶 속에 고난을 주셔서 그의 믿음을 시험하신다.

 

2)마지막 심판은 긍휼 없는 엄중한 심판이다.

어느 정도로 엄중한가? 의인도 겨우 구원을 받을 정도로 엄중한 심판이라는 것이다. 적당주의로 신앙생활하는 신자들에게는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는 말씀이다.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성도들은 항상 깨어 있는 것과 같은 긴장감이 있어야 한다.

 

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6:17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경건치 않은 자와 죄인들에게 긍휼 없는 심판이 임하게 될 것임을 경고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귀담아 듣는 성도들은 두려움 중에도 소망을 갖게 된다. 왜냐하면 고난, 즉 심판이 결국 악인들에게는 피할 수 없는 형벌이지만 자신들에게 축복과 영광이란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도의 결론적 권면

 

벧전 4: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

 

쉬운 성경,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고난받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자기 영혼을 맡겨 두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지은 분이시니 우리 영혼을 지켜 주실 것입니다. 흔들리지 말고, 옳은 일에 계속 힘쓰시기 바랍니다.

 

1)자기 영혼을 하나님께 맡기라.

왜 그런가? 하나님은 우리를 지은 분이시며 우리 영혼을 지켜 주실 분이시기 때문이다. 11장에 기록된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가 다 자기 영혼을 하나님께 맡긴 사람들이다. 그래서 성경은 그들을세상이 감당치 못할 사람들’( 11:38)이라 했다. 믿음의 베짱이 필요하다.)독종

 

2)흔들리지 말고 옳은 일에 계속 힘쓰라.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는 붙잡고 흔드신다. 왜냐? 불필요한 것들 다 떨쳐버리도록 하기 위해서 흔드신다. 그러면 그 사람은 주의 일에 힘쓰는 자가 된다.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된다. 그런 사람들은 세상이 흔들지 못한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욥의 고백

23: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히브리서 기자의 권면

12:5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혹 믿음으로 인해 어려운 일을 당하고 있는가? 낙심하지 말라. 고난은 축복의 통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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