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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베드로서 설교 모음

베드로전서 1:13 - 25 설교 모음

by Jessi J 2024. 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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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내세 /벧전1:23-25

2011-11-08 15:11:31

 

작년 일 년 동안에 천하를 호령하던 전직 대통령 두 분이 세상을 떠났고, 충성된 애국자이며 훌륭한 전역 장성 몇 분도 돌아가셨습니다. 참된 신앙을 가진 분들은 천국에 가셔서 복락을 누리실 것이고, 구원받지 못한 분들은 아무리 천하를 호령하는 수천억, 수백조의 재산을 가졌어도 영원히 슬퍼하며 이를 가는 고통을 받으며 후회하고 탄식하며 지내고 있을 것입니다.

 

대통령이나, 재벌이나, 장관, 장군들도, 그 몸이 무덤 속에서 살이 다 분해돼서 흙이 되고, 해골과 뼈만 남았을 것입니다. 높은 벼슬이나 명예 그리고 매우 많던 재물이 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들도 다 죽음이 있고, 심판이 있고, 영원한 내세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알았다면 그렇게 살지 않았을 것입니다.

 

본문 베드로전서 1 24절에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다는 것은, 육신을 가진 인간은, 풀이 파랗게 자라다가 겨울이 오면 누렇게 시들어 떨어지듯이, 싱싱하던 이 육신은 삽시간에 죽어서 흙이 되고 만다는 것이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다는 말씀은, 인간의 모든 부귀영화 즉, 대통령, 장관, 장군, 재벌이 되는 것 등은 꽃과 같이 화려해 보이지만 풀보다 더 빨리 시들어 떨어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옛날 이성봉 목사님은꿈결 같은 인생에 대해서 노래하기를꿈결 같은 이 세상에 산다면 늘 살까 인생의 향락 좋대도 바람을 잡누나 험한 세상 고난 풍파 일장춘몽 아닌가 슬프도다 인생들아 어디로 달려가느냐

 

참으로 인생은 풀과 같고, 그 영광은 풀의 꽃과 같음을 잘 노래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이 자랑하던 모든 큰 도시, 큰 빌딩, 인간이 성취한 것들은, 순식간에 다 파괴되고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다시 심판하러 오실 때, 바벨론 같은 대 제국들도 뉴욕이나 도쿄, 베이징이나 서울도 다 무너지고, 불타고 만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노아 홍수 때에는 물로 세상을 심판하였으나 예수님이 세상을 심판하실 때에는 불로 심판하신다고 성경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3 6~7절에이로 말미암아 그 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베드로 후서 3 10절에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3 11~13절에는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는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진다고 반복해서 말씀하고 있는데,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습니까?

 

우선, 세계가 보유하고 있는 핵폭탄이 폭발되면 지구를 몇 번이나 불태울 수 있다고 합니다. 제가 신뢰하는 주석가들이 핵폭발 가능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일본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위력은 버섯 같은 구름이 올라가고 그 굉음은 엄청났습니다. 쇠기둥이 녹아져내려 우유를 뿌려 놓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오늘날의 핵폭탄은 다섯 배, 열 배 이상 위력이 크다고 합니다.

 

그런데 역사상 무기를 만들어 놓고 쓰지 않는 일은 없다고 합니다. 베드로후서 3장에는 마지막, 주님의 재림시에는 큰불로 지구를 용해, 분해시켜 파괴 시킨다고 예언했습니다. 핵폭탄이 아니더라도 하나님은 수소나 산소를 가지고도 무서운 폭발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은 수소(hydrogen)와 산소(oxygen)로 결합되어 있지 않습니까? 수소나 산소는 더 큰 폭발력을 가지고 있는데, 수소폭탄을 왜 못 만드느냐 하면 그 폭발력을 일정한 그릇에 가두어 둘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마지막에 지구를 폭발시켜 분해 혹은 용해시킬 때, 물의 원소를 융합시켜 지구를 폭발시킬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3 12절에녹아”(melt)라는 말은데코마이”(tekomai)라고 하는 인데(dissolution), ‘분해되고, 녹아진다는 뜻입니다.

 

베드로후서 3 10절을 다시 봅니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와 다음절 11~13절에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과거에 두 번, 앞으로 한 번, 세 번의 심판이 있을 예정입니다. 첫 번 심판은 아담 이전의 상(Pre-Adamic World)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천사장, 계명성, 혹은 루시퍼(Lucifer)가 하나님의 최고의 영물이며 피조물이었으나, 그 자리로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의 보좌까지 찬탈하려다 저주받고, 당시의 우주가 함께 심판을 받았습니다.

 

이사야 14 12~13절에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Lucifer)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14절에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

 

이렇게 천사장이 교만하여 하나님보다 높아지려 하고, 하나님의 보좌를 찬탈하려다가 저주를 받았는데, 그때에 온 우주가 심판을 받아 대이변, 대재앙(catastrophe)이 일어나, 캄캄하고 무질서한 세상이 된 것입니다. 창세기 1 2절의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했는데, 그러면 그 세상은 어디서 왔겠습니까?

 

그러므로 창세기 1:1절과 창세기 1:2절 사이에는 큰 시간의 차이(gab)가 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 1절의창조는 히브리어로 “barah”인데, 이것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을 말하며, 그다음부터 나오는창조야차르”(Yatzar)아사”(Asha)는 기존 재료를 가지고 만들거나, 기존 재료를 가지고 조립한다는 뜻입니다.

 

세상 과학자들이 주장하는 지층은 몇백만 년, 혹은 몇억 년이 되었다고 하며, 공룡이나 맘모스같은 동물들은 몇백만 년 또는 몇억 년 되었다고 하는데, 왜 사라졌는지 어떻게 설명할 것입니까? 제가 신뢰하는 주경가() 맥기(Mc Gee)나 위어스비(Wiersbe) 나 로이드존스(Lloyd Jones)등이 다 이 학설을 주장합니다. 아담 이전의 상(Pre-Adamic World)은 이렇게 첫 번째 심판을 받았고, 두 번째 심판은 홍수심판입니다.

 

창세기 6,7,8장에 기록 되었고, 베드로후서 3 6절에이로 말미암아 그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즉 하늘에서 물이 내려오고, 땅속에서 샘물이 온 천하를 덮어 세상을 심판하였으나 노아의 8명의 식구만 구원받았습니다.

 

세 번째 심판은 베드로후서 3 7절에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라고 하였고, 3 10절에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라고 하셨습니다. 두 번째 심판은 하늘에서 물이 내려와 심판 받았으나, 세 번째 심판은 땅에 있는 핵폭탄이나 지구에 있는 원소의 융합과 폭발로 심판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 1절에는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보수적인 주경가들 중에는 하나님의 불심판이 임한 뒤에 지구와 하늘이 정화되어 이 세상이 천국이 되는 것처럼 말하는 이가 있으나, 그러면 왜 예수님이 요한복음 14 2~3절에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Mansion)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라고 하셨겠습니까? 3층천 하늘에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Dwelling place of God) 천국으로 가는 것이지 불심판 받은 세상에서 계속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2. 영원한 내세를 사모하며 살아야 합니다

 

세상은 죽을 때 다 버리고 떠나야 하는 나그네와 같은 삶이고, 예수님이 심판하실 때 다 불타버리고 말 곳이므로, 너무 세상 물질이나 명예에 집착하지 말고, 영원한 내세를 기다리고 사모해야 합니다.

 

이태리 밀라노의 대성당에는 문 세 개를 통과해야 하는데, 첫째 문에는모든 즐거움은 잠깐이다라고 새겨져 있고, 둘째 문에는모든 고통도 잠깐이다라고 새겨져있고, 셋째 문에는오직 중요한 것은 영원한 것이다”. 참으로 명 문구입니다. 즐거움도 잠깐, 고통도 잠깐이므로, 영원한 내세 천국을 바라보고 사모하며 살아야 합니다. 기회있는 대로 보화를 하늘에 쌓고, 세상의 칭찬보다 하늘의 영원한 영광과 상급을 받도록 살아야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입니

.

 

의지할 가치가 없는 일시적인 것을 믿고 의지하고 살면 그것이 쓰러질 때 같이 쓰러지고, 그것이 불탈 때, 같이 불타고 맙니다. 요한일서 2 15~17절에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대 바벨론 제국이 무너지듯이, 로마제국이 무너지듯이, 물질을 기초로 세워진 것들은 다 무너집니다. 인간의 영광, 인기와 자랑, 물질의 번영을 기초로 한 것은 다 와르르 무너지고 맙니다. 교회도, 영원한 진리의 말씀과 영으로 세워진 것이 아닌 것은, 아무리 크고 번영하는 것 같아도, 인기가 충천하고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어도, 바벨론처럼 무너지고 맙니다. 언젠가는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져도, 주의 말씀은 영원히 거한다라고 했습니다.

 

 

3. 영으로 태어나야 하나님의 가족이 되고 천국에 들어갑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3장에서사람은 반드시 두 번 태어나야(born again) 하나님도 볼 수 있고, 천국에도 들어갈 수 있다고 하실 때, 니고데모는 사람이 어른이 되었는데 어떻게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 나올 수 있습니까? 라고 질문 했습니다. 육신으로 한번 태어나고 성령으로 영혼이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사도 베드로도 베드로전서 1 23절에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perishable seed) 된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imperishable seed)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달걀이 한번 태어나서 닭이 되는 것이 아니라 따듯한 열을 가해서 두 번째 태어나야 닭이 되듯이, 사람도 죄로 죽었던 영혼이 복음의 말씀을 듣고, 다시 살아나야 영생을 얻고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태어나려면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어야지, 어느 한 쪽만 있어선 안 되듯이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려면, 두 가지가 있어야 하는데, 생명의 씨앗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성령입니다. 인간의 철학이나 사상, 또 인간의 문학작품은 아무리 훌륭해도, 그 속에는 생명이 없기 때문에 썩는 씨앗(perishable seed)이고, 하나님의 말씀, 혹은 복음의 말씀은 그 속에 영적 생명이 있기 때문에, 썩지 않는 씨앗(imperishable seed)입니다.

 

베드로전서 1 23절에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라고 하셨고, 그다음에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곧 예수님입니다.

 

요한복음 5 24절에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마음을 4가지 밭으로 설명하셨는데,

 

첫째는 길바닥 같은 마음, 떨어지자마자 새들이 주워 먹어버리듯이 딱딱하게 굳은 마음이라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마귀가 구원받지 못하게 하고, 두 번째 마음은 흙이 얇은 돌작밭 같은 마음, 예수님 믿고 교회 다니다가 시험이 오고 핍박이 오면 시들어버리는 것이고, 세 번째 마음은 가시덤불 같은 마음, 세상욕심 때문에 믿음을 저버리는 사람이고,

 

네 번째 마음은 부드러운 옥토와 같은 마음인데, 겸손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 들여서, 싹이나고 잎이나고 열매를 맺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4명중에 3명은 복음을 들었다가도 지옥가고 맙니다. 잘해야 25%, 4명중에 1명 정도만 중심으로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 천국에 갑니다. 여러분, 옥토에 떨어진 씨와 같이 다 구원받아 하나님의 가족이 되시기 바랍니다.

 

세상 종말에 있을 불심판은 예수님이 만왕의 왕으로서 천년왕국을 다스리다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천년 끝에 둘째 부활 즉, 심판의 부활을 하여 하나님의 크고 흰 보좌 앞에서 심판을 받고 지옥으로 떨어져 영원한 고통을 받게 되고,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은 천국에 들어간 다음에 있을 것이므로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은 아무염려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할렐루야!

 

신앙은, 유한의 영원에로의 접목 /7:1-16/벧전1:24-25/ 이재철목사

2015-07-25 09:14:26

 

도입 일화

 

미국에 살고 있는 제 조카 중 한 명이, 미국 청년과 결혼하였습니다.

한국인인 제 조카와 결혼하기로 한 마이클은 한국말을 배우기로 결심했습니다.

먼저 '가나다라.....' 즉 한글 알파벳을 익힌 그는,

어디에서든 한글이 보이기만 하면, 읽는 연습을 하였습니다.

 

하루는 한국인이 경영하는 가게에 들렀다가, 그곳에 손님들을 위하여 비치해둔

한국잡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의자에 앉아 잡지를 펼쳐들고선 한자, 한자, 더듬더듬 읽기 시작했습니다.

 

, , .’

마이클은 몇 번이나 한 글자씩 천천히 읽어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단어의 뜻이 무엇인지, 전혀 짐작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마이클은 한국인인 가게 주인에게 정중하게 물었습니다.

아저씨! , , . 가 무엇입니까?’

가게 주인은 마이클로부터 잡지를 넘겨받아 내용을 확인한 다음 박장대소하며 대답했습니다.

이건 orange!’

 

마이클은 한글로 쓰여 있는 ', , ', 영어로 orange일 줄이야 상상도 못했던 것입니다.

 

마이클이 한글로 오렌지란 글자를 읽을 수는 있었지만, 그것도 반복하여 여러 번 읽었지만,

그러나 그것이 orange를 가리키는 글자라는 사실을 알지 못할 때,

그 단어는 그에게 단순한 문자 이상의 의미일 수는 없었습니다.

 

뜻을 알지 못하는 단어를 반복하여 읽는다한들,

그것 또한 가치 없는 일이기는 매한가지였습니다.

 

우리의 신앙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또박또박 소리 내어 읽을 수 있습니다.

반복하여 교회를 다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 있어, 참된 신앙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면,

그 모든 행위는 마치 오렌지를 뜻도 모르면서

', , '로 거듭 읽는 것처럼 무의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참된 신앙의 의미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그 해답을, 본문 벧전1:24~25a절속에서 찾아보려고 합니다.

 

 

◑1. 유한의 영원에로의 접목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벧전1:24~25a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참으로 잘 보여주고 있는 구절입니다.

모든 것이 풀처럼 유한하기 짝이 없는 이 세상에서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영원한 까닭은,

그 말씀의 주체이신 하나님께서 영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유한한 인간에게 있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참된 의미란,

'유한의 영원에로의 접목'이라 표현할 수 있습니다.

 

오늘 싱싱하게 피어있는 듯싶다가도

한 순간에 시들어 떨어져버리는 들풀과 같은 인생이, , 유한이,

 

영원하신 하나님을 믿으므로,

비로소 유한을 뛰어넘어 영원과 접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친히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은 이렇게 끝나고 있습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6:13

 

주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날마다

영원하신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고백케 하심으로써,

우리가 추구해야 할 신앙의 본질적 의미가 영원에 있음을 분명히 일깨워주십니다.

 

신앙의 본질적 의미가 영원과의 접목임을 바르게 알 때

바른 신앙의 정립이 가능합니다.

 

신앙의 참된 의미는 결코 유한의 강화에 있지 않습니다.

유한의 깊이나 높이의 확장에 있지도 않습니다.

유한의 미화에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물거품의 방울을 치장하거나 개선하려는 것처럼 부질없는 짓입니다.

아무리 크고 단단해 보이는 물거품이라 할지라도,

물거품은 어쩔 수 없이 물거품일뿐, 즉 순식간에 사라져버리고 맙니다.

 

영원에 접목되지 아니한 인간의 삶.. 또한 예외일 수 없습니다.

좀 더 잘 먹고 좀 더 많이 가지고 좀 더 높아질 수는 있겠으나

영원을 비켜난 인생이란, 영원과 매일 접목하지 않고 사는 삶이란,

결국 물거품과 같습니다. 늙으면 깨달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찍 깨달아야 합니다.

 

어차피 사라질 물거품에 지나지 않는다면,

거품의 크기가 큰 만큼, 거품이 터져 버릴 때의 허망함만 더 클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말이 무의미한 물거품으로 끝난다면,

그 과정 또한 아무런 의미를 부여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믿음 속에서 영원에 접목된다는 것은,

단순히 들풀 같은 인생의 유한을 뛰어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유한한 인간이 하나님의 영원하심에 접목됨으로써,

인간에게 주어지는 모든 시간과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비로소 영원한 가치를 지니게 된다는 데에, 그 진정한 의미가 있습니다.

 

아브라함, 모세, 여호수아, 사무엘, 다윗과

그 외 여러 믿음의 조상들을 생각해 보십시다.

 

그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희로애락과 질고의 일생을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삶과 고난이 말할 수 없이 고귀하고 가치로운 것은,

그들의 삶과 고난이 영원과 접목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여러 믿음의 조상들과 반대로, 화려하게 살았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애굽의 왕들, 세상 군왕들, 재력가들, 영웅호걸들..

 

우리는, 지금 내가 아무리 비천하고 못났다 할지라도,

내 삶을, 그들 영웅호걸의 삶과 바꾸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 삶은.. 영원과 이어져 있고,

그들의 삶은, 아무리 화려했다 하더라도, 유한에서 끝났기 때문입니다.

(물론아래에서 영원히 지냅니다만, 우리는 그것을생명이라 부르지 않고,

사망이라 부릅니다. 영원과,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되었기 때문입니다.)

영원에 접목된다는 것은 이처럼 중요합니다.

 

모든 순간은, 영원의 일부

흔히 영원을 말할 때, 순간을 하찮게 여기는 우를 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틀렸습니다.

오히려 영원에 접목된 자만 순간의 중요함을 바르게 압니다.

모든 순간이 실은 영원의 일부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영원 속에서만, 순간이 영원의 가치를 지닙니다.

영원 속에서만, 오늘이 영원한 내일을 위한 초석이 됩니다.

 

영원 속에서는 가치롭지 아니한 것이 없습니다.

이 유한한 세상 속에서, 영원보다 더 고귀한 것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본문 행7장을 통해 우리가 얻고자 하는 교훈이 바로 이것입니다.

 

 

◑2. 발붙일 만큼도 안 주시고

 

7장 스데반 집사의 설교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가라사대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 아비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시방 거하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7:2~4

 

아브라함이 본래 살던 곳을 떠나, 가나안으로 이주했던 것은

아브라함의 자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 일이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란에 살던 아브라함을 직접 가나안 땅으로 불러들이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단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순종의 결과를 이렇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발붙일 만큼도 유업을 주지 아니하시고’ :5a

 

분명히 아브라함을 가나안으로 데리고 가신 분은 하나님이시건만,

하나님께서는 그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발붙일 만큼의 땅 한 평조차도 주시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상식과는 완전히 어긋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친히 인도 해 가셨다면,

그것은 마땅히 광활하기 그지없으리라는 것이 우리의 상식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을 위해서는 한 치의 땅도 없었습니다.

(그는 막판에, 막벨라 굴을, 매장지로, 값을 치르고 구입했습니다.)

 

가나안 땅을 주시되, 4백년+ 후에 주시기로 약속

 

그리고 본문은 다음과 같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발붙일 만큼도 유업을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저와 저의 씨에 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

하나님이 또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 씨가 다른 땅에 나그네 되리니

그 땅 사람이 종을 삼아 4백 년 동안을 괴롭게 하리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종 삼는 나라를 내가 심판하리니,

그 후에 저희가 나와서 이곳에서 나를 섬기리라 하시고’ 7:5~7

 

단지 가나안을 주시기는 주시되,

그때까지 아직 태어나지도 아니한,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이집트에서의 노예생활로부터 풀려나게 될

4백 년 후에 말입니다. 참으로 황당한 얘기입니다.

 

그럴 바에야 아예 4백 년 후에 아브라함 후손을 직접 부르실 일이지,

무엇 때문에 하란 자기 집에서 잘 살고 있는 아브라함을

미리 이역만리로 이주케 하신 단 말입니까?

 

자신을 위해서는 발붙일 만큼의 유업도 없는 그 가나안 땅에서

아브라함의 삶이 대체 무슨 의미와 가치를 지닐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 모든 실정을 알고 난 뒤 고향을 등지고 온 아브라함의 실망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지금으로부터 4백년이면, 임진왜란(1592)이 일어났던 때입니다.

그만큼 오랜 기간이란 뜻입니다. 우리 같으면 기절했을 것입니다.

 

4백년, 아니 5백년 후에 이루어질 약속을.. 바라보고 믿으라는 겁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믿고, 좇기를 바라십니다.

주제는.. 신앙은 영원에 잇대어 있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자신을 위해서는 발붙일 만큼의 유업도 없는 그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절망하거나, 혹은 하나님의 약속 을 황당하다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이유인즉, 그는 영원하신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영원과 접목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비록 자식 한 명 없지만,

그러나 영원 속에서 4백 년 후 그의 후손이 큰 민족을 이룰 수 있음을 믿었습니다.

 

후손들이 겪어야 할 400년 동안의 노예생활이 고되지 않을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영원을 경영하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후손들을 사랑하시사,

세상 어느 민족보다 강한 민족으로 훈련시켜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선한 계획임을 믿었습니다.

 

지금 자신이 두 발 딛고 서 있는 땅 위에

자신을 위해서는 단 한 치의 유업도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에 의해 4백 년 후 그 땅이 자기 후손들의 삶의 터전이 될 것을

분명히 믿었습니다.

 

영원에 접목되어 있을 때, 믿지 못할 하나님의 약속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도 분명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후손에게 주실 땅으로

아브라함 자신을 4백 년 전에 미리 부르신 것은,

자신으로 하여금 4백 년 후를 위한 초석을 놓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창세기 23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아브라함은 그의 아내가 죽었을 때에,

원하는 곳 어디에나 고인을 그냥 매장하라는 원주민들의 끈질긴 호의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끝내 값을 치르고 매장지를 매입한 뒤,

그곳이 아브라함의 소유가 되었음을 원주민들로 하여금 공포하게 하였습니다.

 

그것이야말로 4백년 후, 그의 자손들이 그 땅을 향하여 나아올 이정표였습니다.

 

그래서 행7:15~16절은 이렇게 끝나고 있습니다.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가 자기와 우리 조상들이 거기서 죽고, 세겜으로 옮기워

아브라함이 세겜 하몰의 자손에게서 은으로 값 주고 산 무덤에 장사 되니라.’

 

이집트로 이주한 야곱이, 이집트에서 죽자

그의 자식들은 야곱의 유해를 이집트에서 가나안으로 옮겨와,

아브라함이 값을 치르고 매입했던 바로 그 매장지에 장사지내었습니다.

 

이미 이때(아브라함의 증손자 때)부터,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있어서

가나안이란, 반드시 그들이 돌아가야 할 하나님의 약속의 땅이 되어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 땅은 그로부터 4백 년 후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땅이 되었고,

4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스라엘의 영토로 존속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비록 현실의 자신에게는 발붙일 만큼의 땅 한 평도 없었지만,

그러나 영원과 접목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던 아브라함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은 두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가 영원하신 하나님의 영원과 접목되어 있지 않았던들,

발붙일 만큼의 유업도 없던 그 이역만리 타향에서의 삶은,

결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어윈 루처참음으로 기다리는 신앙

 

 

◑3. 나도 아브라함과 마찬가지

 

제가 살고 있는 아파트 앞 가로수는, 벌써 낙엽들이 한 잎, 두 잎 지고 있습니다.

1년을 채 넘기지 못하고 떨어지는 낙엽은 언제나 쓸쓸하고 외로워 보입니다.

 

푸르던 나뭇잎이 낙엽이 되어 떨어진다는 것은

이제 형체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것을 의미하는 탓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낙엽을 보며 허무를 되씹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번 깊이 생각해 보십시다.

과연 나뭇잎은 낙엽이 되어 사라져버리기만 하는 것입니까?

 

나뭇잎으로서의 형체는 분명 사라져 없어집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나뭇잎의 의미와 가치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지난봄에 돋아나 가을이 되기까지 푸른 잎으로 존재하던 그 잎들의 가치와 의미는,

작년보다 더 크고 굵어진 나무줄기와 가지 속에 실은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태양의 빛과 열 그리고 공기를 빨아들이면서

한 해 동안 나뭇잎들이 수고하지 않았던들,

지난해보다 더 성장한 나무로 나무 자체 가 지금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모든 나무란, 그 나무를 거쳐간 숱한 나뭇잎들의

의미와 가치의 총 집합체인 것입니다.

 

인생도 이와 똑 같습니다. 우리에게도 시간은 끊임없이 스쳐 지나가고 있습니다.

사람이 늙어간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시간 이 스쳐갔음을 의미합니다.

10대도 스쳐가고 20대도, 30대도 스쳐지나 갑니다.

 

그러나 그 의미가 사라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 동안 나를 스쳐 지나간 모든 시간은

실은 지금의 내 인생 속에, 나의 삶 속에, 나의 모습 속에 영락없이 남아 있습니다.

 

그 시간들을 의미 없이 탕진했다면.. 지금 의미 없는 인생으로,

가치 있게 선용했다면.. 지금 가치 있는 모습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바로 지금의 내 자신이 나를 스쳐 지나간 모든 시간의 집합이요,

나의 일거수일투족이 그 시간들의 의미와 가치를 스스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나간 세월 동안 진실되이 살아온 자의 지금이.. 거짓된 모습일 수 없고,

거짓되게 살아온 자의 인생이.. 진실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축적되어 있는 의미와 가치가 무엇이든 간에,

그의 인생이 영원에 접목되어 있지 않을 때,

그 의미와 가치는 결국 소멸되기 마련입니다.

 

인생이란 결국 풀의 꽃과 같이 유한한 존재이기에,

그 유한으로부터 비롯된 모든 의미와 가치는, 그 유한과 더불어 소멸되고 맙니다.

 

반면에 우리가 영원에 접목되어 있을 때,

우리를 스쳐지나 가는 시간들은 영원한 가치와 의미를 지니게 되며,

그 당연한 결과로서, 우리의 인생 자체가

그 영원한 의미와 가치의 집합으로 승화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 대표적인 예로,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을 들고 있습니다.

하란에서 실패자로 그 인생이 끝났을 수밖에 없는 아브람!

 

그러나 영원하신 하나님의 영원에 그 자신을 접목시킴으로써,

발붙일 만큼의 땅 한 평도 없던 그 이역만리 객지에서

영원한 믿음의 조상으로 승화되고 이스라엘의 초석이 된 아브라함 말입니다.

 

마치는 말

오렌지는 ', , '가 아니라 orange입니다.

우리가 믿는 신앙의 의미를 알자는 뜻입니다.

 

믿음은.. 유한(현실)의 강화나 확장 또는 유한의 미화를 위함이 아닙니다.

믿음은.. 오직 영원에로의 접목을 위하여 존재합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 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벧전1:24-25

 

모든 것이 유한한 이 세상에서, 영원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그분의 영원하심에, 영원하신 그분의 말씀에 여러 분의 인생을 접목시킵시오.

그 영원의 초청에, 아브라함처럼, 기꺼이 응답 하십시다.

 

영원 속에서는 믿지 못할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도 없습니다.

영원 속에서는 의미 없는 것이 없으며, 가치롭지 아니한 순간이 없습니다.

 

영원 속에서는 발붙일 만큼의 유업조차 없는 오늘일지라도

영원한 내일을 위한 초석이 됩니다.

 

영원 속에서만 나의 인생은 새로운 세계를 위한 발판이 됩니다.

영원 속에서만 새 밀레니엄은 진정한 새 천년이 될 것입니다. 2000년경 설교인 듯

 

진정한 가치와 의미는 오직 영원 속에만 있습니다.

영원보다 더 값진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 영원에 우리를 접붙여 주시기 위해,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기도/ 영원하신 하나님 아버지시여!

유한에 눈이 멀어 영원을 상실한 죄인이건만, 이 죄인을 긍휼히 여기시사

이 시간도 불러 주시고, 아버지의 영원하신 팔을 내밀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아버지의 영원하심에 나를 접목케 하여 주옵소서.

아버지의 영원하신 품에 나를 맡기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영원하신 말씀에 나를 온전히 의탁케 하옵소서.

 

그리하여 발붙일 만큼의 유업조차 없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특히 해외 이민자, 재외동포, 유학생들이 더 그렇지요)

그 속에 간직된 영원한 의미와 가치를 분별하는 통찰력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나를 스쳐지나 가는 모든 시간들이 영원한 의미와 가치의 집합이게 하시고,

그 같은 나의 삶이 정녕 새로운 밀레니엄을 구축하는 영원한 초석이게 하옵소서.

 

어떤 경우에도, 오늘 내가 추구하고 있는 나의 삶이

실은, 내일 내 후손들이 살아갈 삶의 발판이 된다는 하나님의 법칙을 잊지 말게 하소서...

 

 

 

admin

 

다시 거룩함으로. ./벧전1:13-25/ 김병삼목사

2018-11-07 03:25:06

 

13.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14.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16.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17.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20.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린 바 되신 이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21. 너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2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23.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25.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성도가 거룩해야 하는 이유!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부터 오늘 말씀을 시작해 보겠습니다.

베드로는 흩어진 나그네로, 이 땅에서 때로 여러 가지 시험과 근심가운데 사는 사람들에게산 소망을 가지라고 권면했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이영혼의 구원이기 때문이죠. 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부지런히 연구하고 살펴서 이 구원을 바라고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자세로 할 것인가? 13-4절 말씀.

 

13.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14.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우리가 바라는 것은은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 .

이때는 개인적인 종말이 될 수도 우주적인 종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 때 우리가은혜아니면 소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구원이 우리의 자격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온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우리의 자격으로 소유하는 것은 아니지만, 은혜를 누리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 은혜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지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3절에서는온전히 바랄지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온전히 바란다는 것이 단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죠.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 NIV 성경에는 “prepare your minds for action; be self-controlled”

그런가 하면 메시지 성경에는 이렇게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So roll up your sleeves, put your mind in gear, be totally read to receive the gift…”

 

허리를 동인다는 의미를 아시나요? 당시 사람들이 입고 다니는 옷을 영화를 통해서 보셨겠지만, 대개 ‘robe’스타일의 옷이죠. 구멍이 세 개만 있으면 옷이 되는 것, 그래서 활동성을 위해서는 허리띠를 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마음의 허리를 동이고라는 말의 의미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우리가 행보하는데 방해가 되는 늘어진 것들을 동여매라는 것입니다.

참을 것은 참고 절제할 것은 절제 하라는 것입니다.

 

유진 피터슨은소매를 걷어라고 표현하고 있죠. 늘어진 소매 때문에 일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이 있습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

14절의 말씀이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이전에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때에는 모르기 때문에사욕 ‘evil desire’을 따라 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제는순종의 자식이 되었습니다. 영어 성경에는 ‘obedient children’이라고 되어 있는데, 의미가 명확하죠.

 

순종하는 어린이처럼 살라는 말입니다. 이전에는 불순종하는 진노의 자식이었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경험했으니, 아는 대로 행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당면한 문제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이 예수를 믿고,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았는데, 그 신앙을 지키지 못하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유혹도 무섭지만, 고난도 무섭습니다. 시험 가운데 교인들이 살아가는 목적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자꾸 아무것도 알지 못하던 옛날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산 소망을 가지고 살도록 부르심을 입은 자들의목적이기 때문입니다.

 

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16.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레위기 19 2

본문 16절의 말씀은 레위기 19 2절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가장 분명한 하나님의 속성 중에 하나가거룩입니다. 사무엘상 2 2절에서 기도의 응답을 받은 한나가 하나님을 경배하며 고백한 내용 중에도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여호와와 같이 거룩한 이가 없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거룩하다 말씀하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경험한다는 것은 그 분의 거룩함 앞에 서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 역시 우리가거룩해 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음에 살펴보겠지만 베드로전서 2 9절에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우리를거룩함으로 부르신 것은,

우리가 완전하기 때문이라거나, 거룩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거룩할 때, 우리를 부르신 이의 아름다움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룩에는 두 가지 중요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히브리어로카다쉬라는 단어인데분리를 뜻하는 것이죠. 죄로부터 세상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이 거룩입니다.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분리가 배타적인 분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거룩은 배타적인 분리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비타협과 초월, 그리고 변혁을 통해 밝혀지는 것입니다. 너무 멋있는 개념이 아닌가요?

어둠 속에서 빛이 존재를 드러내고, 무미건조한 데서 소금이 맛을 내는 것처럼, 거룩함이란세상한 가운데서 찬란하게 빛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구별입니다.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모든 것들이 구별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행하면 세상과 구별되고, 세속과 구별되고, 더러움과 구별되고, 거짓과 구별되며, 썩어서 냄새가 나는 것과 구별됩니다.

 

말씀을 묵상하는 중에 두 단어가 눈에 들어 왔습니다. ‘모든행실이라는 말입니다.

13절에서는온전히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영어로는 ‘fully’ 라는 말과 15절의 모든 행실을 말하는 ‘all’이라는 단어입니다.

성경에는 우리가 잘 아는 거룩함의 체험이 있습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경험하는 소명장인 이사야 6장이죠.

거룩하심 앞에서 그의 죄가 사하여지고, 그의 입술이 숯불로 지져지는 체험을 하며 쓰임을 받게 됩니다. 이사야 6 5.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나님의 거룩함 앞에서 자신이 망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서야, 그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의 흔적인 입술이 부정하다는 것을 인정하고서야 하나님이 쓰시는 것이죠.

이제 세상적인 언어를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의 삶을 살게 됩니다.

 

또 하나의 소명장은 출애굽기 3장에 나오는 모세의 부르심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모세가 행한 일은 발에서을 벗는 일이었습니다.

상징적인 의미가 있죠. 그가 밟고 살았던 삶의 모든 흔적이신발에 묻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기 전에 그가 밟았던 흔적들은 세상적 이었습니다.

살인하던 사람이었고, 도망자의 삶을 살았던 발걸음 이었습니다.

 

이제 그의 존재를 모두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입니다. 거룩하심 앞에서 새로운 신을 신는 것입니다. 부분이 아니라 ‘fully’ 그리고 ‘all’입니다.

베드로가 염려하고 당부하는 것의 이유가 여기에 다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거룩하게 살지 못하는 이유는 늘부분적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때로는대충행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관행이라 불리는 것들입니다.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더러운 일들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릅니다.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죄책감을 상실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부분적으로 또는 대충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어쩌면 우리의 능력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부분에서 우리는 하나님 없이 생각하고 결정하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성취감을 느끼면교만이 들어옵니다. 교만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훼손하는 첫 번째 적이 아닐까요?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바란다는 것은무기력하다는 말이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을 바라며 한다는 것이 아닐까요?

 

이런 맥락에서 보면 우리가 행하는 행동들에도 자의적 판단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것은 하나님과 관계가 있고, 어떤 것은 하나님과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리고 어떤 일은 거룩한 일이고, 어떤 일은 세속적인 일이라고 구분을 짓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은 우리를 부분적으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온전히 부르셨습니다.

어느 목사님의 설교 예화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주일저녁 예배에 목사님은 설교를 마치면서 교인들에게 물었습니다.

여러분 중에 이 순간부터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기를 결심한 분이 있다면 손을 들어주십시오.”

그때에 뒷자리에 앉아있던 한 부인이 남편의 옆구리를 찌르며 조용히 말했습니다.

여보, 당신도 이 순간부터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지 않겠어요?”

 

그녀는 열심히 교회를 출석했지만, 그 남편은 오늘 처음으로 교회에 나왔으므로 이번 기회에 남편이 예수님을 영접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남편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부인은 슬픈 목소리로 남편에게 물었습니다.

여보, 난 당신이 손을 들 줄 알았는데 왜 안 들었죠?”

그러자 남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그 동안 당신은 신앙인으로 살아왔고 나는 불 신앙인으로 살아왔소. 그런데 그동안 당신의 생활을 보면 나와 다른 점이 하나도 없었소. 내가 카드놀이를 하면 당신도 카드놀이를 하고, 내가 술을 마시면 당신도 술을 마시고, 내가 댄스파티에 가면 당신도 댄스파티에 가고, 내가 화내면 당신도 화내고, 내가 거짓말하면 당신도 거짓말 하고, 내가 욕하면 당신도 욕하고... 이처럼 당신과 나의 생활이 전혀 다를 바가 없는데 내가 무엇 때문에 기독교인이 되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겠소?”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가장 부끄러운 일이 있다면, ‘구별되지 않는 것입니다.

스스로 아무리 거룩하다고 주장해도 구별되지 않는 곳에 거룩함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거룩하다고 말을 해도행동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거룩함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가장 부끄러운 것이 무엇입니까?

가짠데 진짜라고 우기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데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거룩은 하나님 앞에서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그것이 사람들 앞에서증명되는 것입니다.

성락성결교회를 담임하는 지형은 목사님이 쓴 책이 있습니다. [우리는 함께 아름다워지는 거야]라는 제목인데, 여기에서증명이라는 것을 생각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국 역사에서 벤자민 프랭클린이란 유명한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이 밭에 석회가루를 뿌리면 더 많은 양을 수확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프랭클린은 이웃 사람들에게 그런 사실을 알렸지만 아무도 이 말을 믿어 주지 않았다. 그들은 석회가루가 채소와 곡물에게 무슨 도움을 줄 수 있겠냐며 프랭클린에게 면박만 주었다. 프랭클린은 이 문제에 대해서 더 이상 얘기하지 않기로 했다.

 

다음 해 봄이 되어 씨앗을 심을 때가 되었다. 프랭클린은 사람들이 자주 다니는 길목 가까이에 있는 밭에 손가락으로 땅에 구멍을 만들면서 무엇인가를 썼다. 그리고 그 구멍에 석회가루를 섞은 씨앗을 뿌렸다. 그로부터 한두 주간이 지난 후, 씨앗이 싹트기 시작했다. 프랭클린의 이웃들은 그곳을 지날 때마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새싹들이 다른 곳보다 유난히 높이 자라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 싹들은 이렇게 글씨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곳은 석회가루를 뿌린 곳입니다!”

 

프랭클린이 석회가루의 이점에 대해서 더 이상 이웃들과 논쟁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은 물론이다. 몇 주간이 더 지나면서이곳은 석회가루를 뿌린 곳입니다!”는 다른 곳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높이 자랐으니까.

 

부르심을 입은 자의 거룩함은 증명되는 것일 뿐 아니라, 우리들에게 지켜야 하는이 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우리는 위대한 자연을 감상하다 종종 사고를 당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왜 그럴까요? 위대한 자연을 보며 아름다움에 취해경외심을 잃고 방심하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자연을 감상하는 안전한 방법은 안전수칙을 지키는 것입니다.

 

얼마 전 감신 대학원생들을 데리고 부산으로 수업을 갔습니다, 동백섬을 걷게 되었습니다. 해안으로 길이 잘 나있는데, 아름다운 경치 끝으로 이런 팻말이 쓰여 있더군요.

이 곳을 넘어가지 마시오.’ 그런데 그 팻말을 넘어서 한 남자가 바위 위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위험한데라고 하며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리 아름다워도 지켜야할 선을 지키기 않으면 위험하다고 말이죠.

 

하나님이 거룩하다는 것은 좋으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지켜야 하는 것이 있다는 말이 아닐까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훼손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거룩함을 훼손한다는 것은, 우리의 행동으로 인해 하나님이 욕을 먹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누군가에게 손가락질을 당하는 것처럼 무서운 일이 없습니다.

우리가 넘지 말아야할 선이 무엇인가요?

우리가 하는 일로 인해 거룩하신 하나님이 욕을 먹지 않도록 살라는 것입니다.

그 내용이 17절에 있습니다.

 

나그네의식을 갖고 사는 것입니다.

17.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 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거룩하신 하나님의 속성앞에서 우리가 가지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거룩하신 하나님은 우리를외모로 보시지 않고행위대로심판하시는 분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우리가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에 보면외모를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분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a good Father’ and ‘a responsible Father’

하나님이 좋으신 이유는 우리를도우시는 분이기 때문이고,

책임적이라는 말은 우리의 잘못된 삶을 그냥 두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래서 두려운 것입니다.

좋지만 쉽지 않습니다.

사랑하시지만 공의로우시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이 우리와 관계없는 분이라면 별로 두렵지 않을 텐데, 이 하나님 앞에 우리가 서야하기 때문에 두려운 것입니다. 다시 13절 말씀을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13.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실 때는 초대 기독교인들이 바라고 있는재림의 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대면하는 두 가지 방식이죠. 우주적 종말이든, 개인적 종말이든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삶의 방식이 있습니다. 17절 말씀에 보면,

나그네로 있을 때에 두려움으로 지내는 것입니다.

 

NIV 성경에서는 ‘live your lives as strangers here in reverent fear’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먼저나그네라는 것은 완성되지 못한 순례자의 삶입니다. 아직 가야할 여정이 남아 있기 때문에 긴장해야 합니다. 잘못하면 목적지에 다다르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의 가장 기본적인 태도 중에 하나가 바로 이나그네의식이 아닐까요?

사도바울이 늘 긴장 했던 것아직 이루었다 함도 아니요. . .’ ‘푯대를 향하여

 

나그네 의식에서 꼭 필요한 것은두려움입니다. 영어로는 ‘reverent fear’라고 하는데,

유진 피터슨은 아주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a deep consciousness of God’

아주 깊은 하나님 인식이죠.

나그네로 걸어가는 그 길 위에서 늘 하나님을 생각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지켜나가는 것입니다.

 

나그네는 얼핏 들으면 목적의식이 없는 사람이라는 말처럼 들립니다. 갈 곳도 없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아닐까요?

그런데 성경은 이 세상에 사는 우리에게나그네 의식이 아주 중요하다고 말하죠.

이 땅위에서 사는 삶이나그네라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할 때, 우리는 이 세상이 아닌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나그네로 살아가는 삶에 목적을 두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영원히 거할나라에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산다는 것은세상의 소망 때문에 분명한 태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가리켜서불확실성의 시대라고 말을 합니다.

그런데 불확실성의 시대에서 가장 확실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이 바로 나그네 의식입니다.

갤브레이스 (Galbraith, John Kenneth, 1908.10.15~2006.4.29) 라는 미래학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시대는 미래가 불확실하다는 말 빼고는 모두가 불확실한 시대라고 말입니다.

 

가장 확실한 것이 무엇일까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의식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이 가장 명확한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우리가 아무리 속이려고 해도 속일 수 없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겉치레에 속아 넘어가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가릴 수 있다고 생각하죠. 마치 옷을 입어 우리의 약점을 감추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그럴 수 없을 때가옵니다.

헬스클럽이 가장 잘 되는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여름 시즌을 앞둔 2-3개월입니다. 어쩔 수 없니 자신의 몸을 드러내야 되는 순간이 되면 신경을 쓰는 것들이 많아집니다.

만일 그런 관심이 없다면 자신에 대하여 무감각한 사람, 다른 사람을 신경 쓰지 않는 사람, 혹은 자포자기 한 사람이 아닐까요? 오늘 말씀을 가지고 묵상한 한 권사님의 나눔입니다.

 

문지윤 권사 나눔)

여름이 되니 옷 입는 것이 신경 쓰인다. 겨울이면 두툼하게 가려지는 옷들로 신경 쓰지 않던 부분들이 신경 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운동도 더 열심히 하려 하고 저녁에 되도록 과식하지 않으려고 하고, 간식으로 먹는 과자나 빵도 그 칼로리가 얼마나 되는지 살펴보게 된다. 물론 맛있으면 칼로리는 다시 없애면 되는 거라 생각하고 먹어 버리지만,,, 아이들 간식도 칼로리를 보게 되고 내가 하루 먹은 것의 칼로리도 생각하게 된다.

 

문득 드는 생각! 이렇게 외모가 신경 쓰여 먹는 것의 칼로리를 체크하면서.. 나의 영적인 상태는 그 정도 체크하는가 돌아보게 되었다. 새벽에 기도하고, 큐티하는 것으로 일상에 묻혀 지내다가 문득 다시 말씀을 상기하고 하나님께 여쭙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삼시 세끼에 수시로 먹는 간식을 돌아보는 칼로리 계산보다는 그 횟수가 덜한 것 같다.

 

사람의 눈을 이리 신경 쓰면서 정작 하나님의 눈에는 둔감한 나를 보면서 내가 만약 모든 언행에 칼로리 계산 하듯 하나님의 마음과 뜻에 기준하여 합당한 것만 취하여 말하고 행동한다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당연히 하나님의 딸로 훌륭할 것이고 넘어지는 횟수도 엄청 줄어들 것이다.

하나님은 그 행위대로 심판하시되 반드시 하는 분이시니 나의 영적인 것을 늘 두려움으로 준비하며 지내야겠다. 내 몸의 군살을 빼고 빼다가 안 되는 것을 옷으로 가리는 그 정성으로 내 영적인 부분도 관리하고 두려움으로 경계해야겠다.

 

나그네 의식은 목적 없이 사는 것이 아니라, 목적을 가지고 나그네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나눈 것처럼 목적이 있는 나그네를순례자라고 부르죠. 순례자는 지금 이방 땅에서 살고 있지만 본향을 향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종종 여행을 하다보면 두 부류의 사람으로 나눠집니다.

하나는 자신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틈에서, 곧 떠나갈 곳에서 풀어지는 사람,

비록 그곳을 떠나게 될 것이지만, 자신이 지나간 흔적으로 인해 남게 될 인상 때문에 자신을 절제하고 조심하는 사람.

나그네 의식은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는 사람이 아니라, 나그네로 사는 모든 삶이 하나님 앞에서 밝혀질 것을 알기에나그네 의식을 가지고 사는 사람입니다. 21절 말씀을 보세요.

 

21. 너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나그네로 사는 동안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데,

믿음과 소망을하나님께만 두는 것입니다.

또한 22절에 보면,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형제를 마음으로 뜨겁게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믿음과 소망은 오직 하나님께,

그리고 형제는 뜨겁게 사랑하므로 나그네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나그네의 삶을 실패하게 만드는 것은 이 둘의 순서가 뒤바뀔 때가 아닐까요?

나그네로 살아가며 만난 사람을 믿고 소망을 둘 때, 얼마나 많은 배신을 당하게 될까요? 믿음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사람을 믿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믿지는 못해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다 여행하는 나그네 같으나, 하나님 나라에서 모두 만나게 될 사람들입니다.

지금 만나는 사람을 거짓으로 대할 수 없는 이유는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서 밝혀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기 치는 사람들이 대개 어떤 사람들인가요? 이번 한 번으로 관계가 끝나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우리가 누군가에게 거짓 사랑을 한번쯤 보여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사랑은 계속해서 함께 살아갈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 24절이 가장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얼핏 들으면 모든 육체가 풀처럼 시들고, 인생의 영광도 풀의 꽃처럼 덧없이 사라진다는 것이 허무한 인생을 이야기 하는 듯합니다.

우리의 나그네 인생이 풀도 마르고 꽃도 떨어지는 듯 하다는 것이죠.

중요한 것은 그 다음 구절에 있습니다. 24절과 25절을 함께 붙여서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그러나 이 불확실한 세상에서 변치 않는 확실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복음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나그네로 살아가는 것은 분명한데, ‘본향을 향하는 나그네입니다.

이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기에 나그네처럼 보이지만, 사실은순례자입니다. 이 세상을 지나 본향으로 가는 순례자입니다.

나그네 의식을 넘어 순례자 의식을 살아가며 우리가 붙들어야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로마서 8 35, 38-9절을 보세요.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란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지금은 은퇴한 신촌성결교회 이정익 목사님의 설교에 보면 일본 규슈에 있는지옥 온천이야기가 나옵니다. 저도 한 번 가본 적이 있는데요.

 

일본에는 온천이 많습니다. 온천중에도 규슈에 가 보면 지옥온천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그 온천은 노천 온천인데 물이 항상 끓고 있습니다. 물의 온도가 100도로 뜨겁고 물이 나오는 온천구의 온도는 1,000도나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온천수가 나오는 구멍에서는 증기기관차에서 뿜어내는 뜨거운 증기처럼 금방이라도 땅을 터치고 솟아나올 것 같은 위기감이 느껴집니다.

 

일본 초기에 기독교인들을 핍박했는데 끝까지 저항하는 기독교인들을 그 뜨거운 온천탕에 집어넣어 죽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온천 이름이 지옥온천입니다. 특히 162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 때에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탄압이 가장 극심했다고 하는데 그때 운젠 지옥온천이라는 곳이 기독교인들을 1000도로 끓는 물에 쳐 넣어 죽이는 처형장소로 이용되었다고 합니다. 1620년에 너무 많이 학대하니까 기독교인들이 난을 일으키자 3,700명을 그렇게 학살했다고 합니다.

 

그때 기독교인으로 의심되는 사람이 있으면 후미애라는 절차를 밟아서 지옥에 떨어트렸다고 합니다. 후미애라는 것은 예수 상을 땅 바닥에 놓고 그 예수 상을 발로 밟고 가도록 했습니다. 그 사진을 발로 밟고 지나가면 살려주고 거부하는 사람은 운젠 지옥에 집어넣었다고 합니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이 그 사진 앞에서 저항하다가 지옥 온천에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도 뒤에 따라오던 그리스도인들이 주저하지 않고 의연하게 걸어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본에서도 유독 규슈지방에만 교회가 많고 십자가가 보이는 건물들이 서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미래나 현재가 더 이상 불확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그 혹독한 길도 분명하고 중심 있게 걸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들에게 주시는 가장 분명한 확신이 무엇인가요?

산 소망을 붙들고 살라는 것입니다.

가장 불확실한 시대에 가장 확실하게 살 수 있는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뚜벅뚜벅 본향을 향해 걸어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우리를 유혹하고 핍박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어떤 유혹과 핍박에도 우리가 쓰러지지 않을 것은 지금도 우리 곁에서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벧전1:13-21/ 김광일목사

2023-11-10 08:56:07

 

양승훈 교수의물에 빠져 죽은 오리라는 수필집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자동차 서비스 회사에 근무하는 동생이 오랫동안 서울 본사에서 근무하다가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회사 부품 창고로 자리를 옮긴 적이 있었습니다. 가족을 떠나 지방으로 가는 것보다 나았으나 그래도 좌천인 셈이라 동생은 마음이 울적했습니다.

 

게다가 북적거리는 서울 본사와는 달리 고양시에 있는 창고는 건물은 컸지만 근무자들이 많지 않아 분위기가 썰렁했습니다. 그래서 기분도 달랠 겸 창고 옆에 오리를 키울 수 있는 큰 물통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리고 퇴근하기 전에 청둥오리 한 마리를 사서 물통에 넣어줬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에 출근해보니 오리가 죽어있었습니다. 깜짝 놀라 이리저리 오리를 살펴보아도 짐승에게 물린 흔적이 없었습니다.

 

수영이 전문인 오리가 얕은 물통의 턱을 기어오르지 못하고 물에 빠져 죽었다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청둥오리를 산 곳에 가서 주인에게 따졌습니다. 그런데 자초지종을 들은 주인은 그것도 몰랐느냐는 듯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 오리는 양계장에서 부화하고 키운 오리입니다. 그래서 수영을 할 줄 모릅니다. 게다가 그 오리는 어릴 때부터 물속에 집어넣지 않았기 때문에 깃털에 기름이 분비되지 않아 물에 잘 뜨지도 못합니다.” 물통에 빠져 죽은 오리 이야기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적인 교훈을 줍니다. 물갈퀴가 있는 모든 오리가 수영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듯 교회에 다닌다고 바른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비둘기처럼 순결하고 뱀같은 지혜로움이 있을 때 온전히 거룩한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 물정을 모르는 것이 거룩이 아닙니다. 수영도 할 줄 모르는 오리가 오리로서의 삶을 살지 못한 것처럼 성경을 끼고 교회를 열심히 다닌다고 거룩한 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에서 힘을 쓰고 세상에 나가 아무 소리도 못하는 것은 거룩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오리의 진가가 양계장이 아니라 물속에서 드러나야 하듯이 거룩은 세상에서 드러나야 합니다. 특히 타락과 부패로 가득 차 있는 세상에서 정직하게 일하고 돈을 벌어 교회에 헌금을 하고 남을 도우면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는 것이 진정 성경에 따른 거룩한 자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함께신실하게 진실하게를 부릅니다. “신실하게 진실하게 거룩하게 살게 하소서 신실하게 진실하게 거룩하게 살게 하소서 하나님 나의 마음 만져주소서 하나님 나의 영혼 새롭게 하소서. 신실하게 진실하게 거룩하게 살게 하소서 신실하게 진실하게 거룩하게 살게 하소서 하나님 나의 기도 들어주소서 하나님 주의 길로 인도하소서.”

 

본문은 사도 베드로가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거룩한 삶을 위한 권고와 그 이유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 15절에서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고 말합니다. ‘거룩은 원어로하기오스인데하나님에 의해 성별되어진이라는 뜻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히 그분처럼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거룩함을 더럽히지 않도록 모든 부정한 것에서 자신을 분리시키며 행실을 거룩함과 일치시켜야 합니다. 존재론적인 변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행동에 연관된행실의 변화인 실천적인 면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외모가 아니라 행실이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행실이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를 베드로는 과연 무엇이라고 증거합니까?

 

첫째로 거룩하신 하나님이 부르셨기에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는 영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정치가입니다. 그는 수백년 동안 지속된 노예제도의 폐지안 통과를 위해 50년 동안 투쟁하여 결국 승리하였습니다. 1800년대 초 영국에서 노예 매매를 금지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노예제도로 인한 기득권을 누리는 사람들이 많은 손실을 입을 수 있었기에 극렬하게 반대하였습니다. 반대하는 사람들은 윌버포스에게 신체적인 위협도 가했습니다.

 

그러나 윌버포스는 노예제도 폐지를 위해 끈질기게 노력하여 죽기 얼마 전에 성취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젊은 시절에 회심을 체험했을 때 정치의 길을 그만두고 목회자의 길로 가려고 했었습니다. 정치라는 세속적인 일을 버리고 목회라는 영적인 일로 옮겨가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노예 상인이었다가 회심한 존 뉴톤 (John Newton)이 윌버포스에게하나님은 목회 사역보다 정치 영역에 남아 일하도록 당신을 부르셨다고 조언해 주었습니다. 그 후 윌버포스는 기도와 숙고 후에 뉴톤의 조언이 옳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억압받는 자들의 자유를 옹호하도록 자신을 부르셨다고 확신한 것입니다. 1788년 일기에 그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나의 길은 공적인 길이며, 내가 일할 곳은 이 세상이다.”

 

본문 15절입니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여기의너희를 부르신는 원어로톤 칼레산타인데성도들을 세상에서 부르신 하나님을 뜻합니다. 베드로는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이 거룩하기에 하나님처럼 모든 행실에 거룩해져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거룩은 의식상의 정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과 교제함에 필요한 영적 성결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불순종의 자식이 아니라 순종의 자녀들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을 따라 거룩하게 사는 것이 불편하지 않아야 합니다. 말씀을 따르는 것에 기쁨을 누리고 감사하며 찬양하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어떠한 상황에도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신 그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았기에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어거스틴 수도원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한번은 기도하는데 환상 중에 사단이 루터에게 책을 펴서 보여줍니다. 그 책에는 루터가 지은 죄 즉 태어나서 지금까지 지은 모든 죄가 낱낱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책을 가진 사단은여기에 적힌 것이 모두 사실이냐?’고 루터에게 물었습니다. 루터가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사단이네가 이런 더러운 죄를 짓고도 구원을 얻겠단 말이냐?”라고 말하며 조롱하였습니다. 그 말을 들은 루터는 그만 낙심이 되었습니다. 그 순간 하늘로부터 음성이 들립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네 죄를 깨끗이 씻었느니라.’ 그리고그리스도의 피가 네 죄를 지우고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하였다고 하라고 하자 사단이 물러갔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구속받는 길은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는 것 외에 결코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본문 19절입니다.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여기의보배로운 피는 원어로티미오 하이마티인데값으로 살 수 없는 그리스도의 피를 의미합니다. 무죄하신 그리스도의 피가 죄의 대가로 흘러졌기에 구속의 은혜를 받은 우리들은 옛사람의 태도를 버리고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행실로 살아가야 합니다.

 

마음속에 악한 생각이 나고 미움의 감정이 생겨날 때 그리스도의 피를 생각하십시오. 그리할 때 악이 사라지고 선한 생각이 자리잡아 미움이 변하여 상대를 불쌍히 여기고 존중하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의 피로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관계가 화목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피가 마음에 뿌려진 존재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 되었다는 거룩한 증표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행실에 거룩한 존재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기에

 

임어당(林語堂)은 중국 출신 석학으로서생활의 발견이란 수필집으로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본래 그는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예수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기독교의 가르침을 한사코 거부했습니다. 그 대신 동서양의 철학을 섭렵한 교수요 철학자로 나름대로 구원의 길을 찾고자 애쓰며 세상에서 소망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내면은 어둡고 공허할 뿐이었습니다. 어느 날 아내의 권유에 못 이겨 참석한 예배 시간에 설교를 듣던 중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참된 세상의 소망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지극히 평범한 말씀이었는데 성령께서 역사하시자 자신의 죄 때문에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는 사실에서 소망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 진리를 깨닫고 임어당이 한 말이 있습니다. “태양이 떴다. 이제 촛불을 꺼라.” 그렇게 교만하던 그가 죄인된 자아를 발견하고 예수 앞에 무릎을 꿇게 된 까닭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그의 눈을 가리었던 영적 무지와 교만의 눈꺼풀이 벗겨지자 그의 삶이 달라졌습니다. 세상 영광에서 하늘 영광으로, 자기 영광에서 하나님의 영광으로,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데서 예수를 증거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세상에 소망을 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모든 행실이 변하게 된 것입니다.

 

본문 21절입니다. “너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생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나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여기의소망이 하나님께 있다는 원어로엘피다 에이나이 에이스 데온인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은 믿음과 소망을 하나님께 두게 되었다고 베드로는 강조합니다.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어디에 관심과 기대를 두고 있습니까? 우리의 관심은 오직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을 귀히 여기는 습관 때문에 상황이 나빠지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먼저 의심합니다. 그리고 소망을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으로 정하고 맙니다. 소망을 주신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으로 자신에게 닥친 위기를 극복하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거룩을 지키기 위하여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리스 여신상들을 조각하여 세계에 명성을 떨치게 된 독일의 조각가 대네커(Johnn Heinlich Dennecker)는 최고의 경지에 이르자 자신의 재능으로 위대한 작품을 세상에 남겨야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무엇을 소재로 삼을까 고민하다가 예수의 형상을 조각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몇 번의 실패를 반복하였으나 최선을 다하여 최고의 작품을 완성시켰습니다. 작품은 너무도 훌륭하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옷깃을 여미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의 형상을 조각하다가 조각가 대네커가 거룩한 사람으로 변화된 사실입니다. 나폴레옹은 대네커에게 파리로 건너와서 박물관에 소장할 비너스의 조각상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대네커는 그 부탁을 정중히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의 형상을 조각한 나의 손으로 결단코 이교도의 여신인 비너스를 조각할 수 없습니다.” 거룩한 자의 삶은 세속적인 삶으로 되돌아가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성별된 삶을 살며 거룩한 행실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교회에 피아노, 키보드, 기타, 드럼 등 여러 가지 악기들이 있습니다. 이 악기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목적을 위해 구별되었습니다. 그래서 거룩한 피아노라고 거룩한 드럼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하지만 모든 피아노와 드럼이 다 거룩한 것이 아닙니다. 술집에서도 연주를 위해 피아노가 사용되고 드럼이 사용되지만 그 악기가 아무리 비싸고 좋아도 거룩하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세상의 쾌락을 위해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에 있는 피아노와 드럼은 부족한 점이 있어도 하나님을 위해 사용되기에 거룩한 악기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한 사람이 되게 하신 의미도 동일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택하셨기에 행실이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미워하며 살던 모습이 용서하며 사랑하는 행실의 사람으로 변해야 합니다. 원망하고 불평하던 모습이 기뻐하고 감사하는 행실의 사람으로 변해야 합니다. 근심하던 사람이 평안 가운데 살아야 합니다. 상처를 주며 살던 사람이 남을 위로하는 행실의 사람으로 변해야 합니다. 모든 행실이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주신 거룩함과는 아무 상관이 없이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과 너무나도 먼 거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까? 부디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기에 힘을 다하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이 부르셨기에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았기에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행실이 거룩하게 변화되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금은 허리를 동이고 신앙생활 때입니다 /벧전1:13-17/ 김진수목사

2023-11-02 00:07:42

 

인생을 논할 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인생은 싸움의 연속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겁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로 싸움은 아담의 두 아들 가인과 아벨의 형제로부터 시작이 되었지요. 그 이후로 개인은 말할 것도 없이 부족이 부족을 나라가 나라를 싸움은 끊임없이 계속되었고 지금까지도 싸움은 그치질 않고 있음이 사실이잖아요 교회라고 다른가요? 아니에요 다르지 않아요. 사단과의 끊임없는 영적싸움은 광범위하고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이런 현실을 직시한 베드로가 성도들에게 뭘 명령하고 있는지 볼까요?

 

13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허리를 동이라는 말은 출12:11절에허리에 띠를 띠고라는 말에서 왔을 겁니다. 긴 의복을 허리띠로 졸라매는 것처럼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마음의 허리를 동이라는 겁니다. 뭡니까? 교회생활은 광야생활과 같다는 거잖아요 광야생활은 자그마치 40년 동안 자신과의 싸움이요 환경과의 싸움이요 불신앙과의 영적싸움이었습니다. 오늘 날 우리도 다르지 않지요.

 

예수 믿고 시작된 교회생활에서의 사단과의 영적싸움은 우리가 생명 다하기까지 치루 게 될 것이고 주님 오실 때까지 계속될 겁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허리를 동이라는 말씀은 유혹도 이겨야 하고 어려움도 감당해야 하고 핍박도 있을 것이고 사단이 틈을 노리고 가만두지 않을 것이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이끄시는 대로 조심조심 교회생활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의 허리를 동이라는 말씀에서 40년 광야생활을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되었던 삶의 태도가 오늘날을 살아가는 신약성도들에게 요구되고 있음을 봅니다. 허리에 띠를 띠고 그 옛날 이스라엘백성들이 광야를 지나면서 수많은 싸움을 겪었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습니다.

 

경제적인 문제로 압박을 당하잖아요. 이 싸움도 만만치가 않습니다. 뼈가 마르고 죽어버리고 싶은 생각마저 들게 합니다. 실패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깨어지는 가정 갈라서는 식구들 사업의 실패로 오는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 위기 그런가하면 목사와의 갈등 성도간의 갈등 자신과의 갈등 같은 신앙의 위기도 있잖아요. 이런 싸움들을 겪으면서 교회생활을 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뭐라고요? 마음의 허리를 동이는 것이라는 거지요.

 

그 옛날 이스라엘백성들이 허리에 띠를 띠고 구름기둥 불기둥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살았던 것처럼 마음의 허리를 동임으로 내 욕구가 아닌 하나님의 욕구를 따라 사는 용기를 갖게 하지요. 마음의 허리를 동임으로 더 이상 내가 길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지요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그 길을 따라가잖아요. 그 가는 길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만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믿음으로 따라갑니다.

 

홍해를 향하여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이해가 됩니까? 거긴 길이 없는데 홍해가 가로막고 있는데 길이 아닌 곳을 향하여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이 이해가 되지 않지만 뭡니까? 마음의 허리를 동였으니 갈 수 있다는 거지요 그 길을 가길 잘했습니다. 바다에 길을 내시는 하나님의 전능한 능력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마음의 허리를 동이는 것도 그렇잖아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길이 없는 것처럼 보여도 내 생각을 버리고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입니다 내 임의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철저히 맡기는 겁니다.

 

그러면 뭘 경험하게 됩니까? 바다에 길을 내심처럼 길을 내시더라는 거 아닙니까? 그러므로 내 뜻대로 내 생각대로 살지 말자고요 지금 우리는 마음에 허리를 동이자고요 그리고 영혼의 귀를 하나님께 기울이고 주님께 늘 가까이 하시는 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근신하라고 말씀하지요. 근신하다는 헬라어네폰테스술 취하지 않고 정신을 차리다라는 의미입니다. 술 취하는 것처럼 사람을 후회하게 만드는 일이 있을까요? 술에서 깨고 나면 후회가 밀려옵니다. 근신하라는 말 역시 허리를 동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입니다. 마귀에게 틈을 보이지 말라는 거지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어떻게 하랍니까? “너희에게 가져다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이 말을 공동번역에서는여러분에게 내려주실 은총을 끝까지 기다리세요.”

 

그러니까 우리가 쓰고 있는 개역개정성경에서 온전히 라는 말과 끝까지라는 말은 같은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까지 끝까지 온전히 주실 은혜를 소망하라는 말씀이잖아요 그렇습니다. 우리 성도들에게는 세상이 줄 수 없는 미래에 확실한 보장이 있음을 믿습니다. 우리가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끝까지 온전히 주실 은혜를 소망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에 주시는 은혜는 물론이거니와 오늘 날 순간순간 현재에 계속주의 은혜는 주어지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14절입니다.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예수 믿기 전에 삶이 어떠했습니까? 순전히 인간적 사욕을 위해서 살았다는 거지요 그러나 예수 믿는 지금의 삶은 어떻다고 말씀하십니까? 순종하는 자식처럼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따르는 자식으로 산다는 거지요 그 하나님아버지께 순종하는 삶이 15절에 뭐라는 건가요?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 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하나님은 거룩하시지요. 그러니까 그분께 순종하는 자녀인 우리는 그분의 거룩하심을 이뤄야 한다는 겁니다. 거룩은 두 가지가 있어요. 의식적인 거룩과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거룩입니다.

 

의식적 거룩은 제사장이 성소에 들어가기 전에 물두멍에서 손을 씻고 들어가는 것을 말하지요. 그리고 어느 집을 방문했을 때 물 항아리에 물을 받아서 종들이 손과 발을 씻어주는 정결예식을 말하는 이것은 의식적 거룩입니다.

 

관계 속에 드러나는 거룩은 하나님이 거룩하심처럼 그의 자녀인 우리에게 거룩해 지는 것은 노력과 수행으로 되는 것이 아니지요. 예수 믿음으로 하나님의 거룩을 소유하게 되는 겁니다. 18절과 19절 보세요.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이 거룩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의 의입니다. 이것은 예수 믿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저 천성에 임할 때까지 절대로 변하지 않지요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로써의 거룩한 생활을 이루어가는 겁니다. 그래서 초대교부 클레멘트는우리는 거룩한 백성이므로 우리의 모든 행위를 거룩함과 일치하게 하자고 하였습니다.

 

16절입니다.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기록되었으되 앞에 헬라어왜냐하면’ ‘디오티가 있다는 거지요왜냐하면 그것이 기록되었기 때문이다구약성경에 기록된 그것이 뭘까요? 11:44절에서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하나님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거룩하지 못한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셨고 그 독생자로 거룩하지 못한 인간의 모든 불결함을 짊어지고 죽으심으로 당신의 거룩하심을 모든 믿는 자를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관계된 예수 믿는 우리를 성도라고 말씀하잖아요.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곳을 성전이라고 하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성경이라고 하고 하나님의 재단에 기구들을 성구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이 거룩하시니 하나님과 관계된 모든 것이 거룩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17절입니다.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성도들이 이 세상에 있을 때 두렵고 떨림으로 지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과 같지 아니시므로 자기백성인 성민 이스라엘민족이 하나님을 떠나 세상의 우상과 풍속을 쫓아갈 때 징계하셨습니다. 성민이 믿음을 저버리고 원망하면서 살아갈 때도 징계하셨습니다. 하나님과 관계된 사람들이 잘못 살아갈 때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으셨습니다. 반드시 집고 넘어가셨습니다.

 

왜요? 저들은 거룩한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거룩함이 나타나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외모로 보시지 않는 데요 이 말은 공정하게라는 의미입니다. 사람의 신분과 조건 등에 구애되지 않으시고 판단하십니다. 하나님이 누구시니까? 참 진리이시니까 그리고 선악의 절대 기준이 되시니까 그러므로 그분의 판단은 공평정대하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모든 인생은 선과 악이 뒤범벅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을 구별하는 그분의 방식은 한두 가지의 죄로 말미암아서 거룩한 백성인지 아닌지를 구분치 않으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구분하시는가요? 그가 예수 믿어 성령의 사람인지 죄의 지배를 받는 사람인지로 나누시는 것이지요. 그리고 성령의 지배를 받는 예수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들은 거룩한 삶을 살아가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괜히 거룩하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거룩을 이루며 살아갈 때 기적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3:5절에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에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리라

 

기이한 일들을 하나님이 언제 행하세요. 우리 자신을 성결하게 거룩하게 할 때입니다. 너무도 힘들고 감당하기 어려울수록 우리가 필요한 것이 뭐예요? 죄를 멀리하는 거룩함입니다. 그 기이한 일은 여리고 성이 무너진 것이지요. 죄를 미워하고 주의 거룩하심을 닮아갈 때 우리를 가로막고 서있는 난공불락도 무너지게 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왜 대적이 기승을 부립니까? 우리 앞에 놓인 문제가 왜 그렇게 커 보입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쇠해서인가요? 아니지요 우리의 거룩이 상실되어서 그렇습니다.

 

여리고성의 물건들을 따로 훔쳐놓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거룩이 훼손된 아간이란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백성들이 모두 함께 고통을 받았습니다. 아이라는 작은 성에서 참패를 당한 겁니다. 교회의 싸움은 거룩을 잃어버리지 않는 데서 승리합니다. 성도들 각 사람이 거룩으로 살아갈 때 가정을 지켜낼 수 있고 교회를 든든히 세워갈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거룩이 사라지면 연약한 교회가 되고 힘없는 가정이 되는 것임을 알아 강한 교회 든든한 가정을 만들기 위해 마음에 허리를 동이고 거룩한 백성이 되었으니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셨으니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자 /벧전1:10-16/ 김진수목사

2023-10-26 07:26:46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구원이 성부하나님으로부터 계획되어졌다는 거고 그것을미리아심예지라는 거였고 그 다음 성자하나님이 이천년 전에 오셔서 인간을 죄에서 대속하시는 피 뿌림이 있었고 그 다음 성령하나님이 죄인인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의 죄악 된 마음을 거룩하게 하시는 효력 있는 부르심과

 

더불어 순종케 하심으로 믿어 구원에 이르게 하셨다고 베드로는 한 사람의 구원을 위해 성삼위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다고 말씀했었잖아요. 그래서 구원 받은 성도들에게 산 소망이 임했고 다른 한 가지는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하나님의 기업을 잇는 복을 받게 되었다고 말하면서 예수 믿는 자들에 대해믿음의 결국 영혼구원을 받음이라고 선언하고 있음을 지난 두 주 동안 베드로전서를 강해하면서 은혜 받은 내용이지요.

 

10~11절을 보시지요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이렇듯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얻는 구원에 대해서 이미 오래 전 구약의 선지자들이 구약의 말씀을 연구하고 찾았다는 거지요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이 선지자들 속에서 장차 그가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을 영광에 대해서 증언하셨다는 거지요 그러면서 받으실 고난과 부활의 영광이 누구에게 또는 어느 때 임할 것인지 상고했다는 거잖아요

 

이번엔 12절을 볼까요.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알린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뭡니까? 구약의 선지자들이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그 후에 받으실 영광에 대해 살핀 것은 자신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거지요 그러면서 바로 지금 현재와 앞으로 예수 믿는 성도들인 너희를 위한 것이었다는 거거든요 이것을 구약의 선지자들이 무엇으로 알게 되었다는 겁니까? 계시로 알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뭡니까? 신약시대에 이루어질 예수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을 통한 구원의 역사는 이미 구약시대로부터 이미 약속되었었고 신약시대에 믿는 자들에게서 성취되었음을 언급하고 있는 거지요

 

여기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뭡니까? 베드로는 3위이신 성령이 하늘로부터 즉 1위이신 성부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는 삼위일체 진리를 말씀하고 있다는 거지요 요15:26절에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예수님도 성부하나님께로부터 오시는 성령이시라고 확인해주시지요

 

이렇듯 성부로부터 보내심을 받으신 성령을 의지한 복음전하는 자들로 인해 예수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이너희바로 우리에게 알려지게 되었다는 겁니다. 참으로 깊은 진리를 말하고 있는 거지요 그러면서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한다는 겁니다. 이 말은 뭡니까? 하늘의 천사들조차도 오묘한 구원진리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거지요 그러니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 받은 것은 구약의 선지자들도 경험 못했고 천사들까지도 경험하지 못한 특별한 은혜를 우리 믿는 자들이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합니다. 그래서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라고 찬송하게 되는 줄 믿습니다.

 

13절을 볼까요.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여기그러므로가 뭘 말하는 겁니까? 나 한 사람의 구원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 하나님이 일하심으로 이루어진 거고 구약의 선지자들도 하늘의 천사들도 이런 경험을 갖지 못했으니 우리가 예수 믿는 자가 된 것이 얼마나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라는 걸 깨닫는 다면 즉 소중한 것을 안다면 이 믿음을 지키기 위해 먼저마음의 허리를 동이라는 거지요

 

여기동이라헬라어아나조사메노이는 어디를 가기 위해 막 출발하려는 준비를 마친 모습이라는 거거든요 옛날 이스라엘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할 때 어린양을 잡고 문 좌우 설주에 그 피를 바르고 그 어린양의 고기를 먹을 때 허리를 동인 채로 먹었었다는 건 곧 출발하려니까 긴장을 풀지 말라는 거 아닙니까? 그렇다면 여기서 허리를 동이라는 말은 받은 구원이 너무도 귀중하니까 한 순간도 긴장을 풀어 선 안 된다는 말이잖아요. 그리고근신하라’ ‘네폰테스술 취하지 않고 정신을 차리다거든요

 

그러니까 그 당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세상이 몹시 흔들고 있었잖아요. 십자가에 죽이기도 하고 화형을 시키기도 하고 짐승의 가죽을 입혀서 맹수에 찢겨 죽게도 하고 이런 위협만 있나요 이단자들이 전하는 비 진리에도 노출되어 있잖아요. 거기다가 신앙을 포기하면 더 이상 어려움도 없을 거 아니냐는 세상 유혹도 있었단 말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항상 허리를 동임이 필요하고 근신하여야만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더 긴장하여야 하는 이유가 뭐랍니까? ‘예수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것이라는 거지요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가 있을 거라는 겁니다. 재림의 날이 오면 예수 믿기 때문에 겪는 모든 아픔과 위험까지 벗어나게 된다는 거거든요 그래서 베드로는 벧전4:7절에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권면하고 있었던 거지요 예수님도 눅21:34~35절에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재림은 온 세상에 임하는 것으로 그 날이 올 때 믿음에 서 있으라는 거잖아요 그래서 36절에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베드로가 전하는 이 말씀에서 참으로 놀라운 것은 뭡니까? 한 개인의 구원을 위해 과거론 삼위 하나님의 역사 그리고 현재엔 성령의 감동을 받은 복음전도자들을 통해서 예수님이 이루신 십자가의 고난과 영광이 알려지고 믿어서 구원이 이루어지고 미래는 주님의 재림으로 성도들을 환난에서 이길 수 있도록 건져내시는 해방까지 말씀하고 있다는 거 아닙니까?

 

그러므로 그 은혜를 온전히 바라라고 말하지요 14절을 보시지요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예수 믿기 전에 알지 못했던 때 사욕을 따랐던 삶을 다시 본받지 말라는 거지요 왜 너희는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는 자식으로 부름을 받았으니까 그런 말입니다.

 

그렇다면 뭡니까? 그리스도인답게 살라는 겁니다. 지금 그 당시 믿음의 사람들이 제대로 못 살고 죄악에 물 들었기 때문이 아니지요 이렇듯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하나님께로 받은 사람들이니까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답게 살라는 거지요 하나님 아버지의 법에 순종하며 하나님 아버지 성품을 닮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다운 거룩한 생활을 해야 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15~16절을 볼까요.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베드로는 거룩한 삶을 성도들이 살아야할 이유를 말하지요 왜냐하면 성도로 부르신 자가 거룩하시다는 겁니다.

 

이사야선지자가 웃시왕이 죽던 해인데 성전에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여호와 하나님과 성전에 가득한 그분의 옷자락을 보았고 그 여호와 하나님을 천사들이 모셔 섰는데 그 천사들은 각기 여섯 날개를 가지고 있었는데 두 날개로는 얼굴을 가리고 두 날개로는 자신들의 발을 가리고 두 날개로는 날면서 천사들이 하는 말이 사6:3절에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고 말하더라는 거잖아요. 본문에 베드로도 너희를 부르신 자처럼 우리도거룩한 자가 되라는 거지요 사도 바울은 우리가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를 말하지요 딤후1:9절에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 자체가거룩한 소명이라는 거거든요 하나님이 거룩 자체이시고 우리를 부르심 또한 거룩한 부르심이고 그러니 믿는 자는 모든 행실 또한 거룩해야 한다는 거 아닙니까?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거룩은 무엇일까요? 유대인들이 지켰던 유전에서 볼 수 있듯이 먹기 전에 손을 씻는 것이나 밖에서 집으로 들어와 손과 발을 씻는 행위나 도덕적으로 깨끗하게 살려는 그런 움직임이 아니라는 거지요 성경에서 말하는 거룩이란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거리껴지고 방해되는 영적 육체적 정신적인 모든 것을 버리는 행위가 거룩이라는 겁니다. 거룩하지 못했던 믿지 않았던 그 때의 삶에 대해 롬6:21절에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고 하잖아요 그러나 믿음의 결국 영혼구원을 받은 사람들의 삶을 살아가는 지금의 삶에 대해 바로 그 다음 절 롬6:22절에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뭡니까? 믿음으로 죄에서 해방되어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으며 살다가 이 세상에 목숨이 다하는 날 이미 받은 영생을 가지고 영원한 영생의 나라에서 영원히 살게 된다는 거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게 된 성도들은 온전히 주님을 닮아가는 삶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에서 거룩함이라고 말하고 신학적으로는 성화라고 말씀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렇게 살다가 주님의 나라에서 영화로운 삶을 살게 된다는 걸 성경은 말씀하지요 이를 롬8:29절에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무슨 이유로 예정하셨나요?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해그래서 그리스도로맏아들이 되게하셨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다음 절 30절을 보면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우리가 받은 구원의 은혜가 놀라운 것은 구약의 선지자도 하늘의 천사들도 경험치 못한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을 믿어 얻은 구원이라는 사실과 그래서 가지게 된 소망은 산 소망이고 그리고 하늘의 기업을 이을 사람들이 되었으니 우리 구원 받은 사람들은 과거 믿지 않았을 때의 그런 더럽고 죄악된 삶이 아니라 전혀 다른 거룩한 삶으로 살아가야 함을 기억하면서 주님의 거룩하심 나도 이루며 살다가 마침내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화로운 몸으로 변화되어 주님과 영생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벧전1:18-21/ 조학환목사

2022-12-29 03:45:16

 

뉴욕의 한 교회에서 아주 오래전 있었던 일입니다. 한 할머니가 예배가 끝내 갈 즈음에 손을 들더니 말했습니다. ‘목사님 죄송하지만 마지막으로 딱 한번만 강단에 나가서 간증 좀 하게 해 주세요.’ 할머니의 마음이 너무 간절해서 목사님이 허락을 하자 할머니가 앞으로 나가 이야기 했습니다.

 

저는 1860 9 19, 이 교회 바로 옆에 있는 한 노예시장에서 노예로 팔려가기 위하여 다른 여러 명의 사람들과 함께 서 있었습니다. 이윽고 노예를 사려는 사람들이 모이자 우리를 팔아넘기기 위하여 경매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때 나는나는 어디로 팔려갈까, 내가 팔려 갈 집 주인들은 좋은 사람일까, 나를 학대하고 나를 짐승처럼 대하는 아닐까, 과연 내 운명은 어떻게 될까하면서 불안과 초조 속에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때 이 교회에서 사람들이 예배를 마치고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중 한 점잖은 신사분이 오시더니 나를 800불을 주고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이 분은 나를 해방시켜주며 이제는 너는 자유인이 되었으니 집으로 돌아가도 좋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분은 이 교회의 목사님이셨는데 그 날 예배시간에 우리가 지금은 노예 문제를 어떻게 다 해결할 수는 없지만 이번 주일날 한 사람이라도 사서 해방시켜주자고 의논이 되어 노예 한 사람을 사게 되었는데 거기서 바로 내가 선택되었던 것입니다.

 

그 날 이 후로 나는 그 날의 감격과 기쁨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지금부터 약 70년전의 일이지만 그날의 상황들이 지금까지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까지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이 교회도 너무나 감사하고 도무지 이 은혜를 잊을 수가 없어서 한 평생 이 교회를 섬기고 기도하며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바쳐 나름대로 섬겨왔습니다.

 

이제 저는 얼마 안 있으면 하나님께로 갈 것입니다. 저는 너무나 미천한 사람이지만 이제 제가 하나님 품으로 가기 전에 여러분에게 꼭 이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이렇게 노예에서 해방되어 그 은혜를 도무지 잊을 수가 없어서 한평생 감사와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나를 해방시켜 준 이 교회에 감사함으로 섬겼던 것처럼,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받고 다 죄와 사탄의 노예에서 해방된 사람들이니까 우리가 받은 은혜가 얼마나 놀랍고 영광스러운 것인지를 잊지 말고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주님의 교회를 섬기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인생이 정말 아름답고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삶이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정말 너무나 놀랍고 영광스러운 구속의 은총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세상에서 사람의 노예로 있다가 해방되는 것도 이와 같이 감격스럽고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충만하고 평생 잊을 수 없고, 평생 갚아도 다 갚지 못할 은혜일진대 죄와 사탄과 지옥의 노예에서 건짐 받은 이 은혜는 얼마나 감사하고 영광 돌려야 하고 찬양하고 얼마나 감사와 기쁨으로 섬겨야 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도 여기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구속 받았는지, 구속함을 받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며 정말 우리가 받은 구원의 은총의 그 놀랍고 크고 영광스럽고 고귀함을 기억하며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넘쳐나는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1.세상의 헛된 것으로부터 대속 받음

 

먼저 벧전1:18절을 보겠습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 받았다. ‘헛된이라는 말은공허한, 헛된, 효과 없는, 쓸데없는, 무가치한, 무익한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헛된 행실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상숭배를 비롯한 세상의 헛된 사상이나 종교나 철학이나 물질 등의 죄와 무지 속에서 세상의 사상과 가치관과 종교를 따라 행하던 모든 행실들을 말합니다.

 

이런 것들은 헛되고 무익하고 쓸데없고 무가치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세상의 모든 사상과 가치가 완전히 무가치하지는 않을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우상까지도 100% 무가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비록 온전치는 못하나마 조금이라도 위안을 주거나 희망을 줄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헛된 것입니다. 혹시 그것을 통하여 무언가 약간의 유익을 얻는다해도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모독하고 나아가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막음으로 인간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몰아가는 악한 행위에 불과한 것인 것입니다.

 

우리도 과거에는 그런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우상과 자신과 육신의 욕망과 돈과 명예와 사람 등의 헛된 것을 섬기며 그걸 인생으로 착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죽을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죄와 사망과 지옥의 노예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고 감사하고 다행스럽고 영광을 돌릴 일입니까? 사람의 노예에서 해방된 것도 평생 감격하고 기뻐하고 감사하며 은혜를 잊지 않고 은혜에 보답하며 살아야 할 텐데 하물며 영원한 지옥에서 구속된 이 은혜를 어찌 다 형용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는지 기억하며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사람의 노예 생활하는 것도 두렵고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일일진대 마귀사탄의 종노릇하다가 지옥에 가는 것은 얼마나 더 끔찍스러운 일인지를 기억하며 거기서 해방되어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누리게 된 것이 정말 얼마나 놀라운 은총인지를 기억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감격과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이렇게 놀라운 은혜를 입었으니 평생 이 은혜를 잊지 말고 다시는 세상의 것에 종노릇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감사와 감격과 기쁨과 은혜가운데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며 주님과 동행할 때에 진정 세상의 모든 것들로부터 구원함을 받은 자들로써 진정 거룩하고 아름답고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2.우리의 대속은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고 된 것임.

 

먼저 벧전1:18,19절을 보겠습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린 바 되신 이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우리가 과거의 모든 헛된 것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는데 그것은 금이나 은과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도 아니고, 지식이나 과학으로 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순한 인간이나 성인군자나 선지자나 능력자가 아니라 본래부터 하나님의 아들로 영원전부터 하나님께 함께 계셨던 그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물론 우선은 예수님은 단순히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온전히 영광스럽고 거룩하고 깨끗하고 정결하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아들로써 온전히 영광스럽고 거룩하시고 성결하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의 유일한 구세주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이렇게 고귀하신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로 구원의 은총을 입은 우리도 너무나 고귀한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구속 혹은 대속이 뭡니까? 한마디로 값을 지불하고 처벌을 면제받아 구원받게 된 것을 말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노예로 팔린 사람을 돈을 주고 사서 풀어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구속을 받았습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그 고귀한 몸을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죄의 삯을 지불하시고 죄와 마귀사탄과 지옥의 노예에서 구원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어마어마한 대가를 지불하고 우리를 사셨으니 우리는 얼마나 존귀한 존재입니까? 여러분, 세상에서 한 1,000억을 주고 산 물건이라면 얼마나 귀하겠습니까? 얼마나 애지중지 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천억 1 100조가 아닙니다. 온 세상을 다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고 대속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엄청난 존재냐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 사실을 아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선은 물론 감사해야 합니다. 세상의 어떤 일도 이보다 기쁘고 감사하고 감격스럽고 복되고 행복한 일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세상에 이 보다 귀하고 영광스럽고 복된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평생을 감사와 기쁨과 감격과 은혜 속에 주님과 동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렇게 우리가 고귀한 존재인지 안다면 우리는 정말 고귀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말하자면 몸값을 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무 귀한 존재이니까 귀하게 자존감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귀한 몸을 함부로 굴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왕자와 거지와 어울려 거지와 같은 삶을 살아 갈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모든 헛된 것들과 모든 죄와 마귀 사탄으로부터 너무나 귀하고 영광스러운 주님의 그 보배로운 피로 대속함을 받은 너무나 엄청난 은혜를 입은 사람들, 너무나 고귀한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한편으로는 정말 감사하고 기뻐하고 영광을 돌리며 다른 한편으로는 거룩하고 진실하고 아름답고 고귀하게 살아감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귀히 여김을 받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소망을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오늘 2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너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우리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 그래서 영광을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다. 우리 믿음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우리 믿음의 대상도 하나님이시다. 우리 소망의 대상도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온전히 소망을 하나님께 두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과거에는 세상의 헛된 것에 소망을 두고 살았습니다. 거기에 생명과 생명의 기쁨이 있는 양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속고 있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죄와 무지의 결과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셔서 죄와 사탄의 권세에 있는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과거의 헛된 것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헛된 것인 줄 알게 되었습니다. 오직 하나님 안에 생명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세주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알았습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분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 안에 얼마나 영광스러운 나라가 있는 줄 알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우선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야 합니다. 또한 이렇게 고귀한 존재이니까 고귀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더 이상 땅의 것을 좇아 사는 인생이 아니라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살아야 하는 것이지요. 당연하지 않습니까? 과거에는 몰라서 세상의 것을, 헛된 것을 좇아 살았는데 이제는 그걸 알았으니까요. 얼마나 죄와 무지가운데 있었는지 알게 되었으니까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얼마나 엄청난 은혜와 기쁨과 영광과 은혜가 있는 줄 알았으니까요. 그러니 그걸 안다면 왜 세상의 헛된 것을 바라보며 살겠습니까? 왜 영광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오늘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정말 우리가 얼마나 고귀한 인생인지를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금보다 천하보다 세상 모든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이 귀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우신 은총으로 우리가 죄와 사탄의 노예에서 벗어나 주님의 종이 되어 하나님의 그 영광과 존귀와 거룩하고 기쁨과 은혜에 참여하게 된 자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정말 한편으로는 감사하고 감격하고 기뻐 찬양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 놀라운 은혜에 조금이라도 보답하여 또 다른 한편으로는 정말 이 놀라운 신분에 걸맞게 거룩하게 아름답게 존귀하게 살아가며 또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갈 때에 주께 영광을 돌리고 주님의 나라 이루어가며 주님의 은총 풍성하게 누리는 복되고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1:17/양향모목사

2019-09-02 15:44:40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우리가 과거에는 죄인임이 분명하고 선한 삶을 살지 못했던 사람들임에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서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영광스러운 지위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럼으로 이제 남은 생애는 정말로 의롭게 살아야 하고 선한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하고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은 이미 다 아는 사실입니다.

 

문제는 그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의롭게 선하게 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답게 거룩하게 우아하게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나는 영원한 생명을 가졌다, 나는 영원한 하나님나라의 백성이다.

이렇게 스스로 외쳐보면서 살지만 사는 모습은 이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고 오히려 더 나쁜 짓만 하면서 살게 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물론 외형적으로는 좀 거룩한 모습으로 좀 착한 모습으로 살고 있지만 우리의 속에 있는 죄악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읽기에 따라서 참 부담이 되는 말씀입니다.

 

각 사람을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편파적으로 안다고 좀 봐주시거나 넘어가시거나 하시는 분이 아니라 아주 공정하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니 너희가 이 세상을 살면서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살아라.

 

이런 내용의 말씀을 듣고도 여러분 잠을 잘 잘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야 이제 나는 죽었다.

예수님만 믿으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내가 어떻게 행동을 했는가에 따라 심판을 받는다고 하니 큰 일이 났다고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어디에다가 중심을 두느냐에 따라서 그 의미가 달라질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자가 되심에 그 중심을 두면 우리는 정말 두려운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 세상에 어떻게 사는가를 두고 보시고 그 행위대로 심판을 하신다고 한다면 우리가 지금처럼 이렇게 살아서는 정말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심에 중심을 둔다면 좀 안심이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심판을 한다면 두려워해야 할 것이지만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서 심판을 하신다면 그렇게 두려워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주석들을 찾아보니까 대부분의 신학자들이 전자에 그 중심을 두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아버지가 되시지만 심판자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똑바로 살아야 한다는데 무게를 두고 해석을 합니다.

 

그러나 저는 후자에다가 중심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 심판자이신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데에 무게를 두고 해석을 행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 서신이 어영부영 사는 사람들에게 쓴 서신이 아니라 소아시아에 흩어져서 사는 신실한 성도들에게 보낸 서신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바르게 믿으려고 고향을 떠나서 먼 이국에서 고생고생하면서 사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똑바로 살아라, 행동을 바르게 해라 그렇지 않으면 심판을 받을 것이다. 라고 쓰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고생하는 그들에게 더 위로의 말을 보내고 싶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안심을 시키고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 것임을 말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저도 여러분에게 이 말씀으로 경고를 보내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오히려 더 위로를 하고 싶습니다.

편안한 마음을 가지고 살도록 따뜻한 위로와 힘을 드리고 싶습니다.

 

오늘 말씀을 잘 들으시고 위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나그네와 같은 이 세상을 살면서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를 생각하시면서 힘을 얻고 위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1.외모로 보시지 않으시는 하나님

오늘 본문 말씀에 우리 하나님을외모로 보시지 않는하나님이시라고 했습니다.

'외모로 보시지 않고'의 헬라어의 원 뜻은 '얼굴을 보다'라는 뜻을 가진 말에서 파생한 말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봐 주고 어떤 사람은 안 봐주고 그러시는 분이 아니시고 공정하게 대하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절대로 편견이나 불공평에 빠지지 아니하시고 정확하게 판단하시는 공의로우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제일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것이 이 공평하지 못함 때문입니다.

똑같이 못살면 똑같이 못 먹으면 그런 스트레스 받지 않고 행복하게 살 텐데 비교적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저 못사는 방글라데시 사람들에 비하면 우리는 다 상류층 사람처럼 사는데 행복지수가 방글라데시 사람들이 우리보다 훨씬 높다고 합니다.

그들은 다 같이 못사니까 행복하고 우리는 너무 잘 사는 사람이 많으니까 불행합니다.

 

물론 우리나라 같은 민주주의의 정치를 하고 있는 나라에서 무슨 일을 불공평하게 처리하겠습니까?

모든 일에 다 공평하게 기회가 주어지도록 법적으로 제도적으로 장치를 해 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그 공평한 장치가 많은 사람들에게 오히려 차별 대우를 받게 하는 것입니다.

요즘 같은 때에는 가장 인기가 좋은 직업이 공무원이나 초등학교 선생님일 것입니다.

월급도 괜찮지요, 쫓겨날 염려 없지요, 일도 험한 일은 아니지요, 누구나가 다 되고 싶어 하는 직업일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나 할 수 있습니까?

초등학교 선생님이나 공무원이 되려고 하면 보통 머리 가지고는 불가능합니다.

우리 같은 머리 가지고는 절대 불가능한 것이 그 직업입니다.

 

요즘 우리나라는 이 동네 저 동네 다 가 봐도 제일 많이 있는 것이 아파트입니다.

그렇게 높은 층을 짓고 그렇게 많이 지어서 아파트를 부어놓은 것처럼 많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많고 흔한 아파트 한 채를 지니고 사는 것도 그렇게 쉽지를 않습니다.

 

누구나가 다 가서 살 수 있도록 공평하게 해 놓았습니다.

인종차별을 합니까? 학별 차별을 합니까? 거기는 머리 좋은 사람이나 나쁜 사람이나 누구나 다 가서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도 아주 뚜렷한 차별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돈입니다. 누구나 다 살 수 있지만 단 돈이 있는 사람만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표면적으로는 차별이 없는 공평한 세상 같지만 그러나 공평하지 못한 일들이 너무 많은 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이 세상에서 이렇게 불공평한 대우를 받으면서 사는 것도 억울한데 만약에 천국에 들어가는 일에도 불공평한 일을 당한다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그런데 다행히도 우리 하나님은 세상의 그런 외형적인 겉모습을 보고 판단하시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쁘다고 봐 주고, 잘났다고 봐 주고, 똑똑하다고 봐 주고, 돈 많다고 봐 주고 그러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공평하게 정말로 억울한 사람이 없게 한번 정하셨으면 정하신 그 원칙대로 해나가신다는 것입니다.

 

돈 없다고 괄시를 받지 않고, 미련하다고 피해를 보지 않고, 힘없고 배경 없다고 소외를 당하지 않는 그런 세상에서 살고 싶습니다.

그런 분이 우리 하나님이시고 그런 나라가 우리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2.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하나님

오늘 본문 말씀에 우리 하나님을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을 하시는 하나님으로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심판자이십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았는가를 최종적으로 판단하셔서 멸망에 처하기도 하고 영원한 천국에서 생명의 면류관을 상으로 주시기도 하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이 심판에 관해서도 여러 가지 해석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이 심판대 앞에 설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 성도들까지도 한번은 심판대 앞에 서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는가를 심판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다 심판을 받는다는 말씀이 성경에 많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 9:27절에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했습니다.

 

또 고린도후서 5:10절에도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아예 우리 성도들에게는 심판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미 심판을 받았고 의로운 사람이라고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받는 그런 심판은 없다고 말합니다.

 

요한복음 3:17-18절 말씀에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8:1-2절 말씀에는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께서 모든 인생들의 삶에 대해서 심판을 하시는 분임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우리는 이미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그 형벌로의 심판은 이미 면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가 구원을 받았고 이미 우리가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을 받았다고 한다면 우리에게 그런 죄인이니 의인이니 하는 심판은 없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본문에서 생각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심판하시되 그가 행한 행위대로 심판을 하시겠다고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심판이 없다고 믿다가도 이런 말씀을 대하면 좀 흔들립니다.

행위대로 심판하신다면 믿음을 갖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행동하면서 살았는가가 중요하다. 라고 생각을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야고보서에 따르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믿음보다는 행함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이 드시기도 할 것입니다.

 

물론 믿음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로만 믿습니다, 믿습니다. 라고 한다고 해서 다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고백에는 그에 따르는 삶이 반드시 수반이 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기 위해서 선한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과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그 믿음을 행동에 옮기는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율법 아래에 있는 이 세상 사람들은 그 율법에 의해서 심판을 받기 때문에 율법 하나하나 다 지켜야 합니다.

율법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그가 가진 양심에 의해서 심판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양심에 거리끼는 행동을 한 사람은 다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의 행함은 심판을 받기 위한 행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미 구원을 받고 심판을 면한 사람으로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행동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행함, 믿음 안에서의 행함이라고 말을 합니다.

 

오늘 오후시간에 믿음과 행함의 관계에 대해서 공부를 하게 될 것입니다.

골로새서 2:6절 말씀에 보면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라고 했습니다.

 

우리 성도들의 행함은주 안에서 행함입니다.

주 안에서의 행함이란 구원을 받기 위해서 율법을 지킨다거나 선을 행한다는 그런 행함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렇게 해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굳게 붙잡는 것입니다.

이것 외에는 구원 받을 길이 없다는 것을 알고 믿음을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두고 딴 길로 가서 행하라는 말이 절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심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율법에 의해서 양심에 의해서 그들이 행한 행위대로 심판을 받아서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그런 심판은 없습니다.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이 이미 우리를 의로운 사람이라고 인정을 받게 했기 때문입니다.

다만 주안에서 믿음으로 사는 그 행함은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그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 무엇인지 주 안에서의 행함이 무엇인지를 알고 행함이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3.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

저는 오늘 본문에서 강조되어야 할 부분이 이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을 하시는 그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시고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외모로 보시지 않으시고 각 사람이 행한 행동대로 바르게 심판을 하시는 분이심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 공평하심에는 아주 정확한 구별이 하나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다는 것은 아주 뚜렷한 구별입니다.

그것은 아예 처음부터 그렇게 구별이 된 것이기 때문에 누가 시비할 수 없는 구별입니다.

한 종류는 버림을 받은 이 세상 사람들이고 또 한 종류는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 구별은 공평함 위에 있는 구별입니다.

그 구별은 누가 시비하거나 따질 수 없는 아주 확고부동한 구별입니다.

조건에 따라서 바뀌는 구별이 아니라 절대적인 구별입니다.

 

이 세상의 죄인들은 이 세상의 죄인들을 재판하는 기준에 의해서 아주 공평하게 재판을 하십니다.

그들이 잘났건 못났건 귀족이건 천민이건 구별이 없이 다 법대로 재판을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을 심판하시는 것은 다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자녀를 특별 대우하는 것은 차별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꼬우면 그것이 억울하면 교회 다니면 될 것 아닙니까?

누가 교회에 오는 것을 막는 사람이 있습니까?

교회에 온다는데 차별대우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남녀노소, 빈부귀천, 어느 것 하나 차별이 없습니다.

 

얼마나 교회가 많습니까? 얼마나 전도들을 많이 합니까?

이 교회 마음에 안 들면 저 교회에 가면 되고, 이 목사 설교 듣기 싫으면 다른 교회에 가면 되고, 많은 사람들과 교제하고 싶으면 큰 교회에 가면 되고, 큰 교회에 가서 무시를 당하면 작은 교회에 가시면 됩니다.

 

이렇게 기회를 많이 주셨는데도 교회에 가지 않는 것은 그 사람의 책임입니다.

무슨 이유로든 핑계를 댈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교회에 다니면서 십자가의 복음대로 예수님을 믿는 것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여 내치시겠습니까?

그러려면 처음부터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하시지도 않으셨을 것입니다.

 

4.나그네로 있을 때 두려움으로 지내라.

이 세상을 나그네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돌아갈 본향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을 나그네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가서 살 본향은 이 세상처럼 짧고 유한한 세상이 아니라 영원한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 세상을 나그네로서 살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일에 너무 두려움을 가지고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짧은 세상 이렇게 살면 어떻고 저렇게 살면 어떻습니까?

사는 날 동안은 길고 지루하고 지겹고 힘들기도 하겠지만 지나고 나서 보면 하룻밤 꿈과 같은 세상이 이 세상의 삶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두려움으로 지내라는 말은 이 세상 사람들이 가지는 그런 두려움과는 다른 두려움입니다.

 

심판이 있기 때문에 그 심판날 받을 형벌을 생각하면서 부들부들 떨면서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여기 두려움으로 지내라는 말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섬기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없이 우리에게 잘해주시니까 때로는 하나님을 사람처럼 친구처럼 진짜 세상 부모님 대하듯이 대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같이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시기도 하셨고 우리에게 친구가 되신다고도 하셨고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을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아무렇게나 대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그렇게 대하기에는 하나님은 너무나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전능하시고 너무나 위대하시고 너무나 깨끗하시고 우리가 감히 대할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오랜 세월 믿음의 훈련을 받고 하나님의 명령에 자기 독자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려고 할 때 그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 알겠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아무리 큰일도 하나님 앞에서 핑계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이 세상에는 하나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정말로 공평하신 분이십니다.

사람을 외모나 어떤 조건을 보고 판단하시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그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그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심판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서 아버지의 말씀대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우리에게 큰 은혜를 베푸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을 경외하시기 바랍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사랑하고 섬기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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