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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베드로서 설교 모음

베드로전서 3:1 - 12절 설교 모음

by Jessi J 2024. 10.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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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전3:1-7/ 사랑받는 아내, 존경받는 남편이 되십시오 /김은호 목사

2015-05-06 16:12:54

 

34일 동안 남가주 사랑의 교회 한어대학부 수양회를 인도하고 전교인 특별새벽기도회 첫날 말씀을 전하고 돌아왔습니다. 위하여 기도해 주신 성도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주님께서 크고도 놀라운 일을 행하심으로 주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시간들이었습니다.

 

말씀을 듣는 중에 방언이 터지기도 하고 성령께서 기름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많은 형제와 자매들이 치유를 받고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수양회 마지막 날에는 새벽 340분까지 기도로 그들을 섬겼는데 젊은이들의 마음속에 상처가 너무 많았습니다. 그들이 가장 많이 받은 상처는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였습니다.

 

저는 기도를 하기 전에 그들의 기도의 제목이 무엇인지를 묻고 기도하기 시작했는데 그들이 저에게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을 왔는데 부모가 이혼을 했어요, 나는 지금 누구를 선택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엄마가 아빠를 버리고 다른 남자를 만나기 시작했어요, 엄마가 우리를 배신했어요” “아빠가 엄마를 때리는 것을 보았어요어떤 학생은 아빠가 나를 때리고 내 강아지를 때렸어요그래서 어떤 학생은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빠를 죽이고 싶어요” “아니 높은 곳에 올라가면 떨어져 죽고 싶고 달리는 차에서 떨어져 죽고 싶어요

 

부모 때문에 울고 있는 자녀들이 너무 많았어요. 자식을 위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고 미국으로까지 이민을 갔는데 부모 때문에 상처를 받고 부모 때문에 힘들어 하는 자녀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저는 부모 때문에 상처를 받고 부모 때문에 울고 있는 자녀들을 보면서 과연 나는 내 자녀들에게 얼마나 많은 상처를 주었을까? 말은 하지 않지만 내 사랑하는 자녀들은 어떤 상처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을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을 살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상처를 받을 때가 많습니다. 선생님으로부터 상처를 받기도 하고 때로는 직장의 동료와 상사로부터 상처를 받기도 하고, 친한 친구로부터 상처를 받기도 하고, 사랑했던 사람으로부터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사랑했던 남편으로부터 상처를 받기도 하고 아내로부터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나를 낳아주신 부모로부터 상처를 받기도 하고 심지어는 내가 낳은 자식으로부터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상처는 나를 아는 사람 나와 관련된 사람으로부터 받게 되고 내가 사랑했던 사람에게는 사랑했던 만큼 더 큰 상처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가 많고 남편과 아내로부터 받은 상처가 크고 깊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부부에 대하여 권면하고 있습니다. 1절부터 6절까지는 아내에 대한 권면을 다루고 있고 7절은 남편에 대한 권면을 다루고 있습니다.

 

남편에 대한 권면은 짧은 반면에 아내에 대한 권면이 길게 기록되어 있는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만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 가운데 여자 성도들이 차지하는 비율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먼저 아내들에게 주시는 권면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아내에게 주는 권면(1-6)

 

1. 남편에게 순복하라(1)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1)

 

바울은 아내 된 자들에게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고 말씀합니다. “이와같이라는 말은 2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백성이나 종이 주인과 왕에게 순복 하듯이 그렇게 순복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왜 성경은 남편에게 순복하라고 가르치고 있을까요?

 

가정의 질서를 위해서

 

그것은 바로 첫째로, 가정의 질서를 위해서입니다. 여자가 못나서가 아닙니다. 열등한 존재여서가 아닙니다.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가정의 질서를 위해서 아내는 남편에게 순복하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성경은 남녀평등을 말합니다.

 

이 편지가 쓰여질 당시 여자들은 남자의 소유물에 불과했습니다. 사람의 숫자에 들어가지도 못했습니다. 한 사람의 인격체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는 시집가는 딸에게 시집가면 벙어리 3, 귀머거리 3년이 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힘들다고 친정으로 올 생각 말고 그 집 귀신이 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천지만물을 창조할 때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남녀는 평등하다고 가르칩니다. 3:28절을 볼까요?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3:28)

 

여기서 하나이니라는 말은 동일하다는 말입니다. 우리 예수님도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은 나와 아버지는 권능과 영광이 동등한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을 다른 말로 바꾸면 평등하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이와 같이 처음부터 끝까지 남녀평등을 말합니다. 역사적으로도 보면 기독교가 들어간 곳마다 여성들이 자유함을 얻었고 여성들의 지위가 회복되었습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처럼 여성들의 지위가 향상된 나라도 많지 않을 것입니다.

백화점을 가 보십시오. 1층부터 5층까지는 전부 여성들만을 위한 매장입니다. 화장품, 액세서리, 핸드백, 여성의류....남자들은 6층이나 7층 밖에 없습니다.

 

부부싸움을 하게 되더라고 대부분 여자분들이 이기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어느 날 스승에게 제자가 찾아왔습니다. 제자가 묻기를 선생님 댁은 언제나 찾아 뵈도 늘 가정이 화목하고 사모님과도 부부싸움 한 번도 안하시는 것 같은데 무슨 비결이라도 있습니까? 저희들은 이틀이 멀다고 밤낮 부부싸움하는데요

 

그 말을 들은 선생님 이렇게 대답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부부싸움을 하는 건 남편의 할 일과 부인의 할 일의 업무한계를 뚜렷이 구분해 놓고 피차 남의 일에 간섭하지 않기 때문일세

 

업무분담이요? 그게 뭡니까? 응 그건 간단해. 큰 일은 내가 결정하고 자질구레한 일은 마누라가 결정하지

 

그렇습니까? 그럼 사모님이 결정하는 작은 일은 무엇입니까?”

예를 들면 집을 아파트로 옮길 것인가? 단독주택으로 옮길 것인가? 자녀들의 배우자를 누구로 결정할 것인가? 이민을 갈 것인가? 이런 자질구레한 일들일세

 

그럼 선생님이 결정하시는 큰 일이란 무엇입니까?”

앞으로 달나라에 사람이 가서 살 수 있다면 우리 가족이 그곳으로 살 것인가? 말 것인지에 관한 것들이나, 앞으로 3차 대전이 일어날 경우 우리 가족이 취할 태도가 어떤 것인지, 남북통일이 돼서 한 나라가 되면 어떤 정당에 들어갈 것인지.....

 

이런 좀 더 거대한 문제들이지....사실 남편이 결정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만큼 아내가 대부분의 모든 것을 결정해야 집안이 시끄럽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호주 같은 나라는 여성들이 입법, 사법, 행정 3권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여성이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호주 남자들이 우리나라 여자들을 그렇게 좋아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부부가 평등함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아내더러 남편에게 순복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오늘의 이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주로 여성신학을 하시는 분들이 그렇게 주장을 합니다.

 

이 말씀은 남존여비사상을 중심으로 한 과거 문화의 반영이기 때문에 오늘의 남녀평등과 여권신장이라는 측면에서 재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이들은 하나님을 왜 아버지라고 부르는가?

 

이제는 하나님을 어머니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언어는 그 시대의 문화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그러나 본질은 변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아내에게 순종을 요구하는 것은 바로 가정의 질서를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질서가 무너지면 바로 혼돈 가운데 빠지게 되고 방종 가운데 살게 됩니다.

 

가정은 인생을 항해하는 하나의 배와 같습니다. 배에는 배를 움직이는 많은 사람들이 타고 있습니다. 기관사도 있고 항해사도 있고 갑판장도 있습니다. 그러나 선장은 오직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선장이 많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선장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올라갑니다. 비행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장은 한 사람 밖에 없습니다. 부기장도 있고 사무장도 있고 승무원도 있지만 기장은 한 사람 밖에 없습니다. 질서 때문입니다.

 

불신 남편의 구원을 위해서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1절하)

 

아내가 남편에게 순복해야 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믿지 않는 남편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믿지 않는 남편을 구원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말이 아닌 아내의 거룩한 행실입니다.

 

그러면 본문이 말하는 아내의 거룩한 행위는 무엇을 말합니까? 2절을 다같이 보겠습니다.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2)

 

여기서 두려워한다고 하는 것은 남편 앞에서 벌벌 떤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경건한 자세를 말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두려움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두려움을 가진 아내는 정결하고 깨끗한 삶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유혹이 많아도 남편 이외의 남자 친구를 사귀지 않습니다. 동창회 모임에 가도 기도하며 전도할 생각만 하지 술을 먹는다거나 고스톱을 치지 않습니다. 순결하고 정결한 삶을 삽니다. 이런 모습을 남편이 보고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왜 너는 병신같이 고스톱도 못치고 술도 못 먹고 춤도 못 추느냐며 핀잔을 주고 놀려대겠습니까? 남자들은 자기는 바람을 하면서도 자기 부인이 바람피우는 것을 못 봅니다.

 

사랑하는 자매 여러분!

진정 자매님이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당신의 남편이 예수를 믿지 않는다 할지라도 내 아내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려고 애쓰는 사람이기 때문에 세상 여자들이 어떻게 되더라도 나는 하나님을 믿는 내 아내는 믿을 수 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거스틴은 고백록에서 다음과 같은 고백을 했습니다.

나의 어머니는 아버지를 그녀의 주인으로 섬겼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저의 어머니로 하여금 설교하게 하심으로 아버지를 당신에게로 인도하셨습니다.”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는 방탕한 아들을 끝없는 기도로 변화시킴과 동시에 겸손과 순종의 삶을 통해 불신 남편도 변화시킨 위대한 아내였습니다. 말과 입술로는 불신자들을 감동시킬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거룩한 모습으로 살아갈 때 불신자들이 그 모습을 보고 주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왜 주님이 자매님에게 남편에 대한 순종을 요구하고 거룩한 삶을 요구하는지 아십니까? 바로 믿지 않는 당신 남편의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잔소리 한다고 남편이 변화되고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시끄럽게 떠들어대도 남편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말씀대로 가정의 질서를 위하여 순종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갈 때 남편의 마음이 움직여지고 주께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2. 외모 보다는 속 사람을 단장하라

 

사람들은 외모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닭살 돋는 말이지만 이쁜게 죄라면 나는 사형감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이 편지가 쓰여질 당시 부유한 사람들은 자신을 단장하는 일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었습니다. 3절을 다같이 볼까요?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3)

너희 단장(丹粧)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것을 말합니다. 이 말은 아무런 화장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외모를 무시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육체도 외모도 단장해야합니다. 머리는 빗지 않아 까치집이나 지어 다니고 얼굴도 창백하게 하고 다니고 옷도 지저분하게 입고 다니면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전도도 그런 사람이 하면 되지 않습니다. 적당하게 화장을 하고 옷도 단정하게 입고 머리도 단장을 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아내들에게 외모를 치장하는데 너무 신경쓰지 말고 보이지 않는 마음, 속사람을 단장하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머리에 색깔을 들이고, 볶고, 지지고, 장식을 하고 메이커 있는 옷을 입는 외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마음속에 있는 우리의 속사람을 아름답게 하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영원히 아름다운 것입니다.

 

사람들은 외모를 가지고 판단하고 가슴에 달린 상표를 보고 그 사람을 평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시고 가슴에 달린 메이커가 아니라 그 사람의 가슴속을 보고 평가하십니다.

 

그러면 보이지 않는 속사람을 어떻게 단장해야 합니까? 4절을 다같이 보겠습니다.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4)

 

온유함

아내는 무엇으로 단장을 해야 합니까? 온유함입니다. 부드럽고 따뜻한 매력이 흘러 나와야합니다. 사나운 여자를 좋아하는 남편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내는 온유해야 합니다.

 

안정된 마음

아내는 무엇으로 단장을 해야 할까요? 안정된 심령입니다. 안정된 마음으로 단장한다는 말은 아무리 무섭고 아무리 두려운 일을 만나도 걱정하지 않고, 놀라지 않는 태도를 말합니다. 안정한 심령은 환경에 지배를 받지 않는 평온한 마음, 정숙한 마음입니다.

 

살다보면 남편이 사업에 실패할 수도 있고 자녀가 원하는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실패할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아내는 가정을 안정되게 해야 합니다.

 

평온하게 해야 합니다. 아내는 돕는 배필입니다. 그러므로 남편을 늘 위로하고 격려하고 용기를 심어주어야 합니다. 끊임없이 남편의 부족한 점을 격려해 주어야합니다.

 

사업에 실패한 남편을 향하여 당신 같지 않게 왜 그렇게 두려워하세요. 요즘 왜 그렇게 기가 죽어 사세요. 우리 기도합시다. 기도할 수 있는데 왜 낙망하세요.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목전의 은총, 역전의 은혜를 허락해 주실 거에요

 

그런데 만일 아내가 더 화를 내고, 더 못 견디어 하고, 아내가 더 시끄럽게 하고 엄마가 더 화를 내고 힘들어 하면 가정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아내는 안정된 마음으로 단장을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외모의 단장 보다 중요한 것은 사실 마음의 단장입니다. 결혼해서 살다보면 육체의 아름다움 보다는 마음의 아름다움이 더 중요한 것임을 실감합니다.

 

외모의 아름다움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마음의 아름다움은 평생갑니다. 그런데 요즘 젊은 사람들은 사람들을 평가할 때에도 너무 외적인 것만을 까지고 평가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 이런 말이 있습니다.

10대는 샘플 20대는 신품 30대는 명품 40대는 이월상품 50대는 바겐세일 60대는 재고정리 70대는 창고대반출 80대는 분리수거. 90대는 소각처리다는 말이 있습니다. 비성경적인 말입니다. 사탄적인 말입니다. 마음이 아름다우면 세월이 흘러가면서 더 아름다워지고 더 사랑스러워지는 것입니다.

 

어떤 아내가 남편으로부터 사랑을 받습니까? 가정의 질서를 위하여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는 아내입니다. 온유함과 안정된 마음으로 마음을 아름답게 단장한 아내입니다.

 

5절과 6절은 이렇게 마음을 온유함과 안정된 마음으로 단장하고 순종함으로 단장하였던 사람으로 사라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없기 때문에 이 부분은 생략하고 남자들에게 주신 권면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남편에게 주는 권면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7)

 

1.지식을 따라 동거하라

 

남편에게 주신 권면은 바로 지식을 따라 아내와 동거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식을 따라 사랑해야 합니다. 무식한 사랑을 하면 안됩니다. 무식한 사랑을 하면 그 사랑이 오히려 아내를 괴롭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아내를 공부해야 합니다. 아내를 연구해야 합니다.

 

남자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이지만 여성은 지극히 감성적입니다. 그래서 식당을 골라도 남편은 값싸고 양 많은 곳을 고릅니다. 반면에 아내는 분위기가 좋은 곳을 선택합니다. 그러다보니 아내는 남편에게 돼지같이 양만 따진다고 비난하고 반면에 남편은 아내에게 겉멋만 들 실속이 없다고 핀잔을 줍니다.

 

TV를 볼 때에도 남편은 뉴스와 스포츠를 보기 좋아하고 아내는 드라마를 보고 감성에 젖어 눈물을 흘리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다보니 아내는 새로운 뉴스의 내용보다 드라마 주인공의 운명에 대해 더 관심이 많습니다.

 

사람은 나이가 들어 중년기가 되면 남자가 여성화되고 여자가 남성화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남자는 집 안에만 있고 싶어 하고 여자는 나가고 싶어 합니다.

 

남자는 하루 종일 세상에서 할 말을 다 하고 들어와서는 말하기 싫어 침묵하는데 여자는 하루 종일 제대로 말 한마디 못하고 살림만 하다가 남편이 돌아오면 말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모르고 남편은 아내가 바가지를 긁는다고 구박을 합니다.

 

아내에 대한 지식이 필요합니다. 결혼만 해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을 따라 동거하라는 말은 여자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게 필요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무식한 남자들은 무조건 결혼하고 살기만 하면 되는 줄 압니다.

 

돈만 벌어다 주면 되는 줄 압니다. 평소보다 두 배의 돈을 가져다 주변 아내가 두 배나 더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내를 사랑하고 함께 동거함에는 지식이 필요합니다. 지식이 없이 아내와 동거하는 것은 곧 귀한 물건을 사 놓고도 사용하는 방법을 몰라서 썩혀 두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또 성경을 보니까 지식을 따라 동거하되 누구하고 동거하라고 했습니까?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렇습니다. 동거는 아내하고만 동거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하고 동거해서는 안 됩니다. 옆집 아주머니하고 동거해서는 안 됩니다. 직장의 미스리하고도 동거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동거해야 할 대상은 아내입니다.

 

 

2. 지식의 내용은?

그러면 지식을 따라 동거하라고 했는데 그 지식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아내는 더 연약한 그릇이다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남편들이 꼭 기억해야 할 아내에 대한 지식은 아내는 남자보다 더 연약한 그릇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연약한 그릇이란 여성이 남성보다 더 열등한 존재라는 의미가 결코 아닙니다. 성경은 한번도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하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그릇이란 흙으로 만들어 불에 구운 질그릇을 의미합니다. 질그릇은 잘 깨어집니다. 떨어뜨리기만 해도 깨어지는 것이 질그릇입니다.

 

아내가 연약한 그릇이라는 말은 떨어지면 깨어지는 질그릇과 같은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남편의 도움과 세밀한 관심을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육체적으로 볼 때에도 아내는 남편에 비해 힘이 없습니다. 정서적으로 볼 때에도 아내는 쉽게 상처를 받습니다. 여성은 작은 말 한마디로도 상처를 받기도 하고 한번 상처를 받으면 오랫동안 힘들어합니다. 그래서 입술의 30초가 가슴의 30년이 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생명의 은혜를 함께 유업으로 얻을 자이다.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또 남편이 알아야 할 아내에 대한 지식은 생명의 은혜를 함께 유업으로 받을 자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생명의 은혜란 영생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천국을 같이 누릴 존재라는 말입니다.

 

아내가 남편과 함께 생명의 은혜를 공동으로 받게 된다는 말은 그 시대에 혁명적인 선언과도 같은 말씀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여성을 한 인격이 아니라 마치 노예처럼 남성들의 재산이나 소유물정도로 취급하던 시대였습니다.

 

언제나 아내는 남편의 뒤만 따라다니는 그늘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아내도 남편과 함께 동등하게 영생의 기업을 함께 얻게 된다는 것, 구원의 축복을 아내와 남편이 함께 누리게 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3. 왜 지식을 따라 동거해야 하는가?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7절하)

 

기도가 막히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기도는 관계입니다. 관계가 막히면 하나님과의 관계도 막힐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예배를 드리다가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그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5:24)

 

기도가 막힌다는 것은 기도해도 하나님이 듣지 않으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시편 기자는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66:18)고 했습니다.

 

아내와의 관계가 잘못되면 기도가 막히게 되어 있습니다.

왜 우리가 아내를 귀히 여겨야 할까요? 왜 우리가 지식을 따라 아내와 동거해야 할까요?

하나님과의 교제가 막히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아내와의 관계가 깨어지면 하나님과의 관계도 정상적일 수가 없습니다.

 

기도가 막히면 우리는 살 수 없습니다. 답답해서 살 수가 없습니다. 기도(祈禱)가 막히면 기도(氣道)가 막힙니다.

 

기도가 막히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축복이 단절됩니다. 그러므로 가정의 축복을 위해서라도 자녀를 위해서라도 아내를 귀히 여겨야 합니다. 사랑해야 합니다. 지식을 따라 아내와 동거할 때 존경받는 남편이 될 수 있습니다. 돈이 있다고 존경받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이 말씀을 우리 모든 분들이 사랑받는 아내, 존경받는 남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시 관계를 생각하십시오 . /벧전3:1-12/ 김병삼목사

2018-11-07 03:45:10

 

1.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

2.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실을 봄이라

3.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4.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5.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6.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순종한 것 같이 너희는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하면 그의 딸이 된 것이니라

7.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또는 그 아내를 더 연약한 그릇 같이 여겨 지식을 따라 동거하고

8.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9.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10.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11.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

12.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얼굴은 악행하는 자들을 대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

 

관계란 무엇일까요?

관계를 생각하는데 있어서 우리가 얼마나 일방적인지를 깨달으려면 운전할 때의 모습을 떠올려보면 분명해질 것입니다.

운전을 조금 빨리 하는 사람들이라면 정속주행을 하거나 안전운전을 하는 사람으로 인해 앞길이 막혀 있다면 속이 탈 것입니다.

 

운전을 조금 느리게 하는 사람들이라면 빨리 운전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난폭함에 자신이 얼마나 분노하거나 상대방을 경멸하고 있는 지를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스캇 솔즈의 [예수님처럼 친구가 되어주라]에 나오는 글을 조금 소개해 보겠습니다.

코미디언 조지 칼린은 세상에 두 종류의 운전자가 있다고 말했다. 바보 운전자와 미치광이 운전자다. 나보다 느리게 달리면 바보고, 나보다 빨리 달리면 미치광이다.”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상대방을 향해 우리가 가지는 감정 똑바로 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정확한 fact로서의 옳고 그름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내가 원하는 것을 한다는 것이 똑바르다는 기분이 아닐까요?

이런 마음을 우리는 통제의 유혹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서 기자가 부부간의 새로운 관계를 이야기하고, 또 살아가는 삶에서 만나는 누군가에게도 새로운 관계가 적용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조금 직설적으로 아니,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우리가 원하는 대로 통제하려고 하지 않을 때 새로운 관계가 만들어 진다는 것입니다.

부부의 관계가 깨어지는 것은 상대방을 통제하려고 하면서부터입니다. 아니, 깨어지지 않는다 해도 통제하려는 사람과 그 통제를 힘들어하는 상대방으로 인해 많은 상처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통제는 늘 내가 옳다는 신념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자녀의 삶에서도 내가 늘 옳다고 생각하면서 조바심을 내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녀들이 그렇게 내 맘대로 되지 않기 때문이죠.

결국 관계의 시작은 의 통제로부터 하나님의 통제로 권한을 이양하는 데부터 시작하는 것은 아닐까요?

저는 목회자의 자녀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제일 많이들은 말이 너 목사아들이. . .목사 아들답게. . .’라는 말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무언의 통제 아래 들어간 것이죠. 그래서 이런 통제의 압박을 느끼는 순간, 그 통제를 벗어나기 위한 갈등이 시작되는 것이죠.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생각해 보면 저 역시 우리 아이들을 참 힘들게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목회자의 자녀로 우리 아이들이 다른 사람에게 눈총을 받거나 피해가 가는 것을 못 견뎌 해서 통제하려고 했던 적이 참 많기 때문이죠.

물론 바르게 훈계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늘 부모의 기준에서 아이들을 보고 통제하려고 했던 것이죠.

 

스캇 솔즈가 아주 멋진 표현을 했는데,

최고의 작가에게 훈수를 두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남의 이야기를 쓰는 일은 내 몫이 아니다. 걱정이 되긴 하지만 주님께 맡겨야 한다. 특히 자기 자녀의 이야기를 쓸 권리를 주님 앞에 내려놓는 건 정말 힘든 이리다. 그래도 내려놓아야 한다. . . 우리가 통제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것이 항상 더 낫다.”

 

중요한 신앙적 태도: 하나님 앞에서

오늘 본문 말씀의 시작이 아내들을 무척 불편하게 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씀은 성경에 나타나는 아주 일관성 있는 견해입니다. 1절 말씀을 보세요.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

 

오늘 말씀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단서가 되는 말이 있다면 이와 같이라는 말입니다. 왜냐면, 베드로전서 2장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하여 언급한 것과 같이, 아내들에게 명령하는 것입니다.

지금 아내와 남편의 관계를 말하기에 앞서,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시작하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의 신앙 위에서 세워지는 가정을 이야기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순종적인 모습을 본받아서,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아마 우리들에게 가장 힘든 일이 순종할 수 없는 사람에게 순종하고, 존경할 수 없는 사람을 존경하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아닐까요?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해야하는 이유에 대하여도 그렇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이 전제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남편에게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아내가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도 듣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남편에 대한 구원의 계획을 가지고 있으니, 말로 전하는 것에서 그치지 말고 행실로 보여 주라는 것입니다.

 

이런 말이 있지요.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감동이지 강요가 아니다!

남편 때문에 힘들어 하는 아내들이 있다면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남편을 구원하는 것은 잔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순종하는 이유가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는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보여줄 수 있는 모습, 순종은 외적인 것이 아닙니다. 본문 3절을 보세요.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진정한 단장과 태도는 이러합니다. 4절 말씀.

 

4.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unfading beauty of a gentle and quiet spirit” - ‘inner self’

 

하나님 앞에 값지다라는 말을 베드로 2장과 연관 지어 묵상해 보면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합니다.

하나님 의식이 살아 있을 때, 고난을 받는 것도 의미가 있고, 환난을 당해도 능히 견딜 수 있듯이.

아내가 남편 앞에서 행하는 것 역시 동일합니다.

겉으로 잘하거나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사람 ‘inner self’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으로 남편에게 대할 때 이것이 하나님께 값진 것입니다.

영어 성경에 표현된 ‘everlasting ornament’라는 말, 즉 썩지 아니할 장식이 바로 온유하고 안정된 심령입니다.

3절과 연결 지어 본다면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모든 것은 썩어질 것입니다.

 

진정으로 강한 것이 온유함이라는 것을 알지만 잘 되지 않습니다.

쇠를 구부러뜨린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먹으로 때려서 가능할까요?

그런데 불로 가열하기 시작하면 서서히 강함이 부드러움으로 변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부드러워지면 원하는 모양을 만들 수 있게 됩니다.

 

맹자에게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한번은 어떤 문하생이 연로한 맹자에게 질문을 합니다. “선생님, 강한 게 오래갑니까? 부드러운 게 오래갑니까? 그때 맹자는 대답은 안하고 입을 크게 벌리고서는 자기 입을 보라고 말했습니다. 내 입 안에서 뭐가 보이냐? 혀만 보입니다. 그렇다. 이빨은 강해서 오래 갈 것 같지만 내 이는 지금 남은 게 하나도 없다. 그러나 여기 혀를 보라. 부드럽고 약하지만 결국 강한 이빨 보다 오래 가는 게 부드러운 혀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성경과는 좀 무관할 수도 있습니다. 남자로서의 제 개인적인 취향입니다.

‘gentle’ 남자고 여자고 상대방을 대할 때 온유하고 예의가 바르도록 노력해야합니다.

살다보면 아내와 남편이 상처를 받는 것은 커다란 사건보다는 아주 사소한 언행에서 비롯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소함은 의식하지 않는 부주의함에서 기인하는 것들이죠.

의도하지 않아도 우리가 상처를 줄 수 있는 일들이 많다면,

더욱 행동에 조심해야 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gentle’조심하는 것이다! 라고 생각합니다. - 상대방을 생각하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서는 안정된 심령이라 하는데 NIV 성경에서는 ‘quiet spirit’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말씀을 묵상해 보았습니다.

언제 우리는 조용할까요?

먼저 상대방의 말을 들으려고 할 때, 그리고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마음이 들 때가 아닌가요?

혹 우리가 상대방 보다 말을 많이 하고 있다고 느끼면, 자신도 모르는 새에 자기중심적이 되었거나 고집된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요?

더욱 심각한 것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말을 많이 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단계에 가 있는 것입니다.

 

또 저의 개인적인 견해인데,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 고집스럽게 되기에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듣지 않습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누군가에 대하여 권위를 가지게 될 경우가 많다는 것이죠. 단순히 연령뿐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지위도 높아갑니다.

이 때 가장 필요한 것이 있는 데 자기 성찰입니다.

자기 성찰이란 단순히 자신을 묵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끊임없이 바라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런 표현을 썼지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라” - ‘great worth in God’s sight’

 

하나님 앞에서라는 말 가운데 많은 신앙적 질문들이 풀려나갑니다.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할지 궁금한 모든 이에게 아주 중요한 지침이 됩니다.

우리가 하는 행동이 하나님 앞에서가장 정직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행동하기 시작할 때 우리의 성품이 만들어 집니다.

그런 생각이 들지 않으세요?

어린 시절 수련회에 가서 혹은 여름성경학교를 하면서 성경 암송대회라는 것을 많이 했던 기억이 납니다. 조금 더 나가서 밥을 먹을 때면 한 구절 암송하고 합격을 받아야 했던 기억도 있습니다.

그런데 한 번도 성경대로 살기 대회를 해 본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물론 성경에 대한 지식을 가지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참다운 지식은 삶으로 나타날 때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성경 한 군데를 택해서 암송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 군데를 택해서 살아보기를 하는 것이죠. 예를 들어서 산상수훈을 암송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팔복말씀을 따라 살아보기를 해보는 것입니다.

성경을 알고 외운 지식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대로 살아낸 이야기를 간증하는 것.

찰스 쉘던이 쓴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원석이 쓴 [공부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책을 보면,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라는 책의 원 제목은 그의 발자취를 따라” (In His steps)이고 부제가 “What Would Jesus Do?”라고 합니다.

이 책의 저자인 쉘던은 토피카 시에 위치한 센트럴 회중교회에서 매주 저녁예배시간에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한 장씩 이야기 식으로 들려주던 원고를 모은 책이라고 합니다.

이 기간 동안 TV 드라마 보다 더 흥미진진하게 사람들은 설교를 기다렸고 긴장감을 가지고 설교를 들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가장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바로 이것이 아닐까요?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라는 질문을 가지고

예수님 앞에서 우리의 삶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 때문에 일어나는 결과들을 경험하는 것이 진정한 크리스천들의 모습일 것입니다.

 

이원석의 책에 나오는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의 단편 세 수도사의 이야기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러시아의 외딴 섬에 세 명의 수도사가 살고 있었습니다. 한 주교가 이 섬을 찾아가서 보니 이 수도사들이 주기도문조차 모르는 게 아니겠습니까? 이에 셋 다 주기도문을 알도록 가르쳐 주고 만족하며 섬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한참 배를 타고 가는 중에 보니 세 수도사가 바다 위를 걸어서 따라오는 게 아니겠습니까? 배에 올라와서 말하기를 주기도문을 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주교는 이들의 단순하지만 심오한 믿음을 깨닫고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노인들이시여, 여러분의 기도는 이미 하나님께 닿았습니다. 당신들을 가르칠 사람은 내가 아닙니다. 오히려 당신들의 죄 많은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톨스토이가 이 책에서 말하고 싶었던 것은.

이 세 수도사가 자연스런 삶을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인위적인 윤리적 실천보다 자연스런 인간적 삶을 보여주는 사람이 더 아름답고 감동적이었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죠.

 

우리들은 규칙을 정해놓고 행하는 것을 때로 신앙이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규칙을 세워 놓아도 또 부족한 규칙이 생깁니다.

그리고 그렇게 많은 규칙을 세우면 세울수록 자신들의 부족함을 발견할 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라는 말은 우리가 세워놓은 규칙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다 보니 우리의 성품에서 자리 잡게 된 습관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습관을 만들기 위에서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때로 우리의 삶에서 의무로 느껴지는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의무로 느껴지는 것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죠.

그것이 성품입니다.

끝까지 우리가 의무로 살아간다면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성품이란 자연스럽게 묻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호흡을 할 때 의식하지 않아도 숨쉬고 살아가는 것처럼 말입니다.

 

지식가이드라인이다!

이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모습 가운데 남편에 대한 권면이 나옵니다. 7.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남편을 향한 권면이 있습니다.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첫째는, 아내는 너와 함께 사는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둘째는, ‘respect’해야 합니다. 자신보다 더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respect’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중한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몇 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겠죠.

동거라는 말은 같은 집에서 산다는 것인데, 참다운 동거 즉 삶을 같이 하고 있는지,

아내를 안다는 지식이 정말 아내를 이해하는 차원에 있는 것인지를 말입니다.

어떤 이해인가요?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연애할 때는 아내가 참 약한 여자라고 생각을 했는데, 살다보니 늘 강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는지,

아내는 이 세상에서 살다 헤어질 존재가 아니라 생명의 은혜를 이어갈 동역자임을 알고 있는지,

그렇지 않으면 기도가 막히게 될 것입니다.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말씀을 시작할 때 언급한 내용인데,

베드로서 기자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이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베드로 전서 2장 말씀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내와 남편의 관계가 깨어진다면 그리스도와의 관계도 깨어진 것을 알아야 합니다. 깨어진 관계 속에서 어떻게 기도가 될 수 있겠습니까?

습관적으로 기도하고, 예배에 참석하고, 봉사할 수 있지만,

하나님과의 진정한 관계의 통로인 기도는 막혀 버린 것입니다.

 

, ‘존재에 대한 말이 아닐까요?

남편으로서 올바른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 말입니다.

아내에게 요구됐던 것이 남편에게도 동일하게 요구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17-1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오늘 본문의 4절 말씀과 7절 말씀을 이렇게 연결해 보면 어떨까요?

하나님 앞에서’ (insight of God) 지식을 가지고’ (considerate)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지식을 가진 사람은 피상적이거나 가식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생각을 하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행동은 올바른 열매를 맺게 됩니다.

조나단 애드워즈는 심지어 마귀도 피상적인 의미에서 선한 행위로 바른일을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단순히 옳은 일을 하려고 애쓰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옳은 일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기 시작할 때 옳은 일이상의 무엇이 만들어지지 않을까요?

한국교회에 제자훈련이 많이 유행했던 때가 있습니다.

아마 저에게도 누가 개척을 한다면 어떤 것을 가장 하고 싶습니까? 라고 묻는다면 제자훈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자훈련을 아무리 받아도 제자가 되는 것 같지 않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제자훈련을 통해 진정한 제자가 되는 것을 가르치기 보다는 제자가 해야 하는 일을 얼마나 세련되게 수행하느냐를 가르친 것은 아닐까요?

제자가 되지 못했는데, 제자가 되는 일을 가르치는 것이 한계가 분명하지 않을까요?

존재가 변화되지 않은 행위란 언제나 불안하지 않을까요?

 

올바른 지식이란 올바른 행위를 위해 애쓰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관계에 들어가는 일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올바른 관계에 들어서면 특별한 지식을 가지고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살게 되지 않을까요?

하나의 선행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관계 속에 한 걸음 나아가는 것.

 

이런 올바른 관계 속에서. . .

이런 새로운 관계적인 차원에서 다음에 나오는 구절들을 이해하면 어떨까요? 8-12.

 

8.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9.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10.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11.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

12.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얼굴은 악행하는 자들을 대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

 

오늘 말씀은 지난주에 배웠던 2장 말씀과 계속해서 연결되어 있습니다. 고난에 대하여 이야기 할 때 이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다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부르심 가운데서 다시 관계를 생각합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 뿐 아니라,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아내와 남편, 그리고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관계를 말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관계들은 부르심과 연결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8-12절까지의 말씀을 저는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로운 관계로 부르셨기 때문에 행하는 일들입니다.

9절 말씀이 참 인상적이죠. ‘복을 빌라는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가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통하여 복이 유통되어야 한다는 것, 그것이 우리를 부르신 이유입니다.

 

크리스천 작가였던 유명한 마크 트웨인은 이런 재미있는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개와 고양이를 한 우리 안에 넣어 보았다.

뜻밖에도 그들은 내 기대를 뛰어넘어서 잘 지내는 모습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나는 이번에는 새와 돼지와 염소를 한 우리 안에 집어넣어 보았다.

그들은 약간의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했지만

마침내 그들도 더불어 잘 어울릴 수가 있었다.

나는 이번에는 장로교인과 감리교인과 침례교인을 한 우리 안에 함께 있도록 했다.

그런데 그들은 결코 잘 지낼 수가 없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교제를 소중하게 관리하지 못하는가! 라는 모습을 꼬집은

풍자적인 해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이동원 목사의 짧은 이야기 긴 감동 3-

 

형제를 불쌍히 여기는 일,

겸손하고,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않는 일,

오히려 복을 비는 일. . .

이 모든 것이 새로운 관계 속에서 우리가 누리는 진정한 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이런 새로운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종종 복음의 진리를 착각하는 것은 ‘easy way’‘true way’를 종종 동일시 한다는 것이죠.

진리의 길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알 때, 우리의 태도가 바뀌어 집니다.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베드로서 기자는 부당한 고난을 당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죠.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우리의 삶이 어려운 이유는 우리가 너무나 삶을 쉽게 생각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삶이 결코 쉬운 길이 아니라는 진리만 깨닫는다 해도 어려움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달라지지 않을까요?

우리는 종종 하나님 나에게 왜 이러세요?’라고 항변합니다.

힘들기 때문이죠. 그런데 그 일들이 아름다움과 연결되어 있다면 견뎌낼 수 있지 않을까요?

2016820일 연합신문에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습니다. [학교에 물건 대신 가져온 헬리콥터 부모 돌아가세요!”] 라는 내용입니다.

 

고교 방침 화제학생 자립심·책임감 신장 노력에 대다수 반색

(로스앤젤레스=연합뉴스) 장현구 특파원 = 미국의 한 남자 고등학교가 학생들의 자립심을 고취하고자 이른바 '헬리콥터 부모'의 학교 출입을 막아 화제에 올랐다. 헬리콥터 부모는 자녀 주변을 헬리콥터처럼 맴맴 돌면서 자녀의 일에 지나치게 간섭하고 과잉보호하려는 이들을 일컫는 말이다.

 

19(현지시간) 미국 일간지 워싱턴포스트와 온라인 매체 허핑턴포스트에 따르면, 아칸소 주 리틀록에

있는 '소년을 위한 가톨릭 고등학교'는 신학기 개학을 앞두고 지난 10일 학교 현관에 헬리콥터 부모에게 보내는 공지문을 한 장 붙였다.

아들 물건 대신 가져온 부모에게 돌아가라는 공지문이 붙은 미국 아칸소 주 한 고교[소년을 위한 가톨릭 고교 홈페이지 캡처]

"아들이 학교에 가져오는 것을 잊고 나온 점심 도시락, 교과서, 과제물 등을 대신 가져오셨다면, 몸을 돌려 학교 건물 바깥으로 나가세요. 당신의 아들은 당신 없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배울 겁니다"라는 내용이 공지문에 적혔다. 학교 측은 운전할 때 무조건 정지해야 하는 도로교통 표지판인 '스톱 사인'을 공지문 위에 붙여 출입 금지를 강조했다.

 

스티브 스트래슬 교장에 따르면, 사립학교인 '소년을 위한 가톨릭 고교'는 오래전부터 학생들이 까먹은 지참물을 부모가 가져다주는 것을 금지해왔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방침을 잊고 최근 학교로 오는 부모가 늘자 스트래슬 교장은 공지문을 붙였다. 스트래슬 교장은 "도시락을 안 가져온 학생은 친구에게 돈을 빌려 학교 식당에서 배를 채울 수 있고, 책이나 체육 비품 등은 학교에 여분이 있는 만큼 선생님에게 말해 대여하면 된다"고 했다.

 

그는 "엄마나 아빠가 없을 때 아이들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자립 능력과 책임감을 키워주는 우리 학교의 여러 방침 중 하나"라면서 "우리 학교 학부모 중에선 불만을 터뜨린 이는 없지만, 모든 학교에 이 원칙을 권유하진 않겠다"고 덧붙였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자녀들을 버려놓는 것은 부모라는 말이죠.

저는 이렇게 비유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교인들을 버려놓는 것은 잘못된 교회와 목회자들이라고 말입니다.

교회는 교인들이 쉽게 살아가도록 모든 것을 준비해주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올바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곳입니다. 힘든 고난의 시간들이 왜 필요하지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어려움을 지나가며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어려움 가운데 진리의 길을 발견하도록 하는 곳이죠.

우리는 관계 속에서 우리를 부르신 부르심에 합당한 삶이 무엇인지를 생각합니다.

참 어렵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복이라는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그리스도인 가정의 정의는 무엇인가 /벧전3:1-7/ 오창우목사

2023-09-01 10:37:15

 

오늘은 중요한 이야기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이란 무엇입니까? 어느 목사님이 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목사님, 우리 어머니는 일찍 혼자 되셔서 저 하나 바라보고 사셨는데, 5월만 되면 예배당에 가서 스트레스를 받고 오시기 때문에 5월이 없으면 좋겠습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가정이야기를 하면 사랑할 남편도 없고, 돈도 없고, 마치 저주받은 가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너무나 스트레스를 받고 속상해 하신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아버지가 예수님을 안 믿고 오랫동안 속을 썩이고 자녀들을 괴롭혀서 - 마지막에는 하나님을 믿었지만 - 가정에 대한 설교를 하기 싫다는 분도 없잖아 있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도 5월이 되어 가정설교를 하면 이 일 때문에 스트레스 받고 속상해 하는 분들도 없잖아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가정의 의미를 바르게 알지 못하는 현상 때문에 그렇습니다.

 

국어사전에 보면 가정이란 말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부부, 자식, 부모, 가족 등이 공동으로 생활하는 조직체`, 다시 말하면 혈연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조직체입니다. 그런데, 혈연중심의 공동체는 성경에 특히 구약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닙니다. 창조때 하나님이 만드신 아담과 하와, 타락 이후에 태어난 가인과 아벨, 그리고 창12장 후부터 시작되는 아브라함과 그 후손도 혈연적 가족 공동체입니다. 이스라엘의 지파나 족속은 혈연적 가족 공동체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후의 신약에 와서는 가정의 의미를 달리 합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단순히 부모자식으로 지칭되는 혈연적 관계의 가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가정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마가복음 332절에서 35절까지 보면 예수님께서 귀신들린 자를 고치시고, 병든 자를 치료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의 친척들이 예수님을 가리켜서 미쳤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붙잡으러 다녔습니다. 예수님의 가족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와서 이야기합니다.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찾습니다."

바로 이때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누가 내 어머니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라는 말씀의 의미를 가만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속에는 혈연적 가족을 부정하는, 그 역할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 하나님의 백성의 가정이라고 하는 것은 아버지가 하나님을 믿었고, 내가 그 가정에 태어났다고 해서 하나님의 가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역할이 상실된 것을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새로운 신앙의 공동체가 이루어져야 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육신의 가족을 외면한다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못박히시는 참으로 고통스러운 자리에서도 어머니의 앞날을 염려해서 요한에게 네 어머니라고 하면서 어머니의 삶을 보살펴 줄 것을 부탁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요한복음 2장에 보면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어머니가 포도주가 없다고 하시자,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고 할 때 그 `여자여`라는 말은 아람어에서 군왕, 왕비라는 뜻입니다. 왕비여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부모에 대한 사랑과 효도가 참으로 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딤전58절에서 누구든지 자기 친족,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자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혈연적 관계의 가족을 무시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가정, 그리스도인의 가정의 진정한 의미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지는 바로 그러한 곳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만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가정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이 어디입니까? 크게 이야기하면 교회이고, 작게 이야기하면 그리스도인을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숫자적 의미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와 자식, 가족의 구성원이 다 있느냐, 없느냐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뜻이 행해지는 곳이 교회라고 하는데, 교회는 아닌게 아니라 구약의 가정에서 행해지는 유월절 의식이나 율법의 가르침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복음전파와 가르침, 세례의식, 주의 만찬등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약의 그 교회라고 하는 것은 구약의 가정에서 행해졌던 하나님을 향한 신앙적 행위가 그대로 이루어 진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약의 교회는 혈연적 의미의 가정보다는 영적 가정, 신앙적 가정,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가정으로의 변화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2:19에도 보면 이제부터는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를 통해서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가족 구성원이 되고 약속의 유업을 받을 자가 된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가족에 속하는 누구나 신앙 안에서 서로 교제하고 도와줄 의무를 갖는 것입니다. 이것이 초대 교회에서 유무상통의 역사입니다. 여러분, 밥을 같이 나누어 먹는다는 것은 가족입니다.

 

식구라고 하는 말은 먹을 식()입니다. 같이 나누어 먹는 사람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안에는 혼자 믿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 안에는 영적으로 한 가정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도바울은 디모데를 향하여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합니다. 교회 안에서 영적으로 아버지가 있고, 자식이 있습니다. 형제가 있고 자매가 있습니다.

부모와 자식, 형제와 자매를 영적인 관계로 만들어 가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갈 때에 교회는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의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 윤리학자인 죠셉 플리처가 현대의 가정은 가정이 할수 있는 7가지중 6가지를 빼앗겼다고 합니다.

가정은 생산집단이었습니다. 과거에는 식구들끼리 일을 해서 물건을 내다 팔았는데, 지금은 생산 집단이 아니고 소비집단이 되었습니다.

안전보호의 가정이었습니다. 지금은 부부지간의 안정도 경찰이 대신해 주고 있습니다.

교육의 중심이었습니다. 이것을 학교와 학원에 빼앗겼습니다.

가정은 즐거운 곳이었는데 오락장에 빼앗겼습니다.

손님을 접대하는 곳이었는데, 이것도 식당에 빼앗겼습니다.

종교의 터전이었는데, 이것도 교회에 위임해 버렸습니다.

마지막으로 잠자는 곳이었는데, 이것도 여행을 많이 가고 찜질방에 뺏겨버렸습니다.

 

과연 가정의 기능, 이것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가정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미국의 통계입니다만, 83%가 행복하지 않다고 대답했습니다. 여러분, 이러한 가정의 기능을 회복할 수 있고, 이룰 수 있는 곳이 있다고 한다면 교회입니다. 교회는 이러한 일을 이루어야 합니다. 더구나 예수믿는 사람이 많은 교회 속에서 이런 영적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가 필요합니다. 이런 형제 자매의 관계가 필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적인 대모, 대부를 갖고 있는 천주교가 내용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그것도 괜찮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 장로님, 권사님들이 여러분의 신앙적 어머니, 아버지가 되고 우리는 그의 지도와 보호를 받는 자매가 있고, 교인들끼리 믿음 안에서 형제, 자매라고 하는 것을 이야기하면서 서로 나눌 수가 있다면 이 교회는 참으로 하나님이 기뻐하는 그리스도인의 가정이 될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이 땅에는 120억의 인구가 살고 있는데, 120억의 인구 가운데 60억이 빈곤층입니다. 그리고 120억 가운데 20%가 절대 빈곤층입니다. 북한의 2300만 우리동포들은 절대 빈곤층에 속합니다. 이들은 하루에 한끼 먹기도 힘이 듭니다. 그런데, 이 지구상에서 생산되는 식량의 숫자를 보게 되면, 120억 인구가 골고루 나누어 먹을 때 다 먹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런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분배에 대한 역사적 시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세가지인데, 첫째, 멜다스 이론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대로 자기 먹을 것은 자기가 태어난다고 합니다. 사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식량을 더 많이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잘아는 마르크스 이론이 있습니다. 공산당입니다. 공산주의 이론입니다. "같이 일해서 같이 나누어 먹자." 그러나, 공산당 이론도 실패하고 맙니다.

 

마지막으로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미션이라는 것입니다. 선교입니다. 전도하는 사람들,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만이 서로 나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교회는 마땅히 가정이 되어야 할 것이고, 우리의 가정은 또한 교회가 되야 될 줄로 믿습니다. 서로 이런 아름다운 가족 관계, 영적인 가족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이 더욱 영광받으시는 우리 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그리스도인 개인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개인을 부르실 때 그 후손들 대대까지 기억하신다는 것을 우리가 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의 복을 받자, 신앙의 가문을 이루자고 말씀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비유에도 분명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룩 조금이 큰 밀가루 반죽을 부풀게 한다고 했습니다.

겨자씨, 눈에도 잘 보이지 않는 겨자씨가 큰 나무가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28절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누룩이나 겨자씨, 생명들은 계속해서 자라는 것입니다. 작지만 큰 것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가정에 대한 중요한 정의를 하나 내릴 수 있습니다.

가정이 혈연적 관계로만 본다면 마땅히 부모, 자식, 부부가 있어야 합니다. 시편128편에 나온 말씀대로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상에 둘린 자식은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이렇게 되야겠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가족은 신앙적인 관계, 영적 의미는 하나님의 나라와 소명의 입장에서 볼 때에 작은 그리스도인 한사람 한사람이 그리스도인의 가정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농부가 씨앗을 뿌리면서 많은 풍년과 결실을 계획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들 한사람을 보면서 하나님의 가정, 그리스도인의 가정을 계획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보시면서 후손 대대까지 계획하신 것처럼 예수님 믿는 한사람을 보는 것만으로도 하나님께서는 그 가족을 구원할 누룩이요, 씨앗으로 보시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바로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의 가정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구약에서 가족의 공동체는 종교국가입니다. 그러나 신약에서의 이방사회, 구원의 과정에 있는 미완성된 하나님 나라를 종교국가의 가정과 단순비교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가정이 완성되는 것은 주님이 오시는 그날, 새 하늘과 새 땅에서만 이루어 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 하나를 통해서 가정을 보고 계십니다.

 

저희 아버지 한 사람이 믿어 저희 가족이 다 믿고 저희 두 형제가 믿었습니다. 누룩이 퍼져 나갑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보시면서 여러분 한 사람, 한사람을 그리스도인의 가정이라 부르는 것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이 그리스도인의 가정이 어떤 일을 해야 되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가정의 역할 두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미완성된 그리스도인의 가정이 완성을 향해서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두가지를 부탁하고 있습니다.

 

1) 가정에서 구원의 역사가 있어야 된다.

2) 기도의 역사가 된다.

 

먼저 1-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실을 봄이라"

 

여러분,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한다는 것은 부인은 예수님을 믿지만 남편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남편을 구원받게 하라는 것입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죽을 사람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한가지 여쭈어 보겠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도 이 사람과 결혼하겠습니까?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도 당신과 결혼하겠다고 해야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가정이라는 의미의 크리스찬입니다. "나 때문에 구원받게 해야겠다." 구원은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오늘 3장 앞에 보면 예수님이 우리를 어떻게 구원했는지에 대한 이야기합니다.

우리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구원하셨다는 것이 은혜입니다.

은혜로만 구원합니다. 여러분이 잘 하는 이야기 한번 더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국수집에 국수를 먹으러 갔는데, 그 집 메뉴판에 국수는 없고 국시라고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국수를 같이 먹으러 간 사람과 논쟁을 하게 되었답니다. 국수가 맞냐? 국시가 맞냐? 해결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을 찾아가서 무엇이 맞냐고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그 두가지는 만든 재료가 다르기 때문에 서로 다른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재료가 다릅니까?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이 "국수는 밀가루로 만들었고, 국시는 밀가리로 만들었다." 밀가루와 밀가리는 또 어떻게 다릅니까? 그랬더니,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이 "담는 그릇이 다르다. 밀가루는 봉투에 담고, 밀가리는 봉다리에 담는다." 봉투는 뭐고, 봉다리는 뭡니까? 그러자,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이 "봉투는 기계로 만들었고, 봉다리는 손으로 만들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사람은 국수 먹고 갔고, 한사람은 국시 먹고 갔다고 합니다.

 

우리 사는 것이 그렇습니다. 별것도 아닌 것 갖고 괜히 싸우고 섭섭해 합니다.

국수라 하면 그런 것이지, 꼭 국시를 따질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국시라 하면 그러면 됩니다. 부부 자식간에 살다 보면 별것도 아닌 것 같고 서로 헤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은혜의 반대는 법입니다. 네가 잘했냐? 못했냐? 내가 맞냐? 네가 틀리냐?를 따진다면 아무리 사랑해서 결혼했어도 그 가정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은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내는 그냥 부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나 한사람이 그리스도인의 가정이라고 생각 할 때에 내가 바로 아내가 되야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아내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2절 말씀에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실을 봄이라" 이 두려워한다는 말은 상대방을 왕처럼 여기라는 것입니다. 그 높은 권세 앞에서 두려워 하듯이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 선한 행실이 남편을 구원하고 가족들을 구원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3-4절 보겠습니다.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그 당시 로마의 귀부인들은 단장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특히 머리에 관심이 많아서 곱슬머리로도 만들고, 염색도 하고, 금발로 가발도 쓰고, 헤어밴드도 하고 핀도 하는데, 금은보석 장식을 하고, 거울하고 머리빗에 돈을 많이 들여 금으로 만든 빗도 사용합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신는 신발 샌들에도 보석을 많이 박아서 오늘 가격으로 67천만원짜리도 신고 다녔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사도들의 교훈을 `디다케`라고 하는데, `디다케` 속에 보면 그리스도인의 아내들에 대해 이런 가르침을 하고 있습니다.

얼굴에 화장을 짙게 하지 말라. 눈썹을 짙게 하지 말라. 손톱을 짙게 하지 말라.

치마는 무릎 위로 올라오게 하지 마라. 이런 식입니다.

이것가지고 남편을 구원받게 못한다는 것입니다. 얼굴이 아름다운 것 갖고서는 남편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구원할 수 있는 길은 마음이 온유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5절에 보게 되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6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순종한 것 같이 너희는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하면 그의 딸이 된 것이니라"

12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가나안 땅에 갔습니다. 그런데, 얼마 안되어 흉년이 들자, 이것을 피하기 위해 애굽땅에 내려갑니다. 새로운 땅에 갔는데, 그 땅에 살던 바로가 사라가 아름다운 것을 보고 누구냐고 물으니까, 부인이라고 했다가는 자기가 죽을 것 같아서 누이동생이라고 합니다.

 

바로가 사라를 뺏어갔는데, 아브라함은 누워서 잠자며 호의호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만 두시겠습니까? 다시 거기에서 구원받아 가나안땅으로 올라오게 되는데, 아브라함은 부인을 보호하지 않은 믿을만하지 않은 남편입니다. 그런데도, 그 남편을 향해서 ``, ``이라 표현했다는 것입니다.

 

욥기에 보게 되면 욥의 아내가 남편을 저주합니다. 그 때에 욥이 같이 욕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순종과 자세를 가질 때, 믿지 아니하는 가족을 구원할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나의 순종과 나의 아름다운 온유한 마음을 통해서 그 가족을 구원해 내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이요, 그리스도인의 가정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기도의 역사가 있어야 됩니다.

신문에서 보았던 내용입니다. 어떤 독자가 이런 글을 썼습니다. 한번은 지하철을 탔는데, 남자 신사 한분이 큰 소리로 이렇게 외쳤습니다. "네 살짜리 어린 아이가 불치병으로 대학병원에 누워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듣자 마자, 다들 외면했습니다. 돈 달라는 소리로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분이 계속해서 이렇게 이야기하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책에서 보니, 여러 사람이 함께 기도하면 어려운 문제도 해결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부탁이 있는데, 제발 내 딸을 위해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제 딸은 송희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지하철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다 고개 숙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구걸하러 이 아버지가 나섰습니다.

진정으로 우리의 가정이 그리스도의 온전한 가정이 되기를 원한다면 이런 기도가 여러분에게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기도구걸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남편들에게 아내에게 잘해주라는 이유는 기도가 막히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기도가 무엇입니까? 8-9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기도는 복을 빌어주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가 이 아들을 위해 기도할 때 그것은 복 비는 것입니다. 나를 괴롭힌다고 저 사람 죽게 해달라는 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저 사람이 잘 되게 해주세요, 믿지 아니하는 남편과 가족을 위해 기도하는 그 분이 그리스도인의 가정이요, 주님 앞에 인정받을 수 있는 분인 것입니다.

 

기도의 문제에 있어서는 제 어머니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병치레를 많이 했습니다. 죽을 병에 많이 걸렸다가 다시 고쳐지고 이렇게 건강한 몸이 되었습니다. 제 어머니는 제가 아프다, 어렵다 하면 저를 냅두고 산기도를 가셨습니다.

일주일동안 기도하시며 산에 가서 금식기도하시고 내려 오실 때에는 바짝 마른 몸으로 내려오시지만, "하나님이 너를 살려 주신단다." 그렇게 말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목회를 하는 과정 속에서도 어머님이 늘 하시는 말씀이 ", 너 위해 어젯밤 철야했다." 늘 기도하시는 어머니의 이 말씀을 잊을수가 없습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정말 가족을 귀히 여기고 이 가족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기도해야 합니다. 크리소스톰이라고 하는 초대교회 교부가 있습니다.

이 분이 기도에 대해 이런 정의를 내렸습니다.

 

`기도의 위력은 불의 세력을 정복한다. 기도는 노여워하는 사자의 입에 자갈을 물리우고 난세를 정복시켜 고요하게 하고 전쟁을 종결시키며 폭풍우를 달래고 마귀를 내쫓으며 사망의 결박을 풀고 질병을 완쾌시키고 태양을 멈추게 하고 우뢰의 진행을 막는다. 기도는 만능의 갑옷이요, 값이 떨어지지 않는 보화이며 마르지 않는 광산이며 어떤 구름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파란 창공이요, 폭풍으로도 구겨지지 않는 하늘이다. 기도는 뿌리요, 지반이요, 한량없는 축복의 어머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의 역사가 있고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곳, 바로 그곳이 그리스도인의 가정이 될 줄로 믿습니다.

 

어느 목사님 사모님의 수기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남편을 하늘이라 말하고 아내를 땅이라고 말할 때 우리 남편은 비 한방울 내리지 못하는 원망스런 하늘이었고, 땅은 메마르고 갈라지고 있는데도 그 사정을 모르는 무심한 하늘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비 한방울 내리지 않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하늘로부터 내리는 은혜의 단비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새 하늘로부터 단비를 받았기에 저의 심령은 사막이 되지 않았고 젖과 꿀이 흐르는 새로운 땅이 되어 이제까지 살아 왔습니다."

 

원망스러운 하늘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 분이 내 부모이던, 내 자식이던, 그 분이 내 남편이던, 아내이던, 그럴 수 있습니다.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새로운 하늘이신 예수님의 은혜를 바라볼 때 그 분은 우리에게 새로운 기쁨을 더하게 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볼 때는 작은 내가 아니라 내 후손까지 계획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이 내 속에 있는 참으로 큰 나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고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나 때문에 내 가정을 구원해야 합니다. 복을 빌어주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신다고 했습니다. 12절에 말씀하고 계십니다.

 

결국 가족을 사랑한다는 것은 관심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내가 변해야 남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세상에 변화시키지 못하는 것이 두가지가 있답니다. 하나는

지나간 역사를 고칠 수 없고, 하나는 아무개를 변화시킬 수가 없습니다.

 

내가 변하면 내 가정도 변하고, 하나님의 역사도 분명히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오늘도 하나님의 긍휼하시고 높으신 사랑으로 승리하시는 그리스도인의 가정다운 가정을 만들어가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바랍니다.

 

 

 

나를 변화시키소서 /벧전3:1-4/ 유기성목사

2017-06-13 05:47:43

 

벧전 3:1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 2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실을 봄이라 3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4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오늘 설교는 가정을 주제로 한 마지막 설교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가족들의 구원에 대한 설교입니다. 너무나 중요하면서도 또한 무거운 주제입니다.

 

특별 새벽기도회 때, 한 부목사님이 초등학교 다니는 딸을 깨워 새벽기도회에 나오시는데, 졸린 눈으로 집을 나서는 딸이, “목사 딸 노릇하기 정말 힘드네하더랍니다.

그 목사님의 딸의 투정 아닌 투정이 너무 귀여워서 칼럼에 썼더니 금방 어느 성도의 댓글이 달렸습니다.

 

저는 그 목사님의 딸이 너무 부러워요. 저희 가족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아요. 그것이 얼마나 마음 아픈지 몰라요. 너무나 힘들고요. 새벽기도회 나가기 힘들다는 그 목사님의 딸이 저는 너무 부러워요

마음이 먹먹했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가족을 둔 성도들의 마음이 얼마나 힘든지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마지막 심판의 날, 롯과 같은 가정이 많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17:28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29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오듯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 :30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유황불이 쏟아져 소돔성이 멸망당하기 직전, 롯의 가족들을 구원하려는 천사들이 롯의 가족들을 소돔 성에서 끌어내는데 애를 먹었습니다. 롯과 아내와 두 딸이 정신없이 허둥대는 것입니다. 이제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생명 하나 건지는 순간입니다.

 

롯의 사위들은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장인이 하나님께서 이제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겠다 하셨다고 말했을 때, 정신 나간 자의 말로 받아들였습니다. 더 큰 문제는 아내였습니다. 아내가 마음을 잡지 못하고 흔들리는 것입니다.

 

평생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집짓는 일에만 정신 팔려 살았는데, 모든 재산 다 놓고 떠나야 한다니, 롯의 아내가 계속 결단내리지 못하고 주저하자 보다 못한 천사들이 그들을 끌고 나왔습니다. 그러면서 너무 늦어 멀리 피할 수 없으니 가까운 성으로라도 급히 도망가라 하면서 무슨 소리가 들려도 절대 돌아보지 말라고 경고하였습니다.

 

그러나 롯의 아내는 유황불이 쏟아지는 소리를 듣고 그만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마음이 흔들리면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은 어떨 것 같습니까?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짓는일만 신경 쓰다가 주님을 만나면 큰일입니다.

가족의 구원 문제는 먹고 마시고 사고 파는 일 보다 훨씬 중요하고 급한 일입니다.

그러나 전도 중에 가장 어려운 것이 가족 전도인데, 어떻게 하면 구원받지 못한 가족을 전도할 수 있을까요?

 

먼저는 조급한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언제까지 가족 전도에만 매달려야 합니까?” 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음이 급하다고 빨리 전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족을 구원하실 성령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믿지 않는 가족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가족을 구원하려다 보니 자신이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이 되어가기 때문입니다.

가족 전도가 어려운 것은 말로는 전도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지 않는 가족을 전도하려면 삶으로 전도해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 믿지 않는 남편을 둔 여인들에게 남편에게 전도하라하기 전에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권했습니다.

:1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유는 남편이 아내의 말은 듣지 않지만 행실은 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2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실을 봄이라

이것이 불신 가족을 전도하려는 그리스도인들이 명심해야 할 말씀입니다. 정말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삶을 보여줄 수 있다면 오히려 가족 전도가 더 쉬울 수 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하십시오. 필요하다면 말도 사용하십시오.”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것이 전도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복음과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지 않고 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하고 실천하면 최고의 전도자가 됩니다.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는 눈물의 기도로 아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였지만 행실로도 아들을 전도한 사람이었습니다. 성 어거스틴은 자기 어머니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이교도였던 아버지를 주님 모시듯 했습니다. 저는 그 장면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불신 남편을 둔 예수 믿는 아내들에게 외모가 아니라 마음을 단장하라고 권하였습니다.

:3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4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남편을 변화시키는 열쇠는 아내의 외모가 아니라 아내의 마음입니다. 아내가 정말 변했는지 아닌지는 마음을 보고 압니다.

 

그리스도인은 마음에 예수님이 임하십니다. 왕을 모시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마음이 온유하고 안정될 수밖에 없습니다. 썩지 않을 영생을 소유했기 때문입니다. 아내가 진정 이전과 달라졌음을 알게 되면 남편의 마음도 열리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남자 집사 한 분이 실직하여 낙심하여 있던 어느 날 아내가 차려준 저녁 밥상이 너무 초라하더랍니다. 순간 아내가 나를 무시한다는 생각에 화가 치밀어 밥상을 뒤엎어 버린 일이 있었습니다.

 

그 순간 속장님께서 전화를 하셨습니다. "집사님! 오늘 저녁에 우리 집에 와서 식사하세요. 시간 괜찮으세요?" 갑작스런 저녁 초대를 받아 속장님 집에 가서 밥을 먹는데 "집사님! 나 예전에는 개 망나니였습니다."

 

하더랍니다. "~ ! 그러셨어요" 하며 건성으로 대답하였는데 속장님이 예전의 삶과 자신이 어떻게 변화되어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는지 이야기를 하더랍니다.

 

일하던 직장에서 쫓겨나 돈을 벌지 못하던 어느 날 아내가 차려온 밥상에 반찬이 변변찮다고 밥상을 뒤집어 엎어버렸답니다. 순간 아차 내가 큰일을 저질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내는 아무런 말도 없이 거실 바닥에 뒤범벅이 된 반찬들을 다 치우고는 상을 들고 나가더랍니다.

 

저녁 먹는 것은 포기하고 있는데 아내가 방문을 노크하고는 "여보 저녁 드세요" 하고는 밥상을 다시 차려 들어오는데 너무 당황스럽더랍니다. 이 사건이 있은 후 자신이 인간이 되었고 지금처럼 신앙생활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날 그 속장의 아내 집사는 얼마나 마음이 힘들었겠습니까? 그러나 아무 말 하지 않고 거실 바닥을 말끔하게 치우고 다시 밥상을 차려 남편에게 갔다 드림으로 망나니같은 남편을 구원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변화된 삶으로, 믿지 않는 가족을 전도하라는 말에 절망을 느끼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불가능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16:31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그것이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복음입니다. 우리가 노력해서 삶이 변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삶이 변화됩니다. 우리가 할 일은 불신 가족 앞에서 나를 변화시키소서기도하는 것뿐 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잘 믿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4 마지막 부분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4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아내의 변화된 삶은 엄밀히 말하면 남편에게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바로 살려 애쓰면 불신 가족 전도도 저절로 된다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한 청년이 젊은이교회 부모를 위한 기도회 때 간증을 하였습니다.

 

저희 가족은 5년 전 예수님을 영접했는데 주님께서는 가족 중 막내인 제게 십자가 복음을 먼저 깨닫게 하셨습니다. 가족들은 세상과 재정에 대한 염려가 많았습니다.

특히 세상 가운데서 부와 명예를 누리며 우상에 대한 지식으로 가득 찬 아빠는 좀처럼 변할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런 아빠에게 저의 삶을 통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의 변화를 통하여 아빠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 하게 해 주세요.”

 

홀로 영적싸움을 하는 것이 힘들 때도 있었지만 주님께서는 계속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케 하셨습니다. 그렇게 3년 동안 가족의 진정한 구원을 위하여 금식하며 애통함으로 기도하였는데, 저의 삶이 변하고 가족들도 변해갔습니다.

 

집 안에 제사가 없어지고 집에 있던 우상들도 정리되었고 거실에는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24:15)”라는 말씀 액자가 걸리게 되었습니다.

 

아빠가 일을 내려놓게 됨으로 처음으로 가난이라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아파도 병원에 가지 못하여 식구들이 돌아가며 안수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저와 제 가족은 이 가난을 통하여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돌아볼 수 있었고 물질을 귀하게 사용하는 방법을 배워갔습니다. 가족 안에서 고난이 유익이라는 고백과, 질병과 가난 세상의 조롱.. 그 어떤 것도 구원의 은혜와 바꿀 수 없다는 고백이 흘러 나왔습니다.

 

때때로 가족들의 어려움 앞에 좌절하며 세상일에 대한 미련을 놓지 못하는 아빠를 보며 가슴이 아파 기도했습니다.

 

주님, 예수님을 통해 진정 부유함을 누립니다.. 아빠가 주님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저는 평생 주님과 함께하는 가난을 택하겠습니다. 가난해도 좋으니 아빠에게 분명한 복음을 깨닫게 해주세요!..”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작은 저의 기도를 들어 주셨습니다. 가정은 아직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가족들이 십자가 복음으로 회복되고 행복해졌습니다. 다시 일하러 나가시는 아빠가 출근할 때, 가족들이 안아주며 사랑과 축복의 말을 전합니다.

 

아빠는 요즘 무료로 이용하는 지하철로 교회에 가셔서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고 섬깁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치장하던 엄마는 매일 같이 어깨에 띠를 두르고 노방전도를 하며 주님께 감사함을 고백합니다. 오빠는 저의 가장 큰 근심거리이자 기도제목 이었지만 이제는 저보다 더 열심히 기도하며 예배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님은 참 멋진 분입니다. 가족 중 가장 연약하고 자랑할 것 없는 저를 중보자로 세우시고 아무 의미 없던 삶을 예수님 안에서 값진 삶으로 변화시키시니 말입니다.

 

불신 가족 전도 간증을 들어보면 한결 같이 그들 자신이 예수님을 잘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신 가족에게 감사하자는 것입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어떤 모욕을 주고 핍박을 하여도 감사합시다.

그들을 전도하여야 하기에 우리가 영적으로 교만해지지도 나태해지지도 않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로 믿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족 전도에 조급해 하지 말라고 기도도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아니 눈물로 믿지 않는 가족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입니다.

모세는 금 송아지를 섬겼던 동족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의 영혼을 걸었습니다.

 

32:32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그래서 이스라엘도 살고 모세도 살았습니다.

 

사도 바울도 예수님을 배척한 동족 유대인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의 영혼을 걸었습니다.

9: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우리가 할 일은 이처럼 믿지 않는 가족을 위하여 내가 죽어도 좋으니 저를 구원해 주소서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결혼을 하였지만 제게 큰 감동을 준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 청년이 5살 때, 3살 된 동생과 함께 부모님 이혼의 아픔을 겪었습니다. 아이들만 집에 두고 어머니는 집을 나가고, 아버지는 며칠 째 집에 들어오지 않으니 굶어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5살 된 이 아이가 이웃집에 가서 사정을 하여 겨우 밥을 얻어먹고 살았습니다.

 

비뚤어져도 한참은 비뚤어졌을 이 아이가 훌륭하게 자랐습니다.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녔고 초등학교 6학년 때 예수님을 영접했기 때문입니다. 그 때부터 아버지를 위해서 너무나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아버지 술 취해 들어오면 어린 아이가 아버지 머리를 잡고 기도했습니다.

 

아버지가 귀찮다고 이불을 뒤집어쓰면 아버지 발을 잡고 기도했습니다. 그 청년이 군에 입대하기 전 아버지를 꼭 전도하여야 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어느 날 [아버지 전도전략]이라는 전단을 만들어 교인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전도하려 했지만 아직까지도 그것을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매일 점심 금식으로 기도하였습니다, 아버지 마음이 많이 열려서 내일 교회 오겠다고 하셨는데 확실한 답을 주지는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복음의 문이 내일 열리기를 소망합니다,

 

평생 제일 큰 소원입니다, 아버지가 교회에 나오셔서 우리 가정이 믿음의 가정으로 주의 일을 감당하기 원합니다, 우리 사랑하는 아버지를 위하여 기도해 주십시오.

부탁의 말씀 1. 기도문을 받으셨으면 꼭 저희 아버지를 위하여 기도해 주십시오. 2. 기도 후에 아래 전화번호로 전화하셔서 내일 교회오시기로 하셨다면서요? 잘 하셨습니다. 내일 만나시지요. 하고 반갑게 맞아 주십시오.”

 

탬파베이에서 목회하는 주명식 목사님이 무당인 엄마를 전도한 이야기가 [무당 엄마 목사 아들]이란 책으로 나왔습니다.

아무리 전도하기 힘든 가족이라도 무당 보다 힘들겠습니까? 가족 전도가 힘들어 안타까운 분들은 한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주명식 목사님이 어려서 교회에 다녔는데, 은혜를 받고 목사가 될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군에 있을 때, 엄마가 신 내림을 받고 무당이 되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저 무당도 아니고 맨발로 작두를 타는 신력높은 강신무가 된 것입니다.

 

가족들은 모두 어머니를 지지하고 예수를 믿는 저자를 핍박했습니다. 저자는 자신이 신대원에 입학하기 전 어떻게 해서든지 엄마에게서 귀신을 내어 쫓아야 한다는 조급한 마음에 무당 엄마와 사사건건 다투었습니다.

 

영적인 능력이 많다는 목사님, 기도원 원장들을 찾아 상담하였더니, 한결같이 엄마 보다 더 강한 영적 능력을 받아 엄마 안에 있는 귀신을 내어 쫓을 수 있다고 조언해 주더랍니다. 그 후 온갖 부흥회를 쫓아다니며 열심히 기도했지만 엄마와의 관계는 더 악화되어 갔고, 엄마가 무당이 되기 전까지 말싸움 한번 없이 순종적이었던 그가 엄마와 수없이 싸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이건 아니잖아?” 라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엄마 안에 있는 귀신은 미워해야 하지만 엄마를 미워하고 싸워서는 결코 엄마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이 깨달아지더랍니다.

 

초창기에는 어머니께 모질게 대했어요. 그냥 화풀이였죠. 나는 목사가 될 건데, 어머니가 무당이라니, 그 분풀이었어요. 그런데 무당 이전에 어머니에 대한 긍휼과 연민, 엄마의 영혼에 대한 사랑이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불쌍히 여기셨잖아요. 그러므로 모든 전도 사역의 마음은 긍휼이어야 함을 깨달았습니다. 그 후 어머니의 영혼, 인격을 사랑하고 섬기게 됐습니다. 그 후부터 엄마와 부딪히지 않으려 애를 썼고 오직 눈물로 기도하였습니다.”

 

결국 무당인 엄마는 아들의 긍휼과 사랑의 전도로 주님께 돌아오게 됩니다.

주명식 목사님이 이 책을 쓰기로 결심한 것은 자신과 같은 어려움을 겪는 많은 한국 교회 교인들이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정말 말하고 싶은 것은 그 어떤 무당이라 할지라도 그들을 비인격적으로 무시하거나 욕을 하거나 저주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 안에 귀신이 들어갔지만 그가 귀신은 아닙니다. 무당이라도 그 영혼을 예수님처럼 측은히 여기는 게 중요합니다

 

선교사 하면 인도선교사, 중국선교사, 일본선교사 등이 있지만 그런 선교사보다 더욱 중요한 선교사가 있습니다. 바로 가정선교사입니다. 가족 중에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나는 이 가정에 파송된 선교사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깨달으면 불신 가족에 대한 자세가 달라집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살며불신 가족에게 진심으로 감사하고 오직 사랑만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주님이 하십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진정한 구원의 열매가 맺히기를 축원합니다.

 

찬송 503

세상 모두 사랑 없어 (불신 가족, 확신 없는 가족의 마음의 호소를 생각하며)

1. 세상 모두 사랑 없어 냉랭함을 아느냐 곳곳마다 사랑 없어 탄식 소리 뿐일세

악을 선케 만들고 모든 소망 이루는 사랑 얻기 위하여 저들 오래 참았네

사랑 없는 까닭에 사랑 없는 까닭에 사랑 얻기 위하여 저들 오래 참았네

2. 곳곳마다 번민함은 사랑 없는 연고요 측은하게 손을 펴고 사랑 받기 원하네

어떤 이는 고통과 근심 걱정 많으니 사랑 없는 까닭에 저들 실망하도다

사랑 없는 까닭에 사랑 없는 까닭에 사랑 없는 까닭에 저들 실망하도다

3. 어떤 사람 우상 앞에 복을 빌고 있으며 어떤 사람 자연 앞에 사랑 요구하도다

먼저 믿는 사람들 예수 사랑 가지고 나타내지 않으면 저들 실망하겠네

예수 사랑 가지고 예수 사랑 가지고 나타내지 않으면 저들 실망하겠네

4. 기갈 중에 있는 영혼 사랑 받기 원하며 아이들도 소리 질러 사랑 받기 원하네

저들 소리 들을 때 가서 도와줍시다 만민 중에 나가서 예수 사랑 전하세

예수 사랑 전하세 예수 사랑 전하세 만민 중에 나가서 예수 사랑 전하세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 /벧전3:7/ 유기성목사

2022-09-22 10:54:23

 

벧전 3:7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오늘은 가정부흥회로 부부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려 합니다.

이 설교를 듣는 사람들 중에는 배우자와 사별하신 분, 이혼의 아픔을 겪으시는 분, 아직 구원받지 못한 배우자로 인하여 혼자 신앙생활 하는 분, 결혼 전 미혼인 청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분들은 자신의 문제는 아니지만 부모의 문제이고 자녀의 문제이기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의 문제이기도 하니 마음을 열고 들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존 파이퍼는 <결혼신학>에서 디트리히 본 회퍼는 194539세의 나이로 교수형에 처해졌을 때, 마리아 폰 웨드마이어와 약혼한 상태였습니다. 그의 소명은 결혼이 아닌 순교였던 것입니다라는 말을 하면서 실제에 이르기 전에 그림자는 건너뛰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결혼은 그림자이고 실제는 주님과 하나 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결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결혼의 복보다 순교의 복을 주셨고, 어떤 이에게는 독신의 은사를 주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결혼의 복을 받은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히려 많은 사람이 결혼에 대하여 비관적입니다.

혼자 외롭게 사시겠어요? 아니면 결혼해서 지겹게 사실래요?”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살아보면 행복하게 지내기 정말 힘든 관계가 부부입니다.

그것은 너무나 가까운 사이이기 때문입니다.

 

맥스 루카도는 [예수님처럼]이라는 책에서 많은 사람이 매임병으로 고통을 당한다고 하면서 매임병은 가족이나 직장 동료, 교인들 같이 꼼짝없이 매인 사람들 때문에 생긴 병이라는 것입니다. 증상은 짜증이 나고, 자주 화가 나며, 분노가 폭발하고, 속이 타는 것 등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결혼에 대하여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결혼은 하나님의 작품이지 결코 인생의 무덤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중요한 것은 부부가 철저히 성경대로 살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부부관계는 행복하십니까?”

만약 금방 하고 대답하지 못한다면 다음 질문에 대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부부 생활을 성경대로 하고 계십니까?”

 

베드로 사도는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라고 말했습니다.

지식을 따르라라는 것은 가정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있고 그것을 잘 알아야 하며 그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경적 가정생활에 대한 책 한 권 읽어 본 적이 있습니까?

만약 없다면 아직 행복한 가정을 이루려고 노력한 것이 아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성경은 부부 관계에 대하여 충격적인 말씀을 합니다. ‘한 몸이라는 것입니다.

5:31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찌니

엄청난 말씀 아닙니까? 처음 들은 말씀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진지하게 생각해보기는 했습니까?

많은 아내들이 남편에게 순종하라는 말씀을 자존심의 문제로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남편은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라는 말을 건성으로 듣습니다.

그것은 부부가 한 몸이라는 말씀을 믿지 않을 뿐 아니라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도 없다는 증거입니다.

몸이 머리가 하자는 대로 움직이는 것이 자존심 문제입니까? 건강한 것입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이 그와 같은 것입니다.

 

남편은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해야 합니다.

5: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 지셨습니다. 그러므로

남편은 아내의 허물과 죄를 대신 져야 합니다. 그것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정말 남편이 아내의 죄를 대신 질 수 있단 말입니까?’ 질문할 남편이 있을 것입니다.

딸이 잘못하여 쩔쩔매고 있는 것을 본 아버지는 달려가서 딸을 뒤에 감추고 제가 책임질게요! 이 아이한테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고 결심하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저절로 됩니다. 딸이니까요!

딸에게 할 수 있다면 아내에게는 더 말할 것이 없습니다.

한 몸임을 믿기만 하면 말입니다.

 

심각하게 이혼을 생각하는 성도가 있었습니다. 어머니를 모시고 살게 되면서 아내와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답니다. 어머니를 모시고 산 지 1년이 지난 후, 어머니와 아내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관계가 나빠졌습니다. 그런 아내에게 이혼하자고 했습니다. 어머니와 헤어질 수는 없는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분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아내와 한 몸임을 믿습니까?”

어머니와 헤어질 수 없는 관계라면 아내와는 더 그런 사이인 것입니다.

문제는 아내와 한 몸임을 믿지 않은 것입니다.

 

부부 사이에서 순종과 사랑은 계명이 아닙니다.

한 몸을 이루고 지켜내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대학원에서 [영성과 가정]이란 과목을 강의했는데, 참여한 어느 목사님의 일기입니다.

오늘 아침, 아내의 주정차 위반 고지서를 받았습니다. ‘이게 벌써 몇 번째야화가 나 아내에게 사진을 찍어 보냈습니다. ‘당신이 잘못했으니 벌금은 당신이 내는 거 알지하는 것이 제 속마음이었는데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니 그렇게 한 것이 한없이 부끄러워졌습니다. 아내에게 다시 문자를 보냈습니다. ‘여보, 과태료는 내가 낼게.’

그동안 아내와의 관계에서 잘잘못을 따지는 경우가 많았음을 회개합니다.”

 

결혼을 앞둔 청년들의 관심은 온통 결혼식에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감동적이고 화려하고 재미있는 결혼식을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결혼으로 부부가 한 몸이 된다는 사실은 관심도 믿음도 없습니다.

그래서 화려한 결혼식을 하고 신혼여행 때부터 싸우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부부 사이를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벧전 3:7)라고 했습니다. ‘생명의 은혜영생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부는 영적으로 한 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편이 아내를 더 연약한 그릇으로 여기되 귀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귀하게 여기라는 말씀은 주님을 대하듯대하라는 의미입니다.

 

데이비드 배너의 [거룩한 사귐에 눈뜨다]라는 책을 읽었는데, 저자가 어느 모임에서 그리스도인 부부는 영적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요지의 말씀을 전하였답니다. 그런데 한 여성이 강력히 항의하더랍니다. “결혼 관계를 유지하고 사는 것만으로도 너무 힘들어요! 거기에 영적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요? 우리 보고 죽으라는 것이에요?”

 

부부가 한 몸이 되는 것은 노력의 산물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힘들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부부 문제에서 구원해 주시는 것입니다.

부부 문제를 우리에게만 맡겨두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친히 올바르게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예수님과 교회의 관계와 같습니다.

5:31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32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이것은 놀라운 비밀입니다.

예수님과 교회가 한 몸이 되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포도나무와 가지인 관계입니다.

이 은혜가 가장 먼저, 가장 놀랍게 누려지는 것이 부부 사이입니다.

 

부부가 이처럼 한 몸 되어야 하는 이유는 기도가 막히지 않기 위함입니다.

벧전 3:7 ...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부부 관계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 된 관계이기에 기도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칩니다.

혹시 기도가 안 된다면 원인이 부부 관계에 있지 않은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부부 문제는 교회 공동체 전체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칩니다.

베드로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언제 어떻게 붙들려 순교할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들에게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었겠습니까? 공동체의 깨어짐, 분열입니다.

교회 공동체의 원형은 부부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부부 관계가 깨어진다는 것은 공동체 전체가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부부 사이가 하나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는 현재도 동일합니다. 아니 더 심각합니다.

부부가 매번 싸우고 갈등한다면 교회 공동체는 영적으로 죽어가는 것입니다.

공동체 안에 기도의 역사가 일어나려면 부부가 주님 앞에서 하나 되어져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 이미 한 몸이 되었음을 믿고 아내는 순종하고 남편은 사랑하면 예수님께서 부부가 하나 되어 살게 해 주십니다.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예수님의 눈으로 배우자를 보면 자신의 눈으로 보는 배우자와 다른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한 몸인 것이 믿어집니다. 그러면 더 이상 배우자 문제는 없습니다.

자기 문제 하나 있을 뿐입니다. 배우자를 위한 기도는 곧 자신을 위한 기도입니다.

 

한번은 행복플러스 가정세미나를 마친 집사님이 고백했습니다.

강의를 들으면서 우리 부부 관계가 말씀에 기초하지 못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부부가 한 몸인 것을 알지 못하였기에 저의 단점은 적당히 감추면서 남편의 단점은 다른 사람에게 스스럼없이 이야기했습니다. 남편은 남편이었고, 저는 저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부부가 한 몸인 것을 알고 나니 남편의 단점을 가려주고 싶어졌습니다. 남편의 단점이 곧 저의 단점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시댁과의 관계에서 있었던 모든 상처와 미움도 눈 녹듯 사라졌습니다. 친정이나 시댁의 차이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실로 놀랍고 기적 같은 일입니다. 저 스스로는 감히 해결할 수 없었고, 너무 아파서 건드릴 수조차 없었던 가정 내면의 문제를 해결해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예수님은 정말 우리 부부 문제의 해답이고 구원자이십니다.

 

결혼 후 한동안 저희 부부싸움의 최후의 보루는 새벽기도회였습니다.

부부 싸움을 하고서는 다음 날 새벽기도회 인도를 할 수 없었기에 밤이 지나기 전 화해를 해야 했고 그렇게 새벽기도회를 하고 나니 또 회복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새벽기도회 때문에 겨우 다투지 않는 정도로 살다가 예수님을 바라보게 되면서 아내와의 관계가 비로소 한 몸 됨을 깊이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매일 예수동행일기를 서로 나누면서 남편과 아내만 아니라 주님과 함께 사는 놀라운 은혜를 누립니다. 전에는 다투고 화해했지만 지금은 다툼 자체가 거의 없어졌습니다. 너무나 신기하고 놀라웠습니다.

행복플러스 가정세미나 때, 간사님이 목사님, 전에는 사모님과 잘 지내시려고 노력하시는 것처럼 보였는데, 요즘에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사모님과 하나 되어 보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보시기에 부부가 함께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이 부담스러워 보입니까? 행복해 보입니까?

 

부부 문제의 답은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부부가 한 몸인 것을 믿으면 주님께서 역사합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남편이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라 믿으면 예수님이 인도하십니다.

남편이 아내의 죄를 대신 지는 것도 쉬운 일입니다.

아내가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라 정말 믿으면 예수님이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부부가 한 몸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역사가 부부 사이와 가정에 일어나게 됩니다.

 

찬양: 주 안에 우린 하나

 

 

 

나그네의 부부생활 /벧전3:1-7/ 김승규목사

2021-06-08 08:52:46

 

베드로전서3:7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신앙생활 할 때 일어나는 문제 중 하나가 믿는 아내와 믿지 않는 남편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거룩한 순례자의 길을 가는 나그네로서 부부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 권면합니다. 말씀을 통하여 부부관계 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불신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야 하는 삶의 원리를 배울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I. 아내 된 자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1-5)

 

사도 베드로의 주된 관점은 하나님의 자녀들인 성도들의 삶이 가정에서나 사회에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존재가 되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첫째, 행실을 통하여 남편을 구원하라(1,2)

 

1,2절을 보십시오. 아내 된 자들에게 먼저 이와 같이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라는 말은 앞장에서 순종의 모델로 보여 준 예수님을 말합니다. 즉 주님을 믿는 여인들이 하나님에게 순종하신 예수님처럼 그들은 남편들에게 순종해야 한다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이는 비굴하거나 줏대 없는 복종이 아닙니다.

 

자발적인 자기 희생입니다. 그들의 아름다운 행위로 말미암아 남편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해서 자기를 낮추는 것입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남편은 그 아내의 경건한 삶과 순결한 삶을 통해서 감동을 받고, 복음을 받아들이고 구원을 얻게 됩니다.

 

예수 믿는 아내들은 믿지 않는 남편에게 설교하기 쉽습니다. 논쟁을 하여 남편을 설득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남편들에게는 잔소리 같이 들립니다. 베드로는 교회에서 남녀 평등사상이나 주장하고, 남편이 자기를 소유물처럼 여기는 것을 대항하여 싸우라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여성해방운동가처럼 행동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믿지 않는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했습니다. 남편에게 선량한 아내가 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아내의 아름다운 행실을 보고 감동을 받아서 기독교에 대한 편견과 적대감정을 풀게 하라는 것입니다. 남편의 마음을 녹여서 구원의 복음을 영접하도록 섬기라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은 남편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남편을 예수님께로 인도하고자 하는 목자의 심정에서 나오는 순종입니다. 두려움에서 나오는 비굴한 순종이 아니라 완전한 사랑의 순종입니다. 아내의 순종과 아름다운 행실은 남편에게 하는 침묵의 설교입니다. 남편은 아내의 말을 듣고 감동을 받지 않습니다.

 

아내의 경건과 정결한 삶을 보고 복음을 받아들입니다. 예수 믿는 것 빼놓고는 내 아내는 최고라는 칭찬을 들어야 합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남편 싫어하는 일을 골라서 하고, 남편을 무시하고, 대항하여 싸운다면 어느 남편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그래서 베드로는 남편에 대한 목자의 심정으로 그리스도께 받으신 고난의 발자취를 따라 사랑의 십자가를 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잠언 기자는 말합니다. "어진 여인은 그 지아비의 면류관이나 욕을 끼치는 여인은 그 지아비의 뼈가 썩음 같게 하느니라"(12:4) 남편의 뼈를 썩게 하는 고통을 주면서 예수를 믿는다면 이는 남편의 구원을 가로막는 큰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바울도 말합니다.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하지 못하니라.”(고전 7:14) “아내 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고전 7:16).

 

이러한 원리는 믿지 않는 남편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지 않는 가족들과 친척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기 위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에게 좋은 가족이 되고, 그들에게 좋은 형제가 되고, 친척이 되어야 합니다. 착한 행실로 그들을 감동시켜야 합니다.

 

주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5:16)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처럼 말없이 고난을 짊어지고, 꾸준하게 선을 행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때가 되어 가족을 구원하고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둘째, 마음에 숨은 사람을 단장하라(3-4)

 

3,4절을 보십시오. 여자들은 몸단장하는 일에 관심이 많습니다. 단장하는 것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머리를 단장하고, 장신구를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것입니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그 때 이미 머리를 곱슬곱슬하게도 했으며, 염색하기도 했습니다. 머리를 꾸미는 데도 여러 가지 방법이 있었습니다. 사회적인 계급과 신분에 따라서 머리 모양을 단장하는 법이 달랐습니다. 또 몸에 온갖 보석들을 달았습니다. 이사야서에 보면 장신구들이 너무나 다양했습니다. 가발을 썼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숨어 살던 카타콤에서도 가발이 발견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이와 같은 현실을 직시하고 외모를 단장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음에 숨은 속 사람에게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겉으로 드러난 외모와 겉 장식에만 관심이 많습니다.

 

요즘은 겉 장식뿐만 아니라 몸 자체를 뜯어고치는 것이 유행처럼 번져 있습니다. 21세기는 신체의 시대라고 합니다. body가 중요합니다. 몸 짱, 얼 짱, 생얼 짱 등 유행어들이 이 시대를 말해 줍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유행에 따라가기 쉽습니다. 성경은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장식하라고 합니다. 온유하고 정숙한 마음으로 속사람을 단장하라고 합니다.

온유란 야생마가 길들여진 상태를 표현하는 말입니다. 야생마는 힘이 세고, 에너지가 넘칩니다. 그렇지만 길들여지면 주인에게 아주 온순합니다. 주인에게 절대 순종합니다. 온유란 힘이 넘치면서도 아주 부드러운 성품을 말합니다. 편안하고 안정된 마음은 시끄럽게 하지 않고 조용한, 고요한 마음입니다. 온유한 마음이나 안정된 마음은 우리 주님께서 예수 믿는 성도들에게 요구하시는 성품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우리 속사람을 온유함과 정숙함으로 장식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몸을 단장할 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거울입니다. 거울을 보고 머리도 빗고, 장식품도 달고, 옷을 입고 몸에 맞는지 분별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속사람의 모습을 비춰 볼 수 있는 거울이 필요합니다. 이 거울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나의 현재 속사람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말씀의 거울이 없이는 우리 속사람의 얼굴에 무엇이 묻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비추어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의 속사람을 단장해야 합니다.

 

가정에서 혈기를 부리고 신경질 내고 짜증내고 평강을 잃어버리고 조급해지고 다투기 쉽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 말씀에 자신을 비춰 보며 온유한 마음과 안정된 마음으로 속 사람을 단장할 수 있길 축원합니다.

 

셋째,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5,6)

 

베드로는 이제 믿음의 선진들의 삶을 통해서 남편에게 복종한 대표적인 아내의 모습을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에게서 찾습니다. 5,6절을 보십시오. 사라는 모든 신실한 자들의 어머니입니다. 사라는 자기 남편인 아브라함을 주라고 부르면서 복종하였습니다. 사라는 어떻게 자신을 단장했습니까?

 

사라는 편안하고 익숙한 것들을 다 떠나 남편을 따라 낯선 땅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장막 생활을 했습니다. 살림을 살아야 하는 여인에게 이는 참으로 힘든 일이었습니다. 이는 왕궁에서 자기 하고싶은 것은 다 하며 사는 왕비의 삶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끊임없는 변화에 적응하는 믿음의 삶이었습니다. 어느 한 곳에 잠시 정착했는가 하면 다시 다른 곳으로 가야 했습니다. 무엇보다 사라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칠 때에도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했고 두려워하거나 염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늘 하나님의 언약이 이뤄지기를 기도했고, 남편의 기도를 신뢰했습니다. 사라는 남편을 존중하고 남편에게 순종했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께 순종했습니다.

 

사라가 이렇게 남편에게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남편이나 자식에게 소망을 두고 살았다면 어떻게 순종할 수 있었겠습니까? 사라는 남편을 가정의 머리로 부르시고 세우셨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으로 아브라함에게 복종하며 모든 믿는 여인들에게 본이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사라같은 많은 믿음의 여인들이 나오기를 축원합니다. 매일 하나님 말씀 앞에 자신을 비춰 보며 단장하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 갈 수 있길 축원합니다.

 

II. 남편들아, 아내를 귀히 여기라(7)

 

7절을 보십시오. 여기서 말하는 지식이라는 말은 성경에서 말하는 결혼의 진리를 가리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가장 기본적인 결혼의 진리가 무엇인가?

 

첫째는 창조의 원리에 근거한 것입니다.

 

남자가 그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2:24). 남자가 가장으로서 책임을 지고, 아내와 사랑으로 연합하여 한 몸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둘째는 재창조의 원리에 근거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교회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온 마음을 다하여 순종합니다. 이처럼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것처럼 사랑하고, 아내는 교회가 그리스도께 복종하듯이 남편을 공경하고 복종하라고 했습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5:22-25)

 

부부 사이에는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남편은 아내의 머리이고, 아내는 남편의 몸입니다. 그 사이를 그리스도께서 이어 주고 계십니다. 머리는 몸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기까지 사랑하고, 몸은 머리를 위해서 자발적으로 순종합니다. 이런 관계가 성경이 말하는 부부관계의 기본지식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부부관계의 근본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남편의 사랑과 아내의 순종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을 최고의 법으로 알고 실행토록 힘써야 합니다.

 

남편들이 아내에 대해서 알아야 할 기본적인 두 가지 사실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아내는 더 연약한 그릇임을 알고 보호해 주어야 합니다.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연약한 그릇이라는 말은 깨어지기 잘하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내는 남편의 보호를 받고자 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자기를 보호해 주지 않으면 아내는 큰 상처를 받습니다. 따라서 남편은 적극적으로 아내를 보호해 주어야 합니다.

 

제가 알고 있는 어떤 가정은 부부 사이에 심각한 문제가 생겨서 이혼위기에까지 갔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근본 원인이 남편이 자기가 임신했을 때 먹고 싶은 것도 안 사 주고, 적극적으로 자기를 돌봐 주지 않았다는 데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 때부터 남편을 무시하게 되었고, 점차 골이 깊어지게 되었습니다.

 

특히 여성은 임신을 했을 때 가장 남편의 보호를 받고 싶어 합니다. 자녀를 낳았을 때 본능적으로 아주 예민한 시기입니다. 그 때 남편들은 적극적으로 아내들을 care 해 주어야 합니다. 남편들은 아내들이 보호 받아야 할 연약한 그릇임을 알고 적극적으로 보호해 줄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둘째로,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은 자로 알고 귀히 여겨야 합니다.

 

신체 구조적으로나 본성적으로 아내들은 남편보다 더 연약하지만 영적인 차원에서 보면 아내는 그의 남편과 동등한 존재입니다. 아내는 현세와 내세의 모든 축복을 포함한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남편은 아내가 자신과 동등한 영적 신분과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는 당시의 사회 배경 속에서는 혁명적인 선언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여성도 평등한 영적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남녀평등 사상이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아담은 하와를 처음 보았을 때 이는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로다.”라고 사랑을 고백했습니다.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이라는 말은 그만큼 자신에게 있어서 소중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아내에게 합당한 존경을 베풀어야 합니다. 아내의 의견을 존중하고, 그의 안전을 보호해 주어야 합니다. 아내의 행실을 기뻐하며 신뢰하고 넓은 가슴으로 품어 주어야 합니다.

 

남편은 주님께서 교회를 사랑하심같이 아내를 사랑해야 합니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지 않으면 아내는 삶의 기쁨을 잃어버립니다. 낙이 없어집니다. 그렇게 되면 가정은 삭막해지고, 자녀들이 행복한 가정에서 자랄 수 없게 됩니다.

 

무엇보다 남편이 아내를 귀히 여기지 않으면 기도가 막힌다고 했습니다. 아내를 귀히 여기지 않아 마음에 깊은 상처를 주면 아내의 탄식소리가 남편의 기도를 가로막아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편의 기도는 하나님 앞에 상달되지 못합니다. 우리속담에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보호 받아야 할 때 보호받지 못하고 깊은 상처를 받으면 그 상처가 평생을 갑니다. 그러므로 아내는 연약한 그릇이요, 생명의 유업을 함께 받을 자로 알고 귀히 여기는 남편들이 될 수 있길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거룩한 나그네로서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사람들은 가정생활도 달라야 합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속사람을 온유함과 평안함으로 단장해야 합니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여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예수 믿는 자들의 가정은 행복의 보금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자녀들이 사랑으로 양육되고, 부모님들의 아름다운 부부생활을 보면서 믿는 가정의 행복을 알게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의 가정이 이런 복된 가정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성경적인 가정 만들기 /벧전3:1-7

2020-06-08 06:30:04

 

1. 가정이 우선이다

 

가정이 화목하면 모든 일이 잘 이루어진다는 뜻인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은 명심보감(明心寶鑑) 치가(治家) 편의 자식이 효도하면 어버이가 즐겁고, 집안이 화목하면 만사가 이루어진다. 때때로 불이 나는 것을 방비하고 밤마다 도둑이 드는 것을 막아준다(子孝雙親樂, 家和萬事成. 時時防火發, 夜夜備賊來)”는 구절에서 따온 말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 우리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도 일치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에 가정을 만드신 후, 그것이 사회와 교회, 국가와 하나님의 나라의 기초가 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까요? 미국의 기업들은 오래 전부터 이 가화만사성을 기업의 중요한 모토로 여겨 왔습니다. 가정생활이 좋아야 회사 업무에 충실할 수 있다는 것, 즉 직원들의 가정생활이 행복해야 영업 실적도 오른다는 전략에서였습니다. 그 결과, 직원들의 업무 능률이 향상되고, 생산성을 끌어올리는데 성공했습니다. 이후 우리나라의 기업들 상당수도 이 전략을 취했다고 합니다.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재택근무라는 것도 이런 흐름의 하나가 아닐까요?

 

이처럼 개인과 사회와 교회에 있어서 가정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직장을 잃거나 사회적인 큰 혼란이 일어나도 가정이 든든하면 어떻게든 견딜 수 있지만, 가정이 무너지면 전부가 와르르무너지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가정은 평안할 때도 중요하지만, 고난의 시기를 보낼 때는 더더욱 중요합니다.

 

왜 이런 말씀을 드립니까? 오늘 본문이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의 가정생활에 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대로, 본문 당시 교회와 성도들은 엄청난 고난 가운데 있었습니다. 네로 황제와 로마 정부가 짐승 사냥하듯 박해를 했고, 주변 사람들과 사회 전체가 그들을 감시하고 협박하는 상황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힘든 고난이 어떤 의미인지를 지난주에 말씀드렸습니다. 그에 이어지는 오늘 본문은 고난 가운데 있는 신자들의 가정생활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2. 성경적인 가정의 도리

 

1) 남편에게 순종하라

 

베드로는 먼저 아내들에게 말합니다. 그런데 아내들아라고 부른 후 이어서 이와 같이라고 하는데요. 그 말은 지금까지 신자가 세상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권면한 것과 같은 흐름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베드로는 어떤 말을 했습니까?

 

213절에서는 신자는 모든 제도에 순종해야 한다고 했고, 218절에서는 신자인 노예들은 주인에게 순종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따라서 이와 같이라는 말은 그에 이어지는 오늘 본문에서도 똑같은 語調와 주제로 말한다는 뜻으로, 남편을 향한 아내의 순종은 신자가 정부에 순종하듯, 또 신자인 노예들이 주인들에게 순종하듯 그와 같이 순종하라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베드로가 이 편지를 쓸 당시 로마 사회에서의 여성들의 지위는 정말 말하기가 민망할 정도로 형편없었습니다.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아내를 빌려줄지언정 돈은 빌려줄 수는 없다는 말이 상식으로 여겨질 정도였습니다. 아내보다는 돈이 훨씬 더 소중했다는 말입니다. 그 뿐 아닙니다.

 

지금 여러분이 사진으로 보시는 것처럼 로마 시대의 여성들은 노예와 같거나 그보다 못한 대접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당시 로마 사회에서는 부인과 자녀 등 전 가족들이 남편의 종교를 따라야 했습니다. 로마 정부가 사회 전체가 규격화된 질서를 가져야 한다고 규정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편이 기독교인이 되면 아내는 자동적으로 따라야 했기 때문에 문제 될 것이 없었지만, 반대로 아내가 종교를 바꾸면 그것이 家長의 권위를 침해하고 가정을 파괴하는 것으로 여겨 부인을 엄청나게 괴롭혔습니다. 따라서 신앙 때문에 남편과 이혼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여성의 地位나 여성의 人權에 대해 언급하는 것조차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회, 거기다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국가적인 범죄자로 여겨지는 현실, 또 신자인 여성이 남편이나 가정의 종교와 다른 종교를 가진 것만으로 내쳐질 수 있는 상황 가운데, 베드로는 먼저 여성 신자들에게 말합니다.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1).”

 

신자가 핍박하는 정부와 지도자에게 순종하듯이, 신자인 노예가 주인에게 순종하듯이, 한 가정의 부인도 남편에게 그리하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명령은 더 어렵고 복잡한 상황을 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왜 베드로는 순종하라고 하는 것일까요? 이어지는 말씀에 그 답이 있습니다.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1).”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는 모습이 남편을 구원받게 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 수 있다는 말입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할 때, 그것을 통해서 남편에게 전도의 문이 열릴 수 있다는 말이죠. 이 말을 반대로 해석하면,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지 않고 대신에 그 성미를 건드리면 오히려 전도의 기회가 사라진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남편을 구원하기 위해서, 즉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가까운 사이일수록 설교나 강의가 잘 통하지 않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가까운 사람일수록 감동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이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하는 것은 아내로 하여금 남편을 감동시키라는 말입니다.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를 아시지요?

 

모니카는 방황하는 아들 어거스틴을 위해서 정말 오랜 세월 기도했고 그 기도에 응답을 받았지 않습니까? 이것을 모르는 신자, 그리고 여성 신자들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니카의 기도는 먼저 남편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그 결과 남편이 먼저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이런 어머니의 모습이 아들 어거스틴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어거스틴의 참회록에 보면, “나의 어머니는 아버지를 마치 주님 모시듯 했습니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모니카의 삶의 태도가 먼저 그 남편에게 깊은 감동을 주어서 그를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었고, 또 그런 모습이 아들에게도 깊은 감동을 주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아내 된 성도 여러분, 남편에게 순종하십시오. 남편이 감동할 때까지, 그리고 자녀들이 감동받을 때까지, 그리고 그것 때문에 남편에게, 혹은 또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 주님의 복음이 전해질 때까지!

 

남편에게 순종해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실을 봄이라(2)”는 말씀 때문입니다. 신자인 아내가 순종하는 것은 사실 남편 때문이 아닙니다. 주님 때문이고, 그렇게 사는 것이 참된 신자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4절에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는 말씀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신자인 아내가 남편에게 보여주어야 할 신앙의 가치는 무엇입니까?

 

4,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모든 신자들, 그 중에서도 여성 신자들이 반드시 가져야 할 두 가지의 신앙적 가치는 온유함안정됨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온유잘 통제되고 있는 인격을 뜻합니다. 즉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라도, 또 남편이 아무리 도발적인 말이나 행동을 할지라도, 차분함을 유지하면서 관용과 사랑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 온유입니다.

 

둘째는 안정인데요. 여기서 말하는 안정고요하다는 뜻입니다. “예수 믿더니 말만 많아졌다는 소리를 들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죠. 특히 불신 남편과 함께 사는 부인은 남편에게 말을 많이 하기보다는 하나님께 남편에 대해 말을 많이 해야 합니다. 즉 자기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감정과 말들은 하나님께 쏟아내고 남편 앞에서는 항상 안정을 유지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결국 무슨 말인가 하면, ‘믿는 아내는 먼저 남편에게 자신의 속사람의 변화를 나타내 보이라는 말이고, ‘남편으로부터 먼저 인정을 받으라는 말입니다. 남편이 자기 부인을 향해 신앙 때문에 내 부인이 바뀌었어!’라고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세 번째로 신자인 아내는 꾸미는 것과 옷차림에서도 달라져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들은 로마 시대 여성들의 옷차림과 그 꾸민 모습을 보고 계십니다. 로마 시대의 여성들은 화장이나, 정교한 헤어스타일, 그리고 각종 액세서리에 많은 시간을 소비했습니다. 어쩌면 사회로부터, 남편으로부터 무시당하는 현실의 도피처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바로 그것과 관련하여 너희의 단장은 외모로 하지 말고(3)”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단장이란 헬라어로 코스모스(Κοσμοσ)인데요. ‘질서 있는 우주를 뜻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말에서 영어의 화장품, ‘Cosmetics’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베드로는 이 단어를 사용함으로서 신자인 여성들이 외모에 신경을 쓰지 말라거나, 예스럽고 촌스러운 차림을 해야 한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유행에 지나치게 집착하거나, 과도한 치장을 하거나, 너무 짙은 화장을 하는 것은 그 속에 있는 영적이고 신앙적인 덕목과 가치를 가리는 것이 된다는 말을 하려는 것입니다. 즉 신자인 여성은 자기 속에 있는 신앙의 가치, 성령의 열매, 신령한 아름다움이 우선적으로 드러나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로 신자인 여성이 그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은 믿음의 선진들의 모범을 따르는 것입니다.

 

5,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이어지는 6절에서는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순종한 것 같이 너희는 선을 행하고라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면 사라는 믿음의 어머니아닙니까? 그런데 사라는 아브라함을 라고 부르면서 순종했습니다.

 

사실 사라라는 이름의 뜻은 여왕입니다. 여러분, 여성들에게 여왕 콤플렉스,’ 혹은 공주 콤플렉스라는 것이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모든 여성들의 심리의 밑바닥에는 여왕으로 대접받고 싶어 하는 것이 깔려 있다는 말이죠. 사라는 그 이름처럼 정말 여왕 같았습니다. 우선 미모가 뛰어났고, 그와 더불어 나이에 비해 최소 2, 30년은 더 젊어 보였으며, 발달한 문명사회인 갈대아 우르와 하란의 복식과 화장법 등을 두루 갖추었다는 점에서 정말 여왕 같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애굽 왕이, 또 그랄 왕이 욕심을 낸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사라는 남편을 주로 모셨습니다. 그것도 자신을 동생이라고 거짓말하여 다른 남자의 품에 보낸 그 비겁하고 무정한 남자에게 말입니다!

 

그러므로 여성성도 여러분, 그리고 장차 한 남자의 아내가 되실 여러분, 말씀을 따라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여러분이 보시는 그림처럼 복음을 따라 사는 여성은 자기 남편에게 순종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런 여성에게, 그 남편과 자녀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2) 아내를 귀히 여기라

 

이어서 오늘 본문은 남편들에게도 말합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보시는 사진은 옛 로마의 남성들의 생활상입니다. 물론 상류층의 모습이지만요. 당시 가정의 일은 거의 다 노예와 여성들에게 맡기고 남성들은 그저 먹고 즐기고 정치만 했습니다. 그런 사회 속에 살고 있는 신자인 남편에게 본문은 뭐라고 말합니까?

 

남편들아 이와 같이 (7).”

 

이 말은 뒤에 나오는 내용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앞선 내용과 흐름을 같이 한다는 뜻입니다. 그 흐름이란 무엇입니까? ‘사회나 국가 조직의 지도자들과 주인에게 순종하라고 한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순종의 원리는 여성들만 아니라, 신자인 남성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不變原則이라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남편의 순종의 표현, 즉 용어는 조금 다릅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첫째, 남편들은 지식을 따라 아내와 동거해야 합니다. 여기서 지식이란 첫째 여성과 결혼과 가정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가리킵니다. 주 안에서 남편 된 사람들은 여성에 대한 지식, 결혼의 의미, 가정의 의미와 가치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는 말이고, 두 번째는 여자에 대한 일반적인 지식만 아니라 자기 부인에 대한 사적이고 특별한 지식까지 갖추라는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아내들에게 주어진 순종하라보다 남편에게 주어진 명령이 더 어렵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도 나를 잘 모르는데 여성에 대해, 아내에 대해, 결혼에 대해, 가정에 대해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그 지식에 근거해서 가정생활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남성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여성을 잘 알고 계십니까? 그리고 여러분의 아내에 대해 잘 알고 계십니까? 또 성경이 말씀하는 결혼의 의미, 가정의 의미에 대해서 잘 알고 계신가요? 오늘 본문은 이러한 지식이 없는 남편은 자격이 없다고 말합니다.

 

둘째로 남편들은 아내들을 귀히 여겨야 합니다. ‘귀히 여긴다는 말은 217절의 왕을 존대하라는 말과 같은 단어이며, ‘왕을 존대하라는 명령은 거부할 수 없는 절대적인 명령인 것과 같습니다. 즉 신자인 남편들이 아내를 귀히 여겨야 하는 것도 거부할 수 없는 절대적인 명령이라는 말이죠.

 

남편들이 아내를 귀히 여겨야 할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아내들이 더 연약한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여성들은 대체적으로 남성들보다 몸이 약하고, 마음도 약하고, 또 몸도 마음도 훨씬 더 예민합니다. 그래서 아내들은 육신적으로 더 빨리 더 많이 그리고 더 자주 아프고, 정서적으로도 훨씬 더 민감하지요. 따라서 잘 깨어지는 그릇을 떨어뜨리면, 그 소리가 요란한 것처럼 아내를 잘못 다루면 몸도 마음도 잘 깨어질 뿐 아니라, 그 소리가 더 요란하고, 그 아픔은 지금보다 몇 배 더 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합니다. 즉 남편들은 아내의 마음을 아프게 하거나 슬프게 하지 말아야 하고, 외롭게 하지 말아야 하며, 울지 않게 해야 합니다.

 

아내를 귀하게 여겨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아내들이 생명의 은혜”, 즉 영생과 천국을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이기 때문입니다. 아내들은 자녀를 낳거나, 혹은 믿음으로 자녀를 낳아 다음 세대를 이어갈 하나님 나라의 동료 건축가입니다. 그러므로 두 동업자의 파트너십은 정말 중요합니다. 육신의 자녀들을 위하여, 믿음으로 낳을 다음 세대를 위하여 남편이 아내를 존귀하게 여기는 것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천국 운동이라는 것이죠.

 

남편이 아내를 존중해야 하는 세 번째 이유는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7)”는 말씀 때문입니다. 부부 사이가 좋아야 기도도 잘 되지, 부부가 서로 다투면 기도의 문이 닫힌다는 말입니다. 나아가서 부부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은 부부를 하나 되게 하신 주님 앞에 죄가 됩니다. 따라서 죄는 신자의 기도의 문만 아니라 전 삶을 가로막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내를 더 사랑하고 존대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남성성도 여러분, 지식을 갖추고, 아내를 귀하게 여기며, 아내와의 온전한 하나 됨이 곧 하나님과의 一致로 이어진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그렇게 사는 것은 이 생과 내생에서 복된 일입니다.

 

 

3. 최고의 가정, 말씀 위에 세워지는 가정

 

말씀을 맺겠습니다.

 

본문의 순서에 따라 말씀을 살피고 있었는데, 의도하지 않게 가정의 달 5월을 맞으면서 부부와 가정에 대해서 설교할 수 있게 된 것은 너무나 감사한 일입니다. 오늘 본문은 부부에 대해, 가정에 대해 뭐라고 말했습니까?

 

먼저 아셔야 할 것은 가정은 호텔처럼 화려하고 안락한 곳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일류 맛집처럼 맛있는 음식이 있는 곳도 아닙니다. 패션쇼에 나오는 좋은 의복이 있는 곳도 아닙니다. 공원처럼 아름다운 정원이 있는 곳도 아닙니다. 때로는 불편하고, 때로는 답답하고, 때로는 입에 맞지 않는 음식을 먹어야 하고, 또 때로는 오래 된 옷이나 빵구 난 양말을 신기도 하고, 자녀들 때문에 눈물이 있으며, 답답한 일들도 생깁니다. 왜 그렇습니까?

 

가정은 한 남자와 한 여자와 그들 사이의 자녀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남자가 완벽한 남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완벽한 남편도 아니고, 완벽한 아버지도 아닙니다. 또 한 여자도 완벽한 여자가 아니며, 완벽한 아내가 아니며, 완벽한 어머니도 아닙니다. 또 자녀들 역시 완벽한 자녀들이 아니지요.

 

따라서 모두가 부족하기 때문에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 가족이고 가정입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준 상처, 아내가 남편에게 준 상처, 부모가 자녀에게 준 상처, 또 자녀가 부모에게 준 상처도 있는 것이 가정이라는 말이죠.

 

따라서 가족들은 서로가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렇게 바라볼 수 있어야합니다. ‘부족하기 때문에, 모자라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구나!’ 그렇게 서로를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완벽하지 않지만 그래도 성경말씀대로 살려고 애를 쓰는 남편,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아내, 말씀을 배우고 그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즉 성경적인 가정은 완벽한 가정이 아니라, 말씀대로 살려고 힘쓰는 가정이라는 말입니다.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의 노력이 필요한 곳이라는 말이죠.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비록 호화스런 저택에 살지는 못해도 화목하게 살도록! 비싸고 안락한 침대는 없어도 편히 잠들 수 있는 곳이 되도록! 진수성찬은 없어도 서로의 칭찬과 격려와 사랑을 풍성히 먹을 수 있도록! 값진 보석을 선물하지는 못해도 서로를 보석보다 더 귀한 존재로 여길 수 있도록! 세상적인 명예 학위 재산은 없어도 가정에서는 최고라고 느낄 수 있도록! 인격적으로 성자요 성인은 못되어도 서로의 허물을 덮어주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노력들을 하신다면, 성경적인 남편이자 성경적인 아버지가 될 것이요, 성경적인 아내이자 성경적인 어머니가 될 것이며, 성경적인 자녀가 될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은 완벽한 가정보다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힘쓰는 가정을 기뻐하시고, 그런 가정과 그 가족들에게 은혜와 복을 한없이 부어주신다는 기억하면서, 하나님께, 또 가족 서로에게 노력하는 것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복을 받는 길이고, 그 복을 자녀들에게 물려주는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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