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11:8-16/ 벧전2:11-12/순례자의 생활/ 한경직 목사
2014-08-23 08:32:27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 보고 환영하며 또 당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히 十一․十三)
히브리서 저자는 역대의 신앙 용사를 기록하여「나그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나그네라는 것은 보통 우리가 말하는 여행하는 자가 아니고 순례자라는 의미입니다. 또 베드로 전서 二장 十一절에는 믿는 자들을 향하여 사도 베드로가 부르짖은 말씀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과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마땅히 영혼을 거슬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는 구절에도 나그네라는 말씀이 있는 바, 이 역시 분명하게 순례자라고 번역할 수 있는 말입니다.
순례자는 보통 유랑자나 방랑자와는 다른 것입니다.
그들은 목적이 있는 여행자이며 특히 거룩한 목적, 종교적 목적을 가지고 성지를 순례하는 여행자입니다. 우리 기독교도 중에는 팔레스틴 성지를 중심 하여 순례하는 자가 많고 회회교에서는 메카 성지를 향하여 순례하는 자가 많은 것입니다.
믿는 사람은 마치 순례자와 같은데 순례자가 거룩한 땅을 순례하는 것처럼 믿는 사람은 거룩한 목적을 가지고 거룩한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는 순례자로서의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十一장을 읽어보면 성경 중에서 제일 먼저 종교적 목적을 가지고 고향과 친척, 그리고 고국을 떠나 멀미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땅을 향하여 나아간 자는 아브라함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고향은 갈대아 우르인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내가 지시하는 땅을 향하여 가라』하므로 아브라함은 조금도 서슴지 않고 정처 없이 하나님을 믿고 일생을 천막 생활로 유리 생활을 했으니 과연 그의 생애는 순례자의 생활이요, 모든 순례자의 역사의 첫 페이지는 장식하였습니다.
성경을 기초로 하는 기독교의 역사는 다시 말하면 순례자의 역사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모세의 四十 년간의 미디안 광야 생활을 찾아보게 되는데,
모세는 애굽 궁전에서 바로 공주의 아들로 四十 년간을 호화롭게 자라났지만 어떤 날 일터에 나가 애굽 사람이 자기의 동족 이스라엘 사람을 치는 것을 보고 참지 못하여 애굽 사람을 죽인 후 황막한 미디안 광야로 도피하여 나그네의 생활을 하게 되었으니 이것도 하나의 순례자의 생활이었습니다.
그 후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이스라엘 민족을 영솔(領率)하여 애굽에서 나와 홍해를 건너 가나안 복지를 바라보며 장막 생활로 광야에서 방황하였으니 이는 곧 민족 전체의 거족적 순례의 생활이라 하겠습니다.
그 후 여러 선지자들도 집을 떠나 믿음으로 순례자의 생활을 하였습니다. 엘리야는 아합 왕과 이세벨을 피하여 멀리 호렙산까지 순례의 길을 걸었고, 신약 시대에 와서는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면서 광야에서 외치는 생활을 하던 세례 요한의 일생은 순례자의 생애였습니다.
성자 되시는 주님도 나사렛에서 자라나 복음을 외치기 시작하여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의 三년간의 전도 생활은『여우도 굴이 있고 공주에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스스로 증거 하신 것과 같이 그의 생활은 말할 수 없이 외로운 순례자의 생활이었던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는 믿음으로 집을 떠나 거룩한 생활을 한 순례자의 생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성(聖)안토니는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나고 많은 재산을 차지한 청년이었지만 어떤 때 이 청년이 성경 가운데서 한 부자 청년이 예수께 나와『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까』고 물었을 때, 예수님이
『네가 외려 한 가지 부족함이 있으니 가서 있는 것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 그리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자 청년이 재물이 많은 고로 안색이 변하고 근심하며 돌아갔다는 기사를 읽고, 이 성경 말씀이 꼭 자기에게 하는 듯이 생각되었습니다.
성경의 청년은 얼굴을 붉히고 돌아갔으나『나는 성경 말씀대로, 주님의 명하신 대로 살겠다』
고 결심하고 자기의 재산을 누이에게 좀 나누어 준 다음 나머지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후 자기는 공동 묘지인 굴속에 가서 살며 성경 읽기와 기도하기에 힘쓰다가 마침내 아프리카 광야에 유리하며 성자의 생활을 보내었으니 세상에서 믿음으로 성지에 가려는 생각에서 순례자의 생활을 한 첫 순례자입니다.
주후 四세기와 五세기 이후 가족과 친척을 떠나 광야에서, 산상에서 혹은 높은 기둥 위에서 지내면 온전히 일생을 믿음으로 지낸 수도사(修道士)의 수는 몇 만 명이 될 터인데 이런 수도사들은 말할 것도 없고, 유명한 교부들과 믿음의 용사들은 믿음 때문에 친척과 고국을 떠나 나그네의 생활을 하였습니다.
일대의 위인 콘스탄티노불의 대 설교가 크리소스톰은 황태후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콘스탄티노불에서 쫓겨나 만족(蠻族)이 사는 이역(異域)에서 순례의 생활을 하였고, 아다나시어스는 기독교 역사를 보면 정통 신앙 생활을 하기 위하여 다섯 번이나 추방을 당하여 만지(蠻地)로, 광야로 순례생활을 하였습니다.
종교 개혁 시대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순례자는 더욱 많아졌습니다.
종교 개혁자 요한 칼빈 같은 이도 여러 가지 핍박을 받아 이 동네에서 저 동네,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유리하면서 종교개혁 운동을 하며 순례의 생활을 하였습니다.
十七세기에 있어서 영국 교회가 로마 교회로 기울어지는 경향과 신앙의 자유를 구속하는 영국 국교를 상대로 순수한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투쟁하던 청교도들도 핍박을 피하여 먼저 화란으로 향하였고 후에 一六二0년 一0三 명이『메이 플라워』호(號)로 북미주 플리마우드(Plymouth)에 도착하여 순례자의 생활을 시작하였던 것이며,
진젠돌프 백장이 세운 모라비안파 교회는 순례자의 교회였고, 십(十)구(九) 세기이래 동양, 아프리카, 남양 군도에 흩어진 선교사들도 역시 순례자들이었습니다.
지금 우리 대한에서도 혼란한 과도기로 인하여 이북에서 부득이하여 오랫동안 살던 정든 고향과 집과 친척을 떠나 원치 않는 여행을 하여 이남으로 내려오는 교우들이 나그네의 생활을 할 때 어려 가지 고통과 환난이 많지만, 긴 교회 역사상으로 보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모세와 엘리야의 생활의 계승임을 생각하여 수고와 궁핍이 심하지만 오히려 감사의 눈물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상과 같이 기독교 역사는 긴 순례자의 역사일뿐더러 또한 우리 신자는 신령한 의미에서 누구나 다 순례자입니다.
요한 번연의「천로역정」(天路歷程)은 영어로 말하면 The Pilgrim's Progress인 바 그대로 번역하면「순례자의 진로」라는 말입니다. 기독도가 장망성을 떠나 천성을 향하여 나가는 도중에 웅덩이와 높은 산과 기타 여러 가지 괴로운 일과 시험을 많이 당하나 끝가지 싸우며 믿음으로 나갔다는 기록입니다.
참으로 신령한 의미에 있어서 우리 기독교인은 이 죄악 세상을 떠나 진리의 세계로 한 걸은 한 걸음 나가는 순례자의 생활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나님을 믿는 마음으로 담대히 알지 못하는 땅을 향하여 나간 것과 같이 이런 생활을 계대(繼代)해서 살아 나가는 것이 우리 기독신도의 생활입니다.
여러분! 스스로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은 지금 순례자의 길을 떠났습니까? 아직까지 장망성에서 유랑하는 방랑자입니까?
순례자의 생활과 방랑자의 생활은 다른 것입니다.
二세기의 유명한 변증론자(辨證論者) 저스틴은 사마리아에서 난 헬라인으로 인간의 깊은 뜻을 탐구하기 위하여 당시의 사조인 스토아 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피타고라스의 철학에 유랑하였으나 아무런 만족도 얻지 못하고 마침내는 어떤 날 산책하다가 해안에서 한 노신사를 만나 인생의 깊은 문제를 서로 말하게 되었는데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하다는 것과 독생자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어떻게 관계된다는 것을 전도 받은 후 성경을 깊이 연구하다가 크게 깨달음을 얻게 되어 예수를 믿고 새로운 생활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그는 전날 많이 배워 두었던 철학을 기초로 하여 기독교 진리는 변증했습니다.
그는 전날에는 영적 방랑자였으나 한 번 노인을 만나 전도 받은 후에는 믿음의 순례자가 되어 목적 있는 여행, 곧 각처에서 전도하다가 로마에서 순교하였습니다. 그는 대 변증서를 말커스 아우렐리우스에게, 그리고 소 변증서를 원로원(元老院)에 바쳤습니다.
이와 같이 방랑자의 생활과 순례자의 생활은 차이가 있습니다.
어거스틴도 三十四세 나서 회개하기까지는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방랑자였습니다. 그는 라틴 문학과 시세로를 탐독하였고 플라톤 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연구하였고 八년이나 마니교에 따라다니면서 이리저리, 이것저것에 유랑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만족을 얻지 못하다가 마침내 암브로우스를 만나서야 깨달은 바가 있었고 또 그의 모친의 기도의 힘으로 순례자가 도어 일정한 목표를 가지고 나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참으로 믿는 자는 누구나 다 순례자입니다. 스스로 돌이켜 생각해 보세요. 진리의 거룩한 순례의 길에 여러분은 나섰습니까? 장망성의 문을 열지 못하고 그 울타리 안에 유랑하며 방랑하는 한심한 영혼, 유랑자가 아닙니까?
떠났으면 놋의 아내와 같이 뒤를 보지 말고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애굽을 돌아보지 말고, 오직 앞과 위를 바라보고 나가고 또 나가야 합니다. 파도가 아무리 높아도 그냥 배를 저어 나가야 합니다. 산이 아무리 높으나 그냥 위를 향하여 올라가야 됩니다.
오. 순례자의 장도(壯途)여! 축복의 희망봉이여!
그러나 아직 장망성에서 유랑하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성신의 감화를 허락하셔서 장망성을 떠나는 중생의 시간이 되기를 빌어 마지않습니다. 물론 장망성을 떠나 천성을 향해 나가는 진리의 순례의 길은 여러 가지 핍박과 괴로움이 있고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얼마나 아름답고 재미있고 축복 받는 길인지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콜럼버스가 알지 못하는 땅을 향하여 그냥 서편으로 서편으로 나가다가 종려나무 가지를 보고 기뻐하며 대륙을 발견한 그 기쁨은 헤아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기쁨이야말로 괴로움을 이기고 나가지 않았던들 얻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희망봉을 향하여 떠나지 않는 자에게는 이런 기쁨이 올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순례자의 축복이 어떤가를 말씀 드리려 합니다.
아브라함은 일생을 이 같이 나간 결과로 그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그의 믿음의 자손은 하늘의 별과 땅의 모래와 같이 되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복지를 차지하게 되었고 후손에 와서는 다윗 계통에서 인류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가 나신 것입니다.
미국을 건설한 청교도들도 받은 바 고통이 심했지만 그들의 자손들은 오늘날 큰 축복을 받고 있습니다.
과연『그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순례자에게는『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천성을 향하여 나가는 우리에게는 영생의 축복이 있으며 아름다운 내 본향이 있습니다.
『자금 이후로 주를 높이다가 죽은 자에게 복이 있으리라』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旅路)에 피곤한 영에게 영원한 안식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순례자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장망성을 떠나 순례자의 길에 오르게 하여 주신 하나님 앞에 우리는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벧전2:11-12/ 나그네는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김은호 목사
2015-05-06 14:27:26
나그네를 소재로 하는 노래와 영화가 참 많이 있습니다.
슈베르트의 연가곡집 「겨울 나그네, 최희준씨가 부른 「하숙생」, 백년설씨가 부른 「나그네 설움」그 밖에도「비의 나그네」「구름 나그네」「물의 나그네」「서울 나그네」「 나그네 바람」나그네를 주제로 한 노래가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나그네를 주제로 하는 영화도 많습니다. 이번 부산 국제 영화제에도 2005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나그네’라는 영화가 초청작품으로 선정되었습니다.
이렇게 나그네를 주제로 하는 영화와 노래가 참 많이 있는데 그 가사나 내용을 살펴보면 주로 흘러가는 구름, 부는 바람, 떨어지는 낙엽, 아침 안개, 내리는 비와 눈, 흐르는 물 등이 중심 소재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한결같이 오래가지 못하는 것, 흘러가는 것, 떨어지는 것들이 나그네의 삶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런 소재들을 볼 때에 우리의 인생은 흘러가는 구름처럼, 사라지는 안개처럼, 떨어지는 낙엽처럼 한 곳에 영원히 정착하여 살 수 없는 나그네인생임을 부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을 나그네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그네라는 말이 참 많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 11절에도 보면 나그네와 행인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11절을 다같이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11a)
베드로는 지금 예수님 때문에 핍박을 받고, 예수님 때문에 언제 잡혀 죽을지 모르는 초대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부르며 그들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나그네와 행인입니다.
나그네가 누구입니까? 바로 고향을 떠나 타향살이를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누가 행인입니까? 머물지 않고 그냥 지나쳐 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왜 베드로는 성도들을 향하여 나그네와 행인이라고 말하고 있을까요? 우리의 시민권이 바로 하늘에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빌 3:20)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는 것은 우리가 이 땅에 속한 자가 아니라 하늘에 속한 자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가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지만 우리는 이 땅에 속한 자가 아닙니다. 하늘에 속한 자입니다.
지금 우리가 보고, 느끼고, 경험하며 살아가는 이 세상이 우리의 본향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잠깐 지나가는 인생의 정류장에 불과합니다. 잠시 후면 저와 여러분은 인생의 종착역인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땅에서 천년만년 살 것처럼 생각하며 서로 미워하며 싸우며 살아가지만 오래가지 못합니다. 언젠가는 떠나야 할 사람들입니다. 인류 역사를 보십시오. 이 세상을 떠나지 않고 살고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도 언젠가는 이 땅의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떠나야 할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어릴 때 땅뺏기 놀이를 해 본적이 있습니까? 예전에는 다양한 놀이기구들이 별로 없어서 돈이 들어가지 않고도 할 수 있는 팽이치기, 자치기, 땅뺏기 같은 놀이를 많이 하면서 자랐습니다. 땅뺏기 놀이란 넓은 마당에 금을 그어 놓고 돌을 튕겨서 튕겨지는 만큼 금을 그어서 네 땅 내 땅 하며 서로 땅을 많이 차지하고자 하는 놀이를 말합니다.
그런데 해가 기울고 땅 거미가 지기 시작하면 어머니가 빨리 집에 들어와서 씻고 밥을 먹고 자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미련 없이 손을 털고 일어나서 집으로 돌아갑니다. 아무리 많은 땅을 따 놓았어도 해가 기울고 어머니가 부르면 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땅을 뺏으며 놀던 어린이들이 저녁이 되면 다 손을 털고 집으로 돌아가듯이 우리는 때가 되면 반드시 누구를 막론하고 우리의 고향인 천국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마지막 날에 돌아갈 내 인생의 고향이 있는 사람은 참 행복한 사람입니다. 반대로 마지막 날에 자신의 영혼이 이 땅을 떠나는 순간에 돌아갈 고향이 없는 사람은 정말 불행한 사람입니다.
1980년 봄 프랑스의 부르세 병원에서 사르트르가 입원했습니다. 병명은 폐수종이었습니다. 사르트르는 실존주의 철학자로서 프랑스가 자랑하는 세계적인 지성인이었습니다. 사르트르처럼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던 사람도 드물 것입니다.
보석처럼 빛나는 글로, 특히 그는 자유라는 이름의 수많은 글을 발표해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과 교훈을 주었습니다. 1964년에는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되었으나 수상을 거부하여 세계적인 화제가 되기도 했던 사람입니다.
그런 사르트르였습니다만 병원에 한 달 가까이 있는 동안, 소리를 지르고 발악을 하고 미치광이처럼 고함을 쳐댔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에 자기의 병명이 무엇인지를 곁에 있는 아내에게마저 차마 묻지를 못했다고 합니다.
그가 이렇게 죽음 앞에 두려워 떨었던 것입니다. 한 세계를 풍미하며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던 사르트르는 그렇게 소리 지르고 발악을 하다가 1980년 4월 16일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난 뒤 프랑스 언론들이 떠들어댑니다.
“인간의 운명은 인간의 손아귀에 있다”고 말하던 ''''''''사르트르가 왜 그렇게 죽어야 하는가?''''''''
“인간은 자유다, 인간은 자유 그 자체다.”
라며 ''''''''자유를 그렇게도 외치던 그의 마지막이 그토록 비참한 이유가 무엇인가?'''''''' 어떤 독자가 신문사에 투고를 해서 이런 기사가 실렸다고 합니다.
''''''''사르트르의 말로가 그렇게 비참했던 이유는 그에게 돌아갈 고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가 사르트르를 자랑했다면 독일에는 ''''''''본훼퍼''''''''라는 신학자가 있습니다. 저는 신학적으로는 별로 그를 존경하지 않습니다. 그는 사르트르보다 앞서서 세계대전중 독일 수용소에서 나치에 항거하다가 죽었습니다.
어느 날 간수가 그의 감방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는 직감적으로 마지막 순간이 왔음을 알고, 함께 있던 감방 동료들에게 ''''''''형제 여러분! 나에게 죽음이 왔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이 일은 마지막이 아닙니다. 시작입니다.
주께서 나를 위해 예비하신 집으로 갑니다.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히 계십시오.'''''''' 그리고 감방을 나셨습니다. 그 모습을 본 모든 사람들은 그를 뒤덮고 있는 기쁨과 평안을 보았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사르트르와 본훼퍼의 차이가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무신론자와 유신론자의 차이일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과,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의 차이일 것입니다. 돌아갈 고향이 없는 사람과, 돌아갈 고향을 준비한 사람의 차이일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돌아갈 고향이 준비되어 있습니까?
저는 지난 목요일 암 말기 판정을 받고 투병을 하고 있는 한 자매님의 가정을 심방하였습니다. 저는 기도가 끝난 후 어떤 말부터 시작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암 말기에요. 저는 살아계신 하나님도 만났고 돌아갈 곳이 있기 때문에 죽음이 두렵지 않아요. 그런데 우리 자녀들이 마음에 걸려요. 그러면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우리 믿음의 선진들은 이 세상을 나그네 인생으로 살아갔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나그네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 나그네 인생의 삶을 살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야곱도 자신의 삶이 나그네의 삶임을 고백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애굽 왕 바로를 만났을 때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회고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창 47:9)
앞서간 믿음의 선배들은 한결같이 나그네 의식을 가지고 인생을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앞서간 믿음의 영웅들을 소개하면서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히11:13)
믿음의 족장들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 역시 나그네 인생을 살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히브리 민족이라고도 하는데 ‘히브리’ 라는 말은 본래 건너온, 지나가는 등의 행인 또는 나그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이 말의 의미처럼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출애굽 이후 광야에서 40년 동안 나그네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정착하면서 그들은 달라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지상 천국을 꿈꾸기 시작하였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선민사상에 빠져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고인 물이 썩게 되어 있듯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 자신들의 삶에 안주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은 타락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전 세계에 흩으셨고 그들은 디아스포라로 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도 나그네와 행인으로 사셨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여행 중에 태어나셨으며, 태어나자마자 헤롯왕을 피해 애굽으로 피난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리고 공생애 기간 중에 예수님은 자신이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심으로 자신의 삶이 나그네의 삶이심을 밝히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승천하실 때에도 주님은 제자 된 우리들이 나그네로서의 삶을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예루살렘에만 머물러 있지 말고 온 유대와 사마리아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흩어진 나그네로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흩어진 나그네로 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큰 핍박을 통해서 그들을 강제로 흩으셨습니다. 그래서 나그네로서의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신앙은 사람을 차별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구별합니다. 이 땅에 속한 자와 하늘에 속한 자, 땅에 소망을 가진 자와 하늘의 산 소망을 가진 자로 구별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나그네와 행인입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을 나그네라는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이 말은 허무주의와 비관주의로 인생을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나그네와 행인이라는 말은 우리가 이 세상 사람들보다 낮은 신분을 가졌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자로서 구별된 생각을 하고 구별된 인생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라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돈을 사랑하고 돈에 눈이 멀어 분주할 때 돈이 일만 악의 뿌리임을 깨닫고 돈 보다는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며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이 세상 사람이 권력 앞에 비굴하며 아부하고 아첨하며 살아갈 때 천국의 시민권을 가진 자로서 공의를 행하며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 땅에 속한 사람들이 죽음 앞에 겁을 내며 죽기를 두려워하며 살아갈 때 언제 주님이 부르실지라도 찬송을 부르며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자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 육신의 정욕을 제어하라
그러면 구체적으로 나그네와 행인 같은 우리는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첫째로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해야 합니다. 11절 하반절을 다같이 보겠습니다.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11b)
1. 육체의 정욕은 무엇을 말할까요?
육체의 정욕은 육체적 욕망을 채우려는 악한 욕심을 말합니다. 좀 더 풀어 설명하자면 하나님 밖에서 만족을 얻으려는 인간의 세속적인 욕구나 욕망을 말합니다.
2. 왜 우리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해야 합니까?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11b)
그것은 바로 영혼을 거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거듭났지만 우리 안에는 여전히 죄성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육체의 소욕이 있고 성령의 소욕이 있습니다.
부모가 나에게 물려준 옛 사람의 생명은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기를 원하고 예수님의 생명으로 거듭난 새 생명은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살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이 두 소욕이 우리 안에서 치열하게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17절을 보겠습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5:17)
가장 치열한 전쟁이 일어나는 곳이 어디입니까? 바로 내 안입니다. 가장 치열한 영적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현장이 바로 내 마음입니다. 지금 내 안에 갈등이 있다고 하는 것은 지금 내 안에 영적인 전쟁이 진행되고 있음을 말합니다.
외부로부터 오는 박해나 유혹보다도 내 안에 있는 정욕과의 전쟁이 가장 무섭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어떻게 넘어졌습니까?. 물론 외부로부터 사단의 유혹이 있었습니다.
“네가 이것을 먹으면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 그러나 그의 내면에 하나님과 같이 되어 보겠다는 정욕이 타올랐기 때문에 넘어진 것입니다.
그러면 육체의 정욕이 영혼을 거스린다고 했는데 그것은 우리 안에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과의 전쟁이 있음을 말하고 그 전쟁에서 육체의 소욕이 이기게 되면 사망의 열매를 맺게 되고 성령의 소욕이 이기게 되면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7:5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롬7:5)
야고보기자도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는다”고 했습니다. 유대 격언에도 “너희 욕심을 제어하라. 그렇지 않으면 욕심이 너를 제어하리라”는 말이 있다.
왜 우리가 육체의 정욕을 제어해야 합니까? 우리의 영혼을 거스리기 때문입니다. 죽음에 이르는 열매를 맺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육체의 정욕이 가져다 준 열매들은 어떤 것들일까요?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갈5:19-21)
3. 어떻게 하면 육체의 소욕을 이겨낼 수 있는가?
정과 욕심을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갈 때 육체의 욕심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5:1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나가는 나그네요 행인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할 수만 있으면 짐을 가볍게 해야 합니다. 짐이 무거우면 인생의 순례길이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많은 것을 소유하려고 하기보다 주님 부르시는 날에 가볍게 떠날 수 있도록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으십시오. 가져갈 수 없는 것들을 움켜쥐고 발버둥치기 보다 가져갈 수 있는 영적인 보화들을 많이 준비하십시오.
우리의 힘으로는 육체의 욕심을 이기기가 어렵지만 성령을 좇아 행하면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을 받으면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 선한 일을 행하라
두 번째로, 나그네와 행인 같은 우리는 선한 일을 행하며 살아야 합니다. 12절을 다같이 보겠습니다.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12절)
베드로는 지금 예수님 때문에 핍박을 받고 예수님 때문에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 선한 일을 행하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지나가는 짧은 나그네의 인생을 살아가지만 선한 일을 행하며 살아야 합니다.
1. 어디에서 선한 일을 행하여야 하는가?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12절a)
이방인 중에서 선한 행실을 행하여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가 아닙니다. 좋은 사람들만 모여 있는 곳에서가 아닙니다. 예수를 모르고 진리를 모르고 교회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사는 사람들 가운데서 선한 일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아니 예수 믿는 사람들을 중상모략하고 비방하는 자들에게서 선한 일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구체적으로 선한 일을 행하여야 할 이방인들이 어떤 자들인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단순히 예수를 모르는 불신자들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에 대하여 반감을 가지고 있고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에게서 선행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역사적으로 많은 오해와 비난을 받았습니다.
로마의 네로 황제 때에는 방화범으로 몰려 수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해야 했고 성찬을 오해하여 어린 아이의 인육을 먹는다는 비난도 받았습니다. 또 남녀가 함께 모이는 것 때문에 근친상간을 일삼는다고 비난도 받기도 했습니다. 기독교는 진실과 상관없이 많은 오해와 비방을 받아왔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도 세상은 교회를 와해시킬 목적으로 비방을 일삼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교회는 틈을 보이면 안 됩니다. 성도가 깨어 있지 못하고 틈을 보이면 그것을 가지고 비방합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직장 생활을 하다 보면 회식의 자리에 함께 참석하게 됩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술을 먹지 못하니까 음료수를 먹겠다고 말하면 직장의 상사는 물론이거니와 모든 동료들이 분위기를 깬다며 술을 권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같이 근무하지 못하겠다며 협박을 하기도 하며, 직장 생활하려면 술을 마시는 것은 필수라며 회유하기도 합니다. 만일 그 자리에서 마시지 않으면 가십거리로 만들거나 소위 왕따을 시키는 경우도 있습니다.
반대로 술을 권하여 주는 먹고 마시게 되면 뒤 돌아서서는 그 사람 이름만 크리스천이지 가짜 크리스천이라며 놀려대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세상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바로 이런 세상에서 이런 자들 앞에서 선한 행실을 행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2. 왜 선한 일을 행하여야 하는가?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12절b)
권고 하시는 날에 선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입니다. 왜 우리가 선한 일을 행하며 살아야 합니까? 구원을 받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구원을 받은 자로서 선한 행실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도 마태복음 5:16절에서 동일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방법 중의 하나가 뭔지 아십니까? 이방인들 가운데서 선한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을 비방하는 자들 앞에서, 주는 것 없이 교회를 적대시하는 자들 앞에서 선한 일을 행하십시오. 그러면 그들이 그 선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이 편지를 읽고 또 읽었던 초대교회 성도들은 정말 그렇게 살았습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까? 원형 경기장으로 끌려가 사자의 밥이 되고 화형을 당하고 그렇게 엄청난 핍박을 받고 있었는데 기독교인들의 숫자는 줄지 않았습니다.
기독교를 그렇게 박해하던 로마가 313년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했는데 그때 로마에는 기독교인이 9!!!%나 되었다고 합니다. 왜 이런 불가사의한 일이 벌어진지 아십니까?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이 핍박을 받으면서도 선한 행실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마 사람들은 그렇게 기독교를 핍박하면서도 며느리와 신부감은 기독교인 가운데서 구하려고 했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라는 작품에 나오는 내용을 이야기하고자합니다.
미국 워싱턴 광장 서편 한 구석, 그리니치 예술가 마을, 어떤 나지막한 삼층 벽돌집에 수우와 죤시라는 두 처녀 친구가 이 3층 벽돌 꼭대기 집에 화실을 갖고 있었습니다.
어느 해 11월, 이 마을에 갑자기 폐렴(肺炎)이 돌기 시작했는데, 그때 이 죤시라는 처녀도 폐렴에 걸려 꼼짝없이 침대에 누워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소녀가 누운 방의 창 밖에는 담쟁이덩굴이 있었고 소녀는 매일 이 담쟁이덩굴을 바라보는 것이 그저 유일한 낙(樂)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부터인가 이 담쟁이덩굴 잎이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나뭇잎이 많아 세기도 힘들었고, 세는데 시간도 많이 걸렸지만 점점 그 숫자가 줄어 이젠 충분히 셀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열둘, 열하나, 열, 아홉, 여덟, 일곱.....’
소녀는 이 나뭇잎을 세면서 어느 때 부터인가 저 나뭇잎이 다 떨어지는 날엔 자신의 생도 끝날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언제 저 잎이 다 떨어질 것인가’
이런 생각을 하다가 친구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난 마지막 잎이 떨어지는 것 꼭 보고 싶어. 그러면 나도 저 세상으로 가겠지?’
이 얘기를 듣는 순간 친구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얘, 저 담쟁이 이파리 따위는 쳐다보지도 마!!’
친구는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내가 이 친구를 위해 어떻게 도와줄 것인가? 이제 이파리가 한 개밖에 안 남았는데...’
그러다 묘안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같은 건물 1층에 사시는 한 늙은 화가에게 자초지종을 다 설명하고는 그 담장에 아무리 바람 불어도 절대로 떨어지지 않는 이파리를 그려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할아버지는 얘기를 다 듣더니 눈에 눈물이 고이면서 그 마지막 이파리를 벽에 그려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비바람이 몹시 부는 밤을 지냈습니다. 소녀는 간밤에 그토록 바람이 몰아 쳤으니, 이젠 당연히 그 마지막 잎도 떨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친구에게 창(窓)의 커튼을 열어 달라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토록 바람이 몹시 불었던 간밤이었지만 그 마지막 잎은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소녀는 바로 이렇게 강한 바람 속에서도 떨어지지 않은 그 마지막 남은 잎을 보면서 그때부터 용기를 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생명에 대한 애착을 가지기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바로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라는 작품입니다.
드라마틱한 애기는 아니지만 잔잔한 감동을 주는 애기입니다. 선한 일을 행하며 산다는 것은 무슨 드라마틱한 것이 아닙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선한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나그네입니다. 나그네는 아무렇게나 살지 않습니다. 인생의 짐을 가볍게 하기 위해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선한 일을 행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한 나그네의 윤리 /벧전2:11-12/ 하용조 목사
2015-05-26 14:39:48
지혜로운 사람은 다음 세 가지를 생각할 줄 압니다.
첫째는 내가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나의 본질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어떤 것을 아는 것 보다 사람이 자신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두 번째는 나이를 아는 것입니다. 세상에 자기 나이를 모르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마는 사실 자기 나이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젊은데 늙은이가 된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늙었으면서도 아직 철이 덜든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의 생애가 어느 시점에 와 있는지를 알고 사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자기의 나이를 잘 알아야 할 것 해서는 안되는 것, 가질 것, 가져서는 안되는 것들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한계를 잘 알아야 합니다. 그것인 사람이 편하게 사는 길입니다. 철이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가진 것 다 가진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이 하는 것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셋째는 본래 성과 긍극성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즉 뿌리를 알고 사는 것입니다. 내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 것인가를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온 곳과 갈 곳을 정확히 알고 인생을 산다면 인생 길에 방황이 없을 것입니다.
본문에는 평범하면서도 흘려 보내서는 안되는 귀한 말씀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하고 간단 명료하게 비유해서 하신 말씀이 중요한 말씀입니다.
인생은 나그네와 같은 행인이다 - 이 나그네라는 말은 헬라어로 ‘파로이코스’라는 말인데 타향살이를 하는 사람, 낮선 사람을 말합니다. 외국에 이민을 가서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행인이라는 말은 ‘파레피데모스’라는 말인데 ‘지나가는 길손’이라는 뜻입니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 머물러 있지 않는 사람, 과객을 말합니다.
어느 과객이 길을 가다가 날이 저물어 한 집 대문을 두두렸습니다. 주인이 나와서 야속하게도 “우리 집은 나그네가 머무르는 여관이 아니니 여관을 찾아가라”고 했습니다. 나그네가 묻기를 “당신은 이 집에서 몇 년을 살았느냐”고 했습니다.
그 주인은 “우리는 이 집에서 16대를 살았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나그네는 “그럼 그 전에 살던 사람은 다 어디 갔느냐”고 물으니 주인이 “다 돌아 가셨다”고 했습니다.
나그네는 “흠 모두 잠깐 머물러 가는 집이 이 집이구려, 나도 잠깐 머물러 갑시다” 주인이 할 수 없이 나그네를 맞아 주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잠깐 머무르는 곳으로 우리가 영원히 사는 곳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영원히 사는 것처럼 이 세상살이에 집착을 하고 미련을 버리지 못합니다.
인생은 나그네입니다. 잠깐 지나가는 것입니다, 좋은 일이 있어도 너무 떠들지 말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너무 낙심하지 맙시다. 지나 놓고 보면 맷산처럼 엄청난 일들도 먹장구름에 불과하고 태산처럼 큰 문제도 조그마한 언덕이 되는 수가 많습니다. 그 때 그 일 때문에 죽을 것 같았던 고통도 지나면 즐거운 한갓 추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중적인 의미에서 나그네요 행인입니다. 이 땅에 살면서도 우리의 이 땅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삽니다. 남이 듣지 못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삽니다.
다른 사람은 그것이 죄라고 생각하지 않는 일들을 죄라고 회개하며 삽니다. 다른 사람들이 도저히 이해하지도 못하는 헌신과 사랑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렇게 살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우리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들이 상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고 말하고 듣고 행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라니요 하나님의 자녀들이요 천국 백성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임시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임시적으로 살지만 우리들에게는 윤리가 있고 도덕이 있습니다.
그것은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입니다. 제어한다라는 말은 다스린다 컨트롤한다 라는 말입니다. 육체의 정욕이라는 이 세상의 죄악에 끌리는 마음을 말합니다.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하여 갈 5:19,20에서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들이라”라고 말했습니다.
육체에 속한 사람과, 영에 속한 사람, 다시 말하면 육체 주도적인 인간과 성령 주도적인 인간이 다릅니다. 같은 세상에서 같이 먹고 같이 산다고 해도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이 우리를 지배하시는 사람이요 세상 사람들은 세상에 지배를 받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 두 종류의 사람들은 전혀 다르면서도 한 곳에 함께 살고 있습니다. 육체를 제어하라는 말은 임시적이요 가변적이요 순간적인 것들을 버리라는 말씀입니다. 과거에 속한 마음, 가시적인 것, 시시하고 별 것이 아닌 것을 자랑하지 맙시다.
어느 누군가가 말하기를 “사람들이 걱정을 많이 하고 있지만 시시하지 않는 걱정이 어디 있느냐” 그렇습니다. 인생의 종말을 생각한다면 시시하지 않는 일이 이 세상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나는 어렸을 때 딱지를 잘 쳤습니다. 헌 종이로 만든 딱지를 많이 따서 앉은뱅이 책상 서랍에 가득 넣어 두었습니다. 서랍에 책도 없고 공책도 없고 연필도 없이 헌 종이로 만든 크고 작은 딱지만 가지런히 정리가 되어 가득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그 소중한 딱지를 몽땅 밖에 내 버렸습니다. 그것을 잃어버리고 얼마나 울었는지----- 지금은 딱지 때문에 울지 않습니다. 그 보다 훨씬 소중하고 값진 것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딱지를 만든다 든지 그것을 따기 위해 손가락이 터지도록 용을 쓰는 일은 절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 보다 훨씬 소중한 일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책상 서랍에 가득히 차 있는 그것은 휴지에 불과했습니다.
휴지를 얻자고 손끝에 치가 나도록 땅을 치고, 얻었다고 의기 양양하여 잘난 척하고, 없어졌다고 울고불고 하는 사람이야말로 바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그런 바보들이 너무 많습니다.
선을 행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선이라는 말은 ‘아가소스’라는 말과 ‘칼로스’라는 말이 있는데 아가소스는 단순한 선을 말하고 칼로스는 사랑으로 충만한 선을 말합니다. 아주 아름다운 선, 매력적인 선, 사랑스러운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선을 행하라는 말씀은 사랑스러운 나그네로 세상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선교사가 인도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데 언어 때문에 고통이 많았습니다. 가는 곳마다 새로운 언어를 배워야 했기 때문입니다. 선교사는 어느 고을에 가서 그곳 힌두교 신자 한 사람에게 “돈을 달라는 데로 줄 테니 말을 가르쳐 주시오”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거절을 했습니다. 그 이유를 물으니 “당신하고 함께 있어 기독교인이 되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데 그래서 싫소”라고 대답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삶을 살고 있습니까? 이 선교사하고 만나는 사람은 누구나 기독교인이 되어 버린다.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선을 행하고 산다는 것은 성도로서 아름답게 사는 것을 말합니다. 나그네 길을 매력 있게, 아름답게 삽시다. 사랑하며 삽시다. 그렇게 살아도 모자라고 짧은 인생을 미워하고 싫어하면서 살지 맙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점점 더 악해지고 정신 세계나 자연 세계가 온통 더러워지고 추해졌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아름답게 삽시다.
우리가 선을 행하고 아름답게 살아도 비방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은 모두 악하고 나뿐 것이라고 생각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래도 아름다운 것이 진짜 아름다운 것입니다. 미움이 가득 차고 증오가 가득해도 그 속에서 사랑하며 사는 그것이 아름다운 일입니다.
로마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을 대할 때 노예라도 형제라고 한다고 비난하고 부도덕하다고 욕을 했습니다. 주인은 사람이고 노예는 사람이 아닌 노예일 뿐인데 주인과 노예를 같이 취급한다고 비방하고 욕했습니다.
얼마나 우스운 일이요 부도덕한 생각입니까? 그래서 그들은 기독교인들을 욕하고 핍박했습니다. 성도들이 사랑하므로 핍박을 당한 것입니다.
그들은 기독교인들을 식인종이라고 비방했습니다. “네 피와 내 살을 먹으라”는 주님의 말씀 따라 성찬식을 하는 것을 보고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성찬식이나 노예를 사람 대접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사랑입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비방하고 욕했습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 성도들은 노예를 사랑하고 성찬식을 해서 주님 사랑을 증거했습니다.
선한 일을 한다고 욕 안 먹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곳에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하는 것은 얼마나 이 동네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일입니까? 그런데 이 동네 사람들은 우리들을 욕하고 핍박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이 동네를 사랑하고 위해 기도를 하고 전도를 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에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가 악행을 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아름다운 것은 찬양을 받고 승리를 할 것입니다. 오해는 오해한 사람이 나쁜 사람이지 오해를 받는 사람이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누가 아무리 독한 말로 그리스도를 비방하고 성도를 비방해도 그리스도는 언제나 그리스도시니 우리들도 언제나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머지 않아 우리의 사명을 잘 감당하고 이 세상을 떠납니다. 그리고 주님과 영원히 함께 살게 될 것입니다.
버스가 굴러서 사람들이 많이 죽고 부상을 했습니다. 갑자기 한쪽에서 한 청년이 소리를 지릅니다. “의사 선생님 내 피는 0형입니다. 내 피를 뽑아 다른 사람에게 주십시오” “여보 자기도 다 죽어 가면서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요”
“나는 원래 사람을 때리는 깡패로 이제까지 온갖 못된 짓을 다 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죽어 가면서라도 좋은 일을 해 보고 싶습니다. 그러니 내 피를 뽑아 다른 사람을 살려 주십시오”
우리는 나그네입니다. 나그네 인생 길을 아름답게 살도록 하십시다. 썩어질 육체만을 위해 살지 맙시다. 하나님을 위해 인생들을 위해 값있게 아름답게 멋있게 삽시다.
나그네로 사는 법 /벧전2:11-17/ 조정의목사
2020-09-18 02:56:10
그리스도인의 삶은 나그네로 사는 인생이다.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이지만 이 땅에 임시로 거주하고 있는 거류민과 나그네. 땅에 어떤 권세가 세워지는지에 따라 그리스도인은 많은 영향을 받는다. 하지만 동시에 어떤 권세가 세워지든지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해야 할 일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라는 찬양을 부르면서 동시에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This is my Father’s world)을 부른다.
오늘은 그리스도인이 본향에 도달하기 전까지 이 땅에 나그네로 살 때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인지 살펴보기 원한다. 히브리서 기자가 믿음의 선진들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들은…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히 11:13-14).
그들과 같은 믿음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가진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는 삶,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내는 삶을 살아야 한다. 어떤 삶이 그에 합당한 삶인가? 말씀을 통해 알아보자
11절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먼저,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한다. 베드로는 소아시아 성도들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라고 부른다. 거류민은 ‘자기 나라가 아닌 곳에 사는 사람’(외국인, 체류자), ‘자기 집이 아닌 곳에 사는 사람’을 가리킨다. 나그네는 ‘떠돌아다니는 사람’, ‘행인’을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백성으로 죄 많은 이 세상에 체류하고 있다. 분명히 이 땅에 거주하지만 이 땅에 속하지 않은 자가 바로 그리스도인이다.
이 땅은 하나님께서 심판과 멸망으로 불태우기 전까지 보호하고 계신 일시적인 장소다. 베드로는 베드로후서에서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라고 말했다(벧후 3:7). 그리스도인은 잠시 그런 세상에 살고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소속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다.
당신의 정체성을 기억하고 있는가? 거류민과 나그네로 이 땅을 살고 있다고 바르게 인식하며 살고 있는가? 이것이 첫 시작이다. 바른 정체성은 바른 삶의 방식을 요구한다. 이 땅에 속하지 않고 하나님께 속한 백성은 마땅히 성령께서 베드로를 통해 강력하게 촉구하신 권면에 귀를 기울인다: 1. “사랑하는 자들아…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한다(고후 5:20).
1.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11-12)
인생이 고달픈 건 궁극적으로 죄 때문이다. 죄는 땀을 흘려야 먹고 살도록 노동의 고통을 배가했고, 남편과 아내 및 모든 인간관계 속에 갈등과 전쟁을 일으켰다. 질병과 죽음을 가져온 것도 죄다. 죄가 가져온 최악의 결과는 하나님과 영원한 분리, 영적 죽음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죄의 책임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롬 8:1,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하지만 그 말은 곧 죄에게 전쟁 포고를 했다는 말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백성은 죄를 주적으로 규정하고 그에 맞서 싸우는 인생을 산다.
우리는 여러 대적과 싸우고 있다. 1)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과 싸우고(엡 6:12), 2) 타락한 이 세대와 싸우며(롬 12:2), 3) 우리 육체의 정욕과도 싸운다(롬 7:21-24). 특별히 육체의 정욕은 우리 안에서 쉼 없이 우리 영혼을 거슬러 싸운다. 육체의 정욕과 성령의 소욕이 날마다 싸운다(갈 5:17). “내 안에 전쟁 되풀이되는 고통”(전쟁).
하나님을 위해 선을 열심히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가 오실 때까지, 우리가 이 육체를 벗는 그 날까지 계속해서 육체의 정욕을 제어해야 한다. 죄를 피하고 멀리하고 억제해야 한다. 바울은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고 강력한 권면을 했다(골 3:5). 절대 방심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피 흘리기까지 대항하라(히 12:4).
정욕을 제어하고 죄를 멀리하는 것은 선을 행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도박 중독자가 도박을 멀리하는 것뿐만 아니라 성실히 일하는 것을 배워야 하는 것처럼, 죄와의 싸움은 의로운 행실을 맺는 것까지 나아가야 온전한 승리(변화)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베드로는 12절에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지라고 권면한 것이다.
12절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인은 선을 열심히 행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한다(딛 2:14). 하나님께서 미리 예비하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가 바로 그리스도인이다(엡 2:10). 하나님 나라 백성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왕의 명령에 순종한다(벧전 1:16). 선한 행실은 하나님께서 선하다고 말씀하신 온전하고 기뻐하시는 그분의 뜻대로 사는 삶을 가리킨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이 온전하게 사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충분히 말하고 있다(딤후 3:16-7).
거짓말을 멈추는 것에서 오직 참된 것을 말하기까지, 음란한 생각과 행위를 멀리하는 것에서 거룩하고 정결한 부부생활을 하는 것까지, 게으르고 나태한 삶을 사는 것에서 부지런히 일하고 남을 돕는 삶을 사는 것까지 나아가야 한다.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어야 한다(엡 4:24).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고 선한 삶을 사는 것은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나는(성화) 과정일 뿐만 아니라 전도의 방편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인이 거주하는 이 땅에 미치는 막대한 영향력이 있다는 것이다. 12절에서 이방인이라고 말한 대상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을 가리키며, 종종 그들은 그리스도인을 악행한다고 함부로 비방한다.
비방은 ‘남을 비웃고 헐뜯어서 말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리스도인이 죄가 있어 비방을 당할 때도 물론 있지만,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고 선한 삶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해도 이 세대로부터 충분히 비방을 받을 수 있다. 베드로가 이 편지를 쓸 때도 그리스도인은 남녀가 비밀 모임을 갖고 혼잡한 성관계를 갖거나 사람의 피를 마시고 권세를 거역한다는 등 여러 가지 사실과 다른 내용으로 악행한다는 비방을 받았다. 초대 교회가 그런 억울한 비방을 받았을 때 그것을 잠재우는 데 가장 큰 효과가 있었던 것은 바로 세상 사람과 차원이 다른 그리스도인의 경건한 삶이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이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 3:12). 하지만 그리스도인을 비방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인의 선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다. 교회를 향한 세상의 비난이 거짓이라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고, 하나님을 인정하며 그분을 영접하게 만드는 강력한 힘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인해 변화된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다.
당신의 삶은 하나님이 세상 사람 가운데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거룩한 삶인가? 당신의 삶은 그리스도인을 향한 잘못된 비방을 잠재우기에 충분히 선하고 아름다운가? 당신이 씨름하고 제어할 죄를 정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며 치열하게 싸우라. 그 죄 대신 옷 입을 새 사람의 모습을 성경을 통해 확인하고 성령의 능력으로 마음으로부터 삶의 온전한 변화를 받게 해달라고 간절히 구하라. 그리고 열심으로 선을 행하라.
2. 인간의 제도를 순종하라(13-15)
13절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14절 혹은 그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보낸 총독에게 하라
두 번째로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 거하는 백성으로서 세워진 모든 제도를 순종해야 한다. “인간의 모든 제도를 순종하라”가 강조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서 선량하고 준법정신이 투철한 시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인간의 모든 제도 안에 “위에 있는 왕”(현직 권세자)과 그가 보낸 총독을 예로 제시했다. 로마서 13장 3-4절에 나온 것처럼, 권세는 기본적으로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존재하며 그렇게함으로써 사회를 존속하고 질서를 유지하는 순기능을 갖는다. 인간의 모든 제도는 일반적으로 그 목적을 위해 세워진다.
이 땅에 거하는 거류민으로서 그리스도인은 하늘에 속해 있다는 이유로 인간이 세운 제도를 무시하거나 권세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 백성에게 당신을 위하여 이 땅에서 선량하고 순응하는 백성이 되기를 기뻐하신다.
15절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우리말성경선을 행해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잠잠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땅에 세워진 제도와 권세에게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이 뜻에 따라 살 때,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신다.
갈수록 교회가 세상의 비방을 많이 받고 있다. 때론 세상의 공의롭지 못하고 어리석은 잣대로 교회와 그리스도인을 보기 때문에 억울하게 당하는 무식한 말인 경우도 있다. 하지만 많은 경우 교회가 세상의 제도와 권세를 부정하고 반대하며 법을 어기고 상식을 벗어나 합당한 비판을 당할 때도 많다.
교회를 구성하는 각 지체, 그리스도인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다니엘을 시기했던 어리석은 고관들이 무식하게 다니엘을 비방하며 고발하려고 근거를 찾으려 했지만 성경은 이렇게 다니엘을 변호한다. “아무 근거, 아무 허물도 찾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가 충성되어 아무 그릇됨도 없고 아무 허물도 없음이었더라”(단 6:4).
이 땅에 거주하면서 제도와 권세를 반대하고 법과 질서를 어기면서 욕을 먹고 있지는 않은가? 하나님께서 당신의 삶을 통하여 어리석고 무식한 비방을 막으실 만큼 선한 삶을 살고 있는가? 주를 위하여 법을 지키고 권세에 순종하는 선량한 준법 시민이 되기 위해 지금 내가 변해야 하는 삶의 영역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은 다니엘처럼 오직 신앙 외에는 고발할 근거가 없을 정도로 깨끗하고 정결한 삶을 이 땅에서 살아야 한다.
3. 하나님 종처럼 행동하라(16-17)
첫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이 땅에 나그네로 살면서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는 삶,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삶을 말한다. 둘째,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 거주하는 거류민으로서 하나님의 주권 아래 이 땅에 세워진 인간의 제도와 권세에 순종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행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의 선행을 통하여 악한 자들의 비방을 막으신다. 그들의 영혼을 만나주신다. 거듭나게 하신다. 결국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신다. 이 땅의 나그네인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은 잘못된 비방을 비롯한 세상의 죄를 꾸짖는 하나님의 정죄와 죄인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키는 하나님의 도구이다. 당신의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3). 당신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롬 12:1).
마지막 세 번째로 베드로는 앞서 말한 두 가지 삶을 요약하고 적용을 제시한다. 11-15절까지 베드로가 제시한 삶의 모습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종처럼 행하는 삶이다.
16절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나그네로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이 땅에 있을 때 그리고 이 땅을 떠날 때 달라지는 부분이 분명 있지만, 구원받은 순간부터 영원히 변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종이라는 것이다. 이 땅에서 주인의 달란트를 관리한 하나님의 청지기들은 주인이 돌아와서도 그 행한 일의 결과에 따라 상을 받고 계속해서 그 주인을 섬기는 일을 한다(마 25).
그러므로 나그네로 이 땅에 살면서 이 땅의 종처럼 살 필요는 없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 매여있지 않다. 자유가 있다. 이 세상이 원하는 대로 살아야 할 의무가 없다. 이 세상이 요구하는 것, 특히 악에 얽매이지 않아도 된다. 이 땅에서 자유인처럼 행하라.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에 악을 가리는데 그 자유를 쓸 수는 없다. 하나님의 종이 된 그리스도인은 악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지만, 하나님에게선 절대로 자유로울 수 없다.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인은 철저히 악에서 자유로워져야 하고, 철저히 하나님께 종속되어야 한다. 복종해야 한다.
악한 세상에서 자유롭고 하나님께 종속된 삶의 구체적인 모습은 17절에 나오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수직적 관계와 수평적 관계에서 모두 나타난다.
17절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대하라
총 네 가지 대상이 언급되는데, 먼저, 세 번째로 언급된 하나님을 주목하라. 그리스도인은 먼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 경외해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인의 수직적인 관계 속에 마땅히 가져야 할 삶의 태도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분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요일 4:19).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롬 5:8). 그 사랑으로 인해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종이 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기 원한다. 경외한다. 두려워한다. 그분이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뜻대로 살기를 진심으로 원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대로 수평적 관계 속에서 행하는 것이다. 먼저 그들은 뭇 사람(모든 사람)을 공경한다. 그들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기 때문이다. 둘째, 그리스도인은 왕을 존대한다. 하나님이 그들을 세우셨기 때문이고 존경할 자를 존경하는 것이 그분이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셋째, 그리스도인은 형제자매를 사랑한다. 하나님 아버지를 진실로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 아버지가 사랑하시는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사도 요한은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라고 말했고(요일 4:20),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형제자매를 “마음으로 뜨겁게…사랑하라”고 명령했다(벧전 1:22).
잠시 이 땅의 나그네로서 또한 영원한 하나님의 종으로서 악을 멀리하고 선을 열심히 행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맺고 있는 관계 속에 분명히 드러나야 한다. 누구도 무시하지 말고 업신여기지 말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이들을 존중하라. 세워진 권세를 욕하고 비방하지 말라. 하나님이 세우신 그들을 복종하고 존중하라. 형제자매를 미워하고 판단하지 말라. 뜨겁게 끝까지 사랑하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간과하고 자유롭게 악을 행하며 살지 말라. 믿음으로 항상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코람데오)을 살라.
며칠 전 공기가 맑은 날, 진위천 물가 산책길을 걸으며 멋진 구름과 파란 하늘이 펼쳐진 위를 바라본 적이 있다. 영혼 깊은 곳에서 진심으로 ‘하나님 저를 지금 데려가시면 안 될까요?’라는 고백이 나왔다. 특별히 괴로운 일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었지만,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 땅의 나그네로 사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고 절실히 느꼈기 때문이다.
악한 세상에서 사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육체의 정욕과 날마다 씨름하는 삶은 너무 수고스럽다. 탄식이 흘러나올 정도다. 그리스도인을 향한 세상의 비방은 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참된 것을 말하여 사랑으로 그들의 비방에 대답하는 것, 선으로 악을 이기는 삶은 참으로 고되다. 권세는 우리를 늘 실망시킨다. 평안하고 고요한 삶을 살게 만들지만 동시에 그리스도인을 직간접적으로 핍박하는 정책이 어떤 권세가 세워지든 세월이 갈수록 늘어간다. 형제자매의 사랑으로 힘과 위로를 얻고 기쁨을 누리지만 때로는 육체의 정욕과 여전히 싸우는 형제자매로 인해 힘을 잃고 낙심하고 상처를 받기도 한다. 사랑하는 사람은 왜 이렇게 병들고 먼저 우리를 떠나 슬프게 하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게 바로 나그네의 삶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본향을 간절히 찾는 삶을 산다.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않는 삶, 위의 것을 찾는 삶을 산다(골 3:1-2). 그리스도인이 바라는 참된 기쁨과 영광과 소망이 모두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께 있기 때문이다.
나그네의 삶이 괴로운 것은 당연하지만 결코 감당하지 못할 삶을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은 아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신 예수님께서 세상 끝날까지, 그리스도인이 나그네의 삶을 마무리하는 그날까지 항상 함께 하겠다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진실로 속히 오리라” 약속하셨다(계 22:20). 날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고백하며 살자(계 22:20).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자(벧후 3:11-12).
나그네 인생 /벧전2:11-12/ 조향록목사
2023-10-13 11:44:10
지금은 고인이 됐지만 오래 전 대중가수 최희준이 부른 ‘인생은 나그네 길’이란 유행가가 있습니다. 그 가사 대로 실로 인생은 나그네 길입니다. 이 성경에 “나그네와 행인 길손 같은 너희들아!” 하고 사도 베드로가 권고하는 말씀을 했습니다. 인생이 나그네라면 이 나그네 인생을 안고 씨름하는 기독교도 나그네의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본래 유대민족의 구약종교를 모체로 하고 나왔습니다. 유대민족은 정착생활을 하는 농경민족이 아니고, 목축을 하는 유목민들이었습니다. 오늘은 여기서, 내일은 또 천막을 옮겨 양과 염소들이 풀을 뜯고 물을 먹일 수 있는 곳이면 어디나 찾아 가는 유목민들입니다.
그러므로 고대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모신 천막도 언제나 이동해갔던 것입니다. 초대의 기독교들도 기원 73년 유대가 완전히 멸망한 이후, 지중해 연안과 아프리카 유럽 북쪽 러시아 모스코바까지 흩어져 나그네 생활을 했습니다. 또 로마의 박해를 받아 기원 332년 까지는 언제나 떠돌이 길손의 신세를 면치 못했습니다. 이러한 정황 속에 있는 기독자들에게 사도 베드로는 바로 그 나그네 생활 자체가 인생이요, 그 나그네 인생 속에 참 종교 신앙이 있다는 점을 들어 나그네와 길손 같은 너희들이라고 했습니다.
첫째, 인생은 실로 나그네입니다. 어디에도 정착할 수 없는 유랑민이요 방랑자입니다. 시간도 흐르고 공간도 변하고 거기 매어 있는 인생도 변하고 쇠퇴해갑니다. 최근 생명과학이 발달하면서 사람의 죽음을 어느 때로 할 것인가, 심장이 멈출 때인가 신경세포가 기능을 못하게 되는 때인가 등으로 논란을 벌이고 있습니다.
실로 깊이 보면 사람은 태어나고 자라가는 과정이 벌써 한편으로 쇠퇴하고 죽어가는 과정과 병행을 하고 있습니다. 정신 부분만이 아니고 생리적 현상으로도 그러합니다. 본래 생명체란 일시도 정지하지 않기 때문에 신진대사 송구영신을 거듭하는 것입니다. 권세도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 하여 십년을 넘기는 세도가 없고, 돈은 도는 것이라 하여 언제나 한 사람 손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칼브레이트가 쓴 은행의 역사에 보면 세계에서 근대적 은행을 처음으로 창설한 사람은 파리에서 폭도들에게 쫓겨 베니스에 가서 철푼 없이 거지꼴로 살다 죽었고, 미국 페리슨은 파멸을 당했고, 로버트 모리슨은 마지막 빚을 못 갚아 감옥생활을 했고, 해밀턴은 공석 상에서 여자 문제로 총에 맞아 죽었고, 미국 남북 전쟁 때 은행가로 부자가 됐던 앤드류 메론은 소득세 탈세로 징역을 살다 죽었고, 그 이후에도 저명한 은행가들의 예외 없는 비참한 최후를 기록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인생을 엮어 ‘과객 지나가는 길손’이라 했습니다. 인간은 실로 붙잡을 것도 없고 붙잡을 수도 없고 또 머물래야 머물 수도 없는, 동가숙 서가식하는 떠돌이 나그네입니다. 이렇게 인생은 나그네인데 그 어디에 정착을 하려고 하면 잡지도 못하고 자기 먼저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불행은 인생이 이렇게 나그네 인줄을 모르고 천년만년 언제나 변함없이 정착하는 줄만 아는 까닭에 있습니다. 어린 아이가 작대기로 밤하늘에 별을 따려하듯이, 소년이 무지개를 붙잡으려하듯이, 인생은 무엇이나 잡으려고 소유하려 하고 어디에 정착하려 하면 언제나 배반을 당하게 됩니다. 집도 내 집이 아니요, 땅도 내 땅이 아니요, 실로 인생은 나그네요 길손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첫 단계는 인생은 나그네요 길손임을 알게 해 주는 것입니다.
둘째는, 나그네의 실존은 내일에 있고, 길손의 목표는 언제나 미래에 있다는 점입니다. 여행의 쾌감은 전혀 미지의 새 땅과 새 하늘 새 산천을 찾아보는데 있습니다. 로마에 사는 사람은 로마의 귀한 것을 모릅니다. 알프스 산중에 사는 사람은 명산의 감격을 모릅니다. 그것은 고적이 고적이 아니거나 산이 명산이 아니어서가 아니라 새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최근 몰트만이 희망의 신학을 주장하고, 에르스트 불로호가 미래의 철학을 주장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등 뒤에서 훈시하는 할아버지거나 함께하는 친구가 아니라, 앞서가시는 인도자라는 것입니다. 나그네 인생의 매력은 항상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새로운 세계를 찾아보는 전진생활에 있습니다.
기독교는 실로 미래의 소망을 현실보다 더 소중하게 믿는 종교입니다. 요한계시록 마지막 장은 새 하늘 새 땅의 소망으로 기독자의 전진의 표적을 삼아주셨습니다. 샤르뎅 신부는 인간은 아메바에서부터 진화하여 무수한 진화과정을 거쳐 오늘의 영장류의 최고정상에 올랐는데 앞으로 계속 전진 발전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의 경지까지 생리적으로도 이르게 될 것이라고 했고, 그렇게 되기에는 그 목표점을 보고 계속적으로 전진하는데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전진목표를 그리스도요 그리스도가 오메가 포인트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에 들어가 농경문화에 동화되면서 정착하려는 때부터 이스라엘 민족의 정신적 종교적 사상적 타락이 시작된 것입니다. 본래 생명체란 정지가 곧 쇠퇴요 부패이기에 언제나 성장해야 하고 새로워져야 합니다. 우리 개혁교회의 기본자세는 언제나 개혁해 나가는 교회라는데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그 개인이나 그 가정이나 그 민족사회에 들어가면 가만히 정착하여 있지 못하게 하고, 항상 전진 발달 창조 개척을 하게 합니다.
그래서 교회의 기상은 언제나 처녀의 기상이요 소년의 꿈입니다. 사람이 늙으면 안주하고 정착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노쇠증세입니다. 제일 평안한 정착과 안일은 무덤속이요 그것이 죽음입니다. 산 사람은 움직여야 하고 꿈이 있어야 하고 미래가 있고 야망이 있고 전진해야 합니다. 기독교는 언제나 미래를 바라보고 나가는 길손이요 나그네이기 때문에, 현재의 일시적 안일에 안주하거나 약간한 성공에 도취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오늘의 불행에 좌절하거나 오늘의 곤고함에 절망하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실로 꿈의 종교입니다. 성서에서도 미래의 소명과 승리를 약속한 기록들은 모두 묵시문학 즉, 꿈의 기록들입니다. 영원한 새 역사의 창조 영원한 새 세계의 창조, 최후의 승리를 믿고 나가는 종교입니다. 그래서 이 나그네는 오늘의 피곤을 마다 않고 언제나 내일의 꿈에 부풀어 살아갑니다.
나는 한국에 대하여서도 언제나 이 꿈에 부풀어 살아갑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남북이 통일되고, 자유와 정의가 강같이 흐르고, 사랑과 협동으로 서로 화목하고, 배고파 우는 자 눌리고 업신여김을 받은 자 없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노래가 삼천리강산에 차있고, 온 세계 인류가 부러워서 견디지 못하는 새나라가 이룩될 것을 희망하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하나님이 이 민족을 돌보시고 이 역사를 섭리하시는데 안 될 까닭이 없습니다. 너무도 낭만적인 이상주의가 아닌가 하실 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이 찬란한 이상마저 없으면 이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겠습니까?
나는 오늘 우리 젊은 세대가 이 찬란한 내일의 꿈을 잊고 사는 것이 가장 슬픈 일이라 생각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인간에 이상과 꿈을 꾸는 종교요, 이상과 꿈을 가진 사람은 그 이상과 꿈을 실천하기 위한 사명감에 불붙게 되며 그 꿈, 그 이상이 실현을 사실처럼 믿는 신앙에 굳게 서는 것입니다. 현실주의자는 오늘을 지나가는 현실로 소유하지 못하며 동시에 다가오는 내일도 소유하지 못합니다.
부모는 내일을 책임질 아들딸들의 내일을 꿈처럼 바라보고 더 나은 세대를 꿈꾸기에 오늘 흥분을 하고 살아야 합니다. 스승은 내일의 지도자들을 그 어린 제자들 속에서 그려보고 부푼 감격과 흥분으로 교육을 해야 합니다. 성남교회 장로님들 권사님 집사님들, 오늘 여러분은 앞으로 10년 20년 50년 100년, 기원 2천 년 대를 넘어서는 그 때 그 서울, 그 한국의 찬란한 성남교회 상을 그려보고 전진해 가시기를 바랍니다. 소망의 뜻을 알고 나가는 한 여러분은 언제나 청춘이요 소년입니다.
셋째, 나그네는 간 데마다 자취를 남기는 법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인생의 현재적 삶은 오직 자취를 남기는데 관심하는 것입니다. 인생이 남길 수 있는 것은 자취, 흔적뿐입니다. 귀하신 몸, 아름다운 용모, 건강한 체구도 썩어 한줌 흙이 되지, 그대로 남아 있지 못합니다. 평생을 애써 모은 돈은 동전 한 푼 자기 것으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학식도 사상도 그러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을 통한 자취만은 남습니다. 어떤 흔적 어떤 자취를 남길까? 내가 한국의 최초 캐나다 선교사 윌리암 맥켄지(William McKengy)박사에게서 들은 실화 한 토막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한국에 최초로 카나다인 선교사로 온 Willam McKengy 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이분이 당시 노마스코시아에서 북미대륙을 서쪽으로 횡단하여 뱅쿠버에 와서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는 길인데, 횡단 철도가 반절밖에 놓이지 않았던 때입니다. 기차를 타고 그 곳까지 오면 꼭 다음날은 주일날이 됩니다. 그래서 주일날 여행할 수가 없어서 여관집 2층에서 혼자라도 기도하고 예배를 드리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아래층 주막에는 그 집주인을 위시해서 소위 서부의 총잡이 비슷한 동네 깡패 노동자 등 십여 명이 몰려들어 술 먹고 투전판을 벌이고 떠들어 대는 것입니다. 이 맥켄지씨는 도무지 조용히 기도할 수가 없어서 달려 내려가 학생 때 권투와 유도를 했던 솜씨로 몇 놈을 쳐 눕히고, 그 놈들의 총을 뽑아 이놈들 죽여 버리겠다고 덤벼들었습니다. 겁에 질린 이들이 살려 달라고 애원하니, 너희들이 살겠으면 내가 시키는 대로 예배를 드리고, 오늘부터 예수를 믿겠느냐고 해서 그들을 데리고 예배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음날 길을 떠나 한국에 와서 황해도 소래 서방호 장로님 댁에 머물러 한국선교를 준비하다가 11 개월 만에 열병을 앓아 죽었습니다.
그런데 꼭 그가 그 여관에 묵고 간 지 2년 후에, 구례선 목사가 선교사로 한국에 오는 길에, 바로 그 주막에서 쉬게 되었고, 또 그 다음은 주일날이었습니다. 그 주인에게 여기 예배 보는 교회가 없느냐고 물으니 바로 자기 집에서 예배 처소로 예배를 본다 하며 그 때 일을 말하는데, 그때부터 예수를 믿고 매 주일 예배를 본다 했습니다.
맥켄지의 이 사적은 구례선 목사가 아니면 영원히 잊혔을 자취입니다만, 한 젊은 길손이 자기도 모르게 남긴 자취는 실로 큰 데 있습니다. 우리는 무심히 누구에게 던진 말 한 마디가 그를 살리게도 하고 죽이게도 한다는 사실, 나의 한 걸음 삶이 자취를 남긴다는 사실을 중시해야합니다.
어느 시골에 무식한 아들이 아버지가 돌아간 후 비석을 잘 써서 세우기로 하고 동네 훈장을 찾아가 비문을 부탁했다 합니다. 훈장은 너의 아버지 기념할 만한 행적이 있으면 말 해보라 했더니, 이 말 저 말 하기는 하나 글로 새겨 남길만한 자취는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훈장이 써준 예문은 글자 넉자인데 식은 식지사야(食之死也)라, “먹다 죽었다”로 썼다 합니다. 실로 먹다 죽는 인간이면 구더기 같은 인간입니다. 한평생 나그네 인생길을 이 주막 저 주막, 이 마을 저 마을 순례자의 길로 살다 갈 것인데, 간판을 많이 썼다고 자취가 남는 것이 아니고, 동상이 선다고 자취가 남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자취는 그가 일생을 모두 살고 떠난 다음, 죽어서 관 뚜껑을 덮은 다음에서야 그 자취가 바로 드러나는 법입니다.
무명의 여신도가 예수의 머리에 향유를 부어드렸던 한 순간의 일로, 예수는 이 여인의 행한 일을 천하에 이르는 곳마다 전하라 했습니다. 나는 내 아버지의 자취를 회상합니다. 무식하고 가난하고 병신 아버지가 내게 어떤 자취를 남겨 주었을까? 두 가지 분명한 자취, 하나는 새벽이면 낭랑한 목소리로 성경을 초성 좋게 읽던 것, 그리고 또 하나는 하루 삼식 먹을 때마다 십 분씩 식기도를 하던 것이 생각납니다.
십분 이상씩 꼭 같은 기도, 아이들 하나하나의 이름을 들어 기도해 주시던 그 지루하던 기도였습니다. 기도가 속히 끝나기를 기다려 몇 번씩 눈을 떠보며 귀찮아하던 그 기도, 그러나 오늘 생각하니 그 기도가 나를 키워준 유일한 양식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이란 자기를 희생시켜 하나님과 이웃을 위하여 사는 것인데, 우리는 천추에 남을 나의 자취를 남길 수 있기를 원하고, 이를 위해 살고 죽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역시 나그네의 최후 최고의 소망과 기쁨은 부모형제 처자 권속들이 기다리는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데 있습니다. 나그네는 방랑자는 아닙니다. 길손은 유랑민이 아닙니다. 작정한 여행을 마치고 그리운 내 고향 다정한 내 친구 친척 사랑스러운 가족들이 품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인생은 길손이요 나그네 인생인데 바로 그 마지막 인생의 종착역에 내렸을 때 갈 곳이 없는, 마중 나온 부모형제 처자가 없는, 어딜 가야 할 지 모를 방랑자요 유랑민이 될 것인가? 따스하고 사랑스럽고 그립던 부모형제 처자 권속의 마중을 받아 예비한 자기 집으로 가는 자는 실로 크고도 큰 인생 중대사입니다.
지옥의 사자에게 갈 길 없는 이 유랑자가 이끌리어 공포의 문으로 갈 것인가, 천사의 영접을 받고 주님의 예비한 집으로 찬송을 부르면서 갈 것인가는 실로 큰 문제입니다. 나는 때로 이 생각을 할 때마다, 사람이 예수를 안 믿고 어떻게 잘 살 것인가도 문제지만, 어떻게 마지막 숨을 거두고 눈을 감을 수 있을까? 허무한 인생이 끝나고 인생의 종착역을 내리는데, 내 영혼이 두 손 벌려 붙잡을 나의 주님, 내 영혼의 안주할 집, 나의 고향, 그것조차 확실치 못하면 어찌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인가?
기독자가 받는 축복이 세상에서도 한두 가지 만이 아니지만, 역시 최고 최대의 축복은 내가 인생을 마치는 그날, 비록 허물지고 욕되고 죄스러운 인생을 살다 가는 경우라 해도, 우리 주님이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가 가서 너희 있을 곳을 예비하고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가겠다.”는 이 고마운 약속 때문에 찬송을 부르면서 눈을 감을 수 있는 것이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너희에게 권하노니. . /벧전2:11-17/ 김병삼목사
2018-11-07 03:40:22
11.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12.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13.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14. 혹은 그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보낸 총독에게 하라
15.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16.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17.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대하라
권면 1: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추석 연휴에 [안시성]이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그 영화를 보기 전 홍보하는 인터뷰를 본 적이 있는데, 기자가 주연을 맡은 조인성에게 이렇게 묻더군요.
“역사적인 사실, 결말을 아는 영화가 관객들에게 흥미가 있을까요?”
그랬더니 조인성이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결과를 아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이겼는지를 흥미롭게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 정말 흥미진진하게 아는 결과를 보았습니다. 물론 영화적인 재미를 위해 여러 소재들을 더했겠지만, 그 과정을 다시 보는 것이 잘 만들어진 영화 속에서 재미를 더했던 것 같습니다. 오늘 말씀도 그런 것이 아닐까요? 결과를 아는 싸움을 어떻게 싸울지. . .
말씀을 묵상하며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계속해서 세상적인 삶과 영적인 삶을 대비해서 말하고 있다는 것이죠. 옛 습관을 가진 사람과 새롭게 된 우리가 달라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사랑하는 사람, 하나님께 택함을 입은 거룩한 족속인 우리들을 이렇게 정의 하고 있습니다.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이라고 말이죠. 거류민도 나그네도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다 지나가는 사람들입니다.
가장 무책임한 사람들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갑자기 생각나는 말씀이 요한복음 10장에 있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이 강도만난 사람을 두고 그렇게 급하게 지나갔던 이유가 무엇일까?
지금 그들이 지나가는 자리에서 스스로를 ‘나그네처럼’ ‘행인처럼’ 생각했기 때문은 아닐까요?
그래서 그 상황에 대하여 책임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은 아닐까요?
그런 맥락에서 보면, 나그네와 행인 같은 우리가 하늘나라를 향해 가며 쉽게 간과하는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책임을 회피하거나, 영혼을 거슬러 싸우려고 하지 않는 것이죠. 그래서 본문 11절의 말씀으로 권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11.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여기에서 주목해야할 단어가 몇 가지 있습니다.
- against, abstain, 그리고 sinful desire 라는 말입니다.
육체의 정욕이란, 죄악 된 욕망이고, 이것은 우리의 영혼에 반대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악 된 욕망으로부터 우리의 영혼을 지키는 것은 ‘전쟁 (war)’과 같은 것입니다.
죄 된 욕망으로부터 우리의 영혼을 지키는 것이 전쟁이라면 우리가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할까요? 인터넷에 나오는 예화를 하나 소개합니다.
어느 슈퍼마켓에서 한 남자가 쇼핑카트에 아들을 태우고 쇼핑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징징 울면서 고함을 지르고 여간이 아니었다.
그러자 그 남자는 아주 부드럽고 나긋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흥분하지 마라, 혁수야, 소리 지르면 안 돼 혁수야…
가만히 있어. 혁수야. 참아야 된다 혁수야”
그 모습을 보던 옆에 있는 아줌마가 이 남자의 인내심에 감동을 받아 말했다.
“아들을 참을성 있게 달래시는 것을 보니 참으로 훌륭한 아빠네요. 아들 이름이 혁수인가 보죠?”
그러자 남자가 천장을 한 번 쳐다보고 크게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혁수는 아들이 아니라 제 이름입니다..”
흥미로운 이야기 아닌가요? 결국 자신과의 싸움일 것 같습니다.
싸우려 하지 않으면, 회피하려고 하는데, 우리 육신의 정욕이 회피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처절하게 싸우지 않으면 우리 스스로를 지킬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단의 세력이 우리를 치밀하게 공격하기 때문이죠.
로마서 13장 12-14절에 보면 사도바울은 이렇게 성도들에게 권하고 있습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본문 12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악을 이기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부정적인 접근보다는 긍정적인 접근이 필요합니다.
12.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 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함이라.
‘행실을 선하게 가져. . .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행실을 선하게 가지는 것이 중요한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방인 중에서’라는 말입니다.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것만큼 힘든 것이 ‘이방인 중에서’선한 행실로 살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사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 중에 ‘묻어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냥 모두가 같은 모양으로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면 그냥 나도 그렇게 가면 되는 일인데, 우리가 살아야 하는 것은 이방인들 중에서 선함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그런데 종종 우리 신앙의 오류는 이런 ‘선함’을 하나님께 미룰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제이슨 미첼은 그의 책 [쉬운 예수는 없다]에서 이런 표현을 썼습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셔츠’에 눈물과 화장 자국이 묻기를 원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시나요?
저는 종종 영성훈련을 인도하거나, 집회를 참석하고 난 후에 하염없이 우는 사람들을 만나곤 합니다. 참 곤란하기는 한데, 화장을 짙게 한 분들이 울 때면 그리고 그 화장 자국과 눈물이 어깨에 묻을 때면 말이죠.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눈물과 화장 자국을 내 옷에 묻히기 싫어서 하나님께 미루지는 않았는지. . .
누군가를 위로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습이 결국은 우리의 옷에 눈물과 화장 자국을 묻히지 않으려는 모습, 혹은 쉬운 방편을 찾으려는 얄팍한 모습은 아니었는지 말입니다.
조금 더 적나라하게 말한다면,
혹시 우리는 기도만 하느라 실제로 위로하는 사람들을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결국 내면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쉬운 예수를 믿는 마음과 어려운 예수를 따르려는 갈림길에 서 있는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진짜 예수님은 우리가 이 세상 속에서 연민을 느끼며 살라고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연민 때문에 무엇을 할 것인지를 묻지 않으실까요?
이 부분을 평신도 묵상팀에서 이렇게 나눔을 가졌더군요.
김병동 권사 나눔)
내가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있을 때 세월호 사건이 터졌다. 내 큰 아이가 고3이었고 둘째가 중2이었다. 뉴스를 보고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내 기도 시간에 주님께 물었다.
“주님 왜 그러세요. 주님은 왜 일하지 않으세요. 사탄은 지금도 자신일인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들을 미혹하고 유혹해서 이렇게 사건을 통해 자신의 백성들을 확장시켜 나아가는데 대체 주님은 무엇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저 수 백 명의 학생들의 생명은 어찌하고 왜 이런 일이 나도록 두고만 보셨습니까?” 하고 속상할 만큼 상해 있어 막 울며 기도 했을 때 주님이 환상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 환상은 “주님이 그 세월호를 안고 큰 소리로 우시는 것이었습니다.”
“주님 왜 우세요?”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 일꾼 300명을 너희들에게 보냈건만 너희는 너희 욕심을 채우기 위해 내 일꾼 300명을 내게로 도로 돌려보내는구나. 너희 아비들은 돈을 사랑하여 수많은 옳지 못한 방법으로 재물을 모으고 마침내 이단들과 손을 잡고 자신의 영토가 그들에게 점령되어 가는 것도 모르고 행한 결과가 무엇이냐.
너희들이 그런 일을 할 때 교회는 무엇을 위해 일하였느냐.
이 땅에 거짓된 진리가 뿌리 내리지 못하게 내게 기도한 적이 있더냐. 나는 너희들에게 수없이 말했지만 돈을 사랑하는 너희들의 귀에 내말은 들리지 않았던 것은 아니냐?”
나는 이 말씀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버지들의 선한 행실이 아닌 돈의 노예가 된 결과로 생긴 이 일을 누구에게 탓하겠는가? 지금도 옳지 못하고 선하지 못한 일들이 여기저기에서 일어나고 있다. 주님의 가르침대로 살아보자. 그것이 주께 영광을 돌리는 길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즉 이방인들이 우리의 행실을 보고 하나님을 아는 것은,
연민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연민 위에 더해지는 ‘행동’ 때문이겠죠.
동정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그것으로 인해 행동을 옮기고, 실제적인 도움을 만들어 내는 것은 참 제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요?
악한 자들과 함께 하는 것이 참 힘든 것은, 악한 자들이 선한 사람들을 향해 ‘비방’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이 드러나는 때가옵니다.
우리의 선행이 드러나는 때는 우리에게 임하실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때, 그 영광중에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권면 2: 주를 위하여 순복하라!
이제 13절 말씀을 묵상하면서 참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을 맞닥뜨리게 됩니다. 요즘도 그렇지만 당시 상황에서는 더욱 그랬을 것 같습니다.
13.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당시 인간이 만든 제도와 권력으로 인해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핍박을 당하고 목숨의 위협을 당하는 상황인데 ‘순종’이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게다가 인간이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라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특히 세상의 제도와 신앙의 제도가 상충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면 이 말씀을 적용하는 것이 더욱 힘들지 않을까요?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중에 저에게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충돌’이 아닌 ‘변혁’으로 보라는 의미가 아닐까요?
이 세상에 주님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 우리가 참고 인내해야 하는 것, 또한 순종해야 하는 것들 말입니다. 물론 우리가 목숨을 내 놓고 불의한 세상의 권력에 대항해야 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주를 위하여’ 우리가 참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또한 조금 우리가 손해를 보면 주님의 나라를 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또한 ‘모든 제도’라는 말 가운데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경고도 포함되는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의 제도 때문에 신앙의 제도를 이탈하거나 포기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을 위하여’ 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도전하는 것은 아닐까요?
아마 크리스천들에게 가장 고민이 되는 일들이 ‘주일’에 이루어지는 공적인 행사, 시험 같은 것들이 아닐까요?
우리가 공직에 나가기 위해 사회생활을 정상적으로 하기 위해 치러야 하는 것들이 있는데 말입니다. 그럼 주일을 지키기 위해 우리가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 것인가요?
중요한 것은 ‘주를 위해서’가 아닐까요?
단순히 사람들이 만든 ‘주일 예배’라는 형식의 문제가 아니고, 사람들이 정해놓은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고 말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께서 만난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하고, 자신들은 ‘어느 산’에서 예배한다고 하는데, 주님께서는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신령과 진정’이라는 말이죠.
우리가 잘 아는 다니엘의 세 친구 그리고 다니엘의 신앙을 알고 있습니다.
이방 땅에 잡혀와 교육을 받고 있는 그들에게, 바벨론의 구조 속에 들어가 있는 그들에게,
예루살렘을 갈 수도 없고, 예배를 드리는 날도 정해지지 않은 그들에게 신앙을 지킨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들은 정해진 시간과 장소가 아니라, 있는 그 곳에서 신앙을 지키기 위해 기도했습니다.
유대 땅이 아닌, 이방 땅에서 예배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의 제도권 속에서 교육을 받았고, 중요한 위치에 나아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제도 속에서도 ‘주를 위하여’ 살 수 있듯이, 신앙적 조직 안에서 주님을 욕되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지 않을까요?
또 한사람 목회자가 아닌 평신도의 나눔을 소개합니다.
문지윤 권사 나눔)
교회에서 1인 1사역의 운동이 있었는데, 딸이 다니는 초등학교에서도 1인 1봉사라는 것이 있다. 아마도 교회의 것을 따라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나무모임을 갔는데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이 임원을 맡아 그 집사님도 임원이 되어 열심히 학교일을 봉사한다고 했다. 딸로 인해 열심히 하는 학교 일에 비하면, 교회는 주일 예배만 드리는 상황이었다.
그 집사님이 나무 예배에서 자신이 학교 임원 엄마로서의 고충을 이야기하면서 자녀를 학교에 보내는 엄마들은 필수적으로 1인 1봉사를 꼭 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하는 것을 보았다. 좀 아이러니한 느낌이었다. 그렇다면 교회 일은 어떨지 생각해 보았을까?
아이가 크면 언젠가 그 열심이 교회로 돌아올지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세상의 일을 열심히 하는 것에 못지않게 하나님의 일도 열심히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반대로 교회 일을 열심히 하는 성도이면, 세상일도 얌체같이 빠지지 않고 열심히 하는 것이 보기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녹색 어머니를 자원하여 횡단보도에서 열심히 아이들이 안전하게 건너도록 도와주는 일을 정기적으로 하고 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이 땅을 살아가면서 두 일을 조화롭게 잘해 나가는 것이 아마 평생의 숙제일 것 같다.
‘세상의 모든 제도’에 대한 말씀은 베드로 당시 보다는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아주 필요 적절한 지침이 된다는 생각을 합니다. 베드로전서가 쓰여진 당시보다 우리는 훨씬 다양한 정치적 환경 속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직접 정치에 참여하고 지도자를 뽑을 수 있으니 말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지지하는 정당이나 제도, 정치와 이데올로기를 우상으로 삼는데서 발생하는 것들입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주를 위하여’라는 부분이 아주 중요할 듯합니다.
그런 생각을 해보셨나요?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정치 이데올로기와 정당 혹은 인물이 우상이 되어 ‘두려움’을 양산하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참 신기하죠.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자신이 지지했던 사람이 떨어지면 세상이 끝나버린 것처럼, 희망이 사라진 것처럼 생각하니 말입니다. 사실은 같은 나라에서 정치인을 뽑는 선거에서 ‘일치되는 것’ 보다는 ‘불일치’되는 것으로 인해 목숨을 걸고 싸운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서로 일치되는 부분이 많지 않을까요?
정치권력이 우상화 되었다는 말은 ‘주님’의 계획이나 간섭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래서 내가 지지하거나 동조했던 사람들이 권력을 잃으면 모든 것이 끝나버린 것처럼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가 반대했던 그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도 우리의 대통령인데 말입니다.
우리는 반대했던 사람을 무조건 반대하거나 도덕적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이는 우리가 지지하는 정당이 종교화 되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간섭할 여지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전적으로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해법으로 본다는 말입니다.
얼핏 들으면 이율배반적으로 들리는 말인데,
인간이 세운 제도를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이 세운 이념이나 생각을 ‘절대화’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내가 원하는 대로 돌아가지 않을 때, 이 세상을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무기력하게 불의한 일에 순복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우리 자신을 ‘절대 선’으로 생각하는 오만과 편견에서부터 자유 하겠다는 말입니다.
20세기 가장 위대한 윤리학자 중에 하나인 니버가 이런 주의를 당부합니다.
“자기 민족에 대한 자긍심은 좋은 것이기는 하지만 나라의 권력과 번영을 무조건 절대화해서 다른 모든 관심사를 거부한다면 폭력과 불의가 당연하게 자행될 수 있다.”
파시즘, 나치즘, 중화사상, 수퍼히오리즘, 순혈주의 같은 것들이 이런 범주에 들지 않을까요?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 우리가 자랑하고 있는 것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업적이라고 생각할 때, 우리의 교만이 얼마나 무서운 악이 될 수 있는지 모릅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4장에서 교회 안에 서로 반목하고 싸우는 성도들 가운데 존재하는 교만과 우월감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7절에서 이렇게 말하죠.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팀 켈러 목사가 그의 책 [내가 만든 신]에서 인용하고 있는 글을 나눠보겠습니다.
말콤 글래드웰이 [아웃라이어]에서 수많은 사례 연구를 통해 예증했듯이 우리의 성공은 다분히 환경의 소산이다.
일례로 모두 1930년 전후에 태어난 뉴욕의 많은 유대인 변호사들은‘시간의 우연’덕분에 온갖 혜택을 누렸다.
우선 학교에 학생 수가 적어 교사의 주목을 더 많이 받았다. 다시 그들에게는 매우 양질이면서도 비싸지 않은 대학과 법률 교육의 문이 열려 있었다.
또 반유대주의 정서 때문에 백인 상류층 로펌에서 배제된 그들은 기성 변호사가 맡지 않던 주주총회의 위임장 쟁탈전 같은 특수 분야로 부득이 빠졌는데, 덕분에 적대적 인수합병이 시작되던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경쟁력에서 엄청난 우위를 점했다. 결국 모두 돈방석에 앉았다.
나라면 글래드웰과 달리 유전과 환경과 본인의 선택이라는 3대요인에 똑같은 비중을 두겠지만, 그래도 그 책에 충분히 논증된 사실이 있다.
우리 성공은 생각만큼 그렇게 자신이 잘나서 된 게 아니다. 현재의 우리를 있게 한 요인은 다분히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권면 3: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 .
오늘 말씀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문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그 어떤 권면을 하든 그 일을 할 수 있는 자유를 우리가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들은 복음의 가장 큰 특권은 ‘자유’입니다. 죄로부터의 자유,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따른 선택의 자유를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유가 축복이 되기도 하고 저주가 되기도 합니다. 즉, 어떻게 사용하느냐의 문제죠. 자유를 가진 우리들이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증거는 그 자유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사용하느냐에 달린 것입니다. 본문 16-7절.
16.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17.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대하라
그리스도인의 선한 행실의 핵심은 ‘뭇 사람을 공경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한다면, 하나님과 관계된 모든 것들에 대하여 경외심을 가지게 되지 않을까요? 무엇보다 ‘인간에 대한 경외심’입니다.
우리의 신앙고백에 의하면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형제자매’인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공경과 존중이란 무슨 의미일까요?
조심하여 상대방을 대하는 것입니다. 이기적이거나 나 중심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상대방을 생각하고 배려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행동이 단순한 선행의 동기가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하는 행동들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을 통해 황금률을 주셨습니다. 마태복은 7장 12절 말씀을 보세요.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사람들 중에 누군가에게 존중받고 대접받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세상은 이러한 존중이 ‘힘과 돈’의 논리에 의해 좌우되죠.
요즘 우리 사회의 ‘갑질 논란’이 그런 것이 아닌가요? 소위 갑의 위치에서 을의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무작정 존중받으려는 것이죠. 문제는 자신이 바라는 기대만큼 존중받지 못하면 화가 난다는 것입니다. 화가 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을’로 대하는 사람에게 모욕을 주거나 학대한다는 것이죠.
세상을 시끄럽게 했던 재벌 2세들의 행태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 인간들이 존중받고자 하는 원초적인 욕구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방법과 동기가 틀린 것입니다. 우리가 존중 받을 수 있는 권리는 먼저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누군가를 존중하는 것은 ‘갑과 을의 논리’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형제자매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상대방을 대하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생각만 해도 참 아름답고 귀한 일들이 아닐까요?
또 ‘공경’이라는 말은 상대방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 아닐까요?
상대방에 대한 가치는 우리의 판단과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이라는 데 기인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적인 삶의 태도입니다.
이것을 조금 다르게 표현한다면 ‘영성’이라고 부르는 것이죠.
그러고 보니,
영성이란 어떤 고차원적인 학식이나, 고립무원의 땅에서 경험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가장 명확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한 가운데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행해지는 모든 일들이 영성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말씀이 발전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영성이 살아있는 사회일수록 살만한 세상이 된다고 말입니다. 살아가는 삶이 소망이 있다고 말입니다. 세상을 갑과 을의 구조를 만들어 놓고 복종을 강요하고, 억압을 일삼는데,
신앙을 가진 믿음의 공동체에서는 모두를 존중하고 배려하니 말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세상에서는 무시당하는 사람도 없고, 모욕을 당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내가 존중받는 그 모든 일들이, 먼저 내가 신앙적인 삶의 태도로 존중한 것이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인 ‘열매 맺는 삶’이 아닐까요?
심은 대로 거두는, 무엇보다 먼저 땅에 떨어져 썩은 밀알이 열매를 맺는 것처럼 선한 일들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거두는 인생이 되는 것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원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성공’이란 무엇을 많이 가지고, 무엇을 많이 누리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많이 공경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닐까요?
선한 행실과 자유에 대하여 조금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에 보면 16절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자유를 쓰십시오. 당신의 자유를 가지고 어떤 규칙을 깨는데 사용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뭇사람을 공경하고,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대하십시오.
무엇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으므로 기꺼이 ‘종’이 될 수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좋은 종은 주인의 마음을 알 뿐 아니라, 주인의 본성을 닮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6.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16절 말씀을 묵상해 보겠습니다. 우리들을 자유로 부르셨는데 그 자유를 어떻게 사용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종과 같이’ 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주인의 성품을 아는 종과 같이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시편 103편 8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의 성품에 대하여 나와 있습니다.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자주 경책하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는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셨으니 . . .
제이슨 미첼은 그의 책 [쉬운 예수는 없다]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용서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본성을 망각한 결과다. 용서하지 않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다는 사실을 망각한 결과다.
남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할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이 용서를 허락하시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필요 없다며 마다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본성을 닮아간다는 것은 많은 노력이 필요한 일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쉽지 않은 이유입니다. 우리가 원수를 위해 ‘우연히’ 기도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요? 우리에게 해코지 한 사람을 ‘우연히’ 사랑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요?
이런 용서와 사랑의 이야기가 성경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메시지라는 것을 우리가 부인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용서와 사랑만큼 하나님 아버지의 본성을 잘 설명하는 것이 있을까요?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는 말 하나를 가슴에 새기면 될 것 같습니다.
늘 우리의 문제는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면서 주인 대우를 받으려고 하는 것이죠.
종의 가장 큰 직무는 자신이 모시는 분의 아름다운 덕을 드러내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종노릇하지 않는 증거는 참 여러 곳에서 나타납니다.
사학법 개정을 놓고 우리가 벌이는 투쟁을 보면 참 신앙적인 것 같은데, 불신앙 적이죠.
십자가를 들고 데모를 하며 기독교 학교의 정체성을 지키겠다고 하지만, 사실은 ‘기독교 사학’이라는 이름의 문제보다 투명하게 재정을 사용하지 못한 책임들이 있지 않을까요?
조세 문제를 가지고 여러 가지 논쟁이 있습니다.
문제는 왜 세상이 교회를 납세의 대상으로 보고, 조세의 투명성이 필요한 단체로 보게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다시 종과 같이,
순수하게 종과 같이,
섬김의 대상이 아닌, 섬기려는 교회가 되라는 권면이 아닐까요?
베드로가 당시 교인들에게 그렇게 간곡하게 권했던 말씀들이
오늘 우리들에게도 그렇게 간절하게 들려졌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이 땅의 순례자로, 본향을 향해 가는 나그네로 살아갑니다. 사실 우리의 끝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이 흥미로운 것은 그 길을 ‘어떻게’가느냐는 역사를 써 내려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우리의 삶을 흥미진진하게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감독하신 역사에 캐스팅된 우리들에게 물으시고 권면하시는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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