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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요한일서 설교 모음

요한일서 1:5 - 10절 설교 모음

by Jessi J 2025. 3.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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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멀게 만들까? /요일1:5-10/ 조정의목사

2021-09-01 08:38:02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나머지 사도가 모두 순교한 뒤 마지막 사도로서 모든 교회에 요한일서 편지를 통해 그들에게 영생이 있음을 분명히 알게 했다(요일 5:13).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 그가 직접 보고, 자세히 살펴보고, 듣고, 만져본 영생의 주님과 그들이 사귐이 있다는 것을 편지 초반부터 분명하게 밝혔다(요일 1:1-4).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리는 영원한 사귐이다(17:3).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이름을 믿는 자는 그 순간부터 생명을 얻고 더 풍성한 사귐을 누리게 된다(10:10).

 

세상 모든 사귐엔 끝이 있다. 연인은 자주 헤어진다. 가장 친밀하고 꽉 달라붙어 있는 사귐이 부부의 사귐인데 그마저 죽음이 갈라놓는다. 그러면 주님과 우리의 사귐에도 끝이 있을까? 그럴 수 없다! 사도 바울은 우리를 감동시키는 로마서 8장 마지막 구 절에서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라고 분명히 선을 그었다(8:39).

 

하지만, 사귐 자체를 끊을 수 없더라도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사귐이 더 깊어질 수도 있고 소원해질 수도 있다. 관계가 끊어지지 않아도 관계가 멀어지거나 더 가까워질 수 있다는 말이다. 그 차이를 경험한 적이 없다면 어쩌면 하나님과 친밀한 사귐을 누려 본 적이 없어서 일 것이다. 아니면 멀어진 관계를 너무 오래 끌고 온 것이다. 과연 무엇이 우리가 영생을 온전히 맛보지 못 하게 하는가? 무엇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멀게 만드는가? 무엇이 하나님과 우리의 사귐을 위협하는가?

 

1.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멀게 만드는 죄(5)

 

오늘 본문에서 사도 요한이 주목하는 것은 바로 죄다. 죄는 5절에서 어둠으로 비유되었고, 6절에서는 어둠에 행하는 것, “진리를 행하지 않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7절부터 10절까지는 그동안 비유로 설명한 것의 실체인 를 명백히 드러냈다(범죄, 불의 포함 총 6).

 

오래전 선지자 이사야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다고 말했다(59:2). 그렇다.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는 주범이다. 구원받기 전에도 그랬고 구원받은 후에도 그렇다. 죄와 허물은 하나님과 우리의 영적 단절 곧 죽음을 가져왔고(2:1), 예수님으로 인해 생명을 얻은 자들에게도 관계의 문제를 가져온다.

 

5절에서 요한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소식을 전하면서 아주 명확하게 왜 죄가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멀게 만드는지 설명했다. 요한이 전하는 소식은 그가 만들어낸 이야기 혹은 누군가 연구해서 정리한 교리가 아니다. 그 출처는 분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이 직접 말씀하신 권위 있는 진리가 여기에 있다. 바로 우리가 사귐을 갖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빛이시고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다(5).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말의 내포하는 의미는 여러 가지가 될 수 있다. 모든 생명의 근원인 빛으로서 하나님께서 만물의 근원 이 되신다는 의미,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죄가 조금도 없으신 분이란 의미(92:15; 32:4). 따라오는 하나님 안에는 어둠이 전혀 없습니다”(우리말 성경)의 강력한 부정을 생각하면 후자가 강조되는 것이 분명하다. 죄가 조금도 없으신 하나님은 죄가 조금이라도 있는 누군가와 사귐을 가질 수 없다. 빛과 어둠은 공존 불가다.

 

죄 많은 우리도 악한 자와 사귐을 피한다. 계속 입만 열면 불평과 원망을 쏟아내거나 욕설이 끊이지 않는 친구를 가까이 두기 싫다. 어울리면 항상 방탕한 삶으로 이끄는 친구가 있다면 우리 안에 그런 욕망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최대한 멀리하고 싶을 것이다. 하물며 죄를 알지도 못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사귐을 가질 때 우리가 범하는 죄들이 얼마나 큰 문제가 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많은 그리스도인이 복음을 오해하고 하 아님과 우리 사이를 멀게 만드는 죄를 간과하며 심지어 부정하기까지 한다. 요한은 그런 그리스도인의 오해를 바로잡았다.

 

2. 오해1: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멀게 만들지 않는다(6-7)

 

사도 요한이 이 편지를 쓸 무렵 어떤 자칭 그리스도인은 몸으로 짓는 죄가 영생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믿었다. 영지주의의(빛의 종교) 극단적인 가르침 중 하나로 복음을 깨닫는 특별한 지식을 소유한 자는 영으로 구원을 받았으니 육으로 짓는 죄는 자기 영이 지은 것이 아니거나 하나님께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오늘날 극단적인 구원파 교리가 이와 유사하고, 십자가에서 단번에 모든 죄가 사하여진 사실을 믿는 이들 가운데 방종하여 그러므로 이제부터 범하는 모든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큰 방해가 되지 않는다고 은연중에 믿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요한은 타협할 수 없는 진리를 외친다. 6절에 만일 우리 가.” 자기를 포함하여 모든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하는 이들을 말한다. ‘만일 우리 중 누구라도 이렇게 주장한다면.’ 예외가 없다는 말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6).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생을 누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그가 어둠에 행한다면 다시 말해 죄를 범한다면(지속, 습관) 그는 첫째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거짓말한 것이고, 둘째, 그리스도의 진리에 따라 행하지 않은 것이다.

 

잠깐, 아무리 그리스도인이라도 죄를 전혀 짓지 않을 수는 없지 않은가? 우리는 지금 사망의 몸에서 탄식하고 있지 않은가? 중 세 신학자이자 목사인 어거스틴은 구원받은 자의 상태를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상태라고 말했다. 구원받기 전은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상태이다. 둘의 차이가 무엇인가? 그럴 수 있느냐 없느냐 가능성이 아니라 정상과 비정상의 차이다. 영생이 없을 땐 죄를 짓는 것이 정상이었지만 영생을 얻고 나서는 죄를 짓지 않는 게 정상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자가 죄를 짓 는 것은 이제 정상이 아니다. 죄는 그리스도와 사귐이 있는 자에게 비정상이다. 참 많은 그리스도인이 사망의 몸을 핑계로 죄를 당연하고 정상적인 것이라 여긴다. 완전히 틀렸다.

 

정상은 무엇인가? 7절을 보라.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정상적인 그리스도인, 하나님과 사귐을 갖는 자는 그분이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빛 가운데 행한다. 죄를 멀리하고 선을 열심히 행한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2:14). 바로 그런 정상적인 삶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사귐 그리고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사귐을 건강하게 만든다. 친밀하게 한다.

 

당신은 죄가 성도 사이를 얼마나 심각하게 파괴하고 관계를 끊어 놓는지 크고 작은 경험을 해보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죄는 하 아님과 그리스도인의 사이를 멀게 만든다. 냉랭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반드시 죄를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그 죄를 깨끗하게 해결해야 한다. 요한은 하나님과 함께 빛 가운데 행하며 사귀는 자가 죄를 범할 때, 즉 비정상적인 죄로 인해 하나님과 그 사이가 멀어졌을 때, 그 아들 예수의 피가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고 말했다(현재형).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가?

 

3. 오해2: 이미 죄를 다 용서받았으니 회개가 필요 없다(8-10)

 

어떤 사람이 스스로 죄가 없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까?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무신론자가 분명하다. 하지만 이론적으론 부인해도 실제로는 죄가 없는 것처럼 사는 그리스도인이 있다. 바로 회개하지 않는 자다. 죄가 정말 존재하고 자신이 그 죄를 범했으며 그 죄가 하나님에게 저지른 것이고 그분과 사귐을 멀게 만든다면 왜 항상 진지하게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는가?

 

요한은 8절에서 이렇게 말했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우리는 대놓고 죄가 없다고 말하지 않지만, 죄의 심각성을 처절하게 깨닫지는 못하는 것이 분명하다. 다윗은 사울의 옷자락을 벤 것으로 양심에 큰 걸림이 되어 하나님께 회개했지만 어떤 날엔 간, 음과 살인을 저지르고도 하나님이 책망하기 전까지는 전혀 양심에 가책을 느끼지 못했다. 자기 죄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마치 죄가 없는 것처럼 스스로 속이는 것이다. 하나님은 죄를 악하게 보실 뿐만 아니라 죄를 회개하지 않는 것 또한 악하게 보신다.

 

마태복음 18장에서 베드로가 형제가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베드로가 큰맘 먹고 제시한 일곱 번에 일흔 번을 곱하여 490번 용서하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이렇게 회개하는 이를 언제나 용서하신다. 그런데 우리는 하루에 490번 죄의 심각성을 알고 회개하는가?

 

부부 사이를 오랜 세월 서서히 멀어지게 만드는 죄는 다루지 않고 오래 묵혀둔 죄다. 돌이키지 않고 묻어두고 지나가고 넘어가 다 보면 부부의 사귐에 난 실금이 점점 커져 완전히 깊어진다. 하 아님과 우리 사이도 마찬가지다. 회개하지 않는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심각한 문제를 가져온다. 영생을 가졌으면서도 누리지 못하고, 하나님과 사귀면서 취약한 관계를 겨우 맺고 산다. 회개하지 않은 죄 때문이다.

 

요한은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9).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멀게 만드는 것이 죄라면 멀어진 그사이를 가깝게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닌 자백이다. 자백은 먼저 상한 심령이 필요하다. 마음에서부터 하나님께서 얼마나 죄를 미워하시는지 알고 하나님께서 죄를 보시는 관점에 동의하는 것이다. 또한 참 자백엔 핑계가 없다. 죄에 대한 자기 책임에 통감하는 것이다.

 

제가 잘못하긴 했지만, 모든 사람이 이 정도는’ ‘죄를 범하긴 했지만 하나님 기준 자체가 워낙 높아서’ ‘이 사람, 이 상황, 이 환경이 죄를 지을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서’ ‘어쩔 수 없는 죄인 인지라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이런 식의 자백이 아니라 내가 내 죄과를 압니다. 내 죄가 나를 떠나지 않습니다. 내가 주께, 오직 주께만 죄를 지었고 주 앞에서 악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니 주의 말씀이 옳으시고 주께서 순전하게 판단하실 것입니다. 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결한 마음을 창조하소서,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51:3-4). 이런 자백이 필요하다.

 

자백엔 하나님의 약속이 따라온다. 바로 용서와 회복이다. 용서와 회복의 약속은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성품에 근거한다.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신 분이시다. 미쁘시다는 것은 신실한 사랑을 의미하는데, 그분은 그리스도의 피로 맺은 언약에 근거하여 언제나 자백할 때마다 신실하게 당신의 죄를 사하실 것이다. 하나님께 진 죄의 빚을 탕감하신다는 말이다.

 

또한 하나님은 의로우시다. 하나님의 의는 복음의 핵심이다. 우리의 불의를 우리 힘으로 갚게 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혀 주심으로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신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셔서 아들에게서 찾으신 죗값을 우리에게 다시 찾지 않으신다. 대신 아들이 바친 의로운 삶을 우리에게 대신 입히신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자백으로 새롭게 되고 자백할 때마다 깨끗함과 거룩함을 입게 된다.

 

초등학교 5학년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누리며 살면서 죄를 자백하는 이 부분이 항상 어려웠다. 십자가에서 이미 다 용서해주신 죄를 왜 자백해야 하는가? 그리스도인의 죄가 영혼의 종착지를 바꾸지 않는다면 그 죄를 왜 심각하게 여겨야 할까? 풀리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죄 문제는 결국 그리스도와 나의 관계가 아니라 내 안위만 생각하며 고민했기 때문에 어려웠던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성경 일독 방식을 통해 아는 로버트 맥체인 목사는 죄를 지을 때마다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생각했다.

 

 

죄를 지을 때마다 그리스도께 나가 용서를 구해야 한다. 나는 몸을 씻을 때는 구석구석을 살펴 깨끗하게 씻는다. 그런데 영혼을 씻을 때 어떻게 주의를 덜 기울일 수 있겠는가? 내가 지은 죄 하나하나 때문에 예수님의 등에 난 채찍 자국을 기억해야 한다. 나의 죄로 인해 지옥에서 영원히 당할 고통과 똑같은 무한한 고통을 예수님의 영혼이 고스란히 감당하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브라이언 헤지스 <깨어 있음>, 273-4pp).

 

요한이 마지막으로 10절에 말한 바와 같이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죄를 범한다. 세상은 계속 죄를 죄가 아닌 것으로 정의하려 한다. 교만은 자존감으로 동성애와 낙태는 평등한 사랑과 행복추구권으로 간음은 사랑으로 바꾼다. 이런 큰 거짓말에 잘 속지 않더라도 우리는 여자를 보고 음욕을 갖는 것을 남자의 본능이라고 생각하고 가족에게 분노하는 것을 타 고난 성품이라고 얘기한다. 하지만 인정하자.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들지 말자. 이는 모두 죄다.

 

부정적인 측면에서 죄만 생각하지 말고 주님께서 요구하신 긍정적인 면을 무시하는 죄를 생각해보라.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주님을 사랑하는 것, 범사에 감사하는 것, 쉬지 말고 기도하고, 모든 것을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 우리는 얼마나 자주 그리고 많이 삶의 모든 영역에서 우리와 사귐을 갖는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일을 행하고 기뻐하시는 일을 거부하는가?

 

우리 삶에 죄가 얼마나 많은지 잘 모른다는 것은 죄에 둔감하고 죄를 죄로 여기지 않고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하나님 앞에 범죄 하지 않은 사람처럼 사는 것이다. 그런 교만한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거할 수 있을까? 그 말씀이 심겨 열매 맺을 수 있을까?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15:7. 10, 11).

 

충만한 영생의 기쁨, 그 맛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하나님과 멀 어진 채로 형식적 의무적인 관계를 겨우 유지하고 있다면, 당신 에게는 회개가 필요하다. 하나님 말씀이 당신 안에 있어 많은 열 매로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고 그분의 사랑을 가까이에서 늘 경험 하기 원한다면, 당신에게는 지속적인 회개가 필요하다.

 

매일 아무리 작고 사소해 보이는 죄라도 하나님과 당신 사이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을 깨닫고 그 죄를 자백하라.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생각과 마음을 품는 것, 범죄한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가장 보배로운 분으로 모시지 않은 것, 마땅히 돌려야 할 경배와 영광을 돌리지 않은 것을 회개하라. 우리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상태로 구원받았지만 비정상적인 죄를 짓게 될 것이다.

 

그것도 수없이 많이. 하지만 낙심하거나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말라. 오히려 자백을 통해 미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용서와 새롭게 하시는 사랑을 경험하는 기회로 삼아라. 그러면 하나님과 당신 사이는 죄보다 더 큰 은혜로 말미암아 친밀해질 것이다.

 

 

 

빛 가운데 사는 기쁨 /요일1:5-10/ 유기성 목사

2016-08-24 10:10:07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중요한 약속을 하나 하셨습니다. 제자들을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 약속은 성령이 임하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 약속은 제자들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도 동일하게 주신 약속입니다. 그런데 고아처럼 사는 그리스도인이 많습니다. 하나님이 아버지라고 믿지만,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 같지 않은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 사도는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와 실제적이고 구체적으로 사귀며 살 수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과 사랑을 주고 받는 기쁨을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1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말씀이시기에 말씀을 통하여 주님과 사귈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빛 가운데사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과 사귈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7절 그러나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과 같이, 우리가 빛 가운데 살아가면, 우리는 서로 사귐을 가지게 되고

 

그러면 빛 가운데 산다는 것은 어떤 삶을 말하는 것일까요? 쉽게 빛 가운데 사는 삶은 죄짓지 않고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빛 가운데 산다’ ‘어두운 가운데 산다는 말은 죄 짓고 안 짓고와 관련된 말이 아닙니다.

 

7절에서 우리가 빛 가운데 살아가면 ...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주십니다.” 하셨는데,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이 죄 짓지 않는 삶이라면 빛 가운데 행하면, 모든 죄에서 깨끗함을 받는다는 말은 불필요한 말이 되는 것입니다. 죄를 짓지 않았는데, 죄에서 깨끗함을 받을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둠 속에 사느냐, 빛 가운데 사느냐?’ 차이는 죄를 숨기고 사느냐, 죄를 고백하고 사느냐?’입니다.

 

8절에 보면 어두운데 사는 자는 자신은 죄가 없다하고 사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빛 가운데 행하는 자란 어떤 자인가? 9절에서 죄를 지었을 때마다, 하나님께 솔직히 고백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9절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셔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요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은 빛이라고 알려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햇빛을 쪼이려면 햇빛이 비취는 야외로 나와야 하듯이 빛이신 하나님과 사귀려면 누구나 빛 가운데 나와야 할 것입니다.

 

빛 가운데 나오면 자신을 다 드러내게 됩니다. 당연히 자신의 죄가 드러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친밀한 사람은 회개하고 고백하고 사는 것입니다.

 

만약 자신의 죄를 고백하지 않는 사람은 영적으로는 빛이 비취지 않는 어두운 곳에 숨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누가복음 1810-14절에서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를 통하여 보여주셨습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하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바리새인과 세리 중에 누가 더 의인입니까? 세상 기준으로 보면 분명히 바리새인이 더 의인입니다. 죄는 누가 많이 지었습니까? 분명히 세리가 죄를 많이 지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리가 바리새인 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바리새인은 자기가 지은 죄는 일절 말하지 않습니다. 죄 없는 척합니다. 이런 사람이 바리새인입니다. 그러나 세리는 자기는 죄인이라는 것 밖에 고백할 것이 없다고 느끼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빛 가운데 살고, 누가 어두움 가운데 사는 것입니까? 죄를 많이 지었느냐 적게 지었느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느냐 아니냐? 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말로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고백한다고 다 빛 가운데 사는 자는 아닙니다. 그것이 진정한 고백인지 아닌지가 문제입니다.

 

교리적으로 내가 죄인이다.” 하고 받아들인 것이지 진정한 고백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남을 정죄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남을 정죄하는 것이야말로 자기는 죄가 없다는 전형적인 태도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이야기에 보면, 아버지가 집을 나가 재산을 탕진한 채 거지가 되어 돌아온 둘째 아들을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엽니다. 그러나 아버지 말 잘 듣고 집을 지켰던 맏아들은 대단히 화를 냅니다.

 

맏아들의 말을 잘 들어 보십시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맏아들은 동생을 무섭게 정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자신은 죄가 없다는 전형적인 태도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진 자는 아버지와 진정한 사귐을 갖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두운 가운데 행하는 자입니까? 빛 가운데 행하는 자입니까? 이 말은 지난 주간 죄를 지었느냐? 안 지었느냐? 그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였으니 모든 삶을 다 공개하고 살았느냐, 감추고 숨기고 살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숨기고 감추고 누르고 살았습니다. 그것이 잘 사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오늘도 교회에 오면서 얼마나 거울을 많이 보셨습니까? 예수님을 믿고도 숨기고 감추고 누르고 삽니다. 그래서 진정 예수님을 믿는 자유함과 기쁨을 경험하고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항상 두려움 속에 삽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친밀한 삶을 살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자신이 이미 만천하에 공개된 사람임을 아십니까?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사는데 감추고 숨기고 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사람이 보느냐 아니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이제는 솔직히 자신을 드러내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두렵습니까? 아닙니다. 그것이 큰 기쁨입니다.

 

4절 우리가 이 글을 쓰는 것은 우리 서로의 기쁨이 차고 넘치게 하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가 사함을 다고 허물이 씻음을 받기 때문입니다.

 

9절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셔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주 예수님의 피로 우리는 이미 모든 죄에서 구원받았기에 빛이신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또 죄를 지은 것이 있다면 이제는 즉시 회개하면 다시 예수님의 피로 깨끗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빛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축복이고 기쁨입니다.

 

회개하면서도 늘 똑같은 죄를 반복하게 되는데, 여전히 회개해야 합니까?” 좌절감을 느끼고, 회개하는 것도 소용없다고 여길만 합니다. 그러나 묻겠습니다.

 

세수는 왜 매일하십니까? 어차피 또 더러워질 것 아닙니까?” 세수하고 샤워하는 다음 느낌이 빛 가운데 사는 자가 누리는 기쁨입니다.

 

죄 짓는 순간 순간 회개하지 않는 것은, 어차피 더러워진다고 세수 안하고, 1주일도, 한 달도 사는 자와 같습니다. 영적인 삶에 문제가 안 생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죄를 그때 그때마다 자백하는 자는, 결국은 성령께서 그 죄를 짓지 않게 만들어 주십니다. 회개의 열매가 맺힐 때까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죄를 자백하는 것 뿐입니다. 이것이 빛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진정으로 회개했다면 다시 그 죄를 짓지 않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다시 죄를 짓지 않게 되는 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능력으로 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다시 그 죄를 반복하지 않아야 회개했다고 인정한다면, 우리는 너무나 절망적입니다.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죄짓지 않게 해 주실 분은 하나님 뿐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회개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쉽고, 간단했습니다. 그것은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라는 것입니다.

 

고백한 것을 곧 회개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질문하는 분이 계십니다. 고백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십니까?

 

아담이 타락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담아, 아담아 네가 어디있느냐?” 하고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것을 다 아시면서 아담아, 아담아!” 하고 부르신 것은 자기 잘못을 고백하고 회개하기를 원하셨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그 때 아담이 하나님 아버지여 죄를 지었습니다. 아버지가 따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따먹고 너무나 두렵습니다.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했더라면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자기 잘못의 책임을 먼저 하나님께 돌리고 그 다음 자기 아내 하와에게 돌리며 자기 잘못을 전혀 시인하지 않았습니다. 하와도 뱀이 먹으라고 해서 먹었다고 변명했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이 회개를 못한 것이 죄의 속성이기도 합니다. 결국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추방하시고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에덴동산을 지키고 다시 들어오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하는 것이 어려운 것은 자아 본성에 거스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부부 싸움 후에, 교인들과 다툰 후에, 길거리에서 교통사고 후에 제 잘못입니다.” 고백하는 것이 쉬웠습니까?

 

일본은 수많은 증인과 증거가 있지만 제가 잘못했습니다.” 말을 못하지 않습니까? 우리나라는 어떻습니까? 죄를 고백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서 우리의 죄에 대하여 근심하십니다.

 

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그러므로 진정 구원받은 성도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것에 대한 마음의 찔림이 있습니다. 기도하지 못한 것, 말씀대로 살지 못한 것, 말씀을 보지 않고 사는 것, 전도하지 못한 것, 십일조하지 못한 것, 용서하지 못한 것, 사랑하지 못한 것, 성령의 근심입니다. 그 때 빛 가운데로 나올지 어두움에 숨을 자신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가 하나님과 친밀한 사람인지 아닌지가 드러납니다.

 

서울 어느 대학교수 부인이 목사님과 상담하면서저는 회개할 자유도 없습니다.”했습니다. 남편이 가짜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참 뒤, 가짜 학위가 드러났습니다. 비참할 정도로 무너졌습니다. 차라리 그 때 결단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사울 왕과 다윗 왕의 차이가 빛 가운데 나오는 차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택하셔서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시고 아말렉을 쳐서 멸절하실 것을 명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울 왕은 하나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고, 욕심 때문에 아각 왕을 사로잡고 기름지고 좋은 짐승들을 끌고 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진노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사무엘을 통하여 사울 왕을 꾸짖게 했습니다. 사울이 회개하도록 하기 위해서 이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 때 사울 왕은 회개하지 않고 변명하였습니다. 두 번이나 기회를 주었는데 두 번 다 변명하고 심지어는 백성의 탓으로 돌리고 나중에는 또 하나님 탓으로 돌리는 사울 왕을 하나님은 버리셨습니다.

 

다윗은 사울보다 더 무서운 죄를 지은 사람입니다. 부하의 아내와 간음하고 부하를 죽인 자입니다. 있을 수 없는 죄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무서운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 때, 다윗은 사울과 달리 그 자리에서 회개했습니다.

 

다윗은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공개적으로 자기의 잘못을 통회자복하는 시를 지어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고백했습니다. 시편 511-12, 17절이 다윗의 회개문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회개하지 않았다면 죽이셨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과의 사귐은 죄와 허물을 감추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빛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축복이고 기쁨입니다.

 

세계적인 중보기도 사역자들인 독일의 마리아 자매회가 독일 다름슈타트에 있습니다. 그 공동체에서는 매일 [빛 가운데 교제] 시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빛 가운데 교제]란 하루동안 지내면서 서로에게 본인이 미처 깨닫지 못한 그의 모습을 깨닫게 해 주는 시간입니다.

 

아름답고 복된 모습도, 추하고 악한 모습도 다 말해 줍니다. 서로에게 빛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합니까? 혹시 하루 사는 중에 자기도 모르게 어떤 잘못을 한 것이 있다면 하나님 앞에 회개하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게 된 이유가 있었습니다. 1944년 독일이 대대적인 폭격받는 중에, 다름슈타트에서 그들의 공동체를 건축을 했습니다. 밤마다 무서운 폭격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여서, 자신들 안에 죄가 있음을 느꼈습니다.

 

그들은 회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빛 가운데 걷는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모이면 서로 자백하고 또 자백했습니다. 오직 주님의 긍휼만 의지했습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놀라운 평안과 확신이 임했습니다. 공동체의 각 건물들의 건축이 진행되었습니다. 폭격 중에 가나안 공동체가 세워진 것입니다.

 

마리아 자매회 안에 충만한 기쁨을 발견했습니다.‘참 회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회개를 강조하니까, 늘 울기만 하고 침울하고 어두울 줄 알았는데 아닙니다. 빛 가운데 교제는 기쁨입니다. 빛 가운데 사는 자는 교만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정확히 알기 때문입니다.

 

한경직목사, 템플턴 상 수상 축하예배 때먼저 나는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나는 일제 시대에 신사참배를 했습니다. 이런 죄인을 하나님께서 사랑하고 축복해 주셔서 한국교회를 위해 일하도록 나에게 이 상을 주셨습니다.”

 

저희 교회에서는 목요일 새벽기도회를 남자 교인들의 특별한 기도 모임을 갖고 있습니다. 처음 이 모임을 가진 것은 [교회를 믿음의 실험실로 만들자]는 취지에서, 남자 성도들이 매주 한 번 만나서 한 주간 동안 믿음으로 살았던 서로의 간증과 기도제목을 나누기 위하여 시작하였습니다.

 

이름을 [믿음으로 사는 남자들]이라고 붙였습니다. 참여 조건은 이제부터 믿음으로 살 결단을 하는 것입니다. 별의 별 결단이 있었습니다.“술자리를 피하겠습니다.”“먹고 사는 걱정 근심하지 않겠습니다.”“집에서 화내고 짜증내지 않겠습니다.”“자녀들을 위하여 매일 축복기도해 주겠습니다.”

 

정직하고 죄 짓지 않겠습니다.”“정상적인 상품만 취급하겠습니다.”“손해 보더라도 거짓말하지 않겠습니다.”“작은 법도 꼭 지키겠습니다.”“검소하게 살아 꼭 빚 정리하겠습니다.”“수입의 십일조를 드리겠습니다.”“시간의 십일조를 드리겠습니다.”“수요예배 금요철야 전에 영업을 끝마치겠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사는 남자들] 기도모임은 곧 어려움에 부디쳤습니다. 매주 모여 보니 믿음으로 살았다고 나눌 것이 있는 사람은 몇 사람 안되었고, 회개할 것만 많은 것입니다. 그러니 모이는 것이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운영위원들이 다시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곧 응답을 받았습니다. 믿음으로 살려면 먼저 회개 생활부터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사는 남자들 모임][회개하며 사는 남자들 모임]이 되었습니다.

 

한 주일에 한 번, 남자 성도들이 모여서 자신의 삶을 솔직히 고백하고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한 주일에 한번이라도 공개 회개하는 기회를 가진 사람과 그런 기회를 가지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다른지 아십니까?

 

안산광림교회에 부임한 첫 제자반이 마치는 날, 기도원에서 수료식을 할 때 장로님 한 분의 회개가 있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벽을 허무는 축복을 느끼게 해 주셨습니다.

 

회개 모임이 영성일기 나눔방이 된 것입니다. 영성일기는 24 시간 주님을 바라보고 행복하게 동행하는 방법입니다. 자신의 삶을 기록하고 공개하는 것이 빛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516절에 보면 초대교회의 능력은 회개에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마음이 답답하십니까? 하나님이 빛이라고 하셨는데 하나님 앞에 나아갈 자신이 없습니까?

 

그런 상태에서 머무르면 큰 일 납니다.

 

여기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여야 영원한 천국에서도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음에 감추인 죄를 하나님께 조목 조목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바라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고백한 그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셔서 피흘려 죽으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분명히 감사합니다. 주님, 제 죄를 씻겨 주시니 감사합니다.”하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빛 가운데 사는 삶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사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 /요일1:5-10/ 홍정길 목사

2014-12-12 17:52:41

 

이번 전도대회를 통해서 신앙생활을 새로 시작하신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해서 기뻐하는 것 보다 한 사람이 주님 앞에 돌아오는 것을 더 기뻐하시는 아버지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합니다.

 

이번 기회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 삶의 진정한 변화가 무엇인가를 잠시 생각하면서 우리에게 이미 주신 축복들을 부여잡고 그것을 누리는 은혜가 있어야 될 줄 압니다.

 

예수 믿으면 어떤 사람들은 잘 살아진다고 말합니다. 부자된다고 말합니다. 우리 말에 모순이 많은 것 중 하나는 '잘 산다'는 것과 '돈이 많다'는 말을 같은 뜻으로 사용하는 경우입니다. 실제로 제가 정말 돈 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해봅니다.

 

그러면 가난한 목사니까 그 분이 저하고 돈을 견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의 마음을 진실하게 열어놓는 경우를 보는데, 그 사람들은 이렇게 하소연합니다.

 

"목사님, 왜 인생이 이처럼 무겁습니까? 어둡습니까? 내가 일에 쫓기어 지금 아침부터 저녁까지 뛰어다니는데 내 삶이 삶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인생이 이런 것 아니지 않습니까? 목사님 도와주세요."

 

재물이 많은 것이 잘 사는 것이었다면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1등 부자로 만들었을 것입니다. 물론 세계 지도를 펴놓고 예수 믿는 나라와 믿지 않는 나라를 구분해서 색을 칠해보면 일반적으로 예수 안믿는 나라가 가난하고 예수 믿는 나라가 부자로 사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예수 믿을 때 물질을 주시는 것이 목적이라면 한국의 제1 부자는 예수 믿는 사람이어야 됩니다. 그러나 현대가 예수 믿는 기업이라는 말을 못들었습니다.

 

삼성은 원불교에 가깝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가하면 SK는 불교에 가깝습니다. LG는 이것도 저것도 아닙니다. 제일 가능성이 높은 사람이 대우의 김우중씨인데 그 분 어머니가 신앙이 좋다는 말은 여러 번 들었지만 그 분이 예수 믿는다는 소리는 못들었습니다.

 

언젠가 제가 대통령 조찬기도회 때 설교하는데 그 분이 맨 앞 자리에 앉아 있기에 ", 이 분이 오늘은 예배를 드리는구나!"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우리에게 소유가 조금 더 덧붙여지는 것, 이것이 예수 믿는 사람들이 갖는 특권이나 영광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또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 믿으면 사람이 착해진다." 물론 그것도 일리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 믿는 사람들 가운데 위선자가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 믿어도 그 괴팍한 성질은 안변하더라구요. 예수 믿어도 주변 사람들을 찡그리게 만드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단지 우리를 조금 개조된 인생, 과거보다 조금 낳은 인생으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을 때 근본적인 변화 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존재 자체가 바뀝니다. 요한복음 112절은 말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말합니다. 되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후5:17) 아니,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창조물입니다. 피조물이 아닙니다. 피조물은 피조물에서 피조물로 바뀌는 것입니다. 우리말 성경이 잘못 번역되었습니다.

 

새로운 창조물입니다. 이전과 상관없는 창조물입니다. "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의 출발, 하나님의 자녀로의 새로운 삶입니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이 직접 낳아주셨다"(1:13)

 

고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낳아주셨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서 아버지라고 불러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할 때 이 사건이 우리에게서 이미 일어났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마치 호적을 떼어보면 내가 누구의 자녀인 줄 아는 것처럼 성경을 열어보면 내 신분을 알게 됩니다. 누구라구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새로운 근본적인 변화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사람들이 이 땅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리는 특권이 있어야 됩니다. 왜냐하면 어떤 부모를 만나느냐는 그 인생의 출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 자애로운 아버지를 만나면 그 아이는 인생 전체를 밝게 봅니다. 사랑으로 봅니다. 심지어 상대편이 고약한 사람이라 자기를 미워해도 '이 사람은 나를 괴상하게 사랑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버지와 어머니의 관계가 나쁘면 인생을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호의로 대해도 그 사랑을 못받아들입니다.

 

이런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우리들은 아버지로부터 많은 것을 물려받습니다. 돈 많은 아버지를 모셨으면 그 아들은 돈이 많습니다. 또 아버지가 법관이면 자식들도 꼭 고시를 봅니다. 그런 경우가 많아요. 아버지가 의사이면 자식이 따라서 의사를 합니다.

 

저는 자식들에게 물려줄 재산이 없습니다. 그런데 물려줄 것이 있다면 책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두 아들 중 하나도 목사가 안될 것 같아 걱정입니다. 그렇지만 아버지가 하는 일을 자기도 모르게 익숙하게 따라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그것이 자녀의 특권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사람이 이 땅에서 누리는 특권, 그 특권의 몇 가지를 오늘 설명해 보겠습니다.

 

첫번 째 특권은 죄용서 받는 특권입니다. 이것 보다 더 큰 축복은 없습니다. 인생이 불행한 이유는 죄 때문입니다. 죄가 들어오면 그처럼 사랑했던 사람이 갈라섭니다.

 

전현주라는 이름을 아십니까? 초롱초롱 "빛나리" 양의 목을 눌러 죽인 여자입니다. 본인이 비참하고 불행한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무기징역을 선고 받은 후 옥중에 태어난 그의 자녀는 처음부터 저주 받은 인생 아닙니까?

 

생각해보세요. 아무 잘못도 없는데 죄가 다른 사람에게 들어와 그 아래 사람도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초롱초롱 빛나리양의 부모 마음 속에 있는 고통은 누가 책임집니까? 이것이 죄가 만들어낸 고통입니다. 그것 뿐입니까?

 

이 전현주 씨의 부모님이 도망다니는 딸을 향해서 이런 편지를 써보냈다고 합니다. ", 죽어라. 그러면 우리도 따라 죽을께" 고급 공무원으로 있던 그 아버지가 직장을 그만두었습니다.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딸과 함께 죽고 싶어하는 그 비극을 죄가 만들었습니다.

 

아니, 그 가족만 불행했나요? 우리가 그 사건을 보면서 며칠동안 얼마나 우울해했습니까? 세상에 살 맛이 안나지 않았습니까? 죄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합니다.

 

죄가 우리를 불행케 합니다. 죄가 있는 곳에 곤고가 있습니다. 죄가 있는 곳에 비참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 그 죄는 소극적으로 근심, 걱정, 염려, 삶의 무목적, 염세감의 증세로서 우리 마음을 웅크리게 만들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전현주씨 죄하고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죄인 아니라고, 아니 특별한 경우를 어떻게 보편화시킬 수 있느냐고 질문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들이 자녀를 키웁니다.

 

천사 같이 맑은 우리 아이들, 부모가 거짓말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학교에서 거짓말 안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거짓말 안하나요? 동생이 태어나 엄마가 갓 난 동생이 연약하기 때문에 품 안에 안고 있으면 그 아이들의 천사 같은 눈이 갑자기 살기를 띄는 눈으로 변하는 것을 보신적이 있습니까?

 

여러분, 죄를 짓기 때문에 죄인 아닙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습니다. 사과나무는 사과를 엽니다. 배나무는 배를 엽니다. 포도는 만년을 두고 포도를 열매맺습니다.

 

죄인은 죄를 짓습니다. 공산주의가 크게 잘못했던 것 중 하나는 인간이 죄인인 것을 몰랐기 때문에 이론으로 인생을 멋지게 만들어낼 수 있다고 착각했습니다.

 

그러면 "나는 죄와 상관 없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사람들이 아직 하나님의 빛 가운데 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밝음이 내 인생 속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하나님의 밝음이 내 생애 속에 들어오기 시작하고 하나님의 법이 내 마음을 주장하기 시작하면 우리들은 이상한 죄를 발견합니다. 내 모습 속에서 진실해야될 때 거짓된 나를 봅니다. 그런가하면 사랑해야될 때 미워하고 있는 나를 봅니다.

 

내 손을 펴서 주워야 될 때 남의 것이라도 빼앗아 움켜잡는 내 손을 봅니다. 다른 사람을 축복하고 격려하고 세워줘야될 때 그 사람을 은근히 짓밟는 못된 내 괴팍한 심령을 봅니다. 하나님의 밝은 빛 앞에 보니까 내가 그처럼 엉터리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우리야 그렇지만 역사적으로 거룩한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슈바이쳐 같은 사람, 마하트마 간디 같은 사람, 테레사 같은 사람은 그렇지 않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마하트마 간디가 죽기 2주 전에 일기를 썼습니다. 그 일기에 보면 이렇게 써 있습니다. '나의 죄가 나를 신으로부터 자꾸 멀리 벌어지게 만드는 곤고함이 내게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가하면 인류 최고의 성자인 사도 바울의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라. 이 죄악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낼 것인가? 내가 원하는 바 선을 행치 못하고 도리어 원치 않는 악을 행하는도다." 외쳐대고 있는 비참한 신음을 들어보게 됩니다.

 

이 원리는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바다에는 여러 생물이 살고 있습니다. 가장 큰 몸을 가진 고래부터 시작해서, 지능이 높기로 유명한 돌고래, 심지어는 단세포로 되어지는 식물까지 여러 가지 수천 수만 가지의 생물이 바다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바닷가에 살고 있는 것의 종류는 천차 만별이고, 더 멋지고, 좋은 것 같고, 더 아름다운 것 같고, 더 진화된 것 같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다 물 속에서만 살아야되는 공통점입니다.

 

마찬가지로 인생의 모습도 여러 모습이 있지만, 인생은 죄 안에 갇혀 있는 여러 종류의 사람이 있을 뿐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다 악을 행하여 무익하게 되고 의를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저의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3:10-23)고 성경은 말합니다. 모두 죄 아래 갇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마다 죄의 그 무거움에 눌려 신음하고 있습니다. 고통받고 있습니다.

 

인생을 불행케 하는 이 무서운 죄를 해결할 방법을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담에게 양을 잡아서 가죽으로 그의 부끄러운 부분을 가려주셨습니다. 그 사건 속에서는 "내가 너의 죄를 가려준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 아담의 아들, 아벨은 하나님을 온전히 믿었다고 말합니다. 그 인격을 믿고 말씀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 없이 해주는 제사의 말씀을 믿고 그는 자기 양을 잡아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제사를 기쁨으로 받으셨습니다. 이 아벨은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내가 죽는 대신 이 양을 죽여서 하나님 앞에 드립니다. 여기 내 주검이 있습니다. 하나님 보시옵소서. 그리고 하나님 앞에 바로 살기 원합니다." 그는 소원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 용서를 위해 양을 대신 죽인 그 규례를 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한꺼번에 행하게 하신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거룩한 족장, 노아나 아브라함을 통해서 계속 하나님을 향해 죄 대신 양을 죽이는 제사를 드리게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이집트에서의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예로 고통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구원하기로 작정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땅에 재앙을 내립니다. 그 재앙을 경험한 바로왕은 재앙을 당할 때마다

 

"내가 잘못했으니까 용서해주세요. 그리고 내가 하나님 말씀 듣겠습니다."했지만 그 재앙이 풀리면 다시 완악해졌습니다. 이것을 아홉번이나 되풀이 합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열번 째 재앙을 선포하십니다.

 

애굽에 있는 모든 집에 처음 난 것은 사람이든 가축이든 모두 죽이라고 선고했습니다. 모두 죽이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러나 그 밤에 하나님께서 그것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하나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날 밤에 이스라엘의 가장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갑니다.

 

"얘들아, 우리 같이 가자. 우리 양들 가운데 흠 없는 것을 골라라. 발톱이 상했어도 안된다. 헌데가 조금 있어도 안돼. 모양이 틀려먹었어도 안돼. 오른쪽 뿔과 왼쪽 뿔이 삐딱해도 안돼." 좋고 귀한 것들을 고릅니다. "아빠, 왜 이렇게 예쁜 걸 골라야 되나요?"

 

드디어 아이 앞에서 심장을 갈라 양을 잡습니다. 그리고 그 양의 피를 문지방과 설주에 발랐습니다. 그 밤입니다. 하나님의 죽음의 천사가 저들을 지나갑니다. 이 방에서 큰 소리로 우는 곡성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저 집에서 통곡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그 밤에 통곡 소리를 들으면서도 '나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했으니까 안심이야.' 코를 골고 자는 사람이 있었지만 어떤 사람은 양의 피를 발라놓고도 '이것 좀 발랐다고 해결될까?' 벌벌 떨면서 저녁에 한숨 못자고 지낸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효과는 같았습니다. 효과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 사람의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밤 새 잠을 못 이룬 그 집에도 죽음의 천사가 지나갔습니다. Pass Over Day, 그래서 유월절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성경에 유월절이라고 해서 6월 며칠날인가를 고민한 적이 있었습니다. 지나갔다는 말입니다. 죽음의 천사가 지나갔습니다. 그 피를 보고 지나갔습니다. 사람들은 양을 죽이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예수가 오기 700년 전 이사야 선지자는 이상한 말을 했습니다. "저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저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 우리 무리의 죄악을 저들에게 담당시키셨도다."(53:5-6)

 

양만 죽이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라 이 땅에 메시야가 오셔서 죽는다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메시아 그리스도가 이 땅에 틀림없이 오셨습니다. 그 분 이름을 예수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라는 말의 뜻을 아십니까? 예수라는 말은 이런 뜻을 가졌습니다.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구원자입니다.

 

어디서입니까? 죄에서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죄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양을 죽이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라고 한 것입니다. 그 분을 예수님이라고 부르려면 내가 예수님 백성이라는 신앙고백이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라고 부를 때에는 예수께서 죄에서 나를 구원하셨다는 신앙고백이 있어야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십자가에서 인류의 모든 죄를 위하여 죽었다" 이사야 53장의 예언대로 자기가 죽음 당할 메시야라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옆에 있는 제자들은 "주여, 그리 마소서." 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죄 값은 사망입니다. 그 죄값을 지고 점도, 티도, 흠도 없으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말이예요. 만약 예수님께서 우리 인생처럼 죄를 지었다면 죄의 값을 무엇이라고 그랬을까요?

 

죄를 범하였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했고 죄 값은 사망이라고 했으니 예수가 죄를 지었다면 자기 죄로 죽어야지요. 남의 죄를 대신해서 죽을 수 없습니다. 그 분이 점도, 티도, 흠도 없었기 때문에 남의 죄를 위해서 대신 죽을 수 있었습니다. 그 분은 죄의 형벌을 모두 다 당하셨습니다.

 

죄 값은 죽음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죽음이 존재의 중단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죽음은 분리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우리의 영혼과 육체가 분리된 사실을 뭐라고 말합니까? 죽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또 다른 죽음이 있습니다. 영적인 죽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랑과 은혜와 자비와 기쁨과 보람과 감격과 평안과 축복을 날마다 공급받으면서 인생을 멋지게 삽니다. 그런데 단절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영적인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그 고통을 애통해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쉽게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첫번째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했습니다."고 외쳐댔습니다.

 

예수님이 인간적인 육신적인 고통을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남의 죄를 대신 질 때 하나님과 분리를 경험합니다. 한번도 하나님과 분리되지 않았던 예수입니다. 영원토록 영원부터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누렸습니다.

 

아버지는 내 안에 있고 나는 아버지 안에 있다고 깊은 사랑의 교제를 누렸던 예수, 그 분이 하나님께로부터 분리를 경험합니다. 그래서 그는 외칩니다.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죄가 주는 그 분리의 고통을 우리 주님께서 다 당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하나님의 죄의 형벌이 시행되고 하나님 아버지의 용서가 현실로 내 것이 되었습니다.

 

죄 용서받으려면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하나는 죄값을 지불할 때, 또 하나는 그 사람에게 용서받을 때입니다. 그것이 십자가 안에서 다 이루어졌습니다. 비유컨대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어떤 공의롭고 정확하고 엄한 법관이 있었습니다.

 

이 법관이 어느날 심리하는데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이 걸려들었습니다. 보니까 술을 먹고 어느 상점을 덥쳐 상점의 그 많은 물건을 다 깨뜨렸습니다. 그 뿐 아니라 그 상점의 여러 사람을 다치게 만들었습니다. 아들은 사건의 심리자가 자기 아버지니까

 

"됐다. 나 살았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확한 공의자 재판장 아버지는 자기 아들이 지은 죄를 조목조목 분석하기 시작했습니다. 정확하게 증거를 선고했습니다. 너무 중형을 선고하자 그 아들은 "아버지, 너무하다. 잔인하다. 피도 눈물도 없다"고 외쳐댔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공의로운 법관은 집에 돌아가서 딴 짓을 합니다. 박봉으로 사놓은 집을 팝니다. 생명처럼 아꼈던 서적들을 하나하나 모두 팝니다. 그리고 자기 자식이 변상해야될 돈들을 마련해서 모든 사람에게 돌아가면서 갚았습니다.

 

의로운 재판장이었던 그 분은 법정에서 자기 아들을 향해서도 의로운 선고를 했어야 됩니다. 그러나 집에 돌아가면 아버지입니다. 그래서 자기 소중한 것을 모두 팔아서 그 아들에게 보상해야될 것을 모두 보상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에서 일어났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3:16) 이것은 사랑의 비밀입니다. 강아지 하나만 사랑해도 10만원짜리 강아지를 치료하기 위해서 천만원도 아깝지 않은 것이 사랑입니다.

 

우리가 자식을 위해서는 줍니다. 못줘서 안달입니다. 내 목숨이라도 바칩니다. 그러면서도 아까와하지 않는 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는 이것이 현실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내 죄의 형벌을 다 당하셨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진리입니다.

 

이 진리를 붙잡지 않으면 크리스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 진리를 아는 것으로만 끝나면 안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나를 위해서 행하신 그 속죄를 내가 받기를 원합니다. 내 것으로 소유하기 원합니다. 손을 내미는 것이 믿음입니다.

 

"주신 선물, 감사합니다. 얼굴을 들 수 없지만 내가 그 선물을 받겠습니다."하는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할 때 성경은 선포합니다. "네 죄가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 같이, 안개의 사라짐 같이 너희 죄를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나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44:22)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죄가 주홍같이 붉을지라도 흰 눈처럼, 진홍처럼 붉을지라도 양털처럼 깨끗케 하겠다."(1:18) "내가 너의 죄가를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너희에게서 멀리 옮겼노라."(103:12)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출발입니다.

 

내가 죄인인 것을 고백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할 때 이 구속의 사건, 나를 대신해서 죽으신 사건이 내게 효험을 발휘합니다. 그래서 내가 지었던 과거의 모든 죄에 대해서 나는 무지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법전에서 모두 무지하다고, 형벌이 지워졌다고 선포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알았던 하나님의 사람은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를 누가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8:33-34) 외쳐댑니다. 그러나 예수 믿은 다음 또 죄를 범합니다. 연약해서 또 쓰러집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하느냐? 성경은 빛 가운데 살면서 우리의 그 죄를 주님 앞에 자백하라고 합니다. 요한일서 19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케 하실 것이요"

 

내가 또 고백하면 됩니다. "주님, 내가 또 넘어졌습니다. 내 연약을 아시는 주님, 용서해주시옵소서. 내가 주님 십자가에 내 마음의 끌림을 따라서 우리 하나님을 실망시켰습니다. 용서해주세요." 그러면 주께서 용서해주십니다.

 

왜 하나님께서 용서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버지이십니다. 아버지는 자식에게 용서 밖에 못합니다. 다른 사람은 절대 용서 못하는 사건도 부모는 용서합니다. 그런고로 우리 주님 앞에 내 죄를 자백하십시오. 주께서는 널리 용서해주십니다.

 

그런데 회개하시되 같은 죄를 반복해서 고백하지 마십시오. 10년 전에 회개했던 것, 또 회개하고 그 다음에도 또 회개하고 반복을 합니다. 이런 경우가 참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건 하나님의 용서를 안믿는 것입니다. 설명하겠습니다.

 

제가 우리 정목사님께 실수했습니다. 그리고는 "목사님 참 죄송합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그러면 정목사님은 "제가 다 용서했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합니다. 그런데 15분 후에 만났는데 "목사님 또 죄송합니다"

 

그러면 두번까지는 홍목사가 겸손해서, 오죽 가슴 아프면 그러겠는가 할텐데 만날 때마다 10, 20번 반복하면 나중에 마음 속으로 "홍목사, 내 인격을 믿는거요? 안믿는거요? 내가 용서했다면 믿어야지!"하고 역정을 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 회개하고 꼭 이렇게 합니다. 미가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 무리의 죄악을 발로 밟아 바닷속 깊은 곳에 빠뜨리셨느니라" 우리 죄악을 모두 바닥 깊은 곳에 빠뜨렸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바다에는 큰 팻말이 붙어 있습니다. "이 곳에서는 낚시질을 금함"

 

내가 한번 중심으로 회개했으면 그 죄는 다시 회개하면 안됩니다. 다시 죄악감을 들게 하는 것은 사탄이 장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십니다. 완전하신 하나님의 용서는 완전합니다. 완전한 하나님의 완전한 용서를 믿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사탄입니다.

 

그런고로 내가 지었던 과거의 모든 죄에 대해서 내가 회개했으면 무죄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사망아, 네가 이기는 것이 어디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있느냐?"라고 죽음 앞에서도 큰 소리 치는 인생으로 우리 하나님께서 세워주십니다.

 

한국 교회가 잃어버린 것 있습니다. 사죄의 은총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기쁨을 잃어버린 것, 돈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여러분의 마음의 비참이 끝나지 않은 것, 가난해서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여러분을 알아주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사죄의 용서가 없기 때문입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깨끗이 씻겨주시는 그 은총 앞에서 우리 아버지를 다시 만나십시오. 찬란히 빛나는 얼굴로 나를 향해서 나오시는 주의 영광 위에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은혜 베푸시기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첫번째 특권은 죄 용서받는 특권입니다.

 

 

 

 

사귐이 풍성한 교회(II)/요일1:5-10

2001-09-12 09:40:32

 

시골에 있는 우리 부모님 집에 가면 작은 강아지 한 마리가 있다.

우리가 집에 가면 얼마나 반갑게 맞이하는지 귀엽기가 한이 없다.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어머님이 새벽 기도회에 가시면 같이 가서 예배당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예배를 마치고 나오시면 같이 따라서 집에까지 동행을 한다고 한다.

얼마나 기특해 하시는지 모른다.

내가 보아도 귀엽다.

 

며칠 전에 부모님 댁에 들렀더니 이상한 현상이 발견되었다.

비슷한 덩치의 수캐가 우리 강아지 근처에서 얼씬거리는 것이 아닌가?

보니까 털도 꾀죄죄하고 별로 볼품이 없어 보였다.

새벽 기도를 다니는 우리 강아지와 사귀기에는 너무나 품위가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얼른 쫓아버렸다.

 

그리고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수캐가 우리 강아지와 좀 사귀어 보려고 먼 길을 찾아왔는데 주인에게 쫓겨났구나!"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사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도 내 모습 여하에 따라서 사귐을 거절당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 순간 수캐의 신세가 조금은 처량하여 보였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웃과 함께 좋은 교제를 나누고 싶은데 거절을 당하면 기분이 어떨까요?

이 자리에 앉아 계시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안 만나면 만나보고 싶고, 보면 더 오랫동안 보고싶은 아름다운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란다.

 

1. 어두움 가운데 행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들과 사귀며 살아야 될 사람이다.

혼자 무인도에서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누구나 사귐을 가지게 된다.

그렇다면 기왕에 사귀는 것, 좀 의미 있는 사귐을 가지면 어떨까요?

어떻게 하면 쫓겨나지 않고 만나고 싶고, 사귀고 싶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우리들의 사귐을 풍성하게 하기 위한 비결을 살펴봅시다.

사도 요한은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과 사귄다고 말하면서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과 사귀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이다.

하나님과 사귄다고 말하면서 어두움 가운데 행하면 그것은 하나님과 함께 사귀는 것이 아니므로 그렇게 말하는 것은 거짓말에 불과하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이 사귀고 싶어하는 사람이 아니며, 하나님에 의하여 쫓겨나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빛이시기 때문이다.

낮에는 빛이신 하나님과 사귀면서 빛 가운데 살다가, 밤이면 빛이신 하나님은 등뒤로 보내놓고 어두움을 마주하여 어두운 가운데 살아간다고 생각해 보라.

이것은 어느 누구와도 사귀는 것이 아니다. 모두에게 배반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면 어두운 가운데 산다. 또는 빛 가운데 산다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

두 가지 경우로 사용된다.

첫 번째는 도덕적인 경우이다.

일반적으로 한 평생을 착하고 깨끗하게 살았다면 빛 가운데 살았다고 하며, 남을 속이고 괴롭히며 살았다면 어두움 가운데 살았다고 한다. 이것은 권세와는 상관이 없다.

일반 종교에서 말하는 빛도 이런 의미의 도덕적 순결을 말한다.

두 번째 경우는 성경적인 경우이다.

성경에서는 어두움이나 빛을 비유적으로 사용하였다.

성경에서 빛은 진리에 의한 의로움 그 자체를 말한다.

빛은 하나님의 속성으로서 완전한 정결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를 가지고 있다.

그 앞에서는 숨길 수 있는 것이 없으며, 근심이 생기게 하는 것도 있을 수 없다.

사람들이 아무리 착하고 깨끗하게 살아도 근심을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빛 가운데 살게 되면 착하고 깨끗하게 살게 되는 것은 기본이며, 근심이나 걱정에서 해방이 된다.

빛이신 하나님께서는 이런 당신의 백성들을 가리켜 "이방의 빛"(42:6)이라고 하셨다.

진리와 상관없이 살아가는 세상에 진리를 보여줄 하나님과 같은 존재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빛 가운데 산다는 말은 도덕적인 순결함을 넘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진리를 따라 살아간다는 뜻이다.

상대적으로 어두움 가운데 산다는 말은 자신들의 갈 곳도 알지 못한 상태에서 그저 착하게만 살면 되는 줄 알고 살아간다는 말이다.

내일, 자신의 인생이 어떻게 되는지 알지도 못하고 그저 주어진 인생이기에 하루살이처럼 그렇게 살아간다.

이런 세상 사람들 앞에서 우리는 빛인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5: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면 아무리 순결한 삶을 살아도 하나님 앞에서는 의미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면서 순결함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인정을 받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가 진리의 가르침을 따라서 빛 가운데 살면 어떻게 될까?

7절을 보자.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할 때 비로소 하나님과 사귈 수 있는 기본이 준비된다고 말한다.

성도들과도 서로 사귈 수 있는 준비가 되었다고 한다.(14:17-18 참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서로 사귐을 가지면서 살아가고 싶은가?

그렇다면 빛 가운데서 행합시다.

그래서 내가 가서 사귀고 싶어하지 않아도 오히려 사람들이 찾아와서 사귀고 싶어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란다.

 

2. 죄를 인정하고 죄를 자백하면 됩니다.

 

여러분, 우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사귐을 시작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우리들의 사귐을 더욱 견고하게 하려면 그 두 번째로 우리 자신을 속여서는 안된다고 요한은 말한다.

사도 요한이 살아있을 때,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더 이상 죄가 없으며, 그러므로 죄를 자백할 필요도 없으며, 또한 우리들이 행하는 모든 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어떤 사람들이 등장했다.

8절을 보자.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이라고 기록이 되어 있다.

9절을 보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10절을 보자.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고 하면"이라고 기록이 되어 있다.

이것은 어떤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만약 아무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면 요한이 굳이 이런 말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예수께서 승천하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초대교회에는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여기 저기에서 우후죽순처럼 일어났다.

그들은 영지주의자들이다. 이런 영지주의자들 중에는 '니골라당'이라고 불려지는 사람들도 있었다.(2:6)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죄를 용서받고 더 이상 어둠이 없는 빛이요, 죄가 없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된 것은 사실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이 나를 위한 것임을 믿을 때 죄에서 구원을 받아 "의롭다"고 칭함을 받았다.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 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이것을 부인하면 그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여전히 죄악의 본성이 남아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며, 하나님 앞에 매 맞을 일을 자주 하게 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했다.

4:22-24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 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 속에서 경험적으로 알 수 있는 바이다.

 

그러므로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먼저 예수님을 믿는 순간, 그 누구도 정죄할 수 없는 의인이 되었음을 믿어야 한다.

이것은 예수님의 공로를 근거로 하나님이 선포하신 것이다.

동시에 하나님 앞에서 구원을 받은 나도, 구원을 받은 너도, 우리 모두가 연약한 죄인임을 인정해야 한다.

다음에 우리는 우리들의 행위를 통하여 드러나는 죄를 하나님 앞에 고백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사하시며, 우리의 행실이 깨끗하도록 도우실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을 가지게 되는 비결이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임을 인정해도 사람들 앞에서 그런 정신을 잊어버리면 옆에 앉아 있는 지체들과의 사귐은 어렵게 된다.

요즘 텔레비전 앞에 앉아 뉴스를 시청하다 보면 온통 우리 입에는 욕밖에 안 나온다.

나는 선하고 그 사람은 악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텔레비전 앞에서 그렇게 욕을 했던 그 사람을 만나면 우리 입에서 좋은 말이 나올까?

그렇게 되면 사귐은 점점 멀어지는 것이다.

자신은 죄와 상관없는 사람인 것처럼 거룩한 체 한다면 그런 사람과 상종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말하면서 이렇게 사람과 사귐을 가지지 못한다면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한다면 사람과도 사귐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7절을 보자.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빛 가운데 행하여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면 사람들 서로간에도 사귐은 필연적으로 있게 된다고 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올 한해동안 우리가 섬기는 공동체 안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 사귐을 깊게 하기를 소원한다.

그렇게 하려면 우리가 먼저 빛 가운데 살아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라.

그리고 나도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자각하여서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지 말고 겸손히 행하라.

그래서 하나님과 사귐은 물론이요, 사람들과의 사귐도 더욱 풍성하게 해서 사람들이 우리를 찾아와 상담을 요청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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