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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베드로서 설교 모음

베드로전서 3:19 - 22절 설교 모음

by Jessi J 2024. 1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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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내용 /벧전3:18-22

2013-07-10 15:45:40

 

기독교가 정체되고 있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경의 원리를 무시하면서, 여러 가지 프로그램만 교회에 도입하기에, 성경적이지 못한 문제점들이 발생하고 있다. 교회가 성장하려면, 초대교회와 같이, 예배와 말씀이 회복되어야 한다.

 

성경으로 돌아가자!,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구호는, 초대교회가 추구하고 있는 설교와 예배로 돌아가자는 말과 같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방법을 2가지로 설명한다. (1) 말로 전한다. (2) 보이는 성례(침례, 성찬)를 통하여 전한다.

 

기독교의 거룩한 예식 성례에는, 침례와 성찬 2가지가 있다. 거룩한 예식인 성례가 중요한 이유는, 복음을 몸으로 체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례는 성경의 핵심내용, 복음의 핵심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보여준다. 침례는 복음 그 자체이다.

 

1. 복음의 내용은 무엇인가?(18)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예수님의 가장 위대한 사역은, 죄인들을 위해서 단번에(하팍스, + 파스 = 모든 방법이 아니라, 오직 한 방법) 죽으심에 있다. 특히 불의한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셨다. 그 이유는 죄인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함이다. 어떤 사람의 전기나 자서전을 읽어보면, 쌓은 공적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복음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접해 보면, 다른 유형의 자서전이나 전기와는 분명히 구별되는 특색이 있다. 그것은 예수님의 죽음에 초점을 맞춘다. 예수님은 죽기위해, 세상에 오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죽음을 떠나서 이해할 수 없다.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죽기 위해 오셨다. 사람들은 다 살기 위해서, 이 세상에 왔다고 말할 수 있지만,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죽기 위하여 오셨다.

 

예수님의 고난은, 분명한 목적이 있다. 자연적인 죽음도 아니고, 사고도 아니다. 예수님이 목숨을 속죄 제물로 내놓았다. 그 죽음은 의인으로, 불의한 자를 대신했다. 여기서 의인은 단수고, 불의한 자는 복수로 되어있다. 의인은 한 분, 예수님만 의인이다. 그리고 나머지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다.

 

(3:10)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그런데 예수님께서 불의한 자들을 대신해서 죽으셨다.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새로운 피조물로 삼기 위해 죽으셨다. 주님의 고난과 죽음은, 분명히 이런 목적이 있다.

 

그렇게 해서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셨다. 여기에서 인도(프로사고), 왕을 만나 뵈려고 오는 사람을, 왕 앞으로 인도한다는 말이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를, 왕이 되신 하나님 앞으로 인도한다. 육체는 (참으로) 죽임을 당하셨다. 예수님은 실제로 돌아가셨다. 잠시 기절한 것이 아니다.

 

(19)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케륏소).” 이 구절이 성경에서, 가장 난해 구절이라고 말한다.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는, 성경 전체적인 말씀과 조화를 이뤄야 하기 때문이다. 우선 이 구절은, 연옥을 말하지 않는다. 연옥은 인도종교인 자이나교에서 들어왔다.

 

연옥이 교회 안에 자리 잡게 되는 시점은, 면죄부 판매를 허용할 때였다. 그래서 죽은 자를 위해 산 자가, 공덕을 쌓는 행위로, 그들을 구원한다고 하면서, 많은 돈을 거둬드렸다. 그렇지만 성경은 사후의 구원의 가능성을 말하지 않는다.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16:26)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라고 하였다.

 

성경은 사후의 세계에서 위치가 정해진 다음에는 결코,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가, 없음을 말한다. 그러면 무슨 뜻인가? 옥에 있는 영들은, 20절에그들이라고 잘 설명한다.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다.

그들은 노아가 방주를 만들며, 복음을 전하고 있는 동안, 복음에 순종하지 않고, 죽었던 무리들을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옥에 갇혀 있는 자들에게, 죽으시고 부활하셨음을 선포하셨다. 복음을 전했다는 말이 아니라, 약속대로 죽으시고 승리자가 되심을 선포하셨다.

 

18절 말씀처럼, 예수님께서내가 불의한 자들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었을 뿐만 아니라, 이렇게 승리했다면서, 지옥을 향해 선포하셨다는 말이다. 그때 옥에 갇힌 자들은, 땅을 치며 이를 갈며 슬픔이 넘쳐나게 되었다는 말이다.

 

‘…또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이단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이 구절을 들먹이면서영만 부활했다.”고 말한다. 예수님의 부활은육체는 아니고, ‘에만 해당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예수의 영이 나에게 임했다, 내가 재림주다.’는 논리를 편다.

 

그러나 이 말은, 성령님에 의해서 살아나게 되었다는 말이다.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성령이라는 말이다. 성령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키셨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예수님은 죽으셨을 뿐 아니라, 자신의 위대한 승리를 선포하고 부활했다.

(1:3-4)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는 말씀과 같은 맥락이다.

 

2. 복음의 모형과 실체인 방주와 예수 그리스도(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넘쳐나는 물, 넘쳐나는 홍수 속에서, 노아는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 방주를 통해서 구원받았다. 방주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받음과, 몇 가지 동질성이 있다. 방주는 예수님의 예표이고, 그림자이다. 실체는 예수님이다. (6)으로 돌아가 살펴보자.

 

(1) 방주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아이디어다(6:14).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노아가 방주 지을 생각을 하지 않고, 하나님이 노아에게 먼저 말씀했다. 이처럼 방주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아이디어다.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하나님은 방주 안으로 들어가게 했고, 문을 닫았다. 그래서 밖에서는 아무리 폭우가 내려도, 방주 속은 안전했다. 홍수가 나서 아무리 범람하여도, 방주는 심판의 물 위에 떠 있었다. 주님 안에 있는 자들의 안전을 대변해 준다. 지옥불도 주 안에 있으면, 해칠 수 없다.

 

(2)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받도록 하셨다(6:14).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고페르 나무로 방주를 만들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고 하였다. 고페르(집에 거한다) 나무와 역청(코페르, ר󰘵󰗔몸값, 속전)을 칠하라고 했다.

역청은 피와 같은 모습인데, 카파르(용서하다, 속죄하다)는 말에서 왔다.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있어야 한다. 마귀는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게 만든다. 그래서 신자들을 미혹한다. 이단이 왜 위험한가? 사신 주님을 부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단은 교주를 신격화한다.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방법이, 각 시대마다 구원자가 다르다는 말이다. 각 시대마다, 그 시대의 구원자를 세웠다는 말이다. 노아시대에는 노아, 모세시대에는 모세, 예수님시대에는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받듯이, 말세에는 그 시대의 목자, 구원자, 중심인물이 따로 존재한다는 교리는 이단사상이다.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구원자를 찾고, 만나야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

 

(3) 말씀을 믿고, 방주 속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방주에 들어가기 위해서, 돈을 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얼굴이 예뻐야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믿고 들어가면 된다. 어떤 씨를 받아야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방주는 하나님께서 부르신, 은혜로 들어간다. 구원받기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 나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방주를 준비하시고, 이 방주를 통해서 구원해 주심을 믿으며, 감사함으로 방주 속에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스스로 들어가야 한다. 자기 발로 들어가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구원의 영광스러운 사역 앞에, 스스로 응답하길 요구하신다. 홍수에서 방주를 통해 구원받은 이 사건은, 오늘 우리가 구원받는 사실에 관한 아름다운 예표다. 노아시대에 물속에 들어간 사람들은, 모두 다 죽었다. 그런데 방주 속에 있던 노아와, 그 가족은 모두 살았다.

그는 마치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것 같은 경험을 했다. 모두 물 속에 들어갔지만, 방주 안에 있던 자들은 살았다. 똑똑하고, 착하고, 예쁘기에 구원받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을 믿고, 방주 속으로 들어갔기에 구원받았다.

 

3. 침례의 의미(21)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침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베드로는 노아의 홍수를 통해, 신령한 구원의 표인, 침례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노아의 홍수는 침례의 모형이라고 한다. 침례는 성도가 그리스도와 연합된 것에 대한, 외부적인 증거요, 확인이다. 이제는 주님과 연합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아름다운 삶을 살겠다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다.

 

그러면 여기서, 세례와 침례를 무엇이 맞는지, 살펴보자. 세례(ㅎ란티스모스, ‘ραντισμός)는 머리에 물을 몇 방울 떨어뜨리며, 죄를 씻는다는 의미다. 죄를 씻는 개념은, 이란 종교미트라교에서 왔다. 또 조로아스터교로 흘러가고, 인도로 들어가서, 나중에 천주교회의 세례가 된다.

그러나 침례(밮티스마, βάπτισμα)는 물속에, 몸이 완전히 잠긴다. 뜻은염색한다, 연합이란 뜻이다. 침례와 세례가 똑같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뜻이 너무나도 다르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았다고 하면, 예수님께서도 죄가 있단 말이 된다. 만일 예수님께서 죄가 있다고 하면, 그는 이단이다.

 

예수님께서 침례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시고, 그 이튿날 오시자, 요한은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1:29)라고 선포하였다. ‘어린양은 제사를 드릴 때, 필요한 제물이다. 죄인들의 죄를 양에게 짊어지게 하여, 그 양을 죽였다. 요한은 예수님이 그 제물이라고 선포하였다.

이렇게 제물이 되기 위해,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으셨다. 죄 없으신 예수님이, 침례를 받으심으로, 인간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공식적인 제물로 죽으셨다.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으심으로써, 죄인들을 구원하러 오신 주님의 사역이, 공식적으로 시작됐다.

 

우리가 죄용서 받음은, 그냥 용서받음이 아니라, 속죄양 되신 예수님의 죽음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예수님이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가 해결되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주님과 연합된 우리는, 주님과 함께 부활하게 되었다.

침례는 예수님과 연합하여, 물속에 들어가 잠길 때,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선언한다. 물속에서 다시 올라올 때, 예수님과 함께 연합되었기에, 부활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러니 침례가 얼마나 놀라운 복음인가? 복음을 확실히 몸으로 체득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6:3-5)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으므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침례의식은, 엄격히 말하면, 그리스도인의 장례식이며 부활의식이다. 내가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 함께 죽었다가, 예수님과 함께 부활한다는 신앙고백이다. 따라서 침례가 얼마나 복음을 잘 표현하는 예식인가? 성경은 침례를 가르치고, 예수님도 침례를 받으셨다. 초대교회도 침례만을 베풀었다.

 

그런데 사도들이 세상을 떠나게 되자, 진리가 흐려지기 시작하여, 침례를 세례로 바꾸고, 세례를 받아야만 구원받는다는 잘못된 교리들이 나타났다. 그 이유는 사제의 권위 앞에 절대 복종하도록, 막강하게 만들기 위해서다. 지금도 로마 가톨릭은, 그래서 세례(영세)가 원죄를 없앤다고 가르친다.

 

(3:5)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물을 세례로 바꾼 후에, 유아 세례를 받음으로, 원죄가 제거되고, 성화 되는 은총을 받게 된다고 한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아이들을 보호하려고, 유아 세례를 만들었다.

 

이 그릇된 가르침으로 인해서, 세례가 구원의 필수조건이 되자, 구원받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세례를 받아야만 했다. 1311년 라벤나 회의에 모인 로마교회 대표들은 세례만을 실시하고, 침례를 실시하면 사형하기로 결의하여, 많은 성도들을 핍박했다. 그 후부터는 세례만 실시되었다.

 

16C에 종교개혁이 일어나서, 성경의 교훈으로 돌아가는 운동이 있었지만, 많은 사람이 인간적인 이유로 세례를 고집했다. 그들을 도와주는 영주들이 세례 받았기 때문이다. 칼빈도 성경에는 침례로 되어있다고 하면서, 현실적인 이유로 세례를 계속했다. 아직도 세례를 실시하는 교회들이 많다.

믿고 침례를 받으면 구원받는 다는 말은, ‘예수님을 믿고 죄를 회개하였다면, 신앙을 침례로 표현하라는 말이다. 그래서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침례를 받았다(1:4-5). 따라서 침례는 전에는 내가 죄인이었지만, 이제는 회개하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음을, 만인에게 공포하는 선언이다.

 

침례를 받아야 구원받을 수 있다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는, 구원받을 수 없다. 예수님께서 네가 나를 구원자로 여겼으니, 잠시 십자가에서 내려가, 침례를 받고 올라오자고 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내용은 없다.

침례식은 쉽게 말하면, 결혼식과 같다. 오늘날에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결혼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진정한 사랑이 아닐 수 있다. 결혼식을 꼭 해야만 부부는 아니다. 초라하게 해도 결혼식을 치렀어도, 호적에 올라가면 결혼이 성립된다.

 

예수님을 믿고, 죄를 분명히 회개하는 신앙고백이 없다면, 침례를 받을 수 없다. 갓 태어난 아이가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할 수 있다. 따라서 침례교는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는다. 유아세례를 인정한다는 말은, 세례를 구원의 조건으로 보는 경향성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침례가 구원과 연결된다면, 더욱 침례를 받아야 한다. 세례와 침례는 의미가 다르고, 성경이 침례를 행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침례를 받으셨을 때, 구속을 위한 길이 열렸기에,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왔다.

 

하늘로부터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소리가 있었다.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인간과 연합되었기 때문이다. 구원받았음을 침례로, 신앙고백을 하고 선포할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님께서 비둘기 같이 임하시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음성이 있다.

(벧전3:22) “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니라침례를 받으신 주님은,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고,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주님께 복종한다. 얼마나 영광스런 모습인가? 영광의 주님이, 함께 함을 믿고, 고난을 이기자.

 

이처럼 구원받은 우리는 영생을 얻고, 영원한 천국에서 주님과 더불어, 왕 노릇하며 행복하게 살게 됨을 상징한다. 침례는 신비롭다. 죽고 사는 경험이 확실하게 나타난다. 침례를 통해, 병든 자들이 치료받는 경우가 많다. 추운 겨울에도 얼음을 깨고 들어가서 침례식을 행해도, 감기도 들지 않는다.

 

시베리아의 불꽃이라는 책을 읽어 보라. 많은 사람이 침례를 통해, 변화되었다. 침례가 중요하기에 초대교회는 생명을 걸었을까? 그냥 믿기만 하면 되지, 생명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침례를 받았는가? 베드로전서는 고난을 당하는 자들에게, 위로하는 책이다. 침례를 통해 주님과 연합함을 느껴보자!

결론이다. 요즘 옛날에 결혼식을 잘 못해서, 결혼도 앙코르 결혼식을 행하는 분이 얼마나 많은가! 구원의 확신도 없이 세례를 행했거나, 침례를 받았다면, 다시 행해 보라. 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확실히 느낄 수 있다. 주님과 함께 연합되었다는 감격을 느끼는, 귀한 분들이 되기를 바란다.

 

 

 

구약의 구속사적 이해-1/6:9-22,벧전3:18-22

2002-03-15 06:35:12

 

* 성도들이 노아시대의 홍수심판과 방주를 통한 구원 사건을 구속사적으로 이해하도록 돕는다.

 

* 노아시대의 홍수와 방주를 통한 구원을 통해 그리스도 십자가의 속죄 사건을 보다 잘 이해하고 앞으로 다가올 심판에 대비토록한다. 방주를 통한 구원을 통해 그리스도 십자가의 속죄 사건을 보다 잘 이해하고 앞으로 다가올 심판에 대비토록한다.

 

서론

 

지난주 복습 : 죄로인한 죽음.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인간. 그 누구도 대신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아무리 누구를 위해서 희생하려 해도 결국 그 죽음은 자신의 죄 때문에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따라서 첫째 아담의 범죄로 인해 모든 사람들에게 죽음이 왔듯이 둘째 아담, 죄 없는 한 인간의 희생적 죽음이 모든 인류의 죄를 청산하고 죽음에서 해방시킬 수 있는 유일한 해답이다. 이것을 위해 이땅에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직접 오셨다. 죄 없는 인간으로서 죄인을 위한 대속적 죽음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고자 함이다. 죽음으로만 끝난 것이 아니라 부활을 통해 그 죽음이 하나님의 희생의 죽음임을 증명하셨다.

 

우리가 성경을 대할 때 어디부터 시작해야 되는가? 창세기? 요한복음? 요한 계시록? 마태복음.... 정답은 없다. 아무데서, 자기 편한대로 시작하면 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을 깨달아야만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달을 수 있다. 아무리 지성이 넘쳐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을 마음에 담아두지 못하고 성경을 본다면 그처럼 우스꽝스럽고, 무의미한 것도 없다. 히브리 기자는 말하기를 '율법'은 장차있을 참 형상의 그림자라고 소개했다(8,9,10). 실체를 바라보고 그림자를 보면 짐작이 되어지는데 실체 없이 그림자만 바라보면 서로 다른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고 전혀 본질적이지 않은 문제로 시간을 허비하게 된다. 실체를 알고 그림자를 바라보는 신약의 성도로서 보다 중요한 것은 성경에 나온 사실이 현대의 과학적 지식에 근거를 둔 고고학과 역사학의 사실에 일치 하느냐 안하느냐가 중요한게 아니다. 이시대의 과학적 지식과 일치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고, 지금은 일치하다가 나중에는 일치 안하기도 하고, 일치 안하다가 일치하기도 하고 그런거지.... 그런 일에데 우리의 정열을 기울일 필요는 없고 취미정도로 즐길순 있다.

 

그러나 율법의 실체를 아직 이 땅에서 접하지 못한 구약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감히 접근할 수 없었다. 성령께서 특별히 감동한 한 대언자를 통해서, 또는 선지자들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말씀을 접할 수 있었고 율법이 해석되어졌던 것이다.

 

불행하게도 순수하게 성령의 감동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지 않고 자신들의 개인적, 또는 민족적인 유익을 위해 자신들의 지성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키고 있었을 때는 율법의 완성이자 본체이신 예수께서 이땅에 오셨건만 그들은 깨닫지 못하고 영접지 않았을 뿐아니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던 것이다.

 

적용 :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성경 말씀을 왜곡 시키고 있지 않은가? 편한 구절, 유익한 구절들은 찾아 암송하면서도 웬지 달갑지 않은 구절들은 애써 그 의미를 희석시키며 한쪽 구석으로 몰아놓고 있지 않은가? 지금 이 시대에 예수께서 오신다면 우리도 그 유대인들 처럼 혹시 예수를 이단자로 몰아 십자가에 못박는 것 아닌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을 마음에 새기고 나서 성경을 다시 대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사건은 이미 구약시대부터 예표되어졌다(그림자로 나타나 있었다). 비록 십자가만큼 생생하게, 분명하게,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았다 할지라도 실체를 믿고 바라보기에 충분했다.

 

도입

 

전개 - 본문 사건 소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도전적 범죄 이후 하나님과의 자유로운 교제가 단절되어 영적 죽음 상태로 지내게 되고, 비록 에덴동산을 쫓겨났지만 하나님의 관계가 완전히 단절된 것은 아니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추방될 때 선물로 받은 가죽옷은 동물의 희생적 죽음을 보며 하나님 앞에 인간의 죄를 고백하며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하기 위한 실낱같은 희망과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그러한 소망의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과 교통하던 아벨을 시기하여 죽이는 가인의 사건을 통하여 다시 한번 범죄한 인간의 한계를 드러냈다. 하나님께서는 형의 시기 속에 죽어간 아벨을 대신하여 ''을 주시고 하나님과 교제를 회복할 수 있는 경건한 후손을 잇도록 은혜를 베푸셨지만 결국 경건을 이어갈 후손들 마저도 불경건한 가인의 후손들과 어울리는 것을 기뻐하며 하나님을 저버리고 말았다. 그 결과 땅에는 사람들의 죄악들로 가득찼다.

 

노아시대의 대 홍수는 결국 이러한 인간들을 쓸어버리시고 인간들에게 다시한번 경건한 후손들의 번성을 통해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해 보자는 기회를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인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120년간의 회개할 시간을 주고(6:3 '...내가 그들에게 120년 동안의 여유를 주겠다'-현대인의 성경-), 노아에게는 그 기간동안 방주를 건조하도록 말씀하셨다(6:13). 결국 노아의 가족들만 방주에 타게 되었고 그후 40일 동안 역사상 유일무이한 엄청난 홍수가 발생하고(7:10-12) 물이 빠져 다시 인간들이 거주하게 되기에는 1년의 세월이 걸렸다(8:13-14).

 

본론 - 홍수와 방주의 구속사적 의미 소개

 

1. (홍수)

 

벧전 3 : 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

 

21절에는 한 술 더 떠서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고 함

 

''로 세상이 망했는데 성경은 표현하기를 ''로 구원을 받았다고 한다.

 

세상에서는 죽음인데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구원이 된다. 무슨 수수께끼같지 않은가?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paradox이다. 십자가란 죽음의 상징이다. 지금 이 시대에야 고상하게 여기저기 걸어놓고 왠지 십자가만 보면 거룩한 느낌이 들고, 고상한 느낌이 들고, 흥분하던 마음도 차분해지고...드라큐라 백작도..

 

그렇지만 예수님 당시의 십자가를 생각해 보라. 거기서 무슨 평안이 있고, 분위기가 나오겠는가? 죽음의 상징이다. 십자가만 보면 평온했던 마음도 불안해지고, 왠지 가슴이 뛰고, 꿈에 나타날까 두려운게 십자가다. 그렇지만 그 십자가가 죄 가운데 죽어있는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었다. 그 십자가의 능력을 의지하는 자에게는 죽음가운데서 살아나는 역사를 맛보게 된다. 마치 홍수로 인해 뒤덮인 물속에서 온갖 생물들은 죽어가지만 방주를 의지하고 그 안에 타고 있는 자들에게 구원의 역사가 있었듯이 말이다.

 

노아 당시의 사람들은 산 꼭대기에다 건조하고 있는 커다란 배를 보면서 비웃었다. 아마도 그런 배를 건조하고 있었던 노아는 상당한 재력가였겠지... 사람들은 노아를 보면서 비웃었을 것이다. 멋진 항구에 띄울 유람선을 짓는것도 아니고, 우스꽝스럽게 생긴 나무 상자같이 생긴 배를 짓고 있는 노아... 돈 벌어서 쓸데 없는데다 돈 쓰고 있구만... 그저 우리야 가서 일해주고 품이나 받으면 되지....

 

오늘날 십자가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고전 1 :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예수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상당히 미련하게 보이는 것이 '십자가'이다. 미련 정도가 아니라 재수없고, 기분나쁜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구원의 능력이 된다. 십자가 자체에 어떤 신비한 마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우리를 위해 달리신 그리스도의 보혈이 있기에 구원의 능력이 되는 것은 물론이다.

 

2. 하나님의 은혜

 

악한 세상을 바라보시며 세상을 쓸어버리시고 다시 시작하기로 마음 먹으시면서도 당장 쓸어버리신 것이 아니라 120년간의 시간을 주시고 방주를 건조하도록하며 사람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신다. 사람들이 회개하고 착한 짓들을 하기 시작하여 그들을 선별해 내려고 '방주 구출 Project'를 수립하신게 아니라 방주를 보여주면서라도 경각심을 주어 회개하도록 촉구하신다.

 

예수께서 이땅에 오심도 마찬가지다. 회개하고 착한짓 해서 이쁜사람들 구원하러 오신게 아니라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때에(5:8)' 십자가project를 시작하셨다.

 

노아는 묵묵히 방주만 건축한 것이 아니라 '의의 전파자'(벧후2:5)로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의 계획을 선포한다.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아무리 120년이지만 노아 혼자서 방주를 지었겠는가? 사람들을 동원해서 일시키며, 먹을 것 주어가며, 품을 주며... 사람들이 노아로부터 일의 대가로 뭔가 제공 받을때는 굽신 거리며 '생각해 보겠다'고 했겠지... 그러나 뒤돌아서서 비웃었다.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심지어 '홍수가 시작되어 다 멸하하기 까지 깨닫지 못하였다'(24:37-38)고 기록되어 있다.

120 + 마지막 7(7:9-10)

 

예수님은 노아의 때를 예로 들어 설명하며 마지막 때가 그렇하다고 설명하셨다(24:37-38). 많은 사람들이 심판의 멧세지를 선포하지만 비웃는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이 세상의 많은 쾌락을 즐기며 살아가지만 영원한 세상이 아니다. 심판의 때가 있다. 이 기간이 무한정 늘어지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지금은 구원받을 만한 때요 은혜의 날이라고 말하고 있다(고후6:2). 그러나 무한정 길어지는 것은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죽음의 때가 있다. 그 때는 언제 찾아올지 모른다. 예수님의 재림이 먼저일지, 아니면 개인적 종말이 먼저일지... 그 때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금이 구원의 때요 은혜의 날이라는 것이다.

 

3.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만이 가능하다(22).

 

노아가 행한 일은 사람들에게 조소거리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노아는 막대한 노력과 부단한 인내, 그리고 전적인 자기 희생으로 그 일을 수행하였다. 이것은 절대적인 믿음의 발로였던 것이다( 11:7). 그 믿음의 근거는 하나님의 약속이었다(6:18).

 

또한 아무리 방주가 완전하게 홍수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라 해도 그 안에 타지 않으면 구원이 불가능하다. 노아의 방주 건조작업에 제 아무리 땀과 노력을 들이며 동참하였다 해도 노아를 통한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가 아무리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졌다 해도 방주에 타지 않은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했다. 다 지어진 방주를 바라보고 감탄하는 것으로도 구원은 안된다. 그 안에 타야만 되는 것이다. 멀쩡한 대낮에, 구름한점 없는 그때에도 믿음으로 심판의 멧세지를 받아들이고 방주 안으로 들어가야만 구원을 받는 것이다.

 

홍수 심판은 과거 역사로 덮어지고 마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마지막 심판의 상징이며, 방주를 통해 살아 남은 생존자는 마지막 심판 때의 성도들의 구원과 영생의 상징이다(벧후 3:5-13). 성도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노아시대의 홍수 심판이 있기 전의 상태와 유사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은 믿음이다. 의의 전파자 노아의 외치는 소리가 오늘도 이곳저곳에서 들려온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무시하고, 더 나아가 조롱하고 비웃고 있다. 믿음이 필요한 때다. 믿음은 사실을 인정하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옮기는 것 까지 포함한다.

 

결론

 

노아시대의 홍수와 방주를 통한 구원은 단순히 흘러간 역사로 지나쳐 버릴일이 아니다. 물위에 떠 다니는 나무로된 방주는 죄 가운데 구원을 상징하는 나무 십자가요 마지막 심판대에서 구원을 약속하는 은혜의 상징이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체험한 신약의 성도만이 바라볼수 있는 노아시대의 홍수와 방주의 진정한 의미이다(성경의 구속사적 해석).

 

이 시대를 향한 적용과 도전

 

이 시대와 노아의 시대를 비교해 보라

 

''의 전파자가 외로운 시대.

 

지금이 구원의 방주를 건축하는 은혜의 때(고후6:2), 한 해 더 덤으로 연장받은 시기(13:8)

 

120년의 시간을 인내하면서 기다리심. 그러나 때가 되면 방주의 문을 닫음.

 

정말 안타까운 사람들 - 방주 건조 사업에 동참하면서도 그곳에 타지 않는 사람들.

 

무슨 핑계를 댈 수 있을까?

 

 

 

 

심판의 물과 구원의 물/벧전3:20-22/양향모목사

2019-09-03 23:40:57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

 

지난주에 공부한 18, 19절 말씀에는 좀 난해한 구절이 있습니다.

18절 말씀 끝 부분에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을 잘못이해하면 예수님께서 육체로 죽으셨지만 다시 살기는 육체는 다시 살지 못하고 영으로만 다시사신 것이라고 오해를 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분명히 육신을 가진 몸으로 부활을 하셨습니다.

다만 이렇게 표현을 한 것은 그 몸이 우리가 가진 이런 몸과는 다르다는 뜻입니다.

세상에서 사는 이 몸은 죽임을 당하셨지만 영적인 몸으로 영원한 천국에서 살 수 있는 완전한 몸으로 부활하셨다는 뜻으로 이해를 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19절 말씀에는 이렇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라고 했습니다.

여기 그는 예수님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옥으로 가셨다고 하셨는데 그 옥이 무엇을 말하는지 또 옥에 있는 영들이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 또 무엇을 선포하셨는지 잘 알 수 없는 말씀이라서 오해의 소지가 많은 본문입니다.

 

천주교에서는 이 옥을 연옥으로 생각하고 예수님께서 죄를 짓고 연옥에 가 있는 영들에게 복음을 전하셨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죄를 짓고 연옥에 가 있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거기서 회계하면 되고 또 자손들이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헌금하고 선을 행하면 조상들이 다시 천국으로 갈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것 가지고 타락한 중세교회에서 돈벌이 잘 했습니다.

돈 가져다가 바치면 조상이 천국에 간다는데 그것 안할 자손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평소에 불효자들도 죽은 다음에는 수의나 관이나 묘는 아주 비싸게 합니다.

 

그러나 개혁주의 교회에서는 그렇게 이해를 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육신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시기 이전에는 영으로 모든 세대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리셨다는 말씀으로 이해를 합니다.

특별히 노아시대에 노아에게 역사하셔서 노아시대의 패역한 사람들에게 전도를 하신 것으로 해석을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그들은으로 시작을 합니다.

여기 그들이란 예수님께서 노아를 통해서 전도하실 때 그 전도를 받은 그들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물로 심판을 받았고 그 중에 노아가족 여덟 명은 그 물을 통해서 구원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의 신약시대의 성도들도 그 물을 통하여 구원을 받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의 제목을심판의 물과 구원의 물이라고 잡아보았습니다.

 

1.노아시대의 심판의 물

오늘 본문 20절 말씀에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 물이 없으면 모든 생물이 살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이 다 아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실 때 물을 아주 소중하게 사용을 하셨습니다.

물을 하늘 위의 물과 하늘 아래의 물로 나누어 놓으셨다고 했습니다.

 

많은 과학자들이 하늘 위의 물이 노아홍수 이전에는 우리 사람들에게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하늘 위의 물이 지구를 둘러싸고 있어서 태양에서 나오는 나쁜 광선들을 차단하고 지구의 온도를 알맞게 조정을 해서 사람들이 천년을 살고 공룡과 같이 등치가 큰 초식 동물들이 이 세상에서 살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노아홍수 때 그 하늘의 물이 지구로 내려와서 사람을 죽게 하고 또 그 이후 시대의 사람들의 수명을 단축시켰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의 생명과 행복을 위해서 창조된 물이 인간들의 타락으로 인해서 인간들이 죽게 되고 인간들이 물로 인해서 누리는 혜택들도 많이 줄었다는 것을 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우리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신데 왜 하나님께서 손수 지으신 사람들을 그렇게 비참하게 한꺼번에 죽게 하셨을까요?

웬만하면 참으셨을 텐데 참 사람들이 너무나 하나님을 실망시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보시니까 사람의 죄악이 땅에 가득했다고 했습니다.

인간들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들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을 지으셨음을 한탄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근심하시고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을 지면에서 쓸어버리기로 작정을 하셨습니다.

 

그 악한 죄 중에 하나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그들과 결혼을 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당시에도 이미 하나님의 자녀들과 사탄의 자녀들이 나뉘어 있었습니다.

경건한 셋의 후손과 살인자 가인의 후손들이 세상에 같이 살고 있었는데 경건한 후손인 셋의 후손들이 살인자이 후손이고 사탄의 지배를 받고 있는 가인의 후손들과 통혼을 한 것입니다.

 

모든 인간들이 다 타락을 했지만 그러나 그 중에서도 하나님을 따르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따로 구별해서 세우고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셨는데 그들마저도 서로 결혼을 통해 섞이게 되어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진노를 자처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과의 통혼이 경건한 백성으로 유지시키고자 했던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게 만든 것입니다.

 

요즘 글로벌 시대라고 해서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고 서로 이웃으로서 함께 살아가야 된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단일민족을 자랑하던 우리나라도 외국인들과의 결혼 때문에 단일민족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지금 시골에 가면 장가가지 못한 총각들이 저 베트남 필리핀 구소련의 여러 나라 여자들과 결혼을 해서 다문화 가족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10-20년 후에 우리가 고향이라고 시골에 가면 거기에는 고향 후배들이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다른 모습을 하고 다른 문화생활을 하는 외국사람 같은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심각한 우려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특별히 모슬렘 신앙을 가진 여자들이 섞여 있어서 신앙적으로도 큰 문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안 되려면 우리 아가씨들이 도시에만 살려고 하지 말고 시골로 시집도 좀 가야 되고 정 안되면 외국 여자들보다는 중국이나 소련에 있는 우리 조선족들과 결혼을 하도록 권장을 했으면 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와 심성이 비슷해서 기독교 신앙도 잘 받아들이고 외모로도 별 다르지 않아서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실 때 바로 작정하고 바로 시행을 하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그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방주를 만들라고 지시를 하면서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오래참고 기다려주셨다고 했습니다.

방주를 만드는 기간을 120년을 주시고 그 오랜 세월을 기다리면서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하나같이 전도를 받지 않고 그 방주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1000년 가까이 사는 사람들이 죽음의 공포를 몰랐을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구원을 받은 노아는 당대의 의인이었고, 완전한 자고 하나님과 동행한 자라고 했습니다.

노아 스스로가 그렇게 의롭고 완전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았던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평가를 받았습니다.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6:8)라고 했습니다.

이 본문을 원어에 가깝게 다시 번역을 하면 "그러나 노아는 주님의 눈에서 은혜를 찾았습니다"라고 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노아가 의로운 사람 완전한 사람으로 평가를 받은 것은 노아는 여호와의 눈에서 은혜를 찾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노아가 하나님이 자기를 불쌍히 여겨주기를 사모한 것입니다.

그래서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던 것입니다.

 

노아시대나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가 모두다 죄를 짓고 악하게 사는 것은 비슷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더 악하면 악했지 선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전 까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24:37-38)라고 하셨습니다.

어느 시대나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이야 다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신앙을 중요시하면서 가정을 이루어야 합니다.

사람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려면 먹고 마시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먹고 마시는 것만이 목적이라면 동물적인 삶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우리의 잘남이나 우리의 의로움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불쌍히 여김을 받으려고 하는 그 마음이 하나님께 은혜를 입게 하고 그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2.예수님 부활이후 구원의 물

본문 21절 말씀에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시대에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시고 불안해하는 노아가족에게 구름사이의 무지개를 보여주시면서 다시는 그때처럼 물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으시겠다는 언약을 세워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오히려 그 물로 심판이 아닌 구원의 표로 삼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물은 곧 세례라고 했습니다.

세례는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에서 구원을 받은 표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물은 우리를 구원하는 증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세례는 원래 오늘날 우리가 행하는 것처럼 물을 뿌려 약식세례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침례교 사람들처럼 침례를 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에 들어가서 물속에 잠기게 했다가 물에서 나오게 함으로 세례의 의미를 깨닫게 한다는 것입니다.

물속에 잠기면서 죄로 인해서 죽을 우리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에서 나오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의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을 알게 한다는 것입니다.

 

물속에 들어가면서 노아시대 때 물로 심판을 받은 죄인들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나도 그들처럼 그렇게 심판을 받아야 할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에서 나오면서 하나님의 심판인 죽음에서 다시 살게 된 것을 인식하고 새로운 사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거룩한 삶을 시작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우리 장로교는 물을 머리에 뿌리는 약식세례를 베풉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같습니다.

세례를 받을 때 노아홍수시대의 심판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심판을 면하게 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새 사람으로서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하나님의 백성 천국백성으로서의 새 삶을 시작하는 각오를 다짐하는 것입니다.

 

여기 계신 여러분들은 이미 대부분 세례를 받으신 분들이십니다.

세례란 그렇게 간단하게 받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모를 때 세례를 받아서 그 의미를 잊어버리고 살 때가 많이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을 통해서 내가 서례를 받은 특별한 사람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기억하시고 어떻게 살 것인가를 다시 한 번 다짐하시는 시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례란 육체의 더러움을 없애주는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세례를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으면서 물속에 들어갔다가 나온다고 해서 죄가 씻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죄성은 여전히 우리의 몸에 남아 있어서 여전히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고나면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이악한 것들이 깨끗이 사라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정말 하나님의 자녀답게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죄로 오염된 우리의 마음은 항상 남아 있어서 죽는 날까지 우리를 유혹하고 괴롭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바르게 살려고 하면 몸부림을 쳐야 하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열심히 살려고 바르게 살려고 노력할수록 내가 하고 싶어 하는 선한 삶을 살아지지 않고 싫어하는 악한 생각들이 내 마음을 사로잡으려는 곤고한 삶을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세례란 우리의 마음에 있는 죄를 깨끗하게 없애버리는 것이 아니라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전에 가지고 있던 개역한글성경에서는 이 본문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라고 했습니다.

이 본문은 옛날 번역이 더 쉽게 이해가 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음으로 우리의 육체에 더러운 것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살아나서 하나님을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노아가 주님의 눈에서 은혜를 찾았던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

우리의 죄가 너무 악해서 우리 스스로는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선을 행하고 고행을 하고 법을 다 지키려고 노력을 하고 또 심지어 이렇게 죄 사함을 받는 표인 세례를 받아도 항상 의로운 사람으로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런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부디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하나님의 그 자비하심 그 긍휼히 여기심이 아니면 나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저에게는 구속자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항상 필요합니다.

그 십자가의 은혜 그 십자가의 사랑이 아니면 나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고백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고 직분을 받고 좀 바르게 산다고 해서 교만하면 안 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부족하고 우리는 항상 죄를 짓게 되고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필요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우리를 심판하시던 그 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표로 삼아주셨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노아시대의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진노하심과 심판을 받아야 마땅한 사람들이지만 그 자비하심으로 이런 큰 은혜를 받았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립니다.

 

3.심판의 물이 구원의 물이 되게 해주신 예수님을 기억하라

본문 22절 말씀에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더 바르게 알고 주님의 말씀에 따르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구원 받은 후에 예수님을 잊어버립니다.

예수님을 잊지는 않겠지만 예수님을 높이지 않고 예수님에게 영광을 돌리지 않고 자기들이 영광을 받고 자기들이 더 높아지려고 합니다.

 

수만명이 모이는 대형교회의 목사라고 해서 자기가 예수님의 자리에서 영광스러운 대우를 받고 화려한 삶을 삽니다.

얼마나 교만하고, 얼마나 자기중심적이고, 얼마나 권세를 부리고 사는지 모릅니다.

자기들이 하는 말이 곧 법이고, 자기에게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라고 대놓고 말합니다.

 

그들에게는 이미 죄의식이 없어졌고, 그들에게는 이미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받을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십자가의 보혈도, 영원한 천국도, 이 세상에서의 나그네의 삶도, 고난을 자처하면서 사는 것도 이미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높으신 하나님의 보좌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는 주의 종의 모습이 그들에게서는 사라진 것 같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셔서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그렇게 비참하게 죽으신 우리 주님은 이제 더 이상 그런 초라한 모습이 아니십니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에 앉으셔서 천상천하의 모든 천사와 모든 사람들이 다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복종을 하는 만왕의 왕이시오 만주의 주가 되신 분이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이십니다.

 

누가 감히 그 예수님을 함부로 대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분이 우리를 용서하셨다고 해서 우리가 함부로 대합니까?

그 분이 우리의 죄 대신 십자가에 지시기 위해서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고 사람처럼 대할 수 있습니까?

 

사람들이 살려주니까 너무 건방져졌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따라하면 안될 것입니다.

겸손하게 무릎을 꿇고 그 주님의 은혜를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노아시대의 사람들은 그들의 죄악으로 인해서 물로 다 심판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그와 못지않은 죄를 지으면서 살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에게는 그 심판의 물을 구원의 물로 바꾸어주신 우리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소망을 가지고 살게 되었습니다.

 

심판의 물을 구원의 징표로 바꾸어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그 높으신 보좌 앞에 무릎을 꿇고 겸손히 그 은혜와 자비하심을 구하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에서 심판 받고, 최후 심판 면한다 /벧전3:20-21/벧후2:5/ 김성수목사

2015-07-14 16:56:23

 

◑''는 한 사람을 통해 주어진다.

 

아브라함 한 사람을 통해.. 그 후손에게 의가 주어졌고,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해.. 모든 인류에게 의가 주어진다.

 

5: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아래에 노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7:1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 네가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노아의 가족이 아니라, 노아 한 사람의 의로움을 보셨다.

 

그 한 사람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죽어야 할 자들이 살아나는 것,

그래서 그냥 그저 받는 것이.. ‘의 한 가지 특징이다.

(나머지 사람은, 그 의를 수여받는다. 동참한다. 혜택을 누린다. , 순교자)

 

마찬가지로 모든 성도의 삶에서

의의 현실, 십자가의 현실, 복의 근원됨의 현실이,

실제화되어 나타나게 되는데..

 

여러분 한 명이 죽어서, 다른 이들에게 의가 전파되는

그러한 그림이 여러분의 삶속에서부터 장차 드러날 것이고,

이미 과거에도 그런 경험을 하신 분이 계실 것이다.

 

내 한 사람 때문에, 누군가 의를 선물 받을 수도 있다. 그건 하나님이 하신다.

여러분은 그 자리에서, 그냥 자기 믿음 지키시면서, 살면 된다.

그 삶이 한 알의 밀알같은 죽음의 삶이다.

노아, 아브라함이.. 예수님처럼.. 그렇게 살았다.

 

 

의인은죽음을 경험한다.

 

벧후2:5,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의를 전파하는 노아.. 왕따 당했다.

노아는 의인이니까, 자기 삶 자체가 의를 전파하는 삶이었다.

 

그런데 그가 이 세상에서 어떤 취급을 받았는가 하면,

거의 정신적으로 맞아죽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무도 노아의 전도(심판의 경고)를 듣지 않았다. 아무도 방주에 안 들어왔으니까.

그게 의인의 삶이다. 그게 또한 예수님의 삶이셨다.

 

그들 세상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떠난 이 역사의 실체는 무서운 최후의 심판이라는 것이

도저히 감지 안 되기 때문에,

 

그들은왜 우리가 여기서 나가야 해? 왜 여기(세상)서 피해야 돼?’

그러면서 방주 안으로 안 들어온 것이다.

 

노아 가족은, 눈만 뜨면 세상이 자기를 바보 병신 취급 하니까,

어쩔 수 없이 거기서 피해서, 그들을 피해서.. 방주로 들어온 것이다.

 

그게 바로의인의 죽음이다.

그들만 방주 속으로 들어간다.

그게 의인된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똑같이 나타난다.

 

세상은 심판 때까지도.. 못 깨닫는다.

그래서 성경은,

그들이 심지어 홍수에 쓸려 내려가서 죽으면서까지도

내가 지금 왜 죽고 있는지를 몰라하는 것이다.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24:38~39

 

쓰나미 현장에서 발견된 시신들은,

자기 가방하고 귀중품을 끝까지 손에 꼭 붙들고 죽어 있었다고 한다.

이게 뭐야?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야?’

모르니까 여전히 세상 것을 붙들고 .. 그렇게 망하는 것이다.

 

세상이 그렇다. 아무리 복음을, 최후의 심판을 얘기해도.. 모르고, 못 깨닫는다.

그리고 자기가방재산 을 꼭 붙들고 있는 것이다.

 

물은 심판의 도구인데, 동시에 구원의 도구

그래서 아래 구절에, 노아와 그 가족들을 물에서 구원했다 하지 않고 from water

물로 구원했다 그런다. by water (혹은 through water)

 

벧전3: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명 뿐이니, 겨우 8명이라.

 

'물로' .. from water이 아니라 by water이다.

'물로부터'가 아니라, '물에 의해서'이다. (혹은 물을 통해서)

 

물은 죄를 진멸하고, 잘라버리는 용도로 심판의 도구로 하나님께서 쓰신 것이다.

그러면 노아 가족을 '물로 부터' 구원했다.. 가 맞을 것 같은데,

성경에 '물에 의해' 구원 받았다고 기록한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는 물에서 건져지는 것을 구원이라고 알고 있다.

그런데 성경은, 그 심판의 물에 의해서, 노아가 구원받았다 라고 말씀한다. by water

불신자에겐 심판의 물이, 동시에 신자에겐 구원의 물인 것이다.

 

최후의 불심판도 마찬가지다.

의인은 '불심판에 의해' 구원받는다.

-그 불심판이 무서우니까.. 그걸 아니까.. 사전에 피하는 것이다.

-노아도, 물심판을 두려워해서.. 사전에 방주를 지으면서, 심판을 대비한 것이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노아의 홍수같은심판의 물이 그들에게 감지되면

재수 없다고 생각하지,

야 이거 하나님이 진노하시면 큰 일 나겠구나!’ 하면서.. 회개하지 않는다. 피하지 않는다.

 

다만 노아 같은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들은

그걸 심판의 현실로 인식하게 되고,

야 여기서 빨리 빠져나가야 되는 거구나!’ 하고

그 물에 의해 by water 구원 받더라는 것이다.

 

그것이 성도의 역사속 현실이다.

(심판의) 물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여 있는 자들에게는 저주의 물이 되고,

그들은 전혀 감지를 못하고, 피하지 않고, 대비를 안 하니까.. 결국 심판받는다.

 

똑같은 물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부어지면

그게 경고가 되어서, 물에 의해 by water 구원받는 도구가 된다.

 

이번 일본의 쓰나미도,

사실 경고를 받는 사람들은 성도들이다.

성도만, 그런 재해를 보면서, 최후 심판의 경고를 받는 것이다. by 쓰나미이다.

 

성도는.. 살 동안에는 환란을 당하나, 최후 심판을 면한다.

노아는 120년 동안 계속 세상으로부터, 바보취급 당했다.

를 전파하는 사람은.. 그와 같은 죽음의 고난을 통과하게 된다는 것이다.

 

성도(노아).. 세상에서 고난/환란의 죽음을 통과하면서.. 최후 심판 때 구원 받는다.

불신자는.. 세상에서 성도를 비웃고 놀리다가.. 최후 심판 때 죽음을 맞게 된다.

 

노아는 10~20년은 참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100년을 기다려도 비가 오지 않았을 때, 그가 어떤 생각을 했을까?

 

거기에다 먹고 살아야 되고, 방주 짓는데 경제적 손실,

그리고 또 방주에 쓸 양식을 저축해야 되고..

죽도록 일하고 또 죽도록 욕 먹어..

 

그런데 역사 속에서 그 (환란의) 물을 맞았더니,

진짜 심판의 물이 내려오니까, 방주가 그를 덮더라는 것이다.

그게 의인들의 현실이다.

 

 

우리 대신 심판 받으신 예수님

 

언약이 홍수 심판을 막아준다.

 

9:11,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침몰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위 창9:11에서, 언약을 통해, 그 언약이

모든 홍수(, 심판)으로부터 사람들을 막아주었다고 했다.

 

여기서 지금홍수’().. 뭔가를 멸하는 것으로 등장한다.

여기서멸하다 cut off인데,

이게 창 15장에 나오는쪼개다와 같은 단어이다.

 

자르다, 쪼개다는 단어가 언약이며, 할례와도 같은 말이다.

즉 멸하다=자르다, 쪼개다=언약=할례이다. 다 같은 뜻이다.

 

그런데 그 저주의 물을,

예수 방주가 대신 막아 주었다.

 

인간들이 빠져죽어야 할 (멸함을 당해야 할, cut off되어야 할) 저주의 물을

십자가에서 쪼개지신 (cut off되신) 예수께서 대신 막아 주셨다.

 

15장에서, 하나님이 친히 쪼개진 제물 사이로 지나가시면서,

스스로 언약을 체결하신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스스로 쪼개지신 예수님의 언약을.. 예표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인간에게 닥치는 모든 죽음을.. 대신 막아 주셨다.

 

이 십자가에서 하나님이 스스로 쪼개져 버리셨다.

그 언약의 현장에서 하나님께서 재물을 쪼개 놓고

이 언약이 지켜지지 않으면, 이 쪼개진 제물 사이로 지나간 자가 쪼개지는 거야

라고 언약을 하셔놓고, 하나님 혼자 지나가겼다.

그건 내가 쪼개지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십자가에서 쪼개지셨다.

 

여러분 인생에는 그심판의 물이 반드시 들어와야 된다.

그래서 역사 속에서 여러분이 그심판을 경험하셔야 된다.

 

그러나 살아가는 가운데그 심판의 물을 경험하는 성도만,

최후 심판의 물을 피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이 대신 심판을 받아주시기 때문이다. 노아의 방주처럼

또는 십자가처럼!

 

그러므로심판, 환란,

성도로 하여금, 세상을 피하게 하고, 천국과 하나님을 향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섭리인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특별히 성도에게

세상에서 살아갈 동안에 환란, 심판, 고난을 겪게 하신다.

그래서 대신 심판을 받으신.. 언약, 십자가, 방주, 예수께 피하도록 하신다.

그 사람만 최후 심판을 면한다.

 

마치 면역주사를 맞은 사람이, 그해 독감을 이기듯이!

사는 동안에 심판을 받은 사람만이.. 예수께 피하면서.. 최후 심판을 이긴다.

 

물에 의한 심판/구원인 - 세례

 

벧전3:21,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세례는 할례.. 다 죽이는 것이다.

할례 정신을 그대로 담고 있는 것이 세례이다. cut off.. 잘라낸다.

 

나의 옛 사람은 십자가에서 쪼개져 죽었고, 물에 빠져 죽었다.

그래서 세례 받을 때, 머리에 물을 뿌리는 것은,

머리까지 물에 차서, 내가 노아의 홍수처럼, 홍해 도강처럼 빠져 죽었다는 것을 상징한다.

 

세례라는 것 자체가 죽음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성도에게 있어서죽음.. 죽음 자체로 끝나지 않는다.

 

거기서 나를 대신해서 죽으신, 심판을 받으신.. 예수의 죽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인다.

이렇게 예수를 받아들이는 이유는, 그 심판의 무서움을 깨닫고, 예수께 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가 나를 대신해서 죽고, cut off 되고.. 내가 그 혜택으로 살아난다.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그런데 그 세례의 물이 무엇을 하느냐 하면,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게 하는 것이라 했다.

그 번역은, ‘선한 마음이 하나님만을 간구하게 하는 것’.. 이란 뜻이다.

 

에페로테마라는 단어가 무엇을 향하여찾아가다는 뜻이 있는 게 아니라,

간구하다, 호소하다라는 뜻의 찾아감이다.

 

왜냐하면.. 심판의 무서움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믿음으로.. 나를 구원하시기로 언약하신,

, 대신 형벌 받으시기로 언약하신

하나님을 찾아가서.. 그 분께 피하는 것이다.

 

 

예수 승천과 하나님 우편 /벧전3:18-22

2024-04-30 00:12:29

 

베드로전서는 1:1절에서 수신인을 정확하게 짚었습니다.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라고 말입니다. 여기에 거론된 지명은 모두 지금의 튀르키예에 해당합니다. 당시 로마 제국이 이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베드로전서가 기록되던 시기는 네로가 그리스도인을 유별하게 박해하던 60년대이거나 도미티안 황제가 박해하던 90년대라고 합니다.

 

집필 연대를 특정할 수는 없으나 박해받던 시기였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에는 특히고난에 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옵니다. 2:19절에서는 부당한 고난을 겪어도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참으라고 했고, 4:13절에서는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니까 오히려 즐거워하라고 말합니다. 4:16절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지금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 문제로 인해서 불이익을 받는 일이 없습니다. 고난을 즐거워하라는 말도 귀에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인 차원에서는 로마 제국 시대나 오늘 우리 시대나 다를 게 없습니다. 이 시대도 로마 제국 시대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를 무시하고 외면하고, 더 나아가서 혐오합니다. 청년 그리스도인들이 주변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이런 말을 듣는다고 합니다. ‘아니 너처럼 괜찮은 친구가 아직도 교회에 나간다는 말이야?’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어딘가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받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웬만하면 교회 다니는 티를 내지 않습니다.

 

인간관계에서만이 아니라 이 시대정신 자체로 인해서 그리스도인은 어려움을 겪습니다. 이 시대는 그리스도교 신앙과 달리 돈을 숭배하도록 강요하고 자아를 숭배하도록 유혹합니다. 이런 시대를 살고 있다 보니 교회 생활에 충실하게 살려는 그리스도인들은 정체성의 혼란까지 겪습니다. 세상에서의 정체성과 교회 안에의 정체성이 분열되는 겁니다. 일종의 인격 분열 현상입니다. 이런 현상을 피하려다 보니 결국에는 그리스도교 신앙 자체를 포기하거나 신앙생활을 은퇴 시기로 유보합니다. 그렇게 세상에 적응해서 사는 게 편하고 행복하다면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앙의 깊이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그렇게 살라고 해도 그렇게 살지 못할 겁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깊이라는 게 뭐지, 그게 뭐기에 이 현실과 마찰을 빚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받아들인다는 말이냐 하는 질문이 가능합니다. 그 신앙의 깊이가 밥 먹여주나, 지금까지 그리스도인으로 살았지만 별로 확실한 인생을 보장해주지 않는 거 같은데, 하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전서는 그 신앙의 깊이를 날것 그대로 선포했습니다. 그 내용은 너무 낯설어서 우리의 영혼이 서늘해질 정도입니다. 오늘 설교 본문에서 한 구절만 일단 읽겠습니다. 마지막 절인 벧전 3:22절입니다.

 

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

 

이 문장이 여러분에게 어떻게 들렸습니까? 우리나라 말이기는 하나 알아듣지 못하는 외국어처럼 들렸을 겁니다. 오늘 제가 이 문장을 여러분이 이해할 수도 있도록 해석해드리기만 하면 설교자로서의 소명을 다 감당한 것이겠지요.

 

그는 하늘에 오르사

 

여기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예수께서 하늘로 올라갔다는 말을 실제로 우주 공간인 하늘로 올라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없을 겁니다. 우주 공간으로서의 하늘에는 예수님이 계실만한 장소가 없습니다. 낮에 보는 하늘은 밝고 아름답지만, 밤에 보는 하늘은 몽환적으로 보이는 별이 있기는 하나 어둡고 두렵습니다. 우주에는 흑암 에너지와 흑암 물질로 가득합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아직도 비밀입니다. 그 하늘은 우리가 교회에서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천국 표상과는 다릅니다. 신구약 시대에 살던 사람들은 하늘을 생명의 원천으로 여겼기에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다고 표현했습니다. <주기도>에도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하늘에 올라가셨다는 말은 실제로 무슨 뜻일까요? 이 문장에 나오는 하늘은 그리스어 ορανός(우라노스)의 번역입니다. ‘회개하라 천국( βασιλεία τν ορανν)이 가까이 왔다.’( 4:17)라는 예수님의 선포에 나오는 그 단어입니다. 마가복음에는 천국이, 즉 하늘나라가하나님 나라’( βασιλεία το Θεο)로 나옵니다. 똑같은 뜻입니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씀도 자칫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온 천지에 가득하다.’라는 표현이나,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이며, 지금도 존재하고 과거에서 존재했고, 앞으로 오실 분이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하나님은 본래 우주 전체에 충만하신 분이시니까 하늘나라는 어느 시점에 왔다기보다는 이미 와 있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걸 인식하는 사람이 있고 없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예수께서는 그걸 진작에 인식하셨기에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하나님의 현실성이 지금 여기에 드러났다.’라고 선포하신 겁니다.

 

하늘나라라는 그리스어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은 하늘과 동의어인 하나님의 통치, 즉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는 뜻입니다. 가장 우선적인 하나님의 통치는 창조 행위입니다. 창조 행위가 곧 하늘의 통치, 곧 하늘나라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선하게 창조하셨고 지금도 보존하시며 장차 완성하실 겁니다. 그 선하신 창조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는 존재이십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늘이 무엇인지 알고 싶으면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 능력을 느낄 줄 알아야 합니다. 가장 간단한 예를 들어서 사람이 두 발로 걷는다는 게 얼마나 선한 능력인지 무슨 긴말이 필요하겠습니까. 두 손으로 물건을 잡는다는 것도 선한 능력입니다. 우리는 두 손과 발을 통해서 하나님의 창조인 시간과 공간을 경험합니다.

 

집안에서 진공청소기를 돌리는 일은 저에게 맡겨진 임무입니다. 청소기로 집 안 구석구석 먼지를 끌어들이는 작업은 황홀할 정도로 멋진 일입니다. 일반 동물들은 아무리 가르쳐줘도 그걸 못 합니다. 로봇청소기를 사용하라고 추천받은 일이 있는데, 제가 더 늙어서 손과 발을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순간이 오기 전까지는 로봇청소기를 사용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로봇청소기가 저보다 더 부지런하게 청소할지 모르지만, 청소를 인간처럼 예술의 차원으로 끌어올리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설거지도 마찬가지고요. 제 설명이 과장처럼 들릴지 모르겠으나 우리가 몸으로 경험할 수 있는 생명 세계의 깊이가 무궁무진하다는 뜻입니다. 그 무궁무진한 깊이를 경험하는 것이 곧 창조의 선하신 능력을 경험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서 그것이 곧 구원 경험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청소와 설거지를 너무 낭만적으로 설명하는 거 아니냐, 식당에서 최저임금을 받으면서 일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아느냐, 하고 저에게 묻고 싶은 분들이 계실지 모릅니다. 그걸 제가 왜 모르겠습니까. 1988년도에 돌아가신 저의 아버님은 평생 함석으로 물받이를 만들어서 시공해주는 육체노동자로 살았습니다. 멋있게 부르면 함석세공업자였고, 낮춰서 부르면 땜장이였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그분 일을 돕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제가 집수리에 관계된 일은 비교적 잘하는 편입니다. 제 아버님의 인생에서 보듯이 가난한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척박한지는 저도 잘 압니다. 하루 노동을 끝내고 마시는 막걸리 한잔이 그에게 위로였습니다. 그렇지만 그 가난한 삶에도 여전히 창조의 선하신 능력이 은폐되어 있다고 저는 생각하고 그렇게 믿습니다. 본회퍼는 사형당하기 몇 달 전에 감옥에서하나님의 선하신 능력이라는 기도문을 썼다고 하지 않습니다.

 

지난 213일 밤 8시 저는신학공부’ 6십자가와 부활에 관해서를 생방송으로 강독했습니다. 강독 중간에 위르겐 몰트만의 책 『예수 그리스도의 길』(부제: 메시야적 차원의 그리스도론)을 소개했습니다. 그 책 4장 제목은그리스도의 묵시사상적 고난이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고난의끝판왕입니다. 그걸 묵시적 고난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바로 그 고난에서 하나님의 구원이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인간 역사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철저한 실패였으나 하나님 역사에서는 승리였습니다. 4장 마지막 단락인깊은 곳에서의 부르짖음에서 몰트만은 이렇게 말합니다. ‘골고다의 십자가에서 고문당하고 절망하는 그리스도의 부르짖음은죽음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는 부활의 서막이다.’ 그래서 예수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의 죄가 용서받을 수 있게 되었다고 외쳤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로마 제국의 질서로만 세상과 삶을 판단하는 겁니다.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고 권력을 손에 넣은 자가 승리자라는 패러다임으로만 세상을 봅니다. 이와 달리 그리스도교는 오히려 그런 로마 제국의 권력에 의해서 십자가 처형을 당한 예수님을 통해서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고 믿었습니다. 누가 옳은가요? 로마 황제와 제국의 권세와 이데올로기인가요, 십자가에 죽은 예수님인가요! 대답하기 곤란할 겁니다.

 

오늘 본문 19절은 예수 구원의 능력이 얼마나 심층적인지를 아주 특이한 진술을 통해서 묘사했습니다.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여기서 말하는은 죽은 자들이 가는 곳입니다. 영어와 독일어 사도신경에는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께서지옥에 내려가셨다.’라는 구절이 들어있습니다. 지옥에 내려가신 이유는 지옥에 있는 영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겁니다. 이 대목이 들어간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능력이 아주 심층적이고 보편적이라는 사실을 말하려는 데에 있습니다. 지옥에 떨어진 이들에게도 하나님의 창조 능력과 구원 능력이 완전히 단절되지 않았다고 말입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셨다고 말하는 본문이 여전히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신가요? 좀더 분명한 설명이 필요하신가요? 예수의 승천은 우주 공간으로 공중 부양하신 게 아니라 종말에 완성될 하나님의 생명으로 변화되셨다는 뜻입니다. 그런 변화를 가리켜서 부활이라고 합니다. 부활과 승천은 똑같은 뜻입니다. 그런데도 서로 다른 단어를 쓰는 이유는 종말론적 생명으로의 변화가 예수의 제자들에게만 일시적으로 경험되었고 오늘 우리에게는 가려졌기 때문입니다. 비유적으로 여러분이 태어나기 전에 죽은 증조할머니나 할아버지에 대한 아버지의 경험을 여러분이 똑같이 할 수 없는 거와 같습니다. 예수 승천이 가리키는 것은 종말론적 생명이라 할 예수 부활이 우리의 일상에 은폐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늘을 보고 싶으면 우주 공간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일상의 깊이로 들어가야 합니다. 깊이라는 말이 어색하면 신비라고 해도 됩니다. 그것도 멀게 느껴지면 사랑이라고 해도 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로부터 우리가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영혼으로 받아들인다면 고난도 고난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 일상의 깊이에서는 인생살이에 대한 우리의 선입견이 힘을 잃습니다. 지옥 같은 곳도 그 하나님의 생명을 만날 기회는 남아있습니다. 우리가저 사람 인생은 종 쳤어.’라는 말을 들을만한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창조 능력과 그 선하심은 남아있습니다. 사형수들에게도, 콜걸들에게도, 시한부 생명을 선고받은 사람들에게도, 예수 당시의 세리와 창녀와 죄인들에게도, 자살을 계획하는 사람들에게도, 사기꾼과 노름꾼들에게도, 꼴찌들에게도, 전쟁터에 버려진 이들에게도, 큰 수술을 앞둔 사람에게도 다 열려 있습니다. 지옥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그런 이들에게 가지 않으시겠습니까. 다만 그들이 그 창조의 선한 능력을 받아들이는지 아닌지는 본인들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방안에 들어앉아서는 햇빛을 받을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의 우편에 계시니

 

본문은 승천하신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계신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하나님께 우편이 있고 좌편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시겠지요. 하나님의 우편은 하나님과 똑같은 권위가 있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본문이 하나님께만 해당하는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이그에게 복종하느니라.’라고 말한 겁니다. 이런 표현도 세상 사람들에게는 이상하게 들립니다. 로마 황제에게 복종하지 어떻게 예수에게 복종하느냐고, 그런 표현은 순전히 종교적인 차원에 속할 뿐이지 현실에서는 설득력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경제력과 정치 권력과 대중적 인기에 매달립니다. 보통 매달리는 정도가 아니라 자기의 삶을 거기에 완전히 소진합니다. 거기에 복종하는 겁니다. 그런 삶의 목표를 성취한다고 해서 행복하다는 보장이 없는데도 무작정 휩쓸려서 달려갈 뿐입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님과 그리스도교 신앙을 우습게 여기거나 멀게 느낍니다. 이런 시대 정신 가운데 두 발을 딛고 사는 여러분은 만물이 예수께 복종한다는 성경의 증언을 이해할 수 있고, 그렇다고 실제로 믿으시나요?

 

판넨베르크는 졸역 『사도신경해설』158쪽에서 이 문제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예수가 재림할 때 계시될 그것이 비밀스럽게 오늘의 현실성이 되는 것이야말로 부활한 자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있다는 진술의 핵심적 의미이다.” 재림하실 예수는 심판자입니다. 추수 때에 알곡은 모아서 곡간에 넣어두고 가라지는 모아서 불에 태웁니다.( 13:30) 여기서 두 가지 사실을 우리는 눈여겨봐야 합니다. 하나는 그 종말 때까지는 세상 권력이 기세를 올린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하나는 종말 심판이 오늘 여기 우리의 일상에서 비밀스럽게 현실성(reality)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안다면 로마 제국의 폭력성 앞에서 절대 두려워하지 않을 겁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큰 부자가 누군가요? 매일 1억 원씩 써도 평생 다 쓰지 못할 겁니다. 그는 돈에 파묻혀서 살다가 곧 늙어 죽습니다. 가장 큰 부자였다는 사실만 역사책에 기록되겠지요. 그는 죽을 때 그 많은 돈으로 행복했다고 고백하지 못합니다. 돈은 우리의 영혼을 절대 만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돈으로 사랑을 살 수 없듯이 말입니다. 여기 가난하지만, 돈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모든 존재하는 것들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는 자신의 일상에 이미 종말에 완성될 생명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땅에 묻힌 보물을 찾는 사람의 심정으로, 그리고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기 위해서 등잔을 손에 든 여자처럼 일상을 깨어 있는 영성으로 삽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의 삶에는 하나님께서 이루실 종말론적 생명이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이런 삶보다 더 참되고 더 의미 있는 삶이 있을까요? 저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저는 여러분과 함께 예수께서는 승천하셨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며,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 모두를 심판하러 다시 오신다는 신앙고백을 담담하면서도 당당하게 외칠 수 있습니다. 아멘.

 

 

 

옥에 있는 영들에게 /벧전3:19-22/ 염두철목사

2023-02-05 06:33:32

 

오늘 본문은 베드로의 편지뿐만이 아니라, 신약성경 전체에서 해석하기 가장 어려운 부분 중의 하나입니다. 의견이 워낙 분분해서이것이다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그냥 지나칠까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본문을 가지고 한 번쯤은 다뤄야만 할 것이기에 오늘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베드로는 앞서 의인으로서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그 부활의 의미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해주시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여기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를 잘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19-20절이 문제입니다.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이 구절을 근거로예수님께서 지옥에 내려가셨다라고 되어 있는 일부 사도신경 사본들이 전해지고 있고, 어떤 영어 사도신경에는예수님께서 지옥에 내려가셨다(He descended into hell)’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도신경에는 그 내용이 빠져 있습니다. 그 이유는 비록 이 내용을 보존하고 있는 교회조차도 그것을 문자적으로 이해하기보다, 우리를 위하여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진노로 고난당하셨다는 진리의 비유적 표현으로서 간주하는 칼빈의 견해를 따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9 27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는 구절을 근거로, 죽은 자에게 다시 구원의 기회가 주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통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에 대하여 단번에 모든 사람을 위하여 대속의 죽음을 당하시고 부활하신 인류의 구주라고 가르칩니다. 예수님을 믿어야만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칩니다. 예수님 외에는 구원이 없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 죽은 사람들이나 예수님이 오신 후에도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느냐는 질문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에서는 명쾌한 답을 하지 못하고그것은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일이다라고 대답할 뿐이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무엇보다도 성경적 근거가 빈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죽은 자에게 구원의 기회가 주어질 수 있다는 학자들의 견해와 해석이 결코 보편적인 합의에 이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실질적인 원인은 제2의 구원의 기회를 인정함으로서 파생되는 엄청난 교리적, 선교 신학적 문제와 파문을 걷잡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영으로 옥에 가신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중요한 것은 편지를 쓴 사도 베드로의 의도입니다. 베드로가 편지를 쓴 것은 고난 받는 성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한 것이었지 그들에게 느닷없이 어떤 복잡한 교리를 가르치려 한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베드로의 편지가 신학적이거나 교리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베드로 서신의 성격을 생각하면 우리는 단순하게 본문을 대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궁금하게 여기는 몇 가지 사항에 대해서 간단하게 답하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예수님께서 영들에게 언제 전파하러 가셨을까요?

본문 19절을 보면영으로 가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육신 전에, 그의 죽음과 부활 사이에, 승천 후에 세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그러나 앞서 베드로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셨기 때문에 죽음과 부활 사이로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몸은 무덤 속에 있었고, 예수님은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내려가시어 선포하셨을 것입니다. 선포한 내용은 무엇인지는 전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영들에게 가셨다는 사실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누가복음 23 4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회개한 강도에게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죽으신 3일 동안에 지옥에 가셨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서로 대치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조화시키는 것이 필요하리라 생각됩니다. 낙원에 가셨다가 옥에 있는 영들에게로 가셨을까요? 그 어떤 답도 추측일 뿐입니다.

 

어쨌든 본문에서는 음부로 여겨지는 곳에 예수님께서 가셔서 선포하셨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으므로 가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둘째로, 베드로가 말하는 옥은 어디일까요?

본문 19절의이라는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유대인들의 사후 세계에 대해서 알 필요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죽은 자들의 영역은 스올과 하데스입니다. 스올은 음부, 하데스는 지옥을 의미합니다.

베드로는 본문에서 옥이라는 말을 쓸 때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유대인이었고, 수신자 또한 유대인들이었기 때문에 그가 사용한 옥이 음부, 또는 지옥이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사상에 의하면 음부는 죽은 모든 사람이 가게 되는 장소입니다. 유대인들은 죽은 후에 생명에 대해서는 뚜렷한 관념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죽은 인간의 영이 영원히 어슴푸레한 속에서 회색빛 유령처럼 움직이는 곳, 즉 빛도 힘도 기쁨도 없는 어두운 세계에 머무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세계가 음부였습니다. 모든 인간의 영이 죽고 나서 가는 곳은 이러한 컴컴하고 음침한 곳이었습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이 음부의 개념이 조금 더 구체화되어서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최후의 벌과 심판이 이루어질 때까지 영들을 넣어 두는 일종의 감옥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천주교에서는 본문 19절과 고린도전서 3 13-16절의 말씀을 근거로 연옥설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천주교의 연옥설은 제2의 구원의 기회를 인정하는 교리로서 사람들의 문제 제기에 합리적으로 대응한 것입니다.

연옥은 천국과 지옥의 중간 영역으로 완전한 신자는 곧바로 천국으로 가지만 불완전한 신자는 연옥에 가서 형벌을 받아 그 영혼이 정결하게 된 후에 천국으로 가게 되는 데 그 정결은 불로 말미암은 것이며 그러므로 천국은 불로 에워싸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연옥은 교회의 지배권 내에 있으므로 교황은 연옥의 영들을 해방시켜 천국으로 보내는 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죽은 자를 위한 기도, 죽은 자를 위한 헌금 등이 여기서 비롯된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킬 무렵 성 베드로 대성전 건립을 위해 대대적으로 헌금을 거두고 있었습니다. 이 때 선전 위원이었던 테첼 신부는 사람들을 모아 놓고 이런 말로 면죄부를 팔았습니다.

여러분의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아버지가 아들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애원하며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우리가 너희들을 낳지 않았느냐? 양육하고 기르고 재산까지 남겨주지 않았느냐? 너희들은 그렇게도 잔인하고 인색해서 조그마한 돈을 내어 우리를 건져내려고도 하지 않느냐? 너희들은 우리들을 이 불 속에 그대로 있게 하려느냐? 우리들에게 약속된 영광을 지체시키려느냐?’

 

여러분은 지금 부모들을 구해낼 수 있습니다. 동전이 부모들을 구해낼 수 있습니다. 동전이 궤 속에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그들의 영혼이 연옥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금화 한 풀로닌의 4분의 1을 지불하고 이 면죄부 증서를 사서 영혼을 낙원으로 인도하시기를 원치 않으십니까?”

 

선량하고 순박한 농민과 양심은 예민하나 무식한 민중은 저마다 자기의 죄, 사랑하는 이의 죄를 위해 있는 재산을 다 바쳐 면죄부를 사러 모여들었습니다.

 

이것이 연옥 교리가 가져온 문제였고 부작용이었습니다. 결국 연옥설은 하나님의 계시에 의한 것이 아니고 인간의 이성의 산물입니다. 사람들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 낸 비성경적 교리입니다. 여기에 천주교의 근본적인 문제점이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옥에 있는 영들은 누구일까요?

 

본문 20절을 보겠습니다.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 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그들은 노아의 설교에 불순종한 사람들, 즉 노아가 방주 짓기를 다 마치기까지 하나님이 오래참고 기다릴 때 불순종했던 자들, 방주가 지어지던 120년 동안 하나님의 메시지에 대항하여 반역했던 자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지옥에 있는 영들에게 가서 다시 구원의 기회를 주신 것이라고 가정한다면 여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모든 영들에게 기회를 주셨어야지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만 그리하셨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이 말씀은 영이신 예수님께서 노아 당시에 노아를 통해 전파하셨던 것을 의미하며, 그들이 그 당시에는 지옥에 있었던 것이 아니지만 이제는 그들이 영의 상태로 지옥에 있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했다는 식으로 설명하려 했습니다.

 

그리고 칼빈과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지옥 고통을 겪으신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설명하려 했고, 웨스트민스터 교리문답은 죽음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설명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설명도 만족스럽지 못하고, 이 여러 설명들 가운데 어떤 설명이 가장 맞는 것인지도 알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각자의 판단에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 말씀 중에는 다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의 편지 베드로후서 2 16절에서 성경 해석과 관련하여 이런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베드로가 말하는 편지는 사도 바울의 편지를 말합니다. 알기 어려운 것은 억지로 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옥에 있는 영들에 관한 해석은 이 정도만 하고 나머지 부분을 보겠습니다.

 

베드로는 노아 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물을 통해서 구원을 받았고, 그 이외에 모든 불신자들은 물을 통해서 영원한 멸망을 받았습니다. 베드로는 여기서 세례의 의미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본문 21절을 보겠습니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세례란 우리의 육신의 더러운 것을 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향하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물로, 침례 또는 세례를 베푸는 형식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물속에 들어감으로 침례 받는 것이나 물을 뿌려 세례를 받는 의식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진리의 성령으로 영이 거듭나서 그 영이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새로운 선한 양심을 갖게 되고, 그 양심으로 영광의 하나님을 향하여 계속 찾아가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유아세례가 문제입니다. 어린아이는 자발적으로 믿음을 고백할 수 없습니다. 그런 아이에게 세례를 주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물로 세례 받는 의식을 신성시해서 세례 받으면 구원이고, 세례를 받지 못하면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생각하면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베드로의 의도를 알아야 합니다.

 

베드로의 말하고자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성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입니다. 당시 초대 교회 성도들은 고난을 당하면서 낮은 자리에 있었습니다. 성도들은 사회에서 배척을 당했고,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낮아지고 낮아져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셨을 뿐 아니라 지옥에까지 내려가셨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며 성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낮아져서 비천해지면내가 이렇게까지 살아야 하나라고 낙심하고 좌절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고, 높아지고, 출세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이것이 목적이라면 베드로나 바울, 그리고 당시 성도들은 모두 실패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육체의 정욕과 교만을 버리고 예수님처럼 비우고 낮아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낮아졌다고 해서 하나님 나라에서도 낮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낮아지셨을 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높여주셨습니다.

본문 22절을 보겠습니다. “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높이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하늘로 돌아가셨고, 하나님 우편에 계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 자리인 보좌 우편에서 모든 만물과 만사를 주권적으로 통치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도 빌립보서 2 9-11절에서 말씀한 바 있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예수님의 낮아지심은 높아지심으로 끝이 났습니다. 베드로나 바울이 이런 말씀을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하나님을 위하여 살고자 낮아질 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비천해질 때 하나님 나라에서 반드시 우리를 높여 주시고 영광을 얻게 하신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러한 소망은 당시 박해와 고난을 받고 있는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며 격려가 되고 주님을 뒤 따를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얻게 했겠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위해 낮아지면 높아집니다. 주님을 위해 죽으면 주님과 함께 살게 됩니다. 또한 주를 위해 고난을 받으면 영원히 영광될 것입니다. 죽음 다음에 부활이 있습니다. 고난 다음에 영광이 있습니다.

이 부활과 영광은 세상의 썩어지고 쇠하여질 것과는 다릅니다. 영원한 것입니다. 주와 함께 고난 받으면 주와 함께 영광 받게 되는 것입니다.

 

히말라야 고산족들이 소나 양의 값을 매기는 기준이 재미있습니다. 그들은 소나 양의 값을 정할 때 무게를 따지거나 겉모습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 짐승의 버릇을 보아 값을 정한다고 합니다.

 

풀을 먹을 때 아래서부터 위로 오르며 먹는 짐승의 값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며 풀을 뜯어먹는 짐승의 값보다 높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저 지대에는 풀이 없어서 아래로 내려가는 습성을 가진 짐승을 자칫 굶어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교훈을 줍니다. 우리도 위로 올라가야 합니다. 위에 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의 현실이 조금은 버겁고 힘들고 어렵더라도 하늘을 바라보며 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붙잡고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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