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더불어 누리는 사귐, 교제 /요일1:1-4/ 조정의목사
2020-09-18 03:58:00
2020년 새해부터 시작한 은혜의 방편 시리즈 설교가 한 바퀴 돌아 다시 제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말씀, 기도, 찬양을 다뤘는데, 이 특별한 방편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풍성히 내려주신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이 방편을 사모하고 기쁨으로 참여하기 원하는 마음에서 이 시리즈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교제를 살펴볼 것입니다.
오늘 설교의 목표는 아주 단순합니다. 저는 오늘, 우리가 더불어 누리는 사귐, 즉 교제가 세상에서 절대로 찾을 수 없는 아주 특별하고 귀한 것임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입증하기 원합니다. 우리의 교제가 무엇을 근거로 하는지, 우리가 누구와 더불어 사귐을 갖는지 성령의 감동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똑똑히 보고 알기 원합니다. 그래서 더욱더 교제를 사모하고 교제 가운데 충만한 기쁨을 얻기 원합니다.
우리에게 이 놀라운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쳐줄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일서 1장 1-4절입니다.
1. 우리가 누리는 사귐, 교제란 무엇인가?(1:3a)
요한일서는 사도 요한이 쓴 편지입니다. 1세기와 2세기 기독교 문헌에서 요한일서는 한 번도 요한의 저작권을 의심받지 않았습니다(요한복음과 유사성: 빛, 어둠, 영생, 사랑 강조). 요한은 주후 85-96년 사이, 밧모섬에서 세상을 떠나기 몇 년 전, 이 편지를 자신이 장로로 섬기던 에베소 교회에서 썼을 가능성이 큽니다. 편지의 대상은 인사말에 적혀 있는 것처럼 “너희”입니다(2, 3절). 이 말은 곧 특정 대상을 알 수 없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대상으로 쓴 편지라는 것입니다.
요한이 삶의 거의 막바지에 이르러 사도로서 다음 세대의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이 편지를 쓴 이유는 무엇일까요? 3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지금 이 편지를 통해 요한과 그의 동료들이 보고 들은 것을 ‘너희’에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죠? 계속 이어서 보시면,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사귐이 있게 하려는 것, 그것이 이 편지의 목적입니다. 다른 말로 교제하기 원했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 42절을 보면 초대교회 성도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 하기를 힘”썼는다고 말하는데, 여기서 ‘교제’가 바로 사도 요한이 본문에서 말한 ‘사귐’과 같은 단어입니다. 헬라어로는 ‘코이노니아’입니다.
요한이 이 편지를 통해 하고자 했던 것이 바로 ‘코이노니아’, 즉 ‘사귐’입니다. 사도로서 요한은 이 편지를 통해 가르침을 전달하고, 그 가르침을 받은 자들과 서로 ‘교제’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한이 나누기 원했던 사귐, 교제란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이 곧 우리가 누리는 사귐, 교제의 모습을 분명히 보여줄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교제”라고 하면 좁은 의미에서 ‘대화’를 생각합니다. 교제 시간이 부족하다는 말은 성도가 함께 대화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우리 교회 1층 홀에 들어가는 문에 ‘교제실’이라고 쓰여있습니다. 밥을 먹으면서 우리가 ‘대화’하기 때문입니다. ‘분반 교제’라는 말도 있습니다. 반을 나눠 ‘대화’하는 시간을 가리킵니다. 그러면 ‘교제’는 곧 ‘대화’를 의미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교제는 단순히 ‘대화’가 아니라 ‘대화’를 통해 서로의 삶을 나누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저는 ‘교제’보다 더 우리에게 와닿는 단어가 요한이 본문에서 말한 ‘사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서로의 삶을 나누며 서로 사귑니다.
성경에서 “교제” 또는 “사귐”을 나타내는 단어 ‘코이노니아’가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살펴보면 우리가 누리는 사귐, 교제가 무엇인지에 관해 더 상세한 그림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코이노니아’는 ‘사귐’(고후 6:14; 요일 1:3), ‘교통’(고후 13:13), ‘교제’(행 2:42; 고전 1:9; 빌 3:10), ‘참여’(고전 10:16; 고후 8:4), ‘연보’(롬 15:26; 고후 9:13; 히 13:16)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성도와 성도의 관계 속에서 서로 같은 믿음, 성령을 공유하고, 성례와 사역에 함께 참여하며, 서로 고난에 동참하고 물질을 나누며 섬기는 것이 바로 ‘코이노니아’입니다.
한 마디로 서로의 삶을 공유하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교제, 사귐의 참 의미입니다. 사도 요한은 바로 이런 사귐을 여러 성도와 함께 나누기 원하는 마음으로 이 편지를 썼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준 ‘교제’의 참 의미를 생각하면, 과연 우리가 이런 교제를 나누고 있는지 진지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특히 오늘날 세상은 개인주의가 만연하고 교회 안까지 그 폐해가 깊숙이 침투한 현실에 우리는 과연 성경이 말하는 ‘코이노니아’를 풍성히 누리며 살고 있을까요?
여러분, 지금 성도와 사귀고 있습니까? 내 삶 속에 성도를 초청하여 그 성도와 함께 삶을 나누고 공유하고 있습니까? 즐거워할 때 함께 즐거워하고 울 때 함께 울어줄 누군가가 있습니까(롬 12:15)? 고통을 나눠갖고 물질적으로 궁핍할 때 돕고 있는 성도가 있습니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새 계명’ ‘서로 사랑’은 단순히 사랑하는 감정을 품으라는 명령이 아닙니다(요 13:34). 평소에 아무런 교류도 관심도 없이 살다가 일주일에 한 번 만나서 형식적인 인사를 나누라는 명령도 아닙니다.
말과 혀로만이 아닌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는 사랑(요일 3:18),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짐을 대신 지고(갈 6:2) 필요를 공급해주는 사랑(롬 12:13), 가끔 의무적으로 대화 나누며 안부를 묻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삶을 내 삶 속에 초대하여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사랑, 그것이 예수님의 새 계명에 따라 우리가 누리는 교제의 참모습입니다.
중요한 질문: 당신은 교회 안에서 이런 사귐을 갖고 계십니까?
2. 우리의 교제는 무엇을 근거로 하는가?(1:1-3a)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교회 안에서 이런 사귐을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군중 속의 고독이라고 하지요. 많은 사람이 있지만 고독과 외로움을 느낍니다. 나에게 참으로 친밀감을 줄 수 있는 공동체, 깊은 공감과 풍성한 나눔으로 삶을 공유할 수 있는 공동체를 찾아 떠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교제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의 교제는 무엇을 근거로 이루어지는가? 우리의 사귐을 든든하게 묶는 끈은 무엇인가?
어떤 사람은 혈연관계가 교제의 근거로 작용합니다. 교회 안에 가족이 있어서 친밀함을 느끼고 그 안에서 교제의 만족을 찾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지연과 학연에서 사귐의 장을 만듭니다. 오랜 세월 많이 보고 자란 사람끼리 있어서 편안함을 느끼고 친밀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같은 취미나 관심사를 가진 사람끼리 교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반대로 어떤 사람은 가족도 없고, 교회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아는 사람도 적으며, 마땅히 취미나 관심사를 공유할만한 것도 없어 교제가 거의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혈연, 지연, 학연 등 나에게 교제권을 만들어 줄 근거를 찾아 사귐을 시도하고 과감히 교제권을 변경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도가 교제할 때 그 근거로 삼는 것이 무엇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성도와 교제를 시작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나누는 교제를 지속하고 더 견고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있어서 앞서 말한 그리스도인의 참된 교제가 부족한 주요 원인이 우리의 교제를 묶고 있는 근거를 엉뚱한 곳에서 찾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요한이 무엇을 근거로 독자와 사귐을 가지려 하는지 성경이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3절에 나오는 “우리”가 사귐을 가지려는 “너희”, 이 둘의 관계에 대하여 알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우리’와 ‘너희’가 혈연관계인지, 지연, 학연이 있는지, 혹은 공통의 관심사나 취미를 가졌는지 조금도 말해주지 않습니다.
‘우리’와 ‘너희’가 사귐이 있게 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 사도 요한이 ‘보고 들은’ 바로 그것입니다. 요한은 1-2절에 그가 다른 목격자와 함께 ‘보고 들은 바’가 무엇인지 설명하는데, 바로 이것이 우리의 교제를 가능하게 하는 근거입니다.
1절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2절 이 생명이 나타나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게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어떤 분에게는 이 설명이 수수께끼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교회 오래 다니셨거나 말씀을 잘 알고 계신 분들은 1절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을 읽자마자 요한이 누구를 가리켜 말하는지 바로 아실 것입니다.
힌트로 요한은 복음서의 시작을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라고 시작했습니다(요 1: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하나님이신 말씀, 누구를 가리킵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요 1:14).
요한은 ‘우리’가 들었고 보았고 자세히 살펴보았으며 손으로 만졌다고 증언합니다. 예수님은 단지 그들에게 자기에 관한 정보만 기록하여 전달하지 않으셨습니다. 환상으로 보이시거나 영으로 나타나신 것도 아닙니다. 그들 안에 뜨거운 감동만 일으키신 것도 아닙니다.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2절). 그분은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육신을 입고 오셔서 실제로 그들 가운데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요 1:14). 그들과 함께 사셨습니다. 삶을 나누셨습니다. 그들과 사귐을 가지셨습니다. 그들과 ‘코이노니아’ 즉 교제를 나누셨습니다.
그런데 잠깐, 여러분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죄 없으신 하나님이 죄 많은 사람과 교제할 수 있습니까? 빛과 어둠이 어떻게 사귈 수 있습니까? 그런 질문은 참으로 합당한 질문입니다. 성경은 죄인에게 영적으로 ‘사망’ 선고를 내리기 때문입니다.(롬 6:23). ‘사망’은 죄로 인해 하나님과 영원히 관계가 단절된 상태, 다시 말해 교제할 수 없는 상태, 사귈 수 없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하지만 여러분, 여기서 요한이 예수님을 계속해서 뭐라고 부르는지 주목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1절에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 2절에 “이 생명”, 또 바로 이어서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요한은 계속해서 예수님을 “생명”, “영생”이라 부릅니다. 자신이 직접 눈으로 보고 이 편지의 독자에게 확증하고 있는 예수님이 “생명”, “영생”이라고 말합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죄인, 사망 선고받은 죄인에게 생명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죄인의 관계를 영원히 회복하시기 때문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지만 하나님의 은사 곧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입니다(롬 6:23).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예수님이 죄인의 생명이 되셨습니다. 영원히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던 자들이 하나님이신 예수님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사귐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십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영원히 교제할 수 있는 관계가 된 것입니다(요 1:12).
예수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인에게 자기를 알게 하셨고 또 자기를 보내신 자 하나님 아버지를 알게 하셨습니다. 다른 말로 예수님과 사귐이 있게 하셨고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와 사귐이 있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예수님을 “생명” 그리고 “영생”이라고 말한 것입니다(요일 5:20).
자, 그러면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교제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요한은 말합니다. 3절에,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요한이 보고 들은 것은 영생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한과 요한을 통해 예수님을 받아들인 성도 간의 교제의 근거가 되십니다. 성도의 교제를 가능하게 하시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혈연이 아닙니다. 지연이나 학연도 아닙니다. 같은 취미나 관심사가 아닙니다. 직종이 같거나 연령대가 비슷하거나 성격이 잘 맞기 때문도 아닙니다. 성도의 교제가 가능한 이유, 그것을 지속할 수 있는 이유, 더 견고해지고 풍성해지는 이유,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 때문입니다.
여러분, 초대교회 앙숙이었던 유대인과 이방인이 어떻게 하나가 되었습니까? 주인과 종이 어떻게 한 교회를 이룰 수 있었습니까? 남자와 여자가 어떻게 ‘하나’라고 선포할 수 있었습니까? 그들의 교제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습니까? 그 특별한 사귐이 무엇에 근거한 것입니까?
오직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은 한 소망을 가졌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은 한 분 성령님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은 한 하나님을 함께 아버지로 섬겼고, 함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엡 3:6).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은 한 믿음과 한 세례를 공유했습니다(엡 4:4-6). 예수 그리스도 그분 안에 있다는 것 그 하나만으로 그리스도인은 서로 충분히 교제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혈연관계가 다른 어떤 관계보다 더 끈끈한 관계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어떤 책에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확실히 피는 물보다 진하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피보다 진한 것은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영원한 사귐을 가져오기에 충분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 사이에 영원한 사귐을 가져오기에도 충분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성도와의 교제, 그 사귐 속에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근거를 찾지 마시기 바랍니다. 물론 다른 것이 아무 의미가 없다거나 영향력을 미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성도의 교제를 가로막는 방해물이 되게 하지 마십시오.
잘 몰라서 어색하고 불편하다는 이유로, 성격이 안 맞는다는 이유로, 성향이나 관심사,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무너진 장벽, 곧 성도의 사귐을 가로막는 장벽을 다시 세우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서로 사귈 수 있습니다. 교제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면 충분한 근거가 됩니다.
3. 우리는 누구와 더불어 사귐을 갖는가?(1:3b-4)
그리스도인의 교제는 세상에서 찾아볼 수 없는 매우 특별한 교제입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오직 그리스도 그분으로 인해 시작되고 영원히 지속되는 사귐이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 기독교 공동체에서 발견된 참된 교제는 종파와 인종, 사회 계급과 성별 등 다양한 갈등의 장벽을 뛰어넘어 놀라운 사랑의 관계를 보여주었습니다.
특히 사도행전 2장에 보면 믿는 자들이 다 함께 있고(삶을 공유하고) 서로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재산과 소유를 팔고 모든 물건을 함께 사용하는 등 오늘날 공산주의에서 무력으로 강제로 만들어야만 일어날 법한 일들을 자발적으로 행했습니다(행 2:43-47). 어쩌다가 한 번 만나 이벤트성으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한 마음으로 모였습니다. 억지로 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그렇게 교제했습니다.
그들의 입술에서는 찬송이 흘러나오고, 백성들에게 칭찬을 받았으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일으키셨습니다. 날마다 구원받는 사람을 더하셨습니다.
이 놀라운 역사의 기록 앞에 우리는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의 교제가 갖는 기쁨과 능력의 근원을 찾게 됩니다. 그들의 교제에 어떻게 그렇게 큰 기쁨과 능력이 있었는가? 바로 하나님께서 성도의 교제 가운데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우리와 더불어 사귐을 갖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3절과 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교제는 기쁨이 충만한 교제입니다. 우리의 사귐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교제 가운데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누리는’ 사귐.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사귐, 교제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라는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요 13:34).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요 14:23).
여러분, 물론 예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마 28:20).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계시지 않는 곳이 없으십니다(시 139). 하지만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성도의 사귐, 성도의 교제 가운데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더불어 함께하신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 진실로 사랑할 때, 참된 사귐을 누릴 때, 성부와 성자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을 더욱 분명히 드러내실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여러분에게 큰 기쁨이 되지 않으십니까? 우리의 사귐 속에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것이 우리의 기쁨을 충만하게 만들지 않습니까? 더 삶을 나누고, 함께 섬기고, 교제하기 원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지 않습니까?
저는 가끔 반성할 때가 있습니다. 청년회나 정기 집회에 모이기 힘쓰라는 말을 할 때, 자주 빠지는 성도에게 ‘꼭 참석하여 함께 교제합시다’라고 권면할 때, ‘혹시 내가 회원 모집하는 사람처럼, 출석 체크하는 선생님처럼, 참석률이 저조한 사람을 꾸짖거나 좋게 말하면 격려하기 위해 점검하는 것처럼 그런 마음으로 권면하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땐 스스로 반성이 됩니다. 저의 태도를 바꿔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교제를 하나의 일이나 모임으로 생각하는 태도를 고쳐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성도의 교제는 왕의 왕이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더불어 사귐을 갖는 시간입니다. 우리를 위해 친히 자기 목숨을 버리신 주님과 그 아들을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아버지께서 우리의 교제 중에 함께 하십니다. 어떻게 우리가 영원하신 하나님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 동참하는 이 놀라운 특권과 은혜를 얻게 된 것일까요? 그 자리에 항상 함께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우리는 형제자매를 만나는 그곳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사귐을 갖습니다. 형제를 돌보고 섬기는 그 일 가운데 예수님의 함께하심을 경험합니다. 자매를 만나고 교제하고 위로하는 손길 중에 하나님의 역사를 맛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히 경험할 수 있는 은혜의 방편, 우리가 더불어 누리는 사귐인 교제를 여러분 풍성히 누리고 사모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에 다른 성도를 초대하여 함께 삶을 공유하고 더불어 사귐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성도의 슬픔과 기쁨에 동참하고, 돕고 섬기는 일에 기쁨으로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성도가 함께 모여 교제할 때 그 자리에 꼭 함께하시기 바랍니다. 정말 우리 교회가 풍성한 교제가 넘치는 교회, 그래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히 맛보고 하나님께서 놀랍게 역사하시는 것을 보며 그분께 찬양으로 높여 드리기 원합니다.
영생은 무슨 맛일까? /요일1:1-4/ 조정의목사
2021-09-01 08:09:29
요한일서는 적어도 세가지 측면에서 지금 우리에게 꼭 필요한 말씀이고 유익한 하나님의 진리이다.
첫째,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세워 준다. 사도 요한은 주님이 승천하시고 자기를 뺀 나머지 사도들이 모두 세상을 떠 난 뒤(AD 90~95년) 각종 이단과 도덕적 타락에 교회가 위기에 처했을 때, 마지막 사도로서 이 편지를 모든 교회가 회람할 수 있도록 썼다(@에베소). 요한일서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중 하나는 요한이 그리스도인을 빛과 어둠처럼 극명하게 나눈다는 것이다.
당신은 빛이신 하나님과 사귐이 있거나 없는 사람이다. 당신은 죄를 짓거나 짓지 않는 사람 중 하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진리를 가진 자이거나 계명을 지키지 않는 거짓말 하는 자이다. 성도를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는 자이다. 세상을 사랑하는 자이 거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이다. 요한일서는 이렇게 계속해서 참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밝혀 소속을 분명히 한다.
둘째,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맞게 씨름하며 살도록 요청한다. 요한일서의 핵심 주제 중 하나는 그리스도인의 전쟁이다. 적그리스도, 악한 자 마귀, 하나님의 원수인 세상과 맞서 싸운다. 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법은 치열하게 죄와 싸우는 것,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것, 하나님과 성도를 사랑하는 것이다.
편지에서 요한이 말한 바에 따르면 이미 여러 사람이 이 싸움에서 패배하여 참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떠나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다.
개인주의가 팽배하고 이기적인 사랑으로 교회가 병들고 있는 지금, 개인의 삶이 부패하고 교회가 도덕적 타락으로 무너지고 있는 지금, 요한일서는 반드시 회복해야 하는 잊혀진 명령 거룩과 그리스도와 새 계명을 들려줄 것이다. 그리스도인 답게 살도록 하나님의 권위 있는 말씀으로 우리에게 명령할 것이다.
셋째, 요한일서는 방금 소개한 여러 가지 교훈을 반복해서 말해 준다(순환적 구조). 어떤 주석가는 요한일서를 마치 훌륭한 조각 상을 계단을 올라가면서 감상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눈높이와 관점에 따라 같은 조각상에서 드러나는 아름다움의 깊이와 풍부함에 놀라는 것처럼 요한은 계속해서 같은 교훈을 반복하며 그 깊이를 더한다. 오늘날 우리는 많고 복잡한 것보다 단순한 진리를 더 자주 오래 묵상할 필요가 있다.
요한은 편지의 저자, 수신자, 인사말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데, 위기에 처한 교회에 꼭 필요한 교훈을 기록하여 모든 교회의 성도에게 들려줄 목적이 분명하기 때문이다(설교문). 참고로 요한은 70년 예루살렘 함락 이후 어느 시점에 마리아를 모시고 에베소로 건너와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며 사역을 했다(직속 제자 폴리캅과 그의 제자 이레니우스의 증언). 에베소 교회는 바울이 설립하고(55년), 디모데가 목회했던 곳이기도 하다(딤전 1:3). 요한은 밧모섬에 유배되기 전 요한서신을 썼을 것이다.
오늘 본문(1장 1-4절)에서 우리가 알기 원하는 것은 요한이 영생 을 뭐라고 소개하는지에 관한 것이다. 그래서 설교 제목이 “영생은 무슨 맛일까?”이다. 오늘 본문은 피라미드를 거꾸로 세워놓은 모양의 요한일서 가장 밑바닥에 해당하는 핵심 주춧돌이며, 이 편지를 쓴 목적(5장 13절)에 대한 즉각적인 대답이다. 요한은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라고 분명히 편지를 쓴 목적을 밝혔다.
이 편지가 2천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유평교회에서 읽힐 때, 요한은 성령의 감동으로 우리에게 이렇게 묻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이여, 여러분에게 영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 우리는 알고 있다. 당신의 자녀나 친한 동료가 ‘당신도 영생을 가지고 있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때 그들이 이렇게 묻는다고 생각해보라. ‘영생은 무슨 맛이야?’ ‘영생을 가지면 무슨 유익이 있어?’
우리는 먹어본 과일의 맛을 기억한다. 사과, 포도, 배, 레몬, 딸기. 어떤 과일은 이름만 들어도 입에 군침이 돈다. 시큼한 맛이 느껴지기도 한다. 먹어보지 않은 과일은 아무런 감흥이 없다. 그 맛을 모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을 맛본 당신은 그 맛을 뭐라고 표현하겠는가? 어떤 맛이 느껴지는가?
많은 사람이 영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영생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영생을 제대로 맛보지 못하고 누리지 못한다. 두가지 오해를 바로잡고 영생이 무엇인지 어떤 맛인지 본문을 통해 알아보자.
1. 영생은 단지 불멸이 아니다
많은 사람이 영생을 불멸 즉 죽지 않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 땅에서 육신의 죽음을 맛보더라도 그 영혼은 영원히 사는 것, 몸의 부활을 통해 새로운 육신을 가지고 영원히 사는 것을 영생이라고 본다. 하지만 하나님 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는 이들은 이 땅에서 죽으면 끝인가? 새로운 육신을 입는데 제한된 시간을 사는가?
그렇지 않다. 악한 일을 행한 자도 “심판의 부활”로 나온다(요 5:29). 마귀와 거짓 선지자와 함께 “세세토록”(forever) 밤낮 괴로움을 받는다(계 20:10). 문제는 생의 길이가 아니라 질이다. 생명이냐 심판이냐, 천국이냐 지옥이냐가 중요하지 소멸하지 않고 살아남는 건 차이가 없다.
2. 영생은 오직 사후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5장46절에서 말세의 징조를 설명하시고 왕이 군림할 때 왕을 대적한 이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라고 말씀하셨다(마18:8; 마18:9. 그러므로 영생이 예수님의 재림 이후에(혹은 이생 이후에) 더욱 분명하게 누리게 되는 것이 란게 사실이다. 그래서 성경은 여러번 영생에 “이른다”(요 4:36; 롬 5:21; 유 1:21), “마지막”에 얻는다(롬 6:22),영생의 “소망”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딛 1:2; 3:7).
하지만 그전까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가? 이 땅에서 영생은 맛 본적 없는 무언가인가? 요한은 이 편지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너희”가 “영생을 가졌다”고 분명히 밝혔다. 예수님도 “아들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다고 하셨다(요 3:36).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다고 하셨다(요 5:24; 요 6:47; ). 성경의 또 다른 본문에서는 “영생을 취하라”고 요구한다(딤전 6:12). 현재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영생의 맛(유익)이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영생은 정확히 무엇인가?
3.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요한은 본문의 시작부터 생명을 소개한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 의 말씀”(1절), “이 생명”(2절), “이 영원한 생명”(2절).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요한이 묘사하는 영생은 불멸의 삶이나 사후 세계에만 속한 무언가가 아니다. 요한은 영생을 마치 인격체처럼 소개한다.
요한복음의 시작에서 자신이 사용한 방식에 따라 “태초부터 있는…말씀”이 모든 만물 특히 사람에게 생명의 빛을 불어넣어 준 “생명의 말씀”이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하나님이라고 소개한다(요 1:1-4,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2절). 그리고 요한과 그 동료들이 이 영생의 하나님을 체험했다고 확증한다.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1절).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2절, 법정 용어).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가리켜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시고 나를 먹으면 영생한다고 하셨다. 그때, 제자 중 많은 사람이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떠나갔다. 하지만 열두 제자는 “너희도 가려느냐”는 질문에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라고 대답했다(요 6:22-69). 바로 그들이 영생을 눈으로 보고 자세히 살펴보아 그 영적 의미를 파악하고 손으로 만지고 증언한 이들이다.
결국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요한은 이 편지 마지막에 그리스도를 가리켜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라고 말했다(요일 5:20). 예수님도 내가 곧 길, 진리, 생명이라고 하셨다 (요 14:6). 우리에게 영생이 있다는 말은 곧 우리가 영생이신 예수님과 사귐이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 3절에 요한이 “사귐”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영생이신 그리스 도)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그래서 예수님은 영생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셨다. “영생은 곧 유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경험적인 앎, 사귐). 사도 요한은 같은 맥락에서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자 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라고 말했다(요일 5:12).
이제 우리는 영생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을 수 있다. 예수를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모두 부활하고 영원히 존재하는데 누구는 영벌(영원한 심판), 누구는 영생을 누리는 이유는 한쪽은 예수 그리스도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단절 상태이고 다른 한쪽은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원한 사귐을 갖기 때문이다. 영생이 죽음 이후에 더 큰 소망이 되고 이르러야 할 온전한 것이 되는 이유는 그날에 우리가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나님과 얼굴과 얼굴을 대하는 온전한 기쁨과 사귐을 누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현재 이 땅에서도 우리가 영생을 취할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영생을 맛볼 수 있다는 확신을 할 수 있다. 예수님과 그를 믿는 우리의 사귐은 죽고 나서야 시작되는 게 아니라 그분을 믿는 순간부터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은 믿지 않는 이들에게 그 영생을 소개하기 위해 요한복음을 썼다. 그가 말하기를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 요한복음 전체를 통해 요한이 내내 소개한 분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을 믿고 사귐을 갖는 것이 바로 영생이다.
초등학교 때 한 여배우를 좋아했다. 사춘기니까 뭘 모르고 예쁜 외모와 드라마 속 인품을 보고 사랑에 빠졌다. ‘나와 격이 다르고 딴 세상에 있는 것 같은 저 사람과 결혼한 사람은 얼마나 행복 할까’ 이런 생각도 했다.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지만, 막강 부와 권력을 가진 사람, 대단한 인품을 가진 사람, 명성과 인기가 드높은 사람을 매체를 통해 지켜보면서 그냥 지식적인 앎 이 아니라 인격적인 관계가 닿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얼마나 행복할까라는 생각을 할 때가 종종 있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태초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존재하는 모든 것에 생명을 불어넣는 전능하신 하나님. 모든 인류의 역사와 사건을 주관하시는 전지하신 주권자. 모든 부와 모든 명예와 모든 찬양과 경배를 홀로 받기에 합당하신 분께서 당신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기 원하신다는 것을. 언제든 성경을 통해 당신에게 말씀하시고, 언제든 기도로 당신의 목소리를 들으시며, 당신이 어디를 가든지 항상 함께하시고, 당신이 잘 때도 주무시지 않고 보호하시고, 잊고 살 때도 중보를 멈추지 않으신다는 것을.
당신은 이 놀라운 영생의 맛을 진정 잃어버리고 살지는 않는가? 요한은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4절). 영생의 맛, 충만한 기쁨의 맛을 다시 회복하라는 것이다. 당신이 만일 진정으로 영생을 얻은 사람 곧 그리스도와 사귐을 갖는 사람이라면 1772년 윌리엄 쿠퍼가 쓴 이 시에 씁슬하지만 공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처음 주님을 보았을 때
내가 알았던 축복은 어디로 갔을까?
영혼을 새롭게 하는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이 어디로 사라졌을까?
전에 참으로 평화로운 시간을 보냈었구나
그 기억이 지금은 너무나 달콤하구나
그러나 이제는 세상이 채워줄 수 없는 괴로운 공백만 남았도다
어쩌면 당신은 억울함을 호소할지도 모른다. 사도 요한과 그 동료들은 직접 육신의 눈으로 영생의 주를 보았고, 그분의 말씀을 귀로 들었고, 손으로 그분을 만지고 체험할 수 있는 사귐을 누리지 않았냐고. 하지만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여 알려주시기 전까지 그들은 예수님이 진짜 누구신지도 거의 알지 못했다(심지어 부활하신 주를 봤는데도).
성령은 지금도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의 음성을 우리에게 들려주신다. 기도를 통해 우리 목소리를 그분 귀에 들리게 하신다. 성도와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의 선하심과 사랑과 은혜를 맛보게 하신다. 영적인 의미에서 떡과 잔을 통해 그분의 몸을 만지게 하시고 그분의 사랑을 오감으로 경험하게 하신다.
물론 감각을 통해 신비로운 방식으로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느껴보라고 요구하는 게 아니다. 제임스 몽고메리 보이스가 말한 것처럼 “객관적 계시 의 근거 위에서 성령께서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 그리스도가 살아 있게 하시고 실제적인 존재가 되게 하”신다는 말이다 (40p).
당신은 영생을 소유하고 있는가? 그리스도와 사귐을 갖고 있는가? ‘요즘 그리스도와 사귐이 좀 어때?’라고 묻는다면 뭐라고 답하겠는가? 당신의 성경 읽기는 그분과의 사귐을 더욱 깊게 만드는 달콤한 시간인가 아니면 머리에 성경 지식을 집어 넣는 지루하고 형식적인 시간인가? 당신의 기도는 그리스도에게 사랑을 속삭이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애정이 어린 시간인가?
아니면 메마르고 사랑 없는 독백인가? 성도와의 교제를 통해 그 안에서 발견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맛보며 기쁨과 희락을 누리는가? 아니면 무거운 짐처럼 여겨지거나 상처받기 싫고 게을러서 회피해 도 상관없는 사교라고 생각하는가? 당신은 당신의 모든 것을 기쁨으로 바치는 예배를 드리는가 아니면 저는 것과 눈먼 것을 드리는 예배인가?
어쩌면 우리에게도 사도 요한이 이 편지를 쓴 에베소 교회가 영생의 주님께 받은 책망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 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계 2:4-5).
당신이 매일 새롭게 영생을 맛보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주님과 친밀한 사귐을 이야기할 때 과거를 더듬어 찾는게 아니라 현재를 신이나서 말하기를 그리고 미래의 소망에 기쁨이 가득하길 바란다. 영생의 맛은 곧 가장 영광스럽고 고귀하며 아름답고 놀라 우신 그리스도와 사귐의 축복이다. 그 축복을 이 땅에서 제대로 누리기를, 그래서 당신이 사랑하는 이들에게 영생의 맛이 무엇인지 기록된 말씀과 함께 당신의 경험으로 확실히 말해주고 소개 할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한다.
요한일서 강해 (2) - 그리스도인의 기쁨 /요일1:1-4/ 김형익 목사
2021-05-13 07:40:52
1. 서신을 쓰는 목적
요한일서를 쓰는 요한의 목적은 성도들?사랑하는 자녀들?을 참된 믿음과 삶 안에 서도록 보호하는 것이었다는 점에서 목회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령, 요한일서는 기쁨, 거룩, 확신(1:4; 2:1; 5:13)과 같은 덕목들, 즉 목자가 양떼들이 가지기를 바라는 덕목들을 매우 분명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이 서신은 거짓 교사들의 거짓 교리와 가르침을 논박하는 신학적 성격으로 가득한 논쟁적 서신이기도 합니다(2:26; 3:7). 그래서 사도 요한은 무엇보다도 거짓 선지자들을 시험해 보아야 한다(4:1~6)고 말할 뿐 아니라, 그들은 미혹하는 자들이고(2:26; 3:7) 적그리스도들(2:18; 4:3)이라고 분명하게 규정합니다.
이런 신학적이고 논쟁적인 서신의 성격은 처음부터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일반적인 서신과 달리, 요한일서는 문안 형식을 갖추면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사도 요한은 자신이 이 서신을 쓰는 분명한 목적을 이중적으로 밝힙니다. 한편으로는 교회를 흔드는 거짓 선지자와 거짓 교사들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하는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성도들이 자신들이 믿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는 복음이시다!
기독교 신앙은 주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제자들에게 물었던 그 질문에 대한 대답에 기초합니다. 주님께서는 거기서 제자들에게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그리고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아무리 화려한 언어를 구사하여 기독교 신앙을 묘사한다고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에 대한 대답이 불분명하다면, 그것은 온전한 기독교 신앙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지난 주일에 살펴본 바와 같이, 요한일서가 쓰여지던 당시 주님의 교회는 바로 이런 근본적인 문제에서 위협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처음부터 단도직입적으로 그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요한일서가 시작되는 문장 구조도 매우 특이합니다. 사도는 1절에서 시작해서 3절 전반부에서 끝나는 첫 문장의 주 동사를 이 문장의 끝에서 사용하고 있는데 그것은 ‘전함은’이라는 말입니다. 즉, 사도가 교회에게 ‘전하는’ 내용인 목적어가 매우 긴 수식과 함께 맨 앞에 등장합니다. 사도가 전하는 것은 ‘생명의 말씀’입니다. 사도는 1절에서 그 생명의 말씀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는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을 듣고 눈으로 보고 자세히 보고 손으로 만져보았다.”
자, 그러면 이런 질문을 먼저 던져보겠습니다. 사도가 말씀하는 ‘생명의 말씀’이 무엇을 혹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제가 왜 ‘무엇을’ 혹 ‘누구를’이라고 표현했는지 아십니까? 헬라어는 우리 말과 달리, 단어에 남성, 여성, 중성과 같은 ‘성’이 있는 보다 정교한 언어입니다.
그런데 생명의 말씀이라고 할 때, 그 ‘말씀’(로고스)은 남성 명사입니다. 이 ‘말씀’을 뒤에서 수식하려면 당연히 남성 대명사를 사용해야 문법적으로 옳습니다. 그런데 ‘태초부터 있다’, ‘우리가 들었다’, ‘우리가 눈으로 보았다’, ‘자세히 보았다’, ‘손으로 만졌다’고 하는 수식에 모두 남성이 아닌 중성 대명사를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의도적인 것입니다. 만일 사도가 명백하게 남성 대명사를 사용했다면 ‘생명의 말씀’은 의심의 여지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가 의도적으로 남성이 아닌 중성 대명사를 사용했다면,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가리키기 보다 ‘복음의 메시지’를 의미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16에서 사도 바울은 여기서 사용된 것과 똑같은 ‘생명의 말씀’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거기서 사도 바울이 의미한 것이 복음의 메시지라는 것은 명확합니다.
물론, 요한일서의 시작 부분은 요한복음의 시작 부분과 상당히 비슷합니다.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로 시작되고, 요한일서는 “태초부터 있는......생명의 말씀”이라고 시작됩니다. 이런 유사점뿐 아니라 요한복음과 요한일서가 모두 사도 요한에 의해서 기록되었다는 점에서, 생명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생각하기는 쉽습니다.
하지만 사도가 중성 대명사를 사용함으로써 ‘생명의 말씀’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뿐 아니라 복음의 메시지를 포함하는 것으로 더 넓어지는 것입니다. 2절에서 말씀하는 바,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것에는 이의가 없습니다. 그러나 1절에서 ‘생명의 말씀’이라고 했을 때, 그 말씀이 가리키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함께 복음의 메시지, 즉, 생명을 주는 메시지인 복음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말씀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사도가 의도적으로 ‘생명의 말씀’을 수식하는데 남성이 아닌 중성 대명사를 사용하고 있다면, 결론은 이렇습니다. 사도 요한이 ‘생명의 말씀’을 통해서 의도하고자 한 것은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분리될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 즉 복음을 함께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2절은 1절을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1절에서 ‘생명의 말씀’이라고 표현한 것을 2절에서는 ‘생명’, ‘영원한 생명’이라고 전환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사도는 자신이 의도한 것은, 넓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포함하는 것이지만 직접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즉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라는 것을 밝힙니다. 요한복음 1:4에서 이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이라고 소개했고, 예수님께서도 친히 당신 자신을 가리켜 ‘생명의 떡’이라고(요 6:35,48) 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요 11:25)”,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 14:6)”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사도가 말하는 것은 더 명확해졌습니다.
게다가 사도는 그 ‘생명의 말씀’을 들었고 눈으로 보았고 자세히 보았으며 손으로 만지기까지 했다고 쓰고 있습니다. 만일, ‘생명의 말씀’이 메시지라면, 듣고 눈으로 보았고 자세히 (살펴)보았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손으로 만졌다고 말하는 것은 조금 이상해 보입니다. 즉, 사도가 이런 방식의 서술을 통해서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분의 메시지인 복음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고, 나아가서 ‘예수 그리스도는 복음이시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왜 사도 요한은 이렇게 복잡하게 서신을 시작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지금 그가 의식하고 있는 바, 성도들을 미혹하고 교회를 허무는 이단, 거짓 선지자들을 논박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복음의 메시지를 분리시킨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인간 예수와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를 분리시켰습니다.
이런 자들을 향해서 사도 요한은 처음부터 선전포고를 하면서, 예수와 그리스도는 나뉠 수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은 분리될 수 없음을 분명하게 전합니다. 실로, 우리가 믿는 복음은 단순히 지적으로 동의하는 이론이나 체계가 아닙니다.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와 분리될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인격적 관계를 전제하고 수반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곧 복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A.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
사도는 생명의 말씀이 태초부터 계셨다고 말합니다. 이 ‘태초’가 언제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이것은 요한복음에서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선재하심을 말하려는 사도의 의도가 분명합니다. 당시 교회의 거짓 선지자/교사들이 가르친 것과 달리, 예수 그리스도는 예수와 그리스도로 분리될 수 없으며 태초부터 계신 분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태초’가 가리키는 것은 요한복음의 서문에서처럼, 창조 이전, 곧 시간이 창조되기 전의 영원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도 요한은 첫째는 미혹하는 거짓 선지자들 대하여, 둘째는 성도들을 향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진리를 선포함으로써 이 서신을 시작합니다. 이 서문 안에서 사도는 서신을 쓰는 두 가지 목적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셈입니다.
B. 나타나신 생명
그런데 사도는 그 생명의 말씀을 들었고, 눈으로 보았고, 자세히 보았고 심지어 손으로 만졌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영원 전부터 계신 분에 대해서 이렇게 경험적인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일까요? 영원 전부터 계신 분, 태초부터 계신 분을 어떻게 역사 속의 인간인 사도 요한이 듣고 보고 만졌다는 것입니까?
사도는 이렇게 부연하여 설명합니다.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2a).”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이신 분, 그리고 태초부터 계신 분, 또 아버지와 함께 계시던 분께서 인간이 사는 시공간의 역사 속에 육체를 가진 인간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그분의 음성을 듣고 그분을 눈으로 보고 또 자세히 보았으며 손으로 만지기까지 할 수 있었습니다.
만졌다는 것은 가장 강도 높은 표현이기는 하지만 사도가 여기서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보았다’는 단어입니다. 1절에서 두 번, 2절에서 한 번, 그리고 3절에서도 한 번 사용했습니다. 물론 1절에서 ‘자세히 보고’는 다른 단어이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사도가 보았다는 말을 강조하고 것은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이 증인의 요건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지금 태초부터 아버지와 함께 계셨다가 인간의 역사 속에 육체를 입은 완전한 인간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 눈으로 직접 목격한 증인으로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증언하고 전하노라.”
드디어 우리는 사도가 지금까지 설명하는 그분, 생명의 말씀이며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자기가 하고자 한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2절 끝에 ‘증언하여......전하노니’라는 말입니다. 그는 이 서신을 통하여 이분,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전한다고 말합니다. ‘증언한다’는 말은 사도행전 1:8에서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신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증인의 요건은 눈으로 보았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은 직접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한의 세례부터 승천하시기까지 그분을 보고 동행하고 함께 다니던 사람, 즉 사도로서 그리스도를 증언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뿐 아니라, 그는 ‘전한다’는 말을 2절과 3절에서 두 번 사용하는데, 이 헬라어 단어는 증언한다는 것과는 좀 다른 뉘앙스를 가집니다.
증언은 개인적 체험과 목격에 기초하여 이루어지지만, ‘전한다’는 것은 위임을 받아야 할 수 있는 행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려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위임을 받아야 하는데, 사도는 ‘전한다’는 말로써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위임 받은 사도의 권위로서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전한다’는 말은 사도의 권위를 가지고 말하노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가 이제 쓰는 모든 말은 권위 있는 말인 것입니다.
4. 사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전하는 목적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전할 때 사도가 염두에 둔 목적이 있습니다. 3절과 4절에서 그것을 밝히는데 두 가지로 설명됩니다. 직접적인 목적은 사귐입니다(3). 그리고 궁극적인 목적은 그 사귐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 충만한 기쁨입니다(4).
C. 사귐?교제(코이노니아)
사도는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고 했습니다(3).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방식은 아닙니다.
보통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이 복음을 혹은 그리스도를 너희에게 전하는 목적은 너희가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말입니다. 즉, 사도는 사귐이라는 말을 여기서 ‘구원’의 대치어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조금도 비약이 아닙니다. 구원이란,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자들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사건이고(롬 5:10~11; 고후 5:18~20),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자들은 하나님과 사귐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사귐의 관계 속에 들어간 자들은 단지 하나님과 자신과의 개인적인 사귐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사귐을 갖는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새로운 사귐의 관계 속으로 들어갑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이점에서 교회는 사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온전한 교회는 사귐이 없고 예배만 있는 교회가 아닙니다. 예배와 사귐은 교회의 본질입니다.
여기 ‘사귐’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코이노니아’입니다.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사귐 혹은 교제라고 번역되지만, 그저 시간을 함께 보내고 대화를 나누는 관계 이상, 말하자면 자신의 물질까지도 나눌 만큼, 강력한 의미를 함축하는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기도하시면서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하셨습니다(요 17:3). 우리가 누리는 구원, 우리가 누리는 영생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할 때, 이 앎은 경험적이고 서로가 함께 누리는 앎입니다.
즉, 교제와 사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영생은 단지 영원히 사는 삶이라기 보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누리는 사귐의 삶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21절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하나님과 누리는 이 하나됨, 이 사귐이 영생의 삶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이런 사귐을 잃어버렸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강조하는 구원은 성경이 말하는 구원과는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이 너무나 개인주의화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그런 구원을 알지 못합니다.
영생은 사귐이 있는 삶입니다. 그 사귐은 먼저는 하나님과 그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이고, 필연적으로 이 사귐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과의 사귐으로 인도합니다. 즉, 참된 복음의 메시지는 필연적으로 참된 사귐을 낳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신앙을 배워나갈 때,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되는 진리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는 혼자 신앙 생활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참되거나 성경적인 신앙 생활이 아닙니다. 신자들은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 아래 서로가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엡 4:3). 사귐은 신자에게는 선택이 아니라 삶의 본질이고 필연입니다.
또 하나 지적하려는 오늘날 교회의 잘못된 방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사귀는 사귐이 결여된 지극히 인간적이고 사교적인 사귐입니다. 교회는 동호회가 아닙니다. 그런데 인간적인 사귐의 요소를 끌어들여 그것을 교제라 명하고 골프나 등산, 여타 취미 활동들로 엮어진 모임들을 활성화하여 교회를 성장시키려는 모든 시도는 합당할 수 없습니다. 그런 시도들은 교회를 시장으로 만드는 행위일 뿐입니다.
사도는 “내가 너희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의 메시지를 증언하고 전하는 것은 바로 이 사귐이 있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저도 이 말씀 앞에 겸손히 고백하고 여러분 앞에서 말합니다.
제가 벧샬롬 교회의 목사로서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우리 모두가 함께 누리는 사귐이 있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 목적을 품고 말씀 사역과 목회를 감당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께 부탁드립니다. 벧샬롬 교회의 지체로서 신앙생활을 하며 목양과 가르침을 받으실 때, 이것을 염두에 두시고 그 일을 주시도록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고 이 사귐을 세워가는 일에 마음과 힘을 드리시라는 것입니다.
D. 충만한 기쁨
사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전하는 또 하나의 목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사귐을 통해서 그가 이루고자 하는 목적이기 때문에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입니다(4). 이 목적을 위해서 사도는 요한일서를 쓰노라고 말합니다. 사도가 여기서 충만하게 하려는 것은 ‘우리의 기쁨’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이것은 ‘너희(서신서의 독자들)를 포함한 우리 모두의 기쁨’이라고 읽는 것이 합당합니다.
교제의 기쁨은 어느 한 편의 기쁨일 수만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어떤 것일까요? 그리스도인이 은혜를 받은 기쁨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모든 기쁨은 본질적으로 사귐의 기쁨입니다. 일차로 성 삼위 하나님과의 사귐의 기쁨입니다. 그 기쁨은 동일한 그리스도인들과의 사귐의 기쁨과 나뉠 수 없습니다. 시편 기자는 자신이 하나님의 성소에 가서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는 환경 속에서,
이방인들에게 둘러싸여 그들의 조소를 대면하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시 42:1).” 그런데 이어서 그가 하는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찬송의 소리를 발하며 저희를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시 42:4).”
시인은 과거에 안식일을 함께 지키며 동행하고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고 사귐을 갖던 그 기쁨을 회상합니다. 그 기쁨을 회복하고 싶어합니다. 이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신자의 정서입니다. 우리는 교회가 마땅히 이런 사귐의 기쁨으로 충만해지기를 구해야겠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포기할 수 없고, 포기해서도 안 되는 교회의 이상이고 그리스도께서 주신 특권입니다. 이 기쁨이 충만하기를 노사도는 간절히 바랬고 그래서 요한일서라는 이 서신을 쓴 것입니다.
5. 교훈적 적용: 참된 복음의 메시지는 참된 사귐을 낳는다.
오늘 우리가 상고한 말씀, 요한일서의 서문은 이렇게 단순히 정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너희에게 선포하는 바, 생명의 말씀은 처음부터 계셨고 우리가 보았고 들었고 만졌던 분이며, 우리가 그분과 그분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목적은 교제와 기쁨이다.”
사도는 육체를 입고 오신 그리스도를 직접 경험했습니다. 사도는 그분과 그분의 메시지를 전하도록 위임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그리스도와 복음을 전하는 목적은 진정한 영적 사귐이 일어나고 그로 말미암은 기쁨을 충만하게 누리기 위함입니다. 모든 것의 열쇠는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사귐의 기쁨이 충만해지기를 바라는 사도의 간절한 바램은 저에게도 있습니다. 저도 이런 기쁨을 충만하게 누리고 싶습니다. 견딜 수 없도록 말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만이 누리는 그리스도인의 기쁨입니다. 여러분도 그렇습니까? 여러분도 이 땅에서 이 기쁨을 충만히 누리고 싶으십니까? 좋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도는 그 기쁨이 충만해지기 위해서 사귐이 회복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영적 사귐이 회복됩니까? 복음의 메시지를 통해서 회복됩니다. 그래서 사도는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의 메시지를 전한다고 말합니다. 참된 복음의 메시지는 참된 사귐을 낳습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의 메시지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은 은혜를 받고 그 은혜가 사귐을 낳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사도가 전했던 그 옛 복음을 계속 전할 것입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을 때, “오, 주님께서 이 복음의 말씀으로 우리 안에 참된 사귐, 성령의 코이노니아를 세워주시옵소서”라고 간절히 구하는 심령으로 들을 뿐 아니라, 그 일을 위해 수고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요한일서를 통해서 주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도전이고 말씀입니다. 우리는 모두 한 마음으로 주님께서 벧샬롬교회에 주시는 이 엄위하신 말씀 앞에 ‘아멘’이라고 응답하십시다.
당신은 예수님과 얼마나 친하십니까? /요일1:1-4/ 유기성 목사
2016-08-24 10:01:11
요한일서는 어떤 성경인지 말씀드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왜 이 성경을 강해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흔히 험한 세상, 악한 세상이라고 말하는데 바로 이런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은 어떤 존재인지, 무엇을 해야 하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하여 말씀하는 성경이 요한일서입니다.
요한일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려고 쓴 성경이지만,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을 영접한 성도가 세상에서 사는 법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살면서 어려운 일이 생기면 흔히 “기도합시다!” 하고 말합니다. 옳은 말입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해야 할 때인데 기도하지 않는 것이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기도만 해서는 안된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만약 문제를 기도만 해서 해결하는 것이라면 성경책이 이렇게 두꺼울 필요가 있을까요? 기도를 하되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기도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스탠리 죤스 선교사, 2차대전 후 독일에서 독일 교회의 지도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강연하였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강연을 하는 그 자리에 모인 독일 교회 지도자들이 주먹으로 책상을 쾅쾅 두드려댔습니다,
스탠리 죤스 선교사는 당황했답니다, 연설을 마치자 그들이 다가와 말했습니다.“당신은 오늘 독일인들이 어찌하여 파시즘에 기울이게 되었는지를 정확하게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독일 교회는 삶의 의미와 목적과 목표를 가져다줄 무언가를 찾고 찾았는데, 그토록 찾아 헤매던 것이 하나님의 나라였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우리는 기도하기 위하여 먼저 진리의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은 도대체 무엇이며, 우리는 왜 세상에 있으며,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하셨으며, 앞으로 이 세상은 어떻게 될지 알아야 기도도 바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 말씀기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의 서신 첫 부분에서 너무나 중요한 말씀을 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주 예수님과 사귐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믿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사귐을 가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지영이가 어릴 때 어느 날‘인기가수 공연이 있는데 가도 돼요?’하고 물었습니다. 안된다 하고 말해 주려다가“하나님께 의논드려 보아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가려무나.”했습니다. 여러분, 과연 저의 딸이 하나님으로부터 대답을 들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여기십니까?
한 번은 어떤 사람이 고아원을 경영하는 죠지뮬러 목사님에게 찾아와서“목사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하고 물었습니다. 목사님께서 대답하시기를“제게 묻지 마시고, 하나님께 직접 물어 보세요.”죠지뮬러는 오직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것만 의지하여 고아원을 운영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죠지뮬러 목사님을 어떻게 도우라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을까요?
우리가 물으면 하나님께서 대답을 해 주실까요? 주님과 이런 관계가 가능할까요? 아직 믿어지지 않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먼저 자신이 예수님을 직접 만났음을 말씀합니다.
요일 1:1 이 글은 생명의 말씀에 관한 것입니다. 이 생명의 말씀은 태초부터 계신 것이요, 우리가 들은 것이요, 우리가 눈으로 본 것이요, 우리가 지켜본 것이요, 우리가 손으로 만져본 것입니다.
여기서 생명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데 그 예수님을 요한은 눈으로 보고 그 말씀을 직접 듣고 손으로 만지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요한 사도는 유난히 주님과 친밀한 제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 사도가 이 말을 하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자기처럼 예수 그리스도와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사귐을 가질 수 있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3절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여러분에게도 선포합니다. 우리는 여러분도 우리와 서로 사귐을 가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또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사귐입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 사귀어 봅시다 하는 말은 사도 요한이 누리는 엄청난 축복을 ‘흘려 보내주겠다. 함께 누리자’는 말입니다. 요한 사도는 “우리가 보고 들은 바”라는 표현을 현재 완료형을 쓰고 있습니다.
그 말은 사도 요한이 단순히 과거에 예수님을 보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도 계속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또 듣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사귐을 모든 믿는 자도 누리는 사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육신으로 주님을 보고 들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주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알고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고후 5:16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3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또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사귐입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이 여러분의 삶에서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누구를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일반적으로 주일이면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성경을 읽고 십자가 복음을 믿고 세례를 받고 신앙 파악을 할 때 종교란에 기독교라고 쓰고 전도하고 성경의 가르침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이것들이 중요하지만 결정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은 바로 하나님과 연합이요 사귐입니다.
요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영생은 죽고 난 다음 천국에 가서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지식이 아닙니다.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예수님 안에 거하고 예수님은 그 사람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진리를 부인하고, 본질적인 복음의 핵심 교리들 일부나 전체를 부인하면서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올바른 교리를 지키려는 정통 보수신앙을 가지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복음적이고
정통 보수신앙을 가졌다고 그가 그리스도인이라고 인정받는 것도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죄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사함받았다고 믿는 것조차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종교개혁 당시 표어였던 이신칭의 교리 전체를 의심의 여지없이 다 믿는다 할지라도 충분한 것이 아닙니다. 이런 교리를 지적인 의견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정통 보수신앙을 가졌어도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직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직분으로는 목사 장로요, 지식으로 신학박사이면서도 명예욕이나 이기적인 욕심을 해결받지 못한 이들이 많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기본인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와 사귐이 없기 때문입니다. 평생 믿음을 지키며 정통교리를 위해 싸우던 사람이 임종할 때 가서 자신이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에베소교회는 대표적인 정통 보수신앙을 가진 교회였습니다. 그들이 이단들과 치열히 싸운 것에 칭찬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버림받을 수 있다는 무서운 책망을 받았습니다.
계 2: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에베소교회는 정통 교리만 있었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님과의 사귐이 없었던 교회였습니다.
이런 교회 이런 그리스도인들을 지금도 흔히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정신 차려야 합니다. 우리의 가족관계나 교인관계도 예수님과의 사귐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3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또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사귐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는 어떤 사귐이든 주 예수님과 더불어 사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부 사이에 문제가 생기고 가족 사이에 문제가 생기고 교인들 사이에 문제가 생기면 주님과 사이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시시비비를 가리기 전에 주님과 한 주간이라도 기도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해결이 안될 문제가 없습니다. 이것이 가장 아름다운 사귐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기초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세상과 사람이 근본적으로 악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는 나아가 세상을 변화시키라, 변혁시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과 동떨어진 사람이 되라, 수도원에 들어가서 살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우리에게 더욱 필요한 것은 먼저 주님과 사귐을 갖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 때만 세상을 변화시킬 힘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계속하여 실제적인 사귐을 나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놀라운 약속을 하셨습니다.
요 14: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요 14: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WEC 선교회를 설립한 CT 스터드 선교사가 아프리카에 가서 선교관을 세우고 지낸지 얼마 안되어 집에 뱀이 들어온 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보호의 손길이 우리를 덮고 계시는구려. 오늘 아침 식사를 하자마자 아이들이 들어와 말하길‘침대에 뱀이 있어요!’하더군. 담요를 들추어 보니 가느다란 초록색 뱀이 있었소. 물리면 죽는다고 원주민이 일러주었던 바로 그 놈이더군. 간 밤에 그 놈과 함께 잔 거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사자는 아마 한숨도 못 잤을 거요.”
우리가 이처럼 주님과 사귐을 가지려면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를 쓰면서 예수님을 생명의 말씀이라고 한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요일 1:1 이 글은 생명의 말씀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가 주 예수님과 사귐을 가지려 할 때 명심할 것은 그것이 말씀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 안에서 주님과 교제하려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미혹을 받게 될 것입니다.
눅 24:32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웨슬리목사님, 1783년 5월 24일 올더스케잇 거리 한 집회소에서 로마서 서문 말씀을 들을 때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웨슬리 목사님과 만난 것입니다.
일평생, 2천 명의 고아를 먹여 살렸고, 150억 원을 사용했던 죠지뮬러. 그의 젊은 시절은 방탕하고 질이 나쁜 청년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한 가정 예배에 참석했다가 기도와 말씀 중에 형언할 수 없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자신이 방탕한 생활을 할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편안하고 놀라운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 예배 중에서 영으로 임재하신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지금도 주님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어느 신학생이 올린 글입니다.“어느 날... 교수님 중에 한 분께서‘"앞으로 목회하려면 성경 암송을 300개 이상 해라. 그러면 교인들에게 인정도 받고 어디 가던지 성경 암송을 줄줄이 하면 교인들이 그런 목사님을 진짜 목사라고 부러워하고 존경한다.’고 하셨다. 그런데 그 말씀을 들으면서 거부 반응이 생겼습니다.”
이 신학생이 왜 거부 반응이 생기는 걸까? 말씀은 그렇게 쓰라고 주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말씀을 주신 것은 보이지 않는 주님과 사귀고 동행할 수 있게 해주시려는 것입니다.말씀을 대하는 순간이 주님을 만나는 순간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중에 주님과 정말 사귐을 가질 수 있을까 믿어지지 않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저 자신의 경우를 보아서 여러분도 분명히 주님과 사귐을 가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
저는 고등학생 때, 고린도후서 13장 5절 말씀으로 설교를 듣고 도무지 믿어지지 않아서 상담을 하였습니다.
고후 13:5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전도사님과 상담을 해도 믿어지지 않아서 믿는 척 해야 했습니다. 오늘 성경을 신학생 때도 읽었고 전도사 때도 읽었지만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목사 안수를 받고 한 달 뒤 군목훈련을 받다가 주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모든 것이 달라지는 것 같았습니다. 부산에서 담임목회를 할 때, 눈이 뜨이고 안산에서 깊어지고 지금 선한목자교회에서 24 주님 바라보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설교를 준비하면서 너무나 감사하였습니다. 가슴이 떨렸습니다. 이 구절이 아멘으로 이해되고 믿어지고 누려지고 있다는 것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저와 같은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요한 사도는 먼저 우리에게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이 요한일서를 읽어가다 보면 우리의 기쁨이 넘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4절 우리가 이 글을 쓰는 것은 우리 서로의 기쁨이 차고 넘치게 하려는 것입니다.
기쁨은 주님과 사귐을 가지는 자가 누리는 가장 놀라운 축복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악하고 험해도 하나님은 성도들이 기쁨이 차고 넘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약속을 믿고 요한일서를 읽어 가면 좋겠습니다. 오직 주님과 친밀해지기만 갈망하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CT 스터드 선교사의 선교관에도 많은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들에게 스터드선교사는 말했습니다.“당신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기엔 돈이 없습니다.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에 대해 가르쳐 주며 그 분의 말씀을 들려주는 것 뿐입니다." 그들은 대답했습니다.“돈은 조금도 관심 없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하나님입니다."
디엘 무디는 이렇게 말했습니다.“영국 거리에서 걸어 다니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란 뜻입니다. 마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은 좀 나은 사람이고, 뒤에 시종을 하나 거느리고 있는 사람은 부자라는 뜻입니다. 만약에 사종을 두 사람 거느리고 있다면 유산을 많이 받은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 뜻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가난한 사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항상 시종 둘을 뒷자리에 태우고 다니기 때문입니다.”
시 23:6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여러분도 뒤를 한번 보십시오!우리는 정통 보수신앙으로 만족하면 안됩니다.
가장 중요한 질문은 “당신은 주 예수님과 친밀하십니까?"
삶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요일1:3-4/시71:18/ 존 파이퍼
2015-06-23 00:41:34
◑우리가 ‘Desiring God’ 순회집회 사역을 계속하는 이유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함이라.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 요일1:3~4
▲사도 요한은, 먼저 자기가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사도요한은, 당시 여러 도시들과 그 교회들을 방문하면서
‘나는 여러분들과 주 안에서 사귀면서, 먼저 내 기쁨이 충만하다.’ 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나는 나 자신을 기쁘게 하려고 여기에 방문했습니다.
나는 내가 기쁘고자 왔습니다.(혹은 편지를 써서 보냅니다)’ .. 이런 뜻입니다.
이렇게만 보면, 이기적인 표현으로 우리 귀에 들립니다만... 물론 잘못된 생각 입니다.
우리 각자 자신에게 질문해 봅시다.
‘나는 어떤 때 더 사랑받는다고 느끼는가요?’
누군가가 나를 도우려고 하면서,
나를 돕는 것을 기뻐서, 자원해서 나를 도울 때인가요?
아니면 누군가가 나를 도우는 것이
그렇게 해야 하는 의무가 있기 때문에, 억지로 나를 도울 때인가요?
(물론 자원해서, 기뻐서, 나를 도울 때입니다.)
▲예를 들어서 설명해 봅니다.
한 늙은 할머니 앨런이 병원에 입원해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상태가 악화되어서,
목회자인 제가 즉시 할머니의 병원 심방을 해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한참 우리 딸과 놀아주는 중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즐거운 시간을 중지하고,
긴급하게 병원으로 달려가야 하는 마음이.. 썩 유쾌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래서 저는, 병원으로 가는 길에,
주님이 제 마음을 바꿔주시도록 기도하면서, 거기로 갑니다.
양떼를 사랑하고 돌보는 목자의 마음을 달라며.. 속으로 기도합니다.
그런데 경험상, 보통 병원 엘리베이터를 탈 즈음이면,
주님께서 제 마음에 역사해 주십니다.
특히 병실 문을 열고, 환우를 볼 때는,
그 환우가 ‘영원의 문턱’을 한 발자국 막 남겨놓고 있는 순간을 볼 때는,
정말 사랑스런 목자의 마음이 생깁니다.
제가 다가가서 할머니의 손에 제 손을 대면,
할머니가 눈을 뜹니다. 할머니는 제가 누구인지 알아봅니다.
보통 이렇게 말하지요.
‘오, 목사님. 바쁘신데.. 안 오셔도 되는데요.’
만일 그때 제가 이렇게 말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예, 맞습니다. 저도 제가, 여기 오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사실 저는 오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가 여기 온 것은, 제가 당신이 다니던 교회의 목회자라서,
어쩔 수 없이 온 것입니다.’
여러분 다 웃고 계시네요.
예, 저는 그렇게 말하지 않고, 대신 이렇게 말합니다.
‘엘런 권사님, 제가 꼭 안 와도 당신에게 괜찮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병실에 들어와서, 당신을 보았을 때,
제가 기도로, 권사님을 축복해 드리고자 하는 마음에 소원이 샘솟았습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 제가 있고 싶은 곳은, 바로 여기 당신 곁이에요.’ 자발적입니다.
이 말↑이 과연 이기적일까요?
지금 사도요한의 심정을, 예로 들어 설명해 보았습니다.
사도요한이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 요일1:4
라고 말한 것은, 이기적인 표현이 아니란 뜻입니다.
▲사도요한은 지금 흩어진 교회들을 방문하면서, 혹은 흩어진 교회들에 편지를 써서
그들을 축복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격려하고 있습니다.
위의 예에서, 제가 늙은 할머니를 심방했을 때의 느낌처럼,
그들을 심방하는 사도 요한의 마음속에는,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그들을 심방해서, 그들을 기도로 축복하고, 그들의 믿음을 격려하는 것은,
참으로 깊은 은혜와 축복이.. 심방을 받는 환우에게 뿐만 아니라
심방을 하는 자신에게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1년에 2차례, 미국 순회 컨퍼런스를 개최하는 이유입니다.
(미국은 넓어서, 전국이 한 자리에 모이기 힘듭니다. 그래서 순회 집회가 활발합니다.)
저희들은, 이 순회 집회를 통해서,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게 하고,
이것을 통해, 우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고 합니다. 요일1:3~4
(물론 여러분도 기쁘실 것입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받은 사명과,
또한 저희 교회의 사명 선언문,
또한 <하나님을 갈망함 desiring God ministries> *순회 컨퍼런스 개최 선교단체
의 사명은 똑같습니다.
제가 한 목회지에 있은 지 28년이 되었고,
어떤 사역을 12~15년 계속 하다보면,
목회자의 사명과 교인들의 사명이 하나로 합쳐집니다.
그래서 저희 베들레헴 교회의 모든 교인들은
이 사명선언문을 암송할 수 있습니다.
“나는 이 열정을 전파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만물 중에 하나님이 지존해 지셔서,
모든 민족이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골1:15~17참조
그 사명을 계속 감당하기 위해,
우리는 지금 이렇게 를 개최하는 것입니다.
저는, 저의 이 열정을, 여러분과도 나누기 원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믿음과 은혜와 섬김을 통해서’
하나님이 높아지시고, 모든 민족이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처음에는 비록 냉랭한 마음으로 이 집회에 오셨더라도,
돌아갈 때는, 마음에 열정이 다시 불타오르기를.. 기대합니다.
바울이.. 디모데가 받은 은사를 다시 불 지피기 원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딤후1:6
여러분의 마음속에 작은 불씨라도 있으면,
저는 그것을 계속 불씨를 살려서, 큰 열정의 불을 일으키고 싶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순회 컨퍼런스를 개최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제 사명은, “다음 세대”에 관심 있습니다.
그저께쯤 제가 성경을 읽다가, 시편 71편을 읽을 차례가 되었습니다.
저는 성경 일독을 하다가, 시편 71편을 읽을 때,
항상 18절을 다시 암송합니다. 그래서 잊어버리지 않도록 합니다.
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발이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가 주의 힘을 후대에 전하고, 주의 능력을 장래의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까지
나를 버리지 마소서. 시71:18
저는 “다음 세대”에게,
주의 말씀과 능력을 전하게 해 달라고, 다윗처럼 늘 기도합니다.
‘주님, 제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다음 세대에게,
그리스도를 높이고, 그의 위엄을 알리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호흡을 허락하시는 한.. 말입니다.’
◑설교 주제 ‘삶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먼저 제 어릴 적 경험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천국과 지옥’에 관해 조기교육을 철저히 받으며 자랐습니다.
제 John Piper 아버지는 순회선교자이셨고, 2007년에 소천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천국과 지옥이 생생한’ 가정에서 자라났습니다.
저는, 가정에서, 아버지의 말씀을 통해서,
어릴 적부터 늘 ‘천국과 지옥’에 대해, 생각하며 성장했습니다.
아버지는 늘 어린 제게,
사람은 천국에 가거나, 아니면 지옥에서 영원을 허비하게 된다고 말씀 하셨어요.
저는 인류가 그렇게 둘로 분류된다는.. 무서운 사실을 생각하며 자랐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저는 그 사실의 무게감을
생생히 느끼고 있습니다. 조기교육이 중요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도, 사람은 두 부류로 나누어집니다.
천국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과, 지옥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영원히 천국에서 행복한 삶을 누릴 사람과,
영원히 지옥에서, 자기 영원의 삶을 허비할 사람.. 말입니다.
▲아버지가 집에 돌아오시면, 월요일에 제게, 복음의 승리에 대해 얘기하셨습니다.
그 중에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는 간증이 있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그 지역에 아직도 믿지 않는 한 노인을 두고서,
성도들이 합심해서 오래 동안 기도했습니다.
무려 25년 동안 이나, 그의 구원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그 노인에게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은, 그가 정말 죽기 전에 예수를 믿을지.. 의문이 생기기까지 했습니다.
구원 받지 못하고,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던 중, 아버지가 그 교회에서 집회를 여셨고,
교인들은, 그 노인을 초청해서, 그가 이번 기회에 꼭 구원 받기를 기도했습니다.
부흥회 마지막 날에, 그 노인이, 강대상 앞으로, 초청에 응해 나왔습니다.
교인들은 다 크게 놀랐고, 모두 감격했습니다.
그 노인은, 울기 시작했습니다.
예배 후에, 아버지는 그 노인의 곁에 가서 앉았습니다.
아버지는, 개인적으로, 그 분께 복음을 더 자세히 전했고,
그 노인은,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했습니다.
그 노인은 계속 울면서, 이런 말을 계속 반복해서 했다고 합니다.
“나는 인생을 낭비했어.. 나는 인생을 낭비했어..”
아버지는 그 노인의 이야기를, 제게 여러 번 들려주셨습니다.
어린 제게, 그런 이야기들이, 마음 속 깊이 새겨졌습니다.
그리고 저 존 파이퍼는 굳게 결심했습니다.
‘나는 절대 내 인생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여러분의 인생을 지금 낭비하지 마십시오.
어릴 적 그 생각은, 제게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제 인생이 가치 있게 보내기를 원합니다.
지금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제 인생을 낭비하지 않게 해 주세요.’
▲우연히, 제가 고등학생 때 쓴 시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1964년에 제가 다닌 웨이트 햄프턴 Greenville South Carolina 고등학교의
문학잡지에 게시된 詩였습니다. 저도 지금까지 잊고 있던 터였죠.
훌륭한 시라서, 여러분께 소개해 드리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저를 깊이 감동시킨 주제를, 그 시가 담고 있어서, 소개해 드립니다.
당시 17살이던 제가, 이런 시를 다 썼습니다...
‘잃어버린 세월’
오랜 밤 지새워, 삶의 의미를 추구했네.
(삶의 의미를) 헛되이 찾으며, 나의 젊음을 보냈네.
이제 인생의 종착역에 이르러, 다시 찾아야 하네
왜 어린 제가, 이런 시를 썼을까요?
왜 제가 그런 생각을 다 했을까요?
우리 인생의 추구가 헛되게 끝난다면,
노인이 되어서.. 삶의 의미를.. 다시 찾게 되어 있다...는 메시지였습니다.
그러므로 아예 젊어서부터, 젊음과 인생을 낭비하지 말자는 뜻이었습니다.
▲저는 지금 62세입니다.
저는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인생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지금 여러분이 낭비하면.. 죽기 전에 다시 찾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는, 내가 인생을 허비했어! 하고
가슴을 치며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안 될 것입니다.
◑노인이 되어도.. 인생을 낭비하기 쉽습니다.
▲노인이 되면, 자기 생애가 얼마 남지 않아서, 인생을 소중하게 여길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노인이 되어도.. 영적으로 깨어있지 않으면, 인생을 낭비하기 십상입니다.
여러분, 노인이 되면, 왜 인생을 낭비하기 쉬운가 하면,
나이가 들수록, 사람들은 더 쉽게 피곤해지고,
자기도 모르게 안락한 소파에 앉아서 쉬고 싶은 생각이 종종 듭니다.
또한 실제로 그렇게 소파에 앉아 있는 시간이 점점 길어집니다.
노인이 되면,
이제 자기가 노인이니까,
소파에 앉아서 오래도록 편히 쉬어도 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노인 여러분, 인생을 낭비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휴식하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저는 그게 무섭습니다. 제가 62세거든요.
노인이 되면, 모두가 자기를 정당화시킵니다.
‘나는 이제 쉴만한 나이가 되었어! 내가 쉰다고 해서, 누가 뭐랄 사람은 없어..
내가 그동안 일생을 일했으므로, 이제는 쉬어도 돼!’
▲그래서 노인들은, 호숫가나 바닷가에 가서, 편안한 의자를 펴놓고, 거기에 앉아서 시간을 보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을 좋아합니다만..
물론 저도 그렇게 ‘쉬면서’ 살기를 좋아합니다만..
저희 집 서재에는, 아주 오래된 액자에 이런 글귀가 벽에 붙어 있습니다.
‘단 한 번의 인생이 곧 지나갈 것이고, 그리스도를 위해 했던 일만 남을 것이다.’
그 액자는, 어릴 적에 저희 집 부엌에 붙여져 있던 것이었습니다.
제가 아직도 그 액자를 고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 글귀가 여전히 저를 독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제 삶을 낭비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고,
제 삶을 의미 있게 하려는 열정이 있습니다.
▲우리가 삶을 낭비해서 안 되는 이유는,
하나님의 주권으로, 당신에게 주어진, 당신의 삶과 존재의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제 마음대로 스스로 살 수 없는 것입니다.
당신의 삶은, 당신이 창조하지 않은,
즉 하나님이 창조하신 어떤 특별한 이유와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 더 읽으실 분 .............................
▲실존주의 철학의 영향을 받은 현대 기독교
저는 1964~68년에 휘튼 대학을 다녔는데, 그 때는 미국에 사상적으로 격변기였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히피 문화’가 유행하던 시기였는데,
미니스커트, 히피 밴드, 맨발로 다니기, 인종차별주의에 대한 반대, 반전운동 등이 유행했습니다.
또한 ‘실존주의’가 그 당시에 범람했습니다.
이 실존주의란.. 한 마디로 말하면,
신앙과 진리와 하나님의 절대 가치가 설령 있다 하더라도
(그걸 없다고 부인하는 ‘무신론적 실존주의’도 있습니다.)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 실존에 무슨 이득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와 상관이 있으면, 즉 나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면.. 내가 받아들이고,
그것이 나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면.. 비록 그게 절대 가치라 하더라도,
‘나하고는 상관없고, 내게는 별 볼일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가치관이 무서운 것은,
마치 ‘천동설 신자’처럼 ↔지동설
만물과 우주의 중심에 ‘자기’를 두고서,
자기가 하나님이고, 자기가 절대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기독교 신앙이 참 진리라고 해도,
내게 유익이 되면.. 받아들이고
내게 유익이 안 되면.. 나는 관심이 없다는 태도입니다. '내'가 참으로 중요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아마 1960년대의 실존주의의 바탕으로부터
오늘날의 모든 기복주의, 번영신학, 성공주의가 발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성경과 하나님을 절대기준으로 두고서.. 자기를 그 기준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시대사조에 휩쓸려 은연 중에) 자기를 절대 기준으로 두고서..
성경과 하나님 가운데서, 자기에게 필요한 부분만 골라내서 관심 가지는 것입니다.
좋게 말하면, 그 전에 신학이 너무 탁상공론만 하면서,
현실의 삶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하니까,
그런 실존주의적 영향을 받게 되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이듯이,
아무리 기독교 진리가 참 진리라 하더라도,
내게 도움이 안 되는 것들은.. 나는 아무 관심 없다는 태도입니다.
이런 실존주의 철학이 ‘신앙의 적용’차원에서는 다소 도움을 주겠지만,
결국은 ‘인본주의/자기중심적/기복주의/번영신학’의 근거가 되는 셈입니다.
(이 단락, 편집자가 풀어서 씀)
▲기도
주여, 우리가 살다보면, 가끔 깜짝 놀랄만한 나쁜 소식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병원에서, 암에 걸렸다고 소식을 전해 줄 수도 있고,
직장에서, 정리 해고 되었다는 소식을 접할 수도 있습니다.
아버지, 우리가 무슨 일을 겪든지,
우리가 그 일을 통해, 우리 인생을 허비하지 않게 하소서.
그런 일들을 계기로,
우리 각자를 주님께로 더욱 가까이 이끌어 주시고,
예수님 안에서 참 생명을 더 깊이 발견하는 계기가 되게 해 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사귐의 공동체 /요일1:1-4/ 이동원목사
2014-11-29 14:08:59
인간을 가르쳐 흔히 사회적 동물이라고 말합니다.
17세기 영국 성공회의 목사요, 유명한 시인이었던 존 던(John Donne)의 표현을 빌리면 “우리는 외따른 각각의 섬이 아니라 대륙의 한부분”입니다.
그의 시를 읽어볼까요?
"어느 누구도 그 개체로서는 온전한 하나의 섬이 아닐지니/모든 인간은 대륙의 한조각이며/전체의 한 부분이어라/한줌의 흙이 바닷물에 씻겨 내려가도/유럽의 땅은 그만큼 작아지는 것---어느 누군가의 죽음도 그만큼 나를 축소시키나니/나란 존재는 결국 인류속에 포함되어 있기에/그러므로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는지 알려고 누군가를 보내지는 말자/결국 그 종은 당신을 위하여 울리는 것이기에“
성경은 인간이 상호적 관계속에서 살아가는 사회적 존재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 자신이 사회적인 존재인 까닭이라고 가르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요한은 우리의 생명되신 예수님을 소개하며 그분은 태초부터 “아버지와 함께 계시던 분”이라고 소개합니다.
1-2절의 말씀을 읽어보십시오. 여기서 “함께 계시다”는 단어는 정지된 상태에서의 함께 함이 아닌(not with), 서로를 향하여 움직이고 대화하고 교제하고 계시다(pros=toward)는 의미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창조 이전부터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으로 인격적으로 교제하며 존재하고 계셨으며, 따라서 그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도 인간을 하나님을 닮아 사회적인 교제속에 살아갈 존재로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을 때도 우리가 개인으로 살아가게 하시지 않고 교회라는 공동체에 속한 지체로 살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본질적으로 사귐의 공동체인 것입니다. 성경적인 표현을 빌리면 코이노니아 공동체인 것입니다.
수년전 세상을 떠나가신 성공회 대천덕(아쳐 토레이)신부님께서 우리가 교회 생활의 본질인 교제를 소홀히 하게 된 것은 유교적 영향으로 한문으로 교회의 ‘교’자를 가르칠 ‘敎’자로 쓴 때문이라고 지적하신 것이 생각납니다.
사실 교회의 ‘교’자는 교통한다고 할 때의 ‘交’자로 써야 한다고 주장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회(交會)로 모이는 가장 중요한 목적이 교제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교회로 모일 때마다 누구와 교제해야 하는 것입니까?
첫째는 물론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 모여야 하고, 둘째는 다른 성도들과 교제하기 위해 모이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말로 하면 수직적 교제와 수평적인 교제라 할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 두가지 차원의 교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둘중에 어느 하나가 빠지면 십자가를 이룰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교제는 이 두가지 차원을 함께 동시적으로 필요로 합니다. 자, 그러면 우리의 진정한 인간됨을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사귐은 무엇입니까?
1. 하나님과의 수직적 사귐입니다.
인간은 본래부터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지음받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그 하나님과의 사귐이 회복되기까지는 진정한 삶의 기쁨을 알지 못합니다. 본문 3-4절을 읽어보십시오.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4절)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라” 그런 의미에서 성 어거스틴은 “우리가 하나님에게 돌아가 쉴 때까지는 결코 평안함이 없었나이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유대인 철학자 말틴 부버는 그의 유명한 저서“나와 너”(Ich und Du)에서 “나와 너(당신)”사이에 아무리 최선의 인격적인 교감을 가져도 “영원자 당신”(Eternal Thou)과의 만남이 없이는 우리의 만남은 온전할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인생은 모두 신자이건 불신자이건 그 “영원자이신 당신”을 의식, 무의식 속에서 찾고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시인 도종환은 그의 시 “당신은 누구입니까”에서 이런 인간의 보편적인 갈망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창안에서 먼지 자욱한 세상을 바라보고 있습니다./우리는 바람부는 일터에서 흙먼지를 맞으며 있습니다./당신은 늘 당신의 일자리를 잃지 않고 있지만/우리는 쫒겨 다니다 길을 잃을 때가 많습니다./당신은 조용히 있을줄 알아 때묻지 않고 있지만/우리는 으레이 때를 묻히며 지냅니다./당신은 혼자 깊이 깊이 기도하며 밤을 새우기도 하지만/우리들은 사람들과 섞이어 소리치다 주기도문도 잊을 때가 많습니다./당신도 우리 위해 글을 쓰고 우리도 우리들 삶을 글로 씁니다./우리를 위해 글을 쓴다는 당신은 정녕 누구입니까?”
물론 그 당신은 성경적으로 말하면 영원자이신 하나님 그리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그분과의 사귐을 갖지 못하게 되었습니까?
사실 요한일서 이 서신의 중요한 관심의 하나가 이 문제를 규명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면 그것은 우리의 어두움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어두움은 빛과 공존할수 없습니다.
빛과 어두움은 함께 할수 없습니다. 그런데 요한일서 1:5에 의하면 하나님은 빛이시며 그에게는 어두움이 없으십니다. 1:7에의하면 만일 우리도 빛가운데 행하면 빛이신 하나님과의 사귐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어두움가운데 있고 죄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이 죄가 이 어두움이 우리와 빛이신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의 사귐을 단절시켜 놓은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이사야59:1-2) 바로 이런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단절의 비극을 극복하기 위하여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중보자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이 땅에 오셔야 했던 이유였습니다.
사도요한은 그분을 요한일서1;1에서 생명의 말씀이라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그는 그분을 들었고 보았고 주목했고 손으로 만졌다고 증언합니다. 요한복음1:14에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거하시매--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독생자였다고 말합니다.
요한3:16에서는 이 독생자를 주신 이유를 선포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우리의 구원과 우리의 영생을 위해서 그분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가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의 패션(고난)의 가장 중요한 이유였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멜 깁슨의 영화가 전달하려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가 아니었습니까?
그 영화의 첫 장면을 연 것이 이사야 53:5이 아니었습니까?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이제 다시 요한일서 1:7을 읽어보십시오.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이제 우리가 십자가의 사건을 받아드리고 우리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그분을 우리의 구주로 믿고 그분에게 우리의 죄를 자백하는 순간이 바로 이 빛이신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인 나의 사귐이 회복되는 순간인 것입니다.
다시 요한일서 1:9-10의 말씀을 읽어보십시오.“만일 우리가 죄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이제 우리는 죄의 심각성을 깨달은 사람으로 동시에 죄 사함의 거룩한 기쁨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인생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우리에게 십자가에서 피흘리신 예수의 보혈의 능력과 죄의 자백은 지금도 우리와 하나님사이의 거룩한 사귐을 유지하는 유일한 통로인 것입니다.
이제 이 보혈의 능력을 통해 거룩하신 하나님, 전능자이신 하나님과의 사귐을 맘껏 누리십시오. 그것이 바로 성도의 특권인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인간됨을 위하여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사귐외에 또 하나 다른 이웃들과의 수평적인 사귐의 특권을 주신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화해뿐 아니라 이웃들과의 수평적인 화해를 가능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우리 모든 성도들이 추구할 진지한 또 하나의 사귐이 있습니다.
2. 다른 성도와의 수평적 사귐입니다.
본문 3절을 읽어보십시오. “우리가 보고 들은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라” 너희와 우리의 사귐, 이 사귐의 근거는 우리가 꼭같은 예수 체험을 한 까닭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함께 예수를 만났고 함께 그를 보았고 함께 그를 만진 자들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서로 만나면 그분에 대해서 할 이야기가 너무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모여서 그분을 찬미하고 그분에 대한 간증을 나누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의 코이노니아, 성도의 사귐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교제를 통해 얻은 힘을 가지고 아직도 그분을 알지 못하는 다른 이웃들에게 그분의 소식을 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바를 (또 다른) 너희에게도 전하고자 함”인 것입니다. 이 사귐의 기쁨을 아시고 계신지요? 본문 4절에서 사도 요한은 우리가 주님과 함께 하고 또한 이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들과 함께 하는 기쁨으로 충만한 인생-이것이 우리의 인생이 되기를 축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1773년 영국 웨인스게이트(Wainsgate)라는 시골 소도시에서 저술활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어렵게 목양하던 존 포셑(John Fawcett)이라는 침례교 목사님이 런던 대도시 교회의 초청을 받아 44년이상 목회하던 시골 교회를 떠나시게 되었습니다.
이사 마차에 얼마간의 이사짐을 실은 다음 목사관을 막 떠나려고 하던 참에 마중 나온 성도들이 차마 더 좋은 여건의 목회지로 떠나는 목사님 내외를 붙잡지 못하고 눈물을 훔치는 모습을 지켜보던 사모님 메리 포셑(Mary Fawcett)이 갑자기 땅에 주저앉으면서 자기 남편에게
“여보, 난 여기 못 떠나요. 이 형제 자매들을 두고 난 떠날 수 없어요”하고 통곡을 시작하자 삽시간에 교회 마당은 눈물마당이 되었습니다. 잠시후 포셑 목사님은 자기 부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여보, 짐을 다시 들여놓읍시다. 아름다운 성도의 교제가 있는 곳, 그보다 더 좋은 교회가 어디 있겠오.”다시 목사관으로 들어온 목사님이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작시한 찬송이 525장 찬송입니다.
“주 믿는 형제들 사랑의 사귐은 천국의 교제같으니 참 좋은 친교라/하나님 보좌앞 한 기도 드리니 우리의 믿음 소망이 주안에 하나라/피차에 슬픔과 수고를 나누고 늘 동고 동락하는중 위로를 나누리--”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사회적 존재로 지으신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과 교제해야 하지만 또한 동료 인간과의 터치를 경험하며 살아갈 것을 기대하신 것입니다.
어느 성탄절에 우체국에 할머니 한분이 긴 줄에 서 있는 것을 보고 직원 한분이 물었다고 합니다. “할머니, 무슨 도움이 필요하세요?”
“네, 우표, 두장 살거에요” 그래서 “할머니, 우표는 저기 스탬프 기계에 돈 넣으시면 나오는데요”했더니 할머니가 이런 대답을 하셨다고 합니다.
“알아요. 그런데요. 저 기계는 저 카운터에 있는 아가씨처럼 저에게 ”잘 지내셨느냐고, 요새 허리 아프신 것 어떠시냐고. 손자들 잘 있느냐고 묻지를 않아요"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휴먼 터치가 성도의 교제가 필요한 이유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교회가 작은 소그룹공동체인 목장교회에서의 교제를 강조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무엇보다 주님은 이런 교제를 기뻐하시며 기대하십니다.
그는 “형제들이 서로 연합하여 동거함이 얼마나 선하고 아름다운고”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는 그를 믿는 두 세 사람이 함께 하는 곳에 당신이 거기에 있을 것을 약속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의 교제가운데 함께 하심으로 때로 인간상호의 교제가 위기를 만날때에도 그는 우리의 교제의 중보자가 되어 주십니다.
이번 4월호 가이드 포스트지에는 지난해 2월 미 우주 왕복선 컬럼비아호 폭발사고로 7명의 우주인이 목숨을 잃을 때 그리스도인 남편 릭을 떠나보낸 아내 에블린의 이야기가 커버 스토리로 실려 있었습니다.
“지난 1월 16일 이제 2주간이 지나면 남편이 우주에서 돌아와 나를 꼭 안아 주며 내 귀에 다정하게 속삭여 줄 것을 생각하며 편안한 마음으로 우주 왕복선의 이륙을 지켜 보았다. 그런데 2월1일 컬럼비아호는 지구 대기권에 진입하던 중 텍사스 상공에서 폭발했다.
내 삶이 하늘에서 송두리채 산산조각나는 순간이었다.
-엄마, 내 수학 숙제는 누가 도와주나요? 내가 결혼할 때 누가 날 데리고 입장하는 거지요?-울부짖는 딸아이를 난 아무 대답 못하고 끌어안고 있었다. 난 지금까지 남편이 없는 미래를 한번도 상상할수 없었다.
처음 경험하는 큰 충격과 절망감--그런데 그때 내 마음 깊은곳에서 나지막한 음성이 들려오고 있었다. 인생의 어려운 시절마다 한결같이 위안을 주던 음성이었다. 주님의 음성이었다. 넌 헤쳐 나갈수 있다고 그분은 말씀하고 있었다.
그렇다. 우리 결혼 생활의 중심에는 우리의 사랑보다 더 큰사랑이 함께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난 그 큰사랑을 언제나 의지해 오지 않았던가, 그 조건 없는 사랑을. 그리고 그 사랑은 내가 울부짖는 순간에도 여전히 나와 함께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분의 사랑이 내 남편과 나를 그리고 내 예쁜 두 아이를 묶어 주시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그분이 함께 하신다면 우리는 그의 사랑안에서 여전히 함께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분의 사랑이 끝이 없는 것이기에(That love is never-ending)”
그렇습니다. 함께 하시는 주님의 사랑, 그 사랑으로 인간관계의 모든 위기를 넘어서서 성도가 누리는 교제, 그 끝없는 사랑의 기쁨과 승리가 우리 모두의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설교 적용 질문>
1. 본문에서 사도요한은 예수님을 어떻게 소개하고 있습니까?
2. 우리의 사귐의 두가지 대상은 무엇이며 이 두가지의 조화는 왜 중요합니까?
3. 나는 위의 두가지 사귐 중 어떤 측면이 취약한지 왜 그런지를 나누어 보십시오.
4. 우리의 목장에서의 사귐이 좀더 기쁨으로 충만하기 위해 무엇을 노력해야 합니까?
요일1:1-4/ 행1:8/ 천국의 증인 / 조용기 목사
2014-09-05 13:28:19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천국의 증인"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는 증인이라고 하면 곧장 재판정에서 재판할 때 판사와 검사 앞에서 증인으로 소환되어서 증거를 말하는 것을 마음속에 상상합니다. 증인이라는 것은 반드시 자기가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고 체험한 바를 주금도 편벽 됨이 없이 그대로 말하는 것을 증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만일 증인이 자기가 직접 보고 듣고 체험한 사실이 아닌 뜬소문만 듣고 말한다면 그 증거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거짓 증언에 불과한 것입니다.
또는 증인이 자기의 추리가 상상력에 의해서 말한다면 그것도 또한 거짓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우리 모두다 예수님의 증인이라고 말했는데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확실하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수 있겠습니까?
첫째, 우리가 알아보고 싶은 것은 예수님은 하나님에 대한 참된 증인이었습니다.
우리 주님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을 확실하게 인간 속에서 증거 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를 용서하신 하나님을 우리에게 뼈에 사무치도록 확실하게 증거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냥 오셔서 '네 죄사함을 받았다' 그렇게 증거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실제로 오늘날 우리 주 예수를 통해서 우리에게 죄사함을 주길 원한다는 사실을 확실한 체험으로 증거 시켜 주신 것입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의 집에 들어가 계셨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입추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이 들것에 들고 왔으나 예수님 앞에 데려올 수 없어서 지붕에 올라가서 지붕을 헐고 줄에 달아서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내려놓았습니다. 그럴 때 모든 사람이 보는 가운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그럴 때 그 자리에서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이 앉아서 속으로 불평을 말했습니다. '어찌 이 사람이 하나님을 참람하는고. 하나님 이외에 감히 누가 죄를 사해 줄 수 있는가?' 그럴 때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나쁜 생각을 가지느냐?
내가 이 사람에게 죄 사하여 주는 권세가 있음을 너희에게 보여 주리라. 네 죄사함을 받았다는 말과 네가 일어나 침상을 들고 돌아가라는 말 중 어느 말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는 죄사함을 줄 권세를 가지고 있느니라"고 말씀하시고 이 환자를 바라보시고 "일어나 네 침상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시매 이 중풍병 환자가 즉시로 일어나서 그 침상을 어깨에 걸머지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죄사함을 줄 권세가 있다는 사실을 눈앞에 여실히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한 하나님께서 죄사함을 주기 원하신다는 확실한 증거로써 당신이 우리 인류의 모든 죄와 불의, 추악과 절망, 저주와 죽음을 한 몸에 걸머지시고 몸을 찢고 피를 쏟으시므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죄 사해주시기 원한 간절한 뜻을 나타내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러므로 오늘날에 와서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못났음에도 불구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죄 지은 그대로 못난 그대로라도 회개하고 예수를 구주로 믿고 아버지께로 나오면 아버지께서는 누구를 불구하고 죄사함을 주시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확실하게 증거 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귀와 귀신을 미워하시는 하나님을 증거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나가서 어느 곳에 가나 마귀나 귀신에게 눌린 자를 놓아주고 해방시키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마귀를 미워하시고 귀신을 미워하시고 절대로 마귀와 귀신이 사람을 억압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는 것을 실제적으로 증명하여 주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병을 미워하는 하나님이신 것을 예수님은 실제로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 삼분지 이는 병 고치는데 소모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가는 곳마다 병을 고치므로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병을 미워하시고 사람들이 병들어 있기를 원치 않는다는 사실을 진실로 증명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망을 미워하는 하나님이란 것을 증거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 이름을 통해서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이 죽어서 상여에 메어 가는 것을 관 뚜껑을 열어서 살려 일으키셨습니다.
회당장의 딸이 죽은 것을 예수께서 가셔서 일으키셨습니다. 나사로가 죽어서 무덤에 들어가 사흘이 되어 썩은 냄새가 나는데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을 나사로를 살려 주심으로 하나님께서는 사망을 미워하시고 생명을 기뻐하신다는 것을 증거 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인자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되 더 풍성히 얻게 하려 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한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란 것을 예수님은 가는 곳마다 증거 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물론 위선자를 미워하십니다. 물론 하나님이 원치 않는 일을 행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반역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지만 회개하여 순종하고 믿음으로 나온 사람들을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사람들을 돌보아 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예수님을 그 생애를 통해서 우리에게 풍성하게 증거 하여 주셨습니다. 이러므로 예수님의 생애를 통해서 볼 때 하나님은 그 누가 뭐라고 말해도 좋으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 생활 가운데 가장 위대한 혁명이 언제 일어나느냐면 예수를 통해서 나타난 우리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보고 죄사함을 주시는 하나님, 귀신을 쫓아 내 주시는 하나님, 병을 고치시는 하나님 그리고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을 먹이고 돌보아 주시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은 정말 좋으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기를 원하신다 이러므로 내 하나님께 내 영도 마음도 몸도 생활도 전폭적으로 맡기고 절대적인 순종과 믿음과 신앙의 실천으로 나가겠다는 결단을 내를 때 여러분의 인생에 혁명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냥 종교적인 신념으로 의식으로 교회에 왔다갔다 교회 뜰만 밟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야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과 땅과 세계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내게 어떠하신 분이신 가를 확실히 알아야만 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나의 생애 속에서, 어두움 대신에 빛을, 무질서 대신에 질서를, 추함 대신에 아름다움을, 가난 대신에 부요를, 무지 대신에 지혜와 지식을 그리고 여러분과 나에게 영생을 다스리는 권한을 주시길 원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여러분은 강하고 담대하게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마음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적극적이고 긍정적이며 창조적인 삶의 태도를 가질 수 있습니다. 불안, 초조, 절망을 다 제쳐버리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마음 느긋하게 나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종교 이상인 것입니다. 이식 이상인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여러분과 나의 생명이요 삶 전체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바로 이와 같이 살아 계셔서 우리를 돌보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좋으신 하나님을 증명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고 예수님의 일생을 통해서 살아 계시고 우리를 돌보시는 좋은 하나님을 확실하게 주님께서 증거 해 주셨으므로 예수님의 증거에 대해서 우리는 조금도 의심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 하나님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만지고 체험하도록 만들어 주시므로 오늘날 하나님은 종이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이란 것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이제 오늘날 여러분과 내가 증거 해야 될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사실을 증거 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예수님이 정말 부활하셔서 살아 계시며 절망 우리의 구주가 되신 것을 알기 원합니다. 이 세상에는 종교가 많습니다.
불교도 있고 마호메트교도 있고 유교도 있고 도교도 있고 또 이 외에 여러 민족이 가지고 있는 종교들이 있습니다. 그 종교들마다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를 통해서 구원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증거 하는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예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으며 천하 인간에게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이 없다는 사실을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예수께서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증명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로만 증거해서는 아무도 그 말을 증명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증거 하는 그 말이 실제 생활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증거 돼야만 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여러분과 나는 정말 죄사함과 중생을 체험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자기가 만져보고 자기가 체험해야 증인이 되는 것이지 남의 말을 듣고는 증인이 되지 않습니다. 상상으로서 증인이 되지 않습니다. 내가 체험한 바를 말할 때 증인이 됩니다. 여러분이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한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는,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실제로 예수를 믿어서 여러분의 생애 속에 부활의 변화가 다가와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체험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여러분께서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 앞에 와서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구주로 모심으로 말미암아 예수께서 죄사함을 주시고 내 마음속에 한없는 평화와 기쁨을 주시고 세상 중심으로 따라가던 내 삶이 완전히 하나님 중심으로 돌아서고 탐욕에 묶인 내가 해방되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그리고 세속적인 삶을 살던 내가 하늘나라의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이런 변화된 내 생애의 체험을 가져야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오늘 예수 믿으면 당신을 주님께서 용서해 주시고 나처럼 이렇게 변화시켜 줄 수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여러분 예수 믿고 중생 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변화를 받아야 여러분이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또한 오늘날 예수께서 살아 계셔서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 주신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증거 할 수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오순절 날에 120문도가 다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 앉아 있다가 갑자기 하늘로서 바람 같은 소리가 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각 사람 머리 위에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상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러므로 성령이 그들에게 오셨다는 사실을 추어도 의심하지 않고 증거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성령을 체험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시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좇아 다름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그 어느 누구도 성령이 같이 계신 것을 부인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은 성령 충만의 체험을 가졌습니까?
다른 사람이 "아마 당신은 성령 받았을 것이다." 이렇게 말한다면 이것은 증인 자는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께서 실제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고 체험해 봐야 여러분은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러므로 오늘날도 여러분께서 기도해서 성령 충만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자말자 여러분은 성경에 기록한 말씀대로 나도 성령을 받았으므로 성령이 오늘날도 우리 가운데 역사 한다는 사실을 증거할 수 있는 증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바울 선생은 에베소에 가서 12명의 믿는 신자들에게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물을 때 그들은 말하기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알지 못하느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령을 체험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예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안수하매 그들이 성령도 받고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모두 12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그들은 에베소에서 열렬한 그리스도의 증인들이 된 것입니다.
체험해야 증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귀신을 쫓아내 보았습니까? 여러분 자신에게 붙어서 여러분에게 여러 가지 더러운 생각, 고통의 생각을 가져오고 거짓을 말하게 하며 불안, 초조, 절망하게 하고 괴로움을 가져오는 귀신을 예수 이름으로 쫓아내고 자유를 얻은 체험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의 이웃 사람들이 귀신에게 눌려서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예수 이름으로 기도해 주어서 귀신을 압박에서 놓아주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체험자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담대하게 귀신에서 놓여남을 받고 예수 이름으로 자유 함을 얻으라는 증언을 할 수 있고 오늘날도 예수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에 그 이름으로 귀신이 내어 쫓긴다는 사실을 증거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날도 살아 계셔서 우리의 병을 고치시는 예수를 증거 할 수 있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분 자신이 병이 낫거나 그렇지 않으면 병든 자를 위해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해서 낫게 하는 것을 체험해 보아야 여러분께서 강하고 담대하게 증인이 될 수 잇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 계셔서 우리의 병을 고친다고 말할 때 사람들이 증거가 있느냐고 말하면 "내가 이러한 병에서 고침을 받았다."
"내가 이러한 병든 자를 예수 이름으로 안수하고 기도할 때 병이 떠나가고 그 사람이 고침을 얻는 것을 보았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 계신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여러분이 증인이 될 수 있고 이런 증인이 될 때 사람들이 여러분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께서 저주에서 해방되고 가난에서 해방된 체험을 갖고 있습니까? 성경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저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저의 가난하심으로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께서 실제로 가난이나 저주에서 해방을 받았습니까?
여러분께서 십일조를 심고 하나님 앞에 믿음의 씨앗을 심고 기도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생활 가운데 실제로 나타나서 여러분의 현실적인 생활을 돌보아 주고 문제를 해결하며 기적을 베푸는 일을 체험해 보았었습니까? 그럴 때 여러분은 전도할 때 강하고 담대하게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 계셔서 우리의 운명과 환경을 변화시키고 우리의 삶을 형통케 하여 주신다는 사실을 강하고 담대하게 증거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말세라고 말합니다. 주님의 강림이 가까워 온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께서 말세가 되고 주님이 오실 날이 가까워 온다는 것을 힘차게 증거하기 위해서는 여러분은 성경의 말세의 형상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일일이 다 연구해 보고 그 말세의 형상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 환경에서 역사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비교하고 이것이 사실로 일어날 때 사람들 앞에서 강하고 담대하게 체험적으로 주님께서 오실 날이 가까워왔다고 우리를 증거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막연하게 예수님이 재림하실 날이 가까워왔다고 말하면 그 말에 아무런 힘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네 한 말을 증거 해 보라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유대인이 독립이 이루어진 날로부터 말세를 계산하라는 주의 말씀과 함께 1948년 5월 15일날 유대인이 독립하고 난 다음 한 세대가 50년이니 한 세대가 지나기 전에 이 모든 예언이 이루리라 하셨으므로 이미 한 세대가 다 이루어져가니 확실히 말세가 왔다고 우리가 말할 수 있으면 얼마나 우리의 말에 힘이 있습니까?
마지막 때는 유럽의 옛 로마 판도에서 열뿔 시대가 오고 열 발가락 시대가 와서 열 개국이 통합되어 통합 유럽을 이루어서 정치, 경제, 군사로 하나가 되고 그것을 통합하여 다스리는 자가 나타나니 이것이 적그리스도가 될 것이라고 성경이 예언했는데 이미 유럽은 경제적으로 통합하고 1997년도에 정치적으로 완전히 통합을 이루어 작년에 국회에 모든 이사회가 통과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이것을 가지고 증명하면 우리의 증거는 힘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우리가 실제로 증거 할 수 있는가? 우리 자신에게 질문해 봐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맡고 맛보고 손으로 만져 보고 몸으로 체험해야 참된 증인이 됩니다. 남의 말만 듣고 전달하는 것은 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자기 머리 속에 상상한 것을 말하는 것은 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증인이라는 것은 가차없이 보탬도 뺌도 없이 자기가 체험한 바를 말할 때 증인이 됩니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너희는 그리스도의 증인"이라고 말했으므로 여러분과 내가 체험해 보지 않은 사실을 우리가 증거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어찌하여 여의도순복음교회 지역장, 구역장 뿐 아니라 평신도도 그렇게 힘있게 예수를 전도하고 수많은 사람을 주께로 인도하느냐고 말합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여의도순복음교회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는 체험을 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체험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귀신을 쫓아내는 체험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병이 낫고 병을 고치는 체험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고 거두는 법칙을 체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체험했기 때문에 내가 보고들은 바를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나아가서 말하매 이것이 힘이 있어 수많은 사람들을 설복시키고 죄에서 나와서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도록 도와 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는 참된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증인이 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다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참된 증인이었습니다.
사도행전 4장 33절에 보면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 하니 우리가 큰 은혜를 얻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냥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했다는 말만 하지 않고 큰 권능을 나타냈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가는 곳마다 기사와 이적과 권능이 나타나서 그 큰 권능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했다고 증거 하매 사람들이 큰 은혜를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요사이 여러분 우리가 은혜를 받았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살아 계신 그 권능을 체험할 때 큰 은혜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들도 여러분 큰 권능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 하도록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셨습니다. 성경은 믿는 자에게 주시는 약속으로 마가복음 16장 15절로 18절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게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자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이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 할 수 있는 큰 권능을 여러분에게 약속해 주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10장 18절로 19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이러므로 여러분과 나는 예수 믿자말자 권세를 갖고 태어납니다. 뱀과 전갈을 밟는 원수의 모든 세력을 제할 권세를 갖고 태어납니다. 우리가 이것을 깨달았었으면 이 권세를 행사할 수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임하시면 성령께서 우리에게 권능을 주셔서 예수 이름으로 전도하면 권능이 나타나기 때문에 너희는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살아 계심은 여러분께서 권능으로 증명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개인 생활에서 여러분의 이웃에게 체험적인 권능으로 증언을 할 때 여러분은 참된 증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여러분과 내가 기도할 때 성령 받게 하시므로 성령을 통해서 권능있는 신앙 생활을 해서 참 증인이 되도록 길을 닦아 놓으신 것입니다.
또한 요한복음 14장 12절로 14에 보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알 것이요 또한 이보다 더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성경은 계속해서 말씀하기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우리가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셔서 기도를 따라 시행해 주시므로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셔서 우리와 함께 계신 것을 증명해 주겠다고 성경은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 성경에는 예수께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며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시므로 강하고 담대하게 그리스도의 살아 계심을 의지하고 우리가 증인이 될 수 있도록 주님께서 도와주신 것입니다.
이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고 부활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입술로만 증거 할 뿐 아니라 우리의 행동으로 나타내 보여주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말씀을 증거하자 사람들이 믿지 않으니까 내 말을 믿지 않을지라도 내가 아버지의 능력으로 행하는 일을 보고 믿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0절로 11절에 보면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 일을 하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께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시는 그 놀라운 일들을 통해서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믿으라고 주님께서 강하게 증명을 내세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행하시는 일은 보통 사람으로는 행할 수 없는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 안에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 계신 것을 우리가 증명을 통해서 믿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과 행함을 통하여 하나님을 증거 하셨습니다.
오늘의 교회의 가장 큰 약점은 말씀만 자꾸 증거하고 말씀만 자꾸 증거하고 말씀만 자꾸 증거하고 말씀만 자꾸 증거하고 그 말씀의 확실성만 증거 하는 증거가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많은 종교 가운데 유독히 예수만 믿으라 유독히 예수님만 구주라고 자꾸 말로만 하고 실제로 예수께서 살아 계시며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며 사망을 철폐하고 생명을 가져온 구세주란 사실을 우리의 실생활 속에서 체험으로 증거하지 못하는 것이 오늘날 기독교회의 약점인 것입니다.
옛날 초대교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이 큰 권능과 능력으로 예수의 부활을 증거 하매 큰 은혜가 사람들에게 임하신 것입니다. 오늘날도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법정의 재판관 앞에서 아무리 자기 말이 옳다고 주장해도 그것을 증명해줄 증거가 없으면 그 증명은 실효가 없는 것입니다.
내 말이 옳습니다. 내 말이 옳습니다 해도 그 말을 누가 증명해 줄 증인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도 우리가 하나님의 법정 앞에서 온 세상의 사람들 앞에서 우리가 증거 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참된 구주라는 것을 아무리 말해도 그것을 증명할 증거가 없으면 우리는 거짓 증인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일어나서 하나님이 주신 무장으로 무장하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체험하므로 증인들이 되어서 참으로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만방에 전하는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기 도 -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성경에는 우리에게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증인은 남의 말듣고 증인하는 것은 전달꾼이지 증인은 아닙니다. 자기 머리 속에 상상해서 말하는 것은 허위를 말하는 것 거짓 증언자이지 참된 증언자는 아닙니다. 아버지 참된 증언자는 자기가 보고 듣고 맛보고 만져 보고 자기가 체험한 사실을 가차없이 보탬과 뺌이 없이 말할 때 증언자가 되는 것입니다.
내 아버지 하나님이시여,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오늘날 세상 앞에서 참으로 그리스도가 부활하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구주라는 것을 증거 하는 증언자가 되게 도와 주시옵소서. 말로써 이것을 전하고 행동으로 보여 주게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 이름으로 죄사함을 받은 체험을 나누게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게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 이름으로 병을 고치게 도와 주시옵소서. 심고 거두는 법칙을 기적으로 나타내게 도와 주시옵소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역사적으로 증명할 수 있게 도와 주시옵소서. 그래서 사람들이 변명할 수 없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구세주인 것을 알게 되고 회개하고 믿음으로 들어오게 만들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 받들어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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