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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이사야 설교 모음

이사야 19장 설교 모음

by Jessi J 2025. 9.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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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도 하나님의 형상이다 /19:22-25/ 김형욱목사

2024-11-15 11:55:45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들과 함께하길 기도합니다. 오늘은 1월 마지막 주입니다. 상투적인 표현을 할 수밖에 없겠습니다만 시간이 참 빠르지요. 2024년을 시작한 지 정말 엊그제 같은데 벌써 열두 달 가운데 하나를 마쳤습니다.

 

새해에 다짐한 마음을 얼마나 지키고 계시는지요. 올 한해 기도에 힘쓰기로 한 바에 대해 얼마나 마음을 쓰고 계시는지요. 벌써 흐릿해지셨다면 다시금 힘을 내시면 좋겠습니다. 너무 속상해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일쑤 일상에 휩싸여 생각해야 할 바를 놓치곤 하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바를 결코 잊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겐 아직 열한 달이 남았습니다.

 

멀고 먼 평화의 길

지난 송구영신 예배를 기억하시는지요. 많은 분께서 예배당에 나오셨고, 또 적지 않은 분들이 각자 댁에서 온라인으로 함께 예배드렸습니다. 당일 우리 교회는 아주 오랜만에 성만찬을 가졌습니다. 세례받은 교우들이 한목소리로 화답하고 성채를 나누며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의미를 다시 새길 수 있었습니다. 특히 제 개인에겐 정말 특별한 성만찬이었습니다. 제가 목사로서 안수받고 처음으로 집례에 참여한 성찬이었기 때문입니다. 교우들에게 주님의 몸으로 상징된 전병을 나눠드리며 '이는 당신을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몸입니다'라고 말할 때 몇 번이나 눈물이 나오는 것을 참았는지 모릅니다.

 

성만찬과 함께 우리는 한 해의 마무리와 새해의 결단을 위해 한목소리로 여러 제목을 갖고 기도드렸습니다. 모든 교우들이 함께 드렸던 기도 가운데, '우리를 평화의 도구로 삼아주소서'라는 제목의 기도를 주님께 드렸습니다. 평화의 도구라니 참으로 근사한 말입니다. 이 말은 13세기 이탈리아의 수도사이자 작음과 청빈을 기치로 한 프란치스코 수도회를 시작한 성 프란치스코의 기도로 알려져 있습니다. 미움과 다툼과 분쟁이 있는 곳에 평화의 도구로 나를 사용해 달라는 수도사의 고백이 그 어느 때보다 바로 오늘 큰 울림을 주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바로 오늘날이 그 어느 때보다 평화와 거리가 먼 시대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날 시대가 평화와 거리가 멀다는 증거를 굳이 찾지 않아도 될 만큼 자명합니다. 하루가 멀다고 쏟아지는 전쟁 소식은 우리가 사는 시대가 21세기가 맞는지 의심하게 합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소식은 이제 국제 뉴스에 잘 언급되지도 않은 듯 단신으로 처리되곤 합니다. 이스라엘과 하마스 전쟁은 해결되기는커녕 중동 지역 전체로 분쟁을 확대하고 있습니다. 서구 강대국들이 저마다의 경제적 계산기를 두드리며 전쟁을 쥐락펴락하고 있습니다. 사실 멀리 갈 것 없겠지요. 한반도 평화는 그야말로 격랑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이따금 평화를 향한 물고가 트이는 것 같다가도 지난 수년간의 노력이 일거에 물거품이 되고 마는 현실을 우리는 지금 목도하고 있습니다. 국내 사정이라고 나을바 없습니다. 연일 보도되는 혐오와 분노 범죄, 테러, 린치 등은 이제 영화나 드라마의 소재가 아니라 우리 일상의 문제가 되고 말았습니다.

 

평화는 왜 이렇게

교우 여러분, 평화는 왜 이렇게 어려운 걸까요? 우리가 지금까지 언급한 세계의 분쟁 지역 안에도 평화를 꿈꾸는 시민들이 있을 것이며, 전쟁을 멈추자는 소리가 절대 없지 않을 것입니다. 심지어 그 지역에 교회도 있을 것입니다. 그 지역에도 기도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평화는 이렇듯 더디게 오는 것일까요? 아니 우리 시대에 평화가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요? 평화는 어쩌면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요? 어느 경제학자가 자본주의가 제 기능을 유지하는 한도에서 경제적 불확실성을 통제하는 것이 현대의 평화라고 말하는 바를 어느 인터뷰에서 본 기억이 있습니다. 세상은 이렇듯 평화의 정의를 다시 내려야 한다고 우리에게 속삭이고 있습니다. 세상의 평화는 어차피 불가능하니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시스템을 보존하는 정도로 타협하자고 말합니다. 거대한 패배주의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안타까운 것은 우리 또한 평화에 대한 패배주의에 순응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평화라는 말이 너무 크고 무거워서 나와는 관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혹은 평화를 추구하는 일은 정력적인 활동가들이나 하는 일이니 내 삶의 주제가 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혹은 사는 일이 너무 힘겨워 평화를 생각할 겨를이 없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은 평화란 너무 진보적인 담론인 것 같아 부담을 느낀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일정 부분 옳습니다. 평화는 무언가 관념적인 단어인 것만 같고, 세상의 이런저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분쟁은 끊임없고, 나는 평범한 소시민이기에 평화에 관해 이야기하는 일은 과분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평화에 대한 이와 같은 거리두기는 평화를 싫어하는 세상이 가장 원하는 방식입니다. 전쟁과 힘의 논리로 통치되는 세상이 가장 원하는 삶의 방식이 사람들이 평화와 이렇듯 거리를 두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온 세상이 평화에 대해 고민하기를 중단하라 압박하고 있기에 평화를 상상하는 것 자체가 참으로 버거운 일입니다.

 

오늘 우리의 본문인 주전 8세기의 예언자 이사야도 평화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스스로 하나님의 평화를 선포하며 절절히 깨닫고 있었습니다. 오늘 이사야의 말씀을 통해 평화에 대한 성찰을 더 이어나가 보겠습니다.

 

이사야가 본 이집트 심판

오늘 본문은 예언자 이사야에게 내린 하나님의 비전과 말씀 가운데 이집트, 옛한글 성경 말로 더 익숙한 애굽에 내린 예언에 대한 내용입니다. 모두 읽지 않았으나 오늘 본문인 이사야 19장 전체가 이집트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집트는 이스라엘에게 다른 여타의 이방 민족과 달리 더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물론 부정적인 의미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이스라엘에게 이집트는 박해와 억압의 원초적 기억입니다. 민족과 국가 단위로 억압한 최초의 국가가 이집트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중대한 사건인 출애굽은 결국 이집트의 박해로부터의 탈출이었습니다. 이집트는 이스라엘에게 있어 역사적으로 신학적으로나 박해의 상징이자 적대의 근본이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1절부터 이어지는 이집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이스라엘 입장에서 정당하며 또 복음입니다. 몇 구절 살펴보지요. 1절에서 4절까지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1 이것은 이집트를 두고 하신 엄한 경고의 말씀이다. 주님께서 빠른 구름을 타고 이집트로 가실 것이니, 이집트의 우상들이 그 앞에서 떨고, 이집트 사람들의 간담이 녹을 것이다.

2 "내가 이집트 사람들을 부추겨서, 서로 맞서 싸우게 하겠다. 형제와 형제가, 이웃과 이웃이, 성읍과 성읍이, 왕권과 왕권이, 서로 싸우게 하겠다.

3 그래서 이집트 사람들의 기를 죽여 놓겠다. 내가 그들의 계획을 무산시켜 버리면, 그들은 우상과 마술사와 신접한 자와 무당을 찾아가 물을 것이다.

4 내가 이집트를 잔인한 군주의 손에 넘길 것이니, 폭군이 그들을 다스릴 것이다." 주님, 곧 만군의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이처럼 오랜 박해자였던 이집트를 주님께서 친히 심판하겠다니 이스라엘에 얼마나 복음입니까? 다 읽지는 않았지만, 이어지는 구절도 비슷한 말씀입니다. 이집트는 우상으로 가득하여 심판하겠다, 유다 사람들을 괴롭힌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심판의 때가 바로 당장은 아니지만, '그날이 오면'이라는 반복되는 삽입구를 통해 하나님의 때에 반드시 심판이 임하리란 약속을 이사야는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그러니까 이집트 심판 예언 말미에 이르러 매우 놀라운 주님의 말씀이 이사야에게 내립니다. 22절부터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주님께서 이집트를 치시겠으나 곧 낫게 하실 것이며, 그것으로도 모자라 이집트와 또 다른 이스라엘의 박해자 앗시리아가 서로 길을 내어 화해하고 나아가 이집트와 앗시리아 그리고 이스라엘이 온 세상에 복을 나누어주는 복의 통로가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정한 표현으로 나의 백성 이집트 그리고 나의 손으로 지은 앗시리아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지막 25절을 다시 한 번 들어보시지요.

 

25 만군의 주님께서 이 세 나라에 복을 주며 이르시기를 "나의 백성 이집트야, 나의 손으로 지은 앗시리아야, 나의 소유 이스라엘아, 복을 받아라" 하실 것이다.

 

이 말씀은 언뜻 세 나라가 서로 평화롭게 화해하고 복된 나라가 된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물론 맞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나라들을 화평하게 만들지 못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사야 19장 말미의 이 놀라운 예언은 역설적이게도 평화가 왜 불가능한지, 평화가 왜 이렇게 어려운 일인지 보여주고 있음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판단이라는 형벌

이 말씀이 단순히 평화에 대한 희망의 전망이 아닌 이유는 주님의 예언이 단 한 번도 성취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 나라가 화해한 적은 없습니다. 역사적으로도 그러합니다. 북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 당했습니다. 고대 앗시리아와 이집트는 서로 오랜 적국이었습니다. 현실적으로 보자면 이 예언은 애초에 이뤄지기에 불가능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역사적 사건의 유무를 떠나 하나님의 이 말씀이 평화에 대한 불가능성을 보여주는 이유는 이 예언의 당사자인 이스라엘입니다. 말씀드렸듯 이스라엘에게 앗시리아는 물론 이집트는 그들의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을 박해와 억압의 상징입니다. 따라서 이사야의 이 예언은 이스라엘에게 매우 당혹스러운 말씀입니다. 아니 매우 불쾌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모든 것을 따른다 해도 오직 한 가지, 우리 민족과 조상들의 원수인 이집트를 친구로, 함께 평화의 도구로 역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평화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토록 원하시는 평화를 위해 내 이웃들과 화해할 수 있고, 저 멀리 바다 건너 누군가와도 화해할 수 있으나 내가 미워하는 바로 그 사람과 나는 화해할 수 없습니다. 저 사람을 내 평화의 파트너로 삼을 수 없는 이유가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각자 나름의 합당하고 타당한 이유를 근거로 저 삶들과 평화를 도모할 수 없습니다. 차라리 다른 더 어려운 일을 하라면 할 수 있겠다고 말합니다. 저렇게 몰지각한 자와, 저런 죄인과, 저런 격에 안 맞는 자와, 저렇게 말이 통하지 않는 자와 어떻게 평화를 논하겠는가. 여러분, 이것이 평화가 어려운 이유입니다. 이집트와 앗시리아를 주님께서 맞아주시고 세 나라가 복의 통로가 되게 하신다는 말씀에 어쩌면 이스라엘은 코웃음을 쳤을지 모릅니다. 우리와 같은 이유에서 말입니다.

 

교우 여러분,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평화의 동반자로 인정할 수 없었던 이유, 우리가 우리 마음속의 미움의 대상인 그와 화해할 수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유가 여럿이겠으나 무엇보다 그것은 우리가 그를 악하다 판단 내렸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와는 함께할 수 없다고 내 마음속에 이미 판단 내렸기 때문입니다. 한국 사회의 큰 문제인 혐오 문제, 젠더 간에, 세대 간에, 민족과 인종간에 독버섯처럼 번져가는 혐오의 시작도 결국 나의 판단에서 시작하지요. 저 사람은 그런 사람이야. 라는 판단 말입니다. 이탈리아의 정치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이 그의 글에서 이렇게 쓴 바 있습니다.

 

복음서를 읽으면서 나는 인간들이 서로를 판단 하는 대신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판단이란 인간이 사랑에서 벗어날 때마다 의존하는 형벌이다. (내가 보고 듣고 깨달은 것들, 조르조 아감벤)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정확히 포착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주님의 삶이 어떠하셨습니까? 모든 판단을 뒤로하셨습니다. 그가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그가 부유하건 가난하 건, 죄인이건 의인이건, 그가 전염성 높은 위험한 피부질환을 앓고 있건 아니건 모든 판단을 뒤로하고 그저 만나 위로하고 손을 잡아주셨습니다. 판단하지 않고 사랑하셨습니다. 죽기까지 말이지요. 교우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를 판단하지 않으셨다, 이를 가리켜 '은혜'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사랑하기보다 판단합니다. 이 철학자의 말과 같이 판단은 형벌입니다. 너는 죄가 크니까, 너는 나에게 무례하게 대했으니까, 너희 조상이 우리 조상을 박해했으니까, 나는 너와 화해할 수 없다. 이는 매우 합당하다. 타자를 판단한 다는 것은 곧 형벌을 내리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형벌의 열매는 혐오입니다. 증거를 굳이 찾을 필요 없이 온 세상천지가 서로를 판단하고 혐오를 정당화합니다. 주전 8세기의 하나님의 예언이 지금까지 한 번도 성취된 적 없듯 평화가 이렇게 어려운 일인 것입니다.

 

그러나 평화

여러분 이사야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 아니 하나님의 간절한 바람을 묵상하고 성찰하는 지금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어려운 일입니다. 불가능한 꿈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 꿈이 동참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인 주님의 제자들, 곧 그리스도인입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하나님의 꿈을 꾸고 그 꿈을 이 땅에 실현하기 위해 애쓰기로 다짐한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이사야에게 내린 하나님의 예언 말씀에서 우리의 위치를 이스라엘이 아닌 이집트에 두는 것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를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집트에 둔다면 이 예언의 의미가 달라집니다. 우리가 이집트라면, 우리가 누군가의 평화를 방해하고 하나님을 멀리했던 이집트라면 어떠하겠습니까? 여러분, 사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게 이집트고 앗시리아입니다. 누군가의 미움의 대상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나의 판단과 미움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고 그에게 내가 평화의 훼방꾼이었음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한다면 평화의 실마리가 조금은 풀릴 것입니다. 내가 당신의 이집트였음을 인정하고 미안한 마음으로 용서를 구할 때, 판단을 뒤로하고 주님께서 그러하셨던 것과 같이 사랑하기를 선택할 때 이 불가능해 보이는 하나님의 꿈인 평화가 작게라도 시작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청파교회 교우 여러분. 판단을 멈추고 사랑을 선택하십시오. 내가 누군가의 이집트요 앗시리아일 수 있음을 겸허히 인정하십시오. 우리의 이성이 모든 힘을 다해 저자와 함께할 수 없다고 소리쳐도, 저들도 하나님의 형상이니 품지 않을 수 없지 않겠는가! 저 사람 역시 예수께서 피값을 주고 건지신 주님의 사람이 아닌가! 라고, 답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우리가 미움 대신 서로 사랑하기를 선택할 때 불가능해 보이는 주님의 평화가 한 뼘 정도 자라날 수 있습니다.

 

도처에 전쟁 소식이 끊이질 않고 나의 혐오가 정당한 이유를 쏟아내는 시대에 우리는 서로 사랑하기를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우리 모든 사람이 우리를 보고 우리가 주님의 제자인 줄 알게 된다고 요한복음에서 말씀하셨습니다. 평화라는 하나님의 꿈은 결코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판단을 내려놓고 사랑을 선택하십시오. 그러나 불의에는 단호히 맞서야 합니다. 이사야 19장이 이집트에 대한 심판임을 잊지 마십시오. 평화는 하나님의 오랜 꿈입니다. 우리가 그 꿈을 이루어야 합니다. 평화라는 주님의 꿈을 함께 꾸는 여러분 되시길 기도합니다.

 

 

 

초대교회 에베소 /19:1-20/ 이지원 목사

2024-09-30 14:12:57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바울이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니라

 

바울이 이르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 두 해 동안 이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삼아 악귀 들린 자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 하더라.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악귀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악귀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뛰어올라 눌러 이기니 그들이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

 

에베소에 사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알리며,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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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주일은 종교개혁기념주일입니다. 그래서 준비하는 마음으로, 초대교회의 믿음을 본받자는 의미에서 오늘은 초대교회 가운데 모범된 교회였던, ‘에베소 교회에 대하여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요즈음 세상을 바라볼때, 평안과 은혜와 기쁨을 느끼는 분들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코로나로 인하여 2년 가까이 매일매일 조심하며 생활하고 있습니다. 다행이 곧 하와이를 비롯하여 몇몇 안전한 곳으로는, 다시 여행이 재게 된다는 뉴스가 들려오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위드코로나, 코로나와 함께 생활하고, 포스트코로나 코로나가 후에 생활로 전환한다는 뉴스도 들려 오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직전의 시대는, 지금과는 비교할수 없는, 혼란과 불안과 혼돈의 시대였습니다.

 

더우기 세상이 않그래도 혼란한데, 로마 카톨릭은 면죄부를 팔고, 성경에 없는 교리를 만들어~, 혼란에 기름을 끼언고 부채질을 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세상이 다시, 은혜롭고, 평안하고, 안정한 세상으로 바뀔수 있는가?

 

세상의 기초, 삶의 기초, 바로 믿음이 건강을 다시 회복하여야 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로마 카톨릭이 잘못가고 있는길에서 돌이켜 회개하고, 다시 초대교회로 돌아가는 회개의 운동”, “종교개혁의 운동시작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초대교회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어떤 좋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까?

 

 

1. 초대교회는, 성령충만한 교회 였습니다.

 

 

4절에서 7절 말씀까지 보겠습니다.

 

바울이 이르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사도바울이 에베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에베소는 지리적으로, 밧모섬 앞에 있는 도시입니다.

 

에베소는 조용하지만, 자존심이 있는 도시 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사도행전 1935절 하반절에는 에베소 사람들아, 에베소 시가 큰 아데미와 제우스에게서 내려온 우상의 신전지기가 된 줄을 누가 알지 못하겠느냐?”~

 

, 에베소는 아데미와 제우스 우상의 신전지기 도시라고 스스로 자랑스러워 하였습니다.

 

 

제우스는, 당시 로마 우상중에 제일 우두머리 우상입니다. 그리고 아데미는 여신들 가운데 풍요의 우상으로 가장 인기 있는 우상이었습니다.

 

즉 우두머리 우상과 가장 인기 있는 우상의 신전지기도시가 바로 에베소 도시라고 여겼으니, 얼마나 스스로 자존심이 대단 하였겠습니까?

 

 

오늘날도 조용하지만 자존심만 쎈 마을들이 있습니다. 지리산 골짜기에 청학동에 가보면, 오늘날도 옛날옷을 단정하게 입고, 서당에서 훈장님이 한문을 가르킨다고 하지요.

 

서울 사람들이 가서 보면, ~희안하다고 관광구경하겠지만, 청학동 주민들은 스스로 얼마나 자존심이 대단 하겠습니까?

 

 

이렇게 고루한 에베소 도시에, 사도바울이 찾아갔습니다. 2절 상반절에 말씀 합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 사도바울은 에베소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성령에 대하여 전하고, 예수님에 대하여 전하고, 십자가와 구원에 대하여 전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초대교회는 복음전하는 교회였습니다.

 

 

목사님, 복음전할 사람이 따로 있지, ~ 막힌 사람들 한테는 복음전할 필요도 없습니다.”

 

디모데후서 4:2 에는 말씀합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때는 하나님께서는 정하시는 것이고, 그 사람이 구원받을지 말지는, 예수님께서 정하시는 것이요, 우리의 사명은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말씀을 전파하는데 힘쓰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복음전하는 사명에 충실하여, 그 고루하고, 완고하고, 완악한 에베소 사람들에게~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게의치 아니하고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초대교회 신앙을 본받고, 다시 초대교회로 돌아가는 것은, 복음전하는 것으로 돌아가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또한, 사도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자신의 말의 능력과 힘으로 하지 아니하고, 예수님에 대하여,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 전도하였습니다.

 

4절에는 말씀합니다. "바울이 이르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우리가 복음전할 때, 의욕이 앞서고, 간절한 마음이 앞서, 여러 가지 말로 전도하게 될 때가 많습니다. 물론 잘못된 것도 아니요, 틀린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을 보니까 사도바울은 전도할 때, ‘예수님에 대하여 분명히 전하였던 것을 보게 됩니다.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사도바울은 전도를 많이한 사도입니다. 그래서 간절한 마음으로, 열심히 전도를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17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아덴의 아레오바고에서 장문의 전도의 설교를 하게 됩니다.

 

아덴은 우리나라로 보면, ‘부산과 같습니다. 상업의 중심지입니다. 아레오바고는 부산 시청앞 광장과 같습니다.

 

사도바울은 아덴의 아레오바고에 가서, 철학과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장문의 전도설교를 하였는데도 불구하고, 노력에 비하여 성과는 미미하였습니다.

 

전도가 되지 않았고, 아덴에는 교회가 세워지지를 못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은 크게 깨닫게 됩니다. 전도할때는, 전도의 행동도 중요하지만, 전도하는 내용도 있습니다. 만약 전도하는 행동만 있고, 전도하는 내용이 빠지면, 그 전도는 앙코없는 찐빵, 붕어 없는 붕어빵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큰 고민으로 힘들어 합니다. 그럴때 고민으로 힘드시지요~, 예수님께, 나오실 때가 된 것 같으네요. 사람이 감당하기 힘든 일이 있지요.~”

 

 

전도하는 사람과 만날 때, 그 사람을 위로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 사람의 말을 들어주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위로와 공감과 대화 가운데, 주인공 되신 예수님을 전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아덴 아레오바고 전도에서 실패하고, 고린도에 와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고린도전서 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 전도에서 중요한 것은 성령님의 도우심입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일인데 어떻게 사람의 능력과 힘으로만 할 수 있겠습니까?

 

 

사도바울은 에베소에 가서 전도할 때,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며--기도하며 전도할 때, 전도하는 가운데 성령충만의 역사가 타나나게 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이 전도할 때, 전도받는 사람이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하며, 믿음이 뜨겁게 되었습니다.

 

 

요즈음은 희안하고 황당하게도 이단이 전도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우연히 어떤 집사님을 만나서 하소연과 경험을 듣게 되었습니다. “목사님, 회사에 친한 동료가 하도, 자기 교회에 행사가 있으니 가보자고 하여서 갔는데, 하나님의 교회 였습니다.~ 가니까 성경구절을 보여주는데 여자 하나님이라는 글짜가 나와서 깜짝 놀랐습니다.

 

목사님 성경에 여자 하나님이라고 나와 있는데, 왜 나는 그동안 그 구절을 보지 못하였을 까요?“

 

그래서 제가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거 다~ 거짓말입니다. 요즈음 이단이, 자기들 멋대로 자기들 성경을 만들고 있습니다.~ 통일교는 통일교 성경,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 성경, 심지어는 킹제임스 성경, 무슨 편한 성경, 간단한 성경, 단권 복음서 요약 성경...

 

 

그래서 성경은 공인성경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나라 공인성경은 대한성서공회의 개역개정판 성경이며, 우리나라 모든 개신교 교회는 예배 때, 이 성경을 사용하여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시대에도, 여기저기서 자기 맘대로 성경이라고 제목을 다는 일이 횡횡 하였습니다. 도마 복음서, 막달마 마리아 복음서, 바울 계시록, 에녹 승천기, 족장의 교훈...끝도 없이 등장을 합니다.

 

선전하기를, 도마가 예수님을 만지고 깨달은 신기한 내용을 기록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 한테만 가르켜준 내용을 기록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이 천국을 여행하고 거기서 들은 내용을 기록하였습니다.~

 

 

하도 거짓말들이 많아서, 초대교회 성도들도 헷갈려 하고 혼란한적이 있습니다. 신약성경은 27권 이며, 그 외에는 아무리 제목이 그를듯 하여도, 모두 성경이 아닙니다.

 

 

이단들은 거짓말 성경을 가지고도 때를 얻든지 못었든지, 한 영혼이라도 지옥에 끌고 갈려고, 이단들이 열심히 전도하는데, 우리가 사탄에게 양보하면 않되겠습니까?

 

양보는 버스의 자리나, 기다리는 순서를 양보할수는 있어도, 전도는 오히려 사탄과 이단을 이겨야 하겠습니다.

 

 

정리를 하자면, 초대교회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예수님을 전하는 전도하는 교회였습니다.

 

 

2. 초대교회 성경중심의 교회 였습니다.

 

 

8절에서 10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 두 해 동안 이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시골에 할머니 세분이 앉아서 이야기를 합니다.

 

한 할머니가 이야기를 시작 합니다. “어제 며느리가 이야기 하는데, 글쎄 예수님 죽었다고 합니다.”

 

옆에 할머니가 깜짝 놀라서 말합니다. “예수님, ~듣는 이름인데, 어느 마을에 사시는 양반입니까? ”

 

이야기를 꺼낸 할머니가, 힘들어 하며 말합니다. “며늘이가, ‘아부지’ ‘아부지할때가 있는거 보니까, 혹시 사돈~어른인지..도대채 나도 모르겠네요

 

 

옆에 할머니가 불쑥 끼어듭니다. “그럼~, 문상은 다녀 오셨어요?”

 

이야기를 시작한 할머니가, 더 힘들어 하며 말합니다. “갈라 했는데, 3일만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 났답니다.”

 

~? 세상에나~ 그렇군요. ” 듣던 두~할머니가 깜짝 놀라, 고개를 끄득였다고 합니다.

 

 

성경은 예수님에 대한 기록 입니다. 초대교회의 특징은 성경에 대하여 열심을 다하는, 성경 중심적 교회 였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니까, 사도바울이 에베소에서 처음 전도할 때, 12사람이 전도 되었습니다.

 

12, 물론 적지 않는 숫자입니다. 하지만 초대교회의 명성을 떠올려보면 그렇게 많은 숫자라고는 할수도 없습니다. 즉 에베소 교회의 시작은 12, 많지않은 숫자로 시작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에베소 서를 비로하여, ‘사도행전’, ‘요한계시록에서 에베소 교회에 대한 부분을 살펴 보면, 에베소 교회는 훌륭하고 모범적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미미하게 시작되었던 에베소 교회가, 어떻게 나중에는 훌륭하고 모범되고 반듯한 교회로 성장할수 있게 되는 것입니까? 비결은 성경중심적 교회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본문 8절을 보면, 먼저 석달동안 회당에 들어가서,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성경말씀을 강론하고 권면하였습니다.

 

그럴 때 어떤 사람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아니하고 무리 앞에서 사도바울을 비방 합니다. 하지만 또 어떤 사람은 마음이 옥토같아서 성경말씀을 강론할 때, 3060100배로 믿음의 성장하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그곳을 떠나 따로 제자들을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기를, 두해동안 하게 됩니다.

 

 

이렇게 에베소 교회는 날마다 성경공부를 하며, 두해동안 열심히 사도바울로부터 성경을 배우게 될 때, 에베소 교회는 성경말씀위에 튼튼히 서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 지난주일, 말씀을 전하였습니다.만 예수님의 말씀 위에 나를 세우면 어떻게 되어 집니까?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창수가 나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믿음의 기초와 주추를 예수님의 말씀위에 세웠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에베소 교회는, 사도바울로 부터 성경말씀을 배워서, 믿음의 기초가 튼튼하게 되니까...그 다음에는 쫙쫙~ 올라가기 시작 합니다.

 

12명이 24명이 되고, 24명이 48명이 되고, 튼튼하게 1234층 막~ 성장하기 시작합니다.

 

그럴 때 그 다음에는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창수가 나도 까딱하지 않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요한계시록 21절에서 3절에 보면, 이렇게 에베소 교회를 칭찬합니다.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에베소 교회는 복음의 수고와 인내가 있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또한 고난이 와도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참고 견디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난과 환란에도 믿음이 게으르지 아니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얼마나 찬란하며, 성숙되며, 그 믿음이 모범 된 교회 입니까?

 

 

더욱이, ‘악한 자자칭사도라 하되, 아닌 자를 알아보고, 그 거짓된 것을 드러내고, 믿음이 넘어지지 않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럼, 에베소 교회는 어떻게 이단들을 잘~ 분별할수 있었습니까? 바로 사도바울에게 성경을 잘~ 배웠기 때문에, 자칭사도, 자칭선지자, 자칭메시야, 자칭여자하나님, 에베소 교회 성도들은 자칭하는 사람들에게 절대로 넘어가지 않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을 보면, 정말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엘리트인데도 불구하고,..예수님은 영접하지 않으면서, 다른사람이 자기이름으로 올 때는, 두손들고 영접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코로나가 신천지를 타고 시작할 때 갑자기 동네 병원이 제가 신천지 집회에 참석하여 2주간 휴원합니다.”라고 안내문을 붙힌 일도 있었지요?

 

아무리 박사님라도, 성경말씀을 바르게 배우지 아니하면, 신천지가 진리이고, 여자 하나님이 진리라고, 넘어갈수 밖에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에베소교회는 어떻게 환란과 이단들의 틈바구니 속에서도 훌륭한 초대교회가 될 수 있었습니까? 그 비결은, 성경중심적 교회 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3. 에베소는 세상을 깨끗하게 하는 교회였습니다.

 

 

1920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 그렇게 고루하고, 완악한 에베소 도시, 하지만 그곳에 에베소 교회가 세워지고, 에베소 교회가 전도하고, 성령충만하고, 말씀위에 서니까, 에베소 교회의 영향으로, 에베소 도시가 변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마술을 행하던 사람들이, 마술과 관련된 책을 모아서 불사르며 버리게 되었습니다.

 

나쁜 풍습이 바뀌어 좋은 풍습이 들어되고, 나쁜 사상이 바뀌어 복음이 점점 흥왕하며

 

나쁜 세상은 변하고 믿음이 세력을 얻는 도시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가 기도하고, 전도하고, 말씀위에 설때에, 세상은 교회의 영향을 받게 되더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초대교회는 믿음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 였습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합니다.

 

초대교회는 어떤 교회 입니까?

 

전도중심, 기도중심, 성령충만한 교회입니다.

 

말씀위에 든든히 서는 교회입니다.

 

믿음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입니다.

 

 

오늘 우리도, 에베소 교회의 신앙을 본받아,

 

코로나가 --안개와 같이 자욱한 이 시대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며,

 

성숙하고 은혜롭게 살아가는 김포상도교회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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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코로나의 안개, 이단의 안개, 소망이 혼란한 속에서도

 

십자가 붙들고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에베소교회 성도들의 믿음을 본받아,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며, 예수님의 향기를 전하며, 살아가는, 김포상도교회 성도들로

 

한주간 동안도,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며 살아갈수 있도록, 친히~ 동행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 나이다. 아멘.

 

 

 

세계 중에 복이 되는 나라 /19:23-25 /6:12-13/ 이성희 담임목사

2018-04-13 03:22:19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우리나라의 큰 명절 설날을 맞이하여 모든 가정에 하나님의 축복이 풍성하기를 바랍니다. 우리나라는 그 동안 예수님을 믿은 다음 엄청난 복을 받았습니다. 우리나라가 복을 받은 비결은 다른 나라보다 두 배로 복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설날이 두 번입니다. 신정과 구정이 있어 복을 받아도 두 배를 받는 것입니다.

 

중국의 설날이며 가장 큰 명절인 춘제때는 중국 국민이 대이동합니다. 춘절이 되면 밤새 폭죽을 터트리고, 더러운 것을 태우고, 만두를 먹습니다. 저도 언젠가 춘절에 중국에 있었는데 자정이 되면 방방마다 만두를 먹으러 내려오라고 전화가 옵니다. 그리고 복()자를 거꾸로 써서 벽에 붙여 놓습니다. 이렇게 하면 복이 들어온다고 합니다. 심지어 복()자 세 개를 함께 써 놓은 글자도 있습니다. 이렇게 복 받기를 갈구합니다.

 

복의 사전적 의미는 아주 좋은 운수, 큰 행운과 오붓한 행복이라고 합니다. ‘상서에는 수(), (), (), 강령(康寧), 다남자(多男子)가 복이라고 합니다. 중국 고대 통속편에는 장수(), (), 강령(康寧), 심성의 후덕함(攸好德), 고종명(考終命)이 복이라고 합니다.

 

복은 우리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저의 할머니는 예수를 믿어 권사가 되셨지만 아주 별난 미신을 많이 챙기셨습니다.

 

집에 들어올 때 대문을 꼭 닫지 않고 들어오면 복 나간다 문 닫아라고 하셨습니다. 방에 들어올 때 신발을 가지런히 두지 않고 신발 한쪽이 뒤집어지면 복 엎어버린다 신발 바로 놔라고 하셨습니다. 이전 사람들 특히 고대인에게 복은 아주 중요한 생활이었습니다.

 

행복은 다릅니다. 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삶의 은혜를 말합니다. 반면에 행복이란 인간이 경험하고 느끼는 감정입니다. 행복이란 느끼면 되는 것이지만 복이란 느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셔서 누리는 실재입니다.

 

복은 하나님의 손안에서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네게 복을 주어”,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내 복을 너희에게 주어”, “너는 복이 될지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복을 공급하시는 공급자이십니다. 그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우리에게 내가 오늘날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라고 하셔서 복을 얻게 하십니다.

 

성경적 의미의 복이란 사람의 힘으로 얻지 못하는 초자연적 은혜를 말합니다. 복을 가지고 계시며, 복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본성입니다. 하나님은 복의 주인이실 뿐만 아니라 복을 가져가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다행증’(euphoria)이란 증후군이 있습니다. 아무 근거가 없는 병적인 행복감을 말합니다. 행복할 이유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행복해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행복은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라 근거가 있는 행복감입니다.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 때문입니다.

 

창세기 12:1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자신의 고향에서 본격적으로 믿음의 사람이 되게 불러내십니다. 그리고 12:2에서는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어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축복이 무엇입니까?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십니다. 그리고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때문에 그 민족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아브라함 때문에 민족이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 개인과 우리교회 때문에 우리 민족, 우리 국가에게 하나님이 복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교회로 말미암아 우리나라를 세계 중에 복 있는 나라로 만듭시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의 내용입니다.

 

역대상 17:27에는 이제 주께서 종의 왕조에 복을 주사 주 앞에 영원히 두시기를 기뻐하시나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복을 주셨사오니 이 복을 영원히 누리리이다 하니라고 합니다. 다윗 때문에 하나님은 그의 왕조에 하나님이 복을 주십니다. 우리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 민족과 국가에 복을 주십니다.

 

이사야 19장은 세계평화에 대한 하나님의 예언입니다. 최근 한반도에 전쟁위험이 가장 높다고들 합니다. 우리는 평안한데 다른 나라들이 한반도가 마치 전쟁 중에 있는 것처럼 전합니다. 해외에 있는 우리 동포들도 우리나라를 염려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나라가 전쟁이 아니라 복이 있는 나라가 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첫째, 여호와께서 복을 중재하는 나라가 되게 하십니다.

 

이사야 19:24-25 상반절에는 그 날에 이스라엘이 애굽 및 앗수르와 더불어 셋이 세계 중에 복이 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 주시며 이르시되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애굽과 앗수르와 더불어 복의 나라가 되겠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당시에 세계를 대표하는 두 초강대국이 있었습니다. 남쪽에는 애굽이 있었고, 북족에는 앗수르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초강대국 사이 틈바구니에 낀 작은 나라였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축복을 중재하는 나라가 될 것을 예언합니다. 창세기 12:3에는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는데 이제 그 말씀이 성취되고 있음을 말합니다.

 

애굽과 앗수르는 이스라엘과 영적으로 연합하므로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만 주셨던 복을 이스라엘 때문에 애굽과 앗수르에도 주십니다. 물질, 기술, 인구 대국인 애굽과 앗수르가 영적 대국인 이스라엘을 통해 복을 받게 될 것을 예언하십니다.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등 4대강국 사이에서 우리나라가 늘 힘든 줄다리기를 하며 살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도 늘 교량국가로 열강의 짓밟힘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들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때문에 그 나라들이 잘되게 해야 합니다. 또 우리 때문에 잘되는 것을 그들이 알아야 할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때문에 애굽과 앗수르가 잘 되게 하셨습니까?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선택하신 백성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이스라엘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잘되고 복 받은 나라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도 이런 하나님의 축복을 전달하는 나라가 되기를 바랍니다.

 

신명기 28:1에는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 주실 구체적 복을 나열하기 이전에 조건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명령을 지켜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조건에 비하여 과분한 축복을 하나님은 약속하십니다.

 

요즘에는 잘 쓰지 않지만 3세계라는 말을 사용하였습니다.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로 탈바꿈한 구미와 일본을 제1세계라고 하고, 사회주의에서 산업화한 구소련과 공산권을 제2세계라고 하고, 1세계, 2세계로부터 기술과 이데올로기를 도입한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등을 제3세계라고 불렀습니다.

 

선교학에서도 요즘에는 사용하지 않지만 3세계라는 말이 사용되었습니다. 구미의 기독교 선진국을 제1세계, 러시아와 구공산권을 제2세계 그리고 아시아, 아프리카 등을 제3세계라고 불렀습니다. 세계를 이렇게 구분하는 것이 차별의식의 발로라고 하여 아예 사용하지 않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정치, 경제, 선교적으로 강대국이었던 나라들이 기독교가 쇠퇴하였고, 이슬람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제1세계가 추락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지구상에서 아예 정치적 경제적 제2세계는 사라졌습니다. 이제는 제3세계의 시대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전에 후진국, 개발도상국이라고 하던 나라들이 부상합니다.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를 중심으로 기독교 특히 개신교가 활발하게 부흥되고 있습니다.

 

유럽에서는 교회들이 매각되어 카페나 무도장이나 박물관이 되었고, 관광객에게 입장료를 받아 교회가 겨우 유지되고 있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하나님을 떠나서 잘되는 나라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하지 않고 잘 사는 나라가 없습니다.

 

애굽,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등은 성경시대에 등장하는 초강대국들입니다. 언제나 이스라엘에게 위협이 되는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이 나라들은 다 패망하였고 이집트, 시리아, 이라크, 이란 등 그 후손들이 지키고 있는 나라들은 지금 지구상의 문제투성이 나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나라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원조 받는 나라였습니다. 이제는 우리나라가 원조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선교 받는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선교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현재 한국교회는 세계에서 수적으로는 두 번째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는 나라가 되었고, 인구비율로는 세계에서 선교사를 가장 많이 파송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나라는 경제적으로나 선교적으로나 중재국이 되었습니다. 받아봤기에 줄 수 있고, 전쟁을 해봤기에 평화를 중재할 수 있고, 가난하게 살아봤기에 가난한 나라들을 베풀 수 있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복을 중재하는 나라가 된 것입니다.

 

지난 번 쿠바 여행 중 안내하는 가이드가 가보자고 한 곳이 그들의 배급소였습니다. 쿠바는 아직도 공산주의의 잔재가 남아 있어서 기초생활용품들을 배급을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눈여겨보니 배급 담당자가 상당히 권력을 과시하는 듯이 보였습니다. 자기 것을 주는 것도 아닌데 배급 주는 사람과 배급 받는 사람의 표정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나누어주는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힘이 있는 법입니다. 옛날 우리나라도 전쟁 후에 구제품을 줄 때가 있었습니다. 배급을 담당하는 사람은 큰소리를 치고, 구제품 가운데 제법 좋은 것은 먼저 차지하기도 하였습니다. 배급자에게 어느 정도의 권한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군대에서도 보급을 담당하는 보급계는 자기 것이 아니지만 제법 힘을 쓰게 되는 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고 합니다. 야곱에게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고 합니다. 복이 하나님의 것이지만 복을 배달하는 역할을 믿음의 사람들이 했습니다. 복을 전달하는 자도 이렇게 대단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에게 하나님 때문에 복을 받게 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많은 사람에게 나누어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잘되는 가정이 되고, 민족이 되고, 나라가 되어 우리로 말미암아 천하만국이 복을 받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축복이며, 동시에 우리의 책임입니다.

 

 

 

둘째, 하나님이 손으로 지으신 기업인 백성이 복이 있습니다.

 

이사야 19:25 하반절에는 내 백성 애굽이여, 내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지어다 하실 것임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애굽을 내 백성, 앗수르를 내 손으로 지은 자, 이스라엘을 나의 기업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이사야의 종말적 예언입니다. 종말에 가서 하나님의 원수, 하나님의 진노 대상이 하나님의 영광 도구, 사랑의 대상으로 바뀔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이사야의 예언 이후 실제로 이 나라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들을 하였습니다.

 

애굽을 나의 백성이라는 언약관계의 말씀을 하셨는데 기원전 200년에 애굽의 알렉산드리아에서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 성경으로 번역한 ‘70인역이 만들어졌습니다. 앗수르에 대하여 내 손으로 지은이라고 하여 진흙을 빚어 만든 작품이라고 하셨는데 이곳에서 바벨론 탈무드라는 책을 지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나의 기업이라고 하셨는데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자산, 유산이라는 말입니다. ‘기업이란 말은 히브리어의 나할라티인데 신명기 4:20에서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택하시고 너희를 쇠 풀무불 곧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사 자기 기업의 백성을 삼으신 것이 오늘과 같아도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구속은 하나님의 기업이 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것은 결코 하나님께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최상의 정성으로 힘을 다해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창조는 조금도 빈틈이 없고, 온전한 창조였습니다. 얼마나 완벽한 창조인지 하나님은 창조하신 세상을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 가운데 인간은 피조물 가운데서도 가장 완벽한 창조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인간, 특히 하나님의 백성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하나님도 하나님의 기업이라고 하실 만큼 잘 지으신 존재였습니다.

 

남의 밥에 든 콩이 굵어 보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내 것이 가장 귀하다는 말이 맞습니다. 남의 밥에 통이 굵어봤자 내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자기 소유일 때 비로소 귀하고 가치가 있습니다. 하나님도 자기 백성을 얼마나 끔찍이 사랑하시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과 그 백성들을 묶으신다(bind)고 합니다. ‘묶는다는 말은 하사크라는 단어인데 밧줄로 잡아맨 사랑, 뗄 수 없는 사랑을 말합니다. 호세아 11:4에는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고라고 합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그 하나님의 사랑의 줄에서 우리를 절대로 끊을 수 없다고 합니다.

 

동물의 세계를 보세요. 어미들이 새끼를 얼마나 사랑하고 보호하는지 모성이 대단합니다. 어느 동물은 새끼가 다른 짐승에게 물려 죽었는데 죽은 새끼 곁을 어미가 떠나지 못하고 자기 무리가 다 떠났는데도 가지 못하고 머뭇거리다 한참 후에 포기한 듯 떠나기도 합니다.

 

어느 어미오리가 새끼들과 함께 길을 건너다가 길가의 하수구 구멍에 빠진 새끼를 보고 떠나지 못하고 걸음을 멈추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와서 새끼를 건져주니 그제야 새끼들과 함께 그 자리를 떠나갑니다. 이것이 동물이 가지고 있는 모성애인데 우리 하나님의 모성은 여기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의 피로 값 주고 사신 백성들을 절대로 원수에게 내어주지 못하십니다.

 

이사야 43:1에는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합니다. 4절에는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라고 합니다. 하나님도 하나님의 소유인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배롭고 존귀하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얼마나 존귀한 존재입니까?

 

하나님은 심지어 내 백성을 가두어 두지 말라”, “내 백성을 멸시하지 말라”, “어찌하여 내 백성을 짓밟느냐”, “내 백성을 보내라”, “내 백성을 압제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선민에 대한 각별한 사랑을 표현한 말입니다.

 

2006년에 팔레스타인의 하마스에게 납치되었던 이스라엘병사 길라드 샬리트 상병이 이스라엘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던 팔레스타인인 1,027명과 맞교환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군인 1명이 팔레스타인군인 1,000명 이상의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팔레스타인은 한 사람을 주고 1,027사람을 얻었으니 덕을 봤다고 할지 모르지만 이스라엘이 승리한 사건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십니다. 그래서 존귀한 하나님의 기업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이십니다. 기독교는 철학이나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친히 찾아 오셔서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어 죽게 하고, 부활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를 얻은 것이 기독교입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생각은 지금의 선민인 우리와 우리나라에 변치 않는 사랑으로 사랑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이 친히 복을 주십니다.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 복입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 그리스도와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내어주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면 하나님은 우리의 왕이십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의 종이 되면 하나님은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우리의 왕, 우리의 아버지, 우리의 주인은 우리를 잘 아셔서 알아서 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복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본성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복을 주시려고 온갖 애를 쓰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만 되면 복을 받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만 되면 복은 저절로 굴러 들어올 것입니다.

 

 

 

결론

 

이란 히브리어로 에쉐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복을 말하며, 우리 삶의 번영과 행복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말합니다. 헬라어로 복을 마카리스모스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행복이란 뜻도 있고, 축복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신약의 복이란 그리스도의 속죄하심 힘입어 의롭다함 받게 된 사람이 받은 복을 의미합니다.

 

한자로 복()자를 보세요. ‘’() 옆에 입()과 밭()이 있고 그 위에 한()자가 있습니다. 인간의 복은 옷 한 벌과, 입에 풀칠할 수 있는 밭이 하나 있으면 된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너무 욕심을 부리지 말라는 뜻입니다. 과욕은 불행을 자초합니다. 욕심 없는 삶이 복된 삶입니다. 성경적으로 말하면 욕심을 부리지 않고 염려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미리 아시고 주신다는 말입니다.

 

성경적인 의미에서 복이란 말은 사람의 힘으로 얻지 못하는 초자연적인 은혜를 뜻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 하나님의 충성된 종, 하나님의 기업인 백성이 됩시다. 부동산 중개업을 복덕방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복과 덕을 전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거간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교회가 거룩한 교회 다시 세상 속으로가기 위해서는 우리 때문에 세상이 복을 받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 속으로 전달하는 배급자가 되어 복의 배달꾼이 받는 은총과 축복을 함께 누리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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