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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베드로서 설교 모음

베드로전서 1:3 - 9절 설교모음

by Jessi J 2023. 1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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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 때문에 /벧전1:1-9/ 崔 仁 根 牧 師

2023-06-26 11:15:55

 

AD 647월 어느 여름 날 로마의 중심가에 엄청난 화재가 발생하였습니다. 우리들이 너무나도 잘 아는 대로 폭군 내로 황제가 저지른 방화였습니다. 그는 그렇게 불타는 로마시를 바라보면서 춤을 추며 시를 지어 읊을 정도로 미치광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곧 이어 군중들의 거센 항의가 빗발치자 그는 그 모든 요인을 기독교인들에게 돌렸습니다. 기독교인들이 로마시에 불을 질렀다고 선포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로부터 기독교인들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무자비하게 붙잡혀 원형극장으로 보내졌고 무서운 맹수에게 갈기갈기 찢겨 짐승의 밥이 되어갔습니다. 그렇게 되니 로마시에 살던 기독교인들은 저마다 로마를 떠나 피신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소아시아로 터키로 닥치는 대로 그들은 유랑민이 되어 피신하는데 급급하였습니다. 동굴 속으로, 산속으로 바위틈으로 그들은 몸을 숨기고 피하였습니다. 두 번 다시는 올바른 세상에서 고개를 들고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이 없어져버렸습니다. 바로 그 때 사도 베드로가 그들을 위해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인 베드로전서입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벧전1:1-2)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찌어다

 

라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특별히 "갑바도기아"라는 지명이 나타나고 있음을 봅니다. 그곳은 지금도 터키에 있는 한 비참한 도시입니다. 그곳은 도시 전체가 거대한 바위굴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네로의 횡포와 추적을 피해 기독교인들이 함께 모여 피난생활을 했던 그 비참한 동굴로 형성되어져 있는데 땅 속 굴이 끝이 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다시는 이 땅에서 햇빛을 볼 수 없을 것으로 각오하고 땅속으로 굴을 파고 피신해 들어갔던 비참하기 이를 데 없는 그들에게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소망을 심어주었습니다.

 

(벧전1:3)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라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놀라운 단어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산 소망"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살아 있는 소망"이라는 뜻입니다. 죽임 당함을 피하여 토굴 속으로 들어간 그들에게 베드로는 "산 소망"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랬습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믿는 우리 성도들에게는 산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끝까지 우리들의 산 소망이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붙잡아야 합니다. 이와 같은 산 소망만 가지면 반드시 능력의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일어나십니다. 그리고 역사해 주십니다. 우리들의 산 소망이 진정으로 우리들의 삶에 새로운 희망이 된다는 사실을 친히 보여주십니다. 오늘은 이와 같은 말씀으로 힘겨운 우리 이민생활에 진정한 소망을 품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소망 때문에

 

참으로 우리들이 살아가야 할 현실을 돌아보면 그 어디에도 진정한 소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들이 살고 있는 미국은 문자 그대로 절망과 멸망의 소식밖에는 들리지 않고 있습니다. 지난 101일부터 오바마 케어는 시작되었습니다. 자고새면 어느 주가 동성결혼을 합법화 했다는 소식입니다. 2008년도부터 시작된 경제위기는 마침내 연방정부가 쌋다운 되는 지경에 이르렀고 6년이 지나고 있는 지금도 회복의 조짐조차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은 흘러 2013년도도 속절없이 다 흘러가고 있습니다. 앞을 봐도 뒤를 봐도 희망의 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지겹고도 고통스러운 소리만 들려오고 있습니다. 지각이 있고 믿음이 있는 미국의 의사들은 지금 엄청난 딜레마에 빠져 고통당하고 있습니다.

 

의사를 그만 두든지 미국을 떠나 다른 나라에서 의료 활동을 하든지 선택의 기로에서 갈등하고 있습니다. 오바마 케어라는 초유의 악마적인 법이 의사들로 하여금 의무적으로 하나님께서 금하시는 낙태를 시행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의사의 양심이나 신앙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고 무조건 오바마 케어라는 법에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들이 온 몸으로 겪고 있는 마지막 때의 절망이요 고통입니다. 이런 때에 사도 베드로는 선포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소망은 오직 부활하신 우리 주님 예수님뿐이라고 말입니다.

 

(벧전1:3)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 소망이 확실하다면 우리는 우리들의 불확실한 현실에서도 진정한 소망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산 소망이 되시는 주님을 새롭게 믿고 의지하고 따르는 변화를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소망의 말씀을 오늘 기대하고 있습니다. 함께 마음 귀를 기울이고 소망의 새날을 기대해 보는 복된 심령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소망 때문에 낮아지고 겸손해 집니다

 

(벧전1:3)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긍휼이란 쉽게 말하면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 한 가지 소망이 있다면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원하던, 원치 않던 죄를 지을 수밖에 없고 하나님은 그와 같은 죄를 용납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적대적인 관계에서 은총을 입고 회복의 기회를 얻을 수 있으려면 하나님과 우리 둘 중에 하나는 변화를 입어야 하는데 우리들이 하나님께서 원치 않으시는 죄에서 해방되는 일이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죄 중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죄를 일일이 심판하지 않으시려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해 주셔야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기대하는 것이 바로 오늘 우리들의 소망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15장에 보면 한 가난하고 초라한 여인이 예수님께 나아와 귀신들린 딸을 고쳐달라고 간절히 부탁하는 기사 하나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딸이 흉악한 귀신에 들려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회복이 불가능하게 되자 그 여인은 용기를 내어 예수님을 찾아 나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향한 그 여인의 여러 가지 태도를 살펴보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어떠한 자세로 주님께 소망을 두어야 하는지 깨닫게 됩니다. 우선 그 본문 말씀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5:21-28)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이 이름 없는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께 나아와 무조건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는 여인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초지일관 그 소망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 말씀으로 서운해 하거나 실망하거나 마음이 상하여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저런 여자를 위하여서 보내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고 하셨고, 심지어는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않다"고까지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 여인은 搖之不動(요지부동)이었습니다. 오로지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만 호소하고 있습니다. 주님께 불쌍히 여겨 주시기를 소망하는 성도들의 자세가 바로 이러하여야 하는 것임을 우리 주님은 이와 같은 사건을 통하여서 우리들에게 교훈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 여인의 중심의 소원을 친히 확인하신 예수님은 순식간에 그 여인의 소원을 들어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들이 낮아지고 불쌍히 여김 받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눈곱만큼이라도 자존심이 상하거나 무시당한다고 생각되면 미련 없이 교회까지도 떠나는 행동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그 때 우리 주님은 그러한 우리들에게 어떠한 역사를 이루어 주시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가나안 여인과 비교해 보시고 능히 판단하실 것입니다. "너는 먼저 나로 하여금 너를 불쌍히 여길 수 있도록 행동하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저는 지난주일 벤쿠버중앙교회에 가서 21명의 일꾼들을 세우는데 말씀을 전하고 왔습니다. 장로가 6명 안수집사가 6명 권사가 9명이었는데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평소 그들과 함께 20년이 넘는 오랜 세월을 그 교회를 섬기던 모 집사님 내외분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웬일인가 알아보았더니 지난 장로피택 때 떨어졌다고 교회를 떠나버렸다는 것입니다. 그 때 똑 같이 떨어졌던 집사님은 이번에 장로가 되는데 꾹 참고 더 충성하였더라면 지금 반드시 장로가 되었을 텐데... 너무 안타깝다고

 

그와 같이 신앙생활을 해 왔던 동료들이 이구동성으로 입을 모았고 저 또한 똑 같은 생각으로 안타깝고 아쉬웠습니다. 주님께 소망을 둔 성도는 결코 이렇게 처신해서는 안 됩니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주님께서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바라고 참고 인내하고 견뎌내야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가나안 여인의 이야기는 그래서 주님께서 친히 성경에 기록하시고 지금까지 우리들을 교훈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주님께 소망을 둔 까닭에 인간적인 그 어떤 모욕도 참을 수 있는 사람, 바로 그런 사람만이 주님으로부터 긍휼하심과 기적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소망 때문에 하늘 기업을 바라보게 됩니다

 

(벧전1: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참으로 많은 성도들이 하늘의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이 땅에서의 기업을 소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우선순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그렇게 하늘나라의 기업보다 이 땅에서의 기업을 우선시 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할 때 기뻐하시고 땅에 기업은 덤으로 채워주십니다.

 

(6:31-33)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 말씀을 그냥 평소에 잘 아는 말씀으로 넘어가지 말고 곰곰이 되새겨 보면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고 또한 그와 같이 이 땅에서도, 천국에서도 놀라운 축복을 받아 누릴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진짜로 하나님께 소망을 둔 성도들은 절대로 이 땅의 기업을 먼저 구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주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대로 하나님의 것을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우선시 하여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성도들은 진정한 소망을 하나님께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시시때때로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의 육신적인 삶을 들의 풀이나 꽃에다 비유하시며 우리들에게 경각심을 심어 주셨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진정으로 소망을 이야기 하고 있는 베드로를 통하여서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벧전1:24-25)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을 많이 받아 부족함이 없이 잘 살아가나 너무나도 인색하여 하나님께나 사람들에게 넉넉하게 베풀지 못했던 한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가 천국으로 들어갔는데 참으로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찬란하고 아름다웠습니다. 문자 그대로 황금보석으로 길이 만들어져 있고 길 양옆으로 서 있는 집들은 보석으로 지어져 이 세상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그런 엄청난 놀라운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그 숱한 보석 집들을 지나면서 '나도 저 중에 하나에서 살게 되겠구나!' 하면서 감격해 했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인도하는 천사는 그 좋은 집 어느 것도 자신의 것이라고 지적해 주지 않고 계속 자기를 데리고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참이나 지나가니 매우 초라한 집들이 나타나고 천국이 아닌 듯싶은 곳이 나타났습니다. 마침내 천사가 어느 초라한 집 앞에 멈춰서더니, "이것이 그대가 살 집이네"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집을 쳐다보니 아직 다 완성되지도 않았고 지붕조차도 없는 그런 초라한 집이었습니다. 깜짝 놀란 이 사람은 천사에게 다급히 물었습니다. "어찌하여 그 좋은 황금보석으로 지은 집은 아니 주고 이처럼 지붕도 없는 이런 미완성품인 집을 나에게 주느냐?"고 말입니다. 그러자 천사가 한참이나 그 사람을 처다 보더니, "참으로 안타깝게 되었네 그려.

 

대가 세상에서 살 때에 올려 준 돈으로 최선을 다해 지어보았지만 워낙에 경비가 모자라 자네 집이 이렇게 아직 지붕조차도 올리지 못했다네... 세상에서 가졌던 그 많은 돈으로 세상에서만 흥청 되지 말고 이곳 천국으로 부지런히 올려 보내 주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면서 떠나가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지어 만든 이야기겠지만 왠지 가슴이 아파오는 슬픈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이 땅에서 우리는 잠시 잠깐만 살다가 떠납니다. 우리들이 진정으로 오래 오래 살아야 할 곳은 이 세상이 아니고 천국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살아 있는 소망을 하늘나라에 두고 그곳에 투자할 줄 아는 지혜를 터득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단호하게 선포해 주었습니다.

 

(8: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고 말입니다. 비록 우리들이 이 땅에서는 고통을 당하고 가난하고 힘들지만 우리들이 가서 영원히 살 그곳 천국의 영광은 감히 상상을 초월하는 것임을 그는 알고 있었기에 이 땅에 소망을 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소망 때문에 하늘나라 기업을 사모하고 이 땅에서의 고난도 능히 이겨내는 멋들어진 하나님의 사람들이 다 되어야 하겠습니다.

 

소망 때문에 끝까지 구원을 성취하게 됩니다

 

(벧전1:5)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벧전1: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사도 베드로는 오늘 우리들과 같이 이 땅에서 실패를 거듭하였던 참으로 인간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 보시는 면전에서 그 작은 생명 하나 보전해 보려고 그 귀하신 주님을 부인하고 맹세하고 저주까지 하고 돌아 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했던 그가 주님께 진정으로 소망을 둔 이후에는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할 만큼 순순히 내 놓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진정으로 영원을 살아갈 수 있는 천국의 시민이 되는 구원의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놀라운 구원을 주님께서 이루어 주셨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그렇게 소망하고 원했던 믿음은 결국 우리들도 이처럼 영원한 구원의 반열에 설 수 있도록 역사해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소망 때문에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다 가진다 할지라도 우리들이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구원 받지 못한 백성들은 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 영원한 지옥 불에 들어가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의 관심과 소망은 오직 구원에 만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 어떤 고난이라도 그 고난을 떠나 진정한 평안과 행복으로 들어설 수 있다는 소망만 있다면 그 고난은 더 이상 고난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고난이 우리들에게 영원한 소망이 되기 때문입니다.

 

2차 대전이 끝나갈 무련 독일군들에게 포로로 잡혀 더 이상 말로 다 할 수 없는 비참한 생활을 하던 사람의 고백이 기록에 남아 있어 여기 소개해 보려고 합니다. 영국 군인으로 참전하였던 Murdo McDonald 목사가 남긴 기록입니다. 전기 기술자이자 친구인 전우가 라디오를 조립하여 비밀리에 영국방송(BBC)을 듣고 전쟁 상황을 수용소 전우들에게 전달해 주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친구는 제일 먼저 자신을 흔들어 깨웠습니다. "여보게 그들이 왔어, Friend, They have come!"라고 외쳤습니다. 그렇게도 기다리고 기다리던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성공했다는 전갈이었습니다.

 

옆으로, 앞으로 이 기쁜 소식은 순식간에 수용소 전체에 퍼져나갔고 그들은 미친 듯이 마당으로 뛰어 나와 얼싸 안고 춤을 추었습니다. 이 소식을 모르던 독일군들은 총부리를 겨누며 욕설을 퍼부어댔습니다. "이 자식들이 순식간에 집단적으로 미쳐버렸나, 왜 이 야단들이야!" 하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어떠한 협박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기쁨의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사실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여전히 그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떨어야 했고 독일군은 사방을 둘러서 총부리를 겨누고 있었고 사방의 장벽도 그대로 그들을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에는 이미 노르망디를 상륙하여 조만간 들이닥칠 연합군으로 인해 해방의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입니다. 그랬습니다.

 

우리들도 지금 우리들의 주변이 전혀 달라진 것 없이 힘들고 어렵지만 우리들을 구원시켜 주실 주님은 우리 곁으로 다가오고 계십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들의 소망입니다. 그 주님만 오시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되고 우리는 영원히 구원의 노래를 부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서 우리들을 위협하는 그 어떤 세력보다도 우리들을 구원하러 오시는 주님이 더 기쁨이고 바램이고 소망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주님께 소망을 두는 자는 진정으로 복이 있고 기쁨이 넘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군 다윗은 노래하였습니다.

 

(71:14)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 찬송하리이다

 

(146:5)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라고 말입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감사의 계절이 왔다고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에 믿음이 있고 사랑이 넘치며 오늘보다 내일에 대한 소망이 가득하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사를 드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위해 지난 한 달 동안 믿음과 사랑과 소망에 관한 말씀을 받았습니다. 참으로 우리들 속에 세상이 좋아하는 재물과 권세는 없을지라도 이 세 가지 사랑과 믿음과 소망만은 남에게 뒤지지 않을 만큼 풍성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들이 이 세 가지의 진정한 성도의 본질이 없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성도들이 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우리들의 머리털까지도 헤아리고 계시는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무장하고 사랑으로 실천하며 소망으로 오늘의 고통과 아픔을 이겨낼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기적을 보는 진정한 성도들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감사의 계절에 이처럼 기초가 탄탄한 성도들이 되어 하나님께는 감사로 영광을 올려드리고 우리들의 삶에는 신선한 변화의 회복과 축복을 만들어 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하루를 살아도 천국을 맛보며 사는 그런 멋들어진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모쪼록 복되고 귀한 아버지의 날에 아버지의 집에 나오셔서 예배를 드리며 진정한 소망으로 무장하기를 소망하는 빌립보의 모든 권속들에게 하나님만이 주시는 평안과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좋으신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아 멘

 

 

 

참 신앙과 거짓 신앙 (1) - 당신은 그리스도인 입니까? /고후13:5, 벧전1:6-8/ 김형익 목사

2021-05-11 04:28:03

 

1. 정체성(identity): 당신은 그리스도인입니까?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입니까?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우리가 던지고 받는 수 많은 질문들이 있지만, 이것 보다 중요한 질문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질문 여하에 따라서 우리의 영원한 운명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또 이 질문은 피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결국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는 이 질문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읽은 베드로전서는 다른 서신들처럼 분명하게 이 서신을 받는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서두에 쓰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벧전 1:1~2).”

 

이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소아시아의 특정 지역에 살던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고린도후서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쓰여진 편지입니다(고후 1:1). 이 서신은 그리스도인들 즉 교회에게 쓰여진 편지이지만, 서신을 마치면서 사도 바울은 편지의 수신자들에게 이렇게 도전했습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후 13:5).” 자신의 믿음이 참된 믿음인지를 테스트해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번 설교 시리즈의 주제인 [참 신앙과 거짓 신앙]을 다루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어떻게 우리는 우리 자신의 믿음이 참된 믿음, 구원 얻는 믿음인지를 테스트할 수 있습니까?

 

2. 그리스도인의 정의(definition)

당신은 그리스도인입니까?”라는 질문은 의당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 하는 질문을 전제로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입니까? 수리아 안디옥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사용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11:26).”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은 그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라는 레이블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가 핍박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입니다. 제자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 땅에서 자기를 부인하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로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우리 자신을 수식해주는 많은 조건들 중의 하나가 아닙니다. 가령, 남자이고 남편, 아버지이고 목사와 같은 수식어들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가장 본질적이고 중요한 정체성입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섰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실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진짜 그리스도인이냐?”는 질문일 것입니다. 네 믿음이 진짜 믿음이냐 하는 것입니다.

 

3. 참 신앙과 거짓 신앙, 참 그리스도인과 거짓 그리스도인

비록 초대교회가 환난과 핍박 속에서 주님을 따르는 공동체였지만, 거기에도 참 신앙과 거짓 신앙은 공존했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거짓 신앙을 가진 위선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런 자들을 멀리할 것을 경고합니다(딤후 3:5). 또 주님은 사데교회를 향하여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라고 책망하셨는데, 이와 같이 명목상의 교인들이 있다는 것을 성경은 가르쳐줍니다(3:1)

 

. 주님께서 가르치신 열 처녀의 비유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혼인 잔치의 문 앞에 이를 때까지는 아무도 판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25:1~13). 열 처녀는 모두 등을 들고 있었고 모두 신랑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등 안의 기름이 있는지의 여부는 겉으로 확인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어찌되었건 그들 모두가 혼인잔치의 문에 이르렀다는 사실은 거짓 신앙을 가지고도 끝까지 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떤 객관적이고 가시적인 증거들을 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가령 영접 기도를 했고 강단 앞으로 나와서 결신을 했다는 것, 또는 세례를 받았고 교회를 오랫동안 다니고 있다는 것, 성경을 많이 알고 있다는 것 등으로 우리 자신의 믿음의 참됨을 증명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우리 내면에 속한 것이고 그것은 신비한 사건이기에 객관적이고 외적인 모양으로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4. 하나님의 판단과 그 기준(고전 4:3~5; 7)

성경은 우리에게 남의 신앙을 판단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또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판단하느냐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자신에 대한 스스로의 판단 조차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전 4:3~5).”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실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는 기준이 무엇인가는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판단하실 때, 세상에서 그랬듯이 재산의 많고 적음이나 성공과 명성으로 판단하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비교할 대상이 없을 만큼 가장 귀한 것으로 우리를 판단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7절에서 설명한 대로, 믿음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의 유무가 결국은 오늘 설교 제목 당신은 그리스도인입니까?’하는 질문과 통하는 것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분명히 사도 베드로는 믿음을 금에 비교하고 있습니다.

 

당시나 지금이나 금은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통화 기준의 하나입니다. 지폐는 한 순간에 휴지조각이 되는 일이 있어도 금을 보유하고 있는 것은 언제나 안전합니다. 그런데 사도는 믿음은 금보다 귀하다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9절에서 말한 대로 믿음은 영혼의 구원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하나님의 판단 기준은 하나, 믿음뿐입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당신은 그리스도인입니까?’하는 질문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없는 것입니다.

 

5. [참 신앙과 거짓 신앙]의 주제가 왜 중요한가?

이제 우리가 다룰 주제, [참 신앙과 거짓 신앙]이 왜 그토록 중요한 문제인지를 좀 더 설명 드리지요. 성경은 분명히 우리가 신앙의 진위를 판단할 수 있도록 충분한 근거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너무나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주제를 다루는 이유는 성경이 전반적으로 그런 기준들을 우리에게 제시하는 이유로부터 출발합니다. 그 하나의 목적은 무엇보다 우리가 스스로 착각하지 않고 참된 신앙을 가지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거짓 신앙을 가지고 안심하면서 신앙 생활을 한다거나, 우리 자신이 위선적인 신앙의 자리에 빠져들어가지 않도록 경고를 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또 위선적인 자리에서 착각을 하고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을 지옥의 문 앞에서 깨우는 것이 이 설교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평생을 참된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고 살다가 주님 앞에 섰을 때 나는 너희를 도무지 모르겠다는 말씀을 듣게 될 때, “나는 한 번도 제 신앙이 거짓일 것이라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말할 수 없도록 미리 경고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다니면 그저 다 그리스도인이라고 간주하는 시대에 살고 있기에 이런 주제의 말씀은 더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설교 시리즈의 부정적인 목적이 있는데 그것은 신자들이 최소한 거짓 교사들 그리고 거짓 신자(위선자)을 분별함으로써 실족하는 일을 예방하는 차원입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하게 거짓 선지자들을 삼갈 것을 경고하셨고 그들을 열매로 분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7:15~27). 이것을 분별하지 못하면 자기의 믿음을 허물게 되는 치명적인 실족을 경험하게 되기 때문에 이것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주의를 당부하고 싶은 것은 이런 주제의 말씀을 듣다 보면 연약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낙심에 이르게 되는 부작용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펄전이 그렇게 말했듯이, 참으로 이런 말씀을 듣고 자기 영혼에 대해서 근심할 수 있다면 그를 위해서는 별로 걱정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오히려 소망이 있지만, 오히려 이런 말씀을 듣고도 자기 영혼에 대해서 별로 염려를 하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심각한 영적인 상태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인하여 자신의 영혼에 대한 낙담이 일어나기 시작한다면,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시는(42:3)”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분께 나아가 간절한 마음으로 은혜를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하여 연약한 믿음 가운데 계시는 분들이 , 내가 너무나 연약한 신앙 가운데 있구나. 더 확실하고 성숙한 신앙으로 나아가야겠구나생각하고 더 견고하고 확실한 데로 나아가게 하는 은혜를 주시기를 구합니다.

 

6. 시련(trial)과 분별(6~7)

오늘 본문 6절에서 사도 베드로는 시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들이 잠깐 근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상황을 언급합니다. 이 서신의 수신자들은 1절에서 보았듯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나그네들입니다. 박해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시련이 믿음과 관련해서 하는 일이 있습니다.

 

A. 시련은 신앙의 진위를 드러내준다(6).

첫째는 시련이 신앙의 진위를 드러내준다는 것입니다. 이 서신을 받는 사람들의 믿음은 참된 믿음이었기에 그들의 믿음의 확실함은 시련을 통해서 더 온전하게 드러났습니다. 아무리 혹독한 시련 속에서도 참된 믿음의 사람들은 산 소망을 가지고 시련을 견딜 수 있었고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6절에 그러므로가 의미하는 바입니다. 3~4절을 보지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산 소망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입니다. 참된 믿음은 히브리서 기자가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한대로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11:1). 그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 믿음은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나를 아시며 나를 보고 계시다는 것과 하나님을 찾는 자들을 위하여 상을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는 믿음입니다(11:6).

 

그들은 장래의 소망이라는 렌즈로 그들이 경험하고 살아가는 현재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그들이 여러 시련으로 인하여 잠깐 근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지만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라고 쓸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장래의 소망과 은혜의 렌즈로 현재를 보는 사람이고 그러기에 그들은 현재의 고난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바라본 장래의 산 소망은 썩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늘에 간직하여 두신 것이었습니다.

 

B. 시련은 신앙을 연단하고 강하게 한다(7).

시련은 믿음의 진위를 드러낼 뿐 아니라 불로 금을 연단하듯이 믿음을 연단하는 역할을 합니다. 수 많은 불순물들과 함께 섞여 있는 우리의 믿음은 시련을 통해서 순수한 믿음으로 정제됩니다. 이것을 사도 베드로는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고 썼습니다(7).

 

주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을 자는 시련을 통해서 불을 통과한 금처럼 순수하게 된 믿음을 가진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고난을 통해서 이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입니다(8:28). 이것을 알았기에 시련을 인하여 잠깐 근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저들이 오히려 크게 기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7. 참된 신앙은 거룩한 감정?주 예수님께 대한 사랑?안에 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18세기 전반기에 뉴잉글랜드에서 일어났던 제1차 대각성운동을 통해서 매우 격정적이고 흥분을 불러일으키는 다양한 종교적 현상들을 보면서, 참된 신앙인지 아닌지를 가늠할 수 있는 확실하고 믿을만한 증거들인 것과 아닌 것들을 제시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쓴 책이 Religious Affection (신앙감정론)입니다. 그 책의 서두에 그가 채택한 구절이 베드로전서 18절입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그가 왜 이 구절을 선택했을까요? 참된 신앙과 거짓 신앙을 구별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신자의 거룩한 감정(holy affection)이며, 참된 신앙은 거룩한 감정 안에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가 말했던 종교적 감정이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나중에 살펴보더라도, 그가 말하고 싶어했던 신앙감정(religious affection)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것이 바로 주 예수님께 대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사도는 예수님을 본 사람이었지만 이 서신의 수신자들은 육신으로 예수님을 만나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것이 사도와 수신자들의 차이였습니다. 그런데 사도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모두 주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볼 수 없었지만 믿음의 눈으로 사랑하는 주 예수님을 보면서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다락방에 오셔서 제자들을 만나셨을 때에 의심하던 도마에게 하신 말씀을 사도 베드로는 기억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20:29).” 여러분, 단지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육안으로 보지 못했다는 점에서 우리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주 예수님을 사랑했고,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했습니다.’ 이것은 예사로운 표현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믿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봄으로써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 있습니다. 주 예수님에 대한 사랑은 그들로 모든 박해와 핍박이라는 시련을 감당할 힘을 주었고, 계속해서 그리스도를 따라갈 수 있는 힘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말이 아니라 전인격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그리스도께서 마음이 기울어지는 자입니다. 이 사랑은 그들에게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이것은 세상에 있는 유한한 존재에 대한 사랑이 만들어내는 기쁨과는 다른 것입니다. 이것은 무한하고 영원하시며 완전한 아름다움이신 주 예수님에 대한 사랑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하늘의 기쁨이고 주님 안에 있는 기쁨이고 주님이 누리셨던 기쁨입니다. 이것이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이십니까? 여러분은 주 예수님께 대한 참된 믿음을 가지셨습니까? 여러분의 인생에서 이 질문 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없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예수를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합니다. 참된 믿음은 주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비록 현실적으로는 시련으로 인하여 잠깐 근심하지 않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은 산 소망과 믿음 안에서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힘이 있어서 일평생을 그리스도께 나아가게 하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게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능력은 부인하는 자는 아닙니까? 여러분은 살았다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자는 아닙니까? 참으로 그리스도를 믿고 사랑하고 기뻐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 도다 /벧전1:6-9/ 조 정 의 목사

2021-01-26 07:29:05

 

020년을 마무리하는데 가장 적합한 본문을 찾다가 베드로전 서 16-9절만큼 우리가 겪은 상황을 잘 묘사해주고, 우리에게 꼭 필요한 위로와 소망을 주는 말씀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 비두니아 등 소아시아에 흩어진 성도들에게 편지한다 (1). 마치 영상을 통 해 흩어진 성도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지금의 상황과 유사하다.

 

흩어진 성도들은 6절에 나오는 것처럼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 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 다는 이유로 여러 가지 신변의 위험, 경제적 압박, 사회적 비난과 억압을 감내해야 했다. 심지어 목숨을 내놓아야 할 때도 있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지난 한 해를 돌아볼 때 여러 가지 시험을 당 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전무후무한 경험을 하면서 건강, 직장, 교육, 신앙의 위기를 겪었다. 교회에 불어닥친 여러 부정적인 판 단과 조롱도 있었고, 불합리한 정책에 순응하기도 했다.

 

그런데 사도 베드로는 여러 가지 시험으로 근심하게 된 성도들 이 그 시험 중에 오히려 크게 기뻐한다고 말했다. 시험 자체가 기쁘고 즐거운 일이라서가 아니다. 시험이 주는 유익 때문이다. 7절을 보면 시험은 첫째, 성도가 가진 믿음의 확실함, 진실함을 보여준다. 베드로는 용광로에서 금광석을 녹여 순수한 금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비유로 들어 성도의 믿음이 여러 가지 시험에 의해 불순물이 제거되고 가장 순수하고 아름답고 확실한 믿음이 남 게 되었다고 말했다.

 

금은 이 땅에서나 쓸 데 있지 죽으면 아무런 가치가 없다. 하늘나라 보도블록이 순금 아닌가? 하지만 믿음은 이 땅에서도 아주 귀 한 가치가 있고(‘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11:6), 베드로 말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영속 적인 가치를 빛낸다. 그리스도의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는 것이 바로 믿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난 한 해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로 고통스럽고 불편 한 시간이었지만, 동시에 우리의 믿음이 어디에 있는지, 우리 믿음에 섞여 있는 불순물이 무엇이었는지, 순수한 우리의 믿음만 남도록 모든 더러운 것을 제거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연 단의 시간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인생에 어려운 순간에 우리는 그동안 입술로 고백했던 믿음의 현 주소를 발견하게 된다.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불필요한 대상을 버리고 끝까지 붙들 수 있는 대상만 남겨 둔다. 욥이 가진 것을 다 빼앗기고 자식과 건강까지 잃었을 때 하나님께 둔 믿음이 빛 났던 것처럼 시험은 우리가 가진 믿음이 하나님이 주신 물질, 환 경, 사람, 자녀, 건강이 아닌 하나님 그분께 있다는 걸 보여준다.

 

8절을 보면 시험은 둘째, 성도가 사랑하는 대상이 누구인지 보여준다. 우리는 보통 보이는 것을 의지하고 보이는 것을 바라고 보 이는 것을 기대하며 살지만, 여러 가지 시험은 보이는 것들이 절 대 우리 영혼을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우리 영혼의 영원한 만족 되시는 분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체험으로 알게 한다. 시험으로 연단 된 순수한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그리스 도를 향한 사랑을 더욱더 뜨겁게 만든다. 그리고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며 그리스도를 기다리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올해 겪은 여러 가지 시험은 아무런 의미나 유익이 없는 시험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품고 있는 사랑의 대상이 누구인지, 우리가 보이는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세상과 벗하며 세상을 사랑하며 살고 있는지 아니면 보이지 않지 만 믿음으로 그리스도 예수를 바라보며 사랑하며 사는지 알게 하셨다. 그냥 말로만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을 노래하는지, 아니 면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며 그분을 사모하는지 점검하게 하셨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말이 있다. 우리는 참 오랜 시간 노력하지 않으면 멀어지는 예배를 드렸고, 어쩌면 당 신은 교회의 공적인 예배 공동체의 기능이 약해지면서 개인적으로 주님을 만나는데 게을러지고, 그분과 점점 멀어지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큰 상실감과 그리움 없이 잘 살았다면 여러 가지 시험이 당신에게 그리스도를 향한 처음 사랑을 어디에서 잃었는지 반드시 찾아야 한다고,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심 각한 지경에 이르렀다고 진단을 내리는 방편이 되었을 것이다.

 

1) 시험은 우리 믿음을 연단 하여 순수한 믿음을 갖게 하고, 2) 우리 사랑을 오직 그리스도 예수로 향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9 절을 보면 셋째,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게 한다. 우리의 소망을 땅이 아닌 하늘, 물질이 아닌 영적인 것에 두게 한다.

 

베드로가 말한 영혼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으로 신뢰하는 믿음의 결과물(결국)인데, 단지 죽고 나서 최종 목적지가 하늘 나라가 된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 영혼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의를 입고 살아난 것이 구원이다. 하나님의 원수로 살다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구원이다.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되어 있다가 영 원한 화목을 이룬 것이 구원이다. 전적으로 타락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점점 더 그리스도의 형상대로 변화되는 것이 구원이 다. 죄성을 가진 몸을 벗고 그리스도의 새로운 몸을 입으며, 죄 와 오랜 전쟁을 마침내 끝내고 하나님 앞에 온전히 의롭게 된 영 화를 입는 것이 구원이다.

 

이것이 우리의 참된 소망인데, 우리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같은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조금씩 구원의 소망과 함께 우리의 소망으로 여기려 한다.

 

여러 가지 시험은 우리의 믿음과 사랑을 단순화시킬 뿐만 아니 라 우리 소망이 그리스도께 있으며 그분이 우리에게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시는 영혼의 구원을 간절히 소망하게 한다.

 

2020년 한 해 주님은 우리 영혼을 새롭게 하시는 일을 하셨다. 조금 더 주님을 닮게 하셨다. 죄와 싸우게 하셨고 의를 바라게 하셨다. 이 세상이 아닌 하늘나라를 바라보게 하시고, 세상이 주는 것이 아닌 아버지께서 주시는 참된 소망을 기대하게 하셨다.

 

올해만큼 주 오심을 기다리며 하늘나라를 기대하며 살았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2020년은 이 땅이 어둡고 혼란스러운 만큼 밝고 평안한 천국을 기대했던 해, 질병과 죽음의 공포가 짙어 진 만큼 죽음도 눈물도 없는 하늘나라를 소망했던 해였다.

 

많은 사람이 지금의 사태가 언제까지 갈 것인지 염려한다. 하지 만 두려워하지 말자. 주님은 절대 실수하지 않으신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반드시 선을 이루신다. 주님은 올해처럼 내년에도 여 러 가지 시험을 통해 우리의 믿음을 더욱 순수하게 만들어 주실 것이다. 여러 가지 시험을 통해 우리의 사랑을 더욱 그분에게만 향하게 만들어 주실 것이다. 우리의 소망을 이 땅이 아닌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에게 두게 만드실 것이다.

 

2020년 코로나에 우리가 적응하느라 바빴다면, 2021년 새해에는 적극적으로 대응하기를 원한다. 주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하 여 우리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오직 주님 안에 두게 하실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순종으로 동참할 수 있다. 2020년 우리가 노력했던 코로나 시대 신앙 함께 지키기2021년 새해에는 더 힘껏 실천해보자.

1.매일 꼭 성경 읽고 기도하기: 먼저, 우리의 믿음의 호흡은 기 도다. 우리의 사랑과 소망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과 함께 자란 다. 그러므로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자. 새해 에는 교회 전체가 함께 같은 성경 일독 계획에 따라 성경을 읽고 자 한다. 주일은 말씀을 듣고,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성경 읽기 표에 따라 함께 성경을 읽자. 매달 성경읽기표 엽서 제공, 오디 오 성경, 짧은 묵상 영상 등 다양한 방법으로 함께 성경 읽기를 독려할 계획이다. 매일 적어도 하루를 시작할 때와 마칠 때 주님 과 함께 기도로 교제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자.

2.라이브 예배 꼭 참석하기: 주님은 우리가 함께 예배하는 자리에 계신다. 그러므로 당신이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과 사랑과 소 망을 키우려면 당신은 성도가 함께 예배하는 자리에 나와 주님을 만나야 한다. 주일과 수요일, 현장이든 온라인이든 모이기를 폐하는 나쁜 습관을 버리고, 반드시 참석하자. 피치 못할 사정으로 빠지면, 늦게 라도 반드시 찾아보자. 설교 노트를 제작하여 나 눠줄 것인데, 말씀을 정리하고 순종하며 빠짐없이 예배에 참석하 자.

3.교회 학교 참여하도록 꼭 돌보기: 코로나가 만들어낸 긍정적 인 효과 중 하나는 가정이 자녀의 영적 양육의 주체가 되었다는 것이다. 교회 학교는 일주일에 길어야 1-2시간으로 자녀에게 그 리스도를 소개하는 보조 역할을 했다. 이제 자녀가 가정에 머무는 시간이 대폭 증가하고 교회 학교 기 능이 약화되면서 부모가 주의 교훈으로 자녀를 양육하고 그리스 도를 향한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심어줘야 할 책임이 확실히 부각되었다.

그러므로 최소한 교회에서 제공하는 온라인 교회학교에 적극적으로 참석하도록 아이들을 돌보라. 그리고 가급적 주중에 한 번 자녀들과 함께 가정 예배를 드리는 실천을 해보라. 특별히 2021 년 새해부터 2.5단계와 3단계에서 만찬 예배를 가정별로 드리게 끔 하려고 한다. 1~2단계는 현장 예배를 기본으로 하고, 현장에 서 만찬예배를 드리지만, 2.5단계와 3단계는 교회에서 만찬 예 배를 진행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각 가정별로 만찬 예배를 드리고, 제공하는 말씀 예배에 참여하도록 할 것이다. 자세한 내용 은 가정별로 <가정 예배 가이드>를 나눠줄 것인데, 그 책을 참고하면 된다.

 

4.칼럼, 좋은 신앙 서적, 주일 오후 성경 공부 꼭 참석하기: 코로나 때문에 폭발적으로 발전하는 산업은 SNS와 미디어 산업이다. 집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사람들이 주로 SNS, 미디어를 많이 소비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는 것과 읽는 것과 듣는것을 주의해야 한다. 재미있고 흥미로운 걸 금지하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믿음을 더 강력하게 해주는 책, 그리스 도를 향한 우리의 사랑을 더욱더 깊어지게 하는 미디어, 그리스 도 안에 둔 우리 소망을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을 많이 소비해야 한 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좋은 글을 찾아 읽어라(칼럼). 미디어 부에서 비치해 두는 좋은 신앙 서적을 빌려 읽어라. 주일 오후 성경 공부(영적으로 양분이 풍부한 양식), 빠짐없이 찾아 들어라. 설교나 강의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유평교회 성도를 위해 따로 불러 세우신 은 사자들을 통해 제공한 양식이니 반드시 그 양식을 챙겨 먹어라. 건강을 위해 비타민과 각종 보조식품을 챙겨 먹는 것처럼, 영혼의 건강을 위해 각종 좋은 양식을 챙겨 먹자.

 

5.주중에 성도를 위해 기도하고 연락하기:

언택트 시대라고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교제는 절대로 멈출 수 없 다. 우리의 교제 가운데 그리스도를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코 로나 때문에 만나는 것이 조심스럽더라도 우리는 전화, 문자, 메 신저 등으로 얼마든지 서로의 안부를 묻고 서로의 영적 건강을 챙기고 위로와 격려의 말을 건넬 수 있다. 2020년은 물질로 성도를 많이 도울 수 있게 하신 은혜의 해였다. 또한 지역 학교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도 했다.

 

새해 더욱더 서로 돌보고 사랑하는 우리가 되자. 사실 관심이 없으면 궁금해하지도 않고 연락도 하지 않게 된다. 매주 성도를 위 해 기도 제목을 가지고 기도하면, 그 성도의 안부가 궁금해지고 묻고 싶어 진다. 그러니 먼저 성도를 위해 기도하고, 그리고 우리 에게 주어진 도구와 기술을 사용하여 성도가 그리스도를 더욱 믿고, 사랑하고, 소망할 수 있도록 서로 돕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여러 가지 자원을 궁핍한 성도와 이웃에게 나눠주자.

 

2020년 어떻게 흘러왔는지 모를 정도로 갑작스럽고 오래 지속된 초유의 사태에 적응하느라 분투하고 고생했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주님은 우리에게 참 많은 은혜를 베푸셨다. 모든 어려움 속에서 주님은 더 많은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2021년 새해 여러 가지 시험이 우리에게 찾아올 때, 주님께서 우리 믿음을 더욱 순결하게 만드시는 은혜의 손길이라 여기자. 주님께서 우리 사랑을 더욱 주님께로만 향하도록 만들고 계신다 고 생각하자. 주님께서 우리 소망을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께 두 도록 역사하신다고 믿자. 신앙 함께 지키기 운동을 통해 우리가 삶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새해 더욱더 그리스도를 강력하게 믿고, 더욱더 그리스도를 뜨겁게 사랑하고, 더욱더 그 리스도 안에 소망을 확실히 두는 유평교회가 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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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이야기 /벧전1:3-9/ 조정의목사

2020-09-18 11:05:00

 

매년 1225,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합니다. 우리가 이날을 기념하는 것은 단지 이순신이나 세종대왕과 같은 위대한 위인의 탄생을 기억하는 수준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탄생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있어 정말로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2:10). 여러분 정말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뻐하십니까?

 

사도 베드로가 돌아본 소아시아 지역 성도들에게 그리스도는 진정 살아있는 기쁨과 소망이 되셨습니다. 그들 중 누구도 그리스도를 본 적이 없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진실로 사랑했습니다. 여러 가지 시험으로 근심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귀한 믿음이 더욱 연단 되어 그 고난 속에서 오히려 예수님을 더욱 신실하게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했습니다(벧전 1:3-9). 베드로는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고 있는 소망을 산 소망”(living hope)이라 불렀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 있는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까? 혹시 여러분을 둘러싼 여러 가지 시험과 환경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기쁨을 갉아먹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리스도를 너무 사랑해서 모든 시험을 초월할 정도로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을 느끼고 기뻐하는 삶을 살고 있지 않다면, 1225일 우리가 기념하는 그리스도의 탄생은 여러분에게 천사가 크게 외친 것처럼 큰 기쁨의 좋은 소식으로 와닿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기쁨을 회복 시켜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이 얼마나 큰지 다시 한번 맛보아 알게 해주시길 원합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의 은혜가 얼마나 풍성하고 부요한지 깊이 느끼게 하시길 원합니다. 사실 이 구원에 대하여는 우리뿐만이 아니라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벧전 1:10, 12). 그래서 오늘 말씀의 제목이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천사들이 왜 이 구원에 대하여 살펴보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일까요? 인간보다 월등히 뛰어난 지능과 죽지 않고 계속해서 존재하면서 태초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의 역사를, 구원의 섭리를 모두 지켜본 이들이 무엇을 더 간절히 알고 살펴보기 원하는 것일까요?

 

오늘 우리는 어쩌면 우리가 놓치고 있는, 하지만 천사들은 계속해서 놀라고 기뻐하고 감사하고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발견하기 원합니다. 이 작업을 위해서 성경에 천사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수행하는 장면을 찾아 살펴보겠습니다.

 

무수히 많은 성경 구절이 있겠지만 세 가지 장면을 선정하여 거기서 배울 수 있는 것을 천사의 관점에서 살펴보겠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작업을 통해 하나님이 죄인인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나 크고 기쁜 소망을 주셨는지 우리가 확실히 보게 되기를 원합니다.

 

첫 번째로 우리가 살펴볼 장면은 이사야 6장입니다. 우리는 이사야 6장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천사들을 만납니다.

 

1.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천사들(6)

 

이사야 6장은 주전 740년경,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선지자로 세우시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연대가 추정 가능한 것은 1절에서 분명히 웃시야 왕이 죽던 해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인 한 시점에 이사야는 하늘에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주님을 봤습니다. 주님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는데, 그분의 영광이 성전에 충만한 것을 시각적으로 아름답게 묘사한 것입니다.

 

주님의 곁에는 그분을 모시는 스랍들, 즉 천사들이 있었습니다. 스랍들은 세 쌍의 날개를 가지고 있었는데, 두 날개로 날면서 나머지 네 개의 날개로 둘로는 얼굴을 나머지 둘로는 발을 가리고 서로 이렇게 화답하며 찬양했습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3).

 

천사의 날개가 날아다니는 데 필요하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나머지 네 개의 날개로 얼굴과 발을 가리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주님은 모세에게 나타나실 때 신을 벗으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임재하신 그 땅이 거룩하기 때문입니다(3:5). 모세는 여호와 앞에 들어가서 나올 때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는데, 이는 모세의 얼굴 광채가 이스라엘 백성을 두렵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34:29-35).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그 영광이 모세의 피부에 광채로 묻어난 것만으로도 백성들은 크게 두려워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죄가 조금도 없는 영적인 존재 천사일지라도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너무나 커서, 감히 그분의 얼굴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 발을 드러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날개로 가린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을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자연 만물 앞에 설 때 경외심을 느끼고 그 아름다움에 압도됩니다. 하지만 그때라도 우리는 더욱더 시선을 집중하여 경이로운 만물을 바라보지 눈을 가리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영광 앞에 우리는 눈을 가릴 수밖에 없습니다. 너무나 거룩해서 볼 수 없을 정도로 주님은 위대하고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죄가 없는 천사들도 눈과 발을 가린 채로 세 번이나 강조하여 크게 외친 것입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그분의 영광은 성전뿐만 아니라 그가 만드시고 다스리시는 온 땅에 충만하십니다.

 

천사들이 얼마나 크게 화답하여 외쳤는지 그 소리가 문지방의 터를 요동시키고 성전을 연기로 가득 채웠습니다(4).

 

여러분, 이 광경을 두 눈으로 보고 두 귀로 들었던 이사야의 심정을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지진이 나는 것처럼 터가 크게 요동칩니다. 불이 나듯 연기가 무섭게 성전을 가득 채웁니다. 천사들이 천둥소리처럼 큰 소리로 서로 화답하며 하나님의 거룩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높은 보좌에 천사가 감히 눈을 뜨고 볼 수 없었던 주님이 계십니다. 온 땅에 충만한 영광을 가진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고 이사야의 심령에 어떤 생각이 가득 찼을까요?

 

5절에 이사야의 입술에서 터져 나온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이제 죽었다’, ‘나는 이제 끝났다라고 탄식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사야가 말합니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예수님은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15:11). 이것을 생각하면 이사야가 입술이 부정한 죄인이라 말한 것은 단지 입술만 부정하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시작되는 온갖 더러운 죄가 입술로 나오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지 확실히 보고 그 앞에서 죄인은 절대로 용납될 수 없으며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한 것입니다.

 

마치 거룩한 예수님 앞에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한 베드로처럼 이사야는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했습니다(5:8). 눈을 뜨고 감히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하나님의 거룩 앞에서 죄인은 멸망할 수밖에 없음을 직시합니다.

 

지금 하나님 앞에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 모르는 분들도 언젠가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 앞에 자신을 바라보며 이사야처럼 탄식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이제 망했구나라고 고백하며 자신의 영원한 운명, 곧 멸망을 직감하게 될 것입니다. 부정한 사람은 결코 거룩한 하나님과 함께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사이를 좁힐 수는 없습니다. 모든 죄인은 영원히 멸망할 운명을 타고났습니다.

 

그런데 이사야가 자신의 멸망을 직감했던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구원의 손길을 베푸셨습니다. 그리고 그 구원의 역사를 이행한 것이 바로 스랍들 중 하나였습니다. 천사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숯을 가지고 이사야에게 날아와서 이사야의 입술에 대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7).

 

하나님께서 은혜의 구원을 천사를 통해 이사야에게 베푸셨습니다. 부정한 사람들 중 하나로 망할 수밖에 없는 죄인을 하나님이 선택하셨고, 그의 죄악을 사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8절에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을 위하여 보내심을 받은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백성들, 마음이 둔하고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긴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선지자로 세워진 것입니다.

 

, 여기서 저는 스랍들 중 하나인 이 천사를 주목하기 원합니다. 천사는 두 눈과 발을 가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큰 소리로 찬양했던 존재입니다.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 존재입니다. 그는 어떻게 이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께서 부정한 입술을 가진 죄인들 중 하나를 택하시고 그 말씀을 대신 선포하게 하시는지 이해할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제단에 핀 숯 하나를 가져다가 그의 입술에 대고 모든 죄가 사해졌다고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탄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700여년이 지난 후 천사는 더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됩니다. 그것이 우리가 살펴볼 두 번째 장면입니다. 본문은 누가복음 1장입니다.

 

2. 하나님의 탄생을 선포하는 천사들(1, 2)

 

하나님의 곁에서 그분을 섬기면서 중요한 소식을 전달하는 역할을 담당했던 천사가 바로 26절에 나오는 가브리엘입니다. 그는 나사렛이라는 동네에 가서 다윗의 자손 요셉과 약혼한 처녀 마리아에게 하나님의 소식을 전달했습니다. 그가 전달한 내용은 30절부터 나옵니다.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1:30-33)

 

마리아는 처녀로서 아기를 잉태한다는 사실에 매우 놀랐지만, 천사는 다른 측면에서 놀랐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라고 놀라서 질문했고, 천사는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심으로 나실 것이라고 담담하게 대답합니다(35). 전능하신 하나님께 하나도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천사가 놀란 부분은 이것입니다. 마리아를 통해 나실 아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거룩하신 이라는 것입니다. 아기 예수께서 사실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무궁한 하나님 나라를 영원히 다스리실 왕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거룩하고 거룩하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입술이 부정한 백성들 중에 거주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것도 인간의 모습으로 나실 수 있단 말입니까? 천사는 이 부분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천사가 받았을 충격, 경이로움을 놓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펴본 첫 번째 장면과 지금 살펴보고 있는 두 번째 장면을 이어주는 본문인 요한복음 12장을 함께 살펴보기 원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얼마나 위대하고 놀라운 일인지 헤아려 볼 수 있을 것입니다(12:37).

 

요한복음 12장에서 우리가 첫 번째로 살펴본 장면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12:41). 여기서 는 대명사 인데(“그의 영광”), 그가 가리키는 분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말 성경은 이 부분을 이렇게 바르게 번역했습니다.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그가 예수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가리켜 이런 예언을 했습니다.”

 

이사야가 본 거룩하고 거룩하고 거룩한 하나님, 온 땅에 그 영광이 충만한 하나님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과 함께 계신 말씀, 하나님이신 말씀(1:1)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1:14). 아버지의 영광, 충만한 은혜와 진리를 가지고 아무도 본 적이 없는 하나님을 나타내신 하나님, 그분이 바로 천사가 아기로 나실 것이라 예언한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러니 천사에게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소식이었겠습니까? 두 눈과 발을 가리고 큰 소리로 거룩하다 찬양했던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께서 가장 연약하고 의존적인 존재인 아기의 모습으로 입술이 부정한 백성들과 함께 거주하러 오신다는 소식을 전하는 천사의 마음을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도대체 왜 하나님은 이렇게 엄청난 일을 하시는 걸까요?

 

누가복음 2장에서 천사가 선포한 두 번째 메시지에서 우리는 그 대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자기 양 떼를 지키고 있던 날 밤, 목자에게 천사가 나타나 이렇게 외칩니다. “무서워 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10-11)

 

예수님은 구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로 이 땅에 나셨습니다(1:21). 부정한 백성들 가운데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예수님을 통해 전파되었습니다.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그 모든 죄를 사하십니다. 영접하십니다. 받아주십니다.

 

이사야의 부정한 입술에 천사를 통하여 제단에 핀 숯을 가져다 대시고는 너의 모든 죄가 사해졌다고 선언하신 하나님께서, 부정한 백성의 삶을 직접 어루 만지고 그들의 죄를 사하기 위해 이 땅에 가장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낮고 천한 모습으로 나신 것입니다. 그분을 모시고 예배하던 천사가 이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선포할 때 얼마나 감탄했을지 상상해보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가 살펴볼 마지막 장면이 아닙니다. 우리는 천사가 가장 놀라고 어쩌면 그 경이로움에 떨며 바라봤을 세 번째 장면을 살펴볼 것입니다. 그 장면은 누가복음 22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3. 하나님의 죽음을 조력하는 천사들(22:39-46)

 

누가복음 22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나눈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7-23). 주님은 떡을 가리켜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하시고, 잔을 가리켜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19-20). 마태복음에서는 잔에 대하여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라고 하셨습니다(26:28).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마치시고, 예수님은 감람 산 겟세마네 동산이라는 곳에 가셔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습니다(41).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42).

 

제자들과 잔을 나누며 하신 말씀처럼 많은 사람을 위해 피를 흘리게 될 일을 앞두고 예수님은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습니다(14:34). 곧 망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죄를 알지도 못하신 예수님이 모든 죄인의 죄를 짊어지실 것이었습니다. 죄를 심판하실 권세가 있는 예수님이 죗값을 치르기 위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에서 끊어지는 고통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말씀에 따르면 예수님은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리셨습니다(5:7). 그리고 누가복음 2243절 말씀을 보면 바로 그때,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였습니다.

 

여러분 천사의 관점에서 생각해보십시오. 그분은 거룩하고 거룩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영광이 성전에 가득하고, 온 땅에 충만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너무나 거룩하여 눈을 가리고 발을 가리고 쉼 없이 찬양을 돌리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그분 앞에서 입술이 부정한 백성은 망하게 될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거룩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망하게 될 인간의 모습으로 아버지께 울부짖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부정한 백성의 입술에 제단에 핀 숯을 천사를 통해 전달하여 죄를 사하신다 선포하셨지만, 예수님은 직접 부정한 백성들 중에 거주하면서 그들을 대신하여 죽임당할 제단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죄인이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거룩하고 높은 보좌에서 직접 내려오셔서 죄인의 모습으로 죄인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모두 그 몸으로 받으시고, 부정한 백성을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할 백성으로 삼아주셨습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그 일을 행하기 앞서 예수님은 아버지께 심한 통곡으로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천사가 함께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저는 바로 이것이 천사가 그토록 구원에 대하여 간절히 살펴보기를 원하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거룩하고 영화로우신 하나님께서 그 높은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셔서 부정한 백성들과 함께 거주하며 그들의 죄를 대신 지고 죽으셨던 그 크고 깊은 겸손과 낮아지심,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크시기에, 높은 하늘에서 낮은 땅까지 자기를 낮추신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천사들은 계속해서 묵상하고 헤아리고 그 놀라운 은혜에 감탄하며 찬양하기 원하는 것입니다(103:11).

 

곧 있으면 예수님의 나심을 기념하는 성탄절입니다. 천사들은 예수님의 나심을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2:10). 수많은 천군과 천사가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며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외쳤습니다(2:14).

 

저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진정 주님의 나심을 큰 기쁨의 좋은 소식으로 여기십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셔서 하나님이신 자기 아들을 부정한 우리와 같은 모습이 되게 하시고 부정한 우리를 대신하여 죽을 제물로 삼으셔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영원한 평화를 선언하셨다는 것에 관하여 천사처럼 간절히 살펴보기 원하십니까? 신령과 진정으로 찬양하고 예배하기 원하십니까?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성탄절을 늦잠 자는 날이나 아이들 선물을 사주는 날, 연인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날, 나아가 좋은 일이지만 어려운 이웃을 돕는 날로만 기억하지 마십시오. 가족과 함께 모여 빌립보서 26-8절 말씀을 간절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2:6-8).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의 영광을 천사처럼 바라보고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예수님을 찬양하십시오.

 

자기를 비워 사람들과 같이 되신, 종이 되신 주님을 생각하십시오. 사람으로 오신 주님을 선포하며 찬양했던 천사들처럼 부정한 백성과 함께하러 오신 임마누엘 하나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신, 십자가에 우리를 대신하여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깊이 묵상하십시오. 아버지께 울부짖는 예수님과 함께했던 천사처럼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높은 하늘에서 낮은 땅까지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님의 크신 인자하심을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신령과 진정으로 그분을 경외하고 높이시기 바랍니다.

 

지금 천사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거룩하신 보좌에 계신 예수님을 찬양했고, 이 땅에 아기로 나신 예수님을 선포했으며, 십자가 앞에 울부짖던 예수님과 함께 했던 천사들, 그들은 지금 예수님 앞에서 무얼 하고 있을까요? 계시록 511절에 보면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인 천사들이 큰 음성으로 예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5:12)

 

계시록 말씀에 따르면 이 천사들의 큰 찬양에 함께 동참하여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예수님을 이렇게 찬양합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5:13).

 

천사들의 찬양소리에 동참하여 우리는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 아버지와 보좌 우편에 계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 세세토록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오는 성탄절 우리가 하늘 보좌 앞에서 영원히 하게 될 그 일을 가족과 함께, 교회와 함께, 또 천사들과 함께 드리기 원합니다.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자기를 낮추신 예수님만 온전히 높여드리는 성탄절이 되기를,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다시 산 소망으로 /벧전1:1-9/ 김병삼목사

2018-11-07 03:21:56

 

1.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 지어다.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5.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7.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10.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12.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알린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 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 설교 시작 영상

설교 전 베드로의 일생을 영상화 해본다. 예를 들어 밤새도록 고기를 잡던 어부 베드로 그러나 그의 노하우 와 노력과 모든 열정으로 고기를 잡으려 하였으나 빈 그물 뿐, 허탈감과 무력감에 빠져있는 베드로의 모습을 조명하고 그때 주님이 말씀하신다. “깊은 곳에 가서 오른쪽에 그물을 던지라는 말씀을 듣고 다시 힘을 내어 말씀에 의지하여 던져보겠나이다순종의 결과는 그물이 찢어질 만큼 얻는 수확, 그에게 기쁨이 찾아오고 다시 소망이 생기는 모습을 조명하며 설교의 본문으로 들어간다.

 

나그네들에게 주시는 말씀

오늘 말씀을 시작하며 제일 먼저 들어오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나그네입니다.

지금 사도 베드로는 나그네들에게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나그네들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2절 말씀,

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 지어다.

 

나그네들이 정말 가지기 어려운 것 은혜와 평강이 더욱 많기를 바라는 마음이죠. 이 나그네 들은 어떤 사람인가요?

답을 먼저 이야기 한다면 산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

우리가 요즘 쓰는 말 가운데 강을 건넌 사람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목숨을 걸고 북한을 넘어온 사람들이죠.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널 때 그들은 목숨을 걸고 넘어온 사람들입니다.

 

왜 그들은 목숨을 걸고 강을 건너 왔을까요? 강을 건너면 소망이 있기 때문이죠.

성경의 역사를 보면 하비루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마도 어원을 잘 따져 들어가 보면 히브리인이라는 말의 모태가 될 것입니다.

이들은 고대 이집트에서 홍해를 건너고 요단강을 건넜던 사람들입니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간다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고대 메소포타미아 갈대아 우르에서 유브라데스라는 큰 강을 건넌 사람들입니다.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성을 공략할 때 만났던 한 여인이 있습니다. 정탐꾼들을 숨겨줬던 기생 라합이죠.

사실 기생이라는 말 보다는 몸을 파는 여인 창녀라고 말해야 더 어울릴 법한 사람입니다.

그 여인은 온 민족이 멸망하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소망을 가졌습니다.

단지 그 이유로,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 성을 점령하고 가나안 땅을 차지한 후 라합은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족보에 당당히 이름을 올립니다.

 

그런데 성경 어디에서고 그녀가 기생이었던 배경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단지 그녀가 소망을 가지고 결단을 한 이후에 어떻게 바뀌었는지에 관심을 둘 따름입니다.

이것이 성경이고, 우리가 믿는 신앙이고, 우리가 산 소망을 가지고 살 수 있는 이유입니다.

오늘부터 우리가 베드로전서를 묵상하며 공부합니다.

 

2천 년 기독교의 역사를 보면 지금까지 존재하는 것 자체가 불가사이한 일입니다.

만일 소망이 없었다면, 우리가 믿는 복음이 참 소망이 아니었다면, 지금 우리는 이 자리에 크리스천 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A. D. 64년은 유명한 네로황제의 박해가 있던 해입니다. 그해 7월 로마의 중심가에 커다란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네로 황제가 시를 쓰기 위해 상상력을 발휘하려 방화를 했다고 합니다. 문제는 그 화제로 인해 성난 군중들의 항의가 시작되었고 희생양이 필요했던 네로는 방화의 주인공으로 크리스천들을 지목하게 됩니다.

줄줄이 잡혀온 크리스천들은 로마의 원형극장에 끌려가 여러 가지 형태로 참수를 당하게 됩니다. 그로 인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로마를 떠나 소아시아로 피신을 갑니다. 그리고 그 곳 바위 굴속에 들어가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수년 전 교인들과 함께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돌며 둘러보다 들렸던 카파도기아의 한 지하 도시가 있었습니다.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터키에는 여러 곳에 지하 도시가 있는 데 그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곳이 [데린쿠유]입니다. 기원전에 히타이트 인들이 살았던 흔적이 공존하는 그 곳은 박해를 피해 들어온 기독교인들로 인해 거대한 지하 도시가 건설 됩니다.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으나 대략 2-4만 명 정도가 살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현재 지하 20100m 아래까지 발굴이 되었지만 8층 까지만 개방되어 있습니다. 이곳에는 침실, 화장실, 주방 등의 주거시설은 물론 교회와 신학교 등의 시설이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습니다.

 

건강한 남자들만 동굴에서 나와 먹거리를 구하려 다녔으며 어린이와 여자들은 동굴에서 나오지 않고 살았다고 합니다.

지하로 내려가는 느낌은 아래로 빨려들어 가는 듯 했지만 답답한 것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완벽하게 환기 시설을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살 수 없는 환경에서 초기 크리스천들은 소망을 가지고 완벽하게 살아갔다는 증거입니다.

 

베드로전서가 쓰이고 사람들에게 전달되던 상황을 조금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들이 동굴 속에서, 그리고 다른 소아시아지역에 흩어져 살면서 느꼈을 감정, 그리고 삶의 상황들을 상상하며 베드로전서의 말씀을 접하게 된다면 좀 더 생생하게 말씀 속으로 들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1절과 2절의 인사를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여기에 분명하게 드러나는 신앙의 역설이 있습니다.

이들은 흩어진 나그네였지만,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었습니다.

가장 불확실한 인생을 사는 것 같지만 가장 확신에 찬 삶을 살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아니, 베드로는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을 보면서 그렇게 사는 것이 진정한 크리스천의 삶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죠.

환난과 핍박이 하나님의 택하심을 희석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산 소망을 이야기 할 수 있다!

베드로 전서가 쓰이던 때는 초대 교인들이 많은 박해와 어려움을 경험 하던 때입니다.

절망적인 상황이기에 더욱 소망이 필요했던 때, 그리고 그 소망을 붙들고 승리한 우리 믿음의 선배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가지는 소망이 무엇인지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죠. 오늘 가장 중요한 단어를 하나 꼽으라면 산 소망입니다.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유쾌한 사순절이라는 제목의 설교문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사순절이라는 말은 영어의 ‘lent’인데 이란 뜻의 고대 앵글로 색슨어 ‘lang’에서부터 유래했다고 합니다. 대개 이러한 언어는 계절과 관계가 있습니다. ‘사순이 지나면 봄이 옵니다. 모든 것이 얼어서 죽어 있던 것이 새롭게 생명력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입니다.

부활절의 의미 역시 동일합니다.

부활의 참된 의미는 죽음의 땅에서 생명이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순절 문화는 카톨릭 국가에서 카니발이라는 문화와 연관 지어 많이 거론됩니다. 사순절이 시작되기 전 사흘 혹은 일주일 동안 카니발’(carnival) 또는 사육제(謝肉祭)’라는 이름으로 신나게 먹고 마시고 노는 절기를 지키고 있습니다.

사순절이 되면 고기를 먹지 못하고 절제해야하기 때문에 고기를 뜻하는 ‘carne’없애다 혹은 멀리하다라는 뜻을 가진 ‘revare’라는 말이 합쳐진 고기여 안녕!’이라는 의미의 축제를 가지는 것이죠.

 

참 재미있죠?

제대로 슬퍼하기 위해 제대로 먹고 마시며 놀겠다는 말입니다.

슬퍼하기 위해 논다!

전통적인 기독교에서는 사순절 기간 동안 금욕하며 경건하게 지냅니다. 일체의 오락, 결혼식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유쾌한 사순절이란 어떤 의미일까요?

사순절 전에 신나게 노는 이유는 슬픔이 다가올 것을 알기 때문에 제대로 슬퍼하기 위해서 논다는 것이죠.

사순절이 되면 우리가 아는 것이 있습니다. 부활절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죠.

그러면 슬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에게 다가올 기쁨의 부활절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제대로 슬퍼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소망이라는 말과 또 계속해서 나오게 될 고난이라는 말을 연결해 봅시다.

소망과 고난이라는 말이 참 어울리지 않는데, 고난 가운데서 소망을 가지는 이유는 이미 결과를 알기 때문입니다.

 

유쾌하게 고난의 시간을 지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아는 것은 모든 고난을 이기신 주님을 알고 믿고 소망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것은 마지못해 겪으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시나요?

막다른 골목에서 어쩔 수 없이 지신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이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그 일을 통해 죽음 권세를 이기실 하나님 아버지를 굳게 믿었고, 그 일을 통해 구원을 이루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전서의 주제를 한 마디로 이야기한다면 소망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소망이 없다면 결코 이길 수 없는 일들에 대하여, 베드로서 기자는 소망을 가지고 이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한다면 지금 우리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 무엇이냐가 문제가 아니라 소망의 관점을 가지고 보느냐는 것이죠. 말씀을 시작하면서 소망을 가지고 절망을 이긴 한 사람의 이야기를 소개 합니다.

 

곽용 목사라는 분의 유쾌한 사순절이라는 설교에서 인용한 이야기 인데, 좋은 예화라 소개합니다.

2002년 미국의 신경과 의사들이 모이는 신경과학회 학술대회장 자리에서 의사도 아니고 의학자도 아닌 피아니스트 리온 플라이셔(Leon Fleisher)가 공로상을 받았습니다. 피아니스트가 신경과학회가 주는 공로상을 받는 일은 결코 흔한 일이 아닙니다.

 

그 사정은 이렇습니다. 플라이셔는 여덟 살 때 연주회를 가졌던 천재적인 피아니스트였습니다. 그는 1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천재 피아니스트란 말을 들었고, 열여섯 살의 나이에 뉴욕 필과 협연을 했으며, 열일곱 살에 카네기 홀에서 독주회를 가졌을 정도로 앞날이 창창했습니다. 30대 초반 젊은 나이에 짙은 구름이 드리워졌습니다. 오른손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는 결국 서른여섯 살에 음악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날짜를 한 세기 전으로 돌려보겠습니다. 난해하기로 유명한 분석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에게는 모차르트가 다시 살아온 것 같다는 찬사를 들었던 피아니스트 파울 비트겐슈타인이란 형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분석철학의 천재요 다른 한 사람은 음악의 천재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천재의 생이란 것이 순탄할 수만은 없는 법인지, 그는 1차 대전에 참전했다 부상당해 오른손을 잘라내야 했습니다. 오른손이 없는 피아니스트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피아니스트로서의 그의 생은 끝장났던 것입니다. 그 자신뿐 아니라 세상이 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는 10여 년 동안 방황했지만 운명에 굴복하지 않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는 아는 작곡가들을 찾아다니며 자신을 위해서 왼손만으로 칠 수 있는 피아노곡을 작곡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의 청에 응해 왼손만으로 연주할 수 있는 피아노곡을 작곡해준 작곡가는 모리스 라벨이었습니다.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 D장조가 바로 그 곡입니다.

이 연주가 성공하자 그 이후로 많은 작곡가들이 그를 위해 왼손만을 위한 곡들을 만들어주었고 두 손이 다 있는 연주가들도 왼손만으로 그 곡들을 연주하게 됐습니다.

한 손만으로 연주하는 피아노곡이 무려 1천곡이나 된다고 합니다. 이 모든 일들이 파울 비트겐슈타인에게서 비롯된 일입니다.

 

다시 플라이셔 얘기로 돌아오겠습니다. 그도 비트겐슈타인처럼 두 손으로 연주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라는 결론을 내리고 다시 음악세계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지휘자로 컴백했고 나중에는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피아노 교수로 활동했습니다.

 

그리고 발전된 의학의 도움을 받아 1995년에는 드디어 오른손으로도 피아노를 칠 수 있게 됐습니다. 그래서 낸 음반이 <두 손 Two Hands>이란 제목의 음반입니다. 그는 열심히 연주활동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신경계통의 병을 세상에 올바르게 인식시키는 홍보대사 역할도 열심히 했습니다. 신경과학회 공로상은 이 활동 때문에 받았던 것입니다.

 

비트겐슈타인과 플라이셔는 모두 피아니스트에게 생명과 같은 손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정작 피아니스트의 진정한 생명은 손이 아님을 보여줬습니다. 피아니스트의 진정한 생명은 가슴 속에 들어 있는 음악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그것만이 음악인의 진정한 생명이었던 것입니다. 이 생명 덕분에 그들은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생명이 살아 있는 한 그들은 피아노 앞에 앉지 못해도 피아니스트였습니다.

 

다시 한 번 3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산 소망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을 그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찬송할 수 있습니다. 산 소망의 이유는 그의 많으신 긍휼’ (his great mercy)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그 일이 우리에게 산 소망’ (living hope)이 되었습니다.

 

소망이 일회적이거나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에게 생생하게 살아 역사하는 그런 소망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소망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아니 소망을 붙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전체를 묵상하다 보면 기쁨과 감사, 기대와 축복의 메시지가 많은 것 같습니다. 환난가운데서 고백한 것이기에 더욱 값지고 진주처럼 빛나는 것 같습니다.

 

그의 많으신 긍휼이 우리들의 인생을 바꾸어 놓습니다. 상황이 우리를 좌지우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우리 인생을 바꾸어 놓기 때문에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산 소망에 대한 믿음의 고백은 베드로가 경험했던 한 사건과 관계가 있지 않을까요?

그가 예수님을 처음 만나던 때가 바로 소망을 잃었던 때입니다. 밤새도록 그물질을 했으나 아무것도 잡은 것이 없을 때, 주님이 다가오셨습니다.

 

깊은 곳에 그물을 던져라그 명령이 그의 삶에 소망이 되었습니다. 어두운 새벽 소망되시는 주님을 만나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라갔던 그의 인생 경험이 있었습니다.

3절 말씀의 산 소망이라는 말 앞에는 거듭나게 하사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거듭남이 무엇인가요? 그리고 옛 것이란 무엇인가요?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22-24에서 유혹의 욕심을 따르는 것에서부터 벗어나는 것이라고 말하죠. 거듭남이란 성령으로 심령이 새롭게 되는 것이고 그 다음은 성령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묵상 나눔을 가졌던 한 권사님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김병동 권사 나눔)

어느 날 교회에서 아주 친했던 권사님이 말기 암에 걸렸다는 소식이 내게 들렸다. 나 또한 그 소식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전화를 걸어 보았으나 받지 않았다. 몇 번 시도 끝에 통화 할 수 있어 나도 절망 가운데 있었던 시간을 이야기 해 주었다.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은 병이 아니라 그 병으로 말미암아 소망을 잃어버리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고 그리고 그에게 주님이 내게 주신 말씀 세 가지를 적어 보내 주었다. 이것이 그 내용이다.

 

권사님! 3가지 마음가짐과 3가지 말씀을 기억하십시오.(병보다도 더 무서운 세 놈이 찾아올 거예요)

1.실망이 찾아 올 겁니다. 절망하지 말고 이 병을 통해 하나님이 내게 하시고자 하는 뜻을 묻고 답을 구하십시오(29:11~13)

2.두려움이 찾아 올 겁니다. 그러나 두려움을 물리쳐야 해요.(요일4:18) 이것을 반드시 사랑으로 승화시켜야 합니다.

3.기쁨이 사라지려고 할 거예요. (살전5:16~18) 먼저 감사를 찾고 기쁨을 회복하면 됩니다.

 

권사님은 암이라는 중병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이런 것을 회복하는 싸움을 시작한 것입니다.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것이라 믿어요. 당신을 믿음의 형제로써 사랑하고 또 존경합니다. 당신 곁에는 많은 기도의 동역자들이 있습니다. 잊지 마세요. 당신을 위해 기도하는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이 있고, 만나의 기도팀이 있습니다. 우린 반드시 승리 할 것입니다.”

 

몇 년이 지난 그는 이제 그 어려운 항암치료 과정을 모두 이겨내고 주님과 함께 행복한 인생을 새롭게 살아가고 있다. 그가 이길 수 있었던 것은 말씀을 통해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라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기에 은혜가 은혜로 암 흔적 대신에 남게 된 것이다. 이제 그와 나에게 준 이 은혜의 흔적이 그리스도의 거룩한 삶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산 소망으로서의 작은 불씨가 되어 줄 것이다.

 

산 소망을 가진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 소망을 가진 이들이 왜 그리 담대할까요? 어떻게 그렇게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을까요? 6절 말씀을 보세요.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 도다

 

이 땅위에 나그네로 살아가지만 산 소망을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어떠한가요?

아마 베드로전서 강해를 하는 내내 비슷한 말씀들을 많이 접하게 될 텐데, 고난과 시험가운데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6절에서는 특별히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날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어 성경에는 이 부분을 ‘all kinds of trials’이라 쓰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만날 수 있는 온갖 종류의 시험입니다.

 

참 이해하기 힘든 것이 무엇이냐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이 땅위에 나그네의 삶을 살게 하셨는데 왜 고난을 만나게 하시느냐는 것입니다.

언젠가 박관태 선교사님이 말씀을 전하며,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대학교수와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말씀에 의지해 몽골에 선교사로 갔을 때 꽃 길이 열리리라고 생각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생각할 수 없는 온갖 시험을 만나며 깨닫게 된 것이 있는데, 그 온갖 시험 가운데 가장 친밀하게 하나님을 느끼고 연합할 수 있는 길로 인도하셨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기대대로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을 붙드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났더니 근심을 내려놓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그렇게 무겁게 생각하던 것들이 무거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고 말입니다.

마태복음 1130절에서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 .”라는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베드로는 이 부분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온갖 종류의 시험을 만나는 것은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근심이 됩니다. 하지만 잠깐 근심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보호하기 때문에 오히려 크게 기뻐합니다.’ (greatly rejoice) -

왜냐하면 확실한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7절 말씀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않습니까?

 

-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 (7)

 

사도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인들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습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8:18)

 

아마도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다 이런 생각과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결국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고난을 이기지 못하는 것,

우리 앞에 다가오는 시련에 연단되지 못하고 포기하는 이유는 바로 이 믿음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 말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시험 자체를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험이 기뻐서 일부러 시험을 찾아다닌다는 것이 아닙니다. 시험은 모두에게 힘든 것입니다. 그런데 그 힘든 시험을 이길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는 것은 그 시험을 이길 수 있는 길을 우리들에게 반드시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기는 시험을 구원의 과정속에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4-5절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여기에 시험 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는 산 소망을 가진 사람들의 근본적인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5.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첫째는,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가며 하늘에 속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는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는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시험을 당해고 고난을 당하는 다는 것이 무슨 말일까요?

시험이란 우리의 욕망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욕망이 없다면 시험도 없을 것입니다. ‘고난이란 우리가 피하고 싶어 하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죠. 무섭거나 피해야 하는 일들이 없다면 고난도 없을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우리가 구하는 것들이 세상적인 것일 때, 욕망의 시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고난당할 때 힘들어 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썩어질 것이고, 영원하지 않은 것이라는 것을 안다면 그렇게 안달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잘 포장하고 있지만, 직장에서 잘되고, 돈을 잘 벌고, 자식들이 성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 자체가 얼마나 거짓되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하는 문제들을 가지고 안달하고, 그 기대들이 채워지지 않으면 힘들어 하는 것이죠.

이 말씀을 가지고 묵상한 문지윤 권사는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우선 땅의 것이 충족되어야 하늘의 것을 바랄 수 있다는 생각이 내게 있음을 본다. 이 땅을 살아가지만, 그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의 법을 따르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 같다. 이 땅에서 좀 더 자유 하여야 하나님 나라에 속할 것 같다.”

 

아들이 5개월간 준비하던 영재고 시험 발표가 있기 전날이었다. 남편은 내일 발표이니 붙어도 파티를 하고, 떨어져도 파티를 하자고 했다. 남편이 신앙을 가지면서 더 삶에 여유로운 모습을 가진 것을 보게 되어 사실 놀랐고 감사했다. 준비한 기간도 짧았고, 시험 한 달 전부터 몸이 많이 아파 컨디션을 잘 조절하지 못했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어 혹시 떨어질지 모른다고 생각은 했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2차 시험을 치른 영재고에서 아들을 인터뷰하러 직접 중학교에 오는 일이 있어 내심 기대도 하고 있었다.

 

결과는 실패였다.

발표된 날 우리는 멋진 중식당에서 파티를 하였고, 딸은 하나님이 오빠에게 다른 더 좋은 길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오빠를 위로해 주었다. 우리는 아들에게 그 동안 수고했고, 또 다른 길을 예비하심을 기대하자고 말해 주었다. 아들은 짧은 기간 준비하였지만, 면접관이 학교에 보러 오는 영광을 누린 것으로 감사했고, 앞으로 나아갈 것을 좀 생각하는 모습이다.

 

합격을 위해 달려왔지만, 그 보다 더 큰 것에 가치를 두었기에 떨어진 것에 연연해하지 않고 오히려 또 다른 길을 기대하고 온 가족이 격려해주는 시간은, 오직 합격을 목표로 수년간 준비해 오다 불합격되어 아이도 엄마도 정신과 치료를 받는다고 하는 경우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집에서 부담주지 않는 분위기이니 아들도 빨리 회복하는 것 같고, 집안 분위기는 이상하게도 발표 전보다 오히려 더 좋은 것 같아 감사했다.

이 땅을 살아가면서 최선을 다하되 그 가치는 하늘에 두어야 함을 보았고 경험하였고, 감사하게 된 기회였다.

 

이것이 솔직한 고백이 아닐까요?

우리의 가치가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이 좌우 된다는 것 말입니다.

 

둘째는, 사실은 조금 싱거운 이야기입니다. 이미 우리가 보증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5.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아마도 공감하실 텐데, TV를 시청하면서 가장 맥 빠지는 것 중에 하나가 운동경기를 재방송으로 보는 것입니다. 아무리 무시무시한 상대라 해도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보니까.

“. . .받았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고 있습니다.

 

보호하심을 받았다는 말의 헬라어 프루루메누스는 본래 군사적인 용어로 쓰였습니다. , 이 세상에서 순례자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을 공격하는 사단을 막아주시며 보호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믿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쓰인 프루레오는 수동태 현재분사입니다.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계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죠.

우리는 기도하면서 믿습니다!’라는 말을 합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우리의 입술로 하는 기도가 아니라 믿을 만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믿을 만한 사람, 믿음이 있는 사람, 계속적인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사람이 바로 이 땅에 사는 나그네입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이 있는 나그네라는 것이죠. 나그네가 가야할 곳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정처 없는 나그네, 그가 가야할 곳이 분명하다면 순례자입니다.

산 소망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8-9절 말씀이 중요합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 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말씀을 보니 세 가지로 정리가 됩니다.

1. 보지 못하지만 사랑합니다.

2. 보지 못하지만 믿습니다.

3. 그래서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가득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결과가 있습니다.

결국 영혼이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며 로마서 53-5절의 말씀이 오버랩 됩니다.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베드로는 당시 고난당하는 성도들을 향해 쓰고 있지만, 사도바울은 자신이 고난을 당하며 깨닫게 된 신앙의 진리를 전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다시 3절로 돌아갑니다. 산 소망이 있기 때문에 찬송하며 살아갑니다.

모든 종류의 고난이 찾아오지만 잠시 근심할 뿐 찬송하며 이 길을 갑니다.

 

어떤 의사 선생님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자신은 진료를 하면서 약으로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나으리라는 소망을 가지고 병을 고친다고 말입니다.

그 분의 경험에 의하면 불치병 환자가 병명을 모르고 올 때는 혼자 걸어서 오는데, 병명을 알고 나면 힘이 없어 혼자 걸어서 나가지 못한다고,

반면에 불치병이 걸렸다고 생각하고 혼자 걸어오지 못하던 환자가, 자신의 병이 별것 아니라는 것을 아는 순간 걸어 나갈 뿐 아니라 며칠이 걸리지 않아 병이 낫는 것도 보았다고 말입니다.

산 소망을 붙들면 우리 나그네 길을 잘 갈 수 있습니다.

장차 우리에게 올 소망을 붙들면 온갖 고난 가운데서도 찬송할 수 있습니다.

 

이 고난 가운데 믿음으로 승리한 사람들을 베드로는 금보다 더 귀하다고 하죠. 7절 말씀.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세상은 금이 귀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연단을 이겨낸 그리스도인들은 그 금보다 더 귀한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없어질 금이 아니라, 영원한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연단이 무엇인가요?

계속해서 두드려 맞는 것입니다. 세상의 권력과 싸우고, 세상의 악과 싸우고, 세상의 가치관과 싸우며 계속해서 두드려 맞아 너덜너덜 해진 사람들입니다.

마지막 심판 때가 되면 금은 사라져버리지만, 이 모든 연단을 이긴 성도들은 영광된 나라에 참예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다시 한 번 8-9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 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산 소망을 가진 사람들의 승리의 노래입니다. 기쁨의 찬가입니다.

지금 베드로가 편지를 쓰고 있는 대상들 중에 대부분이 예수님을 보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랑으로 인해 모든 고난을 견뎌낸 자들입니다.

우리에게 이 믿음이 없다면 이 세상에서 치열하게 살 수 없습니다.

고난 가운데 기뻐할 수 없습니다.

세상을 향해 담대할 수 없습니다.

 

 

admin

 

 

 

성공이라는 우상! /벧전1:8-9/ 김병삼 목사

2016-03-21 17:19:11

 

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남겼던 적이 있습니다.

 

지난주 같은 지역에서 목회를 하며 교제하는 창조교회 홍기영 목사님으로부터 책을 선물 받았습니다. [, 더 가까이] 1년간 안식년을 마치고 온 목사님의 신앙고백이 들어있는 책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함을 위해 고뇌한 흔적이 있는 책.

 

이런 소제목이 있더군요. "주님이 주님인가?"이런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만약 램프의 요정 지니가 실제로 존재하고 내 앞에 있다면 지니에게 소원을 빌겠는가? 주님께 기도하겠는가?"물론 우리는 주님이라고 대답할 겁니다.

 

그런데 지니에게 마음이 흔들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 지니는 비비면 나오지만, 주님은 간절히 기도해도 침묵하시는 경험을 하기 때문.

 

, 지니에게는 세 가지 소원을 잘 말하면 되지만, 주님에게 소원을 말하는 순간 내 소원에 문제가 없는지 고민하게 한다.

 

, 결정적인 차이점은 지니는 소원을 들어주고 램프 속으로 들어가지만, 주님은 나와 같이 살고자 한다는 것.지니에 비하면 주님은 참 부담스러운 분이십니다.

주님께로 더 가까이 간다는 것은 기도의 응답을 받고 그분을 영접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주님은 '지니'인가 '주님'인가? 조용히 묵상하는 새벽입니다. 내 소원은 주님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내 목회에서 주님은 나의 주님이신지.

 

친밀함인가? 성공인가?

 

신앙인들, 특히 하나님의 일을 꿈꾸는 자들에게 찾아오는 치명적인 유혹이 있습니다. ‘성공이라는 것이죠. 성공이 왜 복음과 배치되는가요? 복음이 하나님의 역사라면 성공은 자기 일을 자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짜 복음적인 사람이 된다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겉으로 나타나는 표적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친밀함을 기뻐하는 것이죠.

 

우리는 종종 밖으로 나타나는 증거를 기적이라는 이름으로 바랄 때가 많습니다. 성령의 불을 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성령의 불이 그리 오래가지 못합니다. 어떤 증거도 주님과 함께 거하는 것 없이 지속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본문에 나와 있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는가?”하는 것이죠. 현상이 아닌 친밀함이란 무엇일까요?

 

교회에서 종종 볼 수 있는 것 중의 하나가 정말 간절하게 기도하는 성도입니다. “주님, 저를 좀 만나주세요. 간절히 구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들이 좌절을 느낍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과 관계없는 사람이라면 그런 간절함이 생기겠습니까? 이 복잡한 세상 가운데서 그렇게 눈물을 흘리겠습니까? 사실은 그분 안에서 관계가 시작된 것이죠. 단지 그 안에 어떤 현상을 보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친밀함이란 이러한 현상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어떤 기적보다도 소중한 것이 관계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찬송이 있습니다.

 

저 장미꽃 위에 이슬”(찬송가 442)

저 장미꽃 위에 이슬 아직 맺혀 있는 그 때에

귀에 은은히 소리 들리니 주 음성 분명하다.

주님 나와 동행을 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그 청아한 주의 음성 우는 새도 잠잠케 한다.

내게 들리던 주의 음성이 늘 귀에 쟁쟁하다.

주님 나와 동행을 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밤 깊도록 동산 안에 주와 함께 있으려 하나

괴론 세상에 할 일 많아서 날 가라 명하신다.

주님 나와 동행을 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어떤 황홀한 체험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가장 친밀한 기쁨이 이 찬양 가운데 존재합니다.

 

팡세를 쓴 파스칼은 성령의 불을 체험하고 난 후에 그 일이 너무 귀해서 불이야!’라고 적은 천을 옷에 꿰매 놓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의 전기를 보면 성령의 불을 체험하고 난 후에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그게 전부였다. 다음 날 아침에는 죄를 지을 만큼 충분히 회복되었다.”

 

우리가 늘 궁금해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태도가 있습니다. 홍해를 건너고 마라의 쓴물이 단물로 변하는 기적을 체험하고도 어쩌면 저렇게 바뀌지 않을 수 있을까? 기적이 사람을 바꾸지 못합니다.

아무리 기적을 체험해도 고난이 다가오면 여전히 하나님을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면서 무엇을 생각하시나요?

 

어떤 목사님의 책에 이런 예화가 있더군요.

 

어떤 사람이 남산 타워 꼭대기에 올라가서 보니까 인천 앞바다가 보이고, 갑자기 그곳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하지만 아무리 가고 싶어도 순간 이동을 할 수는 없습니다. 타워를 내려와서 서울 시내를 거처 인천 앞바다까지 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신앙의 성공을 꿈꿉니다. 한 번에 뭔가를 해보고, 뭔가가 되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지 못하면 실패했다고 생각합니다.

 

복음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성공 여부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즐거움을 아는 것이 진정한 성공입니다.

 

우상숭배는 하나님을 기다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상숭배는 하나님 이외의 것에서 만족을 찾으려는 노력입니다.

현대인들에게 가장 무서운 우상 중의 하나가 빠름 중독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출애굽기 32장에는 애굽에서 400여 년간의 종살이를 마치고 막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을 만드는 장면이 나오고 있습니다. 비록 광야였지만, 앞으로 이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살려는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는 동안 백성 사이에 불만이 터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빠르게 일이 진행되지 않았던 것이죠. 그들의 지도자였던 모세가 40일 시내산에서 머무는 동안 그들의 초조함은 극에 달하고 맙니다.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백성이 아론에게 이르러 말하되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32:1)

 

사람들의 마음을 요동치게 한 것은 그들이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그들만의 이야기일까요? 우리 중에 기다림을 좋아하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우리는 ‘instant’‘fast’의 문화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빨리빨리가야 하는 세상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마음속에는 빠를수록 좋은 것이고, 쉬울수록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 사로잡고 있는지 모릅니다.

 

기다림을 싫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기다리는 것이 무기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어쨌든 이스라엘 백성이 그 오랜 종살이에서 자유를 얻고, 홍해를 건너, 마라의 쓴물을 단물로 바꾸시는 기적을 체험하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지 3개월 만에 우상을 만들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출애굽기 322~4절을 보세요.

 

아론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의 아내와 자녀의 귀에서 금 고리를 빼어 내게로 가져오라 모든 백성이 그 귀에서 금 고리를 빼어 아론에게로 가져가매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금 고리를 받아 부어서 조각칼로 새겨 금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하는지라.”

 

시내산에서 내려온 모세는 이 광경을 보고 불같이 화를 냅니다.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십계명 중에 1계명이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는 계명이었죠.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에게 다른 신들을 예배하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실 수 있는 것을 다른 어떤 존재가 줄 수 있다고 기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완벽한 결혼생활을 꿈꾸며, 완벽한 자녀와 완벽한 가정을 꿈꿉니다. 하지만 이 꿈이 깨어질 때 가정도 깨어집니다. 왜냐하면, 그 어떤 것도 채워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의 기대는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빼내 갈 뿐입니다.

 

더 깊은 갈증과 고통 속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끊임없이 부르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거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1:28-30)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

 

우리에게 우상이 있는가?’ 사실 이 질문은 많이 잘못되어 있습니다. 우리 마음은 이미 우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진짜 질문은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의 가장 큰 경쟁자는 무엇인지 보아야 합니다.

 

*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존재라고 하면서도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보이는 내 모습을 신경 쓰고 있는 나.

* 하나님의 사역을 하고 있다고 하면서도 끊임없이 나의 업적에 목말라 있는 나.

* 가까운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면서도 남들의 요구에 거절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나.

* 아내와 남편을 사랑해야 하는 데도, 그것을 가로막고 힘들게 하는 그 무엇.

 

결국, 우리가 우선순위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로막는 것의 정체를 알아야 합니다. 어쩌면 이것을 아는 순간 우리의 삶에 조금 과격한 결단을 내려야 할지 모릅니다.

 

성공이 왜 우상인가요? 그동안 우리가 배워온 것 역시 성공하라는 것 아니었나요? 성공이 우상인 것은 절대로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만족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공에 중독되면 계속해서 더 많은 것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거짓말하고, 남을 속이고, 모함하고, 피해를 주는 일조차 서슴지 않고 합니다.

 

교회를 위해서라고 말하지만,

가정을 위해서라고 말하지만,

나라를 위해서라고 말하지만,

 

자신만 모를 뿐이지 지켜보는 모든 사람은 다 알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인 열망에 도취해 있는지를 말입니다.

 

중독의 증상은 자신이 제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중독자는 늘 중독 증상에 목말라하며, 무슨 수를 써서라도 중독의 열망을 채우려고 하지요.

 

성공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성공에 중독되어 삶의 우상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유명한 팝 가수 마돈나는 자신에게 찾아온 성공의 유혹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강철 같은 의지를 갖고 있다. 무엇인가가 부족하다는 끔찍한 공포를 이겨내기 위해 언제나 내 모든 의지를 쏟아 부었다. 그 순간을 한 차례 넘기고 나면 내가 특별한 사람임을 깨닫지만, 그런 다음 또 다른 무대에 서면 내가 평범하고 시시한 사람이 된 것 같다.

 

이런 일이 반복되고 또 반복된다. 평범해질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공포심이 내 인생을 움직이는 힘이다. 언제나 그 공포가 나를 몰아붙이고 또 몰아붙인다.

 

이미 대단한 사람이 되었건만 여전히 나는 대단한 사람임을 증명해 보여야 한다. 이런 나의 투쟁은 끝난 적이 없고 앞으로도 절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성공이라는 우상에 휩싸이는 순간 잠시의 휴식도 공포의 순간이 되어 버립니다. 왜냐하면, 누군가에게 성공이 잊힐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성공을 따라가는 순간 하나님과의 친밀함의 관계가 깨어집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여겨지던 것이 어느 순간 자신의 힘으로 증명해 보아야 하는 것으로 변해버립니다. 성공이라는 우상에 사로잡히면 자꾸 외부에서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으려 합니다.

 

그러나 남의 평가에 좌우되기 시작하면 늘 부족함을 느끼게 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가 채울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전도서 210~11절에 보면 우리가 잘 아는 솔로몬의 고백이 있습니다.

 

10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11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몫이로다. 그 후에 내가 생각해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

 

솔로몬은 성공을 향해 달려가면 갈수록,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던 것이죠. 그가 많은 것을 얻으면 얻을수록 헛되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무리 채워도 채어지지 않는 공허함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성공이라는 우상에 사로잡히면 소중한 관계들을 희생하게 됩니다.

 

물론 개인적인 감정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일이라고 변명할지 모르지만, 끊임없이 성공을 향해 달려가며 다른 사람을 희생합니다.

어쩌면 성공이라는 우상에 사로잡히는 순간 그렇게 믿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라도 깨어진 관계는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성공이라는 우상에 사로잡힐 때 나타나는 또 다른 현상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인정에 목을 맨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일을 했어도 다른 사람이 인정하지 않으면 공허해진다는 것이죠.

 

이 우상에 사로잡히면 자기 일을 마치 자신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에게서 일이 전부가 됩니다. 누군가 자기 일을 비난하거나 인정하지 않으면 자신을 버리거나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평생을 일했던 직장에서 쫓겨나는 순간에 힘들지만, 목숨을 버리는 사람들, 누군가에게 버림을 받으며 자신을 포기하는 사람들, 자신 스스로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를 생각하지 못하게 되죠.

 

이건 목회자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인데, 목회하는 교회에서 아무리 성도가 늘어나도 결코 만족스러워하지 못하게 되는 현상입니다.

 

언제부터인가 목회의 목적이 그리스도께 사람을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고 자신이 세워놓은 기록을 넘어서려고 발버둥을 치는 것이죠.

이 사람의 목표는 늘 한 단계더 높이 올라가는 것이죠. 그래서 끊임없이 만족이 없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렇게 성공이라는 우상에 사로잡히면, 항상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성공을 기뻐하지 못하죠. 오히려 다른 사람의 단점을 드러내고 비웃는 사이에 자신이 더 나은 사람이라는 기분이 들게 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그 사람을 비웃으며 그 사람에 대하여 은근히 질투를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남을 비난하며 은근히 자신을 부풀리고 있지는 않았는지 말입니다.

 

지난 8월에 우리는 한 청년의 몰락을 보았습니다.

 

[스펙보다 열정]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전교 꼴찌에서 삼성맨까지라는 주제로 20대 멘토로 강연을 다니던 사람이죠. 실업계 출신으로 대불대 입학 후 두 번의 편입을 거쳐 연세대에 입학합니다.

 

이후 2010년 김원기는 실업계 고교에서 꼴찌였던 내가 4학년이 되기도 전에 삼성 SDS에 특채됐다.”라고 자신을 홍보하며 전국을 돌며 강의를 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20126스펙보다 열정이다라는 제목의 자서전을 출간했죠.

 

하지만 그의 거짓말은 자서전 출간 보름 만에 거짓으로 드러났습니다. 삼성 SDS가 출판사에 그런 사람이 입사한 적 없다고 항의했기 때문입니다. 출판사는 책을 전량 회수했고, 김원기는 출판사에 손해 배상금 2000만 원을 물어줬습니다.

 

그는 이력에 연세대 MBA(졸업)도 추가했는데, 연세대는 말도 안 되는 거짓말로, 그리고 학사경고 3회 누적으로 김원기를 제적했습니다. 그는 조선일보와의 통화에서 성공하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고 밝혔습니다.

 

우리는 성공에 목을 맨 사람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실 학력위조, 논문위조 등이 그런 맥락이 아닐까요?

 

그런 생각을 해보셨나요?

우리가 이루어 놓은 성공이 최악의 실패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마태복음 1626절에서 예수님은, “사람이 말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우리 삶의 가치는 자신이 세상에서 성취한 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정체성에서 시작된다는 것 말입니다.

 

우리 자신은 우리가 이루어 놓은 일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능 그 이상의 존재입니다.

 

남의 말에 의해 좌우되는 그런 존재 이상의 것입니다.

우리의 명함에 새겨진 직책 그 이상의 존재입니다.

우리가 사는 집의 크기 그 이상의 존재입니다.

 

시편 13914절에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이 말씀을 묵상하며 적었던 글이 있습니다.

숨겨짐

 

오늘 새벽 오대원 목사님의 [지금은 엘리야 때처럼]이라는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어쩌면 성공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

숨겨짐’, ‘잊혀짐이 얼마나 필요한 것임을 알려주는 구절이 있네요.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사역 중에 한동안 우리를 '숨기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종종 회피한다. 그래서 때로 소진되기도 하고, 하나님과 다른 동역자들과 소원해진 느낌을 받기도 하며, 우리에게 적대적인 세상을 섬기는 데 필요한 힘과 용기를 잃기도 한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들은 특징이 있습니다.

 

예외 없이 숨겨지는 시간이 있었다는 것이죠. 숨겨짐은 늘 보내시기 위한 준비의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성공에 목마른 사람들은 숨겨짐의 시간을 견디기 힘들어합니다. 아무에게도 드러나지 않는 시간 때문에 사역에 뒤처지고 잊혀가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숨기실 때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숨겨진 시간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함께하시고 일하십니다. 단지 내가 하지 않을 뿐이죠.

 

오늘 새벽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늘 하나님의 일을 꿈꾸면서도 '숨겨짐'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누군가에게 나를 증명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오히려 초라하게 느껴집니다. 나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보다 하나님의 임재를 더 강하게 경험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숨겨짐'은 곧 하나님의 '보내심'으로 이어집니다.

숨겨진 시간 때문에 나의 일이 아닌 하나님의 일이 시작되는 것이죠.

 

숨겨지는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면.

숨겨짐에 하나님의 돌보심을 경험할 수 있다면.

잊혀짐에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역자들을 숨기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는, 우리로 하여금 해를 당하지 않도록 숨기시는 때가 있습니다. 혹은 곤경에서 우리를 위로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애굽에서 요셉을 13년간 숨기셨던 이유도 그런 것이 아닐까요?

 

우리의 자격과 인격이 아직 갖추어지지 않았을 때, 숨겨져 있는 시간을 통하여 훈련을 받는 것이죠. 어쩌면 요셉에게 있어서 그 시간이 그로 하여금 정치적 안목도, 관대함과 용서, 그리고 지혜를 배우는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무너뜨릴 수 있는 과도한 인기나 지나친 분주함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숨기시기도 하십니다.

 

사람 앞에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와 회복을 위해서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시간에 그리고 그분과 함께 움직일 수 있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북한이나 미얀마처럼, 나라들을 숨기신다. 그리고 교회들을 숨기시되, 특히 교회를 핍박하는 나라에서 숨기신다.

교회들을 보호하여 준비시켜, 그 나라를 새롭게 하는 도구로 쓰기 위해 그렇게 하신다. 그리고 보통 그런 준비 기간이 길면 길수록, 하나님이 그 종들을 통해 행하시는 일은 더 크다.”

 

사역과 성공이 우상이 되어 버린 시대에, 우리를 숨기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본다는 것은 굉장한 신앙의 진보입니다. 아니, 축복입니다. 이것이 보이지 않는 사람은 지치게 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떠난 자기 일에 중독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대원 목사님의 고백입니다.

 

1986, 우리 가족이 25년 동안 섬기던 한국을 갑작스레 강제로 떠나게 되었을 때, 나는 이제 우리의 사역은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래전 우리가 선교 사역을 위임받았던 산장을 다시 찾아갔을 때,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사역을 위한 부으심을 받았던 그 산에 다시 올랐을 때, 하나님은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아들아, 네가 나의 사랑 안에서 쉬는 이곳, 나의 임재 안이 바로 너의 집이다. 너의 사역은 내 이름으로 위대한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처럼 너도 나를 사랑하고, 나의 영광을 위해 내가 너를 쓸 것을 신뢰하는 것이다.

 

너는 나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너를 보내어, 깨어지고 아파하는 세상을 섬기게 하면서 너를 통해 나의 일을 할 것이다.” 그 즉시 나는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하신 네가 나로 말미암아 열매를 얻으리라”(14:8)라는 말씀을 기억했다.

 

나는 내 우상이 되어 버렸던 사역을 강제로 그만두어야 했다. 당시 내가 하던 사역에서 나 자신을 분리했던 것은 나의 결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결정이었다. 나는 효율적인 사역의 비결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성공을 쫓아가는 것이 우상 숭배라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시는 일을 묵묵히 살아가는 것은 믿음입니다. 성공을 좇아가면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되지만, 하나님을 좇아가면 우리 사역에서 성공이 찾아오게 됩니다.

 

성공이라는 우상을 깨는 자가 성공합니다. 진정한 성공이란 그런 것입니다. 우상 숭배가 아닌 하나님과의 친밀감으로 일어나는 일 말입니다.

 

 

 

지금은 희망을 가져야 할 때 /벧전1:3-7/ 이동원목사

2014-12-01 20:46:33

 

한때 스페인 영에 속해 있던 리 스본 도시, 지금은 포르투갈의 수도 가 되어 있죠? 이 항구 도시에 해안 마지막 끝나는 곳에 큰 암석 바위가 하나 있었다고 합니다. 이 바위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쓰여져 있었다고 합니다. 이제는 끝입니다.

 

이 넘어 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제는 끝입니다. 이 넘어 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There is nothing behind. 이 넘어 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1492년에 한 사나이가 이 항 구에서 자그마한 배에 오르면서 제 일당의 무리들과 배를 타면서 이렇 게 외쳤습니다.

 

이 바위에 새겨진 글은 사실이 아닙니다. 여기는 끝이 아닙니다. 이 너머에는 위대한 희망 의 세계가 있습니다. 이 사나이 이 름이 크리스토퍼스 콜롬버스 라는 사람이었습니다.

 

15세기 말에 유럽 남부는 두 차례 걸친 커다란 지진을 겪었고 콜레라와 페스트가 휩쓸고 다니면서 유럽 사람들은 깊은 절망 속에 주저 앉았습니다.

그러나 이 때 절망을 거부하고 희망의 항해를 출범 시킨 사람이 바로 이 콜럼버스 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미 대륙을 신대륙을 발견할 수가 있 었습니다.

 

그보다 휠씬 오래 전에 A.D 647월 여름 어느날 저 로마 의 중심가에는 커다란 화재가 발생 했습니다. 잘 알려진 대로 저 유명 한 네로 황제가 저지른 방화였습니 다. 그는 불타는 로마의 도시를 바 라보면서 그는 광적으로 춤을 추면 서 시를 지어 노래 했습니다.

 

그러 나 이어서 성난 로마 군중들의 항의 가 시작되자 그에게는 희생양이 필 요했고 크리스챤들이 방화의 주인공 이라고 소문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따라서 줄줄이 그리스도인들이 잡혀 가 로마의 원형 경기장으로 끌려가 기 시작했습니다.

 

더러는 십자형에 서 참수를 당하기도 했고 더러는 야 생 동물의 밥으로 그들의 몸뚱이가 길길이 찢기어 죽임을 당했습니다. 대부분의 크리스챤들은 로마를 떠났 습니다.

그리고 소아시아를 찾아갔 습니다. 소아시아의 그 암열, 그 바 위 굴속에 들어가 피신해서 그들은 그들의 새로운 삶을 도모했습니다.

 

그러나 깊은 굴속으로 피신했던 그 들은 다시는 아마도 이 세상 구경을 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던 것입니 다. 바로 이때 흩어진 이 크리스챤 가운데 가장 지도자로 추앙을 받았 던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는 그들 에게 편지 한 장을 씁니다.

 

그것이 바로 베드로 전서 입니다. 베드로 전서 1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 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흩어진 나그네 이 도시들 가운데 보면 갑바 도기아 라는 지명이 있죠?

 

우리는 로마에 방문 하면서 로마의 카타콤 의 그 동굴을 보면서 놀라곤 합니 다. 그러나 여러분이 터키를 방문하 고 갑바도기아의 이 암굴 도시를 보신 분들은 로마의 카타콤은 문자 그대로 새발의 피라는 것을 발견하 게 될 것입니다.

 

이 도시 전체가 거 대한 바위의 굴로 만들어져 있습니 다. 거기서 바로 이 시대의 크리스 챤들이 네로 황제의 추적을 피해서 공동생활을 시작 했던 것으로 보여 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 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 네, 거기에다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 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 하노니 은혜와 평강 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 지어다 그의 편지는 계속됩니다, 오늘 본문은 이 렇게 시작합니다.

 

우리 3절을 다같 이 한번 읽겠어요. 3절 다같이 시 작!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 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 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 하심으로 말미암 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 3절에서 우리가 주 목할만한 한 단어는 산 소망이라는 단어입니다. 살아있는 소망. Living hope. 살아있는 희망이라는 단어입 니다.

 

다시 말하면 사도 베드로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흩어졌던 당시 의 크리스챤들에게 그들이 아직도 희망을 갖고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 고 설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금년에 마지막 주일을 맞이 합니다. 참 우울한 분위기 속에서 맞이 합니다.

 

아마도 한해의 마지막 주일 치고 금년처럼 우울한 주일은 다시 없을 것입니다. 절망과 낙심의 분위기가 이 땅을 덮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어딜 가나 누구를 만나나 요즘은 대화가 딱 하나 밖에 없어요. IMF소식입니 다.

 

춥고 우울한 민족 겨울의 이야 기 속에서 우리는 이 한해를 마무리 지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베 드로는 당시의 크리스챤들에게 편지 를 썼던 것처럼 오늘을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우리가 아직도 희 망을 갖고 살아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본문에서 선포합니다. 우리 가 희망을 갖고 살아야 할 그 이유 는 무엇 때문일까요?

 

 

첫째로 그 이유는 우리는 부활의 주님을 체험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믿으십니까? 우리는 부 활의 주님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일을 맞았습니다. 그 리고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이 주일 의 의미가 어디에 있어요?

 

우리가 주일, 이 날에 모여서 하나님을 경 배하는 뜻이 어디에 있습니까? 본래 전통적인 유대인들의 예배일은 안식 일 입니다. 안식일은 토요일입니다. 금요일 날 해가 질 때부터 토요일 날 해가 질 때까지 전통적인 유대인 들의 안식일이 였습니다.

 

그것은 지 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 은 아직도 토요일 날에 그들은 회당 을 찾아가는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 다. 아마도 이 세상에서 가장 보수 적이고 전통을 지키는 일에 철저한 민족이 있다면 유대 민족일 것입니 다.

 

그들은 이것이 끝까지 지켜야 할 가치가 있는 습관이라고 생각하 면 절대로 변경하지 않습니다. 아직 도 안식일은 토요일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견고한 유대인의 전통적인 아집을 깨뜨리고 토요일이 아닌 안 식일 다음날 안식 후 첫 날, 주일날 일단의 유대인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파격적인 날. 그들의 전통을 깨뜨리고 주일에 모이기 시작한 그 이유가 어디에 있 었습니까? 그것은 예수의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이날에 만났기 때 문입니다. 사실 십자가 사건 전후로 해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풍비박산이 되서 공동체는 완전히 와해된 상태 였습니다.

 

그들은 다 흩어졌어요. 드 디어 그들의 메시아 라고 믿었던 예 수가 십자가에 죽자 제자들은 모든 것을 사실상 포기했습니다. 체념했 습니다. 대부분의 제자들은 보따리 를 싸고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리고 다시는 악몽 같았던 예수와의 함께 했던 시간들은 잊어버리자고 그들은 약속한 듯 흩어져 갔어요. 흩어져간 제자들. 사라진 제자들. 체 념해 버린 제자들. 그런데 한순간 제자들은 다시 예루살렘에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목숨 을 걸고 복음을 증거하는 새로운 공 동체로 그들은 태어났습니다. 무엇 이 이 변화를 가져 다 주었습니까? 딱 하나밖에 없어요. 이 변화에 대 한 가능한 역사적 설명은 꼭 하나밖 에 없습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 을 만났습니다.

 

살아계신 주님을 만 났던 것입니다. 예수의 제자들의 흩 어질 때 이름 모를 예수의 두 제자 그들도 그들의 고향인 엠마오 라는 곳을 향해서 걸어가고 있었죠? 누가 복음 마지막 장의 스토리입니다. 슬 픈 기색을 띠고 그들은 낙심하면서 고향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두 제자도 발걸음을 돌이킵 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그 리고 복음을 위해서 그들의 생명을 바치는 제자로 새롭게 일어섭니다. 어떤 사건이 일어났습니까? 부활하 신 주님이 엠마오 길을 향하던 두 제자 곁에 다가오신 것입니다.

 

그러 나 그분이 부활하신 주님인 것을 몰 랐던 두 제자는 여전히 낯선 나그네 와 힘없는 무력한 그들의 절망을 고 백하는 대화를 계속합니다. 그러나 그분은 이 두 제자와 성경의 말씀을 나누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이 풀어 주신 말씀 예수님의 성경이야기를 들으면 어떨까요?

 

이 두 제자는 갑 자기 가슴이 뜨거워 졌죠. 그리고 자기들과 더불어 대화를 나누던 그 상대방 또 앉아서 식탁을, 자리에 앉아서 교제를 하던 바로 그분이 부 활하신 주님인 것을 바라보던 한 순 간 이 제자들의 모든 것이 변합니 다.

 

그들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 갑니다. 그리고 복음을 위해서 생명 을 던집니다. 이것이 부활의 공동체 인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의 시작 이 였던 것입니다. 지금도 오늘 우리는 이 주일에 모입니다. 왜 그렇습니 까?

 

우리는 살아계신 주님이 오늘도 우리의 예배의 자리에 성령으로 임 재 하신 것을 믿습니다. 우리와 함 께 하신 주님, 우리의 예배를 받으 시는 주님, 그리고 엠마오 길에 두 제자와 동행하시던 동일하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을 믿습니다.

 

그 주님을 만난다면 어떻게 될까요? 좀 달라지겠죠? 그런데 제가 가만히 보니까 그 주님을 만난 분들 같지가 않아요. . 무력한 모습이 예요. 너 무나. 저 유명한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이 개혁의 말기에 지쳤습니 다. 그래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 은 유혹을 받았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사실상 포기하고 자리에 누워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넋두리 처 럼 이제 모든 것은 끝났소. 끝났소. 라고 외쳤습니다. 그때 지혜로운 마 틴 루터의 아내가 어느날 상복을 입 고 방에 들어왔어요. 상복을 입고. 그러니까 루터가 깜짝 놀래 갖고 아 니 누가 죽었소? 하니까,

 

. 누가 죽었어요? 하나님이 돌아가셨습니 다. 아니 하나님이 돌아가시다니 무 슨 소리요. 루터의 아내는 정색을 하고 말하기릃 아니 하나님이 안 돌 아가셨으면 당신이 그렇게 누워있을 탓이 있겠소.

 

아 이 아내의 한 마디 가 루터를 흔들어 깨웠습니다.

그렇 지. 살아계시지. 벌떡 일어났어요. 그리고 그는 다시 그의 미션을 수행 하기 시작했습니다.

 

, 오늘 이 3절 의 메시지를 다시 읽어 보십시오.

왜 우리가 이 시대에 희망을 가져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성경은 어떻게 말합니까? 3절 다시 한 번 읽겠습니 까?

 

시작!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 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그 부활 하신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하셨습 니까? 거듭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순간 거듭납니다. 이 거 듭남은 일종의 우리의 부활 사건이 라고 할 수가 있어요. 다시 사신 주 님이 저와 여러분을 다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믿으십니까? 이것은 일종의 영적 부활이 예요. 다시 소 생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부활신 앙의 근겁니다. 그리고 거듭난 사람 들 안에 주께서는 오시사 부활하신 주님 성령으로 임재 하시사 우리 안 에 살아있는 희망을 주셨습니다. Living hope. 살아있는 희망을 주셨 습니다. 이 희망은 계속해서 우리를 새롭게 합니다.

 

우리에게 찾아오신 주님 우리를 다시 살리신 주님. 새 로운 인생관 새로운 세계관 새로운 소망 새로운 안목을 가지고 인생을 다시 살게 하신 부활하신 주님이 우 리의 삶 속에 찾아오셨습니다. 이 사실을 참으로 믿는 다면 참 우리가 이렇게 무력한 자리에 앉아 있을 이 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제가 미국에 있으면서 그 미국교회에 어느 날 청 년들의 연극을 본 일이 있습니다. 연극이 나사로의 , 나사로를 주제로 하는 연극이 였어요. 인상적인 한 대목을 잊을 수가 없는데 어떤 동네 사람이 부활한 나사로에게 이런 질 문을 던집니다.

 

당신이 죽었다가 살 아보니까 뭐가 달라졌습니까? 당신 에게 달라진 것이 뭡니까? 우리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면 뭐가 달 라질까요? 그런데 나사로가 이런 대 답을 해요. 나에게는 더 이상 두려 움이 없습니다. 이 두려움이라는 것 이 왜 생기 냐면 알지 못하는 대서 오지 않습니까?

 

미지의. 미지의 사 실. 모른다는 공폽니다. 죽어보지 못 했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 어요. 다시 산 나사로에게 두려움이 없었어요.

,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 신 그리스도 그분이 참으로 우리 안 에 오셨어요. 무엇보다도 달라져야 할 것은 우리 마음 속에 두려움을 극복하는 소망입니다.

 

소망. 우리가 자주 부르는 복음성가 가운데 보면 살아계신 주 뭐예요? 나의 참된 소 망. 저는 근데 이 복음성가의 그 가 사가 영어의 가사의 의미를 충분히 살렸다고는 생각 하지 않는데 후렴 에 보시면 아주 좋습니다.

 

Because He lives 그 분이 다시 사 셨기 때 문에 all fear is gone모든 두려움과 공포는 사라졌다. Because He lives 그 분이 다시 사 셨기 때문에 and life is worth living 삶은 살만한 가 치가 있는 것 그분이 다시 사 셨기 때문에 나는 나의 인생의 미래를 만 날 수가 있다.

 

I can face tomorrow. 나는 나의 인생의 미래를 만날 수가 있다. 여러분이 살아계신 주님을 만 나 내가 영적으로 거듭나 부활하신 주님을 내 안에 소유하고 그분과 더 불어 살아갈 수만 있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삶이 정황이 아무리 어둡다고 해도 절망 은 이른 것입니다.

 

우리는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 습니다. 주님 다시 사셨습니다. 그 분, 나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와 함 께 하십니다. 왜 무력한 자리에 계 십니까?

 

성경은 말하시기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능력 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 사 산 소망을 주셨습니다, 그 주님 을 찬양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희 망을 가지고 살아야 할 또 한 가지 의 이유가 있어요.

 

그것은 두 번째로 하늘나라의 영 원한 기업을 우리가 약속 받았기 때 문입니다. 하늘나라의 영원한 기업 을 약속 받았기 때문입니다. 아마 우리 시대에서 가장 우리 귀에 젖은 단어 하나가 있다면 기업이라는 단 어일 것입니다.

 

자고 일어나면 들어 오는 소리가 기업소리에요. 기업이 부도났다. 도산 됬다. 어저께는 또 보니까 뭐 불루힐도 무너졌다. 화의 신청이 들어왔다. 계속 기업 소릴 듣습니다. 사실 기업이라는 단어는 성경에도 아주 익숙한 단업니다.

 

이 것은 심지어 1세기 크리스챤들에게 도 아주 익숙한 단어였어요. 그들도 자기들의 기업이 무너지고 빼앗기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와 다 른 그들의 이 기업이 무너지는 현장 에서 그 기업 앞에서 무너져가는 기 업 앞에서 초대 크리스챤들이 드렸 던 놀라운 고백 하나를 여러분 읽어 보세요. 히브리서 10장을 한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한번 다 찾아보세 요. 저 유명한 히브리서 11. 믿음 의 장 직전 장인 히브리서 10장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서 10 34절의 말씀입니다. 같이 한번 읽어보실 까요? 히브리서 1034절 입니다.

 

다같이 시작!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 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그들의 산업이 무너지고 빼앗김을 당했습니 다.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우리하고 다른 것은 뭐예요? 산업을 빼앗길 때 어떻게 당했다고 했습니까? 기쁘 게 당한 것은, 그랬어요. 그들은 이 땅에서의 기업이 무너지고 빼앗김을 당하면서도 기쁘게 당할 수 있었던 이유가 어디에 있어요? 뭐라 그랬습 니까?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그들이 지상의 기업을 잃어버리면서도 결코 희망을 포기하 지 않았던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더 낫고 영구한 산 업, 빼앗기지 아니하는 기업 흔들릴 수 없는 기업 영원한 기업을 소유했 기 때문이다.

 

그것이 지상의 권한과 시련을 이기는 초대 크리스챤의 저 력이요 dynamic한 생동하는 믿음의 근거였던 것을 여기서 우리는 확인 할 수가 있습니다. 본문에서도 사도 베드로가 정확하게 같은 얘기를 합 니다. , 다시 베드로 전서 14절 의 말씀입니다.

 

, 베드로 전서 14절 본문을 한번 더 같이 읽겠습니 다. 시작!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 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 하신 것이라. , 하늘나라의 기업을 얘기하고 있어요. , 이 기업을 가 리켜서 어떤 기업이라고 설명했습니 까? 세 가지 특성을 말했는데 썩지 아니하는 기업, 영원한 기업입니다.

 

더럽힐 수 없는 기업, 이것은 거룩 한 기업입니다, 그다음에 쇠하지 아 니하는 기업 불멸의 기업. 그 영원 한 기업을 우리를 위해서 예비 하셨 다. 어디에? 하늘에 간직한 것이다.

빼앗길 수 없는 기업이 있어요. 다 빼앗겨도 결코 빼앗길 수 없는 영원 한 기업을 주께서 우리를 위해서 예 비하셨습니다. 믿으십니까?

 

, 이 소망의 기업을 어떻게 하나님이 보 장 하시는가. , 그 다음 절을 읽어 보세요. 5절입니다. 다같이 시작! 너 희가 말세에 나타나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이하여 믿음으로 말미 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이 기업만은 아무도 흔들 수가 없습니다.

 

부도 낼 수 없는 기 업. 빼앗길 수 없는 기업, 이 하늘의 영원한 기업은 무엇으로 보호하심을 입고 있다고요? 하나님 자신의 능력 으로 지키심을 받습니다. 이 기업이 영구히 존재하는 한 절망은 없습니 다.

 

저는 오늘 우리 이 시대야 말로 천국 소망을 회복할 때라고 생각해 요. 천국소망. 천국소망과 천국 신앙 의 회복. 이것은 우리 시대 크리스 챤들이 회복해야 할 가장 중요한 신 앙의 과제라고 생각을 합니다. 한동 안 소위 지식인들이 한국교회의 신 앙을 비판할 때 두 가지 비판을 많 이 했어요.

 

한국교회 교인들의 신앙 이 타계 신앙적이고 둘째는 기복 신 앙에 빠져있다. 이런 비판을 참 많 이 했습니다. 이 비판의 상당한 내 용은 정직한 비판이에요. 그것은 부 인할 수 없는 비판 받아 마땅한 요 소들을 한국교회가 가지고 있는 것 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 비판이 전체적으 로 정확한 것이라고 저는 생각하지 않아요. 기복신앙에 대한 비판 다시 말하면 교인들이 지나치게 세상적인 축복에만 매달린다.

 

믿지 않는 사람 들과 꼭 마찬가지로 잘 먹고 잘 사 는 일에 지나치게 매달리고 그것을 획득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 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 똑같다. 믿 지 않는 사람과 마찬가지다. 기복신 앙에 매달려 있다. 이 비판은 상당 한 부분 정확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비판을 할 때 기복신앙을 비판할 때 꼭 같이 나오는 것이 타계 신앙 이 예요. 지나치게 한국 교인들이 너무나 타계신앙을 갖고 있다. 이 역사를 몰라라 하고 천당만 바라보 고 있다. 이 두 가지를 같이 묶어서 비판을 하거든요?

 

그런데 이 비판은 정확한 비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한국 교인들이 기복 신앙에 빠진 이 유가 어디 있냐면 타계신앙이 없어 서 그래요. 천국신앙이 없어서 그래 요. 여러분 천국 믿으세요? 가끔가 다가 의심이 생겨 갖고. 정말 믿어 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영원한 나라를 예비 하셨다.

 

정말 믿으십니 까? 정말 믿는 다면 이 땅에서 조금 못 살아도 괜찮아요. 그 발버둥 치 면서 살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구 요. 왜 기복신앙에 빠지냐 이 말이 예요.

 

천국신앙이 없어서 그래요. 진 정한 의미에서 천국신앙. 하늘의 하 나님이 의롭게 산 성도들을 위해서 준비하신 영원한 보상의 세계. 그리 고 천국에 의한 믿음 이 하나님이 영원한 처소를 준비하셨다.

 

이 사실 을 참으로 믿는다면 세속적인 어떤 작은 이윤이나 이익에 매달려서 몸 부림을 치는 그런 life style을 가져 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단 말입니다. 이 천국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타계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여러 분 1세기를 살았던 순교자들의 그 대담한 신앙의 모습 어디에서 왔습 니까? 야생동물의 밥으로 그들의 몸 뚱이가 던지움을 받으면서도 그들의 신앙을 부인하지 않고 찬양을 부르 면서 원형 경기장을 걸어가던 1세기 크리스챤들의 그 담대함 천국신앙이 예요. 천국 믿었어요.

 

이 타계신앙이 라는 것은 그것이 이 타계적 영향만 주는 것이 아니라 그 신앙이 오늘의 삶을 바꿔요. 천국을 믿는 다면 오 늘의 삶이 달라져요.

 

, 내가 이땅 에서 좀 손해를 봐도 지금 당장 조 금 잃어버려도 주께서 영원한 것을 준비하셨다. 초연할 수가 있잖아요. 제임스 그레이 라는 유명한 신학 학 자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고향길 가는 것이 확실하다면 그 길 도상에서 조그만 어려움이라야 내 얼마든지 견딜 수가 있지 않겠는가.

 

우리가 이 추석 때 혹은 이 구정 설 날 때 보면 이 고속도로가 꽉 메워 지잖아요. 고향 가는 사람들 아마 그 고생을 하면서 가면서 많은 사람 들이 그런 결심을 할 것 입니다. 내 가 다시는 고향에 가나 봐라. 금년 이 마지막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 또 가요. , 고향에 딱 도착하는 순 간 다 잊어버리거든요. 고향에 찾아 온 기쁨. 우리가 확신한 본향. 저 천 국에 영원한 소망이 확실한 것이라 면 그 길 도상에서 우리가 겪는 작 은 어려움 견딜만 하지 않습니까?

 

성경은 우리가 이 시대의 고난과 어 려움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이 포기할 수 없는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 할 이유를 우리에게 설득합니다. 하늘 나라의 영원한 기업을 보장하셨습니 다. 그 하나님을 신뢰하시길 바랍니 다.

 

세 번째로 우리가 희망을 포기하 지말고 살아야 할 또 하나의 이유를 말합니다. 그것은 오늘의 시련이 가 져올 믿음의 유익 때문입니다. 오늘 의 시련이 가져올 믿음의 구체적인 유익때문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천국의 소망만이 우리가 가진 본질 적 소망이 아니라 또 그 소망과 더 불어 이 땅에서의 고난이 우리에게 주는 구체적 유익 가운데 하나는 지 금 여기에서 우리의 신앙을 강화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예요. 시련이 없 이 믿음은 강화되지 않습니다.

 

, 우리가 고난이 오면 그 고난을 통해 서 반드시 체험할 수 있는 유익 중 에 하나는 내 신앙이 강화 된다는 사실이 에. 다 그런 건 아니 예요. 믿음 있는 사람이라면. 참된 성도라 면 그들의 신앙은 더 순수해 질 것 입니다. 더 영광스러워 질 것입니다.

 

더 아름다워 질 것입니다. 더 깨끗 해 질 것입니다. , 본문의 6절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6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6절 다같이 시작! 그러 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 여 여러 가지 시험이라는 단어는 본 래 여러 가지 색깔이라는 뜻입니다. 형형색색의 시험을 우리는 이 땅에 서 경험합니다.

 

육체의 질병, 인간관 계의 단절, 경제적인 시련, 형형색색 의 시험을 만나요. , 이 시험 앞에 서 우리도 근심합니다. 성도들 근심 해요. , 근심 절대 안 하는 성도 봤어요? 어떤 사람이 크리스챤이기 때문에 절대로 근심하지 않고 산다.

 

그러면 저는 그가 사람인 것을 의심 하겠습니다. , 근심하는 것은 당연 해요. 당연해요. 여기도 보면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해서 근심한다고 했 어요. 그러나 우리가 믿음의 사람들 이라면 그 근심을 극복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근심은 얼마 동안이어야 합니까? 그 다음에 뭐라 그랬어요? 잠간 그랬어요. 잠간 근 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마침 내 뭐 한다 구요?

오히려 기뻐한다. 근심은. 넘어서서 마침내 기뻐할 수 있는 기쁨 이 커다란 기쁨의 이유. 그 이유가 뭐라 그랬어요. 그 다음 절이 대답을 들려주죠? 7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너희 믿음의 시 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 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 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 게 하려 함이라. 믿습니까? 여러분. 여기 7절에 믿음의 시련이라는 말이 나와요.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부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어서는 모든 종류의 시험이 결국은 믿음의 시련입니다.

 

우리 믿음을 강화 하기 위해서 주께서 허용하신 시련이 예 요. 그래서 어떤 종류의 시험이든 내가 이 시험을 제대로 크리스챤답 게 통과한다면 반드시 우리는 믿음 의 유익을 얻습니다. 어떤 유익입니 까?

 

이것은 주님 앞에 서는 날, 내 가 칭찬 받을 자, 그리고 영광스러 운 자, 그리고 하나님 앞에 존귀한 자로 마침내 내 인격이 빚어져, 새 로워져, 영광스러워져, 성숙한 자로 세워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믿음의 유익이 예요. 우리의 믿음이 마침내 궁극적으로 가져올 빛나는 유익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것이 확실하다면 그렇다면 잠시의 고난 앞에서도 우리가 왜 이렇게 움 츠려 들고 위축 되야 할 이유가 어 디 있어요. 저는 요즘 사람들 만나 는 게 꺼려져요. 우리 성도들도 그 렇고. 왜냐하면 어디를 가든지 누구 를 만나든지 얘기가 딱 하나밖에 없 어요.

 

가보면 꼭 다 그냥 IMF얘기 에요. 다 늘어져 갖고. 축 늘어져 갖 고. 한참 얘기 하다가 보면 스트레 스 받아 가지고 다 넘어져 있어요. 저는 그런 자릴 나올 때마다 종종 제 안에 늘 질문이 생깁니다. 정말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이런 자 세로 살까? 라는 질문이 예요.

 

제가 어제 어 우리 전도폭발 만찬 자리에 서도 그런 말씀을 드렸습니다만은 사도 베드로는 이 말씀을 계속하다 가 드디어 이런 시대를 살아가는 성 도의 자세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합 니다.

 

한번 3장 읽어보세요. 베드로 전서 3장이 예요. 14절입니다. 314. 15. 베드로 전서 314절과 15절 다같이 한번 읽겠습니다.

 

시 작!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 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 너희 마음 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

여기 14절에 보시면 이런 말이 나오죠?

 

저희의 두려워 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라. 믿지 않는 사람 들이 두려워하고 소동하는 것처럼 너희도 그렇게 하지 말라 그럼 크리 스챤들이 좀 달라야 되잖아요. 달라 져야. 그렇다고 해서 베드로는 다가 오는 고난을 과소평가하고 있는 것 은 아니 예요.

 

우리가 그 다음 장에 보면 얼마나 베드로는 실제적으로 다가오는 고난을 경계했는지 모릅니 다. 한번 4장까지 읽어 보시면요. 4 장이요.12절에 보세요.

 

412절에 보시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 련 하려고 오는 무슨 시험이라고 했 어요? 불 시험을. 베드로는 눈을 뜨 라고 말합니다. 불 시험이 온다. 그 러나 이 불 시험 앞에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소동하지도 말라 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 다.

 

여기 315절에 보시면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 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 대답할 것 을 예비하라.

 

여러분 다 두려워 하 구요, 요즘. 다 걱정하고, 다 염려하 고, 그리고 다 주저 앉아있는데 여 러분만은 당당하게 한번 산다고 한 번 가정해 보세요. 당당하게. 나는 전혀 위축되지 않았어. 이젠 좀 IMF에 자꾸 F자로만 하다보니깐 우 리가 F국가가 되고 F신앙이 되는 것 같아요.

 

그런데 I am F라고 하지 말고 Im fine입니다. 한번 연습해보 세요. Im fine. 나는 괜찮다 말이 예 요. 나는 괜찮다. Im fine. 우리가 만 약 이런 자세로 산다면 사람들이 좀 이상하게 생각할 거예요. , 넌 괜 찮니? ? 넌 괜찮으니?

 

, 사업이 야 어렵지. 근데 너는 어려운 것 같 지 않냐? 벽장에 달라 라도 숨겨 뒀 니? 뭐 이렇게 대답한다고 가정해 보세요. , 벽장에 쌓아둔 것은 없 지만 내 마음에 쌓아둔 것이 있다.

 

소망이 있단 말이 예요. 움직일 수 없는 하늘나라의 소망이 있고, 살아 계신 주님이 내 안에 계시고 그가 내 마음 속에 노래를 만들고 시를 만들고 믿음을 주시기 때문이야.

 

만 약 이런 간증을 한다고 해보세요. , 너 어떻게 그런 신앙을 가질 수 가 있느냐? 이 시대야 말로 복음을 전하기 얼마나 좋은 시댑니까? 사도 베드로는 정확하게 그 얘길 하고 있 는 것입니다.

 

저희의 두려워 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라. 너희 마 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 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 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 대답할 것을 예비하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캄 캄한 어둠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 빼 앗기지 않는 소망이 있습니다.

 

흔들 릴 수 없는 소망이 있습니다. 하늘 의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예비하 신 소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이 시련을 통해서 나를 만 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 합니다, 내 믿음은 더욱 순결해 지 고 있습니다.

 

나는 주앞에도 거룩한 자로 세워지고 있습니다. 나는 마침 내 어느날 주님 앞에 시련을 통과하 고 그 앞에 칭찬 받을 자로 그리고 영광스러운 자로 그리고 존귀한 자 로 세워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 시련의 폭풍의 한 복판 속에서 주님을 찬양합니다.

 

여러분 이런 당 당한 자세로 살아보세요. 세상이 얼 마나 도전을 받겠습니까? 여기 우리 가 희망을 붙들고 살아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 희망의 소망과 함께 그리고 이 희망의 믿음, 그리 고 희망의 주님을 붙들고 새해를 믿 음으로 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 길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그렇습니다. 세상이 어두운 것은 사실이고 또 우리의 삶이 전보다도 더 훨씬 피곤하고 힘든 것도 사실입 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이 내 안에 게시고 우리와 함께 계시다면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는 결코 좌 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의 등뒤에 서 나를 도우시는 주 내 고난의 장 에 달려오시는 그 분. 나의 인생 길 에 지치고 곤하여 매일처럼 주저 앉 고 싶을 때 나를 향해 손을 펴시는 주님, 그리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 성을 들어보세요. 일어나 걸어라. 내 가 새 힘을 주리니 일어나 너 걸어 라 내 너를 도우리. 하나님 포기하 지 않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좌절 하지 않겠습니다. 부활하신 주님 나 를 살려주시고 내 안에 쇠할 수 없 는 이 소망을 주 셨기 때문입니다, 이 소망의 주님 붙들고 살겠습니다. 부활의 주님 살아계신 주님을 붙들 고 일어나겠습니다.

 

오 하나님 우리 를 도와 주시옵소서. 소망이 없는 사람들 처럼 두려워 하거나 소동하 거나 방황하지 않게 하시고 여전히 흔들리지 않는 걸음으로 찬양하며 걷게 해 주시옵소서. 그리고 내가 가진 이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이들에게 그것은 부활하신 주님, 내 주님 되 셨기 때문입니다.

 

증거하게 도와 주시 옵소서. 이 믿음으로 세 상을 이기고 그리고 이땅의 영적인 부흥을 가져오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주여, 이 소망 으로 새해를 맞이하게 도와 주시옵 소서 이 소망으로 절망의 자리를 박 차고 일어나는 당신의 성도들이 되 게 해 주시옵소서

 

 

 

 

 

산 소망의 공동체 /벧전1:3-7/ 이동원목사

2014-12-01 20:38:35

 

주후 64년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잊을수 없는 해였습니다. AD64719일 로마에 대 화재 사건이 일어납니다. 로마 거의 전역에 영향을 줄만큼 큰 화재였습니다.

 

화재가 진압된후 여기 저기 널려진 폐허의 잿더미가 로마 시민들의 마음을 황폐하게 할 무렵 로마시에는 한 악성 류머가 소리 없이 퍼져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당시의 로마제국의 황제 네로가 술에 취해 자신의 시흥을 돋구기 위해 로마시를 방화한 것이라는 소문이었습니다. 네로는 이 소문을 잠잠케 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희생양을 찾기 시작합니다.

 

그 희생양으로 등장한 것이 그리스도인들이었던 것입니다. 곧 이어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체포 명령이 내려지게 되었고 여기저기서 피비린내나는 처형이 이어지게 됩니다.

 

살아남은 그리스도인들은 카타콤의 동굴로 숨어들기 시작했고 적지않은 수의 그리스도인들은 로마를 떠나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해외 여러 지역 특히 소아시아 지역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학자들 사이에 약간의 이견은 존재하지만 베드로전서는 이때를 전후해서 쓰여진 서신이었습니다.

 

베드로전서 4:12-13은 이런 시대적 배경을 잘 전달해주는 말씀으로 보여집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제 베드로전서 1:1의 편지 서두의 수신자가 누구인지 주목해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곧 신앙의 박해로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를 격려하기 위해 이 편지가 쓰여지게 된 것입니다.

 

이 편지의 주제는 희망입니다. 이런 시대의 어둠속에서도 우리가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고난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희망의 공동체가 되어야 하며 그리하여 절망속에 있는 이웃들에게 우리가 희망이 되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 편지를 쓰던 1세기와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21세기는 분명 다른 시대인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의 희망을 위협하는 전 세계적인 테러, 나라와 나라 사이의 전쟁과 대립, 민족 내부의 이데올로기와 세대간의 갈등, 그리고 기독교에 대한 세상의 조롱과 박해가 세계 도처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는 이때에 희망은 여전히 우리가 갈구하는 목표가 아닐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여전히 이런 절망적인 세상에서 희망을 갖고 살아갈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1. 부활하신 주님의 함께하심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우리가 주님을 만난 사건은 희망의 시작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찾아오신 그 주님은 인생 최대의 절망인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 부활하신 주님을 내 인생의 주님으로 영접한 순간 우리는 새 생명을 선물로 받게 되고 그 결과로 우리는 새로운 소망 곧 살아있는 소망을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3절의 증언입니다.

 

그가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 이유-우리를 향한 그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의 긍휼히 여기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소망없이 살고 있는 인생을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의 사랑-그 사랑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게 하시고 우리를 찾아오게 하셨다 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는 순간 우리는 거듭납니다. 새롭게 태어납니다.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체적으로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절망을 안고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 우리는 새 소망을 안고 태어나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 소망이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경험하는 거짓되거나 일시적인 소망과 차별화하기 위해 이 소망을 산 소망이라고 말합니다. 이 소망은 진지한 소망이며 영원한 소망 곧 죽을수 없는 살아있는 소망인 것입니다.

 

영국의 목공소에서 일하던 가난한 청년이 전도를 받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그에게 인생의 소망과 의욕이 넘쳐나게 되었습니다. 열심히 한 10년 일하고 난후 그는 드디어 가구 제조업을 경영하는 사장이 되었습니다.

 

이제 돈도 명예도 갖게 되었습니다. 어느날 그가 자기 공장 뒷편에 있는 언덕에 올라 산책하다가 넓직한 바위를 발견하고 걸터앉아 아름다운 마을의 정경을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그는 가슴에 밀려오는 행복감을 느끼며 그가 이런 작은 행복을 누리고 있음은 자기가 걸터앉은 바위가 자신을 편안히 받쳐주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순간 그에게 자신의 인생을 떠 받쳐주는 바위와 같은 존재가 바로 예수님이신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행복의 근거는 돈도 아니고 명예도 아니고 부활하신 주님 살아계셔서 자신을 인도하시는 예수님 이심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는 종이 한 장을 꺼내 시를 쓰기 시작합니다. 이 시가 바로 찬송가 539(Edward Mote의 시)입니다.

이 몸의 소망 무엔가 우리 주 예수 뿐일세. 우리 주 예수 밖에는 믿을이 아주 없도다. 굳건한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이 찬송시는 춘원 이광수 선생이 번역한 것으로 전해 집니다. 이 가사를 본 순간 그에게 감동이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과 저도 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셨습니까? 그 주님이 우리를 만나주시고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우리는 흔들릴수 없는 소망의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로 교회의 한 지체가 되어 이 땅을 살게 하신 이유-이 소망을 이웃들과 나누기 위해서임을 아시는지요?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벧전3:15에서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이런 소망을 나누고 살아가기로 결심한다면 부활하신 주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시지 않았습니까? “내가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약속)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태28:20). 그렇습니다. 이 부활하신 주님의 함께함-이것만이 우리의 가장 진지한 희망의 이유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하늘나라 기업의 예비하심 때문입니다.

 

우리가 소망을 갖고 살아야 할 또 하나의 이유는 주께서 주의 백성들을 위하여 하늘 나라의 기업을 예비하신 때문입니다.

4절을 읽어보십시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하늘 나라의 소망이야말로 우리의 가장 확실한 보증된 기업이라는 것입니다.

 

오늘처럼 격동하는 시대에서 기업활동을 하시는 분들은 얼마나 우리의 기업들이 유동적이고 불확실한 기초위에서 흔들리고 있는가를 실감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인간이 가지는 모든 세속적인 희망이 다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한 세기전만 해도 무너질수 없다고 생각했던 기업들이 어느 한 순간 흔들리고 무너지고 역사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천국 기업만은 썩지 않고 더럽히지 않고 쇠할수 없는 기업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바람이 흔들어 댈수 없는 하늘에 예비된 기업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이런 천국 소망을 갖고 살고 계십니까? 아니면 아직도 썩을 것이고 더럽혀질 것이고 사라져 버릴 기업에 미련을 두고 살고 계신 것은 아니지요?

 

그렇다고 제가 오늘 기업활동을 하시는 분들의 의욕을 꺽으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열심히 하십시오. 그러나 여러분의 궁극적인 소망만은 거기에 두셔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저는 오히려 소망을 이 땅이 두지 아니하신 분들이 기업을 하신다면 훨씬 자유롭게 욕심없이 섬김의 정신으로 기업을 하실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찬송가 539장을 작사한 에드워드 모트라는 분이 그랬습니다. 그가 천국 소망을 가지고 욕심없이 가구업을 하다보니 기업은 점점 더 융성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천국 소망을 이웃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가지고 전하고 싶은 열망 때문에 그의 나이 55세 되던해 그의 기업과 재산을 정리한후 교회당을 짓고 침례교 목사가 되어 복음을 훌 타임으로 전하는 일에 20년 이상 헌신하다가 그의 나이 77세 되던 해에 그의 평소의 소원처럼 교회 강단에서 설교하다가 부르심을 받아 그가 소망하던 천국으로 떠났습니다.

 

이 찬송가의 3-4절을 기억하십니까? “세상에 믿던 모든 것 끊어질 그날 되어도 구주의 언약 믿사와 내 소망 더욱 크리라. (4)바라던 천국 올라가 하나님 전에 뵈올 때 구주의 의를 힘입어 어엿이 앞에 서리라. 굳건한 반석이시니 그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변하고 모든 것이 사라져도 변할수 없고 사라질수 없는 천국의 소망-이 소망이 있음으로 우리는 고난의 시대를 의연하게 살아갈수 있습니다.

 

3. 하나님의 능력의 보호하심 때문입니다.

 

우리가 소망을 갖고 살아야 할 또 하나의 이유는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보호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에게 주어진 궁극적인 소망은 천국 소망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천국을 보장해 주신 다음 이 세상에서는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든지 그대로 버려 두시는 분일까요?

 

아닙니다. 그는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우리의 구원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지켜지도록 우리의 믿음과 구원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본문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두가지 면에서 특히 성도들에게 함께 하심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첫째는 우리의 구원이 유지되도록 그의 능력으로 도와주시겠다는 것이고, 둘째는 우리가 시험이나 시련속에서도 잘 버티도록 그의 능력으로 지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한번 얻은 구원이 언제라도 다시 잃어 버려질수 있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얼마나 불안정한 것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영생의 선물을 언약하시면서 아무도 그 무엇도 우리에게서 이 선물을 빼앗지 못할 것이라고 보장해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한10:28)고 하셨습니다. 본문 5절에서 베드로 사도는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느니라고 하십니다. 이 약속을 신학에서는 영원한 안전(eternal security) 혹은 성도의 견인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은 또한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가 경험하는 온갖 시험과 시련을 버티도록 도우십니다. 그러나 왜 하나님이 우리가 이런 시험을 당하지 않도록 미리 막아주시지 않느냐고 묻지는 마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오늘의 본문은 우리의 인생의 장에 이런 시련이 허용되는 이유가 인격적인 연단을 위해서라고 베드로는 말합니다. 마치 불을 통과한 금이 아름답게 제련되는 것처럼 시련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의 인격을 빚어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가 좌절하지 않도록 우리를 능력으로 지키시겠다는 것입니다. 본문 7절의 말씀입니다.“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바로 이런 하나님의 목적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시험과 시련속에서도 기뻐할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 6절을 읽어보십시오.“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저는 수년전 어느 교회에서 전도집회를 인도하다가 한 교우의 간증을 감동스럽게 들은일이 있습니다. 나이가 꽤 되신 분인데 담임목사님은 그분을 작은 예수라고 소개하셨습니다. 이분은 자수성가하여 성공하신 분이셨습니다.

 

과거 우리나라가 정말 가난했던 시절 어떤 작은 공장이 있는 회사 하급직원으로 출발하신 분이었습니다. 불과 50만원 정도의 월급으로 출발하셨는데 열악한 직장의 환경속에서도 그분은 아내의 기도 때문에 버틸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분은 자신의 아내를 통해 하나님을 믿게 되었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배웠다고 했습니다. 한번은 직장에 취직한지 얼마되지 않아 도난사건이 있었는데 혐의가 자기에게 쏠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새로 들어왔고 청소를 도맡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부장되시는 분에게 문초를 받은 후 당장에 그만 두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날 점심에 아내가 싸준 도시락을 열었는데 아내는 작은 쪽지를 도시락에 집어넣었다고 합니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고 합니다.

 

나는 당신이 다른 사람을 억울하게 의심하기보다 차라리 의심받는 사람이 된 것이 감사하다고--. 당신의 억울함은 하나님이 벗겨 주실 것이고--.

 

나는 당신이 당신을 의심하는 사람들을 비판하기보다 축복하는 사람이 되기를 기도하고 있다는 것과 그리고 당신이 억울함을 느끼는 그런 어두운 직장이기에 나는 당신이 그런 직장에서 빛이 되시기를 기도하고 있다는 말과 함께 마지막에 베드로전서 2:19이하의 말씀을 적었다고 합니다.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참으면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오.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2:19-21)

 

그날 저녁 그는 회사를 청소하고 나오면서 자기를 문초한 부장의 책상 위에 메모를 남겼다고 합니다. “저는 부장님을 원망치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 일로 서로를 의심해야 하는 오늘의 세상이 된 것을 원망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이런 세상은 정직한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는 채찍으로 오늘의 교훈을 삼겠습니다. 부장님을 축복합니다.”

 

얼마후에 그의 누명은 벗겨졌고 그는 회사 모든 이들의 신뢰속에 진급을 계속하다가 회사 대표이사되신 분이 자손이 없었는데 은퇴하며 그 회사를 이분에게 넘겼다고 합니다.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이 도처에서 핍박을 받으면서 당시의 세상을 이긴 비밀이 바로 이런 하나님의 능력 때문이었습니다. 21세기의 세상도 동일한 소망, 동일한 능력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까?

 

<설교 적용 질문>

 

1. 사도 베드로가 이 편지를 쓴 상황과 우리 시대의 성도들이 처한 유사성은 무엇입니까?

 

2. 사도 베드로가 역경 속에서도 당시의 성도들에게 소망을 가지라고 할 수 있었던 이유들은 무엇입니까?

 

3. 5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은 어떤 의미로 성도들에게 역사한다는 것일까요?

 

4. 본문에서 구체적으로 시련 속에 기뻐한다고 고백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입니까?

 

5. 오늘 우리가 처한 시련과 각자의 소망을 말해 보십시오.

 

 

 

소망의 사람 /벧전1:3-9/ 곽선희 목사

2014-11-20 13:31:29

 

1951년 압록강 강변까지 진격했던 유엔군에 속하는 해병대의 군인들이 중공군의 개입으로 인하여 부득이 후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시는 대로 진격전보다 후퇴하는 작전이 제일 어렵습니다.

 

많은 군인들이 희생되었고 포위 당하는 가운데서 저들은 쫓기고 있다가 바위틈에 은 신하고 피곤하게 지친 군인들이 잠 깐 쉬고 있었습니다. 이 비참한 모 습을 본 한 종군기자가 물었습니다.

"What can I do for you?, 내가 당 신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 까?"

 

그 해병대의 미군은 대답했습 니다.

"Give me tomorrow, 내일을 주십시오"라고 대답했습니다. 아주 유명한 말이 되었습니다. 필요한 것은 돈과 명예가 아닙니다. 내일 입니다. 내일! 즉 미래의 문제요 소망의 문제입니다.

"내게 내일을 주십시오. 내게 미래를 주십시오. 내게 소망을 주십시오."

 

이것이 그 의 외침이었습니다. 여러분 인간은 그가 아는 만큼 사는 게 아닙니다. 인간은 그가 가진 만큼 사는 것도 아닙니다. 그가 바라는 만큼 사는 것이올시다. 얼마나 아느냐 얼마나 가졌느냐에 행복이 걸려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얼마나 소망을 가지고 있느냐, 어떠한 소망을 지니고 사느 냐에 따라서 행복은 좌우되는 것이 올시다.

 

우리는 현대 젊은이들이 타락해 가는 것 같아서 걱정을 합니 다. 도덕적으로 사회적으로 이렇게 걷잡을 수 없이 타락하는 거 같아서 걱정을 합니다 만은 타락하기 때문 에 절망하는 게 아닙니다. 절망하 기 때문에 타락하는 것입니다. 그 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무엇이 잘 못돼서 소망이 없다는 얘기가 아닙 니다. 소망이 없기 때문에 타락하 는 것이올시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걸 생각해보세요. 가끔 이 젊은 이들이 고생하는 걸 봅니다. 요새 뭐 학교 고생하고 젊은 사람들 여러 가지로 시달리고 고생하는 걸 보지 만은 여기 나이 많은 분들은 그 젊 은이들 고생하는 거 하나도 안쓰럽 지 않습니다. 왜냐하면은 젊은이의 고생과 나이 많은 돈 많은 할머니의 생활과를 비교해보세요. 여러분 어 느 쪽입니까?

 

아무리 잘 살면 뭘합 니까 시간이 없는데. 여기에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러나 고생하는 젊은이, 그 젊었다는 그 하나만 가 지고도 충분히 행복합니다. 나이 든 사람은 그렇게 말하고 싶어요.

"이 사람들이 걱정할 것도 슬퍼할 것도 없다. 하루종일 찬송을 불러 도 끝이 없다. 젊은 거 그거 하나 만 가지고 충분하다"

 

왜요? 미래가 있잖아요. 미래가 있고 소망이 있 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겁니까. 미래가 없는 이거 가졌으면 뭘 하고 알면 뭘 합니까. 혹 건강하다면 또 그건 뭘 합니까. 가끔 어떤 분들은 제게 요새 농담 겸 진담 인사로

 

"목사님, 참 전보다 더 건강하게 보 입니다"

그렇게 인사를 해요. 그러 면 전 대답합니다.

"건강하게 보이 면 뭘 하나 실속이 있어야지"

 

내가 그럽니다. 안 그래요? 아 지금 미 래가 눈앞에 있고 카운트다운 하는 데 좀 더 건강하면 뭘 하고 안 하면 뭘 하고. 이게 아니죠. 당신이 지 닌 미래 이것이 나의 행복이거든요. 나의 나 됨을 평가하는 것입니다. 유명한 신학자 폴 틸리히라고 하는 분은 궁극적 관심,

"얼트밑 콘선 (Ultimate Concern)"

 

이라고 하는 책을 썼는데 제가 아주 젊었을 때 이 책을 참 탐독하게 읽었습니다. 그런데 궁극적 관심, 바로 그것이 종교라는 겁니다. 그리고 궁극적 관심에 붙잡혀서 사는 것이 신앙이 다 그랬어요. 그렇게 정의하고 있 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관심이 어디에 있습니까? 현실에 있습니 까, 물질에 있습니까, 무상한 이 생 활 속에 있습니까, 혹은 순간적 쾌 락에 있습니까? 그 사람은 속물이 요. 그건 동물 같은 인간이요. 인 간은 언제나 그 다음을 생각해요.

 

봄에는 여름을 생각해요, 여름에는 겨울을 생각해요, 젊어서는 늙었을 때를 생각해요. 그 다음을 생각하 고 좀 더, 좀 더 나아가서 궁극적인 일에 관심을 가집니다. 그 관심에 이끌리어서 오늘을 사는 것이 그리 스도인이다 하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 몸은 분명히 현재에 삽니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은 저 궁극에 있어야 합니다. 네 가지 궁 극을 생각합니다.

 

첫째는 궁극적 목적입니다. 우리에게 분명히 목적 이 있습니다. 우리 젊은 사람들 대 학에 입학하느라고 그 몇 년 동안 공부하느라고 고생을 합니다. 그저 도시락 둘씩 싸들고 다니면서 새벽 부터 밤까지 고생을 많이 합니다. 그들에게 묻기를 네 목적이 뭐냐? 대학에 입학하는 거라고, 그래 입학 을 하고 보니까 또 어떠냐? 아 이 거 별것도 아닌 거 가지고 고생했습 니다.

 

그렇지요 그건 목적이 될 수 가 없어요. 젊은 사람들 또 자기가 원하는 사람하고 결혼을 하려고 하 면 부모가 반대를 하는데도 불구하 고 죽기살기로 저 여자하고 결혼 못 하면 죽는다고 약을 세 번이나 먹고 별 짓 다 합니다. 아 그래 이렇게 목숨을 걸고 야단을 하지만은 또 결 혼을 하고 나니까 이혼하더라고요. 그게 아니더라는 거야. 이건 목적 이 못돼 이거는요. 이런 건 목적이 못돼요.

 

그러면 보세요, 그건 궁극 적인 것이 못되기 때문이요. 최종, 궁극적 목적이 뭐냐, 그걸 알고 살 아가야 되는 것이죠. 또 하나는 궁 극적 상태, 마지막엔 어떤 모습으로 변하는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게 될 것인가를 생각해야죠.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불란서 파리에 어느 수도원에 가면 그 들어가는 입 구에 큰 돌비석이 있습니다. 그 비 석의 비문은 이렇습니다.

 

"아프레 쓸라(Apres cela), Apres cela, Apres cela"

불어로 딱 석자 써있 습니다. 해설 없이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그런 이상한 문구올시다.

"그 다음은, 그 다음은, 그 다음은"

 

이 렇게 되어 있습니다. 법과대학 졸 업반에 다니는 학생이 고학을 하느 라고 애쓰다가 이제 한 학기 남았는 데 도저히 학자금을 조달할 수가 없 어서, 이 학교를 쉬게 될 거 같아서 너무 마음이 아파서 어느 신부님께 찾아가서

"저를 좀 도와주십시오. 마지막 학기인데 학비를 좀 도와주 시면 고맙겠습니다"

아 그 신부님 은

 

"마침 조금 전에 어떤 교인이 좋 은 일에 써 달라고 돈을 한 묶음 갔 다 놓고 갔는데 이건 분명히 자네를 위한 것일세"

돈을 세 보지도 않고 한 줌을 딱 붙들어서 그냥 주었습니 다. 이 청년이 그 답답했던 중에 소원이 갑자기 이루어지니까 당황해 가지고 오히려 걱정이 돼서

 

"이거 가져도 되는 겁니까?"

"아 그럼, 자 네 거야 그거는. 하나님이 자네에 게 주는 걸세"

"감사합니다, 감사합 니다"

이렇게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데

"잠깐만"

그러더래요.

"뭡니 까?",

 

"내가 하나 묻는데 그거 가지 고가서 뭘 하려나?"

"아 그게 무슨 말입니까 등록금을 치러야지요",

"그 다음은"

"공부해야죠",

"공부하 고"

"졸업 해야죠",

"그 다음은"

 

"법 관이 돼서 변호사가 돼 가지고 억울 하게 당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의로 운 변호를 하겠습니다",

"좋은 생각 이구만 그래주면 좋겠네",

"그 다음 은"

"돈 좀 벌겠습니다",

"그 다음 은"

 

"장가가겠습니다",

"그 다음은"

심상치 않은 질문에 그는 더 이상 대답을 못합니다. 신부는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그 다음은 내가 말하지. 자네도 죽어야되네. 그 다음은 자네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일세, 알았는가"

"알겠습 니다"

 

인사를 드리고 나오는데 귓가 를 계속 때리는 음성이 있습니다. Apres cela, 그 다음은, 그 다음은, 그 다음은. 견딜 수가 없이 계속 들려옵니다. 그런데 이게 전부 사 실입니다. 그 돈을 내 던지고 수도 원으로 들어가서 수도를 하고 훌륭 한 수도사가 되어서 한 평생 귀한 일을 많이 했어요. 그 비석에 그 묘비에 그가 한 평생 자기 책상 앞 에 써 놓고 좌우명으로 외우던 세 마디,

 

"Apres cela, Apres cela, Apres cela"

써 놓았습니다. 여러 분 묻습니다. 그 다음, 궁극적 상태 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당 황하지도 마세요, 깊이 알려고 하지 도 마세요, 슬퍼할 것도 없어요. 당 연히 이 길로 가야됩니다. 궁극적 상태, 이걸 모르고 사는 사람은 미 련한 사람이에요.

 

또한 궁극적 주 인이 누군가를 알아야합니다. 나도 주인이 아니고 너도 주인이 아닙니 다. 나는 지금 누구에게 끌려 살고 있습니까? 마틴 루터의 유명한 말 이 있습니다.

"기수에게 조정을 받 는 말과 같은 것이 인간이다"

 

여기 에 말이 있습니다. 말에 올라 탄 기수가 있습니다. 기수가 말을 채 찍질하면서 말고삐를 쥐고 자기가 원하는 데로 갑니다. 세우기도 하 고 뛰기도 합니다. , 나라고 하는 인간을 끌고 가는 주인이 누굽니까?

 

그게 돈입니까, 명예입니까, 질투심 입니까, 증오심입니까, 끝없는 욕심 입니까? 도대체 나는 누구의 노예 입니까? 궁극적 주인은 악마입니까 천사입니까? 성령입니까 아니면 씻 을 수 없는 과거의 죄악입니까? 무 엇에 끌려 그렇게 허덕이며 살아왔 습니까?

 

궁극적 주인이 누구냐, 그 걸 생각해야 되고요 궁극적 가치를 생각해야 됩니다. 도대체 가치 있 는 게 뭡니까. 그게 여자들 말마따 나 옷입니까 다이아몬드입니까. 정 말로 가치 있는 일이 뭡니까. 영원 히 후회하지 않을 수 있는 것, 두고 두고 기억하며 잘했다 싶은 것, 그 러한 높은 가치, 궁극적 가치, 이걸 잊어서는 안되죠. 여기에 끌려서 오늘을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 사도 베드 로는 본래 갈릴리 어부였습니다.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그가 제자가 되고, 수제자가 되었습니다. 삼년 동안 예수님과 동행합니다 만은 성 경을 읽어서 아는바와 같이 그는 계 속적으로 세속적 욕망을 버리지 못 합니다.

 

예수님이 큰 능력을 행할 때마다 저 능력을 가지면은 이 나라 를 통일할 수 있을 것이다, 구원할 수 있을 것이다. 저같은 희한한 능 력과 지혜라면은 분명히 이 나라를 구출할 수 있는 지도자 메시야가 될 것이라고 그렇게만 생각했습니다. 그가 신앙을 고백합니다.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 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하고 고백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천국열 쇠를 준다. 너는 베드로다"

 

칭찬하 십니다. 바로 그 때, 베드로의 본색 이 드러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 가를 지신다고 할 때,

"절대로 지지 마십시오,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없 습니다"

그 말 뒤에는

"유대나라의 왕이 될 분이 그 무슨 십자가와 같 은 불길한 것을 다 생각하십니까"

그거 아닙니까. 예수님께서는 단호 하게

 

"사탄아 너는 내 뒤고 물러가 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 다"하고 책망하셨습니다. 너는 베 드로다, 내가 천국열쇠를 네게 준다, 말씀하시고 곧 돌이켜서 사탄이라고 불렀습니다. 보세요, 베드로는 세속 적 욕망, 세속적 관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 가를 지시고 부활하신 다음에 그리 고 성령에 충만하게 될 때 비로소 그는 하늘이 열리는 경험을 합니다. 이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됩니다. 영 원한 가치, 궁극적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산 소망"

 

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산 소망, 리빙 호프(Living Hope), 산 소망, 엘피다 죠산, 이 한 마디는 베 드로의 신학의 핵심입니다. 베드로 전서·후서 베드로의 신앙의 극치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산 소망! 오늘 본문에서 그는 소망의 근거를 어디에 두느냐 하면 예수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에 둡니다.

 

부활신앙, 십 자가에 죽어지는 거 같은데 아니요 부활하시더라 이거요. 또 우리도 부활할 것이다. 이제 그의 생각은 영원한 세계로, 궁극적 관심으로 생 각의 방향이 확 돌아갑니다. 그래 서 그는 베드로가 됩니다. 그리고 로마에서 거꾸로 못 박혀 죽는 것, 그는 사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재창조의 능력, 위대 한 능력을 그는 눈앞에 보면서 산 소망 그 속에 살았습니다.

 

여러분 소망과 소원은 다릅니다. 우리 인 간들이 소원을 합니다 만은 그거는 내 마음이고요 소망은 하나님이 약 속해 주신 바를 말합니다. 하나님 의 약속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 믿음으로 그 약속 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 받아들이는 순간 그 약속이, 그 산 소망이 우리 자신들의 마음과 생각 을 지배하게 됩니다. 우리 인격을 완전히 붙들고 나갑니다. 이 사람 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유엔 사무총 장을 지낸 더그 함마슐드 총장을 아 실 것입니다.

 

그가 쓴 에세이에 이 런 말이 있습니다. 재미있는 비유 입니다.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콜롬부스가 탄 배, 그가 타고 지금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 배 안의 선원중의 하나는 이 배 안에 있으면서 큰 걱정이요. 걱정 과 근심으로 가득 찼어요. 그건 뭐 냐하면, 자기 고향에서 자기는 어떤 집에 구두 수선하는 집에 직공으로 있었는데 그 구두 수선하는 주인이 나이 많아요.

 

그래서 자기는 이 배 를 타고 미국까지 왔다가 돈을 좀 벌어 가지고 돌아가서 그 주인의 구 두수선 가게를 인수받으려고, 인계 받으려는 것이 그게 소망입니다. 그런데 걱정이 풍랑이 일어날 때마 다 아이고 이거 죽으면 어떡하나, 좀 시간이 늦을 때마다 아 이거 늦 으면 못 가는데 이거 어떡하나, 또 내가 가지전에 그 노인 죽으면 어떡 하나, 이걸로 걱정이 가득하다 이 말이에요. 자 생각해보세요.

 

신대 륙을 발견하는, 신대륙 아메리카를 발견하는 이 귀한, 위대한 역사에 동참한 사람이 말입니다 그래 그까 짓 가게 하나에 메여 가지고, 지금 집에 못 돌아갈까 봐 걱정하는 이 불쌍한 청년을 생각해보세요. 콜롬 부스는, 콜롬부스가 가진 소망은 저 앞에 있는 것이고 이 청년이 가진 소망은 저 과거에 있는, 뒤에 있는 것이었어요. 여러분 우리가 이 시 점에서 우리는 어디로 향하는 것입 니까? 이렇게 밝은 소망을 가지고 살게 될 때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세 가지로 말씀합니 다. 구체적으로, 이제 여러 가지 시 험을 당한다 그랬어요. 소망을 가 진 사람이 시험을 당합니다. 왜요? 그 소망이 계속 순수한 소망으로 지 켜가기 위해서, 이걸 알아야 합니다.

 

이 소망을 가진 사람에게는 시련이 있어요. 당연한 것이요. 그 시련 중에 더 확실한 소망의 사람으로 살 아갈 수 있기 때문이죠. 그리고 이 시련은 잠깐 지나가는 것이요. 오 늘 본문에도, 잠깐 여러 가지 시험 을 당하지 않을 수 없다. 이걸 당 연사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참 소 망을 위하여, 이 소망의 사람들은 시련을 겪습니다. 그래서 고린도후 서 417절에 사도 바울도 말합니 다.

"잠시 받는 환난에 경한 것이 중한 영광을 이룬다"

 

잠시 받는 환 난의 경한 것, 이것이 바울의 말씀 입니다. 이 시련, 이 잠깐 있는 이 시련, 있을 수밖에 없고 그 위대한 소망 앞에서 생각할 때 이 시련은 잠깐 지나가는 거예요. 또한

"믿음 의 시련이"하는 말씀입니다.

 

믿음 의 시련이, 믿음을 순수하게 하고, 믿음을 온전하게 하고, 믿음을 강하 게 하고 이 시련이, 시련의 초점은 믿음이요. 금보다 귀한 믿음, 이 믿 음을 주시기 위하여 이 시련은 있는 것이다.

 

그런고로 이 소망에 사는 사람은 저 앞을 바라보면서 기뻐하 고 즐거워한다. 그렇습니다. 벅찬 기쁨으로 앞에 있는 시련을 쉽게 넉 넉하게 이겨 가는 것입니다. 요새 보신 분도 계시겠습니다 만은 널리 알려진 아주 슈퍼 베스트셀러 책이 하나 있습니다.

 

"튜즈데이즈 위드 모리(Tuesdays with Morrie)"라고 하는 책입니다. 모리와 함께한 화 요일, 이렇게 번역이 됐습니다. 이 책은 모리 슈워츠(Morrie Schwartz)라고 하는 대학 교수님인 데 브랜다이스 대학의 교수님으로써 지금 연세가 높은 분인데 루게릭이 라고 하는 특별한 불치병에 걸렸습 니다.

 

이 병은 근육이 자꾸만 굳어 지는 겁니다. 이걸 풀 제간이 없습 니다. 근육이 자꾸자꾸만 굳어져 가지고 마지막엔 심장이 멎는 거예 요. 이런 병에 걸려서 병원에 계시 는데, 여기에 미치라고 하는 학생 하나가 화요일마다 찾아옵니다, 교 수님을 위로하기 위해서. 화요일마 다 찾아와서 대화를 합니다.

 

그 대 화하는 중에서 참 귀한 말씀들을 많 이 들었는데 이거 마지막, 마지막 가는 교수와 젊은 학생과의 대화입 니다. 이것을 그 학생이 편집을 해 서 책으로 낸 겁니다. 아주 생생한 생감이 있는 생동감이 있는 그런 대 화올시다. 인생의 궁극을 같이 이 야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의 말 중에 이런 말이 마지막에 나옵니다.

"어떻게 죽어야 할 지를 알면 어떻 게 살아야 할 지도 알 수 있느니라"

 

어떻게 죽어야 할 것인가를 알게되 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알 수 있다 이 말이요. 여러분 어떤 모양으로 죽을까, 나는 어떤 모습으 로 생을 끝내나, 그것을 똑바로 알 고 살면 내가 오늘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는 자연히 쉽게 풀려지는 것이올시다.

 

이걸 잊지 말아야 합 니다. 참 소망은 여기에 있습니다. 소망을 하늘에 두고 사는 사람은 땅 의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미래에 두고 사는 사람은 현재의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영원한 것을 추구하 고 사는 사람은 세상적인 것도 다 얻을 수 있습니다. 불변한 진리를 통달하고 거기에 이끌려 사는 사람 은 변화무쌍한 세상에서도 세상을 달관할 수 있습니다. 희망과 소원 은 결코 소망이 아닙니다.

 

궁극적 인 소망! 확실한 약속! 그것이 크 게 확실하게 내 마음에 들어 올 때, 내가 당한 조그마한 현실, 그거 별 로 문제될 게 없습니다. 모든 문제 의 근본은 소망의 문제입니다. 산 소망, 이 산 소망의 포로가 되어서 살아갈 때 그 앞에 영광과 승리가 있는 것이올시다.

 

 

 

 

흐르는 강물처럼 /27:7-9 벧전1:5-9

2014-10-14 20:09:41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

 

지난주간에 저희 가족은 휴가를 잘 다녀왔습니다. 이번 여름에 휴가를 제대로 다녀오지 못한 교우들께는 미안한 마음이 있지만 이번 기회는 제게 몸과 마음을 새롭게 하고 충전하는 시간이 됐습니다.

 

이번 휴가 동안에 여러 곳을 다녔습니다. 무려 3천 마일을 운전하며 다녔으니 꽤 많이 돌아다녔다고 하겠지요. 하도 많이 다녀서 오레곤주 한 시골 마을에서 자동차 엔진오일을 교환해야 했습니다.

 

한 주유소 직원에게 "이 근처에 오일 교환해주는 곳이 어디 있는가?"고 물었더니 그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Wal-Mart'가 있는데 거기 가면 할 수 있다"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알려준 대로 'Wal-Mart'에 가서 오일 교환을 했습니다.

 

제가 그때까지 미국생활 10년 하는 동안 다른 데는 많이 가봤는데 'Wal-Mart'에 가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일 교환하는 동안 호기심을 갖고 'Wal-Mart'를 구경하게 됐습니다.

 

이곳 저곳 돌아다니다가 영화 DVD 싸게 파는 곳을 발견하고 '뭐 좋은 게 있나?' 하는 마음으로 살펴보다가 한 영화를 발견하고 속으로 '야호!' 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 동안 다시 보고 싶었고 갖고 싶었던 영화 DVD가 거기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영화는 'A River Runs Through It', 한국에서는 '흐르는 강물처럼'이라는 제목으로 상영됐던 영화입니다.

 

1992년에 나온 이 영화는 시카고대학 영문학 교수였던 놀만 맥클린(Norman MacLean)의 자서전적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배우로도 유명한 로버트 레드포드(Robert Redford)가 감독을 했고 크레이그 쉐퍼(Craig Sheffer), 브래드 피트(Brad Pitt), 탐 쉐리트(Tom Sherritt) 등이 출연했으며 그 해 아카데미 촬영상을 수상한 영화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헐리웃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스타가 된 브래드 피트의 초기 모습을 볼 수 있기도 합니다.

 

이 영화는 1차 대전이 일어나기 전 20세기 초 미국 중서부 몬태나주의 수려한 자연을 배경으로 해서 한 장로교 목사 가정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몬태나주 한 시골 장로교회를 목회하는 맥클린 목사에게는 부인과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아내는 가사에만 전념하는 전형적인 그 당시 목사의 아내이고 두 아들 놀만(Norman)과 폴(Paul)은 매우 대조적인 성격의 소유자입니다. 형 놀만은 진지한 성품에 아버지의 말을 잘 따르고 글쓰기를 좋아하는 한편 동생 폴은 자유분방하고 충동적이기까지 한 성격의 소유자입니다.

 

엄격하고 고지식한 전형적인 그 당시의 장로교 목사인 맥클린 목사는 어린 아들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고 자기가 직접 글쓰기를 가르칩니다. 목사는 서재에서 설교 준비를 하면서 아들이 써온 글을 읽어보고 늘 이렇게 말합니다:

 

"좋아. 잘 썼다. 그런데 그걸 절반으로 줄여 오너라." 저는 이 장면을 보면서 '내게 저런 훈련이 필요한데... 내가 저 훈련을 받았더라면 설교가 훨씬 짧아졌을 텐데...'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과정이 몇 번 반복되는 동안 오전 시간이 흘러가고 아버지로부터 최종 합격 판정을 받은 후 아이들은 낚시 대를 들고 물고기를 잡으러 강으로 뛰어가곤 합니다.

 

인생을 제대로 살 수 있는 은총과 절제의 미덕을 얻는 길

 

영화 속의 맥크린 목사의 생활은 설교 준비를 하는 것과 낚시하는 게 전부인 것처럼 보입니다. 자녀들을 향한 그의 가르침의 일부는 주일 설교와 강가에서 이루어지는 송어낚시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에게 플라이 피싱(fly fishing, 날파리를 미끼로 해서 강에서 송어를 잡는 낚시)은 인생의 축소판입니다.

 

"강물의 흐름을 읽고 물고기의 움직임을 살피고 너 자신을 제대로 들여다볼 줄 안다면, 그리고 한치의 낭비되는 동작 없이 물고기를 잡는 데 필요한 동작만을 정확하게 구사할 줄 안다면 너는 인생을 제대로 살 수 있는 은총(grace)과 절제(economy)의 미덕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게 맥클린 목사의 자녀들을 향한 가르침입니다.

 

그는 음악을 할 때 주로 쓰는 메트로놈(metronome)을 갖다 놓고 아들들에게 물고기 잡는 동작을 훈련시킵니다.

 

큰아들 놀만은 아버지의 가르침에 충실하지만 폴은 종종 아버지가 설정해놓은 틀을 깨뜨리고 자기만의 방식을 만들어나갑니다. 나중에 누가 더 큰 송어를 잡고 더 뛰어난 낚시꾼이 되겠습니까? 낚시에 관한 한 승리하는 쪽은 동생 폴입니다.

 

놀만은 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하여 6년만에 학위를 받아 금의환향합니다. 아버지는 은근히 놀만이 목사가 되기를 바라지만 그는 교수직에 뜻을 두고 이미 몇 개의 대학에 지원서를 보내놓은 상태였습니다. 그 동안 폴도 대학을 졸업하고 한 지역 신문 기자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 폴은 어렸을 때의 성격 그대로 신문사에서도 정해진 틀을 따르지 않고 자유분방하게 행동합니다. 사무실에서 술을 마시기도 하고 술집에 가서 기사를 쓰면서 "여기가 바로 내 사무실"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는 당시에는 금기였던 인디언 여인과 사랑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6년만에 놀만이 만난 폴의 변화는 그 정도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폴은 이미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있었고 카드 도박에 빠져 있었습니다. 물론 도박 빚도 많이 지고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그는 술과 도박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모범생' 놀만의 걱정 어린 시선이 폴을 계속 따라다닙니다. 놀만은 계속해서 폴이 일으킨 사고의 치다꺼리를 해주었지만 폴의 생활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놀만은 속절없이 폴을 바라보는 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그런 와중에 놀만은 제시(Jesse)라는 여인과 사랑에 빠집니다. 그리고 시카고대학으로부터 교수로 초빙을 받습니다. 시카고로 떠나면서 놀만은 폴에게 "시카고로 같이 가서 거기 신문사에서 일해보면 어떻겠느냐?"고 권고합니다.

 

아마 그 길만이 폴을 수렁에서 건져내는 유일한 길이었다고 놀만은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폴은 죽을 때까지 몬태나를 떠나지 않겠다고 말하며 형의 제안을 거절합니다. 놀만과 제시는 폴을 두고 둘만 떠납니다.

 

그후 몇 년이 지난 후 놀만은 경찰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습니다. 폴이 죽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는 결국 도박판에서 벌어진 싸움에서 누군가에게 맞아서 죽임을 당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놀만은 부모인 맥클린 목사 부부를 찾아가 폴의 죽음 소식을 전합니다. 한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다른 아들에게서 듣는 부모의 침묵과 눈물은 보는 사람의 가슴을 매우 아프게 합니다.

 

폴이 죽고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 놀만의 가족이 고향을 찾아와 아버지가 인도하는 주일예배에 참석합니다. 그날 맥클린 목사는 이렇게 설교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많이 만납니다.

 

우리는 결코 그것이 왜 그래야 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해하지 못해도 사랑할 수는 있습니다.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랑할 수도 없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아직까지 많은 것들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사랑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이해하지 못하지만 사랑할 수는 있습니다

 

이 설교는 분명 죽은 아들에게 보내는 아버지의 '헌사'였습니다. 아버지가 보기에 분명 잘못된 길로 나가는 아들을 막을 방법이 아버지에게는 없었습니다.

 

아니, 그런 아들을 아버지는 이해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교육을 통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플라이 피싱(fly fishing)을 통해서 아들에게 인생을 바로 사는 법을 가르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실패했습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먼저 아들을 이해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그가 왜 그런 길로 나갔어야 했는지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메트로놈의 리듬을 따라 움직여야 송어를 잡을 수 있다고 믿었던 아버지는 그 리듬을 무시하고 사는 삶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삶은 '교정되어야 하는 삶'이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는 아들이 죽은 후에 비로소 고백합니다. 이해하지 못했어도 사랑했었노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저는 맥클린 목사의 설교를 자기 아들만을 염두에 두로 한 설교 이상으로 들었습니다. 사람 사는 생 그 자체가 그렇지 않습니까? 생 그 자체가 이해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서도 사랑할 수 있는, 아니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인생이 아닙니까? 제가 보기에 이 영화에는 빛나는 연기를 하는 주인공들이 여럿 나오지만 진짜 주인공은 흐르는 강물인 것 같습니다. 또한 강물로 상징되는 '자연''인생' 그 자체가 주인공입니다.

 

아버지 맥클린 목사나 아들 놀만과 폴은 이 거대한 강물의 물방울 하나, 깊고 깊은 인생의 한 작은 단층일 뿐입니다. 이들 모두에게 강물은 이해할 수 없이 신비하고, 그러면서도 매력이 넘치는 역동적인 흐름입니다.

 

그 흐름은 늘 똑같고 변함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한 순간도 똑같아 본 적이 없습니다. 그 수면이 흩뿌리는 광채 또한 변화무쌍하기 그지없습니다. 오늘 바라보는 강물은 어제의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 역시 흐르는 강물과 같습니다. 늘 그날이 그날 같고 변화가 없는 것 같지만 사실 단 하루도 전날과 같았던 적이 없었습니다. 강물이 흩뿌리는 광채가 변화무쌍하듯이 생이 내뿜는 입김 역시 늘 달랐습니다. 그 입김은 얼음처럼 차가웠다가도 금방 봄바람처럼 따뜻하게 다가옵니다.

 

우리 생에서 일어나는 일들 가운데 우리가 예측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모든 일이 우연인 것처럼, 납득할만한 원인 없이 벌어지곤 합니다. 특별히 생 전체에 커다란 흔적을 남길만한 결정적인 일들이 더욱 그런 것처럼 보입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나야 하는지, 무엇 때문인지 누구 때문인지 알 수도 없고 예측할 수도 없습니다. 아픔과 고통을 가져다주는 일일수록 더욱 그러합니다.

 

인간은 결코 자기 운명을 의식적으로 통제하지 못합니다. 메트로놈의 리듬에 충실했던 멕클린 목사의 마지막 고백은 "우리는 이해하지 못해도 사랑할 수는 있다"였습니다.

 

그의 분신과 같은 놀만도 대학에서 은퇴한 후 다시 강을 찾아와 낚시를 하면서 마지막으로 읊조리는 독백에서 다음과 같은 '모호한', 그러면서도 가장 '확실한' 고백을 남깁니다:

 

"강바닥 돌 밑에는 어떤 언어들이 숨겨져 있는 것 같다." 가장 흥미로운 인물 폴 역시 자기 생을 통제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언제나 틀을 깨뜨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리듬을 무시하고서도 가장 큰 송어를 잡았습니다. 이 사실은 영화가 설정해놓은 전제(규범을 따를 때 은총과 절제를 획득할 수 있다는)를 깨뜨리는 일이지만 결국 그의 생은 예기치 않았던 파멸로 막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생에 대한 중대한 메시지를 읽었습니다. "생은 결코 이해될 수 없다"는 맥클린 목사의 말에 저는 동의합니다. 어느 누구의 생도 결국은 누구에 의해서도 이해되지 않습니다.

 

고고한 종교인이나 철인(哲人)의 생 뿐 아니라 남보다 혜택을 덜 받아 고고하게 살 기회를 가져보지 못했던 그저 '평범한' 사람, 혹은 그 이하 사람의 생조차도 결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신앙도 인생을 이해할 수 있는 수단은 되지 못합니다.

 

신앙은 인생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는 아니란 말씀입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도, 아니 신앙이 깊어질수록 생은 점점 더 이해할 수 없는 '신비'로 느껴집니다. 흔히 신앙을 '인과응보'의 철칙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곧 신앙은 '잘 믿으면 복을 받고 잘못 믿으면 벌을 받는다'는 법칙과 같은 것으로 아는 경우 말입니다. '인과응보'의 법칙에는 분명히 교육적인 효과가 있습니다. 나쁜 짓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힘이, 또 나쁜 짓 한 사람을 회개시키는 힘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얕은 단계일 뿐입니다. 생에는 그 법칙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일들이 수없이 많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생의 맛을 알려면, 그리고 신앙의 참 맛을 보려면 우리는 '인과응보'의 법칙에 머물러서는 안되고 더 깊은 물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신앙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사랑하게 만들어줍니다

 

저는, 신앙은 인생을 이해하게 만드는 데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앙은 그리 대단한 효험을 가진 '명약'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이렇게 이해할 수 없는 생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의 문제에는 대단한 효험을 발휘하는 '명약'이 될 수 있습니다.

 

생을 살면서 만나는 모든 일들이 하느님께서 일으키시는 일이라고 믿을 수도 있고 또 그렇지 않다고 믿을 수도 있습니다. 신앙인들 중에서도 전자와 후자가 다 있습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저 자신도 이랬다 저랬다 합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저도 제 생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제가 제 생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생을 사랑하지 못하지는 않습니다. 생에서 전혀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났을 때 어떻게 행동할 것입니까? 누구 때문에, 무엇 때문에,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나는 알 수 없습니다.

 

나는 그 원인을 찾아봅니다.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나나 내가 아는 누구에게 이 일의 책임이 있는가도 물어봅니다.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습니다. 이 일을 일으킨 분(하느님)에게 따져 물어도 봅니다. 그러나 그분은 대답을 주지 않습니다. 오늘 읽은 시편 27편의 시인처럼 "당신 얼굴을 보여달라!"고 외쳐도 봅니다. 그러나 그분의 얼굴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나는 그 고통스러운 일을 끌어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해하지 못하지만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구요? 그럴 수 있습니다. 그걸 가능하게 해주는 힘이 바로 '신앙'입니다. 신앙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힘입니다.

 

베드로서를 썼고 그것을 삶의 양식으로 들으며 살았던 사람들은 그렇지 않아도 가뜩이나 살기 힘들었던 시절에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박해까지 당하면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들 중에 직접 예수를 본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예수를 알면 얼마나 알고 이해하면 얼마나 이해했겠습니까! 그들은 학식도 없고 재물도 가지지 않았던 밑바닥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신앙'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는 생을 어떻게 살 것인지의 문제를 갖고 뜨겁게 씨름했던 사람들임에 분명합니다. 오늘 읽은 말씀에서 그런 사람들의 영혼에서 우러나오는 고백을 우리는 듣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으면서도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보지 못하면서도 믿고 있으며 또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으로 넘쳐 있습니다(베드로전서 1:8).

 

그렇습니다. 우리 역시 그리스도를 본 적도 없고 제대로 알지도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사랑하고 있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여러분이 지금 어떤 상황의 삶을 사는지 잘 모릅니다.

 

물론 전혀 모른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 깊은 영혼의 밑바닥까지 안다고는 말하지 못합니다. 생이라는 강물은 우리를 그 바닥을 볼 수 없는 깊은 곳으로 우리를 끌고 들어갑니다.

 

우리는 그 깊음을 볼 수 없기에, 그래서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기에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러나 용기를 가지십시오. 여러분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것/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는 '신앙'이 있으니 말입니다.

 

, 누구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할 수 없을 때에는 더 이상 이해하려 하지 말고 그것을 끌어안으십시오. 사랑하십시오. 그 고통스러운 일 자체를, 그 고통의 당사자를, 그리고 알지 못하는 고통의 원인 제공자까지도 사랑하십시오. 그것이 진실한 신앙인의 삶의 태도라고 저는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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