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의 사람 /벧전1:3-9/ 곽선희 목사
2014-11-20 13:31:29
1951년 압록강 강변까지 진격했던 유엔군에 속하는 해병대의 군인들이 중공군의 개입으로 인하여 부득이 후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시는 대로 진격전보다 후퇴하는 작전이 제일 어렵습니다.
많은 군인들이 희생되었고 포위 당하는 가운데서 저들은 쫓기고 있다가 바위틈에 은 신하고 피곤하게 지친 군인들이 잠 깐 쉬고 있었습니다. 이 비참한 모 습을 본 한 종군기자가 물었습니다.
"What can I do for you?, 내가 당 신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 까?"
그 해병대의 미군은 대답했습 니다.
"Give me tomorrow, 내일을 주십시오"라고 대답했습니다. 아주 유명한 말이 되었습니다. 필요한 것은 돈과 명예가 아닙니다. 내일 입니다. 내일! 즉 미래의 문제요 소망의 문제입니다.
"내게 내일을 주십시오. 내게 미래를 주십시오. 내게 소망을 주십시오."
이것이 그 의 외침이었습니다. 여러분 인간은 그가 아는 만큼 사는 게 아닙니다. 인간은 그가 가진 만큼 사는 것도 아닙니다. 그가 바라는 만큼 사는 것이올시다. 얼마나 아느냐 얼마나 가졌느냐에 행복이 걸려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얼마나 소망을 가지고 있느냐, 어떠한 소망을 지니고 사느 냐에 따라서 행복은 좌우되는 것이 올시다.
우리는 현대 젊은이들이 타락해 가는 것 같아서 걱정을 합니 다. 도덕적으로 사회적으로 이렇게 걷잡을 수 없이 타락하는 거 같아서 걱정을 합니다 만은 타락하기 때문 에 절망하는 게 아닙니다. 절망하 기 때문에 타락하는 것입니다. 그 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무엇이 잘 못돼서 소망이 없다는 얘기가 아닙 니다. 소망이 없기 때문에 타락하 는 것이올시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걸 생각해보세요. 가끔 이 젊은 이들이 고생하는 걸 봅니다. 요새 뭐 학교 고생하고 젊은 사람들 여러 가지로 시달리고 고생하는 걸 보지 만은 여기 나이 많은 분들은 그 젊 은이들 고생하는 거 하나도 안쓰럽 지 않습니다. 왜냐하면은 젊은이의 고생과 나이 많은 돈 많은 할머니의 생활과를 비교해보세요. 여러분 어 느 쪽입니까?
아무리 잘 살면 뭘합 니까 시간이 없는데. 여기에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러나 고생하는 젊은이, 그 젊었다는 그 하나만 가 지고도 충분히 행복합니다. 나이 든 사람은 그렇게 말하고 싶어요.
"이 사람들이 걱정할 것도 슬퍼할 것도 없다. 하루종일 찬송을 불러 도 끝이 없다. 젊은 거 그거 하나 만 가지고 충분하다"
왜요? 미래가 있잖아요. 미래가 있고 소망이 있 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겁니까. 미래가 없는 이거 가졌으면 뭘 하고 알면 뭘 합니까. 혹 건강하다면 또 그건 뭘 합니까. 가끔 어떤 분들은 제게 요새 농담 겸 진담 인사로
"목사님, 참 전보다 더 건강하게 보 입니다"
그렇게 인사를 해요. 그러 면 전 대답합니다.
"건강하게 보이 면 뭘 하나 실속이 있어야지"
내가 그럽니다. 안 그래요? 아 지금 미 래가 눈앞에 있고 카운트다운 하는 데 좀 더 건강하면 뭘 하고 안 하면 뭘 하고. 이게 아니죠. 당신이 지 닌 미래 이것이 나의 행복이거든요. 나의 나 됨을 평가하는 것입니다. 유명한 신학자 폴 틸리히라고 하는 분은 궁극적 관심,
"얼트밑 콘선 (Ultimate Concern)"
이라고 하는 책을 썼는데 제가 아주 젊었을 때 이 책을 참 탐독하게 읽었습니다. 그런데 궁극적 관심, 바로 그것이 종교라는 겁니다. 그리고 궁극적 관심에 붙잡혀서 사는 것이 신앙이 다 그랬어요. 그렇게 정의하고 있 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관심이 어디에 있습니까? 현실에 있습니 까, 물질에 있습니까, 무상한 이 생 활 속에 있습니까, 혹은 순간적 쾌 락에 있습니까? 그 사람은 속물이 요. 그건 동물 같은 인간이요. 인 간은 언제나 그 다음을 생각해요.
봄에는 여름을 생각해요, 여름에는 겨울을 생각해요, 젊어서는 늙었을 때를 생각해요. 그 다음을 생각하 고 좀 더, 좀 더 나아가서 궁극적인 일에 관심을 가집니다. 그 관심에 이끌리어서 오늘을 사는 것이 그리 스도인이다 하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 몸은 분명히 현재에 삽니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은 저 궁극에 있어야 합니다. 네 가지 궁 극을 생각합니다.
첫째는 궁극적 목적입니다. 우리에게 분명히 목적 이 있습니다. 우리 젊은 사람들 대 학에 입학하느라고 그 몇 년 동안 공부하느라고 고생을 합니다. 그저 도시락 둘씩 싸들고 다니면서 새벽 부터 밤까지 고생을 많이 합니다. 그들에게 묻기를 네 목적이 뭐냐? 대학에 입학하는 거라고, 그래 입학 을 하고 보니까 또 어떠냐? 아 이 거 별것도 아닌 거 가지고 고생했습 니다.
그렇지요 그건 목적이 될 수 가 없어요. 젊은 사람들 또 자기가 원하는 사람하고 결혼을 하려고 하 면 부모가 반대를 하는데도 불구하 고 죽기살기로 저 여자하고 결혼 못 하면 죽는다고 약을 세 번이나 먹고 별 짓 다 합니다. 아 그래 이렇게 목숨을 걸고 야단을 하지만은 또 결 혼을 하고 나니까 이혼하더라고요. 그게 아니더라는 거야. 이건 목적 이 못돼 이거는요. 이런 건 목적이 못돼요.
그러면 보세요, 그건 궁극 적인 것이 못되기 때문이요. 최종, 궁극적 목적이 뭐냐, 그걸 알고 살 아가야 되는 것이죠. 또 하나는 궁 극적 상태, 마지막엔 어떤 모습으로 변하는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게 될 것인가를 생각해야죠.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불란서 파리에 어느 수도원에 가면 그 들어가는 입 구에 큰 돌비석이 있습니다. 그 비 석의 비문은 이렇습니다.
"아프레 쓸라(Apres cela), Apres cela, Apres cela"
불어로 딱 석자 써있 습니다. 해설 없이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그런 이상한 문구올시다.
"그 다음은, 그 다음은, 그 다음은"
이 렇게 되어 있습니다. 법과대학 졸 업반에 다니는 학생이 고학을 하느 라고 애쓰다가 이제 한 학기 남았는 데 도저히 학자금을 조달할 수가 없 어서, 이 학교를 쉬게 될 거 같아서 너무 마음이 아파서 어느 신부님께 찾아가서
"저를 좀 도와주십시오. 마지막 학기인데 학비를 좀 도와주 시면 고맙겠습니다"
아 그 신부님 은
"마침 조금 전에 어떤 교인이 좋 은 일에 써 달라고 돈을 한 묶음 갔 다 놓고 갔는데 이건 분명히 자네를 위한 것일세"
돈을 세 보지도 않고 한 줌을 딱 붙들어서 그냥 주었습니 다. 이 청년이 그 답답했던 중에 소원이 갑자기 이루어지니까 당황해 가지고 오히려 걱정이 돼서
"이거 가져도 되는 겁니까?"
"아 그럼, 자 네 거야 그거는. 하나님이 자네에 게 주는 걸세"
"감사합니다, 감사합 니다"
이렇게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데
"잠깐만"
그러더래요.
"뭡니 까?",
"내가 하나 묻는데 그거 가지 고가서 뭘 하려나?"
"아 그게 무슨 말입니까 등록금을 치러야지요",
"그 다음은"
"공부해야죠",
"공부하 고"
"졸업 해야죠",
"그 다음은"
"법 관이 돼서 변호사가 돼 가지고 억울 하게 당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의로 운 변호를 하겠습니다",
"좋은 생각 이구만 그래주면 좋겠네",
"그 다음 은"
"돈 좀 벌겠습니다",
"그 다음 은"
"장가가겠습니다",
"그 다음은"
심상치 않은 질문에 그는 더 이상 대답을 못합니다. 신부는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그 다음은 내가 말하지. 자네도 죽어야되네. 그 다음은 자네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일세, 알았는가"
"알겠습 니다"
인사를 드리고 나오는데 귓가 를 계속 때리는 음성이 있습니다. Apres cela, 그 다음은, 그 다음은, 그 다음은. 견딜 수가 없이 계속 들려옵니다. 그런데 이게 전부 사 실입니다. 그 돈을 내 던지고 수도 원으로 들어가서 수도를 하고 훌륭 한 수도사가 되어서 한 평생 귀한 일을 많이 했어요. 그 비석에 그 묘비에 그가 한 평생 자기 책상 앞 에 써 놓고 좌우명으로 외우던 세 마디,
"Apres cela, Apres cela, Apres cela"
써 놓았습니다. 여러 분 묻습니다. 그 다음, 궁극적 상태 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당 황하지도 마세요, 깊이 알려고 하지 도 마세요, 슬퍼할 것도 없어요. 당 연히 이 길로 가야됩니다. 궁극적 상태, 이걸 모르고 사는 사람은 미 련한 사람이에요.
또한 궁극적 주 인이 누군가를 알아야합니다. 나도 주인이 아니고 너도 주인이 아닙니 다. 나는 지금 누구에게 끌려 살고 있습니까? 마틴 루터의 유명한 말 이 있습니다.
"기수에게 조정을 받 는 말과 같은 것이 인간이다"
여기 에 말이 있습니다. 말에 올라 탄 기수가 있습니다. 기수가 말을 채 찍질하면서 말고삐를 쥐고 자기가 원하는 데로 갑니다. 세우기도 하 고 뛰기도 합니다. 자, 나라고 하는 인간을 끌고 가는 주인이 누굽니까?
그게 돈입니까, 명예입니까, 질투심 입니까, 증오심입니까, 끝없는 욕심 입니까? 도대체 나는 누구의 노예 입니까? 궁극적 주인은 악마입니까 천사입니까? 성령입니까 아니면 씻 을 수 없는 과거의 죄악입니까? 무 엇에 끌려 그렇게 허덕이며 살아왔 습니까?
궁극적 주인이 누구냐, 그 걸 생각해야 되고요 궁극적 가치를 생각해야 됩니다. 도대체 가치 있 는 게 뭡니까. 그게 여자들 말마따 나 옷입니까 다이아몬드입니까. 정 말로 가치 있는 일이 뭡니까. 영원 히 후회하지 않을 수 있는 것, 두고 두고 기억하며 잘했다 싶은 것, 그 러한 높은 가치, 궁극적 가치, 이걸 잊어서는 안되죠. 여기에 끌려서 오늘을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 사도 베드 로는 본래 갈릴리 어부였습니다.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그가 제자가 되고, 수제자가 되었습니다. 삼년 동안 예수님과 동행합니다 만은 성 경을 읽어서 아는바와 같이 그는 계 속적으로 세속적 욕망을 버리지 못 합니다.
예수님이 큰 능력을 행할 때마다 저 능력을 가지면은 이 나라 를 통일할 수 있을 것이다, 구원할 수 있을 것이다. 저같은 희한한 능 력과 지혜라면은 분명히 이 나라를 구출할 수 있는 지도자 메시야가 될 것이라고 그렇게만 생각했습니다. 그가 신앙을 고백합니다.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 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하고 고백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천국열 쇠를 준다. 너는 베드로다"
칭찬하 십니다. 바로 그 때, 베드로의 본색 이 드러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 가를 지신다고 할 때,
"절대로 지지 마십시오,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없 습니다"
그 말 뒤에는
"유대나라의 왕이 될 분이 그 무슨 십자가와 같 은 불길한 것을 다 생각하십니까"
그거 아닙니까. 예수님께서는 단호 하게
"사탄아 너는 내 뒤고 물러가 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 다"하고 책망하셨습니다. 너는 베 드로다, 내가 천국열쇠를 네게 준다, 말씀하시고 곧 돌이켜서 사탄이라고 불렀습니다. 보세요, 베드로는 세속 적 욕망, 세속적 관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 가를 지시고 부활하신 다음에 그리 고 성령에 충만하게 될 때 비로소 그는 하늘이 열리는 경험을 합니다. 이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됩니다. 영 원한 가치, 궁극적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산 소망"
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산 소망, 리빙 호프(Living Hope), 산 소망, 엘피다 죠산, 이 한 마디는 베 드로의 신학의 핵심입니다. 베드로 전서·후서 베드로의 신앙의 극치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산 소망! 오늘 본문에서 그는 소망의 근거를 어디에 두느냐 하면 예수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에 둡니다.
부활신앙, 십 자가에 죽어지는 거 같은데 아니요 부활하시더라 이거요. 또 우리도 부활할 것이다. 이제 그의 생각은 영원한 세계로, 궁극적 관심으로 생 각의 방향이 확 돌아갑니다. 그래 서 그는 베드로가 됩니다. 그리고 로마에서 거꾸로 못 박혀 죽는 것, 그는 사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재창조의 능력, 위대 한 능력을 그는 눈앞에 보면서 산 소망 그 속에 살았습니다.
여러분 소망과 소원은 다릅니다. 우리 인 간들이 소원을 합니다 만은 그거는 내 마음이고요 소망은 하나님이 약 속해 주신 바를 말합니다. 하나님 의 약속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 믿음으로 그 약속 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 받아들이는 순간 그 약속이, 그 산 소망이 우리 자신들의 마음과 생각 을 지배하게 됩니다. 우리 인격을 완전히 붙들고 나갑니다. 이 사람 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유엔 사무총 장을 지낸 더그 함마슐드 총장을 아 실 것입니다.
그가 쓴 에세이에 이 런 말이 있습니다. 재미있는 비유 입니다.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콜롬부스가 탄 배, 그가 타고 지금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 배 안의 선원중의 하나는 이 배 안에 있으면서 큰 걱정이요. 걱정 과 근심으로 가득 찼어요. 그건 뭐 냐하면, 자기 고향에서 자기는 어떤 집에 구두 수선하는 집에 직공으로 있었는데 그 구두 수선하는 주인이 나이 많아요.
그래서 자기는 이 배 를 타고 미국까지 왔다가 돈을 좀 벌어 가지고 돌아가서 그 주인의 구 두수선 가게를 인수받으려고, 인계 받으려는 것이 그게 소망입니다. 그런데 걱정이 풍랑이 일어날 때마 다 아이고 이거 죽으면 어떡하나, 좀 시간이 늦을 때마다 아 이거 늦 으면 못 가는데 이거 어떡하나, 또 내가 가지전에 그 노인 죽으면 어떡 하나, 이걸로 걱정이 가득하다 이 말이에요. 자 생각해보세요.
신대 륙을 발견하는, 신대륙 아메리카를 발견하는 이 귀한, 위대한 역사에 동참한 사람이 말입니다 그래 그까 짓 가게 하나에 메여 가지고, 지금 집에 못 돌아갈까 봐 걱정하는 이 불쌍한 청년을 생각해보세요. 콜롬 부스는, 콜롬부스가 가진 소망은 저 앞에 있는 것이고 이 청년이 가진 소망은 저 과거에 있는, 뒤에 있는 것이었어요. 여러분 우리가 이 시 점에서 우리는 어디로 향하는 것입 니까? 이렇게 밝은 소망을 가지고 살게 될 때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세 가지로 말씀합니 다. 구체적으로, 이제 여러 가지 시 험을 당한다 그랬어요. 소망을 가 진 사람이 시험을 당합니다. 왜요? 그 소망이 계속 순수한 소망으로 지 켜가기 위해서, 이걸 알아야 합니다.
이 소망을 가진 사람에게는 시련이 있어요. 당연한 것이요. 그 시련 중에 더 확실한 소망의 사람으로 살 아갈 수 있기 때문이죠. 그리고 이 시련은 잠깐 지나가는 것이요. 오 늘 본문에도, 잠깐 여러 가지 시험 을 당하지 않을 수 없다. 이걸 당 연사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참 소 망을 위하여, 이 소망의 사람들은 시련을 겪습니다. 그래서 고린도후 서 4장 17절에 사도 바울도 말합니 다.
"잠시 받는 환난에 경한 것이 중한 영광을 이룬다"
잠시 받는 환 난의 경한 것, 이것이 바울의 말씀 입니다. 이 시련, 이 잠깐 있는 이 시련, 있을 수밖에 없고 그 위대한 소망 앞에서 생각할 때 이 시련은 잠깐 지나가는 거예요. 또한
"믿음 의 시련이"하는 말씀입니다.
믿음 의 시련이, 믿음을 순수하게 하고, 믿음을 온전하게 하고, 믿음을 강하 게 하고 이 시련이, 시련의 초점은 믿음이요. 금보다 귀한 믿음, 이 믿 음을 주시기 위하여 이 시련은 있는 것이다.
그런고로 이 소망에 사는 사람은 저 앞을 바라보면서 기뻐하 고 즐거워한다. 그렇습니다. 벅찬 기쁨으로 앞에 있는 시련을 쉽게 넉 넉하게 이겨 가는 것입니다. 요새 보신 분도 계시겠습니다 만은 널리 알려진 아주 슈퍼 베스트셀러 책이 하나 있습니다.
"튜즈데이즈 위드 모리(Tuesdays with Morrie)"라고 하는 책입니다. 모리와 함께한 화 요일, 이렇게 번역이 됐습니다. 이 책은 모리 슈워츠(Morrie Schwartz)라고 하는 대학 교수님인 데 브랜다이스 대학의 교수님으로써 지금 연세가 높은 분인데 루게릭이 라고 하는 특별한 불치병에 걸렸습 니다.
이 병은 근육이 자꾸만 굳어 지는 겁니다. 이걸 풀 제간이 없습 니다. 근육이 자꾸자꾸만 굳어져 가지고 마지막엔 심장이 멎는 거예 요. 이런 병에 걸려서 병원에 계시 는데, 여기에 미치라고 하는 학생 하나가 화요일마다 찾아옵니다, 교 수님을 위로하기 위해서. 화요일마 다 찾아와서 대화를 합니다.
그 대 화하는 중에서 참 귀한 말씀들을 많 이 들었는데 이거 마지막, 마지막 가는 교수와 젊은 학생과의 대화입 니다. 이것을 그 학생이 편집을 해 서 책으로 낸 겁니다. 아주 생생한 생감이 있는 생동감이 있는 그런 대 화올시다. 인생의 궁극을 같이 이 야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의 말 중에 이런 말이 마지막에 나옵니다.
"어떻게 죽어야 할 지를 알면 어떻 게 살아야 할 지도 알 수 있느니라"
어떻게 죽어야 할 것인가를 알게되 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알 수 있다 이 말이요. 여러분 어떤 모양으로 죽을까, 나는 어떤 모습으 로 생을 끝내나, 그것을 똑바로 알 고 살면 내가 오늘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는 자연히 쉽게 풀려지는 것이올시다.
이걸 잊지 말아야 합 니다. 참 소망은 여기에 있습니다. 소망을 하늘에 두고 사는 사람은 땅 의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미래에 두고 사는 사람은 현재의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영원한 것을 추구하 고 사는 사람은 세상적인 것도 다 얻을 수 있습니다. 불변한 진리를 통달하고 거기에 이끌려 사는 사람 은 변화무쌍한 세상에서도 세상을 달관할 수 있습니다. 희망과 소원 은 결코 소망이 아닙니다.
궁극적 인 소망! 확실한 약속! 그것이 크 게 확실하게 내 마음에 들어 올 때, 내가 당한 조그마한 현실, 그거 별 로 문제될 게 없습니다. 모든 문제 의 근본은 소망의 문제입니다. 산 소망, 이 산 소망의 포로가 되어서 살아갈 때 그 앞에 영광과 승리가 있는 것이올시다.
다시 산 소망으로 /벧전1:1-9/ 김병삼목사
2018-11-07 03:21:56
1.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 지어다.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5.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7.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10.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12.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알린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 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 설교 시작 영상
설교 전 베드로의 일생을 영상화 해본다. 예를 들어 밤새도록 고기를 잡던 어부 베드로 그러나 그의 노하우 와 노력과 모든 열정으로 고기를 잡으려 하였으나 빈 그물 뿐, 허탈감과 무력감에 빠져있는 베드로의 모습을 조명하고 그때 주님이 말씀하신다. “깊은 곳에 가서 오른쪽에 그물을 던지라”는 말씀을 듣고 다시 힘을 내어 “말씀에 의지하여 던져보겠나이다”순종의 결과는 그물이 찢어질 만큼 얻는 수확, 그에게 기쁨이 찾아오고 다시 소망이 생기는 모습을 조명하며 설교의 본문으로 들어간다.
나그네들에게 주시는 말씀
오늘 말씀을 시작하며 제일 먼저 들어오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나그네’입니다.
지금 사도 베드로는 나그네들에게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나그네들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2절 말씀,
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 지어다.
나그네들이 정말 가지기 어려운 것 ‘은혜와 평강’이 더욱 많기를 바라는 마음이죠. 이 나그네 들은 어떤 사람인가요?
답을 먼저 이야기 한다면 ‘산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
우리가 요즘 쓰는 말 가운데 ‘강을 건넌 사람’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목숨을 걸고 북한을 넘어온 사람들이죠.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널 때 그들은 목숨을 걸고 넘어온 사람들입니다.
왜 그들은 목숨을 걸고 강을 건너 왔을까요? 강을 건너면 소망이 있기 때문이죠.
성경의 역사를 보면 ‘하비루’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마도 어원을 잘 따져 들어가 보면 ‘히브리인’이라는 말의 모태가 될 것입니다.
이들은 고대 이집트에서 홍해를 건너고 요단강을 건넜던 사람들입니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간다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고대 메소포타미아 갈대아 우르에서 유브라데스라는 큰 강을 건넌 사람들입니다.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성을 공략할 때 만났던 한 여인이 있습니다. 정탐꾼들을 숨겨줬던 기생 라합이죠.
사실 기생이라는 말 보다는 몸을 파는 여인 ‘창녀’라고 말해야 더 어울릴 법한 사람입니다.
그 여인은 온 민족이 멸망하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소망을 가졌습니다.
단지 그 이유로,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 성을 점령하고 가나안 땅을 차지한 후 라합은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족보에 당당히 이름을 올립니다.
그런데 성경 어디에서고 그녀가 기생이었던 배경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단지 그녀가 소망을 가지고 결단을 한 이후에 어떻게 바뀌었는지에 관심을 둘 따름입니다.
이것이 성경이고, 우리가 믿는 신앙이고, 우리가 산 소망을 가지고 살 수 있는 이유입니다.
오늘부터 우리가 베드로전서를 묵상하며 공부합니다.
2천 년 기독교의 역사를 보면 지금까지 존재하는 것 자체가 불가사이한 일입니다.
만일 ‘소망’이 없었다면, 우리가 믿는 복음이 참 소망이 아니었다면, 지금 우리는 이 자리에 크리스천 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A. D. 64년은 유명한 네로황제의 박해가 있던 해입니다. 그해 7월 로마의 중심가에 커다란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네로 황제가 시를 쓰기 위해 상상력을 발휘하려 방화를 했다고 합니다. 문제는 그 화제로 인해 성난 군중들의 항의가 시작되었고 희생양이 필요했던 네로는 방화의 주인공으로 크리스천들을 지목하게 됩니다.
줄줄이 잡혀온 크리스천들은 로마의 원형극장에 끌려가 여러 가지 형태로 참수를 당하게 됩니다. 그로 인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로마를 떠나 소아시아로 피신을 갑니다. 그리고 그 곳 바위 굴속에 들어가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수년 전 교인들과 함께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돌며 둘러보다 들렸던 카파도기아의 한 지하 도시가 있었습니다.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터키에는 여러 곳에 지하 도시가 있는 데 그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곳이 [데린쿠유]입니다. 기원전에 히타이트 인들이 살았던 흔적이 공존하는 그 곳은 박해를 피해 들어온 기독교인들로 인해 거대한 지하 도시가 건설 됩니다.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으나 대략 2-4만 명 정도가 살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현재 지하 20층 100m 아래까지 발굴이 되었지만 8층 까지만 개방되어 있습니다. 이곳에는 침실, 화장실, 주방 등의 주거시설은 물론 교회와 신학교 등의 시설이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습니다.
건강한 남자들만 동굴에서 나와 먹거리를 구하려 다녔으며 어린이와 여자들은 동굴에서 나오지 않고 살았다고 합니다.
지하로 내려가는 느낌은 아래로 빨려들어 가는 듯 했지만 답답한 것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완벽하게 환기 시설을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살 수 없는 환경에서 초기 크리스천들은 소망을 가지고 완벽하게 살아갔다는 증거입니다.
베드로전서가 쓰이고 사람들에게 전달되던 상황을 조금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들이 동굴 속에서, 그리고 다른 소아시아지역에 흩어져 살면서 느꼈을 감정, 그리고 삶의 상황들을 상상하며 베드로전서의 말씀을 접하게 된다면 좀 더 생생하게 말씀 속으로 들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1절과 2절의 인사를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여기에 분명하게 드러나는 신앙의 ‘역설’이 있습니다.
이들은 흩어진 나그네였지만,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었습니다.
가장 불확실한 인생을 사는 것 같지만 가장 확신에 찬 삶을 살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아니, 베드로는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을 보면서 그렇게 사는 것이 진정한 크리스천의 삶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죠.
환난과 핍박이 하나님의 택하심을 희석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산 소망’을 이야기 할 수 있다!
베드로 전서가 쓰이던 때는 초대 교인들이 많은 박해와 어려움을 경험 하던 때입니다.
절망적인 상황이기에 더욱 ‘소망’이 필요했던 때, 그리고 그 소망을 붙들고 승리한 우리 믿음의 선배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가지는 소망이 무엇인지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죠. 오늘 가장 중요한 단어를 하나 꼽으라면 ‘산 소망’입니다.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유쾌한 사순절’이라는 제목의 설교문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사순절이라는 말은 영어의 ‘lent’인데 ‘봄’이란 뜻의 고대 앵글로 색슨어 ‘lang’에서부터 유래했다고 합니다. 대개 이러한 언어는 계절과 관계가 있습니다. ‘사순’이 지나면 봄이 옵니다. 모든 것이 얼어서 죽어 있던 것이 새롭게 생명력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입니다.
부활절의 의미 역시 동일합니다.
부활의 참된 의미는 죽음의 땅에서 생명이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순절 문화는 카톨릭 국가에서 ‘카니발’이라는 문화와 연관 지어 많이 거론됩니다. 사순절이 시작되기 전 사흘 혹은 일주일 동안 ‘카니발’(carnival) 또는 ‘사육제(謝肉祭)’라는 이름으로 신나게 먹고 마시고 노는 절기를 지키고 있습니다.
사순절이 되면 고기를 먹지 못하고 절제해야하기 때문에 ‘고기’를 뜻하는 ‘carne’와 ‘없애다 혹은 멀리하다’라는 뜻을 가진 ‘revare’라는 말이 합쳐진 ‘고기여 안녕!’이라는 의미의 축제를 가지는 것이죠.
참 재미있죠?
제대로 슬퍼하기 위해 제대로 먹고 마시며 놀겠다는 말입니다.
슬퍼하기 위해 논다!
전통적인 기독교에서는 사순절 기간 동안 금욕하며 경건하게 지냅니다. 일체의 오락, 결혼식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유쾌한 사순절’이란 어떤 의미일까요?
사순절 전에 신나게 노는 이유는 슬픔이 다가올 것을 알기 때문에 제대로 슬퍼하기 위해서 논다는 것이죠.
사순절이 되면 우리가 아는 것이 있습니다. 부활절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죠.
그러면 슬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에게 다가올 기쁨의 부활절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제대로 슬퍼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소망’이라는 말과 또 계속해서 나오게 될 ‘고난’이라는 말을 연결해 봅시다.
소망과 고난이라는 말이 참 어울리지 않는데, 고난 가운데서 소망을 가지는 이유는 이미 결과를 알기 때문입니다.
유쾌하게 고난의 시간을 지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아는 것은 모든 고난을 이기신 주님을 알고 믿고 소망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것은 마지못해 겪으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시나요?
막다른 골목에서 어쩔 수 없이 지신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이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그 일을 통해 죽음 권세를 이기실 하나님 아버지를 굳게 믿었고, 그 일을 통해 구원을 이루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전서의 주제를 한 마디로 이야기한다면 ‘소망’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소망이 없다면 결코 이길 수 없는 일들에 대하여, 베드로서 기자는 소망을 가지고 이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한다면 지금 우리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 무엇이냐가 문제가 아니라 ‘소망의 관점’을 가지고 보느냐는 것이죠. 말씀을 시작하면서 소망을 가지고 절망을 이긴 한 사람의 이야기를 소개 합니다.
곽용 목사라는 분의 ‘유쾌한 사순절’이라는 설교에서 인용한 이야기 인데, 좋은 예화라 소개합니다.
2002년 미국의 신경과 의사들이 모이는 신경과학회 학술대회장 자리에서 의사도 아니고 의학자도 아닌 피아니스트 리온 플라이셔(Leon Fleisher)가 공로상을 받았습니다. 피아니스트가 신경과학회가 주는 공로상을 받는 일은 결코 흔한 일이 아닙니다.
그 사정은 이렇습니다. 플라이셔는 여덟 살 때 연주회를 가졌던 천재적인 피아니스트였습니다. 그는 1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천재 피아니스트란 말을 들었고, 열여섯 살의 나이에 뉴욕 필과 협연을 했으며, 열일곱 살에 카네기 홀에서 독주회를 가졌을 정도로 앞날이 창창했습니다. 30대 초반 젊은 나이에 짙은 구름이 드리워졌습니다. 오른손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는 결국 서른여섯 살에 음악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날짜를 한 세기 전으로 돌려보겠습니다. 난해하기로 유명한 분석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에게는 모차르트가 다시 살아온 것 같다는 찬사를 들었던 피아니스트 파울 비트겐슈타인이란 형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분석철학의 천재요 다른 한 사람은 음악의 천재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천재의 생이란 것이 순탄할 수만은 없는 법인지, 그는 1차 대전에 참전했다 부상당해 오른손을 잘라내야 했습니다. 오른손이 없는 피아니스트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피아니스트로서의 그의 생은 끝장났던 것입니다. 그 자신뿐 아니라 세상이 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는 10여 년 동안 방황했지만 운명에 굴복하지 않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는 아는 작곡가들을 찾아다니며 자신을 위해서 왼손만으로 칠 수 있는 피아노곡을 작곡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의 청에 응해 왼손만으로 연주할 수 있는 피아노곡을 작곡해준 작곡가는 모리스 라벨이었습니다.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 D장조가 바로 그 곡입니다.
이 연주가 성공하자 그 이후로 많은 작곡가들이 그를 위해 왼손만을 위한 곡들을 만들어주었고 두 손이 다 있는 연주가들도 왼손만으로 그 곡들을 연주하게 됐습니다.
한 손만으로 연주하는 피아노곡이 무려 1천곡이나 된다고 합니다. 이 모든 일들이 파울 비트겐슈타인에게서 비롯된 일입니다.
다시 플라이셔 얘기로 돌아오겠습니다. 그도 비트겐슈타인처럼 “두 손으로 연주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라는 결론을 내리고 다시 음악세계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지휘자로 컴백했고 나중에는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피아노 교수로 활동했습니다.
그리고 발전된 의학의 도움을 받아 1995년에는 드디어 오른손으로도 피아노를 칠 수 있게 됐습니다. 그래서 낸 음반이 <두 손 Two Hands>이란 제목의 음반입니다. 그는 열심히 연주활동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신경계통의 병을 세상에 올바르게 인식시키는 홍보대사 역할도 열심히 했습니다. 신경과학회 공로상은 이 활동 때문에 받았던 것입니다.
비트겐슈타인과 플라이셔는 모두 피아니스트에게 생명과 같은 손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정작 피아니스트의 진정한 생명은 손이 아님을 보여줬습니다. 피아니스트의 진정한 생명은 가슴 속에 들어 있는 음악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그것만이 음악인의 진정한 생명이었던 것입니다. 이 생명 덕분에 그들은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생명이 살아 있는 한 그들은 피아노 앞에 앉지 못해도 피아니스트였습니다.
다시 한 번 3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산 소망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을 그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찬송할 수 있습니다. 산 소망의 이유는 ‘그의 많으신 긍휼’ (his great mercy)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그 일이 우리에게 ‘산 소망’ (living hope)이 되었습니다.
소망이 일회적이거나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에게 생생하게 살아 역사하는 그런 소망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소망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아니 소망을 붙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전체를 묵상하다 보면 기쁨과 감사, 기대와 축복의 메시지가 많은 것 같습니다. 환난가운데서 고백한 것이기에 더욱 값지고 진주처럼 빛나는 것 같습니다.
그의 많으신 긍휼이 우리들의 인생을 바꾸어 놓습니다. 상황이 우리를 좌지우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우리 인생을 바꾸어 놓기 때문에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산 소망’에 대한 믿음의 고백은 베드로가 경험했던 한 사건과 관계가 있지 않을까요?
그가 예수님을 처음 만나던 때가 바로 소망을 잃었던 때입니다. 밤새도록 그물질을 했으나 아무것도 잡은 것이 없을 때, 주님이 다가오셨습니다.
‘깊은 곳에 그물을 던져라’ 그 명령이 그의 삶에 소망이 되었습니다. 어두운 새벽 소망되시는 주님을 만나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라갔던 그의 인생 경험이 있었습니다.
3절 말씀의 ‘산 소망’이라는 말 앞에는 ‘거듭나게 하사’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거듭남이 무엇인가요? 그리고 옛 것이란 무엇인가요?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22-24에서 유혹의 욕심을 따르는 것에서부터 벗어나는 것이라고 말하죠. 거듭남이란 성령으로 심령이 새롭게 되는 것이고 그 다음은 성령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묵상 나눔을 가졌던 한 권사님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김병동 권사 나눔)
어느 날 교회에서 아주 친했던 권사님이 말기 암에 걸렸다는 소식이 내게 들렸다. 나 또한 그 소식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전화를 걸어 보았으나 받지 않았다. 몇 번 시도 끝에 통화 할 수 있어 나도 절망 가운데 있었던 시간을 이야기 해 주었다.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은 병이 아니라 그 병으로 말미암아 소망을 잃어버리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고 그리고 그에게 주님이 내게 주신 말씀 세 가지를 적어 보내 주었다. 이것이 그 내용이다.
“권사님! 3가지 마음가짐과 3가지 말씀을 기억하십시오.(병보다도 더 무서운 세 놈이 찾아올 거예요)
1.실망이 찾아 올 겁니다. 절망하지 말고 이 병을 통해 하나님이 내게 하시고자 하는 뜻을 묻고 답을 구하십시오(렘29:11~13)
2.두려움이 찾아 올 겁니다. 그러나 두려움을 물리쳐야 해요.(요일4:18) 이것을 반드시 사랑으로 승화시켜야 합니다.
3.기쁨이 사라지려고 할 거예요. (살전5:16~18) 먼저 감사를 찾고 기쁨을 회복하면 됩니다.
권사님은 암이라는 중병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이런 것을 회복하는 싸움을 시작한 것입니다.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것이라 믿어요. 당신을 믿음의 형제로써 사랑하고 또 존경합니다. 당신 곁에는 많은 기도의 동역자들이 있습니다. 잊지 마세요. 당신을 위해 기도하는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이 있고, 만나의 기도팀이 있습니다. 우린 반드시 승리 할 것입니다.”
몇 년이 지난 그는 이제 그 어려운 항암치료 과정을 모두 이겨내고 주님과 함께 행복한 인생을 새롭게 살아가고 있다. 그가 이길 수 있었던 것은 말씀을 통해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라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기에 은혜가 은혜로 암 흔적 대신에 남게 된 것이다. 이제 그와 나에게 준 이 은혜의 흔적이 그리스도의 거룩한 삶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산 소망으로서의 작은 불씨가 되어 줄 것이다.
산 소망을 가진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 소망을 가진 이들이 왜 그리 담대할까요? 어떻게 그렇게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을까요? 6절 말씀을 보세요.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 도다
이 땅위에 나그네로 살아가지만 산 소망을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어떠한가요?
아마 베드로전서 강해를 하는 내내 비슷한 말씀들을 많이 접하게 될 텐데, 고난과 시험가운데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6절에서는 특별히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날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어 성경에는 이 부분을 ‘all kinds of trials’이라 쓰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만날 수 있는 온갖 종류의 시험입니다.
참 이해하기 힘든 것이 무엇이냐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이 땅위에 나그네의 삶을 살게 하셨는데 왜 고난을 만나게 하시느냐는 것입니다.
언젠가 박관태 선교사님이 말씀을 전하며,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대학교수와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말씀에 의지해 몽골에 선교사로 갔을 때 ‘꽃 길’이 열리리라고 생각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생각할 수 없는 온갖 시험을 만나며 깨닫게 된 것이 있는데, 그 온갖 시험 가운데 가장 친밀하게 하나님을 느끼고 연합할 수 있는 길로 인도하셨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기대대로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을 붙드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났더니 ‘근심’을 내려놓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그렇게 무겁게 생각하던 것들이 무거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고 말입니다.
마태복음 11장 30절에서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 .”라는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베드로는 이 부분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온갖 종류의 시험을 만나는 것은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근심이 됩니다. 하지만 ‘잠깐 근심’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보호하기 때문에 오히려 ‘크게 기뻐합니다.’ (greatly rejoice) -
왜냐하면 ‘확실한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7절 말씀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않습니까?
-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 (7절)
사도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인들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습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롬8:18)
아마도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다 이런 생각과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결국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고난을 이기지 못하는 것,
우리 앞에 다가오는 시련에 연단되지 못하고 포기하는 이유는 바로 이 믿음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 말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시험 자체’를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험이 기뻐서 일부러 시험을 찾아다닌다는 것이 아닙니다. 시험은 모두에게 힘든 것입니다. 그런데 그 힘든 시험을 이길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는 것은 그 시험을 이길 수 있는 길을 우리들에게 반드시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기는 시험을 ‘구원의 과정’속에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4-5절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여기에 시험 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는 산 소망을 가진 사람들의 근본적인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5.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첫째는,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가며 하늘에 속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는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는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시험을 당해고 고난을 당하는 다는 것이 무슨 말일까요?
‘시험’이란 우리의 욕망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욕망이 없다면 시험도 없을 것입니다. ‘고난’이란 우리가 피하고 싶어 하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죠. 무섭거나 피해야 하는 일들이 없다면 고난도 없을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우리가 구하는 것들이 세상적인 것일 때, 욕망의 시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고난당할 때 힘들어 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썩어질 것이고, 영원하지 않은 것이라는 것을 안다면 그렇게 안달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잘 포장하고 있지만, 직장에서 잘되고, 돈을 잘 벌고, 자식들이 성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 자체가 얼마나 거짓되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하는 문제들을 가지고 안달하고, 그 기대들이 채워지지 않으면 힘들어 하는 것이죠.
이 말씀을 가지고 묵상한 문지윤 권사는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우선 땅의 것이 충족되어야 하늘의 것을 바랄 수 있다는 생각이 내게 있음을 본다. 이 땅을 살아가지만, 그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의 법을 따르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 같다. 이 땅에서 좀 더 자유 하여야 하나님 나라에 속할 것 같다.”
아들이 5개월간 준비하던 영재고 시험 발표가 있기 전날이었다. 남편은 내일 발표이니 붙어도 파티를 하고, 떨어져도 파티를 하자고 했다. 남편이 신앙을 가지면서 더 삶에 여유로운 모습을 가진 것을 보게 되어 사실 놀랐고 감사했다. 준비한 기간도 짧았고, 시험 한 달 전부터 몸이 많이 아파 컨디션을 잘 조절하지 못했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어 혹시 떨어질지 모른다고 생각은 했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2차 시험을 치른 영재고에서 아들을 인터뷰하러 직접 중학교에 오는 일이 있어 내심 기대도 하고 있었다.
결과는 실패였다.
발표된 날 우리는 멋진 중식당에서 파티를 하였고, 딸은 하나님이 오빠에게 다른 더 좋은 길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오빠를 위로해 주었다. 우리는 아들에게 그 동안 수고했고, 또 다른 길을 예비하심을 기대하자고 말해 주었다. 아들은 짧은 기간 준비하였지만, 면접관이 학교에 보러 오는 영광을 누린 것으로 감사했고, 앞으로 나아갈 것을 좀 생각하는 모습이다.
합격을 위해 달려왔지만, 그 보다 더 큰 것에 가치를 두었기에 떨어진 것에 연연해하지 않고 오히려 또 다른 길을 기대하고 온 가족이 격려해주는 시간은, 오직 합격을 목표로 수년간 준비해 오다 불합격되어 아이도 엄마도 정신과 치료를 받는다고 하는 경우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집에서 부담주지 않는 분위기이니 아들도 빨리 회복하는 것 같고, 집안 분위기는 이상하게도 발표 전보다 오히려 더 좋은 것 같아 감사했다.
이 땅을 살아가면서 최선을 다하되 그 가치는 하늘에 두어야 함을 보았고 경험하였고, 감사하게 된 기회였다.
이것이 솔직한 고백이 아닐까요?
우리의 가치가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이 좌우 된다는 것 말입니다.
둘째는, 사실은 조금 싱거운 이야기입니다. 이미 우리가 보증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5절.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아마도 공감하실 텐데, TV를 시청하면서 가장 맥 빠지는 것 중에 하나가 운동경기를 재방송으로 보는 것입니다. 아무리 무시무시한 상대라 해도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보니까.
“. . .받았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고 있습니다.
“보호하심을 받았다”는 말의 헬라어 “프루루메누스”는 본래 군사적인 용어로 쓰였습니다. 즉, 이 세상에서 순례자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을 공격하는 사단을 막아주시며 보호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믿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쓰인 “프루레오”는 수동태 현재분사입니다.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계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죠.
우리는 기도하면서 ‘믿습니다!’라는 말을 합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우리의 입술로 하는 기도가 아니라 ‘믿을 만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믿을 만한 사람, 믿음이 있는 사람, 계속적인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사람이 바로 이 땅에 사는 나그네입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이 있는 나그네’라는 것이죠. 나그네가 가야할 곳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정처 없는 나그네’요, 그가 가야할 곳이 분명하다면 ‘순례자’입니다.
산 소망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8-9절 말씀이 중요합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 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말씀을 보니 세 가지로 정리가 됩니다.
1. 보지 못하지만 사랑합니다.
2. 보지 못하지만 믿습니다.
3. 그래서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가득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결과가 있습니다.
결국 영혼이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며 로마서 5장 3-5절의 말씀이 오버랩 됩니다.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베드로는 당시 고난당하는 성도들을 향해 쓰고 있지만, 사도바울은 자신이 고난을 당하며 깨닫게 된 신앙의 진리를 전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다시 3절로 돌아갑니다. 산 소망이 있기 때문에 찬송하며 살아갑니다.
모든 종류의 고난이 찾아오지만 잠시 근심할 뿐 찬송하며 이 길을 갑니다.
어떤 의사 선생님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자신은 진료를 하면서 약으로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나으리라는 소망을 가지고 병을 고친다고 말입니다.
그 분의 경험에 의하면 불치병 환자가 병명을 모르고 올 때는 혼자 걸어서 오는데, 병명을 알고 나면 힘이 없어 혼자 걸어서 나가지 못한다고,
반면에 불치병이 걸렸다고 생각하고 혼자 걸어오지 못하던 환자가, 자신의 병이 별것 아니라는 것을 아는 순간 걸어 나갈 뿐 아니라 며칠이 걸리지 않아 병이 낫는 것도 보았다고 말입니다.
산 소망을 붙들면 우리 나그네 길을 잘 갈 수 있습니다.
장차 우리에게 올 소망을 붙들면 온갖 고난 가운데서도 찬송할 수 있습니다.
이 고난 가운데 믿음으로 승리한 사람들을 베드로는 ‘금보다 더 귀하다’고 하죠. 7절 말씀.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세상은 금이 귀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연단을 이겨낸 그리스도인들은 그 금보다 더 귀한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없어질 금이 아니라, 영원한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연단’이 무엇인가요?
계속해서 두드려 맞는 것입니다. 세상의 권력과 싸우고, 세상의 악과 싸우고, 세상의 가치관과 싸우며 계속해서 두드려 맞아 너덜너덜 해진 사람들입니다.
마지막 심판 때가 되면 금은 사라져버리지만, 이 모든 연단을 이긴 성도들은 영광된 나라에 참예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다시 한 번 8-9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 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산 소망을 가진 사람들의 승리의 노래입니다. 기쁨의 찬가입니다.
지금 베드로가 편지를 쓰고 있는 대상들 중에 대부분이 예수님을 보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랑으로 인해 모든 고난을 견뎌낸 자들입니다.
우리에게 이 믿음이 없다면 이 세상에서 치열하게 살 수 없습니다.
고난 가운데 기뻐할 수 없습니다.
세상을 향해 담대할 수 없습니다.
admin
참 신앙과 거짓 신앙 (2)- 거룩한 감정이 있습니까? /벧전1:8/ 김형익 목사
2021-05-11 04:31:32
1. 거룩한 감정을 잃어버린 교회
우리 시대 기독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외부의 적이 아닙니다. 제가 보기에는 오늘날 기독교회가 현저히 약화된 근저에는 확신이 없는 교인들이 교회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현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안다고 말하지만 그리스도를 아는 자가 적습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 고백하지만 진실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이 적은 것입니다. 이러다 보니 참된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 조차도 무색해졌습니다. 물론 그 주요 책임은 교회의 영적 지도자들에게 있고 그들이 오래도록 강단에서 물 탄 복음을 전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교회의 현실에서 그리스도께 위로를 받거나 그리스도를 즐거워하는 사람들을 찾아보기가 어려워진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의 구절을 경험적으로 공감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적어진 것이지요. 말하자면 거룩한 감정을 잃어버린 교회와 교인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하였던 것이 하나님인가, 아니면 나의 이기적인 추구인가를 돌아볼 때,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이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당신의 말씀인 성경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성경을 면밀히 살펴 말하기를, 참된 신앙은 그 무엇보다도 바로 이 ‘거룩한 감정(holy affections)’ 안에 있다고 했습니다. 만일 그의 말이 성경적으로 옳다면 거룩한 감정은 매우 중요한, 우리 신앙의 진위를 가늠하는 개념일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거룩한 감정’이라는 개념을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2. 감정(emotion)과 이성(reason)의 대립을 넘어서
신앙 감정이라고 할 때 우리가 흔히 말하는 감정(emotion)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이 설교에서 신앙 감정 혹은 거룩한 감정이라고 말할 때에는 그냥 감정(emotion)과는 다른 의미로 사용한다는 것을 먼저 말씀 드립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 감정적이라고 말할 때 이것은 그가 이성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생각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감정과 이성, 가슴과 머리를 대립되는 기능으로 이해하는데 기인합니다. 이성적인 사람은 감정적이지 않고, 감정적인 사람은 이성적이지 않다는 생각이 우리의 언어 습관과 개념 속에 어느 정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기도 합니다. 감정적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성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구분은 신앙의 영역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되는데, 어떤 사람들이나 그룹들은 매우 감정적인 신앙을 보여주는가 하면 또 다른 사람이나 그룹들은 너무나 이성에 치우친 신앙 생활을 합니다. 전자는 지나친 열광주의나 광신주의로 흐르기 쉽고, 후자는 냉담한 지성주의로 가기 쉬운 것입니다.
하지만 참 신앙의 본질은 그 어느 한 면에서 상당한 열정이나 지식을 나타낸다고 하는 데서 찾아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이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여기서 우리는 참 신앙의 본질을 보게 됩니다. 초대 교회의 성도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그 모진 핍박(사도는 이것을 ‘불시험’이라고 표현함으로써 그 혹독함을 보여줍니다, 벧전 4:12)
속에서도 지켜 낼 수 있었던 힘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거룩한 감정이었습니다. 그것은 한 때 펄펄 끓다가 한 순간에 식어버리는 감정(emotion)이 아니었습니다. 또 그것은 성경공부를 많이 해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가르칠 수 있는 실력만도 아니었습니다. 이 불시험을 통해서 그들은 그들의 믿음이 참된 믿음이라는 것을 입증했는데 그 참된 믿음은 바로 그들의 거룩한 감정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라는 표현 속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께 대한 사랑 그리고 그 사랑으로부터 흘러나오는 형언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인 것입니다. 즉 참된 신앙은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과 그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기쁜 감정에 있는 것입니다.
3. 신앙 감정(religious affection)
우리는 지정의(知情意)로 사람을 구분하는데 매우 익숙합니다. 하지만 조나단 에드워즈가 ‘신앙 감정’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을 때 그가 생각한 것은 이런 구분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구분으로는 참된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드러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의 본질은 어떻게 드러날 수 있는가를 생각해볼 때, 그것은 지성을 동반한 감정이라는 개념에서 드러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는 인간에게 두 가지 기능이 있다고 이해했습니다. 하나는 단순히 사물을 이해하고 지각하고 사유할 수 있는 기능이고 다른 하나는 사물을 지각하고 분별할 뿐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든지 지각하고 분별하는 사물들에 대해 끌리고 기울어지게 되는 기능입니다. 끌리고 기울어지는 것을 호감이라고 할 수 있고, 반대의 경우는 비호감, 반감 또는 불쾌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전적으로 지각하고 분별하는 것을 통해서 온다는 것입니다.
무분별하게 그냥 확 끌린다 하는 것은 여기서 에드워즈가 말하는 신앙 감정(religious affection)이 아니라 그냥 격정 혹은 열정(passion)일 뿐입니다. 보통 격정이나 열정 앞에서는 지성과 분별은 힘을 잃게 되고 통제력도 상실되고 맙니다. 참된 신앙의 본질은 이런 격정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이 신앙 감정이 하나님께 대하여 좋아함과 끌림의 정도가 강한 것이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사랑한다는 말로 표현된 것입니다. 이런 신앙 감정에 속하는 표현들은 사랑 외에도, 갈망, 소망, 기쁨, 감사, 만족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 반대편에는 미움, 두려움, 분노, 슬픔 같은 반감, 비호감 내지는 불쾌함이 있습니다.
이런 신앙 감정은 다른 말로는 성향(inclination)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성향은 지성과 관계없는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 자아가 판단하고자 하는 대상이나 교리나 사상에 대한 이해에 기초하는 것입니다. 성향은 반드시 의지를 움직이고 행동을 만들어냅니다. 그래서 신앙의 본질이 거룩한 감정 즉 이런 성향에 있다고 볼 때, 사람의 삶의 다양한 모든 영역들 중에서 신앙은 미지근함이 불가능한 영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언제나 둘 사이에 머뭇머뭇 거리는 신앙, 말로는 믿는다 혹은 믿고 싶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참된 신앙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우리가 대충 건성으로 하나님을 믿고 섬길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보는 기독교회의 모습은 대충 건성으로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로 넘쳐나지 않습니까?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말씀에 비추어 볼 때 판단은 명확합니다.
조금도 모호하지 않습니다. 참된 신앙이 아닌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이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만일 우리 안에서 하나님을 위한 열심,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우리의 의지를 움직이고 행위를 유발함이 없다면 거기에 참된 신앙이 있는지를 의심해야 마땅합니다. 참된 신앙이 거룩한 감정에 있다고 말할 때,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 일하고자 하는 성향과 의지가 왕성하게 발동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4. 빛과 열
저는 지난 수년 동안 목회를 하면서 이런 류의 질문을 간접적으로 적잖이 들어보았습니다. “왜 말씀을 듣는데 내가 변하지 않는가?”하는 질문입니다. 한 마디로 답하면 말씀을 들을 때 내 신앙 감정이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경에 대한 지식이 많고 바르게 복음을 이해하고 있을 뿐 아니라 성경을 가르칠 수 있을만한 실력을 갖춘 사람들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이런 지식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에게 신앙 감정이 그 지식에 의해서 움직여지고 영향을 받지 않았다면 그 지식은 결코 참된 신앙이 될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의 신앙 감정이 말씀에 의해서 영향을 받기까지 그 사람은 절대로 변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설교를 들으면서 늘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리는데도 전혀 변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사람이 설교를 통해서 영향을 받은 것은 거룩한 감정이 아니라 그냥 ‘감정(emotion)’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감동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거룩함과 탁월하심이거나 그리스도의 아름다움 자체가 아닌 것입니다. 얼마든지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나중에 더 깊이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지만, 그가 영향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계시의 내용을 통해서 깨달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진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선하심, 하나님의 무한하신 지혜와 능력,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사랑하심, 그리스도의 낮아지심과 고난과 죽으심 그리고 그분의 아름다우심을 듣고 교리적으로 이해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그저 일반적인 이해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런 지식은 사람을 영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신앙은 빛과 열을 둘 다 가지는 것입니다.
빛은 진리의 빛을 말하고 열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감정을 말합니다. 이 둘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사랑할 수 없습니다. 복음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그리스도를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진리의 빛을 받아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거룩하심과 아름다우심을 더 깊이 깨달아 알게 되고 그 지식이 그 사람 안에 있는 거룩한 감정에 영향을 미치게 되며 이것이 한 인격을 움직여 자기가 사랑하는 하나님을 위하여 살게 하는 것입니다
. 여러분의 기질적 성향에 따라서 신앙이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참된 신앙은 우리를 온전하고 새롭게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빚어가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복음에 대해서 충분하게 배우고 계십니까? 그리고 여러분이 배우는 그 지식 때문에 여러분의 신앙 감정은 영향을 지속적으로 받고 있습니까?
5. 거룩한 감정의 다양한 표현들
성경이 신앙을 설명할 때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그러나 신앙 감정과 연결된 용어들을 통해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 맥체인표에 따라 읽은 이사야 말씀입니다. “네 시대에 평안함이 있으며 구원과 지혜와 지식이 풍성할 것이니 여호와를 경외함이 네 보배니라(사 33:6).”
성경을 통틀어 참된 신앙을 표현하기 위해서 가장 많이 사용된 말이 ‘하나님 경외함’일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바로 거룩한 감정입니다. 이것은 그저 한 순간 뜨거워졌다 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위에서 거룩한 감정이 영향을 받고 세워지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이 예수님을 보지 못하였지만 사랑한다는 것도 거룩한 감정으로 신앙의 본질을 서술하는 한 방식입니다. 이 거룩한 감정은 매우 강렬해서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한다”고 표현되는 것입니다. 또 시편 말씀 중에서 우리가 기억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시 42:1~2).” 여기에는 갈망이라는 거룩한 감정이 있습니다. 또 주님께서 참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의 특징으로 팔복을 묘사하신 것을 주목해 보는 것은 아주 유익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 5:3~10).”
여기에 표현된 것들은 모두가 거룩한 감정들이거나 거룩한 감정이 만들어내는 결과들입니다.
심령의 가난함, 애통함, 온유함,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함, 긍휼히 여김, 마음의 청결함 등은 다 거룩한 감정입니다. 그리고 화평하게 함과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것은 거룩한 감정에 있는 참된 신앙이 밖으로 입증되는 경우를 보여줍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의 신앙도 그렇습니다. 그들은 불시험을 통과하면서 그 참됨이 입증되었고 그 참된 신앙은 바로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그리고 그 사랑이 만들어낸 기쁨이라는 거룩한 감정에 있었다는 말입니다. 참된 신앙의 본질을 결정하는 거룩한 감정은 다양하게 표현된다는 것을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살아있고 정열적인 사랑은 필연적으로 다양한 신앙 감정들을 드러내는데 그 중에는 죄에 대한 강렬한 미움과 혐오, 죄에 대한 두려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감사, 은혜롭게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느낄 때 얻게 되는 만족과 기쁨,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을 때 느끼는 슬픔, 장차 하나님을 누릴 것을 기대할 때 생기는 즐거운 소망,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강한 열정 등이 있다(조나단 에드워즈 전집 제1권, 신앙감정론, p.165).”
6. 하나님께서 거룩한 감정에 영향을 주시기 위해서 성경을 사용하신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목적을 이렇게 명시했습니다.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딤전 1:5).”
설교를 통해서 참된 교리를 가르치는 목적은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거룩한 감정은 말씀을 깨달을 때 감동을 받고 불러일으켜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바로 그날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셔서 구약의 말씀들을 풀어주신 것을 압니다.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 24:27).” 이것은 놀라운 성경공부였습니다. 그 성경공부를 통해서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두 제자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눅 24:32).” 이것은 그냥 감정이 아니라, 거룩한 감정이 움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 앎으로써 그들의 감정이 뜨거워졌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기서 그들이 단순히 말씀을 들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말씀이 가르치는 바를 제대로 깨달아 알게 되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 둘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여기에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사랑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되 참된 믿음을 가지고 믿으려 한다면 여러분은 말씀을 사랑하셔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 읽고 공부하고 심지어 암송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가르쳐지는 교회의 중요성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성경은 바른 교훈이 아닌 다른 교훈, 바른 복음이 아니라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것은 참된 신앙을 만들어내는 대신 도리어 교만한 변론만을 만들어낼 뿐이라는 경고로 가득합니다.
여러분으로 하여금 교회를 결정하게 하는 것은 사랑스러운 분위기도, 인격이 훌륭한 사람들도, 멋진 연주를 하는 밴드도, 병을 치유하고 초자연적인 은사들의 나타남도, 그리고 안락하고 편리한 시설이어서는 안됩니다.
이런 요소들은 마귀도 얼마든지 모방하여 만들어낼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오직 당신의 바른 복음과 말씀을 통해서만 사람의 거룩한 감정을 움직이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른 복음을 전하는 교회에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아무 것도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그 말씀을 열심을 품고 청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7. 거룩한 감정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
찬송가 60장 2절 가사입니다. “이 눈에 단잠 오기 전 고요히 주를 그리며 구주의 품에 안기니 한없이 평안합니다.” 또 484장 1절 가사입니다. “내 맘의 주여 소망되소서. 주 없이 모든 일 헛되어라. 밤에나 낮에나 주님 생각, 잘 때나 깰 때 함께 하소서.”
또 85장은 중세의 성 버나드가 지은 찬송시입니다.
구주를 생각만 해도 내 맘이 좋거든
주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하랴
주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거룩한 감정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참된 신앙에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아는 지식이 있으며,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무한하고 위대하신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더 알기 원하고 더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바로 이것을 오늘 본문에서 말했습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이 거룩한 감정 안에 참된 신앙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이런 거룩한 감정이 있습니까?
있다면 그것으로 인해서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더 많이, 더 거룩하게, 더 강력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열심을 품고 주님을 섬기는 자리로 나아가십시오. 만일 이런 거룩한 감정이 여러분 안에서 발견되지 않는다면 낙심에 이르기 전에 여러분은 합당한 은혜, 참된 은혜를 자비하신 하나님께 구하셔야만 합니다. 구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는 은혜를 구할 뿐 아니라, 매일 말씀을 읽고 말씀을 가르치는 모든 자리에 나아와 그 말씀을 청종하십시오.
이런 일이 없이 교회에서 세월을 보내는 것은 여러분의 영혼에 위험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여러분 안에 은혜를 증진할 수 있는 모든 합당한 수단들을 사용하셔야 합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고 있는 모든 죄악들을 물리치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여러분의 거룩한 감정을 움직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산 소망의 공동체 /벧전1:3-7/ 이동원목사
2014-12-01 20:38:35
주후 64년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잊을수 없는 해였습니다. AD64년 7월 19일 로마에 대 화재 사건이 일어납니다. 로마 거의 전역에 영향을 줄만큼 큰 화재였습니다.
화재가 진압된후 여기 저기 널려진 폐허의 잿더미가 로마 시민들의 마음을 황폐하게 할 무렵 로마시에는 한 악성 류머가 소리 없이 퍼져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당시의 로마제국의 황제 네로가 술에 취해 자신의 시흥을 돋구기 위해 로마시를 방화한 것이라는 소문이었습니다. 네로는 이 소문을 잠잠케 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희생양을 찾기 시작합니다.
그 희생양으로 등장한 것이 그리스도인들이었던 것입니다. 곧 이어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체포 명령이 내려지게 되었고 여기저기서 피비린내나는 처형이 이어지게 됩니다.
살아남은 그리스도인들은 카타콤의 동굴로 숨어들기 시작했고 적지않은 수의 그리스도인들은 로마를 떠나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해외 여러 지역 특히 소아시아 지역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학자들 사이에 약간의 이견은 존재하지만 베드로전서는 이때를 전후해서 쓰여진 서신이었습니다.
베드로전서 4:12-13은 이런 시대적 배경을 잘 전달해주는 말씀으로 보여집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제 베드로전서 1:1의 편지 서두의 수신자가 누구인지 주목해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곧 신앙의 박해로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를 격려하기 위해 이 편지가 쓰여지게 된 것입니다.
이 편지의 주제는 희망입니다. 이런 시대의 어둠속에서도 우리가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고난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희망의 공동체가 되어야 하며 그리하여 절망속에 있는 이웃들에게 우리가 희망이 되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 편지를 쓰던 1세기와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21세기는 분명 다른 시대인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의 희망을 위협하는 전 세계적인 테러, 나라와 나라 사이의 전쟁과 대립, 민족 내부의 이데올로기와 세대간의 갈등, 그리고 기독교에 대한 세상의 조롱과 박해가 세계 도처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는 이때에 희망은 여전히 우리가 갈구하는 목표가 아닐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여전히 이런 절망적인 세상에서 희망을 갖고 살아갈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1. 부활하신 주님의 함께하심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우리가 주님을 만난 사건은 희망의 시작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찾아오신 그 주님은 인생 최대의 절망인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 부활하신 주님을 내 인생의 주님으로 영접한 순간 우리는 새 생명을 선물로 받게 되고 그 결과로 우리는 새로운 소망 곧 살아있는 소망을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3절의 증언입니다.
그가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 이유-우리를 향한 그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의 긍휼히 여기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소망없이 살고 있는 인생을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의 사랑-그 사랑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게 하시고 우리를 찾아오게 하셨다 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는 순간 우리는 거듭납니다. 새롭게 태어납니다.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체적으로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절망을 안고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 우리는 새 소망을 안고 태어나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 소망이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경험하는 거짓되거나 일시적인 소망과 차별화하기 위해 이 소망을 산 소망이라고 말합니다. 이 소망은 진지한 소망이며 영원한 소망 곧 죽을수 없는 살아있는 소망인 것입니다.
영국의 목공소에서 일하던 가난한 청년이 전도를 받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그에게 인생의 소망과 의욕이 넘쳐나게 되었습니다. 열심히 한 10년 일하고 난후 그는 드디어 가구 제조업을 경영하는 사장이 되었습니다.
이제 돈도 명예도 갖게 되었습니다. 어느날 그가 자기 공장 뒷편에 있는 언덕에 올라 산책하다가 넓직한 바위를 발견하고 걸터앉아 아름다운 마을의 정경을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그는 가슴에 밀려오는 행복감을 느끼며 그가 이런 작은 행복을 누리고 있음은 자기가 걸터앉은 바위가 자신을 편안히 받쳐주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순간 그에게 자신의 인생을 떠 받쳐주는 바위와 같은 존재가 바로 예수님이신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행복의 근거는 돈도 아니고 명예도 아니고 부활하신 주님 살아계셔서 자신을 인도하시는 예수님 이심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는 종이 한 장을 꺼내 시를 쓰기 시작합니다. 이 시가 바로 찬송가 539장(Edward Mote의 시)입니다.
“이 몸의 소망 무엔가 우리 주 예수 뿐일세. 우리 주 예수 밖에는 믿을이 아주 없도다. 굳건한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이 찬송시는 춘원 이광수 선생이 번역한 것으로 전해 집니다. 이 가사를 본 순간 그에게 감동이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과 저도 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셨습니까? 그 주님이 우리를 만나주시고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우리는 흔들릴수 없는 소망의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로 교회의 한 지체가 되어 이 땅을 살게 하신 이유-이 소망을 이웃들과 나누기 위해서임을 아시는지요?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벧전3:15에서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이런 소망을 나누고 살아가기로 결심한다면 부활하신 주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시지 않았습니까? “내가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약속)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태28:20)고. 그렇습니다. 이 부활하신 주님의 함께함-이것만이 우리의 가장 진지한 희망의 이유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하늘나라 기업의 예비하심 때문입니다.
우리가 소망을 갖고 살아야 할 또 하나의 이유는 주께서 주의 백성들을 위하여 하늘 나라의 기업을 예비하신 때문입니다.
4절을 읽어보십시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하늘 나라의 소망이야말로 우리의 가장 확실한 보증된 기업이라는 것입니다.
오늘처럼 격동하는 시대에서 기업활동을 하시는 분들은 얼마나 우리의 기업들이 유동적이고 불확실한 기초위에서 흔들리고 있는가를 실감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인간이 가지는 모든 세속적인 희망이 다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한 세기전만 해도 무너질수 없다고 생각했던 기업들이 어느 한 순간 흔들리고 무너지고 역사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천국 기업만은 썩지 않고 더럽히지 않고 쇠할수 없는 기업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바람이 흔들어 댈수 없는 하늘에 예비된 기업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이런 천국 소망을 갖고 살고 계십니까? 아니면 아직도 썩을 것이고 더럽혀질 것이고 사라져 버릴 기업에 미련을 두고 살고 계신 것은 아니지요?
그렇다고 제가 오늘 기업활동을 하시는 분들의 의욕을 꺽으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열심히 하십시오. 그러나 여러분의 궁극적인 소망만은 거기에 두셔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저는 오히려 소망을 이 땅이 두지 아니하신 분들이 기업을 하신다면 훨씬 자유롭게 욕심없이 섬김의 정신으로 기업을 하실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찬송가 539장을 작사한 에드워드 모트라는 분이 그랬습니다. 그가 천국 소망을 가지고 욕심없이 가구업을 하다보니 기업은 점점 더 융성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천국 소망을 이웃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가지고 전하고 싶은 열망 때문에 그의 나이 55세 되던해 그의 기업과 재산을 정리한후 교회당을 짓고 침례교 목사가 되어 복음을 훌 타임으로 전하는 일에 20년 이상 헌신하다가 그의 나이 77세 되던 해에 그의 평소의 소원처럼 교회 강단에서 설교하다가 부르심을 받아 그가 소망하던 천국으로 떠났습니다.
이 찬송가의 3-4절을 기억하십니까? “세상에 믿던 모든 것 끊어질 그날 되어도 구주의 언약 믿사와 내 소망 더욱 크리라. (4절)바라던 천국 올라가 하나님 전에 뵈올 때 구주의 의를 힘입어 어엿이 앞에 서리라. 굳건한 반석이시니 그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변하고 모든 것이 사라져도 변할수 없고 사라질수 없는 천국의 소망-이 소망이 있음으로 우리는 고난의 시대를 의연하게 살아갈수 있습니다.
3. 하나님의 능력의 보호하심 때문입니다.
우리가 소망을 갖고 살아야 할 또 하나의 이유는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보호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에게 주어진 궁극적인 소망은 천국 소망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천국을 보장해 주신 다음 이 세상에서는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든지 그대로 버려 두시는 분일까요?
아닙니다. 그는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우리의 구원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지켜지도록 우리의 믿음과 구원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본문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두가지 면에서 특히 성도들에게 함께 하심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첫째는 우리의 구원이 유지되도록 그의 능력으로 도와주시겠다는 것이고, 둘째는 우리가 시험이나 시련속에서도 잘 버티도록 그의 능력으로 지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한번 얻은 구원이 언제라도 다시 잃어 버려질수 있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얼마나 불안정한 것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영생의 선물을 언약하시면서 아무도 그 무엇도 우리에게서 이 선물을 빼앗지 못할 것이라고 보장해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한10:28)고 하셨습니다. 본문 5절에서 베드로 사도는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느니라”고 하십니다. 이 약속을 신학에서는 “영원한 안전(eternal security) 혹은 성도의 견인”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은 또한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가 경험하는 온갖 시험과 시련을 버티도록 도우십니다. 그러나 왜 하나님이 우리가 이런 시험을 당하지 않도록 미리 막아주시지 않느냐고 묻지는 마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오늘의 본문은 우리의 인생의 장에 이런 시련이 허용되는 이유가 인격적인 연단을 위해서라고 베드로는 말합니다. 마치 불을 통과한 금이 아름답게 제련되는 것처럼 시련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의 인격을 빚어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가 좌절하지 않도록 우리를 능력으로 지키시겠다는 것입니다. 본문 7절의 말씀입니다.“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바로 이런 하나님의 목적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시험과 시련속에서도 기뻐할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 6절을 읽어보십시오.“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저는 수년전 어느 교회에서 전도집회를 인도하다가 한 교우의 간증을 감동스럽게 들은일이 있습니다. 나이가 꽤 되신 분인데 담임목사님은 그분을 작은 예수라고 소개하셨습니다. 이분은 자수성가하여 성공하신 분이셨습니다.
과거 우리나라가 정말 가난했던 시절 어떤 작은 공장이 있는 회사 하급직원으로 출발하신 분이었습니다. 불과 50만원 정도의 월급으로 출발하셨는데 열악한 직장의 환경속에서도 그분은 아내의 기도 때문에 버틸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분은 자신의 아내를 통해 하나님을 믿게 되었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배웠다고 했습니다. 한번은 직장에 취직한지 얼마되지 않아 도난사건이 있었는데 혐의가 자기에게 쏠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새로 들어왔고 청소를 도맡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부장되시는 분에게 문초를 받은 후 당장에 그만 두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날 점심에 아내가 싸준 도시락을 열었는데 아내는 작은 쪽지를 도시락에 집어넣었다고 합니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고 합니다.
나는 당신이 다른 사람을 억울하게 의심하기보다 차라리 의심받는 사람이 된 것이 감사하다고--. 당신의 억울함은 하나님이 벗겨 주실 것이고--.
나는 당신이 당신을 의심하는 사람들을 비판하기보다 축복하는 사람이 되기를 기도하고 있다는 것과 그리고 당신이 억울함을 느끼는 그런 어두운 직장이기에 나는 당신이 그런 직장에서 빛이 되시기를 기도하고 있다는 말과 함께 마지막에 베드로전서 2:19이하의 말씀을 적었다고 합니다.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참으면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오.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2:19-21)
그날 저녁 그는 회사를 청소하고 나오면서 자기를 문초한 부장의 책상 위에 메모를 남겼다고 합니다. “저는 부장님을 원망치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 일로 서로를 의심해야 하는 오늘의 세상이 된 것을 원망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이런 세상은 정직한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는 채찍으로 오늘의 교훈을 삼겠습니다. 부장님을 축복합니다.”
얼마후에 그의 누명은 벗겨졌고 그는 회사 모든 이들의 신뢰속에 진급을 계속하다가 회사 대표이사되신 분이 자손이 없었는데 은퇴하며 그 회사를 이분에게 넘겼다고 합니다.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이 도처에서 핍박을 받으면서 당시의 세상을 이긴 비밀이 바로 이런 하나님의 능력 때문이었습니다. 21세기의 세상도 동일한 소망, 동일한 능력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까?
<설교 적용 질문>
1. 사도 베드로가 이 편지를 쓴 상황과 우리 시대의 성도들이 처한 유사성은 무엇입니까?
2. 사도 베드로가 역경 속에서도 당시의 성도들에게 소망을 가지라고 할 수 있었던 이유들은 무엇입니까?
3. 5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은 어떤 의미로 성도들에게 역사한다는 것일까요?
4. 본문에서 구체적으로 시련 속에 기뻐한다고 고백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입니까?
5. 오늘 우리가 처한 시련과 각자의 소망을 말해 보십시오.
지금은 희망을 가져야 할 때 /벧전1:3-7/ 이동원목사
2014-12-01 20:46:33
한때 스페인 영에 속해 있던 리 스본 도시, 지금은 포르투갈의 수도 가 되어 있죠? 이 항구 도시에 해안 마지막 끝나는 곳에 큰 암석 바위가 하나 있었다고 합니다. 이 바위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쓰여져 있었다고 합니다. 이제는 끝입니다.
이 넘어 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제는 끝입니다. 이 넘어 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There is nothing behind. 이 넘어 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1492년에 한 사나이가 이 항 구에서 자그마한 배에 오르면서 제 일당의 무리들과 배를 타면서 이렇 게 외쳤습니다.
이 바위에 새겨진 글은 사실이 아닙니다. 여기는 끝이 아닙니다. 이 너머에는 위대한 희망 의 세계가 있습니다. 이 사나이 이 름이 크리스토퍼스 콜롬버스 라는 사람이었습니다.
15세기 말에 유럽 남부는 두 차례 걸친 커다란 지진을 겪었고 콜레라와 페스트가 휩쓸고 다니면서 유럽 사람들은 깊은 절망 속에 주저 앉았습니다.
그러나 이 때 절망을 거부하고 희망의 항해를 출범 시킨 사람이 바로 이 콜럼버스 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미 대륙을 신대륙을 발견할 수가 있 었습니다.
그보다 휠씬 오래 전에 A.D 64년 7월 여름 어느날 저 로마 의 중심가에는 커다란 화재가 발생 했습니다. 잘 알려진 대로 저 유명 한 네로 황제가 저지른 방화였습니 다. 그는 불타는 로마의 도시를 바 라보면서 그는 광적으로 춤을 추면 서 시를 지어 노래 했습니다.
그러 나 이어서 성난 로마 군중들의 항의 가 시작되자 그에게는 희생양이 필 요했고 크리스챤들이 방화의 주인공 이라고 소문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따라서 줄줄이 그리스도인들이 잡혀 가 로마의 원형 경기장으로 끌려가 기 시작했습니다.
더러는 십자형에 서 참수를 당하기도 했고 더러는 야 생 동물의 밥으로 그들의 몸뚱이가 길길이 찢기어 죽임을 당했습니다. 대부분의 크리스챤들은 로마를 떠났 습니다.
그리고 소아시아를 찾아갔 습니다. 소아시아의 그 암열, 그 바 위 굴속에 들어가 피신해서 그들은 그들의 새로운 삶을 도모했습니다.
그러나 깊은 굴속으로 피신했던 그 들은 다시는 아마도 이 세상 구경을 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던 것입니 다. 바로 이때 흩어진 이 크리스챤 가운데 가장 지도자로 추앙을 받았 던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는 그들 에게 편지 한 장을 씁니다.
그것이 바로 베드로 전서 입니다. 베드로 전서 1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 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흩어진 나그네 이 도시들 가운데 보면 갑바 도기아 라는 지명이 있죠?
우리는 로마에 방문 하면서 로마의 카타콤 의 그 동굴을 보면서 놀라곤 합니 다. 그러나 여러분이 터키를 방문하 고 갑바도기아의 이 암굴 도시를 보신 분들은 로마의 카타콤은 문자 그대로 새발의 피라는 것을 발견하 게 될 것입니다.
이 도시 전체가 거 대한 바위의 굴로 만들어져 있습니 다. 거기서 바로 이 시대의 크리스 챤들이 네로 황제의 추적을 피해서 공동생활을 시작 했던 것으로 보여 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 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 네, 거기에다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 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 하노니 은혜와 평강 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 지어다 그의 편지는 계속됩니다, 오늘 본문은 이 렇게 시작합니다.
우리 3절을 다같 이 한번 읽겠어요. 3절 다같이 시 작!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 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 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 하심으로 말미암 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 이 3절에서 우리가 주 목할만한 한 단어는 산 소망이라는 단어입니다. 살아있는 소망. Living hope. 살아있는 희망이라는 단어입 니다.
다시 말하면 사도 베드로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흩어졌던 당시 의 크리스챤들에게 그들이 아직도 희망을 갖고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 고 설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금년에 마지막 주일을 맞이 합니다. 참 우울한 분위기 속에서 맞이 합니다.
아마도 한해의 마지막 주일 치고 금년처럼 우울한 주일은 다시 없을 것입니다. 절망과 낙심의 분위기가 이 땅을 덮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어딜 가나 누구를 만나나 요즘은 대화가 딱 하나 밖에 없어요. IMF소식입니 다.
춥고 우울한 민족 겨울의 이야 기 속에서 우리는 이 한해를 마무리 지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베 드로는 당시의 크리스챤들에게 편지 를 썼던 것처럼 오늘을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우리가 아직도 희 망을 갖고 살아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본문에서 선포합니다. 우리 가 희망을 갖고 살아야 할 그 이유 는 무엇 때문일까요?
첫째로 그 이유는 우리는 부활의 주님을 체험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믿으십니까? 우리는 부 활의 주님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일을 맞았습니다. 그 리고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이 주일 의 의미가 어디에 있어요?
우리가 주일, 이 날에 모여서 하나님을 경 배하는 뜻이 어디에 있습니까? 본래 전통적인 유대인들의 예배일은 안식 일 입니다. 안식일은 토요일입니다. 금요일 날 해가 질 때부터 토요일 날 해가 질 때까지 전통적인 유대인 들의 안식일이 였습니다.
그것은 지 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 은 아직도 토요일 날에 그들은 회당 을 찾아가는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 다. 아마도 이 세상에서 가장 보수 적이고 전통을 지키는 일에 철저한 민족이 있다면 유대 민족일 것입니 다.
그들은 이것이 끝까지 지켜야 할 가치가 있는 습관이라고 생각하 면 절대로 변경하지 않습니다. 아직 도 안식일은 토요일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견고한 유대인의 전통적인 아집을 깨뜨리고 토요일이 아닌 안 식일 다음날 안식 후 첫 날, 주일날 일단의 유대인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파격적인 날. 그들의 전통을 깨뜨리고 주일에 모이기 시작한 그 이유가 어디에 있 었습니까? 그것은 예수의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이날에 만났기 때 문입니다. 사실 십자가 사건 전후로 해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풍비박산이 되서 공동체는 완전히 와해된 상태 였습니다.
그들은 다 흩어졌어요. 드 디어 그들의 메시아 라고 믿었던 예 수가 십자가에 죽자 제자들은 모든 것을 사실상 포기했습니다. 체념했 습니다. 대부분의 제자들은 보따리 를 싸고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리고 다시는 악몽 같았던 예수와의 함께 했던 시간들은 잊어버리자고 그들은 약속한 듯 흩어져 갔어요. 흩어져간 제자들. 사라진 제자들. 체 념해 버린 제자들. 그런데 한순간 제자들은 다시 예루살렘에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목숨 을 걸고 복음을 증거하는 새로운 공 동체로 그들은 태어났습니다. 무엇 이 이 변화를 가져 다 주었습니까? 딱 하나밖에 없어요. 이 변화에 대 한 가능한 역사적 설명은 꼭 하나밖 에 없습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 을 만났습니다.
살아계신 주님을 만 났던 것입니다. 예수의 제자들의 흩 어질 때 이름 모를 예수의 두 제자 그들도 그들의 고향인 엠마오 라는 곳을 향해서 걸어가고 있었죠? 누가 복음 마지막 장의 스토리입니다. 슬 픈 기색을 띠고 그들은 낙심하면서 고향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두 제자도 발걸음을 돌이킵 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그 리고 복음을 위해서 그들의 생명을 바치는 제자로 새롭게 일어섭니다. 어떤 사건이 일어났습니까? 부활하 신 주님이 엠마오 길을 향하던 두 제자 곁에 다가오신 것입니다.
그러 나 그분이 부활하신 주님인 것을 몰 랐던 두 제자는 여전히 낯선 나그네 와 힘없는 무력한 그들의 절망을 고 백하는 대화를 계속합니다. 그러나 그분은 이 두 제자와 성경의 말씀을 나누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이 풀어 주신 말씀 예수님의 성경이야기를 들으면 어떨까요?
이 두 제자는 갑 자기 가슴이 뜨거워 졌죠. 그리고 자기들과 더불어 대화를 나누던 그 상대방 또 앉아서 식탁을, 자리에 앉아서 교제를 하던 바로 그분이 부 활하신 주님인 것을 바라보던 한 순 간 이 제자들의 모든 것이 변합니 다.
그들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 갑니다. 그리고 복음을 위해서 생명 을 던집니다. 이것이 부활의 공동체 인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의 시작 이 였던 것입니다. 지금도 오늘 우리는 이 주일에 모입니다. 왜 그렇습니 까?
우리는 살아계신 주님이 오늘도 우리의 예배의 자리에 성령으로 임 재 하신 것을 믿습니다. 우리와 함 께 하신 주님, 우리의 예배를 받으 시는 주님, 그리고 엠마오 길에 두 제자와 동행하시던 동일하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을 믿습니다.
그 주님을 만난다면 어떻게 될까요? 좀 달라지겠죠? 그런데 제가 가만히 보니까 그 주님을 만난 분들 같지가 않아요. 다. 무력한 모습이 예요. 너 무나. 저 유명한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이 개혁의 말기에 지쳤습니 다. 그래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 은 유혹을 받았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사실상 포기하고 자리에 누워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넋두리 처 럼 이제 모든 것은 끝났소. 끝났소. 라고 외쳤습니다. 그때 지혜로운 마 틴 루터의 아내가 어느날 상복을 입 고 방에 들어왔어요. 상복을 입고. 그러니까 루터가 깜짝 놀래 갖고 아 니 누가 죽었소? 하니까,
예. 누가 죽었어요? 하나님이 돌아가셨습니 다. 아니 하나님이 돌아가시다니 무 슨 소리요. 루터의 아내는 정색을 하고 말하기릃 아니 하나님이 안 돌 아가셨으면 당신이 그렇게 누워있을 탓이 있겠소.
아 이 아내의 한 마디 가 루터를 흔들어 깨웠습니다.
그렇 지. 살아계시지. 벌떡 일어났어요. 그리고 그는 다시 그의 미션을 수행 하기 시작했습니다.
자, 오늘 이 3절 의 메시지를 다시 읽어 보십시오.
왜 우리가 이 시대에 희망을 가져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성경은 어떻게 말합니까? 3절 다시 한 번 읽겠습니 까?
시작!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 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네,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그 부활 하신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하셨습 니까? 거듭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순간 거듭납니다. 이 거 듭남은 일종의 우리의 부활 사건이 라고 할 수가 있어요. 다시 사신 주 님이 저와 여러분을 다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믿으십니까? 이것은 일종의 영적 부활이 예요. 다시 소 생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부활신 앙의 근겁니다. 그리고 거듭난 사람 들 안에 주께서는 오시사 부활하신 주님 성령으로 임재 하시사 우리 안 에 살아있는 희망을 주셨습니다. Living hope. 살아있는 희망을 주셨 습니다. 이 희망은 계속해서 우리를 새롭게 합니다.
우리에게 찾아오신 주님 우리를 다시 살리신 주님. 새 로운 인생관 새로운 세계관 새로운 소망 새로운 안목을 가지고 인생을 다시 살게 하신 부활하신 주님이 우 리의 삶 속에 찾아오셨습니다. 이 사실을 참으로 믿는 다면 참 우리가 이렇게 무력한 자리에 앉아 있을 이 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제가 미국에 있으면서 그 미국교회에 어느 날 청 년들의 연극을 본 일이 있습니다. 연극이 나사로의 , 나사로를 주제로 하는 연극이 였어요. 인상적인 한 대목을 잊을 수가 없는데 어떤 동네 사람이 부활한 나사로에게 이런 질 문을 던집니다.
당신이 죽었다가 살 아보니까 뭐가 달라졌습니까? 당신 에게 달라진 것이 뭡니까? 우리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면 뭐가 달 라질까요? 그런데 나사로가 이런 대 답을 해요. 나에게는 더 이상 두려 움이 없습니다. 이 두려움이라는 것 이 왜 생기 냐면 알지 못하는 대서 오지 않습니까?
미지의. 미지의 사 실. 모른다는 공폽니다. 죽어보지 못 했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 어요. 다시 산 나사로에게 두려움이 없었어요.
자,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 신 그리스도 그분이 참으로 우리 안 에 오셨어요. 무엇보다도 달라져야 할 것은 우리 마음 속에 두려움을 극복하는 소망입니다.
소망. 우리가 자주 부르는 복음성가 가운데 보면 살아계신 주 뭐예요? 나의 참된 소 망. 저는 근데 이 복음성가의 그 가 사가 영어의 가사의 의미를 충분히 살렸다고는 생각 하지 않는데 후렴 에 보시면 아주 좋습니다.
Because He lives 그 분이 다시 사 셨기 때 문에 all fear is gone모든 두려움과 공포는 사라졌다. Because He lives 그 분이 다시 사 셨기 때문에 and life is worth living 삶은 살만한 가 치가 있는 것 그분이 다시 사 셨기 때문에 나는 나의 인생의 미래를 만 날 수가 있다.
I can face tomorrow. 나는 나의 인생의 미래를 만날 수가 있다. 여러분이 살아계신 주님을 만 나 내가 영적으로 거듭나 부활하신 주님을 내 안에 소유하고 그분과 더 불어 살아갈 수만 있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삶이 정황이 아무리 어둡다고 해도 절망 은 이른 것입니다.
우리는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 습니다. 주님 다시 사셨습니다. 그 분, 나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와 함 께 하십니다. 왜 무력한 자리에 계 십니까?
성경은 말하시기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능력 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 사 산 소망을 주셨습니다, 그 주님 을 찬양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희 망을 가지고 살아야 할 또 한 가지 의 이유가 있어요.
그것은 두 번째로 하늘나라의 영 원한 기업을 우리가 약속 받았기 때 문입니다. 하늘나라의 영원한 기업 을 약속 받았기 때문입니다. 아마 우리 시대에서 가장 우리 귀에 젖은 단어 하나가 있다면 기업이라는 단 어일 것입니다.
자고 일어나면 들어 오는 소리가 기업소리에요. 기업이 부도났다. 도산 됬다. 어저께는 또 보니까 뭐 불루힐도 무너졌다. 화의 신청이 들어왔다. 계속 기업 소릴 듣습니다. 사실 기업이라는 단어는 성경에도 아주 익숙한 단업니다.
이 것은 심지어 1세기 크리스챤들에게 도 아주 익숙한 단어였어요. 그들도 자기들의 기업이 무너지고 빼앗기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와 다 른 그들의 이 기업이 무너지는 현장 에서 그 기업 앞에서 무너져가는 기 업 앞에서 초대 크리스챤들이 드렸 던 놀라운 고백 하나를 여러분 읽어 보세요. 히브리서 10장을 한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한번 다 찾아보세 요. 저 유명한 히브리서 11장. 믿음 의 장 직전 장인 히브리서 10장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서 10 장 34절의 말씀입니다. 같이 한번 읽어보실 까요? 히브리서 10장 34절 입니다.
다같이 시작!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 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네,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그들의 산업이 무너지고 빼앗김을 당했습니 다.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우리하고 다른 것은 뭐예요? 산업을 빼앗길 때 어떻게 당했다고 했습니까? 기쁘 게 당한 것은, 그랬어요. 그들은 이 땅에서의 기업이 무너지고 빼앗김을 당하면서도 기쁘게 당할 수 있었던 이유가 어디에 있어요? 뭐라 그랬습 니까?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그들이 지상의 기업을 잃어버리면서도 결코 희망을 포기하 지 않았던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더 낫고 영구한 산 업, 빼앗기지 아니하는 기업 흔들릴 수 없는 기업 영원한 기업을 소유했 기 때문이다.
그것이 지상의 권한과 시련을 이기는 초대 크리스챤의 저 력이요 dynamic한 생동하는 믿음의 근거였던 것을 여기서 우리는 확인 할 수가 있습니다. 본문에서도 사도 베드로가 정확하게 같은 얘기를 합 니다. 자, 다시 베드로 전서 1장 4절 의 말씀입니다.
자, 베드로 전서 1장 4절 본문을 한번 더 같이 읽겠습니 다. 시작!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 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 하신 것이라. 네, 하늘나라의 기업을 얘기하고 있어요. 자, 이 기업을 가 리켜서 어떤 기업이라고 설명했습니 까? 세 가지 특성을 말했는데 썩지 아니하는 기업, 영원한 기업입니다.
더럽힐 수 없는 기업, 이것은 거룩 한 기업입니다, 그다음에 쇠하지 아 니하는 기업 불멸의 기업. 그 영원 한 기업을 우리를 위해서 예비 하셨 다. 어디에? 하늘에 간직한 것이다.
빼앗길 수 없는 기업이 있어요. 다 빼앗겨도 결코 빼앗길 수 없는 영원 한 기업을 주께서 우리를 위해서 예 비하셨습니다. 믿으십니까?
자, 이 소망의 기업을 어떻게 하나님이 보 장 하시는가. 자, 그 다음 절을 읽어 보세요. 5절입니다. 다같이 시작! 너 희가 말세에 나타나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이하여 믿음으로 말미 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이 기업만은 아무도 흔들 수가 없습니다.
부도 낼 수 없는 기 업. 빼앗길 수 없는 기업, 이 하늘의 영원한 기업은 무엇으로 보호하심을 입고 있다고요? 하나님 자신의 능력 으로 지키심을 받습니다. 이 기업이 영구히 존재하는 한 절망은 없습니 다.
저는 오늘 우리 이 시대야 말로 천국 소망을 회복할 때라고 생각해 요. 천국소망. 천국소망과 천국 신앙 의 회복. 이것은 우리 시대 크리스 챤들이 회복해야 할 가장 중요한 신 앙의 과제라고 생각을 합니다. 한동 안 소위 지식인들이 한국교회의 신 앙을 비판할 때 두 가지 비판을 많 이 했어요.
한국교회 교인들의 신앙 이 타계 신앙적이고 둘째는 기복 신 앙에 빠져있다. 이런 비판을 참 많 이 했습니다. 이 비판의 상당한 내 용은 정직한 비판이에요. 그것은 부 인할 수 없는 비판 받아 마땅한 요 소들을 한국교회가 가지고 있는 것 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 비판이 전체적으 로 정확한 것이라고 저는 생각하지 않아요. 기복신앙에 대한 비판 다시 말하면 교인들이 지나치게 세상적인 축복에만 매달린다.
믿지 않는 사람 들과 꼭 마찬가지로 잘 먹고 잘 사 는 일에 지나치게 매달리고 그것을 획득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 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 똑같다. 믿 지 않는 사람과 마찬가지다. 기복신 앙에 매달려 있다. 이 비판은 상당 한 부분 정확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비판을 할 때 기복신앙을 비판할 때 꼭 같이 나오는 것이 타계 신앙 이 예요. 지나치게 한국 교인들이 너무나 타계신앙을 갖고 있다. 이 역사를 몰라라 하고 천당만 바라보 고 있다. 이 두 가지를 같이 묶어서 비판을 하거든요?
그런데 이 비판은 정확한 비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한국 교인들이 기복 신앙에 빠진 이 유가 어디 있냐면 타계신앙이 없어 서 그래요. 천국신앙이 없어서 그래 요. 여러분 천국 믿으세요? 가끔가 다가 의심이 생겨 갖고. 정말 믿어 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영원한 나라를 예비 하셨다.
정말 믿으십니 까? 정말 믿는 다면 이 땅에서 조금 못 살아도 괜찮아요. 그 발버둥 치 면서 살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구 요. 왜 기복신앙에 빠지냐 이 말이 예요.
천국신앙이 없어서 그래요. 진 정한 의미에서 천국신앙. 하늘의 하 나님이 의롭게 산 성도들을 위해서 준비하신 영원한 보상의 세계. 그리 고 천국에 의한 믿음 이 하나님이 영원한 처소를 준비하셨다.
이 사실 을 참으로 믿는다면 세속적인 어떤 작은 이윤이나 이익에 매달려서 몸 부림을 치는 그런 life style을 가져 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단 말입니다. 이 천국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타계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여러 분 1세기를 살았던 순교자들의 그 대담한 신앙의 모습 어디에서 왔습 니까? 야생동물의 밥으로 그들의 몸 뚱이가 던지움을 받으면서도 그들의 신앙을 부인하지 않고 찬양을 부르 면서 원형 경기장을 걸어가던 1세기 크리스챤들의 그 담대함 천국신앙이 예요. 천국 믿었어요.
이 타계신앙이 라는 것은 그것이 이 타계적 영향만 주는 것이 아니라 그 신앙이 오늘의 삶을 바꿔요. 천국을 믿는 다면 오 늘의 삶이 달라져요.
자, 내가 이땅 에서 좀 손해를 봐도 지금 당장 조 금 잃어버려도 주께서 영원한 것을 준비하셨다. 초연할 수가 있잖아요. 제임스 그레이 라는 유명한 신학 학 자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고향길 가는 것이 확실하다면 그 길 도상에서 조그만 어려움이라야 내 얼마든지 견딜 수가 있지 않겠는가.
우리가 이 추석 때 혹은 이 구정 설 날 때 보면 이 고속도로가 꽉 메워 지잖아요. 고향 가는 사람들 아마 그 고생을 하면서 가면서 많은 사람 들이 그런 결심을 할 것 입니다. 내 가 다시는 고향에 가나 봐라. 금년 이 마지막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 또 가요. 네, 고향에 딱 도착하는 순 간 다 잊어버리거든요. 고향에 찾아 온 기쁨. 우리가 확신한 본향. 저 천 국에 영원한 소망이 확실한 것이라 면 그 길 도상에서 우리가 겪는 작 은 어려움 견딜만 하지 않습니까?
성경은 우리가 이 시대의 고난과 어 려움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이 포기할 수 없는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 할 이유를 우리에게 설득합니다. 하늘 나라의 영원한 기업을 보장하셨습니 다. 그 하나님을 신뢰하시길 바랍니 다.
세 번째로 우리가 희망을 포기하 지말고 살아야 할 또 하나의 이유를 말합니다. 그것은 오늘의 시련이 가 져올 믿음의 유익 때문입니다. 오늘 의 시련이 가져올 믿음의 구체적인 유익때문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천국의 소망만이 우리가 가진 본질 적 소망이 아니라 또 그 소망과 더 불어 이 땅에서의 고난이 우리에게 주는 구체적 유익 가운데 하나는 지 금 여기에서 우리의 신앙을 강화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예요. 시련이 없 이 믿음은 강화되지 않습니다.
자, 우리가 고난이 오면 그 고난을 통해 서 반드시 체험할 수 있는 유익 중 에 하나는 내 신앙이 강화 된다는 사실이 에. 다 그런 건 아니 예요. 믿음 있는 사람이라면. 참된 성도라 면 그들의 신앙은 더 순수해 질 것 입니다. 더 영광스러워 질 것입니다.
더 아름다워 질 것입니다. 더 깨끗 해 질 것입니다. 자, 본문의 6절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6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6절 다같이 시작! 그러 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네,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 여 여러 가지 시험이라는 단어는 본 래 여러 가지 색깔이라는 뜻입니다. 형형색색의 시험을 우리는 이 땅에 서 경험합니다.
육체의 질병, 인간관 계의 단절, 경제적인 시련, 형형색색 의 시험을 만나요. 자, 이 시험 앞에 서 우리도 근심합니다. 성도들 근심 해요. 자, 근심 절대 안 하는 성도 봤어요? 어떤 사람이 크리스챤이기 때문에 절대로 근심하지 않고 산다.
그러면 저는 그가 사람인 것을 의심 하겠습니다. 네, 근심하는 것은 당연 해요. 당연해요. 여기도 보면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해서 근심한다고 했 어요. 그러나 우리가 믿음의 사람들 이라면 그 근심을 극복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근심은 얼마 동안이어야 합니까? 그 다음에 뭐라 그랬어요? 잠간 그랬어요. 잠간 근 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마침 내 뭐 한다 구요?
오히려 기뻐한다. 근심은. 넘어서서 마침내 기뻐할 수 있는 기쁨 이 커다란 기쁨의 이유. 그 이유가 뭐라 그랬어요. 그 다음 절이 대답을 들려주죠? 7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너희 믿음의 시 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 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 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 게 하려 함이라. 믿습니까? 여러분. 여기 7절에 믿음의 시련이라는 말이 나와요.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부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어서는 모든 종류의 시험이 결국은 믿음의 시련입니다.
우리 믿음을 강화 하기 위해서 주께서 허용하신 시련이 예 요. 그래서 어떤 종류의 시험이든 내가 이 시험을 제대로 크리스챤답 게 통과한다면 반드시 우리는 믿음 의 유익을 얻습니다. 어떤 유익입니 까?
이것은 주님 앞에 서는 날, 내 가 칭찬 받을 자, 그리고 영광스러 운 자, 그리고 하나님 앞에 존귀한 자로 마침내 내 인격이 빚어져, 새 로워져, 영광스러워져, 성숙한 자로 세워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믿음의 유익이 예요. 우리의 믿음이 마침내 궁극적으로 가져올 빛나는 유익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것이 확실하다면 그렇다면 잠시의 고난 앞에서도 우리가 왜 이렇게 움 츠려 들고 위축 되야 할 이유가 어 디 있어요. 저는 요즘 사람들 만나 는 게 꺼려져요. 우리 성도들도 그 렇고. 왜냐하면 어디를 가든지 누구 를 만나든지 얘기가 딱 하나밖에 없 어요.
가보면 꼭 다 그냥 IMF얘기 에요. 다 늘어져 갖고. 축 늘어져 갖 고. 한참 얘기 하다가 보면 스트레 스 받아 가지고 다 넘어져 있어요. 저는 그런 자릴 나올 때마다 종종 제 안에 늘 질문이 생깁니다. 정말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이런 자 세로 살까? 라는 질문이 예요.
제가 어제 어 우리 전도폭발 만찬 자리에 서도 그런 말씀을 드렸습니다만은 사도 베드로는 이 말씀을 계속하다 가 드디어 이런 시대를 살아가는 성 도의 자세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합 니다.
한번 3장 읽어보세요. 베드로 전서 3장이 예요. 14절입니다. 3장 14절. 15절. 베드로 전서 3장 14절과 15절 다같이 한번 읽겠습니다.
시 작!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 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 너희 마음 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
여기 14절에 보시면 이런 말이 나오죠?
저희의 두려워 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라. 믿지 않는 사람 들이 두려워하고 소동하는 것처럼 너희도 그렇게 하지 말라 그럼 크리 스챤들이 좀 달라야 되잖아요. 달라 져야. 그렇다고 해서 베드로는 다가 오는 고난을 과소평가하고 있는 것 은 아니 예요.
우리가 그 다음 장에 보면 얼마나 베드로는 실제적으로 다가오는 고난을 경계했는지 모릅니 다. 한번 4장까지 읽어 보시면요. 4 장이요.12절에 보세요.
4장 12절에 보시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 련 하려고 오는 무슨 시험이라고 했 어요? 불 시험을. 베드로는 눈을 뜨 라고 말합니다. 불 시험이 온다. 그 러나 이 불 시험 앞에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소동하지도 말라 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 다.
여기 3장 15절에 보시면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 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 대답할 것 을 예비하라.
여러분 다 두려워 하 구요, 요즘. 다 걱정하고, 다 염려하 고, 그리고 다 주저 앉아있는데 여 러분만은 당당하게 한번 산다고 한 번 가정해 보세요. 당당하게. 나는 전혀 위축되지 않았어. 이젠 좀 IMF에 자꾸 F자로만 하다보니깐 우 리가 F국가가 되고 F신앙이 되는 것 같아요.
그런데 I am F라고 하지 말고 Im fine입니다. 한번 연습해보 세요. Im fine. 나는 괜찮다 말이 예 요. 나는 괜찮다. Im fine. 우리가 만 약 이런 자세로 산다면 사람들이 좀 이상하게 생각할 거예요. 야, 넌 괜 찮니? 넌? 넌 괜찮으니?
나, 사업이 야 어렵지. 근데 너는 어려운 것 같 지 않냐? 벽장에 달라 라도 숨겨 뒀 니? 뭐 이렇게 대답한다고 가정해 보세요. 야, 벽장에 쌓아둔 것은 없 지만 내 마음에 쌓아둔 것이 있다.
소망이 있단 말이 예요. 움직일 수 없는 하늘나라의 소망이 있고, 살아 계신 주님이 내 안에 계시고 그가 내 마음 속에 노래를 만들고 시를 만들고 믿음을 주시기 때문이야.
만 약 이런 간증을 한다고 해보세요. 야, 너 어떻게 그런 신앙을 가질 수 가 있느냐? 이 시대야 말로 복음을 전하기 얼마나 좋은 시댑니까? 사도 베드로는 정확하게 그 얘길 하고 있 는 것입니다.
저희의 두려워 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라. 너희 마 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 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 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 대답할 것을 예비하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캄 캄한 어둠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 빼 앗기지 않는 소망이 있습니다.
흔들 릴 수 없는 소망이 있습니다. 하늘 의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예비하 신 소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이 시련을 통해서 나를 만 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 합니다, 내 믿음은 더욱 순결해 지 고 있습니다.
나는 주앞에도 거룩한 자로 세워지고 있습니다. 나는 마침 내 어느날 주님 앞에 시련을 통과하 고 그 앞에 칭찬 받을 자로 그리고 영광스러운 자로 그리고 존귀한 자 로 세워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 시련의 폭풍의 한 복판 속에서 주님을 찬양합니다.
여러분 이런 당 당한 자세로 살아보세요. 세상이 얼 마나 도전을 받겠습니까? 여기 우리 가 희망을 붙들고 살아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 희망의 소망과 함께 그리고 이 희망의 믿음, 그리 고 희망의 주님을 붙들고 새해를 믿 음으로 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 길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그렇습니다. 세상이 어두운 것은 사실이고 또 우리의 삶이 전보다도 더 훨씬 피곤하고 힘든 것도 사실입 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이 내 안에 게시고 우리와 함께 계시다면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는 결코 좌 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의 등뒤에 서 나를 도우시는 주 내 고난의 장 에 달려오시는 그 분. 나의 인생 길 에 지치고 곤하여 매일처럼 주저 앉 고 싶을 때 나를 향해 손을 펴시는 주님, 그리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 성을 들어보세요. 일어나 걸어라. 내 가 새 힘을 주리니 일어나 너 걸어 라 내 너를 도우리. 하나님 포기하 지 않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좌절 하지 않겠습니다. 부활하신 주님 나 를 살려주시고 내 안에 쇠할 수 없 는 이 소망을 주 셨기 때문입니다, 이 소망의 주님 붙들고 살겠습니다. 부활의 주님 살아계신 주님을 붙들 고 일어나겠습니다.
오 하나님 우리 를 도와 주시옵소서. 소망이 없는 사람들 처럼 두려워 하거나 소동하 거나 방황하지 않게 하시고 여전히 흔들리지 않는 걸음으로 찬양하며 걷게 해 주시옵소서. 그리고 내가 가진 이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이들에게 그것은 부활하신 주님, 내 주님 되 셨기 때문입니다.
증거하게 도와 주시 옵소서. 이 믿음으로 세 상을 이기고 그리고 이땅의 영적인 부흥을 가져오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주여, 이 소망 으로 새해를 맞이하게 도와 주시옵 소서 이 소망으로 절망의 자리를 박 차고 일어나는 당신의 성도들이 되 게 해 주시옵소서
참 신앙과 거짓 신앙 (1) - 당신은 그리스도인 입니까? /고후13:5, 벧전1:6-8/ 김형익 목사
2021-05-11 04:28:03
1. 정체성(identity): 당신은 그리스도인입니까?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입니까?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우리가 던지고 받는 수 많은 질문들이 있지만, 이것 보다 중요한 질문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질문 여하에 따라서 우리의 영원한 운명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또 이 질문은 피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결국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는 이 질문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읽은 베드로전서는 다른 서신들처럼 분명하게 이 서신을 받는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서두에 쓰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벧전 1:1~2).”
이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소아시아의 특정 지역에 살던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고린도후서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쓰여진 편지입니다(고후 1:1). 이 서신은 그리스도인들 즉 교회에게 쓰여진 편지이지만, 서신을 마치면서 사도 바울은 편지의 수신자들에게 이렇게 도전했습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후 13:5).” 자신의 믿음이 참된 믿음인지를 테스트해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번 설교 시리즈의 주제인 [참 신앙과 거짓 신앙]을 다루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어떻게 우리는 우리 자신의 믿음이 참된 믿음, 구원 얻는 믿음인지를 테스트할 수 있습니까?
2. 그리스도인의 정의(definition)
“당신은 그리스도인입니까?”라는 질문은 의당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 하는 질문을 전제로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입니까? 수리아 안디옥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사용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행 11:26).”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은 그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라는 레이블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가 핍박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입니다. 제자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 땅에서 자기를 부인하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로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우리 자신을 수식해주는 많은 조건들 중의 하나가 아닙니다. 가령, 남자이고 남편, 아버지이고 목사와 같은 수식어들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가장 본질적이고 중요한 정체성입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섰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실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진짜 그리스도인이냐?”는 질문일 것입니다. 네 믿음이 진짜 믿음이냐 하는 것입니다.
3. 참 신앙과 거짓 신앙, 참 그리스도인과 거짓 그리스도인
비록 초대교회가 환난과 핍박 속에서 주님을 따르는 공동체였지만, 거기에도 참 신앙과 거짓 신앙은 공존했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거짓 신앙을 가진 위선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런 자들을 멀리할 것을 경고합니다(딤후 3:5). 또 주님은 사데교회를 향하여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라고 책망하셨는데, 이와 같이 명목상의 교인들이 있다는 것을 성경은 가르쳐줍니다(계 3:1)
. 주님께서 가르치신 열 처녀의 비유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혼인 잔치의 문 앞에 이를 때까지는 아무도 판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마 25:1~13). 열 처녀는 모두 등을 들고 있었고 모두 신랑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등 안의 기름이 있는지의 여부는 겉으로 확인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어찌되었건 그들 모두가 혼인잔치의 문에 이르렀다는 사실은 거짓 신앙을 가지고도 끝까지 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떤 객관적이고 가시적인 증거들을 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가령 영접 기도를 했고 강단 앞으로 나와서 결신을 했다는 것, 또는 세례를 받았고 교회를 오랫동안 다니고 있다는 것, 성경을 많이 알고 있다는 것 등으로 우리 자신의 믿음의 참됨을 증명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우리 내면에 속한 것이고 그것은 신비한 사건이기에 객관적이고 외적인 모양으로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4. 하나님의 판단과 그 기준(고전 4:3~5; 7)
성경은 우리에게 남의 신앙을 판단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또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판단하느냐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자신에 대한 스스로의 판단 조차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전 4:3~5).”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실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는 기준이 무엇인가는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판단하실 때, 세상에서 그랬듯이 재산의 많고 적음이나 성공과 명성으로 판단하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비교할 대상이 없을 만큼 가장 귀한 것으로 우리를 판단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7절에서 설명한 대로, 믿음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의 유무가 결국은 오늘 설교 제목 ‘당신은 그리스도인입니까?’하는 질문과 통하는 것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분명히 사도 베드로는 믿음을 금에 비교하고 있습니다.
당시나 지금이나 금은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통화 기준의 하나입니다. 지폐는 한 순간에 휴지조각이 되는 일이 있어도 금을 보유하고 있는 것은 언제나 안전합니다. 그런데 사도는 믿음은 금보다 귀하다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9절에서 말한 대로 믿음은 영혼의 구원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하나님의 판단 기준은 하나, 믿음뿐입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당신은 그리스도인입니까?’하는 질문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없는 것입니다.
5. [참 신앙과 거짓 신앙]의 주제가 왜 중요한가?
이제 우리가 다룰 주제, [참 신앙과 거짓 신앙]이 왜 그토록 중요한 문제인지를 좀 더 설명 드리지요. 성경은 분명히 우리가 신앙의 진위를 판단할 수 있도록 충분한 근거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너무나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주제를 다루는 이유는 성경이 전반적으로 그런 기준들을 우리에게 제시하는 이유로부터 출발합니다. 그 하나의 목적은 무엇보다 우리가 스스로 착각하지 않고 참된 신앙을 가지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거짓 신앙을 가지고 안심하면서 신앙 생활을 한다거나, 우리 자신이 위선적인 신앙의 자리에 빠져들어가지 않도록 경고를 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또 위선적인 자리에서 착각을 하고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을 지옥의 문 앞에서 깨우는 것이 이 설교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평생을 참된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고 살다가 주님 앞에 섰을 때 “나는 너희를 도무지 모르겠다”는 말씀을 듣게 될 때, “나는 한 번도 제 신앙이 거짓일 것이라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말할 수 없도록 미리 경고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다니면 그저 다 그리스도인이라고 간주하는 시대에 살고 있기에 이런 주제의 말씀은 더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설교 시리즈의 부정적인 목적이 있는데 그것은 신자들이 최소한 거짓 교사들 그리고 거짓 신자(위선자)을 분별함으로써 실족하는 일을 예방하는 차원입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하게 거짓 선지자들을 삼갈 것을 경고하셨고 그들을 열매로 분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7:15~27). 이것을 분별하지 못하면 자기의 믿음을 허물게 되는 치명적인 실족을 경험하게 되기 때문에 이것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주의를 당부하고 싶은 것은 이런 주제의 말씀을 듣다 보면 연약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낙심에 이르게 되는 부작용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펄전이 그렇게 말했듯이, 참으로 이런 말씀을 듣고 자기 영혼에 대해서 근심할 수 있다면 그를 위해서는 별로 걱정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오히려 소망이 있지만, 오히려 이런 말씀을 듣고도 자기 영혼에 대해서 별로 염려를 하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심각한 영적인 상태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인하여 자신의 영혼에 대한 낙담이 일어나기 시작한다면,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시는(사 42:3)”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분께 나아가 간절한 마음으로 은혜를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하여 연약한 믿음 가운데 계시는 분들이 “아, 내가 너무나 연약한 신앙 가운데 있구나. 더 확실하고 성숙한 신앙으로 나아가야겠구나” 생각하고 더 견고하고 확실한 데로 나아가게 하는 은혜를 주시기를 구합니다.
6. 시련(trial)과 분별(6~7)
오늘 본문 6절에서 사도 베드로는 시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들이 잠깐 근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상황을 언급합니다. 이 서신의 수신자들은 1절에서 보았듯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나그네들입니다. 박해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시련이 믿음과 관련해서 하는 일이 있습니다.
A. 시련은 신앙의 진위를 드러내준다(6).
첫째는 시련이 신앙의 진위를 드러내준다는 것입니다. 이 서신을 받는 사람들의 믿음은 참된 믿음이었기에 그들의 ‘믿음의 확실함’은 시련을 통해서 더 온전하게 드러났습니다. 아무리 혹독한 시련 속에서도 참된 믿음의 사람들은 산 소망을 가지고 시련을 견딜 수 있었고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6절에 ‘그러므로’가 의미하는 바입니다. 3~4절을 보지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산 소망’은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입니다. 참된 믿음은 히브리서 기자가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한대로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히 11:1). 그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 믿음은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나를 아시며 나를 보고 계시다는 것과 하나님을 찾는 자들을 위하여 상을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는 믿음입니다(히 11:6).
그들은 장래의 소망이라는 렌즈로 그들이 경험하고 살아가는 현재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그들이 여러 시련으로 인하여 잠깐 근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지만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라고 쓸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장래의 소망과 은혜의 렌즈로 현재를 보는 사람이고 그러기에 그들은 현재의 고난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바라본 장래의 산 소망은 썩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늘에 간직하여 두신 것이었습니다.
B. 시련은 신앙을 연단하고 강하게 한다(7).
시련은 믿음의 진위를 드러낼 뿐 아니라 불로 금을 연단하듯이 믿음을 연단하는 역할을 합니다. 수 많은 불순물들과 함께 섞여 있는 우리의 믿음은 시련을 통해서 순수한 믿음으로 정제됩니다. 이것을 사도 베드로는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고 썼습니다(7).
주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을 자는 시련을 통해서 불을 통과한 금처럼 순수하게 된 믿음을 가진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고난을 통해서 이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입니다(롬 8:28). 이것을 알았기에 시련을 인하여 잠깐 근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저들이 오히려 크게 기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7. 참된 신앙은 거룩한 감정?주 예수님께 대한 사랑?안에 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18세기 전반기에 뉴잉글랜드에서 일어났던 제1차 대각성운동을 통해서 매우 격정적이고 흥분을 불러일으키는 다양한 종교적 현상들을 보면서, 참된 신앙인지 아닌지를 가늠할 수 있는 확실하고 믿을만한 증거들인 것과 아닌 것들을 제시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쓴 책이 Religious Affection (신앙감정론)입니다. 그 책의 서두에 그가 채택한 구절이 베드로전서 1장 8절입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그가 왜 이 구절을 선택했을까요? 참된 신앙과 거짓 신앙을 구별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신자의 거룩한 감정(holy affection)이며, 참된 신앙은 거룩한 감정 안에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가 말했던 종교적 감정이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나중에 살펴보더라도, 그가 말하고 싶어했던 신앙감정(religious affection)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것이 바로 ‘주 예수님께 대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사도는 예수님을 본 사람이었지만 이 서신의 수신자들은 육신으로 예수님을 만나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것이 사도와 수신자들의 차이였습니다. 그런데 사도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모두 주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볼 수 없었지만 믿음의 눈으로 사랑하는 주 예수님을 보면서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다락방에 오셔서 제자들을 만나셨을 때에 의심하던 도마에게 하신 말씀을 사도 베드로는 기억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 20:29).” 여러분, 단지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육안으로 보지 못했다는 점에서 우리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주 예수님을 ‘사랑했고,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했습니다.’ 이것은 예사로운 표현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믿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봄으로써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 있습니다. 주 예수님에 대한 사랑은 그들로 모든 박해와 핍박이라는 시련을 감당할 힘을 주었고, 계속해서 그리스도를 따라갈 수 있는 힘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말이 아니라 전인격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그리스도께서 마음이 기울어지는 자입니다. 이 사랑은 그들에게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이것은 세상에 있는 유한한 존재에 대한 사랑이 만들어내는 기쁨과는 다른 것입니다. 이것은 무한하고 영원하시며 완전한 아름다움이신 주 예수님에 대한 사랑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하늘의 기쁨이고 주님 안에 있는 기쁨이고 주님이 누리셨던 기쁨입니다. 이것이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이십니까? 여러분은 주 예수님께 대한 참된 믿음을 가지셨습니까? 여러분의 인생에서 이 질문 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없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예수를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합니다. 참된 믿음은 주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비록 현실적으로는 시련으로 인하여 잠깐 근심하지 않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은 산 소망과 믿음 안에서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힘이 있어서 일평생을 그리스도께 나아가게 하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게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능력은 부인하는 자는 아닙니까? 여러분은 살았다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자는 아닙니까? 참으로 그리스도를 믿고 사랑하고 기뻐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소망이 내게 있네 /벧전1:3-5/ 이병권목사
2021-01-26 07:30:41
올해 마지막으로 말씀을 나눌 수 있는 시간입니다. 오늘하고 내일 하루가 더 지나면 2020년이 끝이 납니다. 예년 같으면 조금 들뜬 마음으로 송년회를 하고 연말 분위기를 느끼며 한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기대했을 텐데 올해는 그럴 수 없습니다.
여전히 계속되는 코로나의 어려운 상황이 우리 마음을 무겁게 하고 우리를 움츠러들게 합니다. 지난 주일에 강무웅 부친님이 소천하셨는데 어떠한 종교예식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진행되는 장례였습니다. 코로나가 주는 어려움을 또 한 번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어제는 부친님 발인이라 아침 일찍 장례식장을 가는데 앞이 잘 보이지 않을 만큼 안개가 아주 짙게 깔려있었습니다. 자욱한 안개 속에서 장례식장으로 가고 있으니 여러 생각이 들었습니다.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이 길을 계속 가면 결국 끝에 이르게 되는 곳이 장례식장이구나, 결국 장례식장을 향해 열심히 달려가는 것이 인생이 아닐까?
성경은 사람의 생명, 그 인생이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안개라고 말씀합니다. 이 땅에서의 삶은 그만큼 짧고 순식간에 끝납니다. 마치 안개처럼 말입니다. 모든 인생이 그러합니다. 죽음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주어진 인생의 시간이 다되면 죽음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믿는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세상이 겪는 어려움들 우리도 똑같이 겪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세상이 겪지 않는 어려움까지 겪을 때도 있습니다. 믿는 사람이라서 코로나가 피해가거나 위험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닙니다.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도착하는 죽음이라는 종착지,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만나게 되는 죽음이라는 거대한 장벽을 우리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다른 것은 그 거대한 장벽 너머를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압니다. 죽음 이후에 진짜 우리의 삶이 시작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같은 상황을 만나더라도 고난과 어려움을 만나더라도 그것이 심지어 죽음이라는 인생의 마지막이라 하더라도 다를 수 있습니다.
인생의 어려움, 고난이 어찌할 수 없는 것을 우리가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조차도 어찌할 수 없는 것, 그 어떤 것으로도 빼앗을 수 없는 것을 우리가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소망이라 부릅니다. 우리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소망은 우리의 경쟁력이 됩니다. 소망으로 인해 우리가 세상과 다를 수 있습니다. 소망이 있기에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행동하고 다르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세상이 궁금해 할 것입니다.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게 될 것입니다.
소망은 빛과 같아서 주변이 밝을 때는 별로 눈에 띄지 않습니다. 상황이 좋을 때, 어려움이 없을 때, 삶이 평탄하고 문제가 없을 때 사람들은 다 비슷비슷합니다. 별로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주변이 어두울 때는 다릅니다. 어렵고 힘들 때 소망의 빛은 더 두드러지게 눈에 띄게 됩니다. 그 빛을 숨길 수 없습니다.
베드로가 보내는 이 편지의 수신자였던 성도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소망으로 인해 어려운 상황에서도 다르게 살았습니다.
벧전 1: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여러 가지 시험으로 근심할 수밖에 없었지만 오히려 크게 기뻐합니다. 삶을 뒤흔들 수 있는 고난 중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건 소망 때문입니다.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기뻐할 수 있는 건 소망 때문입니다. 변치 않는 기쁨의 이유가 되는 소망, 우리로 하여금 다르게 살게 하는 소망, 오늘은 그 소망에 대해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첫째로, 나에게 있는 소망은 “산 소망”입니다.
벧전 1: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베드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소망을 말하면서 하나의 수식어를 덧붙입니다. 산 소망이라고 말합니다. 살아있는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소망은 실제적인 것입니다. 확실하고 분명한 것입니다. 단순히 희망사항이 아닙니다. 이러면 좋겠다 저러면 좋겠다 될 수도 있지만 안 될 수도 있는 그런 불확실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없이 바라고 기대할 수 있는 소망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소망이 살아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떻게 우리가 살아있는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의 부활 때문입니다. 살아있는 소망은 예수님의 부활을 근거합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예수님의 부활하심으로 우리가 다시 태어났습니다.
죽었던 우리가 생명을 얻어 살아났고 죽은 소망이 아니라 살아있는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시고 살아나심으로 우리의 죽음을 정복하시고 우리를 살려주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활과 우리의 거듭남, 그리고 산 소망을 말하면서 이것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살아있음, 생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나셨습니다. 죽음을 이기는 생명입니다. 그리고 죄로 죽었던 우리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죄를 이기는 생명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있는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고난을 이기는 생명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기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소망은 살아있습니다. 우리의 소망이 살아있는 것은 예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편지를 쓰는 베드로를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의 살아계심은 베드로에게 삶을 완전히 바꾸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베드로의 소망은 사라졌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쓰라린 아픔을 가지고 통곡합니다. 닭 울음소리가 들리고 다시 밝아오는 태양도 그에게 소망을 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무덤 문은 열려있었고 무덤은 비어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살아나셨습니다. 베드로는 이 소식을 듣고 무덤으로 달려가 그 증거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나고 베드로의 소망도 다시 살아납니다. 살아있는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동일한 소망을 가진 자들을 격려하기 위해 이 편지를 남긴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소망은 살아있습니다. 생명이 없는 죽은 소망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살아있는 것과 죽은 것, 그 차이를 생각해보십시오. 죽은 것을 가진 사람과 살아있는 것을 가진 사람 지금 당장은 별 차이를 느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살아있는 것과 죽은 것의 차이는 심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의 시간이 마감되었을 때 그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가 됩니다. 예수님이 살아계시기에 이러한 차이가 생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다시 살아나셨고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있는 소망을 가진 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어떤 상황에서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년에도 예수님은 살아계십니다. 코로나가 아무리 우리를 힘들게 하더라도 예수님은 여전히 살아계십니다. 예수님이 살아계시기에 우리는 소망을 가지고 내일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겪을 수 있는 최악의 상황, 죽음조차도 우리를 굴복시킬 수 없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요11:25) 주님은 생생하게 살아계셔서 우리 삶 가운데 함께 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살아있는 소망가운데 주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머지않아 우리도 주님처럼 부활해서 진짜 인생을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나에게 있는 소망, 둘째는 “유업”입니다.
벧전 1: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여기 말씀에서 유업이라는 것은 유산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보통은 장차 받게 될 땅이나 재산, 물질적인 것을 유업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베드로가 말하고 있는 유업은 그와 다릅니다. 유업이 있는 곳이 다릅니다. 유업이 있는 곳은 하늘입니다. 베드로는 이 땅에서 얻는 유업이 아니라 하늘에서 얻는 유업을 말합니다. 비록 지금 눈으로 볼 수 없고 지금 얻을 수 없지만, 우리는 하늘에 있는 유업에 대해서 상속자로 확정되어 있습니다. 하늘에 간직되어 있는 유업을 우리가 받게 될 것입니다.
본문에서 “간직하신 것”이라는 말은 완료된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이미 이 유업을 준비해두셨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실 유업이 하늘에 간직되어 있고 그날에 우리가 그 모든 것을 직접 보고 직접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누리게 될 하늘 유업이 어떠한지 그 특징을 보십시오. 세 가지 특징을 말하는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게 될 유업은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기에 특별합니다. 그 가치가 변하지 않습니다. 영원토록 변함이 없습니다.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영원한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들은 변합니다. 썩어지고 더러워지고 쇠하여 집니다. 이 땅에 있는 것들이 모두 그러합니다. 하지만 하늘 유업은 다릅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우리가 하늘 유업을 생각하기가 어렵습니다. 지금까지 본적이 없고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어떤 모습일지 어떻게 주어질지 우리 생각의 범위를 넘어가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영원한 하늘 유업이 우리가 가진 소망입니다. 우리가 가진 소망은 단순히 좋은 느낌이나 기대, 손으로 만져지지 않는 형태가 없는 막연한 것들이 아닙니다. 분명히 하늘에 존재하고 우리가 직접 경험할 수 있는 실체입니다. 때가 되었을 때 하늘에 있는 유업이 우리에게 현실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늘을 소망하며 그 나라를 기다립니다. 우리가 받을 유업이 현실이 되는 곳, 천국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을 소망하기에 하늘에서 살게 될 그날을 기다리며 이 땅에서 다르게 살 수 있습니다. 천국에서의 삶을 사모하기에, 그 모든 것을 누리고 기뻐할 날을 기대하기에 지금의 어려움과 괴로움을 참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소망이 이 땅의 삶을 다르게 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소망이 아닙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 땅에 속하지 않은 하늘에 속한 것입니다. 우리 삶의 목표,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이 땅이 아닙니다. 이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을 그냥 지나가고 말 것입니다. 순식간에 끝나고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하늘은 영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늘을 바라보고 하늘을 위해 살아갑니다. 하늘에 속한 유업을 기대하며 하늘의 소망을 품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C.S루이스는 그의 책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소망을 가진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을 떠난다는 뜻이 아닙니다. 역사를 더듬어 보면, 이 세상을 위해 가장 많이 일한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다음 세상에 대해 가장 많이 생각했던 이들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천국을 지향하면 세상을 ‘덤으로’ 얻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지향하면 둘 다 잃을 것입니다.”
역사에 기록될 만한 위대한 일을 했던 인물들이 그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 마음이 천국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세상에서 무기력한 삶을 사는 것은 그만큼 천국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천국을 바라보고 천국을 위해 살면 이 땅의 삶을 자연스럽게 따라올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땅을 목표로 삼고 이 땅을 위해 살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아쉬움과 후회로 이 땅에서의 삶을 마감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소망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소망은 하늘에 속한 것입니다. 하늘 유업입니다. 이 땅에서의 삶은 영원한 하늘을 준비하는 과정입니다. 그러니 이 땅이 아니라 하늘을 바라보시고 하늘에 소망을 두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나에게 있는 소망은 “구원”입니다.
벧전 1:5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베드로는 말세에 얻게 될 구원, 하나님이 예비하신 구원을 말합니다. 우리가 디모데후서에서 말세에 대해서 살펴봤습니다. 말세는 예수님이 오신 때부터 다시 오실 때까지의 기간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보면 오늘 말씀이 무엇을 말하는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말세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경은 똑같이 말세라고 번역되었지만 베드로는 바울이 사용한 단어와는 다른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리고 복수가 아니라 단수로 사용합니다. 기간이 아니라 한 시점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세는 마지막 날, 쉽게 말하면 예수님을 만나는 날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실제로 둘 중에 하나의 말세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때가 되어서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날에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아니면 우리는 죽어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어떤 말세를 경험하게 될지 그날이 언제일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우리가 그날에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미 구원받은 우리가 말세인 그날에 하나님이 예비하신 구원, 그 구원의 완전함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 구원이 어떠한 것인지 그 완벽한 구원을 온전히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는 구원을 받은 자로서 힘든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나의 죄성과 수많은 유혹들, 타락한 세상과 맞서 싸우고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뿐만 아니라 멈출 수 없는 싸움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또한 진리를 왜곡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과 넘쳐나는 거짓들 속에서 우리는 고통당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날에 우리는 그 모든 것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고 구원하고 계시고 또 구원하실 것입니다. 그날에 우리는 그 온전한 구원을 얻을 것이고 그 때까지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보호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그 완벽한 구원을 예비하셔서 그날에 우리에게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이런 상상을 한 번 해보십시오. 여러분이 정말 유명한 식당, 우리나라 최고의 요리사가 있는 식당에 초대가 되었습니다. 식당에는 사람들로 가득하고 식당을 이용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유명한 식당에 내가 갔는데 이미 나를 위한 자리가 예비 되어 있어서 그 예비 된 자리에 앉아서 편하게 식사를 한다는 것, 즐거운 일 아닐까요?
예비 되었다는 것은 선물이며 특권입니다. 예비 되었다는 것은 우리를 안심하게 합니다. 불안하지 않습니다. 고등학생이 입학할 수 있는 대학이 예비 되어 있다면 어떨까요? 취업을 준비하는 청년이 든든한 회사로 취업할 수 있도록 예비 되었다면, 결혼할 배우자가 예비 되어 있다면, 거할 집이 예비 되었다면 어떨까요? 노년에 노후를 보낼 수 있는 안정된 생활이 예비 되어 있다면 어떨까요? 우리는 그런 상황에서 예비된 미래로 인해 만족과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비록 지금 상황이 어렵다 하더라도 잠시 후에 내가 누릴 수 있는 특권으로 인해 나를 위해 예비 된 그 모든 것으로 인해 기뻐하며 인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와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삶이 우리에게 예비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 그 완벽한 구원이 우리에게 예비 되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예비하지 못하고 죽음을 두려워하고 영원을 준비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이것을 준비해두셨습니다. 그 예비 하신 구원은 안전합니다. 취소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보호하고 있기에 누구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영원히 안전한 구원을 보장받았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있는 소망입니다. 나에게 있는 소망입니다.
이렇게 오늘 본문을 살펴봤는데 사실 가장 중요한 것을 남겨두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소망, 이 소망은 하나님이 하신 일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부활하게 하심으로 우리에게 산 소망이 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로, 상속자가 되게 하셔서 유업을 잇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구원을 계획하시고 이루심으로 우리로 구원을 얻게 하셨습니다. 산 소망, 유업, 구원,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로 인해 우리가 얻은 것이 소망입니다. 우리의 공로나 우리의 어떠함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이기에 우리에게 참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찬송합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소망을 가진 자는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하나님을 높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3)
우리가 가진 소망에 대해서 하나님이 하신 그 일을 말하는 것, 그것이 찬송합니다. 하나님이 이 놀라운 일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나 같은 자를 위해서 이 놀라운 일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하신 일을 기억하며 하나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하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찬송합니다. 하나님이 왜 이 일을 하셨습니까? 3절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말합니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3)
하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정말로 긍휼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일을 하신 것은 그 많으신 긍휼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 그 자비하심, 그 인자하심,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생각하며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하나님은 긍휼이 풍성하시기에 그 사랑으로 우리를 위해 이 모든 일을 하셨고, 그 하신 일을 통해 우리가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에게 있는 소망으로 인해 어떤 상황을 만나든지 기뻐하며 우리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습니다. 찬송을 통해 그분을 높이며 그분의 어떠하심을 기억하며 그분이 하신 일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소망은 찬송으로 이어지고 찬송은 다시 소망으로 이어집니다. 그렇게 선한 순환으로 소망과 찬송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하나님께 집중하게 됩니다.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께 집중할 때 우리의 환경이나 상황을 넘어서 우리가 가진 소망으로 인해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게 있는 소망, 그 소망을 주신 하나님을 찬송하십시오. 하나님이 하신 일에 감사하며 그분의 어떠하심을 높이시기 바랍니다. 찬송을 통해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세상과 다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소망이 내게 있습니다. 그분이 우리의 진정한 소망이 되십니다. 다가오는 새해에도 계속해서 이 소망을 붙들고 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 도다 /벧전1:6-9/ 조 정 의 목사
2021-01-26 07:29:05
020년을 마무리하는데 가장 적합한 본문을 찾다가 베드로전 서 1장 6-9절만큼 우리가 겪은 상황을 잘 묘사해주고, 우리에게 꼭 필요한 위로와 소망을 주는 말씀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 비두니아 등 소아시아에 흩어진 성도들에게 편지한다 (1절). 마치 영상을 통 해 흩어진 성도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지금의 상황과 유사하다.
흩어진 성도들은 6절에 나오는 것처럼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 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 다는 이유로 여러 가지 신변의 위험, 경제적 압박, 사회적 비난과 억압을 감내해야 했다. 심지어 목숨을 내놓아야 할 때도 있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지난 한 해를 돌아볼 때 여러 가지 시험을 당 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전무후무한 경험을 하면서 건강, 직장, 교육, 신앙의 위기를 겪었다. 교회에 불어닥친 여러 부정적인 판 단과 조롱도 있었고, 불합리한 정책에 순응하기도 했다.
그런데 사도 베드로는 여러 가지 시험으로 근심하게 된 성도들 이 그 시험 중에 “오히려 크게 기뻐”한다고 말했다. 시험 자체가 기쁘고 즐거운 일이라서가 아니다. 시험이 주는 유익 때문이다. 7절을 보면 시험은 첫째, 성도가 가진 믿음의 확실함, 진실함을 보여준다. 베드로는 용광로에서 금광석을 녹여 순수한 금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비유로 들어 성도의 믿음이 여러 가지 시험에 의해 불순물이 제거되고 가장 순수하고 아름답고 확실한 믿음이 남 게 되었다고 말했다.
금은 이 땅에서나 쓸 데 있지 죽으면 아무런 가치가 없다. 하늘나라 보도블록이 순금 아닌가? 하지만 믿음은 이 땅에서도 아주 귀 한 가치가 있고(‘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히 11:6), 베드로 말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영속 적인 가치를 빛낸다. 그리스도의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는 것이 바로 믿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난 한 해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로 고통스럽고 불편 한 시간이었지만, 동시에 우리의 믿음이 어디에 있는지, 우리 믿음에 섞여 있는 불순물이 무엇이었는지, 순수한 우리의 믿음만 남도록 모든 더러운 것을 제거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연 단의 시간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인생에 어려운 순간에 우리는 그동안 입술로 고백했던 믿음의 현 주소를 발견하게 된다.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불필요한 대상을 버리고 끝까지 붙들 수 있는 대상만 남겨 둔다. 욥이 가진 것을 다 빼앗기고 자식과 건강까지 잃었을 때 하나님께 둔 믿음이 빛 났던 것처럼 시험은 우리가 가진 믿음이 하나님이 주신 물질, 환 경, 사람, 자녀, 건강이 아닌 하나님 그분께 있다는 걸 보여준다.
8절을 보면 시험은 둘째, 성도가 사랑하는 대상이 누구인지 보여준다. 우리는 보통 보이는 것을 의지하고 보이는 것을 바라고 보 이는 것을 기대하며 살지만, 여러 가지 시험은 보이는 것들이 절 대 우리 영혼을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우리 영혼의 영원한 만족 되시는 분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체험으로 알게 한다. 시험으로 연단 된 순수한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그리스 도를 향한 사랑을 더욱더 뜨겁게 만든다. 그리고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며 그리스도를 기다리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올해 겪은 여러 가지 시험은 아무런 의미나 유익이 없는 시험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품고 있는 사랑의 대상이 누구인지, 우리가 보이는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세상과 벗하며 세상을 사랑하며 살고 있는지 아니면 보이지 않지 만 믿음으로 그리스도 예수를 바라보며 사랑하며 사는지 알게 하셨다. 그냥 말로만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을 노래하는지, 아니 면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며 그분을 사모하는지 점검하게 하셨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말이 있다. 우리는 참 오랜 시간 노력하지 않으면 멀어지는 예배를 드렸고, 어쩌면 당 신은 교회의 공적인 예배 공동체의 기능이 약해지면서 개인적으로 주님을 만나는데 게을러지고, 그분과 점점 멀어지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큰 상실감과 그리움 없이 잘 살았다면 여러 가지 시험이 당신에게 그리스도를 향한 처음 사랑을 어디에서 잃었는지 반드시 찾아야 한다고,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심 각한 지경에 이르렀다고 진단을 내리는 방편이 되었을 것이다.
1) 시험은 우리 믿음을 연단 하여 순수한 믿음을 갖게 하고, 2) 우리 사랑을 오직 그리스도 예수로 향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9 절을 보면 셋째,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게 한다. 우리의 소망을 땅이 아닌 하늘, 물질이 아닌 영적인 것에 두게 한다.
베드로가 말한 영혼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으로 신뢰하는 믿음의 결과물(결국)인데, 단지 죽고 나서 최종 목적지가 하늘 나라가 된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 영혼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의를 입고 살아난 것이 구원이다. 하나님의 원수로 살다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구원이다.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되어 있다가 영 원한 화목을 이룬 것이 구원이다. 전적으로 타락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점점 더 그리스도의 형상대로 변화되는 것이 구원이 다. 죄성을 가진 몸을 벗고 그리스도의 새로운 몸을 입으며, 죄 와 오랜 전쟁을 마침내 끝내고 하나님 앞에 온전히 의롭게 된 영 화를 입는 것이 구원이다.
이것이 우리의 참된 소망인데, 우리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같은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조금씩 구원의 소망과 함께 우리의 소망으로 여기려 한다.
여러 가지 시험은 우리의 믿음과 사랑을 단순화시킬 뿐만 아니 라 우리 소망이 그리스도께 있으며 그분이 우리에게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시는 영혼의 구원을 간절히 소망하게 한다.
2020년 한 해 주님은 우리 영혼을 새롭게 하시는 일을 하셨다. 조금 더 주님을 닮게 하셨다. 죄와 싸우게 하셨고 의를 바라게 하셨다. 이 세상이 아닌 하늘나라를 바라보게 하시고, 세상이 주는 것이 아닌 아버지께서 주시는 참된 소망을 기대하게 하셨다.
올해만큼 주 오심을 기다리며 하늘나라를 기대하며 살았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2020년은 이 땅이 어둡고 혼란스러운 만큼 밝고 평안한 천국을 기대했던 해, 질병과 죽음의 공포가 짙어 진 만큼 죽음도 눈물도 없는 하늘나라를 소망했던 해였다.
많은 사람이 지금의 사태가 언제까지 갈 것인지 염려한다. 하지 만 두려워하지 말자. 주님은 절대 실수하지 않으신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반드시 선을 이루신다. 주님은 올해처럼 내년에도 여 러 가지 시험을 통해 우리의 믿음을 더욱 순수하게 만들어 주실 것이다. 여러 가지 시험을 통해 우리의 사랑을 더욱 그분에게만 향하게 만들어 주실 것이다. 우리의 소망을 이 땅이 아닌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에게 두게 만드실 것이다.
2020년 코로나에 우리가 적응하느라 바빴다면, 2021년 새해에는 적극적으로 대응하기를 원한다. 주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하 여 우리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오직 주님 안에 두게 하실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순종으로 동참할 수 있다. 2020년 우리가 노력했던 “코로나 시대 신앙 함께 지키기”를 2021년 새해에는 더 힘껏 실천해보자.
1.매일 꼭 성경 읽고 기도하기: 먼저, 우리의 믿음의 호흡은 기 도다. 우리의 사랑과 소망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과 함께 자란 다. 그러므로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자. 새해 에는 교회 전체가 함께 같은 성경 일독 계획에 따라 성경을 읽고 자 한다. 주일은 말씀을 듣고,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성경 읽기 표에 따라 함께 성경을 읽자. 매달 성경읽기표 엽서 제공, 오디 오 성경, 짧은 묵상 영상 등 다양한 방법으로 함께 성경 읽기를 독려할 계획이다. 매일 적어도 하루를 시작할 때와 마칠 때 주님 과 함께 기도로 교제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자.
2.라이브 예배 꼭 참석하기: 주님은 우리가 함께 예배하는 자리에 계신다. 그러므로 당신이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과 사랑과 소 망을 키우려면 당신은 성도가 함께 예배하는 자리에 나와 주님을 만나야 한다. 주일과 수요일, 현장이든 온라인이든 모이기를 폐하는 나쁜 습관을 버리고, 반드시 참석하자. 피치 못할 사정으로 빠지면, 늦게 라도 반드시 찾아보자. 설교 노트를 제작하여 나 눠줄 것인데, 말씀을 정리하고 순종하며 빠짐없이 예배에 참석하 자.
3.교회 학교 참여하도록 꼭 돌보기: 코로나가 만들어낸 긍정적 인 효과 중 하나는 가정이 자녀의 영적 양육의 주체가 되었다는 것이다. 교회 학교는 일주일에 길어야 1-2시간으로 자녀에게 그 리스도를 소개하는 보조 역할을 했다. 이제 자녀가 가정에 머무는 시간이 대폭 증가하고 교회 학교 기 능이 약화되면서 부모가 주의 교훈으로 자녀를 양육하고 그리스 도를 향한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심어줘야 할 책임이 확실히 부각되었다.
그러므로 최소한 교회에서 제공하는 온라인 교회학교에 적극적으로 참석하도록 아이들을 돌보라. 그리고 가급적 주중에 한 번 자녀들과 함께 가정 예배를 드리는 실천을 해보라. 특별히 2021 년 새해부터 2.5단계와 3단계에서 만찬 예배를 가정별로 드리게 끔 하려고 한다. 1~2단계는 현장 예배를 기본으로 하고, 현장에 서 만찬예배를 드리지만, 2.5단계와 3단계는 교회에서 만찬 예 배를 진행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각 가정별로 만찬 예배를 드리고, 제공하는 말씀 예배에 참여하도록 할 것이다. 자세한 내용 은 가정별로 <가정 예배 가이드>를 나눠줄 것인데, 그 책을 참고하면 된다.
4.칼럼, 좋은 신앙 서적, 주일 오후 성경 공부 꼭 참석하기: 코로나 때문에 폭발적으로 발전하는 산업은 SNS와 미디어 산업이다. 집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사람들이 주로 SNS, 미디어를 많이 소비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는 것과 읽는 것과 듣는것을 주의해야 한다. 재미있고 흥미로운 걸 금지하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믿음을 더 강력하게 해주는 책, 그리스 도를 향한 우리의 사랑을 더욱더 깊어지게 하는 미디어, 그리스 도 안에 둔 우리 소망을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을 많이 소비해야 한 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좋은 글을 찾아 읽어라(칼럼). 미디어 부에서 비치해 두는 좋은 신앙 서적을 빌려 읽어라. 주일 오후 성경 공부(영적으로 양분이 풍부한 양식), 빠짐없이 찾아 들어라. 설교나 강의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유평교회 성도를 위해 따로 불러 세우신 은 사자들을 통해 제공한 양식이니 반드시 그 양식을 챙겨 먹어라. 건강을 위해 비타민과 각종 보조식품을 챙겨 먹는 것처럼, 영혼의 건강을 위해 각종 좋은 양식을 챙겨 먹자.
5.주중에 성도를 위해 기도하고 연락하기:
언택트 시대라고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교제는 절대로 멈출 수 없 다. 우리의 교제 가운데 그리스도를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코 로나 때문에 만나는 것이 조심스럽더라도 우리는 전화, 문자, 메 신저 등으로 얼마든지 서로의 안부를 묻고 서로의 영적 건강을 챙기고 위로와 격려의 말을 건넬 수 있다. 2020년은 물질로 성도를 많이 도울 수 있게 하신 은혜의 해였다. 또한 지역 학교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도 했다.
새해 더욱더 서로 돌보고 사랑하는 우리가 되자. 사실 관심이 없으면 궁금해하지도 않고 연락도 하지 않게 된다. 매주 성도를 위 해 기도 제목을 가지고 기도하면, 그 성도의 안부가 궁금해지고 묻고 싶어 진다. 그러니 먼저 성도를 위해 기도하고, 그리고 우리 에게 주어진 도구와 기술을 사용하여 성도가 그리스도를 더욱 믿고, 사랑하고, 소망할 수 있도록 서로 돕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여러 가지 자원을 궁핍한 성도와 이웃에게 나눠주자.
2020년 어떻게 흘러왔는지 모를 정도로 갑작스럽고 오래 지속된 초유의 사태에 적응하느라 분투하고 고생했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주님은 우리에게 참 많은 은혜를 베푸셨다. 모든 어려움 속에서 주님은 더 많은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2021년 새해 여러 가지 시험이 우리에게 찾아올 때, 주님께서 우리 믿음을 더욱 순결하게 만드시는 은혜의 손길이라 여기자. 주님께서 우리 사랑을 더욱 주님께로만 향하도록 만들고 계신다 고 생각하자. 주님께서 우리 소망을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께 두 도록 역사하신다고 믿자. 신앙 함께 지키기 운동을 통해 우리가 삶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새해 더욱더 그리스도를 강력하게 믿고, 더욱더 그리스도를 뜨겁게 사랑하고, 더욱더 그 리스도 안에 소망을 확실히 두는 유평교회가 되기를 기도한다.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이야기 /벧전1:3-9/ 조정의목사
2020-09-18 11:05:00
매년 12월 25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합니다. 우리가 이날을 기념하는 것은 단지 이순신이나 세종대왕과 같은 위대한 위인의 탄생을 기억하는 수준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탄생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있어 정말로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눅 2:10). 여러분 정말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뻐하십니까?
사도 베드로가 돌아본 소아시아 지역 성도들에게 그리스도는 진정 살아있는 기쁨과 소망이 되셨습니다. 그들 중 누구도 그리스도를 본 적이 없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진실로 사랑했습니다. 여러 가지 시험으로 근심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귀한 믿음이 더욱 연단 되어 그 고난 속에서 오히려 예수님을 더욱 신실하게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했습니다(벧전 1:3-9). 베드로는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고 있는 소망을 “산 소망”(living hope)이라 불렀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 있는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까? 혹시 여러분을 둘러싼 여러 가지 시험과 환경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기쁨을 갉아먹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리스도를 너무 사랑해서 모든 시험을 초월할 정도로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을 느끼고 기뻐하는 삶을 살고 있지 않다면, 12월 25일 우리가 기념하는 그리스도의 탄생은 여러분에게 천사가 크게 외친 것처럼 큰 기쁨의 좋은 소식으로 와닿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기쁨을 회복 시켜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이 얼마나 큰지 다시 한번 맛보아 알게 해주시길 원합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의 은혜가 얼마나 풍성하고 부요한지 깊이 느끼게 하시길 원합니다. 사실 이 구원에 대하여는 우리뿐만이 아니라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벧전 1:10, 12). 그래서 오늘 말씀의 제목이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천사들이 왜 이 구원에 대하여 살펴보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일까요? 인간보다 월등히 뛰어난 지능과 죽지 않고 계속해서 존재하면서 태초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의 역사를, 구원의 섭리를 모두 지켜본 이들이 무엇을 더 간절히 알고 살펴보기 원하는 것일까요?
오늘 우리는 어쩌면 우리가 놓치고 있는, 하지만 천사들은 계속해서 놀라고 기뻐하고 감사하고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발견하기 원합니다. 이 작업을 위해서 성경에 천사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수행하는 장면을 찾아 살펴보겠습니다.
무수히 많은 성경 구절이 있겠지만 세 가지 장면을 선정하여 거기서 배울 수 있는 것을 천사의 관점에서 살펴보겠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작업을 통해 하나님이 죄인인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나 크고 기쁜 소망을 주셨는지 우리가 확실히 보게 되기를 원합니다.
첫 번째로 우리가 살펴볼 장면은 이사야 6장입니다. 우리는 이사야 6장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천사들을 만납니다.
1.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천사들(사 6)
이사야 6장은 주전 740년경,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선지자로 세우시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연대가 추정 가능한 것은 1절에서 분명히 “웃시야 왕이 죽던 해”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인 한 시점에 이사야는 하늘에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주님을 봤습니다. 주님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는데, 그분의 영광이 성전에 충만한 것을 시각적으로 아름답게 묘사한 것입니다.
주님의 곁에는 그분을 모시는 스랍들, 즉 천사들이 있었습니다. 스랍들은 세 쌍의 날개를 가지고 있었는데, 두 날개로 날면서 나머지 네 개의 날개로 둘로는 얼굴을 나머지 둘로는 발을 가리고 서로 이렇게 화답하며 찬양했습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3절).
천사의 날개가 날아다니는 데 필요하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나머지 네 개의 날개로 얼굴과 발을 가리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주님은 모세에게 나타나실 때 신을 벗으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임재하신 그 땅이 거룩하기 때문입니다(출 3:5). 모세는 여호와 앞에 들어가서 나올 때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는데, 이는 모세의 얼굴 광채가 이스라엘 백성을 두렵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출 34:29-35).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그 영광이 모세의 피부에 광채로 묻어난 것만으로도 백성들은 크게 두려워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죄가 조금도 없는 영적인 존재 천사일지라도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너무나 커서, 감히 그분의 얼굴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 발을 드러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날개로 가린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을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자연 만물 앞에 설 때 경외심을 느끼고 그 아름다움에 압도됩니다. 하지만 그때라도 우리는 더욱더 시선을 집중하여 경이로운 만물을 바라보지 눈을 가리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영광 앞에 우리는 눈을 가릴 수밖에 없습니다. 너무나 거룩해서 볼 수 없을 정도로 주님은 위대하고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죄가 없는 천사들도 눈과 발을 가린 채로 세 번이나 강조하여 크게 외친 것입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그분의 영광은 성전뿐만 아니라 그가 만드시고 다스리시는 온 땅에 충만하십니다.
천사들이 얼마나 크게 화답하여 외쳤는지 그 소리가 문지방의 터를 요동시키고 성전을 연기로 가득 채웠습니다(4절).
여러분, 이 광경을 두 눈으로 보고 두 귀로 들었던 이사야의 심정을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지진이 나는 것처럼 터가 크게 요동칩니다. 불이 나듯 연기가 무섭게 성전을 가득 채웁니다. 천사들이 천둥소리처럼 큰 소리로 서로 화답하며 하나님의 거룩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높은 보좌에 천사가 감히 눈을 뜨고 볼 수 없었던 주님이 계십니다. 온 땅에 충만한 영광을 가진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고 이사야의 심령에 어떤 생각이 가득 찼을까요?
5절에 이사야의 입술에서 터져 나온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이제 죽었다’, ‘나는 이제 끝났다’라고 탄식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사야가 말합니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예수님은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5:11). 이것을 생각하면 이사야가 “입술이 부정한 죄인”이라 말한 것은 단지 입술만 부정하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시작되는 온갖 더러운 죄가 입술로 나오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지 확실히 보고 그 앞에서 죄인은 절대로 용납될 수 없으며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한 것입니다.
마치 거룩한 예수님 앞에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한 베드로처럼 이사야는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했습니다(눅 5:8). 눈을 뜨고 감히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하나님의 거룩 앞에서 죄인은 멸망할 수밖에 없음을 직시합니다.
지금 하나님 앞에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 모르는 분들도 언젠가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 앞에 자신을 바라보며 이사야처럼 탄식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이제 망했구나’라고 고백하며 자신의 영원한 운명, 곧 멸망을 직감하게 될 것입니다. 부정한 사람은 결코 거룩한 하나님과 함께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사이를 좁힐 수는 없습니다. 모든 죄인은 영원히 멸망할 운명을 타고났습니다.
그런데 이사야가 자신의 멸망을 직감했던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구원의 손길을 베푸셨습니다. 그리고 그 구원의 역사를 이행한 것이 바로 스랍들 중 하나였습니다. 천사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숯을 가지고 이사야에게 날아와서 이사야의 입술에 대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7절).
하나님께서 은혜의 구원을 천사를 통해 이사야에게 베푸셨습니다. 부정한 사람들 중 하나로 망할 수밖에 없는 죄인을 하나님이 선택하셨고, 그의 죄악을 사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8절에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을 위하여 보내심을 받은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백성들, 마음이 둔하고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긴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선지자로 세워진 것입니다.
자, 여기서 저는 스랍들 중 하나인 이 천사를 주목하기 원합니다. 천사는 두 눈과 발을 가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큰 소리로 찬양했던 존재입니다.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 존재입니다. 그는 어떻게 이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께서 부정한 입술을 가진 죄인들 중 하나를 택하시고 그 말씀을 대신 선포하게 하시는지 이해할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제단에 핀 숯 하나를 가져다가 그의 입술에 대고 모든 죄가 사해졌다고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탄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700여년이 지난 후 천사는 더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됩니다. 그것이 우리가 살펴볼 두 번째 장면입니다. 본문은 누가복음 1장입니다.
2. 하나님의 탄생을 선포하는 천사들(눅 1, 2)
하나님의 곁에서 그분을 섬기면서 중요한 소식을 전달하는 역할을 담당했던 천사가 바로 26절에 나오는 가브리엘입니다. 그는 나사렛이라는 동네에 가서 다윗의 자손 요셉과 약혼한 처녀 마리아에게 하나님의 소식을 전달했습니다. 그가 전달한 내용은 30절부터 나옵니다.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눅 1:30-33)
마리아는 처녀로서 아기를 잉태한다는 사실에 매우 놀랐지만, 천사는 다른 측면에서 놀랐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라고 놀라서 질문했고, 천사는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심으로 나실 것이라고 담담하게 대답합니다(35절). 전능하신 하나님께 하나도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천사가 놀란 부분은 이것입니다. 마리아를 통해 나실 아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거룩하신 이라는 것입니다. 아기 예수께서 사실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무궁한 하나님 나라를 영원히 다스리실 왕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거룩하고 거룩하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입술이 부정한 백성들 중에 거주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것도 인간의 모습으로 나실 수 있단 말입니까? 천사는 이 부분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천사가 받았을 충격, 경이로움을 놓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펴본 첫 번째 장면과 지금 살펴보고 있는 두 번째 장면을 이어주는 본문인 요한복음 12장을 함께 살펴보기 원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얼마나 위대하고 놀라운 일인지 헤아려 볼 수 있을 것입니다(12:37).
요한복음 12장에서 우리가 첫 번째로 살펴본 장면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요 12:41). 여기서 “주”는 대명사 “그”인데(“그의 영광”), 그가 가리키는 분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말 성경은 이 부분을 이렇게 바르게 번역했습니다.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그가 예수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가리켜 이런 예언을 했습니다.”
이사야가 본 거룩하고 거룩하고 거룩한 하나님, 온 땅에 그 영광이 충만한 하나님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과 함께 계신 말씀, 하나님이신 말씀(요 1:1)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1:14). 아버지의 영광, 충만한 은혜와 진리를 가지고 아무도 본 적이 없는 하나님을 나타내신 하나님, 그분이 바로 천사가 아기로 나실 것이라 예언한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러니 천사에게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소식이었겠습니까? 두 눈과 발을 가리고 큰 소리로 거룩하다 찬양했던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께서 가장 연약하고 의존적인 존재인 아기의 모습으로 입술이 부정한 백성들과 함께 거주하러 오신다는 소식을 전하는 천사의 마음을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도대체 왜 하나님은 이렇게 엄청난 일을 하시는 걸까요?
누가복음 2장에서 천사가 선포한 두 번째 메시지에서 우리는 그 대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자기 양 떼를 지키고 있던 날 밤, 목자에게 천사가 나타나 이렇게 외칩니다. “무서워 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10-11절)
예수님은 구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로 이 땅에 나셨습니다(마 1:21). 부정한 백성들 가운데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예수님을 통해 전파되었습니다.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그 모든 죄를 사하십니다. 영접하십니다. 받아주십니다.
이사야의 부정한 입술에 천사를 통하여 제단에 핀 숯을 가져다 대시고는 ‘너의 모든 죄가 사해졌다’고 선언하신 하나님께서, 부정한 백성의 삶을 직접 어루 만지고 그들의 죄를 사하기 위해 이 땅에 가장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낮고 천한 모습으로 나신 것입니다. 그분을 모시고 예배하던 천사가 이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선포할 때 얼마나 감탄했을지 상상해보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가 살펴볼 마지막 장면이 아닙니다. 우리는 천사가 가장 놀라고 어쩌면 그 경이로움에 떨며 바라봤을 세 번째 장면을 살펴볼 것입니다. 그 장면은 누가복음 22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3. 하나님의 죽음을 조력하는 천사들(눅 22:39-46)
누가복음 22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나눈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7-23). 주님은 떡을 가리켜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하시고, 잔을 가리켜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19-20). 마태복음에서는 잔에 대하여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라고 하셨습니다(마 26:28).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마치시고, 예수님은 감람 산 겟세마네 동산이라는 곳에 가셔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습니다(41절).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42절).
제자들과 잔을 나누며 하신 말씀처럼 많은 사람을 위해 피를 흘리게 될 일을 앞두고 예수님은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습니다(막 14:34). 곧 망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죄를 알지도 못하신 예수님이 모든 죄인의 죄를 짊어지실 것이었습니다. 죄를 심판하실 권세가 있는 예수님이 죗값을 치르기 위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에서 끊어지는 고통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말씀에 따르면 예수님은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리셨습니다(히 5:7). 그리고 누가복음 22장 43절 말씀을 보면 바로 그때,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였습니다.
여러분 천사의 관점에서 생각해보십시오. 그분은 거룩하고 거룩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영광이 성전에 가득하고, 온 땅에 충만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너무나 거룩하여 눈을 가리고 발을 가리고 쉼 없이 찬양을 돌리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그분 앞에서 입술이 부정한 백성은 망하게 될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거룩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망하게 될 인간의 모습으로 아버지께 울부짖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부정한 백성의 입술에 제단에 핀 숯을 천사를 통해 전달하여 죄를 사하신다 선포하셨지만, 예수님은 직접 부정한 백성들 중에 거주하면서 그들을 대신하여 죽임당할 제단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죄인이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거룩하고 높은 보좌에서 직접 내려오셔서 죄인의 모습으로 죄인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모두 그 몸으로 받으시고, 부정한 백성을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할 백성으로 삼아주셨습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그 일을 행하기 앞서 예수님은 아버지께 심한 통곡으로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천사가 함께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저는 바로 이것이 천사가 그토록 구원에 대하여 간절히 살펴보기를 원하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거룩하고 영화로우신 하나님께서 그 높은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셔서 부정한 백성들과 함께 거주하며 그들의 죄를 대신 지고 죽으셨던 그 크고 깊은 겸손과 낮아지심,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크시기에, 높은 하늘에서 낮은 땅까지 자기를 낮추신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천사들은 계속해서 묵상하고 헤아리고 그 놀라운 은혜에 감탄하며 찬양하기 원하는 것입니다(시 103:11).
곧 있으면 예수님의 나심을 기념하는 성탄절입니다. 천사들은 예수님의 나심을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눅 2:10). 수많은 천군과 천사가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며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외쳤습니다(눅 2:14).
저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진정 주님의 나심을 큰 기쁨의 좋은 소식으로 여기십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셔서 하나님이신 자기 아들을 부정한 우리와 같은 모습이 되게 하시고 부정한 우리를 대신하여 죽을 제물로 삼으셔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영원한 평화를 선언하셨다는 것에 관하여 천사처럼 간절히 살펴보기 원하십니까? 신령과 진정으로 찬양하고 예배하기 원하십니까?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성탄절을 늦잠 자는 날이나 아이들 선물을 사주는 날, 연인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날, 나아가 좋은 일이지만 어려운 이웃을 돕는 날로만 기억하지 마십시오. 가족과 함께 모여 빌립보서 2장 6-8절 말씀을 간절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의 영광을 천사처럼 바라보고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예수님을 찬양하십시오.
자기를 비워 사람들과 같이 되신, 종이 되신 주님을 생각하십시오. 사람으로 오신 주님을 선포하며 찬양했던 천사들처럼 부정한 백성과 함께하러 오신 임마누엘 하나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신, 십자가에 우리를 대신하여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깊이 묵상하십시오. 아버지께 울부짖는 예수님과 함께했던 천사처럼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높은 하늘에서 낮은 땅까지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님의 크신 인자하심을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신령과 진정으로 그분을 경외하고 높이시기 바랍니다.
지금 천사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거룩하신 보좌에 계신 예수님을 찬양했고, 이 땅에 아기로 나신 예수님을 선포했으며, 십자가 앞에 울부짖던 예수님과 함께 했던 천사들, 그들은 지금 예수님 앞에서 무얼 하고 있을까요? 계시록 5장 11절에 보면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인 천사들이 큰 음성으로 예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계 5:12)
계시록 말씀에 따르면 이 천사들의 큰 찬양에 함께 동참하여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예수님을 이렇게 찬양합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계 5:13).
천사들의 찬양소리에 동참하여 우리는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 아버지와 보좌 우편에 계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 세세토록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오는 성탄절 우리가 하늘 보좌 앞에서 영원히 하게 될 그 일을 가족과 함께, 교회와 함께, 또 천사들과 함께 드리기 원합니다.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자기를 낮추신 예수님만 온전히 높여드리는 성탄절이 되기를,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이야기 /벧전1:3-9/ 조정의목사
2020-09-18 11:05:00
매년 12월 25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합니다. 우리가 이날을 기념하는 것은 단지 이순신이나 세종대왕과 같은 위대한 위인의 탄생을 기억하는 수준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탄생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있어 정말로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눅 2:10). 여러분 정말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뻐하십니까?
사도 베드로가 돌아본 소아시아 지역 성도들에게 그리스도는 진정 살아있는 기쁨과 소망이 되셨습니다. 그들 중 누구도 그리스도를 본 적이 없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진실로 사랑했습니다. 여러 가지 시험으로 근심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귀한 믿음이 더욱 연단 되어 그 고난 속에서 오히려 예수님을 더욱 신실하게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했습니다(벧전 1:3-9). 베드로는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고 있는 소망을 “산 소망”(living hope)이라 불렀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 있는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까? 혹시 여러분을 둘러싼 여러 가지 시험과 환경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기쁨을 갉아먹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리스도를 너무 사랑해서 모든 시험을 초월할 정도로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을 느끼고 기뻐하는 삶을 살고 있지 않다면, 12월 25일 우리가 기념하는 그리스도의 탄생은 여러분에게 천사가 크게 외친 것처럼 큰 기쁨의 좋은 소식으로 와닿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기쁨을 회복 시켜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이 얼마나 큰지 다시 한번 맛보아 알게 해주시길 원합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의 은혜가 얼마나 풍성하고 부요한지 깊이 느끼게 하시길 원합니다. 사실 이 구원에 대하여는 우리뿐만이 아니라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벧전 1:10, 12). 그래서 오늘 말씀의 제목이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천사들이 왜 이 구원에 대하여 살펴보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일까요? 인간보다 월등히 뛰어난 지능과 죽지 않고 계속해서 존재하면서 태초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의 역사를, 구원의 섭리를 모두 지켜본 이들이 무엇을 더 간절히 알고 살펴보기 원하는 것일까요?
오늘 우리는 어쩌면 우리가 놓치고 있는, 하지만 천사들은 계속해서 놀라고 기뻐하고 감사하고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발견하기 원합니다. 이 작업을 위해서 성경에 천사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수행하는 장면을 찾아 살펴보겠습니다.
무수히 많은 성경 구절이 있겠지만 세 가지 장면을 선정하여 거기서 배울 수 있는 것을 천사의 관점에서 살펴보겠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작업을 통해 하나님이 죄인인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나 크고 기쁜 소망을 주셨는지 우리가 확실히 보게 되기를 원합니다.
첫 번째로 우리가 살펴볼 장면은 이사야 6장입니다. 우리는 이사야 6장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천사들을 만납니다.
1.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천사들(사 6)
이사야 6장은 주전 740년경,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선지자로 세우시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연대가 추정 가능한 것은 1절에서 분명히 “웃시야 왕이 죽던 해”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인 한 시점에 이사야는 하늘에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주님을 봤습니다. 주님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는데, 그분의 영광이 성전에 충만한 것을 시각적으로 아름답게 묘사한 것입니다.
주님의 곁에는 그분을 모시는 스랍들, 즉 천사들이 있었습니다. 스랍들은 세 쌍의 날개를 가지고 있었는데, 두 날개로 날면서 나머지 네 개의 날개로 둘로는 얼굴을 나머지 둘로는 발을 가리고 서로 이렇게 화답하며 찬양했습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3절).
천사의 날개가 날아다니는 데 필요하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나머지 네 개의 날개로 얼굴과 발을 가리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주님은 모세에게 나타나실 때 신을 벗으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임재하신 그 땅이 거룩하기 때문입니다(출 3:5). 모세는 여호와 앞에 들어가서 나올 때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는데, 이는 모세의 얼굴 광채가 이스라엘 백성을 두렵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출 34:29-35).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그 영광이 모세의 피부에 광채로 묻어난 것만으로도 백성들은 크게 두려워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죄가 조금도 없는 영적인 존재 천사일지라도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너무나 커서, 감히 그분의 얼굴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 발을 드러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날개로 가린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을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자연 만물 앞에 설 때 경외심을 느끼고 그 아름다움에 압도됩니다. 하지만 그때라도 우리는 더욱더 시선을 집중하여 경이로운 만물을 바라보지 눈을 가리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영광 앞에 우리는 눈을 가릴 수밖에 없습니다. 너무나 거룩해서 볼 수 없을 정도로 주님은 위대하고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죄가 없는 천사들도 눈과 발을 가린 채로 세 번이나 강조하여 크게 외친 것입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그분의 영광은 성전뿐만 아니라 그가 만드시고 다스리시는 온 땅에 충만하십니다.
천사들이 얼마나 크게 화답하여 외쳤는지 그 소리가 문지방의 터를 요동시키고 성전을 연기로 가득 채웠습니다(4절).
여러분, 이 광경을 두 눈으로 보고 두 귀로 들었던 이사야의 심정을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지진이 나는 것처럼 터가 크게 요동칩니다. 불이 나듯 연기가 무섭게 성전을 가득 채웁니다. 천사들이 천둥소리처럼 큰 소리로 서로 화답하며 하나님의 거룩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높은 보좌에 천사가 감히 눈을 뜨고 볼 수 없었던 주님이 계십니다. 온 땅에 충만한 영광을 가진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고 이사야의 심령에 어떤 생각이 가득 찼을까요?
5절에 이사야의 입술에서 터져 나온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이제 죽었다’, ‘나는 이제 끝났다’라고 탄식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사야가 말합니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예수님은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5:11). 이것을 생각하면 이사야가 “입술이 부정한 죄인”이라 말한 것은 단지 입술만 부정하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시작되는 온갖 더러운 죄가 입술로 나오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지 확실히 보고 그 앞에서 죄인은 절대로 용납될 수 없으며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한 것입니다.
마치 거룩한 예수님 앞에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한 베드로처럼 이사야는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했습니다(눅 5:8). 눈을 뜨고 감히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하나님의 거룩 앞에서 죄인은 멸망할 수밖에 없음을 직시합니다.
지금 하나님 앞에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 모르는 분들도 언젠가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 앞에 자신을 바라보며 이사야처럼 탄식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이제 망했구나’라고 고백하며 자신의 영원한 운명, 곧 멸망을 직감하게 될 것입니다. 부정한 사람은 결코 거룩한 하나님과 함께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사이를 좁힐 수는 없습니다. 모든 죄인은 영원히 멸망할 운명을 타고났습니다.
그런데 이사야가 자신의 멸망을 직감했던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구원의 손길을 베푸셨습니다. 그리고 그 구원의 역사를 이행한 것이 바로 스랍들 중 하나였습니다. 천사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숯을 가지고 이사야에게 날아와서 이사야의 입술에 대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7절).
하나님께서 은혜의 구원을 천사를 통해 이사야에게 베푸셨습니다. 부정한 사람들 중 하나로 망할 수밖에 없는 죄인을 하나님이 선택하셨고, 그의 죄악을 사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8절에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을 위하여 보내심을 받은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백성들, 마음이 둔하고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긴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선지자로 세워진 것입니다.
자, 여기서 저는 스랍들 중 하나인 이 천사를 주목하기 원합니다. 천사는 두 눈과 발을 가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큰 소리로 찬양했던 존재입니다.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 존재입니다. 그는 어떻게 이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께서 부정한 입술을 가진 죄인들 중 하나를 택하시고 그 말씀을 대신 선포하게 하시는지 이해할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제단에 핀 숯 하나를 가져다가 그의 입술에 대고 모든 죄가 사해졌다고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탄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700여년이 지난 후 천사는 더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됩니다. 그것이 우리가 살펴볼 두 번째 장면입니다. 본문은 누가복음 1장입니다.
2. 하나님의 탄생을 선포하는 천사들(눅 1, 2)
하나님의 곁에서 그분을 섬기면서 중요한 소식을 전달하는 역할을 담당했던 천사가 바로 26절에 나오는 가브리엘입니다. 그는 나사렛이라는 동네에 가서 다윗의 자손 요셉과 약혼한 처녀 마리아에게 하나님의 소식을 전달했습니다. 그가 전달한 내용은 30절부터 나옵니다.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눅 1:30-33)
마리아는 처녀로서 아기를 잉태한다는 사실에 매우 놀랐지만, 천사는 다른 측면에서 놀랐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라고 놀라서 질문했고, 천사는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심으로 나실 것이라고 담담하게 대답합니다(35절). 전능하신 하나님께 하나도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천사가 놀란 부분은 이것입니다. 마리아를 통해 나실 아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거룩하신 이라는 것입니다. 아기 예수께서 사실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무궁한 하나님 나라를 영원히 다스리실 왕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거룩하고 거룩하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입술이 부정한 백성들 중에 거주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것도 인간의 모습으로 나실 수 있단 말입니까? 천사는 이 부분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천사가 받았을 충격, 경이로움을 놓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펴본 첫 번째 장면과 지금 살펴보고 있는 두 번째 장면을 이어주는 본문인 요한복음 12장을 함께 살펴보기 원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얼마나 위대하고 놀라운 일인지 헤아려 볼 수 있을 것입니다(12:37).
요한복음 12장에서 우리가 첫 번째로 살펴본 장면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요 12:41). 여기서 “주”는 대명사 “그”인데(“그의 영광”), 그가 가리키는 분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말 성경은 이 부분을 이렇게 바르게 번역했습니다.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그가 예수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가리켜 이런 예언을 했습니다.”
이사야가 본 거룩하고 거룩하고 거룩한 하나님, 온 땅에 그 영광이 충만한 하나님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과 함께 계신 말씀, 하나님이신 말씀(요 1:1)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1:14). 아버지의 영광, 충만한 은혜와 진리를 가지고 아무도 본 적이 없는 하나님을 나타내신 하나님, 그분이 바로 천사가 아기로 나실 것이라 예언한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러니 천사에게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소식이었겠습니까? 두 눈과 발을 가리고 큰 소리로 거룩하다 찬양했던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께서 가장 연약하고 의존적인 존재인 아기의 모습으로 입술이 부정한 백성들과 함께 거주하러 오신다는 소식을 전하는 천사의 마음을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도대체 왜 하나님은 이렇게 엄청난 일을 하시는 걸까요?
누가복음 2장에서 천사가 선포한 두 번째 메시지에서 우리는 그 대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자기 양 떼를 지키고 있던 날 밤, 목자에게 천사가 나타나 이렇게 외칩니다. “무서워 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10-11절)
예수님은 구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로 이 땅에 나셨습니다(마 1:21). 부정한 백성들 가운데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예수님을 통해 전파되었습니다.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그 모든 죄를 사하십니다. 영접하십니다. 받아주십니다.
이사야의 부정한 입술에 천사를 통하여 제단에 핀 숯을 가져다 대시고는 ‘너의 모든 죄가 사해졌다’고 선언하신 하나님께서, 부정한 백성의 삶을 직접 어루 만지고 그들의 죄를 사하기 위해 이 땅에 가장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낮고 천한 모습으로 나신 것입니다. 그분을 모시고 예배하던 천사가 이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선포할 때 얼마나 감탄했을지 상상해보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가 살펴볼 마지막 장면이 아닙니다. 우리는 천사가 가장 놀라고 어쩌면 그 경이로움에 떨며 바라봤을 세 번째 장면을 살펴볼 것입니다. 그 장면은 누가복음 22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3. 하나님의 죽음을 조력하는 천사들(눅 22:39-46)
누가복음 22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나눈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7-23). 주님은 떡을 가리켜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하시고, 잔을 가리켜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19-20). 마태복음에서는 잔에 대하여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라고 하셨습니다(마 26:28).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마치시고, 예수님은 감람 산 겟세마네 동산이라는 곳에 가셔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습니다(41절).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42절).
제자들과 잔을 나누며 하신 말씀처럼 많은 사람을 위해 피를 흘리게 될 일을 앞두고 예수님은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습니다(막 14:34). 곧 망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죄를 알지도 못하신 예수님이 모든 죄인의 죄를 짊어지실 것이었습니다. 죄를 심판하실 권세가 있는 예수님이 죗값을 치르기 위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에서 끊어지는 고통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말씀에 따르면 예수님은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리셨습니다(히 5:7). 그리고 누가복음 22장 43절 말씀을 보면 바로 그때,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였습니다.
여러분 천사의 관점에서 생각해보십시오. 그분은 거룩하고 거룩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영광이 성전에 가득하고, 온 땅에 충만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너무나 거룩하여 눈을 가리고 발을 가리고 쉼 없이 찬양을 돌리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그분 앞에서 입술이 부정한 백성은 망하게 될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거룩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망하게 될 인간의 모습으로 아버지께 울부짖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부정한 백성의 입술에 제단에 핀 숯을 천사를 통해 전달하여 죄를 사하신다 선포하셨지만, 예수님은 직접 부정한 백성들 중에 거주하면서 그들을 대신하여 죽임당할 제단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죄인이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거룩하고 높은 보좌에서 직접 내려오셔서 죄인의 모습으로 죄인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모두 그 몸으로 받으시고, 부정한 백성을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할 백성으로 삼아주셨습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그 일을 행하기 앞서 예수님은 아버지께 심한 통곡으로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천사가 함께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저는 바로 이것이 천사가 그토록 구원에 대하여 간절히 살펴보기를 원하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거룩하고 영화로우신 하나님께서 그 높은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셔서 부정한 백성들과 함께 거주하며 그들의 죄를 대신 지고 죽으셨던 그 크고 깊은 겸손과 낮아지심,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크시기에, 높은 하늘에서 낮은 땅까지 자기를 낮추신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천사들은 계속해서 묵상하고 헤아리고 그 놀라운 은혜에 감탄하며 찬양하기 원하는 것입니다(시 103:11).
곧 있으면 예수님의 나심을 기념하는 성탄절입니다. 천사들은 예수님의 나심을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눅 2:10). 수많은 천군과 천사가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며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외쳤습니다(눅 2:14).
저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진정 주님의 나심을 큰 기쁨의 좋은 소식으로 여기십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셔서 하나님이신 자기 아들을 부정한 우리와 같은 모습이 되게 하시고 부정한 우리를 대신하여 죽을 제물로 삼으셔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영원한 평화를 선언하셨다는 것에 관하여 천사처럼 간절히 살펴보기 원하십니까? 신령과 진정으로 찬양하고 예배하기 원하십니까?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성탄절을 늦잠 자는 날이나 아이들 선물을 사주는 날, 연인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날, 나아가 좋은 일이지만 어려운 이웃을 돕는 날로만 기억하지 마십시오. 가족과 함께 모여 빌립보서 2장 6-8절 말씀을 간절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의 영광을 천사처럼 바라보고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예수님을 찬양하십시오.
자기를 비워 사람들과 같이 되신, 종이 되신 주님을 생각하십시오. 사람으로 오신 주님을 선포하며 찬양했던 천사들처럼 부정한 백성과 함께하러 오신 임마누엘 하나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신, 십자가에 우리를 대신하여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깊이 묵상하십시오. 아버지께 울부짖는 예수님과 함께했던 천사처럼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높은 하늘에서 낮은 땅까지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님의 크신 인자하심을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신령과 진정으로 그분을 경외하고 높이시기 바랍니다.
지금 천사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거룩하신 보좌에 계신 예수님을 찬양했고, 이 땅에 아기로 나신 예수님을 선포했으며, 십자가 앞에 울부짖던 예수님과 함께 했던 천사들, 그들은 지금 예수님 앞에서 무얼 하고 있을까요? 계시록 5장 11절에 보면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인 천사들이 큰 음성으로 예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계 5:12)
계시록 말씀에 따르면 이 천사들의 큰 찬양에 함께 동참하여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예수님을 이렇게 찬양합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계 5:13).
천사들의 찬양소리에 동참하여 우리는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 아버지와 보좌 우편에 계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 세세토록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오는 성탄절 우리가 하늘 보좌 앞에서 영원히 하게 될 그 일을 가족과 함께, 교회와 함께, 또 천사들과 함께 드리기 원합니다.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자기를 낮추신 예수님만 온전히 높여드리는 성탄절이 되기를,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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