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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베드로서 설교 모음

베드로전서 2:1 - 10절 설교 모음

by Jessi J 2024. 9.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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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 /벧전2:1-/ 이동원목사

2014-12-01 20:28:44

 

지난 이웃 사랑 축제 기간에 가수 이 상우 형제가 와서 간증하며 발달 장애로 고생하는 아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어 우리 모두의 마음에 안타까움의 공감을 남겼습니다. 이 상우 부부는 자신의 아들 승훈이가 30개월이 지날 무렵부터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는 것을 인지했다고 합니다. 이 아이는 아빠라는 말도 제대로 발음을 못하고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길로 뛰어나가는 등의 감정 조절을 못하는 현상을 보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혼자 옷 갈아입는데 만 만 6

 

, 신발 갈아 신는 것을 배우는데 만 5개월이 걸렸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발달 장애’(development disability)란 정신이나 신체가 <나이만큼> 발달하지 않은 미숙한 상태를 일컫는 장애를 칭하는 표현입니다. 이런 아이들로 인

 

하여 그 부모들이 겪는 아픔은 헤아리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영적 성숙의 과정에도 발달 장애가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영적으로 성장해야 할 나이가 되었는데도 성장하지 못하는 이들로 인하여 하나님이 그리고 영적 지도자들이 아파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시나요? 오늘 날의 교회

 

내에는 교회 생활의 이력서와 상관없이 발달 장애를 겪는 수많은 영적 미숙아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한국 교회가 많은 문제를 직면하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이 두 가

 

지에서 파생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하나는 소위 명목상의 기독교인’(nominal Christian)들의 문제즉 이름만 교인이지 거듭남의 확신도, 구원의 확신도 없이 교회만 출석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것, 그리고 둘째는 구원은 받았지만

 

전혀 영적으로 자라지 못한 미성숙한 교인들’(immature Christians)혹은 육신적 크리스쳔들’(carnal Christians)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한국 교회의 건강을 위협하는 요인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 그러면 우리가 참으로 영적으로 자라가기 위해서 해야 할일은 무엇이겠습니까? 누구보다 영적 기복이 심한 믿음의 여정을 지나왔던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의 말씀으로 권면을 받고자 합니다. 그리고 지난 두 주간 이웃 사랑

 

축제를 통해 예수님에 대한 믿음의 반응을 보인 분들에게도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 믿음이 자라 가야 한다는 성숙의 과제가 앞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십시오. , 그러면 영적 발달 장애를 극복하고 영적 성숙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아보고자 합니다.

 

 

 

1.‘영적 아이 됨의 상태를 인지해야 합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자라가기 위해서는 우리는 아직 자라지 못한 자라가야 할 아이이구나 하는 인식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벧전2:2의 본문 말씀을 다시 읽겠습니다. “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

 

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여기서 사도 베드로는 우리가 먼저 영적으로는 젖을 먹고 자라가야 할 갓난아기임을 인식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바울의 교훈을 살펴볼까요? 고전3:1-2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2)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

 

도 못하리라바울도 베드로와 동일하게 그리스도안에 아이들’(babes,in Christ)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이런 영적 아이들의 특성은 무엇일까요? 성경의 기자들은 두 가지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아직 말씀을 잘 먹지 못하고 소화하지 못하고 있다는 영적인 영양의 결핍(말씀의 무지)을 지적하고 또 하나는 삶의 관

 

점에서 접근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아직도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고 늘 시기하고 미워하고 싸우며 산다면 그는 교회 생활의 햇수나 직책과 상관없이 아직도 영적인 미숙아라는 것입니다. 고전3:3을 보십시오. “너희는 아

 

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본문 벧전2:1의 말씀으로 돌아와 보십시오. “그러므로(너희가 거듭났다면벧전1:23)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그러므로 우리 안에 아직 이런 불신자로 살던 시절의 삶의 관행이었던 미움과 거짓, 시기와 질투가 남아 있다면 나는 영적인 아이임을 알고 영적 성숙의 필요를 절감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필요의 각성이야 말로 바로 영적 성숙의 출발점이 된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2.‘영적인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은혜는 기독교 신앙의 가장 놀라운 특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 우리 교회를 다녀간 오늘의 기독교를 대변하는 세계적 작가인 필립 얀시는 그의 책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에서 <은혜>는 성육신이나 부활보다 더 중요한

 

기독교 신앙의 특성이라고 주장합니다. 은혜를 가르치는 종교는 아무데도 없다고 말합니다.(불교의 고행, 힌두교의 카르마-업보, 유대교의 언약, 이슬람교의 법전등-모두 인간의 합당한 노력으로 신의 호의를 입는 것) ‘은혜의 뜻

 

이 무엇입니까?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도 일방적으로 조건 없이 베풀어지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 사랑, 이 은혜로 구원받아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2:8-9의 말씀을 기억하시지요?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

 

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라그렇습니다. 우리 중에 행위로 구원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종교 개혁자들은 이것을 오직 은혜’(sola gratia, only grace)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사도 베드로는 우리가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처럼 우리의 영적 성숙도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불가능하

 

다고 가르칩니다.

 

 

 

벧후3:18은 사도 베드로의 마지막 유훈 같은 그의 마지막 당부의 말씀입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 그래서 구원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구원은 가장 근본적이고도 중요한

 

은혜이지만 구원이 은혜의 전부는 아닙니다. 그리스도안에는 온갖 은혜가 충만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건강한 그리스도인에게는 이런 은혜의 목마름과 배고픔이 있습니다. <나는 더 이상 은혜를 사모하

 

지 않는다>-이것은 우리가 병든 증거입니다. 마치 병든 사람이 식욕을 상실하듯 영적 건강을 상실하면 은혜를 사모함이 없어집니다. 그의 영혼은 메마른 사막이 되는 것입니다. 은혜는 다시 사막에 생명의 강이 흐르게 하는 것입니

 

. 그리고 성경은 이 은혜의 유일한 통로가 기도라고 가르칩니다. 4:16의 말씀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우리는 늘

 

주님 앞에 서기에 부족한 존재이지만 이 기도로 우리를 도우시는 은혜를 체험하고 이 은혜를 체험하면서 영적으로 자라가는 것입니다.

 

 

 

3.‘영적인 지식을 학습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도 베드로는 이 은혜와 함께 우리의 영적 성숙의 절대적인 요소로 지식을 강조합니다. 물론 이 지식은 영적 지식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다시 벧후3:18을 읽어 보십시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영적 성숙의 본질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의 삶의 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가를 알아가며 그를 닮아

 

가는 과정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지식을 알려주는 책은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인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것을 순전하고 신령한 젖이라고 합니다. 어린 아기가 좋은 젖을 먹고 자라는 것-그것은

 

필수적인 성장의 조건입니다. 다시 벧전2:2을 읽어 보십시오.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도록(구원의 완성)자라게 하려 함이라

 

 

 

건강한 아기는 엄마에게 젖을 달라고 보챕니다. 엄마의 젖은 아기의 생명 줄이요 건강 줄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직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목마름과 배고픔을 갖고 있습니까? 우리 교회는 영적 아기들의 성숙을 도울 목적으로

 

체계적인 성경 공부반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번에 이웃 사랑축제에서 믿음의 여정을 시작하기로 결심하신 분들이 새 생명반에서 시작하여 체계적으로 영적 지식을 섭취하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우리 교회

 

예배에만 참석하고 성경 공부 반에 참석 못한 분들에게 더 이상 늦추지 마시고 이제라도 시작하시기를 권면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성경 공부 없이 예배에만 참석하는 교회 생활 40년보다 성경연구를 통한 체계적인 배움의 4개월이

 

믿음 생활에 차라리 더 실제적인 도움이 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에서 성경 공부를 우리 교회 일군세우기와 연관시키다 보니 이런 의외의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봅니다. 제직이 되기 위한 목적으로 소위 필수적인 성경 공부 반은 이수하는데 이것이 끝나고 나면 더 이상의 성경 공

 

부를 졸업해 버리는 분들이 일부 있습니다. 불행하고도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예수 믿고 지난 45년간 성경공부를 해오고 있고 신학공부만 10년을 했지만 저에게 성경은 여전히 신비로운 책이고 여전히 저의 영적 갈

 

증의 대상입니다. 저에게 성경은 퍼내고 또 퍼내도 마르지 않는 생수의 우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QT하며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입니다. 나는 이 가을 우리 교회 모

 

든 성도들이 다시 하나님의 은혜에 목말라하며 다시 기도의 무릎을 꿇고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지나간 역사에서 모든 위대한 부흥은 성도들이 진실로 기도의 무릎을 꿇기 시작하고 성경 연구를 위해

 

말씀에 대한 진지한 탐구를 시작할 때 일어났습니다. 그럴 때 가정이 새로워졌습니다. 교회가 새로워졌습니다. 사회가 새로워졌습니다. 한 민족이 새로워지고 다른 민족 다른 나라에도 영향을 끼칩니다.

 

 

 

여러분은 혹시 에반 로버츠(Evan Roberts)라는 이름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는 20세기 초 영국 웨일즈에서 일어난 거대한 부흥운동의 주역이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20대 청년 시절 주일 학교 부장으로 봉사하며 한 집회에

 

참석했다가 나를 굴복하게 하소서라는 주제에 깊은 감동을 받고 말씀과 기도하는 일에 온전히 굴복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많이 배우지도 못한 광부의 아들이었지만 기도하는 중에 너를 통해 10만 명의 불신자들이 주께 돌아올

 

것이라는 환상을 받습니다. 그가 섬기던 작은 교회에서 17명과 더불어 시작한 기도회의 불길은 웨일즈 전역에 영적 부흥의 불길을 퍼트리며 그가 본 환상 그대로 웨일즈에서만 10만 명의 불신자들이 주께 돌아오게 되었고 이 영적

 

각성의 소식과 부흥의 불길은 전 세계로 퍼지게 됩니다. 1904년에 일어 난 일입니다. 이 웨일즈 부흥 운동의 현장을 방문하여 목격한 이 중에 하워드 존스톤(Howard A. Johnston,NY)박사라는 분이 있었는데 19069월 한국을 찾

 

아와 선교사 모임에서 웨일즈 부흥의 소식을 전하게 됩니다. 이어서 그는 10월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말씀을 전하며 에반 로버츠를 이야기하며 에반 로버츠처럼 부흥의 도구로 쓰임 받을 한국인은 손을 들어보라고 말합니다. 이 때

 

손을 든 사람이 길선주 장로(다음해 목사가 됨)였고 그가 다음에 1907년 평양 대 부흥 운동의 주역이 된 것입니다.

 

 

 

이 위대한 20세기 초의 세계적 부흥 운동의 단초는 26살 먹은 한 청년의 단순한 기도와 결심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주님, 제가 온전히 주님께 굴복된 삶을 살게 하소서라는 기도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말씀과 기도

 

에 온전히 순복하는 삶을 살기로 결심하고 성경을 공부하고 참으로 주 앞에 엎드려 기도하기로 결심한 다면 우리는 다시 한번 우리가 그토록 목마르게 고대하는 영적 부흥과 영적 성숙을 경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구원 받은 자들의 책임 /2:10; 벧전2:1-3/ 이동원목사

2014-11-30 16:11:02

 

인터넷에 "물과 숲의 집에서 태어난 아이"라는 제목으로 올려진 집에서 수중분만으로 아기를 출산한 엄마의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새삼스레 태어나는 생명의 신비를 경이롭게 느끼게 해주는 글이었습니다. 한 대목을 읽어보겠습니다.

 

"설 하루전 새벽 2시부터 시작된 진통은 점점 간격을 좁히고 격해져 왔습니다. 혼자 조용히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방을 정돈하고 집안을 천천히 걸어다니다가 진통이 10분 간격으로 좁아진후 선생님께 연락을 드렸습니다.

 

함께 있던 남편은 통증의 파도가 밀어칠 때마다 등줄기를 쓸어내리며 손을 잡아 마음을 다스려 주었습니다. 다시한번 청소를 마친 방에 남편은 촛불을 밝히고 아기를 위해 준비해둔 음악을 틀어주었습니다.--어머니는 이웃으로부터 물려받아 삶고 빨아둔 정갈한 아기 옷가지며 이불들을 꺼내 아기를 맞을 차비를 해주셨습니다.

 

진통은 30분에서 10분으로, 이내 2-3분 간격으로 좁아졌고 견디기 힘든 강도로 몰아쳤습니다. --새벽4시 부천에서 구파발까지 달려온 선생님과 함께 식구들은 수중 분만을 위해 방에 튜브를 설치하고 더운 물을 붓기 시작했습니다.

준비해 두었던 숯을 넣고 깨끗이 삶아 두었던 옷으로 갈아입은 후 남편과 함께 물속에서 남은 진통의 시간을 맞이하기 시작했습니다.

 

조금만 정신을 놓치면 아래로 힘이 쏠리고 마는 통증의 파도, --고통이 밀려오는 그 순간 자궁이 아기를 밀어내는 그 힘에 몸을 내어 맡기고 깊은숨을 쉬라고. 그렇듯 아기의 속도와 몸의 속도를 따라가면 물속에서 충분히 이완된 몸에 어떤 열상도 없이 아기가 태어난다고 선생님은 천천히 우리를 이끌어 주셨습니다.

 

혼신의 힘을 다해야 하는 생의 순간, 가장 어려운 일은 바로 혼신의 힘을 다해 깨어 있어, 헛된 힘을 빼는 일이었습니다. 동이 환하게 터오른 아침 740분 몸이 터져 나가는 마지막 진통과 함께 피 한방울 흘리지 않은 맑은 물속으로 아기의 얼굴이, 그 작은 몸이 떠올랐습니다.

 

아빠의 손으로 아이를 건져 아직도 힘있게 펄떡이는 탯줄 그대로 품에 안았습니다. 배운적이 없는 일이건만 이번엔 엄마의 품에 안기자마자 젖을 빠는 아기의 생명력, 여전히 탯줄로 연결되어 있는 생명의 신비, 천천히 아기를 쓸어 안아주며 그 신비의 순간을 촘촘히 느껴보았습니다.

 

따뜻하고 맑은 물속에서 네 식구가 함께 아기의 첫 걸음을 축복하던 그 아침은 탄생의 축제였습니다. 생애 그보다 더 큰 축복과 축하가 또 있을까요?"

우리는 지난 주일부터 수요일까지 동일한 감격을 누릴수가 있었습니다. 이웃 사랑축제를 통해서 이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한 새 생명들이 태어난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의 새생명을 받고 태어난 사건을 가르쳐 성경은 구원의 선물을 받은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오늘의 본문 엡2:10에서 바울사도는 구원받은 것을 다른 말로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라고 기록합니다.

 

그리스도안에 새 피조물로 태어난 것입니다. 새로운 작품이 된 것입니다. 실제로 원문에서는 "그의 지으심을 받은 자(작품-poiema)", 시적인 아름다운 걸작품으로 묘사합니다. 그러나 육체적으로 태어난 아기의 과제가 성장이듯, 영적으로 태어난 새 생명들도 자라가야 합니다.

 

그리고 이 자람의 목표는 "선한 행위"입니다.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했습니다. 우리는 이미 엡2:8-9에서 인간은 자기의 행위로는 구원을 얻을수 없음을 확인하였습니다. 구원은 오직 은혜로만 베풀어지는 선물이며 우리는 믿음으로만 이 선물을 받을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새사람이 된 우리는 선한 행위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선한 행위로 살아가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벧전2:3에서 이런 구원의 체험을 가르쳐 우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게 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제 주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의 최대의 숙제는 구원이 완성되도록 자라가야 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2절에서"--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한 사람마다 믿음으로 구원받은 것이 확실하지만 아직 그 구원은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마치 방금 출생한 어린 아기는 분명한 인간이 된 것은 확실하지만 인간다운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그에게는 성장의 과제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여기 구원받은 사람들의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벧전2:1-3에서 사도 베드로는 영적인 새 생명들이 자라가기 위하여 버릴 것들이 있고 사모할 것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의 책임-한마디로 버릴 것을 버리고 사모할 것을 사모함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1. 버릴 것이 있습니다.

 

어린 아기가 일어서 걷기 위해서는 전 단계의 기어다니던 습관을 버려야 합니다. 누룽지를 쥐고 있는 아기에게 초콜렛을 건네 준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룽지를 버리지 못해 초콜렛을 받지 못하던 장면을 기억합니다.

 

버리지 못하면 받지 못하고 자라지 못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 전서 1장의 말미에서 베드로 사도에게 편지를 받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난 것을 상기시킵니다.

 

그러면서 2장에 들어와 그들이 온전하게 믿음이 자라 구원의 완성에 도달하기 위해 과감하게 버려야 할 것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무엇들을 버려야 합니까? 다섯가지 버릴 것들을 열거합니다.

 

첫째는 모든 악독입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악의입니다. 남을 해치려는 마음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웃을 세우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웃을 해치고자 한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실수 없습니다. 선행은 선의에서 출발합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이웃들에 대하여 선한 마음을 갖고자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먼저 우리는 우리의 이웃들에 대한 일체의 악의를 포기해야 합니다. 그것이 선행의 시작입니다.

 

둘째는 모든 궤휼입니다.

거짓입니다. 사단은 거짓의 아비입니다. 이제부터 믿음이 자라려면 거짓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미쁘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성실하십니다. 성실의 성()자는 한문으로 말()을 이룬다()는 뜻입니다. 사실을 말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거짓을 버리고 성실하고자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운 자녀로 자라갈수 있습니다. 성실을 포기하면 실성하게 됩니다. 선행은 성실의 나무에서만 아름다운 열매를 맺습니다.

 

셋째는 외식입니다.

어떤 초신자 분이 성경 읽다가 외식하지 말라고 해서 밖에 나가 식당에 가는 것을 포기했다고 합니다. 여기서는 그런 외식이 아닙니다. 겉과 속이 다른 것입니다. 겉으로만 꾸미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부터 내면에 충실한 사람이 되십시오. 이웃에게 보이기 위한 선행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영적인 성숙이 이루어집니다. 그래야 우리의 선행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선행이 될수 있습니다.

 

넷째는 시기를 버려야 합니다.

시기는 비교의식에서 유래합니다. 우리의 시선이 하나님에게 머물러 있을 때 우리는 자신을 남과 비교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시기를 버리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곧게 성장할수 있습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의 선행도 온전할수 있습니다. 시기와 질투로 행하는 선행은 다분히 선전용일수가 있습니다. 참된 선행은 우리가 주안에서 붙들게 된 가치에 대한 확신 때문이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버릴 것, 비방하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말로 전도하고 말로 축복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입이 이웃을 허는 말을 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더 이상 축복의 도구가 될수 없습니다.

 

3:10에 보면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물과 쓴물을 내겠느뇨"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적 성숙을 위해 반드시 버릴것이 있는데 곧 비방하는 언어입니다.

 

, 지금까지 우리의 영적 성장을 위하여 다섯가지 버릴 것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악의, 거짓, 외식, 시기, 비방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한가지 사모할 것이 있습니다.

 

2. 사모할 것이 있습니다.

 

순전하고 신령한 젖입니다. 여기서 순전하고 신령한 젖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갓난 아이가 젖을 먹지 않고 자랄수 없듯이 그리스도안에 새 생명으로 태어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먹지 않고는 자랄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적인 젖이며 밥인 것입니다. 예수님도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게 한 이 말씀이 또한 우리를 영적으로 자라게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벧전1:23의 말씀을 다시 읽어보십시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 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런데 오늘의 본문인 벧전2:2에서 "--

 

이로(순전하고 신령한 말씀의 젖) 말미암아 --자라게 하려 함이니라"고 한 것입니다. 건강한 아기일수록 왕성한 식욕으로 엄마의 젖을 사모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구체적으로 말씀을 사모하는 인생을 살수 있겠습니까?

 

첫째, 말씀을 많이 들으십시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10:17)고 했습니다. 자주 말씀을 듣는 기회를 가지십시오.

 

설교를 들으십시오. 예배의 자리에서 들으십시오. 주일에도 듣고 목장교회 모임에서도 들으십시오. 방송으로도 들으십시오. 테입으로도 들으십시오. 성경만을 녹음한 테입도 있습니다. 자주 들을수록 말씀과 가까워집니다.

 

둘째, 말씀을 규칙적으로 읽으십시오.

성경은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1:3)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읽는 것이 말씀을 먹는 것입니다. 먹는 습관중에서 중요한 것은 편식을 피하는 것입니다. 서점에 가면 '성경 읽기표'를 구하실수 있습니다. 규칙적으로 매일 매일 조금씩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셋째, 말씀을 연구하십시오.

행전17:11에 보면 바울이 베뢰아 지역의 성도들을 칭찬하며"--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연구)하니라"했습니다. 성경공부하는 모임에 참여하십시오.

 

우리 교회에서는 단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성경을 연구하도록 안내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배운바를 스스로 확인하고 연구하는 즐거움을 누려 보십시오. 베뢰아의 신사 성도들처럼 말입니다.

 

넷째, 말씀을 암송해 보십시오.

말씀이 완전히 내것이 되기 위해서는 말씀이 마음에 새겨져야 합니다. 그 가장 좋은 방법이 말씀 암송 곧 성경 암송입니다.

 

시편기자는 시119:11에서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고 했습니다. 기독교 서점에서 성경 암송카드를 구하여 암송을 시작해 보십시오. 말씀을 듣고 읽다가 너무 좋은 구절이 있으면 암송해 보십시오.

 

마지막으로, 말씀을 묵상해 보십시오.

들은 말씀을 묵상해 보십시오. 읽은 말씀을 묵상해 보십시오. 연구한 말씀을 묵상해 보십시오. 암송한 말씀을 묵상해 보십시오. 묵상은 흔히 소의 되새김질에 비유됩니다.

 

말씀을 한번 먹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있을 때마다 그 말씀의 뜻을 묵상해 보십시오. 그것이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부탁한 성공하는 삶의 비밀이었습니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1:8)

 

그런데 이 모든 것보다 중요한 것은 방금 인용한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강조한 지켜 행하는 일입니다. 순종이라고도 하고 적용이라고도 합니다. 우리가 듣고, 읽고, 연구하고, 암송하고, 묵상한 말씀을 이제 삶가운데서 지키는 일입니다.

 

그때 비로소 말씀이 내 삶이 되고 능력이 되고 변화가 되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선한 일을 행하는 자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내 착한 행실을 보고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마태5:16)-이것이 바로 구원받은 자의 책임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한 영국교회의 축제에 유명한 크리스챤 배우요 성우가 참석한 것을 보고 한 노 선교사님이 부탁을 했다고 합니다. "죄송하지만 당신의 아름다운 목소리로 시편 23편을 읽어 주실수 있겠습니까?" 그때 성우는 "그렇게 하지요. 단 조건이 있습니다.

 

제가 끝나면 목사님도 읽어 주셔야 합니다."했더니 동의했다고 합니다. 성우가 먼저 성경을 펴서 읽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그의 아름다운 목소리에 취해 듣다가 끝나자 우뢰같은 박수로 응답했습니다. 다음은 평생을 선교지에서 보낸 노 목사님 차례였습니다.

 

그는 천천히 쉰 목소리로 띄엄 띄엄 시편 23편을 암송을 해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의 암송이 끝나자 사람들은 숨을 죽이며 울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차이가 무엇이었을까요? 노 선교사님이 성경을 암송할 때 사람들은 단순히 말씀만을 들은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만나고 그 말씀을 붙들고 살아온 그의 인생을 만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바로 이런 말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말씀이 안내하는 인생을 사모하며 살고싶지 않으신가요?

 

 

 

 

어두울 수록 별은 더 빛난다 /벧전2:9-10/ 김상수목사

2024-09-05 02:36:38

 

어두울수록 별은 더 빛난다는 말이 있다. 이것은 일상적인 삶이나 신앙생활에서나 다 마찬가지다. A.D 64년에 로마시내에 대화재가 났을 때, 당시 네로황제는 그 책임을 기독교인들에게 뒤집어 씌웠다. 그로인해서 성도들에게 큰 핍박이 찾아왔다. 기독교인이라는 것이 밝혀지면 잡혀서 원형경기장에서 사자밥이 되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그때에도 성도들의 신앙은 더 빛났다. 그들은 어떻게 이렇게 어둠 속에서 더 빛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될 수 있었을까? 그 중요한 원인들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그들은 그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분명히 알았다는 것이다.

 

이처럼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다. 만약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는 것은 마치 어둠 속에서 빛을 잃는 것과 같다. 이런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소중하고 가치 있는 존재인지 모르고, 평생을 방황하며 온갖 상처를 안고 슬프게 살아가게 된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극한 환란 중에 있던 성도들에게 편지를 써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고, 성도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강조한다. 그러므로 이 시간 오늘 본문 말씀을 속에서 우리들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께 소중한 존재인지를 다시 한 번 깨닫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부심(Pride)을 갖고 담대한 믿음으로 더욱 굳게 서기를 바란다.

 

우리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사람들인지 오늘 본문 베드로전서 29절을 함께 읽자.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이 말씀들 중에서도 특히 이 시간에는 그의 소유 된 백성이라는 말을 집중하고 싶다. “그의 소유라는 말씀은 바꿔 말하면 그의 것이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대로 한다면 예수님을 믿고 지금 이 시간에도 예배드리고 있는 여러분들의 생명의 소유권은 누구에게 있는가? 바로 하나님께 있고, 예수님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당연히 하나님은 우리의 왕이시고, 요한복음1:12의 말씀처럼 아버지가 되신다.

 

오래 전에 현대건설의 정직원으로 사우디 현장에서 일했던 어떤 분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분 말에 의하면 고 정주영회장이 건설현장에 왔을 때면 직원들을 끔찍이 아꼈다고 한다. 그래서 직원들의 자부심이 높았다고 한다. 지금도 대기업이나 좋은 직장의 정직원이 되면 자부심이 높아진다. 그런데 이처럼 이 세상의 대기업의 정직원만 되어도 이렇게 자부심이 있다면, 하물며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요, 하나님의 자녀들인 성도들은 어떠해야하겠는가? 영어로 왕족, 황실의 가족을 로얄 패밀리(Royal Family)라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 된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의 로얄 패밀리이다.

 

성경을 읽다보면 하나님께 우리들에게 많은 약속들을 주신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그 수많은 성경의 약속들 가운데서도 최대의 약속은 하나님께서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는 약속이다. 그 약속은 지금 이 시간 믿음으로 주님 앞에 나온 우리들에게 동일하다고 확신한다. 그렇다면 왜 그토록 우리들과 함께 하시겠다고 강조하실까? 그 이유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의 백성이고, 자녀이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들이 학교에서 뭘 준비해 오라고 하거나, 뭔가 필요한 것이 있으면 누구에게 말하는가? 당연히 엄마 아빠에게 말한다. 이것이 바로 기도다. 기도는 자녀들이 아버지에게 말할 수 있는 특권이고, 기도는 그 자체가 이미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정한다고 신앙고백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다 아시지만 그래도 기도해야 한다고 수없이 반복해서 강조하시는 것이다.

 

“7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7:7-8)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36:37)

 

만약 여러분의 자녀에게 어떤 문제가 생기면 누가 책임지는가? 물론 가끔 자녀를 외면하는 나쁜 부모들도 있지만 일반적인 가정이라면 당연히 부모가 책임진다. 왜 부모가 책임을 지는가? 그것은 부모는 그 아이의 보호자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문제가 생기면 누가 책임지는가? 보호자인 하나님 아버지께서 책임지신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때로는 징계도 함께 주실 때도 있다(건강, 재정, 실패, 관계, 기타 여러 가지 종류의 징계들 등). 왜냐하면 우리들이 자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징계는 우리를 죽이기 위한 징계가 아니고, 아들이기 때문에 살리기 위해 주시는 징계이고, 더 좋은 그릇으로 사용하시기 위한 징계다. 그래서 히브리서 128-11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다 같이 믿음으로 함께 읽자.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 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12:8-11)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들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늘 잊지 말아야 한다. 설령 이 과정에서 징계가 있다해도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을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것은 하나님이 책임지신다.

 

최근에 어떤 분으로부터 1960-80년대 일본에서 활동하던 야구선수 중에 장훈 선수에 대한 일화를 들었다. 이 이야기는 장훈 선수의 자서전인 일본을 이긴 한국인이라는 책에서도 소개된 내용이다. 1980528, 장훈 선수는 일본 프로야구 역사에서 유일하게 개인통산 3,000안타를 친 선수가 되었다. 장훈 선수가 하도 야구를 잘하니까 일본인들이 그에게 귀화하라고 했다. 그때마다 장훈선수가 힘주어 말했다.

 

와타시와 강코쿠진데스(韓国人です, 나는 한국인입니다)”

 

그랬더니 일본인들이 그를 미워했다. 어느 날 그가 타석에 들어섰을 때 관중석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조센진 빠가야로(ばかやろう). 조센진 물러가라

 

험악한 분위기 때문에 경기가 중단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관중들의 함성이 좀 잠잠해 지자. 장훈 선수가 다시 타석으로 나왔다. 그러자 또 다시 술렁이는 관중석을 향해 소리쳤다.

 

그래 나 조센진이다. 그래서 어쨌다는 거냐?(そうやジョセンジンあるだからどうしたというのか?)”

 

그리고 배트를 잡고 힘차게 휘둘렀는데, 장외홈런이 되었다. 그것을 본 일본인들의 입이 딱 벌어졌다. 그래서 그는 한국과 일본에서 실력으로 인정받고 존경받는 사람이 되었다. 참으로 감격적인 일화다. 장훈 선수는 어두운 환경에서도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았기에 오히려 더 별처럼 빛난 선수생활을 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것은 우리들의 삶에서도 마찬가지고, 특히 성도들의 삶에는 더욱 그렇다. 비난과 야유를 받으면서도 경기를 잘하는 사람이 있고, 응원 받으면서 잘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장훈 선수처럼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홈런 치는 사람이 백배 더 잘하는 사람이다. 때로 우리들이 가난하고, 연약하고 못 배웠고, 약점이 많고, 나이 들었고 때로는 비굴한 상황에 처한다 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 나라의 로얄 패밀리다. 만약 어려운 환경이나 마귀 사단의 거짓 메시지 때문에 낙망이 되고, 열등감이 마음속에 찾아오고 힘들 때는 이렇게 외치라.

 

그래 나 못생겼다. 그래 나 가난하다. 그래 나 나이 많다(또는 어리다), 그래 나 뚱뚱하다. 그래 나 못배웠다. 그래서 뭐가 어쨌다는 것이냐(소왓, So what?). 힘내라! 그래도 난 하나님의 자녀다! 그래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지역 주민 여러분, 이 세상에 소중하지 않은 생명은 없다. 어떤 사람의 말처럼 얼굴에 질서가 있든 질서가 없든, 몸이 장난이든 장난이 아니든 우리 모두는 가장 소중하다. 우리의 왕 되신 하나님, 보호자 되신 하나님이 늘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러므로 자신의 생명의 소중함과 자신의 신분을 분명하게 기억하고, 지금 설령 어려움이 있어도 자신의 타석에서 서서 믿음의 장외홈런을 멋지게 날리자. 그래서 어두울수록 더 빛나는 우리 모두가 되자.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전도의 내용, 무엇을 전할 것인가? /벧전2:9/ 조정의목사

2020-09-22 01:56:47

 

우리는 지난 주에 전도의 중요성에 대해 들었습니다. 전도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둔 데서 불러내어 하나님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시고 그분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벧전 2:9).

 

전도는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맡기신 지상 대사명입니다. 주는 우리를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부르셨습니다(5:13-14). 우리가 전해야 할 복음은 죄의 질병을 앓는 이들에게 우리가 줄 수 있는 유일한 치료약입니다.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1:16). 복음은 말 그대로 영원한 멸망으로 가고 있는 그들의 운명을 뒤바꿔줄 수 있는 좋은 소식(good news)입니다.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시는 하나님의 좋은 소식입니다(3:16).

 

그래서 존 맥아더 목사님이 말한 것처럼 복음 전도보다 더 중요하거나, 그보다 더 영원한 결실을 맺는 임무는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이 복음 전도의 중요성을 기억하며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말과 행동으로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살면서 복음을 전할 기회를 만난 적이 있으십니까? 복음을 꺼내놓기까지 고민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결국 복음의 핵심 메시지를 전달해야 할 상황이 주어졌을 때, 전달할 복음의 내용을 준비하고 계십니까? 저에겐 극적인 장면 하나가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공부할 때, 자기 아버지가 혼수상태에 있는데 와서 복음을 전해줄 수 있겠냐고 아들이 저에게 요청했습니다. 아버지는 한국사람이고, 자기는 미국에서 태어나 우리말을 잘 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어머니는 가톨릭신자라 개신교 사람이 와서 복음 전하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점심에 식사하러 어머니가 자리를 비우실 때 그 틈을 타서 복음을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혼자 차를 끌고 가서 병원에 도착했습니다. 처음보는 사람, 혼수상태에 있어서 내 말을 듣고 있는지 반응을 확인할 수 없는 사람, 언제 어머니가 들이닥쳐 전도를 방해할 지 모르는 상황, 그 속에서 복음을 전해야 했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복음을 시작하시겠습니까? 어떤 이야기를 전달하면 될까요? 그 촉박한 시간 안에 반드시 전달해야 할 내용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사람을 구원하는 능력은 하나님께 있지만, 그것을 전달해야 할 우리가 무엇을 전할 것인가는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할 내용을 분명히 알려주셨고, 우리가 전달하는 것에 죽어가는 영혼의 운명이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우리가 전달해야 할 복음의 내용에 대해 살펴보기 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로마서입니다.

 

로마서는 바울이 로마에 있는 교회에게 쓴 편지로 복음을 담고 있습니다. 편지 인사말에 바울이 자신을 어떻게 소개하는지 보십시오.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택정함을 입었다고 소개합니다(1:1). 로마서의 핵심구절은 116-17절인데, 여기서 바울은 또 다시 복음을 설명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1:16-17)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합니다. 전도는 전적인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복음의 대상은 모든 믿는 자”, “유대인헬라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입니다. 또한 복음의 핵심 내용은 하나님의 의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이 핵심 구절을 시작으로 바울은 복음을 써내려갑니다. 1장에서 11장은 우리가 전해야 할 복음의 내용(교리), 12장에서 16장까지는 우리가 살아내야 할 복음의 내용(행위)을 설명합니다.

 

지난 주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방식으로 말과 행동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로마서는 우리가 전달할 말과 따라야 할 행동 모두가 자세히 적혀 있는 책입니다. 그래서 로마서를 전반적으로 둘러보는 것은 우리가 전해야 할 복음의 내용을 파악하는데 아주 유익합니다.

 

먼저 우리가 말로 전달할 내용, 복음의 교리입니다. 로마서 1장에서 11장까지의 내용입니다. 바울은 로마의 성도들에게 자신이 사명을 받아 전달한 복음의 내용을 체계적으로 잘 정리해서 전달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의 내용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죄(1-3), 칭의(3-5), 성화(6-8) 등 복음의 핵심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입니다.

 

1. 복음 교리(1-11)

 

하나님(1)

 

오늘날 기독교가 말하는 하나님에 대해 들어본 사람은 적지 않습니다. 우리의 전도 대상 역시 한 번쯤 하나님에 대해 들어봤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하나님이 성경의 하나님은 아닙니다. 사람들 각자 만들어낸 신인 경우가 많습니다.

 

바울은 유대인 회당에서 복음을 전할 때는 하나님에 대한 소개를 적게 합니다. 하나님을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전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울이 아덴에 갔을 때는 달랐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없던 사람들에게 바울은 하나님을 소개합니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우주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17:23-29)

 

바울은 하나님을 모르는 이들에게 먼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그가 어떤 분이신지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자이며 만물의 주인이시고, 만민은 그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 호흡에 철저히 의존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절대적인 주권자, 능력자,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소개합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복음을 설명할 때 그는 동일하게 하나님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119절을 보시면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인다고 말합니다. 20절에는 만물에 하나님의 신성, 능력이 분명히 보여 알려졌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이 우리 안에 있는 양심과 우리 밖에 있는 만물이 널리 알려져 있다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하나님을 선포해야 합니다. 우리의 전도 대상은 주로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정면으로 부정하거나 말은 그렇게 하지 않지만 실질적으로는 부인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교회 안에서는 인정하나 밖의 사회에서는 인정해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17:3). 영생의 복음에는 반드시 그 하나님을 바르게 소개하는 내용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존 파이퍼는 하나님이 복음이다라는 제목의 책을 쓰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이 복음입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복음도 없습니다.

 

왜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부정하는 진화론을 받아들이면, 교회와 복음을 속히 떠날까요? 하나님이 없으면 복음도 없기 때문입니다. 만물이 저절로 생겨난 것이라면, 만물에 대한 아무런 계획도 없고, 설명도 없습니다. 인간은 그 어떤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으며, 자기 스스로 신이 되어 자기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존재가 됩니다. 선악을 구분하는 기준을 자기가 정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 중심적 이야기입니다. 처음부터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1:1)고 선포하고 마지막엔 그 하나님이 영원히 다스리실 것이라고 예언합니다(22:1-5).

 

만물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고, 역사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고, 생명이 철저하게 의존하고 있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전달할 복음에는 그 하나님에 대한 선포가 반드시 포함되어야 합니다. 믿지 않는 이웃으로 하여금 우리가 창조주가 만든 피조물로 그분께 철저히 의존하고 있으며 그분의 주권과 통제 아래 있다는 것을 알려야 합니다.

 

(1-3)

 

다음으로 우리는 죄를 선포해야 합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하나님을 소개하면서 함께 이야기 하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바울은 18절에서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를 언급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더러운 모든 것을 말합니다. 그 모든 죄는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입니다(18).

 

그런데 1장에서 바울은 모든 불의의 시작점을 밝힙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21절부터 보시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1:21-23)

 

이것이 죄의 근원입니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버리고, 대신 다른 것을 섬기는 것입니다. 참 빛인 하나님을 버리니 마음이 어두워집니다. 참 지혜를 떠나 미련하게 됩니다. 생명을 버리니 죽음이 찾아옵니다. 참 신을 버리고 거짓 신을 좇습니다. 그 결과 찾아오는 것이 28절부터 나오는 합당하지 못한 일입니다. 하나님을 버린 것에 대한 심판으로 하나님이 그들을 내버려 두신 결과물입니다. 28절을 보십시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1:28-31)

 

우리는 여기 나열한 온갖 더러운 죄의 열매를 맺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버린 결과로 우리가 맺는 열매입니다. 이 심각한 문제를 보여주는 것이 복음의 내용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합니다. 암 환자를 바로 치료하기 위해 암 진단을 내려야 하는 것처럼, 죄의 질병을 가진 자에게 우리는 문제의 본질을 바르게 알려줘야 합니다. 증상만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왜 그런 증상이 나오는지 원인을 말해줘야 합니다.

 

가끔 우리는 법 없이도 살 것 같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들의 죄를 찾기 위해 진땀을 흘립니다. 한 번도 거짓말 한 적 없어? 한 번도 음란한 생각한 적 없어? 초등학교 5학년 때 구원 받은 저는 죄를 인정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때 사람의 기준에서 볼 때 무슨 큰 잘못을 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바울처럼 죄의 뿌리까지 바로 보여줘야 합니다. 죄는 겉으로 드러나는 온갖 더러운 행위나 그에 관련된 생각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의 뿌리가 되는 하나님을 부정하고 그의 다스림을 거부하는 것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알려줘야 합니다.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내게 생명 주신 이에게 감사하지 않고, 매순간 호흡을 주고 계신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것 자체가 죄라는 것을 분명히 전해야 합니다. 단 일초도 하나님의 은혜 없이 살 수 없는 피조물로서 그 하나님에 대해 안하무인인 죄가 얼마나 배은망덕한 것인지 알려야 합니다.

 

양심이 마비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율법이 하나님의 거룩한 기준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그 율법으로 죄를 비춰주는 것이 큰 도움이 됩니다. 예수님은 그런 자들에게 율법이 요구하는 높은 기준을 설명하셨습니다. 살인, 간음만 안하면 되는 게 아니라 형제를 미워하거나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것도 하나님 앞에 심각한 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본래 율법은 우리에게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요구합니다. 누가 그 거룩한 기준에 오를 수 있겠습니까? 그 거룩한 기준 앞에 스스로 죄인임을 깨달을 수 있도록 우리는 분명히 말해야 합니다.

 

그리고 25-6절에 기록된 것처럼, 우리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경고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죄인을 반드시 의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5절 말씀처럼 진노의 날에 죄인에게 쌓아둔 진노를 쏟으실 것입니다. 6절처럼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실 것입니다. 16절 말씀처럼 그 날에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그냥 간과하신다면, 그냥 넘어가신다면 복음은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삶이 괴롭고 고통스럽긴 해도, 그렇게 살다 고통스러운 이곳을 떠나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죄에 대한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 영원한 심판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이 세상이 그나마 덜 고통스러운 곳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겐 구원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에서 구원받는 것이 필요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상한 복음을 전합니다. 교회 나오면 하나님이 병도 낫게 해주고 건강도 회복시켜 주고 사업도 잘 되게 해준다고 말합니다. 아이들이 많이 있으니 사교성을 키우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좋은 격려와 위로를 받고 삶의 위로와 활력소를 얻어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고해성사를 하듯 자기의 잘못된 행위를 쏟아내고 용서를 받아 후련함을 얻고 가는 곳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교회가 함께 모여 그런 유익을 나눌 수 있지만, 이런 것은 복음의 본질이 아닙니다.

 

복음은 우리를 사망까지 끌고 가는 죄의 무서움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버린 결과 우리가 당한 처참한 현실을 알리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이사야가 외친 것처럼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6:5). 부정한 사람으로서 만군의 여호와 앞에 설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서 39-18절에 기록한 것처럼, 의인은 하나도 없고, 깨닫는 자도, 하나님을 찾는 자도, 선을 행하는 자도 없습니다. 그래서 누구도 심판을 피할 수 없고, 모두에게 구원자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너무 섣불리 그리스도의 은혜를 말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의 은혜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부정하고 죄를 가볍게 여기는 사람에게 그리스도는 고마운 구세주가 아니라 오히려 많은 것을 요구하는 귀찮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이 구원자를 간절히 찾을 때까지 먼저 우리는 그들이 구원 받아야 할 상태라는 것을 계속해서 알려줘야 합니다. 하나님이 얼마다 거룩하고 전능하며 의로운 분이신지, 죄가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살아계신 하나님의 진노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깨달을 때까지 기도하며 경고해야 합니다.

 

구원(3:21-8)

 

1) 칭의: 바울은 이어서 믿음으로 얻는 구원에 대해 설명합니다. 핵심구절은 323-24절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3:23-24)

 

바울은 3장에서 5장까지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었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이것을 두 글자로 칭의라고 부릅니다(이신칭의). 복음의 핵심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공로나 열심으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이라 우리 힘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

 

오직 그리스도가 대신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에 대한 대가를 다 치르셨고(속량), 그분이 가지고 계신 온전한 의로움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 보내주셔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이 놀라운 은혜로 인해 우리는 아무런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은 것입니다(칭의)

 

바울은 4장에서 우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5장에서는 첫 사람 아담이 범죄하여 모든 사람이 범죄한 것처럼, 마지막 아담 예수께서 자기 생명이라는 큰 값을 치르고 의를 이루심으로 모든 사람에게 은혜의 복음, 하나님의 의롭다하심이 값없이 넘치도록 임했다고 말합니다. 특히 5장에서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되었다고 말합니다(5:1). 마침내 죄인과 거룩한 하나님 사이에 화평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또 다른 핵심 구절인 58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5:8)

 

복음은 은혜의 복음이며,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입니다. 우리는 이 놀라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 복음의 본질에서 벗어나 다른 복음을 전합니다. 가령 열심히 노력하고 봉사해야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방언을 하거나 특별한 체험을 하면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주님 앞에서 바른 마음을 가지면 뭔가 이 땅에서 좋은 일을 허락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죽었을 때 천국에 가는 입장권을 얻는 것이 복음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복음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되었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나의 공로나 열심이나 봉사나 노력이나 특별한 체험이나 기도를 통해 된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오직 그것만 의지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혜입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 그것이 복음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조금이라도 덜 의지하고 우리의 공로에 눈을 돌리는 복음에 대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1:8-9).

 

2) 성화: 구원이 그리스도를 통해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의롭다하심을 입고 영원히 화평한 관계를 맺게 된 것이라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죽고 나서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도 진행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단지 그리스도를 통해 의롭다고 선포만 하시고 죽어서 하나님을 만나는 그날까지 손을 놓으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로마서 6장에서 8장은 하나님이 신자에게 두고 계신 구원의 더 넓은 개념을 설명합니다. 바로 신자를 거룩하게 하시는 현재형 구원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우리가 이미(과거형) 구원을 받았다면, 이제는 그것을 시작으로 날마다 더 거룩해지는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성화라고 부릅니다.

 

핵심구절은 로마서 829-30절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8:29-30)

 

구원은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철저하게 이 구원을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미리 아셨고, 정하셨고, 부르셨고, 부르신 그들을 의롭다고 선포하셨으며(과거),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실 것입니다. 지금 신자를 거룩하게 하시는 것(현재)성화”, 온전히 아들의 형상을 이루게 하실 것(미래)영화라고 합니다. 칭의-성화-영화는 구분할 수 있지만 절대로 분리할 수 없는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우리가 전할 복음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과거에 매여 있는 어떤 사실에 국한 시켜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네 죄를 다 가져가셨으니 이제 너는 막살아도 천국행이라고 말해거나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구원의 미래에 치우쳐도 안 됩니다. 이 지옥 같은 세상을 어떻게든 견디면 좋은 세상이 온다는 식으로 복음을 전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마치 죄인을 의롭다 하는 것이나 죽고 나서의 죄인의 복지에만 관심 있고 여기서는 어찌 살아도 상관없어 하는 분으로 묘사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과거 십자가 위에서만 위대했던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도 위대하고, 미래 영원한 삶 속에서도 영원히 위대할 것입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에서 과거, 현재, 미래 언제든 우리를 끊어낼 수 없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우리는 구세주가 과거에 무엇을 했는지 말해야 하고, 동시에 구세주가 지금 내 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말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십자가의 복음을 말하고 그 십자가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복음이 현재 자기에게 미치는 능력에 대해 전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상품을 보여주면서 그 상품의 효과나 장점을 말하지 않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리스도가 나에게 지금 어떤 사랑을 부어주시는지 말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가치를 알 수 없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우리와 같은 짐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가장 무거운 죄의 짐과 그로 인해 겪는 고통을 함께 가지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 앞에서 세상 짐을 내려놓고 주 안에 참 평안과 쉼을 누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은 소망을 찾으려 애씁니다. 재물, 권력, 자식, 평안, 안락함 등 이 땅의 것에서 뭔가 붙들 것을 찾습니다. 거기에 참 소망이 없기에 항상 목마르고 갈급합니다. 우린 영원히 목마르지 않습니다. 내 속에서 솟아나는 생수가 되시는 그리스도가 언제나 내 영혼을 만족시킵니다. 우리는 그분을 말할 수 있습니다.

 

환난과 핍박 중에도 그 소망을 노래하며 자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같은 하늘 아래 살아가면서 어떻게 이렇게 다른 마음을 갖고 사는지, 우리 안에서 지금 그리스도가 어떻게 일하시고 있는지 그들에게 선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해야 할 복음이 바로 이것입니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17:3).

 

바울의 이 말로 오늘 말씀을 마치기 원합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10:13-15)

 

전파하는 이가 없으면 세상은 복음을 들을 수 없습니다. 보내심을 받지 않았다면 전파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보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복음 전도의 사명을 받았습니다. 우리 모두 아름다운 주의 발이 되기를 원합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 구원을 가져올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이 되기 원합니다. 좋은 소식을 바로 알고, 제대로 전하고, 힘 있게 살아내는 우리가 됩시다!

 

 

 

 

 

다시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벧전2:1-10/ 김병삼목사

2018-11-07 03:27:55

 

1.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2. 갓난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3.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4.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5.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6.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7.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8.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10.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순전하게 자라나기를. . .

성장하는 것과 성숙해 지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성장에만 목표를 두면 기형적인 모습이 되지만, 성숙에 초점을 맞추면 아름다운 성장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2절 말씀이 정확하게 이해가 됩니다.

 

2. 갓난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갓난 아이의 특징은 아무 것이나 먹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먹지 않으면 이제 갓 태어난 아이는 생존하지 못합니다. ‘newborn’이라는 말이 참 좋습니다.

우리의 신앙을 살아있게 만드는 것이 늘, 갓난아이처럼 사는 것이 아닐까요?

지난주의 말씀을 통해 거룩이란 분리와 구별의 의미를 가졌다고 배웠습니다.

 

오늘 이 말씀이 주는 의미도 분명합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구별된 깨끗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령한 젖이 우리를 구원에 이르도록 성장시키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처럼 신령한 젖을 사모하는 것이야말로 세상과 우리를 구별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죠. 본문 1절을 보세요.

1.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여기에 열거된 것이 모든 것은 아니지만,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의 모습과 영적으로 새로 태어난 사람의 모습이 대비되어 나타나 있습니다.

모든 악독이란 무엇일까요?

의도적으로 다른 사람을 해하려는 무자비한 행동이 아닐까요? 우리가 실수로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거나, 의도하지 않았던 일로 누군가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일이 아니라, 의도적인 악한 감정입니다. 누군가를 아프게 하고 힘들게 하므로 성취감을 느끼는 사람들입니다.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란 무엇일까요?

 

궤휼이라는 말이 참 어려운데, ‘미끼로 잡다라는 말에서 파생된 말이라고 합니다. 누군가를 속여서 무언가를 빼앗기 위해 흉계를 품은 마음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누군가를 속여서 자신의 이득을 취하는 사람들이 참 악하다고 생각합니다. 선한 마음을 담보로, 연약한 감정을 담보로 누군가를 속여 이득을 위하면 물질로 인해 마음을 다치게 됩니다. 누군가에게 속았다고 하는 것보다 인생을 슬프게 하는 것이 있을까요?

 

외식은 겉으로는 겸손한 척, 착한 척 하지만 속마음은 다른 것이죠. 겉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실상을 세상의 권력을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시기는 남이 잘되는 것을 불편하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누군가를 축복할 수 없는 마음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영적으로 거듭나지 못해 신령하지 못한 것을 추구하는 인간들의 마음이죠.

남을 비방하는 말이란 무엇일까요? 남을 나쁘게 말하기 위해 온갖 종류의 말을 지어내고 중상모략 하는 것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자의 혀가 얼마나 무서운지 누군가의 인격을 살인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 살인을 만드는 무서운 범죄죠. 누군가 비방하는 말로 인해 상처를 받고 교회를 떠나고, 믿음을 버리고, 하나님을 떠나 구원에서 멀어진다면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죄일까요? 무책임한 말처럼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인터넷에 떠도는 예화입니다.

 

어느 교회에 새로 부임하신 목사님은 여자 목사님이 있었다.

부임한 다음 날 첫 새벽기도 시간이었다. 여자 목사님은 설교가 끝난 후 강단에 엎드려 부르짖어 기도하였다.

하나님! 이 부족한 여종에게 신성한 영감을 주옵소서!”

하나님! 이 부족한 여종에게 신성한 영감을 주옵소서!”

새벽기도에 참석한 할머니 집사님이 목사님의 기도 소리를 들었다.. 그날 할머니는 그 날 참석하지 않은 권사님을 찾아가 탄식하며 말했다.

시상에 우야노 말세다 말세야~~우야노!~ 부끄런 줄도 모르고...”

권사님은 깜짝 놀라 왜 그러냐고 물었다. 할머니 집사는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글쎄, 새벽에 기도하러갔는데 우리 목사님이 싱싱한 영감을 달라네. 우야노...”

 

제 귀로 똑똑히 들었다고 다 진실은 아닙니다. 그런데 남이 전해 준 말을 듣고는

마치 자기가 본 듯이 말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자일뿐만 아니라 인격 살인자입니다.

상식적으로 맞지 않는 이야기를 들었으면 귀를 씻고 정신을 차리고 판단해야 합니다.

영적으로 자라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믿음에도 불구하고 불신자로 살았던 시절 가졌던 삶의 관행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습입니다. 악독, 기만, 외식, 시기, 비방하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왜 베드로는 교회를 향해 이렇게 권면하고 있을까요? 아마도 영적 아이들인 교인들을 보며 부모의 마음으로 그렇게 권면하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 주변에 드러나지 않지만 장애를 가진 자녀들 때문에 아파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다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외적으로 드러나는 신체적 장애가 있는 것은 장애로 인정하기가 쉬운데, 드러나지 않는 발달장애는 인정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신체적으로 성장하면 지적인 수준과 감정적인 부분이 같이 자라나야 하는데 말입니다.

교회 안에도 동일한 현상이 있는 것 같습니다.

신앙의 연수는 늘어나고, 직분도 높아지고, 봉사의 영역도 넓어지는데, 진짜 자라야 할 영적인 자람이 없다는 것 말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가장 마음 아파하는 부분이 이런 장애가 아닐까요?

영적 갓난아이들의 특징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먹지 못하거나 소화하지 못하므로 영적인 영양의 결핍 상태입니다.

다른 하나는 삶의 문제에 있어서 여전히 영적으로 미성숙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옛적 삶의 관행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영적 성숙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에 나오는 문제는 오늘날 교회에서도 동일합니다. 제가 말씀을 준비하면서 늘 느끼는 것인데, 교회와 교인들의 문제는 그때나 지금이나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A. W. 토저의 [세상과 충돌하라]라는 책을 읽으면서도 어쩌면 이 시대를 향한 메시지를 그 때도 했을까? 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습니다. 토저 목사님은 1960년 대 유명한 복음주의자로 선지자적인 역할을 했던 분이죠. 그 당시 교회를 향해 세 가지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던 적이 있습니다.

 

첫째는, 믿는 자가 성장하지 않고 항상 어린아이로 머물러 있으며 다만 살만 찌는 것입니다.

둘째는, 믿는 자가 교회 안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알지 못하고 오직 참관만 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믿는 자가 서로 일치되지 않고 분열과 다툼만 일삼는 것입니다.

 

토저 목사는 이것을 오늘날 교회의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하면서,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하나님을 알 때만이 가능하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나이가 들수록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나아갈 방향을 알아야 하며, 나아가야 할 때를 알아야 합니다.

 

영적 성숙을 위해 필요한 것에 대하여 베드로는 두 가지를 이야기 합니다.

첫째는 갈망입니다.

본문 2절에 나오는 사모하라는 말을 NIV 성경에서는 ‘crave’라는 단어로 사용하고 있는데 갈망하다라는 의미입니다. ‘갓난아이들처럼 어머니의 젖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갓난아이들은 어머니의 젖밖에는 아는 것이 없습니다.

 

여기에서 사모하라라는 말의 의미는 심한 갈증을 가지고 물을 찾듯이.

심한 배고픔으로 음식을 찾듯이.

그렇게 순전하고 신령한 것을 찾으면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성경을 묵상하며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모든 사도들이 깨닫게 된 공통점이 있는데, 우리의 신앙이 자란다는 것이고, 그 자라는 지향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구원에 이르도록 끊임없이 자라기를 권면했고,

사도바울은 푯대를 향하여 끊임없이 달려가노라고,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데 까지 이르러야 한다고 했죠.

 

둘째는, 맛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3절 말씀을 보세요.

3.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어쩌면 2절 말씀과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갓난아이는 완성이 아니라 가능성입니다. 갈망의 방향대로 자라날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은 완벽한 앎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경험한 하나님의 인자하심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너무 거창하게 시작하지 말고 조금씩 나아가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모습, 성품, 환경이 다 다릅니다. 중요한 것은 자라나느냐는 것입니다. 좋은 예가 될 것 같습니다.

 

미국 얼바인에 위치한 메리너스 교회(Mariners church)는 십일조와 관련하여 ‘1% 프로젝트를 벌였다.

십일조는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이지만, 십분의 일만이라도 하나님께 드리는 훈련을 통해 청지기의 삶을 살도록 훈련하자고 설명했다. 더불어서 이것이 어려운 초신자의 경우에는, 1년에 1%씩 올려서 하나님께 드려보자고, 성숙되어가는 청지기가 되어가자고 프로젝트를 진행했던 것이다.

 

우리가 성숙하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갓난아이처럼 사모하는 마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아직 모든 것을 알지 못하지만, 우리가 맛보고 경험한 것에서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그분의 역사가 우리의 삶에서 적용될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열고, 성숙을 갈망하라는 것입니다.

저는 늘 그런 생각을 합니다. “믿음은 일회적 사건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 변화를 통해 자라나는 것이다!“ 라고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제자들을 부르셔서 3년 동안이나 이 세상에서 동고동락하셨을까요?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후에도 끊임없이 가르치셨을까요? 믿음은 자라나고 성장해서 성숙되어야 하는 것이니까 말입니다.

누가복음 19장에 나오는 삭개오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에 진심으로 그 분을 따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에게 있어서 이 문제가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삭개오의 결단이 나오죠.

누가복음 198-10절 말씀입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삭개오는 이 말씀을 접하는 청중을 아주 불편하게 하는 약속을 두 개나 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소득의 50%를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다는 것이고,

둘째는 모세 율법에 규정된 것을 넘어서는 것이죠. 구약에서는 소득의 십일조를 요구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둘째 약속은 자비를 넘어선 정의의 문제였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남을 속여 돈을 벌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훔친 물건의 20%을 덧붙여 돌려주라고 되어 있습니다. (레위기 516) 그런데 삭개오는 그보다 훨씬 많은 금액인 네 갑절이나 갚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이런 두 가지의 약속을 들으신 주님께서는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잘 보세요.

삭개오가 약속한 것을 행하면 구원이 이를 것이다! 라는 선언이 아니라, 그에게 구원이 이르러서 이런 말을 하고, 이런 결단을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도덕적 규범을 지켜야 하는 고민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가 경험한 주님의 구원으로 인한 결과입니다. 그의 두 가지 약속은 자신이 경험한 은혜에 대한 반응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규범으로 사는 것과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하고 살아가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삶의 질문이 달라지고, 행동의 결과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팀 켈러 목사님이 쓴 [내가 만든 신]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람들은 종종 목사인 나를 찾아와 연 소득의 10%를 헌금하는 십일조에 대해 묻는다.

그들의 지적대로 구약에는 신자들이 10%를 드려야 한다는 명백한 명령이 많이 나오지만 신약에는 헌금에 대한 구체적이고 수량적인 규정이 그만큼 뚜렷하지 않다.

 

그래서 그들은 신약 시대인 지금도 신자들이 무조건 10%를 헌금해야 하는 건 아니지요?” 라고 묻곤 한다. 내가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면 그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하지만 나는 재빨리 이렇게 덧붙인다.

신약에 십일조 규정이 명확히 나와 있지 않은 이유를 말씀드리지요.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계시와 진리와 은혜가 구약의 신자들보다 많습니까, 적습니까?”

대개 여기서 불편한 침묵이 흐른다.

우리가 그들보다 은혜의 빚을 더 졌습니까? 덜 졌습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려고 자신의 목숨과 피를 10분의 1만 주셨습니까, 다 주셨습니까?”

기독교 신자에게 십일조란 최소한의 기준이다. 구약의 신자는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려고 행하신 일을 우리보다 훨씬 적게 알았다. 그런 그들보다 우리 헌금 비율이 낮아서야 결코 안 될 일이다.

 

결국 우리들에게 걸리는 가장 중요한 부분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는가에 있지 않을까요?

 

산 돌 같이. . .

오늘 말씀에는 이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오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버린 받은 돌’,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 ‘모퉁이 돌’, ‘건축자의 버린 돌’, ‘모퉁이의 머릿돌’, ‘부딪히는 돌’, ‘거치는 반석등 무려 일곱 종류의 돌들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모든 의미들을 자세하게 다 살펴볼 수는 없겠지만, 이 돌들의 의미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아주 흥미로운 말씀이 될 것 같습니다.

본문 말씀 4절을 보겠습니다.

 

4. 사람들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가 사람들에게 버림 바가 되었으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 의문이 생기죠. 보배로운 돌을 왜 사람들이 버렸을까요?

이라는 것이 참 하찮은 것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보석들 역시 돌의 일종이 아닌가요? 그런데 그런 여러 돌들 중에서 사람들이 귀중하게 여겨서 선택이 되면 보석이 되는 것이고, 아무도 그것을 가치 있게 여기지 않으면 버려진 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버린 이유는 가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이 가치는 쓸모에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삶에서 예수님이 가치 없게 느껴진 이유는 예수를 믿는 것이 그들의 삶에서 쓸모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초대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보니, 예수를 믿고 간직한다는 것은 박해와 고난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그들의 삶에서 오히려 손해가 나는 일이죠.

 

이런 의미에서 7절에 나오는 건축자의 버린 돌도 이해가 될 것 같습니다.

건축자가 돌을 버렸다는 의미는, 건축하는 데 하등의 도움이 안 된다는 의미겠죠.

우리 인생의 집을 짓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건축자가 그 돌을 버렸습니다. 5절 말씀이 중요합니다.

 

5.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사람들은 예수그리스도를 버렸으나,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를 택하셔서 산 돌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도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게 될 것입니다. ‘거룩한 제사장이 될 것입니다.

이라는 말은 베드로에게 조금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고백위에 예수님께서 지어주신 이름이 반석이었고, 그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베드로는 살아있는이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진행형의 의미입니다. 한 번의 고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계시고 역사하시는 예수님을 산 돌로 고백하고 있는 것이죠.

아마도 베드로는 교인들을 바라보면, 살아계신 주님 안에서 우리들의 삶의 결단을 요구하고, 삶의 태도를 묻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에베소서 220-22절의 말씀을 좋아합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서 모퉁이 돌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순간 죽은 돌산 돌이 되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도 산 돌이 되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질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의 말씀처럼 건물마다 서로 연결되어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2천 년 전 예수님이 살던 시대의 건축기법은 지금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요사이는 콘크리트와 철근으로 기초를 놓습니다. 건물을 다 짓고 난 후에 건물 앞 잘 보이는 곳에 건물에 대한 내용을 적어서 놓는 것이 요즘의 모퉁잇돌(머릿돌)입니다.

 

그런데 2천 년 전에 모퉁이 돌은 건물을 짓기 전에 제일 먼저 놓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의 건물은 주로 돌을 사용하여 지었습니다. 돌과 돌 사이를 시멘트와 같은 접착제를 사용하지 않고, 돌들을 촘촘하게 쌓는 것으로 처리했습니다. 그래서 모퉁이 돌을 중심으로 돌을 쌓았습니다. 따라서 모퉁이 돌의 견고함만큼 건물의 견고함과 건물의 크기가 정해졌습니다. 위로 쌓는 것은 모퉁이돌이라는 기초에 달려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연구한 학자들에 의하면 그 모퉁이 돌은 지름만 11미터에 달했다고 합니다.

 

가만히 말씀을 묵상해 보세요.

지금 말씀을 전하는 대상은 이미 복음을 받아들인 교인들을 향한 것입니다.

즉 산 돌이신 예수를 우리 삶의 모퉁이 돌로 삼겠다고 결심한 사람들이 아닐까요?

그런데 문제는 산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는 것이죠.

산돌 위에서 거룩한 제사장이 되지 못하고 세속적인 사람, 육체의 욕망을 따라 죄를 짓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죠.

모퉁이 돌을 놓았는데, 거기에 무엇을 위한 을 쌓아 가느냐의 문제입니다.

술집을 짓기 위해 돌을 쌓으면 술집이 될 것입니다.

학교를 위해, 교회를 위해, 회사를 위해, 위락시설을 위해, 도박장을 위해. . .

 

정하심과 자유의지

본문 7-8절은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예정과 자유의지가 충돌하는 부분처럼 느껴지기 때문이죠.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산 돌은 택함을 받아 보배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버렸지만 모퉁이 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에게는 부딪치는 돌과 바위가 되어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stumble’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택하심을 받은 자로 구원을 향해 가고 있는지 기준이 되는 아주 중요한 단서입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는 소중한 존재인가?

세상이 우리로 하여금 걸려 넘어지는가?

세상과 충돌하는가?

유석경이 쓴 [당신은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습니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직장암으로 투병하다 201631일에 세상을 떠난 신실한 사역자의 고백이 있습니다. 참 이해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세상에서 돈 잘 벌고 잘 나가던 사람이 사역자의 길을 걷기 위해 결심하고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하지만 그녀에게 찾아온 것은 사역의 열매가 아니라 시한부 선고였습니다. 그녀에게 찾아온 난감함은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런 일을 허락하셨는가?’라는 질문이죠. 그런데 사실, 이런 물음은 하나님의 주권을 오해하는데서 발생하는 일이라는 거죠.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주권을 오해하면서 그분을 억울하게 만들고 사탄을 억울하게 만든다. 뭐가 잘못되면 다 하나님의 뜻이거나 사탄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아마 사탄도 어리둥절할 것이다. ‘? 난 아무 일도 안 했는데?’. . . 비극은 우리가 자유의지로 행동한 결과를 모두 하나님 탓으로 돌리는 데 있다.”

 

오늘 말씀과 연결 지어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배로 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관계된 일이고 이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보배를 우리가 받아들이느냐의 문제는 자유의지의 문제입니다.

8절을 보세요.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그렇게 정하신 것이라.

이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주권과 자유의지를 명확히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자유의지에 의해 제한되어 있는 것이죠.

하나님은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도록 내버려두셨습니다. 하와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자유의지에 대한 책임을 물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자유의지는 우리들에게 아주 무서운 것임과 동시에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동시에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한 결과가 무섭지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은 변함이 없으시기 때문에 언제나 구속으로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여기에서 예배를 드리는 젊은 남녀 중에 많은 사람들을 만나 봤으나 결과가 다 좋지 않은 상대방이었다면 이렇게 불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못된 사람을 만나는 동안 나를 막지 않으셨는가?”

하지만 우리가 그 사람을 만나는 동안 우리의 자유의지를 사용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있나요? 사실은 그 만남의 와중에 성령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께 지혜를 구했더라면 다른 결정을 하지 않았을까요? 신명기 3019절 말씀을 보세요.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명확하지 않나요? 사망과 생명과 복과 저주를 선택할 권한을 주셨다는 말입니다.

그 자유의지를 쓴 결과가 하나님의 탓인지 우리의 책임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누군가는 산 돌이신 예수그리스도에게 걸려 넘어졌고, 누군가는 택함 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듣는 우리들에게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본문 9절 말씀.

 

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 교회에서도 QT 교육을 많이 합니다. 성경을 통해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중요한 두 가지를 발견하지 못하면 QT는 아주 공허한 것입니다.

하나는, 말씀 속에 나타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또 하나는, 말씀 앞에서 나는 누구인가?

이 두 가지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 때 의미가 생기는 것이죠. 그런 면에서 벧전 29절 말씀은 아주 중요합니다. 정체성과 의미라는 두 가지 기둥을 확실하게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두운 데서불러내셨습니다.

 

택하신 족속으로, ‘왕 같은 제사장으로, ‘거룩한 나라, ‘그의 소유

이와 같은 부르심은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우리의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기에

기이한 빛이라고 베드로서 기자는 이야기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불림 받은 이유는 그 분이 하신 일을 선포’ (declare)하기 위함입니다.

선포하는 순간 명확해지고 실체가 되는 것입니다. 묵상팀에서 이 구절을 가지고 이런 나눔을 가졌더군요.

 

문지윤 권사 나눔)

여러분들의 열렬한 지지에 힘입어서 미담을 하나 발표 할게요.

이번 추석에 있었던 일이랍니다.

우리 권사님의 자녀들이 있는데, 그 자녀 중에 큰 아들이 추석 때

부모님 용돈, 조카들 용돈 줄 거를 봉투에다가 다 이렇게 흰 봉투에다가 마련을 해가지고 올라온 거예요.

그런데 그 봉투를 가지고 공원을 산책하다가.....(중략)

그 돈을 다 놓고 잊어버리고 그냥 의자에 놓고 왔대요.

얼마나 이게 황당해요. 이게 다 드리려고 가지고 온 돈인데..

혹시나 해서 습득물 신고센터 같은 게 있다면서요?

전화를 했더니 그 돈이 그대로 와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거를 (요기 이게 미담이 아니에요)

나는 직접 못가니까 우리 어머니가 가도 되겠냐 이렇게 해가지고

돈을 찾으러 간 거예요.

찾았더니 경찰서에서 이 돈을 가져온 사람하고 통화를 하고, 이 돈을 가져가야 됩니다.

그래서 통화를 하게 되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 어머니가 통화를 하면서 아 이거 너무너무 감사한데 제가 조금이라도 보상을 좀 하고 싶은데 어떡하나요?” 그랬더니

 

그 분이 괜찮다고, 괜찮다고 안 그러셔도 된다고

내가 여기 지금 (중략) 여기 사는데 어디사시냐고그랬더니 분당에 이매촌에, 이매동에 산다그랬대요.

그런데 그분이 그분도 아마 추석에 부모님을 만나러 그 곳에 갔었던 것 같아요.

머니까 괜찮다고 그랬더니

우리교회 권사님이 아 이매동에 살면 만나교회 파구스라고 있는데,

거기서 커피라도 내가 한번 대접하고 싶다고, 만나교회 파구스 아시냐고그랬더니

저도 만나교회 다니는 사람인데요?“ 그러더래요.

아니 나도 만나교회 다니는 사람인데여기서 난리가 난거에요.

만나교회 화평동산. 어우 만나교회 만나교회“ (화평이 아니고 희락이라고 합니다.)

제가 오늘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 사람들이 얼마나 기쁘게 이 순간에 이야기를 했을까? 너무너무 감사한대

그 사람이 어디 다녀요? 만나교회 다녀요. 파구스에서 만나자고 했는데 거기를 같이 아는 사람인거에요. 너무너무 감사하고 기쁜 거예요.

 

선포한다는 것은 말로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이 드러나도록 말하고, 행동하고 사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가장 힘들어하는 것 중에 하나가 전도입니다. ‘전도가 되지 않는다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이 선포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많은 말을 할 수 있지만 종국에 드러나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입니다.

요즘 많이 하는 말이 있죠?

 

기승전 O’ 무엇이 되어야 할까요?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들의 귀결이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전도를 힘들어하는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는, 사람을 교회로 끌어오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실상 전도란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 일어난 기이한 일과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임무는 선포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의 선포를 듣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어두운 데서’ ‘기이한 빛으로 들어간 것이 우리들의 삶에서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지난 해 주일을 지키는 안식년을 지내며 제주도에 있는 동안 저를 잘 돌봐주던 제주 사람이 있었습니다. 12월에 분당으로 오기 전 마지막 식사를 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저에게 이렇게 말을 합니다.

저는 죽었다 깨나도 목사님처럼은 못 살 것 같아요. 어떻게 그렇게 평생을 사시나요? 하고 싶은 것을 못하고 살잖아요. 얼마 동안이면 몰라도. . .”

제가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나는 하고 싶은 대로 하는데요. 목사가 아니면, 누가 이렇게 안식년을 지내며 살 수 있을까요?”

아마 그 분에게는 매주일 설교하러 올라가는 제 모습이 안타까워 보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에게는 이 삶이 무척 즐겁고 행복한 데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지를 모르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죠.

 

베드로전서가 쓰인 시기는 교인들이 극심한 박해를 경험하던 때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만난 시련의 이유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시련가운데서 베드로가 권면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절대로 위축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누군가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있다면 위축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정체성에서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것이고, 이러한 분면한 자의식에서 사탄의 권세를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 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자주 비겁해지고, 어려운 일을 만날 때마다 불평했던 이유는 자의식이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자존심이 세워지면 자아를 드러내고 떳떳하게 선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비록 고난을 당하나 하나님께서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기 때문에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고난 가운데 있으나 위축되지 마십시오.

어두움 가운데 있으나 빛을 잃지 않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부르신 거룩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우리가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 보니 산 돌이신 예수그리스도가 걸림돌이 된 것이 아니라, 그 분으로 인하여 우리가 머릿돌이 되었음이 분명하기에,

산 돌이신 그 분으로 인해 우리가 선포하는 그 무엇이 있다는 말입니다.

 

admin

 

댁쟾쇰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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