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와 지식에서 자란다는 것 /벧후3:17-18/ 조정의목사
2022-09-28 08:41:40
죄인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다시 태어나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됐을 때, 주님 안에서 잘 자라기를 갈망한다. 하지만 육신의 성장에 성장장애가 있듯, 영혼의 성장에 여러 가지 장애가 있다. 성장통은 누구나 겪지만, 때론 발육이 멈춘 것 같은 성도, 발달이 너무 더딘 사람이 있다. 최악의 경우 거듭나지 않은 상태인지 의심스럽다. 영적 성장판이 닫혔나? 그럴 리 없다.
우리를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그분은 능력의 한계가 없으시다(고전 3:7).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까지 우릴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은 멈추지 않는다(롬 8:29). 그러면 무엇이 문제인가? 우리의 성장을 가로막는 방해꾼, 원수가 문제다. 마귀는 하나님 자녀인 우리의 신분을 빼앗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가 최선을 다해 애쓰는 건 우리를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에서 우리를 최대한 멀어지게 만드는 것이다: 믿음에 관하여 파선(고후 11:25). 어린 아이, 초보(히 5:12-14), 미혹되어 진리를 떠난 자(약 5:19), 맹인, 실족(벧후 1장), 떨어지다(벧후 3장)
베드로는 본문을 통해 우리 성장을 가로막는 마귀의 주요 속임수를 ‘①경계하라’고 명령한다. 또한 은혜와 지식에서 ‘②자라가라’고 명령한다. 이 두 가지 명령을 제대로 알고 적극적으로 순종하여 당신을 퇴보하게 만드는 미혹된 길에서 벗어나길 바란다. 하나님께서 택하고 부르신 새 삶에서 힘있게 자라나길 바란다.
1. 경계하라: 성장을 가로막는 마귀의 거짓을(17절)
17절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가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그러므로는 편지의 결론을 알리는 접속사다. 베드로는 주께서 사랑하신 성도들 그가 사랑하는 자들에게 앞서 한 모든 말의 결론을 이 두 구절에 요약했다(17-18절). 각 구절마다 하나씩 총 두 개의 명령을 했는데, 첫 번째 명령인 “삼가라”의 대상은 베드로가 2장에서 내내 ‘경계하라’고 부르짖은 ‘거짓 선지자들’, ‘거짓 선생들’이다(2:1).
베드로는 본문에서 그들을 가리켜 “무법한 자들”이라고 했는데(3:17), 2장에선 “범죄한 천사들”(4, 창 6장), 노아 시대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5), 소돔과 고모라의 “무법한 자들”(7)의 뒤를 이어 “후세에 경건하지 아니할 자들”로 묘사된다(6). 그들은 시대를 불문하고 존재해 왔다.
이들의 삶은 “호색”(2), “탐심”(3), “음란”(7), “불법”(8), “불의”(9),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주권자 하나님) 멸시”(10)하는 특징을 보인다. 자기들만 이런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한다(14). “그릇되게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을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한다(18). 이들을 소수의 별종 흉악한 범죄자로 여기지 말라.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부정하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삶의 모습이다(롬 1장, 갈 5장, 고전 6:9-10).
왜 사람들은 이런 삶을 사는가? 거짓 때문이다. 베드로는 2장 1절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들은 멸망하게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특히 베드로가 주목한 이단은 임박한 심판에 관한 하나님 약속을 부정하는 거짓이다(2:3, 4, 5, 6, 9, 10, 12, 16, 17, 19). 3장 3-4절에 그들이 믿는 거짓이 분명히 나와 있다.
3절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4절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그들은 종말을 부정한다. 하나님의 약속을 비웃는다. 이 땅이 전부라고 생각한다. 이런 잘못된 이단이 그들의 현재 삶을 정욕으로, 영원한 삶을 멸망으로 이끌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약한 믿음으로 겨우 잘못된 삶만 피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을 똑같은 거짓된 삶으로 미혹한다. 그리스도인의 성장을 가로막는다.
이것을 주목하여 생각하라. 당신이 육체를 따라 정욕대로 살도록 허용하고 있는 모든 죄의 배후엔 항상 거짓이 깔려 있다. 그 거짓은 종말에 약속된 하나님의 심판을 비웃으며 이 땅이 전부라고 여기는 이단과 다를 바 없는 삶으로 당신을 끌어당긴다.
우리는 거짓 종말을 가르치는 신천지, 동방 번개, 하나님의 교회 같은 이단에 빠지는 것을 우습게 여긴다. ‘어떻게 저런 엉터리 거짓에 속을 수 있나?’ 하지만 지금 우리를 미혹하는 대표적인 이단은 따로 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하지 않을 일, 하나님 약속하신 그대로 심판하시고 보상하시는 걸 믿으면 하지 않을 말과 행동, 영원한 의의 나라,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본다면 추구하지 않을 삶을 살게 하는 이단이다.
베드로는 성도들을 가리켜 “너희”는 달라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왜 그런가? 이것을 미리 알았기 때문이다(3:1-2). 우리가 이미 듣고 가르침을 받은 이것 곧 종말에 관한 하나님의의 말씀이 세상의 거짓을 경계할 수 있는 진리이다(3:7-13).
이 진리를 알고 믿는 성도가 어떻게 이 진리를 모르고 무시하는 세상 사람과 똑같이 살 수 있는가? 그러므로 경계하라. 오늘 밤에 주님이 오셔서 말씀하신 종말의 약속을 이행하신다면, 당장 후회할 일들을 삶에서 지금 몰아내라. 주님이 오실 때까지 계속 ‘그 사람’을 용서하지 않고 미워할 것인가? 주님이 대면하여 결산하실 때까지 삶을 절제하지 않고 방종할 것인가? 주님이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나를 보시며 직접 물어보실 때까지 ‘그 죄’를 허용하고 방치할 것인가? 보초를 서는 병사는 경계를 미루지 않는다. 매일 주님이 오신다는 생각을 품고 항상 감시하라(현재형).
2. 자라가라: 성장을 일으키는 예수님 안에서(18절)
18절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헤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
오직은 17절과 18절이 한 쌍을 이룬다는 걸 보여준다. 우리는 성장을 가로막는 마귀의 거짓을 경계하면서 동시에 성장을 일으키는 예수님 안에서 자라가야 한다. 두 번째 명령은 그래서 자라 가라이다. 성장을 가로막는 마귀의 거짓을 경계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성장을 일으키는 원동력, 예수님의 은혜와 그분을 아는 지식이 필요하다. 예수님 말씀처럼 우리는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요 15:5).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란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단지 일반적, 추상적 의미가 아니다.
17장이 2장과 연결된 것처럼, 18절은 1장과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베드로후서 1장에서 “자라가라”는 명령의 구체적인 사항을 발견한다.
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베드로는 예수님을 가리켜 주 곧 구주라고 불렀다(1:11). 이는 하나님으로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주권과 능력, 구세주로서의 역할을 강조한다. 주님은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다(3).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셨다(4). 경건에 이르도록 자라나는데 필요한 모든 능력과 생명력, 약속을 주님이 주셨다.
이것은 전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은혜다. 우리가 하나님을 부르지 않았고,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다. 우리가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셨다(10). 주님은 우리로 썩어질 세상에서 정욕대로 사는 것을 피하게 하고,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신다. 우리 행위를 보시고서가 아니라 하신 약속에 근거하여(4). 주님은 우리에게 열매 맺는 믿음, 행함이 있는 살아 있는 믿음, 자라나게 하는 믿음을 은혜로 공급하신다. 그래서 믿음에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 우애, 사랑을 더하신다(5-7). 은혜가 실제로 우리를 자라게 한다.
② 예수님을 아는 지식
예수님 안에 있는 은혜는 그분을 아는 지식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인사말에서 베드로는 성도들에게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라고 축복했는데 그 앞에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라고 말했다(2절). 주님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에 속한 모든 것을 주셨는데, 무엇으로 말미암아 주셨는가?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3절). 우리가 게으르지 않고 열매 맺는 삶을 살게 하는 은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가능하다(8). 요컨대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동력으로 자라가는데, 그 은혜를 알게 하는 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다.
예수님을 아는 지식은 주관적인 경험보다(변화산 체험) 더 확실한 예언, 곧 성경 말씀을 통해 얻을 수 있다(12-21절). 그래서 베드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는 “순전하고 신령한 젖”이라고 말하며 사모하라고 명령했다(벧전 2:2). 우리의 성장엔 그리스도의 은혜와 지식이 반드시 필요하다.
앞서 “경계하라”에서 우리는 주님의 오심과 약속하신 종말에 관한 진리를 근거로 모든 육체를 따르는 정욕을 끊어내라고 배웠다. 우린 이 사실을 잘 알면서도 순종할 힘이 없어서 성장하지 못할 때가 많다. 가령 미워하는 사람을 끝내 용서하지 못하고 주님을 만나고 싶지 않지만, 그 사람을 용서하고 진정으로 사랑할 힘이 자기 안에 하나도 없는 것이다. 맞다. 그 힘은 우리 안에 없다. 우리 밖에 있다. 우리 안이 아닌 그리스도 안에 있다. 매일 충전하지 않으면 방전되는 전자기기처럼 우리는 날마다 성장을 위한 동력을 주님 안에서 얻어야 한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자주 그리스도의 은혜를 제한한다. 만찬에서 기념하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너무 뻔한 이야기가 됐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날마다 새롭고 넘치는 은혜를 경험하기보다, 오래되고 한정된 은혜를 계속 우리고 또 우려 마시는 것 같다. 하나님 은혜에 문제가 있나? 우리에게 문제가 있나?
데인 오틀런드는 <우리가 몰랐던 예수>라는 책에서 이렇게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다. “당신과 내가 그리스도의 교제에 관해서 얕은 물에 겨우 발가락 하나를 담그고서 드넓은 바다를 경험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예수님 안에서 경험해야 할 것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은 아닐까?”(194p).
그리스도의 은혜의 특징은 ‘풍성함’에 있다. 차고 넘친다는 의미다. 그냥 풍성한 것도 아니고 “지극히 풍성”하다(엡 2:7). 오는 여러 세대 다른 말로 영원히 나타내도 끝없이 차고 넘치는 그 은혜의 풍성한 능력을 당신은 얼마나 알고 믿고 경험하는가?
매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통해 은혜를 채워라. 은혜가 필요할 때, 성경을 읽으면서 두 가지를 적용하라: 낮추기와 높이기.
1) 낮추기(겸손, 회개): 우리는 틈만 나면 자신을 높인다. 지옥, 저주, 멸망, 심판밖에 합당한 것이 없었던 우리가 내세울 것이 무엇인가? 모든 것이 은혜가 아닌가? 계속해서 자신을 낮춰라.
2) 높이기(경외 ,예배): 우리는 쉴 새 없이 하나님을 우리 수준으로 낮춘다. 하나님께 합당한 것은 영광과 찬송과 감사를 받으시는 것뿐이다. 계속해서 하나님을 그분의 위치까지 높여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18절b).
은혜는 지극히 높은 하나님이 낮고 천한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시려고 높은 하늘 보좌에서 자신을 죽기까지 낮추신 놀라운 사랑의 크기를 보여 준다. 성경을 통해 우리를 지극히 낮추고, 그리스도를 지극히 높일수록 우리는 지극히 풍성한 은혜의 크기를 헤아릴 수 있다. 그리고 충전엔 충분한 시간이 요구된다. 주님의 은혜에 압도되고 감동하고 감사할 때까지 말씀을 충분히 묵상하라.
도대체 언제 크나 싶은 아이가 시간이 지나 장성한 성인이 되는 것처럼 성장은 더디지만 매일 조금씩 이루어진다. 육신의 성장도 영적 성장도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께 달려 있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놀라운 성화의 역사에 동참하는 방법이 있다. 오늘 주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성장을 가로막는 거짓을 날마다 경계하고, 성장을 일으키는 예수님의 은혜와 진리 가운데 더디지만 매일 조금씩 자라가자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벧후3:17-18/ 조정의목사
2020-09-24 09:02:33
벧후 3:17-18 [17]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가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18]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
여러분이 만일 유언을 쓴다면 뭐라고 쓰시겠습니까? 여러분이 오늘 죽는다면 나에게 맡겨진 자녀들에게, 청년들이나 성도들에게 어떤 말을 남길까요?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삶을 사는 것이 마땅하다고 쓰시겠습니까? 베드로후서에는 베드로의 그런 유언적인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곧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같이 나도 나의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1:14) 여기서 ‘장막을 벗는다’는 것은 죽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하셨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 21:18-19).
베드로는 지금 예수님의 그 말씀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폭스의 순교사에 따르면, 베드로는 9개월 간의 감옥생활을 하다가 매를 심하게 맡고 그의 요청에 따라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다고 합니다. 이 편지는 그의 죽음 직전에 쓰인 유언적인 편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그 편지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베드로는 죽기 전 마지막으로 성도들에게 무엇이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것인가를 분명히 기록하기 원했을 것입니다.
이 편지는 베드로가 소아시아 성도들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입니다. 그들은 베드로가 직간접적으로 돌봤던 성도들입니다. 그들에게 편지를 쓴 가장 큰 목적은 그들 중에 있는 거짓교사들 때문이었습니다. “너희 중에도”(2:1)
교회 밖에 여러 이단이 있을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거짓교사가 일어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멸망하게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2:1) 이 편지는 그러한 다급함을 담고 있습니다. 제발 그런 자들에게 미혹되지 말라는 당부입니다.
이 말씀은 거짓교사들의 삶이 어떠한지에 대해 말해주고 있습니다. 호색과 탐심, 정욕, 교만, 비방, 불의, 속임, 의심, 탐욕, 자랑 등의 죄를 언급하는데 바로 거짓교사의 특징들입니다. 그들은 잘못된 교리를 전했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강림하시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의 약속과 완전히 다릅니다. 그들은 만물이 말씀으로 창조되었다는 것도 잊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을 말하는지 큰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권위를 인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내 생각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들의 그러한 태도는 방탕한 삶을 양산하였습니다. 베드로는 그들의 잘못된 삶과 교리를 주의하라고 말합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베드로는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전체적인 내용을 종합 정리합니다. 그리고 당부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이것은 사랑하는 자들을 향한 마지막 당부입니다. 제가 이 자리에서 여러분에게 말씀을 전하는 것도 이 사랑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러한 사랑으로 저의 설교를 듣고 계실 것입니다. 주 안에 한 형제 자매이기에 우리는 서로 사랑합니다. 베드로가 말했던 것처럼 그것은 구원받은 성도의 두드러진 특징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사랑하는 이유는 우리의 아버지가 동일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께 사랑을 받았고 그 아들이 십자가의 죽으시는 사랑, 성령의 돌보심을 받았기에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1:1) 베드로는 그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기를 원했습니다.
베드로가 설명하고 있는 당부는 성도들이 이미 알고 있었던 내용이었습니다. 전혀 듣지 못한 새로운 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다시 깨닫게 하기 위해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서 있으나 내가 항상 너희에게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1:12)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이제 이 둘째 편지를 너희에게 쓰노니 이 두 편지로 너희의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생각나게 하여 곧 거룩한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과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3:2)
이미 성도들이 알고 있는 말씀을 다시 한 번 기억하게 하려고 말씀을 기록한 것입니다. 주일마다 하는 일이 그러합니다. 정확하고 확실한 진리를 전파할 뿐만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것 배웠던 것들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는 것입니다. 아는 지식이 정말 내 것이 되도록, 그 아는 대로 살 수 있도록 계속 말씀이 전파되어야 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했던 말씀도 그것이었습니다(신 6).
그 당부의 첫 번째는, “삼가하라”입니다. 이것은 ‘주의하라’, ‘조심하라’입니다. 자신이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면서 마지막으로 한 당부입니다. 진리에서 떠나지 않도록 조심하라, 위협하는 많은 것들에서 주의하라고 말합니다.
무법한 자들(거짓교사)의 미혹함에서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진리가 아닌 다른 것들을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인 가치가 있다고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을 계속해서 미혹합니다. 그들에게서 멀어지고 주의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거짓교사들의 삶은 불의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 성도를 미혹되게 만듭니다. 믿는 자의 마음을 흔들어놓는 것입니다. 저는 고등학교 시절 자율학습을 했는데, 담당선생님이 일찍 귀가하신 날에는 아이들 사이에서 술렁거림이 있습니다. 저마다 규칙을 어기고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아무도 집에 가지 않고 있다면 그런 유혹이 덜하겠지만 한 명 한 명 사라져 결국 나 혼자 남게 된다면 그 유혹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집니다. 세상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 그리스도인을 유혹합니다.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는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벧후 2:8-9) 소돔과 고모라는 하나님이 친히 심판하실 정도로 악했습니다.
그곳에 살고 있던 롯은 의인이었지만 악한 사람들로 인해 심령이 상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살아갑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기에 자신의 생각이 곧 법인 사람들입니다. 그곳에 섞여 살다보면 하나님의 법에서 멀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불륜이나 동성애를 죄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불법 다운로드도 너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남을 비방하거나 속이는 것, 분노하고 짜증내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우리의 의로운 심령이 상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기서부터 주의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잘못된 교리에서 멀어져야 합니다. 당시에도 주님이 오시지 않는다는 이단사상이 있었습니다. 기록된 말씀에 권위를 무시하는 풍조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교리적인 문제들이 무엇일까요? 계시에 대한 가르침(성경의 원래 의미를 벗어나서 감동을 주실 수 있는 분인가, 특정한 구절이나 단어를 통해 감동을 주실 수 있는가)에서 바로 설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교리적인 부분도 바로 서야 합니다.
성경의 본문이 무엇을 말하는가와 상관없이 나의 깨달음에 의존하는 것도 있습니다. ‘그날’과 ‘그때’를 알려고 노력하는 행동들도 있습니다. 베리칩과 제3성전에 대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프리메이슨이나 유럽이 하나가 되는 시점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 때와 시는 자기의 권한에 두셨고 너희의 알바가 아니라고 하셨는데 사람들은 음모론을 조장하는 것입니다. 구원에 대한 교리도 바로잡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순간적으로 구원은 확정된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점진적 과정을 거친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전인적인 구원을 말하고 어떤 사람은 영혼, 몸, 삶의 순서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영지주의적인 교리도 있습니다. 구원받으면 내면의 영혼은 의로운 사람이 되는데 육체는 죄에 찌들어있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구원에 대한 교리도 우리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입니다. 또 하나, 기복신앙의 문제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 승진하고 세상에서 성공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통해서 나를 예배하는 신앙이 오늘날 우리 한국 교계에 강력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여러 교리적인 문제를 겪고 있는데 성도들은 이 교리들 가운데 무엇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 진리인가 생각해야 합니다. 잘못된 가르침과 거짓교사들을 멀리하라고 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진리를 분명히 알고 그 가운데 서야 합니다.
잘못된 교리는 우리의 영혼을 병들게 합니다. 저는 요즘 아내의 건강을 챙기다보니 계속 유기농 음식만 먹고 있습니다. 그렇게 먹다보니, 육신을 건강하게 하기 위해 이렇게 먹는데 내 영혼의 문제에 이만큼 신경 쓰고 있는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먹는 음식에서 영양소가 몸으로 퍼져 우리의 건강을 유지하는 것처럼, 영혼에 들어가는 음식들도 우리의 영혼을 건강하게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해로운 음식이 건강을 해치는 것처럼, 진리가 아닌 가르침들은 신앙을 병들게 하고 삶을 병들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보고 듣고 읽느냐가 중요합니다. 베드로의 당부처럼 저도 여러분에게 이런 당부를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도 보고 듣고 읽는 것을 조심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순전하고 신령한 젖”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것은 해로운 것이 섞인 가르침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비춰봐서 순전한 것인지 진리인지를 분별하시기 바랍니다.
다음의 당부는 “자라가라”입니다.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앞의 당부가 ‘수비’라면 이 당부는 ‘공격’입니다. 우리가 주의하면 삼가고 덜 미혹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수비만 하면 이길 수 없습니다. 영적인 전쟁에 있어서 주의하고 삼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공격해야 합니다. 말씀 안에서 자라가는 것입니다.
20살인데 갓난아기의 모습이라면 정상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지 10, 20년이 되어도 영적으로 자라지 않는다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영적으로 우리는 자라나야 합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것도 자라가는 것도, 하늘나라에 갈 수 있는 것도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은혜로 가능하게 하셨습니다.
그 은혜 안에서 자라야 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랄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예수님에 대해 증거하고 있습니다. 올바른 말씀만이 거짓이 전혀 없는 지식,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모습을 제공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영적으로 점점 더 자라가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공격입니다. 영적인 전신갑주를 취하라고 할 때 유일한 공격무기가 바로 성령의 검 ‘말씀’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당부를 생각하면서 우리가 왜 이 당부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가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 이것은 지상대명령이라고 알려진 명령입니다.
그리고나서 주님은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할 것이다”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명령을 들은 사도들은 말씀대로 제자를 삼아 가르쳤고 말씀을 지키게 했습니다. 그 제자들은 또다른 제자를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항상 떠나지 않겠다하신 분이 약속대로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동일한 명령을 주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입술과 행동으로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해야 할 것은 그들에게 예수님이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행하게 하는 것입니다. 말씀에서 자라지 않으면 어떻게 그것을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모든 세대의 그리스도인이 기억해야 할 당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배워서 다음 세대에게 전해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제대로 전달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실패한다면 그들도 잘못 전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더욱 힘써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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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자라가라 /벧후3:17-18/ 지용수목사
2015-08-15 10:35:20
성장하는 것, 자라는 것은 흥미로운 일, 신바람 나는 일, 그리고 기쁜 일입니다. 제가 18년 전에 일본을 돌아볼 때는 일본이 굉장히 앞서가는 나라 같았습니다. 일본을 돌아보면서 여러 가지 충격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가서 보니, 18년 전이나 별 다른 점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일본의 전 지역이 예전보다 더 우중충해진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 일본의 전역에 크리스마스 캐롤이 울려 퍼졌습니다.
호텔마다 백화점마다 식당마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하는 찬송 소리가 가득했습니다. 성탄절 트리도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모릅니다. 사람들을 들뜨게 해서 매상을 올리려고 성탄절 캐롤을 들려주고, 트리로 장식한 것뿐입니다.
일본은 영적으로 은혜가 없는 불쌍한 나라입니다. 저뿐 아니라 함께 가셨던 모든 목사님들이 일본은 참 공허한 나라라며 탄식하셨습니다. 일본은 그동안 발전한 모습이 눈에 별로 보이지 않았는데, 우리 한국은 어떻습니까
? 세계에서 가장 급속도로 발전한 나라는 아마 우리 나라일 것입니다. 이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과거에는 이스라엘 사람이 복 있다고 했습니다. 로마 사람, 영국 사람, 독일 사람, 미국 사람이 복 있다고 했는데, 지금은 대한민국 사람이 복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 미국 사람들은 테러 때문에 편지 봉투도 마음대로 뜯어보지 못한다고 하는데, 우리는 마음대로 뜯어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앞으로 우리 민족을 크게 쓰실 줄로 믿습니다.
일본에서 24년간 선교하고 계시는 목사님이 말씀하시기를 일본 교회가 잘 안 되지만 한국 교회에 가서 훈련을 받고 돌아와서 그대로 하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일본 교회도 희망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일본의 목사님들은 지적으로는 뛰어나지만 영적으로 약해서 교회가 안 되는데,
한국 목사님들처럼 영적 훈련을 받으면 일본 교회도 뜨거워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일본을 살리시면 잠깐 만에 살리실 줄로 믿습니다. 어쨌든 일본에 갔을 때 발전한 모습이 없으니 딱해 보였습니다. 발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기가 태어나면 사람들이 기뻐합니다. 하지만 백일이 되고 첫돌이 되었는데도 태어났을 때의 핏덩이 모습 그대로, 3.5kg의 몸무게 그대로 있으면 그 아이는 근심 덩어리가 됩니다. 태어났을 때는 핏덩이 같지만 백일이 되면 까르르 웃으니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좋아하며 축하하는 것입니다.
첫돌이 되면 서는 것을 보고 축하하는 것입니다. 나이에 맞게 자라는 것이 얼마나 자랑스럽고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스물 살이 되어도 여전히 3kg밖에 안 된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여러분의 자녀가 정상적으로 자라는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한 거지가, 병들어 움직일 힘이 없어 얻어먹지 못하는 동료 거지들을 바라보다가 "내 동료들은 병이 들어 걷지 못해서 얻어먹지도 못하는데, 나는 이렇게 걸어다닐 건강이 있으니 감사하구나."라고 감사했답니다.
그 거지가 감사하다가 나중에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되었답니다. 우리 생활 속에 감사한 일이 너무 많습니다. 이렇게 자라는 것도 감사한 일이고, 축하할 일입니다. 어느 날, 어떤 사람들이 저희 아파트 건너편에 '○○○ 장군 진급 축하'라는 플래카드를 달았습니다.
3주가 넘었는데도 아직까지 그대로 달려 있습니다. 대령으로 있다가 장군이 되었을 때 그 가족과 친구들이 얼마나 기뻐했겠습니까? 그 기쁨을 알리기 위해 플래카드를 달아 놓은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그것을 보라고 그렇게 달아 놓은 것입니다. 만일 소위로 임명 받아서 제대할 때까지 40년 동안 소위로 있다면 얼마나 지겹겠습니까? 승진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굴지 회사의 차장님으로 계시던 우리 집사님 한 분이 이번에 부장님이 되셨습니다. 참 좋은 일입니다.
한 집사님의 아들은 컴퓨터에 미쳐서 밤낮으로 컴퓨터만 했습니다. 매일 컴퓨터만 하니 별명이 컴퓨터 박사인데 공부는 형편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고등학교에 들어가더니 철이 들었는지 코피를 흘리면서 공부했습니다. 반에서 3등을 했답니다. 우리 집사님 부부가 신바람나서 어쩔 줄 몰라합니다. 성장하고 발전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제가 처음 부흥 사역을 하게 되었을 때 얼마나 감격했는지 모릅니다. '나같이 못난 것, 돌멩이 같은 것의 죄를 사해 주시고 구원해 주신 것만 해도 감사한데, 이 교회 저 교회 다니면서 부흥 사역을 하게 해 주시다니….' 그러다가 서울에 있는 교회로부터 부흥회를 인도해 달라는 부름을 받았을 때는 '우와! 서울에서 나를 불러 주다니….'하며 흥분했습니다.
오래 전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기도하다가 제가 깜빡 하는 사이에 큰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더 크게 복음을 전하라! 나팔을 불어라!"그 음성을 듣고 저도 모르게 일어났습니다.
눈을 떠서 보니 자욱한 안개 속에서 흰옷을 입은 천사가 금나팔을 불고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 하나님께서 저를 더 크게 써 주셨습니다. 큰 교회, 큰 연합 집회, 대학 집회, 그리고 세계적인 교회에서 저를 불러 주었습니다. 처음에는 저를 불러 주는 것만으로도 흥분했는데, 지금은 시간이 없어서 다 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목회를 하는 저도 성장하니 가슴이 설레고 흥분되고 기쁜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조용하게 묻혀서 진실하고 의롭게 살고, 이웃을 전도하고,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선을 행하면서도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또 그것이 그 사회에, 그 마을에 복이 될 수 있습니다. 소돔 고모라에 의인 열 사람이 있어도 소돔 고모라의 재앙이 지나가게 되는 것처럼, 드러나지 않는 의인이 그 마을, 그 도시에 있어도 복이 됩니다.
그러나 자기 분야에서 성장하고 발전하고 승진하여 명예로운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 더 좋습니다.
정치가가 되려면 워싱턴이나 링컨 같은 존경받는 대통령이 되고, 과학자가 되려면 에디슨 같이 빛나는 과학자가 되고, 음악가가 되려면 하이든이나 바하 같은 위대한 음악가가 되고, 또 사업가가 되려면 록펠러처럼, 카네기처럼, 워너 메이커처럼 세계가 깜짝 놀랄 큰 재벌이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번에 일본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신문을 펴니, 화려하게 장식된 크리스마스 트리의 칼라 사진이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반가운 마음으로 거기에 쓰여진 글을 읽어보았습니다. 그 나무는 뉴욕 록펠러 재단의 것으로 79살 된 노르웨이산 전나무라고 했습니다.
세상에! 79년 된 전나무에 붉고 푸르고 하얀 3만 개의 등이 달려서 빛을 비추니 얼마나 화려한지, 제 속이 다 시원했습니다. 세계적인 록펠러 재단이 4대, 5대째 내려오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 얼마나 좋습니까?
또 사람들에게 은혜도 끼치니 우리도 기쁘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 자신의 분야에서 성장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진보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려면 노력해야 됩니다.
디모데전서 4장 15절에『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숨어서 할 일은 숨어서 해야 되지만, 때로는 나타내어서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게 해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자라 가라. 계속 자라나라. 성장하라.'는 말씀은 학생의 성적이 향상되는 것, 회사원이 승진하는 것, 군인이 진급하는 것, 사업이 발전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자라 가라'는 영적인 성장, 신앙의 성장, 믿음의 성장을 가리킵니다. 따라 합시다. "영적인 성장."
신앙의 성장이 다른 모든 분야의 성장보다 앞서야 됩니다. 마태복음 19장에서 우리는 재산이 많은 한 젊은 청년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 청년이 영적으로 약하니, 신앙이 없으니 재물 때문에 망합니다.
신앙이 약한 사람이 자신의 노력으로 성공하면 그 성공 때문에 멸망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지 않으셔도 내 노력만으로 된다.'고 하며 교만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대학에 들어가고, 기도하지 않아도 판사가 되고, 십일조를 하지 않아도 회사의 사장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일본처럼 부자 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없으면 다 망하게 됩니다. 부자가 되어 망하고, 판사가 되어 망하고, 다 올라가서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신앙이 성장해야 합니다. 신앙이 성장하면 아무리 높이 올라가도 겸손하고, 아무리 많이 가져도 좋은 곳에 잘 쓸 수 있습니다. 신앙이 성장하면 다른 것은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요한삼서 1장 2절에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먼저 영혼이 잘 되어야 합니다. 영혼이 잘 되고 범사가 잘 되고 또 몸이 강건해야지, 영혼은 피폐한데 몸이 건강하고 모든 것이 잘 되면 그것 때문에 그 사람은 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는 약속대로 우리 영혼과 신앙이 잘 되면 다른 것은 따라오게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신앙이 성장하기를 바랍니다.
저도 성장해야 됩니다. 제 5년 전의 믿음, 5년 전의 경건이 지금도 그대로 있으면 안 됩니다. 제가 쑥쑥쑥 커나가야 됩니다. 우리 장로님들도 안수 받을 때의 영적인 상태 그대로 있으면 안 됩니다. 쑥쑥쑥 커나가야 됩니다. 여러분도 커나가기를 바랍니다. 신앙이 자라야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부모에게 보채기만 하고, "옷 사주세요. 양말 사주세요. 장난감 사주세요. 등록금 주세요."하며 돈만 씁니다. 그러나 장성하면 효도하고 가정을 일으킵니다. 나라를 위해 일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믿음이 자라지 않으면 구역장도, 교사도, 성가대원도, 안내위원도, 헌금위원도 못합니다.아무것도 못하고 그저 교회 신세만 지게 됩니다. 신앙이 자라야 주님을 위해 일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8절에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열매가 없으면 하나님께 영광 돌려드릴 것도 없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 못합니다. 부끄럽게 겨우 구원을 받을지라도 상은 받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믿은 지 1년이 지나도 전도도 못하고 충성도 못하고 봉사도 못하는 사람은 천국에는 갈지라도 주님께 상은 받지 못합니다. 신앙이 자라야 자신도 서고, 다른 사람도 세우는 일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장해야 합니다. 어디까지 자라야 합니까?
에베소서 4장 15절에 말씀하십니다.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따라 합시다. "예수님까지 자라자." 우리 신앙의 목표가 예수님이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제가 천 살을 산다 해도, 천 년을 노력해도 예수님만큼 자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과 저는 끝없이, 천국에 가는 그 날까지 계속해서 신앙이 자라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신앙이 자라도록 오늘 본문에 세 가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먼저는, 신앙의 사고를 당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 합시다. "깨어 있어서 신앙의 사고를 당하지 말아라."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이 말씀은 '내가 지금까지 말하지 않았느냐? 거짓 예언자, 거짓 선지자들이 나타나서 신앙을 파괴하고, 육체적인 쾌락과 재림의 혼돈으로 사람들을 넘어뜨리고, 이런 저런 잘못된 것으로 너희들을 넘어뜨리려 한다. 거기에 대해서는 내가 미리 말했으니 깨어 있어서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너희 굳센 데서 떨어질까 조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굳센 데 서 있어도 신앙의 함정에 빠지면 곤두박질치게 됩니다. 그러면 자라지 못합니다.
제가 아는 한 아이가 이웃집에 놀러 갔습니다. 그때 그 집의 아저씨가 어떤 일로 부러진 삽을 던졌는데, 그 삽이 그 아이의 허리를 쳤습니다. 아이가 많이 다쳐 꼽추가 되고 키가 자라지 않았습니다. 어른이 되어도 1m도 자라지 않았습니다. 한 번의 사고로 자라지 못하고 만 것입니다.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녀가 세포 하나라도 다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큰 병을 만나면 자라지 않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 장로, 권사까지 자랐지만 한 번 함정에 빠지면, 교통 사고를 당하면 이지러지는 것처럼 신앙의 사고를 당하면 형편없어집니다.
사탄은 여기 저기에 함정을 파놓고 장로님이 빠져서 망하기를, 목사님이 빠져서 부끄럽게 되기를, 권사님이 빠져서 초라하게 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운전할 때는 항상 조심해야 됩니다. 사고가 나면 어렵게 됩니다. 우리 창원에서 자동차 경기 대회를 하고 있는데, 만일 경주를 하던 자동차가 벽에 부딪쳐 넘어지든지 사고가 나면 그 사람은 실패하게 됩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달려가다가 충돌하여, 사고를 당하여 난처하게 되는 일이 많습니다. 제가 괌에 갔을 때 우리 비행기가 추락했던 산에 일부러 가 보았습니다. 산이 나지막했습니다. 제가 비행기 조종을 해도 부딪치지 않을 것 같은 야산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사고가 났습니다. 잠시 깨어 있지 못해서 비행기는 산산조각이 나고 수백 명의 사람이 죽은 것입니다.
사고는 무섭습니다. 자동차 사고도 무섭고 비행기 사고도 무섭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사고는 더 무섭습니다. 자동차 사고나 비행기 사고로 죽어도 천국은 가는데 신앙의 사고를 당하면 얼마나 어렵게 되는지 모릅니다. 늘 깨어서 조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느 곳에 가면 신앙이 풍덩 빠져서 못 나오게 됩니다. 어느 곳에 가면 신앙이 점점 약해지게 됩니다.
한 청년이 고갯길을 걸어가는데 산 속에서 예쁜 아가씨가 나타나 유혹했습니다. 입에서 아름다운 구슬을 꺼내더니 말했습니다. "이 달콤한 구슬을 가지고 놀이를 합시다. 내가 이 구슬을 입에 넣어 빨고 나서 당신의 입에 넣어 주면 당신이 또 이 구슬을 빤 다음에 제 입에 넣어 주세요. 그러면 당신은 아주 행복해질 거예요."
예쁜 아가씨가 주는 아름다운 구슬이라 청년은 그것을 입에 넣어 굴려 보았습니다. 얼마나 달콤한지…. 또 얼마나 기쁘고 신바람이 나는지, 청년은 계속해서 그 예쁜 아가씨를 만나러 가서 구슬을 주거니 받거니 했습니다.
그런데 마을의 지혜로운 한 어른이 그 청년의 얼굴에 핏기가 자꾸 없어지고 몸에 힘이 자꾸 없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네, 어디 아픈가?" "아니예요." "바른 대로 말해 봐." "사실은 저 산에 예쁜 아가씨가 있는데 아름다운 구슬을 갖고 와서 …."
"그 아가씨는 사람이 아니라 오래 된 암 여우야. 자네 피를 빨아먹기 위해 여우가 아가씨로 둔갑해서 나타난 거야. 이번에 만나도 구슬을 주거든 그 구슬을 멀리 집어 던져 버리게. 절대로 다시 그 여우의 입에 넣어 주어서는 안 되네."
"아니예요. 정말 예쁜 아가씨예요. 천사 같은 아가씨예요." "아니야. 그건 여우야. 명심해." 청년이 아가씨를 만나러 산으로 갔습니다. 아가씨가 또 나타나서 청년의 입에 구슬을 넣어주었습니다. 청년이 구슬을 입에서 꺼내어 멀리 던져버리는 순간, 아가씨가 비명을 지르며 데굴데굴 뒹굴다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땅바닥에는 예쁜 아가씨가 아닌 삼백 년 된 여우가 드러누워 있었습니다. 저희 어머니가 해 주신 이야기입니다. 그 아가씨의 구슬이 달콤하고 맛이 있지만 그 구슬이 결국 피를 다 빼앗아 가 죽게 되는 것처럼,
이것은 이야기이지만 실제로 어느 곳에 가면 믿음이 자꾸 떨어지고 기도가 떨어지고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떨어지고 충성이 떨어지게 됩니다. 그런 곳이 있습니다. 그런 곳을 떠나시기 바랍니다. 그런 사람을 떠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믿음이 성장하게 됩니다.
안젤무스가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다가 딱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아이들이 새를 잡아서 실로 매어 돌에 묶어 놓았는데, 그 새가 날아가려다가 주저앉고 다시 날아가려다가 주저앉곤 했습니다 그것을 본 안젤무스가 말했습니다.
"저 새의 모습이 우리 영혼과 같구나. 저 새가 저 작은 돌에 묶여 있는 저 줄만 끊으면 창공을 날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도 죄의 줄만 끊으면 창공을 날 텐데…. "
우리 중에도 그런 분이 계실지 모릅니다. 서 푼 어치도 안 되는 그것, 그것만 자르면 믿음이 쑥쑥 자랄 텐데, 그것을 자르지 못해서 목사님의 아들이, 장로님의 아들이, 집사님이 평생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지는 않습니까? 오늘, 이 시간에 성령의 가위에 의해 잘라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김유신 장군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지만, 결단력이 있었습니다. 그가 자주 가는 색시 집이 있었는데, '내가 이렇게 색시를 좋아했다가는 인생을 망치겠구나. 다시는 이 곳에 오지 않아야겠다.'라고 결단하고 색시 집에 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김유신 장군이 말을 타고 졸다가 눈을 떠보니 말이 색시 집 앞에 서 있었습니다. 색시가 말을 보고 "서방님!"하며 뛰어나왔습니다. 색시를 보는 순간 김유신 장군의 마음이 약해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바로 마음을 가다듬고 칼을 뽑아 자신이 사랑하는 말의 목을 쳤습니다. 그리고 그 곳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위대한 김유신 장군이 된 것입니다. 만일 그때 그가 그 색시 집에 들어갔으면 역사에 이름이 남는 김유신 장군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이 결단해서 여러분의 신앙이 진보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신앙이 진보하는 출발점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음으로, 은혜의 생수를 마시면서 자라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 합시다. "은혜의 생수를 마시면서 자라 가라."
18절에 보면,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자라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은혜는 물과 같습니다. 은혜는 예수님 반석에서만 나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4절에 말씀하십니다.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왔을 때, 이스라엘 백성이 물이 없는 사하라 사막의 뜨거운 태양 볕 아래에서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반석의 샘을 터지게 하셔서 백성들로 하여금 마시게 하셨는데, 그 반석이 예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오늘날 이 세상은 사하라 사막처럼 시원한 구석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서는 생수가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7장 37절, 38절에 말씀하십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예수님에게서 생수가 흘러나오는데, 그 예수님께서 어디에 계십니까? 교회에 계십니다. 따라 합시다. "교회는 주님의 몸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4장 16절에 말씀하십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우리가 약수를 마시려면 약수터에 가야 되는 것처럼 은혜를 마시려면 교회에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은혜를 마십니다. 물처럼 마십니다. 물이 얼마나 중한지 모릅니다. 아이들이 물을 마시지 않으면 자라지 않습니다. 물 때문에 자라고, 물 때문에 건강합니다.
감사하게도 저는 20년 전에 한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새벽에 반드시 물을 마시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새벽에 일어나면 엎드려 기도하고 성경 몇 장을 읽은 다음에 샤워하고 꼭 물을 마십니다. 큰 컵에 물을 가득 담아서 다 마시면서 항상 주기도문을 외웁니다. 그런데 그것이 제 건강의 비결이 되었나 봅니다. 물
론 제가 건강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새벽에 마신 물이 제 피에 있는 노폐물을 다 거두어 가서 제 피와 몸이 아주 깨끗한가 봅니다. 제가 일 년에 한 번씩 건강 체크를 하는데,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아주 맑고 깨끗하답니다. 그리고 건강 나이를 체크하니 제 나이보다 18년이 젊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지만 물이 몸을 건강하게 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식사할 때는 물을 많이 마시면 좋지 않답니다. 식사시간이 아닌 공복에 물을 마시는 것이 좋답니다. 하루에 2리터 이상의 물을 마시면 좋답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를 조금 마셔도 살긴 하지만, 신앙이 자라지 못합니다. 은혜의 생수를 많이 마시기를 바랍니다. 샘물을 마시려면 두레박으로 퍼야 되고 수돗물은 수도꼭지를 틀어야 되듯이, 은혜의 생수는 간절히 구할 때 마시게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44장 3절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대저 내가 갈한 자에게 물을 주며…』 "목이 말라요. 물을 주세요. 은혜를 주세요."하는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시편 107편 9절에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교회에 와서도 그냥 편안하게 앉아 있으면 은혜의 생수를 마시지 못합니다.
"하나님, 은혜를 주세요. 은혜의 생수를 퍼 마시게 해 주세요."할 때 은혜를 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늘 교회에 오셔서 은혜의 생수를 많이 마시고 성장하기를 바랍니다. 믿음이 자라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은혜의 생수는 성령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요한복음 7장 38절, 39절에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령은 인격체이셔서 우리가 한 번 받으면 영원히 계시지만, 또 성령을 물 마시듯이 계속, 술 마시듯이 계속 마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2장 13절에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와서 성령의 재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물을 마시듯이, 술을 마시듯이 계속해서 성령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강건한 믿음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도 별 수 없습니다. 영혼은 새 피조물이 되어서 깨끗하지만, 육신은 믿지 않는 사람의 육신과 똑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 똑같이 우리에게도 보이는 대로 느낌이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 똑같이 우리 몸에도 혈기가 있고, 음욕이 있고, 교만이 있습니다. 음식을 보면 먹고 싶고, 멋있는 것을 보면 마음이 동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분량까지 자라는 길은 오직 성령의 술을 마시는 것뿐입니다. 어떤 분의 건강이 나빠졌습니다. 폐도 나빠지고 여러 가지로 건강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계속 담배를 피우는 자신이 한심스러웠습니다.
'나를 죽이는, 내 생명을 갉아먹는 담배 하나 못 끊다니….' 하루는 가족 앞에서 선언했습니다. "앞으로 나는 절대로 담배를 피우지 않겠다. 내 명예를 걸고 맹세하는데, 이제 담배를 끊겠다." 그렇게 선언해야 아내나 자식들 보기에 부끄러워 담배를 피우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니 얼마나 담배를 피우고 싶은지, 미칠 지경이 되었습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담배를 피우자니 아내에게도 부끄럽고 자식들에게도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딱 한 대만 피우려고 구석에 숨어서 담배를 물고 있다가 그만 아내에게 들키고 말았습니다.
"한심한 양반! 그렇게 장담하더니. 꼴 좋다!" 얼마나 부끄럽습니까? 궁지에 몰린 그분이 말했습니다. "내가 앞으로 안 피운다고 했지, 언제 옆으로 안 피운다고 했나?" 그리고 담배를 옆으로 물고 피우더랍니다. 담배 하나 끊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은혜를 충만히 받으면 절로 끊게 됩니다. 쉽게 끊게 됩니다. 우리가 유혹이 많은 세상에서 육체를 입고 살지만 성령이 충만하면 올곧게 살 수가 있습니다. 바다의 게는 항상 옆으로 기어가지 않습니까?
그런데 한 총각 게가 이상하게 앞으로 기어갔습니다. 한 예쁜 처녀 게가 그것을 보고 그 총각 게에게 반해서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결혼하고 나니 신랑 게가 옆으로 기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당신이 앞으로 가는데 반해서 내가 당신과 결혼했는데 옆으로 가면 어떻게 해요?" "그러면 아직도 술에 취해 있으란 말이야?" 신랑 게가 술에 취해 옆으로 기지 않고 앞으로 기어갔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돈을 벌고 성공해도 가는 길은 다 그 길입니다.
왕도, 장관도, 대학 교수도, 판사도 병원장도 별수 없습니다. 다 그 길로 가서 망합니다. 바다의 게는 다 옆으로 가게 되어 있는 것처럼 사람도 다 같은 길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의 술에 취해야 앞으로 가게 됩니다. 여러분과 저는 성령의 술을 항상 마시기를 바랍니다. 앞으로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지식은 양식과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삼국사기를 아는 지식이 아닙니다. 세상의 어떤 논문의 지식이 아닙니다. 좋은 책에서 배우는 지식, 대학교에서 배우는 지식이 아닙니다. 이 지식은 바로 성경입니다.
구약성경은 오실 예수님에 대한 말씀이고, 신약성경은 오신 예수님, 앞으로 재림하실 예수님, 또 재림하셔서 온 세계를 영원히 다스릴 예수님에 대한 기록인데, 이것을 먹어야 우리의 영혼이 자랄 수 있습니다.
물이 귀하지만 물만 마시고는 자랄 수 없습니다. 물만 마시면 죽게 됩니다. 물도 마셔야 되지만 양식을 먹어야 되는 것처럼, 우리가 은혜를 받아야 하지만,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하지만,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말씀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서울의 한 유명한 교회에 몇천 명의 청년들이 매주 한 번씩 모여서 두 시간씩 찬양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찬양합니다. 그런데 2년 이상 그 청년회에 나오는 청년이 거의 없답니다. 자꾸 떠나간답니다. 왜입니까? 찬양할 때는 은혜가 있는 것 같은데 말씀을 먹지 않으니 공허하기 때문입니다.
수용소에서 사는 사람은 빵을 먹는 사람입니다. 수프를 먹는 사람은 죽어도 빵을 먹는 사람은 사는 것입니다. 찬양도 귀하고 기도도 중하지만 가장 귀한 것은 말씀인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뜨겁게 찬양해도 말씀을 읽지 않으면 공허해서 넘어지게 됩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성경 줄을 떠나면 이단이 될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지 않고 전도하면 나중에는 힘이 없어 자신이 떨어질 수 있습니다. 밥을 먹지 않으면 힘을 쓸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찬송을 드리는 시간, 기도를 드리는 시간, 헌금을 드리는 시간이 다 중하고 귀하지만, 가장 귀한 시간은 설교 시간입니다. 우리가 사는 한 주간 동안에 귀한 일이 많지만, 가장 귀한 시간은 성경을 읽는 시간이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너무 신비로워서 우리가 어떻게 다 공부할 수 없습니다. 제 선배 한 분은 영국에서 8년간 로마서를 연구하여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지금 서울의 모 대학에서 교수로 일하고 계시는데, 그분이 8년간 로마서를 공부했지만 아직 로마서를 삼분의 일도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성경은 한 사람이 천 년을 살아도 다 알 수 없는 신비로운 책입니다. 얼마나 깊은지 끝이 없습니다. 제가 목사이지만, 오늘까지 성경만 붙들고 살고 있지만 아직 성경의 십분의 일도 모릅니다. 성경은 무궁무진해서 읽으면 재미있고, 은혜를 받고,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자라면 멀리까지 보입니다. 제가 처음 목회할 때는 한 달 앞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조
금 자란 지금은 5년, 10년, 20년 앞이 보입니다. 승용차의 운전석에 앉으면 바로 앞만 보입니다. 그러나 큰 트럭이나 큰 버스의 운전석에 앉으면 멀리까지 보입니다. 그래서 여유있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낮으면 불안합니다. 무슨 일이나 사건이 터지면 "아이쿠! 이것 어떻게 하나?"하게 됩니다. 그러나 신앙이 자라면 일이 터져도 "아! 하나님께서 이것을 간증거리로 만들어 주시겠네."
사건이 생겨도 "이것은 이렇게 되겠네."하며 멀리 보고 나가게 됩니다. 우리 교회 뒷동산에 올라가면 양곡동도 제대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장복산 정상에 올라가면 창원, 마산, 진해가 다 보입니다.
우리가 세상 지식이나 세상의 각 분야에도 높이 올라가면 덕이 많지만, 영적으로 높이 올라가면 모든 것이 다 보여서 승리자가 될 줄로 믿습니다.
성공자가 될 줄로 믿습니다. 또 아무리 놀라운 일을 만나도 놀라지 않습니다. 앞이 다 보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과 저의 신앙이 계속 성장해서 신앙의 거인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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