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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베드로서 설교 모음

베드로전서 4장 7절 - 11절 설교 모음

by Jessi J 2024.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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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의 삶 /벧전4:7-11/ 이동원목사

2014-12-05 21:44:38

 

지금 예배하는 여러분은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마음으로 임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지금 여러분의 삶은 더 할 수 없는 최선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과자 집을 운영하면서 직접 과자를 굽는 주인이 있었습니다. 그 과자 집에는 과자를 사려고 하는 손님들이 줄을 서서 기다렸습니다. 손의 움직임이 얼마나 매끄러운지 과자 굽는 손길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무슨 마술을 보는 듯했습니다. 얼굴에는 항상 평온함이 가득하고, 온 몸짓은 자신감에 넘쳐 있었습니다. 마음이 우울하던 사람도 그 과자 집에 들르면 금방 마음이 밝아졌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그가 일하고 있다기보다는 아름다운 율동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고 했으며, ‘기름칠한 듯한 탱탱한 삶의 모습이 어디서부터 오는지 궁금하다.’고도 했습니다. 그는 과자를 구우면서 곧잘 결코 어제와 같은 과자를 굽지 않으려고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루하루 새 모습으로 살아서, 어제보다 달라진 자신의 모습을 과자에 새겨 넣고 싶다는 말입니다.

 

별 것도 아닌 과자 굽는 일이 다른 사람들에게 힘을 주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는 일 년이면 한두 번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오늘은 기도드리고 싶은 과자가 구워졌어요. 이런 과자를 굽는 것은 일 년에 한두 번밖에 없어요. 손님에게 팔기에는 너무 귀한, 그래서 하나님께 고이 바쳐서 제사 드리고 싶은 과자예요.”

 

별 것도 아닌 것 같은 작은 일이라 할지라도 최선을 다하는 삶의 모습이 아름답고,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자신이 최선을 다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변명으로 환경재능부족한 물질’, ‘건강등을 내세웁니다. 아마도 자신에게 생명의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모는 것이 실제로 가장 큰 이유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일을 주관하시고 섭리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우리들에게 이런 변명은 핑계에 불과합니다. 만일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어느 정도인지를 안다면 결코 이러한 핑계로 허송세월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선한 일에 쓸 수 있는 돈이 항상 있다든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일할 수 있는 건강이 항상 있지도 않고 모두에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일할 수 있는 기회와 시간도 항상 있는 것도 모두에게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까?

 

본문에는 사도 베드로를 통하여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처럼 종말이 가까워 오는 시대의 사람들에게 증거 하는 말씀입니다. 내용 중에는 기도사랑대접하는 것봉사’, 이 네 가지가 대표적으로 등장합니다. 이 네 가지는 오늘 성도된 우리가 생활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하는 생활의 법입니다. 그리고 말씀 속에는 이것을 행하는 방법과 이렇게 해야 할 이유가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1. 먼저, 네 가지의 생활의 법과 행하는 방법을 살펴봅시다.

 

이 네 가지의 생활 법을 살펴보면서 공통점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첫 번째는 기도입니다.

본문 7절의 말씀처럼, 마지막이 다가올 때의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깊이 유지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세상에 사는 동안 영적인 전투를 수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6:12절에서,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고 했습니다. 즉 우리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 영들과 그 세력과의 싸움입니다.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길은 기도뿐입니다.

 

예수님과 세 제자가 변화 산에 올라가셨을 때, 산 밑에서 기다리고 있는 아홉 제자들에게 어떤 사람이 귀신들린 아들을 데려와서 고쳐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내려오실 때까지 고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을 쫓아내시고 고쳐주셨습니다. 후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선생님, 우리는 왜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까?” 그 때 예수님께서,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다.”(9:29)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영의 삶이 지배하는 성도들에게는 기도없이는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이는 형식적인 기도, 의무적인 기도가 아닌 자신의 모든 힘을 기울인 기도를 하라는 말씀입니다.

 

두 번째는 사랑입니다.

사랑에 대하여는 더 말씀드리지 않아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아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것입니다.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3:18절입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본문8절을 보십시오. “열심으로 서로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열심으로라는 말은 경기에서 이기기 위해서 힘을 다 쓰고 있는 선수의 팽팽한 근육을 표현할 때 사용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젖 먹던 힘까지 쓴다.’는 말입니다.

 

세 번째는 대접하는 것입니다.

본문9절입니다.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라고 하셨습니다. 대접한다는 것은 섬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대접은 어떤 특정한 대상에게가 아니라, 서로가 대상이 됩니다. 대접함에 있어서는 원망 없이해야 합니다. 즉 부담과 근심으로 인한 시비 없이 편안하고 친절하고 알맞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타인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대접을 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3:23절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해야 할 이유는 지극히 작은 소자에게 봉사하는 것이 주님께 하는 것’(25:40)이기 때문입니다. ‘지극히 작은 소자,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소외 된 사람들과 약하고 보잘것없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네 번째는 봉사하는 것입니다.

봉사상대를 섬기는 것이며, ‘자기를 희생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은사의 사용에 대하여 함께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은사를 주신 목적이 서로 봉사하도록 하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은사는 서로 비교하거나 자신의 유익과 자랑을 위해 주신 것이 아니라, 서로 봉사하여 지체인 교회를 세우기 위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봉사를 함에 있어서의 법칙은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는 것입니다. ‘공급하다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아낌없이 주는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즉 봉사는 하나님께서 아낌없이 공급해 주시는 것을 염두에 두고 힘껏 해야 합니다.

 

이 네 가지 생활의 법에서 공통점을 찾으셨습니까? 그 공통점은 최선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사와 재능과 재물과 시간과 능력을 다하여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유명한 조각가, 미켈란젤로가 시스틴 채플이라는 교회당의 천정 벽화를 손수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 천정은 까마득히 높았기 때문에 그 아래에서는 사실 천정의 모습이 한 눈에 정확하게 파악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그는 이 천정의 벽에 가까이 붙어서 선 하나하나를 정성을 다해서 그리고 있었습니다.

 

이 광경을 아래에서 물끄러미 바라보던 친구 한 사람이 말 했습니다. “여보게, 여기서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네. 그냥 적당히 해두고 내려오게나.”그러자 미켈란젤로가 천정에서 그 친구를 향해서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여보게, 이 그림을 다 그린 후에 이 그림의 성과가 어느 정도인가를 제일 잘 아는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그야 자네겠지.” “맞네. 내가 알고 하나님이 아시는 한 나는 최선 이하로 일할 수는 없네.”

 

자기의 삶은 자신이 가장 잘 압니다. 뿐만 아니라 삶의 진실성과 정직성은 사람의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께서 더 잘 아십니다. 자신의 삶에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지, 주어진 시간 속에서 주어진 과제를 위해 얼마만큼 최선을 다했는지 하나님이 아시고 자신이 압니다.

 

2. 우리가 이렇게 행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본문11절 후반절입니다.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하는 것이것이 종말이 가까워 오는 시대에 사는 우리가 기도하고 사랑하고 대접하고 봉사해야 할 이유입니다.

 

내가 나의 모든 것을 다하여 주어지는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도록 행하면, 하나님께서는 나를 위하여 일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성도인 우리에게 원하시는 뜻입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미련하여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이익과 평안을 먼저 생각합니다. 당장 내가 편하고 이익이 되면 하나님의 말씀쯤은 별로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어느 날 주님이 나를 부르시면 어떻게 주님을 만나겠습니까?

 

오래 전 신앙계라는 기독교 잡지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복음성가 가수인 김민식 집사의 신앙스케치에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아주 간단한 시험문제였습니다. 그 문제입니다.

아버지가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이 심부름을 꼭해야만 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지혜로울까요? 알아 맞혀 보세요.’

 

1)말로 할 때 한다. 2)조금 얻어맞고 한다. 3)많이 얻어맞고 한다. 4)끝내 버티다가 쫓겨난다.

 

여러분은 몇 번에 동그라미를 치겠습니까?

두 말할 필요도 없이 1)번이 가장 지혜롭다는 데 의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번처럼 사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만약 4)번에 동그라미를 친다면 이건 도무지 소망이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3)번 형의 사람이 많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동그라미야 1)번에 쳤지만 실제의 생활은 3)번처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성입니다. ‘웬만해선 저들을 막을 수 없다.’라는 영화제목처럼 웬만큼 맞아서는 잘 돌아서지 않는 것이 사람의 죄악성입니다.

 

지금 사순절기간입니다. 아무런 대가도 없이 나에게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행복의 나라를 선물로 주신 주님의 고난을 생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의 고난과 십자가 죽으심이 나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감사함과 기쁨으로 이 일들을 행해야 할 것입니다.

 

어찌되었건 여러분의 생명과 모든 삶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을 구주로 믿는 순간에 주님의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주님의 것을 주님을 위해 사용함으로서 신실한 청지기로 하나님께 인정받고, 이 땅에서도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은혜를 맡은 청지기 /벧전4:7-11/ 곽선희 목사

2014-11-23 23:47:06

 

의학을 공부하고 의사가 되려는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진 '히포크라테스 선서' 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의사가 될 때 이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다함께 하고 의사가 됩니다. 그 내용 중에 둘째 항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나의 은사에 대하여 존경과 감사를 드립니다' 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의사는, 모름지기 의사라고 하는 직()이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직이라고 생각을 하고, 이 환자를 돌보는 일보다 더 고귀한 일은 없다고 생각을 하고,

 

그 고귀한 일을 내게 맡겨 주신 거에 대하여 내가 맡게 되는 데 대해서 감사하고, 존경과 감사를 항상 지니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의사입니다. 의사의 입장에서는 사람을 돌보고 병을 치료하는 이보다 더 소중한 일은 없습니다. 그러기에 나 또한 이런 일에 쓰여진다고 하는 것이 자랑스럽고 고귀하고 영광된 것입니다.

 

그것이 의사입니다. 만일에 의사가 환자를 돌보고 이거 외에 일을 더 좋게 생각을 하고, 돈 많이 버는 직업을 좋게 생각하고, 권세를 누리는 것을 더 좋게 생각을 하고 여기저기 넘보고 있다면 그건 의사답지 못합니다. 아니, 그건 의사가 아닙니다.

 

인간은 생일이 둘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생리학적 생일입니다. 여러분이 가지는 생년월일이라고 하는 것,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바로 그날 그 시가 여러분의 생일이 될 것입니다 마는, 두 번째 생일은 나의 존재의 이유와 생이 주어진 목적을 깨닫는 시간입니다.

 

나는 왜 세상에 존재하나, 나는 무엇을 위하여 이 땅에 보냄을 받았는가, 그 의미를 깨닫는 바로 그날이 두 번째 생일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이 두 번째 생일을 맞지 못하고 엄격히 말하면 사람다운 생을 출발도 못하고 끝나는 그러한 유감된 사람들도 많습니다.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과 그 섭리를 믿습니다. 그 거룩한 경륜 속에 내가 태어난 것이올시다. 역사와 나의 개인적 관계를 믿습니다. 이 큰 역사 속에 나라고 하는 작은 존재가 꼭 필요합니다. 해야할 일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우리는 태어났습니다.

 

그런 고로 여기에 사명이 있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여기까지 살아왔습니다. 뭐 이런 고생도 하고 저런 일도 있었고 실패와 성공, 배신과 저신뢰,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을 겪으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여러분 어찌 생각하십니까? 그게 버려진 과거입니까? 잘못된 과거입니까? 적어도 소명을 아는 사람은 바로 이 시간을 위하여 지난날이 있었다는 거예요.

 

모세가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듣는 순간 그는 지난날의 80년의 생이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왜 바로의 궁전에서 40년을 살았는가? 왜 광야에서 40년을 목자생활을 했는가? 이 모든 것이 합쳐서 오늘을 위하여 오늘과 내일을 위해서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거기서부터 나라고 하는 존재의 새로운 생이 출발되는 것이올시다.

 

여러분, 오늘 본문 10절에 보면은 '각각 은사를 받은대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생은 주어진 생입니다. 나의 생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나게 해서 내가 태어난 것일 뿐이지 내가 아버지 어머니를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그 시점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나는 주어진 생을 철학가의 말대로는 던져진 생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각각 주어진 은사가 있습니다. 여기 소명이 있고 사명이 있는 겁니다. 무엇인가 할 수 있도록, 무엇인가를 해야만 되도록 은혜의 선물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을 위하여 주께서는 많은 은사를 은혜의 선물을 주셨던 겁니다. 오늘 본문에는 은혜를 맡은 청지기라는 말로 시작이 됩니다. 오이코노모스, 청지기라는 말은 옛날 번역에는 집사라고 번역을 합니다. 이 집사는 어떤 사람이냐 하면 타율성이 있고 자율성이 있습니다.

 

집사가 하는 모든 일은 다 주인을 위한 겁니다. 주인이 있어서 내가 있고 내가 주인을 위해서 존재하는 겁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주인이 맡겨 준 것이 있습니다. 요만큼의 영역을. 재산도 심지어는 하인도 혹은 어떤 권력을 맡겨주었습니다. 그 한계 안에서는 자율적입니다.

 

그는 자유입니다. 자기의 책임을 자율적으로 감당해야됩니다. 이게 청지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었습니다.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은혜가 곧 이제는 사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고로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아야 합니다. 내게 주신 은혜가 오늘은 소중한 결실을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은혜를 맡은 청지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서로' 라고 하는 말이 세 번 있습니다. 서로! 서로 서로라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133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우리 인간들이 생각하는 '서로'라고 하는 관계는 이것이 서로 하나의 큰 계약적 관계요 인간적 관계요 행적관계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와의 수직적 관계의 결과로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내가 너희를 사랑했노라. 그런 고로 서로 사랑하라." 바꾸어 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로부터 사랑을 받았습니다. 엄청난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런고로 서로 사랑해야 됩니다.

 

우리의 사랑은 원인이 아닙니다. 결과일 뿐입니다. 그 퍼스트 코잘리티, 첫 번 원인은 그에게 있습니다. 그가 우리를 사랑했고 그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고 나를 구속하셨습니다. 그런고로 그 사랑의 근거해서 우리는 그 결과로 서로 사랑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 받았다' 하는 것은 은혜요, '사랑하라' 하는 것은 바로 은사올시다. 서로 사랑하라.

 

오늘 본문에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열심으로 서로 사랑하라.' '열심히' 라는 말을 헬라 원문대로 좀 소개하고 싶습니다. '엑테네' 라고 하는 말인데요 이 말은 '잡아늘인다' 하는 뜻이에요. 그냥 보통 열심히 아니에요. 잡아늘인다. 고무줄이 있어요. 끊어지지 않을 정도로 잡아늘여요.

 

스프링을 잡아늘여요. 이제 보세요. 경마로 쓰여지는 말, 그 말이 가지고있는 자기 능력이 있습니다. 이것을 극대화하려고 좋은 음식을 먹입니다. 잠을 재우고 훈련을 시키고 운동을 시키고 잘했다가 경마장에 나가는 날 이걸 타고 나갈 때 그 잘 달리는 말을 또 때립니다.

 

계속 때리면서 그 능력을 극대화하는 것이에요. 그 능력을 잡아늘이는 것이에요. 여러분, 여러분의 사랑의 영역을 생각해 봅시다. 내가 얼마까지 사랑할 수 있습니까? 사랑의 영역, 사랑의 힘을 잡아 늘여!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구요?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허다한 죄를 덮어요. 죄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허물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사랑해야 되요. 여러분, 여러분 생애에 한번 이렇게 화끈하게 사랑해 본 때가 한번 있지 않아요? 한참 뜨겁게 사랑할 때, 정신없이 사랑할 때,

 

추운 것도 모르고 더운 것도 모르고, 뭐 작으면 작은 대로 좋고 크면 큰 대로 좋고, 실수하면 실수하는 대로 예쁘고, 그냥 무턱대고 마냥 좋기만 한 때가 있었지요? 없었어요?

 

그러면 불행한 거죠. 그래도 그렇게 한번 미쳐본 때가 있잖아요, . 이게 바로 사랑이 잡아 늘여진 사랑이거든요. 그 순간에는 허물이란 없어요. 실수도 없어요. 죄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열심으로 사랑하는 거예요. 열심으로 사랑하는 자는 피곤함이 없어요. 허물이 보이질 않아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요. 그저 예쁘고 아름답고 행복하고 그거예요

.

에리히 프롬(Erich Fromm) 이라고 하는 심리학자가 그 유명한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을 써서 우리 많은 사람들이 다 읽고 읽고 읽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디 아트 오브 러빙(The Art of Loving)'이라는 책인데요 거기서 사랑의 네 단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어린아이 같은 사랑. 어린아이는 사랑 받기 때문에 사랑합니다. 사랑 받고 사랑하고, 그게 어린아이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들 여러분 잘 위해주다가도요 잘 좋다고 하다가도 조금만 자기 비위에 안 맞으면 "아빠, 미워!" 그러잖아요.

 

아 그러면 정이 뚝 떨어져요. 어느 순간에 "엄마, 미워!" 막 그런다 말이예요. 왜요? 사랑 받고 사랑해야겠는데 받는 게 마음에 안 드는 거예요. 이게 유치한 사랑이에요. 어린아이들은 그래요. 유치한 사람은 이렇습니다. 그런가하면 성숙한 사람은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합니다.

 

자기 사랑으로 상대방을 덮어요. 이유 없어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거예요. 또 성숙하지 못한 사랑은 그대가 필요하기 때문에 사랑한다 하는 논리가 있어요. 내게 필요하거든요. 혼자살기 힘드니깐 저거 하나 필요하거든요. 내가 혼자 살 수 없으니깐 저거하나 필요하거든요.

 

내가 필요해서 남을 사랑하는, 극히 율법적이고 계약적 이고 이렇죠. 아주 실리적이에요. 이런 사랑이 이젠 문제가 되죠. 이 에로스라는 거죠. 그런가 하면 성숙한 사람은 그대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대가 내게 필요하다. 사랑의 대상으로 필요해요. 그가 나에게 어떻게 대하느냐는 상관이 없어요

 

. 나는 너를 사랑함으로만 내 삶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에요. 그런 고로 네가 필요해요. 사랑의 대상이 없으면 내가 사랑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않으면 나는 내가 아니니까 그래서 사랑합니다. 이게 성숙한 사랑이요.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열심으로 서로 사랑하라."

 

두 번째는 "서로 대접하라" 그랬어요. 대접한다는 말, '필록스세노이'라고 하는 헬라말을 조금 설명하고 싶습니다. 여기 '필로' 라는 말은 사랑이라고 하는 말이고, 여기 '세노이'라는 말은 행동을 말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것을 번역할 때 호스피탈리티(Hospotality) 라고 번역합니다.

 

말로 사랑하는 게 아니라 대접하는 거예요. 음식도 대접하고 여러 가지로 잘, 내가 사랑하는 자가 필요한 부분을 내가 채워주는 거예요. 구체적으로 사랑하는 거죠. 이게 바로 대접이라는 것이죠. 행동적 사랑을 말합니다. 12세기의 수도사였던 꼴레르보 버나드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의 책 가운데 더 러브 오브 갓(The Love of God) 라고 하는 책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함에 있어서 우리가 시험에 빠지고 유혹에 빠지는 수가 있다. 이렇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네 가지, 첫째는 실망입니다. 여러분, 참사랑에는 실망이 없습니다.

 

어느 순간에라도 실망했다면 당신의 사랑은 거짓말이요 그건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사랑에는 실망이 없습니다. 무한하게 무한한 미래를 바라봅니다. '대통령의 어머니들'이라고 하는 책이 있어요. 미국의 11대 대통령의 그를 대통령 되게 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어머니다 그거죠. 그 어머니들은 누구들이냐?

 

그 어머니 특징이 뭐냐? 그 세 가지로 말하는 중에 그런 말을 합니다. 그 어머니들은 낙심한 일이 없어요. 자식의 실수를 보면서도 절대로 실망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사랑의 실천을 현실로 보여주었어요. 손님을 대접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돌보고 자선사업을 하고, 그런 것들을 보여주었어요.

 

실천했어요. 그게 다른 점이에요. 사랑은 말이 아니에요. 절대로 사랑에는 실망이 없어요. 그런데 쉽게 실망하는 것, 그것은 바로 참사랑이 아니기 때문이요. 사랑에는 절대로 절망이나 실망이 없는 것이요. 또한 그 사랑은 사람들의 칭찬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마음이 없어요. 누가 뭐라고 하든 말든 알아주든 말든 칭찬과는 상관이 없어요. 그 칭찬 받고자 하는 마음, 그게 병든 사랑이요. 사랑의 시험이요. 또 하나는 위선이에요. 사람의 형식만 남고 내용은 없어요. 명예를 좋아하고 야망을 가졌을 때 사랑은 위선으로 빠집니다.

 

또 하는 핑계올시다. 사랑에는 핑계가 없어요. 참사랑에는 핑계가 없어요. 하지 말아야 될 이유, 사랑할 수 없는 이유만 생각을 해요. 벌써 그건 사랑이 아니에요. 사랑할 수 없는 이유는 없어요. 어떤 핑계도 없어요. 전적으로 바치는 것이에요.

 

그게 행동으로 나타나는 거야. 그래서 서로 대접하라. 특별히 오늘 본문에 원망 없이. 사랑의 행동에 무슨 원망이 있어요. 대접하는 일에 무슨 원망이 있어요. 원망 없이 서로 대접하라.

 

요새 유행어가 있습니다. 요새는 모든 것을 이렇게 전부 과학적으로 한다해서 소위 지수라는 말을 많이 써요. 평가지수, 여러분 한번 스스로 생각해봅시다. I.Q.라고 하는 지능지수, E.Q.라고 하는 감성지수, H.Q.라고 하는 유머지수라는 것이 있어요. 요새 유머가 좋아야 출세합니다.

 

H.Q.라고 합니다. 그것보다 J.Q.라고요 잔재주 지수, 이거 좋은 거 아니에요. 그런가하면 O.Q., 오버커밍 쿼션트(Overcoming Quotient) 아주 중요한 얘기예요. 극복하는 지수, 어려운 일들을 넉넉히 극복하는 극복력 지수가 높아야 되요. 여기 까진데요.

 

제가 하나 더 생각해 보았어요. 그것은 S.Q. 봉사지수. 당신은 얼마나 봉사하고 있습니까? 당신은 얼마나 봉사하는 수준을 가지고 있습니까? 봉사하는 사람의 수준에 있느냐 그 말이에요. 봉사지수. 그래요 서로 대접하라.

여러분, 요새 우리는 이 대접하는 일이 점점 없어져가요. 자기밖에 몰라요. 정성을 다하여서 손님을 대접하고 낯선 분들을 대접하고 환자를 방문하고 하는 행동적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가하면 서로 봉사하라. 봉사하라 이거 디아코니아, 서비스를 말하는 거요. 요한복음 1314절에 보면, 내가 너희들의 발을 씻겼다. 그런 고로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마땅하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어요.

 

그는 세상에 오실 때부터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라 섬기려하고 대속물로 주려고 왔다고 말씀하셨어요. 철저하게 그는 섬기는 자로 오셨고 섬김으로 끝을 냈어요. 그렇다면 우리는 섬김을 받은 자로서 섬기는 자세로 살아갈 것이에요.

 

크라잉 벨이라고 하는 상담학자의 웰빙(Well Being) 이라고 하는 책에 보면 네 가지 힘을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가 파워 오버(Power Over), 지배력! 파워 어겐스트(Power Against), 공격력! 파워 포(Power For), 베푸는 능력! 그리고 파워 위드(Power With), 협력하는 능력. 협력하는 능력이 꼭 필요합니다. 우리는 섬기는 마음이 있어야 돼요. 여기 문제가 있습니다.

 

잔잔한 감동을 일으킨 책 중에 '눈물이 나올 만큼 좋은 이야기'라고 하는 작은 책이 있습니다. 이것은 일본의 한 민간단체가 30년 동안 작은 친절 운동을 일으킨 이야기들을 써놓은 책입니다. 한번 들어보시겠어요? 그 중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중소기업사장으로 있던 분이 사업에 실패했어요. 그래가지고 막막하게 되어서 57세나 된 사람이 이젠 맞벌이를 하게 되고 막노동을 하게 됩니다. 집 가까이서 할 수도 없어서 타향에 가서 저 막노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일하던 중에 점심시간이 되어서 점심을 먹으려고 골목을 골목으로 돌아서 좀 작은 집에 가서 싼 음식을 먹어야겠다 하고 갔는데 문을 딱 들어서고 보니까 안에는 그게 아니에요. '아차! 잘못 왔다. 이거 비싼 집에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 그만큼 좋은 집이었어요. 그러나 왕년에 사장을 지내던 양반이라 다시 문닫고 돌아가기는 자존심이 허락지를 않아요. 그래 그냥 들어서 보니깐 점잖은 양반들이 넥타이를 메고 앉았는데 자기 옷이 초라하고 그 분위기에 도저히 어울리질 않아요.

 

너무 창피하고. 그래 저 구석에 가서 앉았어요. 그리고 몸 둘 바를 몰랐어요. 그런데 어떤 회사 여직원 같은 예쁜 아가씨 하나가 가까이 다가오더니 물주전자를 가지고 와서 물 한 컵을 따라 주면서 "물 마시세요" 하고 빙그레 웃었어요.

 

이 사람은 그 시간 눈물이 솟아오르는 거예요. 그 고마움에 복 받쳐서 울었다는 거 아닙니까? 눈물이 나올 만큼 좋은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보니까 울지 않는데요 보니깐. 그 처지에서 생각해 보세요. 기가 막힌 것입니다.

 

우리의 선한 일들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참으로 우리의 봉사를 우리의 섬김을 기다리는 사람들 속에 우리가 살아갑니다. 인간의 성공은 은혜를 아는데 있고 은혜를 베푸는 데 있습니다. 인간의 행복은 자기에게 주어진 은사를 아는데 있고 은사를 따라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여러분, 사랑하고 대접하고 섬기는 삶이 최상의 가치를 사는 길이란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얼마를 가졌느냐가 아니에요. 얼마를 베풀었느냐. 당신은 얼마를 섬기며 살았느냐. 이걸 묻고 싶어요.

 

오늘 본문에는 특별히 이렇게 말합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정신을 차리고 기도하라. 열심으로 사랑하라' 그랬어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습니다.

이제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열심으로 사랑하고 구체적으로 대접하고 서로서로 봉사하면 돼요. 거기서 우리의 삶의 마지막을 가장 아름답게 의미 있게 꽃피워가야 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확실히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운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주여, 열심으로 사랑하고 서로 대접하고 원망 없이 대접하고 또한 서로 봉사하는 그런 생으로 보다 더 높은 의미의 생을 이제는 살아가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벧전4:7-11/ 말세와 성도의 생활 /한경직 목사

2014-08-25 14:53:01

 

이미 읽은 말씀 가운데서 베드로전서 47절을 다시 봉독하겠습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여기에 만물의 마지막이란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동양에도 물유본말하고 사유종시라(物有本末 事有終始)’ 물건에는 근본과 마지막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입니다. 오늘이 금년 중 마지막 주일입니다. 며칠 후에는 금년의 마지막 날 곧 1231일이 올 것입니다.

 

인간의 삶에도 마지막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엄숙한 사실을 알고 살아야 옳고 지혜롭게 살 수 있으며 후회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개인으로는 종말의식이 필요하고, 시대적으로는 말세의식이 필요합니다.

 

성경은 말세가 있음을 분명하게 가르칩니다. 또 사실 우리는 말세에 산다는 사실도 명확히 깨우쳐 줍니다. 그리고 한 걸음 나아가 성경은 말세가 가까워올수록 여러 가지 징조가 나타날 것을 또한 예고하여 줍니다.

 

가령 말세에는 적그리스도가 나타나리라고 교훈합니다. 아마 그 뜻은 정면으로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개인이나 집단을 지적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우리가 사는 이 20세기야말로 기독교를 정면으로 반대하고 공격하는 운동이 일어난 것이 사실입니다. 유물론적, 무신론적, 공산주의 운동은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역사상 가장 큰 적그리스도 운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성경은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일어나 믿는 자들을 미혹하고 그릇된 길로 인도하리라고 경고합니다. 오늘날 세계 교회와 우리 한국 교계를 미혹하는 온갖 사이비 종교인들이 일어나 혹세무민하며, 할 수 있으면 택함을 받은 자라도 그릇된 길로 인도하려고 온갖 거짓 종교인 또는 종파가 우후죽순으로 일어나 믿는 이들을 혼미케 하는 것이 또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말세의 징조를 말할 때에 한 가지 잊을 수 없는 사실은, 20세기에 들어와서 수천 년간이나 사방에 흩어졌던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성지로 모여들게 되었고, 사실 1948년에는 이스라엘 나라가 온전히 회복되었습니다. 이 사실이야말로 성경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모두 말세의 한 징조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말세에는 여러 가지 천재와 지변이 격증하여 사람을 괴롭힐 것이라고 성경에는 경고하였는데, 사실 우리가 사는 이 20세기에 들어와 이러한 현상이 점점 증가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몇 해 전, 미국 안에서 헬렌산의 대폭발을 비롯하여 최근에 콜롬비아에서 일어난 폭발뿐 아니라, 도처에서 대지진도 일어나고, 여러 해 전에 일어난 동경 대지진을 비롯하여 금년 멕시코의 대지진에 이르기까지 재난이 격증하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의학은 발달되었다고 하나, 전에 없던 무서운 질병도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소위 후천성면역결핍증 같은 것은 전에는 듣지도 못했던 무서운 병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모든 사실도 모두 성경에서 가르치는 말세의 징조인 듯합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성경을 떠나 세계 일반 학자들의 입에서도 종종 말세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가령 생태학자들은 지적합니다. 과학이 발전되는 것은 인류의 생활을 향상시키는 좋은 일이나 반면에 또한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사실이 많다고 지적합니다. 현대 인류의 당면하는 큰 문제 가운데 하나는 오염문제입니다. 물이 더러워집니다. 어느 도시나 마음 놓고 마실 수 있는 식수가 점점 큰 문제로 대두합니다. 그뿐 아니라, 물의 오염으로 곡물이 위협을 받고 바닷속의 각종 생물과 어물이 죽어갑니다.

 

또 과학이 발전할수록, 자동차가 많아질수록 공기가 오염됩니다. 이 공기오염은 인간을 비롯하여 모든 생물까지 곧 수림까지 삼림까지 그 생존을 위협합니다. 어떤 학자는 지적합니다. 삼림은 맑은 산소를 공급하는 자원인데, 수림이 녹지대가 점점 세계 도처에서 쇠잔하여지므로 근본적으로 모든 생물의 요소가 되는 산소 공급이 점점 결핍되리라고 염려합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자원이 점점 고갈됨을 염려합니다. 가령 현대 생활의 필수요소인 석유는 점점 고갈되어 20~30년 내로 모두 소모되리라고 합니다. 석탄 자원도 한정이 있습니다. 대체 에너지가 발견되지 아니하는 한 실로 절망적인 상태가 될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현재 세계 인류가 당면하는 아마 제일 큰 문제는 인간성의 타락과 세계 인류의 대립과 분쟁과 그리고 핵무기일 것입니다. 과거에 걸어온 인간의 발자취를 더듬어 볼 때에 이렇게 양분된 세계에서 평화가 끝까지 보존될지 큰 의문이며, 만일 세계적 전쟁이 발발되면 그것은 핵전쟁으로 확산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게 되면 문자 그대로 인류 최종의 날이 오지 아니할까 염려가 됩니다.

 

오늘의 세계 인류는 이러한 공포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말세 의식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사실 성경으로 보나 현대 세계 실정으로 보나 우리는 모두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운 시대에 살고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시대적으로 뿐만 아니라, 우리 하나하나의 개인 생활로 보면 우리 육신은 또한 마지막 날이 있습니다. 죽을 날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종말의식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모두 말세 의식 또 개인적으로는 종말 의식 가운데 살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 믿는 이들이 어떠한 생활을 하여야 할 것입니까? 이점은 깊이 생각해야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성경 말씀은 이점에 대해서 분명히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첫째는,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가르쳐 줍니다.

 

어느 때보다도 정신 차리고 신앙생활을 할 때요, 간절히 기도하면서 신앙생활을 할 때입니다. 이 말씀은 사도 베드로를 통하여 주시는 교훈인데, 사실 그분은 자기 경험을 좀 돌아보면서 주시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과 같이 겟세마네 동산에 가서 조용한 곳에 이르러 주님은 너희는 이곳에서 깨어 기도하라말씀하시고, 자신은 좀더 들어가 피땀을 흘리시면서 기도하시다가 돌아와 보니 제자들은 모두 졸고 또 잤다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도 물론 잤습니다. 예수님은 그날 저녁이 자기 지상 생활의 마지막인 것을 기억하시면서 부탁하였건만, 제자들은 그 종말 의식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주님이 다시 부탁하셨지만 별 효과가 없었습니다. 그때에 반역자 유다는 원수의 무리를 데리고 와서 예수를 잡아갔습니다. 졸고, 자던 제자들은 뿔뿔이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베드로 자신은 주님이 심판받으시던 대제사장 앞문 뜰에까지 따라는 갔으나, 그곳에서 불행히도 예수를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하였습니다. 실로 대참패이었습니다.

 

? 종말의식이 없이 정신 차리고 기도하지 않던 제자들은 이렇게 크게 위기가 올 때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여기에 오늘날 믿는 우리에게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며 기도하라고 권합니다. 우리도 말세에 삽니다. 우리 하나하나에게도 언제 마지막이 올지 모릅니다. 이렇게 사고 많은 세상에 안전한 날이 어느 날입니까? 안전한 날은 하루도 없습니다. 이러한 현실 아래서 성경은 부탁합니다. 정신 차리고 살라고, 그리고 간절히 기도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라고 부탁합니다.

 

매일 기도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옛날 다니엘을 생각하세요. 그렇게 바쁜 이라도 기도하는 시간을 지켰습니다. 또 마음으로는 언제나 기도하는 습관을 양성해야 합니다. 쓸데없는 공상을 버리고, 또 무슨 어려운 문제를 당하면 근심이나 염려만 하지 말고, 깨어 기도할 것입니다. 믿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하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기도한 것은 이룬 줄로 믿으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리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또한 약속하십니다.

 

말세에 사는 우리들에게 둘째로 주신 권면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열심히 서로 사랑하라그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이 말씀을 주의해서 읽어 보세요. 우리 성도들 생활에 힘쓸 것이 여러 가지입니다. 힘쓸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무엇보다도 우리 믿는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기를 힘쓰라고 권면합니다.

 

여러분, 사랑이 어떠한 것임을 다 아십니다. 성경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사랑은 온유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합니다. 사랑은 허물을 덮어 줍니다. 이렇게 성도들이 서로 사랑하는 생활을 하면 그 교회는 백 명이 모이든지 천 명이 모이든지 만 명이 모이든지 언제나 화평합니다. 이러한 사랑을 힘쓰는 가정은 그 가정이 화평합니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란 말이 옛날부터 내려오지만 사실 지나 보니 교화만사성(敎和萬事成)’입니다. 교회가 화평하면 모든 일이 저절로 잘 됩니다. 전도도 잘 됩니다. 교육사업도 잘 됩니다. 복지사업, 자선사업도 잘 됩니다. 말세에 사는 우리는 먼저 성도들끼리 서로 사랑하여 화평한 교회로 꼭 지킬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나도 축복을 받고, 온 교회가 축복을 받고, 나아가서 우리 민족을 구원할 수 있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의 권면이 있습니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선한 청지기가 되어 서로 봉사하라고 하십니다. 여기에서 청지기란 말을 주의하세요. 전 성경의 교훈은 이 진리를 가르칩니다. 곧 청지기의 원리를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은 만물의 소유자요, 인간은 잠깐 세상에 사는 동안 하나님의 소유를 대신 관리하는 관리자 곧 청지기뿐이라고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사실 옛날부터 내려오는 말대로 인간은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입니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갑니다. 사는 동안 다만 하나님의 것을 대신 관리하다가 가는 것뿐입니다. 그것은 물질도 그러하고, 재능도 그러하고, 지식도 그러하고, 모든 것이 그러합니다. 그런데 관리자는 주인의 뜻대로 관리하여야 합니다. 제 뜻대로 못합니다. 관리자는 모든 것을 처리한 후에 주인에게 보고를 해야 합니다.

 

인간이 깊은 의미에서 또한 그러합니다. 사는 동안 하나님 주신 물질이나 재능이나 지식이나 권세나 모든 것을 하나님 뜻대로 사용한 후에 하나님께 돌아가 심판받을 때가 옵니다. 이것을 최후 대심판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분명한 성경의 교훈입니다.

 

내가 무엇을 얼마나 소유하였든지, 내가 얼마나 돈을 벌었든지 꼭 하나님의 뜻대로 그 물질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을 봉사하라고 성경은 가르쳐 줍니다. 그래야 이다음에 하나님 앞에 돌아가 칭찬을 받습니다. 선한 청지기가 있는가 하면, 이 세상에는 악한 청지기들도 많습니다. 말세에 사는 우리는 심판 받을 날이 점점 가까워옴을 미리 깨닫고 선한 청지기가 되라고 성경은 권면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권면이 하나 더 본문에 있습니다. 그것은 청지기는 자기에게 영광을 돌릴 수는 없습니다. 청지기는 만물을 거저 주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서 무슨 좋은 일을 하였든지 그것으로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고, ‘내가 이런 일을 했다는 생각을 하지 말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고 성경은 권면합니다. 그래야 계속해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영원한 나라에서 또한 상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문자 그대로 말세에 살고 있습니다. 또 인간의 삶에는 마지막이 꼭 옵니다. 이 엄숙한 사실을 기억하고, 우리 성도들은 성경의 교훈대로 신앙생활을 바로 하도록 힘을 써야 할 것입니다.

 

항상 정신을 차리고 살며 기도하십시다. 무엇보다도 서로 사랑을 배워 화평한 가정, 화평한 회사, 화평한 교회, 화평한 사회, 화평한 나라를 이루도록 힘쓰십시다. 내가 무슨 축복을 받았든지 물질이나 재주나 지식이나 지위를 불구하고, 선한 청지기로 봉사하며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십시다. 1985년 이 마지막 주일에 우리 모두 이러한 축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아버지, 1985년도 거의 지나고 오늘 마지막 주일을 당해서 성경의 교훈을 새삼스럽게 저희들이 지금 다시 들었습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워오는 이러한 때에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신앙생활을 하며 기도를 힘쓰고 무엇보다도 서로 사랑해서 화평을 힘쓰고 내가 무슨 은혜를 받았든지 물질이나 재능이나 시간이나 집이나 무엇을 받았든지 선한 청지기로서 하나님의 뜻대로 모든 일을 감당하고 또한 최후로 무슨 일에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이런 생활을 할 것을 저희들이 다시 한번 들었사오니 듣기만 하지 말고 우리는 꼭 이 교훈대로 생활해서 금생과 내생에 사실 큰 축복을 받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마지막을 준비하는 삶 /벧전4:7-11

2011-09-01 16:07:12

 

핸드폰하면 세계 최고의 기업으로 핀란드의 노키아를 꼽습니다.

그런데 시대가 변하면서 스마트폰이 등장하고 애플의 아이폰은 순식간에 세계 스마트폰 시장을 장악했습니다.

 

그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이제 아이폰은 하나의 문화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아이폰을 만든 애플사의 CEO스티브 잡스는 스탠포드대학 졸업식 연설문에서 자신이 17세 때 읽었던 자신의 생애에 큰 전환점을 이루게 된 경구를 소개합니다.

 

하루하루를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산다면, 언젠가는 바른 길에 서 있을 것이다

 

스티브 잡스는 이 글에 감동을 받고 지금까지 30년을 넘게 매일 아침 일어나 거울을 보며 자신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지금 하려는 일을 할 것인가?”

 

이 질문에 아니오!'” 라는 대답이 나온다면 다른 것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고 합니다.

 

실제로 시티브 잡스는 췌장암으로 투병하면서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명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넓게는 세계적인 종말의 날과 좁게는 인생의 마지막 날을 늘 생각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을 기다리는 마지막 날은 참으로 중요한 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순간순간 다가오는 마지막 날을 의식하며 오늘이라는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순간을 결코 헛되이 보내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지난 주에는 한국 교회에 큰 발자취를 남기신 온누리교회의 하용조 목사님이 하나님의 곁으로 가셨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분은 아니지만 평소 존경하는 목사님으로 하목사님은 오로지 선교에 대한 열정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선교를 위해 아낌없이 쏟아 부으시며 불꽃과도 같이 사셨던 분이셨습니다.

 

7번의 대수술을 받고 한주에 세 번씩 투석을 받으면서도 오로지 복음에 대한 열정 하나로 살아가시다가 짧은 생애를 마치시고 하나님의 품으로 가신 것입니다.

 

하목사님의 간증 가운데 이러한 열정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사역과 주어진 시간이 항상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하면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데 있어 자신의 연약함과 건강까지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는 고백이었습니다.

 

정말 그 말씀처럼 사시다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으신 것입니다.

 

여러분 원하기는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지금 내가 드리는 찬양, 내가 드리는 기도, 내가 드리는 헌신이 마지막일지 모른다는 간절함을 안고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라고 증거합니다.

 

여기서 가까이 왔으니라는 원어적인 뜻은 임박한 상황을 표현하는 것으로 베드로는 박해를 받는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 낙심치 말고 소망을 가질 것을 말하면서 어렵고 급할 때일수록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권면합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우리의 시간 개념과는 달라서 벧후3:8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그 날과 그 시를 가르쳐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마지막이 가까이 왔다는 표현은 종말에 대한 자세를 강조하는 것으로 늘 깨어 있으라는 의미입니다. 즉 도적같이 임할 그 날을 대비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한때 한국교회에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나타나서 생업을 전폐하고 모든 것을 중단하고 광신적으로 재림에 매달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신앙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경적 종말론의 자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적인 종말론이란 무엇이겠습니까?

 

마틴 루터는 성경적인 종말론에 대해 믿는 사람은 내일 주님께서 오실 것처럼 깨어 근신하고, 동시에 천년 뒤에 오실 것처럼 성실하게 오늘을 살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남은 시간에 대하여, 나 자신에 대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분명한 종말관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믿는자들은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일까요?

7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찰스 스탠리목사는 기도 응답의 비밀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한때 저는 기도를 시작하기만 하면 잠에 빠져들곤 했습니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했지만 헛수고였습니다. 잠을 적게 자고 공부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으면서, 이상하게 기도만 하면 10분을 넘기지 못하고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저는 이 문제로 1년을 씨름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문제의 원인을 보여 주셨습니다.

사탄은 제가 기도하는 것보다 설교하거나 공부하는 것을 원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사탄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바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방해하기 위해 갖가지 교묘한 공격 수단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가 기도라는 영적 전투를 수행하는 것이며 사탄를 대적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 역시 기도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영적 전투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로 무릎을 꿇을 때 시작된다는 것을 사탄은 잘 알고 있기에 필사적으로 우리의 기도 생활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장 크게 사탄의 공격을 받을 때도 우리는 무릎을 꿇을 때이며, 가장 선한 결과를 얻을 때도 역시 무릎을 꿇을 때임을 잊지 않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다시 7절 말씀을 보면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여기서 정신을 차리고라는 원어적인 뜻은 올바른 마음과 침착한 마음을 의미합니다.

근신하여는 환경에 따라 요동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의 중심을 잡는 조심성을 의미합니다.

 

이 말은 다시말해 그리스도인들은 마지막이 가까울수록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며 흔들리지 않고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무절제한 생활을 버리고 깨어 있어야 할 것은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빠서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그러나 바쁘기 때문에 우리는 더 기도해야 합니다.

급변하는 시대 가운데 정신없이 돌아가는 세상이기에 더욱 정신을 차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 가운데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그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한다면 반드시 하나님과의 관계는 물론이고 인간과의 관계도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어려움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바쁘고 어려운 때일수록 자신을 돌아보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더욱 힘써 기도하십시오.

기도할 시간에 기도하지 않으면 당황스럽고 부끄러운 일을 당한다는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마지막 때에 더욱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서로 기도하므로 사탄이 두려워 벌벌 떠는 기도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축원드립니다.

 

 

두 번째로 마지막 때에 믿음의 성도들에게 권면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8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코리 텐 붐여사는 유대인들을 숨겨주었다는 이유로 나치감옥에 수용되어 모진 고문과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가족을 다 잃고 전쟁이 끝난 뒤에 독일의 지방과 교회를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녀의 간증집회 때마다 수많은 독일인들이 참회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어느 날 간증 집회 후 성도들과 악수하며 나오는 그녀 앞에 자신에게 수용소에서 모진 고문을 하고 비인간적인 짓을 저질렀던 사람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녀는 간증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그때 피가 거꾸로 솟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순간 내가 할 말은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 저 사람은 안돼요, 저 사람은 용서할 수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계속 사랑하라는 음성을 내게 주셨습니다. 못한다고 계속 머리를 흔들어도 사랑하라, 이건 명령이다!” 하셨습니다.

그녀는 할 수없이 마음에는 없었지만 하나님 명령이니 그의 손을 꼭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안아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그녀의 마음에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열심히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는 말씀에서 무엇보다도는 어떠한 일보다 사랑을 먼저 하라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열심히 사랑하는 것입니다.

열심히 사랑하라는 것은 힘껏 노력하여 전심전력 하라는 의미입니다.

즉 그리스도인이 힘써야 할 사랑은 감정적으로 하는 일시적인 사랑이 아니라 의지의 결단을 가지고 행동을 수반하는 아가페적 사랑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만이 허다한 죄를 덮을 수가 있습니다.

마지막 때가 가까이 이를수록 마지못해 하는 사랑이 아니라 열심으로 서로 사랑하는 일에 힘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사랑하기 위해 먼저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하지 않고 마음에 미움을 두고는 결코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용서하지 않는 마음은 이미 그 마음이 지옥입니다.

아직도 화해하지 못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서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만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원하기는 마지막 때가 더욱 가까울수록 이와 같은 사랑을 행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세계적 대형할인점 중에 하나인 월마트는 특별한 경영방침으로 미국전역에서 매출액 1위를 차지하였습니다.

지금도 월마트는 특별한 경영 방침을 유지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열 발자국의 원칙이라고 합니다.

 

열 발자국의 원칙은 직원들이 서 있는 자리에서 열 발자국 안에 들어오는 손님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라는 것입니다.

책임지고 환영하고, 책임지고 친절하고, 책임지고 도움을 주라는 것입니다.

월마트는 이 일을 위해 인원을 더 채용하였는데 이것은 한 사람이라도 더 책임 있게 친절을 베풀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열 발자국의 원칙 때문에 월마트에 들어오는 손님들은 편리함을 느끼며, 호감을 갖고 다시 찾게 되니 매출액이 꾸준히 늘어난 것처럼 이것은 우리 신앙에서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교회도 열 발자국의 원칙을 가진 일꾼들이 필요합니다.

초대교회는 이미 열 발자국의 원칙이 있었습니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 도우며 서로 친절히 대하고 그래서 교회는 부흥하고 세상 사람들은 초대교인들을 칭송하게 되었습니다.

 

10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여러분 은사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은사란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신 선물로 자기의 이익과 자랑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교회와 성도들을 세우는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받은 은사를 가지고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해야 합니다.

환경이나 조건에 관계없이 한결 같이 봉사해야 합니다.

자신의 욕심이나 감정이 들어가면 진정한 봉사가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 마지막 때를 앞두고 아직까지 주님 앞에 무엇 하나 봉사한 것 없이 지내 오지는 않으셨습니까?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임을 기억할 때에 서로 봉사하게 될 것입니다.

서로 섬기고 봉사하는 자만이 교회의 유익과 덕을 추구하는 자가 될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마지막이 가까울수록 주님을 위해 봉사하십시오, 충성하십시오, 헌신하십시오

 

 

마지막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더욱 의미있게 하고 집중하게 합니다.

 

한 교회에서 부목사로 섬긴지 5년이 되어 담임 목회를 위해 기도하는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병원에서 검진을 받던 중 암이 발견이 되었습니다.

청천벽력 같은 현실에 교회를 사임하고 항암치료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충북 음성의 한 교회에서 주일설교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 교회를 담임하던 목사님이 유학을 떠나면서 친구인 이 분을 후임으로 추천한 것입니다.

교인들은 잔뜩 기대하고 기다렸는데 막상 나타난 목사님의 모습에 모두가 크게 실망했습니다.

왜냐하면 머리카락은 다 빠지고 뼈만 앙상하게 남은 초라한 몰골의 모습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회의가 소집되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안수집사 한 분이 이 목사님을 후임목사님으로 모시자는 의견을 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저는 이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목사님이 비록 암으로 투병중이라 하더라도 담임목사님으로 모시고 이런 설교를 한 주밖에 더 듣지 못한다 해도 우리 교회로서는 큰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자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며 그 목사님을 후임으로 모시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청빙을 받은 목사님은 암으로 투병중인 자신을 담임목사로 받아주는 교회가 있다니, 비록 자신이 담임을 맡지 못한다 하더라도 말할 수 없는 감격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목사님은 기도원에 올라가 금식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금식기도는 자신이 후임목사로 부임할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너무 그 마음이 감사해서 그 교회에 정말 훌륭한 목회자를 보내달라고 기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암이 치유되는 놀라운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이 목사님은 자신의 암이 치유된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여기고 그 교회의 청빙을 받아 목회를 잘 하셨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여러분 이 목사님의 한 번의 설교가 도대체 얼마나 은혜스러웠기에 모든 교인이 암으로 투병중인 목사님을 후임으로 청빙하려고 했을까요?

 

그것은 아마도 제가 생각하기에는 목사님이 자신에게 있어 마지막 설교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강단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죽음을 앞에 두고 무슨 다른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적당히 할 수 있겠습니까?

정말 마지막 힘을 다해 피를 토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만일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한 주일밖에 없다고 한다면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만일 하루의 시간밖에 이 세상을 살 수 없다면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그래도 가족들과 사소한 문제를 가지고 다투시겠습니까?

그런 상황에서도 돈을 조금이라도 더 벌려고 눈에 불을 켜고 덤벼들겠습니까?

자신의 관점으로 사람들을 판단하고 불평하며 원망하는 어린 아이 같은 모습으로 여전히 살아가시겠습니까?

 

정말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 하나님이 보내주신 소중한 사람들을 사랑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용서를 구하지 않을까요?

 

하나님이 부탁한 일들을 소홀히 한 것을 후회하며 남은 시간 조금이라도 더 최선을 다하려고 하지 않을까요?

영원한 세상을 바라보며 이제 곧 주님 앞에 서야 함을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인생은 하나같이 어리석어서 죽음이 가까워야 비로써 소중한 것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평소에 마지막을 늘 의식하며 소중한 것을 붙잡을 줄 아는 사람은 후회 없는 인생을 살아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만물의 마지막이 점점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원하기는 이 시대에 더욱 깨어 기도하며 서로를 사랑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로 서로 봉사하며 충성하므로 정말 아름다운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종말적 신앙 /벧전4:7-11/ 김경진 목사

2023-12-21 01:41:49

 

<죽음을 인식하며 사는 사람의 가치관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목회를 하다 보면 임종을 앞둔 분들을 찾아가서 마지막 권면을 드리거나, 임종 예배를 집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임종을 맞는 가족의 입장에서는 대부분 처음 경험하는 경우가 많아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경우가 있죠.

 

또 임종을 맞는 분들 중에 죽음을 인지하신 분들도 계시지만 끝까지 받아들이지 못하는 분들도 있어서 권면을 드리거나 예배를 드리는 일이 쉽지는 않습니다.

 

임종을 앞두신 분들을 만나면 이런 말씀을 드립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소망교회 목사입니다. 처음 뵙지만 가장 중요한 시간에 제가 왔습니다. 이제 이 세상에서 아버님의 시간은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요.”

 

그러면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립니다. “이제 제가 마지막 가시는 길을 도와드리려고 합니다. 제 말씀을 들어주세요.”하면 대부분 잘 따라 들어주시며 예배를 드리시곤 합니다.

 

어느 날엔 임종 예배를 드리러 병원에 갔는데, 곧 돌아가실 것 같다는 분이 갑자기 의식이 회복되셔서 말씀까지 하신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번에 정말 죽는 줄 알았습니다.” 말씀하실 정도였습니다.

 

의학적으로는 얼마 남지 않았다는 판결을 분명히 받으셨는데 몸을 보아도 그렇고, 의식도 너무 뚜렷하셔서 차마 마지막 시간입니다.” 말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분이 날씨가 좋다는 등 자녀 이야기, 사업 이야기 나누시는 걸 듣고서 인사를 드리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20분 정도 차를 타고 나오는 길에 전화가 왔습니다.

아버님이 돌아가셨습니다.”

 

그 순간 저는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습니다. ‘왜 내가 그 귀중한 시간을 날씨 이야기로 채웠을까. 그 귀중한 시간을 사업 이야기로 채웠을까.

 

물론 신앙이 있으신 분이니 하나님 품에 안기셨겠지만 그 귀한 시간을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가족을 하늘나라로 보낸 분들은 아시겠지만 죽음이 가까운 걸 알면서도 대면하는 일이 쉽지는 않습니다. 부모님께 드릴 말씀 다 드리고, 유언의 말씀도 들으면서 편안하게 마무리되는 경우는 많치 않습니다. 사람들은 애써 죽음을 외면하려는 심리적 기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2019년에 나온 한 연구(Prediction-based neural mechanisms for shielding the self from existential threat)에 의하면 사람들의 뇌는 죽음이라는 생각을 피하려고 한답니다. 자신의 얼굴 옆에 죽음과 관련된 단어가 비춰지면 그 단어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통계가 있을 정도입니다. 그만큼 우리 뇌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죽음을 회피하는 방어 기제를 가진다는 것이죠.

 

여러분께 한번 묻고 싶습니다. 만약에 의료 진단 결과로 6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으신다면 어떠시겠습니까? 사실 목회를 하다 보면 이런 분들을 참 많이 만나게 됩니다.

 

여러분은 남은 6개월 동안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담담히 받아들이는 분도 계시겠지만 대부분 처음에는 분노와 원망, 두려움, 공포 등을 느낍니다.

 

왜 이런 병에 걸렸지? 다른 사람들은 멀쩡한데. 나처럼 착하게 살아온 사람에게 하나님은 왜 병을 주셨지? 내가 이렇게 된 것은 다 저 사람 때문이야

 

이렇듯 하나님을 향해서, 가족을 향해서 원망을 내뱉고 홀로 떠나는 것에 대한 슬픔과 분노를 느낀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상황이 받아들여질 때 삶을 정리하기 시작한답니다. 남은 시간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질문하면서 말이죠. 그렇게 시간의 무게를 느끼면서 그동안 너무나 하찮은 것들로 시간을 채워 왔음을 깨닫게 된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관점이 바뀌고 가치관이 변화된 것입니다.

 

호스피스가 말하는 죽음을 앞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제목의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꽤 오래된 글인데요. 시한부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을 돌보며 호스피스 사역을 오랫동안 했던 사람이 회고하며 쓴 내용입니다. 글 속에는 그가 만난 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자궁암 말기 진단을 받았던 우씨라는 부인의 이야기였습니다. 공군 소장인 남편이 제대하면 세계 일주 여행을 가자는 말만 믿고 주말 부부를 감수하면서 서울에서 아이들을 키우며 알뜰하게 살았던 부인에게 어느 날 사형 선고가 내려졌습니다. 그것도 남편이 제대를 앞둔 시점이었다고 합니다. 몸은 날로 수척해지고 등, 아랫배, 다리가 붓기 시작해서 진찰을 했더니 복강 내 온통 암세포가 퍼져 버린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울분과 두려움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호스피스인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죠.

 

이렇게 죽을 줄 알았더라면 좀 더 선하게 살 건데. 그게 제일 후회되네요. 주위 사람들, 특히 친척들 생각도 못하고 사람들에게 너무나 나쁜 짓을 많이 했어요. 오로지 남편과 세계 여행 갈 생각으로 돈을 모으느라 그것이 제 삶의 목표였거든요.”

 

그러면서 건강해지면 남에게 봉사하는 삶을 살 텐데..’ 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호스피스 활동을 했던 그분이 이렇게 글을 마무리합니다. 그가 애써 모은 돈은 우씨와 사별 뒤에 재혼한 남편과 새 부인이 지금 잘 쓰고 있는데, 재물은 모으나 그것을 누가 취할지 알지 못한다는 성경의 한 구절이 생각나는 경우였다.

 

여러분,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만약에 6개월 혹은 3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으셨다면 지금과 같이 시간을 사용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이 하는 그 일을 계속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중단하고 다른 일을 하시겠습니까? 시한부의 삶을 진정으로 인식하고 받아들이게 된다면 우리의 가치관, 우리의 사고는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종말적 신앙을 가진 사람을 향하여 깨어 기도하기를 권면합니다.>

 

우리가 종종 종말적 신앙인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냥 그저 종말을 안다는 의미가 아니라 종말이 나에게 있음을 뼛속 깊이 느끼면서 현재를 살아가는 삶의 태도입니다.

 

그렇다면 시한부 인생을 사는 이들은 어떤 모습으로 가치관이 달라질까요? 가치관이 다양하게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어서 하나로 요약하기는 쉽지 않아 보이는데, 우리나라 큰 석학으로 알려지신 고 이어령 선생님이 이야기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며칠 전 CBS 김현정 뉴스쇼에 고 이어령 선생님의 부인인 강인숙 영인문학관 관장이 나와 인터뷰한 내용이 올라왔습니다. 선생님이 마지막 3년여 동안 육필로 써 놓으신 글을 묶은 이어령의 마지막 노트, 눈물 한 방울이라는 책에 관한 인터뷰였습니다.

 

생전에는 주로 컴퓨터를 쓰셨는데 이제는 손이 말을 안 들어서 육필로 쓰셨다죠. 인터뷰 마지막에 앵커가 묻습니다.

 

이어령 교수님이 남긴 마지막 눈물의 의미가 던지는 메시지를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러자 아내 강관장님이 대답합니다.

 

역시 Fraternite(우애)이겠죠. 그게 프랑스 혁명의 세 번째 구호거든요. 자유, 평등, 그다음이 우애거든요. 인간에 대한 사랑, 그게 가장 중요하다는 걸 깨달으신 것 같아요. 그 무렵에 누구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굉장히 많이 하셨어요. 조그만 걸 가져와도 감사하다는 메시지를 꼭 보내셨어요. 시간이 나니깐 그러셨겠지만요. 이 선생님이 그럴 시간이 없었거든요. 선물 받고 고맙단 말 할 시간이 없었던 사람이었는데 마지막 세월에는 그걸 꼭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변하는구나 싶었어요. 또 기독교가 들어와서 뭐가 달라진 것 같으냐. 역시 그쪽인 것 같아요. 우애의 중요성, 인간의 중요성, 이런 거. 그래서 남을 생각하고 뭘 주고 싶고 감사하고

 

이 기사를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그렇겠다!’ 마지막 시간에 우리가 정말로 채우고 싶은 것은 깊은 사랑, 어떤 이는 가족과 함께 우애를 경험하고 어떤 이는 인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고를 피력해 나가기도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1996년 드라마로 방영 후 2011년에는 영화로, 2017년에는 드라마로 리메이크 된 작품입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대화 없는 남편, 유부남과 불륜하는 딸, 그리고 공부 안하는 삼수생 아들 속에서 치매 걸린 시어머니를 모시던 엄마가 말기 암 판정을 받고 가족이 완전히 바뀌기 시작합니다. 엄마 대신 요리하는 딸, 철들려고 노력하는 아들, 아내를 그만 괴롭히라고 어머니 방문을 못으로 박는 남편의 모습이 나옵니다. 11초가 아까운 시간에 엄마는 가족들에게 조금 더 잘할 걸 후회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우애가 아닐까요?

 

긴 이야기를 드렸습니다. , 그렇다면 성경은 우리에게 마지막 시간을 어떻게 채우라고 말씀하고 있을까요? 본문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벧전 4:7 )

 

시한부인 만물의 운명을 말하시면서 시한부 인생인 우리들을 또한 각성케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은 3개월 시한부이고요, 어떤 이는 6개월 시한부이고요. 또 어떤 이는 오래 살 것 같지만 사실은 50, 60년 시한부일 뿐입니다. 모두가 마지막을 앞에 둔 채 살아갑니다. 남은 시간을 세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남은 시간을 지혜롭게 세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마지막이 있음을 인지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실존적으로 깨닫고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종말적 신앙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말씀이죠. 마지막이 있다는 사실을 느끼고 체감하면서 하루하루를 귀중하고도 무겁게 현재를 채워 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우리들을 통하여 주님이 권면하십니다. 첫 번째입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벧전 4:7)

 

여러분이 시한부의 삶을 살고 있다면 제일 먼저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성경은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권면합니다. 마지막을 기도로 준비하라는 말씀이면서 동시에 사랑하는 부모님, 사랑하는 남편, 사랑하는 아내, 사랑하는 자녀, 친구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탄원하고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그 기회를 가지라는 것이죠. 하나님께 우리 자신의 유언을 아뢰는 일입니다.

 

예수님도 마지막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뜨겁게 기도하셨다고 성경은 전합니다. 우리도 때로는 생명의 연장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겟세마네에서 주여, 이 잔을 내게서 옮겨 주십시오.”하고 기도하셨기 때문입니다.

 

기도해서 약속을 선물로 받고, 설령 내가 누리지 못하더라도 자녀들을 통하여 축복이 이루어지도록 하나님을 붙잡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마지막 남은 시간에 간절히 해야 할 첫 번째 일입니다. 야곱이 얍복강에서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하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야곱은 형을 만나면 자신이 죽을 수도 있겠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자를 붙잡습니다. 끝까지 놓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원문상으로는 조금 달리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너희는 기도를 위하여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라.”

 

다시 말해 당연히 기도해야 하겠지만 이 일을 위하여 정신을 바짝 차리라는 명령입니다.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 무엇을 기도할지, 어떤 기도를 드리며 하나님과 약속을 맺을지를 깊이 생각하고 판단하며 살피라는 뜻입니다. 내가 구하는 기도가 하나님과 깊은 대화를 이루는 기도인지, 아니면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한 수단인지를 정직하게 대면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약속을 받는 그 시간, 얼마나 귀합니까? 자녀를 위해 기도하고, 나의 죽음 이후를 위해 기도하고, 남편과 아내를 위해 하나님과 언약을 맺습니다. 자신의 소망을 간절히 주님께 아뢰며 응답을 받습니다. 이렇듯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를 올려 드리는 것이야말로 마지막 남은 시간에 간절히 해야 할 첫 번째 일입니다.

 

 

<이어서 성경은 종말적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에게 서로 사랑하며 섬기라고 말합니다.>

 

두 번째 권면입니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벧전 4:8)

 

그렇습니다. “사랑하라.” “사랑하라.”

 

여기에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지막 시간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뜨거운 사랑입니다. 뜨겁게 사랑하는 것, 우애하는 것, 성경은 그렇게 마지막 시간을 보내라고 권면합니다. 허다한 사랑은 죄를 덮는다는 이 말씀은 사랑의 효능을 말한다기보다, 사랑을 하되 다른 사람의 죄까지도 덮는 사랑을 하라는 말씀으로 해석됩니다.

 

남녀가 뜨겁게 사랑할 때 어떻습니까? 서로의 흠이 보이지 않죠. 부족한 점이 보이지 않습니다. 뭔가에 씌었다고들 하지 않습니까? 모든 것이 다 아름답고 선합니다. 바로 그런 사랑 말입니다.

 

주님은 마지막 시간을 이 사랑으로 채우라고 말씀하십니다. 멀리 가지 못하더라도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가족 간에 먼저 뜨거운 사랑으로 채워 보십시오. 애틋하고 깊은 사랑으로 채워 가는 겁니다. 이것이 종말을 알고, 종말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신앙인의 삶의 방식입니다.

 

아내가 암 판정을 받고 나자 남편의 카톡 화면에 결혼 후 지금까지 지내온 날짜의 수를 하트 모양과 더불어 선명하게 새긴 부부를 보았습니다. 날마다 그 날짜를 세면서 아내와 함께하는 시간을 늘려가고픈 소망이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2014년 폐암과 대장암으로 세상을 떠난 배우 고 김자옥씨가 투병 중에 인터뷰한 내용입니다.

암은 힘든 게 아니라 이별을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주는 병이다. ‘남편한테 좋은 말을 해 줘야지같은 생각을 하게 됐다.”

 

암과 투병하면서 사랑하는 가족이 다르게 다가오게 되고 가족의 연대가 깊어지는 걸 느낄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남편한테 좋은 말 한마디라도 더 해 주어야지 하는 마음을 되뇌이며 마지막 시간을 값지게 사용하고 싶었던 마음이 다가옵니다.

 

 

세 번째 권면입니다.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벧전 4:9~10)

 

우애의 더 큰 측면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서로 대접하며, 원망받을 일을 하지 말고, 자신이 가진 은사와 달란트로 서로에게 봉사하는 것. 이것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마지막을 인식하며 살아가는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여러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선고를 받게 되면 처음에는 내가 왜 이렇게 되는가?’ 생각하면서 다음에는 자기중심적으로 살아야지 생각이 들 법도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은 마지막에 이타적으로 변화되는 점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참 이해하기 어려운 인간의 측면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인천 어느 교회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간증하신 목사님이 목회하던 교회는 주일마다 점심 식사로 국수를 삶아 먹곤 했답니다. 그런데 주방에서 일할 사람들이 들어갔다가는 나오고, 또 안 하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고 합니다.

 

알고 보니 주방에는 시어머니보다 무서운 권사님들이 호랑이처럼 잔소리를 하고, 식당에서는 이북에서 내려오신 입맛 까다로운 장로님들이 국수가 삶아진 상태를 두고 시시콜콜 잔소리를 했기 때문이라는 이유였죠. 그래서 사람들이 봉사를 하려다가는 상처받고 나가는 일들이 계속되곤 했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한 젊은 여집사님이 웬일인지 자진해서 주방 봉사를 하겠다고 나섰습니다. 사연인즉 이분이 말기암 판정을 받았고 일 년밖에는 살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처음에는 절망감에 식음을 전폐하다가 하나님께 그냥 가기가 너무 민망하고 부끄러워서 남은 시간이라도 교회에서 봉사하기로 결정했다는 겁니다.

 

그 집사님이 봉사를 시작하자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한소리 하려던 권사님들이 그만 말을 못했답니다. 몇 달 뒤 죽을 젊은 집사님 앞에서 차마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수 없었던 것이죠. 입맛이 까다로운 장로님들도 그저 맛있게 먹곤 했답니다. 1년 동안 이 집사님이 주방 봉사를 하면서 그 시끄러웠던 주일 점심시간이 연민과 애정이 가득한 애찬의 식탁이 되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종종 종말적 신앙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 말은 종말을 이해하고 안다는 의미가 아니라, 시한부 인생임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살아가는 삶의 태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고민하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철학자 김진영은 2017년에 간암 4기 판정을 받고, 일기장에 글을 쓰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13개월 동안 남긴 글이 아침의 피아노라는 책으로 발간되었습니다. 책에 그가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나만을 지키려 할 때 나는 나날이 약해진다.

타자를 지키려 할 때 나는 나날이 확실해진다.

(20187, 아침의 피아노중에서)

 

 

 

 

선한 관리인답게 /벧전4:7-11/ 김기석목사

2023-11-10 09:47:51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차리고, 삼가 조심하여 기도하십시오. 무엇보다도 먼저 서로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어 줍니다. 불평 없이 서로 따뜻하게 대접하십시오. 각 사람은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관리인으로서 서로 봉사하십시오. 말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사람답게 하고, 봉사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봉사하는 사람답게 하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이 모든 일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영광과 권세가 영원무궁하도록 그에게 있습니다. 아멘.]

 

우리 모두 침묵하자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장미꽃의 계절이 지나자 수국의 계절이 찾아왔습니다. 교회 화단 가득 달맞이꽃이 환합니다. 아침에 교회 마당에 들어설 때마다 저는 잠시 멈춰 서서 화단의 꽃들과 눈 맞춤을 하곤 합니다. 저는 이 척박한 곳에서도 아름답게 피어나는 꽃들에게 무언의 감사인사를 건넵니다. 무심히 피어나는 꽃들은 이런저런 일로 심란한 내게 잠시 멈췄다 가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해야 할 일에 대한 부담과 하지 못한 일에 대한 후회 사이에서 우리는 흔들립니다. 마음이 우리를 속일때도 많습니다. 예레미야는 그래서 이렇게 탄식합니다.

 

만물보다 더 거짓되고 아주 썩은 것은 사람의 마음이니, 누가 그 속을 알 수 있습니까?”(17:9)

 

이런 말이 지나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싶은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저도 한 때는 그런 생각을 품은 때가 있었지만 지금은 이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인간의 지성과 감성과 의지는 그렇게 신뢰할만하지 못합니다. 이기심과 욕망에 물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최고의 지성을 가진 사람이라 해도 이익에 담백하지 못할 때, 권력욕을 내려놓지 못할 때 매우 추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압니다.

 

희망의 조짐보다는 절망의 조짐이 더 많은 것 같은 세상입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다가온 것 같은 느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요즘은 거리를 지나다가 정당이나 시민단체들이 내건 현수막들을 보며 숨이 막힐 것 같은 답답함을 느낍니다. 온통 부정과 조롱과 저주의 언어가 넘칩니다. 적대감을 자극하는 표현들이 일상이 되었습니다. 그런 언어들에 자주 노출되면 우리 속에 여백이 사라집니다. 달리 생각해 볼 여지가 허용되지 않는 곳에서는 평화가 깃들 수 없습니다. 우리가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의도된 합리화혹은 확증편향이 사실이나 진실보다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이런 생각에 골똘할 때면 파블로 네루다의 시 침묵 속에서의 한 구절이 자꾸 떠오릅니다.

 

이제 열둘을 세면/우리 모두 침묵하자/잠깐 동안만 지구 위에 서서/어떤 언어로도 말하지 말자/우리 단 일 초만이라도 멈추어/손도 움직이지 말자

 

욕망에 이끌려 살아온 우리의 부박한 삶의 실상을 인정하고, 모든 판단을 중지하고 잠시 동안이라도 멈춰 설 수 있다면 세상이 한결 평화로워질 것 같습니다. 망가진 세상을 치유하고 싶은 시인의 비전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우리의 삶을 어디론가 끌고가는 것에/그토록 열중하지만 않는다면/그래서 잠시만이라도 아무것도 안 할 수 있다면/어쩌면 거대한 침묵이/이 슬픔을 사라지게 할지도 모른다.”

 

조심

예배는 하나님의 마음을 기준음으로 삼아 우리 마음을 조율하는 시간입니다. 죄와 욕망으로 얼룩진 마음을 씻어주실 하나님의 은혜의 강물에 우리 마음을 풍덩 던지는 시간입니다. 사도가 말하는 삼가 조심하여 기도하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가 바로 이것 아니겠습니까? ‘잡을 조마음 심이 결합된 조심(操心)은 두리번거리며 살피라는 말이 아니라 자기 마음을 굳게 붙들라는 말입니다. 자기 마음의 주인이 되라는 뜻이라고 새겨도 되겠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에게 조심은 마음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자기 마음을 붙들어매는 것입니다. 그 일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조심스러운 마음은 거침없는 태도와 구별됩니다. 미리 속단하고 자기 추측을 사실로 믿어버리는 이들이 많습니다. 모든 갈등의 원인이 여기에 있습니다. 시몬느 베이유는 우리가 사랑 가운데 머물기 위해 필요한 태도가 머뭇거림’(hesitation)이라고 말합니다. 함부로 말하고, 속단하고, 응대하는 이들은 자기를 과신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다른 이들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중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유대교 성전 체제가 죄인으로 규정한 사람조차 사랑으로 대하셨습니다. 죄인과 세리의 친구가 되는 것조차 꺼리지 않으셨습니다. 바울 사도의 말이 통렬하게 다가옵니다.

 

그러므로 남을 심판하는 사람이여, 그대가 누구이든지, 죄가 없다고 변명할 수 없습니다. 그대는 남을 심판하는 일로 결국 자기를 정죄하는 셈입니다. 남을 심판하는 그대도 똑같은 일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2:1)

 

우리가 진정 예수를 믿는다면 아무도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적대감이 가득 찬 세상에서 환대의 공간을 만들라고 부름 받았습니다. 베드로는 성도들에게 무엇보다도 먼저 서로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어 줍니다.”(벧전 4:8)라고 말합니다. 죄를 덮어 준다(kalyptō)는 말은 불의를 못 본 체 한다든지, 불의에 가담한다는 말이 아니라 죄를 드러내 망신을 주지 않는다는 뜻이 아닐까요? 망신주기를 통해 누군가를 인격적으로 살해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셈과 야벳은 겉옷을 어깨에 걸친 채 뒷걸음쳐 들어가서 술에 취해 누워 있던 아버지의 벌거벗은 몸을 덮어 드렸습니다(9:23). 그런 삼가는 태도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사랑의 연대를 더욱 굳게 했습니다.

 

다른 이들의 허물을 드러내는 것으로 자기의 도덕적 우월성을 뽐내려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남의 허물을 잘 드러내는 사람은 실은 내적으로 빈곤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이들은 자기를 성찰할 줄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런 이들을 향해 주님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어찌하여 너는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7:3) 사도 바울도 같은 취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어떤 사람이 어떤 죄에 빠진 일이 드러나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사람인 여러분은 온유한 마음으로 그런 사람을 바로잡아 주고, 자기 스스로를 살펴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6:1). 잘못을 사람들 앞에 까발려 망신을 주지 않는 것, 온유한 마음으로 바로잡아 주는 것, 그리고 자기를 스스로 살피는 것이야말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사람의 바른 태도입니다.

 

불평 없이 따뜻하게

이어서 사도는 성도들에게 진심을 다해 말합니다. “불평 없이 서로 따뜻하게 대접하십시오”(벧전 4:9). 불평(gongysmos)은 뒤에서 구시렁거리는 것입니다. 불평은 창조적인 변화를 일으키기보다는 한 공동체의 결속을 내적으로 허물게 마련입니다. 따뜻하게 대접하라는 말은 환대(歡待)하라는 말입니다. 성경에는 환대의 이야기가 많이 등장합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장막을 찾아온 세 나그네를 정성을 다해 맞아들였습니다. 물을 가져올 테니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에서 쉬고 계시면, 잡수실 것을 마련해 오겠다고 말한 후에 이렇게 말합니다. “이렇게 이 종에게로 오셨으니, 좀 잡수시고, 기분이 상쾌해진 다음에 길을 떠나시기 바랍니다”(18:5). 저는 언제든 이 말씀을 상기하려고 노력합니다. 나와 만난 사람들이 마음이 상쾌해져서 돌아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소돔 성 어귀에 앉아 있던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낯선 두 사람을 보고 일어나서 맞으며,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청했습니다. “두 분께서는 가시는 길을 멈추시고, 이 종의 집으로 오셔서, 발을 씻고, 하룻밤 머무르시기 바랍니다. 내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셔서, 길을 떠나시기 바랍니다”(19:2). 히브리서는 이런 이야기를 염두에 두고 나그네를 대접하기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어떤 이들은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대접하였습니다”(13:1)라고 말합니다. 마태복음 25장도 환대의 이야기로 읽을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지금 굶주린 자, 목마른 자, 나그네, 헐벗은 자, 병든 자, 옥에 갇힌 자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누군가를 환대한다는 것은 그를 동료 인간으로 대한다는 말입니다. 그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삶을 긍정한다는 말입니다. 내가 조금 불편해지더라도 어려움에 처한 이들의 살 권리를 찾아주기 위해 마음을 쓴다는 말입니다. 환대는 우정의 공동체를 만드는 초석입니다. 생텍쥐페리는 <성채>라는 소설에서 친구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친구란 무엇보다도 평가하지 않는 사람이다. 방랑자에게 대문을 열어주고, 그의 목발과 지팡이를 한쪽에 놓아주며, 그를 평가하기 위해 춤을 춰보라고 하지 않는 사람이다. 방랑자가 길 위에 활짝 핀 봄을 이야기하면 자신 안에 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또 그가 자신이 떠나온 마을을 덮친 기근의 끔찍함을 이야기하면, 그와 함께 기근에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이다.”(<생텍쥐페리의 문장들>, 신유진 엮고 옮김, 마음산책, p.48)

 

이런 친구가 한 둘 있다면 우리 인생은 살만하지 않을까요? 주님은 제자들을 친구라고 부르십니다. 마음을 나눈 사이이기 때문입니다. 환대의 공간을 열어가는 사람이야말로 주님의 친구라 할 수 있습니다.

 

환대의 공간 만들기

지난 5월 미국 일정 중에 마지막으로 묵은 보스턴의 한 호텔을 저는 잊을 수 없습니다. 시설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호텔 식당에서 서빙을 하는 한 아프리카계 여성 때문입니다. 나이는 가늠하기 어려웠지만 그는 영화 시스터 액트에 나오는 우피 골드버그를 닮았습니다. 아침에 식당에 들어가자 그는 내게 가까이 다가와서 나긋나긋하고 그윽한 목소리로 테이블에 마련된 식기를 가지고 가서 음식을 담아오면 된다고 또박또박 말해주었습니다. 말투와 표정에 따뜻함이 배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손님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마치 오랫동안 알아온 사람을 맞이하듯 대했습니다.

 

손님들도 그와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체크아웃을 하고도 그를 찾아와 가벼운 포옹으로 작별 인사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일하고 있는 공간을 따뜻한 환대의 공간으로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곳은 그의 일터인 동시에 성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음 날 호텔을 떠나면서 당신은 이곳을 특별한 곳으로 만들고 있다고 말하며 감사의 인사를 전하자, 그는 감동어린 눈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빈다고 축복해주었습니다. 사무적일 수도 있는 한 장소가 그 한 사람으로 인해 우애의 장소로 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산에는 50대의 부부 목회자가 운영하는 살뤼Salut’라는 카페가 있습니다. 목사님 부부가 직접 커피를 내리고 빵을 구워 팔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카페를 시작하면서 두 가지 원칙을 세웠다고 합니다. 첫째는 밀가루, 설탕, 버터, 치즈, 과일 등 모든 식재료를 최고 품질의 것으로 정량대로 사용한다는 것이었고, 둘째는 찾아오는 손님들을 하나님이 보내주신 이들로 여긴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카페는 영업장소이기도 하지만 그 두 분의 성소였던 것입니다. 손님들 가운데는 겸손하고 친절한 이들도 있지만 까다롭고 무례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언제나 자기들이 세운 두 가지 원칙을 기억하며 손님들을 대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한 에피소드를 들려주었습니다. 어느 날 홀로 오신 손님에게 주문받은 빵과 커피를 탁자 위에 내려놓고는 빵을 만든 과정과 커피를 내린 과정을 상세하게 설명해 드리자 손님의 눈에 눈물이 맺히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왠지 그 마음을 알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그 손님은 아주 오랫동안 누군가에게 그렇게 따뜻하고 정성스러운 대접을 받아본 적이 없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따뜻한 환대가 그의 가슴에 도사리고 있던 어떤 설움 혹은 얼음을 녹인 것이 아닐까요?

 

보스턴과 예산에서 만난 분들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환해집니다. 세상을 황무지로 만드는 이들도 있지만, 정성을 다해 세상을 아름다운 정원처럼 만드는 이들도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가정과 일터가 그런 환대의 장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픈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고, 자기 삶이 선물이라는 사실을 깊이 자각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려는 하나님의 꿈에 기쁘게 동참할 수 있는 내적인 힘을 얻을 수 있는 곳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관리인입니다. 우리는 서로 봉사함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가야 합니다. 우리가 머무는 곳 어디에서나 그리스도의 향기가 드러나기를 빕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수 있기를 빕니다. 아멘.

 

 

 

기도하라 /벧전4:7/ 조정의목사

2020-09-23 16:20:24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우리가 전에 배웠던 벧전 41-6절의 말씀은 죄와 치열하게 싸워서 승리하고자 하셨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자신을 무장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저는 현재 복음반을 맡고 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유평교회에 복음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이 더해져 현재 10명 정도가 복음반 공부에 참여하고자 기다리고 있습니다.

 

복음반을 진행할 때를 생각해보면, 아직 복음에 대해 모르는 분들이 제 앞에 앉아 있습니다. 그 분들은 성경은 인간이 만들어 낸 책이 아닌지, 예수님의 존재가 허구가 아닌지 묻습니다. 복음반을 통해 하나님 말씀이 계속해서 전해질 때 견고하고 강퍅한 그들의 마음이 조금씩 부드러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마지막 시간이 되면 어떤 분들은 예수님이 나의 구주라고 고백하고, 어떤 분은 박수를 치며 천국에 소망이 있음에 기뻐합니다. 그동안 예수님이 살아 계시다는 객관적인 증거가 없으면 믿지 못하겠다던 구도자가 갑자기 전화를 걸어와 그 사실이 이상하게 믿어진다고 고백할 때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생각하며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여러분은 그 때가 기억나십니까? 여러분이 처음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를 영접했을 때가 기억나십니까? 그들을 보면서 그들 안에 복음의 소망이 가득 담겨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베드로의 편지를 받았던 소아시아 성도도 우리와 같은 소망을 가지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 소망이 분명하기에 베드로는 그것을 살아있는 소망이라 불렀습니다(1:3). 그들에게 있어서 있으나 마나 한, 혹은 잊혀진 소망이 아니라 살아서 역사하는 소망이었습니다. 그들의 삶이 복음의 소망에 붙들려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너희가 예수를 본 적은 없지만 진실로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했고, 너희가 지금 고난을 당하고 앞으로 불같은 시험이 다가올 것을 알지만 말할 수 없는 즐거움으로 기뻐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들 마음속에는 산 소망이 불타오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불같이 타오르는 산 소망이 여러분 안에 있습니까?

 

전 제 자신을 돌아보며 제 소망은 왜 이렇게 되었을까, 구도자들이 구원을 받았을 때의 그 기쁨이 어디로 갔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축구 영상을 볼 때 기가 막힌 패스나 멋진 슛들을 보며 짜릿함을 느낍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복음의 소망이 그만큼 짜릿합니까? 저는 좋아하는 책을 보거나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 큰 감동을 느낍니다. 여러분 안의 복음의 소망으로 인해 그런 큰 감동을 느끼십니까?

 

왜 우리는 이 세상이 주는 짧은 감동과 기쁨은 좋아하면서도 우리의 영혼을 뒤바꾼 복음의 소망은 기뻐하지 못할까요? 베드로는 47-11절까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산 소망이 살아서 우리 가운데 역사할 수 있는 비결을 말해줍니다. 우리의 소망이 정말 살아있는 소망으로서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는데 있어서 절대로 꺼지지 않는 원동력이 될 수 있게 만드는 비결입니다. 베드로전서 47-11절에는 총 4가지의 비결이 나오는데, 오늘은 그 첫 번째 비결인 기도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4:7). 사도 베드로는 먼저 산 소망을 가져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말합니다. 왜 우리가 더 뜨겁게 소망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지 설명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미지근해서는 안 되는, 흐지부지 해서는 안 되는 분명한 이유입니다. 바로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만물의 마지막두 글자로 말세는 주님이 승천하신 후부터 다시 오실 날까지의 기간을 말합니다. 시대 구분에 있어서 마지막 시대를 말합니다. 이 말세의 특징은 언제 그 끝이 올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하신 분은 바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날과 그때를 알지 못하느니라”(25:13),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1:7). 내일, 또는 지금 이 순간이라도 예수님은 오실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 말세에 대한 분명한 사실은 오늘 베드로가 외치고 있는 것처럼 가까이 왔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의 오심이 임박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는 날은 이미 정해져 있는 날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때는 매순간 더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이 사실 역시 곧 다시 오실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22:20)

 

사도들 역시 주님 오심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말해줍니다. 사도 바울은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의 날이 밤에 도둑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살전 5:1-2)고 말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도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10:37)고 말했습니다. 야고보 역시 보라 심판주가 문밖에 서 계시니라”(5:9)고 말했고, 베드로도 주의 날이 도둑같이 오리니”(벧후 3:10)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속히 오리라는 주님의 말씀에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22:20)고 답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말세의 특징입니다. 그 날과 그때는 아무도 알 수 없고, 그 날이 임박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사실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내일이라도 주님이 오실 수 있다는 것, 주님의 오심이 임박하다는 것에 모두 동의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왜 베드로는 주님의 오심이 임박했다고 썼을까요? 소아시아 성도들에게 이 말씀이 전해진 것은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30여 년이 흐른 뒤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주님이 오시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팽배해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두 번째 편지에서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완전히 마음이 떠나 헛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주 오심을 부인할 것이라고 강력하게 경고했습니다.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벧후 3:3-4).

 

베드로가 경고하고 나서 벌써 이천 년이 흘렀습니다. 그런데도 아직 주님은 오시지 않았습니다. 주 오심을 기다리는 우리들의 마음도 참 변하기가 쉽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내일이라도 주님이 오실 것이라는 그런 삶을 살고 있습니까? 저 자신을 돌아봐도 그렇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내가 살아있을 동안 주님이 오시지 않으리라고 생각을 은연중에 갖게 됩니다.

 

야고보는 실질적인 무신론자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이 살아계시지 않은 것처럼 사는 사람들에게 경고했습니다. 그들은 철저한 계획과 강력한 의지, 분명한 계산을 가지고 살면서도 하나님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사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이 곧 오실 수도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주님의 승천 후, 2천 년이 흘러가면서 주님이 오시지 않았기 때문에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식어가고 잠이 들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자들에 대한 비유로 열 처녀를 비유로 들어 말씀하셨습니다(25). 주님은 그 중 다섯을 슬기 있다 하셨고, 나머지 다섯을 미련하다고 하셨습니다. 그 중 다섯은 기름을 가졌고, 또 다른 다섯은 가지지 않았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신랑이 더디 왔을 때 열 처녀 모두가 잠들어 있었습니다. 신랑이 오고 있었는데 피곤해서 잠든 것입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피곤하여 지친 제자들을 이해하셨습니다.

 

하루 24시간, 일 년 365, 항상 주오심만 생각하며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다섯은 준비되었고, 다섯은 준비되지 못했습니다. 5명은 신랑이 왔을 때 기쁨으로 잔치에 참예했고 나머지 5명은 잔치에 참예하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그 비유를 마치시면서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날과 그때를 알지 못하느니라”(25:13)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그 다섯 명이 깨어 있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다섯 명의 처녀처럼 깨어 있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깨어 있지 못한 자들에게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25:12)고 하셨습니다.

 

주 오심을 기대하며 깨어있지 아니한 자들은 비유에 나오는 신부처럼 신랑의 기쁨이 되지 못할 뿐더러 심각한 경우 그들은 여기 경고된 바대로 주님을 알지 못하는 자로 발견될 수 있다는 무서운 결론에 도달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어떻게 살든지 결국 우리는 마침내 주님을 만날 것이라는 안도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원합니다. 혹 우리가 연약하여 잠들어 있어도 주님은 기뻐 우리를 맞아주신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비유에 따르면, 진실로 깨어 있는 자,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자가 지혜로운 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베드로도 두 가지 명령어를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정신 차리고 근신하라사도 베드로가 준 명령어들은 모두 깨어있으라는 동일한 의미를 갖습니다. “정신을 차리라는 말은 온전한 정신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마가복음 515절과 누가복음 835절에서 귀신 들린 사람이 정신이 온전하여 진 것을 가리킬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

 

귀신과 같이 다른 것에 통제를 받는 정신이 아니라 올바른 정신을 갖고 있으라는 말입니다. 맥아더 목사님은 감정이나 격정에 휩쓸리지 말고 삶에 대해 합당하고 영원한 조망을 유지하라고 설명했습니다(맥아더 성경주석, 1576). 무언가를 생각하고 결정할 때 감정과 풍조에 휩쓸려서 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을 계산하여 하나님 앞에 합당한 것이 무엇인지 고려하라는 것입니다.

 

근신하다는 것은 정신을 차린다와 유사한 표현인데, 본래는 술 취한 상태나 잠든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6,8절과 디모데후서 45절을 보면 정신을 차리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결국 앞에 있는 정신을 차리라와 아주 비슷한 표현입니다. 술 취하거나 잠에 취한 사람이 거기서 헤어 나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술과 잠에 제어를 받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깨어나는 것입니다. 술 취한 사람이 술에서 깨기 위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더 많은 술이 몸에 들어오지 않도록 막는 것이고, 물이나 다른 숙취해소 음료를 마셔서 몸속에 퍼진 알코올을 희석시켜주는 것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라는 명령도 그와 같습니다. 우리 정신과 생각 속에 파고드는 세상의 여러 가지 가치관과 생각들, 잘못된 사상과 풍조들, 감정적 격정적 판단들이 들어오지 않도록 막는 것이며, 계속해서 우리를 세상에 취하게 만드는 것들을 바른 생각과 판단과 기준과 가치관으로 희석시키는 일입니다.

 

이 일을 해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은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사람을 바른 것으로 교훈하고 책망하기 때문입니다(딤후 3:16). 우리의 잘못된 생각을 책망하고 우리에게 올바른 교훈을 하고 잘못된 삶을 바로잡아주고 의로 교육시켜주는 것이 성경입니다.

 

베드로는 말세가 왔으니 깨어 있어야한다고 말씀을 마치지 않고 그 목적을 기도와 연결했습니다. “깨어 있으라는 명령어는 하나의 목적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말세를 살아가면서 우리는 단지 몰려오는 졸음을 이겨내며 깨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목적을 위해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라고 하니 조금은 막연하게 생각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아침, 점심, 저녁 하루 세 번 드리는 기도, 혹은 일어나서, 잠들 때 드리는 기도라는 단편적인 이해를 가진다면 말입니다. 더 큰 의미에서 기도는 우리의 모든 생각을 하나님 중심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기도는 더 광범위하게 말하면 예배입니다. 하나님 중심적인,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예배입니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일이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내 삶과 동떨어진 종교적인 예식이 아닙니다. 일상 속에서 나의 삶과 아무 관계없이 하나님 찬양을 받으세요라고만 기도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먹고 마실 때와 말하고 행동할 때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길이 무엇인지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분명하신 뜻이 내 삶에서 어떻게 드러날 수 있을 것인지 묵상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자리에 다른 무언가를 앉혀두는 내 마음을 다스려 하나님이 중심에 와 계시도록 만드는 것이 기도이며, 지극히 내 중심적으로 살려는 육신의 욕구를 거슬러 하나님 중심적으로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세가 되면 사람들이 하나님보다 자기를 사랑하고, 하나님 보다 돈을 더 사랑하며, 하나님 보다 더 쾌락을 사랑할 것이라 경고했습니다(딤후 3). 기도는 그 말세의 풍조를 거스르는 것입니다. 사람들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돈보다 하나님을 더 우선순위에 두며, 쾌락보다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즐거움을 더 추구하는 것입니다. 칼빈은 우리 마음이 날마다 우상을 만들어내는 공장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 삶은 계속해서 내 중심대로 흘러갑니다. 기도의 삶은 그런 우리에게 계속해서 제자리를 찾아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내 삶에 중심에 모시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기도는 내 삶의 주파수를 하나님의 주파수에 맞추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나의 필요를 땀방울이 핏방울처럼 흐르도록 절실히 간구하면서도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한다고 구하셨던 예수님처럼 구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이렇게 기도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하나님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그분께 아뢰며 그분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산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구원의 소망이 살아 숨 쉬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깨어서 주를 맞이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기도는 산 소망에 있어서 필수적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곧 잠들어버립니다. J. C. 라일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호흡으로 몸이 사는 것처럼 믿음은 기도로 삽니다”.

 

간략하게 말세가 임박한 이 시점에 왜 기도가 절실한지 이유를 말씀드리기 원합니다. 첫번째로 우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기 때문입니다(벧전 5:8) 이것이 사실입니다. 마귀는 우리를 쉴 틈 없이 공격합니다. 교회를 갈라놓으려 합니다. 밤낮 형제를 참소합니다. 죄로 유혹하고 넘어지게 만듭니다. 이 무서운 대적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믿음의 방패를 든든히 쥐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곧 중상을 입고 말 것입니다.

 

두 번째로 말세에 더욱 더 고통 받기 때문입니다(딤후 3).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경고했던 말세의 고통을 우리는 겪고 있습니다. 세상은 더 거짓을 사랑합니다. 우리의 눈에 보암직하고 먹음직한 것들을 더 다양한 방법과 경로로 제시합니다. 현혹시킵니다. 과거에는 현재보다 죄악이 만연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은 죄의 접근성이 갈수록 편해집니다. 죄에 대한 기준이 더 모호해집니다. 죄책감이 없어집니다.

 

포르노그라피를 스마트폰으로 집 안에서 누구나 볼 수 있고, 보편화된 죄는 더 이상 죄가 아니고 그것으로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며 죄들을 합법화시켜나갑니다. 날이 가면 갈수록 우리 안의 죄성을 더 퍼뜨릴 수 있는 세상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악을 더 많이 표출시킬 수 있는 기회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더 많은 악한 폭풍들이 몰아치고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이러한 것을 이겨낼 수가 없습니다.

 

세 번째 이유는 기도하는 삶이 곧 우리가 천국에서 맞이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천국에 대해서 오해할 수가 있습니다. 이슬람의 천국은 인간의 쾌락을 만족시켜주는 곳이고, 불교나 힌두교의 천국은 고통이 없는 해탈과 열반의 경지에 이르게 해주는 곳입니다. 다른 종교들은 이 세상에서 버티고 버티면 드디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할 수 있는 천국이 임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천국은 하나님을 영원토록 예배하는 곳, 찬양과 경배를 드리는 곳입니다. 이 땅에서 그런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천국이 그런 곳이기 때문입니다.

 

J. C. 라일은 거룩이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마 지금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너무 엄격하고, 까다롭고, 진지한 사람들처럼 여겨져, 그들과 함께 있기를 싫어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천국에는 이런 사람만 있는데 어떡합니까? 아마 지금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찬양하는 것이 지루하고, 우울하고, 어리석게 보이고, 가끔 어쩔 수 없이 하는 정도로 달갑지 않은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안식일인 주일이 부담스럽고 지루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시간은 아무리 짧아도 너무 번거롭고 버거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천국은 영원한 안식일입니다. 천국에 사는 사람은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하고 밤낮 부릅니다(4:8). 어린양의 노래를 쉬지 않습니다. 거룩하지 않은 사람이 이런 일을 즐겨 할 리가 만무합니다”(121페이지).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을 바라면서 기도의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우리가 영원한 천국에서 영원히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는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잔소리꾼이나 귀찮은 사람으로 생각하며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분은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을 빨리 만나고 싶지 않습니까. 그분의 손에 난 못자국과 허리의 창 자국을 보면서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까. 얼굴과 얼굴로 만나고 감사하다고 고백하며 그분께 모든 찬양과 경배를 올려 드리고 싶지 않습니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가 기도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베드로는 고난 중에 있던 소아시아 성도들에게 너희 안에 있는 소망에 관하여 묻는 자들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라고 명하였습니다(3:15). 요즘 그리스도인들에게 소망을 묻는 자들이 점점 사라집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소망이 정말 살아있는 것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소망이 그들의 소망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묻는 사람도 별로 없습니다. 복음에 살아있는 소망을 가지고 있다면 사람들이 물을 것입니다.

 

나와 똑같은 어려운 상황에서 감사할 수 있는가, 소망을 품을 수 있는가 말입니다. 복음의 소망이 살아 숨쉬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항상 깨어서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기도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무슨 결정을 하든지 무슨 말과 행동을 하든지 하나님을 예배하고 기도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2016년 한 해는 기도의 삶을 회복하는 시간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서로 사랑하라 /벧전4:8/ 조정의목사

2020-09-23 16:00:20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오늘 제가 전달할 하나님의 말씀은 아주 단순 명료합니다. 바로 서로 사랑하라입니다. 아마도 모르는 분이 없을 정도로 많이 들었던 내용이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따르던 제자들에게 주신 새 계명 서로 사랑하라”(15:12)는 신약성경 안에서도 여러 번 메아리처럼 울려 퍼집니다(12:10; 13:8; 5:13; 4:2; 살전 3:12; 5:13; 살후 1:3; 10:24; 벧전 1:22; 요일 3:11).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라정확하게 말하면 이 계명은 구약시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십계명 가운데 후반의 여섯 가지 계명이 규정했던 것으로 예수님은 그것을 요약하여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10:27). 어떻게 보면 여러분은 교회 안에서 서로 사랑하라는 말을 계속 들어오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은 신기하게도 그 사랑과 죄를 연결 짓습니다.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고 나서 왜냐하면이 등장합니다. 여러분의 성경에는 “~할지니로 약하게 표현되어 있지만, 원어성경에는 분명히 왜냐하면이 들어있습니다. 사랑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말씀은 단순히 서로 사랑합시다라는 막연한 말씀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들었던 사랑하라는 말씀 가운데 아주 특별한 말씀이 될 것이며 사랑의 본질을 다루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잘 들어보십시오.

 

죄는 갑자기 뜬금없이 등장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다루고 있는 본문의 아주 중요한 핵심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4장의 처음부터 죄에 대해 언급합니다. 1-6절까지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무장하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정신, 마음이 무엇입니까? 죄와 치열하게 싸워 승리하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바로 이어서 7절부터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다고 합니다.

 

이것이 죄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말세의 끝이 다가올수록 사람들은 더 죄악에 물들어 갑니다. 하나님보다 자신을, 돈을, 쾌락을 사랑합니다. 세상의 악한 풍조가 더욱 강력해집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경고한 말세는 죄로 인해 고통 받는 때입니다(딤후 3).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까맣게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말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 기도하라!” 날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려는 나의 죄성과 싸워 이기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성과 영적 무감각 사이의 관계는 다음 구절을 통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나는 어떻게 그 복음의 아름다움과 능력과 광활함이 그렇게 자주 그리고 오랫동안 내 마음에서 멀어져 있게 하는가? 왜 나의 생각과 감정은 종종 이런 영광스러운 것보다 내 차는 깨끗한가?’ 혹은 지금 당장 TV에는 무슨 프로가 방영되고 있지?’

 

아니면 오늘 먹은 점심이 괜찮았는가?’와 같은 유치한 것에 지배를 받을까? 왜 나는 영원이라는 관점이 아니라 마치 눈 가리개를 쓰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자주 내 인생을 구상하고 그것에 대해서만 골몰하는 것인가? 왜 이 복음은 언제나 그리고 철저하게 내 아내와 자녀들, 직장 동료들, 친구들 그리고 교인들과의 관계 속으로 확산되지 않는가?

 

나는 그 이유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 그것은 내가 죄인이기 때문이고 세속성은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그날까지 계속해서 내 마음속에 머물며 나를 공격할 것이다. 하지만 그날이 오기까지 나는 그것과 대적하여 싸우고 싶다. 나는 영적 게으름-이 세상이 지속적으로 나를 빠뜨리게 하려고 위협하는 마취된 것과 같은 무감각 상태-과 싸우고 싶다. 또한 나는 이 복음을 힘 있게 수용하고 그것이 나의 행동, 애정, 감정, 욕구, 생각 그리고 의지 이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치게 하고 싶다.'(복음이란 무엇인가, 그렉 길버트, 174p)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통하여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오늘의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바로 이러한 죄의 문제가 다시 대두됩니다. 명령어 서로 사랑하라만 봐도 그렇습니다. 정확하게 번역하면 베드로는 이렇게 명령하였습니다. “사랑을 변치 않게 지켜내라

 

베드로는 이전에(1:22), 성도는 거듭 났을 때, 거짓 없이 형제를 사랑하는데 이르렀다고 했습니다. 저는 어디를 가든지 거듭났다는 것 하나 만으로 형제 사랑이 넘치는 것을 봅니다. 우리가 서로를 본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어도 성도들 사이에서 그런 사랑이 넘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거듭났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노력해서 생긴 것이 아니라 거듭난 순간, 그 영광스러운 순간에 형제 자매를 향한 거짓 없는 사랑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입니다. 사도 요한도 말합니다. “또한 낳으신 이(하나님)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성도)를 사랑하느니라”(요일 5:1). 하나님께서 그러한 순결한 사랑을 넣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변질됩니다. 왜 그 순결한 사랑이 변하게 됩니까? 왜 그것을 지켜내기가 힘듭니까? 바로 죄 때문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쓴 편지를 보면 우리는 그것을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다양한 은사를 받은 좋은 교회였는데 사랑이 없어서 겪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분쟁을 겪고 있었습니다.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베드로), 그리고 심지어 그리스도파도 있었습니다. 서로 싸우던 제자들의 발을 씻기며 너희도 서로 이렇게 섬기라고 하신 주님이 자기 이름을 딴 파를 만들었을 때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까요? 바울은 로마서 129절에서 분쟁은 죄라고 분명히 말하였습니다. 분쟁이라는 죄가 그들의 사랑을 변질시켰습니다.

 

그들은 또한 자랑하고 교만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가진 것들을 자랑했습니다. 교만해져서 자신만큼 가지지 못한 사람들을 판단했습니다. 바울은 너희가 하나님께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고 강하게 책망했습니다. 마치 자신이 잘난 것처럼 서로를 비판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교만하지 않는 것, 자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교만과 자랑의 죄가 그들의 순전한 사랑을 변질시켰습니다. 유평교회가 칭찬받는 이유는 참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모여 있기 때문입니다. 경제적인 배경이나 문화적 배경이 다르고 배움의 깊이가 다릅니다. 그러나 그러한 환경을 가지고 교만해지고 서로를 판단한다면 형제 사랑은 변질되고 말 것입니다. 죄가 그렇게 사랑을 갉아먹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또한 교회 내에 존재하는 죄들을 모른 척 했습니다. 아무도 그것을 다룰 생각을 안 했습니다. 불의를 그냥 놔둔 것입니다. 제사장 엘리는 자녀들을 사랑해서 그들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을 함부로 손대고 예배를 멸시했는데도 그냥 놔두었습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자녀의 죄를 다루는 것이 귀찮고 힘들고 가슴 아프기 때문에 그냥 방치한 것입니다. 결국 그것은 엘리와 그 가족들의 죽음을 가져오게 됩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불의를 방치하였습니다. 그 죄는 그들의 형제사랑을 변질시켰습니다.

 

그들은 서로에게 온유하게 대하지 않았습니다. 눈에 드러나는 불의에 대해 다루지 않았고, 오히려 참고 인내해야 하는 것에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법정까지 성도를 끌고 가서 믿지 않는 자들의 손에 의해 재판을 당하게 만들었습니다. 교회 가운데 아무도 그것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성내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의 분노와 무정함과 오래 참지 못하는 죄는 그들의 사랑을 변질시켰습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서로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교회 안에 우상에게 드려진 제물을 먹어도 되는가, 아닌가에 대한 견해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것으로 인해 다툼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세상에 우상이 어디 있느냐 그것은 음식일 뿐이라고 선을 그었습니다.

 

그러나 형제가 그것으로 인해 실족한다면 평생 먹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견해의 차가 형제 사랑에 장애물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받지 못했습니다. 서로의 진심을 믿지 못했습니다. 서로를 견디지 못했습니다. 서로 용납하지 못하고 받지 못하는 죄는 그들의 사랑을 변질시켰습니다.

 

마지막으로 고린도 교회는 무례하고 자기 유익만 구했습니다. 당시 성찬예배는 식사와 함께 진행되었는데, 먼저 와서 많이 먹은 사람은 배가 부르고, 나중에 온 사람은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배려도 없고 예의도 없었습니다. 자기 유익이 먼저였습니다. 그들의 예배는 가관이었습니다. 당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은사가 뛰어나다고 말합니다.

 

기도와 설교, 찬양을 잘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은사로 남을 섬길까를 생각한 것이 아니라 서로 자기 은사를 뽐내느라 바빴습니다. 순서도 없고 질서도 없는 엉망진창의 예배였습니다. 혼란과 무질서가 그들이 드리는 예배의 특징이었습니다. 훌륭한 은사를 가진 자는 많았지만 그들은 사랑이 없었습니다. 자기 유익만 높이고 배려가 없는 죄는 그들의 사랑을 변질시켰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고린도 교회가 가진 죄의 문제들을 말씀 드렸습니다. 이러한 죄가 그들이 구원받을 때 가졌던 순수한 형제 사랑을 변질시켰습니다. “저는 형제, 자매에게 실망해서 그들을 사랑하는데 조금 문제가 있어서 그렇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는 문제가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분이 계실지도 모릅니다. 사도 요한이 그 말에 어떻게 대답할까요?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 4:20).

 

저는 오늘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가지고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죄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오래 참지 못하고, 온유하지 못하며, 시기하며, 자랑하고 교만하고, 나의 유익을 앞세우고, 성내고, 시기하고, 무례하고, 불의를 기뻐하고, 진리와 멀어지며, 참지 않고, 믿지 않고, 견디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처음에 가졌던 거짓 없는 형제사랑에서 멀어진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래서 명령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변치 않게 지켜내라!”

 

무엇보다도라는 말은 이 계명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줍니다. 가장 최우선 순위에 있어야 한다, 가장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7절에 나오는 기도보다, 9-11절에 나오는 섬김보다 가치에 있어서 중요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우선순위에 있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사랑이 없는 기도는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랑이 없는 섬김은 무엇입니까?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여러 가지 은사를 나열하고 훌륭한 은사로 서로 섬기는 것보다 선행되어야 할 것에 대해 13장에서 다룹니다. 13, ‘사랑장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가 결론입니다.

 

베드로도 한 목소리로 말합니다. “무엇보다도사랑하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새계명은 사랑하라입니다. 그 어떤 명령보다도 선행되어야 할 명령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사랑을 변질시키는 것은 바로 죄입니다.

 

이제 베드로가 왜 사랑하라는 명령 뒤에 이런 이유를 말했는지 이해가 됩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사랑을 회복하는 것은 우리가 가진 죄로부터 돌이키는 것을 말합니다. 최초에 우리에게 주신 순결하고 순전한 형제사랑을 지켜내는 것을 말합니다. ‘덮는다는 표현은 자칫 잘못하면 교회 내에 있는 죄들을 그냥 눈감아주는 것,’ ‘모르는 척 하는 것이라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불의와 죄가 드러났을 때 조용히 넘어가야지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의미는 그것이 아닙니다. 죄를 없는 셈 치는 것이 아닙니다. 죄가 공동체를 무너뜨리지 않도록 막아준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서로 사랑한다면, 우리 안에 있는 죄들이 우리를 무너뜨리지 못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죄가 전혀 없는 완벽한 교회는 없습니다. 판단거리가 없고, 분노가 전혀 없으며, 의견의 차이로 다투거나, 분쟁이 전혀 없는 교회는 없습니다. 이러한 죄는 교회를 파괴시키기에 충분합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신 위대하고 훌륭한 교회들이 어떻게 무너졌는지 역사가 증명합니다. 그것은 대단한 죄들도 아니었습니다.

 

아주 작은 죄들이 그렇게 하였습니다. 때론 한 두 사람의 다툼이, 때론 몇 사람의 비방이, 때론 한 사람의 죄가 교회를 무너뜨렸습니다. 교회를 찢어놓고 산산조각을 냈습니다. 죄는 이렇게 무섭습니다. 가공할만한 파괴력을 갖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망가뜨릴 만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이깁니다. 사랑이 죄의 파괴력을 이겨냅니다. 교회 내에 죄가 발생하더라도 사랑은 그 죄를 이겨내고 공동체를 더욱더 굳건하게 만들어줍니다. 야고보는 이 사실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되어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임이라”(5:19-20).

 

이 말씀을 오늘 말씀에 맞추어 새롭게 바라봅시다.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 중 진리를 떠나 원하는 대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말 대하기 어려운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죄에서 돌아서도록, 회개하고 돌이켜 하나님을 만나게 하기 위해 많은 이들이 수고하고 헌신합니다. 기도하고 진리를 전하며 자신의 집에 초대하며 사랑을 베풀어야 할 것입니다.

 

진리를 깨닫고 돌이키게 하는 데 많은 수고가 필요합니다. 그런 헌신과 형제를 향한 사랑이 그를 생명으로 돌아오게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수고하는 자의 동기는 무엇입니까? 누가 진리를 떠나 미혹된 자를 찾아 돌아서게 하려고 노력합니까?

 

그 눈물과 헌신, 수고는 무엇 때문입니까? 사랑입니다. 바울이 삼 년 동안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할 수 있었던 힘은 무엇입니까?(20:31) 사랑입니다. 성도가 범죄했을 때, 그를 찾아가 온유하게 진리로 그를 회개하게 해야 하는 엄청난 수고를 왜 형제가 감당합니까? 불편하고 힘든 그 일을 우리가 눈물과 헌신으로 해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6:1-2) 형제를 향한 거짓 없는 사랑입니다.

 

죄는 믿지 않는 자들을 영원한 멸망으로, 믿는 자들은 죄의 유혹으로 이끌어 교회를 무너뜨립니다. 그러나 사랑은 죄를 이깁니다. 소아시아 교회는 당시 많은 핍박을 겪고 있었습니다. 외부에서 내부에서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했습니다. 오늘날은 어떠합니까? 한국 교회 역사상 이렇게까지 교회가 외부로부터 비난을 받았던 적은 없습니다. 다른 이유가 아닙니다. 죄의 유혹 때문입니다. 죄가 교회 안팎에 많은 세상입니다. 수많은 교회들이 무너지고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베드로의 말에 기울여야 합니다. 사랑은 죄를 이겨낼 것입니다. 그러니 그러한 사랑을 지켜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이미 우리는 형제를 사랑하게 된 자들로, 처음 받은 그 사랑을 지켜내야 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여기 이 말에 우리가 형제사랑을 변치 않게 지켜낼 수 있는 비결이 있습니다. 처음에 우리가 어떻게 이 사랑을 갖게 되었는지를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에 순종하여 거듭났을 때, 거짓없이 형제를 사랑하는데 이르렀습니다(벧전 1:22).

 

우리가 처음에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을 처음 깨닫고 그것이 얼마나 위대한지 기억했을 때 형제 사랑이 생겼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였습니다. 주 안의 형제 자매를 사랑하는 마음이 우리 가운데 풍성하게 차올랐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약속하신 것이기도 합니다. 다락방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15:11-12). 주가 우리를 사랑하신 것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가득 찼습니다. 주가 원하시는 것이면 무엇이든 하겠다고 고백했습니다. 이제는 주를 위해 살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주의 사랑으로 가득 찼습니다.

 

죄로 인해 날마다 주를 떠나고 마음에 우상을 만들어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보다는 허무하고 보잘 것 없는 썩어질 것에 사로잡혀 살던 나를 주님은 먼저 사랑해주셨습니다. 그분은 나를 오래 참아주셨습니다. 그분의 마음은 온유하고 겸손하셨습니다. 천지만물을 지으신 분께서 나에게 와서 사랑을 베풀어 주실까요? 나 같은 사람이 세상에서 없어지는 것이 아무것도 아닐진데 나 같은 사람의 머리카락 하나도 세시고 먹을 것 입을 것을 생각하실까?

 

그분은 나의 죄를 못 본 체 하지 않으시고 사랑으로 다루어 주셨습니다. 그분은 창조주시오 나는 피조물인데, 내가 무엇이기에 하나님은 허리를 숙이셔서 내게 겸손히 긍휼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목숨까지 내어주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죄인들을 향하여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달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런 사랑을 베풀어주셨고, 지금도 매일의 일상 가운데 사랑을 베풀어주십니다. 그 사랑의 기쁨이 우리 안에 차오를수록 우리는 형제를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의 가치를 잃어갑니다. 다른 것들로 그 자리를 채워갑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을 회복하고, 형제 자매를 위한 거짓 없는 사랑을 지켜내야 합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1-4).

 

유평교회의 목표는 성경적인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교회를 세우겠다 하셨고 친히 그 터가 되셨습니다. 주님께서 최초의 교회에 남기신 명령은 하나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입니다. 우리는 이 명령에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교회에 형제 자매를 향한 사랑이 지켜지지 않고 변질된다면 절대 성경적인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거짓 없는 사랑이 지켜질 수 있도록 자신을 돌아보기를 바랍니다. 자랑하고 싶은 마음, 교만한 마음,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마음이 없는지 스스로 회개하고 돌이켜 하나님 앞에 나와서 복음의 가치를 깨닫고 형제를 향한 거짓 없는 사랑을 지켜 내시기 바랍니다.

 

 

 

서로 대접하라 /벧전4:9/ 조정의목사

2020-09-23 15:42:39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오늘은 이 짧은 구절의 말씀에 담긴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저는 벧전 4:7-11을 하나의 시리즈의 말씀으로 여러분께 전달하고 있습니다. 모든 말씀들은 7절에 첫 문구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우므로 더욱 힘써 이러한 일에 열심을 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열심을 내야 하는 것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근신하여 기도하고 정신을 차리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 마음을 두지 말고 하늘에 우리의 마음을 두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8절에서는 무엇보다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말세가 될수록 자기 자신을, 돈을, 쾌락을 더욱 사랑할 것인데 너희들은 서로 사랑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나서 오늘 살펴볼 본문에서는 그 사랑의 구체적인 실천방법으로 서로 대접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강단에서 구체적인 명령이나 적용 따위를 잘 전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아침에 큐티를 하십시오라든지 매일 저녁 잠들기 전 기도하십시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선포될 때 여러분의 삶 속에서 그 말씀이 구석구석 적용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매우 구체적인 적용이 등장하는 구절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에 매우 구체적인 적용으로 대접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과거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대접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알지 못했을 때 천사들을 대접했고, 출애굽기를 보면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구출하고 나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규례를 주시기를 나그네를 대접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22:21; 14:29). 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은 헬라인 문화에 있는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에게도 역시 이것은 아름다운 미덕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러합니다. 사회적으로 볼 때 대접하는 것은 매우 아름다운 일입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을 생각해보면 대접이라는 것은 더욱 큰 의미가 있습니다. 초대교회에 갑자기 사람들이 더해져 하루 아침에 3천 명이 더해질 정도였습니다. 당시는 오늘날과 같은 예배당이 없었으니 넓은 성전이나 광장에서 모였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에는 집집마다 모여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2:46).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누군가가 자신의 집을 제공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집을 치우고 음식을 준비하고 손님을 맞을 준비를 했을 것입니다. 날마다 그러한 대접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편지를 받고 있는 소아시아 지역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각 성을 다닐 때 머물만한 곳이 마땅치 않았습니다. 당시 그곳은 이교도적인 문화가 팽배했기에 그리스도인이 머물 수 있는 장소가 적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자들과 성도가 여행을 다닐 때 집집마다 대접하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브리스가와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고전 16:19),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하고”(4:15). 이 말씀들을 볼 때 누군가 가정을 개방해서 교회로서 모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6:15을 보면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할 때 루디아가 구원을 받는데 그녀는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성도들마다 집을 개방했고 그 집이 바로 교회였던 것입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대접에 대한 명령을 많이 합니다.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성이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가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10:11). 오늘 본문의 베드로의 명령은 그 합당한 자가 서로 되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12:13)고 했고,

 

히브리서 기자도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13:2)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요한이 칭찬했던 사람, 가이오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네가 무엇이든지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은 신실한 일이니”(요삼 1:5). 그가 칭찬받았던 것은 나그네 된 형제들을 잘 대접하였기 때문입니다. 당시 형제자매를 대접하는 것은 특별히 교회에게 요구된 사랑의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왜 손님 접대가 힘들까요. 우리나라 속담에 숭어와 손님은 사흘만 지나면 냄새난다’ ‘()은 갈수록 좋고 비는 올수록 좋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집에 손님으로 왔을 때 사흘 동안 있다면 이제는 집에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왜 이런 반응이 나올까요?

 

손님을 초대하는 데에는 기본적으로 세 가지가 요구됩니다. 그것은 시간, 비용, 헌신하는 마음입니다. 모든 선택은 기회비용을 치르게 되어있습니다. 이 시간 설교를 들으면 이 시간에 할 수 있는 다른 일들을 포기하고 이것을 선택한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손님을 접대하는 것도 이외에 다른 것들을 포기하고 손님에게 시간을 쏟겠다고 선택한 것입니다. 나의 개인적인 쉼이나 여가 생활, 취미생활, 일 등을 포기한 것입니다.

 

저는 미국에서 공부할 때 아내와 함께 공부하면서 바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방학이 되면 함께 시간을 보내자고 계획했는데 제 동생이 미국에 여행을 와서 2달을 지내고 갔습니다. 저희 부부는 기쁨으로 동생을 섬겼지만 저희들이 하고자 계획했던 많은 일들은 할 수 없었습니다.

 

대접하는 일에는 비용이 듭니다. 손님을 접대할 때 손님을 태워오고 태워가고 음식을 준비하고 그 손님이 사용하는 물과 전기 등이 소비됩니다. 제가 갔던 미얀마에서는 저희를 대접하기 위해 하나 뿐인 개를 죽여 음식을 준비했습니다. 아이를 키울 때도 생활비가 하나 하나 들어가듯이 손님을 대접할 때 비용이 듭니다. 또한 우리에게는 누군가를 대접할 때 헌신하는 마음이 요구됩니다. 손님이 불편한 점이 없는지, 관심이 필요합니다. 이와 같은 것들이 손님 대접이 어려운 이유입니다.

 

우리 교회는 주일에 방문하시는 분들이 매주 더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오시는 분들도 있고 타 지역에서 방문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멀리서 2-3시간을 차를 타고 오시기도 합니다.

 

그런 분들과 주일 오후 시간을 보내지 못하고 함께 식사를 나누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물론 다른 모임이 있기도 하고 성경공부도 해야 하고 축구도 해야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시간과 비용, 헌신을 다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가족들과 쉬고 싶다, 다음날 출근해야 한다, 재미있는 것을 즐겨야 한다, 등의 이유로 우리 안에 헌신의 마음이 사라진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말세에는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돈을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헌신의 마음은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과는 반대되는 것입니다. 말세가 될수록 사랑하는 것, 섬기는 것이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에 따라 순종해야 합니다.

 

서로 대접하되 원망 없이 하라는 말씀에서, ‘원망의 의미는 들리지 않게 혼자 중얼거리다입니다. 손님이 집에 있는데 속으로 조용히 불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대접을 하되 불평하는 마음 없이 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마음, 섬기는 마음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눈치없이 이런 행동을 하지’, ‘과연 내 희생을 알까’, ‘왜 나에게 고맙다고 하지 않지?’ 등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한 원망 없이 헌신하는 마음으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대접하는 것은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는 말씀의 구체적인 실천입니다. 우리가 이것으로 인해 불평하는 것은 뜨겁게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명령에 따라 여러분에게 구체적인 명령을 드립니다. 서로 대접하는 일에 힘쓰십시오.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베드로가 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는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소유된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로 갑옷을 삼은 군인이라고 했을 때, 하나님은 우리의 대장이 되신 분입니다. 천지 만물을 지으신 분이 우리에게 이와 같이 명령하실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순종뿐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자기 아들을 내어주시기까지 아낌없이 주신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순종하는 이유는 그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순종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했던 명령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 구체적인 실천이 여기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대접하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매주 여러분에게 기회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실질적으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면 세상에게, 그리고 우리 자녀들에게 우리가 말하는 것을 우리 스스로 파괴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까? 그것을 가늠할 수 있는 구체적인 기준이 있습니다. 서로 대접하는 것입니다.

 

또한 대접하는 것에는 보상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10:42)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늘나라에 갔을 때 주님께서 그 때 고마웠다, 내가 힘들고 어렵고 배고팠는데 네가 나에게 베풀었던 사랑에 고마웠다라고 말씀하신다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주님은 직접 제자들에게 그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들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니라매주 매 순간 여러분들이 주님을 대접할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매주 성도를 대접하고 있습니다. 자매님들이 수고하여 매주일 점심을 교회에서 먹고 있습니다. 전날 미리 와서 재료를 손질하시고 주일 설거지가 끝난 뒤에도 뒷정리 하는 등 수고가 많으십니다. 그 일에 시간을 들여야 하고 비용을 사용해야 하며 헌신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매주 거르지 않고 맛있게 점심을 먹고 있습니다. 교회에 새로 오신 분들도 타지역에서 방문한 분들도 그 음식을 먹고 있습니다. 참 잘하고 있는 일입니다. 이 일에 베드로의 마지막 명령을 주목하십시오. 그 일을 원망 없이하시길 바랍니다. 주께서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다면 우리도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구역집회를 하면서 우리는 가정을 개방하여 모입니다. 가정을 개방하면 청소도 해야 하고 음식을 준비해야 하기도 합니다. 이런 일들에 있어서 원망 없이 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대접하는 마음으로 성도를 대접하십시오. 교회에 방문한 분들을 초대하여 대접하십시오. 제가 그레이스 교회에 참석했을 때 작은 소그룹에서 인사를 했는데 그날 두 가정에서 각자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겠다고 했습니다. 제가 느낀 것은, ‘이 교회가 만 명이나 모이는 교회인데 이렇게 사랑이 넘치는구나라는 것이었습니다. 지식으로 알아가는 교회가 아니라 사랑으로 드러나는 교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역시 그러한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올해도 8월이 되면 위드바이블 캠프를 진행합니다. 작년과 마찬가지로 가정을 개방해달라고 요청할 것입니다. 주님을 섬길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셨는지 우리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드러낼 수 있는 기회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고 헌신하면서 대접할 수 있는 힘은 주님으로부터 나옵니다. 우리는 성도들의 필요를 돌보는 일을 하지만 주님은 우리의 영혼의 목마름을 해결해 주셨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너희도 나그네였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하십니다(22:21). 그 구원의 능력, 은혜를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베푸신 은혜를 헤아려 보십시오. 그분이 우리에게 얼마나 겸손하게 대하셨으며 얼마나 헌신하셨습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시간을 내어주셨습니까? 그분은 이 땅에서의 모든 삶이 우리를 의롭게 하기 위한 희생제물로서의 삶이었습니다. 주님이 어떤 비용을 제공하셨습니까? 주님이 피 값을 주고 행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베푸신 것을 우리만 누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존 웨슬리는 내 신발장에 있는 신발은 가난한 누군가의 신발이고, 옷장에 있는 옷들은 가난한 누군가가 입을 옷들이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주님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라고 이러한 것들을 허락하셨을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것들을 이 땅에서 누리고 산다면 그저 사라지고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것으로 성도들 섬기고 대접한다면 영원한 썩지 않는 보상이 주어질 것입니다.

 

오늘 말씀처럼 서로 대접하기를 힘쓰시길 바랍니다. 유평교회에 누군가가 방문했을 때 대접과 사랑이 넘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승천하시면서 내가 너희를 떠나겠다 하셨습니다. 그분이 이 땅에 계셨다면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와 진리를 선포하셨을 것입니다. 주님은 떠나시면서 이것을 너희에게 맡기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너희가 내 제자인 것을 알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뜨겁게 서로 사랑하는 것으로 세상에 하나님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성경적인 교회는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교회입니다. 그것은 뜨겁게 피차 사랑하는 것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서로 대접하십시오. 그리스도의 영광이 이 땅에서 드러날 것입니다.

 

 

 

 

 

서로 봉사하라 /벧전4:10-11/ 조정의목사

2020-09-23 15:40:14

 

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

 

 

오늘 말씀을 끝으로 베드로는 지금까지 해왔던 많은 이야기들을 마무리합니다. 이 중요한 시점에서 그는 왜 서로 봉사하라는 명령을 하고 있을까요? 베드로전서는 찬송으로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고 말합니다.

 

그가 태초에 우리를 택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셨으며, 성령으로 날마다 거룩하게 하신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큰 권능으로 그 구원을 지키고 계시고 하늘에 간직하고 계시며, 주님께서 다시 나타나시는 그 날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2장에서는 그리스도를 산돌로 말하고 그와 함께 지어져가는 교회에 대해 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로서 백성답게 살라고 말합니다. 정치 지도자들에게 순종하고, 선한 종으로서 주인에게 순종하라고 말하며, 가정에서, 교회에서, 주님의 백성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했습니다.

 

3장에서는 그들이 처한 많은 고난 가운데 어떻게 성도로서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 말했습니다.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면 너희에게 유익이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4장은 주님이 오실 그날에 대해 말합니다. 현재 수많은 고난을 당하지만 곧 만물의 마지막이 왔다고 말합니다. 이 때에 죄와 치열하게 싸우라고 말하고 정신을 차리고 기도하라고 말합니다. 무엇보다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고 말하고 그에 구체적인 적용으로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던 대접하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개인적인 사랑의 실천방법이라면, 오늘은 성도들이 교회로서 하나되어 서로 섬기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또다른 실천입니다.

 

무엇을 가지고 섬기는가

 

교회가 하나가 되어 섬길 것에 대해 말하면서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라고 말합니다. 각각 받은 은사를 가지고 섬기라는 것입니다. 은사는 헬라어로 카리스마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 단어를 생각할 때 한 사람이 원래 가지고 있는 에너지, 리더십, 능력 등을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강한 카리스마가 있다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조용하고 차분한 카리스마가 있다고 말합니다.

 

성경에서 카리스마는 성령의 은사를 가리킬 때 사용합니다. 거듭날 때 성령께서 주신 영적 능력, 자원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단어는 은혜와 어원이 같습니다. 즉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인 것입니다. 성도 각각에게 하나님이 주신 은사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은사에 대해서는 로마서 12장과 고전12장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흔히 우리가 아는 은사는 방언, 예언, 가르침, 섬기는 것 등이 있습니다. 저는 성경에 나오는 은사를 목록으로 만들어봤습니다. 크게 말로 하는 것행동으로 하는 것으로 나눴습니다.

 

먼저, 말로 하는 것은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가르치는 일’, ‘위로하는 일’, ‘사도’, ‘교사’, ‘선지자’, ‘복음전하는 자’, ‘목사등이 있었습니다. 예언을 하고 영을 분별하며, 방언, 방언 통역 등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방언의 은사는 없어진 것으로 분별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행동으로 하는 것에는 섬기는 일’, ‘구제하는 일’, ‘다스리는 일’, ‘긍휼을 베푸는 일’, ‘병 고치는 은사’, ‘능력 행함등이 있습니다. 물론 이것이 은사의 전부는 아닙니다. 여러분은 이 중에 아무것에도 해당되는 것이 없다 해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정말 다양한 은사가 있는데 그저 대표적인 예시로 들은 것입니다.

 

베드로는 각각이라는 말을 했는데, 한 사람도 빠짐없이 은사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거듭난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은사를 받았습니다. 아무리 어린 아이라도 나이 많으신 분들도 은사를 받았습니다. 이것은 운전면허처럼 우리가 무엇을 해서 얻어낸 것이 아닙니다.

 

거듭난 신자에게 하나님이 성령의 뜻대로 은사를 주시는 것입니다(고전 12:11). 또한 은사는 하나님께 조르고 떼를 써서 받은 것이 아닙니다. 방언의 은사를 주장하는 일부 사람들이 하나님께 열심히 구하면 그 은사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하는데 이는 성경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은사를 받았고 우리의 노력이나 간구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로 얻은 것이라면, 우리는 우리의 은사에 만족해야 합니다. 우리는 각각 다른 은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존 맥아더 목사님 같은 설교가가 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다 해도 저는 만족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은사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내가 남보다 더 지혜 있다거나 다른 사람보다 더 말을 잘 한다거나 봉사를 잘 한다고 교만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내가 취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우월감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베드로는 우리가 각각 하나님께 은사를 받았다에서 그치지 않고 맡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하나님은 서로 섬기라고 은사를 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 은사를 어떻게 사용하는 지에도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선한 청지기는 주인이신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자입니다.

 

누가복음 12장에서 주님은 비유로 말씀하시면서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자신을 맡은 자라고 말하면서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 4:2)고 말합니다.

 

서로 봉사하라에서 봉사하다섬기다와 같은 말입니다. 우리가 받은 영적 자원은 더 넓게는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허락한 모든 것을 말합니다. 재물과 시간, 영향력, 친구관계 등 모든 영역에서 그러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섬길 수 있을까요?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않은 것이 무엇이냐우리의 모든 은사는 하나님으로부터 와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사를 사용할 때 자만하지 말아야 하고 충성해야 합니다.

 

잡히시던 날 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했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제자들은 서로 발을 씻길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13:14-15)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라면 마땅히 서로 섬기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베드로가 이제 성도들에게 이와 같이 명령하고 있습니다. 봉사하라, 섬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섬김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흔히 교회에서 실업자 되지 말라는 말을 듣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교회 안에 어떤 부서에 반드시 소속되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부서에 소속되지 않으면 실업자라는 말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은사, 영적 자원을 성도들을 섬기는 데 사용하지 않는 자가 실업자입니다.

 

여러 부서는 우리의 영적 자원을 사용할 수 있는 좋은 방편들입니다. 애찬 당번으로 일하는 것도, 주일학교나 학생회에서 가르치는 것도, 새로 방문한 성도를 안내하는 것도 모두 봉사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재능과 영적 자원을 가지고 성도를 섬기고 있다면 그는 실업자가 아닙니다.

 

우리가 모이는 주일은 섬김과 봉사의 시간들입니다. 성가대는 찬송을 통해 섬기고, 뒤에서 음향을 맡은 사람은 그 일을 통해서 섬깁니다. 아래층에서 식사를 준비하는 분들도 역시 섬기고 계십니다. 우리가 함께 모였을 때 섬기는 그 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방에서 일하시는 분들은 예배드리지 못한다고 속상해 하지 마십시오. 그것으로 예배에 함께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주 우리가 받은 은사를 통해 섬깁니다.

 

어떻게 섬기는가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11). 제가 이렇게 여러분에게 말로 설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말로 하는 은사입니다. 설교나 가르침, 복음을 전파하는 것, 예언하는 것, 찬양하는 것이 모두 말로 하는 것들입니다.

 

간증하고 교제하는 것, 권면하고 격려하는 것도 역시 말로 하는 것들입니다. 이러한 말로 하는 은사를 사용할 때 베드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그 대언자처럼 말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대로, 그 원리대로 말해야 할 것입니다.

 

설교자로서 이 자리에 선 저는 제가 하고 싶은 말을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모든 말의 은사들은 하나님이 그렇게 생각하시는가, 하나님의 진리가 그 말을 지지하는가를 생각하면서 말해야 합니다.

 

많은 교사들이 고민하는 것이 이것일 것입니다. 자신이 성경과 다른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염려입니다. 그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가르치는 일이 아닌 다른 은사들, 가령 교제할 때 권면하고 훈계하며 조언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 역시 나의 권면이 하나님의 원리에 합당한가 생각해야 합니다. 시어머니 때문에 고통 중에 있는 성도에게 그냥 남편한테 화풀이 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11). 이는 행동으로 섬기는 일입니다. 여기 봉사는 집사와 비슷한 말입니다. 당시 교회에서 집사를 세운 것을 보면, 그들은 재정적인 일을 관리하거나 성도들을 섬기는 일을 했습니다. 교회에는 이러한 봉사와 섬김을 잘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는 명령을 합니다. 그 섬김의 원천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인정하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섬김의 봉사가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힘으로 하고 있다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때로 왜 내 힘을 해야 하지?’라고 생각할 때 우리는 금방 지치게 됩니다. 또한 나처럼 봉사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 불평하고 판단하게 됩니다. 그의 대표적인 인물로 마르다가 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초대하고 부엌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동생 마리아를 보니 주님 곁에서 말씀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께 마리아에게 일을 시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마르다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시작했지만 결국 자신의 힘을 의지한 것입니다. 곧 지치게 되고 다른 사람을 보면서 판단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힘으로 공급받아서 일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 안에는 불평 불만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힘을 얻어서 일해야 하고 또한 하나님이 섬기시는 것처럼 신실하고 온유하게 섬겨야 합니다.

 

왜 섬기는가

 

우리가 이렇게 봉사하는 목적은 무엇인가요?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11). 우리가 주일 예배시간에 가장 많이 하는 기도가 주님 홀로 영광 받으시기를 원한다입니다.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이지만 동시에 예배의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분께 영광 돌리기 위해 모인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받은 은사로 성도를 섬길 때 그것으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이 말씀에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우리의 인생이 어떠했을까요? 우리는 예수님이 없으면 의미가 없는 인생이었습니다. 많은 섬김의 삶을 살아도 (사도 바울의 표현에 따르면) 우리의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예수님이 없다면 하나님 앞에서 의미 없는 활동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분이 친히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셨고, 우리의 모든 행동이 하나님께 의미 있게 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서로 섬길 때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3:17). 우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제 베드로는 마지막에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11). “아멘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동의합니다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은 구약시대에도 무궁했고 베드로의 시대에도 무궁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큰 권능이 드러났던 장면을 구약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작은 백성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고 여러 방법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구출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신약시대에는 더 큰 영광이 드러났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던 인간이 새롭게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권능으로 우리의 구원이 보장되었습니다. 그 구원은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까지 보호받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도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이 무궁합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에 우리는 그 실체를 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가 준 은사로 서로 섬겨라. 그렇게 할 때 내가 영광을 얻는다그것이 우리가 섬기는 이유입니다.

 

저는 계시록 말씀을 보면서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에 유평교회 성도들이 함께 설 날을 상상해 봅니다. 하나님 앞에서와 여러분 앞에서 제가 어떤 평가를 받을까를 생각합니다. 주님은 저에게 주신 은사를 제가 어떻게 사용했는가에 대해 장부를 펼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말씀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의 은사를 통해 힘 있게 성도를 섬겼다고 평가받기를 바랍니다.

 

여기 계신 모든 분들에게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이 무궁히 있기를 바랍니다. 그 하나님을 예배하고 영광 돌렸으면 좋겠습니다. 그때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고 주님이 주신 은사로 섬겼을 뿐이라고 화답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다시 말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벧전4:7-11/ 김병삼목사

2019-05-02 03:20:23

 

베드로전서 강해 9

베드로 전서 47-11

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8.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9.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

 

마지막을 생각하십시오!

오늘 본문 7절에는 마지막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왠지 마지막이라는 말을 들으면 비장한 마음이 듭니다. 적어도 베드로가 성도들을 향해 이 말을 할 때에, 그런 비장한 마음이 아니었을까요? 언제 마지막이 올지 모르는데, 그 날이 도적같이 이르게 될 텐데 준비된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입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시작은 거창하지만 마지막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지는 일들을 봅니다.

우리는 시작이 중요하다는 말을 참 많이 들어왔습니다. 시작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시작을 했어도 마지막이 좋지 않으면 실패한 것입니다. 어쩌면 마지막을 준비하고, 마지막까지 견디는 것이야말로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닐까요?

 

고든 맥도널드의 책 [영적 성장의 길]에 보면 미국 대륙횡단철도 건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미국 역사상 단일사업으로 유래가 없는 수많은 비용과 희생이 따랐던 공사였습니다.

당시 거창한 기공식에는 캘리포니아의 유력한 사람들이 많이 초청을 받았고, 그 중에 가장 중요한 후원자였던 콜리스 헌팅턴이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참석을 거부하며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첫 번째 못을 박는 것을 기념하고 싶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하라, 난 그럴 마음 없다.

저기 보이는 산들은 끔찍하다. 우리는 실패할 수도 있다. 만약 실패한다면 가능한 아는 사람이 적었으면 좋겠다. . .첫 번째 못은 누구나 박을 수 있지만, 첫 번째 못과 마지막 못 사이에 헤아릴 수 없는 노동과 불안이 놓여 있다.”

 

18695월 마침내 철도가 완성되고 마지막 못으로 금 못을 박아 넣자 마침내 두 기관차 (하나는 동에서 또 하나는 서에서 출발한)가 달려와서 만났다. 당시 대통령 율리시스 S. 그랜트에게 전보가 갔다.

각하, 마지막 레일이 놓였고 마지막 못이 박혔다는 사실을 보고 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태평양 철도가 완성되었습니다.” 이제 콜리스 헌팅턴에게도 축하할 거리가 생겼을 것 같다.

 

물론 우리 인생에 시작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마지막이 아닐까요?

주안 장로교회 주승중 목사님이 그날 같은 하루라는 제목으로 오늘의 본문을 가지고 설교하며 인용한 예화를 소개합니다.

 

유명한 애플 컴퓨터의 CEO인 스티브 잡스(Steve Jobs)라는 사람이 있다. 그가 지난 612일에 미국 서부의 명문대학인 스탠포드대 졸업식에서 이런 연설을 하였다. 그는 17세 때 한 경구를 읽고서는 그것이 그의 생의 큰 전환점을 이루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 경구는 이런 것이었다.

 

하루 하루를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산다면, 언젠가는 바른 길에 서 있을 것이다

(If you live each day as it was your last, someday you will most certainly be right.)

그는 이 글에 감동을 받고, 그 후 50살이 되기까지 33년 동안을 매일 아침 일어나 거울을 보면서 자신에게 이렇게 묻곤 했다.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지금 하려는 일을 할 것인가?”

 

(If today were the last day of my life, would I want to do what I am about to do today?)

그리고 그는 이 질문에 아니오!”라는 대답이 나온다면, 다른 것을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말하기를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명심하는 것이 저에게는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됩니다라고 고백했다.

 

마지막을 산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인데,

성경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마지막을 살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이 내 것이 아니라면, 우리에게 내일이 나의 소유가 아니라면,

오늘 우리들에게 주어진 삶을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오늘 본문 7절이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적어도 베드로에게 있어 초대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의 문제는 마지막을 의식하지 못하고 살기 때문이라고 보았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진리를 모르는 것도 해야 할 일을 모르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을 행할 날들이 충분하다고 생각하기에 꼭 필요한 것들을 뒤로 미뤄놓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한 홍 목사님이 쓴 [아멘 다음이 중요하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서문에서 한 홍 목사님이 이 책을 쓰게 된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배시간에 눈물을 흘리고 은혜를 받아도 변하지 않는 교인들, 분명히 말씀에 아멘은 하는데 세상과 똑같은 사람들. 그래서 아멘 다음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감격할 수 있습니다. 죄에서 죽은 우리의 삶을 기뻐하며 축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아멘 다음에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육체가 죄에서 죽었으므로, 이제 죄가 그치고 생명으로 들어갔는데, 다시 정욕에 빠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죄에서 죽었다는 것은 이제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는 새로운 의지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7절의 말씀을 보기 바랍니다.

 

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베드로는 본문에서 마지막을 준비하는 태도와 삶에 대하여 세 가지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be clear minded'. ‘근신하여’ 'be self-controlled' .‘기도하라’ 'so that you can pray'

문맥상으로 보면 기도할 수 있도록 갖추어야 할 조건이 두 가지 있다는 말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근신해서 기도하라는 것이죠. 왜 이렇게 말씀하고 있을까요?

 

마지막 때가 되면 우리를 유혹하는 것들이 있는데 다른것들이 아니라 유사한 것들입니다.

깨끗한 마음으로 자신을 통제하지 않으면 우리를 유혹하는 것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죠.

초대교회에서 사도들이 가장 힘들어 했던 문제는 신앙의 정도를 걷지 않고 유사한 형태로 변해가는 것들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찾아온 사람들이, 예수를 따르면서 부수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게 됩니다.

십자가를 지고 사명을 감당하겠다는 사람들이, 사명을 감당하며 찾아온 칭찬과 명예 그리고 그로 인해 그 자리에서 욕심을 부리기 시작하는 것을 우리는 참 많이 보아왔습니다.

 

심지어 중세교회에는 세상의 욕심을 다 버리고 수도원에 찾아와 수도사가 된 사람들이 원장이 되려고 싸움을 하는 일들이 일어났으니 말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모인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잘 하자고 만들어놓은 건물들과 땅들로 인해 물질로 인해 타락하는 일들이 일어났으니 말입니다.

 

타락한 교회와 타락한 수도원에서 끊임없이 성경을 연구하고 기도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깨끗하지 못한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가 올바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는 삶은 아무리 열심히 기도해도 타락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요즘 자기 성찰이라는 말을 참 좋아합니다.

 

다른 종교에서 자기 성찰이라고 하면 고요한 명상으로 자신을 돌아보는 의미이겠지만,

우리 신앙인들에게 자기성찰이란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보기 위한 시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처음 은혜를 주시고,

죄에서부터 자유하게 하시고,

우리를 사명으로 부르셨던 때를 기억하는 것이죠.

성찰이라는 것을 자신을 비추어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을 비추어 볼 때 보이는 자신의 모습이야 말로 가장 명확하지 않을까요?

 

마지막을 생각하므로 이렇게 사십시오!

이제 8절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8.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무엇보다도뜨겁게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개역한글 버전에서는 열심으로라고 표현하고 있고요.

C. S. 루이스는 불같은 감정이 사그라진 뒤에도 상대방에게 변함없이 헌신하는 것이 바로 참된 사랑이라고 말했습니다.

 

NIV 성경에는 이분을 ‘deeply’라는 단어로 썼습니다.

말씀을 묵상하면서 저에게는 열심히라는 표현보다는 깊이라는 말이 더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뜨겁게 라는 말은 왠지 밖으로 드러나는 요란함 같은 의미라면 깊이라는 말은 드러나지 않는 진중함, 그리고 변치 않을 것 같은 마음이 묻어납니다.

 

그런데 이렇게 깊이 사랑해야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허다한 죄를 덮습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죄를 무시한다거나 가벼이 여긴다는 것이 아닙니다. 모른 척 해서 더러운 죄가 수면 아래서 성행하도록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사랑으로 죄를 덮어 그 죄가 활동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흔히 우리가 교회에서 힘들어 하는 것 중에 하나가 이런 말이 아닐까요?

 

그럼 그런 죄를 그냥 놔두자는 겁니까?”

그리고 우리가 오랫동안 은혜라는 이름으로 죄를 방관하므로 그 죄가 심각해 졌던 것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은혜는 방치가 아닙니다.

은혜와 사랑은 죄를 꼭 묶어서 활동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은혜와 사랑의 무게가 허다한 죄를 덮어서 움직이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참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가 7절의 말씀을 전제하지 않고는 8절이 불가능하지 않을까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올바른 기도를 하지 않는 사람이 정말 뜨겁게 사랑할 수 있을까요?

진정한 하나님의 마음과 사랑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권면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이렇게 말씀을 다시 쓸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하므로 하나님께 받은 생각과 마음으로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왜냐하면 우리들의 문제는 뜨겁게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방식으로 뜨겁게 사랑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그래서 어떤 상담 전문가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학대하는 것이 대개 자녀를 덜 사랑해서가 아니라 너무 사랑해서 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죄가 사라질 수 있을까요?

나쁜 사람들이 없어질 수 있을까요? 절대로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드러나지 않도록, 활동하지 않도록 사랑으로 덮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

이제 조금 더 나아갑니다. 9절과 10절 말씀을 보세요.

 

9.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이 말씀들은 개별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연속선상에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사랑이 허다한 죄를 덮었다면,

이제는 죄가 일어날 수 있는 방법을 예방하는 차원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보자는 것입니다.

 

의 동기가 이기심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만일 우리가 이타적인 본성을 가졌다면 죄를 지을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본성에는 누군가에게 베풀거나, 자신을 포기하고 양보하기 보다는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는 욕구가 있습니다. 문제는 모두가 이런 자기중심적 욕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죠.

한 번 깊이 자신을 생각해 보세요.

누군가에 대한 원망, 불평의 마음들 근원에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래서 우리는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압니다.

 

김영란 법이 만들어 졌을까요?

사람들이 누군가를 대접한다는 것이 순수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꼭 대가를 바라는 그 대접 때문에 불의한 일들이 만들어 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타락하게 만드는 것은 신앙적 결단으로 했던 일들에 대하여 어느 날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아닐까? 선교지에서 선교사들이 타락하는 것은 마땅한 대우를 받겠다는 데서. . .’

열심히 목회하던 목사가 어느 날 이정도 했으니 대우를 받아야 겠다는 데서. . .’)

그런데 이런 인간의 마음들을 법으로 제한하려고 하니 참 힘든 것입니다.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 복잡하고 어려운 김영란 법 대신 베드로 전서 49절 법을 만드는 게 훨씬 더 효율적이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하거나 바라지 않고 한다고 생각한다면,

누군가를 대접하는데 액수가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오히려 커다란 대접을 하면 할수록 더욱 권장할 사항이 아닐까요?

세상에서는 죄를 만들지 않기 위해 무언가를 제한하거나 금해야 한다고 합니다.

 

세상의 법은 금지법이죠.

그런데 성경의 법은 죄를 만들지 않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말합니다.

서로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영어로 ‘offer hospitality'라는 말인데, 호의를 베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단서 조항이 있습니다. ‘원망 없이하라는 것입니다.

원망 없이 호의를 베푸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이 베푼 호의에 대하여 바라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원망은 늘 우리가 바라는 것이 채워지지 않을 때 찾아오는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호의를 베풀면서 우리들에게 찾아오는 불만족’ ‘원망의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니 이런 것들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베드로는 4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섬김에 대하여 우리는 너무 어렵게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요? 신약성경에는 에 대한 말씀이 많이 나오죠. 섬김을 지칭하는 대명사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이 하는 일은 식사 시중을 드는 사람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혹시 우리가 생각하는 섬김이라는 것이 직장을 그만두고 전임목회로 뛰어들라거나, 혹은 먼 곳에 있는 선교지로 가라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요?

혹시 이 세상의 기아와 질병퇴치를 위해 아프리카로 가라는 명령으로 생각하나요?

단지 식사 시중을 들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이러한 시중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제이슨 미첼은 그의 책 [쉬운 예수는 없다]에서 이렇게 제안합니다.

 

섬김의 시작은 작게 하라.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면 바로 앞에 있는 사람들을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남들을 위해 자신의 영광을 겸손히 사용할 때만 찾아오는 보상을 아예 놓칠 수 있다.

 

은사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은사는 숨겨진 것을 애써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은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남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손에 쥐어진 것,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사용하므로,

그것을 주신 분을 영광스럽게 만드는 것입니다.

 

첫째는 은사를 받은 대로하라는 것이고,

둘째는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섬기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비교의식입니다. 참 신기하죠?

선행을 하는데도 비교의식이 생겨납니다. 착한 일을 해도 남들보다 더 잘하고 싶고,

나보다 더 잘하는 사람 때문에 옳은 일을 하고도 부족한 것 같은 마음이 생깁니다.

 

서로 잘 해보자고 했는데 싸움이 나는 경우들을 우리는 많이 경험합니다.

저는 교회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가 선행과 옳음을 경쟁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교회에서 있었던 일이죠.

그 교회는 회의를 할 때마다 늘 싸움을 합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물었답니다.

 

여러분들은 왜 이렇게 싸우세요?”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하죠.

잘 해보려고 합니다.”

목사님이 교인들에게 이렇게 제안을 했답니다.

너무 잘하려고 하지 맙시다!”

여기서도 자기 성찰이 참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사가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하기 원하시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봉사하는 사람들이 상처를 받는 것을 참 많이 봅니다.

특히 재능을 가지고 봉사하는 사람들이 참 힘들어 하죠. 얼마나 내가 기쁘게 신앙으로 봉사했던 자리인데, 나보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이 나타나서 그 자리를 대신하려고 할 때 말입니다.

 

또한 재능이 아니어도, 내가 얼마나 헌신하며 그 자리를 지켰는데 듣도 보도 못한 놈이 나타나더니 그 자리를 대신해?

그래서 자신의 헌신과 봉사의 흔적이 자취를 감추는 것 같을 때 참 힘들어 하지 않나요?

결국 그 내면을 보면, 헌신과 봉사보다 교만이 앞서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교만은 자신이 인정받거나 대접받으려는 욕망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런 세속적인 욕망이 없다면 결코 교만할 리가 없기 때문이죠.

자신을 내세우려는 교만이든, 숨어있지만 인정을 받으려는 교만이든,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끝까지 싸워야 하는 무서운 적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이 교만이 얼마나 무서우면 영혼의 에이즈라는 표현을 썼겠습니까?

에이즈라는 ‘HIV’가 무서운 이유가 무엇일까요? ‘면역 결핍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에이즈는 자체가 병이 아니라, 에이즈에 걸리면 면역세포가 작동을 못하기 때문에 모든 균에 노출되어 감염이 되기 때문입니다. 에이즈에 의해 죽는 것이 아니라, 면역세포가 작용하지 못하므로 쉽게 죽는 것이죠.

 

교만이 우리 속에 들어오면, 온갖 어둠의 세력들이 쉽게 침투합니다.

청지기 의식이야말로 우리를 보호하는 면역세포라는 생각이 듭니다.

누군가 비교의식이 생길 때, 누군가를 향해 미운 마음이 들 때, 자신이 부족하다는 자괴감이 들 때. 청지기 의식이 우리를 튼튼하게 지켜줍니다.

 

얼마 전에 읽었던 장기려 박사의 전기에 그런 내용이 있더군요.

세상을 떠나기 전 사람들이 찾아와 사진을 찍자고 해서 왜 그러나 했더니, 오랜 시간 여기저기를 찍더랍니다. 그래서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돌아가시면 동상을 세우려구요...”

 

그 말에 장기려 박사가 병상에서 노발대발 했다고 하죠.

이런 미친놈들이 나 죽은 다음에 동상을 세우려고, 그런 쓸데없는 짓 하지 말아..”

참 힘든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살았던 삶의 자취를 남기지 않는 것 말입니다.

 

사람들의 욕망 가운데 자신의 흔적을 남기려고 하는 성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후세의 사람들이 그 살아온 발자취를 보며 본받으려고 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본성의 문제요.

진정한 흔적은 동상이 아니라, 그의 자손들이 4대째 의사가 되어 계속해서 섬김의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죠.

 

청지기처럼. . .

그래서 오늘 말씀이 중요합니다. ‘선한 청지기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작은 일이든 큰일이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것이기에 우리가 한 일에 대한 권리주장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맡겨주신 것을 우리가 대신 행한 것뿐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아주 중요한 신앙적 태도가 아닐까요?

 

이제 이런 청지기의 삶에 대하여 조금 더 구체적으로 11절에서 말씀합니다.

 

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

 

당신이 하고 있는 그 말은 자신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조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당신이 지금 하고 있는 봉사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면 지칠 때 하나님께 기도하고, 교만할 때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생각할 때, 우리는 참 좋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성정이나, 욕심이 그대로 드러난다면 그리 좋은 모습은 아닐 듯합니다.

 

예전에 부흥회를 하면 목사님들이 참 많이 했던 말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 가장 무서운 마귀 둘이 있는데, 하나는 섭섭 마귀고 다른 하나는 삐딱 마귀라고 말입니다.

 

섭섭 마귀는 참여하지 않으면 생기는 마귀죠. 교회일 어딘가에 자신이 참여하지 않고 자신의 흔적이 없으면 섭섭합니다. 모든 일에 자신이 관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주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섭섭한 마음이 든다면 언제부터인가 청지기 의식이 사라졌다는 증거입니다.

 

청지기는 주인이 주는 것 가지고, 주인이 시키는 것에만 참여하면 되는데 말입니다.

삐딱 마귀는 자신을 알아주지 않으면 들어오는 무서운 마귀입니다. 청지기의 가장 큰 목적은 주인에게 영광이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영광을 가로채려고 하는 무서운 세력이 바로 사단의 역사입니다.

 

말로는 주인의 일을 한다고 하지만 여전히 그 일의 주인이 자기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청지기 의식이 없으면 아무리 열심히 선한 일을 해도, 주인과 상관없을 수 있다는 것이 무서운 일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고린도에 있는 교인들에게 이런 권면을 했던 것 같습니다. 고린도 전서 1031절에서,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청지기는 주인의 마음을 가장 잘 알고 행하는 사람입니다.

 

한 홍 목사의 책 [하나님이 내시는 길]에 보면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미국 프린스턴대학교 심리학자들이 신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성경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테마로 하여 한 가지 실험을 했다.

먼저 신학생들에게 왜 신학을 공부해서 목회자가 되려 하는지 물었다.

그랬더니 대부분,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목회자가 되려 한다고 했다. 그들에게 각자 선한 사마리아인 본문을 가지고 짧은 설교를 준비해서 캠퍼스 내의 한 건물 어느 방으로 가서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그 설교를 하라는 과제를 주었다.

 

그리고 심리학자들은 연극배우 한 명을 고용해서 학생들이 가는 길에 누워 있게 했다.

아주 가난하고 병약해 보이는 모습으로 누워 지나가는 사람에게 들릴 만큼 신음 소리를 내게 했다. 심리학자들은 선한 사마리아인 본문을 가지고 설교를 준비한 신학생들이 대부분 중간에서 멈추고 그 병약한 사람을 도와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험에 변수가 한 가지 있었는데, 설교하러 출발하려는 학생들 일부에게 자네는 늦었네, 지금 빨리 가지 않으면 시간에 못 맞출 걸세라고 말했고,

다른 일부에게는아직 시간이 넉넉히 있으니까, 지금 출발해서 여유 있게 걸어가도 될 걸세라고 했다.

 

그 결과, 늦었으니 빨리 가라고 한 신학생들 중 10%만 중간에 병약한 사람을 돕기 위해 멈춰 섰다. 어떤 학생들은 길에 누워 있던 그 병약한 사람을 거의 밟고 넘어갈 정도로 급하게 달려갔다고 한다. 이에 반해, 시간이 넉넉하다는 말을 들은 신학생들은 무려 63%나 멈춰 섰다고 한다.

 

심리학자들이 내린 결론은, 아무리 남을 돕겠다는 의도로 신학을 하고 있는 목회자 후보생들이라 해도, 아무리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로 설교를 준비할 정도로 잘 알고 있다고 해도, 그것이 실제 삶의 실천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차이는 시간의 여유가 있느냐 없느냐 였다.

 

조급함은 우리 안의 사랑과 동정심을 죽인다. 아무리 선한 마음을 갖고 있다고 해도 바쁘고 조급하면 무감각해지며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반응할 여유가 없어진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는 시간, 그리고 그것을 알고자 하는 여유가 아닐까요?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지 못했는데,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우리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죄가 드러나지 않도록 하는 가장 결정적인 방법은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과, 빛이 드러나는 곳에 죄와 어둠은 그 자리를 잃고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청지기 같은 삶의 결론이 이것입니다. 11.

 

. .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

 

아주 명쾌한 해답이 주어졌습니다.

하나님께 영광!

모든 권능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습니다.

영원토록 드러나야 하는 것은 하나님 한분이십니다!

아멘!

 

 

 

믿음을 확증하시라 /벧전4:18/고후13:5/ Paul Washer

2015-06-18 18:59:45

 

의인도 겨우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 저는, 많은 교인들이 화를 낼 설교를 할 수도 있습니다. *not true Xn

또 제가 여러분 부모님들에게, ‘자녀들의 신앙교육을 이제껏 잘못 했습니다!’ 라고 말하면,

아니, 우리가 믿음으로 반듯하게 잘 키웠는데, 무슨 소리냐?’ 하며

제게 분노하실 것입니다.

 

흔히들, 진리를 듣는 것보다는, 거짓 소망이라도 붙잡는 편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교회에 다니면서도, ‘진리는 듣기 껄끄러워 합니다.

왜냐하면 그 진리,

자신이 믿기만 하면 쉽고 편하게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하는 거짓 소망

자꾸 뒤흔들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믿어도 구원받기 어렵다는 구절이 있음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 벧전4:18

And, "If it is hard for the righteous to be saved,

what will become of the ungodly and the sinner?"

 

우리는 믿음으로 의인으로 인정받아서, 다 구원 받는다고 알고 있지만,

베드로 사도는 그 의인도, 겨우 구원 받을 수 있다’ ..

다른 말로 의인이 되었을 지라도, 구원 못 받을 수도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머리로만의인이 되었을 때 그렇습니다.

관계로는의인이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신앙은 관계적입니다.

 

예를 들면,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15:7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요일2:6

빛 가운데 있다 하며... 요일2:9

여호와를 친근히 하라.. 23:8

 

이런 구절들은, 성경에 수두룩 빽빽하게 나옵니다.

다 관계를 표현하는 구절들입니다.

 

자신이 머리로써 믿음을 가지면서도,

주님과 개인적/인격적 관계가 없으면... 그것 구원 받는 믿음이 아닙니다. (이 단락, 편집자 삽글)

 

 

믿음을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지금 기독교 안에는,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칭하셔서,

자신이 구원 받은 성도라고 스스로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신칭의 신앙

 

(Paul Washer, 지금 목회자들이

성경을 더 많이 연구하고, 설교를 더 적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전 세계의 사람들, 특히 미국 신자들이,

스스로 구원 받은 자라고 안심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때마다 저는 그 분들께 되묻습니다.

당신이 구원받은 것을, 당신은 어떻게 아십니까?’

 

그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글쎄요. 그냥 믿으니까요.’ 혹은 '우리 목사님이 그랬어요.'

 

오늘 집회가 끝나면, 여러분은 이 도시 각처의 집과 직장으로 흩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동네와 직장에서 만나는 거의 모든 사람을 붙잡고 물어보십시오.

그들은 불신자가 아닙니다. ‘대부분 다 예수님을 머리로만 믿는 신자들입니다.’

 

여러분, 이런 현상은 미국뿐만 아닙니다.

전 세계의 유흥업소, 홍등가(붉은 등불의 거리), 카지노에 가 보시면,

거기에 앉아있는 사람들도 다 머리로는 믿는 사람들입니다.

 

만약 여러분의 믿음이, 그런 사람들의 믿음과 비슷한 수준이라면..

여러분의 믿음이.. 구원 받는 믿음이라고.. 확신하실 수 있으십니까?

그들은, 머리로만 믿고 있지.. 주님과의 관계는 없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개신교에는 2가지 교리가 상당한 위험을 주고 있습니다.

이신칭의성도의 견인입니다.

2가지가 극단적으로 강조된 나머지, 전통적 기독교가 표류하고 있습니다.

 

-이신칭의는.. belief system(신념체계, 사상체계)으로 전락해서

그 원래 뜻이 완전히 달라져 버렸고요,

또 태생적으로 이 교리가.. 중세 가톨릭에 대항해서 나온 것입니다.

16세기 가톨릭교회가, ‘교회 바깥에 구원이 없다고 개신교를 거세게 위협하니까,

개신교는 ‘(교회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고 주장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관련글 : 은혜와 선행, 둘 다 보기

-‘성도의 견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시 가톨릭교회가 너무 교회가 인정하는 구원, 교적에 의한 구원만 주장하니까,

종교개혁자들은, ‘참 믿는 성도는, 하나님이 끝까지 그를 지켜 천국으로 인도하신다

대항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물론 성경적인 바탕에 의한 주장이었습니다.

 

그런 시대적 상황 속에서 생성된 이 두 교리가

16세기와는 전혀 다른 배경에 사는 오늘날 전 세계 성도들에게

거짓일지도 모르는 구원의 확신을 보장해 주고 있습니다.

 

마음으로 믿기만 하면, 누구든지 구원 받는다고.. 그것도 확신하고 있으며,

한 번 구원 받으면, 비행기 안에서 넘어지고 자빠져도 목적지에 간다고 하는데요..

이런 값싼 은혜로 자기 구원에 (거짓) 확신을 주고 있습니다. *cheap grace, 본 훼퍼의 주장

 

처음 믿을 때부터.. 잘못 믿은 것

만약 어떤 신자가,

3~4~1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며 말씀공부와 기도와 성도의 교제에 힘쓰다가

어느 시점부터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하는 것을.. 오늘날 주위에서 흔히 봅니다.

그들은 점점 죄와 세상이 자기를 점령해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제 성도의 교제권을 완전히 버리고,

점점 세상적 교제권 속으로 빠져 들어갑니다.

그렇게 주님을 떠나서 3~4~10년을 계속 삽니다.

 

저는 그분들에게

당신은 크리스천입니다만.. 지금 잠시 넘어져 있습니다.

그러니 속히 회개하고 돌이키십시오!’ ..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진짜 신자라면.. 그렇게 오래 동안 타락할 수 없습니다.

진짜 신자는, 혹시 타락해도 금방 회개하고 돌이킵니다.

 

대신에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처음부터 잘못 믿었습니다.

회개도 하지 않고, 너무 쉽게 신자가 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당신은 크리스천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회개하고.. 정말 참된 크리스천이 되십시오!’

 

그럼 지난 10년간, 교회 다닌 것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그동안 크리스천인 척했던 것입니다. 본성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기 본래 본성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가 정말 본성적으로 크리스천이 되었더라면,

한 때 타락했다 하더라도, ‘본성’(크리스천)으로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그렇게 오래 방황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스스로 확증하십시오.

 

지금 이 자리에도, ‘피상적으로 교회 왔다갔다하는 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본성은 전혀 변하지 않았지만, 크리스천인 척 하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그 본성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본 어겐해야 합니다. *born again : 중생

여러분이 본 어겐했는지, 자신을 확증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고후13:5절에서 바울은 여러분의 믿음을 스스로 확증해 보라고 말합니다.

Examine yourself, Test yourself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고후13:5

 

중생한 사람의 특징

-중생한 사람은, 하나님과 관계를 지속적으로 가집니다.

그래서 늘 기도하고, 말씀을 가까이 합니다.

하나님을 즐거이 섬깁니다.

 

-중생한 사람은, 죄를 두려워합니다.

죄를 지을 때도 있지만, 지속적으로 짓지 못합니다.

죄를 지어도, 즉시 회개합니다.

 

-중생한 사람은.. 하늘을 소망하며, 내세 중심적으로 삽니다.

중생 못한 사람은, 현세 중심적으로 삽니다.

 

-중생한 사람은, 어쩌다 한 번 넘어져도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납니다.

그러나 중생 못한 사람은, 한 번 넘어져도 계속 넘어진 상태로 지냅니다.

 

미국의 최고 보수교단인 남침례교의 어떤 지도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 우리가 진지하게 성경이 기독교에 대해 무엇을 말씀하는지 깨닫는다면,

우리 교인들 가운데, 10~15% 정도만 구원 받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추정 수치입니다. 그것은 하나님만 아시겠지만요...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그만큼 지금 교회 안에 세속적 크리스천이 많다는 뜻입니다.

 

미국에서 가장 보수적이라고 인정받는 남침례교도 이 정도라면

(최근에 남침례교도 교세가 감소하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습니다.)

다른 교단의 사정은 더 심각할 것입니다.

 

계곡을 건너기에는 너무 불안한 구름다리

제가 남미 안데스 산맥에서 선교사역할 때,

가끔 밑이 안 보이는 아득한 계곡 사이에 걸쳐져 있는, 구름다리를 건너야 했습니다.

 

그때는 건너기 전에, 그 구름다리를 한 번 흔들어 봅니다.

밧줄이 튼튼한가, 나무발판이 안전한가..

그리고 그 삐그덕 거리는 소리를 예민하게 들어봅니다.

 

왜냐하면, 내가 그 구름다리의 중간쯤 건넜을 때,

만약 다리가 끊어진다면.. 계곡에 떨어져 죽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믿고 있는 구원을 생각해보노라면,

제가 남미 계곡을 조마조마하게 건너던, 그 구름다리가 자꾸 생각납니다.

여러분들은 너무나 약한, 실타래 같은 줄, 짚으로 엮은 새끼줄을 붙잡고.. 건너려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너무나 안전하지 못합니다. 중간에 툭 끊어져버릴 것만 같습니다.

 

그 계곡 아래에는, 지옥불이 세차게 이글거리고 타오르고 있습니다.

당신의 줄이 끊어질 때, 어리둥절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examine yourself, test yourself (믿음을 확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으시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구원이 무엇인지..

한 번 스스로 연구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 자신이 정말 구원 받았는지.. 한 번 확증해 보십시다.

 

 

스스로 속지 마십시오.

 

요한1서에 <거짓말> 하는 자가 나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요일1:6

 

-당신이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고, 또 자기 스스로 그렇게 믿고 있어도

계속 어두운 죄 가운데 사는 사람.. ‘거짓말하는 사람입니다.

사실은 믿지 않는데, 자기가 믿는다고 거짓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스스로 속는 거짓말입니다.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요일2:4

 

-‘안다는 말씀은, 신약성경에서 인격적으로 안다는 뜻이고, ‘믿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믿는다는 교인이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거짓말인 것입니다.

 

자기는 사실 믿지도 않고, '알지도' 못하는데..

스스로 속고 있습니다.

자기가 주님을 안다고 하고, ‘주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속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요일4:20

 

-번과 같은 맥락이므로, 설명을 생략합니다.

 

바울은 빌1:6에서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라고 말씀 했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10년 이상 다녀도, ‘이루어지지 않는사람이 있습니다.

믿음이, 구원이, 형상이 성숙되거나 온전해지지 않는 사람이 꽤 많습니다.

 

그것은 착한 일(중생)이 아예 시작되지도 않은 것입니다.

거듭나지 않은 채 교회에 다니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분들은, 간절히 기도하며 자기를 확증해야 합니다. examine yourself

주님의 은혜로, 참된 중생의 체험을 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거듭남, 회심

 

지적 동의로 신앙생활을 시작한 것은,

거짓말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고의적이 아니라, 스스로 속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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