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의 삶 /벧전4:7-11/ 이동원목사
2014-12-05 21:44:38
지금 예배하는 여러분은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마음으로 임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지금 여러분의 삶은 더 할 수 없는 최선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과자 집을 운영하면서 직접 과자를 굽는 주인이 있었습니다. 그 과자 집에는 과자를 사려고 하는 손님들이 줄을 서서 기다렸습니다. 손의 움직임이 얼마나 매끄러운지 과자 굽는 손길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무슨 마술을 보는 듯했습니다. 얼굴에는 항상 평온함이 가득하고, 온 몸짓은 자신감에 넘쳐 있었습니다. 마음이 우울하던 사람도 그 과자 집에 들르면 금방 마음이 밝아졌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그가 일하고 있다기보다는 아름다운 율동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고 했으며, ‘기름칠한 듯한 탱탱한 삶의 모습이 어디서부터 오는지 궁금하다.’고도 했습니다. 그는 과자를 구우면서 곧잘 “결코 어제와 같은 과자를 굽지 않으려고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루하루 새 모습으로 살아서, 어제보다 달라진 자신의 모습을 과자에 새겨 넣고 싶다’는 말입니다.
별 것도 아닌 과자 굽는 일이 다른 사람들에게 힘을 주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는 일 년이면 한두 번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오늘은 기도드리고 싶은 과자가 구워졌어요. 이런 과자를 굽는 것은 일 년에 한두 번밖에 없어요. 손님에게 팔기에는 너무 귀한, 그래서 하나님께 고이 바쳐서 제사 드리고 싶은 과자예요.”
별 것도 아닌 것 같은 ‘작은 일’이라 할지라도 ‘최선을 다하는 삶’의 모습이 아름답고,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자신이 최선을 다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변명으로 ‘환경’과 ‘재능’과 ‘부족한 물질’, ‘건강’ 등을 내세웁니다. 아마도 ‘자신에게 생명의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모는 것’이 실제로 가장 큰 이유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일을 주관하시고 섭리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우리들에게 이런 변명은 핑계에 불과합니다. 만일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어느 정도인지를 안다면 결코 이러한 핑계로 허송세월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선한 일에 쓸 수 있는 돈이 항상 있다든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일할 수 있는 건강이 항상 있지도 않고 모두에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일할 수 있는 기회와 시간도 항상 있는 것도 모두에게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까?
본문에는 사도 베드로를 통하여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처럼 종말이 가까워 오는 시대의 사람들에게 증거 하는 말씀입니다. 내용 중에는 ‘기도’와 ‘사랑’과 ‘대접하는 것’과 ‘봉사’, 이 네 가지가 대표적으로 등장합니다. 이 네 가지는 오늘 성도된 우리가 생활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하는 생활의 법입니다. 그리고 말씀 속에는 이것을 행하는 방법과 이렇게 해야 할 이유가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1. 먼저, 네 가지의 생활의 법과 행하는 방법을 살펴봅시다.
이 네 가지의 생활 법을 살펴보면서 공통점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첫 번째는 ‘기도’입니다.
본문 7절의 말씀처럼, 마지막이 다가올 때의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깊이 유지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세상에 사는 동안 ‘영적인 전투’를 수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6:12절에서,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고 했습니다. 즉 우리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 영들과 그 세력과의 싸움입니다.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길은 ‘기도’뿐입니다.
예수님과 세 제자가 변화 산에 올라가셨을 때, 산 밑에서 기다리고 있는 아홉 제자들에게 어떤 사람이 귀신들린 아들을 데려와서 고쳐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내려오실 때까지 고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을 쫓아내시고 고쳐주셨습니다. 후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선생님, 우리는 왜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까?” 그 때 예수님께서,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다.”(막9:29)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영의 삶이 지배하는 성도들에게는 ‘기도’없이는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이는 형식적인 기도, 의무적인 기도가 아닌 자신의 모든 힘을 기울인 기도를 하라는 말씀입니다.
두 번째는 ‘사랑’입니다.
사랑에 대하여는 더 말씀드리지 않아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아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것입니다.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3:18절입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본문8절을 보십시오. “열심으로 서로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열심으로’라는 말은 경기에서 이기기 위해서 힘을 다 쓰고 있는 선수의 팽팽한 근육을 표현할 때 사용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젖 먹던 힘까지 쓴다.’는 말입니다.
세 번째는 ‘대접하는 것’입니다.
본문9절입니다.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라고 하셨습니다. 대접한다는 것은 섬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대접은 어떤 특정한 대상에게가 아니라, 서로가 대상이 됩니다. 대접함에 있어서는 ‘원망 없이’해야 합니다. 즉 부담과 근심으로 인한 시비 없이 편안하고 친절하고 알맞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타인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대접을 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3:23절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해야 할 이유는 ‘지극히 작은 소자에게 봉사하는 것이 주님께 하는 것’(마25:40)이기 때문입니다. ‘지극히 작은 소자’란,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소외 된 사람들과 약하고 보잘것없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네 번째는 ‘봉사’하는 것입니다.
‘봉사’는 ‘상대를 섬기는 것’이며, ‘자기를 희생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은사’의 사용에 대하여 함께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은사를 주신 목적이 서로 봉사하도록 하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은사는 서로 비교하거나 자신의 유익과 자랑을 위해 주신 것이 아니라, 서로 봉사하여 지체인 교회를 세우기 위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봉사를 함에 있어서의 법칙은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는 것’입니다. ‘공급하다’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아낌없이 주는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즉 봉사는 하나님께서 아낌없이 공급해 주시는 것을 염두에 두고 힘껏 해야 합니다.
이 네 가지 생활의 법에서 공통점을 찾으셨습니까? 그 공통점은 ‘최선’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사와 재능과 재물과 시간과 능력을 다하여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유명한 조각가, 미켈란젤로가 ‘시스틴 채플’이라는 교회당의 천정 벽화를 손수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 천정은 까마득히 높았기 때문에 그 아래에서는 사실 천정의 모습이 한 눈에 정확하게 파악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그는 이 천정의 벽에 가까이 붙어서 선 하나하나를 정성을 다해서 그리고 있었습니다.
이 광경을 아래에서 물끄러미 바라보던 친구 한 사람이 말 했습니다. “여보게, 여기서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네. 그냥 적당히 해두고 내려오게나.”그러자 미켈란젤로가 천정에서 그 친구를 향해서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여보게, 이 그림을 다 그린 후에 이 그림의 성과가 어느 정도인가를 제일 잘 아는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그야 자네겠지.” “맞네. 내가 알고 하나님이 아시는 한 나는 최선 이하로 일할 수는 없네.”
자기의 삶은 자신이 가장 잘 압니다. 뿐만 아니라 삶의 진실성과 정직성은 사람의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께서 더 잘 아십니다. 자신의 삶에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지, 주어진 시간 속에서 주어진 과제를 위해 얼마만큼 최선을 다했는지 하나님이 아시고 자신이 압니다.
2. 우리가 이렇게 행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본문11절 후반절입니다.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하는 것’ 이것이 종말이 가까워 오는 시대에 사는 우리가 기도하고 사랑하고 대접하고 봉사해야 할 이유입니다.
내가 나의 모든 것을 다하여 주어지는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도록 행하면, 하나님께서는 나를 위하여 일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성도인 우리에게 원하시는 뜻입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미련하여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이익과 평안을 먼저 생각합니다. 당장 내가 편하고 이익이 되면 하나님의 말씀쯤은 별로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어느 날 주님이 나를 부르시면 어떻게 주님을 만나겠습니까?
오래 전 ‘신앙계’라는 기독교 잡지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복음성가 가수인 김민식 집사의 신앙스케치에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아주 간단한 시험문제였습니다. 그 문제입니다.
‘아버지가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이 심부름을 꼭해야만 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지혜로울까요? 알아 맞혀 보세요.’
1)말로 할 때 한다. 2)조금 얻어맞고 한다. 3)많이 얻어맞고 한다. 4)끝내 버티다가 쫓겨난다.
여러분은 몇 번에 동그라미를 치겠습니까?
두 말할 필요도 없이 1)번이 가장 지혜롭다는 데 의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번처럼 사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만약 4)번에 동그라미를 친다면 이건 도무지 소망이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3)번 형의 사람이 많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동그라미야 1)번에 쳤지만 실제의 생활은 3)번처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성입니다. ‘웬만해선 저들을 막을 수 없다.’라는 영화제목처럼 웬만큼 맞아서는 잘 돌아서지 않는 것이 사람의 죄악성입니다.
지금 ‘사순절’기간입니다. 아무런 대가도 없이 나에게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행복의 나라를 선물로 주신 주님의 고난을 생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의 고난과 십자가 죽으심이 나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감사함과 기쁨으로 이 일들을 행해야 할 것입니다.
어찌되었건 여러분의 생명과 모든 삶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을 구주로 믿는 순간에 주님의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주님의 것을 주님을 위해 사용함으로서 신실한 청지기로 하나님께 인정받고, 이 땅에서도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은혜를 맡은 청지기 /벧전4:7-11/ 곽선희 목사
2014-11-23 23:47:06
의학을 공부하고 의사가 되려는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진 '히포크라테스 선서' 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의사가 될 때 이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다함께 하고 의사가 됩니다. 그 내용 중에 둘째 항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나의 은사에 대하여 존경과 감사를 드립니다' 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의사는, 모름지기 의사라고 하는 직(職)이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직이라고 생각을 하고, 이 환자를 돌보는 일보다 더 고귀한 일은 없다고 생각을 하고,
그 고귀한 일을 내게 맡겨 주신 거에 대하여 내가 맡게 되는 데 대해서 감사하고, 존경과 감사를 항상 지니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의사입니다. 의사의 입장에서는 사람을 돌보고 병을 치료하는 이보다 더 소중한 일은 없습니다. 그러기에 나 또한 이런 일에 쓰여진다고 하는 것이 자랑스럽고 고귀하고 영광된 것입니다.
그것이 의사입니다. 만일에 의사가 환자를 돌보고 이거 외에 일을 더 좋게 생각을 하고, 돈 많이 버는 직업을 좋게 생각하고, 권세를 누리는 것을 더 좋게 생각을 하고 여기저기 넘보고 있다면 그건 의사답지 못합니다. 아니, 그건 의사가 아닙니다.
인간은 생일이 둘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생리학적 생일입니다. 여러분이 가지는 생년월일이라고 하는 것,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바로 그날 그 시가 여러분의 생일이 될 것입니다 마는, 두 번째 생일은 나의 존재의 이유와 생이 주어진 목적을 깨닫는 시간입니다.
나는 왜 세상에 존재하나, 나는 무엇을 위하여 이 땅에 보냄을 받았는가, 그 의미를 깨닫는 바로 그날이 두 번째 생일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이 두 번째 생일을 맞지 못하고 엄격히 말하면 사람다운 생을 출발도 못하고 끝나는 그러한 유감된 사람들도 많습니다.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과 그 섭리를 믿습니다. 그 거룩한 경륜 속에 내가 태어난 것이올시다. 역사와 나의 개인적 관계를 믿습니다. 이 큰 역사 속에 나라고 하는 작은 존재가 꼭 필요합니다. 해야할 일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우리는 태어났습니다.
그런 고로 여기에 사명이 있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여기까지 살아왔습니다. 뭐 이런 고생도 하고 저런 일도 있었고 실패와 성공, 배신과 저신뢰,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을 겪으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여러분 어찌 생각하십니까? 그게 버려진 과거입니까? 잘못된 과거입니까? 적어도 소명을 아는 사람은 바로 이 시간을 위하여 지난날이 있었다는 거예요.
모세가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듣는 순간 그는 지난날의 80년의 생이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왜 바로의 궁전에서 40년을 살았는가? 왜 광야에서 40년을 목자생활을 했는가? 이 모든 것이 합쳐서 오늘을 위하여 오늘과 내일을 위해서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거기서부터 나라고 하는 존재의 새로운 생이 출발되는 것이올시다.
여러분, 오늘 본문 10절에 보면은 '각각 은사를 받은대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생은 주어진 생입니다. 나의 생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나게 해서 내가 태어난 것일 뿐이지 내가 아버지 어머니를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그 시점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나는 주어진 생을 철학가의 말대로는 던져진 생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각각 주어진 은사가 있습니다. 여기 소명이 있고 사명이 있는 겁니다. 무엇인가 할 수 있도록, 무엇인가를 해야만 되도록 은혜의 선물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을 위하여 주께서는 많은 은사를 은혜의 선물을 주셨던 겁니다. 오늘 본문에는 은혜를 맡은 청지기라는 말로 시작이 됩니다. 오이코노모스, 청지기라는 말은 옛날 번역에는 집사라고 번역을 합니다. 이 집사는 어떤 사람이냐 하면 타율성이 있고 자율성이 있습니다.
집사가 하는 모든 일은 다 주인을 위한 겁니다. 주인이 있어서 내가 있고 내가 주인을 위해서 존재하는 겁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주인이 맡겨 준 것이 있습니다. 요만큼의 영역을. 재산도 심지어는 하인도 혹은 어떤 권력을 맡겨주었습니다. 그 한계 안에서는 자율적입니다.
그는 자유입니다. 자기의 책임을 자율적으로 감당해야됩니다. 이게 청지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었습니다.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은혜가 곧 이제는 사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고로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아야 합니다. 내게 주신 은혜가 오늘은 소중한 결실을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은혜를 맡은 청지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서로' 라고 하는 말이 세 번 있습니다. 서로! 서로 서로라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13장 3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우리 인간들이 생각하는 '서로'라고 하는 관계는 이것이 서로 하나의 큰 계약적 관계요 인간적 관계요 행적관계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와의 수직적 관계의 결과로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내가 너희를 사랑했노라. 그런 고로 서로 사랑하라." 바꾸어 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로부터 사랑을 받았습니다. 엄청난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런고로 서로 사랑해야 됩니다.
우리의 사랑은 원인이 아닙니다. 결과일 뿐입니다. 그 퍼스트 코잘리티, 첫 번 원인은 그에게 있습니다. 그가 우리를 사랑했고 그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고 나를 구속하셨습니다. 그런고로 그 사랑의 근거해서 우리는 그 결과로 서로 사랑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 받았다' 하는 것은 은혜요, '사랑하라' 하는 것은 바로 은사올시다. 서로 사랑하라.
오늘 본문에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열심으로 서로 사랑하라.' 그 '열심히' 라는 말을 헬라 원문대로 좀 소개하고 싶습니다. '엑테네' 라고 하는 말인데요 이 말은 '잡아늘인다' 하는 뜻이에요. 그냥 보통 열심히 아니에요. 잡아늘인다. 고무줄이 있어요. 끊어지지 않을 정도로 잡아늘여요.
스프링을 잡아늘여요. 이제 보세요. 경마로 쓰여지는 말, 그 말이 가지고있는 자기 능력이 있습니다. 이것을 극대화하려고 좋은 음식을 먹입니다. 잠을 재우고 훈련을 시키고 운동을 시키고 잘했다가 경마장에 나가는 날 이걸 타고 나갈 때 그 잘 달리는 말을 또 때립니다.
계속 때리면서 그 능력을 극대화하는 것이에요. 그 능력을 잡아늘이는 것이에요. 여러분, 여러분의 사랑의 영역을 생각해 봅시다. 내가 얼마까지 사랑할 수 있습니까? 사랑의 영역, 사랑의 힘을 잡아 늘여!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구요?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허다한 죄를 덮어요. 죄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허물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사랑해야 되요. 여러분, 여러분 생애에 한번 이렇게 화끈하게 사랑해 본 때가 한번 있지 않아요? 한참 뜨겁게 사랑할 때, 정신없이 사랑할 때,
추운 것도 모르고 더운 것도 모르고, 뭐 작으면 작은 대로 좋고 크면 큰 대로 좋고, 실수하면 실수하는 대로 예쁘고, 그냥 무턱대고 마냥 좋기만 한 때가 있었지요? 없었어요?
그러면 불행한 거죠. 그래도 그렇게 한번 미쳐본 때가 있잖아요, 왜. 이게 바로 사랑이 잡아 늘여진 사랑이거든요. 그 순간에는 허물이란 없어요. 실수도 없어요. 죄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열심으로 사랑하는 거예요. 열심으로 사랑하는 자는 피곤함이 없어요. 허물이 보이질 않아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요. 그저 예쁘고 아름답고 행복하고 그거예요
.
에리히 프롬(Erich Fromm) 이라고 하는 심리학자가 그 유명한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을 써서 우리 많은 사람들이 다 읽고 읽고 읽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디 아트 오브 러빙(The Art of Loving)'이라는 책인데요 거기서 사랑의 네 단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어린아이 같은 사랑. 어린아이는 사랑 받기 때문에 사랑합니다. 사랑 받고 사랑하고, 그게 어린아이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들 여러분 잘 위해주다가도요 잘 좋다고 하다가도 조금만 자기 비위에 안 맞으면 "아빠, 미워!" 그러잖아요.
아 그러면 정이 뚝 떨어져요. 어느 순간에 "엄마, 미워!" 막 그런다 말이예요. 왜요? 사랑 받고 사랑해야겠는데 받는 게 마음에 안 드는 거예요. 이게 유치한 사랑이에요. 어린아이들은 그래요. 유치한 사람은 이렇습니다. 그런가하면 성숙한 사람은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합니다.
자기 사랑으로 상대방을 덮어요. 이유 없어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거예요. 또 성숙하지 못한 사랑은 그대가 필요하기 때문에 사랑한다 하는 논리가 있어요. 내게 필요하거든요. 혼자살기 힘드니깐 저거 하나 필요하거든요. 내가 혼자 살 수 없으니깐 저거하나 필요하거든요.
내가 필요해서 남을 사랑하는, 극히 율법적이고 계약적 이고 이렇죠. 아주 실리적이에요. 이런 사랑이 이젠 문제가 되죠. 이 에로스라는 거죠. 그런가 하면 성숙한 사람은 그대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대가 내게 필요하다. 사랑의 대상으로 필요해요. 그가 나에게 어떻게 대하느냐는 상관이 없어요
. 나는 너를 사랑함으로만 내 삶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에요. 그런 고로 네가 필요해요. 사랑의 대상이 없으면 내가 사랑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않으면 나는 내가 아니니까 그래서 사랑합니다. 이게 성숙한 사랑이요.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열심으로 서로 사랑하라."
두 번째는 "서로 대접하라" 그랬어요. 대접한다는 말, '필록스세노이'라고 하는 헬라말을 조금 설명하고 싶습니다. 여기 '필로' 라는 말은 사랑이라고 하는 말이고, 여기 '세노이'라는 말은 행동을 말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것을 번역할 때 호스피탈리티(Hospotality) 라고 번역합니다.
말로 사랑하는 게 아니라 대접하는 거예요. 음식도 대접하고 여러 가지로 잘, 내가 사랑하는 자가 필요한 부분을 내가 채워주는 거예요. 구체적으로 사랑하는 거죠. 이게 바로 대접이라는 것이죠. 행동적 사랑을 말합니다. 12세기의 수도사였던 꼴레르보 버나드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의 책 가운데 더 러브 오브 갓(The Love of God) 라고 하는 책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함에 있어서 우리가 시험에 빠지고 유혹에 빠지는 수가 있다. 이렇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네 가지, 첫째는 실망입니다. 여러분, 참사랑에는 실망이 없습니다.
어느 순간에라도 실망했다면 당신의 사랑은 거짓말이요 그건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사랑에는 실망이 없습니다. 무한하게 무한한 미래를 바라봅니다. '대통령의 어머니들'이라고 하는 책이 있어요. 미국의 11대 대통령의 그를 대통령 되게 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어머니다 그거죠. 그 어머니들은 누구들이냐?
그 어머니 특징이 뭐냐? 그 세 가지로 말하는 중에 그런 말을 합니다. 그 어머니들은 낙심한 일이 없어요. 자식의 실수를 보면서도 절대로 실망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사랑의 실천을 현실로 보여주었어요. 손님을 대접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돌보고 자선사업을 하고, 그런 것들을 보여주었어요.
실천했어요. 그게 다른 점이에요. 사랑은 말이 아니에요. 절대로 사랑에는 실망이 없어요. 그런데 쉽게 실망하는 것, 그것은 바로 참사랑이 아니기 때문이요. 사랑에는 절대로 절망이나 실망이 없는 것이요. 또한 그 사랑은 사람들의 칭찬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마음이 없어요. 누가 뭐라고 하든 말든 알아주든 말든 칭찬과는 상관이 없어요. 그 칭찬 받고자 하는 마음, 그게 병든 사랑이요. 사랑의 시험이요. 또 하나는 위선이에요. 사람의 형식만 남고 내용은 없어요. 명예를 좋아하고 야망을 가졌을 때 사랑은 위선으로 빠집니다.
또 하는 핑계올시다. 사랑에는 핑계가 없어요. 참사랑에는 핑계가 없어요. 하지 말아야 될 이유, 사랑할 수 없는 이유만 생각을 해요. 벌써 그건 사랑이 아니에요. 사랑할 수 없는 이유는 없어요. 어떤 핑계도 없어요. 전적으로 바치는 것이에요.
그게 행동으로 나타나는 거야. 그래서 서로 대접하라. 특별히 오늘 본문에 원망 없이. 사랑의 행동에 무슨 원망이 있어요. 대접하는 일에 무슨 원망이 있어요. 원망 없이 서로 대접하라.
요새 유행어가 있습니다. 요새는 모든 것을 이렇게 전부 과학적으로 한다해서 소위 지수라는 말을 많이 써요. 평가지수, 여러분 한번 스스로 생각해봅시다. I.Q.라고 하는 지능지수, E.Q.라고 하는 감성지수, H.Q.라고 하는 유머지수라는 것이 있어요. 요새 유머가 좋아야 출세합니다.
H.Q.라고 합니다. 그것보다 J.Q.라고요 잔재주 지수, 이거 좋은 거 아니에요. 그런가하면 O.Q., 오버커밍 쿼션트(Overcoming Quotient) 아주 중요한 얘기예요. 극복하는 지수, 어려운 일들을 넉넉히 극복하는 극복력 지수가 높아야 되요. 여기 까진데요.
제가 하나 더 생각해 보았어요. 그것은 S.Q. 봉사지수. 당신은 얼마나 봉사하고 있습니까? 당신은 얼마나 봉사하는 수준을 가지고 있습니까? 봉사하는 사람의 수준에 있느냐 그 말이에요. 봉사지수. 그래요 서로 대접하라.
여러분, 요새 우리는 이 대접하는 일이 점점 없어져가요. 자기밖에 몰라요. 정성을 다하여서 손님을 대접하고 낯선 분들을 대접하고 환자를 방문하고 하는 행동적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가하면 서로 봉사하라. 봉사하라 이거 디아코니아, 서비스를 말하는 거요. 요한복음 13장 14절에 보면, 내가 너희들의 발을 씻겼다. 그런 고로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마땅하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어요.
그는 세상에 오실 때부터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라 섬기려하고 대속물로 주려고 왔다고 말씀하셨어요. 철저하게 그는 섬기는 자로 오셨고 섬김으로 끝을 냈어요. 그렇다면 우리는 섬김을 받은 자로서 섬기는 자세로 살아갈 것이에요.
크라잉 벨이라고 하는 상담학자의 웰빙(Well Being) 이라고 하는 책에 보면 네 가지 힘을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가 파워 오버(Power Over), 지배력! 파워 어겐스트(Power Against), 공격력! 파워 포(Power For), 베푸는 능력! 그리고 파워 위드(Power With), 협력하는 능력. 협력하는 능력이 꼭 필요합니다. 우리는 섬기는 마음이 있어야 돼요. 여기 문제가 있습니다.
잔잔한 감동을 일으킨 책 중에 '눈물이 나올 만큼 좋은 이야기'라고 하는 작은 책이 있습니다. 이것은 일본의 한 민간단체가 30년 동안 작은 친절 운동을 일으킨 이야기들을 써놓은 책입니다. 한번 들어보시겠어요? 그 중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중소기업사장으로 있던 분이 사업에 실패했어요. 그래가지고 막막하게 되어서 57세나 된 사람이 이젠 맞벌이를 하게 되고 막노동을 하게 됩니다. 집 가까이서 할 수도 없어서 타향에 가서 저 막노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일하던 중에 점심시간이 되어서 점심을 먹으려고 골목을 골목으로 돌아서 좀 작은 집에 가서 싼 음식을 먹어야겠다 하고 갔는데 문을 딱 들어서고 보니까 안에는 그게 아니에요. '아차! 잘못 왔다. 이거 비싼 집에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 그만큼 좋은 집이었어요. 그러나 왕년에 사장을 지내던 양반이라 다시 문닫고 돌아가기는 자존심이 허락지를 않아요. 그래 그냥 들어서 보니깐 점잖은 양반들이 넥타이를 메고 앉았는데 자기 옷이 초라하고 그 분위기에 도저히 어울리질 않아요.
너무 창피하고. 그래 저 구석에 가서 앉았어요. 그리고 몸 둘 바를 몰랐어요. 그런데 어떤 회사 여직원 같은 예쁜 아가씨 하나가 가까이 다가오더니 물주전자를 가지고 와서 물 한 컵을 따라 주면서 "물 마시세요" 하고 빙그레 웃었어요.
이 사람은 그 시간 눈물이 솟아오르는 거예요. 그 고마움에 복 받쳐서 울었다는 거 아닙니까? 눈물이 나올 만큼 좋은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보니까 울지 않는데요 보니깐. 그 처지에서 생각해 보세요. 기가 막힌 것입니다.
우리의 선한 일들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참으로 우리의 봉사를 우리의 섬김을 기다리는 사람들 속에 우리가 살아갑니다. 인간의 성공은 은혜를 아는데 있고 은혜를 베푸는 데 있습니다. 인간의 행복은 자기에게 주어진 은사를 아는데 있고 은사를 따라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여러분, 사랑하고 대접하고 섬기는 삶이 최상의 가치를 사는 길이란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얼마를 가졌느냐가 아니에요. 얼마를 베풀었느냐. 당신은 얼마를 섬기며 살았느냐. 이걸 묻고 싶어요.
오늘 본문에는 특별히 이렇게 말합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정신을 차리고 기도하라. 열심으로 사랑하라' 그랬어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습니다.
이제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열심으로 사랑하고 구체적으로 대접하고 서로서로 봉사하면 돼요. 거기서 우리의 삶의 마지막을 가장 아름답게 의미 있게 꽃피워가야 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확실히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운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주여, 열심으로 사랑하고 서로 대접하고 원망 없이 대접하고 또한 서로 봉사하는 그런 생으로 보다 더 높은 의미의 생을 이제는 살아가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벧전4:7-11/ 말세와 성도의 생활 /한경직 목사
2014-08-25 14:53:01
이미 읽은 말씀 가운데서 베드로전서 4장 7절을 다시 봉독하겠습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여기에 만물의 마지막이란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동양에도 ‘물유본말하고 사유종시라(物有本末 事有終始)’ 곧 ‘물건에는 근본과 마지막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입니다. 오늘이 금년 중 마지막 주일입니다. 며칠 후에는 금년의 마지막 날 곧 12월 31일이 올 것입니다.
인간의 삶에도 마지막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엄숙한 사실을 알고 살아야 옳고 지혜롭게 살 수 있으며 후회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개인으로는 종말의식이 필요하고, 시대적으로는 말세의식이 필요합니다.
성경은 말세가 있음을 분명하게 가르칩니다. 또 사실 우리는 말세에 산다는 사실도 명확히 깨우쳐 줍니다. 그리고 한 걸음 나아가 성경은 말세가 가까워올수록 여러 가지 징조가 나타날 것을 또한 예고하여 줍니다.
가령 말세에는 적그리스도가 나타나리라고 교훈합니다. 아마 그 뜻은 정면으로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개인이나 집단을 지적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우리가 사는 이 20세기야말로 기독교를 정면으로 반대하고 공격하는 운동이 일어난 것이 사실입니다. 유물론적, 무신론적, 공산주의 운동은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역사상 가장 큰 적그리스도 운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성경은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일어나 믿는 자들을 미혹하고 그릇된 길로 인도하리라고 경고합니다. 오늘날 세계 교회와 우리 한국 교계를 미혹하는 온갖 사이비 종교인들이 일어나 혹세무민하며, 할 수 있으면 택함을 받은 자라도 그릇된 길로 인도하려고 온갖 거짓 종교인 또는 종파가 우후죽순으로 일어나 믿는 이들을 혼미케 하는 것이 또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말세의 징조를 말할 때에 한 가지 잊을 수 없는 사실은, 이 20세기에 들어와서 수천 년간이나 사방에 흩어졌던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성지로 모여들게 되었고, 사실 1948년에는 이스라엘 나라가 온전히 회복되었습니다. 이 사실이야말로 성경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모두 말세의 한 징조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말세에는 여러 가지 천재와 지변이 격증하여 사람을 괴롭힐 것이라고 성경에는 경고하였는데, 사실 우리가 사는 이 20세기에 들어와 이러한 현상이 점점 증가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몇 해 전, 미국 안에서 헬렌산의 대폭발을 비롯하여 최근에 콜롬비아에서 일어난 폭발뿐 아니라, 도처에서 대지진도 일어나고, 여러 해 전에 일어난 동경 대지진을 비롯하여 금년 멕시코의 대지진에 이르기까지 재난이 격증하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의학은 발달되었다고 하나, 전에 없던 무서운 질병도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소위 후천성면역결핍증 같은 것은 전에는 듣지도 못했던 무서운 병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모든 사실도 모두 성경에서 가르치는 말세의 징조인 듯합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성경을 떠나 세계 일반 학자들의 입에서도 종종 말세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가령 생태학자들은 지적합니다. 과학이 발전되는 것은 인류의 생활을 향상시키는 좋은 일이나 반면에 또한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사실이 많다고 지적합니다. 현대 인류의 당면하는 큰 문제 가운데 하나는 오염문제입니다. 물이 더러워집니다. 어느 도시나 마음 놓고 마실 수 있는 식수가 점점 큰 문제로 대두합니다. 그뿐 아니라, 물의 오염으로 곡물이 위협을 받고 바닷속의 각종 생물과 어물이 죽어갑니다.
또 과학이 발전할수록, 자동차가 많아질수록 공기가 오염됩니다. 이 공기오염은 인간을 비롯하여 모든 생물까지 곧 수림까지 삼림까지 그 생존을 위협합니다. 어떤 학자는 지적합니다. 삼림은 맑은 산소를 공급하는 자원인데, 수림이 녹지대가 점점 세계 도처에서 쇠잔하여지므로 근본적으로 모든 생물의 요소가 되는 산소 공급이 점점 결핍되리라고 염려합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자원이 점점 고갈됨을 염려합니다. 가령 현대 생활의 필수요소인 석유는 점점 고갈되어 20~30년 내로 모두 소모되리라고 합니다. 석탄 자원도 한정이 있습니다. 대체 에너지가 발견되지 아니하는 한 실로 절망적인 상태가 될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현재 세계 인류가 당면하는 아마 제일 큰 문제는 인간성의 타락과 세계 인류의 대립과 분쟁과 그리고 핵무기일 것입니다. 과거에 걸어온 인간의 발자취를 더듬어 볼 때에 이렇게 양분된 세계에서 평화가 끝까지 보존될지 큰 의문이며, 만일 세계적 전쟁이 발발되면 그것은 핵전쟁으로 확산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게 되면 문자 그대로 인류 최종의 날이 오지 아니할까 염려가 됩니다.
오늘의 세계 인류는 이러한 공포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말세 의식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사실 성경으로 보나 현대 세계 실정으로 보나 우리는 모두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운 시대에 살고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시대적으로 뿐만 아니라, 우리 하나하나의 개인 생활로 보면 우리 육신은 또한 마지막 날이 있습니다. 죽을 날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종말의식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모두 말세 의식 또 개인적으로는 종말 의식 가운데 살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 믿는 이들이 어떠한 생활을 하여야 할 것입니까? 이점은 깊이 생각해야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성경 말씀은 이점에 대해서 분명히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첫째는,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가르쳐 줍니다.
어느 때보다도 정신 차리고 신앙생활을 할 때요, 간절히 기도하면서 신앙생활을 할 때입니다. 이 말씀은 사도 베드로를 통하여 주시는 교훈인데, 사실 그분은 자기 경험을 좀 돌아보면서 주시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과 같이 겟세마네 동산에 가서 조용한 곳에 이르러 주님은 “너희는 이곳에서 깨어 기도하라” 말씀하시고, 자신은 좀더 들어가 피땀을 흘리시면서 기도하시다가 돌아와 보니 제자들은 모두 졸고 또 잤다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도 물론 잤습니다. 예수님은 그날 저녁이 자기 지상 생활의 마지막인 것을 기억하시면서 부탁하였건만, 제자들은 그 종말 의식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주님이 다시 부탁하셨지만 별 효과가 없었습니다. 그때에 반역자 유다는 원수의 무리를 데리고 와서 예수를 잡아갔습니다. 졸고, 자던 제자들은 뿔뿔이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베드로 자신은 주님이 심판받으시던 대제사장 앞문 뜰에까지 따라는 갔으나, 그곳에서 불행히도 예수를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하였습니다. 실로 대참패이었습니다.
왜? 종말의식이 없이 정신 차리고 기도하지 않던 제자들은 이렇게 크게 위기가 올 때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여기에 오늘날 믿는 우리에게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며 기도하라고 권합니다. 우리도 말세에 삽니다. 우리 하나하나에게도 언제 마지막이 올지 모릅니다. 이렇게 사고 많은 세상에 안전한 날이 어느 날입니까? 안전한 날은 하루도 없습니다. 이러한 현실 아래서 성경은 부탁합니다. 정신 차리고 살라고, 그리고 간절히 기도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라고 부탁합니다.
매일 기도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옛날 다니엘을 생각하세요. 그렇게 바쁜 이라도 기도하는 시간을 지켰습니다. 또 마음으로는 언제나 기도하는 습관을 양성해야 합니다. 쓸데없는 공상을 버리고, 또 무슨 어려운 문제를 당하면 근심이나 염려만 하지 말고, 깨어 기도할 것입니다. 믿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하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기도한 것은 이룬 줄로 믿으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리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또한 약속하십니다.
말세에 사는 우리들에게 둘째로 주신 권면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열심히 서로 사랑하라” 그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이 말씀을 주의해서 읽어 보세요. 우리 성도들 생활에 힘쓸 것이 여러 가지입니다. 힘쓸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무엇보다도 우리 믿는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기를 힘쓰라고 권면합니다.
여러분, 사랑이 어떠한 것임을 다 아십니다. 성경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사랑은 온유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합니다. 사랑은 허물을 덮어 줍니다. 이렇게 성도들이 서로 사랑하는 생활을 하면 그 교회는 백 명이 모이든지 천 명이 모이든지 만 명이 모이든지 언제나 화평합니다. 이러한 사랑을 힘쓰는 가정은 그 가정이 화평합니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란 말이 옛날부터 내려오지만 사실 지나 보니 ‘교화만사성(敎和萬事成)’입니다. 교회가 화평하면 모든 일이 저절로 잘 됩니다. 전도도 잘 됩니다. 교육사업도 잘 됩니다. 복지사업, 자선사업도 잘 됩니다. 말세에 사는 우리는 먼저 성도들끼리 서로 사랑하여 화평한 교회로 꼭 지킬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나도 축복을 받고, 온 교회가 축복을 받고, 나아가서 우리 민족을 구원할 수 있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의 권면이 있습니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선한 청지기가 되어 서로 봉사하라고 하십니다. 여기에서 ‘청지기’란 말을 주의하세요. 전 성경의 교훈은 이 진리를 가르칩니다. 곧 청지기의 원리를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은 만물의 소유자요, 인간은 잠깐 세상에 사는 동안 하나님의 소유를 대신 관리하는 관리자 곧 청지기뿐이라고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사실 옛날부터 내려오는 말대로 인간은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입니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갑니다. 사는 동안 다만 하나님의 것을 대신 관리하다가 가는 것뿐입니다. 그것은 물질도 그러하고, 재능도 그러하고, 지식도 그러하고, 모든 것이 그러합니다. 그런데 관리자는 주인의 뜻대로 관리하여야 합니다. 제 뜻대로 못합니다. 관리자는 모든 것을 처리한 후에 주인에게 보고를 해야 합니다.
인간이 깊은 의미에서 또한 그러합니다. 사는 동안 하나님 주신 물질이나 재능이나 지식이나 권세나 모든 것을 하나님 뜻대로 사용한 후에 하나님께 돌아가 심판받을 때가 옵니다. 이것을 최후 대심판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분명한 성경의 교훈입니다.
내가 무엇을 얼마나 소유하였든지, 내가 얼마나 돈을 벌었든지 꼭 하나님의 뜻대로 그 물질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을 봉사하라고 성경은 가르쳐 줍니다. 그래야 이다음에 하나님 앞에 돌아가 칭찬을 받습니다. 선한 청지기가 있는가 하면, 이 세상에는 악한 청지기들도 많습니다. 말세에 사는 우리는 심판 받을 날이 점점 가까워옴을 미리 깨닫고 선한 청지기가 되라고 성경은 권면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권면이 하나 더 본문에 있습니다. 그것은 청지기는 자기에게 영광을 돌릴 수는 없습니다. 청지기는 만물을 거저 주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서 무슨 좋은 일을 하였든지 그것으로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고, ‘내가 이런 일을 했다’는 생각을 하지 말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고 성경은 권면합니다. 그래야 계속해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영원한 나라에서 또한 상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문자 그대로 말세에 살고 있습니다. 또 인간의 삶에는 마지막이 꼭 옵니다. 이 엄숙한 사실을 기억하고, 우리 성도들은 성경의 교훈대로 신앙생활을 바로 하도록 힘을 써야 할 것입니다.
항상 정신을 차리고 살며 기도하십시다. 무엇보다도 서로 사랑을 배워 화평한 가정, 화평한 회사, 화평한 교회, 화평한 사회, 화평한 나라를 이루도록 힘쓰십시다. 내가 무슨 축복을 받았든지 물질이나 재주나 지식이나 지위를 불구하고, 선한 청지기로 봉사하며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십시다. 1985년 이 마지막 주일에 우리 모두 이러한 축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아버지, 1985년도 거의 지나고 오늘 마지막 주일을 당해서 성경의 교훈을 새삼스럽게 저희들이 지금 다시 들었습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워오는 이러한 때에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신앙생활을 하며 기도를 힘쓰고 무엇보다도 서로 사랑해서 화평을 힘쓰고 내가 무슨 은혜를 받았든지 물질이나 재능이나 시간이나 집이나 무엇을 받았든지 선한 청지기로서 하나님의 뜻대로 모든 일을 감당하고 또한 최후로 무슨 일에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이런 생활을 할 것을 저희들이 다시 한번 들었사오니 듣기만 하지 말고 우리는 꼭 이 교훈대로 생활해서 금생과 내생에 사실 큰 축복을 받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마지막 때의 그리스도인 /벧전4:7-11/ 이지원 목사
2024-10-05 17:20:18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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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이 개학을 하였는데, 아직도 방학인것 처럼 생활하면, 어리섞은 학생이 아닐수 없습니다.
어른이 되었는데, 아직도 이팔청춘인것 처럼 생활하면, 어리섞은 사람이 아닐수 없습니다.
개학을 하고 새학기를 맞이하여 생활하는 것은, 방학생활을 한 학생에게는, 고통일수 있습니다. 하지만 새학기에 적응하여, 아침일찍 일어나고, 학교에 가서 열심히 공부할 때,
그 학생은 한 학년 더 올라가고, 성장할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어른이 되어서 생활하는 것은, 사람에게 고통일수 있습니다. 의무를 지게 됩니다. 직장에 들어가야 합니다. 가정을 꾸려가야 합니다.
하지만 어른으로써의 생활에 적응하여, 열심히 생활할 때, 그 사람은 훌륭한 어른으로써, 살아갈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순절기가 되고, 믿음이 연륜이 깊어질수록, 믿음생활을 하는 것은 고통일수 있습니다.
하지만, 새벽기도를 하고, 예배생활을 하고, 성경을 읽고, 구별된 생활을 할 때
그 사람은... 믿음이 깊어지고, 영적으로 성장할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1. 그리스도인은 마지막 때에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사람은 누구나 마지막 때를 향하여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스스로 인정하든, 그 사실을 부정하든, 마지막 때는 불현듯 찾아오게 됩니다.
지나간 주에, 고 신효식 집사님 가족이 찾아와서, 장례식을 잘 치를수 있도록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감사인사를 하고 돌아갔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 가운데 있다가, 하늘나라로 간 분들이 제법 됩니다.
한때는 너무 자주 있어서, 그때~ 우리교회 ‘조기’를 따로 만들기 까지 하였습니다.
사람은 누구나....너무나 건강하고, 영원히 이렇게 살 것 처럼 생각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불연듯, 마지막 때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때가 오는 것입니다.
한 인생도 그러한때, 이 세상도... 만물의 마지막 때가 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때를 부정하고, 마지막 때는 나하고 상관이 없다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당장 내일이라도 예수님께서 나를 부르시면 어떻게 할까?
깨어서 주님오실 때를 사모하는‘마라나타의 신앙’....‘아멘 주 예수여 어서오시옵소서.’
....주님 오심을 사모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7절 말씀에는, ‘정신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말씀 합니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기도하기가, 참으로 힘이 듭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가복음 14:38”에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고 말씀 하십니다.
깨어 있지 않으면, 시험에 들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깊은 잠을 자고 있습니다. 그러면 꼬집어도 ‘으응’ 즉각 대응을 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세계 챔피언이라도, 잠을 자고 있다면, 그것 보다 이기기 쉬운 상대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초강대국이라도, 깊은 잠을 자고 있으면, 그것 만큼 이기기 쉬운 상대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에는, 영국이 세계초강대국이었습니다.
그런데 영국이 깊은 잠에 빠져 있었습니다.
독일이 체코를 처들어가도..‘으음’ 반응을 하지 않습니다.
독일이 폴란트를 처들어가도..‘으음’ 반응을 하지 않습니다.
당시 영국을 책임지던 수상이 ‘챔벌린’이란 분이었는데, 이분이 얼마나 안이한지...
독일에 히틀러를 만났습니다. 히틀러가 ‘독일은 공격의사가 전혀 없습니다.’ 라고 능청스럽게 대답을 합니다.
그 말을 듣고 기분 좋아하면서 ‘챔벌린’수상이 영국으로 돌아와서 대대적으로 방송을 하였습니다. “독일에 히틀러가 그러는데, 독일은 전혀 공격의사가 없답니다. 이제 평화가 찾아 왔습니다.~”
그리고 바로 독일이 프랑스를 공격하고, 독일이 폭격기를 띄워서 영국에 폭격을 하였습니다.
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초강대국이 바뀌어 버렸습니다. 영국은 강등 당하여 2류 국가로 떨어지고, 미국이 세계초강대국 자리를 꿰어 찼습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잠을 자고 있으면, 아무리 똑똑하고, 아무리 돈이 많고, 아무리 건강하여도
사탄의 한번 갖고 놀면...‘스투피드’가 되는 것입니다. 재물이 휙~ 날아가 버립니다. 중환자 실을 들락날락 하게 됩니다.
근신..이라는 하는 말은, 삼갈‘근’ 삼갈‘신’입니다. 말과 행동을 삼가고 조심하는 것입니다.
~내가 언제 예수님 오시는지 다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크게 않도와 주셔서, 저는 혼자서 잘 대비하고, 혼자 잘 할수 있습니다.
‘자신감’이라고 하는 것과 ‘교만’이라고 하는 것은, 전혀 다르고 구별해야 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감입니다.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누구냐 할까 하오며” 이것은 교만인 것입니다.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은,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말과 행동’을 조심하며, ‘기도’하는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8절에 보니까,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말씀합니다.
자, 나는 지금 옆에 있는 집사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올라가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하여, 하실수 있는 것은, 다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뜨겁게 사랑하시기 위하여, 생명까지도 버리셨던 것입니다.
나의 눈에 상대방의 ‘허물’이 보이고, 나의 눈에 상대방의 ‘않좋은 행동’이 보인다면, 그것은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만약 어떤 가정에, 손자가 찾아와서 밥을 많이 먹으면, 할머니가 말합니다. “우리 손자는 얼마나 식성이 좋은지 몰라요. 요즈음 클려고 그러는지, 밥을 2그릇, 3그릇 자꾸 먹어요.”
그런데 옆집에서 어디 간다고 아이를 맡기고 갔는데...그 아이가 밥을 많이 먹으면 , 어떻게 되겠습니까?
“남은 힘든것도 모르고, 눈치 없게 자꾸 밥이나 달라고 하고, 옆집애한테... 밥 해 주다가... 세월 다가겠다~ ! 불평을 하지 않겠습니까?”
그냥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뜨겁게 사랑을 하면, 허다한 죄도 덮히게 되는 것입니다.
죄가 죄로 않보입니다. “그럴수도 있겠지~ 오히려 그것을 죄라고 ‘하는 사람’이 더 이상하구먼~” 그러면서 덮으려 하지 않겠습니까?
9절에 보니까....‘서로 대접하기를 원망없이 하고’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 믿음이 크고, 누가 사랑이 크고, 누가 덕스럽고, 누가 통이 넓은가?
대접하면서 원망이 있는지 없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이 클수록, 사랑이 클수록, 덕스러울 스록, 통이 클수록
대접이 크고, 원망이 없습니다.
반대로 믿음이 작고, 사랑이 없고, 속이 좁고, 통이 작을수록...
대접을 잘 않합니다. 조그만 일에도 원망을 합니다.
10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봉사하라”
하나님의 은혜를 맡은 청지기...라는 부분을 주목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을 내려 주셨습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더 좋은 복을 내려 주셨습니다.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이제 우리는, 단순히 누가 우리를 저주하면, 그것이 반사~ 가 되어.... 그 저주가 했던 사람에게 돌아가는 정도가 아니라,
이제는 우리가, 적극적으로 누구를 매어 버리면, 하늘에서도 매어 버리십니다.
우리가 누구를 풀어 주면, 하늘에서도 풀어 주십니다.
‘생사여탈권’이라는 말이 있는데, 묶고 푸는 권한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은혜를 맡은자가 되어, 선한 청지기 같이 봉사해야 하겠습니다.
선한 청지기가 있고, 나쁜 청지기가 있고...신실한 청지기가 있고, 나태한 청지기가 있습니다.
큰 복을 맡고, 큰 능력을 맡은 청지기 일수록, 선하게 잘 사용하고
선하게 그 복과 능력을, 잘~ 관리 해야 하겠습니다.
마지막 때에 무엇을 목표로 살아가야 하는가? 오늘 말씀을 보니까, 깨어서 기도하는 것을 목표로,
뜨겁게 사랑하는 것을 목표로, 원망없이 대접하기를 목표로, 선한 청지기 같이 봉사하는 것을 목표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도록, 살아가야 합니다.
1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
제가 신학대학원을 다닐 때, 소록도에 봉사활동을 간 적이 있습니다.
소록도 하면, 나병환자로 유명한 곳이지요.
소록도에 도착하고 보니, 마침 청소시간이었습니다.
저도 청소를 하려고 하니까, 어떤 분이, 저에게 밀대를 건내 주는데,
밀대를 건내주는 분의 손을 보았더니, 손가락이 하나도 없습니다.
저 밀대를 잡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냥 잡자니, 찝찝하고 겁이 납니다. 저분이 나병으로 손가락이 없는데, 혹시 이 밀대 자루에... 나병균이 묻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않 잡으면...저분이 마음에 상처를 받을텐데... 결국 괜찬은 척 하면서, 밀대자루를 넘겨 받아서, 열심히 청소를 하였습니다.
어떤 분들은 장갑을 끼고, 또 장갑을 끼고.. 봉사활동을 하는 분도 있다고 합니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뜨겁게 사랑하는 것은 무엇인가?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는데...오늘본문 밑에... 13절,14절 에 말씀합니다.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그리스도의 고난의 참여하라.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 하라.
그것이 나중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실때에는 나의 즐거움과 기쁨이 된다고 합니다.
더욱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이 있습니다. 성령이 나의 위에 계시는, 증거라고 말씀 합니다.
소록도에서 봉사활동을 잠깐 더 말씀 드리면,
다음날 새벽에, 교회에서 나가서 새벽기도를 하는데, 그곳에 있는 분들이 다 나와서, 새벽기도를 합니다.
주위를 돌아 보았더니, 어떤 분은 눈이 없고, 어떤 분은 귀가 없고,
어떤 분은 코가 없고, 어떤 분은 손이 없습니다.
이분들은 수요기도회, 금요기도회, 새벽기도를..... 열심히 하시는데~, 내가 앉은 이 의자에, 앉아도 괜찬은 것일까?
나중에 그곳에서 일하는 분이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분들은 ‘음성 나환자’입니다. 전염되지 않는 분들 입니다.
마음에 준비가 않되고, 믿음의 준비가 않되면...
봉사활동을 하러 갈수는 있습니다만, 하지만 그곳에서 사랑의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여, 봉사하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한 청지기의 삶을 살자면,
일회성이 아니라, 계속하여 온전한 청지기의 삶을 살기 위하 여서는
믿음으로 철저하게 거듭나지 않고서는... 않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철저하게 거듭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 언어생활부터 바뀌어야 하겠습니다.
11절에는 말씀합니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과 같이 하고”
그리스도인이 언어 생활을 할때에...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그냥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과 같이 해야 합니다.
나에게 마지막 말을 남기라고 하면, 그 말은 얼마나 신중하게 생각하고... 말을 하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은 마지막 때에, 마지막 말을 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듯이, 언어생활을 해야 합니다.
또한 봉사생활이 바뀌어야 합니다. 11절 하반절에는 말씀합니다.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을 의지하지 않고... 사명 감당할때, 가끔씩...불평, 불만, 태만, 게으름이 나올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각종 근심, 걱정, 의심...않좋은 것에, 매몰 되어서, 힘을 쓰지 못하는 경우가 있게 됩니다.
삼손은 하나님께서 ‘무적을 힘’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삼손은 그 힘이 ‘나의 힘’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공급하여 주신 ‘힘’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럴 때 그 ‘힘’을 내 맘대로 사용 합니다. 그 힘의 ‘근원’을 가볍게 여깁니다.
‘들릴라’가 꾀우니까...들릴라 한테 가르켜 줍니다. 그럴 때, 들릴라가 삼손의 머리털을 빡빡 다~ 깍아 버리고, 블레셋 군대를 불러서, 힘 한번 못 써보고...끌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직분과 봉사와 책임을 ‘나의 힘’, ‘나의 것’으로, 하나님께 봉사해 드린다고 생각할 때,
내 맘대로 봉사하게 됩니다. 가볍게 여깁니다.
심지어는 사탄이 유혹하면, 직분과 봉사와 책임을, 십자가를 던져버리듯 던져 버립니다.
‘구원의 길’이 나에게 선택사항 아니듯이, 내가 받은 직분과 봉사와 책임도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힘으로, 해야할, 나의 일부분이 것입니다.
어떤 장군이 저에게 간증을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목사님 저는 부하들에게, ‘군인은 종교를 가지는 것이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전쟁터에서 목숨을 겁내지 않고, 싸울 수 있기 때문이다.” 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부하들을 전도하였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크게 감명을 받았습니다.
마지막 때를 생각하고, 마지막 때를 준비하여, 마지막 때를 맞이할 때, 열심히 싸우는 군인이 되라...
장군 다운 전도 이구나...
성경은, 오늘 왜 이렇게 마지막 때에 대하여, 그리스도인의 믿음생활을 말씀을 있는 것입니까?
11절 하반절에 말씀합니다.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렇습니다. 이렇게 믿음생활하여, 우리의 평소의 생활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고,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평소의 모든 생활을 통하여....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말씀을 정리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마지막 때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생활을 하고, 뜨겁게 사랑하고, 대접하며, 봉사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생활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이 믿음으로 매일매일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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