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사11:1-10/ 옥한흠목사
2014-11-11 20:07:45
절망은 꿈을 낳는다
우리 교회에서 청소년들을 위해서 7-8년동안 땀과 눈물을 쏟으며 수고한 이찬수 목사님이 최근에 청소년 사역을 정리한『YY성장 보고서』란 책을 내었습니다. YY는 "Youth Yahoo"(유쓰 야후)인데 "청소년 만세" 라는 뜻입니다.
제가 그 책을 받고서 첫 장부터 마지막까지 다 읽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이 청소년들, 중고등부 학생들을 데리고 씨름하는 우리 교역자들의 고민이 무엇일까? 또 청소년들이 가슴 속에 숨기고 있는 많은 갈등과 고통이 어떤 것일까?
이런 것을 좀 알고 싶었고, 사랑의교회가 정말로 이 어린 청소년들을 제대로 교육하고 신앙으로 바로 키우고 있는가에 대해서 제 자신이 좀 알고 싶은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책을 죽 읽는데 어떤 때는 가슴이 너무 아프게 저미어 오는 때도 있었고, 어떤 때는 감격스러워 눈시울이 뜨거워질 때도 있었고, 어떤 때는 내 자신이 은혜를 받는 그런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그 책 가운데 우리 교회 어린 중학생이 이 목사님에게 보낸 편지가 한 토막 인용이 된 것을 보았습니다. 제가 그 편지를 약간 읽어 드리겠습니다.
"목사님, 세상사는 게 너무 힘들고 복잡해서 편지를 드립니다. 요즘 유명하다 똑똑하다 훌륭하다 하는 어른들이 많지요. 이 어른들이 잘못을 저지르는 것을 바라보는 저희들 마음은 착잡할 따름입니다.
사는 게 뭔지 정말로 미쳐버릴 것만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절 왜 이 험악한 세상에 보내셨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이 세상이 너무 너무 싫습니다. 미쳐버릴 것만 같아요. 터져버릴 것만 같아요.
때로 방 안에 틀어박혀 울어도 보고 소리도 질러 보지만 제겐 아무런 변화도 오지 않아요. 특히 우리나라가 싫습니다. 운이 너무 없었나 봅니다. 많고 많은 나라들 중 한국에 태어난 게 원망스럽기만 합니다. 이렇게 썩어 빠진 나라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 글을 읽으면서 제 마음이 얼마나 아팠는지 모릅니다. 몇 년이나 살았다고 벌써부터 이러는가? 생각하니 마음이 더 아팠습니다. 그리고 이 중학생의 마음 속에 있는 고통과 절망이 수십 년 인생을 산 저에게도 있다는 것을 새삼 실감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속으로 그랬습니다. '너만 아프냐? 나도 아프다. 너만 피해자냐? 나도 피해자고, 너만 운이 없냐? 나도 운이 없지. 누구한테 우리가 돌맹질을 해야 할까?
너는 어른들이 잘못해서 세상이 이렇다고 하지만, 네가 어른이 되면 네 자녀들이 똑 같은 소리를 할 텐데. 이게 세상이지. 이런게 세상이야.' 그런 독백을 저 혼자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생의 깊은 절망을 또 한번 경험합니다.
뉴스 시간에 잠깐 나온 이야기입니다. 전부는 아니겠지만, 이번 여름에 여고생들이 봉사활동을 하고 그 봉사 활동 기록을 학교에 내나 봅니다. 그래서 그것이 성적에도 반영이 되고, 대학 입시에도 영향을 주는 보고서로 알고 있습니다.
15명의 여고생이 보고서를 학교에 냈는데 놀랍게도 그 가운데 10명이 전부 허위 보고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들 왜 봉사도 안한 것을 했다고 속이고 20여 시간이나 했다고 장황하게 기록하고 도장 찍어 왔니?"
그랬더니 그 학생들의 대답이 기가 막혔습니다. "우리 어머니가 가서 다 찍어 와서 만들어 줬어요." 어린 딸에게 거짓말을 눈 하나 깜짝 하지 아니하고 가르치는 현실을 대할 때 우리는 절망합니다. 정말 절망합니다.
19명의 어린 생명을 앗아간 씨랜드 참사는 업주와 공무원, 시공회사가 결탁한 총체적 부조리라고 흔히들 말을 합니다. 서로 몰래 주고 받은 몇십 만원, 몇백 만원의 불의한 돈이 19명의 어린 생명을 죽인 것입니다.
많은 가정에 평생동안 아니 영원히 싸매지 못할 깊은 상처를 안겨주었습니다. 너무너무 화가 난 필드하키 국가대표 출신인 아이 엄마는 훈장까지 국가에 반납하고 어느 나라로 이민을 간다고 합니다. 한국이 싫다는 것입니다.
책임없는 지도자, 무책임한 지도자들에게 더 이상 자기 자식을 맡기고 싶지 않고 이 거짓된 세상에 자녀를 남겨 놓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또 한번의 절망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꼭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는 절망 중에서 꿈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절망은 꿈을 잉태하는 요람입니다. 특별히 저에게는 그렇습니다. 저도 세상이 싫습니다. 살면 살수록 더 역겹습니다.
구역질이 날 정도입니다. 이렇게 세상에 대해서 절망하기 때문에 저에게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꿈이 있습니다. 환상이 있습니다.
절망에서 꿈을 가진 사례는 여러 가지 찾을 수 있습니다. 저의 마음에 제일 먼저 떠 오르는 사람이 있다면 마틴 루터 킹 목사입니다. 킹 목사는 노예들에게 자유를 선언한 선언문이 발표 된 지가 백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미국 이곳 저곳에서는 피부 색깔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흑인들 대부분이 정당한 사람 대우를 받지 못하는 현실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흑인들이 사회의 천덕꾸러기가 되고, 빈민굴에서 뒹굴고, 범죄에 빠지는 것을 보았을 때 킹 목사는 너무 절망하였습니다. 너무 절망을 하고 또 절망을 하다가 그는 그 절망 속에서 꿈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저격 당하기 전 그가 한 유명한 감동적인 연설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연설이었습니다. 이 꿈은 절망 속에서 찾은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피에 물든 죠지아의 언덕에서 옛적 노예의 아들과 옛날 노예의 주인의 아들들이 형제와 같이 사랑을 나누며 한 밥상에 둘러 앉아 같이 식사를 할 날이 올 것이라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 나의 어린 네 자녀들이 그들의 피부 색깔이 다르다고 해서 차별대우 받지 않고 그들의 인격으로 판단 받는 세상이 올 것이라는 꿈이 나에게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가슴에 감동이 저미어 옴을 느낍니다. 절망 가운데서 꿈을 가진 사람의 외침입니다.
이사야가 본 꿈
오늘 우리가 읽은 이사야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11장을 기록하고 있는 이사야는 아직 젊은 청년입니다. 그가 젊은 청년 시절에 그 나라는 한 마디로 소망이 없는 나라였습니다. 앞을 보나 뒤를 보나 위를 보나 아래를 보나, 온통 나라가 썩을 대로 썩어서 소망이 없었습니다.
여러분이 집에 돌아가셔서 이사야 5장8절 이하를 한번 읽어보십시오. 소위 "화있을찐저 시리즈"란 것이 나옵니다. 저주와 심판의 시리즈입니다. 그 당시의 사회상을 적나라하게 적어 놓고 있습니다.
부동산으로 축재하느라고 혈안이 되어 있는 지도층들, 아침부터 저녁까지 술과 여자와 함께 인생 즐기느라 정신 못 차리는 부유층들, 거짓이 판을 치고 공의가 뒤틀려 선악을 분별할 수 없는 혼탁한 사회상, 이로 인해서 힘없는 사람들은 짓밟히고 착취당하고 고통하고 절망하는 사회였습니다.
의롭게 살기를 원하는 소수의 사람들은 이미 세상을 등지고 입을 다물고 침묵하는 세상이었습니다. 엄청난 고통이 사회 밑바닥에서 흐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도 이런 유대 나라를 보시고 진노하셔서 북쪽 이스라엘은 앗수르를 들어서 징계하시고, 남쪽 유대는 바벨론을 사용하여 징계하시려고 준비하고 계시는 것을 젊은 청년 이사야가 보았습니다.
유대 나라의 꼴은 도끼를 가지고 가지를 자르고 그 다음에 나무 둥치를 찍어서 이제는 앙상한 그루터기만 남은 것 같은 꼴이었습니다. 그 말이 10장34절에 나옵니다. "철로 그 빽빽한 산림을 베시리니 레바논이 권능있는 자에게 작벌을 당하리라" 여기서의 레바논이나 빽빽한 산림은 모두가 유대 나라를 상징하는 단어입니다.
철로, 도끼로 톱으로 빽빽한 산림처럼 요란하게 서 있는 유대 나라이지만 하나님께서 한번 작벌하니 그루터기만 남은 것입니다. 나라의 형편이 그 모양이 되어 있습니다. 아무런 소망이 없습니다. 이사야는 이런 조국을 보고 절망하고 가슴 치고 답답해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역시 절망 가운데서 꿈을 꾸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꿈을 보여 주셨습니다. 앙상한 그루터기에서 싹이 납니다. 11장1절입니다. 앙상한 그루터기에서 싹이 나더니 그것이 가지가 되고 그 가지에서 잎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습니다.
하나님이 이사야를 보고 "얘야, 이것 보느냐? 이 잎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 맺는 이 가지가 뭔지 아니? 다윗의 후손으로 이 세상에 태어날 메시아 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니라." 라고 하나님이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젊은 이사야는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주님이 말씀합니다.
"그 나라, 예수 그리스도가 다스리는 그 나라가 임하면 네 눈 앞에 펼쳐진 이 혼탁하고 부패한 나라는 사라진다. 그리고 유대 나라만 이와 같이 신천신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온 세계가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신천신지로 바뀔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10절에 있습니다.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시면" 하는 말입니다. 다윗의 후손인, 이새의 후손인 예수가 이 세상에 오시면 그가 기를 높이 세우리라고 합니다.
구원의 기, 복음의 기, 하나님 나라의 깃발을 높이 세웁니다. "그 기를 높이 세우면" 그 다음에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열방이 주에게로 돌아오리니" 대한민국을 위시하여 중국과 일본, 아니 온 세계 열방이 예수 그리스도의 깃발을 보고 다 찾아온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다스리는 나라가 드디어 눈앞에 펼쳐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사야에게 그 환상을, 그 꿈을 주셨습니다.
완전한 통치자, 완전한 나라
하나님의 나라를 다스릴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통치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에게 그 예수 그리스도가 얼마나 완벽한 통치자인가를 2절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여호와의 신에 감동된 분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지도자로서 꼭 갖춰야 될 지혜와 총명을 가진 분이요, 모략과 재능을 가진 분이요, 지식과 여호와 경외를 가진 완벽한 지도자라는 것입니다. 완벽한 통치자입니다.
그 통치자가 다스리는 나라이기 때문에 지도자를 잘못 만나 고통하고 상처 입고 억울한 일을 당하는 일은 이제 주님의 나라에는 있을 수가 없을 것이라는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을 때 이사야가 얼마나 황홀했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이렇게 완전히 갖춘 통치자가 다스리는 나라이기 때문에 그 다스림 자체가 완전할 수밖에 없다고 말씀합니다. 5절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나라를 다스릴 때 공의로 그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몸의 띠를 삼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도자에게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공의입니다. 의와 불의를 바로 분별하는 것입니다. 선과 악을 정확하게 구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은 선대로 악은 악대로 다스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공의입니다.
그러나 공의만 있어서는 안됩니다. 성실이 함께 따라야 합니다. 공의롭게 나라를 다스리려고 해도 지도자가 정직하지 못하고 성실하지 못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통치자냐? 공의와 성실을 허리띠처럼 매고 나라를 다스리는 분입니다. 여러분 허리띠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여자분 보다 우리 남자들에게 더 중요합니다.
아무리 점잖은 사람이고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라도 허리띠가 풀어져 있다든지 허리띠를 안 매고 나오면 이상하게 쳐다봅니다. 그 사람의 인격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봅니다. 허리띠는 항상 정확하게 매고 다녀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다스릴 때 항상 공의와 성실로 허리띠를 매고 다스린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공의롭게 나라를 다스리기 때문에 공과 사가 분명하고, 모든 면에서 치우침이 없는 통치를 하신다고 합니다. 3절에 재미있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치 아니하며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치 아니하며"
정에 매여서 이리도 가고, 저리도 가고, 이거 해 주고 저거 해주고 하다가 보면 공의도 없어져 버리고 나중에는 선이 악이 되고 악이 선이 되는 것을 우리는 현실에서 많이 봅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은 일을 절대로 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악한 자는 악한대로 다루시고, 선한 자는 선한 대로 대접하십니다. 그 땅에 억울함을 당하는 자가 없도록, 고통을 당하며 해를 입어서 한을 풀지 못해서 하늘을 향해서 하소연하는 사람들이 생기지 않는 나라를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이 완벽하게 통치를 하시기 때문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여러분, 6절 이하는 너무 너무 아름다운 서사시가 나옵니다. 성경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서사시가 또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 때에" 그 때는 "예수님이 다스리시는 그 나라가 임하면" 하는 뜻입니다.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완전히 동화의 세계입니다. 저는 이 본문을 이렇게 봅니다.
"이리처럼 간사한 인간, 사자나 표범처럼 사나운 인간, 곰처럼 미련한 인간, 독사처럼 악독한 인간이 발을 붙일 수 없는 나라, 그 나라가 어디인가? 예수님이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아무리 독사 같이 독한 사람도 변화를 받아 어린아이처럼 순진한 자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다."
그 뿐 아니라 독사가 어린아이의 손을 깨물어 죽이거나 사자가 어린 양을 덮쳐서 찢어 놓는, 자연이 인간을 공격하는 일이 주님의 나라에는 이제는 더 이상 일어나지 아니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자연과 인간, 인간과 자연이 서로가 화목해서 함께 손잡고 푸른 초장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이 서사시가 지금 설명하고 있어요. 땅이 한번 꿈틀하니까 터키에서는 수만 명이 죽었습니다. 이런 것이 자연이 인간을 공격하는 현상인데, 이런 살벌한 죄악과 저주들이 더 이상 따라오지 못하는 나라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어떤 결과가 옵니까? 9절입니다. 이 구절은 꼭 외우십시오.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주님이 다스립니다.
악한 자들이 선하게 바뀝니다. 자연과 인간이 화목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이 신천신지가 임하면 그 나라 어느 곳에서도 해를 입는 자도 없고 해를 주는 자도 없고, 상처를 당하는 자도, 상처를 받는 자도 없게 됩니다.
이런 나라가 도래할 것입니다. 이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완전한 통치자, 완전한 통치가 가능한 그 땅이, 그 나라가 임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꿈입니다. 현실을 보고는 우리가 절망을 합니다만 그 절망 중에 우리가 이런 꿈을 갖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비전이요.
온 세상을 덮는 여호와를 아는 지식
어떤 때는 이 나라가 빨리 왔으면 좋겠다는 조바심이 납니다. '하나님, 빨리 이런 나라가 왔으면 좋겠습니다. 왜 지금은 안됩니까?'하고 우리가 조바심을 냅니다만, 그러나 9절 말씀을 조용히 묵상하면 중요한 한 가지 요건이 갖추어져야 그 나라가 임한다고 합니다.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온 세상에 충만하게 될 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비행기를 타고 미국을 갈 때 다섯 시간, 여섯 시간, 일곱 시간, 심지어 여덟 시간 태평양을 건너가면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물만 보입니다. 태평양을 가득히 채우고 있는 물, 빈틈없이 채우고 있는 그 망망한 대해의 물을 보면 감동이 밀려듭니다. 바로 이와 같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온 지구상에 온 세상에 가득할 때 예수님께서 다스리시는 그 나라가 우리 눈 앞에 펼쳐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는 게 뭡니까? 막연히 모든 사람이 다 갖고 있는 신의식입니까? 아닙니다. 그런 것은 마귀도 갖고 있습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약2:19) 야고보가 비꼬는 말로 하신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란 막연히 하나님이 계신다라는 그런 의식이 아닙니다. 그러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무엇입니까? 입으로 "주여, 주여" 하는 믿음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거짓된 지식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여호와를 아는 지식은 요한복음17장3절에 기록된 그 지식입니다. "영생은 이것이니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라." 바로 이 지식입니다.
여호와를 아는 지식을 우리는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주시요, 나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는 '고백적 지식'입니다. 두번째는 예수 그리스도가 나 같은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 하셔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만유의 주가 되셨다는 것을 믿는 '교리적 지식'을 말합니다.
세번째로는 성령을 통해서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시며 나는 그분과 함께 동행하고 있다는 것을 믿는 '체험적 지식'을 말합니다. 또 네번째는 이렇게 영광스러우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그 은혜에 너무 감격하여 주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며 평생을 주님께 헌신하겠다고 하는 결의가 보이는 '실천적 지식'입니다.
이렇게 고백적이요, 교리적이요, 체험적이요, 실천적인 하나님을 아는 지식,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 이것이 바로 여호와를 아는 지식입니다. 이 지식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갖게 되면 사람이 바뀝니다. 근본적으로 바뀝니다. 사자가 어린아이가 되듯이 이리가 어린 염소가 되듯이 근본적으로 바뀝니다. 그리고 사람이 바뀌니까 삶도 바뀝니다.
이런 사람이 온 천지에 가득하게 되면, 이런 사람들이 온 천지에 가득해서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충만해지면 예수 그리스도가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목전에 나타납니다.
몇 달 지나면 20세기가 문을 닫게 됩니다. 우리는 20세기 백 년을 통하여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여 한가지 진리를 배웠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면 세상은 지옥이 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거부하는 인간은 마귀가 된다는 진리를 배웠습니다. 온 세계가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고서 이 진리를 배웠습니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러시아가 나은 유명한 문호인 솔제니친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가 어린아이였던 20세기 초는 러시아에서 공산혁명이 일어났던 때였습니다. 매일 수십 명, 수백 명 씩 끌려가 학살당하고, 온 나라가 공포 분위기에 빠지고, 온 땅이 아수라장으로 변했던 때입니다.
이런 끔찍한 재난들을 두고 어른들이 앉아서 주고받는 말들을 어린 솔제니친이 들었습니다. 그 말은 그가 어른이 되어도 잊어버릴 수 없는 매우 인상적인 말이었습니다. 1983년 솔제니친이 미국에서 템플톤 강연을 할 때, 그는 어릴 적 들었던 그 이야기를 끄집어냈습니다.
그가 들려준 어른들의 대화 내용은 이것이었습니다. "왜 우리에게 이 끔찍한 재난이 왔을까? 사람들이 하나님을 잊은 게야. 그래서 이런 일들이 우리에게 일어난 게야."
솔제니친은 그후 대학에서 러시아 공산 혁명사를 전공하였습니다. 수십 년 동안 수백 권의 책을 읽고 연구하였고 8권이나 되는 관련 서적을 저술했습니다. 그가 그렇게 수십 년 동안 러시아 공산 혁명사를 연구한 끝에 얻은 결론은 의외로 단순한 것이었습니다.
'반 세기 동안 6천만 명이 넘는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갔던 이 참담한 악마와 같은 공산주의 혁명의 비극이 왜 러시아에서 일어났을까?' 라는 질문에 대한 결론은 단 한가지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그가 어렸을 때 들은 어른들의 대화가 유일한 대답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린 거야."
우리는 20세기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피 값을 지불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배웠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너무나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고 배웠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멸시하는 나라는 지옥이 됩니다.
공산주의는 사람들의 뇌리에 있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의식조차 말끔히 쓸어버리려고 갖은 악랄한 방법을 다 동원하였습니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거짓된 인간론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말살하려 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인간의 범죄, 타락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회개하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그들은 철저하게 부정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을 사람의 형상을 가진 하나님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레닌과 스탈린을 대신 앉혔습니다.
1950년 프라우다지에 이런 기사가 실렸습니다. "당신들이 공장에서 일을 할 때 너무너무 힘들어 '나는 할 수 없어.' 라는 좌절하는 마음이 생기면 그 때마다 그 분, 스탈린을 생각하십시오. 당신이 회사에서 일을 하다가 '과연 이것을 할 수 있을까?' 라는 마음으로 갈피를 잡지 못하고 답답해지면 그 분을 생각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마음에 새 힘이 솟구칠 것입니다." 지금 이와 같은 모습을 우리는 북한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부정하고 거부하는 인간이 얼마나 악마같은 존재가 될 수 있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우습게 여기고 멸시하는 사회는 지옥같은 세상이 된다는 것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마음 속 깊이 새겨두어야 합니다.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온 땅에 편만하게 되는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말씀을 들으면 이와같은 생각이 드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여도,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사람들도 별 수 없더라.' 우리의 현실이 이와 같은 의문을 떠오르게 합니다.
최근에 있었던 옷 청문회 사건은 교회를 완전히 발가벗겨 놓는 사건이었습니다. 증인 모두가 집사요 권사였습니다. 그들이 나와서 성경 위에 손 얹어 서약하고서 하는 증언은 도무지 진실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거짓투성이었습니다.
옷청문회가 아니라 교회청문회일 정도로 너무나 부끄럽고 가슴아픈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이 많아도 나라가 이렇게 혼탁한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온 땅에 편만한다고 하여 무엇이 달라지겠나?'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의문에 대하여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성도는 잘못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절대 변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부패하고 혼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절대로 부패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본질을 바로 보아야 합니다. 아무리 교회가 냄새를 피우고, 아무리 예수 믿는 사람이 잘못된 부분이 있어도 이 사회의 소망은 하나님의 교회 밖에 없습니다. 이 나라의 소망은 교회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소망을 위하여 이 세상에 교회를 보내신 것입니다.
믿음 좋다던 권사들도 한순간에 잘못될 수도 있고 거짓말을 할 수 있다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거짓말을 하고 잘 속이겠습니까? 아무리 교회가 불완전해도 이 땅의 소망은 교회 밖에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알아야 이 사회에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도구로 교회를 이 땅에 두셨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길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온 땅에 충만하기 위해서 우리가 꼭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교회만 감당할 수 있는 사명이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선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전해 주어야만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아는 길은 오직 예수님을 알아야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입을 다물고 있으면 이 땅에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편만하게 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기대할 없습니다.
만일 어린 중학생처럼 이 세상 현실에 대하여 절망하고 있습니까? 이 세상에 대하여 절망하므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 꿈이 한낱 몽상이 아니라 현실로 완성되기를 원한다면 전도해야 합니다. 복음 전하여야 합니다. 안 믿는 형제와 친구들에게 예수님을 믿으라고 강권해야 합니다.
예수님이나 기독교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많아 보여도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복음을 모르는 사람이 매우 많습니다. 아침에 어떤 부인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같이 타게 되었습니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교회 다니세요?" 라고 물었더니 다니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잘 됐다 싶어 "예수님을 꼭 믿으세요." 라고 했더니, "예?" 하고 놀라서 저를 쳐다 보았습니다. 마치 '아침부터 재수없게 이게 무슨 소린가?'하는 문치였습니다. 이처럼 우리 주변에는 예수 소리만 해도 놀라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그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도록 해야 합니다.
저에게 참 좋은 책이 하나 있습니다. 이 책 제목은 『마우니 마망아 이방아』입니다. 겉 표지에는 십자가가 새겨져 있습니다. 저는 이 책의 내용을 단 한 줄도 읽을 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 책을 받게 되었을 때 얼마나 감사하고 감격했는지 모릅니다.
이 책은 정제순 선교사가 메께오 부족의 언어로 번역한 신약성경입니다. 그는 약 12년 전에 파푸아뉴기니로 가족을 이끌고 선교사역을 위하여 들어갔습니다. 그곳에서 식구들이 밤마다 모기떼와 싸우느라고 잠을 자지 못한 날이 부지기수였고, 그는 말라리아에 걸려 사선을 몇 번씩 넘나들었습니다.
건기가 되어서 비가 오지 않으면 물 한바가지 가지고 온 식구가 살아야 했습니다. 악취를 풍기는 돼지우리 옆에서 집을 짓고 메께오 부족들하고 같이 살면서 그들의 말을 배웠습니다. 문자가 없는 그들을 위해 문자를 만들어 10년 만에 드디어 신약 성경을 메께오 언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우리 나라 선교사가 타민족 부족을 위해서 신약성경을 완역한 것으로는 제1호입니다.
『마우니 마망아 이방아』 "새롭게 태어난 말씀"이란 뜻입니다. 저는 이 성경을 손에 들 때마다 말할 수 없는 감동과 흥분을 느낍니다. 이때까지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던 메께오 부족들이 이 성경을 읽으면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게 되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물이 바다를 덮음과 같이 그 땅에도 충만하게 될 것을 생각하면 억제할 수 없는 감격과 감사가 쏟아져 나옵니다.
대각성 전도집회는 연례 행사가 아닙니다. 온 땅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충만케 하기 위하여 마련된 것입니다. 이 집회를 통해서 수많은 사람이 예수 믿고 돌아와야 합니다. 내 가족 중에 안 믿는 사람이 있습니까? 직장이나 학교의 친구 중에 아직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사람들 있습니까?
사람들이 하나님 알지 못하면 다 악마들이 됩니다. 그들에게 예수를 증거하여 모두가 예수 믿고 하나님을 아는 경건한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합니다. 이것을 위하여 대각성 전도집회가 존재합니다.
방관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혹시 이 세상이 매력적으로 보이고 너무 좋아 보입니까? 이 세상은 어린 중학생의 눈에도 너무나 절망스러운 곳입니다. 만일 이런 세상에 마음을 빼앗긴 체 하나님 나라의 비젼을 갖지 못한다면 영적인 맹인입니다.
아무런 소망도 안겨다 주지 못하는 이 세상을 바라보면서 우리 모두는 하나님나라에 대한 불타는 꿈을 일구어야 합니다. 젊은 청년 이사야가 바라보았던 영광스런 하나님 나라의 임재의 꿈을 가wu야 합니다.
그 나라가 임하면 "하나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는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으리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온 땅에 충만할 것이니라." 할렐루야! 그 나라가 이 땅에 속히 임하도록 우리 모두는 복음을 들고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절망하는 이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생명과 풍성함을 전하여야 합니다.
고형원 형제가 지은 감동적이고 영감 넘치는 노래가 있습니다. 이사야의 환상을 사랑 숨쉬는 찬양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 찬양의 심정과 같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소유하기를 바랍니다.
세상 모든 민족이 구원을 얻기까지 쉬지 않으시는 하나님
주의 심장 가지고 우리 이제 일어나 주 따르게 하소서
세상 모든 육체가 주의 영광 보도록 우릴 부르시는 하나님
주의 손과 발 되어 세상을 치유하며 주 섬기게 하소서
물이 바다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온 세상 가득하리라
물이 바다 덮음 같이
물이 바다 덮음 같이
물이 바다 덮음 같이
보리라 그 날에 주의 영광 가득한 세상
우리는 듣게 되리 온 세상 가득한 승리의 함성
물이 바다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온 세상 가득하리라
물이 바다 덮음 같이
물이 바다 덮음 같이
물이 바다 덮음 같이
어린 아이가 그들을 인도하게 하라 /사11:1-9/ 임영수목사
2014-12-16 14:23:24
여러분 각자에게 존경하는 인물이 다 있을 것입니다. 그 존경하는 인물이 실제 인물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은 공상세계의 인물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저에게도 어린시절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존경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분은 에이브라함 링컨입니다. 저는 번역된 그의 전기를 1956년 중학생 때에 산 것을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 미래에 평화를 위해 일할 한 인물에 대한 예언이 있습니다. 그 인물은 아주 특별한 가문에서 신비스럽게 태어나지 않고, 매우 보잘 것 없는 평범한 상황에서 태어날 것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특별한 인물이 태어날 때, 그것도 왕과 같은 지위에 앉을 인물은 평범한 가문이 아닌 특별한 가문의 혈통에서 태어나는 것이 알려진 상식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예언된 인물은 그렇지 못합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거들떠 보지않는, 관심의 대상이 될 수도 없는 지극히 평범한 가문에서 태어납니다. 본문에 "이 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줄기'라는 말은 겉으로 보기에 거의 싹이 돋아날 가망이 없이 보이는 마른 나무 밑둥을 뜻합니다. 우리가 산이나 들을 거닐다가 거의 다 말라버린 나무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나무는 지나가는 등산객이나 행인들의 아무런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본문에 예언된 한 인물이 태어나는 이새의 집안도 세인의 깊은 관심의 대상이 되는 명문의 집안도 아닙니다. 너무 평범한 집안입니다.
그리고 역사적 시기도 이 이새의 집안에 대한 기억이 거의 다 잊혀지다시피 한 오랜 세월이 지난 후가 될 것입니다. 그러한 시기에 세상 사람들에게 드러나지 않는 한 인물이 태어나서 매우 중요한 일을 성취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중대한 사건을 일으킨 사람들을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한 부류의 사람들은 매우 해독을 끼친 사람들입니다. 다른 한 부류의 사람들은 유익한 일을 한 사람들입니다.
큰 해독을 끼친 사람들은 어린 유아시절부터 정신적 병리현상이 될만한 건전치 못한 가정이나 사회적 환경에서 원인 제공을 받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자신에 대한 경멸, 다른 사람에 대한 증오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러나 유익한 일을 한 사람들은 어린 시절부터 그러한 부정적인 원인 제공 대신에 그들의 생애에 남다른 동기부여가 있습니다. 그것은 물질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영적인 것입니다.
이새의 가문에서 태어난 인물은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동기부여를 하나님께로부터 받습니다. 본문에 그에게 하나님께로부터 특별한 영적 은사가 임하는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 영적 은사가 세 가지 인데 다음과 같습니다.
○ 지혜와 총명의 영
○ 모략과 권능의 영
○ 지식과 주를 경외하는 영입니다.
이러한 영적 은사들은 이 세상 통치자들이 가지고 있는 기질들과는 전혀 다른 것들입니다. 이러한 영적 은사들은 사회적으로 어떤 지위를 감당할 수 있는 기술들이 아닙니다. 이러한 것들은 그 이전에 참 인간이 되는데 있어야 할 영적 은사들입니다.
성서에서 말하는 참된 인간은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가 진정 하나님을 바로 알고 그에게 온전히 복종하는 것과 관련됩니다.
본문에 이새의 줄기에서 태어날 아니는 하나님께 대해 그러한 삶의 태도를 가진 사람입니다.
○ 그의 즐거움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며,
○ 그는 왜곡되고, 거짓된 증거를 가지고 사람을 죽이고 살리지 않고,
○ 특별히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들의 편에 서고,
○ 잔인하고 사악한 자들은 사회에서 뿌리를 박지 못하도록 하 고,
○ 정의와 성실로 그의 옷을 삼습니다.
어느 시대에서나 그러한 인물에 대해 목말라 합니다. 그래서 그러한 인물이 나타나기를 고대합니다. 본문에 예언된 인물은 그 어느 한 시대에 태어나 역사 속에서 어느 한 일정한 기간에 그러한 통치를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모든 인류가 소망하고 있는 그러한 평화가 이 세상의 궁극적인 목표가 되도록 성취시킵니다. 그래서 그의 통치는 영원한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에 의해 이루어질 궁극적인 평화의 때를 본문에서는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그 정경은 너무나 아름답고 평화스러운 장면입니다.
"그 때에는,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새끼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풀을 뜯고,
어린 아이가 그것들을 이끌고 다닌다.
암소와 곰이 서로 벗이 되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누우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다.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 곁에서 장난하고,
젖땐 아이가 살모사의 굴에 손을 넣는다." (6-8, 표준새번역)
결국 그 때에는 "모든 곳에서, 서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게 됩니다." 모든 적대적인 관계들이 없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그 때에는 어린 아이가 자유롭게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며 모든 것들을 이끌고 다니게 됩니다.
저는 이 본문을 묵상해 가면서 번득 희망의 빛으로 떠오른 장면이 "어린 아이가 그것들을 이끌고 다닌다."는 것이었습니다. 금년도에 상반기와 하반기에 화요 강좌에서 지속적으로 다루어온 문제가 이 부분과 관련된 것입니다.
화요 강좌를 이끌어 오면서 지극히 부분적이긴 하지만 인간과 자연의 파괴의 주된 원인이 우리 속에 내재해 있는 어린아이의 억압과 학대임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점점 잔인해져 가고, 포악해져 가며, 알코올이나 마약으로 파괴되어 갑니다. 그리고 이 세상은 점점 살기 어려울 정도로 생존의 기반이 되는 자연환경이 파괴되어 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버질 게오류기의 말대로 정상을 훨씬 벗어난 "25時"의 상황입니다. 그러한 원인들이 나와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우리들 각자의 자신 안에, 가정에 있습니다. 매우 가깝게 있습니다.
우리가 본래 하나님께로부터 창조의 선물로 받은 우리의 진정한 자아(Real self)는 "자발적이며, 포용력이 있고, 사랑하며, 나누어 주며, 의사소통을 잘하며,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을 용납합니다.
그리고 기쁨과 고통의 감정을 자유롭게 느끼며 자기의 감정을 잘 표현하며, 확신을 가지고 있으며, 창조적입니다." "그러한 상태를 가장 높고, 성숙되고, 발전된 언어로 표현한다면 '어린이 같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어린 아이와 같은 속성들이 가정에서부터 제대로 잘 양육되어야 하는데 거의 그렇지 못합니다. 결핍되고 왜곡된 구속받지 못한 가정에서 이같은 어린 아이의 속성은 거의 억압되고 상처입게 됩니다.
그 대신 우리의 진정한 자신의 모습과는 다른 학대, 수치심, 굴욕감, 죄책감, 비판, 비웃음, 속임, 배반, 상처줌, 잔인함, 얕봄, 지나친 선심, 두려움, 완벽주의와 같은 정신적·정서적 상처들을 경험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한 것들을 경험하는 것으로 끝나면 다행인데, 그러한 내적 경험과 함께 우리의 행동 표현들은 우리의 진정한 내적 자아와는 너무 거리가 먼 꾸밈, 가면을 쓰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러한 유형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 공동체는 음모, 술수, 거짓, 불의, 해침, 파괴 뿐입니다. 본문에 기록된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서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다"고 한 말씀과는 너무 대조적입니다.
이러한 세상에는 우리 속에 있는 어린 아이가 맘대로 자신을 표현하며 살 수 있는 세상이 못됩니다. 어린 아이는 억압되고, 상처받고, 아파하고, 고통합니다.
그 대신 거짓된 연기들만이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일 큰 비극은 우리들에게 평안이 없다는 것입니다. 평안을 상실한 사람들이 이루어 가는 세상 역시 분열, 파괴 뿐입니다.
본문에 우리에게 희망으로 다가오는 빛은, 이새의 줄기에서 나오는 그 분으로 인해 상처입고, 억압된 우리 안에 있는 거룩한 어린 아이들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거짓, 가식, 꾸밈과 같은 허구적인 가치들이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가지 않고, 어린 아이-진정한 참 우리 자신-가 모든 것을 인도해 가는 때가 예언되어 있습니다.
대강절의 참된 의미는 이새의 줄기에서 나온 새싹과 함께 우리 안에 있는 죽은 새싹이 다시 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때를 바라보며 우리 속에 있는 어린 아이와 함께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한 번도 웃어보지 못하고, 기뻐해보지 못하고, 늘 음지에서 슬퍼하며, 고통하던 우리의 어린 아이가 그 분의 오심, 그 분의 약속을 바라보며 기뻐 뛸 수 있습니다.
우리는 대강절에 이제는 우리 속에 있는 어린 아이와 함께 우리의 인생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데 우리의 희망과 기쁨이 있습니다. 영적으로 다 말라 버리고, 죽어버린 밑둥에서 새로운 싹이 돋아납니다.
그것은 지혜와 총명의 영, 모략과 권능의 영, 지식과 주를 경외하는 영이 우리에게로 내려 오시기 때문입니다. 새롭게 돋아난 새싹은 반드시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이미 앞서 돋아난 새싹이 열매를 맺었기 때문에 그 분의 영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게 될 때 우리의 새싹도 열매를 맺습니다.
금번 대강절은 새롭게 시작되는 2000년의 첫 번째 대강절입니다. 이 뜻깊은 대강절에 임씨의 줄기에서, 김씨·박씨·이씨의 줄기에서 새싹이 돋아날 것입니다. 그리고 한 많은 이 한민족의 줄기에서 새싹이 돋아나 아름답게 열매 맺어가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지금 나타나 있는 이러한 사회 현상으로서는 희망이 없습니다. 지금 우리의 현실에서 나타나고 있는 삶의 형태들은 생명의 뿌리가 없는, 그것과는 단절된 가운데서 만들어 낸 허구적인 행위들이기 때문에 희망이 없습니다.
오늘의 우리의 현실은 어린 아이의 속성들이 우리의 삶을 이끌어가는 시대가 아니라 거짓된 가치, 허구적인 충동들이 현실에 주인이 되어 모든 것을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창조적이고 능동적인 어린 아이의 속성들은 억압되고 수동적으로 꾸며가는 삶들이 난무하는 세상입니다.
그 결과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사람들은 자꾸 소외되어 가고, 그들은 적응할 수 없는 현실이 되어가고, 수동적이고 자기자신을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꾸며가는 사람들만이 살아가기 편한 세상이 되어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 어느 부분을 드려다 보아도 실질적이고 영속적인 것들은 찾아보기 어렵고 거의가 다 순간적이고 피상적인 것들, 겉보기 번지르한 것들로 공간을 메우고 있습니다.
어린 아이가 모든 것을 인도해간다는 것은 우매하고 수동적이고, 출세지향적인 삶의 방식들이 그 시대를 이끌어간다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 아이가 모든 것을 인도해 간다는 것은 꾸밈이 없는, 거짓으로 자신을 위장하지 않는, 어린 아이의 속성들이 사람들의 삶을 이끌어 가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순수하고 아름답게 표현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삶의 분위기를 의미합니다.
어느 시대이건 그 시대 어린 아이들이 억압되거나 상처입지 않고 그들의 속성을 그대로 실현해 갈 수 있는 상황이 된다면 그 시대는 진정 평화로운 시대입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를 돌이켜 보면 그러한 시대는 거의 없었습니다.
거의가 다 그와는 반대였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살고 있는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곳곳에서 어린이 학대들이 이루어지고 있고 우리의 가정 역시 어린이들이 꽃피어날 수 있는 곳이 못됩니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의 내면에 있는 어린 아이의 속성이 얼마나 억압되고 학대되고 있는가를 객관적으로 잘 반영해 주고 있습니다.
금번 대강절에 우리의 내면에 있는 어린 아이들이 다시 새롭게 치유되고 우리 각자의 삶들이 그들에 의해 인도되어 가게 된다면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와 우리는 좀더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왜곡된 삶, 이그러진 삶, 병든 삶들이 치유되고 온전케되는 길은 먼저 우리의 내면에 있는 어린 아이들이 치유되어 가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금번 대강절에 우리의 마음에 새로운 아이가 태어날 수 있다면 그리고 그 아이가 지혜와 총명의 영, 모략과 권능의 영, 지식과 주를 경외하는 영으로 자랄 수 있다면 우리의 미래는 매우 밝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새의 뿌리에서 나온 새싹으로 성취된 평화의 그 나라로 다가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가 모든 것을 인도해 간다는 것은 영적으로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의 삶이 거짓과 꾸밈으로 일관해 가는 것에서 벗어나 우리 속에 있는 신성한 어린 아이가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간다는 의미이며, 다른 하나는 우리가 사는 환경이 그러한 평화의 분위기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새로운 천년을 기다리며 금번 대강절에 우리의 삶에 신성한 어린 아이의 영이 임하여 억압되고 상처 입은 우리 속에 있는 어린 아이가 희망과 기쁨으로 다시 태어나 주의 평강을 온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는 기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평강은 외적으로부터 오지 않습니다. 주님의 평강은 우리의 내면에 있는 어린 아이가 기뻐 뛰며 춤추는 데서부터 이루어 집니다.
'설교문 모음 > 이사야 설교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이사야 38장 설교 모음 (1) | 2026.02.24 |
|---|---|
| 이사야 19장 설교 모음 (2) | 2025.09.02 |
| 이사야 53장 설교 모음 (2) | 2024.10.17 |
| 이사야서 65:17 - 25절 설교 모음 (0) | 2024.04.01 |
| 이사야 35장 설교 모음 (1) | 2022.12.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