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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베드로서 설교 모음

베드로전서 2:9 - 12 설교 모음

by Jessi J 2024. 9.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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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감을 회복하라 /벧전2:9/ 차용철 목사

2020-10-28 06:16:11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2:9)

 

<序言>

독일군이 전쟁 때 유대인을 600만 명이나 죽였습니다. 당시 독일 히틀러 정부가 유대인 포로 수용소에서 사용한 정책은 특별했습니다. 수용소에 화장실을 짓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한 수용소에 32,000을 수용했는데 화장실은 단 하나 뿐이었고 화장실에 가는 시간은 하루에 10분씩 두 번만 허락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늘 배변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마침내는 자기들이 사용하는 식기에 배설해야 했습니다. 아침에 깨어 보면 통로이든 입구이든 할 것 없이 자기들의 배설물로 가득 찼습니다. 그 때 유대인들이 부른 시조가 있습니다. "설사면 어떠하리. 된똥이면 어떠하리. 너무 많이 싸 넘친들 어떠하리. 오래 참은 고통 뒤에는 똥만 싸면 좋다 하더라."

 

게다가 목욕할 물도, 세수할 물도 주지 않았습니다. 온 수용소가 배설물로 넘쳤고 유대인들의 모습은 몰골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반면에 독일군은 바지를 칼날처럼 다려 입고 손에는 흰 장갑을 끼고 구두는 반짝 반짝 닦아 신었습니다. 그 때 한 독인 병사가 장교에게 물었습니다. "이왕 죽일 사람들을 꼭 저렇게 해야 합니까?"

 

그러자 장교는 "사람을 죽이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개나 짐승을 죽이는 것은 쉽다. 그리고 개구리를 죽이는 것은 더 쉽다."고 했습니다. 독일 병사들도 짐승같이 사는 유대인들을 죽여 주는 것이 더 자비로운 일이라고 합리화 하게 하려는 의도였습니다. 동시에 유대인들이 짐승같이 살게 하여 스스로도 죽는 게 낫다고 삶을 체념하게 하려는 의도였습니다.

 

그런데 그 때 수용소에서 기적같이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생존 전략은 매일 세수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세수할 물이 지급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새벽에 따듯한 물 한 컵이 지급되는데 그들은 그것을 다 마시지 않고 절반만 마시고 남은 물로 세수를 한 것입니다.

 

반 컵의 물로 옷을 찢어서 적신 다음 이를 닦고 그것을 다시 빨아서 얼굴을 씻고 온 몸을 씻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처음 수용소에 들어온 사람마다 그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그렇게 하지 않은 사람은 다 죽었고 그렇게 한 사람은 살아 남았다는 것입니다.

 

독일군은 유대인을 인간이기를 포기하도록 하는 전략을 사용했지만 그들은 총칼을 든 독일군을 창으로 똑바로 쳐다보면서 물 반 컵으로 이를 닦고 얼굴을 닦고 몸을 닦았습니다. 자신들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보여 준 것입니다. 자존감으로 저항하고 자존감으로 살아 남은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그런 극단적인 상황이 아닐지라도 자존감을 갖고 있는 사람이 행복하고 성공합니다.

 

<本論>

1. 자존감의 의미

 

자존감(自尊感, self-esteem, self-respect, self-importance)은 자기를 존중하는 감정입니다. 곧 자기를 사랑하고 존중하고 가치있게 여기는 감정을 말합니다. 자기의 존재와 성품과 능력과 외모와 행위 등에 대해 귀하게 여기고 자부심을 가지는 감정을 말합니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부정적인 자화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상처를 잘받고 울분과 열등감과 수치심과 자책감과 우울증과 중독증 등 여러 부정적인 감정들에 노출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사실 부정적인 감정들이 있을 때 자존감이 낮아지고 자존감이 낮을 때 부정적인 감정들이 더 많아집니다. 그래서 자존감의 결여와 부정적인 감정들은 상호 유기적 관계를 가지고 있고 자존감의 결여는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의 주 원인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을 치유하기 위해서 가장 근본적인 방법은 낮은 자존감을 회복하고 높이는 것입니다.

 

2. 자존감이 낮을 때의 현상

 

다른 사람과 비교합니다.

자존감이 낮으면 자꾸 다른 사람과 비교를 하게 됩니다. 자신을 남과 비교하므로 자신의 긍정적인 점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꾸 부정적인 면을 보게 됩니다.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상처를 주지 않아도 스스로 자신의 부족한 점을 보고 시험에 듭니다.

 

다른 사람이 승진하고 사업이 잘되고 집이 좋고 자동차가 크고 자녀가 공부를 잘하고 그러면 스스로 시험에 듭니다. 다른 사람이 잘되는 것만 보아도 열등감을 가지고 그 사람과 경쟁하려 하고 그것이 되지 않을 때 울분을 가집니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자신보다 났다고 생각하는 사람 앞에서도 당당합니다. 사자와 토끼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루는 사자와 토끼가 경주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자가 토끼하고 경주한다는 자체가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세상에, 내가 너하고 경주를 하다니 쪽팔려 죽겠다이...." 하면서 달리기를 멈추고 통곡했습니다. 옆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토끼가 팔짱을 낀 채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머리나 좀 매고 뛰어라 이 미친년아!"

 

자기를 비하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다른 사람보다 못한다고 생각하면 자신을 철저히 비하합니다. "나는 왜 이렇게 못할까?" "나는 왜 이렇게 못났을까?" "나는 왜 이렇게 생겼을까?" "나는 왜 이런 부모에게서 태어났을까?" 생각합니다. 자신을 철저히 무가치한 존재로 여깁니다. 자신을 아무 쓸모없는 존재로 여깁니다. 그렇게 되면 결단력과 집중력과 창조성이 없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공동체 의식이 약화되어 공동체에 대해 부정적이게 되고 공동체에서 떠나려 합니다.

 

자기를 증오합니다.

자기 비하가 깊어지면 자신을 미워합니다. "지긋 지긋한 나 나는 이 세상에 왜 태어났단 말인가?" 자기를 스스로 미워하고 학대합니다. 자신을 방임에 내어 줍니다. 엘리야와 요나는 탈진했을 때 자기 생일을 저주하면서 죽여 달라고 했습니다.

 

3. 자존감이 높을 때의 현상

 

자기를 높이 평가합니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우월감을 갖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과 상관없이 자기의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높은 의미를 부여한다는 말입니다. 자기를 가치있게 여기고 귀하게 여기고 사랑합니다. 교만이나 자만과는 구분됩니다.

 

자신감이 넘칩니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자기를 가치있게 여기므로 자기에 대한 자부심을 갖게 되고 매사에 자신감이 넘칩니다.

한 아주머니가 티코를 타고 당당하게 운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옆에 한 대형차가 서더니 아래로 내려다 보면서 물었습니다. "아줌마 그 티코 얼마주고 샀어요?" 그러자 아주머니는 조금도 움추러 드는 기색없이 당당하게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랜저 한대 사면 덤으로 주는 거여요."

 

창조성이 있습니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마음과 생각이 갇혀 있지 않고 자유롭습니다. 그래서 그 자유로움 가운데서 집중력을 가지기고 합니다. 또한 그 자유로움 가운데서 다양한 생각을 하게 되고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갖게 됩니다.

 

4. 자존감이 결여된 원인

 

상처 때문입니다.

상처를 받아 내면화 된 사람은 상처를 더욱 많이 받게 되고 그런 가운데서 열등의식도 생기고 자존감이 낮아지게 됩니다.

 

사랑의 결핍 때문입니다.

모든 병은 사랑의 부족에서 옵니다 (Illness is lack of love). 육신의 질병도 그렇지만 특히 마음의 병은 사랑의 결핍에서 옵니다. 자존감의 결여는 자라면서 (4~6, 청소년기) 사랑을 받지 못했을 경우에 심하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어른이 되어서도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자존감이 점점 상실되어 갑니다. 그러므로 자신은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해가면서 자존감을 회복해야 하고, 자녀들에 대해서는 사랑을 많이 주어야 합니다.

 

5. 자존감을 회복하기 위한 방법

 

자기의 존재의 가치를 발견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위대한 걸작품입니다. 공장에서 일괄적으로 찍어 낸 상품과 같은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 독특하게 만든 걸작품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시고 보기에 좋았더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머리가 없고 눈이 찢어지고 코가 낮고 뻐드랑이가 났고 몸이 뚱뚱하고 키가 작고 안짱다리라 해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장 완전하고 아름답게 만드신 것입니다 (1:31, 2:3).

 

진흙덩이들이 있었습니다. 진흙덩이들은 최고의 토기 작품이 되어서 왕궁의 식탁이나 부잣집의 장식장에 올라가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다행인 것은 그 진흙덩이들로 토기를 만드는 토기장이는 최고의 장인이었습니다. 그가 만든 그릇들은 거의 다 왕궁이나 부잣집으로 팔려 나갔습니다.

 

어느 날 한 진흙덩이를 가지고 그릇을 만들기 위해 반죽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진흙덩이는 흥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작품으로 태어날 내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좀 이상했습니다. 토기장이가 빚는 모습이 이전과는 전혀 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한쪽으로 기울어진 주둥이에 유난히도 넓은 손잡이.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다른 진흙들은 웃었습니다. 그 진흙덩이는 너무 속상해서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습니다. 자신을 그런 흉칙한 모습으로 빚은 토기장이의 손길이 밉고 또 미웠습니다. 마지막으로 불가마에서 나왔을 때는 정말 절망적이었습니다.

 

토기장이가 왜 그런 모습으로 빚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토기장이는 완성된 그릇을 품에 앉고 어디론가 뛰어갔습니다. 그가 도착한 곳은 어느 가난한 농부의 집이었습니다. 토기가 된 진흙덩이는 아무리 가난한 농부에게 팔려고 했어도 그런 모양으로 만든 토기장이가 미웠습니다.

 

차라리 바닥에 떨어져 깨져 없어지기를 바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밖으로 나온 농부의 모습을 보는 순간 난 너무 놀라고 말았습니다. 그 농부는 농사일을 하다가 두 손이 잘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평범하게 생긴 그릇을 사용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토기장이는 이 사실을 알고 이 농부를 위해 손이 아닌 팔로 사용할 수 있는 그릇을 만들었던 것이다. 토기를 붙잡고 눈물을 글썽이는 농부에게 토기장이가 말했습니다. 더 고마운 것은 나요. 내가 질그릇을 만들면서 이렇게 기뻤던 적은 처음이요. 이 그릇은 나의 최고의 작품이요. 그 때 토기가 된 진흙덩이는 자신이 토기장이가 만든 최고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사람들의 시각은 대부분 상대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의 기준은 모두 상대적입니다. 작다 크다 , 예쁘다 밉다 , 좋다 나쁘다 등의 기준이 대상에 따라 다릅니다. 자기 기준에서 각각 다르게 평가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평가도 상대적입니다.

 

자기가 못생긴 사람과 있을 때는 잘생긴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잘생긴 사람과 같이 있을 땐 못생겼다고 생각합니다. 돈이 많은 사람과 있을 때는 가난하다고 생각하고 돈이 없는 사람과 같이 있을 때는 자신도 부자라고 생각합니다. 지식이 많은 사람과 같이 있을 때는 자기를 무식한 자라고 생각하고 무식한 사람과 같이 있을 땐 자기를 유식하다고 생각합니다.

 

악인과 같이 있을 땐 자신이 선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선한 사람과 같이 있을 땐 자기를 악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시각은 상대적인 시각이 아니라 절대적 시각입니다. 하나님이 목적에 합당하게 사용하기에 가장 좋은 모습으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절대적인 시각으로 보고 심히 기뻐하십니다. 이런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아주 먼 옛날 하늘에서는 당신을 향한 계획 있었죠 하나님께서 바라보시고 좋았더라고 말씀하셨네 니 세상 그 무엇보다 귀하게 나의 손으로 창조하였노라 내가 너로 인하여 기뻐하노라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자기의 능력의 가치를 발견해야 합니다.

우리는 기질과 성품과 지능과 재능과 함께 은사도 하나님께서 목적에 가장 합당한 은사를 주셨습니다. 다른 사람이 갖은 은사가 없을 지라도 다른 사람이 갖지 않은 은사를 주셨습니다. 같은 은사라 해도 성향 면에서 다릅니다. 오직 나 자신에게만 주신 독특한 재능과 은사가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동일해지려고 하면 도리어 자존감이 상합니다. 다른 사람과 다른 가치를 발견하면 자존감이 생깁니다.

 

"1250°C 최고의 나를 만나라"는 책이 있습니다. 지은이는 '김범진', 출판사는 '중앙북스'입니다. 지은이는 토끼와 거북이 경주를 들어 얘기를 아주 재미있게 실제적으로 다루며 기록했습니다. '슬론'이라는 이름을 가진 거북이 있었습니다. 이 거북은 알에서 깨어날 때부터 제일 느렸고 그래서 이름도 '슬로우 원'(slow one)을 줄여 '슬론'(slone)입니다.

 

항상 뒤쳐져서 다녔고 그래서 놀림받기 일수였고 늘 가족과 남들의 비난거리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노력에 노력을 했고 우연히 토끼와 경주를 해서 이기게 됩니다. 그 덕에 그는 유명한 신발회사에 스카웃 되어 부귀에 영화를 누리고 유명인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이 거북에게 토끼가 다시 도전을 했습니다.

 

이 거북은 다시 있을 경기를 위해 거북의 세계에서 두꺼울수록 자랑스럽게 여기는 등딱지를 얇게 갈아 냈습니다. 그렇게 하다못해 아예 떼어 내고 인공으로 만든 아주 가벼우면서 단단한 등딱지를 붙였습니다. 그는 거북마을의 모든 거북들과 다른 동물들의 환호와 부러움 속에서 다시 토끼와 경주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거북만 훈련을 했을 리 없었습니다. 토끼 또한 자신의 단점을 극복하고 보완해서 훈련을 했습니다. 결국 거북은 3번까지 경주를 하게 되지만 모두 지게 됩니다. 이제 거북은 모든 것들을 잃어버렸고 좌절해 있으면서 자신의 길을 만류하던 할아버지를 다시 찾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어렸을 때를 돌아볼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주 느리긴 했지만 책을 보며 조용히 있을 것을 좋아했고, 그림을 그리며 시를 쓰는 것을 좋아했고, 한가지를 시작하면 느리긴 하 지만 흡족할 만큼 좋을 결과를 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것은 자신이 아니었음을 깨닫고 다시 처음의 자신으로 돌아가려 노력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 남의 시선, 남들이 좋아하던 것, 또 급하게 맘먹고 빠르게 행동하려 했던 것들을 고치는 데는 엄청 힘들었고 두려웠습니다. 하지만 과거의 자신의 삶이 얼마나 자신과 동떨어진 삶이었고, 그래서 자신에게 얼마나 힘들었었는지를 알고, 끝내 자신을 되찾고 평안을 누렸고 정말 자신 다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나를 가장 가치있게 하기 위해 첫째, 다른 사람이 원하거나 다른 사람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포인트를 두어야 합니다. 둘째, 내가 자장 잘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에 포인트를 두어야 합니다. 셋째, 세상이 지금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포인트를 두어야 합니다.

 

<結言>

우리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49:5). 본문 베드로전서2:9"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고 했습니다. 이사야43:1"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했습니다.

 

스바냐3:17에는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우리 자신을 물질적 관점, 육체적 관점, 세속적인 시각에서 보지 말고 하나님의 시각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를 선택하고 구원하고 궁극적인 목적을 가지고 하고 삶 속에서 섭리합니다. 절대적 사랑을 받고 사는 우리입니다.

 

 

 

 

긍정의 삶 /벧전2:9-10/ 조용기목사

2019-06-05 08:58:06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베드로전서 29~10)

 

인생이라는 길을 가다가 돌을 만났을 때, 어떤 사람은 그것을 걸림돌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디딤돌이라고 말합니다. 똑같은 돌인데 어떤 사람은 그 돌에 걸려서 넘어지고, 어떤 사람은 그 돌을 디딤돌로 삼아 더 멀리 나아가는 것입니다. 인생은 어떤 태도로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긍정적인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긍정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1. 새로운 자화상을 가져라

 

긍정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존중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존중하는 마음을 자존감이라고 하는데, 오늘날 낮은 자존감 때문에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이 행복하지 않은 가장 큰 이유가 바로 낮은 자존감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타인의 시선에 지나치게 민감하고, 다른 사람이 나를 시인해 주지 않으면 불행하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인간관계에서도 지나치게 자기방어적이거나, 지나치게 공격적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기가 힘듭니다.

 

요즘 자기를 무시했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죽이는 그런 끔찍한 일도 일어저는데, 전문가들은 그 원인도 낮은 자존감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대수롭지 않은 일에 쉽게 분노가 폭발하고 타인을 공격하는 현상이 바로 낮은 자존감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자기도 불행한 삶을 살고, 다른 사람들도 힘들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원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은 건강하고 자존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창세기 127절에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인간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피조물 중에 인간을 가장 존중한 존재로 만드신 것입니다.

 

이러므로 아담과 하와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늘 긍정적이었습니다. 밝고 긍정적인 자화상을 가지고 행복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만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서 죄를 짓자,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벌거벗고 부끄러운 자화상을 갖게 된 것입니다.

 

아담은 자화상이 일그러지고 자존감을 잃어버리자 비열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아담은 자기 잘못은 인정하지 않고 여자에게 책임을 둘러 씌웠습니다.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게 된 자기 모습을 감추려고 변명을 하고 남에게 책임을 전가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자기변명을 하고 남에게 책임을 전가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숨을 곳이 없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죄를 덮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죄로 인해 일그러진 자화상이 달라져 회복되려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벌거벗은 자화상과 비천한 자존심을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시켜 주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죄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받은 피조물이 아니라, 이제 주님 안에서 용서 받고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또 베드로전서 29절에는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친히 택하시고,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하나님의 소유로 삼아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새롭게 변화된 자화상을 가지고, 자기 자신을 존중하고, 항상 긍정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2. 가슴속에 꿈을 품어라

 

긍정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꿈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오시면 꿈을 심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꿈을 가진 사람을 통해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제가 옛날에 독일에서 집회를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오려는데, 공항에서 독일 목사님 몇 분이 선교 사업을 위해 자동차 한 대를 사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저는 자동차 사 줄 돈이 지금 없거니와 자동차를 하나님께로부터 구할 수 있는 길을 알려 주겠습니다. 수첩을 꺼내세요.” 그러니까 그 목사님들이 수첩을 꺼내요. 그래서 제가 자동차 몇 대를 원합니까?” 그러니까 한 대입니다.”,

 

그럼 한 대라고 적으세요. 그 다음 어떤 차를 원합니까?”, “봉고차를 원합니다.”, “그럼 봉고차라고 적으세요.” 그 다음 어떤 색깔을 원합니까?”, “파란색을 원합니다.”, “그러면 파란색이라고 적으세요.”, “이제 눈을 감아 보세요. 자동차가 보입니까?”,“! 파란색 봉고차가 보입니다.”, “좋습니다. 이제부터 그것을 바라보고 기도하세요.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것을 마음속에 바라보고 끊임없이 기도하세요.” 그리고 기도해주고 떠났습니다.

 

그 후 독일에 다시 갔을 때 그 목사님들이 공항으로 마중을 나왔습니다. 그리고 내 짐을 봉고차에 실으면서 목사님, 이 차의 이름이 뭔지 아십니까?” 그래서 뭡니까?”하니까, “조용기라고 합니다.” 그때 가르쳐 준 대로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응답해 주셔서 차에다가 내 이름을 붙였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분명한 꿈과 목표를 가지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항상 긍정적이고 성공적인 꿈을 꾸십시오. 내일은 오늘보다, 다음 달은 금번 달보다 나아지는 꿈을 꾸십시오. 건강해지고 잘살게 되고 하나님의 은총으로 복을 받고, 남에게 꾸지 않고 남을 도와주는 삶을 꿈꾸십시오. 우리가 마음속에 꿈꾸는 것은 미래에 대한 청사진을 찍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진 찍은 대로 역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3. 믿음으로 기도하라

 

긍정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마귀는 부정적인 생각을 심어서 우리 삶을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기도로 대적해야 긍정적인 삶, 믿음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종종 이런 생각을 합니다. 에덴동산에서 마귀가 아담과 하와를 유혹했을 때, 만일 아담과 하와가 그 자리에 엎드려서 하나님, 우리가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도와주옵소서.”라고 기도했다면,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 생각을 해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의 유혹을 이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금식하신 후 주리셨을 때, 마귀가 찾아와서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 유혹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리쳤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가 깨어서 기도할 때 마귀의 시험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마귀는 늘 부정적인 생각을 심지만, 하나님은 긍정적인 생각과 희망을 심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가까이 할 때 긍정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갑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가족 간에 친해지려면 대화를 많이 해야 합니다. 대화가 없으면 남과 같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아무 말 안하고 밥만 먹고 각각 학교에 가고 직장에 가고, 돌아와서도 아무 말 안하고 그냥 목욕하고 자면 가족이라도 남보다 못한 것입니다. 대화를 많이 나누어야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대화를 많이 해야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시간이 없어서 기도를 못한다는 사람도 있는데, 기도는 일상생활 중에서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해외여행을 갈 때 기도를 많이 합니다. 열 시간이 넘게 비행기를 탈 때가 많은데, 그러면 비행기 안에서 굉장히 깊이 오래 기도할 수 있습니다. 열 몇 시간을 계속 기도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고함치며 기도할 수는 없어도 속으로 눈감고 마음속으로 계속 기도할 때, 얼마나 기도가 잘 되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60년이 넘는 목회 생활 가운데, 하나님께 많은 도움을 청했는데 돌이켜 보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기도는 즉각 응답되는 것도 있고, 서서히 응답되는 것도 있고, 나에게 해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안 된다고 하실 때도 있지만 그 또한 응답인 것입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기도할 때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수레바퀴에 기름을 치지 않으면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고 힘들게 겨우겨우 굴러갑니다. 그러나 기름을 치면 소리도 안 나고 부드럽게 굴러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있으면, 인생이 시끄럽지 않고 고요하며, 아주 순탄하게 굴러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은혜는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매일 많은 시간을 내어 기도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삶의 문제도 풀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태복음 7: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권력이나 재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기도로써 천국 문을 가장 잘 두드리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대화할 뿐 아니라, 기도를 통해 마귀가 만들어 놓은 더러운 배설물을 씻어낼 수가 있습니다. 기도로써 영과 혼과 몸의 배설물을 씻어내고, 환경의 배설물도 씻어낼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는 영적인 배설물을 씻어내는데, 영적인 배설물은 바로 죄인 것입니다. 우리는 육신의 연약함 때문에 알게 모르게 죄를 지을 때가 있는데, 날마다 회개기도를 통해 죄를 씻어내는 것입니다. 집안을 날마다 청소해야 먼지와 티끌이 쌓이지 않는 것처럼, 날마다 회개기도로 우리 영혼을 청소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그 영혼이 잘되고 정돈되고, 깨끗함과 집이 청결하게 되어서 하나님이 기쁘게 거하는 처소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질병이라는 육체적인 배설물도 기도로 씻어낼 수 있습니다. 오래 전 일인데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한 어머니가 아이를 데리고 왔는데, 신장염이 너무 심해서 병원에서도 더 이상 방법이 없으니 퇴원을 하라고 한 것입니다. 아이를 보니, 온몸이 마치 눈사람처럼 퉁퉁 부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이에게 안수 기도를 했는데, 그때 내 마음속에 한 달 동안 계속 출석시키라는 성령님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그때부터 아이와 어머니는 매일 아침 나의 출근 시간에 나와서 기도를 받았습니다. 그러던 중 별거 중이던 아이 아버지가 회개하고 돌아와서, 부부가 함께 아이를 데리고 와서 기도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한 달이 다 되었는데도, 아이의 병은 전혀 차도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한 달을 채우는 마지막 날, 저는 그 아이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부모가 아이를 재우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이불 속에 있는 아이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너무 놀라서 달려가 보니, 평소에는 아이가 너무 부어 있어서 이불이 둥글게 보였는데, 하룻밤 사이에 병이 씻은 듯이 낫고 부었던 것이 모두 가라앉았습니다. 아이가 작아져서 마치 없는 것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마귀가 질병이라는 배설물을 놓고 가면, 그대로 두지 말고 기도로 쫓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516절에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저는 어떨 때 비정상적으로 피곤할 때가 있습니다. 일을 많이 해서 피곤한 것은 좋은데, 비정상적으로 피곤한 것은 꼭 죽을 것 같습니다.

 

심장에 억압이 오고 온 전신에 진땀이 나고 그렇습니다. 비정상적으로 피곤할 때, 이것은 마귀가 나를 누르고 있구나그래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고 비정상적으로 나를 피곤하게 하는 원수 귀신아 물러가라하고 호통을 치면, 얼마 있지 않아서 피곤한 느낌이 사라지고 몸이 아주 가뿐해지는 것입니다.

 

또 기도는 우울함이나 미움과 원망과 분노 같은 마음의 배설물도 씻어냅니다. 마음속에 미움이나 원망이 들어올 때, 그대로 방치해 두어서는 안 됩니다. 저는 마음에 우울한 심정이 억압해오고 마음에 슬픔이 강물처럼 출렁일 때가 있는데, 이런 일이 다가오면 귀신이 또 나를 억압하는구나깨닫고 즉시 엎드려 기도합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 이름으로 단호하게 물리치면 귀신이 쫓겨나고 순식간에 마음이 그렇게 맑고 밝고 환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음에 미움이 들어와서 고통스러울 때에도 죄를 회개하고 예수 이름으로 미움을 내어 쫓아서 마음속에 있는 귀신을 쫓아내고, 나중에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리고 기도는 가난과 저주라는 환경적 배설물도 씻어냅니다. 사람이 가난하지만 비굴하지 않고 청빈한 모습으로 사는 것은 칭찬 받을 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어떤 목적이나 가치관도 없이 가난에 묶여 비참한 삶을 살아가는 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가난이란 삶의 희망을 빼앗고 인간의 존엄성도 짓밟아 버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로써 가난을 물리쳐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큰 어려움을 당했을 때, “이제 다 끝났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됩니다. “다 끝났다가 아니라, “아직 늦지 않았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겐 아직 기도가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늦지 않았다라는 말처럼 좋은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희망을 주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언제나 아직 늦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개입하셔서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길을 열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상황에 있다 할지라도 끝났다라고 말하지 말고 아직도 늦지 않았다.”라고 말하십시오. 그리고 다시 일어나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위해 친히 일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저의 삶과 사역에 있어서도 가장 큰 원동력은 바로 기도였습니다. 그 동안 저는 기쁠 때나 슬플 때, 어렵고 힘들 때, 아프고 외로울 때, 늘 기도에 매달렸고, 그 결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기도가 연약한 나와 교회를 지탱해 주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준 것입니다.

 

언제나 위대한 일은 기도하는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모든 일에 기도를 통해 인생을 하나님과 함께 살아야 됩니다. 하나님과 함께 살면, 어떤 일을 만나도 넘어지지 않고 넉넉히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할 수 없다, 못 한다, 안 된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한다면, 여러분이 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예배에 오신 여러분 모두가, 건강한 자화상을 가지고 가슴 속에 꿈을 품고 기도함으로써,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아멘!

 

<기도>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마귀의 유혹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자화상을 잃어버린 인생들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무너진 자화상이 회복되기를 소망합니다.

가슴속에 꿈을 품고 믿음으로 기도하여 우리 삶의 온갖 더러운 배설물들이 씻겨 나가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는 연약하오니 날마다 인도하시고 힘을 더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4) - 거류민과 나그네 /벧전2:9-11/ 김형익 목사

2021-05-18 02:43:09

 

이 땅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존재이면서 동시에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기에 그 삶에 긴장이 발생합니다. 이것은 두 나라 시민으로 사는 삶에서의 긴장이고, 종종 혼동을 낳게 되거나 균형을 잃어버리고 때로는 극단적인 태도로 치닫게도 됩니다.

 

1. 그리스도인의 긴장

 

본문에서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의 존재, 정체성, 신분에 대해서 먼저 9절에서 말씀합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9절은 사도 베드로가 구약 성경을 인용한 말씀으로, 출애굽기 19:5~6절의 내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출애굽기에서는,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이라는 조건이 붙고, 그 조건에 따라 너희가되리라는 결과가 주어집니다.

 

그런데 사도 베드로는 이 말씀을 인용하면서, 그것이 조건에 따라 주어지는 결과가 아니라, 이미 너희는 이런 존재라고 말한다는 점에 차이가 있습니다. 사도는 너희는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둘째 아담이자 마지막 아담으로 오셔서 첫 아담의 실패를 완전한 순종으로써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입니다. 10절에서 사도 베드로는 호세아 선지자의 말씀을 차용하여 좀 더 부연합니다.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본래, 우리가 이런 영예로운 신분을 얻을 자격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요 축복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좋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이처럼 영예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11절을 보십시오.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라고 말합니다.

 

분명히 우리는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그의 소유된 백성이지만 이 세상에서는 거류민과 나그네 같다는 것입니다. 거류민은 시민권이 없이 거주하는 외국인을 가리키는 말이고, 나그네는 임시로 거주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쉽게 말해,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갑이 아니라 을이라는 말입니다.

 

이로써, 사도는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자신의 영예로운 신분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한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주인으로 사는 것이 아니며, 이 땅에서 영원히 살 것이 아니라고 암시합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세세토록 왕노릇하겠지만, 이 땅에서는 거류민과 나그네처럼살아갑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어지는 본문에서 그리스도인이 거류민과 나그네로서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야 하는가에 관하여 권면을 합니다.

 

2. 가나안 정복 모델 vs. 바벨론 유수 모델

 

구약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에 존재했던 양식을 크게 두 가지 모델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가나안 정복 모델이고, 또 하나는 바벨론 유수 모델입니다.

 

가나안 정복 모델은,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백성을 불러내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게 하시고, 그 땅에 거주하던 가나안 족속들을 멸하여 내쫓고 그 땅을 정복하라고 하신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때 모세와 여호수아를 지도자로 세워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셨고,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하나님의 통치 법령을 율법에 담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을 정복함으로써, 가나안 족속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실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으로 직접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왕국이었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았고 다른 나라들처럼 자기들에게도 왕을 달라고 구했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락하심으로써 왕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그 나라는 그들 자신이 왕이 되어, ‘여기는 우리가 주인된 나라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430년의 시절과 그 이전 아브라함과 족장들이 가나안에서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아가던 시절(11:13)이 있었지만, 이제 그들은 더 이상 거류민과 나그네가 아니었습니다. 가나안 정복자로서, 을이 아니라 갑이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시절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4대왕 르호보암이 즉위하면서 남북이 분열되어 남왕국 유다와 북왕국 이스라엘의 분열왕국 시대를 열게 됩니다(주전 930). 그리고 200년쯤 지나, 북왕국은 앗수르에게 멸망하고(주전 722), 130년을 더 버틴 남왕국 유다도 바벨론에게 멸망당하고 맙니다(주전 586). 북왕국의 열 지파는 앗수르 제국 전역으로 흩어져 역사 속에서 사라져버렸고, 남왕 유다 지파는 바벨론으로 강제 이주되어 고레스 왕의 명령으로 귀환할 때까지 70년의 바벨론 유수라는 이민 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벨론 유수 모델입니다. 예루살렘의 붕괴와 성전 파괴를 목격하고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간 망국 백성의 삶은 얼마나 비극적이고 절망적이었겠습니까? 하지만,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서 주신 바, 바벨론 유수 모델의 특징을 보여주는 말씀은 다른 뉘앙스를 전달합니다.

 

예레미야 29:4~7입니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게 한 모든 포로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 텃밭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아내를 맞이하여 자녀를 낳으며 너희 아들이 아내를 맞이하며 너희 딸이 남편을 맞아 그들로 자녀를 낳게 하여 너희가 거기에서 번성하고 줄어들지 아니하게 하라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

 

유다 백성은 그들이 붙잡혀간 땅에서 70년만 지내면 되니까, 한탄하고 절망하면서 아무 것도 하지 말고 버티라는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마치 그 땅에서 계속 살 것인양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집을 짓고 살며 텃밭도 가꾸고 열매를 먹으라고 하십니다. 또 결혼도 하고, 자식들도 시집 장가보내면서 자식을 낳아 번성하라고 하십니다. 건축, 직업, 결혼, 출산, 양육을 말씀하십니다. 이것들은 바벨론 사람들이 다 하는 일들이 아닙니까? 너희는 비록 포로로 잡혀온 거류민과 나그네지만, 본토인들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성읍)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그 성읍이 평안해야 유다 백성도 평안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쉬운 명령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바벨론은 유다의 원수가 아닙니까? 유다 백성은 자기 조국을 파괴하고 정복한 바벨론을 저주하고 그들의 멸망을 위해서 기도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너희가 포로로, 거류민과 나그네로 사는 그 성읍의 평안을 빌라고 하십니다. 말하자면, 이방 땅에 사로잡혀와 있는 너희 유다 백성의 존재가 그들에게 축복이 되어야 한다는 암시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서 가나안 족속들을 진멸하고 내쫓고 그 땅을 정복하여 주인 노릇을 하며 살던 시대와는 다른 삶의 모델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우리가 조금만 성경을 주의 깊게 읽는다면, 바벨론 유수 모델은 단지 70년에 그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지만 아직 그들의 땅이라고 주장할 수 없는 상황에서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이것은 바벨론 유수 모델입니다. 또 요셉을 따라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 가서 보낸 430년도 바벨론 유수 모델을 보여줍니다.

 

물론 그 각각의 시대를 일일이 살피면서, 하나님의 백성이 객으로, 거류민과 나그네로 살면서 어떻게 아브라함 언약대로, 땅의 모든 족속에게 복이 되는 소명을 이루고 살았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겠지만, 오늘은 다만 신약 성도들이 살아가는 양식이 가나안 정복 모델이 아니라 바벨론 유수 모델에 가깝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으로 만족하려고 합니다.

 

3. 신약 성도들의 삶의 양식

 

오늘 본문은 이 문제에 빛을 던져 줍니다. 9절에서 말씀한대로, 성도들은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며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이 아브라함 언약의 축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주어졌습니다.

 

갈라디아서 3:7절을 보면,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라고 말씀합니다. 9절과 14절은,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9)..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14).”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들은, 신자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 언약을 누리는 아브라함의 상속자들로 그 약속의 수혜자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스라엘인 교회입니다(6:16). 이렇게, 교회는 아브라함 언약을 통해서 세워진 구속의 나라가 온전하게 드러나고 펼쳐지는 유일한 실체가 되었습니다.

 

이점에서 교회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와 동일시될 수 있는 유일한 공동체입니다. 최종적인 성취가 이루어지는 날이 올 때까지 구속의 나라는 교회에서 그 최종 단계이 직전까지 이를 것입니다. 물론 완전한 성취는 재림하신 주님께서 이루십니다. 그때 우리는 가나안에 들어간 가나안 정복 모델의 실재를 보고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구약의 성도들과 동일한 믿음을 소유한 우리는, 민족과 지리적 경계를 넘어 이루어진 보편적 영적 공동체를 누린다는 점에서, 그리고 장차 올 세상을 멀리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장차 올 세상에 참여하며 영원의 문턱에서 살아간다는 점에서 더 영광스러운 은혜를 누리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는 여전히 노아 언약을 통해 세워진 일반 나라가 존속하고 있습니다.

 

아직은 땅이 있을 동안”(8:22)입니다. 신약 성도들은 이런 일반 나라 속에서 거류민과 나그네로 살아갑니다. 우리는 장차 올 세상의 은혜와 영광을 이미 맛보며 살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완전히 완성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약 성도들의 삶의 양식은 가나안 정복 모델이 아니라 가나안 유수 모델인 것입니다.

 

4. 거류민과 나그네

 

사도 베드로는 본문 11절에서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라고 표현했습니다. 질문을 드리지요. 예수님께서는 지금 온 세상의 왕으로서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시키셨고 온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는데, 성도들은 왜 이 땅에서 거류민과 나그네처럼 살아야 합니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다시 보십시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28:18).” 또 에베소서 1:21~22도 보지요.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 모든 만물을 다스리신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왜 아직도 많은 세력들이 주님의 왕권에 도전하고 반역하는 일이 허용되는 것입니까? 이것은 주님께서 지금 어떤 방식으로 다스리고 계시는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주님은 한편으로는 아브라함 언약을 통해서 구속의 나라를 세워 다스리시면서, 동시에 여전히 유효한 노아 언약을 통해 이 세상의 제도와 일반 나라를 다스리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육체를 입고 세상에 오실 때, 이 세상 나라들을 종결시키지 않으셨습니다. 그 일은 재림 때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8:22).

 

주님께서는 이미 온 세상의 왕으로 다스리시지만, 그리스도인은 장차 올 세상이 완성될 때까지는 두 나라의 시민으로서, 아브라함과 족장들 그리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유다 백성들처럼 거류민과 나그네로 살아야 합니다.

 

주님의 재림으로 이 땅이 더 이상 존속하지 않게 될 때, 노아 언약은 종결되고 하나님의 나라는 완성되며, 우리는 바라던 본향, 영원한 영광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 때까지 우리는 이 땅에서 거류민과 나그네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5. 가정과 국가에도 속한 그리스도인

 

그렇다면, 우리가 거류민과 나그네로 살아가는 영역을 생각해보겠습니다. 가장 중요한 두 영역은 가정과 국가입니다. 이 두 가지는 신자, 불신자를 막론하고 모두가 공유하는 공통의 문화 영역입니다.

 

노아 언약에서 하나님이 보전하겠다고 하신 사회 질서는 최소한 두 가지 영역을 상정합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령은 가정을 상정한 말씀입니다(9:1,7). 둘째로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라고 하신 말씀은 국가의 정치 제도와 사법 제도를 상정한 말씀입니다(9:5~6).

 

이렇게 가정과 국가는 신자, 불신자를 막론하고 모두가 공유하는 문화의 영역이고 소위 일반 나라의 두 제도입니다. 그렇다면, 가정과 국가는 이 땅에 거류민과 나그네로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까?

 

초대교회의 어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결혼이나 부부 관계가 영적이지 않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를 바로잡아야 했던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7장에서 말하기를, 결혼해서 자녀를 낳는 것은 죄 짓는 것이 아닌 잘 하는 일이라고 말씀합니다(고전 7:2,36~38). 디모데전서 5:14에서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젊은이는 시집 가서 아이를 낳고 집을 다스리고 대적에게 비방할 기회를 조금도 주지 말기를 원하노라.” 이외에도, 신약의 서신서들은 가정 안에서의 권위와 질서에 대해서 상당히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가정과 관련하여 특별한 책임을 지닙니다. 미혼 그리스도인은 믿음을 가진 사람과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어야 하며(고후 6:14), 그리스도인 부모는 주의 교양과 훈계로 자녀를 양육해야 하며(6:4), 믿는 자녀들은 주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해야 합니다(6:1~3). 그리스도인 부부는 어떻습니까? 그들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경험하는 부부관계의 은혜를 누리고 그 거룩한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5:22~33).

 

성경은 가정이 신자들만이 아니라, 모든 인류가 가지는 제도라고 해서 무시하지 않고 신자들에게는 더욱 특별한 의미와 책임을 가진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일반 나라인 국가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신약성경은 일반 나라 세속 정부의 위정자가 가진 권위를 인정합니다(13:1~7; 딤전 2:1~2; 3:1).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13~14절도 말씀합니다.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그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보낸 총독에게 하라.”

 

하나님께서는 일반 나라의 위정자에게 그 나라를 구속의 나라인 천국으로 만들라고 명령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거류민과 나그네로서 위정자에게 요구할 것은,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영위하도록 정의를 시행하는 것뿐입니다. 디모데전서 2:2입니다.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

 

로마서 13:3~4도 보지요. “다스리는 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

 

이것은 노아 언약에서 하나님께서 이미 말씀하신 일반 나라의 기본 기능입니다(9:5~6). 일반 나라를 구속의 나라와 혼동하면 안 됩니다.

 

구속의 나라를 드러내는 교회는 영원하지만, 일반 나라의 특징인 가정과 국가는 한시적입니다. 그리고 가정과 국가는 신자, 불신자를 막론하고 모두가 공유하는 공통의 문화 영역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외에도 직업의 영역, 팔고 사는 모든 매매와 상업적 행위 등의 공통 영역에 대해서 그리스도인은 이 모든 것을 무시하고 살 특권을 받지 않습니다. 이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인이 성실하게 행하는 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서신서의 몇 구절을 찾아서 확인해 보지요.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4:28).”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5:8~9).”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3:23).”

 

또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이는 외인에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살전 4:11~12).”

 

전부, 이 세상에서 거류민과 나그네로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어디에서도 하나님은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을 정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라거나 구속의 나라로 변화시키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또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끼리 모여 살고 거래하고 사업하며 살아가라는 명령도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5:10입니다.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이나 속여 빼앗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너희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구속의 나라를 표방하는 교회에서만 신실함을 드러내어서는 안 되고, 가정과 국가 같은 일반 나라에서도 동일한 신실함을 드러내고 살아야 합니다. 가령, 좋은 그리스도인은 좋은 남편이자 좋은 아버지가 되어야 할 책임이 있고, 좋은 사주이며 좋은 직원이어야 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한국교회는 오랜 실패를 경험해 왔습니다. 우리 신앙이 교회의 영역에서만 작동함으로써, 신앙은 병들거나 미숙한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성품과 무관한 신앙이 되어버리는 불균형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과 성숙]이라는 설교시리즈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모범 시민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6. 일반 나라 시민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이 주의할 점

 

그리스도인이 일반 나라에 속해 살아가면서 가지고 누리는 문화활동을 하나님의 선물로 이해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기회로 가지는 것은 바르지만, 이것은 모든 문화활동이 본질적으로 선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서 신자와 불신자를 막론하고 공유하는 모든 영역에서 살아갈 때 특별히 주의할 점이 세 가지 있습니다.

 

첫째로, 가나안 정복의 자세가 아닌 사랑과 섬김의 쟈세로 행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5:43~44).”

 

모든 문화 영역에서 정복이 아닌, 이런 섬김과 사랑의 자세로 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세상에서 다양한 지도력과 지휘권을 행사하는 자리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어떤 위치에서든지 정복자인 갑처럼 행동할 수 없습니다. 섬김과 사랑의 자세로 행해야 합니다.

 

둘째로, 이 땅에서 가정과 국가 그리고 모든 직업 활동과 기타 문화활동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비판적 자세를 견지해야 합니다. 우리가 불신자와 문화적 공통의 영역을 가진다는 것이, 하나님께서 처음에 말씀하신 뱀과 여자,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대감과 대립을 제거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에게 관대함과 너그러움을 보이면서도, 타락한 세상에서 죄가 얼마나 무섭게 모든 문화를 부패시키고 있는지도 항상 주의해서 살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씀한 것입니다(12:2).

 

셋째로 우리는 장차 올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 문화와는 언제나 일정한 거리감을 유지하면서 참여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 문화에 참여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그렇게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어질 영원한 영광에 비교하면, 이 세상의 것은 아무 것도 아니며 잠깐 있다가 없어질 것들에 불과합니다(8:18). 그러므로, 우리가 누리고 살아가는 모든 선한 것들에 대해서도, 그것을 없는 듯 있는 듯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에 온 마음을, 인생 전체를 붙잡히지 말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7:29~31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이 땅에서 거류민과 나그네일 뿐입니다. 우리도 지나가는 인생이지만, 이 세상도 우리를 대하여 지나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류민과 나그네 답게 이 세상에 대해서는 일정한 거리감을 가지고 우리는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장차 올 세상, 진정하고 영원한 본향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임을 기억하십시오.

 

매일, 그리고 아침과 밤마다, 이 세상에서 여러분에게 주어진 것과 주어지지 않은 것 때문에, 여러분의 마음이 속상하고 분요해질 때, 이것을 기억하고 또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이 땅에서 이 세상의 어떤 것에 집착하여 마음과 삶을 다 빼앗기고 살지 않아도 되는 거류민과 나그네일 뿐입니다.

 

ad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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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아름답게 /벧전2:9-12/ 김경진 목사

2023-12-19 15:43:08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회복되어야 할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20221월 두 번째 주일이 되었습니다. 지난 주일에 이어 소망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묵상하고자 합니다. 어쩌면 오늘 나눌 말씀은 우리 소망교회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지난 주일 저는 한 단어를 소개해 드렸습니다. ‘생명이라는 단어였죠. 생명이 죽어 가고 약해지는 사회 속에 살고 있는 우리가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참 생명을 가지고 생명을 살려야 하겠다는 설교였습니다. 생명을 낳고 생명을 키우고, 또 생명이 번성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서 우리 모두가 생명 사역에 동참해야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지난주에 이어 두 번째로 중요한 단어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사실은 3년 전부터 여러 번 말씀드린 단어이기도 합니다. 바로 아름다움입니다. 우리 소망교회와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회복하여서 세상에 전하고, 그 아름다움으로 세상을 또한 아름답게 만들어 가는 교회가 되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이 주제는 제가 부임했던 초기에 드린 바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술가이시다라는 제목의 말씀으로 전해 드렸죠. 그 말씀을 통하여 저는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예술가이시며, 그분의 창조 활동 안에는 예술성이 가득하다는 이야기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예술적 활동을 통해서 온 세상이 탄생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우리는 하나님처럼 예술성을 가지고 있고, 이 예술가적인 상상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해야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이와 함께 저는 예술성이 드러나는 신앙을 살기 위한 세 가지 실천 방안도 논하였습니다.

 

먼저는 예술의 원동력인 사랑을 언급하며 사랑이 없이는 예술이 일어날 수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사랑이 있고 없고의 차이로부터 기술과 예술은 구분됩니다.

 

두 번째로 예술은 보잘것없는 재료를 가지고 가치 있는 것을 만드는 행위라고 전해 드렸습니다. 가치 없어 보이는 것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게 예술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으로서 예술적 삶을 산다고 할 때는 주위에 가치 없는 것들을 통하여 가치 있는 것을 만들어 내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세 번째로 저는 조화와 균형을 이루시며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예술 법칙을 말씀드렸습니다. 진정한 예술에는 조화와 예술이 반드시 공존해야 합니다.

 

따라서 예술적인 신앙인으로서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할 때에는 우리 삶 안에도 조화가 있어야 하고 균형이 잡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 이제 3년 전 드렸던 말씀에 이어 오늘의 설교를 이어 가고자 합니다. 흐름상으로는 지난 설교와 연결되는 부분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한국교회의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를 향한 방향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항상 회자되는 중요한 표현이 있습니다. 바로 아름다움의 회복이라는 표현입니다.

 

이 주제는 종교 개혁 이후 개신교회의 방향성을 두고 이야기할 때마다 등장해 온 주제입니다. 리처드 해리슨(Richard Heries)은 책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예술에서 한탄하듯 말합니다.

 

하나님이 아름답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인데도 교회가 이것을 숨겨 왔다.”

 

교회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숨긴 채 선교와 봉사 위주의 신앙만 강조해 왔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서 교인들은 삶의 기쁨과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한 채 무미건조한 신앙생활을 이어 왔다고 지적합니다. 특별히 개신교회가 예배, 예전 형식이 가지는 아름다움마저 제거함으로써 예배 안에서조차 아름다움을 확인할 수 없게 되었다고 안타까워합니다. 그 결과 신자들이 경건하고 신앙적인 자리에 이르기보다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다고 비판하죠.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러한 진단은 사실 종교 개혁이라는 역사적 특수성과 맞닿아 있습니다. 개신교회가 태동하는 과정에서 종교 개혁이 일어났고, 당시 이 개혁은 무엇이 옳고 바른 신앙인지를 고민하면서 거행되었습니다.

 

종교 개혁자들이 신앙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일을 매우 중요한 가치로 내세우며 바른 신앙을 세워 가고자 노력했던 것입니다. 물론 이 일이 개신교회를 바르게 세우는 데 큰 공헌을 한 건 사실입니다.

 

개신교회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한편으로는 바른 신앙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항상 옳고 그름을 판별해는 일에 익숙해지고 말았습니다. 옳고 그름에 관한 생각이 다를 때마다 계속되는 분열 속에 여러 교파가 생겨나기도 했죠.

 

결국 루터 파, 영국의 성공회, 장로교회, 감리교회, 침례교회, 순복음교회와 같은 다양한 교파들이 생겨나는 형국이 되고 말았습니다. 한국만 해도 장로교회라는 교단 명을 가진 교단이 무려 150여 개 이상 된다는 조사결과가 있습니다.

 

이성주의 사회, 모더니티 사회가 개신교회를 성장시킨 배경으로 작용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시대가 도래하면서 기류는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포스트모던 시대 사람들에게는 이성보다는 감정이 우선되기 때문입니다.

 

이성과 과학적인 사고보다 개인의 느낌과 감정이 중요시되는 사회가 도래한 것이죠. 따라서 이제는 맞고 틀리다로 구분되는 사회가 아니라, 개인의 취향과 생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무엇이 맞고 틀리는지를 가늠하고 구별하는 데 익숙했던 개신교회의 정신은 포스트모던 시대와 통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교회가 시대에 뒤떨어진 정신을 가졌다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맞다, 틀리다만을 강조하는 개신교회의 정신은 자신만을 고집하는 사람들로 비쳐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코로나로 세계적인 위기가 도래한 가운데 한국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분노와 비판의 대상이 된 이유도 이러한 맥락 속에 있다고 보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맞다, 틀리다를 넘어서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는 것이죠. 맞고 틀리고만 말한다면 우리 모두는 이미 하나님 앞에서 틀린 사람이고, 죄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버려질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인간의 모든 죄를 짊어지며 십자가를 지게 하셨습니다. 그 희생을 통하여 온전한 공의를 이루시며 선을 이루셨고, 그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해 내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예술적 경지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하게 할 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예술적 경지는 잘못을 덮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틀린 것을 그대로 두시며 타협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그런 자들을 향하여서 회칠한 무덤이라고 비판하셨습니다. 틀린 것, 잘못된 것, 추한 것을 숨기거나 그 위에 아무리 아름답게 덧칠을 하더라도 속은 썩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지 않은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회칠한 무덤마저도 아름다움으로 보셨다면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지 않으셨을 겁니다. 공의로운 심판 없이 그저 인간들을 받아주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회칠한 무덤을 아름답게 보지 않으시며 죄에 대한 형벌을 반드시 이루셔야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일에 자신을 희생하시며 인간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죄로 보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예술성과는 거리가 멉니다. 죄는 죄로 판별하되 그것을 넘어서서 모든 믿는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하여 용서와 화해를 전하여 주시는 모습, 이것이 하나님의 예술성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는 자에게는 즐거움이 따르며, 그분의 장엄하심을 따라 세상을 변화시켜 갑니다.>

 

, 이러한 전제를 놓고 조금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어떤 모습입니까? 우리가 세상을 아름답게 하려면 하나님의 어떤 모습을 배워야 하겠습니까? 교회는 어떤 모습으로 회복되어야 할까요? 시편 274절 말씀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27:4)

 

다윗의 시 중 일부 말씀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향하여 한 가지 소원을 이야기합니다. 어쩌면 모든 일을 경험했던 다윗이 인생의 마지막에 요구했던 소원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며 하나님의 아름다움,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보며 안식하길 원한다고 고백합니다. 이곳에서 바로 아름다움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평생에 하나님의 공의, 하나님의 정의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걸 보고 싶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다윗의 간절한 소원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요? 여기서 사용된 아름다움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노암’(?????, noam)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아름다움이라는 의미도 가지지만 동시에 유쾌하다’, ‘즐겁다라는 뜻을 가지는데 후자의 의미로 더 많이 사용됩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이 단어를 즐겁다로 번역한 구절들이 꽤 있습니다. 잠언 3장의 말씀이 한 예입니다.

 

지혜를 얻은 자와 명철을 얻은 자는 복이 있나니 그 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의 지름길은 다 평강이니라 (3:13~17)

 

말씀 속에 등장하는 즐거운이라는 표현이 히브리어로 노암입니다. 즉 아름답다고 번역되는 이 단어는 즐겁다는 표현으로도 사용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시편 27편에 기록된 다윗의 시를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겠습니다.

 

여호와의 유쾌하심을 내가 보고 싶다, 유쾌해 하시는 하나님의 모습, 즐거워하시는 하나님의 모습, 기분 좋으신 하나님의 모습을 내가 주의 성전에서 보고 싶다.”

 

다윗에게는 즐거워하고 기분 좋아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름다움이었던 것입니다. 히브리어 노암이라는 단어의 숨은 뜻을 찾아가다 보면 시편 90편의 말씀도 조금 달리 보입니다.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내리게 하사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우리에게 견고하게 하소서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견고하게 하소서 (90:17)

 

여러분, 이 말씀 속에 아름다움이라는 단어가 숨겨 있습니다. 바로 은총이라는 단어입니다. 개역개정성경은 은총이라는 단어 앞에 각주를 달고서 뜻이 아름다움이라는 설명을 붙여 놓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주 우리 하나님의 즐거움, 유쾌함, 아름다움을 내게 내려주시어서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견고하게 해 주십시오.”라고도 해석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예술적 활동을 통하여 우리의 일이 견고해지도록 요청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즉 우리가 하는 일이, 우리 손으로 행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예술적 경지와 맞닿아지길 원한다는 고백이죠. 말씀을 살펴보면서 하나님은 아름다우시고 유쾌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예술적 활동을 즐겁게 하고 계시는 분이라는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거스틴은 그의 고백록에서 아름다우신 하나님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하나님은 아름다움의 정수시요, 태고의 아름다움과 새로운 아름다움을 두루 입고 계시며 아름다움의 본체이십니다.” 그리고는 말합니다.

 

내가 이 아름다운 주님을 늦게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마음을 흔든 건 하나님의 공의가 아니었습니다. 자비하심도 아니었습니다. 어거스틴의 마음을 흔든 건 하나님의 아름다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한 후에야 진정 그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예술가로서의 하나님, 유쾌해 하시며 즐거워하시는 모습이 하나님의 아름다우신 모습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아름다움에는 즐거움이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이 아름답게 되어야 한다는 말씀은 신앙생활이 해야만 하는 것들로 가득 채워져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율법을 짊어지듯이, 무거운 짐을 짊어지듯이 살아가는 것은 신앙의 아름다움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기쁨이 되고, 행복이 되고, 즐거운 일이 될 때에 신앙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회복됩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관련해서 살펴볼 말씀은 시편 81절입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8:1)

 

여기에서 사용된 아름답다???????(addir)입니다. ‘장엄하다’, ‘웅장하다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이름이 얼마나 웅장한지, 장대한지, 위대한지요!”라는 고백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말할 때 생각해야 할 것은 크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작은 것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땅만 바라보며 슬퍼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하늘도 움직이시고 바다도 움직이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홍해 바다에 길을 내심으로 멋진 예술성을 드러내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예술성을 말할 때 불가능은 없다는 말과 함께 사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홍해도 가르시는 분이십니다. 참으로 위대한 예술가이십니다. 어떤 일이든지 이루시며 장엄한 일을 만들어 내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말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위대하심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아름답게 한다는 말은 전능하신 하나님과 함께 불가능한 일들을 이루어 내는 것을 뜻합니다.

 

아름다움은 단지 작은 것을 만지고 다듬는 것을 뛰어넘어 웅대하고 위대한 일을 이루는 것입니다. 위대한 하나님, 놀라우신 하나님과 함께 놀라운 일을 만들어 내는 일이 우리 신앙인들이 해야 할 아름다운 사역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오늘도 우리를 구원해 내시며 그분의 덕을 널리 선포하게 하십니다.>

 

세 번째로 살펴볼 말씀은 오늘 본문인 베드로전서 29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2:9)

 

주님은 베드로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은 택함받은 족속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상관없으시다는 것이죠. 한 걸음 더 나아가 주님은 우리를 향하여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종교 개혁자들은 이 말씀을 가지고 각자가 하나님 앞에 선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왕 같은 제사장으로 세우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에 대해 성경은 우리로 제사장, 자녀로 삼아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신다고 증언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존재하는 목적,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는 목적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선포하는 데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에 사용된 아테레’(?ρετ?, arete)라는 단어는 이라는 의미로도 해석되고, 탁월함으로도 번역됩니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탁월함으로 번역되죠.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덕으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말씀을 이렇게도 해석해 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의 탁월하심과 아름다움을 선포하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탁월성, 즉 우리를 구원하시는 섬세하고 놀라우신 하나님의 덕을 널리 알리도록 부름받은 존재가 우리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탁월하심과 아름다우심을 알리기 위해서는 우리의 인격 또한 아름다워야 합니다. 이것이 베드로전서가 아테레라는 단어를 덕으로 번역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탁월하심과 장엄하심이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 믿는 자들에게도 덕이 필요합니다.

 

세상은 지금도 썩어 가며 아름다움이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덧칠을 하여서 잠시 아름다워 보일 수는 있지만 속은 썩어 가고 부패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생명은 점점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생명이 없으면 세상은 썩어갈 수밖에 없고, 생명이 없으면 죽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생명 있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생명이 있는 사람들이 건강한 사람이고 아름답습니다. 생명을 가지고 생명을 만들어 갈 때에 비로소 세상에 아름다움이 가득해집니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생명에 있습니다.

 

따라서 복음의 생명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한다는 말씀은 복음으로 새롭게 태어난 사람들이 세상을 변혁시키며 세상을 살 만한 곳으로 만들어 간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살 만한 곳으로 만들어질 때에 세상은 진정 아름답게 변할 것입니다.

 

우리 소망교회가 이 아름다움에 대하여, 또 아름다운 성품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지길 원합니다. 즐거움과 유쾌함, 긍정의 마인드, 따뜻한 말, 절제된 입술, 덕을 세우는 손과 같은 모습으로 세상을 더 따뜻하게 하고 아름답게 하는 일에 사용되기를 원합니다. 이 일에 우리 함께하십시다. 예술가이신 하나님께서도 참으로 기뻐하실 일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영광스러운 인생 /벧전2:9-10/ 조학환목사

2023-06-07 13:05:41

 

1.우리는 영광스러운 신분의 소유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님의 사람이라면 우리가 얼마나 대단하고 엄청나게 영광스럽고 존귀하고 복되고 크나큰 특권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 영광스러운 주님의 자녀로써 그에 걸 맞는 자부심을 가지고 존귀하고 자랑스럽고 당당하고 멋진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자신을 별 볼일 없고 낮고 천한 존재로 안다면 어떻게 귀하고 복되게 감사하며 기뻐하며 살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반대로 자신이 대단히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존재라는 걸 안다면 당연히 자부심을 가지고 귀하고 복되게 감사하며 기뻐하며 살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주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하고 엄청나고 영광스럽고 존귀하고 복되고 크나큰 특권을 가진 사람인 줄 알아야 하고, 정말 이걸 안다면 자부심을 가지고 존귀한 모습으로 감사하며 기뻐하며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정말 세상 누구보다도 너무나 영광스럽고 존귀하고 복된 존재들입니다. 이건 무슨 자아도취에 빠져 허세를 부리며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는 분명하고 확실하게 세상의 그 어떤 대단하고 영광스럽고 굉장한 것과도 비교자체가 안 되는 엄청나고 영광스럽고 존귀한 신분의 소유자요 그에 상응하는 엄청난 영광과 특권을 소유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우리가 누굽니까? 하나님의 자녀 아닙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물론 우주만물의 창조주로 모든 생명과 복과 은혜와 진리와 선과 의의 근원이십니다. 그래서 오로지 홀로 영원토록 영광과 존귀와 찬양만을 받으실 분이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라면 그 자체로서 얼마나 영광스럽고 존귀한 신분의 소유자냐는 것입니다.

동시에 그렇게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이면 얼마나 크나큰 특권을 가지고 있겠습니까? 안 그래요? 세상에서 왕자로 태어나 왕위를 계승받고 온갖 부귀영화를 누려도 나름대로 영광스럽고 귀하고, 그에 상응하는 영광과 특권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만왕의 왕이시오 만주의 주이신 하나님의 아들로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사람들이니 얼마나 굉장하고 대단한 영광과 특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냐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롬8:17절에서는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상속자로 하나님께 속한 그 너무나도 귀하고 복되고 영광스러운 모든 것들을 영원토록 누릴 수 있는 어마어마한 특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우리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광의 나라의 상속자자라는 것을 잊지 말고 늘 자부심 가운데 존귀한 모습으로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아감으로써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마음껏 누리며 주께 영광을 돌리는 진정 복되고 존귀하고 행복한 인생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좀 더 구체적으로 우리가 무엇이 그렇게 대단한 존재이겠습니까?

2.택하신 족속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자녀로서 정말 자부심을 가지고 감사와 기쁨 속에 존귀하고 복된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래야 하는 이유는 수없이 많지만 오늘 본문을 통해 먼저 생각 할 것은 우리는 우주만물의 창조주로 완전한 능력과 주권과 지혜와 선과 의의 하나님, 그래서 모든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영광과 기쁨과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세상에서도 대통령이나 영웅호걸이나 그 외에 돈과 권세가 많고 게다가 인물과 인품 좋은 사람이 나를 택하여 양자나 배우자로 삼아 준다면 그것도 꽤 영광이고 그로 인해 누릴 수 있는 영광과 특권도 제법 많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그렇게 세상에서 대단한 사람의 자녀이거나 그에게 택함을 받아 양자가 되거나 배우자가 되는 것도 꽤나 영광스럽고 누릴 수 있는 특권도 제법 많을 진대 하물며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로서 영원하고 완전한 영광과 생명의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 그 자녀요, 신부가 되었다는 것은 얼마나 더 굉장한 영광이겠으며, 그로 인해 누릴 수 있는 영광과 특권은 얼마나 더 대단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실은 오늘 9절에 분명히 나타나 있는데 상반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여러분, 보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너무나도 영광스러운 하나님께 택함을 받아 주님의 자녀가 되어 주님의 가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얼마나 귀하고 영광스럽고 엄청난 신분의 소유자이며 얼마나 엄청난 영광과 특권을 가진 사람들이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물론 세상의 좋은 것을 많이 소유한 것도 나름대로 영광과 특권이고 그래서 제법 많은 것도 누릴 있겠지만 그러나 그까짓 것들은 가지고 있는 동안도 뭐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거니와 우리를 끝까지 지켜주며 좋은 것도 주지 못하고 금방 사라지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적 육체적 물질적 정신적 시간적 공간적 질적으로 완전하고 영원한 영광과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누릴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마치 하나님도 천국도 영광의 나라도 모르는 사람들처럼 그까짓 세상의 별 것 아닌 것들 때문에 근심 걱정 낙심 절망 염려 불평 불만 시기 질투하거나 그런 것들에게 끌려 다니는 초라하고 볼품 없는 인생이 되지 말고, 정말 세상의 것과는 비교도 안되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오로지 하나님을 따라 믿음과 말씀과 선과 진리와 사랑과 은혜를 따라 주님과 동행할 때에 진정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평안과 위로가 넘치는 복되고 존귀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왕 같은 제사장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로서 큰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운데 존귀하고 복된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하여 우리가 또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도 역시 9절에 나타나 있는데 다시 보겠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보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으로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왕 같은 제사장이란 무슨 뜻입니까? 쉽게 말해 한편으로는 제사장으로써 세상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일을 감당하는 존재요 다른 한편으로는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의 자녀로써 모든 죄와 어둠의 세력과 거짓 영들과 상황과 환경과 근심 걱정 염려 죽음의 세력을 다스리며 완전한 승리자로 살아갈 수 있는 권세를 가진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또한 얼마나 영광스럽고 존귀한 존재이냐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제사장으로 세상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고 회개하게 하여 하나님께로 나아 갈 수 있도록 인도하는 일보다 더 귀하고 복되고 위대한 일이 어디겠습니까? 정말 안 그래요? 세상에 사람을 살리는 일, 그것도 육체적으로만 살리는 게 아니라 영혼을 살려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누리게 하는 이 일보다 귀하고 복되고 위대한 일이 뭐냔 말씀입니다. 그러면 그런 위대한 일을 하는 우리는 얼마나 존귀한 사람들이냐는 것입니다.

왕 같은 존재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세상 누구보다도 존귀한 모습으로 강력한 힘으로 세상을 다스릴 수 있는 왕 같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가장 존귀한 모습은, 가장 큰 권세는 무엇입니까? 가장 존귀한 모습은 주님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바로 주님의 자녀로 주님의 닮아 세상 것을 이기며 살아다 영광의 나라를 차지할 사람들이니 왕같은 존재인 것입니다.

또 가장 큰 권세는 무엇입니까? 물론 인류의 가장 큰 원수인 마귀 사탄을 이기는 권세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인류의 고통과 아픔과 상처와 절망이 어디서 옵니까? 우리를 추하고 더럽고 악하고 심지어 죽게 만드는 것이 뭡니까? 물론 마귀 사탄입니다. 마귀 사탄이 우리 가운데 역사하며 온갖 고통과 상처와 어둠과 절망과 더러움과 추함과 악함과 죽음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서 이런 것들을 얼마든지 이길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왕 같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대단하고 굉장하고 영광스러운 존재들이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얼마든지 마귀사탄의 역사나 어둠의 세력이나 유혹이나 핍박이나 시험이나 상황이나 환경이나 그 어떤 힘들고 어려운 것도 다 이길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약하지만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이신 주님이 힘주시고 능력주시고 도우시고 인도하시면 우리는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넉넉히 이기고도 남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혹 세상에서 가진 것이 많지 못하고 나아가 힘들고 어렵고 괴로운 일이 있더라도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더욱 주님을 의지하고 바라보며 주님과 동행할 때에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능력과 은혜와 기쁨과 평안이 넘치는 가운데 주께 영광을 돌리는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삶이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거룩한 나라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아 왕 같은 제사장으로 자부심을 가지고 감사하며 기뻐하며 존귀한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하여 한가지 더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도 역시 9절에 나타나 있는데 다시 보겠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즉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이기 때문에 거룩한 나라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니까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라면 이미 지금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며 살다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누리며 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뭡니까? 하나님의 통치권이 이루어진 곳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주님을 심령에 모셨고, 그래서 주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래서 그 통치를 받으며 살고 있지 않습니까? 바로 그래서 우리는 지금 여기서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아직은 영원한 천국의 그 영광과 기쁨과 은혜를 다 누릴 수는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과 보호하심 가운데서 지금도 얼마든지 천국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눅17:21절에서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물론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분명 완전하고 영원한 천국은 따로 있지만 지금 여기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청와대나 백악관이나 재벌이나 기타 인간적으로 대단한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모신 우리 마음속에 이미 이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가 주님안에 있으면 우리는 당연히 하나님 나라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바로 그래서 우리는 지금 여기서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며 살다가 마침내 때가 되면 영원하고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 우리는 얼마나 존귀하고 영광스럽고 복된 존재로서 얼마나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삶이 되어야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을 잊지 말고 그까짓 세상의 돈과 명예와 상황과 환경과 사람들 때문에 불평불만 시기 질투하거나 마치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사람처럼 낙심하고 근심하고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긍심과 주님이 주시는 능력과 은혜로써 세상의 모든 상황과 환경과 도전과 유혹과 시련을 이기고 생명의 능력과 은혜와 감사와 기쁨이 충만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마음껏 누리며 세상 속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복되고 존귀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거룩한 삶 (Living a Holy Life) /벧전2:9-12/ 이백민목사

2023-05-23 00:30:27

 

1968년 컬럼비아 대학(뉴욕) 사회 심리학 교수 팀이 재미있는 실험을 하였습니다. 거리에 지갑을 떨어뜨리고 그것을 집어간 사람들이 지갑 속에 있는 신분증을 주인의 주소로 얼마나 돌려주는지를 알아보는 실험이었습니다. 실험 결과 45%정도는 되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이 실험에서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실험일 중에 64일이 들어 있었는데 이 날 지갑을 집어간 사람은 한 명도 돌려보내지 않았습니다. 그 날은 암살당하였던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동생 로버트 케네디가 시르한이란 이름의 괴한에 의해 권총으로 살해당한 바로 그 날이었습니다. 로버트 케네디는 그 당시 차기 대통령 후보로 가장 유력한, 인기 절정의 인물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심리학자들은 '나쁜 소식이 사람의 행동을 부정적으로 만드는가?'하는 문제를 연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좋은 소식을 주고, 다른 사람에게는 나쁜 소식을 주어 그들의 반응을 살폈더니 확실히 좋은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더 명랑하고 협력적이며 남에게 선의를 더 나타냈다는 것입니다. 반면 나쁜 소식을 들은 사람은 침울해지고 남과 어울리거나 협력하는 행위를 기피했다고 합니다.

 

성도들은 복음 곧 좋은 소식을 들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좋은 소식을 들은 사람들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성경은 복음을 들은 성도들은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1. 거룩의 의미 The Meaning of Holiness

어떤 삶이 거룩한 삶입니까? 우리는 먼저 거룩의 의미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거룩이란 단어가 성경에서 제일 처음 나오는 곳은 창세기 23절입니다.

(2:3)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여기서 거룩하게 하셨으니는 히브리어 동사로 카다쉬인데 구별하다’, ‘분리되다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주로 하나님의 의해, 하나님을 위해 구분된 어떤 것들을 거룩하다고 표현합니다.

구분된 날: 성일

구분된 장소: 성소, 지성소

구분된 집: 성전

구분된 사람들: 성도

 

하나님께서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 사람들과 구분하여 불러내셔서 새로운 법을 주시고 이집트 뿐만 아니라 가나안 지역 등, 주위에 있는 사람들과 구분된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7:6)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28:9) 여호와께서 네게 맹세하신 대로 너를 세워 자기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니 이는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할 것임이니라

 

본문 말씀에서도 믿음의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벧전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택하신 족속은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과 구분하여 선택한 백성입니다. 그래서 거룩한 족속이 되는 것입니다. “왕 같은 제사장은 하나님께서 구분하여 세운 성직자였습니다. 거룩한 직분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리고, “거룩한 나라”, “그의 소유가 된 백성성민입니다. 이 모든 말씀들이 믿음의 사람들은 거룩하다는 것, 곧 하나님께서 구분하여 택하신 사람들이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2. 거룩한 삶 Living a Holy Life

하나님께서 이집트에서 노예의 삶을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여 불러내셔서 거룩한 백성, 곧 성민으로 삼으셨습니다.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셨지만 그들이 자동으로 거룩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다른 민족들과 구분된 삶을 살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구분된 법을 주셨습니다.

 

그들은 신분적으로는 거룩한 백성 곧 성민이 되었지만 거룩한 백성 답게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했습니다.

(28:9) 여호와께서 네게 맹세하신 대로 너를 세워 자기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니 이는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할 것임이니라

 

한 성도가 저에게 별로 맵지 않으면서 부드럽고 아삭한 고추씨를 주었습니다. 고추씨를 심고 고추가 잘 열려서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리고, 그 나무에서 씨를 받아 두었다가 올해 다시 결실을 보게 되었는데 전과는 모양도 두께도 맛도 다른 고추가 나왔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근처에 다른 종류의 고추나무가 있는데 벌들이 날아다니며 고추의 꽃가루가 서로 섞여서 잡종 고추가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도를 소금에 비유하셨습니다.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소금은 짠맛을 내어야 소금의 역할을 제대로 하는 것처럼 성도는 성도의 맛을 내어야 합니다. 그 맛은 바로 거룩한 삶입니다.

 

오래 전에 한 성도가 연말에 어떤 곳에서 밤 늦게까지 일을 하였는데 일을 하고 돈을 제대로 못 받았다고 저에게 하소연하였습니다. 다른 곳에서 일을 하면 공휴일에 밤 늦게까지 일을 하면 오히려 돈을 더 많이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을 다 끝내고 나서도 돈을 주지 않다가 나중에 늦게 받게 된 것도 화가 나는데 5시 이후부터 밤 늦게까지 한 임금은 계산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고용한 사람에게 잔업한 것에 대한 임금이 계산되지 않은 것 같다고 했더니 오히려 제대로 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일을 더 해 줄 수 있느냐고 부탁했을 때 그렇게 하겠다고 한 것은 임금을 받지 않고 일을 더 해주겠다는 말로 이해했다는 것입니다.

 

그 성도는 고용한 사람에게 전혀 그런 의미로 들리지 않았다고 그럴 줄 알았으면 일찍 마치고 집에서 쉬지 누가 공휴일 밤 늦게까지 잔금에 대한 임금도 받지 않고 일을 하겠느냐고 따졌지만 결국 계산이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분에게 돈을 떼먹는 그런 사람과 같은 삶을 살지 않고 있는 것이 손해는 보았지만 오히려 더 복된 삶이라고 위로해 주었습니다.

 

성도는 작은 이득을 위해서 세속적인 삶을 사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성도가 거룩한 삶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세상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말씀과 기도로 가능합니다.

(딤전 4: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3. 거룩의 목적 Purpose of Holiness

그렇다면, 우리는 왜 거룩한 삶 곧 구분된 삶을 살아야 합니까? 먼저는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명령이라는 것은 그 명령에 순종하지 않으면 죄를 짓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거룩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19:2)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11:44)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 길짐승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11:45)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무엇보다도 거룩한 삶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삶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다.

(벧전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2:12)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거룩한 삶이란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이요 그 삶이 선한 삶, 착한 삶입니다.

(5: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이런 삶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본이 되고 전도가 되는 것입니다.

(2: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순종의 삶이 착한 삶이요, 착한 삶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이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이 거룩한 삶입니다. 2023년 새해에는 거룩한 삶으로 사람들에게는 진리를 비추는 빛이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려 드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적 용>

* 베드로전서 2:9-12

1. 어떤 삶이 좋은 삶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타 종교에서는 거룩에 대하여 어떤 의미를 가집니까?

 

 

2. 성경적으로 거룩의 의미는 무엇입니까(9, 2:3)?

 

3. 성도는 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까(9, 12, 19:2, 11:45, 5:16, 2:47)?

 

4. 어떻게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까? 나는 거룩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성도의 신분 /벧전2:9-10/ 염두철목사

2023-02-05 01:13:06

 

여러분은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멋있다’, ‘괜찮다’, ‘그럴듯하다라고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자기도취에 빠져 자신만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현대인의 특징 중의 하나는 낮은 자존감입니다. 엘리트 그룹에 속한 사람일지라도 의외로 자신감 없는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자신의 자화상에 대한 건전한 태도를 가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습관이라는 책을 쓴 심리학자 아치발트 하트는 수년에 걸친 시험을 통하여 “95%의 사람들이 내색은 하지 않지만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고 했습니다.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몇 사람이 있었지만 다그쳐 물으면 그들 역시 그런 환상에 빠진 적이 있었음을 인정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곧잘 다른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환상에 빠집니다. 아이들은 만화 영화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하고, 청소년들은 인기 있는 연예인이나 운동선수가 되고 싶어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역할 모델을 영웅이라고 부르며 우상화하고 그렇게 되기를 열망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나치게 자신이 남보다 얼마나 더 똑똑한가, 현명한가, 정열적인가, 유능한가, 예술적인가, 카리스마적인가, 또는 사랑스러운가를 비교합니다. 심리학자들은 이것을 가리며 인상감시(impression monitering)이라고 합니다.

 

그 누군가처럼 되고 싶어 하는 것은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인간은 다른 사람처럼 되고자 하기 때문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잠재력의 4분의 3을 상실한다고 했습니다. 남을 흉내 내지 말고 자신을 사랑하고 자기 자신의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가 똑같기를 원하셨다면 모두 같은 모습으로 만드셨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똑같은 키와 몸무게에 똑같이 생긴 입과 귀를 가졌을 것이고, 체격도 같고 걸음걸이도 같았을 것입니다. 또한 유머 감각이나 취미도 같을 것이고, 음식 취향도 같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만드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각각 다르게 창조하시고 각각의 인생을 살게 하셨습니다.

 

현재 지구상에 70억의 사람들이 살고 있지만 똑같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손가락의 지문 하나까지도 다 다릅니다. 이 사실만으로도 우리 개개인의 가치는 무한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힘세고, 잘나고, 명철한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죄와 허물이 많고 부족하고 못난 자들을 대신하여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그 아들을 내어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귀하게 여기십니다. 본문에서도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기뻐하시고 귀하게 여기시는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늘은 본문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지 알아보겠습니다.

 

첫째로,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셔서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드라마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수많은 민족 가운데서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셨습을까요? 그들이 강한 민족이었기 때문에, 아니면 그들의 수가 많았기 때문일까요?

 

모세는 신명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설교에서 그 이유에 대해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7:7)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신 것은 그들에게 그럴만한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들을 택하실 때 지혜 있는 자, 능한 자, 문벌 좋은 자보다도 미련하고 약하고 천하고 멸시받는 자들을 택하시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고전 1:26-27). 이것이 하나님의 선택원리입니다.

이 원리는 우리를 선택하는데 있어서도 동일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인상에 남을만한 일을 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 우리의 신실함 때문도 아닙니다. 우리의 지적인 능력 때문도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부름 받고 구원을 얻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부족함으로 인하여 우리 자신에 대해 불만스러워하거나 미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목사이자 사상가로서 라브리 공동체를 만든 프란시스 쉐퍼는 인간은 죄악에 차 있으나 쓰레기는 아니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대단히 중요한 말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자신을 향하여 나는 쓸모없는 인간이야이라는 식의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태도는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계획해 놓으신 잠재력을 상실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꾸밈없어도 우리의 모습 그대로를 받아주시고, 우리의 이 모습을 사랑하십니다. 내가 선택해서 예수를 믿은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만세 전부터 우리를 선택하셨고 이제 불러내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수천 년 동안 나라를 잃어버리고 떠돌이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 선택받은 민족이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대단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이 선민사상이 지금까지 이스라엘을 존속하게 하였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택함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택하신 족속입니다. 이 사실만으로도 하나님 앞에 무한히 감사해야 하며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 성도들은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왕 같은 제사장이란 왕을 겸한 제사장이라는 뜻입니다. 장차 성도들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그리스도와 함께 보좌에서 만국을 통치하며, 동시에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며 예배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왕으로서의 역할은 앞으로 하늘나라에서 이루어지게 될 것이나 제사장직은 지금 우리들의 삶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누구나 직접 하나님께 나아가 자유롭게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과거 구약시대에는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었습니다. 반드시 제사장을 통해서 나아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제사장은 레위 지파에서 선택된 자들 외에는 아무나 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영원한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성전 휘장이 찢어짐으로 누구든지 성소와 지성소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특별한 신분은 사람들을 당당하게 합니다. 춘향전을 보면 이도령이 과거급제 하여 암행어사가 된 후 자기 신분을 감추고 남루한 모습으로 내려오자 사람들은 그를 푸대접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전혀 마음이 상하거나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의 옆구리에 마패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있던지 간에 우리는 장차 그리스도와 왕 노릇할 자들이요, 사람들이 두려워 떠는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나갈 수 있는 제사장들입니다. 이 같은 신분의식만 분명하다면 우리는 늘 당당하게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모두가 살기 힘들다고 아우성입니다. 어깨가 축 처져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왕 같은 제사장들입니다.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살고, 힘을 내서 웃으며 기쁘게 살아야 합니다.

 

셋째로, 우리 성도들은 거룩한 나라입니다.

거룩한이라는 말은 특별한 목적을 위해 구별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 성도는 하나님께 선택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 특별한 목적을 위해 선택됨으로 우리는 거룩한 존재가 되고,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구성원이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미국을 지상에서 가장 좋은 나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세계 각국의 많은 사람들이 아메리칸 드림(American dream)’을 꿈꾸며, 기회와 일자리가 있고 군사적으로 세계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미국에서 사는 것을 동경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미국 영주권을 얻고, 나아가 시민권을 얻어 정당한 시민의 권리를 갖고자 애씁니다. 시민권만은 못하더라도 일단 미국 영주권이라도 취득하게 되면 세계인들이 부러워하는 미국 시민으로 인정받을 것이라 기대하는 것이 보통 이민자들의 생각입니다.

 

그래서 일단 미국으로 가자는 생각이 팽배하다보니 미국은 불법 체류자들로 넘쳐납니다. 불법 체류자들은 좋은 직업을 얻지 못하고 괄시와 냉대를 받지만 언젠가 영주권이나 시민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고대하며 참고 지냅니다. 그들은 미국 시민권을 얻는 것이 가장 큰 소망이며 그것만 얻으면 천하를 얻은 것처럼 기뻐합니다.

 

신약 시대는 로마가 오늘날 미국과 같은 나라였습니다. 사람들은 로마 시민권을 얻으면 어디서나 신변 보호를 받고 특권을 누리며 당당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바울에게도 로마 시민권이 있었지만 바울은 로마 시민권보다 천국 시민권을 더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오늘날 미국 시민권보다 더 좋은 것이 천국 시민권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룩한 나라, 천국 시민이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우리의 거할 처소를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조만간 우리를 데리러 오실 것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처소는 저 하늘나라요 우리의 시민권은 천국에 있습니다. 우리는 천국 시민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마르틴 루터 킹 목사가 불만 섞인 표정으로 거리를 청소하는 흑인 청소부를 만났습니다. 그가 킹 목사에게 불평을 털어놓았습니다. “내가 백인들의 집이나 청소하고 저들이 어질러 놓은 길이나 청소하며 살아야 합니까?”

 

이 때 킹 목사가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당신은 백인들의 길 한 모퉁이를 청소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의 한 모퉁이를 쓸고 있다고 생각하시오

 

우리에게도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천국시민이라는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거룩한 나라의 일원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비록 청소를 하고 있더라도 우리는 천국시민입니다.

 

우리가 천국 시민이라면 사는 방식이 달라야 합니다. 현세만 바라보며 사는 이 세상 사람들과 같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좇아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하나님 중심주의, 하나님 제일주의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넷째로,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힘이 있거나 부유하거나 유명한 사람들의 물건들은 아무리 흔한 것이라도 귀중하며 심지어 그 값을 따질 수 없을 정도로 값이 나갑니다.

 

나폴레옹이 쓰던 칫솔은 21천 달러에 팔렸습니다. 여러분, 낡고 낡은 칫솔을 수천 달러나 주고 산다는 것을 상상이나 해 보았습니까? 히틀러가 타던 자동차는 15만 달러가 넘는 가격에 팔렸습니다. 케네디 대통령의 목재 골프채는 7725백 달러에 팔렸습니다.

그 외에도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의 물건들, 윈스턴 쳐칠이 쓰던 책상, 베토벤이 직접 쓴 악보, 한 때 에네스트 헤밍웨이가 살았던 집 등이 모두 비싼 값에 팔렸습니다.

금목걸이는 그것이 목걸이기보다는 금이기 때문에 가치를 지닙니다. 금반지는 찌그러져도 그것이 금이기 때문에 여전히 가치를 지닙니다. 우리 인간도 그와 같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모습을 지녔던 간에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존귀한 것입니다.

 

죄를 지으면 죄 값을 치러야 합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우리는 죄로 인하여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소유하기 위하여 상상할 수 없는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바로 그 값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을 주고 우리를 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내가 다 이루었다라고 하신 말씀은 우리의 죄 값을 다 지불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소유물인 우리는 얼마나 가치가 있을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비록 예수님은 은 30의 종의 몸값으로 팔리셨지만 그로 말미암아 우리의 몸값은 믿을 수 없을만한 값비싸며,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존귀해진 것입니다.

 

다섯째로,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백성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로서 누구보다 열심이 넘치고, 때로는 오만하기까지 하며, 갈릴리 바다를 걷는 등 환희의 순간을 맛보았지만 패배의 슬픔과 고통도 맛보았습니다. 그 가운데 그는 주님의 자비와 긍휼을 경험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경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동료들 앞에서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26:33)라고 공언을 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22:33)라고 말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불과 몇 시간 후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밖으로 나가 통곡하였습니다. 주님을 배반한 죄책감이 마음을 짓누르고 영혼을 괴롭힐 때마다 베드로는 괴로움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절망과 낙심 가운데서 허우적거리도록 베드로를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상심한 베드로를 찾아가셔서 그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회복시키시고, 다시 사명을 주시어 초대 교회를 이끄는 지도자로 사용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큰 은혜며 긍휼하심입니까?

 

오늘날 현대인들은 치열한 생존경쟁 속에서 바람에 찢기는 낙엽처럼 심령과 육체, 생활이 찢긴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절망과 낙심 가운데 주저앉아 있습니다. 회복의 기능은 점점 약해져가고 있습니다.

 

한 때 베드로를 밀 까불듯 했던 마귀는 지금도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 마귀는 이미 회개한 죄까지 들쳐 내어 우리를 참소하려고 하며, 무능력과 무가치함을 자책하도록 하여 우리의 존재를 무기력하게 만들려고 합니다.

마귀는 끊임없이 인간을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는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시고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시는 자비와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에 힘입고 힘을 내서 실망과 낙심과 좌절의 자리에서 일어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주저하지 말고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믿고 그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찢겼다 할지라도 주님은 우리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주님께서 베드로를 찾아가 용서하시고 회복시키신 것처럼 지금도 주님께서는 사람들을 치유하시고 회복시키시고 다시 일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절망이나 포기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우리를 비교하고 모방하려는 습관을 버리고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특별히 작성하신 청사진을 펼쳐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언제나 잊지 말고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입니다.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거룩한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백성입니다. 여러분은 누가 뭐라고 해도 하나님 앞에 고귀한 존재입니다.

알고 보면 우리는 참으로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그 대단한 성도의 신분을 알고, 성도답게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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