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Part I /벧전4:1-3/ 조정의목사
2020-09-24 02:00:24
1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2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3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한 때 기독교는 죄를 매우 싫어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죄를 미워하긴 합니다. 그러나 과거에는 정말 심각하게 죄를 싫어했습니다. 3세기 교부들 중 오리겐은 남성의 욕정을 멈추기 위해서 스스로 거세를 하기까지 합니다.
참 극단적이죠? 여러분에게 그것을 추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들이 그 정도로 죄를 미워했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매우 금욕적인 생활을 했습니다. 오늘날 그들을 보면 참 ‘독특하다’, 또는 ‘너무 극단적이다’라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로마시대 사람들이 많이 가는 극장에 성도들은 가지 않았습니다. 이교도들이 만든 음식이나 음악은 전혀 접하지 않았고, 이교도 풍습이 있는 병원에 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죄를 짓느니 차라리 죽겠다는 의지로 살다가 순교를 택했습니다. 중세 시대로 넘어오면, 정치와 종교가 결탁한 카톨릭 교회가 등장합니다.
그들은 바리새인처럼 외식적으로 금욕적인 생활을 강조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카톨릭의 외식적인 금욕은 비판했지만, 죄를 멀리하는 금욕적인 삶은 강조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성경을 매일 묵상하고 금식하는 것이 삶의 일부일 정도였습니다.
형제교회의 조상이라 할 수 있는 청교도들은 더욱 경건한 삶을 추구했습니다. 주일은 주님께 드리는 날로 철저히 지켰습니다. 이러한 경건함, 죄와 싸우려는 치열함을 오늘날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마음을 되찾으라고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는 명령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1).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갑옷을 입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또한 ‘갑옷을 삼으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오늘날 우리에게 갑옷은 생소합니다. 중세시대 영화나 사극에서 장수들이 입는 것을 본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이는 전쟁에서 몸을 보호하는 방어무기입니다. 그렇게 단단하게 무장하라는 것입니다. 새번역을 보면 “같은 마음으로 무장하십시오”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지금 고난 중에 있는 소아시아 성도들에게 편지하고 있습니다. 그는 무장하고 단단하게 (죄와의) 전쟁을 대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같은 마음으로” 말입니다. 여기서 “마음”은 ‘정신’, ‘생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마음을 말할 때 감정적인 느낌을 가리킬 때가 많은데, 성경에서 마음은 생각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생각, 정신으로 무장되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그리스도께서도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다”고 나옵니다. 여러분이 생각할 때 육체적으로 가장 심각한 고난은 무엇입니까? 육체의 고난은 상처나 질병일 수 있습니다. 육체가 당하는 최악의 고난은 죽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목숨, 가장 큰 고난은 그것을 잃는 죽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목숨을 버리셨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당하셨을 때 가지셨던 마음을 우리가 가져야 합니다.
주님은 죽음을 당하셨을 때 어떤 마음을 가지셨나요?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3:18).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이유는 “죄를 위하여”입니다. 죄를 정복하기 위해, 죄의 사슬을 끊기 위해, 최종적인 승리를 위해 죽음을 불사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는 죄가 없으셨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분께는 죄가 없으셨습니다. 그러나 불의한 자를 대신하여 의인으로서 죽으셨습니다. 그리스도 스스로의 죄 때문이 아니라 여러분과 저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그 죄를 이겨내기 위해, 승리를 선포하기 위해 죽음을 불사하신 것입니다. 고후 5:21은 예수님을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런 분을, 우리르 대신하여 죄를 삼으셨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오르셨을 때 죄에 승리를 선포하시기 위해 죽음을 택하신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마음과 정신은 ‘죄를 미워하는 주님의 마음’입니다. 어느 정도로 미워하셨습니까? 죄를 끝장내기 위해서 죽음을 선택하실 정도로 죄를 미워하셨습니다.
우리를 종처럼 부리던 죄의 세력으로부터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죽기까지 싸우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정신을 가지고 무장해야 합니다. 이 마음으로 죄와 싸우고 거룩함, 경건함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마음을 찾아보기 힘든 오늘날이 되었습니다. 참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6시간 동안 십자가에 매달리셨고 물과 피를 쏟으면서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많은 고통 가운데 생각하신 것은, 예수님이 대신 짊어지신 죄인들의 짐이 모두 해결되는 것이었습니다. 죄인들이 하나님께 나올 수 있는 길을 여시는 것이 그분의 생각이었습니다. 그 정신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희생과 사랑을 생각할 때, 오늘날 이것이 사라진 것은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은 죄의 노예로 죽을 때까지 살다가 결국 멸망을 향해 가게 되는데, 예수님께서 이를 위해 희생하시고 십자가에서 목숨을 내어 주시고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런데 다시 죄를 찾아간다면 이것이 비극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이것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한 사람은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죄와 인연이 끊어진 사람이고, 죄에 매일 필요도 없고 종노릇할 필요도 없는 사람입니다. 죄가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사는 것이 그리스도의 정신을 잘 아는 사람이 사는 삶입니다.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1-2). 이제는 죄가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사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롬 6:6-11).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정신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의 삶입니다. 죄에 대하여는 죽은 사람, 하나님에 대하여는 산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12,13).
이것이 앞에 이야기한 초대교회 성도들, 종교개혁자들, 청교도인들이 추구했던 경건한 삶의 모습입니다. 경건을 추구하기 위해 노력하고 죄와 치열하게 싸우는 삶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그것으로 무장되어 있는 삶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러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내 마음에 이러한 열정이 있는가, 주님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 살고자 하는 마음, 죄를 이겨내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가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는 왜 그러한 정신을 잃어버렸을까요. 청교도 신학의 모든 것”이라는 책에서 조엘 비키와 마크 존스는 이렇게 호소합니다.
‘누가 옛날의 교회와 오늘날 우리의 교회의 차이를 알 수 없겠는가? 옛날에는 그리스도인들이 불이 타올랐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안에서 우리의 심장은 있다고 해도 거의 타오르지 않고 있다. 이전에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한 열정에 이끌린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동기를 거의 부여받지 않은 것 같다. 옛날 그리스도인들은 죄와 싸우고, 하늘의 힘으로 거룩함을 위해 분투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죄를 매우 쉽게 묵인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을 최저한도로 행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이렇게 될 때까지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하나님은 변하지 않았다. 구원 능력도 변하지 않았다. 거룩함에 대한 요청도 변하지 않았다. 원수의 위협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면 왜 그토록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위해 불타오르지 않고 잠에 곯아떨어져 있는가?’(조엘 비키, 마크 존스 “청교도 신학의 모든 것”(1074p).
양심에 찔리지 않으십니까. 청교도 시절까지 돌아가지 않아도,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도로가 포장되지 않아서 먼지 날리는 길을 성도들은 아기들을 업고 교회에 나왔습니다. 모임에 대한 열정이 있었습니다. 전도에 대한 열정이 있었습니다. 조금이라도 잘못이 있으면 죄를 하나님께 쏟아내야겠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청년회, 학생회 교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님은 삶의 전부가 아닌 일부가 된 것 같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타락을 보고 놀랍니다. 제가 어릴 때는 동성애라는 말 자체를 듣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현재 미국에서는 동성결혼이 합법화되고 그것을 가지고 교회에서 설교를 하면 잡혀갑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에 간통죄가 폐지되었습니다. 그 이유로 개인의 행복 추구권이 우선된다고 말합니다. 아내가 있어도 다른 여자를 사랑한다면 아내를 내치고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어도 나의 행복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악하고 폭력적이고 약한 사람을 괴롭힐 수 있는가, 약자를 보호하지 못하는 법을 보고 놀랍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성도들이 오늘날 교회를 보면서 무엇에 놀랄까요? 그들은 아마도 이런 생각을 할 것입니다. ‘어떻게 교회가 세상 사람들과 다르지 않게 살고 있지?’ ‘목숨을 버려서도 지켜야 하는데 어떻게 이렇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지?’
초대교회 성도들은 도덕적으로 구별된 삶을 살았는데, 현재 우리는 그 경계선이 모호할 정도로 세상과 비슷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불륜이 소재가 된 드라마 좋아합니다. 배신과 배반, 사기가 넘치는 영화, 미신적인 영화를 좋아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봤다면 상상할 수 없는 문화생활을 즐기고 있지 않습니까.
마음의 무장이 반드시 필요할 때입니다. 죄와 치열하게 싸우겠다는 정신으로 우리의 마음이 불타올라야 합니다. 사탄, 마귀는 두루 다니면서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 갈수록 악하고 부패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더욱 깨어있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히 12:4). 여러분과 저는 죄와 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말씀처럼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합니다. 예수님이 피를 흘리시면서까지 죄와 싸우신 것처럼 우리도 그러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의 일상에서 어떤 죄의 유혹이 있을까 생각해봤습니다. 조엘 비키와 마크 존스는 직장인이 받는 죄의 유혹과 부모로서 받는 죄의 유혹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그리스도인 노동자가 일하는 환경을 생각해보라. 그는 끊임없이 나쁜 상황들에 직면한다.
직장에서 불경한 말, 조잡한 농담, 독설을 듣고, 잡담, 비방, 불평, 험담, 악의적인 말, 거짓말에 휩싸여 있고, 죄를 미화시키고, 결혼 서약을 깨뜨리고, 시시덕 거림을 즐기는 사무실 분위기에 속해 있다. 그는 야한 옷차림, 유혹하는 말, 음탕한 눈에 노출되어 있다. 그는 거짓말하고, 속이고, 훔치고, 사기치고, 의도적으로 정보를 숨기고, 반쪽 진실을 온전한 진실로 포장하도록 요구받는 명령과 기대에 직면한다’(청교도 신학의 모든 것(1086p).
부모가 받는 죄의 유혹들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모든 소명 가운데 부모 역할을 하는 것은 가장 힘든 일 가운데 하나다. 그리스도인 부모는 자녀를 하나님께 이끌도록 부르심을 받지만 자녀의 하나님의 일들에 대한 본성적인 거역 곧 그들의 교만, 이기심, 죄에 대한 내재적 사랑과 욕망, 유전 받은 본성의 부패와 싸우고 있다. 본성적인 죄악성의 이런 공세에 맞서 부모는 자녀를 훈련시키고 자녀가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해야 한다.
이 소명은 얼마나 힘들까! 사실은 훨씬 힘들다. 부모는 자녀의 죄악성에 직면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죄악성을 무릅쓰고 자신의 소명에도 순종해야 한다. 부모는 자신이 전념해서 싸우고 있는 바로 그 일을 자녀에게 기대해야 하고, 자신이 계속 싸우고 있는 삶의 분야에서 자녀가 불순종할 때 징계해야 한다. 이로 말미암아 부모는 위선자처럼 느끼고, 양심이 괴롭고, 자녀를 교정시켜야 하는 모든 시간이 매우 무겁게 다가온다.
자시느이 죄에 대해서는 변명이 전혀 없지만, 자신도 극복하려고 싸우고 있다는 단순한 이유로 부모가 자녀의 죄를 묵인하는 것은 다만 그 죄를 더 조장할 뿐이다. 부모는 자녀를 징계해야 한다. 엄밀히 말하면 부모로서 감당해야 할 일이 너무 힘들기 때문에 부모는 끊임없이 자녀에 대한 사랑으로 열심이 꺼지지 않도록 부채질해야 한다’(청교도 신학의 모든 것(1087-88p).
목회자는 더 많은 유혹에 빠집니다. ‘만약 마귀가 한 사람의 목회자를 게으르고 불성실하게 만들 수만 있다면, 한 사람의 목회자를 탐욕과 욕정에 빠뜨릴 수만 있다면, 그는 이를 통해 무지막지한 침략을 가할 계획을 할 것입니다’(리차드 백스터, 참목자상, 68p), ‘형제 여러분, 그대의 모든 설교와 가르침은 그것이 그대 자신의 마음 속에서 철저히 실현되기 전까지는 꿈과 사악한 위선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대의 육신적 마음이 그토록 혐오하는 목회 사역을 어떻게 밤낮으로 행할 수 있겠습니까?’(77p)
목회자의 자리는 정말 힘든 자리입니다. 항상 승리한다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지만 저 역시 넘어지고 죄와 싸우고 있기에 이 자리에 서서 말씀을 가르치는 일이 정말 어렵습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무장되지 않으면, 죄와 치열하게 싸우고 경건으로 무장되지 않으면 설교를 할 수 있겠습니까, 부모가 자녀를 바른 길로 인도하겠습니까, 직장에서 수많은 유혹들을 어떻게 이겨내고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겠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 정신으로 무장되어야 합니다.
저는 모든 죄의 유혹을 반드시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고, 죄로 인해 넘어지면 끝이라고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전투에서 종종 패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싸움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자신을 무장해제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매순간 전쟁 중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과 정신으로 무장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피흘리기까지 싸워야 합니다.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3). 예수님을 믿기 전에 지은 죄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앞서 나온 여러 죄들은 구원받기 전의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이 모습에서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영국의 한 조사에 따르면 한 사람이 온라인에서 보내는 시간을 평생으로 계산했을 때 ‘15년’이라고 합니다.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환경에서 자라난 아이들은 그보다 많은 시간을 쓸 것입니다.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시간들이 참 많습니다. 이제 얼마 살지 못하는 사람에게 누군가가 15년을 그렇게 무의미하게 보낸다고 한다면 어떨까요. 우리는 영적으로 생각할 때 죄라는 불치병에 걸린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의 목숨을 버리면서 영생을 주셨고 죄와의 관계를 끊어놓으셨습니다. 그런데 다시 그 죄로 돌아간다면 얼마나 무가치한 일입니까. 도박을 해서 진 빚을 다 갚고 도박장에서 아들을 데려왔는데 그것에 감사하면서도 다시 도박장으로 간다면 부모의 마음이 어떨까요? 부모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네가 예전에 도박한 것으로 충분하지 않니.”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기 전에 저질렀던 죄로 족합니다. 죄는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악인의 삯은 허무하되 공의를 뿌린 자의 상은 확실하니라”(잠 11:18). 악인이 한 것들은 허무하고 소득이 없습니다. 그러나 의인이 부리는 씨는 확실한 보상이 주어집니다. 악을 버리고 경건을 추구하는 삶이 정말 남는 삶입니다.
우리는 인정하든 하지 않든 매순간 죄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죄와의 전쟁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그러합니다.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무장되어 있고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남은 생애를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무장되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리스도가 죄에 대하여 어떤 마음을 품으셨는지 날마다 묵상하십시오. 여러분 삶에 분노가 올라올 때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물리치십시오. 게으름, 방탕함, 비방과 수군거림이 스며드는 것을 막아내십시오. 욕망과 욕정이 도사리는 장소와 대상을 피하십시오.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무장된다면 죄를 이기고 경건한 삶을 추구하며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이 그것을 보기를 원합니다. 이제는 진짜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필요합니다.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곳이 성경적인 교회입니다.
노인/ 남은 때를 어떻게 살 것인가? /벧전4:1-8
2019-11-27 00:01:19
몇 년 전 영국의 더 타임스지(The Times)에는 다음과 같은 해프닝이 보도되었습니다. 인도 북부에 '무자파르나가르'라는 작은 동네가 있는데 그 마을의 '아닐 쿠마르'라는 사람이 이웃사람들에게 자신의 땅을 정리해주면 대가를 지불하겠다고 제안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땅에서 고대 황금유물이 발견된 것입니다. 이 소문이 퍼지자 모든 마을 사람들이 그 땅에 달려들었습니다. 그들이 발견한 것은 하라파문명시대의 고대유물이었는데 금은의 무게만도 500킬로그램에 달했습니다.
경찰은 100년 이상 된 유물은 개인소장이 불가함을 알리고 모든 유물을 회수하려하자 이에 반발한 마을사람들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지기에 이르렀습니다. 황금유물로 인하여 평안했던 마을은 순식간에 유혈사태와 폭동이 일어나고 화평했던 마을 사람들의 인간관계는 욕심과 질투와 반목으로 황폐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어려운 경제시대를 맞이하여 온 국민이 내핍생활과 검약을 실천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각성하지 못하는 사회풍조를 보여줍니다. 또한 서울의 압구정동에 무속밸리가 있습니다. 이들은 인터넷 홈 페이지까지 개설하였습니다.
과거에는 사람들이 결혼이나 사업에 관한 점을 주로 보았으나 최근은 시대조류를 반영한 듯 해외 유학이나 전공문제로 점을 많이 보러 온다는 것입니다. 이에 편승해 해외유학파 역술인이 큰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영적인 공황상태, 가치관의 혼란상태, 현세주의와 쾌락주의가 만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들의 삶이 성공하는 삶이 되기 위한 원리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기간이 대단히 긴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보람되게 보내지 못하고 허송세월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우리의 연수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인생은 결코 긴 것이 아니라 잠깐 동안입니다. 이사야 38:12 에서는 "나의 거처는 목자의 장막을 걷음 같이 나를 떠나 옮겼고 내가 내 생명을 말기를 직공이 베를 걷어 말음 같이 하였도다 주께서 나를 틀에서 끊으시리니 나의 명이 조석간에 마치리이다"고 했으니 사람의 수명이 짧은 것은 확실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생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남은 생이 보람되기를 바랍니다.
1.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받을 각오로 사십시다. 1절
벧전 4:1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고 했습니다.
아무 죄도 없으신 주님께서 고난을 받으셨는데 하물며 죄와 허물투성이인 우리들이 어찌 평안하기를 바라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고전 15: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오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여생을 평안히 살겠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더 많이 수고하고 더 많이 봉사하고 더 많이 고난을 받을 각오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2. 정욕대로 살지 말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십시다. 2절
벧전 4:2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고 했고
또 딤전 6:7-8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 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정과 욕심을 날마다 십자가에 못박고 살아야 합니다. 제아무리 욕심을 부리고 살아도 죽을 때는 관 한 개와 땅 5-6평이면 족합니다. 어리석은 부자 비유에서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것이 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마땅히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주의 뜻을 따라 선택할 수 있는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한 사람의 선택에 의하여 그의 평생이 좌우되며, 한 가정의 가장의 선택에 의하여 가문의 축복과 저주가 좌우됩니다.
여호수아는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고 거룩한 선택을 하자 그 가문이 하나님의 복을 받았습니다(여호수아 24:15).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면 나와 가정과 교회의 미래가 하나님의 복 주심가운데 활짝 열려집니다.
3. 과거의 죄지은 것을 부끄러워하면서 새롭게 사십시다. 3절
벧전 4:3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라고 했는데 "음란과 정욕"은 성적인 모든 죄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술 취함과 방탕과 연락"은 성적 타락과 동반되는 죄악들입니다.
이것들은 하나님 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게 하는 무서운 죄악들입니다. "지난 때가 족하도다"란 말은 믿지 않을 때에 지은 죄악이 적지 않았던 사실을 회상시켜서 이제부터는 절통한 회개와 새 생활의 필요를 느끼게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나 때문에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신 주님을 생각하면서 과거의 죄악을 과감히 끊어 버리도록 합시다.
여러분들이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것을 남들이 비방할 때에 그들을 축복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머리에 숯불을 올려놓으시는 것처럼 그들을 판단하실 것입니다. 우리를 비방하는 자들을 하나님의 판단에 맡기고 축복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공하는 삶으로 인도해주실 줄 믿습니다.
4. 불신자들이 이상히 여길 만큼 새로워져야 합니다. 4절
벧전 4:4 "이러므로 너희가 저희와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하지 아니하는 것을 저희가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했는데 우리가 과거를 깨끗이 청산하고 새롭게 된 사실을 불신자들이 보고 비방할 정도로 새로워지라는 말씀입니다.
신앙인들이 불신자들에게 비방이나 핍박을 받지 않는 상태라면 그것은 분명히 불신자들과 타협을 하고 있든지 아니면 신앙생활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 증거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언제나 어디서나 불신자들과 타협하지 말고 계명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런 일 때문에 비방을 받고 조롱을 받아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서 우리의 삶을 늘 갱신되도록 해야 합니다.
5. 미래의 심판을 생각하며 사십시다. 5절
벧전 4:5 "저희가 산 자와 죽은 자 심판하기를 예비하신 자에게 직고하리라"고 했는데 우리의 생이 다 끝나면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서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남은 때를 잘 살아야 그때 심판대 앞에서 자신 있게 설 수 있습니다. 지금 부끄럽게 살면 그때 심판대 앞에서 부끄럽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을 조심해서 믿음으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 그 앞에서 악한 자들은 자신들의 불신앙과 패역을 숨김없이 고백해야 할 때가 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또한 예수 믿는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믿음으로 살다가 받은 핍박,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감당했던 모든 사역을 하나님 앞에 아뢰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의의 심판, 상급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남들이 여러분들의 섬김과 수고를 알아주지 못한다 해도 낙심하지 말고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가 되십시오. 이는 우리의 수고가 결코 헛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수고한 모든 것은 우리의 다음세대에 반드시 열매 맺고 교회와 민족에 복으로 임하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당당히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6절은 또 하나의 난해구절입니다. 여기서 죽은 자들이란 살아있을 때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 재림 이전에 죽은 자들을 말할 겁니다. 복음의 능력을 회복해야 합니다. 복음의 능력을 가슴에 체득하며 살아가는 것이 복음의 능력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죽은 영혼들을 살리고 치유하는 능력입니다(6절). 영국 캠브리지의 엑시터 시립박물관은 19세기의 위대한 화가 존윌리엄 워터하우스의 작품을 단돈 7만원에 팔아버렸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 가치가 무려 45억 원으로 밝혀졌습니다.
우리도 이처럼 값진 복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자처럼 빈핍하게 살지는 않습니까?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능력이며 삶의 역경을 승리케 하는 지혜가 됩니다. 우리 모두가 비록 나이는 들었지만 하나님 앞에 더욱 가까이 나아가 복음의 사람으로 세워지고, 구원받은 성도로 구별된 삶을 힘있게 살아갑시다.
6. 정신을 차리고 기도하며 사십시다. 7절
지금은 마지막 때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내 모든 것을 아뢰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며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은총의 길입니다.
본문에서 정신을 차리라는 말씀은, 올바른 마음과 생각을 가지고 기도하라고 하는 뜻입니다. 세상도 정욕도 다 지나갑니다. 그러므로 세상 욕심에 붙잡혀서 욕심의 유혹을 받아 살지 마세요.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마음과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에베소서 5장 17절에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분별하라”고 말씀하시고 18절에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말씀 하십니다. 우리의 모든 삶이 성령 안에서 은혜가 되고 행복하고 진정한 의미의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성령으로 충만할 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고 우리의 모든 삶이 행복할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차리고 기도하여 성령으로 충만한 은혜로 사시기 바랍니다.
특히 어르신들은 시간이 많습니다. 틈만 나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가정과 자녀들을 위해서,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한반도의 평화와 세계평화를 위해서 말입니다.
7. 뜨겁게 서로 사랑하며 사십시다. 8절
사랑은 근원적인 은혜요, 본질이며 가장 중요한 삶의 원칙입니다. 마태복음 22: 37-40절은 “네 마음과 뜻과 목숨과 성품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의 강령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사랑을 알고 믿고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이 구원이요 영생입니다. 성경은 말세에 사람들의 사랑이 식어지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열심히 서로 사랑하는 생활로 사람들의 가슴에 위로와 희망을 주고 영혼을 빛 가운데로 인도하는 사명을 실천하심 바랍니다. 사랑은 내 존재와 삶 전체를 가장 행복하게 만들어 줍니다. 사랑하며 사십시다.
노년일수록
1.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받을 각오로 사십시다.
2. 정욕대로 살지 말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십시다.
3. 과거의 죄지은 것을 부끄러워하면서 새롭게 사십시다.
4. 불신자들이 이상히 여길 만큼 새로워져야 합니다.
5. 미래의 심판을 생각하며 사십시다.
6. 정신을 차리고 기도하며 사십시다.
7. 뜨겁게 서로 사랑하며 사십시다. 할렐루야!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마십시오! /벧전4:1-6/ 김병삼목사
2019-05-02 02:54:37
다시 생각하라8 (베드로전서 강해)
베드로 전서 4장 1-6절
1.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2.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3.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4. 이러므로 너희가 그들과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그들이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5. 그들이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로 예비하신 이에게 사실대로 고하리라
6.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
아직도. . .
오늘 말씀을 통해 느껴지는 감정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얼마나 간절하게 교회 공동체를 향하여 호소하고 있는지를 알게 되는 것이죠.
우리가 아는 바, 그리스도께서 육체의 고난을 받으시므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죄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가지는 안타까운 심정입니다.
한국관광대학 노인전문병원의 김인철 원장님이 쓴 글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미국에서 실신한 한 조사에 의하면 새해 결심이 성공할 확률은 8%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또 훨씬 더 낮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결심을 한 사람들 25%는 일주일 만에 포기했고,
30%는 2주안에 그리고 한 달 안에 반 가까운 사람들이 포기했다고 합니다. 작심삼일이 아니라 작심삼십일 안에 절반 정도가 목표를 포기했고 결국 연말에 가서 결심을 이룬 사람들이 10%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목표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고 대개는 실행하는 방법이 틀렸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실패의 원인이 ‘방법의 문제’였다는 분석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결국 이 이야기를 오늘 말씀과 대입해 보면,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를 주라 고백하면서 삶을 살아가는 방법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기는 하는데, ‘아직도’ 옛 삶의 흔적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입니다. 오늘 제목으로 잡은 것처럼, 본문 2절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분명합니다.
2.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다시’라는 말을 영어 성경에서는 ‘no longer’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조금 더 명확할 것 같습니다. ‘더 이상’죄를 짓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1절 말씀을 보면 ‘고난’이라는 말이 나오고, 그리스도의 고난과 죄의 문제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에서 설명하는 1-2절을 보고 이 둘의 상관관계를 조금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여러분이 지금 겪고 있는 모든 고난과 그보다 더한 고난을 겪으셨으니, 여러분도 그분처럼 생각하는 법을 익히십시오.
여러분의 고난을, 전에 늘 자기 마음대로 살려고 하던 죄악 된 옛 습관을 끊는 기회로 삼으십시오. 그렇게 할 때 여러분은 자기 욕망의 압제 아래살기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추구하면서 자유롭게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문맥을 통해 알게 되는 것이 있는데 ‘죄’가 고난을 겪지 않으려는 욕망에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결국 죄는 인간의 정욕을 따라 편하게 살려는 욕구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죠.
이것은 또한 단순한 ‘고난’을 피하려는 소극적인 동기에서 뿐 아니라, 자신의 육신의 욕망을 이루기를 원하는 지극히 인간적이고 악마적인 본성에서 기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참 놀랍게도 베드로가 경험했던 당시 교회나, 오늘날의 교회에서 동일하게 ‘욕망’의 문제는 하나님의 뜻을 가리는 가장 원초적인 문제입니다.
김형석 교수의 [어떻게 믿을 것인가?]에 나오는 이야기 한토막을 소개합니다.
김형석 교수가 충남 예산의 한 감리교회에서 집회를 할 때 만났던 청년의 이야기입니다. 그 청년은 유교 전통의 가정에서 자랐는데 아무래도 유교를 가지고는 이 민족에 장래가 없다고 생각하고는 자진해서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교회 봉사를 하고 주일학교 교사를 하던 여선생을 만나 결혼까지 하고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시골에서만 신앙생활을 하던 이 청년에게 전국의 지도자들이 모이는 연회에 참석할 기회가 생겨 기대를 하고 갔습니다. 흥분과 감격 속에 참석한 정동 감리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런데 불행한 사건이 벌어졌다. 감독 선출 투표가 있었는데 역사상 유례가 없는 105회 투표가 벌어졌던 것이다. 그 때 오가던 대표 목사들의 이야기와 행태를 본 이 젊은이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내가 속았구나’라며 절망의 뉘우침을 했다.
그 후로 그는 교회를 등지게 되었다. 가족들에게도 면목이 없었다. 살 용기마저 잃어버렸다. 그는 모든 일을 단념하고 외항선원이 되어 배를 타고 한국을 떠나 돌아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그 충격과 실망을 달래기 위해 계속 술을 마셨고, 결국 알코올 중독에 빠지고 말았다.”
이 이야기를 들은 김형석 교수는 이 청년에게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당신은 예수를 믿은 것이 아니라 교회와 목사를 믿었던 것입니다. 이제라도 예수를 믿어야겠습니다. 교회는 나가지 않아도 좋으니 조용히 성경을 읽고 그리스도께 다시 나를 찾아 달라고 기도를 드리십시오.”
오늘 본문 말씀 2절에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의 문제가 무엇이냐면, 예수를 믿었는데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생각했는데, 인간이 만들어 놓은 교회 공동체와 그 조직을 이끌어 가는 사람들을 따라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참 무서운 것은 우리가 조금만 방심하면 사탄의 꾀에 빠져 정욕을 따라가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끝까지 신앙을 붙드는 것입니다.
참 놀랍고 부끄러운 교회역사의 죄악상이 있습니다.
중세 수도원의 마룻바닥에서 발견된 수없이 많은 영아들의 유골들입니다.
신부와 수녀들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을 몰래 버려서 죽인 것이죠.
이들이 처음부터 그런 마음으로 수도원에 들어왔을까요? 그 마음을 지키지 못한 것입니다.
모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오직 예수를 따라 살기로 결심한 사람들이 모인 수도원에서 서로 원장이 되기 위해 싸웠다는 것이 이해가 되시나요?
평생을 하나님을 위해 살겠다고 헌신한 목회자들의 모임에서 서로가 대표가 되겠다고 세상 법정에 소송을 하고, 돈이 오가는 선거판을 만드는 것이 이해가 되시나요?
하나님을 믿겠다고 모인 평신도들이 교회 일을 하다가 조금만 자존심이 상해도 토라져 버리고 상대방에게 막말을 하는 사람들,
하나님을 예배하겠다고 모인 사람들이 자신에게 조금만 불편한 일이 있어도 참지 못하는 일들이 바로 육신의 정욕을 따라 사는 일들이 아닐까요?
성경은 이런 육신의 정욕이 ‘원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만들고 싶어서 만든 원수가 아니라, 우리가 조금 방심하므로 우리들에게 찾아 들어온 원수들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에게 보여주신 것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자녀로 우리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법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의 욕망과 옛 습관을 끊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영광’을 통해서가 아니라 ‘십자가의 고난’과 한 없이 ‘낮아짐’을 통해서 임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죠.
성경의 이야기들과 증언은 일맥상통합니다.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영광의 자리에서가 아니라, 한 없이 낮아짐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야말로 세상이 추구하는 방식과 다른 하나님의 방식이기 때문이죠.
교회의 문제는 하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이 살아가신 방식대로 살아가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후로는’이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전에는 고난을 벗어나 욕망대로 사는 것이 옳은 줄 알고 살았지만, 그리스도를 통해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고난을 당해야 할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는 것은 더 이상 ‘육신의 정욕’아래 살지 않는 것입니다.
지난 해 대학원생들과 수업을 하며 한 교회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평신도 사역과 제자훈련을 열심히 하고 있는 이 교회의 담임목사님에게 한 학생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 그리스도인과 비 그리스도인의 차이를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마도 이 학생의 물음 가운데는 제자양육을 많이 하고 평신도 사역에 집중한다는 교회에서 조차 그리스도인과 비 그리스도인의 경계가 모호하다고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때 목사님이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자신의 삶의 주인이 그리스도가 된다는 것이고, 비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여전히 삶의 주인이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참 명확한 대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후로는’이 무엇인가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심으로 인해 더 이상 우리가 죄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그 후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가 명확합니다.
육신의 정욕의 지배를 받지 않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살았던 삶의 방식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구하며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던 주님의 모습,
그리고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가르쳐 주신 주님의 모습.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는 자가 되면, 그 다음에 우리의 삶에서 모든 것을 이루시고 채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죠.
우리의 원수 ‘정욕’
‘정욕’의 문제를 조금 더 다루어 보겠습니다.
정욕을 이기는 길은 단순한 감정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들의 구체적인 삶에서 경험되고, 그것이 행동으로 나타날 때입니다. 본문 2절의 말씀을 보세요.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As a result, he does not live the rest of his earthly life for evil human desires, but rather for the will of God
이 말씀은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지에 대한 가장 명확한 바람이 아닐까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으로 부르심을 받았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두 가지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도록,
다른 하나는,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도록.
사실 우리 관심이 종종 ‘신앙적으로 무엇을 하지’ 혹은 ‘소명은 무엇인지’에 집중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느냐 보다 ‘어떤 사람’으로 부르심을 받았느냐는 것입니다.
얼마 전 한국 ‘mercy and grace’ 문대란 대표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소명’을 찾기 위해 아무 일도 시작하지 못하고 질문을 던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신앙적으로 귀하지만, 진정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 앞에 귀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임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일을 하다보면 자신이 하는 일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인지 아닌지를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젊은이들에게 이런 tip을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신앙적 관점에서 살아간다면 다음의 세 가지에 대하여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좋아하는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잘하는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가?
예를 들어서 자신이 도박을 좋아하고 잘한다고, 도둑질 하는 것을 좋아하고 소질이 있어도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면. . .
신앙적 관점이란, 하나님 앞에서 인격적 관계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제자’의 관계는 일을 시키는 일꾼에 앞서 ‘교제’의 관계입니다. 인격적이고 개인적 관계입니다.
오스 기니스는 [소명]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소명을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우리의 일차적인 소명은 그분에 의한, 그분의, 그분을 위한 부름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관심은 무엇을 하느냐보다 우리가 누구냐는 것이죠.
이 말은 우리가 얼마나 예수님을 닮아가려는 사람, 인격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주님을 닮아가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남겨진 삶을 살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차적인 부르심 가운데서 하나님은 우리를 다음 ‘소명’으로 부르십니다.”
이것을 본문 3절 말씀과 연결해 보겠습니다.
3.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지나간 때,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전에 살았던 과거의 삶에 대하여 성경이 이야기 합니다.
음란과 정욕, 그리고 술취함과 방탕. .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 등입니다.
이러한 과거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서는 좀 더 적극적인 삶의 결단을 필요로 합니다.
지금 이야기하는 방탕함의 이야기들은 우리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이길 수 있는 것은 2차적인 소명과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결국 우리들이 주님의 제자라는 믿음의 고백을 가지고 세상에서 무엇을 하며 살아가느냐는 것이죠. 일상적인 직업, 평범한 삶의 일거리 가운데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폴 손의 책 [청년의 시간]에 보면, 신앙과 일, 경제 연구소에서 발표한 소명의 4가지 측면을 이야기 합니다.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1차적인 소명을 가지고 있지만 2차적인 소명이 이루어지는 곳은,
1. 육신의 가족에 대한 소명.
2. 교회로의 부르심.
3. 서로 이웃으로 부르심을 받음.
4. 직업으로의 부르심입니다.
아주 멋진 말입니다. “일은 살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하기 위해 사는 것이어야 한다. . .일꾼이 재능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영적, 정신적, 육체적 만족을 찾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또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통로여야 한다.”
우리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게 만드는 것은 단순한 결심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무엇을 위해 사느냐의 분명한 인식이 아닐까요?
이러한 인식을 변치 않도록 만들어 주는 것은 ‘충성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충성된 삶이란, 우리의 인생에서 매순간 하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사느냐, 우리의 존재가 누구의 소유인지를 인식하고 살아가는 삶이 아닐까요?
제가 결혼 주례를 하며 신랑신부에게 하는 말이 있습니다.
혼인 서약을 할 때 손에 얹은 성경책을 꼭 신혼여행에 가지고 가라는 것,
그리고 주례를 마치고 말씀을 기억하고 살아가도록 ‘결혼 패’를 꼭 간직하라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속했느냐를 명확히 하는 것보다 그 삶을 충성스럽게 만드는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결혼식에서 왜 ‘반지’를 교환할까요? 그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런 의미에서 결혼반지와 시계는 비싼 것이 아니라, 늘 지니고 다닐 수 있는 것이 참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볼 때마다 결혼을 생각하고, ‘존재’와 ‘속함’의 의미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사는 길을 예수님께서는 구체적인 것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6장 27-28절을 보면,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제이스 미첼의 책 [쉬운 예수는 없다]에 보면 이 말씀가운데 네 가지 동사에 주목합니다.
‘사랑하며’: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은 대개 ‘감정’이다. 하지만 이 구절에서 ‘사랑’으로 번역한 단어는 감상적인 사랑과는 거리가 멀다. 예수님이 생각하시는 사랑은 남을 위해 무엇이든 하겠다는 행동 지향적이고 희생적인 결단이다. 손해를 보면서까지 내어주는 사랑이다.
‘선대하며’: 이 구절에서 ‘선’으로 번역한 단어는 ‘옳고도 아름다운’ 것을 추구한다는 뜻의 헬라어 ‘칼로스’다. 따라서 선대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삶을 의미한다. 그것은 상처 나고 망가진 것을 아름답게 회복시키는 삶이다.
‘축복하며’: 축복의 의미는 아주 간단하다. 이 단어는 말 그대로 누군가에 관해서 ‘좋게 말해주는 것’을 의미하는 헬라어 ‘율로게오’를 번역한 것이다.
‘기도하라’: 신약에서 ‘기도하다’라는 단어는 잘되기를 빌어준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 구절에서도 예수님은 그런 의미로 말씀하셨다. 누군가를 위해 기도할 때는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하자.
예수님께서 누구에게 그리 하라고 하셨는지 말씀을 통해 깊이 생각해 봅시다.
사랑하라, 너희 원수를.
선대하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축복하라,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기도하라,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원수는 훨씬 더 평범한 사람들이다.
우리에게서 뭔가를 앗아 간 사람이라면 다 원수다.
쇼핑몰에서 주차 공간을 가로챈 사람도 원수다.
내 시간을 빼앗은 사람도 원수고,
내 믿음을 이용한 사람도 원수다.
날 인신곡격한 사람도 원수다.
내 배우자에게 추파를 던진 사람도 원수다.
우리의 원수 ‘정욕’은 우리의 삶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진 것들이 아닙니다.
신앙은 이 세상을 넘어선 이상향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를 부르신 그 부르심의 자리에서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한 자리에서 ‘정욕’으로 살아갈지 아니면, 그리스도의 삶의 방식을 따라 갈지를 말입니다.
지난 향림 설교대회에서 1등을 차지한 김지현 전도사님의 설교 중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에 딱 들어맞는 전도사의 고백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신학교 1학년 때 즐겨 부르던 찬양이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많이 아시는 찬양일 거예요.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라는 찬양이에요. 제가 이 찬양이 너무 좋아서 항상 흥얼거렸어요. 그런데 어느 날 학교 수업시간에 교수님께서 갑자기 이 찬양에 대해 말씀하시는 거예요.
“여러분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라는 찬양을 들어보셨나요? 제가 제일 큰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예~ 그럼요” 그러자 교수님이 “이 찬양은요. 아주 큰 모순이 있어요. 분명히 가사에는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라고 고백하면서 뒤에는 뭐라고 하는 줄 아세요? ‘세상 등지고 십자가 보네.’ 라고 말해요. 여러분 언제 우리 주님이 세상을 등 지시셨습니까? 언제 우리 주님이 세상을 무시하셨어요? 그 세상을 사랑하셔서 십자가를 지신 분이 우리 주님 아닌가요?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그렇지 않나요?” 제가 이 말을 듣는데요. 머리를 망치로 한 대 얻어맞는 것만 같았어요. 또 교수님이 한 말씀 더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정말 주님 뜻대로 살기를 원한다면 세상을 등지고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등에 지고 살아가야만 합니다.”
저는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해요.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로써 세상을 등에 지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아파하는 영혼들, 죽어가는 영혼들을 등에 지고 생명을 향해 걸어가는 자들입니다. 때로는 그것이 우리에게 버겁게 느껴질 수 있어요. 때로는 우리가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이거 하나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주님이 흘리셨던 눈물과 땀방울이 우리에게 생수의 강물이 되었듯 우리가 흘리는 눈물과 땀방울이 생수의 강물이 될 것입니다.
이상히 여김이 마땅합니다.
오늘 본문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구절이 저에게는 4-5절의 말씀이었습니다.
4. 이러므로 너희가 그들과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그들이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5. 그들이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로 예비하신 이에게 사실대로 고하리라
이 부분을 메시지 성경으로 다시 옮겨보겠습니다.
물론 여러분들의 옛 친구들은 여러분이 그들과 함께 어울리지 않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게 일일이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장차 하나님 앞에서 책망 받을 자들이니 말입니다.
우리가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는데 가장 힘든 것이 무엇인가요?
우리의 삶의 방식이 세상과 다르다는 것이고, 세상이 우리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아니, 이해 정도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을 비방하고 핍박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든 것들에 대하여 일일이 설명하거나 과민하게 대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자칫 오해하면, 세상을 무시하거나, 대응하지 말라는 ‘도피’ 혹은 ‘회피’가 될 텐데, 진정한 의미는 우리가 가야할 길을 꿋꿋하게 가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믿음이 무엇인가요?
의의 최후 승리를 믿으며, 마지막 심판 때에 모든 것이 다 드러나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조금 부적절한 예화가 될지 모르겠지만, 가장 좋은 설명이 될 듯합니다.
예전에 제가 노름하고 포커를 칠 때입니다.
서로가 가진 패를 모르고 베팅을 합니다. 한 장 한 장 패를 더 가질 때마다 어떤 사람은 이길 확률이 높아지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확률이 낮아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상대방을 모르기 때문에 자신이 없는 사람은 ‘die’라고 말하며 포기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계속 해서 ‘run’을 하죠.
혹시 포커를 모르는 분을 위해 ‘고스톱’으로 예를 들까요?
이미 점수가 났는데 계속해서 ‘고’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 있게 ‘쓰리고’를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이미 자신의 손에 확실한 패를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주저할 필요가 없는 것이죠. 우리는 이미 확률을 따지는 사람이 아니라 ‘이겨놓고 싸우는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패를 가진 다음에는 다 펼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최후의 승리는 가장 좋은 패를 가진 사람의 몫이 되는 것이죠. 이 때 명확한 승리, 그리고 반전이 일어납니다.
저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의 방식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미 가장 좋은 패를 쥐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지난 해 추수감사절에 2002년 메이저리그에서 홈런을 쳤던 110kg의 거구 제레미 스캇 브라운에 관한 이야기를 기억하시나요? 그는 몸이 무거워 도루를 생각도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홈런을 치고 나면 빨리 달릴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의 페이스대로 달려도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홈런을 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패가 무엇인가요?
영원한 생명과 죄를 이기는 그리스도의 능력입니다. 그 어떤 악의 세력도 견줄 수 없는 능력과 영광스러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때때로 세상이 우리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렇게 구차하게 변명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그 길을 가라는 것입니다.
‘더 이상’ 죄를 짓지 말고 세상의 유혹에 넘어지지 말고, 육신의 정욕에 무릎을 꿇지 말고 말입니다.
오늘 말씀가운데 가장 실제적이기도 하고 흥미로운 것이 있습니다. 세상이 우리 크리스천들을 비방하는 이유가운데 하나가 단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죠. 4절 말씀에 보니까,
. . . 너희가 그들과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 . .
그런 이야기죠. 지금 초대교회 사람들이 어떤 사람이냐면, 예수를 믿기 전에 세상 사람들처럼 ‘극한 방탕에 달음질’ 하던 사람들입니다.
극한 방탕이 어느 정도의 방탕함인지 모르겠지만,
중요한 것은 같이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예수를 믿고 나더니 자신들과 함께 하지 않는 것입니다. 삶의 방식이 달라진 것입니다.
진짜 이상한 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세상이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 아닐까요?
더 이상 육신의 정욕을 쫓아 살지 않는 것이 이상해야 합니다.
더 이상 세상의 가치를 따라 악착같이 살아가지 않는 것을 보면서 이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 한국교회와 신앙인들에게 가장 큰 문제는,
세상과 다른 가치를 구하기 때문에 이상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보다 더 세상적인 것을 구하고 따라가는 것을 보면서 이상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과 다르게 그리고 확신 있게 살아가야 하는 이유!
죽은 자든 산자든 모두가 하나님 앞에 서서 자신이 한 일들을 직접 이야기하는 날이 옵니다.
누군가에게는 두려움의 날이고, 누군가에게는 영광스런 날이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조금 이해하기 힘든 구절이 6절에 있습니다.
6.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니라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까요?
사도바울의 설명에 따르면, 복음을 듣기 전에 살던 사람들에게는 양심을 따라, 아니면 그 시대를 따라 하나님께서는 이미 말씀하시고 판단하셨다는 것입니다.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는 다는 것은, 모든 육체는 죽는다는 것이죠. 그러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영생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에게 가장 확실한 것,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람의 정욕을 따라 살지 않을 수 있는 이유.
그것은 우리의 삶이 육신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처럼 영이 살게 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에 박해는 64년 네로 황제를 시작으로 10대 박해로 불리는 엄청난 고난의 시기들이 있었습니다. 화형을 당하기도 하고, 사자에 물려 죽기도 하고, 물소의 뿔에 치여 죽기도 했으며, 검투사와의 싸움에서 희생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영생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허무하게 죽어가는 것을 비웃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조롱 앞에서 죽어가는 크리스천의 의연함에, 환한 모습으로 천국을 바라보는 얼굴들을 보면서 감동하기 시작했고, 믿음에 대한 의구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더 이상 조롱이 아니라, 그렇게 죽어갈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한 부러움이 생기기 시작하고 호기심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삶과 죽음이 그들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지 않고, 우리 신자들을 비웃는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십시오.
그들은 알지 못하는 것을 우리가 알고, 크고 비밀한 것을 가슴에 품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것을 부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하나님의 사람을 부러워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의 것을 가진 것 때문이 아니라, 하늘의 비밀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베드로가 성도들에게 다시 한 번 이야기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요?
당당하게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라 살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말입니다.
육체의 남은 때 /벧전4:1-6/ 염두철목사
2023-02-05 06:35:24
‘유종의 미’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지막을 아름답게 장식한다는 말입니다. 인생은 얼마나 오래 사느냐보다는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의 인생을 멋있게 마무리 짓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가을 어느 날 붉게 물든 나무들을 바라보다가 마음속으로 대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연을 통해 말씀하시는데 단풍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한참 후에 그는 답을 얻었습니다. ‘단풍은 나뭇잎의 마지막 모습이다. 나뭇잎이 저렇게 아름답게 끝난다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는 더욱 더 아름답게 인생을 정리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인생의 마지막을 아름답게 장식하여 추앙받는 역사의 인물이 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면에 인생의 마지막을 잘못 마무리하여 역사의 반역자로 낙인찍힌 사람도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아간(수 7:20-21), 갸룟 유다(마 26:14-16) 등은 인생의 마지막을 잘못 마무리하여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습니다. 반면에 삼손(삿 16:28-30)이나 스데반(행 7:54-60) 등은 인생의 마지막을 아름답게 장식하여 믿음의 용사로 오늘 날에도 추앙받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베드로는 임박한 환난을 대비하여 성도들에게 육체의 남은 때를 잘 마무리하라고 간곡히 당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 육체의 남은 때를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첫째로,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1-2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입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베드로는 왜 성도들에게 예수님처럼 고난을 받겠다는 마음을 가지라고 말씀할꺼요? 고난을 통해 죄를 끊고, 고난을 축복의 기회로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과거에 인간의 본능을 따라 정욕을 추구하던 생활을 청산할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2장 15-16절을 보면 “이 세상이나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육신의 정욕은 음란한 것이고, 안목의 정욕은 사치한 것이고, 이생의 자랑은 교만한 것입니다. 세상을 바라보십시오. 음란과 사치와 교만이 넘치고 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거룩함은 왜 필요할까요? 거룩함을 가르쳐 주는 레위기 11장 45절을 보면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거룩함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목표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거룩함을 추구하는 일은 하나님을 닮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해서는 거룩함을 구해야 하고 거룩함에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거룩을 추구하는 성도들을 미워합니다. 같이 술 안 마신다고 미워하고, 술 안 마시고 앉아 있으면 술맛 떨어진다고 미워합니다. 같이 죄를 짓지 않는다고 미워하고, 같이 먹고 적당히 눈감고 하지 않는다고 미워하는 것입니다.
또 같이 욕을 하지 않는다고 미워합니다. 욕할 때는 같이 욕을 해야 하는데 말을 안 하고 가만히 있으면 같이 욕 안한다고 미워합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의 요구에 응하여 어울리면 진짜 좋아할 것 같습니까? 성도가 세속화되면 세상 사람들은 오히려 엉터리 신자라고 비웃고 조롱합니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사람들에게 짓밟히고 마는 것입니다.
조금 잘 살게 되었다고 사치하며 외모를 꾸미는데 돈과 에너지를 쏟는 시대입니다. 우리 성도는 사치를 버리고 검소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도는 교만을 버리고 겸손해야 합니다. 성공했다고 절대로 교만하면 안 됩니다. 교만하면 망하고 겸손하면 흥하게 됩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본문 2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예정하시고 선한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산다는 것은 우리가 가장 지혜롭고 현명하게, 그리고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사는 비결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 33절에서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 31절에서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의 육신적인 모든 것을 포기한 한 사람을 소개하겠습니다. 그는 인기 절정의 가수였습니다. 돈도 많이 벌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참된 기쁨과 평안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성경을 뒤적이다가 어릴 때 가졌던 믿음에 대한 향수가 가슴속에서 뭉클하게 솟구쳐 올라 즉시 교회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가운데 자신의 지난날을 돌아보면서 자신의 영광만을 위하여 살아왔던 것을 철저하게 회개하고, 남은 생애를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살기로 다짐했습니다.
집에 돌아온 그에게 방송국에서 엄청난 금액을 제시하면서 전속계약을 하자 했을 때 그는 정중하게 거절했습니다. “너무 늦게 전화하셨습니다. 이제 저는 제 목소리와 모든 재능을 오직 하나님을 위해서만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이 사람이 유명한 복음성가 가수이며 작곡가인 쉐아(G. B. Shea)입니다. 그는 영감 있는 멜로디에 어릴 때 어머니가 암송하던 성시를 가지고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라는 찬송가를 작곡했습니다.
한번은 전도 집회에서 영감 있는 그의 찬송에 모두 뜨거운 박수를 보내었습니다. 그때 뜨거운 박수에 답례하면서 쉐아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부족한 저를 위해서 이렇게 박수갈채를 보내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의 박수갈채와도 예수님을 바꿀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손해 볼 일이 많고 억울한 일도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삶을 책임져 주시고 보상해 주십니다. 궁극적으로 잘되게 해 주십니다. 이 땅에서의 보상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 나라에서의 보상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2장 17절에서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서 주님과 더불어 영원히 살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지나간 때를 족한 줄로 알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3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음란, 정욕, 술 취함, 방탕, 향락, 우상숭배는 이방인들의 삶의 특징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천국을 유업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끊어버려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그것이 싫어서 안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에 미련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예수 믿기 전에 배터지게 술을 먹고 끊어야 했는데…’라고 말합니다.
세상 풍속을 따라 사는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한 것입니다. 더 이상 미련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지나간 때를 족하게 여기지 못하고 여전히 이방인의 뜻을 따라 산 사람은 마지막 날 주님으로부터 “나는 네가 누구인지 모르겠다”며 문전박대를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세상의 풍속을 따라 살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받으면 지나간 때가 조금도 그립지 않습니다. 지나간 때가 부끄러울 뿐입니다.
넷째로, 세상 사람들이 이상히 여기는 삶을 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4절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너희가 그들과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그들이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그들이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로 예비하신 이에게 사실대로 고하리라.”
눈 하나만 있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에 가면 눈 두 개가 있는 사람은 이상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정말 이상한 사람들은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는 자들이지만 그들은 오히려 성도들을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세상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마음대로 믿게 내버려 두지를 않습니다. 지나온 역사를 보면 어느 사회나 기독교의 복음이 들어가는 곳에는 반드시 수난이 있었고 박해가 뒤따랐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박해의 종교이고 수난의 종교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기독교는 빛의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빛을 싫어합니다. 세상은 어두움의 세상이고 기독교는 빛의 종교이기 때문에 빛이 세상에 오면 어두움의 세상이 밝아지니까 세상은 그 빛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그 특성상 박해가 따르고 수난이 따르도록 되어 있습니다.
더구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심판 날에 불로 심판할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네로 황제 때 로마시 대화재에 대한 혐의를 뒤집어쓰고 대대적인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 때 바울과 베드로가 순교했습니다.
교회는 무려 300여 년 동안 로마 제국으로부터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하는 소위 밀라노 칙령을 발포했습니다. 이로써 기독교는 300여 년에 걸친 박해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어떤 동기에서 그 오랜 로마제국의 적수였던 기독교를 공인했을까요? 당시 기독교인의 수는 아무리 잘 본다 해도 인구의 15퍼센트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것도 광대한 로마제국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그 정도의 숫자로는 국가 정책을 뒤엎을 수 없습니다.
혹자는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밀리안 다리에서 전투할 때 빛나는 십자가상을 보고 그 깃발로 싸워 승리하고 황제가 되었기 때문에 공인했다고 합니다. 또 그의 모친 헬레나가 성지순례를 갔을 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그 못을 하나 얻어 그것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군모에 꽂게 하여 싸워서 이긴 까닭에 공인했다는 전설도 있습니다.
물론 콘스탄티누스 대제에게 신앙이 있어서 기독교를 공인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신앙은 미미한 것이어서 임종 직전에야 세례를 받았을 정도입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진정한 동기는 순전히 정치적인 것이었습니다. 로마제국의 미래가 기독교인들의 손에 달렸다는 징조를 본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그것을 보았고 과감하게 행동에 옮겼던 것입니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소수였지만 엄격하게 훈련받고 매사에 규모가 있으며 잘 조직된 정예부대였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수세기에 걸쳐 그들을 사자 굴에 던져 진멸하려던 적수를 이겨낸 역전의 용사들이었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헌신과 충성으로 하나 된 하나님 나라의 특수부대였습니다. 당시 기독교인들처럼 강력한 힘을 풍기는 언어나 글을 쓸 수 있는 사람들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야말로 세계의 소중한 문명과 구원의 계승자라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로마의 퇴폐한 무리들, 쾌락에 젖어 어린아이를 낳지 않고 몰락하고 있는 로마시민들을 가지고는 나라를 지탱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것이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배경이었습니다.
기독교를 이상이 여기며 비방하고 핍박했던 로마 제국이 결국에는 기독교만이 로마를 살릴 수 있다고 판단하여 국교로 인정했던 것입니다. 성도의 삶은 이렇게 세상 사람들로부터도 인정받을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다섯째로, 영으로 하나님을 따라 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6절을 보십시오.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
죄 아래서 태어난 우리는 육의 생명을 가지고 있지만 영으로는 죽은 상태였습니다. 죽어있는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신 예수님은 모든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육체로는 심판을 받아 죽으셨지만 우리로 하여금 영으로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요한복음 14장 10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십자가에 달리실 것을 말씀하시면서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안에 계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만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안에 계신 예수님께서 이제 우리 안에 계십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 사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 용서하고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죄와 세상을 이기기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 힘으로는 어렵지만 예수님을 따르면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싫어 버린바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사 영광의 보좌에 앉히셨습니다. 그렇듯이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도 높이사 영광의 자리에 앉히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8장 17-18절에서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성도들이 당하는 고난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고난을 통해서 죄를 그치게 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고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육체의 남은 때를 헤아려 보셨습니까?
나이가 들면 욕심이 줄어들고 초연해야 할 터인데 오히려 더 욕심을 부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영원한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일에 대한 보장이 없기 때문에 더욱 현실에 집착하고, 조금이라도 더 행복을 누려보려고 욕심을 부리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육체의 남은 때를 헤아려보는 일은 절망감을 갖게 하는 일이요, 생각하기도 싫은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소망을 가지고 사는 우리 성도들의 경우는 세상 사람들과는 입장이 다릅니다.
비록 이 땅에서 고난을 당하나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살았던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 있어서 남은 때를 헤아려 보는 일은 하나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날을 손꼽는 가슴 설래는 일이었습니다.
미물의 짐승들도 자신이 죽을 때를 안다고 합니다. 코끼리는 죽을 때에 아무도 모르는 자신들만이 아는 죽는 곳으로 가서 죽고, 호랑이는 자기가 태어난 굴에 가서 죽는다고 합니다. 강원도 양양 남대천에서 태어난 연어들은 태평양에서 몇 년 동안 살다가 죽을 때가 되면 태어난 남대천에 와서 알을 낳고 죽습니다.
미물의 짐승들도 자신의 죽을 때를 알고 있는데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남은 때를 알지 못하고 허랑방탕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죽음 이후 소망이 없는 세상 사람들과 영원한 소망을 가진 우리 성도들은 육체의 남은 때를 사는 방법이 달라야 합니다.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말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 지나간 때를 족한 줄로 알고, 세상 사람들이 이상히 여기는 삶을 살며 하나님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값지고 아름답게 장식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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