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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요한일서 설교 모음

요한일서 2:1 - 6 설교 모음

by Jessi J 2025.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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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깝게 만들까? (2) /요일2:1-6/ 조정의목사

2021-09-01 08:47:23

 

요한일서는 계단을 올라가면서 다양한 관점에서 아름다운 조각 품을 감상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성령의 감동으로 빚어진 권위 있고 은혜로운 요한일서 작품의 기초를 감상했다(1:1-4). 영생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 게 나타내신 바 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를 믿는 순간부터 그분과 더불어 아버지와 함께 영원한 사귐을 충만하 게 누리게 된다는 놀라운 진리였다.

 

계단을 한 층 올라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멀게 하는 주범, 죄를 발견했다. 하나님은 어둠이 조금도 없으신 빛이시기 때문에 죄 는 하나님과 우리의 사귐을 망친다. 하지만 신자 중에는 죄를 짓 고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착각하는 사람 이 많다. 그래서 하나님과 멀어진 채 산다. 죄로 멀어진 관계는 자백으로 가까워지며 참된 자백에는 언제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용서와 회복이 주어진다.

 

오늘 우리는 계단을 한 층 더 올라가 어떻게 하면 영생의 주님과 더 가까이 사귐을 갖고 더 충만한 기쁨을 누리며 살 수 있는지 요 한을 통해 성령이 만드신 작품, 요한일서 2 1-6절 말씀을 통 해 살펴보기 원한다. 그래서 단지 하나님과 당신 사이가 멀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 가까워 지기를 바란다. 영생이 있음을 알 게 할 뿐만 아니라 그 영생을 풍성히 누리게 하는 것이 바로 요한 일서 전체 목적이고 오늘 설교의 목표다.

 

1. 죄를 멀리함으로 하나님과 가까워진다(1-2)

 

나의 자녀들아요한은 실제로 나이도 많고, 사도로서 신앙의 연 차가 가장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요한일서 수신자들을 말씀으로 양육하고 돌본 목사였고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실제로 요한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났기 때문에 친밀하고 사랑이 가득 담 긴 표현인나의 자녀들아라고 그들을 불렀다(1).

 

바로 이전에(1 5-10) 요한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멀게 만 드는 주범이 죄라고 밝혔는데, 다시 한번 이 편지를 쓰는 개인적 이고도 명백한 목적을 밝히면서(“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1), 죄를 범하지 말라고 권면한다.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와 영원한 사귐을 갖는 이에게 죄는 정상이 아니다. 넘어지고 죄를 범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말이 아니다. 죄를 범하는 것을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처럼 절대 여기지 말라는 것이다.

 

최고의 기독교 변증가로 널리 알려진 라비 재커라이어스가 (1946~2020) 생전에 다수의 여성에게 오랜 세월 성폭력을 저 질렀다는 사실이 최근에 밝혀졌다. 평생 무신론자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입증하고 선포하며 전세계적인 영향력을 끼치고 수많은 영혼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한 그는 지금 천국에 있을까? 지 옥에 있을까?

 

섣불리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마스터스 대학의 애브너 차우 교수는 만일 라비가 아직 살아있고 자신을 찾아왔다면 그의 삶이 정상이 아니고 영생 없는 이의 삶이니 반드시 회개하라고 분명하게 견책해야 한다고 말했다. 요한도 틀림없이 그렇게 말할 것이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요일 3:8), “(그리스 도)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요일 3:6).

 

우리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님으로 인 해 더불어 사귐을 누릴 수 있는 이유는 결코 죄가 큰 문제가 아니라서가 아니다. 예수님은 죄를 짓게 하는 지체가 눈이라면 빼어 버리고 오른손이라면 찍어버리라고 경고하셨다. 그 죄가 온몸을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 불에 던져지게 할 만큼 심각하기 때문 이다( 5:27-32; 9:43-5). 죄는 언제나 심각한 문제다.

 

우리 죄가 이토록 심각함에도 우리가 영생의 주 더불어 하나님 과 친밀한 사귐을 누릴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계신 대언자 예수님 때문이다. 요한은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라고 말했다(1).

 

대언자의 또 다른 말은 보혜사인데(Helper), 때를 따라 돕는 분 이다. 오직 예수님만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하여 우리를 도우실 수 있다. 그분만이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 도 없으시며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 곧 의로우신 이로 의로우신 재판장 하나님 앞에 서서 우리의 대언자 역할을 할 수 있다( 7:11; 딤후 4:8; 고후 5:21; 벧전 2:22). 이는 대체 불가다.

 

어떤 면에서 그리스도인이 죄를 간과하고 방종 하는 이유는 죄 가 너무 쉽게 해결된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이미 십자가에서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가 사해졌다고 하니, 죄를 지을 때마 다 자백하면 바로 해결된다고 하니 죄가 그만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구약처럼 가축을 잡으면 귀찮고 불편해 서라도 더 심각하게 여겼을지 모르겠다. 벌금을 내면 어떨까?

 

하지만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절대로 죄를 가볍게 보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은밀한 일을 선악 간 에 반드시 심판하신다( 12:14). 소멸하는 불로 모든 더러운 죄 를 태워 심판하신다( 12:29).

 

여기에 분명한 진리가 있다. 당신이 범죄하고 자백할 때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대언 하시고 아버지께서 우리의 죄와 허물을 용서하시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단지 대언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 죄의 대가를 자기 생명으로 치르셨기 때문이다. 우리 뿐만 아니라 아담으로부터 앞으로 이 땅에 태어날 모든 죄인의 죄까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는 자마다 용서하시고 그들과 화목한 관계를 맺으시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죄인 사이를 막는 죄의 값을 자기 목숨으로 대신 치르신 화목 제물이 되셨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2).

 

최근 신학교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 죄와 아무런 상관없으며 단지 억울한 누명을 쓰고도 원수를 위해 기도하며 희생적으로 죽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의 본을 보여줄 뿐이라고 말하는 가르침이 인기를 얻고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아버지가 아들을 십 자가처럼 끔찍한 사형 틀에 죽게 하면서봤지 이만큼 내가 너를 사랑해라고 말하는 것이 아름다운가? 소름 끼치도록 무서운가?

 

하나님께서 자기 사랑하는 독자를 아낌없이 내어 주셨다는 것은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보여주는 동시에( 5:8) 우리 죄의 크기와 심각성을 분명하게 알게 한다. 아들이 십 자가에서 끔찍하고 수치스러운 죽임을 당하신 만큼 우리 죄는 심 각하다. 그러므로 자백할 때마다 쉽게 죄 사함을 받고 용서받아 관계가 회복된다고 생각하지 마라. 예수님이 그 죄에 상응하는 값을 조금도 부족함 없이 치르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영생의 충만한 기쁨을 누리며 사는 사람 일수록 자기 죄에 더욱 민감하다. 거룩하신 하나님께 그 죄가 얼 마나 가증하고 더러운 것인지 알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 서 그 죄를 위해 얼마나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맛보셨는 지 십자가에서 흐른 그 피가 얼마나 고귀하고 보배로운지 알기 때문이다.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멀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죄를 멀리 함으로 하나님과 가까워진다. 비정상적인 죄를 범할 때 의로우신 그리스도를 힘입어 자백하면 미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용 서와 깨끗하게 하심을 입는다. 그래서 하나님과 다시 가까워진 다. 회개는 영생의 주와 동행하는 자가 매일 힘써야 할 영적 훈련 이다. 그렇게 날마다 주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간다.

 

2. 말씀을 가까이함으로 하나님과 가까워진다(3-6)

 

요한은 두 번째로 말씀 순종을 강조한다. 3절에그의 계명을 지키면”, 5절에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6절에는그가 행하시 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모두 그리스도의 말씀, 그분이 명령 하시고 본을 보이시고 기뻐하시는 뜻을 따르는 것을 가리킨다.

 

말씀 순종은 하나님을 아는 것 곧 영생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17:3). 3절에서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라고 말하고 4절에서는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라고 말한다. 말씀 순종이 하나님과 그 사람 의 관계를 말해준다는 것이다.

 

주목할 것은 순종 곧 행함이 강조된다는 것이다. 말씀의 지식과 정보를 아는 것 이상을 요구하신다. 계명을 아는 사람이 주님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 주님을 아는 사람이 다. 반대로 계명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그가 주님을 안다 고 말해도 그 말은 거짓말이다. 예수님은 열매 곧 삶으로 알리라고 말씀하셨다( 7:16-20). 진리대로 살지 않는 이의 영혼에 진 리가 심겼을 리 없다는 것이다(‘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함’).

 

5절과 6절에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안에 있 는 것, 하나님의 안에 사는 것을 말하는데, 이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더불어 더욱 친밀한 관계를 누리는 것을 말한다. 예수 님은 제자들에게나의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셨다( 15:9).

 

여기에서도 말씀 순종이 강조된다. 5절에서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 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6절에서는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말씀에 순종하면 할수록 우리는 그분 안에 살게 된다. 그 분 안에 거하게 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명백히 말씀하셨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 15:10)

 

특별히 5절에 있는 이 표현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 온전하게 되었나니를 주목하라. 무슨 뜻일까? 말씀을 순종하면 하 나님의 부족했던 사랑이 온전하게 우리 안에 채워진다는 것인가? 그 반대다. 우리가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더 온전하게 채워진다는 것이다. 예수님은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라고 말씀하셨다( 14:15). 주님의 계명을 지키면 주님을 향한 우리 사랑이 표현된다.

 

놀라운 부분은 이것이다. 우리가 계명을 지켜 주를 사랑할 때 아버지께서도 우리를 사랑하신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14:23). 관계가 친밀해지고 가까워지는 것을 보는가? 말씀 순종이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나타낼 때, 아버지와 함께 주께서 우리를 사랑으로 가까이하 신다. 그분의 사랑이 우리에게 더욱 크게 표현되는 것이다.

 

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25년 만에 얻은 사랑하는 독자를 바 치라고 하셨을까? 예비하신 숫양을 수풀에 미리 준비하시고는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자기를 향한 경외 또 다른 말로 사랑이 순 종으로 나타나기를 원하셨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에 준행한 그 와 천하 만민에게 사랑의 복을 내려주시기 기뻐하셨다. 사랑은 표현될 때 더욱 커진다. 아브라함의 순종이 하나님께 표현되어 더욱 온전해졌고, 하나님은 그분의 사랑을 더 크게 나타내셨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법을 무거운 짐처럼 여긴다. 읽어 야 하는 숙제, ‘그렇게 살면 좋을 텐데…’라고 말하는 조언 정도로 여긴다. ‘이렇게 사는 사람이 어디 있어?’ ‘이걸 순종하는 건 불가 능해’ ‘적당히 순종하고 적당히 불순종도 하는 거지 뭐이렇게 생 각한 적이 있지는 않은가?

 

하지만 오늘 어쩌면 잊고 살았을지 모르는 진리와 마주하라. 당 신이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주님 을 더 알기 위해서, 그분 안에 거하기 위해서, 더 가까이 그분 안 에 살기 위해서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입으로만 말씀을 줄줄 꿰고 법과 규칙처럼 철저하게 지켜온 바리새인에게 예수님은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라고 탄식하셨다( 15:8). 당신의 마음 은 지금 영생의 주에게서 얼마나 멀어져 있는가? 말씀 순종이 그 거리를 좁힐 수 있다. 당신의 사랑을 순종으로 표현하라.

 

앞서 회개가 영생의 주와 동행하는 자가 매일 힘써야 할 영적 훈 련이라고 말했다. 헬라어 동사가 현재형으로 쓰였을 때 일반적으 로 그 동사는 일회적인 행동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행동 이라고 말한다. 3절에서 6절까지 말씀을지키다”, “행하다가 모두 무슨 형태일까? 현재형이다(4). 말씀 순종은 주와 동행하 는 자가 매일 힘써야 할 영적 훈련이다. 회개와 순종이 하나님과 당신 사이를 날마다 더 가깝게 만든다.

 

3. 적용

 

나는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생각하며 살았던 걸까? 나는 예수님 을 얼마나 무시하며 살았던 걸까? 입술로만 사랑한다고 말하고 마음은 오래전에 이미 멀어진 채로 살고 있지 않나?

 

영생의 주와 사귐을 풍성히 누리려면 그분께 시간을 드려야 한 다. 물론 모든 삶이 그분께 드리는 예배이지만, 특별히 그분 앞 에 일대일로 마주 앉아 종일 어떻게 그분께 사랑을 순종으로 표 현했는지 돌아보는 시간, 매일 주님과 나 사이에 끼어든 크고 작 은 죄를 깨끗하게 자백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이런 시간의 필 요성을 알지만, 그동안 계속 미뤄온 사람도 있을 것이다. 정직하 고 솔직하게 스스로에게 질문해보자. 자기 아들을 우리 죄 때문 에 내어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자꾸 이 순위로 밀려나는 것인가?

 

예수님은 우리가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고 이 땅에 오셨다( 10:10). 회개와 순종으로 영생의 주와 더 풍성한 사귐을 누리자. 매일 주와 동행하면서 그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 서 자라가자(벧후 3:18).

 

 

 

하나님을 사랑하면 기적이 일어난다 /요일2:1-6/ 유기성 목사

2016-08-24 10:16:47

 

우리가 받은 복음이 얼마나 놀라운지 아십니까? 예수님을 믿으면 지옥에 갈 죄인이라도 천국에 가게 되고, 어떤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다 용서받는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기 전에 지은 죄만 용서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은 후에 지을 죄도 다 용서받았습니다.

 

우리가 앞으로 어떤 죄를 지어도 우리는 의롭다 거룩하다고 인정받는다는 것입니다! 성도의 견인이라고 하는 교리입니다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놀라운 복음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런 복음을 듣고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이제 죄를 지어도 되겠네!” 초대교회 때부터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복음을 몰라서 하는 생각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놀라운 속죄의 복음을 주신 것은 이제부터는 안심하고 죄를 지으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래도 괜찮아, 너는 여전히 의로운 자요 거룩한 자야, 믿기만 해.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었잖아.” 하신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렇게 주장하는 하는 사람들 중 한 무리가 구원파 이단입니다. 이것은 십자가 복음을 순전히 교리로만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요한 사도는 충격적인 말씀을 하였습니다.

 

요일 2:1 나의 자녀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렇게 쓰는 것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죄를 짓지 않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분명히우리로 하여금 죄짓지 않도록 하려고이 서신을 쓰고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짓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면 왜 우리에게 죄를 지어도 의롭다 거룩하다 인정받는 축복을 주신 것입니까?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정말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싶습니까?” “죄 안짓고 살고 싶습니까?”

 

이것이 열쇠입니다. 정말 그렇다면 우리가 육신이 약하여 다시 죄를 짓게 되더라도 주님은 완전한 대책을 마련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요일 2:1 ... 누가 죄를 짓더라도 아버지 앞에서 변호해 주시는 분이 우리에게 계시는데,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저 사람은 분명히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 모든 죄를 지고 이미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저 사람의 죄는 제가 이미 다 지고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었습니다. 이제 저는 죄지은 자가 아닙니다.“

 

서커스 곡예 중, 그네타기 묘기가 있습니다. 그 묘기가 펼쳐질 때 밑에 그물을 쳐 놓습니다. 곡예 도중에 떨어져도, 언제나 안전하게 받쳐 주기 위해서입니다. 몇번이고 받쳐줍니다. 만약에 그물이 없다면 어떻겠습니까? 아마 그네 타기 묘기가 불가능할 것입니다.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거듭난 자의 삶을 살아갈 때, 완전한 용서가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입니다. 혹시 실수하고 넘어지더라도, 하나님은 언제나 용서하여 주십니다.

 

서커스 그물이 떨어지라고 쳐 놓은 것입니까? 안심하고 묘기를 부리게 하려고 쳐 놓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완전한 용서를 주신 것은 안심하고 죄지으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죄짓지 않게 하려고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죄짓지 않는 것은 우리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끈질김]이라는 책에서 존 비비어 목사님은 고등학생 때 십계라는 영화를 보고 고라 무리들이 모세에게 반역을 일으켰다가 땅이 갈라져 산채로 생매장 되는 장면을 보면서 미친 듯이 회개하고 다시는 악하고 정욕적인 행동을 하지 않겠다고 하나님 앞에 약속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다시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대학교에 들어가서 어떤 친구가 전도하였는데 그때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전과 똑같이 죄악 된 삶을 계속 살았습니다.

 

몇 년 후에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12:14)말씀이 무거운 벽돌처럼 비비어 목사님을 내리쳤다고 합니다.‘나는 하나님을 보고 싶은데 그러려면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는 거잖아!’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율법주의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율법적인 논리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기 시작했고 그들에게 거룩하게 살라고 요구했지만, 자신도 그렇게 살지 못하고 그렇게 살 수 있는 길도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얼마 후, 기도하는데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아, 거룩함은 네 육신의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내 은혜의 산물이다.’

 

우리에게는 완전한 용서의 은혜가 있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복음이라 죄를 지었어도 즉시 고백하면 주님은 우리 죄를 사하시고 모든 허물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예 죄짓지 않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이 은혜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죄 안 짓고 살 수 있게 안하시는 것이 아니라 못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완전한 용서의 은혜를 교리로만 알면 안됩니다. 주님과의 사귐 가운데 누려야 합니다.

 

3-4절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면,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참으로 알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요, 그 사람 속에는 진리가 없습니다.

 

여기안다는 말은 지식이 아니라 사귐을 말합니다. 어느 정도의 사귐입니까? 주님이 우리 마음에 오실 정도의 사귐입니다.

 

필립 켈러 목사님이 쓰신「목자가 본 시편 23편」이라는 책에, 그가 파키스탄의 어느 사막에 체류하던 날 경험했던 일을 쓰고 있습니다. 외딴 마을에 홀로 있었는데 갑자기 얘기치 않게 쏟아지는 억수 같은 비와 번개를 피하기 위해 급히 흙벽으로 된 조그만 움막을 찾아 들어갔습니다. 몸을 깊숙이 굽혀서 낮은 출입구를 기어 들어간 후에도 한 칸뿐인 어둠침침한 그 움막 속에서 한참동안 더듬거려야 했습니다.

 

움막 안에는 짐승의 분뇨가 타고 있었고, 그 때문에 안의 공기는 매운 연기로 가득 찼습니다. 게다가 그처럼 좁은 공간에 몇 종류의 가축들이 사람들과 같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안의 공기는 가축 분뇨에서 나오는 냄새로 매우 고약했습니다. 한쪽 구석에서는 주인의 딸로 짐작되는 허약해 보이는 십대 소녀가 아기를 안고 웅크린 채 앉아 있었습니다.

 

그는 폭풍우가 흙벽을 때리는 동안 연기나는 불 곁에서 가만히 웅크리고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천장 틈사이로 스며드는 빗물은 벽을 타고 흘러 내렸습니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성령님은 결코 잊을 수 없는 분명한 음성으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사람들에게 찾아왔던 환경이다.’

 

이 음성은 사막의 외딴 마을을 쓸어가는 폭풍 속의 천둥소리 만큼이나 강렬한 힘으로 그의 영혼을 두드렸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오셨습니다. 그것이 사귐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주님과 사귀는 자가 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서 예수님과 사귐을 갖는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요한 사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5절 그러나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속에서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참으로 완성됩니다....

 

사랑의 완성! 정말 가슴떨리는 말씀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사랑하십니까?

 

예수님을 저주까지 하며 부인하였던 베드로를 회복시키시기 위하여 베드로에게 물으신 것은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한 마디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한 가지만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 우리 마음에 오신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지난 금, 토 양일간 일터사역 컨퍼런스가 우리 교회에서 열렸습니다. 주제가일터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라!”였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지요? 일터에서 오래 일하거나 월급 많이 받기만 원하는 사람은 무서워서 기도도 못할 일입니다.

 

이번에 보니 일터를 사명지로 여기는 증인이 많았습니다. 어떻게 그렇지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터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어느 청년이 직장 이야기를 했습니다. 직장에 기독교 핍박하는 직원이 있었습니다. 크리스챤을 무너뜨리는 것이 사명이라고 선언하는 사람입니다. 많은 크리스쳔들이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자신은 그 사람을 전도하는 목표를 세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악한 세상에서 산다는 것은 힘든 것 만이 아닙니다. 죄짓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을 '힘들다, 어렵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죄짓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삶의 목표요 비젼이 됩니다. 하늘꿈학교 건축, 탈북 청소년들의 변화에 감동을 크게 받았기 때문입니다.

 

DTS 수료간증, 김혜성 자매서울에 와서 너무 힘들 때, 집사님이 인도해 주셔서 교회를 다녔지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는 못했어요.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이 육신의 아버지처럼 믿어져요. 이제는 하나님을 그냥아버지라고 부를 거예요!

 

아버지~!”하며 울었습니다.“ 이처럼 주님의 사랑을 알고 나니 변화가 여기저기서 일어났습니다.

 

탈북 청소년들을 위한 하늘꿈학교 이사회, 한 청년이 기도를 받고자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일주일 금식기도에 들어가려고 하는 학생, 진로문제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부모로부터 이어지는 강한 죄의 힘이 제거되기를 기도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학생이 처음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의 완성은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5 ...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음을 압니다.

 

6절 하나님 안에 있다고 하는 사람은 자기도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과 같이 마땅히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주님 안에 거하는 자만이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 같이 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사신 삶의 핵심은 사랑이었습니다. 모든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죄짓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 밑바탕이 사랑이 아니라면 무서운 율법주의가 된다는 것입니다.

 

죄짓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 중에 무서운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것이 사랑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의 종교생활, 율법생활, 가슴 아픈 일입니다. 어릴 때부터 보았습니다.

 

플로이드 맥클랑은 어린 시절 미국 남부 보수적인 교회에서 자랐다고 합니다. 그곳을 다녀왔는데, 정말 전통적으로 예수님을 잘 믿는 지역이었습니다. 큰 교회들도 너무나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곳은 흑인 노예, 인종차별을 수용했던 곳입니다.

 

플로이드 맥클랑은 거기서 종교생활을 하는 이들을 보고 성장하였다고 했습니다. 율법생활, 종교생활을 하는 이들의 특징은 열심이 있으나 무서웠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람들을 사랑하는 모습은 별로 없고,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매우 비판적입니다. 누군가의 결점을 찾아 눈을 부라리며 살핍니다. 말이 무섭습니다.

 

교회에서 모이는 횟수는 너무 많지만 기쁘지는 않습니다. 찬송가를 부르지만 분위기는 가라앉았습니다. 겉으로는 거룩한데 얼마나 사랑을 실천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엄숙하냐가 기준입니다. 예배가 끝나는 시간이 얼굴이 가장 은혜롭습니다.

 

위선적인 모습 때문에 충격을 받습니다. 자신들은 잘 모릅니다. 그런데 이런 분위기에서 살다 보면 자신도 어느덧 그런 모습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끊임없는 죄책감으로 괴로와하고 인정과 칭찬을 받고자 노력하고, 자신의 약점과 잘못을 숨기느라 늘 좌불안석이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기만 해서는 율법주의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교리적인 신앙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면 전혀 달라집니다. 죄짓고 살고 싶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싶어집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을 사랑합니다.

 

유치원 선생님인 자매가 있습니다. 부모님이 다 예수님을 잘 믿지만 예수님을 바라보며 동행하여야 함을 알지 못하였답니다. 그런데 유치원에서 일하다 보니 동료 교사들과 아이들과 힘들 때가 많더랍니다. 마음에 상처를 크게 받을 때도 있고 좌절을 겪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영성일기를 쓰면서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어느 순간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 따뜻하게 느껴지고, 주님이 함께 하심이 느껴지더랍니다. 그러니 변화가 일어나는데, 아이들 하나하나의 영혼이 품어지고 간절해지고 어려움이 올 때도 주님께 묻고 주님의 마음으로 말하고 행동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성경의 위대한 사람들은 다 하나님을 사랑했던 사람들입니다, 에녹도 노아도 아브라함도 모세도 다윗도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사도 요한도 사도 바울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데서 그치면 안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여야 합니다,

 

“24시간 주님을 바라보는 것은 방법이 아닙니다, 사랑입니다예수님을 사랑하면 24시간 주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김병년 목사님, 이번 세미나 때 참가하셨는데 이번에 내신 [아빠 우린 왜 이렇게 행복한거야] 하는 책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사모님께서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9년 동안 전신마비인 사모님을 간병하는 목사님의 애틋함과 사랑, 그리고 사모님 없이 자녀를 교육하고 목회하면서 겪는 어려움을 솔직히 나누시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시는 목사님이십니다,

 

제자훈련 세미나를 마치고 어느 교회 금요기도회에서 말씀을 전하고 왔다고 하시면서 어제 페이스북에 올린 글입니다.

 

나는 밤에 이동하는 것을 싫어한다. 특히 호텔이나 모텔같은 곳을 지나는 것이 싫었다. 아름다운 길도 혼자일 때는 서러움이 되어 돌아오니까. 그리고 언제나 유혹이 마음에 찾아온다.

 

그리움이 마음 한켠에서 베어 올라온다. 그래서 싫다. 그러나 어제는 그런 요란한 호텔 ,모텔의 간판들이 전혀 마음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냥 저기 저런 시설들이 있구나 정도로. 내가 갈 곳은 아니지.

 

24시간 예수님과 동행하는 실제를 그 순간에 경험한 하루였다. 어둠이 스며들도록 허락하는 것이 아니라 어둠속에서 함께 하시는 주님의 손을 붙잡았다. 밤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어둔 내 마음이 무섭다.“

 

여러분 모두도 그저 예수님을 믿는다는 수준에서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가 되어 보십시오. 주님의 은혜로 죄짓지 않고 사는 놀라운 기적, 죄많은 사람들을 오히려 사랑하게 되는 놀라운 기적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소통하는 신앙 /요일2:1-6/ 배의신

2018-02-28 23:24:11

 

요한일서 2:1-6, “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2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3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4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5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6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 들어가는 말

 

생명체의 가장 큰 공통된 특징은소통(疏通, communication)’입니다. 동물들은 말할 필요도 없이 당연히 소통의 방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식물들도 역시 꽃이나 꽃가루, 꽃모양, , 향기 등등으로 소통을 합니다.

 

우리 인간들의 사회는 어떻습니까? 지금의 우리 시대를정보화시대라고 합니다. 하루에도 수많은 정보들이 역시 다양한 채널을 통하여 소통됩니다. 현대는 사회 관계망 구축인 ‘SNS(social network service / facebook, twitter, cyworld, instagram, google+, youtube, cacaotalk 등등)’를 통하여 온 세계가 마치 한 도시에 있는 것처럼 빠른 정보공유와 소통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런 소통의 세계에서는 자기표현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글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모양을 담은 이모티콘이나 그림, 동영상까지 동원하여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여 소통합니다. 이처럼 현대사회는 자기표현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정부와 국민이 소통이 되지 않아 불협화음이 거세지고 있습니다. 불통이 되면 육신이나 영의 모든 삶이 고달프게 됩니다.

 

그런데 정말 소통이 중요한 곳은 영적인 세계입니다. 육신의 세상은 눈으로 볼 수 있거나 혹은 소리로 혹은 감각으로라도 소통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의 세계는 이 모든 육신적인 감각으로 소통할 수 있는 것은 지극히 제한적일뿐 대부분은 영적인 감각에 의하여 소통하게 됩니다.

 

특히 하나님과의 영적인 소통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말씀 혹은 기도로 찬양으로 혹은 드물게는 환상이나 꿈을 통하여 소통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 상호간에도 기도를 통한 영적인 소통이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인의 소통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소통의 주체이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본문 1-2절에서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2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고 하십니다. 영적인 소통을 방해하는 죄를 소멸시키시고 하나님 아버지와 소통하게 하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과의 소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영적인 소통이 무엇이며 왜 필요합니까?

 

현대인의 건강을 위협하는 3대 질병은 암, 뇌졸중(腦卒中, stroke, apoplexy / 뇌출혈, 뇌경색 / 중풍), 급성심경경색입니다. 이 중에서 뇌졸중과 급성심경경색은 혈관이 막힘으로 인하여 나타나는 질병입니다.

 

즉 육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중대 질병은 혈액의 소통이 막히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레위기 17:11절입니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재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육신이 건강하고 싶다면 피를 깨끗하게 유지해야 하고,

 

그 피가 흐르는 혈관의 소통을 원활하게 유지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생명을 위협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소통을 막는 죄입니다. 하나님과의 소통이 막히면 영은 죽게 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버립니다.

 

예레미야 5:25절에서는너희 허물이 이러한 일들을 물리쳤고 너희 죄가 너희로부터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 고 하시며, 시편 66:18절에서는내가 나의 마음에 죄악을 품었더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고 하시며, 로마서 3:23절에서는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영적인 소통이 막히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본문말씀 5절을 봅시다.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그리고 요한복음 15:4-5,10절을 봅시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이 말씀에서 소통이 무엇인지, 소통을 원활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나타내십니다. 영적인 소통은내가 주님 안에, 주님이 내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적인 소통을 원활하게 하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소통이 원활할 때에 신앙의 열매, 삶의 열매가 아름답게 열리게 됩니다. 요한일서 5:4, 14-15절을 봅시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어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혈관이 막혀서 피의 흐름이 원활하지 못하게 되면 육신은 건강을 잃게 되거나 심한 경우에는 목숨을 잃게 됩니다. 영의 소통이 막혀서 하나님과의 교통이 원활하지 못하면 영의 생명이 위태로워지며 육신의 삶까지도 어둡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영적인 소통이 원활한지를 항상 점검하고 유지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영적인 소통을 원활하게 유지할 수 있습니까?

 

영적인 소통을 원활하게 유지할 수 있는 길은 무엇입니까?

 

앞부분에서 잠깐 언급한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영적인 소통을 원활하게 유지할 수 있는 길입니다. 그러면말씀을 지킨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한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내 생활 속에서 실천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실천하는 것은 마치 어린아이가 음식을 먹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어머니 태로부터 막 태어난 아이를신생아혹은갓난아이라고 부릅니다. 갓난아이는 생존을 오직 부모나 혹은 다른 사람에 의존합니다. 스스로는 보호할 능력도 없으며,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시작점에 서 있습니다.

 

이들은 백지 같은 마음의 장소에 자신이 듣고 보고 배우는 것들을 하나씩 기록하고 저장합니다. 그래서 어린아이에게는모방 본능이 있고, 이 시기를모방의 시기라고 합니다. 이처럼 육신적으로갓난아이가 있듯이 영적으로도갓난아이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거듭난 사람은영적 신생아입니다.

 

이들은 말씀이라는 영적인 음식과 기도라는 호흡을 통하여 자라가게 됩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교회에서나 주변의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보고 듣고 배우는 것들을 모방해 가면서 영적인 지식을 쌓아갑니다.

 

이 시기는 생명을 좌우하는 대단히 중요한 시기입니다. 하지만 아직은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5:12절입니다. “때가 오래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 순종하기 위해서는 먼저 영적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아직 말씀의 의미도 이해하지 못하는 영적인 어린아이로서는 말씀을 실천할 수가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수십 년을 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영적으로는 어린아이일 수가 있습니다.

 

영적인 성장은 세월이 흐른다고 저절로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성장의 요건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기도로 호흡하고, 순종으로 활동하는 것입니다. 본문 6절을 봅시다.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실천하며 기도로 주님과 소통하는 사람은 그의 삶에서 나타나게 됩니다.

 

이렇게 자신의 생활 속에서 작은 일부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행동으로 나타냄으로서 영적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어린아이는 젖을 먹다가, 이유식을 하고, 부드러운 음식을 먹고, 나중에는 어떤 음식도 먹을 수가 있을 정도로 성장하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깨닫게 하시는 대로 하나씩 순종하고 실천함으로서 영적으로 장성하도록 자라게 됩니다. 그러므로 작은 일 하나부터 시작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는 대로 순종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여 영적인 성장을 이루게 되면 주님과의 원활한 소통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본문 3절에서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하시며, 요한복음 15:10절에서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연합이며 원활한 소통입니다.

 

어느 초등학교 선생님에게 열두 살짜리 딸이 있었습니다.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그는 딸에게 엄마의 역할까지 해주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학교일 때문에 딸에게 시간을 충분히 내주지 못하는 것 때문에 늘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그는 크리스마스 휴가가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크리스마스 휴가 때는 딸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으리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휴가가 시작된 첫날 딸은 자기 방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는 식사 시간 이외에는 밖에 나오지를 않았습니다. 다음 날도, 또 다음 날도 그랬습니다. 크리스마스가 될 때까지 계속 그랬습니다. 아버지는 영문도 모르는 채 외롭게 지내야만 했습니다.

 

마침내 크리스마스 아침이 되자 크리스마스트리에는 선물이 매달려 있었습니다. 뜨개질로 짠 예쁜 한 켤레의 양말이었습니다. 딸은 두 눈을 반짝이면서 말했습니다.

아빠. 크리스마스가 되기 전까지 이걸 다 짜야 한다고 얼마나 마음 조였는지 몰라요. 제가 방문을 잠그고 지금까지 했던 건 바로 이 뜨개질이었어요. 이젠 다 짰어요. 아빠 양말이에요! 좋으세요?” “. 좋고말고. 얘야. 정말 예쁘게도 짰구나. 고맙구나.”

 

아빠는 딸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딸을 덥석 껴안았습니다. 하지만 그 마음으로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철없는 아이야. 양말은 시장에 가서 사면 되지 않니. 난 양말 같은 것은 원하지도 않아. 너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단 말이야. 난 너와 함께 지내며 너를 사라하고, 너의 사랑도 받고 너의 관심을 사고 싶었던 거야.”

 

아마도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마음도 이럴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인가 하나님을 위하여 거창한 일을 하고, 많은 것을 드리고, 다 좋은 모습을 보이려고 애를 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구약의 황금률이라고 부르는 미가 6:6-8절을 봅시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현대어성경 / (무엇을 가지고 내가 감히 주님 앞으로 나아가며, 무엇을 바치고 내가 높으신 하나님을 경배해야 옳겠습니까? 불에 태워 바칠 번제물들을 들고 가면, 일 년 된 송아지들을 번제물로 들고 가면 되겠습니까? 주께서 수천 마리의 숫양이나 수만 줄기로 흐르는 강물같이 많은 올리브기름을 기뻐하시겠습니까?

 

적의를 품고 반항한 나의 죄악을 씻으려면 나의 첫아들을 희생 제물로 바치고, 그릇된 길로 살아간 내 인생의 허물을 벗으려면 내 몸에서 난 자식을 바쳐야 되겠습니까? 아니다! 주께서 원하시는 것은 이미 네게 알려져 있다.

 

`법을 지켜서 실천하고 변함없는 사랑을 베풀고 네 하나님과 맑은 정신으로 동행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말씀을 순종하여 실천하고, 사랑으로 행하고,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입니다. 이처럼 삶에서 행동으로 나타내는 신앙이 표현하는 신앙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삶에서 나타내지 않으면 아무도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본문 6절에서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매일의 생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로 호흡하며, 깨달은 말씀을 실천하여 하나님과 소통하는 삶이 최상의(best of best) 신앙과 삶을 이루게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매일 말씀 묵상과 기도와 순종의 삶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까?

 

혹시 하나님과 불통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과의 소통하는 생활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최상의 은혜로 충만한 열매를 맺는 삶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과 통하는 사람/요일2:1-11

2006-09-27 15:43:54

 

미국 하바드 대학의 설립자인 남북 전쟁의 영웅 하바드 장군이 미국 서해안 지역을 방문하려 했을 때그의 절친한 친구들이 그를 즐겁게 해 주기 위해서몰래 환영 파티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 친구들은 그 지역의 유명 인사들을 초청해 놓고 수요일 날을 정하여

하바드 장군이 도착했을 때 자신들의 계획을 알렸습니다.

하바드 장군은 친구들의 계획을 듣더니 진지한 얼굴로 이렇게 말합니다.

[ 친구들, 고맙네만

수요일은 중요한 약속이 있으니 목요일로 연기해줄 수 없겠나? ]

그러나 친구들은 펄펄 뛰면서

[ 장군, 이번에는 미국의 유명 인사들을 대거 초청해 놓았으니

만약 파티가 연기되면 유명 인사들과 교제가 끊겨질 건데 어찌하겠나? ]

그러자 하바드 장군이 하는 말이

[ 내게는 유명 인사들과 교제보다 하나님과 교제가 더 중요하다네

당신들이 알다시피 나는 그리스도인이네

나는 주일과 수요일 예배 때에 주님과 만나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나는 주님과의 약속을 깨뜨릴 수가 없어서 그런다네 ]

결국 그 파티는 목요일 날로 연기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사실이 미국 역사책에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과 교제가 더 중요한 사람

오늘도 하나님과 더 잘 통하는 사람, 하나님이 들어 쓰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시고 창1:28절에

[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 고 하시며 복을 주셨는데 사람들이 땅위에 번성하기 시작하니 창6:5절에

[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 할 때에

그래도 하나님의 시선이 집중하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아담의 10대손 노아입니다.

성경은 노아를 소개하면서 창6:9절에

[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했다 ] 고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말은

모든 사람들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단절되었지마는

노아만큼은 하나님과 통하는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 시대에 노아같이 하바드 장군같이

하나님과 통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럼 무엇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단절시킵니까? <2>

1.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첫 번째가 무엇입니까?(1)

1 [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

사도 요한은 부모가 자식에게 애정과 진심으로 말하듯이

당시 교회와 우리들에게 말합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먼저 4절에

[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라 ] 말하며

오늘 본문 1절에서 또

[ 내가 이것을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 합니다.

구원받은 성도의 삶의 특징은 바로 기쁨이 충만한 삶입니다.

이 기쁨 어디서 옵니까?

바로 기쁨의 근원되시는 예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구원받은 성도가 누리는 기쁨의 삶을 뺏어가려고 합니다.

어떻게? 바로 죄를 짓게 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으려고 합니다.

2:14절에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간에 막힌 담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범죄한 후 회개할 때에 시51:12절에

[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

우리가 죄를 짓고 나면

무엇보다도 삶의 기쁨이 없어집니다.

그리고 자원하는 심령,

즉 기도하고 싶은 마음, 예배드리고 싶은 마음,

주의 일 하고 싶은 마음이 소멸되어 버립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들에게 죄를 범치 않게 하기 위해 이 글을 쓴다고 합니다.

성경은 히12:4절에 [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대항하라 ] 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죄 안 지어야지 하고 마음만 먹으면 죄를 안 짓느냐?

그렇지 않다는 것이 현실입니다.

어느 교회 집사님이 도박에 빠져서 교회에 오면

[ 예수님 제발 화투가 눈에 사라지게 하옵소서 ] 기도하면 할수록

교회 예배 마치고 나오면 앞에 가는 차량번호가 5789가 보이니

[ ! 오칠팔 짓고 갑오구나 ] 딱 눈에 들어오더랍니다.

죄 안 지어야지 마음먹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그기에 빠져들어 가서는 안 되지요.

이런 말이 있지요.

[ 공중에 날아가는 새가 가지 위에 앉을 수는 있지만

집을 짓도록 놓아두어서는 안 된다 ] 는 말과 같이

순간, 순간 죄의 유혹이 들어오지만 죄를 지어서는 안 되겠지요.

그런데 감사한 것은 <3>

하나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혹 죄를 짓는다고 해도 죄사함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예비해 놓았습니다.

 

1절 그 다음을 보세요

[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 고 합니다.

2. 그럼 우리가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길은 무엇입니까?(1-2)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다고 합니다.

대언자가 뭡니까?

대언자란 <파라클레토스>라 하는데 보혜사 성령님과 같은 말입니다.

<대언자>변호자, 위로자, 중보자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왜 우리의 <대언자>이십니까?

그분이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시기 때문입니다.

2절에 [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

<화목제물> (휠라스모스)이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막기 위한 제물입니다.

구약에는 짐승의 피를 흘려 화목제물로 드렸습니다.

그러나 짐승의 피로써는

끝없이 죄를 짓는 인간의 죄를 근본적으로 속량할 수 없습니다.

어디 까지나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화목제물의 예표입니다.

7:26절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단번에 자신을 드려

우리가 날마다 제사드릴 필요가 없도록 영원한 화목제물이 되셨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하는 방법은

죄를 자백하면 됩니다.

1:9 [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요 ]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늘 열려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가로막힌 죄를 뉘우치고,

그것을 그분께 자백하는 순간

우리는 새롭게 완전한 교제를 회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을 믿어야만 합니다.

마귀는 옆에 와서 자백하고 회개하려는 우리에게

[ 빈대도 낯짝이 있지 니가 한 번 두 번이가? ] 라고 하면

우리도 맞받아 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마18:21절 이하에서 하신 말씀 <4>

[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가지 하리이까? ]

[ 아니 일곱 번 뿐만이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주라 ]

그러니 마귀가 [ 빈대도 낮짝이 있지] 하거든

[ 아직 490번은 멀었어 ] 하고 주님 앞에 자백하면

하나님과 통하는 길이 열려질 줄 믿습니다.

성경 창28:을 보세요.

야곱이 아버지 이삭과 형 에서를 속이고 도망가다가

루스 광야에서 꿈 가운데서 하나님 만났을 때

하나님이 야곱에게 제일 먼저 보여 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사닥다리 환상인데, 사닥다리 끝이 하늘에 닿았는데

그 사닥다리에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뭘 말합니까?

우리는 사닥다리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줄이 하나님께 닿아있는 사람들입니다.

이제는 하나님과 통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백 그라운드가 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교제가 뜸해 졌다고 생각되거든

하나님 앞에 엎드리시기를 바랍니다.

자백하시기 바랍니다.

2절에 화목제물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시대,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해 피 흘리신 것이며

또 현재 범하고 있는 우리의 죄까지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자백을 통해 속죄함의 은혜와 기쁨을 누리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럼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를 유지하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3. 하나님과 통하는 사람의 삶의 자세는 어떠합니까?(3-6)

그것은 우리가 빛 가운데 거하는 삶인데

빛 가운데 산다는 것은 <주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3 [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

우리가 하나님과 통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우리가 주의 계명을 지키는 삶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누가 주의 계명을 다 지킬 수 있습니까?

주의 계명을 다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의 계명대로 살려고 노력한다는 것입니다.

맞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내 속에 예수의 영이 있는지 한 번 점검해봐야 합니다.

문제는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5>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려고 하지 아니한다는데 있습니다.

4절에 [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

여기서 거짓말하는 사람들은 <영지주의자>들을 가리킵니다.

지금 사도 요한은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하여 반박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자신들만이 영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그들을 주님의 계명을 무시하고 지키지 아니합니다.

그러므로 저들이 하나님과 잘 통한다.

하나님을 잘 안다 하는 것은 거짓말이란 말이지요.

오늘도 말로는 혼자 예수 잘 믿는 것같이 떠 벌리면서도

주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교인들

한 마디로 하나님 안다고는 하지만 하나님 만나지 못한 사람입니다.

헬라어안다는 말 <기노스코>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경험적인 지식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의 경험>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러니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주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교인은

아직 하나님 만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 만나는 체험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을 체험하게 되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 말씀이 듣기워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5절 보세요.

5 [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

사랑하게 되면 포로가 되고 맙니다.

사랑에 이끌리면 그 분의 말에 이끌리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만나 하나님을 체험하게 되면

그때부터는 주의 말씀을 듣게 되고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린다면

하나님과 통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럼 사도 요한이 말하고자 하는 계명이 무엇입니까?

4. 옛계명과 세계명이 말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7-8)

요한이 말하고자 하는 주의 계명은 하나님의 말씀 전체를 가르치기도 하지만

본문에서는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랑을 강조하기 위해서 사도 요한은 7-8절에서 <6>

옛계명과 새계명을 대조해서 말하고 있는데

내가 너희에게 새로운 계명을 쓰는 것이 아니라

전에부터 내려오는 옛계명을 말하는 것인데

그러나 다시 너희에게 강조하는 뜻에서 새계명이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롭게 완성되었기 때문에

새계명을 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헬라어에는새롭다라는 단어가 두 개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네오스이고 다른 하나는카이노스인데,

네오스는 시간적으로 새로운 것이고,

카이노스는 질적으로 새로운 것입니다.

네오스란 말은 주로 물질적인 것에 붙여지는 말이지만

카이노스는 영적인 것에 부쳐지는 말입니다.

물질적인 것은 시간이 지나면 헌것이 되고 또 새것이 나옵니다만

질적인 것은 변화를 통해 새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요한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

구약에서도 하나님의 계명으로 전해내려 왔지만

새계명 - 카이노스란 말을 쓴 것은 질적으로 다른 사랑,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새계명의 사랑을 요13:1절에서는

[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 하고 감탄을 합니다.

어떠한 사랑 - 포타포스 -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일을 말할 때

이 사랑이 벌써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비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교통하는 사람은

이 사랑의 빛이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말 있지요. 맛을 봐야 멋있게 산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십자가의 사랑을 체험해야만

사랑을 베풀며 살아가는 멋있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통하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사람 즉 하나님과 통하는 사람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5. 하나님과 통하는 사람의 삶의 특징이 무엇입니까?(9-11)

빛 가운데 거하는 사람 즉 하나님과 통하는 사람은

9-11절에서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아직도 미워하는 형제가 있으면

이 빛을 모른체 <어두운 가운데 있는 사람>입니다.

빛 가운데 사는 사람은 형제를 미워할 수 없습니다. <7>

하나님과 통하는 그 어떤 사람과도 통할 수 있습니다.

사도요한이 자녀 같은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진정 바람이 있다면

32절에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 하노라 ]

어릴 때 부흥회 하면 강사들이 자주 외치던 말씀

신통하면 물통, 인통한다는 말 - 많이 들었지요.

어떤 강사는 신통방통이라 해요.

신통하면 모든 것이 형통하다는 말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요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통하는 사람은 형제들과도 통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통하는 사람이라면 형제와도 담 쌓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1) 10절에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 형제를 미워하고 형제와 담 쌓고 사는 사람은

아직도 그 속에 거리낌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 거리낌 <스칸달론>이란 말 - 꼭 마음에 두시기 바랍니다.

이 말은 <, 올무, 함정>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스켈달론은 꼭 내게 덫이 되고 올무가 됩니다.

왜 형제를 사랑하고 원수까지도 용서해 주라고 합니까?

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스켄달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내가 올무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안산에 대형교회 담임목사님의 설교 가운데 이런 간증이 있습니다.

남편이 딴 여자와 눈 맞아 아내와 삼남매를 버리고 가버렸습니다.

갈 곳 없는 그 아내는 서울에서 안산으로 이사와

전도 받아 그 교회 교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온갖 모진 고생 다해가며 삼남매 모두 대학을 마치게 했고

20여년 교회 섬기며 권사 직분을 받아 충성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50세 중반부터 신부전증이 나타나

결국 합병증으로 임종을 맞게 됐습니다.

목사님이 마지막 병상 심방을 갔는데 심방 간 목사님께 용서를 빌더랍니다.

[ 목사님은 나의 남편을 용서하라 하셨으나 나는 도저히 용서가 안 돼 엊그제 찾아온 그를 저주하며 쫓아 보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을 뵙고 이제야 그를 용서합니다 ] 하고는 눈을 감더랍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하나님께 항의를 했답니다.

하나님, 왜 죄진 사람은 저토록 건강하고 형통한 데

억울하게 버림당한 권사님은 고통으로 평생 살게 했습니까.

하나님의 응답이 마음에 이렇게 와 닿더랍니다. <8>

[ 죄 지은 사람의 죄보다 믿는 사람이 용서해주지 못한 죄는 더 크다. 용서는 상대를 위한 것이 아니라 실상은 너 자신을 위한 것이다.

용서란 네 마음을 고통을 제하는 것이다 ] 라고 하더랍니다.

성도 여러분 ! 비록 내게 어떤 손해와 상처를 입혔다 할지라도

그 사람에게 대해 한을 품으면 그 한이 되려 내게 덫이 되고 올무가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았기 때문에

형제를 용서하고 불상히 여기는 사랑의 마음을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2) 그리고 아직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11절에 <눈 먼 사람>이라고 합니다.

11 [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 ]

눈먼 사람 - 모든 것이 막혀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통하는 사람은 사람들과도 통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이번 한 명숙 총리에게 기대를 걸어봅니다.

한명숙 총리가 국민일보에

내게 못박는 사람도 사랑으로 감쌀 것이라는 제하에 기사가 실렸습니다.

한 총리가 3 26일 주일날 일산의 한 교회에서 예배드렸는데

그 교회 담임목사님이 당시 한 총리후보를

단상쪽으로 불러 선물상자를 건넸습니다.

상자 안에는 웬 말뚝만한 쇠못 하나가 들어있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쓰였다고 추정되는

15㎝ 정도 길이의 육각못을 실물 크기로 재연한 것입니다.

돌아와서 한 후보자는 총리실 간부들에게

[ 목사님이 못을 준 것은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내게 못을 박는 사람들도 포용하라는 뜻일 것 ] 이라며

[ 그 점을 가슴 깊이 받아들이고 되새기면서 일할 각오 ] 라고 밝혔습니다.

 

내게 못을 밖는 사람도 포용할 수 있는 마음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통하는 사람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혹 우리 마음에 덫이나 올무가 없는지

혹 나의 눈을 멀게 하는 미움이 없는지

날 위해 십자가에 피흘려 돌아가신 주님 앞에 자백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며 형제를 사랑하는 삶을 사는

하나님과 통하는 사람들 되시기 바랍니다.

13:14

[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

(김성덕 목사)

 

 

 

 

기적에 담긴 일상성/16:2-5,요일2:1-4,9:12-17

2004-01-10 22:33:14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종살이할 때에 이 사람들이 제일 원했던 것은 자유라는 것이었습니다.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지만 종살이를 하던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했던 것은 바로 자유를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출애굽 사건은 자유를 얻기 위한 사건입니다. 아무리 배불리 먹어도 자유가 없으면 인간에게 행복은 없습니다. 행복이 없더니 하나님이 주신 축복도 없는 것 갔습니다. 자유를 찾기 위해서 홍해를 건넜습니다. 홍해를 건너는 기적 같은 사건이 이스라엘 백성의 뇌리에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자유는 해방과 같습니다. 홍해가 갈라진 기적은 자유와 해방의 사건입니다

 

. 일단 자유를 얻고 나면 인생은 행복해집니까? 당분간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자유의 대가가 너무나 크다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야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광야에는 고기가 끓는 가마솥이 없습니다. 물도 없습니다. 자유를 찾아 왔지만 자유가 주는 대가는 너무 큽니다. 배고파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외친 소리는 하나입니다. 먹을 것을 달라. 많은 사람들이 옛날 고기 가마솥 가에 앉아서 고기를 뜯어먹던 옛 시절이 그립습니다. 막상 돌아가자는 말은 아니나 옛날이 그립습니다. 자유에 더하여 먹을 것을 주십시오. 사상의 자유도 중요하고 육신의 몸을 살찌우는 먹는 자유도 중요합니다

 

. 홍해를 건너 것이 기적이라고 하면, 자유를 얻은 배고픈 백성에게 하나님은 또 하나의 기적을 허용하십니다. 메추라기 떼를 하늘에서 보낼 테니 하루에 먹을 만큼만 가져가 먹고 그 이상에 가져가는 것은 전부 썩게 하라. 하늘에서 메추라기가 올 터이니 그것을 먹고 자유를 만끽하십시오. 모세의 분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렇게 경험합니다. 출애굽에 있었던 자유라는 기적을 얻었고 광야 땅에 와서는 자유 얻은 백성들이 너무 배고파서 메추라기라고 이름하는 먹을 것을 기적으로 얻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두 가지를 기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보면 그것은 기적이 아닙니다. 당연히 사랑하는 백성에게 베풀어야 할 하나님의 당연한 분깃이었습니다

 

. 이때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합니다. 우리가 주릴 때 먹여 주시는 하나님, 우리가 괴로울 때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 우리가 억눌려 있을 때 해방시켜서 자유를 주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래서 생겨난 말이 "임마누엘",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한 우리는 외롭지 않습니다. 이 기적의 이야기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기적입니다. 기적이 내리시면 우리는 복 받습니다. 이것이 구약성서 전체에 쓰여져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오셔서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실 때에 이스라엘 백성의 판단 기준은 단 한가지 - 당신은 기적을 행하실 수 있습니까? 그렇다고 하면 우리가 임마누엘 하나님의 아들임을 우리가 믿겠습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는 기적을 보여 주셨습니다. 첫 번째 기적은 병자를 고치는 기적입니다. 오늘 요한 복음의 말씀대로 소경 하나가 예수께로 찾아 왔습니다. 소경에게 흙을 가지고 침을 뱉어서 그 흙을 눈에 바르고 손으로 만지면서 이제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소경이 나았습니다.

 

소경이 낫는 것을 보고 이스라엘 백성은 이것도 기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기적이 안식일 날 생겨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일 날 생겨난 기적을 보고 기적을 중요시하기보다는 안식일 법을 위반한 것을 다시 문제 삼았습니다. 예수의 생각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를 갈라지게 해서 건져 놓았더니 먹을 것이 없다고 다시 이집트로 돌아가려고 했던 백성, 그래서 메추라기 떼를 주셨는데, 하나를 얻으면 또 불평하고, 다시 하나를 주면 또 불평하고, 이 백성의 불평이 예수에게까지 옮아 왔습니다. 소경을 고쳐주신 기적을 보여주었더니 이제는 왜 안식일에 고쳐 주었냐고 난리입니다

 

. 예수에게 마지막 불평은 이렇게 나옵니다. 예수께서 마지막 십자가에 달려서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는 불평입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의 아들이 어떻게 십자가에 매달려 이렇게 처참하게 죽을 수 있습니까? 왜 십자가에서 떼어 내리지 못하고 죽어야만 합니까? 우리한테 기적을 보여 주십시오.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내가 보여 줄 수 있는 기적은 십자가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내가 죽고 내가 피를 흘려서 죄에 빠진 여러분들을 구하는 것 말고 내가 달리 기적을 보여 줄 수 없느니라

 

. 이스라엘 백성은 예수에게서 십자가의 기적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는데 동의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기적을 당대에 보이지 않으시고 삼일이 지난 연후에야 부활을 통해 기적을 보여 주셨습니다. 부활 사건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한다고 하면, 더 이상 기적은 사람에게 준 축복은 아닙니다. 무슨 기적을 또 보여야 하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오늘 무슨 기적을 원하십니까?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한 기적 말고 또 무엇을 원하십니까?

 

 

 

뉴욕과 파리를 왕복하는데 6시간 반이 걸린다고 합니다. 그 시간을 더 줄이기 위해서 콩코드 기가 만들어 졌습니다. 이 비행기가 추락한 사고가 났습니다. 사람들 속에 불신이 생깁니다. 콩코드 기는 다시는 이용할 수가 없겠습니다. 뉴욕과 파리를 왕복하는데 보통 비행기로 6시간 반, 콩코드기로 3시간 반이라고 그러는데, 더 줄일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까? 그래서 과학자들이 연구한 결과 최근에는 다중 접속점이라는 것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저는 과학자가 아니라서 잘 모르겠습니다. 두 점을 연결하는 가장 짧은 거리는 직선 거리입니다. 그러나, 직선이 아무리 가까워도 선은 선입니다.

 

두 개의 점이 평행으로 있는 한, 만나지 못한다고 한다면 그 거리는 아직도 멉니다. 그래서 발견 한 것이 두 지점을 구부려서 접목시킵니다. 종이 한 장에 있는 두 점을 가운데 접어서 두 점을 접목시킵니다. 접목시킨 두 점에 구멍을 뚫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구멍 속으로 벌레가 왔다갔다합니다. a 라는 점에 있던 벌레가 구멍을 통해서 b 라는 점으로 갑니다. a 라는 점이 있던 평면의 세계와 b 라는 점이 있던 평면의 세계가 전혀 다릅니다. 제가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평양과 서울의 거리가 얼마나 멉니까?

 

무엇으로 가야 가장 가깝습니까? 이산 가족의 만남은 어디에서 만나야 가장 가깝습니까? 엉터리 같은 이야기 같지만 평양과 서울이 평행선을 달리는 한, 그 거리가 아무리 좁아진다고 하더라도 거리는 거리로 남을 겁니다. 어떻게 하면 통일되는 기적이 생기는가 하면 평양과 서울이 합쳐져야 합니다. 삼팔선을 가운데 두고서 우리 지도를 접어 보십시다. 지도를 딱 접어서 한쪽이 평양이 있는 북한의 평면, 뒤에는 서울을 중심으로 하는 남한의 평면, 두 개가 겹치게 해서 서울과 평양에 구멍을 뚫어 보십시다. 평양을 다니는 사람이 구멍을 통해서 서울로 올라와 보고 서울을 통해 내려간 사람이 평양을 가보고.. 두 개가 전혀 다른 세계이긴 하나 두 개의 거리는 짧아졌습니다.

 

 

 

공간이 합치지 못하면, 사상이 합치지 못한다고 하면 평양의 마음과 서울의 마음은 두 점이 만나듯 합쳐질 수가 없습니다. 기적을 일으키는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는 하늘이라는 공간과 땅이라는 공간이 평행으로 달리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서 합치게 하시려고 합니다. 홍해가 갈라진 사건은 하늘의 능력과 땅의 바다가 만난 사건입니다. 눈먼 환자에게 예수께서 흙을 바른 사건은, 하늘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직접 손을 가지고 땅의 사람인 환자를 만져 주신 사건입니다. 두 공간이 합쳤습니다.

 

그랬더니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땅에서는 눈 먼 자가 눈 뜨이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죄악으로 물든 세상에 하늘의 정의가 와서 공간이 합쳐졌더니 이 땅이 구원받는 세계가 되었습니다. 기적이라는 이야기가, 어제의 기적이 오늘의 기적은 아닐 수 있습니다. 새가 날라 다니는 것을 기적으로 보았지만 지금은 비행기가 새처럼 날라 다닙니다.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어제의 기적 같지만 오늘은 일상 생활이 되어 버릴 수 있습니다. 과학도 의술도 공간의 합침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두 공간이 만나는 지점이 있으면 그 곳에서는 항상 기적이 나타납니다. 오늘 예수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서 가나안 땅에 온 것도, 가나안 땅에 와서 자유를 누리며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도 하늘과 땅이 만났기 때문입니다. 내가 온 것은 하늘과 땅을 하나로 합치러 왔습니다. 물리적으로 증명이 안 돼도 과학적으로 증명이 안 돼도 마음으로 증명해 보십시오. 하늘의 마음과 땅의 마음이 만나면 그 곳에는 반드시 혁명적 사건이 생겨납니다. 변화라는 사건이 생겨납니다. 그것을 기적이라고 우리는 이름했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보면 그것은 기적이 아닙니다. 당연히 이루어야할 임마누엘의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임마누엘. 그렇게 고백하는 순간 하늘과 땅이 합치는 기적이 생겨납니다. 아픈 사람이 낫고 병든 역사가 의롭게 됩니다.

 

 

 

이 기적을 이스라엘 백성은 지금도 요구를 합니다. 우리도 요구합니다. 이 기적을 하늘과 땅이 만나는 기적이라고 생각하신다고 한다면 이 기적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 가까운데 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권세를 쥐었습니다. 내 손아귀에 하늘의 권세와 땅의 권세가 함께 있습니다. 이 손을 가지고 앉은뱅이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이 손을 가지고 불의한 세상을 정의로운 세상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이 손을 가지고 침을 뱉어서 흙을 바르면 눈먼 사람이 낫습니다. 여러분들의 병든 마음을 내가 고칠 수 있습니다. 내가 바로 하늘과 땅을 합친, 두 접점이 만난 공간의 중심입니다.

 

이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중심에는 십자가 사건이 있습니다. 이 십자가 사건을 통과하는 사람은 부활의 생명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과학적으로 만나는 공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만나는 기적적인 공간에 우리가 살아갑니다. 기적을 만난 사람들, 하나님의 능력을 받고 성령을 받은 사람들,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뭉쳐야 그 속에 참 하나님 임마누엘의 하나님의 역사가 있습니다. 예수의 중심 속에는 십자가라는 것이 있습니다. 십자가 없이는 하늘과 땅이 만나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여러분은 하늘을 끌어 않으시길 바랍니다. 그것이 귀절입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은 항상 땅을 끌어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끌어안고 하나님은 땅을 끌어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껴안아서 하나님 같은 사람을 만드시고 사람은 하나님 품에 안겨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평행선으로 달리시지 말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공간과 사람의 공간이 십자가에서 만나는 기적 같은 역사가 매일매일 여러분 생활에서 있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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